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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NBA 역사탐방

by Wood-Stock 2017. 9. 18.

NBA 역사탐방 ①부, 리그초창기 건설역군들


세계최고 농구리그인 NBA가 북미대륙을 넘어 지구촌 수십억 인구가 즐기는 메이저 프로스포츠 단체로 거듭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현재 성장세가 지속된다면 美 프로스포츠 경쟁자들인 NFL(미식축구), MLB(야구), 그리고 유럽 축구리그 등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전신리그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가 지난 1946년 출범한 이래 전개된 약 70여년의 경쟁역사. 양대 컨퍼런스 최고명문인 보스턴 셀틱스, LA 레이커스가 경쟁을 주도한 가운데 빌 러셀,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 "특별한" 슈퍼스타들 역시 농구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근래 리그흥행을 이끌고 있는 르브론 제임스, 스테픈 커리, 러셀 웨스트브룩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2016-17시즌 종료 후 두문불출했던 『오늘의 NBA』는 1년 중 가장 한가한 시간에 맞춰 NBA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새로운 시장개척, 현대 드래프트&샐러리캡제도 도입, 타 프로스포츠 단체들과의 경쟁 등 굵직한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시간이 될 전망. 시작은 리그초창기로 분류되는 1940년대 후반~1960년대 역사탐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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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1949년, NBA 성립기 

미국에서 프로농구리그가 등장한 시점은 1800년대 후반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1898년 NBL(National Basketball League) 창설. 농구라는 스포츠가 1891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¹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에 의해 고안된 점을 떠올려보자. 당연히 NBL도 세계최초의 프로농구 단체였다. 그러나 해당단체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아무래도 美 북동부 지역의 몇몇 유지들에 의해 운영되다보니 리그운영과 선수수급&대우 등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결국 NBL은 1903-04시즌 중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국인의 스포츠라 불렸던 MLB(Major League Baseball)가 1800년대 성립기를 거쳐 1900년대 초반 완벽하게 정착했던 부문과 대조된다. *²야구와의 흥행경쟁 "절대열세"는 ②부에서 기술할 1960년대  J.월터 케네디 NBA 2대 커미셔너의 리그개혁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¹ 캐나다 출신인 네이스미스 박사는 그가 30세였던 1891년 농구의 기틀을 고안해냈다. 최초의 농구 룰북(rule book) 작성과 농구경기 시연 역시 그의 작품. NCAA 명문 캔자스대학 농구팀을 창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美 농구업계는 그의 업적을 기려 명예의 전당을 "네이스미스 메모리얼 바스켓볼 홀 오브 페임"(Naismith Memorial Basketball Hall of Fame )으로 명명했다. 아마추어농구 창조주답게 NCAA 선수가 누릴 수 있는 최고 명예인 "칼리지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상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간다.(Naismith College Player of the Year) 

*² 美 3대 프로스포츠로 평가받는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의 본격적인 시작은 1922년(리그창설은 1920년)이었다. 

 

NBL 실패 후 두 번째로 등장한 프로농구리그의 명칭은 ABL(American Basketball League)이다. 1925년 창설 후 1931년까지 운영되며 나름 프로리그 틀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질적인 흥행요소 부재, 건강하지 못했던 자금사정 등으로 인해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¹당시 산업중심이었던 북동부, 시카고 정도 지역에서만 운영된 부문도 악재. 앞서 언급했듯이 야구가 꽉 잡고 있던 지역의 팬덤을 농구로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겨울스포츠라는 장점도 딱히 도움을 주지 못한다.(야구는 실외/봄~가을 스포츠) 국내에서 고전하던 프로농구는 다행히 국제무대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네이스미스 박사를 위시한 농구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힘입어 글로벌 농구단체인 FIBA(International Basketball Federation)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이후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대한 지속적인 로비 결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²초대 챔피언은 정해진 수순처럼 미국의 차지. 단일 스포츠 제전으로는 세계최고&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올림픽무대에서의 국위선양 덕분에 꽤나 큰 파급효과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이는 잠시 중단되었던 ABL 재개(1933년), NBL 부활(1937년)이라는 호재로 연결된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 농구라는 스포츠가 깊이 각인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¹ 1920년대 ABL에 참가했던 뉴욕 "오리지널" 셀틱스는 종종 NBA의 보스턴 셀틱스와 혼동되기도 한다. 보스턴 셀틱스의 역사는 BAA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밖에도 볼티모어 오리올스(1926-27시즌/현재 MLB 구단), 디트로이트 라이온스(1925~27시즌/현재 NFL 구단) 등 현대 프로스포츠 구단들과는 관련 없는 팀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² 1936년 올림픽 농구종목 금메달 미국, 은메달 캐나다, 동메달 멕시코. 원시농구(?) 시기답게 결승전 최종스코어는 19-8에 불과했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끝에 메이저 프로스포츠 단체 성립을 위한 씨앗이 풍족하게 뿌려졌던 상황. 마침 1945년에 이르러 2차 세계대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던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구 반대편(유럽, 아시아/태평양 전선) 국외에 쏠렸던 미국인들의 관심이 다시 국내로 향한 것이다. 겨울철 여가시간에 즐길 거리를 찼던 스포츠팬들에게 농구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이는 NBA 초대 커미셔너로 유명한 모리스 포도로프(당시 명칭은 프레지던트) 등의 주도 하에 1946년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 출범으로 연결된다. ABL과 NBL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BAA가 새롭게 등장한 배경은 좀 더 대국적인 시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ABL, NBL에 소속된 팀들은 재정문제로 인해 연고지역에서만 근근이 연명하던 존재들이었다. BAA는 보다 안정적인 재정건전성을 확보한 가운데 과거 실패사례를 반면교사삼아 현대적인 리그운영기조 마련에 성공했다. *¹보스턴 셀틱스, 뉴욕 닉스 등 BAA 원년멤버들이 21세기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원년우승(1946년), NBA 최초왕조인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첫 우승(1949년) 등 성공적으로 프로스포츠 시장 연착륙에 성공한 리그.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는 천하통일이었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경쟁단체들인 ABL, NBL은 프로스포츠 초창기에 흔히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NBL이 1949년 BAA에 흡수통합 되면서 우리가 아는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리그가 탄생한다. NBA리그는 이후 빠르게 몸집을 불려나갔다. 단순하게 덩치만 키운 것도 아니다. NBL에서 활약했던 돌프 쉐이즈, 알 세르비 등 스타선수들을 대거 수급한 결과, 리그경기의 전반적인 수준 역시 몰라보게 향상되었다. *²선수들이 진정한 프로대접을 받으면서 연고지스타로 거듭난 것도 플러스요인이다. 한편, BAA-NBA와의 경쟁에서 밀린 ABL의 잡초 같은 생명력은 1953년 맨체스터 브리티쉬-아메리칸스의 우승을 끝으로 소진된다. 강력한 경쟁자인 ABA(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가 등장한 1967년까지 농구업계를 통일한 맹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¹ BAA(1946~49년) 시절 구성원 중 현재까지 생존한 팀들은 보스턴, 뉴욕,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LA 레이커스), 포트 웨인 피스톤스(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로체스터 로얄스(새크라멘토 킹스) 6개 구단이다. 

*² NBL 소속 팀들의 취약한 재정건전성은 프랜차이즈 스타 부재로 연결되었다. 알 세르비의 경우 1937년 버팔로 바이슨스 소속으로 데뷔한 이래 1948년 시라큐스 내셔널스에 정착하기 전까지 로체스터 로얄스, 트렌튼 타이거스 등을 떠돌았다. 

 

네이스미스 박사는 농구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았다.(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보스턴의 1950년대 중반~1960년대 독주 

NBA가 자리 잡은 1949년 이래 리그 최초의 지배자 타이틀은 NBL에서 넘어온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가 가져갔다. 로체스터 로얄스에게 왕좌를 넘겨줬던 1950-51시즌 제외, 1948~54시즌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¹역사상 세 차례에 불과한 파이널 3연패 업적 달성 구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네아폴리스는 1950년대 중반부에 접어들어 권좌에서 내려온다. 직접적인 원인은 리그초창기 황제로 평가받던 센터 조지 마이칸의 은퇴였다. 1924년생으로 신체나이 전성기를 보냈던 1948~54시즌 구간 리그를 지배한 반면 30대에 접어든 순간 거짓말처럼 부상 탓에 쓰러진 것이다. 

 

스포츠과학이 발달한 현대 시점에나 30대 초반 구간도 전성기로 분류할 뿐, 과거에는 스포츠선수의 30대 진입은 은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참고로 마이칸의 1948~54시즌 구간 평균성적은 24.3득점, 14.1리바운드, 개별선수의 팀 승리기여도를 의미하는 WS(Win Shares) 수치 +107.1로 한 단계 아래는커녕 2~3단계 아래 비교대상조차 전무했다.(WS 2위 에드 마칼리 +69.4) 같은 시기 롱런했던 빅맨 후배들인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등이 특별했을 뿐, 마이칸의 경우 당시 일반적인 은퇴수순을 밟은 셈이다. 보스턴 왕조의 파이널 10연패를 미연에(?) 방지했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영웅 빅맨 밥 페팃 역시 32세였던 1964-65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²이후 레이커스는 1960-61시즌 서부개척을 외치며 연고지를 LA로 옮긴다. 불세출의 스타들인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가 새로운 얼굴마담으로 떠올랐지만 우승은 1971-72시즌까지 전무. *³NBA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지배자 보스턴과 상대하며 점철된 눈물의 역사였다. 

 

*¹ 파이널 3연패 이상 경험 구단 :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1951~54시즌), 보스턴 셀틱스(1958~66시즌), 시카고 불스(1990~93, 1995~98시즌), LA 레이커스(1999~2002시즌) 

*² 흥미로운 사실은 레이커스가 미네아폴리스 시절 선수들을 은근히 찬밥대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작 5시즌 동안 활약한 윌트 체임벌린의 13번을 영구결번해준 반면 마이칸의 99번, 슬래터 마틴의 22번 등은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처리해주지 않았다.(비공식 결번) 단, 파이널 우승회수 16회에는 미네아폴리스 시대가 포함된다. 

*³ 레이커스는 1958~70시즌 구간에서 무려 여덟 차례나 파이널 준우승에 그쳤다. 1970년 vs 뉴욕 제외, 모두 보스턴에게 당한 패배다.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시대가 저문 후에는 잠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시라큐스 내셔널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보스턴 셀틱스, 세인트루이스 호크스가 각각 한 차례씩 우승트로피를 가져간 것.(1954~58시즌) 특히 보스턴의 1956-57시즌 창단 이래 첫 우승은 여러모로 뜻깊었다. 바로 "반지의 제왕" 빌 러셀이 데뷔한 시즌이다. 비록 MVP, 신인왕 영광은 동료들인 밥 쿠지, 탐 하인손에게 양보했지만 데뷔시즌부터 평균 14.7득점, 19.6리바운드(리그전체 1위) 기록으로 비범한 기량을 과시한다. 여기에 명장 레드 아워백 감독, 명예의 전당 멤버들인 프랭크 램지, 빌 셔먼, 샘 존스, KC 존스 등까지 맹활약하며 리그를 아예 통째로 접수해버렸다. 

 

만약 밥 페팃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가 1957-58시즌 우승하지 못했더라면 NBA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¹전무후무한 파이널 10연패 팀이 탄생했을 것이다. 보스턴은 리그원년멤버로 현재까지 총 17회 파이널트로피를 가져갔다. 러셀이 활약했던 1956~69시즌 구간 총 11회 우승. 그나마 페팃의 세인트루이스(애틀랜타 전신구단), 대괴수 윌트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 76ers(1966-67시즌)만이 보스턴의 독주를 겨우 막아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셀틱 프라이드"가 어떻게 해당시기에 상식 밖의 우승 퍼레이드를 펼칠 수 있었을까? 물론 각각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아워백 감독과 러셀, 쿠지 등의 존재감이 절대적이긴 했다. 단, 13시즌 동안 11차례 우승은 단순하게 선수단 구성만으로는 100% 설명해내기 어렵다. 리그 외적인 요소들까지 결부시켜서 살펴보기로 하자. 

 

*¹ 보스턴이 각각 1958년 파이널(vs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1967년 디비전 파이널(vs 필라델피아) 시리즈에서 승리했다면 파이널 13연패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MLB 최다 연속시즌 월드시리즈 우승 팀은 뉴욕 양키스(1949~1953), NFL의 경우 슈퍼볼 3연패 구단조차 없다. 

 

보스턴의 1950년 후반부~1960년대 일방적인 독주 첫 번째 배경은 리그 규모에서 찾을 수 있다. NBA는 1949년 NBL 흡수통합 후 과감한 확장정책을 펼쳤다. 1949-50시즌 당시만 하더라도 3개 디비전 체제 하에서 17개 팀이 경쟁했었다. 그러나 우후죽순으로 가세한 팀들인 인디애나폴리스 올림피언스, 워털루 호크스, 덴버 너겟츠(현재 너겟츠 구단과는 관련 없다), 세인트루이스 봄버스 등은 ABL, NBL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단운영으로 일관했다. 선배리그들이 실패했던 이유를 떠올려보자. 메이저 프로스포츠 시장 진입을 노렸던 사무국 입장에서 아차 싶었을 것이다. 전반적인 리그수준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결국 리그규모는 1951-52시즌 2개 디비전 10개 팀, 1953-54시즌 9개 팀을 거쳐 *¹1955-56시즌 8개 팀 체제로 개편된다. 리그규모축소는 양질의 선수유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는 당연한 이치다. 프로선수를 꿈꾸는 스포츠 유망주들은 미래가 불투명한 농구 대신 개인종목(육상 등), 야구, 미식축구 쪽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NBA는 가장 큰 수입원인 TV 중계권 계약마저 간당간당한 처지였다. 그리고 운동능력 좋은 흑인들이 재키 로빈슨 등장 후 문호를 활짝 개방한 MLB 스타를 꿈꿨다. 체임벌린, 러셀 등의 신장이 190cm 언저리였다면 야구 대신 농구를 선택했을까? MLB에 가세해 윌리 메이스, 프랭크 로빈슨 등의 라이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¹ 8개 팀 체제는 1960-61시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중부 대도시 시카고 시장을 노리며 시카고 팩커스 등이 창단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본격적인 리그확장은 2대 커미셔너인 월터 케네디의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보스턴은 제한된 선수자원유입문제를 가장 현명하게 대처한 팀이었다. NBA에 본격적인 샐러리캡 제도가 도입된 시점은 1980년대 중반. 리그 초창기에도 샐러리캡 개념이 존재했지만 불과 1시즌 만에 폐지된다. 자유경쟁제체를 40년 가까이 유지한 셈이다. 여기서 보스턴의 장점이 발휘된다. 북동부 지역에서 뉴욕 다음가는 스포츠시장에 어울리는 자금력, 아워백 감독의 카리스마, 재능 넘치는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라커룸 분위기가 역대 최고왕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실제로 왕조 주역들인 밥 쿠지, 빌 러셀, 톰 하인손, 프랭크 램지, KC 존스, 샘 존스 등은 보스턴에서 데뷔한 후 은퇴시즌까지 한솥밥을 먹었다. 또한 대우가 나쁘지 않은 가운데 우승까지 밥 먹듯 했으니 이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¹1947년부터 시작된 드래프트 제도로 리그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²당시 모든 선수가 드래프트를 통해 리그에 가세한 것도 아니었고, *³보스턴의 경우 러셀을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또한 대개의 경우 드래프트 1라운드 출신 선수들만 실제전력으로 분류되었을 뿐, 2라운드부터는 선수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모든 선수들에게 드래프트 권리를 행사했던 시대에 빚었던 촌극이다. 가뜩이나 제한된 S급 선수자원들을 보스턴이 영리한 운영으로 쓸어 담았으니 13년간 11회 파이널우승은 당연한 전리품이었다.      

 

*¹ NBA는 의외로 드래프트 제도를 초창기에 시행한 프로스포츠 단체다. MLB 드래프트는 1965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NFL의 경우 1936년부터 실시했다. 

*² 윌트 체임벌린은 캔자스대학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4학년 시즌을 포기했다. NBA 드래프트 참가자격은 대학졸업생 신분. 그는 묘기 농구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소속으로 1년을 보낸 후 NBA에 가세한다. 필라델피아가 그를 영입한 원동력은 연고지출신선수 지명 권리였다. 

*³ 밥 쿠지는 1950년 드래프트에서 트리-시티즈 블랙호크스에 의해 전체 3순위로 지명되었다. 트리-시티즈가 해당권리를 시카고 스태그즈에 팔았던 상황. 문제는 시카고가 1950년 해체되었다는 점이다. 쿠지는 10월에 시행된 땡처리(?) 드래프트를 통해 보스턴 품에 안겼다. 러셀의 경우 1956년 드래프트 당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지명된 후 곧바로 트레이드 되었다. 

 

NBA의 좁은 권역도 선수자원영입을 위축시켰다. 1960년대 초중반 당시 리그구성원들은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라큐스, 뉴욕, LA, 신시네티, 디트로이트,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당시 경제중심지&인구밀집지역인 대서양 연안과 오대호 근방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¹홀로 서쪽에 떨어진 LA 레이커스는 다른 팀들과 비교해 어처구니없는 이동거리를 감수해야했다. MLB가 같은 시기 LA 다저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미네소타 트윈스, 휴스턴 콜츠.45‘s 등 서부, 남부, 북부시장에 대한 개척 역시 꾸준하게 진행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인기와 규모, 흥행 모두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NBA는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연고지에 프로스포츠 구단이 존재하지 않으면 관심도가 떨어지기 마련. *²위에서 언급했듯이 NBA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공급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보스턴이 15년 가까이 득세했던 것은 선수단 실력뿐만 아니라 프런트가 제한된 환경 하에서 다른 팀들과 차별화된 구단운영을 선보였던 덕분이다.  

 

*¹ 레이커스의 서부 독수공방신세는 1962-63시즌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의 등장과 함께 풀렸다.(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연고지 이전, 필라델피아 76ers의 역사는 시라큐스 내셔널스와 공유된다) 

*² 빌 러셀은 남부 루이지애나 출신이다. 단, 학업은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마쳤다. 

 

 

대괴수들의 시대 

NBA 과거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괴수들의 엄청난 수치에 깜짝 놀라게 된다. 바로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1962.3.3. vs 뉴욕), 단일시즌 평균 50.4득점&24.3리바운드(1962-63시즌), 오스카 로버트슨의 시즌평균 트리플-더블(1961-62) 등 놀라운 대기록들이 생성되었던 1960년대다. *¹10년 단위로 끊어 시즌평균 30득점 선수가 가장 많이 등장했던 시기 역시 해당시기였다. 특히 리바운드 수치가 다른 시대와의 비교 자체를 거부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기당 평균 리바운드 15개 이상 정도로는 리그전체 1위 경쟁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다. 위대한 빅맨들인 체임벌린, 러셀 등이 평균 20개 이상 쓸어 담던 시기였던 탓이다. 이는 1960년대가 빅맨의 시대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대농구처럼 공격전술이 짜임새 있게 다듬어지기 전 시점. 3점 라인이 없다보니 코트를 넓게 활용하는 전술에 대한 필요성도 적은 편이었다. 

 

야투성공률을 비교해보자. 1959-60시즌부터 1964-65시즌까지 리그평균 야투성공률은 41%~44%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3시즌(2014~17) 야투성공률의 경우 각각 44.9%, 45.2%, 45.7%에 달한다. 또한 경기템포가 워낙 빨랐던 관계로 리바운드 기회가 더욱 자주 생성되었다.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 1960년대에 대입시키면 완벽하게 들어맞는 농구격언이다.   

 

*¹ 1960년대 시즌평균 30득점 이상 기록 : 릭 배리 1회, 엘진 베일러 3회, 월트 벨라미 1회, 윌트 체임벌린 6회, 밥 페팃 1회, 오스카 로버트슨 6회, 제리 웨스트 4회. 1970년대에는 11회, 1980년대 14회, 1990년대 4회(only 마이클 조던), 2000년대 12회, 2010년대 3회다.(스테픈 커리, 케빈 듀란트, 러셀 웨스트브룩)

 

전격 도입된 공격제한시간도 개별선수들의 기록상승에 큰 영향을 끼쳤다. 초창기 농구는 공격제한시간이 없다보니 경기템포가 무척 느렸다. 팬들을 열광시킬만한 화끈한 요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에 모리스 포도로프 커미셔너는 1954-55시즌부터 공격제한시간을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1953-54시즌 리그평균득점은 고작 79.5점, 경기당 야투시도 역시 75.4개에 머물렀다. *¹새로운 문물로 선수들을 채찍질(?)한 1954-55시즌 평균득점은 무려 93.1점, 야투시도는 86.4개였다. 또한 역사상 단일시즌에 야투 8900개 이상 시도한 사례는 1959~62시즌 구간 보스턴(3회), 필라델피아 워리어스(1회) 2개 구단에 불과하다. 많이 시도하고, 많이 놓치고, 많이 리바운드 잡는 구조가 형성되었던 모양새다. 이러한 환경에서 림 근처에 자리 잡은 S급 빅맨들의 가치가 상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환경 등 각종 보정수치를 구하는 세이버 매트리션들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연구주제. 마이클 조던, 래리 버드 등 특급 득점원들의 고대농구 체험, 체임벌린, 러셀 등의 현대농구 체험이 이루어지면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여부를 예상하는 것은 오래된 논쟁거리다. 정답은 없다. 해당선수들 모두 당시 리그환경에 적응해 찬란한 업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조던, 체임벌린, 샤킬 오닐 등 리그를 완벽하게 지배한 선수들이라면 어떤 시대에 투입되더라도 MVP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겠지만 말이다.  

 

*¹ 보스턴 1953-54시즌 대비 48분 환산 공격기회를 의미하는 경기페이스 +15.6(93.0 -> 108.6) 1959-60시즌에는 134.4까지 증가했다. 

 


NBA 역사탐방 ②부, 춘추전국시대 도래


영원할 것만 같았던 NBA 초창기 지배자 보스턴의 질주는 1968-69시즌 우승을 끝으로 멈췄다. 인류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이다. 이후 도래한 흐름이 바로 1970년대를 관통한 춘추전국시대. 1969-70시즌부터 1970년대 끝자락인 1978-79시즌까지 8개 팀이 파이널우승 역사에 이름을 새긴다. 1958-59시즌부터 1968-69시즌까지 11년 세월동안 우승 팀은 고작 2개 구단에 불과했다.(보스턴 10회, 필라델피아 1회) 


1970년대는 리그 내/외적으로 큰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해당시기 주요이슈로는 강력한 도전자 ABA(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와의 경쟁, 새로운 시장개척 등이 꼽힌다. 특히 ABA의 존재는 제자리걸음 중이었던 NBA가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리그 초창기스타들인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제리 웨스트 등의 은퇴 후 새로운 영건들이 속속 등장했다. 1969-70시즌 데뷔한 카림 압둘-자바(루 엘신더)의 경우 선배 러셀, 후배들인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리그역사상 가장 빛났던 슈퍼스타 중 하나다. NBA 역사탐방 ②부에서는 리그초창기와 "영광의 1980년대" 사이의 가교역할을 해줬던 1970년대를 간략하게 조명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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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압둘-자바는 NBA 197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다.(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ABA의 등장&새로운 시장개척 

우리는 NBA 역사탐방 ①부에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美 프로스포츠 시장에 뿌리내렸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1946년 리그출범 후 1960년대 중반까지 20여년의 세월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진 못했다. 리그는 고작 8~9개 팀으로 운영되었으며 흥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TV 중계권계권 협상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¹경쟁자들인 MLB, NFL 등과 비교해 메이저 프로스포츠단체로 분류되기에 민망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장개척이 꽤나 늦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산업중심이었던 지역은 대서양과 오대호를 끼고 있던 북동부 도시들이다.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서부지역을 먼저 공략한 쪽은 MLB. 뉴욕 삼형제 구성원이었던 브루클린 다저스(現 LA 다저스), 뉴욕 자이언츠(現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서부개척이 유명하다.(연고지 이전) *²한편,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은 후발주자 AFL(American Football League)과의 경쟁구도가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며 남부, 그리고 플로리다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NBA 입장에서는 흥행열세 돌파구인 새로운 시장선점 경쟁에서조차 뒤쳐졌던 셈이다.  

     

*¹ 북미 4대 프로스포츠로 분류되는 NHL(National Hockey League)의 경우 애당초 캐나다에서 시작된 관계로 MLB, NBA 등과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웠다. 과거부터 인기 팀이었던 "오리지널 식스"에도 몬트리올 캐너디언스,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등 캐나다 2개 팀이 포함된다.(나머지 4개 팀은 뉴욕 레인저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보스턴 브루인스, 시카고 블랙호크스) 

*² NFL과 AFL은 치열한 출혈경쟁 끝에 1969년 리그통합에 합의했다. MLB는 이미 1900년대 초반에 내셔널리그(NL)와 아메리칸리그(AL)의 콜라보 완성. NBA는 선발주자들을 있는 힘껏 쫓아가도 부족한 시점이었던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중반 당시 ABA와의 경쟁에 직면한다. 후술하겠지만 ABA와의 경쟁이 긍정적인 결과물을 낳긴 했다. 단, 1970년대 들어 MLB 등과의 격차가 좀 더 벌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서로 다른 리그가 동등한 조건에서 통합된 MLB, NFL이 각각 자연스럽게 NL vs AL, NFC vs AFC 구도를 형성한 반면 단일리그였던 NBA의 경우 인위적으로 서부/동부 컨퍼런스를 구분 지었다.     


야구, 미식축구와의 경쟁에서 고전하던 NBA는 1967년 프로농구 산업 내적으로도 큰 위기에 직면한다. ABA가 NBA 타도기치를 내걸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ABA 창설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가 조지 마이칸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누구인가?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 소속으로 리그최초왕조를 건설했던 전설적인 "NBA" 선수다. 전(前) 직장(?)의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그는 경쟁단체카드를 통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재정건전성이 취약했던 ABA가 선발주자와 정석적인 방법으로 경쟁하긴 무리였다. 해법은 틈새시장 개척. *¹뉴욕, LA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인디애나, 오클랜드, 마이애미, 댈러스, 샌안토니오 등 프로농구 프랜차이즈가 없었던 지역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리그운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30초 공격제한시간 시행, 3점슛 도입, 삼색볼 사용, *²리그진입규정 완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각성한 NBA의 신속한 대처, 근본적인 문제였던 취약한 재정을 극복하지 못한 끝에 1976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단, ABA가 농구업계에 남긴 발자취들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경쟁 없는 집단은 도태되기 마련. NBA가 리그초창기 시행착오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프로농구업계 일인자로 등극한 배경에는 ABA와의 경쟁을 빼놓을 수 없다.    

     

*¹ ABA 해산 후 NBA에 편입된 팀은 인디애나 페이서스, 덴버 너겟츠, 샌안토니오 스퍼스, 뉴저지 네츠(現 브루클린 네츠) 4개 구단이다. 

*² ABA는 NBA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스타선수확보에 주력했다. 취약한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프로무대 진출을 앞둔 일류 유망주들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약속했던 이유다. 모제스 말론이 대표적인 사례. 고교졸업 후 매릴랜드 대학 리쿠르팅을 뿌리치고 ABA 유타 스타즈에 입단한다. 줄리어스 어빙도 ABA에서 프로커리어를 시작한 케이스다. 


다시 NBA 얘기로 돌아가자. ABA와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2대 커미셔너 제임스 월터 케네디 중심으로 전개된 개혁이다.(1963~75년) 그의 첫 번째 업적은 리그내실 다지기. *¹사무국권한에 도전했던 세력들을 명확한 규정 확립으로 깔끔하게 진압한다. TV중계권계약 체결을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한 부문도 눈에 띈다. 1960년대 보스턴왕조의 활약상이 본격적으로 전파를 타면서 프로농구 인기 역시 동반상승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폐쇄적인 리그확장정책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했다. 그가 취임한 1963년 당시 리그 구성원은 9개 팀에 불과했다. 마침 ABA의 등장과 함께 리그확장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상황. 시카고 불스(중부), 볼티모어 불리츠(동부/現 워싱턴 위저즈),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서부/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연고지 이전), 버팔로 브레이브스(동부/現 LA 클리퍼스), 휴스턴 로켓츠(중부), 뉴올리언스 재즈(중부/現 유타 재즈), 시애틀 슈퍼소닉스(서부/現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피닉스 선즈(서부),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서부) 등이 케네디 재임기간동안 등장한 팀들이다. 신생구단들의 등장은 리그평준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고, 이는 1970년대 춘추전국시대 도래에 있어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²NBA는 그의 업적을 기려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선 선수들에게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를 수여하고 있다.  


*¹ 2대 커미셔너 케네디는 철권통치(iron-handed)로 유명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리시즌 경기를 두고 대립했던 보스턴 감독 레드 어워백에게 내린 단호한 벌금처벌, 심판이 동점 버저비터득점을 인정하지 않아 촉발되었던 “Phantom Buzzer Game” 소요 진압(?)이다.(1969.11.7. 시카고 vs 애틀랜타)   

*²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시상식은 1974-75시즌부터 진행되었다. 초대수상자는 웨스 언셀드. 근래에는 루올 뎅, 조아킴 노아, 웨인 엘링턴, 르브론 제임스 등이 수상했다.  


줄리어스 어빙은 ABA, NBA 양쪽 모두에서 레전드였다.(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케네디가 악역(?)을 맡아준 덕분에 후임자인 3대 커미셔너 래리 오브라이언은 좀 더 수월한 리그운영이 가능했다. 재정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ABA의 몰락 역시 호재로 작용한다. 그의 대표업적은 경쟁단체 흡수통합을 매끄럽게 처리한 것이다. *¹그나마 경쟁력을 갖춘 ABA 팀들인 샌안토니오, 인디애나 등은 통합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에 ABA무대를 주름잡던 슈퍼스타 줄리어스 어빙, 모제스 말론, 조지 거빈, 아티스 길모어 등이 NBA에 합류했다. 리그확장에 따른 선수공급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이다. 


상대 장점을 적절하게 벤치마킹했던 부문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현대농구 필수요소 중 하나인 3점슛 규정을 처음 도입한 시점이 바로 그의 재임기간인 1979-80시즌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²그리고 1976년, 1983년의 중요한 CBA(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s) 협상을 통해 리그가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게끔 설계해냈다. 리그통합에 따른 불협화음 최소화, 현대적인 플레이오프 제도가 정비된 것도 해당 시기다. 1대(MVP 트로피 명칭), 2대 커미셔너(시티즌십 어워드)가 은퇴 후 누린 영광에 발맞춰주기 위해서였을까? 오브라이언은 파이널트로피 명칭의 주인공이 되었다.(Larry O'Brien NBA Championship Trophy)  


*¹ NBA는 ABA 몰락 후 발생한 프로농구 공백지역에 대한 진출을 잊지 않았다. 유타, 댈러스, 샬럿, 마이애미, 미네소타, 멤피스 등은 ABA가 선점했던 지역이다.  

*² 오브라이언 체제 하에서의 전국방송(CBS) TV계약은 리그사무국 입지를 단단하게 다져줬다. 3대 커미셔너의 수완은 4대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에게 고스란히 전승된다. 



혼돈의 리그, 춘추전국시대 

보스턴의 천하통일로 요약되었던 1960년대. 그들의 치세는 레드 아워백 감독이 1966-67시즌 프런트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반지의 제왕" 빌 러셀은 선수 겸 감독으로 2회 더 파이널우승을 차지한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1967~69시즌) 그렇다면 보스턴에게 번번이 발목 잡혔던 리그역사상 가장 불운한 2인자 LA 레이커스의 시대가 활짝 열렸을까? 복병 뉴욕이 골드&퍼플 군단의 앞길을 가로 막는다. 명예의 전당 콤비 월트 프레이저와 윌리스 리드가 *¹프랜차이즈 첫 파이널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다. "비운의 콤비"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 입장에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 포스트 러셀 시대를 노리기에는 그들 역시 나이가 들어버렸던 탓이다.(1969-70시즌 베일러 35세, 웨스트 31세) 레이커스의 연고지 이전 후 첫 우승은 1971-72시즌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러셀 시대의 또 다른 피해자 윌트 체임벌린은 레이커스 소속으로 커리어 두 번째 우승반지획득에 성공한다. 


*²뉴욕은 1972-73시즌에도 프레이저, 볼티모어로부터 새롭게 수혈한 득점기계 얼 먼로의 분전에 힘입어 두 번째 파이널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밀워키 벅스는 고작 창단 후 3번째 시즌이었던 1971년 우승했다. 선수 커리어 측면에서 1970년대 지배자로 평가받는 카림 압둘-자바의 리그 2년차 시즌이었다.  


*¹ 뉴욕은 1950~53시즌 3년 연속 파이널준우승에 그쳤던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뉴욕의 앞길을 가로막은 존재가 연고지 이전하기 전 시점 레이커스였다.(1952~53년 파이널) 연고지는 달랐지만, 어쨌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팀 상대로 멋지게 복수한 셈이다.  

*² 필 잭슨은 1972-73시즌 뉴욕 우승멤버다.(1969-70시즌은 등 부상 아웃) 뉴욕 최전성기에 활약했던 주력구성원 중 하나. 그는 2014년 사장 직함을 달고 금의환향한다. 하지만 친정팀과의 재회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1973-74시즌부터는 본격적인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우승트로피 주인공이 새로운 "셀틱 프라이드" 존 하블리첵의 보스턴을 시작으로 골든스테이트, 포틀랜드, 워싱턴, 시애틀 순서로 계속 바뀐 것이다.(보스턴 1975-76시즌 다시 우승) *¹특히 뉴욕, 밀워키, 포틀랜드, 워싱턴, 시애틀의 경우 1970년대 우승 후 두 번 다시 파이널트로피와 인연이 없었다. 어느 정도 평준화가 이루어진 리그에서 사이좋게 프랜차이즈 마일스톤을 나눠가졌던 모양새다. *²NBA 역사상 5년 구간 기준 각기 다른 구단이 우승한 것도 8~9개 팀 체제였던 1950년대 중반 제외, 1970년대가 유일하다.(1974~79시즌) 


시대별 리그 누적승률 1위, 5위 팀 간의 격차를 살펴보자. 1960년대 누적승률 1위 보스턴(70.7%/우승 8회)은 5위 신시네티 로얄스(53.2%/우승 0회)와의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1970년대 해당부문 1위 역시 보스턴(60.0%/우승 2회)이 차지했지만 5위 워싱턴(58.7%/우승 1회)과의 격차는 고작 1.3%다. 1위 팀의 누적승률자체가 70.7%에서 60.0%로 떨어진 사실을 감안하면 리그평준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¹ 밀워키, 워싱턴은 1970년대 마감 후 현재까지 우승은커녕 파이널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그리고 골든스테이트의 1975년 우승은 연고지 이전 후 첫 쾌거였다. 이후 40여년(!) 동안 리그 대표적인 약체로 전락할지는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황금전사들이 다시 득세한 시점은 2014-15시즌이다.(스테픈 커리 MVP, 안드레 이궈달라 파이널 MVP)

*² 1974~79시즌 구간 NBA는 18~22개 팀 체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의 1977-78시즌 우승라인업(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경기력측면에서 고찰해보면 페이스가 꽤나 둔화되었다. 공격제한시간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이 속속 개발된 덕분이다. *¹실제로 1960년대에는 모든 팀들이 경기당 평균 110.0득점을 돌파했었다.(10년 평균) 반면 1970년대에 평균 110.0득점 이상 기록한 팀은 화력전 세계였던 ABA에서 넘어온 샌안토니오와 덴버(1976~79시즌 평균), 그리고 전통의 공격 팀 LA 레이커스밖에 없다. 


빅맨들의 득세는 계속되었다. ABA 신식문물이었던 3점슛이 도입된 시점은 1979-80시즌. 림 근처에서 위력이 배가되는 빅맨들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각각 1975년, 1979년 파이널우승 주인공인 골든스테이트, *²시애틀 제외 모든 우승 팀들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빅맨과 함께했을 정도다. 1970년대 개별선수의 팀 승리기여도를 의미하는 누적 WS(Win Shares), 분당생산력 지표인 PER(Player Efficiency Rating) 수치를 둘러보자. WS 상위 5명 중 4명이 빅맨(카림 압둘-자바, 밥 레니어, 엘빈 헤이즈, 데이브 코웬스), 평균 PER 수치 역시 4명이 상위 5위 내에 위치한다.(1970~79시즌 구간 300경기 이상 소화기준/압둘-자바, 레니어, 밥 맥아두, 조지 맥기니스)


*¹ 1960년대 당시 경기당 평균 야투시도 106.9개(!)를 시도했던 보스턴은 1970년대 97.6개 시도에 그쳤다.  

*² 시애틀의 주전센터 잭 시크마는 명예의 전당 입성여부와 별개로 우승시즌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었다. 실제로 팀 기여도 측면에서 놓고 보면 백코트 원투펀치 거스 윌리엄스&데니스 존슨과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카림 압둘-자바에 대한 묘한 평가 

NBA *¹1970년대 간판스타가 압둘-자바였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을까? 줄리어스 어빙, 모제스 말론 등도 쟁쟁한 스타였지만 ABA 출신인터라 리그위상에서 어느 정도 격차가 발생했다. 대학무대 평정 후 NBA 출사표를 던진 빌 월튼의 경우 부상으로 인해 평가절하 된 케이스다. 압둘-자바가 당시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²리그 2년차 시즌을 시작으로 MVP에 무려 여섯 차례나 선정되었으며(1970~80시즌 구간) 대부분의 지표에서 독보적인 1인자였다. 2위와의 누적득점격차가 3,144점(19,780득점/2위 엘빈 헤이즈 16,666점), WS 수치격차도 무려 74.9(+162.2/2위 밥 레니어 +87.3)에 달했을 정도다. *³1971-72시즌 평균 34.8득점은 역대 센터순위 6위로 이후 해당포지션에서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한 선수는 없다.(밥 맥아두 1974-75시즌 34.5점, 모제스 말론 1981-82시즌 31.1점) 탄탄한 기본기에 기반을 둔 포스트 플레이, 시그내쳐 무브인 스카이훅, 수비코트에서의 존재감 모두 농구역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¹ 1970년대 "셀틱 프라이드" 존 하블리첵은 데뷔시점이 1962-63시즌이었다.(1977-78시즌 37세까지 활약) 데이브 코웬스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가졌던 부문도 고려해야 한다. 

*² 카림 압둘-자바 역대 누적 MVP 수상 1위.(6회) 공동 2위는 빌 러셀과 마이클 조던이다.(5회)

*³ 단일시즌 센터포지션 평균득점 1~5위는 윌트 체임벌린이다.(1961-62시즌 50.4득점/역대 모든 포지션 통틀어 1위) 


카림 압둘-자바의 커리어 후반부 영광은 매직 존슨과 공유된다.(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압둘-자바 커리어에 있어 아쉬운 부문이 있다면 우승회수다. 개인커리어로 1970년대를 완벽하게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파이널우승은 고작 1회에 그쳤다.(1970-71시즌 밀워키) *¹LA 레이커스 소속이었던 1979-80시즌 커리어 두 번째 우승의 경우 매직 존슨이 등장했던 터라 평가하기 다소 애매하다. 이는 1980년대에 추가된 네 차례 우승평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대의 지배자들을 떠올려보자. 빌 러셀을 제외하더라도 1980년대의 존슨&래리 버드, 1990년대의 마이클 조던, 2000년대 초반의 샤킬 오닐, 2010년대의 르브론 제임스(현재진행형) 모두 팀 내 1인자 신분으로 우승반지 3개 이상 획득했다. 데뷔 팀 밀워키의 짧은 전성기, LA 레이커스 이적 후 찾아왔던 리툴링 기간 등이 여러모로 아쉽다. 참고로 압둘-자바의 최전성기 플레이오프무대 성적이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69~80시즌 구간 플레이오프 94경기에서 평균 30.4득점, 15.7리바운드, 3.9어시스트, 야투성공률 53.6%를 기록한 괴수였다. 


*¹ 카림 압둘-자바의 1979-80시즌 팀 기여도가 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 매직 존슨이 파이널 MVP를 수상하는 등 "The MAN" 우승측면에서 평가가 갈린다.  



그들이 움츠린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NBA 역사 속에서 1970년대는 종종 잊혀진(?) 시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1960년대와 비교해 득점력이 감소했고, MLB&NFL 등과의 흥행경쟁에서 여전히 고전했던 탓이다. 오죽하면 NCAA 인기가 더 높았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다. 물론 1970년대를 버린 자식 취급하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리그내실을 튼튼하게 다졌다. 워싱턴, 시애틀, 포틀랜드 등 후발주자들이 정상에 섰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훗날 두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토양을 다진 시기라고 표현하면 무리일까? 어쨌든 리그는 1980년대 들어 매직 존슨(LA 레이커스)과 래리 버드(보스턴)가 참천한 라이벌 구도 성립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NBA 역사탐방 ③부, 황금시대에 진입하다


NBA 역사에서 1970년대는 경쟁단체였던 ABA 흡수통합, 새로운 TV 중계권 체결 등 내실다지기에 주력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또한 뉴욕(2회), LA 레이커스(연고지 이전 후 기준), 밀워키, 골든스테이트(연고지 이전 후 기준), 포틀랜드, 워싱턴, 시애틀 등이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파이널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던 셈이다. 단, 흥행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팬들의 주목을 끌만한 슈퍼스타파워가 다소 부족했고, 빅마켓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았던 우승경쟁 역시 흥행에 악영향을 끼쳤다. 오히려 대학농구(NCAA)가 득세했을 정도다. 


NCAA의 1970년대 후반부 흥행 중심에 섰던 존재를 떠올려보자. 미시간 주립대학의 매직 존슨, 그리고 인디애나 주립대학의 래리 버드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특히 두 선수는 가장 많은 팬들이 지켜봤던 농구경기 중 하나로 회자되는 NCAA 1979년 파이널무대 주인공이었다. 존슨과 버드는 1979-80시즌부터 프로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대학농구인기가 고스란히 NBA 흥행으로 연결된 것이다! 여기에 빅마켓으로 분류되는 필라델피아(줄리어스 어빙), 시카고(마이클 조던), 뉴욕(패트릭 유잉) 등에도 슈퍼스타들이 속속 등장했다. 화끈한 공격농구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도 플러스요인. NBA는 1980년대 들어 여러 가지 호재에 힘입어 MLB, NFL와 동일선상에서 경쟁 가능한 메이저 프로스포츠 단체로 도약했다.(마이클 조던이 1990년대에 美 프로스포츠 경쟁구도 완성) 황금시대라고 칭송받는 1980년대 역사를 간략하게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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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LAL) vs 래리 버드(BOS) 흥행카드 완성 

NBA 입장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대형신인 존슨과 버드는 축복이었다. *¹두 선수가 양대 컨퍼런스를 대표하는 명문구단 LA 레이커스, 보스턴 소속으로 데뷔한 것도 엄청난 호재. 흥미로운 사실은 각자의 소속팀에 합류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했었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팀 소속으로 데뷔했다면 NBA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버드의 보스턴 합류과정부터 살펴보자. *²그는 1978년 드래프트 당시 보스턴의 전체 6순위 지명을 받았다. 실력측면에서는 당연히 1순위 후보였지만 대학 4학년 시즌과 NBA 진출을 결정하지 못했던 터라 드래프트 순번 1~5위 팀들이(POR, KCK, IND, NYK, GSW) 그를 지나쳐버렸다. 버드는 결국 인디애나 주립대학 잔류결정. *³보스턴은 이듬해인 1979-80시즌이 되어서야 대학무대 최고스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¹ 보스턴 파이널우승 17회(승률 81.0%/21개 시리즈 최종 17승 4패), LA 레이커스 파이널우승 16회(승률 51.6%/31개 시리즈 최종 16승 15패)  

*² 1978년 드래프트는 마이칼 탐슨(바하마/클레이 탐슨 아버지)이 역대 최초로 외국인 1순위 지명을 받았던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³ NBA는 1970년대 당시 드래프트 자격을 갖춘 모든 아마추어 농구선수에 대한 권리를 행사했다. 보스턴의 버드에 대한 권리는 이듬해까지 유지되었다. 


존슨의 레이커스 합류과정 역시 극적이다. 뉴올리언스 재즈(現 유타 재즈)는 1976년 8월 레이커스 소속이었던 *¹올스타가드 개일 굿리치 FA영입과정에서 보상 차원으로 다수의 미래 드래프트 지명권을 내줬다. 굿리치는 유타합류 후 부상&노쇠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설상가상으로 뉴올리언스는 1978-79시즌 동부컨퍼런스 꼴찌에 그쳤다. 당시 드래프트 규정에 의해 서부컨퍼런스 소속이었던 시카고(1980-81시즌 동부컨퍼런스 이동)와 1순위 지명권을 놓고 동전 던지기 시행.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해당 동전 던지기 승리와 함께 완성되었다. 레이커스가 1979년 "매직 존슨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²그렇게 존슨은 카림 압둘-자바가 건재했던 명문 팀 소속으로 데뷔한다. 사전에 치밀하게 작성된 시나리오처럼 진행된 존슨(LAL), 버드(BOS)의 빅마켓 합류가 NBA 흥행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¹ 국내 프로스포츠 단체들의 FA영입 보상규정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NBA의 현대적인 FA제도는 데이비드 스턴(1984~2014) 커미셔너 취임 후에야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² LA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합류 전에도 5할 승률 이상&플레이오프진출에 성공했던 강호였다. 1980년대 "쇼 타임 레이커스"는 1982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제임스 워디 합류와 함께 완성된다. 워디 역시 클리블랜드와의 1980년 2월 트레이드(돈 포드, 드래프트 지명권)를 통해 얻은 행운이었다. 보스턴의 1980년대 스타들인 로버트 패리쉬, 케빈 맥헤일도 트레이드로 합류한 선수들.(1980년 골든스테이트-보스턴의 패리쉬 트레이드 당시 맥헤일 드래프트 권리가 함께 넘어갔다) NBA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1980년대 LA 레이커스 vs 보스턴 라이벌구도 성립은 여러모로 극적이다. 


레이커스와 보스턴은 1980년대를 양분했다. 레이커스 파이널진출 8회&우승 5회(1980, 1982, 1985, 1987, 1988), 보스턴 파이널진출 5회&우승 3회.(1981, 1984, 1986) *¹보스턴의 파이널진출 회수가 다소 부족했던 것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동고서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또한 리그는 두 팀의 도약에 힘입어 MLB(뉴욕 양키스 vs 보스턴 레드삭스), NFL(댈러스 카우보이스 vs 워싱턴 레드스킨스)에 버금가는 라이벌 흥행카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농구팬들은 맞대결이 성사될 때마다 TV 앞으로 모여든다. 마이클 조던(with NIKE), 데이비드 스턴 커미셔너에 의해 훗날 완성된 NBA 세계화 기초 작업 역시 불꽃같았던 1980년대 LAL vs BOS 경쟁구도 덕분에 탄력 받았다. 


*¹ LA 레이커스가 1979~89시즌 구간에서 파이널진출에 실패했던 것은 각각 1981년, 1986년 플레이오프 밖에 없다. 두 차례 레이커스 사냥 주인공은 휴스턴. 그러나 휴스턴은 1981년, 1986년 파이널 모두 보스턴 상대로 무너졌다. 한편, 보스턴은 1980년대 초반에는 필라델피아, 후반부에는 디트로이트의 거센 공세에 시달렸다. 이는 NBA 1979~89시즌 구간 누적승률 상위 5개 팀 중 4개 팀이 동부컨퍼런스 소속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가능하다.(BOS, PHI, MIL, ATL)  



스포츠팬들의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개인 라이벌리(속된 표현으로 A vs B 놀이)도 뜨거웠다. 존슨은 비록 1979-80시즌 신인왕을 버드에게 양보했지만 해당시즌 파이널우승으로 만회해냈다. *¹버드의 경우 1983~86시즌 MVP 3연패로 다시 반격했다. 존슨의 첫 번째 MVP 수상은 1986-87시즌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흑인 vs 백인, 동부컨퍼런스 빅마켓 vs 서부컨퍼런스 빅마켓, 투사(버드) vs 매지션(존슨) 등 서로 다른 배경과 플레이 스타일. 어쩌면 두 선수의 1980년대 경쟁은 NBA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을 "특별한"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¹ 역대 3시즌 연속 MVP 수상에 성공한 선수는 빌 러셀(1960~63시즌), 윌트 체임벌린(1965~68시즌), 래리 버드(1983~86시즌) 3명밖에 없다. 마이클 조던의 경우 각각 1987-88시즌, 1990~92시즌, 1995-96시즌, 1997-98시즌에 수상했다. 


"패배자들의 도시" 필라델피아에도 잠시나마 광명이 찾아왔다. ABA에서 넘어온 슈퍼스타 줄리어스 어빙, *¹휴스턴에서 탈출한(?) MVP 출신 빅맨 모제스 말론, 프랜차이즈 스타 모리스 칙스 등이 뭉쳐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중반 동부컨퍼런스 흥행을 주도한 것. 특히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맞대결은 LA 레이커스 vs 보스턴 관계만큼이나 화끈했다.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적보다 동부컨퍼런스 우승 길목에서 지긋지긋하게 마주친 가까운 거리 적이 더욱 까다로웠다. 그들은 1982-83시즌 유명한 "FO-FI-FO"(PO 시리즈 4승 스윕-4승 1패-4승 스윕) 우승으로 프랜차이즈 역사상 세 번째 파이널트로피 획득에 성공한다. 마침 MLB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불세출의 영웅 스티브 칼튼, 마이크 슈미트의 활약에 힘입어 월드시리즈 정상에 섰던 부문도 눈에 띈다. *²적어도 1980년대 초반만 놓고 보면 "승리자들의 도시"였던 셈이다. 


*¹ 모제스 말론은 1981-82시즌 평균 27.8득점, 17.6리바운드(리그전체 1위), 1.5블록슛, 야투성공률 54.0%, 개별선수의 분당생산력을 의미하는 PER(Player Efficiency Rating) 수치 26.8(1위), 팀 승리기여도인 WS(Win Shares) 수치 15.4(1위) 맹활약으로 생애 두 번째 MVP 트로피 획득에 성공했다. 문제는 소속 팀 휴스턴이 해당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는 점이다. 그는 (각종 불협화음 끝에)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다음 시즌 MVP 2연패&우승반지 획득 등 커리어 최고의 시간을 보낸다. 

*² NHL의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도 1980년대 내내 강호지위를 유지했다.(스탠리컵 진출 3회) 단,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경우 1981년 플레이오프 탈락을 끝으로 다시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NBA 황금시대인 1980년대 마지막을 장식한 팀은 디트로이트다. 명장 척 데일리 감독 아래 뭉친 아이재이아 토마스, 조 듀마스, 빌 레임비어, 데니스 로드맨, 릭 마혼 등은 "배드보이스 1기"라 불리며 거친 농구를 선보인다. 특히 "배드보이스 1기"의 득세는 1980년대를 관통한 공격농구기조에 사약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987-88시즌 공격농구 간판인 LA 레이커스에게 파이널패배를 당한 반면 이후 *¹1988~90시즌 구간에서는 특유의 수비농구로 정상에 올랐다.(1989년 파이널 vs LAL 4승 무패) 마이클 조던의 황제대관식을 1990년대로 늦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던의 커리어는 "화려한 데뷔 -> 보스턴, 디트로이트 등을 상대로 펼친 눈물겨운 투쟁 -> 1990년대 초반 1차 황제즉위 -> 1990년대 중반 2차 황제즉위"로 요약된다. 그의 커리어가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1980년대의 투쟁역사가 동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NBA 역사탐방 ④부에서 좀 더 자세하게 조명하기로 하자. 

  

*¹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득세한 1986~90시즌 구간 수비 수치를 살펴보자.(파이널진출 3회&우승 2회) 경기당 평균 102.7실점만 허용, 리그전체 1위에 올랐다. 100번의 수비기회에서 실점기대치를 의미하는 디펜시브 레이팅(DRtg) 수치는 104.9로 유타, 휴스턴에 이어 3위. 특히 1989년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를 평균 102.3득점, 야투성공률 46.5%로 묶은 것은 충격이었다. 레이커스는 해당시즌 서부컨퍼런스파이널(vs 피닉스 4승 무패) 당시 평균 115.0득점, 야투성공률 51.9%를 기록했었다.(서부컨퍼런스 PO 11경기 전승)   




공격농구시대 

1970년대 당시 주춤했던 리그 득점력은 1980년대 들어 다시 상승했다. 많은 득점에 열광하는 구기 종목의 특성상 득점력상승은 황금시대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였다. 선두에 섰던 팀이 바로 "쇼 타임 레이커스". 특히 매직 존슨과 제임스 워디, 바이런 스캇 등이 전면에 나섰던 1980년대 중후반 구간이 유명하다. *¹공격농구를 리그차원에서 장려했던 ABA에서 넘어온 덴버, 조지 거빈이 이끌었던 샌안토니오(ABA 출신), 가공할만한 폭발력을 과시했던 피닉스, 조지 칼&돈 넬슨 감독 등이 거쳐 갔던 골든스테이트 역시 해당시기 주목할 만한 공격 팀이다. 반면 동부컨퍼런스 팀들은 점점 수비농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과 같은 득점기계들과 조우하며 많은 득점이 아닌, 적은 실점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²예를 들면 조던이 소속된 팀과 득점쟁탈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³리그의 전반적인 공격성향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점차 둔화된다.    


*¹ 덴버와 샌안토니오는 1960년대, 그리고 1971-72시즌 LA 레이커스 제외 단일시즌 평균 120.0득점 이상 기록한 팀들이다.(1980년대 덴버 5회, 샌안토니오 1회) 

*² 마이클 조던의 개인득점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점은 1980년대 후반부다. 1986-87시즌 평균 37.1득점은 역대 6위에 해당한다.(1~5위 윌트 체임벌린 4회, 엘진 베일러 1회)

*³ 1990년대 들어서도 꾸준하게 공격성향을 강조한 돈 넬슨은 오랫동안 이단아 취급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주창했던 농구는 21세기 들어서야 후배들에 의해 꽃피운다. 

  

포지션 헤게모니가 빅맨에서 가드&윙 포지션으로 넘어간 대목도 눈에 띈다. 1940~70년대는 조지 마이칸,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자바 등 전설적인 빅맨들이 지배했던 시기. 황금시대에는 포인트가드 매직 존슨, 스몰포워드 래리 버드&줄리어스 어빙, 슈팅가드 마이클 조던 등이 리그흥행을 책임졌다. 실제로 1980년대 우승팀의 간판스타들은 *¹1983년 파이널 모제스 말론 제외 모두 가드 또는 윙 포워드들이다. 이는 농구전술의 발전과도 궤적을 같이 한다. 3점슛 도입 등으로 인해 공격전개가 더욱 정교해진 결과, 넓어진 코트에서 볼을 오래 소유하는 핸들러들의 역할이 증가한 것이다. 물론 1980년대에도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쉬, 하킴 올라주원, 랄프 샘슨, 패트릭 유잉 등 포스트 압둘-자바&말론 시대 빅맨들이 좋은 활약을 펼쳤다. *²단, 리그 간판스타지위는 분명 존슨과 버드 등 다른 포지션 선수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¹ 줄리어스 어빙 1950년생, 1971-72시즌 ABA, 1976-77시즌 NBA 데뷔. 1980년대 들어서는 완만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우승시즌 에이스가 말론이었다는 의미다. 여담으로 찰스 바클리는 1984-85시즌 레전드들이 즐비한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데뷔했지만, 선배들의 노쇠화와 함께 고생길에 오른다. 

*² 1970년대 빅맨 MVP 10회&파이널 MVP 6회, 1980년대 빅맨 MVP 3회&파이널 MVP 2회


동부컨퍼런스 1988년 올스타(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데이비드 스턴의 치세  

데이비드 스턴이 3대 커미셔너 제임스 월터 케네디에게 물려받은 *¹NBA는 평화로웠다. 더욱 과감한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할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가 역대 커미셔너 중 가장 오랜 기간(1984~2014년) 재임하며 선보였던 첫 번째 업적은 드래프트&FA제도 정비로 평가받는다. NBA 드래프트는 1984년까지만 하더라도 무려 10라운드까지 진행하는 등 아마추어 선수들에 대한 일방적인 권리를 누렸다. 스턴은 NCAA, 선수노조와의 지속적인 협상 끝에 1989년 2라운드까지만 진행되는 현대 드래프트 제도를 정착시켰다. *²하위권 팀들이 극단적인 치킨런(chicken-run)을 펼쳤던 탱킹에 로터리추첨제도 도입으로 맞섰던 부문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³NBA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신인선수 수급으로 평가받는 1984년, 1996년, 2003년 드래프트 역시 스턴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다. FA제도와 관련한 CBA협상은 1990~2010년대까지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으로 역사탐방 ③부에서 생략하도록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4대 커미셔너의 업적은 무려 20여년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¹ 1970년대부터 불거진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약물문제는 분명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스턴이 커미셔너 재임기간 내내 가장 강조했던 사안 역시 약물이슈 제거였다

*²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팀들이 받는 드래프트 로터리추첨 참가 권리는 1985년부터 시행되었다. NCAA 조지타운대학의 킹콩 패트릭 유잉에게 리그 모든 팀들이 군침을 흘렸던 상황. 결국 뉴욕이 1순위 지명권 행운과 함께하게 된다.  

*³ 1984년, 1996년, 2003년 드래프트 출신선수 :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존 스탁턴, 앨런 아이버슨,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써니, 드웨인 웨이드 등 


세계화 초석을 다졌던 시기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 위치한 현지사무국 설치, 냉전시대 종식에 적절하게 편승한 해외중계권 계약확대, NBA 소속선수들의 올림픽 등 국제무대 참전, *¹유럽&아시아 유망주들에 대한 드래프트 문호 전면개방 모두 스턴의 치세 하에서 현실화된 업적들이다. 물론 위에 나열한 업적들이 1980년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0여년에 걸쳐 진행될 굵직한 사업들 초안이 마련된 시기 정도로 기억하자. 또한 황금시대 흥행을 발판삼아 리그확장에 더욱 공세적으로 임했다. *²미지의 영역이었던 플로리다 시장 공략(올랜도, 마이애미)과 더불어 흥행부진 팀들의 연고지 조정까지 착착 진행된다. 바로 캘리포니아 시장에 대한 러브콜이다.(캔자스시티 -> 새크라멘토, 버팔로 -> 샌디에고 -> LA) 스턴과 사무국이 황금시대의 풍족한 현재에 취해 미래대비를 소홀히 했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아는 세계최고 프로농구리그 NBA의 위상확립은 훨씬 늦춰졌을 것이다. 다음 시대에 펼쳐졌던 "마이클 조던 특수"의 기원조차 1980년대 꾸준한 성장에 배경을 두고 있다.   


*¹ 아비다스 사보니스 등 국제무대를 호령했던 해외스타선수들이 NBA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1990년대다. 하킴 올라주원(나이리지아), 패트릭 유잉(자메이카) 등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케이스. 진정한 해외출신 드래프트 1순위 선수의 등장은 2002년에 이루어졌다.(야오 밍) 

*² 리그확장 마지막사업이었던 캐나다시장 공략은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절반의 성공) 근래에는 멕시코시장을 눈독 들이고 있다. 




NBA 역사탐방 ④부, 마이클 조던의 황제즉위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구분은 서구문화 중심으로 돌아가는 특성상 기원 전/후로 나뉜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에 맞춘 기원 전(Before Christ)과 기원 후(Anno Domini) 개념이다. 해당개념은 종종 스포츠업계에서도 활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MLB(Major League Baseball)의 베이브 루스 신격화. 프로야구 역사가 루스 전(Before Ruth), 루스 후(Anno Bambino)로 구분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1920년대 당시 "홈런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루스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MLB는 그의 엄청난 흥행파급력에 힘입어 "미국인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한다.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업계에도 루스의 존재감에 버금가는 영웅이 존재한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주인공이다. 우리는 NBA 역사탐방 ③부에서 1980년대 황금시대흐름을 둘러봤었다. 각각 양대 컨퍼런스 최고명문 팀 소속인 LA 레이커스 매직 존슨과 보스턴 래리 버드의 불꽃 튀는 경쟁구도는 프로농구인기를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렸다. 조던의 역할은 선배들이 점화시킨 인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다. 북미대륙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스포츠 아이콘"으로 군림하며 각종 신화를 작성해나갔다. 마침 본격적으로 도입된 위성방송을 통해 국내 포함 전 세계 스포츠팬들이 그의 예술적인 플레이를 감상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호재였다. 글로벌 스포츠 NBA의 위상이 확립된 시기. 시간이 흘러 미래에 조던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춘 선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NBA가 몰락한 후 재탄생하지 않는 이상 조던만큼의 기량과 업계 기여도를 동시에 갖춘 선수는 두 번 다시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는 농구의 신이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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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의 황제즉위  

NBA 역사에서 마이클 조던의 1990년대 황제 대관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려면 1980년대 커리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84년 드래프트 전체 3순위 지명과 함께 시카고 유니폼을 입었다. 시카고는 직전 시즌 27승 55패 *¹리그전체 22위에 그쳤던 최약체. 2시즌 연속 올스타를 배출하지 못하는 등 별다른 구심점조차 없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팀은 혜성같이 등장한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출신 득점기계와 함께 서서히 강호로 도약한다.(조던 1984-85시즌 신인왕&팀 3년 만의 PO진출) 그러나 "동고서저"의 벽은 너무나 견고했다. *²조던은 1986-87시즌부터 시작된 4시즌 연속 득점왕 정복에도 불구하고 리그 아이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득점만 노리는 이기적인 선수라고 비난받는다. 앞길을 번번이 가로막았던 존재는 디트로이트 "배드보이스 1기". *³팀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동일한 상대에게 무너졌다. 무엇보다 탄탄한 조직력을 앞세운 팀에게 연거푸 패배한 탓인지 "가드포지션의 이기적인 득점왕은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라는 리그의 오랜 편견에 더욱 시달리게 되었다.

 

*¹ 1983-84시즌은 23개 팀 체제로 진행되었다. 보스턴, LA 레이커스, 필라델피아 등이 리그를 주름잡았던 시기다.  

*² 조던은 1986-87시즌부터 1992-93시즌까지 7년 연속 득점왕 타이틀을 독식했다. 1차 은퇴로 인해 자리를 비운 1993-94시즌, 그리고 복귀 후 17경기 소화에 그친 1994-95시즌(26.9득점)을 제외할 경우 10년 연속 득점왕.(1995~98시즌) 7년 연속 득점왕은 윌트 체임벌린(1959~66시즌)과 함께 역대 공동 1위에 해당한다. 단일시즌 3,000득점 이상 기록한 선수 역시 체임벌린(3회), 조던(1986-87시즌 3,041점) 2명밖에 없다.  

*³ 시카고 1988년 PO 2라운드 vs DET 1승 4패 -> 1989년 PO 컨퍼런스파이널 vs DET 2승 4패 -> 1990년 PO 컨퍼런스파이널 vs DET 3승 4패.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대를 서서히 극복해냈음을 알 수 있다. 디트로이트와의 1991년 PO 컨퍼런스파이널 시리즈결과는 4승 무패 스윕이었다. 


거친 고난을 이겨낸 자만이 진정한 영광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던가? 조던과 시카고는 1980년대 투쟁의 시간을 거치며 점점 챔피언에 어울리는 팀으로 성장해나갔다. *¹리그 역사상 최고의 승부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필 잭슨 감독, 조력자들인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 BJ 암스트롱 등이 속속 합류한 것도 플러스요인. 그들은 1990-91시즌 마침내 파이널정복에 성공한다. 이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지긋지긋한 디트로이트를 4승 무패 스윕으로 압도한 후 파이널무대에서는 마지막불꽃을 태웠던 LA 레이커스까지 4승 1패로 제압해버렸다! 리그가 1980년대 황금시대를 넘어 1990년대 "MJ era"로 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²아울러 조던은 NBA 역사상 최초로 가드포지션 득점왕&MVP&파이널 MVP 동시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이루어냈다. 고난의 시간, 리그의 오랜 편견, 라이벌들을 모두 극복한 시즌이었던 것이다.     


*¹ 필 잭슨은 1988-89시즌 시카고 합류 후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아버지" 텍스 윈터 코치와 의기투합했다. 시카고는 덕 콜린스(1986~89시즌) 감독 재임 당시만 하더라도 조던의 개인역량에만 의존한 성격이 짙었다. 잭슨은 특유의 선수단장악력, 그리고 우승에 필요한 전술기반마련을 통해 시카고의 1990년대 전성기를 창조해냈다. 

*² NBA 역사상 득점왕 시즌에 파이널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조지 마이칸(센터), 카림 압둘-자바(센터), 샤킬 오닐(센터), 그리고 조던(가드) 4명에 불과하다. 조던 이전/이후 가드포지션 득점왕이 팀을 우승으로 이끈 사례는 없다.(앨런 아이버슨 2000-01시즌&스테픈 커리 2015-16시즌 득점왕/준우승)


시카고는 창단 이래 첫 우승 후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1991-92시즌 파이널상대는 포틀랜드. *¹1984년 드래프트 악연에 얽힌 팀이다. 조던은 서부컨퍼런스 no.1 슈팅가드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울리며 두 번째 우승트로피에 키스했다. *²1992-93시즌 파이널은 가드포지션 에이스 팀의 역대 첫 파이널 3연패, 그리고 피닉스 소속이었던 찰스 바클리의 눈물로 기억된다. 특히 바클리는 조던의 1984년 드래프트 동기이자 절친이었다.(5순위) 피닉스의 화끈한 공격농구를 주도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막상 파이널무대에서는 시카고 신화작성 들러리신세로 전락한다. 농구 황제는 "1차 황제즉위" 후 충격적인 은퇴의사를 밝혔다. 정상을 정복한 영웅만이 느낄 수 있다는 허무감,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망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그는 야구선수전업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 마이너리그 선수로 뛰었다. *³성적은 당연히(?) 부끄러운 수준. 1994시즌 말미에는 리그파업까지 겹치며 더 이상 야구업계에서 도전을 이어갈 명분마저 사라졌다. 이는 1995년의 유명한 "I’m back" 선언으로 이어진다. 

  

*¹ 198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자는 센터 하킴 올라주원이다. NCAA 무대에서의 위상과 빅맨 선호주의를 고려하면 납득이 가는 선택. 문제는 2순위 지명권을 쥐고 있던 포틀랜드가 센터 샘 보위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포틀랜드는 1983년 드래프트 당시 클라이드 드렉슬러(14순위)를 손에 넣은 터라 같은 포지션인 마이클 조던 필요성이 덜했다. 포틀랜드가 "보위 대신 조던을 선택했더라면"은 NBA 역사상 가장 뜨거운 "IF 시나리오" 중 하나다. 참고로 휴스턴은 1983년 드래프트에서 센터 랄프 샘슨을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다시 센터 포지션을 추가했다.(샘슨 1983년 전체 1순위+올라주원 1984년 전체 1순위)   

*²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제외 역대 파이널 3연패 팀 간판스타는 모두 센터였다.(미네아폴리스&조지 마이칸, 보스턴&빌 러셀, LA 레이커스&샤킬 오닐) 

*³ 마이클 조던의 통산 마이너리그 127경기 성적은 타율 .202, OPS .556, 3홈런, 51타점, 볼넷 51개/삼진 114개였다. 그래도 슈퍼스타답게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시카고 불스(NBA)와 시카고 화이트삭스(MLB)를 동시에 소유한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 입장에서는 만능 꽃놀이패였던 셈이다. 


1994-95시즌이 한창이었던 1995년 3월, 농구팬들은 한 장의 짤막한 팩스를 접하게 된다. 바로 조던의 복귀선언이다.(I’m back) 비록 해당시즌에는 47승 35패 승률 57.3%, 동부컨퍼런스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에 그쳤지만 *¹와해 직전의 시카고왕조가 부활했기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상대가 올랜도였다는 점이다.(최종 2승 4패 탈락) 농구 황제 1차 은퇴 후 "흑상어" 샤킬 오닐이 리그의 새로운 아이콘 지위를 노렸던 시기. 승부욕 강하기로 유명한 조던은 1995년의 치욕을 가슴 속에 담아둔다. 


*¹ 시카고는 마이클 조던 1차 은퇴 후 우승전선에서 물러났다. 조던의 복귀가 없었다면 필 잭슨 감독 포함 1차 파이널 3연패 주력구성원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위험이 크다.  


브라이언 러셀에게 NBA 하이라이트 영구출연권을 선사한 The Shot(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그가 *¹등번호 45번에서 다시 23번으로 돌아온 1995-96시즌의 시카고는 리그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회자된다. 골든스테이트(2015-16시즌/73승)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역대 단일시즌 최다승인 72승(10패)을 쓸어 담았다!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도 프랜차이즈 네 번째 파이널우승 포함 18경기 15승 3패 훌륭한 성적을 남겼다. 작년 플레이오프에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던 올랜도를 4승 무패 스윕으로 제압한 것은 보너스다.(컨퍼런스파이널) 조던과 시카고는 유타와 2년 연속 조우했던 1997~98년 파이널에서도 우승, 농구역사의 신화적인 존재로 등극했다. *²그리고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그는 미련 없이 코트를 떠난다. "데뷔 -> 고난극복 -> 첫 번째 파이널 3연패 -> 1차 은퇴 -> 두 번째 파이널 3연패"로 요약되는 여정은 거품(?) 잔뜩 들어간 여타의 위인전에서도 쉽게 접하기 힘든 완벽한 전개. 켄 그리피 주니어(MLB), 마이크 타이슨(프로복싱) 등 동시대를 살았던 스포츠영웅들은 부상&사고 등 급작스럽게 찾아온 위기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던 아픈 기억이 있다. 조던은 모든 위기를 극복한 후 NBA를 넘어, 스포츠역사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¹ 마이클 조던은 1994-95시즌 등번호 45번을 달고 복귀했다. 다시 23번으로 바꾼 시점은 올랜도와 조우했던 1995년 동부컨퍼런스 플레이오프 2라운드다. 이후 그는 은퇴시점까지 계속 23번과 함께 한다.  

*² 마이클 조던은 2001-02시즌 워싱턴 소속으로 다시 복귀했다. 2시즌 더 활약한 후 커리어 마침표를 찍는다. 그가 2차 은퇴번복 후 다시 코트에 복귀한 사연은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황제가 잠시 외도했던 시기 리그를 접수한 팀은 휴스턴이다. 1994~95년 파이널 2연패 금자탑. *¹특히 리더였던 하킴 올라주원 역시 1980년대의 조던 못지않게 눈물 젖은 빵을 씹었던 남자다. 휴스턴 올드팬이라면 그가 1994년 파이널 우승확정 당시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 오티스 도프, 케니 스미스, 로버트 오리 등 전우들과 함께 환하게 미소 지었던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단, 양지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음지가 발생하는 법. 래리 버드(BOS)-아이재이아 토마스(DET)-조던(CHI)으로 연결된 "동고서저"에 신음했던 뉴욕의 "킹콩" 패트릭 유잉은 마침내 잡은 절호의 기회에서조차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1994년 파이널 vs HOU 3승 4패) *²그는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4대 센터 중 유일하게 우승반지 없이 은퇴하게 된다. 휴스턴의 1994-95시즌 우승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서부컨퍼런스 팀들의 강력한 반격, 부상악재가 겹친 탓에 시즌 내내 고전한 것이다. 다행히 올라주원의 휴스턴대학시절 동료였던 *³클라이드 드렉슬러 트레이드 영입효과가 빛을 발휘하며 파이널 2연패에 성공했다. 플레이오프 6번 시드 우승은 역대 가장 낮은 시드 팀의 쾌거다. 또한 파이널 매치업이었던 샤킬 오닐의 리그정복을 늦춘 것으로 유명하다. 오닐은 LA 레이커스 이적 후 시점인 1999-00시즌이 되어서야 no.1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¹ 휴스턴은 1985-86시즌 랄프 샘슨&하킴 올라주원이 뭉친 트윈타워 위력에 힘입어 서부컨퍼런스를 정복했다. 그러나 하필 파이널상대가 "위대한 1985-86시즌" 보스턴이었다.(2승 4패 준우승) 이후 휴스턴은 번번이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에 그치며 고전한다. 

*² 4대 센터 중 샤킬 오닐과 하킴 올라주원은 커리어 최전성기에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비록 2인자 성격이 강했지만 어쨌든 우승반지 2개 획득.(with 팀 던컨) 유잉은 마지막 우승기회였던 1999년 파이널에서도 샌안토니오에게 1승 4패로 무릎 꿇는다. 로빈슨의 첫 번째 우승이었다. 

*³ 비운의 아이콘 찰스 바클리가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뒤를 이어 1995-96시즌 휴스턴에 합류하지만.... TNT 방송에서 바클리가 케니 스미스의 NBA 커리어를 얕잡아보면 "그래서 우승반지는?"라고 반격 당한다.  


한편, 샌안토니오는 1990년대 끝자락이었던 1998-99시즌 파이널정상에 올랐다. 여러모로 평가절하 당했던 우승. 리그인기가 조던 2차 은퇴 후 추락했을 뿐만 아니라 *¹최악의 직장폐쇄까지 겹쳤던 탓이다. 또한 조던의 화려한 플레이에 익숙해졌던 팬들 입장에서 샌안토니오의 조직력 농구는 딱히 매력적이지 못했다. 실제로 대다수 팬들은 *²8번 시드 신화를 노렸던 뉴욕에게 더욱 많은 응원을 보내줬다. 그들은 알았을까? 첫 번째 우승이 폄하 당했던 샌안토니오가 21세기 최고의 팀으로 등극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21세기 우승 4회, 20시즌 연속 PO 진출, 1999~2017시즌 누적승률 71.2% 압도적인 리그전체 1위/2위 댈러스 62.4%) 


*¹ NBA 수입이 199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한 영향 탓에 구단과 선수협회간의 수입배분(basketball-related income) 협상에서 큰 이견이 발생했다. 결과는 직장폐쇄. 리그는 32경기가 취소된 후에야 간신히 재개되었다. 무엇보다 당시 선수협회장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심했다. NBA 직장폐쇄사태는 2011-12시즌에 재현된다.(1995년, 1996년에도 직장폐쇄위기가 있었지만 시즌개막직전 극적으로 풀렸다)    

*² 뉴욕은 1998-99시즌 27승 23패 승률 54.0%, 동부컨퍼런스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상위시드 팀들인 라이벌 마이애미(1라운드), 애틀랜타, 인디애나를 연거푸 제압했지만 샌안토니오 벽은 넘지 못했다. 


위대한 센터들의 뒤틀린 운명(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NBA 세계화 

서두에서 NBA가 위성방송보급에 힘입어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다고 언급했었다. 언론과의 중계권계약협상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는 데이비드 스턴 4대 커미셔너가 1980년대부터 노래를 불렀던 사업이기도 하다. 올드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¹국내중계가 없던 시절, 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의 제한적인 중계를 제외하면 오직 위성방송만이 NBA 시청갈증을 해갈해줬다. *²또한 해외파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블라데 디박, 토니 쿠코치, 드라잔 페트로비치, 아비다스 사보니스, 릭 스미츠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 해외 팬들 입장에서 익숙한 자국농구 영웅들의 NBA 진출은 리그세계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¹ 국내 인터넷보급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²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부를 제외할 경우 대부분의 해외출신 선수들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케이스였다.(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틀리프 슈렘프 등)   


美 국가대표 농구팀인 드림팀의 등장도 호재로 작용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결승진출은커녕 동메달에 그치며 체면 구겼던 상황.(소련 금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농구협회는 물론 *¹거대 자본집단들이 NBA의 참전을 강하게 요구했다. 참가에 미온적이었던 사무국과 선수들도 점차 국제무대에서의 영광에 관심을 나타낸다. 그렇게 탄생한 집단이 바로 "최종병기" 드림팀이다. 1992년 美 국가대표 농구팀은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전승우승에 성공했다. *²본선부터 결승전까지 8경기 동안 작전타임이 단 한 차례도 없었을 정도니 말다했다. 마이클 조던, 래리 버드, 매직 존슨, 찰스 바클리 등 리그 아이콘들의 화려한 플레이가 전 세계 농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음은 물론이다. 이는 NBA에 대한 관심증가로 연결되었고, 세계화사업 밑그림이 완성된다. 

 

*¹ 올림픽이 글로벌 기업들의 이속 챙기기에 물들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이키 등 다국적기업들이 스포츠스타들의 국제무대참가를 더욱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자사의 광고모델이 시청률 보장되는 올림픽무대에서 뛰는 것보다 효과적인 홍보수단은 없다.   

*² 1992년 드림팀이 남긴 충격적인 업적들 : FG 57.8% vs 상대 FG 36.5%, 평균 117.3득점&73.5실점(마진 +43.8점), 총 320분 경기시간 중 306분 54초 리드, 결승전 vs 크로아티아 32점차 승리(117-85)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리그가 잠시 주춤했던 시기는 1990년대 후반이다. 마이클 조던의 2차 은퇴로 인해 흥행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선수들이 리그의 이윤창출에 따른 정당한 수입배분을 요구했다. 1999년 직장폐쇄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사무국에 닥쳤던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는 새로운 스타 발굴. 언론, 스포츠용품업체들과의 좋은 조건 재계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타가 필요했다. 샤킬 오닐을 필두로 코비 브라이언트, 빈스 카터, *¹앨런 아이버슨 등이 리그와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원사격을 받았던 이유다. 조던의 2000-01시즌 복귀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워싱턴 2001~03시즌) *²물론 복합적인 복귀이유가 있었지만, 흥행소방수로서의 막중한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만큼 조던이라는 사나이가 리그에 남긴 족적은 거대했다.  


*¹ 앨런 아이버슨은 데뷔 당시 분위기와 달리, 커리어 중반부에 접어들어 아이콘 경쟁에서 탈락했다. 특히 리그 이미지를 중요시했던 데이비드 스턴 커미셔너는 아이버슨의 불성실한 태도와 힙합패션에 꽤나 부정적이었다. 2005년 규정화된 NBA 드레스코드는 다분히 "The Answer"
를 저격한 성격이 강하다. 

*² 마이클 조던의 2차 복귀는 개인적인 농구열정, 구단운영참여, 흥행을 고려한 리그의 요청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영광의 1992년 드림팀(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수비의 중요성이 부각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부각된 수비의 중요성은 1990년대로 넘어오며 리그대세로 자리 잡았다. 우승팀들 면면을 살펴보자. 1990~91시즌부터 1998-99시즌까지 100번의 수비기회에서 실점기대치를 의미하는 디펜시브 레이팅(DRtg) 수치 기준 리그 7위권 밖에 위치한 팀이 파이널에 진출한 사례는 1993년 피닉스(9위), *¹1995년 휴스턴(12위)&올랜도(13위), *²1997~98년 유타(10위/18위) 4개 팀밖에 없다. 시카고 역시 마이클 조던의 역사적인 퍼포먼스에 가려졌을 뿐, 기본적으로 단단한 수비력을 갖춘 팀이었다. 1990-91시즌 리그평균 106.3득점이 1995-96시즌 99.5점, 1998-99시즌에 이르러서는 91.6점까지 감소했음을 확인해보면 이해가 쉽다. *³다운 템포&수비농구를 주도한 팀들은 동부컨퍼런스 소속구단들. 특히 1980년대 "쇼 타임 레이커스" 지휘자였던 팻 라일리 감독이 뉴욕, 마이애미를 거치며 선보인 거친 수비 농구는 1990년대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대세에 반기를 들었던 골든스테이트, 피닉스 등의 운명은? 팬들 입장에서 재미있는 농구를 펼쳤지만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1990년대 중후반부 기준) 단, 새크라멘토가 밀레니엄 전후로 주도했던 모션오펜스의 적극적인 도입은 훗날 현대농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¹ 휴스턴은 1995-96시즌 당시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경기력이 전혀 다른 팀이었다. 올랜도는 샤킬 오닐이 리그 모든 팀의 인사이드를 박살내고 다녔던 시기다.  

*² 유타의 1996~98시즌 구간은 칼 말론&존 스탁턴 콤비의 공격효율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실제로 1996-97시즌 100번의 공격기회에서 득점기대치를 의미하는 오펜시브 레이팅(ORtg) 수치 2위(1위 시카고), 1997-98시즌에는 1위에 올랐다. 

*³ 리그평균 경기페이스 1990-91시즌 97.8 -> 1998-99시즌 88.9. 1998-99시즌 당시 경기페이스 하위 7개 팀이 동부컨퍼런스 소속이었다.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줄리어스 어빙 등 위대한 선배들이 주도했던 포지션 헤게모니 변화는 19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된다. 조던 중심으로 뭉친 스윙맨 진영과 올라주원 등으로 대표되는 빅맨들의 치열한 주도권다툼이 전개된 것. *¹리그는 1990대 중반의 핸드체킹 룰 개정으로 공격 쪽의 권리를 우선시해줬다. 과거의 느슨한 파울콜들이 슈터들의 족쇄로 작용했었음을 떠올려보자. 슈터들 입장에서 좀 더 적극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여기에 발맞춰 공격수들의 득점루트가 페인트존&림 근처에서 점점 3점 라인 쪽으로 확장되었다. *²슛 거리가 길고, 돌파와 점프슛 양쪽 모두를 구사할 수 있는 윙 포지션 볼 핸들러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반대급부로 활동영역이 더욱 좁아진 빅맨들의 전성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갔다. 샤킬 오닐? 10년에 한 번 등장할법한 MDE(Most Dominant Ever)의 재능은 리그대세와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다. NBA 역사탐방 ⑤부에서 다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오닐의 2000년대 초반 리그정복이다.    

 

*¹ 현재 수준의 핸드체킹 룰이 도입된 시점은 2004-05시즌이다. 

*² 빅맨들도 21세기 들어 중장거리 점프슛, 퍼리미터 스크린 제공, 넓은 활동범위 등을 강요받게 되었다. 




NBA 역사탐방 ⑤부, 밀레니엄 패권다툼


NBA 1990년대 역사는 마이클 조던의 황제대관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각 시대별 지배자 또는 no.1 팀에 대해서 이견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조던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제국을 구축했다. 심지어 "반지의 제왕" 빌 러셀조차 개인성적 측면에서는 윌트 체임벌린에게 한 수 접어줬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만큼 조던과 시카고가 남긴 업적은 대단했다. 황제의 2차 은퇴 후 시작된 21세기 밀레니엄 시대. 권력공백기가 발생한 NBA 패권을 놓고 새로운 영웅들이 속속 등장한다. 첫 번째 패자(覇者)는 LA 레이커스를 파이널 3연패로 이끈 샤킬 오닐이었다. 팀 던컨과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뭉친 샌안토니오 역시 2000년대 전장을 주도한 팀으로 분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5년에 걸친 징검다리 파이널우승에 힘입어 오닐의 레이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2003~07년) 밀레니엄 시대 마무리를 장식한 팀들은 전통의 라이벌 레이커스와 보스턴이다. 2007~10시즌 구간 파이널우승을 주고받으며 "클래식 라이벌" 명성에 부합하는 스토리를 이끌어냈다. 포스트 조던 시대 아이콘 코비 브라이언트의 묵은 한(恨)이 풀렸던 시간이기도 하다.       


리그 내/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우리가 아는 NBA 뼈대가 확실하게 정립된 시기. 특히 양대 컨퍼런스 하의 6개 디비전에 속한 30개 팀 체제가 자리매김했다. 또한 지역수비허용과 핸드체킹 룰 개정 등 경기력향상(+흥행)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꾸준하게 연구된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양질의 해외파 선수들이 대거 참전한 부문도 눈에 띈다. 야오 밍, 안드레아 바그냐니 등은 美 현지농구경험이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 영광을 누렸다. 드래프트참가 연령제한을 개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준비가 덜된" 고졸선수들이 넘쳐났던 2000년대 초중반구간은 경기력측면에서 딱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광의 1980~90년대 바통을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21세기에 안착한 NBA 2000년대 역사를 간략하게 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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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대의 첫 번째 지배자(사진제공 = gettyimages Korea)

  


밀레니엄 패권다툼 

"쇼 타임 레이커스" 시대 마감 후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LA 레이커스 프런트는 1996년 여름 솔깃한 첩보를 접한다. *¹1992-93시즌 데뷔 후 리그 인사이드를 박살내고 다녔던 샤킬 오닐과 소속 팀 올랜도와의 재계약협상이 난항에 빠졌다는 첩보였다. 올랜도 프런트는 "흑상어"의 플로리다해안 잔류를 장담했지만, 그의 시선은 할리우드(Hollywood)에 꽂혀 있었다. *²그렇게 오닐의 NBA 두 번째 여정은 7년 1억 2,100만 달러 매머드급 계약과 함께 서부해안으로 향하게 된다. 단, "골드&퍼플" 군단이 오닐 합류 후 곧바로 득세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황소군단이 건재했을 뿐만 아니라, 서부컨퍼런스 내에서조차 *³팀 던컨을 손에 넣은 샌안토니오와 칼 말론&존 스탁턴 콤비의 유타 등 버거운 상대들이 즐비했다. 실제로 그들은 1996~99시즌 구간 플레이오프에서 샌안토니오, 유타(2회) 상대로 무너졌다. 마지막 조각을 찾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일까? 1998-99시즌 종료 후 시카고 신화의 주역 필 잭슨 감독을 영입해 밀레니엄 시대를 정조준 한다.

    

*¹ 샤킬 오닐은 데뷔 후 4시즌 구간에서 신인왕, 올스타 선정 4회(데뷔 후 6년 연속 선정, 1999년은 직장폐쇄 탓에 올스타전이 개최되지 않았다), ALL-NBA 팀 선정 3회 영광을 누렸다. 그는 역대 데뷔 후 4시즌 평균 27.0득점, 12.0리바운드를 기록한 마지막 선수다.(조지 마이칸, 엘진 베일러, 윌트 체임벌린, 월트 벨라미, 엘빈 헤이즈, 카림 압둘-자바, 밥 맥아두) 심지어 1970년대 선수였던 맥아두 이후 해당성적을 기록한 선수는 오닐밖에 없다.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와 비교하면 브록 레스너급 충격이었다.  

*² 샤킬 오닐의 이적배경에는 1억 달러 이상 거대계약을 망설였던 올랜도 프런트의 방심, 선수 본인의 빅마켓 이적욕구, 동료 앤퍼니 하더웨이와의 미묘한 리더 경쟁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 

*³ 샌안토니오는 1996-97시즌 당시 에이스 데이비드 로빈슨이 부상 탓에 이탈하자 탱킹노선으로 전환했다. 단장이었던 그렉 포포비치는 "탱킹도 내가 한다."라며 감독 취임. 해당시즌 20승 62패 승률 24.4% 노고(?)의 대가는 1997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자 팀 던컨이었다. 참고로 샌안토니오가 1988-89시즌 이래 승률 57% 미만으로 떨어진 시기는 1996-97시즌이 유일했다. 


오닐과 잭슨 감독사단(커트 램비스+텍스 윈터 등)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무엇보다 오닐은 포스트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설계된 전술적 기반 덕분에 말 그대로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동부컨퍼런스 전선 통과 후 파이널무대에 도달했던 인디애나, *¹필라델피아, 뉴저지 등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간다. 스스로 MDE(Most Dominant Ever)라고 칭했던 그는 파이널 MVP 3연패와 함께 리그의 독재자로 우뚝 섰다. 2000~02년 플레이오프 평균 29.9득점, 14.5리바운드, 개별선수의 분당생산력을 의미하는 PER(Player Efficiency Rating) 수치 29.3을 기록했으며 *²비슷한 퍼포먼스를 펼친 선수조차 전무했으니 말다했다. 오죽했으면 페인트존을 박살낸 오닐의 존재로 인해 지역수비가 부활했다는 푸념이 나왔을 정도다. 흥미로운 사실은 레이커스 입장에서 파이널무대보다는, 서부컨퍼런스 경쟁이 훨씬 치열했었다는 점이다. "서고동저"의 시발점. 같은 구간 *³서부컨퍼런스파이널 18경기 성적은 12승 6패 승률 66.7%, 파이널 15경기 성적의 경우 12승 3패 승률 80.0%에 달한다. NBA 21세기 키워드 중 하나인 "서고동저"현상은 아래 문단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¹ 필라델피아 2001년 파이널 1차전 연장접전 끝에 승리. LA 레이커스가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필라델피아 에이스 앨런 아이버슨은 파이널 시리즈 패배(1승 4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² 팀 던컨 2000~02년 구간 플레이오프 22경기 평균 25.7득점, 14.5리바운드, PER 28.1. 오닐은 58경기에 출전해 던컨보다 우월한 성적을 남겼다. 

*³ LA 레이커스 입장에서 2002년 서부컨퍼런스파이널 새크라멘토와의 시리즈는 "진지하게" 위기였다.(최종 4승 3패) "밀레니엄 킹스" 팬들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은 시리즈. 새크라멘토가 해당시즌 우승했다면 리그에 모션오펜스 기반 유기적인 농구가 좀 더 빠르게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른다.  


오닐의 독재는 2002-03시즌에 접어들어 한풀 꺾였다. 마이클 조던(1990~92시즌) 이후 첫 MVP 2연패에 빛나는 팀 던컨(2001~03시즌)이 강력한 도전장을 던진 것. *¹정규시즌부터 5번 시드로 밀리며 삐걱거리더니 결국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조우한 샌안토니오에게 무너졌다. 눈 크고 무표정한 사나이가 마침내 NBA 21세기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ver.2 카와이 레너드) 특히 빅맨 no.1 지위가 오닐에서 점차 던컨에게 넘어간 것은 꽤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샌안토니오는 "미스터 기본기" 중심으로 단단한 공수밸런스를 자랑하며 5년에 걸친 징검다리 파이널우승에 성공한다. 최전성기 오닐을 극복한 2003년, 디트로이트 "배드보이스 2기"의 리핏(repeat)을 저지한 2005년, *²르브론 제임스의 야망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제압해버린 2007년 우승 모두 나름 뜻깊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은 NBA 역사탐방 ⑥부에도 출연예약한 상태다. ⑥부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美 프로스포츠 역사상 특정감독&선수조합이 무려 3개 시대(1990년대~2010년대)에 걸쳐 동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포포비치 감독&던컨이 유일하다.   


*¹ LA 레이커스 시절 내내 아웅다웅했던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오월동주는 점점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파워게임 최종승자는 코비. 오닐과 레이커스의 인연은 2003-04시즌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² 팀 던컨은 2007년 파이널 당시 클리블랜드를 4승 무패로 가볍게 제압한 후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르브론, 이제 너의 시대가 도래할거야." 던컨의 예언은 2014년 파이널 샌안토니오 vs 마이애미 시리즈결과(4승 1패, 마이애미 쓰리핏 좌절)와 함께 자기부정으로 남는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2003년 파이널우승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동부컨퍼런스 팀들도 힘겹게나마 반격을 가했다. 선봉장은 1980년대 영광을 재현한 디트로이트 "배드보이스 2기". 벤 월라스, 라쉬드 월라스, 쳔시 빌럽스 등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들이 뭉쳐 2004년 파이널우승트로피에 입 맞춘다. *¹여기에 파이널상대가 무려 칼 말론, 개리 페이튼 등을 수혈한 "전당포 레이커스"였다! 비록 이듬해 파이널에서 만난 샌안토니오에게 무릎 꿇었지만 두 팀이 선보인 극한의 수비농구는 *²끈적한 농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¹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LA 레이커스는 2010년 여름 기존의 코비 브라이언트, 파우 가솔에 드와이트 하워드&스티브 내쉬를 추가시킨 새로운 "빅 4"를 들고 나왔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다만 2004년의 "전당포 라인업"은 저물어가는 오닐 시대를 연장시켜보려는 발버둥 성격이 강했다. 

*² 리그사무국 입장에서 2005년 파이널은 재앙에 가까웠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팀들 간의 파이널 매치업, 수비농구, 화려한 윙 포지션 에이스 부재 등 흥행과는 거리가 먼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NBA가 핸드체킹 룰을 강화한 시점은 "배드보이스 2기"의 득세가 시작된 2004년 파이널 직후였다.


마이애미의 2006년 파이널우승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¹바로 오닐을 조력자로 만들어버린 리그 3년차 애송이 드웨인 웨이드의 화려한 퍼포먼스다. 웨이드는 댈러스 상대로 시리즈 1~2차전 연패위기에 몰린 파이널무대에서 3~6차전 평균 39.3득점, 8.3리바운드, 2.5스틸, 야투성공률 50.5%를 기록한 끝에 커리어 첫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린다.(+파이널 MVP) 웨이드의 당시 활약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다음 문장을 확인해보면 이해가 쉽다. 역대 파이널 6경기 구간 기준 200득점, 45리바운드, 야투성공률 46.5% 이상 기록한 가드포지션 선수는 1993년 마이클 조던(246득점, 51리바운드, FG 50.8%), 그리고 2006년 웨이드 2명에 불과하다. 단, 그는 상대 덕 노비츠키의 눈물을 2011년 파이널에서 닦아주긴 했다.(2011년 파이널 6경기 평균 22.6득점, 6.0리바운드, FG 43.5%)   


*¹ 샤킬 오닐은 2004년 여름 마이애미로 트레이드 되었다. 2006년 파이널우승에 조력한 후 저니맨 신세로 전락한다.(마이애미 -> 피닉스 -> 클리블랜드 -> 보스턴) 


샌안토니오가 르브론 제임스의 도전을 물리쳤던 2007년. "잠자는 거인" 보스턴은 거대한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래리 버드 은퇴 후 방황하던 그들은 2000년대 초반 잠시 분전했지만 우승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니 에인지 단장은 2007년 오프시즌 *¹현대농구에서 보기 힘든 유망주 폭탄세일로 정상급 베테랑들인 케빈 가넷과 레이 앨런을 동시에 쇼핑했다.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이기심을 버린 (구)고독한 에이스들은 2007-08시즌에 이어 2008년 파이널까지 지배한다. 리그사무국 입장에서도 보스턴의 부활은 호재였다. 마침 LA 레이커스가 짧은 리빌딩을 마무리 지은 후 다시 우승전선에 합류한 것이다. 21세기 버전 "클래식 라이벌" 매치 성사. 두 팀은 2008년 파이널(BOS 4승 2패), 2010년 파이널(LAL 4승 3패)우승을 주고받으며 흥행 최전선에 섰다. 잠시 외도했던 팬들의 이목을 다시 농구코트로 끌어들임에 있어 보스턴 vs 레이커스 라이벌전만큼 효과적인 스토리는 없었다. 


*¹ 샐러리캡 제도 하에서는 저렴하고 길게 보유 가능한 유망주 가치가 상승한다. 21세 들어 통계학의 대대적인 도입에 힘입어 유망주평가기준&성장 프로세스가 더욱 정교해진 것도 한몫했다. 보스턴은 2007년 여름 케빈 가넷, 레이 앨런 영입 당시 몇 년간 수집했던 유망주 원기옥들인 라이언 곰즈, 제럴드 그린, 알 제퍼슨, 세바스찬 텔페어, 딜론테 웨스트, 다수의 미래 드래프트 지명권을 아낌없이 소모했다. "빅 3" 결성 대가로 지불한 선수들 중 가넷, 앨런 수준으로 성장한 케이스는 없다. 


또한 포스트 조던 시대의 아이콘 코비 브라이언트가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¹그는 2000~02년 파이널 3연패 당시 우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2옵션 취급에 시달렸던 아픈 기억이 있다. 2009~10년 파이널 2연패는 커리어 내내 옥에 티였던 "1옵션 우승" 갈증을 풀어줬다. 한편, 슈퍼스타들의 이합집산(ex. 2007-08시즌 보스턴)은 무관의 제왕 르브론을 더욱 초초하게 만들었다. 이는 2010년 여름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해버린 "디시젼 쇼"로 연결된다. 마이애미 "빅 3" 결성은 NBA 2000년대와 2010년대 역사를 나누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¹ 코비 브라이언트 2000~02년 파이널 평균 22.0득점, FGA 18.9개, FG 42.5%. 2008~10년 파이널 평균 28.7득점, FGA 23.8개, FG 41.3%. 코비는 일단 야투를 많이 던져야 제 맛이다! 


보스턴 2008년 파이널 우승구성원(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데이비드 스턴의 21세기 치세 

데이비드 스턴 4대 커미셔너는 1984년 취임 이래 2014년까지 20년 동안 NBA의 절대 권력자였다. 리그가 치세기간동안 눈부시게 성장했으니 그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존재 또는 집단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1세기 들어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은 룰 개정. 지역수비허용을 통해 수비코트에서의 다양한 선택지 확보에 나선다.(대신 수비자 3초 바이얼레이션을 추가했다) *¹이전에는 대인수비 탓에 발생한 빈 공간을 제어하기 위해 각종 편법들이 동원되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존재가 샤킬 오닐. 2001-02시즌부터 폐지된 일리걸 디펜스는 오닐 제어에 힘들어했던 경쟁자들 입장에서 희소식이었다. 문제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로우 템포&저실점 양상이 지역수비허용과 함께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²득점력저하에 고민하던 사무국은 2004년 강화된 핸드체킹 룰 재정으로 공격수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그러나 공격농구로의 대세전환은 201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¹ 과거 NCAA에서 3년 이상 활약했던 선수들은 수비이해도가 나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고졸 또는 원앤던(one-and-done) 선수들이 넘쳐나면서 리그의 전반적인 수비전술 경쟁력이 퇴보해버린다.  

*² 2000년대 수비농구가 극한에 달했던 시점이 바로 2005년 파이널이다. 시리즈 7경기 평균 샌안토니오 84.9득점, 디트로이트 86.7득점. 2017년 파이널 5경기 평균득점이 골든스테이트 121.6점, 클리블랜드 114.8점이었음을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다.  


여기 수비농구가 대세로 자리 잡았던 시기에 반대로 갔던 팀이 있다. "혁명가" 마이크 댄토니 감독과 *¹포인트가드 백투백 MVP 스티브 내쉬가 뭉친 피닉스다. 그들은 어떻게 실점을 감소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더 많은 득점으로 승리하겠다고 대답했다. *²피닉스는 2004-05시즌 리그평균 경기페이스와 비교해 +5.0(평균 110.4득점), 2005-06시즌에도 페이스 +5.3(평균 108.4득점)을 기록해 화력전 마니아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아쉽게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내쉬가 백투백 MVP를 수상했던 2004~06시즌 구간 플레이오프 서부컨퍼런스파이널에서 각각 샌안토니오, 댈러스에게 무너졌던 것이다. "풍운아" 돈 넬슨 감독의 숨결이 살아있던 2006년 플레이오프(컨퍼런스파이널 vs 댈러스) 패배는 어쩔 수 없다손 치자. *³전술상으로 대척점에 있던 샌안토니오의 경우 2000년대 당시 세 차례나 피닉스의 발목을 잡았다.(2005, 2007, 2008 PO) 그렇다고 댄토니의 업 템포 기반 런&건 농구를 폄하하지는 말자. 그와 돈 넬슨 등이 조롱받으며 NBA 코트에 뿌렸던 스몰라인업&공격농구씨앗은 2010년대 들어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  


*¹ 스티브 내쉬는 매직 존슨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포인트가드 포지션 백투백 MVP를 수상했다. 그가 첫 장을 작성한 포인트가드 전성시대는 2010년대 주요흐름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² 레퍼런스 기준 2004-05시즌 피닉스 리그평균대비 페이스 +5.0, +13.2득점. 2005-06시즌 페이스 +5.8, +11.4점. 샌안토니오의 같은 구간 평균득점은 각각 96.2점, 95.6점이었다. 

*³ 마이크 댄토니는 2016-17시즌 휴스턴 감독으로 샌안토니오 그렉 포포비치 감독과 재회했다. 결과는 서부컨퍼런스 2라운드 맞대결 시리즈 패배.(2승 4패) 크리스 폴이 추가된 차기시즌 맛집 신세 탈출이 가능할지 여부가 궁금하다. 


스턴이 21세기 들어 두 번째로 추진한 사업은 정풍운동(?)이다. *¹과거와 달리 인터넷, SNS 보급 등으로 인해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게 된 시점. 설상가상으로 어린 선수들의 비율이 급증한 탓에 다양한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2000년대에 도입된 선수들의 복장착용규정(드레스코드), 드래프트연령제한 변경은 경기력 측면뿐만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한 선수들의 언론노출빈도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²어쨌든 고졸출신 선수는 2005년 드래프트 마텔 웹스터, 앤드류 바이넘 등을 끝으로 거의 사라졌다.   


*¹ 과거에는 데니스 로드맨처럼 노골적으로 튀지 않는 이상 이미지포장하기 쉬웠다. 

*² 여전히 NCAA를 거치지 않고 NBA 문을 두드리는 선수들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해외리그 1년 진출(브랜든 제닝스, 엠마뉴엘 무디에이), 고등학교 1년 더 재학(쏜 메이커) 등은 예외적인 경우다. 


NBA 2000년대는 해외파선수들이 드래프트 데이를 정복한 사건으로도 회자된다. 대표적인 선수가 아시아의 영웅 야오 밍이다. 그는 국제무대에서의 성과, 대체할 수 없는 신체조건(229cm)을 앞세워 2002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또한 호주출신 센터 앤드류 보것(2005년/NCAA 경험), 이탈리아 출신 몽상가(?) 안드레아 바그냐니(2006년) 등이 전체 1순위 지명 영광을 누렸다. NCAA무대를 거치지 않은 외국인선수들의 NBA 참전 비중을 조사해보자.(캐나다 제외) 1990년대 당시에는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 토니 쿠코치, *¹페자 스토야코비치, 덕 노비츠키 등 성공사례가 드물었다. 반면 2000년대 들어서는 야오 밍, 파우 가솔, 마크 가솔, 안드레이 키릴렌코, 루이스 스콜라, 토니 파커, 마누 지노빌리 등 성공사례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개별선수들이 유럽 등 해외에서 쌓은 경험에 더해 *²다양한 유형 농구적응도를 높인 리그와 팀들의 노력 덕분이다.  


*¹ 1990년대에 데뷔한 페자 스토야코비치(크로아티아), 덕 노비츠키(독일)의 NBA 커리어 전성기도 21세기부터 시작되었다. 

*² 마이크 댄토니 감독은 유럽무대에서 NBA로 역수입된 케이스다. 


21세기 빅맨 경쟁을 주도한 해외출신 선수들(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서고동저 

보스턴, 디트로이트, 뉴욕, 마이애미, 애틀랜타, 시카고 등은 거친 1980~90년대 동부컨퍼런스 전장을 누볐던 강호들이다. 해당시기가 명확한 "동고서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부컨퍼런스와 대등하게 경쟁했던 시기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팽팽했던 균형추는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어 급격하게 "서고동저"로 기운다. 앞서 언급했듯이 21세기 시작과 함께 LA 레이커스의 "서부컨퍼런스우승 = 파이널우승" 공식이 성립된 게 신호탄. *¹샌안토니오, 댈러스, 피닉스, 레이커스 등이 격렬했던 서부컨퍼런스 전장을 누빈 반면 동부의 몇몇 강호들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경쟁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양대 컨퍼런스의 간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벌어지고 있다. 치열한 전장에서 싸웠던 팀들은 구단운영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반대로 몇몇 팀들을 제외한 동부컨퍼런스 사정은 드래프트 등으로 양질의 신인들을 공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개선되지 못했다. *²2000년대 플레이오프진출 커트라인 팀들의 평균승률은 서부컨퍼런스 56.1%, 동부컨퍼런스 48.9%다.     


*¹ 2000~10시즌 구간 누적승률 1~10위 : 샌안토니오, 댈러스, LA 레이커스, 피닉스, 디트로이트, 유타, 휴스턴, 보스턴, 새크라멘토, 올랜도(서부 7개 팀 vs 동부 3개 팀) 

*² 2007-08시즌 서부컨퍼런스 8위 덴버 50승 32패, 동부컨퍼런스 8위 애틀랜타 37승 45패. 당시 서부컨퍼런스 11위 새크라멘토가 38승 44패였다. 


몇 가지 변수를 정리해보자. 이동거리? 동부 해안가 또는 오대호 주변에 밀집된 동부컨퍼런스와 비교해 서부컨퍼런스 팀들은 광활한 美 대륙 중부 또는 남부에 위치한다.(+서부 캘리포니아) *¹서북단에 외로이 떨어져있는 포틀랜드, 남동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사우스웨스트 디비전에 속한 멤피스 등을 떠올려보면 이동거리는 변명거리에서 제외된다. 마켓 크기? 멤피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은 스몰마켓 한계를 극복하고 강호로 군림 중이다. *²이들은 RC 뷰포드, 샘 프레스티와 같은 명석한 프런트집단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최대마켓을 보유한 동부컨퍼런스 뉴욕의 21세기 불행과 대조된다. "서고동저" 흐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동부컨퍼런스 구단들이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 *³최소한 클리블랜드 또는 마이애미처럼 과감한 투자로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도 선보일 필요가 있겠다. 


*¹ MLB의 시애틀 매리너스도 NBA 포틀랜드와 유사한 이동거리 고통을 겪고 있다.(NFL 시애틀 시호크스는 경기 수 자체가 적은 관계로 제외) 

*² 빅 마켓 골든스테이트+밥 마이어스 이하 명석한 프런트 조합은 2015-16시즌 73승 9패, 3시즌 연속 파이널진출, 2015년&2017년 우승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동부컨퍼런스의 마사이 유지리(토론토), 션 막스(브루클린), 리치 조(샬럿), 케빈 프리차드(인디애나), 마이크 부덴홀저(애틀랜타) 등은 서부컨퍼런스에서 수입된 구단운영진들이다. 

*³ 르브론 제임스 치트키와 별개로 클리블랜드, 마이애미는 많은 사치세를 감내했었다. 2017-18시즌 선수단 연봉총액 1위 역시 클리블랜드다. 




NBA 역사탐방 ⑥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2010년 7월 11일. 르브론 제임스가 공식적으로 마이애미 선수단에 합류한 날이다. 그는 클리블랜드의 2003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을 통해 NBA 무대에 등장한 후 "The Chosen one"이라고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각종 최연소 기록들을 빠르게 갈아치워 나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데뷔 후 7시즌 동안 신인왕, MVP(2회), ALL-NBA 퍼스트 팀(4회)에 여러 차례 선정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컨퍼런스 라이벌 팀들에게 밀렸던 탓이다.(vs DET, BOS, ORL) 암초에 부딪친 커리어로 인해 절박해졌던 것일까? 르브론은 2010년 여름 희대의 촌극으로 회자되는 "디시전 쇼"로 마이애미 "빅 3" 결성을 알린다. NBA 2010년대 초반부 역사가 르브론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르브론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파이널에 무려 7년 연속 진출했다.(MIA+CLE) 이는 1960년대 보스턴왕조 소속 선수들을 제외하면 역대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한다. 과거와 비교해 경쟁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10개 팀 미만 체제 -> 30개 팀 체제), 전력평준화까지 이루어진 현대농구에서 꽤나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최전성기 마이애미 "빅 3" 조합과 베테랑 팀들의 경쟁도 흥밋거리. 덕 노비츠키의 댈러스, 팀 던컨이 구심점역할을 해준 샌안토니오가 대항마로 나서 우승반지 획득에 성공했다.(2011~14년 파이널 구간) 르브론이 클리블랜드로 다시 돌아간 후에는 더욱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다.(2014-15시즌~현재) 바로 21세기를 넘어, 과거 시대별 no.1들까지 소환해 키보드배틀이 펼쳐지게 만든 장본인 골든스테이트다. NBA의 헤게모니는 2016-17시즌까지 진행된 현 시점만 놓고 보면, 르브론 손을 떠나 스테픈 커리와 케빈 듀란트, 드레이먼드 그린 등이 뭉친 황금전사군단에게 넘어간 상태다.    


2010년대는 농구의 패러다임이 바뀐 시기이기도 하다. 스몰볼 철학이 리그대세로 자리 잡은 가운데 업-템포 운영, 3점슛과 같은 공세적인 전술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또한 르브론으로 대표되는 다재다능한 선수가 더욱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인 빅맨 역할이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상대적으로 가드&포워드 포지션의 볼 점유율과 경기운영권한이 증가한 결과물이다. 심지어 센터들조차 장거리 점프슛, 속공가담, 퍼리미터 스크린제공 등 다양한 역할을 강요받고 있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팔방미인형 인재가 NBA에서도 득세하게 된 모양새. 특정분야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one-way player)들은 살아남기 힘들어졌다.(물론 현대사회의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절반 이상 진행된 NBA 2010년대 역사를 간략하게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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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W vs CLE 파이널 트릴로지 주인공들(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동부의 지배자 vs 서부컨퍼런스 

2010-11시즌 최대이슈는 과연 우승을 노리고 결성된 마이애미 "빅 3"가 최종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¹거대한 안티집단을 형성하면서까지 뭉친 만큼 파이널우승에 성공하더라고 본전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정작 2011년 파이널대미를 장식한 팀은 댈러스. *²르브론 제임스 못지않게 사연 많은 덕 노비츠키가 마침내 정상에 선다. 특히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눈부신 클러치활약으로 전 세계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노비츠키의 파이널 MVP 선정은 21세기 농구흐름을 적절하게 반영한 장면이기도 하다. *³유럽출신 신장 213cm 선수가 내/외곽을 넘나들며 마치 슈터포지션 에이스처럼 활약한 것이다. "스트레치 4" 빅맨 자체가 노비츠키에 의해 완성된 개념. 그가 널리 전파한 슈팅빅맨 중심 전술은 현대농구를 관통하는 대세 중 하나다.    


*¹ 르브론 제임스의 "디시전 쇼"는 클리블랜드 팬들 가슴에 대못박는 행동이었다. 여기에 "빅 3" 결성과정에서 드웨인 웨이드(재계약), 크리스 보쉬(사인&트레이드), 르브론 제임스(사인&트레이드)가 순차적으로 합류하는 등 사전담합 의혹까지 받았다. 세 선수는 2003년 드래프트 동기이자 올스타전, 美 국가대표팀 동료생활 등으로 돈독한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카멜로 앤써니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² 덕 노비츠키는 2005-06시즌 커리어 첫 파이널우승에 도전했지만 드웨인 웨이드의 마이애미에게 저지당했다. 설상가상으로 2006-07시즌에는 택배 MVP 수모까지 당했다.(댈러스 정규시즌 승률 1위+노비츠키 MVP -> PO 1라운드 vs GSW 2승 4패 탈락) 그는 2011년 파이널무대에서 마이애미 상대로 복수극을 펼친다. 

*³ 덕 노비츠키 이전에도 샘 퍼킨스, 라쉬드 월라스 등 내/외곽을 넘나들며 활약한 선배들이 존재했다. 단, 노비츠키와 같이 소속 팀 전술 핵심역할을 맡은 선수는 없었다. 그는 역대 4명밖에 없는 30,000득점&10,000리바운드 달성선수다.(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자바, 칼 말론)


마이애미의 본격적인 질주는 2011-12시즌부터 시작된다. 동부컨퍼런스 2번 시드로 출사한 플레이오프 전장에서 뉴욕, 인디애나, 보스턴, 오클라호마시티를 차례로 제압한 것. *¹사실상 보스턴 "빅 3" 시대를 마감시킨 동부컨퍼런스 파이널(4승 3패)과 비교해 오클라호마시티와 조우한 파이널 시리즈가 수월했던 점도 눈에 띈다. 르브론 눈에 비친 적군 에이스 케빈 듀란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군분투했던 본인의 클리블랜드 1기 시절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²르브론의 커리어 첫 파이널 시리즈(2007년 vs SAS) 성적은 22.0득점, 7.0리바운드, 6.8어시스트/5.8실책, 야투성공률 35.6%, 듀란트의 경우(2012년 vs MIA) 30.6득점, 6.0리바운드, 2.2어시스트/3.8실책, 야투성공률 54.8%였다.     


*¹ 보스턴 "빅 3"는 2011-12시즌 종료 후 레이 앨런의 이탈과 함께 해체되었다. 2012-13시즌에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 그들은 2013년 여름 리빌딩버튼을 누른다. 한편, 앨런은 라이벌관계였던 마이애미로 이적, 우승반지를 추가했다.(2013년 파이널) 

*² 르브론 리그 4년차 시즌, 케빈 듀란트 5년차 시즌 첫 파이널진출. 듀란트의 첫 번째 파이널 퍼포먼스는 르브론과 비교해 우월한 편이었다.  


마이애미에 대한 평가는 2012-13시즌 종료 후 대폭 상향조정되었다. 2011-12시즌의 경우 *¹직장폐쇄사태, 그리고 애송이(?) 오클라호마시티와의 파이널 매치업 등으로 인해 다소 평가절하 된 성격이 짙다. 정규시즌 당시부터 *²역대 2위에 해당하는 27연승 신화를 작성하더니, 최종성적 역시 66승 16패 승률 80.5%로 리그전체 1위에 올랐다. 마이애미가 "빅 3" 시절 동부컨퍼런스 1번 시드를 획득한 것은 해당시즌이 유일하다. 플레이오프 전장에서의 스토리도 풍성했다.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조우한 인디애나(최종 4승 3패), 파이널 상대였던 샌안토니오와의 맞대결(최종 4승 3패) 모두 NBA 2010년대 모든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통틀어 명승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특히 그렉 포포비치 감독&팀 던컨 조합이 마지막불꽃을 태웠던 샌안토니오와의 시리즈는 치열한 공방전, 세대교체, *³스몰볼 대세전환 등 여러모로 큰 화제를 모았다. 여담으로 마이애미가 방심한 부문이 있었다면?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는 만국공통 격언을 망각한 것이다. 그들은 다음 시즌 불씨를 재점화시킨 샌안토니오의 맹렬한 역습에 말 그대로 처참하게 무너진다. 


*¹ 2011-12시즌은 직장폐쇄사태로 인해 팀당 66경기 소화에 그쳤다. 샌안토니오의 첫 우승 역시 단축시즌 탓에 평가절하 되었던 기억이 있다.(1998-99시즌 50경기 소화) 

*² 역대 연승부문 1위 LA 레이커스 33연승.(1971년 11월~72년 1월) 골든스테이트는 2015년 28연승 질주에 힘입어 마이애미를 제치고 역대 2위에 올랐다. 

*³ 마이애미 "빅 3"는 빈약한 빅맨 라인업을 나머지 포지션의 풍부한 활동량으로 극복한 케이스다. 마이크 댄토니 감독의 피닉스(공격), 에릭 스포엘스트라 감독의 마이애미(수비+역습)가 발전시킨 21세기 스몰라인업 운영교리는 2010년대 중반 골든스테이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드웨인 웨이드,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 보쉬(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3개 시대(1990~2010년대)에 걸쳐 동고동락한 포포비치 감독과 던컨은 2013년 파이널패배 후에도 묵묵히 전진했다. 무수히 많은 전장을 헤쳐 왔던 팀인 만큼 *¹패배에서 다시 일어서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코트에 불어 닥친 뉴웨이브(new wave) 집단들을 모조리 제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전리품. 듀란트의 오클라호마시티(서부컨퍼런스 파이널), 르브론의 마이애미(파이널)를 차례로 격파한다. 특히 마이애미와의 파이널 리벤지 시리즈결과가 충격적이다. 최종 4승 1패 일방적인 시리즈 승리를 거둔 와중에 *²5경기 누적 득실점 마진이 무려 +70점(528득점-458실점)에 달했다! 이는 샌안토니오가 공/수 양쪽 모두에서 상대를 압도했음을 잘 보여준다. 팀 내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도 값진 성과다. ABA에서 NBA로 건너온 후 "조지 거빈(1980년대 초반) -> 데이비드 로빈슨(1990년대) -> 팀 던컨(1990년대 후반~21세기) -> 카와이 레너드(현재)" 순서로 정권이양이 이루어졌다. 괜히 프로스포츠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팀이라고 평가받는 게 아니다. 마이애미 "빅 3"의 경우 2014년 파이널패배 이후 해체되었다. 르브론 입장에서는 리그 간판스타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 *³역대 최고선수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타이틀이었던 MVP 3연패(듀란트 2013-14시즌 MVP 수상)&파이널 3연패 기회 모두 놓쳤다. 르브론 중심의 NBA 헤게모니에 조금씩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¹ 샌안토니오 2013-14시즌 62승 20패 승률 75.6% 리그전체 1위. 팀 던컨 은퇴시즌이었던 2015-16시즌에 67승, 지난 시즌에도 62승을 쓸어 담았다. 21세기 기준 단일시즌 60승 이상을 4회 이상 경험한 팀은 샌안토니오가 유일하다.(그들은 서부컨퍼런스 소속이다!) 

*² 샌안토니오 2014년 파이널 누적 득실점 마진 +70점 역대 1위(2위 보스턴 1965년 파이널 vs LAL +63점, 해당부문 2~6위 모두 보스턴이다)

*³ 마이클 조던은 MVP 3연패가 없는 대신 파이널 6회 우승(3연패+3연패), 그리고 파이널 MVP 6회가 있다. 또한 데뷔 팀 파이널 3연패&1차 복귀 후 파이널 3연패 프리미엄까지 붙는다. 호사가들은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이적한 순간 조던을 넘을 기회가 사라졌다며 촌평하기도 했다. 


르브론의 전격복귀와 함께 막을 올린 2014-15시즌. 클리블랜드가 주도하려했던 스토리라인에 골든스테이트가 불쑥 난입했다. 근래 슈퍼 팀들인 LA 레이커스, 보스턴, 마이애미 등과는 달리 *¹드래프트 기반으로 뭉친 그들은 화려한 공격농구를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²포인트가드 전성시대를 주도한 스테픈 커리의 놀라운 퍼포먼스 역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클리블랜드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비록 2015년 파이널에서 2승 4패로 물러났지만 2016년 파이널에서는 NBA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전적 1승 3패 열세를 뒤집은 역전우승에 성공한 것이다. 커리, 클레이 탐슨, 드레이먼드 그린, 안드레 이궈달라, 르브론, 카이리 어빙, 케빈 러브 등 스타들이 대거 참전한 파이널전쟁은 2017년까지 지속되었다. *³흥미로운 사실은 골든스테이트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끈임 없이 발전욕망을 드러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케빈 듀란트가 추가된 골든스테이트 vs 클리블랜드 파이널 트릴로지(trilogy) 시나리오가 팬들 앞에 배달된다.    


*¹ 골든스테이트 스테픈 커리 2009년 드래프트 전체 7순위, 클레이 탐슨 2011년 11순위, 해리슨 반즈(現 댈러스) 7순위, 드레이먼드 그린 35순위 지명. 안드레 이궈달라, 앤드류 보것, 케빈 듀란트 등 적재적소의 선수영입도 큰 도움이 되었다.  

*² NBA 역사상 포인트가드 포지션 선수가 MVP 2연패에 성공한 사례는 매직 존슨(1988~90시즌), 스티브 내쉬(2004~06시즌), 스테픈 커리(2014~16시즌) 3명밖에 없다. 

*³ 골든스테이트는 2015-16시즌 역대 1위인 개막 24연승, 역대 2위인 28연승, 역대 최다승(73승) 위업을 이뤘다. 그러나 정작 파이널무대에서는 클리블랜드 상대로 무너졌다. 패배충격은 2016년 여름 케빈 듀란트 영입으로 연결된다. 


골든스테이트는 2016-17시즌 67승 15패를 기록해 다시 한 번 리그전체 1위에 올랐다. 세 시즌 연속 최다승.(67승-73승-67승) *¹또한 스몰라인업 운영의 미세한 약점까지 해결해준 듀란트 영입 덕분에 전술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 아래 문단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황금전사군단이 지난 시즌 선보인 공수밸런스는 역대 최고수준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클리블랜드와의 2017년 파이널 매치업은 진검승부라고 평가받았다. *²부상변수 탓에 얼룩진 2015년 파이널, 드레이먼드 그린 징계가 나비효과를 부른 2016년 파이널과 대조되게 두 팀 모두 베스트라인업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마침 서로 간의 컨퍼런스 플레이오프 전장에서 각각 "Perfect 12"(GSW), 12승 1패(CLE) 호성적을 수확한 부문 역시 관심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파이널 트릴로지 3부작 최종 시나리오는 서부컨퍼런스 챔피언의 수월한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기존의 "스플래쉬 브라더스"와 그린 등 핵심선수들에 더해 듀란트 한 스푼이 첨가된 골든스테이트는 제어 불가능한 존재였다. "누구나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골든스테이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골든스테이트의 2016-17시즌 여정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문장이다.(PO 최종 17경기 16승 1패 승률 94.1% 역대 1위)      


*¹ 케빈 듀란트는 전임자(?) 해리슨 반즈와 비교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무엇보다 수비코트에서의 사이즈와 클러치상황 퍼포먼스는 2017년 파이널 핵심변수로 작용했다. 

*² 클리블랜드는 2015년 파이널 당시 케빈 러브(1라운드 이탈), 카이리 어빙(파이널 1차전 후 이탈) 부상변수 탓에 100%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자 파출리아의 신출귀몰한 위치선정(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스몰볼 시대 

빅라인업 중심의 전술운영은 NBA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유지된 철학이다. 1990년대부터 "풍운아" 돈 넬슨과 "혁명가" 마이크 댄토니 등이 반기를 들었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¹스몰라인업 운영이 점진적으로 도입된 시점인 2000년대 후반부 우승 팀 샌안토니오, 보스턴, LA 레이커스 역시 우승과정에 있어 팀 던컨, 케빈 가넷, 파우 가솔 등 빅맨들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해당흐름은 2010년대 시작과 함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다. 마이애미가 윙 포지션 중심 스몰라인업 전술로 쏠쏠한 재미를 본 것이다. *²빅맨 포지션인 크리스 보쉬의 경우 기존 스타일에 대폭 수정을 가해야 했다. *³그들은 전성기 슈퍼스타들의 엄청난 활동량에 기반을 둔 압박수비, 그리고 수비성공 후 역습상황을 즐겼다. 높이열세에 따른 단점은 활동량으로 극복하고, 공격코트에서는 장점인 운동능력을 살린 셈이다. 4시즌 연속 파이널진출&2회 우승. 굳이 우승회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경기접근방법 자체가 리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이애미가 주도한 스몰라인업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이후 골든스테이트가 완성시킨다.      

 

*¹ 2007~10년 파이널 MVP는 순차적으로 토니 파커(PG), 폴 피어스(SF), 코비 브라이언트(SG/2회)다. 세 선수 모두 가드 또는 포워드 포지션. 단, 개별선수의 팀 승리 기여도를 의미하는 우승시즌 플레이오프 WS(Win-Share) 1위는 각각 2007년 팀 던컨(+3.3 vs 파커 +1.6), 2008년 케빈 가넷(+4.1 vs 피어스 +3.0), 2010년  파우 가솔(+4.3 vs 코비 +3.6)로 빅맨들의 공로가 컸다.(2009년은 코비가 1위)  

*² 크리스 보쉬는 마이애미 "빅 3" 시절 동료들을 위한 공간 벌리기, 수비, 리바운드 등 조연역할에 그쳤다. 현대농구의 스몰라인업 운영 핵심조건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빅맨이 페인트존을 비워줘야 해당공간에 대한 동료들의 공략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보쉬의 공격코트전장은 페인트존이 아닌, 중장거리 지역이었다.(하이스크린+점프슈터 역할)    

*³ 마이애미 2011-12시즌 경기페이스 93.66 리그전체 15위&상대실책기반 19.7득점 2위, 2012-13시즌 경기페이스 92.97 리그 23위&상대실책기반 18.6득점 3위. 마이애미가 2014~17시즌 구간 골든스테이트와 달리 로우-템포&역습에 기반을 둔 스몰라인업 운영에 최적화된 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골든스테이트는 마이애미가 선보였던 스몰라인업 운영에 업-템포를 추가시켰다. 빠르게 코트를 왕복하며 상대저항을 무력화시킨 접근방법. 또한 공격코트에서의 정교한 패스게임은 황금전사군단에 날개를 달아줬다. 스테픈 커리, *¹드레이먼드 그린, 안드레 이궈달라, 케빈 듀란트 등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이애미와 비교해보자. 세트오펜스에서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등 슈퍼스타들의 개인퍼포먼스 파생전술(아이솔레이션 이후 선택지)이 중심이었던 선배들과 달리 코트 위 5명 모두 패스게임에 유기적으로 참여한다. *²2016-17시즌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 30.4개는 역대 5위에 해당하며 그들의 패스게임 완성도가 얼마나 탁월한지 잘 보여준다. 구성원 대부분이 서로 다른 분야인 점프슛과 속공가담, *³높은 수비전술 이해도와 에너지레벨, 패스게임 참여 소양을 갖추고 있다? 스티브 커 감독 이하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합심해서 이룩한 골든스테이트 스몰라인업의 위대함이다.  


*¹ 드레이먼드 그린은 골든스테이트 전술운영의 핵심으로 평가받는다. 팀 내 영향력만 놓고 보면 스테픈 커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2015-16시즌 평균 14.0득점, 9.5리바운드, 7.4어시스트, 1,5스틸, 1.4블록슛, FG 49.0%, 3P 38.8%. 역대 빅맨들 중 시즌평균 14.0득점, 9.0리바운드, 7.0어시스트 이상 기록한 선수는 그린과 윌트 체임벌린(2회) 2명밖에 없다.(모든 포지션 기준 래리 버드 2회, 존 하블리첵, 그랜트 힐, 매직 존슨, 팻 레버, 오스카 로버트슨 4회, 러셀 웨스트브룩 추가) 

*² 역대 단일시즌평균 어시스트 30.0개 이상&파이널우승을 동시에 달성한 팀은 LA 레이커스(1984-85시즌), 골든스테이트(2016-17시즌) 2개 구단이다. 1980년대 레이커스가 NBA 역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여부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반대로 생각하면 골든스테이트가 점점 "역대급" 팀 반열에 올라서고 있음을 의미한다. 

*³ 골든스테이트 2014-15시즌 100번의 공격기회에서 득점기대치를 의미하는 오펜시브 레이팅(ORtg) 수치 리그전체 2위&100번의 수비기회에서 실점기대치를 의미하는 디펜시브 레이팅(DRtg) 수치 1위, 2015-16시즌 ORtg 수치 1위&DRtg 수치 4위, 2016-17시즌 ORtg 수치 1위&DRtg 수치 2위. NBA 역사상 가장 균형 잡힌 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다. 2014~17시즌 누적 207승은 3시즌 구간 기준 역대 1위에 해당한다.(파이널진출 3회&우승 2회/시카고 1995~98시즌 203승 파이널진출 3회&우승 3회)  


공격전술에서 3점슛 점유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스몰라인업 시대와 궤를 같이 한다. *¹실제로 단일시즌 3점슛 성공 1위부터 17위까지 모두 2010년대 팀들이다. 이는 2009-10시즌 리그 경기당평균 3점슛 시도 18.0개가 지난 시즌 27.0개(!)로 증가한 수치를 통해 확인가능하다. NBA 지도자들은 더 이상 빅맨 위주의 좁은 코트운영이 아닌, 가드 또는 윙 포지션에 위치한 볼 핸들러 중심으로 전개되는 넓은 코트운영을 주문하고 있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빅맨들조차 3점슛 연마에 매진하게 된 것은 시대흐름을 반영한 현상이다. 3점슛 시대의 간판스타는 스테픈 커리. *²그의 놀라운 슛 거리와 정확도는 현대농구에 또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내 NBA 인기부활 배경 역시 커리의 명성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가드포지션 선수의 아기자기한 드리블과 시원한 점프슛, 이타적인 플레이성향은 거인들의 리그라고 오해받던(?) NBA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줬다. 새로운 역사를 작성 중인 골든스테이트의 에이스인 부문도 플러스요인이다.        


*¹ 역대 단일시즌 3점슛 성공 1위(HOU), 3위(CLE), 4위(BOS), 5위(GSW)가 2016-17시즌에 출현했다.(GSW 2015-16시즌 1,077개 성공 2위) 마이크 댄토니가 휴스턴 감독으로 복귀한 것도 3점슛 시대의 부스터다.  

*² 스테픈 커리 역대 단일시즌 3점슛 성공 1~3위, 5위, 10위. 2015-16시즌 402개 성공은 본인 2위 기록인 2016-17시즌 324개와 78개 차이다. 


커리어 종착역을 앞둔 덕 노비츠키(사진제공=gettyimages Korea)



프랜차이즈스타 시대의 종말 

LA 레이커스의 2015-16시즌 마지막 경기를 기억하는가? *¹코비 브라이언트가 영욕의 NBA 20시즌 커리어를 마감한 날이다.(1996~2016시즌) 또한 샌안토니오의 팀 던컨이 2016년 여름 조용하게 은퇴의사를 내비쳤다.(1997~2016시즌) 이제 데뷔 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이적 없이 은퇴를 앞둔 스타선수는 덕 노비츠키, 마누 지노빌리 정도만 남아 있다. 특정 팀에서 10년 이상 장기 근속하는 선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현역선수들 중 데뷔 팀 소속으로 커리어 10년 이상 보낸 선수는 노비츠키(DAL 19시즌), 닉 콜리슨(SEA-OKC 13시즌), 마이크 콘리(MEM 10시즌), 지노빌리(SAS 15시즌), 토니 파커(SAS 16시즌), 유도니스 하슬렘(MIA 14시즌) 6명에 불과하다. 콘리, 파커 제외 차기시즌 당장 은퇴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선수들임을 떠올려보자. 다음 시대인 2020년대에는 프랜차이즈스타에 대한 정의가 바뀔지도 모른다. 


*¹ 코비 브라이언트는 NBA 역사상 데뷔 팀에서 20년 이상 활약했던 유일한 선수다.(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쉬, 케빈 윌리스, 케빈 가넷 등은 최소 1회 이상 이적) 참고로 그는 은퇴경기에서(vs UTA) 60득점(FG 22/50)을 기록했다. 가장 코비다운 은퇴경기였던 셈이다.  


프랜차이즈스타 시대의 종말은 FA제도가 활발해진 시대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선수들은 과거선배들과 비교해 더 좋은 계약조건 또는 우승기회를 위해 이적하는 선택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올해 오프시즌에도 프랜차이즈스타로 사랑받던 고든 헤이워드(UTA -> BOS), *¹폴 조지(IND -> OKC) 등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단, 선수들의 비즈니스적 접근을 무작정 비난하면 곤란하다. *²드웨인 웨이드를 보면 알 수 있듯 구단이 소속선수를 소모재 취급하는 사례 역시 빈번하다. "폭군" 드마커스 커즌스도 새크라멘토 구단수뇌부의 판단에 의해 정든 팀을 떠나지 않았던가? 팀 성적과 흥행수입, 리빌딩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구단과 본인 커리어를 챙겨야하는 선수들의 줄다리기는 늘 팽팽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아쉬운 부문이 있다면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코비, 던컨 등과 같은 "팀=선수" 공식이 성립되는 영웅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²노비츠키와 같이 구단과 윈-윈하며 커리어를 마감하는 선수가 좀 더 많이 등장해주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구단&선수들이 머니게임과 우승커리어에 더욱 집작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실현되기 어려운 바람이긴 하다.  


*¹ 폴 조지는 올해 오프시즌 오클라호마시티로 트레이드 되었다. 복잡한 케이스. 인디애나가 그를 버렸다고 치부하기에는 고향 팀(?) 노래가 너무 노골적이긴 했다.   

*² 드웨인 웨이드는 청춘을 마이애미에 바쳤지만 팻 라일리 구단운영책임자에게 버림받았다.(2016년 여름 시카고와 FA 계약) 



*NBA 역사탐방 ⑥부는 현재진행형인 시대를 다뤘습니다. 결론이 명확하게 도출되지 않은 시점인 만큼, 개별 팀 또는 선수에 대한 평가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사진 제공 : gettyimages Korea


기록 참조 : NBA.com, basketball-reference, ESPN.com, Elias Sports Bureau


염용근 기자(shemagic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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