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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NBA Super Star

by Wood-Stock 2018. 8. 22.


  • [NBA 현미경] 스탁턴이 쌓아올린 거대한 탑, 1만5806어시스트

NBA 역대 통산 어시스트 1위는 1만5806어시스트의 존 스탁턴이다. 그리고 그 뒤를 1만2091어시스트의 제이슨 키드, 1만335어시스트의 스티브 내쉬가 따랐다. 현역 중에는 13시즌을 보낸 크리스 폴(33·휴스턴 로켓츠)이 8708어시스트로 9위에 올라있다.

즉 스탁턴은 어시스트 숫자 측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다. 동일하게 각각 19시즌씩 보냈던 스탁턴과 키드 사이의 통산 어시스트 차이는 키드가 본인 커리어 시즌 최다 기록인 808어시스트를 5시즌 더 기록해야 추월할 수 있는 차이다.

현재 NBA 현역 중에서도 스탁턴의 거대한 어시스트 숫자 탑을 넘길 페이스의 선수는 보이지 않는다. 공수 전환 횟수 측면에서 리바운드 순위는 실패한 슈팅 횟수가 훨씬 더 많았던 과거 1960,70년대 시절 선수들을 앞지르기 힘든 면이 있다. 하지만 스탁턴의 활동 시절인 1980,90년대와 21세기 NBA 경기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렇다면 스탁턴이 어떻게 이런 범접하기 힘든 숫자를 쌓을 수 있었을까.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이는 외모 뒤에 어떤 무서운 위력이 숨어 있던 것일까.

  • NBA 포인트 가드를 말할 때 스탁턴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AFPBBNews = News1

▶통산 출전 경기 수 역대 3위

부문별 통산 숫자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선 될수록 많은 경기를 출전하는 것이 유리하다. 역대 통산 득점 부문 1위(3만8387득점)에 오른 카림 압둘자바의 경우 빼어난 득점 능력이 무엇보다 컸지만 통산 출전경기 2위(1560경기)에 올랐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힘이었다.

그리고 통산 어시스트 부문 1위이자 스틸 부문 1위(3265스틸) 스탁턴은 통산 1504경기를 출전하면서 압둘자바에 이은 통산 출전경기 부문 3위에 올라 있다. 19시즌을 보낸 자신보다 더 많은 20,21시즌을 치렀던 선수들이 현재까지 7명 있음에도 출전경기 순위에서 탑3 안에 들었다.

거의 모든 시즌들에서 82경기 개근하는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19시즌 중 17시즌을 개근으로 마감했다. 1998~99시즌의 경우 리그가 50경기만 치렀던 단축시즌이었기에 50경기 개근이었다. 나머지 두 시즌에서는 각각 78경기 및 64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NBA 역사에서 40세 이상 나이로 82경기 모두 치르며 시즌을 마감했던 선수는 단 두 명이다. 2001~02시즌 및 20002~03시즌의 스탁턴, 2002~03시즌 마이클 조던뿐이다. 35세였던 1997~98시즌 초반을 무릎 인대 부상으로 빠졌던 스탁턴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결장하지 않았다. 그때가 스탁턴 19시즌 커리어 중 유일한 주요 부상 시기였다.

▶코트 위에 있는 동안 동료들에게 가장 많은 어시스트

NBA 역사에서 한 시즌 평균 12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던 선수들은 단 4명이다. 스탁턴이 4년차부터 연속 8시즌, 매직 존슨이 6시즌, 그리고 케빈 포터, 아이제이아 토마스, 케빈 존슨이 각자 1시즌씩이다.

또한 역대 한 시즌 평균 어시스트 순위에서 1위(14.5어시스트)부터 6위(13.6어시스트)까지 3위 토마스의 13.9어시스트를 빼면 모두 스탁턴의 시즌들이다.

한 시즌 1000어시스트 이상의 잣대를 통해 봐도 스탁턴의 이름들로 도배돼 있다. 역대 9시즌에 걸쳐 개인의 1000어시스트 이상이 나왔고 그 중 7시즌이 스탁턴의 시즌들이다.

이런 독보적인 양적 숫자가 나온 데에는 독보적인 질적 숫자가 뒷받침됐다. 단순히 스탁턴이 코트 위에 비교적 오래 있었기 때문에 숫자가 컸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어시스트 퍼센티지(이하 AST%)다.

AST%란 코트 위에 있는 시간 동안 같이 뛴 동료들의 야투 성공 중 그 선수가 어시스트한 비중을 뜻한다. 여기에서 스탁턴은 역대 최고 시즌 기록들을 남겼다.

한 시즌 500분 이상 소화한 역대 선수들의 시즌들 중 AST% 1위(57.5%)와 2위(57.4%)가 스탁턴의 시즌들이다. 1990~91시즌과 1989~90시즌이다. 그리고 10위 안에 스탁턴의 시즌들이 6시즌이다. 2016~17시즌 꽤 오랫동안 러셀 웨스트브룩이 역대 1위의 시즌 AST%를 기록 중이었지만 결국 3위인 57.3%로 마감했다.

커리어 평균 10.5어시스트를 기록한 스탁턴의 커리어 AST%는 50.2%였다. 2017~18시즌 500분 이상 소화한 선수들 중 최고의 AST%를 기록한 선수는 49.8%의 웨스트브룩이었다.

  • 칼 말론의 스크린으로 시작하는 스탁턴-말론 픽앤롤은 당시 NBA에서 큰 칭송을 끌어낸 전술수행이었다. ⓒAFPBBNews = News1

▶뛰어난 감각을 지닌 위력적인 공격수

스탁턴을 두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픽앤롤이다. 특히 18시즌을 함께 보낸 칼 말론과의 픽앤롤은 상당한 위력을 뽐내던 전술 움직임이었다. 최근에는 완전히 기본적인 전술이 됐지만 1980,90년대에는 그렇게 일상적인 전술은 아니었다.

픽앤롤은 볼 핸들러와 스크린 세터 사이의 호흡이 중요하지만 결국 볼 핸들러와 스크린 세터의 각자 위협 수준이 중요하다. 특히 최근에는 픽앤롤이 거의 볼 핸들러의 득점 위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드로서 커리어 야투율 51.5%, 2점 야투율 54.1%라는 뛰어난 해결 능력을 보여줬던 스탁턴은 드리블 과정에서 상대 수비의 반응을 끌어냈다. 이를 통해 본인에게 복수의 수비수들이 붙었을 때나 동료가 빠르게 잘라 들어갈 때 건네는 패스들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스탁턴 자체가 뛰어난 패스 감각을 갖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가는 동료를 향해 먼 거리에서 던지더라도 정확히 전달되는 패스는 스탁턴의 순간적인 예측 능력이 대단했음을 증명한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되는 동시에 주저 없이 반대 진영 골밑으로 달려가는 동료에게 던지는 패스들이다.

충실한 전술 수행자를 넘어 스탁턴만이 갖고 있는 예측력과 손 감각이 누구도 따르지 못한 어시스트 숫자를 남긴 결정적인 열쇠였다 볼 수 있다.

▶다시 나올 유형의 선수인가

현재 NBA 농구의 경향에 토대를 두자면 스탁턴만큼 어마어마한 어시스트 숫자를 쌓아올릴 선수가 다시 나오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경기 흐름 자체가 한 선수의 많은 어시스트를 억제하는 면이 있다.

우선 최근 포인트 가드의 전성시대라는 말도 있었듯이 포인트 가드, 즉 볼 핸들러들이 각자의 득점 위력을 뽐내는 시기가 도래했다. 물론 웨스트브룩처럼 본인의 득점 위력을 발판으로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할 수도 있지만 스탁턴의 공격 전개와는 초점이 다른 면이 있다.

그리고 볼 핸들러의 볼 배급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 시기이기도 하다. 굳이 포인트 가드가 관여하지 않아도 나머지 선수들 간의 패스 플레이가 효과를 일으키는 전술들이 나오고 있다.

때문에 거의 매 시즌 82경기 출전을 했던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은 둘째치더라도 스탁턴이 보여줬던 경이로운 단위 시간 당 어시스트 숫자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스탁턴은 역사에서 잊히지 않을 확실한 위업을 남겼다.


  • [NBA 현미경] 깨지기 힘들 기록,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를 돌아보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책임진 100득점. 이는 이제껏 NBA 역사에서 최고 기록이다. 이 기록이 작성된 지 50년이 훌쩍 넘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다시 또 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1962년 3월2일(이하 현지시각) 경기에서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그리고 1961~62시즌 오스카 로버트슨의 평균 30.8득점 12.5리바운드 11.4어시스트 시즌 트리플더블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기록들이다. 하지만 시즌 트리플더블은 2016~17시즌 및 2017~18시즌 러셀 웨스트브룩에 의해 깨졌다.

그렇다면 혹시 체임벌린의 100득점 기록도 깨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물론 아예 없진 않다. 하지만 체임벌린이 100득점을 올렸던 시대 배경과 현대 농구의 배경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그 달라진 농구 환경은 아무리 위력적인 선수라도 100득점을 올리기 정말 힘들게 만든다.

체임벌린이 100득점을 올렸던 당시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왜 현재 또는 미래에 개인의 100득점 경기가 나오기 힘들까. 그 힘든 기록을 체임벌린이 달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1996년 50주년을 맞이해 NBA가 선정했던 위대한 NBA 선수 50인에 들었을 정도로 체임벌린은 굵직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AFPBBNews = News1

▶팀의 169득점이 나왔던 경기

당시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현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169-147로 승리를 거뒀다. 최근 NBA에 있어서는 올스타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대량 득점 양상이다.

지난 시즌 4쿼터까지 한 팀의 최다 기록이 148득점이었다. 1월20일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로 이뤘다.

169득점은 NBA 역사에서 연장을 가지 않은 경기들 중 3번째로 가장 높은 팀 득점이다. 1958~59시즌 2월27일 보스턴 셀틱스 및 1990~91시즌 11월10일 피닉스 선즈가 각각 173득점으로 공동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그런데 하나 눈여겨 볼 점은 1961~62시즌이 이런 169득점이 나올 만한 때였다는 사실이다. NBA 리그 평균 득점이 가장 높았던 때가 1961~62시즌(109.4득점)이었다. 2017~18시즌은 32번째(106.3득점)다.

그리고 1959~60시즌부터 1961~62시즌까지는 리그 평균 야투 시도가 역사에서 가장 많았던 세 시즌이다. 평균 107.7회 야투 시도의 리그에서 워리어스는 2번째(111.6회)로 많은 야투 시도를 가졌었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에서는 115회를 가졌다.

2017~18시즌 리그 평균 야투 시도는 86.1회에 4쿼터까지의 최고 기록이 109회였다. 21세기 NBA 경기들 중 연장을 가지 않으면서 한 팀이 110회 이상 야투 시도를 가졌던 적은 단 세 번이다. 그리고 이 중 최고 득점이 110회 야투 시도 42.7% 야투율을 통한 126득점이다.

▶리그의 독보적인 거대 괴수 체임벌린

팀 득점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한 선수의 100득점 경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한 팀 4쿼터까지 NBA 최다 기록 173득점이 나왔던 두 경기에서 각 팀의 최고 득점자들은 각각 43득점 및 32득점을 올렸었다. 현재에도 보기 힘든 숫자들은 아니다. 다른 동료들의 득점 활약도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체임벌린은 당시 워리어스에서 유일하게 20득점을 넘겼던 선수였다. 63회의 야투시도를 가졌던 체임벌린 다음으로 야투시도가 많았던 동료는 18회의 폴 아리진이었고 16득점을 올렸다.

216cm 신장 124kg 체중, 현재 기준에서도 장신인 체임벌린은 당시 기준에서 정말 돋보일 수밖에 없는 신체조건이었다. 1980~81시즌부터 NBA 평균 신장이 더마 드로잔의 201cm라면 1961~62시즌에는 제임스 하든의 196cm이었다.

지난 시즌 30개 팀 리그에서 코트에 나섰던 7피트(213cm) 이상 선수들이 45명이었다. 반면 9개 팀 규모 1961~62시즌에는 체임벌린 포함 단 3명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체임벌린을 막았던 208cm 대럴 임호프와 206cm 클리블랜드 버크너가 버텨내긴 힘들었다.

이런 거구에 기동성 및 손끝 감각까지 겸비했던 체임벌린은 수비에 대해 큰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NBA 역사에서 개인이 60득점 이상 기록했던 적이 68회다. 여기에서 체임벌린은 100득점을 필두로 절반에 가까운 비중의 32회나 작성했다.

NBA 역사 시즌 평균 득점 순위에서 1위(50.4득점)부터 3위(38.4득점)까지 모두 체임벌린이 차지했던 데에는 이런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점이 컸다. 그리고 여기엔 시대 배경도 한몫했다.

▶체임벌린을 도왔던 시대 배경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 NBA에서는 매우 빠르게 공수 전환이 일어났다. 선수들이 전광석화처럼 달렸다기보다는 공격 진영 사용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현대 농구처럼 공격 전술이 몇 단계에 걸쳐 전개되지 않고 일찍 끝나곤 했다. 여기에다 체임벌린은 볼 터치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63회에 달하는 야투 시도와 32회에 달하는 자유투 시도를 가졌다.

그리고 당시 체임벌린은 48분 경기 내내 뛰었다. 최근과 달리 당시는 슈퍼스타들의 출전시간이 매우 많았다. 리그 전체 선수들 113명 중 10위까지가 평균 40분 넘게 뛰었다. 게다가 체임벌린은 평균 48.5분을 기록했다.

당시는 시즌 일정이 80경기였다. 그리고 80경기 모두 출전했던 체임벌린은 한 경기 40분을 제외하고 모두 48분을 채웠으며 연장까지 간 7경기까지 포함 평균 48.5분을 기록했다. 당연히 100득점 경기에서도 모든 시간을 뛴 체임벌린은 쿼터별로 1쿼터부터 23,18,28,31득점을 올렸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1961~62시즌 정점을 찍었다. 당시 3년차였던 체임벌린이 양적 숫자들에서 커리어 중 정점을 찍은 데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유독 그날 경기에서 체임벌린의 자유투가 잘 들어갔던 행운도 작용했다. 자유투 성공률 커리어 54.0%, 1961~62시즌 50.6%를 기록했던 체임벌린이 당시 경기에서는 32회 시도 중 28개(87.5%)를 성공시켰다. 체임벌린의 커리어 1045경기 중 자유투 20구 이상 성공은 그 경기 한 번뿐이었다.

  • 1999년 세상을 뜬 체임벌린의 장례식장에 걸렸을 정도로 그의 100득점 기념사진은 큰 상징성을 가졌다. ⓒAFPBBNews = News1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현대 농구에서 가장 빠른 농구를 펼쳤던 2017~18시즌이었지만 경기 당 야투 및 자유투 시도를 비교했을 때 결국 1961~62시즌보다 훨씬 느린 페이스를 기록했다. 그리고 정말 경기가 치열하게 펼쳐지지 않는 이상 한 선수가 코트 위에 계속 있지도 않는 최근 NBA다.

때문에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는 깨지기도 다시 나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볼 수 있다. 만약 나온다면 400명이 넘는 NBA 선수들 가운데 비교하기 힘든 독보적인 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마추어에서는 기량 차가 극심할 경우 200득점도 넘게 올린 사례가 있다.

1974년 2월 스웨덴의 소년 농구 대회에서 13세의 소년이 272득점을 올리며 기네스 기록을 작성했던 적이 있다. 당시 경기는 272-0으로 끝났었다. 그리고 폴란드와 크로아티아의 14세 미만 리그 경기들에서 각각 개인이 227득점 및 178득점을 올렸었다. 두 경기의 점수는 326-15와 187-70, 역시 정말 크게 기운 경기들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일방적인 경기가 나오기 힘든 곳이 NBA다. 저마다 힘든 과정을 통해 세계 수준급 선수들이 모인 리그다.

물론 2005~06시즌 코비 브라이언트가 81득점을 올리며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음을 보여줬다. 당시 브라이언트는 122-104로 끝난 경기에서 41분56초를 뛰며 81득점을 올렸었다.

하지만 점점 승리를 위해 선수 관리를 엄격히 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경향을 봤을 때 48분 출전 100득점은 전설의 기록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NBA 현미경] 바클리, 다시 나오기 힘든 독보적 유형


2m가 넘지 않은 신장이지만 찰스 바클리는 NB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빅맨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바클리의 16시즌 커리어 평균 기록은 22.1득점 11.7리바운드 3.9어시스트 1.5스틸 0.8블록이다. 어떤 선수의 커리어 최고 시즌 기록일 법한 숫자다.

신인이었던 1984~85시즌을 제외하고 2년차부터 37세로 마친 마지막 시즌까지 모두 득점 및 리바운드에서 두 자릿수 더블-더블 평균 기록을 남겼다.

바클리의 공식 신장은 198cm다. 동시대 라이벌이자 슈팅 가드의 아이콘인 마이클 조던의 신장과 동일하다. 하지만 바클리는 커리어 내내 포워드로서, 대부분의 시즌들을 파워 포워드로서 뛰었다.

  • 바클리는 작은 사이즈의 빅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힘들 정도로 큰 위업을 남겼다. ⓒAFPBBNews = News1

본인 스스로 NBA에서 가장 지배적인 파워 포워드들 중 한 명이라 일컬을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남겼다.

명예의 전당 입성. 1992년 및 1996년 올림픽 ‘드림팀’ 일원으로서 금메달 획득. 시즌 MVP 1회 선정. 11회 올스타 선정. 올NBA 퍼스트 팀 5회, 세컨드 팀 5회, 써드 팀 1회 선정. 이런 명확한 성과들을 통해 충분히 꺼낼 만한 호칭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클리는 다시 나오기 힘든 유형의 선수로 꼽을 만하다. 어쩌면 제2의 조던보다 더 나오기 힘든 유형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바클리는 선수 시절 동안 어떤 기록들을 남겼을까. 무엇이 통상의 상식을 깼을까.

▶상반된 이미지들의 조화

198cm 신장에 114kg 체중, 두꺼운 체격을 지닌 바클리는 포스트에서 패스를 받은 뒤 수비수를 등으로 밀며 공략하는 움직임을 많이 선보였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전통적인 파워 포워드의 공격 진영 움직임이다.

반면 외곽에서 볼을 다루고 있을 때의 바클리는 상당히 날렵하고 정교했다. 본인이 직접 드리블로 속공을 전개시키기도 했고 외곽에서의 드리블로 동료들의 기회를 만들어내곤 했다.

바클리가 활동했던 1984~85시즌부터 1999~00시즌까지의 포워드와 센터들 중 오직 바클리만이 평균 4어시스트 이상을 9시즌에 걸쳐 기록해 봤다. 물론 13시즌 커리어 평균 6.3어시스트의 래리 버드가 비교적 일찍 은퇴한 덕도 있었지만 1980,90년대에 있어 바클리도 꽤 독특한 유형이었다.

그리고 강인한 투지와 영악함이 조합되며 상당한 자유투 획득 숫자가 나왔다. 이는 바클리의 득점 효율성에 큰 뒷받침이 됐다. 커리어 평균 8.1회의 자유투 시도에 가장 많이 던졌던 4년차 1987~88시즌에는 11.9회를 기록했다.

▶신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리바운드 숫자

득점에 있어서는 날렵함과 기술을 통해 신장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리바운드에 있어서는, 특히 늘 동일 포지션과 경쟁하는 입장에서 비교적 작은 신장의 바클리에겐 불리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바클리는 3년차 1986~87시즌 평균 14.6리바운드를 필두로 15시즌에 걸쳐 두 자릿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를 통해 커리어 평균 11.7리바운드가 나왔다.

  • 장신 숲에서 리바운드를 따내는 모습은 바클리의 경기력 중 가장 놀라운 면모라 할 수 있다. ⓒAFPBBNews = News1

개인 평균 리바운드 순위에서 1990~91시즌 14위(10.1리바운드)와 1991~92시즌 11위(11.1리바운드)를 제외하고 2년차부터 마지막 시즌까지 매번 리그 10위 안에 들었다. 본인 최고 시즌인 1986~87시즌에 리그 1위에 오른 한편 네 번에 걸쳐 2위에 올랐다.

리그 평균 신장이 확연히 1980년대 이후보다 작았던 1970년대까지는 198cm 이하 신장에서도 바클리보다 많은 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들이 꽤 있었다. 1960~61시즌 19.8리바운드도 기록해 봤던 196cm 신장 엘진 베일러를 필두로 거스 존슨, 해리 갤러틴, 빌 브리지스 등이 198cm 이하 신장에도 평균 15리바운드 이상 시즌들을 남겼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198cm 이하 최고 시즌 리바운드 기록들은 모두 바클리의 차지다. 1위부터 13위까지 모두 바클리의 시즌들이다. 이다음으로 평균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기록해 본 1980년 이후 198cm 이하 선수들에는 래리 존슨, 러셀 웨스트브룩, 클라렌스 웨더스푼, 퀸틴 리차드슨이 있다.

▶농구 감각과 자리 잡기

앞서 언급한 웨스트브룩이나 제이슨 키드처럼 가드임에도 높은 리바운드 숫자를 기록하는 선수들에겐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 볼에 대한 후각이다. 볼이 어디로 튈지, 향할지에 대한 감각을 통해 수비 진영에서든 공격 진영에서든 신장을 넘어선 리바운드 성과를 냈다.

바클리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강인한 투쟁심을 통해 상대 선수가 자신 앞에 있음에도 뒤에서 리바운드를 걷어내기도 하지만 여유 있게 잡아내는 장면들은 감각을 통한 자리 잡기의 힘이다.

이는 득점에서도 통했다. 바클리의 득점 장면들 중 뛰어난 자리 잡기 능력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경기 당 15회에 가까운 야투 시도를 가졌음에도 5시즌 연속 2점 야투율 60%를 넘겼던 비결들 중 하나다.

  • 1984년 드래프트 5순위 바클리와 3순위 조던은 1992~93시즌 NBA 파이널에서 한 번 만났었다. ⓒAFPBBNews = News1

▶유례를 찾기 힘들 독보적 유형

신장이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 사이에 있는 선수들을 두고 흔히 트위너(Tweener)라고 칭한다. 둘 사이에 끼어있다는 뜻이다. 둘 다 잘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지만 둘 다 애매하게 모자를 때 붙이는 딱지다.

하지만 바클리는 아예 가드에 어울리는 신장임에도 강력한 파워 포워드로서 남았다. 버텨낸 수준이 아니라 두각을 나타내는 위치까지 올랐다. 자신의 신체 능력과 기술에서 장점들을 정말 잘 조화시켰던 덕분이다.

사실 바클리는 NBA 역사에서 플레이오프 우승이 없는 첫 시즌 MVP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조던과 같은 년도 드래프트부터 시작해 거의 비슷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고 플레이오프 동안 컨퍼런스 파이널을 한 번만 통과해 봤다.

그럼에도 바클리는 다시 찾기 힘든 위대한 선수로 볼 수 있다. 즉 제2의 바클리는 나오기 힘들 것이란 뜻이다. 듣는 이들의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의 입담과 더불어 바클리는 독보적 존재로서 기억될 것이다. 


  • [NBA 현미경] 윌킨스, 큰 별들에 가려진 애틀랜타 최고의 스타

나름의 큰 별이었지만 워낙 휘황찬란하게 빛난 별들이 옆에 있었기에 그 위업이 가려진 NBA 전설이 도미니크 윌킨스다.

1980년대 NBA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시대로 요약할 수 있고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였다. 그리고 저 시대들을 고스란히 모두 보낸 선수가 윌킨스였다.

1982~83시즌부터 1998~99시즌까지, 외국 리그 생활 2시즌을 뺀 15시즌을 보냈다. 그 동안 윌킨스는 같은 동부 컨퍼런스에서 버드도 봤었고 조던도 봤었다. 그리고 같은 시대 3시즌 연속 파이널 진출에 2회 우승까지 거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도 봤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가장 높이 올라갔던 플레이오프 무대가 2라운드였던 윌킨스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간과하기엔 윌킨스의 개인 커리어는 너무나 컸다.

특히 69시즌이라는 긴 구단 역사를 가진 애틀랜타 호크스에게 있어 윌킨스의 위치는 정말 높다. 구단이 홈구장에 세운 유일한 선수 동상의 주인공이 윌킨스이기도 하다.

  • 애틀랜타에게 윌킨스의 의미를 이 동상의 존재만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AFPBBNews = News1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의 커리어 평균 24.83득점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은 윌킨스의 별명이다. 실전 경기들에서 멋진 하이라이트들을 많이 뽑아냈기 때문이다. 윌킨스의 야투 성공들 상당수가 드리블 돌파 후의 레이업이나 덩크들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윌킨스의 득점이 그렇게 풍성하진 못할 듯하다. 하지만 윌킨스는 NBA 역사에서도 정상권에 드는 대량 득점원이었다. 윌킨스의 커리어 통산 2만6668득점도, 커리어 평균 24.83득점도, 모두 NBA 역대 13위의 숫자다.

통산 득점 순위에서 윌킨스 앞에 있는 3위 코비 브라이언트(3만3643득점), 6위 덕 노비츠키(3만1187득점), 7위 르브론 제임스(3만1038득점) 모두 윌킨스의 시대 뒤에 등장한 스타들이다. 즉 은퇴 시점에서 윌킨스는 역대 10위 안에 드는 대량 득점원이었다.

전성기를 모두 보낸 애틀랜타에서는 12시즌 동안 평균 26.41득점을 남겼다. 현재 한창 때의 NBA 현역들 중 2017~18시즌까지의 커리어 평균 득점에서 윌킨스보다 높은 숫자를 기록 중인 선수는 단 2명이다. 제임스(27.15득점)와 케빈 듀란트(27.12득점)다.

애틀랜타에서 3년차 1984~85시즌부터 10년차 1992~93시즌까지 9시즌 연속 평균 25득점을 넘겼다. 트레이드로 넘어갔던 LA 클리퍼스도 포함시킨다면 10시즌 연속 평균 25득점 이상이다. 평균 30득점은 두 번 넘겨봤으며 1985~86시즌 리그 득점왕(30.3득점)에 오르기도 했다.

1970년 이후 평균 25득점 이상을 10시즌 연속 기록해본 선수들은 윌킨스 외에 마이클 조던, 칼 말론,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 제임스, 듀란트가 전부다.

놀라운 점은 1991~92시즌 아킬레스 건 파열이란 치명적 부상을 당했음에도 1992~93시즌 71경기를 소화하며 평균 29.9득점 6.8리바운드 3.2어시스트 1스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여전히 예후가 좋지 못한 아킬레스 부상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복귀 사례로 꼽힌다.

▶덩크 챔피언을 넘어선 득점 기량

NBA 올스타 슬램덩크 대회의 챔피언들 중 운동능력에 비해 실전 농구 기량이 따르지 못한 선수들이 종종 나오곤 한다. 아니면 뛰어난 슈퍼스타들 중 덩크 대회 참여를 피하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덩크 챔피언이자 대량 득점원인 선수가 윌킨스였다. 1984~85시즌과 1989~90시즌 챔피언에 올랐다. 그리고 이런 윌킨스와 덩크 컨테스트 경쟁구도를 가진 선수가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라 부를 만한 조던이었다.

윌킨스와 조던이 맞붙은 대회는 1984~85시즌과 1987~88시즌이었다. 조던은 1986~87시즌 및 1987~88시즌 챔피언에 올랐다.

  • 2004~05시즌 올스타 슬램덩크 대회에서 조쉬 스미스가 윌킨스의 유니폼까지 입고 헌정 덩크를 성공시키며 챔피언에 올랐었다. ⓒAFPBBNews = News1

1990년대에 3점슛을 제법 던지는 등 패스 받은 직후 점프슛 비중이 커지긴 했지만 한창 때의 윌킨스는 주로 본인의 드리블 후 득점 기회를 노렸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풋워크는 상대 선수들을 따돌리는 큰 원동력이었다.

▶최고의 하이라이트 경기, 조던과의 맞대결 57득점

윌킨스의 커리어 최고 경기 득점은 두 번의 57득점이었다. 한 번은 1985~86시즌 4월10일(이하 현지시각) 뉴저지 넷츠 상대로, 한 번은 1986~87시즌 12월10일 시카고 불스 상대였다.

이 중 시카고 상대 경기에서는 해당 시즌 본인의 커리어 최고 기록인 평균 37.1득점을 올렸던 조던을 상대했었다. 당시 조던은 41득점을 올렸었다.

경기는 57득점을 올린 윌킨스와 19득점 13어시스트를 올린 닥 리버스의 활약을 바탕으로 애틀랜타가 123-95로 승리했다. 실제 1986~87시즌 애틀랜타는 57승25패(승률 69.5%)로 동부 컨퍼런스 2위이자 리그 3위의 좋은 성적을 냈었다.

반면 당시 시카고는 조던이 평균 37.1득점을 올렸음에도 40승42패(승률 48.8%), 컨퍼런스 8위로 마감했다. 이런 가운데 윌킨스는 시카고의 수비를 계속해서 뚫어냈다. 속공 득점들에 더해 드리블 돌파를 동원하며 레이업과 덩크들이 연이어졌다.

당시 경기에서 윌킨스는 야투도 19개, 자유투도 19구 성공시켰다. 그 19개의 야투 성공 중 4개만 점프슛과 훅을 통한 과정을 거쳤고 나머진 모두 레이업과 덩크들이었다.

윌킨스 커리어에서 50득점 이상은 7경기에 걸쳐 나왔고 53득점 이상의 최고 득점 4경기에서 전승을 거뒀다. 왔다. 대신 나머지 3경기에선 전패다. 현역 중 50득점 이상 경기를 7경기 이상 가졌던 선수들에는 제임스 하든(9경기)과 제임스(11경기)가 있다.

  • 초창기와 달리 조던은 윌킨스에게 넘기 힘든 벽이 되는 거물로 성장했다. ⓒAFPBBNews = News1

▶플레이오프 장벽

윌킨스가 가장 많이 출전한 단일 시즌 플레이오프 경기 수는 12경기였다. 그 외에는 모두 한 자릿수의 플레이오프 경기들만 치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윌킨스의 플레이오프 진출 10시즌 중 7시즌에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나머지 3시즌에서도 2라운드가 끝이었다.

윌킨스 입장에서 가장 좋았던 기회는 역시 12경기를 치렀던 1987~88시즌이었다. 당시 애틀랜타는 1라운드에서 밀워키 벅스를 3승2패로 꺾고 올라와 보스턴 셀틱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렀다.

당시 보스턴에는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쉬의 올스타 트리오가 있었다. 7차전 버드가 3쿼터까지 14득점에 그치기도 했지만 4쿼터에만 20득점을 올리면서 보스턴이 계속된 접전 리드를 잡을 수 있었다. 윌킨스는 47득점을 올리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뒤집지는 못했다.

윌킨스의 애틀랜타를 플레이오프에서 막아섰던 팀들에는 3시즌의 보스턴, 2시즌의 밀워키 벅스와 디트로이트, 1시즌의 시카고가 있었다. 팀의 공수 균형에 있어서 1986~87시즌 및 1987~88시즌이 가장 좋았지만 기회를 살리진 못했다.

▶애틀랜타에서 손꼽히는 큰 별

1996년 NBA는 리그 50주년을 맞이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50명의 선수들을 선정했었다. 50년에 걸쳐 단 50명을 뽑는 것이기에 그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윌킨스가 빠졌다.

공교롭게도 1995~96시즌 윌킨스는 NBA가 아닌 그리스 리그에서 활동했었다. 35세에 마친 1994~95시즌 급격히 하락세를 맞이하며 외국 리그에 눈을 돌렸다. 이 때문이었는지 윌킨스는 위대한 50인 선정에서 빠졌고 여기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매체들이 뽑은 아쉬운 탈락 선수에 윌킨스가 가장 먼저 꼽히기도 했다.

  • 2009년 NBA 아시아 챌린지 행사에 방문했던 NBA 전선들 중 한 명이 윌킨스였다. KBL 제공

그래도 9회의 올스타 선정, 7시즌에 걸친 올NBA 팀 선정 등의 업적과 더불어 윌킨스는 역사적인 선수로 인정하기에 충분한 숫자들을 남겼다. 강력한 숫자를 늦은 나이까지 꾸준히 보여줬다.

윌킨스는 34세 1993~94시즌을 평균 26득점으로 마감했다. 34세 이상 시즌에서 평균 25득점을 넘긴 선수는 역대 단 6명이다. 알렉스 잉글리시, 버나드 킹, 윌킨스, 말론, 조던, 브라이언트다.

그리고 애틀랜타에게 있어 윌킨스는 정말 큰 존재다. 애틀랜타를 거친 선수들 중 가장 많은 12시즌 882경기 3만2545분 출전을 남겼고 통산 최고인 2만3292득점도 남겼다. 통산 6119리바운드는 4위, 2321어시스트는 8위, 1245스틸은 2위, 588블록은 7위다.

물론 역대 구단 선수들 중 2번째로 높은 통산 2만880득점을 남긴 19950,60년대 전설 밥 페팃이 구단 역사 최고의 선수로 꼽힐 자격이 충분하다. 69시즌 구단 역사에서 유일한 우승을 거뒀을 때의 주역이다.

그래도 세인트루이스에서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옮긴 1968~69시즌 이후로 보자면 확실히 윌킨스는 애틀랜타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볼 수 있다. 버드와도 경쟁했고 조던과도 경쟁했던 윌킨스는 화려함과 실력을 동시에 보여준 큰 별이었다.


  • [NBA 현미경] 뉴욕 역사 속 최고의 선수, 유잉

뉴욕은 미국 내 최대의 시장 규모를 자랑한다.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도시인구에 여러 사업체들이 밀집돼 있다.

이런 도시에 연고를 둔 덕분에 뉴욕 닉스는 성적과 상관없이 큰 값어치를 가진다. 유력 경제지 포브스가 해마다 발표하는 NBA 구단 가치에서 뉴욕은 2018년을 포함 계속해서 1위에 올랐다. 21세기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벅찬 팀임을 고려했을 때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 있다 보니 뉴욕엔 매체들의 집중도가 크다. 그렇다면 뉴욕을 거쳐 간 NBA 선수들 중 매체와 가장 많은 접촉을 거친 이는 누구였을까.

패트릭 유잉을 꼽을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은 15시즌을 뛰었고 가장 많은 1039경기를 뛰면서 개인으로서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선수였기 때문이다.

다만 구단 역사에서 2회의 우승 경험이 있는 뉴욕이 유잉 시절에는 우승을 건진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유잉이 평가에서 절하당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72시즌이란 긴 구단 역사 속에서 뉴욕이 영구 결번시킨 번호는 단 7개다. 이 중 6개는 모두 1969~70시즌 및 1972~73시즌 우승을 달성했을 때 있던 인원들의 번호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유잉의 33번이다.

이렇게 유잉은 뉴욕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유잉이 남긴 숫자들을 통해 그가 쌓은 커다란 업적의 탑을 돌아보기로 한다.

  • 뉴욕이 1990년대를 전후로 1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던 데에는 유잉이라는 큰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AFPBBNews = News1

▶자메이카 소년에서 대학 최고의 선수로

중앙아메리카 군도 국가들 중 하나인 자메이카의 수도에서 1962년에 태어나 자란 유잉은 1975년 청소년기를 앞에 두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타고난 신체조건 덕분에 또래 중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지타운 대학에서 유잉은 인생 최고의 농구 업적을 경험했다. 2학년부터 4학년까지 계속 전미 대학농구 토너먼트 결승까지 진출했으며 1984년 3학년 시즌에는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대학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토너먼트 파이널 포 최고의 선수, 1985년 전미 올해의 대학 선수, 2학년부터 3년 연속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 선정. 이런 성과를 통해 1985년 NBA 드래프트는 시작도 전에 유잉의 1순위가 기정사실화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런 유잉을 뽑는 행운은 뉴욕에게로 갔다.

▶출발부터 강력한 신호의 숫자

1985~86시즌 유잉은 신인으로서 평균 20득점 9리바운드 2어시스트 2.1블록 1.1스틸을 기록했다. 부상으로 인해 32경기를 빠지는 위기가 있었지만 워낙 돋보인 기록이었기에 신인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사실 평균 20득점은 엄밀히 따졌을 때 20득점이 아니었다. 50경기 동안 998득점으로, 19.96득점이었다. 그래도 이는 NBA 역사 신인들 중 58위의 득점이다.

그리고 평균 20득점 9리바운드 2블록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킨 NBA 신인은 단 7명이다. 시간 순서대로 랄프 샘슨, 올라주원,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팀 던컨, 모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전설들이다.

▶부드러운 손을 통한 고득점 행진

투박한 외모와 달리 유잉은 매우 부드럽고 정교한 손을 지녔다. 유잉의 득점 과정은 어지간한 선수들에게 있어 매우 불안정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곧잘 성공시킬 수 있었다.

포스트에서 상대 선수를 등지고 볼을 받은 뒤 곧바로 턴어라운드 점프슛이나 러닝 훅을 구사했는데 대개 수비수의 머리 위로 볼을 띄우는 과정이다. 213cm 장신 229cm 양팔너비의 토대가 있긴 하지만 부드러운 손 터치가 있지 않고서는 성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거리 점프슛도 잘 구사했다. 자신의 수비가 도움 수비를 가느라 멀어졌을 때 오픈 상태에서 던진 미드레인지 슈팅이 또 좋은 성과를 냈다.

2년차 1986~87시즌부터 13년차 1997~98시즌까지 매번 평균 20득점을 올리는 동시에 최소 46.6%에서 최대 56.7%까지의 야투율을 기록했다. 양과 질을 동시에 만족시킨 성과들이었다.

그 중 절정 조합은 5년차 1989~90시즌 55.1% 야투율을 통한 커리어 최고 평균 28.6득점이었다. NBA역사에서 평균 28득점 이상 야투율 55%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켰던 선수들은 단 7명뿐이다. 5시즌씩의 샤킬 오닐과 에이드리안 댄틀리, 3시즌의 카림 압둘자바, 1시즌씩의 키키 밴더웨이, 찰스 바클리, 유잉, 칼 말론이다.

17시즌을 보낸 유잉은 커리어 평균 20.98득점을 남겼다. 이는 NBA 역대 43위의 숫자다. 그리고 통산 2만4815득점은 23위에 올라있다.

  • 뉴욕의 종전 통산 득점 기록인 프레이저의 1만4617득점을 돌파하던 1993~94시즌 경기에서 유잉이 월트 프레이저에게 축하를 받았다. ⓒAFPBBNews = News1

▶수비 실적 향상을 통한 성적 상승

커리어 평균 2.4블록을 남긴 유잉은 신인 때부터 14년차 1998~99시즌까지 매번 평균 2블록을 넘겼다. 유잉의 통산 2894블록은 NBA 역대 7위에 올라있다.

유잉이 1991~92시즌을 마지막으로 올디펜시브 팀에 3회 선정됐지만 뉴욕 팀의 수비 실적이 확실하게 리그에서 명망을 떨친 시기는 1992~93시즌부터였다. 바스켓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해당 시즌 뉴욕은 100포제션 당 99.7실점으로 리그 2위(104.9실점)와 큰 차이로 1위의 수비지표를 남겼다.

물론 팻 라일리 감독이 부임한 1991~92시즌부터 리그 3위의 수비지표(104.2)에 오르는 등 강력함을 보여줬다. 유잉에 더해 찰스 오클리와 존 스탁스 등 인원 측면의 준비는 이미 된 상태에서 코칭스태프의 전략이 더해졌다.

수비 체제를 다지면서 뉴욕의 성적은 부쩍 상승했다. 1990~91시즌 39승43패(승률 47.6%)를 기록했다가 1991~92시즌 51승31패(승률 62.2%)를 기록했다. 이후 4시즌 연속 60%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고 1993~94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NBA 파이널 진출까지 이뤘다.

▶유잉에게 잔인했던 플레이오프

유잉의 큰 무대 영예는 대학 시절이 정점이었다. NBA에서의 큰 무대는 유잉에게 시련을 주기 일쑤였다.

생애 첫 진출이자 실질적인 마지막 출전이었던 1993~94시즌 휴스턴 로켓츠 상대 파이널에서 유잉은 큰 하락을 봤다. 하필 대학 시절 결승에서 꺾었던 올라주원을 상대로 보였던 부진이기에 더욱 아쉬웠다.

사실 1993~94시즌 파이널 시리즈는 매 경기 올라주원이 유잉보다 좋은 성과를 냈음에도 5차전 때 뉴욕이 3승2패를 만들며 우위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6,7차전 연속 원정에서 내리 지며 물러나야 했다. 마지막 두 경기 접전의 패배들에서 유잉은 총 24개의 야투를 실패하며 17득점씩에 그쳤다.

본인이 뛰던 시절 뉴욕의 2번째 NBA 파이널 진출인 1998~99시즌에 유잉은 부상으로 나서질 못했다. 이미 그 전 시즌 큰 부상으로 26경기 출전에 그쳤던 유잉은 1998~99시즌에도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아킬레스 통증으로 인해 경기들을 빠져야 했고 그 탓에 팀도 간신히 8번 시드로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래도 뉴욕은 8번 시드로서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유잉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출전 의지를 보여주면서 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까지 코트에 섰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섰기에 결국 유잉의 시즌은 파이널 전에 끝나야 했다. 당시 파이널에서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로빈슨과 던컨이라는 막강한 빅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은퇴 후 유잉은 자신의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AFPBBNews = News1

▶뉴욕 선수들 중 최고의 성과

이렇게 유잉의 파이널 경험은 썩 좋지 못한 과정과 결과들로 끝맺음됐다. 하지만 우승 반지가 없다는 이유로 낮게 볼 이유는 없다. 15시즌 동안 계속해서 팀을 위해 헌신했고 본인의 부상이 있을 때도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힘을 보탰다.

커리어 마지막 두 시즌을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올랜도 매직에서 뛰었지만 15시즌 동안의 뉴욕 커리어만 해도 대단한 숫자를 남겼다. 단적으로 뉴욕에서 올린 통산 2만3665득점은 NBA 역대 27위 로버트 패리쉬(2만3334득점)보다 높다.

뉴욕에서 유잉의 1039경기 3만7586분 출전, 2만3665득점 1만759리바운드 2758블록 1061스틸 모두 뉴욕을 거쳐 간 선수들 중 가장 높은 통산 기록들이다. 통산 2088어시스트만이 1위가 아닌 12위다.

우승 시즌들에서의 주역 월트 프레이저와 윌리스 리드의 경우 10시즌씩만 보냈고 출전도 각각 759경기 및 650경기였다. 뉴욕에서 유잉이 평균 22.8득점을 올렸다면 프레이저는 19.3득점, 리드가 18.7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유잉을 돋보이게 만드는 다른 업적들도 있다. 11회 올스타 선정. 1996년 NBA 50주년에 선정한 가장 위대한 NBA 선수 50인 중 일원. 그리고 자메이카 출신이지만 시민권 획득을 통해 1984년 아마추어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데에 이어 1992년 원조 드림팀으로서도 합류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커리어 황혼기에 각종 큰 부상들까지 겹쳐 외부의 많은 눈총을 사며 구단을 떠나기로 마음먹기까지 했지만 선수로서 유잉은 몸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헌신했다. 그리고 그 성과는 NBA 역사에서도 돋보이는 수준이다. 때문에 여전히 유잉을 뉴욕의 심장으로, 역대 최고 선수로 바라볼 이유는 충분하다.


  • [NBA 현미경] 아프리카 출신 첫 NBA 전설, 올라주원

21세기 전까지 NBA는 매우 배타적인 리그였다. 미국 외의 선수들이 들어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NBA에서 큰 족적을 남긴 나이지리아 태생 하킴 올라주원은 매우 이례적인 선수로 볼 수 있다. 물론 미국의 휴스턴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리그 입성 자체는 기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휴스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은 정말 당시로써는 적은 가능성들의 연속이었다.

되돌아보면 올라주원이었기에 그런 가능성들을 뚫고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일원이자 NBA 50주년인 1996년에 선정됐던 위대한 50인 일원이 될 수 있었던 대단한 18시즌 NBA 커리어를 보냈던 올라주원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리그의 대표적 스타로 떠오를 가능성을 보여준 조엘 엠비드(24·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비교대상으로 많이 꼽히는 과거 선수가 올라주원이다. 올라주원과 엠비드 사이에는 농구 기량을 떠나서도 재미있는 공통분모들이 있다.

만약 엠비드가 올라주원이 이뤘던 성과 근처에 도달하더라도 매우 성공적인 NBA 커리어라 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라주원이 그렇게 큰 성과를 내는 동안 남겼던 숫자들은 무엇일까. 얼마나 큰 숫자들이 나왔을까.

  • 비교적 꽤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했지만 올라주원은 가장 완벽에 이른 기술을 선보인 센터가 됐다. ⓒAFPBBNews = News1

▶엠비드와 비슷했던 미국 진출 과정

1963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성장과정도 거친 올라주원은 17세 전까지 농구를 하지 않았던 축구 골키퍼였다. 아프리카 대륙 카메룬에서 태어났던 엠비드가 15세 전까지 농구가 아닌 배구 선수로서 활동했던 것과도 같다.

즉 두 선수 모두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면서 늦게 농구를 시작한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신체능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정말 빠른 속도로 농구 플레이 기술을 습득했다 볼 수 있다.

다만 카메룬인 NBA 선수 룩 음바아무테가 2011년 카메룬에서 열었던 캠프에서 발견했던 엠비드에 비교해 올라주원의 미국 진출은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휴스턴 대학 농구 감독 친구의 추천으로 테스트를 받으러 미국에 도착한 올라주원을 마중 나갔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라주원은 청소년 시기에 몸담았던 축구가 큰 도움이 됐다고 소회를 전했다. 자신을 상징하는 그 돋보였던 풋워크와 함께 NBA 역대 3위인 커리어 경기 당 3.1블록을 기록했던 능력에 축구 골키퍼 시절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빅맨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득점 기술

커리어 1238경기를 뛰는 동안 올라주원이 던졌던 3점슛은 124회밖에 안 된다. 한 시즌 가장 많이 던졌던 적이 19회였다. 지난 한 시즌 동안에만 해도 총 214회, 경기 당 3.4회 3점슛을 던진 엠비드와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포스트 플레이어로서 올라주원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득점 기술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수비수와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포스트에서 수비수를 등진 상태에서도, 언제든 득점을 노릴 수 있었다.

초창기 시절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수비를 제치며 챙긴 돌파 득점, 경험을 쌓으며 완숙의 단계에 이른 포스트 풋워크로 수비수를 따돌리며 챙긴 득점 등 올라주원이 레이업이나 덩크로 연결시킨 멋진 장면들이 수도 없이 많다.

특히‘드림 셰이크(Dream shake)’라 불린 풋워크 및 페이크 조합 동작을 통해 포스트에서 수비수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은 올라주원의 대표적 기술이다. 은퇴 후 최근까지도 NBA 스타 선수들의 특별 과외를 맡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213cm의 신장 및 229cm 양팔너비를 이용해 수비수가 적극적으로 저항할 때도 주저 없이 슛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특히 수비를 등졌다가 턴어라운드 점프슛을 던질 때 그렇게 수비수와 멀어질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올라주원의 득점 측면 전성기는 꽤 늦게 왔다. 30세를 넘기면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올라주원의 9년차 시즌이자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이 첫 82경기 시즌을 지휘했던 1992~93시즌부터 커리어 최고 득점들을 남겼다.

1992~93시즌부터 1995~96시즌까지 4시즌 연속 올라주원은 평균 25득점을 넘기는 가운데 매번 야투율 50% 이상을 기록했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정말 높은 숫자를 기록했다는 뜻이다.

▶역대 통산 블록 1위, 스틸 8위

역대 최고의 센터들 중 한 명으로서 올라주원을 꼽을 수 있는 이유로 득점 능력만을 꼽아서는 안 된다. 수비 진영에서도 정말 위력적인 선수가 올라주원이었기 때문이다.

큰 신장이었지만 올라주원은 대단히 날렵한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에다 긴 팔로 인해 수비에서 상대에게 큰 위압감을 줄 수 있었다.

이 같은 모습은 숫자로도 확실한 증거를 남겼다. 앞서 언급했듯이 커리어 경기 당 3.1 블록을 기록한 올라주원은 커리어 통산 3830블록으로 역대 1위에 올랐다. 이 뒤를 콩고 민주공화국 출신 디켐베 무톰보(3289블록)가 따랐다.

그리고 올라주원의 커리어 통산 2162스틸은 역대 8위에 올라 있다. 올라주원 앞의 선수들 7명 모두 가드 또는 스몰 포워드들임을 봤을 때 놀라운 기록이다.

커리어 평균 1.7스틸을 기록한 올라주원은 4시즌에 걸쳐 평균 2스틸을 넘겼다. NBA 역사에서 시즌 평균 2블록 및 2스틸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킨 선수는 단 세 명이다. 최근부터 2005~06시즌 제럴드 월러스, 1991~92시즌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1987~88시즌부터 1990~91시즌까지 4시즌의 올라주원이다.

1992~93시즌 및 1993~94시즌 두 시즌 연속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됐던 올라주원은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세컨드 팀에 4회 선정됐다.

▶역대 3번째 쿼드러플더블

농구 기록 네 항목들에 걸쳐 두 자릿수를 기록했을 때 붙이는 명칭, 쿼드러플더블을 NBA 경기에서 남겼던 선수가 현재까지 총 4명이다. 1974~75시즌 네이트 서몬드, 1985~86시즌 앨빈 로버트슨, 1989~90시즌 올라주원, 1993~94시즌 로빈슨이다.

시간상 역대 3번째인 올라주원의 쿼드러플더블은 해당 시즌 3월29일(이하 현지시각)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40분 동안 뛰며 18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 11블록을 통해 나왔다.

올라주원이 커리어 1238경기 중 각 부문 두 자릿수 기록한 것으로 득점 부문 1132경기, 리바운드 부문 790경기, 블록 부문 11경기, 어시스트 부문 5경기다. 쿼드러플더블 경기를 제외하고 득점 및 리바운드에 더해 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한 경기가 4경기라면 블록으로 작성한 경기가 9경기다.

  • 올라주원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경쟁 상대들을 확실하게 따돌리며 우승을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AFPBBNews = News1

▶4대 센터들 중 가장 빠른 우승

1984년 드래프트 1순위 올라주원에 더해 1985년 1순위 패트릭 유잉, 1987년 1순위 로빈슨, 1992년 1순위 샤킬 오닐은 1990년대를 수놓으며 흔히 4대 센터로 불린다. 그리고 이 4명 중 유잉을 제외한 3명 모두 NBA 파이널 우승을 차지해봤다.

그 중 올라주원이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서 1993~94시즌 및 1994~95시즌 가장 빠른 시기에 우승을 맛봤다. 더욱이 그 두 시즌 동안의 플레이오프에서 나머지 스타 센터들을 만나 맞대결 우위를 남겼다.

유잉을 상대로는 1984년 전미 대학 농구 결승에서 맞서 패했던 복수를 확실하게 했다. 로빈슨 상대로는 전 시즌 MVP이었다가 해당 시즌 MVP를 로빈슨에게 뺏겼던 복수를 확실히 했다. 당시 동료 로버트 오리는 올라주원이 전에 보여주지도 않았던 움직임들을 로빈슨 상대로 펼쳤다고 밝혔다.

훗날 3연속 포함 4회 우승을 차지했던 오닐은 1994~95시즌 파이널에서 4연패 스윕으로 물러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자부심이 유독 강한 오닐이 올라주원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던 이유다.

▶첫 외국 태생 MVP

1993~94시즌 평균 27.3득점 11.9리바운드 3.6어시스트 1.6스틸 3.7블록을 기록했던 올라주원은 시즌 MVP에 선정됐다. 생애 단 한 번의 MVP 수상이었지만 올라주원은 그 MVP 수상으로 NBA 역사에서 최초로 남은 MVP 수상 이력들을 남겼다.

우선 동일 시즌에 시즌 MVP, NBA 파이널 MVP, 올해의 수비수, 세 부문에 동시 선정된 유일한 사례다. 그리고 역사 최초로 외국 태생으로서 MVP에 선정됐다. 이후 팀 던컨, 스티브 내쉬, 덕 노비츠키가 추가됐다.

올라주원을 설명할 업적들은 정말 많다. NBA 역사 위대한 50인, 농구 명예의 전당, 올림픽 금메달, 2연속 NBA 파이널 우승 등 NBA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선수가 미국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음에도 나타났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엠비드에게 쏟아지는 기대를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커리어 황혼기를 제외하면 올라주원은 건강에 있어 매우 안정된 시즌들을 보냈다.

아프리카 대륙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형세다. 때문에 자체적으로 뛰어난 농구 선수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올라주원을 필두로 NBA에서도 위력을 뿜어낼 수 있는 원석들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오랜 세월 NBA 리그를 주름잡아왔던 스타들의 근원적 뿌리가 아프리카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 [NBA 현미경] 코트 안 야수-코트 밖 인도주의자, 무톰보

NBA의 국경 없는 농구 프로그램 일환으로 아프리카 경기가 지난 5일(이하 한국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렸다. 세 번째를 맞이하는 이번 아프리카 경기는 넬슨 만델라의 생일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의도 있었다.

이런 행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1966년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1971년~1997년 자이르)에서 태어나 자란 NBA 전설 디켐베 무톰보다. 이미 전부터 국경 없는 농구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무톰보는 NBA 글로벌 홍보대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어쩌면 NBA 팬이 아닌 사람들에겐 인도주의 업적으로 유명한 사람일 수 있다. 현역 시절부터 시작해 무톰보의 인도주의 사업은 여러 경로를 거쳐 진행됐고 진행되고 있다. NBA와 더불어 무톰보는 심신장애자들을 위한 스페셜 올림픽의 국제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모습과는 달리 농구 코트 안의 무톰보는 매우 거친 움직임을 보였던 선수다. 병원을 세운 무톰보지만 리바운드 과정에서 자신의 팔꿈치 휘두르기로 다치게 만든 선수들이 20명 근처였다.

이런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기반으로 올해의 수비수 4회 수상이라는 NBA 공동 최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른 4회 수상자는 벤 월러스다. 월러스와 마찬가지로 무톰보도 공격 진영보다 수비 진영 활약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이런 무톰보가 남긴 숫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꽤 늦게 시작했던 그의 농구 커리어를 되돌아보며 꼽아보고자 한다.

  • 올해의 수비수 트로피는 무톰보가 NBA에서 백만장자로서 18시즌 동안 버틸 수 있던 힘을 요약해 준다. ⓒAFPBBNews = News1

▶늦게 시작한 농구로 미국 진출

지난 [NBA 현미경]에서 다룬 아프리카 출신 첫 NBA 전설 하킴 올라주원처럼 무톰보도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올라주원, 무톰보 두 명 모두 성장기 때 축국 골키퍼로서 활동했다.

키 큰 가족들 중에서도 유난히 컸던 무톰보는 10대 후반 7피트(213cm) 가까이 자랐다. 이에 아버지와 형은 농구를 권장했고 무톰보는 마지못해 시작했다. 사실 미국 조지타운 대학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데에는 농구가 큰 힘이 됐지만 무톰보의 속마음은 대학에서 공부해 의사가 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결국 조지타운 대학 존 톰슨 감독의 설득으로 농구에 전념하기로 했다. 영어를 하지 못해 대학 2학년부터 시작된 늦은 농구 커리어였지만 특출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을 거듭했다.

다만 나이는 분명 같은 학년 선수들 중 많은 편이었다. 22세에 대학 2학년 시즌을 시작했고 4학년 시즌을 25세에 마쳤다. 대신 4학년 시즌 평균 15.2득점 12.2리바운드 4.7블록이라는 큰 숫자를 남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1991년 NBA 드래프트 4순위로 뽑힐 수 있었다.

▶시작부터 큰 숫자를 남긴 리바운드와 블록

덴버 너겟츠에서 25세 나이에 시작한 무톰보의 NBA 1년차 1991~92시즌 기록은 평균 16.6득점 12.3리바운드 3블록이었다. 신인으로서 역대 3위의 평균 리바운드이자 역대 7위의 평균 블록이다.

이렇게 큰 신인 기록 숫자를 남긴 218cm 신장 무톰보는 11년차 2001~02시즌까지 계속해서 평균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남겼다. 평균 득점은 신인 때가 커리어 최고일 정도로 득점 기량이 늘진 않았지만 역시 11년차까지 계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며 11시즌 연속 평균 더블더블을 남겼다.

한편 블록은 30세 달한 1995~96시즌 평균 4.5블록으로 정점을 찍었다. 평균 4.5블록은 역대 6위에 달하는 높은 숫자다. 커리어 평균 2.8블록을 기록한 무톰보는 통산 3289블록을 기록하면서 올라주원(3830블록)에 이어 역대 2위에 올라있다.

보통의 경우 트리플더블 기록은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를 통해 작성된다. 하지만 무톰보의 커리어 트리플더블 10경기는 모두 득점-리바운드-블록을 통해 작성됐다. 이렇게 득점-리바운드-블록 조합으로 작성된 커리어 트리플더블 횟수에서 10경기는 올라주원과 더불어 역대 최다 기록이다.

  • 블록 후 상대에게 날리던 검지 흔들기는 여전히 언제 어디서든 무톰보를 대표하는 동작이다. ⓒAFPBBNews = News1

▶가장 빛났던 1993~94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

무톰보가 들어오기 직전 1990~91시즌 덴버는 평균 실점 리그 30위(130.8실점)로 최악의 수비 팀이었다. 바스켓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당시 덴버의 100포제션 당 114.7실점 수비지표 역시 최하위였다.

이런 덴버가 무톰보 입단 이후로 확 달라진 숫자를 기록했다. 1991~92시즌 평균 실점 리그 8위(107.6실점), 수비지표 13위(108.6)에 올랐다.

그리고 무톰보의 생애 첫 플레이오프 진출 년도인 1993~94시즌에는 평균 실점 리그 9위(100.3실점) 수비지표 5위(102.3)까지 올랐다. 당시 공격지표는 20위(103.9)에 그치긴 했지만 수비력을 통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셈이다.

그래도 결국 8번 시드였다. 당시까지 8번 시드가 1번 시드를 꺾는 일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2연패로 시작하면서 5전3선승제였던 당시 그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3연승을 거치며 NBA 플레이오프 역사 최초 8번 시드의 업셋을 이뤄냈다. 1,2차전 106,97득점을 올렸던 1번 시드 시애틀 슈퍼소닉스는 3,4,5차전에서 93,85,94득점에 그쳤다. 해당 시즌 시애틀은 공격 지표 2위(111.1)에 올랐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동안엔 100포제션 당 104.9득점에 그쳤다.

이런 팀의 수비에 있어 무톰보는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5차전까지 무톰보는 총 31블록을 남겼다. 이는 NBA 플레이오프 5전3선승제 시리즈에서 나온 최다 블록 기록이다. 연장까지 갔던 5차전 마지막 수비 리바운드를 잡은 뒤 바닥에 누워 무톰보가 환히 웃던 장면은 역사에 남은 하이라이트다.

▶수비를 통해 스타로

무톰보는 올스타 8회 선정에 빛날 정도로 큰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위치에 오를 수 있던 데에는 공격보다 수비의 힘이 컸다.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3회 선정, 세컨드 팀 3회 선정이라는 명예도 따랐다. 그리고 올NBA 세컨드 팀 1회, 써드 팀 2회도 수비를 바탕으로 따라온 영예다.

그래도 결국 무톰보의 수비 진영 업적은 올해의 수비수 4회 수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94~95시즌, 1996~97시즌, 1997~98시즌, 2000~01시즌이다. 소속별로는 덴버에서 한 시즌, 애틀란타 호크스에서 두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한 시즌이다.

수비는 무톰보가 플레이오프 팀들의 구애를 받는 힘이기도 했다. 2000~01시즌 NBA 파이널에 진출했던 필라델피아는 해당 시즌 중에 무톰보를 트레이드를 통해 들였다. 2001~02시즌 및 2002~03시즌 2시즌 연속 파이널에 진출했던 뉴저지 넷츠는 2002~03시즌에 무톰보를 영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톰보의 커리어는 2002~03시즌에 큰 내리막을 형성했다. 계속된 부상들로 24경기 출전에 그쳤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이후 출전시간도 계속해서 큰 감소세를 보였다.

다만 30대 후반의 나이였음을 감안하면 무톰보가 꽤 늦은 나이까지 버텨냈음을 알 수 있다. 2008~09시즌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서 은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무릎 부상을 당했던 당시 무톰보는 43세였다.

  • 본인의 재단을 통해서든 단체의 힘을 통해서든 무톰보는 아프리카 삶의 질 향상에 큰 노력을 쏟아왔다. ⓒAFPBBNews = News1

▶결국 꿈을 이룬 무톰보

청소년기 무톰보의 꿈은 골키퍼 또는 의사였다. 정확하게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결국 큰 의미에서는 두 가지 꿈을 모두 이룬 셈이다.

농구에서 블록으로 상대방의 슈팅을 막아냈고 백만장자가 돼 2007년 개원한 병원으로 고국의 동포들이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두 번의 큰 전쟁에 연루됐었다. 무톰보와 고향이 같은 NBA 현역 엠마뉴엘 무디에이는 어린 시절 그 전쟁 통에서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무톰보는 당시 별달리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병원을 열었다.

이런 힘든 세월을 거친 아프리카와 고국을 위해 무톰보는 계속해서 큰 힘을 쏟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 걸친 활동을 통해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코트 안에서는 거칠게 부딪히고 날카롭게 쳐내는 선수였지만 코트 밖의 무톰보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NBA 현미경] 레지 밀러, 앨런과 커리 전에 그가 있었다

3점슛 하면 최근에는 스테픈 커리나 클레이 탐슨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5년 전쯤에는 레이 앨런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떠올릴 이름이 레지 밀러였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3점슛으로 가장 먼저 연상시킬 이름이기도 하다.

이런 이름에 걸맞게 밀러는 NBA 역대 통산 3점슛 성공 개수에서 2560개로 2위에 올라 있다. 1위는 밀러보다 9년 늦게 데뷔한 앨런(2973개)이다. 그리고 밀러보다 22년 늦게 데뷔한 커리가 현재 7위(2129개)로서 남은 커리어를 무난히 보낸다면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페이스다.

그렇다면 밀러보다 앨런이나 커리가 뛰어난 3점 슈터인 것일까. 물론 숫자 측면으로도 코트 위 플레이 모습으로도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NBA에서 3점슛은 계속해서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는 부문이라는 사실이다.

즉 1965년생, 1987년 NBA 드래프트 11순위 밀러는 자신과 비슷한 시대를 거친 선수들 중에서 독보적인 결과를 남겼다. 3점슛 부문 역대 상위권 선수들 중 밀러를 제외하면 모두 2000년대 이후에 한창 시절을 보낸 선수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경향이 나왔을까.

  • 슈터로 한정하기엔 정말 폭넓은 기량을 지닌 밀러였지만 슈터로서 너무나 이상적인 움직임을 선보여 줬다. ⓒAFPBBNews = News1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는 리그 3점슛 숫자

NBA 코트 위에서 선수들이 처음으로 3점슛을 던졌던 시즌이 1979~80시즌이었다. 그리고 당시 NBA 리그 전체의 평균 3점슛 시도 횟수가 2.8회였다. 선수 한 명이 아닌 평균의 팀이 2.8회를 던졌다. 당시 가장 많이 던졌던 팀이 샌디에이고 클리퍼스(6.6회)였고 가장 적은 팀은 경기 당 1개꼴도 아닌 애틀랜타 호크스(0.9회)였다.

3점슛에 대한 적응 문제를 떠나 거부감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당시 리그 사람들에게 3점슛은 농구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진 편이었다. 이런 출발로 시작해 더딘 증가를 거쳐 10년이 지난 1989~90시즌에는 경기 당 6.6회에 달했다.

그래도 리그 평균 3점슛 시도 횟수는 계속해서 상승을 거쳤다. 예외라면 1994~95시즌부터 1996~97시즌까지의 3시즌 전후다. 바스켓으로부터 정면 및 윙 3점 라인까지의 거리가 통상 23.75피트(약 7.2m)에서 양 코너와 똑같은 22피트(약 6.7m)로 줄었던 당시 부쩍 시도가 늘었다가 변경 후 다시 급감했다.

지난 시즌 NBA 리그는 경기 당 29회의 3점슛을 던졌다. 10년 전 2007~08시즌에는 18.1회, 20년 전 1997~98시즌에는 12.7회였다. 그리고 30년 전이자 밀러가 데뷔한 1987~88시즌에는 경기 당 5회를 던졌던 리그다.

당시 밀러의 소속팀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경기 당 5.9회의 3점슛을 던졌고 신인 밀러는 척 퍼슨(2.2회) 다음 2번째로 많은 2.1회를 기록했다.

밀러의 가장 높은 경기 당 3점슛 시도 횟수는 1996~97시즌의 6.6회였다. 이를 42.7%만큼 성공시키며 평균 2.8개의 성공을 남겼다. 이에 비해 앨런은 2005~06시즌 커리어 최고 평균 8.4회의 3점슛을 시도해 41.2% 성공률로 3.4개를 성공시켰다. 커리는 만장일치 MVP로 올라섰던 2015~16시즌에 경기 당 11.2회의 3점슛 시도를 45.4%만큼인 5.1개 성공시켰다.

▶50-40-90 클럽

농구 선수의 드높은 슈팅 정확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숫자가 50-40-90이다. 통상적으로 180 클럽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숫자는 야투율 50%, 3점슛 성공률 40%, 자유투 성공률 90%를 의미한다. 즉 각 부문 숫자를 동시에 넘겨야 들 수 있는 대열이다.

각 부문 기본 요건을 충족시킨 시즌 성과로 이 대열에 든 역대 NBA 선수는 현재까지 단 7명이다. 시간 순으로 래리 버드, 마크 프라이스, 밀러, 스티브 내쉬, 덕 노비츠키, 케빈 듀란트, 커리다. 이 중 버드는 2시즌, 내쉬는 4시즌에 걸쳐 이룩했다.

밀러는 7년차인 1993~94시즌에 50.3% 야투율, 42.1% 3점슛 성공률, 90.8% 자유투 성공률로 이룩했다. 18시즌 커리어 중 50% 이상 야투율이 4시즌, 40% 이상 3점슛 성공률이 10시즌, 자유투 90% 이상 시즌이 8시즌이다.

  • 현재에도 대표적인 방송 해설자로서 밀러는 NBA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AFPBBNews = News1

▶밀러 타임, 플레이오프 클러치 승부사

양적인 측면에서 밀러의 득점 부문 숫자는 크게 돋보이지 않는 편이다. 커리어 평균 18.2득점을 남긴 밀러는 3년차 1989~90시즌의 평균 24.6득점이 최고 기록이었고 평균 20득점 이상은 6시즌이었다.

이런 탓에 올NBA 선정은 써드 팀 3회가 전부다. 올스타 선정도 5회로 아주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밀러가 많은 세월이 지나고도 많은 NBA 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유에는 플레이오프 활약이 컸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를 만한 것이 밀러 타임으로 불린 8.9초 8득점 활약이었다. 1994~95시즌 인디애나는 2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했다. 그리고 원정에서 치른 1차전 마지막 즈음 18.7초를 남기고 6점차로 뒤져 있었다. 승리 가능성이 낮은 상황이었다.

그때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밀러는 일단 곧바로 3점슛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실점 후 인바운드 패스를 하던 뉴욕은 밀러에게 스틸을 당했고 밀러는 곧바로 또 3점슛을 던져 성공시켰다. 이렇게 6득점을 올리며 동점을 만들기까지 불과 6.5초만 걸렸다.

그리고 인디애나는 곧바로 뉴욕에게 파울을 가해 자유투를 내줬는데 하필 뉴욕의 존 스탁스가 2구 모두 실패했다. 그나마 패트릭 유잉이 공격 리바운드로 던진 팁인도 빗나갔고 끝내 리바운드를 잡은 밀러가 파울을 당해 자유투 2구를 모두 성공시켰다.

이렇게 8.9초 동안 8득점을 올리며 2점차 승리를 이끌었다. 그 시리즈에서 인디애나는 4승3패로 승리했다.

뉴욕에게 밀러가 치를 떨 만한 인물로 각인된 것은 이미 그 전부터였다. 1993~94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만난 두 팀은 2승2패 상황에서 5차전을 맞이했다. 여기에서 밀러는 39득점 맹폭을 가하며 93-86 승리를 이끌었다.

3점슛 11회 시도 중 6개(54.5%)를 성공시켰고 4쿼터에만 25득점을 퍼부었다. 다만 그 5차전 승리 후 2연패를 당하며 시리즈는 뉴욕에게 내줘야 했다.

한편 1997~98시즌에 2번째 3연속 우승을 달성했던 시카고 불스에게 가장 진땀 뺐던 시리즈가 인디애나와의 컨퍼런스 파이널이었다. 4승3패로 통과해야 했다. 인대애나가 1승2패로 밀려있던 4차전에서 밀러는 2.9초 남기고 1점차 뒤져 있을 때 3점슛을 성공시키며 역전 결승 득점을 뽑아냈다.

이렇게 밀러의 플레이오프 클러치 활약에서 3점슛은 큰 힘을 발휘했다.

  • 2001~02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뉴저지 넷츠를 상대로 결국 패하며 물러나긴 했지만 2차 연장까지 끌고 갔던 밀러의 활약이 너무나 큰 인상을 남겼었다. ⓒAFPBBNews = News1

▶슈터의 교과서

슈터의 교과서로 불리는 선수들의 공통점은 올곧은 슈팅 자세에 있다. 그리고 전력 질주하다가도 즉각 정지해 올바로 슛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밀러는 슈터들에게 큰 모범이 됐다.

인디애나 빅맨 동료들의 스크린 도움을 이용해 밀러가 수비를 따돌리며 오픈 기회를 얻어내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곧바로 정확한 슈팅 자세로 전환시키는 유연함을 보여줬다. 이는 훗날 앨런에게도, 현재 탐슨에게서도 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밀러는 18시즌 커리어를 오직 인디애나 한 팀에서만 보내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2004~05시즌 때 팀 동료 몇몇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폭력 행사에 연루되며 장기 징계를 받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꿋꿋이 팀을 이끌었다. 공교롭게 커리어 마지막 경기였던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상대가 디트로이트였고, 밀러는 역사에 남을 감동적인 작별 장면을 남겼다.

이렇게 밀러는 정서적으로 큰 인상을 남긴 선수이기도 하지만 프로 농구선수로서 매우 높은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3점슛 부문에 있어 밀러는 NBA 역사에서 정말 크나큰 선구자였다. 때문에 명예의 전당에 들을 수 있었고 위대한 선수로서 기억될 수 있다.

  • [NBA 현미경] 포틀랜드와 휴스턴의 큰 별, 드렉슬러

두 팀에서의 커리어를 통해 두 곳 모두에서 영구 결번을 거친 NBA 선수들은 매우 적다. 한 팀에서도 이루기 힘든 일이다.

현재까지 이와 같은 영예를 누린 선수들은 10명을 조금 넘는다. 이 대열엔 윌트 체임벌린, 오스카 로버트슨, 줄리어스 어빙, 모제스 말론, 카림 압둘자바, 찰스 바클리, 샤킬 오닐 등의 당대 거물급 스타들이 속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도 있다. 등번호 22번이 찍힌 드렉슬러의 유니폼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휴스턴 로켓츠의 홈구장 두 곳에 모두 걸려있다.

드렉슬러는 1983~84시즌부터 1997~98시즌까지 NBA에서 총 15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앞선 12시즌 반을 포틀랜드에서 보냈고 뒤쪽의 4시즌 반을 휴스턴에서 보냈다. 이 두 구단 모두에서 드렉슬러는 큰 업적과 기록들을 남겼다.

이에 드렉슬러가 남긴 NBA 업적과 기록들을 두 팀에 나눠 비교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뛰어난 운동능력에 유연성을 겸비한 드렉슬러의 경기력은 큰 인기를 끌만한 멋진 플레이들로 연결됐다. ⓒAFPBBNews = News1

▶선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포틀랜드

1983년 NBA 드래프트에서 14순위로 뽑혔던 드렉슬러는 1년차 1983~84시즌에서 82경기 모두 출전했지만 선발출전은 3경기에 그쳤다. 출전시간도 평균 17.2분에 그치며 평균 7.7득점을 남겼다.

하지만 2년차부터 드렉슬러는 높은 기량을 선보였고 출전시간이 평균 31.9분으로 대폭 증가해 17.2득점을 남겼다. 그리고 4년차 시즌부터 온전히 전 시즌을 선발출전하며 커리어 처음으로 평균 20득점을 넘긴 21.7득점을 남겼다.

커리어 최고 평균 득점 27.2득점이 6년차 1988~89시즌이었다. 1987~88시즌부터 평균 27득점으로 포틀랜드의 확실한 득점 선두로 올라선 드렉슬러는 이후 1993~94시즌(19.2득점)을 제외하고 매번 포틀랜드의 최고 득점자로서 앞장섰다.

퍼스트 팀 1회를 포함 드렉슬러가 남긴 시즌 올NBA팀 5회 선정 이력 모두 포틀랜드 시절을 거쳤다. 다만 올NBA 써드 팀에 선정됐던 1994~95시즌은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돼 포틀랜드에서 41경기, 휴스턴에서 35경기를 치렀다.

NBA 역사에서 전체 경력 동안 올스타 선정 두 자릿수를 넘긴 선수는 불과 39명이다. 총 10회 선정으로 이 대열에 속한 드렉슬러는 포틀랜드에서 8시즌 동안 올스타에 선정됐다. 1987~88시즌부터 1993~94시즌까지는 7시즌 연속이다.

기여도 측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시즌도 포틀랜드 시즌이다. 1991~92시즌 76경기 평균 36.2분을 출전했던 드렉슬러는 25득점 6.7어시스트 6.6리바운드 1.8스틸 0.9블록을 남기며 MVP 투표 점수에서 마이클 조던(900점) 다음의 2위(561점) 점수를 남겼다.

▶휴스턴의 2연속 우승, 드렉슬러의 첫 우승

휴스턴은 1967~68시즌부터 시작된 52시즌의 구단 역사에서 2회의 우승을 남겼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우승이 1993~94시즌 및 1994~95시즌 2시즌 연속 우승이었다.

지난 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2시즌 연속 우승이 나오기 전까지 NBA 역사에는 2시즌 이상의 연속 우승을 거둬본 구단이 총 6개 구단뿐이었다. 보스턴 셀틱스, LA 레이커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카고 불스, 마이애미 히트, 그리고 휴스턴이다.

휴스턴이 이 같은 위업을 남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93~94시즌 휴스턴은 지난 2017~18시즌 65승17패(승률 79.3%)가 나오기 전까지의 최고 성적 58승24패(승률 70.7%)를 거뒀던 팀이다. 이에 비해 1994~95시즌에는 47승35패(승률 57.3%)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드렉슬러가 트레이드로 들어오기 전까지 30승17패(승률 63.8%)를 거두던 팀이 드렉슬러가 참여한 35경기에서 17승18패를 거뒀으니 기대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6번 시드로서 참여한 플레이오프에서 휴스턴은 기적과 같은 일을 냈다. 서부 컨퍼런스 3번 시드 유타 재즈, 2번 시드 피닉스 선즈, 1번 시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차례로 모두 꺾었다. 그리고 NBA 파이널에서는 리그 공동 4번째 승률(69.5%)을 달성했던 올랜도 매직을 4연승 스윕으로 꺾었다.

즉 휴스턴은 네 시리즈 모두 홈코트 우위 없이 치렀음에도 매번 승리했다. 여기에는 물론 드렉슬러의 휴스턴 대학 시절 동료이기도 했던 센터 하킴 올라주원의 힘이 컸다. 플레이오프 평균 33득점 10.3리바운드 4.5어시스트 1.2스틸 2.8블록이란 괴물 기록을 남겼다.

  • 드렉슬러의 커리어 첫 우승에 있어 동료 올라주원의 존재는 정말 컸다. ⓒAFPBBNews = News1

그래도 드렉슬러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플레이오프 평균 20.5득점 7리바운드 5어시스트 1.5스틸 0.7블록을 남기며 다방면의 활약을 펼쳤다.

NBA 파이널에서는 윙 포지션으로서 평균 21.5득점 9.5리바운드 6.8어시스트 1스틸 0.3블록으로 더욱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특히 4경기 동안 총 13개의 공격 리바운드는 올랜도 쪽 호레이스 그랜트의 19개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득점원을 넘어선 기여도

드렉슬러의 별명은 대학시절 붙여졌던 ‘글라이드(Glide)’다. 미끄러지는 듯한 동작 또는 활공을 뜻하는 이 별명은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기도 했고 뛰어난 운동능력을 토대로 멋지게 득점 마무리를 했던 드렉슬러의 움직임에서 나오기도 했다.

실제 드렉슬러는 신인이었던 1983~84시즌부터 1988~89시즌까지 1985~86시즌만을 제외하고 올스타 슬램덩크 대회에 매번 출전했다. 다만 우승 경력은 없고 1988~89시즌 결승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다.

빼어난 운동능력에 더해 점프슛에도 좋은 기량을 선보였다. 뛰어난 골밑 마무리 및 점프슛 능력을 통해 커리어 15시즌 중 8시즌에 걸쳐 2점 야투율 50%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드렉슬러를 득점원에 한정시키기엔 모자란 감이 크다. 뛰어난 운동능력과 감각을 지닌 201cm 윙 포지션에겐 득점 외의 여러 부문에 걸쳐 기여할 길들이 열려 있다. 드렉슬러는 커리어 전체를 모두 슈팅 가드로서 나섰지만 그 포지션을 뛰어 넘는 다방면의 숫자들을 기록했다.

1988~89시즌 최고 평균 7.9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던 드렉슬러는 공격 리바운드 3.7개를 기록했었다. NBA 역사에서 201cm 신장 이하 선수들 중 공격 리바운드 평균 3.7개 이상을 기록했던 선수들은 주로 찰스 바클리나 데니스 로드먼처럼 작은 사이즈의 파워 포워드들이었다. 가드 포지션은 드렉슬러뿐이다.

그리고 어시스트도 1985~86시즌 평균 8어시스트를 필두로 12시즌에 걸쳐 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1980,90년대 206cm 매직 존슨이나 201cm 레지 티어스 및 앤퍼니 하더웨이 같은 장신 포인트 가드들이 있긴 했지만 드렉슬러도 래리 버드나 스카티 피펜처럼 평균 5어시스트 이상 시즌들을 다수 남긴 윙 포지션이었다.

올디펜시브 팀에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을 정도로 드렉슬러의 수비 진영 기여도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드렉슬러가 남긴 스틸 숫자만큼은 역대 정상권 순위다. 드렉슬러의 통산 2207스틸은 역대 7위다. 그리고 커리어 평균 2.03스틸은 역대 11위다. 현역 중 드렉슬러 앞에 있는 선수는 크리스 폴(2.25스틸)뿐이다.

  • 현재 드렉슬러는 3대3 농구 리그인 빅3 리그의 커미셔너로서 활동 중이기도 하다. ⓒAFPBBNews = News1

▶포틀랜드 구단 최고의 숫자들

드렉슬러가 이끌던 당시 포틀랜드는 2회의 NBA 파이널 진출을 이뤘지만 1989~90시즌 디트로이트에게 1승4패로, 1991~92시즌 시카고에게 2승4패로 밀리며 준우승에 멈췄다. 구단 역사 총 3회의 NBA 파이널 진출 중 1976~77시즌에만 우승을 거뒀다.

때문에 드렉슬러의 위치가 드높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틀랜드 구단 역사에서 드렉슬러는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 숫자들을 남겼다.

48시즌의 구단 역사 동안 포틀랜드에서 오랜 시즌을 보낸 선수들은 적었다. 12시즌의 드렉슬러가 가장 오래 보냈고 그 외 10시즌을 넘긴 선수는 제롬 커시(11시즌)와 테리 포터(10시즌)뿐이다. 높은 소속감을 보이고 있는 현역 스타 대미안 릴라드는 이제 6시즌을 보낸 터다.

이를 통해 드렉슬러는 역대 포틀랜드 선수들 중 1위의 통산 867경기 2만9496분 출전, 1만8040득점 1795스틸을 남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다재다능함을 뽐내듯이 통산 5339리바운드는 2위, 4933어시스트도 2위, 594블록은 7위다.

▶당대 손꼽히는 스타들 중 한 명으로서 기억되다

이로서 드렉슬러는 포틀랜드의 역대 최고의 구단 스타로 꼽을 만하지만 본인 인생에 있어 휴스턴의 의미가 크다. 첫 우승을 맞이한 소속팀을 넘어 연고 도시 휴스턴이 실질적인 고향이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줄곧 휴스턴에서 보냈다.

은퇴 직후 2시즌 동안 잠깐이나마 모교 휴스턴 대학의 감독을 맡기까지 했다. 그리고 현재는 휴스턴에서 9시즌을 보냈던 맷 불러드와 함께 휴스턴 지역 중계 해설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1962년생으로 36세에 은퇴한 1997~98시즌 평균 18.4득점을 올렸을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커리어 평균 20.4득점의 드렉슬러는 휴스턴에서의 4.5시즌 동안 평균 19득점을 올렸다.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와 악동 디트로이트를 거쳐 농구 황제의 시카고에게 막혔던 드렉슬러지만 15시즌 동안 당대의 큰 스타로서 인정받을 큰 기록들을 남겼다. 그리고 전설로 남은 동료 올라주원과 함께 하며 우승도 맛봤다. 여기에 더해 1992년 올림픽에서 원조 드림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렇게 드렉슬러는 1996년 NBA가 선정했던 50년 역사 동안 가장 위대한 NBA 선수 50인 안에 들 수 있었다. 즉 큰 별들이 등장했던 1980,90년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가 드렉슬러였다.

  • [NBA 현미경] 21세기 이전 최고의 파워 포워드, 말론

NBA 역사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꼽을 선수로 은퇴 선수들인 칼 말론과 팀 던컨이 항상 거론된다. 그리고 둘 사이의 경쟁에서 대개 던컨에게 무게중심이 쏠리는 경향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충분히 말론을 꼽을 수 있다. 던컨과 달리 커리어 전체 동안 계속해서 파워 포워드로서 뛰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1세기가 오기 전까지 보자면 단연 역사 최고의 파워 포워드는 말론이란 사실이다. 19시즌 커리어 51.6% 야투율 평균 25득점 10.1리바운드라는 드높은 기록을 통해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말론의 드높았던 위치를 요약해주는 숫자가 또 있다. 3년차부터 16년차까지 14시즌 연속 올NBA팀에 선정됐던 말론은 퍼스트 팀에만 무려 11회 선정됐었다. 즉 1988~89시즌부터 1998~99시즌까지 줄곧 리그 최고의 포워드 2명 안에 들었다.

이 기록은 현역 르브론 제임스의 지난 시즌까지 12회 다음으로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역대 공동 2번째로 많은 올NBA 퍼스트 팀 선정 횟수다.

말론이 이와 같은 위업을 쌓을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힘을 통해 얼마나 큰 숫자의 탑을 쌓았던 것일까.

  • 던컨과 같은 시대를 뛰기도 했던 말론은 코트 위의 모습으로 절대 밀리지 않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AFPBBNews = News1

▶스탁턴과 기록한 역대 최고의 출석 듀오

유타 재즈는 1984년 NBA 드래프트에서 존 스탁턴을 전체 16순위로 뽑은 뒤 1985년엔 말론을 13순위로 뽑았다. 이렇게 해서 1985~86시즌부터 시작된 스탁턴-말론 듀오는 2002~03시즌까지 18시즌 동안 계속해서 유타의 심장으로서 존재했다.

이들이 함께 플레이한 1412경기는 NBA 역사 중 동일 팀에서 두 선수가 같이 플레이한 가장 많은 경기 수다. 일찍부터 오랜 시즌을 함께 한 것도 있지만 양 선수 모두 결장이 매우 적었다. 유타 커리어 동안 말론은 불과 9경기, 스탁턴은 22경기만을 결장했다.

또한 스탁턴-말론 듀오는 NBA역사에서 2위와 큰 차이로 가장 많은 승리를 챙겼다. 스탁턴-말론이 906승이라면 2위 로버트 패리쉬-케빈 맥헤일은 656승, 3위 빌 러셀-샘 존스는 618승이다.

스탁턴의 역대 통산 1위 1만5806어시스트는 깨질 가능성이 희박한 기록으로 꼽힌다. 그리고 말론은 카람 압둘자바의 3만8387득점에 이어 역대 통산 2위의 3만6928득점을 쌓았다. 이 듀오가 각자 이런 큰 탑을 쌓은 데에는 각자 19시즌이란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있지만 능력 자체가 역사에서 손꼽히기 때문이다.

▶픽앤롤 득점에 모범적인 말론의 능력

현재 NBA에서 픽앤롤은 전혀 특이점이 없는, 모든 팀들에게 기본적인 전술이 된 움직임이다. 하지만 픽앤롤이 리그에서 쓰이기 시작할 무렵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선수들이 스탁턴-말론 듀오다.

206cm 신장 113kg 체중 말론은 완전한 근육질 몸매를 통해 누구 못지않은 몸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이런 몸으로 서는 스크린에다 말론은 뛰어난 주력을 보였다. 때문에 스크린 후 효과적으로 빈 공간을 잘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픽앤롤 전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이 말론의 점프슛 능력이었다. 스크린 후 본인의 수비가 멀어졌을 때 던지는 말론의 미드레인지 슈팅은 상대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줬다.

실제 말론의 슈팅 지점은 두 구역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바스켓 주변과 자유투 라인 근처의 중거리 지점이다. 말론의 야투 시도 중 거의 대부분이 이 구역들에서 나왔다.

그리고 말론은 볼을 가졌을 때 본인의 전진이 상대 수비의 몸에 의해 멈췄을 때도 좋은 마무리 실력을 보여줬다. 부드러운 손끝 터치를 통해 수비수 머리 위로 던질 때도 성공시키곤 했다.

사실 말론의 시대에만 해도 최근처럼 픽앤롤이 기본적으로 사용되진 못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말론이 역대 통산 2위의 득점을 남길 수 있던 데에는 강인한 체격과 부드러운 손의 조합이 큰 역할을 했다.

  • 바스켓 근처에서 말론은 꺼낼 수 있는 모든 득점 기술들을 지니고 있었다. ⓒAFPBBNews = News1

▶기록이 된 자유투 획득 능력

말론의 별명 우편배달부는 그의 꾸준한 생산성에서 비롯됐다. 실제 말론은 8년차 1992~93시즌부터 13년차 1997~98시즌까지의 모든 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시즌 평균 득점을 봐도 2년차 1986~87시즌(21.7득점)부터 18년차 2002~03시즌(20.6득점)까지 17시즌 연속 20득점을 넘겼다. 평균 25득점 이상으로는 3년차부터 13년차까지 11시즌 연속이다.

이렇게 꾸준히 높은 대역의 득점 생산력을 보인 데에는 앞서 언급한 말론 자체의 뛰어난 야투 해결 능력이 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꾸준한 고득점 행진을 잇기 힘들다. 자유투가 더해져야 한다.

자유투는 득점 효율성에서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말론은 이 자유투 활용에 있어 모범이 됐다. 우선 놀라운 성장을 보여줬다. 커리어 자유투 성공률 74.2%의 말론은 신인 때 불과 48.1%에 그쳤다. 그런데 2년차 59.8%를 거쳐 3년차 70.0%, 그리고 4년차에 76.6%까지 올렸다.

그리고 경기에서 얻어내는 자유투 자체가 많다. 커리어 최고 경기 당 자유투 시도 11.5회를 필두로 말론은 10회 이상의 자유투 시도 시즌을 6시즌 가졌다. NBA 역사에서 말론보다 평균 10회 이상 자유투 시도 시즌을 많이 가진 선수는 윌트 체임벌린(11시즌)과 샤킬 오닐(8시즌)뿐이다.

7시즌에 걸쳐 말론은 자유투 시도 리그 1위에 올랐고 자유투 성공에선 9시즌에 걸쳐 1위에 올랐다. 말론의 자유투 정확도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통산 자유투 시도(1만3188회)에서도, 통산 자유투 성공(9787개)에서도, 말론은 양 부문 역대 1위에 올라 있다. 각 부문 2위와는 각각 1326회와 1256개의 넉넉한 차이들이다.

▶강인한 체격과 영악함을 통한 수비

최근 NBA 빅맨들에 대한 수비 진영 평가 잣대는 얼마나 가드와 윙 포지션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빅맨들이 골밑 몸싸움을 통해 득점을 올리는 시대는 아니다.

반면 말론이 있던 시대에서는 픽앤롤을 통한 스위치 수비가 빈번히 일어나지도 않았고 뛰어난 득점력을 선보인 빅맨들도 많았다. 때문에 빅맨에게는 얼마나 자신이 맡는 동 포지션을 잘 막느냐가 관건이었다.

여기에서 말론은 큰 힘을 보여줬다. 딱히 상대적으로 큰 신장은 아니지만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체격을 지녔고 상대가 힘으로 승부할 때 교활한 움직임을 통해 실책을 끌어내곤 했다. 스텝을 꼬이게 만들어 트래블링 또는 공격자 반칙 등의 턴오버를 유도했다.

그리고 턴오버를 끌어내는 방법이 또 있었다. 커리어 최저가 평균 1.1스틸일 정도로 말론은 꾸준한 스틸을 기록지에 남겼다. 커리어 평균 1.4스틸을 남긴 말론은 통산 2085스틸을 남기며 역대 10위에 올랐다.

말론은 팔이 유난히 길지도 않았고 붕붕 날아다니는 고공 플레이도 잘 보여주지 않았다. 이 같은 모습은 평균 1블록 이상의 시즌이 4시즌에 그친 것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는 말론의 방식이 충분히 통할 수 있었다.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3회에 세컨드 팀 1회 선정이 이를 증명한다.

  • 지저분한 플레이 순위에서 손꼽히는 말론은 상대 선수들에게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AFPBBNews = News1

▶눈앞에서 놓쳤던 우승들

1974~75시즌 뉴올리언스 연고를 시작으로 유타의 44시즌 역사에서 아직 우승은 없다. 가장 높이 올라갔던 적이 스탁턴과 말론이 있던 1996~97시즌 및 1997~98시즌의 NBA 파이널 진출이었다. 하지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의 2번째 3연속 우승에 배경이 되고 말았다.

두 번의 파이널 시리즈에서 말론은 시즌 성과보다 떨어지는 결과를 냈다. 수비 강도가 올라가는 플레이오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원정에서 파이널을 시작한 1996~97시즌은 55.0% 야투율 평균 27.4득점 대비 44.3% 야투율 23.8득점이었다. 그리고 홈에서 시작한 1997~98시즌은 53.1% 야투율 평균 27.4득점 대비 50.4% 야투율 25득점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시즌에 비해 유타의 정교한 팀 공격의 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모습의 반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말론이 홀로 해결해야 하는 모습이 많기도 했다. 말론의 해결 능력이 좋기는 하지만 결국 확률에 기대야 하는 슈팅들이 주를 이뤘다.

그래도 1997~98시즌 파이널 5,6차전에서 말론은 연속으로 30득점을 넘겼다. 하지만 6차전 마지막 즈음 공격에서 조던에게 볼을 빼앗기며 앞서던 경기를 뒤집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이널에서 쓴맛을 본 말론은 2003~04시즌 최소 금액만을 받는 조건으로 LA 레이커스에 합류했다. 당시 오닐-브라이언트 듀오에 말론과 개리 페이튼까지 합류하며 레이커스는 우승 가능성이 정말 높아 보였다.

하지만 커리어 최초로 말론은 부상에 시달리는 시즌을 보냈고 파이널에서도 발목 부상을 당하며 제몫을 못했다. 레이커스 팀 자체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결국 우승에 실패했다. 당시 파이널에서 말론은 최고 9득점, 야투율 33.3% 평균 5득점에 그치는 수모를 겪었다.

▶우승 외에 모든 것을 이루다

이렇게 NBA 파이널들은 말론에게 아픈 기억들로만 남았다. 때문에 말론의 커리어 평가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론이 커리어 전체 동안 보여줬던 플레이 모습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돋보이지 않는 신장임에도 공수 양 진영에서 말론은 정말 큰 선수처럼 보였다. 신인 시즌과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숫자 측면에서 정말 꾸준하게 높은 대역의 곡선을 그렸다.

1996~97시즌 및 1998~99시즌 MVP 수상을 통해 당대 최고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를 통해 명예의 전당 헌액과 1996년 50주년 NBA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50인 선정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NBA 역대 통산 득점 2위, 통산 1만4968리바운드로 7위, 통산 스틸 10위, 통산 자유투 성공 1위, 이를 통해 말론은 유타를 넘어 NBA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선수들 대열에 속하는 동시에 최고의 파워 포워드들 중 한명이 될 수 있다.

  • [NBA 현미경] 페이튼, 공수 양 진영에서 크게 빛난 가드

1990년대를 모두 거친 포인트 가드들 중 개리 페이튼은 큰 별로서 빛났다. 물론 존 스탁턴이란 큰 별도 있었지만 페이튼도 NBA 팬들의 큰 인기를 끌 만큼 코트 위 활약이 대단했다.

페이튼을 두고 당대 최고라 일컬었던 목소리도 있었다. 1970대에 큰 활약을 펼치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던 게일 굿리치는 2000년 무렵 전성기의 페이튼을 두고 ‘역대 누구 못지않게 완벽한 가드일 것’이라 칭했다.

이 같은 칭송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튼이 공격 및 수비 양 진영에서 모두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굿리치와 비슷한 시기 스포팅 뉴스지에서는 페이튼을 두고 ‘역대 최고의 공수 겸장 포인트 가드’가 되는 중이라 일컬었다.

그렇다면 페이튼이 어떤 숫자와 업적들을 남겼기에 이런 극찬을 받은 것일까. 일단 명료한 하나의 업적이 있다. 역대 어느 포인트 가드도 이뤄보지 못한 일이다.

  • 명예의 전당 선배 페이튼은 후배 제이슨 키드와 오클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고 NBA에서의 공수 양 진영 플레이 스타일도 서로 비슷한 맥락을 보여줬다. ⓒAFPBBNews = News1

▶역대 유일한 올해의 수비수 포인트 가드

1982~83시즌부터 시작된 올해의 수비수(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선정에서 거의 대부분이 빅맨들의 차지였다. 특히 센터의 독점에 가까웠다. 그나마 빅맨이 아니면 가끔가다 윙 포지션에서 차지했다.

포인트 가드는 페이튼이 유일했다. 페이튼이 선정됐던 1995~96시즌을 앞뒤로 7시즌씩 센터들이 선정됐음을 보면 더욱 놀랍다. 즉 15시즌 기간 중 유일하게 센터가 아닌 선수가, 그것도 포인트 가드가 수상했다.

포인트 가드가 올해의 수비수가 되기 힘든 이유는 팀에서 가장 수비에 영향력이 작은 포지션이 포인트 가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센터가 곧잘 선정되는 이유는 가장 영향력이 큰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페이튼은 압도적인 투표를 받으며 선정됐다. 총 113표 중 페이튼에게 56표가 갔고 2위 스카티 피펜에게 15표, 3위 디켐베 무톰보에게 11표가 갔다.

그리고 올해의 수비수 수상을 거둔 시즌은 물론이고 1993~94시즌부터 2001~02시즌까지 9시즌 연속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됐다. 이토록 수비에 있어 페이튼은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어떤 선수였기에 이런 것일까.

▶손, 집중력, 투쟁심, 감각, 몸 단련

페이튼의 별명이 장갑을 뜻하는 글로브(Glove)였고 수비력에서 나온 별명이다. 그렇다고 커리어 평균 1.8스틸로, 역대 4위의 통산 2445스틸로 페이튼의 수비력을 정리하기엔 한참 모자라다.

뛰어난 수비수의 자질을 두고 다음의 세 항목을 고려해야 한다. 빠른 손과 집중력으로 상대의 볼에 적극 간섭할 수 있을 것. 탄탄한 몸과 빠른 발을 통해 상대가 슛하기 까다롭게 만들 것. 볼이 없는 구역에 있을 경우에도 팀 전체의 수비에 영향력을 미칠 것.

페이튼은 이 세 항목의 칸 모두에 체크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당대 손꼽히는 지저분한 입담의 달인으로서 상대 선수를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게 만드는 선수였다. 그리고 이런 페이튼의 수비 자질이 가장 요약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의 맞대결이었다.

▶글자그대로 조던과의 맞대결

1995~96시즌 NBA 파이널은 양 컨퍼런스 1번 시드끼리의, 리그 1,2위끼리의 대결이었다. 2015~16시즌 전까지 NBA 역대 최고 성적 72승10패(승률 87.8%)의 시카고 불스, 그리고 64승18패(승률 78.0%) 시애틀이 올라갔다.

바스켓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100포제션 당 실점의 수비지표에서 당시 시카고는 1위(101.8), 시애틀은 2위(102.1)에 올랐을 정도로 수비 강호끼리의 대결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드 쪽의 수비 배정이 흥미로웠다.

슈팅 가드 조던이 포인트 가드 페이튼을, 그리고 페이튼이 조던을, 서로 맞대결을 이루는 수비 배정이었다. 이런 크로스매치가 당시엔 그렇게 흔한 그림이 아니었다. 특히나 198cm 신장을 지닌 당대 최고의 공격수에게 193cm 신장 가드를 붙이는 것이 무리수로 보일 수도 있다.

  • 당시 조던은 자신의 성과 하락에 대해 페이튼의 수비 탓이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페이튼의 경기 움직임은 증거로 남았다. ⓒAFPBBNews = News1

하지만 해당 시즌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됐던 페이튼은 그 수비력으로 조던을 힘들게 만들었다. 조던의 커리어 파이널 경기들 중 가장 힘든 경기도 만들었고 가장 힘든 파이널 시리즈로도 만들었다.

물론 시리즈는 시카고가 4승2패로 승리했고 3차전에선 조던의 36득점 활약도 나왔다. 하지만 조던 커리어 파이널 경기들 중 최악의 경기 6차전도 있었다. 6차전 진흙탕 경기에서 87-75로 승리해 결국 우승 및 파이널 MVP 트로피를 들었지만 경기 중 조던은 26.3% 야투율로 22득점을 올렸다.

22득점은 조던의 파이널 경기들 중 1996~97시즌 NBA 파이널 4차전과 공동으로 가장 낮은 득점이다. 그리고 26.3% 야투율은 조던 파이널 경기들 중 최저다. 여기에다 2번째로 가장 낮은 31.6% 야투율도, 7번째로 낮은 야투율 40.9%도 시애틀 상대 시리즈에서 나왔었다.

▶뛰어난 인사이드 득점

통산 2만1813득점으로 NBA 역대 32위에 올라있는 페이튼은 바스켓 근처를 주로 공략하는 공격수였다. 바꿔 말하자면 외곽에서 무서운 슈터는 아니었다. 페인트 구역 바깥에서 페이튼의 슈팅 정확도는 리그 평균을 밑돌곤 했다.

하지만 돌파와 포스트업을 통해 바스켓 주변에서 좋은 효과를 봤다. 1996~97시즌의 경우 바스켓으로부터 8피트(약 2.4m) 안 야투에서 페이튼은 경기 당 리그 3번째(5.9개)로 많은 야투를 성공시켰다.

샤킬 오닐(9.5개)과 크리스 웨버(6개) 다음이 페이튼이었다. 동료 파워 포워드 숀 켐프의 5.3개보다도 많았다. 성공률도 페이튼(57.8%)이 켐프(56.3%)보다 살짝 높았다. 수비에서도 공격에서도 페이튼의 탄탄한 몸은 큰 힘이었다.

▶전성기를 모두 보낸 시애틀에서의 소닉 붐

1990년대 시애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들로는 페이튼과 켐프였다. 그리고 그 듀오에게는 소닉 붐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초음속 돌입 시의 폭발음을 뜻하는 말처럼 이 듀오는 멋진 폭발력을 보여줬다.

빠르고 날렵하던 시절의 켐프는 페이튼의 패스를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켐프의 커리어 최고 득점 시즌은 1998~99시즌(20.5득점)에 나왔지만 득점 효율성까지 감안한 최고의 시즌들은 1996~97시즌까지 페이튼과 함께했던 시애틀 시절이었다.

한편 페이튼은 17시즌 커리어 중 13시즌 반을 시애틀에서 보냈다. 1968년생으로서 35세인 2002~03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 무렵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됐다. 시애틀에서 페이튼은 평균 18.2득점 7.4어시스트 4.2리바운드 2.1스틸의 훌륭한 기록을 남기며 떠났다.

▶시애틀 이후의 침체기

시애틀 다음의 커리어 동안 페이튼은 이미 농구선수로서 많은 나이였기 때문에 큰 활약을 보여주긴 힘들었다. 그래도 트레이드로 건너 간 밀워키에서 평균 19.6득점 7.4어시스트, 플레이오프에서도 18.5득점 8.7어시스트로 활약했지만 1라운드에서 멈춰야 했다.

그리고 가장 아쉬웠던 시간이 LA 레이커스에서 보냈던 2003~04시즌이었다.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스타 듀오에 칼 말론과 페이튼까지 합류했기 때문에 기대치가 대단했었다.

하지만 페이튼은 포인트 가드가 나서기 힘든 팀 체계 속에서 큰 침체를 겪었다. 플레이오프 동안 야투율 36.6% 평균 7.8득점은 당시 페이튼을 알고 있던 NBA 팬들에게 당혹스런 숫자였다.

  • 이제 3대3 농구의 빅3 리그 팀 감독이 된 페이튼의 입씨름 상대는 심판이 됐다. ⓒAFPBBNews = News1

▶백전노장의 한 방으로 기여한 우승

레이커스 후 보스턴 셀틱스에서 한 시즌을 보낸 페이튼은 2005~06시즌 마이애미 히트와 최소 금액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래도 시즌 동안 평균 28.5분 출전으로 무시 못 할 기여를 했다. 그리고 결정적 활약이 플레이오프, NBA 파이널에서 나왔다.

사실 당시 플레이오프 평균 5.8득점은 매우 적은 기여로 볼 수 있다. 파이널 동안엔 불과 2.7득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한 방들을 터뜨려주며 기적과 같은 팀의 시리즈 승리에 일조했다.

우선 댈러스 매버릭스 상대로 2연패로 몰리며 맞이했던 3차전에서 종료 9초전 미드레인지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동점인 경기를 마이애미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경기 중 유일한 야투 시도를 절박한 상황에서 성공시켰다.

그리고 2승2패로 맞이했던 5차전에서는 자신의 유일했던 야투 성공이 팀의 마지막 야투 성공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종료 29.8초를 남기고 1점차로 앞선 마이애미는 이후 2점을 주고받으며 1점차로 승리했다.

사실 당시 마이애미가 0승2패에서 4승2패로 역전을 거뒀던 데에는 3년차 드웨인 웨이드의 놀라운 대활약이 아주 큰 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시리즈는 페이튼이라는 베테랑의 품격도 볼 수 있던 기회였다. 늦었지만 본인의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을 맞이할 충분한 자격을 보여줬다.

▶길이 기억될 스타

2013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된 페이튼은 돋보였던 대학시절 농구에 더해 올해의 수비수와 더불어 각각 9회의 올스타 선정 및 올NBA 팀 선정에 빛나는 NBA 커리어의 힘을 크게 받았다. 여기에 1996년 및 2000년 올림픽 금메달도 더해졌다.

이렇게 굵직한 커리어를 보낸 페이튼은 또한 독보적인 캐릭터로서도 인기를 끌었다. 쉬지 않고 떠드는 피곤한 상대방이었다. 하지만 결국 스타덤에 올라서게 만든 것은 공수 양 진영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플레이였다. 특히 수비 진영에서 남긴 페이튼의 업적은 다른 포인트 가드가 따라잡기 힘든 위업으로 보인다.

  • [NBA 현미경] 켐프, 호쾌함으로 코트를 지배했던 빅맨

숀 켐프를 기억하는 NBA 팬들에게 그의 외모는 꽤 간극이 큰 차이로 기억될 것이다. 날렵했던 때의 모습으로도 기억될 수 있고, 거대한 몸집의 모습으로도 기억될 수 있다.

물론 켐프의 전성기는 날렵했던 때의,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몸담았던 8년차 1995~97시즌까지로 볼 수 있다. 본인의 2년차 시즌부터 함께한 스타 포인트 가드 개리 페이튼과 함께 NBA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플레이들을 숱하게 남겼다.

특히 호쾌한 움직임을 통해 시원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은 켐프의 위상을 한껏 올려줬다. 2년차 시즌 후부터 붙은 켐프의 별명이 ‘레인맨(Reign Man)’, 경기를 지배하는 자였다.

  • 켐프의 덩크는 실전 덩크에 있어 최근까지도 역대 최고들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AFPBBNews = News1

하지만 아쉽게도 시애틀 이후의 모습은 자신의 별명과는 멀어진 경향이 컸다. 불어난 체중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1969년생으로서 14년차 2002~03시즌, 34세에 마친 NBA 커리어가 길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비교적 짧고 굵게 빛났던 스타이기에 팬들은 여러 갈래 감정의 기억과 추억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의 [NBA현미경]은 켐프가 리그의 대표적인 스타로 올라섰던 과정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스타로서 그가 남겼던 숫자들에 대한 분석이다.

▶뛰어난 운동능력 토대의 빠른 성장

켄터키 대학 입학 후 절도 관련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시즌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1989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켐프는 17순위로 호명 받으며 시애틀에 입단한다.

켐프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유망주로서 이름을 알렸었다. 208cm의 장신에 더해진 뛰어난 운동능력은 큰 기대를 걸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술 측면에선 NBA에서 통할 만큼이 아니었다. 신인 시즌 81경기 출전 중 1경기 제외 모두 벤치에서 나오며 평균 13.8분의 시간만 받았다.

그래도 운동능력을 통한 플레이만큼은 인정을 받았다. 신인시즌부터 5년차 1993~94시즌까지 1992~93시즌만을 제외하고 4시즌 모두 올스타 슬램덩크 대회에 출전했다. 신인 때 8명 중 4위에 올랐으며 2년차 때 2라운드까지 줄곧 1위에 오르며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챔피언은 되지 못했다.

플레이가 다듬어져 주력 인원에 참여한 시기는 빨랐다. 2년차에 평균 30.1분을 기록하며 15득점 8.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4년차에는 팀에서 가장 많은 평균 33.1분을 기록했다.

▶활약 모습에 비하면 작은 덩치의 숫자

한창 때가 시애틀 시절이라 했지만 켐프의 커리어 최고 평균 득점 시즌은 이적 후에 나왔다. 시애틀에서 평균 20득점을 넘겨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최고가 1995~96시즌의 평균 19.6득점이었다.

비슷한 사이즈에서 최고로 꼽히는 운동능력을 통해 빠른 움직임과 고공 플레이를 선보인 켐프의 모습은 훗날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또는 그 뒤의 블레이크 그리핀을 떠올릴 수도 있다.

화려한 드리블 기술은 없지만 외곽에서부터 속도를 붙이고 림으로 돌파할 때의 켐프를 막긴 힘들었다. 그리고 바스켓 근처에서 수비수가 곁에 있더라도 제치고 들어갈 유연성이 있었다. 여기에다 자신의 돌파를 의식해 수비가 떨어질 때면 미드레인지 점프슛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이런 뛰어난 득점 능력에도 엘리트 득점원의 숫자라 할 수 있는 평균 20득점에는 도달하기 힘들었다. 스타더마이어에게 커리어 30득점 이상이 109경기라면 켐프는 22경기였다. 왜 그랬을까.

우선 켐프의 출전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시애틀에서 가장 많이 뛴 1996~97시즌의 평균 34분은 해당 시즌 리그 81위였다. 29개 팀 규모 리그에서 분명 높은 순위는 아니다.

이렇게 출전시간이 적었던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파울 관리 부족이었다. 켐프는 2년차부터 11년차까지의 10시즌 동안 평균 4파울을 기록했다. 시즌별로 봐도 줄곧 평균 4파울 안팎이었다. 개인 파울 리그 1위에 올랐던 3시즌을 비롯해 3위 안에 들었던 적이 8시즌이다.

그리고 시애틀의 선수 구성이 켐프에게 집중적으로 공격기회가 돌아갈 배경이 아니었다. 페이튼에 더해 데틀레프 슈렘프, 허시 호킨스, 샘 퍼킨스 등 공격기회를 나눠가질 득점 위협들이 꽤 있었다.

켐프가 시애틀에서 왕성히 득점활동을 펼쳤던 2년차부터 8년차까지 코트 위에 있는 동안 팀의 공격기회를 사용한 지분이 24.6%였다. 이는 통상의 스타 에이스가 보여주는 지분보다 적은 편이다. 대개 25%를 넘기는 경향이다.

  • 1995~96시즌 NBA 파이널 동안 데니스 로드먼 등 강력한 수비 진영의 시카고 불스를 상대로 켐프는 아쉽지 않을 성과를 냈다. ⓒAFPBBNews = News1

▶커리어 최고의 1995~96시즌

켐프의 커리어에서 올NBA팀 선정은 1993~94시즌부터 1995~96시즌까지 세컨드 팀 연속 세 번이다. 그리고 이 중 숫자 측면에서 가장 좋았던 시즌이 1995~96시즌이라 할 수 있다. 평균 33.3분 동안 56.1%야투율로 19.6득점 11.4리바운드 2.2어시스트 1.2스틸 1.6블록을 남겼다.

소속팀 시애틀도 구단 역사 최고의 시즌을 맞이했다. 64승18패(승률 78.0%)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포함해도 구단 역사 최고 성적이다. 다만 동일 시즌에 2015~16시즌 전까지 NBA 역사 최고 성적 기록인 72승10패(승률 87.8%)의 시카고 불스가 있었다.

리그 1,2위를 기록한 시카고와 시애틀은 NBA 파이널에서 맞붙었다. 시리즈는 4승2패로 시카고가 가져가며 2번째 3연속 우승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파이널 시리즈 동안 켐프는 평균 40.3분을 뛰며 55.1% 야투율로 23.3득점 10리바운드 2.2어시스트 1.3스틸 2블록을 기록했다. 시즌 동안의 높았던 기록을 제대로 이은 셈이다.

▶시애틀을 떠난 후의 하락세

얼핏 숫자 측면에서 보자면 시애틀을 떠난 후 켐프가 하락세를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어난 것은 그저 양적인 숫자였지 질적인 숫자는 떨어졌다.

1996~97시즌을 마친 후 시애틀 구단과 마찰을 빚은 켐프는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이어진 두 시즌에서 각각 평균 18득점 및 20.5득점을 올렸다.

평균 20.5득점은 켐프의 NBA 커리어에서 최고이며 유일한 20득점 이상 기록이다. 하지만 시애틀에서 뛴 8시즌동안 야투율 52.1%를 기록했던 켐프는 1997~98시즌 44.5%, 1998~99시즌에 48.2%로 떨어졌다.

그리고 공식 기재 체중이 230파운드(약 104Kg)인 켐프는 단축 시즌으로 늦게 시작했던 1998~99시즌 때 280파운드(약 127kg) 체중으로 트레이닝캠프에 나타났다고 보도됐다. 당시 클리블랜드 농구단장이 실제로는 315파운드(약 143kg)까지 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클리블랜드 시절 켐프는 팬들에게 큰 낯설음을 줬을 만큼 체중 관리에 아쉬움을 보여줬다. ⓒAFPBBNews = News1

1998~99시즌은 평균 20득점을 넘기며 넘어갔지만 1999~00시즌은 확실한 하락세를 보여줬다. 야투율 41.7% 평균 17.8득점이었다. 그리고 2000~01시즌의 평균 6.5득점 이후로 줄곧 평균 6득점 근처를 맴돌았다.

숫자를 떠나 체중 조절에 실패한 이후 켐프의 플레이 모습은 시애틀 시절을 전혀 연상시킬 수 없었다. 상대 빅맨에게 감당하기 힘들었던 주력과 날렵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2002~03시즌 올랜도 매직에서의 한 시즌을 끝으로 NBA 커리어를 끝냈다.

▶아쉬운 커리어 마감이지만 확실한 시애틀의 큰 별

켐프에 대한 안 좋은 뉴스의 정점은 2005년 4월 마약류 소지 건으로 체포됐던 일이다. 그리고 2006년 7월에도 다시 마리화나 소지 건으로 체포됐다. 이 무렵에 NBA 복귀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 켐프에 대한 기억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게 된 기점이었다.

그래도 시애틀 팬들에게 켐프는 큰 추억으로 남겨져 있던 듯하다. 2006~07시즌 11월 5일(이하 현지시각) 경기의 하프타임 동안 시애틀은 40주년 기념 팀 16인 명단을 발표했다. 거스 윌리엄스 및 잭 시크마 등의 1978~79시즌 우승 주역들로 시작해 페이튼을 거쳐 레이 앨런 및 라샤드 루이스 등의 최근 스타들까지 시애틀의 역대 스타들이 모인 팀이었다. 당시 나왔던 선수들 중 가장 오래 박수를 받은 이가 켐프였다.

그만큼 켐프는 시애틀 팬들의 마음을 크게 끌었던 선수였다. 시애틀 팬들을 넘어 세계 NBA 팬들의 마음을 끌기도 한 큰 스타였다. 훗날의 행보에 아쉬움이 크지만 1990년대를 관통했던 스타들 중 꼭 거론해야 할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NBA 현미경] 여러 차례 리그 정상에 올랐던 제독, 로빈슨

신인상, 올해의 수비수, 득점왕, 시즌 MVP 등 리그 정상을 의미하는 위치들에 올랐던 선수가 제독, 데이비드 로빈슨이다.

NBA 역사 유일의 미국 해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로빈슨에게 붙여진 별명이 제독(The Admiral)이다. 이 별명답게 로빈슨은 여러 시즌에 걸쳐 소속팀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신인 때인 1989~90시즌부터 팀 내 선두에 있어 득점 및 블록 부문 7시즌 연속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로빈슨은 NBA 역사에 있어 보기 드문 숫자들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다 센터라는 포지션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역동적인 플레이 모습을 통해 큰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다만 팀의 지휘자로 있었을 때 높은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지 못했던 이력과 팀 던컨이 동료로 들어오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던 위치 등으로 인해 점수가 깎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8년차 1996~97시즌 등 부상으로 기량이 한 풀 꺾이기 전까지의 로빈슨은 NBA의 간판스타들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이에 로빈슨의 커리어를 돌아봄과 동시에 그가 이룩했던 높은 성과들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 24세로 비교적 늦게 시작한 로빈슨의 NBA 커리어지만 일찍이 리그 정상급의 기량을 펼쳐 보였다. ⓒAFPBBNews = News1

▶늦게 시작한 농구지만 빠르게 쌓은 명성

어려서부터 여러 종목에 두각을 나타냈던 로빈슨이지만 농구에 큰 흥미가 없었고 생애 첫 정규 농구부 경험이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2m 가까이 자란 장신으로 인해 학교에서 필요해서였다.

해군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아버지를 둔 로빈슨이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뒤 농구에 집중하게 된 계기도 너무나 큰 신장 때문이었다. 합격 통보 시점부터 신장 상한선 6피트 6인치(약 198cm)에서 2인치(약 5cm)를 넘겼지만 사관학교장의 용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7피트(약 213cm) 신장을 넘겨버린 로빈슨은 2학년 후 학교를 떠나기로 마음먹기까지 했다. 해군의 전투함선 등에는 너무나 큰 신장이 치명적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장과의 면담 후 해군장관이 기술관련 직렬에서 원래의 5년이 아닌 2년만을 복무해도 될 것을 허락했다.

한편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대학 감독들에게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던 로빈슨은 전미 대학농구에서 이름을 날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졸업반 때는 네이스미스 상과 존 우든 상, 대학 농구선수에게 있어 최고의 상 두 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1987년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호명됐다.

▶최고의 팀 성적 반전, 만장일치 신인상

1988~89시즌 21승61패(승률 25.6%)를 기록했던 샌안토니오는 로빈슨이 군복무를 마치고 입단한 1989~90시즌에 56승26패(승률 68.3%)를 기록했다. 당시까지 구단 역사 최악의 성적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반전을 이뤘다. 또한 35승이 더해진 것으로써, 당시까지 NBA 역사에서 최고의 성적 상승이었다.

재미있게도 그 기록은 또 샌안토니오가 경신했다. 1996~97시즌 20승을 기록했다가 부상에서 돌아온 로빈슨 그리고 던컨의 입단 덕에 1997~98시즌 또 56승을 이뤄 36승을 추가했다. 현재까지 최고 기록 주인은 2006~07시즌 24승에서 2007~08시즌 66승으로, 42승을 더했던 보스턴 셀틱스다.

81경기 평균 36.6분 출전, 24.3득점 12리바운드 2어시스트 1.7스틸 3.9블록을 기록한 로빈슨은 공수 양 진영에서 큰 견인력을 보여줬다. 물론 샌안토니오는 로빈슨 외에도 선수단 변경이 컸다. 하지만 로빈슨의 고효율의 득점과 강력한 수비는 가장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신인이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 2어시스트 1스틸 이상 동시에 작성한 경우는 로빈슨 포함 역대 4명뿐이다. 그리고 평균 3.9블록은 역대 21위의 기록이며 신인들 중에선 1985~86시즌 231cm 역대 최장신 마누트 볼의 5블록 다음 2위다.

극적인 성적 반전, 그리고 크나큰 숫자의 기록들을 통해 로빈슨은 만장일치 투표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NBA 역사에서 만장일치로 신인상을 수상했던 선수들로는 시간 순으로 랄프 샘슨, 로빈슨, 블레이크 그리핀, 대미안 릴라드, 칼앤써니 타운스, 이렇게 5명이다.

▶7시즌 연속 올디펜시브 팀, 1991~92시즌 올해의 수비수

빠른 발과 높은 도약 능력은 공수 양 진영 로빈슨의 활약에 큰 자산이었다. 특히 공식 기재 216cm의 장신까지 더해지며 로빈슨의 블록은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줄곧 만들어냈다.

로빈슨의 통산 2954블록은 후배 던컨의 3020블록 바로 다음 6위다. 그리고 커리어 평균 2.99블록은 역대 4위다. 1년차부터 7년차 1995~96시즌까지 평균 3.2블록에서 4.5블록 사이의 대역을 형성했다.

그리고 커리어 평균 1.4스틸을 기록한 로빈슨은 1991~92시즌 커리어 최고 2.3스틸을 기록했다. 커리어 유일의 평균 2스틸 이상 시즌이기도 하다.

동일 시즌 커리어 최고 4.5블록을 기록하기도 한 로빈슨은 NBA 역사에서 평균 2스틸 및 2블록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킨 단 3명의 선수들에 속한다. 하킴 올라주원이 4시즌에 걸쳐 이룩했고 로빈슨과 제럴드 월러스가 1시즌씩 달성했다.

이런 활발한 수비 진영 활약을 토대로 로빈슨은 14시즌 커리어 중 8시즌에 걸쳐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됐다. 퍼스트 팀과 세컨드 팀 각각 4시즌씩이다. 1년차부터 7년차까지는 7시즌 연속이다.

그리고 평균 2.3스틸 4.5블록을 기록했던 3년차 1991~92시즌에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해당 시즌 평균 2.3스틸은 리그 5위였고 4.5블록은 1위였다. 이렇게 경기 당 숫자에서 블록왕 1위를 한 시즌 차지해봤고 총 블록 1위에서는 동일 시즌 68경기 305블록과 더불어 2년차 1990~91시즌 82경기 320블록(평균 3.9블록)이 있다.

  • 2시즌 NBA 파이널 우승을 거두는 동안 로빈슨은 전과 같지 않은 기량이었지만 수비 진영에서 크게 헌신했다. ⓒAFPBBNews = News1

▶득점왕, 한 경기 71득점의 1993~94시즌

1986~87시즌부터 1997~98시즌까지 12시즌 중 10시즌의 득점왕이 마이클 조던이었다. 그 예외의 두 시즌이 로빈슨의(29.8득점) 1993~94시즌과 샤킬 오닐(29.3득점)의 1994~94시즌이다. 득점왕에 올랐던 로빈슨은 커리어 최고 평균 4.8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로빈슨은 전성기에 빠른 발을 이용해 속공에 자주 나서기도 했고 컷인 득점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장신을 이용해 림 근처에서 수비수를 등진 상태로 득점을 올리는 동시에 외곽에서의 점프슛도 곧잘 이용했다.

커리어 평균 51.8%의 높은 야투율을 기록한 로빈슨은 시즌 평균 29.8득점의 높은 숫자를 뽑았을 때도 50.7%의 좋은 야투율을 선보였다. 평균 29득점 이상, 야투율 50% 이상을 만족시킨 개인 시즌은 NBA 역사에서 41시즌뿐이다. 로빈슨 뒤로는 오닐의 2시즌과 르브론 제임스, 케빈 듀란트, 스테픈 커리의 1시즌씩이 전부다.

그리고 본인의 최고 득점 시즌에서 역사에 남을 최고 득점 경기가 나왔다. 1993~94시즌 4월24일(이하 현지시각),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71득점을 뽑아냈다. 이는 현재까지 NBA역사에서 공동 8번째로 높은 단일 경기 개인 득점이다.

▶MVP 수상과 함께 한 팀 최고 성적

득점왕 시즌보다 살짝 내려갔지만 바로 다음 1994~95시즌 로빈슨은 가장 알찬 득점 시즌을 통해 MVP에 선정됐다. 53.0% 야투율에 평균 27.6득점 10.8리바운드 2.9어시스트 1.7스틸 3.2블록을 남겼다.

그리고 로빈슨에게 압도적인 표가 갔던 데에는 개인 기록뿐만 아니라 리그 1위 성적이자 당시까지 구단 최고 성적인 62승20패(승률 75.6%)를 달성했던 것도 컸다. 그 뒤로 샌안토니오가 62승보다 많은 승리를 쌓은 시즌은 2005~06시즌(63승)과 2015~16시즌(67승)뿐이다.

다만 이런 MVP 수상의 영예를 누린 지 얼마 안 돼 제법 씁쓸한 기억을 갖게 됐다. 해당 시즌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6번 시드 휴스턴 로켓츠에게 2승4패로 패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시즌 MVP이었던 올라주원의 공격에 당하곤 하는 모습들이 크게 남았다. 올라주원이 시리즈 야투율 56.0%에 평균 35.3득점이었다면 로빈슨은 44.9% 야투율에 23.8득점이었다.

전성기의 로빈슨에게 가장 큰 감점 요인이었다면 플레이오프 성과였다. 신인 때부터 30세에 마친 7년차 1995~96시즌까지 7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이 가장 높았고 그것도 한 번뿐이었다. 1라운드에서 3시즌 멈췄고 2라운드에서도 3시즌 멈췄다.

▶커리어 제2막에 찾아온 영예들

1996~97시즌은 로빈슨의 커리어에 있어 큰 고비였다. 프리시즌에 당한 등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빠져야 했고 복귀 후 당한 발 부상으로 결국 6경기 출전에 그쳤다. 특히 등 부상은 30세를 넘긴 로빈슨에게 큰 기량저하를 가져오는 계기였다.

본인의 큰 자산이었던 운동능력이 저하된 로빈슨에게 그 이전의 높은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 큰 고비의 시즌이 구단에게는 최고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20승62패(승률 24.4%)는 구단 역사 최악의 성적이었다. 해당 시즌 리그 27위, 3번째로 가장 낮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드래프트 로터리 추첨에서 1순위에 당첨되면서 던컨이라는 구단 역사 최고의 선수를 들일 수 있게 됐다.

자신과 비슷한 포지션을 맡는 던컨에게 로빈슨은 긴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에이스 자리를 넘겨줬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98~99시즌 본인에게 첫 우승이자 구단 첫 우승이란 결실로 이어졌다.

그 후 LA 레이커스가 3시즌 연속 우승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본 뒤 다시 2002~03시즌 2번째 우승을 맞이했다. 그리고 2002~03시즌은 로빈슨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기도 하다. 이렇게 로빈슨은 우승과 함께 은퇴하는 큰 복을 누리게 됐다.

  • 로빈슨과 던컨 그리고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기나긴 세월 동안 샌안토니오의 구단 문화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쳐왔다. ⓒAFPBBNews = News1

▶샌안토니오 종신 제독

1997~98시즌 이후 로빈슨의 모습은 확실히 그 전과 결이 달랐다. 플레이에 있어 견인보다는 뒷받침이 주를 이뤘고 대신 정신적인 측면에서 팀을 이끌었다. 던컨이 프리 에이전트로서 팀을 떠날 뻔했던 일을 막은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도 당시 던컨과 면담을 했던 로빈슨이었다.

로빈슨의 이런 모습은 최근까지도 줄곧 이어지고 있다. 홈경기에 종종 관중으로서 나타나는 로빈슨은 샌안토니오의 여러 중요 시즌 국면들에서 선수들에게 큰 응원을 해오고 있다.

로빈슨은 어린 시절 군인 가족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정착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프로 농구 스타로서 24세부터 자리한 샌안토니오가 실질적인 고향이다. 이곳에서 학교 이사장 및 사업가로서, 그리고 영향력이 큰 자선가로서 은퇴 이후의 삶을 보내고 있다. 즉 1990년대 이후의 샌안토니오 팬들에겐 전 세대를 아울러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샌안토니오의 역사에서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행사는 단 두 번이었다. 이를 통해 로빈슨과 던컨을 뽑았다. 1987년과 1997년, 10년 차이를 두고 구단의 5회 우승 및 스포츠 팀으로서 크나큰 위업들을 쌓는 큰 주춧돌들을 마련한 셈이다.

로빈슨과 던컨은 플레이뿐만 아니라 구단 문화에 있어서도 큰 방향을 제시했다. 때문에 중위로서 전역한 로빈슨이 실제 제독과는 거리가 먼 군복무 경력을 보냈지만 샌안토니오에겐 로빈슨이 종신 제독일 수밖에 없다.

  • [NBA 현미경] 골밑의 전사, 알론조 모닝

1990년대 NBA를 수놓았던 센터들로서 거론되는 선수들이 주로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이다. 저마다 커리어 평균 20득점 및 10리바운드 근처의 드높은 숫자를 기록했던 위대한 센터들이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대를 거친 또 다른 센터 알론조 모닝에 대한 조명은 약한 감이 있다. 커리어 평균 17.1득점 및 8.5리바운드로 숫자 덩치도 작았고 치명적 질병이라는 불운으로 인해 빛났던 시기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균 21.5득점 10.1리바운드 3.1블록을 기록했던 모닝의 첫 8시즌 커리어는 비교적 짧긴 하지만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시기였다. 특히 모닝은 유달리 저돌적인 몸싸움들을 보이면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이에 신장 질환으로 인해 커리어에 큰 위기가 오기 전까지 모닝의 활약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 신인 모닝의 입단은 창단 후 5번째 시즌의 샬럿 호넷츠가 플레이오프 팀이자 인기 팀으로 올라서도록 만든 큰 힘이었다. ⓒAFPBBNews = News1

▶오닐과 함께 시작한 NBA 커리어

1992년 NBA 드래프트 1순위가 오닐이고 2순위가 모닝이었다. 오닐은 대학 3학년을 마쳤음에도 20세였고 4학년을 마친 모닝은 22세였다. 게다가 216cm의 장신을 가진 오닐이 208cm의 모닝에 비해 센터로서 더욱 큰 장래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대대로 오닐은 역대 최고의 NBA 센터 대열에 들 만한 성과를 쌓아갔다. 신인 시즌부터 56.2% 야투율로 평균 23.4득점 13.9리바운드 3.5블록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2~93시즌 신인상 투표에서 오닐은 98표 중 96표를 받았다.

이런 오닐에 비해 나머지 2표만 받은 모닝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교를 떠나면 모닝의 숫자는 충분히 대단했다. 51.1% 야투율 평균 21득점 10.3리바운드 3.5블록이었다.

베테랑에게도 엘리트 기록인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달성했던 역대 NBA 신인은 20명뿐이다. 모닝 이후로는 팀 던컨, 엘튼 브랜드, 블레이크 그리핀만이 달성해봤다. 여기에 평균 3블록 이상도 추가 조건으로 붙이면 역대 단 3명만 남는다. 로빈슨, 오닐, 모닝이다.

▶드높진 않았지만 꾸준히 유지한 평균 20득점 대역

흔히 4대 센터로 불리는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오닐에 비해 유독 모닝이 가려진 부문이 득점일 것이다. 저 네 명의 센터들은 각자 평균 27득점을 넘겨보기도 했고 리그 평균 득점 순위에서 수위권 안에 들었다. 로빈슨과 오닐은 평균 득점 리그 선두에 올랐던 적도 있다.

이에 비해 모닝은 최고 순위가 1995~96시즌의 7위(23.2득점)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평균 19.2득점과 21.7득점 사이의 대역이었다. 그래도 한 팀의 에이스로서 나서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2년차 1993~94시즌부터 8년차 1999~00시즌까지 1996~97시즌을 제외하고 매번 팀의 득점 선두였다.

3년차까지 샬럿 호넷츠에서 함께 뛴 래리 존슨과 4년차부터 마이애미 히트에서 함께 한 팀 하더웨이를 통해 모닝은 평균 40득점 가까이 합작해내는 듀오를 형성했다.

득점 측면에서 모닝은 림 근처에서 수비를 앞에 두고 처리하는 능력에 있어 4대 센터들보다 평가가 낮을 수 있다. 수비를 곁에 둔 손끝 마무리에서 보다 좋은 결과를 보여준 4대 센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닝은 수비와의 몸싸움을 통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 강인한 체격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렵함도 겸비해 느린 센터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에 가볍게 올라가는 점프슛도 있었다.

커리어 838경기들 중 30득점을 55회 넘겨 본 모닝의 최고 경기 득점은 1995~96시즌 3월29일(이하 현지시각) 워싱턴 불릿츠 상대 50득점이었다. 당시 워싱턴에는 231cm 리그 최장신 조지 뮤레산과 216cm 신장 짐 맥클베인이 각각 센터로 나섰지만 모닝의 힘과 날렵함을 앞세운 플레이에 속절없이 당했다.

▶커리어 막판까지 유지된 막강한 블록 능력

모닝의 득점 부문 기록은 이미 신장 질환으로 고역을 치렀던 2000~01시즌과 2001~02시즌에도 큰 하락세를 보였다. 그리고 2003년 12월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복귀한 뒤로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올린 적이 없을 정도로 완연한 하락세가 나왔다.

대신 모닝의 가장 대표적인 수비 진영 숫자인 블록만큼은 크게 줄지 않았다. 커리어 평균 2.8블록을 기록한 모닝은 2004~05시즌부터 마지막 2007~08시즌까지 평균 2.3블록을 기록했다. 2005~06시즌에는 평균 20분 출전에도 2.7블록까지 기록했다.

  • 모닝의 블록 타이밍은 상대에게 뜻밖의 당혹감을 주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AFPBBNews = News1

커리어 최고 평균 3.9블록까지 기록해봤던 모닝의 가장 큰 능력은 타이밍이었다. 여기에 정말 길었던 229cm 양팔너비는 모닝이 센터로서 딱히 큰 키가 아니었음에도 골밑에서 상대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블록이 아니더라도 모닝은 골밑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공수 양 진영에서 상대와 부딪히는 데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모닝은 상대 센터의 슈팅 지점이 외곽에 맴돌도록 만들곤 했다.

다만 디켐베 무톰보까지 해서 워낙 수비에서 쟁쟁한 센터들이 등장했던 시대에 있던 탓인지 올디펜시브 팀에는 단 2시즌에 걸쳐 선정됐다. 그래도 1998~99시즌 및 1999~00시즌 연속 퍼스트 팀에 선정됐다.

동시에 더 나아가 2시즌 연속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는 영예도 누렸다. 1982~83시즌부터 선정된 역대 올해의 수비수 22명 중 2회 이상 수상자는 9명이다. 그리고 연속 수상자는 8명이다.

▶한 시즌이지만 오닐을 추월하다

올디펜시브 팀만큼이나 모닝의 올NBA 팀 합류도 적었다. 1998~99시즌 퍼스트 팀, 1999~00시즌 세컨드 팀이 전부였다. 그래도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998~99시즌의 퍼스트 팀이다. 오닐을 제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드와 포워드는 두 자리씩이지만 센터는 오직 한 자리다. 즉 퍼스트 팀부터 써드 팀까지는 당대 탑3 센터들의 서열과도 다름없다.

써드 팀이 추가된 1988~89시즌부터 올NBA 센터의 세 자리는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오닐이 돌아가며 차지하는 그림이었다. 특히 퍼스트 팀은 1997~98시즌까지 모조리 이 4대 센터들의 독과점 분위기였다.

그러다 1998~99시즌에 딱 한 번 4대 센터가 아닌 모닝의 이름이 퍼스트 팀에 등장했다. 특히 오닐은 1997~98시즌부터 2005~06시즌까지 모두 퍼스트 팀을 독점할 수 있었지만 모닝이 한 시즌을 빼앗았다.

직장폐쇄로 단 50경기만 치러진 1998~99시즌에 모닝은 46경기 출전 51.1% 야투율로 평균 20.1득점 11리바운드 1.6어시스트 0.7스틸 3.9블록을 남겼다. 리바운드와 블록은 본인 최고 시즌 기록이었다.

올NBA 퍼스트 팀 센터와 올해의 수비수를 넘어 1998~99시즌 모닝은 MVP 선정에도 큰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MVP 칼 말론과 모닝의 득표 차이는 1차에서 44표-36표로 크지 않았다.

  • 2014년에 모닝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렸다. ⓒAFPBBNews = News1

▶대학 선배 유잉과의 경쟁 그리고 우정

조지타운 대학이 센터 명문으로 불리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유잉과 모닝이었다. 유잉은 1981~82시즌부터, 모닝은 1988~89시즌부터 1학년으로 시작했고 양 선수 모두 4학년까지 채웠다. 실제 모닝은 대학시절부터 유잉에 대해 큰 존경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프로에서는 다른 팀의 경쟁 상대였다. 더욱 얄궂게 모닝과 유잉은 플레이오프에서 자주 맞붙었다. 마이애미와 뉴욕 사이의 경쟁 구도는 당시 리그에서도 유명했다.

우선 3시즌만을 뛴 샬럿이지만 1992~93시즌 모닝은 신인 때부터 플레오프에서 8년차 유잉을 만났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는 1996~97시즌부터 1999~00시즌까지 4시즌 연속 뉴욕을 플레이오프 상대로 만났다. 다만 1997~98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유잉이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맞붙은 두 명은 각 시리즈 동안 몸을 부딪치고 신경전도 벌이면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로 년차의 차이가 컸었기 때문에 앞선 대결에선 유잉이 앞섰고 뒤쪽의 대결들에선 모닝이 앞섰다.

그래도 코트 밖에서 두 명의 우정은 컸다. 대표적인 예로 모닝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했을 때 신장을 떼어주겠다고 나선 NBA 선수가 유잉이었다. 실제 기증자는 모닝의 사촌이었지만 유잉은 검사까지 마쳤었다.

▶후반기 마이애미에서 거둔 우승의 영광

신장 질환과 수술 영향으로 코트에 잘 나서지 못했던 뉴저지 넷츠 시절을 뒤로 하고 모닝은 2004~05시즌부터 마이애미에 다시 합류했다. 물론 원래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 됐다가 바이아웃을 거쳐 마이애미로 건너간 과정은 깔끔하지 못했다.

어쨌든 드래프트 동기인 오닐을 동료로서 만나 모닝은 가장 큰 팀으로서의 성과를 맛봤다. 2005~06시즌 마이애미는 1988~89시즌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맛봤고 모닝도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앞서 언급했듯 2006~06시즌 모닝의 블록은 대단한 페이스였다.

모닝은 많은 시즌들을 보내지 않았어도 샬럿과 마이애미에서 블록 부문 가장 큰 탑들을 쌓았다. 단 3시즌을 보낸 샬럿이지만 통산 684블록은 역대 샬럿 선수들 중 가장 높다. 11시즌을 보낸 마이애미에서도 역대 1위에 오른 통산 1625블록을 남겼다.

둘 다 1988~89시즌에 창단돼 비교적 짧은 역사를 보낸 팀들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모닝은 NBA 블록 무문 역대 통산 11위(2356블록)에 오른 큰 업적을 쌓았다.

신장 질환으로 인해 빛나는 숫자를 남긴 시즌이 8시즌에 그쳤음에도 모닝은 시대의 스타로서 인정받을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7회 올스타 선정의 모닝은 신장 질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2000~01시즌과 2001~02시즌에도 올스타에 선정됐었다.

공수 양 진영에서 상대와의 몸싸움을 마다치 않는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상대의 레이업들을 순식간에 나타나 쳐내는 블록 능력은 모닝이 스타 센터들 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큰 자산들이었다.

  • [NBA 현미경] 웨버, 다재다능함을 꽃피웠던 파워 포워드

다재다능함을 통해 1990년대 후반기와 2000년대 전반기에 큰 인기를 모았던 NBA 선수가 크리스 웨버다.

1993년 NBA 드래프트의 전체 1순위로 시작한 웨버의 커리어는 꽤 굴곡진 편이다.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의 두어 시즌을 60경기 넘게 결장하기도 했고 또한 부상으로 인해 한창 기량을 펼칠 나이에 빠른 쇠퇴기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한 상태였을 때 웨버의 플레이는 매우 특별하고도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빅맨으로서의 힘 넘치는 활약과 더불어 가드 같은 볼 핸들링을 동시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208cm 신장 웨버보다도 큰 벤 시먼스나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아예 가드 포지션으로 나서기도 한다. 이에 비해 웨버는 빅맨으로서의 확실한 존재감을 바탕으로 부드럽고 정교한 움직임을 더했다.

이에 웨버가 남긴 숫자들을 통해 5회 올스타에 빛나는 15시즌을 돌아보고자 한다.

  • 하이포스트에서 시작하는 플레이에는 웨버의 전성기 기량이 집약돼 있었다. ⓒAFPBBNews = News1

▶대단했지만 시끌시끌했던 대학 시절

미시건 대학에서 웨버는 전미의 인기를 끄는 스타로서 돋보였다. 웨버 포함 1991년 같이 입학했던 미시건 대학 신입생 다섯 명은 엄청난 5인조를 의미하는 팹 파이브(Fab Five)로 불렸다. 그 중에서도 웨버가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1학년 평균 15.5득점 10리바운드 2.2어시스트, 2학년 평균 19.2득점 10.1리바운드 2.5어시스트는 대학농구에서 정말 크나큰 숫자였다. 이런 웨버가 있는 미시건 대학은 2년 연속 전미 토너먼트 결승까지 진출했다.

다만 2학년 199~93시즌 토너먼트 결승은 웨버에게 잊히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경기 막판 2점차로 뒤졌을 때 타임아웃이 다 소진됐음에도 웨버가 타임아웃을 요청하며 따라갈 기회를 놓쳤다.

그 사건은 당시 경향과는 다르게 웨버가 2학년까지만 활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였다. 훗날 밝혀진 스캔들은 꽤 심각했다. 미시건 대학의 신입생 모집 과정에서 웨버가 금품을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특별했던 신인 숫자, 팀과의 이별

어쨌든 NBA 신인으로서 1993~94시즌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보낸 웨버는 평균 32.1분 동안 55.2% 야투율을 통해 17.5득점 9.1리바운드 3.6어시스트 1.2스틸 2.2블록을 남겼다. 5개 기록 항목 모두 알차게 채운 셈이다.

평균 15득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 1스틸 2블록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킨 NBA 신인은 웨버가 유일하다. 특히 평균 3어시스트와 2블록 이상은 신인 중에 웨버와 1974~75시즌 빌 월튼뿐이다.

이런 독특한 숫자를 남긴 웨버는 신인상을 받았고 큰 기대를 받게 됐다. 하지만 소속팀과의 연은 거기까지였다. 센터로서 뛰는 동안 돈 넬슨 감독과 웨버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더 안쪽에서 싸우길 원하는 감독과 가드 같은 플레이도 펼치고 싶은 선수 사이의 갈등이었다.

결국 웨버는 단 1시즌만을 채운 채 워싱턴 불릿츠(현재 워싱턴 위저즈)로 트레이드됐다. 신인상을 받은 선수가 곧바로 트레이드되는 묘한 상황이었다.

▶돌파와 골밑 공격 위주의 초창기 시절

워싱턴으로 이적한 2년차부터 웨버는 평균 20득점을 넘기는 에이스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커리어 평균 20.7득점의 웨버는 2년차 1994~94시즌부터 10년차 2002~03시즌까지 9시즌 연속 20득점을 넘겼다.

골든스테이트와 워싱턴 시절 웨버는 꽤 전투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다. 물론 신인 때 감독으로부터 더 파고들라는 요구도 받았지만 웨버는 폭발적인 움직임을 통해 림으로 돌격하는 움직임을 많이 선보였다.

  • 한창 젊었던 때의 웨버는 전투적이고도 역동적인 플레이들을 보여주곤 했다. ⓒAFPBBNews = News1

웨버가 상대 수비를 몸으로 밀치며 득점 기회를 얻어내는 경향이 강하진 않았다. 대신 외곽에서부터 수비를 따돌린다거나 포스트에서 수비를 감아 돌아가는 움직임을 많이 보여줬다.

이를 통해 2점 야투율에서 최고인 1년차(55.9%)를 보냈고 3번째 소속팀 새크라멘토 킹스로 옮긴 직후인 1998~99시즌(50.3%)에도 50%를 넘길 수 있었다.

▶하이포스트 플레이의 정점을 보인 새크라멘토 시절

하이포스트, 페인트 구역의 자유투 라인 쪽 양 모서리 지점은 농구 공격수들에게 매우 중요한 위치다. 수비수와 가장 많은 대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솔레이션이 가장 많이 시작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이미 이 구역에서의 플레이에 중점을 둬온 웨버는 새크라멘토로 옮긴 뒤 정점의 기량을 선보였다. 본인의 득점을 시도하는 출발점이기도 했고 팀의 공격을 진행시키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돌파한다거나 슛한다거나 패스를 건네거나 하며 화려한 새크라멘토의 공격을 이끌었다.

오른손잡이인 웨버는 특히 바스켓을 바라본 기준으로 왼쪽 하이포스트에서 즐겨 자리 잡았다. 페인트 구역 바깥에서의 슈팅도 많았지만 폭발적인 돌파를 통한 바스켓 근처 슈팅도 꽤 많았다.

새크라멘토에서의 3번째 시즌이자 28세에 마친 2000~01시즌에서는 웨버의 숫자가 가장 크게 빛났다. 48.1% 야투율로 평균 27.1득점 11.1리바운드 4.2어시스트 1.3스틸 1.7블록을 기록했다. 커리어 최고 득점이었으며 그 시즌을 앞뒤로 웨버는 각각 평균 24.5득점씩도 올렸다.

웨버의 5회 올NBA 팀 선정 중 유일한 퍼스트 팀도 2000~01시즌에 나왔다. 개인성과 측면에선 최고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가 이런 분위기를 완전히 망쳤다. 3승1패로 무난히 통과한 1라운드였지만 웨버는 35.4% 야투율 평균 20.3득점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2라운드에서 LA 레이커스를 만나 4연패 스윕으로 물러났다. 여기에서는 4경기 평균 42.0% 야투율 26.3득점의 무난한 숫자지만 2,4차전에서 각각 34.6% 및 32.0%의 저조한 야투율이 나왔다.

  • 새크라멘토에서 웨버와 블라디 디바치의 빅맨 듀오는 패스할 줄 아는 빅맨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AFPBBNews = News1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모두를 만족시킨 전성기

하이포스트에서 주로 공격을 시작했던 웨버지만 공격 진영 시간 내내 외곽에서 맴돌았던 것은 아니다. 로우포스트에서도 많은 활동을 보였다.

그리고 공격 진영의 주 활동 위치와 수비 리바운드는 상관이 없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웨버는 커리어 평균 9.8리바운드의 많은 숫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평균 10리바운드 이상은 6시즌에 걸쳐 기록했는데 워싱턴 시절의 1시즌 그리고 새크라멘토로 옮긴 이후 5시즌 연속이었다.

이와 함께 웨버는 커리어 평균 4.2어시스트를 기록했고 3시즌에 걸쳐 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2002~03시즌에는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이상을 동시에 만족시킨 23득점 10.5리바운드 5.4어시스트를 남기기도 했다.

NBA 역사에서 이 조건을 만족시킨 개인 시즌은 27시즌뿐이다. 웨버 외에 오스카 로버트슨, 엘진 베일러, 윌트 체임벌린, 빌리 커닝햄, 시드니 윅스, 카림 압둘자바,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 케빈 가넷, 러셀 웨스트브룩, 드마커스 커즌스가 달성해봤다.

즉 뛰어난 재능과 소질을 갖고 있는 선수들만이 이룩할 수 있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웨버에겐 뛰어난 운동능력과 감각에 정교한 손이 더해진 경우다.

▶커리어를 아쉽게 만들었던 무릎 부상

2000~01시즌엔 플레이오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2001~02시즌엔 달랐다. 시즌 49.5% 야투율 평균 24.5득점 10.1리바운드 4.8어시스트를 기록한 뒤 플레이오프에서는 50.2% 야투율 23.7득점 10.8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만난 레이커스 상대로도 5차전까지 3승2패로 앞서는 위치에 있었다. 실제 3승4패로 끝났지만 시리즈 동안 각 부문 숫자는 새크라멘토가 앞섰다.

결정적으로 훗날 알려졌지만 당시 시리즈는 심판 판정에 있어 큰 논란이 불거졌다. 즉 새크라멘토가 레이커스에게 농구 실력으로 진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웨버와 새크라멘토는 계속해서 우승 도전을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2003~04시즌 웨버에게 닥친 무릎 부상은 해당 시즌뿐만 아니라 커리어 전체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웨버의 장기인 스텝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비에서도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2004~05시즌 중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의 트레이드 당시 눈에 띄는 반대급부 없이 웨버가 보내졌던 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웨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남은 것은 결국 고도의 농구 감각이었고 이를 통해 웨버가 전면에 나서기는 힘들었다.

필라델피아 이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거쳐 첫 소속팀 골든스테이트로 돌아와 2007~08시즌에 커리어를 마쳤다. 1973년생 웨버에게 다소 이르다 할 수 있는 은퇴 시기였다.

이렇게 웨버의 커리어에는 꽤 시끌벅적한 굴곡들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굴곡들은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 30세 무렵에 당한 무릎 부상은 당시의 주변 소란들을 떠나 커리어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그래도 2000년대 초반 서부 컨퍼런스의 강세를 구성했던 파워 포워드들로서 팀 던컨 및 가넷과 함께 웨버도 빼놓을 수 없다. 폭발적이고도 정교한 움직임을 통해 전성기의 웨버는 다재다능함의 끝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 [NBA 현미경] 코비 브라이언트의 날, 81득점 경기를 돌아보다

LA에서 8월24일(이하 현지시각)은 코비 브라이언트의 날이다. 2016년에 은퇴한 브라이언트를 기리기 위해 LA 시의회는 같은 해부터 8월24일을 코비 브라이언트의 날로 정하기로 발표했다.

브라이언트는 20시즌 NBA 커리어를 모두 LA 레이커스에서만 보냈다. 그리고 유니폼 등번호로써 앞선 10시즌에는 8번을, 뒤의 10시즌에는 24번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8월24일이 나왔다. 한편 바로 전날 8월23일은 브라이언트의 생일이다.

역대 3위의 통산 3만3643득점, 5회의 NBA 파이널 우승, 2연속 NBA 파이널 MVP, 시즌 MVP, 역대 2번째의 올스타 선정 18회, 역대 최다 올스타 선발 15회 등 브라이언트는 정말 여러 각도에 걸쳐 업적을 논할 수 있다.

그 중 브라이언트하면 떠올릴 수 있는 위업 하나가 81득점 경기일 것이다. 이는 역대 최고 기록인 1961~62시즌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다음의 2위에 올라 있다.

2005~06시즌 1월22일 경기 막판 브라이언트가 81득점에 다다랐던 순간 모든 NBA팬들은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당시 NBA팬들을 넘어 세계 전체에 큰 뉴스로 퍼졌다. 이에 그날의 경기에 대해 되짚어 보는 한편으로 한 선수의 81득점이 NBA 역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 81득점 경기 안에는 브라이언트가 득점을 올리는 모든 경로들이 담겨져 있었다. ⓒAFPBBNews = News1

▶당시의 레이커스와 브라이언트는

2001~02시즌까지 3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던 레이커스는 가장 큰 견인 역할을 했던 샤킬 오닐이 2004년 여름 트레이드로 나간 직후 큰 하락세를 거쳤다. 3연속 우승을 포함 10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다가 2004~05시즌엔 34승48패(승률 41.5%)로 진출 문턱에 한참 모자랐다.

이런 실패를 겪은 레이커스는 2003~04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났던 필 잭슨 감독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2005~06시즌이 시작되고 레이커스는 롤러코스터처럼 성적의 등락이 있긴 했지만 5할 승률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다. 마침 1월22일 경기 직전에도 3연승과 2연패를 거치며 21승19패(승률 52.5%)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이언트의 2005~06시즌은 개인 측면에서 엄청난 숫자를 기록했다. 오닐과 헤어진 직후인 2004~05시즌에 평균 27.6득점을 기록하더니 2005~06시즌엔 35.4득점으로 마감했다. 이는 NBA 역대 9위의 시즌 평균 득점이자 1986~87시즌 마이클 조던(37.1득점) 이후 유일한 35득점 이상 기록이다.

1월22일 경기 전까지에도 브라이언트는 상당한 경기 득점 기록들을 갖고 있었다. 우선 당시까지 커리어 최고 기록인 62득점이 12월20일 댈러스 매버릭스 상대로 나왔다. 그리고 1월초엔 연속 5경기에 걸쳐 41득점에서 50득점 사이의 대역을 형성했다. 1월22일 직전에는 51득점 포함 4경기 연속 37득점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1월22일 경기 직전 브라이언트의 시즌 38경기 평균은 34.8득점이었다. 시즌 전체에서 81득점 경기를 뺀 79경기 평균도 34.8득점이다.

▶당시의 토론토는

1월22일 레이커스의 상대는 토론토 랩터스였다. 해당 시즌 27승55패(승률 32.9%)로 마감했던 토론토는 1월22일 전까지 14승26패를 기록 중이었다. 당시 5연속 서부 원정길에 올라 있던 토론토는 2연패로 시작 후 1승을 건졌다가 4번째로 레이커스를 만났다.

2005~06시즌 토론토는 실제 코트에 나서는 선수들 라인업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좋은 수비 실적을 내지 못했다. NBA닷컴에 따르면 100포제션 당 109.7실점으로 리그 29위에 그쳤다.

주전 윙으로서 모리스 피터슨과 제일런 로즈가 주로 수비 때 브라이언트의 앞에 섰고 서로 같은 슈팅 가드인 피터슨이 제1수비수로서 담당했다.

해당 경기 토론토의 선발 라인업은 마이크 제임스-피터슨-로즈-크리스 보쉬-맷 보너였다. 한편 레이커스의 선발 라인업은 스무쉬 파커-브라이언트-라마 오덤-콰미 브라운-크리스 밈이었다.

▶대기록의 전조가 느껴지지 않았던 전반전

당시 실시간으로 경기를 보고 있던 관중이나 시청자들 중 전반전에 대기록을 예감했던 이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브라이언트가 그렇게까지 눈에 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쿼터 12분 모두를 뛰며 14득점을 올렸던 브라이언트는 2쿼터의 첫 6분을 벤치에서 쉬면서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6분 동안 12득점을 더하며 총 26득점을 기록했다.

물론 전반전 26득점도 대단한 숫자다. 하지만 1993~94시즌 데이비드 로빈슨의 71득점 이후 닿은 적이 없던 70득점 이상의 대기록 예상을 떠올리기는 일렀다.

그래도 2쿼터 막판 브라이언트의 연속 득점 페이스는 인상 깊었다. 전반 종료 1분31초를 남긴 시점부터 버저가 울리기까지 나온 레이커스의 7득점 모두 브라이언트가 올렸다. 특히 브라이언트가 쉰 6분 동안 단 3득점에 그쳤던 레이커스였기에 브라이언트의 6분 동안 12득점은 컸다.

  • 해당 경기에서 브라이언트 외의 레이커스 선수들은 33.3% 야투율로 43득점을 올렸다. ⓒAFPBBNews = News1

▶3점슛 몰아쳤던 3쿼터 27득점과 역전

사실 하프타임 전후로 눈에 띈 인물은 토론토에서 나왔다. 토론토가 전반전을 63-49로 넉넉하게 앞서며 마치기도 했고 주전 포인트 가드 제임스가 5개의 3점슛 모두 성공시키는 등 19득점을 올렸다. 여기에다 벤치에서 나온 찰리 빌라누에바는 12득점을 보탰다.

3쿼터의 첫 포문 역시 제임스의 3점슛이 터지며 6연속 3점슛 성공을 이뤘다. 하지만 이 3점슛이 제임스의 3쿼터 득점의 전부였다. 반대로 3점슛으로 경기를 휘어잡기 시작한 선수가 브라이언트였다.

레이커스의 3쿼터 첫 12득점 모두를 올린 브라이언트는 2점 점프슛도 통한 한편 2연속 3점슛 성공의 도움도 받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2개의 3점슛을 성공시킨 브라이언트는 3쿼터 동안 5회 시도 중 4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

승부가 뒤집힌 시점도 3쿼터였다. 3쿼터 막판 수차례 볼 핸들링 실수를 저지른 토론토에게 브라이언트는 역공 득점으로 응징했다. 특히 85-85에서 2점차로 앞서는 속공 덩크가 브라이언트에게서 나왔다. 1쿼터 초반 이후 첫 역전이었고 이후 내리 리드가 유지됐다.

쿼터 막판 레이업과 덩크들을 쏟아낸 브라이언트는 3쿼터 동안 전반전의 26득점보다 많은 27득점을 올리며 마감했다. 이로써 경기 53득점을 채웠다.

▶각종 움직임의 향연, 4쿼터 28득점

한 번 뒤집힌 경기에서 토론토는 힘을 되찾지 못했다. 계속해서 끌려 다녔고 브라이언트의 득점에 큰 저항을 하지 못했다. 물론 브라이언트의 슈팅 자체가 자신도 넣기 어렵고 수비도 저항하기 어려운 유형이 많다.

4쿼터 레이커스의 첫 득점이자 브라이언트의 첫 득점인 자유투에서 레이커스 홈 관중은 MVP 환호를 보냈다. 이미 50득점을 넘기며 경기를 역전시킨 에이스에게 충분한 환호였다.

이후 브라이언트의 득점 과정은 아주 다양했다. 빠르게 드리블하다 멈춰 던지는 점프슛, 3점슛, 3점 라인 밖에서 얻어낸 파울로 던진 자유투 3구, 플로터 등등 본인의 득점 무기들을 골고루 꺼내들었다.

브라이언트의 70득점은 4분52초를 남기고 3점슛을 통해 나왔다. 이전까지 한 경기 70득점을 넘겨 본 선수는 단 4명이었다. 체임벌린이 100득점 포함 6경기, 1977~78시즌 데이비드 탐슨이 73득점, 1960~61시즌 엘진 베일러가 71득점, 그리고 로빈슨의 71득점이 전부였다.

이제 종료 4분25초를 남기고 터진 브라이언트의 중거리 점프슛을 시작으로 역대 한 경기 개인 득점 순위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종료 43초를 남기고 얻어낸 자유투 2구를 모두 성공시키며 81득점에 도달했다.

체임벌린 외에는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체임벌린도 1경기만 도달해봤던 80득점 영역이었다. 4쿼터 레이커스의 31득점 중 28득점을 브라이언트 혼자 올렸다.

결국 경기는 122-104로 레이커스가 크게 이겼다. 종료 2분 남았을 때 15점차로 앞설 정도로 여유가 있었지만 새로운 영역을 밟고 있는 브라이언트에겐 다른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트의 경기 전체 기록은 41분56초 동안 60.9% 야투율과 자유투 18구 성공을 통한 81득점 6리바운드 2어시스트 3스틸 1블록 3턴오버였다.

  • 브라이언트에게 60득점 이상 경기들은 커리어 동안 2015~16시즌 마지막 은퇴 경기까지 총 6경기 있었다. ⓒAFPBBNews = News1

▶역사 속 81득점

역대 2위의 한 경기 개인득점인 81득점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저 숫자만 본다면 한 선수의 욕심으로 채운 거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쿼터 초반 18점차 뒤지고 있던 팀의 선수로서, 2쿼터 자신이 쉬고 있던 6분 동안 단 3득점만 올렸던 팀의 선수로서 승리를 이끌어낸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NBA 역사 속 한 선수의 70득점 이상 11경기들 중 5경기가 소속팀의 패배로 연결됐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에 충분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성과였다. 체임벌린의 100득점은 소속팀의 169득점 경기에서 나왔다. 이에 비해 브라이언트의 81득점은 소속팀의 122득점에서 나왔다. 48분을 모두 뛰며 뽑아낸 100득점과 42분을 뛰며 뽑아낸 81득점이기에 관점의 차이에 따라 우열이 바뀔 여지가 있다.

한편 당시 토론토가 열악한 수비 실적을 낸 팀이긴 하지만 툭하면 상대 선수에게 엄청난 득점을 허용하진 않았었다. 2005~06시즌 토론토 상대로 한 선수가 40득점을 넘긴 사례는 브라이언트의 81득점을 제외하고 42득점 3경기와 41득점 1경기였다. 다른 팀들과 다를 것도 없다.

▶브라이언트의 마지막 8번 유니폼 시즌

개인의 성과 측면에서 평균 35.4득점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 1.8스틸의 2005~06시즌은 브라이언트에게 최고의 시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즌 MVP를 수상했던 2007~08시즌을 꼽을 수도 있지만 양적 숫자 측면에서 2005~06시즌은 최고조에 있었다. 질적 측면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브라이언트는 그 시즌을 뒤로 하고 등번호를 24번으로 바꿨다. 8번의 10시즌과 24번의 10시즌은 서로 비슷한 크기의 숫자들을 보여줬다. 즉 어느 시절의 브라이언트가 더 뛰어났는지에 대해 쉽게 의견을 모을 수가 없다.

8번 시절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거라면 한 번 더 많았던 우승과 함께 양적인 측면에서 많았던 기록 숫자들을 댈 수 있다. 그 중 81득점 경기는 충분히 그 근거들 중 하나로서 꼽을 수 있다. 체임벌린의 100득점은 물론이고 현대 농구에서 한 선수가 81득점을 넘길 가능성은 섣불리 전망하기 어렵다.


  • [NBA 현미경] 앤퍼니 하더웨이의 뜨거웠던 커리어 초반

14시즌의 NBA 커리어 동안 평균 15.2득점 5어시스트 4.5리바운드 1.6스틸은 미지근해 보일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1990년대 후반 앤퍼니 하더웨이에게 향했던 그 뜨거웠던 인기가 의아할 만하다.

가장 높았던 평균 득점이 21.7득점이었던 것을 봐도 이 선수가 당시 농구 황제로 군림했던 마이클 조던을 잇는 스타로 여길 만했던 것일까 의심할 수 있다.

그래도 저런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큼 하더웨이가 초창기 대단한 플레이를 보여줬던 것은 사실이다. 불과 4년차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확실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2년차 1994~95시즌과 3년차 1995~96시즌 하더웨이는 2시즌 연속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됐었다. 1994~95시즌은 존 스탁턴과, 1995~96시즌은 조던과 함께 리그 최고의 가드 두 명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하더웨이의 그 뜨거웠던 모습을 담을 기록들은 없을까. 몇 가지를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하더웨이의 등장은 당시 NBA 리그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AFPBBNews = News1

▶당대 최고의 센터들 중 한 명과 동료

1993년 NBA 드래프트는 꽤 독특한 그림을 갖고 있었다. 로터리 추첨에서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3팀이 모두 미끄러지고 11위의 확률(1.52%)을 갖고 있던 올랜도 매직이 1순위에 당첨됐다. 2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5위, 3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7위, 마찬가지로 꽤 낮은 당첨 확률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순위의 올랜도와 3순위의 골든스테이트는 서로 뽑은 선수들을 맞교환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원래의 1순위 크리스 웨버는 골든스테이트, 3순위 하더웨이는 올랜도로 향했다. 파워 포워드 또는 센터를 맡는 웨버보다는 가드인 하더웨이가 당시 올랜도에게 맞는 조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샤킬 오닐이었다. 신인이었던 1992~93시즌 평균 23.4득점 13.9리바운드 3.5블록을 남긴 괴물 센터 옆에는 빅맨보다는 가드가 더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하더웨이도 드래프트 전 올랜도와의 면접에서 강한 합류 의사를 비쳤다.

단 4시즌을 뛰고 프리 에이전트로서 팀을 떠났지만 올랜도에서 오닐은 큰 숫자들을 남겼다. 2년차와 3년차 연속으로 평균 29.3득점을 남겼고 4년차에도 26.6득점의 높은 숫자를 기록했다.

오닐은 올랜도에서의 4시즌에 걸쳐 코트 위에 있는 동안 야투 및 자유투 시도 또는 턴오버로 팀의 공격 기회 중 29.9%를 사용했다. 그리고 하더웨이와 함께 한 3시즌 동안에는 31.0%를 사용했다. 1994~95시즌의 31.9%와 1995~96시즌의 32.8%는 지난 2017~18시즌의 르브론 제임스(31.6%)보다 높은 사용지분이다.

이 공격기회 사용지분을 의미하는 유시지 퍼센티지(Usage percentage, 이하 USG%)에서 하더웨이는 오닐과 함께한 3시즌 동안 23.6%를 기록했다. 가장 높았던 3년차 1995~96시즌엔 25.5%를 기록했다. 이 USG%는 지난 시즌 러셀 웨스트브룩(34.1%)과 함께 뛰었던 폴 조지(25.7%)와 비슷하다.

▶뛰어난 재능과 감각을 선보이며 뽑아낸 높은 효율성

장신 포인트 가드의 대명사 매직 존슨과의 비교를 정말 많이 끌어냈던 하더웨이는 공식 기재 신장이 201cm다. 현재 리그에서는 클레이 탐슨, 더마 드로잔, 제일런 브라운, 카와이 레너드 등의 윙 포지션과 드레이먼드 그린 같은 빅맨도 이 신장을 지녔다.

우수한 신체 조건을 앞세워 하더웨이는 페인트 구역 쪽으로 침투했을 때 매우 훌륭한 마무리를 보여줬다.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들은 물론 포워드 수비수들을 앞에 두고도 곧잘 성공시키곤 했다.

2년차 1994~95시즌 및 3년차 1995~96시즌에서 하더웨이는 각각 55.8%와 57.3%의 2점 야투율을 기록했다. 평균 20득점을 넘기면서 2점 야투율 55%를 넘겨본 역대 201cm 신장 이하 NBA 선수들은 17명뿐이다. 현역 중에는 2015~16시즌 및 2017~18시즌의 스테픈 커리뿐이다.

1994~95시즌 평균 20득점을 넘긴 선수들 중 2점 야투율 1위가 오닐(58.5%)이었고 2위가 하더웨이였다. 1995~96시즌에는 세드릭 세발로스(57.6%) 다음의 2위였다.

여기에 역대 2m 이상 신장 최고의 볼 핸들러들 중 한 명으로서 꼽힐 볼 핸들링과 신묘함까지 느낄 수 있는 패스 감각이 더해져 하더웨이는 막기 힘든 선수로 인정받았다.

▶오닐의 공백 동안 보여줬던 폭발적인 숫자

1995~96시즌 올랜도는 부상으로 인해 오닐 없이 첫 22경기를 치러야 했다. 당시로써는 꽤 비상사태인 상황에서 올랜도는 17승5패(승률 77.3%)의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여기에는 11월 이달의 선수에 선정됐던 하더웨이의 견인이 컸다.

11월3일(이하 현지시각)부터 11월30일까지 15경기 동안 하더웨이는 51.0% 야투율 평균 27득점 6.5어시스트 5.8리바운드 2.2스틸 1블록을 기록했다. 그리고 오닐이 돌아오기 직전인 12월13일까지 22경기 동안엔 50.3% 야투율 평균 26.4득점 6.8어시스트 5.3리바운드 2스틸 0.9블록을 기록했다.

길지 않다면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 팀의 확실한 구심점으로서 나설 만한 활약과 숫자를 기록했다. 하더웨이가 82경기 모두 뛴 이 시즌에서 오닐이 28경기를 결장했음에도 올랜도는 29시즌 구단 역사에서 최다 기록 60승을 이룩했다.

  • 시즌 경기 최고 기록이 42득점이었던 하더웨이는 플레이오프에서도 42득점이 최고 기록이다. ⓒAFPBBNews = News1

▶오닐과의 작별 후 보여준 플레이오프 고군분투

빛나는 시즌 성과와 함께 하더웨이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빛을 발했다. 2년차 1994~95시즌엔 1990~91시즌 이후 조던에게 유일한 플레이오프 시리즈 패배를 안겨준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일 시즌 NBA 파이널에서 4연패 스윕으로 물러났지만 50.0% 야투율 평균 25.5득점 8어시스트의 훌륭한 숫자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오닐이 떠난 뒤 하더웨이도 올랜도도 위기를 맞이했다. 1996~97시즌 하더웨이는 에이스로서의 위치를 굳힐 시기에 잦은 부상들을 겪으며 3년차까지의 드높은 성장세를 잇지 못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에이스로서의 역할에 집중할 때 하더웨이가 얼마나 매섭게 되는지 볼 수 있었다. 1라운드에서 2연패를 당한 뒤 3차전부터 42득점과 41득점을 올리며 2연승을 이끌었다. 당시 상대방 마이애미 히트의 팻 라일리 감독 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연속 40득점을 넘긴 선수는 하더웨이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3차전부터 시작된 3경기 연속 47분 이상의 출전 혹사는 시리즈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1라운드가 5전3선승제였던 당시 2승3패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1997~98시즌에 하더웨이의 커리어를 무너뜨린 무릎 부상이 나왔고, 이후로 화려했던 시절 하더웨이를 다시 보기는 힘들었다.

2년차부터 올NBA 퍼스트 팀 및 올스타 선발에 선정되기란 어렵다. 리그 최고의 가드 2명 안에 들어야 되기 때문이다. 4시즌 연속 올스타 선발로서 선정된 하더웨이는 심지어 1997~98시즌 19경기의 불안정한 출전에도 NBA 팬들의 강력한 투표 지원을 받았다.

즉 치명적 부상이 오기 전까지 하더웨이의 첫 NBA 4시즌은 그만큼 NBA 매체와 팬들에게 크게 각인됐다는 의미다. 조던의 은퇴 시기와 맞물릴 즈음 리그의 간판스타 자리를 물려받을 선수로서 인정받기도 했다. 농구 기록에 남긴 숫자의 덩치가 엄청 크지는 않았지만 나서야 할 때는 그런 숫자를 남길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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