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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 서울시향 논란

by Wood-Stock 2011. 12. 28.

정명훈 사태에서 정명훈을 걷어내자 - 황종욱(@yocla14)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에 대한 반박과 향후 발전적 논의를 위한 제언

 

김상수가 프레시안을 필두로 미디어오늘, 한겨레 등 여러 매체에 정명훈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면서 불붙은 논쟁이 이제 20일을 훌쩍 넘겼다. 그 와중에 진중권, 목수정, 김갑수 등이 제각각 트위터나 블로그, 칼럼 등을 통해서 말을 보태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의 논쟁 상황을 요약해보면 초반의 문제제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오로지 정명훈에게 모든 담론의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평소 고전음악에 대해서 언론이 보였던 관심에 비하면 지난 20일 동안 고전음악이 온 국민으로부터 받은 관심은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지만, 논의의 폭은 오로지 정명훈이 누구인가의 문제로 축약되어 있었다.

 

김상수, 2011.12.02 정명훈, ‘토목공사식 성과주의’ - 한겨레

김상수, 2011.12.06 정명훈은 왜 MB 취임식에 '환희의 송가'를 지휘했을까 - 미디어오늘

양창섭, 2011.12.06 김상수 씨의 칼럼에 대해 - http://blog.naver.com/leclair/10126058169

김상수, 2011.12.07 정명훈 연봉,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 - 미디어오늘

김상수, 2011.12.12 서울시는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1 -미디어오늘

김상수, 2011.12.12 박원순 시장, 정명훈 연임 결정할까 -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2 -미디어오늘

김갑수, 2011.12.22 정명훈과 진중권, 우리를 착잡하게 만든다 - 오마이뉴스

김상수, 2011.12.23 "박원순 시장에게 묻는다, 정명훈 재계약이 최선이었나" -미디어오늘

 

논의의 과정에서 소위 진보 미디어들이 담론의 축적을 심각하게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 작금의 상황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중권의 트윗들을 가지고 아예 그를 제목으로 소환하면서 정명훈을 서둘러 옹호한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의 동생 아닌가?”(김갑수)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정작 서울시향의 직원이 김상수에게 답한 블로그 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목수정과 진중권의 고공난타전에서 그들의 메일 내용, ‘낙서장에 쓴 글들까지 기사화되었지만 블로그 생태계에서 자라난 담론들에 대해서 진보 언론들은 무관심했다.

 

굳이 언급하자면 미디어오늘은 김상수에게 양창섭의 포스트에 대해 질문하긴 했다. 불행히도 김상수의 대답은 참담했다. 그가 빠져나가기 가장 쉬운 구멍을 찾은 것을 비판하지는 않겠다. 그는 자신이 떠든 내용들이 모조리 허물어지는 파국 앞에서 매우 인간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자선음악회라는 표현을 곡해한데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고, 1년 내내 단 하나의 오케스트라만 맡는 지휘자란 없다는 반박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아니, 자신의 인터뷰에서 그 주장을 반복했다. 그 문제에 대해 내가 트위터 상에서 문제제기를 하자 그는 내가 네티즌으로부터 일부만 받았어요라는 말로 빠져나가려 했다. 일반적으로 일부만을 읽었을 때 나도 그 글을 봤다. 내 팩트는 정확하다”(김상수, 2011.12.23)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김상수가 기사의 댓글이 나의 의도를 잘 요약했군요라는 말을 한다는 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비참한 자백인지를 알았으면 한다. 의도가 어떤 자명한 섭리가 아닌 이상에야, 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전적으로 논지전개 과정의 명징함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의 의도는 불행히도, 그것을 떠받치는 논거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함께 침몰했다. 그와 어떤 섭리를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계시였는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그의 글은 그저 순수한 지면낭비에 불과했다.

 

이 글의 목적은 간단하다. 문화와 공공분야가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예비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말 많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나는 김상수가 미디어오늘, 프레시안, 한겨레를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것이 그의 논지를 어떻게 약화시키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 검토하고 나면, 김상수가 문제를 제기하는 프레임은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유의미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글의 마지막의 세 개 장에서 나는 정명훈에 가려져서 제기되지 못한 문제, 즉 공공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고전음악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였다.

 

 

1. ‘세계적이지 않은정명훈.

 

이런 민망한 표제를 달고 나는 김상수가 자신의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서 구구절절 주장하는 내용인 그는 세계적인 거장이나 마에스트로가 아니다”(김상수, 2011.12.23)라는 명제를 검증하려 한다.

 

많은 이들은 세계적이라는 말에 이력이 난 것 같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말이 떠다니는 이 담론의 풍경은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사실 이번 논쟁에서 수많은 말들이 본디의 개념을 이탈해서 흉기와 같이 쓰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적이라는 말, 정확히 말하면 세계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부정형으로 뭔가를 정의하려니 참으로 갑갑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세계적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김상수는 그것을 해냈다. 온갖 잡다한 사실관계들을 소환해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중에 진실인 것을 찾기는 어렵다.

 

김상수가 세계 4대 오케스트라를 운운하면서 내년 시즌 정례 연주회에 초청받아 지휘하는 지휘자 명단에 그는 없다”(김상수, 2011.12.23)는 주장을 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비판하는 문화적 식민지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분류가 희극적일 뿐 아니라 세계 몇 대를 꼽아가는 그 자체가 이미 문화적 식민지 의식에 포섭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 아닌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고 그 세계 4대 오케스트라 운운하는 이야기를 받아준다고 해도, 정명훈이 2008년 자신이 언급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로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독일에서 투어를 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이 문제를 제기한 트위터리안(@britz0641)에게 놀랍게도, ‘내가 쓴 글엔 2008년은 언급 안했음이라는 말로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2012년 동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 전체를 정명훈이 지휘한다는 사실을 내밀어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2010년 암스테르담에서 정명훈이 동 오케스트라를 여러 차례에 걸쳐 지휘한 것까지 누락한 걸 보면 도대체 김상수는 무슨 자료조사를 한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왜 하루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가? 다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음악 동호회인 고클래식의 동호인들이 작성한, 1969년부터의 정명훈의 연주 목록 아카이브를 덧붙여둔다.(http://t.co/ES4yHztm)

 

더불어 좀 늦게 논전에 뛰어든 김갑수는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는 이상한 가정을 설파하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김상수보다도 피상적인 논의다. “대략 10명 정도의 세계적 지휘자를 선택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세계4대 오케스트라에 못지않은 황당한 이야기인데, 더 웃긴 건 김갑수는 자기는 그 열 명에 정명훈을 넣을 것이지만, “외국인일 경우 얼마든지 나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거란다. 정명훈이 훌륭한 지휘자라는 판단을 얻기 위해서 외국인들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건 불행히도 그들이 그토록 토목 중심의 성과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행태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김갑수는 프랑스 출신의 음악인들이 지나치게 시향에 많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도 서양악기 연주를 전공하는 친구”(김갑수)의 권위를 굳이 빌리는데, 수사의 한 방식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서양음악의 논리를 타자화시키는 것이 논의에서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나는 정명훈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므로 김상수의 논변들의 잔해 위에 정명훈이 왜 세계적인지를 추가적으로 논하지는 않겠다.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제시한 사실들은 김상수가 굽히지 않고 반복하는 정명훈은 세계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반박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사실 다소 희극적인 이 문제제기는 그가 시장이라는 말을 하면서부터 심각해진다.

 

 

2. 시장으로 나온 정명훈.

 

김상수는 중앙일보에 대해서 반론을 하면서 시장(market)”이나 경제라는 개념을 몇 차례 반복하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말은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라는 단정이다. 그의 논의에서 특이한 고리는 한국 말고 미국이나 일본, 또 그가 거주하는 프랑스 어느 도시에서 연 20억원 이상의 돈을 한 도시가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예술감독 1년 보수 및 경비로 정명훈씨에게 지급할 수 있을까?”라는 말과 바로 다음 문장, “해외 클래식음악 시장에서 정명훈은 그 위치에 있지 않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의 연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가 왜 그렇게 세계적인 것에 집착했는지가 드러나는데, 한마디로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한국에서만 말하는 세계적인 지휘자”(김상수, 2011.12.02)에게 왜 그렇게 큰돈을 주냐는 것이다. 김상수에게 시장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가는 얼마나 세계적인가와 동일한 문제다.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받고 있는 평가가 온당한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세계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김상수의 문제는 계속 이렇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인데, 그는 다른 오케스트라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곤경에서 탈출하려 했다. 더불어 프레시안의 허환주는 자신의 기사에 정 감독의 연봉은 이전에 지휘했던 바스티유 오페라단과 라디오 프랑스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술했는데, 그렇게 알려준 게 도대체 누구냐고 묻고 싶다. 가급적이면 믿을만한 소스를 사용하시라.

 

양창섭은 자신의 포스트에서 1992년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 재계약을 하면서 연봉을 점차 높여 2000년에는 800만 프랑, 당시 환율로 13억을 받을 예정이었다는 기사를 인용했는데, 김상수는 여기에 대해서 근거를 대고 못하면 책임지라고 윽박질렀다. 물론 내가 그 근거를 제시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양창섭의 공개적인 멘션에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1992124일자 동아일보는 Le Point지를 인용하여 정명훈의 재계약조건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는 양창섭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 1994년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의 지리한 공방 끝에 돌아와 마지막 공연을 지휘한 뒤에 나온, 동일한 재계약 내용을 다룬 L'Express지의 기사를 김상수에게 링크해주었는데, 그는 대뜸 내용이 틀렸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의 분규에서 받은 배상금(indemnités)과 그의 연간소득(gain annuelle)조차 혼동하고 있었다. 김상수는 자신이 프랑스어를 읽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당당했던 것인가? 허환주가 알고 있는 정명훈의 연봉은 어디에 있는 연봉인가? 설마 1992년이라 해도 ‘13이니까 20억보다는 작다는 논리인가? 지적 성실성이 결여된 이러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누르면서 정명훈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고자 한다. 팩트의 측면에서 김상수가 정명훈에 대해 제기한 쟁점들의 대부분은 허위다.

 

막간극 하나. 서울시의원 민주당 장정숙은 “‘서울시민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는 시향교향단이 마치 서울시민에게 봉사와 무료의 공연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내막에는 세계 최고의 개런티가 회당 숨겨져 있었다는 수준 이하의 지적을 하는데, ‘무상급식이라고 해서 급식 노동자들도 무료로 일하라는 이야기냐는 촌철살인의 반박(@socio59)을 옮겨두는 것으로 더 이상의 말을 줄인다.

 

막간극 둘. 목수정은 뜬금없이 자기 블로그에 문화적인 공로와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의미에서주불 한국대사관이 정명훈에게 한불문화상을 주려다 한국문화원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내용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일전에 트위터에서 반박되었듯이 정명훈은 이미 2001년 그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쯤 되면 한숨 나온다. 최소한의 팩트 검증을 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웃음거리는 안 되지 않겠는가?

 

 

3. ‘언터쳐블한 정명훈 - 김상수의 문제제기 방식

 

지금까지 길게 이어진 사실관계를 보며 어떤 이는 통쾌할 것이고, 어떤 이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MB선동의 소재 중 하나로만 정명훈을 인식해왔다면 그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것이다. 물론 정명훈이라는 사상의 오물덩어리에 대한 근원적 증오를 불태우는 이들에게도 저 사실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분들에게는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는 방식의 문제제기는 잘해야 진영 내 결속을 도모했는지는 몰라도 진영 바깥에 있는 이들을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며, 진영 내부에서조차 이탈을 양산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양창섭이 지적했듯이, “정명훈이 00보다 많이 받는데, 00보다 나은 지휘자냐? 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도 우문이지만, 토대가 허약한 사상누각이다. 김상수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그가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은 오히려 정명훈을 더욱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보내버렸다. 최소한 이런 식으로 팩트 전쟁을 하고 싶었으면(그가 인용한 여러 수치들이 논의의 장식품 이상의 효과를 노린 거라면) 조사라도 더 했어야 했다. 김상수가 상식을 요구하며 기를 쓰고 허구의 팩트를 전달할수록 정명훈을 옹호하는 이들은 김상수의 오류를 정정하고 그가 알지 못하는 클래식 음악계의 특수한 관행을 지적하면서 점점 멀어져갈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김상수가 자신의 모든 글들에서 정작 비판하고자 하는 토목공사식 문화성과주의의 논지전개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스스로 제시한 사실관계에 번번이 걸려 넘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하게 정명훈의 시장가치를 재단하려고 한 그의 문제제기 방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정명훈의 발언을 입맛에 맞게 잘라서 인용한다. “이번 투어를 하면서 서울시향에 투자하면 확실한 수익을 책임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 “수익은 정명훈씨에게만 해당됐다.”(김상수, 2011.12.02)

 

사실 예술에서 성과와 수익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예술인들 일반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김상수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특권적인 존재이므로 문제제기가 그다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서울시의 전임 시장들이 세계10대 오케스트라라는 허언을 뿌리고 다녔으니 그 정도는 음악을 지휘하던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활짝 웃음 띤 얼굴로 선물한”(김상수, 2011.12.06) 정명훈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익이 서울시향이 투어나 레코딩을 하는 이유 중 하나“(레코딩을 통해 세계의 좋은 지휘자들을 객원으로 모시고 더 좋은 연주를 관객에게 선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양창섭)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거나 아예 존재하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상수는 자신이 미디어오늘에 실은 칼럼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서울시향에 대한 거창한 제언을 하는데, 앞으로 발전적 논의를 원한다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의 오케스트라 상황과 서울시향을 등치시키는 논리는 그만 폈으면 한다. 빈 필하모닉이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은 오케스트라들이 상임을 따로 두지 않는다거나 투표를 통해서 지휘자를 뽑는다는 등의 사실을 새삼스럽게 제시하는 모습을 보면 한심스럽다. 그들 오케스트라가 많은 음악인들의 조합의 성격을 가지고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한 실행이 적어도 백년을 훌쩍 뛰어넘는 역사 속에서 특수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김상수 등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문화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김상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먼 래틀의 시도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술의 힘이 사회적 양극화나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행동할 것”(김상수, 2011.12.12)을 요구하는데, 서울시향은 이미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구로구 등지에서 한국형 엘시스테마 사업인 우리동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다. 자기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이 현실감 없는 제언들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젊고 패기 있는 한국인 지휘자를 상임으로 두고, 수 명의 국내외 객원 지휘자를 선정해 교향악단이 과거처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단원 경쟁 체제보다 지휘자 경쟁 체제로 가는 방식으로 전환”(김상수, 2011.12.12)하자는 것인데, 경쟁을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한다는 저 획기적(!)인 발상이 그가 그토록 청산하고 싶어 하는 개발독재 시기의 잔재와 얼마나 다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서울시향은 그런 경쟁가는 관계없이 이미 수많은 객원 지휘자들을 불러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객원 지휘자들을 부르기 위해 정명훈과 예술자문 마이클 파인이 판공비로 쓴 돈을 배임운운하며 비판하던 것이 김상수 아니었는가?

 

이제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지루해진다. 김상수의 글에 등장하는 사실관계와 논리의 오류는 이제 자명하며, 그의 문제의식 중 유효하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논의를 좀 더 생산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4. ‘고전음악의 논리’ - 소외를 넘어 이해로.

 

김갑수는 “'예술은 예술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면서 왜 이 경우에는 스포츠의 논리를 가져다 대는지라는 말로 진중권의 예술의 논리라는 표현을 비판하는데, 스포츠계와 비교했을 때 정명훈의 몸값이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냐는 반론에 대해 별로 생산성 있는 대답은 아니다.

 

김갑수가 사실 김상수와 차별성을 가지고 던지는 논점이란 진중권이 사려 깊다면 최소한 서울시향 문제에 관해서만은 언급을 자제했어야 한다는 것과 악장뿐 아니라 단원의 15% 이상이 고액의 외국인 초빙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정도다. 스포츠의 논리를 가져오지 말라고 하니 현재 한국의 프로 스포츠 팀에서 뛰고 있는 수많은 용병 선수들을 이야기한댔자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다.(나는 그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가 현재 외국에 나가서 관현악단의 단원으로 활동 중인 수많은 한국 국적의 음악인들을 알고 있다면 서울시향에 대해 “‘서울시민의 오케스트라라고 하기는 좀 민망하지 않은가?”(김갑수)라는 표현을 쓰기 전에 좀 더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 던져놓고라도, 김상수가 문제삼는 진중권의 그 예술의 논리라는 표현은 모호하다. 그 모호성은 표현을 한 당사자가 보론을 통해서 해소할 일이지만, 그 표현이 다른 이들의 담론까지 막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기에 여기에서 생각을 더 진행해보기로 하자. 최소한 김상수와 목수정은 저 트윗을 정명훈의 정치적 지향과 그의 행위 일반을 모두 그가 예술가니까이해해야 한다는 도피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 같다. 나치와 푸르트벵글러, 프랑코와 카잘스가 난무하는 김상수의 칼럼이나 예술가들은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위로 기어올라가[sic] 권력자의 엉덩이를 핥든, 시민들의 손 때 묻은 돈을 횡령하든, 자유롭게 냅둬야[sic] 한다는 건 당신의 몹시 잘못된 생각일 뿐이라는 목수정의 격앙된 코멘트를 보면 그 혐의는 짙어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현재까지 김상수를 반박해온 누구도 정명훈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았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그걸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 이 세 사람 뿐이다.

 

수많은 고전음악 수요자들이 예술의 논리를 말할 때는 이 분야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고려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고전음악계 일반을 단죄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공공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을 반박하는 것은 예술의 논리로 도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고전음악이 계급음악이라는 좌파의 고정관념을 일소하고 이 문제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더불어 정명훈이라는 상징에 대한 화형식만 거행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공공영역이 고전음악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5. 공공영역과 고전음악 -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예술을 위하여

 

사실 이 문제는 지방선거 이후 조선일보의 심층 분석 보도를 통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이 기사는 공공영역 중에서도 지방자치단체가 이제껏 고전음악에 대해서 아무런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과시적인 전용홀을 지어놓고 애물단지로 전락시키는가 하면, 지역 예술가들에게 대관료도 받지 않고 공연장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지자체장으로부터 하달되는 방식으로 문화계와 지자체는 소통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여 공공영역 전반은 지금까지 고전음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지난 10년간 시정에서 서울시향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오케스트라에게 넓은 자율권을 보장했던 사실은 칭찬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민들의 품 가까이로 돌아왔다.

 

반드시 우리동네 오케스트라 같은 적극적인 사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이 들어온 이후, 오케스트라의 기량이 극적으로 향상되고 그런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고전음악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증거이다. 찾아가는 음악회는 말할 것도 없다. 좋은 음향조건을 갖춘 공연장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왜 대형교회로만 가냐는 김상수의 불평은 설득력을 잃는다. “서울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시향은 기독교 선교악단이 아니다. 서울시향은 순복음교회 등 특정 종교를 위해서 음악을 들려주는 악단이 아니”(김상수, 2011.12.07)라는 비분강개는 고작 오세훈 시장과 종교인 몇몇의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을 가지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음악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높은 접근가능성을 가지는지는 한 사회의 분배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상수가 정명훈씨[sic]가 언론 인터뷰에서 자선음악회라 말한 찾아가는 음악회의 내막을 보면 정기연주회 지휘료로 계약한 4200만원의 반값인 2100만원씩을 지휘 때마다 꼭 챙겼다.“(김상수, 2011.12.02)는 말을 한 데 대해서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선음악회라는 표현 자체가 김상수의 착각인 것은 양창섭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거니와(그가 주장의 출처로 밝힌 주간한국 기사에서 정명훈은 찾아가는 음악회가 아니라 유니세프 자선음악회를 언급한 것이다.) 찾아가는 음악회가 자선음악회라는 인식 자체가 복지를 자선 정도로 생각하는 수많은 수구우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케스트라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전적으로 공공재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이제 시대적인 추세가 아니라 말하는 김상수의 지적은 일견 타당한 듯하지만 공공영역이 고전음악에 대한 지원을 줄일 경우 그 과정에서 개입하게 될 대기업들이 음악 생태계에서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가 없다.

 

SBS 김수현 기자는 취재파일(http://curtaincall.tistory.com/91)을 통해, 지난 1115일에 있었던 삼성전자와 함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을 비판하며 대기업들의 문화마케팅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명 연주자의 대규모 내한공연 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고전음악 공연시장에서, 기획사와 대관극장 측은 생존을 위해서, 공격적 문화마케팅을 전략으로 하는 대기업의 스폰싱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고전음악의 공공성 자체가 기로에 서 있는 마당에 왜 그 부담을 공공영역이 져야 하냐는 말은 냉소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고전음악 수요자와 생산자들은 시장에서 책정된 가격에 군말 없이 따르라는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다. 최소한 경제 생태계에서 공공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참고로 이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대구시에서는 대구시향의 곽승 지휘자의 몸값이 논란이 되었는데, 문제를 제기한 대구시의회 한나라당 배지숙 의원은 대통령의 연봉이 15천만원인데, 곽승 지휘자의 연봉이 적정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진영을 막론하고, 고전음악 수요자들에게는 사회의 잉여자원이 남았을 때나 시민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비슷하다.

 

 

5. 고전음악을, 그것도 좋은 고전음악을 들을 권리를!

 

글을 맺으면서, 나는 고전음악 애호가라는 말 대신 의식적으로 고전음악 수요자라는 표현을 쓸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고전음악이 어떤 취향의 영역에 있다는 인식을 주는 저 표현은 고전음악의 공공성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희석시킨다. 또한 어마어마한 돈을 받는 정명훈을 반복해서 기사화하여 고전음악이 마치 유한계급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일부 논객들과 언론들에게, 고전음악을 듣는 이들을 폄하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자는 의미이다.

 

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김갑수의 이 언급을 읽어보시길. “서양음악, 그것도 오케스트라 음악의 애호가는 얼마나 될까? 불과 수만 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1000만 명 서울시민이 예외 없이 1년에 1300원씩의 돈을 내는 셈이라면 이것은 합당한 것일까?” 내 세금 그렇게 쓰지 말라는 말에서 무서운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문화정책은 단순한 정부의 통제를 넘어 사회의 부를 어떤 식으로 효율적이고 합목적적으로 배분하느냐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그중 처음으로 고전음악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논의의 장에 남은 것은 엉터리 사실들의 잔해와 천박한 인식들의 흔적 뿐이라 다소 허무하지만, 어쨌든 그 장에서의 논의를 발전적으로 끌어가야 할 의무가 많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 같다.

 

문화와 예술의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정치의 논리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치적 논의의 장에서 그것이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이제 왜 고전음악이 중요한지, 왜 공공영역이 고전음악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 상황을 보며 어떻게 정치의 논리가 예술의 논리를 잠식할 수 있는가라고 개탄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고전음악계는 지금까지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자체에 대해서 별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논의를 이끌어감에 있어 기본적인 지적 성실성을 놓치지 말고 진영논리를 경계하자. 그리고 모든 예술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는 자명한 전제를 서로 잊지 않는다면 향후 진행될 논의는 훨씬 생산적일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은 나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분들이 제보해주신 정보들이 아니었으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글이기도 하다.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한 문제제기에 호응해주시고 지식을 나누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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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도 되지 못하는 김상수의 정명훈 비판 (서울시향 양창섭)(http://blog.naver.com/leclair/10127763639)

 

또 하나의 글을 쓴다. 나는 김상수 작가(이하 이름만 쓴다)<한겨레> 칼럼을 반박하는 글을 올린 후 어떤 생산적인 이야기도 그로부터 듣지 못하였고, 정명훈 예술감독이 재계약을 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면서 굳이 또 한번 긁어댈 필요가 없다 싶었다. 또한 김상수의 <미디어 오늘> 기고들이 자신의 얕은 지식과 거친 예술()관을 그대로 드러내어 이미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샀기에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미디어 오늘>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인터뷰를 하면서 재계약을 결정한 박원순 시장과 정명훈 예술감독을 압박하는 것을 보고, 최종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생산적인 토론 따위는 김상수가 전혀 의도하고 있지 않으므로 나 역시 그런 이야기는 빼고자 한다.

 

물론, 이미 1225일 밤 트위터리안인 황종욱(yocla14)씨가 김상수 논리 전개의 허점과 발전적인 토론을 제안하는 글을 써서 올렸고(http://yocla14.tistory.com/50) 이로써 많은 부분들이 반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상수가 자기만이 아는 국제적인 관례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부분을 건드려왔기에, 그의 글이 미처 커버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나는 황종욱의 글과의 중복을 피해가면서 김상수의 글을 반박하고자 한다. 따라서, 내 글을 읽기 전에 앞서 언급한 황종욱의 글을 반드시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황종욱의 보론이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 이슈에 대해 이미 충분히 반박의 논리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크게 보아 김상수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정명훈은 세계적인 지휘자가 아니다. 또한 권력에 아첨하는 타락한 예술가다. 그러나 그는 서울시와의 변칙(꼼수)계약을 통해 공금을 유용하고, 특권적 대우를 받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1인만으로 발전하지도 않으며, 서울시향에 외국인 단원이 많은 것은 문제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경쟁 체제를 통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 정명훈-서울시향 식의 모델로 만들어지는 예술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위와 같은 김상수의 논지를 하나씩 반박하고자 한다.

 

 

<정명훈>

 

1. 아직도 정명훈은 세계적인 지휘자가 아니다’?

 

일단 김상수가 세계 4대 오케스트라라는, 클래식 음악을 30년 동안 좋아해왔고 이 업계에서 10년 넘게 몸담은 나로서는 처음 듣는 표현을 써가며(빈 심포니는 애교로 넘어가자) 정명훈이 세계적인 지휘자가 아니라고 깎아내린 것은 이미 황종욱이 반박하긴 했으나 첨언하도록 하자.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김상수의 이중 논리이자, 자기 멋대로 설정한 기준이다.

 

김상수가 <프레시안>에 쓴 첫 번째 글을 잠시 보자.

 

서울시향은 과연 이명박의 공언처럼 "세계 10대 오케스트라"가 됐나? 무엇으로 "세계 10대 오케스트라"를 평가할 수 있는지, 그 평가기준을 따지고 말 것도 없이 이명박의 공언과 달리 7년이 지난 현재까지 서울시향은 "세계 10대 오케스트라"가 되지 못했다. 물론 일정부분 오케스트라의 성과를 인정하는 의견도 있지만, 서울시향이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반열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나는 아직까지 들어본 바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세계 10대 오케스트라"라는 표현과 또 "세계 10대 오케스트라"가 되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고 적절한 기대인가도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장차 훌륭하고 개성적인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 앞으로 서울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오케스트라라는 시민 대중의 평가와 전문가의 음악성에 대한 평가기준은 앞으로도 나올 수 있겠지만, 수년 안에 "세계 10대 오케스트라"가 되리라는 이명박의 2005년 공언은 애초부터 현실성이 없거나 틀린 주문이고 공표(空表)가 아니었던가.

 

일단, 서울시향이나 정명훈이 세계 10대 오케스트라따위의 언사를 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자. 이런 소리는 모르는 사람들이나 호사가들이 하는 말이다. 김상수의 말대로 도대체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이런 순위나 몇 대 놀이는 일종의 평판과 평론가들의 개인적인 평가가 불충분하게나마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평론가 집단들은 종종 개인적으로 또는 전문가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순위를 내기도 한다. 역시 참고자료일 뿐이나, 이는 상위권 오케스트라들의 홍보자료로 애용된다. 가령,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1위를 차지한 2008<그라모폰>지의 발표는 해당 오케스트라에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그러나, 여전히 애호가들의 마음에서 베를린 필이나 빈 필하모닉이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김상수는 위에서 세계 10대 오케스트라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것임을 슬쩍 내비치고 있다. 아마 이는 예술가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는 등수 매기기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래도 김상수가 이것만은 정확하게 느끼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미디어 오늘> 인터뷰에서 그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클래식 애호가들이 처음 들어보는 세계 4대 오케스트라라는 표현을 클래식 음악계에서 말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개하고 있다. 이런 세계 몇 대따위의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가 있지도 않은 세계 4대 오케스트라라는 표현을 끌어온 것은 정명훈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다. 나는 이것이 그의 나쁜 점이라고 본다.

 

이 대목에서 황종욱의 지적을 반복할 생각은 없다. 좀 더 보태도록 하자. 김상수의 말대로라면 바로 엊그제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기공연을 지휘한 니콜라 루이소티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 지휘자를 아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그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솔직히 정말 모르니까. 김상수의 말대로라면, 정명훈은 1984년에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분명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고, 뉴욕 필하모닉을 무려 20일간 총 11번 지휘했다. 당시의 정명훈이 세계적인 지휘자였던가?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김상수의 기준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상수에게 재밌는 사례를 들려주고 싶다. 1999년 정명훈은 2001년부터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로 계약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의 자매 악단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정명훈을 찾아왔다. 우리를 한번만 지휘해 달라, 해보고 마음에 들면 우리도 음악감독을 찾고 있으니 우리에게 와주길 바란다, 라고 한 것이다. 정명훈이 국제적 인지도로 따지자면 더 나은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이 아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으로 가게 된 것은 그 일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 내정 기사는 찾아보면 나올 것이고 - 또 출처 못 밝히면 책임지라고 할 것 같은데 검색 능력 좀 키우시라고 굳이 링크는 걸지 않는다 - , 저 일화는 팀파니 수석 아드리앙 페뤼숑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다.)

 

정명훈이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에 안 가게 되자, 그 자리에 간 인물은 쿠르트 마주어다. 모를 듯하니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마주어는 바로 직전까지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었던 인물이다. 상스럽게 말하자면 정명훈이 버린 자리를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받은 셈이다. 마주어 전에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들을 열거하자면,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로린 마젤, 샤를 뒤투아 등이었다. 다 의심할 바 없이 세계적인 지휘자들이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정명훈이 마주어보다 낫다거나 하는 유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김상수는 예술가를 세계적인 거장과 그렇지 못한 인물들로 딱 잘라 구분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예술과 예술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2. 권력에 아첨하는 타락한 예술가

 

김상수의 예술()관은 역시나 분명해 보인다. , 예술가란 인간적으로 겸손하고 훌륭해야 하며, 올바른 정치-역사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이는 예술을 윤리나 이념으로 치환시켜서 설명하는 하나의견해에 불과하다. 당연히 정반대편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논지가 있을 것이다. 예술()가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 둘은 서로 보완적인 주장이 되어야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사회 속에서 발현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정명훈은 4200만원을 받는데, 소방관은 5만원을 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선동적인 언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김상수의 글들이 본인과 다른 생각을 가진예술가를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그의 단순한 예술()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한 그의 주장이다. 이명박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인가? 선거로 당선된 정권이다. 설사 반대했더라도 새로 뽑힌 대통령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거의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 희망을 모아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달라는 의미로 준 지휘봉이라고 하면 그것은 틀린 해석인가? 거기서 권력자에 대한 아첨을 읽어내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독심술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한 바대로, 정명훈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정기공연에서 본 프로그램과 별도로 추모음악을 지휘한 바 있다.

 

김상수가 훌륭한 예술가라고 떠받들었던 파블로 카살스는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의 백악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이 역시도 정반대로 말할 수 있다. 인기 좀 있는 대통령 앞에서 연주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아첨 아닌가? 참고로 어떤 이들이 보기에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 전에 파병을 한 미국 제국주의의 대통령이다. 유치한 표현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세상이 그렇게 하나의 잣대로 간단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정명훈의 계약>

 

3. 변칙 계약

 

다음으로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맺은 계약이 일방적인 계약이며, 변칙 계약이라는 논리다.

 

서울시민의 시장으로 한 결정이지만, 재계약 이전에 과정으로의 사실조사가 생략된 점은 큰 문제다. 그리고 연봉의 삭감으로 보도됐지만, 연봉을 보수라는 표현으로 22천만원, 지휘료를 따로 받는, ‘변칙계약문제는 전혀 바로 잡히지 않았다. 상임 지휘자라면 지휘 몇 회에 연 얼마씩으로 통괄 계약을 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고 상식이다. 더구나 예술감독까지 겸임하면서 연봉은 유럽 수준으로 보수라는 명목으로 22천만원 챙기고, 지휘료를 객원지휘자 국제 최고수준인 4400만원으로 따로 책정하는 건 변칙계약이다. 요즘 말로 전형적인 꼼수다.” (<미디어 오늘> 인터뷰)

 

지겹게 이야기하지만, 그게 국제적 관례고 상식이면, 해외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나 상임지휘자 계약서를 딱 2개만 보여주고 이야기하시길 바란다. 여하튼, 김상수는 정명훈이 상임지휘자도 하고 예술감독도 겸임하면서 예술감독 보수까지 받는 변칙계약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보자. 해외의 계약사례는 여전히 찾기 힘들지만, 독일의 음악 저널리스트인 헤르베르트 하프너가 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까치출판사)라는 책을 인용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바도는 연간 14만 마르크의 기본급, 연간 최소한 24회 연주회 출연, 매회 출연마다 24,000마르크의 추가 금액을 보장받았다.” (288)

 

이것이 1990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부임할 당시의 상황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이 Norman Lebrecht, <The Maestro Myth>, 319쪽에 언급되고 있다.) 이것과 정명훈의 계약 형식과 무엇이 다른가? 기본연봉이 있고, 최소 연주횟수를 집어넣고, 회당 출연료를 제시했다. (설마 위의 인용 문장을 24회 출연에 14만 마르크라고 해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미리 쐐기를 박자면, 이렇게 되면 24회까지 회당 지휘료는 5,833마르크가 되므로 추가 금액인 회당 24천마르크와는 엄청난 격차가 난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변칙계약을 한 것인가? 헤르베르트 하프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소문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것인가? 좀 더 김상수를 헷갈리게 하자면 아바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도 아니고 수석지휘자(chefdirigent)였다. 횟수대로 지휘료만 총액으로 계약하고 받아 가야지, 무슨 기본급인가? 아바도도 정명훈처럼 꼼수를 부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여기에 넘어갔단 말인가?

 

 

4.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

 

이 지점에서 김상수가 오케스트라의 ABC라고 할 만한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김상수가 <미디어 오늘>에 쓴 글을 인용하자.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아주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과 무관한 자신만의 이론이다.

 

해외의 경우 교향악단 중에서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와 예술감독(music director) 또는 음악감독(Intendant)은 별도의 직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따로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 상임지휘자는 계약에 의해 연간 맡겨진 연주만 지휘하고 통상 연봉 일괄계약으로 10회 또는 15회 이상의 정기공연 및 특별공연 지휘를 맡긴다. 연주를 앞둔 연습기간도 계약에서 명시하기 마련이다. 그 이외 연주 기획이나 협연자, 객원지휘자 섭외 등은 상임지휘자 역할이 아닌, 예술감독이나 음악감독이 임무를 맡는다. 단원의 해고나 기존 단원을 새로 뽑는 오디션은 상임지휘자는 관여하지 않을뿐더러 참견할 수도 없다. 물론 큰 교향악단의 소위 스타급 지휘자들은 연주와 관련된 많은 것을 맡기도 한다. 종합예술감독(General music Director)이란 지위인데, 이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 보다 상위 개념의 계약이다. 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연주곡목이나 협연자 등을 찾는 공연기획업무 전반을 지휘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한정적으로 집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개이기 때문에 책임과 의무와 시간의 투입에 따르는 넓은 활동과 모든 일의 결재권을 가지려하지는 않는 게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범례다. 서울시향의 정명훈이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를 같이 맡는 경우란 책임이 너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것이다.

 

우선 서울시향이 음악감독이라는 번역어를 쓰지 않고 예술감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나 사실상 똑같은 의미로 쓰고 있으며 영어로는 music director임을 미리 알려드린다.

 

해외 교향악단에서 상임지휘자나 수석지휘자(chief conductor, principal conductor)를 두는 경우와, 음악감독(music director)을 두는 경우가 있다. 할 일이 없어서, 이걸 일일이 찾아보았다.

 

상임지휘자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빈 심포니(빈 필하모닉이 아니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 BBC심포니, 필하모니아, 체코 필하모닉 등

 

음악감독 : 뮌헨 필하모닉, 파리 오케스트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할레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등

 

무 자르듯이 나눌 수는 없으나, 음악감독의 권한이 상임지휘자보다 크다. 쉽게 말하면 음악감독이 상임지휘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상임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대표지휘자로서 자신의 공연을 이끄는 게 주업이라면, 음악감독은 여기에 더해오케스트라의 전반적인 예술성을 총책임진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단원을 뽑고 평가하고 다른 객원지휘자 및 아티스트의 선정과 프로그래밍 등에 일정 부분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라는 말은 음악감독 하나만으로도 사실 충분하다. 그런데도 좀 더 전폭적인 직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한다. 외국에서도 종종 쓴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구글의 검색창에서 “Music(또는 Artistic) Director and Chief Conductor"-양쪽에 따옴표를 다 넣어야 하나의 단어처럼 검색이 된다-를 쳐보시기 바란다. 유명 악단의 사례를 몇 개만 들어드리도록 한다. 베를린의 주요 교향악단인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의 전임 지휘자 잉고 메츠마허나 현직 투간 소키예프는 상임지휘자이자 예술감독이다. http://www.dso-berlin.de/content/e54/e17876/index_ger.html  취리히 톤할레의 데이빗 진먼도 마찬가지다. https://www.tonhalle-orchester.ch/index.php?id=19&L=0  (이 악단들이 듣보잡이라고 말하는 무례는 범하지 않길 바란다.)

 

논지와 무관하지만, 김상수가 말한 General Music Director는 오케스트라보다는 오페라극장처럼 오케스트라, 합창단, 성악진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할 때 주로 쓰이는 개념이다. 가령 다니엘 바렌보임은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 도널드 러니클스는 베를린 도이체오퍼의, 켄트 나가노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프란츠 벨저뫼스트는 빈 슈타츠오퍼의 Generalmusikdirektor . (여기라고 극장장이 따로 없을 거라 생각하진 마시길 바란다.)

 

또한 김상수의 주장과 달리 Intendant는 음악감독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인사, 재정, 행정 등)을 총괄하는 총감독(General Manager)이다. 가령, 베를린 필하모닉의 Intendant는 파멜라 로젠버그에 뒤이어서 마르틴 호프만이 맡고 있는데, 직무기술서가 없으니 이 사람의 이력을 홈페이지에서 보시기 바란다. http://www.berliner-philharmoniker.de/en/berliner-philharmoniker/general-manager/  이 사람이 김상수가 말하는 대로 연주 기획이나 협연자, 객원지휘자 섭외 등을 맡는 사람인가? 오케스트라의 제반 행정적인 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미국 오케스트라에서는 흔히 President라고 표현하는 대표가 있고 영국에는 Managing Director가 있는데, 이것이 독일의 Intendant. 서울시향에 대표이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로 위키피디어에서 ‘Artistic Director'라는 항목을 번역하여 인용해본다. “어떤 곳에서는 예술감독이 회사를 운영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조직에서 예술감독은 예술에 관한 결정만 하고, 재정 펀드레이징 이사회 후원 홍보 마케팅 등의 행정은 General Manager, COO, Managing Director의 책임이다.”

 

김상수가 내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와 예술감독(music director) 또는 음악감독(Intendant)은 별도의 직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따로 두고 있는 경우를 보여주면 된다. Intendant가 음악감독이 아님은 반박했으므로, 어느 교향악단이 동시에 “music director”“chief(principal) conductor”직에 서로 다른 2명을 고용하고 있었던 사례를 몇 가지 보여주면 된다. 자꾸 말로만 국제적인 관례고 상식이라고만 말하지 말고 직접 사례를 들어주시라.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보편적인 사례를 들어드리겠다. 시카고 심포니에서 음악감독 다니엘 바렌보임이 사임한 후 후임자를 선정하지 못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를 상임(수석)지휘자에 임명하여 임시 체제를 운영했다. 물론 리카르도 무티가 음악감독으로 선임되자 하이팅크는 그 직책을 떠났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도 유사하다. 음악감독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사임 이후 2007년 샤를 뒤투아를 상임(수석)지휘자 겸 예술고문으로 임명하였고, 그의 임기가 끝나는 2012/13 시즌부터 야니크 네제세갱이 음악감독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이 단어들의 일반적인 용례다.

 

위키피디어에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검색해 간단한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다.

 

“In February 2007, the orchestra named Charles Dutoit to the newly created posts of chief conductor and artistic adviser for four seasons, starting in the fall of 2008 and running through the 20112012 season. This move was made to provide an "artistic bridge" while the orchestra searched for its eighth music director.”

 

솔직히 나는 수많은 오케스트라에서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들이 정확히 어떤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령,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뮌헨 필하모닉 음악감독 시절 이슈 중 하나가 음악감독으로서 객원지휘자의 연주곡목에 대한 권한이었던 것을 기억해보시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상수가 자꾸 음악감독도 하고 상임지휘자도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비상식적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5. 일방적인 계약서?

 

다시 계약서로 돌아와 이것이 일방적이라는 이야기도 짚어봐야겠다. 정명훈의 계약서를 경영관리팀의 양해를 얻어서 살펴 보았다.

 

연주 및 연습계획 수립. 연간 10회 이상 자체공연 연습 및 지휘. 부지휘자 임명. 객원지휘자 및 협연자 초청계획 수립. 연주곡목 선정. 단원 선정(선발). 단원의 위해촉, 단원평가를 포함한 고과 및 상벌에 관한 사항의 인사위원회 심의요구. 단기 및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 홍보마케팅 계획 수립.

 

이게 정명훈이 해야 할 일이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저기에 권리만 있는가? 의무는 없는가? 그리고 저것들을 하기 위해 정명훈이 아래아한글로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리석은 이야기다. 서울시향이 협연자를 초청할 때도 계약서를 쓴다. 계약 조건에 불가항력이니 뭐니 빤한 소리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돈 얼마 준다, 호텔 어디서 재워준다, 비행기 몇 장, 무슨 클래스로 준다가 우리가 제시하는 모든 것이고, 그쪽이 해야 할 일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곡을 연주한다, 가 전부다. 그 협연자더러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할지 구구절절 쓰라고 해야 하는가?

 

이 계약은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와 계약하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이 해야 할 일은 정명훈이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시향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항상 주목하고 있다.

 

 

6. 시장의 논리?

 

김상수는 정명훈이 과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정명훈이 현재 한국 말고, 미국이나 일본, 또 그가 거주하는 프랑스나 유럽 어느 도시에서 연 20억원 이상의 돈을 한 도시가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예술감독 1년 보수 및 경비로 정명훈에게 지급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해외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정명훈은 그 위치에 있지 않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 (<미디어 오늘> 인터뷰) - 한마디만 보태자. 인터뷰라고 하니 문장이 꼬일 수는 있다. 그런데, 글을 게재하려면 제발 문장은 만들어서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정명훈이 해외에서 20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누누이 말했듯이 유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음악감독)의 연봉은 정식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또한 미국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의 연봉은 오로지 금액밖에 드러난 것이 없다. 1년에 10주 일하는 사람과 20주 일하는 이의 연봉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연봉을 연도별로 보면 이렇다. 당연히 화폐단위는 미화 달러다.

 

Orchestra

 음악감독

04/05

05/06

06/07

07/08

08/09

 

 Boston Symphony

 James Levine

1,592,000

1,536,768

1,907,000

1,693,748

1,767,748

 

 Chicago Symphony

 Daniel Barenboim

2,044,679

1,910,997

 

 

 

06년 사퇴

 Cleveland Orchestra

 Franz Welser-Moest

 1,232,515

1,226,197

1,284,185

1,316,120

1,124,033

 

 LA Philharmonic

 Esa-Pekka Salonen

1,339,500

1,576,285

1,124,503

1,531,775

1,195,145

 

 New York Philharmonic

 Lorin Maazel

2,638,940

2,189,455

2,834,745

2,777,753

3,291,791

 

 Philadelphia Orchestra

 Christoph Eschenbach

1,546,000

1,586,000

2,297,000

1,749,000

 

08년 사퇴

 San Francisco Symphony

 Michael Tilson Thomas

1,636,218

1,576,874

1,779,251

1,759,604

1,588,816

 

 

위의 표에서 숫자가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급증하기도 하고 급감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 숫자가 바로 어떤 조건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증거다. 김상수의 논의가 사상누각이라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로린 마젤의 연봉이 다른 이들에 비해 대단히 많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상수의 주장대로라면 로린 마젤은 저기 언급된 지휘자들 중에서 최고의 예술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여러분들은 얼마나 동의하는가? 과연 그의 몸값은 어떻게 책정될까?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언급한 아바도의 금액은 물론 20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상당히 싼 편이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해서라는 김상수 씨의 <프레시안> 언급은 제발 잊어주시라. 미국보다 낮을 가능성은 있지만, 연봉 54천유로, 한화 9090만원 운운은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김상수는 자신있게 gehalt.de라는 사이트를 증거로 제시했는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분들은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그 사이트가 어떤 사이트인지 파악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김상수의 54000유로 근거는 다음의 링크라고 추정된다. http://www.gehalt.de/einkommen/Musikdirektor/1059540) 같은 독일인데 남부 지방 뮌헨의 사례도 들어보자. 뮌헨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었던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92, 자신의 연봉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헤르베르트 하프너의 <세계의 오케스트라>에서 인용하자.

 

그해 가을, 첼리비다케는 현재의 연봉에서 324000마르크를 더 올려달라고 요구하여 시 당국과 오케스트라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연봉은 그리 많은 음악회를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300만 마르크에 이르게 된다. 이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때문에 가스타이크 문화센터의 카를오르프 홀에서 첼리는 우리에게 너무 비싼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까지 열렸다. 결과는 마에스트로의 승리였다.” (181)

 

이런 일이 드물게나마 있었던 것이 재미있다. 여하튼, 첼리비다케의 연주횟수가 안 나오긴 했지만 재미로 주판알을 튕겨보자. 첼리비다케는 결론적으로 그리 많은 음악회를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300만 마르크(당시 한화 약 15억원)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글 앞에서 인용한 아바도는 1990년 사인할 당시로 따져, 1년에 24회를 지휘한다고 할 때 받는 돈은 기본급 14만 마르크를 합해도 716천마르크(한화 36천만원)에 불과하다. 아무리 2년의 격차가 있고 인플레이션이 있다고 쳐도 그 차이는 상당하다. 그래서 아바도의 연봉을 언급하면서 헤르베르트 하프너는 이는 첼리비다케라면 결코 뮌헨 가스타이크로 가지 않았을 액수였다”(<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88)라고 덧붙인 것이다. 물론 첼리비다케는 훌륭한 지휘자다. 그런데 아바도는 아닌가? 설사 첼리비다케를 더 높이 친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엄청난 연봉 차이가 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참고로 두 곳 모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충분히 받고 있다. 김상수 말대로라면 1950년대를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본 적도 없는, ‘세계적인 지휘자도 못되는 첼리비다케를 임용하기로 한 직원은 공금유용이나 횡령, 배임으로 고발당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다.

 

나도 세계의 지휘자를 전부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매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그런 일은 없다. 결과적으로,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하모닉에서 20년 전에 15억원을 내놓으라고 했고, 그게 먹힐 만했다. 그런데 아바도는 훨씬 적은 돈에도 사인을 했다. 아바도는 착하고 첼리비다케는 돈만 밝히고? 베를린 필의 행정직원은 협상을 잘하고 뮌헨 필하모닉의 행정직원은 무능한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오케스트라와 그 지휘자의 관계가 그렇게 설정된 것이다. 그게 굳이 따지자면 시장의 논리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히 수요-공급의 법칙이겠지만, 이 업계는 김상수가 생각하는 자유경쟁 체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공급되는 용역(지휘)의 품질을 감식하기란 대단히 까다로우며, 고품질의 용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주변 시장에서의 가격도 공개되어 있지 않다. 수요자는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은 고품질의 용역에 충분한 돈을 지불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급자가 돈만 준다고 자신의 용역을 무조건 제공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 수요자의 구성원인 단원들과 공급자(지휘자)의 역학관계도 중요하다. (내가 경제학을 공부한다면 이 업계가 가진 독특한 모델에 대해서 한번쯤 연구해보고 싶을 듯하다.)

 

정명훈이라는 지휘자가 서울시향과 계약하던 당시 한국에서 가졌던 위상을 따져보라.(지금도 마찬가지다.) 음악감독으로서의 기본급, 회당 지휘료, 1등석 2, 그리고 부대경비를 요청할 만하니까 했고, 들어줄만 하니까 들어준 것이다. 정명훈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으면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김상수는 연봉책정에 따른 국제적인 조사를 하자고 말하는데, 그게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 헤르베르트 하프너의 <세계의 오케스트라>라는 책을 통독해보시라. 거기에 위와 같은 예외적인 연봉 공개 사례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 그게 나온다고 한들, 그게 무슨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가.

 

(지휘자가 단원들에 비해서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실이며, 이에 대해 외국에서도 종종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노먼 레브레히트의 책 318쪽부터 328쪽을 읽어보시라. 거의 위키리크스 수준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당연히 없으며 숫자만 둥둥 떠다닐 뿐이다.)

 

 

7. 공금유용

 

김상수는 분명히 하자. 논점을 흐리면 안 된다. 나의 문제제기는 고액연봉의 시비는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지적은 공공예산 지출의 정당성과 투명성 문제가 핵심이다.”라고 하면서 공금 유용의 문제를 거론했다.

 

문제가 된 가족항공권과 유럽주재 보좌역 인건비는 공금유용의 사항이 아니다. 계약서에 위배되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적인 문제도 전혀 없다. 이는 계약 당시 매니저의 요구를 서울시가 받아들인 것 뿐이다. 이미 여러 법적 자문을 거쳤고, 각종 감사를 받은 바 있다.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항목은 아티스트에게 통상 지급되는 계약 옵션사항이며, 노무적으로는 포괄임금의 일종이다. 포괄임금이란 사용처에 대한 사전 합의로 인해 정산이 불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이것에 대해서 국민 정서상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명훈은 이 부분에 대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변호사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사용 용도와 항목이 정해져 있는 공금을 다른 용도로 전용(A용도의 공금직원들 회식비로 사용)하는 것을 항목유용이라고 합니다. 이와 구별되는 것으로 공금을 개인적인 이익과 용도로 지출하는 경우가 전형적인 횡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해당되는가? 김상수는 법적인 문제와 일반인의 정서를 뒤섞어버리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발전과 운영> 이제 김상수의 훈계는 오케스트라 운영에 대한 것으로 넘어간다.

 

8.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서양 클래식 음악 오케스트라의 완성이 갑자기 한 사람 지휘자에 의해 만들어질 수도 없다.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서울시립오케스트라가 자기 정체성을 지니려면, 서울시향의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보는 시야에서 준비해야만 한다.” (<미디어 오늘> 인터뷰)

 

뒷말은 맞지만 앞말은 틀렸다. 지난번에도 썼지만, 음악감독이나 상임지휘자의 활동이 너무 많으면 오케스트라의 다양성이 죽고, 그 반대가 되면 오케스트라의 컬러가 없어진다. 도대체 몇 대 몇의 비율이 정답인지는 귀신도 모를 것이다.

 

다만, 오케스트라가 실력을 갖추고 발전하려면 한 명의 음악감독이나 상임지휘자가 상당기간 맡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최소한 국제무대에서 무명이나 다름 없었던 버밍엄 심포니, 오슬로 필하모닉, 몬트리올 심포니의 수준을 확 끌어올린 사이먼 래틀, 마리스 얀손스, 샤를 뒤투아는 각각 18, 23, 25년을 이끌었다. 60~70년대 반짝 한 후 묻히고 있던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를 지금 이만큼 끌어올린 것은 데이빗 진먼이 1995년부터 17년째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과거의 명장들, 곧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조지 셸, 유진 오먼디, 레오폴트 스토콥스키, 레너드 번스타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리카르도 샤이 같은 이들이 수십년씩 갈고 닦으면서 베를린 필, 클리블랜드, 필라델피아, 뉴욕 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같은 오케스트라가 지금과 같은 명성을 쌓게 된 것이다.

 

맨날 음악감독이나 상임지휘자를 갈아치우는 곳치고 잘 되는 곳이 있을 수가 없다. 3년이나 5년마다 지휘자를 바꾸면서도 수준이 향상된 사례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그런 곳은 서로 불만이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일정 궤도에 오른 곳이라면 지휘자의 개성에 따라 악단의 개성도 조금씩 바뀌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악단의 실력이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로, 사이먼 래틀과 버밍엄 심포니의 발전은 좋은 사례연구가 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니콜라스 케니언이 지은 <사이먼 래틀>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여기서 상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단체의 발전과 단원들의 고용/해고의 문제(202), 버밍엄 문화예술위원회가 버밍엄 심포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직제를 신설하고 연봉을 상향시키려고 한 것(226), 1991년 버밍엄 심포니홀의 건립(349), 1994년 경제위기 속에서 지원이 줄어들려고 하자 악단과 언론이 합심한 것(379) 등이 나와있다.

 

 

9. 외국인 연주자의 문제

 

자꾸 김상수가 외국인 연주자들의 문제를 언급하므로 역시 짚어보자. 그가 지적하는 것은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다. 외국인 상근단원과 외국인 비상근단원. 외국인 상근단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3인은 모두 비독일인이다. 이스라엘인, 일본인, 폴란드인이다. 트럼펫 수석 2인 모두 헝가리인이다. 비정상적인 체제인가? 그들이 독일인들보다 잘 하니까 뽑았을 것이다. 서울시향을 백의민족의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은가?

 

외국인 비상근단원 문제. 이 포스트에 주로 논의되는 것은 서너명에 불과하다. 김상수는 마치 정명훈이 상근 단원을 뽑지 않고프랑스에서 이들을 데려와 특권적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진실은 뽑지 못하고 있다가 맞다. 왜냐하면 악장, 트럼펫 수석, 팀파니 수석 등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서울시향의 급여로 부르기에는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시켜주고 싶다면, 서울시향 단원들의 급여를 인상시켜 주시기 바란다.

 

참고로 위의 서너 명은 관객에게 세계적 수준의 연주란 이런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악단 내부에서는 파트 연습을 이끄는 등 모범적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펫 수석을 맡고 있는 알렉상드르 바티는 최근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을 그만두고 김상수가 말하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의 트럼펫 수석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서울시향에서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김상수가 모르는 사실을 지적하자면, 특히 유럽 오케스트라들의 수석이나 악장은 상근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대개 1년에 60%~70% 정도만 활동하며 나머지 기간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에 가서 협연을 하기도 하고 개인 연주활동을 하기도 한다.(그러니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서울시향에 올 수 있는 것이다.) 종종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 우리가 아는 이름난 수석이나 악장들이 출연하지 않는 이유도, 또 에마뉘엘 파위(베를린 필 플루트 수석)나 알브레히트 마이어(베를린 필하모닉 오보에 수석)가 서울시향이나 국내 악단의 협연자로 오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이를 두고, 베를린의 언론이 김상수처럼 비판을 하는 일은 없다.

 

 

10. 지휘자 경쟁체제

 

정말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휘자를 경쟁을 시킨다? 서울시향의 지휘자라는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한다고 하자. 거기에 오려고 하는 지휘자는 서울시향의 수준에 적합한 지휘자일까? 서울시향과 함께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지휘자일까? 이렇게 경쟁을 시켜서 훌륭한 지휘자를 입맛대로 뽑을 수 있는 악단은 전세계에 얼마 되지 않는다.

 

김상수는 모르겠지만, 아스코나스 홀트, 해리슨 패럿, IMG, CAMI 같은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무척 많다. 그들이 우리가 아는 지휘자나 협연자들을 대부분 공급한다. , 그들에게 김상수가 말하는 최고 수준의 지휘자를 우리가 초빙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적이 있을까? 미안하게도 그 매니저들은 김상수가 말하는 세계 4대 오케스트라를 자주 지휘하시는 훌륭한 지휘자들을 서울시향에게 거의 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지휘자들은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씩 날아오지 않아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얼마든지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서울의 악단에 경쟁까지 거쳐가며 올 이유가 없는 이유다.

 

그래서 좋은 지휘자를 초빙하려면 악단의 명성이 올라가야 한다. 서울시향이 흑자도 못내면서 유럽 투어를 하고 레코딩을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이는 지난번 글에서 상론했으므로 더 거론하지 않겠다.

 

 

<아직도 남은 몇 가지>

 

11. 팩트만 쓰면 다인가?

 

단원 연주료 6만원, 정명훈 지휘료 4200만원, 이른바 700배 차이와 관련하여 내가 블로그에 쓴 글에 대해 김상수가 한 반박을 읽어보자.

 

나도 그 글을 봤다. 내 팩트는 정확하다. 그 직원은 단원들이 5천만원 이상 월급을 받는데, 마치 내가 팩트로 제시한 돈 6만원 연주료만 단원들이 받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내가 썼다고 주장한다. 어처구니없다. 1회 연주에 단원들은 6만원 받는다. 틀리지 않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쓴 사실이 난 없다. , 그럼 이렇게 쓸까? 6개 서울시립 예술단체들 단원들은 시향단원들 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 차이가 너무 크다. 같은 서울시 산하 예술 단원들인데 왜? 서울시향 단원들은 5천만원 이상씩 받고(블로거에 글을 쓴 서울시향 직원의 주장) 다른 단체는 거의 터무니없는 돈을 급료로 받을까? 서양 클래식 음악은 특별한 지위인가? 서울시 산하 다른 예술단체 단원들이 알면 분노할 얘기를 시향직원은 지금 말하고 있다.” (<미디어 오늘> 인터뷰)

 

이렇게까지 말해주어야 알아듣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역지사지 해보시라고 반대의 경우를 들겠다.

 

내가 정명훈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고 치자. 서울시향 단원들의 평균 기본급은 연 42백만원 수준이다. 정명훈씨의 기본급은 단원의 5배가 조금 넘는 22천만원이다. 서울시향 단원들은 하루 연습을 할 때마다 2만원씩 수당을 받지만, 정명훈씨는 공연을 위해 며칠을 연습하건 연습수당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올해 유럽투어 기간에 단원들은 식비 92백만원을 제공받았지만 정명훈 예술감독은 한푼도 지급받지 못했다.” 이 문장들에 사실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위의 내 작문은 다음의 문장과 뭐가 다른가? 서울시향 단원들은 1회 연주 때 6만원을 받는다. 정명훈씨는 무려 700배인 4200만원이 1회 지휘비다. 올해 유럽투어에서 그는 회당 42447000, 4회 총 169788000원을 받았고, 전체 단원 105명의 연주비는 2520만원이었다.”(김상수 <한겨레> 칼럼)

 

사실이 진실은 아니다. 자료의 취사선택에서 이미 자신의 주관이 개입된다. 객관적인 정보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깨닫지 못하도록 제한적으로 정보를 노출했다면, 그리고 이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만들었다면, 버틸 게 아니라, “내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과연?]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본인이 생각하시는 훌륭한 예술가상에 조금이나마 부합한다.

 

뒤에 덧붙여주시기를, “자 그럼 이렇게 쓸까?”라고 하시면서 타 예술단체 급여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렇게 쓰셔도 된다. 왜 안 되는가? 나는 국공립 예술단체의 급여가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마치 서울시향이나 나를 생각해서 서울시향과 타 예술단체 연봉 차이를 언급하지 않으신 듯한데, 얼마든지 쓰셔도 된다. 한 개인의 계약서도 이렇게 세세히 밝히면서 100명이 넘는 단체의 평균 연봉은 차마 안 밝히는 그 큰 뜻을 내 짧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주제를 한 가지만 간단히 짚고자 한다.

 

 

12. 좋은 오케스트라, 훌륭한 음악이 왜 필요할까?

 

김상수는 단원들이나 해고하는 좋은 예술은 필요 없다고 하였으니 이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고 싶다. 서양고전음악이 남의 것인가? 오케스트라 음악은 남의 것인가? 물론 그 기원은 당연히 한반도와 무관하다. 하지만 국악은 우리의 것인가? 언제부터 우리의 것이었는가? 그것은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고 발전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나머지 모든 예술장르가 다 그렇다.

 

재일조선인으로서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서경식 선생을 우리에게 알려준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였다. 그는 최근에 <나의 서양음악 순례>라는 책을 썼다. 한달쯤 전에 그의 북 콘서트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가 했던 말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자꾸 서양미술작품, 서양음악을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것이고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향유해야지요.” 김상수는 이것도 문화적 식민지의 징후로 볼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을 타자화시키는 것이 더욱 문제적인 태도다. 서양고전음악이 활용하는 악기나 음악의 구조는 서양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남의 것인가?

 

한국의 무수한 음악대학을 보라. 최소한 수십만명의 음악도들이 그동안 배출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레슨을 하고, 일부는 유학을 간다. 그들 중 일부는 교향악단 단원이 되거나, 음대의 교수가 된다. 역시 그들은 또 학생을 가르치고 음악도를 길러낸다. 아마도 점차로 그 숫자가 늘어나는 이 순환구조가 지난 수십년간 한국을 지배해왔다. 그런데, 그들과 수용자층은 철저히 괴리되어 있다.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다. 그 예외가 되는 사람들이 정경화, 백건우, 정명훈부터 최근의 손열음, 김선욱, 조성진에 이르는 아주 적은 수의 1류 연주자들, 곧 독주자들이다. 이 예외를 제외하면 한국의 음악가들과 한국의 음악수용자들은 연결고리가 거의 없다. (KBS 교향악단이나 부천필하모닉, 경기필하모닉 등 타 교향악단의 노력과 업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향악에 한정시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음악수용자들의 귀는 카라얀이나 베를린 필 수준에 맞춰져 있는데, 한국 교향악단의 수준은 그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논자들은 클래식이 상위 1%나 듣는 상류층 음악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그와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3층이나 합창석 티켓도 10만원에 육박하는 해외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 된다. 이렇게 음악가들은 무수히 배출되지만 그들의 음악을 듣는 수용자는 거의 없는 현실, 그게 OECD 가입국가이고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우리나라 음악계의 현실이다.

 

130억이라고 하면 무척 큰 돈인 건 분명하지만, 우리나라나 서울시의 예산규모로 보았을 때 이 정도의 재정지출이 과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타 예술단체에도 더 많이 지원해주는 것에도 당연히 찬성한다.) 서울시향이 지난 6년반 동안 이룬 성과는 바로 앞서 말한 한국의 고전음악수용자들에게 상위 1%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음악을 들을 권리를 돌려준 것이다. 김상수는 자꾸 이를 경제논리로 환원시키는 자가당착에 빠지지만, 정명훈이 지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세계 4대 오케스트라를 최근에 지휘한 적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객원지휘자 정기공연의 유료티켓 판매 숫자가 2006년에 700명대였다가 20111700명대로 올라선 것은 소중한 성과다. 이것이 나타내는 것은 서울시향의 기본기가 그만큼 올라갔다는 것이며, 오케스트라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서양고전음악 연주자들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트위터리안의 말을 보탠다. “제가 밥 한 끼 얻어먹은 거 없는데도 정명훈과 서울시향을 지지하는 글을 쓰게 되었던 건 그들이 레슨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 연주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만큼 중요한 언급을 알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에 앞서 글을 쓴 황종욱이나 또 SNS 상에서 김상수의 글을 비판하고 서울시향을 옹호하는 이들 중에서 상당수는 정치적인 이슈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다. FTA에 반대하고,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며,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라고 단원들을 해고하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예술을 옹호하고 싶겠는가? 김상수는 그런 예술은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많은 이들은 예술가들에게 고용보장 말고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레슨으로 생계나 유지하게 하면서, 정작 수준높은 예술은 관객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한국 공연예술계에 질색해왔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단원들의 신분 안정과 더 나은 처우가 해결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제를 정명훈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유럽의 오케스트라와 극장에서 수십년간 음악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우리가 아는 모든 명문 악단과 오페라극장에서 지휘해 온 사람이다. 이 글을 읽는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식견을 존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맺음말>

 

김상수는 공공예산 지출의 정당성과 투명성 문제가 핵심이라고 말을 돌리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글 대부분은 정명훈에 대한 특권적 대우, 고액 연봉, 정명훈의 정치적 편향을 공격하는 것에 바쳐졌다. 나는 두 번의 글을 통해 그의 논지 대부분을 반박했다. 그가 지적한 수많은 이야기 중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는 한 두 가지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공금유용등 사실과 무관한 선동적 언어로 치장되어 있다. 당연히 서울시향은 서울시와 감사원의 감사를 받아왔으며 이번에도 서울시에서 관련 서류 일체를 제출받았다. 누가 과연 징계를 받고 배임의 죄를 짓게 되는지 두고 보도록 하자. 건방지게 훈계하자면, 작가이건 언론이건,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말과 글이고 이는 단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허술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작가와, 그것을 게재하는 언론은, 남의 수준을 들먹거리기 전에 자신들을 먼저 살펴보길 권한다.

 

제발 시민과 공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무지와 편견을 남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지 마시라. 그리고, 이런 논쟁적인 글을 쓰려거든 반대의견에 성실하게 응하시기 바란다. 이미 황종욱이 지적하였으니 바스티유 연봉 13억 기사 출처의 책임 운운한 것을 재론하지는 않겠지만, 김상수의 태도는 대단히 불성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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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 정리

http://cafe.naver.com/gosnc.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7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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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 자유야, 자유!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에서 정명훈은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 <합창> <환희의 송가> 앞부분과 독창이 등장하는 부분을 짜깁기해서 지휘를 했다. (…) 정명훈은 음악을 지휘하던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활짝 웃음 띤 얼굴로 선물한다. 이튿날 대형 기득권 보수참칭(僭稱) 종이신문들은 일제히 ‘대한민국을 잘 지휘하라는 의미로 지휘봉을 준 것’이라고 해설했다.”

이명박의 부역자

김상수라는 이름의 연출가가 여러 진보매체를 오가며 집요하게 지휘자 정명훈을 물고 늘어졌다. 정명훈은 세계적 지휘자가 아닌데 과도한 연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지로 점철된 그의 글은 이미 여러 클래식 애호가들의 반박을 받아 한갓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그 얘기를 굳이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은 문제는 그가 정명훈을 물고 늘어지던 그 ‘정치적’ 방식의 고약함에 대한 지적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치 독일 치하에서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공연으로 ‘위대한 독일민족의 지도자 히틀러’를 찬양하기 위해 동원된 푸르트뱅글러의 <환희의 노래>와 정명훈이 이명박 취임식에서 지휘한 <환희의 송가>는 어떤 차별성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로써 정명훈은 졸지에 푸르트뱅글러와 같은 나치 부역자가 된다. 이명박이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켰나, 유대인을 학살했나, 아니면 헌정을 파괴했나?

 

이렇게 그는 정명훈을 졸지에 이명박의 부역자로 둔갑시킨다. 그런데 그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정명훈은 이례적으로 시향의 연주를 중단하고 관객과 함께 서거한 분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심지어 언젠가 김대중 국민회의 대표가 신당을 창당할 때 거기에 이름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우익의 김상수라면 이를 두고 정명훈은 전라도 빨갱이 정권의 하수인이라 부르지 않을까?

 

몇년 전에도 사건이 있었다. 문화부에서 국립 오페라합창단을 해체하려 했을 때, 파리에 사는 진보신당 당원 목수정이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정명훈에게 지지를 부탁하러 찾아갔다. 나는 이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향에서 일하는 누이를 통해 ‘마에스트로’를 만나는 절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는 누이도 웬만한 일은 비서를 통해 처리하고, 꼭 만나야 할 경우 미리 약속을 정해 휴식시간에 잠깐씩 본단다.

 

서명이 필요하면 용지를 비서에게 맡기고 돌아가면 될 일. 하지만 그들은 “기왕 온 김에 단 3분이라도 그에게 우리의 육성으로 절박한 현실을 전하고 그의 예술가적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기에”, 정명훈이 중요한 식사모임을 갖는 호텔로 찾아가서는 “돈 많은 현대의 귀족들의 충실한 심복 같은 그들”(호텔 직원)의 ‘나가달라’는 요청도 거절한 채 기다렸다가 그와 직접 대면을 했단다. 때는 새벽 1시. 당연히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는 상황.

 

결국 그녀는 마에스트로에게 당연히 험한 얘기만 듣고 만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도대체 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 게 아니야. 이 계집애들이 말야. 한밤중에 찾아와서.” “기도하라구. 기도.” 이에 분개한 그녀는 “그에 대한 무한한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순수-참여 논쟁

이 해프닝에서 그녀가 끌어낸 결론. “이로써 그동안 어떻게 저 고매한 예술가가 이명박과 손발이 맞아 수년간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방에 해결되었다.” 정명훈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인간적으로 거만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나? 기어이 그를 이명박으로 만들어놓는다. “그 사고의 경박함은 이명박, 유인촌과 그가 한치의 차이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오페라합창단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해야 할까? 그러자 목수정은 이렇게 대꾸한다. “우린 왜 그럼, 친일 인명사전을 편찬하며, 거기에 홍난파니, 서정주니 하는 이름을 끼워넣은 건가? 예술가들은 영혼이 없이, 기예만 뛰어나면 된다니? 그들은 좌로 가든 우로 가든 자유로운 영혼들이니 아무 데나 가서 줄서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둬라?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논리다.”

 

그녀가 그 “논리”를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면 그것은 무식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듣고 본 유일한 논리는 80년대 운동권에서나 통용되던 193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이리라. 하지만 현대미학에서 예술을 정치와 연결하는 연구는 보기 드물게 되었으며, 간혹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를 그렇게 무식하게 따지고 들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시대착오, 즉 ‘좌파’ 미학의 문화지체 현상이다.

 

이 대목에서 박노자 선생이 등장한다. “그런데 지금 (…) 귀족화된 예술인 정명훈을 옹호하는 진중권을, 그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지 않습니까?” 정명훈 옹호했다가 죽임까지 당할 판이다. 세계적 예술가들은 정명훈만큼은 “귀족화”됐을 텐데, 그들을 다 몰아내야 할까? 이건 거의 프롤렛쿨트 수준. 그토록 급진적인 트로츠키가 왜 10월 혁명 직후에 ‘지금은 부르주아 문화의 정수를 보존할 때’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된다.

 

<나는 꼼수다> 콘서트 기획자 탁현민의 예술인식을 보자. “정명훈의 예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세종문화회관을 지나는 저 종종걸음의 대중에게 있지 않음은 나는 알겠다. 마에스트로는 무슨 개뿔. 대체, 고작해야 한시절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음악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조낸 참담한 음악교육. 그렇다면 그 시절 아프리카 가나나 짐바브웨에서 불렸던 음악도 클래식이라고 해야지. 씨바.”

 

한국 ‘진보’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어쩌다가 이렇게 처참해졌을까? 그렇게 치열하던 80년대에도 이 정도로 참담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도, 히틀러도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현대음악은 탄압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클래식만은 키워서 체제선전과 대중교양에 써먹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명훈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진보의 예술관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수준도 못되고, 그냥 폴 포츠 수준이다.

예술가의 자유

목수정은 이렇게 말했던가? “예술가들은 영혼이 없이, 기예만 뛰어나면 된다니? 그들은 좌로 가든 우로 가든 자유로운 영혼들이니 아무 데나 가서 줄서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둬라?” 정명훈이 평양 가서 그곳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했단다. 재미있게도 “영혼이 없이 기예만 뛰어난” 것은 정작 북한 음악의 특성. 이는 물론 예술적 가치 위에 정치적 효과를 올려놓는 그 잘난 사회주의 미학의 결과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악단의 기예(연주)에 지휘자의 해석(영혼)이 들어가면서 그들의 음악은 놀랄 만큼 좋아졌단다. 연주를 마친 뒤 정명훈이 예의 싹수없는 말투로 북한 지휘자에게 말하기를,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야, 자유!” 그라고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 효과를 방금 직접 눈으로 지켜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정명훈이 방을 떠나자 그 지휘자,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터뜨리며 울었다고 한다.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 어설픈 이념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

 

2011.1.20 / 씨네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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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비판, 진중권-김상수 논쟁에 부쳐

[기고] 이채훈 MBC PD, 진중권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진중권씨,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저서 <미학 오디세이>을 읽은 덕분에 르네 마그리트 그림을 보는 눈이 틔인 점, 감사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최근 ‘진보 진영’의 언행에 대해 쓴소리를 연발하는 걸 보며 ‘왜 이러시나?’ 의아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등에’ 노릇을 한 것처럼, 당신의 비판적 발언들 또한 ‘진보 진영’ 사람들의 도덕적, 문화적 각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려니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MBC가 이명박 정권에 침탈당할 때 MBC 사옥 정문에서 극우인사들에게 맞으며 저항하던 당신의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만큼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는 당신의 진심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논객 진중권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 만들 줄 밖에 모르는 한 명의 방송 PD니까요. 그런데, 최근 <씨네21> ‘진중권의 아이콘 - 자유, 자유”라는 글에서 크게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대목들을 발견했습니다. 정명훈과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글이려니 생각하지만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몇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싶지 않지만, 얘기를 꺼내려니 말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글 중 한 대목이 매우 거슬렸음을 고백합니다. “이명박이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켰나, 유대인을 학살했나, 아니면 헌정을 파괴했나?”

이명박과 히틀러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명박을 위한 연주를 나치 부역에 비유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명훈은 논외로 하고, 이명박은 헌정을 파괴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를 파괴했습니다. 미네르바를 잊진 않으셨겠죠? 유모차부대에 대한 탄압이 옛날 일인가요?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의 사장을 내쫓고 자기 아바타를 심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게 ‘헌정을 수호한 일’인가요? <PD수첩>에 대한 비상식적인 탄압은 검찰이 한 짓이니 이명박과 무관한가요?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지식인 진중권은 뭐라고 답하실지 궁금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졌다고 하기엔 너무 심각한 발언 아니었나요?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한 주가조작 사범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이므로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면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가 전과 14범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팩트’이고, ‘팩트’에 대해서는 토론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명박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다행입니다. 이명박은 제주 4·3과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고, 광주학살의 전두환처럼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 용산 참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한국타이어 사업장에서, 촛불집회 의료봉사단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에서, 1년 가까이 지속된 김진숙의 고공 크레인 농성을 방치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냉혹한 학살자의 냄새를 맡았다면 제가 과민한 걸까요? 이명박을 ‘학살’에 결부시킨 것은 순전히 내 ‘과대망상’이라고 해 둡시다. ‘과대망상’으로는 토론이 안 될 터이니 이 또한 그만 하죠.  

다시 정명훈 얘기로 돌아가지요. 이번 논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저야말로 정명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94년 바스티유 음악감독 논란이 시작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그를 여러 번 취재했습니다. 97년, 정명훈에 대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이어서 99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이란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김상수 식으로 표현하면, ‘정명훈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선’ 주류언론의 ‘죄인’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정명훈의 음악적 성취는 주목할 만 했고,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에게 거는 국내 음악팬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다큐 촬영 당시 정명훈은 살 플레이엘에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르 몽드는 “라파엘 쿠벨릭과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그 누구도 정명훈만큼 청중을 압도하지는 못했다”고 썼습니다. 저 또한 공감했습니다. 정명훈의 말러는 탁월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바스티유 단원들의 정명훈에 대한 사랑 또한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단원들은 그의 바톤 아래서 매우 고된 연습을 했지만 급속히 음악 수준이 향상되는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프랑스의 대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이 정명훈을 가리켜 ‘천재’라고 극찬한 것이 그냥 빈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지휘한 정명훈 지휘자와 악수하고 있다.

 

 

지휘자의 실력에 성적을 매기고 석차를 따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시 세계 음악계를 이끌던 게오르그 숄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세이지 오자와 등 대지휘자의 뒤를 잇는 차세대 거장으로 그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를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프로그램이었지요. 개인적으로 정명훈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말러는 그때나 지금이나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의 모차르트는 좀 아닙니다. 모차르트 이전의 고음악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는 다큐에 담지 않았습니다. 재능있는 지휘자를 조명한 음악 다큐였을 뿐이니까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에서는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엄격한 오디션에 따른 일정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음악의 질을 높이려는 의욕적인 시도로 간주했고, 객원 단원, 상임 작곡가, 공연기획 자문을 두고 <SPO>를 발행하는 등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의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최근 연출가 김상수가 제기한 재정적 문제들은 잘 몰랐고, 취재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향의 ‘베토벤 전곡 사이클’을 중심에 놓고 구성한 ‘음악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면 방송 저널리스트로서 다소 안일하게 만든 다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제 소개 겸해 다큐 얘기를 꺼낸 게 좀 길어졌네요.

연출가 김상수의 문제제기는 다소 거칠게 보일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명박 취임식 때 베토벤 9번을 발췌 연주하고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바친 것, 이른바 ‘건국 60년 기념음악회’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를 지휘한 것은 내가 봐도 결코 유쾌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이를 곧바로 카라얀의 나치 부역에 비유한 것은 비약입니다. 나치에 반대한 파블로 카잘스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훌륭한 음악가고 나치에 부역한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는 저열한 음악가였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김상수의 문제 제기 자체는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김상수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이지만, 스스로 이야기하듯 서양 음악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의 문제제기 자체를 희화화 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보면, 그는 ‘음악론’을 펼친 게 아니라 음악이 정치에 사용(詐用)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논지는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산정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집행해야 할 돈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핵심 논지가 실종되고 감정적인 비난이 난무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 “한국 매스컴이 정명훈의 음악 수준을 과대포장했다, 알고 보면 정명훈은 한국을 우습게 아는 인간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음악 또한 형편없다, 그런데도 정명훈은 한국이 낳은 스타라는 이유로 비판의 성역에 있다...” 김상수의 이러한 주장은 엄밀히 검증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논거를 무수히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팩트’와 ‘의견’이 거미줄처럼 꼬여서 미궁에 빠질 이슈들입니다. 굳이 검증하려 한다면 매우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고, 일정한 대목에서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상수는 이 많은 주장들을 거칠게 쏟아냈기 때문에 엉뚱하게 역풍을 만났고, 논점이 흐려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입니다. 김상수의 ‘잘못’이 있다면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진중권씨 얘기로 넘어갑니다. 김상수의 오류를 빌미로 그를 바보 취급하고 그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의 핵심 논지를 슬쩍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얘기로 그를 희화화하는 것은 예의 있는 태도도 아니고 용기 있는 행동도 아닙니다. 진중권씨의 글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문화적 조악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딱 그 지점까지입니다. 다음 구절은 선을 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도, 히틀러도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현대음악은 탄압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클래식만은 키워서 체제선전과 대중교양에 써먹으려 했다.”   

스탈린!! 그가 얼마나 저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난도질하고 예술가들을 목 졸랐는지 진정 모르시는 건가요?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에서 거슬리는 대목이 나오자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었죠. 쇼스타코비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 이유는 쇼스타코비치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염세적인 정서로 가득한 교향곡 4번을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5번 D단조에 대해서는 엉뚱하게도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고 격찬을 늘어놓더니 9번이 맘에 안 들자 아예 창작을 금지했고, 스탈린 본인을 우상화하는 저열한 영화음악을 만들도록 강요했습니다. 자, 이게 스탈린이 클래식 음악을 ‘대접’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통령 취임식과 ‘건국 60년 기념 음악회’에서 정명훈의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려 한 이명박 정권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무지한 ‘좌파’보다 낫다는 결론이군요. 이게 진중권씨가 말하고자 한 바였습니까? 그런 ‘대접’이라면 안 받는 게 낫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볼 때는 ‘좌파’든 ‘우파’든 추악한 본질을 클래식으로 포장하려는 위선자들보다는, “폴포츠 수준"의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차라리 나아 보입니다.

히틀러가 바그너와 베토벤을 앞세워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한 것도 퍽 교양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이군요.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김상수조차 “베토벤 음악은 반유태주의 따위와는 상관없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에서 노래한 ‘형제애’를 ‘게르만 민족 공동체’로 해석한 게 베토벤을 잘 ‘대접’한 건 아니라는 점, 진중권씨도 동의할 거라고 믿습니다. 바그너는 본인이 반유태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니 히틀러의 나치와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그너 음악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히틀러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 따위의 ‘대접’과 상관없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대한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히틀러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그들 중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너머 바그너 음악의 위대성을 인정했습니다. 종전 후 그가 녹음한 바그너 관현악곡집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연주로 꼽힙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과 브루노 발터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의 차이, 이해하실 수 있는지요?

발터의 넉넉한 태도는 카라얀과 비교하면 더욱 돋보입니다. 카라얀은 나치가 파리에 주둔할 때 침략의 최전선에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나치 군복을 입고 지휘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그너를 ‘사랑한’(?) 카라얀은 종전 후엔 바그너를 지휘한 일이 없습니다. 나치 부역의 기억을 되살릴 게 뻔하니 지휘할 수 없었던 거겠죠. 그는 오랜 세월 유럽 음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이면을 보면 다소 옹색한 인생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카라얀 얘기가 나왔으니 다시 우리의 정명훈으로 돌아가 볼까요? 정명훈 다큐를 촬영할 때 다소 의아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어요. 그는 “저는 음악밖에 몰라요”를 되풀이했습니다. 음악가가 ‘음악밖에 모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묻지도 않는데 “음악 이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자꾸 고백하는 걸까, 좀 답답하다고 느꼈죠.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몇 년 전, 카라얀의 나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를 보니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 거였어요. 카라얀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카라얀은 정치는 몰랐다. 그는 오직 음악밖에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치가 뭔지도 몰랐지만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힘있는 자들 편에 서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역을 하게 됐다” 정도로 요약되는 거죠. 같은 다큐에 출연한 역사가 올리버 로트콜프도 “카라얀은 자신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하더군요.

진중권씨는 누구보다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잘 아시겠지요. 더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체제가 유지되고 그 안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모자란 것이 큰 문제라는 점, 공감하시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명훈이 카라얀처럼 부도덕한 권력에게 부역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면 어떤 결과를 부를지 그 또한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명훈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심각한 무지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정명훈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정명훈을 위하는 일인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병이 있는데 “괜찮다”고 외친다 해서 그 병이 없어질까요? 초기에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기 바랍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트위터에 올리신 글 중에 도가 지나친 게 있어서 지적해 드립니다. 김상수의 글을 실어주고 그를 인터뷰까지 했다는 이유로 <미디어오늘>을 ‘저질 매체’라고 단정하셨고, “이 분들의 보도 수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이셨네요. 아마 “‘정명훈=이명박’으로 깔아놓고 조지면 새로 당선된 서울시장이 뭔가 조치를 하겠지”, 이런 류의 계산 아래 기사를 썼다고 의심하시는 것 같네요. <미디어오늘>이 실제로 그랬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연스럽지 못한 추측을 바탕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미디어오늘>을 비난하시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점, 지적해 드립니다.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서울시향이나 정명훈과 직접 관계도 없는 진중권이 이토록 김상수와 <미디어오늘>을 비방하는 것은 아마 자기 누나들이 서울시향 녹을 먹기 때문일 것”이라는 속물스런 의심 또한 정당화될 것입니다.

진중권씨는 2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트위터리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20만명 개개인이 잘 판단하실 일이겠지만, <미디어오늘>의 이미지는 이미 작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만명에서 적게 잡아 절반이면 10만명인데, 그 사람들이 진중권씨의 말에 공감해서 “<미디어오늘>은 저질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권력자의 폭력과 비슷한 행태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영세신문입니다. 조선일보처럼 세련되게 편집도 못 하고, 좋지 않은 문장도 자주 눈에 띕니다. 하지만 조중동이 압도적인 여론 지배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파행적 언론 지형에서 나름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기특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 비슷한 걸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문을 단 한 마디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생각 없는 행동 아닌가요?

제가 볼 때 한국 주류 언론은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주류 언론이 보여준 파시스트 행태를 기억하시겠지요. 지금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에 대해서는 거의 광신도처럼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후보 선수로 출장해도 뉴스입니다. 김연아와 결별한 외국인 코치는 죽일 놈이 됩니다. 정명훈도 한국 언론에서 비슷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국민적 스타를 비판하면 매국노가 됩니다. 이건 매우 촌스럽고 후진적인 행태입니다. 제가 늘 보아 온 진중권씨라면 주류 언론의 이러한 행태를 좀 더 강하게 비판하고, <미디어오늘>에겐 애정 어린 채찍을 드셔야 합당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다소 의아합니다.

이 글이 <미디어오늘> 지면에 올라가면 ‘가재는 게편’이라고 오해하실 수 있겠네요. <미디어오늘>은 언론노조 기관지로 시작해서 자립한 신문이라 저희 언론노동자들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랜 동지 관계 때문인지 저같은 무명의 필자가 쓴 글도 간혹 실어 줍니다. 저희 언론노동자들에겐 그래서 문턱이 낮은, 친근한 신문입니다. 부디 ‘<미디어오늘>과 이채훈의 관계’ 같은 사소한 대목은 괘념치 마시고, 제 글의 진심을 읽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진중권씨는 “필요하면 정명훈 관련해서는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글에는 정명훈의 음악에 대한 평가도 들어갈 걸로 예상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다. 음악을 아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토론, 나쁘지 않겠지요.
 
끝으로,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 어설픈 이념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진중권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대와 호흡하고 그 시대에서 자양분을 얻어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돌려줘야할 예술가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 예술가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이용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파시즘에 이용될 자유까지 포함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명훈을 ‘이념’의 잣대로 괴롭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거 기득권자들이 흔히 써 오던 참주선동과 메카시즘을 연상시킵니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상식에 바탕을 두면 더 이상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은 정명훈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는 별개입니다. 토스카니니든, 푸르트뱅글러든, 브루노 발터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유는 민주사회의 일원이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 내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2012.2.6 / 미디어오늘 / 이채훈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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