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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변호인

by Wood-Stock 2013. 12. 30.

[사설] 한 그릇 국밥 같은 영화 ‘변호인’


영화 <변호인>의 관객수가 25일로 250만명을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1000만명 돌파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 영화 자체는 그리 빼어나지도 딱히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게 평론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인 것 같다. 웃음 한 숟갈 눈물 한 컵 식의, 휴먼드라마 조리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데도 보는 이의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시장통 국밥 같은,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사람들 얘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샘을 가장 부풀어오르게 하는 걸로는, 밥값을 떼먹고 도망갔던 주인공 변호사가 몇년 만에 국밥집을 다시 찾아온 장면이 꼽힌다. “자고로 묵은 빚은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다. 그기 뭐라고 여태 얹힜노”라며 안아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은 사람 사는 도리와 정을 말해주고 있다. 속물 변호사가 시국 변호사로 바뀌는 것도 그런 평범한 상식이었다. 거창한 이념도 명쾌한 논리도 아니었다.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 이런 게 어딨어요?” 짙은 부산 사투리에 담긴 이 두 마디면 충분했다.

법정에서 권력자들의 오만함을 질타하는 용기조차도 그런 상식과 원칙에서 나온다. “국민이 국가다”라는 주인공의 절규조차 지극히 원론적인 헌법 제1조의 내용일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달달 외운 헌법 조문이지만,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되살아난다.

이 영화는 30년도 더 된 낡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건 그만큼 현실에서 상식과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한다. 관객들은 영화 곳곳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이나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그리고 민주노총 난입 등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고 노무현 대통령의 경험을 다룬 게 아니다. 생전의 그가 통과했고 분노했던 순간들을 다시 보여주며 우리에게 묻고 있는 거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영화의 제목은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인이다. 변호사는 직업이지만 변호인은 사람이다. 비록 변호사 자격증은 없어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변호인이 되어줄 수 있다. 그 변론은 한 자루의 촛불일 수도 있고, 한 장의 대자보일 수도 있다. 아니 그저 담벼락을 쳐다보고 내뱉는 한마디 욕일 수도 있다. 그런 힘이 모이면 혹독한 한겨울을 나는 것도 그리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처럼 뱃속도 가슴속도 덥혀줄 것이다.


2013.12.25 / 한겨레





죄수복 입고 법정에 선 1987년 노무현은…

김형태 변호사가 본 영화 ‘변호인’

‘속물’이 투사로 변신할 때까지만 다룬 편견 없는 영화
실물보다 더 변호사 같은 송강호, 편안함과 희망 선사

모든 합성된 것은 덧없다. 이 세상에 어디 합성되지 않고 저 스스로에게서 유래되어 저 스스로 영원한 게 있을까. 잿빛 겨울 하늘을 천천히 떠가는 저 시커먼 구름의 형상은 코끼리 같기도 한데, 조금 있으니 거인으로 바뀌었다가 어느덧 예쁜 여자 얼굴이 된다. 그러다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면 하얀 눈이 되어 온 천지간에 흩날릴 게다.

영화 <변호인> 마지막 자막이 다 올라가고 팝콘, 커피 냄새 가득한 영화관을 나와 저녁 하늘을 본다. 상고 졸업한 막노동꾼이 고시생이 되고, 판사가 되고, 돈 벌려고 고작 부동산 등기나 좇아다니던 속물 변호사에서, 고문으로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현실에 맞서 투사로 나서기까지 영화는 노무현의 ‘변호사 시절’을 그리고 있다. 마치 저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구름 같은 그의 삶, 아니 바로 우리네 삶을.

우리 모두는 노 변호사의 <변호인> 이후의 삶도 다 알고 있다.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향해 명패 던지고, 지역감정에 맞서다가 계속 선거에서 떨어지고. 곡절 끝에 대통령이 되고 그리고 집 뒷산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까지.

그런데 <변호인>은 딱 1987년에서 멈추기에 이후 그의 삶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영화를 갖고 그리 흥분할 일은 아니다. ‘1987년까지의 노무현’을 편견 없이 그저 영화로 보면 될 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랜만에 나에게 희망과 편안함을 준다. 마치 <춘향전>을 보듯이. ‘부림사건’ 재판 당시 학생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걸 멋지게 폭로하는 노 변호사는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치며 육모 방망이를 들고 나쁜 사또 변학도에게 저승사자처럼 달려드는 이 도령 같다. 비록 그 학생들이 징역 몇 년씩을 선고받고, 노동자 돕던 노 변호사는 구속까지 되지만 그래도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현실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가 객관적으로는 분명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으니까. 영화 내내 순간 순간 분통 터졌지만, 영화가 참 순진했다.

영화 속 재판 장면은 요즘도 되풀이된다. 얼마 전 미군기지 이전비용 문제를 제기해온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보안법 재판 때도 그랬다. 이적 감정을 한 검사 쪽 증인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남북이 합의한 통일 3원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합의한 건데도 잘못된 거냐고 내가 묻자 그래도 잘못된 거란다. 그럼 ‘자주’를 하지 말자는 거냐고 묻자 똑같은 자주를 이야기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이적성이 달라진단다. 무얼 근거로 구별해 내느냐고 하자 “그냥 딱 보면” 안단다. 그냥 딱 보면 빨갱이인지 아닌지 안다고?

영화 <변호인> 시절에는 극히 일부를 빼고는 판사고 검사고 기자고 형사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은 알았다. 지금은?

정의는 사라지고 편가르기만 남았다. 공자님이 오셔서 공자님 말씀을 하셔도 ‘너 누구편인데’ 하고 추달을 당하실 판이다.

영화 속 송강호는 현실의 노 변호사보다는 덜 촌스럽고, 노 변호사보다 오히려 변호사스럽다. 오래전 그와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노 변호사의 요트 이야기며, ‘여자’ 이야기가 보수 잡지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리던 무렵이었다. “노 선배님, ‘라이방’(선글라스) 끼고 장충동 모 호텔에서 여자를 만나신다면서요?” “김 변호사, 나는 생긴 게 워낙 촌스럽고 표나게 생겨서 라이방 껴도 다 알아봐.”

영화 <변호인> 뒤에 이어진, 저 겨울 하늘을 떠가는 덧없는 구름처럼 스산한 삶의 이야기들. 노 변호사를 ‘속물’에서 ‘인권’으로 이끌어내고 감싸준 영화 속 자애로운 선배 변호사 실제 모델은 부산 인권변호사의 대부라는 김광일 변호사다.

1990년 민주당 김영삼이 민정당 노태우, 공화당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한 뒤 김광일은 김영삼 정부에 참여하고, 노무현은 ‘야합’이라며 이를 거부해 두 사람은 길이 갈렸다. 2002년 대선 때 김광일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되는 10가지 이유를 들었다. 노 대통령 탄핵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부림 3차 사건 재판 담당 판사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피고인들 편에서 재판을 하고 좌천되었다가 옷을 벗고 한동안 인권 변론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성조기 그린 군인모자 쓰고 다니며 어버이연합, 박정희 대통령 바로 알리기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노 변호사도 대통령이 된 뒤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라크 파병, 노동자 파업 진압 등 영화 속 ‘진보’ 노무현과는 다른 모습을 일부 보였지만, 그래도 진보 정치인의 상징으로 사람들 머리 속에 영원히 남을 게다.


모든 합성된 것은 덧없다. 하지만 덧없다는 건 그저 모든 게 변해간다는 뜻일 뿐이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 세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내 설교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다. ‘용기를 내시라’고. 주여,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우리에게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죄수복 입고 법정에 선 1987년의 노무현 <변호인>은 2013년의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2013.12.24 / 한겨레



‘변호인’의 실제 인물을 찾아

‘변호인’ 실제 인물 “노무현, 정말로 판사와 싸웠어요”

“며칠 동안 연고 발라 고문의 흔적 싹 지웠어요…
아무도 사과 안했지만 고문 경찰들은 잘 살았어요”

▶영화 <변호인>의 개봉으로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속 ‘국밥집 아들’의 실제 주인공인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송병곤씨를 만나봤습니다. 두 분 모두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실제 사건과 영화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는데, 고문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기사에 영화 내용이 일부 담겨 있으니 조심해서 읽으세요.


고호석(오른쪽)씨와 송병곤씨가 25일 오전 부산시 초림동의 한 철길 인근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이들은 1981년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노무현 변호사가 이들의 변호를 맡았다. 당시 대공분실은 초림동 철길 인근에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고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고호석(57)·송병곤(55)씨가 25일 오전 11시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인근 한 철길 옆에 섰다. 널찍한 철길 한편에 2층짜리 부산 철도차량사업소 건물이 서 있었다. 고씨는 건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쯤에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둘은 조금 더 철길을 따라 걸었다. 꼭 찾고자 하는 건물이 있었다. “철길 바로 옆에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어놓고 출판사 건물인 척 있었어요. 허름한 시멘트를 바른 2층 건물이었어요.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건물 앞에는 조그만 마당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고씨와 송씨는 1981년 여름. 이곳 대공분실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했다.

30여분을 주변에서 헤매었지만 과거 대공분실은 찾지 못했다. 주변의 2층짜리 건물은 철도 관련 시설이 유일했다. 7층 규모 모텔 건물과 5층 규모 복합상가 건물이 철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아마 다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 것 같아요. 하긴 30년도 전의 일이니까….” 얼굴에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고씨가 말했다. 머리칼이 희끗한 송씨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은 어두컴컴한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내뱉던 피 묻은 신음 소리와 변호사 노무현의 분노를 말한다. “우리들 이야기가 30년 만에 세상에 이렇게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고씨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요즘 기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국밥집 아들’은 두 사람 이야기 합친 것

배가 출출해질 즈음 인근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30년이 지나도 살이 떨릴 만한 고통이지만 이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저런 증언을 그동안 꾸준히 해온 덕에 그리 힘들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1981년 봄. 부산에는 79년 부마항쟁이 남긴 민주화 열기의 잔불이 타고 있었다. 부마항쟁은 79년 10월 유신 철폐를 외치며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시민이 벌인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81년 4월과 6월 부산대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당국은 배후를 캐내기 위해 분주했다. 때마침 학림사건 수사 도중 이태복(김대중 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씨가 부산지역 청년 몇명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림사건이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서울 지역 학생운동단체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2012년 6월 대법원 재심에서 관련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그해 81년 7월부터 부산지역 운동권 색출에 나섰다. 운동조직이라고 해봐야 대학내 동아리와 사회과학 서적 구입을 위한 협동조합(양서협동조합) 정도가 전부였지만 검경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인 것처럼 포장했다. 딱히 조직 이름을 붙이지도 못해 서울의 학림사건에 빗대어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이라 불렀다. 22명의 학생과 교사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이들의 유죄를 설명하는 82년 6월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국가 전복을 꾀한 일’이라고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모임을 꾸리거나 송년회 자리 등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한 것 등이 전부였다.

‘변호인’의 모델인 부림사건 
국밥집 아들도 군의관의 폭로도 실제 사건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문받았다 주장하는 피해자와 판검사-변호인 설전은 실화

“우리 이야기가 30년 만에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고문 경찰들은 잘살았어요” 
고호석·송병곤씨는 재심 중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거니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민중 혁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당시 국민들이 흔하게 머릿속에 품던 생각들이었어요. 우리가 어떤 단체를 조직해서 (혁명을) 준비하던 게 아니었어요. 재판 받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호석씨는 아직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송병곤씨는 81년 당시 부산대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입대 전까지 현장 경험을 쌓고 싶어 부산의 한 밸브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그때는 이런 선택을 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경찰에 끌려갔다.

“81년 7월6일 저녁으로 기억해요. 부산대 동기 호철이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저를 잡았어요.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어딘가로 끌고 갔어요. 대공분실이었어요. 취조실 의자에 앉히자마자 40대 남자가 ‘너 평양 갔다 왔지?’라고 묻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피식 웃어버렸어요. 그러자 경찰은 제 옷을 다 벗기고 미리 준비해둔 군복을 입혔어요. 구타가 시작됐어요.”

부산대를 졸업한 고호석씨는 1980년부터 부산 대동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다. 그는 81년 8월2일 경찰에 끌려갔다.

“집으로 가고 있는데 시커먼 사람들이 나타나서 ‘고호석 선생이죠?’ 한번 묻더니 곧바로 저를 대공분실로 끌고 갔어요. 데려간 날부터 구둣발로 밟고 때리고 정신없이 맞았어요.”

<변호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여러 허구적 내용이 섞여 있다. 영화 속 부림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국밥집 아들(진우)은 고호석씨와 송병곤씨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다. 야학 교사를 하다 붙잡혀 간 것은 고호석씨의 이야기이고, 아들이 실종되자 수십일 동안 부산 곳곳을 찾으러 다닌 어머니(순애) 모습은 송병곤씨의 사연을 각색한 것이다.

아직 송병곤씨 어머니는 당신의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송씨가 전했다. “제가 한달 넘게 안 보이니까 어머니는 제가 어디 끌려가 죽었는지 알고 제 주검을 찾으러 부산 시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고 해요.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처럼 주검이 바다에서 떠오르진 않을까 싶어 영도다리 밑도 가보시고….”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고 허위자백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받았던 것만큼은 허구가 아니라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전했다.

“산도둑같이 생긴 어떤 형사가 ‘너 김일성에게 지령 받았지?’, ‘김대중이 너 배후지?’라고 물었어요. 제가 아니라고 부인하면 몽둥이로 이곳저곳 때립니다. 하도 맞아서 구토가 나오면 때리는 것을 멈췄어요.”(고호석)

“고문 형사들 입에선 자주 술냄새가 났어요. 맨정신에 때리기엔 힘들었나 봐요. ‘통닭구이 고문’을 시켜도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자 저를 태종대 앞바다에 데려가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어요.”(송병곤)

노 변호사에게 ‘전환시대의 논리’ 권한 고호석씨

대공분실 곳곳에서는 잡혀 온 동료들의 신음이 들렸다. 철길 옆에 위치한 대공분실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기차 소리에 파묻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의 남영동 분실과 부산의 초량동 분실은 공교롭게도 모두 기찻길 옆에 위치했다.

국밥집 아들이 허구인 만큼 노무현 변호사와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만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속 장면도 허구다. 피해자 어머니들은 노 변호사를 찾아 사건 수임을 부탁한 적이 없다.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의 대부 격인 김광일 변호사가 검찰의 압력으로 사건을 맡지 못하게 되자, 자신과 인맥이 있던 동료 변호사들에게 피해자들의 변호를 분담했다. 노무현 변호사에게는 고호석·송병곤 등 5명의 피해자가 배당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운명이다>를 보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돈만 밝히는 변호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선배인 김광일 변호사가 부탁하니까 부림사건 변호를 맡은 것에 가까웠다. 노무현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김광일 변호사 밑에서 3개월간 시보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다.

고호석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영화 속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국밥집 아들을 구치소 면회실에서 만나 온몸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한다. 그러나 실제 노무현 변호사가 발견한 고문의 흔적은 고호석씨의 빠진 발톱 흔적이 전부였다.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에 경찰들이 고문의 흔적을 싹 지웠어요. 몸에 멍이 든 곳은 모두 소염제 연고를 며칠씩 발랐어요. 노 변호사는 (고문 장소인 대공분실이 아닌) 구치소로 면회를 온 것이라 몸에 멍이 든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제가 고문으로 인해 빠진 발톱 흔적을 보여줬어요. 고문이 실제 있었다고 확신한 것은 그때예요.”

법정에서 고문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그러나 원심 판사(조창호)는 관심이 없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검찰 공소장 내용만 거의 그대로 반복돼 기술되어 있다. 판결문만 보면 재판정에서 고문 폭로가 있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고호석씨는 조창호 판사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고문으로 ‘발톱이 빠져 있다’고 말해도 ‘한번 살펴보자’는 말도 안 했어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흥분해 판사와 말싸움을 벌이던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항소심 결심 공판 때 노 변호사는 감정적으로 격앙됐어요. 판사에게 제지도 많이 당했고요. 가족들이 ‘저러다 3년형 선고 받을 것을 5년 받는 것 아니냐’ 걱정할 정도였어요.”(고호석) “노 변호사가 ‘미국과 북한이 축구경기를 할 때 북한을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고 따지자 검사가 ‘용공 발언을 삼가라’ 반박하면 판사는 검사 편을 들어줬던 것도 기억이 나요.”(송병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이룬 군의관의 폭로와 변호사들이 판사와 형량을 협상한 것 등은 모두 허구다. 원심 재판부는 피고인들 20명에게 최고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이 특별사면 형태로 이들을 석방하기까지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호석씨는 88년 9월이 되어서야 복직 소송에서 이겨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재 부산의 거성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다. 송병곤씨는 법무법인 ‘부산’에서 사무장으로 일한다.

이들은 ‘부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고문 가해자들이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가해 경찰 이아무개씨 등 2명을 부산지방검찰청에 2011년 고소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각하했다.

송병곤씨는 마음속 상처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고문 경찰들은 저희들 사건 이후 승진해 잘살았어요. 수사를 지휘한 당시 부산지검 최병국 검사는 후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누구 한명 저희를 찾아와 사과를 하지 않아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최병국 당시 검사 “고문 주장은 자기 행동 미화”

<한겨레>는 24일 최병국 전 의원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 부림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 관련자들에게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전 의원은 “그들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기들 행동을 미화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전 의원은 “수사 당시 부산 대공분실로 찾아가서 고문당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다. 피의자들이 ‘고문당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고문 경찰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고문당했다고 해서 허위자백을 할 수는 없다. 또 고문을 하면 뭔가 흔적이 남게 돼 있는데 그런 흔적도 없었다”고 답했다.

최 전 의원이 전임 검사로부터 인계를 받아 사건을 맡은 것은 81년 8월 말에서 9월 초 무렵이다. 대공분실에서 웬만한 고문은 마무리된 시점이다. 최 전 의원은 고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문은 없었다’는 경찰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 전 의원의 해명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호석씨는 최 전 의원의 대답을 전해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고문한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왔던 것을 기억해요. 그때 제 왼쪽 눈에 멍이 들어 있었어요. 취조실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 야전 매트리스만 있었어요. 이곳이 고문 현장이라는 것은 검사 정도면 쉽게 눈치챌 수밖에 없어요.”

부산지법은 올해 3월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을 내렸다. 2009년 부림사건 피해자 일부가 계엄포고령과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을 거쳐 일부 무죄를 받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한 재심은 이뤄지지 않았다. 송병곤씨는 “부림사건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관객의 영화 ‘변호인’

영화 <변호인>의 영화미학적인 장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분명 쇼트나 편집, 영화언어의 특질에서는 차별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개봉 열흘 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송강호의 연기도 성공 요인 중 하나이며, 시대적 특색을 재현한 미술팀의 노고도 빛을 발한 것 같다. 하지만 단기간 이토록 극적인 공감을 끌어낸 것을 물리적 요인으로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영화의 주요 소재는 1981년 부산에서 일어났던 ‘부림사건’이다. 부림사건은 부산 지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면서, 당시 세무변호사였던 노무현을 인권변호사로 거듭나게 만든 계기가 된 실제의 사건이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송우석 변호사는 사상범에게는 물증이 없으니 자백에 포커스를 맞춘다는 상대편 증인의 발언에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증거라고는 고문해서 받아낸 자술서밖에 없는데, 국보법이 헌법 위에 있고 형사소송법의 대원칙도 무시합니까?” 송 변호사의 대사만 떼어놓으면, 이 문장은 2013년 겨울의 광화문 광장에 붙더라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기시감은 하나의 문장에서라기보다 영화 전체의 뉘앙스에서 온다.

<변호인>의 최대 장점은 관객을 ‘상상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상상적 인간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화학자 에드가르 모랭이다. 그에 따르면 스크린을 통해 인지된 사실들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이미지’의 형태로 바뀐다. 이후 기억을 통해 이미지들은 다시 ‘영상 이미지’로 재생되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본질이다. 이 때문에 회화와 달리 영화는 ‘살아 있는 영상’을 목표로 한다. 이와 같은 상상적 인간 개념은 영화에서 관객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현대에 이르러 정신분석학의 발전과 더불어 관객의 정의는 세밀하게 재편되었지만, 넓게 보아 모랭의 원칙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변호인>은 주인공을 위주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따라서 영화를 본 관객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영화가 만족스러웠습니까?”보다는 “이 영화에 공감합니까?”가 더 적합할 것 같다. 아마도 후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관객이라면, 만족도에 대한 전자의 질문 역시 긍정적으로 답할 확률이 높다.

흔히 심리학은 “범죄자가 자신을 ‘심판자’라고 여기기보다 ‘제사장’이라고 여긴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할리우드 범죄 스릴러 속의 악역을 설명할 때 적합하다. <변호인>에서 곽도원이 연기하는 차 경감 캐릭터 또한 심판자보다는 제사장에 더 가깝다.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을 등에 업은 그의 행동에는 일말의 회의조차 비치지 않는다. “공안형사만 14년째라, 눈빛만 봐도 국보법 사건인지 아닌지 안다”는 태도는 종교적 제사장과 다를 바 없다.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비극의 핵심이 ‘대칭 요소들의 대립’에 있다고 설명한다. 비극의 위기는 ‘붕괴 중인 질서’가 아니라 ‘생성 중인 질서’의 관점에서 온다고 말이다. 차 경감은 제사장이 되어 붕괴되는 과거를 지키려는 인물이다. 한편, 영화 속 송 변호사는 생성되는 질서를 만들려는 인물의 상징이다. 생성 중인 질서의 형성이 곤란하다고 느끼는 관객들은 객석에서 영화에 공감하며, 영화의 요소가 되어 함께 격분한다. 한마디로 영화 <변호인>은 영화를 본 직후보다 생각할수록 더 좋은 작품이다. 관객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2013.12.29 / 한겨레)


변호인



<변호인> 흥행, 노무현 때문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이 공존한 시대를 돌아보다

영화 <변호인>의 기세가 무섭다. <광해>와 <7번방의 선물>보다 하루 빨리 2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개봉 10일 만에 400만 관객을 불러모으며 천만관객 흥행대열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여기에는 영화 완성도 외의 다른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개봉 전부터 포털 사이트의 '별점 테러'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고, 개봉 이후에도 '대통령 노무현의 변호사 시절' 일화가 영화의 소재라는 것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변호인>이 흥행가도를 달리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담긴 굵직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변호사 '송우석'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의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이 공존했던 시대


경제성장을 통해서 다양한 가능성이 꿈틀대던 80년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군부독재 정부였다. 바야흐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했던 시기였다. 독재정권의 공안정국 아래에서 다들 '경제발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달려야 했고, 이루어진 모든 것이 그의 업적인양 대통령을 찬양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였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도 이러한 대중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판사를 그만둔 그는 부산으로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불편한 시국에 대한 인식은 접어둔 채로, '부동산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며 재산을 늘리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그는 '세금 전문 변호사'로 다시 한 번 변화를 시도하고, 당대 10위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도 받게 된다.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이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것은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송 변호사는 자주 들르던 국밥가게 아들이 '간첩 누명'을 쓰며 조작된 사건에 휘말린 사실을 알게 되고, 청년의 어머니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기를 맞는 것은 이 지점이다. 돈과 출세를 위해 돌진하던 그는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청년의 변호인으로 나서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던 관점이 달라지며 국가의 폭압에 희생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편에 서고, 그 결과 탄탄하게 성공의 길로 들어서던 그의 인생은 격랑에 휩싸인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영화의 절정은 부림사건 재판 장면이다. 고문과 강요로 받아낸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에서 변호사 송우석은 검사와 판사의 '짜고치는' 재판 진행에 날카롭에 이의를 제기한다. '만들어진' 간첩이 되어 버린 청년들의 무죄를 입증하려 애쓰고, 거대한 폭력이 되어버린 공권력의 남용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안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정권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안보의식은 굳이 인위적으로 자극된다. 그래야만 하기에, 독재 정권은 대를 이어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른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던 헌법은 유린되고, 국민들의 안전과 진실도 덩달아 일그러진다. 영화 속 송우석 변호사가 분노하는,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다. 몇 개의 숫자로 환산될 경제발전, 권위주의로 무장한 정부의 탄압에 비참하게 짓밟히는 민주주의. 권력의 압력에 숨죽이는 언론, 피투성이가 된 죄없는 청년들을 아무도 변호하지 않으려는 현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영화는 극적인 내용 전개로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백골단에 맞선 시위대의 선봉에 서는 송우석 변호사의 모습은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모두가 부당한 권력이 두려워 고개를 떨구던 시대에서 당당히 일어서 탄압받는 약자를 보호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물결의 시작이었음을 내포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2013년에도 현실감이 살아있는 이 영화


SNS에서는 연일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사람들의 감상평이 쏟아진다. 공통된 내용은 "영화 속의 현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는 것.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면서도 "내 덕분에 당신들이 발 뻗고 잔다"며 혀를 끌끌차던 사람들은 현재에 와서 당시의 간첩 사건들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쉽게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치부되고, 죄없는 사람들마저 붉은색으로 칠해진다. 공중파 언론의 대다수는 침묵하거나 이를 돕는다. 영화가 현실감있게 느껴지는 이유라면 배우의 무게감 있는 연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겠지만, 80년대를 연상시키는 오늘날의 현실도 한 몫 거들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영화 <변호인>의 짜임새는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 투박하게 보이기도 하고, 악역의 인물 설정이 다소 과장된 느낌도 있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공안정국의 주범이었던 인물들이 고문을 하면서도 일상적인 걱정을 늘어놓을 정도로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사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지나치게 신파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캐스팅과 더불어 배우 송강호의 연기력이 담백하게 캐릭터를 소화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했던 '포털 별점테러'를 비롯해서 이 영화를 지나치게 비난하는 사람, 반대로 심하게 자극받아 서거한 정치인을 회상하는 도구로 쓰려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한가지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인물의 위대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라는 점이다. <변호인>이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일대기가 아니라 특정 시기의 사건을 줄거리로 설정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영화 <변호인>의 흥행열풍은 80년대에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민주주의 가치'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분위기의 반증일 것이다. 깊어지는 갈증과도 같은 열망이 단지 영화로 푸는 '대리만족'과 지나간 인물에 대한 '그리움'에 모두 소진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독재세력의 자기정당화와 불통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현실이 너무나 뼈아프기 때문이다.


2013.12.30 / 오마이뉴스




  영화 ‘변호인’에 등장한 불온서적 ‘역사란 무엇인가’

오랜 고전이자 검증된 명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영화 ‘변호인’으로 인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영화에서 이 책은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된다. 

이 책에 대해 변호사 송우석은 영국 외교부를 통해 그들의 공식입장을 전달받는다. 영국 외교부는 ‘E. H. 카를 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영국이 자랑스러워하는 학자로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개인과 사회는 양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 그래서 개인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사실, 그 개개인의 행렬이 모여 역사의 과정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카의 삶은 부조리의 광풍이 몰아친 20세기 초를 관통하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현상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사회의 산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건을 해석하는 역사가의 관점은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편협한 사고와 허위에 경도되지 않기 위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카는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이 책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상황을 극복하는 힘을 갖도록 한다. 그런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1981년 부림 사건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나라를 전복하기 위한 빨갱이들의 사상서로 조작하였다. 

송우석이 최후 변론에서 “국가란 무엇입니까?”를 외치는 장면은 혼란의 소용돌이를 살아 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역사 해석의 관점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카가 책에서 여러 차례 예로 들었듯이, 역사란 과거를 규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역사란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각이 현재의 제반 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해 빛을 받을 때에만 올바로 씌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폭제가 된다. 

이 책은 또한 자신이 사는 시대에 관심을 갖고 역사를 올바로 판단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마땅한 의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개개인의 분명한 역사 인식이 지금의 위태로운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지를 결정하는 거대한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카의 명저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참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가는 하나의 개인들이 모인 국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역사란 개인의 의식이 모여 쌓임으로써 형성된다. 그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성숙한 의식이 국가의 색깔, 국가의 나아가는 방향이 되는 것이다. ‘변호인’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그럼으로써 이 시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여지를 주고 있다. 
 2013.12.30 / News A




영화 <변호인>이 말하지 않은 것들

영화가 외면한 80년대, 누가 그들을 '변호'할 것인가


영화 <변호인>은 과연 감(感)이 동(動)하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몇 번씩이나 애꿎은 혀를 깨물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자 감동(感動)은 쉽게 잦아들었고 동시에 쉽게 풀릴 성 싶지 않은 어떤 의문 하나가 고개를 슬며시 쳐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영화가 소재로 삼은 '부림 사건'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용공 조작' 시비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시기였다. 폭력 혁명, 사회주의 혁명, 체제 전복 등의 혐의는 영화 속 일개 독서 서클 회원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기획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당시의 국가는 통치를 위해 필요에 따라 용공 사건을 조작해내곤 했으니 비판의 초점이 국가 폭력의 잔혹성과 비정상성에 맞춰지는 것 역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1980년대는 동시에 진심으로 폭력 혁명, 사회주의 혁명, 체제 전복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엄존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가령 1980년대 민중문학론과 노동해방문학론을 수놓았던 격정적인 수사들은 1980년대의 '운동권'들이 단지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연약한 피해자에 머물지 않았음을, 나름의 기획과 혁명에 대한 지향을 품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증언한다. 풀기 어려운 숙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1980년대는 영화가 그려내는 것처럼 국가 폭력에 의한 일방적인 희생양들을 양산했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회주의 혁명을 믿었고 실행하려 했던 이들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거나 처리되어야 하는가?

▲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위더스필름


그 유명한 '박인수 사건'에서 법원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바 있다. 하지만 '정조'를 '국민'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메시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50년대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속 학생들이 마르크스-레닌-김일성주의를 신봉하고 폭력적 민중 혁명을 고대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영화가 지금처럼 '감동스럽게' 소비될 수 있었을까? 즉 이 영화는 '보호받아야 할 국민'과 '보호받지 말아야 할, 보호받을 수 없는 국민' 사이의 명확한 경계에 입각해 있다. 물론 이 둘의 경계조차 자주 희미해지고 있는 요즘, 이러한 인식을 환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를 역사화 하는 방법이 이렇게 '선량한 국민'과 '가공할 국가 폭력'의 구도에 갇혀버릴 때 발생하는 문제 역시 분명하다. 1980년대가 가진 정치사회적 의미, 즉 사회주의에 입각해 국가를 전복하려 '기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양산했던 시대라는 사실은 편의적으로 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각은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이러한 감각에 익숙해지다 보면 문득 돌출하는 어떤 '실재'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혹스러운 표정 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 영화 속에서 학생들을 다루는 방식 역시 어딘가 불편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12월 27일 부림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한 <한겨레>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이 인터뷰에서 보이듯 1980년대의 학생들은 단지 철없고 나약했던 피해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와 그에 대한 변혁적 전망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 속에서 이러한 지점은 소거되어 나타난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은 그 부대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만적 소거'는 영화 속에서 1980년대적 기획의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실제 노무현을 변화시킨 것은 80년대의 '민중 운동'이었지만 영화 속 송우석을 변화시킨 것은 그의 실존적 고뇌로 처리된다. (영화 속에서 고문 받던 진우가 사상을 대라는 차동원의 질문에 '실존주의'라고 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우석(완쪽)이 국밥집 주인 최순애(가운데)와 함께 부림사건에 연루된 최순애의 아들 진우를 면회하는 장면. ⓒ위더스필름


따라서 이 영화가 이른바 '휴먼 드라마'를 표방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980년대의 정치성이 소거된 자리를 채우는 데 (실존주의와 결합한) '휴머니즘'보다 더욱 적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근원적인 '탈정치성'이 드러난다. 실존했던 정치인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영화의 정치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물론 이때의 '휴먼'은 보편적인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온하고 위험한 '비국민'이 배제된 '선량하고 정직하지만 나약하기 그지없는 보통 국민들'만을 일컫는다. 이렇게 보호받아야 하는 '선량한 국민'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의식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보호하는가?

그것은 바로 '법'과 '모성'이다. 일반적으로 법은 아버지의 은유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진우가 아버지가 없는 '호로 자식'으로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진우의 생물학적 아버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아버지의 기호가 부재한 당대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우석은 이 사라진 '아비'를 되찾아 세우는 인물로서 '법-아버지'의 상징을 담당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악당들과 혈전을 벌이는 <테이큰>과 유사해진다.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 '주먹'으로 해결한다면 <변호인>의 송강호는 '법'이라는 아버지의 또 다른 상징으로 해결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터. 이 영화에서 '모성'은 '휴머니즘'을 구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바, 이렇게 자연화 된 모성 앞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일시 정지되고 만다. 하여 영화 속에서는 1980년대의 다양한 정치적 기획과 실천은 사라지고 아버지의 힘(법)과 어머니의 마음(모성)만이 눈물겹게 부유한다. <변호인>이 선사하는 감동은 실은 이 지점에서 발원하며 끝내 그 경계 내에 고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보다 끈질기게 물어야 할 것은 국가와 제도 안에서, 그 국가에 반하고 제도에 반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법'이 보호하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모성'이 차마 당당하게 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들을 위해 '변호'해줄 것인가? 누가 감히 이 시대의 '안티고네'를 자처하고 나설 것인가?


2014-01-02 / Pressian / 한영인 연세대 국문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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