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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무하마드 알리

by Wood-Stock 2016. 6. 22.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다 ①] 매력 덩어리 알리

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


1974년 10월 하순으로 기억한다(1974년 10월 30일).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날의 분위기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버지와 삼촌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분위기는 들떠 있었고 술렁대었다. 초조하게 무엇을 기다리는 눈빛들. 바로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있었던 날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증인 신문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경기이다. "김일성이 알리 응원했다고 내가 알리 응원하면 나도 국가보안법?"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닐 암스트롱이 달에 인류의 발자국을 박아 넣은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첫 위성 생중계가 아니었나 싶다. 1년에 딱 이틀만 쉬시던(설날과 추석날) 아버지마저 가게 문을 잠시 닫으시고 중계를 보려고 집으로 오셨으니 그날의 관심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만큼이나.

주변의 몇몇 이웃도 우리 집에 찾아와 경기를 기다리던 모습은 왠지 어린 가슴에 못돼 먹은 교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집에 TV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야.'

경기가 있기 전 대부분 어른의 예상은 이랬다. 포먼 1라운드, 포먼 3라운드, 포먼 4라운드, 포먼 2라운드…. 포먼의 경기를 어린 눈으로나마 몇 차례 녹화 중계로 본 나도 수많은 어른들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조지 포먼! 그는 정말 권투의 히어로였다. 그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When we were the kings) 자신을 알아볼 시간을 상대에게 주지 않고 바로 바닥에 눕혀 버렸으니까. 무참하게 처참하게.

탐색전 그런 것은 포먼에게 없었다. 발견해서 파괴하라. 어린 눈에 권투 경기는 그래야 했다. 아무튼, 대다수 어른들의 평가는 길게 가야 5라운드라는 것이었고 어린 나에게 5라운드는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만은 좀 더 신중한 예상을 하셨는데 경기가 달리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신께서는 어떤 기회로든 젊은 날의 알리, 즉 타이틀을 억울하게 박탈당하기 전의 캐시어스 클레이의 경기를 보신 게 틀림없다.)

그랬다. 경기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곧 나가떨어질 것이라던 알리는 좀처럼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로프에 몸을 기댄 채 잔뜩 웅크리고 날아오는 펀치를 맞으며 라운드를 보냈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알리는 "뻔뻔하게도" 나의 복싱 영웅 포먼의 안면에 유효타를 꽂아 넣었다.

라운드가 지나갈 때마다 포먼은 어린 눈에 보기에도 힘이 빠진 것으로 보였고 급기야 8라운드에 알리의 오른손 크로스가 날아들었을 때, 나의 복싱 영웅은 그만 링에 쓰러지고 말았다.

무하마드 알리. 어린아이에게 그는 어떤 의미였는가?

"저열한 놈, 치사한 놈, 정정당당하게 상대와 맞붙지 않고 힘을 빠뜨린 후에 마치 뒤통수를 후려 갈기듯 상대를 속여먹는 치졸한 놈."

'로프 어 도프'(rope a dope, 말 그대로 옮기면 '멍청이를 로프로 묶다' 정도가 되겠는데, 알리는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에서 그날 자신의 전술을 이렇게 칭했다. 참고로 말하면 링을 등지게 되고 구석으로 몰리게 되는 것은 모든 복싱 선수에게 거의 무의식적 차원의 금기 사항이다)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흘러야 했다.

내가 본 알리의 두 번째 경기는 1977년 9월의 화창한 날이었다. 그간 2년의 세월이 흘렀고, 아마도 흐른 시간만큼이나 머리에 피도 조금은 더 말랐을 것이다.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마침 KBS는 어니 세이버스를 상대로 한 무하마드 알리의 타이틀 방어전을 녹화 중계하고 있었다.

여전히 알리는 변함이 없었다. 링 구석에 웅크리고 상대의 펀치를 맞아가며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늙고 추하며, 무엇보다 저열한 복싱 선수였다. 2라운드와 7라운드 그리고 14라운드에 세이버스는 몇 대의 적중 타를 알리 안면에 날렸고, 그를 비틀거리게 하였다. 드디어 저 늙고 치졸한 복서를 골로 보내버릴 선수가 나오는 듯싶었다.

그리고 15라운드.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 라운드에서 비틀거렸던 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세이버스 안면에 믿기 어려운 연타를 적중시켰고, 급기야 라운드 후반에 세이버스를 비틀거리게 하였다. 만약 로프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세이버스는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뭐랄까 황혼에 접어든 사자의 마지막 포효라고 할까? 늙은 복서는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불사르고 있었다. 세이버스 안면에 꽂히는 연타들은 순간 내 머리에-내 아버지가 봤다던-"젊은 날의 그의 모습은 정말 어땠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다. 이 의문을 진지하게 따라가기까지 또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1995년 6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 중이었는데 TV에서 알리 관련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지켜보게 되었다. 알리의 독일 방문을 계기로 서부독일방송(WDR)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다큐멘터리에서 지미 엘리스와 그의 아내가 한 알리에 대한 회상 인터뷰였다.

참고로 말하면, 엘리스는 알리와 동향 친구이고,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였으며, 알리가 야인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 챔피언 선정 토너먼트에 우승해 잠시 세계 챔피언이었고, 예의 조 프레지어(알리의 라이벌)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복서이다.

그 인터뷰에 따르면 엘리스의 아내는 남편에게 알리와의 시합을-아마도 알리가 치렀던 경기 중 그 어떤 압박 없이 가장 즐겁게 또 가장 유희적으로 치렀던 경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꼽는 알리의 다섯 경기 중 하나이다-앞두고 이렇게 주문했다. (☞바로 보기 : 무하마드 알리 vs. 지미 엘리스)

"가서 알리를 이기고 와요. 하지만 절대로 그를 아프게는 하지 마세요. 털끝만큼이라도 그를 다치게 해서는 안 돼요!"

순간 나는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알리가 말한 대로 복싱 경기가 "수많은 백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지는 두 흑인의 싸움박질"이라면 어떻게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고 상대에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의 주문에 따르면 엘리스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알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바로 그녀가 자신의 남편에게 했던 바로 이 주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상대 선수의 아내에게 이런 보호 아닌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랬다. 그에 대한 관심은 한 "걸출한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한 "위대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생각에 복싱은 그에게 너무도 작은 세계였고, 상대적으로 그는 그저 한 사람의 복서이기에는 너무도 큰 인간 존재였다"라는 포먼의 평대로 결코 스포츠라는 세계로 가둬지지 않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 말이다.

2000년 밀레니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놀이에 환호하고 있을 때, 난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연작 다큐멘터리([The Greatest])로 그야말로 날 밤을 까고 있었고, 결국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미 엘리스의 아내 메리 엘리스와 똑같이.

그리고 2016년 6월 4일 나는 술과 함께 그를 떠나보냈다. 그의 나머지 삶을 지겹게 따라다녔던 파킨슨병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말이다.

"무하마드, 잘 가시게!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떨지 마시고. 부디 알라 앞에서 예의 발놀림과 입놀림도 함께 찾으시기를 (…) 내 가슴에 남아있는 'Forever Young'의 모습 그대로 (…) 그대 있음에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웠으니…."

"신의 발가락" 그리고 "민중의 챔피언"

그의 죽음을 두고 세계가 잠시 잠깐 시끄러웠다. 길든 짧든 수많은 추모의 술회들이 각종 매체를 타고 돌아다녔다.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 민권 운동가였던 운동선수, 복싱 역사상 길이 남을 위대한 챔피언, 반전주의자, 회교도, 외교가, 시인, 불멸의 스포츠 영웅….

그리고 대저 우리들의 경험이 그러하듯 또 세계는 다른 관심거리로 옮겨갔다. 이 모든 추모의 술회들을 종합하면 대충 알리는 자신의 타이틀을 희생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민권 운동을 주도한 불멸의 그리고 불세출의 스포츠 영웅이다. 다시는 또 나타나지 않을….

다 맞는 말이다. 여기에 내가 덧붙일 것은 없다. 그런데 진정 그를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질문은 남는다. 이런 객관적인 의미 말고 그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과연 한마디로 어떤 존재일까?

기실 수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결국 대답을 포기했다. 로버트 립사이트(알리가 활동했던 1960~70년대 <뉴욕타임스>의 스포츠 기자)는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바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얀 필립 렘츠마도 대답을 포기한 사람들 중 한 명인데, 그가 단 이유는 너무도 많은 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말솜씨는 그저 한 사람의 권투 선수이기는 너무도 재치가 있었고, 한 사람의 시인이기에 그의 주먹은 너무도 매서웠다. 그냥 단순한 광대이기에는 너무도 예리한 지성을 지녔고, 외교관이 되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너무도 몰랐다.

또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그가 무엇보다 원했던 것이 아니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기에 너무도 돈과 여자를 좋아했고, 사업가이기에는 이재에 너무 어두웠으며, 교육자이기에 그의 학력은 너무도 짧았다(1960년대 거의 대부분의 흑인 복서가 그렇듯 그도 공부와는 아주 담을 쌓고 살았던 사람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면면을 지니고 있어서 그 무엇으로 하나로 그를 고정시키려고 하면 바로 다른 모습이 겹쳐져 상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다. 희랍의 모든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정말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게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냥 그 정의를 그 스스로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며, 자신이 내린 정의가 바로 나에게 그가 차지하는 의미일 것이다.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알라가 세상에 내어준 천사가 아닌가 싶다. 실제로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좀 엉뚱하게 "신의 발가락"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내린 정의의 이유였다.

말하자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은 일종의 천사와도 같은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는 마치 천사와도 같은 그런 인간 존재였다. 어찌 보면 또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전설과 모든 성담에서 그러하듯 천사가 매우 다양한 형상을 지니고 현현한다는 것은. 따라서 립사이트가 말한 천 개의 얼굴은 아마도 알리라는 "천사"가 띠었던 다양한 형상들의 면면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처럼 링 위에서 흑인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팼고–어떤 경기는 정말 경기라기보다는 학대와 고문에 가까웠다-, 때로는 저항자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으며, 때로는 지식인처럼 부정의 한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의 명문대에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가 믿는 신의 말씀에 따라 그는 언제나 약자들 편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했고, 그들과 함께 불의에 맞섰으며, 그런 불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마음껏 희롱했다.

그의 정의대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단순히 권투를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어두운 곳을 누벼야 하는 "신의 발가락"이라면, 그는 한 번도 세계 챔피언이 아닌 적이 없다. 심지어 그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라이선스를 잃어 야인의 시간을 보내던 때조차 그는 여전히 "신의 발가락"이었고, 그래서 그는-복싱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명문 대학을 돌아다니는 일련의 순회강연에서 그는 언제나 정충들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한다.

"Who is the real heavyweight champion of the world?"

그는 언제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에게 내세운 요구였던 "민중들의 챔피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와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하게 되었다. 만약 수많은 언론매체에서 회자되고 있듯이 그가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종류의 불세출의 챔피언이라면 그 이유는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도, 그가 세 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기 때문도 아니라, 점점 체계화되고 행정화하는 현대 스포츠 세계에서 그처럼 민중들의 삶에 파고든, 민중들과 함께 하는 천사 같은 챔피언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자신의 남편에게 내세운 메리 엘리스의 "부당한" 요구는 어찌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군들 이 독보적이고 각별한 "신의 발가락"이 조금이라도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이렇게 그는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때로는 매서운 주먹으로, 날랜 몸놀림으로 그게 아니면 때로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그게 아니라면 촌철살인의 입놀림으로, 기지와 유머 그리고 필요하다면 조롱과 희롱으로 팍팍하고 암울했던 1960~70년대를 살아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먹먹한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던 그런 인간 존재였다.

아마도 알리에 대한 포먼의 평가는 이런 각별한 인간 존재와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레리 홈즈의 말처럼 그는 링 위에서든 링 밖에서든 그를 체험한 "모든 사람의 기분을 왠지 좋게 만들었고", 그렇게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리네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를 바꾸지는 못했다. 천사는 어디까지나 신의 말을 전달하는 존재 아니던가? 스포츠를 통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스포츠 태동기 일부 얼빠진 엘리트 이론가들이 품었던 오래된 환상이다. 장폴 사르트르의 전언을 믿자면 문학과 예술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스포츠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다. 문학도 예술도 그렇듯이 스포츠도 우리네 삶을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풍부하게는 만들어 줄 수 있다. 돌이켜보면 1975년 10월 그 어느 날 어른들의 표정에서 읽혔던 이상야릇한 흥분 상태는 아마도 한 천사가 제공하는 한 판의 시합을 통해-마치 프란시스 고야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 밥 딜런과 비틀즈의 노랫말이 그런 것처럼-맛볼 수 있는 후련함과 따뜻함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나 싶다.

결론짓자면 알리는 입증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신을 등에 없고 세계의 어두운 곳곳을 누비며 기적을 행했던 천사였던 게 분명하다. 신을 등에 업지 않고서야 일자무식의 복싱 선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한 마리의 파리가 쇠쟁기를 끌 수 있다고 / 그대에게 말하는 나는 좋은 사람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 파리에게 쟁기를 매라."

이 시는 독일의 문필가 본더라첵의 전언에 따르면 소니 리스턴을 꺾고 처음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 전 날 모두들 그가 진다고 말했던 사람들 앞에서 스물두 살짜리가 되뇌었던 시란다.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재능이며, 미워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 아닌가?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다 ②] 가장 위대한 자

왜 무하마드 알리는 끊임없이 입을 놀렸을까?


"내가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훨씬 전부터 나는 그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위대하다(the Greatest)"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남들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인정하기 한참 전부터, 심지어 챔피언이 되기 한참 전부터 그는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사내가 등장하기 전에 또 그 사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스포츠 세계에서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 경우는 없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리라.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가 어떤 꼴을 보게 되는지는 최근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Floyd Mayweather jr.)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 바가 있다.

메이웨더가 자신이야말로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을 때, 그에게 돌아간 것은 싸늘한 시선과 실소 그리고 조롱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솔직히 좀 과한 농담을 했으려니 한다. 특정 종목을 막론하고 마이클 조던이 그렇게 말했다면 내 고개가 끄덕여졌을 테지만, 그조차도 스스로를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러주었을지언정.


그 사내가 나타나기 전에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스포츠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가 사회적으로 분명히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만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챔피언들은 하나같이 과묵했다.


기실 자신이 무어라고 말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는가? 스포츠 선수에게는-구기 종목처럼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또는 복싱처럼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든-"상대를 때려눕히는" 능력이 스스로 무어라고 칭하는 능력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라면 말이다. 그들에게 과묵은 미덕이었고, 말은 곧 공포심의 방증일 뿐이었다.

그 사내 이후에도 운동선수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은 작금의 슈퍼스타들이 진짜로 겸손한 인사들이기-"호날두"와 "겸손"? 딱 봐도 영 그림이 아니다-때문이 아니라, 이미 체계화될 대로 체계화되어버린 현대 스포츠의 이미지 관리 전략에서 나온 행위 코드라는 의심 먼저 들게 한다.

요즘처럼 PR과 프레젠테이션이 중요한 세상에 그들이 그 사내처럼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행위 코드에 충실한 것뿐이지, 진짜 겸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대중들은 악당보다는 "뻔뻔한" 인간을 더 싫어하고, 현대 스포츠는 바로 그런 대중의 지속적 관심을 먹고사니까.

그런데 그 사내만큼은 모든 게 달랐다. 로마에서 금메달을 따고 프로로 전향한 후 그가 "뻔뻔하게"도 "내가 제일 위대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왠지 극에 달한 오만과 독선이 아니라,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끼와 자신감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그가 세 번째로 챔피언에 등극하고 링에서 "내가 여전히 가장 위대해"라고 말했을 때, 심지어 그를 증오해왔던 사람들조차도 그가 밟아왔던 삶의 궤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수 없었다.

그랬다. 스스로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는 레녹스 루이스가 제대로 짚고 있는 것처럼 "재능"과 "용기" 그리고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내였다. 그의 재능은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만 했으며, 그 무엇도 심지어 국가 권력도 그의 용기를 꺾을 수 없었다. 또 숭고한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쇠쟁기를 끈다던 파리처럼 모든 사람들이 열세를 점치고 있을 때마다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어 냈다.

그렇다.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가장 칭송되고(Muhammad) 가장 숭고한(Ali) 자"였다. 이름대로라면 "가장 위대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이상할 판이다. 적어도 슈퍼맨과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그는 DC Comic에서 출간된 영웅 시리즈에 실재 이름을 가지고 나온 유일한 생존 인물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에게 무엇보다 통쾌한 것은 시간을 되돌려 생각하면 그의 "위대함"이란 게 결국 한 무명 복서의 자기 주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가장 위대하다"라는 자기 주장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굴하지 않는 용기와 만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뒷받침 되면서 그를 말해주는 객관적인 수식어가 되어 갔고, 그를 증오하든 사랑하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하나의 사실처럼 자리 잡아갔다.

주장을 현실로 바꾸는 자. 그건 바로 니체가 말한 "강한 자"의 본질적 내용 규정 아니던가? 이제 알리가 죽은 날 레녹스 루이스가-확실히 링 위에서 함께 보낸 3분은 사무실에서 보낸 3년보다 서로를 잘 알게 하는가 보다-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겨놓은 세 가지 화두(재능/용기/신념)를 따라 어떻게 한 애송이 복서의 자기 주장이 점차 사회적 현실이 되어갔는가를 추적해 볼 시간이다.

천부적인 재능 : 몸놀림만큼이나 눈부셨던 입놀림

재능은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세상에 널리 알린다. 이는 무하마드 알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능은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았고, 끼는 차고 넘쳤다. 그의 재능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가 가졌던 재능은 무엇인가? 운동선수로서의 탁월한 능력?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는 한 스포츠 영웅이 되지는 못한다. 스포츠라는 은하에 그저 그렇게 또 수없이 명멸해간 스포츠 스타가 될지는 몰라도. 우리를 매료시켰던 그 재능의 저변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는 링 위에서 가장 움직임이 많았던 복서이다. 이제껏 그보다 링에서 많이 움직이고 또 뛰어다닌 선수는 없었다. 권투 역사상 가장 날랬다던 슈거레이 레너드도 효과적으로 움직였을 뿐, 그만큼 화려한 움직임으로 권투 경기를 수놓지는 않았다.

모든 권투 선수들은 링에서 밟는 스텝을 그저 풋 워크(Foot Work)라고 이해하고 또 그렇게 부른다. 워크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노동 세계의 고단함을 전달한다. 그건 말하자면 싫지만 해야 하는 일, 사정만 된다면 기꺼이 하지 않을 일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움직임과 스텝을 단 한 번도 풋 워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춤추기(Dancing)"라고 불렀다. 그것은 예술 세계의 즐거움과 유희를 연상시킨다.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똑같은 발놀림은 그 표현에 따라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온다. 내일 시합을 앞두고 어떤 전략으로 임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현실적인 질문에 그는 으레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전 그와 함께 춤을 출거에요. 밤새도록."

"댄싱"이라는 말은 내게 무하마드 알리가 발휘하는 재능과 그로부터 발휘되는 그 묘한 마력을 매우 응축적으로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그가 지녔던 재능은 다분히 이중적이고 또 역설적이다. 마치 댄싱이라는 말이 곧 "행위"이면서 동시에 "표현"이라는 근원적인 이중성과 역설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행위와 말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서로 배리 관계에 놓여 있는 매우 이질적인 두 요소이다. 내가 하는 행위는 온전히 말이 되지 못하고, 내가 하는 말이 온전히 행위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 역설적이고 배리적인 관계를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동선수에게 말은 원론적으로 불필요합니다. 반대로 학자에게 행위 자체는 그 어떤 원론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래서 둘이 만나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지요. 그리고 그건 스포츠 인문학이 처하게 되는 어떤 근원적인 난제를 시사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리에 견줄 만한 신체 사용 능력을-물론 엄청나게 드문 케이스기는 하겠지만-지닌 선수들은 그것을 "댄싱"이라는 하나의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것을 댄싱으로 개념화시킬 수 있는 학자들에게는 물론 그것을 체현할 신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옳다면, 즉 말과 행위 사이에 근원적으로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그야말로 서로 배리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이질적인 요소의 역설적이고 이상적인 결합체였다. 그랬다. 그는 가히 춤추기에 가까운 신체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런 신체적인 능력에 "댄싱"이란 표현을 부여해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을 동시에 지녔던 거의 유일한 스포츠맨이었다.

서로 맞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가 역설적으로 결합되면 정말 올가미와도 같은 마력을 발산하는데, 무하마드 알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1975년 알리에게 도전한 바 있는 론 라일 역시 이런 마력에 푹 빠져든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알리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그가 하는 행위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이지요."

두말 할 나위 없이 무하마드 알리는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젊은 시절 그가 치렀던 몇몇 시합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고, 그저 눈부실 정도로 빛이 난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링 위에서 그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민첩함과 기민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손은 정말 빨랐고, 빠른 만큼 째는 듯이 매서웠다. 흐르는 듯한 중심 이동과 고개의 움직임과 연동된 허리놀림에 상대의 펀치는 거의 대부분 허공을 가르기만 한다.

"저는 링에 오르기 전과 링에서 내려온 모습이 똑같은 유일한 복서 입니다. 허긴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손이 어떻게 때리겠어요?"

완벽한 신체의 조율과 제어 능력은 그만의 독특한 아웃 복싱 스타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앤젤로 던디를(알리의 평생 트레이너였다)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모든 트레이너들이 절대 금기시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복싱 ABC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알리의 손은 안면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항상 허리춤에 머물러 있다. 얀 필립 렘츠마(Jan Phillip Reemtsma)에 따르면 복싱 교본에는 치명적인 허점으로 규정되는 그만의 아웃 복싱 스타일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체 제어, 조율 능력과 결합되면서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일단 상대에게 그의 스타일은 겉보기와는 달리 훨씬 큰 공포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펀치가 어디서 날아드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제나 허리춤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주먹은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다. 특히나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올라간 상대의 손은 스스로의 시야를 더욱 좁히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스타일은 상대에게 시야의 비대칭을 강제한다. 그의 주먹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고 상대의 주먹은 그의 시선 바로 앞에 놓이게 된다. 그는 상대의 예상되는 공격을 빤히 보고 있지만, 상대는 그의 주먹이 언제 어디에서 날아들게 될지 전혀 종잡을 수 없다. 얀렘츠마에 따르면 이런 비대칭성이야말로 알리가 링 위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절대적 지배력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 절대적 지배력은 일차적으로 상대 선수와 상관되는 일만은 아니다. 알리의 말처럼 권투가 "백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관중) 벌어지는 흑인 두 명(선수)의 주먹다짐(콘테스트)"이라면, 알리의 복싱 스타일은 당연히 관중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작용을 미친다.

로마민법에 따르면 "셋이 모여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손을 자유롭게 쓰면서 그의 움직임은 더욱 수려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이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두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팔을 마음껏 전후로 휘저으며 뛰고, 다른 한 사람은 양손을 턱에 댄 채 뛴다고 할 때 과연 누구의 움직임이 자유롭게 보일지를 생각해보라. 알리의 스타일은 직립을 통해 양손을 자유롭게 놀리게 되었을 때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당연히 이는 관중들에게는 엄청난 자신감의 발산으로 다가오고, 링 위에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놀라운 반사 신경,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 흐트러짐 없는 중심 이동, 자유롭게 노는 팔 동작은 미학의 고전적인 이상인 균형성과 우아함을 구현하고, 이런 자연스러운 움직임들에서 나오는 가속도는 펀치의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더해 간다. 말 그대로 "나비처럼 흘러서 벌처럼 쏘다!" 자체이다.

그리고 이 벌과 나비의 결합은 하나의 역설이다. 우아함은 파괴성을 배제하고 파괴력은 우아함을 거부하는 게 상례이지만 이 상례는 알리의 움직임에서 깨진다. 하늘거리는 나비의 펄럭거림에서 나오는 예리한 벌침. 마치 언어와 행위의 역설과 마찬가지로 "벌나비"는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 그의 경기에서 느꼈던 그 마력의 발전기였다. 그의 경기는 말 그대로 "백인들이 지켜보는 흑인들의 주먹다짐"이라기보다는 무슨 한 편의 시적 무대 연출 같은 미학적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전달력은 젊은 시절 무하마드의 경기를 가히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그것이 경기와 시합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건장한 사내들의 주먹질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주장하듯이 문명화 과정을 거친 현대의 문명인들에게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이다. 주먹다짐을 보고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은 문명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인간들의 반응 양식이다.

권투 경기는 분명 문명에 반하는 행위이며, 미국의 여성 수필가 조이스 캐롤 오아테스(J. C. Oates)에 따르면 인간에게 존재했던 그리고 우리 내부 어딘가에 잔존하는 원시적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권투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제의(Ritual)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제껏 대부분의 헤비급 챔피언들은 대부분 이런 원시적인 폭력성을 구현하는 타입이다. "찾아라, 부숴라 그리고 박살내라!" 잭 존슨, 소니 리스턴,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경향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 선수들의 무차별적인 주먹질은 문명화된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의 펀치를 맞는 상대 선수에 대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런 주먹을 맞는 상대 선수는…" 하며 몸서리를 치게 마련이다. 그것은 매질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정서와 감정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문명적인 반응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는 이런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과 몸속에 각인된 자연 발생적 수준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유일한 경기였다. 오히려 그의 경기는 가격의 미학을 구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피학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가학의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상대를 저렇게 때릴 수도 있는 거구나!"

그의 경기는 묘하게도 관전자들에게 맞는 사람보다는 때리는 자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가 링 위에서 한 일이 본질적으로 주먹다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경기라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놀이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을 예술적인 경지로 고양시킬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권투 선수였다. 이 예술적인 경지에서 그가 치른 경기들은 관전자들에 의해 다양한 의미들로 해석되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의 경기는 흡사 자연적 움직임 대 기계적인 움직임(조 프레이지어)의 대결, 인간의 능력 대 자연의 무차별적 폭력(조지 포먼)의 대결, 문명적인 행위 대 야수적 행위(소니 리스턴) 간의 대결처럼 비쳐졌다. 그랬다, 권투라는 "주먹다짐"은 더 이상 야수적인 "주먹다짐"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어떤 아름다운 행위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말하기와 움직임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운동선수로서 그가 우리에게 선사했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노먼 메일러가 맞다. 만약 누군가 그의 경기를 애써 그냥 또 하나의 야만적인 주먹질이라고 폄훼한다면, 우리는 메일러에 따라 렘브란트의 <야경>도 그저 한 페인트 공의 의미 없는 "뺑끼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종이 위에 그적 댄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하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 내 기억으로 그보다 말이 많았던 선수는 이제껏 없었다. 링 밖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살인적인 주먹이 오고 가는, 잠시 잠깐의 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링 위에서조차도 그는 상대에게 말을 걸고 관중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보통 권투 선수들은 말이 없다. 링 위에서는 물론이고 링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말(언어)과는 다른 능력들이 요구되고, 그 직업상의 요구가 링 밖에서 그들의 행동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과묵은 곧 권투 선수들의 지켜야할 덕목이자 아비투스이다. 링 위에서 그 어떤 식으로든 발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복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극단적인 예외이자 철저한 파격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무하마드 알리는 경기를 치르는 와중에도 상대 선수에게 말을 걸었던 유일한 복서이다. 경기 중 그는 상대를 언어적으로 조롱하고 우롱하고 희화화시켰다. 메일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럼블 인 더 정글"에서 살인적인 주먹을 휘두르는 챔피언 조지 포먼의 귀에다 끊임없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 조지, 정말 이게 다야? 정말 이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야? 이거 엄청 실망인걸, 어디 한 번 제대로 쳐보라고. 우리가 팝콘이나 튀기려고 링에 올라온 건 아니잖아?"

물론 그의 탁월한 운동 능력과 반사 신경이 없었다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언제든지 한 방에 상대를 보내버릴 수 있는 조지 포먼 앞에서 그런 행위를 실행한다는 것은 여간 상상이 가질 않는 일이다. 그의 이런 발화 행위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전략적인 효과를 발했다.

그것은 언제나 일차적으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의심에 빠뜨리며-실제로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소니 리스턴은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게 아니라, 어떤 미친놈과 싸우는 줄 알았다고 한다. 미친놈을 무슨 수로 이겨먹겠는가?-급기야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고 상대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경기를 보는 관전자들에게 그것은 왠지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제를 보란 듯이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링 위에서 말을 거는 알리의 발화 행위는 상대 선수를 직접적으로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간접적으로 오히려 관중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관중들에게 어떤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행위이다. 그것은 링 위에서 철저한 지배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나아가 그는 실제로 경기 중에 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행위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경기 중간 중간 관중들의 연호를 유도하고, 자신을 응원하는 관중들을 향해 상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몸짓을 보냈으며, 그를 야유하는 관중들을 향해서는 상대와 함께 희롱하는 몸동작을 취하기 일쑤였다. 이를 실행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축구선수가 드리블을 치는 가운데 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특정 몸동작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렇게 그는 경기행위 중에도 관중들과의 언어적 비언어적 접촉을 시도한 유일한 복서이다.

혹자는 알리의 행위를 그저 흥행 몰이를 위한 액션이나 괴짜 복서의 쇼맨십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확실히 단견이다. 이런 치부는 그의 행위에 담겨 있는 훨씬 깊은 의미들의 층위들을 필연적으로 간과하게 만들고 "프로 스포츠"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가로막는다.

알리가 시도하는 접촉은 관전자들을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끌어들인다. 관중들은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나 그저 수동적인 관전자가 아니라, 이런 사건들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알리의 취하는 액션에 증오의 시선을 보내거나 반대로 그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수동적인 관전자나 객관적인 관찰자로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

알리가 시도했던 그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시도에 접촉되는 순간 수동적인 관전자는 링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증언의 능력을 지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원래 시합(contest)이라는 게 "함께 모여(con) 증언하는(testi)" 일 아니었나? 가히 알리라는 현상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프로 스포츠 세계에 가져온 중요한 의미 변화이자 의미 회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바꾼 나비 알리, 그리고 잭 존슨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 밤 마침내 미국에 변화가 찾아왔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해 11월4일 시카고의 그랜트 공원에서 많은 청중들이 모인 가운데 당선 소감을 밝혔다. 

아프리카 흑인 20여명이 노예선을 타고 미국 땅에 내린 지 389년 만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지 149년 만에, 잭 존슨이 헤비급 복싱 사상 최초의 흑인 챔피언에 오른 지 100년 만에, 미국은 가장 강력한 세계 정치의 헤비급 챔피언이나 마찬가지인 미국 대통령에 그들 손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것이다.

변화는 아무런 대가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와 같은 흑인 지도자들이 인권 운동을 이끌었고 수많은 유명, 무명의 인권운동가들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희생해 일군 변화였다. 

스포츠계에서는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그랬다. 잭 존슨이 미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흑인 스포츠 스타의 가능성과 그 영향력, 방향 설정을 제시했다면 알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 같은 영향력과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역할을 했다. .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비슷한 잭 존슨과 알리의 삶을 비교하며 미국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보자. 

▶ 잭 존슨의 분신

알리가 등장한 60년대 초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최초의 흑인 챔피언 잭 존슨을 떠올리며  그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격랑을 경계했다.

잭 존슨은 전세계가 백인을 중심으로 백인을 위해 돌아갈 때 주먹 하나 믿고 나타나 백인 사회를 뒤흔든, 백인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흑인과는 타이틀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백인 챔피언 토미 번즈를 유럽-호주까지 따라다니며 도전권을 따냈고 끝내 백인들에게 참담한 모멸감을 안겨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세 번의 결혼 상대가 모두 백인여성이었다는 점은 그를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검둥이'로 만들었다.

잭 존슨을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1908년 12월 26일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호주의 백인 경찰들은 두 번이나 경기를 중단시켰다. 더 이상 백인이 흑인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는 꼴을 관중들이 보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경기 사진이 유출되지 않도록 경기 후반 촬영을 금지했고 카메라도 압수했다.

잭 존슨은 경기 도중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주로 백인 상대들을 모욕하는 말들이었다.

토미 번즈와의 타이틀매치에서는 "네 피부는 마치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처럼 하얗다"고 조롱했고 토미 번즈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려 하면 교묘하게 잡아 지탱한 뒤 더 많은 펀치를 날렸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백인에게서 받은 수모를 그는 링 위에서 그대로 백인 상대와 관중들에게 되돌려 주려 한 것이었다.     

백인 사회는 잭 존슨에 맞설 '위대한 백인의 희망(Great White Hope)'으로 은퇴한 전 챔피언 제임스 제프리스를 복귀시켰으나 그 역시 무참한 KO패를 피할 수 없었다. 

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프로에 전향한 알리는 여러모로 잭 존슨과 비교됐다. 빠른 발과 레프트 잽을 앞세운 경기 스타일은 둘 모두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인 것이었고 경기 도중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비슷했다. 알리는 한술 더 떠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언제 상대방을 KO 시킬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잭 존슨이 어려서부터 백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자랐다면 알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에도 변함없는 흑백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좌절하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에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엑스를 만나 블랙무슬림이 되며 그의 좌절은 백인들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무하마드 알리 (왼쪽부터)

▶ 세상을 뒤흔든 나비

알리가 유명해진 건 1964년 당시 무적으로 여겨지던 철권 소니 리스튼을 누르고 챔피언에 오르면서부터다. 그가 읊어 유명해진 '나비같이 날아 벌같이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는 말도 리스튼과의 경기를 앞두고 나온 것이었다.

알리가 떠오른 60년대 초반은 잭 존슨이 활약하던 50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잭 존슨이 활약할 때 백인들은 유난히 '세계헤비급 챔피언'이라는 지위에 집착했다. 세계헤비급 챔피언의 자리는 곧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의미였고 그 상징적 자리를 흑인들에게 내주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자연히 잭 존슨의 상대는 백인이 많았다.

하지만 30년대 후반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등장한 뒤 헤비급 복싱계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조 루이스는 잭 존슨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 강령을 세우고 '착하고 말 잘 듣는 흑인'으로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성공해 백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 루이스 이후 에자드 찰스, 조시 조 월코트, 플로이드 패터슨과 같은 흑인 챔피언이 나왔고 이제 헤비급은 완전히 흑인들이 주무르는 세상이 됐다. 모두가 잭 존슨과는 다른, '착한 흑인'으로서였다.

플로이드 패터슨을 두 번이나 1회 KO로 제압하고 챔피언이 된 리스튼은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드나든 범죄자 출신으로 악명 높았다. 그가 챔피언이 되자 백인 사회는 다시 한 번 '못된 흑인' 챔피언의 등장을 염려했다.

이에 리스튼은 자신의 이미지를 선하게 고치기 위해 착한 흑인의 대명사 격이던 조 루이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캠프에 머물게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필라델피아 경찰은 세계챔피언이 된 그를 감시했다.

1999년(좌), 1964년 (우) SportsIllustrated 커버를 장식했던 무하마드 알리와 소니 리스튼 

<출처. SportsIllustrated 홈페이지>

1964년 리스튼에 7회 KO로 승리해 챔피언이 오른 알리는 "내가 세상을 뒤흔들었다(I shook up the world)"라고 외치며 챔피언 등극을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뒤흔든 건 링 위에서가 아니라 링 밖에서였다.

그는 챔피언이 된 뒤 블랙무슬림으로 개종하며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도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바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알리의 친 아버지 조차도 섭섭한 감정을 표시할 정도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는 것도 괘씸한 데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라는 블랙무슬림 단체는 흑인들의 무장봉기까지 선동하던 과격단체였다. 이후 알리는 50년 전 잭 존슨처럼 백인들의 기독교적 가치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 1호가 됐다.

60년대 헤비급 복싱계에 위대한 백인의 희망은 없었다. 단지 백인들은 착한 흑인, 말 잘 듣는, 기독교를 믿는 흑인이 알리를 때려눕히길 바랄 뿐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선수가 전 세계 챔피언인 플로이드 패터슨이었다. 

알리는 자신을 기독교의 대리인으로 세계헤비급타이들을 기독교 품 안으로 가져오겠다고 밝힌 플로이드 패터슨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65년에 벌어진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알리는 수 차례 경기를 끝낼 기회를 잡고도 경기를 끝내지 않았다.

결국 패터슨은 12회 알리의 잽을 맞고 무릎을 꿇었고 심판은 경기를 중단했다. 한 기자는 이 경기에 대해 장난꾸러기 어린이가 벌레를 잡아 날개와 다리를 차례로 떼어내며 괴롭히는 것 같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1908년 잭 존슨이 쓰러지는 토미 번즈를 부축한 뒤 주먹세례를 날리던 잔인한 모습이었다.

관중들은 이 경기 후 퇴장하는 알리에게 방석 등을 던지며 야유를 퍼부었고 알리 역시 주로 백인들인 관중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강한 경멸의 표시를 보였다.

▶ 저항과 시련의 세월

링 위에서 알리를 제압할 선수는 없었다. 알리의 복싱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가 보여주는링 위에서의 몸동작은 우아한 발레와도 비교됐다. 알리의 발목을 잡은 건 상대방의 주먹이 아니라 정부가 내건 법이었다. 이 역시 잭 존슨의 상황과 비슷했다.

1910년 잭 존슨이 제임스 제프리스 마저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승리하자 당시 백인 의원들은 얼토당토 않은 법을 만들어 잭 존슨의 발을 묶으려 했다. 백인 여성의 매춘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법은 여자가 성행위를 목표로 주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인 아내를 데리고 다닌 잭 존슨을 겨냥한 법이었다.  
  
결국 잭 존슨은 이 법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은 뒤 캐나다로 탈출,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도피 생활을 하며 타이틀전을 벌여야 했다. 그의 첫 번째 백인 아내는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잭 존슨은 "백인들의 증오심과 편견이 내 아내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잭 존슨은 37세의 나이로 전성기를 훨씬 넘긴 1915년 쿠바의 하바나에서 백인 거한 제시 윌라드에게 26라운드 KO패로 패했다. 타이틀을 잃은 잭 존슨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 1920년 미국으로 돌아와 자수, 스스로 감옥행을 선택했다.

그의 백인에 대한 증오심은 그저 개인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다 꺼진 모닥불이었다. 제임스 제프리스를 누른 날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을 벌이고 일부 도시에서는 백인들과 충돌하며 폭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으나 그건 단지 한 순간의 한풀이였다. 

정치적으로 힘을 얻기에는 당시 흑인들의 사회적 기반이 너무 약했고 잭 존슨 스스로 문란한 사생활을 이어갔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그에 비해 알리는 고난의 시대에 자신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거대한 시대 흐름을 이끄는 마법을 경험했다.   

1964년 첫 신체검사에서 지능지수 78로 면제 판정을 받은 알리는 재검 끝에 현역 입영대상자가 됐으나 입영을 거부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월남전에 참전할 수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이에 67년에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제 그의 상대는 지구상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미국 정부가됐다.

그가 유죄판결을 받자 뜻하지 않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는 단식 투쟁과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그 같은 소식이 세계에 퍼져 순식간에 알리는 단순한 복싱선수가 아닌 세계 평화와 반전의 상징이 됐다.

딸 라일라의 승리를 축하하는 알리

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할 미국 대표선수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던 흑인선수들은 인권운동을 펼치며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는데 그 중 한가지가 바로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복싱 자격증마저 빼앗긴 알리의 복권이었다.   

미국 정부는 뒤늦게 협상을 시도했다. 군복만 입고 있으면 복싱선수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세계챔피언보다는 백인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저항의 검둥이가 되겠다"며 투쟁을 선언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때 더 소중한 것을 얻을 때가 있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돈과 명예, 인생의 전부와 마찬가지인 복싱도 포기했다. 이후 그의 신념을 확인한 세계의 팬들은 알리를 성원했고 그는 훗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 공공의 적에서 국민의 챔피언으로

잭 존슨과 알리의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알리는 국민의 인정을 받았지만 존슨은 그렇지 못한 채 글러브를 벗어야 했다는 점이다.

1971년 알리는 대법원 상고심에서 병역 거부에 대해 배심원 만장일치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의 병역 거부가 단순히 군입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배심원들이 인정했다. 

링에 복귀한 알리는 자신을 대신해 챔피언이 된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했다가 생애 첫 패배를 안기도 했으나 재기에 성공, 74년 자이레의 킨샤샤에서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다시 한 번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67년 정부에게 빼앗긴 타이틀을 조지 포먼에게서 되찾은 셈이었다.

'럼블 인 더 정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당시 경기는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후 '더 그레이티스트(The Greastest)'라는 알리 전기 영화가 제작됐고 포먼과의 경기를 취재한 더큐멘터리 필름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만큼 알리의 재기는 극적이었다. 

잭 존슨의 드라마틱한 삶도 '위대한 백인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훨씬 앞선 70년대 초반 영화와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브로드웨이 연극 공연을 관람한 알리는 "잭 존슨의 이야기 가운데 백인 아내 대신 군대 문제를 넣으면 완전히 내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니냐"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알리에게는 분디니라는 영적 트레이너가 있었다. 슈거레이 로빈슨의 개인 비서와도 같았던 그는알리의 자신감을 키워주고 투지를 북돋는 게 임무였다. 분디니는 이후 경기를 할 때면 "잭 존슨이 여기 와 있다. 유령이 여기 있다(Jack Johnson is in the house. The ghost is here)"고 외치며 알리를 응원했다.

억울하게 범죄자가 되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던 잭 존슨도 복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애리조나주 상원 의원 존 매케인이 당시 잭 존슨을 범죄자로 만든 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복권을 신청해 지난해 하원을 통과했다. 그가 사망한 지 62년만의 일이다.  

잭 존슨은 194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텍사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뉴욕에서 벌어지는 조 루이스의 타이틀 방어전을 보기 위해 급히 차를 몰던 중 노스캐롤라이나 랄리라는 도시에서 충돌사고를 일으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알리는 파킨슨씨 병 후유증으로 주먹보다 강하고 빨랐던 말을 잃었다. 초점을 잃은 눈과 표정도없는 얼굴 모습은 그의 기분이 어떤지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알리는 '무하마드 알리 센터'를 운영하며 살아 있는 성인 대접을 받고 있다.  

이제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선출됐다. 100년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던 미국 사회는 지금 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때보다도 여유롭게, 74년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깨뜨릴 때 보다도 더 부드럽게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사회의 1백년 변화를 두 복서의 삶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잭 존슨은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던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종적인 편견과 증오의 시대에 그를 딛고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점은 이후 조 루이스와 알리의 탄생에 자양분이 됐다는 점에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잭 존슨과 알리가 겪은 투쟁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있다.   

따지고 보니 1월17일은 알리의 생일이다. 67세가 된 그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이뉴스24 | 김홍식 기자 dio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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