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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조선의 에이스 박현명

by Wood-Stock 2014. 11. 5.
[박동희의 야구탐사] '조선의 에이스' 박현명 이야기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쌍벽을 이루는 일본 프로야구(NPB) 최고 인기구단이다. 한국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최고 구단으로 알려졌으나, 한 시즌 관중 동원과 상품판매에선 오히려 한신이 앞선다. 역사도 깊다.

1935년 ‘오사카 타이거스’이란 이름으로 창단했다. 올해로 구단 나이가 78살이다. 1년 앞서 창단한 도쿄 자이언츠(요미우리의 전신) 다음으로 역사가 깊다. 홈구장인 고시엔구장 역사는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그 어느 구단 홈구장보다 유서 깊다. 1924년 지어졌으니 올해로 89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 전통과 역사의 한신이지만, 지난해까지 한국 프로야구(KBO) 출신 선수를 영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외는 이번에 깨졌다. 한신은 시즌 종료와 함께 한국 최고 마무리 오승환을 영입했다. 한신 구단 사상 첫 한국 프로 출신 선수 영입이었다. 그러나 이때 논란이 생겼다. 한신 나카무라 가쓰히로 단장이 12월 4일 서울에서 열린 입단식 때 한 말이 발단이었다.

당시 나카무라 단장은 “한신의 78년 역사에서 한국 선수 영입은 오승환이 처음”이라며 “한국 최고의 마무리를 영입해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일본 언론과 몇몇 한국 언론에선 나카무라 단장의 소감을 그대로 인용했다. 하지만, 일부에서 “1938년 박현명이 오사카 타이거스(한신의 전신)에 입단했는데, 어째서 오승환이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냐”며 “명백한 오보”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여기다 한 스포츠 평론가는 “집단 오보 사태는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넘겨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라며 “일본 한신 단장이 만약 식민사관에 입각해 박현명 선수를 한국인 선수로 보지 않고 발언한 것이라면, 우리 언론들뿐 아니라 야구계와 체육계까지 그들의 잘못된 사관을 걸러내지 못한 채 우리 야구 역사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이 평론가는 “이번 사태에서 안타까운 부분은 대한야구협회나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기록을 관리하는 이들 그리고 대학이나 체육계, 야구계에서 체육사를 공부한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한탄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는 박현명이 분명했다. 만약 나카무라 단장이 식민사관에 입각해 박현명의 존재를 부정했다면 이는 확실한 문제였다. 특히나 나카무라 단장의 의도대로 한국 언론이 나팔수 역할을 했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박현명에 대한 존재를 대한야구협회와 KBO 그리고 야구관계자들이 몰랐다면 창피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계는 “박현명 선생은 십수 년 전부터 야구계와 학술계에선 잘 알려진 인물이며, 그가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란 것 역시 오랫동안 회자하고, 각종 야구 서적에 명기된 ‘전혀 새로운 게 없는’ 사실”이라며 “박현명 선생과 관련돼 나온 최근 이야기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시각에선 ‘대단한 발견’일지 몰라도 야구계와 체육 학술계에선 그리 놀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맞는 말이다. 박현명의 한신 1호 입단은 갑자기 발견된 사실이 아니다. 과거 신문기사와 각종 야구 서적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원로 야구인들도 대부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나 모 평론가는 대한야구협회와 KBO를 포함한 야구계의 무지와 무성의를 질책했지만, 야구기자들이 합심해 1999년 발간한 <한국야구사>엔 박현명의 한신 입단이 1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비중있게 다뤄져 있다. <한국야구사>는 야구기자들이 야구 역사 기사를 쓸 때 ‘바이블’처럼 보는 책이다. 놀라운 건 이 책이 대한야구협회와 KBO의 주도로 발간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박현명의 존재를 야구계나 체육계가 몰랐거나 무지했거나 혹은 방치했다는 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카무라 단장의 발언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기자는 12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오승환의 한신 입단을 취재했다. 당시 한신은 “한국 프로 출신으론 처음으로 한신에 입단한”이라고 오승환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카무라 단장은 “한국인으론 처음”이라는 말을 썼을까. 정말 한신이 박현명의 존재를 애써 부정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이 역시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한신의 구단 연혁엔 구단 초창기에 투수로 활동한 ‘박현명’이 국적 ‘조선’으로 표기돼 있다. 한신 구단사뿐만 아니라 각종 일본 야구 관련 서적에도 ‘박현명이 한신에 입단한 첫 조선인 내지 한국인’으로 명기돼 있다. 한신 관계자는 “지금껏 한신에서 활동한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선수가 알게 모르게 많았다”며 “나카무라 단장이 ‘한국 프로 출신’을 이야기하려다 순간적으로 ‘한국인’으로 이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단장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적은 언론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언론은 ‘한국 프로 출신’이라는 말로 오승환의 한신 입단을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한국 스포츠 언론 OSEN은 나카무라 단장의 ‘첫 한국인’ 발언이 나왔을 때 ‘첫 한국 프로 출신’으로 수정해 기사화했다.

어쨌거나 이번 논란으로 ‘잊힌 천재 야구 선수’ 박현명이 새롭게 조명됐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었다. 가뜩이나 올해는 박현명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렇다면 과연 박현명은 어떤 선수였을까. 야구 원로들은 입을 모아 “박현명 선생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라며 “반세기 넘게 잊혔던 대(大) 야구인을 재조명할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6척’ 박현명, 당대 최고 스타 이영민과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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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국 올스타팀으로 일본을 방문한 베이브 루스(사진 왼쪽부터)와 전일본 올스타팀의 유일한 조선인 선수 이영민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현명. <한국야구사>엔 박현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8번 나온다. 첫 번째는 1937년의 이야기다.

그해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모국을 방문해 국내 야구팀들과 친선경기를 치렀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매번 수준 높은 경기를 펼쳤는데, 그해 7월 20일 서울 휘문운동장에서 치른 고려야구단과의 경기에선 2대 13으로 참패했다. <한국야구사>엔 당시 고려야구단을 ‘한국야구의 기치를 치켜든 한국야구계의 정예 선수들로 구성된 일종의 국가대표팀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고려야구단의 주축 투수 겸 6번 타자가 바로 박현명이었다.

박현명은 1913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4남 4녀 가운데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야구를 시작한 것도 뛰어난 체격 덕분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의 동생들도 같았다. 하나같이 체격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더군다나 형의 영향을 받았는지 동생들은 모두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특히나 동생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야구계의 거목이 됐는데, 이들이 한국야구 발전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먼저 둘째 박현덕이다. 1919년생인 박현덕은 평양고보,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거쳐 해방 이후 조선운수와 전인천군에서 선수로 뛰었다. 1946년부터는 인천 동산고에서 상업교사와 야구부 감독을 겸직했는데, 1973년까지 동산고를 떠나지 않았다. 이 기간 그는 전국대회 감독상을 6회 이상 수상하며 고교야구계에서 ‘명지도자’로 불렸다.

동산고 야구부에서 박현덕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강대진 전 경기도협회 사무국장은 “박 감독은 신인식, 최관수 등 뛰어난 투수들을 차례로 배출한 능력있는 지도자였다“며 “실업팀들이 감독으로 모시려고 여러 차례 추파를 던졌음에도 고교야구 감독과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해 언제나 제안을 고사한 진정한 야구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셋째 박현민 역시 선린상고 야간에 다니며 투수로 활동한 야구인이었다. 형들과 동생에 비해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교 시절 꽤 주목받는 투수였다.

넷째 박현식은 형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였다. 동산중(현 동산고), 경희대를 졸업하고 조선운수-육군-농업은행 등에서 현역으로 뛰었던 박현식은 각종 전국대회에서 홈런왕을 휩쓸며 해방 이후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한 이였다. 대한야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박현식은 동산중 3학년이던 1946년부터 제일은행에서 은퇴하던 1968년까지 통산 112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당시는 배트 강도와 공인구의 반발력이 극도로 낮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이유로 홈런 자체가 귀했다. 그럼에도 11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냈다는 건 대단한 기록임이 틀림없었다.

특히나 박현식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6년 연속 한국 대표팀 멤버로 출전하며 1965년 아시아야구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철인상’을 받는 등 국제야구계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서 제일은행 감독을 거쳐 삼미 슈퍼스타스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던 박현식은 KBO 심판위원장과 LG 2군 감독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한국야구 발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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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구장에서 필리핀 팀과의 경기를 마친 '인천군' 박현식(사진 왼쪽부터)과 필리핀 선수, 박현덕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

하지만, 원로 야구인들은 4형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는 박현명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장골(壯骨)로 유명했던 4형제 가운데 체격도 박현명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산야구의 대부’이자 대한야구협회 사무국장과 KBO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고 이호헌(본명 이정열) 씨는 생전 박현명에 대해 “당시로선 보기 드문 장신(한국 기록 : 182cm, 일본 기록 178cm)이었다”며 “원체 키가 커선지 박현명 씨의 별명이 ‘6척’이었다”고 회상했다.

‘6척’ 박현명은 지금으로 치면 류현진급의 투수였다. 야구에 관심 있는 조선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평양 능라도 부근에 25만 평의 땅을 소유한 부농이던 박현명의 아버지는 큰아들이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다. 수재들이 모인다는 평양고보에 아들이 입학했으니 그런 바람을 품을 만도 했다. 하지만, 평양고보에 진학한 박현명은 공부 대신 야구에 집중했다. 박현명이 야구계의 스타로 부상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고난 체격과 노력으로 박현명은 평양고보 시절 이름난 투수가 됐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박현명은 1933년 평양실업에 입단했다. 평양실업의 에이스로 활약한 박현명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무대는 1936년 제10회 ‘흑사자기쟁탈 전일본 도시대항 야구우승대회(흑사자기회)’ 조선 예선전이었다.

흑사자기회는 도쿄 일일신문사(마이니치 신문의 전신)가 1927년부터 주최한 도시대항 대회로,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 만주, 타이완 등 범(汎)극동지역의 야구팀들을 모두 아우르는 당시로선 가장 규모가 큰 성인야구대회였다. 일본 본토는 도시별로 대표 출전팀을 가렸지만, 조선, 만주, 타이완 등엔 단 한 장씩의 본선 티켓만을 줬기에 본선 진출권을 둘러싼 예선전은 매우 치열했다.

1936년 조선 예선전도 그랬다. 5개 팀이 한 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친 가운데 ‘전(全)경성’과 ‘평양실업’이 결승에서 만났다. 전경성엔 불세출의 스타 이영민이 버티고 있었다.

배재고보-연희전문 출신의 이영민은 육상, 축구, 농구 선수로도 맹활약한 당대 최고의 스포츠맨이었다. 야구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보여 특급투수와 홈런타자로 동시에 활약했다.

고 이호헌 씨는 “한국야구의 홈런 계보를 살폈을 때 그 시발점은 이영민”이라고 평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1928년 6월 8일 경성운동장(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현 서울대 의대)과의 정기전에서 1회 말 3번 타자로 나온 연희전문 이영민은 커다란 홈런을 기록했다. 1926년 개장 이후 경성운동장에서 나온 첫 홈런(야구역사가 홍순일 씨는 ‘이영민 이전 흑인 선수가 경성운동장에서 홈런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고 말한다.)이었다. 당시 민족신문이던 ‘동아일보’는 이 홈런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영민에게 홈런상을 수여했다. 이는 한국야구사에서 첫 홈런왕 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쨌거나 불세출의 스타 이영민이 버틴 전경성은 평양실업보다 어딜 보나 한 수 위였다. 경성(서울)과 평양의 지역 라이벌 구도까지 겹치며 두 팀의 대결에 전(全) 조선의 관심이 집중됐다. 전경성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리란 예상은 7회까지 적중하지 못했다. 두 팀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며 7회까지 0대 0, ‘0의 행진’을 계속했다.

이영민의 투구가 평양실업 타선을 꽁꽁 묶은 까닭도 있었지만, 평양실업 투수들의 호투 역시 대단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평양실업 투수가 바로 박현명이었다.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현명의 강속구에 전경성은 꼼짝없이 당했다.

8, 9회 전경성이 지친 평양실업 수비진의 실책과 투수들의 난조로 대거 8점을 내며 결국 8대 0으로 승리해 본선 진출권을 따내지만, 당대 최고스타 이영민과 팽팽한 투수전을 펼친 박현명은 이 경기 호투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한국인으론 가장 먼저 국외리그 무대를 밟았던 ‘천재 투수’ 박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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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이스' 박현명의 오사카 타이거스 시절 사진

1937년 박현명은 평양을 떠나 서울의 체신국에 입단한다. 체신국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박현명은 1938년 다시 ‘흑사자기대회’ 조선 예선전에 참가한다. 그러나 소속팀은 체신국이 아닌 경성을 대표하는 ‘전경성’이었다. 2년 전 조선 예선전에서 평양실업의 발목을 잡았던 전경성에 박현명이 들어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야구계는 지금으로 치자면 ‘환상의 원투펀치’ 소릴 들을 법한 이영민-박현명 조합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영민이 출전하지 않으며 전경성 마운드의 조선인 투수는 박현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해 전경성은 박현명의 호투 덕분에 조선 예선전에서 본선 티켓을 거머쥔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일본으로 건너간 뒤 본선에서 승승장구한다. 일본야구계는 전경성이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결승까지 오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결승에서 도쿄 후지쿠라 전선에 1대 4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전경성 투수 박현명의 인지도는 일본야구계로까지 퍼져 나간다.

하지만, 정작 박현명의 일본 진출이 결정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한국야구사>와 박현명의 막내 동생 박현식의 생전 증언 그리고 한신 구단사를 종합하면 박현명의 오사카 입단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38년 8월. 일본 프로야구단 오사카 타이거스가 내한한다. 오사카는 6일 함께 내한한 나고야와 경성에서 친선경기를 펼쳐 6대 1로 승리한다. 다음날 오사카는 자체 홍백전을 하기로 했는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고야전에서 분전한 몇몇 선수가 피로와 부상으로 도저히 자체 홍백전에 뛸 수 없게 된 것이다. 1936년 창단 이후 줄곧 얇은 선수층 때문에 고생했던 오사카로선 ‘예견된 낭패’였다. 오사카는 이참에 조선에서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서 선수를 소개받는다. 이때 오사카가 소개 받은 선수가 체신국 투수 박현명이었다.

오사카는 지금의 ‘공개 테스트’와 비슷한 운동능력측정 시험을 보고서 박현명을 스카우트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박현명의 나이 25세. 지금이야 ‘막’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지만, 당시로선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박현명이 뛰어야 할 무대는 조선이 아닌 ‘낯선 땅’ 일본이었다.

그해 10월 박현명은 도쿄를 거쳐 오사카에 입성해 마침내 오사카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는다. 조선인 선수가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정식 입단하는 순간이었다. 오사카는 박현명에게 등번호 ‘20’번을 달아주며 선전을 부탁한다.

‘전(全)인천군’ 선수이자 대한야구협회 기록통계부장을 역임했던 신현철(89)옹은 박현명의 존재를 잘 아는 야구인이다. 신 옹은 박현명의 동생 박현식과 함께 인천에 살며 두터운 친분을 유지한 사이라, 가뜩이나 박현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신 옹은 “박현명 씨가 줄곧 이북에서 활약하다가 1년 정도 서울로 건너와 체신부에서 뛰었다”며 “그 기간 오사카 타이거스의 눈에 띄어 조선인으론 가장 먼저 국외리그인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고 밝혔다.

신 옹은 “젊었을 때 원로 야구인들의 말을 들으면 박현명 씨가 오사카에 진출하자 조선야구계가 꽤 흥분하고, 기뻐했다”며 “많은 조선 야구인이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고 전했다.

박현명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바로 아래 동생 박현덕에게 남은 가족을 부탁했다고 한다. 연희전문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박현덕 역시 일본 프로구단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박현명은 “넌 공부를 잘하니 계속 학업에 열중했으면 좋겠다”며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한눈 팔지 말고 학업에 정진하라”는 당부를 들려줬다고 한다.

‘조선의 에이스’ 박현명은 그렇게 한국인(조선인)으론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고, 많은 이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성공’이란 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2번의 프로 등판에서 평균자책 1.08을 기록했던 박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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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완식 선생이 한큐에서 뛸 때의 사진

일본에 진출한 박현명은 대장장이의 집게에 잡힌 쇠붙이가 물 속에서 ‘치익’ 소릴 내며 단련의 과정을 마치듯 오사카에서 프로선수로서의 기본기를 연마한다. 원체 체격이 좋고, 빠른 공을 던졌기에 투수로서 많은 활약이 기대됐다.

한신의 공식 구단 기록사엔 박현식의 첫 1군 출전이 1939년 8월 12일이라고 적혀 있다. 상대는 나고야 긴코. 도쿄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박현명은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국외리그에 진출한 첫 조선인’이라는 부담감과 프로 데뷔전이라는 중압감이 더해지며 박현명은 경기 초반 흔들리는 듯보였다. 그러나 강력한 속구와 당찬 자신감을 바탕으로 박현명은 4회 2사까지 5피안타 1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한다.

비록 팀이 0대 2로 지며 패전투수가 됐지만, 프로 데뷔전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오히려 당시 일본야구 수준이 한국보다 한 단계 높았고, 박현명 시각에서 ‘일본은 국외 무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다고 평가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박현명의 호투에 고무된 오사카는 4일 뒤인 16일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난카이군’전에도 박현명을 선발로 등판시킨다. 만약 이 경기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친다면 박현명의 팀 내 입지는 공고해질 게 자명했다. 결과만 본다면 이번에도 성공적인 투구였다. 박현명은 3⅔이닝 동안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피안타 7개가 흠이었으나, 어쨌거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줄 만했다.

2번의 선발 등판에서 8⅓이닝 동안 39타자를 상대로 12피안타, 3볼넷, 2탈삼진, 1실점(1자책), 1패, 평균자책 1.08을 기록한 박현명은 오사카 투수진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은 거기까지였다. 박현명은 더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1939년 8월 16일 이후 박현명과 관련한 일본 내 기록은 전무하다. 어째서 그는 다시 마운드에 서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본 선수들 틈에서 ‘박현명’이라는 조선 이름을 쓰며 당당하게 활약한 ‘6척’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국야구사>와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엔 박현명이 일본 무대에서 2경기만 등판하고,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어깨 부상’으로 적고 있다. <한국야구사> 박현명 편엔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 중 배팅볼을 도맡아 던지는 등 꾀부리지 않고 팀 훈련에 앞장서다가 어깨고장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시즌에 들어가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라고 기술돼 있고, <한국야구인 인명사전> 역시 ‘1938년 동계훈련 중 어깨를 다쳐 39시즌서 2게임에 등판, 1패를 당한 뒤 퇴단’으로 적혀 있다.

그랬다. 조선 야구의 희망이자 영웅이었던 박현명의 발목을 잡은 건 예기치 못한 부상이었다. 팀을 위해 배팅볼을 도맡아 던졌던 그 ‘성실함’과 ‘팀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 박현명의 성공가도에 암초로 작용한 것이었다.

기자는 3년 전 박현명의 존재를 처음 알고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그의 자료를 찾았다. 1991년 발간된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경과’와 1992년 출간된 ‘오사카 타이거스 구단 역사’ 그리고 오사카대학교에 보관된 각종 일본 프로야구 관련 논문엔 박현명의 이름이 간혹 나온다.

박현식은 생전 “큰 형님(박현명)이 큰돈을 받고 오사카에 입단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박현식이 언급한 당시 박현명의 계약금은 150원이었다. 150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게는 수십억 원, 적게는 몇억 원씩하는 계약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1938, 1939년 생활상을 다룬 각종 문헌엔 당시 소학교 교원의 월급이 사십 원, 상급 학교 교원의 월급이 100원 정도로 나와 있다. 일본 강점기 시절 교원이 선망의 직장이었음을 고려하면 계약금 150원은 적진 않지만, 그렇다고 큰 금액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박현명뿐만 아니라 그즈음 일본 프로야구 구단에 입단했던 선수들의 계약금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선 계약금을 ‘준비금’이라고 불렀는데, 고시엔대회 전국 우승 투수로 유명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전 요미우리 감독, 작고)가 1936년 교진군(요미우리의 전신)에 입단했을 때 받은 준비금이 3백 엔이었다. 그즈음 일본 교원의 월급이 50엔, 전차 운전사 초봉이 50~60엔 정도 했으니, 큰돈이긴 했어도 지금처럼 ‘억(億)’ 소리 나는 돈까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많은 선수가 계약금 없이 입단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박현명이 150원을 받고 입단했다는 건 오사카가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었다. 이는 월급에서도 알 수 있다.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경과’에선 박현명의 월급이 150엔으로 나와 있다. 2년 먼저 입단한 가와카미가 110엔을 받았고, 그즈음 프로야구 선수들의 월급이 보통 100~130엔, 특급선수 월급이 200엔 정도였으니 박현명에 대한 평가는 꽤 후한 편이었다.

자,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이처럼 후한 평가를 받은 박현명이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 중 배팅볼을 도맡아 던지는 등 꾀부리지 않고 팀 훈련에 앞장서다가 어깨 부상을 당했느냐’는 것이다. 적지 않은 투자와 기대를 품었던 투수가 어깨 부상을 당할 정도로 과도한 배팅볼을 던지는 데도 오사카 구단이 이를 가만히 지켜봤다는 건 의문이다.

이유는 박현명의 보직에 있었다. 한신 구단사에 적힌 박현명의 보직은 매우 특별했다. 그는 오사카 구단 최초의 ‘전임 타격 투수’였다.

조선의 에이스는 어째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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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선수단 명부. 맨 오른쪽 박현명이 이름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바로 퇴단을 의미하는 뜻이다.

‘타격 투수’. 언뜻 단어의 뉘앙스만 보면 타자와 투수를 병행하는 선수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타격 투수’는 배팅볼 투수를 뜻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1939년에도 ‘타격 투수’는 타자들의 프리 배팅 때 공을 던져주거나 토스 배팅 때 공을 올려주는 임무를 담당했다.

박현명이 이 임무를 맡게 된 배경을 한신 관련 문헌에선 두 가지로 추측한다. 하나는 박현명의 제구가 뛰어나 배팅볼 투수로서 매우 적합했다는 것이다. ‘한신 구단사’엔 “‘타격 투수’를 담당했던 쓰리 쓰네오는 제구가 나빴다”며 “박현명과 19살 투수 기노시타 이사무의 제구가 좋아 타자들이 치기 쉬운 공을 던졌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박현명과 함께 배팅볼을 도맡았던 기노시타는 1939년 19경기(14경기 선발)에 등판하며 ‘전임 배팅볼 투수’에서 물러난다. 훗날 기노시타는 한 시즌 10승 이상을 3번이나 기록하는 등 수준급 투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박현명은 계속 배팅볼을 던졌다. 그가 오사카 구단 초대 ‘전임 타격 투수’로 기억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노시타와 달리 단, 2경기 등판을 제외하곤 줄곧 배팅볼만 던진 까닭이다.

여기서 두 번째 설이 나온다. ‘타격 투수’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가 조선인 투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다. 1939년 9월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사카 주력 선수들이 잇따라 입대한다. 투수층이 얇아진 건 당연했다. 강속구와 제구가 좋았던 박현명이 투수진에 합류할 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현명은 8월 이후 전혀 등판하지 못했고, 19살의 기노시타와 신인 미와 하치로에게도 밀렸다. 한신 구단사에서조차 “그(박현명)가 조선인이었기에 불이익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현명과 비슷한 처지의 선수로 유완식(작고)이 있다. 박현명에 이어 1년 늦은 1939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유완식은 포수였다. 그해부터 4년간 유완식은 2군 포수로 뛰었고, 나머지 3년간은 1군에서 활약했다. 그는 한큐 시절 호방한 성격과 리더십으로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했다. 하지만, 그의 1군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유완식은 생전 “실력은 다른 일본 포수보다 뛰어났지만, ‘조선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며 “1군에서 활약하려면 이팔용(후지모토 히데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퍼팩트 투수)처럼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으나, 그걸 거부한 통에 ‘불펜 포수’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 야구의 긍지’였던 박현명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배팅볼 투수로 뛰며 많은 공을 던지다 결국 어깨에 탈이 났다. 그리고 1940년 3월 조용히 평양으로 돌아온다. 조선 이름을 그대로 썼던 박현명의 퇴단은 ‘조선 야구’의 아픔이자 좌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게 있다. 박현명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오사카 구단에서 뛰었던 걸 두고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이다. 박현명이 오사카에서 활약하며 일본 이름을 쓰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의 대대적인 창씨 개명이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박현명은 재일교포가 아닌 성인이 될 때까지 조선에서 뛰었던 선수다. 오사카는 이를 고려해 박현명을 조선명으로 표기했고, 박현명뿐만 아니라 그즈음 다른 구단의 타이완, 만주 태생 선수들도 일본식 이름을 쓰지 않았다.

만약 박현명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을 듣는다면 거듭된 일본 프로 구단의 입단 권유에도 한결같이 “일본 구단에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틴 이영민의 기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 구단에 입단한 박현명과 그걸 마다한 이영민 가운데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킨 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거기다 비록 일본 이름으로 바꿨지만, 당시 일본에 살던 재일교포들은 나름의 창씨 개명으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 OB, 빙그레(한화의 전신) 감독인 재일교포 출신 김영덕(77)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 일본명이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다. 원래 가네히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가네히코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쓴 건 내가 ‘언양(彦陽) 김(金)씨’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양 김씨들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언양’의 뜻이 포함된 ‘가네히코’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했다. 조선 이름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뿌리가 어딘지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선적 역사의식이 때론 사실을 과장하고, 역사적 인물들의 노력과 눈물의 의미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잊혀져야 했던 천재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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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중국에서 열린 친선경기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평양 철도청 야구단'이 상하이에서 기념촬영한 사진. 사진 가운데 양복을 입은 이가 박현명이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26년 동안 혼자서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을 발간, 개정하고 있는 홍순일(전 문화일보 편집위원) KBO 야구박물관자료수집위원장은 신현철 옹과 함께 박현명의 존재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이다

2000년 3월에 발간된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엔 무려 6천700명의 야구인과 관계자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 가운덴 박현명도 포함돼 있다.

홍 위원장은 “1989년 박현식 씨를 만났을 때 박현명 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그때 박현명 씨가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국외리그 무대를 밟았다는 걸 알았다”고 밝혔다.

홍 위원장의 노력으로 박현명은 ‘어둠의 역사’에서 ‘열린 역사의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박현명이 오사카 구단을 퇴단하고 평양에 돌아온 1940년 3월 이후 행적에 대해선 홍 위원장도 “자료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홍 위원장뿐만이 아니다. 각종 야구 문헌을 살펴도 박현명의 1940년 3월 이후 행적은 찾을 길이 없다. 원로 야구인들도 어찌된 일인지 박현명의 1940년 이후 행적에 대해선 침묵했다. 이는 박현식, 박현덕 형제도 같았다.

신현철 옹은 “박현식, 박현덕 형제와 무척 가까워 두 이의 입을 통해 박현명 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1940년 이후에 대해선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어쩔 땐 두 이 모두 큰형님 이야기를 애써 피하려 했다”고 전했다.

오사카에서 퇴단한 박현명은 1940년 3월 평양으로 돌아가 ‘이스즈 자동차’에 입사했다. 홍 위원장이 ‘한국야구인 인명사전’ 개정판에 넣으려고 새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박현명은 ‘이스즈 자동차’ 입사와 함께 야구단을 창단해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1년 전까지 현역으로만 뛰었던 걸 고려하면 박현명의 ‘선수 겸 코치’는 그의 어깨 부상이 심각했음을 알려준다.

사실 ‘이스즈 자동차’를 끝으로 박현명에 대한 공식 자료는 없다. <한국야구사>에도 더는 박현명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되레 이 시점부터 박현명은 야구계에선 ‘입에 담아선 안 될 인물’이 됐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간명하다. 그가 해방 이후 북한에 남아 북한 야구계의 지도자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생전 박현식은 이산가족이 된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면서 둘째 형(현덕)과 나 그리고 누이 둘은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터를 옮겼다. 하지만, 큰형(현명)과 셋째 형(현민) 그리고 나머지 누이 둘은 계속 평양에 눌러살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쪽의 형제들과 남쪽의 형제들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돼버렸다. 큰형의 자식 둘도 전쟁 통에 아버지와 헤어진 채 줄곧 남한의 외가에서 자랐다. 전쟁 이후 형제들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어 새해만 되면 북쪽을 바라보며 형제들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다.”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엔 사실상 연좌제가 있었다. 가족 형제 가운데 누가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거나 이름이 있다면 한국의 가족은 국외여행이 불허되거나 공무원 임용에서 제외되는 등 유무형의 불이익을 받게 마련이었다. 청와대가 인정한 한국야구 최고의 홈런왕이던 박현식과 아마추어 야구계의 거목이자 교육자였던 박현덕으로선 현실적으로 박현명의 이름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른 야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박현덕의 제자였던 강대진 씨는 “선생님께선 박현명 씨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셨다”며 “아주 간간이 ‘우리 형이 일본에서 프로 선수로 뛰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은 있어도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회상했다.

박현식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큰형의 소식을 들은 건 1989년이었다. 이해 박현식은 일본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볼>을 보고 깜짝 놀란다. 바로 큰형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슈칸베이스볼>의 일본 기자는 이해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중국 푸저우에서 열린 ‘이화배 국제야구대회’에 참가했다가 평양으로 돌아가려던 북한 ‘평양 철도청 야구단’을 상하이에서 만났다. 당시 일본 실업팀 JAL과 중국 이화팀을 상대로 4승 무패를 거둔 ‘평양 철도청 야구단’은 4경기에서 완봉승을 2번 거둘 정도로 완벽한 투수진을 자랑했다.

일본 기자는 ‘평양 철도청 야구단’의 대표이던 김희수 국가체육위원회 야구협회 서기장을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김희수 서기장은 “처음엔 세계 최강인 쿠바 야구를 배웠지만, 동양인은 일본야구 쪽이 맞는다”며 “우리 지도자들은 거의 17, 18살까지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던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그 가운데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로 뛰었던 원로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자는 김 서기장과의 인터뷰와 선수단 사진을 지면에 실었고, 박현식은 우연한 기회에 이 기사를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진 속엔 전쟁 이후 40여 년 가까이 떨어졌던 큰형이 양복을 입은 채 ‘평양 철도청 야구단’ 선수들 사이에 서 있었다.

일본 기자는 박현명의 정확한 직책을 알 수 없다고 기술했는데, 1980년대 북한 스포츠단에서 양복을 입은 원로 체육인들은 대개 단장급 이상이었기에 박현명 역시 고위 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형의 생존을 확인한 박현식은 그길로 박현명의 아들과 ‘남북 고향방문단’을 신청했다. 박현식이 원체 유명한 야구인이었기에 고향방문단의 일원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남북 적십자 회담이 결렬되면서 고향방문단 구성 역시 지지부진해진다. 결국 박현식은 다른 길을 통해 큰형과의 만남을 성사하려고 노력했다.

신현철 옹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인 봄인가 됐을 거다. 하루는 (박)현식이가 ‘3일 후 중국에 갑니다. 거기로 큰형이 감독을 맡고 있는 팀이 온다고 하니까 이참에 찾아가 꼭 만나봐야겠어요’라고 했다. 큰형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조심히 다녀오라’고 전했다. 아, 그런데 얼마 있다가 현식이를 만났는데 연방 한숨을 내쉬지 뭔가. 왜 그런지 물었더니 ‘갔는데 못 만났다’고 하더라. ‘정식대회도 아니고 친선경기라, 도대체 어디서 경기를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물어볼 때도 없어서 베이징 거리만 헤매다 왔습니다’하는데 내 마음이 다 아팠다.”

박현식은 그해 가을에도 베이징을 찾았다. 당시 베이징에선 제11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혹시 북한 야구 대표팀 관계자로 큰형님이 오시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에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헛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형은 고사하고, 북한 야구 대표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눈을 감기 전까지 박현식은 “죽기 전에 큰형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난 박현덕도 큰형님 박현명을 몹시 그리워하며 북쪽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국외리그 진출 1호 박현명에서 추신수까지 75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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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TV 웹사이트에 실린 '기관차체육단' 야구단 선수들의 훈련 장면

박현명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 100살이다. 따라서 야구계는 박현명이 이미 작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1989년 잠시 언론에 노출됐다가 사라진 박현명처럼 북한 야구 역시 1993년 호주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이후 종적을 감췄다. 북한 내부에서 전해오는 야구 소식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올 1월 24일. 북한 관영방송사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야구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조선중앙TV는 '기관차체육단' 선수들의 동계훈련 소식을 전하며 야구 배트를 든 선수의 사진을 자사 웹사이트에 올렸다. 야구 관련 소식을 거의 전한 바 없는 북한이기에 조선중앙TV가 갑자기 ‘기관차체육단’의 야구단을 소개한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만약 박현식, 박현덕 형제가 살아있었다면 두 이는 이 소식을 들으며 벅찬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 일본 문헌에 따르면 북한 ‘기관차체육단’의 전신이 바로 박현명이 관계자로 있던 ‘평양 철도청 야구단’이기 때문이다. 박현명은 작고했을지 몰라도 그의 야구 열의와 사랑은 ‘기관차체육단’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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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거 추신수. 그의 인사는 선대 야구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일지 모른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최근 메이저리거 추신수가 7년 1억3천 만달러(약 1천378억원)의 조건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리며 한국 야구계가 들썩이고 있다. 추신수보다 75년 전에 국외리그를 밟았던 박현명 같은 선각자가 없었다면 한국 야구도, 추신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원로 야구인들의 중평이다.

한국 야구의 역사가 이참에 더 많이 발굴되고, 더 정확하게 기술돼 많은 야구 선각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도 한국 야구사엔 수많은 박현명이 후세의 재발견으로 새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다.3년의 추적 끝에 쓴 기사. 별 내용이 아닌 것같지만, 이 기사 쓰려고 정말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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