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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겨레가 만난 사람] 70년대 ‘3대 저항가수’ 양병집

by Wood-Stock 2013. 2. 4.

[한겨레가 만난 사람] 70년대 ‘3대 저항가수’ 양병집

“돈맛에 빠진 사회서 배고파도 밤무대는 안선다”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엘피(LP)카페 피터폴앤메리. 1960~7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혼성 포크음악 트리오의 이름을 딴 이 카페에서 피터폴앤메리의 명곡 ‘위프 포 제이미’(Weep for Jamie)가 흘러나왔다. 앞에 있던 양병집(62)씨는 기자에게 “내가 신청한 곡인데 이거 죽이는 곡이야”라며 노래를 낮게 따라 불렀다. 이 노래는, 도수 높은 안경에 담배꽁초를 물고 시니컬하게 쳐다보는 눈초리의 재킷으로 유명한 그의 데뷔앨범 <넋두리>에 ‘잃어버린 전설’로 번안해서 수록돼 있다. 70년대 명반으로 불리는 음반이건만, 카페 주인은 이 앨범의 주인공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70년대 3대 저항가수로 불리는 양병집씨는 그렇게 대중은 물론 제법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잊혀 있었다. 1974년 3월 나온 그의 데뷔앨범 <넋두리>는 시대상황을 풍자하는 노랫말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불온음반’으로 분류돼 발매 3개월 만에 전량 회수 조처되면서 일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고가인 30만~1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그의 존재는 자신의 노래 제목처럼 ‘잃어버린 전설’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타복네’ ‘소낙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원제 ‘역’) 등 제법 알려진 그의 노래들도 각각 서유석, 이연실, 김광석의 노래로 대중들에게는 각인돼 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말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한울 펴냄)라는 자전 에세이집을 냈다.

책을 보면 밥 딜런,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등 미국 포크가수들의 명곡을 우리 현실에 맞게 풍자적으로 개사해서 만든 데뷔앨범은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증권회사 직원, 음반 제작자, 라이브카페 경영자로 변신했으나 잇따른 좌절과 실패를 한 뒤 1986년 가족회의 끝에 선택의 여지 없이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자동차 딜러, 청소부, 음식점·소주방 운영 등 각종 직업을 전전했으나 여전히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실패한 뒤 거리의 음악인으로 나서고 자살까지 시도하고 결국 부인과 합의 아래 1999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그의 인생에는 반전이 없었다. 지금까지 일곱장의 음반을 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들국화, 해바라기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굴했으나 끝내 제작에는 좌절하고, 귀국해서는 손지연이라는 재능있는 여성 포크가수의 음반 제작을 했으나 실패해 돈만 다 까먹고 7평짜리 단칸방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23일 두차례 8시간에 걸친 인터뷰와 한차례의 이메일 문답을 통해서 드러난 그의 삶은 책의 내용보다 훨씬 드라마틱했다. 음반 제작 실패 뒤 2004~2005년 서울 이태원과 광화문, 강남 등지의 거리에서 ‘생계형 콘서트’를 벌여 하루 6만~7만원을 벌기도 했다는 그는 현재 서울 상도동에서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5만원인 다세대주택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각각 의사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두 딸이 두달에 한번꼴로 보내주는 1000달러(호주달러)와 간간이 들어오는 방송 및 행사 출연료를 바탕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통 모던포크음악은 지성의 음악이고 깨침의 음악”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밤업소에 출연하지 않는 음악적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돈의 맛에 빠진 한국 사회”에 울분을 토하며 여전히 시대와 불화를 겪고 있는 그는 자신은 평범한 기인 중의 하나라며 ‘70년대 3대 저항가수’라는 표현에도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인터뷰/ 김도형 기획위원 aip209@hani.co.kr

 

 

-살아온 과정이 파란만장합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불우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이 ‘화살이 최소한 3개는 있어야 셋 중 하나라도 과녁을 맞힐 수 있는데 너는 왜 맨날 화살 하나만 있으면 일을 벌이다 실패하면 접느냐’고 했어요. 한대수씨의 말을 빌리면 시대의 톱니바퀴와 내가 맞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추구했던 것하고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요. 또 하나는 스스로 자책을 하자면 집요한 끈기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생계를 위해 거리공연에도 나선 적이 있다면서요?

“우리 딸들이 변호사, 의사가 되기 전에 아주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2004년 손지연 판을 만들고 잘 안 팔렸을 때 4~6월 이태원에서 거리공연을 했어요. 하루 6, 7만원 벌이가 됐어요. 많은 때는 10만원도 벌었고요. 2009년, 2010년, 2011년도엔 광화문, 인사동, 강남 등지에서도 했어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지금은 하지 않아요. 자랑스런 이력이 못 되잖아요.”

그렇게 거리공연을 통해 어렵게 번 돈 일부를 노숙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6만원 정도 벌면 2만원 이하로 나눠주었다. “음악을 하면 사회가 따뜻해져요. 나는 그들보다 가진 자이고 음악을 할 수 있죠. 제가 돈을 주면 처음에 안 받으려 하다가 나중엔 저에게 우유를 주고 반응이 와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였지만…. 정치인도 지식인도 음악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사회가 따뜻해지니까요.”

 

“서울 상도동 다세대주택에서 보증금 300만원에 월 25만원짜리 방을 빌려 살고 있어요.” 70년대 대표적인 포크가수 중 한명인 양병집씨는 사는 게 팍팍해도 자신의 분신 같은 기타만은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불온음반으로 판금된 데뷔앨범 모던포크의 명반으로 평가받아
빈곤층·월남파병 등 메시지에다 음악 정통성 지키려는 고집담아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낼 생각은 없나요?

“음반사업자 등록을 내기 위해서 호주 시민권은 반납했어요. 내가 원하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만 호주의 식객이 되기 싫고, 호주에 기여한 바가 없는 사람이 노인복지 혜택 받기 싫어요. 나는 한국의 편리한 시스템을 더 좋아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하루에 한번은 외식하는데 노량진에 가면 컵밥집에서 월남국수를 2500원에 팔아요. 컵밥은 안 먹어요. 서서 밥 먹는 게 슬퍼요. 월남국수 먹으면 얼마나 절약하느냐는 생각 들어요. 외식할 때 진짜진짜 그리워하다 먹는 게 8000원짜리 갈비탕이에요.”

그는 “소득수준이 차차상위 또는 차차차상위 계층”이라면서도 “차는 없지만 스쿠터 타고 다니고 누굴 만나서 가수로서 체면을 손상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가난하지만 자족적인 생활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단 한가지 안쪽 치아 3개가 빠졌는데 임플란트 할 수 있는 돈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목돈이 1000만~2000만원 필요한데 그런 돈이 없어요. 임플란트 하고 가수로서 벌 수 있는 돈이 많다면 어떻게든 그렇게 하겠지만 내가 1년에 버는 돈이 1000만원 이하라서 아직 못하고 있어요. 얼마 전 <한국방송> ‘7080’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섭외가 들어오는 게 두려워요. 혹시 (저의 이빨 빠진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까 해서요. 기피까지는 아니지만 텔레비전 매체는 자신이 없는 거죠.”

-책에서는 3대 저항가수라는 평가에 대해 약간 저항감을 표시했습니다. 반항가수라고 자조적 표현도 했는데요.

“금지곡 가수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우리 저항가수 특징이란 게 무엇입니까? 밤무대 출연하지 않고 방송 출연을 위해 방송사에 아부하지 않은 거예요. 김민기나 한대수가 밤무대 출연했습니까? 밤무대 제안은 있었지만 적어도 포크가수로서 품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응하지 않았어요. 많은 가수들이 ‘나도 저항가수는 아니지만 나도 금지곡 가수였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는 1970년대 서울공대생들의 데모에 끼어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학벌 때문에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서라벌예대(현재 중앙대) 중퇴라고 하니까 ‘똥통대학 다니는 놈이 웬 데모야. 민기야 서울대라도 나왔지. 뭘 안다고 까불어’ 해서 꼬리를 내린 거죠. 저항가수 아니라고 하는 부분도 내가 우겨봐야 언어가 그 사람의 품격과 맞아떨어져야 힘도 있고 영향을 주고 하는데 제 백그라운드가 엉망진창이니까…. 오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꼬리를 내렸죠.”

 

-데뷔앨범은 ‘저주받은 명반’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저와 잘 매치됐으면 대중들도 더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경험이나 실력이 모자라 반주를 맡은 밴드 ‘동방의 빛’의 반주, 템포, 키(음역)에 맞춰 녹음하다 보니 어떤 것은 잘 나왔고 어떤 것은 못 나왔어요. 음악적으로 크게 만족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음악 관계자들이 수많은 음반 중 모던포크의 명반으로 평가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록 명작은 못 남기고 순수창작은 못했지만, 나름대로 내가 한 것은 포크의 정통성, 그것만은 고집하고 싶었던 거죠. 포크음악은 상당히 건방진 음악이에요. 메시지를 담고 지성을 던진다는 말이죠. 일반인들의 음악에 대한 의식은 즐겁고 슬프고 그러해야 하는데 내가 환영을 못 받은 이유는 가수가 사회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던진단 말이에요.”

 

 

잇단 실패로 이민 뒤 99년 귀국, 신인가수 음반제작도 해봤지만 돈만 다 까먹고 월세 단칸방 삶
한때 거리 나서 ‘생계형 콘서트’

 

-유신정권에 의해 피해를 당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죠. 군사정권을 포함해 거의 20년간을 철권통치한 독재자가 나중에 한국 경제를 살린 영웅으로 재평가되고 그런 대통령의 딸이 아버지의 업적을 후광 삼아 정치에 입문해서 집요한 도전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니까요. 당시 이 땅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를 갈구하며 투쟁하다가 이름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억울함이나 투쟁의 의미, 그리고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지루하게 길었던 어두움의 세월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아버지의 공과를 심각하게 저울질해본다면 그렇게 쉽게 용서 내지는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국민의 반 이상이 그녀를 지지하고 당선시켰으니까요. 내가 핍박을 받아서 언짢고 그런 것은 전혀 없어요. 축하까지는 모르겠지만….”

-데뷔앨범은 대부분 번안곡인데요.

“솔직히 만약에 제 옆에 훌륭한 작곡자가 있었으면 번안곡 안 했을 거예요. 그전에 이연실이 앨범 내면서 곡을 달라고 해서 <소낙비> 등 번안곡에 손댔지요. 당시 포크라고 해도 돈이 되는 컨트리송이나 사랑노래를 많이 불렀지 노래에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내가 내쉬빌(라이브하우스)에서 포크를 배울 때는 적어도 포크음악인은 지식의 선두주자로서 일반대중의 의식을 깨우쳐주기 위해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저소득층 착취, 고용자-피고용자 문제, 월남 파병 문제 등 메시지를 곡에 담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배웠다는 사람들이 배움의 목적을 사회적 성공이나 부귀영달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밥 딜런 등 아메리칸 모던포크 가수는 혁명가는 아니지만 메시지를 던져주거든요. ‘깨어라’는 메시지요.”

대중음악 평론가인 박성서씨는 2004년 나온 <넋두리> 복각판 속지에 쓴 글에서 그의 번안곡에 대해 “그가 새롭게 편곡하고 노랫말을 입힌 이 노래들은 원곡과는 사뭇 다르다. 아메리칸 포크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외려 한국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대부분의 원곡들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악보만을 기준으로 악상을 터득해 그만의 감성으로 해석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연약한 몸을 가누면서/ 참다 참다 쓰러져 간 아름다운 꽃송이야”로 시작되는 ‘잃어버린 전설’에 대해서는 월남전 파병과 산업화의 그늘을 떠올리게 한다고 박씨는 평했다. 그는 “70년대 넋들이 누굴 위해 피어난 꽃송이였는지를 묻는 듯하지만 사실은 무엇 때문에 스러져 갔는지를 아프게 되묻고 있다”고 해석했다.

 

두달전 ‘두바퀴로…’ 자전에세이
40년 지난 지금 사회적 상황도 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
힘들어도 지성·깨침의 음악 할것

-70년대 엄혹한 상황 속에서 노래에 시대의 메시지를 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를 이야기할 때 나쁜 게 어떤 거냐 하면, 경제성장의 부작용이나 산업부흥의 어쩔 수 없는 역효과이겠지만, 룸살롱 최초로 만든 게 그 사람들이에요. 그전 정권에서는 요정이라는 게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요정이라는 말이 없어졌어요. 박정희 정권 들어서면서 경제가 커지고 차관 나눠먹고 접대문화가 생기면서 룸살롱이 생겼습니다. 당시 내 친구 중에 홍제동 산동네에서 물도 길어 먹는데, 한쪽에서는 어여쁜 여자가 미니스커트 입고 룸살롱 나가고 그랬거든요. 당시 이런 사회적 상황이 안타까워 ‘서울하늘 2’에 담았지요. 그런데 사십년이 된 지금도 사회적 상황은 변함없다는 거죠.”

 

지난해 11월 출간된 포크가수 양병집씨의 자전에세이

 

“…오늘은 무엇을 할까 무얼 마실까/ 어여쁜 아가씨들 짧은 치마 입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과일장수 아줌마의 돈 세는 소리만 서울의 밤하늘 위로 퍼져나간다”라고 읊조리는 ‘서울하늘 2’는 피트 시거 노래를 번안한 곡으로 당시 시대 상황을 풍자한 곡이다.

-귀국 뒤 음반 제작도 실패했습니다.

“가수의 꿈이 좌절되면서 방송에서 트는 곡이 맘에 안 들어서 비틀스를 만든 조지 마틴 같은 프로듀서의 꿈을 꾸었어요. 제 인생에서 음악을 못 버리는 것은 생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귀국해서도 음악 프로듀서 일을 했죠. 손지연 같은 신인을 발굴해서 기뻤어요. 기존 인디에도 사이비가 많은데 그를 만나면서 존재의 의의를 느낀 거죠.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돈 5만달러가 줄어들다 어머니 유산으로 조금 생긴 돈으로 그냥 손지연 음반 제작을 했어요. 처음엔 1000만원 예상했던 금액이 시디가 나올 때 3500만원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1500장 나가고 주춤해서 방송사 출연 섭외했는데 좌절만 맛봤습니다. 지금은 대형 기획사들이 프로그램을 블록별로 장악하고, 재능있는 신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더라고요.”

23일 피터폴앤메리에서 진행된 2차 인터뷰 말미에 록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히트곡 ‘설튼스 오브 스윙’이 흘러나왔다. 양씨는 이 그룹명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극도의 궁핍입니다. 밥 딜런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입니다. 김 기자도 한겨레의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되어주세요.”

 

20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