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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유격수 - Short Stop

by Wood-Stock 2014. 9. 19.


MLB 명유격수를 조명하다


영원한 캡틴 데릭 지터

지난 달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스포트에서 리틀리그 월드시리즈가 벌어졌다. 경기 전 어린 학생들이 자신을 영어로 소개한다. 이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선수(My favorite player)' 코너가 있다. 그 시대 인기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여년 이상 꾸준하게 등장한 리틀 리거들의 동경 대상이었던 선수가 뉴욕 양키스 유격수 데릭 지터(40)다. 이번 대회 개막전에서 한국에 패한 체코 선수들의 절반 가량이 지터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로 꼽았다.




올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지터는 메이저리그를 상징하는 대표 유격수다. 다른 팀도 아닌 뉴욕 양키스의 유격수 포지션을 20년 동안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1992년 양키스가 고교 출신인 지터를 지명했을 때 명예의 전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했던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지터는 명문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활동해 항상 논란이 됐던 게 '과대 평가(Overrated) 선수'였다. 1996년 루키로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이후 4차례나 더 팀을 정상으로 끌어올렸지만 전문가들은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메리칸리그에는 쟁쟁한 유격수들이 즐비했다. 프리 에이전트로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양키스의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의 노마 가르시아파라, 오클랜드 에이스의 미겔 테하다 등이 지터의 경쟁자들이었다.

1996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지터가 이 가운데 기량 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4명 가운데 공격력이 가장 처졌다. 유격수에게 중요한 요소인 어깨도 3명에 견줘 떨어졌다. 가르시아파라는 1997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출신이다. 2002년 아메리칸리그 MVP에는 테하다가 뽑혔다. 2003년에는 텍사스의 로드리게스가 받았다. '과대 평가된 선수'라는 지적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야구는 마라톤이었다.

버드 셀릭 커미셔너의 지시로 2007년 11월 발표된 전 상원의원 조지 미첼의 '미첼 리포트'를 통해 테하다와 로드리게스는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약물의 힘에 의해 파워 히팅을 했던 것이다. 최근 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된 가르시아파라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14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뛴 것으로 만족했다. 9년간 펜웨이파크를 지킨 뒤 시카고 컵스, LA 다저스, 오클랜드 에이스 등을 거쳤다.

2003년 로드리게스는 아메리칸 리그 MV가 된 뒤 우승 팀을 원했다. 트레이드를 자원해 뉴욕 양키스 유니폼 핀 스트라이프를 입었다. 보스턴 레드삭스행이 결렬돼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때만 해도 로드리게스의 기량, 인기, 비중은 지터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로드리게스는 2000년 겨울 북미 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10년 2억5200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프리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초특급스타였다. 그는 양키스에서도 유격수를 맡고 싶어 했다. 다른 부문별 기량은 제쳐 두고라도 어깨에서 지터는 로드리게스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 토리 감독은 지터를 유격수로 고정시켰다. 로드리게스는 3루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양키스 클럽 하우스 내의 지터-로드리게스의 헤게머니 싸움도 볼 만했다. 선수들도 지터와 로드리게스 편으로 갈렸다. 로드리게스는 약물이 발각되기 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부드럽고 강한 임팩트를 구사하는 우타자로 꼽혔다.

하지만 이 싸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로드리게스는 지터의 리더십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큰 경기에서 약했다. 지터는 월드시리즈에서 김병현을 울린 클러치 히터였다. 지터는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치른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연장 10회 김병현으로부터 끝내기 우월 홈런을 터뜨렸다.

원래 4차전이 10월 31일 시작됐는데 연장전으로 흐르면서 자정이 넘어 11월 1일이 된 경기였다. 뉴욕의 신문들은 일제히 제목을 '미스터 노벰버(11월)'로 뽑았다. '미스터 옥토버' '미스터 노벰버'는 클러치 히터를 상징하는 애칭이다.

지터는 요즘 말하는 '파이브 툴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공수주에다가 팀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십을 갖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올스타게임 선정 14회, 월드시리즈 챔피언 5회, 월드시리즈 MVP, 실버 슬러거 5회, 골드 글러브 5회 등 그의 화려한 경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지터는 팬들은 물론이고 미디어 관계자들에게도 호평 받는 선수다. 한마디로 '나이스 가이'다. 이에 비해 로드리게스는 가식적인 선수란 평이다. 거짓말을 밥먹 듯 한 게 들통 나 팬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현재 출장 정지징계 중이다.

전설의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


흔히 유격수를 감독을 대리하는 야전 사령관으로 표현한다. 포지션의 중요성 때문이다. 야전 사령관으로서 의미를 살리려면 공수주를 모두 갖춰야 한다. 쉽지 않다. 역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회원 가운데 유격수 포지션은 22명이다. 포지션별 배출 수로 투수, 외야수에 이어 3위다. 공격형 유격수보다는 수비형이 훨씬 많다. 22명 가운데 통산 100개 이상의 홈런을 친 타자가 8명에 불과하다.

유격수의 공격 기록은 초창기 피츠버그 파이어리츠(1900-1917년)에서 활동한 호너스 와그너가 단연 선두다. 와그너는 통산 타율 3할2푼7리 안타 3,415개 타점 1,732개 득점 1,736개 도루 732개를 남겼다. 이들 부문에서 모두 1위다. 와그너는 특히 희귀 야구 카드로 사후에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경매에서 210만 달러에 낙찰됐을 정도로 고가다.




와그너가 유격수 부문에서 뛰어난 기록들을 갖고 있으나 홈런만큼은 1위가 아니다. '미스터 컵스'로 통하는 전 시카고 컵스의 어니 뱅크스(83)가 통산 512개로 유격수 홈런 부문에서 모두 1위다.

뱅크스는 지난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시민 최고의 영예인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훈장을 받았다. 야구인으로 이 훈장을 받은 선수는 뱅크스를 비롯해 행크 애런, 로베르토 클레멘테, 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벅 오닐(니그로 리그 출신), 프랭크 로빈슨, 재키 로빈슨, 테드 윌리엄스 등 9명이다. 뱅크스는 유격수로서 "Let's play two"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Banks, ca. 1954  Wrigley Field  Photo: George Burke/George Brace archive via Legendary Auctions Ernie Banks

오지의 마법사와 철인

메이저리그 유격수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는 '오지의 마법사'로 통하는 오지 스미스(59·샌디에이고 파드레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 오리올스)다.

스미스는 전형적으로 수비에 능했던 유격수다. 통산 타율 2할6푼3리를 기록한 스미스는 15차례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수비에 관한 한 천재급이었다.

'철인' 칼 립켄 주니어는 유격수의 대형화를 불러왔다. 립켄 전에는 유격수라면 체격이 작고 발 빠르고 정확한 송구를 하는 선수들이 선호 대상이었다.

2007년 98.5%의 지지를 얻어 뉴욕 쿠퍼스타운 멤버가 된 립켄은 키 193cm 몸무게 102kg의 대형 유격수다. 신인왕으로 뽑힌 1982년에는 유격수와 3루수를 반반씩 맡았다. 1983년부터 붙박이 유격수를 맡았고 앞으로 절대 깨질 수 없는 2,632 연속 경기 출전 대기록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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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켄은 명예의 전당 유격수로는 와그너, 로빈 욘트(밀워키 브루어스)와 함께 3천 안타 이상을 남긴 주인공이다. 홈런(431)과 타점(1,695)도 유격수 부문 역대 2위다. 욘트는 현역 생활 중반 이후 중견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립켄의 수비율은 9할7푼9리로 수비의 대명사로 꼽히는 오지 스미스의 9할7푼8리보다 오히려 높다. 다만, 수비 폭에서 스미스가 월등히 높았고, 수비의 전체 기회도 차이가 난다.

공격력 겸비한 현역 유격수 누가 있나

공격에 치중하는 대형 유격수들의 수비력은 자연히 떨어진다. LA 다저스 핸리 라미레스를 보면 답이 나온다. 수비는 불안하다. 경기 후반 미겔 로하스로 바꿀 수밖에 없다.

201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월드시리즈를 안겨 주고 마이애미 말린스 감독으로 부임한 오지 기엔은 가장 먼저 한 게 라미레스를 3루수로 돌리고 프리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호세 레이에스(토론토 블루제이스)를 붙박이 유격수로 세운 일이다. 공격은 라미레스가 앞선다. 레이에스는 발 빠르고 수비 좋은 톱 타자를 맡는 유격수다.

현역 가운데 공격력을 겸비한 유격수는 워싱턴 내셔널스의 이언 데스몬드, 시카고 컵스 스털링 카스트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조니 퍼랄타, 시카고 화이트삭스 알렉스 라미레스 등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유격수를 맡았던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는 워싱턴으로 이적해 2루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데스먼드가 버티고 있어서다. 2007년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된 15년 경력의 베테랑 지미 롤린스(35·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지난해부터 공격력이 쇠퇴하면서 라인 샌드버그 감독과 갈등을 빚고 있다. 현역 유격수로는 은퇴 후 명예의 전당 후보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공수주 기량을 두루 갖췄다.

글 문상열 스포츠 칼럼니스트(LA) 사진 WIKIPEDIA



'수비의 진수' 일본야구 명 유격수 열전


일본의 전설 요시다 요시에

수비를 중시하는 일본야구의 초창기 유격수 달인은 요시다 요시에(81)다. 1953년 한신에 입단해 1969년까지 부동의 유격수로 뛰었다. 1경기 15번 수비기회, 한 시즌 94번 병살, 15차례 리그 최다 수비 기회를 기록했다. 포지션별 으뜸 선수에게 주는 '베스트나인'에 9번이나 뽑혔다.

볼을 잡자마자 던지는 송구는 일품이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유격수였다. 350도루의 빠른 발을 이용한 수비폭도 넓었다. 통산 타율은 2할6푼7리이지만 179타석 연속 무삼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등번호 23번은 한신의 영구결번이다.


요시다의 빠른 송구는 노력으로 만든 것이었다. 첫 해 38개, 2년째 30개의 실책을 저지를 정도로 형편없는 유격수였다. 3년째부터 글러브와 공을 항상 옆에 끼고 살았다. 끊임없이 글러브에서 공을 빼며 손가락 감각으로 단번에 공의 실밥을 찾는 훈련을 했다. 이렇게 해서 요시다의 빠른 송구가 등장했다. 송구 동작이 빨라 1루수가 포구 준비도 하기 전에 볼이 가는 경우가 생겨 "천천히 던져달라"는 읍소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던지면 송구가 안된다"며 주자가 없는데도 2루수에게 볼을 송구해 1루로 던지게 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요미우리의 히로오카 다쓰로(82)도 명 유격수였다. 그라운드가 울퉁불퉁해도 완벽하게 포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만큼 기본기에 충실한 수비수였다. 일본을 찾은 메이저리거가 수비의 기본 동작을 처음부터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기본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끊임없는 반복 훈련과 연구로 요미우리 9연패의 주전유격수로 성장했다. 요시다의 그늘에 가려 당시 베스트나인은 단 1회에 그쳤지만 히로오카의 안정된 포구와 송구 등 기본기 수비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들도 많다.

도요다 야스미쓰(79)는 일본 최초의 공격형 유격수로 거론된다. 니시테쓰 입단 4년째인 1956년부터 8년 연속 베스트나인에 뽑혔다. 강력한 타격으로 통산 263홈런, 888타점을 올렸고 1956년에는 유격수 최초로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수비력은 인정 받지 못했다. 실책이 많고 병살 플레이를 하면서 2루수 왼쪽으로 볼을 던지거나 1루 악송구가 많았다.

유격수 전성시대


1970년대 유격수 계보를 이은 인물은 후지타 다이라(66·한신), 야마시타 다이스케(62·다이요). 오하시 유타카(68·한큐) 3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후지타는 1960년대 말부터 10년 넘게 한신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베스트나인 7회, 골든글러브(1972년부터 신설된 최고 수비수 표창) 3회를 수상했다. 통산 19년 동안 2,064안타, 207홈런, 802타점을 올린 명실상부한 공수 겸비형 유격수로 이름이 높았다.

야마시타는 2년 차인 1975년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골든글러브를 8번 차지했다. 322번 연속 수비기회 무실책 기록을 세웠다. 타구에 대한 반응이 빠르고 투수의 구종과 타자의 특성에 따라 변화 무쌍한 수비시프트를 선보였다. 어려운 타구를 쉽게 잡아내는 유격수로 유명했다.

오하시는 1969년 도에이에 입단해 1972년 한큐로 이적한 이후 철벽 내야진을 이끌며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5연속 베스트나인, 7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퍼시픽리그의 대표 유격수였다. 통산 타율이 2할1푼에 그칠 정도로 타격 보다는 수비 공헌도가 높은 유격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한신의 히라타 가쓰오(55)가 센트럴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활약했다. 전설의 유격수 요시다의 후계자로 지목 받아 1984년부터 4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어 요미우리의 가와이 마사히로(49)가 등장해 1990년대 중반까지 유격수 계보를 이었다. 가와이는 당대 최고의 수비력을 과시하며 골든글러브를 6회 수상했다.

이 시기 퍼시픽리그에서는 이시게 히로미쓰(57·세이부)가 등장했다. 1981년 입단과 동시에 개막전 유격수로 출전한 이시게는 공-수-주를 두루 갖춘 유격수였다. 수비에서는 안정된 포구와 폭넓은 수비범위, 정확한 송구력을 인정받았고 공격력에서도 16년 동안 통산 타율 2할8푼3리, 236홈런, 847타점, 243도루를 기록했다. '20홈런-20도루'를 세 번이나 달성했고 골든글러브와 베스트나인을 각각 5회씩 거머쥐면서 세이부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90년대 센트럴리그는 가와이에 이어 야쿠르트 미야모토 신야(43)가 명품의 바통을 이었다. 1995년부터 1군에 출전했는데 화려함보다는 견실하고 꼼꼼한 수비로 투수에게 안정감을 주는 유격수였다. 어려운 타구를 손쉽게 처리하는 재능을 가졌다. 유격수 골든글러브 6회, 3루수 골든글러브 4회를 수상했다. 지난 2012년에는 2000안타를 기록하는 등 공격력도 상당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주니치 이바타 히로가즈(39)가 등장했다. 골든글러브 7회, 베스트나인 5회 등 공수에서 주니치를 이끌며 2000년대 대표적인 유격수로 활약했다. 지금은 이바타가 노쇠기미를 보이며 퇴장하는 분위기이고 도리타니 다카시(33·한신)가 으뜸로 꼽히고 있다. 요미우리 간판유격수 사카모토 하야토(26)가 바통을 기다리고 있다.

퍼시픽리그는 니혼햄의 다나카 유키오(46) 시대가 있었다. 1986년 입단해 20년 동안 유격수로 활약하며 골든글러브 5회, 베스트나인을 4회 수상했다. 3루수-유격수 간의 깊숙한 타구를 잡아 노바운드로 1루에 던지는 어깨가 으뜸이었다. 339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기록도 작성했다. 2,012안타, 287홈런, 1,026타점을 올리는 등 공수를 겸비한 유격수로 인정받았다.

메이저리그 입성한 마쓰이 가즈오

다나카에 이어 공포의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38·라쿠텐)가 등장했다. 1994년 세이부에 입단해 9년 동안 골든글러브 4회, 베스트나인 7회를 차지했다. 시속 150㎞짜리 공을 뿌리는 강한 어깨에 빠른 발까지 갖추었다. 입단 후 유격수로 전환해 포구, 송구 등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웠는데 탁월한 신체능력 덕택에 단숨에 으뜸 유격수로 성장했다. 여러 가지 팔의 각도로 볼을 던지는데도 송구가 정확했다. 좌우의 수비 폭이 넓고 후방 주력이 뛰어나 머리 뒤로 넘어가는 팝 플라이도 곧잘 잡아냈다. 메이저리거급이라는 평가 속에 2004년 뉴욕 메츠에 입단했다.

공격력도 뛰어났다. 2014년 8월 26일 현재 일본과 메이저리그 통산 2,406안타, 438도루, 211홈런, 929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전까지 9년 동안 3할 타율 7회, 도루왕 3번을 차지했다. 2000년부터 4년 동안 23홈런-24홈런-36홈런-33홈런 등 장타력도 뜨거웠다. 2002년에는 '타율 3할-30홈런-30도루'에 가입했다.

마쓰이 이후 퍼시픽리그는 고사카 마코토(41·니혼햄)가 주름을 잡았다. 고사카는 수비능력만 본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안타성 타구 1개 정도는 줄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가와사키 무네노리(33·소프트뱅크-토론토), 니시오카 쓰요시(30· 한신), 나카지마 히로유키(32·세이부)가 유격수로 활약해왔다. 나카지마는 11년 동안 162홈런을 터트리면서 장타력을 갖추었다. 주로 퍼시픽리그에 공격형 유격수가 많다.

센트럴리그의 공격형 유격수는 1980년대 중반 등장한 이케야마 다카히로(49·야쿠르트)가 꼽힌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터트리는 등 통산 304홈런과 898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수비수로도 405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골든글러브는 1회에 그쳤지만 베스트나인을 5회 수상했다.

이시이 다쿠히로(44)도 1997년부터 베스트나인 5회를 수상했지만 골든글러브는 1회에 그쳤다. 수비력은 미야모토에 뒤졌지만 공격력은 출중했다. 요코하마와 히로시마에서 24년 동안 2,432안타, 102홈런, 358도루를 기록했다. 유격수로 1,767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다.

글 이선호 OSEN 기자



강정호, 위대한 유격수 그 계보를 잇다


유격수는 투수와 포수 다음으로 중요한 포지션이다. 내야진의 핵심인물이다. 그 이유는 전체 타자의 75%가 우타자이고, 어느 내야수보다 많은 땅볼타구가 유격수로 몰리기 때문이다. 유격수는 어깨가 강해야 한다. 3, 유간 깊은 곳이라면 1루까지의 거리가 40m가 넘는 등 대체로 긴 거리를 던져야하므로 송구동작이 빨라야 하고 2루수나 3루수에 비해 어깨가 강할 필요가 있다.

수비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지만 유격수는 다른 내야수와 달리 발보다 머리를 많이 써야하는 포지션이다. 타자에 대한 정보를 갖춰 그에 따라 위치를 이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격수는 타구를 잡은 후 송구 자세를 잡기까지 몸을 반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2루수보다 적기 때문에 직립 상태에서 그대로 송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레너드 코페트)

이광환 베이스볼 아카데미 교장은 팀이 강해지려면 중앙라인, 즉 투, 포수, 유격수, 중견수가 견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팀의 중추가 튼튼해야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이 말은 진리다. 더군다나 중앙라인 가운데 수비의 핵인 유격수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유격수 역사 새로 썼다

2014년 프로야구 1, 2위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 넥센 히어로즈를 보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삼성은 견실한 수비를 자랑하는 김상수(24)가 성장, 수비만 놓고 본다면 리그 최고로 꼽을 만하다.

넥센은 올해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로 불러도 손색없는 강정호(27)의 변신이 눈부시다.

8월 27일, 목동구장에서 열렸던 KIA-넥센전에서 강정호는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4-4로 팽팽하던 8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강정호가 KIA 투수 김병현을 상대로 벼락같은 타격으로 공을 가운데 펜스를 훌쩍 넘겨버린 것이다. 왕년의 메이저리거 김병현이 위세가 한풀 꺾인 투수라고 할지라도 강정호가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러 대형 아치를 그려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메이저리그와 일본의 스카우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터진 그 홈런 한방(시즌 36호)으로 넥센은 2위 자리를 노리며 숨 가쁜 추격을 하고 있는 NC 다이노스를 3.5게임차로 밀어내 한숨을 돌리게 됐다.


강정호는 그 홈런으로 역대 유격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30홈런-100타점을 달성했다. 유격수 30홈런은 이종범(한화 코치)이 1997년에 기록(30개)했고, 100타점은 홍세완(KIA 코치)이후 두 번째이자 동시 달성은 강정호가 처음이다.

그날 목동구장에는 강정호를 보기 위해 메이저리그에서 8개 구단(클리블랜드, 볼티모어, 보스턴,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텍사스, 워싱턴)과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가 파견한 16명의 스카우트가 모여들었다.

전설, 그 너머의 꿈을 향해

이제 강정호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적어도 공격 부문에서 가장 강한 유격수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됐다. 강정호가 김재박(60. MBC 청룡)→류중일(51. 삼성)→장종훈(46. 한화 이글스)→이종범(44. KIA 타이거즈)→유지현(43. LG 트윈스)→박진만(38. SK 와이번스)의 뒤를 잇는 리그를 대표하는 유격수임에 틀림없다.

공, 수 양면에서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유격수는 이종범일 것이다. 비록 1997시즌을 마치고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외야수로 전향하는 바람에 야구사에 길이 남을 유격수로서의 기록이 멈추긴 했지만 이종범은 유격수 최초 타격왕(1994년)과 1982년 프로야구 첫 해 타격왕 백인천( .412)의 기록에 가장 근접한 3할9푼3리의 최고 타율 보유자이다.


이종범이 획득한 타이틀만도 타격왕을 비롯해 도루왕 4회(1994, 1996, 1997, 2003년), 출루율 1위(1994년), 득점 1위(1993, 1994, 1996, 1997, 2004년) 등으로 화려하기 그지없고, 게다가 1994년 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MVP)와 한국시리즈 MVP(1993, 1997년), 올스타전 MVP(2003년), 골든글러브(1993, 1994, 1996, 1997, 2002, 2003년) 수상 경력까지 더한다면, 여전히 '역대 최고 유격수'이다. 그의 1993, 1996, 1997년 기록은 소속 팀(해태 타이거즈)의 우승과 함께 했기에 그 값어치가 더욱 빛났다.

이종범의 윗세대인 김재박 역시 이종범 못지않은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유격수 부문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1983~1986, 1989년) 기록을 갖고 있는 김재박의 전성기 시절 수비 능력은 독보적이어서 누구라도 흉내 내기 어려웠다.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별' 강정호가 이종범과 김재박을 능가하는 최고의 유격수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이제야 비로소 꽃을 피우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다만 올 한해의 활약상을 놓고 볼 때, 강정호는 역대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유격수이다. 유격수로서 그가 써내려가고 있는 기록은 앞으로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기록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만약 올 시즌 후 강정호가 더 큰 무대로 떠나간다면, 이종범처럼 의미 있는 기록의 축적과 연속성이 단절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강정호가 김재박과 이종범을 뛰어넘고, 나아가 메이저리그의 위대한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데릭 지터 같은 큰 유격수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글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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