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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

by Wood-Stock 2014. 11. 5.
[박동희의 야구탐사] ‘잊힌 60년의 전설’ 최후의 국가대표(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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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가 19살의 나이에 대한민국 최초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던 서동준 선생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대표팀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영웅이다(사진=스포츠춘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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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출전 한국 대표팀 멤버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서동준. 우리 야구계는 그간 서동준 선생 같은 분을 너무 소홀히 대했다. 올해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창단 60주년인지도 모르는 게 이 나라 야구계의 현실이다(사진=스포츠춘추)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결성된 야구 국가대표팀 멤버였다. 
1954년 그는 필리핀으로 떠나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는 패배를 통해 교훈을 배웠고, 승리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그의 나이 19살.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영원한 건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뿐이라고. 세월이 흘러 19살의 청년은 이제 79살의 노인이 됐다. 그리고 그는 지금.
최후의 국가대표로 남아 세월과 싸우고 있다. 그의 이름은 서동준이다.

기자가 ‘서동준’이란 이름을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야구 역사책이나 원로 야구인들의 입을 통해서나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한동안 기자는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해 겨울. 홍순일 KBO(한국야구위원회) 야구박물관 자료수집 위원장으로부터 잊고 있던 그의 이름을 다시 들었다. 존경받는 원로 야구기자이자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을 편찬한 홍 위원장은 “요즘도 원로 야구인들이 소리소문없이 세상을 뜨고 있다”며 “서동준 선생마저 세상을 뜨면 한국 야구 대표팀의 역사는 그야말로 공백이 될 것”이라 걱정했다.

서·동·준

기자는 홍 위원장에게 “서동준 선생과 한국 야구 대표팀의 역사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고 물었다. 홍 위원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조직된 야구 대표팀의 멤버였다”며 “당시 대표팀 멤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멤버라곤 서 선생밖에 없다”고 답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야구 대표팀

기자는 내친김에 홍 위원장에게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시초를 물었다. 한국 최고의 야구역사가답게 홍 위원장은 여러 자료를 펼쳐 보이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구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한국엔 국가대표 야구팀이 존재할 수 없었어요. 나라가 없으니 국가를 대표할 팀이 없던 건 당연했지요. 해방 이후 국가대표격인 조선야구단을 결성해 하와이 원정을 떠나려 했고, 1954년엔 한국야구단을 만들며 자유중국(지금의 타이완)으로 원정길에 오르려 했지만, 죄다 무산됐어요. 그 외에도 조선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모여 미군 팀이나 국내 팀들과 붙긴 했지만, 국가대표팀이란 게 올스타팀과는 다르거든요. 다른 나라 대표팀과 맞붙으려고 조직하는 게 국가대표팀이지, 미군팀이나 국내팀과 상대하려 만든 팀을 국가대표팀이라 부르진 않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조직된 국가대표팀을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최초 야구팀으로 부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사실이다. 해방 이후 조선엔 여러 형태의 대표팀이 조직됐다. 1945년 10월 14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조·미 야구친선대회에선 미군(101부대)을 상대하려고 조직한 조선군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조선군은 이영민, 유완식, 손효준, 함용화 등 초호화 멤버로 구성됐다. 하지만, 조선군이 상대한 팀은 미군부대팀이었고, 조직 단계서부터 국가대표보단 올스타팀에 가까웠다.

1947년 7월 18일 조직된 조선야구단은 ‘국가대표’에 가장 근접한 팀이었다. 협회(조선야구협회) 차원에서 우수 선수를 뽑아 만든 야구단이었던데다 처음부터 국외 원정을 위해 조직한 팀이기 때문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그해 ‘하와이 교포회’는 조선야구협회에 하와이 동포 위문 모국 야구단 파견을 요청했다. 경비 일체를 교포회가 부담하기로 약속하면서 조선야구협회는 김영석 감독을 비롯해 장종기, 유완식(이상 투수), 김영조(포수), 손희준(1루수), 김계현(내야수) 등을 뽑아 지금의 국가대표격인 조선야구단을 만들었다.

애초 하와이 교포회가 원한 방문 날짜는 1947년 8월 20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야구협회는 ‘준비 미비’를 이유로 1948년 2월로 연기를 요청했다. 조선야구협회는 이때부터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는데 대표팀 전력을 끌어올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1948년 9월 24일부터 이틀간 서울운동장에서 한성실업연맹 선발군과 평가전을 치른 조선야구단은 11월 15, 16일에도 ‘하와이 원정 조선야구단 환송경기’를 펼치며 팀 전력을 최종 점검했다.

하지만, 1948년 5월. 이번엔 교포회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모국 야구단 방문 일정을 늦췄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오며 조선야구단의 국외 원정은 무기 연기되고 만다. 여기서 '부득이한 사정'은 하와이 교포회의 중심역할을 했던 전경무 선생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국 야구단의 하와이 방문을 추진했던 전 선생은 1948년 5월 29일 올림픽 회의 참석 차 스웨덴으로 떠나다 중간 기착지인 일본에서 조난으로 숨졌다. 모국 야구단 초청의 기획자였던 전 선생의 순직으로 조선야구단은 하와이 땅을 밟지 못했다.

결국 조선야구단은 1948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서울운동장에서 미군 24군단, 미군 31부대, 미군 308부대와 각각 한 번씩 총 세 번의 친선경기를 치르며 하와이 원정 무산의 아픔을 달랜 뒤 바로 해산했다. 야구역사가들이 국외 원정이 무산되고, 미군팀과 친선경기를 치른 조선야구단을 ‘해방 이후 최초의 국가대표팀’으로 부르길 주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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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나고 야구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폐허로 변한 나라에서 제대로 된 야구 인프라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사진처럼 마운드가 없는 야구장이 대부분이었다(사진=스포츠춘추)

1950년에도 야구 국가대표팀이 조직될 뻔했다. 1949년 세계아마추어야구연맹에 가입한 대한야구협회는 1950년 5월 세계야구연맹으로부터 “9월부터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하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당시 협회는 도쿄 국제대회 참가와 함께 대학선발팀의 미국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협회는 일단 ‘제5회 월계기쟁탈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서울팀을 도쿄 국제대회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이어 이정순 협회 이사장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대학연맹 측과 ‘한·미 대학야구 친선경기’ 일정을 조율하도록 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이정순이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6월 25일 폭우가 내리며 방미 일정이 27일로 늦춰졌다. 그리고 이정순은 끝내 미국땅을 밟지 못했다. 6·25 남침이 발생하며 방미는 고사하고, 북한군에 납북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한국 야구 대표팀 역시 첫 국제대회 참가가 무산되긴 마찬가지였고, 대학선발군의 미국 원정도 물거품이 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대표팀이 결성된 건 3년간의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이었다.

쓸쓸히 ‘하늘 그라운드’로 떠난 김양중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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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 왼쪽에서 고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가 김양중 선생이다. 해방 이후 한국 야구계의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사진=스포츠춘추)

홍 위원장은 기자와의 대화가 끝날 즈음 “서동준 선생이 살아 계신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려줬다. 홍 위원장은 낙담한 표정으로 “2, 3년 전인가 자택으로 전화를 드렸는데 서 선생 사모님께서 ‘남편이 많이 편찮으시다. 앞으로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일 있으면 이쪽에서 먼저 전화드리겠다’고 말했다”면서 “그 뒤론 ‘통’ 소식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홍 위원장은 “지금껏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김양중 선생처럼 조용히 세상을 뜨시면 안 되는데···”하고 말끝을 흐렸다.

김·양·중 선·생

1958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내한 경기 때 한국 대표팀 투수로 등판해 당대 최고의 스타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사나이. 광주서중(지금의 광주일고) 시절 경남중 ‘라이벌’ 장태영과 운명의 접전을 펼쳤던 ‘철완’이라 불린 사내.

한국야구사에 큰 획을 그었던 김양중 선생은 2013년 10월 27일 ‘하늘 그라운드’로 떠났다. 향년 83세. 해방 직후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기업은행 감독 시절 최관수·배수찬·이건웅 등 특급선수를 다수 배출했던 명지도자의 타계였지만, 야구계와 언론은 그의 죽음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젊은 야구인들은 ‘김양중’이 누군지 몰랐고, 언론은 김 선생의 타계 소식을 단신으로 처리했다.

이는 지난 6월 5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난 전 보스턴 감독 돈 짐머와 비교할 때 매우 서글픈 장면이었다. 당시 짐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언론뿐만 아니라 한국 언론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는데, 그의 생애를 잘 정리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국내 야구계의 거목과 미국 야구계 거목의 타계 소식을 어쩌면 이리 차등해 다뤘던 것일까.

따지고 보면 누굴 원망할 것도, 탓할 것도 없었다. 현재에만 급급해 선배 야구인들을 소홀히 대한 후배 야구인들과 야구사(史) 정리에 게을렀던 야구계 그리고 취재와 발굴보단 국외 정보와 자료를 간편하게 수집하고 조합하는 걸 즐기고, 그걸 ‘전문가’로 칭하는 이 사회의 모순이 만든 씁쓸한 장면일 뿐이었다.

기자도 할 말은 없었다. 기자는 김 선생을 2007년 6월에 만났다. 그의 자택에서 장시간 인터뷰를 했었고, 김 선생은 생면부지의 기자에게 짜장면을 대접하며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기자는 그런 김 선생과 헤어질 때 “틈날 때마다 찾아뵙겠습니다”하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 선생을 다시 뵌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9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였다. 당시 기자는 김 선생과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고, 그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됐다.

그래서일까. 기자는 김양중 선생을 떠올리며 반드시 서동준 선생의 근황을 알아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서 선생의 근황을 알아내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원로 야구인들과 만날 때마다 서 선생의 근황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모르겠어.” “못 본 지 꽤 됐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하는 답변뿐이었다. 원로 야구인들은 되레 기자에게 “서 선생의 근황을 알게 되면 꼭 연락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동료·선배 야구인들에 대한 걱정과 회한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취재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꼬박 1년이 넘도록 서 선생의 생사와 소재를 알려고 뛰어다녔지만, 손에 쥔 거라곤 주인이 바뀐 예전 전화번호와 집주소뿐이었다. 기자는 서 선생 취재를 연기하고, 대한민국 최초 야구 대표팀의 자료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사상 첫 국제무대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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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필리핀 마닐라 리잘스타디움에서 기념 촬영하는 장면. 한국야구사에서 이들이 없었다면 2014년 인천AG에서 한국 야구는 지금처럼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1954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직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3년간의 전쟁으로 거의 모든 사회적 기능이 마비된 터였다. 이는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야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사망하거나 부상 혹은 월북과 납북으로 많은 야구인이 그라운드를 떠나며 대한민국 야구는 심장 박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그해 5월 17일 한국,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 등 4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아시아야구연맹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결성됐다. 한국야구계에선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과 이영민 부회장이 마닐라로 떠나 아시아 야구연맹 결성식에 참가했다.

결성식에선 의미 있는 합의안이 도출됐다. 바로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의 탄생이었다. 아시아야구연맹 4개 회원국 임원들은 ‘1954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개최하자’고 결정하며 모든 회원국이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빈국(貧國)이었다. 먹고 사는 게 걱정이었던 시절이라, 국외 원정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특히나 아시아야구대회는 출전국이 왕복 경비(대회 기간 숙식비는 주최국 필리핀이 부담)를 감당해야 했기에 한국에서 필리핀까지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표팀 선발이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생전 김양중 선생은 기자에게 “전란 중에 다수 야구인이 희생되고, 야구경기도 중단된 통에 유망주가 자라지 않아 막상 아시아야구대회 대표팀 참가 선수들을 소집하려니 젊은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며 “과거 일제하에서 일본이나 만주에서 뛰던 30대 노장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정확한 기억이었다. 제1회 아시아야구대회 참가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평균 연령은 31세였다. 당시는 20대 중반만 돼도 ‘노장’ 소릴 듣던 때라, 31세면 현역선수론 ‘환갑’이나 다름없었다. 놀라운 건 현역선수론 ‘환갑’이 훨씬 지난 30대 중반 이상 선수도 수두룩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게 대표팀 주장에 선임된 좌익수 노정호는 당시 38세였고, 투수 유완식은 36세, 포수 김영조는 36세, 1루수 심양섭은 34세, 2루수 김계현은 36세, 유격수 강대중은 34세, 우익수 홍병창은 37세나 됐다. 32세의 포수 장석화, 30세의 2루수 박상규, 32세의 우익수 정관칠, 31세의 유격수 이덕영, 28세의 3루수 이기억은 고참축에도 끼지 못했다.

막내그룹이 24세의 중견수 허곤, 25세의 투수 김양중과 장태영(중견수), 26세의 박현식, 27세의 1루수 김정환이었을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젊은 피’라곤 19세의 투수 서동준이 유일했다.

당연한 이유로 아시아야구대회 참가국 가운데 평균연령이 한국보다 높은 팀은 단 한팀도 없었다. 그래도 대한야구협회는 “대표팀을 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며 내심 고참 선수들의 경험이 대회에서 장점으로 작용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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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로 떠나기 전 이승만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는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사진=스포츠춘추)

대표팀 구성을 끝마칠 즈음, 대한야구협회에 기쁜 소식이 전달됐다. 정부가 “경비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협회로부터 출전 선수 명단을 받아본 뒤 야구 대표팀의 국외 원정을 허락하며 정부 관계자에게 경비 지원을 지시했다.

난제였던 선수 선발을 마무리하고, 왕복 경비까지 손에 쥔 협회는 뛸 듯이 기뻐했다. 어디 협회뿐이었겠는가. 당시 야구인들은 벅찬 감정으로 국제대회 원정길을 떠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게 응원을 보냈다. 야구사적으로도 야구 대표팀의 첫 국외 원정은 매우 뜻깊은 장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해방 이후 국가대표팀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많았으나, 국제무대 참가를 위해 조직한 야구 국가대표팀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국가대표팀이 국외 원정길에 오른 것도 역시 당시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 팀이 ‘대한민국(KOREA)’을 대표하고, 이 ‘KOREA'팀을 국제야구연맹(NBC)이 한국 대표팀으로 인정한 것도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가 처음이었다.(NBC는 1954년 11월 5일 대한야구협회가 전쟁 이후 다시 회원국으로 정식가입하자 아시아야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KOREA' 대표팀으로 인정했다. 국제야구연맹이 한국 대표팀을 국제무대의 일원으로 인정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생전 김양중 선생은 “지금이야 많은 선수가 병역혜택 차원에서 태극마크를 달기 바라지만, 당시 야구선수들은 나라를 대표한다는 마음에 앞다퉈 태극마크를 달길 원했다”고 말하고서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1회 아시아야구대회 대한민국 대표팀 멤버로 뽑혔을 때 친구들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 장도(壯途)에 나선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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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기 KNA 항공기를 타기 전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기념촬영 장면(사진=스포츠춘추)

지난 8월 중순이었다.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이는 강대진 전 경기도야구협회 사무국장이었다. 프로야구 초창기 삼미 슈퍼스타스에서 기록원을 맡기도 했던 강 선생은 누구보다 인천야구사(史)를 상세히 아는 이로, 인천야구계에선 존경받는 야구인으로 꼽히는 이였다.

기자는 일전 강 선생에게 “인천고 출신 투수 서동준 선생의 소재를 알고 싶다”고 부탁한 바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강 선생은 “3, 4년 전까지 서 선생을 뵙지만, 그 뒤론 나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수소문은 해보는데 소재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큰 기대는 하지 마라”고 말했었다.

기자는 오랜만에 걸려온 강 선생의 전화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강 선생은 “박 기자, 종이와 펜 준비하시오”하며 뜻밖에도 서동준 선생의 자택과 자택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강 선생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근까지 이 집에 사시면서 이 전화번호를 쓰신 것으로 안다”며 “한 번 연락을 해보라”고 권했다.

강 선생의 노력과 수고가 없었다면 서동준 선생의 집 주소와 자택 전화번호를 구하는 건 영원히 어려웠을지 몰랐다. 기자는 강 선생이 전해준 전화번호로 바로 연락을 취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서 선생의 사모님이었다. 기자는 떨리는 심정으로 “서동준 선생님의 전화번호가 맞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그런데요”였다.

최후의 국가대표와 만나기 위한 1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1954년 12월 11일에도 그랬다. 지금이야 4시간 남짓 걸리는 비행 거리지만, 60년 전 한국에서 필리핀까지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서울 여의도 공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해 연료를 채운 뒤 다시 필리핀을 향해 날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첫 국외 원정길, 거기다 첫 국제대회 참가인 까닭에 한국 야구 대표팀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촌극도 많았다.

1999년 발간된 <한국야구사>엔 당시 한국 야구 대표팀의 웃지 못할 촌극이 이렇게 표현돼 있다.

‘한국팀은 12월 15일 C-46 공군 수송기 편으로 장도에 올랐다. 선수단은 단복을 맞추어 입었는데 겨울이라 여름 옷감을 구할 수 없어 흰 옷감에 감색 물을 들여 입고 떠났다. 냉방이 안되는 공군 수송기에서 무더위에 선수들은 땀을 많이 흘려야 했다. 염색한 단복에서 땀에 젖은 흰 셔츠로 물감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얼룩덜룩 엉망이 된 셔츠를 같이 타고 가던 미군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대로 단복을 입은 채 견뎌야 했다. 중간 급유를 위해 홍콩에 기착했을 때 주무인 이신득이 시내에 나가 반소매 티셔츠를 구입해 와 갈아입었다. 필리핀에 도착해서도 한국팀은 이 티셔츠를 단복으로 삼았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빈국이었던 시절.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일반 여객기도 아닌 냉방도 잘되지 않는 공군 수송기를 타고 필리핀을 향해 떠나야 했다. 수송기 안의 고온으로 염색한 단복 물감이 흰 셔츠로 번지는 창피함을 견디면서 그들은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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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한국 야구 대표팀이 KNA 민항기를 타고 필리핀을 향하는 장면. 사진에서처럼 선수들은 단복을 벗고 편안한 상태였다. 사진 뒷쪽엔 항공사 여성 승무원이 보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하지만, <한국야구사>에 기록된 이 내용은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홍순일 KBO 야구박물관 자료수집 위원장은 지난해 “한국 대표팀이 타고간 비행기는 공군 수송기가 아닌 KNA(대한민국항공사)의 일반 여객기였다”며 그 증거로 생전 김양중 선생이 보관했던 ‘1954년 12월 11일자’ KNA 탑승 티켓을 제시했다. 덧붙여 홍 위원장은 “공군 수송기가 아니었던 만큼 기내 고온으로 흰 셔츠에 단복 물감이 배어들었다는 건 낭설이다. 단복 물감이 흰 셔츠에 스며든 건 기내가 아니라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라며 “마닐라의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갑자기 단복 물감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어느 쪽 말이 사실일까. 홍 위원장의 말이 사실이다. 기자가 입수한 당시 사진엔 KNA 여객기에 탑승하는 대표팀 선수들이 또렷하게 나와 있다. KNA 여객기 안에서 단복을 벗은 채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도 보인다. 특히나 <한국야구사>엔 한국 대표팀의 출국일도 잘못 기재돼 있는데 12월 15일이 아니라 11일에 출국한 것이었다. 홍콩에 도착했을 때 시내에 나가 반소매 티셔츠를 사온 이도 주무 이신득이 아니라 김영석 감독이었다. 그리고 홍콩에서 산 게 아니라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구입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야구사>에 실제와 다소 어긋난 내용이 적혀 있는 건 고 장태영 선생의 자서전 ‘백구와 함께한 세월’을 고증없이 인용했기 때문이었다(공군 수송기를 타고 필리핀에 간 건 1955년 2회 아시아야구대회였다). 홍 위원장이 “<한국야구사>를 다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대표팀이 KNA 민항기를 타고 필리핀을 향해 떠날 수 있던 건 정부, 그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이 대통령은 “국외 장도에 오르는 우리 선수들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덕분에 대표팀 선수들은 KNA 민항기를 전세 내 필리핀으로 떠날 수 있었다.

기자는 60년 전 사진을 정리한 뒤 서 선생 사모님이 알려준 주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야구공처럼 하얀 침대 위엔 포수 미트를 바라보는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는 노년의 한 사나이가 누워 있었다. 그는 바로 ‘최후의 국가대표’ 서동준 선생이었다.


[박동희의 야구탐사] 60년 전, '원조 태극전사'가 있었다(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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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18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한국 대표팀 주장 노정호가 선서하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1954년 12월 11일 오후 11시. 서울 여의도공항을 떠난 KNA402(대한국민항공사, KAL의 전신)편 항공기는 12일 오전 9시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KNA402편에 탑승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항공기가 중간 급유를 위해 홍콩에 착륙하자 피곤한 기색도 없이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다.

선수단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달려간 곳은 홍콩 시내의 백화점이었다. 선수단은 백화점에서 시계, 재봉틀 바늘, 화장품 등을 구입했는데 자신들이 쓰려고 산 물건은 거의 없었다. 당시 대표팀 주축투수였던 김양중 선생은 “그땐 국외에 나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 웬만한 재력가도 국외 나들이가 어려웠다”고 회상하고서 “내가 홍콩을 거쳐 필리핀에 간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지인들이 찾아와 ‘홍콩에 가거든 이걸 좀 사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줘 그 물건들을 사러 돌아다니느라 홍콩 관광은 거의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는 다른 선수들과 감독,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홍콩은 번영의 상징이었다. 한국에서 홍콩은 ‘없는 게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통에 선수단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첫 국외 원정이라는 감격도 잊은 채 ‘대리 백화점 쇼핑’에 매달려야 했고,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까지 홍콩 시내를 누볐다.

한국 선수단이 필리핀에 도착한 건 12일 오후 8시였다. 하루가 걸린 비행 탓인지 선수들은 녹초가 돼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선수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하루 전까지 선수들은 여의도공항에서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찬바람을 맞았다. 반면 필리핀은 해가 졌는데도 영상 30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독(旅毒)과 고온이 겹치며 선수들은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적인 첫 국외원정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절망과 자신감이 교차했던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첫 국제무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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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국제무대 데뷔전이던 한국-일본전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다음 날. 한국 야구 대표팀은 호텔에서 대회가 열리는 마닐라 로잘 스타디움으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선수들은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꼈다. 생전 김양중 선생의 증언이다.

“언제 국외 여행 비행기를 타봤겄어. 신기하지. 비행기 안에서 수다 떨고, 자다 보니까 홍콩까지 도착했고, 홍콩에서 쇼핑하다 보니까 피곤하더라고. 좀 자고 일어낭께 비율빈(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는 거여. 그때까진 몰랐지. 근디 다음날 버스를 타고 야구장으로 이동하는데 이거 ‘딱’ 가슴이 얹힌 거맨키로 불안한 거여. ‘아, 이제부터 시합이구나’ 싶더라고. ‘망신당하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고. 합숙 훈련 오래 허지 않았느냐고? 했지. 근디 ‘합숙’만 했지, ‘훈련’은 거의 못혔어(웃음). 9일간인가 합숙훈련하긴 했는데, 추워서 훈련다운 훈련을 못혔지. 게다가 우리는 10월 초에 다 대회를 마친 다음이라, 12월 초까지 경기를 거의 못했거든. 리잘 구장이 가까워져 오는데 불안감이 더 커지더라고.”

사실이었다. 한국 야구 대표팀은 서울 협동호텔을 베이스캠프 삼아 9일간 합숙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번듯한 실내 연습장 하나 없던 시절이라, 대표팀 선수들은 강추위에 시달리며 러닝과 캐치볼로 몸만 풀어야 했다. 무엇보다 10월 초 이후 경기다운 경기를 치르지 못하며 경기 감각이 무뎌진 상태였다. 가뜩이나 선수단 평균 연령 31세에서 보듯 한국 야구 대표팀은 노장이 많았던 터라, 경기 감각을 단시간 내에 끌어올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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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스포츠팀 가운데 정부 발급 여행증명서(지금의 여권)를 받고 국외에서 열리는 국제 무대에 출전한 건 1954년 야구 대표팀이 처음이었다. 이 여행 증명서는 김양중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사진 제공 : 홍순일)

로잘 스타디움에 도착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또 한 번 불안감을 느꼈다. 이번 불안감은 훈련량 부족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최고의 야구장 때문에 느끼는 불안감이었다. 김양중 선생이 작고하기 전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홍순일 KBO(한국야구위원회) 야구박물관 자료수집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김 선생의 회고담을 들려줬다.

“김양중 씨가 그러더라고. ‘리잘 구장같은 야구장은 난생처음 봤다’고. 어찌나 천연잔디가 고운지 비단이 깔린 것 같았다고 말이지. 김양중 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선수가 천연잔디 구장이란 걸 그때 처음 봤을 거예요. 조명탑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들은 리잘 스타디움의 훌륭한 시설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던 것일까.

“김양중 씨가 하루는 그러셨어요. ‘맨땅에서 야구할 땐 그런 일이 없었는데, 천연잔디 구장에선 자꾸 잔디에 스파이크가 걸려 움직이기가 불편했다’고. ‘조명탑도 난생처음 보는 시설이라 그런지, 도통 눈이 부셔 공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말이지(웃음). 구장 시설 좋은 게 그런 구장을 처음 보는 우리 선수들한텐 되레 불안하고, 불편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더라고요.” 홍 위원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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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팀의 막내 서동준(사진 왼쪽부터)과 김양중이 배트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입던 유니폼과 사용하던 배트, 글러브 등 모든 장비는 다른 팀들의 비웃음을 살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팀은 이 형편없는 장비로도 나리를 대표한다는 자긍심으로 뛰었고, 결국 1승을 거뒀다(사진=스포츠춘추)

선수들을 불편하게 만든 건 또 있었다. 장비였다. 19살의 나이로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팀 멤버로 뽑혀 로잘 스타디움을 밟은 서동준 선생은 1970년대 후반 <월간 야구>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다.

“유니폼은 지금의 밀가루 부대와 같은 무겁고 통풍이 안 되는 것이어서 땀에 젖어 가뜩이나 노쇠한 선수들의 움직임이 더 민첩하지 못하여 우리들을 더욱 둔한 상태로 만들었다. 볼과 그러브(주 : 글러브)는 동양인에게 맞지 않는 미국제여서 크고 무거웠으며 야구 스파이크화 역시 무겁고 스파이크는 도람 통을 오려서 만들어 강도가 약해 금방 휘어져 가뜩이나 잔디가 없는 그라운드에서만 뛰던 우리의 하체를 받쳐주지 못했으며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뺏드(주 : 배트) 역시 미제라서 무거워 맨윗 부분을 깎아 사용하는 실정이었는데 상대 팀으로부터 ‘부정 뺏드’라고 항의를 받는 실정이었다.”

무엇하나 한국 대표팀에 유리할 게 없었다. 선수들은 어쩌다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렇다고 한국 선수단이 절망만 한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대표팀 오윤환 코치는 <주간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한국 야구 수준이 외국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그다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금번 대회는 아마튜어 (주 : 아마추어)대회이며 푸로(주 : 프로)대회가 아닌 만큼 각 팀의 실력 차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팀도 출발을 앞두고 충분히 연습하였으며 연습에 성과가 큰 만큼 좋은 플레이를 할 것으로 예상한다. 단지 우려가 되는 것은 그곳의 기후가 한국과 너무 차이가 크고 선수들의 컨디션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첫 께임부터 신중을 기하여 싸워볼 작정이다.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바란다”며 선전을 다짐했다

주장 노정호도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 원정하는 걸 보니 우리의 책임이 큰다는 걸 느낀다. 우리는 코치 지도에 따라 팀이 일치 합심해서 싸위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경기 면을 떠나서도 스포츠맨들의 우수한 점을 넓이 선양해야 한다. 합심하면 강한 실력이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장도에 오르게 되니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역시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한국 대표팀은 12월 17일까지 현지 적응훈련을 끝마친 뒤 18일 대회 개막전을 준비했다. 공교롭게도 개막전 상대는 일본이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그 데뷔전을 ‘숙적’ 일본과 치러야 할 판이었다. 선수들의 부담감과 승리에 대한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불운한 천재’ 유완식-김영조, 한국 야구 국가대표 첫 배터리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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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사진 왼쪽에서 하얀 옷을 입은 이)과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함께 찍은 사진. 당시 필리핀은 한국보다 부유한 나라였고,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의 리더였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오른쪽 세번째로 서 있는 이가 고 김영조 선생이다(사진=스포츠춘추)

18일 로잘 스타디움. 초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축하하는 개막 행사가 열린 뒤 곧바로 한국-일본의 대회 개막전이 시작됐다.

한국이 상대할 일본팀은 이해 전일본도시대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회인 야구팀 야와타제철(신일본제철의 전신)로, 투·타 전력에서 야와타제철은 다른 참가국을 압도했다. 특히나 대회 전 늦가을 날씨의 가고시마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터라,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 감각 역시 꽤 좋았다.

그런 야와타제철을 맞아 한국은 유완식을 선발투수로 지명했다.

유·완·식

김영석 감독이 당시 36살의 노장 투수 유완식을 선발로 지명한 덴 이유가 있었다. 유완식이 일본 프로야구 출신으로, 누구보다 일본야구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39년 일본 프로야구단 한큐군(阪急軍 : 오릭스 버펄로스의 전신)에 입단한 유완식은 1939년 오사카군(한신 타이거스의 전신)에 입단한 박현명에 이어 한국인으론 두 번째로 일본 프로 무대를 밟은 이였다.

유완식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한큐군 2군에서 뛰었는데 1943년부턴 1군 백업포수로 활약했다. 호방한 성격과 리더십으로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한 유완식은 1944년부터 주전 포수가 기대됐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하며 일본 프로야구가 중단되는 통에 194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완식은 후배 야구인들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하면서도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해 현역생활을 이어갔다. 36살의 늦은 나이에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던 것도 그의 실력이 20대 투수와 비교해 전혀 떨어질 게 없는 까닭이었다.

유완식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성공하지 못한 ‘한(恨)’을 풀려는 듯 일본을 상대로 1회 초부터 호투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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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완식이 한큐군에 뛸 당시의 사진(사진=스포츠춘추)

따지고 보면 유완식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 김영조도 ‘한(恨)의 사나이’였다. 어쩌면 유완식보다 더 깊은 한이 맺혔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김영조는 젊은 시절 일본야구계에서 유망주 가운데 유망주로 뽑힌 이였다.

김·영·조

1923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김영조는 7살 때 가족과 함께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이주했다. 유소년 시절부터 야구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김영조는 야구 명문 데이쿄상고에 입학하고서 촉망받는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특히나 2년 연속 여름 고시엔 대회 도쿄지역 예선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김영조는 ‘고시엔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이 최고조에 달하며 고시엔 대회가 무산된 통에 꿈에 그리던 고시엔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꿈이 모두 좌절된 건 아니었다. 고향에서 인삼밭을 팔고서 일본으로 건너온 뒤 와세다대 주변에서 조선요리 식당을 운영하던 김영조의 부모는 ‘조센징’이라는 차별 속에서도 아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고, 그런 부모를 보며 김영조는 다시 꿈을 키웠다. 김영조가 이를 악물고 야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좇아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것도 헌신적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부모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도쿄 6대학 야구리그가 중단되자 김영조는 1944년 일본 프로야구팀 아사히군에 입단한다. 많은 선수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통에 김영조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프로야구팀에서 뛸 수 있었다.

그해 4월 22일 김영조는 거인군(요미우리의 전신)과의 경기에 대타로 출전하며 ‘제3의 꿈’이던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밟는다. 공교롭게도 그의 프로 데뷔전 첫 타석의 거인군 상대 투수는 후지모토 히데오, 한국명 이팔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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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 투수 이팔용.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퍼팩트 게임 투수다

이·팔·용

부산에서 태어나 8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팔용은 시모노세키상업고-메이지 대학을 거쳐 1942년 거인군에 입단한 재일 한국인이었다. 1943년 5월 22일 나고야군과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이팔용은 그해 34승 11패 승률 .756, 평균자책 0.73, 탈삼진 253개로 다승, 승률, 평균자책, 탈삼진왕 등 4관왕에 오르며 일본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섰다. 훗날(1950년 6월 28일 니시니폰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팩트 게임을 달성하게 될 이팔용을 상대로 김영조가 데뷔 타석을 치른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임에 틀림없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를 상대로 김영조는 주눅 들지 않았다. 되레 반대였다. 김영조는 아시히군의 촉망받는 신인답게 이팔용의 공을 잘 받아쳐 홈런을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프로 첫 타석 첫 홈런’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서 김영조는 이팔용으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생전 김영조는 “이 선배가 ‘넌 최고의 선수가 될 거다. 앞날을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했는데, 실제로 김영조는 그해 홈런 2개로 나고야군의 가나야마 지로의 3개에 이어 홈런 2위에 오른다.(그해 일본프로야구는 전쟁의 영향으로 35경기만 치러졌다)

탄탄대로를 걷던 김영조는 그러나 미군의 도쿄 공습이 심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여기다 일본이 패망하고, 한·일 국교가 단절되면서 김영조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생전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한국에서 열심히 야구에 매달리자’는 각오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자신의 다짐을 이루고자 한국에 남아 여러 실업팀에서 현역선수로 뛰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지 10년 만에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일본 대표팀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일본야구 관계자들은 ‘불운의 유망주’ 김영조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와 반갑게 해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 36세. 현역 선수론 ‘환갑’이 넘은 나이였기에 김영조가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뛸 순 없는 일이었다. 김영조는 ‘언젠가 일본과 대전할 날’이 10년 만에 찾아오자 온힘을 다해 유완식과 함께 경기를 풀어갔다.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역사적인 국제 무대 데뷔전. 상대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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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 로잘 스타디움의 조명탑. 한국 선수들은 조명탑 아래서 처음으로 야간경기를 치렀다. 그래선지 강한 조명빛에 눈이 부셔 외야 플라이 타구를 놓치곤 했다. 2014년 인천AG에서 타이 선수들이 목동구장의 조명탑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보고 기자는 60년 전 최초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느꼈을 당혹감을 이해하게 됐다. 어디 기자뿐이겠는가. 타이를 비롯한 '야구 저개발국'도 언젠간 한국처럼 초라했던 과거를 딛고 야구 강국으로 우뚝 설지 모른다. 그러려면 한국, 일본, 타이완 같은 야구강국들이 적극적으로 '야구 저개발국'에 대한 지원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야구가 '그들만의 스포츠'로 전락하는 걸 막는 길이다(사진=스포츠춘추)

1954년 12월 18일 필리핀 마닐라 로잘 스타디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개막전 한국-일본전의 자세한 경기 내용은 지금껏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최근 홍순일 KBO 야구박물관 자료수집 위원장이 수집한 자료엔 당시 경기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적인 국제 무대 데뷔전이던 일본전을 상세히 기술한 이는 기자가 아닌 윤길구 서울방송 아나운서였다. 아시아야구대회 실황 중계를 위해 마닐라로 떠난 윤 아나운서는 대회가 끝난 뒤 <주간 스포츠>에 3회에 걸쳐 ‘아주야구(亞洲野球)를 보고’라는 연재기를 썼다.

윤 아나운서는 연재기에서 이렇게 한국-일본전을 예상했다.

‘일본전에서 우리가 질 것으로 예상한 이가 많았다. 국내 스포츠계에서 야구는 뒤떨어진 종목으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렇게 평가되어온 것이다. 특히 일본에 비하면 실력이 떨어져 콜드 께임(게임)을 걱정하는 야구인이 많았다. 그러나 야구 애호가인 필자는 아마튜어 일본과는 해볼 만하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그러기를 희망해왔다.’

윤 아나운서의 연재기에서 보듯 한국이 일본에 이기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되레 ‘콜드 게임으로 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은 3회까지 1점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한국 배터리 유완식-김영조는 일본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공 배합으로 별다른 위기없이 3회까지 버텼고, 야수진 역시 1개의 실책도 범하지 않는 철통 수비를 자랑했다. 물론 한국 역시 일본 선발투수의 구위에 눌려 3회까지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고비는 4회였다. 3회까지 호투하던 유완식은 4회 들어 갑자기 제구가 흔들렸다. 구위 역시 눈에 띄게 떨어졌는데 이유는 3회 말 무리한 주루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3회 말 유완식(9번 타자)이 볼넷으로 출루하자 오윤환 코치는 1루 주자 유완식과 1번 노정호에게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냈다. 문제는 타자의 스윙이 번번이 파울로 이어지며 1루에서 2루로 뛰던 유완식이 기진맥진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마닐라의 고온과 두 번의 베이스러닝으로 온몸이 땀으로 적셔진 유완식은 4회 초 갑자기 난조를 보이며 볼넷과 안타, 2루타를 맞고서 2실점했다. 윤 아나운서는 “께임의 승자는 4회에 가려졌다”며 “일본은 (2점을 낸 뒤) 승기를 잡았으며 한국은 비 맞은 비둘기인양 의기소침한 빛을 보였다”고 기술했다.

한국 벤치는 지친 유완식을 내리고, 김양중-박현식을 차례로 올렸지만, 일본에 6회 1점, 7회 2점, 9회 1점을 내주며 0대 6으로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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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아시아야구대회를 현장에서 중계한 서울방송 윤길구 아나운서가 쓴 이 글은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팀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한국의 국제대회 첫 득점이 무산된 건 아쉬움이었다. 7회 말 0대 5로 뒤지던 한국은 대타 장태영의 3루타로 첫 득점의 물꼬를 텄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첫 안타이자 3루타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3루 베이스코치를 맡았던 주장 노정호는 벗겨진 장태영의 모자를 집어주며 눈물이 글썽한 표정으로 후배의 등을 두들겨줬고, 장태영은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쉽게 후속타 불발로 득점엔 실패했지만, 이 안타로 한국은 노히트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선수들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윤 아나운서는 “경기가 끝나고서 어느 필리핀 신문기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키 큰 한국이 꼬마 일본에 맥 없이 졌다’고 말했다”며 “원통해도 일본이 확실히 우리보다 실력이 위였다”고 평했다.

사실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대부분의 한국 타자가 본 적이 없는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여기다 경기 경험이 풍부해선지 몸놀림이 가볍고, 무엇보다 전체 선수가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라, 체력 또한 좋았다.

이에 반해 한국은 실력은 둘째치고 경기 내내 스파이크가 천연잔디에 걸려 어기적어기적 움직였고, 난생처음 보는 강한 불빛(조명)에 적응하지 못해 번번이 외야 플레이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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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첫 국제 무대 데뷔전 기록(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일본에 패한 그날 밤.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윤 아나운서는 <주간 스포츠>에 연재한 칼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저녁 패전지장(敗戰之將)은 그야말로 말이 없었다. 어느 선수가 오늘 실황을 방송했느냐고 나더러 묻는다. 내가 ‘이 비보(悲報)는 이미 1초간에 지구를 일곱 번 반 도는 전파로 고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말하니 이 선수는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비통한다. 그러더니 이내 ‘일본과 다시 께임할수 없소? 6대 0으로 이길 자신이 있소!’라고 한다. 나는 말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거요. 내년에 이기도록 하시요.’ 나는 힘없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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