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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화보로 보는 '코리언 특급' 박찬호의 야구인생 - 민훈기

by Wood-Stock 2012. 12. 4.

결국 박찬호(40)는 은퇴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한 박찬호는 어언 30년의 외길 야구 인생을 쉴 새 없이 달렸습니다. 공주 중 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 재학 중이던 지난 1993년 LA 다저스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힘입어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영입전 끝에 그 해 마지막 날에 LA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던 박찬호. 그 후 기대를 뛰어넘는 활약으로 LA 다저스에서 MLB 정상급 투수로 성장하며 시즌 평균 15승을 거두는 쾌투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FA로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지만 부상과 부진의 힘겨운 시절도 보냈고 샌디에이고 트레이드, 뉴욕에서의 좌절, 그리고 다시 구원 투수로 부활 등 정말 드라마 같은 빅리그 생활 끝에 통산 124승이라는, 동양 선수 최다승을 기록했습니다. 일본의 오릭스를 거쳐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서의 한 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린 박찬호의 야구 생애를 화보를 통해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박찬호는 공주 중동초등학교 때 육상부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처음으로 접한 야구의 묘미에 흠뻑 빠졌습니다. 가난하던 부모님은 처음엔 공부도 곧잘 하던 둘째 아들 찬호의 야구부 입단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고집이 남달랐습니다. 공동묘지 훈련, 옥상에서 스윙 천 번 후에 취침 등 남다른 집념을 보여준 일례가 많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공주 고교 시절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눈길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된 투수가 아니었던 박찬호는 한양대에 입학, 방장 정민태 아래서 대학 생활을 하다가 2학년 때이던 1993년 MLB의 명문 구단 LA 다저스 입단 절차를 밟게 됩니다.

 

< 1994년 1월 LA 코리아타운에서 열린 입단 기자회견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줍음을 머금은 스무 살 박찬호는 그러나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첫 해에 스프링캠프에서 155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져 미국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곧바로 개막전 로스터에 진입해 두 번째로 화제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박찬호의 성공을 점치는 이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곧 마이너로 가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

< 잠깐의 빅리그 생활 끝에 더블A로 간 박찬호는 2년간 혹독한 미국 야구 수업을 받았습니다. 2년간 더블A와 트리플A에서 뛰며 43경기에서 11승14패를 기록한 박찬호는 211과⅓이닝 동안 201K를 기록하며 '코리언 특급'의 잠재력을 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발끝이 머리까지 올라가는 놀란 라이언 하이킥을 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마이너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샌안토니오의 아파트에서 라면을 끓여먹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야구를 포기할까 좌절하기도 했던 박찬호는 그러나 버트 후튼 투수코치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 빅리그 투수가 되는 기틀을 잡아갔습니다. >

< 1996년 다시 빅리그에 진입한 박찬호는 4월7일 시카고의 리글리필드에서 한국인 최초의 빅리그 승리 투수가 되는 감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메이저리그 투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첫 해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5승을 거둔 후 1997년 풀타임 2년차부터 선발 투수로 자리를 확실히 잡았습니다. 155km를 넘나드는 강속구와 낙차 큰 슬로우 커브, 그리고 슬러브를 장착하면서 5년간 한 시즌 평균 15승을 거두는 무서운 기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IMF의 시름에 빠졌던 시절 세계 최고의 야구 무대인 MLB에서 거구들을 상대로 삼진을 뽑아내며 승리하는 그의 활약은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즐거움이었습니다. >

< 박찬호에게 잊을 수 없는 태극마크의 추억은 1998년 방콕아시안 게임입니다. 해외파들의 첫 합류로 최초의 드림팀으로 불리는 당시 국가대표의 에이스로 출격한 박찬호는 일본, 대만 등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일조했습니다. 그 후로도 박찬호는 WBC와 올림픽 예선 등 조국의 부름에 응하며 태극 마크에 대한 사랑을 과시했습니다. 2010년 필리스 입단을 앞두고는 기자회견에서 국가대표를 은퇴한다고 발표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

 

< 투수 중에도 가장 매력적인 강속구 투수, 삼진 능력이 탁월하고 동양의 예의바른 선수로 이름을 날린 박찬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미국 팬들은 물론이지만 특히 교민, 유학생 등에게 박찬호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홈구장에서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5000명이 넘는 교민이 다저스타디움을 찾기도 했고, 뉴욕 같은 대도시 원정에서도 교민들의 응원 열기는 홈팀을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보비 발렌타인 당시 메츠 감독이 셰이스타디움인지 다저스타디움인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

< 투수도 타격을 하는 NL 소속인 다저스에서 빅리그 생활을 시작한 박찬호는 투수치고는 아주 타격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통산 성적을 보면 1할7푼9리에 3홈런 31타점이 있고 볼넷도 20개 골랐습니다. 특히 희생번트를 54개나 성공시켰으며 희생플라이도 2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시범 경기 때는 뉴욕 메츠의 서재응을 상대로 홈런을 친 기억도 있습니다. >

 

< 최초의 한국인 빅리거였던 박찬호는 늘 초미의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 신문은 상주 특파원이 있었고 그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교포 언론과 본국의 방송사 특파원들도 대거 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내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낯을 가리는 편인 박찬호는 때로는 언론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기도 했지만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신도 말했듯이 늘 언론과 함께 가는 관계였습니다. >

 

< 2001년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MLB 올스타전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짐 롬의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해 재치 있는 입담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시애틀의 세이프코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랜디 존슨에 이어 두 번째 투수로 NL을 대표한 박찬호는 은퇴를 앞둔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는데, 은퇴하는 대선배에 대한 예우라고 팬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박찬호는 후에 변화구보다는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

 

< 박찬호는 교민들에게도 큰 기쁨이었지만 입양아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늘 이방인으로 정체성과 동일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양아들에게 한국 청년 박찬호의 뛰어난 활약은 커다란 힘이 됐습니다. 박찬호도 각종 입양아 단체의 행사나 모임 등에 자주 모습을 보이며 그들과 호흡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 다저스 시절 박찬호는 많은 은인을 만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피터 오말리 구단주였고 그의 미국 아버지를 자처한 토미 라소다 전 감독 역시 그를 대단히 아꼈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은인에 바로 전설의 투수 샌디 코팩스였습니다. 플로리다 주 베로 비치에서 열리는 스프링 캠프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코팩스는 박찬호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늘 조언과 대화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하는 박찬호는 자신의 노력만큼이나 인복도 있었습니다. >

 

< 다저스 진출과 미국 정착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인물은 그의 에이전트였던 스티브 김입니다. 탄탄한 건축가의 길을 접고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된 스티브 김은 2001년 LA 다저스와 대형 계약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시즌 중반에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는 형식으로 스티브 김은 계약 과정에서는 손을 뗐습니다. 그 후 야구 관련 사업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다시 LA에서 건축 일을 하고 있습니다. >

 

< 2001시즌을 끝으로 박찬호는 FA가 됐습니다. 다저스에서 총 80승을 거두며 빼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재계약에는 실패했습니다. 보라스는 당시 스토브리그 투수 최대어이던 박찬호를 홍보하기 위한 책자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에이스를 애타게 찾던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을 끌어냈습니다. >

 

< 톰 힉스 구단주(사진 왼쪽 끝)는 입단 기자회견에 오라고 전세기를 보낼 정도로 박찬호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6년간 6500만 달러, 평균 연봉 1300만 달러라는 '메가 딜'을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전 해에 보라스의 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사상 최고액의 협상을 했던 힉스 구단주는 레인저스의 우승을 꿈꿨습니다. >

< 텍사스의 혹독한 기후만큼이나 박찬호의 레인저스에서의 여정도 힘겨웠습니다. 첫 스프링 캠프부터 부상이 왔고 무리해서 개막전 등판을 강행했다가 부상이 악화됐습니다. 그 후로 피나는 훈련과 재활로 재기를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실망과 좌절이 쌓여갔습니다. 텍사스에서 3년 반 동안 22승23패에 평균자책점 5.79를 기록했습니다. 다저스 시절의 3.77보다 2점이나 나빠졌습니다. >

< 정신적으로도 텍사스 시절은 정말 힘겨웠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박찬호는 에이스로서의 역할과 거액 연봉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지 못하자 자책했고 원형탈모증이 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이던 이만수 현 SK 감독을 만날 때면 어려움을 토로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박찬호에겐 정말 외롭고 정망적인 시절이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을 찾아간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

 

< 2005년 시즌 중반 레인저스는 토론토로 원정을 갔습니다. 박찬호 등판이 잡혀서 캐나다 교민들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등판이 취소됐습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이런 현상은 트레이드가 성사됐다는 뜻입니다.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전격 트레이드됐습니다. 실은 텍사스에서도 8승5패로 부활의 조짐을 보였는데 샌디에이고 이적 후 4승을 보태며 그 시즌을 12승으로 마쳤습니다. >

< 제1회 WBC는 박찬호에겐 잊을 수 없는 대회입니다. 이미 30대에 접어들었고 가까스로 재기의 조짐을 보인 2005시즌이 끝나고 다음해 봄에 열린 이 대회였지만 박찬호는 기꺼이 국가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일본을 두 차례나 꺾는 등 선전을 거듭하며 야구의 인기 몰이를 가져왔고, 박찬호는 구원과 선발을 오가며 그 선봉에 섰습니다. 단 하나, 이 대회를 지켜본 MLB 관계자들은 박찬호가 구원 투수로도 뛸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

< 2007년은 다시 찾아온 좌절과 도전의 시즌이었습니다.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좋은 시즌을 보내던 박찬호는 장출혈로 선수 생활의 큰 위기를 맞습니다. 수혈과 수술을 거쳐 놀랍게 빠른 회복을 보이기는 했지만 7승7패로 시즌을 마친 후 파드리스와 재계약은 없었습니다. 결국 뉴욕 메츠와 계약했는데 스프링 캠프의 경쟁에서 밀리며 마이너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단 한 번의 빅리그 등판 후 방출을 요청했습니다. 은사 버트 후튼이 있던 휴스턴의 트리플A로 이적해 재기를 노렸지만 그 시즌에 다시 빅리그에서 기회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제 은퇴'를 예감했지만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 2008년 봄 박찬호는 백의종군으로 자신의 친정인 LA 다저스에서 명예회복을 노렸습니다. 메이저리그 계약이 보장되지 않은 초청자격으로 스프링 캠프에 참가하는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마이너에서 보낸 1년간의 소중한 경험과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는 박찬호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습니다. 캠프 막판 마이너행을 통고받기도 했지만 부상 선수가 나오면서 개막전부터 다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5번의 선발을 포함해 총 54경기에 나서 4승4패 3.40의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포스트시즌 NLCS까지 진출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통산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거둔 성적은 84승58패가 됐습니다. >

< 2009년은 박찬호에겐 힘겨웠지만 결과적으로 찬란한 시즌이었습니다. 전년도 NLCS에서 패한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노장 박찬호의 활약을 눈여겨봤다가 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선발 기회도 주겠다는 조건으로 필리스 유니폼을 입었는데 초반 몇 차례 선발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박찬호는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오말리씨와 만나 진로에 대한 조언을 얻은 박찬호는 다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45경기에 출전해 3승3패 4.43의 성적을 올렸고, 시즌 막판 부상에도 결국 포스트 시즌 NLCS와 마침내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서는 감격도 맛봤습니다. 필리스에서의 1년은 박찬호에게 잊지 못할 시즌이 됐습니다. >

 

< 2010년 박찬호는 스스로 팀을 선택했습니다. 시카고 커브스에서 내놓은 좋은 조건을 뿌리치고 뉴욕 양키스에 가겠다고 캐시맨 단장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박찬호에게 혼쭐이 났던 양키스는 대환영.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첫 등판 라이벌 보스턴을 상대로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고, 두 번째는 보스턴을 꺾고 승리 투수가 됐습니다. 그러나 시즌 중반까지 2승1패 5.60의 성적 끝에 방출됐습니다. 그러자 극과 극의 팀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노장 박찬호를 영입했습니다. 양키스를 떠날 당시 박찬호는 통산 122승, 노모 히데오의 동양 투수 최다승에 1승이 모자랐습니다. 9월초 구원승을 보태 동률을 이뤘지만 좀처럼 추가 승리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0월2일 시즌 종료 하루를 남기고 플로리다 전에 구원 등판 3이닝 6K 무실점 호투로 승리 투수가 됐습니다. 러셀 감독과 선발 매커친 투수 등의 배려 속에 MLB 동양 선수 최다승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박찬호의 MLB 마지막 등판이었습니다. >

< 2010시즌이 끝나고 다시 FA가 된 박찬호는 부인의 고향인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도모 합니다.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의 유니폼을 입고 일본 무대에 데뷔했지만 결과는 저조했습니다. 부상이 겹치면서 7경기에서 1승5패 4.29에 그쳤습니다. 잘 던진 몇 차례의 경기에서 승운이 따르지 않았고 2군에서 간 후로는 다시 1군 기회를 잡이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자신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 드디어 자신의 마지막 목표이던 고향팀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 2012시즌이었습니다. 야구계는 특별법까지 만들어 영웅의 귀환을 도왔고 박찬호는 등판 때마다 운동장을 꽉 메운 한국팬들 앞에서 열심히 던졌습니다. 박찬호는 총 23경기에 나서 5승10패 5.06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시즌 중반과 후반에 부상으로 결장도 하면서 은퇴를 생각한 박찬호는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다시 좋은 모습을 과시했고, 주변에서 한 시즌만 더 뛰자는 바램과 부탁이 이어지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감독과 코칭스태프도 바뀌는 변화 속에 무엇보다 팀 전력에 과연 얼마큼의 도움이 될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은퇴를 택했습니다. >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 영웅 박찬호는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마이너와 한국까지 프로 생활을 통틀어 그가 거둔 성적은 150승147패입니다. 그 중에 메이저리그에서 124승98패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승패를 떠나 박찬호는 한국 선수의 메이저리그 입성의 문을 열어 제친 선구자였고, 어려운 시절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던져준 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투수로서 박찬호의 시대는 이제 끝났지만 야구인으로서 그의 시대는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입니다. 당분간 쉬면서 진로를 결정하겠지만 일단 미국으로 건너가 오말리 일가가 다시 일선에 뛰어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지도자와 야구 경영인의 수업을 또 받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야구만큼 공부에도 욕심이 많아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올 것이고, 결국은 대한민국 야구를 위해 다시 뛰어들 것입니다. 수고했고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의 박찬호의 행보에도 큰 기대가 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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