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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영화로 읽는 세상 - 장시기(프레시안)

by Wood-Stock 201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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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장시기(동국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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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자전>의 탈근대성 - 21세기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I. 탈근대적 새로운 장르의 등장

오랜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접고 <음란서생>(2006)을 통하여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 음란성과 생산적 현실인식, 그리고 풍자적 역사 코미디와 진실성 있는 멜로드라마의 화려한 혼합을 보여준다. 관객들의 음란한 욕망을 생산적 웃음으로 해소시키면서 2010년의 현실과 조선시대 역사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 통찰력은 가슴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혼합은 유교의 이성적 논리로 무장한 상류층 양반 이몽룡(류승범 분), 백치의 여성미로 등장한 춘향(조여정 분), 그리고 화류계의 달인으로 나오는 마노인(오달수 분)과 권력형 변태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송새벽 분), 권력형 비리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남원 관아의 호방(오정수 변)을 담당하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더욱 빛을 발한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진정한 친구와 연인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수자였던 방자(김주혁 분)와 향단(류현경 분)이의 열연 또한 볼만하다.


<방자전>을 통하여 21세기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연 김대우 감독 또한 봉준호나 이창동 혹은 박찬욱이나 임상수 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음란서생>(2006)을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했을 뿐만 아니라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2003), <로드무비>(2002), <반칙왕>(2000) 등등과 같은 뛰어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경험은 장르의 혼합과 시간 이미지의 등장을 특징으로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탈근대적 영화, 즉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라는 성숙한 성인 영화관객을 위한 새로운 장르를 열기에 충분한 지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모든 것이 과거로 퇴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영화만이 스크린 이미지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의 탈근대적 역사 비틀기를 보여주는 김대우 감독의 등장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II. 에로티시즘의 역사성과 코믹함의 쾌락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음란하고 에로틱하다. 그래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이다. 탈근대의 시대에 "성적 욕망으로 자아의 존재가 어지럽다"라는 의미의 음란하다거나 에로틱하다는 관계의 욕망은 숨길 일이 아니다.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은 개체적 존재에서 관계적 존재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개체적 존재는 나무나 돌, 혹은 들풀처럼 존재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근원적인 서열관계를 부정하는 탈근대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나 소년, 소녀는 존재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어린이나 유아, 혹은 소년이나 소녀는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무나 돌, 혹은 들풀을 존재 그 자체로 돌보아주어야만 하듯이 그들을 존재 그 자체로 돌보아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어린이나 유아, 혹은 소년이나 소녀를 존재 그 자체의 이유로 인하여 보호하고 양육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탈근대의 사회와 국가는 가족관계를 떠나 보육과 양육, 그리고 교육의 공적인 책임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성인은 다르다. 성인은 그 사회와 국가 속에서 그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 남녀관계이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에서 벗어나 남성이나 여성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적 대상을 성적으로 욕망한다. 그러한 성적 욕망을 음란하다고 하고 에로틱하다고 한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성적 욕망은 그 누구의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만 존재하게 되는 개체적 존재에서 그 누구를 보호하고 양육함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관계적 존재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고 아무런 보상 없이 그 누구를 보호하고 양육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러한 성적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따라서 음란하고 에로틱한 쾌락은 성적 욕망의 부산물이지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성적 욕망의 대상은 관계적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관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로 존재하는 사회와 국가는 근원적으로 관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근대의 출신을 통한 신분제도나 근대의 자본을 통한 계급제도는 그 사회와 국가의 권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신분제도나 계급제도의 욕망으로 왜곡시킨다. 그래서 전근대나 근대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신분을 욕망하고 계급을 욕망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성적 욕망이 좌절되는 것은 관계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이나 돈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근원적으로 숨길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분이나 돈이 없음을 한탄하거나 신분이나 돈을 욕망하게 된다. 그러한 왜곡된 욕망의 관계로 말미암아 근대 국가와 전근대 사회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욕망 그 자체의 생산성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본과 계급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탈근대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를 배격하는 탈근대의 영화들이 신분제도나 계급제도,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가 인간의 근원적인 남녀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대우 감독이 인간의 근원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기 위하여 에로티시즘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을 <방자전>으로 패로디하는 것은 그의 탈근대적 생산의 욕망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 신분사회에서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을 탈근대의 에로티시즘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근대적 계급제도가 만든 권력과 자본의 욕망을 인간의 진정한 성적 욕망으로 착각하고 있는 근대성의 왜곡된 욕망이 아직도 우리의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수많은 관계들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자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이 지니는 유교의 이성적 논리로 무장한 상류층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이 시대의 검사나 판사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며, 변학도와 호방의 왜곡된 욕망은 이 시대 권력형 변태와 비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조선시대 에로티시즘 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의 내용을 하나도 변형시키지 않았다. 판소리와 이야기 책이 지니는 『춘향전』의 수많은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으로 인하여 더욱 풍요로워졌다. <방자전>으로 인하여 『춘향전』은 계급사회와 신분사회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욕망으로 인하여 선인이거나 악인, 혹은 창녀이거나 처녀성의 천사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하도록 만드는 변학도와 호방, 그리고 춘향이와 향단이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존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성적 욕망이 사회적으로 왜곡되거나 좌절된 인물들로 바라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신분사회나 계급사회에서 만들어진 왜곡되거나 좌절된 욕망을 보여주는 변학도와 호방, 그리고 향단이의 코믹스러움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비롯한 관객들의 왜곡되거나 좌절된 욕망이 그들의 이미지 속에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스러운 낭만주의적 권력형 욕망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이몽룡을 보며 한없이 비웃다가, 변학도의 권력형 변태의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다가, 혹은 호방의 간사스러운 현실주의가 변학도의 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은 강남의 벼락부자들과 같은 향단이의 대단한 출세에 박수를 보낼까 말까 하다가, 혹은 신분사회 속에서 몸과 마음이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춘향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영화의 끝마무리에서 관객들은 자기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몽룡과 변학도, 이방과 춘향이 그리고 향단이가 보여주는 신분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욕망의 코믹스러움이 보여주는 쾌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 자신, 혹은 관객들 자신의 이미지 그 자체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방자가 정신이 나간 춘향이를 없고 "이리 오너리 같이 놀자"하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불현듯이 2010년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나 관객들이 이몽룡, 변학도, 호방, 그리고 춘향이와 향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III. 마노인의 탈근대성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 보여주는 21세기의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의 실험은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공의 근원에는 이몽룡, 변학도, 호방, 춘향이, 향단이 등등의 고전 『춘향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인물에 대한 김대우 감독의 애정이 고전 『춘향전』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인 드라마의 한계를 극복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현대적인 영화 드라마로 성공시킨 요인이다. 그러나 고전 『춘향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영화감독의 애정은 『춘향전』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방자전>을 조선시대의 에로티시즘이 아닌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으로 승격시킨 "마노인"의 등장으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발한다. 탈근대의 순수한 관계적 욕망을 지닌 "마노인"의 등장은 <방자전>을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로 성공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마노인"의 시대초월적이고 역사초월적인 탈근대적 욕망은 <방자전>이 역사 드라마이며 21세기 현실인식의 리얼리즘 영화가 되는 가장 큰 요인이다.


김대우 감독이 영화 <방자전>에서 "마노인"을 창출한 것은 영화 <방자전>이 근대적인 남성 중심주의와 후기 근대의 페미니즘에서도 벗어나게 만든다. 소위 "성의 달인", 혹은 에로티시즘의 달인으로 등장하는 "마노인"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맥락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오직 인간의 근원적인 성적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만 달인이다. 마치 박정우 감독의 <바람의 전설>(2004)에 등장하는 박풍식(이성재 분)과 같은 "마노인"은 <방자전>이 지니는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를 더욱 풍요롭고 알차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화에서 "마노인"은 "방자"가 역사적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인물이고, 영화 <방자전>이 후기 근대 페미니즘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탈근대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에로티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마노인"의 시대초월성이나 탈근대성은 "마노인" 스스로 소수자 되기를 한다는 점에서 김대우 감독의 예술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예술적 인물의 전형이다. "마노인"과 같은 탈근대적 인물의 전형을 창조한 김대우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만화 <이끼>와 영화 <이끼> - <이끼> 강우석 감독은 탈근대인인가?


I. 근대적 장소와 탈근대적 공간

영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텅 비어 있는 스크린의 공간은 카메라의 눈을 통하여 시와 소설뿐만 음악과 미술, 그리고 건축과 만화를 모두 흡수한다. 영화가 만드는 모든 예술 장르들의 혼합을 통하여 영화 관객들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공간의 이미지들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떤 장소로 변화되는지 사유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적 사유의 가장 큰 첫 발자국은 영화의 스크린에 등장하는 장소들의 지도를 그리면서 시작한다. 지리적인 지도를 인식적인 지도로 이동시키는 것이 곧 사유하는 것이다. 인터넷 웹툰 만화로 인터넷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윤태호의 만화, <이끼>는 경상도 농촌의 한 작은 마을에 관한 지리적인 지도를 인식적인 지도로 전환하는 이야기이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지도를 더욱 더 상세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지도는 마을에서 읍면으로, 그리고 소도시에서 대구와 부산, 그리고 광주와 대전을 비롯하여 마침내 서울까지 다다르는 대한민국 전체의 근대적 지도그리기이다.


그러나 마을과 읍면, 그리고 소도시와 대도시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전체의 근대적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이끼>에 등장하는 김덕천(유해진 분)과 전석만(김상호 분), 그리고 하성규(김준배 분)는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냥 산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이 살게 될 마을의 지도를 그리면서 형사 출신의 천용덕(정재영 분)이 아니라 유목형(허준호 분)을 이장으로 선출하여 새롭게 마을을 가꾸었다면 그들의 삶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운 영혼을 가꾸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마을, 읍면과 소도시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그런 삶의 가능성들로 넘쳐흐른다. 그 가능성들을 파괴성과 폭력성으로 바꾼 사람들이 바로 천용덕과 같이 근대 식민지 권력을 가지고 마을을 자신의 자본에 대한 욕망의 도구로 삼은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지와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베트남 파병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대부분 마을들의 근대적인 부와 권력은 이러한 근대 식민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근대 식민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마을과 도시에서 근대적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이장 천용덕처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인식의 지식을 지배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목형과 같이 일제식민지에서, 미군정 치하에서, 한국전쟁에서, 베트남 파병에서, 혹은 광주 민주항쟁에서 근대적 마을과 도시의 파괴성과 폭력성을 인식하고 그러한 근대적 마을과 도시라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장소들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탈근대적 마을과 도시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19세기 구한말부터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 이전까지는 유목형과 같은 사람들이 항상 이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천용덕과 같은 사람들에게 패배하는 근대의 역사였다. 그 패배의 역사 속에서 마을과 도시를 구성하는 우리 자신들, 즉 김덕천(유해진 분)과 천석만(김상호 분), 그리고 하성규(김준배 분)와 이영지(유선 분)는 파괴성과 폭력성의 부스러기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근대적 장소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II. 탈근대인의 탄생


이장 천용덕의 근대적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지도그리기와 그러한 권력과 폭력을 아무런 반성 없이 추종하는 김덕천과 천석만, 그리고 하성규의 근대 식민지성은 항상 자기 파괴성과 폭력성으로 종결된다. 이와는 달리 유목형이 지니는 삶의 근원적 욕망의 생산성과 마을과 도시의 상호관계가 지니는 창조성을 추구하는 생산적 욕망의 지도그리기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파괴와 폭력의 장소들을 탈근대적 생산의 공간들로 재구성한다. 이들이 바로 윤태호의 만화와 강우석의 영화, <이끼>에 등장하는 이영지와 유해국(박해일 분), 그리고 박민욱(유준상 분) 검사이다. 전석만과 하성규는 차치하고라도 김덕천과 이영지의 차이는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천용덕이 만든 근대적 마을의 지도를 그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김덕천은 근대적 마을의 지도그리기의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이나 이라크 혹은 아프가니스탄 파병과 같은 근대적 개죽음을 당하지만, 근대적 마을의 지도그리기의 능력을 습득한 이영지는 근대적 마을의 장소를 탈근대적 마을의 공간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영지가 탈근대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계기는 유목형이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스스로 터득한 "나를 구원하는 자는 (신이나 목사가 아니라, 교회나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더더욱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라는 역설적인 근대적 기독교의 깨달음을 그녀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박민욱 검사도 마찬가지이다. 우연히도 유해국이라는 특이한 인간을 만나서 "검사"라는 근대적 권력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습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승화시키는 박민욱 검사의 탈근대적 재탄생은 근대적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스스로 탈영토화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살듯이 우리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근대인이 되느냐, 아니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탈근대인이 되느냐의 조건은 근대적 과거가 무엇이든지간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자는 (신이나 목사가 아니라, 교회나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더더욱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영지와 박민욱 검사와는 달리 유해국은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다. 유해국이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근대적 국가구조를 깨트렸던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 이후에 청소년기와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유해국과 같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근원적으로 탈근대인들이다. 유형목과 같은 1987년 이전의 기나긴 민주화 투쟁의 인물들이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를 계기로 유해국과 같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탈근대인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윤태호 작가의 만화 독자들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 관객들은 유해국이나 이영지, 혹은 탈근대적 깨달음 이후의 박민욱 검사와는 달리 "나는 누구누구의 아들(혹은 딸)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교회의 교인이다, 혹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라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인식이 우리를 근대인으로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장 천용덕과 그의 아들, 혹은 마을사람들의 관계처럼 나와 나의 아버지, 나와 그(혹은 그녀),나와 학교, 나와 의사, 혹은 나와 대한민국의 관계는 상호생성적인가, 아니면 파괴적인가?

그러나 아무리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경상도 산골의 아주 조그마한 마을처럼 아직도 여전히 근대적 장소들이 대한민국의 마을들, 읍면, 학교, 회사, 교회, 그리고 소도시와 대도시들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 내 삶의 터전을 탈근대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살았던 경상도의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유해국의 탈근대적 삶을 방해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근대적 장소들의 폭력성과 파괴성이다. 이러한 폭력성과 파괴성을 생산성과 창조성으로 바꾸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이다"라고 사유하는 수많은 탈근대인들이 나이와 성, 혹은 지위와 공교의 차이를 떠나서 서로서로 친구나 연인같은 상호생성적인 탈근대적 관계들을 구성함으로만 가능하다. 유해국과 이영지, 그리고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는 사로서로 오해하고 의심을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서로서로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탈근대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한 탈근대적 관계가 그들의 힘이고, 탈근대적 관계의 생산성과 창조성이 그들의 미래이며, 그러한 생산성과 창조성이 근대의 대한민국을 탈근대의 대한민국으로 변화시키는 희망이다.

III. 강우석 감독은 근대인인가, 탈근대인인가?


강우석 감독은 윤태호 작가의 만화, <이끼>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영화 <이끼>를 만들었다. 특히 만화의 특이한 인물들은 강우석 감독이 발탁한 뛰어난 영화배우들 덕분으로 더욱 뚜렷한 영화 이미지들로 남는다. 더더욱 영화의 말미에서 만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몇 년 후의 경상도 산골 마을이 탈근대적으로 재구성되는 영화 이미지는 유해국과 이영지의 새로운 관계를 더욱 깊게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강우석 감독은 마을을 재구성하는 이영지를 바라다보는 유해국의 얼굴, 이와 반대로 다시 돌아온 유해국을 바라다보는 이영지의 얼굴을 "클로즈 업" 시킨다. 그러나 유해국의 얼굴과는 달리 이영지의 얼굴에서는 과거에 그녀를 지배했던 이장 천용덕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영지의 얼굴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이장 천용덕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근원적인 탈근대인인 유해국일까, 영화를 만든 강우석 감독일까, 아니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일까? 강우석 감독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영지의 얼굴을 더욱 세심하게 사유하라고 강요한다. 영화 관객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2010년 대한민국은 21세기의 탈근대적 지도그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1987년 이전의 근대적 장소들로 퇴행하고 있다. 4대강 죽이기 사업이 그렇고, 천안함 사건 이후의 남북관계가 그렇고,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광주의 조선대학교, 대구의 대구대학교, 서울의 동덕여대와 덕성여자대학교가 이명박 정부의 근대적 권력회귀와 더불어 민주화 이전의 대학들로 되돌아가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탈근대적 공간들이 폭력과 파괴가 만연하는 근대적 장소들로 회귀하는 현실에서 강우석 감독은 수많은 영화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탈근대인으로 거듭났던 이영지가 근대적으로 퇴행하는 가능성을 "클로즈 업"으로 더욱 세밀하게 사유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 사유의 토대는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생명성과 관계의 생산성이다. 유목형 뿐만 아니라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가 없는 상황에서 이영지는 끊임없이 근대적으로 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유해국은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권력과 자본을 욕망하는 근대적 삶의 습관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삶은 누가 바라볼 것인가?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 지구촌 평화를 위한 미국 자유인들의 축제


I.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경계인, 이안 감독

대만 출신이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안 감독은 서구의 근대가 만든 동양의 식민지성에 갇혀 있지도 않고, 또한 서구에 대한 맹신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이슬람과 같은 지구촌을 구성하는 개별 지역의 동아시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쿵후 선생>(1991)을 시작으로 <결혼 피로연>(1993), <음식남녀>(1994),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 <아이스 스톰>(1997), <라이드 위드 데블>(1999), <와호장룡>(2000), <헐크>(2003), <브로크백 마운틴>(2005), <색계>(2007)에 이어 <테이킹 우드스탁>(2009)까지 동과 서를 넘나들면서 동양과 서양의 지역성을 넘어 상호 공존의 지구촌 세계의 삶에 대한 영화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며 또한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근대적인 언어와 제도의 경계이지 탈근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스크린 이미지의 경계가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또한 그렇다.


<색계>에서 1938년의 홍콩과 1942년의 상해를 넘나들며 서구의 근대화가 만든 당시 중국의 서구적(혹은 식민지적) 근대성과 저항적(혹은 폐쇄적) 근대성의 이분법 속에서 한 여성의 욕망이 지니는 탈근대성을 보여준 이안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 조그마한 시골 마을의 지역성 속에서 지구촌 평화를 위한 미국 자유인들의 축제가 지니는 탈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것처럼 1969년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이 이미 파국을 맞이한 서구 유럽의 근대성을 계승하면서 오직 서구 유럽의 백인들만을 위한 국가가 되어 지구촌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 있던 시대였다. 그것은 서구 유럽의 근대성이 만든 가장 큰 피해자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 최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시절이고,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근대 서구 유럽의 식민지들을 미국이 고대로 물려받아 지배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베트남 남북전쟁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절이었다.

1969년은 또한 "아폴로 11호"로 명명되는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서구 근대산업의 과학기술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구 문명과 기독교 그리고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든 서구 근대화의 과학기술은 서구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면서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전쟁의 도구로만 사용되었지 지구촌의 평화와 생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절정이 바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우드스탁 페스티벌로 표현된다. 그래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 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는 서구 근대성이 지구촌 전체를 "참혹한 전쟁의 잔상"과 "의미 없는 인종차별" 그리고 "혼돈에 빠진 (근대) 이데올로기"라는 근대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와 상생의 연대를 위한 탈근대성의 이미지를 아직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안 감독은 다시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미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II. "지역적으로 살고 지구적으로 사유하는" 탈근대인


근대인에서 탈근대인으로 변화하는 삶의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개인이 살고 있는 지역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키며, 마침내 지구촌 전체를 갈등과 대립에서 평화와 상생으로 만드는 그 우연한 사건은 바깥을 보려고 하지 않는 개인이나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사회,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국가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 매일 우리의 주변에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이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가족에게 갇혀있고,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리엇 타이버(드미트리 마틴 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엘리엇은 다른 자식들처럼 늙은 부모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뉴욕 주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갇혀서 살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생각은 외부에 열려 있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친구에게 그렇고,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네 노인들에게 그렇고, 히피와 여성주의자와 마약과 동성애에 대한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마음이 열려 있는 엘리엇으로 하여금 외부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가족주의의 가족이고, 지역주의의 사회이며, 국가주의의 미국이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가 우리를 근대인의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엘리엇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때문에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야만 한다. 사건은 바깥과 만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깥이 아니라 나와 다른,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와 논리와 사유를 하는 타자와 만나는 것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온갖 근대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소문만 무성한, 그래서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해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빨갱이들의 축제"이다. 엘리엇은 "빨갱이들의 축제",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만난다.

모든 만남은 사건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만남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각각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가족의 한 구성원이고 지역의 한 주체이며 국가의 주인으로 거듭나서 가족과 지역과 국가를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닌 상생의 구조로 재구성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권력자들은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히피라고 부르며 여성주의자라고 부르며 마약중독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라고 부르며, 마침내 빨갱이라고 부른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주인공 엘리엇은 실제로 히피가 되기도 하고, 여성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마약중독자가 되고, 동성애자가 되며, 마침내 빨갱이가 된다. 단지 그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그렇게 보수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그렇고, 심지어 유태인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의 어머니도 순간적으로 마약중독자가 된다. 그것은 모두 근대의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상생하는 일대 일 관계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재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엘리엇이 우연하게 만든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인간의 사유, 즉 두뇌를 구성하는 눈과 귀의 만남이다. 눈과 귀의 만남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미지를 그리는 미술과 귀로 듣는 소리라는 음악과의 만남이다. 미술과 음악의 만남이 엘리엇의 두뇌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엘리엇처럼 다시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어머니도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듣고, 또한 동일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어머니는 궁극적으로 다시 사유하지 않는다. 엘리엇이 다시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편견을 가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귀에 들리는 소리의 선율에 그의 몸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몸은 예전에 있었던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예전에 있었던 관념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음악의 선율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리듬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축제는 끝났다.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삶의 장소로 되돌아가고, 엘리엇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또 다른 축제를 위한 새로운 미래의 창조이다. 엘리엇의 마을은 미국 뉴욕 주의 조그마한 시골이 아니라 미국의 중심이 되었다. 엘리엇뿐만 아니라 엘리엇 가족도 또 다른 축제를 준비해야만 한다. 엘리엇과 엘리엇의 아버지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어머니는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과 가족의 관계를 위한 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불쌍한가?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사람. 그것은 썩어가는 것이고 또한 살아 있으되 죽어가는 것이다.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어디 영화 속의 엘리엇 어머니뿐이겠는가?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경계인, 이안 감독은 엘리엇의 어머니가 아직도 미국의 국가주의와 지역주의와 가족주의 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69년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1969년의 그 때처럼 지구촌을 "참혹한 전쟁의 잔상"과 "의미 없는 인종차별" 그리고 "혼돈에 빠진 (근대) 이데올로기"로 몰고 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드스탁>이 아니라 <테이킹 우드스탁>의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III.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 "우드스탁 코리아"


2010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일대에서 열리기로 한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 "우드스탁 코리아"가 돌연 취소되었다는 것에 평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원성이 드높다. 그 내용과 이유가 어떻든 간에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가 돌연 취소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거대 기업이나 국가가 관객을 동원하여 축제를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 "우드스탁 코리아"는 취소되었지만, 올 여름 홍대 앞과 대학로를 비롯하여 춘천과 강릉, 주문진과 함양, 만리포와 해운대 등등의 수많은 피서지에서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는 근대의 전쟁과 인종차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수없이 많은 사건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건들은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에 등장하는 열려 있는 마음의 소유자, 엘리엇 타이버의 눈과 귀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근대적 사유가 아닌 탈근대적 사유를 통한 탈근대적 삶을 영위하게 만들었듯이 코리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엘리엇들로 하여금 지역적으로 살고 지구적으로 사유하는 탈근대적 삶의 길을 열어놓았을 것이다.

"우드스탁 코리아"가 아니라 영화와 같은 미국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의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우리는 "2002 월드컵"과 "촛불문화제"에서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2002 월드컵"과 "촛불문화제"를 미국 뉴욕 주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처럼 우리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열어야만 한다. 엘리엇과 같은 열려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대한민국에도 수없이 많지 않겠는가?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하녀>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녀인가?


I. 주인과 하녀의 탈근대적 역설

이창동 감독의 <시>와 함께 2010년 프랑스의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는 근대적인 영화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영화가 아니다. 김기영 감독은 그의 영화 <하녀>를 통하여 1960년대의 대한민국 영화관객들에게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올바른 주인 노릇을 하라고 강요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 <하녀>를 통하여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혼재되어 있는 2010년 말기 근대의 대한민국 영화관객들에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인과 하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러한 탈근대적 영화의 질문을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녀인가?"라는 근대적 질문으로 곡해하여 "나는 주인이다"라거나 "나는 하녀이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관객들은 우리의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가족과 교회, 직장과 국가를 포함한 근대적 국가장치들에 의하여 1960년대에 만들어진 김기영 감독의 <하녀>로 되돌아가서 자기 스스로 올바른 주인 노릇을 하라고 강요한다. 영화 이미지를 이미지로 사유하지 않고 교훈이나 계몽의 대상으로 추락시키는 이러한 근대적인 자체검열은 시대를 달리하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무차별적으로 비교하여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이분법의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 김기영 감독의 <하녀>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근대의 고전적인 "홈 코미디"의 장르영화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오늘날의 대부분 영화들처럼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이다.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는 기독교화와 서구화와 산업화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영화 서사구조에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종속되어 있지만,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관계를 맺음으로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는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사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통한 관객들의 사유가 개별 관객들이 지니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 따라 끊임없이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가족과 국가의 생산적 서사구조를 생성시킨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보면서 만들어지는 관객들의 새로운 서사구조는 "나는 주인이다"라거나 "나는 하녀이다"라는 근대적 이분법이 아니라 "나는 주인이기도 하면서 하녀이기도 하고, 하녀이기도 하면서 주인이기도 하다"라는 시간 이미지의 과정에 대한 사유의 이야기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녀가 되는 것이고, 내가 하녀라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이 되는 탈근대적 역설이 생산되는 것이다.

II. "주인 되기"의 근대성과 "하녀 되기"의 탈근대성

▲ 임상수 감독의 <하녀>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는 주인공 동식(김진규 분)의 시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기영 감독의 한계가 아니다. 아버지와 맏아들이 살아야 가족이 산다고 믿었던 1960년대 한국 근대화 과정의 한계이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사구조 속에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를 종속시켰던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의 한계이다. 장르영화의 규칙에 따라 김기영 감독은 동식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여주고, 그래서 1960년대 근대화 과정의 한국 사회와 가족의 "주인 되기"를 시도한다. 두 자식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인 동식의 시선에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려는 악마들이다. 심지어 부인(주증녀 분)과 하녀(이은심 분)는 이름조차도 없다. 하녀와 부인의 차이는 저급 하녀와 고급 하녀의 차이이고, 그 차이는 결혼이라는 합법적 장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동식 이외에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조경희(엄앵란 분)는 동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고 그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으며 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현모양처의 교양을 쌓는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이미지 그 자체로 돌아가면, 동식은 자본의 노예일 뿐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의 근대 고전영화들은 가족과 국가를 핑계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들을 다룰 뿐이다.

▲ 임상수 감독의 <하녀>

김기영 감독이 <하녀>에서 주인 되기를 하는 것과는 달리 임상수 감독은 <하녀>에서 "하녀 되기"를 달성한다. 물론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스크린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중년의 가부장 동식(김진규 분)의 시선과 동식의 이야기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스크린 이미지는 하녀, 은이(전도연 분)의 시선이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마치 어느 도시를 여행하는 이방인이 그 도시를 바라보는 풍경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하녀 은이, 주인 남자 훈(이정재 분), 주인 여자 해라(서우 분), 나이든 하녀 병식(윤여정 분),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안서현 분) 모두의 시선이 뒤엉켜 있다. 임상수 감독은 이들이 만드는 시선들의 풍경 속에서 모든 관계들의 하녀 되기를 하는 은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은이와 어린 딸의 관계, 은이와 병식의 관계, 은이와 해라의 관계, 그리고 은이와 훈이의 관계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은 은이 뿐이다.

은이는 가족주의의 계율 속에서 권력의 노예가 되고 있는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로 하여금 세상을 자신의 시선으로 보도록 생성시키며, 같은 하녀이면서 주인 노릇을 하는 병식으로 하여금 직업적 관계와 인간적 관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든다. 또한 관객들은 은이와 해라와의 관계에서 해라가 단지 근대적 가부장주의의 자식 낳는 기계, 즉 병식과 같은 고급 하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은이가 훈이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도 또한 그녀가 하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성되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 이혼의 경력이 있는 그녀가 이전에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돈과 권력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암시한다. 그러한 은이에게 이 세상의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은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 훈이는 얼마나 황홀한 이성적 관계의 대상이겠는가? 그래서 은이는 자신의 여성되기를 위하여 훈이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하녀 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하녀 되기의 섹슈얼리티는 근대 서구 유럽의 백인 남성이 아프리카의 흑인 여성에게서 발견하는 섹슈얼리티이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 백인 남성이 근대 식민지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유색인 여성에게서 발견하는 섹슈얼리티이다. 이와 반대로 근대 식민지 아프리카 흑인 여성에게 아프리카 흑인 남성은 돈과 권력의 노예들이고, 근대 식민지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유색인 여성에게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성들은 식민지 지배 권력과 자본의 노예들로 보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에게 백인 남성의 아름다운 몸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성의 섹슈얼리티로 보임에 틀림이 없다.

▲ <하녀>

그러나 은이의 여성되기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달리 훈이의 근육질 몸이 지니는 인위적 가공성은 임상수 감독의 카메라의 시선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진다. 마치 육체미 과시를 하듯이 상반신 나체로 한 손에는 와인 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서 와인을 가득 따른 와인 잔을 들고 은이 앞에 서서 권위적으로 은이를 내려다보는 훈이는 가부장주의의 권위적인 사디스트의 몸이다. 임상수 감독은 은이의 여성되기가 빗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관객들은 훈이의 몸 아래에 있는 은이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훈이의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가 은이의 아픈 과거처럼 권력과 자본의 노예 이미지라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하나의 환상이고, 그 환상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 밝혀지듯이 영화 스크린 속에 있는 은이는 영화관객들처럼 훈이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보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근대 제국주의가 흑인 여성이나 유색인 여성들의 여성되기에 의하여 남성 되기의 생산성을 지니지 못하게 인종차별주의라는 제도로 여성되기의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근대국가 내부의 가족주의의 제도가 은이와 같은 여성되기의 여성들이나 남성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근대적인 모든 관계, 즉 친구와 연인을 비롯하여 가족과 사회, 종교 그리고 학교와 국가의 모든 관계에서 그 관계의 주인 되기를 하는 것은 은이와 같은 여성되기의 소수자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근대적인 국가(사회) 장치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상수 감독은 나이든 하녀 병식이 하녀이면서도 주인 되기를 하기 때문에 주인보다도 더 나쁘게 은이의 여성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마침내 병식이 주인 되기를 때려치우고 은이와 친구 되기를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은이와 친구 되기를 하는 사람은 단지 병식만이 아니다.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은 은이의 하녀 되기, 즉 어린 소녀인 자기와 친구 되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은이를 죽게 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라는 사실을 아주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마치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사랑하는 동료 선배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살한 중학교 여학생 희진(한수영 분)이가 시인 되기를 하는 양미자(윤정희 분)가 되어 영화관객들을 노려보듯이,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이 생일파티를 마치고 갑자기 영화관객들을 노려보는 것은,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인인가?"하고 우리들에게 묻는 것은 아닐까? 당신도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주인 되기를 하면서, 하녀 되기를 하며 당신을 생성시키는 수많은 은이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III. "피아노"와 "와인"의 근대성과 식민지성

▲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은 피아노와 와인이다.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은 피아노와 와인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주인공 동식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피아노이고,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 자본가 훈이를 다른 일상적인 남성들과 구분하여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와인이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 가족주의의 근대성은 피아노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었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업주의의 후기근대성은 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우리의 음악문화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거문고나 가야금 혹은 징이나 북처럼 그냥 여타 음악 악기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와인도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인들은 와인을 술의 주인으로 섬긴다. 그러나 와인은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류문화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소주와 막걸리, 혹은 배갈이나 샤케와 같은 수많은 술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한 음악 악기들 중의 하나인 피아노와 수많은 술들 중의 하나인 와인을 음악과 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근대성인 동시에 식민지성이다.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피아노와 와인은 바이올린이나 위스키로 변신하면서 우리들을 끊임없이 근대적 주인 노릇을 하는 식민지 노예로 만든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 왜, 악마를 욕망하는가?


I. 근대의 사회적 욕망

근대문학비평이론이 정의하는 것과는 달리 문학과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어느 한 구석에 살고 있는 작가들의 상상적 창조물이 영화이고 문학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나 시인 혹은 소설가가 어떤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 살고 있는가는 영화를 보는 수많은 재미들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문학 독자들이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은 영화감독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들과 더불어 상상하며 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영화관객들이 그들의 두뇌 속에 남아있는 영화 스크린 이미지의 인물들을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속의 창조적 인물들은 영화관객들의 현실적 삶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장경철(최민식 분)과 김수현(이병헌 분)도 마찬가지이다. 장경철과 김수현은 영화관객들의 삶과 현실에서 어떤 상상적 창조물로 변형될까? 그래서 영화감독과 시인과 소설가들이 어떠한 현실에 기대어 소설과 시와 영화텍스트들을 상상하고 있는가는 영화관객들과 작가들을 소통시키는 주요한 통로이다.


<조용한 가족>(1998)으로 데뷔한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2000),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상상적 영화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근대적 스릴러, 갱스터, 웨스턴 등등의 장르 영화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근대적 장르 영화들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근대적 장르영화들의 한계는 장르의 바깥에 있는 이미지들을 모두 지운다는 것이다. 이번에 개봉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악마를 보았다>(2010)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경철과 김수현의 삶 이외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삶은 소외되고 제거되었다. 필자가 영화를 보는 사이 두 명의 여성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화관을 나갔다. 그들은 여성들의 삶이 소외되고 제거된 영화 이미지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장경철과 김수현과 같은 폭력의 능력이 없는 필자도 수없이 여러 번 자리를 박차고 영화관을 나오고 싶었지만 영화를 보기 위하여 지불한 돈(함께 술을 마셨던 동료 교수들의 영화비도 지불했다)이 아깝기도 하고 아직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근대의 남성적 세계의 두려움과 공포에 매료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의 폭력은 관객들에게 마치 새로운 세계와 이질적인 존재를 만나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을 생산한다. 공포와 두려움의 느낌은 현실 속에서 항상 존재한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혹은 나와 다른 존재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낄 때, 내 이전의 세계가 깨어지는 공포와 두려움은 나의 온 몸을 엄습한다. 그러나 그 공포와 두려움은 이후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즐거움을 생산한다.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김수현이 장경철에게 가하는 폭력의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연인에게 전화로 하는 사랑의 표현마저도 동료에게 들킬까봐 수줍어하는 김수현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은 공포와 두려움이 폭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로 나아가, 마침내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는 오직 그만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장경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의 그가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했을 때, 그는 아마도 영화 속의 김수현이나 혹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와 두려움의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 처음의 두려움과 공포가 자신에 대한 사회적 환기나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로 진입했을 때, 그는 현재의 김수현처럼 과거와 현재의 악마가 된 것이다.

II. 근대적 선과 악의 이분법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즐거움을 생산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은 선과 악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선과 악의 이분법도 없고 색깔도 없다. 욕망은 프로이드가 정의하는 오이디푸스도 아니고 그의 제자 라캉이 정의하는 결여도 아니다. 욕망은 오직 즐거움을 생산하고자 모든 관계 속에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욕망이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욕망은 자본을 욕망하고, 전제군주 사회에서 욕망은 권력을 욕망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장경철의 폭력에 대한 욕망은 근대적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에서 1등은 선이고 2등 이하는 모두 악이라는 서열주의, 배운 자는 선이고 배우지 못한 자는 모두 악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 경제관계에서 돈을 가진 기업재벌들은 선이고 돈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영세업자들은 모두 악이라는 경제적 선과 악의 이분법, 정치적으로 국가권력을 가진 자들은 선이고 국가권력이 없는 자들은 모두 악이라는 국가보안법의 빨갱이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으로 미국이나 서구적인 것은 모두 선이고 전통적이거나 아시아적인 것은 모두 열등한 것이라는 식민주의적 이분법이 만든 사회적 욕망이다.

고전적인 근대의 장르영화에서 장경철과 같은 폭력의 악마는 국가의 경찰이나 검찰 혹은 의로운 영웅에 의해서 처단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은 이미 상투적이 되어버린 그러한 고전적 영웅의 이야기에 식상해 하고 있다. 경찰과 검찰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의 폭력이 장경철과 같은 악마의 폭력처럼 너무도 흔한 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미 드러났듯이 종교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종교적 사제들이 신도들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고, 정치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정치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고, 경제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돈 있는 자들이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한 기만이며, 교육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교사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정신적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지배하기 위한 지배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애인을 잃고 사적 응징의 복수에 나서는 김수현은 근대적 이분법의 세계에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가는" 근대인의 한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선도 없고 악도 없다거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악이라는 신자유주의나 미국 할리우드의 포스트모던(후기 근대) 영화문법이 등장한 것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거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악이라는 사유방식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이분법을 변형된 방식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생산하는 폭력의 미학을 통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우리 한반도를 지배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남북관계나 진보와 보수의 대립관계처럼 폭력이 공포를 낳고, 공포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즐거움을 향유하는 길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지만 소외되거나 제거된 주연(오산하 분), 세연(김윤서 분), 세정(김인서 분), 간호사 한송이(윤채영 분)의 삶을 상상하고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나 <올드 보이>(2003),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2005)는 동일한 폭력이 등장하더라도 단일한 폭력의 장르영화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날은 근대적 영화들이 소외시키거나 제거시킨 주연이나 세연이의 삶을 상상하거나 장경철이나 김수현처럼 뛰어난 폭력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의 삶을 상상하기 위하여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대다수이다.

김지운 감독의 모든 영화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칙왕>에서 그는 소외된 셀러리맨의 삶을 상상하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그는 미국 할리우드의 웨스턴 장르영화가 보여주었던 선(좋은 놈)과 악(나쁜 놈)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일제시대 만주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놈"이 만드는 탈근대적 역사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마치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가 깡패들만의 세계가 아닌 청소년기의 "친구들"과 깡패들의 세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영화감독 상택(서태화 분)이의 시선을 보여주면서 미국 할리우드의 갱스터 영화를 넘어서고 있듯이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에서 벗어나 갱스터와 멜로드라마, 스릴러와 홈 코미디, 그리고 웨스턴과 역사 드라마 등등이 혼합되었을 때, 영화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생성시킨다. 그것은 순전히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의 삶이 근대의 고전적 장르영화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단일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남녀노소가 함께 새로운 욕망을 생성시키며 즐거워하는 영화가 오늘날의 훌륭한 영화가 아닐까?

III. 탈근대적 욕망

일반인들의 삶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우리는 근대적 제도들에 얽매어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그것들에 저항하기도 하고, 또 그것들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술한 바와 같이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영화는 상상적 창조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을 지니고 있는, 즉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생산하려는 욕망의 힘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욕망처럼 욕망은 자신이 생성시키고 생산한 이미지들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고자 하는 힘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만드는 폭력의 욕망도 욕망이다. 그래서 폭력의 이미지는 폭력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는 힘이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를 보다가 영화관을 뛰쳐나간 수없이 많은 영화관객들처럼 더 이상 폭력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는 영화 이미지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 이미지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적이고 생산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즐기는 것이다. 근대적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지배와 피지배, 남과 북의 고정된 이분법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것과 다른 그 무엇, 동물이 되고, 여성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소수자가 되는 이미지들을 상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영화들 속에서 탈근대적 욕망을 욕망한다.


 2010-09-05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 몸과 마음의 사랑 변주곡


I. 일상적 삶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의 것들을 사유하게 만든다. 일차적으로 그의 영화는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 그리고 설악산과 통영이라는 우리나라 지역의 이미지를 영화의 이미지로 만든다. 지역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고정된 이미지라면,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변화와 생성의 이미지이다. 고정된 지역의 이미지에 영화라는 인물과 풍경이라는 변화와 생성의 이야기가 만드는 새로운 이미지가 삽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지역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영토화하여 각각의 지역들에 대한 홍상수의 영화와 자신의 삶이 결합된 변화와 생성의 새로운 이미지로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영화 이미지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이미지와 관계적 삶의 이미지로 재결합되는 것이다. 그것은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뿐만 아니라 영화 보는 관객의 자아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춘천과 경주, 그리고 제천과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프랑스, 혹은 베네주엘라와 이라크 등등의 지역들에 대해서도 고정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 고정된 이미지는 할리웃 영화난 매스컴이 근대적으로 가공한 근대의 일상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근대의 일상적 이데올로기에서 탈영토화하여 변화와 생성의 새로운 탈근대적 이미지로 재영토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새로운 생성적 관계의 이미지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새로운 관계의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하하>(2010)에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문경(김상경 분)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 분)의 사랑 이야기는 통영에 살고 있는 관광해설가 성옥(문소리 분)과 시인 정호(김강우 분)의 지역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청계산에서 마시는 막걸리와 함께 "하하하"의 웃음소리로 이어지는 문경과 중식의 사랑 이야기는 통영을 지역성과 폭력성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로맨스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영토화한다는 것은 근대적으로 구성된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교수, 영화감독, 시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 등등의 근대적으로 구성된 서열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근대의 언어 이데올로기에서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혼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와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적 대화의 언어나 이야기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일관성이 없으며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언어와 이야기의 부서진 틈새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것은 몸과 마음이 관계를 맺는 수없이 다양한 인간과 인간이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그 사랑의 변주곡 속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몸의 관계가 새로운 언어와 마음을 창출시키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 사랑의 변주곡 속에서 몸과 마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두 남자와 한 여성의 삼각관계 속에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II. 몸과 마음의 사랑 변주곡


<옥희의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라는 네 개의 단편영화들이 서로서로 뒤엉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옴니버스의 영화이다.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주문을 외울 날>과 <키스 왕>, 그리고 <폭설 후>라는 또 다른 각각의 완결된 단편의 이미지들을 다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즉, 각각의 단편에서 만들어진 정규직 교수, 비정규직 교수, 학생, 대학, 강의, 영화 등등에 대한 영화 이미지의 언어들은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서 다시 산산조각이 나고 또 다른 이미지의 언어들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 남는 것은 영화감독 성 교수(문성근 분), 또 다른 영화감독 비정규직 교수 진구(이선균 분), 그리고 옥희(정유미 분)의 상호관계가 지니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변화하는 생성적 이미지들뿐이다.

근대적인 사유와 지식과는 달리 언어와 이미지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몸과 마음(정신)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하나이고, 몸과 마음도 근원적으로 하나이다. 순간적인 관계의 이미지가 언어를 만들고, 순간적인 관게의 몸이 마음을 만든다. 이미지가 언어를 만드는 것처럼 몸이 마음을 만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지로부터 만들어진 언어가 이미지를 지배하는 것이고, 몸으로부터 만들어진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일시적 현상들이다. 이러한 언어가 이미지를 지배하고, 마음이 몸을 정신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주문을 외울 날>은 비정규직 교수 진구의 언어가 성 교수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진구의 마음이 진구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진구의 언어는 실제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문과 풍문으로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리고 진구의 마음은 몸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열등감으로 구성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근대의 감옥 속에 가두어 놓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근대적 대학제도의 문제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근대적 제도는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체들을 풍문으로 만들어진 언어와 열등감으로 구성된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실제의 이미지와 몸을 스스로 지배하도록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다. 따라서 성 교수에 대한 진구의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폭력은 영화 시사회에서 한 여성관객이 진구에게 행하는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폭력과 동일하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에서 보여주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만드는 근대적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과 동일한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미시적 관계의 폭력성은 몸과 몸이 맺어지는 수없이 많은 사랑의 변주곡에 내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키스 왕>은 각각의 단편들을 매개하는 연결의 고리일 뿐만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마음을 매개하는 연결의 고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설 후>의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성 교수와 진구의 관계, 진구와 옥희의 관계, 그리고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그들이 나누는 질문과 대답을 구성하는 언어들의 실제 이미지이다. 물론, 그 관계들의 이미지는 <옥희의 영화>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폭설 후>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의 유희와 상호 간 마음의 갈등은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재구성된다.

옥희와 진구의 관계는 상호 동일한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몸의 관계이고,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관계이다. 옥희와 진구의 관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혹은 교수와 학생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계가 구성하고 있는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서로서로의 이미지와 몸에 매료되어 관계를 맺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그러나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왜곡된 관계와 마찬가지로 교수와 학생,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계가 만든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창출하여 만든 사랑의 변주곡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몸과 몸의 관계가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은 생성적 이미지를 창출하지만, 근대적 서열관계의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은 모든 관계의 미시적 파시즘을 만드는 원인이다.

III. 늙은 남자의 아차산과 젊은 남자의 아차산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 혹은 설악산과 통영처럼 아차산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와 만남으로 인하여 또 다른 무한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아차산의 무한한 이미지들 중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생산한다. 하나는 늙은 남자의 아차산에 대한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의 아차산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마음이 아니라 몸,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비관계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젊은"과 "늙은"이라는 언어는 아차산에 대한 관계가 구성하는 언어와 마음의 느낌을 정반대로 재구성한다. 아차산의 이미지를 이미지 그 자체로 즐기는 사람은 늙은 남자이고, 아차산을 언어의 이데올로기 속에 가두는 사람은 젊은 남자이다. 몸이 맺는 관계의 중요성을 마음으로 구성하는 사람은 늙은 남자이고, 몸과 마음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젊은 남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몸의 생산성을 사유하는 사람이 늙은 남자이고,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이미지와 몸의 생산성을 파괴하는 사람이 젊은 남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수많은 이미지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만드는 언어의 예술을 인식하지 못하고 몸 그 자체가 생성적이기 때문에 몸과 몸의 관계가 만드는 수많은 생성적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젊음이고, 늙음으로 인하여 한정된 관계의 이미지 속에서 수많은 생성적 언어들을 창출하고 몸이 노쇠함으로 인하여 몸이 만드는 마음의 관계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이미지와 언어, 몸과 마음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역설로 젊은 아차산과 늙은 아차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언어와 마음도 젊은 아차산과 늙은 아차산과 마찬가지로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0-09-19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외딴 섬' 대한민국 위 서울공화국, 그 비극과 극복에 대하여


I. 근대 서울공화국의 비극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복남(서영희 분)이 옆에서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해원(지성원 분)이가 피리를 불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넌 너무 불친절해…"라는 영화광고 카피의 언어가 인쇄되어 있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영화 포스터의 사진이다. "불친절한" 것이 피투성이 살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코엔 형제(에단 코엔과 조엘 코엔)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에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지대인 텍사스의 무차별적인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 분)는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주유소의 주인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무차별적인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은 살인마가 아니라 "무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열 살 아이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순진한 복남이다. 그녀는 왜, 단지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어렸을 적의 친구였고 자신의 이상과 꿈이었던 해원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멕시코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든 텍사스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닌 것처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만든 서울 공화국이 "여성(혹은 비정규직)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근대 서울공화국의 전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장철수 감독은 "무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기 위하여 영화 카메라를 들고 "무도"라는 섬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김복남 살인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서울의 거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한 해원이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다시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해원이가 자신이 목격한 살인자들을 경찰에게 정확히 지적해주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무도"에서 일어난 "김복남 살인사건"이 단지 "무도"라는 자그마한 섬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서울공화국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복남 살인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동호 할매(백수련 분)나 만종(박종학 분), 철종(배성우 분), 득수(오용 분)는 차치하고라도 복남의 어린 딸 연희(이지은 분)는 물론이고 순이 할매(손영순 분), 파주 할매(김경애 분), 개똥 할매(이명자 분)는 이미 죽었다. 해원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은행창구에서 대출을 받으려는 임대 아파트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했으면, 혹은 해원이가 복남이가 수없이 보낸 편지를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더라면, 혹은 무도에 가서 해원이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는 복남이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였다면, 심지어 자신이 목격한 연희의 살인사건을 섬에 온 경찰에게 정확하게 전달이라도 해주었다면, "김복남 살인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비정규직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 조금만이라도 친절하게 관심을 갖는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근대 서울공화국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의 사건을 만드는 근대 서울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이다.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II.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

남편과 시동생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 어린 딸만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음과 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복남이에게 서울에 살고 있는 해원이는 오매불망 기다리는 구원의 님이다. 복남이의 서울에 대한 갈망과 꿈은 근대 대한민국 서울공화국이 만든 근대적 현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을 통한 본격적인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모든 근대국가 기구와 장치들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을 건설하는 정점에 서울 강남 공화국이 있다.

그러나 서울뿐만 아니라 강남도 결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근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서울특별시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은 강남으로 집중되어 있고, 강남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은 미국의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집중되어 있다. 근대 서울공화국은 대한민국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뉴욕이나 워싱턴을 최고 정점으로 하는 미국을 향한 해바라기 식민지 공화국인 것이다.

근대 서울공화국의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이데올로기는 서울에 살고 있는 해원이의 비정규직 삶에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서울의 거리 모퉁이에서 건장한 청년들이 백인과 함께 한 여성을 폭력으로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해원이의 삶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개체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녀는 심지어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비정규직의 그녀가 근대 서울공화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소망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비정규직 직장에서 정규직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직장을 얻으면 또 다시 승진하는 것이 소망이 되고, 승진을 하면 원룸 오피스텔에서 자그마한 아파트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 되고, 강북의 아파트는 다시 강남이나 분당, 혹은 일산 신도시의 아파트가 목적이 된다. 삶을 함께 나누며 서로서로의 삶을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없는 해원이의 파편화된 삶이 해원이를 근대 서울공화국의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근대인으로 만드는 것이 근대 서울공화국에 내재하고 있는 식민지 이데올로기이다.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 속에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미국이거나 미국의 백인, 혹은 마음으로 동경하는 뉴욕이나 워싱턴에 있다고 꿈꾸는 미국적 삶이다.

이것은 마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등장하는 "무도"라는 섬에 살고 있는 복남이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해원이이거나 해원이의 어릴 적 이미지, 혹은 해원이가 지니고 있다고 복남이가 꿈꾸고 있는 해원이의 머나먼 서울의 삶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러한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비극적이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것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만든 마음의 허상이 순진무구하고 생성적인 여성의 몸을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비극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나 오바마가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이나 비정규직 문제, 혹은 한반도의 분단을 해결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삶에서 찌들대로 찌들은 해원이가 "무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

복남이는 서울에 있는 해원이나 해원이의 어릴 적 이미지, 혹은 해원이의 서울의 삶이 아니라 섬에 살고 있는 순이 할매와, 파주 할매, 그리고 개똥 할매를 자신의 삶의 동료로 만들었어야 했으며, 그들을 통하여 어린 딸 연희와 동호 할매뿐만 아니라 치매 할배(유순철 분)를 삶의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와 연인으로 만들었어야만 했다.

그들이 함께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었을 때,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무도의 섬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는 만종이와 철종이, 혹은 그들과 연대하고 있는 득수나 서 경사(조덕제 분)의 식민지적 폭력이나 자본으로 결탁한 식민지적 남성성은 깨어졌을 것이다. 복남이의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무도의 섬에서 함께 어우러질 때, 무도는 폭력과 파괴의 서울공화국의 해바라기 섬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지며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희망의 섬이 될 것이다. 해원이는 미국이나 영국, 혹은 일본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무도의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이 만든 식민지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파괴를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다.

III. 대한민국이라는 근대의 섬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서울로 돌아온 해원이는 이미 비정규직 직장에서 쫓겨난 상황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신이 목격한 살인자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녀는 무도의 섬이 작은 대한민국이고, 근대 서울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아시아 대륙과 이어지는 반도가 아니라 태평양에 홀로 떠 있는 미국령 섬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섬은 영화의 말미에서 무도의 섬 이미지가 해원이의 몸 이미지와 겹쳐지는 것처럼 근대 서울공화국이 만든 마음의 미국 해바라기이거나 서울 해바라기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무도와 대한민국의 섬으로 구성된 순진무구하고 생성적인 몸을 파괴하고 죽이는 섬이다.

해원이는 무도에서 자신이 목격한 경험을 통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마음의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생성적인 몸을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의 폭력과 파괴의 절정에서 역설적으로 폭력과 파괴의 화신이 된 죽은 복남이와 피해자의 친구가 될뿐만 아니라 같은 비정규직 직원들과 동료와 연인이 되어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경험은 단지 영화감독의 이야기 구조나 주인공의 삶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무도의 섬이 해원이의 몸 이미지와 겹쳐지는 것처럼 영화가 보여주는 스크린 이미지의 세계는 나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적 세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지닌 무도의 섬이 폭력과 파괴의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과 여성, 비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식민지인과 식민지인이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어 그 폭력과 파괴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서울공화국이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과 여성, 비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서울공화국의 식민지인과 식민지인이 서로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어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비정규직법이나 국가보안법, 행정수도법, 그리고 오직 미국만을 해바라기하는 근대 서울공화국의 모든 국가장치와 기구들을 해체하거나 다원화해야 한다. 해원이처럼 영화의 경험이 현실의 경험으로 승화되었을 때, 무도의 섬은 사람이 사는 섬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태평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니라 아시아인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공유하는 아시아 대륙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2010-10-03



탈근대 영화를 사유하는 법 - 1998년, IMF 삭풍과 대한민국판 누벨바그


I. 1958년 무렵의 프랑스

지난 여름, 옛 허리우드 극장에 있는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는 7월 30일부터 8월 29일까지 "2010 시네 바캉스 서울 - 매혹의 아프로디테"라는 주제를 내걸고 영화감독들이 좋아했던 유명한 여배우들의 영화를 특선으로 선보였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그리고 전공 공부에 시달리다 보니 현대 영화들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루이 말, 장 뤽 고다르, 마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프랑스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들은 특히 눈에 띄었다.

그것은 노마돌로지의 지식이나 탈근대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영화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영화들의 대표적인 감독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연인들>(1958),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 마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 그리고 프랑스와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1964)은 21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지구촌 영화들이 보여주는 느낌과 감각들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영화들이 만드는 영화 이미지의 새로운 느낌과 정서들을 이끌고 있다. 이것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이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유이다.

▲ <미치광이 삐에로>

그렇다면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들뢰즈는 1948년 무렵의 이탈리아에서 탈근대의 현대적인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등장한 것처럼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근대 제국주의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일반인들의 억압적 삶"에 대한 관심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누벨바그의 영화들을 등장시켰다고 말한다.

근대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서사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근대 장르 영화들에서 벗어나 노마드적인 개인과 관계적 삶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이 등장한 것은 1958년 무렵의 일본과 1968년 무렵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일본과 독일에서 이러한 영화의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처럼 승전국이든지, 혹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일본과 같이 패전국이든지간에 제 2차 세계대전은 궁극적으로 근대 식민지 쟁탈전이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이탈리아와 일본 그리고 독일과 달리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영화관객들이 근대적인 국가와 가족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정서와 느낌에서 탈근대의 노마드적이고 관계적 생성의 느낌과 정서로 이동하게 된 것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영화 이미지를 조작하는 근대 장르영화들에 대한 환멸이다.

▲ <8월의 크리스마스>

그러면 도대체 16세기 르네상스부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화 하면서 서구의 근대성을 창시한 나라들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 이미지들을 통하여 근대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이성적 지식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적 삶의 느낌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정서적 지식으로 나아가는데, 구소련의 변증법적 사회주의 장르영화와 미국의 헐리웃 아메리칸 드림의 장르영화들이 변화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근대성의 국가주의를 구소련이 사회주의의 저항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틀로 국가주의 선전의 장치로 영화를 이용하였고, 미국이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WASP)" 중심의 서구 근대성을 자유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연합국가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틀로 아메리칸 드림의 성전장치로 헐리웃 영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패배하면서 맞이한 서구 근대성의 위기를 미소 데탕트로 해결하는 동시에 소위 러시아 백색주의를 중심으로 한 구소련과 백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통한 냉전 이데올로기를 국가적 지배의 장치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II.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

1989년 구소련이 스스로 붕괴되면서 러시아 백인 중심과 미국의 앵글로색슨 백인 중심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던 서구 근대성이 붕괴되면서 그 동안 서구 근대성의 확산으로 만들어진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식민지적 근대성이 지니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로 유지되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 장르영화들이 붕괴하면서 탈식민지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의 노마드적인 개인과 관계적 삶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1958년 무렵의 프랑스적 상황이 1990년 무렵의 동유럽 국가들과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그리고 남아프리카와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와 미국의 영화들에서도 목격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유럽의 나라들에서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과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을 포함한 비서구 지역들에서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은 조금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들이 남성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의 근대성이 지니는 파괴적 억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비서구 지역의 탈근대 영화들은 서구, 백인 중심주의의 식민지성이 지니는 파괴적 억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근대성은 곧 비서구의 식민지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세계체제는 비서구 식민지 세계체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현상은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난다.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이 만든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립과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 확산된 서구적 국가제도의 거대화와 경제체제의 확립을 통한 서구 선진국으로의 진입이라는 환상은 IMF 구제금융사태 국가부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총과 칼로 국민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 파쇼정부는 물러났지만,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문민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국민의 피와 땀으로 만든 근대국가 대한민국을 국가부도의 파산으로 만들면서 각각의 개인과 소수자들, 즉 여성과 빈민 그리고 노동자들을 국가의 노예로 만드는 근대국가의 파시즘적 체계는 더욱 강화시켰다.

소위 들뢰즈가 1958년 무렵의 프랑스적 상황이라고 말한 근대 국민국가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민중의 억압적 삶"에 대한 관심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젊은 영화 예술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1998년은 비록 <타이타닉>이나 <아마게돈>, 혹은 <사랑과 영혼>과 같은 헐리웃의 근대적인 영화가 흥행순위 1, 2위를 오르내렸지만,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등등은 이미 단편영화로 등장했거나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등등의 수많은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감독들과 더불어 이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정서와 느낌을 토대로 한 탈근대의 지식과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 <공동경비구역 JSA>

개인적으로 탈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 1998년 이후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영화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과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을 들고 싶다.

<공동경비구역>에 등장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군 중사 오경필(송강호 분)과 전사 정우진(신하균 분),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군 병장 이수혁(이병헌 분)과 일병 남성식(김태우 분)은 모두 상호 생성적인 관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노마드적 존재들이다.

특히 이들의 즐겁고 생성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한반도의 두 국가로 존재하는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중립국 스위스군의 소령 소피 장(이영애 분)의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로 다가오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일반인들의 억압적 삶"을 아주 잘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공동경비구역JSA>이 다른 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형성된 두 개의 국가관계를 서로 대립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상생적인 친구관계로 제시하듯이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지배적이거나 억압적인 상하의 수직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누이나 친구, 혹은 연인의 상호 동지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오누이인 미라(문소리 분)와 형철(엄태웅 분)의 관계 누나와 동생, 혹은 남성과 여성의 서열구조나 지배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딸과 엄마의 관계를 구성하는 선경(공효진 분)과 매자(김혜옥 분)의 관계도 또한 나이의 서열구조나 지배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오누이와 모녀관계는 연인관계로 등장하는 경석(봉태규 분)과 채현(정유미 분)의 친구관계처럼 또 다른 각각의 노마드들이 지니는 "사랑과 스캔들과 비밀"로 가득하다.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구성하는 관계의 끈은 근대 가족주의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연인이라는 상호 동지적인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정신분석이나 과학적인 문학비평에서 자주 애용하는 "아버지-엄마-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구조는 가족 구성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 생성적인 가족을 근대적인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구조로 정착시키려는 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 <가족의 탄생>

III. 근대적인 사진적 사유에서 탈근대적인 영화적 사유로의 이동

문제는 1948년 무렵의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958년 무렵의 프랑스로 이어져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으로까지 나아간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들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근대적인 사진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근대의 문학비평에서 시작하여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까지 확장된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은 시나 소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나 비언어적인 기호를 영화의 변화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고정된 상징이나 은유 혹은 환유로 해석한다.

이러한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은 마치 프란츠 카프카나 마르셀 푸르스트의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의 언어를 사유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에서 횡행하는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들을 해석할 수 없다.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과 달리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은 고정불변의 사진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영화 이미지들이 전달하는 새로운 연인관계나 친구관계의 관계적 기능을 발견하고, 그러한 새로운 관계적 기능이 생성적이고 생산적인 또 다른 관계들을 끊임없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적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러한 관게적 기능과 개념을 토대로 나와 우리의 생성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2010-10-18



엘 시크레토(The Secret in Their Eyes, 2009)

20세기의 기억과 사건이 만드는 21세기의 사랑


21세기의 새롭고 훌륭한 영화들은 대체로 미국의 헐리웃 영화시장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21세기의 탈근대 영화들은 이태리와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 이어 동유럽과 북유럽의 비주류 유럽,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혹은 대한민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등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헐리웃과 아카데미영화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영화와 영화제도가 근대적인 영어 제국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 대부분의 영화제들과는 달리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오직 영어로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영화들만을 다루고, 영어가 아닌 영화들은 대부분 취급하지도 않으며 단지 몇몇 영화들만 외국어 영화상 후보들로 올린다. 오늘날 미국인으로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스페니쉬, 아시안, 혹은 이슬람이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미국이 지니고 있는 지구촌 세계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도(WASP)" 중심의 영어 제국주의는 "아카데미 영화제"를 지배하고 있는 동시에 미국 영화들의 질을 하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2011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보다는 차라리 영어권 국가들을 포용하고 있는 영국의 런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캐나다의 밴쿠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국제영화제가 차라리 영어권 나라들이 만드는 영화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영화들이나 헐리웃의 영화관계자들이 아니다. 문제는 미국의 헐리웃 영화시장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형 극장들과 세계 3대 영화제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베를린, 깐느, 베니스 영화제"는 약간의 관심을 갖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오직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만을 신처럼 받들고 있는 우리의 저널 매체들과 영화정책 입안자들이다. 나탈리 포트만을 201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게 만든 <블랙 스완(Black Swan)>이나 코믹 배우 잭 블랙의 연기 이외에 별 볼일 없는 18세기 소설가 조나단 스위프트의 동명 소설보다도 못한 영화 <걸리버 여행기>는 버젓이 대형영화관에 걸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아르헨티나의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엘 시크레토>는 대형영화관에서 상영조차 하지 않았다.

200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영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들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초찌(Tsotsi: 깡패)>와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John M. Coetzee)의 소설을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국내에 알려진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불명예(Disgrace, 2009)>는 국내에 소개조차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멕시코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 중남미 탈근대 영화들을 이끌고 있는 감독들 중의 하나인 아르헨티나의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를 국내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헐리웃 영화배급사의 지배에서 벗어난 씨네 큐브, 모모, 아트 씨네마 등등의 수많은 소형 영화관들에서만 오직 볼 수 있는 영화를 사랑하는 축복들 중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의 하나이다. <엘 시크레토>는 미국의 헐리웃 영화들이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의 빈곤을 기존의 근대문학이나 예술로 치유하기 위하여 반복하고 있는 세익스피어나 18세기나 19세기 소설가들의 소설들, 혹은 유태인 학살 이야기 등등을 회상하는 것처럼 25년 전 과거의 아르헨티나를 다시 상상하고 과거와 다른 현재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헐리웃 영화들의 과거 회상들과 <엘 시크레토>가 만드는 과거 회상의 차이는 헐리웃 영화들이 대부분 세익스피어나 18세기, 혹은 19세기의 과거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엘 시크레토>는 현재의 삶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과거를 현재로 재구성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또 다른 현재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근대적인 1960년대의 영화 <하녀>와 탈근대적인 2010년의 영화 <하녀>가 서로 다르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근대적인 영화 <만추>와 2011년의 탈근대적인 영화 <만추>가 서로 다른 것과 유사하다.

II. "기억"과 "기억의 기억"이 지니는 사건의 차이

<엘 시크레토>는 25년 전 과거의 아르헨티나 검찰과 독재정부의 추악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은둔하여 살고 있는 벤자민 에스포시토(리카르도 다린 분)가 25년 전 살인사건을 소설로 다시 쓰기 위하여 25년 전의 과거를 다시 추적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25년 전 자신이 경찰로 근무했던 직장의 법원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던 아름다운 여인의 살인사건을 다시 구성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나체로 죽어있는 여인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했던 지극히 평범한 남자. 그는 그 아름다운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를 위하여 살해범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1980년대 한국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경기도 화성 살인사건을 다시 추적하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처럼 21세기 아르헨티나 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과거 속에서 현재로 돌아와 미완의 추억으로 끝이 나지만, <엘 시크레토>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새로운 삶을 만드는 사랑, 즉 새로운 현재의 생성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나체로 죽은 여인의 아름다운이나 그 여인을 기억하는 평범한 남자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의 아르헨티나는 당시의 대한민국처럼 독재와 군사정권의 시대였다. 그러나 독재와 군사정권은 지배자들이 만드는 폭력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권력이나 자본으로 서열화되어 있지 않다.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눈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권력자들에게 미국의 대학은 모두 하버드 대학이고, 서울의 대학은 모두 서울대학이다)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새로운 검사로 임명된 이렌 메넨데즈 해스팅스(솔레다드 빌라밀 분)와 검사보로 일하는 에스포시토, 그리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릴리아나 콜로토(칼라 쿠에브도 분)가 권력의 서열로 이루어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이지만, 그들은 단지 나이와 성의 구별을 벗어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일 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이 함께 일하는 법원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잊고 친구처럼, 혹은 연인처럼 해스팅스는 에스포시토를 도와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고 콜로토는 에스포시토를 위해 그의 사진을 숨기면서 나이가 어린 에스포시토를 위하여 자신이 대신 죽는다. 그들에게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한민국처럼 197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독재와 군사정권은 그들의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를 파괴하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든다.

나체로 살해당한 여인의 아름다움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의 열정을 위하여 에스포시토와 콜로토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체포하고, 에스포시토의 열정에 감복한 해스팅스의 재치로 범인의 자백을 얻어낸 강간살해범. 그러나 그는 그 폭력적 능력의 과감한 열정을 인정받아 군사정권의 좌익사범 테러를 위한 최고 권력의 정보원이 되고, 대낮의 법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권총으로 에스포시토와 해스팅스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열정을 폭력으로 해결하도록 유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를 파괴하여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로 보도록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과 파괴의 세계에서 해스팅스와 에스포시토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친구와 연인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부인 미국의 자본과 연결된 권력자의 딸이고 평범한 법원의 직원이다. 법원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 일부를 구성하는 검사와 그의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형사로 스스로를 보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그들이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러한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를 강요하는 법원이라는 권력기구에서 탈영토화하는 길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드는 폭력의 공포에 노출된 에스포시토의 눈에도 해스팅스는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권력자의 딸이고 법원의 검사일 뿐이다. 권력과 폭력으로 강요된 기억이다.

권력과 폭력의 공포가 만든 기억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삶이 만드는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폭력의 열정으로 만드는 기억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기억의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이고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필요로 하고 소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공포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적 삶을 위한 기억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 위하여, 혹은 자신의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되찾기 위하여 25년 전의 기억으로 되돌아 간 에스포시토는 평범한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었던 은행원 리카르도 모라레스(파블로 라고 분)를 다시 찾는다. 그의 평범한 삶의 열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현재적 삶도 25년 전의 기억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이나 국가나 사회가 해야 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권력과 자본의 폭력적 서열관계만을 유지하기 위한 공포의 도구가 되었을 때, 우정과 사랑의 열정을 지닌 평범한 소시민들은 스스로 폭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범인을 벌주고 있는 모라레스처럼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든 개개인의 폭력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III. 사랑과 우정이라는 열정의 부활



25년 동안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이 세상과 유리시킨 25년 전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 삶을 위한 기억의 기억으로 재구성한 에스포시토는 25년 전 과거의 연인이었던 해스팅스를 다시 찾는다. 해스팅스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에스포시토가 쓰는 소설의 완성이기도 하고, 또한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이 과거와 다른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보여주는 영화 <엘 시크레토>의 결말이기도 하다. 25년 전과는 달리 현재의 에스포시토와 해스팅스는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같은 직장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서로 다른 가족을 구성하였거나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 서로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다른 삶은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든 권력과 자본을 중심으로 한 서열관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남아서 평범한 은행원, 모라레스의 삶을 갉아먹는 과거의 기억이 만드는 폭력적 틀의 자그마한 일부이다. 25년 전에 만들어진 잘못된 폭력의 틀에서 벗어나서 다시 그 때처럼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되찾는 것은 해스팅스의 말처럼 너무 "복잡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다.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하여 소설이 있고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2011-03-13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0) - 현빈과 탕웨이가 시애틀에서 만난 까닭


I. 김태용 감독이 미국의 시애틀로 간 이유

1966년에 이만희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과 문정숙이 주연한 <만추(晩秋)>의 배경은 서울이다. 그리고 1981년 감수용 감독이 연출하고 정동환과 김혜자가 주연한 <만추>의 배경은 강릉이다. 그러나 2010년 김태용 감독이 연출하고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으로 활약한 <만추>의 배경은 미국의 시애틀이다. 1966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과 2010년의 시애틀은 어떤 유사성과 차이가 있을까?

1966년의 서울은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중심을 이루었던 수도이다. 그래서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와 강원도의 지역이 지니고 있는 전근대적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 삶을 찾아 떠나고자 했던 가족과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소수자들의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1981년의 서울은 다르다. 60년대와 70년대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근대적 자본과 권력의 서열구조로 고착된 1981년의 서울은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던 그 이전과 달리 여성, 노동자, 빈민들을 끊임없이 변두리로 추방시키는 근대적 국가권력의 수도였다. 그래서 1981년의 가족과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소수자들이 사랑과 우정을 찾아서 찾아간 곳은 강릉이나 청주, 춘천이나 전주 등등과 같은 지역의 소도시였다. 그래서 1981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가 배경으로 하는 곳은 강릉이다.

그런데 2010년 김태용 감독이 <만추>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간 곳은 미국의 시애틀이다. 김태용 감독이 시애틀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60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에서 보여주었던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의 공간이 오늘날의 미국 시애틀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6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공간은 근대적인 가족과 자본의 권력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과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을 찾는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대한민국의 외부로 쫓아내는 공간이 되었다. 김태용 감독은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우정을 추적하기 위하여 미국의 시애틀로 갔다. 물론 그곳이 미국의 시애틀이 아니어도 좋다.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이 이루어지는 곳은 미국의 텍사스일 수도 있고, 필리핀의 마닐라일 수도 있고, 인도의 캘커타이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권력과 자본들도 또한 1966년의 서울이나 1981년의 강릉처럼 호락호락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태용 감독은 1966년 <만추>의 배경이었던 서울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돈(자본주의의 자본)에 대한 욕망이 1981년 <만추>의 배경이었던 강릉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깡패집단이 되고, 마침내 2010년 미국 시애틀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미국이라는 깡패국가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을 추적한다.

II. 탈근대적 지구촌의 깡패국가, 미국

<만추>라는 영화가 시작하면서 카메라의 앵글은 로스앤젤레스 감옥에서 살인죄로 7년 동안 복역을 하고 있는 애나(탕웨이 분)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듣고,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받아서 감옥으로부터 나와 시애틀 행 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건달풍의 훈(현빈 분)이가 시애틀 행 버스에 올라 한국 여성인줄로 착각하고 다가간 여성이 바로 애나이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흑인이나 스패니쉬, 혹은 이슬람인이나 유럽인들처럼 서구 유럽이 지난 500년 동안 지구촌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근대화 과정에서 시간의 격차를 지니고 미국에 온 유랑자들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국적이 없고 오직 사랑과 우정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미국이라는 국가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근대화 과정의 유랑자들이 만든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미국은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인디언들은 물론이고 백인, 특히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범죄자나 타자로 취급한다. 훈이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직 돈만 벌어서 자기 나름대로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애나의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7년 동안의 소외된 삶에서 우러나오는 쓸쓸함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돈만이 그의 살아있음을 보장해 줄 것이고, 그 돈을 위하여 현실의 영혼과 젊음을 파는 것은 미국이라는 깡패들의 나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애나는 다르다. 아직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훈이보다 한 세대나 두 세대, 혹은 그 이전에 미국에 온 그녀는 돈이란 삶의 보완물이지 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이미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근대적인 남성의 애정불구자이고, 오빠를 비롯하여 그녀의 가까운 가족들은 오직 어머니가 남긴 돈에만 관심이 있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사랑이나 우정은 그저 사치품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소수자들로 치부하는 앵글로-색슨 중심주의 깡패국가에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돈과의 관계만을 삶의 중심에 우뚝 세우고 사는 고립된 감옥의 세계를 감지한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미국이 앵글로-색슨 중심주의 깡패국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소수자들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돈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좀비들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좀비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7년의 감옥생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올 수 있었던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반납하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루지 않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망설임의 순간에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시애틀 행 버스에서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붙였던 좀비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느낌을 지닌 훈이다.

근대의 국가적 서열구조나 자본주의가 만든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삶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욕망은 모든 살아있는 사람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러한 생명의 힘은 근대의 국가적 서열구조나 자본주의에 덜 물들어 있는 여성에게 더욱 강렬한 힘으로 작동한다. 그 사람이 바로 시애틀의 호텔로 찾아와서 훈이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함께 도망치자고 요구하는 옥자(김서라 분)이다. 애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받은 옥자의 애절한 목소리를 훈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옥자에 대한 훈이의 마음은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힘을 믿고 있는 동일한 인간에 대한 우정이다.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을 성적 대상이거나 인식적 타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그러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도 못한다. 옥자의 미국인 남편, 스티븐(제임스 번즈 분)은 권력이나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훈이에게 다가가는 옥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훈이의 삶을 폭력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마음과 느낌이 아니라 돈과 권력으로 사랑과 우정을 가로채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폭력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훈이를 애타게 찾는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2년 후 감옥에서 출소한 애나의 기다림은 어떻게 되었을까?

III.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

1966년의 <만추>는 당시 서울의 자본과 권력이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81년의 <만추>는 국가권력에 빌붙어 있는 깡패집단이 충청도 사람과 강원도 사람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010년의 <만추>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미국의 자본과 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태용 감독이 영화 <만추>를 다시 만들기 위하여 서울과 강릉을 거쳐 미국의 시애틀로 간 이유는 오늘날 지구촌 모든 지역의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만드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미국이라는 자본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영화적 삶의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그리고 2010년의 <만추>를 통하여 1981년과 1966년의 <만추>를 되돌아 볼 때, 미국이라는 제국을 정점으로 하는 각 지역의 깡패집단과 자본의 종속으로 이루어진 국가권력이 지구촌 모든 지역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거대한 족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추>에 등장하는 훈이와 애나가 서로서로 갈망하며 찾는 것처럼 이라크인과 이란인, 아프가니스탄인과 파키스탄인, 볼리비아인과 과테말라인이 서로서로 갈망하며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미국은 마치 영화 속의 스티븐처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지역과 지역이 만나지 못하도록 폭력으로 가로막는다.

1966년, 1981년, 그리고 2010년의 <만추>가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이웃하고 있는 지역과 지역, 그리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맺는 관계를 차단하는 근대적 국가와 깡패집단의 최고 정점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영화 <만추>에서 훈이를 애타게 찾는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은 우리와 같은 100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 즉 서남아시아와 이슬람 지역의 300년,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지역의 500년 역사가 만든 근대화 과정의 종말에 대한 욕망이고 기다림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지난 100년, 300년, 혹은 500년의 근대화 과정은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의 지역과 지역, 그리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망각하고 오직 식민지 지배국가와 피식민지 국가의 종속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만을 사유하고 행동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반도가 지니고 있는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는 지역과 지역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오직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으로 점철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은 미국이 근대 제국주의의 서구 유럽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한 나라로 되돌아가고, 훈이와 애나와 같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지역과 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자유롭게 만나서 사랑하고 우정을 맺는 삶에 대한 욕망이고 기다림이다.


2011-03-27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2011) - 죽음 권하는 사회와 교육


I. 새로운 감각의 탄생

▲ 윤성현 감독의 영화 <파수꾼> (2011)

<아이들>로 2008년 "대학생평화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윤성현 감독은 분명히 지난 20세기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서 21세기 지구촌 사회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윤성현 감독과 같은 새로운 감독들에게 영화는 미국이나 일본 혹은 서구 유럽의 부속물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삶처럼 그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지역이나 사회의 느낌이거나 감각이다. 그러한 느낌과 감각은 그들과 같은 지역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관객들과 더불어 과거와 다른 지역과 사회의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구성한다. 그것이 영화가 미래를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윤성현 감독과 같은 새로운 신인들이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구성하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난 20세기의 정신적 상처(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사회와 그 사회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폭력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초중등교육과 대학 교육의 현장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만들어진 식민지성과 미국에 대한 종속의 근대성이 결합하여 구성된 "식민지 근대성"은 끊임없이 한국 사회로 하여금 선진국을 해바라기하는 후진국을 강요하며, 또한 한국 교육을 영어 식민지로 만들어 미국의 대학을 해바라기하는 식민지 대학과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양철북>(독일, 1979)에 등장하는 "오스카"가 나찌 치하에서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난장이로 남아있는 것처럼, "식민지 근대성"은 한국 사회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멈추고 일본과 미국의 권력을 해바라기하는 난장이 국가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식민지 근대성"은 이 세계와 인간과 자연을 주인과 노예,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서열주의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우정을 구성하는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을 지닌 윤성현과 같은 새로운 감독들에게 그들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고 한국사회를 난장이로 만드는 정신적 상처이다. 그래서 윤성현 감독은 그의 사춘기, 혹은 청소년 시절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파수꾼>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 관객들도 영화 <파수꾼>을 통하여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식민지 근대성"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과 우정의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으로 구성된 21세기의 한국사회가 지니는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사유하게 된다. 그 역동적 생명의 힘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모두 서열주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을 구성하는 일대 일 상호관계를 구성하는 역동적 생명의 힘이다. 영화 <파수꾼>은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의 힘이 "식민지 근대성"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사회를 미래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힘을 잘 보여준다.

II. 죽음을 강요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근대 인문학의 문명과 야만, 그리고 근대 사회과학의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으로 구성된 "식민지 근대성"은 야만과 후진국의 식민지 지역이 문명과 선진국의 제국주의 지역에 대한 열등감으로 구성된 식민지인의 자의식이 만드는 근대적 "이성"이다. 사랑과 우정의 일대 일 상호관계를 배제하고 오직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서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근대적 "이성"은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성"의 "이성"은 제국주의 지배를 위하여 근대적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강요되기도 하고, 또한 열등감을 지닌 식민지인 스스로 취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 근대성"의 열등감은 이미 지리적이거나 역사적으로 문명과 야만이거나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자부심으로 전환되거나 서열구조의 최고에 이르는 승자에 도달할 수 없는 의식의 구조이다. 그 구조 속에서 자부심을 획득하거나 승자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래서 영화 <파수꾼>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에 다니는 대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처럼, 혹은 자살률 세계 최고라는 대한민국 자살공화국의 실상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영화 <파수꾼>은 한 소년의 죽음을 추적하는 것으로 "식민지 근대성"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식민지 근대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근대 한국사회의 최고 정점이기 때문에, 서울의 강북과 지역 중소도시에서 그토록 우러러보는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기태"(이제훈 분)의 죽음은 "식민지 근대성"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 근대성"을 삶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조성하 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자라난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영화에서 "기태"의 아버지가 아들 "기태"의 죽음을 추적하는 것과는 달리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과 같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자라난 한국사회의 식민지 근대권력은 죽음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와 교육이 지니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본질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본질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과는 달리 소시민의 "식민지 근대성"을 경험한 "기태"의 아버지는 "동윤"(서준영 분)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기태"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기태"의 아버지는 그 책임감을 다하기 위하여 오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고 싶을 뿐이다.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기태"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 "동윤"이다. 그는 이미 "식민지 근대성"을 유지하려는 서열구조의 교육에서 스스로 벗어나 있는 자유인이다. "동윤"이는 중학교 시절에 주먹으로 학교를 제패하는 서열구조의 "짱"을 경험하였지만, 그것이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 속에서 결코 영속적으로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지닌 21세기의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년이다. 그래서 그는 서열구조의 "짱"과 그 똘마니들이라는 식민지적 서열구조에서 벗어나 "기태"와 "희준"(박정민 분)이와 함께 상호 일대 일의 친구관계를 구성하는 우정의 역동적 생명의 힘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단위는 단지 우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소년들에게 다가오는 낯선 사랑은 식민지 근대성을 넘어서는 우정보다도 더 큰 힘이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율적인 생명의 존재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대 일 관계를 맺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생명성이다. "동윤"이와 "기태" 그리고 "희준"이가 만드는 "식민지 근대성"을 인위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우정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등장하면서 그 본색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참하게 깨어진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 근대성"의 교육구조가 온 몸에 배어있는 "기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기태"는 고등학생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의 "식민지 근대성"이 만든 21세기의 전형적인 기형아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언어마저도 잃어버리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생각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초중등교육의 희생자이며, 서로 동등한 사랑과 우정을 만들 줄 모르는 식민지 근대 권력의 구조와 동일하게 사유한다. 자신의 적과 싸우면서 이미 적과 동일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 교육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랑과 우정마저도 "식민지 근대성"의 폭력과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동윤"이와 "희준"이는 각각의 자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태"는 사랑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사랑을 할 줄도 모르는 불구자이다.

그래서 "기태"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희준"이가 좋아하는 "보경"(정설희 분)이가 부담스럽고, "보경"이 때문에 점점 멀어져만 가는 "희준"이가 언짢다. "식민지 근대성"의 한국사회와 교육이 "기태"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만들 줄 모르게 만들고, 심지어 사랑과 우정의 관계조차도 폭력적 서열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태"는 사랑과 우정이 산산조각이 난 후에 비로소 스스로 "식민지 근대성"의 화신이 되어 산화하는 것이다.

III. 사랑과 우정의 관계 재영토화하기

"동윤"이는 "기태"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21세기를 살고 있는 파릇파릇한 "기태"라는 소년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태"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교육을 이끌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이어야만 한다. "기태"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동윤"이는 혼잣말로 "그래, 네가 최고야!"라고 말한다. 오직 "최고"만이 살아남는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 그리고 그 "최고"는 단지 언어의 허상일 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식민지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그 "최고"를 달성하는 길은 오직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길일뿐이라는 사실을 "동윤"이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사라져버린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동윤"이의 몫이다. "기태"가 "식민지 근대성"의 한국사회와 교육구조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식민지 근대성"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동윤"이와 "희준"이는 "기태"만을 남겨놓고 그 구조에서 도망쳤다. 그래서 "기태"의 외로운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알고 있는 "동윤"이는 "식민지 근대성"의 완전한 죽음이 오지 않는 이상 "기태"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구조나 교육구조 내부가 아니라 그 구조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영화의 "동윤"이는 윤성현 감독이 된다. 그래서 윤성현 감독은 영화 <파수꾼>의 영상 이미지 속에서 "동윤"이가 되어 영화 관객들과 함께 "기태"의 장례식과 더불어 우리 사회와 교육에 만연되어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을 치르자고 제안한다. 그 장례식에는 "식민지 근대성"의 삶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는 "기태"의 아버지도 있다. 영화 속에서 거의 아무 말도 없는 "기태"의 아버지는 영화 밖에서 관객들과 함께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을 치르는 대열에 함께 할 것이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만이 이미 죽음을 선택한 카이스트의 학생들이나 수없이 많은 청소년들과 더불어 "기태"의 진정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태"의 아버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장례식은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구조 속에 내재해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열구조의 타파는 지난 20세기의 세대들이 아닌 새로운 21세기의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는 교육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타파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기태"처럼 "식민지 근대성"의 망령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동윤"이나 "희준"이처럼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에서 탈영토화하여 사랑과 우정의 사회와 교육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2011-05-01



'한국 환경영화의 흐름'과 '강, 원래 프로젝트'의 단편영화들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


I. 근대 다큐멘터리 영화의 비극

2011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상암 CGV에서 상영되는 서울 환경영화제는 8살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 영화축제이다. 그러나 8살 되는 서울 환경영화제의 영화축제는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문화관광부의 예산 지원이 끊긴 상태이다. 녹색성장을 선전하는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의 환경을 생각하기 보다는 한강을 비롯한 4대강 파괴 프로젝트를 통한 대형 건설사 살리기를 위하여 환경영화제의 지원비는 삭제한 것이다. 그래서 제 8회 서울 환경영화제는 난지도 쓰레기 소각장 위에 설치되어 있는 상암 CGV의 한 귀퉁이에서 초라하게 열리고 있다. 이것이 녹색성장을 부르짖으며, 친환경과 친서민 정책을 홍보하는 이명박 정부의 실상이다.


이명박 정부는 뉴타운 개발정책과 4대강 파괴 프로젝트가 친서민이고 친환경인 녹색성장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환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서구 유럽에 의하여 만들어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프로젝트가 서우 유럽인들만을 위한 "원주민 학살 초토화 프로젝트"이듯이 이명박 정부의 뉴타운 개발정책과 4대강 파괴 프로젝트의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환상은 서구화되고 유럽화된 자본가들만을 위한 대한민국 사회와 자연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 근대성의 개발과 발전의 환상이 근본적으로 한반도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파괴와 분열인 이유는 서울 환경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진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진을 나열하는 영화는 미래의 변화를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곧 생성과 창조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의 변화를 사유하기 위한 영화의 장르가 다큐멘터리이다. 그런데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이후로 다큐멘터리 영화는 항상 비극이 되었다. 그것은 근대의 프로젝트, 즉 서구화(기독교화)와 산업화 그리고 도시화라는 서구적 근대의 문명이 곧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발이거나 발전이라고 믿고 있는 환상들은 지난 16세기 서구 유럽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즉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이라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구절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서구 유럽의 아메리카 침략이었고, "희망봉 발견"은 아프리카 대륙의 침략이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지난 16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근대의 역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백인들에 의한 거대하고 장기적인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19세기 초반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후이거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독립 국가들은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서구화 되고 제국주의화 되고 기독교화 되어, 스스로 서구적 근대의 가치들을 신봉하면서 자신들 나라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을 더욱 가속시켰다.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하는 우리의 서울과 같은 각 나라들의 중심부에는 서구 유럽이거나 미국 백인들이 이식되어 살고 있고,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자연 중심부에는 서구 유럽과 미국의 동식물들이 이식되어 살고 있다.

II. 인천 <배다리 사람들>과 <강, 원래 프로젝트>의 동식물들



제 8회 서울 환경영화제에서 "한국 환경영화의 흐름"이라는 섹션으로 묶여있는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류무선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엄태화 감독의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 김소희 감독의 <배다리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구적 근대화의 인식론은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듯이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서구 중심, 선진국 중심, 인간 중심, 남성 중심, 그리고 문명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류무선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서 보듯이 물과 바람이 내포하는 자연은 외딴 시골이나 지리산 골짜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시멘트가 되거나 아스팔트가 되어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통하여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냄새로 우리의 생명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변화시킬 힘도 함께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엄태화 감독이 "흔한 이야기"라고 명명하듯이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비서구, 후진국, 동물, 여성, 그리고 자연으로 구성된 근대 국민국가 변두리의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다.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는 그렇게 밀려나고 밀려나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서울이나 개발 도시에서 떠나 경기도 수지의 신봉리에 들어와 살았던 가족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나 그곳이 "신봉리"에서 "신봉동"이 되어가는 와중에 신봉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곳에 살고 있었던 고양이 가족과 멧돼지 가족이 모두 신도시 개발이라는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들이 된다. 나무와 흙과 돌의 바람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아파트의 바람이 되면서 나무와 흙과 돌의 바람으로 사는 원주민들은 사라지고,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아파트의 바람을 먹고 사는 서구화 되고, 자본주의화 되고, 기독교화 된 이주민들이 원주민 흉내를 내는 것이다.

김소희 감독의 <배다리 사람들>에는 최초로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피난을 나와 이곳으로 왔거나 혹은 도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서울의 낙원동이나 돈암동의 재개발에서 밀려나 강 건너 사당동이나 방배동으로 갔다가 다시 강남 개발로 상계동이나 일산, 혹은 성남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신도시 개발로 더 멀리 쫓겨난 사람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 배다리 마을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만든 이들이 그곳의 원주민들이다. 그곳을 정말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만드는 개발과 발전이라면, 그들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도록 만드는 것을 정부와 시는 도와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와 시, 그리고 시의회 사람들은 배다리 마을을 스스로 "역사문화 마을"로 만들어 보호하면서 변화하고자 하는 원주민들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총 다섯 개의 단편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는 <강, 원래 프로젝트>의 단편영화들에는 죽어가는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19세기와 18세기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스페인어나 영어, 혹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 아프리카인이거나 아메리카 인디언이듯이 한강과 낙동강의 원주민은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하는 식물이거나 물고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이동렬 감독의 <강길>이나 <강에서...>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이고, 박명순 감독의 <농민 Being>에 등장하는 유기농 농민이며, 김준호 감독과 박채은 감독이 공동 제작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등장하는 노동자이며, 또한 김성만 감독의 <죽지 않았다>에 등장하는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어린이,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이 강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들의 삶이 자연의 동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와 서구 근대성이 만드는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나 시인, 혹은 영화감독처럼 어린이,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과 같은 사회와 국가, 혹은 지역의 인간 원주민들이 물고기와 강 주변의 식물들, 그리고 철새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 삼아 삶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더욱이 살아있는 생명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만드는 변화와 생성의 아름다움은 결코 인간의 기술이 만드는 개발이나 발전의 인위적 아름다움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서 자연과 인간을 새롭게 생성시키는 우주의 아름다움은 근대적 개발과 발전의 환상 속에서 모든 아름다움을 자본과 권력으로 치환되는 근대적 개발의 과학과 철학으로 무장한 근대인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 살면서 서구 유럽의 가치와 미국의 자본과 권력으로 사는 것은 한반도 대한민국의 원주민이 아니라 식민지 이주민이고, 식민지에 이식된 자본과 권력의 노예이다.

자본과 권력의 이주민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던 어린이나 소녀, 혹은 여성이나 농민, 혹은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어린이 되기, 소녀 되기, 여성되기, 혹은 농민 되기나 노동자 되기는 과거로 돌아가거나 생물학적 성을 바꾸거나, 직업을 바꾸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진정한 원주민들인 소수자 되기는 어린이나 농민의 느낌, 소녀의 감각, 그리고 여성과 노동자의 생산적 즐거움을 우리가 스스로 향유하는 것이다.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이라고 배운 근대적 지식과 이성을 버리고 어린이와 농민의 느낌과 소녀의 감각을 향유하고, 그리고 여성과 노동자의 생산적 즐거움을 향유할 때, 우리는 뉴타운 개발정책이나 4대강 프로젝트와 같은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녹색성장"이니 "친환경" 혹은 "친서민 정책"으로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때, 우리는 이명박 정부와 더불어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참가하는 범죄자들이 되는 것이다.

III.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자!

서구적 근대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대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서구 유럽의 섬이 되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일부가 아니라 서구 유럽의 변방이 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서구 유럽 백인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서울은 아시아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라 뉴욕이나 런던, 혹은 파리나 베를린보다 더 근대화 된 서구 유럽이나 미국의 한 도시가 되었고, 청계천처럼 이 땅의 흙이나 바람, 혹은 물을 마시며 살아가야만 하는 원주민들의 생명은 시멘트나 아스팔트 혹은 아파트로 꽉꽉 막아 숨을 쉬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러한 서울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이제 인천과 부산, 광주와 대구, 그리고 대전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대한민국 전 국토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적전"으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적 인식과 과학, 그리고 철학적 사유방식이 건재하고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처럼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대한민국 원주민 문화의 순례를 떠나는 일이다. 한강을 비롯한 낙동강, 그리고 다른 여타의 강들은 현재의 청계천처럼 시멘트로 범벅이 될 것이고, 그곳의 원주민 동식물들은 숨을 쉬지 못하고 마침내 사라질 것이며, 그렇게 위장된 강물 위에 현재의 청계천처럼 새롭게 이식된 동식물들이 마치 원주민처럼 숨을 쉬며 살 것이다. 이동렬 감독의 <강길>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례의 길을 카메라의 렌즈로 잡았다. 그 순례의 길에 동참하자!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서울이나 인천, 혹은 부산에 남아있는 마지막 원주민들의 문화를 순례하자! 용산 서부이촌동의 골목길, 동대문 왕십리나 황학동 거리, 서대문 아현동의 언덕들을 오르내리자! 그렇게 순례의 길에 오르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사진들의 기억과 더불어 어린이, 소녀, 농민, 여성, 그리고 노동자의 느낌과 감각과 즐거움을 향유하자!


2011-05-23



강형철 감독의 <써니>와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

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 되기


I. 어린이 되기와 소녀 되기의 느낌과 감각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왜곡된 학문들 중의 하나가 발달심리학이다. 유아는 어린이로 발달하고, 어린이는 청소년으로, 그리고 청소년은 청년과 장년으로 발달하여 마침내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하여 어른이 아이들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백인이 유색인을 지배하고,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현실의 원칙을 제시한다. 더군다나 이런 발달심리학의 끝은 죽음이다. 이러한 발달심리학의 논리로 프로이드는 현실의 원칙에 적응하지 않고 저항하거나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을 "죽음의 욕망"이라고 보았다. "생명의 욕망"과 "삶의 욕망"을 "죽음의 욕망"으로 전이시켜 지배의 논리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근대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결코 어린이가 어른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며, 소녀가 아줌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변화하고 새롭게 생성하는 것처럼 어린이는 어른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소녀는 아줌마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과정 속에서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사람이 있고, 그러한 느낌과 감각을 망각하거나 스스로 저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근대 국가사회를 유지시키고 있는 학교나 교회 혹은 가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나 군대나 법원 혹은 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 속에서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은 항상 배제되거나 억압된다. 이러한 근대 국가사회 속에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되살리게 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 속에서 문학과 예술은 죽어가고 있고, 심지어 어린이나 소녀들에게조차 경쟁과 싸움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무상급식을 어른의 논리로 재단하고, 대학 등록금 문제를 권력과 경쟁의 논리로 재단한다. 어른의 논리나 권력의 논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어린이나 소녀는 죽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반장선거에 어른들의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여중생이나 여고생의 집단 난투극이 어른 깡패집단보다 더 요란하다. 발달 심리학을 비롯한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지식을 통하여 형성된 어른의 세계가 만든 근대의 비극이다. 이러한 근대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립과 갈등의 근대적 지식에서 탈영토화하여 변화와 생성을 보여주는 탈근대의 영화들을 통하여 잃어버린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탈근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II. 유호정의 소녀 되기와 소피 마르소의 어린이 되기




2009년 <과속스캔들>로 데뷔한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는 이 세상에서 부족할 것 하나 없는 강남 아줌마 "나미"(유호정 분)가 우연히 병실에 누워있는 고등학교 친구 "춘화"(홍진희 분)를 만나면서 1980년대의 고등학교 소녀 "나미"(심은경 분)가 되는 이야기이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의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With Love ... From The Age of Reason)>(2010)는 투자 정보회사의 커리어 우먼으로 활동하는 "마거릿 벨"(소피 마르소 분)이 일곱 살이었을 때의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다시 되찾는 이야기이다. <써니>에서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갓 전학을 한 고등학교 소녀 "나미"의 느낌과 감각을 잃어버린 강남 아줌마 "나미"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고, 자신의 고민 속에 빠져있는 사춘기 소녀 딸에게도 소외되어 무기력한 삶에 젖어있다. 이와는 달리 <디어 미>에 등장하는 "마거릿"은 멋있는 남자와 결혼도 하고 남편과 함께 투자 정보회사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활동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강남 아줌마 "나미"는 집에서 딸의 교복을 입고 이리저리 으스대다가 갑자기 들어온 딸에게 창피함을 느끼듯이 고등학교 시절의 칠공주파 소녀가 되기 전에 이미 그 시절의 느낌과 감각으로 되돌아간다. "나미"가 칠공주파 소녀들을 다시 만나서 최초로 행한 일은 어른의 논리로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소녀 깡패들을 혼내주는 것이고, 또한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은 교복 자율화가 이루어져 자유로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데 반하여 이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딸은 다시 교복의 시대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1980년대의 거리에서 칠공주파에서 이루어지는 칠공주파의 싸움이 민주화 투쟁의 대학생들과 경찰의 싸움으로 패러디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1980년대에는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어린이나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대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에서 어린이나 소녀가 된 할머니의 역할이나 혹은 대학생 운동권 오빠의 치기가 자본의 논리나 권력의 논리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에 "나미"와 더불어 칠공주파 소녀들은 다른 깡패 소녀들과는 달리 더불어 사는 소녀들의 느낌과 감각을 더욱 많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 혹은 개인적 관계나 사회 그리고 국가의 생산성과 파괴성은 논리나 이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논리나 이성은 권력의 논리이고 자본의 논리이다. 이런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만이 어린이나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헛된 것이거나 유치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써니>에서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 "수지"(민효린 분)이다. 그래서 수지는 "나미"가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그녀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지를 안타깝게 여긴 "나미"가 수지의 집에 찾아갔을 때, 수지의 엄마는 진한 사투리를 쓰고 있다. 그것을 창피하게 여긴 "수지"는 "나미"가 "지역차별"이나 "지역감정"이라고 말한 것을 쉽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을 바로 느낀다. 그런 후에 서로가 화해하고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마시며 우는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배꼽이 빠질 정도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싸우는 추악함과 비교하여 이들이 술을 마시며 울고불고 하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답다.

소녀와 어린이들의 관계가 만드는 아름다움은 상호 생성적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논리에 조금 가깝게 다가간 수지가 엉엉 울면서 "예뻐서 미안해! 나 이제 그만 예뻐질 게, 엉엉-- 네가 예뻐져!"하고 나미에게 하는 말이 소녀와 어린이들의 진실한 느낌과 감각이기 때문에 감동은 더욱 배가된다. 수지처럼 오늘날의 서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에 살아서 미안해! 서울은 충분히 발전했어, 엉엉-- 이제 지방이 발전해야 돼, 그러니까 행정수도도 옮겨야 하고, 대학들도 서울과 지방이 똑같아야 해!"하고 말이다. 무상급식도 마찬가지이다. <써니>에 등장하는 칠공주파 소녀들처럼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와 상관없이 서로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듯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모두가 지역과 돈 혹은 권력에 상관없이 모두 즐기는 무상급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학 등록금 문제도 이와 같게 생각해야만 한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변화함과 더불어 초중등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제 대학교육도 보편교육이 되어버렸다.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되찾은 강남 아줌마 "나미"는 국립대와 사립대, 혹은 B학점 이상이나 이하와 상관없이 대학 등록금도 모두 무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디어 미>에 등장하는 "마거릿 벨"도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마침내 어린이 되기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써니>의 "나미"가 일시적으로 고등학교 소녀 되기의 느낌과 감각을 획득한 것과는 달리 "마거릿 벨"의 어린이 되기는 단순한 느낌과 감각의 획득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꾼다. 이러한 차이는 "나미"의 소녀 되기가 교육을 통한 사회화와 어른의 세계에 어느 정도 진입한 것과는 달리 "마거릿 벨"의 어린이 되기는 교육제도와 사회화의 세계에 진입하기 이전의 어린이, 그래서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로 유지되는 어른의 세계가 완전히 잃어버린 순수한 느낌과 감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벨이 7살 어린이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가는 곳은 아프리카이다.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만이 판을 치는 투자 정보회사의 능력을 갖춘 커리어 우먼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한 우물 만들기 사업에 뛰어 들어간 것이다. 서구 유럽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풍요로운 땅을 빈곤의 땅으로 만든 근대의 범죄를 "마거릿 벨"이 어린이가 되어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III. 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 되기

서구 근대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지식이 단순히 발달심리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만은 아니다. 어린이와 어른을 구별하거나, 혹은 근대화 이전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와 서구 유럽의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비문자의 세계와 문자의 세계였다. 발달심리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세계라는 가정 속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결코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세계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우주 은하의 세계가 지구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비문자의 세계가 문자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세계는 비문자의 세계를 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것이고, 그래서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를 개발하고 계몽시킬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모든 근대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서구 근대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지식들이다. 이러한 지식들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지배와 연루되어 있다.



<써니>에 등장하는 강남 아줌마 "나미"를 세상 사람들은 "강남 좌파"라고 부른다. 그녀가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에서 벗어나 고등학교 소녀의 느낌과 감각으로 "지역차별"을 이야기하고, "무상급식"을 이야기하고, 또한 "대학등록금 무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강남 좌파"라고 부른다. 그것은 곧 오늘날 이야기되는 대한민국의 "지역차별"과 "무상급식"과 "대학등록금 무상"과 "남북의 평화적 대화"와 "4대강 개발반대" 등등은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가 아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느낌과 감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미"와 같은 "강남 좌파"의 강남 아줌마가 하나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가 되는 길은 강형철 감독의 <써니>나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탈근대의 영화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어린이 되기와 소녀 되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나미"와 같은 강남 아줌마들이 더 많이 강남 좌파가 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서울과 지역, 그리고 남과 북의 차별 이 없는 새로운 탈근대의 나라가 될 것이다.


 2011-06-07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

<도가니>, 근대적 인권과 탈근대적 문화권 사이


I. 근대적 구조의 이성적 제도

세상이 온통 "도가니" 열풍이다. 국회는 "도가니 방지법"을 세운다고 법석이고, 광주시 교육청은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복지학교를 폐교한다고 난리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나 황동혁의 영화 <도가니>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대적 구조의 이성적 제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 <도가니>에는 끊임없이 근대적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마침내 죽음의 고통으로 몰고 가는 근대적 제도의 악이 표현되어 있다. 그 근대적 구조의 악들은 교사나 교장, 혹은 경찰이나 판사의 개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서구의 식민지 근대 국민국가로 만드는 근대 기독교 종교의 교회와 근대 계몽주의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와 근대의 서구적 인권을 토대로 한 법원이다.



19세기 근대 미국의 "도가니"를 표현하고 있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 의 <도가니(Crusible)>가 21세기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로 재현되듯이, 근대적 종교와 근대적 교육과 근대적 법률이 지속하는 한 전남 무진시 자애학원의 "도가니"는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끊임없이 지속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경악을 하며 "실화"라고 언급되는 전남 무진의 자애학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지 무진시의 자애학원이라는 특수한 기관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 모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근대적 일상인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이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생명의 문화를 가진 개체들이다. 그러나 근대적 기독교와 근대적 교육과 근대적 법률은 그들이 각각 생명의 문화를 가진 개체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서 밀러의 <도가니>를 <시련>이라고 번역하고 있듯이, 근대 기독교는 그들이 신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상적 "시련(crusible)"을 감수해야만 하는 신의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영어를 못하고 한국어를 하거나 강남에서 살지 못하고 강북에서 사는 것은 영어를 하기 위하거나 강남에서 살기 위한 시련이 아니라 한국어의 문화이고 강북의 문화이듯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은 말을 하거나 듣기 위한 시련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문화이다. 그들은 또한 근대 문명의 방식으로 말을 하거나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이 아니라 특수교육을 받아야만 한다고 근대 계몽주의 교육은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교장의 노예이면서 종노릇을 하는 폭력교사 박보현(김민상 분)이 민수(백승환 분)를 개 패듯이 패면서 "선생님 말을 왜 안 듣니?"라고 하는 말처럼 "선생님 말을 잘 듣는" 것은 근대 식민지 사회와 국가의 노예나 종노릇을 하도록 만드는 교육이다. 소위 근대의 식민지적 이성을 가진 인간, 즉 서구ㆍ백인ㆍ남성을 모델로 하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법률이 보장하는 인권도 마찬가지이다.

II. 소수자 되기를 달성하는 탈근대적 생명의 힘

서구적 근대의 인권(human rights)을 탄생시킨 주권(sovereignty)은 16세기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탄생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주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주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식민지 지배권(sovereign power)이다. 16세기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왕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식민지인들은 주권의 보호를 받지만, 왕의 지배권이 미치지 못하는 산악지방의 원주민들은 마치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학생들처럼 주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취급되었다. 근대 국민국가는 왕의 주권을 국가의 주권으로 변형시킨 것일 뿐이다. 19세기 초 조선의 주민 수가 천만 명이었는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후의 오늘날 7천만 명이 되었는데 반하여 19세기 초 미국의 인디안 원주민들의 수가 2천만 명이었는데 오늘날 4백만 혹은 5백만 명이라니, 근대적 주권과 인권을 토대로 한 미국 백인의 근대적 폭력과 야만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주권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서구 유럽 국가로 역수입되어 근대 국민국가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인권"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인권이 만들어진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서 여성과 노동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인권을 통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서구적 근대의 인권을 토대로 한 야만과 폭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9.11 사건" 이후 부시 전 대통령이 "미국의 편은 선이고 미국의 반대편은 악"이라는 근대적 인권의 신념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들의 삶의 문화를 말살하고 있다. 영화 <도가니>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아니다.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특수학교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을 "도가니"로 만드는 것은 서구ㆍ백인ㆍ남성들만의 주권과 인권을 근대적 선이라고 믿고, 서구ㆍ백인ㆍ남성들에게 저항하거나 그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혹은 북조선을 비롯한 아프리카나 중남미 혹은 이슬람 지역을 악이라고 설교하는 기독교 교회와 그들에게 폭력과 야만을 강요했던 근대의 역사를 계몽이라고 가르치는 교육, 그리고 편협한 근대적 인권의 신념으로 가득 찬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를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법률이다. 영화 <도가니>에서 근대적 이성과 인권에서 벗어나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특수학교의 폭력과 야만을 폭로하는 미술 교사 강인호(공유 분)와 인권운동가 서유진(정유미 분)만이 그러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법률에서 벗어나 있는 탈근대인들이 아닌가? 그들이 탈근대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적 인권과 제도에서 벗어나 있는 연두(김현수 분)나 유리(정인서 분) 그리고 민수와 같은 탈근대인들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강인호와 같은 번민에 시달리는가? 식민지적 종교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권력적이고 파괴적인 교육제도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유를 억압하고 정의롭지 못하며 평등하지 않는 법률제도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서구적 근대의 식민지 국가에서 목사나 신부 혹은 검사나 판사는 물론이고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목사와 신도 혹은 판사와 피고인의 관계처럼 상호존중의 일대 일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에 혹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일 뿐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종교나 교육 그리고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폭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길이다. 강인호가 어머니가 준 "란 화분"을 교장에게 주려고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민수를 짐승처럼 끌고 가는 정말로 짐승과 같은 박보현에게 "란 화분"으로 냅다 치는 순간, 강인호는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 마치 미친 사람의 광기처럼 분노한다. 강인호를 분노하게 만드는 그 광기와 같은 저항의 힘이 근대적 제도에 의하여 선생이나 남자 그리고 아버지(혹은 아들)로 살아가는 강인호로 하여금 학생 되기나 여성되기, 그리고 마침내 소수자 되기를 달성하는 탈근대적 생명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 생명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서구인 되기, 백인 되기, 남성 되기라는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 아시아인 되기, 한반도인 되기, 그리고 소수자적 삶의 여성되기를 하게 만드는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의 삶이다.

III. 교육문화권을 통한 탈근대의 교육




우리는 모두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다. 스피노자가 일찍이 "신, 즉 자연"이라고 일컬은 것처럼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사회적 관계에서 자연적 관계를 근본으로 하는 자연인이 되기 위한 방법이다. 자연인이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도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느낌과 정서이다. 그 느낌과 정서의 사회적 발현이 사랑과 우정이다.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교회나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토대로 한 것이지 근대적 현실을 지배하는 지배와 피지배 혹은 주인과 노예의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관계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다.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교사들이나 기독교 신도들 그리고 법원의 판사나 변호사들을 끊임없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근대적 교육제도에 있다. 학생들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토대로 하는 교육문화권이 아니라 일반학교와 특수학교를 구분하고, 일제고사로 학생들을 일등서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줄을 세우고, 미국의 대학을 모델로 하여 일류대학과 이류대학을 서열화하는 근대적 교육제도는 소설과 영화 <도가니>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런 근대적 교육제도 속에서 교육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즉 정상적인 교육을 남들보다 뛰어나고 훌륭하게 수행한 교수나 판사 혹은 의사나 목사 등등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듯이 아프리카나 중남미 혹은 이슬람지역에 가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은 수화를 포함하여 각각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자기 문화의 언어와 종교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그들 문화의 느낌과 정서를 배가시키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교육문화권을 토대로 한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인권이 만든 편협하고 파괴적인 경험을 거울삼아 각각의 지역과 언어 그리고 종교를 근본적으로 보장하는 삶의 문화권을 토대로 탈근대의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교육문화권이다. 스크린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문명의 언어를 토대로 한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를 보여주듯이 영화 <도가니>는 근대적 이성을 가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인간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도가니>에서 인권운동가 서유진이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싸우는 것"라는 근원적 생명의 힘이 탈근대의 대한민국 만들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근원적 생명의 힘은 인간이 동물의 한 종(種)이듯이 근대적 이성의 인간 이야기가 아닌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동물 이야기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2011-10-02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 -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


I. 서울, 신자유주의적 허상의 도시

▲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2011)

홍상수 감독이 설악산(<강원도의 힘>, 1998)에서 시작하여 춘천과 경주(<생활의 발견>, 2002), 제천과 제주도(<잘 알지도 못하면서>, 2008), 그리고 전주(<첩첩산중>, 2009)와 통영(<하하하>, 2010)을 거쳐 다시 서울로 입성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잠깐 외도를 하여 프랑스 파리(<밤과 낮>, 2008)에서 삶의 탈근대적 현실과 맞닥뜨리지 못하는 비겁한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부터 시작하여 2010년에 발표된 <옥희의 방>까지 이어지는 대부분 영화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북촌방향>과 이전 영화들의 차이는 <오 수정>(2000)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를 비롯한 예전의 영화들이 서울의 내부에서 그 속에 살고 있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일상적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에 <북촌방향>은 서울에서 탈주하여 전주나 통영, 혹은 춘천이나 제천에 살고 있는 성준(유준상 분)이가 서울을 찾으면서 서울의 근대적 일상을 아주 낯설게 탈근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식민지 "근대의 풍경은 외부인들의 시선으로 더 잘 목격"되는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에 등장하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식민지적 왜소함과 신자유주의적 허상이 만드는 일상적 삶의 파괴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성준이가 본래 왜소하고 열등함에 찌들어 있는 식민지 근대의 지식인이거나 오직 서구적 근대의 허상만을 좇는 신자유주의적 환상의 도덕적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서울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식민지 권력과 신자유주의의 상대주의적 지식의 문화에서 벗어나고자 서울에서 탈주(혹은 도피)하여 그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생산적이거나 혹은 도피적인 삶을 찾는 중이다. 그래서 예전에 잠시 영화감독이었던 성준이가 찾는 곳은 서울의 다른 곳들과 전혀 다른 "북촌방향"이다. 서울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가회동과 삼청동 그리고 인사동 등등으로 이루어진 "북촌방향"은 전근대적인 한옥 건물들과 근대적인 서양식 건물들이 어울려 지역성과 세계성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아우르고 있는 탈근대적 문화의 표본이다. 그러나 서울의 "북촌방향"은 서울의 일상이 아니라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공간이다. 그래서 <북촌방향>에 등장하는 성준이는 "예전처럼 사고 치지 말고 오직 선배 영호(김상중 분)만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영호는 이미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그러한 근대적 일상에 저항하거나 탈주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신자유주의의 상대주의적 허무감으로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처럼 사고 치지 말고 오직 선배 영호만을 만나기로 결심"하는 성준이의 의식과는 달리 성준이의 무의식은 예전의 연인이었던 경진(김보경 분)이를 만나는 것이다. 성준이의 무의식은 영화를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드러난다. 그리고 성준이의 무의식은 곧 근대적 일상이 아니라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욕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연히 만난 대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무의식적으로 찾아간 도곡동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나온 성준이는 근대적 의식으로 탈근대적 무의식을 억압한다. 성준이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의식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이루어진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덕,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들의 시선만으로 이루어진 양심 그리고 깨달음이거나 삶의 진리가 아닌 오직 "정보의 가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절단된 정보만을 갖는"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체계이다. 성준이의 무의식이 경진과의 만남 속에서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욕망을 생산하는 반면에 서울의 일상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도덕과 양심 그리고 식민지적 지식으로 구성된 의식은 폐쇄적이고 파괴적인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일상적 패거리 문화 속으로 퇴보한다.

II.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

성준이는 타인의 견해들로 구성된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서 탈주하자는 경진이의 호소에도 영호와 만나 신자유주의 지식인 패거리 문화의 일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일상은 식민지적 근대성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 즉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양심의 가책과 증오와 죄의식"의 일상이다. 성준이는 자신의 "삶을 모욕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가회동의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성준이가 중원(김의성 분)이에게 삶의 만남과 구성은 "인과론적 결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연과 사건"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만 근대적 일상의 "인과론적 결과"에 빠져들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적 원한"이다. 그러나 "도덕적 원한"의 근본적 가설, 즉 "선과 악의 이분법"은 영적 깨달음의 기독교가 권력화되고 제도화되면서 대중을 무지의 암흑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고, 그것이 근대 기독교의 문자해석학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 속의 탈근대 철학자였던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서에서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마라"라는 말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는 과일로 인한 "중독"의 문제이다. 과일이나 술, 혹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섹스하는 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중독"이 만드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인 것이다.

▲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


"중독"의 측면에서 이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는 결코 선과 악이 아니다. 그 새로운 관계는 아담, 혹은 성준이를 생성적인 새로운 몸으로 "좋게" 생성시킬 수도 있고, 또한 파괴적인 권력과 폭력의 몸으로 "나쁘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관계의 만남이 만드는 좋음과 나쁨은 결코 사회적인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만남의 관계를 만드는 두 존재의 생산적 윤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에서, 만남을 조직하고, 자신의 본성과 맞는 것과 통일을 이루며, 결합 가능한 관계들을 자신의 관계와 결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훌륭하다고(좋음이라고, 혹은 자유롭다고, 합리적이라고, 혹은 강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이와 반면에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나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관계 아래서 아무것이나 만나기 때문이다."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양심의 가책과 증오와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나, 혹은 그(녀)의 독특함과 특이성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사성"만을 추구하는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이다.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이 나, 우리, 그리고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독특함과 특이함을 사유하지 못하고 오직 서구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의 유사성만을 사유하여, 마침내 북한이나 중국, 혹은 베트남이나 쿠바,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등의 독특함과 특이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성준이는 자기 자신과 경진이, 그리고 자신과 경진이의 관계가 만드는 독특함과 특이함을 사유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만난 예전(김보경 분)이의 외양이 지니고 있는 경진이와의 "유사성"만을 발견한다. 마치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근대적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미국이나 서구 유럽의 유사성에 매혹되어 그와 다른 독특함과 특이함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성준이는 예전이가 가지고 있는 경진이와의 유사성만을 인식할 뿐, 보람(송선미 분)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함과 특이함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그는 "열등하고, 예속적이고, 약하고, 미련하게" 된다. 스스로 "유사성"만을 사유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결과를 영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


근대 식민지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은 서구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가 만든 "삼중의 환상"으로 작용한다. 첫째로, 그것은 "(근대적) 의식은 오직 결과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이미지들이 만드는) 사물들의 질서를 (문자해석학을 토대로 한 근대적 서열체계)로 전도시킴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메우는," 즉 현실이라는 자본과 권력의 게임에 임하는 "목적인이라는 환상"이다. 이러한 "목적인의 환상"은 현실의 다양한 관계들이 만드는 상호 생성의 좋음과 나쁨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이 나의 몸에 미친 결과를 오직 "목적인"으로서만 사유한다. 이것은 둘째의 환상을 만드는 원천인데,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것처럼 극단적 개인주의를 통하여 "자신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제 1 원인으로 간주하게 되고," 마침내 끊임없이 생성적 무의식을 만드는 "자신의 몸에 대한 억압적 권력을 내세우"는 근대적 의식이 지니는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현실의 무지가 드러나는 곳이거나 영화 속에서 성준이가 영화를 공부하는 대학생들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드러나듯이 "목적인이라는 환상"과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이런 곳에서 "목적인과 자유명령에 의해 행위를 하며, 영예와 처벌에 따르는 세계를 인간에게 마련해 놓은 신(혹은 운명)을 내세우는" 것이 바로 "신학적 환상"이다.

근대 식민지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은 <북촌방향>의 성준이가 자신의 도덕적 원칙으로 영호와 보람이의 관계를 예단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면서 자본과 권력의 게임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도덕적 원한"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법률이나 검찰의 명령이 근원적인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위한 근대적 서열체계이듯이 영호가 이혼하거나 별거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가족의 서열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성준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원한"의 무지는 예전이와의 관계에서 바로 드러난다. 관객들은 성준이가 예전이와의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그의 삶의 의지가 만드는 본원적 욕망이 아니라 "유사성"만을 추구하는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의 작용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화의 말미처럼 그 다음 날이거나 혹은 그 언젠가의 어느 날에 성준이가 또다시 "유사성"을 토대로 보람이와 닮은 영화 팬(고현정 분)을 만나서 더욱 나빠지는 것은 신학적인 원죄의 운명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이 무지에서 비롯된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 만든 "신학적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은 <소설>의 주인, 예전이처럼 느낌도 감각도 없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욱더 큰 문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노예의 삶을 지식이나 도덕으로 포장하여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III. 탈주하라! 그(혹은 그녀)와 새로운 탈근대의 영토를 만들라!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고, 관객들은 쓸쓸하게 현실의 삶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삶은 저렇게 더럽고 환멸스러운 것인가? 사랑은 언제나 내 삶을 더욱더 나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삶은 내 느낌과 감각을 더욱 더 새롭게 만드는 것이고, 사랑은 내 느낌과 감각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감염되거나 감염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더욱더 커다란 느낌과 감각의 덩어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서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다른 지역들로 갔을 때의 차이이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관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삶의 파괴성을 깨닫게 되고, 서울에서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가 다시 서울에 온 두 남자의 이야기인 <하하하>는 서울의 일상에서 벗어나 통영에서 새로운 삶의 느낌과 감각으로 충만해진 풍자의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제공한다. 그러한 깨달음과 풍자가 서울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서울의 신자유주의적 삶의 일상이 온갖 자본과 권력을 통하여 식민지 근대성으로 퇴행시키기 때문이다. 성준이의 식민지적 퇴행성은 근대의 "도덕적 원한"에 갇혀 경진이와 함께 서울을 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주하라! "도덕적 원한"으로 당신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려는 근대적 지식으로부터 탈주하라! 당신에게 원죄 의식을 강요하는 모든 근대적 제도와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는 결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하하하>에서 보는 바처럼 순간적인 깨달음이나 풍자의 해탈은 이룰지언정, 탈주는 결코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탈주는 친구나 연인 관계를 만드는 둘 이상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혹은 그녀)와 함께 탈주하여 새로운 탈근대의 영토를 만들라! 그 영토는 새로운 친구들과 연인들로 가득 찰 것이 분명하다. 그 영토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느낌과 감각의 세계이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 원한"으로 만들어진 주인과 노예의 "목적인이라는 환상", "자유명령이라는 환상", "신학적 환상"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영토는 또한 새로운 친구나 연인관계의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지식은 끊임없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벗어나 친구나 연인 관계의 느낌과 감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모든 친구나 연인의 관계를 생성시키는 좋은 지식과 그 관계를 파괴하는 나쁜 지식이 있는 것이지 선과 악의 이분법을 통하여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생성시키는 친구나 연인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환원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11-11-08




이한 감독의 <완득이> - 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I. 나는 누구인가?

한 때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에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또한 20대의 나이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은 명진 스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명진 스님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화두의 작용을 한다. 명진 스님은 어머니의 죽음과 동생의 죽음이라는 삶의 위기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 들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평생의 화두로 삼은 것이다. 명진 스님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위기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끈다. 그 위기의 한 모퉁이에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의 시절이 있다. 이한 감독의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유아인 분)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물론 완득이는 명진 스님처럼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영화 스크린의 이미지이거나 소설 속의 한 인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나"나 "우리"라는 영화의 관객들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는 "완득이는 누구인가?"라고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완득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영화관에 와서 이렇게 영화 <완득이>를 보고 있는 "나"나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 이한 감독의 영화 <완득이>(2011)

문제는 학교, 교회, 사회 그리고 국가는 그러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학생들이, 교회의 신도들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리고 국가의 국민들이 "나는 누구인가?"라거나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학교와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라는 기관들은 그 구성원들에 대한 지배의 힘을 잃어버린다. "나"나 "우리"는 결코 나나 우리가 속해 있는 기관들을 움직이거나 작동시키는 부속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학교와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는 나나 우리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다. 학교의 교사나 교장, 교회의 목사나 장로,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원로나 위정자들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나 "우리"를 각 기관의 부속품으로 기관화한다. "나"나 "우리"가 각 기관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거부할 때, 그들의 권력과 권위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의 담임 선생님, 동주(김윤석 분)는 학교라는 기관이 제공하는 학생들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스스로 버리고 학생들 각각의 "나"나 "우리"가 학교와 사회와 국가에 "나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도록 만든다.

동주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학생들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율학습은 학생들의 진정한 자율에 맡기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나"나 "우리"는 자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판단이다. "나"가 수많은 관계에 의하여 스스로 구성되는 것을 거부하고, 외부에 의해서 "너는 아들이다, 너는 학생이다, 너는 국민이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나"를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서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국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외부에서 강요되는 "나"는 "노예"이고, 외부에서 강요되는 "우리"는 식민지인들이다. 동주는 그러한 지배와 독재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반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학생들의 친구가 되고, 학생들의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내려놓은 교사로서의 권력과 권위를 학생들의 믿음을 통하여 다시 쟁취하게 된다. 이처럼 가족이나 학교, 사회나 국가의 관계들 속에서 권력과 권위는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기관들이나 제도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II. 다시 "붉은 악마"가 되자!

문제는 나와 우리가 소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와 학교이다. 근대 식민지의 대한민국과 그 교육제도는 "나"를 노예로 만드는 학교이고, "우리"를 식민지인들로 만드는 국가이다. 그리고 노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를 문제아나 운동권 등등의 이름으로 악마화 하고, 식민지인들에게서 벗어나 시민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자율적인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를 빨갱이라고 강요한다. 완득이는 이미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신체장애 아버지와 정신장애 삼촌과 함께 살고 있는 완득이는 이미 다른 학생들처럼 자본의 노예가 되는 교육의 장에서 벗어나 있고, 스스로 자율적인 사회와 국가를 포기하고 깡패들과 경찰들을 동원하여 스스로 자율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과 여성 등등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식민지인들의 구성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 완득이에게 "무한한 관심을 갖고 있고, 학교의 동료들에게 숨기고 싶은 가족사와 사생활을 폭로하여 창피하게 만들고, 오밤중에 쳐들어와 아버지, 삼촌과 술잔을 기울이는" 동주는 악마이거나 빨갱이임에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수업 중에 교실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가 유치장에 갇혀 있다.

완득이는 자신의 삶에 침투해 들어오는 동주가 싫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 "제발, 동주를 죽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노예들을 만드는 학교와 사회,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식민지인들이 되기를 강요하는 국가에 저항하지 않고 훌륭한 노예나 영리한 식민지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열등감 또한 또 다른 노예이고 또 다른 식민지인이다. "나"가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와 관계를 맺는 수많은 관계들을 주인과 노예의 예속적 관계가 아닌 친구나 연인의 상호생성적인 관계로 구성해야만 하고, "우리"가 식민지인들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로 동등한 친구나 연인들로 구성된 상호 생성적인 관계들을 집단적인 무리로 연결시켜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구성시키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스스로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완득이는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주에게 감염되어 정서적으로 동화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노예나 식민지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완득이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처럼, 혹은 박지성이 축구를 하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처럼 킥복싱을 하고자 한다.

노예와 식민지인들의 특성은 주인과 식민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반면에 노예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나라들을 멸시하는 것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들에게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국가라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나라들을 악마화 하고 빨갱이의 나라라고 비난하는 것이 노예와 식민지인들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노예가 아니고 식민지인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노예가 되지 않고 식민지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악마라고 부르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악마가 되고 빨갱이가 되는 것임을 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의 등장은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 함께 삶을 즐기고, 이 나라를 식민지인들의 국가가 아닌 자율적인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등장한 젊은이들의 축제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나 "스스로 존재하는 나라"가 되지 않으면, 수많은 자본의 노예들과 식민지인들은 온갖 수단들을 동원하여 "나"와 "우리"를 다시 노예와 식민지들로 만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붉은 악마"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시 노예와 식민지인이 되어 스스로 소멸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자본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서열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연인의 사랑을 하고 친구의 우정을 맺는 것이다. 그래서 완득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반에서 일등을 하는 윤하(강별 분)와 연인이 되어 윤하 또한 교육체제의 노예나 국가의 식민지인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담임선생 동주와 친구가 되어 아버지와 국가에 저항만 하여 부드러움을 잃어버린 동주로 하여금 연인과 사랑을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든다. 완득이가 선생이 되어 여성을 사랑하는 법을 동주에게 가르쳐주어 마침내 동주도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호정(박효주 분)이를 사랑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노에나 식민지인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상호 평등한 완득이와 윤하의 연인관계, 혹은 완득이와 동주의 친구관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둘 이상이 모이면 이미 사회이고 국가이다. 킥복싱을 하기 위하여 핫산(수디프 바네지르 분)과 친구관계가 되듯이, 완득이는 필리핀인 엄마(쟈스민 분)를 통하여 학교와 국가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 속에서 동아시아와 지구촌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III.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

▲ 영화 <완득이> 중 한 장면


지난 20세기 근대적 인간관계와 국가관계의 노예나 식민지인에서 벗어나는 길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붉은 악마"처럼 "나"나 "우리"가 스스로 과거의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명명하였던 악마나 빨갱이가 되듯이, 21세기 오늘날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길은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강요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득이는 미국인들이나 백인들에게는 비굴하게 노예나 식민지인 노릇을 하면서 같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주인이나 지배자 노릇을 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당당히 "이 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강요하는 근대의 지식에서 이야기하는 순수한 혈통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순수한 혈통을 주장하는 것은 근대적 국가관계 속에서 지배하거나 저항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회나 국가는 순수한 혈통이나 민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삶의 관계를 교환하는 문화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살면 미국인이 되는 것이고, 중국인과 결혼하여 러시아에 살면 러시아인이 되는 것이다.

완득이가 당당하게 필리핀 출신의 어머니를 옆에 두고 "이 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근대적 지식이나 식민지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근대 식민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한반도와 필리핀 그리고 동아시아가 지녔던 근대 식민지 역사를 나와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이다.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은 근대적인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식민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는 "나"나 "우리"가 되는 선언이다. 이와 같은 탈근대적 주체의 "나"나 "우리"는 완득이나 동주 혹은 윤하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고, 이러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 만드는 대한민국의 학교와 사회는 노예나 식민지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교육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필리핀인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 완득이와 친구나 연인이 되는 것처럼 중국이나 북한 혹은 베트남이나 몽골과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를 만드는 교육이나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인관계나 친구관계의 사회나 국가는 마치 완득이와 동주, 혹은 완득이와 윤하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한 것처럼 남한과 북한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나 친구처럼 선생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2011-11-22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 - 미국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자화상


I. 만리장성과 미국-멕시코 국경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는 만리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헬프>는 1963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의 잭슨 시에서 흑인 가정부와 백인 여성이 서로 손을 맞잡고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헬프>에 등장하는 가정부 흑인 여성 에이블린(바이올라 데이비스 분)과 작가 지망생 백인 여성 스키터(엠마 스톤 분)의 서로 맞잡은 두 손을 보면서 그 옛날 만리장성의 벽을 허물어트리는 아시아 민중의 연대와 그 언젠가 무너질 것이 분명한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가로지르는 미국과 멕시코 민중의 연대를 상상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성이다. 전근대적 풍경의 만리장성을 근대적 풍경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과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이 전근대적인 중화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은 근대적인 백인 중심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미국은 백인 남성, 그것도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남성들만을 위한 나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화주의의 지배를 강화하였지만 만리장성이 허물어지면서 몽골과 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언젠가 미국은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다인종과 다문화의 국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때가 되면, 미국은 서구 유럽의 백인을 대표하는 국가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아메리카 대륙의 한 나라가 될 것이다.

▲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 (2011)

만리장성의 거리는 2700km인데 반하여 미국-멕시코 국경의 거리는 3200km이다. 만리장성이 몇 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처럼,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도 몇 대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가 무엇이고, 미국이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쌓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오랑캐로 치부하며 중국 내부에서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고, 미국이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쌓는 이유는 장벽 너머의 멕시코인들을 포함한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치부하며 미국 내부에 있는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 옛날 중국 내부에 중화인들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중화인들보다 더 중화인 행세를 하는 만리장성 너머의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미국에도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행세를 하는 이명박이나 그의 형 이상득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 주의 잭슨 시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아슬아슬하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운 상호 연대의 투쟁을 보면서 마냥 즐겁지 않은 것은 아파르트헤이트를 토대로 한 근대적 지식과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스키터가 에이블린과 그녀의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헬프(The Help)>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의 근대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미국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들의 국가보안법이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아프리카 백인 아프리카너들의 국가보안법이었다. 1990년 이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과 1960년대 미시시피 주와 같은 미국의 남부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는 흑인ㆍ여성ㆍ노동자ㆍ어린이ㆍ자연의 시각에서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면 악마이고 마녀이며 빨갱이라는 근대적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러한 근대적 지식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ㆍ백인ㆍ남성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 권력을 중심으로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학과 오직 개인주의적인 자본의 이익으로 각각의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적 지식은 근대 이전의 만리장성이나 근대적인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나 베를린 장벽 혹은 한반도의 휴전선 장벽과 같은 지역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을 통하여 유지되고 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학과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의 근대적 지식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사회와 국가 내부의 남성과 여성의 대립, 백인과 흑인의 대립, 어른과 어린이(청소년)의 대립,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구성한다.

II. 근대의 아파르트헤이트와 노예 노동자

흑인 노예제도와 아파르트헤이트가 오늘날의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수정헌법 13조를 통하여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리고 1964년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남부의 몇몇 주에서 실행하던 인종차별법을 폐지시켰지만, 노예제도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인종차별법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일상의 지식은 오늘날의 미국 중산층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가 테이트 테일러 감독을 만나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하기 이전에 미국에서 출판되지 못한 배경이기도 하다. 소설가 캐서린 스토킷과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가 <헬프>를 쓰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영화 <헬프>에서 등장하듯이 끊임없이 현재의 성인이 된 스토킷과 테일러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1950년대나 60년대 혹은 70년대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은 영화 속에서 스키터가 주위로부터 곤경에 처할 때마다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으로부터 듣는 "너는 친절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며, 귀중한 사람이야(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라거나 영화에서 밥 딜런의 노래로 흘러나오는 "두 번 생각하지 마라, 너 자신이 옳다(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라는 탈근대의 지식이다.


▲ 영화 <헬프> 중 한 장면


어른이 되어서, 혹은 성인이 되어서 "두 번 생각할" 때, 우리의 삶에는 근대 자유 민주주의 정치학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게 되거나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손익계산서가 작동하게 된다. 그러한 근대의 정치학과 경제학의 이성이 개입했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힐리 홀브룩(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분)처럼 그녀의 삶은 느낌과 감각을 잃어버린 현실적인 남성 정치의 부속물이 되고, 그녀의 사랑은 그녀 앞에 있는 흑인 가정부는 멸시하면서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라는 경제적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옷의 화려함이나 외모와는 상관없이 스키터가 콘스탄틴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마음이 비열할 때가 정말로 못생긴 것이야(When your mind is mean, that's when you is really ugly)"라는 콘스탄틴의 가르침은 힐리에게 너무나도 잘 적용된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학과 경제학의 이성은 에이블린이 만든 케이크의 동맛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이성이다. 따라서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정치학이나 손익계산서의 경제학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힐리 홀브룩보다는 차라리 소녀에서 여성으로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한 셀리아 풋(제시카 차스테인 분)의 천방지축의 순수함이 더 1960년대 미국 중산층 여성의 전형에 가깝다. 흔히 근대적 여성의 백치미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셀리아나 콘스탄틴이 올바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스키터의 엄마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흑인 가정부나 그 옛날 노예 보모 밑에서 자라난 미국 중산층 백인 여성의 전형이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지 못한 셀리아 풋과는 달리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였지만 근대 정치학의 이데올로기가 경제학의 손익계산서에 물들지 않고 소녀의 감각과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스키터, 혹은 소설 <헬프>의 저자 캐서린 스토킷이나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의 탈근대적 지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난 500년의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ㆍ백인ㆍ남성이 아닌 비서구ㆍ유색인ㆍ여성은 노예에서 "이주노동자(cooly)"로, 이주노동자에서 정착노동자로, 그리고 정착노동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끊임없이 변화하였을 뿐, 서구ㆍ백인ㆍ남성의 세계지배는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적 세계는 비록 그 제국주의 지배권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영국과 프랑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동하였거나 폭력과 전쟁에서 법률이나 국가적 제도들로 변화했을지언정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정치학과 경제학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지식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 <헬프>와 영화 <헬프>는 아직도 그런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적 이성에 물들어 있는 미국 백인들에게 "너희는 흑인의 똥으로 만든 케이크를 먹고 자라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1960년대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서 영화 <헬프>에 등장하는 스키터나 에이블린 혹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 분)와 같은 탈근대인들의 연대를 통하여 비로소 탈근대의 꿈을 꾸기 시작한 시대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탈근대의 꿈은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이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다. 그 꿈은 "미국이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며,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이고,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과 영화 <헬프>에 등장하는 스키터나 에이블린 혹은 미니와 같은 사람들의 탈근대의 꿈은 아직도 미국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지난 500년의 근대화 과정이 노예에서 이주노동자로, 이주노동자에서 정착노동자로, 그리고 정착노동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변화되었듯이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 제국주의 지배 전략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농장 노예가 아니라 공장 노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한 노예해방인줄로 착각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가 근대에서 벗어나는 탈근대로 착각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나와 마찬가지로 "너도 소중하다(you is important)"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사이비 지식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국 탈근대의 꿈은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내 아이들이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너는 친절하고, 훌륭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 그리고 대한민국이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 서해의 푸른 바다와 연평도의 "붉은 언덕에서 북조선의 후손들과 남한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 그리고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판문점이나 국회나 검찰이나 청와대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이 바로 대한민국과 한반도가 지니고 있는 탈근대의 꿈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남한이 북조선을 야만인으로 취급하거나 지역차별과 학력차별 그리고 이주민 노동자의 차별은 영화 <헬프>가 1960년대 미시시피 주의 진정한 야만인들은 미국 백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진정한 야만인들은 대한민국의 중상류층을 대표하는 강남 사람들이거나 국회의원, 판사나 검사, 혹은 교수나 의사, 그리고 그들의 연인이나 부인들이다. 그러한 근대적 야만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화 <헬프>의 스키터처럼 대한민국의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이주 새터민들, 그리고 북조선의 인민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III. 탈근대의 꿈

▲ 영화 <헬프> 중 한 장면


영화를 보고 나서 스키터와 에이블린 그리고 미니의 생기발랄하고 유쾌한 반란이 마냥 즐거움과 웃음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국회에서 한미 FTA가 날치기로 통과되었다는 소식 때문이다. 미국이 미국 내부의 탈근대의 꿈을 잠재우기 위하여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 자유무역협정이다. 그것은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주나 조지아 주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차별을 통한 값싼 노동력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대립, 백인(내국인)과 흑인(외국인)의 대립, 어른과 어린이의 대립,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멕시코나 중남미의 국가 혹은 한국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마치 미국 백인들의 밥과 빨래와 아이 보육을 해주면서도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에이블린이나 미니처럼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맺었으면서도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을 강화하여 멕시코를 다국적 기업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북미자유무역협정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현재 멕시코 민중의 분노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당시의 까를로스 살레나스 멕시코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근대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 박사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왜 그리도 까를로스 살레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과 유사한 것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농민들과 도시의 소규모 생산직 노동자들은 마치 1960년대 미국의 흑인들처럼 농사를 파기하고 도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해야만 할 것이고, 아니면 멕시코의 원주민들처럼 생업을 팽개치고 머리에 가면을 둘러쓰고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FTA반대 투쟁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영화 <헬프>에 있다. 1963년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 주에서 그토록 강력한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주의를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연대로 저항하였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저항하기 위하여 멕시코 원주민과 시민들이 서로 연대하여 자파티스타 연합(혹은 연방)의 투쟁을 전개하듯이, 우리도 하루라도 빨리 6.15 남북공동선언이 강조하고 있는 남북연합(혹은 연방)을 선언하여 한FTA를 폐기하든지, 아니면 남북연합(혹은 연방)코리아와 미국의 일대 일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오늘날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그리고 영화 <헬프>에서 스키터와 에이블린 그리고 미니의 꿈이 이루어졌듯이, 우리가 희망하는 탈근대의 꿈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탈근대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길은 영화 <헬프>의 스키터처럼, 혹은 소설가 캐서린 스토킷이나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처럼 소녀나 어린의 느낌과 감각을 기억하여 그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시키는 것이다.


2011-12-04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 - 아름다운 생명의 힘


I. 아름다운 생명의 찬가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처럼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상생관계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또한 매일매일 또 다른 삶을 산다. 악이라는 일시적 행동을 경험하지 않으면 선이라는 아름다운 행동을 수행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여성이라는 다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성이라는 차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잠이라는 일시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삶이라는 아름다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삶과 죽음 등등의 이분법을 만드는 것은 마치 선이 악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삶이 죽음을 지배한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식이다. 우리의 근대적 지식은 이와 같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주의,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남성 중심주의,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프로이드의 근대 정신분석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근대적 지식들은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따라서 영화 이미지를 통한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근대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러한 근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식에서 벗어나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을 상생의 관계로 사유하게 만드는 탈근대적 지식 생산의 영화인가를 잘 보여준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2011)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처럼 잠이라는 일상적 죽음이 아닌 자연적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근대적으로 만들어진 하루라는 일과의 일상적 삶이 아닌 자연적 삶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어브 라이프>는 동생의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은 암이라는 죽음의 선고를 통하여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테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어브 라이프>는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현실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삶의 구성을 도외시하면서 이미 근대적으로 형성된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지식으로 삶을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트리 어브 라이프>는 블랙홀로부터 공룡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영상 이미지를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신은 무엇인가?"라는 상투적인 질문으로 치환되어 영화감독이 배치한 추상적 자연의 이미지들로 끝을 맺는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자신이 자신의 동생에게는 왜 아버지와 똑같은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즉 미국과 미국인의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현실의 삶은 추상적인 신과 자연의 이미지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II. 근대적 삶과 탈근대적 삶


▲ 영화 <비우티풀> 중 한 장면


<트리 어브 라이프>처럼 근대적인 것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탈근대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영화적 치장에 머무르는 것이 미국 헐리웃 영화들이 지니는 근대적 상상력의 한계이다. 이와 반대로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근대적인 삶들에 대하여 저항하면서 영화 이미지들을 통한 탈근대적 사유를 촉발시킨다. <비우티풀>은 <트리 어브 라이프>의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영상 이미지들과는 달리 추하고 어두운 근대적 삶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5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구적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지 세계를 창출한 도시! 콜롬부스가 황금과 향료의 나라, 인도로 가기 위하여 항해를 시작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곳! 비록 지난 500년의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유렵의 근대성과 동시에 세계의 식민지성을 지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헤게모니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로 이전되었지만, 지난 500년 동안에 이루어진 서구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뿐이겠는가? 영국의 런던이 그렇고, 프랑스의 파리가 그렇고, 독일의 베를린이 그러하며, 또한 미국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혹은 로스앤젤레스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냐리투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적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근대적 출구를 사유하도록 만드는 영화들이다. 멕시코시티의 근대적 삶을 이야기하는 <아모레스 페로스(사랑은 개)>(2000)가 그렇고,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뒤엉켜 있는 아프리카(모로코)와 아시아(일본)와 아메리카(멕시코와 미국)를 다양한 언어들로 연결시키는 <바벨>(2006)이 그러하며, 근대적 삶에 왜곡되어 있는 생명 그 자체를 다루고 있는 <21 그램>(2003)이 그러하다. 다른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비우티풀>에 등장하는 유스발(하이에르 바르뎀 분)은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마약을 중개하는 중개상이며,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밀입국자들을 짝퉁가방 공장에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다."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마약을 중개하고, 인력브로커라는 의미에서 근대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산적이거나 생성적인 삶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근대인이라는 것이다. 근대적이거나 식민지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대부분 유스발이 마약을 중개하는 것처럼 금융을 중개하거나 지식을 중개하고 혹은 상품을 중개한다. 중개하는 지식이나 마약을 사거나 파는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 유스발처럼 밀입국자이든지 혹은 지방 출신이든지간에 그들을 짝퉁가방 공장과 같은 대학이나 회사 혹은 정부에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다.

우리들 대부분처럼 유스발은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중개하는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이 마약인지 아닌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을 중개하면서 만들어지는 월급이나 중개료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밀입국자이든지 누구이든지간에 우리가 부모나 교사이거나 교수 혹은 선배나 어른이라는 이름의 인력브로커로 작용하여 그들이 일하거나 공부하는 회사나 대학이나 정부가 그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인력브로커로 일하는 우리의 관심은 단지 그들의 노동을 통하여 잉여 이익을 취득하는 것뿐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이 작동하는 관계의 법칙은 이분법이 아닌 상생의 관계이다. 모든 관계는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되는,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되는 상호 생성적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들 대부분이 중개하는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이 유스발이 중개하는 마약처럼 누군가를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이라면, 혹은 우리가 알선하는 대학이나 회사나 정부가 유스발이 알선하는 공장처럼 누군가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곳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핍박하여 나 자신을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이다.

유스발은 3개월 시한부의 암 선고를 받고 난 후에야 마침내 자신의 삶이 죽음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 인민전선 군에 있었던 유스발의 할아버지가 정치적 망명지로 선택한 멕시코, 그리고 그의 손자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약 중개인과 인력브로커로 일하게 되는 바르셀로나. 이것은 단지 유스발의 삶만이 지니는 근대의 비극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온 흑인 부부, 아시아의 중국에서 온 불법이주민들은 모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하여 500년 동안 지구촌 전체를 삼켜버린 근대성과 식민지성의 산물이다. 서로서로의 피를 빨아먹는 중계상과 인력브로커는 비르셀로나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국가의 정부나 은행 혹은 기업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근대성과 식민지성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삶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나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죽은 아버지와 꿈속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속의 대화를 토대로 현실의 관계를 상호 생성적인 관계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는 불법이주민으로 추방당한 세네갈 남성의 부인과 아기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이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중국 불법이주민들을 돌본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져 마약을 일삼는 아내로부터 피폐해진 자신의 아이들을 돌본다.

근대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탈근대적 삶이 모두 생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스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중심가에서 마약을 판 아프리카 흑인들은 경찰의 무자비한 단속으로 강제출국을 당하고, 추위를 조금이라도 이기라고 사다 준 난로에서 가스가 새어나와 중국인 불법이주민들이 몰살을 당하기도 한다. 서구적 근대가 만든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구조가 자본과 잉여이익으로 남아 아름다운 바르셀로나 해변을 죽음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은 근대적 현실의 삶을 서서히 바꾼다. 마침내 유스발은 서서히 죽어가지만, 옆에서 죽어가는 그를 지켜주고 있는 그의 어린 딸의 기억은 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으로 그녀의 삶을 지켜줄 것이고, 그의 아름다운 삶은 오직 자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흑인 여성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만든다. 세네갈에서 탈주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오려는 그녀의 남편은 암흑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스발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세네갈 출신의 흑인 여성과 그의 딸과 아들이 만드는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은 스페인과 아프리카와 멕시코를 탈근대의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들의 삶이 백인과 흑인, 혹은 스페인과 멕시코라는 이분법의 지배와 피지배나 주인과 노예의 파괴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생성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III. 예술적 생명의 힘

▲ 영화 <비우티풀> 중 한 장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는 근대적 일상 속에서 스페인과 멕시코, 스페인과 아프리카라는 근대적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는 대한민국의 서울이나 일본의 동경 혹은 미국의 뉴욕에서 일어나는 근대적 일상 속에서 대한민국과 일본(혹은 미국), 대한민국과 아시아(혹은 북한) 여러 나라라는 근대적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로 되풀이 된다. 국가와 국가, 혹은 대륙과 대륙의 근대적 관계가 만드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그 속에 살고 있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든다. 이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지배자이든지 피지배자이든지간에 서로서로의 삶을 파괴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관계이다. 그러나 <비우티풀>에 등장하는 유스발처럼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서로서로 죽이는 삶이 아니라 서로서로 살리는 삶이 아름다움을 생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생의 삶은 유스발처럼 근대적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근대가 만든 소수자들, 즉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여성, 어린이, 불법이주민 등등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백인 남성 유스발의 아프리카인 되기, 아시아인 되기,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불법이주민 되기가 아름다운 것처럼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는 코리안 남성의 소수자 되기는 탈근대적 아름다움을 생성시킬 것이다.

근대적 지식의 미학은 아름다움을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한정시킨다. 그러한 근대적 지식은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문학을 재단하거나 영화를 재단하여 문학을 죽이고 영화를 죽인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근대적 지식의 미학이 규정하는 것과 같은 형식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철학적 개념의 선(good)이나 과학적 관찰의 진실(truth)과는 달리 예술적 창조의 아름다움(beauty)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적 아름다움은 항상 새로운 철학적 개념과 새로운 과학적 진실을 만드는 토대이다. 이러한 예술적 아름다움의 새로움이 곧 생명이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된 미술이나 음악의 생명력을 보라! 따라서 생명의 힘은 저 들판의 나무나 풀이나 바람을 아름답게 생성시키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생성시킨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생성시키는 생명의 힘은 <비우티풀>의 유스발처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 즉 근대의 권력구조가 만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empowering force)"이다. 유스발이 생명의 아름다운 힘을 불어넣는 흑인 여성과 그의 딸과 아들은 유스발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아름다운 힘을 통하여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아름다운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러한 아름다운 생명의 힘이 근대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탈근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2011-12-11




유하 감독의 <하울링> - 당신은 늑대 인간인가, 개 인간인가?


I. 늑대와 개의 차이

늑대와 개는 개과에 속하는 같은 종의 동물이다. 그러나 늑대와 개의 차이는 인간과 호랑이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늑대는 같은 늑대들과 어울림으로 말미암아 자연적 동물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개는 같은 동물들과 어울리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과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자연적 동물성을 잃어버리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동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늑대와 개의 차이는 늑대와 인간과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것이 늑대 인간과 개 인간의 차이이다.

▲ <하울링> 포스터.

유하 감독의 <하울링>은 개과에 속하는 늑대와 개라는 같은 종의 동물이 가지는 차이를 대한민국 사회, 특히 경찰의 수사과에 있는 형사들을 통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로 묘사한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동일한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이 남성적 관계와 여성적 관계의 차이를 통하여 늑대와 개, 인간과 호랑이, 그리고 백인과 흑인의 차이만큼 크게 벌어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500년 전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 유럽의 중세인과 근대인의 차이만큼, 혹은 100년 전 조선 사회의 조선인과 근대인의 차이만큼,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는 식민지적 근대인과 자율적인 탈근대인의 차이가 백인과 흑인의 차이이거나 남성과 여성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 차이는 늑대와 개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늑대는 크던지 작던지 간에 늑대의 무리와 함께 다닌다. 늑대의 무리에는 지도자와 다수는 있을지언정 주인과 노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늑대는 무리의 다수성과 지도자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생명의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 늑대는 그렇게 자연적 동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개는 개의 무리 속에서 벗어나 먹고 살기 위하여 인간이라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 무리의 다수성을 잃어버렸고 개들의 무리 속에서 지도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주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생명의 결정권을 맡겨 버렸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의 무리와 집단들 속에서 인간이라는 무리의 다수성과 어떤 지도자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생명의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늑대 인간이 있는 반면에, 개처럼 인간이라는 자신의 속성을 잃어버리고 삶에 대한 생명의 결정권 또한 권력이나 자본이라는 주인에게 맡겨버리고 노예가 된 개 인간이 있다.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는 백인과 흑인, 동일한 국가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동일한 사회에 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인간이 늑대와 개의 차이만큼이나 크게 벌어진 이유도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영화 <하울링>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영화 관객들에게 당신은 늑대 인간인가, 개 인간인가에 대하여 질문한다.



II. 늑대 인간 은영이와 개 인간 상길이의 만남

<하울링>에 등장하는 "질풍"이는 늑대도 아니고 개도 아닌 늑대 개다. 그래서 "질풍"이는 늑대의 무리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그는 개의 훈련은 기술이 아니라 따뜻함과 배려의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최고의 조련사(장인호 분)와 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조련사의 딸(남보라 분)을 만남으로 인하여 늑대의 다수성과 생명의 자기결정권, 그리고 개의 인간되기를 동시에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질풍"이가 인간되기를 수행하면서 조련사와 그녀의 딸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 "질풍"이와 전혀 다른 동물의 종에 속해 있는 은영(이나영 분)이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이 없고 이혼을 한 은영이는 질풍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동물의 종이 지니고 있는 다수성과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순수성의 "고아"다. 은영이처럼 우리들 주위에는 인간이라는 종의 다수성과 삶에 대한 생명의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없이 많은 늑대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근대/식민지 세계체제 속에서 은영이와 같은 늑대 인간들은 그들의 무리와 집단들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 학교와 교회, 그리고 조직과 가족이라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강요하는 개 인간들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상길(송강호 분)이다. 상길이도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늑대 인간들처럼 은영이와 같은 인간이라는 종의 다수성과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늑대 인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 그는 은영이처럼 늑대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이혼을 당하고, 이미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된 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경찰 수사과의 왕따 형사이다. 그러나 그는 은영이와 달리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린 딸과 아들을 돌보아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그의 딸과 아들 또한 아직 개 인간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인간의 다수성과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늑대 인간들이다. 그들의 다수성과 그들의 고유한 권한인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지켜주기 위하여 상길이는 개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증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상길이에게 그 기회가 왔다. 그것은 마치 늑대가 개가 되어 마침내 늑대의 기억마저도 잃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투견개가 되는 것처럼, 늑대 인간이 개 인간이 되어 마침내 인간이었던 기억마저도 잃어버리고 오직 자본과 권력의 돈벌이 짐승들로 변해버린 인신매매집단 내부의 살인사건! 그러면 도대체 수사과에 있는 다른 개 인간들과 상길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경찰 수사과의 다른 후배 형사들은 이미 개 인간들의 논리, 즉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논리에 찌들어 있다. 상길이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에서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의 이성애적 도덕, 남성의 식민주의적 법, 남성의 가부장적 의리를 토대로 한 수사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것이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과 상길이가 공유하고 있는 개 인간들의 공통점들이다. 그러나 마침내 개가 되어버린 인신매매집단의 개새끼들과는 달리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과 상길이가 공유하고 있는 개 인간들의 공통점은 개로 변할 수 없는 늑대처럼 완전히 개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느낌과 감각이 있다. 그래서 그 느낌과 감각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은영이의 등장은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과 상길이가 잃어버린 인간의 느낌과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이다. 상길이는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형사들은 그 기회를 차 버렸다. 따라서 영화 <하울링>은 근대의 인간들에 의하여 늑대 개가 된 "질풍"이가 조련사와 그의 딸 덕분으로 늑대가 되는 것처럼, 늑대 인간 "은영"이 때문에 개 인간이었던 상길이가 늑대 인간이 되는 이야기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다수성과 삶에 대한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은영이와 상길이를 포함한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는 느낌의 감각과 논리적 이성의 차이이다. 수사과의 신참으로 들어온 은영이는 "살인사건"에서 만나는 피해자들의 느낌과 감각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살인사건의 최대 피해자이며 가해자인 "질풍"이의 느낌과 감각을 온전히 자신의 느낌과 감각으로 만드는 늑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처럼 경찰이나 형사라는 직업의 논리적 이성으로 가득 차 있는 상길이는 "살인사건"에서 만나는 피해자들이나 가해자들을 같은 개 인간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느낌과 감각을 지닌 생명의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직업상 일거리로 처리해야 할 물질적 대상들로 취급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 수사과의 형사들만이 아니라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모는 자식을, 선생은 학생을, 교회는 신도를, 자본가는 노동자를, 정부는 공무원을, 국가는 국민을, 남성은 여성을, 정상인은 장애인을, 그리고 인간은 동물을 느낌과 감각을 지닌 생명의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본과 권력의 물질적 대상들로 취급한다. 그래서 개 인간들의 사회에는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만이 존재한다.

늑대 인간, 은영이가 지니고 있는 느낌과 감각의 논리와 이성은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이 아니라 생명의 논리와 다수성을 지닌 일대 일 관계의 이성이다.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이 생명의 느낌과 관계의 감각을 야만이거나 동물성, 혹은 미숙함으로 치부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과 늑대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느낌과 관계의 감각은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보다도 더욱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논리와 이성을 지니고 있다. 상길이나 수사과의 다른 형사들과는 달리 생명의 느낌과 관계의 감각으로 가득 차 있는 은영이는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으로부터 무차별적인 폭력이 가해지고 있는 "조련사들의 세계", "훈련견들의 세계", 그리고 "어린 소녀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 속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느낌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논리와 관계의 감각으로 상길이에게 늑대 개가 지니고 있는 늑대라는 생명의 논리와 조련사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억을 통한 관계의 이성적 판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침내 상길이도 은영이와 같은 늑대 인간이 지니는 인간의 다수성과 삶에 대한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III. 늑대 인간의 무리 되기

영화는 끝나고 마침내 개들이 되어버린 인간들과 사이비 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늑대 개, "질풍"이는 상길이의 총에 맞아 죽었다. 영화 속에서 "질풍"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오직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에서 벗어나 있는 조련사와 그의 정신장애아 딸, 그리고 은영이 세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관 바깥에서 지금도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질풍"이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의 역사는 서구 유럽을 필두로 해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각각의 지역에 살고 있는 늑대 인간을 개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인간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질풍"이와 같은 수많은 생명체들에 대한 살육의 역사이다. 그래서 마침내 생명의 논리와 감각의 이성을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이성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포장하여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교육하는 곳이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근대/식민지 세계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부분 국가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유하 감독은 관객들에게 '당신은 늑대 인간인가, 개 인간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늑대 인간, 은영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를 도저히 습득할 수 없을 것 같은 머저리 왕따와 같은 상길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늑대 인간 은영이의 덕분으로 마침내 개 인간들 속에서 인정을 받은 상길이가 승진하여 만드는 어느 경찰서의 수사과, 혹은 대학교의 학과나 회사, 혹은 그것들 모두가 만드는 대한민국은 늑대 인간 은영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늑대 인간, 은영이의 존재 없이는 상길이 또한 다시 개 인간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영화 <하울링>을 보고 난 이후 대학원생 친구들과 더불어 생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은영이와 함께 있는 상길이, 은영이가 존중받고 은영이가 중심이 되는 상길이가 부임한 어느 경찰서의 수사과, 그리고 마침내 은영이와 같은 생명이 지니는 느낌의 논리와 동일한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대 일 관계의 감각적 이성이 사회와 국가의 지식이 되고 그러한 느낌과 감각을 지닌 수많은 늑대 인간, 은영이들이 존중받고 은영이들이 중심이 되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은 <하울링>에 등장하는 상길이처럼 개 인간들 속에 포획되어 있는 우리가 늑대 인간 은영이의 도움으로 마침내 근대/식민지 영토의 개 인간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늑대 인간으로 재영토화할 때 가능할 것이다.



2012-02-26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의 자화상


Ⅰ. 아! 대한민국

윤종빈 감독은 이미 <남성의 증명>(2004)과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통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사회 제도나 군대와 같은 국가장치들이 한 인간을 어떻게 근대 식민지인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가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그의 탈근대적 시선은 가족이나 사회 혹은 군대라는 개별적인 근대 국가장치들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에 의문을 제시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다른 여타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된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구성원들의 성격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생명체이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작동되는 대한민국은 건강한 생명체가 아니라 마치 봉준호 감독의 <괴물>처럼 독극물의 악성 바이러스가 침투되어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이 어떤 생명체인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괴물의 생명체가 되어 있다. 그 괴물의 생명체는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나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경주 최씨 35대손 충렬공파의 최익현(최민식 분)은 2012년 대한민국의 1퍼센트를 구성하는 괴물 권력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 영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 

오늘날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이 대한민국처럼 괴물로 변해버린 국가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독일은 과거 동서분단이라는 근대적 비극을 평화적으로 극복하고 유럽연합과 더불어 새로운 독일을 구성하는 나라이고, 오늘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5퍼센트의 백인이 70퍼센트의 흑인과 나머지 유색인들을 차별했던 근대적 인종차별주의 아파르트헤이트 권력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흑백통합의 무지개 나라를 구성하는 중이며, 오늘날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등등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필두로 시작된 서구 유럽 500년 침략의 역사에서 침묵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새로운 탈근대적 가치들을 실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오늘날과 같은 괴물의 생명체가 아니라 새로운 상생의 생명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공동선언'은 독일이나 남아프리카처럼 한반도에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구성하는 토대가 될 수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개혁을 부르짖으며 '검찰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처럼 대한민국의 검찰이 대한민국 원주민을 위한 권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였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영화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리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기준은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없이 과거의 향수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영화의 현재는 국가와 사회의 현재에 따라 변화한다. 사회와 국가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을 때, 영화의 생산과 소비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는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의 말미에는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 국가의 범죄가 이루어지는 최고 꼭대기에 "영어는 권력이다"라는 근대 식민지 국가의 신조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최익현의 아들이 최고의 성적으로 검사가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라는 생명체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다면, 그것은 "영어는 권력이다"가 아니라 "영어는 (불어나 스페인어 혹은 일어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언어일 뿐이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한반도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을 위한 권력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원주민의 언어인 한글이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한반도 원주민의 언어인 한글이 권력이 되는 시대여야만 한다.

Ⅱ. 전쟁 범죄국가의 근대 식민지성

대한민국이 모델로 하는 미국이나 일본 혹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 국가들은 그들 국가 내부의 범죄자들을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의 식민지 국가들에 침투시켜 식민지들을 건설하여 이룩한 국가들이다. 500년 전 콜럼버스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선원들은 대부분이 스페인 지역의 범죄자들이었으며, 200년 전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를 만들면서 동원된 사람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범죄자들이었고, 150년 전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한 선봉에 선 사람들이 미국의 백인 범죄자들이었고, 100년 전 일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일본의 범죄자들이었다. 이것은 단지 500년 전, 200년 전, 혹은 100년 전의 일만이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쿠바 식민지를 지배했던 토대는 근대 갱스터 영화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Godfather)>(1972)에 등장하는 것처럼 마피아 범죄 집단들이었다. 이러한 범죄 집단들을 동원한 근대 국가의 전쟁은 오늘날에도 미국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500년 동안 이들 범죄 집단들에 의해서 행해진 가장 큰 범죄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에서 원주민 언어를 말살시킨 것이다.

전쟁과 범죄로 이루어진 근대 국가의 또 다른 병폐는 식민지 지역에 또 다른 범죄 집단을 끊임없이 양산시키는 것이다. 소위 범죄로 이루어진 권력의 사닥다리를 만드는 것이 근대 국가의 목표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지 범죄 집단은 제국의 범죄 집단이 제공하는 울타리 속에서 만들어진 잉여자본을 가지고 호텔을 짓고, 교회를 만들고,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만들고,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호텔, 교회, 학교, 병원, 그리고 기업이 근대 식민지 국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사용된 언어를 가지고 사는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500년 동안의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지구촌의 역사는 그러한 범죄 집단의 근대 국가를 설립하거나 그러한 범죄 집단과 대항하여 또 다른 범죄 집단의 근대 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의 역사였다. 오늘날에도 미국 제국주의에 의하여 작동되는 근대국가는 끊임없이 범죄자들을 양산시켜 전쟁을 통하여 전쟁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괴물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남아프리카나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들은 전쟁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국가가 아니라 그곳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평화의 희망을 먹고 자라나는 국가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 영화 <범죄와의 전쟁> 중


문제는 경주 최씨 35대손 충렬공파를 자랑으로 여기는 유교적 가부장주의에 물들어 있는 최익현이 60년대와 70년대의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 속에서 배운 근대교육과 공무원의 경험을 통하여 전쟁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근대 식민지인이라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것처럼 그는 60년대와 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이 대한민국 원주민의 권력에 의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범죄 집단에 의해서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같은 범죄의 피를 먹고 살아가는 괴물이 된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유신정권 이후 최초로 국민의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정권이 만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최익현은 노무현 정권이 만든 '범죄와의 전쟁'이 가지고 있는 근대 식민지성을 잘 알고 있다. 마치 지난 500년 동안의 지구촌 범죄 집단들처럼 근대 대한민국이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미국의 용병으로 참가하여 근대 제국주의 국가가 가지는 잉여자본을 나누어 받아 성장한 것처럼, 노무현 정권이 비록 국민의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권력의 구성원들이 모두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근대 식민지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최익현은 잘 알고 있다.

최익현이 자신의 권력 너머에서 더 커다란 범죄 집단이 자신들의 범죄성을 숨기기 위하여 만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근대 식민지성이 무엇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최익현의 근대 식민지성이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배반과 모략 그리고 아부가 아니라 그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배우고 경험한 '유교적 가부장주의'이다. 대한민국의 근대 식민지성은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문학과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서구의 언어와 논리 그리고 사유체계를 통하여 그렇게 극복하고자 했던 전근대의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전근대에서 벗어나 근대의 자유와 평등의 세계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양반과 상놈이라는 전근대 조선의 신분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신분체계와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의 신분체계가 갖는 차이는 전자가 원주민의 언어가 아닌 한문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의 신분체계가 영어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이 한문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날의 교육은 영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Ⅲ. 미래의 희망

<범죄와의 전쟁>은 손자의 돌잔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최익현이 범죄 집단의 대부였던 최형배(하정우 분)의 "대부님"이라는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그것이 최익현의 환청이든지 혹은 최형배의 진짜 목소리든지 간에 <범죄와의 전쟁>은 2012년의 현재에서 막을 내린다. 그것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과거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의 범죄 집단이 만든 권력과 그들의 노력과 후원으로 만들어진 최익현의 아들이 구성하고 있는 영어의 권력 사이에 우리들의 아버지와 형제들 중의 하나인 최익현의 권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뻔하다. 그것은 최익현의 죽음이다. 그러나 최익현의 아들이 구성하는 영어의 권력이 최익현의 죽음과 더불어 끝날 것인지, 아니면 최형배의 범죄 집단과 결합하여 새로운 권력을 행사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최익현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새롭게 자신이 배운 영어의 지식을 원주민의 언어와 삶을 양육시키고 생성시키는 새로운 원주민의 권력으로 거듭날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희망과 기대가 없으면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없으면 현재는 항상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든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근대 식민지 국가의 경험과 더불어 탈근대의 국가로 접어드는 경험도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부와 더불어 "영어는 (권력이 아니라) 제국의 언어일 뿐이다"라거나 "지식은 그 지역 원주민들의 권력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수나 교사, 혹은 학생들에 의하여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최익현이 범죄 집단과 더불어 만든 호텔처럼 근대 식민지성의 범죄 집단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과거의 조선대학교, 인천대학교, 상지대학교와 같은 범죄 집단으로 구성된 유교적 가부장주의 대학들이나 중고등학교들을 민주화시킨 경험이 있고, 교회를 미국이나 서구 유럽의 식민지 교회가 아니라 원주민을 위한 교회가 되도록 만든 새로운 기독교 사제들과 신도들의 경험이 있다. 비록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계승하는 이명박 정부가 상지대학교를 다시 범죄 집단에게 넘겨주고, 곽노현 서울 교육감이 복직시킨 민주교사들을 다시 해임시켰지만, 근대 식민지성에서 벗어났던 과거의 경험은 2013년 혹은 그 이후의 미래를 희망하고 기대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한 희망과 기대가 2012년에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고, 모든 지구촌 시민들과 상생하는 길이다.


2012-03-19




변영주 감독의 <화차(火車)> - 근대 자본주의국가의 욕망


I. 욕망이라는 이름의 "화차"

사랑은 생성이다. 문호(이선균 분)는 사랑하는 선영(김민희 분)이가 존재함으로 남자가 되고, 선영이는 사랑하는 문호가 존재함으로 드디어 여자가 된다. 그 누군가의 남자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의 욕망이 만드는 사랑이다. 선영이가 선영이가 아니듯이 문호가 문호가 아니어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이름일 뿐이지 문호의 선영이나 선영이의 문호가 지니고 있는 몸이라는 생명의 욕망이 지니고 실체가 아니다. 선영이의 실체는 문호가 욕망하는 생명의 몸이고, 문호의 실체는 선영이가 욕망하는 생명의 몸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생명이 생명이고자 하는 힘이다. 이러한 생명이 생명이고자 하는 힘의 욕망이 가족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몸이라는 생명체가 지니는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욕망은 또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욕망의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나'라는 근대 핵가족의 가족주의적 욕망이고,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의 팔루스는 후기 근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욕망과는 달리 욕망은 살고자 하는 힘이고, 살고자 하는 힘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이다. 그 관계는 근원적으로 일대 일의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으로 구성된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관계는 수없이 다양한 일대일 관계들의 조합이다.

▲ 영화<화차> 중 문호(이선균 분)와 선영(김민희) ⓒ영화제작소 보임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그것이 일본이든지 대한민국이든지 혹은 미국이든지 영국이든지 간에 그 국가 내부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국민이나 시민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문호와 선영이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작동하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가족주의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대학과 가족을 통하여 수많은 문호와 선영이를 자본으로 치환시키기 때문이다. 자본, 혹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와 권력관계로 구성된 가족주의가 문제이다. 변영주 감독과 마찬가지로 <화차>에 등장하는 문호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만드는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그는 선영이가 그의 사랑하는 여자, 선영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근대 국가의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영이가 문호의 선영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근대 국가의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는 은행에 다니는 그의 친구 동우(김민재 분)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고향에 있는 그의 아버지(최일화 분)의 이름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문호가 형사직에서 쫓겨난 종근(조성하 분)이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선영이를 찾는 과정은 자신과 더불어 일대일 관계의 생산적인 가족을 구성하고자 했던 선영이의 근원적인 삶의 욕망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에 의해서 일그러진 파괴적 욕망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II. 욕망에는 선과 악이 없다

<화차>에 등장하는 선영이는 고아다. 선영이는 또한 언젠가 그녀가 아빠와 엄마라고 불렀던 그 누군가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고아의 욕망은 그나 혹은 그녀의 엄마와 아빠가 그나 혹은 그녀를 생산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하였듯이 자신도 관계적 욕망의 생산을 향유하기 위하여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나의 남자이거나 나의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성이 되거나 여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은 '나와 너'라는 일대일의 관계로 시작하는 것이지 '아빠-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로서의 나는 일대 일 관계로 구성된 아빠와 엄마라는 그 누군가의 생산물이다.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듯이, 혹은 농민이 곡식을 생산하듯이 생산물은 생산자에게 생산의 즐거움을 향유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소유의 자본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자본은 생산의 수단이 아니라 교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영이처럼 우리는 모두가 고아다. 엄마와 아빠는 고아인 선영이가 여성이 되거나 남성이 되어 가족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친구나 연인의 일시적인 이름일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친구와 같은 엄마이거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친구와 같은 엄마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없는 선영이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는 그녀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와 같은 엄마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아버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아빠-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처럼 '국가-정부-국민'이라는 가족주의에 토대를 둔 국가주의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아인 선영이를 그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로 만들도록 강요한다. 가족주의의 아버지가 나를 자본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주의의 국가는 국민을 자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선영이의 삶은 자본으로 치환된 그 누군가의 딸에서 벗어나고 돈으로 인식된 그녀의 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탈주의 삶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이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듯이 주민등록번호라는 자본으로 치환된 국민의 이름이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앗아가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끊임없이 자본으로 치환하는 국민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선영'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인 선영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탈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누군가와 일대 일 관계의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영이와 같은 모든 생명의 욕망은 자본의 권력구조로 구성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인 동시에 일대 일 관계의 생산적이고 생성적인 고아들로 구성된 또 다른 가족과 국가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탈주하고자 하는 동시에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나 혹은 그녀가 속해 있는 가족과 국가에 따라서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 문호의 사촌형이자 전직 형사, 종근 역은 배우 조성하가 맡았다.


문호는 충북 제천에서 또 다른 선영이의 흔적을 본다. 그리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소외되어 있는 농촌 아낙들의 의심에 가득 찬 눈빛과 무턱대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시선으로 낯선 문호를 공격하는 또 다른 선영(선영이의 친구)이와 그녀의 남자를 본다. 그는 미치고 싶다. 그가 속해 있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일대일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만드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선영이의 탈주가 문호 없이는 불가능하듯이 문호의 탈주 또한 선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문호는 마침내 부산과 마산에서 삶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선영이의 실체와 부닥친다. 그러나 그 선영이의 실체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희생물인 동시에 그러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악을 고스란히 닮아버린 선영이이다. 문호는 선영이가 되기 위하여 또 다른 선영이를 죽이고자 하는 선영이의 파괴적 욕망마저도 근원적으로 그녀의 삶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애절하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가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삶의 욕망을 생산적 욕망이 아닌 파괴적 욕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III. 선영이의 탈주선

선영이와 문호가 고아이듯이 우리는 모두가 고아들인 또 다른 선영이와 문호이다. 문호와 선영이가 만나서 상호 일대일 관계의 가족을 만들고자 욕망하였듯이 우리도 일대일 관계의 생산적이고 생성적인 가족을 만들고자 욕망한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는 고아인 선영이가 자신의 생산적인 욕망에 따라 일대일 관계의 가족을 만들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가족, 학교, 기업, 군대, 법원, 정부 등등의 수많은 국가기구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력으로 구성된 '아빠-엄마-나'라는 서열관계의 가족주의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국민의 친구이어야만 하고, 의사는 환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환자의 연인이어야만 하듯이 총장이나 이사장은 아버지가 아니라 교수들의 친구이거나 연인이어야만 하고, 교수와 선생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학생들의 친구이거나 연인이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와 기업과 국가가 지배와 피지배의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관계가 아닌 그 구성원들로 구성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로 이루어질 때, 선영이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욕망은 죽음으로 치닫는 욕망의 탈주선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그 누군가를 생성시키는 지속적인 삶의 탈주선이 될 것이다.

ⓒ영화제작소 보임


그러나 죽음으로 치닫는 선영이의 탈주선에는 분명히 그 무엇인가의 잘못이 있다. 그것은 선영이의 욕망이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가족이 아니라 또 다른 가족주의를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영이가 벗어나고자 하는 가족주의가 선영이로 하여금 또 다른 가족주의를 만드는 것이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선영이는 가족주의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 속에서 존재하는 문호와의 가족을 구성하기 이전에 또 다른 선영(차수연 분)이나 호두 엄마(배민희 분)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고아들과 친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고아들이 모여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고, 기업을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 우리의 가족과 학교와 사회 그리고 국가는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나 국가가 될 것이다. 문호의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한나(김별 분)와 문호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생성시키는 친구관계이듯이 문호가 꿈꾸는 가족이나 병원 또한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가족이나 병원이다. 동물 병원이나 동물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 왜 인간의 가족과 사회에서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근원적으로 친구관계이거나 연인관계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본이나 권력을 매개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전환시킨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가족주의와 국가주의 때문이다.


2012-03-25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 - 보수와 진보, '야권연대'의 아름다운 만남


I. '부러진 화살'은 없다

김명호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사무처장 일을 맡고 있었던 2004년 겨울이었다. 민교협과 교수노조(전국교수노동조합) 사무실이 있는 낙성대 주변의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생맥줏집으로 민교협과 교수노조의 집행부 교수들과 김명호 교수가 함께 이동했다. 사무실과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진 주된 대화는 김명호 교수가 해직교수협의회(2004년 당시 전국의 해직교수는 50여 명에 이른다)에 들어와서 다른 해직 교수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법정에서 다른 교수들과 함께 김명호 교수의 해직이 불법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맥줏집으로 옮긴 자리에서 민교협과 교수노조 집행부 교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김명호 교수의 재판부와 판사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을 들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재판에 대한 해당 법조문뿐만 아니라 유사한 사례들의 판례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영화 <부러진 화살>에도 등장하지만, 김명호 교수의 논지는 수학의 공식처럼 법률은 너무나도 명료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보안법'도 수학의 공식처럼 너무나도 명료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법이냐고 어떤 교수가 질문을 했다. 그건 "자신이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정말로 대학에서 수학만 가르치고 연구실에서 수학만 연구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누려야만 하는 학자 중의 학자였다. 나도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근대 식민지성의 헌법에 대한 현실 판단이 그의 생각과 달랐다.

▲ <부러진 화살> (서형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그는 해직 교수 협의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다른 해직 교수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물소처럼 혼자서 싸웠다. 민교협과 교수노조 회원 교수들은 김명호 교수 대책위원회의 부탁으로 1인시위 이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연구년으로 해외에 나갔고, 영화 <부러진 화살>은 그 이후의 재판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중·동 신문이 1면 머리기사들로 그렇게도 요란하게 대한민국의 부정이고 법정모독이라고 떠들어댔던 '부러진 화살'은 없었다. 그는 수학의 공식처럼 너무나도 명료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법을 올바로 수행하지 않는 판사에게 항의하기 위하여 판사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식민지 근대성은 병원이나 대학이나 신문사의 언론이나 법원이나 정부나 의회의 개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병원을 구성하는 자본의 권력, 대학을 구성하는 식민지적 행정체제의 권력, 법원을 구성하는 법관들의 권위주의 권력, 정부를 구성하는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의 독재 권력, 그리고 의회를 구성하는 국회 권력의 구조들이 식민지 근대성의 지식과 권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권력, 학문을 연구하는 교수의 권력, 변호사와 검사 혹은 원고나 피고와 소통하면서 올바른 재판을 하고자 하는 판사의 권력, 지역구 주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권력,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대통령과 정부각료들의 권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한민국의 근대적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각각의 권력구조가 시민과 국민 그리고 소수자들을 위하여 각각의 아름다운 권력들을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김명호 교수는 비록 지난 20세기 대학의 권력구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21세기 법원은 각각의 판사들이 각각의 아름다운 권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 <부러진 화살> 속에 등장하는 박준 변호사(박원상 분)는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구조가 각각의 판사들로 하여금 각각의 아름다운 권력을 창출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헌법과 법원의 권력구조를 개혁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진보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명호 교수(안성기 분)를 '보수'라고 이야기하고 박준 변호사를 '진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결코 '꼴통'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의 삶이 만드는 사건들에 따라서 보수주의자도 되고 진보주의자도 되는 아름다운 보수와 진보의 원칙주의를 대표한다. 정지영 감독은 아마도 서형 작가의 소설 <부러진 화살>을 읽고, 소위 '꼴통 보수'와 '꼴통 진보'라고 일컬어지는 두 사람이 대한민국 법원의 아름다운 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가 되는 탈근대적 아름다운 만남에 매료되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리라?

II. 석궁 사건과 야권연대의 사건

'사건(event)'과 '사고(accident)'는 다르다. '사건'은 과거와 미래를 변형시키는 현재이지만, '사고'는 과거를 지속시키는 현재의 불협화음이다. 그래서 훌륭한 영화를 보는 '사건'은 영화 관객들을 변화시킨다. '6.15남북공동선언'을 포함하여 '2002한일월드컵' 등등의 수많은 21세기의 사건들은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을 탈근대의 생성적인 대한민국으로 변화시키는 사건들이었다. 김명호 교수의 '석궁 사건'은 근대 식민지성의 대학과 법원을 탈근대의 생성적인 대학과 법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김명호 교수는 아마도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석궁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성을 고수하는 법원 판사들의 권위주의와 언론권력의 저널리즘은 탈근대적 '사건들'을 지속적으로 근대 식민지성의 '사고들'로 폄하한다. 미국의 '9.11 사건'이 그렇고 지난 해 서해안에서 일어난 '천안함 사건'이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지난 20세기와 달리 탈근대 영화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처럼, 대한민국 사회와 정치의 장에서도 탈근대적 사건들은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것이 바로 '4.11 총선'을 대비하여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만든 야권연대의 '사건'이다. 김명호 교수가 대한민국 대학과 법원의 근대 식민지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석궁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정치인들이 '4.11 총선'을 통하여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을 탈근대의 생성적인 대한민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야권연대'라는 탈근대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 영화 <부러진 화살> 포스터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마치 민교협이나 교수노조의 교수들과 김명호 교수의 만남처럼 근대 식민지성의 일상 속에서 김명호 교수와 박준 변호사는 도저히 서로 화해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술자리나 대학 교정에서 서로 만났다면, 서로 소리를 지르며 언쟁을 하거나 혹은 서로 본체만체하며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통한 만남은 그렇지 않다. 수학을 전공하는 보수적인 김명호 교수는 법률을 전공하는 진보적인 박준 변호사보다 더 진보적인 법 해석을 하고, 진보적인 박준 변호사는 보수적인 김명호 교수보다 더 수학적 논리체계를 갖춘 보수적인 법조인이 된다. 영화 속에서 둘의 변화과정은 마치 김명호 교수가 변호사이고, 박준 변호사가 대학에서 쫓겨난 수학을 전공하는 보수적인 학자인 것 같다. 사건은 둘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검찰과 변호사의 논증 과정을 엄밀히 분석하는 석궁사건의 2심을 맡았던 이태우 판사(이경영 분)도 또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근대 식민지성을 대한민국 법정의 권력으로 알고 있는 검찰이나 석궁사건의 1심을 맡았던 박봉주 판사(김응수 분)의 잘못을 알게 된다. 사건의 핵심인 '부러진 화살'이 없는 것이다. '부러진 화살'만 없는 것이 아니라 '피가 묻은 와이셔츠'도 없다. 피고인으로 나온 김명호 교수는 교수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의 사건을 근대 식민지성의 법원을 탈근대의 생성적인 법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성의 법원 권력이 이태우 판사를 신재열 판사(문성근 분)로 대체해 버린다.

신재열 판사와 같은 근대 식민지성의 수구세력은 김명호 교수나 이태우 판사와 같은 원칙이 있는 보수가 아니다. 보수를 가장하고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의 노예이다. 법정 사건을 다루는 신재열 판사는 사건을 사건으로 인식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피고인과 변호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법정사건을 다루어서 올바른 판결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가는 것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판결이 나 있다. 대한민국 근대의 보수를 자처하는 김명호 교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보수주의적 원칙 속에서 신재열 판사는 판사가 아니다. 마치 대학입시 수학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수가 보수주의적 원칙 속에서 교수가 아닌 것처럼 김명호 교수의 보수주의적인 법의 논리 속에서 신재열 판사는 판사가 아닌 것이다. 진보적인 변호사를 자처하는 박준 변호사가 김명호 교수의 보수주의적 원칙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심지어 김명호 교수처럼 변호사의 자리를 내팽개치고 싶어 한다. 그의 삶과 그의 분노를 함께하는 장은서 기자(김지호 분)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신재열 판사에게 물병을 던졌을 것이다. 석궁 사건과 또 다른 근대 식민지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법정모욕사건! 박준 변호사와 장은서 기자, 혹은 그의 아내(진경 분). 그리고 김명호 교수와 그의 아내(나영희 분)의 관계처럼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에서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익과 우익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 영화 <부러진 화살> 중 ⓒ아우라 픽쳐스


영화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 보자.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에서 진보와 보수는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500년 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침략과 바스쿠 다가마의 아프리카 침략 이후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근대 식민지화를 토대로 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지식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근대 식민지성의 전략이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보여주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은 상호보완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 문명과 자연이 상호보완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처럼 서로 대립하거나 상하의 서열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1990년대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그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에서 건강한 보수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화 <부러진 화살>에 등장하는 김명호 교수처럼 근대 대한민국의 사법부와 입법부 그리고 행정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의 권력과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권력 등등이 시민과 국민, 그리고 소수자들을 위한 각각의 아름다운 권력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근대 진보주의 세력과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계승하는 수구꼴통 세력과 연대했고, 연대하고자 했다.

III. 이정희 의원의 눈물과 김용민 후보의 아름다운 싸움

199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 근대 식민지화 과정의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과거의 민주당을 계승하는 민주통합당은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근대 보수주의 정당이고 과거의 민주노동당을 계승하는 통합진보당은 개혁이 없이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근대 진보주의 정당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석궁사건을 통한 보수주의 학자 김명호 교수와 진보주의 활동가 박준 변호사의 만남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처럼 대한민국 근대 식민지성의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유례도 찾을 수 없었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4.11 총선'을 탈근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야권연대의 만남 또한 너무나도 어려웠다. 근대 식민지성의 독재 권력을 계승하는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근대 식민지성의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으로 야권연대를 깨기 위한 집요함은 마치 영화 <부러진 화살>에 등장하는 신재열 판사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도 역겹다. 그러나 영화 <부러진 화살>에 등장하는 박준 변호사처럼 '4.11 총선'을 대한민국 탈근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야권연대를 깨지 않기 위하여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보여준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이정희 의원의 눈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개그맨들과 개그를 하기 위한 농담을 가지고 근대 식민지성이 지니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으로 막말 논쟁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의 투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정희 의원의 눈물과 김용민 후보의 투혼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정희 의원의 눈물에 보답하듯이 그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은 민주통합당의 결단도 아름답고, 이정희 의원을 대신해서 '야권연대'를 깨지 않기 위하여 이정희 의원 지역구에 출마한 통합진보당 이상규 후보의 용기는 얼마나 갸륵한가! 그들만이 아니다. '4.11 총선'을 탈근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야권연대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전국 각 지역구 후보들의 노력은 마치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석궁사건을 탈근대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만남으로 승화시킨 장은서 기자나 박준 변호사의 아내, 혹은 김명호 교수의 아내, 그리고 '김명호 교수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한 소설가 서형 씨와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문제는 우리다.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과 권력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거나 진정한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4.11 총선'을 어떻게 근대 식민지화 과정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탈근대적 사건으로 만드느냐이다. 그것은 마치 김명호 교수 개인과 박준 변호사 개인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는 석궁사건의 재판을 <부러진 화살>이라는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서 영원한 탈근대적 사건으로 승화시킨 서형 작가와 정지영 감독처럼 근대의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서로서로 만나서 탈근대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역사적 사건으로 '4.11 총선'을 만드는 것이다.


2012-04-08



정지우 감독의 <은교> - 소녀의 '여성되기'와 노인의 '시인되기'


I. 사건의 만남

70세의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와 패기 넘치는 30대의 젊은 소설가 서지우(김무열 분), 그리고 18살 고등학생 소녀 한은교(김고은 분)의 만남.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의 "순간은 하루보다도 더 크고, 그 하루는 일 년보다도 더 크다". 정지우 감독의 <은교>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큰 그러한 세 사람의 만남의 사건을 다룬다.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노인과 청년과 소녀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각각의 생명을 지닌 각각의 서로 다른 존재의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래서 문제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사건의 순간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와 소설과 영화는 사건의 순간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건의 노래요, 사건의 이야기요, 그리고 사건의 이미지들이다.

▲ 영화 <은교> ⓒ 정지우 필름


영화 <은교>에서 만남의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18살의 소녀는 여성이 되고, 70세의 노시인은 소설가가 된다. 그러나 30대의 패기 넘치는 소설가 서지우는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습의 이데올로기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그에게 세 사람의 만남은 사건이 아니라 단순한 사고일 뿐이다. 사고는 관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그래서 소녀의 '여성되기'와 노인의 '시인되기'를 이루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사건 속에서, 사건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지우는 관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치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영화 <은교>는 18살 소녀의 '여성되기'와 70세 노시인의 '소설가 되기'의 즐거움과 쾌락, 그리고 소녀와 노인의 '친구되기'와 '연인되기'의 아름다운 생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제는 18살 소녀 은교가 아직 소녀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반면에, 70세의 노시인 이적요는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항상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인이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그 사건의 '순간'이 지니고 있는 생성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적요 시인이 몸이 늙어서 정신마저 늙어버린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 아침의 햇살과 풀잎의 이슬방울 그리고 허공에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새들의 이미지들을 모두 순간순간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사건으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이미지의 언어로 바꾸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적요 시인은 별이 다 똑같은 별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별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별에도 무한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소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하나의 소녀가 아니라 무한히 다양한 여성이 되어가고 있는 소녀이다. 그 소녀의 무한한 생성 앞에서 이적요 시인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탄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의 무한한 생성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탄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무한한 생성이 되고 생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그러나 소녀는 노인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적요 시인과 달리 스스로 생성하고 스스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녀의 '여성되기'이다.

II. 장편소설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

▲ 운명적 만남과 디테일이 완성한 이정교의 집 ⓒ정지우 필름


영화 <은교>에서 소설가 서지우가 썼다는 <심장>이나 시인 이적요가 은교를 만나면서 쓴 소설 <은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영화 관객들은 모른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장편소설 <심장>을 서지우가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지우는 은교에게 자신의 소설이 대중소설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소설을 쓴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소설에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적요는 18살 소녀 은교에게 소설 <심장>을 읽은 소감을 말해달라고 한다. 그녀가 소설 <심장>을 읽은 감동과 마찬가지로 그도 감동한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분명하다. 생산의 즐거움은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지 부끄러워하거나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소설이든지 고급소설이든지 간에, 소설이나 문학은 단순 글쓰기의 재주가 아니라 심장과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서지우는 소설이나 시를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이나 시를 단순히 하나의 글재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소설이나 고급소설이라는 말은 근대의 문학교육이 만든 허상의 이분법이다. 우리는 심장과 영혼이 있는 소설과 문학, 혹은 심장과 영혼이 없는 소설과 문학을 발견할 뿐이다. 문제는 심장과 영혼을 지닌 생명이다. 저 들판의 이름이 없는 꽃이나 온갖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나 혹은 수많은 가지를 뻗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늙은 나무가 모두 각각의 생명인 것처럼 18살 소녀 한은교나 30대의 소설가 서지우나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는 각각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각각의 서로 다른 이미지의 존재이다. 그 이미지의 존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이미지의 존재가 심장과 영혼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심장과 영혼은 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편 소설 <심장>과 단편 소설 <은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소설들이 모두 몸 과 더불어 두근거리는 '심장'에 관한 이야기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여성으로 생성되고 있는 은교의 몸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심장과 심장이 만나는 것,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것처럼 친구가 되는 것이요, 또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되는 것이나 연인이 되는 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것처럼 일대일의 관계이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것이다.

18살 소녀 은교와 70세 노시인 아적요의 만남은 하나의 심장과 또 다른 심장의 만남이요, 하나의 영혼과 또 다른 영혼의 만남이다. 그것은 인간 그 자체로 구성된 언어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18살 소녀 은교는 노시인 이적요가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라는 시적 언어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적요는 은교의 "헐"이라는 다양하고 발랄한 시대적 생명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언어가 그들의 몸 자체일 때,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나 영혼과 영혼의 만남은 그것들이 소속하고 있는 그들의 몸을 생성시킨다. 그 생성은 은교의 심장과 이적요의 심장이 다르듯이 혹은 은교의 영혼과 이적요의 영혼이 다르듯이 소녀 은교의 몸을 여성의 몸으로 생성시키고, 노인 이적요의 몸을 청년 남성의 몸으로 생성시킨다.

여성의 몸이 '생명'을 잉태하는 생성의 몸이라면, 남성의 몸은 '세계'를 잉태하는 생성의 몸이다. 70세의 노시인은 은교를 만나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의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은교>라는 소설을 쓴다. 그 소설 속에서 18살 소녀 은교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적 생성의 몸이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은교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혹은 이적요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노인의 마지막 친구이면서 연인이었던 은교에게 주는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은교가 맞이하게 될 아름다운 여성되기의 순간을 근대적 관습의 이데올로기에 젖을 대로 젖어 있는 서지우가 훔쳐가 버렸다.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인은 소녀의 몸이 여성의 몸이 되는 생성의 순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이나 존재의 다양한 이미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사회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주어진 이름만으로 알고 있는 서지우는 생성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오직 섹스만을 알고 있지, 몸과 몸이 어우러지는 생성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노시인 이적요는 분노한다. 몸의 아름다움, 몸의 생성, 그리고 은교의 '여성되기'를 단순히 섹스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기계적인 섹스만을 하는 서지우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심장이 없고 영혼도 없이 오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섹스를 하는 한은교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노시인의 분노는 서지우와 한은교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분노는 서지우를 그렇게 만든 자신의 동정심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며, 시와 소설을 단순히 영혼과 심장이 없는 상징과 은유로 해석하는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의 권력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서지우는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근대 자본주의의 청년들이 사랑이나 섹스를 심장이나 영혼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과 똑같다. 그는 이적요가 자신을 따르고 보살펴준 '세경'으로 써 준 <심장>을 발표하면서 그 소설을 분명히 읽어보았을 것이고, 이적요의 서재에서 소설 <은교>를 읽으며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적요의 '심장'을 알지 못하고,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은교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 은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가 '공대생'이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교육과학기술부'나 '문화관광부'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근대의 문학교육과 문학제도가 문학이나 예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학이나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삶의 문화와 예술을 단순한 자본의 관광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지우에게 심장과 영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분명히 심장과 영혼이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장과 영혼은 예술과 철학을 모두 과학으로 재단하는 대한민국 근대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단순히 기념관과 시비로만 계산하는 문학제도와 문학권력에 빠지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장편소설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를 심장과 영혼이 살아 있는 이미지의 생성으로 읽지 못하고 단순히 언어의 기교로만 읽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몸은 심장과 영혼이 없는 기계 덩어리의 감각만 있고, 그의 섹스는 기계적인 반복만 있을 뿐 심장과 영혼의 환희로 이루어진 생성의 사랑이 아니다.

III.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

은교가 떠난 노시인의 저택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은교를 만나기 전, 거울 앞에서 늙은 노인의 몸을 바라보는 이적요 시인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는 낡은 저택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은교와 이적요가 만나는 사건 이후로 생명의 빛이 들어오고, 노시인의 무한한 생성적 이미지의 언어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은교의 순수한 생명의 이미지가 만드는 즐거운 환희의 집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어둠이요, 죽어가고 있는 생명이 없는 집이다. 그 집에 어느 날 문득 은교가 찾아온다. 은교가 장편소설 <심장>의 '심장'이 이적요의 심장이요, 단편소설 <은교>의 아름다운 영혼이 바로 이적요의 '영혼'이라는 것을 은교가 마침내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지우에 대한 분노와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에 대한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잘 가라, 은교야"라고 말하면서 편안하기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적요는 마침내 은교가 아름다운 생성적인 여성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70세의 노인이 이제 갓 피어나는 소녀처럼 하나의 생명이듯이 죽음 또한 영영 이별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인간의 관습이나 언어로 이루어진 인간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자연의 시각에서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탄생이다. 그 탄생은 소설가 이적요의 탄생일뿐만 아니라, 은교의 새로운 탄생이기도 하다. 이적요의 심장과 이적요의 영혼을 온전하게 자신의 심장과 영혼으로 받아들인 은교가 이적요의 장편소설 <심장>과 그의 단편소설 <은교>를 다시 찾아줄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작업은 심장과 영혼이 사라져버린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 영화 <은교> 중 한 장면 ⓒ정지우 필름


소녀 한은교가 아닌, 여성 한은교의 사랑과 투쟁은 이적요와의 만남의 사건이 아름다운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안다. 사랑이 소유가 아니라 생성이고, 파괴적인 것들과의 투쟁이 분노나 적대감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것을! 권력과 자본의 섹스가 아닌 우리 몸속에 있는 심장과 영혼의 울림이 있는 사랑, 그리고 문학과 예술과 지식을 관습의 이데올로기로 재단하려는 과학적 합리성의 기술과 기교로만 파악하려는 근대 문학제도와 교육제도에 대한 투쟁은 단지 영화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은교의 몫만은 아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 또한 나의 잘못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적요의 조용한 외침을 깨달음으로 받아들이는 영화 관객들과 이적요와 같은 노시인을 사랑했던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을 통하여 소녀에서 여성이 되는 수없이 많은 은교, 그리고 늙음이나 장애 등등으로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들의 사랑과 투쟁이 근대의 교육과 제도가 잃어버린 심장과 영혼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영화관 밖으로 나와 바라보는 대한민국과 이 세상은 단지 추함의 세계로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적요가 한은교를 만나는 사건처럼, 이 세상의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 정지우 감독과 그에게 노시인의 심장과 영혼을 불어넣어 준 소설가 박범신의 <은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적요 시인과 같은 노시인과 만나 와인 한잔을 들고서 '뾰족한 연필의 슬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봄이다.


2012-04-29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들의 일그러진 한국학개론


I. 1990년대 삶의 이중성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1990년대의 과거와 2012년의 현재를 서로 넘나들면서 대한민국의 서울과 제주도를 오간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과 남쪽 끝 제주도! 서울과 제주도의 지리적 관계는 1990년대를 정점으로 그 이전의 중심과 변두리라는 근대적 관계에서 하나의 지역과 또 다른 지역이라는 탈근대적인 일대일 관계로 변했다. 서울과 제주도의 관계적 변화처럼 지난 20세기 말이었던 1990년대는 분명히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다.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과 1990년대 이후의 탈근대적 자율성이 개인적이든지 사회적이든지 간에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 1990년대이다. 그러나 정지우 감독의 <은교>에 등장하는 서지우(김무열 분)나 1980년대의 암울한 근대적 현재를 이야기하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영화로 만든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에 등장하는 이원상(박해일 분)과 같은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인들에게 제주도는 여전히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변두리의 끝에 있는 가장 소외되어 있는 변두리이다.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는 승민(엄태웅 분)이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에서 서울과 제주도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첫사랑의 여인으로 승민이 앞에 나타난 서연(한가인 분)이의 집을 지어주기 위하여 승민이와 서연이는 서울과 제주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서연이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맞이했던 서울의 삶을 마감하고 제주도에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지만, 승민이에게는 아직 자신의 집이 없다. 집은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영토다. 서연이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있는 제주도의 집을 새롭게 다시 지으려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더불어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아련한 첫사랑의 승민이에게 집의 설계와 건축을 부탁한 것이 아닐까? 그 집이 서연이의 집이면서 또한 승민이의 집이 될 수 있을까? 승민이와 서연이가 새롭게 지으려는 집은 마치 1990년대 이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근대의 대한민국에서 서로 헤어졌다가 서로 더불어 사는 탈근대의 대한민국이라는 집을 지으려는 우리들과 같다.


II. 건축학개론과 한국학개론

ⓒ명필름


문제는 집을 짓는 가장 근본적인 건축학개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2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서연이와 함께 승민이는 1994년 신입생 시절의 건축학개론 강의실로 돌아간다. 건축학개론을 강의하는 강 교수(김의성 분)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건축학은 시작한다"고 말한다. 건축학만이 아니다. 문학이나 철학, 정치학이나 경제학의 모든 학문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내가 일하고 있는 집과의 일대일 관계적 선분을 긋는 것.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아는 것과 그 관계적 선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강 교수는 학생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의 각 지역들에서 학생들이 현재 공부하고 있는 대학교를 버스 노선이나 지하철 노선을 따라 선분을 긋는 것으로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건축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문학이나 사회철학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학이라는 우리의 인식의 집도 그 내부적 지역들과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적 선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1994년의 승민(이제훈 분)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의 정릉이라는 지역을 강남의 지역에 대비하여 열등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릉은 1990년대 이전까지 서울의 다른 여타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을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방배동이나 돈암동이 서울을 구성하는 다양한 선분들의 두 개의 점이듯이 정릉과 개포동은 서울을 다양한 선분들로 구성하는 수많은 점들 중의 점들이다. 승민이가 정릉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열등한 곳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마치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이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일본이나 미국에 비교하여 열등한 곳이라는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근대 식민지성은 항상 우리의 삶을 지리적으로 양분한다. 일본과 미국이라는 근대 식민지 모국과 식민지 피지배 지역, 본국의 이주민 지역과 식민지 원주민 지역, 중심과 주변, 서울과 지방 등등.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강남은 본국의 이주민 지역도 아니고 서울의 중심도 아니다.

19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강남과 강북의 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이분법을 통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자신의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열등감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이나 권력 중심으로 유지되고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이다. 그러한 근대 식민지성은 자기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연인관계와 친구관계 그리고 가족관계를 파괴한다. 근대 식민지성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 삶의 관계적 파괴성과 폭력성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연인과 친구 그리고 가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정릉에 사는 것을 열등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승민이는 서연(배수지 분)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고, 단지 서연의 사랑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랑은 두 사람 간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관계이고,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서로의 삶이 함께하는 미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성중심적인 기교의 차원으로만 인식한다.

199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근대 식민지성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강남에 살고 있는 선배 재욱(유연석 분)이와 재수생 친구 납뜩이(조정석 분)이다. 바람둥이인 재욱이는 관계를 자본의 관계로 인식하고, 여고생을 사귀고 있는 납뜩이는 관계를 남성 중심의 권력의 관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같은 대한민국의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서연이는 다르다. 그녀에게 서울은 모두 서울이다. 강남과 강북의 구분은 서울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배 재욱이 앞에서 자신을 가지고 그녀를 여자 친구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승민이를 이해할 수 없고, 느닷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 "꺼져!"라고 말하는 승민이의 어설픈 폭력성을 이해할 수도 없다. 아마도 그녀가 승민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서울의 경험은 또 다른 근대 식민지성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있는 승민이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적 근대 식민지성에 함몰되어 있는 또 다른 재욱이거나 납뜩이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2012년의 현재 근대 식민지성의 온상인 서울에서 벗어나 제주도로 온 것이다.

2012년의 승민이는 변했을까? 아니다. 인식은 결코 개인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관계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만들고, 의식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연이가 다시 승민이를 찾은 것은 승민이가 근대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율적인 개체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근대 식민지성의 열등감을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삶의 장소로서 강남에 대한 열등감이 건축학이라는 학문으로서 미국의 건축학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근대 식민지성의 인식으로 인하여 정릉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의 토대를 잃어버린 것처럼 대학교 1학년 시절에 배우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건축학은 시작한다"는 개론의 지식도 없이 그냥 미국의 건축학에 대한 열등감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를 찾은 서연이로 인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다시 인식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민이의 근대 식민지적 의식은 다시 서연이에게 화를 내는 어설픈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III. 제주도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삶

ⓒ명필름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도 등장하는 것처럼 1990년대는 한국 사회의 건축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집단적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것은 건축학만이 아니다. 문학도 그렇고, 역사학도 그렇고, 사회학이나 여타의 학문들이 모두 그렇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모든 학문은 내가 살고 있는 터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각각의 관계들이 지니고 있는 일대일 관계의 상호생성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개론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부산이나 광주, 혹은 대전이나 춘천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소도시나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역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 일대일의 관계가 생산적이며 상호생성적이라는 탈근대적 인식이 등장한 것이 1990년대이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비록 불협화음은 있을지언정 구소련은 새로운 러시아와 다른 여타의 나라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중국은 새로운 중국으로 거듭났으며, 독일은 동서독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유럽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1990년대에 우리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 권력의 계승으로 인하여 근대 식민지성의 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교육과 문화적 장치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열등감을 강요한다. 그 열등감의 근본, 즉 근대 식민지성의 실체는 영어 식민지성이다. 1990년대 이전 영어 식민지성은 지구촌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는 아니다. 스페인어권의 중남미 나라들이 영어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스페인어권의 문화로 돌아가고 있고, 아프리카 또한 영어나 프랑스어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한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영어는 결코 이 지구촌 세계가 움직이고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실체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권력과 자본의 언어이지 결코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일상적 삶의 언어가 아니다. 그 권력과 자본의 언어가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근대 식민지성이 바로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다.

승민이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시간에 서연이는 승민이가 지은 제주도의 집에 있는 작은 어항 속에서 노닐고 있는 붕어들을 바라본다. 서연이는 아마도 어항 속에서 노닐고 있는 붕어들을 보면서 근대 식민지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랑과 삶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승민이와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좇는 재욱이와 납뜩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이라는 어항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승민이만은 근대 식민지성의 작은 어항 속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근대 식민지성의 건축학이 아니라 탈근대의 건축학은 미국의 건축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정릉의 한구석에서 찾아낸 빈집의 한옥처럼 대한민국 곳곳에 숨어 있는 빈집의 한옥들을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승민이에게 자신이 사는 집을 부탁한 것이 아닐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승민이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진실한 삶과 사랑을 깨닫고 제주도의 서연이 곁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나만의 꿈일까?


2012-05-06




문현성 감독의 <코리아> - 탈근대의 코리아 연합, 혹은 연방 공화국


I. 탈근대의 시작

영화관에서 표를 사는데, 뒤에 있는 젊은 연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코리아>, 저건 너무 인위적으로 질질 짜게 만드는 영화일 것 같아. <건축학개론>은 어때?" 옆에 있던 여자가, "그래, <건축학개론> 보자!"라고 답한다. 나는? 나는 울고 싶어서 <코리아>를 보기로 결심했다.

▲ 영화 <코리아> ⓒ(주)더타워픽쳐스

젊은 연인들의 대화처럼, 영화 <코리아>는 관객들을 질질 짜게 만드는 근대 영화의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코리아에 대하여 캄캄한 영화관 내부에서 실컷 울고 싶어서 혼자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21세기의 오늘날은 분명히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만들어진 '6.15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6.15 남북공동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만을 인정한다고 하기 때문에 영화 <코리아>는 1991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대통령이 탈근대를 부정하니, 국민인 나도 근대로 되돌아가 실컷 울어보자는 심산으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1990년대는 전 지구적으로 그 이전의 근대적 과거와는 달리 인종적, 종교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서 새로운 상생을 위한 만남의 장을 열었던 시대이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났고, 유럽에서 동유럽과 서유럽이 만났으며,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만났으며, 아메리카에서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이 만났다. 그 결과로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서구 유럽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근대의 제국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지구촌을 구성하는 자율적인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유럽은 그 구성원들이 서로 상생하고자 하는 새로운 유럽연합이 탄생했으며, 남아프리카는 흑백통합정부를 구성했고, 아메리카는 500년 동안 침묵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등장하여 백인 이주민들과 흑인 노예 출신들을 포함한 다양한 혼혈 종족들을 포용하는 새로운 아메리카를 만들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그러한 지구촌의 탈근대적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하나의 탈근대적 사건이었다.

II. 남과 북의 탈근대적 만남의 사건

ⓒ(주)더타워픽쳐스


서구 유럽의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침략으로 시작된 근대화 과정의 가장 큰 문제는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을 출발점으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존재를 정신과 몸,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으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지구촌 세계에서 일어난 탈근대적 깨달음은 오늘날 서구와 비서구가 모두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몸이며,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몸의 일부분이고, 개인은 결코 사회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남과 북의 개개인은 서로서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한 국가대표 탁구팀과 북조선의 국가대표 탁구팀이 북경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하여 하나의 대표팀을 구성하는 것은 단지 탁구선수들 개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40년 동안 서로서로 이질적으로 자라난 남한 사회와 북조선 사회가 최초로 만나는 사건이었다. 영화 <코리아>는 그러한 탈근대적 사건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서로서로 이질적으로 자라난 남자와 여자의 만남처럼, 남과 북의 만남은 설렘과 긴장,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과 반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온전하게 자라난 남자와 여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 만나서 서로가 서로를 서로 다른 남성과 여성임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을 하여 미래를 만드는 준비를 하듯이, 서로 다른 사회와 국가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한 하나의 주체가 되어서 서로 다른 상호체제를 인정하고 함께 공통의 미래를 만드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남한의 국가대표 현정화(하지원 분)와 북조선의 국가대표 리분희(배두나 분)는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고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당당함 속에서 근대적인 모든 만남이 지니고 있는 설렘과 긴장,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과 반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처럼 설렘과 긴장은 잠깐이고, 서로 다른 오해와 갈등이거나 대립과 반목의 근대적 일상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근대적 일상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과 반목을 넘어서서 탈근대적 평화와 생성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삶으로 표현되고 있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당당함이다. 당당함은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한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복식조 대표를 뽑는 경기에서 현정화는 당당하게 최연정(최윤영 분)과 함께 하는 자신들의 복식조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리분희와 유순복(한예리 분)의 복식조가 코리아팀의 대표 복식조가 되게 한다. 현정화와 리분희, 그리고 남북 탁구 대표팀 선수들의 만남처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해야만 한다. 그 당당함은 근대화 기간 동안 만들어진 남한의 식민지성을 인정하고, 또한 북조선의 폐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러한 당당함은 단지 현정화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선수들에게 다 적용될 수 있다.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 등등의 모든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당당함은 근대적 일상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평화와 생성의 세계를 만든다. 영화 <코리아>에서 현정화의 당당함은 유순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서 리분희와 현정화의 환상적인 복식조를 만들게 하여 남한과 북조선 모두가 그렇게 갈망했던 중국의 벽을 넘어서는 금메달을 따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현정화와 리분희, 그리고 유순복과 최연정 등등의 대표팀 선수들이 대한민국 국민이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이라는 당당함을 여전히 근대적인 체제경쟁으로 치부하는 권력층들이다. 영화 속에서 그러한 위기를 다시 한 번 극복하는 사람은 현정화이다. 비를 맞으며 함께 경기장에 나가자고 무릎을 꿇은 현정화의 모습에 감복하여 북조선의 조감독(김응수 분)은 북조선 권력층의 폐쇄성을 넘어서서 북조선 선수들과 함께 주체적 자율성의 결정을 한다.

1991년의 남북탁구 단일팀 구성을 계기로 남과 북은 끊임없이 근대적 일상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과 반목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2000년에 만들어진 '6.15 남북공동선언'이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가 1990년대의 지구적인 탈근대적 분위기에 휩쓸려서 만든 것이라면,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의 두 지도자가 마침내 도달한 탈근대적 깨달음에 의한 결단이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마치 영화 <코리아>에서 현정화와 리분희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당당함 속에서 환상적인 복식조를 구성하듯이 남과 북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당당함 속에서 "코리아 남북연합(혹은 연방)공화국"을 구성하자는 합의이다. 근대적인 측면에서 남한은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성의 국가이고, 북조선은 서구적인 근대화와 단절되어 있는 폐쇄적인 국가이다. 탈근대적 깨달음은 남한의 근대적 식민지성을 탈근대적 세계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북조선의 근대적 폐쇄성을 탈근대적 주체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III. 탈근대적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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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화는 경기가 끝나고 북조선으로 떠나가는 리분희에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반지를 선물한다. 리분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가장 근원적인 관계는 근대적인 오해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시장의 교환관계가 아니라 관계적 삶의 문화를 구성하는 선물관계이다. 현정화는 하나의 반지를 선물했지만, 리분희는 아마도 그녀의 마음을 현정화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 세계를 놀라게 만들고 있는 한류 문화처럼 남한의 근대적 식민지성을 탈근대적 세계성으로 만들고 북조선의 근대적 폐쇄성을 탈근대적 주체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강조하는 "코리아 남북연합(혹은 연방) 공화국"은 남과 북의 선물관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마치 영화 <코리아> 속에서 현정화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북조선과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게 현정화처럼 당당한가?

영화 속에서 현정화가 리분희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함께 훈련하고 경기를 치르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정화와 리분희만이 아니다. 남과 북의 모든 선수들과 코치 그리고 감독이 근대적 일상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대립과 반목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근대적인 시장의 교환관계가 아닌 탈근대적 삶의 선물관계가 되었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이러한 시간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이명박 정부뿐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차치하고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마저도 인정하지 않고 저 옛날 박정희 시대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외교정책이다. 영화를 필두로 하는 한류 문화가 만드는 대한민국의 탈근대적 세계성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대적 식민지성을 탈근대적 폐쇄성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세계관이다. 그래서 문현성 감독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하여 만들어진 남북 탁구 단일팀 구성이라는 최초의 탈근대적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닐까?


2012-05-20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 -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


I. 프로이트와 융의 위험한 방법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 등장하는 근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로이트(비고 모르텐슨 분)와 그의 정신분석학이 강조하는 개인 무의식에서 벗어난 집단 무의식에 대한 연구의 선구자였던 융(마이클 패스밴더 분)의 관계는 근대적 개인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의 한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서구적 근대의 인문학이 기독교 성서해석학과 과학적 문자해석학의 결합인 것처럼 신과 인간, 혹은 원본과 복사본의 이분법은 개인(무의식)과 사회(무의식)의 이분법이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구성하는 근대적 분과학문 체계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신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인문학은 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철학에서 언급하는 저자의 원본을 선택할 것인가 분석자의 복사본(해석학)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사회과학은 개인(자본가나 지배자)의 이익이나 권력을 선택할 것인가 사회(노동자나 국민)의 이익이나 권력을 선택할 것인가가 근대 분과학문 체계의 근본적인 대립과 갈등의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두 선택지 중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규정된 인간이고, 복사본은 원본에 의해서 규정된 복사본이며, 노동자나 국민은 자본가나 지배자에 의해서 규정된 노동자나 국민이기 때문에 근대적인 지식은 근대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프로이트는 20세기 초반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19세기 말까지 서구 유럽의 인간학은 기독교 성서 해석학에 등장하지 않는 인간 무의식의 세계나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자연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 즉 '리비도'라는 생명의 힘을 발견하자마자 곧 그것을 근대 가족주의의 감옥 안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정신의학의 한 분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의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교육체계, 그리고 근대국가의 기업과 정부, 군대, 법원 등등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근대국가의 국가장치들이 만드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속에서 '나와 너'라는 친구와 연인의 동맹관계나 동지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구조만이 존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의 지도를 받았던 융은 리비도나 무의식을 오직 오이디푸스의 성적 욕망으로 규정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의심하면서도 별다른 방법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대화치료(talking cure)'의 방식을 채택하여 정신이상 환자를 치료한다.

문제는 칼 융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교육기관과 병원, 법원과 정부, 그리고 경찰과 군대, 언론과 정당 등등의 모든 국가장치들은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모델을 자체의 핵심 구조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아버지의 힘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본과 권력이다. 대한민국의 국가 장치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과 역사학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 등등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과 지식은 우파와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데이저러스 메소드>는 서구 근대성의 지식,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이 탄생한 그 자리에서 신, 원본, 그리고 자본가와 지배자의 편에 있는 프로이트와 그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인간과 복사본, 그리고 노동자와 국민의 편에 있는 칼 융의 관계 속에서 오늘날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재생산하는 정신분석학의 이분법적 구조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II.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원효의 아라야식

근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로이트보다 1300년 전 신라에서 한국 불교학의 새벽이라고 알려진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ㆍ별기>에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보다 더 뚜렷하게 무의식이나 욕망, 혹은 창조적 생명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라야식(阿羅耶識)'에 대한 논의가 아주 뚜렷하게 등장한다. '리비도'나 무의식에 해당하는 '아라야식'만이 아니라 칼 융이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들면서 제시한 역사(사회)적 무의식, 즉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후기에 제시한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ness)'이나 '슈퍼에고(super-ego, 초자아)'에 해당하는 '말나식(末那識)'은 물론이고, 19세기의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의 의식과 18세기의 존 로크가 이야기하는 '인간 오성론(人間悟性論)'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원효의 글에는 '안이비설신'의 오성(제5식)과 의식(제6식)-말나식(제7식)-아라야식(제8식)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효가 제시하는 무의식의 '아라야식'은 욕망이라는 창조적 생명력이고 깨달음의 힘이기 때문에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개입하는 그 어떤 서열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학에서 바라보는 모든 인간이나 사회 혹은 자연의 관계는 도반(道伴), 즉 깨달음의 길을 함께 가는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지 지배와 피지배, 혹은 주인과 노에의 관계가 아니다.

▲ 사비나 슈필라인 역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칼 융은 마이클 패스벤더가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구성하는 지식과 권력은 고대 신라의 한국 불교학을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으로 치부하면서, 오직 서구의 근대적 지식을 구성하는 프로이트나 헤겔, 혹은 융이나 데카르트만을 우러러보며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 서구적 근대 정신분석학의 두 흐름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역설적으로 제시하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프로이트와 융 때문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융과 프로이트의 징신과 치료 환자이기도 하면서 연인인 동시에 동료 학자였던 아동심리학의 창시자였던 사비나 슈필라인(키이라 나이틀리 분)이 프로이트와 융을 넘어서서 '리비도'라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실천하고 논리화하였다는 것이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주요한 연구방법론으로 채택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에서 사비나 슈필라인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가 제시하는 것은 사비나 슈필라인이 융이나 프로이트보다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만이 오직 진실한 사랑, 혹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비나 슈필라인이 어렸을 적의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만들어진 성도착에서 벗어나 뛰어난 아동심리학의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마조히스트적인 욕망을 이해하고 그녀를 사랑한 융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였던 융과 슈필라인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둘이 친구 관계와 연인 관계로 정신과 치료뿐만 아니라 욕망과 무의식을 사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지니고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구조의 가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이 환자였던 슈필라인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인식하고 있었던 동료 정신의학자 오토 그로스(벵상 카셀 분)의 "오아시스가 보일 때는 반드시 멈춰서 물을 마셔라"라는 욕망의 흐름을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슈필라인과 융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환자가 되고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이 오토 그로스와 친구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슈필라인과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부자 관계를 모델로 정신분석학과 지식을 이해했던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융은 근대적인 사회의 스캔들에 대한 비난, 경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내 엠마의 가족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라는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융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슈필라인은 자신의 새로운 주치의로 프로이트를 선택하여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이트의 가족주의적 욕망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학문적 동료가 되기 위하여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욕망이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창조적 생명력, 즉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그러한 자아를 파괴하는 힘이 "새로운 창조적 생명력"으로 작동한다는, 즉 욕망은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에 있는 생명의 흐름이라는 들뢰즈의 탈근대적인 욕망의 인식, 혹은 사회적이거나 기족적인 현실의 업(業)으로부터 탈각해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원효의 '아라야식' 인식론과 유사한 자아상실의 충동이론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슈필라인 때문에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융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 즉 부자 관계를 모델로 하는 학문적 사제 관계를 미끼로 슈필라인을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또한 슈필라인이 제시하는 자아상실의 충동이론을 '죽음충동(타나토스)'이라고 명명할 뿐,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이 지니는 '리비도'의 근원적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대의 사회적 권위주의와 자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III. 탈근대의 생명학

▲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한 장면


슈필라인과 융은 6년 만에 스위스에서 다시 재회한다. 융은 슈필라인과 다시 연인 관계와 친구 관계로 되돌아가서 슈필라인과 함께 환자의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이 아닌 인간의 생명학에 대한 논문을 쓴다. 그리고 근대의 냉철한 이성만으로 근대적 삶에 안착하려고 했던 융은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채로 러시아로 떠나려 하는 슈필라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열정과 생명, 즉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이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성은 단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감옥에 가두려는 덫일 뿐이다. 감각과 느낌, 즉 본능적으로 모든 사회적 이분법을 넘어서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즐거움을 갈망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융은 슈필라인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학문적인 진전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의 가치, 즉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슈필라인에게 고백한다. 영화는 그곳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슈필라인과 융이 서로 함께 있었다면, 융과 슈필라인은 프로이트의 근대적 정신분석학에서 벗어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근원적으로 밀고 들어가 마침내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탈근대의 생명학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수필라인이나 융, 혹은 프로이트가 아니다. 그들은 100년 전 근대 기독교주의가 팽배한 서구 유럽에서 무의식이나 '리비도'라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서구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구조를 탄생시킨 사람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지난 100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학과 병원, 국가와 법원, 그리고 정부와 정당 등등의 구조 속에서 프로이트와 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신처럼 작동한다. 근대적 이분법이 확대되어 프로이트와 융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근대 식민지성이 대한민국의 국가 속에 스며들어 국가와 사회와 가족과 개인의 몸을 지배하는 의식, 즉 근대의 냉철한 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적 '대화 치료법'이 슈필라인과 같은 뛰어나고 창조적인 여성을 서서히 죽이는 너무나도 '위험한 방법론'이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서구 유럽 스스로가 프로이트와 융에서 벗어나 슈필라인이 제시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현실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1300년 전 원효의 <대승기론론소ㆍ별기>에 등장하는 '아라야식'을 다시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슈필라인과 들뢰즈와 원효가 만나는 탈근대의 생명학으로 세계를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2012-06-04




탈근대인들의 등장 :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돈의 맛>, 연약해서 아름다운 섹슈얼리티


I. 탈근대인들의 등장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로 데뷔하여 한국 탈근대 영화들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는 감독들 중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은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에서 과거의 영화들과 다른 본격적인 탈근대인의 전형을 영화 스크린에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돈의 맛>에 등장하는 윤나미<김효진 분)와 주영작(김강우 분)이다.

▲ <돈의 맛> 포스터 ⓒ휠므빠말

근대적 영화들의 전형들과는 달리 <돈의 맛>에 등장하는 나미와 영작은 영웅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의 나미와 영작은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윤나미의 섹시한 자태와 지적이며 냉소적인 언술, 그리고 주영작의 근육질 남성미와 침착함이 어우러지면서도 자본주의의 권력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성,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그의 내재적 힘. 영화 속에서 그들은 영웅들이 갖출 모든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영웅들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소시민의 관객들에게 더욱 가깝다. 물론 <돈의 맛>에서 윤나미와 주영작의 등장은 윤회장(백윤식 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윤 회장과 같은 근대적 영웅의 비극이 윤나미나 주영작과 같은 매력적인 탈근대인을 등장하게 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의 모든 영화들은 1998년을 기점으로 하는 그 이전 대한민국 사회의 근대성과 그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탈근대성을 가로지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1998년이라는 역사적 기점은 근대적 남성과 다른 탈근대적 여성의 등장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등장하는 호정(강수연 분)이와 연(진희경 분)이와 순(김여진 분)이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바로 탈근대성이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처녀들의 저녁식사> 이후 그들의 탈근대적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바람난 가족>(2003)에 등장하는 근대적 가족주의와 <그때 그 사람들>(2005)이 보여주는 근대 식민지 권력의 국가주의, 그리고 <오래된 정원>(2006)에서 드러나는 근대 식민지 권력에 저항하는 저항적 근대성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면서 근대적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희생적 도구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임상수 감독의 근대 식민지성에 대한 탐구는 <하녀>(2010)에서 은이(전도연 분)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자본의 폭력 앞에서 그 아름다움이 무참하게 찢기는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대한민국 사회의 근대적 역사와 가족의 질곡들을 보여주던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에서 근대 식민지성 대한민국 사회의 질곡으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나 윤나미나 주영작과 같은 매력적인 탈근대인들을 등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식민지적 근대성과 저항적 근대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윤 회장의 죽음 때문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등장하는 세 여성들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는 오직 젊은 여성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기발랄함이 지니는 생명성과 섹슈얼리티가 지니는 관계성은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돈의 맛>에서 윤 회장이 식민지적 근대성에서 저항적 근대성으로 자신의 삶을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 그리고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성이 마치 섹슈얼리티처럼 상호 생성적이어야만 한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은 그가 "돈의 맛"이 주는 순간의 달콤함이 아니라 에바(마우이 테일러 분)의 근원적인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II.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

▲ 배우 김효진이 윤나미 역을 맡았다. ⓒ휠므빠말


윤 회장이 에바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되고 그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로 그녀를 매료시킨 것은 둘의 관계가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출발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족과 사회와 국가는 근원적으로 생명성을 토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고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는 관계의 산물이다.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가족은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고,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사회는 즐거움과 쾌락의 윤리와 도덕을 만들며,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국가는 즐거움과 쾌락을 재생산하는 생산적 지식을 생성시킨다.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윤 회장과 에바의 관계는 필리핀에 있는 에바의 자식들과 함께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와 국의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근대 식민지성의 자본주의적 사회와 식민지 권력의 국가가 개인의 일탈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바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된 윤 회장의 낭만주의적인 저항적 근대성은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의 폭력적 근친관계를 너무 얕본 것이 문제였다.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에서 가족은 결코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는 가족이 아니다. 가족주의는 가족의 관계를 자본과 권력의 관계로 한정시킨다. 가족의 관계를 자본과 권력의 관계로 한정하는 것은 근대 가족주의의 가족을 근대 자본주의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에 가족의 구성원들을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과 권력의 관계에서 일탈한 윤 회장은 더 이상 근대 식민지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윤 회장 가족의 자식이 아니며, 남편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니다. 따라서 윤 회장이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로부터 탈주한다는 것은 근대 식민지성의 자본주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부터 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탈주는 치밀하고 서서히 준비하면서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탈주는 결코 과거의 영토로 다시 돌아오면 안 된다. 마치 <그때 그 사람들>에 등장하는 김재규(백윤식 분)처럼 윤 회장은 치밀하지도 않았고, 또한 과거의 영토, 즉 자본주의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 되돌아오는 잘못을 범했다.

▲ 배우 김강우가 주영작 역을 맡았다. ⓒ휠므빠말


윤 회장의 생명성과 그의 섹슈얼리티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고 싶었던 주영작은 윤 회장의 영웅적 죽음을 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나미가 어렸을 때 보았던 <하녀>에 등장하는 은이의 영웅적 죽음일 수도 있고, 실제의 역사를 다루었던 <그때 그 사람들>에 등장하는 김재규의 영웅적 죽음을 본 관객들의 감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 회장(혹은 실제의 역사에서 나타난 탤런트 장자연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웅적 죽음은 영작이나 나미, 혹은 탈근대적 관객들에게 영웅적인 죽음이지 백금옥(윤여정 분) 여사나 그의 아들 윤철(온주완 분)이나, 혹은 노 회장(권병길 분)과 같은 다른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빠져 있는 돈과 권력의 노예들에게는 아니다.

그들에게 윤 회장의 죽음은 에바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은밀히 처리하고 비밀로 간직하는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자본과 권력의 맛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말로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본질을 알고 있는 주영작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탈주는 서서히 준비되는 것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작동하는 근대적 인식의 세계 속에서 적과 싸우는 것은 적을 닮아가는 것이다. 깡패와 싸우는 것은 깡패를 닮아서 또 다른 깡패가 되는 것이고, 독재자와 싸우는 것은 독재자를 닮아서 또 다른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과 가족주의는 다르고, 사회의 자본과 자본주의는 다르며, 문화 공동체의 국가는 국가주의와 다르다.

그러한 가족과 사회와 국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은 강함이 아니다. <돈의 맛>에 등장하는 나미와 영작이 지니고 있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적이 강한 것은 적과 싸우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적과 깡패와 독재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력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순간적인 감정에서 윤철에게 덤벼들었던 영작이의 연약한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된 나미의 아름다움! 그러나 각각의 연약함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작이와 나미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는 둘이 함께 있을 때에 강력한 사회적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그들의 강력한 아름다움은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사회와 국가에 전염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생성시키는 것이지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를 인위적이거나 근대의 영웅적 행동으로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인 서열관계에서 벗어나 탈근대적 수평적 관계의 주위를 돌아보라! 근대 식민지성의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돈의 맛"과 국가주의의 권력의 맛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수많은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미는 그러한 영작이의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또 다른 연약한 생명성과 아직 자라나지 않은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추구하는 사회 속으로 탈주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작이와 나미는 서구 유럽과 미국 혹은 일본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근대 식민지성의 질곡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가난과 싸우고 있는 필리핀의 국가와 살해당한 에바의 어린 자식들의 사회 속으로 탈주한다.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탈주한다는 것은 곧 "돈의 맛"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작이와 나미는 이미 알고 있다.

III. 탈주의 미학

ⓒ휠므빠말


근대적 인식의 공간에는 탈주를 위한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근대 식민지성의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적 인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돈의 맛>에서 영작이와 나미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족주의가 아닌 사랑과 연민이 작동하는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본주의적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고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에서 벗어나는 것은 근대 서구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에서 수입된 근대적 인식론의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시공간에서 생성되는 지식을 통하여 수평적으로 작동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등의 지구촌 세계의 관계적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돈의 맛"으로 작동하는 대한민국 근대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탈주해 필리핀에서 만드는 나미와 영작이의 탈근대적 가족은 에바의 자식들을 포용함으로 말미암아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를 만들 것이고, 그렇게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필리핀과 대한민국을 포함하는 상생적 즐거움과 쾌락의 지식을 생성시키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만들 것이다.

<돈의 맛>에서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과 돈의 노예로 성장한 노 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자본과 권력을 계승하는 윤철이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 미국에 있는 말기 근대 자본주의의 자본과 제국주의의 권력을 대변하는 로버트(달시 파켓 분)와 권력적 연대를 맺고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근대 식민지성을 유지시키는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지식과 권력은 서구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 있는 근대 제국주의의 지식이나 권력에 식민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과 일본에는 대한민국의 근대 식민지성을 유지시키는 "돈의 맛"과 권력의 맛의 원천이 있지만, 필리핀과 베트남과 아프리카와 중남미에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생성시키고 지속시키는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새로운 지식이 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먼저 근대 식민지성의 "돈의 맛"과 권력의 맛에서 벗어나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탈근대의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다음엔 백인들 공격하는 영화 찍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난 500년 동안 서구 유럽이 만들었고, 오늘날 미국이 계승하고 있는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과 권력을 영화 스크린으로 드러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벌써 그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2012-06-17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 - "우리도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I. 케빈은 누구인가?

최근의 미국 영화들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미래는 고양이처럼(The Future)>(2011)에서 드러나듯이 근대적인 일상에 찌든 미국인들의 삶과 사유 속에서 미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의 미국 영화들은 미셸 아자나비슈스의 <아티스트(The Artist)>(2011)나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처럼 1920년대의 헐리우드나 1920년대의 프랑스 파리라는 근대적 과거의 환상으로 도피하거나, 혹은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의 <치코와 리타>(2010)처럼 근대의 이국적인 취향에 함몰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은 마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나 일본의 영화들처럼 하나의 과도기적인 현상들일 것이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 

과거 이들 나라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의 제국주의적 근대성이 갈 길을 잃으면서 제국주의적 근대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거대 서사들로 점철되었던 근대적인 영화들이 소멸되고, 마침내 이미지의 변화와 생성이 지니는 각 개체들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탈근대의 영화들로 전환하였던 것처럼 미국 영화들이 근대적인 것에서 탈근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오늘날의 미국 영화들이다. 그러한 전환의 정점에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가 있다. 린 램지 감독은 미국인들에게 아주 뚜렷하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케빈(에즈라 밀러 분)은 누구인가? 케빈은 지난 7월 19일 미국 콜로라도 주 한 극장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지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이기도 하며, 또한 2005년 미국 북부 미네소타 주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케빈과 같은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 의해 미국에서 매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한 이래로 미국 사회가 여전히 지난 서구적 근대의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총기 소유를 합법화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난 서구적 근대의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근대적 교육과 사회가 콜럼버스나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와 같은 근대인을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고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고 있는 바스코 다가마(실제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그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기난사를 감행하였다. 그러한 총기난사를 통하여 그들은 영웅이 되었다. 또한 미국 할리우드의 근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총잡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이라는 근대적 명제를 통하여 합법화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미국 근대인들의 합법적인 총기난사는 인권수호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케빈은 오늘날의 21세기에 살고 있는 콜롬버스이며, 로빈슨 크루소이며, 또한 바스코 다가마이거나 바르톨로뮤 디아스이다. 소위 지구촌 시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21세기에 미국 사회에서 케빈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는 지난 근대적 과거에는 기독교나 문명, 혹은 고급문화나 자유주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서구적 근대의 교육과 사회가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서구적 근대를 수호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회로 연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0년 동안 이루어진 근대적 과거에는 기독교나 문명, 혹은 고급문화나 자유주의 인권이 서구적 근대의 자본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후기 근대에는 오직 개인의 능력만이 근대적 자본과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교육하고 가르치는 신자유주의 교육과 사회만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근대적인 가족과 학교, 그리고 대학의 학문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케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무차별적인 살육, 영웅적이고 고상한 방식의 자살,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하루에도 수만, 혹은 수십만 건으로 발생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의 폭력과 폭언 등등을 일삼는 영웅적인 근대인들을 재생산한다.

II. 모성애와 근대성

영화 <케빈에 대하여>여 등장하는 케빈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와 같은 대한민국의 어떤 청소년을 포함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근대인의 모범이 되고 있는 콜럼버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 혹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전형적인 근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마치 하멜이 제주도를 발견한 것이 아닌 것처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의 끝자락을 여행한 것이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끝자락인 희망봉을 여행한 것이다. 하멜이 우연히 제주도에 표류한 이후로 당시의 수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하멜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처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혹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후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따라서 <하멜 표류기>에 등장하는 하멜과 같은 '로빈슨 크루소'가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발명품인 것처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 발견"은 서구적 근대의 발명품이다. 마치 뉴턴의 "만유인력의 발견"이 그 시대의 과학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패러다임 속으로 가두어 놓았듯이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의 '발명'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구촌 세계의 삶과 지식을 근대적 서구 유럽의 세계관 속에 가두어 놓았다.

ⓒ티캐스트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 별견"이 서구적 근대의 지리적이거나 역사적인 발명품인 것처럼 천부적인 '모성애라는 관념은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의 발명품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모성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에바(틸다 스윈튼 분)의 삶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에바의 직업은 과거의 콜럼버스나 바르톨로뮤 디아스처럼 여행가이다. 과거 남성의 몫이 오늘날 여성의 몫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과거 남성의 몫이 오늘날 여성의 몫으로, 과거 서구 백인의 몫이 오늘날 동아시아 한국인을 포함한 비서구 유색인의 몫으로 확대된 것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육과 인식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근대적인 제도와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적 삶의 확장은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으로 강요받는 것이고, 비서구 유색인들의 삶의 확장은 그들의 삶이 서구 백인들의 삶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을 잃어버리고 남성이 되며, 지리적인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잃어버리고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되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인이 지리적으로 서구 유럽과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아메리카인이 아니라 서구 유럽의 백인이라고 착각하듯이 말이다.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에바는 마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걸리버가 여행에서 돌아와 여성의 삶을 경멸하듯이 현실의 삶에서 드러나는 근대적 여성의 삶을 경멸한다. 그녀의 주위에서 근대적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은 모두 그녀가 책임져야만 하는 삶의 적이다. 돈을 벌어야만 하고 자신의 삶도 책임지기가 벅찬데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삶도 책임져야만 한다. 그녀의 아이, 케빈은 마치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처럼 여행을 하며 오늘날 미국이 책임지고 있는 근대적인 서구적 질서 속에서 지역적 특이성으로만 존재하는 지구촌의 다양성을 즐기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뉴욕으로만 한정되도록 만든 원인이다. 마치 오늘날의 서울처럼 뉴욕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뉴욕은 최소한 근대적인 미국의 서구적 질서 속에서 서구인이 되고 백인이 된 수많은 비서구 유색인 여성들이 그들의 인종적이고 지역적인 특이성으로만 존재하는 지구촌의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케빈의 공격적인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선택한 교외의 전원주택은 더더욱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미국 중산층 가족의 삶과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의 꿈이었던 여행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지도를 자신만의 방에 도배하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주장하는 케빈에 의하여 무참하게 뭉개진다.

에바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된 것처럼 케빈은 이미 아이나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 남성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교육 속에서 에바처럼 똑똑한 여성이 이미 남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케빈처럼 똑똑한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교육과 사회를 모방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똑똑한 아이는 벌써부터 어른이 되고, 똑똑한 여성은 벌써부터 남성이 되며, 똑똑한 지식인들은 벌써부터 서구 유럽인이 되거나 미국인이 되지 않는가? 이미 어른이 된 케빈은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 혹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 '로빈 후드'가 되고자 한다. 그의 엄마나 아빠, 혹은 그가 다니는 학교나 미국 사회가 그가 '로빈 후드'가 되는 것을 장려하고 고무시킨다.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개인적인 발명의 영웅만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근대적인 가족과 근대적인 교육과 근대적인 사회는 케빈이 로빈 후드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총기류 따위는 너무 일상적이다. 그래서 케빈은 로빈 후드처럼 전통적인 활을 선택한다. 뛰어난 개인이 이 시대의 의적, 로빈 후드가 되는 길은 자신의 삶을 위협하고 자신의 삶을 빼앗으려고 하는 적대적인 사회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밖에 없다. 콜럼버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기독교를 위하여 그랬고, 19∼20세기에는 서구 문명을 위하여 그랬던 것이 이제는 오직 개인의 삶만을 위하여 근대적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III. 탈근대적 케빈을 위하여

미국 사회의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미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감옥에서 케빈을 면회하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있는 에바는 케빈을 낳고 현실의 미국적 삶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프랑스는 여성이 남성이 되어야만 하고, 비서구 유색인이 서구 프랑스인이 되어야만 하는 탈근대의 사회 속에서 그들이 여성적 삶과 비서구적 삶과 유색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즉 남성이 여성이 되고, 서구 백인이 비서구 유색인이 될 수 있는 탈근대적 사회제도와 교육제도를 갖추고 있다. 에바의 소망과는 달리 미국의 현실 속에서 에바는 미국적 삶에 충실했다. 에바는 열심히 살았고, 자신의 아들인 케빈을 사랑했다. 그러나 케빈은 그녀가 또한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딸을 살해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미국 사회마저도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다. 누구의 죄인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에바를 단죄할 것인가? 아니다. 모성애가 사회적 산물인 것처럼 영웅이거나 악인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콜럼부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지난 과거의 인물로 돌려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처럼 이제 더 이상 세계 경찰국가의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고 지구촌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자라고 있는 근대적인 케빈을 탈근대적인 케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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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하는" 미국의 미래는 미국인들의 몫이다. 문제는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교육을 모방하여 여성이 여성이 될 수 없게 만들거나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신자유주의의 무조건적인 경쟁과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사회와 교육이다. 이 대한민국의 근대적 에바는 미국의 근대적 에바처럼 서구 유럽과 아프리카와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등등의 여행을 꿈꾸면서 신자유주의의 경쟁이 강요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고, 대한민국의 케빈은 미국의 근대적 케빈이 로빈 후드를 꿈꾸는 것처럼 임꺽정이나 돈키호테를 꿈꾸면서 그 증오의 화살을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이 사회와 학교에 조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근대적인 과거나 유교주의의 도덕 교육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프랑스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베네수엘라 등등과 같은 나라들처럼 남성이 여성이 되고, 어른이 어린이가 되고, 지식인이 노동자가 되고, 남한이 북조선이 되고, 서구 유럽이 아랍이나 아프리카가 될 수 있는 모든 개체가 지니는 생명의 동질성 속에서 관계의 다양성을 살 수 있게 만드는 탈근대적 교육과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개혁과 교육개혁 그리고 사회개혁은 그러한 개체의 풍요로운 삶 속에서 어떻게 대환민국이 탈근대적 사회와 국가를 만드느냐에 관한 논의이다.


2012-07-31




박정희와 김일성 넘어서기 - <피에타>가 연 황금시대, '탈근대 코리아'의 조건은…


I.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

▲ <피에타> ⓒ김기덕필름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2012)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황금시대가 1990년대 후반 이후 21세기의 문화 한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1960년의 4.19 혁명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황금시대가 도래했었고, 소설과 시를 비롯한 한국문학과 더불어 한국영화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그리고 일본의 뉴저팬 시네마와 함께 새로운 문화 한류의 흐름을 형성했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더불어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한 분단체제로 인한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 체제와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 체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문화적 시도였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김수영 시인의 <풀> 등등의 시와 소설들과 더불어 김기영 감독의 <하녀>, 홍성기 감독의 <길은 멀어도>, 김화랑 감독의 <울려고 내가 왔던가>,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와 <이 생명 다하도록>, 이규환 감독의 <낙화암과 삼천궁녀>, 양주남 감독의 <대지의 어머니> 등등은 21세기 현재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시와 소설 그리고 영화들은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그리고 뉴저먼 시네마 등등과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즉 서양과 동양이나 백인과 유색인 혹은 남성과 여성 등등의 이분법을 통하여 지속적인 대립과 갈등을 양산하는 식민지 근대성이거나 폐쇄적 근대성을 강요하는 서구적 근대성을 넘어서고자 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한국문화 황금기의 시대는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근대 극복의 문화가 사라져버린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타임스>지가 선정한 세계 3대 독재자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과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노쓰 코리아(North Korea)의 김일성 주석이었다.

1970년대의 박정희와 김일성은 코리아의 남과 북을 지배하는 독재자로 세계 방방곡곡에 그 유명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서구 유럽의 전 지구적 확산으로 이루어진 지구촌 근대화 과정에서 비서구 지역들에 존재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근대성의 두 가지 축면을 대표한다. 그것은 박정희가 대표하는 식민지적 근대성과 김일성이 대표하는 주체적 근대성이다.

박정희의 식민지적 근대성은 미국을 추종하기 때문에 서구 유럽이 만든 지구적인 근대성의 측면에서 일본과 유사한 세계적 근대성의 요인이 존재하고, 김일성의 주체적 근대성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적대시하기 때문에 서구 유럽이 만든 지구적인 근대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중국과 유사한 폐쇄적 근대성의 요인을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국가도 항상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름의 장점과 단점으로 드러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지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식민지적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이라는 근대적 이중성의 단점들을 넘어서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세계적 근대성과 주체적 근대성이라는 근대적 이중성의 장점들을 되살려 싸우스와 노쓰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탈근대의 코리아를 만들기 위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한 것이다.

▲ <실미도> ⓒ플래너스(주)

그러나 오늘날 이명박 정부 하의 대한민국, 그리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등장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20세기의 박정희와 김일성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를 계승한 미국이 선진국과 후진국이거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을 통하여 서구적 근대성을 지속시키는 근대적 세계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은 지난 20세기의 한반도가 낳은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함은 온전한 하나의 위대함이 아니라 반 쪼가리의 위대함이고, 그들이 대표하는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은 온전한 하나의 한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반쪽인 싸우스 코리아나 또 다른 반쪽인 노쓰 코리아를 대표할 뿐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이중성은 단지 박정희와 김일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세기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분단 상황에서 서로 같으면서 서로 다른 근대국가를 추구했던 싸우스 코리아인과 노쓰 코리아인은 박정희와 김일성이라는 두 가지 근대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와 현실에서 모두 드러난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에 등장하는 1968년의 '684 주석궁폭파부대'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김일성 모가지 따기'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모가지 따기'를 실행하기 위하여 청와대로 향한다. 이와는 반대로 1980년대 <강철서신>으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운동권 주사파의 대부 노릇을 했던 김영환 씨는 1990년대 이후 북한 인권운동가가 되어 박정희 세력의 최전선에서 그 나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II. 박정희와 김일성의 두 가지 근대성 넘어서기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기보다는 다시 박정희를 불러내고 김일성을 불러내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독재시대로 퇴행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시와 소설, 그리고 영화의 문화 한류가 시작되었던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쿠데타 사이의 4.19 혁명 시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해보자.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승만을 계승하여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부활시켰던 1960년과 1961년 사이의 4.19 혁명 시절은 오늘날과 유사한 문화적 해방의 시대였다. 그러한 문화적 해방의 4.19 혁명 시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이다.

철학자 강신주 교수가 한 대학의 특강에서 다루어 화제가 되고, 한만수 교수가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칼럼의 "'김일성 만세'와 국가보안법"(☞ 바로가기)에서 다시 언급된 김수영의 유작 시는 당시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마찬가지로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에 있었던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을 모두 넘어서고자 했던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탈근대성의 구체적 역사성을 제시하는 시이다. 문제는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가 보여주는 특이성은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의 등장과 '박정희 만세'를 부르는 식민지 근대성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에 등장하는 '조지훈이란 시인'이 대표하고 있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식민지 근대성 인문학 지식인들과 '장면이란 관리'가 대표하는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식민지 근대성 사화과학 지식인들을 구성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지식과 권력이다.

김수영의 시를 음미하면서 4.19 혁명 시절의 문화 한류를 계승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2000)과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을 살펴보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 시인은 이승만 체제와 김일성 체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4.19 혁명의 상황에서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 나는 잠이 올 수밖에"라고 말한다. 당시의 대학과 언론의 지식권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조지훈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지식인들이 식민지 근대성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김수영 시인이 세상사 다 팽개치고 "잠이 올 수밖에"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라는 정치권력의 식민지 근대성의 논리에서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이야기한다.

수십 명의 학생들의 죽음과 수백 명의 시민들이 상처를 입고 달성한 4.19 혁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민주당 정부의 관리가 오직 식민지 근대성에 안주하여 주체적 근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니 더욱 강력한 식민지 근대성의 정치인들이 등장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김수영은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이승만보다 더 강력한 식민지 근대성의 정부와 국가를 만들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모두 독재체제로 만드는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서 주체적 근대성과 세계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탈근대적 한반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수영 시인과 마찬가지로 김지하 시인이나 장준하 선생과 같은 지식인들도 "잠이 깰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일제 식민지 교육이나 미국의 신자유주의 교육이 아닌 자율적 근대교육을 받은 대학생들도 "잠이 깰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것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장준하 선생님처럼 죽음을 당하거나 김지하 시인처럼 아직도 고문의 상처에서 시름하고 있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성의 대한민국에서 온전하게 잠에서 깨어나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북조선의 폐쇄적 근대성과 남한의 식민지적 근대성을 넘어서서 북조선의 주체적 근대성과 남한의 세계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주체적 세계성이라는 한반도의 탈근대성을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이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한 1990년대 이후의 세대들이다.

▲ <공동경비구역 JSA> ⓒ명필름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문화 한류의 영화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과 임상수 감독이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에 등장하는 북조선 인민군 중사 오경필(송강호 분)과 전사 정우진(신하균 분), 그리고 남한의 국군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은 <실미도>에 등장하는 식민지적 근대성이나 폐쇄적 근대성에 매몰되어 있는 1960년대나 70년대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김일성이나 박정희는 중국의 모택동이나 장개석처럼 단지 과거의 인물들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군이 관할하고 있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주체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남한의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이고 세계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북조선의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이다. 그들이 공동경비구역의 북측 막사에서 감광석의 노래를 듣거나 오리온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박정희의 식민지적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 세계적 근대성과 주체적 근대성이 서로 결합한 주체적 세계성을 지닌 탈근대인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다. 그 분단 상황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박정희와 김일성 넘어서기를 한 사람은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장 소령(이영애 분)이다. 그녀는 최인훈의 <광장>에 등장하는 이명훈처럼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 남과 북의 그 어느 곳도 선택하지 않은 아버지가 제3국을 선택한 덕분으로 스스로 주체성과 세계성을 두루 갖춘 탈근대인이 되었다. 그녀는 싸우스 코리아인도 아니고 노쓰 코리아인도 아니면서 싸우스와 노쓰를 모두 아우르는 코리안 스위스인이다. 그녀는 김일성주의자도 아니고 박정희주의자도 아니면서 김일성주의와 박정희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탈근대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근대적 분단 상황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공동경비구역의 판문점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남한이나 북조선의 어느 하나를 조국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오경필 중사와 이수혁 병장에게 안타까운 연민을 보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폐쇄적이며 식민지적인 관계로 만드는 남과 북의 근대적 대립과 갈등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상황은 죽은 김일성이 되살아나는 것이고, 또한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죽은 박정희를 되살리는 것은 죽은 김일성을 되살리는 것이 되고, 죽은 김일성을 되살리는 것은 죽은 박정희를 되살리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 <그때 그 사람들> ⓒMK Pitures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은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한민국 식민지 근대성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가 1960년대의 4.19 혁명 시절에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을 계승하는 박정희의 등장을 예견하는 것처럼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은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이 다시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을 계승하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을 예견하도록 만든다. 전통적인 보수성을 대표하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의 열기를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1979년 10월 26일의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암살은 1980년 잠시 동안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서울의 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시의 대한민국을 지배한 사람들은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정치인들도 아니고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학자들도 아니었다. 오랜 식민지 근대성으로 인하여 미군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서 같은 언어와 역사를 기지고 있는 이웃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이 박정희의 시신을 감싸고 국회를 지배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를 암살한 새벽,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김재규(백윤식 분)의 심복이었던 주 과장(한석규 분)이 텅 비어 있는 중앙청 앞 도로를 갈팡질팡 운전하는 모습은 미래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식민지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정희보다 더 강력한 전두환의 신자유주의 식민지 근대성이 판을 칠 수밖에….

III.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

서구적 근대성을 모두 부정하는 폐쇄적 근대성의 대안이 서구적 근대성을 모두 받아들이는 식민지 근대성이 아닌 것처럼, 서구적 근대성의 노예가 되는 세계적 근대성의 대안이 외부와의 단절을 통한 내부의 통제로 이루어진 주체적 근대성은 아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1960년의 4.19 혁명 시절이나 1980년의 '서울의 봄' 시절과는 달리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근대의 시대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처럼, 혹은 지난 런던 올림픽에서 브라질과 멕시코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축구 대표 팀이 나란히 4강에 올라간 것처럼 문화적인 삶에서 근대적 서구유럽의 문명과 비서구 지역의 야만, 혹은 근대적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이 사라진 탈근대의 시대이다.

김기덕 감독뿐만 아니라 박찬욱, 홍상수, 임상수, 봉준호 등등의 수많은 감독들의 영화들이 서구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가지각색의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K-팝으로 대표되는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대한민국의 탈근대 문화는 다양한 지구촌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더불어 삶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 근대의 문화를 생산하기 시작한 16세기 서구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처럼 탈근대적 문화의 생산 중심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식민지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김수영의 지적처럼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식민지 인문학의 지식인들이고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식민지 사회과학의 지식인들뿐이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 박찬욱이나 임상수 혹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그동안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주체성과 세계성을 결합한 주체적 세계성이라는 탈근대성의 스크린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21세기에 맞이한 대한민국 문화의 황금기가 1960년의 4.19 혁명 시절처럼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들에서 서구 유럽과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지구촌 전체의 탈근대 문화의 형성에 기여할 것인가이다. 그것은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식민지 인문학의 지식인들과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식민지 사회과학의 지식인들이 하루라도 빨리 식민지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문화를 토대로 한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을 형성하는 것에 달려 있다.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은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이나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에 내재해 있는 세계적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에 내재해 있는 주체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비서구 유색인 여성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자연의 생명의 권리와 문화의 권리 그리고 교육의 권리 등등을 보장하는 주체적 세계성의 탈근대 코리아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의 두 독재자들, 즉 박정희와 김일성의 근대적 망령이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탈근대의 코리아를 만드는 것이다.


2012-09-14



조근현 감독의 <26년> - 21세기 미친 대한민국을 위한 씻김굿, <26년>


I. 기억의 과거와 망각의 현재, 1980년 5월 18일

2012년 12월의 오늘. 대한민국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1980년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 5월을 망각한 사람들이다. 1980년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향유하지 못한다. 이와 반면에 1980년의 5월을 망각한 사람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찬양하며 21세기의 대한민국을 향유한다. 근대적인 정신분석학이 아닌 탈근대의 욕망이론에서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 아니라 망각의 동물이다. 과거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그 과거가 오늘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이 어제와 다르기 위해서는 어제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사랑을 망각해야만 가능하다. 시간의 흐름은 그런 것이다. 조근현 감독의 영화, <26년>은 이러한 두 종류의 대한민국 사람들, 1980년 5월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1980년 5월을 망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2006년 5월 18일의 대한민국과 서울을 다루고 있다. 2006년 5월은 2012년 12월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청어람

1980년 5월 18일은 대한민국 국군이 전라남도 도청소재지 광주에 파견되어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날이다. 물론 그 전날 밤 광주시에 있는 미문화원 직원들과 외국인들은 모두 특별 경호를 받으며 광주시를 빠져나갔다. 부산 앞바다에는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이 한반도를 겨냥하며 수십 대의 전투기와 미군 병사들이 전시체제를 갖추고 정착하고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는 이미 비상계엄령이 내려졌고, 총을 든 비상계엄군들이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거부하는 적이 필요하듯이 박정희 독재자를 계승한 전두환 독재자는 적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왜 그 적이 광주였을까? 서울이나 부산, 혹은 대구나 대전, 인천이나 춘천이 아니고 광주였을까? 그것은 독재자 박정희의 적이 광주였고, 박정희를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와 동일한 적을 만듦으로 인하여 박정희를 계승한다는 독재자의 원칙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진배(진구 분)가 있었고, 미진(한혜진 분)이가 있었고, 정혁(임슬옹 분)이가 있었으며 갑세(이경영 분)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진배와 미진이와 정혁이는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고, 대구나 대전이 아니고 광주가 왜 전두환이나 박정희의 적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남편을 잃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엄마와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빠와 살면서 진배와 진구는 서서히 1980년의 역사를 알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대통령의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부를 쌓기 위해서, 수천 명의 광주 시민들의 목숨을 무차별적으로 앗아간 것이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이라는 것을. 진배와 미진이에 비해서 정혁이는 비록 나이가 어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등학생 누이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진배나 미진이보다 더 뚜렷하게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기억한다.

II. 과거를 지우기 위한 몸부림의 씻김굿, 2006년 5월 18일

26년의 세월이 흘러서 한 세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기억하면서 아파하고 있다는 것은 그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광주학살의 주범이 대통령의 권력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심심하면 언론에 등장하여 1980년 5월 18일의 아픔을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심지어 당시에 전두환으로부터 6억 원(80년 당시 25만 원이던 대학등록금이 500만 원이 되었으니 오늘날의 화폐로 계산하면 120억 원)을 받은 박정희의 딸이 여당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아픔 속에서 진구의 엄마(이미도 분)는 정신이상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미진이의 아빠(이상훈 분)는 연희동 전두환 자택 앞에서 분신을 하며 세상을 떠났다.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어찌 진구 엄마와 미진이 아빠뿐이겠는가?

문제는 진구 엄마나 미진이 아빠처럼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서 일어난 슬픔과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21세기 현재의 삶의 향유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통과 슬픔을 광주에서뿐만 아니라 서울과 부산 그리고 대구와 대전 등등에서 수수방관했던 우리들이다. 수천 명의 광주 시민들이 전두환의 총칼에 무참하게 살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 내 친구는 무사하다는 이유로 1980년 5월 18일을 망각하고 사는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이 제정신일까? 진구 엄마나 미진이 아빠, 혹은 진구나 미진이의 시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 아닐까? 그 미친 사람들을 위하여, 미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씻김굿을 한판 벌여야만 하지 않을까? 영화 <26년>은 21세기 미친 대한민국과 미친 대한민국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씻김굿이다.

ⓒ청어람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 21세기 지구촌 시대의 대한민국을 향유하기 위한 씻김굿의 주체는 결코 그 당시 광주에서 죽은 수천 명의 원혼들이나 진구 엄마나 미진이 아빠처럼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겉으로는 지난 20세기의 악몽에서 벗어나 세계화 시대니 지구촌 시대니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듯한 21세기의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이다. 그래서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있다가 기업인으로 성장한 김갑세와 그의 양아들 김주안(배수빈 분)은 진구와 미진이와 정혁이를 부른다. 그들 또한 깡패가 되어, 국가대표 사격선수가 되어, 그리고 경찰이 되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이들 다섯 명만이 아니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하고 후회하는 광주 수호파 깡패두목 안수호(안석환 분)와 수호파 패거리들, 그리고 숨죽여가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그 뻔뻔스러운 전두환의 죽음을 목격하고자 했던 관객들이 <26년> 씻김굿의 주체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 21세기 대한민국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그 씻김굿에서마저도 우리는 온전하게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사한 진구와 미진이의 애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온 삶을 바쳐 전두환의 진심 어린 사죄와 개과천선의 모습을 받아내려는 갑세와 주안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 18일을 망각하고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정혁이가 있기 때문이다. 정혁이는 전두환을 경호하는 경호책임자 마상렬(조덕제 분)이나 탁 실장(민복기 분) 혹은 최 계장(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서 전두환 계엄군의 총알에 누나를 잃은 정혁이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전두환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도록 보호하는 또 다른 마상렬이며 탁 실장이며 최 계장이다. 그가 죽은 누이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또 다른 마상렬이며 탁 실장이며 최 계장이 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고 현실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현실적 삶의 욕망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2006년 5월 18일을 기점으로 하는 영화 <26년>의 씻김굿은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처럼 직장에서 진급을 해야 하고, 아름다운 사랑도 하고, 생산적인 가족도 갖고,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현실의 욕망에서 정혁이가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씻김굿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전두환처럼,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계엄군들처럼, 혹은 1980년 5월 18일에 서울이나 부산 혹은 대구나 광주의 그 어느 곳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했던 그 시대의 그 사람들처럼 21세기의 우리도 또한 살인자이거나 혹은 살인방관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 <26년>이 벌려놓은 씻김굿의 완성은 전국에 있는 <26년> 영화 관객들뿐만 아니라 아직도 전두환과 전두환 일당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2012년 12월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III. "명령하지 마!", 너 안에 있는 전두환을 버려라, 2012년 12월 19일

ⓒ청어람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조근현 감독이 마련한 <26년>의 씻김굿은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에 완성되어야만 한다. 정혁이처럼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1980년 5월 18일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진이처럼 총을 들 수도 없고, 진구처럼 두 주먹과 맨몸뚱이만을 가지고 연희동으로 침입해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김갑세처럼 26년 동안 이를 악물고 1980년 5월 18일만을 기억하면서 대자본의 기업인으로 성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총도 없고, 무쇠와 같은 주먹이나 용기도 없고, 또한 국가에 대항할 거대한 자본도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투표장에 갈 수 있는 두 발과 올바른 21세기 대한민국 지도자에게 투표할 수 있는 두 손, 그리고 이 대한민국이 식민지 대한민국이거나 독재자의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되어야만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다.

식민지 대한민국이나 독재자의 나라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와 민주주의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에 대한 판단은 영화 <26년>의 마지막 장면에 모두 드러나 있다. 1980년 5월 18일에 김갑세와 함께 광주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수천 명의 광주시민들을 죽이고 현재까지 전두환의 개 노릇을 했던 마상렬은 김갑세를 쏘아 죽이라는 전두환의 말에, 그의 생애 최초로 "명령하지 마!"라고 항거한다. "명령하지 마! 더 이상 나에게 명령하지 마!" 그는 죽음 앞에서 마침내 자신은 전두환의 하수인이 아니라 하나의 자유인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우리도 마상렬처럼 선언해야만 한다. '명령하지 마! 나는 독재자의 후손이나 살인자의 하수인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자유인이야!' 2012년 12월 19일의 대한민국 모든 투표장에서 우리 모두의 '자유인 선언!'이 이루어질 때, 영화 <26년>에 등장하는 진구와 미진이, 그리고 갑세와 정혁이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또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2012-12-16




<설국열차>, 근대와 다른 세계에 대한 사유


I. "괴물"의 근대적 대한민국과 "설국열차"의 근대적 (서구유럽)세계

영화 <괴물>을 통하여 괴물이 된 서울과 괴물이 된 근대의 대한민국을 보여주었던 봉준호 감독이 영화 <설국열차>를 통하여 서울과 대한민국이 괴물이 된 근원이었던 근대 서구유럽 세계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이 된 서울과 괴물이 된 근대 대한민국의 근원은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은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제국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근대 서구유럽 사회가 되고자 열망하는 대한민국이 자발적으로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영화 <설국열차>에서 1914년 7월 1일에 멸망하는 근대 서구유럽 세계의 근원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설국열차" 속에 오늘날의 인류를 멸망하게 만든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되었던 근대의 세계적 구조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괴물>이 괴물이 된 근대의 서울과 근대의 대한민국을 사유하게 만든다면, 영화 <설국열차>는 마침내 스스로 멸망하게 될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세계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오늘날의 인류가 멸망한 새로운 빙하의 시대, 그 얼어붙은 지구의 표면 위에 달라붙어 있는 얼음을 관통하면서 17년 동안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설국열차"는 근대의 서구유럽 중심이 만든 세계이다. 그 안에는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에 도달한 이후, 그리고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 쿠바 해안에 도달한 이후, 500년 이상 동안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지역과 나라들을 서구 유럽이 만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화하고, 산업화하고, 도시화한 근대의 언어와 근대의 논리와 근대의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새로운 빙하의 시대로 근대의 세계가 멸망했는데, 그 멸망의 터전 위에서 근대의 서구적 언어와 근대의 서구적 논리와 근대의 서구적 사유는 그대로 남아서 열차의 모든 칸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감시하고 있다.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혁명을 꿈꾸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와 그에게 감명을 준 길리엄(존 하트 분),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책임지고 있는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II. 다른 언어와 다른 논리

근대의 세계는 "설국열차"가 엔진을 중심으로 서로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근대의 세계를 창시한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과거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인문학의 지식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과 후진국, 혹은 제 1세계와 제 2세계와 제 3세계라는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지역과 계급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혁명들처럼 근대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혁명, 그리고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과 같은 대부분의 혁명들은 서구유럽의 중심을 영국에서 미국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그리고 서부 유럽에서 동부 유럽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지 결코 노예제도와 식민지화에 토대를 둔 근대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소련이 멸망하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중남미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이주민이 통합되고 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설국열차>에서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만난 것처럼 서로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계급은 서로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내 이웃의 지역과 내 이웃의 계급과 내 이웃의 성과 내 이웃의 생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199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가 봉준호 감독으로 하여금 괴물이 된 근대의 서울과 근대의 대한민국을 넘어서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근대 서구유럽의 세계를 보여주는 <설국열차>를 만들게 한 예술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에서 동아시아나 중남미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근대적 논리와 근대적 사유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어나 불어, 혹은 독일어나 일본어와 같은 근대 제국주의 언어에서 벗어나 근대와 다른 논리나 근대와 다른 사유체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중남미 아메리카 지역의 이주 백인(크레올)이 중남미 아메리카 원주민의 케추아어나 아이마라어를 만나거나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이주 백인(아프리카너)이 줄루어나 코사어를 만나듯이 영어의 세계가 아닌 남궁민수(송강호 분)가 사용하는 한글의 세계와 만난다. 하나의 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거나 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나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대학 총장들과 같은 근대적 서구유럽의 식민지적 사유밖에 하지 못하는 속물들 외에 누가 있는가?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와 일본어가 수백 년 동안 근대적 세계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논리와 근대적 사유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언어와 다른 한글과 같은 근대적 비주류의 언어들은 아직도 근대적 언어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논리와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커티스가 열차의 제일 앞 칸에 있는 윌포드를 만나기 위해 열차의 한 칸 한 칸을 연결하고 있는 문턱을 넘어서는 것과는 달리 남궁민수가 열차의 새로운 칸을 열고 또 다른 열차의 칸으로 들어서는 것은 환각제인 산업폐기물로 만든 크로놀을 수집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난다. 커티스가 근대적 과거의 기억을 자각하고 깨어있는 기억의 논리라면, 남궁민수는 근대적 과거를 망각하고 꿈을 꾸는 꿈의 논리이다. 근대적 과거의 기억은 대립과 갈등이고 살육과 전쟁뿐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이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근대적 제국과 식민지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반도의 남과 북이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전쟁의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적관계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지 않은가?

근대적 과거의 기억은 서구 유럽이 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지난 500년의 근대적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설국열차>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영국의 대처 수상에게 붙여진 "철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 총리, 일본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일본군 복장의 방위대장은 차치하고라도 <설국열차>에서 윌포드를 찬양하는 교육처럼 미국이나 유럽의 교육현장에서 콜럼부스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찬양하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를 아프리카 희망봉의 발견자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교육현장에서 일제 식민지 찬양자였던 이광수와 최남선을 근대한국문학의 창시자로 찬양하고 있고,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하자고 주장했던 맥아더를 민족의 구원자로 찬양하고 있다. 물론 이광수와 최남선, 혹은 맥아더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일어가 아닌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근대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광수요, 최남선이요, 또한 맥아더가 아닌가? 커티스가 궁극적으로 근대적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친일과 반일, 친미와 반미, 혹은 친북과 반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설국열차>는 그렇게 근대적인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커티스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논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과거를 재생산한다. 역사적으로 찬양받고 있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대체했을 뿐이고,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과 서구 유럽의 제 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미국과 소련의 식민지로 대체했을 뿐이다. 그러나 커티스와는 달리 남궁민수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과거에 대한 망각의 논리와 화해의 논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 그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궁민수와 요나(고아성 분)가 보여주는 꿈의 논리는 개인적으로 환각에 빠져 있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과는 다르다. 남궁민수나 요나와 마찬가지로 크로놀의 환각에 빠져 있는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은 근대적 세계의 <설국열차>를 유지시키고 있는 또 다른 피지배 노예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이 커티스와 남궁민수 그리고 요나에게 반혁명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이 근대의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환각에 빠져 있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남궁민수와 요나의 환각은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환각과 다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망각은 현실적 화해를 위한 것이고, 그들의 꿈의 논리는 현실적 향유의 개인적 꿈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꿈이고 현재의 세계를 넘어 미래를 투시하는 논리이다. 집단의 꿈이라는 점에서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논리는 서로 만날 수 있고, 현재의 세계를 넘어 미래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궁민수의 꿈은 요나의 미래적 투시력과 만날 수 있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1990년대 이후에야 마침내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중국과 몽골, 혹은 베트남과 필리핀, 그리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199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이 서구화와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근대적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탑승했던 것처럼 그렇게 근대 서구유럽 중심 세계 열차의 마지막 칸에 탑승할 마지막 나라들이 아니다. 중남미의 브라질과 에콰도르 그리고 볼리비아가 근대적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는 나라들이 아니라 중남미 지역을 구성하는 서로서로 열려진 나라들인 것처럼 남과 북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서로 열려져서 아시아의 한 지역을 구성하는 나라들이다. 문제는 다른 언어와 다른 논리를 통하여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이다.



III. 열차의 바깥에 대한 사유

1990년대 이전의 그 어떤 지역의 혁명들도 지난 500년 동안 지속된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세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설국열차>의 맨 앞 칸에서 엔진을 가동하고 있는 윌포드와 그 열차의 맨 마지막 칸에서 민중의 추앙을 받고 있는 길리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서구화와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적 명제에 길들여진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중남미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 식민지 종주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이 제 2의 일본이 되고자 열망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혁명을 겪으면서 그것을 자각한 길리엄은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 혁명의 지도자인 커티스에게 "윌포드를 만나면 무조건 죽이라"고 주문을 한다. 열차를 멈추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리엄의 주문을 망각한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고, 어떤 희생을 겪더라도 "설국열차"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그의 논리에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이제 네가 지도자가 되라"는 윌포드의 말에 그는 또 다른 사유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오늘날의 서구유럽이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유럽의 지식과 논리이다.

마침내 멸망할 것이 분명한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발전이니 진보니 하는 현재의 천년왕국을 구성하고 있는 "설국열차"의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근대적 서구유럽이 가지고 있는 문명의 언어가 아니라 한글과 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대지와 함께 자라난 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커티스처럼 과거의 기억을 통한 현재의 발전이나 진보의 논리가 아니라 남궁민수처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미래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생명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침내 남궁민수는 대지의 언어인 한글과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떨 요나의 미래적 삶을 열어주고자 하는 생명의 논리를 통하여 서구유럽 중심의 근대가 만든 인위적이고 과학적이고 문명적인 것으로 가득 찬 열차가 아니라 그 바깥, 지연적이고 예술적이며 생성적인 탈근대의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망각하고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인이 서구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대지와 더불어 사는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 세계의 중심에 아시아인 소녀 요나와 아프리카인 소년과 북극곰이 마주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서구유럽 중심의 근대적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연적이며 예술적이고 생성적인 지역과 대지와 생명에 토대를 둔 새로운 지식과 권력을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2013-08-20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봉준호의 <설국열차>

'내란음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국정원의 영화 만들기,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국정원이 전액 국가지원의 예산으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 사건이 불거지고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새로운 촛불문화제로 확산하자마자,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중심으로 통합진보당의 일부 요인들을 내란음모죄로 고발하였다. 이처럼 내란음모죄라는 국가보안법을 중심으로 한 언어적 개념이 이석기 의원이라는 한 개인과 통합진보당의 이미지를 선과 악, 혹은 친북과 반북의 이분법으로 지배하는 것이 근대적인 영화들의 전형이다.

따라서 국정원은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서구 유럽에서는 1930년대나 40년대에 유행하였던, 그리고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나 80년대에 유행하였던 지배 이데올로기 선전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과 같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한류문화'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화들로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를 감동시키는 것과 전혀 다른 역사적 방향이다.

오늘날의 한국 영화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면, 국정원이 만드는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다시 지난 20세기의 독재국가나 파쇼국가의 이미지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이중성은 국정원 요인들이나 북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나 장철수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같은 영화들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국정원의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강제로 관객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 같은 현실이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들처럼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몸을 오싹하게 하고, 아직도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요즈음 등줄기에 얼음 조각이 박힌 것처럼 국민들을 떨게 한다.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국가보안법의 올가미가 나나 주위의 삶에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모든 사유를 차단한다. 이와 더불어 국정원은 일제식민지 시대나 미 군정, 혹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의 지배 도구였던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폭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강제로 주입하고 있다. 이러한 국정원의 망상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과 국가도 변화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다. 그 시간적 변화가 근대적인 영화들을 탈근대적인 영화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과거의 근대적인 영화들과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들의 차이는 교육의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는 근대적인 주입식 교육과 탈근대적인 창의적 교육의 차이와 같다.

과거의 근대적인 영화들은 각각의 영화 장르들에 따라서 이야기, 즉 영화의 내러티브가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통하여 삶과 생명의 세계를 스스로 사유하도록 만든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설국열차>가 그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정기국회 첫 날인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 자신의 의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2. 우리는 '설국열차'의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근대적인 인류의 문제를 모두 담고 있는 '설국열차'의 안과 그 열차에서 벗어난 탈근대적인 바깥을 동시에 사유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에 결코 설국열차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설국열차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은 '설국열차'라는 근대의 국가보안법이나 국정원, 혹은 근대의 대한민국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나 국정원, 혹은 근대의 대한민국 바깥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 우리는 <설국열차>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것처럼 열차의 꼬리 칸에서 막연하게 제1세계와 제2세계, 혹은 제1세계와 제3세계를 구성하는 미국이나 구소련, 혹은 중국이나 북한 등등의 이름을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유할 수 없었다. 더더욱 1990년대 이전의 한반도는 그 꼬리 칸마저도 두 개의 코리아로 칸막이가 처져 있었다. 그 두 개의 코리아를 유지하는 방법은 실제로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도 마치 서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길리엄(존 하트 분)과 윌포드(에드 해리슨 분)이다. 그러한 근대의 적대적 공존이 크게는 미국과 구소련일 수도 있고, 미국과 중국의 제1세계와 제3세계일 수도 있고, 박정희와 김일성일 수도 있으며, 마지막 꼬리 칸 내부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가 혁명가로 등장하기 이전의 아수라장이었던 세계의 길리엄과 커티스의 대립과 갈등, 즉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소련이 스스로 멸망하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의 대립과 갈등이 화해와 평화로 해결된 1990년대 이후의 세계, 혹은 1990년대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제1세계와 제2세계 혹은 제3세계 등의 수많은 서로 차단된 열차 칸으로 나눈 것처럼, 대한민국과 한반도 내부의 대립과 갈등이, 근대라는 서구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설국열차'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달리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과 한반도 내부에서 여당과 야당,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가 대립과 갈등이라는 적대적 공존의 세계에 있는 길리엄과 커티스의 서로 다른 이미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를 구성하는 적대적 공존의 세게는 <설국열차>에서 열차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인구의 조절'이라는 방식으로 정기적인 "내란음모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식민지 대한민국을 지속시키기 위한 국정원이 만드는 정기적인 영화이다. 마치 제1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윌포드와 제3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길리엄이 '인구의 조절'이라는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기 위하여 서로서로 쪽지를 주고받듯이 과거의 미국과 구소련, 혹은 과거의 김일성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근대적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한반도의 남과 북이라는 적대적 공존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서로 밀사를 파견해 의견을 교환했다. 또는 서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립하거나 갈등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 청와대와 국정원의 합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인 구조 안에서, 혹은 근대적인 '설국열차' 안에서 과거의 수많은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던 안중근 의사나 류관순 열사, 혹은 조봉암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 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백기완 선생 등을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길리엄이나 커티스로 사유할 수도 있다. 근대적인 구조나 근대적인 한반도, 혹은 근대적인 대한민국 안에서 우리는 그 수많은 "내란음모 사건"의 배후자들을 배척하기도 하고 흠모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대한민국을 탈근대적인 대한민국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문화한류의 다양한 이미지들처럼 근대적 국정원을 탈근대적 국정원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실시하고 있는 2013년의 오늘, 설국열차의 꼬리 칸을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정원은 스스로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길리엄처럼 지배자와 내통하고 있음을 자백하면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을 새로운 커티스로 만들고 있다.

문제는 국정원이 만들고 있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봉준호의 <설국열차>와는 달리 열차의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국열차>에서 마침내 길리엄이 윌포드에게 살해되는 것처럼, 혹은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서 망연자실하는 것처럼, 국정원의 길리엄을 자칭하고 있는 과거의 국정원장이나 현재의 국정원장, 그리고 국정원이 커티스라고 지목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모두 탈근대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문제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의 개념들이 영화의 이미지들을 지배하는 근대적 영화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탈근대적 영화들이 등장한 것처럼, 혹은 봉준호의 <설국열차>에서 근대적 세계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설국열차"를 수많은 삶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달리게 만드는 엔진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근대적 세계와 근대적 대한민국을 지속적으로 달리게 만들고 있는 개념과 담론들을 버리고 탈근대적 세계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관계들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의 식민지적 개념과 담론들이 바로 16세기 이래로 서구유럽의 세계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일제 식민지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 민족, 조국, 발전, 진보 등등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해석학적 개념들과 담론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나 민족이나 조국은 내가 살고 있고 삶의 문화를 형성하고 계급적이거나 지역적이거나 성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의 관계를 생성시키는 문화적인 개념들이지 결코 나와 우리를 지배하고 존속시키는 절대적 개념들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의 발전이나 진보는 끊임없는 인간이익의 추구나 권력의 쟁취를 의미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변화처럼 지속적인 인간과 자연의 상호생성적인 변화와 생성의 이미지들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근대적인 개념과 담론들이 지배하는 '설국열차'가 아닌 생명과 상생, 문화와 삶의 관계 등등이 살아있는 그 바깥, 즉 탈근대의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도록 만든다.

하나는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1914년 7월 1일로 설정된 빙하기의 지구가 등장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근대적 국가구조로 만들어진 국가 원수들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근대적 국가구조들의 연합, 즉 국제연합(UN)은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조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지구촌 세계에서 미국과 서구 유럽은 결코 지구촌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식민지 지역과 식민지 종주국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라는 과거의 세계처럼 오늘날의 세계는 결코 각각의 국가나 지역이 설국열차의 열차 칸들처럼 서로 차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의 동아시아 지역처럼 과거 근대적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탈근대의 동아시아 지역을 만들기 위하여 대한민국과 중국과 일본과 대만 등등의 국가들은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는 않았지만 서로서로의 국가적 문을 열고 있다. 또한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국제연합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메리카의 브라질, 서구 유럽 변방의 러시아, 서남아시아의 인도, 동아시아의 중국,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구촌 세계의 지역과 국가를 대변하는 브릭스(BRICS)를 만들어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고 있다. 각각의 지역들이 서로서로 지역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구촌 세계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설국열차가 산산조각이 나고 열차에서 살아남은 아시아인 소녀 요나와 아프리카인이거나 아메리카인인 소년이 설국열차 바깥으로 나가서 멀리 지나가는 북극곰과 마주하는 사건이다. 두 소년과 소녀, 그리고 북극곰이 어떻게 근대가 만든 빙하기가 서서히 물러가는 새로운 지구촌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는 전적으로 연화의 관람객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동물이라는 이분법으로, 혹은 남성과 여성이거나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사건은 영화의 시작부터 말미까지 피비린내 나는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마침내 모두가 멸종해버린 설국열차 안에 있었던 수많은 근대인에 대한 연민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 선진국과 후진국, 제1세계와 제2세계 그리고 제3세계. 혹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등등의 수많은 근대적 개념들을 가지고 서로서로의 열차 칸들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의 문들을 열고 광장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었으면 하는 소망과 동시에 처음부터 커티스와 윌포드, 그리고 길리엄과 남궁민수가 만나서 근대적인 설국열차의 엔진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논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3. 대한민국 국민이 만드는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또 다른 영화

1914년 7월 1일, 혹은 그 이후의 어느 날, 근대라는 이 세계의 종말이 빙하기나 핵전쟁 등등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2013년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근대적 대한민국이나 근대적 한반도의 몰락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수많은 국민이 요구하는 것처럼 국정원과 박근혜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국정원 불법선거개입을 인정하고 사과함과 동시에 국정원이 스스로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너무나도 진부한 근대적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상호생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탈근대적 영화 만들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한 탈근대적 대한민국 만들기에서는 수천 년 동안 한반도라는 동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했던 남과 북이 서로서로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한 남과 북의 상호개방 속에서 일본과 중국과 대만과 몽골 그리고 필리핀 등등의 동아시아 지역이 서로서로 넘나드는 탈근대적 지역 광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한 남과 북의 상호개방과 동아시아 지역의 탈근대적 광장의 연장 선상에서 미국과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설국열차'는 서서히 엔진 가동을 중단하고 평화롭게 서로의 열차 칸에서 내려 지구촌 세계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탈근대적 광장의 세계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좌파도 없고 우파도 없다.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다. 그러한 탈근대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북도 필요하고 반북도 필요하며, 친미도 필요하고 반미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친일도 필요하고 반일도 필요하다.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2014년 7월 1일 근대의 인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대한민국과 한반도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는 한반도의 전쟁을 다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걱정하는 다양한 방식, 평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방식, 즉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성향도 필요하고 국정원과 청와대의 정치적 성향도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여당과 야당 등등의 이분법은 과거의 미국과 구소련, 혹은 과거의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처럼 개인이나 조직과 집단이 서로서로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죽이면서 각각의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은 <설국열차>의 마지막 꼬리 칸에서 길리엄과 커티스가 화해하기 이전의 세계이다. 적대적 공존으로 서로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서로 죽이는 아수라장에서 길리엄은 자신의 다리를 잘라서 커티스에게 주었다. 그러한 길리엄처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오늘날의 아수라장을 해결하기 위하여 국정원은 스스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서 국민들에게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들이 요구하는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새로운 영화 만들기이다.


2013-09-03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 - 위대한 탈근대적 지도자, 넬슨 만델라


I.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너 민족

넬슨 만델라의 죽음 소식을 듣고, 미국의 전형적인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영화배우이자 정치인이며 영화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인빅터스>를 다시 보았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 1995년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프링복스' 팀이 우승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 <인빅터스>(2010) 포스터.

그러나 이 영화에는 1652년 네덜란드계 개신교도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화 정책에 따라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된 다양한 인종과 종족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인류 전체가 경험한 근대화 과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탈근대적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칭송하는 것과 더불어 1652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정착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와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보어인에서 아프리카너(Afrikaner) 민족으로 성장한 아프리칸스어(Afrikaans)를 사용하는 남아프리카의 "창백한 백인들"을 칭송한다. 그들의 근대화 과정의 역사는 공교롭게도 우리 한민족의 근대화 과정의 역사와 너무나도 닮았다.

'보어인(Boer)'이라는 말은 농민이라는 말이다. 1952년부터 척박한 남아프리카의 땅을 오늘날의 비옥한 농장으로 개간한 사람들은 이들 보어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지역의 다양한 종족들을 억압하는 동시에 1794년부터 영국의 제국주의 식민지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1830년대부터 그들은 남부 웨스턴 케이프와 이스턴 케이프의 해안지역에서 내륙으로 이주하는 '대이주(Great Trek)'를 통하여 새롭게 남아프리카 지역 내륙에 '나탈공화국'을 세웠다가 다시 영국에 빼앗기고 더 북쪽으로 이주하여 '자유공화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대규모의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됨과 동시에, 다시 영국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제1차 보어전쟁(1880~81)과 제2차 보어전쟁(1899~1992)이다. 보어전쟁은 전쟁사(史)에서 전근대적인 전쟁에서 근대적인 전쟁으로 변화하는 전환점에 있었던 전쟁이다. 제1차 보어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제2차 보어전쟁에서 잔인한 초토화 작전과 2만 명에 가까운 여성과 어린이들을 죽이는 포로수용소의 운영으로 보어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처럼 영국식민지의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들었다.

'아프리카너'라는 언어는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생긴 언어이다. 그들은 1652년부터 케이프타운에 장착한 네덜란드계 이주민이라는 '보어인'이라는 언어를 버리고 남아프리카의 백인 원주민이라는 의미의 '아프리카너'라는 새로운 근대적 민족 정체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동일한 남아프리카 지역 내부에 있는 '코사'나 '줄루', 혹은 '바수투'와 같은 흑인 종족과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족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프리카너 종족이 영국과 대항하면서 영국 제국주의를 그대로 닮아버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1948년 남아프리카 지역 백인들만의 단독선거에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주창한 국민당이 승리한 이후 영국 제국주의 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인종차별을 합법화하고, 마침내 1961년에는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그들의 무기는 이제 그들과 같이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인 흑인과 유색인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런 서구 유럽의 근대성에 매몰된 아프리카너들에게 넬슨 만델라는 너무나도 신기한 존재였다. 1964년의 너무나도 악명이 높은 <국가전복 반역죄 재판>, 최후진술에서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백인 지배에 저항하여 싸웠고, 흑인 지배에 저항하여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더불어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지향하고 반드시 달성하고자 하는 이상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이상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서구/비서구, 백인/비백인, 자본주의/사회주의, 진보/보수, 가진 자/가지지 못한 자 등의 이분법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백인지배에 저항하는" 동시에 "흑인지배에 저항하는" 넬슨 만델라는 기이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또한 지배/피지배를 사회와 국가 구성의 제1 원칙으로 알고 있는 근대인들에게 젊은 넬슨 만델라가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더불어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는 정말로 꿈과 같은 머나먼 이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과 이상이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만델라의 최후진술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하여 남아프리카 전국에 방송된 이후,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의 흑인들뿐만 아니라 민족과 계급과 종족의 근대적 지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남아프리카의 백인 아프리카너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탈근대적 가치의 현실이 되었다. 1990년 그가 2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현실의 세계에 등장한 것은 '아프리카국민회의(ANC)'와 같은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아프리카너 지식인들의 근대극복과 백인정권에 대한 저항에 힘입은 바가 크다.

II. 위대한 탈근대적 지도자, 넬슨 만델라

1994년 4월 26일,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루어진 70퍼센트의 흑인과 16퍼센트의 백인 그리고 14퍼센트의 유색인 모든 주민들이 참여하는 최초의 선거에서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신문들은 모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위험한 나라로 선포하였다. 이것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위험한 나라인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나라들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위험한 나라인지 모른다. 넬슨 만델라 정부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의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근대 식민지를 경험한 아프리카의 54개국을 문화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아프리카연합 건설을 준비하기도 하였고, 여전히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 중심의 국제연합(UN)을 넘어서기 위하여 브라질과 중국, 러시아, 인도와 손을 맞잡고 브릭스(BRICS)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제적 행보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유럽의 국가들에게 위협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서구 비유럽 중심의 국제적 행보는 지구촌 시대의 탈근대 세계에서 중국과 브라질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들의 모든 꿈이기도 하다.

▲ 넬슨 만델라 대통령 역은 모건 프리먼(왼쪽)이, '스프링복스' 팀 감독 프랑소와 피에나르 역은 맷 데이먼(오른쪽)이 맡았다.


근대적인 국제관계에서 탈근대적인 국제관계로 이동하는 지구촌 세계의 정세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개개인들에게 너무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 <인빅터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내부에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보여주었던 탈근대적 지도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남아프리카의 다양한 국민 구성원들이 근대적으로 만들어진 습관과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탈근대적인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더불어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평화적인 행동과 생명 중심의 지식을 구성하는 문제이다. 넬슨 만델라는 그 문제들 중의 하나를 스포츠로 보았다.

오늘날의 우리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럭비와 축구 그리고 크리켓은 서구 유럽의 근대 식민지화 과정에서 각각의 종족을 대표하는 스포츠가 되어버렸다. 럭비는 아프리카너의 스포츠이고, 축구는 흑인들의 스포츠이며, 크리켓은 영국계 백인들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근대적 관습은 또한 크리켓을 하는 아프리카너들을 같은 아프리카너들이 비난하고, 럭비를 하는 흑인들을 같은 흑인들이 비난하는 적대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그런 근대적 관습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남아프리카를 만들기 위하여 1995년 럭비월드컵을 이용한 것이다.

아프리카너는 오늘 날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이나 뉴질랜드인 혹은 중남미 아메리카의 백인 이주 원주민 크레올(creole)처럼 미국과 영국의 앵글로-색슨 서구유럽 중심주의에서 소외되어 있는 백인 소수자들이다. 넬슨 만델라는 1652년부터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새롭게 아프리카너 민족을 구성한 그들의 영욕의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법이 지배했던 현실 속에서 남아프리카 대부분의 흑인들에게 아프리카너들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명백한 적이다. 거의 350년 동안 억압받은 현실의 역사 속에서 그 적들의 축제에 함께 참여하고, 심지어 그 적들을 응원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현실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흑인 대중은 남아프리카의 대표팀 '스프링복스'와 영국의 경기에서 영국을 응원한다. 마치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과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의 경기에서 남한 사람들이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눈앞에 보이는 적대적 구조 때문에 우리의 등 뒤에 있는 근대적 지배구조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으로 이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 분)는 럭비를 통하여 백인 아프리카너와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하나의 탈근대적 국민으로 연결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 분)는 '스프링복스' 팀의 주장 프랑소와 피나르(맷 데이먼 분)를 프레토리아에 있는 대통령 궁으로 불러 1년 뒤의 럭비월드컵에서 우승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인간적 친분을 쌓고, 이에 대한 답례로 '스프링복스' 팀은 흑인거주 지역 타운쉽을 찾아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 볼을 선사한다. 만델라는 '스프링복스' 팀 연습장을 찾아 백인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그들은 만델라 대통령에게 선수복과 모자를 선사한다. 만델라는 녹색으로 상징되는 '스프링복스' 팀의 선수복과 모자를 쓰고 대중들에게 다가가 '스프링복스' 팀을 응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한 역사적 과정은 아프리카너 백인들도 남아프리카를 구성하는 다양한 흑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족이라는 사실을 국민들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럭비월드컵은 개최되었고, 참가국들 중에서 최약체로 평가되었던 '스프링복스' 팀은 넬슨 만델라에게 우승을 선사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팀을 차례로 이기고 역대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뉴질랜드 팀과 결승전을 하게 된다.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하여 경기장을 찾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 이제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게 야유를 보내는 그 어떤 우익 보수주의 백인 아프리카너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남아프리카 흑인들도 마침내 350년 동안 그들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짐승 취급을 했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탈근대적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지도력을 통하여 백인과 흑인 그리고 유색인 모두의 남아프리카인들은 서로서로 적대적이었던 근대적 남아프리카의 사회적 구조를 극복하고 탈근대의 남아프리카 국민으로 거듭난 것이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포용하였다. 그래서 아프리카너 백인 선수들은 자신들의 종족을 위하거나 자신들만을 위하여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만델라와 남아프리카 국민들에게 우승을 선사하기 위하여 경기를 한다. 그리고 만델라를 지지했던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적이었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응원해달라고 부탁하는 넬슨 만델라의 모습을 보고 아프리카너 백인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지배와 피지배 구조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들이 코사, 혹은 줄루 남아프리카인들인 것처럼 그들도 아프리카너 남아프리카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III. 넬슨 만델라는 '성자'가 아니다

넬슨 만델라는 자신을 성자(saint)로 취급하는 영국과 미국 중심의 서구 유럽 언론에 저항하여 "당신들이 성자를 죄를 씻으려고 노력하는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나는 성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만델라의 이러한 말은 남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날리고 인도의 지도자로 우뚝 선 마하트마 간디를 "동방의 성자"로 신비화하여 인도 반도 지역을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던 영국의 근대 제국주의 정책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넬슨 만델라는 1960년 비폭력적 저항을 유지하였던 '아프리카국민회의(ANC)'로 하여금 비폭력적 저항과 폭력적 저항을 결합시키도록 만든 무장투쟁 단체 '음콘토 웨 시즈웨(MK: 민족의 창)'의 청년 대장이었었고, 1994년 4월 2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흑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남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는 서구 유럽의 자본과 권력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유방식이나 행동을 신비화한다. 그래서 지배자의 자본과 권력에 반대하는 행동이 성공하면 그것을 신비화하고, 그것이 실패하면 야만인으로 비난한다.


1652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네덜란드계 백인 정착촌이 만들어진 이후로, 넬슨 만델라와 같은 남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보어인들이나 영국인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거나, 로벤 아일랜드의 유배지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야만인으로 취급되어 과거의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나 만델라와 그의 국민들은 각 마을들의 구술역사를 통하여 그들 모두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아프리카의 소크라테스라고 칭송되는 몰로미가 있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내부에 있는 레소토공화국의 창시자였던 모쇼에쇼에 왕이 있으며, 19세기의 넬슨 만델라라고 불리어지는 신학자이며 군사전문가이고 사상가였던 마칸다기 있었으며, 바틀로코아(들고양이) 족 여성 족장이었던 만타티시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자가 아니라 남부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대지가 만드는 오묘한 생명의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우리는 단지 아주 운이 좋아 감옥에서 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서구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과거 근대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서구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환상을 버리고 아프리카인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스스로 폭력적 지배 권력을 포기한 아프리카너들 때문이다.


2013-12-13



모든 노무현에게 보내는 편지

"'빨갱이 사냥' 시대, 노무현처럼 '빨갱이'가 되자"


I. 넬슨 만델라와 노무현

아프리카 대륙 남단 끄트머리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남아프리카의 국민을 구성하는 백인과 흑인 그리고 유색인과 수많은 남아프리카 원주민 종족뿐 아니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영국의 찰스 황태자, 그리고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대통령를 비롯한 전 세계 대표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만델라 대통령의 장례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가 지구촌 세계의 진실과 화해로 나아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대한민국의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까지 못하게 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침울한 장례식을 기억한다. 화해와 용서를 주장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했던 두 대통령의 장례식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대한민국에서 화해를 요청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구성원들로 거듭났는가의 문제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에 수많은 아프리카너 백인 법조인들, 교수 지식인들, 국가정보국과 경찰, 그리고 군인을 포함한 국가공무원들이 스스로 반성을 하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RC)'에 출석해 역사적 사실을 진술하고, 마침내 용서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을 용서해준 것에 대하여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달랐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하여 1980년의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반성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들을 용서해주었다. 어찌 그들뿐인가? 박정희 유신정권과 일제식민지 치하의 제국주의 권력, 그리고 그들 밑에서 법정권력을 휘두르던 법조인들, 교육 권력을 휘두르던 교수 지식인들, 그리고 폭력과 이데올로기 권력을 휘두르던 국정원과 검찰, 그리고 군인과 경찰을 포함한 국가 공무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반성을 하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용서를 비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다.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은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단편적인 사람을 통해 그들이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전혀 용서도 빌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으로 스스로 반성을 하고, 잘못을 하였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변호인>에서 그렇게 스스로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바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이다. 서울대나 연대나 고대, 혹은 부산대나 동아대도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의 변호사, 송우석은 지난 20세기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밑에서 대졸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판사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개인적 능력을 믿고 승승장구하는 평범한 변호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평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들, 혹은 서울대나 연대나 고대 출신의 변호사들은 더더욱 그렇다.

II. 평범한 사람들과 특별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갖고, 사랑을 하고, 가족을 구성하고, 자식을 키운다. 그런데 자신의 일을 갖고, 사랑을 하고, 가족을 구성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는 일정한 책임감이 뒤따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책임감을 돈으로 측정하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사랑, 내가 구성하고 있는 가족, 그리고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자식들을 위하여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

▲ 변호사 송우석(왼쪽), 그리고 국밥집 아줌마 최순애(오른쪽)와 그녀의 아들 진우(가운데)


<변호인>에 등장하는 고졸 출신의 송우석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고 당장 먹고 살아야만 하는 돈 때문에 포기한 사법고시 시험을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단골 국밥집 아줌마 최순애(김영애 분) 씨의 외상 친절을 36계 도망 행으로 죄를 지어 마련한 돈을 가지고, 사법고시 응시를 위한 서적을 다시 구입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단골 국밥집 아줌마의 친절을 원수로 갚았다는 죄를 반성하고 정말로 용서를 빌기 위하여 7년 후에 다시 그 국밥집을 찾는다. 국밥집 아줌마의 용서와 화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변호사>에 등장하는 국밥집 아줌마처럼 지난 350년 동안 서구 유럽의 백인 이주민들이 그들에게 행한 인종차별과 폭력을 용서해준 것은 <변호사>에 등장하는 송우석처럼 남아프리카의 평범한 백인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정말로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국밥집 아줌마와 송우석만이 아니라 최순애 씨 가족과 송우석의 가족이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갖게 된다.

송우석 변호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직업)에 대한 책임도 진다. 판사를 스스로 포기한 송우석은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자기 자신과 부인과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책임을 수행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를 만든 국밥집 아줌마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세상엔 돈으로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송우석보다 더 평범한 국밥집 아줌마와 그녀의 아들, 진우(시완 분)와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와 연대, 혹은 고대 등의 대학 출신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평범한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 송우석은 그것을 진심으로 알지 못한다. 그는 또한 서울대나 연대, 혹은 고대 출신의 변호사나 판사, 혹은 검사들이 너무나도 잘 법을 집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동산 등기나 세금 등의 사소한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송우석 변호사처럼 평범한 법조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서울대나 연대, 혹은 고대를 졸업하였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서울대나 연대, 혹은 고대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전두환이나 박정희처럼 자신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검사나 판사, 혹은 결찰서장이나 치안감, 혹은 보안사 대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국밥집 아줌마나 그녀의 아들, 혹은 노동판에서 일했거나 고졸 출신의 송우석 변호사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 경찰 차동영을 비롯한 판사와 강 검사는 변호사 송우석과 국밥집 아줌마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위더스필름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송우석 변호사처럼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의 사랑,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자식을 위한 책임으로 검사나 판사, 혹은 경찰서장이나 치안감, 혹은 보안사 대령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이데올로기나 돈의 노예로 전락해 그들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1981년 당시의 평범한 대학생들이나 평범한 시민들은 전두환 군사 쿠데타가 국가 범죄이고 무지막지한 폭력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반면, 특별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전두환처럼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호인>은 근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특별한 사람들의 너무나도 커다란 차이를 1981년 부산에서 일어난 전두환 정권의 '부림사건(당시의 공안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모임의 학생 등 22명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용공조작사건)'을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송우석 변호사는 국밥집 아줌마에 대한 고마움의 책임으로 그녀의 아들이 감금돼 있는 구치소를 찾는다. 온갖 고문과 폭행으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국밥집 아줌마의 아들 진우를 보면서, 송우석은 1981년 당시의 대한민국이 평범한 나라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독재, 파쇼 국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리고 변호사라는 직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림사건' 재판 과정은 근대 대한민국의 구성원들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서민과 지식인들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검사나 판사, 그리고 경찰서장이나 교수 등을 구성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근대 대한민국의 법정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보여준다. 군사 쿠데타의 수장이었던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가의 헌법을 다루는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와 경찰서장이라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헌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리는 것이다. 고졸 출신이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송우석 변호사는 그것을 결코 참을 수가 없다. 당시의 국가보안법이 불법서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서적들을 밤새워 읽으면서 국가보안법이 근대 대한민국의 헌법에 얼마나 위배되는지에 대하여 절감한다. 송우석 변호사는 당시 '부림사건'을 책임지고 있는 판사(송영창 분), 강 검사(조민기 분), 경찰 차동영(곽도원 분)에게 자신이 국밥집 아줌마에게 용서를 빌었던 것처럼 고문과 폭행으로 만신창이가 된 피고인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러 나온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고문과 폭행을 목격했던 파견 군의관 윤 중위(심희섭 분)이다. 그 윤 중위마저 그들의 악마 같은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공우석은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평범한 송우석 변호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싸늘한 '냉소'와 '빨갱이 변호사'라는 딱지뿐이다.

III. 우리 모두 '빨갱이'가 되자!

평범한 송우석 변호사가 비록 특별한 판사와 검사, 그리고 경찰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그는 스스로 변화하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부산의 모든 변호사 사회를 변화시켰다.

<변호인>은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의 장례식 사건으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시 처분을 당한 재판과정에서 부산 지역의 대부분 변호사들이 그의 변호인을 자청하여 재판장 방청석을 가득 채우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특별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부산 지역의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용서를 빌기 위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송우석 변호사처럼 '빨갱이 변호사'의 변호인이 되는 '빨갱이 변호사들'이 된 것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분노 덕분으로 1987년 민주화 대장정은 1988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마침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와 더불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송우석 변호사가 노무현 대통령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평범하지 않았다.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는 특별한 사람들을 용서해주었고, 국밥집 아줌마와 그의 아들 진우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민주노동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한나라당과 연정을 제안하여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헌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노무현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검사와 판사, 교수와 기업인, 그리고 경찰과 국회의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다고 착각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넬슨 만델라처럼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2013년의 오늘, 그들은 1980년대처럼 자신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대통령과 장관, 검사와 판사, 교수와 기업인, 그리고 경찰과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들은 자신들이 검사와 판사, 교수와 기업인, 그리고 경찰과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 특별한 사람들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살을 하고, 대한민국 사회는 다시 1980년대의 '빨갱이 사냥' 시대가 되었다.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빨갱이 사냥' 시대가 등장했을 때, 당시의 평범한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빨갱이 변호사'가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이 '빨갱이 사냥' 시대가 되었을 때, 당시의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노무현은 '빨갱이 변호사'가 되었다. 2013년 지구촌 세계의 서로 다른 한구석을 구성하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운명을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남아공에는 수없이 많은 넬슨 만델라가 등장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새로운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노무현이 등장하는 길은 우리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넬슨 만델라나 노무현처럼 '빨갱이 사냥' 시대의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2013-12-29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뤽 베송 감독의 <루시>

두뇌 철학인가, 몸 철학인가?


I. 근대적 영화와 탈근대적 영화

이 시대의 걸출한 배우, 최민식이 출연했다는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뤽 베송 감독의 <루시(Lucy)>는 아마 내가 보고자 하는 영화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식의 <루시> 출연처럼 한국 영화의 세계적 역량이 커지면서 한국 배우들의 세계적 진출 또한 많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 배우들의 세계적 진출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세계적 진출이 기존 영화와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아이.조>에 출연한 이병헌이나 최민식 등 한국 배우들은 여전히 서구-백인-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한 오리엔탈리즘의 근대적 삶과 사유방식의 환상에 기여하는 동양인이나 한국인의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루시>에 등장하는 대만이나 홍콩과 같은 중국어 문화권의 도시에서 오직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미스터 장과 코리안 갱들의 비현실적 이야기는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일본어 문화권의 차이가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나 이태리어 문화권의 차이만큼 클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서로 다른 언어 문화권들이 동북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는 문화적 지식마저도 갖추지 못한 서구 유럽인과 미국인의 근대적 오만함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하다.    

▲ 영화 <루시> 포스터. 스칼렛 요한슨, 모건 프리먼, 최민식, 애널리 팁튼 주연. 

<루시>에 대한 불편함과 분노는 영화 속에 내재해 있는 서구 유럽과 미국인의 오리엔탈리즘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미스터 장이나 코리안 갱을 이용한 코리아(코리안), 은밀하게 중국과 중국인들의 세계적 등장에 대한 비난 때문만은 아니다. <루시>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건'을 통한 변형과 생성이라는 영화적 형식에서는 근대적 과거의 영화들과 다른 탈근대적 영화의 형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SF 공상과학영화라는 근대적 장르 도식에 머물러 근대적 서구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근대적 영화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뤽 베송 감독의 철학적 한계일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시장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 제국주의의 구조적 한계이기도 하다. 서구 유럽에서 근대적 영화로부터 탈근대적 영화로 이행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나 프랑스의 누벨 바그 영화, 그리고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 허울 좋은 승전국이라는 명명 속에서 이름만 남아있는 제국 프랑스, 그리고 분단된 독일 관객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이탈하는 거대한 감수성의 변화를 보이자, 뛰어난 감독들이 영화적으로 반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그리고 독일 관객처럼 미국 관객들도 서국-백인-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탈근대성의 감수성에 도달한 시대가 있었다. 서구-남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불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와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1991) 뿐만 아니라, 백인 중심주의의 근대적 서부영화에서 탈피한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1990) 등은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Truman Show)>(1998)나 샘 샌더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1999)등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관객의 새로운 탈근대적 감수성에 대응한 뛰어난 감독들이 영화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탈근대적 영화의 등장을 가로막는 할리우드 영화시장이 지니고 있는 거대 자본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007 시리즈'를 비롯해 황당한 SF를 통해 영화적 감수성의 퇴행을 조장하고 있다. <루시>도 이런 감수성 퇴행에 한 몫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 서구 유럽의 서구-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정신 철학을 뛰어 넘어 서구와 비서구 뿐만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을 평등하게 사유하는 몸 철학의 생명성을 뤽 베송이 두뇌 철학으로 퇴행시켰기 때문이다.

II. 몸 철학인가, 두뇌 철학인가?

영화는 스크린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몸을 보여주고 몸을 사유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는 몸의 일부이지 인간의 몸과 동떨어져서 몸에게 명령을 하는 또 다른 기관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몸의 작용이 없었다면 사물을 식별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의 두뇌는 몸의 작용이 없었다면 옳고 그름을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몸의 작용에 길들여진 성인 남녀를 포함한 인간 대부분은 새로운 몸의 작용 없이 관습적인 인간의 눈을 통해 기계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인간의 두뇌를 통해 상식적인 논리로 세상을 사유한다. 그러한 기계적인 사물인식과 상식적인 논리의 사유가 바로 일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작동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몸의 생명성을 파괴하고 몸을 이데올로기적 주인의 노예로 만든다. 서구 유럽의 암흑기라고 알려진 중세의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카르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에서 과학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는 근대 초기 정신을 고상한 것이라고 명명하고, 몸을 저열한 것이라고 판단해 정신과 몸의 이분법을 통해 몸이 정신적인 것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다. 논리철학을 매개로,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과학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것이다. 

▲ 평범한 삶을 살던 '루시'는 지하세계의 절대 악 '미스터 장'에게 약물 운반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연히 약물이 '루시'의 몸에 퍼지게 되고, 그로 인해 모든 세포와 감각이 깨어나게 된다. 


훌륭한 시와 소설, 혹은 회화와 음악처럼 영화는 몸의 새로운 감각적 반응을 통하여 우리가 익숙하게 길들여진 이데올로기적 시선과 상식적인 논리를 다시 인식하고 사유하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그런 변화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온다. 영화를 보는 사건!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 따라서 영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사건을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시>도 마찬가지이다. 

<루시>는 기계적인 사물인식과 상식적인 논리 속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루시'(스칼렛 요한슨 분)가 사건을 통한 몸의 감각적 변화에 의해 그녀만의 독특한 사물인식과 창조적인 사유의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루시>에서 사건(불의의 사고)을 통해 루시 몸에 합성 약물이 퍼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와 생성이 근본적으로 두뇌를 포함한 몸의 감각적 변화이지, 두뇌 사용량의 변화에 따른 몸의 초자연적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속적으로 '노만 박사'(모건 프리먼 분)의 두뇌사용량의 변화에 따른 인간 생체의 변화에 대한 연구발표와 루시의 변화를 교차 편집해 몸의 변화와 더불어 몸의 일부인 두뇌가 변화하는 것임에도 마치 두뇌 사용량의 변화에 따라 두뇌와 별개로 작동하는 몸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처럼 관객을 몰아가고 있다.

물론 몸의 느낌과 감각을 100퍼센트(%)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두뇌의 작용을 100%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10%의 두뇌 사용을 15~20%의 두뇌 사용으로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상된 두뇌 사용을 통해 몸의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의 변화는 마치 영화 <루시>에 등장하는 '미스터 장'(최민식 분)이나 코리안 갱들처럼 두뇌와 이성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을 기관화한 후 기관화 된 몸을 파괴하는 것이지, 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통해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루시'의 사건을 통한 몸의 변화와 생성은 몸을 정신과 대립하는 물질로 취급하는 처방의학의 서양의학과는 달리, 한의학이나 동양의학이 두뇌와 정신을 모두 포용하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종합으로 몸을 다루는 예방의학처럼 '루시'가 그녀의 몸이 새롭게 생성시킨 느낌과 감각으로 하여금 미스터 장과 코리안 갱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는 '루시'의 친구가 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간이나 폐가 어떻게 나쁜가를 감지하도록 만든다. 몸의 정서적 느낌과 감각의 변화가 만든 두뇌의 작용과 지식의 능력이 새로운 몸의 작용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노먼 박사, 그는 자신의 이론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루시'를 돕기로 마음 먹는다. ⓒEuropacorp


그러나 영화 <루시>는 두뇌가 몸의 일부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탈근대의 몸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데카르트의 정신/몸의 이분법처럼 두뇌/몸의 근대적 이분법을 가정하는 두뇌(정신)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몸이 지니는 이중성, 즉 몸의 감각과 느낌이 만드는 생산과 소비의 상호순환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 생산/소비의 이분법 속에서 몸의 생산성은 경시하고 오직 몸의 소비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루시'는 새로운 몸의 감각과 느낌으로 새로운 두뇌의 지식을 생성시킴에도 불구하고, 두뇌의 지식은 다시 몸의 감각과 느낌을 새롭게 생성시키는 순환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 마치 귀신처럼 몸 없는 두뇌만이 작동해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런 '루시'의 몸 없는 두뇌는 비록 서구-백인-남성을 서구-백인-여성으로 대체한 사이비 페미니즘의 너울을 쓰는 쾌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적인 정신 철학의 논리체계, 즉 '루시'의 몸 없는 두뇌가 '루시'라는 한 개인의 소문자 두뇌(brain)가 아니다. 너무나도 다른 인간 모두를 대표하는 대문자 두뇌(Brain)가 되어 마치 수많은 책 중의 책(Book of books)을 기독교의 성서(Bible)로 간주하는 기독교주의의 근대 이데올로기나 몸 없는 정신을 가정하여 대문자 정신(Mind)을 기독교의 하나님(God)과 동일시하는 데카르트의 근대 철학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Ⅲ. 서구 유럽 근대인들의 상상력과 공포

영화 끝 부분에서 몸의 변화와 생성으로 초인간적 능력을 발휘하는 '루시'의 몸은 사라지고 그녀의 '말씀'만 남는다. 그리고 그녀의 '말씀'은 거대 용량의 컴퓨터 지식으로 응집된 하나의 USB에 저장되어 두뇌지식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만 박사에게 전달된다. 노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루시'가 남겨놓은 USB 메모리만 해독하면,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구원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영화적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근대 초기의 기독교적 상상력과 너무나도 닮았다. 마치 전지전능한 기독교적 신이 오늘날의 USB와 유사한 성서에 그 '말씀'을 남겨놓고, 그 '말씀'만 해독하면 인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마침내 구원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상상력! 그러나 그런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서구 유럽의 기독교 제국들은 지난 5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세계 각지에 팔아 자본을 축적했으며, 그런 폭력의 결과로 세계 모든 지역을 서구 유럽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질서체계는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유럽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 영화 <루시> 중 한 장면. ⓒEuropacorp


16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유럽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은 17~18세기에 기독교적 상상력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가 선봉에 섰으며 19~20세기에는 산업혁명을 통해 기독교적 상상력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전환한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 세력을 대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구(舊) 소련에 의해 서구 유럽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은 지속됐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는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된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을 포기했으며, 문화적으로 서구 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중국이 새롭게 세계무대에 등장해 서구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동일한 동아시아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의 일원이라고 자부하는 일본인이나 일본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채 영화의 주된 줄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합성약물)개발이 중국어권 문화 지역이며 이를 위한 과학 개발이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미스터 장의 갱단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가정은 지난 500년 동안 이어진 서구 유럽 중심주의의 세계질서에 익숙한 제국주의자들의 두려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중국과 코리아를 서구 유럽 중심주의의 근대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적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14/09/23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김한민 감독의 <명량>과 이석훈 감독의 <해적>

21세기를 사는 두 종류의 지식체계


I.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과 자유인(혹은 유목민)의 지식

1847년에 세워진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 공화국이었던 라이베리아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정치학자였던 에드워드 윌모트 블라이든(Edward Wilmot Blyden)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화를 정당화시키는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인종들(Identical but unequal races)"이라는 허구적 종족이론에 저항해 "독특하지만 평등한 인종들(distinct but equal races)"이라는 새로운 종족이론을 주장했다. 당시 라이베리아 국립대학교의 교수이자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블라이든은 자신의 새로운 종족이론을 토대로, 라이베리아 국가의 토대를 기독교적 종교체제와 이슬람식 정치체제 그리고 아프리카식 문화체제가 서로 상생하는 사회를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의 이런 노력은 영국과 미국의 폭력적인 간섭과 강요로 실패했고, 오늘날까지도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현실은 여전히 개인·종족·인종 모두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동일하지만' 계급이나 성 혹은 국가의 차원에서 서로 '불평등한'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나 블라이든의 지적처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문화적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의 서로 다른 종교, 언어, 사랑, 우정을 지닌 '독특한' 존재임과 동시에 각각의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평등한' 존재이다. 블라이든의 평화적이고 상생적인 종족 이론은 몇몇 아프리카인에게 계승돼 마침내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까지 이어지는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종족과 종족의 관계 그리고 인종과 인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친구나 연인의 문화적 관계로 보느냐, 아니면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계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개인이던지 잡단이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가능성을 지니며, 그것이 옳든 틀리든 간에 사회화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유인(혹은 유목민)이고, 사회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배자(혹은 주인)가 되거나 피지배자(혹은 노예)가 된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지식인이었던 블라이든은 당시 서구 근대 인문학의 핵심이 바로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임을 밝혀내며, 아프리카의 전통적 지식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유행하는 자유인의 지식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 영화 <명량>(왼쪽)과 <해적>(오른쪽) 포스터.


그러나 블라이든의 종족 이론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과 미국 학계에서 거의 한 세기 이상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이 아닌 블라이든의 종족 이론이 학계에서 논의되는 경우에 영국·미국의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식민화의 지배 논리뿐 아니라, 영국·미국 내부에서도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를 위협받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블라이든의 부활은 서구의 근대적 지식의 허구성을 밝히는 동시에, 그동안 억압됐던 자유인의 지식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블라이든이 제시하는 것처럼 서양·동양, 아프리카·유럽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시대와 장소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지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서구적 근대의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만든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이라는 입장에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라이베리아의 블라이든처럼 세계주의적 시각으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이라는 입장에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전자가 플라톤과 공자의 국가철학적 지식이라면, 후자는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노마돌로지(Nomadology) 지식이다. 오늘날 국가철학적 지식과 노마돌로지의 지식은 서로 상호보완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면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개인-사회-국가를 매개하고, 또한 상호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철학적 지식과 노마돌로지 지식이 상호 작동하는 것은 영화의 생산과 소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배우, 혹은 관객이나 비평가가 국가철학적 지식으로 영화적 사건을 바라보느냐와 노마돌로지의 지식으로 그것을 인식하느냐의 문제는 영화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개봉된 김한민 감독의 <명량>과 이석훈 감독의 <해적>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와 영화를 만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인식하는 서로 다른 지식임과 동시에 상호보완적 지식임을 보여준다.

II.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 <명량>

영화 <명량>은 '하나의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이순신 장군이나 선조 임금, 일본군이나 조선군 모두가 '동일하지만' 조선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구조나 군대구조에 의해 서로서로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그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가 정말로 '불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은 임진왜란의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일본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 당시에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순신 진영에 있는 수많은 인사들이 '불평등한' 서열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편한 '불평등한' 관계가 드러난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순신의 진영이나 선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과 달리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경우, 최초로 일본 영토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이뤄진 '불평등한' 서열관계가 희대의 영웅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영화 <명량>은 당시 조선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럽지 않은 '불평등한' 서열관계 속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고 단지 두려움만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인물이 어떻게 당시의 일본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불평등한' 서열관계 속에서 서로 앞을 다퉈 충성심을 보이고자 일본 수군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두려움의 공포와 자부심의 용기!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로 구성된 <명량>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두려움에 따른 공포와 자부심의 용기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순신(최민식 분) 장군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용기는 그의 부관으로 있었던 아들뿐 아니라, 수많은 부하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경지의 세계이다. 일본 수군이 가지고 있는 330척 배와 싸울 수 있는 배는 단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들을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 또한 '불평등한' 서열관계의 최고 꼭대기에 있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눈 밖에 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를 새로운 자부심의 용기로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명분도 당시의 조선 수군의 진영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일본 수군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옥에 티라고 할까? 일본 수군 수장인 도도(김명곤 분) 장군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공포는 이미 그 이전의 임진왜란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 만들어진 것이다. 도도 장군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인 두려움의 공포를 대체하기 위해 멀리 일본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적이었던 구루지마(류승룡 분)를 장군으로 승격시켜 조선 수군을 격퇴하도록 임명한다. 따라서 구루지마를 대장으로 새롭게 모신 일본 수군은 자부심의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주)빅스톤픽쳐스


그러나 구루지마 장군과 일본 수군들의 자부심의 용기는 진정한 자부심의 용기가 아니라 12척의 조선 수군과 비교하여 330척이라는 수적 우세와 활이라는 구식 무기에 비교해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계산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이와 비교하여 이순신 장군의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은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들의 관계이지, 장군이라는 지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의 용기는 선조 임금이나 수많은 백성들이 모두 '독특하지만 평등한' 각각의 생명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의 입장에서 자신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당시의 조선 지역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보호하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의 용기가 그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단지 하나의 소망일 뿐,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국가철학적 사유방식에 찌들 대로 찌들어있는 병사가 느끼는 수적 열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를 자부심의 용기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소망하는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는 '유교'라는 국가철학적 사유체계의 바깥, 즉 불교의 승려들과 일반 백성 사이에서 생겨난다. 국가철학적 지식이 아닌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무장한 승려와 일반 백성의 도움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불사한 자부심의 용기는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Ⅲ.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 <해적>

<명량>이 지니고 있는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와는 달리 <해적>은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서사 구조처럼 근원적으로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로 이뤄졌다. 영화 대부분을 구성하는 산적 두목 장사정(김남길 분)과 해적 두목 여월(손예진 분), 해적에서 산적으로 신분 이동을 했다 다시 해적으로 복귀하면서 중구난방 웃음을 선사하는 철봉(유해진 분), 아버지가 자신을 팔았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여월의 해적단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흑묘(설리 분) 등 사유체계는 분명히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체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이 해적과 산적도 이성계(이대연 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과 마차가지로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서열관계가 존재하지만, 그 서열관계의 근본은 친구나 연인처럼 일대 일의 평등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집단 내부의 상생과 평화를 위한 동맹관계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노마돌로지 지식체계가 장사정으로 하여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저항해 다시 산적 두목이 되게 했고, 여월로 하여금 개인의 권력과 부를 위해 동지를 죽이거나 파는 해적 두목 소마(이경영 분)에게 저항해 새로운 해적 두목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가 <해적>의 근간을 이루면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국새 분실이라는 영화적 사건을 통한 대립과 갈등은 노마돌로지 지식 체계의 구성원과 국가철학적 지식체계의 구성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대립과 갈등의 근간에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친구나 연인관계로 구성된 해적과 산적의 근원적인 노마돌로지의 지식을 지속하려는 장사정과 여월의 세력과 개인의 부와 권력을 위하여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서열관계로 구성된 이성계 국가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소마와 모흥갑(김태우 분)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문제는 원래 산적 두목이었던 모흥갑을 배반한 것은 장사정이고, 원래 해적 두목이었던 소마를 배반한 것은 여월임에도 불구하고, 장사정과 여월을 따르는 산적·해적은 영화를 관람하는 장사정과 여월이 배반자가 아니라 소마와 모흥갑을 배반자로 느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조선 초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관객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나 근대 식민지 세계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로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을 전제로 한 -국가철학적 지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객들의 삶과 사유체계의 근간에는 바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리마오 픽처스


해적과 산적의 집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반'과 '모함'이라는 언어적 개념이 불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한 국가철학적 서열관계가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생명이라는 평등한 동맹관계의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멸망한 고려와 건국된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언어적 개념 또한 근본적으로 국가철학적 서열관계를 토대로 한 이성계 한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된 조선이라는 국가가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는 새로운 동맹관계의 노마돌로지 지식에 근거한다. 

따라서 영화 <해적>은 여월과 소마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장사정과 모흥갑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산적이나 해적 집단이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가 고려라는 또 다른 국가와의 동맹관계 원칙을 부수고, 새로운 동맹관계의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런 질문은 또한 수백 명의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이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나 조선, 혹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독재국가와 어떻게 다른 동맹관계를 토대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해적에서 산적, 산적에서 해적으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철봉에 대한 연민과 소마와 모흥갑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가철학적 지식 또한 근본적으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IV. 국가철학과 노마돌로지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국가철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명량>의 영화 서사에서 불세출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충성'이 조선을 왕과 동일시하지 않고 백성과 동일시하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노마돌로지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고, '독특하지만 평등한' 노마돌로지 지식을 토대로 한 <해적>의 영화 서사에서 국가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여월의 해적과 장사정의 산적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국새의 분실이라는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국가의 건국이 지니는 노마돌로지의 정당성을 질문하듯 <명량>과 <해적>을 본 관객은 '천안암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통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지니는 노마돌로지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명량>과 <해적>의 관객들이 질문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오늘날의 국가구조가 진정으로 국민 개개인 모두를 포용하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동맹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느냐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명량>에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마저도 죽음을 불사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의 용기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적>에 등장하는 여월이나 장사정처럼 단지 불평등하기만 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구조에서 벗어나 친구나 연인의 관계를 구성하여 바다와 산으로 가서 대한민국의 국적 내팽개쳐버리는 무국적의 해적이나 산적이 되고 싶은 현실을 만든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여월이나 장사정처럼 해적이나 산적이 되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년 혹은 5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영화적 사건으로 되살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다시 질문하는 두 영화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을 하나의 국가나 국민의 동맹관계로 전제하지 않는, 단지 불평등하기만 한 국가의 권력구조는 400년 혹은 500년 전과는 달리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량>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를 발휘하는 이순신 장군을 백성이 구하는 것처럼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월이나 장사정과 같은 수많은 개인이 산이나 바다로 탈영토화해 산적이나 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대한민국을 '독특하지만 평등한' 대한민국으로 재구성할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대한민국의 탈영토화 과정을 우리는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에서 분명하게 목도할 수 있다. <제보자>에 등장하는 제보자 심민호(유연석 분), 윤민철 PD(박해일 분) 그리고 방송국 국장(권해효 분)과 방송국 사장(장광 분)은 21세기 대한민국을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근대 국가철학의 식민지 국가로부터 탈영토화시켜 "독특하지만 평등한" 탈근대의 대한민국으로 재영토화시키고자 하는 <명량>의 이순신 장군이며 <해적>의 여월이고 또한 장사정이다.


2014/10/07




<태양의 후예>와 4.13 총선


I. 거짓과 현실의 절묘한 타이밍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나 드라마는 거짓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삶은 현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와 같은 거짓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거짓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매료된다. 그 이유는 거짓과 현실이 상호 뒤바뀌는 역설의 아이러니가 오늘날의 삶과 세계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이응복·백상훈 연출, 김은숙·김원석 극본)에 등장하는 유시진 대위(송중기 분)와 강모연 의사(송혜교 분), 그리고 서대영 상사(진구 분)와 윤명주 중위(김지원 분)는 거짓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의 드라마를 보는 순간, 마치 드라마에 등장하는 송중기나 송혜교, 혹은 진구나 김지원처럼 '유시진 되기'나 '강모연 되기', 혹은 '서대영 되기'나 '윤명주 되기'를 경험한다. 이러한 허구의 감각적 경험은 단순히 드라마를 보는 순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유시진이 되어 강모연과 만나는 것을 상상하고, 윤명주가 되어 서대영과 만나는 것을 상상하고, 마침내 나의 연인에게 강모연 되기를 하거나 서대영 되기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사랑은 우리가 열광하고 매료되었던 소설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의 반복이다.

거짓과 현실이 상호 뒤바뀌는 역설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국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태양의 후예>에 등장하는 유시진 대위를 보호하는 대한민국이나 강모연 의사가 교수가 되는 이야기는 '거짓의 대한민국'과 그 사회이다. <태양의 후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대한민국과 그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유시진 되기나 강모연 되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꿈을 꾸거나 상상하는 미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꿈과 상상의 미래도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유시진과 같은 남성, 혹은 어떤 윤명주와 같은 여성을 만나는 사랑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사회가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난 4월 13일은 그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사회의 거짓과 현실이 뒤바뀌는 역설(逆說)이 절묘하게 이뤄진 날이다. 앞으로 4년 동안 대한민국 국회를 책임지는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4.13 총선과 지난 14일 16회를 마지막으로 종영된 아름다운 대한민국과 정의로운 대한민국 사회를 꿈꾸는 <태양의 후예>가 절묘한 타이밍을 이룬 것이다. <태양의 후예>가 이야기하는 거짓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대한민국이 '바뀔 수 있다'는, '역설의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출연진. 왼쪽부터 송중기(유시진 역), 송혜교(강모연 역), 김지원(윤명주 역), 진구(서대영 역). ⓒ프레시안


II. 유시진과 서대영의 남성적 아름다움과 박근혜의 식민지적 열등감

<태양의 후예> 방영 일정과 4.13 총선 과정이 겹치는 절묘한 타이밍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여소야대'의 제20대 국회를 만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태양의 후예>의 주 시청층이었던 20~30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반란이었다. 4.13 총선에서 내가 던진 한 표가 마치 강모연이 된 내가 유시진을 만나는 것처럼, 혹은 서대영이 된 내가 윤명주를 만나는 것처럼, 드라마를 보면서 꿈궜던 아름다운 대한민국과 정의로운 대한민국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난 것이다. 과거의 베트남 파병은 차치하고라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미군의 용병으로 참여했던 현실의 대한민국 군인이 미군 특전사 군인들과 당당히 겨루고, 영어만이 아닌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면서 우르크 어린이를 돌보는 군인이 존재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는 것, 더더욱 한 명의 국민이 납치되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군인 본연의 임무"라며 청와대 곽인준 외교안보수석(이한수 분)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특전사 사령관 윤중장(강신일 분), "국민을 무사히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외교와 안보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대통령. 정말로 거짓과 상상의 극치를 이루는 대한민국이다.

드라마와 달리, 현실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사회는 너무나도 추한 국가이고 불의가 판을 치는 사회다. 수백 명의 단원고 학생과 시민들이 몇 시간 동안 바다에 떠 있었지만 군인과 경찰은 국민을 구조하기는커녕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세월호 사건'은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대통령은 묵묵부답이다. 그리고 권력의 입맛대로 만든 '세월호 특별법' 때문에 이후의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를 권력과 지배자의 역사로만 재단하고 그것을 미래의 젊은 세대들에게 주입하겠다며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대통령과 이에 맞서 단식투쟁도 못하는 야당 지도자, 그리고 국민을 가상 범죄자로 만드는 테러방지법 제정에 저항해 192시간 27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한 국회의원을 단상에서 끌어내린 한 야당 지도자는 자신이 정한 비례대표 순번 때문에 당 대표를 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철없는 투정을 부리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태양의 후예>에 등장하는 거짓 대한민국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대한민국의 격차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새로운 한류 스타로 떠오른 유시진 대위 역의 송중기나 서대영 상사 역의 진구가 지닌 남성적 매력과 젊음의 강인함은 그들이 가진 '평화'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욱 빛난다. 우르크에 파견된 강모연을 비롯한 여성 의료진에게 매일 아침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특수부대원의 행군은 평화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한 남성적 매력과 젊음의 강인함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들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과 닮지 않았나. 그래서 유시진 대위와 각각의 조국애를 바탕으로 맺어진 미군 특수부대 델타포스 출신의 아구스(데이비드 맥기니스 분), 남북대화 과정에서 만난 북한군 안정준 상위(지승현 분)와의 우정은 더욱 아름답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그리고 지구촌 세계의 평화가 비록 국적은 달라도 평화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한 남성적 매력과 젊음의 강인함이 각각의 조국애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대한민국은 식민지적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비뚤어진 아집(我執)이다.

대한민국의 식민지적 열등감이 만든 비뚤어진 아집은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명박 정부 시절 대한민국은 러시아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실패했다. 반면, 북한은 성공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성공을 축하하고 그 인공위성 발사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대화를 시도해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올바른 일 아닐까?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남북 대화의 끈으로 하나 남은 개성공단마저 폐쇄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가까스로 성사된 대북방송 중단 약속마저 깬 채 비무장 지대의 대북방송을 재개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를 깨고 오직 전쟁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과 적개심만을 키우는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과 미군정 시대에 만들어진 식민지적 열등감이다. <태양의 후예>에 등장하는 유시진 대위나 서대영 상사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남성적 매력과 젊음의 강인함은 적에 대한 그 어떤 두려움이나 적개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강인함에는 평화에 대한 사랑과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드라마 <태양의 후예> 중 한 장면. ⓒKBS


III. <태양의 후예>와 20대 국회

지난 2월 24일부터 4월 14일까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총 16회가 방영된 <태양의 후예>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일정인 4.13 총선의 절묘한 타이밍이 '여소야대'의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희망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서 21세기의 새로운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국가와 사회의 형상을 고민했던 필자에게는 4.13 총선이 만든 '여소야대' 결과는 <태양의 후예>를 통해 마침내 이뤄진 문화 한류와 정치가 만난 절묘한 타이밍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개인 간의 아름다운 사랑과 국가나 사회에 대한 소중한 사랑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희망은 각 개인의 죽음이나 국가의 소멸에 다다를 때까지 절대로 끝나지 않는 삶과 문화의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만드는 상상의 세계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러한 예술적 상상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열광하며 매료되는 것이다. 그 예술적 열광과 매료는 우리의 삶과 사회와 국가를 새롭게 만든다. 

<태양의 후예>에 열광하고 유시진과 강모연 그리고 서대영과 윤명주에게 매료됐던 우리는 그것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여소야대'의 제20대 국회에게 가슴 벅찬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국회를 기반으로,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제20대 국회가 '세월호 특별법'을 개정해 21세기의 벌건 대낮에 어떻게 학생과 시민이 몇 시간 동안 바다에 떠있다 무참하게 죽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하루라도 빨리 '테러 방지법'을 개정해 시민의 사생활이 공권력에 침해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폐쇄된 개성공단을 다시 살려 시들어가는 대한민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식민지적 열등감이 만든 북한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남북전쟁을 부추기는 '북한인권법'을 폐지하고, 평화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한 대화와 타협의 '한반도 평화유지법'을 제정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나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상호 대화와 타협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6/04/19



"좋은 영화 <아가씨>와 나쁜 영화 <곡성>"


I. 영화의 구성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가장 훌륭한 비평적 글쓰기란 "그 무엇을 위하여 쓰거나 그 누구에게 동의하는 글쓰기"라고 정의한다. 그 무엇을 비난하거나 그 누구를 폄하하기 위한 글쓰기는 나쁜 글쓰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 <아가씨>와 나쁜 영화 <곡성>'이라는 제목으로 박찬욱 감독과 나홍진 감독의 영화 구성에 대하여 찬양과 질타의 글을 쓰는 것은 그 무엇을 비난하거나 그 누구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화 예술의 미래를 위한 간절한 미음으로 글을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처럼, 혹은 미술과 음악처럼 영화는 근원적으로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이름 그자체로 시나 소설, 혹은 미술과 음악 그리고 영화가 무조건 훌륭한 것은 아니다. 다른 여타의 예술 텍스트들처럼 영화에는 좋은 영화가 있고, 또는 나쁜 영화가 있다. 다른 여타의 좋은 예술처럼 좋은 영화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통하여 제공된 그 어떤 느낌과 감각을 생산적이거나 생성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드는 영화이다. 나쁜 영화는 그 반대이다. 영화가 제공한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인 느낌과 감각을 생산적으로 사유할 수 없거나 심지어 사유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영화는 나쁜 영화이다.

영화는 또한 다른 여타의 예술 텍스트들보다 더 강압적으로 관객들의 느낌과 감각을 구성한다. 폐쇄적인 영화관이라는 닫힌 공간 덕분이기도 하지만, 시와 소설, 미술, 음악, 건축 등등의 모든 예술 텍스트들을 총망라한 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만들어지는 강렬한 느낌과 감각은 영화관 바깥의 현실적 이미지들에 대한 느낌과 감각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포르노 영화가 포르노 사회를 만들고, 마국 헐리웃 영화가 "미국의 편은 선이고 미국의 반대편은 악"이라는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감독은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화가나 작곡가처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자이자 신이다. 영화감독이 창조자이자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는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언어나 색깔 그리고 선율로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 다른 여타의 예술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절정기였던 1930년대의 영국식과 일본식 건축이 결합된 백작의 저택이라는 공간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고,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근대적인 도시의 공간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곡성"이라는 농촌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한다.

▲ 영화 <아가씨> 포스터.


II. 창조(생성)적 영화와 파괴(폭력)적 영화

그러나 우리는 원초적 이미지의 형상을 사유할 수 없다. 이미지의 형상은 느낌과 감각만을 제공한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의 형상들 속에서 뛰어노는 언어적 개념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등장하는 영국식과 일본식 건축이 결합된 백작의 저택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이미지의 형상들은 아름답다거나 사치스럽다거나, 혹은 제국주의적이거나 귀족적이라는 느낌과 감각을 전달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도 마찬가지이다. <곡성>에 등장하는 "곡성 마을"의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마을들은 아름답다거나 적막하다거나, 혹은 고요하다는 느낌과 감각을 전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가씨>에 등장하는 백작의 저택 속에서 영화의 관객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근대적으로 훈련된 귀족 아가씨 히데꼬(김민희 분)와 하녀 숙희(김태리 분), 그리고 사기꾼 백작(하정우 분)과 후견인 이모부(조진웅 분) 등등의 인물적 형상의 개념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 성, 남성, 여성, 돈(자본), 귀족, 평민, 계급, 민족, 식민지 조선, 제국주의 일본 등등의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데 반하여 <곡성>의 마을들에서 살아가는 경찰관 종구(곽도원 분), 무당 일광(황정민 분), 외지인 일본인(쿠니무라 준 분), 무명(천우희 분) 그리고 소녀 효진(김환희 분) 등등의 인물적 형상의 개념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과 공포, 가족 등등의 개념들은 사유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곡성>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의 형상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생명과 자연의 개념들에 대한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영화의 외부, 즉 영화감독이 만든 수많은 이미지들의 형상이 단지 <곡성>만이 제공하는 영화 이미지의 패러다임 속에서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분법의 상징과 은유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곡성>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형상들은 절대적 악의 상징(외지인 일본인)과 절대적 선을 대표하는 잠정적 가능성의 상징(무명), 그리고 절대적 악에 패배한 상대적 선을 대표하는 근대화된 전통적 전근대의 상징(무당 일광)과 서구적 근대의 종교적 상징(기독교 사제)의 싸움일 뿐이고, 종구와 그의 딸 효진을 포함한 수많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발견되는 마을 사람들이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단지 희생물이거나 악의 영령이나 선의 영령에게 제사를 드리는 번제물일 따름이다. 그리고 선을 대표하는 무당 일광과 기독교 사제의 패배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제 식민지 36년을 살았던 한반도 민중의 아픔과 공포에 대한 역사적 은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제 식민지 36년의 역사적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가 악이지 무차별적인 외지인 일본인 개개인이 악이 아니며, 무당 일광이나 기독교 사제 또한 선의 상징이거나 악의 상징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미국 헐리웃 영화나 반공영화처럼 단지 이데올로기의 주입일 뿐이다.


영화 <곡성>의 더욱 더 큰 문제는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돌을 던지며 경찰이라는 지역 권력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종구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 무명이 영화의 말미에서 효진의 목숨을 빌미로 기독교적 상징으로 작동하는 닭의 세 번 울음소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믿어달라고 종구에게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적 선과 악의 무차별적인 폭력의 재생산을 의미할 뿐이다. 근대의 역사적 상상력을 통하여 <곡성>에 등장하는 무명이 일제 위안부 소녀의 상을 상징한다고 치더라도 영화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종구나 그의 딸 효진에게 무명은 외지인 일본인이나 무당 일광과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외부적 폭력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력은 영화 <곡성>에 등장하는 연약한 주민들 속에서 가장 연약한 어린 소녀인 동시에 생기발랄한 자연과 생명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효진에게 더더욱 무차별적이라는 측면에서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잔인함의 폭력이 어떤 영화적 이미지의 형상이 만드는 현실적이거나 역사적인 관계의 설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 <곡성>은 영화의 관객들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곡성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칸 영화제"에서 <곡성>을 보러왔던 상당히 많은 영화의 관객들이 영화가 상영되는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버렸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영화 <아가씨>에 등장하는 폭력의 강도는 영화 <곡성>보다도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가씨>에 등장하는 폭력의 이미지는 일본 근대 제국주의와 근대 식민지 조선,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적 후기 근대의 역사성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의 필연적 장치이다. 영화 속의 폭력과 사랑 그리고 섹슈얼리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공간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개개인들의 삶의 욕망과 무관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의 식민지 조선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식과 일본식 주택 구조가 결합된 백작의 저택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근대 영국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근대의 사회적 구조를 식민지 조선에 강제로 이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대부분의 일상적 소규모의 사회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백작의 저택에는 제국주의적 지배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인 백작의 후계자 히데꼬와 하녀 숙희 그리고 사기꾼 백작과 이모부의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어린이나 자연의 세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배자가 부재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는 일대 일의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고, 수많은 관계의 종합이 가족이고, 사회이며, 또한 국가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욕망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고, 어떤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에서 드러나는 욕망은 그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의 욕망이다.


욕망의 근원적 모델은 성적 욕망이다. 따라서 백작의 저택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상사들은 온갖 추잡한 사회적 섹슈얼리티가 난무한다. 이런 측면에서 백작의 저택에서 이미 구성된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의 사회적 욕망이 발현되기 이전의 가장 순수한 개체적 생명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히데꼬의 욕망이다. 히데꼬의 욕망에는 이미 구성된 가족주의도 없고 사회적 속성이나 국가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생명을 지속시키는 삶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근원적 힘을 통하여 소녀에서 여성으로 존재하고자 하고,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서 드러난 숙희의 욕망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돈에 대한 욕망이고, 사기꾼 백작의 욕망 또한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는 하층민 남성의 자본과 권위에 대한 욕망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식민지 귀족 중년 이모부의 욕망은 식민지 국적을 넘어서기 위한 제국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 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거나 하나의 여성이 되고자 하는 성적 욕망이 국가주의적 권력이나 사회적 자본이나 개인적 권위에 대한 부수적 욕망이 되었을 때, 개체적 생명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으로 작동될 수밖에 없다.


▲ 영화 <곡성> 포스터.

관계적 욕망의 결과물은 즐거움(혹은 쾌락)의 향유이다. 그러나 관계적 욕망을 구성하는 관계적 주체가 일대 일이 되지 않거나 주인과 노예, 혹은 지배나 피지배의 일방적 관계일 때, 관계적 욕망이 만드는 즐거움의 향유는 일방적인 즐거움의 향유이고, 또한 관계적 대상에 대한 폭력이며 관계적 대상의 생명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나 국가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사디스트적이거나 마조히스트적인 즐거움의 향유만을 생산한다. <아가씨>에서 제국주의 권력이나 자본, 혹은 남성적 권위의 사회적 욕망으로 인해 성적 관계의 근원적 욕망이 사회적 욕망으로 변질된 후견인 이모부나 사기꾼 백작은 필연적으로 사디스트적이거나 마조히스트적인 욕망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는 다르다. 애초부터 남성적 권위나 제국주의적 권력에 대한 욕망이 차단되어 있는 숙희는 돈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망보다 여성적 몸의 생성을 통한 생호생성적 관계의 즐거움에 대한 향유가 더욱 강렬하며, 관계적 대상인 히데꼬의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한 이후 마침내 상호생성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일대 일 관계의 욕망이 발현된다. 따라서 히데꼬와 숙희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생명의 욕망과 상호생성적 사랑이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간적 힘으로 발현된다.

III. 철학의 극장

질 들뢰즈는 오늘날의 영화를 새로운 "철학의 극장"이라고 명명한다. 들뢰즈의 이 말은 이태리의 네오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류 영화들은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과거의 근대적 철학의 상투적인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과 관계의 작동을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영화 <아가씨>는 일본식과 영국식이 결합된 일본제국주의 백작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 36년의 역사를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식민지 착취론'의 이분법으로만 이해하려는 오늘날의 근대적인 보수/진보 (남성) 지식인들의 고루한 사유방식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시대와 오늘날의 역사를 다시 사유하라고 끊임없이 설득한다. 또한 식민지 역사나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유(철학)는 국가, 권력, 자본 등등의 근대적 세계관이 만든 개념들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삶을 유지하는 근원적 생명, 관계, 욕망 등등의 개념들을 토대로 사유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영화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로 다른 느낌과 감각들을 근대적 관습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명, 관계, 욕망 등등의 개념들로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좋은 영화이다.


이와는 달리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몸의 강렬한 느낌과 감각이 결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별적인 생명들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들이고, 아버지와 딸이나 부부, 혹은 친구의 관계들의 힘은 드러나지 않으며, 심지어 인간의 근원적 생명의 힘이라고 말하는 욕망은 포르노 영화처럼 쓸데없는 영화적 소비의 장치로만 제공된다. 따라서 <곡성>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전근대적인 시골 마을의 경치,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단지 초월적인 것/현실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가시적인 것 등등의 이분법을 통한 선/악의 이분법만을 재생산한다. 특히 "세월호 사건"이나 "옥시 사건"을 통하여 현실적 삶과 생명이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에 의하여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고 있는 근대적 현실 속에서 영화의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삶과 생명과 관계와 욕망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곡성>은 정말로 나쁜 영화이다. 심지어 <황해>와 같이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곡성>과 같은 퇴행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새로운 한류 영화의 관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곡성>의 관객이 500만을 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일제 식민지 시대나 1950년대나 60년대의 근대화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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