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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자전거 대왕 - 엄복동

by Wood-Stock 2017. 10. 12.

'자전거 대왕' 엄복동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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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이 1923년 4월 마산체육회 주최의 전조선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뒤 찍은 기념사진. 사진=엄복동기념재단 발간 '엄복동의 자전거일대기'에서 재인용>


지난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에 있는 손기정기념관 앞 광장에 200여명의 국내 스포츠계 인사들이 모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했던 손기정의 장거를 보도하면서 그의 가슴에 붙어있던 일장기를 말소해 일제시대 민족혼에 불을 질렀던 동아일보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의 흉상 제막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종세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은 식사를 통해서 "이길용 기자의 생애는 스포츠와 미디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역사로, 선수는 최선을 다하고 미디어는 그 땀의 성취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알릴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밝혔다. 이어 열린 관련 포럼에서 김정효 서울대 겸임교수는 "민족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으로 우리는 손기정을 지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손기정을 손기정이게 한 인물이 이길용이며, 손기정은 이길용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 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기정은 이길용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민족의 영웅이라는 월계관을 써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불렸던 손기정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또 그 의미를 항상 되새기고 있다. 그런데, 손기정보다 앞선 1920년대 이미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된 스포츠인이 또 한 사람 있다. 엄복동(嚴福童)이다. 그는 자전거를 탔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는 신문물의 상징이었다. 그는 근대를 상징하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에서 열린 각종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인 선수들을 물리치면서 조선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동양 자전차왕' 또는 '자전거 대왕'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이 붙었다. 그가 경기에 나서는 날이면 수만명의 조선 민중들이 경기장에 모여서 환호하고, 열광하고, (상대 선수에 대해서)욕을 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느꼈다. 스포츠가 대중의 욕구를 분출하는 통로로 작동하면서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는 우리 근대사가 만들어낸 최초의 대중적인 스포츠 스타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손기정 이전에 엄복동이 있었다.


그러나 엄복동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엄복동을 제대로 '재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의 인용문을 통해 보듯이 손기정은 '이길용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지금도 민족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엄복동에게는 그런 '미디어'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느낀 후배들이 뒤늦게나마 '엄복동기념재단'을 만들었다. 2014년 11월의 일이었다. 재단은 엄복동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나 사진, 대회 전단지, 해외 정보 등 자료 수집에 나섰지만 기존에 확보된 것 이상의 유의미한 추가 자료 발굴에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용우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사이클 담당)는 "당시 자료들이 극히 적다. 현재 남아있는 것도 적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자전거 경기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삼위일체'는 엄복동의 이야기를 두편으로 나눠서 다룬다. 상편에서는 한정된 자료내에서 '사이클 스타' 엄복동의 일대기를 복원하고 정리해 본다. 다음 주에 올릴 하편에서는 현재의 시각에서 본 엄복동의 의미를 분석한다. '근대스포츠의 선구자'이자 '조선 민족의 영웅'으로서 갖는 의미를 재조명해 볼 예정이다.


(이 글은 엄복동기념재단에서 올 하반기 발간할 예정인 책 '엄복동의 자전거 일대기'와 재단 이사장 이용우 교수와의 인터뷰에 큰 빚을 졌다. 본문에 인용된 당시 신문 자료 등은 별도 표기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엄복동의 자전거 일대기'에서 재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자전거 점포의 배달 사원,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다

엄복동은 1892년 6월 20일 서울 중구 오장동 143번지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격동의 시대에 그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생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엄선양, 어머니는 김씨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신문기사에 그가 함경남도 원산 또는 인천 출신이라는 내용도 실리지만 재단이 확인한 호적 등본에 따르면 오장동 출신이 맞는 것같다. 엄씨 가문의 복덩어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복동'이란 이름을 갖게 됐지만 5살 때 집안의 가산이 모두 탕진되면서 거친 풍파의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그는 선천적으로 뼈대가 단단했다. 또 힘이 장사여서 동네 씨름 대회에 나가면 독무대가 되곤 했다. 키는 165㎝ 정도였으니 장신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넓고 가슴이 컸다. 하체가 발달하고 심폐기능이 좋아 뛰어난 자전거 선수가 될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엄복동은 17세를 전후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수입자전거대리점 일미상회의 점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자전거와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집안이 어려워졌기에 공부보다는 점원으로 일하게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전거 점포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배우게 된다.


'당시 관철동에는 가죽을 파는 중국 피혁상들이 많이 있었고 피혁상마다 배달용 자전거와 배달부가 고용돼 있었다. 복동은 어렸을 때부터 배달부들의 자전거 타는 솜씨를 신기한듯 늘 주시해 왔었고 한편 타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강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어느날 가까운 친구의 소개로 한 배달부를 알게 되어 그후부터 복동은 자전거 배우기를 결심했다. 배달부는 주인의 눈을 피해 가며 복동에게 자전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1969년 월간스포오츠)


엄복동도 1921년 11월 8일 '매일신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열릴곱 살에 첨으로 자전차 타기를 배호가지고 금년 28세가 되기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업스며"라고 하고 있다. 엄복동이 일했다는 일미상회는 일제와 영국제 자전거의 조선내 대리점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이곳 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피혁상의 배달용 자전거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점포의 자전거가 '저전거 대왕'의 토양이 된 것이다.

 

<현역 선수 시절 엄복동(왼쪽 위)의 모습. 사진=재단 발간 '일대기'에서 재인용>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국내에 자전거가 본격적으로 보급됐는데 당시 신문 광고를 보면 경성 평양 진남포 등 세 곳에 자전거 판매특약점이 있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자전거 보급률이 매우 높아져 경성의 경우에는 교통량 증가로 사고 위험도 커져 자전거에도 번호표를 달게 했다. 엄복동이 자전거를 통해서 스포츠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자전거 보급률이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애용했던 시대적 상황과 연관이 크다고 할 수 있다.(문화재청 발간 '엄복동 자전거 등 자전거 관련 자료조사' p.7~8 참조)


엄복동은 18세가 되던 1910년 처음으로 자전거 경기대회에 출전해 1위를 차지한다. 미래의 일제시대 스포츠 영웅이 공식적으로 첫 모습을 드러냈던 대회가 공교롭게도 한일합방이 이뤄졌던 바로 그 해였다는 점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하다. 그가 첫 출전한 자전거 대회는 지금은 국립의료원 터에 있는 훈련원에서 열렸다. 스타탄생의 예고편부터 3년뒤인 1913년 4월 13일 용산연병장에서 열렸던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다시 한번 1위를 차지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자전거 영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당시 이 대회는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의 공동주최로 열렸으며 4월 12일 인천, 13일 용산, 27일 평양에서 연속해 개최됐다. 특히 13일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경기는 일본의 톱클래스 선수 4명과 조선의 엄복동, 황수복 등이 출전해 민족 대결의 양상을 보였다. 조선이 국권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도 있어서 이날 용산연병장에는 약 10만여명의 대관중이 운집했다고 한다. 당시 경성의 인구수가 24만명 내외였다고 하니 얼마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3일 용산연병장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중략)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로 이루어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서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겹 스무겹식 둘렀고 산비탈 아래에서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1913년 4월 15일자 매일신보)


이렇듯 장안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이 대회에서 엄복동은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하면서 '자전거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같이 출전했던 황수복은 3위를 차지했다. 엄복동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영국 자전거 회사 러지에서 생산한 최신형 자전거 한대를 상품으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엄복동 자전거'로 알려진 이 제품은 먼 훗날 해방된 조국의 문화재청에 의해서 근대문화재로 지정된다(엄복동 자전거의 의미에 대해서는 하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엄복동 자전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전조선 제일유의 대경주를 개시했는데 선수는 내지인(일본인)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명이라(중략) 엄복동과 황수복은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국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중략)십만 동포의 박수갈채하는 가운데에 감사한 눈물로 동포의 다대한 열성을 사례하며 엄복동은 인천 공영사에서 기부한 우승기와 용현상점에서 기부한 라지 자전거 한 채를 받았으며…'(1913년 4월 15일자 매일신보)


◇'자전거 영웅'에서 '민족의 영웅'이 되다


영웅의 탄생을 위해서는 드라마가 필요하다. 엄복동이 단지 자전거를 잘 타는 스타에서 일제시대 억눌렸던 조선 민중들의 한을 대변하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드라마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마치 손기정이 동아일보 이길용기자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더욱 민족 영웅으로 부각됐듯이 말이다. 그런 사건이 바로 1920년 5월 2일 경복궁 경회루 앞에서 열렸던 제1회 경성시민 대운동회에서 벌어졌다. 엄복동에게는 의도하지 않았던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자.


경복궁에서 벌어진 경성시민 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 결승에는 엄복동을 포함해 8명이 출전했다. 이들은 레이스를 벌이다가 선수들끼리 부딪혀 넘어지는 일이 발생해 엄복동과 일본인 선수 모리시타 한 명만이 남았다. 엄복동이 모리시타보다 몇 바퀴나 앞서 있었기에 여유있게 1위가 예상됐지만 갑자기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일본인 심판이 해가 지고 있다는 이유로 경기를 중단한 것인데, 당연히 엄복동의 우승을 막으려는 의도로 읽혔다. 이에 화가 난 엄복동이 "이까짓 우승기를 무엇하려고 하느냐"고 소리치며 울분을 참지못한 가운데 우승기를 잡아 꺾어버리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쳤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인 심판과 주변 일본인들이 엄복동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엄복동이 피를 흘리자 이번에는 조선인 관중들이 "엄복동이 맞아 죽는다!"고 소리치며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난투극이 벌어지게 됐다. 결국 경찰이 투입돼 군중을 해산시키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정당한 스포츠맨십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부당하게 엄복동의 우승을 막는 것을 넘어서, 폭력 행사까지 한 일본인을 향한 분노가 조선인 관중들을 자연스럽게 격분시켜 벌어진 사태였다. 식민지 치하에서 잠재해 있던 '지배~피지배자 사이의 내재적인 모순'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경복궁 안에 시민대운동회는 맛참 일긔가 청명하야 잘 진행하는 중 엄복동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사람만 나마 승부를 결하게 되엿난대 그것도 엄복동군은 삼십여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몃회를 뒤떨어져 일등은 의심업시 엄군의 엇개에 떠러지게 되였는대 엇지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벼알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긔지 못하야 우승긔 잇는 곳으로 달녀드러 이까진 우승긔를 무엇다 무엇하느냐며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달녀드러 엄군을 구타하야(중략) 일반군중들은 소래를 치며 엄복동이가 마저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가치 달녀드러 욕하는 자 돌던지는 자 꾸짓는 자 형형색색에…'(1920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장충단에서 열린 엄복동 출전 경기의 기사와 사진이 실린 1922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 사진=재단 발간 '일대기'에서 재인용>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엄복동은 '자전거 영웅'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상향 평가되는 분기점을 맞는다. 이 사건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자전거 대회에서 엄복동은 발군의 실력으로 우승 행진을 이어간다. 그가 경기장에 나타나면 민중은 환호했고, 그는 실력으로 우승하면서 민중의 성원에 보답했다. 1922년 5월 20일 장충단 자전거대회 우승, 같은 해 5월 31일 평양윤업회 주최로 열린 전조선 자전차경기대회 우승, 1923년 4월 29일 마산체육회 주최의 전조선 자전거대회 우승, 1925년 상주기차역 개통기념 조선팔도 자전거 대회 우승, 1928년 전국 우수조합 대회 우승 등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는 엄복동의 우승 레이스들이다.


그는 레이스 방식도 독특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종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엉덩이를 치켜 올린 뒤 빠른 발놀림으로 스퍼트해 우승을 차지하곤 했다. 그래서 경기 도중 엄복동이 엉덩이를 세우면 조선인 관중들의 응원 함성도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자전거 경주를 할 것 같으면 의례히 엄복동군이 일등을 하게 되는 고로 작년과 작저년에 일본에서도 몇째 안에 가는 자전거 선수 몇 사람이 일부러 나와서 참가를 하였었으나 마침내 일등은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금년에는 일본에서도 제일 유명한 선수 10여 명이 며칠 전부터 경성에 들어와서 연습을 하며 자웅을 결단코자 하는 중이므로 경성 시민은 더욱이 엄복동군에게 정신이 몰리던 중에(중략) 다시 군악 소리가 서로 외침을 따라서 군중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하며 엄복동군은 맹열한 용기를 내이며 ?을 쫓는 매의 형세로 달려서 선두에 서기를 시작하더니 선두에 이르러는 더욱이 고함소리가 높음에 따라 맹호같이 소리를 지르고 다른 선수보다 칠팔 보를 앞서기 시작하더니 첫날 최후의 승리는 또한 엄군의 손으로 돌아갔다더라.(1923년 5월 7일자 조선일보, 월간조선 2017년 8월호에서 재인용)


<사이클계의 김장곤 원로가 엄복동(맨 왼쪽)과 함께 찍은 귀중한 자료 사진. 사진=재단 발간 '일대기'에서 재인용>


사이클계의 김장곤 원로는 엄복동을 직접 만나본 몇 안되는 생존자다. 1930년생인 김장곤 원로는 엄복동기념재단과의 인터뷰에서 "그 양반이 몸이 상당히 건장했어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상남자. 뼈가 상당히 굵은 흔히 말하는 통뼈였어. 하여간 그 양반이 나타났다하면 일본 애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니까"이라고 회고했다. 또 경기 스타일에 대해서는 "라스트 들어가는데 엉덩이 들고 잘 들어갔어. 그러면 관중들이 손뼉치고 환호하고 그랬지"라고 기억했다.

 

◇동양 자전차왕의 불우했던 말년


엄복동은 현역 시절 해외에서 열리는 경기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특히 일본인들이 주최하는 대회나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일절 출전하지 않았다. 이용우 한체대 교수는 "엄복동 선생은 민족주의 정신이 매우 강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자 일본인들이 대회 참가를 위해 회유를 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사이클계 원로분들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달리 일본 선수들과 경기를 할 때에는 눈에 독기를 품으셨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그랬던 엄복동이 유일하게 출전했던 해외 대회가 있다. 1923년 5월 20일 중국 다롄에서 열렸던 국제 자전거대회다. 아시아 각국에서 선수들이 나왔던 이 대회에 엄복동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에 이주했던 동포들이 환영행사를 열기 위해서 모금을 하기도 했다. 5만명이 넘는 대관중이 모인 가운데 엄복동은 또다시 우승을 차지한다. 명실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전거 선수로 공인받았고 이 대회를 계기로 '동양 자전차왕'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됐다.


'자전거 대장 노릇하는 엄복동군이 대련시 봉판정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 대경주회에 원정차로 떠났는데 개최일이 되는 이십일 아침부터 관람자들이 무려 오만여 명에 달한 중에 특히 조선인 관람자가 많아서 엄군의 우승을 열광적으로 바라며 열심히 응원했다.(중략)엄 선수는 줄곧 다섯 바탕으로 앞서 놓고 돌매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두른 모양은 장관이었는바 최후의 칠십 주에 이르러 엄 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은 이착이 되고 중국인은 삼착으로 마치어…(1923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장종수 저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p.에서 재인용)


엄복동이 일제 시대 과연 얼마나 많은 대회에 나섰고, 어떤 성적을 남겼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1926년 6월 18일자 시대일보 기사를 보면 '오십여 번의 우승기와 수천수만의 상품을 받고, 동요까지 얻게 된 조선의 자전거대왕 엄복동군'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사에 따르면 엄복동이 당대 최고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던 자전거 대회를 통해서 엄청난 명예와 부를 누렸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기사 이후에도 엄복동의 우승 기록이 남아있으니 최소 50번 이상은 단일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워낙 인기가 있다보니 그가 출전하는 대회에는 엄복동을 보기 위해서 장안의 기생들이 줄을 섰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급 이상의 인기스타였던 것같다.


그랬던 엄복동도 40세가 되던 1932년 4월 전조선 남녀자전거대회에서 1위를 한 것을 끝으로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40세 은퇴라면 현역 생활을 건실하게 오래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후에도 엄복동이 자전거 대회에 출전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1935년 5월 함흥에서 열린 전조선 남녀자전차경기대회나 그해 7월 평북 정주에서 열린 정주자전차대회, 1936년 6월 황해도 재령에서 열린 전조선 남녀자전차대회 등이 그것이다. 이런 대회에서는 노장선수 또는 구선수라 불리는 일종의 번외경주에 출전했던 것으로 나온다. 대회 흥행을 위한 일종의 특별 초청케이스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1986년 5월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있었던 엄복동 동상 건립 기공식 장면. 사진=연합뉴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5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 자전차대회에서 번외 노장부 3000m 1위를 차지했다(1946년 5월 6일자 중앙신문). 또 1947년 5월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런던올림픽 선발대회에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입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947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한국 사이클이 국제대회에 첫 출전한 것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다.


엄복동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광복 이후 생활고에 시달렸고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인근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에는 전쟁통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성기때는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운동 선수들이 요즘처럼 재테크에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이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50&aid=0000000018&viewType=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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