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노래 이야기

마왕 신해철(1968~2014)

by Wood-Stock 2014. 10. 28.







안녕, 마왕 ① 신해철의 음악 타임라인 1990 ~ 1997년 – 전설의 시작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음악이 그런 것이더라. 이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죽는 순간에 ‘난 음악에게 바칠 만큼 바쳤어’라고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구나. 아직은.” (텐아시아와의 인터뷰 중)


2014061215072614562-400x520_99_20140612172303 2014070902215044714-400x600_99_20140709185003



거장이 숨졌다. 신해철은 10월 27일 밤 8시 19분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다. 22일 신해철이 스카이병원에서 심정지로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았다는 보도가 났을 때만 해도 이런 결말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신해철은 눈을 감았다.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큰 별이 진 것이다.


# 1990 ~ 1991년
신해철은 1988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로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파고다 헤비메탈 신(scene) 현장에 있던 신해철은 메탈 밴드들이 아마추어 정도로 치부했던 대학가요제에 나갔고, 대상 받는 모습을 부활 김태원이 당구장에서 TV로 봤다고 한다. 어쩌면 쪽팔린 출발이었지만, 이 상과 ‘그대에게’라는 노래는 신해철이 가요계에 데뷔하는데 반석이 돼준다. 신해철은 록밴드로 활동하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무한궤도는 오래 가지 않는다. 이후 신해철은 1990년 1집에서 댄디한 이미지로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히트시킨다. 이듬해 발표한 ‘마이셀프(Myself)’에서는 작사 작곡 편곡 연주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해결하는 아티스트의 모습을 선보인다. ‘마이셀프’라는 앨범 제목처럼 자신의 정체성으로 꽉꽉 채운 음반이었다. 이런 기조는 그의 마지막 앨범까지 이어진다.

서태지와 신해철, 정석원, 윤상은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미디와 같은 컴퓨터음악을 새로운 기재로 이용했다. 이들은 밴드 편성에 주안점을 두고 곡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컴퓨터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신해철이 일찍이 1991년 ‘재즈 카페’에서 시도한 미디 음악은 넥스트의 ‘도시인’으로 이어졌다. 당시로써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고, 이처럼 신해철은 기존의 히트공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트렌드의 곡들을 대중에게 알려나갔다.

# 1992 ~ 1994년
1992년은 넥스트 1집이 나온 해다. 이들 외에도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윤상, 015B 등이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해다. 신해철은 기타리스트 정기송, 드러머 이동규와 함께 넥스트를 결성하고 1집 ‘홈(Home)’을 발표한다. 신해철이 일찍이 1991년 ‘재즈 카페’에서 시도한 미디 음악은 넥스트의 ‘도시인’으로 이어졌다. 이 앨범부터 신해철은 ‘인형의 기사 파트 1’과 같은 웅장한 음악, ‘영원히’와 같은 아시아(Asia) 풍의 록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4년 앨범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1 비잉(The Return Of N.EX.T PART 1 Being)’을 통해 넥스트는 헤비메탈부터 아트록에 이르기까지 기존 밴드들에 비해 일취월장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이 앨범에서 가장 히트한 곡은 ‘날아라 병아리’였고,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는 평단에서 신해철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게 된다.

# 1995 ~ 1997년
1995년에 신해철은 넥스트를 이끌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넥스트 멤버는 신해철, 김세황(기타), 김영석(베이스), 이수용(드럼)로 넥스트는 음악적, 상업적으로 최전성기를 찍고 있었다. 사실 록밴드의 인기가 보잘 것 없던 90년대 중반에 넥스트의 존재는 특별했다. 록밴드가 지금의 아이돌그룹과 같이 충성도 높은 팬덤을 지니고 있었다. 1995년에 발표한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2 월드(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에서 넥스트는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진보된 결과물을 선보였다.

넥스트가 선보인 웅장한 록은 절대로 대중친화적인 것들은 아니었지만 넥스트는 당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꽉 채울 정도로 관객동원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신해철의 힘이었다. 창작력이 궤도에 올랐던 신해철은 1996년에 영화 ‘정글스토리’ OST, 윤상과 함께 전자음악 프로젝트 앨범 ‘노댄스’도 발표했다. ‘정글스토리’에 담긴 ‘절망에 관하여’는 절망을 노래했지만, 역으로 당시 사춘기 소년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궈줬다. 솔로부터 넥스트까지 가장 많이 다룬 주제가 바로 ‘자아’다. ‘이대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팬들과 계속 이야기해왔다.

선수들끼리 만난 ‘노댄스’는 트렌드를 상당히 앞서간 결과물이었으며 신해철을 단지 록 뮤지션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줬다. 1997년에는 파격적으로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Here I Stand For You)’와 ‘아리랑’ 두 곡이 담긴 싱글을 음반으로 발매했다. 이 곡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는 ‘날아라 병아리’와 함께 넥스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록발라드 곡으로 남게 된다.


안녕, 마왕 ② 신해철의 음악 타임라인 1998 ~ 2014년 – 불멸에 관하여

2014061714281510748-400x593_99_20140617143203 2014070902172320261-400x600_99_20140709185003

# 1998년
1998년에 신해철은 솔로앨범 ‘크롬스 테크노 워크(Crom’s Techno Works)’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테크노를 비롯한 전자음악을 실험하게 된다.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과 함께 했던 넥스트는 1997년 12월 31일에 해체를 공식 발표했고 신해철은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신해철은 넥스트의 사운드가 집대성된 것으로 평가받는 앨범 ‘라젠카(어 스페이스 록 오페라)(Lazenca(A Space Rock Opera), 1997)’, 그리고 수작으로 평가받은 ‘모노크롬(Monocrom, 1999)’를 연달아 발표할 만큼 음악적으로 정점에 올라 있던 시기다. ‘크롬스 테크노 워크’는 영국에서 음악유학 중이던 신해철이 발표한 일종의 중간보고서와 같은 앨범이었다. (자신의 과거의 곡들인 ‘1999’ ‘재즈카페’ ‘50년 후의 내 모습’ 등을 전자음악으로 편곡했다) 이 앨범에 담긴 ‘일상으로의 초대’는 낯선 스타일의 곡이었음에도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 2000 ~ 2005년
21세기, 즉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던 2000년에 신해철은 새로운 멤버들과 비트겐슈타인의 앨범으로 돌아왔다. 비트겐슈타인의 음악은 그리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넥스트 시절에 비해 큰 파급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신해철은 슬슬 전성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2000년 후에도 그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송능한 감독의 작품 ‘세기말’의 영화음악을 맡았으며 (신해철은 영국 유학시절 한국말을 까먹지 않기 위해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를 수십 번 봤다고 한다) 2005년에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의욕적으로 넥스트를 재결성해 5집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III : 대한민국(The Return Of N.EX.T Part III : 대한민국)’를 발표했다. 아이돌 광풍이 불고, 음반 산업도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신해철도 힘이 부쳤다.

# 2007년
2007년에 신해철은 대뜸 재즈 빅밴드 앨범 ‘더 송즈 포 더 원(The Song For The one)’을 발표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앨범에서 신해철은 연미복을 입고 토니 베넷과 같은 50~60년대 미국의 크루너 보컬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바치는 앨범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가족을 위해 이 정도 음악적 외도는 수긍할 만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으로 빅밴드와 함께 한 이 아날로그 작업은, 신해철의 일종의 음악적 휴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그리고, 2014년
오랜 공백을 뒤로하고 컴백했다. 6년여 만에 활동을 재개해 솔로 정규 6집 ‘Part.1 ‘리부트 마이셀프(RebootMyself)’를 발표했다. 원맨 아카펠라 곡 ‘아따(A.D.D.a)’를 만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기사를 참조하도록)을 들어보니 그 완벽주의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소수의 작곡가가 다수의 히트곡을 찍어내듯 만드는 요즘 세태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곡이었다. 역시 마왕의 감각은 날카로웠고, 집요했다.

팬들의 투표를 통해 타이틀곡으로 선정된 ‘단 하나의 약속’에서 신해철은 “제발 아프지 말아요”라고 노래했다. 이 곡에 대해 신해철은 “우리 인생에서 없어진 정말 중요한 것은 뭘까 생각해봤다. 나 어린 시절 열심히 공부하면 할머니가 ‘네 모한다꼬 아프지만 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거 같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지금도 괜찮다고, 좋다고 해주는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돌아와 “아프지 마라”고 노래한 신해철. 그가 이렇게 떠날 줄은 정녕 몰랐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영원히,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안녕, 마왕 ③ 신해철이 그린 한국 대중음악의 지도

“내가 나중에 선배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리마스터 작업이 아닐까 한다.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된 리마스터 앨범이 나온 게 없다. 가끔 보면 밸런스가 무너진 결과물들이 나오기도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리마스터 작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 (텐아시아와의 인터뷰 중)

신해철의 음악적 인맥은 대단하다. 무한궤도 시절부터 솔로, 넥스트에 이르기까지 그는 선후배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음악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프로듀서로서, 또는 붙임성 좋은 후배로서, 살가운 선배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늘 옆에 있어줬다.

가수 신해철

# 015B
015B는 신해철, 서태지와 아이들, 윤상 등과 함께 90년대 가요계의 트렌드를 리드한 대표적인 팀 중 하나였다. 015B가 신해철의 밴드 무한궤도에서 파생된 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015B는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정석원을 필두로 정석원의 친형인 장호일, 그리고 역시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조형곤, 조현찬으로 결성됐다. 015의 팀 이름부터 무한궤도에서 온 것이었다. (‘무’는 ‘0’, ‘한’은 ‘1’, ‘궤도’는 ‘orbit’으로 발음 대로 이름을 만든 것) 신해철이 넥스트로 록을 추구한 것과 달리 정석원은 015B를 통해 하우스, 뉴웨이브 등 또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둘 다 잡식성의 취향을 가졌던 것은 닮은 점이었다.

# 내일은 늦으리
신해철은 1992년에 환경보호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를 기념해 발매된 앨범 ‘내일은 늦으리’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신승훈, 이승환, 015B, 윤상, 신성우, 이덕진, 푸른하늘 등 당대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전대미문의 행사였다. 당시 넥스트는 매우 실험적인 곡이었던 ‘1999’를 이 앨범에 각각 실었다. 신해철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한 메인 테마 곡 ‘더 늦기 전에’는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이 한 소절씩 돌아가면서 노래했다. 환경에 대한 심오한 가사와 진중한 멜로디가 어우러진 이 곡은 미국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와 비교될 만큼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형 프로젝트였다.

2014062422012915483-400x400_99_20140625092406

# 윤상
1996년에 신해철과 윤상이 함께 ‘노댄스’란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 ‘골든힛트’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앨범이었다. 둘은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미디와 같은 컴퓨터음악을 새로운 기재로 이용했고, 이로써 전자음악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90년대 중반에는 둘 다 아이돌 가수와 같은 인기를 누릴 때였고, 둘의 만남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허나 이 앨범은 ‘골든힛트’라는 제목처럼 대중성을 지니는 앨범은 절대 아니었다. 타이틀곡 ‘기도’만 들어봐도 이것이 히트를 목적으로 한 앨범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질주’는 이 앨범이 한국 가요사에서 클래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곡. 흥미롭게도 이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노래는 걸그룹 S.E.S.가 리메이크한 윤상의 곡 ‘달리기’였다.

# 전람회
신해철은 김동률과 서동욱의 듀오 전람회의 앨범 프로듀서를 맡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해철과 김동률은 ‘대학가요제’ 선후배 사이. 작사 작곡 능력은 탁월했지만, 사운드 메이킹에 있어서 아마추어에 가까웠던 전람회는 신해철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1집 ‘엑시비젼(Exhibition)’에 실린 노래 ‘여행’에서 신해철과 서동욱, 김동률의 대화가 나온다. “야, 이거 생브라스 써야 하는데”(서동욱) “생브라스 돈 많이 들잖아”(김동률) “야, 돈 걱정 너희가 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해”(신해철)라고 주고받는 대화가 재밌다. 이 앨범재킷에는 ‘배리 스페셜 땡스 투(Very special thanks to)’의 대상으로 부모님과 신해철의 이름이 올라있다.

# 유희열
유희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신해철이 심야에 진행한 라디오 ‘FM 음악도시’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부터다. 당시 유희열은 입담과 음악적 지식으로 애청자들을 사로잡았고 신해철의 후임으로 1997년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FM 음악도시’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스타급 연예인들이 라디오 DJ를 하던 관행에 비춰봤을 때 유희열이 DJ를 맡은 것은 다소 파격이었다. 이는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픈 신해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고 한다. 약 십수 년 전 신해철은 유희열이 지금과 같은 인기 방송인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을까?

# 고스트스테이션
신해철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매주 진행한 ‘인디차트’는 당시 공중파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디음악을 들을 수 있는 통로였다. 당시 이 프로그램의 청취율은 상당해 후배들에게 활로가 되기도 했다. 가령 허밍 어반 스테레오는 ‘고스트스테이션 – 인디차트’에서 4주간 1위를 하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음반이 매진되기도 했다고. 이외에도 피터팬 컴플렉스, 뷰렛, 페퍼톤스, 아일랜드 시티, 시베리안 허스키 등 많은 인디밴드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지난 6월 시베리안 허스키의 보컬 유수연 양이 숨진 채 발견됐을 때 신해철은 트위터에 “왠지 억울합니다. 지금은 고스트스테이션도 없고 아무런 여력이 없으나 인디 씬의 모든 분들에게 그저 마음과 성원 보냅니다. The show must go on”이라고 글을 남겼다.


안녕, 마왕 ④ “안녕 안녕 진짜 안녕 내 영웅 안녕” 우리가 기억하는 신해철

10730875_841338765918951_1127802595089412641_n 김준원, 신해철, 이동규, 임재범 (왼쪽부터)


신해철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만, 이제 보내줘야 한다. 슬픔의 목소리를 모아봤다.

“해철이 형 우리 어릴 때 둘이 닮았다고 인터뷰도 같이 많이 하고 그랬었죠. 내가 사고치고 힘들어할 때 빨리 재기하라고 아낌없이 격려해 주고 집에 갈 때 차비하라고 내 손에 돈 꽉 쥐어주셨던 형 절대 잊지 못합니다. 형… 할 말을 잃었네요. 내가 말입니다. 보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기억하겠습니다. 형 하나님 곁에서 편히 쉬세요.” (현진영)

“신문기자시절 생전의 신해철을 몇 차례 사진으로 담은 적이 있다. 볼 때마다 그는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신해철은 반세기 음악여정 동안 무수한 음악실험을 했다. 멈추지 않고 실험적 음악에 몰두하며 늘 새로운 음악적 변화를 추구한 것은 그의 도전정신 때문이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작년 타지에서 처음 인사 드렸는데 벽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뒤풀이도 같이 가자고 권하셨던 형님. 이 순간이 마지막 인사였을 줄 알았더라면 덜 수줍어하며 좀 더 오래 눈을 마주 봤을 텐데.” (옴브레, 고래야)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그댈 사랑해’ 중고등학교 축제에 늘 그 부분은 나의 것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지난 어느 시절 스며들지 않은 곳 없이 흐르던 그의 음악과 노랫말이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혼란스러운 밤이다. 우린 어색하고 슬프다 말하고 또 스치며 지나가는 하루가 될지라도, 부디 고통 없는 길에서 미소 지으며 평온히 온전하게 마무리 되어 지길 기도해본다. 그 삶이 끝날 때까지…” (이규호)

“우리 피아 많이 돌봐주셨는데…. 아 이럴 수가, 형님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소서.” (양혜승, 피아)

“그냥 미안하다. 해철아 널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했었다. 머지않아 한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곳에서도 멋진 음악 들려주고 있기를.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한동준)

“오늘의 첫 곡은 ‘민물장어의 꿈’이었다. 고스트네이션을 들으며 자랐다는 띠동갑 PD가 말하길, 그가 자신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지길 원했다던 노래. 생방송을 얼마 앞두고 소식을 들었다. 8시 넘어 원고를 보내는 시간까지, 뉴스도 페북도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은 터였다. 놀란 마음을 우선 진정시키고, 부랴부랴 오프닝을 수정했다. 코끝이 빨개진 PD와 DJ도 선곡을 바꾸고 멘트를 고치느라 모두 부산했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고, 오프닝 멘트 후 음악이 나가는데, 절로 눈물이 터졌다.” (이진희 경인방송 작가)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로 데뷔하던 날부터 2집 마이 셀프, 넥스트의 1집과 2집을 거치며 그는 나에게 영웅 같은 존재였다. 록을 하기 전에도 록스타 같았고, 록을 할 때에는 이 땅의 록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넥스트2집 발매 직후, 친구들과 “드디어 이런 음악이 한국에도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음악가도 우리 곁을 떠나니 마음이 무척이나 허전한걸 보니 모두에게 가족 같은 존재였나보다. 오랫동안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신해철 편히 쉬세요.” (김광진, 더 클래식)

“누가 뭐래도 특별했던 아우 신해철의 명복을 빕니다.” (김준원, H2O)

“너를 떠나보내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만 해철아 복수해 줄게.” (신대철, 시나위)

“Rest in Peace 신해철. 섭섭하기도, 즐겁기도한 추억만을 남기고 이렇게 먼저 가버리는구나.
보고 싶다. 거기선 편히 즐거운 농담하면서 음악을 하길.” (박영철, 블랙신드롬)

“안녕, 안녕 진짜 안녕. 내 영웅. 안녕. 당신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어쩌나. 진짜 이제 어쩌나.” (차준우, 스톰)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마왕'의 거침없는 말들

시대와의 불화를 무릅쓰고, 이 세상에 던졌던 '신해철의 말들'















*********

신해철, 그는 대답할까…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마왕’ 신해철을 떠나보내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을 맘에 갖고 있어/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넥스트 ‘히어로’)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흔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그는 19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한 번쯤 통과의례처럼 지나야 하는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신해철이란 이름은 한 시대를 대변하는 이름이었고, 음악적 신뢰와 실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1988년 성탄 전야에 열린 대학가요제 무대. 한 번만 들어도 잊을 수 없는 도입부가 울려 퍼지던 순간, 노래의 마지막에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그댈 사랑해”라고 속삭이듯 노래하는 순간, 많은 이들이 걸출한 음악가의 탄생을 예감했다.

‘그대에게’로부터 시작한 그의 음악 여정은 놀라움과 파격과 실험으로 가득했다. ‘인기’가수의 길을 걸었던 솔로 시절에도 그는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앨범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고,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윤상, 송재준 등과 미디음악(실제 악기 대신 컴퓨터로 만드는 음악)의 선구자로 얘기될 만큼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후 안정적인 솔로 가수의 길을 포기하고 록 밴드 넥스트를 결성한 것도 파격이었지만, 넥스트를 통해 들려준 음악은 더 파격이었다.

록·메탈서 일렉트로니카까지 한국대중음악 수준 끌어올리고 인디음악 알리는데 적극적 역할
19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통과의례처럼 지났던 ‘상징’

1992년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넥스트는 넉 장의 앨범을 통해 우리도 이 정도 수준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New Experimental Team’이라는 팀명처럼 그 전까지 한국 대중음악계에선 쉽게 들을 수 없던 새롭고 실험적이고 강한 록·메탈 음악을 전면에 내걸었다.

2집 (1994)에 실린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와 ‘이중인격자’ 같은 곡들은 외국의 헤비메탈만을 듣던 애호가들의 귀를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역시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는 제목처럼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아트 록 명곡이었다. 3집 (1995)에 실린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의 리프나 구성은 말 그대로 세계 수준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철저하게 비대중적인 음악을 가지고 대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밴드 무한궤도로 데뷔한 가수 신해철은 솔로 앨범 6장, 밴드 넥스트 앨범 4장 등을 통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을 꾸준히 선보였다.

넥스트는 당시 스타디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록 밴드였다. 그만큼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종교 부흥회를 연상케 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새로운 공연 문화를 선도했다. 그 지지의 배경에는 넥스트와 동시대를 산 젊은이들이 있었다. 노랫말을 도맡아 쓴 신해철은 동시대의 청년과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근사하게 풀어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통해 교육, 환경, 낙태, 동성동본 문제를 얘기하고 현대인의 외로움을 얘기했다. 지금 이런 노랫말을 썼다면 허세나 중2병 정도로 가볍게 치부될 수 있겠지만, 그의 시대는 아직까진 진지함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그의 죽음 뒤로 많은 이들이 그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가 그때 우리의 생각과 이야기를 대변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대중음악계의 영역을 더 넓고 깊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윤상과 함께 노땐스(No Dance)라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그저 댄스 음악으로 치부되던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했고, 일렉트로니카는 록과 함께 신해철 음악의 양대 축이 되었다.

신해철, 시대를 대변하는 이름이자 음악적 신뢰와 실험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한 명의 영웅이 또 세상을 떠난다

넥스트와 모노크롬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룬 사운드 프로덕션의 성취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것이었다. 그가 맨땅에 부딪쳐가며 얻은 경험과 지식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데뷔 앨범을 만들었던 전람회가 대표적이고, 그밖에도 많은 후배들이 수혜 대상이 됐다. 그로 인해 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가 한층 더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전달자로서도 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로 한국 인디 음악을 비롯해 비주류 음악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세상을 떠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두 번 틀고는 이런 노래는 한 번 더 들어야 한다며 세 번 연속으로 같은 노래를 튼 것도 그였다.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디 음악이 소개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는 인디 음악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언자였다.

오랜 음악적 침체를 겪은 뒤 그는 적극적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최근 공개한 ‘아따(A.D.D.A)’와 ‘I Want It All’은 다시금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곡들이었고, 넥스트의 재결성을 선언한 그에 곁엔 창단 멤버인 정기송이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를 뒤로 하고 갑작스레 그는 떠났다. 굳이 감상적인 말을 덧붙이진 않겠다. 그가 남긴 노래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오래도록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우리의 추억을 그와 90년대에 바친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studiocarrot@naver.com


[신해철에 대해 몰랐을 법한 이야기①] 잘 가요, 우리들의 '시장님'


가수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추모 기사가 쏟아진다. 빈소 표정에서부터 조문 행렬, 사망 원인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에 황망한 빛이 역력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뮤지션이기에 그를 재조명하는 글도 많다. 신해철은 온 국민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그대에게'로 대학가요제가 낳은 최고의 스타였고, 싱어송라이터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솔로 활동도 성공적이었다.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처럼 기존 가요계 문법으로 다가간 곡도 대박을 터뜨렸지만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길 위에서' 등 다채로운 장르의 실험적인 곡의 히트는 당시 댄스와 발라드로 양분된 가요계에 큰 자양분이 됐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아이돌 가수로 현실에 안주했을 법도 한데 밴드 '넥스트(N.EX.T·New Experiment Team)'를 결성해 팀 이름처럼 새로운 실험에 매진한 것도 아티스트로서의 위치를 공고하게 했다. 락도 얼마든지 주류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고, 한국 락을 서양 락보다 한수 아래로 보던 마니아들의 인식을 바꿔 놓기도 했다. 락에만 그치지 않고 테크노와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의 외연 확장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인디 뮤지션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신해철 하면 음악적 평가 못지않게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시장'이다. 그는 1996년 4월부터 MBC 라디오 'FM 음악도시' 디제이를 맡았다. 당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사연과 신청곡이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됐던 것과는 달리 'FM 음악도시'는 다양한 코너와 철저히 음악성에 기초한 선곡으로 치열한 0시대 전쟁에서 압도적인 청취율을 기록했다.

신해철은 이전에도 디제이를 맡은 적이 있었지만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한 것은 'FM 음악도시'가 처음이었다. 안혜란 PD는 "단순히 음악을 들려주는 것 이상으로 청취자들에게 얻어 갈 수 있는 한 가지를 주자는 생각으로 만들게 됐다"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가요를 무조건 틀지 않았다. 각 분야 음악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1시간이나 들여 편성했다. 초기 진행자였던 신해철이 음악도시의 '시장'을 자처하며 색깔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고 밝혔다.

그는 'FM 음악도시'에서 무대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를 유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동네 형·오빠'를 자처했다. 거창한 쇼케이스 없이 신곡 'Here I Stand For You'를 맨 처음 공개한 곳이 라디오였을 정도다.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안 이슈에 대해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소위 '중2병'을 앓고 있는 청년층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다. 가수 신해철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디제이 신해철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을 정도였다.

현재 뮤지션이자 방송인으로 각광받고 있는 유희열이 스타덤에 오른 것도 'FM 음악도시' 공이 크다. 당시 수요일 게스트로 참여했던 유희열은 무명에 가까웠지만 신해철이 차기 디제이로 적극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팝 칼럼니스트 성우진이 참여한 해외 차트 소식, 한 명의 국내 뮤지션을 정해 헌정한 코너, 남희석 출연분 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가왕' 조용필이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해철은 1997년 9월 'FM 음악도시'에서 하차할 당시 "여러분들이 행복을 들고 있는 이상 누구도 여러분들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승리자고 챔피언"이라고 전했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마지막 방송이었지만 청취자들은 그마저도 그답다 생각했다. 이후 '마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던 신해철은 2012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디제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송사 개편 때마다 오매불망 저음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기다렸던 팬들을 뒤로 하고 '시장'이자 '마왕'은 이렇게 떠났다.


[신해철에 대해 몰랐을 법한 이야기②] “서태지는 송곳, 나보다 영리하고 인내심 강해”

27일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은 2008년 8월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음악 웹진 ‘이즘(IZM)’과의 인터뷰에서 서태지에 대해 “나보다 영리하고 인내심도 더 강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신해철은 “(서태지 신보를) 몇 초 정도만 들어봤다”며 “숨소리만 들어도 앨범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아티스트가 한 나라에 한 10명, 20명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팬들은 너무 지조가 없다”고 말했다. 이른바 ‘서태지 신드롬’은 당연한 문화적 현상이라는 것.

서태지에 대해선 “그 친구에 대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건 조심스럽다”면서도 “서태지가 나보다 더 영리하고 인내심도 더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사람들은 서태지의 신비주의나 은폐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비판도 하지만,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 같은 경우는 물건으로 비유하면 갈퀴다. 잔뜩 긁어 담은 것 안에 쓸모없는 것들이 같이 왔더라도 건지는 타입”이라며 “서태지는 송곳이다. 한 군데 딱 타깃을 노리고 거기를 집중해서 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신해철은 “(서태지는) 가장 유리하고 잘할 수 있는 곳에서만 싸움을 벌인다. 나 같은 경우는 내가 불리해도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하는데, 태지는 그런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며 “그런 점에서 영리하다. 솔직히 장수로 치면 그게 옳은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데뷔 20주년에 포커스를 맞춰 진행된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대학가요제를 나갔을 때와 기타를 잡았을 때, 솔로로 전향한 것”을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꼽았고, 무한궤도 해체 이유에 대해선 “처음 만들 때부터 (대학교) 4학년이 넘어가거나 그 때까지 우리가 성과를 못 얻으면(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못 타면) 무조건 끝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 곡에 대해 “보컬 쪽에서 내 베스트였다고 생각하는 건 ‘정글 스토리’ OST 앨범에 있는 ‘절망에 관하여’, 사운드 메이킹에서 베스트는 ‘Into the arena’”라면서 “‘재즈 카페’는 내 음악 인생의 터닝 포인트 구실을 했다”고 설명했다.

특유의 가사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가사로 맘에 드는 건 ‘아버지와 나’, 팬들이 좋아하는 건 ‘나에게 쓰는 편지’가 아닐까 싶다”며 “내 만족도나 팬 만족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가장 오랜 세월동안 남는 가사는 ‘The Ocean’”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래도 제일 정이 가는 노래는 ‘그대에게’인 것 같다”며 “원래 사랑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살다보니 정이 드는 것이 있다. ‘그대에게’가 그런 곡”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신해철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뮤지션에 대해 “백두산, H2O, 시나위, 부활. 다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 부활의 김태원은 직접적인 스승”이라며 “뮤지션이 뭔지 알려준 형이고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줬다”고 말했다.

그는 “솔로 성공하고 가요 프로그램 1위 했을 때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며 “트로피 한 손으로 받고, 막 아무렇지 않게 빙빙 돌리고. 어쩌면 그런 건방이 날 20년 동안 살린 건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연예활동 20년 만에 남은 건 빚 20억 뿐’이란 발언에 대해선 “tvN ‘택시’에서 한 말인데 기자들이 긁어다 쓴 것”이라며 “죽을 때까지 그런 말을 언급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반농담조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야?”라고 반문하면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신해철에 대해 몰랐을 법한 이야기③] 그가 직접 뽑은 ‘나의 명곡’ 15선

27일 세상을 떠난 신해철은 2005년 9월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가 운영하는 음악 웹진 ‘이즘(IZM)’을 통해 총 15곡의 ‘나의 명곡’을 꼽았다.

1. 킹 크림슨(King Crimson) ‘I talk to the wind’

초기 킹 크림슨의 걸작으로, 중세 음유시인의 분위기와 아트 록의 공식적인 결합점을 제시한다.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의 작사, 그렉 레이크(Greg Lake)의 목소리, 이언 맥도날드(Ian McDonald)의 연주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탐미주의의 극치에 도달하면서도 절제의 미덕을 동시에 내포하는 걸작.

2. 포리너(Foreigner) ‘Juke box hero’

포리너의 장기인, 팝과 록의 두 어장이 동시에 교차하는 한류와 난류 사이의 음악의 해협에서 노련한 어부의 솜씨로 건져 올린 수륙양용 양서류 음악. 거친 파도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베테랑들의 솜씨를 보라.

3. 트러스트(Trust) ‘Le mitard’

에이씨/디씨(AC/DC)의 본 스코트(Bon Scott)의 지원으로 세계에 알려진, 흔치 않은 프렌치 메탈 밴드 트러스트의 솔직히 말하면 유일한 걸작. 라 마르세이유의 폭력적인 가사에서 보여지듯 프랑스어가 그리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노래가 증명한다. 

4. 라우드니스(Loudness) ‘Esper (Japanese ver.)’

‘Disillusion’ 앨범은 라우드니스의 상업적 대성공에 힘입어 훗날 영어 버전으로 재녹음됐다. 그래서 이 앨범이 라우드니스 최초의 영어 음반이 되지만, 그들의 진수는 오히려 일본어 버전에 있다. 트러스트(Trust)의 불어 메탈이 둔탁한 둔기에 의한 연속 타격이라면, 라우드니스는 날카로운 흉기의 질감을 가진 일본어를 헤비메탈에 얹어 일찌감치 메탈의 글로벌화를 실현했다. 

5. 티-렉스(T-Rex) ‘Cosmic dancer’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에 삽입됨으로서 재발견된 티-렉스의 걸작. 글램 록 밴드의 음악적 역량을 얕보는 얼치기 록 팬들에겐 통렬한 일격이다.

6. 퀸시 존스(Quincy Jones) ‘Ai no corrida’

상업주의 댄서블 음악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 올린 마스터피스. 디스코, 펑크(Funk), 게다가 재즈와 현대음악의 요소를 버무린 거장의 여유로운 윙크. 자동차로 치면 롤스로이스나 벤틀리사가 만들어낸 스포츠카랄까.

7. 카메오(Cameo) ‘Word up!’

콘(Korn), 건(Gun) 등의 록 밴드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한 댄스음악의 걸작. 록의 기준을 전기 기타의 유무나 보컬의 창법으로 분류하는 우리나라의 음악 매니아들에겐 낯설게도, 이 노래는 록을 비트로 파악하는 서양인들에겐 록 넘버로도 분류된다. 

8. 맥스웰(Maxwell) ‘Till the cops comes knocking’

온 몸이 녹아드는 끈적거림과 음탕한 가사. 어른의 음악이란 이런 것. 타고난 싱어란 이런 것. 

9. 프린스(Prince) ‘1999’

흑백음악의 최소 공배수를 찰나의 감으로 추출한 프린스류의 미니멀 음악. 천재란 이런 것이다. 

10. 비쉐이지(Visage) ‘Fade to grey’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헐리우드에서 앞 다투어 묘사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테크노-뉴 웨이브-신스 팝의 걸작. 고전 SF의 느낌이랄까. 퇴폐와 염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나 댄서블의 비트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11.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 ‘Day after day’

우리나라에서 ‘Old and wise’ 만큼은 크게 알려지지 않은 알란 파슨스의 숨은 노래. 재미있는 것은 ‘애비 로드(Abbey Road)’의 치프 엔지니어인 알란 파슨스가 담당했던 가장 유명한 두 밴드 비틀스(Beatles)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냄새를 동시에 풍긴다는 것.

12. 에이씨/디씨(AC/DC) ‘Hells bells’

세상엔 가끔 유행의 물결 저 위에서 비웃음을 던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아이템들이 있다. 할리 데이비슨, 기네스 맥주, 그리고 에이씨/디씨. 그들은 등장 당시부터 이미 백화점이 아니라 앤틱(Antique) 숍에 진열 될 모습으로 나타났다. 

13.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Bob Marley And The Wailers) ‘Get up, stand up’

밥 말리의 노래는 그 가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남국의 휴양지와 어울리는 영원한 태평가다. 그러나 그 가사를 음미하고 나면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분노로 흔들리는 영혼의 깊숙한 떨림이다. 

14. 펄프(Pulp) ‘This is hardcore’

오아시스(Oasis)의 상업성, 블러(Blur)의 지성, 일스(Eels)의 의외성을 동시에 갖춘 펄프. 그들은 그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저 스틱스(Styx) 만큼이나 과소평가된 밴드다.

15. 인큐버스(Incubus) ‘Stellar’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 고갈된 21세기 음악계에선 원액 제조자 보단 블렌딩 기술자가 대우를 받는 법. 젊은 블렌딩 마에스트로들의 영악함과 믿기지 않는 노련함을 보라.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

************************************



잘 알려지지 않은 고 신해철 대학생활에 대한 10가지

고 신해철 씨의 '대학생활'은 어땠을까. 신 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87학년이다. 하지만 중도에 학교를 자퇴했다. 

29일 '여성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서강대 철학과 동문들의 입을 통해 과거 신해철의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생활을 들어본 내용이었다. (http://www.womennews.co.kr/news/76773#.VFCYTPmsWIg)
신해철 씨와 함께 캠퍼스 누볐던 이들이 증언한 '특별한 기억들'이다. 

1. 민중가요 '아침이슬'을 락 버전으로 편곡했다.

 

2. 과방 칠판에 "나 대학가요제 대상 먹으러 간다" 메모 남기고 대학가요제 출전. 실제 1988년 밴드 '무한궤도' 멤버로 나간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했다.

 

3. 대학가요제 출전 앞두고 '그대에게' 데모 테이프를 들은 대학 동기한테 "꼭 태권브이 주제가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4. 밴드 '아기천사'로 출전한 1988'강변가요제'에서 탈락했다. 당시 대상은 '담다디'를 부른 이상은


 


5. 강변가요제 탈락 후 "이제 어떻게 하면 가요제에서 수상할 수 있는지 알았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6. "머리가 좋아 벼락치기를 해도 학점이 잘 나왔다" (서강대 후배 표정훈 씨)

 

7. 철학과 노래패가 교내 축제공연을 하게 되자 곡을 써주고 자신의 고가 악기를 빌려줬다.

 

8. '전방부대 입소 훈련 반대' 시위에 참가

 

9. 학교에서 철학과 티를 내려고 자신을 "'신인간 해방철학'의 신해철입니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0.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한 후 자퇴했지만, 2010년 학교 측의 '명예학위' 수여 제의를 거절했다.


*********************************

한 사람이 갔다. 한 시대가 갔다.


형식은 가족장이라 했다. 사실상 음악인장이었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선 줄은 백미터는 족히 넘었다. 그렇게 많은 화환을 본 적이 없다. 음악인들의 이름이 리본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차례가 왔다. 사진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북이 쌓인 흰 국화 더미에 한 송이를 더하고서야 시선을 올렸다. 눈꺼풀이, 그리 무거울 수 없었다. 2007년 재즈 앨범 <Songs for The one>을 낼 무렵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흑백 사진을 그는 마음에 들어했었다. 그 사진을 흰 국화가 둘러쌀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나 다른 사람들이나. 눈물이 왈칵 밀려 왔다.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도 눈가가 뜨거웠다. 농담같았던 부고 소식이 현실이 됐다. 90년대를 통과하여 2000년대를 살아온 이들의 인생 한 페이지가 뜯겨져 나갔다. 신해철은, 그렇게 갔다.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거라 공언했던 1999년 작 ‘민물장어의 꿈’이 빈소에 계속 울렸다. 그가 간 다음 날 음원차트 1위에 올랐다. 그의 첫 음원 차트 1위곡이었다. 죽은 후에야 1위에 올랐다는 사실과 대중이 그를 추모하는 방식, 두 가지 생각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했다. 담배 연기가 유난히 폐속 깊이 빨려 들어오는 밤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하필 그 사진을 찍었던 무렵이었다. 마포구 공덕동에 있던 그의 회사 세이렌 뮤직의 대표실이었다. 사무실의 느낌은 아니었다. 거대한 서재이자 AV룸이었다. 대충 해아려도 천권은 됨직한 책과 천장은 넘을듯한 LP와 CD가 빼곡이 차있었다. 책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철학과 역사, 사회와 정치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목록이었다. 87로 시작하는 그의 학번이 써있는 두툼한 철학개론과 ‘반지의 제왕’같은 환타지 소설이 한 책꽂이에 꽂혀있었다. <강식장갑 가이버>를 비롯한 초인만화도 적지 않았고 테이블 쿠션 밑에는 일본 성인 만화 한 권이 굴러 다녔다. 학창 시절 교재로 쓰였던 책을 제외하고 다른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며 신해철은 공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 했다. 환타지 소설뿐만 아니라 서가에 꽂힌 적지 않은 책들이 현실에 실재하는 것 보다는 상상과 비현실을 다루고 있었다. 80년대 전반기에 청계천을 누비며 사모았을 ‘빽판’부터 요즘 한국 인디 밴드들의 음반까지, 음악 애호가로서 한 남자의 역사가 줄을 서 있었다. ‘어둠의 방’이라 불린다는 신해철의 집무실은 그의 감성과 이성의 나무에 다름아니었다. 


그 나무를 바탕으로 신해철은 줄곧 대드는 삶을 살았다. 단정한 대학생 머리를 하고 리드 보컬과 리드 기타, 심지어 키보드를 종횡무진 누비며 ‘그대에게’를 부르는 모습은 그를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렸다. 1988년 겨울,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이듬해 무한궤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데뷔했다.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가 줄줄이 히트했다.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여학교 앞 문방구에서 그의 브로마이드는 가장 앞줄에 전시됐다. 두 장의 솔로 앨범 모두 성공했다. 도박을 걸었다. 아이돌의 삶을 포기하고 밴드를 결성했다. 넥스트의 1집 <Home>은 같은 해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와 더불어 록의 불모지였던 한국 가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I : The Being>은 지금껏 그의 이미지를 록커라 쐐기박는 작품이 됐다. 어쩌면 이 앨범은 그의 20년 음악 생활의 가장 빛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OST였던 <Lazenca(A Space Rock Opera)>까지, 총 넉 장의 앨범을 발표한 후 넥스트는 해체했다. 사실 넥스트의 결성 자체가 도박이었다. 그룹을 하다가 아이돌 가수가 되는 사례는 많았어도 인기의 정점에서 밴드를 결성하는 사례가 국내 최초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솔로앨범 두장을 내고 밴드로 전환하지 않았으면 오래 못갔을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결과론적인 얘기다. 솔로 두장이 대박이 터지니까 ‘이제 회사에서 뭐라고 못하겠지. 자, 하자’ 이렇게 된거다.” 


도박 아닌 도박은 성공했다. 넥스트 이후의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윤상과의 테크노 프로젝트 노 댄스를 시작으로 <Crom's Techno Works>로 그는 테크노 뮤지션으로 변신했다. 이제 막 ‘도리도리 댄스’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본격적 테크노는 국내에 상륙하기도 전이었다. 홍대앞 댄스 클럽이 테크노 클럽으로 불리던 때였으니, 테크노는 그야말로 매니아의 장르였지만 이 앨범에서 ‘일상으로의 초대’를 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록에서 테크노로 옮겨 갔다. 하지만 뮤지션 신해철이 대중에게 가지는 파급력은 여기서 약화되기 시작한다. 세기말의 가요계는 이미 아이돌의 독무대였다. 21세기, 음반이 급속도록 몰락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뮤지션 진영이었다. 특히 록을 기반으로 한 진영이었다. 강력한 팬덤을 구축한 서태지, 보편적 감성에 기댄 유희열, 김동률 등보다 신해철의 자리는 빠르게 감소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때도 대중과 타협하지 않았다. 2001년부터 시작한, 그의 라디오 인생에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 음악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뉴스로 만들었다. 이 방송은 실로 ‘기괴’했다. 신해철의 세계이기도 했다. 이 프로를 통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소개됐으며 하드코어 밴드 바세린이 차트 1위에 올랐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세 번 연달아 플레이 됐다. 생방송 도중 강병철과 삼태기의 ‘삼태기 메들리’를 틀어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21분 54초 짜리 곡이었다. 하지만 이 방송의 진가는 그의 발언들에 있었다. 다른 심야 방송들이 청취자들의 달달한 사랑 고민을 소개할 때, 신해철은 라디오판 ‘백분토론’을 혼자 써내려 갔다. 주한미군, NLL, 노무현 전대통령 탄핵, 이효리 표절 논란 등 그 어떤 사안에도 주저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조심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곧 인터넷 언론을 타고 뉴스가 되어 퍼져 나갔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일종의 아젠다 세팅을 했던 아마도 유일한 DJ가 신해철이었다. 


그의 ‘말’은 그리고 2000년대를 관통해왔다. 라디오를 넘어 그는 <백분토론>에 단골로 출연하는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패널로 5번 등장해서 간통죄 폐지를 주장했고, 대마초 합법화를 얘기했으며, 학교 체벌 폐지를 외쳤고 불법다운로드를 근절하자고 역설했다. 진중권 등과 함께 보수 진영의 논객들과 명쾌한 언어와 논리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소년에서 시민이 된 그의 팬들은 환호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 TV찬조 연설에 나섰고 심지어 방송도 한 달 가까이 접은 채 그의 당선을 도왔다. 지금도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걸 피하는 풍조에서, 그는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신을 접지 않았다. 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보면 일종의 자부심같은 거였을 거다. 자부심과 자신감은 인간 행동의 가속 페달이다. 유불리를 따지고 승산을 생각하는데 몰입하다보면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욕망과 명분이 만나면 바로 움직이는 게 자부심 강한 이들의 특징이다. 삼국지의 관우와 같다. 데운 술이 식기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다는 관우의 호언장담과 커피 한잔 시켜놓고 녹음실에 들어가 식기 전에 다 불러버렸던 신해철의 모습은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지나친 자부심은 아와 피아를 너무나 명확하게 가른다. 팬만큼이나 적을 양산하는 것이다.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보수층에서 급격히 그의 적이 늘어났다. 연예인의 정치적 활동을 고깝게 보는 이들 역시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음악 산업의 위기에서 면책받고 있는 대중을 비판했고, 과거사에 연연하는 한국인들을 성토했으며, “우리 국민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우수한 것도 아닌데 자꾸 우수하다고 선전하고 가르치는 게 문제”라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속에 있는 얘기 다하면 아마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와 인터뷰를 하던 나는 녹음기를 끄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토록 투사 기질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동료 음악인에게만큼은 ‘선배’가 아닌 ‘형’이었다.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 인디 음악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 섰다. 지금만큼 인디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기성 뮤지션들은 ‘그들만의 리그’안에서 놀 뿐, 홍대앞의 새로운 후배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신해철은 녹음 부스안에서 까마득한 후배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이런 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피터팬 컴플렉스, 스키조 등의 밴드들의 앨범을 제작해줬으며, 곤란한 문제를 겪는 음악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지원 사격을 퍼부었다. 90년대 음악계를 빛낸 이들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인디 음악인들에게 ‘형’소리를 들었던 이가 신해철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20대의 그에게 반했던 90년대의 10대와 30대의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2000년대의 20-30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미디어의 벽안에 갖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위선과 거짓 겸손같은 거 내팽겨치고 누구에게나 직설 화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조언이건 공격이건간에.


그런 사람이 갔다. 김동률이 음원 차트를 정복하고, 서태지가 <슈퍼스타K>에 출연하고, 이승환이 <히든 싱어>에 나오는 딱 그 무렵에. 1990년대가 대중 문화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딱 지금에, 신해철이 갔다.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스타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음악으로 스타덤에 오르는 스타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자신의 언어로 사회적 논란과 담론의 한복판을 해쳐나가는 스타를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재능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력의 문제만은 더더욱 아니다. 시대의 문제다. 그가 살아왔던 시대는, 그것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시대의 혜택을 받았으되 시대를 책임지려 했던 한 사람이 갔다. 한 인생의 완결된 서사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며, 신해철이 갔다. 


주간동아 '김작가의 음담악담'

***********************************


신해철(1968~2014), 우리가 살았던 한 시대의 종언

신해철이 88년 대학가요제에 무한궤도 멤버로 '그대에게'를 들고 처음 등장했을 때, 화질이 마치 흑백과 컬러의 중간처럼 보이는 예전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는, 최근의 모습만으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마르고 앳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쉽고 간단한 노랫말로 '언제 어디에서든 영원히 널 사랑해!'라고 시작부터 끝까지 당당하게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많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남짓, 신해철의 삶과 음악은 우리가 살았던 한 시대를 그대로 표현했고 또 그는 언제나 전위에서 활동했다. 시대의 욕망이 신해철에게 곧장 투영되었고, 그의 음악은 그것이 나온 때의 한국사회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요즘 20살짜리 대학생이 과연 '그대에게'와 같은 사랑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시작하자마자 클라이막스가 나오듯 쉼없이 무조건 달리는 멜로디에,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랑만을 위해 오로지 전진만 하겠다는 가사.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냅다 사랑한다고, 절대 널 포기할 수 없다며 온 힘을 다해 나한텐 너뿐이라고 선언하는 노래. 아마도 민주화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했던 88년 어떤 낭만적인 한국 젊은이들의 사랑은 정말 이랬을 테고, 또 이런 음악이 대중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20~30대가 연애, 결혼, 출산을 절망적으로 포기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여자친구(또는 남자친구) 있냐?"는 말을 웬만해서는 잘 물어보지 않지만, 90년대 이전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가장 기본 레퍼토리가 이거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무슨 일을 하냐?"라고 묻는 게 때로는 실례가 되기도 하듯이, 이제 애인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20~30대에겐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좀 친해지면 누군가 물어보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면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 나이에 연애도 안하고 뭐하냐"다. 우리 때는 잘났든 못났든 다들 연애하느라 바빴는데, 요즘 젊은애들은 도대체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88년에 신해철이 그대에게를 불렀을 당시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2014-10-31-ShinHaeChul.png

또한 88년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오랜 군사독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래도 조금씩 뭔가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굶어 죽는다'라는 표현이 더이상 흔치 않게 된 시점에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다. 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88년에는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 나라는 마침내 의심의 여지 없는 후진국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약 10여 년간 그러니까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어쨌든 '발전'이라는 단어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고, 궁색하고 부실할지언정 일종의 설렘과 긍정적 기운이 사회에 아직 돌고 있었다. 그리고 신해철의 '전성기'도 이 시기였다. 신해철의 음악을 들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장이 요동치던 시절.

여느 대학밴드와 같이 '무한궤도'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솔로데뷔 앨범을 내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본인도 말했듯이 무명시절이 없는 인기가수가 되었고,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의 DJ까지 맡는다. 20살이 되자마자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고, 20대 초반에 성공적인 솔로데뷔를 했으며, 20대 중반을 최고 인기의 록그룹 '넥스트(N.EX.T)' 리더와 공중파 라디오 DJ로 화려하게 수놓은 신해철. 그는 이즈음 아시아의 승천하는 용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던 대한민국과 많이 닮아 있다. 그때는 신해철처럼, 한국 사회도 젊었다. 거침이 없었고, 어떤 희망이 있었으며, 최후의 낭만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신해철의 20대는 넥스트의 주옥같은 명반들과 함께 찬란히 빛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았던 한 시대의 힘찬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7년 말에 넥스트는 해체하고, 우리는 끝내 IMF 구제금융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신해철은 영국으로 음악유학을 떠나 새로운 음악을 준비하고, 한국의 유권자들은 놀랍게도 정권교체를 이뤄낸다. 이후에도 신해철은 나름 활발히 음악활동을 계속 했으며(MONOCROM · 비트겐슈타인), 한동안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라디오방송 '고스트스테이션'도 진행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특수상황 속에서 탄생한 김대중 정권은, 정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민주정부 2기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며 지금으로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10년 간의 '인디안 썸머'를 맞이한다.

이때 중요한 기점이 바로 2002년 월드컵이었다. 신해철은 '붉은악마'와 함께 공식 응원앨범을 통해 그 유명한 "대.한.민.국! 짝 짝 짝 짝짝!" 구호를 선보이며 월드컵 열기의 최전선에서 주효한 역할을 한다. 월드컵 기간 내내 신해철이 만든 응원구호가 온 나라에 연일 울려퍼졌고, 요즘도 한국대표팀의 국가대항 스포츠경기가 있을 때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이 역시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커다란 선물인 셈이다. 서울올림픽 이후 14년, 국민들은 월드컵을 통해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꿈을 꾼다. 그런 강력한 기운으로 대한민국의 기존 질서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상고출신 노무현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신해철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직접 선거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이나 2002년과 같은 행운이 2007년에 또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은 노무현의 실패와 함께 막을 내렸고,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퇴행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신해철은 노무현의 죽음 앞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을 흘렸고, 최근에 새 앨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한동안 이렇다할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2009년에 신해철은 사교육 광고에 출연함으로써 괜한 의구심을 샀고, 그것 자체의 떳떳함이나 논리적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신해철이 가지고 있던 기존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일종의 상징적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일들은 신해철에 대한 팬들의 지지나 이해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일반 대중의 힐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이런 측면에서 '서태지 팬덤과 사회적 인식', '신해철 팬덤과 사회적 인식'은 꽤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88년부터 10년 동안의 전성기와 98년부터 이후 10년 간의 인디안 썸머를 지난 뒤, 한국사회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점차 대중의 관심·음악적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퇴행의 가속화가 한창 비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새 앨범을 들고 의욕적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서려고 했으나, 결국 이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

신해철의 영정 사진 앞에서 이런 생각도 한번 해본다. 바로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관한 상상이다. 앞세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뒷세대인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시민혁명의 힘찬 기운을 온전히 다 누린 음악가였다. 고전주의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혁명 전 귀족의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낭만주의 작곡가인 쇼팽이나 리스트는 혁명 이후의 반동과 부르주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혁명의 설렘과 흥분·변화의 밝고 강력한 힘만이 가득한 세상을 보았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성격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나갔으며, 또 그렇게 위대한 음악을 만들었다.

혁명을 이뤄낸 시민사회가 가진 최고조의 희망이 베토벤의 음악 속에 오롯이 담겼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음악가도 베토벤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영광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비록 진정한 혁명의 좌절 · 반동의 시대가 시작될 무렵 청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외부세계와 단절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베토벤의 삶과 음악은 그 자체로 찬란한 혁명의 산물이었다. 반면에 신해철은 한국사회의 희망과 발전, 좌절과 퇴행을 양쪽 모두 겪었다. 88 올림픽부터 2002 월드컵까지, 군사독재부터 민주정부를 거쳐 반동정권까지, 그는 전위에서 이걸 다 경험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노무현의 실패와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요즘 젊은세대의 포기와 체념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신해철의 삶과 음악에는 말 그대로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이다. 과연, 베토벤과 신해철 중에 어떤 삶이 더 완전한 삶일까?

아무튼 신해철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았던 어떤 한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수명을 생각했을 때 신해철은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걸로 보인다. 누구라도 한눈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들쭉날쭉한 40대 신해철의 체중 변화는 모두가 염려를 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신호였고, 오래된 팬으로서 보기에 종종 노무현 추모공연처럼 공개된 무대 위에서 행한 그의 퍼포먼스도 예전같지 않았다(몇 살 더 나이가 많은 이승환의 외모와 퍼포먼스를 신해철과 비교해 보면 이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제반 상황과는 별개로, 그의 부인과 신대철이 제기한 바 있는 '의료사고' 의혹은 철저히 규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신해철도 하늘나라로 갔고, 그와 함께 했던 시대는 절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의 데뷔 이후 사반세기 남짓한 세월, 한국사회는 아시아의 비상하는 용으로서 급격한 사회 발전을 겪었고 IMF 구제금융 속에서 놀라운 정치 변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압축 성장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부실한 사회시스템과 길지 않은 민주화 역사 때문인지 그 결과는 슬프게도 '좌절'로 남았고, 지금은 반동과 퇴행의 시대를 걸어가고 있다. 현재 초저성장 장기불황 시대에 접어든 대한민국은 앞으로 인구감소와 재정위기를 피할 수 없으며, 향후 몇십 년 동안 지속적인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린 눈으로 신해철의 데뷔와 전성기를 지켜본 팬들은 그의 죽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짧디짧은 성공과 길고긴 실패'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해철세대'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http://www.huffingtonpost.kr/Arthur-jung/story_b_6079882.html?utm_hp_ref=kr-entertainment


------------------------------------------------------------------------------------------------------------------------


마왕을 보내며 - 진중권


“안녕하세요. 저, 해철입니다.” “예?” “가수 신해철이라구요.” 2007년의 어느 날 그에게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당시에 나는 인터넷 위에서 회자되는 그의 신랄한 발언들에 통쾌함을 느끼던 차였고, 같은 ‘악동’으로서 그 역시 내게 모종의 동류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날 두 악동은 어느 일식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후 그의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그후 사적 만남이 한번 더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로 기억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분의 죽음이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한동안 술만 마시며 폐인처럼 지냈다고 토로했다. 그 밖에도 가끔 혼자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전화로 내게 의견을 물었다. 대개 제 생각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할 때였다. 자기확신이 강하여 누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는 그도 자신이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지난 8월 어느 팟캐스트 방송을 위해 그와 대담을 했다. 단 둘만 들어가는 녹음실에서 네 시간에 걸쳐 얘기를 나누며, 비로소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던 인간 신해철의 전체상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그의 마지막 공식 인터뷰가 되고 말았다. 몇 달 후 그의 추천과 부탁으로 새로 시작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의 1회분 녹화를 마친 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역시 그의 마지막 방송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 두 번의 ‘마지막’에 공교롭게도 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내게 감당하기 힘든 아픔으로 다가왔다. 가끔 우리는 죽은 이를 문득 떠올리며 그리워하곤 한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 고인이 된 그를 가끔 떠올리는 게 아니라, 문득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아, 그러고 보니 그가 떠났구나.” 이미 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만은 아직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다. 이게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아직 그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훌륭한 뮤지션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상실이나, 우리가 잃은 것은 그뿐이 아니다. ‘고스트스테이션’ 세대에게 신해철은 가수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은 그가 골라주는 음악들을 통해 감각을 기르고, 그가 사회를 향해 퍼붓는 발언들을 통해 가치관을 형성했다. 그들이 신해철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제 정체성의 일부가 상실됐다고 느끼기 때문이리라.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어른은 소년이고,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소년은 어른이다”.

 

왜 그런지 몰라도 내 머릿속에서 ‘로커’라는 말은 체제에 저항하는 전사의 이미지와 얽혀 있다. 그저 나만의 환상일지 모르지만, 이 전사로서 로커는 금지된 욕망을 대변함으로써 낡은 도덕과 관습에 억눌려 사는 대중에게 숨통을 터주는 환풍구 역할을 해야 한다. 신해철은 내가 생각하는 ‘로커’의 이미지에 정확히 들어맞는 가수였다. 숨막히도록 보수적인 이 사회에서 자유롭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그처럼 용감하게, 그처럼 통쾌하게 대변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앞으로는 있을까?

 

“하도 욕을 얻어먹어 영생할 것”이라 늘 장담했던 그이기에,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오랫동안 우리를 통쾌하게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있을 때 잘해”라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남긴 채 너무나 빨리 우리 곁을 떠났다. 어떤 죽음이든 상실감을 남기기 마련이나, 그의 죽음이 남긴 상실감은 예외적이다. 이 남다른 상실감은 그의 빈자리가 그 밖의 다른 누구로도 채워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리라.

 

나는 그의 존재가 고마웠다. 그가 그저 이 땅에 우리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다. 해철씨, 고마워. 그리고 잘 가.


----------------------------------------------------------------------------------------------------


http://blog.naver.com/11track/90014557501


----------------------------------------------------------------------------------------------------




신해철1968~2014 / 오비추어리(Obituary) - 김작가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2014년 10월 27일은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고 김동률이 음악 차트를 올킬한 직후였다.
  • 신해철은 두발· 교복 자율화, 사교육 철폐라는 배경의 중산층 가정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40대의 욕망을 폭발시킨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1990년대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한복판에서, 그가 떠났다.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싸이, 윤종신, 윤도현, 타블로, 이승철이 한자리에 섰다. 무대도 호텔 프레스룸도 아닌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굳은 표정으로 섰다.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신청하고자 그들이 함께 섰다.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음악인들이 신해철을 위해 기자들 앞에 섰다. 

동료 의식의 발로였을까. 5일간 이어진 조문 풍경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웅변했다. 형식은 가족장이었으나 내용은 그 이상이었다. 일반에 공개된 빈소에는 내내 수백 명이 줄을 섰다. 분향을 하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웬만한 유명인사 빈소를 아득히 능가하는 화환들이 아산병원 장례식장 2층을 국화꽃 향기로 채웠다. 조용필부터 장기하까지, 한국 가요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의 이름이 모두 리본에 적혔다.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의원을 필두로 정치인들의 이름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은 명백히 너무 이른, 게다가 석연치 않은 신해철의 죽음에 대한 허탈함이었다. 한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그리움이자, 신해철이 개척하고 상징한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었다.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

뮤지션 신해철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 시대이기도 한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였다. 발라드 가수들이 대부분이던 당시 ‘그대에게’를 들고 나온 무한궤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미 시나위, 백두산 등의 헤비메탈 밴드가 그 전해부터 TV에 적지 않게 출연하던 터라 무한궤도보다 더욱 로킹(rocking)한 사운드에는 이미 익숙했다. 

문제는 리드 보컬을 맡은 사람이었다. 키보드를 치며 노래하는 것도 신선했는데, 세상에, 기타 솔로까지 하는 것이었다. 로커의 상징인 긴 머리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학생 머리를 하고 기타 속주를 구사하는 모습이란, 뭐랄까, 당시로서는 농구화를 신고 축구를 하는 것 같았다. 

무한궤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대상을 차지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온통 무한궤도 얘기만 했다. 평범한 중학생에게 TV 말고는 별다른 놀 거리가 없던 때였으니, 누구나 대학가요제를 지켜봤던 것이다. “야 어제 대학가요제 봤냐. 대상 받은 애들 죽이지 않냐” “보컬 하는 애 완전 캡짱이더라. 건반도 치고 기타도 막 쳐. 열나 잘 쳐.” 

음악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선희, 작품하나, 그리고 이상은까지 1980년대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무한궤도의 데뷔 무대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다’를 아득히 뛰어넘는 ‘멋스러움’이 그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멋스러움은 한 시대의 욕망이자 축적이었으며 그리고 폭발이었다. 재능은 종종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주머니를 뚫을 정도의 재능이란 제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뚫을 만한 주머니를 만나야 한다. 신해철에게는 1980년대가 그 주머니였다. 

1980년대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왔다.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엔 국민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돌리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했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3S정책’이 나왔고 대학입학 정원이 대폭 늘어났으며 사교육이 폐지됐다. ‘12시 통행금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석유파동의 후유증이 극복되고 수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컬러TV와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아이들은 2차 베이비붐 세대라 할 만큼 많았다. 이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 청년이 됐다. 두터운 중산층과 두터운 청년층. 이런 사회적 조건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건 당연했다.

저항과 자유의 공존, 양립

대학생의 증가는 곧 일정 기간 생산을 유예받는 계층의 증가를 의미한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정점을 찍은 것이 정치적 결과였다면, ‘신촌’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다운타운의 출현과 그 안에서 발현한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은 문화적 결과였다. 들국화와 김현식의 신화는 신촌의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저항과 자유의 공존, 또는 양립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20대에 그치지 않았다. 10대도 마찬가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불리며 심지어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 20대의 정치적 고민은 10대에게 미치지 않았다. 아직 어렸던, 호기심과 감성이 발아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건 해방감이었다. 두발 및 교복 자율화로 당시 10대는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세대였던 것이다. 시간도 많았다. 사교육 철폐는 오후와 주말, 그리고 여가를 선물했다. 인터넷은커녕 PC통신도 없던 시절이다. 문화의 보급 통로는 TV와 라디오, 잡지가 전부였다. 

TV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이 기성세대까지 아우르고자 했다면, 음악 프로는 명확히 청년 세대를 겨냥해 전파의 화살을 쐈다. 1980년대까지 음반시장에서 팝과 가요의 시장점유율은 8대 2였다. 사람들은 팝을 즐겨 들었고, 음반 구입이라는 능동적 소비를 주저하지 않았다. 밤마다 심야 라디오방송에 귀 기울이며 녹음 테이프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청계천을 누비며 불법 복제 음반인 ‘빽판’을 사들였다.

당시 라디오 키드의 문화를 신해철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 초보자는 ‘2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장르 구분과 명곡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김기덕을 통해 초급반을 마친 다음에는 중급반 격인 ‘황인용의 영팝스’로 건너가서 심장을 때리는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다음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마스터클래스로 넘어갔다.” 두터운 청소년층이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 있는 시대였다.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그룹 ‘무한궤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해철이다.

라디오 키드의 飛上

모든 창작자의 출발은 마니아다. 바꿔 말하면 마니아는 곧 창작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팝과 록을 들으며 감수성을 키우던 청소년들은 하나둘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 욕망이 통기타였다면 80년대 욕망은 일렉트릭기타였다. 뒤늦게 소개되기 시작한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등 1960, 70년대 전설적인 밴드들과 동시대에 탄생한 헤비메탈은 음악뿐 아니라 ‘소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도대체 저런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그래서 아이들은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1세대 헤비메탈 밴드가 탄생했다.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주말마다 20대 초반의 헤비메탈 밴드들이 ‘항쟁’을 벌였고, 웬만한 고등학교에선 속속 스쿨 밴드가 등장했다. 어쨌든 호기심은 왕성했고 시간은 많았던 것이다. 

신해철 역시 이런 라디오 키드이자 로큰롤 키드 중 하나였다. 중학생 때 1970년대 하드록에 꽂혀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수위를 달리던 성적이 곤두박질쳐 결국 아버지가 기타를 부수고 말았다는 스토리는 비단 신해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던 이들이 반드시 록만 소비했던 것도 아니다. 명동 뒷골목에서 유통되던 ‘논노’ 등 일본 패션잡지와 회현동 지하상가에서 몰래 거래되던 안전지대, 체커스 같은 최신 일본 음반은 거품경제의 최전성기를 누리던 멋스러운 일본 문화에 매료된 이들에게 교과서 구실을 했다. 팻 메스니를 필두로 한 동시대 재즈 뮤지션들이 소개되면서 지적이고 세련된 음악을 추구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소비가 창작으로 폭발한 해가 바로 1988년이다.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인 그해 여름,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이 ‘담다디’로 대상을 수상했다. ‘담다디’의 주말이 지나고 온 월요일,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꺽다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이 스무 살의 키 큰 아가씨는 단숨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대상을 받으면 으레 펑펑 울던 그 전 신예들과 달리 그녀는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부모도, 친구도 아닌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했다. 후일 이상은은 ‘담다디’를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음악은 비틀스를, 비주얼은 체커스를 연구했다”고 밝혔다. 팝의 클래식과 일본 음악의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무한궤도 신드롬

이상은이 대상의 영광을 누렸던 그해의 강변가요제에 신해철도 참가했다. ‘아기천사’라는 그룹으로. 후일 자신의 솔로 앨범에 실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원곡 격인 ‘그리움은 기다림의 시작이야’라는 노래로 출전해 3차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탈락한 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가요제에서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약관의 패기였을까. 

하지만 허세에 가까운 이 선언을 그는 반년도 되지 않아 지켰다. 그해 겨울 대학가요제 마지막 순서였던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가 무대에 올라 ‘그대에게’를 불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조용필이었다. 들국화도, 시나위도 무한궤도만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것이다. 번듯한 학벌, 잘생긴 얼굴, 화려한 연주, 인트로부터 쉴 틈 없이 달리는 전개,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무한궤도는, 그리고 신해철은 아이돌의 자리에 올랐다.

무한궤도는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가 담긴, 한 장의 앨범을 남긴 후 해체했다. 신해철은 솔로로 전향해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 발라드를 내세운 이 앨범들로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성공을 이어갔다. 여고 앞 문방구에서 그의 브로마이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언변도 화려한 덕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MBC ‘우리는 하이틴’으로 DJ 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한국 최초로 전곡을 미디(MIDI)로 작업한 앨범 ‘Myself’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10대 가수상을 안겨다줬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변진섭, 신승훈, 이승환과 더불어 이문세가 완성한 한국 발라드 가수의 계보 그 시점에 신해철이 있었다. 그가 아이돌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신해철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생활’ ‘일상’ ‘개인’

풍요의 시대 걷어찬 음악적 도발 선구자

지난 7월 jtbc 예능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신해철.

음악계에는 ‘10년 주기설’이라는 게 있다. 10년마다 한 번씩 판을 뒤집어 엎는 거물이 나타난다는 거다. 1960년대에 비틀스가 있었고 70년대에는 레드 제플린이 있었다. 80년대의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90년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에선 너바나가 등장해 얼터너티브 혁명을 주도했다. ‘X세대’라는 신조어가 너바나와 함께 등장했다. 

얼터너티브의 물결은 한국에도 상륙해 ‘록=헤비메탈’이라는 등식을 깼다. 긴 머리와 가죽재킷 대신 체크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가 새로운 시대의 록 패션이 됐다. 70년대 펑크에 팝 멜로디를 결합한 너바나의 음악은 그전까지 헤비메탈을 경원시하던 음악 소비자까지 록 팬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노래하던 ‘허무’와 ‘자아’는 때마침 불어닥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최인훈의 ‘화두’ 열풍에 딱 들어맞는 시대정신 같은 것이었다.

음악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1990년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는 더 이상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았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전대협이 해체되고 한총련이 등장했다. 1993년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표어와 함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활’을 전국 학생 조직의 어젠다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교정 내 대자보의 단골용어가 될 즈음이었다. 즉, ‘집단’이 아닌 ‘개인’이 화두가 된 것이다. 

1992년 고 최진실과 최수종이 주연을 맡은 ‘질투’는 트렌디 드라마를 표방하며 20대의 연애 그 자체를 묘사했다. 편의점이 확산되면서 밤은 소비의 시간이 되었고, 노래방이 유행하며 굳이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서태지와 신해철의 공존

갈 곳 잃은 운동권 인사들은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소비문화에 불과했던 대중문화를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1970년대 이탈리아 아트 록이 뒤늦게 소개되며 몇 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러시아 고전 영화들이 단관 개봉돼 역시 몇 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자크 라캉, 카를 융 등 현대 철학자의 이론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이와이 슈ㄴ지가 불법 복사 비디오테이프로나마 소개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역시 1992년에 나왔다. 시대적 격랑의 정점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모든 지형이 바뀌었다. 1982년 미국에서 MTV의 개국으로 음악이 ‘듣는’ 것에서 ‘보는’것으로 전환된 사건이 딱 10년 후 한국에서 일어났다. 발라드와 트로트로 양분되던 시장에 댄스음악이 순식간에 중심에 섰다. 음악의 주도권은 라디오에서 TV로 넘어왔고, 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잡기 위해 쇼 프로그램 카메라맨들은 온갖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한국어로는 절대 안 될 거라던 랩이 ‘난 알아요’를 통해 한국화했다. 멜로디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음악이 리듬 중심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모든 요소는 음악시장의 주요 소비자를 20대에서 10대 중후반으로 급격히 끌어내렸다. 19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한국 음악의 1990년대는 그렇게 1992년에 찾아왔다.


‘서태지 혁명’을 뒷받침했던 건 신해철의 변신이었다. “이제 솔로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그룹 넥스트를 결성한 것이다. 당시 시대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은 ‘도시인’, 무한궤도 시절부터 꾸준히 발전시켜온 존재론적 독백 ‘증조할머니의 무덤가에서’ 등이 담긴 앨범으로 신해철은 90년대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다. 그리고 서태지와 더불어 90년대 전반기의 대중음악혁명을 견인하는 쌍두마차가 됐다. 팝과 가요를 동시에 듣는 세대의 뒷받침이 있었다. 새로운 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세대의 층이 그만큼 두터웠던 거다. 

그러한 지지를 발판으로 신해철은 자신의 야심을 더욱 거대한 규모로 구현한다. 1994년,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넥스트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으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결합한 이 앨범은 한국 록 초유의 블록버스터였다. 가사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깊어졌고,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불러와 다듬은 사운드는 이전의 한국 대중음악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굿바이 얄리’ 같은 발라드 이면에는 ‘껍질의 파괴’ ‘The Ocean’같은 대곡이 존재했다. 샤우팅 창법과 속주 기타는 ‘한국에도 이런 애들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오직 서구 록만 듣던 도도한 마니아들은 넥스트의 이 야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이 얼터너티브 록을 전격 수용하며 팝의 최신 트렌드와 한국 대중음악의 시제 일치를 이어갔다면, 넥스트는 1980년대부터 이어져오던 한국 록계의 열등감을 한 방에 청산했다. 염원을 이루어냈다. 

신해철의 음악적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테크노’라는 말조차 낯설던 1996년 윤상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를 결성, 전자음악을 시도했으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OST를 맡아 지금 들어도 웅장하기 그지없는 스코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야심과 재능이 뿜어내는 빛을 받아 안기에는 시대가 또다시 변하고 있었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후 생긴 공백을 메운 건 H.O.T.였다. 아티스트의 재능이 아닌, 기획사의 능력이 시장을 주도하는 세상이 열렸다. 홍대 앞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인디신에서 넥스트, 크래시 등은 공룡처럼 거대한 존재일 뿐이었다. 넥스트와 그 외 활동을 통해 쌓아온 예술성과 대중성은 또 한 번의 새로운 흐름 앞에서 흔들렸다.

신해철이 택한 건 정면돌파였다. “밴드로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는 1997년 넥스트를 해체했다. 그리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크롬’이란 이름으로 전자음악 앨범을 발표하고, 세계적 프로듀서인 크리스 탕가그리스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했다. 대중과의 타협 같은 건 없었다. 넥스트를 결성하며 그랬듯 그는 늘 자신의 음악적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신해철은 말한다. “오랫동안 하다보니 어떻게 해야 평론가들이 좋아할지 예측이 된다. 하지만 1997년부터 더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넥스트를 해산할 때 더 올라갈 곳이 없어서 해산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평가와 판매를 원한 적이 없다. 이후부터는 철저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1997년까지의 내가 인기 있는 소설가였다면 이후부터는 논문을 썼던 셈이다.” 

하나는 분명하다. 그 실험들이 없었다면 2002년 월드컵 때 전국을 쩌렁쩌렁 울렸던 ‘Into The Arena’의 박력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21세기의 신해철 음악 중 가장 잘 알려진 곡이 이 노래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난 mp3는 급격히 빠른 속도로 음반 시장을 몰락시켰다. 팬덤의 강력한 숭배로 아이돌은 건재했다. 20, 30대 여성을 주 소비층으로 삼는 ‘웰 메이드가요’ 역시 충분히 고난의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신해철을 위시한 장르주의 음악가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팬덤도, 유사 연애감정도 없는 시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신해철은 자신의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통해 심야 라디오 프로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던 그는 자신의 간판 프로가 된 ‘고스트 네이션’을 통해 막강한 라디오 팬덤을 구축했다. 그의 ‘음악’보다 ‘말’이 더욱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미 라디오의 패러다임이 음악에서 토크로 넘어갔던 때, 그는 다른 DJ들은 하지 않는 말들로 자신의 시간을 장악했다. ‘마왕’이란 별명이 생긴 것도 그때다. 남들이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신문 배달하는 청년의 사연을 소개했다. 아이돌 음악이 라디오마저 장악했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인디음악을 틀었다. 기행을 주저하지 않았고 사회적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숭배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활자화하고 이슈가 됐다. 라디오를 통해 어젠다 세팅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DJ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신해철밖에 없다.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2002년 대선에서 그는 한 달 동안 방송도 접은 채 노무현 후보 당선을 위해 앞장서며 소셜테이너의 원형을 세웠다. 그전까지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음악이 민중음악의 역할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는 가사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신의 세계관을 일치하려 활동했던 것이다. 신해철이란 가수의 탄생을 지켜본 세대가 사회 주체가 돼 뮤지션과 팬이 아닌,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원인이었다.


꿈꿀 수 없는 시대

그런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오랜 공백 끝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 돌아오려던 찰나였다.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던 날, 김동률이 음악 차트를 올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갔다. 1990년대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한복판에서 그가 갔다. 그때를 추억하던 세대가 접한 이 갑작스러운 부고는, 그래서 그들의 시대가 황혼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나침반 같은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뮤지션의 죽음’ 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한 시대의 끝’이라는 함의로서 작용하던 밤. 그날은 2014년 10월 27일이었다.

억압과 자유가 기묘하게 공존하던 1980년대를 자양분으로 성장한 세대가 1990년대 대중문화 혁명의 주체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대적 운동의 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모든 곳에 신해철이 있었다. 유행과 인기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때로는 대중이 그를 따랐고, 때로는 시민사회가 그를 지지했다. 한 시대의 감성을 만들어냈고, 한 시대의 표현 영역을 극단까지 확장했으며,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했던 신해철의 때 이른 죽음에 온 사회가 애도한 것은 ‘좋았던 시절’의 갑작스러운 종언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었을까. 

그만한 재능을 가진 스타는 또 등장할 것이다. 그만큼 노력했던 스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런 재능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재능과 취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사교육의 노예로 살아간다. 심지어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철저히 교육제도의 틀 안에 들어가버렸다. 10대 혹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스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기획사의 시스템 안에서 아이돌로 키워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이 꿈을 꾼다는 건 사치가 됐다. 그 꿈을 꿀 수 있는 아이들도 점점 줄어간다. 압도적으로 많은 기성세대의 벽에 부딪혀 그들의 꿈은 시대와 공명하지 못하고 막힐 수밖에 없다. 다시는 신해철 같은 아이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확신 비슷한 생각이, 그래서 그 누구의 장례식보다 짙었던 국화 향과 함께 피어오른다.


입력 2014-11-20 13:24:00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3479/1)






[신해철 2주기] 음악만큼이나 '말' 잘했던 사람... 그의 빈자리가 크다

김제동 이전에 '마왕' 신해철 있었다


2014년 10월 27일, 신해철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연합뉴스


신해철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시대가 해괴해지니 그의 존재는 유독 크게 느껴진다. 언제나 약자 편에서 바른말을 했던 '입'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소셜테이너'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가장 적극적인 '사회 참여' 연예인이었던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느 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신해철이 그간 해왔던 '사회 참여 발언'을 되돌아보며 추측해보도록 하자.

2002년, 신해철은 '광장'에 나섰다

신해철은 이전부터 자신의 가사를 통해, 또 라디오 <FM음악도시>와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진 않았다. 그의 발언이 어디까지나 뮤지션과 '라디오 디제이'라는 직업적 틀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12월, 그는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TV 찬조연설에 출연하고, 유세장에 함께 다니며 '노무현 지지'를 호소한다. 현재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김제동이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회를 보면서부터 '소셜테이너'로서 부각됐다면, 신해철은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 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 2002년 겨울에 아빠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었어'라고 물으면 '어 아빠는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뭐 정치하고는 무관하고 그때는 음악실에서 열심히 곡을 쓰고 있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도저히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저는 사람 사는 세상,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이번 12월 19일에 노무현 후보에게 담아서 띄워보고 싶습니다.
- 노무현 후보 TV 찬조 연설 중

2002년 노무현 후보 찬조 연설의 한 장면ⓒ SBS


신해철의 입을 열게 만든 직접적 계기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그해 11월 29일 열린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오프닝쇼에서 싸이와 함께 '킬러'라는 곡을 부르며 모형장갑차를 부수는 반미 퍼포먼스를 보였다. 두 명은 앞서 9월에 열렸던 '심미선 ·신효순양 추모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신해철은 11월 30일 광화문 촛불시위에 나서서 미국을 향해 "그따위로 하려면 나가라" "양키 고 홈"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노무현 찬조 연설에도 이 사건이 언급됐다.

노무현 정부에 반기를 든 신해철

노무현 정부는 초기부터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신해철은 참여연대의 '파병반대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참여해 "이번 참전 이유로 '국익'을 내세우는데 이는 더 큰 국익을 보지 못한 좁은 생각"이라며 "파병한다면 향후 우리 후손에게 도덕적 부담감만 물려주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의 정치 성향은 사실 예전부터 민주노동당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왜 노무현을 지지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치에 뜻이 없었기에 이런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가수 신해철씨가 지난 2003년 3월 21일 청와대앞에서 이라크파병 반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씨는 이날 '상복'의 의미로 검은색 양복, 넥타이, 신발을 착용한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오마이뉴스 김지은


'자 이제 민노당에 마음의 빚을 갚자, 당원 가입을 하자' 그랬더니 와이프가 "오빠의 일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요만큼이라도 터치하고, 그러는 것 봤냐, 하지만 이건 안 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어" 그랬죠. 

"이제 와서 당원으로 입당을 하면, 누가 봐도 (아내 입장에서)오빠는 정치를 할 것으로 보인다는 거죠. 당적을 옮겼을 뿐이지.
- <신해철의 쾌변독설> 95p~96p

이후 신해철의 행보는 거침 없었다. 그해 9월에는 문신 예술가였던 김건원씨가 병역기피자에게 문신을 해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자 공개 탄원서를 제출했고, 12월에는 김건원씨 '후원 콘서트'의 사회 역할을 자처하면서 '문신 시술 법제화'를 주장했다. 2005년 이후에는 MBC <100분 토론>에 6번이나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사회 참여 연예인'으로 거듭난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논쟁 빠짐없이 참여

노무현 정부 시절은 한창 '개인의 자유' 논쟁이 가열되던 시절이었다. 사회를 지배하던 권위주의가 사라져간다고 믿었고, 각계에서 헌법에서 규정하는 '자유권'을 되찾으려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졌다. 신해철은 언제나 '현상 유지'보다는 '개혁'을, '통제'보다는 '자유'를, '집단' 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이슈에서 체제에 반기를 드는 쪽을 택했고,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논란이나 정책 변화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이전부터 있었다. 스크린쿼터 폐지 논란이나 MP3 불법다운로드 문제 같은 경우다. 그러나 전방위적인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갈 만큼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전방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신해철이 유일했다.  

신해철은 2005년 3월 '대마초 논란'편으로 <100분 토론>에 첫 등장한다. 그는 "대마초에 대한 지나친 공포, 잘못된 오해들이 만연하고, 대마초 흡연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 비범죄화해서 조금 더 섬세한 통제할 수 있는 룰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대중은 그의 대마초 흡연 이력을 들먹이며 속칭 '뽕쟁이'등의 비난을 퍼붓는다. 그는 훗날 이 토론에 대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표현했다.

그해 11월 '간통죄 폐지 논란' 편에서는 진선미 변호사(현 더민주 의원)와 함께 '간통죄 폐지 찬성'의견 측으로 100분 토론에 출연했다. 그는 간통은 국가 공권력이 간섭할 문제가 아닌, '사적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토론 내용과 관계없이 흰색 후드티셔츠에 검은색 가죽장갑을 꼈다는 이유로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간통죄는 약 10년이 지나서, 신해철 사후에야 폐지됐다. 

논란을 일으켰던 의상. 흰색 후드에 검은색 장갑을 꼈다.


2006년 7월 '체벌, 폭력인가 애정인가'편에서는 육체적 체벌은 호전성이나 반사회적 행동을 가져오게 되며,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와 장자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며 체벌 금지를 주장했다. 그는 2004년에 당시 MBC <고스트 네이션>을 통해 학교에서 이뤄지는 체벌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 뒤, '체벌금지법제화추진모임'이라는 커뮤니티를 직접 개설한 적도 있다.

'달라진 신해철', 기대했었는데...

이 밖에도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자신의 SNS, 인터뷰집 등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화두를 던졌다. 드림콘서트 '소녀시대 침묵' 사건, 가요 프로그램 순위제 부활, 씨앤블루 표절 논란 등 비교적 민감하다고 여겨지는 가요계 이슈에서도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영어공교육 강화 정책에 대해 '차라리 미국의 51번째주가 되는가'라며 조롱하는가 하면, 그의 인터뷰집 <쾌변독설>에서는 "오죽하면 개독교라고 욕을 먹겠는가"라며 한국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관련 기사: 신해철, 그는 왜 기독교를 질타했나)

그러나 그가 언제나 '바른말', '올바른 행동', '합리적 판단'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전형적인 '록커' 기질이 있었다. 청취자를 향해 "나 방송 안 해"라는 식의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고, 소위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경솔하고 과격한 주장을 펼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런 성향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바로 2009년에 일어났던 '입시학원 광고 모델'과 '북한 미사일 축하' 논란이었다.

평소 한국의 교육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신해철이 어느 날 입시 학원 광고 모델로 등장하면서, 거의 '융단 폭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신해철은 "각하(이명박 전 대통령)께서 주신 용돈 잘 쓰겠다", "난 공교육을 비판했지, 사교육 반대론자가 아니다"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팬들을 포함한 대중에게 큰 실망감만을 안겨준다.

'학원 모델' 논란에 이어 2009년 4월에 일어난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후략)"라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겼고, 이는 큰 파장을 불러온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비꼰 것이다"라고 밝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일종의 '실패한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대중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신해철은 tvn <오페라스타>에서의 태도 논란, KBS <Top 밴드>에서의 판정불복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언제나 강한 발언, 경솔하고 삐딱한 태도로 일관했던 신해철이 2014년 솔로앨범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를 내면서는 사뭇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연한 SNL과 '속사정쌀롱'에서는 '독설' 대신 성찰이나 위로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속사정 쌀롱>에 출연한 신해철ⓒ JTBC


tvn <SNL 코리아>에서는 "나이를 먹으니 굳이 사람들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으며, 당시 진행자였던 유희열씨가 막말을 후회하느냐고 묻자 "가르치려 들면 안 되는데, 기술적으로 서툴렀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학원 광고에 대해서는 "자식들이 학원 갈 나이가 된 후 고민해보고 결정했어야 하는데 아쉽다"며 처음으로 후회한다고 밝혔다. jTBC <속사정쌀롱>에서는 예전의 '마왕' 대신 후배 연예인들의 놀림을 받아주고, 느긋하게 방송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패널 중에 유일하게 사연에 나오는 '32살 백수'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다그치지만 말자'고 말했던 것도 그였다.  

2012년에 담낭염 수술을 한 이후에 건강이 나빠져 한동안 활동을 못 했고, 두 아이가 커나가는 걸 보면서 그는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내심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하게,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래서 더욱 허망하다.

'야비한 시대'일수록 신해철의 말은 기억된다

최근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과 '여성혐오' 논쟁에 의해서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가속화되면서, 신해철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지적했던 발언들도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에 방송된 MBC <명랑히어로>에서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들의 성적이 뒤처져서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그게 왜 문제가 되나, 여전히 사회 나가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므로 미리 성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라며 다른 남성 패널들의 성차별적 발언을 전부 반박하는 모습은 뒤늦게 화제가 됐다.

이렇듯 사회가 퇴보할수록, 약자에 대한 폭력이 더욱 강해질수록 신해철의 말은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것이다. 세월호 침몰, 백남기 농민 사망, 최순실 게이트 등 연달아 기가 막히는 일들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그가 세상을 향해 쏟아낸 분노에 찬 말들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의 말들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되는 것을 신해철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하늘에서 간절하게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가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면, 지금보다는 세상이 조금이나마, 정말 아주 조금이나마 더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국 사회가 청년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어른, 약자들의 말을 널리 퍼트리는 대변인 하나는 더 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저 우리는 그리워할 따름이다.

지난해 10월 25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열린 '신해철 1주기 추모식 및 봉안식'에서 고인의 아내 윤원희씨가 야외 안치단에 헌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3956&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