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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국 걸밴드의 역사 - 최규성

by Wood-Stock 2013. 7. 24.

  한국 걸밴드의 역사


(ROCK)음악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장르 자체의 강력하고 저항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여성들이 구사하는 록 음악은 흔히들 걸스락(Girl’s Rock)’ 혹은 레이디 락(Lady Rock)’이라 말한다.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착된 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 걸스락은 예로부터 폭넓은 대중의 관심권에서 늘 벗어나 있다. 걸 밴드를 탁월한 음악성과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펼쳐내는 아티스트로 평가하기보다는 남성들의 야릇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섹시한 비주얼을 앞세운 오락적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왜곡되고 해묵은 대중적 시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엔 몇 팀의 걸 밴드들이 활동을 하고 있을까?

 

1960년대 이후 전 세계가 전설적인 영국밴드 비틀즈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한국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이에 국내에도 록밴드들이 하나 둘 탄생되기 시작했다. 8군 하우스밴드 코끼리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키보이스와 신중현이 리드한 에드훠를 필두로 수많은 밴드들이 명멸을 거듭해 왔다. 사실 한국대중음악사에 기록된 록밴드는 남성밴드가 주류를 이룬다. 걸 밴드 역시 보이 밴드와 더불어 무수하게 등장했지만 대부분 잠깐 이슈화되고 사라졌을 뿐 한국 록 음악사에 기록된 걸 밴드는 거의 전무하다. 대중은 여성이 전자기타를 들고 있는 것조차 대단하게 여겼기에 진정한 뮤지션의 존재가치보다는 뮤지션 이미지를 흉내 내는 섹시한 모습을 강요당했던 구석도 없지 않았다. 걸스락 음악에 대한 이 같은 뿌리 깊은 대중적 편견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남성적 시각으로 정체성이 재단된 폐해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걸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것은 그 어느 장르보다 험난했던 선구적인 작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며 남녀의 사회적 위치는 동등해 졌고 최근 여성들의 파워는 오히려 남성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남성 밴드 못지않은 음악 실력을 담보했음에도 상대적으로 부당하게 평가절하 받아온 걸 밴드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도 이제는 개선될 필요가 있다. 걸 밴드들의 독특한 활동반경도 대중화에 걸림돌이 된 부분이 부인하기는 힘들다. 자신들만이 유니크하다는 인식을 가진 걸 밴드들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단 숨어서 작은 행사만 뛰었던 폐쇄적인 활동으로 일관했던 경향이 분명 있었다. 실제로 여러 걸 밴드 멤버들은 지상파 TV에서 진행했던 톱밴드 경연대회에 출전했을 때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2013년 현재, 활동하고 있는 걸 밴드는 대략 10여 팀 정도로 확인되었다. 그동안 독립군처럼 각기 다른 길을 외롭게 걸어온 이들이 작은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20126월부터 걸스락 페스티발이란 이름으로 뭉쳐 두 달에 한 번씩 벌써 여섯 번의 공연을 치러냈다.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걸스팩토리 공연을 마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3인조 러버더키와 2인조 스윙즈는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워킹 애프터 유-수요일엔 빨간 장미를(가제)’를 진행 중이다. 6회 걸스락 페스티발 이후 시작한 이 공연은 이번 주에 5회 공연까지 마쳤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디딤홀에서 정기적인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공연을 통해 탄생된 곡들로 창작앨범 발표까지 꿈꾸고 있다. 현재 창작곡 2곡을 편곡하며 살을 붙여가고 있는데 이모코어 스타일의 4~5곡을 완성해 늦가을 쯤 EP음반을 발표할 목표라 한다.

 

러버더키 스윙즈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워킹 애프터 유 피쳐사진

합동공연을 갖는 러버더키와 스윙즈


공연 전 매력적인 멤버들과 인터뷰와 피쳐 사진촬영을 진행한 시간을 가지며 즐거웠다. 함께 음악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걸 밴드 멤버들의 모습에서 이들은 아무리 현실이 녹녹치 않다 해도 결코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큰 무대건 작은 무대건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땀 흘리는 뮤지션의 모습은 아름답다. 사실 걸 밴드의 공연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란 기대도 상상도 하지 않았다. 비록 작은 무대였지만 최선을 다하며 땀을 흘리는 걸 밴드 멤버들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일단 칼럼을 쓰기위해 활동하고 있는 걸 밴드 중 한 팀을 선택해야 했다. 스윙즈도 훌륭했지만 평단의 추천을 받았고 실제로 공연을 보면서 상당한 내공을 담보했음을 확인한 3인조 러버더키 멤버들과 홍대 앞 한 커피숍에서 한 번 더 만나 새벽 2시 심야까지 인터뷰를 했다이번 텐아시아 골든 인디 컬렉션 걸 밴드 러버더키 편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등장했던 중요 걸밴드들의 역사까지 야심차게 짚어 보는 거대 프로젝트로 꾸며질 예정이다. 한국 걸 밴드 역사를 바로 세우기를 위해 스페셜하게 마련된 이번 칼럼은 PART1, 2는 한국 걸스락 역사를 수놓은 전설적 밴드들을 소환해 귀한 사진과 함께 소개할 예정이고 다음 주 PART3, 42010년 첫 앨범을 발표한 러버더키를 중심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걸 밴드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한국 걸 밴드 역사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정리하는 작업은 처음이기에 방치되고 훼손된 한국 걸 밴드의 역사를 복원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대략 1960년대 한국 걸 밴드 시생대부터 2013년 현재까지 30여개의 국내 걸 밴드들을 소개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 같다.

 

러버더키 스윙즈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워킹 애프터 유 공연

러버더키 스윙즈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워킹 애프터 유’ 공연사진


사실 한국 걸 밴드의 역사는 장구하다. 남성 록밴드의 역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앞선다. 1962년에 블루리본이 등장한 이래 수많은 걸 밴드들이 미8군과 다운타운 클럽무대에서 활약했고 당대의 한국 청춘영화에도 무수하게 출연했었다. 심지어 동남아로 진출해 음반까지 발표했던 미지의 코리언 걸 밴드도 있었다. 한동안 개체수가 멸종상태였지만 1980-90년대에는 걸출한 음악성을 담보했던 밴드와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밴드까지 뒤를 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개체수를 헤아려야 할 정도가 숫자가 증가했지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명멸을 거듭하며 대중의 기억 저편에 봉인되었다.



1962년 9인조 스윙재즈 걸밴드 블루 리본 멤버사진, 좌측 세번째는 신중현의 부인인 드러머 명정강


국내 최초의 9인조 스윙 재즈 걸 밴드 블루리본(Blue Ribbon)1962년에 결성되어 1964년까지 3년 정도 활동했다. 밴드 결성시기가 1962년이면 한국 최초의 밴드로 회자되는 키보이스, 에드훠보다 앞서 결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또한 ‘9인조 걸 그룹은 소녀시대가 최초라는 잘못된 대중적 인식도 이 역사적 걸 밴드로 인해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소녀시대보다 45년 앞서 결성된 블루리본의 멤버는 9인조였고 댄서 1인을 포함 총 10명의 멤버가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을 했다. 드러머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부인 명정강 선생이다. 이들은 미8군 쇼 대행업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한국흥행 즉 화양소속이었다. 밴드 구성은 모두 서울의 명문 여대 음대생들로 바이올린 2, 클라리넷 2, 플루트 1, 피아노와 기타 그리고 콘트라베이스, 드럼까지 9인조 밴드로 이뤄졌고 고전무용 1명까지 모두 10인의 청순한 외모의 미인들로 구성되었다.

 

5개월 동안 각고의 연습 끝에 45분 쇼를 구성하여 미8군 오디션에 통과한 이들은 서울의 용산, 의정부, 동두천, 춘천, 원주 등 미군부대가 있는 곳은 거의 다 섭렵했다. 하얀 원피스에 파란 리본을 맨 의상을 착용했던 이들은 제법 인기도 높아 배우 최은희가 제작 주연한 검은 상처의 블루스란 영화에도 출연을 했었다. 2년여의 세월이 지나 음대에 재작 중이던 대다수 멤버들은 졸업과 더불어 결혼문제가 현실로 다가와 해체했다. 아쉬운 점은 공식 음반 발표 없이 사라진 점이다. 명정강 선생이 보관해온 빛바래고 구겨진 멤버들의 흑백사진 한 장이 이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주간여성 1972년 6월 4일자

주간여성 197264일자 / 걸밴드 서울패밀리 1964

 

블루리본에 이어 1964년에 결성되어 탁월한 댄스, 연주, 노래실력으로 미8군 무대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서울패밀리가 등장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위일청이 리드했던 동명의 혼성밴드와는 다른 걸 밴드다. 멤버들은 친자매 지간으로 리드기타를 친 큰 언니 김백희를 리더로 김태영, 김영경, 김태옥, 김태리나 그리고 이종사촌 정창원까지 6인조로 구성되었다. 700여곡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유한 이들은 1972년 당시, 파격적인 월 2만 달러의 개런티를 받고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했었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 김시스터즈가 1959년에 진출한 이래 한국 걸 밴드로는 최초의 일이다. 탁월한 연주와 보컬능력을 담보했던 이들은 70년대까지 활동을 계속했지만 아쉽게도 블루리본과 마찬가지로 서울패밀리 역시 가장 중요한 음반을 남기지는 못했다.



3 섹시한 5인조 걸 밴드 레이디버드 앞 중앙이 리드싱어 장미화 1966년1965년 탁월한 미모를 자랑했던 5인조 걸 밴드 레이디 버드가 뒤를 이었다. 1964년 KBS 톱싱어 대회 연말결선에서 대상을 받았던 여고생 장미화는 신중현이 리드한 록밴드 애드훠의 객원보컬로 미8군 무대에 섰다. 스무 살의 날씬하고 예쁜 여자보컬리스트의 등장에 미8군 사병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고 한다. 그때 동영프로덕션에서 걸 밴드를 결성해 외국공연을 떠나자는 제의를 받았다. 리드싱어와 드럼을 맡은 장미화를 주축으로 한 레이디버드는 동남아, 미국, 캐나다로 순회공연을 떠나 4년 후에 귀국했다. 한 명이 탈퇴해 4인조가 된 레이디버드는 1969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성황리에 열린 제1회 전국보컬그룹 경연대회에 참가해 섹시하고 육감적인 용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 관객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내며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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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결성된 국내 최초의 4인조 여성 비틀즈 이미테이션 밴드 바니스 비틀즈도 있었다. 드럼 노현희, 리드기타 주명원, 베이스기타 임계영, 세컨드 기타 안성희로 구성되어 흥겨운 무대를 연출했다. 그동안 전설적인 록밴드 키보이스가 최초이자 유일한 1960년대 비틀즈 이미테이션 밴드로 알려졌었는데 뒤를 이어 이미테이션 걸 밴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기록과 밴드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수많은 1960년대의 걸 밴드들은 국내 무대뿐 아니라 파월장병 위문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 진출해 국위를 선양했던 한국 걸 밴드 한리버스엔젤도 있었다. 현지에선 한국왕사소녀음악대(韓國王使少女音樂隊)라 불린 이들은 리드보컬, 드럼, 기타 3명으로 총 5인조로 구성되었다. 멤버에 대한 정보조차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걸 그룹이다. 코리안 걸 밴드 한 리버 앤젤스는 싱가포르 TNA레코드에서 ‘To Sir with love’, ‘Wipe Out’, ‘san francisco’, ‘LaBamba’ 같은 록큰롤 초기 히트 팝송들을 수록한 싱글 음반을 4장 발표했을 정도로 현지에서 인기를 구가했었다. 팀명에 ‘한강’을 넣어 한국적 이미지를 부각시킨 점은 가슴 뭉클하다.


바니스 비틀즈 월간 가요생활 1966년 11월호 소개기사(위), 리버 엔젤스(아래)





전설적 걸 그룹 해피돌즈가 1971년 태동했다. 5~7인조로 활동했던 이 팀의 리드보컬 김명옥은 천재 소녀 보컬리스트 출신 나미다. 일곱살의 어린 나이에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수활동을 시작해 1980년대 최고 여성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나미는 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였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던 1971년, 5인조 걸 밴드 해피돌즈의 멤버가 되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7인조 시절, 전원 10대들로 구성되었던 멤버들은 리더인 기타 겸 색소폰 김승희, 기타와 플롯 겸 보컬에 김명옥, 베이스 이종숙, 퍼스트 기타 겸 트럼본 김승미, 오르간 김영숙, 트럼펫 이종숙, 리듬기타 신수연, 드럼 김은숙이다. 당시 이들은 ‘7인의 어린마녀들’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밤무대를 평정했었다.


주간여성 1972년 10월 8일자 해피돌즈 연습장면(1972년)


미군들로부터 ’코리안 잭슨 파이브‘로 불린 해피돌즈는 2년 동안 베트남에서 활동했다. 1973년 귀국한 해피돌즈는 실버타운, 라스베가스 클럽에서 HE6, 키 보이스 같은 기라성 같은 남성 록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이후 달콤하고 감미로운 버블껌 사운드나 춤추기 좋은 고고음악을 주로 노래한 이들은 5년 간 미국 전역을 돌며 활동했다. 1977년, 뛰어난 연주솜씨와 춤 그리고 이국적인 용모로 사랑받았던 이들은 캐나다 토론토의 솔라스 레코드사에서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1972년 밤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4인조 힛걸스와 5인조 화녀들, 1978년 독집을 발표한 5인조 박신덕과 다섯 재롱이도 있었다.


25인조 걸 밴드 화녀들 70년대(위), 박신덕과 다섯재롱이 1978년(아래)



11 이브 2기 멤버 1989년한동안 명맥이 끊긴 걸 밴드 역사는 1988년 리드보컬 백운지, 기타 김경희, 키보드 박혜선, 드럼 배애경, 베이스 기타 김소라로 구성된 5인조 걸 밴드 이브가 등장하며 명맥이 이어졌다. 걸 밴드 이브는 하드한 사운드를 제대로 구사했던 걸 밴드였다. 멤버 대부분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 신입생의 어린 멤버들이었다. 고역의 샤우팅 창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한 소찬휘는 리드기타리스트로 만만치 않은 기타실력을 선보였다. 이브는 곧바로 베이스기타가 김소라에서 허수정으로 교체되어 2기를 결성해 1989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소찬휘는 1992년 SBS 신세대 가요제에 출전해 은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1996년 솔로 1집 발표 전까지는 김경희란 본명으로 활동했다.

◀ 이브 2기 멤버(1989년)



12 와일드로즈  멤버1993년

1989년 결성해 1993년 공식 데뷔한 5인조 걸 밴드 와일드 로즈의 존재는 한국 걸 밴드역사에 있어 매우 신선하다. 여성밴드가 히트곡 ‘그대처럼’에서 보듯 멋지게 연주하고 강하게 노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렸다. 부산출신 걸 밴드라는 점도 그렇고 홀연히 등장했다가 사라진 것도 신비롭다. 멤버는 보컬 최정숙과 베이스 이인희, 키보드 양희경, 드럼 이지은, 기타 김선미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2집 발표 이후 지상파TV에 출연하며 폭넓은 대중과 소통하려 힘썼다. 그러나 강하고 멋진 음악을 들으며 품었던 섹시하고 근사한 팬들의 환상은 브라운관에서 등장한 이들의 모습에 깨졌다. 멤버들은 예쁘지도 않았고 강한 사투리, 과묵한 이미지였기 때문. 이들은 걸 밴드의 성공요인은 탁월한 음악성에다 비주얼까지 겸비해야 된다는 숙제를 남겼다. ▲ 와일드로즈 (1993년)



18 미스미스터 공연포스터 2007년

1996년 등장한 듀엣 걸 밴드 미스미스터는 보컬 박경서, 기타 김민정으로 구성되었다. 넥스트의 베이스트 김영석이 프로듀싱한 1집을 발표한 이들은 남성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중성적 외모였던 리드보컬 박경서가 단연 화제를 모았다. 타이틀 ‘널 위한 거야’가 맥주광고 삽입곡으로 사용될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1997년 2집 후 활동을 중단했다. 공백기인 1999년 박경서는 솔로 앨범을 발표해 독립했고 2000년 혼성그룹 ‘베이비 블루’ 출신의 베이시스트 이혜민을 영입해 트리오로 재결성해 3집을 발표했다. 멤버들이 작사, 작곡을 담당하며 실험성과 완성도 높은 음악성을 구사했지만 이들 역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 미스미스터 공연포스터 (2007년)


1998년 등장한 14~16세의 중학교 1, 2, 3학년 소녀였던 김한나, 김한별, 김한샘 친자매로 구성된 3인조 걸 밴드 한스밴드는 걸 밴드 역사상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인기 밴드였다. 충청북도 영동에서 성장한 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팀 의상으로 착용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깜찍한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히트곡 ‘선생님 사랑해요’는 1960년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의 90년대 버전이라 할 만 했다. 섬마을 선생님은 말도 못하고 수많은 밤을 헤이며 섬마을 처녀의 마음을 도려낸 1960년대식 선생님 사랑을 노래했다면 한스밴드는 선생님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다는 소녀의 적극적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 선생님에 대한 소녀들의 사랑도 정서도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IMF로 직장을 잃은 아버지를 ‘오락실’에서 만나는 내용의 ‘오락실’ 또한 뭉클한 감동을 안기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14한스밴드 공연 1998년 한스밴드 공연(1998년)

3활동 당시 한스밴드는 음반사와 전속금 500만원에 전속기간 5년의 계약을 맺은 뒤 음반판매수익이나 방송출연 수익 등을 제대로 받지 못해 관할 동사무소에서 생계보조비를 받으며 생활해온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안겼다. 3집까지 발표하고 활동을 중단했던 자매들은 동덕여대 실용음악과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2007년 컴백해 4집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세기가 끝나가던 1999년 톡톡 튀는 매력으로 승부한 이여진, 박꽃별등으로 구성된 3인조 걸 밴드 아이다도 있었지만 한스밴드의 인기에 밀려 2집 발표한 후 해체했다.


세기가 바뀐 2000년 5인조 지젤(gissele)이 포문을 열었고 이어 2001년 2인조 모던 록 걸 밴드 버튼(Button)이 등장했다. 국내 최초 3인조 크로스오버 전자 걸 밴드 일렉쿠키(ELECCOOKIE)도 나타났다. 바이올린 이성은(진미), 키보드 이혜정(기명), 첼로 박현영(보연)으로 구성된 이들은 2004년 화려한 액션, 파워풀한 연주로 클래식과 팝, 라운지, 민요까지 다양하게 수록한 1집 ‘TEMPTATION’으로 그해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9년 서지영(드럼), 최영신(베이스), 박송이(기타), 장한이(보컬)로 구성된 여성 4인조 걸 밴드 니아가 등장했다. 니아의 기획사와 보컬 장한이의 기획사는 서로 다른데 두 제작사가 이익보다는 음악성을 위해 의기투합한 사례다. 2010년 3인조 러버더키와 2011년 해인, 미선, 아연으로 구성된 3인조 스윙즈가 등장해 걸 밴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다 1999년(위), 16 지젤 1집 2000년 대영 (아래)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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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화사관(史官)

-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 -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K팝의 오늘에서 오래전 이 땅에 대중음악의 씨를 처음 뿌렸던 뮤지션들의 흔적을 본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기적은 없다. K팝의 인기 뒤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많은 가수들의 노력이 있었다. 지금은 잊힌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 대중가요 역사를 기록하는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굴 작업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열렬한 가요 애호가였던 덕분이다.




치밀하게 복원한 걸그룹의 역사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58)은 지난 상반기에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몇 가지 숙제들을 무사히 끝냈다. 그중 가장 홀가분한 일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정리해오던 한국 걸그룹 역사를 《걸그룹의 조상들》이란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대중이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한국 걸그룹의 역사를 실증적인 사진 자료와 함께 복원해낸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책에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결성돼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는 ‘저고리 시스터즈’를 시작으로 2000년대 이전까지 활동했던 305개 걸그룹의 존재와 활동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 관련 인사들에 대한 탐문 조사는 이 책의 집필에 바친 시간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2012년에도 약 150개 팀의 자료를 찾아 걸그룹 역사를 정리했던 적이 있어요. 이번 책은 그 작업의 연장선으로 이전 책의 개정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팝의 인기를 견인하는 한 축인 걸그룹의 역사를 바로잡고 싶었어요. 아직도 SES나 핑클이 걸그룹의 원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K팝의 저력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드리는 게 저 같은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지 쌓인 신문사 자료실과 고물상, 당시에 발행된 신문 잡지 기사를 뒤져 희미하게 남은 걸그룹들의 존재를 발굴하는 일은 노예로 팔려온 선조의 흔적을 더듬는 알렉스 헤일리 소설 《뿌리》의 쿤타 킨테 못지않은 여정이었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굴 작업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열렬한 가요 애호가였던 덕분이다.


사실 그는 가요평론가란 직업 외에 대중가요 수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걸그룹의 조상들》출간에 앞서 지난 3월 서울 롯데백화점 월드타워점에서 열렸던 ‘100앨범, 100아티스트展’의 전시물품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산더미 같은 자료 중 일부를 선별해 내놓은 것이다.


한국 대중가요에 관한 한 그만큼 방대한 자료를 가진 수집가는 없다. 경기도 파주 ‘한국대중가요연구소’를 가득 메운 1만 2천여 장의 LP와 고색창연한 가요잡지, 빛 바랜 포스터, 가수들의 동정을 담은 신문·잡지의 기사 스크랩, 가요제 트로피와 메달, 업소 전단지 등은 그가 얼마나 대중가요 연구에 천착 해왔는지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장소가 좁아 몇몇 귀한 자료들은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 전시 중이에요. 국내 대중음악의 역사가 백 년에 가깝지만 학술적인 연구도 제대로 돼 있지 않고, 자료 보관도 부실합니다. 여기 있는 음반들의 상당수도 고물상 같은 곳을 뒤져 찾아낸 것들이에요. 값을 매긴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구입가로만 따져도 몇 십억 원이 넘습니다.”


그의 컬렉션에는 하춘화가 여섯 살때 부른 데뷔 앨범 《하춘화 가요앨범(1962)》처럼 수백만 원을 줘도 구할 수 없는 희귀 자료부터 데뷔 앨범도 내지 못하고 사라진 무명 걸그룹에 대한 토막 기사,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팬들이 한정판으로 만든 과자류까지 없는 게 없다. 그가 이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해온 전문가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191장의 LP에 담긴 음반의 가치와 대중가요의 역사를 재조명한 저서 《대중가요 LP가이드북(2014)》,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홍대 앞 41팀의 인디 씬을 세상에 알린 《골든 인디 컬렉션, 더 뮤지션(2015)》등이 그간의 산물이다.


“어려서부터 팝과 우리 음악에 관심이 많아 음반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게 출발점이었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용돈을 아껴 3,400여 장의 앨범을 모았는데 군대 간 사이에 아버님이 다 내다 버리셨더라고요. 그 뒤 직장 생활이 바빠 한동안 잊고 있다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다시 한 장 한 장 음반을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집벽과 기록에 대한 욕심은 20년 간 일간지 기자로 일하며 몸에 밴 습성이다. 2000년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주석의 제 1차 남북정상회담 장면을 찍은 사진기자가 바로 그였다.


행복한 취미 생활에 만족하며 언론사에 몸담고 있던 그가 가요평론가로 전향해 지금껏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한 건 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주간지의 펑크 기사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취미 삼아 모으기 시작한 가요 물품들이 무려 6년 8개월 동안이나 주간지에 글을 연재하는 데 많은 영감과 도움을 줬다.


음악 동호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의 글들은 B급 문화로 치부돼 오던 한국 대중가요가 주류 음악의 하나로 인정받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글에 대한 욕심이 가요자료 수집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재점화시킨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1990년대 중반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등 PC통신을 이용하던 동호인들은 ‘절판소장’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최규성을 여전히 각별하게 기억한다.


유독 절판된 레이저디스크에 애정을 보이던 절판소장의 글과 자료는 한국 가요사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접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하는 자료를 사 모으기 위해 그 좋아하던 술도 딱 끊었어요. 처음 보는 자료가 경매에 나오면 지금도 아내는 제가 주머니 사정은 생각 안 하고 욕심을 낼까 봐 안절부절못합니다.”



대중문화 연구가 중요한 이유


지난 2006년 정들었던 신문사를 퇴사한 뒤 그는 지금껏 한국대중가요에 대한 글을 써오고 있는 중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에 서비스 중인 ‘한국 대중가요 앨범 11,000’도 그의 감수를 거쳤다. 1923년부터 1990년 사이 발매된 한국 대중가요 음반 중 역사적 의미가 있는 6천여 장에 대한 리뷰를 쓴 것도 그였다.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LP음반의 70퍼센트 가량을 소장하고 있고, 글과 사진에 익숙한 그가 아니면 쉽게 엄두도 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이번 책 역시 그간의 연구에 대한 중간 평가라 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음악에 대한 평가 이전에 뮤지션들이 살아온 삶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노래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상, 음악에 바쳐진 한 뮤지션의 열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건 그들이 흘린 땀의 값어치이다.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노래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상, 음악에 바쳐진

한 뮤지션의 열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대형기획사에서 몇 년씩 연습생 시절을 보내는 지금의 걸그룹 못지않게 당시의 걸그룹들도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는 연습으로 밤을 지샜다. 어쩌면 최규성은 K팝의 오늘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기적이 아니라 피땀으로 쌓아올린 노력의 결과라는 걸 역설하고 싶은 건 아닐까.


“대중가요사를 연구하며 노력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남들이 당장 높게 평가하지 않더라도 세상에 쓸 데 없는 노력은 없습니다. 지금껏 명멸했던 수많은 걸그룹에게 뒤늦게라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을 기록하는 건 저 같은 사람이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해요.”


K팝의 역사를 성실히 기록하는 그에게서 문화사관(史官)으로서의 책임감이 읽힌다. 그의 도전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지켜보며 기록해야겠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http://www.isamtoh.com/monthly/monthly01_view.asp?seqid=2503&year_v=2018&month_v=8&category=588&category_name=%C0%CC%B4%DE%BF%A1%20%B8%B8%B3%AD%20%BB%E7%B6%F7




한국 걸그룹의 뿌리를 찾아서…

SES가 원조 걸그룹이라고?
83년 전 저고리시스터가 먼저

원더걸스, 미국 진출 첫 걸그룹?
김시스터즈 1959년에 벌써 갔다

한국 걸그룹 64년 300팀 정리한 
‘걸그룹의 조상들’ 출간·전시회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 ‘김시스터즈’가 196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하는 모습. 안나푸르나 제공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 ‘김시스터즈’가 196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하는 모습. 안나푸르나 제공

걸그룹이 넘쳐나는 시대다.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인기 걸그룹 노래들이 어디서든 흘러나오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낯선 이름의 신인 걸그룹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되기까지 초석을 다진 이들로 젊은 세대는 흔히 1997년 데뷔한 에스이에스(S.E.S.)와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꼽는다. 이른바 ‘걸그룹의 조상’이다.


하지만 걸그룹의 진짜 조상은 따로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83년 전에 이미 활동했던 ‘저고리시스터’를 비롯해 이전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걸그룹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가 그들의 발자취를 모아 써낸 책 <걸그룹의 조상들>(안나푸르나 펴냄·3만원)이 최근 출간됐다.

<걸그룹의 조상들> 표지. 안나푸르나 제공
<걸그룹의 조상들> 표지. 안나푸르나 제공

이 책은 1935년부터 1999년까지 등장한 한국 걸그룹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글쓴이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한 앨범, 잡지, 사진, 광고 등 방대한 자료와 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300여팀의 존재와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2012년 걸그룹 자료 전시회를 처음 연 이후 꾸준히 한국 걸그룹의 뿌리를 좇아 이번에 결실을 이뤘다. 책 출간과 함께 27일까지 서울 롯데갤러리 영등포점에서 ‘걸그룹의 조상들’ 전시회도 하고 있다.


최 대표는 “한국 걸그룹 역사의 원년은 저고리시스터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이 등장한 1935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에도 여성들로만 구성된 합창단, 악극단 등이 있었지만, 저고리시스터야말로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팀이라는 것이다. 저고리시스터는 일제강점기 오케레코드에서 운영한 조선악극단 소속 여가수들로 구성됐으며, 주로 5~6인조로 공연 활동을 벌인 프로젝트 걸그룹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참여 멤버 중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 눈에 띈다.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저고리시스터’ 멤버들.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서봉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안나푸르나 제공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저고리시스터’ 멤버들.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서봉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안나푸르나 제공

하지만 이들의 공식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세월이 더 흘러 1950년대에 데뷔한 ‘김시스터즈’를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으로 보는 이유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두 딸과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로 이뤄진 3인조 걸그룹이다. 주한미군부대 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은 데 힘입어 1959년 정식 계약을 맺고 미국에도 진출했다. 2009년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보다 50년 앞선 시점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이시스터즈, 아리랑시스터즈, 펄시스터즈 등 수많은 ‘시스터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로 큰 사랑을 받은 ‘이시스터즈’ 멤버들. 왼쪽부터 김천숙, 이정자, 김명자. 안나푸르나 제공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로 큰 사랑을 받은 ‘이시스터즈’ 멤버들. 왼쪽부터 김천숙, 이정자, 김명자. 
안나푸르나 제공

걸그룹은 성을 대상화한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해방 전후 ‘기생’들이 걸그룹 활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동양 여성이라는 신비감 때문에 외국에서 더 주목받은 측면도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짐짓 외면하면서도 뒤로는 은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 최 대표는 “어쩌면 걸그룹의 역사는 편견과의 싸움이기도 하다”며 “지난 시대 걸그룹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과 함께 모순과 편견의 시대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던 삶의 부침도 담았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6207.html#csidx81ae81e7135c48b88ba4021931c3ecb 




김시스터즈가 방탄소년단을 만날 때

[한겨레21]
여성 아티스트 위상 커지며 빌보드 휩쓴 여풍
전세계 소녀 팬들은 방탄소년단 존재감 키워

5월20일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5월20일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걸그룹 전성시대다. “트와이스가 제일 좋다”는 10살배기 딸은 <치어 업> <라이키> 등 히트곡이란 히트곡은 죄다 따라 부른다. 레드벨벳은 아예 평양까지 가서 북한 관객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기며 화제를 만들어냈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초석을 다진 이들로 젊은 세대는 흔히 1997년 데뷔한 S.E.S.와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꼽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원조 걸그룹 ‘저고리시스터’


<걸그룹의 조상들>(안나푸르나 펴냄)은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가 최근 내놓은 책이다. 음반 수집광인 그는 모아온 자료와 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국내 걸그룹 300여 팀의 존재와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그가 소개하는 걸그룹의 역사는 83년 전인 19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팀이라는 ‘저고리시스터’다. 저고리시스터는 일제강점기 조선악극단 소속 여가수들로 구성됐다. 주로 5~6인조로 공연을 벌인 프로젝트 걸그룹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 리더 격이다. ▶[화보] 저고리시스터에서 AOA까지 ‘걸그룹 열전’

이들의 공식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참 뒤인 1950년대에 데뷔한 ‘김시스터즈’를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으로 보는 이유다. 김시스터즈에도 이난영의 손길이 닿아 있다. 이난영의 두 딸과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이 김시스터즈의 세 멤버이기 때문이다. 이난영이 키워낸 김시스터즈는 미8군 무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의 인기는 멀리 미국까지 전파돼 아예 정식 계약을 맺고 미국에 진출했다. 1959년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한 아시아 최초의 걸그룹이 됐다. 2009년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보다 50년이나 앞선 ‘원조 한류’였던 셈이다.


김시스터즈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다리가 퉁퉁 부어 계단을 기어올라야 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한국에서 노래만 했던 이들은 미국 현지 수많은 보컬그룹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색소폰, 베이스기타, 드럼을 중심으로 각자 10여 가지 악기를 연습하고, 끝내 연주해냈다. ‘동양의 요정’ ‘다이나마이트 걸트리오’란 별명을 얻은 이들은 당시 미국 최고 인기 TV 토크쇼 <에드 설리번 쇼>까지 진출했다.


김시스터즈의 폭발적 인기에는 “신비로운 동양의 여성들”이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그들의 대중음악을 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음악보다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독특한 매력의 여성에 더 큰 포커스가 집중된 것이다. 대중문화의 속성상 ‘무엇을 하느냐’뿐 아니라 ‘누가 하느냐’도 중요하다지만, 김시스터즈의 인기 열풍에선 유독 이런 요소가 두드러졌다. 이때 만들어진 한국 걸그룹의 특별한 이미지는 훗날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더걸스가 복고풍 의상을 입고 복고 댄스를 추며 선보인 <노바디>로 2009년 미국 진출에 성공한 건 우연이 아니다. 원더걸스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76위로 진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여성 음악인들의 위상 변화


김시스터즈가 꼭 59년 전 처음 공연했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난 5월20일(현지시각)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를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먼저 여성 음악인들의 변화된 위상이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도 문화계 주류는 남성이 차지해왔다. 영화계를 대표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음악계를 대표하는 그래미 시상식이 너무 남성 중심이라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 빌보드 뮤직 어워즈의 분위기는 달랐다. 첫 무대의 막을 연 아리아나 그란데를 시작으로 두아 리파, 노르마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데미 로바토, 제니퍼 로페즈, 매런 모리스, 재닛 잭슨, 케샤, 켈리 클락슨, 카밀라 카베요,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여성 3인조 힙합 그룹 솔트 앤 페파까지, 15번의 축하 무대에 참여한 여성 가수는 14명이나 됐다. 이날 시상식은 여성 가수들에게 바치는 헌사나 마찬가지였다. 시상식 사회자는 켈리 클락슨이었다.


‘톱 여성 아티스트’상과 ‘톱 셀링 앨범’상을 받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지금 여성 가수들로 꾸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모든 여성 아티스트들, 또 새롭게 탄생할 신인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받은 재닛 잭슨은 “어떤 역경이 있어도 마침내 여성들이 더는 억압받지 않는 순간에 살고 있다. 조종받지 않고 이용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여성들과 함께하겠다. 그리고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남성들과도 함께하고 싶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남성 중심주의가 공고했던 음악계에서 여성 음악인들이 주체적으로 나서며 연대하는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방탄소년단이었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은 쟁쟁한 팝스타들을 제치고 시상식 맨 앞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이들을 시시때때로 비췄고, 이들은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받았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끝에서 두 번째 축하 무대를 장식한 것도 방탄소년단이었다. 사회자 켈리 클락슨이 방탄소년단을 소개하자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다양한 피부색의 소녀 팬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국내 아이돌 그룹 공연장에서 볼 법한 광경이 세계적인 팝 음악 시상식에서 펼쳐진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 인기를 얻으며 주류 음악시장으로 진입한 데는 케이팝의 장점에다 세계적 트렌드를 더한 음악의 완성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효율적 활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그에 못지않게 주목하는 것은 전세계 소녀 팬들의 움직임이다.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의 힘과 문화는 전세계로 확장됐고, 이제는 주류 음악시장과 언론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방탄소년단을 사랑하는 팬들의 힘이 커질수록 방탄소년단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대중문화의 적극적 소비 주체로서 여성의 힘을 세계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 시대 김시스터즈가 나온다면?


다시 김시스터즈를 떠올려본다. 여성 아티스트의 위상과 여성 문화 소비자의 힘이 부쩍 커진 이 시대에 김시스터즈가 나온다면 어떻게 됐을까? 단지 신비로운 동양에서 와 호기심을 부르는 여인이 아니라, 열정과 능력과 매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결과를 예측하긴 힘들지만, 왠지 방탄소년단의 당당한 모습 위로 환하게 웃는 김시스터즈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


서정민 <한겨레>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46687.html#csidx6b6564b3e0e232f9ea41dd656c90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