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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거꾸로 보는 프로야구사 - 김은식

by Wood-Stock 2011. 1. 14.

[거꾸로 보는 프로야구사 1] 1982년 4월 25일, 삼미와 OB의 춘천 결전

'불사조' 박철순은 왜 삼미 슈퍼스타즈를 두려워했나

 

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제일 애를 먹인 건 삼미 슈퍼스타즈였어. 아니, 그 녀석들은 왜 그렇게 홈런을 잘 때리는지···. 삼미 때문에 연승기록이 몇 번이나 끊어질 뻔했어. 백인천, 김봉연 잘 치는 거야 원래 알았지만, 삼미는 누군지도 모르는 타자들이었는데 … 정말 무시무시한 팀이었어."

 

'불사조' 박철순에게, 프로 원년에 22연승으로 내달리던 중 만났던 최강의 난적이 누구였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15승 65패, 승률 1할 8푼 8리의 전설적인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 더구나 바로 그 해 박철순이 이끌던 우승팀 OB 베어스에게 16전 16패를 당하면서 특정 팀 상대 시즌 전패라는 역사까지 남겼던 그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40경기가 치러진 그 해 전기리그에만 혼자서 18승을 올리는(전후기 통합 24승) 압도적인 위력으로 리그를 지배했던 원조 슈퍼에이스 박철순이 자신이 혼자 쌓은 승수보다도 9승이나 적었던 시즌 15승의 팀을 난적으로 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을 사람이 있을까?

 

'불사조' 박철순의 천적, 삼미 슈퍼스타즈

 

▲ 창단식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 이전부터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꼴찌 후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예정되어있던 길을 고분고분 걷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되기 전부터 꼴찌 후보로 낙인찍혔던 팀이다. 국가대표 출신이 단 한 명도 포함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업팀에서 주전급으로 뛰던 선수마저도 얼마 되지 않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미는 결국 그 예상대로, 아니 예상에도 훨씬 못 미치는 처참한 몰골의 꼴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애초에 승부는 제쳐 둔 채 인격수양이나 하자고,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으며' 유유자적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에게도 '세상의 예상'을 뛰어넘을 기회는 있었고, 뛰어 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도전했던 순간이 있었으며, 결국 그것이 좌절되자 흘렸던 눈물들이 있었다.

 

1982년 3월 28일 대구. 그날 그곳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세상 앞에 첫 선을 보였다. 개막 이전 삼미가 만장일치의 꼴찌후보였다면, 그날 상대했던 삼성은 만장일치의 우승후보였다. 야구인들 눈에도 생소한 이름들 뿐이던 삼미의 라인업과 달리, 삼성은 주전과 후보 명단 모두를 국가대표와 대학선발대표 출신으로만 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날의 승자는 삼미였다. 그날 삼미의 선발투수 인호봉은 3점만을 내주며 삼성 타선을 막아냈고, 양승관을 비롯한 타자들은 삼성의 황규봉과 권영호를 두들겨 5점을 뽑아냈던 것이다. 전날 서울에서 청룡의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으며 개막전을 망친 데 이어 꼴찌후보에게까지 지면서 2연패하는 봉변을 당한 삼성의 서영무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성난 대구의 팬들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팀 창단경기에서 역사적인 첫 승을 이루어낸 삼미의 박현식 감독이 감격을 담아 기자들에게 일갈했다.

 

"앞으로 우리 팀을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우리는 모두가 슈퍼스타들이다. 대표선수 출신은 없지만 모두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열심히 하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프로스포츠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경향신문. 1982년 3월 29일자)

 

어쨌든 삼미는 한국프로야구사에 그렇게 씩씩하게 첫 발을 내디뎠고, 걷기 시작했다. 이튿날에는 팀의 2선발인 김재현이 역시 완투했지만 악에 받친 삼성 투수들의 혼신의 투구에 눌리며 1대 5로 졌고, 일주일 뒤 춘천에서의 홈 개막전에서는 초반 연승행진 중이던 롯데의 노상수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튿날인 4월 5일에는 롯데에게 7대 4로 끌려가던 9회 말에 연속 4안타를 집중해 동점으로 만든 다음 연장 11회 말에 장정기의 끝내기 안타로 뒤집으며 2승째를 올리게 된다. 시즌 2승 2패. 특히 극적인 끝내기역전승이었고, 3연승행진을 벌이던 선두 롯데를 잡은 큰 승리였다. 언론은 삼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 삼미 슈퍼스타즈 마스코트 프로원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동물이 아닌 마스코트를 가진 팀이었다.

▲ 감사용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를 통해 뒤늦게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에서 패전처리투수로 그려졌지만, 만약 그를 실제로 패전처리투수로 썼다면 삼미의 성적은 조금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 해 삼미의 문제는 패전처리투수를 활용함으로써 주력투수의 어깨를 아껴준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데 있었다

 

1번 타자로 나서던 조흥운이 4할을 넘나드는 출루율에 도루 선두를 달리던 기동력으로 공격의 활로를 뚫었고 장정기, 김무관 등으로 이어지는 후속타자들 역시 수시로 연속안타를 쏟아내며 상대팀의 정신을 뽑아놓았다. 양승관과 금광옥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장타를 터뜨려 쐐기를 박았다. 삼미는 비록 투수력은 처지지만 공격력 하나만큼은 중위권 이상인 복병으로 통했다.

 

물론 삼미를 허깨비 취급하는 팀은 없었고, 삼미의 승률이 1할 대로까지 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최소한 경기 중반까지는 접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더라도 경기 막판까지 집중력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투수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긴 했지만, 박현식 감독은 이기든 지든 그나마 믿고 가야 할 두 명의 주력투수 인호봉과 김재현에게 2,3일씩이라도 등판간격을 지켜주었고, 불가피하게 연투를 할 때는 한두 이닝 정도에서 잘라주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최고의 팀과 최악의 팀이 갈라서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던 4월 24일과 25일, OB와의 춘천 2연전이 시작되기 전 7승 5패의 3위 팀 OB와 3승 8패의 6위 팀 삼미 사이의 격차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1982년 4월 25일, 최고의 팀과 최악의 팀이 갈라서다

 

4월 24일, 삼미는 먼저 4점을 뽑고도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며 4대 6으로 역전패했다. 그날 OB 타선이 뚝심의 역전극으로 구해낸 투수가 바로 박철순이었고, 그에게 그날의 승리는 시즌 5승째(4연승 째)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25일, OB 베어스의 선발투수는 선우대영이었다. 그는 박철순에 이어 OB 마운드의 2인자로 통하는 투수였지만, 전날 아깝게 역전패한 아쉬움 때문에 독기가 오른 삼미의 타자들이 초반부터 퍼부어대는 맹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삼미는 1회 3연속안타로 2점을 선취했고, 2회에는 조흥운의 2점 홈런을 포함해 한 이닝 최다안타 기록인 7안타로 OB 선우대영과 두 번째 투수 박상열을 난타하며 6점을 추가했다. 그래서 3회 초를 시작할 때 이미 점수는 8대 0. 승부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3회 초, 삼미의 선발 감사용이 OB의 1,2,3번 타자에게 연속안타를 맞으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야구경기에서 큰 점수 차는 뒤집힐 위험이 크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만약 뒤집힌다면 역전패한 팀 전체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점수 차가 작건 크건 야구의 모든 순간은 날카로운 칼끝 승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었던 백전노장 박현식 감독은 조기진화를 위해 인호봉과 김재현을 차례로 투입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의 투수들은 아니었다. 저력의 팀 OB는 3회에 5안타와 실책 하나를 묶어 4점을 내더니 4회에는 2사 후에 4연속 안타를 집중시키며 다시 석 점을 뽑아 턱밑까지 추격했다. 5회에는 다시 석 점을 만들며 끝내 10대 8로 역전시킨다.

 

이제 기록적인 최다점수차 역전패의 목전으로 몰린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은 몸이 굳고 시야가 좁아지는 걸 느끼며 진땀을 닦아야 했고, 감사용에 이어 인호봉, 김재현까지 소진한 삼미의 마운드에 남은 것도 박경호라는 무명 중의 무명투수 뿐이었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는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큰 점수차의 열세를 순식간에 뒤집어놓고는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으로 경기를 즐기는 OB 베어스의 살인타선이 되살아나 있었다.

 

기세가 오른 OB는 6회와 7회에도 다시 한 점 씩을 보탰고 점수차는 12대 8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까지는 삼미도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는 팀이 아니었다. 삼미는 그날 1번 타자로 출장해 5타수 5안타를 때린 장정기의 활약에 힘입어 8회에 한 점을 만회한 뒤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도 끈질긴 연속안타 행진을 벌여나갔다. 그러자 OB도 8회에 올렸던 황태환을 내리고 결국 전날 등판했던 에이스 박철순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하의 박철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삼미의 도전은 거칠었다. 삼미는 끝내 두 점을 더 불러들이며 12대 11까지 쫓아갔고, 결국 상황은 '한 점 차, 9회 말 투아웃 만루'라는 절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미 전날 패전위기에 몰렸다가 역전승을 거두며 되살아났던 박철순은, 다시 짧은 안타 한 개 만으로도 패전투수가 될 수 있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삼미의 뚝심은 거기까지였고, OB의 위기도 거기 까지였다. 삼미의 2번 타자 조흥운이 때린 공이 3루수 양세종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확히 송구된 공이 조흥운의 빠른 발보다 앞서 1루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순간 3루수 양세종과 투수 박철순, 그리고 뒤늦게 달려든 아홉 명의 수비수가 마운드 위에서 한데 뒤엉켰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환희의 세리머니가 이어졌다. 

 

4시간 24분 동안 양 팀이 각각 21개와 17개의 안타를 폭발시켰고, 또 각각 네 명과 다섯 명의 투수가 불려나와 줄줄이 뭇매를 맞은 접전이었다. 그 접전의 승자 OB는 9승 5패를 기록하며 2위로 올라섰고, 패자 삼미는 3승 10패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삼미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그 경기 중이 아니라, 그 경기가 끝난 다음 부터였다. 직접 경기를 지켜보던 삼미의 김현철 회장이 박현식 감독에게서 지휘봉을 뺏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천 팀이 감독도 없이 출범하는 꼴을 보시겠느냐'고 매달리며 이미 10여 년 전 현장을 떠나 은행 지점장으로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인천야구의 옛 영웅 박현식을 끌어들일 때 김현철 회장이 했던 말은 '꼴찌를 해도 좋다. 대신 몇 년 잘 키워서 강팀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3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삼미 김현철 회장에게 그날의 대역전패는 '꼴찌' 이상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극약처방, 독이 되다

 

계약기간 중, 특히 시즌 중에 감독을 교체하는 것은 그야말로 극약처방에 해당한다. 그것은 선수단 전체를 향해 '당장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 놓으라'는 윽박지름이고, 결국 당장 뭔가를 내놓기 위해 쓰지 말아야 할 힘까지 쓰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의 삼미는 그런 극약처방을 견뎌낼 만 한 체력을 가지지 못한 팀이었다.

 

박현식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물려받은 것은 투수코치 이선덕이었다. 그 역시 고교와 실업을 거치면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노련한 이였다. 하지만 이미 그 상황 속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소신 따위와는 무관하게 영양실조의 환자에게 극약을 주사해야 하는 가련한 돌팔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덕 감독대행은 당장 1승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일은 없다는 듯' 매일 던질 수 있는 모든 투수를 투입해대기 시작했고, 타자들에게는 어차피 한두 점 앞선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듯 일체의 작전 없이 풀스윙을 요구했다. 그것은 무의미한 집착이기도 했고, 동시에 무기력한 자포자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만 급했던 마구잡이 전법으로 전기리그의 남은 26경기에서 건질 수 있었던 것은 5승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작 가뜩이나 기초체력이 부실했던 팀이 별 실속도 없이 1승에 매달리느라 무리했던 후유증은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심타자 양승관과 금광옥이 부상으로 이탈한 데 이어 조흥운, 김경남, 김호인이 나란히 부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리그가 끝난 시점까지 타격 8위에 올라 있던 김경남(.338)과 9위에 올라있던 조흥운(.325)은 후기리그가 시작되자마자 슬금슬금 미끄럼을 타더니 2할대 중반(각각 .269와 .284)에서 시즌 성적을 마감했다. 홈런 5개로 공동 9위에 올라있던 양승관도 후기에는 3개를 추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투수들의 성적이 곤두박질 친 것도 물론이었다. 시즌 초반만 해도 사흘에 한 경기 정도씩 나누어 맡던 두 기둥투수 인호봉, 김재현은 물론이고 이래저래 마당쇠 역할을 해야 했던 감사용, 김동철까지 거의 매일 같은 경기에 한꺼번에 투입되다시피 하며 동시에 방전상태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정상적인 투수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네 투수가 그저 얻어맞는 걸 직업으로 생각하는 듯 시간 되면 마운드에 오르고 내려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심지어 7월 28일에 선수등록을 마치고 8월 4일부터 경기에 투입된 '새로운 피' 오문현은 그로부터 팀이 치른 27경기 중 무려 22경기에 투입돼 120이닝을 책임지는 무시무시한 혹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이 잡을 수 있었던 공에도 몸을 날리지 못하고, 칠 수 있었던 공에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며 자멸해갔던 것이 바로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게 야구라면, 그 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너무 일찍 스스로의 운명을 끝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세 번의 10연패 행진이 반복되자 이미 삼미 슈퍼스타즈는 언론이 조롱하기도 미안하다는 듯 외면하는, 소리 없이 패전과 실점과 피안타와 실책에 관한 기록을 쌓아가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천야구장(도원)이 긴 보수공사 끝에 개장한 7월 17일부터는 한 달 간 인천에서만 무려 11연전을 치르는 특혜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삼미는 1승 10패를 기록하며 전반기 내내 기다려왔던 인천 팬들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전기리그에 10승, 후기리그에 5승. 그래서 아마 앞으로도 한국 프로야구에 큰 탈이 나지 않는 한 영원히 깨지지 말아야 할 불멸의 1할 8푼 8리라는 전설적인 승률이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최종성적이 되었다.  

 

▲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 야구의 프로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정책으로 확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3개월이었다.

하지만 일단 '방침'이 확정된 뒤 여섯 개의 기업들이 각자 야구단을 창단하고 KBO 창립총회를 치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섯 개의 프로야구팀이 역사적인 개막경기를 가진 것은, 다시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정리 해고된 열 한 명의 슈퍼스타들

 

그해, 22연승을 하며 단일시즌 세계최다경기 연승기록을 세운 박철순이 여러 차례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힐 뻔 했던 것은 사실이다. 5월 26일에도 8회에 구원등판해 2실점하며 패전위기에 빠졌다가 연장 10회 말에 터진 양세종의 끝내기안타로 10연승 관문을 통과했다. 6월 2일에도 6회에 등판했다가 동점을 허용하며 연장 14회까지 끌려간 끝에 이홍범의 끝내기 희생플라이 덕에 12연승 째를 기록하기도 했다. 15연승 째였던 6월 16일 경기 역시 김우열의 3점 홈런에 힘입은 역전승이었다. 하지만 늘 마지막 승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슈퍼스타즈에게 남은 것은 16전 16패의 참담한 성적표뿐이었다.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국가대표 배터리 임호균과 김진우, 그리고 삼미를 16전 16승으로 짓밟았던 OB가 양보한 서울 출신의 이선웅과 대전 출신의 정구선을 영입하며 한 명도 없던 국가대표 출신을 4명이나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프로야구 통산 91승의 거물 장명부와 일본프로야구 10년 경력의 유격수 이영구를 영입하며 이름 그대로 '슈퍼스타들의 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지우고 싶었던 전년도의 참극은 고스란히 못난 선수들의 탓으로 전가되었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며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뛰고 굴렀던 11명의 선수들에게 한꺼번에 정리해고통보가 전해졌다. 그 열 한 명 중에는 1982년 봄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뛰어들어 15번의 선발등판을 비롯해 32번이나 출전해 93이닝을 던졌던, 하지만 그 해 겨울 방출 통보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투수 김동철도 있었다.

 

패배자의 삶은 그런 점에서 고달프다. 이기고 졌다는 것이 그대로 노력과 열정의 있고 없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기억되다보니, 패배자란 그저 진 사람이 아니라 게으르고 열정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꼴찌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미 슈퍼스타즈가 정말 땀도 열정도 없었던 쓰레기였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증언을 남겨야 한다.

 

정부의 '방침'이 떨어지고부터 단 1개월 만에 6개 구단을 창단하고 다시 석 달 만에 개막전을 치러야 했던 세월 속에서 그들을 프로무대에 올려놓은 '졸속한' 과정은 시대적인 희극이었다고 하는게 맞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도전에 나서 있는 모든 것을 던져 한 순간 타오른 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던 슈퍼스타즈 선수들의 무모한 열정에야 박수를 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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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프로야구사 2] 발야구의 탄생, 1983년 MBC 청룡

28년 지났어도 '발야구' 지존, 청룡 김재박 못 잊어

 

1983년 후기리그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MBC 청룡의 피 말리는 각축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먼저 치고 나간 것은 삼미였다. 전기리그 종반까지 2.5경기차로 앞서가다가 광주원정에서 2위 해태에게 충격적인 3연패를 당하면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쳤던 삼미는 이미 전반기에 무리할 만큼 무리했던 장명부와 임호균을 또다시 하루 간격으로 완투시켜가며 악에 받친 듯 가속페달만을 밟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 한에는 체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투혼'이 통했던 것은 그나마 7, 8월 두 달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MBC는 출발은 늦었지만 뒤늦게 가속도가 붙은 쪽이었다. 청룡은 시즌 개막과 동시에 4할 타자이기도 했던 감독 백인천이 이탈하는 봉변 속에 전기리그를 감독 없이 치르며 3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감독이었던 김동엽을 영입해 전열을 가다듬고, 다섯 명의 투수가 고르게 100이닝 이상씩을 분담하며 아낀 체력을 바탕으로 8월 31일 처음 단독선두로 나서게 된다. 

 

 

▲ 청룡 시절의 김재박 프로무대에서 김재박의 공격력은 실업시절의 명성에 못 미쳤다. 하지만 유격수로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수비능력, 그리고 스피드와 센스를 겸비한 현란한 주루플레이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힐 만 했다.

▲ 김재박의 개구리번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최종전에서 만나 우승을 다투었고, 2대 0으로 끌려가던 8회에 거짓말처럼 5점을 뽑아내며 역전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의 배터리가 고의로 뺀 공을 향해 솟구쳐 성공시킨 김재박의 기습번트는 동점타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운을 결정적으로 끌어온 의미있는 한 방이었다

 

그 뒤로도 삼미와 MBC 두 팀이 마지막 한 장의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잡기 위해 2경기차 이내의 팽팽한 평행선을 달려가던 9월 14일, 잠실이었다. 그 날 삼미는 인천에서 임호균이 12승째 완투승을 기록한 데 힘입어 롯데를 잡아 놓고 청룡의 경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실에서 삼성과 만난 청룡은 1회와 2회에 각각 2점과 1점을 내주며 3대 0으로 끌려가고 있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오랜만에 승차는 1로 좁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 1회 초에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며 선취점을 내주었던 청룡 김재박이 후반 들어 '발'로써 만회의 반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6회 말에는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삼성의 수비실책을 틈타 홈으로 파고들며 3대 2로 쫓아가는 점수를 만들어내더니, 8회 말에도 다시 2사 후에 내야땅볼을 치고도 전력질주해 1루에서 세이프 되며 추격의 불씨를 살렸던 것이다.

 

다음 타자는 이해창. 바로 지난해 프로출범 당시 서울지역 선수들에 대한 지명권을 OB베어스와 2대 1로 나누어 가져야 했던 MBC 청룡이 박철순에 앞서 김재박과 더불어 1순위로 지명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문에 프로진출을 1년 강제로 유보 당했던 그는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자 3번 지명타자로서 우승을 이끌어낸 뒤 한 해 늦게 팀에 합류해 있었다.

 

이해창이 때린 공은 펜스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좌익수 왼 쪽 약간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안타였고, 2사 후였던지라 스타트가 빨랐던 김재박이 3루까지 진루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실업야구 무대에서 늘 김일권과 도루왕 타이틀을 다투며 '쌕쌕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타자 이해창 역시 2루까지는 무난히 들어갈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김재박은 동점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듯 뒤돌아보지 않고 홈으로 내달렸고, 삼성의 좌익수 장효조는 차분하게 유격수 오대석에게 공을 건네고 있었다. 이미 장효조가 공을 잡은 것은 김재박이 3루 베이스를 통과하기 전이었고, 그 공을 넘겨받은 오대석이 포수를 향해 공을 던지는 순간에도 김재박은 3루와 홈의 중간 정도 밖에는 오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김재박이라지만 역부족으로 보였고, 기회는 그대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곧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김재박이 태그를 피하기는커녕 포수의 미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이빙하듯 몸을 날렸고, 오대석의 송구는 김재박의 헬멧을 맞고 포수 뒤쪽으로 한참이나 흘러 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포수 이만수가 뒤로 빠진 공을 주우러 달려가며 비워진 홈을 김재박이 손으로 되짚었고, 뒤이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3루까지 달려가고 있던 이해창 역시 방향을 돌려 홈으로 돌진해 4점째를 만들고야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대역전극이었다.

 

물론 기록은 오대석의 실책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빗나간 송구가 아니었다. 3루 쪽으로 치우친 채 중계플레이에 나섰던 오대석의 위치에서 주자의 몸을 피해 송구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공은 포수 이만수가 요구하던 그 위치로 정확히 날아가고 있었다.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포구에서 송구로 이어간 동작으로나, 송구의 정확성으로나, 오대석이 그 이상 잘 해야 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어차피 발로는 늦었다는 것을 알아챈 주자 김재박이 마침 활짝 열린 채 공을 기다리던 포수의 미트가 공의 표적임을 알아채고 자신의 몸을 그 앞으로 날리며 실책을 '만들어낼' 만큼의 센스와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날 승리를 통해 청룡은 후기리그 순위싸움의 최대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9월 20일과 21일에는 광주 2연전에서 또다시 해태를 만나 연패한 삼미를 따돌리게 되고, 25일에는 삼미를 3위로 밀어내고 올라온 해태마저 12대 0으로 대파하며 사실상 후기리그 우승을 결정짓게 된다(후기리그 우승이 확정된 것은 다시 삼미가 해태를 잡은 9월 26일이었다).

 

발로 만든 3점, 후기리그의 판도를 바꾸다

 

출범 2년째였던 1983년의 프로야구는 첫해에 비해 여러 면에서 급격한 수준향상을 이루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문에 첫 해 발이 묶여있던 국가대표들이 대거 합류한 데 이어 재일교포 선수 네 명이 들어와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내고 더 많은 삼진을 잡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수비조직의 짜임새였다.

 

1982년에 6개 팀이 80경기씩을 치르면서 기록한 도루는 무려 699개였다. 특히 그 중 절반 가까운 323개가 해태와 삼미를 상대로 기록됐는데 두 팀은 프로수준이라고 할 만한 포수를 가지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김용만, 박전섭, 홍순만 등이 마스크를 나누어 쓴 해태는 159개의 도루를 허용하는 동안 56개를 잡아냈을 뿐이고, 금광옥과 최영환, 김진철 등이 맡았던 삼미는 164개를 허용하면서 41개를 잡아냈을 뿐이었다(특히 삼미의 김진철은 37개를 허용하는 동안 3개밖에 잡아내지 못하면서 .075의 처절한 도루저지율을 남기게 된다).

 

물론 강견의 포수 이만수가 지켰던 삼성처럼 도루저지율이 5할에 육박하는 팀도 있었다(59개 허용, 52개 저지). 하지만 최소한 해태와 삼미를 상대하는 팀의 선수들은 1루에 출루하기만 하면 다들 한 번쯤 도루를 노려보곤 했는데,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주자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팀들의 경기모습은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천하무적야구단>의 경기모습을 상상하면 비슷할 것이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단 두 개의 도루를 추가했을 뿐이던 마흔 살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 일본프로야구 통산 209홈런-212도루를 달성했던 관록만으로 11개의 도루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그런 허술함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수준급 포수들이 대거 한국프로무대를 밟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첫해에 앞뒷문을 다 열어둔 채 시즌을 치렀던 두 팀 해태와 삼미가 국내 최고 수준의 포수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해태의 재일교포 김무종과 삼미의 국가대표 출신 김진우가 그 주인공인데, 특히 김진우의 경우 거의 혼자서 한 시즌을 책임지면서 60개를 허용하고 60개를 저지해 무려 5할이라는 도루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물론 김진우의 경우 거의 일 년 내내 장명부와 임호균이라는 두 명의 특급 투수하고만 손발을 맞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뛰어난 주자 견제의 혜택까지 입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팀당 경기수가 100으로 늘어났던 1983년에 기록된 도루는 499개에 불과했다. 경기수가 20%이상 늘어난 데 반해 도루는 30% 가까이 하락한 역설적인 결과였다. 삼성처럼 도루가 절반 이상 줄어든 팀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40%가량 감소한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1982년과 별다르지 않은 도루수를 유지한 팀이 있었으니, 바로 MBC 청룡이었다. 

 

 

▲ 장명부와 김무종 1983년에 처음 한국무대를 밟은 재일교포 선수들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멤버들과 함께 한국야구의 급성장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장명부(오른쪽)는 전무후무한 시즌 30승의 위업을 세우며 투수와 타자의 승부에 관한 많은 깨우침을 전해주었고, 김무종(왼쪽)은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끈 포수로서 타자의 분석과 공 배합을 포함한 투수리드에 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 전도사로 꼽힌다.

▲ 이해창의 홈 쇄도 이해창은 스피드와 센스 외에도 저돌성을 갖춘 선수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이대형의 발과 정근우의 저돌적인 창의성을 겸비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의욕이 지나쳐 경기의 흐름을 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진은 1983년 한국시리즈 4차전 11회말, 내야 땅볼 타구 때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쇄도하다 횡사해 1승을 올릴 마지막 기회를 날리던 장면이다. 곁에서 웃고 있는 것은 블로킹에 성공한 해태의 포수 김무종.

 

 

발야구의 탄생, MBC 청룡

 

그해 청룡은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선수조차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루 10걸 안에 무려 다섯 명의 선수들(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이종도, 김인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청룡이 기댈 수 있는 득점루트는 그들의 발 뿐이었다.

 

특히 발야구를 이끌었던 김재박과 이해창의 위력은 단지 도루의 개수만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둘은 숱한 단타를 2루타로, 또 2루타를 3루타로 바꾸어냈고, 조금 깊숙한 내야수 플라이만으로도 3루에서 홈으로 파고드는 명장면을 연출하곤 하는 송곳 같은 선수들이었다. 9월 14일 경기에서의 대역전극도 그 해 팀의 1,2번으로 나란히 출격해 상대 팀의 넋을 빼놓았던 숱한 명장면들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조직력이 엉성했던 그 시절 대포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는 송곳이었다. 타구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했던 수비수들에게 주자들의 발놀림까지 묶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고,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도루나 리터치를 허용한 수비수들은 제풀에 무너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원 높은 기동력을 활용해 상대팀 수비진의 빈틈을 집요하게 후벼 파는 움직임으로 청룡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전후기 통합승률 1위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물론 그해의 청룡은 끝이 좋지 않았다. 단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1무 4패로 철저히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1차전과 2차전에 김동엽 감독은 끊임없이 교체신호를 보내는 선발투수 오영일과 유종겸을 7점과 8점을 내주도록 방치한 채 완투시키는 심술을 부렸다. 선수들도 태업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승리에 대한 집념을 포기해버리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악의 졸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뒷날 밝혀진 것은 후기리그 막바지에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내걸었던 우승보너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시작된 갈등 탓에 이미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도 전에 MBC의 선수와 감독과 구단이 산산이 쪼개져 버렸더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역시 도루 10걸 안에 네 명의 이름을 올린 또 하나의 송곳 해태 타이거즈와의 수준 높은 유격전을 감상할 기회를 빼앗긴 것은, 삼십 여 년이 흐른 지금에 생각해도 새삼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해의 준우승을 끝으로 청룡은 다시는 포스트시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팀이 돼 버리고 만다. 한국시리즈에서 노출되었던 불화 탓에 김동엽 감독이 다시 반 년 만에 옷을 벗었고, 선수들 내부에서도 팀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으며 가지고 있던 역량을 흐트러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청룡은 한국야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던 팀이었지만, 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자기혁신을 이룰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빠른 팀이긴 했지만, 가장 빠르지도 못하면서 파괴력도 가지지 못한 애매한 팀컬러로 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장명부의 30승, 해태의 첫 우승...그리고 MBC 청룡

 

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비교해보더라도, 요즘 MBC 청룡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차라리 인상적인 꼴찌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LG가 청룡을 인수해 트윈스로 새출발하던 첫해 우승을 이루어내며 청룡 팬들의 아쉬움마저 흡수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를 더 꼽는다면, 청룡이 정말 청룡다운 모습을 보였던 유일한 해였던 1983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기억 속에서마저 '철인 장명부'와 '해태왕조의 개막'에 밀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강함보다는 세밀함', 그래서 '한 베이스 더 가고 30센티미터를 더 빠르게 선점하는 야구'를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야구의 한 뿌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한 번 쯤 되새겨볼 만하다.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도 더럽지만, 꼴찌쯤 해야 그나마 신경 써주며 평범한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세상도 야속하기 때문이다.

 

1983년은 장명부가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에 성공하며 왕조시대의 첫걸음을 시작한 해다. 하지만 또 하나 그 해의 프로야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에 MBC 청룡이 '야구에서 점수를 내는 것은 빠른 공과 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지능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의 발'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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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프로야구사 3] 마무리의 탄생, 1984년 OB 베어스

'에이스' 박철순 빠진 자리, OB베어스의 생존 비결

 

1982년 박철순은 팀의 56승 중 24승을 혼자 책임지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겨우 8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그가 던졌던 224.2 이닝은 팀이 치른 전체 이닝의 30.8%에 달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 해에는 그보다 더 많이 던진 투수도 있었다.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시즌 31승의 5위 팀 롯데의 14승 투수 노상수가 혼자 전체 이닝의 32.5%에 해당하는 232.1이닝을 던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몇 술 더 뜨는 투수가 나타났다. 바로 현해탄을 건너 온 괴인 장명부였다. 그는 그 해 427.1이닝을 던지면서 30승을 올렸는데,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7%와 57.7%에 달했다. 하지만 너무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장명부의 '보조투수' 쯤으로만 알려진 같은 팀의 임호균 역시 그 해 234.2이닝을 던지며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책임진 투수였다.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그 두 명의 투수를 제외한 7명의 투수가 던진 이닝을 모두 합해야 247이닝이었고 승수는 10에 불과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그 두 해의 경험이 각 구단의 수뇌부와 지도자들에게 심은 인식이란, '프로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에이스'의 존재'라는 점이었다.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진 한 명의 에이스는 국가대표 출신으로만 라인업을 가득 채운 자타공인의 강팀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승률 1할 대의 형편없는 약체팀도 한순간에 우승경쟁에 뛰어들 만큼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무기임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사 200이닝의 시대

 

1984년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각 팀의 에이스들이 가장 처절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해였다. 팀당 10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무려 여섯 명의 투수들이 각 팀의 운명을 짊어지고 200이닝 이상을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200이닝 투구라는 것이 투수 혹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다. 오히려 200이닝을 소화한다는 것은 내구력과 안정성을 겸비한 완성형 선발투수, 즉 진정한 에이스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단면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2000년대 이후의 200이닝이란 온전히 선발투수로서 일정한 등판간격과 투구수 관리를 받으며 만들어내는 기록들이라는 점, 그리고 경기수가 130경기 안팎으로 늘어난 환경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30여 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도 한 시즌에 기껏 한 두 명이 200이닝을 던질 수 있을 뿐이며, 그나마 2007년 리오스(234.2)와 류현진(211) 이후 한 명도 나오고 있지 않은 고단한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4년, 200이닝을 넘겼던 여섯 명의 투수들은 선발등판경기의 절반 이상을 완투했음에도, 대개 선발로서 등판했던 경기의 수는 전체 출장경기수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길어야 사나흘에 한 번씩 마운드에 올라 별일 없으면 완투를 해야 했고, 쉬는 날에도 경기 흐름이 묘하다 싶으면 구원 등판해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 에이스의 역할이라는 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장명부와 김일융 일본 프로야구에서 개인타이틀을 따낸 적도 있었던 두 거물급 재일교포 투수는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장명부는 1983년 혼자 427.1이닝을 던지며 30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남겼고, 김일융 역시 1985년 226이닝을 던지며 25승을 기록해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거칠 필요도 없이 우승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 마무리투수의 효시, 윤석환 마무리투수의 필요성에 눈뜬 것은 한국야구 발전의 중요한 한 대목이었다. 윤석환은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선발투수로 보냈고, 또 1984년에도 이기든 지든 경기 중반 아무 때나 등판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마무리 투수'와는 달랐다. 하지만 마운드의 크고작은 일들을 모두 에이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힌트를 던진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시대의 이단아, OB 베어스

 

하지만 그 해 그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단적인 투수운용을 했던 팀이 있었다. 바로 OB 베어스다. 그해 라이벌 팀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1984년 베어스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였다. 

 

두 해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쉽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박철순 급'의 에이스란 훈련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어스는 원년 멤버 계형철, 박상열과 신예 장호연, 최일언, 김진욱 등 좋은 재목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박철순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김성근 감독은 결국 여러 명의 투수들이 각자 가장 강력한 순간만을 마운드 위에 설 수 있도록 치밀한 분업의 체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선발로 나서지 않으면서 전천후로 후방지원을 하는 투수'인 윤석환이었다.

 

선린상고 3학년이던 197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윤학길과 맞대결해 15대 1로 이겨 우승을 이끌며 주목을 끌었던 윤석환은 성균관대를 거쳐 그 해 처음 프로무대로 들어섰다. 좌투수로서 빠른 공과 안정된 제구력도 겸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낙천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선수였다. 신인으로서 연투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 약점이었지만, 짧은 이닝만 던지게 한다면 장점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강속구 투수 계형철과 김진욱,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포크볼을 던지던 최일언, 그리고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박상열과 장호연이 돌아가며 선발 마운드에 오르는 '로테이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든 경기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부상조하며 서로를 갉아먹는 대신 늘 대기하고 있던 윤석환에게 공을 넘기는 분업체계도 자리를 잡았다.

 

또다시 깨진 전망, 꼴찌 후보 OB와 롯데의 선두다툼

 

1984년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체로 일치했다. 전년도 한국시리즈 파트너였던 해태와 MBC, 그리고 삼성이 3강이었고 삼미와 롯데, OB가 3약이었다. 그중에서도 전년도에 멀찍한 밑바닥에서 탈꼴찌싸움을 벌였던 롯데와 OB로부터는 별다른 희망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특히 감독마저 버리고 떠난 팀 OB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시즌이 개막되자마자 OB 베어스는 4월 중순부터 거침없는 9연승 질주를 벌이며 7할 대를 넘는 승률로 단독선두로 치고 나갔다. 원년멤버 계형철과 박상열이 앞에서 이끌었고, 최일언, 김진욱, 장호연도 덩달아 연승행진의 신바람을 탔다.

 

하지만 초반 연승기간의 1등 공신은 역시 윤석환이었다. 4월 한 달 동안 윤석환은 1구원승과 9세이브를 수확하며 거의 매 경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그런 깔끔한 마무리는 선발투수들 전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연투가 없는 팀이고, 그래서 투수들의 체력소모가 적다보니 분위기를 한 번 타면 연승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해 OB 베어스는 장호연이 1.58의 평균자책점으로 그 부문 타이틀을 따낸 것을 비롯해 네 명의 투수들이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계형철, 최일언, 박상열, 윤석환), 가장 뒤처진 김진욱 조차도 3.05를 기록하는 단단한 투수진을 구축했다.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평균보다 0.74나 낮은 2.53에 불과했고, 바로 그것이 그 해 OB 베어스가 통합승률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 해 바로 그 '승률 1위 팀' OB 베어스는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 무대조차 밟아볼 수 없었다. 평준화된 다섯 명의 선발투수들로 시즌을 치른다는 것은 좋은 흐름일 때는 함께 순항할 수 있지만, 나쁜 흐름을 만났을 때 거슬러 오르는 힘을 가지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스 한 명의 체력소진으로 연승이 끊어질 염려도 적지만, 에이스 한 명이 없어 연패를 끊을 수 없을 때도 생기는 것이다. 

 

5월 1일과 2일, OB는 2위 팀 삼성을 대전 홈으로 불러들여 2연전을 가지게 된다. 두 경기를 모두 잡는다면 연승행진이 11로 늘어날 수 있었고, 두 팀의 격차는 4경기로 벌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찌감치 전기리그 우승의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고, 다른 팀들이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따기 위한 보다 현실적인 길로 후기리그 우승 쪽을 택하도록 밀어내면서 좀 더 수월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경기에서 OB는 삼성의 쌍두마차 에이스 김시진과 김일융에게 연달아 완투패당했고, 두 경기차의 간격을 모두 소진하며 공동선두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열흘간의 혼전 끝에 다시 만난 5월 14일 대구 맞대결에서 또다시 김일융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단독선두마저 내주게 되고, 그 허탈감 때문인지 그 달 하순 내내 6연패를 당하며 전기리그 우승의 꿈을 깨야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전기리그 우승을 놓친 후유증은 후기리그까지 이어졌다. 후기리그에서는 슬슬 몸이 풀렸다는 듯 페이스를 끌어올린 최동원의 팀 롯데가 초반부터 연승행진을 달리며 선두로 달려 나갔고, 전기리그를 차지한 뒤 느긋하게 체력을 아끼던 삼성은 유독 OB전에만 전력을 쏟아 부으며 발목을 잡았다. 지난겨울 김영덕 감독이 OB에서 삼성으로 이적해오는 과정에서 깊어진 두 팀 사이의 감정의 골 때문이었다.

 

하지만 OB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끈질기게 추격하던 9월 15일과 16일, 드디어 1.5경기차로 꼬리를 문 채 선두 롯데와 부산에서 2연전을 치르게 됐던 것이다. 두 경기를 모두 잡는다면 0.5경기차 역전을 이룰 수 있었고, 그렇다면 후기리그 우승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날인 15일 최동원이 버틴 롯데를 7대 1로 제압하며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튿날 가장 믿었던 고참투수 계형철이 마지막 한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경기 초반부터 난타당하며 5실점을 하고 말았고, 롯데 마운드에는 이미 숨을 끊어두었다고 믿었던 전날의 패전투수 최동원이 다시 나타나 6이닝을 3안타로 OB 타선을 묶어버렸다. 결국 5대 1로 패배. 승차는 다시 1.5로 돌아갔다.

 

삼성, '고의패전 경기'의 빌미를 주다

 

결국 후기리그 우승팀이 결정된 것은 9월 22일과 23일의 2연전을 통해서였다. 1경기차로 앞선 1위 롯데는 부산에서 삼성과 2연전을 가지게 돼 있었고, 2위 팀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역시 2연전을 가지게 돼 있었다.

 

물론 삼성과 해태 모두 우승이 좌절된 처지였기에 이를 악물고 달려들 이유는 없었고, 반대로 롯데와 OB는 한 경기라도 놓치면 안 될 절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이틀을 통해 시즌을 지배한 것은 또 다른 당사자인 삼성이었다. 이미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으로서는 한국시리즈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의 선택은 롯데였다. 롯데가 27승 투수 최동원 한 명만 봉쇄하면 되는 빈틈 많은 팀이었던 반면, OB는 약한 고리가 보이지 않는 단단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겨울 김영덕 감독의 이적 이후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며 시즌 내내 난투극을 벌여왔던 OB에 대한 막연한 알레르기도 있었다.

 

하지만 22일 경기에서 삼성은 진작에 주전급은 모두 제외시킨 라인업으로 임했음에도, 1회 초부터 6점을 선취하는, 후보들의 눈치 없는 선전 덕분에 경기는 예상치 못한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감독이 뜻밖의 호투호타를 선보이는 신예들을 다시 뒤로 물리고, 직접 '말귀를 알아 듣는' 멤버들을 투입하며 눈에 드러날 만큼 억지스런 '져주기'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첫 경기에서 삼성은 최소한 여섯 개 이상의 노골적인 주루사와 8개의 노골적인 도루허용, 그리고 이루 셀 수도 없는 고의적인 실책들을 '연기'하며 11대 9의 극적인 역전승을 적진에 선물했다. 그리고 그런 곤욕을 치른 보람도 없이 이튿날 또다시 1회 초부터 3점을 선취하는 꽉 막힌 선수들을 다독거리며 또다시 매 이닝 공을 흘려주고 패대기쳐주며 8대 15로 다시 한 번 역전패하는 꿋꿋함을 과시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OB 베어스는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쳤고, 삼성은 뜻대로 롯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다들 아는 바와 같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장면으로 꼽힐 만한 그 엄청난 사건을 벌여가며 삼성이 얻은 것은, 오히려 롯데 자이언츠에서 오직 '한 명뿐이던' 두려운 인물 최동원에게 고스란히 4승을 쓸어다 바치며 희대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뿐이었다.

 

 

▲ 최동원과 임호균 최동원(왼쪽)은 시즌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4승을 따낸 1984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임호균(오른쪽) 역시 1983년에는 234.2이닝, 1984년에는 161.2이닝을 던지며 10승 이상을 거둔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지만, 장명부와 최동원이라는 거목에 가려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살아야 했다.

▲ 본격적인 마무리 시대의 개척자, 김용수 김용수는 프로 2년차이던 1986년부터 전문마무리투수로 나섰고, 선수인생의 대부분을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청룡과 트윈스를 거치며 팀의 전력이 약할 때도 일정한 선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그는 트윈스가 경험한 두 번의 우승(90년, 94년) 때 모두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두 해만큼은 그가 선발투수로 활약했던 해였다

 

마무리의 탄생, 하지만 아직은 에이스의 시대

 

그해 OB 베어스는 마무리투수라는 것을 선보이며 '에이스 없이 강팀이 되는 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공룡을 공격하는 쥐떼처럼, 에이스가 이끄는 팀들을 포위 공격해 한 경기 내주고 두 경기 뺏어내며 승률 1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우승자결정전은 김시진과 김일융 '투탑'의 팀 삼성과 최동원 '원탑'의 팀 롯데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그나마 왕좌에 오른 것은 '둘보다 더 강한 하나'를 가진 롯데였다. 그 해를 통해 한국야구가 얻은 것은, 엉뚱하게도 '역시 야구는 에이스 놀음'이라는 왜곡된 깨달음이었다.

 

한국야구가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껴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 해가 지난 뒤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의 김용수는 약체팀을 최약체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고, 90년대 초반의 송진우와 선동열은 강팀을 최강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또한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1984년에 OB 베어스가 조금 더 전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두 해라도 일찍 마무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한두 해라도 먼저 투수들을 '아낀다'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면,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숱한 영웅들의 이름 앞에서 적지 않은 '비운'의 딱지들이 지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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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4] - 1985년 후기리그 패권을 가른 롯데 대 삼성의 5연전

한국시리즈 거른 유일한 1985년, 쇼킹했던 기억

 

지난 두 시즌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5년, 개막전에서 무명의 정성만이 천하의 최동원과 맞대결해 5대 1의 완투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날인 3월 31일에 롯데의 신인투수 박동수에게 완봉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꼭 한 달 뒤인 4월 30일 최계훈이 MBC를 상대로 완봉승을 얻어낼 때까지 무려 30일 동안 단 한 번도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고역을 치르게 된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18연패의 신기록이 작성된 것이 바로 그 해였다.

 

그 18연패가 몰고 온 파장은 작지 않았다. 18번째 패배를 당했던 4월 29일에는 김진영 감독이 '휴가'라는 명목의 해임 통보를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도 자금난을 겪고 있던 모기업 삼미가 야구단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끊어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연패를 끊은 다음 날인 5월 1일 구단 매각이 발표되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3년 반 동안 120승 211패 4무라는 눈물겨운 성적을 남기고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먼저 낙오한 팀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 18연패는 1985년의 한국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더 충격적인 연패는 따로 있었다. 어차피 꼴찌인 바에 연패의 길고 짧음이란 그저 수식어를 결정하는 문제일 뿐이었고, 18연패의 신기록 속에서도 삼미는 1할 대 승률에 머물렀던 3년 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후기리그의 절정이던 8월 중순에 롯데가 경험했던 사건은, 그 해를 30년의 프로야구사에서 유일하게 한국시리즈를 거른 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미의 18연패 vs 롯데의 8연패

 

그 해 최강팀은 김시진과 김일융, 그리고 이만수와 장효조라는 리그최강의 쌍두마차를 공수 양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였다. 물론 프로출범 이래 그제까지 최강으로 평가받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늘 뭔가 예상할 수 없었던 허점과 어그러짐 때문에 조역에 머물러야 했던 삼성이었지만, 그 해만큼은 달랐다.

 

당대 최고의 작전능력을 가진 김영덕 감독이 취임 2년째를 맞이해 선수단에 대한 장악력을 키웠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 해 고의패전이라는 추태를 벌여가면서 골라낸 파트너 롯데에게 대역전패를 당한 망신이 조여 놓은 긴장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 해 삼성 라이온즈는 가장 강했고, 가장 명민했으며, 가장 냉철한 팀이었다. 

 

반면 삼성을 제외한 5개 팀의 전력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삼미가 전기리그 개막 이튿날부터 내리 18연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경쟁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청보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기리그에는 한때 선두권까지 바라보며 4위로 올라선 것만 보더라도 그랬다. 저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이 드러나는 형편이었고, 그 강점들과 약점들이 맞물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천적관계가 두드러진 한 해였다.

 

그 결과 전기리그에서 2위 OB와 5위 MBC 사이의 승차는 고작 5.5경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준이 다른 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OB를 무려 11경기차로 떼어놓으며 간단히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741의 승률은 기별 최고기록이었다.

 

그리고 후기리그 들어서도 삼성 라이온즈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 해에 OB 베어스가 전후기 통합승률 1위를 차지하고도 전후기리그 각각 2위에 머물렀던 탓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1985년부터는 종합승률제가 도입되었기 때문. 즉,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전·후기리그 통합승률 1위 팀에게도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 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에, 84년처럼 전·후기리그 우승팀과 종합승률1위 팀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가려야 했다. 따라서 전기리그 우승팀인 삼성 역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확보하지는 못한 셈이었고, 따라서 후기리그에서도 최선을 다 해 종합승률 1위에 올라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리그 들어서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그제까지 경험한 네 번의 시즌 동안 늘 시즌 내내 강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흐름을 만나면 단기간은 최강의 팀으로 변신하곤 했던 롯데 자이언츠였다. 그 해는 82년, 84년과 달리 봄이나 가을이 아닌 여름에 그 흐름이 도래했고, 롯데 자이언츠는 7월 말부터 연승행진을 벌이며 일거에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 무렵, 삼성 라이온즈는 2진급이었던 진동한과 양일환을 중용하며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김시진과 김일융이 오랜만에 등판하는 날에도 전기리그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

 

반면 롯데는 최동원 한 사람에게만 의존했던 지난 해와 달리 제법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여전한 원투펀치 최동원과 임호균에 재일동포 출신의 김정행이 가세했고 신인 박동수와 양상문까지 다섯 명의 투수가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정상적인 마운드'를 비로소 운용하고 있었다. 타선에서는 김용철이 부진했지만 김용희, 유두열, 홍문종이 전기리그에 이미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공격 각 부문의 10위권에 나란히 진입해있을 만큼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그 해 롯데의 '보약' 노릇을 했던 것은 7월 26일부터 31일 사이에 벌어진 5연전을 고스란히 헌납하고 선두권경쟁에서 튕겨 나가버린 해태 타이거즈였다. 롯데는 그 5연승을 발판 삼아 후기리그 단독선두로 질주했고, 우승을 가시권에 넣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고개를 만난 것이 8월 6일이었다.

 

▲ 김시진 고교시절부터 늘 최동원, 김용남과 더불어 '개띠 삼총사'라 불렸던 1958년생의 명투수. 늘 최동원에 밀려 2인자에 머물렀지만 1985년을 기점으로 역전, 1987년에는 최동원보다 11승 앞선 채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라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고비에 걸려 넘어지다

 

8월 6일과 7일에는 부산에서, 그리고 하루 건너 9일부터 12일까지는 대구에서 선두 롯데와 2위 삼성의 5연전이 치러져야 했다. 후기리그 일정의 정확히 절반을 막 넘어서던 그 시점에서 롯데와 삼성의 승차는 4.5였고, 삼성과 3위 해태의 승차는 2였다. 롯데로서는 2승만 건져도 승차 3.5를 유지하며 선두자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고, 삼성으로서는 더 이상의 격차를 허용하면 2위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였다.

 

물론 삼성이 다섯 경기를 모두 잡아내 순위를 뒤집는다거나, 반대로 롯데가 삼성 마운드를 전멸시키며 중위권 싸움을 안갯속으로 밀어 넣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미 전기리그 우승으로 배가 불렀던 삼성이나 이변이 없는 한 후기리그 우승이 안정권에 들어왔다고 본 롯데 모두 그런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큰 불만이 없다는 심산이었다. 

 

부산에서의 2연전은 말 그대로 탐색전이었다. 롯데는 1차전에 박동수를 세웠고 삼성은 진동한과 권영호로 맞섰다. 그리고 타격전 끝에 7대 5로 삼성이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도 롯데는 그 해 단 한 번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이진우를 내세웠고 다시 삼성 황규봉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로 몰리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결판은 3차전에 벌어졌다. 더 이상 밀릴 수 없었던 롯데에게는 '언제라도 필요한 1승을 만들어 줄' 구세주 최동원이 있었다. 8월 9일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 롯데가 최동원을 선발로 내보낸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삼성이 에이스 김시진을 그 경기에 등판시키는 맞불을 놓은 것이었다.

 

▲ 최동원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한국야구에서 '에이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이름이다. 당대 투수들의 평균적인 구속보다 10km이상 빠른 강력한 직구와 최고 수준의 커브를 무기로 국내무대와 국제무대를 휩쓸었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구단과 입단계약을 맺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약체팀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늘 비정상적인 무리를 감수하거나 자청했던 탓에 후배인 선동열 만큼의 오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다시 만난 숙적, 최동원과 김시진

 

만약 그 5연전에서 4승 이상을 잡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그 경기를 버리는 대신 4,5차전에 김시진과 김일융을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을 이였다. 잡을 경기와 버릴 경기를 뚜렷이 구분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선두 팀을 상대로 한 5연승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반대로 이미 전기리그를 우승한 삼성 입장에서는 져도 큰 타격이 없을 상황에서 최동원의 기를 꺾어보자는 모험을 걸어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흔들린 것은 김시진이었다. 동갑내기로서 고교시절부터 실업시절을 거치며 라이벌로 불렸지만 늘 결정적인 고비에서 패퇴하며 2인자로 낙인찍혔던 김시진으로서는 필생의 숙적을 상대로 또다시 썩 유쾌하지 않은 시험대에 오른 것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롯데는 1회 초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볼넷을 골라 출루한 데 이어 내야안타로 간단히 한 점을 만들어냈다. 김시진의 슬라이더는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감각이 무뎌진 듯 제구에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반면 최동원은 별다른 위기 없이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김시진은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고, 2회부터는 칼날같은 제구력을 자랑하는 예전의 김시진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주무기인 직구의 구속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시즌 내내 최동원에게 눌려있었던 삼성 타자들도 두 세 번 타순이 돌아오자 그 날의 최동원은 공략할 수 있는 상대임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5회에 배대웅의 중전안타로 동점을 만든 데 이어 6회에 들어서자마자 5안타를 집중시켜 4점을 뽑아내며 드디어 최동원을 쫓아낼 수 있었다.

 

김시진의 7.2이닝 5안타 2실점 호투에 힘입은 3번째 승리. 삼성은 그 날 경기를 통해 5연전에서 최대목표로 삼았던 3승을 이미 확보한 데다 최동원 마저 깨뜨리며 김시진과 타선의 기를 살려놓는 망외의 소득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내친 김에 두 번을 더 이기면 후기리그에서도 단독선두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고, 이미 '심리적 지지선'인 최동원 마저 무너진 롯데가 그걸 막아설 여력은 없어 보였다. 한국시리즈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많은 삼성으로서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전후기리그 우승과 통합최고승률을 모두 휩쓸며 그대로 통합우승을 확정짓는 것이 최선임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남은 두 경기에서 롯데가 그런 삼성의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하루 쉬고 열린 11일 경기에서는 장효조, 배대웅, 김용국, 오대석이 내기라도 하듯 홈런포를 날려대며 김정행이 버틴 롯데를 12대 5로 난타했고, 12일의 마지막 5차전에서는 김일융과 황규봉의 2인조가 이진우, 양상문으로 맞선 롯데를 다시 3대 1로 꺾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5연승.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4.5경기차는 뒤집혀 삼성이 0.5경기차 선두로 올라서는 결과가 빚어졌다.

 

롯데는 그 충격의 5연패를 시작으로 13일 잠실에서 청룡에게, 다시 16일과 18일에는 광주에서 그 해 내내 쥐고 흔들었던 타이거즈에게마저 반격을 당하며 연패행진을 8로 늘려놓은 채 선두싸움을 계속할 기력을 잃고 만다. 반면 삼성은 5연전이 끝난 뒤 한 호흡 쉬어 8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무려 13연승의 아찔한 질주를 벌이며 전기리그에 작성한 최다연승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최동원을 상대하며 부활한 에이스 김시진은 그 연승 기간 중 무려 6승을 추가하며 최동원과의 통산승수 경쟁에서도 한 발 앞서 나가게 된다.

 

삼성이 후기리그마저 석권하며 그 해 통합우승을 결정지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였다. 하필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부산에서 김빠진 2위를 유지하고 있던 롯데와 다시 3연전을 치르게 됐을 때 삼성은 이미 매직넘버 2를 남겨두고 있었고, 단 한 경기만이라도 지면 그대로 안방에서 상대팀의 우승축하연을 열어주어야 했던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3연전의 첫 경기였던 17일에 선발등판한 삼성의 김시진을 뚫어낼 힘이 롯데 타선에는 남아있지 않았고, 패기를 무기 삼아 한 때 2인자로까지 떠올랐던 롯데의 박동수 역시 기세가 오른 삼성 타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기는 7대 4로 끝났고, 롯데는 홈인 구덕구장에 삼성 측의 샴페인 반입을 허락하지 않는 소심한 복수로 분을 삭여야 했다.

 

▲ 선동열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올라섰고, 1985년에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데뷔전에서 삼성의 김일융과 맞대결해 패배했지만, 그 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챙겼고, 이듬해부터 곧장 김시진, 최동원과 에이스 삼국시대를 열었다. 물론 프로무대에서의 성적은 압도적으로 선동열의 우위였지만, 그 역시 김시진의 통산승수 기록과 최동원의 통산탈삼진 기록을 돌파하는 시점에서 한국무대에 대한 싫증을 느꼈을 만큼 두 선배의 벽은 거대한 것이었다

 

왜곡된 기억, 치열했던 1985년

 

올드팬들에게 1985년의 프로야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은 삼성의 13연승과 통합우승, 그리고 삼미의 18연패다. 그래서 늘 승패가 결정된 경기들로 시즌이 흘러간 무료한 시즌이었던 것 같은 윤색된 기억이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출범 4년째를 맞은 그 해에도 프로야구는 진화하고 있었고, 전력의 격차도 꾸준히 좁혀지고 있었다. 어느 팀이라도 페이스의 과열을 자제하지 못하면 연승 끝에 곧바로 연패에 빠지며 서로 물고 물리는 잔인한 게임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한두 명의 에이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원시적인 운영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그 해 종합승률 1위 팀과 최하위 팀 사이의 경기차는 38이었다. 41까지 벌어졌던 1982년에 버금가는 큰 격차였다. 하지만 1위 팀과 2위 팀 사이의 격차만 무려 18.5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시즌 중의 열기는 결코 차갑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삼성 라이온즈라는 단 한 팀이 너무나 강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최강팀이 시즌 내내 6개 구단 중 가장 독한 마음가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 시즌이었던 1984년의 대참사가 낳은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흐름의 한 고비에 두 에이스의 특별한 대결이 있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늘 가장 높은 곳에서 맞대결해 늘 이겼던 최동원과 늘 졌던 김시진 사이의 오랜 라이벌전이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바로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던 두 명투수의 승부는 이제 '투혼'에서 '체력'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최강팀 삼성과 약체팀 롯데라는 배경의 힘이 그렇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곧 두 사람의 라이벌전에 대해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선동열이라는 이름의 괴물 투수가 프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바로 그 해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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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5] - 한국프로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이뤄진 1986년

한국 최초 아이돌 야구스타, 그러나 2인자들이 해냈다

 

"나는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가도록 던졌고, 성준은 1년을 절치부심 칼을 간 끝에 팀을 3관왕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가 됐어요. 하지만 노준이 발목이 부러진 것 말고는 그 해 사람들에게 기억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고교야구의 인기가 최정점을 찍던 시절의 주역 중 한 사람인 김건우가 술 한 잔 걸친 자리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했던 이야기다.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천재와 범재, 1인자와 2인자, 혹은 스타와 조연의 처지에 관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말이기도 했다.

 

1981, 고교야구의 절정기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1981, 한국야구의 메이저무대였던 고교야구 최고의 팀은 단연 선린상고였다. 선린상고의 쌍두마차 박노준과 김건우는 2학년생이던 1980년에 이미 한 해 선배들인 선동열(광주일고)과 이상군(천안북일고)을 때려 부수며 전국적인 선수로 자리잡고 있었다.

 

같은 해 경북고의 성준, 진흥고의 김정수 등이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선린상고 듀오와는 이름값에서 한 단계의 격차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중에서도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박노준이었다.

 

박노준은 리틀야구 시절부터 나가는 대회마다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던 '천재'였다. 그리고 고교 2학년이던 1980년에는 이미 초고교급으로 불리던 대형투수 선동열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맞대결해 타자로서는 홈런 포함 3안타 3타점을 뺏는가 하면 투수로서도 5이닝 2안타 1실점으로 광주일고 강타선을 잠재우는 KO승을 거두기도 한 1인자였다.

 

게다가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에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썼던 모자와 헬멧이 풍기던 과묵한 카리스마가 '독일병정'이라는 멋진 별명을 붙게 했다. 여고생들이 매일 선린상고 담장 안으로 종이비행기 편지를 수백 통씩이나 날려대는 진풍경을 연출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 박노준과 김건우 1980년과 1981년, 선린상고는 투타 양면에서 고교무대 최고수준의 기량을자랑했던 박노준과 김건우을 앞세워 가장 강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팀으로 군림했다.(좌 : 박노준, 우: 김건우)

 

그렇게 한국현대사 최초의 아이돌 스타였다는 이야기까지 듣는 박노준은 모든 동갑내기 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목표였으며,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을 들쑤시는 원흉이기도 했다. 그것은 각자의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박노준을 쓰러뜨려야 했던 성준뿐만 아니라, 늘 뒤지지 않은 활약으로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도 늘 초점 흐린 배경으로만 남겨지던 김건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로지 박노준 하나만을 떠올리며 절치부심했던 성준은 그 해 경북고에 전국대회 3관왕의 영광을 안길 수 있었고, 뒤늦게 투수훈련을 시작한 김건우는 그 해 7월 미국에서 열린 제 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한 선린상고는 불운의 절정이었던 1981826, 그 모든 영광들을 한 편의 비극에 쓸려보내고 말았다.

 

그날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던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덜 마른 그라운드에 박히면서 발목이 겹겹이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미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간 상태로 전날 완투하는 무리를 감수했던 김건우는 다시 마운드에 올라 투혼을 던졌고, 성준이 이끌던 경북고는 '박노준 없는 선린상고에게마저 밀리는 대참극'을 피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국 역전에 성공하면서 우승컵과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손에 쥔 경북고의 성준은 '박노준을 꺾겠다는 일념으로 땀흘려왔다'고 비장한 소감을 남겼고, 이튿날 우승컵을 들고 박노준의 병실을 찾아 우정의 악수를 건네는 풋풋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미 TV 카메라와 야구팬들의 모든 관심은 결국 경북고가 우승을 확정 짓고 3관왕에 오른 동대문야구장 대신 박노준이 긴급수술을 받고 누워있던 병원으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 고교야구의 후폭풍, 1986년의 프로야구

 

1981년의 고교야구세대들이 프로무대로 진입한 것이 바로 1986년이었다. 그 해 대학을 졸업한 박노준, 김건우, 성준, 김정수가 각각 OB, MBC, 삼성, 해태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한 발 뒤에 늘어서있던 김태원, 차동철, 한희민 등이 역시 MBC, 해태,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게다가 한 해 전에 입단한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가 그제서야 1군 무대에 진입하면서 사실상 함께 데뷔하게 된 이상군이 있었고, 상무를 거치느라 두 해를 거른 윤학길도 있었다.

 

물론 '최대어'는 박노준이었다. 그 박노준을 잡기 위해 서울 팀 MBCOB가 신경전과 협상을 벌인 끝에도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처음으로 동전던지기를 해야 했다. 또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명권을 확보한 OB'선동열급 대우'를 요구하던 박노준과 계약조건을 놓고 피 말리는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예상을 완전히 깨는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 누적된 무리와 부상, 그리고 프로입단 후에도 투수와 타자를 놓고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던 여파로 박노준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기나긴 침체의 시간을 시작해야 했던 것. 반면 늘 그에게 밀려왔던 2인자들이 앞 다투어 스포츠신문의 1면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타자로 방향을 잡았다가 해외전지훈련장에서 준비해 간 배트를 모두 부러뜨리는 바람에 '그냥 놀 수는 없어서' 투구연습을 하다가 코치의 눈에 띈 김건우는 역대 데뷔시즌 최다승인 18승을 기록하며 당당히 신인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김건우와 고교시절에는 숙적으로, 대학시절에는 절친한 동반자로 맺어졌던 성준이 15승으로 뒤를 이었고, 이상군이 승수는 12에 불과했지만 혼자 243.1이닝을 던지며 3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꼴찌팀 빙그레의 대들보 노릇을 해 찬사를 받았다.

 

아마추어 시절의 이름값으로는 결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았던 윤학길 역시 1승에 머물며 박노준과 함께 '뜻밖에 부진한 거물들' 범주에 묶였지만, 9승을 올리며 딱 기대만큼의 가능성을 입증한 김정수와 한희민도 있었다. 어쨌든 그 해 그렇게 수준급 이상의 투수들이 프로무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 가을까치 김정수 1981년, 서울에 박노준과 김건우가 있고 대구에 성준이 있다면 광주에는 김정수가 있었다. 역대 최강의 좌완 강속구 투수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그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인 투수는 없었다.

▲ 성준 박노준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1981년에 경북고에 전국대회 우승컵 3개를 바치며 우뚝 섰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교시절의 성준은 박노준의 길고 짙은 그늘에 가려진 2인자일 뿐이다

 

2인자들의 투혼승부, 김신부와 차동철의 15이닝 완봉 맞대결

 

하지만 그 해 신인투수들이 보여준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727일 인천 도원야구장이었다. 그 날 청보 핀토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각각 김신부와 차동철이었고, 두 사람 모두 그 해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이었다.

 

차동철은 치열했던 1981년 광주일고를 이끌고 늘 전국무대에서 일정한 성적을 내던 에이스급 투수였다. 하지만 팀 내에서는 한 해 선배 선동열과 비교되고, 전국무대에서는 박노준, 김건우, 성준 같은 동기생들과 비교되며 조명받지 못했던 처지였다. 건국대를 거쳐 입단한 그 해에도 같은 광주 출신의 김정수에게 밀리며 큰 기대를 받지는 못 하는 처지였다.

 

반면 김신부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를 거친 재일교포였다. 한국만큼이나 대단한 고교야구 열풍이 불었던 1981년 일본에서 김신부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고시엔 우승을 이끌며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긴테스에 전체 1번으로 지명되었던 김의명과 관서지역에서 오랜 라이벌관계를 맺어온 투수. 김신부 역시 난카이에 1차로 지명됐고 김의명과 나란히 2억 원에 가까운(6천만 엔) 초고액의 계약금을 요구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결국 4년간 1군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경험하지 못한 채 방출된 뒤 한국으로 건너왔고, 그 시점에서는 대학에서 4년을 보낸 차동철과 똑같은 23세의 동갑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프로야구 1군 무대'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처지였다.

 

그 두 투수가 만났던 727일이 그 해를 상징한다고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 날 두 투수는 나란히 15이닝을 던졌고, 두 사람 모두 단 한 점의 실점도 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역사상 전무후무한 '15이닝 완봉 맞대결 무승부경기'였다. 차동철의 기록은 10피안타 6탈삼진이었고 김신부의 기록은 8피안타 10탈삼진이었다.

 

김신부는 원래 정통파 스타일에서 사이드암을 거쳐 언더핸드로 전향한 스타일로서, 직구도 시속 130킬로미터를 간신히 오르락내리락하던 '감속구 투수'였다. 그리고 차동철 역시 빠르기보다는 변화구로 승부하는 축이었는데, 특히 투심 스타일의 직구와 포크볼 같은 '떨어지는 공'을 섞어 던지면서 헛스윙을 유도하는 투수였다.

 

나름대로 강했지만 더 강한 이들때문에 묻혔던 선수들. 그리고 힘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우회하는 스타일로 버텨냈던 투수들. 그 두 사람은 그 해 나란히 10승을 올리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고, 또 각자의 팀에서 버려진 먼 훗날 LG 트윈스에서 잠시 한솥밥을 먹는 인연으로 재회하기도 했다.

 

한국야구의 첫 번째 세대교체, 그리고 업그레이드

 

세대의 구분이 꼭 10년이나 10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이 나고 성장하는 것이 꼭 미리 정한 일정대로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1986년, 한국프로야구에는 유례 없이 좋은 투수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들은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축투수로 자리를 잡으며 그동안 괴물같은 선수 한 명의 출현에 좌지우지되며 널뛰기하던 각 팀의 안정적인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 더해 지난 해 후반기에야 첫선을 보였던 2년차 선동열이 무려 262.2이닝을 소화하면서도 0.99라는 기이한 숫자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압도했다.

 

역시 실업팀을 거쳐 뒤늦게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2년차 투수 김용수도 그 해 35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며 마무리투수의 시대를 안착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섯 해째를 맞은 한국프로야구가 한 번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경험했고, 또한 뚜렷한 '업그레이드'를 완성했다.

 

더구나 박노준과 윤학길이라는 선두주자들이 출발선에 걸려 넘어졌음에도, 김건우와 성준, 혹은 김신부와 차동철 같은 2인자 3인자들이 활개쳐 날아오르며 그려내던 싱싱했던 풍경. 바로 그런 것들이 1986년을 더욱 멋진 해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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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6] 최동원과 선동열, 한명은 무너져야 했다

1987년 5월 16일,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세대교체 순간

 

남자의 삶에서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다. 아버지와의 팔씨름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힘을 쓸 수 없었던 날이 그 중 하나다. 스무 살을 조금 넘은 언제쯤 오랜만에 아버지의 손을 맞잡은 순간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진 저항을 느끼며, 혹시 일부러 져주시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지만, 결국 이제 이기고 지는 것이 나의 마음에 달리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울림 때문에 주춤거렸던 단 몇 초의 순간 말이다.

 

물론 아버지뿐이고, 남자들뿐이겠는가. 높고 멀고 단단하게만 보이던 앞 세대의 벽을 넘어서는 순간 모든 뒤 세대들이 느끼는 찰나의 감상이 그렇다. 해냈구나 하는 짜릿함, 그리고 그것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게 만드는 까닭 모를 서글픔. 그래서 사생결단 죽을힘을 짜내야 할 만큼 팽팽하게 맞선 채 담장 한 끝에 걸터앉아 어제와 오늘이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인정하는 한 순간이란,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멋진 세대교체에 대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1987년 5월 16일 사직야구장에서 벌어진 한 판의 처절했던 승부를 사람들이 두고두고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날, 오직 세월이 흘러가는 방향의 앞쪽과 뒤쪽에 서있었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우와 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두 명의 전설적인 투수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힘을 뿜어내 아찔한 평행선을 그려내며 앞 세대와 뒤 세대 모두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뛰어 넘은 큰 별, 최동원

 

 

▲ 최동원 최동원은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다.

 

최동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남고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대최강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던 1977년과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1978년 이후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막 대학 1, 2학년이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그는 연세대와 실업팀 롯데에서 늘 팀이 치르는 경기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는 마당쇠였고, 그렇게 거의 혼자 힘으로 늘 팀을 정상에 끌어올리는 슈퍼맨이었다. 부상으로 거르다시피 했던 1979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대학무대에서 한 번 이상씩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실업리그와 캐나다 대륙간컵대회에서 다시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특히 혼자 6차전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지다시피하며 김시진이 이끌던 경리단을 물리치고 롯데의 역전우승을 이끌었던 1981년 실업리그 코리언시리즈는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곧 투수, 혹은 야구 자체를 상징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야구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의 이름 속에서도 최동원의 이름이 각별한 빛을 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시속 150킬로미터 중반대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불필요한 구속이었다.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공을 던지는 투수가 몇 되지 않았던 데다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공의 빠르기란 늘 상대적인 것이어서 시속 140 킬로미터의 공을 빠르다고 느끼는 타자들에게는 시속 145킬로미터의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알루미늄 배트란 시속 160킬로미터가 넘는 공을 던지더라도 힘으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적절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구속을 유지하며 더 많은 타이틀과 더 많은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역대 최고의 반열을 다툴 수 있는 것이 그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승부의 경기가 아니라 기록경기에라도 나선 선수처럼, 상대타자가 아닌 자신의 한계와 싸우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빠른 공을, 가장 정확히,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이 던지곤 했다.

 

그래서 그의 공은 요즘처럼 '공의 위력으로' 배트를 누르며 파울을 양산하는 '강한 공'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속구는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의 빠른 공과 시속 10킬로미터 이상의 차이를 내는 비현실적인 스피드로 상대 타자의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비웃는 '마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육체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로 절대적으로 많은 공을 던진 그의 방식은 그 한계의 도래를 재촉했다. 프로무대에서 1984년에 또다시 시즌 27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전담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을 비롯해 4년간 75승을 기록한 뒤 맞이한 1987년, 최동원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이미 신체능력은 절정기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물론 그 시절의 서른이란, '운동만으로 먹고 사는 것'을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절 야구인들이 스스로 한계로 설정하던 사회적 정년이기도 했다.

 

'제 2의 최동원'을 넘어 '국보투수'가 된 선동열

 

▲ 선동열 선동열의 강점은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다. 그 해 광주일고 3학년이던 선동열은 봉황기대회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더니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팀을 결승까지 이끌며 감투상을 받았고, 대통령기대회에서는 팀에 5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을 안기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한 해 내내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 진학한 1981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 창설대회에 참가해 초대 MVP에 선정되며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고, 대학리그경기에서 시속 154킬로미터의 구속을 기록하며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역시 동년배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였고, 해마다 몇 명씩 야구기자들이 선심 쓰듯 붙여주었던 '제 2의 최동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1982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그는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넘어서게 된다. 선동열은 대학 2학년, 만 19세의 나이로 그 대회 대표로 발탁된 데 이어 컨디션 난조를 겪던 기존의 대표팀 에이스들인 최동원과 김시진을 대신해 난적들인 미국과 대만, 그리고 사실상 우승을 놓고 맞붙은 일본과의 최종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경기를 모두 완투해 3승(평균자책점 1.00)을 기록하며 감격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결국 대회 MVP에 오르며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던 것이다.

 

그렇게 일찌감치 거물로 자리매김한 덕분에 1985년에는 프로와 실업리그가 법정싸움까지 벌이는 대소동 끝에 '전기리그는 근신하는' 조건으로 프로무대를 밟았고, 그 해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986년, 선동열은 24승을 기록하며 프로무대 슈퍼에이스의 반열에 합류했다. 더구나 그 해 그는 19번이나 완투하는 등 262.2이닝을 던지는 강행군 속에서도 0.99라는 묘한 숫자를 기록지에 남겼는데, 그것은 한국프로야구사상 전무후무한 '0점대 투수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선동열 역시 최동원에 버금가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무기는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최동원이 공을 던지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함께 불끈불끈 열이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면, 선동열이 공을 던질 때는 관중석과 브라운관 넘어서까지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선수는 그렇게 닮은 듯 다른, 혹은 상반된 방식으로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거인들이었다.

 

1986년과 1987년,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던 시대

 

1984년에 정규리그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기록하며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던 최동원이라는 태양은 85년 20승, 86년 19승으로 중력을 무시하는 궤도를 그렸고, 1985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동열은 86년과 87년에 거푸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섭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선동열이 24승과 0.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 1986년, 최동원 역시 19승과 1.55를 기록하며 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오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해에는 최동원과 선동열이 두 번에 걸쳐 선발 맞대결을 벌여 한 번씩의 완봉승과 한 번 씩의 완투패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떠오른 태양과 아직 지지 않은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놓고 불꽃을 튀기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처 판가름내지 못했던 승부가 이어진 것이 1987년, 5월 16일이었다. 압도적인 꼴찌 청보 핀토스를 제외하면 1위부터 6위까지 4경기차 이내에서 엎치락 뒷치락하던 전기리그의 중반이었고, 특히 해태와 롯데가 1.5경기 차로 중위권에 엉킨 채 치열한 순위 싸움을 벌이던 무렵의 중요한 고비였다. 그 대목에서 선동열과 최동원이 선발투수로 나선 것은 해태와 롯데 모두 '자존심'이니 '흥행카드'니 하는 한가한 생각을 할 여력이 없이 저마다 '이기면 선두권을 넘볼 수 있지만, 지면 하위권으로 떨어진다'는 절박함 속에서 꺼낸 필승카드의 대충돌이었다.

 

1회 초와 말이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되며 싸늘하게 시작된 경기는, 그러나 2회 말 롯데가 김용철의 볼넷과 김민호, 정구선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해태 내야실책을 틈타 먼저 2점을 선취하며 균형이 깨졌다. 사실 선동열은 고교와 대학 시절 종종 경기 초반에 실점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던 투수였다. 이제 완성형 투수의 상징인 20승을 넘어선 데 이어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완벽'이라는 수식어까지 달게 된 그였지만, 그 날의 초반 난조 역시 천하의 최동원을 맞상대하는 한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떨림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동원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다. 몇 해 동안 조금도 늦추지 않고 전력투구만을 강행해온 무모한 행보 탓인지 구속은 '최동원'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렇게 무뎌진 속구는 커브의 위력마저 반감시키고 있었다. 그는 3회 초 2사 2루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추격의 1점을 내주었고, 5회에도 선두타자 김일권에게 안타를 내준 데 이어 차영화에게 큼지막한 2루타까지 내주는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해태 김무종의 번트 실패 덕분에 선행주자 김일권을 잡아낸 데 이어 롯데 포수 김용운이 정확한 홈 블로킹으로 해태의 대주자 이순철까지 홈에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겼지만, 위기는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날의 승부의 핵심은 힘과 기술이 아닌 자존심과 뚝심이었다. 선동열은 초반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곧 냉정을 되찾았고, 최동원은 초반의 안일함을 자책하듯 열정을 끌어올렸다. 경기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선동열은 들쭉날쭉하던 공을 정밀하게 스트라이크존 경계선에 꽂아넣기 시작했고, 최동원은 구속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만화에서는 늘 냉철한 안경잡이 에이스로 그려지던 최동원이 불의 기운으로 싸웠다면, '해'라 불리던 선동열은 물의 기운으로 맞서는 형국이었다.

 

해태와 롯데의 타자들은 삼진, 혹은 기껏해야 내야 땅볼을 주고 받으며 부지런히 타석과 더그아웃 사이를 오고갔다. 하지만 흐름이 이어지는 한 이미 초반에 만들어진 한 점의 열세를 안은 해태 쪽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회 초,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선두타자 6번 한대화가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7번 김일권에게 보내기번트를 지시했고, 8번 타순의 포수 장채근마저 빼고 왼손 타자 김일환을 내세우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최동원은 그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 어느 것보다도 짜릿했을 1승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결국 김일환이 우익수 키를 넘기는 커다란 2루타를 때려 2루의 김일권을 불러들이며 동점을 만들었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늘 경기 전에 이미 남들 한 경기 던질 만큼의 공을 뿌리며 몸을 풀던 최동원의 어깨는 이미 한계를 한참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롯데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리고 늘 그 자존심에 대한 책임을 완벽하게 져왔던 최동원을 함부로 내릴 수도 없었다. 상황은 여전히 동점이었고, 더구나 상대는 다른 투수도 아닌 선동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태 쪽에도 있었다. 선동열 역시 만만치 않게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지만 네 살이나 많은 최동원보다 먼저 '체력'을 핑계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차례 최동원을 흔들어보느라 대타와 대주자 카드를 꺼냈던 해태는 주전포수 김무종과 백업포수 장채근, 그리고 포수 수비가 가능한 이건열 마저 모두 소진해버린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신들린 연장투구, 전설이 된 마지막 승부

 

결국 연장 10회, 마운드에 다시 선 것은 최동원과 선동열이었다. 그리고 해태는 내야수 백인호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앉는 진풍경까지 연출해야 했다. 하지만 경기의 양상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삼자범퇴, 삼자범퇴. 어차피 변화구를 잡아줄 수 없을 초보 포수에게 선동열이 던질 수 있는 것은 직구 뿐이었고, 최동원 역시 최대한 투구간격을 좁히며 직구 위주의 간결한 피칭을 이어갔다.

 

한계를 넘어선 투수들의 질주를 지켜본 적이 있는 이들은 그 현기증 나는 몰입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예컨대 박충식이, 예컨대 박정현이 체력이 모두 고갈되어버린 순간부터 마치 초인으로 변신한 듯 묵묵히 놀라운 위력의 공을 꽂아 넣으며 주위의 말문을 막아버리던 장면들 말이다. 말 그대로 '신들린 듯' 던지는 투수들. 바로 그렇게 최동원과 선동열은 신들린 듯 다시 6이닝을 던졌고, 연장 15회 말 선동열이 롯데의 마지막 세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아내며 길고 긴 승부의 끝이 맺어졌다.

 

232개의 공을 던져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을 기록하며 2실점한 선동열, 그리고 209개의 공을 던지며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과 역시 2실점을 기록한 최동원. 물론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 순간 이후 두 선수 사이의 맞대결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그 1987년은 최동원의 전성기 마지막 해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이듬해 7승으로 주저앉은 데 이어 1989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는 충격을 겪어야 했고, 다시 그 다음해인 1990년에 패전처리를 전전하는 수모 속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 선동열은 좀 더 높은 곳으로 떠올랐고, 최동원 마저 사라진 마운드에서 그는 한국야구의 정점으로 좀 더 오래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그 해의 치열했던 맞대결을 끝으로 최동원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선동열의 시대는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 선동열 vs 최동원 1987년 5월 16일, 두 명의 전설적인 투수는 15회까지 팽팽하게 마주 달리며 한국프로야구의 기념비를 세웠다.

▲ 최동원과 선동열 최동원과 선동열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름들이다.

그런 이들을 '전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넘치는 일이 아니다.

 

최동원과 선동열, 여전히 그 이름이 주는 떨림

 

다시 십 수 년이 흘렀고, 이제 선동열의 시대마저 흘러가 버린 지 오래다. 그 뒤로 이상훈이 있었고, 정민태가 있었고, 다시 이제 류현진과 김광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1987년 5월 16일 이후 그렇게 처절한 저항과 충돌 속에서 화려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야구장에서 세월은 다시는 그렇게 굵은 마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미 흘러 지나간 시대의 영웅들이었던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작지 않은 떨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과 기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 느끼고 상상하는 우리 삶의 눈물겹도록 엄숙한 단면들 때문이다. 한 경기가 아닌 하나의 삶이, 그리고 한 시대가 결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님'을, 그리고 '멋진 끝이 멋진 시작을 낳을 수 있음을' 말이 아닌 몸으로 증명한 한 순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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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7> 1988년, 장호연과 이동석의 노히트노런

무릎꿇은 선동렬, '노히트노런'이 나올 줄이야

 

선발투수가 단 한 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은 채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노히트노런(No hit - No ru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점수와 안타 외에 4사구나 실책으로라도 한 명의 주자도 살려 내보내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한다면 퍼펙트게임(perfect game)이라는, 한 층 더 명예로운 기록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노히트노런이란 대개 아홉 이닝동안 4사구나 야수들의 실책으로 한두 명을 내보내는 것만으로 상대타선을 봉쇄하는 경우에 완성된다. 하지만 갑작스레 굵어진 빗방울 때문에 강우콜드게임으로 경기가 끝나버리는 경우 5회만 던지고도 노히트노런 기록을 수립하는가 하면(1993. 5. 13. 사직. 박동희), 팀 타선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 단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하는 통에 10회를 무안타무실점으로 틀어막고도 연장선 투수교체로, 아무 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배영수).

 

물론 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고 해서 투수에게 2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당한다고 해서 상대 팀이 2패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나오는 기록이 아니다보니 삼십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도 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언급되고 되새겨진다. 그래서 그 영광도 보통의 1승보다는 많이 길어지고 그 치욕도 보통의 1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기게 이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도 역시 야구의 생명은 '기억'이고, '이야기'다.

 

유일한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

 

1988년에는 두 번의 노히트노런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순간에 튀어나온 의외의 기록이었고, 또 노히트노런 치고도 자주 보기 어려운 희귀한 기록들이었다. 그 두 번의 노히트노런은 야구가 각자 나름의 강함만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상대적'이고 '유연한' 경기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기도 했다.

 

그 희귀한 이변이 시작된 것은 시즌의 출발점인 4월 2일이었다. 그날 사직 개막전의 OB 베어스 선발로 내정되어있던 김진욱이 경기 당일 오전 연습 때 동료 타자 김광림의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

 

그 무렵 OB 베어스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데뷔 첫 해 시즌 17패로 넙치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도 이듬해 곧장 1.58의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을 따내는 배짱을 과시하기도 했고, 86년과 87년에는 13승과 15승을 올리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1988년 시즌을 앞두고 늘 그랬듯 길고 지루한 연봉싸움을 벌였던 그는 동계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컨디션은 아직 실전에 투입되기에 너무 이른 상태였다. 급작스레 뚫려버린 구멍에 그가 배치된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었다. 개막전이라고 하지만, 그 한 경기 때문에 시즌 첫 주의 선발로테이션을 한꺼번에 허물 수 없었던 김성근 감독으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노는 말'이 장호연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별명은 '짱꼴라'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말의 뜻과는 무관하게 장호연과 잘 어울리는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단단한 것 같으면서도 말랑말랑하고,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꼬여있는. 그래서 '짱돌'과 '꽈배기'와 '짜증' 같은 단어들을 한꺼번에 연상하게 만드는 스타일. 그래서 타자들은 늘 그의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하면서도 '다음에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너는 끝장이다'라는 자신감으로 불끈거렸다. 그러다가 정말 한 번 제대로 잡고 두들겨댄 날도 왠지 깔끔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속 120키로미터 후반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들이 딱 배팅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 그 날 갑자기 등판하느라 제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라는 약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롯데 타자들이 '다음 타석에는 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며 세 번씩 타석과 더그아웃을 오가고 나자 거짓말처럼 경기는 끝이 나버렸고, 전광판의 아랫 줄에는 무수한 '0'이 새겨져있었다. 볼 넷이 두 개, 몸에 맞는 공이 한 개 있었지만 병살타 역시 두 개 기록되며 타석 수는 28이었고, 투구수도 딱 99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점수 0, 안타 0. 삼진도 실책도 0. 노히트노런, 그것도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기록이었다.

 

 

▲ 장호연 구속은 느렸지만 기술과 제구력, 그리고 배짱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통산 100승-100패 이상을 기록한 단 9명의 투수 중 한 명이다.

▲ 이동석 선동열과의 완투맞대결 끝에 한국프로야구 제 4호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이동석. 지금은 군산상고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기록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

 

그로부터 불과 보름이 지난 뒤, 이번에도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7일, 광주 무등야구장.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던 자타공인의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와 그 해 역시 탈꼴찌 싸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창단 3년차의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더구나 해태의 선발은 '천하의' 선동열이었고, 그 선동열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이 선동열의 맞상대로서 미련 없이 버린 카드는 2년차 신인투수 이동석이었다.

 

전 시즌이었던 1987년, 선동열은 14승과 0.89라는 신화적인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더 단단히 하고 있었다. 반면 군산상고 출신임에도 고향팀 해태의 1차 지명자 3명 안에 들지 못해 타향팀으로 밀려났던 이동석이 거둔 성적은 고작 1승과 6.37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 두 투수의 맞대결에서 관전포인트라면, 이동석이 과연 몇 회까지 버티면서 다른 투수들의 어깨를 아껴주느냐 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그날 그는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에 이정훈과 장종훈이 가세하며 힘이 붙기 시작하던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무려 11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9이닝을 완투했고, 점수는 단 한 점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시즌 2패째를 당하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맞상대했던 이동석이 덜컥, 또 한 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동석이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장호연의 것보다도 더 놀라운 면이 있었다. 바로 '무4사구 노히트노런', 즉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개의 볼 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내주지 않는 기적적인 투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와 4사구 없이도 '퍼펙트게임'이 되지 못한 이유는 두 개의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7회 말과 8회 말, 유격수 장종훈이 1루수 강정길에게 던진 공이 뒤로 빠지면서 두 번 출루를 허용했던 것인데, 그 중 한 번은 장종훈, 한 번은 강정길의 실책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동석이 장종훈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날 두 팀을 통틀어 유일했던 점수를 만들어냄으로써 대기록의 전제인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7회 초 우월 3루타를 치고 출루한 뒤 선동열의 견제구가 뒤로 빠진 틈을 타 홈을 밟은 장종훈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 이동석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7승을 올리며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기존의 한희민, 이상군에 더해 이동석, 김홍명, 김대중, 김용남 등의 투수들이 전반기에만 54경기중 20경기를 완투한 대활약을 토대로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이후 이동석은 다시는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성적이나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7년만에 프로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그 뒤 그는 화순고를 거쳐 모교인 군산상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군산상고 훈련장에서 만난 이동석 감독에게 그날 노히트노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살짝 얼굴까지 붉혀가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그날 상대선발로 내가 나온다고 그러니까 해태 타자들이 전날 술을 엄청 먹어서 그런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빛나는 승리와 민망한 패배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날의 영광을 자세히 떠올려 자랑하기에는, 그날의 빛나는 승리를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남겨둔 채 프로선수로서의 삶을 마감했다는 자책과 후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철순이 아닌 방수원, 최동원과 선동열이 아닌 장호연과 이동석

 

대개 상대 타선을 세 차례 이상 상대하면서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구위가 필요하다. 머리싸움만으로 최소한 27번의 승부를 번번이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 타자가 '알고도 못 치는' 압도적인 직구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 위해 투수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무려 10개의 4사구를 내주고도 노히트노런에 성공한 A.J.버넷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강하고 빠른 공'을 가진 투수들이 대개 가지는 약점인 '제구력 불안' 때문에 허용하곤 하는 4사구는, 점수를 내주지만 않는다면 몇 개가 나오더라도 무방한 것이 노히트노런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박철순이 아닌 방수원, 그리고 최동원과 선동열이 아닌 장호연과 이동석이 노히트노런이라는 역사를 개척했다는 것은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그들을 통해 자신의 힘을 믿고 전진하는 정면승부 못지않게,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영리하게 유인하는 전략 역시 중요함을 한국야구가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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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8] 1989년, 최동원과 김시진의 맞트레이드

삼성 '자이언츠', 롯데 '라이온즈'를 상대하다

 

1988년 11월 23일, 삼성과 롯데가 김시진과 최동원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통산 최다승 투수와 통산 최다탈삼진 기록을 가진 최고액연봉의 투수가 서로 유니폼을 바꾸어 입게 된 사건이었다(자세한 내역은 롯데의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이 삼성의 김시진, 허규옥, 오대석과 맞바꾸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팀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가 기자들의 전화세례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시진과 최동원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경우에는 … 아무래도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것 같습니다. 30년간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가물가물합니다." (김시진)

"트레이드는 구단의 고유권한이어서 구단에 대해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성원해 준 부산 팬들을 떠나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최동원) - 경향신문 1988. 11. 23일 자

 

그러나 충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한 달여 뒤인 1988년 12월 20일, 이번에는 롯데의 김용철과 이문한을 삼성으로 보내고 삼성의 장효조와 장태수가 롯데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는 내용의 트레이드가 발표되었다. 물론 트레이드의 축은 통산타율 .350에 48홈런 305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와 역시 통산타율 .289, 87홈런 365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강타자 김용철이었다. 

 

호적에서 파내지는 아픔으로, 트레이드를 감수하다

 

1982년에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각 구단에게 연고지 출신 선수에 대한 독점적인 선발권을 무제한으로 보장해주고 있었다. 연고지 우선지명권이 '무제한'에서 10장으로 줄었던 1986년에도 2차 지명을 통해 선발된 다른 지역 출신 선수는 7개 구단을 통틀어 3명에 불과했다. 각 지역의 프로야구단에 본격적으로 외지인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1차 지명권이 3장으로 축소된 1987년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문호가 개방되고 외지인들이 각 팀에서 의미있는 비중을 차지하면서,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또 다시 십여 년이 흐른 뒤였다. 그래서 최소한 80년대와 90년대에 프로야구팀이란 각 지역의 야구명문 몇 개 학교의 동문연합팀이었고, 그 지역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팀이었으며,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타향살이를 하는 선수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프로원년에 불과 15명을 데리고 창단식을 치러야했던 해태는 임정면, 조충열, 김경훈, 홍순만 같은 타지 출신 선수들을 해당 연고구단의 양해를 얻어 데려다가 채워 넣어야 했다. 그 해 1할대 승률에 허덕이며 프로야구 전체의 존립을 위협한 꼴찌 삼미는 이듬해 우승팀 OB의 양해를 얻어 이선웅과 정구선이라는 국가대표 야수를 받아들인 것을 비롯해 정구왕, 김대진, 최홍석 같은 선수들을 얻어 써야 했다.

 

당시 '트레이드'라는 것도 없지는 않았다. 1983년 고향 팀 삼성에서 오대석이라는 벽에 막혀 만년 후보신세가 될 처지였던 서정환이 직접 프론트를 찾아가 '나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요'라며 애원한 끝에 해태로 건너가 무주공산이던 주전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 이듬해인 1984년에는 '굴러 온 바위' 장명부의 견제를 못 이긴 인천의 '박힌 돌' 임호균이 부산으로 쫓겨가는 일이 있었고, 다시 한 해를 지낸 1985년에는 선수단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청룡이 이해창을 삼성으로 보내고 이름값 높던 왼손투수 이선희를 받아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선수나 구단의 필요에 따라 남는 부분을 잘라내 선심을 쓰거나 거래하는 식이었고, 구단과 주요선수와 지역과 지역민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도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없었다.

 

최동원과 김시진의 트레이드가 충격적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그대로 롯데 자이언츠였고, 부산이었고, 부산사람이었으며 김시진은 그대로 삼성 라이온즈였고, 대구였으며, 대구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최동원과 그 김시진이 자리를 맞바꾸자 사람들은 '삼성 자이언츠'와 '롯데 라이온즈'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더 집요하게 표현해보자면 부산 라이온즈와 대구 자이언츠이기도 했다.

 

 

▲ 삼성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 '롯데의 심장'이 아니라 '롯데 그 자체'였던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7승 7패만을 기록한 채 쓸쓸히 사라져갔다.

▲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김시진 삼성에서 6년간 111승을 올린 김시진은 롯데로 트레이드되면서 '아마도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듯 하다'며 착잡해했다.

 

 

부산 '라이온즈' vs 대구 '자이언츠'

 

롯데는 해마다 연봉싸움에서 질기게 버티며 '물을 흐리는' 데다가 선수회까지 만들겠다고 앞장섰던 골칫거리 최동원을 처분하고 싶었고,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독한 선수'라고 판단했던 삼성은 김시진을 내주고라도 최동원을 가지고 싶었다.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던 삼성으로서는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거둔 4승이 김시진의 통산 111승보다 훨씬 무게있는 기록으로 여겨졌다. 김시진은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그 때까지 7연패만을 기록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회심의 트레이드는 두 팀과 두 선수, 그리고 두 팀의 연고지 팬들 모두에게 만족이 아닌 상처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아직 너무나 단단하게 붙어있던 서로의 머리와 심장을 떼어내 바꿔 끼워 넣는 어설픈 수술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동원은 구단의 고유권한인 트레이드 결정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유권한인 새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며 버텼다. 조건은 엉뚱하게도 롯데 박종환 단장의 퇴진이었다. 반면 김시진은 곧장 새 팀으로 옮겨 칼을 갈기 시작했고, 롯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등판하던 1989년 4월 14일 OB와의 대전경기에서 자신은 절대 새가슴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14이닝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는 오기를 발휘하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분노도 오기도 오래도록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김시진은 곧 4연패의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6월 말이 되어서야 삼성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합류한 최동원은 준플레이오프 2차전과 3차전에 연달아 선발등판 했지만 모두 초반에 강판당하며 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태평양 돌핀스가 벌이던 자축연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산의 팬들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맞은편 더그아웃에 앉은 최동원이 눈에 띌 때마다 응원가 가사를 잊었고, 대구의 팬들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돌아온 김시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섣부른 판단으로 성적도, 팬들의 호응도 모두 잃어버린 채 밀려드는 부산팬들의 항의전화에 질려버린 롯데의 단장과 사장이 정말 최동원이 삼성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사표를 내야만 했다. 그것도 그해 트레이드가 몰고 온 후폭풍의 한 요소였다. 

 

그 시기 있었던 트레이드에서, 장효조와 김용철은 잠시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 다시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마무리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자와 달리 예민한 것이 투수였고, 그중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존재하던 이름이 최동원과 김시진이었다. 김시진은 92년 중반까지 3년 반을 더 롯데에서 뛰면서 13승과 24패를 통산기록에 추가했고, 최동원은 두 해 동안 7승과 7패만을 더한 뒤 90년을 끝으로 옷을 벗고 말았다. 선수생명이 짧았던 시절이긴 했지만,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막 서른을 넘어서던 두 전설적인 투수의 허리를 꺾어놓은 것이다.

 

비극적 트레이드, 허리 꺾인 두 에이스

 

각 프로야구단들이 연고지 안에서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선수의 수는 3명에서 2명을 거쳐 1명으로 줄었고, 이제는 그나마 전면드래프트제가 도입되면서 옛날일이 돼 버렸다. 그래서 연고지와 구단의 연결관계는 상징적인 것으로 격하되었고, 구단과 선수의 관계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직장과 직원의 계약관계로 돌아갔다.

 

지금에야 누군가 트레이드 매물이 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팀의 필수요원이 아니라는 서운함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뿌리 뽑힌다'는 위기감을 느낄 리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변화인지는 또 모르겠다. 개방화도 좋고 평준화도 좋지만, 그래도 야구가 제일 재미있는 것은 구단과 팬이 한몸이라고 느껴질 때가 아닌가 해서다.

 

최동원과 김시진은, 1988년 11월 23일 이후 다시는 고향 팀에 돌아갈 수 없었다. 선수로서도 그랬고 지도자로서도 그랬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최동원과 김시진이라는 이름에서 떨림을 느끼고, 그리워하고, 애틋해한다. 잘려나간 분신들에게서 20년이 넘도록 아픔을 느끼는 것, 기껏 공놀이 따위가 가슴에서 암세포처럼 번져버린 야구광들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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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9] 1990년 LG 트윈스, 꼴찌에서 우승까지

한국판 뉴욕 양키스의 탄생, 서울이 들떴다

 

1990년 6월 3일, 태평양 돌핀스와의 일요일 홈경기에서 5대 0으로 완패한 LG 트윈스 선수단은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라커룸에 숨어 있어야 했다. 100여 명의 분노한 팬들이 잠실구장의 본부석 출입문으로 몰려들어 백인천 감독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혼전이 벌어진 해였다. 개막 후 두 달이 넘은 6월 초까지도 1위 빙그레부터 5위 삼성까지 1경기 차로 뒤섞여 있었고, 매 경기가 예비 한국시리즈라 불릴 만한 혈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5년 연속우승에 도전하는 해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해태에 세 번째 도전장을 던진 창단 5년 차 신흥강호 빙그레가 칼을 갈고 있었다.

 

거기에 전통의 강호 삼성과 지난 시즌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적을 연출했던 돌풍의 팀 태평양이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년도 꼴찌 팀 롯데도 거물신인 박동희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응국을 앞세워 봄 한때나마 선두경쟁에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유독 LG 트윈스만 홀로 6경기 차로 멀찍이 떨어진 채 갈지자걸음을 계속하는 태평세월이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5위, 6위, 6위로 뒷걸음질친 끝에 끝내 꼴찌까지 밀려나자 팬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복귀해 MBC 청룡에 이어 LG 트윈스에서도 초대 감독이 된 백인천은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쳤다. 특유의 '힘의 야구'를 구사하며 한 점에 연연하지 않았고, 감독석에서 연신 파안대소하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속 모를 여유가 서울 팬들의 가슴을 긁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긴 잠에서 깨어난 맹수의 연승 질주

 

어쨌든 그날의 청문회 소동이 약이 되었던지, 그 다음 경기일인 6월 5일 트윈스는 광주에서 김영직의 연속경기 홈런에 힘입어 해태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독식하며 탈꼴찌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문득 정신을 차린 맹수처럼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6월 13일까지 무려 8연승을 질주해 단숨에 5위로 올라서며 중위권 싸움으로 전장을 옮겨놓았다.

 

분위기의 반전을 이끈 것은 경북고 시절 4관왕 투수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프로무대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문병권이었다. 그는 팀이 꼴찌로 처져있던 5월부터 5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연패탈출과 연승연결의 주역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김태원과 김용수, 그리고 마무리 정삼흠으로 이어지는 주축투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며 서너 번 이기고 한 번 쉬어가는 흐름을 시작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이 갈리고, 그에 따라 팬들의 호와 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지도자 백인천이다. 하지만 감독 중심의, 선 굵은 야구를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이 대개 젊고 힘 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과 궁합이 맞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트윈스는 만년유망주 김태원과 문병권이 18승과 10승으로 올라섰고, 김동수, 노찬엽, 윤덕규, 이병훈 등 젊은 타자들이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축 선수들의 컨디션에 연연하지 않는 감독의 배짱은 신인급 선수들에게 확실한 기회가 됐고 한 점과 1승에 안달복달하지 않는 감독의 여유는 선수들이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시즌 개막 직전 김기범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김건우의 재활이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뚫린 선발진의 공백을 막기 위해 김용수와 정삼흠의 보직을 맞바꾼 도박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선수인생 내내 팀 마운드의 가장 믿을 만한 버팀목이었던 김용수는 역시나 선발투수로서도 12승을 올리며 제 몫을 했고, 선발로서는 기복이 있던 정삼흠이 마무리로서 짧게 던지면서 오히려 안정을 찾고 23세이브를 올렸다. 게다가 후반기에 들어서자 후배들의 분발에 자극받은 김상훈, 이광은, 김재박, 신언호마저 차례로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하며 불붙은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어댔다. 

 

 

▲ 1990년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이병훈, 윤덕규 등의 선수들이 백인천 감독에게 샴페인을 붓고 있다

 

 

투타의 균형, 신구의 조화

 

팀타율 1위, 팀평균자책점 2위. 투수와 타자 부문에서 단 한 개의 개인타이틀도 따내지 못한 팀에서 이룬 알찬 성적. 그리고 김태원과 김동수가 주축을 이룬 젊은 배터리와 김재박에서 이광은으로 이어진 백전노장의 수비진. 그것이 그 해 LG 트윈스가 진정한 강팀이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해는 다른 팀들이 갖가지 내분을 겪으며 주춤거리는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주축선수들의 줄부상에도 불구하고 4강권을 유지할 힘은 남아있던 태평양 돌핀스가 '임호균 각서파동'으로 떨어져나간 것도 그 한 예였다.

 

노장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겠다는 구단에 맞서며 '임호균이 5승을 거두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고 각서를 썼던 김성근 감독은, 구단이 다시 '그 5승은 반드시 선발승이어야 한다'고 압박해오자 임호균을 단 한 번도 선발등판을 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목을 떼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즌을 좌우한 더 결정적인 내분은 빙그레에서 벌어졌다. 시즌 내내 단독선두 자리를 놓지 않던 빙그레가 9월 쯤 '김영덕 감독과 종신계약을 맺었다'는 소문 속에 스스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김영덕 감독과 그의 후임으로 여겨졌던 강병철 수석코치와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서 선수단 전체가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선두싸움이 절정에 오르던 9월에만 빙그레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9승 13패를 하며 뒷걸음질 쳤고, 같은 기간 LG는 15승 5패를 거두며 빙그레와의 4.5경기차를 뒤집어 1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LG에 이어 해태에까지 추월당하며 준플레이오프로 밀려난 빙그레는 끝내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한 채 4위 삼성에마저 2연패를 당하며 시즌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록 2위에 오르긴 했지만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세 명의 투수에게 52승을 의존하던 얇은 선수층의 해태도 4연속 우승의 피로감 속에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22승의 슈퍼에이스 선동열마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의 김용국, 김용철에게 거푸 홈런을 맞으며 무너지자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4위로 합류해 3위와 2위를 상대로 포스트시즌 5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삼성도 1위 팀 LG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체력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운드가 얇았다. 오직 우승을 위해 데려온 최동원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나란히 13승을 올린 선발듀오 김성길과 이태일은 김태원과 김용수에게 한 치씩 못 미쳤고, 홀로 12승과 18세이브를 올린 김상엽은 체력이 남아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옵션이 한정된 팀이라면, 노련한 백인천 감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언더핸드 이태일을 상대로 4번 타자로 표적기용한 왼손 교타자 김영직이 이태일뿐만 아니라 김상엽과 성준까지 두루 두들기며 2,3,4차전 내내 타격을 이끌었고, 반대로 LG의 왼손 타자들을 노리고 등판한 삼성의 왼손 투수 성준은 이병훈, 김동수, 노찬엽으로 무너뜨렸다. 

 

1차전에서 무려 13대 0으로 역대 한국시리즈 사상 최다 점수차 경기 기록을 세운 트윈스는 2차전의 고비를 김영직의 동점타와 역전타로 돌파한 뒤 3차전을 3대 2, 그리고 4차전은 6대 2로 휩쓸어버렸다. 한국시리즈 MVP는 1차전과 4차전에서 상대 타선을 완벽히 압도하며 첫 단추와 마지막 단추를 채운 김용수가 선정되었다.

 

 

▲ 김용수 LG 트윈스는 두 번 우승했고, 두 번 모두 한국시리즈 MVP는 김용수였다. 1990년 그는 시즌중 마무리에서 선발로 보직을 전환했고,

12승과 5세이브를 따낸 데 이어 한국시리즈 1,4차전 승리투수가 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 김영직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의 마운드에 김용수가 있었다면 타석에는 김영직이 있었다. 그는 끌려가던 2차전 9회말 2사 후에 극적인 동점타를

날린데 이어 연장 11회말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 승부의 물줄기를 옮겼다. 그리고 이어진 3차전과 4차전에서도 팀 공격을 이끌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300만 관중시대 열려

 

사연 많았던 그 해, 네 명의 감독이 옷을 벗었다. 꼴찌팀 OB가 이광환 감독을, 6위팀 롯데가 김진영 감독을 각각 해임했고, 5위 팀 태평양도 '각서의 조건을 채우지 않은' 김성근 감독과 갈라섰다. 그리고 두 개의 상위팀을 상대로 포스트시즌 5연승을 거두며 찬사를 받았던 그해 가을의 또다른 주인공 삼성의 정동진 감독이 불의의 해임 통보를 받았다. 한국시리즈에서의 무기력한 4연패란, 최소한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서는 전통 있는 해임사유였던 것이다.

 

 

반면 LG는 MBC 청룡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뛰어든 첫해, 그것도 6월까지 꼴찌로 처져있던 팀을 우승까지 이루어내는 기적 같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며 90년대의 출발선을 장식했다. 그리고 천만의 도시 서울을 연고지로 한 팀이 처음으로 우승을 이루어냈던 그 해 한국프로야구 역시 사상 첫 300만 관중시대를 열며 또 한 번의 도약을 시작했다.

 

젊고 강한 팀. 그리고 파워와 스피드와 세련미를 동시에 갖춘 팀. 역시 그 해 다져진 전력을 뼈대 삼아 4년 뒤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도 LG 트윈스가 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강팀이 되리라는 전망은 의심할 바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도 결국 그랬듯, 한국 역시 최대도시 연고팀이 중심을 이루며 주변부의 도전 세력과 벌이는 구도가 정착되리라는 전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곤 했다.

 

물론 그 뒤로 다시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가르쳐준 것은 한 경기를 놓고도 그렇고, 한 해를 놓고도 그렇지만, 수십 년을 두고도 야구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허탈한 진리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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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0> 부산야구의 두번째 봄, 1991년

'백만 관중' 모은 롯데, 가슴이 뛰었다

 

1991년 9월 15일, 롯데 자이언츠는 그 해의 마지막 홈경기에 해태 타이거즈를 불러 들여 5대 1로 승리했다. 시즌 내내 시달렸던 난적이었고, 그날의 승리를 합해도 6승 12패의 적자였지만, 어쨌든 깔끔한 마침표였다. 마운드에서는 오랜만에 제구가 잡힌 박동희가 해태 타선을 힘으로 짓눌렀고, 타석에서는 그 전 해 트레이드의 정신적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처음 3할 이하로 떨어져보는' 수모를 당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대타로 출장해 홈런을 날리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날,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또 하나의 빛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관중석을 가득 채우며 그 해 100만 1920명 홈관중을 기록해 첫 번째 '백만 관중 동원 팀'이 된 것이다.

 

그 해 롯데가 백만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극적인 우승을 이루어낸 1984년을 기점으로 폭발한 부산의 야구열기가 있었고, 1985년 10월에 완공된 3만 석 규모의 사직야구장이 그 열기를 그득히 받아내는 그릇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1984년의 우승 뒤 무려 6년 동안 가을야구에서 소외된 채 입맛만 다셔야 했고, 1989년에는 1984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롯데와 부산 야구의 상징이기도 했던 최동원을 쫓아내듯 떠나보내는 자책골로 끓어오르던 열기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도 했다. 최동원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투수도 찾기 어려웠고, 최동원에 이어 떠나보냈던 김용철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타자도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

 

▲ 사직야구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는 사직야구장. 기억 속의 1984년과 1992년을 넘어 또 한 번의 연료가 주입될 시점이 되고 있다.

 

 

1991년, 부산야구의 두 번째 봄

 

1991년, 부산야구에는 다시 봄기운이 돌아왔다. 박동희가 14승을 올리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수식어가 야구팬들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 2승으로 삐끗했던 윤학길이 17승을 기록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에 3년차 김청수와 고졸신인 김태형이 각각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롯데는 일약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를 보유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선도 제법 안정된 해였다. 4번 타자 김민호가 20홈런과 3할을 기록하며 중심을 잡았고, 투수에서 전향한 김응국이 3할과 25도루를 기록하며 짝을 이루었다. 거기에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부활하며 3할 4푼대의 고타율로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했고, 신인 박정태와 전준호가 각각 타점과 도루로 팀을 이끌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특히 속 터지도록 느긋했던 강병철 감독의 배짱은, 막 피어오르는 숯불 같던 선수들의 열기와 어우러지면서 묘하게도 그 해만큼은 궁합이 맞았다. 역전패를 거듭하면서도 선발 로테이션은 무너지지 않았고, 선수들 역시 오늘 지면 내일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조급한 모험을 자제했다. 그렇게 롯데의 전력은 오히려 후반기가 되면서 더 단단해져갔고, 8월 14일에 반 경기차로 앞서가던 LG를 잠실에서 5대1로 잡고 4위로 올라선 뒤 한 번도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채 시즌을 완주해내며 가을야구의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그 해도 마땅한 마무리투수를 만들지 못한 약점은 여전했고, 그래서 시즌 내내 최강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 경기 희망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고, 지더라도 허탈하게 경기장을 빠져나오지 않을 수 있었던 그해, 부산의 팬들이 야구장을 찾는 발걸음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윤학길과 장효조의 타이틀 싸움

 

윤학길과 장효조가 벌였던 타이틀 싸움도 한 가지 볼거리였다. 윤학길은 지긋지긋하게 많은 역전패와 1실점 패전을 기록하면서도 선동렬과 다승왕 다툼을 벌였다. 특히 장효조는 빙그레의 이정훈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1리 차의 현미경 싸움을 벌여나갔다.

 

특히 백만관중을 달성한 그 역사적이었던 9월 15일에 날렸던 결승 홈런으로, 장효조는 3할4푼 5리까지 타율을 끌어올리며 4년만의 타격왕 복귀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그는 그날 경기 후 기자들 앞에서 17일과 18일 대전에서 치러질 시즌 최종전에 나서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3리 차로 앞서있던 수위타자 이정훈의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의 투수들이 좋은 공을 줄 리 없고, 그러다 보면 대구상고 선후배 사이에 좋지 못한 모습을 연출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틀 뒤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굳이 장효조를 타석으로 내보냈고,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이정훈을 벤치에 잡아 두었다. 그리고 첫 타석에서 안타를 내주며 1리 차까지 추격을 허용한 송진우는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타석과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장효조에게 연달아 볼 네 개를 던졌고, 그 뒤를 이은 장정순이 또다시 한 개의 볼 넷을 내주었다. 그 이튿날은 장효조도 더 이상 타석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정훈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다시며 타격왕에 올랐다.

 

물론 그 해는 선동렬과 장종훈이 투수와 타자 부문 개인 타이틀을 휩쓸어가다시피 했고, 결국 롯데에서 따로 소득을 챙긴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우리 아무개가 최고다'라고 핏대 올릴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홈 팬들에게는 엄청난 즐거움이며, 힘이고 위로라는 사실은 구단과 선수들도 기억해야 할 일이다.

 

▲ 박동희 1991년과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끈 투수. 또 한 명의 최동원, 혹은 선동렬이 될 것으로 믿었던 기대,

그리고 사상 최고의 강속구를 던졌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슈퍼베이비'로 불리곤 했다

 

 

짧았던 꿈, 하지만 또 다시 처절했던 롯데의 가을 야구

 

그렇게 7년 만에 올라선 가을 무대에서 만난 첫 상대는, 6년 전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던, 그리고 그 뒤로도 세 번을 더 만나며 만날 때마다 혈전을 벌이게 되는 가을의 숙적 삼성 라이온즈였다. 그 해 삼성은 16승과 18세이브를 기록한 김성길을 중심으로 11승의 유명선과 10승의 이태일, 그리고 9승의 최일언과 8승의 성준이 마운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선발진의 무게감은 롯데만 못해도 선발과 마무리 양쪽에서 중심을 잡아준 김성길이라는 확실한 에이스 카드를 가진 점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낫다고 쉽게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타격 면에서는 삼성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었다. 아직은 전성기를 끝내지 않은 이만수가 있었고, 신경식, 허규옥, 강기웅, 김용국, 류중일, 장태수 등 주전급 야수들 모두가 3할 언저리에 늘어선 채 투수진을 압박했다. 박승호, 이종두, 정성룡 같은 백업멤버들도 언제든 기회만 주어지면 3할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괴력을 무기로 롯데와의 상대전적에서도 12승 1무 5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물론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다 보니 3, 4위 팀이라고는 하지만 팀 간 승차도 무려 8경기나 벌어져있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그것도 먼저 단 두 번의 승리만 잡아내면 끝나는 초단기전 승부는 또 다른 것이었다. 6년 전 최동원의 어깨 하나로 4승을 잡아냈던 롯데가, 이번에는 윤학길과 박동희의 힘을 빌어 두 경기쯤 잡아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부산팬들만의 생각일 뿐, 많은 전문가들과 외지의 야구팬들은 싱거운 삼성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막이 오르고, 9월 22일 대구에서 열린 1차전은 삼성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5회까지는 롯데가 3대 2로 앞서가며 근근이 버텼지만, 삼성은 5회 말 김종갑, 김용국, 신경식이 연달아 2루타, 3루타, 2루타를 때려내며 단숨에 전세를 뒤집은 뒤 다시 김용철의 적시타로 신경식마저 불러들이며 5대 3의 승기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 뒤 6회에는 류중일이 홈런을 날렸고, 장태수가 다시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며 8대 3의 승부를 완성했다. 삼성은 성준과 김성길을 투입했고 롯데는 박동희에 이어 김태형과 김청수를 소모한 경기였다.

 

하지만 이튿날 곧바로 부산으로 옮겨 치러진 2차전을 윤학길이 잡아내며 롯데가 기사회생했다. 뒤를 받쳐줄 투수가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윤학길은 8회까지 3안타만 내주며 역투했고, 근성의 타선은 1회부터 타자일순하며 5점을 뽑아내 그런 윤학길을 측면지원했다. 10대 2의 설욕.

 

문제는 이틀 뒤 다시 대구로 돌아가 치른 마지막 결전, 3차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날의 결전에 양 팀은 성준과 김태형을 선발로 내보내며 탐색전을 벌였다. 하지만 동시에 양팀의 타선은 1회 초 김민호, 1회 말 류중일이 홈런을 때려내며 서로의 레이더를 꺾어버렸다. 결국 김성길과 박동희가 1회와 2회부터 각각 불려나와 제대로 맞붙는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경기는 김성길은 12.1이닝을 1실점으로, 박동희는 10.2이닝 동안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만으로 막아내는 절정의 투수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연장 13회까지 4시간 37분의 혈투를 벌이고도 결론은 무승부였고,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추가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4차전은 이튿날 곧바로 이어졌다. 하지만 준비된 일정 동안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롯데는 6년 전의 어느 순간처럼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박동희는 바로 전 날 10.2이닝을 던졌고, 윤학길 역시 8이닝을 던진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게다가 26일 대구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까지 첩첩산중을 앞에 두고 이미 하루 일정을 넘긴 준플레이오프를 하루 더 쉬어갈 수는 없었다. 삼성은 제 2선발 유명선을 내세웠고, 롯데의 선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러낸 왕년의 에이스 김시진이었다. 하지만 그 해 김시진은 단 2승에 6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을 뿐인 퇴물이었고, 역시 1회를 버티지 못한 채 실점하고 김태형으로 교체되어야 했다.

 

의외로 3회 초에는 롯데 타선이 유명선을 공략해 2안타와 볼넷 2개를 묶어 두 점을 뽑아내며 역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한 점 차의 리드를 지켜내야겠다는 강병철 감독의 조바심이 4회 말부터 아직 성치 못한 어깨의 윤학길을 불러냈고, 결국 최동원이 될 수는 없었던 윤학길이 6회 말에 김용철에 역전홈런을, 그리고 8회 말에는 류중일과 장태수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으며 무릎을 꿇게 된다.

 

▲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우승 1992년, 롯데 자이언츠는 120만 관중 앞에서 두 번째 우승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 1992년은 1991년이라는 질 좋은 거름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고, 그 연장선상에 놓인 해였다

 

1991년의 값진 패배, 1992년의 달콤한 승리로 돌아오다

 

끝까지 가봐야 새로운 출발점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곳에서 멈추는 이에게는 돌아올 내일 역시 적당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 해 그렇게 하얗게 불태운 롯데의 투혼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쳤고, 동시에 최고의 자리까지 남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염종석이라는 걸출한 신인이 합류하고, 박정태와 전준호와 공필성이 다시 한 걸음씩 성장하며 그 빈자리를 말끔히 채워낼 수 있었다. 1992년, 롯데의 두 번째 우승과 120만 관중 기록은 1991년의 거름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2007년과 2008년을 지나면서 한국프로야구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한때 12만까지 쪼그라들었던 부산야구는 138만을 넘어 150만 관중시대를 겨냥하고 있고, 한국야구 역시 592만 기록을 딛고 6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각 구단의 입장에서야 우승인가 백만 관중인가, 그래서 더 많은 승리인가, 더 많은 팬서비스인가를 놓고 가늠하며 고민할 만하다. 하지만 팬들의 가슴을 더 강하게 뛰도록 하는 것은 가진 것을 다 털어 넣는 승부, 그래서 손끝으로 한계지점을 짚은 채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의 한 장면이다. 그것이 한 경기든, 한 시즌이든, 아니면 하나의 선수단, 하나의 구단 전체의 운영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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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1] 1992년, 장종훈 40홈런 시대를 열다

연습생 출신 홈런왕, 가을에 울다

 

1992년 9월 17일, 빙그레 이글스가 해태 타이거즈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즌 17차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열흘 전에 2위 그룹과 10경기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이글스였지만, 타이거즈와의 승부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1991년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 해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2위를 달리던 해태 타이거즈였고, 또 역대 최강이라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완성하고도 이글스는 유독 타이거즈에게만은 시즌 4승 12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해 역시 정성껏 쑨 죽으로 호랑이 밥을 챙기는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양 팀의 기둥투수 송진우와 이강철이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정규시즌의 남은 경기는 17일과 18일 두 경기 뿐이었고, 그 안에 뭔가 결판이 나야 했다. 그 밖에 해태의 이순철도 롯데의 박정태를 누르고 최다안타 타이틀을 챙기기 위한 안타 한 개가 필요했다. 

 

물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6대 0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5회 초에 선발투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프로야구 최초의 '다승(19승)-구원(25 세이브포인트)' 2관왕을 배출했다. 그러자 이강철의 동료 문희수가 5회에 자진등판해 이정훈과 장종훈의 몸통에 화풀이를 하고 퇴장당하는 소동을 빚었고, 그렇게 격앙된 틈에서 다시 해태의 이순철은 7회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최다안타 타이틀을 확정짓는 150개째 안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모두 세월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에도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남은 또 다른 대목이 있었다. 0대 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무사 1,2루에 주자를 놓고 타석에 선 이글스의 4번 타자 장종훈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해태 선발 신동수의 4구째를 때려 펜스 가운데의 가장 깊숙한 곳을 넘기는 130m 짜리 홈런을 날렸던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한국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40개의 홈런을 날리는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홈런, 야구가 가진 모순적인 매력

 

어쩌면 홈런은 야구가 품고 있는 가장 반 야구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야구는 촘촘하게 짜인 팀플레이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전과 협력플레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3할 타자와 2할5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단 5% 차의 확률에 근거해 주전과 후보를 나누고 타순을 짜고 작전을 선택하며, 스타와 후보 선수를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홈런은 그 모든 과정들을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경기 종반 결정적인 한 점 싸움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홈런 한 방은 그 앞의 타자가 아웃카운트 하나와 바꾸며 성공시킨 희생번트, 혹은 주자가 횡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유니폼에 온통 흙물을 들여가며 성공시킨 과감한 도루의 모든 숨 가쁜 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경기 막판에 터져 나온 만루 홈런 한 방은 기선을 잡는 선취점이니, 안전궤도에 올리는 추가점이니, 사실상 승부를 가른 쐐기점이니 하며 세 시간 넘도록 해설가가 열을 올리던 모든 순간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물론 홈런을 치겠다는 일념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도 있을 수 없고, 폭죽 같은 홈런포에 의지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겠다는 감독도 있을 수 없다. 야구감독은 경기장의 선수들을 향해 수많은 사인을 날리지만 '홈런을 치라'는 사인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역설적인 매력 때문에 홈런은 야구장으로 팬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 '왜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적당한 곳에만 떨구면 안타가 되는 것을, 굳이 외야수가 지키고 선 곳까지 멀리 때려내느라 헛수고들이냐'고 질타했다는 초창기 어느 야구단 사장의 생각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멀리 강하게 때릴수록 대단한 것'이라는 단순함. 그리고 어떤 궁지에서도 '번쩍' 한 순간에 뒤집어내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호쾌함.

 

그래서 야구를 미국인들의 삶으로 만든 것은 베이브루스(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였고, 일본인들의 자존심으로 만든 것은 오 사다하루'(일본에서 태어난 중화민국 국적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였다.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러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

 

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에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장종훈은 17일에 40홈런을 날리며 송진우의 19승째를 만들어냈고, 18일에는 이강철의 19승 도전을 좌절시키는 41호 결승홈런을 날리며 다시 송진우에게 단독 다승왕 타이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칭호와 함께 2년 연속 MVP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 장종훈 타격폼 '국보투수' 선동열은 장종훈의 타격폼에 전혀 빈 틈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 장종훈은 선동열을 상대로 단 한 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선동열과 장종훈의 '격차'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정대현(SK)의 공을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해서 이대호(롯데)가 부족한 타자가 아니듯 말이다.

▲ 1992년 롯데 자이언츠 우승의 주역, 염종석 1992년 최고의 선수는 장종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것은 염종석이었다.

 

 

연습생 출신의 홈런왕, 하지만 가을에 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신생팀 빙그레의 월급 40만 원짜리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이듬해 팀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틈에 1군 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던 소년.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은 뒤 8cm나 자란 키만큼 기량도 쑥쑥 성장해 불과 4년 만에 홈런왕 타이틀을 접수했고, 1991년에는 한국프로야구 35홈런과 114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더해 .345의 타율과 21개의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두고 기어이 40홈런 벽을 넘어서며 후배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다.

 

그가 세운 41홈런의 벽은 98년에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의해 무너졌고, 99년에 50개의 벽을 넘은데 이어 2003년에 56개까지 달려간 이승엽의 기록 뒤편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물론 1992년 이후 한국 야구의 홈런시대가 개막된 것은 아니었다. 장종훈이 불운 속에 깊은 부진의 늪에 빠졌던 1993년에는 김성래가 28개로 홈런왕이 올랐고, 그 뒤로 다시 김상호와 김기태가 25개만으로 홈런왕에 오르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장종훈이 있었기에 이승엽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종훈의 41홈런 이후 해마다 새로운 시즌이 막을 올리고 누군가 연달아 서너 개라도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하면 신문과 방송은 그것이 과연 1992년의 장종훈에 견주어 어느 만큼 빠르거나 느린 것인가를 가늠했고, 그런 과정에서 후배 타자들이 근육을 키우고 스윙 궤적을 다듬으며 도전하는 목표선이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져 나온 장종훈의 홈런 두 방은 이글스 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데 이어 '눈엣가시' 해태 타이거즈의 기를 꺾는 기분 좋은 결정타들이었기 때문이다.

 

▲ 은퇴식 장종훈이 은퇴식에서 후배 정민철과 부둥켜안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해의 우승은 3위로 올라와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꺾은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이글스에 네 번째 준우승을 선사한 롯데 자이언츠였다. 시즌 내내 불을 뿜은 장종훈의 대포는 한국시리즈 기간 단 한 차례도 가동되지 못했고, 반면 롯데 자이언츠의 소총부대는 쉼 없이 단타와 번트와 도루의 잔공격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리즈 다섯 경기에서 나온 단 두 개의 홈런은, 롯데 타선에서도 소문난 소총인 이종운과 공필성이 때려낸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홈런이 가진 역설의 한 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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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2] 1993년, 트윈스가 내놓은 투수운용의 새 패러다임

'슈퍼에이스' 없이 우승하는 법, 찾았다

 

1993년의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을 홀로 상대하며 181개의 공을 던진 라이온즈 박충식의 투혼과, 하지만 투혼 따위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진군해 일곱 번째 왕좌에 오른 타이거즈의 능숙한 세리머니 속에서 저물었다.

 

선동렬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 정상 고지에서 내려서야 했던 타이거즈는, 이번에는 마무리투수로 재기해 0.73이라는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세운 선동열의 힘으로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선동열이 완벽하게 뒷문을 틀어막자 온기가 선발진으로까지 번지며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무려 다섯 명의 10승 대 투수가 배출됐다(선동열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 그런 압도적인 마운드 아래서는 팀 타율이 25푼에 턱걸이한 물 방망이도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없었다.

 

우승은 늘 그런 압도적인 위력의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다. 원년 OB 베어스는 우승의 제단에 박철순의 허리를 내놓았고, 1984년 자이언츠는 최동원의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 해태의 왕조시대가 시작된 이래 잠시나마 그 숨 막히는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한 편으로는 선동열의 부상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에 내려진 김태원과 김용수, 염종석과 박동희 같은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1993년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축복과 동떨어진 침침한 변두리에서 묵묵히 전진했던 이들에 의해 또 다른 길이 개척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듬해 패권의 주인공이 되는 LG 트윈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대항마가 되는 태평양 돌핀스에 관한 이야기다.

 

창단 첫 해의 우승, 그 뒤의 깊은 추락

 

1990년에 창단하자마자 해태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왕좌에 올랐던 트윈스는 1991년에 6, 1992년에는 7위로 전락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다. 선수단의 명단은 1990년 우승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각각 팀을 떠나면서 내야진을 새로 꾸려야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20대 선수들과 20대 못지않은 내구력의 김용수, 정삼흠으로 꾸려진 투수진만큼은 우승 당시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타격이 약하고 수비조직력이 흐트러진 팀이 정상을 넘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단단한 투수진을 보유한 팀이 하위권으로 처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기 드문 일이다. LG트윈스가 첫 우승 이후 두 해 동안 오히려 뒷걸음질을 쳐야 했던 것은 오로지 투수들이 돌아가며 전력에서 이탈하는 부상과 부진의 릴레이 때문이었다. 물론 그 부상과 부진이란 상당부분 '내년을 생각하지 않는' 임기응변식 마운드 운용 때문이었고, 그래서 적절하고 효율적인 몸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18승을 올리며 정규시즌을 이끌었던 김태원은 이듬해 8승으로 주저앉았고, 12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2승을 거둬 MVP가 되었던 김용수도 1992년에는 세이브 없이 5승으로 내려앉았다. 각자 훈련에 전념할 수 없었던 개인사정이나 크고 작은 부상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우승 당시 23세이브를 기록했던 정삼흠이 1991년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내리 세 번이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갑작스레 선발진으로 복귀하면서 투수들의 보직이 한꺼번에 뒤엉켰던 것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2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이광환 감독이 '돌발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마운드'를 구상하게 했던 배경이었다.

 

실패와 난관이 새로운 길을 찾게 하다

 

이광환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것은 서울 라이벌 OB 베어스에서였다. 프로원년 김영덕 감독 아래서 코치로 프로지도자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시즌을 마친 뒤 베어스의 2대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해서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자율야구'의 기치를 올렸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스스로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엄하고 험한 규율 속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선수들이 자율을 이해하고 움직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반면 구단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전임자를 밀어내고 이광환 감독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당장 우승을 해 보이라는 단순한 요구 때문이었다.

 

1989년에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밀려난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반복했고, 결국 10연패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11연패에 빠져벼렸던 619일에 그는 전격 해임당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잠시 공백을 거친 뒤, 이번에는 백인천 감독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털고 일어선 빈자리를 물려받은 LG 트윈스에서 그는 무작정 각자에게 과정을 맡기는 대신 각자의 책임감을 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고, 그 결과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른바 그가 명명한 '스타시스템'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발 로테이션의 고정, 그리고 계투와 마무리로 이어지는 확실한 투수 분업 시스템이었다.

 

1993, 트윈스는 선발진에 김태원과 정삼흠을 축으로 삼아 김기범과 차명석, 그리고 신인 이상훈을 배치했고 8년차 베테랑 우완 차동철과 신인 좌완 강봉수를 필승계투요원으로, 그리고 김용수를 마무리로 고정했다. 그리고 선발투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기든 지든 6이닝 이상을 맡겼고, 화급한 사정이 없는 한 마무리 투수에게 2이닝 이상은 맡기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아주 신통한 것은 아니었다. 선발진의 에이스 정삼흠이 15승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김기범과 이상훈이 9, 김태원이 8승씩을 기록하며 각자 꼭 같은 숫자의 패전까지 떠안았고, 5선발 차명석은 그나마 79패로 패전이 조금 더 많은 평범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흐름이 시즌 내내 계속되었고, 연타를 당하고 있는 선발투수를 좀처럼 교체하지 않는 모습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비난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차동철과 강봉수를 거쳐 김용수로 이어지는 불펜만큼은 시즌 내내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한 번 잡은 리드는 빼앗기지 않는 강팀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마무리로 뛰던 80년대 후반 내내 매시즌 100이닝 이상(1986178이닝) 던져댔던 김용수는 그 해 만큼은 50경기에서 단 75.2이닝만을 던지는 여유를 누리며 5승과 26세이브로 뒷문을 단속해 주었고, 그 덕에 정규리그 4위를 거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이광환 감독 이광환 감독은 공과와 장단점이 뚜렷한 지도자이며, 통산성적도 그리 내세울만 한 편은 못 된다.

하지만 1993년에 그가 제시한 투수진 운용의 원칙은 한국야구가 한 단계 올라선 중요한 계기로 평가할 만 하다.

▲ 1994년, 두 번째 우승에 성공한 트윈스 1990년의 우승이 몇 가지 행운과 노련한 지도력이 결합된 결과였자면,

1994년은 잘 구축된 시스템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돌풍 뒤의 미풍, 돌핀스의 과제

 

트윈스 못지 않게 반복되는 무리와 몸살의 악순환을 고민하던 팀은 태평양 돌핀스였다. 돌핀스는 1989,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만년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상승하는 경악스러운 돌풍을 연출했던 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떠난 그 이듬해부터 곧장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그리고 정민태와 김홍집까지 돌아가며 부상으로 이탈, 단 한 번도 최상의 투수전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유령선 같은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악몽의 절정은 1993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공교롭게도 모든 주전급 투수들이 동시에 드러눕는 불운 속에 신생팀 쌍방울에게마저 멀찍이 따돌려진 채 선두 해태와 무려 43.5경기차로 벌어진 압도적인 꼴찌로 내팽개쳐지는 대참사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조건 재활 우선의 사인을 보냈고, 감독 생명 연장을 위한 무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많게는 7, 적게는 3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 여섯 명이 고르게 한 경기 씩을 책임지고 가는 여유로운 운영을 이어갔고, 정명원과 박정현과 정민태 등이 통째로 한 해를 쉬며 느긋하게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 정명원 1993년을 통째로 쉬며 충분한 재활의 시간을 가진 정명원은 1994년에 40세이브로 통산 최다세이브 신기록을 세웠고,

올스타전에서는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투수로서는 두 번째로 미스터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천운의 동행 없이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다

 

물론 그렇게 '급할수록 돌아가는' 운영의 대가는 한 해 뒤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 트윈스는 1년간의 시험가동 끝에 완성된 신무기를 내놓을 수 있었고, 돌핀스는 1년간의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고치고 날을 세운 칼을 쥐고 나설 수 있었다.

 

1994, 트윈스의 마운드는 18(이상훈)-16(김태원)-15(정삼흠)의 막강 선발 삼각편대로 시작해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전일수로 두터워진 계투진을 거쳐 35세이브포인트의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완벽한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타선에서 터져나온 유지현-김재현-서용빈 트리오의 폭발력과 만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중 한 장면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에 견주기에 너무나 초라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역시 팀타율 최하위라는 악재 속에서도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와 40세이브 신기록의 마무리투수를 배출하며 인천 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에 조금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드디어 '천운의 동행'이 없이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명의 에이스를 기다리고 그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고 강요하는 시대에 조금씩 막을 내리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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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3] 1994년, 현대 피닉스의 탄생

'낙선' 정주영의 선택, 8개 구단 공포로 몰아넣다

 

1994년 대졸 신인 야수 중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선수는 한양대 출신 유지현이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국가대표 주전 내야수 자리를 지키며 한 살 터울의 이종범을 제외하면 딱히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그가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은 7000만 원이었다.

 

국가대표 경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격과 수비 어느 면에서도 유지현과 비교될 수준은 아니었던 단국대 출신의 내야수 김재걸이 1년 뒤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은 유지현이 받은 것의 딱 세 배인 21000만 원이었다.

 

물론 유지현이 대학 4학년 시절 어깨부상을 당하면서 이름값에 못 미치는 계약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 해 전 그 유지현보다도 한 수 위로 평가받던 이종범이 역시 7000만 원을 받았던 것, 그리고 그 이종범을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던 양준혁이 1100만 원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더라도 김재걸이라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수비형 유격수'에게 그런 거액의 계약금이 안겨진 사연은, 그 해 출범한 현대 피닉스라는 괴물 같은 아마추어 팀과 연관짓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김재걸 만능수비수로 '걸사마'로 불렸던 사나이. 하지만 오히려 짐이 되고 만 2억 1천만 원이라는

과분한 계약금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현대, '2 리그'를 꿈꾸다

 

1982년,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프로야구의 성공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정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까지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을 맡아 달라는 프로야구 추진세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년부터 만루홈런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박철순과 최동원의 투혼이 드라마를 연출해내면서 프로야구가 모두의 예상을 깬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도 정주영 회장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9MBC청룡이 매물로 나왔을 때도 '적자기업은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반복해 프로야구무대에 '저렴하게' 입성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 벌어졌던 갑작스러운 사건들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 해 봄 정주영 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정권 접수'에 나서게 되고, 국민당은 불과 창당 한 달여 만에 참가한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해 일약 3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반값아파트''공산당 합법화', 혹은 '사재 2조 원 국가헌납' 등의 파격적인 공약과 안기부가 개입된 '초원복국집'에서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해내 폭로할 정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3'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은 400만 표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현대그룹 식구들 표만 지켜도 해볼 만하다'고 했던 낙관의 순진함이 드러난 것이고,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층의 표가 오히려 김영삼 후보 쪽으로 몰려가는 기현상의 역풍을 정면에서 맞은 탓이었다.

 

정권 핵심층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고도 낙선한 정주영은 곧 정치이력을 1년 만에 마감하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는 마치 총수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던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국민당의 외곽조직 혹은 패잔병조직 정도로 전락한 대외적인 그룹의 이미지였다.

 

▲ 정치판에 돌풍을 몰고 왔던 정주영 그가 정치인이었던 것은 불과 1년 안팎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 그는 원내 31석을 가진 제3당의 대표와 대선후보를 지냈고, 또 '반값아파트'를 비롯한 센세이셔널한 공약과 '초원복국집 회동 폭로' 사건 등으로 정치권에 돌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수백억을 들여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것은 그 1년을 지우기 위한 출구전력의 일환이었다.

 

 

낙선, 그리고 스포츠를 통한 재기

 

정주영 회장은 경영에 복귀해 처음으로 가진 사장단 회의에서 '임직원들의 사기와 대외적인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스포츠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각 종목별 스포츠협회의 후원자를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정권의 고민을 풀어주며 자연스럽게 화해무드를 만들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축구협회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정세영 그룹회장(수상스키), 박재면 현대건설회장(수영), 이내흔 현대건설사장(역도), 이현태 현대석유화학회장(아마야구) 등이 일시에 스포츠계로 산개하게 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이 9년째 양궁협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을 합치면 무려 여섯 종목의 수장을 현대그룹이 휩쓸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은 내내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기존에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던 여덟 개의 기업들은 굳이 현대라는 강력하고도 껄끄러운 경쟁자를 끌어들이면서까지 9, 10구단으로 리그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구단들은 7구단으로 빙그레 이글스가 가입할 당시 30억 수준이었던 리그 가입금을 많게는 400억까지 불러대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 텃세에 허리를 굽힐 사람이 아니었던 정주영 회장의 선택은 '2의 프로야구리그 창설'이라는 어마어마한 기획이었다.

 

사실 미국과 일본의 '양대리그' 역시 기존의 프로야구 질서 밖에서 후발주자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리그를 만들어 대항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현대의 발상이 황당무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업'보다는 '정책'으로서 출범한 한국의 프로야구에서 그것은 가능한 방식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에서 낙점한 인물이 커미셔너를 맡는 '준국가기구적인' 질서에 대항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정권의 허락을 받는다고 해도 그 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새로운 리그를 구성할 '동체급의' 기업을 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기획이었든,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노림수를 위해 외곽을 때리는 명분이었든, 현대가 '새로운 리그를 만들 만큼의'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이상 한국야구계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는 우선 '피닉스'라는 실업야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조만간 뜻을 함께하는 다른 기업들을 규합해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십억의 현금가방을 들고 예의 저돌적인 기세로 대학야구팀 숙소를 밤낮으로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해 대학을 졸업하는 선수들은 어차피 곧 똑같은 프로선수가 된다는 전제하에 훨씬 많은 계약금에다가, 당시만 해도 프로선수가 되면 포기해야 했던 올림픽 대표선수가 될 자격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존 프로야구팀들과 달리 이런저런 규약과 합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현대 피닉스는 1994년 연초부터 일찌감치 민첩하게 움직이며 계약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피닉스, 18의 싸움판에 서다

 

19946월 무렵 이미 그 해의 대졸 빅4로 불리던 문동환, 심재학, 안희봉, 위재영을 비롯한 상위랭커 25명이 모두 현대 쪽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대를 졸업한 뒤 롯데의 지명을 받고도 곧바로 상무에 입대했던 마해영을 비롯한 전역예정 선수들도 상당수가 현대 피닉스행이 예약되어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잘 골라서 지명만 해놓으면 선수들로서는 별 수 없이 입단하게끔 되어있었기에 느긋하기만 했던 8개 프로구단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1031일까지는 아마추어 팀 소속의 선수와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던 아마와 프로 사이의 합의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이 달아오른 프로팀들은 '현대보다 한 장 더 얹어 주겠다'며 달려들었고, 결국 그렇게 한 개의 아마추어 팀과 여덟 개의 프로팀 사이에 치열한 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7월 들어 태평양 돌핀스가 4년 전부터 매달려온 투수 위재영을 2억 이상의 계약금과 4년 전 대학과 이중계약에 휘말렸을 때 깨끗이 물러나고 기다려준 인정에 호소한 끝에 '구두약속'을 받아냈고, LG 트윈스 역시 비슷한 액수와 방식으로 타자 심재학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단들은 현대와의 돈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전선이 고졸예정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김승관(삼성)과 조현(LG) 등이 각각 억대의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행을 확정했다. 그 무렵 끝내 대학행으로 결론이 난 고졸 최대어 김건덕에게 건네진 제안은 2억이 넘을 정도였다.

 

프로팀 사장들은 '한 구단이 한 명씩만 책임지고,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선수를 빼옴으로써 현대를 저지하자'고 서로를 독려해가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만큼 모든 면에서 지난해보다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뜨거운 돈싸움이 펼쳐졌다. 애초에 역시 1억 가량의 계약금으로 현대를 택했던 김재걸을 돈싸움에 자존심싸움까지 벌인 끝에 삼성이 21000만 원이라는 황당한 액수를 던지며 끌어낸 것 역시 그런 와중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문희성, 조경환, 조태상은 그렇게 프로팀으로 한 발을 옮기려다 다시 '그 돈에 다시 한 장 더'를 외친 현대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 문동환 대학 시절,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최동원과 선동열 못지 않은 재목으로 꼽혔던 문동환. 1994년 현대 피닉스는 그에게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최고액이었던 3억원을 안겨주었지만, 그도 선수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사상 최대의 돈 싸움, 하지만 곧 다다른 막다른 길

 

19941128, 결국 현대 피닉스가 창단식을 가졌다.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최고액인 3억 원을 받은 문동환을 비롯해 문희성, 안희봉, 조경환 등의 A급 선수들 외에도 조태상, 김동호 등이 모두 억대 이상의 계약금을 챙기며 현대 피닉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프로 창설 이래 최강의 아마추어 팀이 탄생한 것이고, 거꾸로 프로팀들은 역사상 최악의 신인흉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5년에도 피닉스의 기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프로 출신의 김시진과 김봉연이 코칭스태프로 가세했고, 이듬해에는 임선동과 박재홍을 LG와 해태로부터 빼앗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런 화려한 멤버들의 힘으로 피닉스는 실업야구리그에서 어린애 팔 비틀 듯 승리를 잡아냈고 1995년과 1996년 사이 실업무대의 거의 모든 대회를 휩쓸며 공룡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1995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 2 프로야구리그의 창설멤버라는 선수들의 꿈을 일시에 박살내버리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1995831, 현대건설 이내흔 사장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매입대금은 무려 470억 원. 피닉스 선수들에게 쏟아 부었던 경악스런 계약금 수십억 원도 사실 미끼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엄청난 규모의 머니게임이었고, 이제 피닉스는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의 전력을 빠르게 보강하기 위한 선수공급처 혹은 선수거래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는 96년 재출범을 앞두고 태평양 시절부터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1번 타자감으로 박재홍을 보강할 수 있었고, 그 박재홍이 1번보다는 3번으로서 더 큰 효용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자 다시 문동환을 롯데로 보내면서 전준호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 힘은 그대로 창단 첫 해 한국시리즈에 오른 데 이어 3년차인 1998년에는 인천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이루어낸 원동력이었다.

 

순식간에 잊혀진, 하지만 거대했던 사건

 

유니콘스가 창단한 이후, 피닉스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실업팀으로 전락했고, 2002년에는 실업리그의 소멸과 함께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나마 프로야구 8개구단을 동시에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거창한 팀에 관한 기억은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잠깐 스쳐갔을 뿐인 임선동과 박재홍,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무대에서 한 번이라도 불타올랐던 문동환과 조경환을 제외한다면 그 화려했던 멤버들 대다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히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갔고, 선수 이력을 마쳐갔기 때문이다.

 

안희봉과 강혁, 그리고 문희성과 김동호와 조태상. 실업무대에서 의미 없는 적수들과 만나 알루미늄 배트를 든 채 2, 3년을 허송한 탓이 크다고도 하고 '피닉스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곳곳에서 제대로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고 원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던 계약금과 너무 쉽게 잡힐 것 같았던 장밋빛 미래가 그들이 한순간도 놓치지 말았어야 할 정신적 긴장과 균형을 무너뜨린 탓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1000만 원이라는 과분한 계약금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늘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단한 '먹튀'라도 되는 듯 한탄하고 조롱하던 팬들의 시선만 아니었다면 김재걸이 조금 더 멀리 뻗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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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4] 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조치

YS정부의 방위병 퇴출, 프로야구사를 바꾸다

 

1995년 4월 22일, 부산 사직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삼성 라이온즈를 불러들여 홈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는 1989년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고 1994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곧장 7승을 올리며 기대를 모은 2년 차 강상수였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강상수는 그날도 3회까지 삼성의 강타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4회 초가 채 끝나기 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실과 이정훈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린 것까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갑자기 강판해야 했던 이유는 TV를 통해 경기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상수는 첫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 방위병으로 입대한 군인 신분이었고, 주말을 이용해 홈경기에 등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된 소속부대 관계자가 경기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10년 이상 불안하게 이어져 온 '방위병의 홈경기 출장'이라는 관행은 그렇게 확실히 깨졌고, 그 이후 한국야구의 물줄기는 크게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다.

 

방위병 출장금지, 한국야구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1982, 프로야구위원회 초대 총재였던 서종철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각 부서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요구를 국방부가 거절할 수 없었고, '복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방위병의 경기 출장을 허용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홈경기에만 출장하는 조건이었지만, 퇴근 후의 시간인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서 '시즌의 절반'은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1984년에 입대한 베어스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이었고, 1993년 프로 입단과 동시에 상무에서 방위부대로 소속을 바꾼 라이온즈의 신인 양준혁은 그렇게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충격을 몰고 오기도 했다. 대개 대졸 신인들은 첫 시즌을 보내며 '프로감각'을 익힌 뒤 2년차를 방위병 신분으로 보냈고, 3,4년차부터 전성기를 향한 본격적인 스퍼트를 시작하곤 했다.

 

 

▲ 전두환 대통령과 서종철 총재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하고 있다. 그 뒤에 선 이가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 서종철이다.

국방부장관을 지낸 군 원로였던 그는 프로야구선수들이 병역과 경기출장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고, 국방부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 괴물신인, 괴물방위병 1993년에 데뷔한 양준혁은 '괴물신인'이라 불린 첫번째 선수였다. 그는 신인으로서 타율, 출루율, 장타율의 세 부분을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시즌 내내 팀 선배 김성래와 홈런왕 타이틀을 다투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성적이 놀라웠던 것은 신인이라서가 아니라 방위병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쟁자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경기출장기회에도 불구하고 대등하거나 압도적인 성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문민정부 3년 차를 맞이하던 한국인들은 슬슬 '특권'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동안 사회적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군대'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것은 무려 30여 년간 군사정권 아래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것이 가지는 모순된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대란 그 자체로 가늠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힘 좀 쓴다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자기 아들만큼은 빼고 돌려 '빡빡 기며' 삼 년을 보내는 서민의 자식들을 서럽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문민'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당시의 정부는 그런 국민적 감성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라면 그들이 늘 그랬듯, 맥락 없이 터뜨리는 '깜짝쇼' 방식의 일 처리에 있었다. 그 해 봄, '군인은 영리행위를 하거나 겸직할 수 없다'는 군인복무규율에 근거해 각 부대가 해당지역의 프로야구팀에 방위병 선수의 출장 불가방침을 통보했고, 그렇게 갑작스레 내려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는 프로야구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1995년 봄을 기준으로, 방위병 신분의 프로야구선수는 모두 55명이었다. 10명과 9명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서 군부대로 출퇴근했던 방위병은 돌핀스와 이글스가 가장 많았고, 5명씩이었던 베어스와 타이거즈가 가장 적었다.

 

하지만 정작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트윈스와 타이거즈였다. 트윈스는 박종호(2루수)-유지현(유격수)-송구홍(3루수)으로 이어지는 주전 내야수 전원이 방위병이었고, 타이거즈는 투수·타수의 새 기둥인 이대진과 이종범이 방위병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구단들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경기력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은 물론이고, 방위병임에도 경기출장을 전제로 계약을 하고 연봉을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따져도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된 셈이기 때문이었다. 각 구단과 기업들이 각자 가능한 통로를 통해 정부를 압박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반응이 돌아왔다. 즉흥적인 조치에 예상을 뛰어넘는 파장이 이어지자 국방부 역시 당황했던 것이다.

 

427, 이정린 국방부 차관은 '오랜 관행을 바꾸면서 유예기간도 두지 않으면 큰 혼란이 빚어진다'는 이유를 들며 한 발 물러섰다. 연말까지는 그대로 출장을 허용하되, 12월 이후로는 규정대로 출장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 사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며 프로야구판을 들었다 놓았던 갈지자(之) 행보에 대한 비판여론이 치솟자, 다시 정부는 521일 국방부 제1차관보 손병익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그 해 당장은 한 시름을 놓았지만, 정해진 대로 이듬해부터는 방위병들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굵직한 변화의 줄기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야구소년들, 병역의 부담을 더 무겁게 느끼다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대거 프로 직행을 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직행을 택하는 것은 '소년가장'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던 분위기가 있었다. 프로원년, 진흥고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김정수와 장채근이 해태 코치의 꼬임에 넘어가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했다가 뒤늦게 아버지에게 뒷덜미 잡혀 대학 기숙사에 던져졌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대학과 프로팀이 대등한 위치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의 문호가 좀 넓어지고 집집마다 살림에 구김살도 좀 펴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방위병 출장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던 1994년은 프로와 대학의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그 해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 김재현과 김동주가 각각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사연 속에 프로와 대학으로 갈라섰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병역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4년의 세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갑자기 머리를 누르기 시작한 2,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년간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부터 대졸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해오던 드래프트에 고졸선수들까지 포함시키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또한 방위병 경기출장 금지조치는 그로부터 몇 해 뒤 터져 나오게 되는 대규모 선수병역비리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합법적 병역 회피수단'인 국제대회 대표 선발과 메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야구드림팀'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그렇게 젊은 고졸선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팀 입장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느긋하게 한두 해 가르칠'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2군이 종전의 '부상자 회복실' 내지는 '애매한 부실자원 관리소'의 낡은 의미를 벗고 비로소 '미래 스타들의 산실'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도 그에 속한다.

 

야구선수의 병역,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문제

 

야구선수들에게 병역이란 보기보다 중요한 문제다. 누구라도 첫발을 내딛는 순간, 결코 10년을 장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프로선수생명이라면 그 중 두 해 이상의 공백과 정체는 초일류와 삼류의 갈림길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역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참 어렵게 넘어서는 성장의 한 고비라는 점에서 선수들만 동정하고 마음 쓸 일이 아니긴 하다. 그래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기도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극히 특별한 몇몇의 사례가 기준이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이기에 모든 선수들에게 정답이라고 제시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박찬호에서 추신수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국위선양하면서 문제를 돌파한 이들도 훌륭하고, 상무나 경찰청을 거치며 한 단계 올라서서 돌아오는 선수들도 대견하다고 인정해줄 뿐이다.

 

하지만 벽의 가장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고 뛰어넘어 돌아온 이들의 분투에 대해서는 한 번 더 돌아보고 박수를 쳐줄 이유가 충분히 있다. 예컨대 일반전투부대, 혹은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돌아와 다시 프로야구 판도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윤상균(LG)과 임훈(SK)이 바로 그들이다

 

▲ 해병 윤상균의 무한도전 고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 두 번의 드래프트에서 모두 쓴맛을 본 뒤 해병대에 입대했던 윤상균은 제대 후 2008년 SK와이번스의 신고선수로서 프로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뒤 트레이드를 통해 LG 유니폼을 입은 올 시즌, 그는 '에이스 킬러'로 이름을 날리며 팀의 상승세를 이끄는 소금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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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5] 1996년 박재홍, 30홈런-30도루시대 개막

물병 굴욕 타자, 가장 강하고 빠른 선수가 되다

 

한국야구의 걸출한 재목들이 가장 많이 태어난 해로 1973년이 꼽힌다. 그 해에 태어난 선수들 중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데뷔한 것이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던 73년생의 핵심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나타난 것은 1996년이었다.  

 

하지만 정작 1996년 박찬호와 조성민이 미국과 일본으로 떠나고, 역시 일본 진출을 원했던 임선동이 자신을 1차 지명의 사슬로 엮은 LG와 기나긴 법정싸움을 벌이느라 야구장 밖을 떠돌면서 소문보다는 먹을 것 없는 잔치가 될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투수로는 차명주와 이정길이 각기 5억과 4억의 계약금을 받으며 '반사이익'을 챙기기도 했지만, 각기 2승과 0승으로 주저앉으며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그 해 야수로서 주목받은 '92학번'들은 박재홍과 김종국, 그리고 홍원기였다. 그 중 박재홍이 4억대, 김종국과 홍원기가 2억대의 몸값과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공식경기인 시범경기 개막전에 선두타자로 나선 첫 타석에서 초구 홈런을 날리며 '또 한 명의 이종범'으로 이름을 알린 해태의 김종국과 시범경기 8할 타율을 기록한 한화의 홍원기였다.

 

반면 박재홍은 파워와 스피드 어느 면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고비용 저효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대졸 92학번의 대표주자, 박재홍


92학번의 '3', '4'니 하던 선수들이 이래저래 모두 빠져나가 버렸던 그해 박재홍은 실질적으로 투수와 야수를 통틀어 대졸 신인 중 최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 30-30 개척자, 박재홍 30-30은 홈런과 도루 양 부문에서 모두 최고수준임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20-20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피곤한 우여곡절 속에 박재홍은 겨울 전지훈련조차 참가하지 못했고, 그것은 더구나 기나긴 정규시즌이 요구하는 체력관리의 노하우를 가지지 못한 신인 선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단이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갑이 주고 받았지만 누구도 2할대 중반조차 넘기지 못했던 1번타자 자리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피드와 주루 감각만큼은 아마와 프로의 격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었고, 아직 다듬어지거나 검증되지 못한 단신의 박재홍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홍은 외야수로 전향했고, 1번 타자로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몇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들이 드러나면서 1번 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우선 너무 공격적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박재홍은 선두타자로 나서면서도 투수가 더 많은 공을 던지게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작정을 했다는 듯 초구부터 풀스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삼진 수가 볼넷의 두 배를 넘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신중하게 파헤쳐가며 실마리를 잡으려던 김재박 감독을 허탈하게 했고, 작전이라는 걸 써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몹쓸 1번 타자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결격사항은, 지나치게 장타력이 좋았다는 점이었다. 박재홍은 개막하자마자 안타의 절반 가까이를 장타로 연결했고, 3경기에 하나 꼴로 홈런을 날려대며 4번 타자 김경기마저 제치고 홈런랭킹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경기쯤 소화한 뒤로는 아예 홈런 단독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김재박 감독은 '자동 원아웃'으로 경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선두타자의 공백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3번 타순으로 옮겨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번으로 타순을 옮긴 뒤, 탐색과 출루라는 부담감마저 벗어버린 박재홍은 미친 듯이 휘두르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68%. 높지 않은 도루 성공률이었지만 출루만 하면 무모하리만큼 달려대는 그는 확실히 상대 배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걸 넘어 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결대로 친다'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듯, 어떤 구종 어떤 구질의 공이든 자신의 방망이로 새로운 궤적을 입력해 펜스 너머로 직격해버리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선보이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타자'라는 느낌으로 투수들을 주눅들게 하곤 했다.

 

716, 박재홍은 한화와의 청주 원정경기에서 3회 초 이상목을 상대로 3점 홈런을 빼앗아내며 20-20을 완성했다. 신인으로서는 두 해 전 김재현에 이어 두 번째, 통산으로는 8번째였고, 그 여덟 번 중 가장 적은 경기 만에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지나친 장타력, 1번에서 3번으로 '좌천'되다

 

물론 내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동계훈련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치르는 프로 첫 시즌의 체력적 부담은 날씨가 더워지면서 성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장종훈의 41홈런 기록을 깨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던 페이스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8월 들어서는 그와 함께 팀의 분위기도 눅눅하게 처지기 시작했다. '부정타격자세시비'도 부채질을 했다.

 

다른 타자들과는 정반대로 타석 맨 앞쪽에 서서 타격하던 그의 왼발은 종종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석 밖의 공간을 밟았다. 그것을 당시 쌍방울의 김성근 감독이 처음 지적했고 곧 이어 해태의 김응룡 감독도 가세했다.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규칙에는 '타자가 한 발 또는 양 발을 완전히 타자석 밖에 두고 타격을 했을 경우 아웃 처리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박재홍의 경우 분명히 배트가 공을 때리는 순간 한 발을 타자석 밖에 두곤 했다. 

 

하지만 KBO'타격을 하기 전에 타석을 벗어나면 아웃처리하며, 타격을 하는 과정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심판이 고의성 여부를 판단해서 처리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박재홍에게 부정타격 아웃을 선언한 심판은 없었고, 그렇게 한 고비는 넘겨졌다.

 

또 다른 고비는 고향 광주 팬들의 원망이었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아끼고 기다려왔던 광주 팬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특히 박재홍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첫 시즌부터 프로야구무대를 쥐고 흔드는 것을 보면서 배신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510, 첫 광주 원정경기에 중견수로 나섰던 박재홍은 7회 말 수비 때 해태 이순철의 중전안타 타구를 잡다가 관중석에서 날아온 물병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결국 더그아웃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광주 관중석에서는 종종 그에게 십 원짜리 동전이 날아들었고, 고향의 팬들에게 받는 따가운 시선과 야유는 부정타격 시비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고향의 관중석에서 날아든 십 원짜리 동전

 

하지만 처음 달리는 프로무대 정규리그에서 최악의 구간을 지날 무렵에 만난 꿀맛 같은 올스타전 휴식기간을 거친 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8월 말, 조금씩 타격감을 회복하기 시작한 데 이어 93, LG와의 잠실 원정경기에서 그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만다.

 

3회 초 11,3. 선발로 전향해 다시 LG 마운드를 이끌던 김용수가 그 무렵 자타가 공인하던 박재홍의 약점인 몸 쪽 낮은 코스로 떨어뜨리려던 포크볼이 높은 곳으로 밋밋하게 밀려 들어왔고, 그런 횡재를 놓칠 리 없던 박재홍의 배트가 둔탁하게 밀어낸 공은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 스탠드에 박혔다. 시즌 30호 홈런. 그리고 이미 825일에 달성해두었던 32도루와 함께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30-30'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홈런을 잘 치는 선수가 도루도 잘 하는 것은 70년대까지 우리 야구사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에이스 겸 4번 타자'도 없지 않은 마당에 홈런과 도루를 겸비한다는 건 사실 큰 화제도 아니었다. 장효조, 김일권, 김봉연 같은 선수들이 모두 대학과 실업 무대에서 도루왕과 홈런왕을 두루 섭렵했고 김재박 같은 경우에는 도루왕과 홈런왕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에서 투수로까지 활약한 인물이기도 했다.

 

프로가 출범한 뒤로도 처음 30홈런과 '20-20'을 달성했던 김성한이 한때 10승 투수로도 활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고 재일교포선수들을 통한 문화충격을 겪으며 빠르게 진화하고 성장한 한국야구는 곧 전문화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잘 던지면서 잘 치는 선수는 김성한 이후로 곧장 씨가 말랐고, 강하면서 빠르기도 한 타자 역시 김성한을 제외하곤 각자 한 쪽을 택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만수와 장채근이 홈런타자를 상징하고 이순철과 전준호가 도루왕을 상징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김성한으로부터 이호성, 장종훈, 이정훈, 송구홍, 이순철, 김재현으로 이어졌던 '20-20' 역시 '호타준족'으로 불리긴 했지만 20개씩의 홈런과 도루로는 어느 쪽에서도 '최고'로 이름을 내밀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재홍의 30-30, 아니 30홈런 36도루는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당장 홈런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도루 부문에서도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인 끝에 4위에 오른 '최고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두 해 전 입단한 이종범, 그리고 한 해 뒤에 입단하는 이병규와 더불어 '완성형'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들의 탄생이었고, 한국야구가 또 한 번 질적 성장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 원조 팔방미인, 김성한 이만수와 더불어 1980년대 최강의 타자였던 김성한. 그는 첫 타점왕에 올랐던 1982년 팀의 유일한 10승투수이기도 했다.

▲ 이종범의 눈물 박재홍, 이병규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이후 '완성형 선수들의 시대'를 이끌었던 이종범.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 그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가슴 속 어느만큼까지 스며드느냐를 가지고 야구팬의 '구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형 선수의 출현, 한국야구의 또 한 단계 성장

 

1996년 한국프로야구는 언제나 처럼 8개 팀이 피터지게 싸운 끝에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유례없이 강력한 두 개의 돌풍이 지배한 해이기도 했는데, 하나는 김성근 감독의 마술로 정규시즌 2위까지 돌격했던 만년 꼴찌팀 쌍방울 레이더스였고, 다른 하나는 '만년 꼴찌에서 이등 팀' 태평양을 인수해 창단 첫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현대 유니콘스였다.

 

특히 LG감독 시절 펜스를 앞으로 당겨 'X'을 설치하기도 했던 장본인이지만, 그해 김재박 감독은 인천 도원야구장의 펜스를 낮추며 타격에 승부를 걸었고, 박재홍은 그 최대의 수혜자였다. 박재홍은 그해 인천에서만 18개의 홈런을 날렸고 30개의 홈런을 28명의 투수에게서 골고루 빼앗아내는 '무차별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가 질주하고 김경기가 20개로 뒤를 받치며 전통의 물방망이 인천팀이 사상 처음으로 팀 홈런 1위를 기록하는 대포군단으로 거듭났고, 그렇게 두 해 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나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보감독 김재박과 초보선수 박재홍이 이끌었던 현대호의 돌풍은 또 하나의 돌풍 쌍방울과 플레이오프 5차전 혈전을 치르며 함께 잦아들고 말았다.

 

1997년에는 이종범이, 그리고 1999년에는 이병규와 홍현우와 데이비스가 30-30클럽 회원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박재홍이 가지는 위상은 각별하다. '최초'일 뿐만 아니라 1996년에 이어 1998년과 2000년에도 30-30을 성공시키며 '최다'의 주인공이며, '유일한 다수 성공'을 통해 시즌의 특수성과 가장 관련이 적은 사례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30-30 기록이 작성된 지 10년이 넘고 있다. 그리고 박재홍도 벌써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둔 노병이 됐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방망이와 다리가 모두 녹슬어버린 박재홍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아직도 '호타준족'이라는 별명이 외쳐지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1996년을 목격한 이들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상식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사람을 상대하며 기록과 싸우고 기억과 맞서며 추억과 마주하는 것이 프로야구라서 그렇다. 

 

예컨대, 그해 돌풍의 주역 김성근 감독과 박재홍이 한 팀을 이룬 SK와 그 돌풍을 차례로 잠재운 이종범과 이대진의 팀 KIA. 예컨대 20097차전 승부를 지켜보며 1996년의 회상에 잠겨볼 수 있는 것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야구장에서 길게 버텨온 올드팬들의 몇 안 되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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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6] 1997년 4월 29일, 그의 은퇴식

은퇴경기 거부한 박철순, 마운드에 무릎 꿇다

 

만나는 일 못지않게 떠나보내는 일 역시 중요한 것은 야구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선수의 인생이란 길어도 이십 년을 넘기 어려운 것이고, 팬의 기억이란 한 사람의 삶보다도 길게 이어져 한 번도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선수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깝게 떠나보낸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은 그가 선물한 수많은 즐거움과 놀라움과 희열의 순간마저 모두 덮어버리는 우울한 장막이 돼 버린다.

 

예컨대 김재박과 이만수, 그리고 최동원과 김시진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 한국 프로야구 스타계보의 맨 윗줄에 가장 굵은 글씨로 기록될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은퇴식을 치르지 못한 채 쫓겨나듯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는 점이다70년대 생의 야구소년들, 각자 유격수를, 포수를, 그리고 투수를 꿈꾸게 했던 영광의 세월을 보낸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늘 한 줄기의 그늘이 스쳐가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한 선수를 떠나보내기 위해 3만 관중이 모여들다

 

1997429,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트윈스와의 베어스 홈경기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팔려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 뒤로 다시 베어스의 평일 홈경기가 매진되는 데는 무려 124개월이 걸릴 만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그날 통산 76승을 기록했을 뿐인 '그저 그런' 한 노장투수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파였다. 기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박철순이라는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 박철순 그곳에서 이기고, 그곳에서 지고, 그곳에서 쓰러졌다가, 그곳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내려와 목숨 같던 유니폼을 벗었다.

 

 

"그날 원래 은퇴경기를 하기로 했어. 그래서 내가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딱 1이닝을 던지고 내려와서 은퇴식을 하기로 했는데···그 때 상대팀 타자들이 와서 그러더라고. 그냥 가운데로 던지시면 알아서 스윙 세 개 하고 물러가겠다고. 은퇴경기 마지막 등판에서 딱 연속으로 삼진 세 개를 잡고 내려가는 거지. 그런데그거 못하겠더라고. 내가 어떻게 지키고 버텨온 마운드인데, 거기서 장난질 치는 것 같고. 그래서 도저히 등판할 수가 없다고, 그냥 은퇴식만 하게 해달라고 했어." (박철순)

 

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1년을 보낼 때까지 체격이 좋고 공이 빠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그래서 전국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박철순이 투수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공군 팀 '성무'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한 근성의 사나이 이종도와 부대끼며 '드디어 야구를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당대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명투수 남우식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며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대 말년에 출전한 1978년 백호기 결승에서 연세대 최동원과 완투맞대결을 벌여 20으로 승리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쿠바전 최초의 승리투수가 되고 다시 미국무대로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것은 역시 1982, 프로야구 원년이었다. 그 해 서울연고 선수들을 21로 나누어 가지게 된 MBC청룡과 OB베어스는 두 팀만의 드래프트를 벌였고, 청룡이 먼저 김재박과 이해창을 지명한 뒤 OB베어스가 찍은 것이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그렇게 OB 유니폼을 입었고, 마침 서울에서 열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 등이 프로진출을 유보당했던 그 해 마운드의 독보적인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는 빠른 공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였지만, 간간히 너클볼과 팜볼 같이 생소한 궤적과 속도로 날아가는 신무기를 선보이며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해 팀당 80경기가 치러지는 가운데 그는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기록했고, 그런 압도적인 활약으로서 팀에 역사적인 첫 우승컵을 안기게 된다.

 

원년 에이스, 그리고 '불사조' 신화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야구팬들에게 각별하게 기억된 것은 오히려 그 뒤의 일들 때문이었다. 심각한 허리부상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후유증이 이듬해부터 시작됐다. 다시 부상부위에 직선타를 맞은 불운까지 겹치며 그는 병상과 연습장을 오가는 기나긴 세월을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오랜 투병생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그를 돕기 위해 구단 프런트가 주선한 광고 촬영에 나섰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사고까지 당하면서부터는 연습장에서보다 더 긴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하는 신세로 몰린다. 

 

"나한테 남아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고, 그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유니폼 입고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지다가 죽어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박철순이라는 사람이, 뭐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또 대단한 투수도 아니었거든. 그저 단 하나,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 그랬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야구팬들이 대견하게 봐주시고 기억해주시는 건데정말 고마운 일이지." (박철순)

 

허리, 발목, 허리, 발목.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었던 부상의 늪에서 헤어 나오는 데만 십여 년이 걸렸다. 그 사이 연봉은 줄었고, 병원비는 쌓였으며, 그 사이 억세진 두 아들을 지키고 키우는 것 역시 박철순 혼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재기에 성공해 최고령 승리투수, 최고령 완투승, 최고령 완봉승 따위 기록들을 차례로 깨나가며 90년대 내내 7승에서 9승을 기록하는 듬직한 허리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결국 1995년에는 팀의 두 번째 우승에 작은 디딤돌 노릇을 해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다 문득 멈춰 섰을 때, 프로원년을 함께 시작했던 이들 중 아직 현역으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1997, 그는 1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응원팀에 상관없이 3만 명의 눈물어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고, 무릎을 꿇은 뒤, 투수판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어. 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곳이고, 내가 쓰러진 곳이고. 거기서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고, 실수도 했고. 한 번은 전날 비가 쏟아지니까 내일 경기 안 한다고 새벽까지 술을 퍼먹었는데 갑자기 날이 개서 비틀비틀 올라갔다가 마운드에서 토한 적도 있었지. 허허허. 거기서 물러나면서 정말 입을 맞추고 싶었어."(박철순)

 

최고의 업적을 쌓은 선수도 아니며, 가장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대단히 살뜰하게 후배들을 끌고 당겨준 선배도 아니었던 박철순. 하지만 그런 그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삶이 그렇듯 야구 역시 단순하지 않은 굴곡의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 구대성 국가대표팀 최강의 에이스. 그리고 최강의 선발과 최강의 마무리를 동시에 감당했던 최강의 투수.

 

 

▲ 김현욱 쌍방울과 삼성의 에이스였으며, 무엇보다도 중간계투의 가치를 한 단계 격상시킨 주인공.

▲ 주형광 부산야구의 봄날을 이끌었던 에이스. 선수인생에는 행운도 있고 비운도 있었지만, 마운드에 입을 맞출 기회를 가졌던 것은 같은 팀 출신의 투수들 중 행운에 속했다.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떠나는 투수들

 

19974월의 그날 이후, 투수판에 입을 맞추는 것은 투수들의 은퇴식에서 빠지지 않는 순서로 자리 잡았다. 부산야구의 짧은 봄날을 이끌었던 주형광이 그랬고, 중간계투로서 20승 신화를 남긴 김현욱이 그랬으며, 또한 200승 신화의 송진우와 국가대표팀 사상 최강의 에이스 구대성도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팔꿈치와 어깨와 허리와 무릎의 뼛가루를 쌓고 땀과 눈물로 다져온 땅 위에 마지막으로 입 맞추고 눈물 떨구며 옷을 벗었고, 그렇게 이어가고 물려온 마운드는 야구팬들이 마음으로 지키는 성지가 되고 있다.

 

만남의 기억은 헤어질 때까지 이어지지만, 헤어지는 순간의 기억은 잊혀질 때까지 계속된다. 야구가 계속되는 한 야구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늘의 야구팬들이 베이브 루스와 사첼 페이지를 기억하듯 내일의 야구팬 역시 이종범과 손민한을 이야기할 것이다. 헤어짐의 순간에 좀 더 세심해야 할 이유를 구단들이 좀 더 깊이 새겨주었으면 하는 이유다

 

▲ 송진우 200승과 3000이닝의 금자탑을 세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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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7] 1998년, 외국인 선수의 등장

숀 헤어는 장외홈런을 장담하지 않았다

 

프로야구가 '상품화된 야구'를 의미하는 한, 이미 돈 문제는 부차적인 게 아니다. 하지만 돈이 결정하는 승부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이들은 없다는 점이 난감한 문제들을 만든다. 비즈니스인 동시에 비즈니스가 아니어야 하고, 돈으로 움직여야 하는 동시에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것. 그것이 프로야구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딜레마다. 

 

한국 프로야구가 그 딜레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때는 1998년이었다. 그해 한국사회는 'IMF시대'의 첫해를 맞이했고, 프로야구 판에서도 8개 구단 중 2개가 모기업의 좌초 속에 선수라도 팔아야 버틸 수 있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특히 그 2개 구단 중 하나가 통산 9회 우승의 전설적인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였다는 점은 더 극단적인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오직 돈 앞에 무릎 꿇은 최강자의 모습은 많은 프로야구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또 하나의 변수가 엎친 곳에 덮쳤는데, 그것은 외국인 선수에 대한 문호개방이었다. 팀당 두 명씩 영입할 수 있게 된 외국인 선수의 능력치는 절대적으로 그들의 몸값과, 그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스카우트진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있는 때문이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팀들에게는 즉각적인 전력상승 기회가 주어졌고, 그럴 수 없었던 팀에게는 당연하게도 더 큰 상대적 박탈감이 남게 되었다.

 

▲ 한국 프로야구의 첫 번째 외국인선수들 각 구단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 쪽부터 조 스트롱(현대), 마이크 부시9한화),

더그 브래디(롯데), 마이클 앤더슨(LG), 숀 헤어(해태), 우즈(OB). 그 중 숀 헤어와 우즈는 나란히 역대 최악과 최고의 외국인선수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야구판의 부익부 빈익빈 시대

 

1997년 11월 3일부터 열흘간 미국 플로리다에서 한국프로야구의 외국인선수 선발을 위한 트라이아웃 캠프가 열렸다. 모두 16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류심사를 거쳐 메이저리그와 트리플A 경험이 있는 선수 위주로 58명이 공개훈련에 투입되었고, 세 차례 공식 연습경기를 통해 각 팀 스카우트의 낙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중 21명은 투수였고, 5명의 포수를 포함해 야수가 37명이었다.

 

직전 3년간 합산 성적의 역순으로 전체 1번 지명권을 가진 현대가 대만 프로야구에서 5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웠던 강속구 투수 조 스트롱을 지명했고, 이어서 마이크 부시, 에드가 케세레스, 호세 파라, 주니어 펠릭스 등 메이저리그 경력의 선수들이 차례로 각 팀의 지명을 받고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은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와 홈런을 칠 수 있는 야수들이었는데, 서양인 선수들에 대한 열등감과 기대감의 핵심이 '파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뛴 첫해였던 1998년, 한국프로야구의 판도를 결정지은 것은 외국인선수들이었다. 조 스트롱이 그럭저럭 마무리 역할을 하고 스캇 쿨바가 4번 타자로서 타점, 타율, 홈런에서 3,4,5위에 오르며 공격력의 중심을 잡아준 현대는 그 해 우승을 했고, 베이커와 파라가 각각 선발과 마무리로 15승과 19세이브를 올려준 삼성이 정규시즌 2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대박을 터뜨린 것은 2순위로 고른 타이론 우즈가 당장 42홈런을 터뜨려 장종훈의 기록을 넘어서며 외국인 최초의 MVP에 오르는 역사를 남긴 OB 베어스였다. 전년도 꼴찌였던 팀이 일약 4강권으로 발돋움한 것 역시 우즈의 힘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 이대진,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의 1998년 이대진은 그 해 10타자 연속삼진기록을 수립하며 절망과 싸웠다. 하지만 외국인선수 영입의 실패,

이대진의 부상, 그리고 김상진의 암 발견 등의 악재가 연달아 터져나왔고, 1998년은 결국 해태 타이거즈가 강팀의 면모를 보인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자면 첫해의 외국인 선수들이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타자로서는 우즈와 쿨바만이 주요 순위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고, 투수로서는 베이커가 선발진에서, 그리고 스트롱, 앤더슨, 파라가 불펜에서 각각 손가락에 꼽히는 활약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애초에 화려한 경력으로 화제를 모았던 마이크 부시(한화)와 더그 브래디(롯데)가 2할대 초반의 물방망이를 휘두른 것을 비롯해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실망스런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마이너리그에서 주로 뛰어왔던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역설적인 경향이 있었다.  

 

박찬호의 조국이라는 점 말고는 세계 야구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극동지역의 조그만 나라에까지 눈길을 돌린 메이저리거 출신이라면 뭔가 사연(예컨대 부상 같은)이 있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이고, '만년 마이너리거'들로서는 더 늦게 전에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빅리그 물을 먹어봤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 고르기'에서도 구단의 능력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봉은 상한선이 12만 달러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돈 싸움' 자체의 위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현지 에이전트들이나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좀 더 규모가 있고 능력이 있는 스카우트진을 파견해 심층적으로 선수 분석에 매달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구단과 그렇지 않은 구단의 선택은 애초에 정확성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구단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기회란 단 열흘간의 캠프, 그리고 단 세 차례의 공식 연습경기뿐이었다.

 

구단의 역량이 성패를 가르다

 

예컨대, 공식적인 절차 외의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가 뽑아온 숀 헤어라는 선수가 있었다. 89년부터 97년까지 9시즌을 뛰며 마이너리그에서 2할8푼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한 만 30세의 젊은 선수였고 메이저리그에서도 4시즌에 걸쳐 64경기에 출전했던 나름대로 준수한 경력의 외야수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 '역대 최악의 외국인 선수'를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름으로만 남았는데, 그는 홈런 없이 고작 .206의 빈타에 허덕인 끝에 29경기 만에 조기퇴출되는 불명예스러운 기록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참담한 실패 원인을 오직 선수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안 되는 사연이 있었다. 숀 헤어의 실패는, 빅리그의 경험만을 믿고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던 부실한 선수와 더불어 좋은 선수를 고르고, 고른 선수에게서 최대한의 능력을 이끌어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라는 '어설픈 구단'이 함께 책임져야 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타이론 우즈 우즈는 한국프로야구의 첫 외국인 선수였으며, 동시에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기도 했다. 만년 마이너리거였던 그는 삼진이 많고 어깨 부상경력이 있다는 점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늦은 밤까지 훈련에 매진하는 진지한 자세를 포착한 OB베어스의 지명을 받았고, 첫 해 42홈런을 날리며 MVP에 선정되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해 당장 십만여 달러의 현금마저 동원할 능력이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외국인 선수를 데려올 능력마저 잃어버린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좋은 외국인 선수들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이종범의 주니치행에 동의해준 김응룡 감독의 원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형식적으로 스카우트진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김응룡 감독의 요구에 따라 '오로지 왼손 타자'만을 대상으로 기록지를 훑어보며 지명선수를 결정했고, 정작 지명된 선수에게는 이렇다 할 조건 제시도 없이 '협상결렬'을 선언하고 귀국해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시즌이 개막되자마자 연패를 당하자 여론은 '지명한 외국인선수마저 데려오지 않는 안일함'을 질타하기 시작했고, 김응룡 감독 역시 '지명해놓은 선수라도 데려와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러자 뒤늦게 신인 3루수 안상준을 트레이드하며 확보한 현금으로 숀 헤어를 불러들였지만, 애초에 형식적인 지명이었던 데다가 계약 실패에 낙담해 반년 가까이 운동을 포기하고 있던 선수가 갑자기 시즌 중에 투입되어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못했던 선수는 생소한 리그를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나마 인내심이 강하지 못했던 데다가 비로소 구단의 이중적인 행보에 염증을 느낀 감독은 단 29경기 만에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짜증스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선수는 낯선 땅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구단의 일 처리 방식에 어리둥절해하던 사이 졸지에 퇴출의 칼을 맞았고, 감독은 오직 면피를 위해 허수아비 같은 선수를 데려다 세우는 얄팍한 구단에 마지막 정을 떼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는' 명문팀의 새로운 구세주가 될 것으로 믿고 반겼다가 마지막 기대마저 놓쳐버리게 된 팬들이야말로 그 부실한 사기극의 최대 피해야였지만 말이다.

 

"'30홈런과 3할 타율 중 무엇을 원하느냐'고?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책임은 '한국야구를 우습게 보다가 혼쭐이 나고 쫓겨난 거만한 용병녀석'에게 미뤄졌고, 그렇게 조금 더 이어질 수도 있었던 선수의 인생과 그 한 시즌의 농사를 함께 망쳐버린 무책임한 구단의 책임은 잊히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30홈런을 원하는가, 아니면 3할 타율을 원하는가' 혹은 '장외로 넘겨야만 홈런인가'라고 물었다는 정체불명의 어록 뿐이었다. 

 

물론 사람 사이에 오간 말과 뜻에 관한 진실이야 그대로 밝혀내기가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이의 기억에 비추어 보는 것이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추론할 뿐이다.

 

"처음에 광주 구장에 왔는데, 당시에는 광주 구장에 펜스가 이중으로 쳐져있었어요. 요즘 잠실구장의 'X존'처럼, 원래 펜스가 있고 그 앞에 또 한 개의 펜스가 설치돼있으니까,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죠. 숀 헤어 선수가 그걸 보면서 확인을 한 거예요. 앞의 것을 넘겨야 홈런이냐, 아니면 뒤의 것을 넘어가야 홈런이냐고. 그리고 30홈런을 원하는가, 3할 타율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당시 선수단 통역 이억중. 현 기아타이거즈 지원팀 과장)

 

가정을 한다는 게 부질없지만, 우즈와 숀 헤어가 만든 승리와 패배의 격차를 제외한다면 물론 망한 살림이더라도 그해 가을야구의 초대권은 한 번 더 해태 타이거즈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해 결국 베어스는 시즌 막판 기적의 연승행진을 벌인 끝에 최종전에서 타이거즈를 꺾으며 1경기 차로 4강 티켓을 잡았고, 해태 타이거즈는 그렇게 강팀으로서의 마지막 면모를 잃게 된다.

 

▲ 쌍방울 레이더스 늘 가난했고 늘 약했던 팀 쌍방울 레이더스. 하지만 바닥에서 출발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고, 1996년과 1997년 연달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첫 우승의 희망에 부풀어가던 무렵 IMF의 삼각파도에 휩쓸렸고, 끝내 매각도 아닌 해체의 비운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맨 왼 쪽에 팀의 마지막 유망주 이진영의 앳된 모습이 보인다.

 

어쨌든 그렇게 우즈와 함께 베어스는 또 한 번의 중흥기를 시작했고, '숀 헤어 소동' 속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길었던 영광의 시대를 마감했다. 물론 그나마 트라이아웃 캠프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더 노골적이고 더 비참한 방식으로 소멸하여 갔던 일 역시, 그해와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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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8] 1999년, 사상 첫 해체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프로야구사의 미아가 된 제8구단

 

19981225, 쌍방울 레이더스가 타격왕과 홈런왕을 지낸 4번 타자 김기태와 3관왕 경력의 투수 김현욱을 삼성 라이온즈에 내주고 양용모, 이계성이라는 무명의 선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물론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와 투수를 받게 된 삼성이 내놓은 실질적인 트레이드카드는 현금 20억 원이었다.

 

한 해 전 역시 쌍방울 레이더스가 15억 원을 받고 넘긴 박경완과 조규제는 그대로 1998년 현대 유니콘스의 첫 우승을 이끌며 프로야구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그러자 재계 라이벌 삼성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태의 조계현, 이강철, 그리고 임창용을 데려가며 맞불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직전 두 해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와 3위권을 지켰던 쌍방울은 1997년 겨울에 터져 나온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추락하기 시작했고, 그 유산을 흡수한 두 마리의 공룡 현대와 삼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떠오르며 '라이거스 vs 레이콘스'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돈으로 남의 집 기둥뿌리를 빼가는' 것을 한국야구위원회 역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 벗고 나서서 흐름을 바꾸고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용오 KBO 총재는 박효수 쌍방울 레이더스 사장을 불러들여 각서 한 장을 쓰게 했고,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식상한 다짐을 곁들여 트레이드를 승인했다.

 

각서의 내용은 A급 선수에 대한 추가 트레이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 전반기 중 무슨 일이 있어도 승률 3할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각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쌍방울 문제를 이사회에서 논의한다'는 애매한 조항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게 내려잡은 '3할 승률'이라는 목표치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하지 않고는 야구장에서 1승이라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껴보지 못한 책상물림의 한가한 망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 김기태 박경완과 조규제가 팔려간 1998년, 김기태와 김현욱은 쌍방울의 마지막 기둥이었고 그 기둥에 의지해 레이더스는 6위로 버텨내며 작은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은 두 기둥마저 뽑혀나간 1999년에 역대 최다패 신기록의 멍에를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 김성근 감독 1989년 태평양 돌풍의 주역 김성근 감독.1996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취임한 그는 이번에도 전년도 꼴찌팀을 곧바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연출했다. 하지만 주력선수를 모두 팔아치운 데다 신인선수의 공급줄까지 묶여버린 1999년만큼은 그 역시 뚫고 나갈 수 없었다.

 

1승도 거져 주어지지는 않는다

 

당시 쌍방울의 사령탑은 없는 전력에서 성적을 뽑아내기로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온 '김성근 감독'이었다. 1989년과 1996, 나란히 전년도 꼴찌 팀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를 맡아 플레이오프까지 올려놓은 것은 그런 그의 실증적인 업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발굴하고 고쳐 쓸 선수의 공급마저 차단된 상황에서 단 한 장의 필승카드도 남기지 않고 털어낸 전력으로도 뭔가를 만들어낼 마력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99 시즌, 쌍방울은 철저한 동네북이었고 승수 쌓기의 제물이었다. 시즌 초반 현대에서 폐기처분된 김성근 감독의 옛 제자 박정현이 4연승을 달리는 오기를 보이며 분위기를 이끌기도 했지만, 곧 팀 승률은 정해진 듯 2할 대 중반으로 맞춰졌다. 그리고 양대리그제가 시행된 그 해, 개막 한 달여가 지난 시점부터 매직리그 선두 LG10게임차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리그 1위 팀이 서너 차례나 자리바꿈을 하는 사이에도 변함없이 승차는 꾸준히 늘어만 갔다.

 

그 사이 선수단과 프런트의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2군이 해산되며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그리고 1군 선수단 역시 원정경기 숙소가 3급 호텔로 하향조정되었고 광주와 대전 원정경기는 매일 전주에서 출퇴근을 하며 치러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선수를 구해달라는 감독의 다급한 목소리는 늘 메아리없는 독백으로 끝이 났고, 오히려 구단 수뇌부에는 감독이 전력보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승부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불신의 분위기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전반기를 마쳤을 때 쌍방울이 기록하고 있던 승률은 각서에 명시한 3할에 한참 못 미치는 .224(17559)였다. 물론 당장 KBO가 쌍방울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구단주와 사장의 발언권이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올스타전이 끝나던 714일 밤 박효수 사장은 '구단주와 사장의 현실인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쓴소리를 서슴없이 해대던 김성근 감독을 만나 해임을 통보하게 된다. 명분은 슬프게도 '성적 부진의 책임'이었다박 사장은 그 자리에서 김 감독에게 '구단 고문직'을 제안했지만, 바로 전날까지도 '지금이라도 선수를 보내주면 반전이 가능하다'며 집념을 버리지 않았던 김성근 감독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살을 베려던 칼에 뼈를 꺾이다

 

지휘봉을 물려받은 김준환 감독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주어진 조건의 한계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다. 김준환 감독이 남은 기간 동안 더한 것은 11승과 38패였고, 결국 최종승률은 김성근 감독이 물러나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는 .224로 맞춰졌다. 그리고 그것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이었다.

 

팀타율(.248)과 팀방어율(5.85), 팀홈런(86) 모두 8위였고 1982년의 삼미 슈퍼스타즈(.188) 덕분에 역대 최저승률은 면했지만 늘어난 경기수 때문에 시즌 97패의 단일시즌 역대 최다패 기록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 해 전주와 군산의 홈경기를 찾은 관중수는 5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4만 9956명으로, 경기당 평균관중수는 757명이었다.

 

1997년 겨울 모기업 쌍방울 그룹이 부도처리된 뒤 레이더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매각 뿐이었다. 하지만 결단해야 할 마지막 시기를 놓친 채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선수를 팔아치우는 방식은 끝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박경완, 조규제, 김기태, 김현욱 같은 주축선수들에 이어 입단도 하지 않은 신인선수(마일영)의 지명권까지 팔아 치우다보니 팀 자체의 가치를 남김없이 갉아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을 베어내겠다고 든 칼이었지만 현장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 어설픈 칼질은 끝내 뼛속까지 치명상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 공급이나 관중동원과 기업홍보효과라는 수요 면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전북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새로이 프로야구 시장 진입을 검토하는 기업들의 경우 하나같이 서울 입성을 희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9년 이후 시점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한다는 것은 팀 전력 구성에 있어서 별다른 이점이 없는 반면 인수 후 연고지 이전에 관한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고약한 물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쌍방울 레이더스 마스코트 '방울이' 이름과 표정 모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귀여운 캐릭터임에 분명할 '방울이'. 하지만 오늘날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방울이의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해체 구단

 

결국 200016, 한국야구위원회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대한 법정퇴출을 선고했고, 이튿날 구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만다. 1990년에 창단해 이듬해 1군 무대에 오른 이후 9시즌동안 1140경기를 치러 455655패와 30무승부를 기록한 팀의 역사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한국프로야구는 6개 구단으로 출범해 8개로 발전해왔고, 이제 10개 구단체제를 현실적인 목표로 떠올리고 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그 중 여덟 번째로 창단하며 등장했지만, 불과 10년 만에 이번에는 '사상 최초의 해체구단'이라는 씁쓸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마침표를 찍고 사라지며 한국프로야구사의 격렬했던 부침의 한 시기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10년은 전주와 군산의 야구팬들이 자신들의 팀을 향해 충분히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고, 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끗이 지우고 말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역사와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고 누구도 애써 챙겨가며 기념하려하지 않는 역사 속의 미아가 되어버린 오늘, 쌍방울 레이더스는 서둘러 삼켜져 소화되지 않은 채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있는 조그만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잘 곱씹어 넘긴 기억은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된다. 하지만 그저 방치하고 덮어둔 기억은 어느 구석에선가 부대끼고 상처가 된다. 예컨대 SK 와이번스와 연관된 역사논쟁의 경우에서처럼 누군가를 조롱하는 소재로나 불려 나오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이름이, 들판을 구르며 이 발 저 발에 차이는 어느 객사자의 유골을 보는 듯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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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9] 2000년, 임수혁이 쓰러지다

한국야구, 임수혁 잃고 외양간 고쳤다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동안 너무 게을렀던 게 아닌가 하고 반성했어.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지. 뛰면 뛸수록 더 아팠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뛰어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나 자신과 어리석은 대결을 벌이다가, 결국 제대로 쓰러지고 말았던 거지."

 

'불사조' 박철순은 1982년 겨울의 한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프로원년이었던 그 해 24승을 올리며 팀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지만 곧 심각한 허리 디스크로 쓰러진 그의 지긋지긋한 15년간의 사투가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몸이란 결국 정신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는 시대적인 신념 속에 숨어 있던 치명적인 오류의 덫에, 한국프로야구가 배출한 첫 번째 별이 크게 걸려 넘어지던 순간이었다.

 

한국야구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프로출범 이전까지 야구선수들은 흔히 '몸 관리'보다도 '인간관계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운동보다는 경조사를, 보약보다는 술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른 넘어서까지 유니폼을 입는 것은 고달픈 신세라고 생각하던 실업야구 시절에는 선수의 몸 역시 '썩어지면 흙이 될 것'에 불과했고, 굳이 몸을 아껴가며 한 해라도 더 오래 뛰는 것보다는 '화끈한 투지와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발휘해 조직과 주위의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시작될 본격적인 직장생활에 보탬이 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야구를 단지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도구 이상으로 생각해 어깨에 보험을 든 최동원이나, 술 담배는커녕 커피조차 입에 대지 않았던 이만수 같은 젊은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야망은 종종 물정 모르는 풋내기의 철없는 짓으로나 여겨지곤 했다. 반면 '하면 된다'는 시대적 슬로건은 운동선수들에게 더 깊이 영향을 미쳐 먹고 자고 쉬고 치료하는 일의 중요성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연봉협상이 시작되면서 '몸이 재산'이라는 인식이 생기긴 했지만, 그 재산을 지키고 불려줄 노하우까지 뚝딱 생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일교포 투수들이 '얼음찜질'이라는 것을 전수해주기 전까지는 경기를 마친 투수들이 열이 올라 벌겋게 충혈된 어깨를 뜨끈한 열탕에 담가 모세혈관들을 두 번 죽이는 미련한 짓을 되풀이하기도 했던 것이다.

 

 

프로야구,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 병상의 임수혁 4분 내에 조치를 했다면 살릴 수 있었던 임수혁은 십분여만에 병원에 도착했고,

그 5분 남짓한 시간은 그를 10년이나 병상에 누워있게 했다.

 

 

2000418일에 벌어진 일 역시 한국야구의 여전히 미개했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날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야구장인 잠실 야구장에서 서울 팀 LG 트윈스와 부산 팀 롯데 자이언츠가 맞붙는 빅이벤트가 열렸고, 2회 초 2루에 나가있던 주자가 갑자기 쓰러져 호흡과 심장박동을 멈춘 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지병인 심장부정맥 때문에 순간적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고, 당장 필요한 것은 심장이 다시 뛰어 숨을 들이쉬게 만들기 위한 심장마사지와 인공호흡이었다. 하지만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허리띠를 풀어주고 '들것'을 외치는 것 뿐이었다.

 

곧 들것과 함께 구장에 대기하던 단 한 명의 응급요원이었던 간호사가 도착했지만, 그녀는 '다른 선수나 공과의 물리적 접촉이 없이 쓰러진 채 다리를 떤다'는 점에 주목해 '간질발작'을 의심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들것에 실려 흔들리며 야구장 밖까지 옮겨진 임수혁이 태워진 구급차에는 그 순간 그에게 꼭 필요했던 심폐소생기가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하다는 '초기의 4'을 훌쩍 넘겨 십 분 이상이 흐른 뒤 도착한 병원에서는 심장과 호흡을 살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임수혁은 의식을 잃은 채 10년을 병상에서 버텼고, 결국 지난 201027일 눈을 감고 말았다.

 

임수혁을 잃고, 외양간이 고쳐지다

 

"집이 잘 살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워낙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늘 밥값 술값 혼자 다 내는 건 유명한 얘기였고, 그 험하다는 고려대 야구부에서도 후배들에게 손 한 번 대지 않고 얼굴 한 번 붉히지 않는 선배였어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죠."

 

고려대와 상무를 거쳐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던 한 살 터울의 후배 마해영은 임수혁을 그렇게 기억했다. 유복했고, 따뜻했고, 그래서 그늘진 구석이라곤 없는 듯 했던 사람. 하지만 무릎을 다친 서른 무렵부터는 선수로서의 입지가 급작스레 좁아지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비닐하우스로 나앉는 일까지 벌어지며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고 말았다.

 

그런 임수혁은 심장부정맥이라는 치명적인 지병을 애써 드러낼 수 없었고, 그렇게 수많은 선수들이 각자의 삶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감수하는 크고 작은 위험들에 대비할 능력과 의지를 한국프로야구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롯데가 자랑했던 걸출한 공격형 포수이며, 1999년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의 영웅 임수혁은 그렇게 쓰러졌다.

 

임수혁이 쓰러진 후, 많은 것이 변했다. 구급차가 언제라도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경기중에는 전문의가 대기했으며, 혹서기에는 더블헤더를 치르지 않도록 규정이 고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멀게는 선수협의회가 만들어져 부족하나마 선수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씨앗이 뿌려진 것도 그 날이었다.

 

 

▲ 임수혁 선수의 영정 쓰러진 지 10년만인 지난 2010년 2월 7일 오전 8시. 임수혁은 눈을 감았다.

▲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가 자랑했던 공격형 포수, 그리고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을 가능하게 했던 '한 방'의 영웅.

하지만 임수혁의 죽음은 의미있는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행복을 사는 팬들, 목숨을 거는 선수들

 

한국야구는 더디게나마 발전하고 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선수들의 몸에 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스스로 교체를 요청했다가 '책임감 없는 나약한 정신자세'를 질타 받던 시절이 문득 지나가 버렸고, 이제 '선수 혹사'에 관한 혐의가 감독에 대한 가장 격한 비난의 소재로 활용되는 시절이 온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발전의 한 계기가 불과 10년 전에 벌어졌던 끔찍한 사고였다는 점을 곱씹어본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잃고 나서야 고치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30년 전 '꿈과 낭만'을 내걸고 출범했고, 우리는 오늘도 야구장에서 행복을 산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누군가에게 치열한 생존경쟁의 철창이며, 언제나 뛰고 싶고, 이기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몸서리를 치는 격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전쟁터다. 그리고 그런 모순된 진실을 통찰할 때에야 야구는 비로소 삶의 감동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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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0] 세 명의 외국인 선수가 뒤흔든 2001년

우즈, 갈베스·호세 넘어 최고의 외국인선수 '등극'

 

2001년은 세 명의 외국인선수가 지배한 해였다. 호세는 62경기 연속출루기록과 역대 최고 출루율 기록(.503)을 세우며 시즌 중 감독을 잃은 초상집 롯데의 희망이 되었고, 5월 중순을 넘겨서야 합류한 갈베스는 첫 8경기에서 3연속 완투승을 포함해 7승을 올리는 압도적인 투구로 삼성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정규리그 타점왕에 오른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만 4개의 홈런을 쏘아올린 우즈의 두산이 차지하게 된다.

 

최고의 타자, '호세'

 

▲ 검은 갈매기, 호세 2001년의 호세는 한국프로야구 30년 역사상 가장 공포스러운 타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해 9월 18일 배영수의 턱에 작렬한 호세의 주먹은 무려 4년간 이어진 롯데 자이언츠의 '꼴찌악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 해 홈런왕은 39개를 넘긴 이승엽이었고, 타점왕은 113타점의 우즈였다. 하지만 그 해 최고의 타자는 단연 펠릭스 호세였다. 99년에 이미 마해영, 박정태와 클린업트리오를 이루어 롯데 자이언츠를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던 호세는 2001년, 더욱 압도적인 모습으로 한국무대에 복귀했다.

 

6월 20일과 21일에는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연속게임 만루 홈런을 날렸고, 6월 17일부터는 무려 62경기 연속경기 출루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77개의 볼넷을 얻었는데, 그 대부분이 넓게 보자면 '고의'에 의한 것들이기도 했지만 특히 포수가 일어선 채 네 개의 공을 받은 경우만 하더라도 20개에 달할 정도였다(시즌 내내 얻은 볼넷은 127개, 고의사구는 28개였다).

 

물론 그것은 호세의 압도적인 위력 때문이었다. 그는 정확성(.327의 타율)과 힘(36개의 홈런)을 겸비한 타자였을 뿐 아니라, 투수의 유형에 따라 좌우타석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스위치타자이기도 했다. 물론 좌우 어느 타석에서라도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파워까지 갖추고 있었고, 실제로 1999년 5월 29일에는 전주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4회와 8회,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서 홈런을 날려 '최초의 한 경기 좌우타석 홈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해 롯데 자이언츠에서 호세를 제외하면 경계할 만한 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두 해 전의 파트너 마해영과 임수혁이 자리를 비웠고, 박정태는 2할 5푼에도 못 미치는 타율을 기록하며 깊은 부진에 빠져 있었다. 대신 중거리포 조경환이 3할 언저리의 타율에 33개의 2루타를 때려내며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99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상대 투수들은 호세와 대결해야 하는 부담을 한 개의 출루와 간단히 맞바꾸고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1년은 순위 싸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해이기도 했다. 삼성과 현대가 시즌 내내 멀찍이 앞서나가긴 했지만, 4위 팀과 8위 팀의 격차가 결국 2경기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 치열한 어깨싸움의 와중에 최하위로 처져있던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은 롯데 자이언츠는 우용득 감독대행을 중심으로 4강 복귀를 다짐했고, 그 반격의 중심에는 물론 호세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6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며 막판 총력전을 벌이던 2001년 9월 18일, 마산구장에서 빈볼을 둘러싸고 벌어진 몸싸움이 두 선수와 두 팀의 운명에 생각보다도 훨씬 커다란 파장을 남겼다. 그 날 롯데가 4대 3으로 앞서있던 7회 말, 삼성 투수 배영수는 호세에게 거푸 세 개의 공을 몸 쪽으로 던진데 이어 네 번째 공마저 등 뒤로 던져 1루로 내보냈고, 다음 타자 얀에게마저 팔꿈치를 때리는 공을 던졌다.

 

그러자 화가 난 타자 얀이 타석을 벗어나 마운드를 향해 두어 걸음을 뗐고, 주심과 포수가 얀을 막아서려던 순간 모두의 시야 밖에 있던 1루 주자 호세가 마운드를 향해 돌진했다. 배영수의 왼쪽 뺨을 향해 체중이 제대로 실린 호세의 라이트 훅 펀치가 날아들었고, 배영수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호세는 남아있던 정규리그 8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그제껏 이어가던 연속경기 출루 기록을 62에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승엽과 한 개 차이로 각축을 벌이던 홈런왕 경쟁도 포기해야 했고, 그 홈런왕 타이틀만 얹는다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었을 시즌 MVP의 영예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롯데 자이언츠였다. 그 해 117경기에서 36홈런 102타점 .335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주포를 잃은 롯데는 6위에서 8위로 미끄러졌는데, 그것은 역대 팀 최다연속기록인 4년 연속 꼴찌행진의 출발점이었다.

 

그 해 겨울 롯데와 메이저리그 몬트리올 엑스포스 사이에서 이중계약을 맺은 호세는 롯데의 요청에 의해 KBO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고, 그렇게 수년간 사라져간 중심타자들의 빈자리를 홀로 메워내던 호세라는 거대한 기둥이 뽑혀나간 자리를 롯데 자이언츠가 다시 채워 넣기까지는 적어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고의 투수, '갈베스'

 

▲ 카리브의 괴인, 갈베스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 경력의 갈베스는 2001년 한국무대에 오르자마자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며 연승행진을 벌였고, 삼성 라이온즈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해 삼성이 13.5경기차의 3위팀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내주어야 했던 것 역시 갈베스 때문이었다.

 

물론 배영수에게도 후유증은 있었다. 그는 그 해 13승을 거둔 거물이긴 했지만, 아직 여린 입단 2년차의 신인일 뿐이었다. 그는 그 사건 뒤로 단 1승도 보태지 못하며 다승왕 경쟁에서 하차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아무런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아쉬운 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무려 7경기차로 정규시즌을 마친 뒤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던 삼성 라이온즈가 3위팀 두산에 2승 4패로 밀리며 우승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 데는 더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바로 '약 준 다음 병을 준' 그 해 최고의 투수 갈베스였다.

 

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까지 올랐던 화려한 경력의 갈베스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2001년 5월이었다.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의 머리를 향해 강속구를 던진 적이 있을 만큼 거칠었던 성격 탓에 일본 무대를 떠나야 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그를 영입하기 위해 삼성 라이온즈는 규정을 어겨가며 100만 달러 이상의 뒷돈을 써야 했다.

 

그리고 한 달 여 늦게 레이스에 뛰어든 갈베스는 연전연승하며 곧장 투수 각 부문 타이틀 경쟁에 끼어드는 괴력을 선보였다.

 

첫 8경기에서 1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며 7승을 따내는 놀라운 페이스였고, 전문가들은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세 부문의 유력한 승자로 주저없이 갈베스를 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창용(14승), 배영수(13승), 김진웅(11승)으로 이어지는 토종 10승대 선발진에 슈퍼에이스급 외국인 투수 갈베스가 가세한 삼성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 해 삼성의 사령탑은 해태 타이거즈 9회 우승의 주역 김응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두산 베어스에게 먼저 1차전을 따내고도 2승 4패로 밀리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첫 우승에 실패하고 만다. 원인은 가장 강한 고리에 생긴 균열, 즉 갈베스와 배영수로 이어지는 선발진의 부진이었다.

 

물론 배영수의 부진은 역시 호세와의 난투극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갈베스의 이해할 수 없는 자멸이었다. 10승을 채우며 계약서 이면의 옵션을 모두 채운 갈베스는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무기력해졌고, 특히 위독한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8월 20일에 출국한 뒤 십여 차례에 걸친 약속을 어긴 끝에 45일만인 10월 4일에야 귀국하는 파행까지 일삼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수단 내부에는 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김응용 감독의 한국시리즈 구상도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결국 갈베스는 한국시리즈 1,4차전에 선발로 나서 6이닝 10실점으로 무너졌고, 꼭 잡아야 할 경기에서 오히려 가장 무기력하게 패퇴한 삼성 역시 한국시리즈 우승의 꿈을 다시 미루어야 했다.

 

하지만 MVP는 우즈

 

▲ 흑곰, 우즈 한국프로야구의 첫 번째 외국인 스타. 우즈는 1998년부터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2001년에는 경력과 능력 면에서 모두 그보다 한 수 위인 호세와 갈베스에게 시선을 빼앗겨야 했다. 하지만 그 해 최후의 승자는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우즈였다. 그의 무기는 절박함과 진지함, 그리고 냉철함이었다.

 

반면 한국프로야구가 외국인에게 문호를 열었던 1998년, 곧바로 장종훈의 시즌 최다홈런기록을 깬 42홈런을 날리며 정규리그 MVP에 선정되었던 우즈는 2001년에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물론 4년째 꾸준한 활약이기는 했지만 타율(.290)과 홈런(34)이 예년보다 조금씩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외국인 호세와 갈베스에게로 언론의 주목이 옮겨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즈는 소문난 몸싸움을 벌인 적도 없었고, 특이한 기행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없었다. 언론을 향해 자극적인 말을 내뱉는 편도 아니었고, 그저 카메라를 들이대면 낼름 혀를 내밀며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일면을 내비치는 정도로 팬들과 교감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기복 없는 활약으로 '조용한 강자'의 모습을 시즌 내내 이어갔고, 113타점으로 그 해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는 .391의 고타율에 4홈런 8타점을 몰아치면서 한국시리즈 MVP마저 석권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의 호세, 혹은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 출신의 갈베스와 비교하면 마이너리그에서만 10년을 구른 우즈의 경력은 일천했고, 냉정하게 보면 재능이나 강점도 그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것이 우즈였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야구로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절박함과 진지함이었고, 그것이 끝내 한국프로야구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서 그를 꼽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재능과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수준을 가르는 진정한 기준은 그 재능을 일깨워줄 겸손함과 성실함, 그리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줄 진지함과 냉철함이다. 2001년은 세 명의 외국인선수들을 통해 어느 때보다도 선진야구의 위력을 실감한 해이기도 했지만, 그 세 명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성실함과 진지함이 가지는 가치를 되새긴 시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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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1] 2002년의 가을야구, 삼성과 LG의 갈림길이 되다

삼성의 '맺힌 한' 날려버린 마해영의 한 방!

 

2002년 여름, 한국인들은 바로 눈앞에서 사상 첫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달아올랐고, 축구장 밖으로 흘러넘친 인파는 전국의 모든 '광장'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공간들을 붉은 물결로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프로야구 경기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웠고, 한국야구위원회(KBO)마저 월드컵 한국전이 벌어지던 날에는 경기를 취소시켜가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 탓만을 할 일은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확연하게 갈라진 구단들 간의 빈부격차가 경기력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며 승부에 대한 호기심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 그랬듯, 프로야구 역시 삼성과 현대라는 두 재벌그룹의 대리전으로 불을 뿜었고, 나머지는 힘겹게 구색을 맞춰가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해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239만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7개 구단 시절이던 1989년보다도 적은 숫자였고, 225만 관중을 기록했던 1983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3만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부산 사직구장에 10월 16일과 19일에 96명과 69명만이 자리를 지키는 서늘한 풍경이 연출된 것도 그 해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해의 야구장 역시 가을에는 어김없이 달아올랐다. 각자의 불운과 정면승부해야 했던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그 승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땀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야구사의 암흑기라 불리는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역설적인 최고의 명승부로 남게 되었다. 

 

1990년대 최강의 팀 'LG 트윈스'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첫 손에 꼽아야 하는 것이 LG트윈스다. 1990년을 '창단 첫 해 우승'이라는 진기록과 함께 시작했을 뿐 아니라 곧이어 '선발-중간-마무리'의 투수분업제를 기초로 하는 선진적인 전력운용 시스템을 처음으로 안착시키고 가장 이상적인 세대교체의 전형을 선보이며 강팀의 체질을 만들어내며 90년대 내내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상훈-김태원-정삼흠의 선발진에서 차명석, 강봉수, 차동철의 계투진을 건너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마운드나 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시작해 김동수, 송구홍을 거쳐 한대화, 노찬엽으로 이어지며 김영직으로 군데군데 방점을 찍는 타선은 장단과 완급과 신구의 모든 면에서 환상적인 조화였고, 빈틈없는 라인업이었다.

 

1994년에 이루었던 두 번째 우승은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런 압도적인 강함의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인 차명석 코치가 떠올리듯 '2년에 한 번 씩은 우승을 할 것 같았던' 것은 그저 기분이 아니라 객관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1990년대에 LG트윈스는 4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그것은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가장 많은 횟수였다.

 

하지만 1995년에 내내 선두로 질주하다가 막판에 발목을 잡히며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친 데 이어 1997년과 1998년에는 연달아 한국시리즈에 오르고도 해태의 9번째 우승과 현대의 첫 번째 우승의 제물이 되어 무릎을 꿇는 불운이 이어졌다. 시즌 전이면 손에 쥔 것만 가지고도 우승이 충분해 보였지만, 시즌이 치러지면서 그 중 한두 개가 자리를 이탈했고 그것이 묘하게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모든 계획을 뒤엉키게 만드는 흐름이 해마다 반복됐다. 

 

그리고 그렇게 허송세월하는 사이 팀의 기둥이 하나씩 빠져나갔고, '노송'이라 불리던 김용수마저 사라져간 2000년대에 남은 것은 옛 영광의 흔적들 뿐이었다. 2000년대는 LG 트윈스에게 깎아지른 절벽 앞이었고, 그대로 추락해 하위권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다시 물길을 되돌려 90년대의 영광을 회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갈림길이 되었다. 항상 강팀이었으면서도 전력을 다해 부딪혀보지 못한 그들에게, 자신의 힘과 한계를 스스로 느껴보는 것은 그 무렵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김응용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음지의 야구인', 김인식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서민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의 성적을 끌어내는 것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수로 통했다. 하지만 늘 '우승과 인연이 없는' 감독으로도 꼽혀왔는데, 2007년 SK와이번스에서 첫 번째 우승을 맛본 뒤로는 또 하나의 왕조시대를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맞수였던 김응용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듯 하다' 고 감탄했던 일로부터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통산 10회 우승의 명장 김응용 감독 이미 30대의 나이에 실업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40대 초반부터 프로팀의 감독으로 일하며 통산승수, 통산승률, 통산우승횟수 등의 모든 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남겼다. 2002년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우승은 그가 프로팀 지도자로서 이룬 열 번째 우승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 최강의 팀 '삼성 라이온즈'

 

LG트윈스가 90년대의 강팀이었다면,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프로야구사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프로원년인 1982년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만 7번이었고, 정규시즌 최고승률을 기록한 것도 4번이었다. 하지만 우승팀으로 대접을 받은 것은 전후기리그 통합우승을 이룬 1985년 한 번 뿐이었고, 한국시리즈에서는 7번 모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던 삼성은 동시에 '비운의 팀'이기도 했다.

 

특히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내외의 대형 선수들은 물론이고 해태 타이거즈 9회 우승의 주역 김응용 감독까지 모셔다가 최강의 전력을 구성한 덕에 라이벌 현대마저 7경기차로 따돌리며 압도적으로 정규리그를 1위로 마쳤던 2001년은 삼성에게 더욱 쓰라린 추억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던 그 해의 우승컵 역시 에이스 갈베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믿을 수 없는 불운 속에 정규리그에서 무려 13.5경기차로 뒤졌던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며 달갑지 않은 일곱 번째 준우승 트로피를 수집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거짓말처럼 반복된 일곱 번의 불운은 이제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야구'라느니 '배부른 사자'라느니 하는 야유도 듣기 싫었지만, 그 무렵 스포츠칼럼에 간혹 등장하던 '불임구단'이라는 단어는 푸른 유니폼을 걸친 이들 모두의 가장 불쾌하고 고통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신경의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2002년의 가을야구, 10년의 운명을 가르다

 

삼성은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의 네 부문을 석권한 이승엽과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마해영에 FA계약을 통해 복귀시킨 양준혁으로 클린업트리오를 구성하고 있었다. 마운드 역시 17승의 임창용과 13승의 평균자책점왕 엘비라가 이끌고 100%의 승률왕 김현욱이 뒤를 받치는 의심의 여지 없는 최강의 진용을 꾸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LG쪽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선발진을 이끄는 것은 8승의 만자니오와 6승의 최원호였고, 그 공백은 중간에서 100이닝 이상씩을 던지며 10승을 올린 장문석과 8승을 올린 이동현, 그리고 돌아온 마무리 이상훈으로 간신히 메워가고 있었다. 야수진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긴 했지만, 삼성에 비해 팀타율은 2푼 이상, 팀홈런은 두 배 가까운 차이로 약세였다. 그 해 트윈스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것은 .293의 이병규였다.

 

정규리그에서 간신히 4위에 턱걸이한 LG는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최동수의 활약으로 현대를, 플레이오프에서는 박용택의 활약으로 KIA를 누르며 한국시리즈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 사이 7경기의 혈투를 치러야 했고,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못한 선발진은 이미 고갈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대로 비교해도 한참 기우는 삼성과 LG의 승부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몇 차전까지 가느냐였고, 문제는 삼성의 그 수많은 스타들 중 누가 그 해 한국시리즈의 주인공이 되느냐였다. 

 

월드컵 때문에 한참 뒤로 밀린 일정 탓에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것은 11월 3일이었다. 그리고 첫 경기는 엘비라의 호투 속에 완력의 차이 그대로 4대 1의 삼성 승리였다. 2차전은 외국인투수 만자니오가 한 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치고 조인성이 홈런을 터뜨리는 활약 덕에 LG가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는 최원호가 초반부터 난타당한 데 이어 4차전에서는 믿었던 마무리 이상훈까지 실점하며 무너진 LG가 1승 3패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5차전에서 마해영에게만 홈런 두 방으로 다섯 점을 내주는 곤욕을 치르고도 필승카드 이동현과 장문석을 총동원해 간신히 뒷문을 닫으며 한 점차로 LG가 이기면서 시리즈 전적은 2승 3패로 이어졌다. 하지만 다시 대구로 옮겨 치른 6차전에서 LG는 3회 초 먼저 최동수의 석점 짜리 홈런으로 기선을 잡고도 2,3,4회에 연속실점하며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제 더는 버티기 어려운 한계가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시리즈 전체의 승부의 추가 확연히 기울어지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6회 초에 찾아온 1,2루의 찬스에서 LG의 김성근 감독이 던진 승부수가 판도를 안갯 속으로 밀어넣었다. 권용관의 자리에 김재현을 대타로 기용했던 것이다. 1994년 신인으로서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90년대 내내 최강 LG시대를 이끌었던 영웅. 하지만 고관절이 썩어 들어가는 치명적인 병을 얻으며 달릴 수 없게 된 그는 선수인생의 기로에 서있었다. 물론 2사 상황에서 달릴 수 없는 타자를 세운다는 것은 감독으로서도 배수진이었다.

 

어지간한 짧은 안타로는 1루에서조차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장타가 아니고는 타점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 중에도 늘 당겨치던 김재현을 향해 상대팀이 극단적으로 수비진을 우측으로 밀어놓는 시프트를 펼칠 때마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더 멀리 때려서 넘기라'고 주문하던 김성근 감독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한 번 정면승부를 주문했던 것이다.

 

김재현은 선수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그 타석에서 역시 정면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밀어치기였다. 노장진이 던진 바깥쪽 150킬로미터짜리 직구를 결대로 밀어쳤고, 공은 그대로 좌중간을 날카롭게 가르며 두 명의 주자를 모두 홈으로 불러들였다. 담장까지 뻗어 가는 장타를 날린 김재현은 절뚝거리며 간신히 1루에 안착했고, 그것은 그대로 경기장의 분위기마저 LG 쪽으로 끌어가는 내상 깊은 일격을 삼성에 가하게 된다.    

 

김재현의 2타점으로 6대 5로 재역전되었고, 그 분위기를 타고 8회 초에는 또다시 최동수와 조인성이 연속적시타를 때려 점수 차를 9대 5까지 벌려놓았다. 삼성도 8회 말 김한수의 희생플라이로 추격전을 벌였지만, 여전히 석 점 차가 남겨진 채 9회 말이 시작되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시리즈 전적은 3승 3패로 돌아가게 되고,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단판 승부로 몰려가게 되어 있었다.

 

8회 말 2사부터 LG는 마무리 이상훈을 마운드에 올렸고, 이상훈은 1,2루 위기에서 진갑용을 플라이로 잡아내며 최고 마무리의 위용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9회 말, 삼성의 첫 타자는 공격력이 가장 빈약한 9번 김재걸이었고, 이미 승부에 대한 기대를 접은 김응용 감독도 굳이 대타를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김재걸이 중견수 키를 넘기는 큼직한 타구를 날리며 2루까지 달려 나갔고, 1번 강동우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2번 브리또가 다시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나가면서 두 번째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승엽. 그 해 스물 여섯의 나이에 이미 네 번째 홈런왕에 오른 그는 이상훈의 2구째 밋밋한 슬라이더를 날카롭게 당겨 쳤고, 타구는 순식간에 대구구장의 우중간 펜스를 훌쩍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석 점 홈런. 까마득해 보이던 9회 말 석 점 차의 간격을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린 극적인 동점 홈런이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장면은 그 다음에 숨어있었다. 이승엽의 뜻밖의 동점홈런이 불러일으킨 흥분이 채 식기도 전, 이상훈을 대신해 마운드에 오른 LG 투수 최원호의 세 번째 공이 바깥쪽 높은 코스로 날아들자 마해영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통타해 우측 펜스를 그대로 훌쩍 넘겨버리고 말았다. 거짓말 같은 끝내기 홈런. 그것으로 그 해의 모든 승부가 끝이었다.

 

▲ 마해영과 최원호 이승엽의 극적인 동점 스리런 홈런이 터저나온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해영이 날린 또하나의 타구가 담장을 넘었고,

그렇게 모두의 예상보다 두 템포 빠르게 마침표가 찍혀졌다. 마해영은 환호했고, 최원호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분수령, 2000년대 초반의 강팀과 약팀

 

한 시즌 내내 지지부진하다가 가을 넘어 초겨울에야 활짝 피어났던 그 해의 야구. 그래서 마치 가을부터 야구를 시작했던 듯 한 착각을 기억 속에 남긴 그 해 LG와 삼성 두 팀은 야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겼고, 또한 각자 큼직한 성과들을 챙길 수 있었다.

 

삼성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한국시리즈와의 악연을 청산하며 그 뒤로 다시 네 해 동안 세 번 한국시리즈에 나가 두 번 더 우승하는 가을의 강팀으로 탈바꿈했고, '비운'이라는 딱지도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LG도 성과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김재현은 선수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할 힘을 얻었으며, 팬들은 지울 수 없는 역사와 드라마를 갖게됐다. 자신감과 더불어 모래알 같던 선수단에 일시에 구심력을 확보한 것도 성과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과정과 결과를 통해 보완해야 할 점들을 찾은 것도 성과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2000년대 초반의 대표적 강팀 삼성과 약팀 LG를 가른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단과, 우승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세운 채 허둥거리다 얻은 성과마저 날려버린 구단의 차이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과를 내는 일보다, 그것을 챙겨 쌓아올리는 일이라는 점을, 우리는 몇 해를 두고 지나서야 알게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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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2] 56호 홈런으로 암흑기 밝힌 이승엽

잠자리채 든 관중, 야구장으로 몰려들다

 

2003년 9월 27일, 8회로 접어든 경기 후반, 12루 상황에서 삼성의 3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두 점 차로 뒤져있긴 했지만 추격의 의지를 아직 놓지 않고 있던 상대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 김용철은 투수 가득염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한 점이라도 더 내준다면 뒤집기 어려운 상황에서 절정의 타격감을 자랑하는 타자를 피해가며, 동시에 병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석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삼성의 3번 타자가 이승엽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틀 전 광주에서 55호 홈런을 날리면서 일본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가 1964년에 기록한 한 시즌 최다홈런기록(그리고 2001년 긴테스의 로즈와 2002년의 세이부의 카브레라가 낸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었다. 당장 그 날이라도 한 개의 홈런만 추가한다면 역사적인 56홈런의 신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기회는 그 날 경기까지 포함해서 여섯 경기가 있었다.

 

이승엽은 기록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그 날 1회와 4, 5회에 각각 타석에서 정면승부의 기회를 잡았지만 삼진과 땅볼, 뜬공으로 물러나며 부진했다. 그래서 네 번째였던 8회의 그 타석은 그 날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기회가 고의사구로 허망하게 사라지자 역사적인 기록 작성의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운이 좋다면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될 그 56호 홈런볼을 손에 넣기 위해 저마다 잠자리채를 들고 내야석을 비워둔 채 외야석부터 빼곡히 채워 앉은 12천 여 명의 관중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결국 이승엽이 네 번째 공을 지켜보다가 1루로 걸어 나가는 순간, 흥분한 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무수한 오물과 불붙은 신문지들을 던져대기 시작했고, 결국 1시간 43분 동안이나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승엽과 삼성의 홈구장인 대구가 아닌 원정지 부산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롯데 감독과 투수를 질타하며 분노를 터뜨린 것은 보통 때라면 롯데 선수를 향해 던져지는 견제구 하나를 향해서도 벼락같은 '' 함성을 질러댔을 사직의 야구팬들이었다는 점이다.

 

암흑기의 빛, 홈런

 

2003년에도 한국프로야구의 '암흑기'는 계속되었다. 월드컵이라는 대형태풍에 휩쓸리며 239만 명까지 줄어들었던 관중들은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다시 야구장에 발길을 주지 않았다. 삼성과 현대와 기아의 세 재벌 구단과 나머지 다섯 구단이 각각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이루며 딴 세상 야구를 하는 모습도 변함이 없었고, 구단마다 '돈 안 되는' 어린이 회원은 원년의 수십 분의 1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등 팬서비스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모습도 여전했다. 20035월 말까지 관중 수는 오히려 전년보다도 25%나 감소하며 역대 최저관중기록을 세울 기세였다.

 

하지만 5월 하순에 들어서면서 돌발변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벌써 생애 다섯 번째 홈런 타이틀에 도전하고 있던 스물일곱의 젊은 홈런왕 이승엽이 515일에 대구에서 열린 연속경기에서 각각 두 방씩, 하루 동안 네 방의 홈런을 몰아친 데 이어 28일과 31일에도 각각 두 개씩의 홈런을 몰아치며 가뿐하게 20개를 넘긴 것. 그러더니 2610개월 4일이 되던 622일에는 '세계최연소 300홈런기록'이라는 이벤트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종전기록은 오 사다하루의 273개월 11). 게다가 늘 봄이면 등장하는 '단순계산'에 의하면, 그런 페이스가 시즌 막바지까지 이어진다면 이승엽의 홈런은 60호를 돌파할 가능성마저도 점쳐질 정도였다.

 

홈런이 관중을 불러 모은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자리를 굳히는 과정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존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1994년의 선수노조 파업으로 바닥을 쳤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1998년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왕 대결이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홈런은 복잡한 룰이라든가, 작전이라든가, 미묘한 불문율 따위의 야구가 가지는 난삽한 진입장벽들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점수결정방식이며 그 자체로 모든 관중들을 한 순간에 폭발하게 만드는 감성적인 순간이다. 그 홈런이 가장 많은 이들에게 야구라는 경기의 매력을 간결하고도 강인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승엽의 홈런은 '로또보다 확률 높은 대박의 가능성'이라는 색다른 즐거움을 더했다. 어디까지 뻗어갈지 모를 유망한 홈런타자가 때려내는 홈런공은 그 하나하나가 새롭고 의미 있는 기록의 증거물이었고, 그래서 혹시라도 그 홈런 공을 손에 넣는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만 원 이상의 가치를 확보하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300호 홈런공을 주운 이는 삼성 구단의 '29인치 TV와 야구장 연간회원권' 제안을 뿌리치고 직접 거래에 나서 12천만 원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400, 혹은 500호의 기록으로 갈아치워질 300호에 비해 한시즌 최다홈런기록을 만드는 55호와 56호 홈런공의 가치는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되었고, 야구팬들은 본격적으로 야구장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승엽이 등장하는 경기라면 내야석보다 외야석이 먼저 채워지는 게 상식이었고, 방망이 풍선보다는 잠자리채나 뜰채를 챙기는 것이 야구장 나들이 준비의 정석이었다.

 

 

▲ 잠자리채 관중 2003년에 한해서는, 막대풍선보다 먼저 챙겨야 할 야구장 나들이의 필수품은 잠자리채와 뜰채였다.

▲ 헤라클레스 심정수 심정수는 이승엽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고, 2003년 홈런왕 대결의 2인자였지만, 그 해 투수와 감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타자는 오히려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였다

 

조연이 아닌 라이벌, 심정수

 

그런 홈런 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심정수라는 멋진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6월과 7월 내내 6,7개의 차이를 유지하며 이승엽을 추격하던 심정수는 8월 들어 이승엽이 폭행시비에 휘말려 2경기 출장정지 처분까지 받으며 보름 넘게 손맛을 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틈에 813일에는 1개 차까지 추격했다. 그로부터 한 달 여 동안 피 마르는 1, 2개 차이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나갔던 것이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입문했던 두산 시절부터 '소년장사'라 불렸던 그는 나이를 먹으며 '헤라클레스'로 진화해 있었다. 각각 재계 라이벌 삼성과 현대의 얼굴이기도 했던 이승엽과 심정수는 각자 뚜렷한 개성과 스타일을 가진 홈런타자였는데, 이승엽이 정확한 타이밍과 유연한 스윙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공을 흩뿌리는 우아한 장면을 연출했다면, 심정수는 엄청난 근육량에서 나오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어떤 공이든 잡아당겨 왼쪽 펜스를 넘길 수 있는 사나이였다.

 

심정수는 통산기록 면에서도 이승엽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앞뒤에 늘어선 동료 타자들의 지원사격도 이승엽만큼 받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홈경기 때마다 찾아와 열광적으로 응원해줄 팬들을 가지지 못한 수원 '임시거주팀'의 소속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엽처럼 잠자리채 관중을 몰고 다니지도 못했고, 홈런행진 역시 끝내 53개에서 멈춤으로써 그 해의 승자가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심정수를 단순한 '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투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간결한 스윙을 바탕으로 이승엽보다도 훨씬 높은 타율을 기록한 정확성 높은 기술적인 타자였다는 점, 그리고 단 세 개 차이로 멈춰선 홈런포도 '비거리'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이승엽을 능가하는 양질의 것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타격 3관왕에 도전했던 그는 .335(2), 53홈런(2), 142타점(2), 110득점(3), 154안타(6), 124볼넷(1)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시즌 기록을 남긴 타자 중 한 명이 되었지만, 결국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그에게 한 가지 위로가 된 것이 있다면, 그 해 한국프로야구 선수협의회에서 동료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것은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라는 점이었다.

 

극적인 마침표, 56홈런

 

102일의 경기는 삼성의 그해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그제껏 이승엽의 홈런 수는 55에 머물고 있었고, 이제 나라 안팎의 기대와 이목은 이승엽을 경기 전날 가위에 눌리게 할 만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날 경기가 열린 곳은 대구였고, 상대팀은 또다시 롯데 자이언츠였다.

 

1회 초에 롯데에 먼저 두 점을 빼앗긴 뒤 1회 말 반격에서 김종훈이 몸에 맞는 공으로 진루했지만, 3번으로 나선 양준혁이 병살타로 물러나며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따라 3번이 아닌 4번에 배치된 그의 첫 타석이 돌아온 것은 2회였다.

 

상대투수는 2년차 신인 이정민이었고, 이승엽과는 첫 대결이었다. 하지만 경기상황으로나, 야구장 안팎의 상황으로나, 그에게도 정면대결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정민은 1,2구로 연거푸 직구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하나씩 던졌고, 3구 역시 직구였다. 다만 최대한 낮은 코스였고, 최대한 바깥 쪽을 노린 공이었다.

 

그 순간 이승엽의 배트가 돌았고, 정확히 걸리긴 했지만 맞아나가는 타구의 궤적이 너무 낮았다. 자칫 내야수에게 직선으로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직선의 타구였다. 하지만 그 공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빳빳하게 날았고, 순식간에 대구구장 좌중간쪽 외야 펜스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펜스와 전광판에서는 폭죽과 불꽃이 솟구쳤고, 관중석에서는 관중들의 함성이 폭발했다. 따지고 보면 '비공인'이긴 하지만, '아시아 시즌 최다홈런기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해 홈런쇼의 거대한 마침표였다.

 

 

56홈런, 그 이후

 

 

그해 심정수가 날린 홈런은 53개였다. '아시아 신기록'이 되기 위해 도달해야 했던 56개에 세 개 모자랐고, 종전까지 이승엽이 가지고 있던 '한국 신기록'을 깨기 위해 필요했던 54개에도 한 개가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승엽을 제외하면 50홈런 고지를 넘어선 유일한 기록이었고, 그해 모든 투수와 감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타자는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이기도 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되새겨볼 만한 장면들이 있었다. 이승엽의 56호 홈런이 터져 나오는 순간 대부분의 기자들도 취재를 중단했고, 사실상 그해의 시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최하위 팀 롯데는 이승엽과 양준혁에게 홈런을 맞고도 차곡차곡 점수를 챙겨가며 그 날의 승리를 가져가 간신히 3할 승률을 채웠고, 이정민은 56호 홈런의 제물이 된 얼떨떨한 충격 속에서도 5이닝을 3실점으로 버텨 프로데뷔 첫 승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꽃놀이를 통해 불러모은 관중들은 길게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이듬해, 자유계약선수 자격과 함께 '아시아 홈런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나고, 라이벌을 잃은 심정수도 허탈감에 사로잡힌 듯 절반 이상 떨어진 홈런 페이스로 몸살을 앓자, 야구장은 다시 휑하니 비어갔다. 2004년 한국프로야구 총관중은 최악이라던 2002년보다도 오히려 6만 명이 적은 233만 명으로 주저앉았고, 특히 대구는 2003년의 절반 수준인 19만 명으로 격감하고 말았다.

 

홈런과 스타가 관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약발이 길지 못하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오히려 한국프로야구에 제대로 다시금 핏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홈런이 줄고 확실한 스타도 없었지만 구단들이 비로소 절박함을 느끼고 팬들을 향해 눈을 돌린 2007년과 2008년 무렵 이후였다는 점과 비교해 곱씹어볼 만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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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3]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승부

삼성과 현대, 진짜 '진흙탕'에서 싸웠다

 

1996, 현대그룹이 470억 원이라는 거액으로 태평양 돌핀스를 사들이며 프로야구 무대로 진입했다. 프로야구 창설 당시 '격이 맞는 기업이 없다'는 이유로 참가를 고민했던 유일한 초거대기업 삼성에 엄청난 자극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주무르던 삼성과 현대의 격돌이, 비로소 프로야구판에서도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마침 IMF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쌍방울 레이더스로부터 특급포수 박경완을 9억 원에, 그리고 당대 최고의 왼손 마무리투수 중 한 명이었던 조규제를 4억 원에 데려오는 화끈한 투자를 통해 현대 유니콘스가 불과 창단 3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구어내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자금력, 그리고 우승에 대한 갈망 모두 현대에 뒤질 리 없던 삼성이 곧장 또 하나의 좌초선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줄줄이 핵심선수와 감독까지 빼가며 맞불을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은 늘 삼성과 현대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마징가Z와 로봇 태권V'의 대결을 벌이고, 나머지 여섯 구단은 지상에서 나름대로 치고받으며 두 개의 전선을 그은 듯 한 양상을 이어갔다. 2000년에는 현대가 우승했고, 2001년에는 현대와 삼성의 패권싸움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13.5경기차 3위 팀 두산이 가을 한 순간을 노리고 달려 나와 우승컵을 가로채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삼성이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2003년에는 다시 현대가 정상을 탈환했다.

 

전면전, 야구실력·돈·자존심을 걸고 싸우다

 

전쟁은 해마다 우승컵을 나누어 들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1996년 현대가 창단하던 해부터 선수 선발을 놓고 돈싸움에 법정싸움까지 벌이는가 하면, 때로는 양 팀 투수들이 서로 간판타자를 향해 보복구를 던지며 으르렁대기도 했고, 양 그룹의 고위인사들은 맞대결하는 날 직접 야구장을 찾아 특별보너스를 걸며 '오늘만은 이길 것'을 당부하며 승부의 불길에 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배영수의 도발을 정명원이 응징하고, 심정수의 방망이를 이승엽이 꺾는 나날이 이어졌다.

 

2004년은 삼성과 현대의 거인전쟁이 정점에 달했던 해다. 2003년 아시아홈런 신기록을 세우며 야구장으로 잠자리채 관중을 몰고 왔던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났지만, 삼성은 타격왕 경력의 당대 최고 2루수 박종호에게 28억 원을 안겨주며 바로 현대로부터 빼와 균형을 다시 맞추었다

 

그 무렵 이미 현대그룹의 지배구조에 변동이 생기고, 유니콘스의 모기업 하이닉스의 자금난이 심화되면서 '돈싸움' 면에서는 이미 균형이 많이 무너져 있었다. 2000년 연고지 인천을 떠난 현대는 서울 진입 직전에 제동이 걸리며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있었고, 그와 함께 신인 1차 지명의 기회를 봉쇄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수코치 김시진과 타격코치 김용달을 중심으로 한 코칭스태프는 그동안 확보한 자원들을 부지런히 가공해내며 전력의 하락을 저지하고 있었고, 창단 이후 늘 라이온즈에 한 발 앞서 있던 유니콘스의 선수들 역시 여전히 강자의 여유를 지키고 있었다.

 

2004, 삼성은 17승의 다승왕 배영수와 36세이브의 구원왕 임창용을 축 삼아 최강의 마운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기에 1,2,3루수 골든글러버 양준혁-박종호-김한수가 내야를 지키고 있었고 역시 골든글러버 박한이가 중심에 선 외야진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에 맞선 현대는 8개 구단 최강의 스카우트진이 발굴해 온 16승의 외국인투수 피어리로 맞섰고, 34세이브로 구원 2위에 오른 조용준이 마무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야수진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하던 박진만과 역시 그 해 도루왕이자 당대 최고의 중견수이기도 한 전준호가 내외야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타선의 핵은 그 해 타격, 장타율, 출루율 부문 1위에(볼넷 1, 홈런, 안타 2, 타점 3) 오른 외국인 타자 브룸바였다.

 

삼성은 이승엽의 공백이 있었고, 외국인 선수들이 줄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현대도 심정수(28홈런)와 정민태(7)와 김수경(11)이 다소 부진하며 기대만큼을 채워주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의 권오준(11승)과 현대의 오재영(10)이 떠올라 선배들의 빈틈을 채우며 신인왕 경쟁에 나선 것까지도 팽팽했다.

 

그 해 정규리그는 현대의 1.5경기차 우승으로 맺어졌다. 모든 면에서 팽팽하거나, 오히려 삼성 쪽이 우세한 양상이었지만, 승부처는 역시 맞대결이었다. 현대는 삼성을 만나 1072무승부로 앞섰고, 딱 그만큼의 차이로 먼저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3위팀 두산을 만나 31패로 간단히 꺾으며 2001년의 아픈 기억을 설욕했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운명의 맞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것은 1021일이었다.

 

 

▲ 10이닝 노히트노런, 명예로운 불운의 주인공 배영수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투구를 보여준 투수는 배영수였다.

 하지만 그가 거둔 성적은 단 1승도 없이 2패, 그리고 '10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비공인의 '기억' 뿐이었다

 

최후의 결전장, 2004년 한국시리즈

 

그 해 한국시리즈는 밤 10시 이후에는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다는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투수력과 그보다 더 치열한 자존심으로 맞서는 두 팀에게 밤 10시라는 제한은 너무 짧은 것이라는 점은 곧 현실에서 드러나게 된다.

 

1차전에서는 피어리와 배영수의 에이스 맞대결에서 현대가 먼저 승기를 잡으며 1승을 챙겼지만, 이튿날의 2차전은 8-8로 맞선 채 9회를 마치자 이미 제한시간을 넘기며 첫 무승부를 기록하게 됐다. 이어 대구로 옮겨 치러진 3차전을 삼성이 이겨 균형을 맞춘 뒤 4차전에서도 삼성의 배영수가 10이닝동안 무안타 무실점으로 버티고도 타선이 한 점을 만들지 못해 12회까지 0-0으로 맞서며 '비공인 10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복잡한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어 5차전과 6차전을 다시 나누어 가진 뒤 1029일에 잠실에서 치러진 7차전마저 6-6으로 맞서며 세 번째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미 74승제의 마지막 일곱 번째 판까지 치렀지만 두 팀은 고작 2승씩만을 챙겼을 뿐이었고, 이제 시리즈는 도대체 몇 차전까지 이어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한국시리즈는 11월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두 팀은 새로이 시구자들을 섭외하는 부산을 떨어야 했다

 

8차전에서는 '10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명예로운 '불운'의 주인공 배영수의 불운이 다시 이어졌다. 7회에 현대의 전근표가 삼성 배영수를 상대로 예상 밖의 역전 투런 홈런을 날렸고, 그것을 결승점 삼아 현대가 3-2로 이겨 3승 고지에 먼저 올라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진땀나는 기록과 지루하도록 이어졌던 날카로운 평행선의 결정판은, 역시 9차전이었다. 111, 잠실 야구장에서만 한국시리즈의 다섯 판째가 열린 그 날 서울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그라운드는 삽시간에 진흙탕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야구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이미 9차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를 10차전까지 넘길 수는 없었고, 경기는 무조건 강행되었다.

 

 

▲ 수중전, 아니 진흙탕 속에서의 몸부림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은, 5년간 이어온 전쟁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 조용준 폭우와 야수들의 실책, 그리고 밀리면 뒤집어진다는 압박감 속에서도 조용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점 위의 정점, 9차전

 

경기는 1회 말에 삼성에 1점을 내주고는 곧바로 2회 초 반격에 대거 8점을 만들어내며 역전한 현대의 페이스였다. 2회까지 8-1이라면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삼성이 4회 말에 3, 6회 말에 다시 한 점을 야금야금 따라가며 점수 차는 8-5까지 좁혀졌지만, 현대는 무적의 마무리투수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데뷔 후 해마다 평균 30세이브를 쌓아올리며 조만간 김용수의 통산기록을 넘어서는 것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던 젊은 수문장 조용준이었다. 김재박 감독은 8회말 조용준을 투입하며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하지만 역시 폭우가 문제였다. 이제 경기는 수중전이라는 말조차 민망할 진흙탕 속 몸부림이었다. 조용준은 첫 타자 신동주에게 땅볼을 유도했지만 3루수가 실책을 범하고 말았고, 조용준은 박종호를 볼넷으로 내보낸 데 이어 조동찬에게마저 안타를 맞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미묘한 순간에도 반전은 숨어있었다. 조동찬의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졌고, 당대 최강의 어깨를 자랑하던 우익수 심정수의 송구를 의식한 2루 주자 신동주가 3루를 돌다가 뒤늦게 급브레이크를 밟자 2루를 돌아 3루를 향하던 대주자 강명구가 미아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가 유유히 전달되어온 공에 태그당하면서 11,3. 박한이의 2루 땅볼로 다시 한 점을 따라가 8-6까지 추격할 수 있었지만, 결정적인 역전의 찬스는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9회 말, 상황은 21,2루까지 몰려가 있었고, 타자는 또다시 8회말 첫 타자로 나와 3루수 실책으로 살아나가며 위기상황을 만들었던 신동주였다. 이번에도 신동주는 조용준의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고, 그의 타구는 내야에 어설프게 솟아오르는 평범한 플라이볼이었다. 더구나 공을 향해 팔을 벌린 것은 수비의 귀재 박진만이었고, 1,2루에 있던 주자들은 달리고 있었지만 고개는 이미 체념한 듯 숙여진 상태였다.

 

두 팀의 선수들과 2만여 관중들은 그 해 시리즈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허리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따가울 지경으로 퍼부어대던 빗속에서 박진만은 공의 행방을 잃었고, 그 타구가 내야의 진흙탕을 뒹구는 사이 다시 한 명의 주자가 홈을 밟으며 점수차는 8-7.

 

중계화면이 흐릿해질 지경으로 퍼붓는 빗속에서 실책을 거듭하는 야수들. 마운드 위의 조용준은 지쳐보였고, 상대팀의 주자는 3루까지 진출한 아찔한 상황. 삼성 쪽 더그아웃에는 생기가 살아났고, 반대로 현대 쪽 더그아웃은 침울했다. 하지만 김재박 감독으로서도 조용준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 순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투수는 없었고, 그것은 조용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조용준은 세상 모두와 맞선 듯 이를 악물었고, 눈빛을 번뜩였다.

 

타석에 들어선 것은 대타 강동우. 어떻게든 그를 잡아내야만 하는 조용준. 8-1의 리드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기세와 분위기의 우열을 바꾼다는 의미였고, 그렇게 된다면 그 날의 승리는 물론이고 이어질 10차전의 승부 역시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순간 조용준은 안타를 맞아도, 폭투를 던져서도, 혹은 타자를 걸려보내 역전주자를 만들어도 안 되는 벼랑 끝에 서있었다.

 

게다가 야구장 잔디밭 어디든 타구가 떨어지기만 한다면, 야수들이 공을 잡고 던지고 받는 모든 순간에서 얼마든지 실책이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폭우. 빠른 발의 타자. 어쩌면 번트만 대도 내야안타가 될 확률이 절반은 넘지 않을까 싶었던 극단적인 상황이었지만 조용준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공을 던졌고, 강동우는 자신있게 방망이를 돌렸다.

 

하지만 강동우가 잡아당긴 잘 맞은 공은 흙탕물을 몇 번 튕기며 1루수 이숭용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고, 이숭용은 공을 쥔 글러브를 높이 치켜든 채 직접 달려가 1루 베이스를 밟으며 끈질겼던 9차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조용준이 그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포효했고, 그제서야 표정이 풀어진 박진만이 마운드로 달려갔다. 한국시리즈 MVP는 삼성의 타자들과 현대의 수비수들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무시무시한 장대비를 꽂아댄 하늘까지 홀로 상대해 이긴 조용준의 것이었다.

 

▲ 현대의 마지막 우승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9회말 2사에서 삼성 강동우의 타구를 잡은 이숭용이 1루를 밟는 순간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달려나오고 있다.

 

절정, 그리고 종막

 

그 해는 현대와 삼성 두 재벌기업이 야구장에서 벌인 전쟁의 절정이었으며 마지막 장이기도 했다. 그 시즌을 끝으로 삼성은 백억을 던져 현대의 심정수와 박진만을 데려갔고, 한 해 전에 데려간 박종호와 함께 현대 출신 선수로 내외야의 핵심을 재구성하는 이식수술을 완성하며, 더 이상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의 전력을 구축하게 된다.

 

현대의 김재박 감독은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심정수와 박진만과 박종호를 경쟁팀에 내주고도 전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해는 현대 유니콘스가 마지막으로 우승을 했던 해로 남게 되었고, 그 이듬해부터는 삼성 라이온즈의 독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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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4] 2005년, 전무후무한 하위권팀 출신 MVP가 탄생하다

'먹튀'가 된 에이스...누가 그를 '씹을' 수 있을까

 

1990년대 중반까지 사람들이 '롯데' 하면 떠올리는 단어가 최소한 '꼴찌'는 아니었다. 그 무렵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이언츠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독종'이라거나 '끈질김' 같은 것들이었고, 그것은 그 팀의 선수나 팬들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었다. 최동원의 4승 역투로 판도를 뒤집은 1984년의 한국시리즈, 연봉 1500만 원짜리 19세 소년 염종석이 이끈 1992년의 우승, 발목이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2년 만에 치르는 복귀전에서 3안타를 때려낸 박정태와 그가 이끈 그해의 준우승 등이 물론 그런 이미지의 실제 근거들이었다.

 

염종석과 주형광이라는 소년 에이스들이 마운드의 중심을 잡고 있었고, 마해영과 박정태라는 재능 있는 젊은 강타자들이 타선의 주축을 이루어 1995년 준우승을 이룬 이후에도 해마다 5억짜리 거물 신인들을 수혈한 그 롯데 자이언츠가 전설 같은 꼴찌 팀의 역사를 써나간 것은 그래서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1990년대 후반,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롯데를 전설적인 약체팀으로 전락시킨 것은 불운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선수협을 분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역대 최고 타자 중 하나인 마해영의 트레이드도 불사했던 구단 고위층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목표의식과 동기와 자극을 부여하며 발전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관리라도 해가며 현상유지를 시키지도 못했던 지도자들의 무능에서 심화된 것이며, 당장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고 해서 해마다 시즌 중반에 감독을 갈아치운 구단의 경박함에서 골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도 아쉬울 것 없다'는 식으로 손을 놓아버린 부도덕한 감독이 있었고, 그와 함께 승리에 대한 집념마저 놓아버린 한심한 선수들이 있었다.

 

염종석, 주형광, 손민한, 문동환 같은 명투수들을 동시대에 보유하고도 늘 '선수의 부족', 더구나 '투수력의 빈곤'에 허덕였던 사정을 그저 불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꼴데(꼴찌+롯데)'의 원흉으로 각인된 한 감독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여러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 손민한 그의 선수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그의 전성기에 팀은 바닥을 기었고, 팀의 전성기에는 그가 쉬어가곤 했다.

 

 

손민한, '먹튀'로 프로인생을 시작하다

 

손민한은 얼른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파란만장한 선수인생을 보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늘 최고로 꼽혔고, 늘 동년배들 중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던 선수였지만 프로에서의 삶은 진흙탕에서 시작한 것부터가 그랬다.

 

1997, 그는 국가대표 에이스의 명성을 업고 롯데 자이언츠에 1차로 지명되며 5억 원의 계약금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롯데 팬들의 가슴 속에는 두 해 전 우승 직전에서 좌절했던 분기가 남아 있었고, 그해 나란히 입단한 두 거물투수 손민한과 문동환이 곧 복수극의 선봉장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손민한과 문동환은 입단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 약속이라도 한 듯 '팔이 아파 공을 던질 수가 없다'며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기존 주력투수들인 윤학길과 박동희가 나란히 허리부상으로 전열을 이탈한 데다가, 한 해 전에 입단한 또 한 명의 '5억 팔' 차명주는 아픈 데도 없이 초점 없이 흩어지는 공을 던져댔다. 그 결과는 팀 창단 후 첫 '2년 연속 꼴찌'의 자맥질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약팀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3년간, 손민한이 팀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었다. 2년차인 1998년에는 단 한 개의 공도 1군 무대에서 던지지 못했고, 겨울부터 '재기'에 관한 요란한 소문을 몰고 나타난 1999년에도 10경기에 나와 19.1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첫 3년간 그가 남긴 성적은 132세이브가 전부. 야구만 잘하면 밥도 택시도 공짜라는 부산, 그러나 '손민한'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없는 부산 땅에서 그의 삶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꼴찌 팀의 에이스로 재기하다

 

더 이상 끈질기게 그의 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을 2000년에 그는 드디어 12승을 기록하며 다시 나타났고, 그 이듬해에는 내친 김에 15승으로 전진하며 다승왕 타이틀까지 따내는 기적을 연출한다.

 

하지만 1997년에 '문동환-손민한 쇼크'로 꼴찌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비상해 1999년 준우승의 기적까지 연출했던 팀은 손민한이 다승왕으로 화려하게 돌아온 2002년 다시 꼴찌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손민한은 롯데라는 팀과의 바이오리듬이 엇갈리는 선수거나, 아니면 약체팀의 기둥이라는 슬픈 운명을 점지받은 선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 그 2001년부터 롯데 자이언츠라는 팀의 본격적인 비극은 시작됐다. 한 명의 감독이 심장마비로 떠나고, 다시 두 명의 감독이 시즌 중에 잘려나간 뒤에도 다시 한 시즌을 더 치르도록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초유의 '4년 연속 꼴찌'의 신화가 작성된 것이다.

 

그 사이 1999년에 0.372라는 기록적인 타율로 타격왕에 오르며 35홈런까지 곁들였던 리그 최강의 타자 마해영이 '선수협 주동자'라는 이유로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쫓겨났고, 그와 짝을 이루던 거포형 포수 임수혁이 쓰러졌으며, 다시 2001년 시즌이 끝난 뒤에는 역대 최고 출루율(0.503)의 신화를 쓴 최고의 외국인타자 호세가 짐을 챙겨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그 시기에 손민한 역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2년간 7승밖에 올리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었고, 2004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마무리투수로 전향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05, 다시 선발투수로 돌아온 그는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한다. 선발투수로서 26, 구원투수로서 2번 등판하며 모두 168.1이닝을 던졌고, 2.46의 평균자책점과 1871세이브를 기록했다. 특히 선발투수로서 평균 6.1이닝을 소화했고, 특히 6회 이전에 강판한 것이 5번에 불과했을 만큼 평균치로서 드러낼 수 없는 '안정성'이라는 면에서도 최고의 능력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성적은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전체 1위에 해당했고, 그렇게 2관왕에 등극했다.

 

그해 롯데 자이언츠는 5위를 차지한다. 비록 3위 팀 SK와는 14.5경기, 4위 팀 한화와는 6경기차가 벌어진 '확실한' 하위권이긴 했지만, 그것은 연속꼴찌기록이 5년으로 이어지는 것을 저지한 의미 있는 반등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럴 만한 전력을 갖추고 이룬 당연한 성적은 아니었다. 그해 롯데의 팀 타율과 팀 출루율은 단연 꼴찌인 0.253이었고, 팀 홈런과 팀 도루도 7위에 해당하는 처참한 상태였다. 상위권에 해당하는 팀기록은 실책(3), 삼진(2), 도루실패(2) 등 나쁜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나은 것은 4.30으로 전체 4위에 해당한 팀 평균자책점을 비롯한 투수 쪽 기록이었고, 그것에 의지해 롯데는 꼴찌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손민한의 위력이 작용했다. 그는 그 자신을 제외하면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가운데 고군분투했고, 혼자 힘으로 팀 평균자책점을 무려 0.32나 끌어내리는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만약 손민한이 없었다면 한국프로야구의 팀 최다연속꼴찌 기록은 '5' 이상으로 늘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 2005년 정규리그 MVP 그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하위권 팀이 배출한 유일한 정규리그 MVP다.

 

 

전무후무한 하위권 팀 출신의 MVP

 

그런 손민한에게 정규리그 MVP의 영광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29년의 프로야구사에서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팀의 선수에게 주어진 정규리그 MVP였다.

 

물론 그것은 그해 홈런과 타점 부문의 서튼(현대, 7), 타격과 최다안타 부문의 이병규(LG, 6)처럼 하위권 팀 선수들이 주요 개인타이틀을 석권하는 기현상 때문이긴 했다. 물론 승률(오승환), 탈삼진(리오스, 배영수), 세이브(정재훈) 등 상위권 팀 출신의 타이틀홀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을 석권한 손민한을 놓고 다른 투수가 MVP를 넘볼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선수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임에도 불구하고 MVP는 팀의 성적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팀의 위세가 선수에 미치는 '후광효과'이기도 하지만, 팀의 성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개인기록은 의미가 떨어진다는 팀 스포츠의 철학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 해 손민한의 활약은 여느 해의 우승팀 에이스 못지않은 가치를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승패가 결정된 경기에서도 선발투수로서 늘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며 팀 마운드 전체를 안정시킨 투수였고, 때로는 타이틀 경쟁 와중에서도 불펜 등판 요구를 거부하지 않은 헌신적인 투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승을 이어가는 것보다도 연패를 끊는 것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도 결정적으로 그가 끊은 연속꼴찌의 기록이 롯데는 물론이고 한국프로야구를 구원한 의미 있는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 롯데 암흑기 투타의 기둥, 손민한과 이대호 2005년에는 손민한이 투수부문 2관왕에 올랐고, 2006년에는 이대호가 타자부문 3관왕에 올랐다.

문제는 한동안 그 둘이 롯데 투타 전력의 거의 전부라는 점이었다.

 

 

손민한의 역투에 눈물 흘린 기억, 진정한 롯데 팬의 훈장

 

하지만 손민한의 선수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로부터 다시 4년간 두 자리 수 승리를 기록했고, 1980년대의 최동원과 1990년대의 염종석-주형광에 이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팀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008, 무려 9년 만에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던 그해에 12승을 거둔 뒤 FA 계약을 맺고 연봉만 사상 최고액인 7억을 받는 귀한 몸이 되고도 다시 부상으로 쓰러졌다. 그래서 만약 다시 기적적으로 재기하지 못하는 한 어린 팬들의 기억에 'FA 먹튀'로만 남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빛의 가치는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법이지만, 프로스포츠에서는 조금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 암흑의 시기에는 팬들마저 모두 떠나버리기에, 홀로 빛을 발한 선수를 기억해줄 이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야구장에서 꿋꿋이 팀의 추락을 저지해준 낡고 굵은 기둥의 노고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또다시 고난이 닥칠 때 같은 몫을 자청할 이도 찾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사직구장의 관중석을 끝내 지키며 손민한의 활약에 눈물 흘렸던 이들이라면 '손민한 먹튀'를 씹어 뱉는 경박한 팬들을 향해 혀를 찰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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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5] 2006년에 세운 통산 200승 금자탑

송진우 200승, 한국야구사의 서글픈 순간

 

2006829, 기아 타이거즈와의 광주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 타선은 유난히 집중력이 돋보였다. 2회 초,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에 시달리던 기아 선발 전병두가 갑자기 흔들리며 김태균과 이범호에게 거푸 볼넷을 내주자 후속타자 이도형이 안타를 치고 나가 무사 만루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백재호, 조원우, 그리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타석에 돌아온 김태균이 각각 2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어버렸다. 2회 초에 이미 70.

 

반면 기아 타이거즈의 공격은 내내 무기력했다. 2회 말 반격에서 곧바로 외국인 타자 스캇 시볼이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한 점을 따라붙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화의 선발투수는 최고구속이 시속 137킬로미터에 불과한 직구를 커브와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여러 가지 변화구들과 섞어 던지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고, 승리투수의 요건이 갖춰진 6회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와 땀을 닦았다.

 

결국 경기는 한화의 101 대승으로 끝났고,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홈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00발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바로 그 날 원정팀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 송진우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통산 200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해 730일 잠실 두산전에서 통산 199승을 넘어선 이후 꼭 한 달간 5번째 도전 끝에 보탠 귀중한 1승이었고, 그의 나이 만 406개월 13일의 일이었다.

 

200자신을 이겨내고 얻은 전리품

 

선발 5인 로테이션 체제가 일반적인 오늘날 보통 한 명의 선발투수가 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지킨다고 할 때 부여받게 되는 등판 기회가 25회 안팎이 된다. 그래서 선발투수에게 승패의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몇 경기를 제외하면, 대략 5할 이상의 승률이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10승이다.

 

하지만 투수는 상대 타자하고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부상의 위험과도 싸워야 하고, 자신의 체력 한계와도 싸워야 하며, 팀 내 경쟁자들과도 '출전기회'를 놓고 싸워야 한다. 그래서 한 시즌을 치르고 나면 각 팀에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개근하는 선발투수의 숫자가 2, 3명도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10승이란, 팀 내 경쟁에서 살아남은 뒤 한 시즌을 부상 없이 버텨낼 수 있는, 철저하고 성실한 몸관리에 성공한 투수가 주어진 기회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5회 이상 버텨내며 최소한의 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야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A급 선발투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시즌 10승이며, 한 시즌 20승을 기록한 투수에 대해서는 '슈퍼에이스'라는 호들갑스런 칭호를 붙여도 아깝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단한 10승을 20년 동안 쉼 없이 이어갈 때 도달할 수 있는 200승이란, 누구라도 쉽게 목표로 삼거나 현실적인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논할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송진우의 기록은 바로 그 가능과 불가능, 현실과 초현실의 애매한 영역에 분명한 객관적 증거를 가진 목표선을 그은 것이고, 그로써 현존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모든 투수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송진우 그는 21번을 달았던 또하나의 전설 박철순과 함께 한국야구사에 '극기'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겼다.

▲ 송진우의 은퇴식 송진우는 21년간 210승 153패 103세이브의 기록을 남기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는 투수판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몇 되지 않는 전설 중의 한 명이었다.

 

 

불모지에 태어나 개척자가 되다

 

송진우는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 청주 세광고 2학년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모교의, 그리고 동시에 충북야구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끈 선구자였다. 약체 팀의 에이스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대로 그 역시 어린 나이부터 무리한 탓에 동국대 2학년 시절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프로 진출도 동기들보다 1년 늦추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프로무대에 오르자 그는 늦은 세월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렸다. 첫 발을 프로통산 다섯 번째로 기록되는 '신인 데뷔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나타난 그는 특히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병행'했다. 그래서 루키 시즌이던 1989년에 9승과 9세이브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선발투수로 전념하게 된 1995년 이전까지 6년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에만 나섰던 '반쪽짜리' 시즌 두 개를 포함하면서도 무려 66승과 82세이브를 쌓아올린 성적은 완벽한 '2인분'의 활약이었다.

 

그 기간 중 1991년에는 11완투-11세이브를 기록하고 1992년에는 19승과 17세이브(25세이브포인트)로 다승과 구원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그런 초인적인, 하지만 비정상적인 활약 덕분에 신생팀 빙그레는 해마다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 되는 리그 최강팀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선발투수로 전업한 뒤에도 1995년과 1996년 각각 13승과 15승을 올렸던 그는 입단 9년 만인 97920일 인천 현대전에서 선발승을 거두며 역대 10번째로 100승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1997년과 1998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치솟는 동시에 승수도 6까지 떨어지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향하던 그에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무리와 과로가 독을 뿜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슬슬 선수인생의 종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전망이었다.

 

하지만 송진우는 199915승으로 재기한 데 이어, 그 해 겨울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직을 맡아 선수협파동의 중심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2000518일에 역대 11번째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곁들이며 13승을 올렸다.

 

2002423일에는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146승을 넘어서는 147승째를 올려 한국프로야구사상 최다승 기록을 세우는 등, 한국 나이로 마흔에 접어든 2005년까지도 꾸준히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해나가는 기적적인 '2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다. 책임감이 커지고 위기감이 커지면 더 치밀하고 처절한 준비와 훈련으로 이겨나가는 송진우식 승부의 결실이었다.

 

초라한 시절, 찬란한 업적

 

▲ 송진우의 기록 송진우가 은퇴하던 날, 대전 구장에는 그가 21년간의 선수인생동안 쌓아올린 역사가 기록되었다. 210승, 2048탈삼진, 3003이닝.

   모두 한국야구 30년사가 낳은 최고의 업적이며, 앞으로 다시 30년간 후배 투수들이 목표로 삼아 달려야 할 관문이며 이정표다.

 

 

투수에 관한 모든 최고, 최다, 최고령 기록들을 부수고 새로 쌓으며 달려온 송진우는 그렇게 2006200승을 돌파했고, 200866일에는 2000탈삼진을 넘어섰으며, 200949일에는 3000이닝 투구를 달성했다. 그리고 2009923, 공백 없이 21번의 시즌을 치르며 만 437개월 8일까지 유니폼을 입은 기록을 남겼고, 그 순간까지 이어져온 그의 통산기록은 210103세이브 2048삼진, 3003이닝 투구였다. 그는 한··일을 통틀어 1982년 일본의 에나쓰 유타카(206193세이브)에 이어 두 번째로 200-100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로 세계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은 아직 한국 프로야구의 침체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 정점을 찍은 뒤 기나긴 내리막을 걸어온 관중규모는 그 해에도 300만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었고, 2003년에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대결이 일으켰던 반짝 특수는 그 해에 오히려 이승엽 선수가 뛰던 일본 프로야구중계방송의 시청율로 새나가는 부작용까지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송진우의 200승이 달성되던 2006829일은 팬과 미디어의 외면 속에서 가장 위대한 기록의 탄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프로야구사의 가장 서글픈 순간이기도 했다. 그 날 광주 무등경기장에 발걸음해 대기록의 탄생을 지켜본 팬들의 수는 3360명에 불과했고, 중계권을 가진 SBS는 이승엽 출전경기를 중계방송하면서 송진우의 200승 달성경기를 이따금 작은 화면으로 이원 중계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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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6] 한국야구의 이방인 감독 이야기

한국야구의 세번째 실험, 그 이름 '로이스터'

 

 

20071126, 롯데 자이언츠는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감독을 지낸 경력이 있는 제리 로이스터를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고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한국프로야구사 최초로 외국인 감독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는 재일교포 이충남(일본명 야마모토 타다오)'조감독'으로 영입해 실질적으로 팀 운영의 전권을 맡긴 적이 있었다. 이충남은 1967년 난카이 호크스(오늘날의 소프트뱅크 호크스)22번으로 지명된 유망주였지만 선수로서는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6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고, 난카이의 수비코치를 거쳐 당시에는 한큐의 작전분석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경기의 흐름을 읽고 상대팀의 움직임을 분석해내는 능력이 뛰어나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굳이 '조감독'이라는, 프로야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괴상한 직책을 맡긴 것은 당시 경북야구의 대부로까지 불리던 서영무 감독을 밀어내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는데, 그런 눈치를 모를 리 없는 서영무 감독이 시즌 중 자진사퇴하면서 이충남의 직책은 '감독대행'으로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이충남의 기용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철순의 투혼에 말리며 실패했지만 후기리그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고 객관적 전력 면에서는 자타공인 최강이었던 탄탄한 전력에다가 1983년에는 김시진과 장효조라는 국내 최고의 투수와 타자를 영입하고도 삼성은 그 해 4(전기리그 5, 후기리그 공동 2)로 추락했던 것이다.

 

물론 한 팀의 성적을 오로지 감독의 능력만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 전년도 15승 트로이카인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가 동시에 부진에 빠진 것도 컸고 3할을 치던 톱타자 장태수가 2할대 초반으로 추락하면서 공격력이 전반적으로 무뎌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전혀 한국말을 할 수 없었기에 선수들과의 융합은커녕 선수들에 대한 파악도 어려웠다는 점, 그리고 역시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칠었던 반일본 정서가 만들어내는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이 그를 고립시킨 것이 문제였다. 이충남은 능력 있는 야구인이었지만, 감독에게 더 중요한 자질은 리더십이었고 리더십은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그의 한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1983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하고 있는 서영무 감독(가운데)과 이충남 조감독(오른쪽)

일본과 한국의 '롯데'팀을 오가며 수석코치로서 경력을 쌓았던 도이 쇼스케(도위창)

 

이방인 사령탑의 실험, 이충남과 도위창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외국인과 같은 경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충남은 한국야구위원회가 한국인으로 간주하기로 한 '재일교포' 였다. 하지만 순수한 외국인이 한국 프로야구팀의 사령탑에 오른 경우도 있었는데, 1990828일자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으로 임명돼 91일부터 1031일까지 24경기를 지휘한 도이 쇼스케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재일교포도 아닌 순수한 일본인이었지만, 오히려 한국야구와의 인연은 이충남보다 훨씬 길었다. 1976년 실업팀 롯데의 창단 코치로 부임해 4년간 활동했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에도 1984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로 기용돼 다시 4년간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몇 년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롯데' 팀을 오가며 양 팀에서 수석코치를 번갈아 지낸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었고, '도위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만들어 쓸만큼 한국과의 인연을 각별히 생각했다.

 

1986년 그는 이미 한 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에 오른 적도 있었다팀에 창단 후 첫 우승을 선물한 강병철 감독이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구단 전무와 충돌하며 팀을 떠나자 구단에서는 후임으로 도이의 정식감독 기용을 검토했다. 하지만 KBO'일본인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데 대한 국민감정'을 이유로 만류해 결국 무산되었는데, 당시 그가 감독대행으로 보임되었던 기간이 121일부터 19일까지의 비시즌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휘봉을 잡고 지휘한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

 

어쨌든 1990년 가을, 도이 감독대행은 24경기를 지휘했지만 성적은 8115패로 참담했다. 물론 그의 지휘 아래 기록한 승률 .354는 그 해 시즌 승률 .388과 별다를 것 없었고, 이미 최하위권으로 성적이 굳어진 채 치른 경기에서 선수들의 의욕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패'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면도 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가 그 시즌이 끝난 뒤 '첫 우승의 주역' 강병철 감독과 화해하고 영입에 성공하자 도이의 지도력을 실험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실험, 로이스터

 

2008년의 로이스터는 이충남으로부터 25, 도이 쇼스케로부터 18년이 지난 한국야구계의 개방성과 흡수력, 포용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사례가 되었다. 그는 조감독이나, 감독대행이 아닌 정식감독이었고, 절친한 사이인 투수코치 아로요와 야구선수 출신이자 마이너리그에서 함께 코치로 일했던 한국인 보좌역 커티스 정(한국명 정윤현)으로 구성되는 나름의 '사단'을 대동했다. 게다가 그를 보좌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도 그가 직접 선발했고 그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미국야구 출신의 선수 2명도 따라 붙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가 출발한 환경은 이충남이나 도이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로이스터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기본기''변화'를 선언했고, 선수들에게는 '자율과 책임', 그리고 '두려움 없는 플레이'를 요구했다. 그 모든 요구사항의 공통분모는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이스터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물론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롯데에서의 첫 해에 부산 팬들이 8년간 소망해 온 '가을야구'의 꿈을 실현시켰고 그 성적을 3년간 유지했다. 2008년 롯데는 2007년에 비해 1할 이상 높은 승률을 만들어냈다. 타율은 1푼 이상 높아졌고, 평균자책점은 0.5가량 떨어졌으며, 도루는 무려 두 배(67133)로 늘어났다. 실책이 10개 늘었지만, '미루다 흘리는' 악성 실책들을 '나서다 빠뜨리는' 양성 실책으로 대체해가며 경기의 질을 높였다.

 

로이스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기존에 인맥이나 파벌에서 비롯되던 선수와 지도자 기용 등의 '관점에 따라 늘 달라지던 불공정의 문제'들이 일시에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장점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그가 최소한 하루하루 그 날 거두어야 하는 1승에 집착하는 스타일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점과 연관된다. 그가 재계약에 어느 정도 신경쓰고 스트레스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눈 앞의 한 경기를 잡기 위해 장기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충분치 않은 자원 속에서 무수한 경기를 극적인 블로운 세이브로 망쳐가는 가운데서도 끝내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던 마운드 운용은 그 대표적인 영역이었다. 20086, '한국에서는 4강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해임되곤 하는 관행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사실 한국에서 감독의 임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성적이 좋지 않으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지휘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쨌든 나로서는 지금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 모든 관심사는 이 팀이 조금 더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 팀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팬들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게끔 하는 일뿐이다."

 

물론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의 거물'이라는 존재감은 그가 선수단 내에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유용하게 기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을 결정적으로 확립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성적이었다. 그가 감독으로 취임한 첫 해에 롯데 자이언츠는 21세기 들어 최초로 '가을야구'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더 크게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 로이스터와 가르시아 감독으로서 첫 번째, 하지만 실질적인 사령탑으로서는 세번째 이방인이었던 로이스터는

   3년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김으로써, 선수와 팬들의 신뢰를 얻다

 

김성근 전 SK 와이번스 감독에게 강한 훈련의 효과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답을 얻은 적이 있었다.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것은 감독으로서도 승부야. 훈련을 잘 소화하는 것이 선수들의 몫이라면, 그렇게 훈련한 선수들을 데리고 성적을 내는 게 감독의 몫이야. 그렇게 강하게 훈련을 했는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선수들은 지도자를 불신하게 돼 있어. 그래서 지도자는 선수들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성적을 내야 해."

 

로이스터는 선수들에게 강한 훈련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율의 영역을 극대화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강한 훈련을 강요하든, 자율적 훈련을 요구하든, 그것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 그 지도자는 선수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그리고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선수들의 핑계거리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지도자들은 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로이스터 역시 감독으로 재임했던 3년간 내내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며 선수들과 팬들의 신뢰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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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7] 2008년, 18이닝 1박 2일 경기

18회 말, '무승부의 딜레마'에 탈진했습니다

 

2008년 9월 3일, 잠실에서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시즌 16차전이 벌어졌다. 두산은 정재훈, 한화는 유원상을 각각 선발로 내세우고 있었다. 4년째 팀의 주전 마무리로 뛰고 있던 정재훈으로서는 무려 1년 만의 선발등판이었고, 팀의 주전급으로 자리를 굳히지 못하고 있던 3년차 유원상 역시 1달여 만의 선발등판이었다.

 

두 선발투수 모두 익숙하지 않은 임무였지만, 동시에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정재훈은 6회까지 안타 2개와 사사구 2개를 내주긴 했지만 고비마다 삼진 7개를 솎아내며 무실점으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하지만 유원상 역시 똑같이 6회까지 4안타와 사사구 1개를 내주면서도 6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버텼고, 두 팀의 감독은 나란히 투수교체를 단행하게 된다. 전문 선발투수가 아닌 두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끌어냈다고 봐야 했고,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서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승부는 불펜싸움으로 넘겨지게 됐다.

 

두산에서는 이재우가 나왔고, 한화에서는 구대성이 나왔다. 하지만 두 투수가 버틴 7·8회에도 역시 나란히 무실점이 이어졌고, 9회에는 다시 두산이 임태훈을, 한화가 최영필을 거쳐 토마스를 투입했다. 하지만 역시 승부는 끝을 보지 못했고 결국 두산은 연장 13회에 네 번째 투수 김상현을 내보냈으며, 한화는 연장 12회부터 박정진, 마정길, 그리고 안영명을 올려보냈다. 그럼에도 두 팀의 투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팀과 순서를 가리지 않고 호투로 일관했고 타자들은 팀과 타순을 가리지 않고 빈공으로 일관하는 기묘한 평행선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연장 18회라는 신기원에 도달하는 순간, 묘하게도 전광판의 시계는 정확히 자정을 가리켰다. 그리고 TV 중계를 맡고 있던 캐스터는 지친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금 하이라이트가 아닙니다. 생방송입니다."

 

 

▲ 연장 18회 말 한 경기에서 두 경기에 해당하는 이닝을 소화했던 2008년 9월 3일 두산-한화전.

  천재지변으로 인한 연기 없이 1박 2일에 걸쳐 진행된 것은 그 날의 경기가 처음이었다.

▲ 안영명 연장 18회말 2사 후 볼 넷 네 개를 허용하며 1박 2일 경기에 종지부를 찍은 안영명.

  그날의 경기는 그의 선수인생 내내 이어진 파란만장한 에피소드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18회 초 한화의 공격 역시 무득점으로 끝이 났고, 18회 말 두산의 공격 역시 무기력하게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며 경기는 19회를 향하고 있었다. 두산의 4번째 투수 김상현은 이미 6이닝을, 한화의 7번째 투수 안영명은 4.1이닝을 던지고 있었다. 선발투수 못지않은 많은 공을 던진 셈이었고, 이제 교체할 만한 투수들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줄줄이 아홉 번째 타석으로 불려 나오는 양 팀 타자들의 방망이질이 투수들의 공보다도 훨씬 둔해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날이 밝을 때까지 경기를 해도 끝나지 않겠다는 푸념을 넘어선 걱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 날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한화 선발 안영명이었다. 그제껏 4.1이닝을 완벽하게 막아오던 그는 연장 18회 말 2아웃을 잡아놓은 뒤부터 갑자기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넣지 못했다. 그래서 이성열, 이종욱, 고영민에게 거푸 볼 넷을 던져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결국 안영명은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에게마저 네 개째 볼을 던짐으로써 밀어내기로 그 경기의 유일한 점수를 만들어 주었다.

 

00시 22분. 무려 5시간 51분에 걸친 혈전이었고, 우천 등의 이유로 중단된 경우를 제외하면 사상 최초의 1박 2일 경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홈 팀 두산은 구장 내의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이 모두 문을 닫아 버리자 입장권에 햄버거 세트 시식권과 교환할 수 있는 확인도장을 찍어줌으로써 대중교통이 끊어져 버린 그 시간까지도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한 관중들에게 감사하고 송구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무제한의 곤란함과 무승부의 허탈함 사이에서 야구라는 경기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간 제한이 없다는 점에 있다. 야구는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횟수의 공격과 수비 기회를 통해 우열을 가림으로써 끝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를 둘러싼 사람들의 현실적인 한계와 필요 때문에 대회마다 경기를 끝내는 일시적인 규칙들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하루를 넘겨 이어가는 '서스펜디드 게임' 규정을 도입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일정한 시간이나 회수까지 마무리짓지 못한 경기를 '무승부'로 정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한국프로야구에서도 대부분의 기간은 무승부제도를 운영했고, 대개는 15회를 끝으로 무승부 선언이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무승부가 3시간 넘는 시간을 투자하고 집중해 경기를 관전한 이들에게 최악의 결과라는 점이 문제였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는 짜릿한 희열과 쾌감을, 졌을 때는 깊은 회한과 안타까움을 새기며 '다음 번'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프로 스포츠의 매력이라면, 무승부라는 것은 오로지 허탈감을 남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대회에서의 잇따른 승전보와 더불어 오랜만에 흥행의 훈풍을 맞이하던 한국프로야구가 2009년 처음으로 '무제한 연장 승부제'(일명 끝장승부제)를 도입한 것은 일종의 승부수였다.  

 

하지만 그 해 6월 12일에 목동구장에서 시작된 히어로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가 경기 중간에 내린 비 때문에 55분간 중단된 데다가 14회까지 이어지면서 사상 처음으로 자정을 넘긴 0시 49분에야 마무리된 데 이어 3개월여 만인 그 날 다시 '연장 18회 1박 2일 경기'가 이어지며 그 승부수에 대한 평가는 실패로 일단락됐다. 넉넉하지 못한 선수 자원으로 긴 시즌을 치러야 하는 현장에서는 '승부에 집중하다가 선수들을 다치게 하는' 위험을 제도 개선을 통해 차단해야 한다는 당연한 요구를 해 왔고, 그 두 번의 극단적인 연장승부는 좋은 근거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절전'을 위해 탄생해, '흥행'을 위해 사라지다  

 

원래 프로 출범 당시 한국프로야구는 15회까지 경기를 치르고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무승부로 선언하며, 무승부는 승률 계산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에 관한 규정은 따로 없었고, 밤 10시 이후에는 진행되고 있던 이닝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조명을 가동하겠다는 서울야구장(동대문야구장) 관리소 측의 방침에 따라 그것이 그대로 시간제한으로 적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3년부터 잠실야구장에서는 별다른 제한 없이 조명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83년 6월 3일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가 밤 11시 37분까지도 승부를 내지 못한 채 규정에도 없는 연장 12회 무승부를 선언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규정대로 15회에 이르자면 아직도 3회를 더 치러야 하는, 그래서 새벽 한 시 안팎까지는 경기를 치러야 할지도 모를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그 경기의 주심은 12회를 끝으로 경기 종료를 선언했지만, '근거 없는 규칙 적용'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오후 10시 30분 이후에는 새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규정이 마련됐다. 그 뒤로 연장 15회, 혹은 밤 10시 30분을 한계로 삼아 무승부를 선언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유지되는 가운데, 그렇게 만들어진 무승부를 팀 성적에 반영하는 방식은 꾸준히 바뀌어 왔다.

 

당초에 승패 계산에서 제외하던 무승부가 1987년부터 0.5승으로 간주되게 되었고, 다시 1998년부터는 승률 계산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가, 2003년부터는 아예 승률 계산을 할 필요도 없이 각 팀이 최종적으로 거둔 승리의 숫자만으로 순위를 가리는 '다승제'가 도입됐다. 최소한 9회 이상의 노력을 투입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허무함의 문제 때문에 부분적인 성과를 배분하려던 것이,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양팀의 '암묵적인 담합'이 이루어지면서 무승부가 양산되는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제도는 꾸준히 바뀌었지만, 크게 보면 돌고 도는 순환의 과정이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다시 '무승부를 승률 계산에서 제외'하는 원년의 방식으로 돌아갔고, 2008년에 '끝장승부'의 승부수를 던졌다가 2009년에는 본질적으로 2003년의 '다승제'와 유사하게 무승부를 패전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지만, 2011 시즌부터는 결국 또다시 원년의 방식으로 환원되게 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문제는 '승부가 확실히 갈려야' 재미가 있다는 대결의 본질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야구의 특징, 그리고 '집에 가서 잠도 자고 다음 날 아침에는 서둘러 출근도 해야 하는' 한국인들의 사정과 한데 묶여 만들어 내는 난감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뾰족한 해결책이라는 게 있을 수도 없고, 또 상황에 따라 강조되는 요소가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좀 더 무리를 해서라도 끝을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는 반면 '먹고 살기 바쁘고 팍팍해질수록' 그냥 간단히 마무리하는 것을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하지만 해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또다시 제도를 바꾼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야구팬들이 짜증스러워하는 것은 한국프로야구가 최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해 미봉책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박함 때문이다. 팬들의 목소리도, 현장의 목소리도, 한 번도 귀담아 듣지 않고 어느 사장, 어느 단장이 낸 아이디어에 휘둘리는 무성의함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지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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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절정 최동원… 그를 울린 장효조

생전 맞대결 장효조 우세



“인기는 최동원, 승자는 장효조!”

롯데 최동원과 삼성 장효조는 1980년대 프로야구를 뜨겁게 달궜던 주인공이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최동원에게 집중됐다. 최동원은 롯데의 에이스로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때 4승을 모두 책임졌다. 해태 에이스 선동열과의 자존심 대결에서도 1승 1무 1패로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썼다. 장효조 역시 역대 통산 타율 최고 기록(0.331)을 보유할 정도로 불방망이를 휘둘렀지만 최동원만큼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다.

둘이 맞붙었을 때의 성적은 어땠을까. 한국야구위원회(KBO)의 협조를 얻어 20여 년 전 빛바랜 야구 기록지를 찾아봤다. 당시 맞대결에선 장효조의 ‘창’이 최동원의 ‘방패’를 압도했다. 장효조는 1983년부터 1990년까지 최동원과 맞붙어 6시즌이나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통산 맞대결 성적도 4할(타율 0.386)에 육박했다. 1987년 이후 4년간 최동원에게 삼진을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드라마’였던 롯데와 삼성의 한국시리즈에서도 둘의 맞대결 승자는 장효조였다. 최동원은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을 거뒀고 평균자책은 1.80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효조에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장효조는 최동원이 등판한 경기에서 타율 0.353(17타수 6안타)으로 강했다. 특히 1차전과 7차전에서는 각각 4타수 2안타를 날리며 삼성 타선을 이끌었다. 마지막에 최동원이 웃긴 했지만 장효조도 자신의 이름값은 다한 셈이다.


http://news.donga.com/3/all/20120906/49149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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