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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유럽의 미술관

by Wood-Stock 2012. 8. 26.

이탈리아·프랑스의 알짜 미술관 9곳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유럽미술기행은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밀라노를 거쳐 프랑스 국경을 넘은 뒤 남부지방인 니스, 생폴드방스, 아를, 엑상프로방스, 마르세유를 경유해 파리와 그 근교인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정점을 찍는 12일간의 대장정이었다.

이번 여정에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들르는 바티칸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미술학도라면 한번쯤 순례하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센터는 물론 한국인들이 흔히 놓치지만 알짜 작품을 모아놓은 미술관이 줄줄이 포함돼 있다. 이들 미술관에서는 르네상스과 바로크 시대는 물론 현대미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다비드 진품 볼 수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메디치 가문 컬렉션 팔라티나 미술관

이탈리아의 숨은 보석은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 현대미술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팔라티나 미술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

보르게세 미술관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인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예술적 탐욕이 만든 컬렉션. 추기경은 교황의 비호를 받아 갖은 수단을 동원해 카라바조 등 당대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누이와 정략결혼했던 카밀로 보르게세가 거의 모든 고대 조각품을 프랑스에 넘긴 대신 소장하게 된 <승리자 비너스로서 폴린 보나파르트>가 대표 작품. 왼손에 사과를 쥔 채 장의자에 기대어 누운 반나신의 비너스는 살아 있는 듯하다. 베르니니의 걸작 <다비드>, <아폴로와 다프네>,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를 만날 수 있다.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한테 큰 영향을 준 카라바조의 <바구니를 든 소년>, <팔라프레니에리의 마돈나>, 티치아노의 <신성과 세속의 사랑>도 유명하다. 전화 예매(06-328101)를 해야 한다.


현대미술관 현대미술과 건축을 위한 공공미술관으로 2010년 개관했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다. 건물이 육면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유기체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이다. 뻥 뚫린 로비 위쪽으로 사선으로 교차하는 계단을 통해 층을 달리해 전시장을 옮겨다니다 보면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내부 모양을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다. 넓은 창문으로 들어온 외부의 경치가 내부의 작품들과 뒤섞이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피아차 만치니(만치니 광장)의 버스 종점에서 가깝다.


 로마 현대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1784년 학생들의 미술교육을 위해 만든 미술관. <깨어나는 노예> <아틀란티스> <젊은 노예> <수염 난 노예> 등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이 좌우로 도열한 ‘노예의 방’ 끝에 <다비드>의 진품을 만난다. 피렌체의 한 조각가가 이 원석으로 작품을 만들려다 실패해 버린 것을 거두어 작품화했다고 한다. 2m 좌대 위에 올라선 다비드상은 골리앗과 승부를 벌이기 직전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정면에서 보면 호기심과 자신감이, 왼쪽에서 보면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진다. 또다른 특징은 멀리서 보면 팔은 비정상적으로 길고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에 비해 굵고 길며 얼굴은 주걱턱처럼 길다. 하지만 4m 정도까지 접근하면 다비드는 완벽한 비례를 가진 미소년으로 변신한다. 두오모 광장에서 5분 거리.

우피치 미술관 전기작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간여해 완성한 ㄷ자형 르네상스 건물. 메디치 가문이 300년 동안 수집한 작품을 기반으로 800년 유럽미술의 고갱이를 소장하고 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그림과 조각, 뒤러, 루벤스, 렘브란트 등 북유럽 출신의 르네상스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해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의 핵심은 10~14전시실. 보티첼리의 <봄> <비너스의 탄생> <수태고지>를 볼 수 있다. 15전시실에는 다빈치의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20전시실은 뒤러, 25전시실은 미켈란젤로, 26전시실은 라파엘로, 28전시실은 티치아노, 41전시실은 루벤스가 중심이다. 43전시실에는 여성 화가 젠틸레스키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44실에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있다.


팔라티나 미술관 피렌체의 왕궁이었던 피티궁 내 여섯 전시관 중 하나. 역시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이다. 작품은 16~17세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작가들의 회화와 조각품이 대부분이다. 토스카나 출신의 라파엘로, 필리포 리피, 베네치아화파인 틴토레토, 베로네세, 벨기에 출신의 루벤스의 작품도 상당수다. 작품 감상 외에 기능에 맞춰 나뉜 왕궁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 가구를 그대로 살려 볼거리가 쏠쏠하다. 두오모 광장에서 가깝다.

브레라 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로마 바티칸박물관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곳. 14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 1천여점이 전시돼 있다. 만테냐, 베르고뇨네, 브라만티노 등 롬바르디아 지방을 대표하는 르네상스화가, 벨리니, 틴토레토, 티에폴로, 카날레토 등 베네치아 화파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모딜리아니의 <모이제 키슬링의 초상>(1실), 만테냐의 <죽은 예수>(6실), 벨리니 형제의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산마르코의 행진>(8실), 빈첸초 포파의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15실), 라파엘로 <동정녀의 약혼식>(24실),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만찬>(29실)이 있고, 37실에는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입맞춤>이 있다. 2호선 란차역, 또는 3호선 몬테나폴레오네역에서 가깝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건축물과 소장품 수준이 매우 높은 밀라노의 숨은 진주. 소장품 가운데 티치아노의 <동방박사의 경배>, 다빈치의 <음악가>, 라파엘로가 바티칸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의 밑그림,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가장 내세운다. 1, 3호선 두오모역에서 멀지 않다. 02-806921.


피렌체 아카데미아미술관(왼쪽), 니스 마티스미술관(오른쪽)



프랑스에서는 니스의 샤갈 미술관, 마티스 미술관, 생폴드방스의 마그 미술관, 엑상프로방스의 그라네 미술관 등이 파리의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센터와 함께 필수방문 코스로 꼽힌다.

마그 미술관 화랑 주인이었던 마그 부부가 출연해 설립한 사립 미술관. 1964년 7월 개관 때 문화부 장관인 앙드레 말로가 와서 테이프를 끊었을 만큼 모범 사례로 꼽힌다. 건축가인 루이스 세르트가 설계하고 브라크, 샤갈, 미로, 자코메티, 콜더, 칠리다, 우바크, 탈코트 등 화가, 조각가들이 참여해 건물과 정원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만들었다. 경사지를 적절히 활용해 여러 출입구로 내정과 외정, 테라스를 오갈 수 있게 설계하고, 1층과 지하는 콘텐츠에 맞게 전시를 기획할 수 있도록 빛의 유입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10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다. 휴양지 니스에서 한시간이면 닿는다.


 생폴드방스의 마그재단미술관

 

그라네 미술관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화가이자 컬렉터 프랑수아 마리위스 그라네(1777~1849)의 이름을 딴 미술관.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기증하고 건물의 한쪽 날개를 지을 비용을 댔다. 그의 작품뿐 아니라 플랑드르파 거장 로베르 캉팽, 신고전주의를 이끈 앵그르, 근대회화의 아버지 세잔의 작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퇴락한 미술관을 이곳 출신 인사들의 기증과 증여로 프랑스 주요 미술관 중 하나로 키웠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회화, 조각, 고고학 자료 등 1만2000여점이 소장돼 있다. 이밖에 샤갈 미술관과 마티스 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장해 작가 연구를 하는 사람한테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유럽 미술관 제대로 구경하는 법


미술관은 조각, 회화, 사진, 동영상 등 시각을 미디어로 하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전시하는 곳. 이들 작품은 문자 발명 이전, 또는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시절, 종교의 교리를 일반인에게 전달하여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됐다고 보면 된다. 마을마다 설치돼 관공서 구실을 했던 성당 벽화와 이콘화가 예술가들의 활동무대가 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거칠게 보면 르네상스 시대가 큰 분수령. 작품의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며 신이 서 있던 자리에 울근불근 근육을 가진 인간이 들어선다.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 등 거장들의 작품도 알고 보면 상징적 표현으로 족하던 작중 인물을 인간으로 대체하면서 해부학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이어 교황권과 절대왕권이 차례로 흔들리면서 교황과 왕후장상의 전유였던 작품의 향유층이 부르주아 시민계급으로 확대됨에 따라 보통사람들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인물화와 사건화의 배경이던 풍경이 독자적인 장르가 된다. 종교의 힘이 기울기 시작하는 중세 이후 뭇 미술관들이 서서히 모양을 갖추게 된 데는 이런 숨은 그림이 들어 있다. 이러한 흐름을 깔고 작품을 보면 언뜻 복잡해 보이는 미술관의 풍경이 일목요연해진다.

미술관을 즐기는 또다른 방법은 작가들이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

가장 큰 줄기는 원근법의 정착.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볼록 튀어나온 것은 그가 본디 조각가였기 때문이지만, 그에 앞서 원근법을 고민한 조토 디본도네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 볼록그림이 나오기 전에 또다른 단계인 깊이 사라지기 기법을 거친 점도 주목하면 재미있다. 앞면에 인물을, 뒷면에는 앞면의 배경을 깊숙이 사라지는 풍경으로 그린 프란체스카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사진)도 원근법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다.

작품에 드러나는 개별적인 요소를 당대 또는 전·후대의 작품들과 비교하기도 좋은 감상법.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이 성서의 인물과 엮이는 과정은 신학의 성립 과정과 흡사하다. 수없이 반복돼 그려진 수태고지, 성모의 승천, 피에타, 예수의 고난 등의 작품을 서로 비교하여 작가의 세계관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대화가들한테서 르네상스 그림과 조각들의 잔영을 읽어내기도 재밌다.

도판으로 본 작품들을 실제로 놓인 자리에서 실물을 보는 감동을 놓칠 수 없다. 예컨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실제 시스티나성당의 바닥에서 바라보면 천장 중앙에서 시작해 순차적으로 신·구약 이야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 천장의 모양에 따라 인물들을 배치하면서 남모를 웃음을 머금었을 미켈란젤로를 그려볼 수도 있다. 미술관으로 옮겨와 맥락을 잃은 각종 종교화도 제단의 모양을 상상하면 그 의미가 갑절로 늘어난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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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마을 오베르쉬르우아즈

밀밭에서 무덤까지 고흐를 찾아서


고흐의 <카페 테라스의 밤> 모델이었던 아를의 한 카페와 실제 작품(작은 사진)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7㎞가량 떨어진 오베르쉬르우아즈. 전형적인 시골마을이 이름을 얻은 것은 그곳에 고흐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미술에 입문한 그는 8년여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900점의 그림과 1700점의 스케치를 남겼다. 죽기 한해 전 작품 한점을 팔았을 뿐, 동생 테오가 대주는 돈으로 연명했던 그에게 캔버스에 찍어 올린 물감 튜브 하나하나는 식사 한 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위에 떠는 겨울 밀처럼 마지막 두달 동안 이곳에서 8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로마~피렌체~니스~생폴드방스~아를~파리를 경유하는 유럽미술기행. 12일 여정 끝에 비로소 인상파에 이른 셈이다.


 

작품 속에서 마차가 지나던 랑글루아 다리는 기능을 잃은 채 기념물이 됐다



오베르의 계단, 도비니의 정원 등 고흐 그림 속 장소가 곳곳에

서른일곱 고흐가 숨을 거둔 라부 하숙집 다락방. 그곳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은 낡아서 삐걱거렸고, 침대 하나와 세숫대야 하나면 족한 방에는 천창에서 떨어진 햇볕이 사선을 그렸다. 수도사처럼 외로운 고흐의 시간이 박제된 그곳에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티끌세상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고흐의 방 전후에 거쳐야 하는 기념품 매장이 훨씬 넓고 편했다.

골목에서 문득 만난 <오베르의 계단>. 아낙 넷이 걸어 들어가는 골목길에 동양인 30여명이 두런거렸다. 오른쪽으로 난 계단에는 잡초가 어지럽고 그림 속 빨간 지붕의 건물은 무성한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꺾어 3~4분 걷자 뾰죽한 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회를 바라보면서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성모교회는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듯한 모양으로 서서히 바뀐다. 아! <오베르의 교회>다. 꿈틀거리는 교회는 그가 즐겨 그렸던 사이프러스의 변형.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향이 종탑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로 치환된 것. 고흐가 이젤을 놓고 몽당붓 방아를 찧었을 법한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들이대자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진득하니 머물며 고흐의 기도에 동참할 수는 없는가.

오른쪽 언덕길은 무덤으로 가는 길. 가난한 화가는 죽어서도 공동묘지 뒤쪽 구석자리에 묻혔다. 육개월 뒤 그의 분신이었던 동생 테오가 뒤를 따랐고 1914년에 형의 곁으로 옮겨왔다. 형제의 무덤에는 봉분 대신 아이비가 무성했다. 화가는 죽은 뒤 서서히 빈센트 빌럼 반 고흐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은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빛난다. 살아서 이름없고 죽어서 이름없을 사람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앞서 묵상에 잠기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실제 풍경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재현 위해 주민들이 밀농사, 오베르역은 갤러리 겸해

묘지 맞은편 밀밭으로 난 길. 주민들은 관광객을 위해 밀을 심고 고흐의 그림 입간판을 세웠다.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 밀밭과 꿈틀거리는 코발트 하늘이 대비를 이루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가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밀밭은 한참 전에 수확이 끝나고 뙤약볕에 그루터기 색이 바랬다. 까마귀 대신 비행기들의 배기가스가 너절한 직선을 그렸다. 주민들은 까마귀까지 날려 현장을 재현하고자 했다는데 다른 데로 날아가 버렸다나 어쨌다나.

무덤을 본 사람들은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일행과 떨어져 들른 오베르역. 열차가 하루 몇 차례 다닐 뿐인 그곳은 갤러리를 겸했다. 길 건너 고흐공원은 마을 노인 몇몇이 벤치에서 무료한 시간을 죽였다. 비쩍 마른 동상 속 고흐는 오른손에 초크를 쥐고 있었는데, 초크의 끝이 닳아서 반짝거렸다. 필시 나처럼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이 쥐었다 놓았다 한 흔적이리라. ‘가셰 의사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만국기가 걸린 ‘마을호텔’을 만났다. 뜰 앞에 주차한 자동차들을 제거하면 <오베르 마을회관>이 분명 맞는데 안내판이 없다. 피자집에서 피자 한판을 사서 나처럼 길을 잃은 숙녀 한분과 골목길 그늘에 자리를 폈다. 식후에 찾아간 ‘의사 가셰의 집’. 담벼락에 붙은 <의사 가셰의 초상> 속에서 박사는 삐딱하게 고개를 고인 채 이렇게 물었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마을을 헤매고 다니는 이유가 뭔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보는 즐거움이 하나. <카페 테라스의 밤> <별이 빛나는 밤에> 등 고흐가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오기 직전 2년 반 동안 머문 아를에서 시작된 놀이다. 왜 그는 하필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했을까.


오베르쉬르우아즈 공동묘지에 있는 고흐 형제의 무덤


반복적으로 그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귀를 자른 까닭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다음. “이 남자는 뭔가 강렬하게 느끼고 있구나, 매우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야.”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 동시대에서 동떨어져 고립된 화가의 외로움은 얼마나 지극했을까. 자기와의 싸움 끝에 겨우 얻은 그림에 대한 자신감은 얼마나 허약했을까.

아무래도 우리가 현대미술사의 초입에서 헤매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우리 선배들이 일본에서 인상파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일본의 색채와 풍광에 열광했던 인상파한테 경도된 일본인들의 정서에 닿아 있는 것. <랑글루아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은 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와 비슷하고 심지어 자화상 속 그의 눈은 일본인처럼 쪽 찢어져 있지 않은가.

오베르쉬르우아즈(프랑스)=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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