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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한국 축구

by Wood-Stock 2016. 8. 2.

한국 축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68년 전 오늘


68년 전 오늘, 그러니까 정확히 1948년 8월 2일은 한국 축구의 올림픽 도전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 세워진 날이다. 광복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 축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나간 첫 번째 매머드 국제 대회서 경기한 날이기 때문이다. 1948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본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 축구의 세계 무대 도전에 있어 위대한 첫발로 기억되는 1954 FIFA(국제축구연맹) 스위스 월드컵과 달리 1948 올림픽 남자 축구 본선은 후세 축구 팬들에게 그리 회자되지 않는 듯싶다. 더욱이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승리하는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무척 아쉽다.


모든 게 어수선했던 준비 속에서 일군 기적

1948 올림픽 남자 축구에 출전한 한국 올림픽대표팀은 일본을 지역 예선에서 물리치고 군용기를 타고 경기 당일 스위스에 도착해 대회를 치렀던 1954 월드컵 때보다 혹독하면 혹독했지 덜하지 않은 고된 여건 속에서 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1948 올림픽엔 해방 직후인 1946년 대한축구협회의 전신인 조선축구협회가 FIFA에 가입하면서 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런데 FIFA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전하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독립은 했지만, 이 땅에는 우리 정부가 없었다.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각각 들어와 군정을 실시한, 이른바 신탁 통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이라는 국호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는 것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축구협회는 해방 후 첫 국제 대회인 런던 올림픽 출전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계획하에 미 군정과 수시로 접촉해 출전을 허락받으려 노력했다.

어렵사리 미 군정의 승인을 받은 후에는 감독 및 선수 선발 문제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조선축구협회는 1948년 3월 서울운동장(현재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에서 연희대학(현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총 5개 팀이 모여 선수 선발전을 벌였고, 이 중 우수한 선수 16명을 선발해 대표팀 명단을 확정 지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축구의 혼'으로 불렸던 스타플레이어 김용식을 비롯해 홍덕영·정남식·민병대·정국진·이유형 등 한국 축구 초창기를 이끌었던 스타들이 팀을 이뤘다.

그러나 선수들이 속한 팀 간 자존심 싸움이 워낙 심했던 터라, 선수 선발에 대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선수 선발 잡음은 결국 올림픽 개막 3일 전 사령탑 교체라는 어이없는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사령탑이었던 박정휘 감독이 이 사건 때문에 물러남은 물론 무슨 연유에선지 출국 금지 처분까지 받게 됐다. 그리고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당시 조선야구협회(대한야구협회 전신) 시찰단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이영민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난데없이 감독을 내친 후 야구인을 사령탑에 앉힌 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곤란하다. 물론 이 감독이 야구계에 남긴 족적은 엄청나다. 현재 대한야구협회가 고교 야구 타격 1위를 차지한 유망주에게 주는 상 이름이 ‘이영민 타격상’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감독은 야구계의 레전드가 맞다.

그렇지만 이 감독은 축구를 비롯해 농구·육상 등에서도 선수로 활약하며 대단한 업적을 남긴 레전드다. 배재고 시절에는 축구부를 전조선 대회 정상에 올려놓았으며, 현재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는 일왕배 전일본 선수권대회에서, 1935년 전경성 축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에 우승을 안기기까지 했다. 참고로 1921년에 시작되어 거의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일왕배 역사상 한국 팀이 우승을 차지한 사례는 이때가 유일하다. 이런 족적 때문에, 훗날 ‘한국 축구 대부’로 불리게 된 김용식과 김영근이 이 감독을 무척이나 흠모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축구인들에게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라, 조선축구협회가 야구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에게 과감하게 지휘봉을 맡긴 것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한국 올림픽대표팀은 대회가 벌어지는 영국으로 떠났다.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일본·홍콩을 돌고 돌아 첫 경기 4일 전인 1948년 7월 29일이 되어서야 런던에 들어설 수 있었다. 현지 적응만으로도 고된 상황에서, 북중미 멕시코를 상대로 나흘 후 경기를 치러야 했다. 상대 팀 전력 분석,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68년 전에 만든 메이저 대회 첫 승

당시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본선에서, 아시아를 대표해 출전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중화민국) 두 팀이었다. 함께 출전한 아시아 대표 대만은 터키에 0-4로 완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탈락했다. 당시 대륙 간 실력 차가 워낙 컸던 까닭에, 대만의 패퇴는 해가 동에서 서로 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은 놀랍게도 대회 최대 이변을 일으켰다. 1948년 8월 2일 둘위치 챔피언 힐(현재 밀월 홈구장)에서 벌어진 멕시코전에서, 5-3으로 승리하며 8강에 오른 것이다. 한국은 전반 13분 최성곤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배종호·정국진(2골)·정남식의 릴레이포가 터져 북중미 최강자를 자처하던 멕시코를 격파했다. 멕시코에는 안토니오 카르바할·라울 카르데나스 등 현재 레전드로 평가되는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으나, 아시아에서 날아온 미지의 국가 한국에 일격을 맞고 짐을 싸야 했다.

이 멕시코전 승리는 한국 축구사에 있어 길이 남을 업적이다. 지금이야 올림픽 축구가 23세 이하 연령 제한이 걸려 있어 FIFA 월드컵에 비해 격이 낮은 대회로 치부되지만, 그때만 해도 월드컵 축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다. 연령별 제한이라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출전국들이 모두 A대표팀을 총출동시켜 승부를 벌였다.

대회에 참가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은 1934·1938 FIFA 월드컵에서 '아주리 군단'에 2연패를 안긴 비토리오 포초 감독이었다. 개최국 영국을 이끈 감독은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황금기를 가져다 준 첫 번째 지도자로 불리는 맷 버스비다. 금메달을 차지한 스웨덴의 공격을 이끈 선수들은 AC 밀란을 당대 유럽 최강에 올려놓은 트리오 ‘그레놀리(Gre-No-Li)’, 군나르 그렌·군나르 노르달·닐스 리에트홀름이었다. 요컨대 당대 최강의 팀과 선수들이 출전한 대회였고,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벌어지는 축구 국가 대항전이다 보니, 참가 팀마다 최고 전력을 꾸리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멕시코전서 거둔 기적적 승리는 한국 축구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68년 전 멕시코전 승리는 갓 해방된, 엄밀히 따지면 군정기라 독립 상태라 할 수 없는 아시아의 이름 모를 소국 한국이 세계 메이저 대회에 첫선을 보이고 데뷔전에서 첫 승을 거둔 기념비적 결과다.

더해 지금도 깨지지 않는 위대한 기록과 유산을 양산했다. 한국이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가장 많은 득점(5골)을 넣어 승리한 경기가 바로 이 1948 올림픽 멕시코전이다. 두 골을 기록한 정국진은 지금까지도 한국 축구 사상 유일하게 메이저 대회 한 경기 멀티 골 득점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더군다나 ‘야구인’이었던 이 감독은 한국 축구 사상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지도자가 됐다.

이때 그라운드를 누빈 선수들은 1954 월드컵 때 한국 축구를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주역이 됐다. 최고참이었던 김용식은 감독으로 변신했고, 홍덕영 등이 6년 전 올림픽 때 쌓은 경험을 앞세워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1950~1960년대 한국 축구가 아시아 축구사 초창기부터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 축구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데 있어 68년 전 런던의 그라운드를 누빈 전설들은 주춧돌 구실을 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축구는 없다.

그래서 잊히는 듯한 분위기가 안타깝다. 일본축구협회(JFA)는 지난 1일 1936 베를린 올림픽 때 스웨덴을 꺾었던 올림픽대표팀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기억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고 타박하는 게 아니다. 우리 역시 그들 못잖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과거의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가 안타깝다. 68년 전 정확히 오늘, 한국 축구 전설들이 멕시코를 상대로 만들어 낸 전설적 승리를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글=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사진=베스트 일레븐 DB. 영국 스포츠 매체 <후이트올더파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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