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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Jackie Robinson

by Wood-Stock 2013. 4. 17.

'첫 흑인 빅리거' 재키 로빈슨 - ML ‘4·15 검은 혁명’…그날이 되면 42번만 달린다

만능스포츠맨 1946년 브루클린 다저스 입단, 이듬해 인종차별 딛고 ML 역사적인 데뷔전
빈볼·왕따도 극복 …10년간 종횡무진 활약, 명예의 전당 입성…ML선 42번 영구결번

'재키 로빈슨의 날' 모든 선수 42번 달고 뛰어

 

미국 현지시간으로 매년 4월 15일이면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들은 등번호 42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른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른 날이 바로 4월 15일이다. 메이저리그는 1997년 로빈슨의 백넘버 42를 영구결번으로 정하고, 2004년부터는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최근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42'가 개봉됐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이겨내고 위대한 인간승리의 표본이 된 로빈슨. 그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불우했던 천재

로빈슨은 1919년 1월 31일 조지아주 카이로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 로빈슨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LA 인근 패서디나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온갖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혹한 현실에 불만을 품은 로빈슨은 사춘기에 잠시 갱단에 몸을 담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야구뿐 아니라 풋볼, 농구, 육상까지 두루 섭렵했다. 1939년 그는 UCLA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종목에서 학교대표선수로 뽑히는 기록을 세웠다. UCLA 유니폼을 입고 치른 첫 경기에서 4타수 4안타 2도루로 맹활약했지만, 1940년 시즌 성적은 타율 0.097에 불과했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체육프로그램의 코치를 맡아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얼마 후 정부가 지원을 중단하자 실업자로 지내다가 1941년 세미프로 풋볼팀에서 러닝백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군 복무를 했다.

○야구계 복귀와 다저스 입단

제대 후 텍사스주 오스틴의 샘휴스턴 칼리지에서 농구 감독을 맡던 1945년, 로빈슨에게 니그로리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다. 월 400달러, 현재로 치면 5000달러가 넘는 금액이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모나크스는 체계적이지 못했고 도박으로 승부조작에 연루되기 일쑤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4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87, 5홈런, 13도루로 니그로리그 올스타에 뽑혔다. 그해 8월 로빈슨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를 눈여겨본 브루클린 다저스 사장 겸 단장 브랜든 리키와 단독 면담 후 월 600달러의 조건에 입단 계약을 했다. 인종차별로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꾹 참는다는 약속이 전제조건이었다. 1946년 트리플A 몬트리올 로열스 스프링캠프가 차려진 플로리다주 데이토나비치에 로빈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인종차별이 본격화했다. 숙소 출입을 금지 당했고, 그가 출전하면 시범경기를 불허한다는 협박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4월 18일 저지시티 자이언츠와의 시즌 개막전에 출전했다. 비록 마이너리그 경기였지만, 흑인 선수가 처음 경기에 나오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동안의 울분을 토하듯 그는 3점홈런을 포함해 4안타 3타점 4득점으로 맹활약해 팀의 14-1 대승을 이끌었다. 원정경기에선 여전히 그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았지만, 몬트리올 팬들에게는 최고의 스타였다. 그해 로빈슨이 나온 경기를 관전한 관중은 무려 100만명이 넘었다. 타율 0.349, 수비율 0.985를 기록한 그는 인터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흑인 최초 메이저리거의 탄생

1947년 시즌 개막 6일 전, 다저스 구단은 로빈슨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합류시켰다. 4월 15일 다저스의 홈구장 에베츠필드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2만6623명의 만원 관중 가운데 흑인은 무려 1만4000명. 그러나 팀 동료들은 그를 '왕따' 시켰다. 그의 옆에 앉지도 않았고 노골적으로 모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레오 듀로처 감독은 "피부가 노랗거나 검은 것은 아무 상관없다. 우리 팀에 로빈슨은 꼭 필요한 선수다. 이에 대해 불만이 있는 선수는 즉각 다른 팀으로 보내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원정은 늘 고달팠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로빈슨이 출전할 경우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경기 중에는 빈볼이 날아오기 일쑤였고, 더블플레이를 할 때는 발을 높이 들어 태클을 해 그의 정강이 살이 찢겨지기도 했다. 그래도 28세 늦깎이 루키는 타율 0.383, 12홈런, 48타점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 신인왕의 영예를 안았다. 1949년 봄, 로빈슨은 또 한 명의 은인을 만났다. 조지 시슬러 타격 인스트럭터의 가르침으로 밀어치는 타법을 연마했고, 빠른 공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노력의 열매는 달콤했다. 직전 시즌 0.296이던 타율은 0.342로 올라갔고, 빠른 발을 이용해 37도루를 기록했다. 또 124타점, 122득점을 올려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끝내 외톨이였던 선구자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가 된 로빈슨은 1950년 자신을 주제로 한 영화 '재키 로빈슨 스토리'에서 직접 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영화 출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저스 월터 오말리 공동구단주는 로빈슨을 일컬어 '리키 단장의 프리마돈나'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듬해에도 오말리 구단주는 "로빈슨이 트리플A 몬트리올의 감독직을 수락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며 은퇴를 종용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1954년까지 6년 연속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뽑히는 등 꾸준한 성적을 보였다.

로빈슨은 마침내 1955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개인 성적은 빅리그 데뷔 후 최악인 타율 0.256, 12도루에 그쳤다. 마지막 시즌이었던 1956년에는 당뇨병을 앓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즌을 마친 뒤 다저스는 지역 라이벌 뉴욕 자이언츠의 딕 리틀필드와의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로빈슨은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한 뒤 사업가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10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았던 메이저리그 경력에서 로빈슨은 통산 타율 0.311, 137홈런, 734타점을 기록했다. 197개의 도루 중 홈스틸이 19번이나 됐는데, 모두 더블스틸이 아닌 단독 홈스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야구센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은퇴 후 5년이 지난 1962년, 후보 자격을 얻은 첫 해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흑인선수로는 최초로 입성한 로빈슨은 사업에도 재능을 보여 뉴욕 할렘 지역에 흑인이 경영하는 프리덤내셔널은행을 공동으로 설립했다. 50대 들어 당뇨합병증으로 거의 실명 상태가 된 그는 1972년 10월 24일 53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는데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선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듯' 로빈슨의 업적은 사후 찬란하게 재조명되고 있다. 1999년 주간지 타임은 20세기를 빛낸 100인 중 1명으로 로빈슨을 뽑았다. 미국 우표에도 로빈슨은 3번(1982·1999·2000년)이나 등장했다. 메이저리그는 1987년부터 신인상을 '재키 로빈슨 상'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최초의 흑인선수로 당한 편견과 수모는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영화 '42'에선 "누가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최소한 인간다운 대접을 해주길 바란다"고 절규하는 로빈슨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선구자 로빈슨의 고독한 투쟁은 메이저리그를 백인들만이 아닌 전 세계 최고 스타들의 경연장으로 바꾸어놓았다.

 

 

  

 

 

[민기자 MLB 컬럼]재키 로빈슨 영화와 MLB의 흑인 선수

로빈슨의 생애를 다룬 영화 '42' 개봉 주간에 MLB는 흑인 선수 부족의 문제점에 봉착

 

'42'

미국의 야구팬들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이고 의미가 깊은 숫자입니다. 메이저리그에 가로막혀 있던 인종의 장벽을 허문 재키 로빈슨이 달았던 등번호입니다. 이제는 모든 구단에 이 번호가 영구결번이 됐고 야구장 외야의 담장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호를 달고 뛰는 마지막 선수인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면 이 번호를 달고 뛰는 선수는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오로지 전설 속에서만 42번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 그런데 이번 주말 미국에서는 '42'라는 수자를 전국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모든 크고 작은 극장의 간판에 바로 이 수자가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42'가 미전역에서 개봉됩니다. 'LA 컨피덴셜'과 '맨 온 파이어' 등의 시나리오를 쓴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언 헬그랜드가 제작한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재키 로빈슨 영화 중에 가장 큰 규모로 야심차게 그리고 극적으로 재키 로빈슨의 생애를 그렸다는 평을 듣습니다. 채드윅 보스만이 로빈슨으로 나오고 브랜치 리키 단장은 해리슨 포드가 맡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가 너무 냉정하게 현실적으로만 로빈슨을 다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70년 가까이 전해져온 신화가 많이 퇴색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당시 상황을 재연하며 '인간 재키 로빈슨'을 조명하고 다루는데 주력했다는 호평도 많습니다.


이 영화는 로빈슨의 전 생애가 아닌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한 1947년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초기 몇 년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구 선수 로빈슨은 물론이지만 젊은 남편이자 갓난아이의 아버지로서 전례가 없던 새로운 세상에 내던져진, 그러나 실은 너무도 익숙했던 불평등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대항해 싸워야 했던 한 유색인종 사나이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헬그랜드 감독은 이 영화의 제작 초기부터 끝까지 로빈슨의 미망인 레이첼 로빈슨의 조언과 증언에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만개의 작은 용기 있는 행동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용기 있는 행동을 이뤘다."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재키 로빈슨의 고행을 이야기했습니다.

대부분 미국인이나 혹은 외국의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로빈슨의 업적 뒤에 숨겨져 있던, 미국과 메이저리그 야구가 그 젊은 흑인 선수를 얼마나 혹독하게 괴롭히고 집요하게 차별했는지의 어두운 단면들을 이 영화는 담고 있습니다. 과거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숨기고 싶었던 쓰라린 상처를, 그리고 젊은 층에게는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이 영화가 13세 이상 입장가가 아니라 18세 이상 입장가로 만들어졌다면 비정하고 비열했던 당시 현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릅니다. 다큐멘터리는 아니므로 극적인 요소가 담기긴 했지만 미망인 레이첼을 비롯해 로빈슨의 전기 작가 등 당시 상황을 직접 보고 겪었고 재구성했던 인물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하면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대단히 심층적으로 담았습니다. 때론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것처럼 재키 로빈슨이라는 한 젊은 흑인 야구 선수의 메이저리그 초창기 생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감동과 충격을 함께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재키 로빈슨의 42번은 MLB 전체의 영구 결번으로 30개 모든 야구팀 은퇴 번호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 야구 선수의 비율은 계속 줄고만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국가도 모순과 차별과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이 존재합니다.
메이저리그가 그리고 미국이 이렇게 존경하고 추앙하는 영웅 재키 로빈슨이 새로운 영화로 또 다른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가운데 MLB는 특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번 주 초 버드 셀릭 커미셔너는 17명의 다방면의 인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했는데, 이 위원회의 목표는 MLB에서 흑인계 선수의 저조한 참여에 대한 연구와 개선책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데이브 돔브로스키 사장이 위원장을 맡게 됐고 각 팀의 수뇌부 인물은 물론 대학교수와 전직 MLB 감독, MLB 스카우트국 국장 등 다양한 분야의 관계자들이 다음 주 밀워키에서 첫 미팅을 갖습니다.

2013시즌 개막전을 기준으로 MLB의 흑인 선수의 비율은 전체의 8.5%입니다. USA 투데이는 올해 흑인 선수의 비율이 사상 최저인 7.7%라는 보도도 했습니다. (중남미계 선수는 따로 분류되는데 그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년도 챔피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비롯해 세인트루이스, 시애틀, 텍사스 등은 아예 흑인 선수가 한 명도 없습니다. 흑인 선수가 두 명 이하인 팀이 30팀 중에 18개입니다. 정확한 비율을 떠나 지난 1986년 흑인 선수의 비율이 19%였던 것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1975년 흑인 선수의 비율은 최고 27%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흑인 선수의 비율이 8% 선으로 떨어진 것에 반해 외국에서 출생한 선수의 비율은 28%를 넘어서 정 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재키 로빈슨을 전설의 영웅으로 추앙하면서도 정작 흑인 선수의 비율은 오히려 갈수록 떨어지는 난감한 현상에 대해 MLB는 사실 수년전부터 고민을 해왔고 해결책을 모색해 왔습니다. 지난 1989년부터는 흑인 거주자가 많은 도시 빈민층 지역의 야구 활성화를 위해 RBI 프로그램 (Reviving Baseball in Inner Cities)을 만들어 나름 활발한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흑인 청소년 스포츠 스타를 농구나 풋볼에 빼앗기는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야구가 그만큼 어렵고 오랜 마이너리그 기간을 거쳐야 하고 치열한 경쟁으로 생존 가능성이 낮은 등의 난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고 부상 위험도도 풋볼 등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등 강점도 분명히 많다는 자체 평가입니다.

전례도 신통치 않았기에 과연 이번 특별위원회가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마련할지는 기다려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필 재키 로빈슨에 대한 사상 최고의 영화라는 평까지 듣는 '42'가 개봉하는 바로 그 주간에 MLB는 턱없이 적은 흑인 선수에 대한 타개책을 찾는 특별위를 구성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기자 MLB 리포트]재키 로빈슨 기념일에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올해도 MLB는 어김없이 '재키 로빈슨 데이'를 기념하고 축하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은 야구계는 물론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문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이며, MLB는 매년 4월15일이면 그의 브루클린 다저스 데뷔를 기리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실은 미국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모세스 플릿우드 워커를 비롯해 몇 명의 흑인 선수가 NL에서 뛰었습니다. 그러다가 1898년부터 흑인은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뛰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빈슨은 정확히는 49년 만인 1947년 다시 빅리그에 등장한 최초의 흑인 선수였습니다.)

 

MLB 사무국은 로빈슨이 다저스에서 데뷔한 지 50년째가 되던 지난 1997년 4월 15일 42번을 전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날이 되면 수많은 MLB 선수들이 저마다 42번을 단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는 진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4월15일 재키 로빈슨 데이가 아닌 다른 날에 42번을 달고 뛰는 선수는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유일합니다. 이 번호가 영구 결번이 되던 시점에 42번을 달고 뛰던 선수에게는 은퇴할 때까지 그 번호를 그대로 달고 뛰어도 된다는 결정이 났고, 이제 그 중에 유일하게 현역으로 남은 선수가 '세이브의 전설' 마리아노입니다. 마리아노는 최근 뉴욕 데일리 뉴스와 인터뷰에서 "42번을 달고 뛰는 마지막 소수민족 선수라는 것은 내겐 무한한 영광이자 특권이고 동시에 큰 도전이다. 재키의 존재가 아로 새겨진 이 번호에 담긴 유산을 욕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예정대로 그가 은퇴한다면 매일 42번을 달고 뛰는 선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MLB가 42번을 전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결정하고 또한, 매년 4월 15일이면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42번을 달고 뛰는 일은 스포츠계에서 대단히 기념비적인 결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깨기 위한 노력과 그리고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미국 사회에서도 재키 로빈슨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프로야구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켄 그리피 주니어는 MLB의 이런 결정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자발적으로 4월15일이면 42번을 달고 뛰기도 했습니다. 에인절스의 토리 헌터도 그리피 주니어의 뒤를 이어 자발적으로 그날이면 42번을 달고 뛰었습니다.

양키스의 중견수 커티스 그랜더슨은 올해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은 물론 특수 제작한 42번이 찍힌 스파이크를 신고 경기에 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경매에 내놔 수익금을 재키 로빈슨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그랜더슨은 "오늘은 바로 내가 이 위대한 경기,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준 날이다. 65년 전 재키 로빈슨씨가 피부색의 벽을 허물었기 때문에 야구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랜더슨은 그의 라커룸 벽에 로빈슨이 슬라이딩하는 사진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흑인 선수들의 재키 로빈슨에 대한 감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조금 괴리가 있습니다. 최근 '재키 로빈슨 데이'에 맞춰 USA 투데이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MLB에서 흑인 선수의 비율은 근래 들어 최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5일 현재 MLB의 흑인 선수의 비율은 8.05%였습니다. 전체에서 단 61명뿐이었습니다.


로빈슨이 MLB에 뛰어든 지 12년째가 되던 1959년 보스턴 레드삭스는 MLB에서 마지막으로 흑인 선수를 받아들인 팀이 됐습니다. 당시 흑인 선수의 비율은 17.25%였습니다. 그리고 1975년 MLB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의 비율은 무려 27%나 됐습니다. 지난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미국에서 흑인의 인구 비율이 12.6%였으니 37년 전에 27%가 흑인 선수였다면 대단히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을 정점으로 MLB에서 흑인 선수의 비율을 점점 떨어졌습니다. 1995년에는 19%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은 한참 때의 3분의1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개막전 기준으로 볼 때 흑인 선수가 한 명 이하인 팀이 10팀이나 됩니다.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 LA 에인절스, 다저스 등 세 팀에 흑인 선수의 25%가 모여 있습니다. 그 대신 외국에서 출생한 선수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올 개막전 현재 외국 선수의 비율은 28.4%나 됩니다.

흑인 선수가 계속 줄어드는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부시 정권 이래 미국 사회의 장기화된 불경기로 대학 장학금이 줄어들어 가난한 흑인 선수들에게 기회가 줄고 있습니다. 야구는 아무래도 경비가 많은 드는 스포츠라는 점도 빈곤층이 많은 흑인 청소년들이 야구에서 멀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고교나 대학 최고 스타가 곧바로 1군에서 뛸 수 있는 농구나 풋볼과는 달리 야구는 긴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당장 큰돈을 만지려고 야구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야구가 미국인의 오락이던 시절과는 달리 요즘은 스포츠가 대단히 다양화되고 수많은 다른 기회들이 생기면서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농구나 풋볼은 물론 수많은 다른 종목에 빼앗기기도 합니다.

또한, 야구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나 프론트 오피스 쪽에서 흑인의 비율이 턱없이 낮기 때문도 큰 이유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현재 흑인 단장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케니 윌리엄스와 마이애미 말린스의 마이클 힐 두 명이 있습니다. 감독으로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론 워싱턴과 신시내티 레즈의 더스티 베이커, 역시 두 명이 있습니다. 지난 2008년 뉴욕 메츠의 제리 매누엘 이후 흑인 감독은 새로 기용된 적이 없고, MLB 역사상 흑인 단장은 딱 5명 있었습니다.

MLB도 나름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빈민층 흑인 청소년들에게 야구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계속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흑인 선수들도 지역 사회를 방문하고 흑인 청소년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야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행크 애런을 비롯한 전설의 흑인 선수들도 자선단체나 봉사 단체를 만들어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야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 선수의 비율이 계속 줄어들면서 흑인 스타의 탄생도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990년부터 1995년까지 12명의 NL과 AL MVP 중에 흑인 선수가 9명이나 됐습니다. 지난 5년간 10명 중에 흑인 MVP는 2007년의 지미 롤린스 하나뿐이었습니다.
흑인 선수의 감소는 흑인 관중의 감소로 이어집니다. 작년 MLB 경기를 찾은 관중은 7345만1522명이었는데 그 중에 흑인 관중은 9%에 불과했습니다.

조만간 확정이 되면 어빈 '매직' 존슨은, 비록 공동으로 만든 그룹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MLB 최초의 흑인 구단주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LA 다저스는 맷 켐프라는 걸출한 흑인 스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농구 선수 출신이지만 미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의 하나인 매직 존슨이 최초의 구단주가 된다는 점에서 MLB도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이 오늘 이런 상황을 지켜본다면 절대 만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스포츠에서 인종과 피부색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MLB에서 흑인계의 불만은 상당히 큰 것이 사실입니다.

 

 

[박흥진의 할리우드 통신] "내겐 그라운드 인종차별 뚫을 배짱이 있소"

메이저리그 첫 흑인선수 로빈슨 감동 실화 담아

 

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흑인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실화를 감동적으로 담은 전기 드라마. 제목은 그가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전신)의 선수로 입단해 받은 백넘버를 뜻한다.

물론 영화는 야구경기 장면도 많이 나오는 야구영화지만 그보다는 가혹한 인종차별을 인내와 용기로 극복하고 미 야구사, 나아가서 미 역사를 바꿔놓은 한 용감한 남자의 감동적인 영웅담이다.

재키 로빈슨(채드윅 보스만)이 영웅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65세로 그를 스카우트한 다저스의 제너럴 매니저 브랜치 릭키(해리슨 포드)다. 따라서 영화는 이 초인적인 두 사람의 인간관계를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로빈슨을 사랑과 격려로 받쳐준 강인하고 독립심이 강한 아내 레이철(니콜 베하리)과의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다.

영화는 1945년부터 시작해 로빈슨의 결혼과 다저스의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얼 로열스와의 계약 그리고 다저스와 계약한 1947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재미 있으며 연기와 차분한 연출력 등이 돋보이는 훌륭한 영화다.

1997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은 소속 전 팀으로부터 42번을 은퇴시켰다. 42번은 매년 4월 15일(그가 브루클린 다저스로 첫 경기를 치른 날) '재키 로빈슨 데이' 때마다 이 날 경기를 하는 모든 팀의 선수들의 백 넘버로 등장한다.

영화는 흑인 야구기자이자 브랜치에 의해 로빈슨을 돌봐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의 개인 비서 같은 일을 했던 안드레 홀랜드(웬델 스미스)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브랜치 릭키가 참모들에게 로빈슨을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다. 

그러나 고집불통이요 용감하며 의식 있는 인본주의자인 브랜치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로빈슨을 면담한다. 브랜치는 성질이 있는 로빈슨에게 "네가 그라운드에 서면 이루 말 할 수 없는 인종차별 발언을 들을 텐데 이를 참을 배짱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로빈슨은 "당신이 내게 유니폼과 백넘버를 주면 난 당신에게 내 배짱을 주겠다"고 답한다. 이 때부터 두 사람 간의 스승과 제자요 아버지와 아들이자 또 친구와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맺어진다.

먼저 몬트리얼 로열스 팀에서 뛰게 된 로빈슨은 이 때부터 동료선수들과 관중들로부터 심한 인종차별을 받는다. 그러나 로빈슨은 이를 악물고 참는다. 이어 로빈슨은 마침내 다저스와 계약을 맺는다.

로빈슨은 언론과 관중들과 팀 동료선수들로부터도 인종차별을 당하는데 다저스 선수들은 로빈슨과는 함께 못 뛴다는 연판장까지 돌린다. 그러나 로빈슨은 이런 수모와 고통을 견디고 백넘버 42를 달고 터널을 통해 당시 다저스의 홈구장이었던 에베츠필드의 그라운드에 선다.

그는 상대편 코치의 입에 담지 못할 모욕과 투수의 고의 빈볼과 육체적 가해 행위를 죽어라 하고 참는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코치의 모욕에 견디다 못해 터널에서 배트를 부러뜨리면서 울부짖는다. 이 때마다 그를 격려하는 사람이 브랜치였다. 

로빈슨은 인종차별에 대해 실력으로 앙갚음을 하는데 결국 그의 인내와 자존심과 용기는 동료선수들과 관중들을 감동시킨다. 비교적 신인인 보스만이 차분하고 강단 있는 연기로 역할을 잘 소화해낸다. 처음에 다소 과장된 연기를 선보이던 포드도 극이 진행돼 가면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보스만과 베하리의 콤비도 좋다. 브라이언 헬게랜드가 각본 겸 연출을 맡았다.

 

 

재키 로빈슨 야구 명언

 

매년 4월 15일, 메이저리그 경기가 펼쳐지는 미국 전역의 야구장에서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진다. 그라운드에 서는 모든 선수들뿐만 아니라 주심들까지 '42'라는 배번이 적힌 저지를 입고 경기를 치른다. 이 이벤트는 2009년 처음 시작된 이래 연례 행사로 자리 잡아 이번 시즌까지 3년째 이어지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199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42라는 배번을 메이저리그 최초의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제정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 42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1947년 4월 15일은 42번의 저지를 입은 니그로리그 출신의 재키 로빈슨이 흑인 선수로서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한 날이었다.

재키 로빈슨은 10년의 선수 생활(1947~1956) 동안 소속팀 브루클린 다저스를 여섯 차례나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으며 1955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창단 첫 우승의 영광을 안긴 슈퍼스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뿐 아니라 모든 미국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신인왕'이나 '1949년 내셔널리그 MVP', '올스타 6회 선정' 등 그의 천부적인 야구 실력을 수식해 주는 화려한 경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사회가 진정으로 계승하려 하는 것은 재키 로빈슨이 야구를 통해 당시 미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 인종차별이라는 부당함에 맞선 도전정신, 흑인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그라운드 안팎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던 숭고한 희생 정신이다.

상대팀 선수들은 물론 같은 팀 동료들조차 그를 시기했다. 백인 관중들은 그에게 끊임 없는 조소와 야유를 보냈고 그는 살해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만약 재키 로빈슨이 이에 굴복해 메이저리그를 떠났다면, 혹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더라면 윌리 메이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같은 스타들은 역사 속에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국민스포츠' 야구를 소통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에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쉽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홍정욱 의원이 본지 기고글(2011년 3월호)을 통해 소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책 < 그대를 나는 노래합니다 > (Of Thee I sing)에서 나오는 구절만큼 재키 로빈슨의 생애를 잘 함축한 구절은 없는 듯하다.

"A man named Jackie Robinson played baseball and showed us all how to turn fear to respect and respect to love."
"재키 로빈슨이란 이는 야구를 했고 어떻게 두려움을 존경으로, 존경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재키 로빈슨은 현역 시절에는 묵묵히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통해 미국 사회가 가진 그릇된 관점을 변화시키려 했고 은퇴 후에는 흑인들의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명언들은 매우 직설적이며 그의 인생 철학을 명료하게 반영한다.

"A life is not important except in the impact it has on other lives."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


"Life is not a spectator sport. If you?e going to spend your whole life in the grandstand just watching what goes on, in my opinion, you?e wasting your life."
"인생은 구경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저 스탠드에 서서 일어나는 일만 지켜 볼 것이라면 당신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I'm not concerned with your liking or disliking me. All I ask is that you respect me as a human being."
"당신이 나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 주는 것이다.

글= 유병석 (KBO 홍보팀)

 

http://pinterest.com/elbeece/jackie-robinson/

 

 


[이현우의 MLB+]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재키 로빈슨 데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미국 날짜로 4월 15일은 특별한 날이다. 이날 열리는 메이저리그 경기에선 모든 선수가 등번호 42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름하여 '재키 로빈슨 데이'다. 71년 전 오늘, 뉴욕주 브루클린에 위치한 이벳필드에서 일어난 사건이 메이저리그를 넘어 미국 사회를 바꿔놓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다. 
 
1947년 4월 15일 열린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 출전한 브루클린 다저스의 선수단 가운데는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 명문 UCLA 대학을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전년도 마이너리그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하고 막 빅리그 무대를 밟은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받은 이유는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로빈슨은 그날 경기장에 모인 선수 50명 중 유일하게 피부색이 달랐다. 메이저리그 경기에 검은 피부의 선수가 출전한 것은 1884년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선수 겸 감독 캡 앤슨이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였던 플릿우드 워커를 쫓아낸 이후 63년 만이었다.
 
캡 앤슨은 메이저리그 초창기의 슈퍼스타였다. 선수로서는 최초로 3000안타를 달성했고 감독으로선 팀을 3연속 지구우승으로 이끈 그가 '검둥이'와 경기를 하느니 팀을 해체하겠다고 하는 데는 상대팀인 톨레이도 블루스타킹스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후로 메이저리그는 백인만의 무대였다. 흑인 선수들은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이렇게 흑인 선수들로만 이뤄진 리그를 가리켜 니그로리그라고 한다. 로빈슨 역시 1945년까지 니그로리그의 수많은 흑인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흑인 전용 좌석을 거부한 군인과 야구계의 혁명가
 
2차 세계대전 무렵 미육군 소위로 임관한 재키 로빈슨(사진=엠스플뉴스)
 
잠시 1947년 당시의 시대상을 짚고 넘어가 보자. 남북전쟁 이후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면서 명목상으로 미국 내 흑인들은 해방된 상태였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흑인들이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한 것은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과 1968년 새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8)이 통과된 다음부터다.
 
로빈슨의 데뷔는 그로부터 21년 전이었다. 그가 받았을 차별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로빈슨이 니그로리그에 몸을 담게 된 계기도 육군 소위 시절 흑인 전용 좌석으로 옮기라는 버스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후 명예제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경력을 눈여겨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조지 시슬러다.
 
시슬러는 통산 타율 .340를 기록한 전설적인 1루수다. 193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미시간 대학 시절 은사였던 단장 브랜치 리키의 부름을 받아 다저스의 타격 코치 겸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시슬러는 리키로부터 "어떤 야유에도 흔들리지 않을 배짱을 가졌으며 백인들이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흑인 선수"를 발굴해달라고 부탁받은 상태였다.
 
리키는 야구 역사를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명단장이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재직하던 시절 현대식 스프링캠프의 틀을 다졌고 배팅 케이지와 피칭 머신, 마이너리그 팜 시스템을 고안했다. 훗날 회고에 따르면 리키는 대학코치 시절 팀 내 최고 선수인 찰스 토마스가 흑인이란 이유로 숙박 거부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리키(사진=엠스플뉴스)
 
앞서 소개된 일화가 미화된 얘기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리키가 1942년 다저스 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흑인 선수를 영입하려고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런 시도는 비슷한 시기 또 다른 혁신가인 빌 비크가 '전설' 사첼 페이지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디어의 보도로 인해 비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리키는 포기하지 않았다.
 
1944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한번 흑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시슬러의 소개로 로빈슨과 만난 리키는 그에게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아낼 사람이 필요하다. 자네가 그걸 해낼 수 있겠나?"고 물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로빈슨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리죠"라고 대답했다.
 
이로써 마침내 역사가 이뤄졌다. 1946년 로빈슨과 계약을 맺은 리키는 그를 당장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키기보다는 산하 마이너리그팀이었던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내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리키의 기대대로 그곳에서 로빈슨은 팀의 우승을 이끌며, 단 한 시즌 만에 몬트리올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저스 내부의 선수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47시즌을 앞두고 과반수 이상이 남부 출신이었던 다저스 선수단은 로빈슨을 빅리그로 부르지 말 것을 서면을 통해 요청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다저스 감독 리오 듀로서가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억울한 1년 출전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선수단과 팬들의 관심이 듀로서에게 집중된 사이 리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빈슨을 빅리그로 불러들였다.
 
뛰어난 실력과 인품으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다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우여곡절 끝에 로빈슨은 빅리그 무대에 서게 됐다. 그러나 동료들과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로빈슨은 원정경기 때마다 흑인 전용숙소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고, 우편함은 협박편지로 가득 찼다. 상대 투수와 수비수, 주자는 위협구와 거친 플레이로 로빈슨을 괴롭혔다. 심판마저도 불리한 판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로빈슨은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며 참아내야 했다.
 
1947년 5월 13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에 들어선 6688명의 관중은 로빈슨이 등장하자 야유를 퍼부으며 '검둥이'를 외쳤다. 그런데 경기장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무렵 다저스의 주장이자 유격수였던 피 위 리즈가 수비 위치에서 벗어나 로빈슨 옆에 섰고, 글러브를 벗더니 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경기는 다저스의 영봉패로 끝났지만, 이날은 흑인에 대한 야구계의 인식이 바뀐 커다란 분기점이 됐다. 이후 로빈슨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데뷔 첫해 151경기에 출전해 타율 .297 12홈런 48타점 29도루를 기록하며, 이해 제정된 NL '올해의 신인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로빈슨의 활약으로 다저스는 7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활약이 정점에 달한 해는 1949년이었다. 이해 로빈슨은 타율 .342 16홈런 124타점 37도루로 NL 타율-도루 부문 1위를 석권, MVP를 수상했다. 그는 타고난 주력을 활용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여기에 높은 타율과 빼어난 선구안은 그를 NL 최고의 1번 타자로 만들어줬다. 이런 로빈슨의 활약과 인품은 그 어떤 사회적 운동보다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저스타디움에 세워진 재키 로빈슨 동상(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인 만 28세에 데뷔한 로빈슨은 10번째 시즌이었던 1956년 만 37세가 됐다. 그해 그는 1형 당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저스는 경기력이 떨어진 그를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려 했지만, 로빈슨은 이를 거절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데뷔 이듬해였던 1948년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흑인 메이저리거는 그 무렵 2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투표권을 얻은 첫해 77.5%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로빈슨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은 이후에도 흑인 인권을 위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업가로서 흑인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72년에는 흑인 선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감독은 없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감독 프랭크 로빈슨이 부임하는 것(1974년)을 보지 못하고 그해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장례식에는 유명 야구 선수 대부분과 수만 명의 팬이 함께 했고, 그는 죽음 후에도 여전히 많은 이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이에 사무국은 1997년 4월 15일 그의 등번호 42번을 역사상 최초로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어 2004년 그가 데뷔한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했다. 2007년 4월 15일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가 사무국에 42번을 달고 뛰고 싶다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42번을 단 선수들이 점점 늘기 시작해, 2009년부터 메이저리그의 출장하는 모든 선수와 코치진, 심판들이 등번호 42번 저지를 입고 경기에 임하게 됐다. 이는 모두 한 위대한 야구 선수를 기리기 위해서다.
 
 
로빈슨의 이야기는 흑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빈슨이 깬 인종의 장벽은 라틴 아메리카, 더 나아가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 배출로 이어졌다. 1994년 박찬호의 데뷔 역시 앞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문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바통은 현역 메이저리거인 류현진, 오승환, 추신수, 최지만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자리 잡는 데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공이 컸다. 하지만 로빈슨이 10년간 경기장에서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실력은 야구라는 종목을 넘어 프로스포츠, 더 나아가 미국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Ruth change baseball, Robinson change America).
 
이현우 기자 hwl0501@naver.com

http://v.sports.media.daum.net/v/20180416060006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