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노래 이야기

금지곡 이야기, 금지곡 콘서트

by Wood-Stock 2012. 6. 8.

 

[변상욱의 기자수첩] 우리 승리하리라, 참으면 이긴다…금지된 노래

 

1987년 6월, 6.10 민주항쟁 25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중에 금지곡만 부르는 음악회도 있다한다. 오늘은 노래와 정치적 저항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은 저항가요(Protest song)의 전통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무의미하게 죽어간 한 사람을 위해 천만 어머니들의 가슴이 무너진다... 한 어머니가 눈물 흘리며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다. ‘나는 내 아들을 병사로 키우지 않았어요 나는 자랑과 기쁨으로 그 아이를 길렀어요. 누가 감히 그 아이의 어깨에 총을 메고 다른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을 쏘게 만들었나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 반전운동에서 불린 “나는 내 아들을 병사로 키우지 않았다”라는 저항가요이다. 앨프레드 브라이언이 지은 노래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지 싫어했던 노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추진해 조선을 일본에 넘긴 미국 제국주의의 개척자) 

저항가요로 우리가 김민기 씨를 떠올린다면 미국인들은 포크음악의 창시자 피트 시거를 기억한다. 피트 시거는 저항가요를 확실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만들었다. 194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최근의 이라크 전쟁 반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음악인이다.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 ‘들에 핀 꽃들은 어디로 갔나’ 등이 그의 작품이다.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등 유명한 가수들이 피트 시거의 추종자들이었다.

◇ 아침이슬은 금지곡? 대통령 애창곡?

피트 시거의 노래들은 1970년대 초 한국으로 상륙한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1972년 김민기 씨가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번안해 불렀고 이후 대학가로 번져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가요가 됐다. 이때 저항의 의지를 노래에 담은 가수들이 김민기 씨를 비롯해 한대수, 서유석, 양희은 씨 등이다. 

독재정권의 감시와 통제가 아주 엄격했기 때문에 김민기 씨가 작곡한 저항가요들은 대중적으로 불리지 못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으로 시작하는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금관의 예수)”,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마을‘ - “공장의 불빛”,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 “이 세상 어딘가에”

그래서 일반 대중가요를 저항의 뜻을 담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이슬’이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많은 노래들이 정치적 의도로 또는 오해로 금지곡이 되어 버린다. 아침이슬은 겉으로는 ‘붉은 태양’이 문제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시대상황에 실망할 때마다 너무 애창해 금지곡.
이장희의 ‘그건 너’는 군사정권에게 손가락질하며 대드는 이미지라고 금지곡.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정권의 신뢰를 훼손한다고 금지. (전설에 의하면 방송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 막 나갔는데 그 다음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이 노래를 내보내는 바람에 금지라고...)
송창식의 ‘왜 불러’는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장발단속, 불심검문하는 경찰 공권력에 저항하는거냐며, 금지.
한대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케 해서 금지.
‘행복의 나라로’는 독재정권 아래서 살기 싫다는 거냐며 금지.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은 정권 찬양 홍보 노래 좀 만들라는데 신중현 씨가 거절해 미운털이 박혀 금지.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은 한일관계를 풀어가려는데 일본 감정 자극한다고 금지.
반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창법이 왜색이 짙어 금지.

상당히 엉뚱한 금지곡도 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박정희 대통령의 작은 키 때문에 금지.
‘고래사냥’은 허무주의 조장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대학생들이 데모하러 나가자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통에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겉으로는 ‘너무 허무주의야’라고 핑계를 댔지만 민주화를 그리는 이미지라고 금지됐다. 

◇ 1980년대, 참으면 이긴다

1980년대에는 대학가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운동권이라는 영역이 자리 잡으면서 지어 부르고 구전되는 노래가 많아졌다. 특히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저항을 담은 노래도 많아지고 책으로 묶어내는 작업들도 이뤄져 시중에 유통되었다.

정권이 금지하든 말든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많아지니 굳이 대중가요를 저항의 뜻으로 빌려쓰지 않았고 저항가요와 대중가요가 확실히 분리되어 금지곡이 많지 않다.

심수봉 씨의 금지곡 리스트가 눈에 띈다. ‘그 때 그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때문에 금지.
‘순자의 가을’ - 이건 전두환 대통령만 부를 수 있는 노래라 금지. 그래서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바뀌었다.
‘무궁화’는 ‘참으면 이긴다 ~’는 가사가 문제가 돼 금지. 뭘 참고 누구를 이겨?

◇ 6·10 항쟁 25주년.

6·10을 항쟁으로 부르기도 하고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 국민 모두가 공감하도록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국가와 국민이 발전하는 토대 중에 ‘공유’라는 것이 있다. 과거의 아픔과 기쁨 역사적 사건을 공유해야 하고 미래의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많이 아쉽고 아프다. 일제의 침략과 강점, 해방과 친일, 6.25와 분단, 군사독재, 지역감정과 이념대립... 그걸 정치적 정략적 이해가 아니라 모두의 아픔과 안타까움으로 공유하고 미래의 희망도 공유해야 하는데 아직도 치열하기만 한 분열과 대립으로 우리 사회는 어지럽기만 하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그냥 한 번 불러봤어~!

 

-------------------------------------------------------------------------------------------------------------------------------------------------------

start610_20120607.gif

 

 

70년대 금지곡을 인디밴드 버전으로

 

6월항쟁 25주년 기념 콘서트 “40년전 청춘노래로 세대공감”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송과 유통이 금지됐던 1970년대의 옛 노래들이 인디밴드의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고 ‘6월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인디밴드가 부르는 70년대 금지곡 콘서트’가 오는 8일과 10일 각각 서울 홍익대 앞 놀이터·클럽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열린다. 공연의 부제는 ‘프리덤(Freedom) 610- 금지를 금함’이다.

이번 공연은 6월항쟁 25주년을 기념하고 유신 40주년을 기억하는 자리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불온 가요’를 선정해 방송은 물론 음반판매까지 금지했다. 건전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정권에 비판적인 노래를 막으려는 의도가 컸다. 금지곡들은 대부분 1987년 6월항쟁 이후 ‘해금’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번 공연에서 불려질 10여개 ‘금지곡’의 금지 사유는 다양하다. 1983년 공연윤리위원회가 정리한 금지곡 목록집 등을 보면, “불신을 조장하고 창법이 저속하다”(김추자의 ‘거짓말이야’), “가사가 저속하다”(신중현의 ‘미인’), “사상이 불순하다”(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가사가 퇴폐적이다”(이장희의 ‘그건 너’), “허무주의를 조장한다”(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의 이유로 금지곡을 선정했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모두 17개 인디밴드가 70년대 금지곡을 새롭게 편곡해 선보일 예정이다.

콘서트를 기획한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역사관건립위원회 사무국장은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즐기는 노래를 당시에는 왜 못 부르게 했는지, 억압적인 유신시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콘서트에 참가하는 가수 손병휘씨는 “대안문화 운동을 하는 홍익대 앞 인디밴드들이 30~40년 전의 청춘들이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며 세대공감을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연령제한 없이 누구나 무료로 공연을 볼 수 있다. 문의는 (02)3709-7691, 누리집 start610.or.kr

이경미 기자

-------------------------------------------------------------------------------------------------------------------------------------------------------

 

 

10월유신 40주년 ‘금지곡 콘서트’

 

 

돌이켜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노래를 가지고 별별 일을 다 한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베사메무쵸’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상록수’가 떠오르지만 그건 그저 그들의 애창곡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면 수많은 노래들이 머릿속에서 엉킬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그는 노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이해하는 대통령이었다.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에 주문제작한 ‘잘 살아 보세’를 발표해 국민적 애창곡으로 만들었다. 쿠데타 수뇌부가 작사자로 방송극작가 한운사를 낙점까지 했다니 놀라운 혜안이다. 이후 박정희 시대 내내 공공단체와 방송국 등이 추동하여 많은 건전가요들이 쏟아져 나왔고, 길옥윤 작 ‘서울의 찬가’, 신중현 작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적지 않은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전 국민에게 부르도록 했다.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가 그것이다. 유신시대 내내, 텔레비전에서는 애국가에 뒤이어 두 노래가 나온 후에야 방송이 시작되었다. 국립합창단의 ‘나의 조국’ 뮤직비디오는 애국가 못지않게 웅장하여,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란 대목에선 여지없이 백두산과 한라산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내 또래들은 지금도 3절까지 입에서 줄줄 나올 만큼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0월유신 없었으면 이 나라 망했겠네’ 식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며 킬킬댔다.

‘새마을 노래’를 제쳐놓고 하필 이 노래가 야유의 대상이 된 것은, 이 노래가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올드패션’의 선율로 되어 있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이 노래는 일본식 ‘라시도미파’의 5음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트로트와 동일한 음악언어를 쓰고 있다.(목소리를 꺾으며 느린 템포로 불러보면 영락없는 트로트이다.) 1917년생으로 트로트와 일본 군가의 전성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을 그가 이런 일본색의 노래를 구사했다는 것은, 할리우드 키드들이 할리우드 감각의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애창곡도 트로트의 원조 격인 ‘황성 옛터’라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내내 ‘동백 아가씨’ 등의 트로트 곡이 ‘왜색가요’로 낙인 찍혀 금지곡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걸 보면 박정희 정권기의 금지곡이란, 트로트의 일본색이 문제라서, 혹은 가사가 정말 퇴폐·불온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금지곡을 몇 개쯤 만들어놓는 것의 사회적 파급력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윤리위원회가 발표한 대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가 ‘불신 조장’을 한다고 금지했다면 너무 우습지 않은가. ‘고래사냥’의 금지 사유인 ‘시의에 적절치 않음’은 또 뭐란 말인가. ‘라라라’(‘조개껍질 묶어’)는 길옥윤 작 ‘사랑이란 두 글자’의 표절이라는데, 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고, 대마초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려 인기가수들을 5년 동안 완벽하게 퇴출시킨 조치는, 확실히 사회 전체를 군기 잡는 효과로는 만점이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한두 놈만 대표로 세게 ‘빠따’를 치면, 모두 고분고분해지는 효과라고나 할까. 그 ‘한두 놈’을 대중적 파급력이 높은 대중가요로 선택했다는 것 역시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 정말 노래가 뭔지 아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수많은 금지곡들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제5공화국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야 풀렸다. 그 금지곡들을 모아, 10월유신 40주년과 6월항쟁 25주년을 기념한 ‘금지곡 콘서트’를 홍대앞과 정동에서 연단다. 참, 올해는 이래저래 기념할 것이 많다.

<이영미 | 대중문화평론가>

-------------------------------------------------------------------------------------------------------------------------------------------------------

 

박근혜에게 <아침이슬> 들려주면 뭐라 그럴까

긴급조치 9호로 탄압받던 '청년문화'... 지금도 현실은 편치 않다

 

 

지난 6월 8일과 10일, 홍대 부근 일대의 클럽과 야외에서 금지곡 콘서트가 열렸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체제 하에서 금지곡이 됐던 노래들을 요즘 세대의 젊은 음악인들이 새롭게 해석해 부르는 콘서트다. 이 콘서트는 의미심장하게도 6월 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생각해 보면 대중의 의식과 감성까지 통제하려 했던 군사 독재 시대의 유물인 금지곡만큼 민주주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게 하는 게 또 있겠는가.

 

70년대 금지곡 하면 우선 떠오르는 건 물론 당대 대학생들의 감성과 정신을 보여줬던 일군의 통기타 음악이다.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청년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대변하는 뛰어난 작가적 뮤지션들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뮤지션을 꼽는다면 모던포크의 기수였던 김민기와 한대수, 청년문화의 울타리를 넘어 스타로까지 도약했던 송창식과 이장희, 그리고 한국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 청년 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많은 노래가 금지곡의 사슬에 묶임으로써 70년대 청년문화의 정치성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긴급조치 9호... 청년문화 시대 막 내리게 해

 

▲ 긴급조치 9호 발동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사회 전체를 일사불란한 병영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대학생 집단은 가장 큰 반대세력이었고, 이들의 문화는 체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방종으로 인식됐다. 군사정권은 이미 70년대 초부터 대중음악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며 금지곡을 양산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1975년에는 문공부가 나서서 아예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며 222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어 '방송윤리위원회(방륜)'이 <고래사냥> <아침이슬> 등에 대해 추가 금지 조치를 행하게 된다. 그 해 말에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과 함께 청년문화의 주역 대부분이 활동을 정지당하고 방송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7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통기타 음악과 청년문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김민기의 경우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은 공식적으로 <아침이슬>뿐이었지만 사실상 그의 이름을 건 모든 작품이 음으로 양으로 금지돼야 했고, 한대수의 경우도 <물 좀 주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이미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도 금지됐고, 신중현의 <미인> <거짓말이야> 등 많은 노래도 금지됐다. <거짓말이야>의 금지 사유가 '불신 풍조 조장'에 있었다는 건 그 시대를 함축하는 코미디였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미인> <고래사냥> 등 이미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노래를 금지시킨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당시 심의위원은 "가사나 곡 자체는 문제점이 없으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좋지 못한 점을 감안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불건전하게 바꿔 부른다는 게 이유였다. 음악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노래가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사후 결과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한국 가요만 탄압 받은 게 아니었다

 

금지의 사슬은 국내 가요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구미의 많은 팝음악들이 이른바 가요정화를 위한 금지의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금지의 사유는 크게 ▲ 혁명 고취 및 불온물 ▲ 퇴폐 저속 외설작품 ▲ 마리화나 음악 등이었다.

 

존 바에즈의 'We Shall Overcome'과 밥 딜런의 'Blowing in the Wind'는 '반전'으로, 비틀즈의 'Revolution'과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은 '불온'으로, 맬라니 사프카의 'Lay Down'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Plastic Fantastic Lover'는 '불건전'으로, 시카고의 '25 or 6 to 4'와 템테이션스의 'Psychedelic Shack'는 환각으로, 조니 미첼의 'Woodstock'은 '퇴폐'로 각각 금지당해야 했다.

 

일부 곡이 금지되면 앨범 발매가 정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유명한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와 'A Day in the Life'가 빠져야 했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Greatest Hits'에는 'Cecillia'가 없으며, 퀸의 'A Night at the Opera'에는 'Bohemian Rhapsody'가 없고 딥 퍼플의 'In Rock'에는 'Child in Time'이 빠져야 했다.

 

대부분 해당 앨범의 핵심적인 곡들이었으니 한국의 팝음악 팬들은 이 시기 팝음악의 정수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셈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이른바 '빽판'이라 불리는 불법복제판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금지곡에는 월북 작가의 작품이나 트로트 가요들도 적지 않았고 록 계열 음악도 있었다. 대마초 파동 역시 록 음악인들과 통기타 쪽에 두루 걸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요 재심사나 대마초 파동이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도전을 엄단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해 이른바 국민총화를 달성한다는 군사정권의 정치적 전략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이다. 

 

청년문화가 '척결 대상'이었다니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당시 군사정권의 경직된 시각에서는 청년세대의 최소한의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대학가를 장악했던 청년문화는 이른바 국민총화를 해치는 '불온'과 '퇴폐'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김민기와 이장희의 '차이', 심지어 신중현과의 '차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모두가 '국민총화를 해치는 척결 대상'이었을 뿐이다.

 

6월 8일과 10일의 금지곡 콘서트를 찾은 젊은 세대는 그들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금지곡의 시대를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노래들이 금지된 사유를 들으면서 아마 배꼽을 잡고 웃거나 어이없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수십 년 전에 있던 어처구니없는 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도 될 만큼 지금 우리의 현실이 편안하지 않다. 금지곡의 칼날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딸이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심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아버지 시대에 남발됐던 금지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5·16을 구국의 혁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금지곡도 유신체제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국민총화를 위해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창남씨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