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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장정구 vs 유명우

by Wood-Stock 2012. 6. 1.

장정구 vs 유명우 '시대의 복싱영웅이 붙었다면?'

 

대한민국 복싱계에는 강력한 중력장을 발생시키며 셀 수 없는 많은 팬들의 밤을 하얗게 탈색시켜온 초대형 블랙홀이 존재한다. 이른바 '장유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833월 대권을 잡고 886월까지 15차 방어를 달성하며 WBC 라이트플라이급을 철권통치했던 장정구 전챔피언(이하 장정구)8512월 왕좌에 올라 91년까지 17차례의 방어전에서 승리하며 치세를 펼쳤던 유명우 전챔피언(이하 유명우)은 당시 세계 라이트플라이급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했던 지배적 포식자들이었다. 각국에서 수많은 도전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었지만 모두 두 선수의 벽에 가로막혔다.

 

현재의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관계처럼, 양자간의 대결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많았지만 당시 국내의 정서는 양측 누구의 패배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도 다소 있었고 게다가 장정구의 전속권을 행사하던 KBS와 유명우의 MBC간에 대전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너무도 강력했던 두 선수가 대전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장유논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80년대 후반 이래 약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복싱 마니아들의 의식 한켠에서 여전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뜨거운 감자. '천재' 장정구와 '영웅' 유명우간의 WBC-WBA 라이트플라이급 통합전이 만약 벌어졌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경기가 되었을까.

 

이 논쟁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복싱 아이콘 사이의 극단적인 콘트라스트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궤적부터 복싱스타일까지 그야말로 서로 반대다. 복서로서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한국 복싱의 중흥기를 투톱체제로 이끌었다는 부분 말고 두 사내의 공통점은 찾아내기 힘들다.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빈민가 출신 열혈청년 장정구, 복싱만이 살길이었다

 

장정구는 196324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6.25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던 빈민가였다고 한다. 폭력이 유용한 소통의 도구였던 그곳에서는 힘없으면 그냥 두드려 맞는 것이 상식이었고, 어른들은 어린 장정구에서 지면 안 된 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골목대장' 장정구는 물리력의 필요성을 어릴 때부터 인지하였으며 12세 시절 살아남기 위해 복싱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의 천재성은 즉시 두각을 나타냈고 14세 때부터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장정구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싱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잘 살 수 있었지"

 

이 언급에서 복싱과의 인연 덕에 스스로에게 지워졌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즉 왕성한 투쟁심과 전투력을 가진 70년대 빈민가의 소년들이 당시 흔히 받게 되었던 어두운 세계로부터의 초대라든지, 가난하고 학업을 일찍 접었던 사람으로서 입신의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된다든지 하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은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실력은 워낙 뛰어났지만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그로서는 아마추어 경력을 쌓는데 제약이 많이 따랐다고 전해진다. 이에 장정구는 198017세 때 바로 프로무대로 진출했다. 데뷔전은 챔피언의 등용문으로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던 'MBC 신인왕전'이었다. 이 대회에서 6연승을 거두고 자신의 체급에서 우승하면서 대회의 우수선수로 선발된 장정구는 827월까지 18연승(7KO)의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이 시기 장정구는 당시 35112무를 기록하고 있던 베테랑 알폰소 로페즈를 3KO로 잡았고 28(22KO) 10패의 전적을 자랑하던 강권의 전챔피언 아만도 우르수아를 판정으로 누르면서 일라리오 사파타의 WBC 라이트 플라이급 도전기회를 잡았다.

 

알폰소 로페즈영상 

 

사파타는 파나마 선수로 신장이 크고 재빠른 왼손잡이이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복싱에서 빠른 것과 긴 것, 그리고 왼쪽인 것은 정말 피곤하다고 보면 간단한데, 사파타는 그 셋을 다 갖춘 난적이었다. 1982918일 장정구의 첫 타이틀 도전은 15라운드 스플릿디시전(부심 3명이 2:1 판정을 내린 경우, 즉 근소한 우세를 의미)의 판정패가 되고 만다.

 

이것은 장정구의 프로 첫 패전이었고 그는 경기 후 엄청난 감정폭발을 겪었다고 한다. 감정이란 잘 다스리면 좋은 에너지원이 된다. 장정구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이전까지 상대에 대한 연구를 해 본적이 없던 그는 사파타에게 진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경기영상을 돌려보며 상대를 연구, 분석했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대로 장정구의 습관으로 굳어졌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사파타전의 패배 덕에 상대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15차 방어를 이루어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고 밝혔다.

 

1983326,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장정구는 챔피언 사파타를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두들겼고 3라운드 TKO승을 거두며 WBC 라이트플라이급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당시 한국 복싱계는 챔피언이 없었다. 11차례의 세계도전이 연속으로 실패하고 있던 상황에서 장정구의 챔피언 등극은 굉장한 뉴스였다. 그의 고향에는 대형 현수막이 나부꼈고 성대한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일라리오 사파타 2영상(PART 1)

일라리오 사파타 2영상(PART 2)

 

이후 장정구는 88년까지 15명의 도전자를 차례로 돌려세웠다. 그 중에는 62전의 경험을 가진 초베테랑 헤르만 토레스라든지 47(36KO) 33무를 기록하고 있던 이시드로 페레즈 같은 강타자도 있었다. 하지만 장정구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를 떨게 만들었던 것은 언제나 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으로 챔피언 레벨의 복싱이 요구하는 엄격하고 고통스러운 단련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장정구의 15차례 방어전은 시청률 30~50%를 넘나들던 KBS의 킬러컨텐츠였다(장정구는 80년대 중반 스포츠 스타 중 최고의 수입을 올렸다. 장정구가 3억을 벌 때 프로야구의 홈런왕이자 최고연봉자였던 김봉연의 연봉이 1억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을 상대로 싸웠던 5경기의 의미는 전부 각별했다. 장정구는 이나미 마사하루, 도카시키 카즈오, 구라모치 다다시, 오하시 히데유키(2)를 도전자로 맞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수준이 굉장했다. 일본인과의 경기는 이기면 애국이 되지만 지면 매국이라는 공식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선수들의 부담감은 대단했는데, 장정구는 대표적인 애국자였다.

 

4명의 일본인 도전자들은 모두 패했고 게다가 5회의 타이틀매치에서 경기종료의 공 소리를 들은 경우는 845차 방어전 상대였던 구라모치 다다시가 유일했다. 나머지 세 명의 네 차례 방어전에서 일본인 도전자들은 모두 KO로 나가 떨어졌다. 특히 일본이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복서라고 자랑하던 오하시 히데유키를 한국에서 한번 일본에서 한번, 두 차례에 걸쳐 박살냈던 대목에서 당시 대한민국이 느꼈던 통쾌함은 필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장정구는 일본인과의 대전에 대해 "저희 나이 때 사람들만 해도 일본에 대한 그런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일본선수와 하면 그냥 부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오하시 히데유키 2영상(PART 1)

오하시 히데유키 2영상(PART 2)

오하시 히데유키 2영상(PART 3)

 

88627일 오하시 히데유키와의 2차전을 일본 원정으로 치렀고 다운을 주고받는 엄청난 명승부 끝에 상대를 8회에 잠재운 장정구는 돌연 벨트를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굳이 그것을 다시 들추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후 잠시 재기했지만,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개인사정이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정구는 세상과 쉽게 융화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은퇴이후 상당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이에 많은 복싱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장정구의 대모이자 숭민 프로모션의 여제 심영자 회장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탤런트 출신의 미녀로 동아체육관의 김현치 회장, 극동프로모션의 권재우 관장 등과 함께 복싱 중흥기를 리드했던 거물 프로모터였다. 한 때 '죽음의 키스'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졌던 여걸이며 80년대 미용실을 휩쓸었던 장정구 파마도 그녀의 작품이다).

 

장정구는 2000WBC 선정 '20세기 위대한 복서 25' 선정됐고, 2009년에는 동양인으로서는 다섯 번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겁 많던 소년 유명우, 링의 최강자로 우뚝

 

화목한 집안의 막내둥이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던 유명우는 홍수환을 보며 복서의 꿈을 키웠다. 두 주먹만으로 세계와 맞서는 그 남자다운 세계를 향한 동경은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유명우를 복싱도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몰래 복싱을 배우던 아마추어 시절에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프로 데뷔는 19세 때였던 1982328일이었다. 상대는 최병범이라는 선수로 당시 25~26세 가량이라고 한다. 데뷔전에 대해 유명우는 아래와 같은 후일담을 남겼다.

 

"저보다 나이가 좀 많았고요. 저는 그때 열아홉 살, 그분은 20대 중반이었어요. 굉장히 막 우락부락하고 가슴에 털도 났고요. 또 권투선수들이 시합하기 전에는 면도도 안하고 이발도 안하고 덥수룩하게 막, 징크스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어린마음에 안 그래도 링에 긴장되는데 상대를 보는 순간 겁이 나더라고요. 무서웠어요. 아저씨하고 시합하려니까. 그래서 시합하기 전에는 겁을 먹었던, 초조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정은 그랬다 할지라도 유명우는 상대를 4라운드 판정으로 꺾었다. 이후 8312월까지 유명우는 13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모두 판정승이었다. 그의 첫 KO승은 8414번째의 경기였던 리틀 바귀오라는 필리핀 선수를 상대로 터졌다. 다음경기에서 정비원 선수에게 판정승을 거둔 유명우는 그해 12월 필리핀의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상대했고 다시 한 번 KO승을 따냈다. 그리고 17전 째, 인도네시아의 투바구스 자야라는 선수에게도 역시 KO승을 기록했다. 이 시점까지 유명우는 17전을 치르는 동안 한국선수를 상대로는 모두 판정승을 기록했고 외국선수들은 모두 KO로 잡았다.

 

198598일 유명우는 손오공과 대전했다. 손오공은 당시 1919KO승을 거두고 있었는데, 근래의 10승 중 9회의 KO승이 있을 정도로 주먹에 물이 올라있던 선수로 타이틀전을 목전에 두고 있던 강자였다. 유명우 역시 17(3KO) 무패라는 깔끔한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두 선수간의 승자에게 타이틀 도전권이 주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 경기는 유명우 스스로 꼽는 자신의 베스트 트랙 중 하나다. 경기의 내용은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대타격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상대를 7회에 스톱시킨 유명우는 같은 해 128일 조이 올리보가 보유한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경기는 라스트라운드인 15회까지 가는 접전이었으며 유명우가 스플릿 디시전의 판정승을 거두며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로써 정정구에 의해 이미 국내로 들어와 있던 WBC타이틀에 이어 WBA타이틀마저 한국인의 차지가 되었다.

 

손오공영상(PART 1)

손오공영상(PART 2)

손오공영상(PART 3)

 

유명우는 이후 199112월까지 이 타이틀을 보유한 채 17차례의 연속방어를 달성한다. 유명우 본인은 역시 기구의 랭킹 1위에게 도전권이 주어지는 지명방어전이 확실히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1-8차 방어전에서 만난 호세 데 헤수스(1차전 당시 1621), 3-12차 방어전의 마리오 알베르토 데마르코(1차전 당시 2024), 6차 방어전의 로돌포 블랑코(1차전 당시 1651), 13-14차 방어전의 레오 가메즈(1차전 당시 20승 무패) 등이 그들이다. 다들 강한 선수로 유명우에게 고배를 마시고도 다시 랭킹 1위 자리로 치고 올라와 유명우의 앞에 선 선수들이었고 만약 유명우가 없었다면 이들의 레코드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고미야마 카쓰미영상(PART 1)

고미야마 카쓰미영상(PART 2)

고미야마 카쓰미영상(PART 3)

 

특히 베네주엘라의 레오 가메즈의 경우 당시 14KO승을 포함한 20연승을 달리며 WBA 미니멈급을 석권하고 2체급을 노리며 올라온 선수였지만 유명우에게 저지당했다. 가메즈는 그렇지만 유명우가 은퇴하면서 공석이 된 WBA 라이트플라이급 벨트를 냉큼 집어갈 수 있었던 실력파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WBA 플라이급, WBA 슈퍼플라이급 벨트까지 수집하며 4체급을 달성한다. 그는 베네주엘라가 낳은 최강의 복서 중 한명인 대 선수였다. 이런 선수조차 유명우를 상대로는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1991년 당시 유명우는 36연승(14KO)을 달리고 있었다. 유명우의 연승기록은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 의해 깨졌다. 그해 1217일 일본으로 원정방어전을 떠난 유명우는 당시 18(9KO) 21무를 기록하던 도전자에게 스플릿 디시전에 의한 판정패를 당하며 벨트를 풀게 된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원정방어의 생소함과 나이에 의한 체력문제, 그리고 약간의 방심과 현지의 텃세가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11개월 후였던 921118일 유명우는 다시 한 번 현해탄을 건너는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이오카와의 복수전을 위해서였다. 이오카는 유명우의 타이틀을 챙겨간 이래 두 차례의 방어전을 성공시킨 상태였는데 이에 대해 유명우는 "이오카, 지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오카 히로키 2영상

 

혈전 끝에 유명우는 메이저리티 디시전(심판 세명 중 두 명이 한선수의 승리를 선언하고 나머지 한명은 무승부를 준 경우)으로 보복을 달성하고 자신의 벨트를 되찾아 돌아왔다. 유명우는 유이치 호소노라는 일본선수를 국내로 불러들여 18번째의 타이틀 방어전을 성공시킨 후 스스로 벨트를 풀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은퇴 후 많은 권투선수들이 사기에 당하는 등 세상의 쓴맛을 본 것과는 달리 유명우는 여러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그는 자신을 복싱의 길로 이끌었던 홍수환 전챔피언과 함께 KBC(한국권투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웃음이 많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다.

 

센스-신체능력 타고난 '복싱천재' 장정구

 

장정구는 감각적이고 변칙적인 복싱을 구사했다. 어떤 유형으로 묶기에는 너무나 자유롭고 변화무쌍했던 것이 바로 짱구 스타일이다. 그는 상대의 특성, 경기 중의 상황에 맞춰 전략을 즉석에서 빚어 사용한 복싱천재였다.

 

해외의 명복서 중 장정구와 비슷한 유형으로는 로베르토 듀란이나 아론 프라이어를 들 수 있다. 듀란과 장정구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다양한 앵글과 의외의 레인지, 그리고 악마적인 타이밍에서 불의의 강타를 상대의 급소에 찔러 넣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론 프라이어는 프리스타일러로 단발과 콤비네이션의 구분이 애매하고 팔을 커버링이나 블로킹 가드 등의 방어동작에 사용하기보다는 거의 공격을 위해 전용하였으며 방어는 거의 상체움직임과 헤드웍으로 처리한 점이 장정구와 비슷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명예의 전당 헌액행사에서 링지의 관계자가 장정구를 '호크'라고 부르고 원래 그 별명의 주인인 아론 프라이어가 이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명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프라이어가 보기에도 장정구는 자신과 비슷한 타입이었던 것이다. 이에 장정구는 프라이어에게 "너는 빅호크, 나는 스몰 호크"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장정구는 상대했던 선수 중에 누가 가장 강한 펀치를 구사했느냐의 질문에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상대의 클린히트를 좀처럼 맞아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장정구는 상대의 펀치가 떨어지기 직전에 헤드웍을 이용해 조준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굉장한 반사신경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급소에 정타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분들은 장정구를 놓고 '테크닉이 부족하다, 방어가 약하다'라는 비평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다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장정구의 테크닉은 정석적이지 않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며 방어능력 역시 보통의 선수들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전혀 부족함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피드와 동체시력, 반사신경 등의 신체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후학들의 입장에서 참고가 잘 안 되는 경향은 있다(그래도 차후 최요삼이 짱구 스타일에 상당히 근접한 복싱을 선보였다).

 

그리고 장정구는 굉장한 승부근성의 소유자로 가끔씩 마도의 기술도 즐겨 사용했다. 도발적인 몸짓으로 상대의 신경을 긁는다든지, 도발기와 공격을 연계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대의 발등을 밟는 기술과 전략적인 버팅 등도 가끔씩 나오는 그의 절기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장정구는 링 밖에서는 신사여야 하지만 링 위에서는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친 바 있다.

 

장정구의 복싱스타일에 대한 비평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거둔 실적 때문이다. 말이 많아도 테크닉이 부족하고 방어가 약한 선수가 무려 15차 방어를 달성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약점은 사실 성격적인 부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격정적, 야수적 성향의 그는 페이스 조절을 가끔 잊어버리는 탓에 경기 후반부에 체력문제를 때때로 노출했던 것 정도가 유일한 약점으로 지목될 수 있다.

 

 

유명우, 정석적인 교과서 복싱의 대명사

 

유명우의 경우 그야말로 권투 교과서 같은 선수였다. 그의 복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복싱의 원론이라 할 수 있는 공수전환이다. '수비 후 공격, 공격 후 수비'라는 극도로 상식적인 패턴의 구사에서 유명우는 거의 완벽한 모습을 과시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해 보면 굉장히 어렵다. 끝없는 반복훈련과 경기 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런 방식은 그냥 평범한 복싱이 되고 만다.

 

유명우의 공격은 정석적인 거리와 적절한 앵글에서 확실한 타이밍에 구사되는 인사이드 펀칭(상대의 커버링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펀치, 주로 잽과 스트레이트, 어퍼컷 등을 의미, 커버링의 바깥쪽에서 측면을 노리는 훅이나 오버핸드 등 아웃사이드 펀칭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원투 스트레이트와 레프트 훅, 혹은 레프트 바디로 이어지는 원투쓰리와 레프트 더블의 달인이었으며 상대가 원을 치면 원투로, 원투를 치면 원투쓰리로, 원투쓰리를 치면 원투쓰리포로 갚아주는 볼륨펀칭을 구사해 도전자들을 압도했다. 그의 하이템포 연속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일본인 해설자가 '소나기 펀치'라는 별칭을 붙여준 일이 있을 정도로 그의 콤비네이션은 훌륭했다. 이러한 전략은 우수한 체력적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유명우 본인은 슈거레이 레너드를 본받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그의 캐리어 후반부에는 굉장한 수준의 아웃복싱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절정기의 유명우는 전형적인 멕시칸 스타일의 복서-펀쳐였다. 차베즈나 호야 같이 막을 것은 막고 피할 것은 피해가면서 막대한 양의 펀치를 풀라운드 내내 마구 쏟아내 상대를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제왕의 복싱을 능숙하게 구사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다운을 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강인했던 턱도 멕시칸 스타일과 유사한 부분이다.

 

파워가 다소 약했다는 비평은 사실 피상적인 결과만 놓고 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섬세한 공수전환을 위해서라면 파워는 양보해야 한다. 풀스윙으로 힘 있게 때리고 나서 재빠르게 수비로의 전환을 하겠다고 하면 욕심이 과한 것이다. 유명우는 언제나 다음동작, 수비테세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펀치를 내기 때문에 한방 한방의 위력은 강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유명우의 펀칭철학에 파워는 중요도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유명우에게 약점이 있었느냐. 이것은 참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슬로우 스타터여서 경기 초반에는 가끔씩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다. 보통 공수전환을 위주로 싸우는 선수들은 상대의 리듬과 타이밍, 습성 등이 어느 정도 입력되고 나서 정상적인 기량을 발휘한다.

 

 

'영웅vs전설' 장유논쟁의 정답 있나?

 


사실 현역에서 은퇴한지 오래 된 선수들, 더군다나 한국 복싱의 전설이 된 장정구와 유명우의 대결을 가상으로 예상해 누구 하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또한 이미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만큼 이제 와서 누가 강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필자 둘은 무승부의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이 정답이 될 순 없다.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두 선수의 스타일과 이제 나열할 두 선수의 특징에 따른 경기예상을 떠올려 독자들 스스로 예측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무승부라는 결론이 단순히 부담스러워서 내린 것은 절대 아니다. 양선수의 전력이 백중세에 있어 도저히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두 글쓴이의 생각이 일치했다.

 

전강후약의 프리스타일러 장정구와 슬로스타터의 정통파 유명우가 대전한다면 전반은 장정구, 후반은 유명우로 볼 수 있다. 15라운드면 유명우가 유리할것이고 12라운드라면 장정구가 유리하다. 넓은 링이라면 유명우 좁은 링이면 장정구 쪽일 것이다.

 

유명우는 몸이 풀리기 전까지 장정구의 공세에 치명적인 충격을 받거나 부상을 입지 않는 운영이 중요할 것 같다. 예리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경기초반의 장정구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다. 반면에 장정구는 초반에 체력관리에 신중해야 한다. 유명우의 후반부는 상대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지옥과 같은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몸이 풀리고 상대의 리듬과 타이밍에 익숙해지면 유명우는 전반부와 완전히 다른 선수로 변신한다.

 

1라운드부터 6라운드까지는 장정구가 우세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며 6라운드 이후부터는 유명우의 영역일 것이다. 경기 내용은 말도 못하게 치열하고 수준 높을 것이며 경기장을 찾은 관객들은 아마 경기 내내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게 되며 흥분할 것이다.

 

경기가 KO로 끝날 가능성은 극단적으로 낮으며 판정을 하는 부심들이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내용으로 전개될 여지가 다분하다. 이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경기 당일 양선수의 컨디션이 될 것이다. 너무나 팽팽한 실력의 양선수이기 때문에 승부는 실력 외적인 운에 의해 결정 날 공산이 크다.

 

경기에서는 114:114로 서로 6라운드씩을 나누어 가지며 무승부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보통 무승부에 배팅을 하면 20~30배 가량의 배당을 돌려주는데, 이 경기에서는 그것이 터질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을까.

 

장정구는 양자간의 가상대전에 대해 "해 봐야 아는 것"이라 답했고 유명우는 "내가 무조건 진다"고 말했다. 장정구는 이에 대해 "유명우가 선배에 대한 예우로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붙는다면 절대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편집자주) 1980년대 한국복싱은 아시아의 맹주였고 장정구와 유명우는 한국을 넘어 세계복싱의 영웅으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한국복싱은 메이저타이틀 하나 보유하지 못한 국가로 전락한 모습이었고 아울러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구세대식 프로모션, 부정부패, 편파판정 등으로 인기가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최근의 모습에서는 다시 희망이 느껴진다. 행정부의 개편으로 다시 팬들에게 신뢰를 쌓아가고 있으며 선수들의 활약도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국내 선수가 자국 땅에서 응원을 받으며 메이저 타이틀매치에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고준일 기자 junil.k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