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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MLB와 NBA, NFL을 오간 스타들

by Wood-Stock 2018. 2. 13.

MLB와 NBA, NFL을 오간 스타들


프로 최고의 무대인 야구 MLB뿐 아니라 풋볼 NFL, 농구 NBA를 풍미한 선수들

최근 뉴욕 양키즈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마이너리그 내야수 러셀 윌슨을 트레이드 영입했습니다.

우리 야구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 이름은 미국에서는 큰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윌슨은 바로 NFL 풋볼팀 시애틀 시혹스를 이끌고 슈퍼보울 우승을 차지한 화려한 경력의 쿼터백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끝난 시즌에도 시애틀 주전 쿼터백이던 그는 2007년 고교 졸업 때 MLB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드래프트했던 유망주 2루수이기도 했습니다.

프로야구 대신 풋볼 쿼터백으로 NC 스테이트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의 야구사랑은 유명했고, 2010년 드래프트에서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그를 4라운드에 뽑았을 정도입니다. 2012년 NFL 드래프트에서 시애틀이 뽑으면서 프로 쿼터백이 됐지만 여전히 야구는 콜로라도 소속이었는데, 2013년에 텍사스가 룰5 드래프트로 데려갔습니다. 2014, 2015년에는 실제로 레인저스 스프링 캠프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자서전 표지에서 보여주든 보 잭슨은 야구에서도 풋볼에서도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야구와 풋볼 농구는 미국 4대 스포츠(아이스하키) 중 3강이지만 한 선수가 두 리그에서 뛴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윌슨도 대단한 쿼터백으로 풋볼에서는 최고 스타플레이어지만 MLB에서는 빅리그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MLB.com에 따르면 두 종목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꽤 있었습니다. 최고의 프로 레벨에서 야구와 풋볼을 동시에 뛴 선수는 70명, 농구와 야구를 동시에 한 선수는 12명으로 집계됐습니다. 그 중에는 올드 팬에게 꽤 익숙한, 혹은 젊은 스포츠 팬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법한 대단한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보 잭슨입니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파워에다가 놀라운 운동신경을 지녔던 잭슨은 야구와 풋볼 무대를 동시에 누볐을 뿐 아니라 MLB와 NFL에서 모두 올스타에 뽑혔을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잭슨은 이런 진기록을 이룬 유일한 선수입니다. 1986년 NFL 드래프트에서 탬파베이 벅커니어스는 잭슨을 전체 1번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풋볼 대신 전년도 MLB 챔피언인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을 했습니다. 비록 4라운드에 뽑혔지만 잭슨은 1989년 이미 MLB 올스타에 선정됐을 뿐 아니라 공수 맹활약으로 그 경기 MVP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잭슨은 32홈런에 105타점을 기록했는데, 외야 담장을 밟고 튀어 오르며 공을 잡아내는 묘기와 삼진을 당하면 방망이를 양팔로 부러뜨리는 퍼포먼스의 원조로 팬들을 열광시키기도 했습니다.

1987년 NFL 인기팀 LA 레이더스에 다시 드래프트된 잭슨은 폭발적인 러싱 능력을 과시하며 주전 러닝백으로 풋볼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Bo Knows’라는 나이키의 광고도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1991년 터치다운 직전에 태클을 당하며 엉치뼈를 크게 다쳐 대체 수술을 한 잭슨은 풋볼에서는 은퇴하고 말았지만 199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받는 등 야구 선수 생활은 조금 더 이어갔습니다.

오번 대학 육상부 당시 100미터를 10초39에 주파한 기록도 남긴 그는 부상 후 오프 시즌에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 못 마친 아동과 가정학 학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풋볼과 야구에서 모두 인기를 구가한 디온 샌더스 @MLB.com

- ‘프라임타임’ 디온 샌더스를 기억하시는 팬들도 분명히 꽤 많으실 겁니다.

놀라운 스피드와 민첩성, 그리고 신기의 움직임을 보유했던 샌더스는 1990년대 애틀랜타 팔콘스를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 49ers, 댈러스 카우보이스 등에서 코너백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어찌나 패스 수비를 잘 했는지 상대 팀에서 아예 그가 수비를 맡은 영역으로는 거의 패스를 던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주로 코너 수비를 맡았지만 킥이나 펀트 리터너에다가 때로는 와이드리시버로 공격도 담당하는 등 풋볼에서도 다재다능의 대명사.

그러나 발군의 외야 수비를 바탕으로 MLB에서도 그의 명성과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워낙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데다 1997년 한 시즌 115경기를 뛰며 56도루를 기록하는 놀라운 스피드와 과감한 플레이로 환호를 끌어냈습니다.

1989년에는 양키즈에서 홈런을 친 그 주말 경기에서 팔콘스의 터치다운을 기록하기도 했고, 시즌이 살짝 겹치자 하루에 MLB와 NFL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는 그의 모습이 뉴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디온 샌더스는 여전히 월드시리즈와 슈퍼보울에서 모두 뛴 유일한 선수입니다. 1992년 월드시리즈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4경기를 뛰며 15타수 8안타를 쳤지만 우승은 못했는데, 댈러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슈퍼보울 우승 반지를 끼었습니다. 파워의 대명사 보 잭슨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절대 밀리지 않는 활약과 인기도를 기록한 선수였습니다.


- 다재다능이라면 짐 쏘프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912년 올림픽에서 5종 경기와 10종 경기 금메달을 차지하며 미국 인디언스로는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된 그는 다음해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해 야구 실력을 뽐냈습니다.

6년간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던 와중에 캔턴 불독스라는 프로 풋볼팀에 입단해 3번의 우승 주역이 됐습니다. 후에 인디언들로 구성된 프로 농구팀에서도 뛴 쏘프는 말년에 가난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안타까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 농구, 야구, 코치, 감독, 사장까지 지낸 대니 에인지는 악바리의 대명사였습니다.

1979년부터 3년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2루수였던 에인지는 1980년대 NBA 보스턴 셀틱스의 슈팅 가드로 1984, 86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 후 새크라멘토, 포틀랜드, 피닉스 등에서 가드로 활약한 그는 NBA에서 두 번째로 3점포 900개 이상을 성공시킨 슛쟁이였습니다. 은퇴 후 3년간 피닉스 선스의 감독을 지냈고, 보스턴 셀틱스의 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에인지는 1980년대 이후 몰락했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사장에 올랐습니다.


- MLB 인종의 벽을 허문 재키 로빈슨은 UCLA 대학 시절 4종목 스타였습니다.

야구뿐 아니라 농구, 풋볼, 육상에서도 학교를 대표했습니다. 대학 최고의 풋볼 선수에게 주어지는 ‘하이즈만 트로피’를 차지했을 정도였습니다. 역대 하이즈만 트로피 수상자 중에 MLB에서 뛴 선수는 딱 둘이 있었는데 1950년 수상자 빅 자노비치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잠시 뛴 적이 있습니다. 로빈슨은 2차 대전에 징집되기 전에는 LA 불독스와 호놀룰루 베어스 등의 세미 풋볼팀에서도 뛰었습니다.


프로 풋볼 선수로 맹활약 후 특이하게도 야구 심판으로 명성을 떨쳤던 허바드 ⓒWikimedia Commons

- 우리에겐 생소한 인물이지만 칼 허바드는 미국 스포츠계에서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1927년부터 10년간 NFL 뉴욕 자이언츠와 그린베이 팩커스 등에서 활약한 허바드는 라인베커라는 풋볼의 핵심 수비 포지션을 만들어낸 인물로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15년간 AL에서 심판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결국 그는 풋볼 명예의 전당은 물론 심판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10명 중 하나가 됐습니다. 풋볼과 야구에서 모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입니다.

배우이기 전에 프로 농구와 야구 선수로 활약했던 척 코너스 ⓒWikimedia Commons

- 어쩌면 배우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를 척 코너스는 1940년대 농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1946년에는 프로 농구팀 로체스터 로열스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셀틱스에서도 잠깐 뛰었습니다. 그러나 1949년 브룩클린 다저스에서 야구 선수로 데뷔했습니다. NFL의 시카고 베어스도 그를 드래프트했지만 풋볼 선수로는 뛰지 않았습니다.


-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은 프로야구 선수의 꿈도 이뤘습니다만 빅리그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시카고 불스에서 3번의 NBA 타이틀을 차지했던 조던은 1993년 돌연 농구에서 은퇴하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습니다. 더블A에서 외야수로 뛴 조던은 그러나 MLB의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 다시 농구로 복귀, 3번의 타이틀을 추가하며 NBA 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가 뛰던 시절 더블A 버밍햄 팀은 최고의 리무진 버스로 이동해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조던이 기증한 버스였습니다.


존 엘웨이는 풋볼 팬이라면 기억할 이름입니다. 그런데 1981년 드래프트에서 뉴욕 양키즈는 스탠포드 대학 쿼터백이자 우완 투수이던 엘웨이를 2라운드에 뽑았습니다. 프로야구 첫 시즌 그는 마이너리그 뉴욕 펜리그에서 .318/.432/.896의 뛰어난 슬래시 라인에 42경기에서 12개의 외야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강견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NFL은 엘웨이를 놔두지 않았고, 9번이나 올스타에 뽑히면서 덴버 브롱코스의 전설로 활약했습니다.


2007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 토니 그윈은 같은 날 프로야구와 프로농구에 동시에 드래프트된 재능을 과시했습니다. ⓒWikimedia Commons

- MLB 명예의 전당 멤버인 데이브 윈필드와 토니 그윈은 다른 종목을 뛰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었으면 분명히 가능했습니다. 윈필드는 풋볼팀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농구팀 애틀랜타 혹스는 물론이고 마이너 농구팀 유타 스타에서도 드래프트했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택했고 통산 3110안타에 465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샌디에이고는 당초 그를 투수로 지명했었습니다.

1981년 6월1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토니 그윈이라는 타자를 3라운드에 뽑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열린 NBA 드래프트에서도 당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가 가드 토니 그윈을 뽑았습니다.

그윈은 야구와 농구에서 모두 올스타였는데, 농구는 지역 컨퍼런스 올스타였던 반면에 야구는 전미대학 올스타였습니다. 타격왕 8번에 올스타 15번, 실버슬러거 7번, 골드글러브 5번을 차지했으니 야구의 선택은 최고의 결정이었습니다.



민훈기 입력 2018.02.13. 05:47 수정 2018.02.13. 06:28

http://v.sports.media.daum.net/v/20180213054705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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