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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Johan Cruyff (1947~2016)

by Wood-Stock 2016. 3. 25.


네덜란드 축구팀 아약스 홈페이지 캡쳐

요한 크루이프 현대 축구의 이정표

오늘날 축구는 ‘공간’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축구장 어디에서나 공간이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돈다. 대표팀 경기나 프로 리그는 물론이고 동네 축구에서도, 조기 축구에서도, 꼬마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다니는 놀이에서도 공간이란 말이 쉽게 들린다. 여기서 공간은 물리적 크기 곧 축구장의 어떤 면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축구에서 공간이란 바람이 80% 정도 들어 있는 풍선과도 같다. 어디를 어떻게 만지고 누르느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한다. 축구에서 공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쩌면 1초 전에는 없었던 것이며 다시 말해 1초 후에는 사라질 수도 있는 유기체적인 영역이다. 순간 아차 방심하면 우측면이 뚫리고 황급히 그 빈터를 메우고자 하면 중앙이 텅 비어버리는 상황, 이렇게 전술적인 유효 공간은 쉼없이 변한다.

그런 의미의 공간이라는 용어가 월드클래스는 물론 국내의 동네 꼬마들 놀이까지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2002한일월드컵 이후 10여 년 동안 변화해 온 대표팀 축구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그 하나다. ‘포백 라인’이나 ‘쉐도우 스트라이커’나 ‘더블 볼란치’ 같은 말들이 10여 년의 대표팀 감독 교체 드라마 속에서 반복되었는데 그러한 모든 논쟁은 결국 어떻게 의미 있는 공간을 창출하느냐 하는 점이 관건이었다. 두 번째로 박지성의 유럽 진출(정확히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입성)과 더불어 수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럽축구(정확히는 EPL)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축구 게임이다. 게임 속 축구장에서 그야말로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조합/재조합하여 경기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게임 문화 속에서 ‘공간’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용어가 되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축구 문화를 급변시키고 급성장시킨 바로 그 키워드, 현대 축구의 마법의 열쇠가 되는 바로 그 용어, 그 축구 혁명의 실천가를 떠올려 보자. 우리 모두가 조금이라도 현대 축구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단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바로 그 사람이다.

크루이프 이전의 역사들

요한 크루이프에 의하여 공간의 의미는 확실히 달라졌다. 또한 그로 인하여 ‘토털 사커’가 구현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발상이 크루이프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네덜란드 축구를 풍미했던 잉글랜드 출신의 잭 레이널즈를 비롯하여 1950년대 페렌츠 푸스카스가 주축이었던 헝가리 대표팀이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한 레알 마드리드 혹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부터 수비 전체를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의 8부 능선까지 도약했던 프란츠 베켄바워 같은 사례가 없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있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아약스 암스테르담 선수로 뛰면서 1947년과 1957년에 팀 우승에 크게 기여한 미헬스는 1965년부터 감독으로 취임하여 네 차례나 리그 우승을 이룩하고 1971년에 스페인 FC 바르셀로나로 가서 역시 우승컵을 거머쥔 명장이다. 미국 LA 아즈텍스에서 잠시 활동했던 그는 독일로 가서 FC 쾰른과 바이어 레버쿠젠 등을 이끌었는데 이 레버쿠젠에서 차범근 선수를 중용하기도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난 1999년에 그를 ‘20세기 최고 축구 감독’으로 선정한 바 있고 2007년에는 영국의 [더 타임스]’가 전세계 축구 지도자, 비평가, 전문가 등의 의견을 취합하여 선정한 ‘세계 감독 랭킹 톱 50’에서도 그의 이름을 가장 높은 자리에 기록된 바 있다.

20세기 최고의 축구 감독으로 평가 받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축구 철학을 그라운드에서 실천해낸 선수가 크루이프이다. <출처: (CC)Nationaal Archief Fotocollectie Anefo>

미헬스 감독은 말한다. “선수들이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상대 진영으로 전진한 후, 공을 빼앗긴 이후에도 제 자리를 찾아서 후퇴하기 보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볼을 빼앗기 위해 압박 수비를 한다. 즉 수비할 때에도 ‘공격’을 염두 하면서 수비 하는 것이다. 후퇴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고 압박해야 경기를 공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이 전술의 최고 목표는 상대로부터 공을 가로채서 곧바로 슛과 연결시키는 것이며 최저 목표는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거나 늦춰서 수비 라인이 안정되도록 도모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헬스는 골키퍼를 제외한(때로는 골키퍼까지도) 모든 선수에게 고정된 ‘포지션’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경멸했다. 포지션은 경기 전에 경기 감독관에게 제출하는 서류에서나 의미 있는 것일 뿐,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선수들은 고유한 영토(포지션)를 간수하되 수시로 그 영토를 벗어나 전후좌우로 유기체가 되어 움직일 것을 당부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빈 공간’이라는 말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움직임으로써 전술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이 거듭 창출되고 그 공간의 순간성 위에서 선수들은 쉼없이 재조직 된다. 상대 팀으로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공간의 ‘의미/무의미’에 따라 끊임없이 수비 라인을 해체/재구성해야 한다.

과거처럼 3번이 9번 막고 4번이 10번을 막는, 그런 식의 축구는 1960년대부터, 미헬스를 비롯한 수많은 파이오니어에 의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토털 사커에 의하여 ‘압박’, ‘오버래핑’, ‘극단적 오프사이드’ 같은 현대 축구가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크루이프, 레전드의 연대기

그렇다면 왜 요한 크루이프인가. 제 아무리 리누스 미헬스라고 한들 그 형이상학적인 축구 실험을 푸른 잔디 위에서 아름답게 실천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면 공염불이다. 바로 그것을 그라운드에서 실천해낸 선수가 크루이프이다.

그 진가가 발현된 것이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비록 우승컵은 서독이 쟁취했지만 축구 역사는 네덜란드의 패스 플레이와 공간 창출을 더 ‘가치’있게 기억하고 있다. 특히 크루이프의 킥오프로 시작되어 무려 16차례의 패스가 이어진 끝에 서독 수비진으로부터 페널티킥을 뽑아낸 전반 시작 장면은 토털 사커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 물론 베켄바워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크루이프는 뛰어난 선수다. 그러나 우리가 우승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뛰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 <출처: (CC)German Federal Archives>

결승전의 팀 전술도 그렇지만, 도르트문트에서 벌어진 스웨덴 전에서 그가 선보인 이른바 ‘크루이프 턴’ 또한 크루이프를 진정한 레전드로 등극시킨 빛나는 장면이다. 당시 스웨덴의 수비수 얀 올손은 “이 친구를 잡았다 싶었는데 공도 사라지고 크루이프도 사라져버렸다”고 회고한다. 크루이프는 올손을 역동작으로 제치면서 공을 발 안 쪽으로 밀어 넣고 몸을 반대편으로 틀어 빈 공간으로 달려나갔다. 지금 크루이프턴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만 한 가지 올손을 위로한다면, 크루이프는 최고 절정기의 월드클래스였고 올손은 본업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수도 스톡홀름 남서쪽의 작은 도시, 사방이 바다에 흡사한 수많은 호수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 아트비다베리의 아마추어에 가까운 선수였다는 점이다.

 

아무튼 크루이프는 1971년, 1973년, 1974년 발롱도르 상 수상에서 확인되듯이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 10살 대 아약스의 유소년 클럽에서 공을 차기 시작한 그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아약스의 최고 전성기를 이뤄냈고, 강력하게 러브콜을 해온 레알 마드리드 대신 FC 바르셀로나를 선택하여 이적한 바로 그 해의 우승을 비롯하여 숱한 성취를 일궈냈다. 80년대에는 네덜란드와 돌아와 잠시 레반테 UD와 계약하였으나 곧 모천회귀하는 연어처럼 아약스로 돌아가 리그 우승을 두차례나 이뤄낸 뒤 36살 때 페예노르트를 끝으로 은퇴했다.

1975년 fc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던 모습. <출처: (CC) Nationaal Archief Fotocollectie Anefo>

이런 와중에 그는 일반적인 선수와는 다른 경험들까지 쌓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코 독재자의 팀으로 전락해버린 레알 마드리드 대신 자유와 민주의 열망을 가득 품은 fc바르셀로나를 선택한 것이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 가족이 납치당하는 상황에서 아르헨티나로 떠날 수는 없는 일을 겪은 것도 평범한 경험은 아니다. 한동안 이 대회의 불참을 두고 크루이프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벤트로 전락한 것이라고도 하였으나 크루이프는 2008년 카탈루냐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가족 납치’라는 끔찍했던 이유를 스스로 밝힌 적 있다. "나와 아내는 손목이 묶여 있었고, 아이들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파트에 있었다.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루이프가 독재자들을 존중하거나 그 밑에서 공을 차는 것을 즐겼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카탈루냐 식으로 ‘조르디’라고 지을 만큼 바르셀로나(곧 카탈루냐)의 시민의식과 그 정신을 사랑했던 선수다. 카탈루냐는 현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투쟁을 진행 중이다. 강제로 병합된 나라였으니 옛 독립주권 국가 상태를 회복하겠다는 운동이다. 그런 뜻에서 그들은 카탈루냐 지역 내에서 그들의 말과 문자와 상징들을 사용한다. 그 중 하나가 카탈루냐 대표팀이다. 스페인 대표팀이 엄연한 가운데 카탈루냐 지역을 대표하는 팀을 따로 창설하여 각종 친선대회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크루이프는 이 카탈루냐 대표팀의 감독을 지냈는데, 최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그 자리에 물러났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그라운드 안에서 축구의 현대성, 곧 토털 사커에 의한 공간의 창출을 이뤄낸 크루이프는 은퇴 이후에 더욱 의미 있는 지평을 펼쳐냈다. 1988년부터 옛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감독에 취임한 크루이프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라 리가 4연패를 비롯하여 일일이 세기도 벅찬 우승컵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감독 미헬스에게 선수 크루이프가 있었다면, 감독 크루이프에게도 유럽 최강의 선수들이 있었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 로날드 쿠만(네덜란드), 미카엘 라우드롭(덴마크), 호마리우(브라질), 호셉 과르디올라(스페인) 등이 그의 축구를 잔디 안에서 실천했다.

그러나 곧 크루이프는 그러한 축구 문화와는 전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축구가 글로벌 스포츠 시장의 꽃이 되면서 서서히 세계적인 기업과 갑부들이 유럽의 클럽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하자 크루이프는 뜻이 맞는 바르셀로나 임원진과 함께 탄탄한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 마시아’(카탈루냐어로 농장이라는 뜻)다.

크루이프가 시작한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 ‘라 마시아’ 초기에 사용하던 건물 모습. 2011년 새 건물로 옮겼다. <출처: (CC)XiscoNL at Wikipedia.org>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세계 곳곳에서 뛰어난 선수들을 사와서 우승도 하고 마케팅도 해서 그것으로 또 돈을 버는 것, 그것은 크루이프가 꿈 꾼 축구가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팀을 꾸려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린 유망주들에게 공부도 시키고 기술도 가르쳐서 천천히 ‘하나의 팀’으로 성장해가는, 그런 축구 문화를 크루이프는 꿈꿨다.

크루이프와 그 동료들이 일궈낸 '라 마시아‘에서 함께 놀고 공부하고 공을 차며 성장한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피케 등이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축구를 하고 있다. 2012년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는 19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시설과 장비를 새로 보강하고 축구뿐만이 아니라 유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교실, 공부방, 여가 시설, 의료 및 재활 시설 등을 갖춰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40년 가까이 바르셀로나를 위해 헌신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오리올 토르트 센터로 명명되었다. 바르셀로나를 일컬어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화면 속에 비친 그들의 화려한 패스워크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강력한 오피니언 크루이프

오늘날 크루이프는 유럽 축구의 오피니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와 감독으로 20세기 후반의 현대 축구를 이끌어온 크루이프이기에 큰 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유럽 각지의 스포츠 미디어들은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럴 때마다 크루이프는 비범한 통찰력으로 현대 축구의 경락과 혈도를 짚어낸다.

때로 그의 말은 철학자의 아포리즘처럼 들린다. 이를테면 "스피드라는 것은 종종 통찰력과 혼동된다. 내가 나머지 사람들보다 먼저 뛰기 시작하면 내가 빠른 것처럼 보인다."와 같은 말은 무슨 뜻인지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실수를 하기 전까지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와 같은 너무나 당연한 말도 크루이프의 말이기에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모든 불리함에는 각각의 유리함이 있다."는 말도 그렇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편보다 한 골을 더 넣어야 한다."는 말도 그렇다. "찬스는 논리적인 것"이란 말은 그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축구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날 크루이프는 유럽 축구의 오피니언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CC)Lobo at Wikipedia.org>

그런데 그가 이렇게 공터에 자리 깐 도사처럼 알쏭달쏭한 말만 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오늘날의 축구가 지나치게 상업화 되어 가히 우격다짐의 체력전으로 비화되고 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2005년 9월, 국제축구연맹(FIFA)이 발간하는 [피파 매거진(FIFA Magazine)] 10월호 인터뷰에서 그는 “오늘날 정말로 멋진 경기는 거의 보기 힘들다. 모두 그저 미디어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현대 축구가 수준 미달에 머물고 있는 핵심적 이유는 지나치게 경기 일정이 많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FIFA를 정점으로 하여 각국 협회, 수많은 스폰서와 미디어 등에 의해 너무 많은 경기가 너무 뛰어난 선수를 혹사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같은 소설가도 오래 전부터 비판해온 양상이다. 이런 악순환에 의하여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경기임에도 ”기술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 축구는 근래에 수년 동안 무덤에 묻혔으며, 오늘날 축구를 결정하는 것은 전술과 체력에 불과"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크루이프는 비판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21세기의 축구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업화’라는 호랑이 위에 올라탄 상황이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크루이프는 유럽의 축구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2012년 5월 첼시가 바이에른 뮌헨의 공세를 막아내며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4-3으로 우승을 하자 크루이프는 [데 텔레그라프]와 인터뷰에서 "오직 첼시 팬들만이 그들의 우승에 행복할 것이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승리만 거둔다면 나머지는 모두 잊힌다는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우승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며 비판했다. 이른바 ‘안티 풋볼’ 즉, 극단적인 수비 축구로 일관하며 우연한 기회를 노리는 축구를 그는 경멸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수비 축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정교한 수비 축구는 예외가 된다.

자국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은 날카롭다. 2010년 7월, 남아공월드컵 결승전이 끝난 후 크루이프는 스페인 '엘 페리오디코'에 기고한 칼럼에서 “네덜란드 선수들은 마치 공 잡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선수들은 안타깝게도 더러운 플레이만 펼쳤다. 끔찍한 거친 태클을 했고 곧바로 퇴장을 당했어야 할 선수도 한 두명 있었다. 그런 천박한 스타일은 축구도 아니다”고 비판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맞아 8장의 경고와 수비수 욘 헤이팅아의 퇴장 등을 겪으며 0:1로 패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힘들게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안티 풋볼이다”고 비판했다.

크루이프가 ‘안티 풋볼’의 대명사로 자주 비판하는 사람은 레알 마드리드의 주제 무리뉴 감독이다. 무리뉴 감독이 첼시 때부터 놀라운 전과를 기록했지만 오직 크루이프만은 그를 인정하지 않아왔다. 크루이프는 “무리뉴의 축구는 ‘안티풋볼’이다. 재미도 없고 상대팀 존중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토탈사커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비판했다. 물론 경기장 밖의 독설 전쟁에 이골이 난 무리뉴 역시 “날 가르쳐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늘 발전하면서 트로피를 쓸어 모으고 있다. 크루이프는 과거에 얽매어 있다. 기꺼이 내가 가르칠 용의가 있다.”고 반박했다. 2005년 10월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축구란 어떤 것인가. 역시 fc 바르셀로나의 축구다. 그들 중에서도 메시와 사비를 크루이프는 특별히 지목한다.

2011년 1월, 크루이프는 축구 전문 사이트 '트라이벌 풋볼'을 통해 "호날두는 파워를 앞세워 많은 결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다양성이 부족하다. 플레이, 페이스의 변화, 위치 선정 등에서 메시가 호날두보다 더 빠르다. 이런 스피드는 호날두가 해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우선 메시를 평가했다. 그리고 2012년 3월 스포츠 전문방송 ESPN과의 인터뷰에서 크루이프는 "다양한 포지션 때문에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처럼 스펙타클한 선수도 있지만, 사비처럼 경기 전체를 컨트롤하는 선수도 있다. 둘은 다르지만 모두 훌륭한 선수다"고 상찬했다.

크루이프, 아름다운 이름

각국마다 새로운 시즌이 되면 한 해의 축구 발전과 그 흥행을 위한 일종의 시즌 개막 친선전을 벌인다. 대체로 전 시즌의 리그 우승 팀과 FA컵 우승 팀이 단판으로 맞붙는다. 일반적으로 슈퍼컵이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독일에서는 이를 DFB-슈퍼컵이라고 부르고 스페인에서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라고 부르고 잉글랜드에서는 FA 커뮤니티 실드 (일명 채리티 실드)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트로페 데 샹피옹이라고 부르고 포르투갈에서는 슈페르 타카 데 포르투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경우 1999년에서 2007년까지 슈퍼컵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왔다.

네덜란드에서는 슈퍼컵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데, 네덜란드 시즌 개막전을 요한크루이프슈퍼컵 대회라고 부른다.

네덜란드 역시 이러한 단판 경기가 있다. 박지성와 이영표가 지난 2003년에 PSV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네덜란드 슈퍼컵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특이한 것은, 위에 나열한 여러 나라의 경우와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이 슈퍼컵에 사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주인공은 크루이프다. 요한크루이프슈퍼컵 대회가 바로 네덜란드 시즌 개막전의 명칭이다.

2007년, 아약스는 자신들의 빛나는 시대를 이끌어 왔던 크루이프의 60살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욘 야케 단장은 “이 번호는 영원한 아약스의 주전 선수인 당신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내겐 너무나 큰 영광이지만 언젠가 더 훌륭한 선수가 출현하여 그 번호를 사용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요한 크루이프, 아름다운 축구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정윤수 이미지
정윤수 | 축구칼럼니스트
1995년 문화비평지 계간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와 문화 전반에 걸쳐 연구 비평 작업을 해왔다. 인문학 단체 [풀로엮은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kbsn스포츠, 마산mbc 등에서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축구장을 보호하라],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낙원 - 현대도시와 삶에 대한 성찰] 등이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01&contents_id=20424&leafId=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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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월드컵 최강&최고] 1974년 네덜란드와 크루이프
 
ㆍ토탈사커 전설을 쓰다

74년 월드컵 우승팀은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이끈 개최국 서독(현 독일)이다. 그러나 대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킨 '토탈사커'의 원조 네덜란드와 '슈퍼스타' 요한 크루이프였다.

네덜란드는 아쉽게 준우승했지만 '전원 수비·전원 공격'의 획기적인 신개념 전술로 전세계 축구팬을 매료시켰다. 또 주장 크루이프의 현란한 드리블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네덜란드 사령탑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창시한 '토탈사커'는 선수들의 역할 분담이라는 축구의 전통 개념을 거부하고 변화무쌍한 축구의 특성에 맞춰 탄력적이고 유기적으로 대처하는 '혁명적 전법'이었다. 

70년 멕시코대회까지 유럽 축구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네덜란드는 74년 대회를 통해 36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는다.

69~70년 유럽 챔피언 페예노르트 주전 7명과 70~73년 같은 대회서 3연패한 아약스의 크루이프 등이 주축을 이룬 대표팀은 본선 1라운드에서 2승1무(우루과이 2-0, 스웨덴 0-0, 불가리아 4-1)로 가볍게 통과한다. 

2라운드에서도 강호 아르헨티나를 4-0, 동독을 2-0으로 완파하고 브라질과 결승 진출을 놓고 맞붙었다. 전 대회에서 '축구 황제' 펠레의 활약으로 줄리메컵을 영구 소장한 브라질은 펠레가 대표팀에서 빠졌지만 자일징요·리베리노 등 전설의 스타들이 건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혁신적인 축구 스타일에 막강 브라질도 역부족이었다. 후반 네스켄스와 크루이프의 연속골로 2-0 승리, 36년 만에 오른 월드컵에서 당당히 결승에 오르며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결승전 상대는 베켄바우어를 중심으로 리베로 시스템을 처음 선보인 서독. 
'토탈사커'의 지휘자 크루이프와 '혼(魂)의 축구' 서독의 사령관 바켄바우어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경기 시작 2분 만에 크루이프가 페널티킥을 얻어내 1-0으로 앞서 '토탈사커'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독일의 전설적 골게터 뮐러에게 연속골을 내주고 결국 역전패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 정상권으로 급부상했고 세계 축구의 전술변화에도 큰 파장을 몰고왔다. 
또한 '오렌지 군단의 전설' 크루이프는 환상적인 드리블과 폭발적인 돌파력, 정확한 슈팅력으로 세계 축구팬을 매료시키며 당대 최고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상대 수비를 농락하는 특허 기술 '크루이프 턴'에 세계는 경탄했다.

국가대표로 48경기에 출전, 33골을 기록한 크루이프는 아약스 시절 3년 연속 유럽 최우수선수에 뽑혔으며 '20세기 최고의 유럽 축구선수'에 선정됐다. 현재 무보수로 카탈루냐 대표팀을 맡고 있다.

 

 






'토탈사커' 축구계 혁명 일으키다 (1974년 네덜란드)
 
'월드컵 클래식팀' 코너의 첫 번째 선택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준우승팀인 '무적의 마자르' 헝가리였다. 당시 그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런 설명을 했었다.

《월드컵의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팀들 가운데 딱 10팀만을 추려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아야한다니 선정부터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당 기준은 성적이어야겠고 그렇다면 우승은 필수에 가까운 조건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 우승팀만 18개 팀인지라 최소 8팀은 '클래식팀'에 이름조차 올릴 수 없다. 그런데 나머지 10팀도 무혈입성은 불가능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이런 팀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친, 그러나 '무적의 마자르' 혹은 '매직 마자르'라 불린 헝가리대표팀이다.》 

우승팀보다 특별했던 2등 '무적의 마자르' 때문에 적잖은 1등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헝가리만 유달랐던 것은 아니다. 1등만 아니었을 뿐 최고였던 2등이 또 있으니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1974년 월드컵 준우승팀인 네덜란드대표팀이다. 

미첼과 토털싸커

능히, 역대 월드컵 최고의 팀으로 손색없는 전력을 갖췄었고 실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토털사커'의 아버지 리누스 미첼 감독과 감히 누군가와 견줘지기를 거부했던 요한 크루이프를 필두로 롭 렌센브링크, 루드 크롤, 요한 니스켄스, 아리에 한까지 차고 넘쳤던 스쿼드는 그네들의 유니폼 색깔처럼 화려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월드컵 트로피를 품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베켄바워의 서독이 아니었다면 응당 1인자가 어울렸던 그들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강렬한 잔상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네덜란드 축구를 이야기하려면 먼서 리누스 미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와 그가 집대성한 '토털사커'의 개념을 짚고 가는 게 순서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사실 딱히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전체'라는 단어가 들어갔듯 토털사커는 '전원공격, 전원수비'를 모토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실천한다는 전술이다. 요컨대 누구는 방어만 하고, 누구는 허리 진영에서만 움직이며, 누구는 최전방에서 골 사냥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골키퍼를 제한 필드플레이어들은 누구라도 수비수로, 미드필더로, 공격수로의 즉각적인 변화가 가능해야한다는 이론이다. 물론, 정신없는 포지션 체인지 와중에도 일정한 전형을 유지해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니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지금으로서도 어지간한 수준이라면 마음먹기조차 어렵고, 따라서 정해진 포지션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때였으니 충격적인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미첼과 그의 제자들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펼쳤다는 점이다. 물론 '토털사커 센세이션'을 미첼만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미첼의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라는 이름이 나와야 자연스럽다.
 
미첼의 아이들
 

 

 
축구팬이라면, 요한 크루이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미의 자랑이 펠레와 마라도나로 귀결된다면, 서독의 카이저 베켄바워와 함께 유럽의 자존심을 지켜준 인물이 바로 크루이프다. 아약스를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3연패(1971~73)를 달성하며 발롱도르를 3회(1971, 72, 74) 수상했으며 지도자로 변신한 이후로도 '원조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이끌며 1991~94년 라리가 4연패와 1992년 챔피언스리그 정상을 정복했으니 그야말로 위대했던 축구인이다. 이쯤이면 화려함으로는 누구와 견줘도 당당한 커리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일하다싶은 아쉬움인 월드컵 트로피를 품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베켄바워는 언젠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미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로 인해 혁신적인 개념의 토털사커가 탄생했지만, 크루이프라는 천재 플레이어가 없었다면 토털사커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실상 위대한 지도자 미첼과 위대한 플레이어 크루이프만으로 실상 1974년 네덜란드대표팀의 위력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워낙이 일당백인지라 둘의 존재감으로도 당당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나머지'로 표현하기에 당시 네덜란드대표팀에는 천부당만부당한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수비의 핵은 단연 루드 크롤인데, 토털사커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1974대회에서는 왼쪽풀백으로, 1978월드컵에서는 센터백으로 나서 준우승 2연패를 이끌었던 크롤은 수비수에게 수비만을 요구하지 않았던 미첼 감독의 뜻에 따라 좌우 횡적인 움직임 뿐 아니라 종으로의 공격가담 능력도 수준급이었다. 1978년 월드컵에서는 캡틴으로 리더 역할까지 했으니 토털사커의 척추였다 해도 과언 아니다. 허리라인으로 올라오면 요한 니스켄스와 아리에 한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아리에 한은 크루이프로부터 '철의 다리'라 불리었던 인물로 장거리슈팅이 상당히 위력적이었고 중요한 순간 곧잘 골까지 기록했던 쓰임새 많은 요원이었다. 

아리에 한이 크루이프의 디딤돌이었다면 니스켄스는 파트너이자 조력자였다. 'Johann the second'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만큼 크루이프와의 호흡은 찰떡궁합이었다. 방대한 활동량과 크루이프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으니 1970년 이후 10년 동안 네덜란드 대표팀 중원의 한자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크루이프가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센스로 박자를 맞춰주었던 니스켄스의 공이 적잖고, 크루이프가 주연으로 빛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림자처럼 뒤를 받쳐준 니스켄스의 영향이 지대하다. 

니스켄스가 2선에서 크루이프를 도왔다면 전방에서는 감각적인 윙포워드 롭 렌센브링크가 짝을 이뤘다. 특히 왼쪽에서 빛났던 렌센브링크는 여느 동료들과는 다르게 커리어의 대부분을 벨기에리그에서 보냈다. 안더레흐트가 2차례 컵위너스컵(1976∙78)을 차지했을 때 공히 결승전 결승골을 터뜨렸을 만큼 큰 경기에, 찬스에 강했던 해결사다. 크루이프가 워낙 대단했을 뿐, 다른 이들도 결코 못지않았던 화려한 스쿼드다. 

짙은 여운을 남기다 
 
소개한 이들과 함께, 1974년 월드컵에서 오렌지군단은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운 내용과 결과를 선보였다. 네덜란드는 스웨덴 불가리아 우루과이와 함께 묶인 1차 라운드에서 2승1무를 거두고 가볍게 1위로 통과했다. 스웨덴과 0-0으로 비긴 것이 옥에 티고 4-1로 불가리아를 대파할 때 그 뛰어난 루드 크롤이 자책골로 실점을 헌납했다는 게 또 다른 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동독과 함께 묶였던, 더 험난했던 2차 라운드는 차라리 완벽이었다. 아르헨티나를 4-0으로 셧아웃 시키더니 동독과 브라질 역시 각각 2-0으로 무릎 꿇렸다. 요컨대 서독과의 결승전을 앞둔 6경기에서 14골1실점이라는 짱짱한 기록을 남겼는데, 결국 1실점도 자책골이니 자신들만 15골을 터뜨린 셈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토털사커, 전원공격 전원수비'라는 기치를 들고 나온 미첼의 네덜란드를 바라보는 세계 축구계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했지만, 미첼의 네덜란드는 정작 결승에서 서독에게 1-2로 무너졌다. 구구절절 결승전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네덜란드로서는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2인자의 꼬리표였다. 

챔피언이라는 칭호도, 트로피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였다. 크루이프와 함께 단 한 번밖에 펼쳐 보이지 못했던 그때 그들의 퍼포먼스를 월드컵의 역사가 잊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미첼과 미첼의 아이들이 보여준 환상적인 경기력이 경탄스러운 까닭이다. 누군가 "토털사커는 전술의 발전이 아닌 혁명적 발견"이라는 말을 했었다. 이것이 1974네덜란드대표팀의 아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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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 제 10회 1974년 서독 월드컵

축구의 역사는 당대 가장 좋은 팀이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는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궁극의 영예는 개최국 서독에 돌아갔으나 전 세계 많은 축구팬들은 준우승팀 네덜란드를 축구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혁명적이고도 우아한 팀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이른바 ‘토털 풋볼(TotalFootball)’을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사하는 팀이었는데, 토털 풋볼이 시대를 초월해 축구라는 종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술적 이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이 사나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이 그처럼 훌륭하게 실행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토털 풋볼을 위한 첫 번째 조건, 그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다.

토털 풋볼러(Total Footballer)

‘토털 풋볼’의 위대한 사령관 요한 크루이프.
<출처 : wikipedia(MittelstädtRainer)>

크루이프를 설명하기 위한 첫 머리에는 역시 토털풋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토털풋볼의 연원에 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1920년 전후 아약스 와 네덜란드를 지도했던 잉글랜드 출신 감독 잭 레이놀즈로부터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1960년대 초중반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았던 빅 버킹엄의 공헌은 어쩌면 더 직접적이었는데 특히 그는 크루이프를 프로 무대에 데뷔시킨 장본인기도 하다. 다른 한 편으로, 1950년대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 대표 팀이 이미 토털 풋볼의 일부 개념(특히 포지션 체인지)을 활용하고 있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전체적인 스타일에 있어 틀림없이 ‘앞선 시대의 크루이프’로 간주될 만한 인물)야말로 ‘토털 풋볼러’ 그 자체였다는 견해들에도 당연히 일리가 있다. 또한 1960년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일부 클럽들에서도 이미 토털 풋볼과 같은 스타일이 시행되고 있었고, 1966 월드컵에서부터 스타가 된 ‘공격하는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는 가장 선명한 유형의 ‘토털 풋볼의 기수’로 평가받기도 한다.

따라서 토털 풋볼은 거장 리누스 미켈스와 요한 크루이프만의 전유물은 아닌, 하나의 시대적 사조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켈스-크루이프’로 이루어진 축구사 역대 최고의 ‘사제 드림팀’이 토털 풋볼의 아이디어를 가장 완성도 높은 형태로 체계화, 정립, 구현했을 뿐 아니라 파급력 및 역사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도 최고의 공헌을 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켈스와 크루이프가 ‘토털 풋볼의 표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토털 풋볼이란 무엇인가? 미켈스 감독은 상대가 볼을 빼앗아 나올 때 팀 전체가 뒤로 물러나 수비하지 않고 가급적 상대 골문과 가까운 위치에서 볼을 되찾아 공격을 재개하는 형태의 공격 축구를 원했다. 수비를 위해 완전히 후퇴한 후 다시 전진하는 축구는 도대체 효율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브라질 수준의 개인기 좋은 선수들이 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좋은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결국 미켈스의 선택은 수비 라인을 높은 지역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는 전방에서부터의 적극적인 ‘압박’으로 상대의 볼 소유권을 최대한 높은 지역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선수들의 움직임은 ‘포지션’이 아니라 ‘공간’을 기준으로 펼쳐지게 됐다. 예를 들어 공격수들이 수비수의 역할을 수행, 상대를 압박해 볼을 탈취했을 때 효율적인 역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반대로 빈 공간을 파고드는 수비수나 미드필더의 공격 가담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동료가 비워둔 공간을 다른 동료가 메워주는 플레이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렇게 포지션과 역할을 수시로 변경하면서 ‘팀 전체가 공간을 기준으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토털 풋볼의 핵심이었다.

결국 토털 풋볼을 수행하는 선수들에겐 상황에 맞는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는 전술적, 공간적 센스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압박에 요구되는 체력, 그리고 무엇보다 수준급의 기본기까지 필요하게 됐다. 압박을 수행함에 따라 고갈되기 쉬운 체력을 최대한 안배하기 위해서는 아군이 볼을 지니고 있는 시간을 가급적 늘려야만 하는데, 이는 선수들의 기본기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미켈스의 위대한 구상이 그라운드 위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도 크루이프를 위시한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의 평균적인 우수성 덕택이었다.

특히 크루이프의 존재는 토털 풋볼의 완성에 있어 절대적인 것이었다. 크루이프는 스승 미켈스의 토털 풋볼 이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나이였을 뿐 아니라 판단력과 개인기, 스피드를 비롯 토털 풋볼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은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크루이프는 팀 전체의 ‘첫 번째 방아쇠’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크루이프가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나머지 동료들은 그의 발사에 맞춰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축구사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의 축구 두뇌와 모든 부문에 걸친 올라운드 재능이 아니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16차례의 패스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네덜란드와 서독의 대결은 ‘토털 풋볼 vs. 토털 풋볼’이라 묘사될 수도 있으리만치 당대의 혁명적 사조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승부였다. 물론 네덜란드가 토털 풋볼의 정점을 치닫고 있던 팀인 반면 서독은 토털 풋볼의 기조가 다소 약화된 시점이었기는 하지만, 베켄바워로 상징되는 토털 풋볼의 일부가 서독에게도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미 유럽을 제패한 클럽들인 아약스와 페예노르트 선수들로 구성된(롭 렌센브링크는 예외) 네덜란드는 감독 미켈스의 영도 하에 이미 대회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2차 조별리그에서 전 대회 우승팀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함으로써 토털 풋볼의 위력을 유감없이 떨쳐 보였다. 그 경기에서 크루이프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멋진 골을 터뜨렸으며 요한 네스켄스와 주고받는 플레이 또한 격찬을 받았다. 펠레는 떠났으되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존재했던 브라질은 결국 대회 4위에 머무르게 된다.

결승전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그리 어렵지 않은 우승을 예상했다. 실제로 경기 초반 그러한 예상은 잘 들어맞고 있었는데 특히 네덜란드가 터뜨린 완전무결한 첫 골이 그것을 예감케 했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부터 시작된 네덜란드의 패스가 16차례 이어지는 동안 서독은 단 한 번도 볼을 만져보지 못했다. 볼은 결국 중원의 크루이프에게 되돌아왔고 크루이프의 드리블 돌파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까지 이어진 순간 급기야 서독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만다. ‘작은 요한’ 네스켄스가 그것을 성공시킴으로써 경기 시작과 더불어 스코어는 1-0. 네덜란드의 우수성이 다시금 증명된 장면이었다.

네덜란드는 단지 우승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독을 망신주기를 원했으며 첫 20분 동안은 그러한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서독은 베켄바워의 지휘 하에 그들의 주무기인 ‘신념’을 잃지 않고 있었다. 25분 경 베른트 횔첸바인이 얻어낸 페널티킥 장면에서 파울 브라이트너가 동점을 만들어냈고 베르티 포그츠는 투혼의 마크로써 크루이프를 묶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독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예의’ 역전에 성공하고야 만다. 최고의 팀이 우승을 거머쥐지 못한 반면 개최국 서독은 20년 전의 ‘베른의 기적(무적 헝가리를 상대로 서독이 일궈낸 대역전 우승)’을 재현해냈다.

하지만 틀림없이 크루이프는 서독 월드컵 최고의 선수였고 그 해의 유럽 골든볼(발롱도르)도 베켄바워가 아닌 크루이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대회는 그의 선수 경력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본선이 되고 말았다. 1977년 10월 크루이프는 가족의 신변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택하게 되고,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우승 문턱에서의 좌절을 경험한다.

크루이프 턴

디 스테파노가 그러했듯 크루이프는 그라운드의 사령관일 뿐 아니라 개인전술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그는 이미 상대 선수를 제치는 일과 드리블에 매우 능숙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1974 월드컵 스웨덴 전에서 크루이프가 성공시킨 한 가지 동작은 크루이프의 뛰어난 개인전술을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인 동시에, 기술과 두뇌를 겸비한 크루이프의 ‘창의적 발상’의 대표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그 동작은 다름 아닌 이른바 ‘크루이프 턴(Cruyff Turn)’. 수비수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크루이프의 절묘한 ‘백힐 드리블’은 이후 세계 축구에 급속도로 펴져나갔고 축구 교본들에 등장하는 일반적 기술이 됐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축구황제 펠레와 매한가지로 월드컵 무대를 통해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페널티 패스

크루이프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와 북미축구리그(NASL)를 거쳐 다시 네덜란드 리그로 돌아온 노장 크루이프가 커리어의 황혼기에도 불구, 여전히 녹슬지 않은 우아함을 과시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1982년 아약스가 헬몬트 스포르트를 상대했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차게 된 크루이프는 볼을 골문을 향해 차지 않고 왼쪽 앞으로 굴려버렸다. 이는 팀 동료 예스퍼 올센을 향한 ‘패스’였고 달려온 올센으로부터 다시 패스를 건네받은 크루이프는 어리둥절해 있는 골키퍼를 상대로 가볍게 득점을 터뜨린다.

이 페널티 패스(?)에 의한 컴비네이션 골은 축구사의 첫 시도로 기록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크루이프의 장난기어린 모험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먼 훗날, 크루이프의 ‘14번’을 흠모했던 아스널의 티에리 앙리는 로베르 피레스와의 유사한 컴비네이션 시도에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드림팀 바르셀로나

크루이프는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낸 대표적인 경우다. 선수 시절의 라이벌 베켄바워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들어 올렸다면, 크루이프는 클럽 축구계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성공들을 일궈냈다.

1988년부터 옛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은 크루이프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스페인 라 리가 4연패의 업적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에 클럽 역사상 첫 번째 유러피언컵을 안겨줬다. 특히 크루이프 시대의 바르셀로나에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 로날드 쿠만(네덜란드), 미카엘 라우드롭(덴마크), 호마리우(브라질)와 같은 초특급 재능들이 존재, 바르셀로나 역사의 ‘초대 드림팀’으로서 영원히 기록된다.

선수 시절은 물론이고 지도자 시절에 이르기까지 크루이프 축구에 면면히 흐르는 토털 풋볼의 정신은 제자 호셉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지금의 바르셀로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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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이미지
한준희 | KBS 축구 해설위원
글쓴이 한준희는 2003년 문화방송에서 축구 해설을 시작, 2005년부터는 한국방송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이다. 유럽 5개 리그, 챔피언스리그, 월드컵, 유럽선수권, 코파아메리카, 아프리칸 네이션스컵, 클럽월드컵, K리그, 실업축구, 여자축구에 이르는 광범위한 중계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한국방송의 <일요 스포츠 쇼>, <비바 K리그>,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등의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9&contents_id=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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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 이슈] 레전드 그 이상, 축구는 크라위프 전후로 나뉜다


축구계는 크라위프와 같은 '이상주의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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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축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던 크라위프


지난 한 주 동안 세계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한 인물은 꽤 오랫동안 현장에서 떠나 있던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요한 크라위프(68)였다. 스페인 라디오 방송 ‘엘 몬 아 RAC1’이 20일 크라위프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보도했고, 22일 최종적으로 그의 폐암 투병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이 기간 세계 유력 언론이 크라위프가 축구 역사에 갖는 상징성을 칭송했다.

 

크라위프는 자신이 정기적으로 컬럼을 기고하는 네덜란드 신문 ‘더 텔레흐라프’를 통해 “사실 내게 언론은 과중한 짐과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수 많은 미디어가 나의 상황에 보여준 반응에 감동했고, 가슴이 따뜻해졌다”고 밝혔다. 늘 거침없고, 단호하며, 냉철한 독설로 ‘이상주의’를 설파하던 크라위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이었다.


다소 과할 정도로 자신의 축구적 이상을 밀어붙이는 크라위프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를 잃을 수 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두가 그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경기력이 수반되지 않은 결과는 가치가 없다. 경기력 없이 얻는 결과는 지루하다”고 말했던 크라위프의 이상은 ‘고집불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고집으로 인해 축구는 ‘혁신’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서력을 기준으로 한다. 서력에 다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아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누어 해를 헤아리고 있다. 인류 사회의 기술적 진보는 1차적으로 산업사회를 가속화시킨 헨리 포드를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은 스마트폰의 시대를 연 스티브 잡스를 ‘기원’으로 삼는다. 잡스는 이 시대의 혁신의 아이콘이다. 축구계에선 크라위프가 바로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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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직접 만났던 크라위프. 카메라 정면을 익살스럽게 응시하며 화려한 연변을 자랑했다.


크라위프, 축구의 지적 진보를 이끈 혁명가


축구사는 크라위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C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 일명 ‘티키타카’로 불리는 스타일로 세계 축구를 정복한 배경에는 크라위프이즘이 있다. 크라위프가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남긴 수 많은 발언은 진보한 현대 축구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공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공을 가져야 한다. 공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볼 점유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공을 소유해야 공격할 수 있다. 공을 소유한다면 상대의 공격을 허용 할리 없다. 크라위프는 “우리가 공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는 득점할 수 없다”는 매우 단순한 진리를 통해 자신 만의 방법론을 구축했다. 개인 드리블을 중시했고, 거친 몸싸움을 용인했던 초기 축구는 규정 변화와 전술 발전 속에 점점 더 수비적으로 변해왔다. 그 흐름을 공격으로 돌려 놓은 이가 크라위프다.

 

공 소유력을 중시하면서 크라위프는 발로 공을 차는 것이 기본 사항인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신장이나 몸집과 같은 신체 조건, 주력이나 순발력과 같은 운동 능력, 심지어 공을 다루는 기술 보다 공을 운반하는 타이밍과 루트를 결정하는 판단력, 즉 선수의 지능적 요소를 강조했다. 축구라는 스포츠의 지적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데 주력한 것이다.


크라위프는 "스피드가 무엇인가? 스포츠 신문은 스피드라는 것을 통찰하는 데 있어서 혼동하는 것 같다. 보라. 내가 나머지 사람들보다 조금만 먼저 뛰기 시작하면 내가 더 빠른 선수인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물리적 스피드를 이길 수 있는 축구 지능의 힘을 말했다. 크라위프는 현연 선수 시절 놀라운 가속력을 통한 돌파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 자신은 비결을 신체 능력 보다 판단력으로 설명했다.

 

공을 다루는 기술 역시 창조적 사고력과 영리한 판단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기술이란 저글링을 1000개씩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연습하면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서커스단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단 한 번의 터치로 패스를 하는 것이다. 적절한 스피드로 당신의 동료가 받기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것이 기술이다."


동료의 발 1미터 앞 공간에 떨궈주는 패스를 통해 경기 템포 상승, 상대에 수적 열세를 야기할 수 밖에 없는 횡패스 금지 지시 등 현대 축구에서는 매우 당연시 되는 요소들을 먼저 설파하고 시류를 만든 것이 크라위프다. 크라위프는 늘 생각하는 축구를 지향했고, 모든 플레이에 대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또 전했다. 이를 통해 팀 전체를 지적으로 만들었다.

 

크라위프는 “축구는 실수를 가장 적게 하는 이가 승리하는 경기”라고 했는데, 속임수에 능했던 크라위프는 실수 조차 이용했다. "내 스스로 실수를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난 실수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자화자찬인 동시에 자녀들과 게임을 할 때도 이기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는 그의 승부 접근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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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위프는 누구보다 생각의 속도가 빨랐던 선수다.


크라위프는 "내 팀에서 골키퍼는 첫 번째 공격수이고, 스트라이커는 첫 번째 수비수다"라고 했다. 피치 위의 선수를 포지션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전원의 멀티 플레이어화를 추구했다. FC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던 마지막 시즌에는 훈련장에서 수비수에게 골키퍼 장갑을 끼도록 하는 실험을 벌이기도 했다. 골키퍼 라인에서의 빌드업 능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에서다. 이를 통해 선수들을 향한 기술적 요구는 더 높아졌다.


크라위프가 올스타팀의 ‘불용론’을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각자 포지션에 특화된 최고의 선수가 아닌, 전체 팀으로 하나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팀이야 말로 강하다는 것이다. "각 포지션별로 최고의 선수를 골라고 가장 강한 베스트11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11명의 선수로 가장 강한 하나의 팀을 만들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위프는 돈으로 승리를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은 팀을 왜 이기지 못하나? 난 골을 만들 수 있는 돈가방은 본 적이 없다." 축구 팀은 오직 하나의 팀으로 전원이 서로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유기체처럼 기능할 때 가장 강하다. 물론 그 11명의 선수가 크라위프가 원하는 수준의 기술력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가장 단순한 축구를 위한 가장 어려운 고민


그렇기 때문에 크라위프의 방법론은 전 세계 모든 팀에게 적용되기 어렵다. 크라위프 스스로도 그 어려움을 인정했다. “축구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축구를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설파하는 축구 이론은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 당연하고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외면하고, 쉬운 길을 택한다면, 발전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의 시각을 도용하기 보다는, 나만의 시각으로 패배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한 크라위프는 그 어려운 미션에 도전한 인물이다.

 

공격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공격 전술을 구축하는 것은 그래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수비 전술을 만드는 것 보다 어렵다. 골을 넣는 것은 골을 먹히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창조적인 사고와 더불어 고도의 정밀함을 요한다. 실점에 대한 위험 요소도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크라위프의 승리 방정식은 “언제나 상대보다 한 골을 더 터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크라위프의 팀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을 이뤘고, 1992년에는 바르사의 창단 후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다. 크라위프 스타일이 세계 축구를 지배했다. 누구도 그 방식을 감히 따라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한 세대의 팀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영구불멸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는 아약스와 바르사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기초를 만든 이가 크라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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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 불꽃 같은 시간을 보낸 지도자 크라위프


그러나 지도자로 크라위프의 전성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불리함에는 각각의 유리함이 있다”는 말로 그 어떤 조건도 ‘완벽함’을 담보할 수 없다고 했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총 8년 동안 바르사의 역대 최장기 집권 감독으로 재임한 크라위프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바르사 감독으로 총 11개의 트로피를 들었지만, 1994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AC밀란에 0-4 참패를 당했고, 그 뒤로 두 시즌 동안 주요 대회 무관에 그쳐 사임했다. 2009년 비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카탈루냐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기까지 그는 일선을 떠났다.

 

크라위프는 1970년에 선수로 전성기를 보냈고, 1990년대에 지도자로 황금기를 보냈다. 선수와 감독 모두로 시대를 뒤흔들만한 성공을 이룬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아약스와 네덜란드에서 ‘토털풋볼’의 부흥을 이끈 크라위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그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20년이 지나 그의 축구가 세계를 정복하는 모습을 야인의 자리에서 목격했다. 영국이 축구를 만들고, 브라질이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크라위프야 말로 축구를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스포츠로 바꿔 놓은 혁명가일 것이다.


바르사, 크라위프, 과르디올라 그리고 리더십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끈 바르사는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14개의 우승컵을 들었다. UEFA챔피언스리그만 두 차례 더 우승하며 역대 최고의 팀으로 불렸다. 그 이전에 바르사 지휘봉을 잡았던 네덜란드 출신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도 크라위프의 지지를 받은 감독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레이카르트 감독이 남긴 유산에 크라위프 스타일을 더 강하게 적용해 대업을 이뤘다. 지금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는 과르디올라 감독은 “바르사라는 대성당을 지은 이는 크라위프다. 그 후임 감독의 역할은 그저 이를 보수하고 발전시킨 것뿐이다. 영광스러운 바르사의 플레이는 크라위프 축구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했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와 바르사에 매우 결정적인 존재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그리 빠르지도 않았던 미드필더 과르디올라는 볼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고, 그 볼을 언제 어디로 보내야 하는 지에 대해 잘 아는 선수였다. 바르사B팀에서 과르디올라에게 주어진 역할은 오른쪽 미드필더였지만, 크라위프는 당시 바르사B 감독이었던 카를라스 레샤크에게 수비 라인 앞의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시켰고, 빠르게 1군으로 끌어 올려 팀 플레이의 중심으로 삼았다.


크라위프 자신도 그런 선수였다. 모든 선수들이 자동적으로 역할을 바꿔가며 능동적인 축구를 하기를 바랐지만,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령탑의 존재는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탁월한 공격 능력과 득점 능력에도 전방 보다 중원, 중원 보다 후방으로 내려가 경기 전체를 리드하는 임무를 즐겼다. 크라위프 축구의 리더는 중원에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내다보고, 조정한다. 크라위프는 이러한 마에스트로가 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동료들이 실수를 벌인 뒤 질책하는 선수는 진짜 리더가 아니다. 진짜 리더는 피치 위에서 다른 선수들이 실수를 범할 것마저도 이미 알아 차리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 시대에 펼친 놀라운 경기 영향력과 상징성을 통해 바르사의 중앙 미드필더 교과서가 됐다. 그라운드 위의 감독은 곧 좋은 감독이 될 재목이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의 길을 걷고 있다.


과르디올라의 등장 이후 차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등 중원에서 공을 관리하며 경기를 조율하는 선수가 꾸준히 배출될 수 있었다. 크라위프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하는 리오넬 메시의 진화 과정도 이와 같다. 공을 쥐고 드리블하기를 즐겼던 아르헨티나 소년은 점차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크라위프는 이상적인 축구를 꿈꾸지만, 결코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메시에게 충분한 연봉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는 떠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편도 아니다. 그의 관점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다. 바르사의 경기력과 운영 방식에 지독한 독설을 퍼붓기도 서슴지 않는다. 조국 네덜란드의 축구에 대해서도 그렇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0-1로 패하며 1978년 이후 무려 32년 만에 준우승을 차지한 네덜란드 대표팀을 향해 “결승전 경기 내내 추하고 천박하며 형편없었다. 끔찍하고 슬플 정도로 지저분한 안티 풋볼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외로운 영웅, 초월적 레전드


크라위프는 “기회는 논리적”이라고 했다. 모든 상황에 대해 ‘왜’와 ‘어떻게’를 생각하는 크라위프는 축구계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이 됐다. 자신의 전성시대를 연 아약스에서 토탈풋볼을 함께 창시한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종국에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결별했다. 자신이 함께 성장 시킨 동료 선수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주장직에서 내려온 것이 바르사 이적의 단초였다.

 

선수 시절에서 돈을 따라 다닌다는 지적에 네덜란드 팬들로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바르사 내에서도 회장 선거를 둘러싼 정치 게임 속에 잠시 명예 회장직에 올랐다가 물러났다. 친정팀 아약스에서 맡은 기술 고문 역할도 오래 하지 못했다. 바르사 지휘봉을 내려 놓은 이후 크라위프는 정처 없는 생활을 해왔다. 그의 소속은 그냥 크라위프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안 좋은 것이죠. 사사건건 다른 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들게 되거든요.” 크라위프의 참견과 독설은 그렇게 결국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크라위프가 축구에 끼친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경력 내내 대립각을 세운 주제 무리뉴 마저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2009년 겨울, 기자는 카탈루냐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바르셀로나에서 가진 기자회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유럽의 고고한 취재진 조차 회견이 끝난 뒤 크라위프에게 달려가 사인을 요청했다.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를 매주 목격하는 스페인 현지 취재진에게도 크라위프는 초월적인 영웅으로 숭배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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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취재진에게 사인을 해준 크라위프


실제 크라위프의 회견에서 느낀 분위기는 ‘냉랭함’보다 유머였다. 글로 옮기면 거칠 수 있는 거의 언사는 특유의 너스레와 블랙 유머, 그리고 웃음이 결합되어 한 편의 토크쇼처럼 보였다. 크라위프는 그의 복잡한 비유법과 표현에 대해 “당신을 이해시키고자 했다면 더 나은 설명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 언론을 불신했고,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 사이 쌓인 오해의 불순물이 크라위프라는 인물에 부정적 이미지를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위프라는 인물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았다. 크라위프를 잃는 것은 단지 한명의 추억의 스타를 잃는 슬픔의 문제가 아니다. 크라위프의 독설은 전술적 게으름에 빠지고, 결과와 효율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지루하고 손쉬운 선택을 내리려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크라위프의 방식 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크라위프가 없다면 아마도 축구는 훨씬 더 지루한 스포츠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축구계은 아직 크라위프가 필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도 바르셀로나에서 건축 중인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크라위프가 꿈꾼 축구 대성당은 계속해서 산통을 겪으며 더 웅장한 건물로 지어지고 있다. 투병 중인 사실을 떠나서도, 크라위프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크라위프의 이상은 영원 해야 한다. 그가 남긴 말 하나 하나는 이미 현대 축구의 바이블이 되었다. 크라위프가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겨 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기도한다.


바르사를 수식하는 말이 ‘클럽 그 이상’이라면, 크라위프는 한 명의 축구 레전드 그 이상이다. 어쩌면 그는 축구 그 자체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말했듯, 그의 뒤를 이을 감독, 나아가 모든 축구인들의 임무는 그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글=한준 (풋볼리스트 기자, 스카이스포츠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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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유럽최고’ 크루이프라 가능했던 9가지 업적




[인터풋볼] 이현민 기자 = 세계축구의 큰 별이 졌다. 요한 크루이프가 2016년 3월 24일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크루이프 재단은 24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암 투명 중이던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의 레전드 크루이프가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언론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은 이 소식을 다뤘고, 축구인과 관계자들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영국 ‘미러’는 “6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저 놀라운 스타가 아닌 혁신가였다. 단순히 아약스, 바르셀로나, 네덜란드의 레전드가 아닌 축구 그 자체 전설이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우아했던,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그는 암과 사투 끝에 세상과 이별했다. 선수와 감독으로 혁신적이었고, 기존에 뻔한 전술을 파괴한 혁신가였다”고 높게 평가하면서, 그만 가진 9가지 업적을 조명했다. 

1. 크루이프턴
본인의 이름을 딴 기술을 가진 선수가 몇이나 될까.

2. 토털사커 창시자
‘티키타카’는 현재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축구의 간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1970년대 크루이프가 이끌었던 아약스, 네덜란드의 ‘토털사커’에서 비롯된 것이다. 빠른 패스, 빠른 무브먼트, 유기적 움직임이 그것. 왠지 친숙하지 않나. 크루이프는 홀로 리오넬 메시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임무를 수행했다.

3. 발롱도르 최초 3회 수상
현재 최고 기록은 5회인 메시가 보유하고 있다. 메시가 태어나기 전 크루이프는 1971, 1973, 1974 4년 동안 3회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4. ‘3선’ 아디다스 아닌 홀로 ‘2선’을 입은, 그것도 월드컵에서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걸 딱 질색한 크루이프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결승에 올려놓았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디다스 유니폼을 입었다. 결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홀로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다른 동료들과 달리 혼자 2선 유니폼을 입었다. 그가 아디다스에게 연유를 설명했을까. 당시 흔치 않았던 마이웨이를 엿볼 수 있다. 


5. 최고의 스타가 등번호 ‘14번’
과거에 대부분 주전 선수들은 1번에서 11번 셔츠를 입었다. 크루이프가 부상 회복 후 복귀한 1970-71시즌에 그 번호를 다른 선수가 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4번을 부여받았고, 기존의 틀을 깼다. 현재 40번~50번인 유스 선수들은 크루이프에게 고마워하라.

6. 아약스→바르사 이적 때 ‘200만 달러’
최고 스타인 크루이프는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당시 200만 달러의 이적료를 기록했다. 현재 한화로 약 23억3천만 원이다. 무려 40년 전이다. 이 금액을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7. 기술과 능력 위주 ‘라 마시아’ 극대화
마치 축구공장 같은,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는 끊임없이 좋은 선수를 배출해내고 있다. 흔히 표현하는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산’이라고 하는 것처럼. ‘라 마시아’는 크루이프가 1988년 팀 매니저로 부임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신체조건 위주로 선수 선발을 해왔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부터 라 마시아는 기술과 능력 위주로 탈바꿈했다. 메시와 이니에스타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크루이프가 아니었다면 작고 왜소한 선수들이 설 자리가 없었을지도. 

8. 오렌지군단의 최초 퇴장 선수
다소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다. 1968년 체코 슬로바키아를 상대로 레드카드를 받은 최초의 선수로 남아 있다. 

9. 한 세기 동안 유럽 최고의 선수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선수다.

사진=네덜란드축구협회, 크루이프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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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가 남긴 축구에 남긴 '진한' 발자취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FC바르셀로나)
"천재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후안 마타)
"오늘은 축구계에서 가장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슬프다."(울리 슈틸리케)

애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찬사도 이어졌다. 업적과 찬사를 뒤로 하고 떠난 그. '플라잉 더치맨', '크루이프턴' 요한 크루이프가 사망했다. 지난해 1월 폐암 선고를 받았다. 병마와 싸웠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고인이 됐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폐암과의 대결에서 2-0으로 앞서있다"고 말한 그였기에 사망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현대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수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또한 이후의 삶에서도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크루이프가 남긴 족적을 따라가봤다. 

1972년 6월 3일.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오른쪽) ⓒAFPBBNews = News1
▶5관왕

1972년 크루이프는 아약스의 5관왕을 이끌었다. 국내리그인 에레데비지에, KNVB컵, 유러피언컵(유럽챔피언스리그 전신)을 석권해 트레블을 이뤘다. 여기에 UEFA슈퍼컵과 인터컨티넨털컵(클럽월드컵 전신) 우승까지 더했다. 

1964년 아약스에서 프로에 데뷔한지 8시즌만에 일군 대성과였다. 그의 뒤에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있었다. 1965년 미헬스 감독과 만난 크루이프.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게으른 천재'였다. 경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였다. 그런 그에게 미헬스 감독은 '토탈사커'를 제시했다. 다른 선수들은 알지 못했다. 다들 '체력 부담'을 걱정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달랐다. "위치선정만 잘하면 체력도 아끼고 승리고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전술"이라고 했다. 미헬스 감독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미헬스 감독과는 1971년까지 함께 했다. 그 사이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와 유럽 무대를 평정했다. 5관왕을 차지하던 1971~1972시즌 미헬스 감독은 아약스를 떠나있었다. 그럼에도 미헬스 감독의 야전사령관 크루이프는 맹활약하며 5관왕을 이끌었다. 

바르셀로나 시절 크루이프(왼쪽) ⓒAFPBBNews = News1
▶5대0

1973년 여름 크루이프는 아약스를 떠났다. 그리고 스승 미헬스 감독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왔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가 크루이프 영입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당시 스페인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경멸하고 있었다. 프랑코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레알 마드리드로 갈 이유가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온 크루이프는 역사적인 경기를 치렀다. 바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 원정이었다.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맹활약 속에 레알 마드리드를 5대0으로 눌렀다. 그 시즌 바르셀로나는 1959~1960시즌 이후 14년만에 리그 우승을 거뒀다 

▶크루이프턴

현재는 너무나도 많은 선수들이 쓰고 있는 기술이다. 볼을 발 뒤로 빼내서 상대를 제치는 것. 크루이프가 제일 처음 썼다. 종종 써왔던 기술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상대할 때였다. 당시 볼을 받은 크루이프는 크로스를 올리는 척하면서 볼을 뒤로 뺐고 그대로 전진해 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베켄바우어(왼쪽)와 크루이프(가운데)가 펼친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 ⓒAFPBBNews = News1
하지만 서독에는 크루이프에 대적할만한 선수가 있었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그는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를 밀착 마크했다. 결국 크루이프는 고전했고 네덜란드는 1대2로 졌다. 물론 그해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차지했다. 마지막 위로였다. 

이 경기는 크루이프의 마지막 월드컵이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를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정작 본선에 자신은 나가지 않았다. 당초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2008년 스페인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크루이프는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그 충격으로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다시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와 함께. ⓒAFPBBNews = News1
▶감독 크루이프

이후 크루이프는 미국에서 뛰었다. 그리고 1981년 아약스에 돌아왔다. 2시즌을 뛴 뒤 1983~1984시즌 페예노르트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리고 은퇴 선언. 

은퇴와 동시에 크루이프는 아약스 유소년팀을 맡았다. 로날드 데부어, 프랑크 데부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시도로프 등을 길러냈다. 미헬스 감독의 토탈사커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1985~1986시즌 크루이프는 아약스의 정식 감독이 됐다. 그 시즌 KNVB컵을 우승했다. 다음 시즌에도 KNVB컵 2연패를 달성했다. 동시에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88~1989시즌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물론 감독이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 리빌딩에 들어갔다. 미카엘 라우드럽과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펩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등 드림팀을 구성했다. 1990~1991시즌을 시작으로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의 신화를 썼다. 1991~1992시즌에는 유러피언컵을 차지하기도 했다. 

8시즌동안 리그 4회, 코파델레이 1회 우승을 일궜다. 유러피언컵에서도 1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컵위너스컵 1회 우승도 있다.

ⓒAFPBBNews = News1
▶유산
크루이프는 1995~1996시즌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그 책임을 지고 바르셀로나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의 고문으로 재직했다. 크루이프가 남긴 유산은 대단하다. 가장 큰 것이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다. 크루이프가 아약스를 본받아 현재의 유스시스템을 정비했다. 또한 전세계에 토탈사커를 전파하기도 했다 


[런던(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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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 Cruijff, Netherlands (Ajax, Barcelona, New York Cosmos, Ajax, Feyenoord, Netherlands):



‘전설’ 크루이프가 남긴 축구 명언 25개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요한 크루이프(68)가 암 투병 끝에 24일 별세했다.

영국의 <비비시>는 24일(현지시각) 네덜란드의 축구 스타이며,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에서 뛰면서 세 차례의 발롱도르 상을 받은 크루이프가 숨졌다고 보도했다. 크루이프는 1970년대 네덜란드의 토털 사커를 그라운드에서 구현한 대표적인 선수다. 1974년 토털사커를 앞세운 네덜란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팀을 결승까지 올렸으나 서독에 졌다. 당시 크루이프는 ‘크루이프 턴’이라는 축구의 기술을 처음 선보였고, “축구는 다리가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경기”라고 말하는 등 일생 동안 축구에 대한 격언도 많이 남겼다. 선수 은퇴 뒤에는 1996년까지 감독으로서 바르셀로나를 이끌었고, 바르셀로나 명예회장과 아약스 이사 등을 맡기도 했다.

크루이프는 경기가 있는 날에도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지만 1991년 심장 이상으로 응급 상황을 겪은 이후에는 금연 캠페인에 나서기도 했다.지난해 10월 폐암진단 뒤 투병을 해왔다. 지난달에는 “지금 암과의 싸움에서 2-0으로 앞서고 있다. 암을 꼭 이길 것”이라고 했지만 축구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다음은 크루이프가 남긴 명언 모음이다. 한번 읽어보면 크루이프가 왜 축구 전술의 역사뿐 아니라 축구 지성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사진 AFP 연합뉴스


25 Johan Cruyff Quotes That Will Change the Way You Think about Football


축구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바꿀 요한 크루이프의 ‘25개 격언’

http://www.pastemagazine.com/articles/2015/02/25-johan-cruyff-quotes.html

25 Johan Cruyff Quotes That Will Change the Way You Think about Football

1. 기술은 공을 1천번 튕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연습으로 가능하고, 그 기술은 서커스단에서 쓰일 수 있다. 기술은 원터치로, 정확한 속도로, 동료의 발까지 생각해 패스하는 것이다.

2. 선수가 경기 중 공으로 저글링을 하면 수비수들은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을 얻게 된다. 팬들은 그가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선수는 서커스단에 가야 한다.

3. 포지션마다 최상의 선수를 뽑아라. 그러면 강한 11명이 아니라 11명의 강한 하나가 될 것이다.

4. 나의 팀에서 골키퍼는 첫번째 공격수이고, 골잡이는 첫번째 수비수다.

5. 부자 클럽을 왜 못 깨는가? 나는 돈 가방이 골을 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6. 나는 항상 공을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다시 공을 잡으면 유일하게 마크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7. 나는 선수였고, 기술고문이었고, 코치였고, 감독이었고, 명예회장이었다. 멋있기는 한데 모두 사멸하는 것이다.

8. 리더답지 못한 선수들은 실수 뒤에 상대방을 때려 부수려 한다. 진짜 선두 주자는 다른 이들이 운동장에서 실수할 것을 미리 생각한다.

9. 스피드란 무엇인가. 언론은 스피드와 통찰을 혼동한다. 내가 상대보다 조금 먼저 움직이면 내가 빨라 보인다.

10. 맞춤하게 이뤄지는 때는 딱 한순간이다.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느리면 닿을 수 없다.

11. 나는 실수하기 전에 그 실수를 하지 않는다.(두번 이상 반복되는 실수는 없다)

12. 선수는 통계적으로 경기 중 3분만 공을 소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머지 87분 동안 무엇을 하는가다. 그것이 좋은 선수와 나쁜 선수를 가른다.

13. 우승한 뒤에 남는 것은 100퍼센트가 아니라 90퍼센트다. 마치 마개를 따는 순간의 탄산수 병처럼 가스는 이미 얼마간 빠져 나간 상태다.

14. 공은 하나다. 그것을 잡아야 한다.

15. 나는 종교적이지 않다. 스페인에서는 22명의 선수들이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데, 그러면 모든 경기는 무승부가 돼야 한다.

16. 가장 못하는 상대방에게 가장 많이 공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즉시 빼앗아 올 수 있다.

17. 공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라운드를 가능한 널찍하게 활용해야 하고, 공을 잃으면 그라운드를 가능한 좁혀 사용해야 한다.

18. 프로 골퍼들에게는 드라이브, 어프로치, 퍼팅 코치가 따로 있다. 축구에서 1명의 코치가 15명을 관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19. 1라운드에 살아남는 게 나의 목표는 아니다. 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과 한 조가 되고 싶다. 그래야 1라운드 뒤 2개의 라이벌팀이 떨어져 나간다. 그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20. 선수들은 오직 발등으로만 찬다. 나는 인사이드, 발등, 아웃사이드에 양발을 쓴다. 6배나 월등하다.

21. 결과 없는 내용은 맹탕이고, 내용 없는 결과는 지루하다.

22. 견제 당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선수가 많다. 그럴 때 좋은 공격수라는 말은 해도, 그 선수를 막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23. 재능있는 선수를 컴퓨터 통계 자료로 퇴짜 놓는 것은 미친 짓이다. 지금 아약스에서 이뤄지는 그 기준이라면 난 퇴짜를 맞았을 것이다. 15살 때 왼발 킥은 15m, 오른발 킥은 20m를 나가지 못했다. 내 재능과 기술과 시야는 컴퓨터로 발견될 수 없다.

24. 축구를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쉽게 축구하는 것은 가장 어렵다.

25. 당신이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더 잘 설명했어야 한다.


Football, UEFA Cup Winners Cup Final, Berne, Switzerland, 10th May 1989, Barcelona 2 v Sampdoria 0, Barcelona Manager Johan Cruyff watches from the dug-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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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tch soccer legend and Ajax player Johan Cruyff (L) reacts to appluse by Arsenal's Thierry Henry during a pre season 'Dennis Bergkamp' testimonial match at Emirates stadium in north London, 22 July 2006.The match played in honour of Arsenal's Dutch player Dennis Bergkamp who has served the club for 11 years and will retire after the game is the first match played at the club's new stadium.Arsenal defeated Ajax 2-1. AFP PHOTO / ODD ANDERSEN

Dutch footballer Johan Cruyff at the World Cup football competition in West Germany, June-July 1974.

Dutch footballer Johan Cruyff playing for AFC Ajax, June 1971.

Johan Cruyff, of Ajax and Holland relaxes with teamates prior to their European Cup tie with Arsenal. Mandatory Credit: Allsport Hulton/Archive

Sport, Football, Spain, 15th March 1978, UEFA Cup, Quarter Final, Second Leg, Barcelona 2 v Aston Villa 1 (Barcelona win 4-3 on aggregate), Barcelona's Johan Cruyff in action during the match at the Nou Camp Stadium

Johan Cruyff of the Los Angeles Aztecs before the Birmingham City v Los Angeles Aztecs friendly match played at St Andrews, Birmingham, 15th October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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