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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한국계 일본 야구스타

by Wood-Stock 2011. 11. 9.

일본야구계의 전설적 투수. 이팔용

요미우리 자언언츠의 전설의 투수 한국인 이팔용

일본프로야구에 불멸의 기록을 보유한 재일 한국인 선수이자, 재일동포로써 일본 프로 야구에서 최초로 할약한 이팔용(藤本八龍, 中上英雄, 藤本英雄, 1918~1997) 선수에 대해 소개 해 보고자 한다.

이팔용(일본 명; 후지모토 히데오, 藤本 英雄) 선수는, 1918년 5월, 부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찌 현(山口) 시모노세키(下關) 상업고등학교에서(전국 고교 선발 대회 12회. 14회 우승) 두각을 나타내어 메이지(明治) 대학에 입학, 1942년 요미우리(讀買) 자이안트(巨人, 교진)에 입단한 일본 야구 역사상 대기록을 달성한 야구 명사이다.

 


1942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하여 대학 졸업이 늦어져,  9월부터 프로 마운드에 올라 10승 무패, 방어률 0.81 이라는 기적적인 기록을 데뷰 첫해에 달성 하였다. 이로 인하여, 요미우리 교진은 2위 팀에 12.5게임차로 우승하였다.

2년째의 1943년에는 전쟁 중 시합수가 줄어들었으니, 34승 11패, 방어률 0.73(일본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최다승과 최우수방어률 타이틀을 획득, 253탈삼진으로 삼진왕의 기록도 보유, 요미우리 교진 팀의 승수가 54승으로 우승하였으니, 이팔용 선수는 거의 3분 2의 승리로 팀 우승에 공헌 한 것이다. 그해 5월 22일 노히트 노런 달성하였다.

1944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아, 시합수가 대폭 줄어 들았음에도 불구, 114 탈삼진으로 삼진왕이 되었다.

1947년에 쥬니치(中日)에 이적하였으나, 1년만에 요미우리 교진으로 복귀, 1948년 어깨부상으로 부진 하였으나, 1949년 24승 9패의 성적으로 부활 하였다. 방어률은, 1.94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 획득, 요미우리 팀도 2위 팀에게 16게임 차이로 우승하였다.

1950년 6월에 일본 최초의 완전시합(퍼팩트승) 달성, 1954년 어깨 통증으로, 1955년의 시즌 종료 전 200승 달성(1승 무패) 후 현역을 은퇴하다.
 
역대 통산 방어율 1위, 시즌 방어율 역대 1위의 기록 보유자가 되다.

통산 성적(13년); 200승 87패, 방어률 1.90(역대 1위), 1177 탈삼진, 63 완봉승. 최우수방어율 3회(1943. 1946. 1949), 최다승(1943), 최다탈삼진(1943. 1944).

이팔용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게에 남긴 기록을 더 자세히 보자면,

1. 1943년, 방어율 0.73은 일본 프로야구 사상 불멸의 기록.

62회 무실점 기록(또 다른 한국계인 투수인 가네다<金田正一>가 기록한 일본 최다 이닝무실점  64회 3분의 1에 거의 대등함), 6시합 연속 완봉승과 함께 19시합 완봉 승리 투수.
승율 756리, 탈삼진 253 등 투수 전부분 1위로 투수 5관왕 획득하였다.(1944년과 1946년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 하였다)

2. 일본 최초로 스라이더 사용한 선수로도 유명하다.

많은 투구수로 인하여 어깨 통증을 느낀 이팔용은, 미국의 보브페라(Bob Feller) 투수의 저서를 읽고 스라이더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 일본 최초로 슬라이더 구질을 연마, 1949년 24승 9패, 방어율 1.94의 좋은 성적을 내었다.

3. 일본 최초의 완전 시합(퍼팩트 승)을 기록하다.

1950년 6월 28일, 아오모리(?森)에서 니시니혼(西日本)과 시합에서 선발 예정 투수가 복통을 일으킨 관계로 대신 등판하여, 9회까지 무안타, 무실점, 무사사구, 무실책이라는 일본최초의 퍼팩트승을 당성 하였다. 이 해에는 타자로써도 7홈런을 기록 일본 투수 사상 최다 홈런을 보유 하게 되었다. 이에 요미우리 구단에서는 이팔용의 공적에 상금 3만엔을 수여 하였다고 한다. 

4. 일본 최초의 통산 200승 달성.

만년의 어깨 통증으로 인해 1954년 1승 2패로 시즌을 마감한 이팔용은, 통산 199승이라는 것에 불만, 1955년 시즌 말인 10월 11일, 히로시마 전에서 5회 무실점으로 승리, 통산 200승으로 현역을 은퇴 하였다.

5. 일본 프로야구 사상 통산 방어율 1위 기록하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역대 통산 방어율 1의의 기록인 1.90은 깨어 질 수 없는 불멸의 기록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일본 프로야구 전문가들은 이 기록은 절대 깨어 질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이팔용 선생은 1976년 일본 야구전당에 입당 되었고, 1997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셨다.

 

“재일교포들이 한국에 나가면 중앙 정보부에 끌려 간다는 소문이 돌았지. 그래서 귀화한 사람이 많았어. 나도 그중 하나였지. 몇 년 동안 고민했는데 어쩔 수 없더군. 이렇게 나와 보니까 다 헛소문인데 그걸 참지 못하고….”

 

중년의 남자는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야구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한국인으로서는 회한에 묻혀 살았던 남자. 그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만들어낸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 한국인 이팔룡(李八龍)이었다.

 

이팔룡은 1968년 대한야구협회 초청으로 모국을 방문,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등에서 10차례의 강습회를 열어 일본의 선진 야구 기술을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4월 중순 강습회 종료를 기념하는 리셉션장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귀화를 선택해야 했던 재일 한국인의 아픔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1918년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난 이팔룡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모노세키로 건너갔다. 시모노세키 상업학교에서 야구에 특별한 재능을 과시한 그는 명문 메이지대학에 진학, 모교를 두 차례 연맹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194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팔룡은 이듬해 생애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다. 56경기에 나와 다승(34승11패) 방어율(0.73) 탈삼진(253개), 최다 투구회수(432.2이닝), 승률(0.756) 등 무려 5개 부문을 석권한 것.


이팔룡은 1947년 투수의 생명인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했다.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은 그는 1년 뒤 친정 요미우리에 복귀하면서 새 구종을 개발, 제2의 전성기를 연다. 이때 그가 개발한 구종이 바로 슬라이더. 새 변화구를 장착한 이팔룡은 1950년 6월 28일 벌어진 니시 닛폰과의 원정경기에 선발로 등판한 그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 경기를 작성했다.

 

1955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팔룡은 통산 방어율 1위(1.90), 통산 최고 승률(200승87패), 시즌 방어율 1위(0.73)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와무라상도 두 차례나 수상했다. 1960년대 초 귀화를 결심하고 처가에 양자로 입적해서 성을 나카가미(中上)로 바꾼 그는 1976년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명 투수 후지모토는 1997년 세상을 뜰 때까지 끝까지 한국인으로 남지 못한 죄책감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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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고투수 이나오의 추억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우완투수로 평가받는 이나오 가즈히사(稻尾和久) 씨가 지난 (2007.11)13일 오전 1시 후코오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향년 70. 한국계로 알려졌고 한국에 와 우리 선수를 지도하기도 했던 이나오 씨는 지난 1030일 뇌에 악성 종양이 생겨 입원했습니다. 당초 의료진은 1주일 정도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진단했으나 갑작스레 증상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나오 가즈히사 이나오 가즈히사(가운데)는 투수로서 일본 프로야구에서 탁월한 성적을 남겨 '신령님, 부처님, 이나오임'으로 불리기도 했다.

 

빙그레 이글스 초대 사령탑을 지낸 김영덕(71) 전 감독은 이나오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 나와 일본프로 입단 동기생이었는데" 라면서 안타까와 했습니다. 이나오씨는 1956년 니시데쓰(國鐵)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김영덕 감독은 같은 해 난카이(南海) 호크스에 입단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을 이끌고 방한한 한재우 감독도 같은 해 니시데쓰에 입단했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 프로 입단 후 나는 별 볼 일 없는 투수였으나 이나오는 첫 해 신인왕(215)을 수상하는 등 격이 다른 투수로 성공했다 " 고 회상합니다. 김 감독은 난카이에서 7승을 올리고 643월에 조국에 돌아와 해운공사-한일은행을 거치며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는 등 한국 최고의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나오는 프로 2년 때 일본 최고 연승 기록인 20연승을 올리며 35승을 올렸고 이후 6시즌 내내 20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특히 61년에는 경이적인 42승을 올렸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 그 당시는 요즘과 달리 투수들이 자주 출장했고 완투를 하던 시기였지만 이나오는 더 많은 경기에 나와 거의 하루 걸러 등판했다 " 고 회상했습니다.

 

또 김 감독은 " 나보다 2년 늦게 난카이에 입단했지만 나가시마와 함께 릿쿄대학을 거친 2년 선배 스기우라 다다시는 보기 드문 서브머린 투수였는데 입단 2년째 5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1~4차전에 모두 등판해 3경기는 완투하고 1경기는 구원으로 나서 혼자 4승을 따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한시즌 384패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이나오와 비슷하게 많은 투구를 했다. 이후부터 일본에서도 잦은 등판과 완투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 고 예전의 고지식하고 무시무시한(?) 야구 풍토를 들려 주었습니다.

 

스기우라가 59년 일본시리즈 1~4차전에서 4승을 독식한 데 비해 이나오는 신인이던 56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6차전 전경기에 출장해 1완투승 등 3승을 올려 요미우리와 앙숙이던 미하라 니시데쓰 감독에게 첫 우승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요미우리를 상대로 2완투승을 거두어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했고 58년 다시 요미우리와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해 팀이 3연패 후 4차전 완투승, 5차전 구원승, 6~7차전은 연속 완투승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하며 최강 요미우리를 3년 연속 물리치고 니시데쓰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5차전에서는 연장 10회말에 끝내기 홈런까지 터뜨려 타격도 대단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남자 팬이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아 합장을 하고 "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 " 이라며 울부짖어 이 감동적 절규가 이나오의 대명사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OB-삼성을 거쳐 88년부터 빙그레 이글스 지휘봉을 잡은 김영덕 감독은 " 당시 노진호 단장과 일본통인 조해연 기록원이 이나오 씨를 초청해 3년 가량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 고 밝혔습니다. 그 당시 빙그레 투수였던 이상군 한희민 지연규 등이 코치를 받았습니다당시 이글스의 코치였던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 이나오 씨는 '규슈의 덴노헤이카'로 불릴 정도로 규슈, 벳푸, 후쿠오카 등지서 추앙을 받고 있어 빙그레의 전지훈련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고 밝힙니다.

 

강병철 감독은 " 이나오 씨에 대해서는 한국계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본인이 이를 정식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골격이나 스타일로 봐 한국계로 누구나 알고 있었다 " 면서 " 그분은 건강 체질이었고 약간 비만했으며 고기를 잘 먹는 포식가였다 " 고 회상합니다.

 

필자는 80년대 말 대전구장에서 이나오씨를 잠깐 만난 적 있습니다. 생긴 모습이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물리친 북한 축구 영웅 박두익씨와 비슷해 깜짝 놀랐습니다. 몸매가 굵고 둥글둥글한 인상의 중견 배우 백일섭 씨를 연상하면 됩니다. 한국에 자주 온 이나오 씨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모토이, 시마바라 등 코치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홍윤표 OSEN 대기자는 지난 1012일 칼럼 '존경받는 야구인을 보고 싶다'에서 이나오 씨의 타계 직전 근황을 전했습니다.

 

'지난 102일 일본 오이타현 벳푸시에서 철완 이나오 가즈히사(70)'이나오 기념관'이 개관됐다. 새로 건립한 벳푸시민구장에 들어선 그 기념관에는 니시데쓰의 황금시대 에이스인 이나오 씨의 족적이 담긴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의 투구폼을 본 뜬 모형 동상도 세워졌다.

 

그는 " 이 폼을 어린이들이 보고 흉내낸다면 좋겠네 " 라며 농담 섞인 소감을 밝혔다. 벳푸는 이나오 씨의 고향. 벳푸시는 " 이나오기념관과 벳푸시민구장을 통해 벳푸나 오이타의 어린이들의 야구를 지원할 것 " 이라며 벳푸를 야구진흥의 거점으로 삼을 방침을 천명했다.

 

이나오 씨는 1950년대 후반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전신인 니시데쓰 라이온스에서 활약하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재팬시리즈 최다인 개인통산 9완투 및 11승 기록을 지니고 있다. 승률왕 2, 평균자책점 15(1956~1958, 1961, 1966), 다승왕 4(1957, 58, 1961, 1963) 등의 업적을 남겼고 1961년에는 경이적인 한 시즌 최다 기록인 42승을 올리기도 했고 8년 연속 20, 30승 이상 4차례, 20연승 등 그가 세운 숱한 기록은 일일이 손에 꼽기도 어렵다. 일본 프로야구 기록의 전설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1993년에 그는 야구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바다 건너 일본이지만 신화적인 제구력으로 전설의 대기록을 남긴 이나오 씨의 별세는 우리 야구인들에게도 안타까움과 추억을 다시 한 번 새길 기회를 갖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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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야구단 이야기

 

http://cafe.daum.net/ocicbc/ELt7/25?docid=1Gt3A|ELt7|25|20091128133229&srchid=IIMZvaWF200#A%25B0%25A1%25B3%25D7%25BD%25C3%25B7%25C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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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전 롯데 우승 이끈 한국계 대투수 가네다

[프레시안 스포츠]일본으로 귀화해 국내선 대접 못받아

 

롯데 마린스가 31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향해 쾌속 항진 중이다. 일본시리즈 1,2차전에서 홈런포를 가동한 이승엽도 타격감이 절정에 올라 고시엔 구장에서 펼쳐지는 경기(3,4,5차전)에서 좋은 활약이 기대된다.

 

롯데는 재일교포 사업가 신격호(현 롯데그룹 회장)1969년 도쿄 오리온즈를 인수한 뒤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하게 3000안타를 달성한 장훈도 이 기록을 롯데 오리온스에서 세웠고 롯데가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 정상에 오를 때도 지휘봉을 한국계인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金正一·62)가 잡고 있었다.

 

 

 

가네다 마사이치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로 손꼽힌다. 가네다는 일본 프로야구 최다승(400) 투수이며 무려 4490개의 탈삼진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가네다는 1951년부터 14시즌 동안 연속 20승이란 불멸의 대기록도 세웠다.

 

186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빠른 볼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커브를 주무기로 삼았던 좌완 가네다는 '요미우리 킬러'이기도 했다. 가네다가 입단한 고쿠데쓰 스왈로스는 '치면 병살, 지키면 실책, 달리면 아웃'이란 구호가 붙었을 정도로 최약체였지만 가네다와 요미우리의 맞대결은 전국적 관심을 끌었다.

 

가네다는 1958년 개막전에서 훗날 일본 야구의 영웅이 되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4타석 연속삼진으로 돌려세워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다. 시범경기에서 상대팀 에이스를 KO 시켰던 나가시마 신드롬을 가네다가 제압한 셈이다.

 

미국 야구계는 오 사다하루(王貞治)의 홈런 세계 신기록(868)을 비하하면서도 가네다의 탈삼진 세계 신기록은 높게 평가했다. 가네다의 기념구와 글러브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전시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철인 28>에 나오는 주인공 가네다 쇼타로의 이름도 대투수 가네다로부터 따올 정도로 일본 내에서 가네다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가네다는 한국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떳떳한 한국인' 장훈과는 달리 가네다가 일본으로 귀화했기 때문이다.

 

1년 전 도쿄돔에 위치한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 학예사에게 질문을 했더니 곧장 "한국 사람입니까?"라고 되물으며 대뜸 가네다의 유니폼이 전시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학예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명예의 전당을 찾는 한국인들은 모두 장훈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가네다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는 것.

 

1973년 롯데 감독으로 부임해 팀의 유니폼까지 디자인했고 이듬해엔 우승을 일궈낸 한국계 대투수 가네다에 이어 31년 만에 이승엽이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 수 있을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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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00승 투수 김경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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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사에서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은 두 개뿐이다.” 지난 6월 16일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은 팀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끼가 일본 개인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인 287세이브를 거두자 그같이 말했다.

그가 말한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두 개뿐인 대기록’ 가운데 하나는 오 사다하루(중국명 : 왕정치)의 개인통산 868홈런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의 개인통산 400승이었다. 과장이 아니다.

평생 868개의 홈런을 치려면 20년간 40홈런 이상씩을 해마다 때려야 한다. 같은 의미로 400승을 거두려면 20년 동안 해마다 20승을 기록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두 기록 가운데 무엇이 더 달성하기 어려울까.

대부분의 일본 야구 관계자들은 후자를 꼽는다. 이유가 있다. 오의 홈런은 당시 요미우리의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구장의 덕을 자주 봤다. 홈플레이트에서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90m에 불과했다. 왼손 타자였던 오는 대부분의 홈런을 당겨쳐 우측 펜스 뒤로 넘겼다. 여기다 오는 현역 시절 보통의 배트보다 반발력이 뛰어난 압축배트를 즐겨 사용했다. 물론 오는 구장과 압축배트 덕을 보지 않았어도 훌륭한 타자였다. 그러나 미 메이저리그는 오의 개인통산 홈런을 세계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이유 때문이다.

반면 미 메이저리그는 가네다의 400승 기록은 기꺼이 인정한다. 펜스의 거리는 앞으로 당길 수 있어도 홈플레이트와 마운드까지의 거리 18.44m는 좁힐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네다는 오와는 다르게 주변의 모든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서도 400승을 달성했다.

가네다가 데뷔 이후 15년 동안 뛰었던 고쿠테쓰 스왈로스(야쿠르트의 전신)는 약체 가운데 약체였다. 가네다가 입단한 1950년부터 요미우리로 이적하기 전인 1964년까지 고쿠테쓰는 일본시리즈 우승은 고사하고, 리그 우승도 경험하지 못했다. 리그 3위가 최고 성적이었고, 대부분 4위 이하였다. 가네다가 있었기에 그나마 리그 꼴찌를 3번만 경험했을 뿐이었다.

고쿠테쓰 타선의 위압감은 센트럴리그 바닥이었고, 수비 역시 시원치 않았다. 가네다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가네다는 고쿠테쓰 시절 한 시즌 20패 이상을 6번이나 했다. 고쿠테쓰에서 14년 연속 20승을 거뒀지만, 데뷔 이후 15년 연속 두자릿수 패배를 경험한 것도 고쿠테쓰 시절이었다. 1대 0 경기에서 23번이나 완봉승을 거뒀으나, 0대 1 완투 패전이 21번에 달했던 것도 고쿠테쓰 유니폼을 입었을 때였다.

하지만, 홈구장의 짧은 펜스 거리와 타자들의 압축 배트 그리고 약팀의 숙명을 떠안은 가운데서도 가네다는 14년 연속 20승을 돌파했다. 더 놀라운 건 15년 동안 평균자책이 3점대였던 적이 단 한 시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가네다가 4년 연속 330이닝 이상 투구, 20승 이상, 1점대 평균자책, 300탈삼진, 0점대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달성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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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마사이치의 400승 기념패. 일본 만화 철인 28호의 주인공의 이름 '가네다'는 가네다 마사이치를 흠모해 따온 것으로 유명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가네다는 1965년 일본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해서야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그가 없었다면 요미우리의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은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가 입단하고 나서 요미우리 선수들이 자신들의 인기가 거품임을 알아차리고, 프로 선수다운 몸 관리와 정신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가네다는 1969년 400승을 따내고서 화려하게 은퇴했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내려왔지만, 그의 대기록은 여전히 일본 야구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가 세운 통산 400승과 4천490탈삼진은 일본 프로야구 역대 1위이자 메이저리그와 비교해도 역대 다승은 사이 영과 월터 존슨에 이어 3위, 탈삼진도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에 이어 4위다.

이 밖에도 그는 최다 완투 365회, 64 1/3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 노히트노런과 퍼팩트 경기를 한 차례씩 달성했다. 그가 은퇴하고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건 그래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가네다는 감독으로도 성과를 냈다. 1974년 롯데 오리온즈(지바롯데의 전신) 감독으로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일궈냈고, 1990년부터 1991년 사이 다시 롯데 감독을 맡아 재능 넘치는 많은 투수를 배출했다.

거짓말 같은 성적과 호방한 인품으로 일본 야구팬의 사랑을 받은 가네다는 현역 시절 ‘가네다 천황’으로 불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네다가 구장에 나타나면 선수들은 멀리서, 감독들은 앞까지 조심스럽게 걸어와 머리를 숙인다. 젊은 감독들은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한다. 가네다는 일본에선 일왕보다 사랑받는다는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 유일하게 머리를 숙이는 선배로 알려져 있다. 

일본 야구계의 큰 별인 가네다는 그러나 한국 야구계에선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아니 그 이하였다. 사람들은 가네다와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 장훈)을 비교했고, 결국엔 가네다를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들이 집중한 건 성적과 인품이 아니라 여권에 기재된 국적이었다.

그렇다. 가네다는 한국인이다. 부모가 한국인이고, 자신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귀.화.한 한국인이다.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올 때마다 어깨를 펴지 못했고, 쏟아지는 비난에 침묵해야 했다. 사실 그는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변명도 삼갔다.

그런 그가 최초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스포츠춘추>는 일본 도쿄에서 가네다를 만나 그의 속내에 귀를 기울였다. 대기록의 사나이였으나, 78년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경계인으로 살았던 한 사내의 이야기를 장시간 들었다. 야구와 인생을 아우르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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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가네다 사무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가네다는 78살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정력적이다. 인기 강사인데다 CF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유소년 야구팀을 찾아가 야구 지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빡빡한 일정 탓도 있지만, 그는 여간해선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 인터뷰는 사절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피하는 게 아니라 언론이 알아서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는다. 원체 대스타이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인데다 인터뷰 잡기가 어려워 웬만한 방송이나 신문은 가네다 인터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런 와중에 <스포츠춘추>가 가네다를 인터뷰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가네다 측은 “여태껏 한국 기자와 정식으로 인터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일본 기자와도 몇 년째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인터뷰도 무산될 게 자명했다. 그러나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이후 가네다 측의 반응이 바뀌었다. 인터뷰를 받아들였고, 인터뷰 장소도 도쿄 시부야의 가네다 사무실로 잡혔다.

이 소식을 안면이 있는 일본 기자에게 전했을 때 그는 깜짝 놀라며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가네다 씨가 갑자기 변한 것 같다”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가네다와의 인터뷰는 도쿄가 가장 뜨거웠던 8월 말에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처음 뵙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더울 텐데 시원한 음료수 한잔하세요. 땀을 식히는 게 우선이오(웃음). 자자, 어서 들어요.

고맙습니다. (음료수를 마시고서) 이런 말씀 드리면 예의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정정하십니다.

고맙소. (혼잣말을 하듯) 이제 나도 늙은이지, 늙은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래야 인터뷰도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소. (비워진 잔을 보며)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참고로 이방에 들어온 기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소. 천천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도록 해요.

“내 원적은 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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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투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 부모님은 한국인으로 압니다만.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 내 원적은 (한국말로) 경상북도 삼주, 삼주.

경상북도 삼주요? 혹시 상주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요?

(한국말을 최대한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하며) 그래, 상주. 경상북도 상주. 어머니는 경상북도 대구분이요.

몇 년간 일본 프로야구계를 취재하면서 많은 이를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선생님이 자이니치(재일한국인)라는 걸 아는 이도 있었지만, 순수 일본인으로 아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자이니치임을 공표하신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눈을 감으며) 과거만 해도 일본에선 한국 출신이라는 게 터부시 돼 왔네. 그래서 내가 자이니치라는 것이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아졌지.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님을 비롯해 원로 재일교포분들을 뵈면 하나같이 “과거 일본사회에서 자이니치로 산다는 건 외로움과 생존이 위협받는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 1933년생이시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조용한 어조로) 인종차별, 우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네. (차 한잔을 마시고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셔서 한국이 고향이시지만, 나와 형제들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일본이 고향인 셈이네. 자식들도 다 일본에서 태어나 여기서 결혼해 아기도 낳았으니 일본인이라 볼 수 있지. 하지만, 역시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니까.

선생님 부모님께서 경북 상주를 떠나 일본으로 오신 게 언제인가요.

아마 다이쇼 시대(주 : 大正時代, 일본 연호의 하나로 다이쇼 일왕의 재임기간을 뜻함) 끝날 무렵과 쇼와 시대(昭和時代)가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1925년이나 1926년쯤에 일본으로 이주하셨을 걸세.

상주는 곶감을 비롯해 농업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상주에 사실 때 농사를 짓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한국어로) ‘양반’, 양반이었다고 들었네.

양반 출신이 일본에선 어떤 일을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힘든 일을 하셨네. 말하자면 노동일이지. 땅 파고, 강가에서 일하고. 어디 우리 부모님만 그랬겠나. 옛날 분들은 다 그렇게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어.

선생님의 유년시절도 그리 유복하진 않으셨을 듯합니다.

(고개를 흔들며) 힘든 건 없었네.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셨거든.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다거나 입을 게 없었거나 그런 일은 없었네. (부모님이) 매우 좋은 분들이어서 이웃들도 우릴 잘 대해줬어. 운 좋게도 일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거지.

선생님의 동생 3명도 야구선수로 뛰었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야구 A급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네 지금 호적 조사 나왔나?(웃음). 가족사만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지나가니까, 이제 슬슬 야구 이야기로 넘어감세.

고교 2년 중퇴생.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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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테쓰 스왈로스 입단 당시의 가네다

야구와는 언제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음, 옛날 일본에선 야구를 좋아해도 야구를 하기 어려웠네. 태평양 전쟁 때 그랬지. 왜였는지 아나? 야구가 미국 스포츠였기 때문이야. 일본에선 그 때문에 한동안 야구를 금지했었네. 그래서 소학교(주 : 한국의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어. 실제로 야구공을 잡고 선수가 된 건 고교에 입학하고 나서네.

고교 때 야구를 시작한 계기라도 있으셨습니까.

야구선수는 발이 빠르든가, 어깨가 강하다든가, 어쨌든 기본적인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네. 키가 작아도 센스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야구야. 나는 센스가 있어서 고 1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네.

사실 고교에 입학하고 야구를 시작했다면 상당히 늦은 나이입니다. 대개는 초교 때나 늦어도 중학교 2학년 이전에 야구선수를 시작하는데요.

고교 2학년을 중퇴하고 프로로 갔으니, 야구한 지 2년 만에 프로 무대를 밟은 셈이군(웃음).

선생님은 남보다 늦게 선수생활을 시작했지만, 실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습니다.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셨고요.

1949년이었을 거야. 그때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적이 있다네. 하지만, 당시 난 팀의 에이스는 아니었어. 두 번째 투수였지.

성적은 어땠습니까.

1학년 땐 준준결승인가까지 올라갔을 거야. 하지만, 2학년 땐 예선에서 떨어졌네.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지금은 전부 추억으로 남아있지.

고 1때부터 포지션이 투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지.

고 2때 여름 고시엔에서 학교가 예선 탈락하자 바로 프로팀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셨습니다. 그즈음 대학에서도 선생님을 영입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었네. 모든 구단이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학교로 찾아올 때 대학에서도 날 데려가겠다고 난리였어. 와세다대학교는 “등록금도 낼 필요 없으니까 자네가 꼭 우리 학교에 와줬으면 좋겠네”라고 했다네.

와세다대라면 차후 야구선수로 실패해도 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소릴 들으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명문대입니다. 그래서 당시 와세다대는 많은 고교야구선수가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째서 와세다대에 입학하지 않고 고교 중퇴 후 프로팀 고쿠데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신 겁니까.

이유야 간단했어. 돈 벌려고 갔네(웃음). 농담 같나?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일세. 고교 중퇴하고 프로로 간 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어. 빨리 돈을 벌어 아버지,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고 싶었거든. (차 한잔을 마시고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가네다 야구는 곧 돈 벌기 위한 야구였네(웃음).

계약금은 두둑이 받으셨습니까.

많이 받은 편이야. 당시로선 신인 계약금으로선 최고대우였으니까.

당시 고쿠테쓰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재정이 풍부한 회사도 아니었고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명문 인기구단에 입단하지 않고, 고쿠테쓰를 선택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손으로 기자를 가리키며) 인간관계, 다시 말해 인연 때문이었네. 오늘 다른 사람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자네와 내가 이 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이네. 우리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이 방에 자네가 들어온 걸세. 인연이란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거야.

17살의 나이였고, 한창 정규 시즌이 진행 중일 때 입단하셨으니 상당히 긴장이 됐을 법합니다.

긴장이라, 글쎄. 나는 프로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마음먹었네. ‘야구는 이기면 되는 것’이라고. 야구는 이론적으로나 논리론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야. 나이가 많든 적든, 아마추어든 프로든 이기면 그만인 거야. 그래서 부담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네.

혹시 데뷔전 기억나십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며) 하도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네. 확실한 건 데뷔 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됐다는 걸세.

맞습니다. 1950년 8월 23일 히로시마 카프전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하셨습니다.

그렇지. 사요나라 게임으로 졌어.

당시 기분이 어떠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그거야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어?(웃음). 그래도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건 매일 있는 일이니까. 내가 데뷔할 때 원체 시끄럽고, 말하자면 각광을 받은 상태에서 프로에 입문했었기에 내 데뷔전 패배가 꽤 화제가 됐었네.

하지만, 두 번째 등판 경기에선 승리투수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완투승으로 데뷔 첫승을 장식했습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최연소(17살) 데뷔 완투승이었습니다.

그래, 이겼어. 참,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군.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던졌던 기억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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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노히트노런 당시 받았던 트로피. 트로피 상단의 투수 모형을 자세히 보면 오른손 투수다. 가네다는 미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의 샌디 쿠펙스'로 불리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더 놀라운 건 데뷔 2년째였습니다. 1951년 9월 5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18살 35일 만의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해 처음으로 20승 고지(22승)에 오르셨습니다.

(손으로 옆에 있는 장식장을 가리키며) 저기에 당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 받은 트로피가 있네.

(장식장으로 다가서 트로피를 발견하곤) 아, 이겁니까.

괜찮아. 가져와 봐도 되네. 정확히 60년 전의 트로피구먼. 트로피를 잘 보면 알겠지만, 여기 투수상(像)이 오른손 투수네. 왼손 투수가 처음으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다 보니 왼손 투수용 트로피를 준비하지 못한 게지.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물자도 태부족했어. 그래 왼손투수용 트로피를 받아야 하는데 오른손 투수용 트로피를 받은 걸세.

그로부터 6년 뒤인 1957년 8월 21일엔 주니치 드래건스를 상대로 퍼팩트게임을 달성하셨습니다.

(노히트노런 트로피를 흔들며) 그래, 이거 받고 6년 뒤에 달성했어.

투수에게 퍼팩트게임처럼 경이로운 대기록이 있을까 싶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퍼팩트게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참, 어려운 일이야. 정말 힘든 대기록일세.

퍼팩트게임을 달성하셨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퍼팩트게임은 말 그대로 ‘퍼팩트’니까 할 이야기가 없네(웃음).

그렇군요.

일본 야구팬들이야, 잘 아는 이야기니까 흥미있어하겠지. 하지만, 한국분들은 낯선 이야기니까. 그리고 퍼팩트게임을 글로 써서 하는 건 재미가 없을 거야. 술 마시면서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의 스토리로 이야기해줘야 말하는 사람도 흥이 나고, 듣는 사람도 재밌을 걸세.

퍼팩트게임 달성 직전에 큰 소동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9회 1사에서 체크 스윙 판정을 두고 주니치 측에서 심판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경기가 40분간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정확히 45분이었다네. 보통 사람 같았으면 45분이나 쉬고 던지라고 했으면 못 던졌겠지. 나니까 던진 거야(웃음).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시 마운드에 오르신 겁니까.

간단하네. 우리는 어떤 상황이라도 해야겠다 싶으면 꼭 하고 마네. 45분을 쉬고 마운드에 섰으니 어깨가 식었겠지. 그러나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여기에서 뛰는 투쟁심만은 절대 식지 않았어. 항의가 끝나고 경기가 재개됐을 때 나머지 2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네.

14년 연속 45경기 이상 등판, 300이닝 이상 투구, 20승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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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는 일본 야구계에서 '가네다 천왕'이라 불렸다. 마운드 위에선 일왕보다 더 막강한 힘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셨습니다. 여기다 14년 연속 45경기 이상 등판과 300이닝 이상 투구 그리고 14완투승을 기록하셨는데요.

내가 세계기록 많이 갖고 있지(웃음).

외람된 말입니다만, 과연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인가 싶습니다.

비즈니스지.

비즈니스요?

그렇다네. 잘 들어보게. 난 “20승 했으니까 얼마 주시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네. 프로야구는 비즈니스기 때문에 구단에 “20승 할 테니까 얼마 주시오. 못하면 깎고”하는 거야. 지금 일본 프로선수들은 “20승 했으니까 얼마 주시오”하더군. 만약 당시 내가 30승 달성을 전제로 계약했다면 난 정말 30승을 했을 걸세. 그래선지 계약 때 구단과 싸운 적이 없어. (한국말로) 신용, 전부 신용이었지. 정말이야. 구단과 내가 연봉을 깎거나 얼굴을 붉힌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번 말한 것에 대해 신용을 지켜서 달성하면 받는 것이고, 못 하면 못 받는 게 바로 프로일세.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셨으니 연봉이 꽤 높았을 듯합니다.

그때 당시에 억(億)을 돌파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얼만지는 모르겠군. 그런데 그때 받은 돈은 지금 다 써버렸어(웃음).

선생님의 야구인생을 돌아보면 참 극적인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1958년 4월 5일 센트럴리그 개막전에서 거물 신인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맞대결은 지금도 일본 야구계에 회자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나가시마가 가네다를 누를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선생님은 “나가시마를 4번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결과는 후자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당대 최고의 스타 나가시마를 4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습니다.

당연한 게 아닌가. 나가시마가 프로에 입문했을 때 난 벌써 180승을 올리고 있었다네. (한쪽 벽면에 걸린 당시 사진을 가리키며) 저기 사진 있구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일본 야구인들은 “가네다가 강속구로만 나가시마를 상대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공이 빨랐어. 왠지 아나?

원래 공이 빠르지 않으셨습니까.

나가시마와 상대할 땐 더 빨랐어. 바로 마음으로 던졌기 때문이네.

마음으로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 그건 이론이 아니야.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거야. 전력투구, ‘어디로 던질까’가 아니라 정면으로 붙어서 ‘반드시 너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던지는 거야. 만약 내가 그때 나가시마한테 두들겨 맞았다면 14년 연속 20승은 없었을 걸세. 이겼으니까 여기까지 온걸세. 

결국엔 지금 이야기도 글로 써선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선수들 다 모은 가운데 내가 이야기하면 재밌을 거야. (조용한 목소리로) 내가 상대할 타자는 나가시마 혼자만이 아니었네. 다른 타자들과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 그때의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새로운 기분으로 마운드에 올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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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대결 사진

항간엔 전성기 때 선생님의 속구 구속이 시속 160km를 상회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더군요.

스피드는 제법 나온 것 같은데, 시속 160km 혹은 170km를 던지면 몸이 망가진다네. 뚱뚱하면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어. 체중을 가볍게 해서 공을 ‘팍’하고 던져야지.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라고. 봐서 알겠지만, 내가 살쪘었던 사진을 찾을 수 없을 걸세.

선생님의 속구만큼이나 변화구도 일품이었다고 하더군요.

난 주로 속구와 커브만 던졌네. 전성기 때 구종은 두 가지였지만, 같은 커브라도 다양하게 던졌지.

(벽에 걸린 사진을 훑어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당대 최고의 메이저리거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셨습니다.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 스탠 뮤지얼 등 정말 최고의 스타들인데요.

메이저리그에 가면 다들 날 알지. 저 친구 중에 나한테 3연속 삼진을 당한 이도 있어(웃음)(주 : 1955년 뉴욕 양키스가 일본에 친선경기를 위해 왔을 때 가네다는 맨틀을 상대로 3연타석 삼진을 잡았다. 맨틀은 "저런 투수가 왜 일본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구단에 "당장 미국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까지 가네다의 국적은 한국이었고, 최전성기를 그는 한국인으로 살았다. 훗날 맨틀과 가네다는 절친한 사이가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려고 합니다. 혹시 메이저리그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은 없으신가요.

꼬셨지. 게네들(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하지만, 요즘 같은 때가 아니었어. 전쟁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일본의 국교 문제도 걸려 있었고, 내가 영어를 아는 것도 아니었네.

그래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셨습니까.

솔직히 ‘뭐 하러 가나?’ 싶기도 했다네. 물론 가고 싶으면 가면 됐겠지.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계속 뛰면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려운 대기록을 세울 수 있지만, 미국에 가면 ‘아, 일본 선수가 왔구나’ 하는 정도로만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네. 저 트로피와 사진들을 보라고. 저것들은 내가 죽어도 다 남는 것들일세.

만약 요즘 같은 시대에 야구를 하셨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셨을까 궁금합니다.

요즘 같으면…글쎄, 어디에 가도 야구는 강한 사람이 이기는 법일세.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일본에 남나 미국에 가나 다 똑같다고 보네. 물론 미국에 가도 성공을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봐. 어차피 아시아인이나 미국인이나 같은 인간일 뿐 다른 건 없으니까.

‘요미우리 킬러’, 요미우리로 이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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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마사이치처럼 당찬 자신감으로 정면승부를 펼쳤던 최동원. 최동원과 김시진의 양자 제의설은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가네다는 최동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야구계에도 선생님처럼 배짱과 자신감으로 ‘칠 테면 치라’는 식으로 타자를 상대했던 투수가 있습니다. 혹여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최동원’이란 투수가 있었는데요.(주 : 인터뷰 당시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작고하기 전이었다) 1970년대 후반 선생님께서 최동원과 김시진(넥센 감독)의 뛰어난 기량에 탄복해 ‘양자로 입적해서라도 꼭 키워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신 걸로 압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양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싶군. 안경 쓴 선수는 기억이 나네만, 내가 양자 입적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은 없네. 물론 지금도 한국의 유망주들이 내게 온다면 노하우를 알려줄 용의와 진정은 있네. 투구폼만 봐도 한눈에 ‘좋아질까, 아닐까’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만약 노하우를 전수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 건가요.

한가지 얘기하자면, 요즘 젊은이들은 꼭 알아둘 게 있어. 그건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려면 몸에 150km를 던지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세.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가 전형적인 예야. 그 친구는 공은 빠르게 던지지만, 점점 뚱뚱해져 버렸어. 뚱뚱한 몸으로 이전과 같은 구속의 강속구를 던지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 타박상을 입게 되지. 던지는 순간, 몸이 타박상을 입게 돼. 왜냐? 무리를 하게 되니까. 무리하니까 부상도 당하고, 골절도 되는 거야. 몸 관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네.

고쿠테쓰에 뛰실 때 ‘요미우리 킬러’로 유명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게 1964년까지 고쿠테쓰에서 기록한 353승 가운데 요미우리를 상대로 무려 65승을 거두셨습니다.

그랬지. 자네 조사 많이 했구먼(웃음).

특별히 요미우리에 강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 요미우리가 TV에 가장 많이 나왔잖나(웃음).

요미우리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각별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1965년 바로 그 요미우리로 이적하셨습니다. 당시 일부에선 “가네다가 약체 고쿠테쓰가 싫어 강팀 요미우리로 갔다”고 평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내가 고쿠테쓰를 떠나 1965년 요미우리로 간 건 고쿠테쓰가 싫어서가 아니었어. 반대였다네. 고쿠테쓰가 돈이 없어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서 요미우리로 갈 수밖에 없던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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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로 이적한 가네다가 구단 수뇌부와 환하게 웃고 있다

요미우미로 이적했을 때 당시 자이언츠 사령탑이던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 누구보다 선생님을 반겼다고 합니다. “젊은 선수들이 대투수 가네다를 보고 배우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전부 맞는 말이야. 내가 요미우리에 입단하고, 하나씩 하나씩 시스템이 다 바뀌어 나갔네. 선수들 전부가 잘 먹고, 잘 쉬면서 몸이 중요하다는 걸 자각하게 됐네. 그래 선수들 스스로 몸을 절제하게 됐지.

자네와 난 유교 정신의 한국사람들이니까 다 알겠지만,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일세. 그래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거야. 자기가 잘나서 야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세. ‘가네다의 야구’란 부모로부터 좋은 몸을 물려받아서 그걸 잠시 내가 맡고, 그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는 것이었네.

생각해보게. 부모들이 우릴 키울 때 목숨을 걸지 않나. 목숨 걸고 우릴 먹어주고 재워주지 않느냐고. 보라고. 항상 한국 부모들은 자식 얼굴만 보면 “밥 먹었니”하고 묻지 않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경기에 나가서도 이길 수 있는 걸세.

요미우리 선수들에게 그런 식으로 ‘몸 관리’를 강조하신 겁니까.

그랬지. 자기들이 똑똑해서 야구 잘한다고 생각하는 애들은 오래 못 가. 부모에게서 몸을 빌렸다고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쉬고, 몸을 절제하고, 죽을 정도로 러닝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요미우리가 변한 거네.

선생님의 몸 관리에 대해선 유명한 일화들이 많더군요. 벤치 크리어닝 때도 왼팔을 보호하려고 수건을 왼팔에 ‘둘둘’ 만 채로 뛰쳐나갔다고 하더군요.

그뿐이 아니야. 뭐든지 왼팔은 쓰지 않았어. 아들을 안을 때도 오른팔로만 안았다네. 감독일 때 난투극이 벌어지면 “와!”하고 뛰어나갔지, 선수 때는 그러질 않았어. 화가 나도 손이 아니라 발로 찼지(웃음).

현역 시절 “식사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식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듯합니다.

프로 선수는 잘 먹는 것에 그쳐선 안 돼. 좋은 음식을 가려 먹을 줄 알아야 하네.

삼계탕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말로) 삼계탕? 좋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 맛난 걸 많이 먹을 수 있네(웃음). (아련한 눈빛으로) 우리 어머니가 만드신 삼계탕은 서울 시내서 파는 삼계탕과는 비교가 안 됐네. 우리 엄마가 만든 삼계탕이 최고였지.

몸 관리에 철저하셨고, 한 끼 식사도 허투루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가네다식의 강훈’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군요. 현역 시절 ‘연습 기계’, ‘연습 벌레’로 통하셨던데요.

프로 선수가 혹독하게 연습하는 건 당연한 걸세. 좀 깊은 이야기인데, 요즘 선수들도 연습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운동 마치고 해야 하는 ‘애프터 케어(사후 관리, After-Care)’엔 서툴러. (혀를 차며) 애프터 케어를 마사지 받는 걸로 착각하는 선수도 있네. 하지만, 진정한 애프터 케어는 식사부터 휴식 등 생활습관 전반을 관리하는 걸 말하네. 자기가 힘쓴 것에 비해 몇십 배의 공을 들여 몸을 관리해야 하네. 왜 그래야 하는지 아나?

알려주십시오.

연습은 최고의 컨디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토록 철저히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선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스럽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생님의 몸 관리를 따라 하던 많은 선수가 중도에 포기한 게 아닌가 싶군요.

다들 그랬어. 처음엔 의욕을 갖고 따라 하다가 다 포기했네.

그런 의미에서 모국의 젊은 야구선수들에게 들려줄 조언이 있으시리라 봅니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데…. 예를 들어 같은 거리를 달려도 특급 선수와 B급 선수는 달리는 내용 자체가 다르네. 톱 레벨의 선수가 되려면 다른 선수들과 같은 훈련을 해선 안 되네. 정말 죽을 각오로 연습하지 않으면, 그러면서도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단호한 어조로) 톱 레벨의 선수가 될 수 없어. 한국인은 분명히 저력이 있으니까, 그 저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키워나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네.

최초로 밝히는 '일본 프로야구의 사이 영' 가네다가 귀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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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강타자 스탠 뮤지얼과 함께 찍은 사진. 뮤지얼은 가네다에게 "미국에 와도 15승 이상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빅리그행을 강권했다. 미국에선 가네다를 '일본의 사이 영'이라고 부른다.

과거 한국에 자주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어떠신가요.

두달 전 한국에 왔었네. 롯데 회장님과 식사를 함께했어.

선생님께 한국은 모국이자 낯선 나라고, 애착이 가는 반면 상처로도 기억되는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들려줌세. 옛날이야기네만, 야구 때문에 한국에 온 적이 있네. 방한 인원 가운데 일본으로 귀화한 이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내겐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이유로 다 주는 흔한 꽃다발 하나 주지 않더군. 나는 엄연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문엔 일본인으로 소개까지 됐었네. 내게 모국, 한국은 한때 그런 나라였네.

어느 원로 야구인이 그러시더군요. “그때 이후로 가네다 씨가 한국 야구계를 찾지 않는다”고요.

(손을 가로 저으며) 그건 아닐세. 이 이야기를 한 건 하나의 추억거리로 한 것뿐일세. 나는 일본인의 프라이드가 뭔지 아네. 같은 의미로 아버지·어머니의 프라이드도 잘 아네. 왜 “악! 악!”하는 게 있지 않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도 한·일전이 열리면 성격이 있기 때문에 “악!”해서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네.

음.

부모님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와 대구이고, 내 몸엔 그 피가 흐르고 있네. 가족, 유교문화, 한국의 친절하고 부드러움은 언제나 내 눈엔 반갑고 고마운 것들일세.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정을 느끼네. 일본에 살면서 몇 가지 한국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면.

네.

한국은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일세. 그런 장점을 성장시켜야 하네. 그런데 요즘 한국을 보면 돈 좀 벌었다고 거만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다른 사람과 다 똑같은 거야. 옛날에 말일세. 지금은 삼성 오너가 된 이건희 회장이 와세다대에 다닐 때였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네. 그럼 난 늘 “건짱”하고 불렀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삼성 관계자들이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하지 뭔가. 나이가 들든, 적든 아니면 돈이 많든, 적든 사람은 다 똑같아. 그걸 보고 한국 시스템에 매우 실망했었다네. 물론 이 회장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어.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 같으신 분을 보게. 절대 그런 법이 없어. 늘 누가 됐든 존중해주고, 예를 지킨다고.

지금이야 달라졌겠지만,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끼리 나뉘고, 그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뭉쳐선 절대 안 되네. 전부 하나가 돼야 나라도 부강하고, 야구도 마찬가지로 더 성장할 수 있다네. 그래서 더 하는 말인데.

네, 계속 말씀하시지요.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한국 선수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네. 세계야구를 제패할 능력이 있다는 뜻일세. 체력도 좋고, 하기만 하면 되는데 간혹 게으름을 피우는 게 문제네.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빠지고, 뭐가 무섭다고 가버리고.

기본적으로 몸이 좋으니까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올 텐데, 물론 좋은 선수들도 많지만 말이야. 그런데 (가슴을 치며) 마음은 아니야. 그런 패턴을 계속 유지하면 일본에 와서도 성공할 수 없네. 그저 ‘양반’이 돼버리는 거야. 그걸 고치지 않으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성공하기 어렵네. (혼잣말을 하듯) 더 좋은 선수들이 나와야 기쁘고 그럴 텐데….

귀화는 언제 하셨습니까.

프로 선수가 되고도 한참 있다 했네.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자의가 아니었네…. 일본 정부에서 귀화를 시킨 걸세. 일본 법무성에서 찾아와 “귀화를 하라”고 재촉했지. 심사 없이 바로 귀화를 진행하더군.

“야구는 보물, 그 보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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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네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69년 10월 10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개인통산 400승을 달성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퍼팩트게임의 희생양이었던 주니치였습니다. 롯데 오리온스(지바롯데의 전신) 감독 시절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봤을 때도 상대는 주니치였는데요. 수많은 대기록을 세우고 그해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 34살에 그만뒀지. 19년 2개월간 마운드 위에 있었네. 더 현역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연봉이 비싸다 보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조금 몸값을 내리더라도 더 현역으로 뛰셨다면 어땠을까요.

바보인가. 프라이드가 있지(웃음).

19년 2개월간의 현역 생활 동안 가장 보람 있던 순간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한 번도 연봉이 내려간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일본 야구계에선 그런 일이 없을 걸세. 나와 나가시마 시게오를 제외하곤 말이야.

선수와 현역 시절 포함 8번의 퇴장 명령을 받았습니다. 역동적인 야구인생만큼이나 풍파도 심했는데요.

퇴장, 많았지. 하지만, 그것도 다 돈벌이야(웃음).

한국 야구계를 다시 방문하시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장훈이 있잖은가.

재일교포 가운데 타자는 장훈, 투수는 선생님 아닙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국에 찾아갈 날이 있으면 오겠지. 오늘같이 기념적인 날이 다시 올거네.

한국 야구는 직접 보신 적이 있으세요?

한국에서 야구를 본 적이 있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를 본 것이었어. 난 야구 센스를 가진 선수들을 보면 희열을 느낀다네. (강한 어조로) 한국인은 무한한 파워가 있다네. 한국의 젊은 선수들은 그걸 잘 몰라. 과연 그런 선수들이 가네다식 연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아마 괴로울 거야. 그래도 한국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 중국 야구도 급성장하고 있으니, 한국이 더 분발해줬으면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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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롯데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환호하는 팬들에게 가네다 감독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야구의 미래, 어떻게 보십니까.

일본은 고교야구팀이 매우 많아. 기반이 안정돼 있어 쉽게 내려가진 않을 거야. 한국은 고교야구팀이 얼마나 되나?

53개교입니다.

53개라, 그럼 젊은 친구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더 정성껏 지도하여야 하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 젊은 친구들에게 선생님께서 직접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전엔 나한테 그런 요청이 안 왔었네. 지금은 시대가 변했겠지. 만약 기회가 온다면 조언을 들려주고 싶네. 내가 어드바이스를 하면 꼭 클 거야. 암, 그렇고 말고(웃음).

한국의 젊은 야구팬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말은 필요 없고, 내 좌우명을 들려주고 싶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끝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다시 말해 ‘네버 기브업(Never Give up)!’이야. 경기 중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야 해. 자신의 스타일로, 자신의 길로 싸우는 것이고, 자신을 믿는 거야.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기대지 말고, 1회부터 9회까지 ‘쭉’ 가는 거야. 야구를 보라고. 9회까지 130구 정도만 던지면 끝나는 걸세. 인생도 똑같아. 자신을 믿게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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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살의 가네다의 꿈은 하나다. 아버지의 고향, 상주를 찾는 것이다. 한때 귀화한 재일교포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이 있던 게 사실이다. 누가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따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가족의 생계와 자식의 혼인이나 취직에 불이익을 줄까' 두려워 재일교포들이 고심 끝에 일본으로 귀화하면 '변절했다'며 비난했다. 물론 일본과의 역사적 특수성이 있다.그러나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듯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귀화한 재일교포들에 대해서도 넓은 시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선생님에게 야구란 무엇입니까.

보물일세.

보물이요?

보물은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되네. 그래서 난 ‘보물’이라는 야구를 지금도 갈고 닦으면서 야구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네. 시대가 지나면 그 보물이 결국, 아이들의 것이 될 테니까. (기자를 바라보며) 아, 자네.

네.

상주는 좋은 곳인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공기도 맑고, 인심도 후한 곳이지요.

상주에 한번 갈 테니까 그때 자네가 안내 좀 해주게. 상주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 TV 역사물에 배경으로 자주 나오더군. (고갤 돌려 창문을 바라보며) 상주는 한번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

생년월일 : 1933년 8월 1일
체격조건 : 186cm / 73kg
투타 : 좌투좌타
이력 : 교에이고 중퇴-고쿠테쓰 스왈로스(1950 - 1964) -요미우리 자이언츠(1965 - 1969) -롯데 오리온스 감독(1973 - 1978, 1990 - 1991) 
기록 : 일본 프로야구 기록 (통산 400승, 298패, 탈삼진 4천490개, 완투 365회, 20승 이상 14회, 64 1/3이닝 연속 무실점) / 센트럴리그 기록 (통산 등판 994경기, 통산 완봉 82회, 한 시즌 완투 기록 34회) 노히트노런, 퍼팩트게임 달성
경력 : 다승왕 3회, 최우수 평균자책 3회, 최다탈삼진왕 10회, 베스트 나인 3회, 사와무라상 3회(3년 연속), 명예의 전당 헌액(1988년)

20시즌 동안 944경기 등판, 5526 2/3이닝, 400승 298패 승률 5할7푼3리, 4천490탈삼진, 평균자책 2.34, whi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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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통산 성적(1950~1964는 고쿠테쓰, 1965~1969는 요미우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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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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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어린 나이로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했던 '텐노' 가네다 마사이치


덴노(天皇).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왕은 국가 원수로서 절대적인 통치권과 군사 통수권을 한몸에 지니며 전통적인 제사권을 행사하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부정했고 현재는 일본과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신에서 인간이 됐다고 해도 여전히 경외의 대상이며 ‘덴노’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것 자체도 터부시 되고 있다. 그런 일본에서 유일하게 덴노라고 불린 이가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다.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가네다가 일본야구계의 덴노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꾸준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400승 투수. 승리 외에도 패전(295), 완투(365), 이닝(5526⅔), 탈삼진(4490), 볼넷(1808) 등 최다와 관련한 기록은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또한, 프로 입단 2년째인 1951년 22승과 233탈삼진을 올린 후 1964년까지 14년 연속 20승과 200탈삼진 이상을 달성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는 5년 연속으로 300개 이상의 탈삼진을 잡아냈고 탈삼진왕도 10회나 올랐다.

하지만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1위는 각각 3회에 그쳤다. 이것은 그의 책임이 아닌 소속팀이 워낙 만년 약체였기 때문이다. 입단 후 1964년까지 고쿠테쓰에서 활약하며 353승을 거두는 동안 팀은 833승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가네다 혼자서 팀 승수의 42.5%를 책임진 것이다. 1958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기록인 64⅓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퍼펙트게임과 노히트노런을 각각 1번 달성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혹사 속에서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사실 한두 시즌의 강렬함만 본다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투수는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이가 1957년 일본시리즈에서 7차전 중 6경기에 등판(4경기 완투)해서 4승을 올리며 ‘하나님, 부처님, 이나오님’으로 불린 이나오 가즈히사. 1978년 한 시즌 최다인 42승을 올렸고 3년 연속(1968~1975)으로 30승 이상을 포함해 8년 연속(1956~1963) 20승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는 딱 8년으로 끝났다. 반면, 가네다는 하루는 선발로 다음날은 불펜으로 마운드에 오르면서도 20년이라는 동안 활약하는 꾸준함을 나타냈다.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한 '가네다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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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의 명성은 미국에서도 자자했다. 많은 메이저리거가 그의 친구가 되길 원했고, 그가 미국에서 뛰길 바랐다.

1950년 교에이상고 2학년 때 고시엔 대회 예선에서 패하자마자 고교를 중퇴하고 시즌 중에 고쿠테쓰 스왈로즈의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이 결정되고 나서 처음으로 고쿠테쓰의 경기를 보고 독설의 퍼부었다. “뭐야! 프로야구라고 해서 강할 줄 알았는데 약해 빠졌다. 오늘 경기의 고쿠테쓰보다 내가 다녔던 교에이상고가 더 강하다.”

소년 가네다에게 프로야구도 무서울 게 없었다. 오히려 상대 타자는 물론이고 같은 팀 포수와 심판 등이 공포에 떨었다. 빠른 볼이 어디로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스피드건이 없는 시절이라서 그의 공이 얼마나 빨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그를 상대한 타자들은 “시속 150km 이상은 틀림없고 시속 160km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너무나도 빠른 볼에 포수가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일도 한 경기에 몇 번이나 나왔다. 한번은 포수 마스크에 그대로 박혔고 포수는 두개골 골절을 당했다.

입단 첫해 한 경기에서 10개의 폭투를 범하는 등 프로 6년 차까지 매년 세자릿수 볼넷을 허용할 정도로 제구력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차츰 제구력이 안정되며 마운드의 지배자로 일본 프로야구에 군림했다. 그의 최대 무기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였다. 12시에서 6시로 떨어지는 커브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오는 속구에 타자들은 헛스윙하거나 물끄러미 쳐다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특히,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를 4연타석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1958년 4월 5일 고쿠테쓰와 요미우리와의 개막전은 일본 열도의 이목이 쏠렸다. 덴노 가네다와 대학야구를 호령한 강타자 나가시마 시게오가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네다라고 해도 나가시마의 방망이 앞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네다는 덴노였다. 첫 타석에서 강속구로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데 이어 둘째 타석은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 세 번째, 네 번째 타석도 나가시마는 삼진의 제물이 됐다. 후에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대타자를 마음껏 갖고 논 것이다. 게다가, 그다음에 만난 경기 첫 타석에서도 삼진으로 솎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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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는 자신의 왼손을 가리켜 "식권"이라고 했다. 가난한 집안이 왼손에 달렸다고 믿었고, 그는 은퇴하는 날까지 왼손 보호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57년 8월 21일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가네다는 8회까지 단 한 명에게도 1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퍼펙트게임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3개. 9회 말 주니치는 대타 사카이 도시아키를 기용했지만 2-1에서 바깥쪽 낮은 속구에 배트가 살짝 돌았다. 심판은 하프스윙으로 판정하며 스트라이크아웃을 선언했다. 이 판정에 대해 아마치 슌이치 주니치 감독이 강하게 항의하며 경기는 45분이나 중단됐다. 가네다의 리듬을 깨기 위한 아마치 감독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가네다의 투지를 불태우게 했다. “한가운데 속구로 전부 삼진으로 돌려 세우겠다”고 다짐하며 마운드에 올랐고 그대로 실현했다. 두 타자 모두 3구 삼진. 일본 프로야구 역대 4번째 퍼펙트게임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투구 수 88개, 탈삼진 10개, 내야 땅볼 8개, 내야 플라이 3개, 외야 플라이 6개.

약체 구단의 에이스로 353승을 거둔 가네다 덴노는 1965년 10년 이상 한 팀에 있는 선수에게 주어진 자유계약 권리를 행사하며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마운드의 지배자가 최강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가네다는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은 5년 동안 47승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5년 2월 니시테쓰(현 세이부)와의 시범경기에서 라이너 타구에 왼손을 맞으며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했다. 부상 이후 돌아온 가네다는 덴노가 아니었던 것. 1969년 10월 10일 주니치를 상대로 통산 400승을 달성한 것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가네다가 혹사를 당하면서도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관리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요미우리 감독이 “나보다 더 많이 뛰는 인간은 처음 봤다”고 말했을 정도로 하반신 단련을 위해 매일 달리고 달렸다. 또한, 신경을 쓴다는 이유로 자동차 운전도 하지 않았다. 특히 왼손을 보호하기 위해 아들도 왼손으로 안은 적이 없었으며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을 때도 왼손에는 글러브를 끼고 뛰어나갔다.

일본 야구계의 큰 어른 가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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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에서의 가네다

은퇴 후 가네다가 다시 프로야구계로 돌아온 것은 1973년. 롯데 오리온스 사령탑에 올랐다. 그전까지 일본 야구계에서 유아독존인 가네다가 감독 자리에 오를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독선적이며 자기애가 강해서 리더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야구계를 떠난 4년 동안 덴노 가네다에서 인간 가네다로 변신해 있었다. 롯데 감독직에 올라 가고시마에서 전지훈련 할 때의 일이다.

구단 관계자가 쌀쌀한 날씨를 고려해서 벤치에 있는 드럼통에 불을 피웠다가 가네다 감독의 불벼락을 맞았다. 벤치 위에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는 팬에게 연기가 간다는 이유였다. 또한, 팬이 요구할 때마다 웃는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유니폼 차림으로. 아무리 추운 날씨라고 해도 점퍼를 벗었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팬서비스로 생각한 것이다. 선수 시절의 가네다라면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역에서 은퇴한 후 가네다는 야구해설가로 활동하면서 ‘가네다 기획’이라는 프로덕션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연예사업에 뛰어들었다. ‘15초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방송 출연이 빈번했지만 사업은 사업이었다. 이전까지 자기 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하며 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자기 멋대로 하는 인간이 프로야구 감독이 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가네다에게 감독을 맡기기 전에 롯데 프런트가 야구 관계자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이구동성으로 한 얘기다. 덴노 가네다만 아는 이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같은 재일교포인 신격호 구단주의 생각은 달랐다. “저렇게 보여도 가네다는 책임감이 강한 사내다. 안심하고 롯데를 맡길 수 있다.” 신 구단주는 가네다의 변신을 꿰뚫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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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야구원로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는 가네다

1973년 70승 49패 1무로 퍼시픽리그 2위로 팀을 이끈 가네다 롯데는 1974년 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마저 제패했다. 선수로 일본 프로야구를 군림한 가네다가 감독으로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퍼펙트게임도 통산 400승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도 상대는 주니치였다. 그러나 이후 성적이 떨어지면서 1978년 해임됐다. 1990년과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을 맡았지만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 통산 성적은 471승 468패 72무.

1978년 7월 24일에는 일본 프로야구 스타출신의 모임인 명구회를 조직했고 초대회장에 올랐다. 명구회는 투수로서 통산 200승, 혹은 250세이브 이상을 거뒀거나 타자로서 통산 2,000안타 이상을 친 선수만 가입할 수 있다. 또한, 야구계 현안에 대해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등 일본 프로야구의 큰 어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손윤 야구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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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의 야구탐사]'조선의 에이스' 박현명 이야기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쌍벽을 이루는 일본 프로야구(NPB) 최고 인기구단이다. 한국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최고 구단으로 알려졌으나, 한 시즌 관중 동원과 상품판매에선 오히려 한신이 앞선다. 역사도 깊다.

1935년 ‘오사카 타이거스’이란 이름으로 창단했다. 올해로 구단 나이가 78살이다. 1년 앞서 창단한 도쿄 자이언츠(요미우리의 전신) 다음으로 역사가 깊다. 홈구장인 고시엔구장 역사는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그 어느 구단 홈구장보다 유서 깊다. 1924년 지어졌으니 올해로 89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 전통과 역사의 한신이지만, 지난해까지 한국 프로야구(KBO) 출신 선수를 영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외는 이번에 깨졌다. 한신은 시즌 종료와 함께 한국 최고 마무리 오승환을 영입했다. 한신 구단 사상 첫 한국 프로 출신 선수 영입이었다. 그러나 이때 논란이 생겼다. 한신 나카무라 가쓰히로 단장이 12월 4일 서울에서 열린 입단식 때 한 말이 발단이었다.

당시 나카무라 단장은 “한신의 78년 역사에서 한국 선수 영입은 오승환이 처음”이라며 “한국 최고의 마무리를 영입해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일본 언론과 몇몇 한국 언론에선 나카무라 단장의 소감을 그대로 인용했다. 하지만, 일부에서 “1938년 박현명이 오사카 타이거스(한신의 전신)에 입단했는데, 어째서 오승환이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냐”며 “명백한 오보”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여기다 한 스포츠 평론가는 “집단 오보 사태는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넘겨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라며 “일본 한신 단장이 만약 식민사관에 입각해 박현명 선수를 한국인 선수로 보지 않고 발언한 것이라면, 우리 언론들뿐 아니라 야구계와 체육계까지 그들의 잘못된 사관을 걸러내지 못한 채 우리 야구 역사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이 평론가는 “이번 사태에서 안타까운 부분은 대한야구협회나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기록을 관리하는 이들 그리고 대학이나 체육계, 야구계에서 체육사를 공부한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한탄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는 박현명이 분명했다. 만약 나카무라 단장이 식민사관에 입각해 박현명의 존재를 부정했다면 이는 확실한 문제였다. 특히나 나카무라 단장의 의도대로 한국 언론이 나팔수 역할을 했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박현명에 대한 존재를 대한야구협회와 KBO 그리고 야구관계자들이 몰랐다면 창피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계는 “박현명 선생은 십수 년 전부터 야구계와 학술계에선 잘 알려진 인물이며, 그가 한신 입단 1호 한국인 선수란 것 역시 오랫동안 회자하고, 각종 야구 서적에 명기된 ‘전혀 새로운 게 없는’ 사실”이라며 “박현명 선생과 관련돼 나온 최근 이야기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시각에선 ‘대단한 발견’일지 몰라도 야구계와 체육 학술계에선 그리 놀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맞는 말이다. 박현명의 한신 1호 입단은 갑자기 발견된 사실이 아니다. 과거 신문기사와 각종 야구 서적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원로 야구인들도 대부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나 모 평론가는 대한야구협회와 KBO를 포함한 야구계의 무지와 무성의를 질책했지만, 야구기자들이 합심해 1999년 발간한 <한국야구사>엔 박현명의 한신 입단이 1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비중있게 다뤄져 있다. <한국야구사>는 야구기자들이 야구 역사 기사를 쓸 때 ‘바이블’처럼 보는 책이다. 놀라운 건 이 책이 대한야구협회와 KBO의 주도로 발간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박현명의 존재를 야구계나 체육계가 몰랐거나 무지했거나 혹은 방치했다는 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카무라 단장의 발언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기자는 12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오승환의 한신 입단을 취재했다. 당시 한신은 “한국 프로 출신으론 처음으로 한신에 입단한”이라고 오승환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카무라 단장은 “한국인으론 처음”이라는 말을 썼을까. 정말 한신이 박현명의 존재를 애써 부정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이 역시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한신의 구단 연혁엔 구단 초창기에 투수로 활동한 ‘박현명’이 국적 ‘조선’으로 표기돼 있다. 한신 구단사뿐만 아니라 각종 일본 야구 관련 서적에도 ‘박현명이 한신에 입단한 첫 조선인 내지 한국인’으로 명기돼 있다. 한신 관계자는 “지금껏 한신에서 활동한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선수가 알게 모르게 많았다”며 “나카무라 단장이 ‘한국 프로 출신’을 이야기하려다 순간적으로 ‘한국인’으로 이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단장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적은 언론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언론은 ‘한국 프로 출신’이라는 말로 오승환의 한신 입단을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한국 스포츠 언론 OSEN은 나카무라 단장의 ‘첫 한국인’ 발언이 나왔을 때 ‘첫 한국 프로 출신’으로 수정해 기사화했다.

어쨌거나 이번 논란으로 ‘잊힌 천재 야구 선수’ 박현명이 새롭게 조명됐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었다. 가뜩이나 올해는 박현명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렇다면 과연 박현명은 어떤 선수였을까. 야구 원로들은 입을 모아 “박현명 선생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라며 “반세기 넘게 잊혔던 대(大) 야구인을 재조명할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6척’ 박현명, 당대 최고 스타 이영민과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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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국 올스타팀으로 일본을 방문한 베이브 루스(사진 왼쪽부터)와 전일본 올스타팀의 유일한 조선인 선수 이영민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현명. <한국야구사>엔 박현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8번 나온다. 첫 번째는 1937년의 이야기다.

그해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모국을 방문해 국내 야구팀들과 친선경기를 치렀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매번 수준 높은 경기를 펼쳤는데, 그해 7월 20일 서울 휘문운동장에서 치른 고려야구단과의 경기에선 2대 13으로 참패했다. <한국야구사>엔 당시 고려야구단을 ‘한국야구의 기치를 치켜든 한국야구계의 정예 선수들로 구성된 일종의 국가대표팀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고려야구단의 주축 투수 겸 6번 타자가 바로 박현명이었다.

박현명은 1913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4남 4녀 가운데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야구를 시작한 것도 뛰어난 체격 덕분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의 동생들도 같았다. 하나같이 체격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더군다나 형의 영향을 받았는지 동생들은 모두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특히나 동생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야구계의 거목이 됐는데, 이들이 한국야구 발전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먼저 둘째 박현덕이다. 1919년생인 박현덕은 평양고보,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거쳐 해방 이후 조선운수와 전인천군에서 선수로 뛰었다. 1946년부터는 인천 동산고에서 상업교사와 야구부 감독을 겸직했는데, 1973년까지 동산고를 떠나지 않았다. 이 기간 그는 전국대회 감독상을 6회 이상 수상하며 고교야구계에서 ‘명지도자’로 불렸다.

동산고 야구부에서 박현덕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강대진 전 경기도협회 사무국장은 “박 감독은 신인식, 최관수 등 뛰어난 투수들을 차례로 배출한 능력있는 지도자였다“며 “실업팀들이 감독으로 모시려고 여러 차례 추파를 던졌음에도 고교야구 감독과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해 언제나 제안을 고사한 진정한 야구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셋째 박현민 역시 선린상고 야간에 다니며 투수로 활동한 야구인이었다. 형들과 동생에 비해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교 시절 꽤 주목받는 투수였다.

넷째 박현식은 형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였다. 동산중(현 동산고), 경희대를 졸업하고 조선운수-육군-농업은행 등에서 현역으로 뛰었던 박현식은 각종 전국대회에서 홈런왕을 휩쓸며 해방 이후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한 이였다. 대한야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박현식은 동산중 3학년이던 1946년부터 제일은행에서 은퇴하던 1968년까지 통산 112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당시는 배트 강도와 공인구의 반발력이 극도로 낮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이유로 홈런 자체가 귀했다. 그럼에도 11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냈다는 건 대단한 기록임이 틀림없었다.

특히나 박현식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6년 연속 한국 대표팀 멤버로 출전하며 1965년 아시아야구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철인상’을 받는 등 국제야구계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서 제일은행 감독을 거쳐 삼미 슈퍼스타스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던 박현식은 KBO 심판위원장과 LG 2군 감독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한국야구 발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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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구장에서 필리핀 팀과의 경기를 마친 '인천군' 박현식(사진 왼쪽부터)과 필리핀 선수, 박현덕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

하지만, 원로 야구인들은 4형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는 박현명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장골(壯骨)로 유명했던 4형제 가운데 체격도 박현명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산야구의 대부’이자 대한야구협회 사무국장과 KBO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고 이호헌(본명 이정열) 씨는 생전 박현명에 대해 “당시로선 보기 드문 장신(한국 기록 : 182cm, 일본 기록 178cm)이었다”며 “원체 키가 커선지 박현명 씨의 별명이 ‘6척’이었다”고 회상했다.

‘6척’ 박현명은 지금으로 치면 류현진급의 투수였다. 야구에 관심 있는 조선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평양 능라도 부근에 25만 평의 땅을 소유한 부농이던 박현명의 아버지는 큰아들이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다. 수재들이 모인다는 평양고보에 아들이 입학했으니 그런 바람을 품을 만도 했다. 하지만, 평양고보에 진학한 박현명은 공부 대신 야구에 집중했다. 박현명이 야구계의 스타로 부상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고난 체격과 노력으로 박현명은 평양고보 시절 이름난 투수가 됐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박현명은 1933년 평양실업에 입단했다. 평양실업의 에이스로 활약한 박현명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무대는 1936년 제10회 ‘흑사자기쟁탈 전일본 도시대항 야구우승대회(흑사자기회)’ 조선 예선전이었다.

흑사자기회는 도쿄 일일신문사(마이니치 신문의 전신)가 1927년부터 주최한 도시대항 대회로,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 만주, 타이완 등 범(汎)극동지역의 야구팀들을 모두 아우르는 당시로선 가장 규모가 큰 성인야구대회였다. 일본 본토는 도시별로 대표 출전팀을 가렸지만, 조선, 만주, 타이완 등엔 단 한 장씩의 본선 티켓만을 줬기에 본선 진출권을 둘러싼 예선전은 매우 치열했다.

1936년 조선 예선전도 그랬다. 5개 팀이 한 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친 가운데 ‘전(全)경성’과 ‘평양실업’이 결승에서 만났다. 전경성엔 불세출의 스타 이영민이 버티고 있었다.

배재고보-연희전문 출신의 이영민은 육상, 축구, 농구 선수로도 맹활약한 당대 최고의 스포츠맨이었다. 야구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보여 특급투수와 홈런타자로 동시에 활약했다.

고 이호헌 씨는 “한국야구의 홈런 계보를 살폈을 때 그 시발점은 이영민”이라고 평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1928년 6월 8일 경성운동장(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현 서울대 의대)과의 정기전에서 1회 말 3번 타자로 나온 연희전문 이영민은 커다란 홈런을 기록했다. 1926년 개장 이후 경성운동장에서 나온 첫 홈런(야구역사가 홍순일 씨는 ‘이영민 이전 흑인 선수가 경성운동장에서 홈런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고 말한다.)이었다. 당시 민족신문이던 ‘동아일보’는 이 홈런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영민에게 홈런상을 수여했다. 이는 한국야구사에서 첫 홈런왕 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쨌거나 불세출의 스타 이영민이 버틴 전경성은 평양실업보다 어딜 보나 한 수 위였다. 경성(서울)과 평양의 지역 라이벌 구도까지 겹치며 두 팀의 대결에 전(全) 조선의 관심이 집중됐다. 전경성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리란 예상은 7회까지 적중하지 못했다. 두 팀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며 7회까지 0대 0, ‘0의 행진’을 계속했다.

이영민의 투구가 평양실업 타선을 꽁꽁 묶은 까닭도 있었지만, 평양실업 투수들의 호투 역시 대단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평양실업 투수가 바로 박현명이었다.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현명의 강속구에 전경성은 꼼짝없이 당했다.

8, 9회 전경성이 지친 평양실업 수비진의 실책과 투수들의 난조로 대거 8점을 내며 결국 8대 0으로 승리해 본선 진출권을 따내지만, 당대 최고스타 이영민과 팽팽한 투수전을 펼친 박현명은 이 경기 호투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한국인으론 가장 먼저 국외리그 무대를 밟았던 ‘천재 투수’ 박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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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이스' 박현명의 오사카 타이거스 시절 사진

1937년 박현명은 평양을 떠나 서울의 체신국에 입단한다. 체신국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박현명은 1938년 다시 ‘흑사자기대회’ 조선 예선전에 참가한다. 그러나 소속팀은 체신국이 아닌 경성을 대표하는 ‘전경성’이었다. 2년 전 조선 예선전에서 평양실업의 발목을 잡았던 전경성에 박현명이 들어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야구계는 지금으로 치자면 ‘환상의 원투펀치’ 소릴 들을 법한 이영민-박현명 조합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영민이 출전하지 않으며 전경성 마운드의 조선인 투수는 박현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해 전경성은 박현명의 호투 덕분에 조선 예선전에서 본선 티켓을 거머쥔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일본으로 건너간 뒤 본선에서 승승장구한다. 일본야구계는 전경성이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결승까지 오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결승에서 도쿄 후지쿠라 전선에 1대 4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전경성 투수 박현명의 인지도는 일본야구계로까지 퍼져 나간다.

하지만, 정작 박현명의 일본 진출이 결정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한국야구사>와 박현명의 막내 동생 박현식의 생전 증언 그리고 한신 구단사를 종합하면 박현명의 오사카 입단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38년 8월. 일본 프로야구단 오사카 타이거스가 내한한다. 오사카는 6일 함께 내한한 나고야와 경성에서 친선경기를 펼쳐 6대 1로 승리한다. 다음날 오사카는 자체 홍백전을 하기로 했는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고야전에서 분전한 몇몇 선수가 피로와 부상으로 도저히 자체 홍백전에 뛸 수 없게 된 것이다. 1936년 창단 이후 줄곧 얇은 선수층 때문에 고생했던 오사카로선 ‘예견된 낭패’였다. 오사카는 이참에 조선에서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서 선수를 소개받는다. 이때 오사카가 소개 받은 선수가 체신국 투수 박현명이었다.

오사카는 지금의 ‘공개 테스트’와 비슷한 운동능력측정 시험을 보고서 박현명을 스카우트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박현명의 나이 25세. 지금이야 ‘막’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지만, 당시로선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박현명이 뛰어야 할 무대는 조선이 아닌 ‘낯선 땅’ 일본이었다.

그해 10월 박현명은 도쿄를 거쳐 오사카에 입성해 마침내 오사카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는다. 조선인 선수가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정식 입단하는 순간이었다. 오사카는 박현명에게 등번호 ‘20’번을 달아주며 선전을 부탁한다.

‘전(全)인천군’ 선수이자 대한야구협회 기록통계부장을 역임했던 신현철(89)옹은 박현명의 존재를 잘 아는 야구인이다. 신 옹은 박현명의 동생 박현식과 함께 인천에 살며 두터운 친분을 유지한 사이라, 가뜩이나 박현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신 옹은 “박현명 씨가 줄곧 이북에서 활약하다가 1년 정도 서울로 건너와 체신부에서 뛰었다”며 “그 기간 오사카 타이거스의 눈에 띄어 조선인으론 가장 먼저 국외리그인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고 밝혔다.

신 옹은 “젊었을 때 원로 야구인들의 말을 들으면 박현명 씨가 오사카에 진출하자 조선야구계가 꽤 흥분하고, 기뻐했다”며 “많은 조선 야구인이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고 전했다.

박현명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바로 아래 동생 박현덕에게 남은 가족을 부탁했다고 한다. 연희전문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박현덕 역시 일본 프로구단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박현명은 “넌 공부를 잘하니 계속 학업에 열중했으면 좋겠다”며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한눈 팔지 말고 학업에 정진하라”는 당부를 들려줬다고 한다.

‘조선의 에이스’ 박현명은 그렇게 한국인(조선인)으론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고, 많은 이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성공’이란 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2번의 프로 등판에서 평균자책 1.08을 기록했던 박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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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완식 선생이 한큐에서 뛸 때의 사진

일본에 진출한 박현명은 대장장이의 집게에 잡힌 쇠붙이가 물 속에서 ‘치익’ 소릴 내며 단련의 과정을 마치듯 오사카에서 프로선수로서의 기본기를 연마한다. 원체 체격이 좋고, 빠른 공을 던졌기에 투수로서 많은 활약이 기대됐다.

한신의 공식 구단 기록사엔 박현식의 첫 1군 출전이 1939년 8월 12일이라고 적혀 있다. 상대는 나고야 긴코. 도쿄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박현명은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국외리그에 진출한 첫 조선인’이라는 부담감과 프로 데뷔전이라는 중압감이 더해지며 박현명은 경기 초반 흔들리는 듯보였다. 그러나 강력한 속구와 당찬 자신감을 바탕으로 박현명은 4회 2사까지 5피안타 1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한다.

비록 팀이 0대 2로 지며 패전투수가 됐지만, 프로 데뷔전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오히려 당시 일본야구 수준이 한국보다 한 단계 높았고, 박현명 시각에서 ‘일본은 국외 무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다고 평가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박현명의 호투에 고무된 오사카는 4일 뒤인 16일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난카이군’전에도 박현명을 선발로 등판시킨다. 만약 이 경기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친다면 박현명의 팀 내 입지는 공고해질 게 자명했다. 결과만 본다면 이번에도 성공적인 투구였다. 박현명은 3⅔이닝 동안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피안타 7개가 흠이었으나, 어쨌거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줄 만했다.

2번의 선발 등판에서 8⅓이닝 동안 39타자를 상대로 12피안타, 3볼넷, 2탈삼진, 1실점(1자책), 1패, 평균자책 1.08을 기록한 박현명은 오사카 투수진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은 거기까지였다. 박현명은 더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1939년 8월 16일 이후 박현명과 관련한 일본 내 기록은 전무하다. 어째서 그는 다시 마운드에 서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본 선수들 틈에서 ‘박현명’이라는 조선 이름을 쓰며 당당하게 활약한 ‘6척’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국야구사>와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엔 박현명이 일본 무대에서 2경기만 등판하고,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어깨 부상’으로 적고 있다. <한국야구사> 박현명 편엔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 중 배팅볼을 도맡아 던지는 등 꾀부리지 않고 팀 훈련에 앞장서다가 어깨고장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시즌에 들어가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라고 기술돼 있고, <한국야구인 인명사전> 역시 ‘1938년 동계훈련 중 어깨를 다쳐 39시즌서 2게임에 등판, 1패를 당한 뒤 퇴단’으로 적혀 있다.

그랬다. 조선 야구의 희망이자 영웅이었던 박현명의 발목을 잡은 건 예기치 못한 부상이었다. 팀을 위해 배팅볼을 도맡아 던졌던 그 ‘성실함’과 ‘팀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 박현명의 성공가도에 암초로 작용한 것이었다.

기자는 3년 전 박현명의 존재를 처음 알고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그의 자료를 찾았다. 1991년 발간된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경과’와 1992년 출간된 ‘오사카 타이거스 구단 역사’ 그리고 오사카대학교에 보관된 각종 일본 프로야구 관련 논문엔 박현명의 이름이 간혹 나온다.

박현식은 생전 “큰 형님(박현명)이 큰돈을 받고 오사카에 입단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박현식이 언급한 당시 박현명의 계약금은 150원이었다. 150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게는 수십억 원, 적게는 몇억 원씩하는 계약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1938, 1939년 생활상을 다룬 각종 문헌엔 당시 소학교 교원의 월급이 사십 원, 상급 학교 교원의 월급이 100원 정도로 나와 있다. 일본 강점기 시절 교원이 선망의 직장이었음을 고려하면 계약금 150원은 적진 않지만, 그렇다고 큰 금액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박현명뿐만 아니라 그즈음 일본 프로야구 구단에 입단했던 선수들의 계약금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선 계약금을 ‘준비금’이라고 불렀는데, 고시엔대회 전국 우승 투수로 유명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전 요미우리 감독, 작고)가 1936년 교진군(요미우리의 전신)에 입단했을 때 받은 준비금이 3백 엔이었다. 그즈음 일본 교원의 월급이 50엔, 전차 운전사 초봉이 50~60엔 정도 했으니, 큰돈이긴 했어도 지금처럼 ‘억(億)’ 소리 나는 돈까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많은 선수가 계약금 없이 입단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박현명이 150원을 받고 입단했다는 건 오사카가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었다. 이는 월급에서도 알 수 있다.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경과’에선 박현명의 월급이 150엔으로 나와 있다. 2년 먼저 입단한 가와카미가 110엔을 받았고, 그즈음 프로야구 선수들의 월급이 보통 100~130엔, 특급선수 월급이 200엔 정도였으니 박현명에 대한 평가는 꽤 후한 편이었다.

자,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이처럼 후한 평가를 받은 박현명이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 중 배팅볼을 도맡아 던지는 등 꾀부리지 않고 팀 훈련에 앞장서다가 어깨 부상을 당했느냐’는 것이다. 적지 않은 투자와 기대를 품었던 투수가 어깨 부상을 당할 정도로 과도한 배팅볼을 던지는 데도 오사카 구단이 이를 가만히 지켜봤다는 건 의문이다.

이유는 박현명의 보직에 있었다. 한신 구단사에 적힌 박현명의 보직은 매우 특별했다. 그는 오사카 구단 최초의 ‘전임 타격 투수’였다.

조선의 에이스는 어째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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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선수단 명부. 맨 오른쪽 박현명이 이름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바로 퇴단을 의미하는 뜻이다.

‘타격 투수’. 언뜻 단어의 뉘앙스만 보면 타자와 투수를 병행하는 선수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타격 투수’는 배팅볼 투수를 뜻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1939년에도 ‘타격 투수’는 타자들의 프리 배팅 때 공을 던져주거나 토스 배팅 때 공을 올려주는 임무를 담당했다.

박현명이 이 임무를 맡게 된 배경을 한신 관련 문헌에선 두 가지로 추측한다. 하나는 박현명의 제구가 뛰어나 배팅볼 투수로서 매우 적합했다는 것이다. ‘한신 구단사’엔 “‘타격 투수’를 담당했던 쓰리 쓰네오는 제구가 나빴다”며 “박현명과 19살 투수 기노시타 이사무의 제구가 좋아 타자들이 치기 쉬운 공을 던졌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박현명과 함께 배팅볼을 도맡았던 기노시타는 1939년 19경기(14경기 선발)에 등판하며 ‘전임 배팅볼 투수’에서 물러난다. 훗날 기노시타는 한 시즌 10승 이상을 3번이나 기록하는 등 수준급 투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박현명은 계속 배팅볼을 던졌다. 그가 오사카 구단 초대 ‘전임 타격 투수’로 기억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노시타와 달리 단, 2경기 등판을 제외하곤 줄곧 배팅볼만 던진 까닭이다.

여기서 두 번째 설이 나온다. ‘타격 투수’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가 조선인 투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다. 1939년 9월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사카 주력 선수들이 잇따라 입대한다. 투수층이 얇아진 건 당연했다. 강속구와 제구가 좋았던 박현명이 투수진에 합류할 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현명은 8월 이후 전혀 등판하지 못했고, 19살의 기노시타와 신인 미와 하치로에게도 밀렸다. 한신 구단사에서조차 “그(박현명)가 조선인이었기에 불이익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현명과 비슷한 처지의 선수로 유완식(작고)이 있다. 박현명에 이어 1년 늦은 1939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유완식은 포수였다. 그해부터 4년간 유완식은 2군 포수로 뛰었고, 나머지 3년간은 1군에서 활약했다. 그는 한큐 시절 호방한 성격과 리더십으로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했다. 하지만, 그의 1군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유완식은 생전 “실력은 다른 일본 포수보다 뛰어났지만, ‘조선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며 “1군에서 활약하려면 이팔용(후지모토 히데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퍼팩트 투수)처럼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으나, 그걸 거부한 통에 ‘불펜 포수’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 야구의 긍지’였던 박현명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배팅볼 투수로 뛰며 많은 공을 던지다 결국 어깨에 탈이 났다. 그리고 1940년 3월 조용히 평양으로 돌아온다. 조선 이름을 그대로 썼던 박현명의 퇴단은 ‘조선 야구’의 아픔이자 좌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게 있다. 박현명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오사카 구단에서 뛰었던 걸 두고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이다. 박현명이 오사카에서 활약하며 일본 이름을 쓰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의 대대적인 창씨 개명이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박현명은 재일교포가 아닌 성인이 될 때까지 조선에서 뛰었던 선수다. 오사카는 이를 고려해 박현명을 조선명으로 표기했고, 박현명뿐만 아니라 그즈음 다른 구단의 타이완, 만주 태생 선수들도 일본식 이름을 쓰지 않았다.

만약 박현명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을 듣는다면 거듭된 일본 프로 구단의 입단 권유에도 한결같이 “일본 구단에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틴 이영민의 기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 구단에 입단한 박현명과 그걸 마다한 이영민 가운데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킨 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거기다 비록 일본 이름으로 바꿨지만, 당시 일본에 살던 재일교포들은 나름의 창씨 개명으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 OB, 빙그레(한화의 전신) 감독인 재일교포 출신 김영덕(77)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 일본명이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다. 원래 가네히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가네히코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쓴 건 내가 ‘언양(彦陽) 김(金)씨’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양 김씨들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언양’의 뜻이 포함된 ‘가네히코’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했다. 조선 이름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뿌리가 어딘지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선적 역사의식이 때론 사실을 과장하고, 역사적 인물들의 노력과 눈물의 의미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잊혀져야 했던 천재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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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중국에서 열린 친선경기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평양 철도청 야구단'이 상하이에서 기념촬영한 사진. 사진 가운데 양복을 입은 이가 박현명이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26년 동안 혼자서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을 발간, 개정하고 있는 홍순일(전 문화일보 편집위원) KBO 야구박물관자료수집위원장은 신현철 옹과 함께 박현명의 존재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이다

2000년 3월에 발간된 ‘한국야구인 인명사전’엔 무려 6천700명의 야구인과 관계자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 가운덴 박현명도 포함돼 있다.

홍 위원장은 “1989년 박현식 씨를 만났을 때 박현명 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그때 박현명 씨가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국외리그 무대를 밟았다는 걸 알았다”고 밝혔다.

홍 위원장의 노력으로 박현명은 ‘어둠의 역사’에서 ‘열린 역사의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박현명이 오사카 구단을 퇴단하고 평양에 돌아온 1940년 3월 이후 행적에 대해선 홍 위원장도 “자료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홍 위원장뿐만이 아니다. 각종 야구 문헌을 살펴도 박현명의 1940년 3월 이후 행적은 찾을 길이 없다. 원로 야구인들도 어찌된 일인지 박현명의 1940년 이후 행적에 대해선 침묵했다. 이는 박현식, 박현덕 형제도 같았다.

신현철 옹은 “박현식, 박현덕 형제와 무척 가까워 두 이의 입을 통해 박현명 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1940년 이후에 대해선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어쩔 땐 두 이 모두 큰형님 이야기를 애써 피하려 했다”고 전했다.

오사카에서 퇴단한 박현명은 1940년 3월 평양으로 돌아가 ‘이스즈 자동차’에 입사했다. 홍 위원장이 ‘한국야구인 인명사전’ 개정판에 넣으려고 새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박현명은 ‘이스즈 자동차’ 입사와 함께 야구단을 창단해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1년 전까지 현역으로만 뛰었던 걸 고려하면 박현명의 ‘선수 겸 코치’는 그의 어깨 부상이 심각했음을 알려준다.

사실 ‘이스즈 자동차’를 끝으로 박현명에 대한 공식 자료는 없다. <한국야구사>에도 더는 박현명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되레 이 시점부터 박현명은 야구계에선 ‘입에 담아선 안 될 인물’이 됐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간명하다. 그가 해방 이후 북한에 남아 북한 야구계의 지도자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생전 박현식은 이산가족이 된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면서 둘째 형(현덕)과 나 그리고 누이 둘은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터를 옮겼다. 하지만, 큰형(현명)과 셋째 형(현민) 그리고 나머지 누이 둘은 계속 평양에 눌러살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쪽의 형제들과 남쪽의 형제들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돼버렸다. 큰형의 자식 둘도 전쟁 통에 아버지와 헤어진 채 줄곧 남한의 외가에서 자랐다. 전쟁 이후 형제들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어 새해만 되면 북쪽을 바라보며 형제들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다.”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엔 사실상 연좌제가 있었다. 가족 형제 가운데 누가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거나 이름이 있다면 한국의 가족은 국외여행이 불허되거나 공무원 임용에서 제외되는 등 유무형의 불이익을 받게 마련이었다. 청와대가 인정한 한국야구 최고의 홈런왕이던 박현식과 아마추어 야구계의 거목이자 교육자였던 박현덕으로선 현실적으로 박현명의 이름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른 야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박현덕의 제자였던 강대진 씨는 “선생님께선 박현명 씨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셨다”며 “아주 간간이 ‘우리 형이 일본에서 프로 선수로 뛰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은 있어도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회상했다.

박현식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큰형의 소식을 들은 건 1989년이었다. 이해 박현식은 일본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볼>을 보고 깜짝 놀란다. 바로 큰형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슈칸베이스볼>의 일본 기자는 이해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중국 푸저우에서 열린 ‘이화배 국제야구대회’에 참가했다가 평양으로 돌아가려던 북한 ‘평양 철도청 야구단’을 상하이에서 만났다. 당시 일본 실업팀 JAL과 중국 이화팀을 상대로 4승 무패를 거둔 ‘평양 철도청 야구단’은 4경기에서 완봉승을 2번 거둘 정도로 완벽한 투수진을 자랑했다.

일본 기자는 ‘평양 철도청 야구단’의 대표이던 김희수 국가체육위원회 야구협회 서기장을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김희수 서기장은 “처음엔 세계 최강인 쿠바 야구를 배웠지만, 동양인은 일본야구 쪽이 맞는다”며 “우리 지도자들은 거의 17, 18살까지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던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그 가운데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로 뛰었던 원로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자는 김 서기장과의 인터뷰와 선수단 사진을 지면에 실었고, 박현식은 우연한 기회에 이 기사를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진 속엔 전쟁 이후 40여 년 가까이 떨어졌던 큰형이 양복을 입은 채 ‘평양 철도청 야구단’ 선수들 사이에 서 있었다.

일본 기자는 박현명의 정확한 직책을 알 수 없다고 기술했는데, 1980년대 북한 스포츠단에서 양복을 입은 원로 체육인들은 대개 단장급 이상이었기에 박현명 역시 고위 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형의 생존을 확인한 박현식은 그길로 박현명의 아들과 ‘남북 고향방문단’을 신청했다. 박현식이 원체 유명한 야구인이었기에 고향방문단의 일원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남북 적십자 회담이 결렬되면서 고향방문단 구성 역시 지지부진해진다. 결국 박현식은 다른 길을 통해 큰형과의 만남을 성사하려고 노력했다.

신현철 옹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인 봄인가 됐을 거다. 하루는 (박)현식이가 ‘3일 후 중국에 갑니다. 거기로 큰형이 감독을 맡고 있는 팀이 온다고 하니까 이참에 찾아가 꼭 만나봐야겠어요’라고 했다. 큰형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조심히 다녀오라’고 전했다. 아, 그런데 얼마 있다가 현식이를 만났는데 연방 한숨을 내쉬지 뭔가. 왜 그런지 물었더니 ‘갔는데 못 만났다’고 하더라. ‘정식대회도 아니고 친선경기라, 도대체 어디서 경기를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물어볼 때도 없어서 베이징 거리만 헤매다 왔습니다’하는데 내 마음이 다 아팠다.”

박현식은 그해 가을에도 베이징을 찾았다. 당시 베이징에선 제11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혹시 북한 야구 대표팀 관계자로 큰형님이 오시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에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헛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형은 고사하고, 북한 야구 대표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눈을 감기 전까지 박현식은 “죽기 전에 큰형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난 박현덕도 큰형님 박현명을 몹시 그리워하며 북쪽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국외리그 진출 1호 박현명에서 추신수까지 75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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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TV 웹사이트에 실린 '기관차체육단' 야구단 선수들의 훈련 장면

박현명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 100살이다. 따라서 야구계는 박현명이 이미 작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1989년 잠시 언론에 노출됐다가 사라진 박현명처럼 북한 야구 역시 1993년 호주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이후 종적을 감췄다. 북한 내부에서 전해오는 야구 소식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올 1월 24일. 북한 관영방송사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야구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조선중앙TV는 '기관차체육단' 선수들의 동계훈련 소식을 전하며 야구 배트를 든 선수의 사진을 자사 웹사이트에 올렸다. 야구 관련 소식을 거의 전한 바 없는 북한이기에 조선중앙TV가 갑자기 ‘기관차체육단’의 야구단을 소개한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만약 박현식, 박현덕 형제가 살아있었다면 두 이는 이 소식을 들으며 벅찬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 일본 문헌에 따르면 북한 ‘기관차체육단’의 전신이 바로 박현명이 관계자로 있던 ‘평양 철도청 야구단’이기 때문이다. 박현명은 작고했을지 몰라도 그의 야구 열의와 사랑은 ‘기관차체육단’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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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거 추신수. 그의 인사는 선대 야구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일지 모른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최근 메이저리거 추신수가 7년 1억3천 만달러(약 1천378억원)의 조건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리며 한국 야구계가 들썩이고 있다. 추신수보다 75년 전에 국외리그를 밟았던 박현명 같은 선각자가 없었다면 한국 야구도, 추신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원로 야구인들의 중평이다.

한국 야구의 역사가 이참에 더 많이 발굴되고, 더 정확하게 기술돼 많은 야구 선각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도 한국 야구사엔 수많은 박현명이 후세의 재발견으로 새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다.3년의 추적 끝에 쓴 기사. 별 내용이 아닌 것같지만, 이 기사 쓰려고 정말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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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보낸 불면의 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훈과 왕정치는 나란히 프로에 입단을 한다. 퍼시픽리그의 만년 하위팀 도에이에 입단을 한 장훈과는 달리 왕정치는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입단을 한다. 요미우리는 일본의 야구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뛰고 싶은 최고의 명문팀이다. 장훈 역시 요미우리를 동경했다.

 

사실 장훈은 고교 시절에 이미 좌완 투수로 요미우리의 미즈하라 감독에게 입단 제의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학업은 마쳐야한다는 형 세열씨의 강한 반대와 그즈음 무리한 투구로 인해 어깨가 망가져 더 이상 투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시련까지 겹치면서 요미우리 입단의 꿈을 접어야했다.

 

하지만 61년 도에이 감독으로 미즈하라가 부임해 오면서 장훈은 미즈하라 감독과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서로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들의 두 번째 만남은 기적을 낳게 된다.

 

도에이 유니폼을 입고 고시엔에 서다

 

만년 하위팀 도에이가 62년 한신 타이거스를 물리치고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기적의 중심에 장훈과 미즈하라 감독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기적이 만들어진 장소는 바로 장훈이 꿈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던 한신의 홈구장 고시엔이었다.

 

장훈의 고시엔을 향한 열망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억울한 휴부명령을 받고 고시엔의 꿈이 좌절된 당시를 친구 야마모토씨는 이렇게 회고 했다.

 

잠에서 깼는데 장훈이 없었다. 2층에서 내려와 보니 장훈은 달빛 아래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장훈은 두 손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손바닥이 피에 물들여 있었다. 장훈의 손바닥은 끊임없는 스윙으로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데 그것이 벗겨질 정도면...놀라움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옆으로 누워 장훈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에서 한줄기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시엔의 꿈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장훈이 어떤 심정으로 그날 배트를 휘둘렀고 손바닥이 벗겨지고, 무엇이 남자를 울게 만들었는지를 모를 것이다. -1975< 마이니치 신문 > 과의 인터뷰-

 

"천하제일의 나니와가 조센진의 힘을 빈다는 것은 수치다. 하리모토(장훈) 따위는 우리 야구부에 필요 없다" 며 장훈의 고시엔 출전을 막은 다케우치 감독의 얼굴을 허공에 그리고 수천번이나 분노의 배트를 휘두르며 울분을 삼켜야만 했던 장훈이 그토록 열망하던 고시엔의 흙을 밟고 일본 프로야구 정상에 선 것이다.

 

장훈과 왕정치는 같은 해 프로에 데뷔를 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기지만 왕정치가 받은 스포트라이트를 장훈은 받지 못했다. 도에이와 요미우리의 차이, 홈런왕과 타격왕의 차이라고 백 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23시즌 동안 3085개의 안타를 때려냈고 504개의 홈런을 기록한 장훈이다.

 

매 시즌 150개가 넘는 안타와 25개의 홈런을 20년간 꾸준하게 쳐내야만 가능한 숨 막히는 기록을 세운 장훈이 선수 생활 내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왕정치의 홈런 하나에 열도가 들썩일 때 장훈은 훗날 전설로 남을 대기록을 조용히 때려내며 외로운 정복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59410일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를 한다. 갓 입단한 신인으로 당당히 한큐와의 개막전에 출장했지만 프로 첫 타석에서는 삼구 삼진, 수비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지르며 그렇게 프로와의 인연을 시작한다.(장훈은 화상으로 불구가 된 오른손 때문에 공격에 비해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튿날 한큐와의 두 번째 경기 두 번째 타석에서 드디어 프로 첫 안타를 2루타로 장식한다. 상대 투수는 아키모토, 세 번째 타석에서는 이시이를 상대로 첫 홈런까지 때려냈다. 23시즌에 걸쳐 3085개의 안타와 504개의 홈런을 때려낸 장훈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슬럼프에 빠지다

 

도에이(후에 일본햄으로 바뀜), 요미우리 그리고 롯데로 팀을 옮기면서 23시즌 동안 장훈은 한 번도 데뷔시즌에 기록한 .275 이하로 타율이 내려간 적이 없었다. 통산 수위타자 7회와 4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시즌을 3할 타율 이상을 기록한 장훈에게 도무지 슬럼프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장훈은 슬럼프로 인해 수없이 좌절했고 그런 자신의 꼴이 한심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스스로 말한다. 도대체 장훈이 말하는 슬럼프란 어떤 것일까.

 

장훈은 스스로 만족한 스윙을 하지 못했다면 안타를 때려내고 홈런을 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슬럼프라 생각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자신이 나태해 진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다시 원하는 스윙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자학했다고 한다. 매일 밤 자신만의 스윙을 잃어 버릴까봐 항상 불안해서 배트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장훈.

 

"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스윙을 하면 붕붕하는 소리가 난다. 수백 개의 스윙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귀신의 울음 같은 섬뜩한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이 실린 스윙, 바로 그 혼()의 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왔다. " 너무 과장이 심한 것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다. 마치 만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훈련을 수십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는 것이 그것도 실체가 있지도 않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숨처럼 아끼는 야구를 조국을 위해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했으며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 있는 야구장 한 가운데서 당당하게 "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 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 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 라고 외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제대로 기억조차 해주지 않는 대한민국을 아직도 세계에서 제일 좋은 나라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현실과 타협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하며 살아왔다면 장훈의 위대한 오늘은 결코 만들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화를 살다' 일본작가 야마모토 데쓰미가 장훈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의 제목이다. 장훈은 '신화'를 살아온 것이다.

 

 

요미우리는 대기록을 원치 않았다 ~ 숨막힐 듯 달려온 장훈의 기록들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을 한 1959년 장훈은 411일 투수 아키모토를 상대로(한큐) 두 번째 타석에서 자신의 프로 첫 안타를 2루타로 기록했으며 세 번째 타석에서는 바뀐 투수 이시이에게 프로 첫 홈런을 때려냈다.

 

6번 타순에서 시즌을 시작한 장훈은 623일 팀의 4번 타자를 맡게 된다. 이제 19살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팀의 4번 타자가 된 것이다. 당시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어린 4번 타자였다. 시즌이 끝났을 때 장훈은 .275위 타율과 13개의 홈런, 57타점을 기록했다. 팀 내 최다 홈런과 타점이었다. 장훈은 195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1960, 프로 2년차를 맞았지만 장훈에게는 흔히 말하는 '2년차 징크스'가 없었다. 배트가 공기를 예리하게 가를 때 생겨난다는 혼의 소리, 그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매일 밤 배트를 휘둘렀던 장훈에게는 징크스조차 사치였다. 1960년 장훈은 .302의 타율을 기록하며 드디어 3할 타자에 이름을 올렸다. 리그에서 3할을 넘기는 선수가 세 명 내외였던 시절이었다.

 

1961년에는 .336의 타율을 올리며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으며 24개의 홈런과 95타점을 기록해 부쩍 좋아진 장타력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4번 타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해 장훈은 16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내 이 부문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조센진'에게 고의사구를 줄 수 없다며 오기로 승부를 걸어오는 투수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결과는 비참했다. 결국 장훈은 이후 4년 연속 고의사구를 가장 많이 얻어냈으며 투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타자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됐다.

 

1962년은 .333의 타율과 31개의 홈런, 99타점을 기록하는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만년 하위팀이었던 도에이를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려놓고 생애 처음으로 MVP에 뽑히는 등 장훈에게 최고의 시즌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현해탄을 건너온 후 일본 땅에서 온갖 차별과 냉대를 경험하며 자라면서도 야구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국인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장훈은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놀라운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기록한 기록들을 한 번 나열해 보자.(자료 도움: 박성호의 야구이야기)

 

장훈은 1967년부터 70년까지 4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했으며 통산 7번이나 타격왕에 올랐다. 특히 70년에 기록한 .383의 타율은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이었다.(현재는 통산 4)

 

장훈은 16번의 시즌에서 3할 이상을 기록했으며(1) 9년 연속 3할 타율(1)을 기록했다. 20년 연속으로 100안타(왕정치와 공동 1)를 넘겼으며 2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4)을 기록했다. 16번의 시즌에서 20홈런을 넘게 기록했고(4) 16년 연속 두 자리 수 도루를 기록했다.

 

통산 2752경기에 출장(3)을 한 장훈은 3085개의 안타(1)504개의 홈런(7), 1676타점(4) 을 기록하며 타격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일본 프로야구 최정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숨 막힌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자랑스럽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이다.

 

 

 

 

박수 받지 못했던 23

 

선수생활 거의 마지막 시기였던 1976년부터 일본 야구의 심장이라 불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장훈은 전무후무 한 대기록 3000안타를 불과 30여개 남겨두고 롯데로 트레이드 된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

 

장훈이 있는 동안 요미우리는 두 번의 우승을 해냈다. 요미우리에서 뛰는 4년 동안 왕정치와 함께 'O.H 타선'을 이끌며 세 번이나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우승에 큰 공을 세웠고 팀을 위해 부상까지 참고 경기에 나섰던 장훈이었다.

 

그러나 장훈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팀에서 박수를 받으며 대기록을 세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가시마가 빠진 요미우리 타선을 살리기 위해 장훈에게 먼저 손을 내민 요미우리였지만 한국인 장훈이 일본의 심장에서 대기록을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요미우리가 장훈을 트레이드 시킨 곳은 한국인 구단주가 있었던 롯데였다.

 

" 그곳에서 대기록을 세우는 것이 자네에게도 그리고 모두에게도 좋네. "

 

하세가와 요미우리 대표의 말은 이미 노장이 되어버린 장훈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꽂혀왔다. 20년을 넘게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어왔지만 여전히 자신은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당해온 일인데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장훈은 나니와 상고 시절 자신의 고시엔 꿈을 빼앗아간 다케우치 선생을 떠올렸다. 조센진 장훈의 힘을 빌지 않아도 충분히 나니와는 우승을 할 수 있다며 소년 장훈의 일생의 꿈을 짓밟은 다케우치를 장훈은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 처음으로 사람을 미워해 봤습니다. 사람을 미워해 본 것은 처음이에요. 그 사람을 죽어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보통은 사람이 죽으면 모두 다 용서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이 사람만은 죽어도 절대로 용서 못해요. 지금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흥분해서 손이 떨려요. " -2000년 월간조선 12월호 인터뷰-

 

롯데로 트레이드 된 장훈은 1980528일 대망의 3000안타를 기록했다. 23년간 박수만 받고 뛰어도 모자랄 것 같은 기록을 세운 장훈이 일본에서 받은 것은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질투와 야유였다.

 

그들이 안했다면 우리가 장훈에게 박수를 보내주자. 지난 수십년 동안 자신의 한계에 도전을 하면서 수도 없이 찾아왔을 포기라는 그 달콤한 유혹을 억누르며 끝까지 달려준 장훈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주자.

 

수많은 길들 중에 가장 외로운 길을 선택했지만 자랑스러운 조국이 함께 달려줬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영웅을 기억하지 않는 야구는 죽은 야구다 "야구 인생에 결코 후회는 없다"

 

1979528일 롯데의 홈구장 가와사키 구장에서 벌어진 한큐와의 경기 6회말 12루 상황에서 투수 야마구치의 빠른 볼에 장훈의 방망이가 매섭게 돌았다.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2점 홈런, 장훈의 3000번째 안타였다.

 

장훈은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감히 넘어서지 못했던 대기록을 달성하고 천천히 베이스를 돌았다. 히로시마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나니와 상고에서 겪은 좌절 그리고 지난 22년간의 프로 생활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장훈을 스쳐지나갔다.

 

자기가 할 일이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자 순간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술을 좋아했지만 프로 생활 내내 술을 멀리했던 장훈은 3000안타를 때린 날 엉망으로 취했다고 한다. 22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대장정의 종착역. 장훈은 3000안타를 기록한 이후에도 구단주의 간곡한 만류로 결국 1년을 더 현역에서 뛰었다. 3000안타에서 85개의 안타를 다시 추가한 장훈은 198023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쟁같이 치열했던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통산 타율은 .319

 

대부분의 선수들은 은퇴를 하면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던 그라운드에서 떠난다는 사실에 많은 회한과 아쉬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리라. 때로는 은퇴후에도 그라운드를 못잊고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그것을 야구를 향한 아름다운 열정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장훈은 전혀 달랐다.

 

'이제 다시는 타석에 들어서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제 다시는 배트를 들고 싶지 않다.'

 

장훈은 야구에 어떤 미련도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장훈에게 야구는 전쟁이었다. 장훈에게 그라운드는 총알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장훈은 그 전쟁에서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어느 누가 그 전장으로 다시 나가기를 원하겠는가.

 

"23년간의 야구 인생에 결코 후회는 없다."

 

장훈은 단호하게 말한다. 결코 후회는 없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리라. 귀화라는 좀더 쉬운 길, 좀더 안락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거칠고 험한 길을 선택한 장훈,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만큼 힘든 고통과 싸워온 세월이었다.

 

야구는 장훈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었지만 장훈에게 야구는 조국을 선택한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전쟁과도 같았다. 그래서 장훈의 야구가 눈물겹도록 고맙고 미안한 것이고 그래서 이 남자의 삶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대와의 화해 그러나...

 

1990724일 요코하마 야구장.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왕정치보다도 이른 헌액이었다.

 

그런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서 이상하게도 쌓였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녹았다. 마치 기독교의 세례의식처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그동안 한국인으로서 당해야 했던 갖가지 억울함이 어느 새 잊혀졌다. - < 일본을 이긴 한국인 > 중에서-

 

평생 화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일본 야구와 장훈,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일본 프로야구였고 장훈은 그들이 내민 손을 힘껏 잡았다. 장훈은 자신의 국적이 아닌 실력으로 모든 걸 평가받기를 원했고 자신이 이방인이 아닌 한 야구선수로 보이길 원했다. 그 소박하기만 한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훈은 이후 나가시마 시게오나 왕정치 같은 대스타들과는 다르게 일본 프로야구 감독직을 맡지 않고 있다. 감독 제의는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훈이 감독을 맡지 않는 이유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앙금을 느낄 수가 있다.

 

" 전 앞으로도 감독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선수일 때도 스포츠 신문에서 공격당하고 차별당했습니다. 감독이 돼 보세요. 사실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당하고, 친구가 당합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그런 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기자)도 매스컴 사람이지만, 매스컴은 가족까지 공격하니까요. 사실 야구라는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문제로 공격당하면 가족이 엉망이 됩니다. " -200012월호 < 월간 조선 > 장훈 인터뷰- 아이들에게 장훈 유니폼을 사다 입힐 수 있다면...

 

얼마 전 양준혁(삼성)이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2000안타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정작 필자에게 양준혁의 2000안타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양준혁의 2000안타 기사에서 장훈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라도 언론을 통해 한국에서 장훈 선생이 조명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승엽의 기사에서 가끔 장훈 선생을 만날 수 있고 프로야구단 전지훈련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같은 국제 야구대회에서 선수들에게 조언을 하는 장훈 선생의 기사를 가끔 만날 수 있다. 그나마 그것도 감지덕지겠지만.

 

그러나 이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장훈이 왜 일본땅에서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고 걸어왔는지 이유를 안다면, 장훈에게 조국이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는 삶의 자랑이었는지를 안다면, 이땅에서 장훈을 이렇게 기억해서는 안된다. 시대와 화해하지 못하고 평생을 주변인으로 살면서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만큼 숨막히는 업적을 일궈낸 장훈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세계에 내세울수 있는 위대한 영웅이다.

 

아이들에게 장훈의 유니폼을 사다 입힐 수 있는 곳이 한국에 있다면, 장훈이 이룬 업적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관이 단 한 곳이라도 있다면, 프로야구에서 장훈을 만날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라도 있다면 감히 한국 야구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장훈에 대해 한국인이 쓴 절판되지 않은 책 세 권 이상을 찾을 수 있다면 한국 야구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귀화하는 사람을 뭐라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개인의 생각 나름이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부모는 모두 한국인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한 끝에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도 있는데, 이건 아무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돼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데 대해서는 저항이 없습니다. 제가 막을 권리도 없죠. 결국 귀화 여부는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가능하면 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이런 좋은 나라가 세계에 없으니 하지 말라'고 합니다. " -200012월호 < 월간조선 > 장훈 인터뷰- 영웅을 기억하지 않는 야구는 죽은 야구다.

 

/이정래 기자

 

 

3085안타를 만든 장훈의 손

 

[스포츠서울닷컴 | 박정환기자] 지난 828일이었다. KBS 1TV 휴먼 다큐 프로그램 '사미인곡'에서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안타 기록 보유자 장훈(68)의 굴곡진 삶을 반추했다. 방송은 1980528일 장훈이 3000번째 안타를 홈런으로 연결시킨 롯데 오리온즈(현 롯데 마린즈) 가와사키 홈 구장을 첫 장면 삼았다.

 

그리고 현재. 장훈이 일본 TBS 방송의 한 패널로 녹화를 하고 있다. 장훈은 현역 은퇴 후 25년 동안 TBS TV와 라디오 등에서 전속 해설자 활동을 한 후 2006년 프리랜서가 됐다. 그러나 고희를 앞둔 나이에도 으리으리한 눈빛이 여전하며 당당한 풍채를 간직 중이다. 또 해설자로서의 뼈 있는 한마디 역시 그대로였다.

 

아이자와 다케시 TBS 프로듀서는 "장훈 선생님은 꾸민 듯한 말이나 듣기에만 좋은 칭찬을 하시는 일이 결코 없다. 솔직하게.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훌륭한 분이다"고 말한다. 장훈의 이런 정체성은 어머니와 형의 영향. 재일 교포란 신분으로 경험한 숱한 차별.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등에서 비롯됐다.

 

 

잘 알려진 대로 장훈은 4세경 불을 피워 놓고 고구마를 굽다가 급히 후진한 트럭에 떠밀려 오른손 화상을 입었다. 장훈의 약지와 새끼 손가락은 엉겨 붙었고 손 전체가 굽어 버렸다. 장훈은 "보통 사람들이 손을 보면 깜짝 놀란다. 은퇴한 이후 처음 밝혔다. 현역 때는 말하지 않았다. 변명 거리일 뿐이니까"라고 말한다.

 

장훈의 평생 친구인 고교 동창 야마모토 아쓰무는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소회한 바 있다. '장훈이 숙소로 왔다. 곁눈질로 흘낏 보니 배트를 놓은 채 창문을 열고 있었다. 장훈은 두 손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장훈의 손바닥은 그칠 줄 모르는 연습으로 딱딱하다. 나무처럼. 그게 벗겨질 정도면.'

 

'놀라움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누워서 장훈의 얼굴을 보고 또 놀랐다.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정 꿈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장훈이 어떤 심정으로 손바닥이 벗겨질 만큼 배트를 휘둘렀고 무엇이 남자를 울게 만들었는지 모를 것이다.' 장훈은 그렇게 훈련을. 야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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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장명부 ()

 

1983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대이변의 한 해였다. 전년도 우승팀인 OB 베어스와 영원한 우승 후보라는 달갑지 않는 꼬리표를 단 삼성 라이온즈의 몰락과 함께 최동원의 영입으로 기대치가 한껏 부풀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해태 타이거스와 MBC 청룡이 각각 전후기를 제패하였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가 완승을 거두면서 한 해를 마감하였다. 하지만, 1983년을 대표하는 팀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해태가 아닌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1982년에 전후기를 합쳐서 15(65)밖에 거두지 못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해태 타이거스와 MBC 청룡에게 아쉽게 밀려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무려 52471무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미아리의 벼락맞은 대추나무집에서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1982년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력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승리의 기쁨을 맛 본 슈퍼스타즈의 1983년도 사실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임호균과 김진우라는 국가대표 배터리와 베어스의 동냥으로 정구선 등이 보강되었지만, 타팀의 전력보강과 비교하면 전력보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구단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KBO는 슈퍼스타즈와 타이거스에게 로또를 구입할 기회를 주었고, 슈퍼스타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신반의했던 로또는 대박을 터트려서 아마 한국프로야구에서 앞으로 깨지지 않을 30승을 슈퍼스타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로또의 이름은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장명부였다.

 

엑스트라에서 조연으로

 

장명부는 19501227일 돗토리현에서 태어나서 지역의 야구 명문고로 이름높은 돗토리니시고교에 입학해서 팀의 간판투수로 활약했지만, 전국 무대인 코시엔을 한번도 밟지는 못했다. 코시엔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지는 못했지만, 지역의 강호로 군림했던 돗토리니시고교의 에이스였던 관계로 많은 팀들의 주목을 받았다. 국적이 한국인 관계로 드래프트의 대상이 아닌 자유계약으로 1968년에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었다. 여담이지만, 1968년에 벌어진 드래프트는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열혈 남아로 불리는 호시노 센이치가 요미우리의 약속파기로 주니치로 가게 되면서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시즈오카상고를 준우승으로 이끈 1학년이던 김일융이 자퇴를 하면서 메이저리그 구단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까지 가세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일본의 중학교, 고교, 대학을 다닌 적이 있는 선수는 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되도록 개정되는 소동이 있었다.

 

입단 첫해인 1969년에는 2군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눈물젖은 빵을 먹었던 장명부는 1970년에 부상으로 시름하고 있던 김일융을 제치고 먼저 1군에 데뷔하였다. 11경기에 등판해서 승리없이 3패만을 거두었지만, 신인치고는 준수한 방어율 3.07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는 V9의 주역이었던 호리우치를 정점으로 해서 타카하시, 세키모토, 와타나베 등으로 마운드가 물생 틈 없이 짜여져 있어서 장명부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게다가, 부상에서 회복한 김일융 등으로 인해 1971년과 1972년에는 각각 2경기와 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두터운 1군 마운드를 뚫지 못하고 무명의 2군선수로 끝날 것으로 보였던 장명부에게 시즌이 끝난 후에 생각하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토미타 마사루의 트레이드 대상으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퍼시픽리그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난카이에는 일본 제일의 포수인 노무라 테츠야가 감독겸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노무라 재생공장으로 불릴만큼 투수리드가 뛰어난 노무라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얕은 투수층으로 인해 장명부는 2군으로 강등될 걱정 없이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

 

1973년에 스포트라이트는 20승을 거둔 팀동료인 야마우치에게 집중되었지만, 장명부도 27경기에 등판해서 77패와 함께 1402/3이닝을 던지면서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일본시리즈의 상대는 8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기량을 알아주지 않았던 전소속팀인 요미우리였고, 장명부는 리벤지를 다짐하였지만, 1패를 기록하는 등 요미우리가 9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조센징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직업 야구선수를 향해 달린 장명부로서는 1973년의 활약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또한 폐쇄된 일본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1974년에는 10승에 단 1승 모자란 9승을 거둔 장명부는 1975년에는 에모토와 함께 팀내 최다승인 11(12)을 거두면서 당당히 팀의 주축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88이닝을 소화하는 등 무리한 투구 때문인지 1976년에는 671세이브를 기록하면서 팀내 위상도 불펜 요원으로 추락하였다. 야마우치, 나카야마, 후지타, 사토 등으로 선발 마운드가 짜여지면서, 다시 한번 트레이드의 대상된 장명부는 센트럴리그의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하였다.

 

1975년에 처음으로 센트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히로시마 카프는 열성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구단으로 매우 유명하다. 리그 우승 이후, 중위권으로 떨어진 히로시마 카프는 1977년에 트레이드를 통해서 전력 보강을 꾀하면서 재도약을 꿈꾸지만, 시즌 개막과 함께 하위권으로 추락한 성적은 회복하지 못하고 6팀 중에서 5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장명부도 665세이브로 여전히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시즌 후반기에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간직한 채 히로시마에서의 첫해는 그렇게 끝났다.

 

1978년에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동시에 개인 최다승인 15승에 230이닝을 던지면서 일약 팀의 에이스로 화려한 부활쇼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1979년에는 전년의 무리한 투구의 영향으로 791세이브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처음으로 100탈삼진 이상을 잡는 등 구위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팀도 2년만에 리그 우승을 탈환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했고, 킨테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2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해서 완투승을 거두면서 팀이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는데 공헌하였다.

 

1980년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156패를 거두면서 처음으로 개인 타이틀인 승률왕을 차지하는 등 카프가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주역이 되었다. 전년도에 이어서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1완투승을 거둔 장명부의 활약 등으로, 카프는 복수에 불타던 버팔로스를 2년 연속으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2년 연속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였다. 1981년에도 그는 129패를 기록하는 등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을 이어갔다.

 

1982년에는 이상하게도 승운이 없던 그는 3112세이브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710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을 조기에 마감하였다. 생각 이상으로 허리 부상이 심각해서, 재기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이기에 그 누구도 그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222일 장명부는 전격적으로 은퇴선언을 하면서 더 이상 그의 모습을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19701군무대에 데뷔한 장명부는 통산 91849세이브 방어율 3.69 등을 일본프로야구에서 기록하였다. 프로에 입단할 때부터 언론과 팬들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팀의 간판 투수로 100이닝 이상을 언제나 소화한 그는 마운드의 음지에서 팀을 위해서 노력한 선수였다.

그가 전격적으로 은퇴 선언을 한 것은 부상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통산 100승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팀 내의 젊은 투수들의 성장 등을 생각하면 앞으로 자신은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갓 프로야구가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에 가기 위한 신변 정리였기도 하였다.

 

결국, 장명부가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이유때문은 아니었다. 요미우리와 난카이, 히로시마 등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에이스로서 팬들의 각광을 받은 적도 없었기에, 지도자로서 일본에서 활약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신의 경험과 앞으로 물밀듯이 진출할 한국계 선수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인29호라고 불리운 사나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한다면, 최강팀이나 최약체에 가고 싶었던 장명부는 자신의 바램대로 탈 꼴찌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었다. 최강의 팀에 가서 한국의 우수한 선수들과 함께 최고의 명문 구단을 만들거나 가장 약한 팀에 가게 되다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서 만년 조연에 머물렀던 그의 삶에 최초로 주연을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을 거둔 장명부의 한국행으로 미국 마이너리그 출신으로 OB 베어스를 1982년에 우승으로 이끈 박철순과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인 최동원이 벌일 한미일 투수 대결에 언론과 팬들은 관심이 모아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강속구 투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힘의 야구가 미덕이던 시대로, 불같은 강속구로서 타자와 정면 승부를 펼치는 투수야말로 진정한 대투수이고, 변화구로 요리조리 피하는 기교파 투수는 비겁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초 장명부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강속구 투수로 오해해서, 그의 강속구를 기존의 타자들이 배트에 맞출 수 있을지, 그리고 최동원과 박철순 등과 펼칠 한미일의 스피드 경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문만 무성하던 장명부가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 느낀 감정은 아마도 배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그의 엉거주춤한 투구 동작과 스리쿼터에서 던져진 파리가 날아가는 듯한 아리랑 볼은 강속구 투수로서 장명부를 상상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거액이지만 1억원 이상의 거금을 받아서 1억원의 사나이로 불리고 있던 장명부였기에, 사람들은 일본의 퇴물을 거액을 주고 데리고 왔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장명부의 공은 배트가 아닌 파리채로도 칠 수 있다는 평가 속에서 페넌트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분명히 장명부의 공은 공략이 가능했고, 실제로 안타는 쳤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점수를 뺏지 못하였고, 삼미 선수들에게 장명부가 나오면 이긴다는 [장명부 효과]까지 더해지면서 장명부는 승리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뒤를 막아줄 투수도, 또한 임호균을 제외하고는 믿을 수 있는 선발 투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명부는 선발로 나와서 완투한 후에 다음날에 다시 구원으로 등판하는 등 원맨쇼에 가까운 대활약을 펼쳤다. 그가 한시즌 최다승인 30승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지금이라면 기본 중의 기본인 체인지 오프 페이스 - 볼속도의 완급 조절과 투구폼의 변화를 통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어냈고, 또한 스크류볼을 과감하게 던지는 등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몸쪽 승부를 펼친 결과였다.

 

능글능글한 외모와 자포자기 한듯한 투구폼, 그리고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볼 배합 등으로 사람들은 장명부를 어느 순간부터 [너구리]라고 불렀다. 게다가, 장명부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닭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야구판의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크류볼 등을 통한 몸쪽 승부는 빈볼 시비를 불러왔고, 또한 홈런 등을 맞았을 때에 글러브를 던지거나 심판의 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지나치게 어필하는 등 장명부의 격한 행동에 대해서 한국의 언론들은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지나치게 안하무인하다]던지 [동업자 의식이 없다]던지 [자신밖에 모른다]던지 등으로 비난을 퍼부었고, 그를 악한 존재로 만들었다. 장명부의 성공 시대는 1982년에 벌어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한 한국이 일본 프로야구 출신의 노장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장명부는 한국 프로야구의 스타가 아닌 타도할 대상이었다.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과 한국에서도 [우리]가 되지 못하고 [너희]로 취급되는 상황에 적지 않게 당혹감도 느꼈지만, 오히려 그는 그렇다면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성적을 남겨주겠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전후기 통합 우승을 노리던 장명부의 슈퍼스타즈는 김진영 감독의 구속 등으로 화룡정점에 실패하면서 해태 타이거스의 우승으로 전기리그의 막은 내렸다. 한국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인 후기리그 우승을 향해 질주하던 슈퍼맨은 김진영 감독의 근신으로 팀의 중심이 된 백인천 코치겸 선수의 간통으로 인한 구속과 몇 번의 이해하기 어려운 판정 등으로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83년에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후기 모두 2위에 거치면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시리즈가 끝나고 김무종과 포옹하면서 울먹이던 장명부의 모습은 이제는 20년 이상이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흘린 눈물이 지금 현재도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목표로 했던 꼴찌팀인 슈퍼스타즈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1983년에 보인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슈퍼스타즈가 치룬 총 100경기 중에서 60경기에 등판한 그는 무려 4271/3이닝을 던지면서 30166세이브 방어율 2.34 등을 기록하였다. 장명부가 거둔 한시즌 30승을 평가절하시키기 위해서, 보너스 1억원이 걸린 30승을 채우기 위해서 바람잡이 선발투수를 기용해서 이길 것 같은 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근거도 없는 비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인간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가 기록한 30승 중에서 선발승이 28(이 중 26승이 완투승)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언제나 그렇듯이 무식이 죄다). 1984년에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27승을 거둔 최동원이 51경기에 등판해서 2842/3이닝을 던진 것을 생각하면, 1983년의 장명부는 너구리가 아닌 철인 28호 아니 29호였다고 할 수 있다.

 

혹자들은 장명부가 슈퍼스타즈가 아닌 라이온즈나 청룡 등과 같은 강팀에 있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장명부는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었기에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83년에 한국프로야구에는 총 6명의 이방인이 등장하였다. 일찍이 중앙고 시절 강속구를 앞세워서 전국 무대를 평정하고 일본과 미국의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를 거쳐서 멕시코리그 등에서 활동한 이원국(멕시코국적)과 작전의 귀재라는 호평 속에 조감독이라는 애매모호한 명함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이충남, 그리고 장명부를 위시한 주동식과 김무종, 이영구가 일본 프로야구 출신들이 우승 청부업자로 국내 무대에 데뷔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장명부가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닌 프로에 대한 인식조차 생소한 한국에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2년에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지만, 프로야구 이전에도 출신 고교의 이름 아래에 모여서 대항전을 치렀고,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선수들을 구성한 각 구단이었기에 내부적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선후배 의식이 매우 강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연고지인 인천에도 인천고와 동산고라는 두 야구 명문고를 중심으로 한 좋게 말해서 선의의 라이벌 의식 - 갈등이 있었지만, 1982년의 처참한 성적과 스타플레이의 부재 등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 다른 구단에 비해서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별 문제 없이 장명부를 중심으로 슈퍼스타즈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또한 장명부 자신도 1983년 한해로 야구인생에 종지부를 찍게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영원한 이방인, 장명부 () ~ 너구리라면에는 너구리가 없다

 

장명부의 경이적인 활약으로 각 팀들은 전력 보강을 위해서 일본으로 날아갔고, 만년 우승 후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 삼성 라이온즈는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김일융을 OB 베어스와의 치열한 쟁탈전 끝에 영입하였다. 일본에 이어서 장명부와 김일융의 제2라운드가 바다 건너 한국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30승을 할 경우에 보너스로 1억원을 주겠다는 구단 사장의 약속이 부도 수표가 되면서 장명부는 분노를 넘어서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다. 돈은 돈이고 야구는 야구이기 때문에, 김진영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 아래에 장명부는 투수 코치를 겸하게 되었고, 1983년에 이루지 못한 우승에 대한 아쉬움과 이기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 구단에 몇가지 요구를 하였다. 그 요구는 자신과 함께 마운드를 지켰던 임호균의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보강과 일본에서의 전지훈련 등이었다.

 

최계훈 외에는 특별한 신인 보강이 없었던 슈퍼스타즈로서는 임호균과 이광길의 트레이드를 통해서 권두조, 김정수, 박정후, 우경하, 김호근 등과 해태에서 신태중을 영입하는 등 마운드와 내야진를 두텁게 하면서 장기레이스를 대비하였다. 수비의 핵인 유격수를 맡았던 이영구를 원래의 포지션인 3루로 돌리고, 수비력이 좋은 안정된 권두조에게 유격수를 맡기면서 기존의 정구선과 함께 안정된 미들 내야진을 갖출 수 있었고, 임호균의 공백은 정성만과 박정후, 신태중을 장명부 본인이 직접 조련해서 공백을 메우겠다는 구상이었다.

 

장명부는 팔도 유람단과 같았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하기 전까지 트레이드를 통해서 지역색을 없앤 구단을 만들어냈다. 장명부는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인천야구의 대부로 실업 야구 시절에는 해병대의 감독을 역임했던 김진영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OB 베어스를 제외한 5개 구단이 해외 전지 훈련을 가졌고, 괌으로 날아간 롯데 자이언츠를 제외한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해태 타이거스, 삼미 슈퍼스타즈가 일본에서 구슬 땀을 흘렸다. 특히, 삼미 슈퍼스타즈는 다른 팀들이 거의 단독으로 훈련하면서 일본 팀과 겨우 친선경기를 몇 경기 밖에 치루지 못한 것에 비해서, 장명부의 연줄로 히로시마 카프와 합동 훈련을 할 수 있었고, 선진 프로 야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트레이드와 전지 훈련 글을 통해서 슈퍼스타즈의 선수단 전체의 전력은 플러스가 되었지만, 팀 승리의 70% 이상을 차지한 장명부의 지나친 혹사에 따른 후유증과 임호균의 공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였다. 기대와 우려 속에 우승 후보(?) 슈퍼스타즈의 1984년 시즌은 시작되었다. 개막전 상대는 전년도에 내환으로 자멸했던 삼성 라이온즈로, 기존의 김시진, 권영호, 황규봉 등에 김일융과 김성래, 진동한 등이 보강된 막강한 선수층에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김영덕을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강력한 우승 후보다운 전력이었다. 8:5로 뒤진 9회 말에 구원으로 나온 김일융을 금광옥이 3점홈런으로 두들기면서 동점을 만드는 등 슈퍼스타즈는 분전했지만, 10회 연장 끝에 한점 차 패배로 시즌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슈퍼스타즈는 전년도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하고, 전후기 모두다 꼴찌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슈퍼맨이 추락한 원인은 역시 장명부가 전년도만큼의 활약을 펼쳐주지 못했고, 신인인 최계훈이 분전했지만 임호균의 공백을 메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30승에 따른 보너스 문제로 장명부가 태업을 했다는 말들도 있지만, 태업이라기 보다는 1982년에 일본에서 당한 부상과 1983년의 무리한 혹사의 후유증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1983년에 타이거스를 우승으로 이끈 이상윤이 2년 연속(83년과 84) 200이닝을 소화한 후에 오랜 부상에 시달렸듯이 장명부의 어깨 역시 강철 합금이 아닌 이상 휴식이 필요하였다. 1983년의 원맨쇼에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장명부는 45경기에 등판해서 2612/3이닝을 던지는 가운데, 13207세이브 방어율 3.30 등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몫은 충분히했다고 생각한다.

 

장명부의 애제자 3인방으로 불리면서 기대를 모았던 정성만은 8승을, 보크 논란 등으로 페이스가 흔들렸던 박정후는 5승을 거두는 등 일정한 제역할을 수행했지만, 불펜 에이스로 유명했던 신태중이 시즌 개막 직전에 당한 부상과 새가슴을 극복하지 못하고 1승밖에 거두지 못한 것도 슈퍼스타즈가 몰락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임호균의 트레이드 없이 선수 보강이 가능했다면, 혹은 임호균 급의 투수가 한 명만 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해였다. 작년과는 달리 패하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장명부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나빠졌다. 김진영 감독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무시한다거나 석연치 않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나타내면 역시 장명부는 오만불손하다는 등 1984년에도 여전히 장명부는 [우리]가 아닌 [너희]였다.

 

장명부가 가진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아마도 자신과 같이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을 스카우트한 것은 자신들의 기량과 경험 등을 통해서 한국 프로야구 전체가 발전하기 위해서인데도, 현실은 오로지 자신()을 쓰러뜨려야만 하는 상대로 취급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장명부의 오해였다. 한국 프로야구(KBO나 구단)에서 원래부터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장명부와 같은 해외에서 활동한 선수들이 필요했던 것은 흥행을 위해서 그리고 팀의 우승을 위한 우승 청부업자로서 존재 가치가 있었을 뿐이었다.

 

영원한 이방인

 

천당과 지옥을 한번씩 맛본 장명부였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여전히 믿을 언덕은 그가 유일했기에, 1985년에도 슈퍼맨의 열광적인 팬들은 그의 부활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시범 경기에서 뜻밖에도 1위를 차지하였고, 개막전에서도 전년도의 우승팀인 자이언츠의 최동원을 무너뜨리면서 승리를 거두는 등 슈퍼스타즈는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팬들은 올해는 작년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개막전 이후 18연패였다. 공격의 핵인 양승관과 김진우 등이 부상으로 빠졌고, 지리한 연봉 협상 등으로 장명부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슈퍼스타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모기업인 삼미의 부도로 전기 리그를 끝으로 DDD 마누라와 관련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청보가 인수하면서, 슈퍼맨과 원더우먼 사이에서 마린보이가 태어날 줄 알았는데 웬걸 조랑말이 태어났다. 후기 리그에서는 그래도 분전한 핀토스는 베어스와 청룡을 밀어내면서 4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장명부는 45경기에 등판해서 246이닝을 소화하면서, 11255세이브 방어율 5.30 등을 기록하였다. 25패라는 패수도 문제이지만, 방어율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을 보면 1983년과 1984년에 무리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구단의 입장에서는 너구리 인형의 배터리를 오래가는 신제품으로 교환해야 할지 아니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인형 자체를 바꿀지를 선택해야할 시점이었다.

 

새술은 새부대라는 말처럼 청보 핀토스로서는 전신인 슈퍼스타즈의 이미지가 강한 장명부보다는 새로운 선수를 선호하였고, 결국 장명부와 이영구 대신에 빅3로 손꼽히던 김기태와 김신부 등을 영입하였다. 토사구팽이라고 할지, 아니면 전혀 프로다움을 보이지 못하던 구단이 처음으로 프로다움을 보였다고 할지 장명부는 새로운 둥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운 좋게도 신생팀인 빙크레 이글스가 창단하면서, 1986년에는 독수리 오형제에 찬조출연할 수 있었다. 이글스가 장명부를 선택한 것은 신생팀으로서 기존 팀들로부터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야구를 주름잡았던 민문식과 한희민, 이상군, 이효봉 등이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는 미지수였기에, 프로야구를 경험한 노련한 투수가 필요했다. 매년 성적이 추락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는 장명부는 구단 상층부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재활용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글스의 바램과는 달리 장명부는 1986년에 개인 최다 연패인 15연패를 포함해서 11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어느 정도 승운이 없었던 관계도 있었지만, 2년 계약에 연봉도 미리 지급된 관계로 이글스로서는 1987년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계속해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로 경험이 없던 배성서 감독과의 심각한 마찰을 보인 장명부는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에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라이온즈의 감독이던 박영길의 추천으로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1990년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인연을 맺은 김진영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투수 코치로 기용되기도 하는 등 다시 한번 그라운드의 품에 안겼지만, 김진영 감독의 퇴진과 함께 보따리를 살 수 밖에 없었다.

 

장명부의 한국프로야구 통산성적

 

한 동안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사라졌던 장명부가 19915월에 성낙수와 함께 마약 사범으로 구속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KBO로부터 영구제명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장명부가 보낸 한국에서의 짧은 생활은 벌은 돈을 사기로 날리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그가 마약의 검은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픈 몸과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한국 프로야구와 한국 사회로부터 돌아온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츠하라 아키오로 태어나서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후쿠시 아키오로 다시 후쿠시 히로아키로 개명하는 등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국적 변경을 한 후에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온 장명부를 떠올릴 때마다 [보노보노]의 너구리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너구리 라면에는 여전히 너구리 고기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소식을 도저히 알 수 없던 그가 2005413일에 자신이 점장으로 있던 마작 하우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졌다. 더 이상 검은 얼굴로 인해 더욱 더 희게만 느껴졌던 흰 이빨을 드러낸 미소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쉽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장명부의 1983프로야구 농락하다

 

프로야구 원년이었던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승률은 2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0.188였다. 80경기에서 거둔 승리는 고작 15(65)에 불과했다.

 

그해 OB 박철순이 혼자 24승을 챙겼고, 삼성 이선희-권영호-황규봉 트리오가 나란히 15승씩 따냈다. 아무리 꼴찌였다고는 하지만 민망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82년 삼미가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팀 평균자책점 6.14(리그 평균 3.88)를 기록한 형편없는 투수력에 있었다. 팀 타율 0.240(리그 평균 0.265)인 공격력 역시 한심한 수준이었지만, 투수진의 '몰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시즌이 끝난 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삼미의 허형 사장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던 재일교포 투수를 거금을 들여 영입하기로 한 것. 삼미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의해 한국 땅을 밟은 투수는 히로시마 카프에서 뛰었던 후쿠시 히로아키. 바로 장명부다.

 

프로야구를 농락했던 장명부

 

73년부터 82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10시즌 동안 91849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린 장명부는 823승을 거두는 부진을 겪자 32살의 나이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마지막 시즌 기록을 보면 한물간 투수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장명부가 불과 2년 전인 80년엔 15승을 거두며 센트럴리그 승률왕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82년 부진만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거물투수' 장명부를 모셔오기 위해 삼미가 쏟아 부은 구체적인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외부에서 추정한 계약금은 1억원에 연봉 4000만원 이상.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30승을 목표로 하겠다. 20승도 못 거두면 옷을 벗겠다" 고 호언장담 했다. 마치 한국 야구를 얕잡아 보고 있는 듯했다.

 

"괜히 호기 부리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마라!" 적어도 그때까지 야구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단 한 명의 투수에게 한국프로야구가 지배당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다.

 

장명부는 83년 숱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한 시즌 100경기를 소화했던 당시 장명부가 마운드에 오른 경기는 60번이었다. 그의 손으로 끝낸 경기는 51번이다.

 

60게임 출장, 44게임 선발 등판, 427.1이닝 투구, 30166세이브 평균자책점 2.34. 모두 83년 장명부가 만들어낸 기록이다. 36번 완투했으며 그중 5번은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388개의 안타를 맞고 106개의 볼넷을 허용했지만, 워낙 많은 이닝을 소화한 까닭에 WHIP1.16에 불과했다. 탈삼진은 220개였다.

 

다승, 탈삼진, 투구이닝, 등판 게임, 선발 출장, 완투, 완봉, 피안타, 볼넷, 몸에 맞는 공. 장명부가 83년 시즌 1위에 이름을 올린 부문이다. 장명부가 투수 부문 가운데 1위에 오르지 못한 부문은 평균자책점(2), 세이브(3), 승률(3) 세 부문뿐이다.

그해 장명부의 427.2 이닝은 삼미의 모든 투수들이 소화한 총 투구이닝 908.2이닝의 47%에 해당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대 1위다.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 44번을 선발로 출장한 것이나 전문 마무리 투수가 아닌 선발 투수가 51번의 경기를 마무리 한 것도 장명부가 유일하다.

 

1983년 장명부의 가장 위대한 기록은 무엇보다 30승이다. 장명부는 자신이 장담한대로 30승을 달성했다. 당시 사실상의 투수 코치의 역할을 병행했던 장명부는 지나친 욕심으로 간혹 동료들의 승리를 가로채는 무리한 투수 교체를 하기도 했지만, 편법을 동원했다고 비난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대기록이다.

 

82년 삼미가 거둔 전체 승리보다 두 배나 많은 승리를 83년 장명부 혼자 따냈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농락'이다. 1983년 프로야구는 장명부라는 '몬스터'에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1983년 프로야구가 꾸었던 달콤한 꿈

 

장명부가 괴물의 괴력을 뿜은 시즌은 1983년 단 한해뿐이었다. 장명부는 83시즌을 마친 후 30승 보너스 문제와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급격한 하향세를 걸었다.

 

84년 장명부는 13(20)을 기록하는 데 그쳤으며, 85년에는 무려 25패를 당하기도 했다. 장명부는 86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118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영웅의 말로는 비참했다. 1991년 마약복용 사실이 발각돼 한국 야구계에서 추방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장명부는 2005413일 일본 와카야마현 미나베초의 자신이 운영하는 마작점에서 54세를 일기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의 임종을 지켜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를 꼽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동열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고, 최동원에게 엄지를 치켜드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야구에서 가장 '놀라운 시즌'을 보낸 투수를 꼽으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장명부가 만들어 낸 1983년은 프로야구가 꾸었던 달콤한 꿈이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그런 꿈.

 

장명부는 1983년과 함께 우리의 추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너구리같은 미소 속에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을 숨긴 채 그는 오늘도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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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보 4번 타자' 기요하라 '아듀'

 

고교 1년때부터 일본 열도를 떠들석하게 했던 '국보 4번 타자' 기요하라가 그라운드를 떠난다.

기요하라 카즈히로(41, 오릭스 버펄로스)는 지난 1일(2008.10월)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23년 간의 화려했던 프로 생활의 막을 내렸다.

 

이날 2루타를 날리며 은퇴 경기를 치렀던 기요하라는 "프로 생활은 눈물로 시작됐고, 눈물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는 "내 아들에게 다시는 홈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유일한 후회로 남을 것 같다 "고 전했다.

 

기요하라가 날린 525개의 홈런은 오 사다하루(868), 노무라 가쓰야(657), 가도타 히로미쓰(567), 야마모토 고지(536)에 이어 일본 프로야구 통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한 때 일본 야구계를 쥐고 흔들었던 선수가 한국계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은퇴가 더욱 아쉽다. 이제 터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야구 대장'의 모습은 지도자로서 만날 수밖에 없다.

 

 

 

 

K-K 콤비 기요하라와 구와타

 

기요하라와 구와타 마쓰미라 고교 1학년 새내기들은 나란히 PL학원(오사카 PL가쿠엔고교)에 입학했다. 이들은 투타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일본 언론과 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고시엔대회에서 PL학원을 3차례 우승시켰고, 2번의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일본의 고교팀 수가 4000개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시엔구장의 흙을 한 번이라도 밟고 싶어하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고시엔 1회전 탈락 선수들도 승패에 관계 없이 고시엔구장의 흙을 담아가곤 한다.

 

그러나 기요하라와 구와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시엔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특히, 기요하라는 고시엔구장에서 13개의 홈런을 터뜨려 이 부문 최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것도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구와타를 지명했고, 기요하라를 눈여겨 본 팀은 바로 세이부 라이온즈였다. 기요하라는 눈물을 머금고 세이부로 향했다.

 

8번의 리그 우승과 6번의 일본 제패

 

세이부는 횡재를 했다. 너무 엄청난 선수가 들어온 것이다. 기요하라는 1986년 데뷔 첫 해 무려 31개의 홈런을 폭발시켜 신인왕을 수상했다. 세이부의 4번 타자로 입지를 굳힌 기요하라는 팀을 8번의 리그 우승, 6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0년에는 개인 커리어 최다인 37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통산 2122안타(525홈런) 1530타점에 타율 0.272를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97년에는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에 입단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05년 성적부진 등으로 쫓겨나다시피 요미우리에서 나왔고, 오릭스로 이적했다. 그는 요미우리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어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2006년 완벽하게 하향곡선을 그린 뒤 2007년에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1군 무대에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올해 초 친구 구와타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부활을 노렸지만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에이스 사냥꾼', " 나는 약한 녀석들은 때리지 않아 "

 

기요하라는 힘이 빠진 투수나, 약한 투수들을 상대로는 홈런을 노리지 않았다. 또 이미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는 홈런을 의식하지 않았다. 이상적인 4번 타자였다. 팀을 위해서 배팅을 할 뿐 자신의 기록을 의식해서 스윙을 하지 않았다. 또 팀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이를 4번 타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525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일본 투수들은 기요하라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승부했다. 기요하라와 맞설 때 상대 투수의 기세와 구속은 눈에 띄게 늘었다. 그 만큼 전력으로 붙어보고 싶은 상대가 기요하라였다. 상대가 강해졌을 때를 노린 기요하라는 의미있는 한 방으로 보답하곤 했다.

 

 

 

'야구 간판타자' 기요하라, 23년간 선수생활 마감

 

일본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 기요하라 카즈히로(41.오릭스 버팔로스)23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한국계로도 알려진 기요하라는 1일 홈구장 교세라돔에서 열린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해 6회말 11루에서 우중간을 가르는 1타점 2루타를 쳐 선수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화려하게 빛냈다.

 

200698일 니혼햄전 이후 2년여 만에 선발로 전 경기를 소화한 기요하라는 경기 후 은퇴식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며 꽃다발을 전달해준 두 아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팀 동료들은 그에게 헹가레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여전히 수술을 받은 왼쪽 무릎에 완전치 않았지만 기요하라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마지막 타석이었던 8회말 1사 상황에서는 140km짜리 직구에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했지만 특유의 호쾌한 스윙을 뽐내 홈팬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타석에서 기요하라를 상대했던 소프트뱅크 투수 스기우치 토시야는 프로야구 대선배를 위해 빠른공으로만 승부를 하기도 했다.

 

기요하라의 프로야구 선수 인생은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을 맺었다. 19851120일 그토록 원했던 요미우리 구단이 자신일 지명하지 않자 그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선수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기요하라는 눈물을 흘렸다. 기요하라는 " 오사카에서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 23년간 사랑해준 전국의 프로야구 팬들에게 고맙다 " 고 소감을 밝혔다.

 

1967818일생으로 올해 만 41세인 기요하라는 1985년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세이부에 입단한 뒤 올시즌까지 통산 525홈런을 기록한 일본야구의 간판스타였다. 고교시절 소속팀 PL학원을 고시엔대회에서 3차례 우승, 2차례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주목받았던 기요하라는 프로 입단 후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기요하라는 '일본야구계의 대장'이라 불릴 만큼 특유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일본프로야구 팬들을 사로잡았다. 기요하라는 세이부에서 활약하던 1986년부터 1996년까지 11년 동안 무려 6번의 재팬시리즈 우승과 8번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끌며 최전성기를 누렸다. 1997FA자격을 얻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뒤에는 친정팀 세이부와 맞붙은 2002년 재팬시리즈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홈런을 빼앗아 요미우리의 우승을 견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잦은 부상과 노쇠함이 겹쳐 내리막길을 걷게 된 기요하라는 결국 2005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돼 오릭스 버팔로스로 이적해야 했다. 이후에도 고질적은 무릎부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기요하라는 20069월 수술대에 오른 뒤 1군 무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2007년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면서 쓸쓸히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기요하라는 지난 82, 695일만에 감격적인 1군 복귀를 이뤄 다시한번 '역시 기요하라'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818" 다음 시즌에는 뛰지 않겠다 " 며 사실상 은퇴를 선언해 작별을 예고했다.

 

현재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2위를 달리고 있어 포스트시즌은 클라이막스시리즈에 나갈 기회가 있다. 하지만 기요하라는 " 클라이막스시리즈에는 출전하지 않겠다 " 고 선언했다. 차기 오릭스 감독직을 맡을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왔지만 기요하라는 이를 부인했다

 

 

 

 

'GOOD BYE'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기요하라 전설

 

GOOD BYE 기요하라, 그후로 23

 

지난 1일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시즌 24차전.

눈물로 야구인생을 마감한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한국계 기요하라 가즈히로(41, 오릭스)였다.

 

81사 후 기요하라의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생애 마지막 타석. 소프트뱅크 선발 스기우치의 역투가 미트를 향해 파고 들었고, 기요하라는 온 힘을 다해 풀스윙을 했다. 헛스윙 삼진. 3175명이 들어찬 교세라돔의 관중 앞에서 기요하라가 23년간의 현역생활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기요하라의 은퇴 기념 경기로 열린 이날 지명타자 겸 4번타자로 선발출장한 기요하라는 4차례 타석에 들어서 우익수 플라이, 삼진, 적시 2루타, 삼진을 기록했다. 6회에는 통산 2122안타˙1530타점을 기록하는 의미있는 적시타를 치기도 했다.

 

올 시즌 퍼시픽리그 2위가 확정된 오릭스는 기요하라의 은퇴 경기를 4-1 승리로 장식하며 지난 1995년 이래 13년만에 75승 고지를 밟았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같은 선수가 출장한 '마지막 경기'답게 많은 인사들이 이날 구장을 찾아 기요하라를 축하해줬다. 경기 전에는 역시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야구계를 떠나는 소프트뱅크 오 사다하루 감독이 직접 꽃다발을 기요하라에게 수여했다. 또 시애틀 매리너스의 이치로도 경기를 관람하고 축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가수 나가부치 쓰요기는 축가를 불렀다.

 

기요하라는 경기 후 "전부 직구 승부를 펼쳐준 스기우치 투수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 직구를 헛스윙하면서 (선수로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이 남는 것이 있다면 아들에게 '피날레 홈런'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고 은퇴 경기 소감을 밝혔다.

 

눈물로 시작, 눈물로 끝난 기요하라 전설

 

일본 프로야구계의 '살아있는 전설' 기요하라는 야구 명문고 PL 학원을 졸업했다. 요미우리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구와타 마스미(41)와 동기동창이다. 둘은 투-타 라이벌로서 요미우리 입단을 간절히 원했으나, 요미우리가 구와타를 지명함에 따라 기요하라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1986년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이 일화는 현재까지 '눈물로 시작한 기요하라의 야구인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기요하라는 마지막 은퇴 경기서도 눈물로 막을 내렸으니,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야구인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기요하라는 1997년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로 이적, 2005년까지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에토-마쓰이(현 양키스)-기요하라로 이어지는 요미우리 공포의 타선을 이끌었다. 2006년 오릭스로 옮긴 후에는 오릭스의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손꼽히는 등 팬들의 여전한 관심을 받고 있다.

 

기요하라는 두 번의 수술을 딛고 힘겨운 재활 끝에 올 시즌 선수로 복귀했다. 지난 200698일 이래 무려 695일 만의 일이었다.

 

기요하라는 오릭스로 이적한 200698일 뜻밖의 무릎 부상으로 1군을 떠났다.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무릎 연골 수술을 받고 2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그라운드 복귀를 앞둔 그의 투지만큼은 어느 후배들 못지않았다.

 

기요하라처럼 연골 이식 수술을 받고 재기에 성공한 전례가 없었던 데다 그는 지난 52군에서 훈련하다 설상가상으로 우측 팔꿈치 부상까지 입었다. 그러나 그는 재기에 대한 의지를 접지 않았고 극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79일부터 2군 경기에 복귀했다. 711일 소프트뱅크 2군전에서는 감격스런 복귀 홈런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101일 은퇴경기로 1군 무대에 나섰고, 팀 동료들은 헹가레로 반겨줬다. 기요하라는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지만, 선수생활 마지막 해에 팀이 클라이맥스시리즈(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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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주름잡는 한국계 스타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출신의 마쓰이 가즈오(33·휴스턴 애스트로스)가 한국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823일 오사카에서 발생한 화재 소식을 전하던 일본 언론이 이 사건의 소식을 다루면서 마쓰이의 조부인 " 박재윤씨가 사망했다 " 고 실명을 언급, 보도하여 공식적으로 마쓰이가 한국계임이 확인된 것. 이에 일본 야구팬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는데. 일본의 야구 스타 중에 한국계 선수는 어느 정도일까?

 

일본인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재일 한국인'의 줄임말이다. 재일교포들은 약 60~7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민단계열과 조총련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이들을 재일교포라고 부르고 일본인들은 모두 자이니치로 부른다.

사실 1억 명의 일본인 가운데 재일교포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포츠계와 연예계는 물론 정계와 재계 문화계에도 한국계 실력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 한국인의 특유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가수, 탤런트, 영화배우, 프로듀서, 감독 등 연예계 쪽에 한국계 연예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면 한번쯤 한국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한다. 확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영화 철도원의 주인공 다카쿠라 겐과 인기남성그룹 스머프의 최고스타 기무라 다쿠야도 한국계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프로야구계에도 재일교표 선수들이 많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선수는 장훈이다. 통산 3085안타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일본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한국인이다. 온갖 차별과 설움을 딛고 최다안타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일본프로야구 선수 중 60~70명이 한국계?

 

장훈은 드러내놓고 한국인임을 밝히고 있지만, 일본의 12개 구단 가운데 재일교포 선수들이 몇 명이 될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면 스스로 한국인 또는 한국계라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수를 관리하는 구단직원이라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일본여권이 아닌 한국여권을 가진 선수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한 팀에 10명 정도라는 설도 있는데, 대략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를 통틀어 약 60~70명의 한국선수들이 뛰고 있다고 한다.

 

야구계의 원로 조해연 씨의 저서 < 이야기, 일본프로야구(지성사·1998) > 에 보면 일본프로야구 속의 한국인 유명선수를 몇 사람 소개하고 있다. 일본 최다승의 주인공 400승 투수 좌완 가네다 마사이치와 장훈의 이름이 거론된다. 아울러 일본 최초로 완전경기를 수립한 후지모토 히데오(이팔용)도 있다. 베이징올림픽 일본대표팀 사령탑으로 나선 호시노 센이치의 이름도 등장한다. 야쿠르트의 주전 내야수로 맹활약을 펼친 이케야마 다카히로와 세이부와 요미우리를 거쳐 얼마 전 오릭스에서 은퇴를 발표한 '무관의 제왕' 기요하라 가즈히로도 있다. 연속경기 풀출장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한신의 철인사나이 가네모토 도모아키도 거론했다.

 

이들과 함께 현재 한신 가네모토의 제자로 알려진 아리이 다카히로(한신)도 한국계 선수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일본대표팀 4번타자로 활약했다. 지난 2006WBC 대회를 앞두고 귀화했다고 한다. 아라이(新井)라는 성은 한국의 박씨다. 이승엽의 동료인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도 한국계인데, 지난 2003년 아테네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설득을 받아 귀화했다는 설이 있다. 소프트뱅크의 에이스로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 우완투수 사이토 가즈미도 한국계이다 

 

뉴욕 양키스의 마쓰이 히데키는 증조부가 한국인이라는 말이 있었다. 고베 인근 구라시키 출신인 호시노 감독도 아버지 쪽이 한국계라는 설은 그럴 듯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야구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나가시마 시게오까지 한국계라는 말도 있다. 물론 이들이 이를 인정하거나 말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일본이 국가대표로 출전을 시키기 위해 한국계 스타들을 설득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선수들은 일본에서 초중고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규정상 외국인선수로 취급받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대표는 일본인만 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귀화를 해야 가슴에 일장기를 달 수 있다. 지난 200311월 아테네올림픽 야구종목 아시아예선대회가 삿포로돔에서 열린 당시의 일이다. 일장기를 달고 그라운드에 나섰던 재일교포 선수들이 새삼 조명이 된 바 있다.

 

국가대표 되기 위해 일본으로 귀화

 

당시 아테네올림픽 일본 대표팀에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때는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종신명예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구단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초로 전원 특급 프로선수로 드림팀을 구성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던 선수들 가운데 재일교포 출신들이 포진되어 있었던 것이다.

 

눈길을 모은 선수는 마쓰이 가즈오(세이부, 현재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니혼햄)이었다. 퍼시픽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들이었던 이들은 대회직전까지 재일교포였다. 이들의 국적이 한국인지 북한인지는 모르지만,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일본야구계의 설득을 받아 나란히 일본으로 귀화했다.

 

당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기자들과 야구계에서는 불문율로 여기고 있지만 대개 재일교포 선수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포츠투데이 소속으로 삿포로 예선 취재에 나섰던 기자는 친분이 있던 자유기고가에게 마쓰이 가즈오와 오가사와라의 국적 문제를 문의해본 결과, 얼마 전까지 재일교포였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이미 내부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게 하나의 룰이었다. 일본의 방송이나 신문에서 이들의 국적을 밝히는 기사는 단 한건도 없다. 황색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주간잡지에서 간혹 거론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들의 국적을 거론하는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구단관계자 등 어느 누구도 그냥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재일교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한국인임을 밝히는 이들도 있다. 선동열 삼성 감독의 증언이 뒷받침한다. 선동열 감독이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한신의 간판선수 히야먀 신지가 직접 찾아와 " 나도 한국인입니다. 선상이 잘해서 기분이 좋다 " 고 직접 밝혀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닛폰햄 파이터스의 외야수 모리모토 히초리(森本稀哲) 역시 한국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이름 히초리는 희철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름에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한국인으로 밝혀져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모두 불문율로 여기고 이를 금기시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스포츠라는 특수성이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막아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적이 아닌 실력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재일교포 선수들. 이들이 스스로 국적을 밝히지 않거나 숨기는 것을 가지고 비난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귀화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볼 것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이제 60년이 지났다. 재일교포는 4세대까지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하라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들이 지닌 언어와 문화는 일본인의 정체성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뿌리를 박고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닌 바로 일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르면,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재일교포들의 국적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될 것이다. 한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다만 그들이 한국이라는 뿌리를 잊지 말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닌가 싶다.

 

 

PLUS INFO) 연예계의 한국계 스타들은?

 

연예계 쪽은 스포츠계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이미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인지 여러 차례 소동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지난 1990년 야스다 나오미(安田成美)라는 가수겸 탤런트의 도중하차 사건이다. 그녀는 1년간 방영될 예정이었던 NHK의 간판 드라마 < 봄이여 오라! > 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는데, 촬영 1주일 만에 돌연 중도하차했다. 태평양 전쟁을 그린 장면을 찍은 직후였다. 이를 놓고 온갖 억측이 일었다. 한 평론가가 아침 버라이어티쇼에 출연 " 야스다는 이른바 자이니치 2세로 태평양 전쟁에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차했다 " 고 발언, 파문이 일었다. 이후로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재일교포로 밝혀져 하차했다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재일교포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필연적으로 스포츠와 연예계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엄연히 차별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외국인 신분으로는 공직진출이 제한되어 있다. 직업선택의 자유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회사원, 아니면 개인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스포츠와 연예계 쪽은 큰 차별 없이 성공만 한다면 부와 명예를 단숨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재일교포들의 목표가 된다.

 

일본의 대중오락인 빠징코 자본의 대부분이 재일교포들의 소유로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야쿠자 쪽에서도 중간 보스급에 많이 포진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곱지 않는 시선을 받지만 스포츠와 연예계는 다르다. 실력만 있다면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이미지도 좋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포츠와 연예계 쪽에는 수많은 재일교포 준비생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한다.

 

글 이선호(OSEN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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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의 별’ 철인 가네모토의 퇴장

 

"히로시마가 이기면 환호성이 들리는 곳은 히로시마현 뿐이었다. 하지만 한신이 이기면 일본 열도가 들끊는다."

 

 

2003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한 가네모토 토모아키(44)는 새로운 팀에서 뛰는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한신이 가네모토를 데려온 것은 그의 출중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타도 거인'의 선봉장에 상징적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는 동쪽과 서쪽에 숙명의 라이벌 팀이 있다. 간토 지역을 대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간사이 지역을 대표하는 한신 타이거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요미우리가 21회의 일본시리즈 우승 기록과 전국구 인기 구단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신의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는 고작 1차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기라면 막상막하를 다툴 정도로 이 두팀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하다. 올 시즌 전반기 63경기까지 홈경기 관중수를 보면 요미우리의 평균 관중은 39,826명 그리고 한신이 37,740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팀에 대한 충성도에 있어서는 한신이 요미우리를 압도한다.

 

올해 한신은 12개 팀 가운데 유일하게 최소 관중 경기에서 2만명(21,851)을 웃도는 관중 동원력을 자랑했다. 요미우리의 한 경기 최소 관중은 13,181명이다. 올해 한신의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항상 2만명 이상은 들어왔다는 말이다.

 

가네모토가 한신으로 이적한 첫해(2003) 한신은 만년 하위권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던지며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봤다. 이적 첫해 우승을 차지한 가네모토에게 '서쪽의 대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이쯤이었다. 히로시마 출신의 촌놈이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오사카의 심장으로 우뚝선 것이다.

 

 

말 그대로 가네모토는 재일교포의 별이었다. 그 자신이 재일교포 3(가네모토의 한국 이름은 김지헌)이기도 했지만 간사이 지역을 대표 할 만한 카리스마와 타의 모범이 되는 경기력은 한신의 큰 자랑거리였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가네모토의 국적은 일본이다. 히로시마 시절이었던 2001년 일본 여성과 결혼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류상의 국적은 피의 색깔은 바꾸지 못한다.

 

가네모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철인''근성'이다.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전(1492경기=13,686이닝) 기록은 한미일 통틀어 최고이며, 880경기 연속 4번타자 출전(일본 기록) 그리고 가네모토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기록중 하나인 1,002타석 무병살타 기록 역시 일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젊은시절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가네모토는 아마추어 때부터 유명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은퇴)를 동경해왔다. 고교시절 가네모토는 1년 선배격인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PL학원(오사카 가쿠엔고교)이 고시엔대회에서 상종가를 달리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때 기요하라의 모습을 구경하러 갔을 정도로 엄청난 팬이었다고 한다. 또래들에 비해 야구에 소질도 없었을뿐더러 힘든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 두기를 거듭했던 가네모토 입장에서는 고시엔 스타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요하라가 동경의 대상이 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던 가네모토는 지인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동북복지대학)에 들어간 후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을 통해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이게 된다. 일본대학 야구선수권에서 3년연속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그는 마지막 기회였던 4학년때 관서대학을 결승에서 물리치며 결국엔 우승을 차지한다. 별볼일(?)없었던 그의 야구인생에 있어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이었다.

 

 

1992년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한 가네모토는 탄탄대로를 달릴것 같던 기대와는 달리 공격과 수비 모든면에서 함량미달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체를 이용하지 못하는 타격폼, 그리고 부정확한 송구 능력은 외야수로서 매리트가 없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그때 가네모토의 별명이 '두더지 죽이기' 였다고 한다. 송구만 하면 어깨에 힘만 들어가 공을 땅바닥에 패대기쳤기 때문이다.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한 그는 이후 하체의 근력강화는 물론 타격시 하체를 이용하는 방법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94년을 기점으로 히로시마의 주전선수가 된 가네모토는 이후 에토 아키라(히로시마의 전설적인 강타자)의 요미우리 이적을 기회 삼아 2000년부터 팀의 4번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이해에 생애 처음으로 30홈런-3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1,002 타석 연속 무병살타의 일본신기록까지 작성한 그는 공수주 3박자는 물론 찬스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타자로 우뚝서게 된다.

 

2002년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한 가네모토는 이적 첫해인 2003년에 한신을 18년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비록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에게 일본시리즈 패권(34)을 내주긴 했지만 3경기 연속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총 4개의 일본시리즈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것 같았던 가네모토의 전성기는 2005년 리그 MVP를 끝으로 기록이 하향세로 접어든다. 물론 연속 경기 풀이닝(1,492경기)출전이란 대기록을 수립하며 기네스북에도 그 이름을 올리는등 '철인'으로서 존경의 대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2010년 야쿠르트와의 개막전에서 어깨부상을 당한 가네모토는 결국 418일 경기(요코하마전)를 끝으로 연속 경기 무교체 출전기록도 중단됐다. 가네모토는 2010년 전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144경기를 뛰고도 규정타석에 들지 못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2년연속 전경기 출전 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대타로 출전한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네모토가 12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내년에 한신은 팀 리빌딩을 통해 새로운 팀 컬러로 변신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깨부상을 늘 안고 사는 가네모토가 팀 전력에 있어 도움되지 못하며 그 자신 역시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을거라 추측된다.

 

2005년 정규시즌 MVP에 올라 최고의 한해를 보냈던 가네모토는 올해까지 21년을 뛰며 현재까지 통산 타율 .287(8829타수 2532안타) 474홈런 1517타점의 대기록을 남겼다. 안타까운 것은 통산 500홈런을 눈 앞에 두고 은퇴, 그리고 일본시리즈 우승 감격을 한번도 맛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네모토 역시 은퇴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이 점을 현역 생활의 아쉬움으로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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