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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음악편지 - 마음에서 마음으로

by Wood-Stock 2011. 12. 9.

 

'이채훈의 음악편지'를 시작하며

 

“음악 초짜용 쉬운 입문서 없나여?” S에게서 갑자기 문자가 왔다.

 

S는 한국 TV의 탐사 저널리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PD다.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월과 풍파를 함께 헤쳐 오면서 방송계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가 됐다. 25년 동안 같은 회사에서 동고동락해 왔지만, 아직 나는 그를 잘 안다고 감히 얘기할 수 없다.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술과 음악으로 도피하고 일탈할 때도 그는 언제나 정확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S는 내게 때로 외경스런 존재로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50살이 되도록 순수함과 열정을 잃지 않은 그의 부리부리한 눈빛, 언제나 변함없이 강직하고 곧은 그의 성품을 나는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쯤 얘기하니 모자이크 처리 엉성하게 한 화면처럼, S를 아는 사람들은 대략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기도 하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모두 알아볼 것 같아서 이 정도 해 두지만, 나는 병아리 PD시절 그가 나의 조연출을 했었다는 게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명작의 무대 – 작곡가 강석희’ 편이었다. 음악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는 이른바 ‘현대 음악’의 창조 과정을 뚝닥뚝닥 다큐멘터리로 엮어내는 내 모습이 초짜 PD인 S에게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나보다. 그 뒤로도 S는 여러 번 그 다큐멘터리 만들 때의 추억을 입에 올리곤 했다.

 

이런 S가 요즘 클래식 음악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쌀쌀해지는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이 정권 들어 언론계가 퇴행하고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고 껍데기가 판을 치는 상황이 된 탓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황량할수록 위안에 목말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무개념, 몰상식, 파렴치, 무책임의 연속... 이 탁류에 길들여져 넋 놓고 살아가기에 S는 아직 너무나 젊고 맑고 패기있는 영혼이다. 이른바 ‘이슈 파이팅’ 하기도 바쁜 요즘 방송계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을 통해서 인간 정신의 깊고 선한 부분을 발견하고 싶은 욕구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이 욕구는 지금, 이 어두운 독점과 탐욕의 시대를 뛰어넘어 더 큰 시간의 지평을 향해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 생각해 본 뒤 문자로 답했다. “내가 써 주마.”

 

초보자를 위한 음악 입문서는 많이 있다. 음악을 사랑하고 잘 아는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서 써 놓은 책들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적절한 시점, 알맞은 수준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찾아서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음악 입문서에 한권을 더하는 것은 내게 그리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에서 밝혔듯, “음악을 ‘해설’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관심사도 아니다.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음악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라고 여기는 나는 그저 음악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고, 전염시키고, 전염당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음악에 처음, 기꺼이 귀 기울이려는 사람에게는 친구, 연인, 가족 등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직접 권해주는 음악만큼 좋은 게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면 어느 정도는 덩달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자주’ 감정적인 동물이니까. 그리고 음악은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그래서 나는 나만의 음악 이야기를 써서 S에게 보내기로 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베토벤이 장엄미사(Missa Solemnis)의 표지에 써 넣었고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모토가 된 이 한 마디야말로 음악으로 소통하고 나누려는 사람들이 기억해 둠직한 진리인 것이다.

 

서경식은 최근 저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서 “음악에 대한 자각은 성(性)에 대한 자각과 닮았다”고 했다. “음악 자체가 성적인 관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연설명은 절대적으로 옳다.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것, 마음 그 자체, 아니,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둘을 합한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게 음악이니까. 일단 음악에 입문했을 때 다른 어느 예술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하고 운명적이라는 점, 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서경식 선생의 지적은 백번 맞다.

 

그러나 성에 대한 자각은 때가 되면 저절로 온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번식을 하고, 모두 필연적으로 성에 눈뜨게 만들어져 있다. 이에 반해 음악의 문은 누구에게나 저절로 열리지는 않는다. 듣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되풀이 들어서 익숙해져야 하고, 일정한 감성의 훈련 또한 필요하다. 약간의 능동적인 노력이 있어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경식 선생의 말을 100프로 수긍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성(性)에 대한 자각 또한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을 키울수록 성숙해 가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음악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면 서경식 선생의 지적이 온당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클래식 음악이 뭔가 고상한 거라고 보는 통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음악은 유한계층의 ‘패스타임’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음악을 쉽게 즐기지 못하는 현실적 제약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좀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친숙하게 즐기고 이를 정신적 자양으로 승화시켜 내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과 함께 개인적 노력, 약간의 ‘자기 교육’이 필요하다. 약간의 능동적인, 열린 마음이 있어야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한국사회처럼 아직 음악 현장, 교육 현장이 경쟁위주로 치닫는 척박한 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어지는 글들은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부담없이 주고받는 음악 이야기들이다. 그 자리에는 내 친구 S가 있다. 그리고 함께 앉아서 마음과 음악을 나누고자 한다면 누구든 환영이다. 단시일에 음악에 입문할 수 있으려면? 일단 즐겁게 들어야 한다. 괴로운데 왜 들어? 즐거울 경우에만 듣는다. 글만 읽고 음악을 안 들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매 칼럼마다 해당되는 곡들을 먼저 들어볼 수 있도록 괜찮은 연주를 링크시킬 생각이다. 독자는 글을 읽는 중간중간에 그 음악을 되풀이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나눠야 한다. 음악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소통이고 공감이기 때문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들으며 얘기하는 사이에 음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어느덧 자라나 있을 것이다.

 

내가 ‘음악의 신’이라 생각하는 모차르트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찾아가는 길에서 꼭 마주치게 될 곡 중 내 마음 속 깊이 와 닿은 곡들을 하나씩 선정해서 얘기를 꺼내려 한다. 모차르트는 단순하고 쉽지만, 그 단순함 속에 담긴 깊고 섬세한 뉘앙스와 파토스를 속속들이 이해하기는 사실 매우 어렵다. 모차르트보다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음악들도 많다. 대중가요보다 더 진솔하고 평이한 클래식 음악들을 S의 마음에, 그리고 이름 모를 친구들 모두의 마음에 담아주고 싶은 것이다.

 

그 음악들에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PD로서 살아온 기억들이 얽혀 있게 될 것이다. 그 기억에 얽힌 소중한 나눔의 기억들도 담게 될 것이다. 한 개인, PD로서 나는 혼자 살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글들은 내가 사랑한 음악의 기록이자 좌충우돌 버둥대며 걸어 온 내 삶의 기록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우주다. 알량한 내 삶 또한 그러하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고 음악을 업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음악은 언제나 내 곁에, 내 안에 있었다. 내 삶의 느낌, 색깔, 무드와 동떨어진 음악, 그게 뭔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상식과 예의가 결여된 요즘 세상에 대해 내가 개탄했을 때 한 선배가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 아니냐?” 뜻밖의 촌철살인에 무릎을 치며 공감했었다. 한편으로는 이 엄중한 시절, 음악에 탐닉하는 것은 현실도피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없지 않았다. 이 못난 자괴감에 면죄부를 주는 말씀이니 귀가 번쩍 트일 만도 했다. 그러나, 선배의 그 짧은 코멘트는 내용 자체로 옳다고 생각한다. 파렴치의 세월, 그 풍파에 흔들리거나 마모되지 않고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을 꿋꿋이 옹호하고 고양시키는 음악, 그것이야말로 빛나는 축복 아닌가. 덧없지만 영속하는 것, 추악한 시대의 그늘에서 희망을 잉태하는 우리들의 살아있는 마음, 바로 그 자리에 음악이 있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 아니겠는가.

 

<미디어오늘>에서 클래식 칼럼을 쓰라고 권하셨을 때 기쁘고 고마웠지만 다소 난감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음악 이야기를 내밀었을 때 기꺼이 읽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설혹 일부 독자가 인내를 갖고 읽는다고 한들, 그걸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음악 사랑을 싹틔울 수 있을까, 염려가 앞섰다. ‘지면 낭비’라는 힐난을 듣지 않을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미디어오늘>에서는 문화면을 좀 더 다양한 콘텐츠로 키워가려는 바램이 있었을 거고, 방송가에서 클래식 음악 깨나 좋아한다는 내게 기회를 주겠다는 선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며칠째 전전긍긍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때 S가 내게 “음악 초짜용 쉬운 입문서 없나여?”란 문자를 보낸 것은 기가 막히게 ‘타임리’(timely)한 일로, 고맙기 짝이 없다.

 

‘음악 입문’이란 게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언제부터, 왜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묻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왜, 언제부터 그걸 맛있다고 느꼈는지 묻는 것도 마찬가지. 물론 ‘연애의 기술’ 같은 책도 있고 무궁무진한 요리책도 있다. 하지만 책보다 더 좋은 게 친구의 이야기 아닐까. <미디어오늘>에게, S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답하기 위해, 미흡한 능력이지만 최대한 진솔한, 읽을 만한 글을 써 보려 한다. 살아있는 날,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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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당신을 위한 아리아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요즘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에 항의하는 파업을 주도했다고 해고된 동지들,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황당한 징계를 받은 <PD수첩> 제작진들, 너를 비롯해서 정당한 프로그램을 박탈당한 채 침묵을 강요받는 PD들, 그리고 좌초해서 침몰하는 우리 언론의 모습에 절망한 모든 사람들... 정말 편안히 잠들기 어려운 세상이야.  

<PD수첩>이 걸어온 길, 험난했지. 1990년 <PD수첩>이 처음 시작한 그 해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해고되는 수난을 겪었는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시밭길은 여전하구나. 당시 얘기를 조금만 해 볼까. 1990년 9월,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사장의 갑작스런 지시로 불방되는 일이 벌어졌지. “서울을 방문 중인 북측 적십자 대표단에게 우리 농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어. 어처구니없는 일방적 지시에 제작진은 물론 노조 집행부도 강력히 항의했지. 사측은 먼저 김평호 선배(당시 사무국장)를 해고했어. 노조는 대응책을 논의했고, 그 방안 중 하나로 사장 불신임투표를 강행했어. 이에 사측은 안성일 선배(당시 위원장)마저 해고해 버렸지. 징계 사유는 ‘사 명예실추와 위계질서 문란’...      

나는 개인적으로 안 선배에게 죄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어. 집행부의 신중한 논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지만, “불신임투표를 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게 바로 나였으니까. 안 선배는 의연하게 처신했지. 약한 마음이나 개인적 감정을 남한테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고, 노조 위원장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사석에서 안 선배가 한 얘기는 오래 잊을 수 없었지. 안 선배는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어. 새벽에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벽을 주먹으로 친 일도 있다고 했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누가 징계를 내리고 누가 징계를 받는가,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아닌가? 아니야,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지. 이제 정년을 코앞에 둔 안 선배, 그리고 지금도 잠 못 이루고 있을 동료들에게 음악 한 곡 소개하는 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잠 안 올 때 틀어놓으면 좋을 곡, 재즈 음악가로 유명한 키스 자렛의 쳄발로 연주로 들어볼까? 내가 볼 때는 취향이 훌륭하고 섬세한 연주야. 어려울 거라는 선입관 버리고 그냥 틀어놓고 아무 생각이나 해도 돼.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듣다가 지루하면 꺼 버려도 돼.

골드베르크 변주곡 (쳄발로 : 키스 자렛)
http://www.youtube.com/watch?v=X1idOSZBL7M 


어때? 매혹적이란 느낌이 들어? 졸립다고? 어느 쪽이든 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음악 퀴즈 하나! 쳄발로, 하프시코드, 클라브생, 이 세 가지 악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답 : 쳄발로(Cembalo)는 독일어, 하프시코드(Hapshichord)는 영어, 클라브생(Clavecin)은 불어라는 게 차이점이야. 왜냐? 이 세 가지 이름은 모두 같은 악기를 가리키는 말이니까. 피아노의 전신으로, 16세기~18세기 유럽에서 제일 많이 쓰던 건반악기야. 18세기 중엽부터 피아노로 진화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당시 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지.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했다는데 아직도 원숭이가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이건 농담이고.

S, 너는 다큐멘터리 만들 때 어느 과정이 제일 즐거워? 난 음악을 고르는 시간이 제일 좋아. 대개는 음악 담당하는 분한테 각 장면의 느낌을 설명하고 선곡을 부탁하지만, 나만의 각별한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곡이 떠오르는 경우도 많아. 촬영 테입과 씨름하며 편집할 때 다소 고통스러운 게 우리 PD들이지만, ‘이 대목에서 어떤 음악을 쓸까’ 궁리하는 즐거움으로 그 고통을 상쇄하곤 하지. 

최근 방송한 <MBC스페셜-인생 이모작>를 편집할 때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떠올랐어. 기품 있고 아름다운 노년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은?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피아노 선율이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이 곡의 주제에 해당하는 ‘아리아’(위 링크의 처음부터 2분 30초 지점에 해당)를 썼고, 텔럽(스태프를 소개하는 자막)에서는 신나는 제1변주곡(위 링크의 2분 35초부터 3분 50초 지점에 해당)을 썼어.  

이 곡은 바흐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제일 인기 있는 곡이야. 지난 2000년, 바흐 서거 250년을 맞아 MBC FM의 <클래식은 아름다워>에서는 천리안 고전음악연구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와 그의 작품을 물어본 일이 있지. 그 결과는 바흐,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1742년 작곡)이었어. 바흐의 전기를 제일 먼저 쓴 포르켈에 따르면 이 곡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드레스덴에 머물던 러시아 대사 카이절링 백작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골드베르크라는 쳄발로 연주자를 고용하여 밤마다 잠들 때까지 옆방에서 쳄발로를 연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면증은 점점 더 심해져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됐다. 백작은 그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바흐에게 밤에 들을 음악을 작곡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 작곡한 게 바로 이 변주곡이다. 카이절링 백작은 이 곡에 몹시 만족해서 '나의 변주곡'이라 불렀고,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골드베르크를 불러서 '나의 변주곡'을 연주해 달라고 하곤 했다. 백작은 이곡에 대한 사례로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서 바흐에게 사례했다. 이것은 바흐의 1년 봉급을 웃도는 금액으로, 바흐가 평생 받았던 사례비 중 제일 많은 것이었다" 

드레스덴의 카이절링 백작은 ‘부드럽고 생기 있는 자장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게 바로 이 곡이었지. 바흐는 이 곡의 자필 악보에 이렇게 적었다고 해. “변주곡은 기본 화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해 봤자 재미 볼 게 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졸리게 만들기에는 최고로 좋은 방법이지.” 

이 곡이 백작의 불면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어. 하지만, 듣다가 그냥 잠들기에 너무나 훌륭한 선율과 아이디어로 가득 찬 걸작이지. 역설이 아닐 수 없어. 카이절링 백작의 궁중 쳄발로 연주자였던 요한 고틀립 골드베르크(당시 15세)가 초연했기 때문에 ‘골드베르크’라는 이름이 붙었어. 미국에 오래 사신 어떤 분은 글쎄, ‘골드베르크’를 미국식 발음 ‘골드버그’로 듣고 ‘황금 벌레’(Gold Bug)인 줄 착각했다더구나. ‘황금 벌레’(Gold Bug)나 ‘돈 벌레’가 저얼대 아니야!!

프랑스풍 아리아에 30개의 변주곡이 이어지고 다시 아리아로 돌아와서 끝나. 아리아는 우아하고 고결한 느낌을 주는 사라방드로, 1725년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에 수록되어 있던 곡을 다시 꺼내서 사용했어. 30개의 변주곡은 9개의 캐논(3, 6, 9, 12, 15, 18, 21, 24, 27 등 3배수째의 곡)을 뼈대로 양쪽에 푸가, 춤곡, 프랑스풍의 서곡 등으로 살을 붙인 형식이야. ‘3’이라는 숫자가 성스러운 의미를 갖고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음악은 어디까지나 '세속 음악'으로, 전체적으로 밝고 화사하며 유머러스한 느낌이야.  

(‘클라비어’는 피아노에 해당하는 독일말이야. 피아노가 없던 시절에는 쳄발로를 가리켰으니 건반악기를 통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사라방드’, ‘푸가’, ‘캐논’ 같은 말은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이거 몰라도 음악 듣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 ‘쫄지 마!!’)

마지막 변주곡에 해당하는 ‘쿠오드리베’(Quodlibe)는 바흐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모이면 즐겨 부르던 당시의 노래를 사용했다고 해.  

“참 오랜만에 돌아왔구나.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오렴” 
“양배추랑 순무밖에 안 주셔서 저는 떠났지요. 
엄마가 고기를 해주셨으면 안 나갔을 텐데….” 


우리가 들으면 그저 그런 가사지만 당시 바흐의 가족과 친구들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며 깔깔 웃곤 했다고 하네. 개념 없는 시대를 아파하느라 잠 못 이루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음악이야.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이윽고 마음이 밝아진다면 감사할 일이지. 반대로, 이 음악이 지루해서 S, 너의 잠을 재촉한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이야. “감사합니다!!”

바흐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곡인만큼 레코드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 피아노 독주, 쳄발로 독주는 물론이고 바이올린과 하프와 오르간, 오보에와 바이올린, 목소리와 쳄발로, 현악 삼중주, 현악 합주, 클래식 기타 등 다양한 형태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어. 훌륭한 연주가 너무 많아서 한두 개 꼽기가 어렵지만, 피아노 연주로는 로절린 투레크의 1988년 녹음(VAI Audio)이 아주 탄탄하고 안정감이 있어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데, 유투브에는 맛보기만 있네.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피아노 : 로잘린 투렉)
http://www.youtube.com/watch?v=A2MfdZCais0

제29변주곡을 피아노, 쳄발로, 전자 피아노로 연주하여 대비한 동영상 (연주 : 로잘린 투렉)
http://www.youtube.com/watch?v=kJ-qpocNQNk&feature=related

캐나다의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이 곡을 두 번 녹음했어. 1955년의 첫 녹음은 바흐 연주사에 혁명을 일으킨 음반이야. 그 전에는 바흐 시대의 악기인 쳄발로로 연주하는 게 대세였는데, 이 음반 이후 피아노로도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는구나. 하지만 이 녹음은 템포가 너무 빠르고 모노 녹음이라 음질이 떨어진다는 흠이 있지. 1981년의 두 번째 녹음은 아마도 모든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중 가장 인기가 높을 거야.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 제7변주곡 (피아노 : 글렌 굴드, 1981년 녹음)
http://www.youtube.com/watch?v=g7LWANJFHEs

뽀송뽀송한 음색, 경쾌한 흐름, 요염한 표정이 넘쳐흐르지. 굴드는 연주 도중 허밍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기벽으로 유명한데, 모차르트와 쇼팽에 대한 뜻 모를 독설 - “모차르트는 너무 오래 살았던 나쁜 작곡가다”, “쇼팽은 장식음이 너무 많아서 시시하다” - 때문에 나에게는 상당히 ‘재수 없는’ 음악가로 찍힌 바 있어. 이 분이 연주한 모차르트 소나타 A장조가 좋다기에 한번 들어 보았는데, 나는...ㅋZ  글쎄,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어. 일부러 엉터리로 연주한 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모차르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 (피아노 : 글렌 굴드)
1악장 주제와 변주곡 http://www.youtube.com/watch?v=Ae6ctuy-1ic
3악장 론도, 터키풍으로 http://www.youtube.com/watch?v=MJfUrFbNSvk

글렌 굴드가 왜 이렇게 모차르트를 기괴하게 연주했는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천천히 알아보려 해. 이 분이 제일 좋아한 모차르트 곡은 ‘환상곡과 푸가’ C장조 K.394라고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이 곡이 “제일 모차르트 음악 같지 않아서”였다고, 헐. 모차르트가 바흐 음악을 공부하며 습작으로 만든 곡이야. 그냥 들으면 바흐 음악인 줄 알 거야.  

모차르트 환상곡과 푸가 C장조 K.394 (피아노 : 글렌 굴드)
환상곡 http://www.youtube.com/watch?v=F2GWmW1SM6g&feature=related
푸가 http://www.youtube.com/watch?v=upOfod9Pdao&feature=related

내가 아직 잘 이해 못하는 이 연주자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 한명 있어. 다름 아니라, <미디어 오늘>에 클래식 칼럼을 써 보라고 전화를 준 사람이 바로 그 주인공이야.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서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 이정환, 그리고 그의 블로그 ‘이정환닷컴’에 실린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란 글이었어.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본인이라는 거야! 이런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 <투기자본의 천국, 대한민국>을 쓴 경제전문 기자 이정환이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니, 놀라운 일이었어. 글렌 굴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정환 기자의 다음 글을 참조하면 돼.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0208.html

역시 글렌 굴드는 바흐 음악에 모든 걸 바친 연주자였나 봐.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랑 쇼팽을 시덥잖게 얘기해서 불쾌했지만(아니, 의아했던 거지?) 바흐 연주에 관한 한 이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한 이 분의 연주를 변함없이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 연주를 ‘굴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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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사랑의 예감, 추위 따위는 흔적도 없다 -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인 무곡

 

 

춥다, 추워...

 

어제, 23일, 저녁 약속이 있어서 시청 앞에 나갔어. 무지 춥더군. 영하 2도였는데,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서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였다네. 그 추운 날씨에 1만명 가까운 사람이 모여 있더군. FTA 날치기 통과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역시 크구나, 느끼면서 잰걸음으로 전투경찰 대오를 지나 집을 향했지.

 

그런데, 헐, 집에 와서 뉴스를 검색해 보니 바로 그 자리에서 저녁 9시부터 물대포를 쏘아댔다는 거야. 물벼락 맞은 사람들 옷이 마른 동태처럼 꽝꽝 얼어붙었다는 거야.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물벼락을 맞고 얼음 덩어리로 변해버렸다는 거야. 또 해외토픽 감이로군.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소통’을 외치면서 언제나 ‘불통’의 길을 걸어온 이 정권이 하는 짓, 역시 예상대로군. 집권하자마자 미국 쇠고기 협상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이 정권은 결국은 FTA 때문에 무너질 거라는 예감이 들더군. 3개월 이내에 ISD 재협상을 하겠다 했지만 제대로 할 리가 없고, FTA가 비준되면 30개월 넘은 쇠고기 수입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더 강해질 거라니, 내년 봄으로 이어질 촛불은 꺼질 수가 없겠구나... (이거 괴담인가?)

 

추위의 기억... 따뜻한 방 안에 앉으니 문득 2004년 이맘때 상뜨 뻬쩨르부르그 풍경이 떠오르더군. 정말 추웠지. S, 네가 소련 멸망 이전인 1989년 <소련 동구의 문학과 예술> 취재할 때는 거기 안 갔었나? 암튼 난 너보다 5년 늦게 러시아를 처음 밟았고, 키로프 발레단을 취재하고 있었어. 아마도 그 사이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던 게지. 인민예술가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무용에 전념하던 키로프 발레단원들은 이제는 아파트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극장 욕실에서 땀을 씻는다 하더군.

 

그때, 촬영 하는 짬짬이 상트 뻬쩨르부르그 구석구석 부지런히 구경 다녔지. 도스토예프스키가 걷던 네프스키 거리, 10월 혁명의 시작을 알린 순양함 오로라호와 겨울 궁전... 추위는 은근히 몸을 감싸나 했더니 어느덧 뼛속까지 스며들더군. 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싶을 때 조그만 까페 하나를 발견했었지. 서둘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핫 초콜렛으로 몸을 녹일 수 있었지.

 

그 해 마린스키 극장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키로프 발레단이 공연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그 중 특히 한국 출신 발레리나 유지연이 출연한 ‘스페인 무곡’이 떠오르네. 무용 없이 음악만 들어봐.

http://www.youtube.com/watch?v=pCEo3YAgZe8 

 

거침없이 폭발하는 정열적인 선율에 몸을 맡겨 봐. 요동치는 케스터네츠와 탬버린, 생명에 넘쳐 펄펄 뛰는 오보에와 피콜로, 포효하는 금관의 찬란한 함성, 남쪽 나라의 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게 해주는 현의 속삭임, 점점 더 빠르게 고조되는 환희의 몸짓을 들어 봐.

 

이번에는 발레와 함께 들어봐. http://www.youtube.com/watch?v=0_HZ4Odoecw&feature=related 

 

그때 취재한 <심야스페셜>에는 유지연이 나오지만 이 링크의 무용수가 누군지는 모르겠구나. 남자 두명은 아마도 투우사겠지? 기품있고 늠름한 몸짓이 근사하지? 하지만 아무래도 발레의 꽃은 여성 무용수인 듯... 한손에 부채를 들고 허리를 뒤로 90도 제치는 정열적인 동작이 보기에도 즐겁지? 삶의 환희와 관능적인 사랑의 예감이 넘치는 이 무대에서 추위에 웅크리는 사람들의 나약함은 흔적도 없어.

 

키로프 발레단의 드미 솔로이스트(Demi Soloist, 준 프리마 발레리나) 유지연은 이 춤을 도맡아 추곤 했는데, 리허설 때 보니까 안무 선생님께 계속 뭔가 지적을 받고 있더군. “아니, 세상에서 이 춤을 제일 잘 추는 사람이 유지연씬데, 무슨 지적을 그렇게 받는 거에요?” 내 질문에 유지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가락끝 놀림으로 표현되는 느낌, 그 ‘뇨양스’(뉘앙스) 하나까지 다 점검해 주시는 거에요.” 자, 그럼 이번엔 여자 무용수의 손가락끝 동작에 주목하며 한 번 더 볼까? 이제 ‘스페인 무곡’이 좋다는 느낌이 좀 들지?

 

그럼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다른 곡도 조금 들어볼까? http://www.youtube.com/watch?v=iAxmkPBtBPU 

 

누구나 아는 멜로디가 나와. 너도 아는 곡이지? 이 곡은 2막의 ‘정경’이야. 지그프리트 왕자가 백조 떼를 발견하는 신비로운 밤의 호수 장면이지. <백조의 호수> 줄거리는 구글 가서 ‘구걸’하면 바로 알 수 있어. 성년이 된 왕자 지그프리트가 백조 사냥을 갔는데, 알고 보니 그 백조들은 악마의 마술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이 되면 아름다운 처녀로 변해. 그 중 오데뜨 공주에게 반한 왕자는 결혼을 약속하지. 그런데, 악마는 자기 딸 오딜르를 오데뜨로 변장시켜 왕자와 결혼시키려 해. 결국 왕자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죽고, 백조와 왕자의 슬픈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 스토리는 평범한 동화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3대 발레 -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 중 으뜸으로 치는 작품이야. 키로프 발레에서 주역을 맡았던 울리아나 로파트키나의 말이 기억나네. 이 작품은 발레리나 한명이 오데뜨와 오딜르 두명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큰 도전이고, 흥미롭다는 거야.

 

내가 취재 갔던 키로프 발레단은 이 작품을 세계 초연한 유서 깊은 곳이고, 주요 출연자 울리아나 로파트키나, 다닐라 코르순체프, 유지연 등의 스토리는 <심야스페셜 – 키로프 발레단의 백조들>에 요약돼 있어. 내가 연출한 프로그램인데 유투브에 누군가 올려놓았네.

 

http://www.youtube.com/watch?v=VTYJNtu75dY&feature=related (1)
http://www.youtube.com/watch?v=sonLfljnh4Y&feature=related
 (2)
http://www.youtube.com/watch?v=Gz0UK87XoMw&feature=related
 (3)

그때 쓴 제작후기도 있네. 아래 박스 참조.

 

<백조의 호수>에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왈츠가 나와. 1막 시작하자마자 궁정에서 펼쳐지는 무도회의 화려한 춤인데 두 번만 들으면 누구든 좋아하게 될 거야. 

http://www.youtube.com/watch?v=ph3h2IJAsgk 

 

큰 동작의 군무로 넘어갈 때 기쁨에 겨워 소리치는 트럼펫 소리도 들리지? 중간 부분, 그리움에 젖어서 노래하는 바이올린의 선율도 아름답고... 이제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곡 3개를 들어봤으니 어디 가서든 <백조의 호수> 안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 음악이 즐겁게 들리기 시작했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거야. 아니, 음악을 듣고 싶다는 자각이 생겼을 때 이미 음악을 좋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너는 이미 음악에 ‘입문’한 거야. 축하!!

 

<백조의 호수>에는 이밖에도 매혹적인 음악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발레 조곡으로 간결하게 발췌한 음반도 여럿 나와 있어. 발레 음악 전곡을 차차 들어도 좋을 거고... 돈이 좀 들겠지만 공연 있을 때 한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나중에 들어보면 좋아. 그러다 보면 다른 발레 음악도 많이 알게 되겠지? 아, 키로프 발레단 취재 갔을 때의 행복한 기억이 꼬리를 무네. 홍보담당 유가나는 참 귀여운 꺽다리 처녀였지. 공연 뒤 생맥주를 나눴던 친절한 단원들도 떠오르고... 참 추웠지만 사람들은 아주 따뜻했어. 오늘은 이만.

 

 

 

 [취재 후기] 키로프 발레단의 백조들


10월의 상뜨 뻬쩨르부르그는 온통 빨갛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의 찬란한 영광과 볼셰비끼 혁명의 피끓는 열정이 나란히 살아 숨쉬는 도시. 이 곳이 동유럽 문화 예술의 중심지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차이코프스키, 글린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위대한 작곡가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고골리 등 대문호들의 발길이 거리마다 느껴지는 곳... 이러한 상뜨 뻬쩨르부르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바로 키로프 발레단과 오페라단이다. 특히 발레단은 마리우스 쁘띠빠, 레프 이바노프 등 전설적인 안무가와 니진스키, 누레예프, 파블로바, 바리쉬니코프 등 역사상 최고의 무용수들이 만들어 온 빛나는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숨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바로 키로프 발레단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공연했다.

 

취재진이 이들의 보금자리인 마린스키 극장을 찾은 것은 10월 5일 밤 9시 경... 8일로 예정된 개막 공연을 준비하느라 단원들은 이 시간까지도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1783년에 창단했으니 올 시즌은 222번째가 된다. 극장 입구에서 취재진을 맞아 준 사람은 키로프 발레단의 유일한 외국인인 한국의 유지연. 백조 군무와 2막의 스페인 춤에 출연하는 그녀의 반가운 표정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촬영은 다음날 시작됐다. 군무 리허설은 손 동작, 발 동작으로 백조의 이미지를 표현하면서 단원들의 완벽한 호흡을 다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군무단(Corps de Ballet) 또한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클래스 매스터인 니나 우코바 선생은 이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반복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시범을 보이면서 단원들을 독려하는 그에게서 ‘완벽주의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발레리나 유지연이 공연한 백조의 호수 중 한 장면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유지연을 마주쳤다. 세계 최고의 무용수들이라는데 야단맞는 학생처럼 이렇게 많은 지적을 받는 이유가 궁금했다. 유지연은 “전체적인 호흡의 완성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군무가 솔로보다 더 어려워요”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데뜨/오딜 역을 맡은 울리아나 로파트키나가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안나 파블로바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받는 우리 시대의 프리마 발레리나. 그는 고된 연습에 숨이 가빴는지 소파에 푹 쓰러지더니 반쯤 누운 자세로 멀거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도도함과 카리스마가 물씬 풍겼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다운 얼굴이었다. 좀 더 나은 화면을 촬영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자는 나의 제안을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완벽한 춤을 위해서 노력하듯, PD 또한 좋은 영상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즉시 이해해 준 것이었다. (인터뷰가 3-4분 진행되자 그는 PD가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 듯, 친밀하고 소탈한 태도로 바뀌었다.)

 

그가 오데뜨 역을 처음 맡은 것은 10년전. “그때나 지금이나 늘 새롭게 느껴지는 배역”이며, “가장 매혹적인 작품의 주역인 만큼 발레리나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도전이자 시험과 같다”고 했다. “오데뜨와 오딜의 두 가지 역할을 다 해야 하는데, 상반된 두 가지 성격을 표현하는 일이 언제나 재미있고 매혹적”이라고 했다. 1막 빠드되 리허설은 TV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인터뷰 현장에서 로파트키나에게 요청하여 ‘5분 동안’ 촬영하기로 했다.

 

상대역인 지그프리트 왕자는 다닐라 코르순체프가 맡았다. 두 사람의 리허설을 가까이서 본다는 건 행운이었다. 리허설에 방해가 될까봐 구석에서 촬영하려고 했더니 로파트키나가 한가운데에 와서 찍으라고 했다. 잠깐 촬영하는 건데도 제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마추어인 PD 입장에서는 리허설 모습만 보아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뭐가 문제인지 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을 되풀이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들의 경지를 단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로파트키나의 선생님인 니넬 쿠르갑키나 선생님의 귀띔으로 알았는데, “그는 올해 아기를 낳은 뒤 처음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 들어갈 멘트를 생각했다. "이들에게 '굉장히 잘 하기'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잘 하는'것과 다르다."

 

유지연의 스페인춤 리허설을 촬영했다. 스페인춤은 2쌍의 남녀가 추는 다이내믹하고 열정적인 춤으로 <백조의 호수> 중 가장 화려한 부분 중의 하나다. 유지연은 “나이가 들수록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춤이 좋아진다”고 했다. 상대역인 이슬롬 바이무라도프는 아주 유쾌한 사람으로, 무대 위에서 벌어진 재미있는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예컨대 무대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동료 무용수들과 얘기를 주고 받기도 하는데, 이빨이 안 보이도록 해서 작은 소리로 얘기하면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 아주 심각한 장면에서 우스운 얘기를 슬쩍 하는 바람에 유지연이 무대 위에서 웃음을 참느라 혼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슬롬에게 유지연을 평하라고 했더니 “그녀는 표현력이 뛰어나고 모든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실수로 넘어질 때조차 옆에서 보면 그렇게 넘어지는 게 옳다고 느낄 정도”라고 너스레를 떨어서 모두 유쾌하게 웃었다.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키로프 발레단에 새로운 스타를 공급하는 이곳의 교육과정은 ‘엄격’ 그 자체였다. 매년 주연급 무용수를 꿈꾸는 3000명의 소년, 소녀들이 이곳에 지원하지만 70명 정도만 선발한다. 신체조건과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부모의 체형까지 확인 한 뒤 뽑는다. 발레를 하려면 음악성이 중요하므로 피아노가 필수고, 영어와 불어, 필요할 경우 펜싱까지 가르친다. 이 곳에서 8년 동안의 험난한 교육과정을 견디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인 듯 했다. 한 학년에서 절반 가량은 도중에 탈락한다고 한다.

 

구내 식당에서 만난 학생들은 거침없이 "힘들다"며, "작년에 함께 수업 듣던 12명 중 4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 학교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학생만 키로프에 입단에 허용되며, 키로프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사람들로만 이 학교의 교사진이 이뤄진다. 이러한 인력 순환 구조가 키로프 발레단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로파트키나는 “바가노바 시절, 어떤 날은 연습하는 도중에 학생들이 너무 지쳐서 모두 혼수상태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며 “그 곳에서 배운 것은 인내와 극기,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절제였다”고 했다. 화려한 주역 무용수가 되기 위해 가야 할 길에는 피눈물나는 연습 밖에 없다는 걸 이 학교의 어린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마린스키 극장은 긴박감이 더해 갔다.

 

구내 매점에 잠시 앉아 있는데 유지연이 황급히 들어와서 생수와 홍차를 사는 걸 목격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어떻게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내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에이, 굶긴 왜 굶어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못 먹지만...” 유지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얘기했지만 무용수들의 삶이란 게 보통 고달픈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역인 로파트키나와 코르순체프가 몹시 힘든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공연 당일. 1000석의 객석이 꽉 찼다. 무대 뒤에서는 무용수들이 의상과 분장, 소품을 챙기느라고 분주했다. 공연 전과 인터미션 때는 발레리나들이 옷을 갈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남자인 PD의 출입이 금지됐다. 난감해 하는 내 표정을 본 발레단장의 비서 유가나가 대신 들어가서 촬영해 주겠다고 했다. 촬영된 화면을 나중에 보니 화사하게 꾸민 무용수들의 모습이 매혹적이었다.

 

1막에서 백조, 2막에서 스페인 처녀, 3막에서 다시 백조로 꾸민 유지연의 모습 또한 참으로 아름다웠다. 공연 촬영은 단 10분만 허용됐다. 1막 왈츠와 빠드되, 2막 오딜의 솔로와 스페인 춤, 그리고 3막 피날레를 찍었다. 충분히 촬영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훌륭한 공연을 상뜨 뻬쩨르부르그 현지에서 촬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벅찬 일이었다. 3막, 해피 엔딩으로 각색된 피날레에서 오데뜨가 다시 살아나서 지그프리트의 품에 안기고 막이 내렸다. 20분 가까이 박수가 이어졌다. 관객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섰다.

 

밤 11시, 마린스키 극장 맞은편 아이리시 퍼브에서 열린 뒷풀이에서 유지연, 그리고 그를 아끼는 동료 단원들과 함께 즐겁게 생맥주를 나눌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트가 떠올랐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인생 전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키로프 발레단의 백조들, 그들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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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보면서 눈물 흘린 적 있나 -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

 

 

내친 김에 차이코프스키 얘기 좀 더 해 볼까? 이 분 만년의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인데, 1840년 태어나 1893년에 죽었으니 53살... 헐, 내 또래에 죽었네! 나도 참 오래 살았구나! 31살 때 "슈베르트보다 오래 살았네", 35살 때 "모차르트보다 오래 살았네", 39살 때 "쇼팽보다 오래 살았네" 했었지. 51살 되면서 "헐, 말러보다 오래 살았네" 했는데, 내년까지 살아 있으면 드디어 "차이코프스키보다 오래 살았네" 하게 됐으니... 그래도 함께 나이 들어가는친구들이 많이 있고, S, 너와 함께 이렇게 음악 얘기 나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차이코프스키는 그 시대에 '커밍아웃'하기 곤란한, 아주 드문 동성애자였다네. 갑작스런 콜레라 때문에 죽은 걸로 알려져 왔는데, 소련 문화성에서 1979년 다시 검증한 결과 정확한 사인이 ‘독살’로 밝혀졌다고. 이 분이 동성애에 탐닉하고 있다는 얘기가 퍼지자 스캔들이 자기들에게 파급될 것을 우려한 법관들 - 법률학교 시절 동급생 - 이 그에게 스스로 독배를 마시도록 강요했다는 거야.

 

이 분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마지막 작품인 <비창> 교향곡이겠지. 자기 죽음을 예측했던 걸까?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과 탄식으로 끝나지. 이 곡은 음악 교과서에 베토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미완성>,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와 더불어 ‘4대 교향곡’의 하나로 늘 나오고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단골 메뉴이니, 제목 정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이 분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유명하지. 한국이 낳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로 다음 링크에서 6분 8초 지점만 조금 들어봐. 아는 멜로디일 거야. 


http://www.youtube.com/watch?v=KOcz_JRULjQ&feature=fvst

"지금 감상하신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 중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바이올린에 정경화, 샤를르 뒤투아가 지휘하는 몬트리얼 심포니의 연주였습니다."

 

FM 방송이라면 요런 MC 멘트가 나올 차례겠지? 'D장조', 'Op.35', '알레그로 모데라토' 어쩌고 하니까 &*@%xX^^%$$&!&^@@... 골 아프지? 하하, 이건 그래도 좀 나은 거야. 차이코프스키가 쓴 바이올린 협주곡이 한 곡 뿐이라서 1번, 5번, 41번 같은 번호를 알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거 하나두 몰라두 돼. 음악 듣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까 안심하시라. 나중에 기회 되면 조금씩 알려줄게.

 

말 나온 김에 조금만 설명하면, ‘D장조’는 우리말로 라장조, ‘#’(샵)이 두 개 붙어 있는 조성이란 뜻이야. D음, 즉 ‘라’음이 으뜸임이지. ‘Op’는 라틴말로 Opus, 작품이란 뜻이고, 대개는 악보가 출판된 순서대로 붙인 일련번호야. Op.35라 하면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중 35번째로 출판된 곡이라고 생각하면 돼. ‘알레그로 모데라토’는 이탈리아 말인데, ‘적당히 빠르게’로 해석하면 될 듯. ‘모데라토’는 음악 교과서 보면 ‘보통 빠르기’라고 나오는데,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절제된, 적당한’이란 뜻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지. 그러니 너무 빠르게 연주하면 안 된다는 말이야. 에이, 이런 거 몰라두 돼! 

 

이 분의 피아노 협주곡도 아주 유명해. 미국 사람으로 1958년 차이코프스크 콩쿨에서 우승, 전 세계의 환호를 받은 반 클라이번의 연주로 맨 앞 부분만 들어봐. 이것도 아는 멜로디일 걸.

http://www.youtube.com/watch?v=-M7M4UoqBpA&feature=related

 

그것 봐, 아는 곡이지? 이미 음악을 많이 알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다고 얘기한 것, 이제 반성하시라! 이 분의 음악은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게 제일 큰 특징이야. 이 분을 ‘멜로디의 천재’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래서인지, 이 분의 음악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 나라 사람들 정서에 아주 잘 맞아. 어려운 러시아말 이름 대신 그냥 우스개로 ‘차에 코 푼 XX’라 불러도 돼.^^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해적판 LP로 <비창> 교향곡을 처음 들었고, 그 뒤 이곡 저곡 들어보았지만, 사실 이 분 음악을 각별히 좋아한다는 느낌은 없었어. 그런데, 방송사에 들어와서 한참 지난 1996년, 발레리나 강수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였어. 그녀가 속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 <오네긴> 공연 현장을 취재했지. 강수진이 여주인공인 타치야나 역을 처음 맡았어. <오네긴> 1막 중 타치야나의 여동생인 올가와 시골 시인인 렌스키의 청순한 사랑을 표현하는 2인무. 이 장면에 나온 그 선율은 촬영할 때부터 내 마음 속에 은근히 스며들더니, 편집하면서 되풀이 듣는 동안 뼛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박혀 버렸어. 그 뒤 나는 차이코프스키를 열렬히 좋아하게 됐어. 나에겐 각별한 이 음악, 한번 들어 봐. 발레 <오네긴> 중 1막, '렌스키와 올가의 2인무'
http://www.youtube.com/watch?v=qjsXHcneAjI&feature=related

 

이 선율도 귀에 익은 것 같지 않아? 꽤 오래전 SBS 드라마 <도둑의 딸> 주제곡으로 나온 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지. 이 곡은 발레와 드라마에서는 관현악 연주로 나오지만 원래는 피아노 모음곡 <사계>(Seasons) 중 '6월 - 뱃노래'야. 19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자, '건반 위의 차르'로 불리는 미하일 플레트네프 연주로 들어 봐.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6월 - 뱃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eBDAklpf8X4

 

<사계>는 차이코프스키가 1876년 뻬쩨르부르그의 음악 잡지 <누벨리스트>에 한 달에 한 번 싣기 위해 작곡한 12곡의 피아노 소품집이야. 당시 그는 교향곡 3번의 모스크바 초연,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미국 초연이 잇따라 대성공을 거뒀고 <백조의 호수>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는 넉넉지 못했다고 해.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연 6천 루블의 후원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해인 1877년부터였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을 위해서 만든 이 소품집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짭짤한 수입을 안겨 준 모양이야. <사계>를 작곡할 당시 그는 친구에게 기분 좋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

 

“팬케이크를 만들 듯 작곡하고 있어요. 오늘 10번째 팬케이크를 구워냈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은 구두공이 장화를 만들 듯 주문에 의해 불멸의 작품들을 만들었죠. 주문이 없었다면 만들지 않았을 곡들이에요…. 음악의 영감에는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자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고 또 하나는 주문 받을 때 오는 건데, 후자의 경우 확실한 플롯과 텍스트, 마감 시간, 그리고 수백 루블의 지폐가 약속돼야 해요.”

 

차이코프스키가 아주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야. 러시아판 악보에는 곡마다 그 달을 묘사하는 시구가 붙어있었는데, ‘6월 - 뱃노래’ (Barcarolle)에는 플레세이어(Pleseyer)라는 시인의 다음 노래가 있었대. 

바닷가로 가자,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입맞출 거야. 
신비로워라, 별들은 우리에게 슬픈 눈빛을 던지네.

 

<사계>에 들어 있는 12편의 소품은 모두 A-B-A의 단순한 형식으로 ‘멜로디의 천재’ 차이코프스키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서정적인 곡들이야. 내친 김에 다른 곡들도 좀 들어 볼까. 아름다운 곡들이니 관현악 편곡은 물론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기타, 만돌린으로 편곡한 것도 있어. 취향대로 들으면 되지. 일단 영상 예쁜 것들로 골라 봤어.

 

‘4월 - 눈방울’ (Snowdrop) http://www.youtube.com/watch?v=Rn5AEKZsGWE

푸르고 순결한 눈방울꽃이 피어나고, 
그 옆에는 마지막 눈이 내리네. 
지나간 슬픔이 남긴 마지막 눈물, 
새로운 행복의 첫번째 꿈…. (마이코프)

 

‘10월 - 가을의 노래’ (Song of Automn) http://www.youtube.com/watch?v=RybOFnK2grQ&feature=related

우리 가난한 과수원에 내리는 가을…. 
노란 낙엽이 바람에 날리네. (톨스토이)

 

‘11월 - 삼두마차’ (Troika) http://www.youtube.com/watch?v=UG9LLsp088c&feature=related

외롭다고 길을 바라보지 마라. 
삼두마차를 따라서 달려가지 마라. 
그냥 그리워하라. 
홀로됨의 두려움을 단숨에, 
영원히 네 가슴 속에서 질식시켜라. (네크라소프)

 

피아노 연주 CD를 사려면 유투브에 없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연주를 권하고 싶네. 이 연주보다 섬세한 시정(詩情)이 넘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 플레트네프 것도 훌륭해.

 

다시 발레로 돌아가 볼까. <오네긴>에서 제일 에로틱한 장면은 1막 끝의 '거울의 2인무'야. 도시 청년 오네긴을 보고 사랑에 빠진 문학소녀 타치야나가 꿈을 꾸지. 그 꿈에선 오네긴이 거울 속에서 뛰어나와 타치야나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 하지만 그건 타치야나의 환상이었을 뿐이야. 발레 <오네긴>중 1막, '거울의 2인무'.
http://www.youtube.com/watch?v=M4zyNoJvJTY&feature=related

 

'멜로디의 천재'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이렇게 관능미가 넘치다니 놀랍지 않아? 강수진이 맡은 타치야나는 유투브엔 유감스럽게도 짜투리 밖에 없네. 96년 3월 방송한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을 찾아서 보는 수밖에 없겠지. 이 링크에 나온 여자는 1960년 초연 당시 타치야나를 맡았던 마르시아 하이데. 강수진의 스승이기도 한 이 분은 브라질 출신으로, 내가 취재 갔을 때 슈투트가르트 발레 단장이었어.

 

그런데, 이 발레에는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묘한 대목이 있어. 글쎄, 발레가 사람을 울린다니까. 3막 피날레인 '규방의 2인무', 오랜 세월 방황 끝에 타치야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오네긴이 열렬히 구애하지만 타치야나는 받아들일 수 없지. 애끊는 두 사람의 아픔을 표현한 음악에 마음을 맡겨 봐. 아래 링크의 3분 35초 지점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5분 23초 지점부터 눈물이 펑펑 쏟아질 거야. 발레 <오네긴> 중 3막, '규방의 2인무'.
http://www.youtube.com/watch?v=WXglZgfXNlc&feature=related

 

마르시아 하이데가 주연을 맡은 발레 <오네긴>은 전체가 유투브에 있으니 시간 날 때 맘먹고 무료 감상하시길... 이 무용에 음악이 없었다면 눈물이 나왔을까? 음악의 힘, 정말 대단하지? 울려 준다니까. 제대로 된 멜로드라마 <오네긴>을 보고 제대로 눈물을 흘리려면 <오네긴>의 스토리를 알아야 하는데, 아래 박스의 제작 후기를 참조하시라. 오늘은 여기까지.

 

 

 

 [취재후기]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 <신춘 특집 다큐멘터리 -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방송 : 96. 3. 17)

 

바흐를 기막히게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중앙 정거장 꼭대기에서 우스꽝스럽게 돌고 있는 벤츠 마크, 과묵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늘 찌푸리고 있는 잿빛 하늘... 10년전 강수진이 처음 슈투트가르트에 왔을 때도 같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헤겔, 횔덜린, 실러, 헤세, 벤츠 자동차, 바이첸 크리스탈 맥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엄격하고 보수적이지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독일 남부 슈바벤 지방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활동 무대는 시내 중심가인 슐로스가르텐에 자리한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립극장이었다. 취재진이 강수진을 만난 곳도, 그와 작별인사를 나눈 곳도 거기였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오직 연습 뿐이었다.

 

1 월 27일 아침,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강수진의 두 눈에 약 0.1초 가량 눈물이 어린 것을 보았다. 홀로 외롭게, 그러나 강인하게 이국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 온 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그는 무척 들뜨고 긴장해 있었다. 오랫동안 원했고 기다려 온 <오네긴>의 타치아나 역이니까...

 

<오네 긴>은 푸시킨 원작,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3막 발레로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창립자인 존 크랑코가 안무했다. 모든 장면에서 러시아 냄새가 배어나지만 정작 러시아의 볼쇼이나 키로프는 이 작품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1960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창단 때 세계 최초로 무대에 오른 뒤 지금까지 이 발레단이 가장 자랑하는 레퍼토리다.

 

문학소녀인 타치아나는 도시 지식인 오네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오네긴은 아직 풋내기인 타치아나의 구애를 '타이르듯' 거절한다. 오네긴은 타치아나의 동생 올가를 희롱하고, 올가가 장난스레 이에 화답하자 격분한 애인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 결국 오네긴의 총에 맞아 죽는다. 10년 후, 오랜 방황 끝에 잘못을 뉘우친 오네긴은 성숙한 타치아나를 보고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 그레민 공의 부인이 된 타치아나는 애틋한 정을 느끼면서도 그의 구애를 단호히 거절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푸시킨의 운문 소설은 스토리가 멜로드라마와 비슷해서 우리 정서에 아주 잘 맞는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이 작품에 심취해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을 작곡한 바 있다. 천재적 안무가 존 크랑코는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녹턴> 등의 선율을 모아서 발레 <오네긴>을 만들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음악이 서구적인데 비해 <오네긴>의 음악은 순수한 러시아의 향기가 넘치며, 특히 1막 '거울의 2인무'와 3막 '규방의 2인무' 부분의 음악은 아주 매혹적이고 정열적이며 달콤하기 그지없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무용수 65명, 엔지니어와 미술 담당 50여명, 전속 관현악단 50여명을 통틀어 200명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된 커다란 팀이다. 연습에 임하는 단원들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고, 프로페셔널다운 헌신과 집중력을 그들 모두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20여개국에서 온 정상급 무용수로 이뤄져 있다. 단장인 마르시아 하이데는 브라질, 오네긴 역의 베니토 마르첼리노는 네덜란드, 올가 역의 율리아 크레머는 독일, 렌스키 역의 이반 카발라리는 이탈리아, 그리고 이번 공연의 꽃인 타치아나 역의 강수진은 한국 출신이다. 유럽 정상급인 그들은 취재진에게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들 모두 강수진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연 사흘 전부터 강수진은 눈에 다래끼가 나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작년 10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할 때도 왼쪽 손가락을 삐어서 고생했다. 중요한 공연 때마다 뭔가 탈이 나는 징크스인지... 강수진은 아주 독한 마이신으로 부은 눈을 가라앉힌 뒤 무대에 올랐다.

 

1 월 30일, 첫 공연이 있던 날 서울에서 부모님과 동생 대준이가 왔고 모나코에서 사춘기 때의 은사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이 왔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극장의 1,600석이 모두 찼다. 1막 '거울의 2인무'가 펼쳐지는 동안 숨소리, 기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3막 '규방의 2인무'가 끝났을 때 많은 독일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발레리나 강수진

  

공연 뒤 무대 뒤에서 만난 하이데 단장 - 그 역시 20여년 동안 세계 정상급 발레리나였다 - 은 눈물 사이로 웃으며 "내가 가르친 것 이상으로 해 냈다"며 행복해 했다. 마리카 선생 - 그는 유럽 발레계의 대모라 할 수 있다 - 은 "마이 베이비, 마이 베이비..."를 연발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슈투트가르트 차이퉁>과 <슈투트가르트 나흐리히트>지는 "30년 전 하이데가 초연한 이래 강수진이 가장 훌륭한 타치아나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강수진이 한 말은 "다음엔 좀 더 잘 해야 할텐데..."가 전부였다.

 

강수진은 93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역을 맡은 뒤 <마타하리>, <마술 피리>,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꾸준히 성장해 왔고, 이번 <오네긴> 공연으로 확고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전성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먼저 타치아나를 했던 선배 발레리나 마리온 예거, 베아트리체 알메이다, 안니 마이에는 진심으로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서 화려한 정상의 자리를 후배에게 내준 발레리나의 슬픈 뒤안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발레는 음악이나 미술 분야와 달라 발레리나는 전성기가 지나면 예술가로서 내리막길을 걷게 마련이다. 몸으로 하는 예술이니까... 선배인 베아트리스가 연습 도중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언제 단 한번의 부상으로 발레 인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게 그들의 삶이다. 강수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길지 않은 전성기 동안 조심스레 다루고 아끼며 키워 나가야 할 우리의 연약한 새...

 

두번째 공연이 끝난 다음날, 강수진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심한 독감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새 작품 <샤콘느>를 연습하러 바덴 뷔르템베르크 극장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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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클래식 들으면 안 되냐?” -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에 얽힌 추억

 

 

참 격세지감이 드네. 이 정부 들어서 표현의 자유가 87년 6월 항쟁 이전으로 되돌아갔다는 건 통탄할 일이지. 하지만 수평적 소통 방식이 대세가 됐고 시민사회의 문화적 다원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변화야. 대통령이든, 회사 간부든, 누구도 예전처럼 수직적 리더십을 고집하거나 획일적 가치를 주입하는 건 불가능해졌어.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엔 이른바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됐고, 이러한 독재에 저항하는 대열 한 켠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 좀 켕기는’ 일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한결 자연스러워졌어. 다행이야.

 

과거의 부자연스런 태도 이면에는 클래식 음악은 ‘유한계층이나 즐기는 것’,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겐 너무 한가한 여흥’, 뭐, 이런 류의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아.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나 안 듣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어. 어렸을 적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어 온 나 또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가령, 책을 읽다가 ‘칼 마르크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좋아했다’, ‘북한에서는 쇼팽을 진보적인 음악가로 매우 높이 평가한다’ 같은 대목이 눈에 띄면 “어, 그런가? 참 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으니까. 87년 이후 노조 활동에 꽤 열심히 참여했던 나조차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은 ‘뿔 달린’ 사람 아닐까” 라는 원초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칼 마르크스도, 북한 사람들도, 그리고 나 자신도 결코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자연스레 인식하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이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처음 자극을 준 사람은 뜻밖에도 당시 ‘노동자문화운동연합’ (줄여서 ‘노문연’) 의장을 맡고 있던 김정환 형이었어. 형은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 예수>, <기차에 대하여> 등 20권이 넘는 시집을 냈고,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 등 음악 에세이도 많이 쓴, 아주 소탈하면서도 뚝심 있는 글쟁이지. 술 좋아하고, 젊은 친구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술이 좀 되면 그 자리에서 오페라 아리아 수십 곡을 연달아 부르기도 하는 괴력의 예술가였지. 얼마 전부터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한다 하셨는데, 그 똥배에서 나오는 묵직한 힘으로 잘 해 내실 거라고 봐.

 

암튼, 당시 정환 형은 우리 노조와 교류가 많았지. ‘노문연’ 노래패는 지금 상상이 잘 안 될 정도로 맹활약을 했는데, 특히 이들이 낸 카세트 11집 <평등의 땅에>는 정점에 이른 노래 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들로 가득 차 있었어. 89년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언론노조 (당시는 ‘전국언론노련’) 창립대회 때 선보인 이 노래들은 지금은 아쉽게도 거의 잊혀진 것 같아. 하지만 얘기 나온 김에 한두 곡만 함께 들어보면 좋겠네.    

 

<저 평등의 땅에> http://www.youtube.com/watch?v=_DYZUxvrrjI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
큰 상처 입어 더욱 하얀 살로
갓 피어나는 내일을 위해
그 낡고 낡은 허물을 벗고
잠 깨어나는 그 꿈을 위해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넓은 평등의 땅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날이 오면>으로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선애였지. 서정적인 터치의 신곡 <저 평등의 땅에>도 89년 언론노조 창립총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어.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투쟁 현장에서 아직도 가끔 부르나 봐.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http://www.youtube.com/watch?v=1O8Pn-FAiV4

죽은 자 무엇으로 남았는가 
남에 유채꽃, 북에 진달래 흐드러져 
이 땅에 흘린 피로 맺혀 있네
온 누리 온 몸 흔드는 함성 
눈부신 노동과 투쟁의 열매로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가
남과 북의 원한 강물 져 흐를 때
우리는 해방의 나라로 가야하네
온 누리 물불로 아름다운 세상
치욕인 산 눈물인 산 떨쳐 일어나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우리 해방의 나라 기억하리라
산천초목 영원한 기쁨의 나라
온누리 부활로 피어 오르니
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영원으로 만나는 세상
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어휴, 지금 들으니 좀 찬송가 같기도 하네. ‘온누리’, ‘영원’ 같은 단어도 좀 생경하고. 하지만 당시는 통일을 향한 열정과 강고한 투쟁 의지를 담고 있는 이 합창이 장내를 압도했지. 나도 이 노래에 흠뻑 취해 집회 뒤풀이 때 큰 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나네.

 

당시 나는 한편으로는 ‘운동권 가요’를 입에 달고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클래식 음악을 혼자 들으며 지내는, 일종의 ‘분열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탓에, 난 ‘대중 가요’는 하나도 모르고 오직 클래식 음악 아니면 운동권 노래뿐인 바보가 됐어. 내가 노래방 가는 걸 제일 싫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분위기 살릴 만한 노래는 한 곡도 모르니 친구들 썰렁하게 만들 게 뻔하지. 그러니 노래방 갈 엄두가 나겠어?

 

아무튼, 89년 어느 날 정환 형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어. 그런데, 당산동 집 앞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어디선가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야. 이 분이 클래식 음악 좋아한다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으므로 혹시 다른 집에서 나오는 소리 아닌가 귀를 의심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방을 꽉 채우는 모차르트!

 

http://www.youtube.com/watch?v=Zu9VqoNWK-s FM 방송 진행자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아르투르 그루미오가 연주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K.216 중 1악장 알레그로였습니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5곡 내지 7곡 완성했어. 7곡 중 5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게 분명하지만 나머지 2곡은 불확실해서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그래서 정확히 몇 곡인지 모르는 거야. 암튼 이 곡은 3번째 작품이야. 협주곡은 독주악기와 관현악단이 대등한 자격으로 함께 어우러지도록 만든 음악이야. ‘G장조’는 우리말로 하면 ‘사장조’로, ‘G’음(‘사’음)을 기본음으로 하는 장조곡이야. 악보 첫머리에 ‘#’(샵)이 하나 붙어있지. ‘K’는 모차르트 작품 목록을 만든 쾨헬(Koechel)의 이니셜이야. 이 분이 정리한 모차르트 작품 목록 중 216번째 곡이란 뜻이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번호는 Op(Opus)인데 모차르트는 좀 특이하지? ‘알레그로’는 이탈리아말로 ‘빠르게’라는 템포 지시어고. 흠... 이런 건 몰라도 된다고 지난번에 얘기했으니 머리 아파하지 말 것.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어리둥절한 내가 질문했지. “아니, 노동자 문화운동 하시는 분이 모차르트가 웬 말이요?” 정환 형이 웃으며 대답하더군. “노동자가 모차르트 들으면 안 되냐? 좋은 건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어야 되지. 그래야 좋은 거 아니야?”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어. “????...? !!!!!...!”

이윽고 나는 정환형의 ‘뻔뻔함’(?)과 ‘대담함’을 새삼 존경하게 됐고, 어색한 죄책감에서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 정환 형을 만나면 함께 음악 듣고 얘기 나누는 게 즐거워졌어. 홍대 앞에 있던 ‘키작은 자유인’에서 가끔 한잔 하며 음악을 나누곤 했지. 이후, 세월의 힘을 빌어, 머리에 뿔난 사람은 없고,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데는 좌와 우가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지.

 

소련이 낳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이 곡을 연주했어. 내가 아주 존경하는 이 분이 직접 지휘하며 연주하는 동영상이 있네. 1968년 스톡홀름 연주. 아직 냉전이 한창일 때지? 음악 앞에서 이념과 체제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http://www.youtube.com/watch?v=M-UqcolD2Qk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1968년 스톡홀름 연주 장면.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은 내가 중학 시절부터 아주 오래 제일 좋아했던 곡 중 하나야. 어린이 같은 순수함으로 가득 찬 따뜻한 음악이야. 중학교 때 처음 들은 건 지노 프란체스카티 연주였어. 내가 숭배하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콜럼비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협연했지. 바로 그 연주를 함께 들어보자.

 

1악장 알레그로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BkCcK-RG6ms

 

오케스트라가 첫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모든 현악기가 도약하는 대목(위 링크 24초 지점)부터 행복감을 느꼈지. 호른이 연주하는 2주제(40초 지점)에서 잠시 편히 쉬나 했더니 즉시 순결한 현악기의 노래가 이어지더군. (48초 지점) 그런데 얼마 안 가 바이올린이 예쁘게 속삭이고 첼로가 부드럽게 받쳐주는 대목(55초에서 1분 8초까지)에서 한 순간 천국의 문이 열리는 걸 느꼈어. 이 대목들에서 느낀 감동은 곡 전체로 이어졌지. 

 

모차르트가 19살 때 고향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루네티를 위해 만든 곡이야. 이미 유럽 전역의 음악 흐름을 다 흡수했고, 세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도 우뚝 선 젊은 모차르트. 그는 자유 음악가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아직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2006년 다큐멘터리 ‘모차르트 2부작’을 만들 때 모차르트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 곡 2악장의 선율을 사용했어. 평생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유지했던 모차르트의 이미지에 이 곡의 주제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아래 링크 1분 42초부터 제1주제 / 2분 22초부터 2주제) 그가 몰이해와 푸대접으로 아픔을 느끼는 대목에서 단조로 변형된 주제를 썼어. ‘천사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 아닐까? (아래 링크 4분 10초부터)

 

2악장 아다지오 (아주 느리게) http://www.youtube.com/watch?v=Uy3bSP7OyF4&feature=related

 

모차르트 음악은 이렇게 평온하고 달콤했지만 이는 음악가로서의 소명에 따른 창작의 결과일 뿐, 모차르트 자신의 삶이 언제나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아. 아버지에게 쓴 편지 한 구절.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몇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말입니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 http://www.youtube.com/watch?v=mNp1hnPNTxE&feature=related

 

마지막 악장은 천진한 어린이가 뛰노는 모습을 보는 듯해. 아주 단순한 곡이니 형식을 조금 살펴 볼까? 일단 음악을 두 번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처음 들을 때는 첫 주제가 나오는 대목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위 링크 시작 부분 / 34초 / 1분 39초 / 3분 / 4분 40초 / 6분 12초 지점) 메인 주제가 되풀이 나오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하고 재미있는 악절들이 삽입된 ‘론도’ 형식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야. 이탈리아말 ‘론도’는 영어로 라운드(Round), ‘돌고 도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고전 협주곡의 마지막 3악장에서 많이 쓰는 형식이니 지금 이해해 두면 좋을 듯. 한 번 더 들을 때는 중간 중간 삽입된 대목들의 매력을 느껴보도록. 단조로 구슬프게 흘러가는 대목(1분 51초 지점), 스트링의 피치카토(pizzicato, 현악기를 활로 연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주법) 위에서 솔로가 매혹적으로 노래하는 대목(3분 27초 지점), 그리고 아예 귀여운 동요가 나오는 대목(3분 56초 지점)을 들어봐. 너무 머리를 많이 쓰지 말고 그냥 느끼면서 따라 부르면 더 좋아. 어때, “♬도.도.도.레.미.미.미.도.레.레.레.시.도시도레도!♬”-->“♬밥.상.위.에.젓.가.락.이.나˜란히나˜란히나.란.히!♬”랑 똑같지?

 

모차르트 협주곡의 착한 멜로디가 흐르는 집은 늘 따뜻하겠지? 오늘 얘기한 3번 말고 다른 곡들도 좋으니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기 바래. 참,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니지만, 5번의 느린 악장으로 쓰기 위해 새로 만든 ‘아다지오’ E장조 K.261도 참 아름다운 곡이야. 아래 링크해 놓을게. 밤에 잠들기 전에 틀어 놓으면 가족 모두 평화로운 시간을 맛볼 수 있을 거야. 강추!! 
 
아다지오 E장조 K.261 
http://www.youtube.com/watch?v=UvygWVTEkb8&feature=related (아르투르 그루미오)
http://www.youtube.com/watch?v=XSrOwiuJ0jg&feature=related
 (이착 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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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죽음과 베토벤의 '운명' -  베토벤 교향곡 5번

 

 

내가 언제나 음악을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지 묻곤 했어. 그럼 누나 얘기를 하지. 72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누나가 돌아가셨는데, 당시 22살이던 누나가 남겨놓고 가신 LP를 듣고 “아,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됐다”고. “좋아하게 됐다”는 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좋아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돌아가신 뒤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어. 특히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니! 어린 내겐 큰 상처였음이 분명해. 그 뒤 몇 년 동안 누나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니까. 누나의 추억을 짧은 글로 끄적인 건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뒤였으니까. (아래 박스 글)

 

누나는 당시 구하기 어렵던 원판 LP를 꽤 많이 갖고 계셨어. 누나가 음악을 들을 때 나도 어깨 너머로 함께 들었던 거지.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제법 심각한 곡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어. 세고비아나 줄리언 브림이 연주한 기타 솔로곡도 꽤 많이 들었어.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되풀이 듣기’ 훈련을 이미 누나를 통해 받았던 셈이지.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누나가 남긴 LP를 들으며 누나의 추억과 손길을 혼자서 느끼곤 했어. 그런데,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빠르고 힘차게)

http://www.youtube.com/watch?v=U-glr-ow_po&feature=related

 

음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바로 그 지휘자가 연주한 걸로 다시 들으니 감동이 새롭네. 보통 <운명>교향곡이라 불리는 이 곡은 클래식 음악 역사상 제일 잘 알려진 곡이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이 곡을 빠뜨리고 갈 수는 없어. ‘따따따따~~~~’ 하는 첫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나를 ‘운명적’으로 음악의 세계로 이끈 게 바로 이 주제야.

 

특히 위 링크 1분 36초 지점, 호른이 포효하듯 1주제를 연주하는 대목이 가장 강력하게 뇌리에 박혔어. 젊은 나이에 떠나버린 누나의 ‘운명’을 느꼈던 걸까. 통곡하듯 ‘따따따따~~~’ 첫 주제가 다시 나온 뒤 3분 9초부터 3분 35초까지, 현악이 흘러가는 동안 파곳과 클라리넷이 고뇌에 잠겨서 노래하고 이어서 오보에가 가냘프게 숨결을 이어가는 대목, 여기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을 느꼈어. 이어서 4분 41초 지점, 폭풍처럼 몰아치는 클라이맥스는 인생의 고뇌 그 자체를 내게 들려주고 있었어.

 

이 무렵, 나는 인간의 모든 지적, 문화적 유산 가운데 음악이 가장 위대한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음악을 공부해서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 보기도 했지. 아버지가 반대하셨고, 나 또한 ‘작곡을 할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전공을 포기했지만 말야. 하지만 음악이 인간 본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의지, 충동, 사랑, 선의를 가장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일생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하루와도 같았다”고 했지.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어.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꼽히는 베토벤이 26세 때부터 귓병을 앓았고, 30대 중반에는 거의 귀머거리가 되었고, 이 때문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절망했는지는 32세 때 가을에 쓴 비통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어. 
   
“나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말해 주세요, 저는 귀가 먹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었어.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극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알았던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그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나는 그럴 수 없어. 너희들과 기꺼이 어울려야 할 때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것을 용서해다오. 나의 이 불행은 내겐 이중으로 괴롭단다. 왜냐하면 이 불행 때문에 나는 오해받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상호간의 심정 토로도 할 수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 1802년 10월 6일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베토벤은 침통한 마음으로 두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면서도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바로 그것 뿐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베토벤은 결국 음악가로서 저주라 할 수 있는 청각상실을 딛고 불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지.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표상되는 베토벤의 위대성을 바로 이 교향곡에서 알 수 있는 거야.

 

 

‘따따따따~~~~’ 하는 1악장 첫 주제는 모든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지. 여러 위대한 지휘자들이 4개의 이 음표를 어떻게 연주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거야. 다큐멘터리 <The Art of Conducting>의 첫 대목에선 아르투어 토스카니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조지 셀의 지휘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어. 
http://www.youtube.com/watch?v=6va_z525JJc

 

<운명>이라는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따따따따~~~~’ 네 음표를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는 제자 안톤 신틀러의 증언이 있어. 여기에서 <운명>이란 부제가 나왔다는 거야. 하지만 이 제목은 독일에선 별로 안 쓰인 반면 일본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고, 그 결과 한국에서도 흔히 그렇게 불리게 된거야. 보통은 그냥 ‘C단조 교향곡’이라 하지.

 

안톤 신틀러의 설명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어. 베토벤이 빈의 프라터 공원을 산책하며 들은 노랑촉새 소리에서 이 주제를 따 왔다는 제자 칼 체르니의 증언이 있어. 최근 영국의 지휘자 가디너가 수많은 문헌 자료를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현실의 억압 속에서도 삶의 낙천성을 놓지 않고 있는 프랑스 농민들의 민요에서 따 온 것”이란 얘기도 있어. 어느 게 맞는 얘긴지 확인하긴 어렵겠지. 베토벤이 한 가지 악상을 품고 다니다가 여기저기서 다 확인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세 가지 주장이 다 맞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이 단순한 ‘따따따따~~~~’ 소리는 이 교향곡 전체에서 되풀이 나타나며 발전해 가지. 위의 1악장 링크를 다시 들으며 ‘따따따따~~’ 소리가 어떻게 변형돼서 나타나는지 들어봐. 주제가 처음 나온 뒤 발전되는 과정 (14초 지점부터)에서도 계속 ‘따따따따~’ 소리가 들리지? 46초 지점에서는 저음을 맡은 팀파니도 ‘딴딴딴딴~’ 하지? 56초 지점부터는 부드러운 2주제인데, 목관이 노래할 때 현악 파트가 ‘따따따따~’ 하고, 저음의 첼로도 ‘따따따따~’ 하지?

 

이 4개의 음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BBC뉴스의 시그널로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어. 이 리듬이 모스 부호의 V, 즉 승리를 나타내기 때문이었다고 해. 전시에는 적국 작곡가의 음악 연주를 꺼리게 마련인데도 이 곡이 독일의 적이었던 영국 공영방송의 시그널로 쓰였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이 곡이 인간 사이의 갈등과 전쟁을 뛰어넘는 인류의 명곡임을 누구나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4악장 알레그로(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J5CEAlKxJOg&feature=related

 

이 주제는 3악장에서도 변형돼서 나타나. 아래 링크의 28초 지점, 호른이 연주하는 스케르초(해학곡, 3박자의 경쾌한 악곡)의 주제도 ‘따따따따~~’야. 1분 41초 대목에서 현악이 연주할 때 목관이 ‘따따따따~~’하며 거드는 게 들리지? 스케르초의 중간 부분(2분 13초부터)은 코끼리가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신나는 대목이고, 다시 나지막히 숨죽인 스케르초에서도 ‘따따따따~~’가 이어지지. (3분 56초부터)

 

이 곡은 스케르초에서 피날레로 휴식 없이 넘어가는 게 특징이야. 교향곡 역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일 거야. 인간 의지의 승리를 구가하는 피날레로 가기 전, 기나긴 침묵과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팀파니가 심장 박동처럼 낮게 두근거리고 바이올린이 주술을 외듯 새로운 세계를 불러오는 느낌? (5분 13초부터 5분 57초까지) 이윽고 관악이 가세하면서 화산처럼 폭발하는 피날레로 이어지지. 이 찬란한 피날레의 중간 부분에서도 ‘따따따따~~’는 추억처럼 다시 나와. (9분 30초에서 10분 6초까지) 오케스트라는 더욱 큰 기세로 한 번 더 폭발하고 거침 없이 생을 구가하다가 12분 37초 부분에서 코다(종지부, 끝부분)에 이르게 돼. 파곳과 호른의 시그널로 시작, 트럼본과 피콜로까지 가세하여 맘껏 환희를 외치는 이 대단원으로 베토벤은 인생을 긍정하게 되지.

 

이렇게 단순한 주제가 발전하면서 곡 전체를 구성하게 되는 작곡 기법이 왜 중요하냐고? 이런 방식은 음악사상 모차르트가 교향곡 40번 G단조에서 처음 시도했고, 베토벤이 이 곡에서 한껏 발전시켰으며, 후대의 말러, 브루크너 등 근대 교향곡의 대가들이 이어받은 교향곡 구성 방식이야. 교향곡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어. 음악사 얘기 나온 김에 팁 하나 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어둠에서 빛으로’, ‘고통을 너머 환희로’라는 베토벤의 모토는 후대의 말러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베토벤 5번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5번에서 어둠을 딛고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로워. 

 

이 곡은 1808년 12월 22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교향곡 6번 <전원>과 함께 초연되었는데, 역사적인 연주회답게 정말 장관이었던 모양이야.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해서 10시 30분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진 이 음악회에선 6번 <전원>이 먼저 연주됐다고. 베토벤은 작곡자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6번에 이어 5번을 지휘했고, 파죽지세로 오라토리오 Op.86을 지휘한 다음에는 독주자로서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고, 이어서 ‘합창 환상곡’ Op.80까지 내쳐 연주했다고 해.

 

이 역사적인 연주회를 지켜본 라인하르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우리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 6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그곳에 앉아,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장점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격언을 확인했습니다. 여러 가지 작은 실수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긴 했지만, 음악회가 끝나기 전에 일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빈 사람들은 5번 C단조보다 6번 <전원>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해. 암튼, 음악회가 워낙 길다보니 공연 후반부에 사고가 일어났대. 다른 한 참석자의 증언.

 

“마지막으로 또 다른 환상곡이 연주되었는데, 이번에는 관현악단이 연주에 동참하고 합창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이한 편성의 연주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지요. 관현악단의 연주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베토벤은 예술가의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청중과 주위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연주를 다시 시작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를 비롯한 베토벤의 친구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나는 빨리 그 곳을 떠날 수 있는 마차가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연주회가 결국 엉망이 되었다는 얘기지만,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표현인 교향곡 5번과 6번이 세상에 처음 나온 그 날 그 연주회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벅차는 것 같아. 이 교향곡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지, 몇 가지 사례를 볼까.

괴테는 “나는 이 교향곡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천장이 와르르 무너질 듯 마구 흔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어.

 

베를리오즈 <회상록>에 나오는 내용도 자주 인용되지. 1828년 파리국립음대에서 이 곡이 연주됐을 때 얘기인데, 베를리오즈는 평소 베토벤에 대해 좀체 좋게 평하지 않았던 스승 르쥐에르(Lesueus)를 모시고 이 음악회에 갔대. 4악장이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음악에 압도된 나머지 아무도 박수를 칠 엄두를 못 내고 멍하니 앉아 있었대.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뒤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박수를 시작하니까 비로소 사람들이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고. 르쥐에르(Lesueur)는 연주가 끝나자 소감을 묻는 베를리오즈에게 이렇게 말했대. “우선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굉장하군. 그런데, 모자를 쓰려는데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다음에 얘기하세” 다음날 베를리오즈가 찾아가서 다시 묻자, 스승은 어제의 감동에서 덜 깬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대. “이런 곡은 다시는 작곡돼선 안 될 거야.” 베를리오즈의 대답이 걸작이었어. “물론이죠. 다른 사람이 앞으로 이런 곡을 작곡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슈만은 이 곡을 듣던 한 어린이가 마지막 악장이 시작되자 “무서워!” 하고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 품에 파고들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어. 슈만 자신은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새롭게 외경과 경탄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이 교향곡은 음악의 세계가 지속되는 한 몇 세기가 지나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느낌도 이 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인간 정신이 자연을 더 닮았던 시절, 사람들은 음악을 더 강렬하게 느낄 줄 알았던 걸까. 아직 어리던 중학교 1학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다시 느끼는 게 요즘은 쉽지가 않아.

 

다시 누나 생각. 베토벤은 끝내 삶을 긍정할 수 있었지만 22살 젊은 누나는 훌쩍 떠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살아 계시다면 60을 넘겨서, 경륜과 따뜻함을 가진 초로의 할매가 되어 있을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당혹해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살짝 웃어줄 수 있는 유머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까. 상상할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추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 어릴 적 내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안데르센 동화, 그림 동화 얘기를 들려주던 누나의 목소리가 지금도 어렴풋이 귀에 들려. 그리고 누나와 함께 걷던 변두리 산책길로 쏟아지던 저녁 햇살이 지금도 아스라이 반짝여. 그 추억이 떠오르게 해 주는 곡, 바로 베토벤 5번 교향곡의 2악장이야.      
 
2악장 안단테 콘 모토 (느리고 평온하게)
http://www.youtube.com/watch?v=v5qS6tiNaFg 
 

 

 

 50년전 오늘... 생각컨대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누나는 태어났다.

내가 갖고 있는 누나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집안에 큰 일이 있던 날, 마당 한켠의 창고로 쫓겨나 - 아마 아이들은 나가 있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 나에게 수박을 먹이며 씨를 퉤퉤 뱉게 하고 도리도리를 시키며 깔깔 웃던 12살 난 장난꾸러기 소녀의 모습이었다. 더운 여름 밤이었나 보다.

 

그 다음은 다섯 살 난 내게 정종을 먹이며 "잘 마신다"고 살살 칭찬을 하고, 누나의 칭찬에 신이 난 내가 됫병을 거의 다 비우고 비틀비틀 헤롱대는 걸 보고 깔깔 웃던 모습이다. 누나는 꽤 엽기적인 취미를 가진 사춘기 소녀였음이 분명하다.

 

누나는 내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동화 얘기를 해 줬는데 안델센과 그림형제의 동화 - <눈의 여왕>, <인어공주>, <일곱 난쟁이 얘기> 따위 - 를 주로 들려 줬다. 누나와 함께 걷던 변두리 산책길로 쏟아지던 저녁 햇살이 지금도 생생히 반짝인다.

 

누나가 사 준 책 중에 <호도까기인형>하고 <그리스 신화>를 열심히 읽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책이 먼저였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초등학교 - 그때는 국민학교 - 1, 2 학년때였던 것 같다. 아직 수색에 살 때니까....

 

밤늦게 자려고 누워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누나와 형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적도 있다. 새로 집권한 박정희를 비판하는 얘기도 있었지... 누나와 형은 어린 동생이 잠든 줄 알았겠지만 나는 뭔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은밀한 설레임으로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누나한테 빗자루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은 기억도 있다. 방바닥에 떨어진 누나의 돈 5원을 주워서 동생과 함께 몰래 찐빵도 사 먹고 만화가게에서 실컷 만화도 본 게 발단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우리를 혼낸 건 우리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지...

 

누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클래식 기타를 쳤다. 누나는 파가니니 소나티네 C장조를 쳐 주며 이 곡을 쓴 게 파가니니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아니야, 거짓말..." 이라고 박박 우겼는데, 그 이유는 이 곡의 멜로디 중 "미.솔.솔.파.미.솔.솔.파~ "하는 대목이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하는 동요의 멜로디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요랑 멜로디가 같은 클래식 곡이 있을 리가 없어... 누나는 내가 그렇게 우기는 이유를 잘 이해해 주었다.

 

누나는 내게 "마음이 갑갑할 때 언덕에 올라~"라는 가사의 동요를 가르쳐 준 적도 있다. 나는 이 곡의 가사가 거짓말이라고 박박 우겼는데, 누나는 그 이유도 잘 이해해 주었다. 동요 가사에 "갑갑한..."이라는 이상한 말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였지...

 

내가 Praetorius의 <라 볼타> 멜로디를 따라하니까 누나가 눈이 동그레져 가지고 어떻게 그 곡을 아냐고 물어보던 기억도 난다. 누나가 자주 틀던 존 윌리엄스의 LP에서 여러번 들었었지...

 

누나가 모은 LP 중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베토벤 5번을 듣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건 누나가 돌아가신 뒤였다. 이 LP는 지금도 내 책꽂이 한 구석에 그대로 있다.

 

영혼이 떠난 누나의 얼굴을 본 건 72년 봄... 방의 문을 잠그고 연탄가스를 피워 놓고 수면제를 먹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밤길을 달려 왕진 올 의사를 찾아 헤맸었다. 겨우 의사를 찾아서 부른 뒤 돌아오던 밤하늘에는 별들이 유난히 많았지... 누나는 벌써 저 별들 사이 어디엔가 있을까...?

 

형이 불러온 의사가 먼저 와 있었는데 두 분은 예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미 늦었다... 의사 두 분이 무슨 얘기인가 나누며 껄껄 웃는 게 너무 야속해서 분개했던 게 생각난다.

 

누나가 만 22살 때였다. 그 뒤 28년이 흘렀다. 그가 살았던 기간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시간이 훨씬 더 길 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생각컨대 어머니의 외로운 죽음은 누나가 견디기 어려운 상처였고 새어머니와의 끊임없는 갈등은 삶이 주는 피로감을 가중시켰던 것 같다. 그리고 사회 생활 첫 해 그가 본 세상은 문학처럼 섬세하고 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방의 세 면을 가득 채운 독일 문학 서적 - 그때 네 아들이 한 방 안에서 우글거릴 때 누나는 독방을 썼지 ... - 을 나중에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은 게 단 한권도 없었다. 문학에서 현실로 뛰어들었다가 소스라쳐 놀란 걸까...

 

나는 너무 어려서 이유를 몰랐고 형도, 부모님도 아무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나도 그 뒤 10년 넘도록 누나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나가 남긴 글들과 사진은 모두 누나와 함께 화장했다고 한다.

 

22살 누나는 절망 속에서 용기를 갖는 법에 단련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나의 선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선택에 대해 말하거나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누나의 외로움을 나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다.

 

누나가 살아 계시다면 오늘은 누나가 만 50살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누나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누나가 세상을 떠난 일보다는 누나가 살아 계실 때의 일만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2002년 4월 20일, 천리안 고전음악연구회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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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을 사랑한 베토벤의 모습이 고스란히 -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

 

 

흠, 오늘은 베토벤이 태어난 날이구나.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으니 241주년이구나. 그리 먼 옛날이 아니지. 인류가 얼마나 지구상에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살아 있을 거야. 아니, 인류의 역사를 베토벤 교향곡이 없던 시절과 있는 시절로 나눠서 볼 수도 있겠네.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은 하나하나, 인류 음악사에 획을 그은 ‘혁명적’ 작품들이지.
 
앞의 교향곡 5번 <운명>과 같은 날, 1808년 12월 22일 같은 곳에서 초연된 6번 교향곡 <전원>을 들어볼까. 쌍둥이로 세상에 나온 이 두 곡은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야. 5번이 비극적 운명에 당당히 맞서 승리를 구가하는 베토벤의 강한 얼굴이라면 6번은 인간과 자연을 무한히 사랑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모습이야.
 
베토벤은 1802년 가을 비통한 마음으로 유서를 썼던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8년에 요양하고 있었는데, 그 때 쓴 작품이야. 이 때 그의 일과는 아침이 밝아오면 일어나서 오후 2시까지 일을 한 후 저녁때까지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대. 때로는 어둠이 내린 뒤까지 산책만 할 때도 있었다고 해. 귓병 때문에 사람과 만나는 걸 두려워한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렸던 것 같아. 그는 때로는 “사람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지. 이때의 감상을 그는 이렇게 적었어.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청력 상실에 절망한 나머지 유서까지 썼던 베토벤이 새로운 삶의 욕구를 심어 준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노래가 바로 이 곡이야. 모차르트 다큐 촬영을 위해, 빈필하모닉 취재를 위해, 장한나 지휘 데뷔 다큐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들를 때마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찾았었지. 베토벤의 발길이 닿았음직한 산책로를 탐욕스레 찾아 걸어다녀 봤지. 베토벤의 유물과 자필 악보가 있는 작은 박물관, 그리고 ‘호이리게스’(heuriges)라는 새로 담근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카페가 있을 뿐, 베토벤이 나이팅게일과 지빠귀새의 노랫소리 들으며 ‘시냇가의 풍경’ 악상을 떠올렸음직한 자연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 하일리겐슈타트의 텅 빈 산책로를 채운 건 내가 흥얼대는 <전원> 교향곡의 선율뿐이었어.^^
 
내가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지난번 얘기한 5번보다 더 오래됐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TV에서 만화영화로 봤으니까. 그런데, 오늘, 혹시나 해서 유투브를 뒤져보니, 그 옛날 만화영화가 있지 않겠어! 월트 디즈니가 1940년 만든 <판타지아>를 60년대 한국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에서 방송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매혹됐던 기억이 또렷해. 올림포스산의 하루를 묘사한 이 영화에는 뿔 하나 달린 유니콘, 반인반수인 켄타우루스, 하늘을 나는 말들, 그리고 아기 요정들이 나와서 자연과 신들과 어울리지. 70년 전에 만든 애니메이션, 지금 봐도 재미있어. 꼬마들과 함께 보면 참 좋겠다. 거장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1악장, 아침 해가 밝아오고,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깨어나 하루를 찬양하기 시작하지. 모든 출연자들이 삶을 구가하며 화면에 선보이지. 만화영화 전체의 인트로에 해당.  
http://www.youtube.com/watch?v=uKFiR8GvUY4
 
2악장, 꼬마 요정들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남녀 켄타우루스 (반인반수)가 한바탕 어우러진 다음 각자 짝을 찾게 된다는 스토리. 끝 부분, 베토벤이 새들의 울음소리를 묘사한 부분을 요정들이 나팔 부는 장면으로 재치있게 연출한 게 재미있어.   
http://www.youtube.com/watch?v=PKTJyyZ-Igw&feature=related
    
3악장, 시골 축제, 신나게 어울려서 우스꽝스런 춤을 추고 와인을 마시며 노는 사람들. 
4악장, 천둥과 폭우. 제우스신이 벼락을 내리치고, 혼비백산한 동물들은 황급히 숨고. 특히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의 도움을 받아 벼락을 던지는 대목은 음악과 영상이 절묘하게 맍아떨어져서 숨소리마저 죽이게 하는 훌륭한 대목이야. (3, 4, 5악장은 휴식 없이 연결됨)
http://www.youtube.com/watch?v=dh8vuxyL6X8&feature=related
 
5악장, 폭풍우가 지난 뒤 올림포스 산에 크게 무지개가 크게 걸리고, 동물들은 맑은 하늘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신들게 감사 기도를 올리지. 태양신 아폴론이 모는 불덩어리 마차가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넘어가면 달의 신 아르테미스가 밤하늘에 별가루를 뿌리지. 모든 동물들은 평화롭게 잠들고... 
http://www.youtube.com/watch?v=wrl737x_B2c&feature=related
 
베토벤은 자필악보 표지에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었어. 각 악장에도 표제가 붙어 있어. 이 때문에 이 곡을 ‘표제음악의 시조’라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곡일 뿐, 자연 현상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는 점을 베토벤은 강조하고 싶었던 거야. 따라서, 표제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느끼며 감상하면 되는 거야. 연주는 윌리엄 스타인버그 지휘 피츠버그 교향악단. 50년 녹음인데 연주도 음질도 훌륭하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유쾌한 느낌 (Allegro ma non troppo /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만화영화 본 느낌 지우고 그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 생각하며 들어보기를...
http://www.youtube.com/watch?v=jsYjxXd7Nuk
  
2악장,  시냇가의 풍경 (Andante molto mosso / 느리게, 매우 생동감 있게)
현악이 살랑이는 시냇물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부드럽고 정다운 숲속의 이야기를 펼쳐 가지. 특히 끝부분, 플루트가 꾀꼬리 소리를, 오보에가 메추리 소리를, 클라리넷이 뻐꾸기 소리를 묘사한 대목에 귀 기울이도록. 
http://www.youtube.com/watch?v=81oKXxB4nww&feature=fvwp&NR=1
  
3악장, 시골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Scherzo Allegro / 해학곡,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wsYM9Y62uKI&NR=1&feature=endscreen
  
4악장, 천둥과 폭풍 (Allegro / 빠르게) - 휴식없이-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Allegretto / 약간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mk5sjooQOts&NR=1&feature=fvwp
 
무인도에 교향곡을 딱 한 곡 들고 가라면 어떤 곡을 택할까? 아주 고민되겠지만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게 이 곡이야. 베토벤이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하더라도 난 그를 제일 위대한 작곡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거야. <전원> 교향곡은 ‘혁명적’이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지만, 교향곡 역사상 이른바 ‘표제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으로는 최초의 곡이니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이라 해도 좋을 듯.
 
베토벤 음악 중 이 곡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곡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가곡 <아델라이데> Op.47, 로망스 2번 F장조 Op.50. 피아노소나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 Op.53, 피아노소나타 24번 F#장조 Op.78 <테레제를 위하여>, 바가텔 A단조 일명 <엘리제를 위하여> 등, 나중에 하나씩 찾아서 들어 보자.
 
<전원>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70년대 FM을 틀면 늘 나오던 그 명연주,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연주로 한번 더 들어봐. http://www.youtube.com/watch?v=EM8RlCZP0KQ

 

 

 

이건 내가 숭배하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R3YfBGR-WSo
 
이건 내가 중딩때 많이 들었던 카라얀 지휘 베를린필 연주. 50살 안팎의 클래식 애호가들 중엔 카라얀 지휘로 베토벤 들은 사람이 많을 거야. 이 분 지휘는 어떻게 해도 따뜻한 느낌이 안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카메라웍과 컷 분할이 정확하기 때문에 어떤 대목에서 어떤 악기가 연주하는지 알아보기는 제일 좋으니 참고하시길.
1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98n2LiINLWo
2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L-5MarwaDyg&feature=fvwp&NR=1
3악장 & 4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FkiekSYfK-0&feature=fvwp&NR=1
5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EloXCsR6Cno&feature=endscreen&NR=1
 

 

 

 

 베토벤 교향곡과 베토벤 바이러스 - <운명>과 <전원> 200주년을 기리며  
  
 <베토벤 바이러스>를 처음 접했을 때 ‘M-바이러스’(말러), ‘B-바이러스’(브루크너) 같은, 음악 친구들 사이에 유행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한번 감염되면 헤어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며 낄낄대곤 했다. 이 드라마의 ‘바이러스’가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른다. 아무튼 중반을 넘은 지금 시청률 1위를 지키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뿌린 것 같긴 하다.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순수한 음악 사랑이 천재적 지휘자와 만나 해피 엔딩을 이룬다는 발상도 좋아보였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음악이 중심에 놓여있지 않다. 여느 드라마처럼 사랑과 갈등, 야망과 좌절이 중심축이고, 음악은 장식에 불과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한 예술이 음악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클래식을 ‘뭔가 고상한 것’처럼 여기는 연출 태도가 적지 않게 거슬렸다. 소탈한 음악 사랑이 배어나는 내면 연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명민(강마에), 이지아(두루미), 장근석(강건우)의 괴팍스런 언행과 ‘오버액션’은 비위 약한 나로서는 인내가 필요했다. 이순재, 송옥숙, 박철민 등 조역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이지아의 대사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연주 동작과 음악이 안 맞는 대목들은 집중을 방해했다. 무엇보다 음악 세계를 묘사한 대목들에 리얼리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울시향의 오보이스트 김미성과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이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상세히 지적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http://cafe448.daum.net/_c21_/bbs_search_read? cafetop&nil_menu=sch_updw
 
하지만 어떠랴. 리얼리티가 모자라는 것은 “드라마는 어차피 만화”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음악이 장식이면 어떠랴. 많은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클래식을 되풀이 들려주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시청자들이 오케스트라의 세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 것도 이 드라마의 성공을 증명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특히 젊은 층의 찬사를 받고 있으니 내가 투덜댈 일은 아니다. 10~20대 젊은 층에서 높은 시청률이 나온 것은 직설적인 대사, 스피디한 영상 등 제작진의 탁월한 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연기자들이 실제로 악기와 지휘를 배우고, 24명 안팎의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300여곡의 클래식을 선곡하고,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연주를 삽입하는 등 화면 뒤 제작진의 노력이 각별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올해는 세계 음악사에서 뜻 깊은 해이다. 영원한 명곡인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세상에 나온 지 꼭 200년 되기 때문이다. 두 곡은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함께 세계 초연됐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이 점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는 절묘할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두 곡은 베토벤의 두 얼굴을 대표한다. <운명>은 청력상실이라는, 음악가에게 저주와 다름없는 아픔을 딛고 일어나 힘차게 삶을 긍정하는 승리의 찬가다. <전원>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속삭이며 노래하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모습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이 최소한 이 두 곡 정도를 확실히 알고 즐기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베토벤은 <장엄미사> 표지에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모토를 적어놓았다. ‘마음’이 빠진 음악은 소음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마음’을 담고 있기에 사람들은 모든 좋은 클래식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귀족적’이라는 편견, ‘어렵다’는 부담감만 내려놓으면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음악은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소통’이기도 하다. 혼자 듣는 것보다는 함께 나누는 것이 좋다. 그러기에 단순히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강마에와 오케스트라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연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강마에와 단원 한명 한명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나 되어 연주하고, 그 음악이 시청자 한명 한명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베토벤이 보아도 흐뭇해 할 멋진 결말을 기대한다.      
 
(2008년 10월,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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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클래식 음악은 가능한가?

<레 미제라블>, 뮤지컬과 오페라의 경계를 넘다

 

“19세기에 베르디와 푸치니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있어.”

 

음악동호회의 오페라 광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가 코웃음거리가 된 기억이 나네. 응식이, 제성이... 너희들은 굳이 반박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픽픽 웃기만 했지. 정말 오랫동안 못 보고 지냈구나. 돈키호테같은 내 주장에 웃음으로 답해준 너희들이 고맙고, 그 시절이 그립구나. 잘 지내는지? 우린 별처럼 찬란했고, 또 별처럼 멀었지. 함께 음악 나누고 대화 나눈 그 시간들은 아득하지만, 기억은 또렷하네. 

 

응식이와 제성이는 전통 오페라와 20세기 뮤지컬은 음악 수준이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였어. 일리가 없진 않지. 정제된 오케스트라의 음악,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이 기량을 맘껏 뽐내는 유명 아리아들 생각하면 뮤지컬은 값싼 여흥으로 보일 수밖에.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아. 듣는 사람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삶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다면 뮤지컬이 전통 오페라만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오페라라는 게 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줄거리가 있는 문학작품을 음악으로 옮긴 것, 오케스트라와 독창자와 합창이 어우러지는 음악을 중심으로 세트, 의상, 소품을 활용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종합 예술. 이론서적 뒤져봐도 대충 이 정도를 뛰어넘는 뾰족한 정의는 안 나와.

 

그럼 오페라와 뮤지컬의 차이는? 결정적인 기준은 없는 것 같아. 뮤지컬도 오페라처럼 오케스트라가 라이브로 연주해. 오페라는 성악을 전공한 분들만을 위한 작품이지만, 그게 결정적인 차이일까? 출연자의 성량이 크다, 이 테너는 최고음인 하이-C 음을 쉽게 낸다, 이런 게 종종 화제가 되는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뮤지컬이 상업성을 앞세운 대중음악이라면, 오페라도 흥행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야.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곡의 뮤지컬 <미스 사이공>과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한 장면을 비교해 볼까?    

 

<미스사이공> 첫 장면 ‘사이공의 열기’
http://www.youtube.com/watch?v=WyURt9Kp6JM&feature=related

 

<아이다> 2막 중 ‘개선행진곡’
http://www.youtube.com/watch?v=1_NRazjCiG4&feature=related

 

흠... 클래식인 <아이다>의 ‘개선 행진곡’은 아는데, 뮤지컬 <미스 사이공> 음악은 처음 듣지? “클래식 모른다” 소리 이제 그만!

 

<미스사이공>은 월남전이 한창일 때 주인공 베트남 처녀 킴이 팔려온 사이공의 술집 장면에서 시작해. 만취한 미군들이 난잡하게 놀고 베트남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몸을 팔지. 화면이 상당히 선정적이지? 뮤지컬 다큐 촬영하러 런던 가서 ‘로열 드루리 레인’(Royal Drury Lane) 극장에서 첨 봤는데, 꽤 야하더라.

 

<아이다>는 에티오피아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집트 병사들의 행진에 이어 승전을 축하하는 춤판이 벌어지지. 음악의 격조나 무용의 품위는 <아이다> 쪽이 단연 뛰어나. 하지만 일정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은 마찬가지 아닌가? <아이다> 한국 공연 때는 이 장면에서 코끼리를 무대에 올려 화제가 된 일도 있어. 기획사에서도 코끼리를 홍보 포인트로 써먹었지. 뮤지컬이나 오페라나 ‘쇼 비즈니스’인 건 마찬가지란 얘기야. 오페라 매니아들의 취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야. ‘오페라는 고상하고 뮤지컬은 저속하다’는 도식적인 편견을 넘어서자는 얘기일 뿐이야.

 

“닥치고 감상!”

 

 

 

<레 미제라블> 중 1막 피날레 ‘하루가 지나면’ (One Day More)
http://www.youtube.com/watch?v=BpGA_VRc1Ro&feature=fvst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소설로, ‘비참한 사람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거야. 19세기 전반, 파리가 무대야.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장발장, 배고파 우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행 - 탈옥과 재수감을 되풀이한 끝에 19년 만에 출옥 - 가는 곳마다 박대를 당하던 그는 밀리에르 주교 집에서 신세를 진 뒤 은촛대를 훔쳐서 달아나다가 잡히고, 주교는 그 촛대를 자기가 선물했다고 증언해서 장발장을 구함 - 이에 감화된 장발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사랑의 삶을 실천 - 그의 유죄를 확신하는 자베르 경감은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 그를 잡으려 함 – 장발장은 코제트의 어머니 팡틴을 만남, 팡틴은 코제트를 부탁하고 사망, 장발장은 테나르디에로부터 코제트를 구해서 10년간 키움 – 장발장은 코제트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코제트는 마리우스와 사랑에 빠짐 – 장발장, 학생 무장봉기 때 바리케이드에서 위기에 빠진 마리우스를 구함 – 포로가 된 자베르 경감을 장발장이 풀어 주고, 자베르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살 -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하고, 장발장은 두 사람을 떠나려고 함 – 모든 사연을 알게 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장발장을 찾아냄 – 장발장, 두 젊은이 앞에서 임종.

 

워낙 대작이라 ‘간단히’ 요약이 잘 안 되네.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야 하던 프랑스 민중들의 실상을 그린 대 파노라마야. 실패로 끝난 1832년 학생 봉기가 나오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 소중하다는 신념을 꿋꿋이 실천하는 장발장의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지. 1985년 카메론 매킨토시가 뮤지컬로 만들어 런던 바비컨 센터에서 초연한 뒤 지금까지 ‘팰리스’ 극장 (Palace Theater)에서 27년째 공연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센스 공연이 예정돼 있어. <캐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과 함께 4대 뮤지컬의 하나로 꼽히는 걸작이야.

 

<하루가 지나면>(One Day More)의 내용을 살펴볼까. 학생 무장봉기 전야,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내일이 오면 일어날 일을 각각 노래하지.

 

(링크 처음) 장발장은 날이 밝으면 새 운명을 찾아 떠날 거라고, 자기 범죄를 아는 자베르가 자기를 잡으러 올 거라고 노래해. (28초 지점)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와 코제트도 가슴 아픈 이별을 예감하고 있어. “내일이면 당신은 머나먼 세계에 있겠죠. 나의 세계는 당신과 함께 방금 시작했는데...” 헤어지는 게 얼마나 아쉬우면 ‘머나먼 세계’(worlds away)란 표현을 썼을까! (55초 지점) 마리우스를 홀로 사랑하는 가엾은 에포닌은 ‘나 홀로 맞게 될 하루, 그가 날 생각하지 않을 하루’를 탄식하고,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변치 말고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지.

 

(1분 22초) 학생 대표 앙졸라스가 내일이면 총을 들고 자유의 바리케이드에 모이자고 선언하고,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함께 있을지, 봉기에 동참할지 갈등하는 마음을 노래해. (1분 48초) 장발장이 “하루가 지나면”(One Day More)을 선창하면 자베르 경감이 다짐하지. “혁명이 하루 앞이라고? 그 싹을 잘라 주겠어, 코흘리개 학생 녀석들, 피에 흠뻑 젖게 해 주마!”

 

(2분 1초) 탐욕스런 테나르디에 부부가 등장, 시체 더미에서 돈과 귀금속을 주워 모을 거라고 노래하고, (2분 11초) 모든 사람이 함께 “새로운 날의 시작, 모든 사람은 왕이 되리라!” 노래하지. (2분 27초) 합창의 가사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로 이어지면 이에 화답하듯 마리우스가 등장, “내가 설 곳은 여기야, 너와 함께 싸우겠어!”라고 외치지. (2분 36초)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동시에 노래하며 대단원을 이뤄.  

 

앞의 글에서 클래식 음악의 경계가 애매하다고 했는데, 20세기에 등장한 뮤지컬과 정통 클래식 오페라 사이의 경계도 딱 부러지게 얘기하기 어려운 것 같아. 그런데, 분명한 건 이 뮤지컬 장면이 어느 오페라 못지않게 감동적이고 훌륭하다는 점이야. 그렇다면 이 뮤지컬을 클래식에 포함시키면 왜 안 되는 거지?

 

오페라의 역사를 얘기하는 건 내 능력 밖이니 생략. 오페라를 알려면 나보다 훨씬 오페라를 잘 아는 이용숙 저 <오페라, 행복한 중독>(예담, 2003)이나 박준용 저 <오페라는 살아있다>(폴리포니, 1999)를 권하고 싶어. 둘 다 좋은 책이야.

 

근대 오페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1607년에 세상에 나왔고, 그래서 지난 2007년에는 ‘오페라 400주년’ 행사도 여기저기서 열렸지. 초기 오페라는 궁중의 여흥이었어. 비발디, 헨델, 퍼셀, 라모, 글루크, 살리에리 등 우리가 이름을 아는 작곡가들의 작품이 거의 다 그랬지. 18세기 부르주아 계층이 대두하면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 등이 일반 시민들의 갈채를 받게 되고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누리지. 모차르트 오페라는 나중에 자세히 소개해 줄께.

 

여기까지는 모두 공감할 텐데, 지금부터 얘기를 더 하면 오페라 광들한테 돌 맞을 것 같군. 암튼 내친 김에 계속하자면, 모차르트 이후 그보다 더 좋은 오페라는 나오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리고, 마침내 2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모차르트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 나왔는데, 그게 바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거지. 에휴, 돌 날아온다!

 

오페라 사상 최대의 걸작 <돈조반니>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 비교적 가벼운 작품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19세기 후반 베르디, 푸치니에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지.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등등 고만고만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있는데, 그 다음은? 몰라.

 

<마술피리>가 독일 오페라의 정점이라면 그 이후는? 베토벤이 <피델리오> 하나를 썼지만 너무 엄숙해서 재미가 없고, 슈베르트가 오페라를 몇 편 썼지만 모두 실패했고, 베버의 <마탄의 사수> 정도가 명맥을 이었지. 오펜바흐, 요한 슈트라우스, 레하르 등 오페레타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그 뒤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작을 남겼어. 근데, 이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치료 불능 중독자가 되기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기엔 너무 거창한 음악이야. 선율이 끝도 없이 구불구불 흘러가고, 일단 너무 길어. 바그너의 ‘반지’(Ring) 사이클에 속하는 네 작품은 모두 들으려면 16시간은 잡아야 해. 음악 동호회에 가 보니 이걸 다 외우는 친구도 있더군. 지금 서울대 있는 문정훈 교수... 이 친구 덕분에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를 다 들은 경험이 있고 그 점 평생 감사하지만, 지금도 내겐 너무 길어. 바그너 음악은 일부 관현악 대목은 무척 좋아하지만, 솔직히 성악 부분이 좋은지는 모르겠어. 암튼 바그너 이후 독일 오페라는? 알반 베르크 <보체크>가 있다지만 도무지 좋은 줄 모르겠고, 브레히트 시에 음악을 붙인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가 좀 대중적이긴 하지만 영향력이 미미했고. 그 이후는? 몰라.

 

19세기 러시아의 글린카와 차이코프스키와 무소르그스키, 20세기 소련의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프랑스의 드뷔시와 메시앙, 미국의 거슈인 등이 훌륭한 작품을 남겼지만 음악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 했어. 오늘날 공연되는 오페라 작품들은 딱 여기까지야. 따라서 내 결론은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오페라 작곡가는 역사상 없었다는 거고, 이른바 ‘정통 클래식’ 안에서 대중들을 사로잡을 오페라가 새로 나오길 기대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거야. 암만 높은 품질을 유지해도 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현대 오페라가 무슨 존재 의의가 있을까?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이 점점 대중과 멀어지며 ‘그들만의 리그’로 흘러간 영향도 있을 거야. 20세기 후반 들어서 이러한 ‘음악과 대중의 괴리’는 거의 치유 불가능한 지경까지 온 것 같아. 비단 오페라 뿐 아니라 일반 기악에서도 마찬가지지. 그럼 20세기 대중들이 즐길 만 한 오페라는 뭘까? 혹시 뮤지컬 아닐까?   

 

‘세계 4대 뮤지컬’을 제작한 사람, ‘뮤지컬계의 스필버그’로 불리는 카메론 매킨토시도 그렇게 생각하더군. 1996년 다큐멘터리 <무대 위의 환상 뮤지컬> 촬영 때 만난 이 분 인터뷰 한 대목.

 

“뮤지컬의 음악은 극적이어야 합니다. <라 트라비아타>나 <나비 부인>처럼 인기 있는 오페라는 음악이 훌륭할 뿐 아니라 스토리가 아주 강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는 일반 대중들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뮤지컬은 대다수 오페라가 갖지 못한 현실성이 있어서 더욱 재미있고 대중적이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19세기 오페라 작가가 했던 일과 같습니다.”

 

앞서 감상한 <하루가 지나면>(One Day More)처럼 여러 출연자가 제각기 다른 가사로 노래하는 기법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 뮤지컬에서 차용했어. 주인공 장발장의 비감한 심정,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 혁명 전야의 갈등, 그리고 테나르디에 등 탐욕스런 민중의 속내가 어우러져 극적인 효과를 높이지. 주요 등장인물에게 한 막에 한 번씩, 평균 두 번씩 독창을 하도록 배치한 것도 모차르트 오페라를 닮았어. 오페라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노래, 하나 더 들어볼까. 

 

 

 

무장봉기를 계획하는 학생들의 모임을 묘사한 1막 <ABC 카페>(ABC Cafe).
http://www.youtube.com/watch?v=hsmoXmaID50&feature=related

 

(처음) 학생 대표 앙졸라스는 봉기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확인하고, 정부군의 화력이 우월하므로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 민중들이 함께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지. (1분 4초)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가 뒤늦게 도착하고, “유령을 본 표정이네, 웬일이야?”는 친구들의 물음에 마리우스가 “그래, 유령을 본 것 맞아. 그녀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대답하자 친구들은 “전투에 이겨야 한다더니 돈 주앙이 돼서 나타났네. 오페라보다 더 재미있군” 익살스레 화답해.

 

(1분 52초) 이 때 멀리서 민중의 행진 소리가 들려오지. 클라리넷이 차분하게 연주하는 이 대목이 일품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야. 어느 오페라에서 이만큼 섬세한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앙졸라스는 “세계의 색깔이 하루하루 변해 가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 확실히 결정해야 할 때”라고 선언하고 ‘빨간 색과 검은 색’의 행진곡을 노래해. (2분 33초)

 

“빨간 색, 분노한 자의 핏빛 
 검은 색, 지나간 시대의 어둠
 빨간 색, 밝아오는 세계
 검은 색, 마침내 끝나는 밤”

 

마리우스는 사랑에 빠진 달콤한 느낌을 같은 멜로디에 담아서 노래하지. 그녀를 만난 뒤 한 순간에 변해 버린 세상. (3분 19초)

 

“빨간 색, 불타오르는 내 영혼
 검은 색, 그녀가 없는 세상
 빨간 색, 욕망의 색깔
 검은 색, 절망의 색깔”

 

마리우스의 노래에 합창이 가세하여, 혁명 전야인데도 친구들이 마리우스의 사랑을 축복해 주는 느낌이야. 얼마나 사랑스런 젊은이들인가! 앙졸라스는 “마리우스의 선의를 인정하지만 지금은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개인을 바쳐야 할 때”라고 강조해. (3분 56초) 금관과 드럼이 가세, 다시 한 번 우렁찬 합창이 이어지지. 오페라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고, 음악도 여느 클래식 못지않게 훌륭해. 

 

이 뮤지컬의 로고송이라 할 수 있는 노래는 꼬마 코제트가 부르는 <구름 위의 성>(Castle on a Cloud)이야. 1996년 뮤지컬 다큐를 만들 때도 이 노래를 제일 먼저 썼지. 가난한 어머니 팡틴의 품을 떠나 테나르디에 부부의 주막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꼬마 코제트의 환상. 구름 위의 성에는 장난감도 많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해 준다는 꿈. 매켄토시 프로덕션이 해외 순회 공연할 때면 해당 나라의 어린이를 오디션 해서 꼬마 코제트를 뽑지. 흥행 전략일 거야. <구름 위의 성> http://www.youtube.com/watch?v=ag7j-pCvvfU

 

가난 때문에 온갖 험한 일을 해야 했던 팡틴의 독창 <나는 꿈이 있었지> (I Dreamed a Dream)를 들어 볼까.

http://www.youtube.com/watch?v=pm59pPbqAMQ&feature=fvst

 

가난하지만 아름다웠던 지난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이 노래의 주제는 앞서 감상한 <하루가 지나면>(One Day more)에서도 변형돼 나오지. 작곡자 클로드 미셸 숀버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어. 2009년 영국의 TV 프로그램 ‘영국인은 재능이 있다’(Britains Got Talent)에서 우승한 수잔 보일이 부른 바로 그 노래.

수잔 보일 <나는 꿈이 있었지> (I Dreamed a Dream)

http://www.youtube.com/watch?v=PnNk4zpsqew&feature=related

 

이 뮤지컬에는 전세계 99%에 해당하는 민중이 함께 부름직한 노래가 나와. 99%를 위한 월가 점령 시위 때 사람들이 이 곡을 불렀는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유럽과 미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노래야.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http://www.youtube.com/watch?v=9-GRyOqsi9M&feature=related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 분노한 사람들의 저 노래 소리 /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 사람들의 음악 소리 / 네 심장의 고동이 / 드럼 소리에 메아리 칠 때 / 내일이 밝아 오고 /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네” 

 

민중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가사지만 끝부분에서는 단조로 어둡게 물들어 버리지? 2막 바리케이드 봉기 장면에서 정부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할 운명을 예고하는 듯 해. 이 노래가 피날레에서 다시 한 번 나올 때는 장조로 씩씩하게 끝나지.

 

 

 

링크 6분 37초 지점. http://www.youtube.com/watch?v=MCHQdAIYrLk

 

<레 미제라블> 초연 25주년 기념 행사 때, 장발장을 맡았던 세계 각국의 17명 주연배우가 이 노래를 차례로 이어 부르는 앵콜 이벤트가 있었어. 동영상을 볼까. 상업적 이벤트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암튼 대단한 무대였던 것 같아.

http://www.youtube.com/watch?v=hUCZywEwbvo&feature=endscreen&NR=1

 

온 세계 언어로 부르니 가히 ‘인터내셔널가’에 버금가는, ‘세계 99% 민중의 노래’란 게 실감나지? 집회, 시위 때만 부르는 게 아니라 EU 공식 행사에서도 불렀네. 1996년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EU 총회 폐회식. 표현의 자유가 군부독재 시절로 돌아간 우리나라 같으면 불온시 될 노래인데, EU에선 각국 정상들 모인 자리에서도 불렀다니 그쪽이 이상한 건가, 우리가 이상한 건가?

http://www.youtube.com/watch?v=3_V0NXFpSSA

 

시간 날 때 전곡을 다 찾아서 들어보기 바래. 그리고 기회 되면 라이브로 감상해도 좋겠지. 뮤지컬 티켓이 너무 비싸서 쉽진 않겠지, 쩝. 혹시 런던에 갈 일 있으면 시간 내서 웨스트엔드의 ‘팰리스’ 극장 (Palace Theater)에서 직접 봐도 좋아. 한국보다 티켓이 덜 비싸고, 극장이 생각보다 작아서 배우들의 호흡을 가까이 느낄 수 있어.

 

이탈리아어 오페라의 최고봉 <돈조반니>(1787), 독일어 오페라의 최고봉 <마술피리>(1791), 그 후 200년 가까이 지나서 비로소 누구나 즐길 만한 좋은 작품이 나왔어. 1985년에 초연된 <레 미제라블>, 영어로 된 ‘20세기의 오페라’라고 생각해도 좋아.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른 지 27년, 앞으로도 오래 공연될 것 같지? 이 뮤지컬을 ‘클래식 오페라’로 분류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언젠가는 증명될 거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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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들어도 애국심이 솟아나지 않는 이유

'아리랑'이나 '그날이 오면'은 어떨까

 

 

“어려운 것”, “뭔가 고상한 것”,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 등등,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이 의외로 완강한 것 같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상당히 난감한 일이지. 맛있는 요리가 왜 맛있는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맛을 알려면 먹어보면 되는 거지. 클래식 음악도 일단 들어야 맛을 아는 거지.

 

이런 편견은, 뒤집어 놓고 보면 “클래식 음악 모르면 무식한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당혹스럽기도 해. PD로서 이런 편견을 박살내기 위해서 정말 서민 눈높이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어. MC는 ‘순악질 여사’ 같은 캐릭터가 맡아도 좋겠지. “그래, 나 클래식 모른다, 어쩔래? 이 곡이 왜 좋은지 나한테 알려줘 봐!” 뭐, 이런 투의 프로그램 어떨까? 고상 떠는 것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거다. 이 프로그램, 머지않아 꼭 할 거다.

 

언젠가 후배 한명이 황당한 질문을 한 게 기억나네. “선배는 클래식 음악을 전부 다 알아요?” 헐, 1,000만분의 1도 모르지. 이름 아는 작곡가도 10만분의 1이 안 될 걸.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음악사상가 페루지오 부조니란 분의 말을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가 있고, 소수의 일류 작곡가가 있고,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가 있고,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내가 아는 작곡가는 모차르트랑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들 뿐이야. 정말, 10만분의 1도 안 돼. 그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니, 정말 1,000만분의 1도 안 되는 거야.

 

 

 

암튼, 후배의 거창한 질문에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지. “그래, 다 알어,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다 알어!” 이 대답의 논리적 귀결은? “그래, 너도 다 알어. 네가 좋아하는 곡들은 다 알잖어.”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몰라두 돼. 많이 알면 뭐 해,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게 중요하지.
 
클래식 음악은 경계도 애매해. 훌륭한 곡이니까 오랜 세월 살아남았고, 국경과 언어를 너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즐겨 듣는 거겠지? 몬테베르디가 400년, 바흐가 300년, 모차르트가 200년 이상 살아남은 건 그만큼 좋은 음악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꾸 들으면 귀가 열려. 그러려면 마음부터 먼저 열어야겠지.

 

클래식 음악으로 분류되는 곡을 좀 더 대중적으로 편곡한 이른바 ‘크로스오버’라는 게 있어. 부담 없이 접근하려면 ‘크로스오버’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때 오스트리아 취재 갔더니 TV에서 ‘모차르트의 정신’ (The Spirit of Mozart)이란 특집을 하더군. 근데 모차르트 음악을 원곡대로 안 하고, 죄다 재즈로 고쳐서 연주하고 있더라구. 모차르트의 ‘자유로운’ 정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난 별로였어.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있는 그대로 최상의 음악인데 굳이 개악해서 놀고 있는 저 꼬락서니라니, 쯧쯧..” 이런 씁쓸한 느낌이 들더군. 암튼,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면 굳이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클래식’으로 분류되지 않는 음악을 클래식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경우도 있어. 예컨대 비틀즈의 노래를 베를린 필 첼리스트들이 연주한 것, 이게 ‘클래식’인지 아닌지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세미 클래식’이라 해야 할지... 암튼 들어서 좋으면 그만인 거야.

 

에스터데이(Yesterday) http://www.youtube.com/watch?v=Kqcd7zDZFuk
렛잇비 (Let it be) http://www.youtube.com/watch?v=-2ME0EagyNY

 

96년, 지휘자 주빈 메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인터뷰한 내용이 기억나네. 단도직입적으로 “음악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물었더니 이 분, 대가답게 답변을 잘 하더군. “음악에는 많은 사랑이 들어있다"는 거야. 공감이 가더군. 사랑에도 종류가 많겠지. 당시 연주 곡목은 사라 장이 독주를 맡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신들의 황혼> 모음곡이었는데, 멘델스존에는 멜랑콜릭하고 달콤한 사랑이, 바그너에는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 들어있었어.

 

모차르트의 친구 야크빈이 빈 시절 모차르트 집 방명록에 남긴 말도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가슴이 없는 천재라는 것은 넌센스다. 천재란 위대한 지성이나 탁월한 상상력, 심지어 이 두 가지를 합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재를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 뿐이다.”

 

정말, 사랑에도 종류가 많아. ‘클래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데 클래식 이상의 감동을 주는 음악도 있어. 뭘까? 누구나 부르는 애국가!!! 나라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음악!!! “가장 저급한 종류의 사랑”이라고 비아냥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가장 흔하게, 공공연히 표출되는 게 바로 ‘애국심’이지. 월드컵 경기 때 선수들 입장하고 태극기 휘날리고 애국가 흐르면 대한민국 사람 중 99%는 우리나라가 이기길 바랄거야. 올림픽 때 김연아나 박태환이 금메달을 목에 걸 때 태극기 올라가고 애국가 나오면 가슴 뿌듯해 하는 게 대한민국 ‘보통 사람’이겠지.

 

한국 ‘애국가’  http://www.youtube.com/watch?v=CceXXXubvdE
김연아 금메달 수상 http://www.youtube.com/watch?v=fs1ZBdGQ1QE&feature=related

 

‘애국심’이란 건 자칫 개인보다 국가를 위에 두는 ‘국가주의’로 흐르면 위험하니 경계해야 해. 특히나 스포츠와 결부시켜 광적인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재체제 유지에 이용하는 건 히틀러, 무솔리니, 피노체트, 전두환 같은 파시스트들이 즐겨 써 먹은 수법이니 즉각 알아채고 배격해야겠지. 일본 극우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하려는 걸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이 맹목적인 애국심에 휩쓸리도록 스스로 방치한다면 모순이겠지.

일본 ‘기미가요’  http://www.youtube.com/watch?v=8iuYxdXFPbc&feature=related

 

하지만 ‘애국심’이란 게 본질적으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뿌리가 같으므로 자연스런 인간 감정이라 할 수 있어. 그래서 모든 나라에는 국가가 있고, 사람들은 국가를 부르면서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거겠지.

 

우리가 보통 ‘북한’이라고 부르는 나라,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언젠가 통일해야 할 상대방이니 ‘북측’ 또는 ‘이북’으로 불러야 타당하게 여겨지는, 그 나라도 애국가가 있어. 신생국가 건설의 벅찬 애국심을 노래한 건 남측 애국가와 마찬가지야. 북측 정권은 남측보다 더 ‘애국’을 강조해 왔지. 북측 주민들이 전쟁 때, 전후 복구 때, 그리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을 때 이 노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어. 같은 민족이 반으로 쪼개져서 제각각 다른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리네. 흠...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우리 방송에서도 전파를 탔으니 이 노래 얘기한다고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 일은 없겠지? 이 노래 들어보았다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을 숭배하게 되는 건 아니니 남쪽 일부 관계자들, 혹시나 ‘쫄지 마시길’. 

 

조선 ‘아침은 빛나라’ http://www.youtube.com/watch?v=oXWg4EmajW0&feature=related

 

 

 

흠, 동영상에서 이북 국기가 거꾸로 휘날리고 있네. 이북이 ‘철천지 원쑤’로 여기는 ‘미제 승냥이’ 나라, 세계 유일 최강대국, 대다수 세계인이 ‘자유의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도 국가가 있어. 독립전쟁 때 만든 이 노래는 9.11 이후 엄청난 애국주의 열풍과 함께 미국에서 쉴 새 없이 불리웠지. 2002년 ‘미국’ 시리즈 취재하면서 거리마다 넘치는 성조기를 봐야 했고, 이 노래를 들어야 했어. “이렇게 강한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란 작은 나라 침공하면서 ‘뭉쳐야 산다’(United We Stand)를 합창하다니, 참 단순무식한 국민들이다” 느꼈지. 아무튼, 노래의 힘이 참으로 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 이 노래를 부르며 조국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어.

 

미국 ‘성조기여 영원하라’ (Star Spangled Banner)
http://www.youtube.com/watch?v=-4v5lr7CskQ&feature=related

 

미국 국가와 북측 국가, 애국심 불어넣는 데에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네. 흠, 애국가 얘기가 좀 장황해졌네. 흠, 재미삼아 좀 생소한 중남미 국가 경연대회를 한번 해 볼까? 이쪽 동네 분들, 음악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 국가도 상당히 예술적이야. 그리고 스페인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 주권을 확립할 당시의 기억을 잘 승화시킨 가사도 음미해볼 만한 것 같아. 모두 클래식 음악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아르헨티나 http://www.youtube.com/watch?v=CjWOxr3-M4c
브라질 http://www.youtube.com/watch?v=jXzzE52tQhg&feature=related
칠레 http://www.youtube.com/watch?v=tsxQ8n8JLgk
멕시코 http://www.youtube.com/watch?v=QiWGz5SBO1s
니카라구아 http://www.youtube.com/watch?v=W_oppAlORos
페루 http://www.youtube.com/watch?v=rvOEyeeR5Vs
베네수엘라 http://www.youtube.com/watch?v=4drS57s-7os

 

시간 관계상 다른 나라들 생략. 어느 노래가 젤 맘에 들어? 사람마다 다르겠지. 장엄한 아르헨티나 국가는 예술성이 모차르트 오페라 <황제 티토의 자비> 뺨치는 수준이네. 가사도 한번 볼까.

 

아르헨티나 국가, ‘애국의 행진’.

인간들이여! 신성한 외침을 들으라!    
자유, 자유, 자유!
끊어진 사슬의 소리를 들으라,
고귀한 평등의 즉위를 보라.
이제 그 명예로운 주권을 이루어냈다.
하나 된 남쪽의 주들에 의해서.

세계의 자유민들은 화답하리라.
오,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이여!

영광의 월계관이여 영원하라.
우리는 승리를 알고 있노라,
우리는 승리를 알고 있노라.
영광의 주권이 함께하지 않는 삶이라면
영광스런 죽음을 맹세하자!

 

전세계 국가 경연대회 한번 해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 애국가 자체를 ‘클래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애국심, 좋은 의미에서 ‘고향 사랑하는 마음’이 잘 녹아 있는 어엿한 클래식 음악도 있어. 브라질 국가, 아르헨티나 국가, 베네수엘라 국가를 듣고 ‘좋다’고 느꼈다면 충분히 듣고 이해할 수 있어. 핀란드의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디아>, 체코의 스메타나가 작곡한 <블타바> 같은 곡이지. 그 나라 국가 듣는다 생각하고 가볍게 들어봐. <핀란디아> 듣고 핀란드에 대한 사랑을, <블타바> 듣고 체코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변태일까?

 

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 http://www.youtube.com/watch?v=Fgwr3wrenkQ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 http://www.youtube.com/watch?v=FfnGDZG8gSI

 

내친 김에 우리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나오는 원곡, 안익태 작곡 <한국 환상곡>도 들어보자. 1999년, 정명훈 지휘 KBS교향악단 연주.

안익태 <한국 환상곡> http://www.youtube.com/watch?v=kJxBK9ZaIZc

 

이 곡을 들을 때 <핀란디아>나 <몰다우>의 경우처럼 이 나라에 대한 사랑이 샘솟지 않는 건 왜 그럴까? 음악 자체가 조금 못한 탓도 있을 거야. 그리고 음악 외적인 사실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질곡의 우리 현대사, 그 어두운 기억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거야.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1906~1965)는 13살의 나이에 3.1운동에 가담한 바 있지만 이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 환상곡’을 작곡했고,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탄생 2600년 축전곡’을 세계 최초로 지휘했고, 일본 천황 즉위식에서 쓰이던 일본 전통음악 ‘월천악’(에텐라쿠)을 작곡, 지휘했어. 그는 1930년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며 일본인 행세를 했어. 그 때문에 ‘친일 인명사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은 바 있지. 게다가 ‘애국가’의 선율이 만주국 축전음악의 선율과 거의 같다는 지적도 있어 씁쓸한 뒷맛이 오래 남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시절이니 그의 이러한 행적을 눈 감아 주어야 하는 걸까. 이 때문에 ‘애국가’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어. 우리 민족의 상징 <아리랑>을 새 국가로 하자는 얘기도 있었고, 80년대 많이 불렀던 <그날이 오면>이 어떻겠냐는 얘기도 있었지.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굴절된 우리 현대사, 통일이 되어 남북이 함께 부를 가슴 벅찬 새 국가를 갖게 될 그날은 언제일까. 에휴, 지금은 <몰다우>와 <핀란디아>를 한 번 더 듣는 게 낫겠다. 

 

 

 

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 

 http://www.youtube.com/watch?v=afUFvbVwq-I

 

시벨리우스(1865~1957)의 조국 핀란드는 ‘숲과 호수의 나라’로 불린다. 한반도 1.5배 크기의 이 나라는 전국토의 70퍼센트가 원시림으로 덮여있고 크고 작은 호수가 6만개나 된다. 북극권에 가까우므로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그러나 핀란드가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긴 밤과 추위보다 더 혹독한 외국의 침략이었다.

 

시벨리우스가 태어나서 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핀란드는 이웃 러시아의 압제에 허덕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를 러시아에 병합하려고 자치권 폐지, 의회 탄압, 언론 탄압, 러시아어 강요 등 온갖 핍박을 가했다. 암울한 그 시대의 한가운데, 1899년 11월에 <핀란디아>가 태어났다.

 

이 음악을 들으면 짙은 안개에 잠긴 호수와 깊은 숲의 정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 곡은 결코 핀란드의 웅장한 자연과 민족의 생활을 묘사한 음악이 아니다. 여기에는 핀란드 민중을 무겁게 짓누르는 암울한 공기, 그리고 이를 단숨에 말끔히 씻어내려는 국민의 우렁찬 포효와 열정이 있다.

 

이 곡은 1900년 7월 2일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초연됐다. 핀란드의 명지휘자 카야누스가 바톤을 잡고 헬싱키 필하모닉이 연주했다. 시벨리우스는 35살, 상처 입은 조국에 대한 피끓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당시 ‘수오미’(핀란드의 별명, ‘호수의 나라’)란 제목으로 발표하여 핀란드 국민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는데, 러시아 정부는 내용이 너무 애국적이라며 일시 연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마침내 1904년 핀란드 국민이 일으킨 대파업에 러시아 정부는 충격을 받고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이 곡도 해금되어 제목도 ‘핀란디아’로 당당하게 고쳐서 연주할 수 있게 된다.     

 

금관의 묵직한 포효, 그리고 팀파니의 격정적인 박동으로 시작한다. 핀란드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이 압축된 에너지로 꿈틀거린다. 링크 1분 6초 지점, 목관과 현이 주고 받는 대화는 이 격정을 좀 차분하게 안으로 삼키는 느낌이다. 그러나 감정은 서서히 고조되고,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포효로 이어진다(2분 54초 지점). 회오리 바람처럼 솟아오르는 현악의 몸부림이 가세한다(3분 23초 지점), 거침없는 민중의 행진이 시작된다(3분 33초 지점), 금관의거침없는 포효, 햇살처럼 찬란한 심벌의 환호는 현악의 거대한 소용돌이와 만나고(4분 17초, 5분 2초 지점), 이윽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5분 15초 지점). 목관이 차분히 생각에 잠겨 ‘핀란드 찬가’를 노래한다(5분 23초). 이 주제를 현악이 받아서 다시 한 번 아름답게 노래한다(6분 22초). 민중의 행진이 다시 한 번 이어진다. 앞의 행진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힘차다(7분 21초). 금관이 기쁨의 함성으로 ‘핀란드 찬가’를 외쳐 부르고, 팀파니의 크레센도, 목관의 트릴, 심벌즈의 현란한 빛이 더해지며 끝맺는다.

 

이 곡에 삽입된 ‘핀란드 찬가’ 부분은 시벨리우스 자신이 합창으로 편곡하여 연주한 바 있고, 요즘도 합창으로 삽입되는 경우가 많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기쁨의 대단원을 향해 가자”는 이 노래를 새로운 국가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했으나 기존 국가와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글은 안동림 선생의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2005년) 892~893쪽 내용을 주로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

 

1990년, 프라하의 봄, 라파엘 쿠벨릭 지휘 체코 필하모닉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_koIqWSOCA8&feature=related

 

"똑, 똑, 똑..." 봄이 오면 보헤미아 남쪽, 높이 1300미터 고원의 얼음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다. 독일 이름 '몰다우(Moldau)’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블타바’강. 스메타나(1824 - 1884)의 교향시 <블타바>는 체코 사람들의 가슴에 어머니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이 강의 첫 물방울 소리로 시작한다.

 

두 대의 플룻이 두 줄기 시냇물의 흐름을 노래하고, 다양한 강변의 풍경들, 숲속의 사냥, 농부의 혼례, 달빛 아래 수정(水精)들의 춤 등이 도도하게 흐르는 현의 선율에 실려서 함께 흐른다. 블타바강은 이윽고 프라하 시내로 흘러가 체코 사람들의 영광된 과거를 노래한다.

 

6곡으로 된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두 번째 곡인 <블타바>는 스메타나가 평생 품어왔던 보헤미아에 대한 사랑을 집약시킨 애국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스메타나는 체코 음악의 아버지, 체코 민족 음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작곡가다. 국제적인 명성은 드보르작보다 떨어지지만, 19세기 체코 사람들이 다시 한번 통일된 민족으로 일어서려 할 때 창조적인 예술인으로서 국민의 잠재적인 지성과 도덕의 힘을 일깨워 준 사람이 바로 스메타나다. 체코 사람들은 이 곡을 마음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국민적 교향시로 생각하고 있으며, 체코 필하모닉은 해마다 '프라하의 봄' 음악제 첫날 - 스메타나가 서거한 5월 12일 - 에 그의 교향시 <나의 조국>을 연주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19세기에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 하에 있었다. 1848년의 혁명은 스메타나를 열광적인 보헤미아 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 발라드, 폴카, 즉흥곡, 슈만식의 피아노곡을 즐겨 작곡하던 스메타나는 이 시기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자유의 노래', 학생부대 행진곡, 국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 체코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싸움에 참여했다. 스메타나가 청년 시절에 만든 피아노곡에는 쇼팽과 슈만의 영향이 보이고, 그 뒤 리스트의 영향으로 교향시를 작곡했다. 그러나 교향시 <나의 조국>은 그의 독창적인 민족 정서와 유머, 자연스럽고 유연한 멜로디를 들려준다.

 

그의 결혼은 행복하게 시작했으나 불행하게 끝났다. 어린 네 딸 중 세 명이 죽었다. 아내 카테르지나마저 결혼 10년 만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셋째 딸 조피에에 의지하여 은둔생활을 하던 그는 1874년 <나의 조국> 중 첫 곡 <높은 성(비셰흐라드)>를 쓸 무렵 청각 장애를 앓기 시작했고 1879년 여섯번째 곡 <블라니크>를 쓸 때에는 심한 이명, 두통, 현기증, 보행 장애에 시달렸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모차르트와 베토벤 앞으로 편지를 쓰다가 안 되니까 자기자신 앞으로 편지를 쓰는 등 극도의 절망 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1884년 4월, 그는 심한 발작을 일으켜 프라하의 지방 정신병원에 수용됐고 그해 5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의사는 뇌질환의 결과로 청각 상실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차르트나 리스트와 같은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으나 현실에서는 베토벤과 같은 고난의 삶을 살았다. 거의 완전히 귀가 먹은 스메타나가 그 고통과 좌절 속에서 이토록 신선하고 화려한 작품을 구상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다운 <블타바>의 선율은 국적을 떠나 듣는 이의 마음에 조국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자아낸다. 스메타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츠 리스트는 말했다. "그는 정말로 천재였다"

 

체코 출신의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은 모두 5개의 녹음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71년 보스턴 심포니 연주(DG)와 90년 체코 필하모닉 연주 (Supraphon)를 먼저 꼽을 수 있다. 쿠벨릭이 서방 세계에 망명 중이던 71년 연주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연주 곳곳에 배어 있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한편 그의 90년 '프라하의 봄' 실황 연주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42년만에 귀국, 민주화된 조국에서 지휘한 감격적인 연주이다. 이날 연주회에는 하벨 대통령을 비롯한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지휘에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 - 소르의 ‘위안’ (L'Encouragement) Op.34

 

 

클래식 기타 얘기를 조금 해 볼까. 1992년 ‘50일 파업’ 때 일이니까 벌써 20년 전이구나. 파업이 길어지면서 집회 프로그램도 온갖 게 다 선보였는데, 그 중 권오형과 내가 기타 듀엣을 했던 게 생각나네. 사람들은 “노동조합 파업 집회를 클래식 기타 연주로 수놓은 건 우리 뿐일 거”라며 기뻐했지.

오형이 - 여러 직장을 거치며 늘 창조적으로 살아오던 그가 지금은 한 종편 채널의 임원으로 가 있으니 세월 참 많이 흘렀다!! - 와 나는 슈베르트 ‘밤과 꿈’, 타레가의 ‘마주르카’를 연주해서 많은 박수를 받았어. 두 곡 다 내가 멜로디를 하고 오형이가 저음 반주를 했는데, 사람들은 멜로디 연주하는 쪽이 잘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반주가 더 어렵고, 멜로디는 쉬워. 다시 말해 기타를 잘 치는 오형이는 뒤로 숨고, 초보 실력인 내가 전면에 나선 셈이지. 

당시 해고자 복직, 공정방송조항 사수, 임금일방인상 철회 등 세 가지 이슈로 파업을 했는데, 사태의 본질은 ‘노조를 인정하라’는 것이었어. 사측은 90년 <PD수첩> 불방지시에 항의하던 노조 사무국장을 해고했고, 이어서 사장 불신임투표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위원장까지 해고했어. 이어서, 위원장이 해고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단체교섭을 거부했고, 노조와 협상도 없이 임금을 5% 일방 인상했어. 사측은 노조가 없다는 듯 행동한 거야. 지금 상황과 무척 비슷하지?

외부 상황도 황량했어. 89년 공안정국과 함께 노동운동은 침체했고, 90년 KBS 침탈과 이른바 ‘방송구조개편’, SBS와 유선TV 출범 등으로 방송은 노태우 군사정권에 다시 장악되고 있었어. 그 동안 이뤘던 방송민주화의 성과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위기감이 팽배했지. 노조 집행부가 1년 가까이 철야농성을 해도 사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노조원들의 자괴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 하지만 모든 것을 걸고 성취해 낸 방송자유를 지키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의연히 살아 있었어.

드디어 92년 9월 2일, 전면 파업에 들어갔지.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 다 함께 해고되고 구속돼도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모든 조합원들이 공유하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어. 이러한 낙관성이 있었기에 파업 집회에서 ‘뚱딴지 같은’ 클래식 기타 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러한 넉넉함이 있었기에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성 기타 듀오, 케티 스토야노바와 보얀나 스토야노바.

 

 

설 연휴, 그리고 파업 전야.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는구나.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기타 음악 한 곡을 들어보고 싶네. 불가리아 태생의 쌍둥이 자매 스토야노바 듀오가 연주한 소르의 ‘위안’, Op.34. 창밖엔 눈이 펄펄 내리고, 젊은 두 자매가 눈빛을 주고 받으며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첫 부분 칸타빌레 http://www.youtube.com/watch?v=nB5B65Gojtk
(‘칸타빌레’는 ‘노래하듯’이란 뜻. ‘노래’를 뜻하는 ‘Canto', ’Cantata', 'Canzone'와 어원이 같아)

‘기타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스페인의 작곡가 페르난도 소르(1778~1839)의 대표작 중 하나야.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듯 연주하는 모습이 재밌지? 화면을 자세히 보면 첫 부분에선 보야나(왼쪽)가 멜로디를, 케티(오른쪽)가 반주를 연주하는데, 1분 12초 지점, 멜로디가 발전할 때는 반대로 케티가 멜로디를, 보야나가 반주를 맡아. 1분 34초 지점, 단조로 바뀌면서 멜로디와 반주 역할이 다시 바뀌지. 이렇듯, 앙상블을 감상할 때는 연주자들의 역할을 눈여겨 보고 호흡을 느껴보는 재미가 있어.

2분 21초 지점은 이 곡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야. 보야나(왼쪽)가 고음에서 애틋한 선율을 노래하고 케티(오른쪽)가 저음에서 빠른 스케일을 연주해. 칸타빌레 부분에서 제일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두 파트가 어우러져 이렇게 아름다운 앙상블을 만들어 내다니, 참 신기하지. 3분 7초 지점에서는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차분히 마무리해.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라... “인간은 모두 고독하고, 사랑할 때 더욱 고독을 느낀다”는 매우 상투적인 이 말은 아무래도 철학적 근거가 있는 것 같아. 삶과 죽음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어느 생물학 책에서 “죽음이란 개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란 말을 읽은 게 기억나. 죽으면 모두 흐물흐물 흙으로 돌아가잖아. 사람이든, 곤충이든, 풀이든, 나무든 모두 마찬가지 아니야?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개체의 벽 속에 갇혀 있다”는 뜻인 것 같아. 살아 있는 동안 나와 타인의 완벽한 합일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고독은 절대 고독인 거야. 사랑할 때 상대방과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고양되지만, 이 또한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니 더욱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거지. 죽고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타자와 섞일 수 있는 게 모든 생물의 숙명이라니... 개체의 환생 같은 건 없고, 모두 흙으로 돌아간 뒤 섞여서 다른 개체로 태어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봄에 피어날 들꽃과 다르지 않은 것일까. 

이 곡 링크 2분 21초 지점을 그래서 나는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라 부르고 싶어. 두 대의 기타는 고독한 두 영혼이야.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끊임없이 대화하며 조화를 이뤄. 고독하다고, 삶이 덧없다고 모두 무의미한 건 결코 아니야. 매 순간의 만남과 대화는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더욱 경이롭고 소중한 것 아닐까.

소르의 ‘위안’은 첫 부분 ‘칸타빌레’, 둘째 부분 ‘주제와 변주’, 마지막 부분 ‘왈츠’로 이뤄져 있어. 마저 들어보시길..

주제와 변주 http://www.youtube.com/watch?v=lBgyntsYKz0&feature=related
왈츠 http://www.youtube.com/watch?v=ApSezmgK4EI&feature=related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음악에 미쳐서 전공을 하고 싶다니까 아버지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어. 피아노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거라시며... 그 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도 음악 타령을 해 대니 좀 불쌍해 보이셨던지 “사내놈들 기타 뚱땅거리며 노래하는 건 좋아 보이더라”며 기타 학원가는 걸 허락하셨지. 난 그때나 지금이나 ‘기타 뚱땅거리며 노래하는 건’ 할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암튼, 이 ‘주제와 변주’는 고딩 때 기타 학원에서 선생님과 대학생 형이 치던 거를 넋놓고 들었던 추억이 새롭네.

‘왈츠’는 정확히 링크 1분 36초 지점부터야. 무척 흥겹지? 기타의 음색이 다양할 수 있는 건, 브리지 근처를 퉁기면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브리지에서 멀수록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나기 때문이야. ‘왈츠’ 링크 3분 19초 지점, 3분 47초, 4분 37초 지점을 들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듯.

 

 

줄리안 브림과 존 윌리암스가 연주하는 페르난드 소르의 위안. L` Encouragement,op.34.

 

 

이번에는 클래식 기타의 거장 줄리언 브림과 존 윌리엄스의 이중주로 들어보자.
소르 ‘위안’(L'Encouragement) Op.34 http://blog.daum.net/potamia/15664873

이 곡을 바로 이 연주로 방송에서 몇 번 썼지. 1993년 아침방송이었나.. 당시 ‘푸른영상’ 소속으로 일하던 박현선 감독이 만든 인디 다큐 ‘결혼 전 이야기’를 소개할 때 이 곡을 썼어. 결혼하는 친구의 스토리를 결혼식 40일전부터 당일까지 촬영한 이 작품은, 행복과 불안이 교차하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었어. 서로 다르면서 조화를 이루는 젊은 두 남녀의 모습을 이 음악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또 한 번은 작년 <MBC스페셜> ‘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편이었어.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에 상심해 있던 박남준 시인이 집 앞뜰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어느덧 복수초가 피고 다시 봄이 찾아오는 대목... 링크 2분 48초 지점은 애틋한 슬픔이 어려있지만, 결국은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의 위안으로 끝나. 사랑하는 친구는 갔지만 봄은 다시 와. 이 곡의 제목이 ‘위안’(L'Encouragement)인 건 바로 이 대목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설 연휴 내내 몸살이 지독하네.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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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에 따뜻한 음악 한잔 -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

 

 

추우니 따뜻한 음악 하나 더. 지난번 차이코프스키 발레 <오네긴> 얘기하면서 그의 피아노모음집 <사계> 얘기를 했었지. 그런데 <사계>란 제목의 곡은 참 많아. 하이든 오라토리오에 <사계>가 있고 비발디 협주곡에 <사계>가 있지. 룰리의 발레 <사계>가 있었다는데 못 들어봤고… 암튼 그 많은 <사계> 중 뭐니뭐니 해도 비발디 <사계>가 제일 유명할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도합 4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네 계절을 묘사하고 있는데, 각 악장에 비발디 자신이 소네트를 붙여 놓았어.

겨울의 2악장을 들어볼까.

 

 

“밖에는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고 / 사람들은 따뜻한 난롯가에서 둘러앉아 / 즐거웠던 나날들을 떠올린다”

‘겨울’ 2악장, 차분히, 노래하듯 (라르고 에 칸타빌레)
http://www.youtube.com/watch?v=emk7g7qaoGQ&feature=fvst (바이올린 정경화)

 

바이올린 솔로가 연주하는 선율이 참 따뜻하지. 멜로디가 쉽고 단순해서 휘파람으로 불기 안성마춤이야. 모든 파트가 피치카토로 반주하는데, 이건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라 해도 좋고, 화로 속 나무가 불타는 소리라 해도 좋겠지. 난롯가의 아늑한 풍경이 보이는 듯 해. 겨울인데도 눈이나 고드름이 아니라 ‘비에 젖는다’ 했으니 비발디가 살았던 베네치아는 여기처럼 춥지는 않았나 봐. 

 

하지만 1악장 소네트를 보면 역시 겨울은 겨울이었나 봐.

“잔인한 바람의 매서운 입김 아래 / 소름끼치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 끊임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 너무 추워 이를 부딪친다”

‘겨울’ 1악장 빠르게, 너무 심하지 않게 (알레그로 논 몰토)
http://www.youtube.com/watch?v=Du4rBm0aCqE (바이올린 정경화)

 

 

현의 꾸밈음(처음)과 트릴, 그리고 트레몰로(1분 34초)는 추워서 덜덜 떠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바이올린 솔로(32초)는 고통에 못 이겨 절규하지.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많이 나오는데, 이 또한 고통스런 느낌이야. 2분 5초 지점에서 바이올린 솔로가 목을 길게 빼고 따스한 햇살이 어디 있을까 사방을 둘러보지만 곧 불협화음의 트레몰로가 삼켜버리지. (2분 14초) “으으, 손 시려” 하며 움츠러드는 모습이야.

 

3악장에 붙인 소네트.

“넘어질까 두려워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음 위를 걷는다 / 힘차게 한번 걸었더니 미끄러져 넘어지고 / 다시 얼음 위로 뛰어가 보지만 이번엔 얼음이 깨지고 무너진다 /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바람들이 전쟁을 하듯 돌진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이것이 겨울이고, 또한 겨울이 주는 즐거움 아닌가.”


‘겨울’ 3악장, 빠르게 (알레그로)
http://www.youtube.com/watch?v=elto_raXzuM (바이올린 정경화)

 

처음부터 1분 55초 지점까지, 어느 대목에서 얼음 위를 살살 걷는지, 미끄러져 넘어지는지, 얼음이 깨지고 무너지는지 상상하며 들어봐. 1분 55초 지점에서 ‘겨울’에 대한 상념이 시작되고, 2분 40초 지점에서 모든 종류의 찬바람, 돌풍이 몰아치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라도 음악이 있고 친구가 있다면 견딜 만 하다고 비발디는 얘기하는 것 같네.

추운 1악장과 3악장을 들었으면 다시 따뜻한 2악장으로 돌아가자. 이번엔 사라 장 연주!


‘겨울’ 2악장, 차분히, 노래하듯 (라르고 에 칸타빌레)
http://www.youtube.com/watch?v=RNtAH5slWgg&NR=1&feature=endscreen (사라장)

 

‘빨강머리의 신부’로 알려진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25살 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오랜 기간 베네치아의 산 피에타 성당에 있었어. 이 성당에 부속된 피에타 자선원에는 40명 안팎의 소녀 연주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연주 실력은 출중했다고 해. 자선원은 버려진 사생아나 고아들을 수천명 수용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엄선한 소녀들이 합주를 했다는 거야. 비발디의 협주곡을 제일 먼저 연주한 게 바로 이 소녀들이었다는군. 비발디는 25살 때부터 이곳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37살 때 정식 악장으로 취임했다고 해. 그런데 어느 전기를 보니까 이 소녀들이, 글쎄, 쇠창살 속에 갇혀서 지냈다고 하는구나.

 

이 소녀들에게는 음악을 연습하고 연주하러 나가는 시간이야말로 햇살을 보는 해방의 시간이었고, 비발디의 음악이야말로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 주는 축복이었으리라 상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음악을 연주하고 다시 쇠창살 속으로 돌아가야 했을 소녀들을 생각하니 슬퍼지네. 300년 전 유럽 한켠,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지.

 

‘사계’는 1725년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란 제목으로 다른 8곡의 협주곡과 함께 Op.8로 출판되어 비발디에게 큰 인기를 안겨주었어. 그의 작품은 당대의 바흐에게도 전해져 높이 평가되었지만 18세기말 낭만시대가 오면서 한동안 잊혀졌어. 그러나 20세기 들어 450곡이 넘는 그의 협주곡들이 다시 발견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어. 너무 쉽고 단순하면서도 훌륭한 음악이니 부담없이 되풀이 들으면 좋을 듯. 봄, 여름, 가을도 좋으니 찾아 들으시면 되겠다.

 

봄 (La Primavera) http://www.youtube.com/watch?v=l-dYNttdgl0&feature=related
1악장 빠르게(알레그로) “드디어 봄이 왔다! 새들은 매우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그러나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잠시 후 하늘은 다시 파랗게 개고, 새들은 또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2악장 느리게(라르고) “예쁜 꽃이 가득 핀 풀밭 위에 나뭇잎과 가지들의 상쾌한 속삼임을 들으며 양치기는 한가로이 잠이 든다. 충실한 개를 옆에 두고.” 3악장 빠르게(알레그로) “소박한 백파이프의 흥겨운 선율에 맞춰 목동과 요정들은 화사한 봄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춤을 춘다.”

 

여름 (L'Estate) http://www.youtube.com/watch?v=8BsBbtp4gW4&feature=related
1악장 빠르게, 심하지 않게(알레그로 논 몰토) “불타는 태양의 열기 속에 사람도 가축도 모두 지쳤다. 소나무조차 붉게 시들었다. 뻐꾸기가 노래한다. 산비둘기와 오색방울새도 노래한다. 산들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오지만 갑자기 북쪽에서 찬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내려 목동을 당황케 한다.” 2악장 느리게(아다지오) “공포와 불안에 목동은 지친다. 번개는 달리고 뇌성은 울린다. 파리와 말벌이 미친듯이 떼지어 날아다닌다.” 3악장 급히, 빠르게(프레스토) “아, 참으로 무서운 뇌성과 벼락이 보리 이삭을 꺾고 곡식을 쓰러뜨린다.”

 

가을 (L'Autunno) http://www.youtube.com/watch?v=QOSg7LFgt6Y
1악장 빠르게(알레그로)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풍년을 축하하고, 술의 신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맘껏 들이킨다. 그들은 기쁨으로 잠에 빠져든다.” 2악장 느리게(아다지오) “축제 뒤에 흐르는 평화로운 적막,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멈추었다. 이 가을은 만물을 달콤하기 그지없는 잠의 즐거움으로 초대한다.” 3악장 빠르게(알레그로) “새벽이 밝아오면 사냥꾼들은 뿔피리와 총을 매고 개와 함께 길을 나선다. 잠에서 깨어난 숲속의 동물들은 놀라 도망가고 사냥꾼의 추적은 시작된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놀란 동물들은 두려움에 떤다. 총에 맞아 상처가 나서 도망치지만 불쌍한 동물들은 결국 쓰러져 죽는다.”

 

나 개인적으로는 ‘가을’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해. 위 링크 ‘가을’ 58초 지점과 2분 11초 지점은 96년에 ‘베니스 비엔날레’를 취재한 방송 프로그램에 사용한 기억이 있네. 때론 발랄하고 때론 나른한 바이올린의 패시지가 근사하지 않아? 그리고 ‘가을’ 2악장(링크 4분 25초부터)은 신기하게도 비틀즈의 노래 ‘Because'와 느낌이 비슷해. 건반이 낮게 깔리고 조용한 합창으로 생각에 잠겨 노래하는 분위기가 똑같고,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비감한 종교음악 분위기로 끝나는 것도 비슷해.

비틀즈, ‘Because' http://www.youtube.com/watch?v=dWlLPJG9Cvg

 

보너스 하나 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비발디의 수많은 곡은 나도 모르는 게 많고, 아는 걸 일일이 다 소개할 수도 없으니 대표로 한 곡만 소개할께.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몇 번씩 듣는 곡. 귀에 익은 선율일 거야.

http://www.youtube.com/watch?v=QPba-i26Y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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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처럼 섬세한 음악…‘야상곡’의 세계로 초대

가장 단순해서 가장 아름다운 곡 ① 쇼팽 왈츠 A단조

 

 

KBS 1TV의 <명작 스캔들>,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에 방송하는 이 프로그램은 ‘초보자를 위한 클래식’으로 제격이야.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딱 시작하지. 2010년 10월 첫 방송 후 최근까지 50회 정도 했는데, 음악과 미술의 명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에서 시작, 본격적인 작품 분석까지 들어가는, 꽤 밀도 높은 프로그램이야.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야.

 

오늘 아침엔 쇼팽의 녹턴(야상곡) 20번 C#단조 얘기를 하더군. 1830년, 20살 쇼팽이 빈에서 작곡해서 누나에게 편지로 보낸 곡인데, 쇼팽이 죽은 지 한참 뒤인 1875년에 비로소 출판됐대. 이 곡은 원래 악보에 ‘렌토 콘 그란 에스프레시오네’(느리게, 많은 표정을 담아서)라고만 표시돼 있었는데, 누나 루드비카가 후에 ‘야상곡’이란 타이틀을 붙였다는군. 출판업자로서는 이 타이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 당시 ‘야상곡’이라 하면 인기가 높아서 악보가 잘 팔렸다는 거야.

 

<명작 스캔들>에서는 이 곡이 ‘야상곡’으로 둔갑한 사연을 흥미롭게 풀어냈고, 곡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피아니스트> 자료를 썼고, 유럽 현지 전문가 인터뷰도 했고, 피아니스트 임동민 연주도 넣는 등, 꽤 공을 들였더구나. 트릴(두 음을 떨듯이 번갈아 연주하는 기법), 단순한 스케일(음계) 등으로 우수와 사색적인 느낌을 표현했다는 해설도 곁들였고…여러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토크를 하며 음악을 갈기갈기 찢어 놓아서 좀 산만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 이 방송을 보았다고 치고 차분히 음악만 감상해 볼까.

 

섬세한 감성이 뛰어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m5qeuVOIbHk

 

프로그램에서는 쇼팽의 지론인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어느 유럽 음악학자가 낭독해 주는 대목이 나왔어. 그 때 내게 딱 떠오른 곡이 바로 이 왈츠 A단조야. 이 곡도 생전에 출판되지 않은 ‘유작’이야. 쇼팽이 파리에 있을 때인 1843년 경 로스차일드 백작부인, 또는 그의 딸을 위해 작곡한 걸로 추정되는데, ‘어린이를 위한 쇼팽’ 같은 악보집에 실리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곡이야. 길이도 1분 50초밖에 안 되니 무척 짧아. 일단 들어보자. 역시 아슈케나지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mZJt-oWDD7U

 

가장 단순하다는 것은? 아무 꾸밈과 허세가 없다는 뜻, 누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의 독백을 홀로 담담히 노래한 곡이라는 뜻 아닐까? 그러니 가장 진솔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거지. 링크에 나오는 사진은 죽기 1년 전 찍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쇼팽의 사진이야. 39년의 짧은 생애, 그 절반인 19년 동안 조국에서 살았고, 그 뒤 20년의 후반생을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에서 보냈던 쇼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그가 평생 작곡한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이러한 각별한 애정을 담고 있어. 이 왈츠를 쓸 때 쇼팽이 특별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다는 기록은 없어.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특정한 곡에 담겨 있다기보다는 ‘영속적인’ 그의 정서였다고 할 수 있어. 이 곡 또한 고향에 대한 그의 간절한 그리움을 상상하며 듣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mZJt-oWDD7U

 

가슴에 손을 얹어 봐. 눈물이 가슴 한 가득 고여 있어. 링크 처음에서 22초까지, 고향 젤라소바 볼라의 아득한 봄 풍경, 연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 눈 덮힌 교회와 동산, 정다웠던 누나와 친구들의 모습, 그가 사랑했던 소녀 콘스탄차의 모습이 한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지지…. 피아노가 고음으로 치달으면 그리움은 더욱 고조되어 뼈에 사무치고(링크 23초~33초), 그 슬픔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33초~43초) 평상심을 되찾으면(43초~52초) 아득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현실인 양 달콤하게 눈앞에 펼쳐져(53초~1분 2초). 이 달콤한 꿈이 한번 반복되고(1분 2초~ 1분 22초)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1분 22초~1분 33초),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에 있을 뿐이야. 음악이 끝나면 눈물 한 방울만 남아 있어(1분33초~1분 50초).

 

‘피아노의 시인’ 쇼팽,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손끝에서 마술처럼 섬세한 음악을 뽑아낸 아름다운 사람,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쇼팽을 사랑하지 않는 여성은 좋은 여성이 아닐 것 같다는 황당한 생각도 들어.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쇼팽에게 밥 지어주고 빨래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 같다는 망상까지…그런데, 쇼팽은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나 봐.

 

16살의 아름다운 처녀 보진스카와 사랑하게 됐지만 결국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거절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엔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과 딸이 결혼하는 걸 허락할 수 없다”고 쓰여 있었어. 조르쥬 상드 등 그를 아낀 여성들의 따뜻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결핵은 점점 악화됐어. 1848년부터 심한 각혈을 했고, 결국 1849년 10월, 3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쇼팽의 장례식은 10월 30일 파리의 마들렌느 성당에서 치러졌어.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만은 자신의 유언에 따라 조국 폴란드로 돌아갔어. 누나 루드비카가 바르샤바로 가져가서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했지.

 

2010년 3월, 쇼팽 탄생 200년을 맞아 폴란드에서는 그를 국가 브랜드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이 벌어졌어. 당시 <세계와 나 W>를 하던 나는 그 현장을 촬영해서 방송했지. 쇼팽의 음악에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여러 편의 시설을 만들고 널리 알리는 건 나쁜 일이 아니겠지. 그러나 자칫 가장 중요한 음악 사랑이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날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어. 쇼팽의 이름을 알고, 그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그의 대표작 멜로디 몇 개를 아는 사람들은 많을 거야. 하지만 그를 기리고 찬양하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그의 고독과 그리움을 함께 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을까. 결국 음악에 대한 사랑보다 그 음악과 인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했던 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 아닐까. 다수의 인간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을 외면하고 떠들썩한 시장의 원리에 휩쓸려 왔던 게 아닐까.

 

쇼팽에 대한 <W>의 취재, 쇼팽에 대한 이 글, 그리고 오늘 아침 방송한 KBS의 <명작 스캔들>, 이 시도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쇼팽에 대한 사랑을 일깨웠는지 알 길이 없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긴 것만큼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이니 결국 이 모든 시도가 부질없는 것 아닐까, 우울한 생각이 꼬리를 무네. 살아서 고독했던 쇼팽, 그는 죽어서도 고독해 보여. 쇼팽 곡 중 가장 짧고 단순한 이 곡이 담고 있는 사무치는 감정을 자기 마음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그립구나. 몸살이 안 떨어져서 그런지, 쇼팽 생각 시작하니까 어린애처럼 징징 울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구나. <세계와 나 W> 말미,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로 돌아왔다”는 내레이션 대목에서 이 왈츠 A단조를 사용했어.

 

 

 

쇼팽, 4개의 발라드

 

1835년,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쇼팽은 친구의 집에서 자신의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끝까지 듣고 난 동갑내기 작곡가 슈만이 말했다. “자네의 작품 중에 나는 이 곡이 제일 맘에 드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쇼팽이 대답했다. “아주 기쁜 일이군. 실은 나도 이 곡이 제일 좋아.” 그런데, 이 에피소드를 발견하고 나 또한 몹시 기뻤는데, 왜냐하면 나 또한 쇼팽 곡 중 이 곡을 제일 좋아하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발라드 1번 G단조 Op. 23이었다.

 

쇼팽을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른다면 그가 남긴 4곡의 발라드(‘담시곡(譚詩曲)’이라고 흔히 번역한다)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의 시인 미키에비츠의 시 ‘콘라드 와렌로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표제 음악처럼 이 시의 내용을 묘사한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음악 자체가 한 편의 시로서, 듣는 이의 가슴 속에 시심을 불러일으킨다. 발라드는 원래 ‘이야기를 담은 성악곡’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쇼팽에 의해 기악곡으로 자리잡았다. 브람스와 포레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남겼다.

 

아슈케나지 연주 쇼팽 발라드
http://www.youtube.com/watch?v=cb2JAxCapVo

 

1번 G단조(처음~9분 44초)는 낙엽지는 가을이다. 이 곡의 악상을 얻은 것은 쇼팽이 스물두 살 나던 해였다. 조국 폴란드를 막 떠난 젊은 쇼팽의 상실감을 떠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방금 바르샤바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쇼팽은 여행지인 빈에서 극심한 분노와 시름에 잠긴 채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1번 G단조는 다른 세 곡에 비해 ‘서사시’ 같다는 느낌을 준다. G단조의 첫 주제, 그리고 장조로 전개되던 선율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우면서 단조로 바뀌는 부분들은 젊은 쇼팽이 늘 느끼던 고독과 우수를 말해준다.

 

2번 F장조 Op. 38(9분 48초~17분 26초)은 여름의 오후다. 미키에비츠의 시 ‘비리스 호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8분의 6 박자의 첫 주제는 신기하게도 숲의 그늘이 드리운 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킨다. 조용한 주제가 끝나면 갑자기 포르티시모의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온갖 환상이 펼쳐진다. 장르는 다르지만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나 말러 교향곡 7번의 ‘세레나데’가 들려주는 매혹적인 여름밤의 서정을 맛보게 해준다.

 

3번 Ab장조 Op. 47(17분 30초~25분)은 일정한 형식을 찾아내는 게 곤란할 정도로 자유로운 흐름을 취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네 곡 가운데 가장 세련된 균형미를 느끼게 해준다. ‘물의 요정’이란 시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매혹적인 선율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쇼팽의 음악은 그 자체가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한다”며 구체적인 해설을 회피한다. 이 곡을 듣고 영국의 화가 비어즐리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우아한 숙녀를 그렸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4번 F단조 Op. 52(25분 4초~끝)를 주저없이 ‘쇼팽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다. 쇼팽이 서른두 살 되던 1842년에 만든 이 곡은 소나타 형식과 변주곡 형식이 서로 얽히며 서서히 거대한 구조를 만들고, 우아한 클라이맥스를 거쳐 비극적인 느낌으로 끝난다. 원숙한 쇼팽이 구사하는 현란한 화성과 대위법을 한껏 맛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는 디테일에서 충분한 루바토를 구사, 시적인 느낌을 진하게 표현한 훌륭한 연주다(위 링크, Decca, 1978∼1985년 사이 녹음).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쇼팽이라면 바로 저렇게 연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유연한 연주를 들려준다(서울음반 라이선스, 1995년). 거장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연주는 쇼팽의 협주곡, 왈츠, 녹턴, 마주르카에 관한 한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연주자들의 낭만적인 쇼팽 해석에 반기를 들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20세기 연주자의 모범이 된 그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발라드에 관한 한 어쩐지 ‘시정’이 부족하고 다소 건조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RCA, 1959년 녹음 · 1985년 CD 발매).

 

 

 

가장 단순해서 가장 아름다운 곡 ② 모차르트 소나타 C장조 K.545 중 2악장

 

어느 여름밤 이었나…. 여의도에서 친구들과 한잔 하고 전철 타러 걸어가던 길. 취한 내 머리를 멜로디 하나가 맴돌기 시작했어. 비에 젖은 작은 새처럼 애틋하기도 하고,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맑디맑은 이 작은 선율…. 이게 무슨 곡이었지? 무슨 곡이었더라? 너무 단순하고 친숙해서 전혀 의식도 하지 않고 지냈던 곡, 공기처럼 물처럼 늘 곁에 있어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 함께 지냈던 곡, 바로 모차르트의 소나타 C장조 K.545의 2악장 ‘느리게’(안단테)였어. 오, 이렇게 단순하고 예쁜 멜로디가 있었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VK4vWzQCQxU

 

‘음악 애호가’ 중엔 나이 먹을수록 모차르트가 더 좋아진다는 사람이 꽤 많아. 왜 그럴까? 천의무봉, 아무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경지. 나이 들수록 세속의 때에 찌들은 자신을 뒤로 하고 영원의 품으로 조용히 돌아갈 날을 그리워하기 때문일까.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을 생각하다가 ‘집착 없는 사랑’이 바로 그의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어.

 

마음이 없는 천재라는 것은 넌센스다. 천재란 위대한 지성이나 탁월한 상상력, 심지어 이 두 가지를 합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천재를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 뿐이다.”

-1787. 4. 11 친구 야크빈이 모차르트 방명록에 남긴 말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모차르트에 대한 책을 쓸 때도 이 말의 뜻을 충분히 알지 못했지. 다른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에도 사랑은 담겨 있어. 그런데, 왜 하필 모차르트일까? ‘집착 없는’ 이란 수식어를 붙일 때 모차르트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모차르트가 5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35년 동안 베끼지도 못할 만큼 많은 작품을 썼고, 한곡 한곡이 모두 완벽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어.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 ‘집착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위대한 천재의 본질임을 뒤늦게 깨달았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오는 클라리넷 협주곡의 선율을 기억해 봐. 사랑하는 세상과 헤어지는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지만, 엉엉 울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아. 투명한 아름다움 속에 조용히 노래할 뿐이야.

 

http://www.youtube.com/watch?v=g1_G62aaaLM&feature=fvsr

 

 

모차르트를 숭배했던 위대한 작곡가들을 생각해 볼까. 차이코프스키는 마지막 작품인 <비창> 교향곡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탄식하며 울부짖었어. 말러도 마지막 교향곡 10번에서 알마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 부르며 회한에 몸부림쳤어. 베토벤은 마지막 현악사중주곡 F장조 악보에 “그래야만 했을까? 그래야만 했어”라고 썼어. 비극적인 투쟁으로 가득했던 삶을 돌아보며 비로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한 거지. 하지만 모차르트처럼 투명한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까. 모차르트 음악과 다른 사람의 음악을 다른 차원에 서게 하는 이 미세한 차이는 도대체 뭘까. 

 

 

19살 무렵의 청년 모차르트

 

 

모차르트도 사람인지라 죽기 전날 친구들 앞에서 잠시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 그러나 곧 맑은 미소를 되찾았어. 이 미소가 바로 클라리넷 협주곡 아다지오가 노래한 ‘집착 없는 사랑’이 아닐까. 그는 처제 조피에게 아내 콘스탄체를 잘 돌봐 달라고 했고,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어. 1787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쓴 편지의 한 구절.

 

“죽음이란 것은 우리 삶의 마지막 목적지이고, 저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좋은, 참된 벗인 죽음과 이미 친숙해졌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이 두렵기는커녕 반대로 위안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저는 아직 젊지만 잘 때마다 ‘오늘밤에 잠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 때문에 제가 침울해 보인다거나 슬퍼 보인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 1787년 4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에서 6번 가족의 죽음을 겪었어. 22살 때 어머니, 3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콘스탄체와 결혼한 뒤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 중 4명이 죽었어. 민감한 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어. 그러니 그의 마음 어디에 ‘집착’이 발붙일 자리가 있었겠어?

 

당연한 귀결로 그는 살아있는 날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나누는 게 유한한 인간들의 큰 축복이라는 점을 체득하고 있었어. “삶의 비극적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 진정 즐거운 사람”이라는 말은 모차르트에게 완벽히 적용되지.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 이별의 느낌을 담고 있는 노래 <라우라에게 보내는 저녁 상념>,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같은 노래도 썼어. 하지만 같은 시기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이나 <음악의 유머>처럼 즐거운 작품도 썼어. 이 점은 내게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어. 잘 알다시피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최대 스승이자, 매니저였어. 하늘같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마당에 어떻게 그런 유머러스하고 예쁜 곡을 쓸 수 있었을까. 모차르트는 희노애락 따위의 인간적인 감정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결론은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죽음조차 음악으로 승화해 냈다는 점이야. 그의 존재 자체가 음악이었고, 모든 ‘집착’이 부질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는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우리는 음악의 힘으로 죽음의 어두움을 기꺼이 헤쳐 나가리”라고 노래했어. 마술피리를 불면 사나운 짐승들이 춤을 추고, 악당들이 착한 사람으로 변해. 모차르트는 이 장면을 보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을 거야. 나는 이러한 음악의 마술이 어느 정도 사실일 거라고 믿어. 마술처럼 한 순간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집착 없는’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널리 확산된다면 이 세상은 점점 더 아름다운 곳이 되리라고 확신해.   

 

모차르트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불어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를 만난 일이 있어. 이 분은 “모차르트 음악이 음악 이상의 것, 곧 삶의 지혜를 준다”고 말했어. 그가 모차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모차르트 뿐 아니라 사랑, 즐거운 것, 아름다운 것,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그 모든 것’을 뜻한다는 거야.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이 세상에 있는 한 절대로 이 세상을 떠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유한한 존재인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지. 그때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되살려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었다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거야.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촬영이었지만 나는 에릭의 이러한 생각에 깊이 공감했었지.

 

그 때 파리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는 “모차르트 음악은 불교와 통하는 바가 있다”고 말했어.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몇 시간이고 연주를 해 준 모차르트의 소탈함을 닮았다고 생각해.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엄하다’는 부처의 가르침은, 황제 요제프 2세부터 고아원 어린이까지 모두 동등한 친구로 대한 모차르트의 열린 마음을 닮았어.

 

다시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545 2악장, 안단테. http://www.youtube.com/watch?v=VK4vWzQCQxU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이 단순한 노래는 더욱 또렷하게, 영롱하게 흘러. 이 단순함은 나약한 감상과 달라. 매우 강하다는 거지. 53초까지 첫 주제가 나오고 한번 되풀이 되면 2분 40초 지점부터 좀 더 자유롭게 발전해. 이 또한 반복되고, 3분33초 지점에서 애틋한 단조 선율로 변해. 삶의 아픔과 슬픔마저 따뜻하게 가슴에 품는 모차르트의 모습이야. 4분 26초 지점에서 다시 첫 주제로 돌아가고, 5분 20초 지점에서 차분히 결론으로 넘어가.

 

하지만 이런 분석이 무슨 소용 있겠어? 몹시 슬프거나 피곤할 때 그냥 머리를 비우고 들어봐. 이 단순한 소나타에는 인생을 긍정하게 하는 지혜가 들어 있어. 이 소나타는 1악장이 아마 좀 더 유명할 거야. 핸드폰 신호음으로도 많이 쓰였으니 들으면 알 거야. 

K.545 1악장, 알레그로. http://www.youtube.com/watch?v=JcUh-ggBfzI&feature=related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시름 가득한 세상, 위안을 속삭여 주는 음악이 있으니 조금은 기뻐해도 좋지 않을까. 이 곡은 ‘쉬운 소나타’(Sanata facile), ‘단순한 소나타’(Sonata semplice)라고도 하고, ‘초심자를 위한 소나타’라고도 해. 피아노를 갓 배우는 어린이들의 ‘소나티네’ 악보집에 들어있어. 1788년 6월에 썼으니 모차르트가 마지막 ‘3대 교향곡’을 쓸 무렵, 넷째 딸 테레지아가 죽기 사흘 전에 완성했네. 인생의 비애와 슬픔을 잘 알던 모차르트가 이렇게 단순하고 예쁜 곡을 썼다니 새삼 놀랍지 않아!

 

오늘도 파업이 계속되는구나. 아직도 무개념, 몰상식, 파렴치, 무책임이 판을 치는 세상, 이에 맞선 후배들의 투쟁이 여전히 힘겨워 보이는구나. 험악한 세상, 모차르트의 그 ‘집착 없는’ 사랑이 더욱 그리운 오늘이야. 원숙할수록 단순해지는 모차르트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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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자기를 바친 위대한 마에스트로 ‘발터’

브루노 발터 서거 50년에 부쳐

 

오늘 2월 17일은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돌아가신지 만 50년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발터는 내게 늘 특별한 지휘자였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에 눈뜰 때 언제나 그의 지휘에 감동을 받았다. 음악을 소비할 줄만 아는 게으름뱅이인 탓에 그를 ‘내가 숭배하는 지휘자’라 부르고 ‘무조건 신뢰하는 지휘자’로 생각해 왔을 뿐,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돌아가신지 50년, 그가 남겨놓은 음반들이 살아 있다는 게 새삼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내 삶에 준 기쁨과 자양분을 돌아보고, 무딘 글로나마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삶과 음악, 인간을 상세히 얘기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이다. 내가 체험한 그의 음악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지휘자 브루노 발터에 대해 늘 품어왔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피력하고 싶다. 먼저, 처음 접한 발터의 모차르트 음반에 들어있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 C단조 K.477을 그의 추억에 바친다. 모차르트에 대해 무한한 외경과 찬탄을 간직했던 브루노 발터가 78세였던 1954년에 녹음했다.

 

  

 

 

http://www.gosinga.net/koechel-player.php?IDkv=114 

 

 

이 곡은 모차르트가 1785년 11월, 프리메이슨 회원인 프란츠 에스터하치 백작과 게오르그 아우구스트 공작의 장례 때 초연했다. ‘죽음’에 대한 모차르트의 사색과 감정을 집약하여 표현한 곡이다. 당시 모차르트 음악은 가볍고 명랑한 줄만 알았던 내게 슬프고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참 얼굴을 처음 보여준, 맑디맑은 연주였다.    

 

오리는 알을 깨고 나와서 처음 본 존재를 어머니로 알고 따라다닌다 했던가. 브루노 발터는 내겐 그런 존재였다. 중학교 1학년때 그의 베토벤 5번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는 점은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이 곡을 포함, 당시 좋아했던 그의 연주 중 지금은 조금 낯설게 들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곡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완벽하다는 느낌을 준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도,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도,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도 그러하다. 자연스런 템포, 풍부한 음색, 디테일의 섬세한 표정 등 모든 요소를 잘 버무려서 작곡자의 참 모습을 들려준다. 오선지 안에 숨어 있던 작곡자의 마음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 있는 소리로 변하여 한껏 춤을 춘다. 자연과 인간을 무한히 사랑한 베토벤, 우수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꾼 슈베르트, 미국에서 고향 보헤미아를 그리워 한 드보르작, 모두 그의 지휘를 통해 듣는 이의 마음 한가운데에 직접 다가선다.   

 

사람들은 흔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를 꼽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설적인 거장들을 비교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분들의 녹음을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다. 개인적 취향 차이일 수도 있다. 1만 명의 음악애호가가 있으면 1만 가지의 취향이 있고, 각각의 머릿속에는 모두 다른 ‘음악 지도’가 있으니까….

 

아마도 이분들이 발터에 비해 일찍 돌아가셨다는 점이 일정한 제약 조건이 됐을 것이다. 발터보다 10년 연하였던 푸르트뱅글러는 1954년에 사망했다. 토스카니니도 공교롭게 같은 해인 1954년 연주 도중 실신한 뒤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두 거장이 남겨 놓은 레코드가 음질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듣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을 것이다. 토스카니니가 NBC 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음반들, 푸르트뱅글러가 만년에 베를린 필, 필하모니아, 빈 필과 함께 EMI에서 녹음한 음반들은 모두 역사적인 명연으로 인정되지만 음질이 현격히 떨어진다. 잘 듣고 감동하려면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결국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라는 두 거장과 친해지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 분들이 좀 더 오래 사셨다면 좋은 음질의 명연주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반면 발터는 1876년에 태어나 1962년에 돌아가셨다. 86살, 꽤 오래 사셨고, 스테레오 LP 녹음 기술이 최고로 발전한 50년대 후반 이후 매우 훌륭한 음질의 레코드를 녹음할 수 있었다. 만년에 그가 녹음한 이 음반들 덕분에 그를 부담 없이 만날 수 있게 된 건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의 대지휘자들. 왼쪽부터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에리히 클라이버, 오토 클렘페러,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물론 젊은 시절 발터가 녹음한 음반들도 음질이 불량해서 듣기 어려웠다. 그를 경외한 나머지 2~30년대에 유럽에서 녹음한 음반들을 눈에 띄는 대로 사 모았지만, 음질이 열악하여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그리고 발터의 초기 녹음을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발터 만년의 우수한 녹음 덕분에 세월이 가도 사람들이 이 위대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20세기의 거장 중 어느 분이 가장 뛰어났는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과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발터에게 더욱 매료된 이유는 당대의 여느 지휘자들보다 인간적이고 겸손했으며 이러한 그의 인품이 언제나 음악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전반의 명지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독재자’였다. 음악 호사가들 사이에 전해지는 우스개가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총알을 두발씩 주고 앞에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지휘자를 세워 놓는다면 누구를 쏘겠느냐고 물었을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대답은? “두 발 다 지휘자를 향해 쏘겠다”는 것. 물론 지난 시대 지휘자들의 독재 스타일을 풍자한 우스개일 뿐인데, 여기서 예외가 될 만한 지휘자는 브루노 발터뿐일 거라는 얘기가 있다.

 

발터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한명 한명을 친구로 대했다. 1957년 1월, 그를 위해 조직된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려고 첫 리허설을 시작할 당시 그의 나이는 어느새 80세를 넘었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교향악단의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겨울에 우리는 서로 더욱 깊이 사귈 수 있게 되었군요. 나는 우리가 참 좋은 가족으로서 일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오케스트라 위에 군림하지 않고 음악 동료로 단원들을 대하는 그의 소탈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가 밴쿠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 브람스 교향곡 2번을 리허설할 때의 동영상이 남아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aztB7E1Wjbs

 

모차르트 교향곡 36번 <린츠> 리허설은 오디오만 남아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zuyvUvE-WUs&feature=related

 

“노래하세요, 노래하세요” 요구하는 그의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는’ 단원들의 열성이 느껴진다. 모차르트 리허설의 경우 단원들이 자기 파트를 스스로 연주해 보이며 지휘자의 의견을 묻는 대목들이 나온다. 보통 리허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지휘봉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이 자발적으로 일치된 호흡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려는 그의 일관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빈필하모닉의 바이올린 주자 슈트라서는 “브루노 발터는 한번도 우리를 위압적으로 누른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지휘의 거장들>, 볼프강 슈라이버, 홍은정 역, 을유문화사, 179쪽)

 

  구스타프 말러 (1860~1911)

 

 

따뜻한 민주주의자 발터였지만, 음악에 대해 어정쩡하게 타협한 적은 없었다. 리허설 도중 뭔가 수정이 필요할 때 발터는 “난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호소하곤 했다. 현명하고 온화한 그의 성품 뒤에 철저함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휘자 발터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악보와 작품을 통찰하는 분석적 능력, 둘째, 내면의 귀로 듣고 자각하는 능력, 셋째, 음악가들에게 올바른 것을 전달하고 관철시키는 의지와 권위, 즉 인간적인 설득력이다. (같은 책, 177쪽) 모차르트 교향곡 36번 리허설 전 과정이 녹음된 음반을 들어보면, 1악장 서주의 첫 마디에서 점16분 쉼표를 충분히 지키라며 무려 20분이나 반복 연습한다. 단 한 마디 연습에 무려 20분이 소요되다니, 놀랍지 않은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 기꺼이 최선을 다한다.

 

이 리허설 이후 발터가 콜럼비아 교향악단과 함께 녹음한 모차르트 교향곡 36번 D장조 <린츠> K.425. 역시 1954년, 78세 때의 녹음이다. 1악장 서주 아다지오 - 알레그로 스피리토조(빠르고 생생하게), 2악장 안단테(느리게), 3악장 메뉴엣, 4악장 프레스토(밀어붙이듯 빠르게)

http://www.gosinga.net/koechel-player.php?IDkv=1

 

발터는 “진정한 지휘자는 위대한 작품의 영혼 그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범과 가르침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작품의 보편적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함께 작업하는 모든 사람들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브루노 발터 저, 김병화 역, 마티, 33쪽) 지휘자로서의 말러를 묘사한 것이지만 발터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베를린 태생인 그는 1894년, 18살의 나이로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 음악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의 조수가 되어 지휘를 시작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와 말러는 음악사에서 주목할 만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말러는 발터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서로의 말이 무슨 뜻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고 했다. 발터는 “말러의 영향은 나의 전 생애에 내린 축복이었다”고 했다. 말러는 후배 지휘자 발터의 음악 역량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빈 국립가극장의 후임자로 발터를 키우려고 했다.

 

지휘자 말러에 대해서 발터는 “그가 보여준 찬란한 모범 덕분에 내가 불완전한 수준에 만족하고 거기에 길들여져 버릴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같은 책, 60쪽) 발터는 1911년 말러가 사망한 뒤 그의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을 세계 초연했고, 유럽은 물론 망명지 미국에서 말러 음악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미국에서 자신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음반의 해설지를 직접 쓰기도 했다.

 

“첫 순간부터 나는 내 운명이 이 음악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음을 느꼈습니다. 말러의 작품이 그 이후의 내 음악 인생을 이끌어 줄 별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이 내면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말러의 음악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나 또한 그 약속을 지켰기 바랄 뿐입니다.” (1958년, 말러 교향곡 2번 해설지에 발터가 쓴 글 중) 6~70년대에 레너드 번스타인과 게오르그 숄티가 말러 붐을 일으키고 오늘날 말러가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널리 사랑받는 건, 그의 각별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말러를 처음 들은 건 고등학교 때, KBS-1FM에서 흘러나온 4번이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중 이렇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건 없었다. 1악장 시작할 때의 방울소리가 이색적이었고, 스트링이 연주하는 두 개의 주제가 매혹적이었다. 모든 악기가 연주하는 포르테(forte) 대목도 근사했지만, 실내악처럼 솔로 파트가 연주하는 대목들이 매우 섬세했다. 새로운 ‘말러 열병’이 시작됐고, 그 뒤 20대 내내 나는 이 ‘열병’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말러 교향곡 4번 G장조, 첫 부분. 발터 지휘 빈필하모닉, 1950년 녹음.

http://www.youtube.com/watch?v=flMflXZKgfg

 

발터는 평생 바그너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나의 신이었고 나는 그의 예언자가 되고 싶었어요.” 전쟁 전 유럽 오페라의 중심이었던 빈과 런던에서 그는 가장 뛰어난 바그너 해석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나치는 유태인이 바그너를 연주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그는 유럽 곳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1939년 미국 망명에 올랐다. 먼 타국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 소식을 들은 그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는 작가 토마스 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천신만고로 생존했지만, 그 생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도가 덜한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음악과 권력> 베로니카 베치, 노승림 역, 컬처북스, 496쪽)

 

전쟁이 끝난 뒤 나치 부역 혐의를 받고 있던 작곡가 한스 피츠너는 미국의 발터에게 편지를 보내 “나치의 만행이 과장되게 알려졌으며 사실이 아니었다”고 항변한 바 있다. 발터는 답장에서 오랜 음악 동료에게 애틋한 우정과 반가움을 표하고, 이어서 “이번 전쟁 중에 일어났다고 알려진 잔혹한 사건들이 그저 낭설만은 아닐 거라는 내 의견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며 “내가 전해들은 경악할 만한 장면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행위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시 연락이 닿은 마당에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는 서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 말고도 우리를 이어줄 것은 아주 많으니까요”라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같은 책, 470쪽)

 

진영 논리를 넘어선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바그너에서 연상되는 나치의 끔찍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후 바그너를 연주하고 녹음했다. 1957년 콜럼비아 심포니와 녹음한 그의 바그너 관현악곡집은 바그너 연주 사상 가장 뛰어난 음반 중 하나로 꼽힌다. 유태인 말러의 음악에 헌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반유태주의의 상징이 된 바그너 음악을 그냥 ‘음악 자체’로 되살려 낸 것이다. 인종과 이념을 너머 오직 음악을 위해서만 봉사한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모습이다.

 

 

 모차르트의 악보를 연구하고 있는 만년의 브루노 발터

 

바그너와 말러의 대곡을 수없이 지휘한 그가 상대적으로 훨씬 단순한 모차르트를 ‘어렵다’고 얘기한 것은 다소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나는 진정으로 모차르트를 사랑한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조금씩 성숙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젊었을 때는 모차르트의 유쾌함 속에 숨겨진 진지함과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위대함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지휘의 거장들>, 179쪽)

 

그는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를 제대로 지휘하려면 적어도 50살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테크닉도 어렵지만, 이 교향곡의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도 여러 번 이 곡을 지휘했지만 매우 불완전하고 좋지 않은 연주였음이 분명하다고 술회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느끼려면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모차르트는 때로 너무 엄숙하다고 느껴지지만, 지적은 누구든 한번쯤 음미해 볼 만 하다.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발터가 77살 때인 1953년 녹음. 지금 들으니 1악장 제시부를 반복하지 않은 게 다소 아쉽다. 1악장 몰토 알레그로(아주 빠르게), 2악장 안단테(느리게), 3악장 메뉴엣 알레그레토(메뉴엣풍, 조금 빠르게), 4악장 알레그로 아사이(충분히 빠르게).

http://www.gosinga.net/koechel-player.php?IDkv=28

 

발터는 1911년 11월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세계 초연했고 이후 세 번 녹음했는데, 1952년 마지막 녹음 당시의 일화가 전해진다. 알토 파트를 맡은 캐슬린 페리어는 6악장 ‘이별’의 끝 부분, “영원히, 영원히...” 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래 링크 6분 지점부터 끝까지.

http://www.youtube.com/watch?v=UdZR2XEnB5c&feature=related

 

 

음악이 끝나자 발터는 그녀에게 “우리가 당신처럼 훌륭한 음악가였다면 우리는 모두 울었을 것”이라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음악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대지의 노래>, 발터 지휘 빈필 연주. 솔로 캐슬린 페리어

 

 

오직 음악만을 위해 헌신한 발터, 그의 태도는 “음악밖에 몰랐다”며 자신의 정치적 무지와 세속적 일탈을 합리화한 일부 지휘자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가 음악을 이끄는 곳엔 언제나 따뜻한 교감이 넘쳤고, 위대한 음악들은 그의 바톤을 통해 따뜻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그 따뜻한 마음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의 신념을 기억해 본다. “창조(작곡)와 재현(연주)의 영역에서 강력한 개성의 불꽃이 눈부신 빛을 내며 계속 타오르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위험한 세계에서도 희망을 가질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1958년판 서문 중) 브루노 발터는 1962년  2월 17일 베벌리 힐즈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지만, 50년 지난 지금도 자신의 음악 속에서 살아 있는 그의 체온을 느낀다.

 

 

  말러 <대지의 노래>

“봄이 오면 사랑스런 대지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 세상은 다시 푸르러지네 / 어디서나, 영원히, 지평선은 푸르고 밝구나 / 영원히, 영원히….”
(말러 <대지의 노래> 6악장 ‘이별’ 마지막 구절)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대지의 노래>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세상에 다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이맘 때 메마른 마음을 푹 적셔줄 수 있는 멋진 음악이다. 테너와 알토가 차례로 솔로이스트로 나오는 6개의 악장 - ‘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술노래’, ‘가을에 쓸쓸한 사람’, ‘젊음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봄에 취하는 사람’, ‘이별’ - 으로 된 교향곡으로, 사랑하는 이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인간의 덧없는 삶을 달관한 슬픔으로 노래한다. 

1악장 ‘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술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K0DFWb68ATU 

“금잔의 술은 벌써 나를 부른다 / 이 잔을 비우기 전에 그대를 위해 / 노래를 부르리라 / 
수심에 찬 노래는 그대 마음속에 웃음으로 울리리라 / 슬픔이 다가와 마음의 정원을 황폐하게 하니 / 기쁨은 시들고 노래는 사라진다 / 삶도 어둡고 죽음도 어둡다” 
(1악장 ‘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술노래’ 중)


음악은 술과 눈물에 흠뻑 젖은 페시미즘으로 시작하여 “영원히, 영원히…”라고 탄식처럼, 염불처럼 노래하며 사라지는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의 피날레로 끝난다. 말러가 이 곡의 작곡에 착수한 1907년, 네 살 난 큰딸 마리아가 세상을 떠났고 그 자신도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 이때의 심경을 말러는 제자 브루노 발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금까지 내가 편안하고 명료한 마음으로 이뤄온 것들을 나는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모두 잃어버렸네. 나는 ‘허무’와 얼굴을 마주보고 서있네. 지금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서서 나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듯 걸음마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야.” 

이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한스 베트게라는 사람이 독일말로 번역한 한시집 <중국의 피리>였다. 인생의 덧없음을 잘 알면서도, 아니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넉넉한 자세로 술과 시를 벗하여 웃으며 살아간 동양인의 지혜에서 크나큰 위안을 발견했다고 할까. 30대까지 죽음과 부활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놓고 인간의 영원성을 부르짖었던 말러는 4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인생의 유한함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연과의 이별을 담담한 슬픔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6개의 가곡으로 이뤄진 이 ‘교향곡’은 이태백과 왕유, 맹호연의 시를 텍스트로 했고, 앞에 인용한 마지막 부분은 말러 자신이 가사를 덧붙였다. 말러는 이 곡을 ‘교향곡’이라고 불렀지만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순서대로라면 9번이 되어야 하지만 베토벤이나 브루크너가 교향곡을 9번까지만 작곡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징크스를 크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러는 이 곡에 이어서 교향곡 9번을 작곡했고, 서둘러 10번에 착수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대지의 노래’를 완성한 지 3년 만인 1911년 5월이었다. 

말러의 영향을 받은 두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가 남긴 녹음은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빛나는 명연주다. 클렘페러 지휘, 뉴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연주는 다른 어떤 연주에서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구성력을 보여준다. 미성의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와 ‘말러 가곡의 1인자’로 꼽히는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의 노래도 일품이다. 1967년, 뉴필하모니아, EMI. 

브루노 발터는 말러가 사망한 뒤인 1911년 이 곡의 초연을 지휘한 사람으로, 그가 남긴 3개의 녹음 가운데 알토 캐슬린 페리어와 테너 율리우스 파착이 노래한 마지막 녹음이 연주와 음질 모두 가장 훌륭하다. 1952년, 빈필, Decca.

 

 

 

‘MBC 프리덤’과 베토벤의 ‘에로이카’ - "오늘을 기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파업 중인 후배들이 <제대로 뉴스데스크> 2편에서 선보인 뮤직비디오 ‘MBC 프리덤’, 정말 대박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vT1J9ZwH1jM 

 

이미 다 보셨겠지만, 3분 길이 동영상을 롱테이크 한 컷으로 촬영했다. 카메라와 출연자의 동선을 절묘하게 처리, 컷을 나누지 않고도 김나진 아나운서와 후배 PD 등 앞의 출연자가 한 번 더 나오게 했다. 재기발랄한 가사와 율동이 귀엽고, 단 세 번 만에 촬영에 성공한 조합원들의 일치된 호흡이 대견하다. 

 

지난 주, 파업 집회장 뒤로 지나가다가 이 동영상을 목격했을 때, 내게 떠오른 것은 “아, 선배들의 시대는 갔구나, 이제 후배들이 주인공이구나”라는 피할 수 없는 자각이었다. 1992년 ‘50일 파업’ 당시, 집행부가 감방 구경할 정도로 단호히 싸웠고, 모든 조합원들이 불이익을 무릅쓰고 똘똘 뭉쳤기에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꽤나 근엄하게 투쟁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꼭 20년, 민주 방송을 추구하는 똑같은 파업을 후배들이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후배들은 당시 선배들이 꿈조차 꾸지 못한 방식으로 새롭게, 즐겁게 투쟁하고 있다.

 

이 동영상에는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한결같이 민주방송의 씨앗을 다시 틔우려고 노력하는 파릇파릇한 후배들이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들의 몸부림을 누가 짓밟을 수 있겠는가. 그 자연의 흐름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 좋아하는 신동엽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개나리, 복사” 
- 신동엽 <아사녀>(1960) 중 

 

클래식 음악사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리허설을 지켜본 하이든은 충격을 금치 못한다. “상당히 길고 복잡하군. 못 듣던 음악이야. 다른 어느 작곡가도 이런 걸 시도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히 소란스럽지만, 정말 새롭긴 하군.” 소감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 하이든은 두어 걸음 옮긴 뒤 덧붙인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구나.”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의 영화 <에로이카> 중 한 장면(아래 링크 1분 50초)에서 이 극적인 순간이 묘사된다. 베토벤역은 아이언 하트가 맡았고, 엘리엇 가디너 지휘, ‘혁명과 낭만’ 관현악단이 연주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NkVuv0kLqNM&feature=related

 

음악 교과서에는 ‘고전파’ 작곡가로 늘 하이든(1732~1809), 모차르트(1756~1791), 베토벤(1770~1827)의 이름이 나온다. 세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두 사람은 24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아끼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하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늘 ‘파파 하이든’이라 부르며 믿고 따랐다.

 

 

  

                                     요젭 하이든(1732~1809)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1791)

 

 

모차르트는 1785년, 각고의 노력을 들여 만든 6곡의 현악사중주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이 곡이 연주된 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내가 만났거나 이름을 들어본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세련된 감성과 취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작곡 기법에 능통합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바친 현악사중주곡 중 D단조 K.421   http://www.gosinga.net/koechel-player.php?IDkv=63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1787년, 만 16살의 베토벤은 빈의 모차르트를 찾아와 즉흥연주를 들려주었고, 모차르트는 “언젠가 이 젊은이를 온 세상이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어머니의 결핵이 위중해서 곧 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두 사람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1791년, 35살에 죽었다. 베토벤이 빈에 데뷔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792년 11월,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모차르트가 10여년만 더 살아서 <에로이카>의 초연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두 사람이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며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면 어떠한 음악이 태어났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경쟁이나 애증이 생길 겨를이 없었다.

 

하이든과 베토벤은?

베토벤이 빈에 도착한 1792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1년 남짓 하이든에게 배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나는 하이든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역정을 내며 말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스승으로부터 고전 음악의 양식을 배운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 음악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정신은 하이든과 무관할 거라는 점 또한 사실일 것이다.

 

  

<에로이카>를 초연할 무렵의 베토벤(1770~1827). 멜러가 그린 초상 (1804).

베토벤 <에로이카> 악보 표지.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표지에서 ‘보나파르트’라고 쓴 부분을 찢어버렸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769~1821). 10년 동안 프랑스 황제로 군림했지만 체포되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계몽사상에 심취했고 혁명에 열광했던 베토벤은 하이든이 평생 귀족의 후원 아래 활동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수 있다. 베토벤은 빈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하이든을 ‘경쟁자’로 여겼고, 자기 독자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1800년 즈음에는 이 대선배의 가르침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데 질곡이 된다고 느꼈다. 베토벤은 자신의 ‘새로운 길’은 하이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며, 자신의 음악이 하이든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무서운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 신참일 뿐인 베토벤이 신속하게 빈의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인정받는 데 대해 질투와 경계심을 느끼기도 했다. 베토벤의 천재성이 빛나기 시작할 즈음엔 그가 자신을 스승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데 대해 안타까움과 분노마저 없지 않았다.

 

1804년 초연된 <에로이카>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다”는 하이든의 반응은, 자기 시대는 갔고 이제 베토벤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으로 들린다. 하이든은 베토벤을 만나 우정을 쌓고 싶어 했다. 베토벤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하이든과 멀어지는 것은 베토벤에게도 고통스런 일이었고, 자신이 젊고 생산력이 왕성한데 비해 스승이 늙어 가며 일을 못하게 됐다는 점에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 메이너드 솔로몬 저, 김병화 역, 한길아트 210쪽)     

 

베토벤은 1808년 3월, 하이든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음악회에 참석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됐고,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 이후 베토벤은 하이든에 대해 말할 때 과거의 원망과 괴로움 없이 언제나 따스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을 헨델과 바흐, 글루크, 모차르트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고, 자신은 그 인물들 옆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하이든과 베토벤은 애증이 얽힌 사제지간이었고, 결국 시간과 더불어 해피엔딩으로 나아간 셈이다. 음악에서 타협을 몰랐지만 속마음은 따뜻했던 베토벤이었기에 자연스레 화해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뒤 자기가 물러나야 할 때를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인 하이든의 지혜를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민주화 운동? 젊었을 때 나도 다 해 봤어”라며 후배들을 나무라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년 전 파업에 앞장섰다가 지금 눈앞에서 진행되는 똑같은 파업을 ‘불법 정치파업’으로 매도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다. 지혜롭게 늙어간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가보다. 과거가 나의 것이었다면 미래는 새로운 세대의 것, 오늘 그것을 깨달으면 좋은 일이 아닐까. ‘MBC 프리덤’을 만든 후배들을 보며, 이렇게 일치된 호흡과 단결력, 열정과 창의성이 있으니 언젠가 방송에 복귀했을 때 선배들보다 더 멋진 방송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푸르트뱅글러 지휘, 빈필이 연주한 <에로이카>. 하이든 영향이 남아있는 1번 C장조와 함께 들어 있다.

 두 곡을 대비해서 들어 보면 <에로이카>가 얼마나 혁명적인 작품인지 알 수 있다.

 

 

베토벤의 이 작품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작품이라 할 만 하다. 교향곡 1, 2번에는 선배 작곡가인 하이든의 영향이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이 3번 <에로이카>는 우주를 향해 포효하는 인간 베토벤의 성숙한 모습을 들려준다. 

 

 

푸르트뱅글러 지휘, 빈필이 연주한 <에로이카>. 하이든 영향이 남아있는 1번 C장조와 함께 들어 있다. 두 곡을 대비해서 들어 보면 <에로이카>가 얼마나 혁명적인 작품인지 알 수 있다.

 

우선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악장은 이전 교향곡 전 악장과 맞먹는 규모다. 또한, 전대미문의 작곡 기법은 연주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1악장 첫 부분이 두 개의 퉁명스런 불협화음으로 시작하고, 재현부에서 주제 대신 호른의 시그널이 먼저 나오자 연주자들은 “베토벤이 악보를 잘못 쓴 거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2악장은 상식 밖의 장송행진곡이고, 3악장 스케르초는 규모가 두 배로 불어났고, 마지막 악장은 서주가 딸린 웅장한 변주곡이다. 당시 청중은 ‘듣도 보도 못한’ 괴물 같은 교향곡에 맞닥뜨린 것이다.

 

당시 한 비평가는 평소 베토벤을 숭배해 왔음을 밝힌 뒤 “이 긴 작품은 연주가 극히 어렵고, 너무 크게 확대되어 있고,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곡 전체의 파악을 방해하는 기괴한 요소들이 너무 많다. 통일감을 거의 잃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베토벤은 “내가 한 시간이 걸리는 교향곡을 써도 짧다고 느끼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 곡은 한 때 ‘혁명의 우상’이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했다. 그러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베토벤이 악보 표지에 있던 ‘보나파르트’라는 부분을 찢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역시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 또한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오로지 자기 야망에만 탐닉하겠다는 것인가?”

 

 

당시 유럽의 많은 가정에서는 그리스도 신상을 떼내고 그 자리에 나폴레옹 초상을 걸었다고 한다. 맹목적인 신앙과 위계적인 교조를 거부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변해가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꼈음 직 하다. 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배치한 것은 베토벤이 영웅의 탄생과 부활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미 염두에 둔 게 아니었을까 추측케 한다.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베토벤은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며 2악장 ‘장송행진곡’을 상기시켰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제목 대신 ‘한 위대한 인물의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곡함’이라고 표지에 써 넣었다.

 

음악가로서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귓병을 비관하여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던 베토벤. 그는 오직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다시 일어섰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곡에 만족할 수 없다. 오늘부터는 전혀 새로운 길을 열어갈 생각이다!” 베토벤의 이 다짐이 맺은 첫 열매가 바로 <에로이카> 교향곡이다. 

 

브루크너, 말러의 대교향곡을 경험한 지금은 베토벤의 <에로이카>를 별 충격 없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초연 당시 청중들이 느꼈을 전율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 시대의 악기를 사용한 프란스 브뤼헨 지휘, ‘18세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어 보자. 그 시절로 돌아가 ‘교향곡의 혁명’을 체험하게 해 주는 훌륭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빠르고 힘차게)
 http://www.youtube.com/watch?v=7_P8mVbKZzI&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watch?v=HyKyvPIG-UM&feature=related

 

 2악장 장송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충분히 느리게)
 http://www.youtube.com/watch?v=yIU34FkbvnM&feature=related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빠르고 생기있게)
 http://www.youtube.com/watch?v=uVFDGborWFg&feature=related

 

 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아주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j8I43SLEK_k&feature=related

 

 

 

 

빈 필하모닉이 들려주는 ‘봄의 소리’ -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 MBC / 통통 대한민국 /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소통”

 

MBC사옥에 겨우내 걸려 있던 현수막이다. 소통이 요즘 가장 절실한 화두란 걸 인정하긴 하나보다. 하지만 좀체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 소통을 외치는 게 자못 우스꽝스럽다. 공정방송을 회복하자는 노조 파업이 한 달이 돼 가고, 보직 부장들이 파업에 합류하고, 135명의 고참 사원이 기명 성명을 내고, 간판앵커들이 마이크를 내려놓는데도 사측은 여전히 마이동풍이다. 내부 소통이 원활치 못한 현 MBC 체제로는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송’을 하기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소, 징계가 해결책인가, 그들의 ‘소통’에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소똥’이 낫다 해야 할지…. 

 

음악은 가장 정직한 소통 매체다. 음악은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본질적이고, 강력하다. 음악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음악은 시간 속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지만, 음악에 감응한 마음은 오래도록 남는다. 음악은 나눔을 통해 한없이 풍요로워진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빈 필하모닉의 슬로건은 언제 봐도 멋지다.

 

빈 필하모닉은 뭐니뭐니 해도 해마다 1월 1일 오스트리아 국내외 4억 시청자에게 생중계되는 ‘신년 음악회’로 유명하다. 카라얀이 지휘를 맡은 1987년 빈 필 신년 음악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성큼 다가왔으니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작곡 <봄의 소리> 왈츠를 들어보자. 캐슬린 배틀이 노래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E0ibzRZiGUY

 

 

1987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 <봄의 소리> 왈츠를 노래하는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

 

 

매혹적인 선율에 행복감을 느낀다. 특히 이 연주는 79세, 사망 2년 전의 카라얀과 흑인 소프라노 배틀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이 왈츠를 독립 성악곡으로 격상시킨 명연주다. 가사 앞 부분.

 

“종달새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 부드러운 바람, 사랑스런 숨결은 들판에 입 맞추며 봄을 깨우네 / 만물은 봄과 함께 빛을 더해 가고 / 아, 모든 고난은 이제 끝났어라 / 슬픔은 사라지고 행복한 기대가 피어나네 / 아, 만물은 웃음으로 다시 깨어나네”

 

카라얀이 지휘하던 손을 멈추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미소 짓는다. (링크 3분 53초 지점) 늘 근엄하게 눈 감고 지휘하기로 유명한 카라얀이 웃음을 보이다니, 희귀한 장면이다. 캐슬린 배틀 뒤에서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도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지휘자와 성악가,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 함께 음악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청중들도 그 순간 똑같은 행복감을 맛보았으리라. 음악을 통한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다.

 

빈 필하모닉의 고향인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부드럽고 윤기있는 사운드를 자랑한다.

 

 

빈 필 신년 음악회는 1941년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첫 지휘자로 등장한 뒤 악장 빌리 보스코프스키가 25회나 지휘하는 기록을 세웠다. 80년부터 로린 마젤이 7년 동안 계속 바톤을 잡았지만 최근에는 빈 필 단원들이 지휘자를 결정하는 전통을 살려 해마다 새로운 지휘자를 초빙한다. 카라얀, 클라이버, 무티, 아바도, 메타 등 당대 최고 실력의 지휘자들이 이 자리에 선 바 있다. 올해는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가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로 포디엄에 섰다. 해마다 이 음악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http://www.youtube.com/watch?v=9wQX_swJwZg

 

지휘대로 걸어 나오면서 드럼 연주자에게 큐를 주는 얀손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행진곡을 연주할 때는 청중들도 박수를 치며 함께 연주에 참여하고, 지휘자도 오케스트라와 청중을 번갈아 보며 지휘한다. 오케스트라와 청중의 벽을 아예 허물어 버린 셈이다. <열린 음악회>에서 늘 보던 풍경이 클래식 음악에서 자연스레 연출되는 걸 볼 때마다 “빈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작품을 대중음악으로 여기는구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음악회의 레퍼토리는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간혹 모차르트 춤곡을 삽입하는 정도였는데, 올해는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연주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올해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는 2012 빈 필 신년음악회를 활용하여 빈의 문화유산을 소개한 특집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재미있으니 1시간 정도 시간 내서 꼭 즐기시길. http://www.youtube.com/watch?v=ZeEMnLZShqs&feature=related

 

전반부는 즐거운 음악 다큐멘터리다. (처음부터 23분 11초까지) 빈 필하모닉의 음악가 7명이 연주하는 사라사테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 흐르고, 시티투어 차를 탄 손님들이 빈의 문화유산 체험 여행을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성의 마음이 드뷔시 <달빛>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12분 20초) 아름다운 빈 풍경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사랑이 이뤄지는 해피엔딩에서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들을 수 있다. (21분) 르네 마그리트의 <콘코다>(1953) 주인공처럼, 사람들이 빈의 문화유산 사이로 둥둥 떠다니도록 한 연출이 흥미롭다.

 

후반부는 2012 빈 필 신년 음악회 하이라이트다. 첫 곡은 올해 레퍼토리 중 파격에 해당하는 차이코프스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2막 ‘파노라마’다. (24분 05초) 이어서 덴마크 작곡가 한스 크리스티안 룸비에의 <코펜하겐 열차> 갤럽, 처음 듣는 곡인데 참 즐겁다. (26분 41초) 지휘자가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면 온갖 타악기들이 출동, 달리는 열차를 묘사한다. 경적 소리를 내는 요상한 목제 악기가 흥미롭다. 타악기 연주자들이 열차 승무원 복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익살스럽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네 삶을 즐겨라>, 요것도 처음 듣는 곡인데, 세 쌍의 남녀 무용수가 펼치는 발레를 보니 참 행복한 느낌이 든다. (30분 37초부터) 요한 슈트라우스의 폴카 <불타는 사랑>, 헐, 이것도 처음 듣는 곡! (39분 11초부터) 빈에서 활동한 클림트의 그림 <키스>가 화면에 가득 차면, 두 남녀가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사랑의 이인무를 춘다. 빈 사람들만 떠올릴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 정말 부러울 뿐이다. 이어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트리치 트라치> 폴카. (43분 20초부터) 이제야 아는 곡이 나오는군! 재미있는 건, 빈 소년합창단이 오케스트라 위, 파이프 오르간 앞에 도열하여 노래 부른다는 점이다. 해마다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려는 연출진의 열정이 느껴진다.

 

2012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트리치 트라치>(재잘재잘) 폴카를 부르는 빈 소년합창단원들.

 

끝으로, 빈 사람들이 영원히 사랑하는 왈츠의 대표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46분 27초부터) 빈을 여행 중인 젊은 남녀가 벨베데레 궁에 들어가면 무용수 5쌍의 발레가 환상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무용수들의 푸른 옷은 도나우강의 색채를 표현하는 듯하다. 발레가 끝나고 두 남녀가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 왈츠가 끝난다.

 

2006년, 뜻밖에 큰 행운을 얻은 일이 있다. 방한 연주를 앞둔 빈 필하모닉을 국내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특집 다큐 <비엔나의 선율 – 마음에서 마음으로>를 제작한 것. PD가 아니라면 어떻게 빈 필하모닉 단원들을 가까이 취재하고 인터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당시 빈 필이 머물던 스위스 루체른에서 이틀, 빈에서 주변 취재 이틀, 합쳐서 고작 나흘 찍었을 뿐이지만, 빈 필 단원들의 친절한 협조로 꽤 충실한 취재가 가능했다. 제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같지만, 즐겁게 봐 줄만한 음악 다큐멘터리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빈 필하모닉의 음악이 전편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다.

 

빈 필하모닉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추어리즘’이다. 아무 사심 없이 음악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주한다는 뜻이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한결같이 선량하고 친절했다. 이 마음을 청중과 나누고 온 인류에게 선사하는 일에 그들은 행복해 했다. 빈에서 인터뷰한 당시 단장 클레멘스 헬스버그는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전세계의 인간 공동체를 위해 음악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계화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럴수록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이 구호는 연주할 때 우리의 기본 자세입니다.”

 

빈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봄의 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다. 어서 겨울이 가고 소통 불능의 이 시대가 끝났으면 좋겠다. 만물이 환하게 피어나는 봄, 사람들도 다시 깨어나 광장에서 소통할 수 있으려나.

 

1842년 오토 니콜라이 주도로 창단된 빈 필하모닉은 고전시대 빈의 음악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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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해피엔딩, 현실에서는 불가능한가? -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을 생각하며

 

 

사람의 마음이 음악에 감응되는 한 순간을 <쇼섕크 탈출>만큼 감동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많지 않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죄수들 가운데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다가 잡혀온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그들의 굶주리고 메마른 영혼에 오히려 더욱 온전히 흡수된다. http://www.youtube.com/watch?v=azWVPWGUE1M

 

 

전혀 예기치 못한 음악 소리에 죄수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한 명 한 명 음악에 귀 기울인다. 음악이 흐르는 짧은 시간, 죄수들은 교도소 담을 훌쩍 넘어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를 맛본다. 관객들은 음악의 위대한 힘을 느끼는 한편 ‘흉악범’에게도 지극히 선한 인간성이 살아있음을 발견하여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앤디 (팀 로빈스 분)가 교도소 운동장으로 쏟아 부은 음악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3막에 나오는 ‘산들바람의 노래’ (Canzonetta Sullaria)다. 바람둥이 백작을 유인하기 위해 백작 부인이 편지를 구술하고 하녀 수잔나가 받아쓰는 장면에 나온다. 그래서 ‘편지의 이중창’이라고도 한다. 백작 부인 로지나가 알마비바 백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시절, 두 사람이 만나던 저녁 숲에 상쾌하게 불던 산들바람을 회상하는 가사로 시작한다. 
   
   (백작부인)     산들바람의 노래….
   (수잔나)       산들바람이 불고? 
   (백작부인)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수잔나)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백작 부인)    산들바람이 속삭이는 오늘 밤…. 
   (수잔나)       산들바람이 속삭이는 오늘 밤! 
   (백작 부인)    수풀 속의 소나무 아래…. 
   (수잔나)       소나무 아래? 
   (백작 부인)    수풀 속의 소나무 아래! 
   (수잔나)       수풀 속의 소나무 아래….
   (백작 부인)    그렇게 쓰면 나머지는 다 알아들으실 거야 
   (수잔나)       분명히 다 알아들으시겠죠.

 

가장 단순한 3박자의 앙상블

 

<쇼섕크 탈출>에서는 “이름은 모르지만 두 이탈리아 여자가 부른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만큼은 자유를 느꼈다”는 모건 프리먼 (물자 조달을 맡은 죄수)의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이탈리아 말로 노래를 부른 두 여자는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군둘라 야노비츠와 스위스의 에디트 마티스이다. 칼 뵘이 지휘한 도이치오퍼 베를린의 녹음이다. 아름다운 저녁의 산들바람처럼 잔잔히 설레는 마음…. 지극히 단순한 멜로디로 이토록 섬세한 감정을 노래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없이 음악만 들어보자.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 빈 필 연주, 백작부인은 리자 델라 카사, 수잔나는 힐데 귀덴이 노래한다. 수많은 <피가로의 결혼> 녹음 중 가장 맘에 든다.  http://www.youtube.com/watch?v=j5XcVE2QyOg (링크 27초~3분 9초)

 

 

 

혁명 전야에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된 후 3년만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된 1786년은 프랑스 혁명 전야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호사스런 궁정 생활을 누렸다.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은 세금도 안 내며 부를 독점한 반면, 나머지 98%에 해당하는 평민들은 가혹하게 수탈당했다.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국고가 바닥나자 혁명의 기운은 점점 더 무르익었다.

 

지배 계급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보마르셰의 희곡은 1781년에 이미 완성됐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당신들 대영주는 신분, 재산,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나 태어나는 고통을 빼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당신들이 한 게 무엇이요?” 지배 계층은 이러한 노골적인 표현이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보마르셰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친 뒤 가까스로 이 연극을 파리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격분한 귀족과 시민이 충돌해 사상자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uyhQIwAgC8g 영화 <아마데우스> 중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위해 황제 요젭 2세를 설득하는 장면이다. 황제가 ‘원작은 나쁜 희곡’이라며 탐탁치않아 하자 모차르트는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며,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모차르트와 다 폰테는 이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원작의 노골적인 정치 풍자를 완화하고 연애 스토리 중심으로 새로 구성, 1786년 빈에서 공연하는데 성공한다. 하인과 주인이 평등해 질 시대를 예고한 이 작품은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피가로의 결혼>, 줄거리와 코믹 포인트

 

백작은 하인 피가로의 약혼녀인 수잔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초야권’이라는 옛날 관습을 부활시키려 한다. 백작은 궁정 안의 여자를 다 건드리는 호색한으로 유명하다. 자기는 뭐든지 맘대로 하면서 타인의 잘못은 용서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인간이다. 그는 꼬마 바람둥이 케루비노를 잡아서 군대에 보내려 하고, 부인 로지나가 부정하다고 의심하며 처벌하려 한다. 피가로는 백작의 이기적 행태를 여러 가지로 풍자하며 반발하지만 역부족이다. 농민들은 백작을 야유하고 백작부인을 따뜻하게 위로하지만 ‘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결국 백작 부인과 수잔나가 꾀를 내어 백작을 수풀로 유인, 꼼짝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고 용서해 준다.

 

코미디는 원래 점잔 빼는 사람이 넘어져야 웃기는 법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강자인 백작이 우둔한 짓을 되풀이하는 반면 약자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백작을 제압해 버리는 데에 코믹 포인트가 있다. 첫째 바보는 백작이고, 둘째 바보는 피가로다. 백작은 시종일관 좌충우돌하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피가로는 백작에게 나름 저항하지만 막판에 바보로 돌변해서 수잔나에게 혼쭐이 난다. 백작부인과 수잔나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믿음직한 ‘동지’다.

 

 

혁명적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제대로 감상하기

 

http://www.youtube.com/watch?v=tTfiboMetpY&feature=related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3막 피가로와 수잔나의 결혼 행진곡 (링크 처음~50초)과 4막 피날레에서 백작이 뉘우치는 장면 (50초~끝)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산들바람의 노래’ 외에도 귀에 익은 매혹적인 선율이 많이 나온다.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 빈 필의 1955년 녹음. 동영상이 없어서 아쉽지만 가장 훌륭한 연주라 생각하여 링크한다.

 

 

 

 

1막 피가로의 아리아 ‘더 이상 날지 못하리’ (Non piu andrai) 
http://www.youtube.com/watch?v=CgpYh65-ABc 바리톤 체자레 시에피.
“바람둥이 나비야, 더 이상 날지 못 하리 / 여기 찝적, 저기 찝적 / 여자들의 가슴을 어지럽히는 아도니스, 나르치스야 / 군인들 대열에 서서 / 커다란 콧수염, 꽉 조이는 군복 / 어깨에 총, 허리에 칼을 차고 / 등을 곧게 펴고 근엄한 표정으로 / 큰 철모나 터번을 쓰고 / 명예에 살지만 돈은 못 버는….”

 

2막 케루비노의 아리아 ‘사랑이 뭔지 아시는 숙녀님들’ (Voi che sapete) 
http://www.youtube.com/watch?v=BvqmF_3ZyvE, 메조 소프라노 수잔 당코.
“사랑이 뭔지 아시는 숙녀님들 / 제 가슴 속에 있는 게 사랑 맞나요? / 제가 느끼는 걸 모두 설명해 드리죠 / 새로운 경험이라 저는 뭔지 모르겠어요 / 욕망으로 가득찬 이 마음 / 한 순간은  즐거움, 다음 순간은 고통 / 제 영혼은 얼어붙었다 녹아버리고 / 활활 타오르다가 금새 얼음으로 돌아가요 / 제 바깥에서 보물을 찾으려 하지만 / 누가 그 보물을 갖고 있는지, 아니 그 보물이 뭔지조차 모르겠어요 / 나도 모르게 한숨 쉬다 신음하고 / 이유도 모른 채 전율하죠 / 낮이나 밤이나 평화가 없어요 / 하지만 이 나른한 기분이 좋긴 해요.”

 

3막 백작부인의 아리아 ‘아름다운 날은 가고’ (Dove sono) 
http://www.youtube.com/watch?v=LAyUbdBvSjA 소프라노 리자 델라 카사.
“달콤했던 행복의 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거짓 입술로 속삭인 엄숙한 맹세들은 다 어디로 갔나? / 모든 것이 눈물과 아픔으로 변해 버린 지금 / 왜 나는 그 축복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걸까? / 이 무정한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은 / 모든 고통을 이겨낸 나의 사랑 / 오직, 나의 변함없는 신념에서 나올 뿐.”

 

그리고 1막, 3막에 나오는 농민들의 합창을 빼놓으면 안 된다. 1막 합창은 붉디 붉고 희디 흰 장미를 연상시킨다. http://www.youtube.com/watch?v=pdJheEHCT8A 농민들은 “유쾌한 처녀들아, 고귀하신 백작님께 꽃을 바치자. 그의 너그러운 가슴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순결하게 피어나겠지”라며 백작을 야유한다. 그러나 음악은 더없이 단순하고 맑다. 3막 합창, http://www.youtube.com/watch?v=SVH15T76EQQ 꽃을 바치는 농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백작부인을 위로한다. 두 합창의 순결한 빛깔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바탕색이 된다.  
 
<피가로의 결혼> 전곡을 보려면 3시간 이상 걸린다. 쉽지 않겠지만 휴일에 마음을 내서 한 번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지휘,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글라인번 페스티벌 오페라의 1994년 공연, 영어 자막이다. 
1, 2막 http://www.youtube.com/watch?v=lW1_LJn6keY&feature=related3, 
3, 4막 
http://www.youtube.com/watch?v=uCvjE-Zr8Fo&feature=related

 

 

회해와 용서를 노래한 모차르트, 그러나 현실은?

 

천성이 상냥했던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언제나 화해와 용서를 노래했다. 불화와 갈등이 빚어질 때 힘 있는 쪽이 먼저 책임을 느끼고 사과하면 화해가 수월한 게 필시 모든 인간사일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백작이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자 해피엔딩이 성큼 다가온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프랑스혁명을 앞당겼다는 일부의 주장은 아마 과장된 것이리라. 현실의 인간들은 모차르트처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게 쉽지 않았나 보다. 프랑스의 지배층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데 인색했으니, 3년 뒤 성난 군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단두대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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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조반니의 최후를 생각한다 - 마음에서 마음으로

 

 

<피가로의 결혼>에 대한 글에서 “천성이 상냥했던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늘 ‘화해와 용서’를 노래했다”고 썼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자기 ‘악행’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은 돈 조반니는 결국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진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돈 조반니가 심판받는 장면. 
http://www.youtube.com/watch?v=OnKk0877_QI&feature=related

 

 

끝내 참회를 거부하고 기사장의 심판을 받는 돈 조반니.

 

 

돈 조반니, 자유와 윤리의 충돌

 

잘 알다시피 돈 조반니는 스페인 전설에 나오는 희대의 바람둥이다. 그는 타락한 자유주의자, 또는 ‘나쁜 남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동 쥐앙>에서 그를 “지상의 모든 규칙에 반항하는 자,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자, 모든 권위를 조롱하고 위선을 풍자하는 아나키스트, 시대가 강요하는 관습과 믿음에 반기를 드는 자, 심지어 자신의 본능을 옹호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자”로 그렸다. (<동 쥐앙, 또는 석상의 잔치> 서문, 이화숙, 기린원 5~6쪽)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는 이 전설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바람둥이 주인공 돈 조반니는 끊임없이 윤리와 충돌한다. 하지만 목숨으로 자유를 지키는 순교자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돈 조반니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돈 조반니의 성격에 대해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 작품을 ‘오페라 부파’(가벼운 코믹 오페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영웅의 죽음으로 끝나는 일종의 ‘비극’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듣는 이의 상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더욱 재미있다.

 

돈 조반니가 심판 받기까지의 과정

 

돈 조반니는 여주인공 돈나 안나를 겁탈하던 도중에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타난 아버지 기사장을 살해한다. 이어서 자기가 버린 돈나 엘비라와 마주치자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속여서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심지어 시골 결혼식장에서 새 신부 체를리나를 유혹하기도 한다. 돈 조반니는 하룻밤 내내 쫓기며 실패를 맛보는데, 이 과정에서 거대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의 악행은 오페라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하인 레포렐로와 옷을 바꿔입고 돈나 엘비라를 따돌린 돈 조반니는 그녀의 하녀를 유혹하려 한다.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과정에서는 레포렐로의 아내를 건드리기도 한다. 그의 영혼을 염려하는 엘비라를 무참히 모욕한 돈 조반니는 기사장의 대리석상에게 심판 받고 불구덩이에 떨어져 죽는다.

 

‘돈 조반니’는 프랑스 혁명 전야인 1787년 프라하에서 초연됐다. 1막 피날레에서는 돈 조반니의 선창으로 ‘자유 만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이 오페라를 만들 당시 사망한 부친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의 상상 속에서 기사장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으로 해석했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설정이다. <돈 조반니>를 감상할 때 주요 등장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돈 조반니의 매력

 

돈 조반니는 부도덕하다. 윤리적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유혹자가 도덕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돈 조반니가 ‘정복’한 여성은 하인 레포렐로가 ‘카탈로그의 노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640명, 독일에 231명, 프랑스에 100명, 터키에 91명, 그리고 스페인에 무려 1,003명”이다. 그는 “농촌 처녀, 도시 처녀, 하녀, 백작부인, 남작부인, 후작부인, 공주님 등 모든 계층, 모든 용모, 모든 연령의 여성들”을 유혹한다, “금발의 여자는 세련됐다고 칭찬하고, 은발 여자는 달콤하다고 칭찬하고, 갈색머리 여자는 마음이 진실되다고 칭찬한다.” “겨울에는 통통한 여자를, 여름에는 마른 여자를” 좋아하며, "치마만 둘렀으면 부자든 가난뱅이든, 예쁘든 못 생겼든" 따지지도 않고 유혹한다.

 

윤리와 충돌하는 이 지점을 제외한 돈 조반니는 대단히 매력적인 남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유혹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돈 조반니는 공감력이 뛰어났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신속하게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그가 재산과 권력을 사용할 때는 친절하고 겸허하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에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 섬세한 감정 변화, 어두운 열정, 단호한 용기를 모두 음악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 오페라에는 돈 조반니의 아리아는 아주 짧은 두 곡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오페라에서 가장 덜 중요한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돈나 엘비라, 돈나 안나, 체를리나와 함께 부르는 앙상블에서 그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음악적 조화를 이끌어 낸다.

 

시골의 결혼식장에서 새 신부 체를리나를 유혹하는 돈 조반니. 상대 여성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그의 성격을 모차르트는 음악으로 완벽히 재창조했다.

 

 

세 여주인공의 성격

 

돈나 안나는 자기 침실에 잠입한 돈 조반니를 따라 나오며 누군지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한다. 그녀의 침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객들은 아무도 모른다. 한밤중의 소동에 뛰쳐나온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은 돈 조반니에게 결투를 청하고, 결국 돈 조반니의 칼에 맞아 죽게 된다. 돈나 안나 입장에서 돈 조반니는 자기를 겁탈한, 최소한 겁탈하려 한 ‘치한’이고, 동시에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복수뿐이다. 한편, 그녀가 짧은 만남에서 돈 조반니를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호프만의 해석도 있다. 이 해석이 옳다고 가정하면, 극적인 울림은 더욱 커진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다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보면 그녀의 노래 하나하나에 영혼을 떨게 하는 아픔이 있다. 아무튼, 그녀는 자기를 지극히 아끼는 약혼자 돈 오타비오의 마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돈 오타비오가 그녀에게 “잔인한 사람”이라 하자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는 돈나 안나의 노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그뤼머. http://www.youtube.com/watch?v=dAPg4v7SazQ

 

돈나 엘비라는 수녀원에서 기도하며 살다가 돈 조반니의 유혹에 빠져 속세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녀는 돈 조반니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자기가 무시당한 걸 생각하면 복수심에 사로잡히지만, 돈 조반니가 위험에 처하면 다시 연민을 느낀다. 그녀의 2막 아리아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날 속였지만’ (Mi tradi quel'alma ingrata)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숭고한 느낌을 주는 아리아다. 소프라노 리자 델라 카사의 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Upg6wwaS2cs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날 속였고 / 날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 오, 신이여, 기만당하고 버림받은 나는 / 아직도 그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 그가 준 고통을 생각하면 / 내 가슴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 그의 앞에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 / 내 마음은 다시 흔들립니다.”

 

체를리나는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시골처녀다. 신랑이 될 마제토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네 신분을 바꿔 줄께’라며 유혹하는 돈 조반니에게 흔들린다. 체를리나는 1막에서 마제토가 화를 내며 나무라자 “때려 주세요”라는 달콤한 노래로 신랑의 마음을 살살 녹이고, 2막에서 마제토가 돈 조반니에게 흠씬 두드려맞은 채 쓰러져 있을 때는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젊고 발랄하고 유쾌한 처녀 체를리나는 1787년 프라하 초연 당시 제일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고 한다. 남자 관객들은 그녀가 등장하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고 한다. 반대로 돈 조반니가 등장하면 여자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다고 하니, 당시 극장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리버럴했나보다.

 

<돈 조반니>를 제대로 얘기하려면 책 한권이 필요할 테니 지금 내 능력 밖이다. 전곡을 듣고자 한다면 로린 마젤 지휘, 파리 오페라 연주, 요젭 로지 감독 영화를 권하고 싶다. 영어 자막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g3XZCgqo6ws&feature=related. 상영 시간 2시간 57분.

 

 

돈 조반니의 당당한 최후

 

윤리 규범을 무시하는 유혹자 돈 조반니가 만인의 평화를 위협한 끝에 심판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 파국의 순간에 그는 당당하다. 돈 조반니가 부도덕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이 당당함 때문일 것이다. 2막 ‘기사장의 심판’ 장면이 불멸의 고전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선남선녀들은 돈 조반니를 추적하지만 끝까지 자기 힘으로 복수할 수 없었다. 결국 초자연적인 힘에 해당하는 기사장의 대리석상이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돈 조반니>, 그 중에서도 압권인 2막 ‘기사장의 심판’ 장면. 사무엘 라미와 쿠르트 몰이 출연한 1990년도 공연으로 보자. 영어 자막.

http://www.youtube.com/watch?v=dK1_vm0FMAU&feature=related

 

(기사장)    돈조반니, 그대와 만찬을 하러 왔네.   그대가 초대했으니 이렇게 온 것이네.
(돈 조반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군.   레포렐로, 당장 1인분을 더 차리게.
(레포렐로)  주인님, 우린 모두 죽게 될 거에요.
(기사장)    나는 세속의 양식이 필요하지 않네.   천상의 음식을 먹기 때문이지.    훨씬 심각한 목적으로 이 땅에 내려왔네.
(레포렐로)  열병에 걸린 듯 손발이 떨리네.
(돈 조반니) 무엇을 원하는 거요?
(기사장)    잘 들어라, 시간이 많지 않다.
(돈 조반니) 말해 보시오, 듣고 있소.
(기사장)    나는 자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제 자네가 내 초대를 받을 차례야.  대답하라, 나와 함께 가서 식사하겠느냐?
(레포렐로)  시간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하세요.
(돈 조반니) 나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야.
(기사장)    결정하라.
(돈 조반니) 이미 결정했다.
(기사장)    그럼 함께 가는 거냐?
(레포렐로)  아니라고 하세요!
(돈 조반니)  내 심장은 굳세다. 두렵지 않다. 가겠다.
(기사장)     그럼, 이 손을 잡고 약속하라.
(돈 조반니, 기사장의 손을 잡고) 아, 죽음처럼 차갑구나!
(기사장)    참회하라, 네 삶을 바꿔라. 마지막 기회다.
(돈 조반니) 결코 참회하지 않을 것이다. 손을 놓아라! 
(기사장)    참회하라, 악한 자여!
(돈 조반니) 싫다, 비실비실 늙은 바보야!
(기사장, 돈 조반니)   참회하라! 싫다!
(기사장)    네 심판의 시간이 왔다.
(돈 조반니) 내게 다가오는 이 낯설고 끔찍한 형상들은 뭘까?  나를 공포로 채우는 이 지옥같은 환영들은 뭘까? 
            이 고통, 이 광기, 이 지옥, 이 공포!

(돈 조반니, 비명과 함께 불구덩이로 떨어진다)

 

 

 

요젭 크립스 지휘 빈 필의 1955년 녹음. 체자레 지에피, 리자 델라 카사 등 역사상 최고의 캐스팅과 훌륭한 음악 해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주.

 

 

“이 고통, 이 광기, 이 지옥, 이 공포!”

 

돈조반니는 자기 선택으로 무한한 사랑의 자유를 누렸고, 그 자유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불구덩이로 떨어져 죽는 쪽을 택했다. 종교도, 도덕도, 법도 거부한 돈조반니는 사회 통념에서 보면 분명히 ‘악인’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자유에 인생을 건 ‘비극적 영웅’이기도 했다. 어차피 닥쳐온 최후의 순간을 의연히 맞이한 돈 조반니의 모습은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돈 조반니와 ‘그 사람’을 비교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차원이 다르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차피 닥쳐올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니, 필시 외부의 손짓 하나로 내려올 게 예상된다. 이 타율적 인간이 안간힘을 쓰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모습이 안쓰럽다. ‘해고, 고발’에 의연히 맞선 청계광장의 촛불들이 “이 고통, 이 광기, 이 지옥, 이 공포!”를 기어이 잠재울 것이라 믿는다. 돈 조반니의 당당한 최후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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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파업과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하이든 교향곡 45번 F#단조 <고별> 중 4악장, 프레스토-아다지오 (아주 빠르게 – 느리게)

http://www.youtube.com/watch?v=uICvLchS2kg (링크 4분 15초부터)

 

 2009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고별>교향곡을 지휘하는 다니엘 바렌보임.

 

 

오케스트라 없는 지휘자는 존재할 수 없다.

 

한 명씩 두 명씩 떠나간다. 호른 주자 한명이  떠난다. 바이올린, 비올라 주자 6명이 떠난다. 오보에 연주자가 떠나고 더블베이스 연주자가 떠난다. 지휘자는 곤혹스럽지만 음악을 계속한다. 첼로 주자 4명이 떠난다. 교향악은 규모가 현저히 줄어들어 거의 실내악 수준이다. 지휘자는 남아있는 단원 수를 세어 보고, 그런대로 음악이 가능하다는 듯 지휘를 계속한다. 첼로 주자 2명이 일어나자, 너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손짓까지 한다. 남아 있던 현악 연주자 중 바이올린 두 명만 남고 모두 떠난다. 이제 음악은 거의 솔로다. 지휘자가 할 일이 없다. 지휘자는 끝까지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마지막 두명마저 떠나간다. 지휘자는 텅빈 오케스트라석을 향해 손짓을 하며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좌절한 기자들이 먼저 떠났다. 2년간의 패악을 견디다 못한 노조원들이 떠났다. ‘지휘자’는 “떠난 사람 몇 명 안 된다”며 무시했다. 20년 넘은 고참 사원들 135명이 성명을 내고 상황이 심각함을 경고했다. 앵커 2명과 보직간부 3명이 떠났다. ‘지휘자’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메우도록 했다. 각 직능협회는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고언했다. ‘지휘자’는 귀를 막은 채 징계, 해고로 응수했다. 166명의 기자들은 사직서를 쓰며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지휘자’는 말 안 듣는 사원들을 다시 무더기 징계, 해고했다. 이와 함께 19명의 보직부장들이 자리를 떠났다. 회사를 떠받치던 기둥들이 하나둘씩 빠진 MBC는 앙상한 몰골이 됐다. ‘지휘자’가 딛고 설 포디엄이 사라져버렸다.

 

MBC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데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당연히 MBC 사장이 제일 먼저라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징계, 해고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적반하장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사원들 중 제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차례 쫓아내는 형국이다. 아직도 제작현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중 다수는 “공영방송 MBC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000 사장과 그가 만들어놓은 회사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3월 5일~6일, 성명서 <보직을 사퇴하며> 중)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 떠났다는 점이다.

 

예능PD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은 ‘가슴이 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통과 공감을 먹고 사는 그들에게 ‘불통’의 쓴맛은 아팠을 것이다. 정치와 무관한 예능PD들의 절규를 ‘불법 정치파업’으로 매도한 건 그들을 한 번 더 좌절시켰을 것이다. 166명의 기자들이 사직을 결의한 것은 언론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공정방송 요구에 해고로 답한 것은 기자 전체를 짓밟은 것과 다름없다”는 분노가 그들을 극한 행동으로 내몬 것이다. 

파업 사태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수학문제 풀 듯 해법을 생각해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역지사지,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그는 징계, 해고, 고소, 고발 등 강경책을 써서 끝까지 사장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사원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그는 잃어버렸다. 기자들이 공정보도를 요구할 때 미리 대화에 나섰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일정한 수습책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타이밍을 번번히 놓쳤다. 징계, 해고, 고소, 고발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원들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는 사장직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직무수행을 해낼 지도력을 스스로 내버렸다.  

MBC의 사시(社是)는 ‘자율, 책임, 품격, 단합’이다. 박정희 정권 때 만들었지만 지금 보니 꽤 좋은 사시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MBC의 ‘자율’은 ‘알아서 기는’ 자율로 전락했고, 이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아름답지 못한 각종 의혹에 회사의 ‘품격’은 땅에 떨어졌고, 구성원 간의 ‘단합’은 갈갈이 찢어져 버렸다. 

사원들의 몸부림은 이러한 MBC의 전통과 가치가 무참하게 훼손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다. 이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퇴여부와 상관없이 MBC의 전통과 가치가 철저히 망가진 작금의 상황에 깊이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정도의 결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인 것 같다. 조속한 사태 해결이 기대난망이니 사원들의 절망이 깊어갈 뿐이다. 후배들이 징계, 해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절망이 깊기 때문이다. 그 절망의 힘으로 기어이 희망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하이든과 에스터하치 공의 지혜로운 ‘음악 대화’

강퍅한 현실에서 좀 더 ‘상냥한’ 음악으로 고개를 돌리면 위안이 될까. <고별> 교향곡은 하이든이 40살이던 1772년에 작곡했다. 그가 섬기고 있던 니콜라스 에스테르하지 공은 헝가리의 호반에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고 여름 내내 그곳에서 음악을 즐겼다. 악단 멤버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 빈에서 왔는데, 몇 달씩 가족을 떠나 지내는 게 쉽지 않았다. 매일 밤 연주회가 되풀이되면서 단원들은 향수병에 걸릴 지경이 됐다. 하지만 1772년, 가을이 다가왔는데도 에스터하치 공은 단원들을 고향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원들의 불만이 쌓여 자칫 소요사태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에스터하치 공이 휴가를 보내주지 않자 단원들은 소요 사태 직전까지 간다. 이때 하이든이 기지를 내어 작곡한 게 바로 <고별>교향곡이다. 사진은 빈 모차르트 오케스트라.

‘교향곡의 아버지’ 요젭 하이든 (1732~1809) / 하이든의 후원자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공 (1714~1790)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챈 하이든은 이 곡을 작곡, 에스테르하지 공 앞에서 연주했다. “단원들을 빈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 달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스터하치 공의 노여움을 살 수 있었기에 음악으로 표현한 것. 하이든은 피날레에서 각 파트가 자기 연주를 끝내면 촛불을 끄고 차례차례 퇴장하여 바이올린 두 사람만 남는 걸로 음악을 구성했다. 연주를 들으며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챈 에스터하치 공은 다음날, 단원들 모두 고향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마지막 아다지오, 단원들이 한명한명 자리를 뜨면서 연주하는 음악은 상냥하고 따뜻하다. 인간 본성의 착한 측면을 자극하는 이 음악이 에스터하치 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늘 ‘파파 하이든’이라 부르며 따랐던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그는 이 작품에서 음악 한 곡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uICvLchS2kg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빈 필하모닉 연주, 2009년 빈필 신년음악회 실황이다. 8분 정도 시간 내서 들어보자. 분노를 잠시 내려놓자.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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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목숨 없는 것과 싸워 얻어내는 목숨이 진짜 목숨”

 

 

씨앗 하나를 틔우기 위해 우주가 힘을 모았다.

 

정릉골의 아침, 온갖 새들이 노래한다. 새벽에 내린 봄비가 가지마다 방울져 반짝인다. 개나리 줄기가 초록으로 물들었다. 까치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요란히 날아다닌다. 새로 집을 지으려는 모양이다. 어딘가 쇠별꽃이 얼굴을 내밀었을 텐데….

 

기적처럼 봄이 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았으므로 어김없이 만물이 깨어나 번식을 시작한다. 그러나 봄이 저절로 오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겨우내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음을 생각한다. 씨앗 하나를 틔우기 위해 우주가 힘을 모아야 했음을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 작곡 <봄의 제전>은 봄이 오기까지 힘겨운 투쟁이 있었고 제물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 ‘신성한 춤, 선택된 처녀’ (모리스 베자르 안무)

http://www.youtube.com/watch?v=vNt0mvjoS08

 

모리스 베자르는 1960년 파리세계연극제에서 <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을 공연해 ‘최우수 안무가상’을 받았다.

 

 

민주방송의 싹을 다시 피우려는 MBC 후배들의 파업이 50일을 넘기고 있다. ‘50일 파업’으로 간신히 그 싹을 지켜낸 92년…. 그때보다 봄은 왜 이리 더딘지. 봄을 부르는 새싹들의 아우성은 KBS, YTN, 연합뉴스, 국민일보, 부산일보, 서울신문 등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도 목소리를 모아 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들이 새싹을 억누르고 있다. 대지를 덮고 있는 겨울의 잔재, 그 무게는 아직 가볍지 않다.

 

생명 없는 것들을 밀어내고 움트는 봄

 

생명 아닌 것들이 봄을 가로막고 있다. 신뢰와 도덕성과 지도력을 잃고도 스스로 진퇴를 결정할 줄 모르는 그는 생명이 없다. MBC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방송문화진흥회는 밖에서 지시가 없으면 아무 판단도 못 하니 이들 또한 살아있지 않다. 자기가 낙하산을 보내놓고도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며 외면하는 청와대의 아무개도 생명이 없다.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 모르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그는 생명 없는 모든 흉한 것들의 ‘몸통’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꿈에서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교도들의 제전이라는 구상이 떠올랐다. 제물로 바쳐질 처녀가 죽을 때까지 춤추는 것을 사제들이 둘러앉아서 지켜보는 장면이었다.” (정준호 <스트라빈스키>, 을유문화사, 71쪽) 당대의 고고학자 료리히는 스트라빈스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발레의 줄거리를 만들었다. 료리히는 ‘발레 뤼스’의 대표 디아길레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봄의 제전> 줄거리

 

1부, ‘대지를 찬양함’. 우리는 성스런 고원에 발을 들여놓는다. 슬라브족 남녀가 모여 봄을 기리고 있다. 총각들이 처녀들에게 달려들어 구애 동작을 하고, 남녀의 전쟁놀이 춤이 이어진다. 현명한 원로가 나타나 이들을 진정시키고 대지에 입맞춘다. 2부, ‘희생물과 제사’. 한밤중 젊은 남녀들의 신비로운 모임이 열린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제물을 바쳐야 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를 선택하여 여신으로 모시며 봄의 영광을 찬양하는 춤을 춘다. 광란의 춤이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 처녀는 숨을 거두고 막이 내린다.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초연됐는데, 당시 객석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 자신의 회상. 

“공연 시작부터 저항이 일어났다. 긴 머리의 안짱다리 소녀들이 뛰어다니자 소동이 일어났다. 내 뒤에서 ‘닥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이 16열 창녀들아!’ 16열은 파리에서 가장 고상한 부인들이 앉는 자리였다. 객석은 혼란이 계속됐고 나는 화가 나서 자리를 떴다. (중략) 무대보다 지휘자 몽퇴의 뒷모습이 더 생생했다. 그는 꼿꼿이 서 있었고 악어처럼 냉정했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끝까지 연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공연 뒤 우리는 흥분했고, 화를 냈고, 역겨워했고, 즐거워했다. 디아길레프는 말했다. ‘정확히 내가 원하던 바야.’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준호, 같은 책, 77~78쪽)

 

<봄의 제전> 초연 무렵의 작곡자 스트라빈스키. (왼쪽, 32살)와 안무가 니진스키(오른쪽, 23살)

 

 

당시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은 “아름다움만이 진실이 아니다”라는 모토에 공감하고 있었다. 니진스키의 안무가 무용에 가져 온 혁신은 단순하지만 파괴력이 아주 컸다. 우아한 전통발레와 거리가 먼 파격적인 안무는 청중들을 분노케 했다. 원시적인 음향과 리듬, 강렬한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음악과 춤의 혁명,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는 이 곡에서 태고의 원시성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음악적 기법을 선보였다. 규칙적 리듬 대신 5박자, 7박자, 11박자 등 ‘변박자’를 사용했고, 두 개의 조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복조’를 구사하여 풍요롭고 다양한 색채감을 주었다. 즉흥적 연주 효과, 조성을 완전히 파괴한 무조기법 등으로 원시인들의 그로테스크한 축제의 단편들을 표현해 냈다. 지휘를 맡았던 피에르 몽퇴는 디아길레프에게 “<봄의 제전>에 나오는 음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디아길레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이건 진정 음악에 혁명을 몰고 올 걸작이고, 자네를 유명하게 만들어 줄 거야. 자네가 지휘를 맡았으니까.”

 

원시적 리듬과 즉흥적 연주효과로 가득한 <봄의 제전>의 악보

 

 

초연 당일의 충격과 소동은 BBC 다큐멘터리 끝부분에 근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꺼져라, 이 러시아 놈들아!” 외치는 소리, 객석에서 벌어지는 주먹다짐 등 당시 상황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니진스키의 원래 안무를 철저히 고증하여 재연했고, 음악도 생생히 잘 들린다.

http://www.youtube.com/watch?v=4Zp7fCiTIKI&feature=related

 

 

현대 발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처음에는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초연 직후 파리에서 4, 런던에서 3번 공연된 뒤 한 동안 발레 레퍼토리에서 사라졌다. 혁명적 안무를 선보인 니진스키는 몇 년 후 정신분열증에 걸려 30여년 후 죽을 때까지 이 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음악이 발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하기 위해 수차례 개작했다.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음악은 1940,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판타지아>로 느닷없이 세계 대중들 앞에 되살아났다. 스토리는 원래 발레와는 아무 상관없는 우주의 탄생 - 생명의 진화와 소멸이다. 음악과 애니메이션이 기막히게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디즈니 <판타지아> (1940)

 

탄생 http://www.youtube.com/watch?v=-gZbMOq_Ge8

 

진화 http://www.youtube.com/watch?v=-gZbMOq_Ge8

 

소멸 http://www.youtube.com/watch?v=M16zasqydUE&feature=related

 

현대 발레의 거장 모리스 베자르는 1960년 이 작품을 발레로 되살려냈다. 원작의 스토리와 달리 봄에 분출하는 생명의 거대한 에너지 자체를 강렬한 동작으로 살려냈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대신 남녀가 결합하여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또 한명의 거장 피나 바우슈는 원작의 스토리를 되살려 냈다. 제물로 바쳐질 처녀의 고뇌를 묘사한 끝 장면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s7pV2cX0qxs&feature=related 

 

피나 바우슈 안무의 <봄의 제전>. 1979년과 2010년 한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봄을 부르는 젊은 몸짓이 처절하다. 생명을 싹틔우려는 몸부림과 이를 억압하려는 죽은 것들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일요일 팔순을 맞으신 ‘영원한 젊은이’ 백기완 선생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목숨 아닌 것과 싸워 얻어내는 목숨이 진짜 목숨이야.” (백기완, 한겨레신문 201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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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히만’들, 그리고 ‘발퀴레’

 

 

히틀러의 사람들

 

히틀러의 부역자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이념에 적극 동조하여 그의 수족이 되기를 자원했지만, 개인적인 출세욕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맡은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곤 했다. 히틀러의 침략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 몰랐다고 얘기하기 일쑤였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는데도 자기 눈앞의 일에 매몰되어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항변하곤 했다.

 

<의지의 승리>로 다큐 역사에 기록된 레니 리펜슈탈. 그녀는 히틀러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민족사회주의를 미화했지만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서는

억울하게 생각했다. 훗날 “히틀러와의 만남이 내 인생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말했다

 

레니 리펜슈탈. 그녀는 제6차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로 다큐멘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 작품은 새 영도자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를 미화한 게 분명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나치 부역’ 구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감동을 받은 그녀는, 권력을 잡은 히틀러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그의 측근이 됐다.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역작이었다. <의지의 승리>에서는 30대가 넘는 카메라를 동원했고 <올림피아>에서는 스포츠 녹화 사상 처음으로 수중촬영과 비행선 항공촬영을 선보였다. 소신 있고 고집 센 그녀는 다큐 제작 도중 나치 선전상 괴벨스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히틀러는 언제나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리펜슈탈 감독 <의지의 승리>
http://www.youtube.com/watch?v=GHs2coAzLJ8&feature=related

 

그녀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충동에 따라 일했을 뿐이고, 정치는 관심 밖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나치 당적을 갖지 않았고, 나치의 폴란드군 학살을 목격한 뒤에는 실제로 침략 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서기도 했다. 따라서 히틀러가 패망한 뒤 4년 동안 수감된 채 연합군에게 조사받고, 그 뒤 오랜 세월 혹독한 여론재판에 시달린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기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한계이자 비극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깊은 감명을 준 인물이 세 명 있었다. 한 명은 <올림피아> 1편 ‘민족들의 제전’의 마지막 10분을 장식한 손기정 선수, 또 한 명은 예술적 열정 때문에 자기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호, 그리고 또 한 명이 게르만주의의 영웅 히틀러였다. 그녀는 히틀러를 권력자나 야심가보다 진정성 있는 한 인간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101살까지 살았다. 나치와 함께 한 10여년의 행적만으로 그녀의 긴 예술 인생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훗날 “나치가 침략전쟁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며, “히틀러와의 만남이 내 인생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술회했다.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아돌프 아이히만. 재능있는 예술가 리펜슈탈에 비하면 아이히만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이런 인간이 즐비했고, 지금도 ‘작은 아이히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백만 유태인의 목숨을 앗아간 그는, 개인적으로는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남자였고 개인적으로 ‘반유태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며,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백만명의 유태인 학살을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자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 재판 과정을 지켜 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지극히 온순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데 놀랐다. “그는 사악하지도 않았고,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서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결론은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아이히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반성적 사유의 결여’ 때문에 ‘냉철한 톱니바퀴 기술자’가 되어 유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법정의 검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것이 아이히만의 죄”라며 사형을 구형했다. 

 

우리 주변의 아이히만들

 

비극을 돌이킬 수 없는데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아이히만을 굳이 사형에 처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일 뿐이다”라는 그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루살렘 법정은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면 안 된다”며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며칠 후 교수형이 집행됐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군인들이 모든 명령에 로봇처럼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도입했다. UN ‘집단살해에 관한 협약’은 집단살해를 명령한 상급자 뿐 아니라 이 명령에 의해 집단살해를 실행한 하급 군인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상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하급자의 범죄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며, 부당한 명령에 대해서는 개인이 도덕적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자기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려 하지 않고,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그저 충실히 따르고 실행하는 아이히만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악의 평범성’이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아이히만들이 있는 걸까? 

 

히틀러 암살을 꿈꾼 사람들

 

독일군 내에서 히틀러 축출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들도 있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Valkyrie, 2009)는 실패로 끝난 1944년의 히틀러 제거 작전을 그렸다.

http://www.youtube.com/watch?v=yzeOyvlY6d4&feature=fvwrel(링크 처음부터)

 

주인공 슈타우펜버그 대령의 집, 연합국의 폭격으로 건물이 진동할 때 LP에서 바그너의 <발퀴레> 3막의 주제가 흘러나온다.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장교들의 모임으로 장면이 바뀐다. 이들은 히틀러의 침략 전쟁으로 독일이 망가지고 유럽이 파괴되고 반인륜적 학살이 계속되는 현 상황을 끝내려면 히틀러 체제를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건 쿠데타 계획이다.

 

“‘발키리’가 뭐지?”
“작전명 ‘발키리’죠. 베를린에는 수천 명의 예비군이 있는데 히틀러 암살 같은 비상사태 때 동원되는 부대입니다. 히틀러 정부를 보호하는 게 유일한 임무죠.”
“그래서?”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하자는 겁니다. 친위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보이게 하자는 거죠. 히틀러가 유고 상태가 되고 총사령부가 계엄령을 내리면, 바로 그때 ‘발키리 작전’을 시작하는 겁니다. 예비군이 베를린을 신속히 장악하고 친위대의 쿠데타를 무력화시키는 거죠. 히틀러 정부를 위한 작전으로 위장하는 거죠. 그 사이 우리는 새 정부를 세우는 겁니다.”
“히틀러가 죽어야만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친위대의 쿠데타라고 믿게 할 수 있나?”
“히틀러를 죽여야죠.”

작전명 ‘발키리’

 

쿠데타의 성공을 위해서는 ‘발키리 작전’을 수정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히틀러의 서명이 필요하다. 슈타우펜버그 대령이 직접 히틀러의 서명을 받으러 간다. 튀니지 전선에서 큰 공을 세운 대령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은 두텁다. 히틀러는 ‘발키리 작전’ 수정안에 서명하며 대령에게 말을 건넨다.

http://www.youtube.com/watch?v=xoN-kIqXbx4&feature=related (링크 6분 30초부터)

 

히틀러, “바그너 음악을 잘 아나?”
슈타우펜버그, (고개를 끄덕이며) “…….”
히틀러, “신화 속 발퀴레는 신들을 섬기면서 인간의 생사를 결정했네. 용맹한 전사들을 고통스런 죽음에서 해방시켰지. 바그너 음악을 이해 못 하면 민족사회주의도 이해 못 해.”
슈타우펜버그, “…….”

 

2차 대전 중 15차례에 걸친 히틀러 암살 계획은 모두 실패했다. 영화에 묘사된 1944년 7월 20일의 거사는 그 마지막 시도였다. 슈타우펜버그는 히틀러의 벙커인 ‘늑대굴’에서 폭탄을 터뜨린다. 히틀러의 생사는 불투명하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 쿠데타 장교들은 계획대로 예비군을 동원하여 친위대를 무장해제하고 라디오 방송을 비롯한 베를린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살아 있음이 확인되고, 쿠데타 주모자들은 모두 체포된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슈타우펜버그 대령을 비롯한 쿠데타 주모자들은 죽음을 맞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작전명 발키리>, 1944년 히틀러 제거 계획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무척 재미있다.

독일 고대 신화의 여전사 ‘발퀴레’ / 영화 <지옥의 묵시록> 중 헬리콥터 장면.

 

 

“그대들은 자유, 정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저항했다. 그대들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다.”

 

쿠데타 기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에르빈 폰 비츠레벤 장군이 1944년 8월 4일 법정에서 남긴 말.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총살시키지만, 몇 달 뒤면 성난 국민들 손에 산 채로 독일 거리를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예비군 사령관으로 출세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프롬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지론은 다음 대사에 압축돼 있다. “나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 있었어. 총통이 살아있는 한 변함이 없어.” 그러나 프롬 또한 쿠데타 기도를 알면서도 침묵했다는 이유로 1945년 3월 12일 처형됐다.

 

독일의 명예를 위해, 유럽이 폐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성의 상실에 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장선 슈타우펜버그 대령은 총살 직전 외친다. “독일이여, 영원하라!”
http://www.youtube.com/watch?v=ZpHYTzw-6eQ&feature=related (링크 4분부터)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끝까지 전쟁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베를린이 연합군에게 포위됐다. 탈출구가 없음을 깨달은 히틀러는 신제국궁전의 벙커에서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베를린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대들은 자유, 정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저항했다. 그대들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발퀴레>

 

‘발퀴레’는 원래 북유럽 신화의 여신 ‘발키리아’로, 평상시에는 노래를 부르며 길쌈을 하는 여신이다. 베틀의 다리는 칼이나 방패고, 베틀의 추는 인간의 목이다. 그들은 전쟁이 나면 몸에 꼭 달라붙는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 출정한다. 한 손에 말고삐를, 또 한 손에 칼이  나 창을 들고 온몸에서 광채를 뿜으며 달린다. 그들은 전쟁터의 용사들 중에서 죽을 운명에 있는 자의 숨을 끊어 그 시체를 오딘이 살고 있는 '발홀' (Valhol, 바그너 오페라에서 '발할라' Walhalla)로 옮기는 일을 한다. 전사한 영웅들은 발홀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히틀러에게 발퀴레는 나치 독일을 위해 죽은 ‘영웅’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화 속의 상징이었다. ‘발할라’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미화하는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기능을 했다. 

 

오페라 <발퀴레>는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의 반지>(라인의 황금 - 발퀴레 - 지그프리트 - 신들의 황혼) 중 두 번째 작품이다. 3막 ‘발퀴레의 기행’ (騎行 / The Ride of Valkyries / Ritt der Walküren)에서는 격정적인 관현악에 이어 8명의 발퀴레가 노래한다. 지크문트를 죽게 하라는 아버지 보탄의 명령을 어기고 노여움을 산 브룬힐데가 지크린데를 데리고 도착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지크린데는 쌍동이 남매 지크문트와의 근친상간으로 아기를 가졌는데, 이 아기가 훗날 브룬힐데의 연인이 될 영웅 지그프리트…. 흠, 암만 봐도 독일 고대 신화가 재미있지 않네.

 

더 자세한 해설은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를 쓴 오페라 박사 이용숙씨의 글 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511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발퀴레의 기행’ 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에 삽입된 뒤 유명해졌다.
http://www.youtube.com/watch?v=Gz3Cc7wlfkI&feature=fvwrel

 

무대 공연은 다양한 연주와 연출이 있으나 영어 자막이 있는 걸로 골랐다. <발퀴레> 3막, 바렌보임 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공연. http://www.youtube.com/watch?v=uOk_lqPlX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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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사찰의 악몽, 그리고 ‘음악의 농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Eine kleine Nachtmusik / ‘작은 밤의 음악’)을 들어보자. 순수함, 즐거움, 생동감, 단순함, 합리성, 조형미, 균형미를 갖고 기품있게 잘도 흘러가는 음악이다. 

http://www.gosinga.net/koechel-player.php?IDkv=182

 

 

모차르트가 대작 <돈조반니>를 작곡하던 도중인 1787년 8월 잠시 짬을 내어 만든 현악 합주곡으로, 어떤 행사를 위해 작곡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는 생동감 넘치는 팡파레 음악이다. 한번 주욱 올라갔다가 이에 응답하듯 주욱 내려오는 첫 부분 팡파레의 4마디를 기억해 보자. 2악장 로만체는 다정하고 포근하다. 한때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주제가 실린 적이 있다. 3악장 메뉴엣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는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귀에 익은 분이 많을 것이다. 4악장 론도 알레그로(빠르게)는 가장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모두 합쳐 18분 정도, 그리 길지 않으니 각 악장을 모두 들어보자. 

 

 

                                                       미국의 현대 작곡가 피터 쉬컬리(1935~ )


아이네 클라이네 ‘니히트’무직(?)

 

모차르트의 이 곡을 갖고 장난을 친 기인이 있다. 미국의 현대 작곡가 피터 쉬컬리(1935~ )의 <아이네 클라이네 ‘니히트’무직>(Eine kleine Nichtmusik / ‘음악이 아닌’ 작은 곡). 모차르트 곡의 원제목 ‘Nachtmusik’(밤의 음악)에서 철자 하나를 바꿔 ‘Nichtmusik’ (음악 아닌 곡)을 만든 것. 모차르트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헨델, 베토벤, 브람스,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베르디, 라흐마니노프, 드보르작, 쇼스타코비치 등 엉뚱한 선율들이 끼어들어 익살스런 효과를 낸다. ‘금발의 제니’, ‘볼가강의 뱃노래’, ‘떴다떴다 비행기’, ‘오 수잔나’ 같은 친숙한 멜로디도 심심찮게 나오니 아는 곡 얼마나 나오는지 한번 들어보시길. 엉뚱한 선율마다 곡명이 자막으로 나온다. 맨 뒷부분이 제일 재미있으니 중간에 그만두기 없기. 

http://www.youtube.com/watch?v=SAMB01JK5pY&feature=related

모차르트 음악이 유려하게 흐르는 가운데 들으면 알 만한, 내로라하는 걸작들의 선율이 끼어든다. 모차르트의 리듬, 조성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대목도 있고, 엉뚱한 소리를 해서 웃기는 대목도 있다. 돌출하는 이 선율들은 우리 귀를 현란하게 사로잡아 원래 곡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포스터의 민요 등 너무나 익숙한 곡들이 섞여 들어와서 모차르트 음악의 흐름을 놓치게 한다. 그러나 결국 가장 큰 음악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모차르트다. 듣는 이는 어떠한 선율의 방해에도 물러서지 않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의 위대한 힘에 감탄하게 된다. 진실한 음악은 다른 어떠한 음악이 개입해도 결국 우뚝 서서 빛을 발한다는 역설적 결론에 도달한다. 

피터 쉬컬리는 현대음악가로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음악 패러디로 유명한데, 오케스트라, 실내악, 합창을 위한 풍자곡을 100곡 넘게 썼다. 그는 ‘P.D.Q 바흐’라는 장난스런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P.D.Q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자녀들 중 있지도 않은 21번째 자식이라는 것. 생년월일도 엉터리다. ‘1807년에 태어나 1742년에 사망’(?)한 음악가라는 것이다. 

피터 쉬컬리가 얼마나 웃기는 사람인지는 다음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이올린의 거장 이착 펄만과 함께 무대에 서서 우스꽝스럽게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다. 바이올린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기상천외한 연주가 펼쳐진다. 존 윌리엄스 지휘, 보스톤 팝스 오케스트라 협연이다.

곡목은 번역 불가! P.D.Q 바흐 작곡, ‘똥싸는 협주곡’(Konzertschitcke)이라고 할까? 단어 중간에 들어간 ‘shit’에 주목하실 것. ‘작은 협주곡’(Konzertstücke)을 살짝 바꾼 신조어다. 폭소 준비하시라. 

http://www.youtube.com/watch?v=ZMSEPUuNP8k&feature=relmfu

 

 

 

피터 쉬컬리의 앨범 ‘작은 악몽 음악’(A Little Nightmare Music)


 

<아이네 클라이네 ‘니히트’무직>, 이 곡은 ‘작은 악몽 음악’(A Little Nightmare Music)이란 앨범에 들어 있다. 악몽…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음악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사찰과 은폐공작의 악몽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 악몽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음악이 되어 흘러간다.

 

 

교향시 ‘악몽-사찰과 은폐’

1악장, 촛불에 대한 보복, 그리고 반대자 솎아내기  
     
집권 첫 해인 2008년, 촛불 시위에 간담이 서늘해진 VIP는 국민 앞에 두 번 사과했다. 언제나 그랬듯 진심은 아니었다. “선거 때 무슨 말은 못 해요?”라 하신 분 아닌가? 정권이 위기인데 무슨 제스처인들 못 하랴? VIP는 두 번 다시 촛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촛불이 잦아들 무렵인 2008년 7월, 총리실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들었다. 촛불집회에 공직자가 참여해? 집권 초기에 폐지했지만 이거, 꼭 필요한 거였군…. 흠, 촛불 근처에서 얼쩡거린 공무원들 감찰하는 김에 촛불 선동한 <PD수첩>, 촛불 배후 종북좌파 단체들, 촛불 앞장선 유모차들, 촛불도 모자라 경제정책 사사건건 딴지를 걸던 미네르바 등등 손봐줘야 할 놈들 모두 사찰해! 

2악장, 방송부터 장악하라

어차피 방송은 내 손에 쥐어야 한다고 일찌감치 생각해 왔는데, 잘 됐다. KBS 정연주부터 쫓아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나? 뭐, 먼지가 안 난다구? 그럼 먼지 나게 만들어! 국민들이 눈치채면 시끄러우니까 올림픽 개막식 때 전격적으로 해 치워. YTN 구본홍, 캠프 출신이라 한 자리 주니까 열심히 하는 척 하더니 역시 미지근하군. ‘충성심이 돋보이는’ 배석규 시켜봐. 사장직대 하는 거 보니 괜찮네? 정식 사장 시켜! 제일 골치 아픈 게 MBC인데, <PD수첩> 처리하는 거 보니 엄기영도 안 되겠군. ‘사과방송’ 한번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잔머리 굴리는데, 안 되겠다. 수족 다 잘라버려서 스스로 내려오게 만들고 말 잘 듣는 김재철 보내. 김연아 금메달 따는 날 해 치워. 신경민, 김제동, 김미화, 윤도현, 김어준…. ‘좌빨들’ 다 끌어내려. 하지만 “좌파 연예인 표적 사찰했다는 말 나오지 않게” 조심조심 처리해.

 

3악장, 권력기구 총동원, 전방위 사찰

나, VIP가 있는 청와대를 중심으로 왼쪽 ‘공직윤리지원관실’에는 검찰, 경찰에서 파견된 사람 있으니 공조 탄탄하고, 오른쪽엔 국정원, 기무사 있으니 이제 완벽하네. 정연주 쫓아낼 때 함께 손발 맞춘 경험 있지? 앞으로는 자동적으로 일할 것. 늘 보고하되, 굳이 VIP인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러가도록 할 것. ‘정치인·재벌총수·언론계·금융계 인사’ 가릴 것 없이 삐딱한 것들 동향, 모두 파악해…. 

뭐? ‘사찰’하는 거, 국민들이 알아챘다고? 또 <PD수첩>때문이라고? 젠장, <PD수첩> 유죄 판결만 나 봐라, PD들 다 잘라버리고 프로그램 없애버려. 헐, 무죄라고? 그래도 중징계해! 사찰 대상자는 옴짝달짝 못하게 드러난 김종익, 남경필 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해. 장진수 주무관더러 독박 쓰라고 해. 뒷감당은 다 해 줄께. 애들 교육시켜야 한다니 돈도 주고 일자리도 알아봐 줘서 입 틀어막어.  

4악장, 모두 VIP를 위하여

이 정도로 봉합하고 임기말 조용히 지내려 했는데, 이건 또 뭐야? 장진수 주무관이 입을 열기 시작했네? 청와대가 관련된 게 꼼짝없이 드러났으니 어쩌나? 이영호, “제가 몸통입니다. 어차피 각하와 저는 한 몸 아닙니까?” 깃털이 몸통을 자처하는, 유례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전파를 탄다. 검찰 입장에서 봐도 이건 웃긴다. 이영호가 기자회견만 안 했어도, 재수사에서 “이영호가 몸통”이라 하고 적당히 끝낼 수 있었는데, 이거 곤혹스럽다. ‘사즉생’의 각오로 이영호 윗선 하나쯤 넣어야 할텐데, 어쩔꼬? VIP께서는 권재진에게 변함없는 애정의 몸짓을 보내고 계시다. 권재진이 누구인가? 사찰이 한창일 때 민정수석을 하다가 지금 법무장관으로 검찰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2년 전 민정수석 시절 검찰수사를 방해했던 인물이 지금 검찰의 수장인 것. VIP가 봐도 거 이거 참, 모양새 고약하네. 

5악장, 피날레 : 언어의 혼란

곤경에 빠진 VIP에게 호재가 나타났다! KBS 노조 애들이 실수했네. 2,619개 문건 중 80%가 참여정부 때 만든 건데 전부 우리 거라고 발표했구나. 어리숙한 넘들, “참여정부가 훨씬 더 많이 사찰했다”고 발표하면 너희들은 끝장이야. 참여정부 때 총리실에 ‘조사심의관실’이 있었지? 그게 사찰기관이었다고 하면 되지. KBS, MBC, YTN, 연합뉴스 아직 다 내 수중에 있으니 그렇게 발표하면 국민들은 그렇게 알 거야. 

방송 기자 출신인 청와대 홍보수석이 기자회견을 연 뒤, 언어의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청와대 “우리가 사찰한 것 맞긴 한데, 참여정부 때 훨씬 많이 했다.” (?)
박근혜 “청와대와 참여정부는 똑같다, 나는 사찰 두 번 받은 피해자다.” (??)
야당 “사찰 당했다면서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나? 동조자다.” (???)
새누리당 “특검하자.” (????)
민주통합당 “시간 벌어서 위기 모면하려는 꼼수다, 청문회 약속해라.” (?????)
새누리당 “우리는 한나라당 아니다.” (??????)
민주통합당 “새누리당은 한나라당 맞다.” (???????)
새누리당 “특검 이외의 대안은 없다. 혹시 너희들이 켕겨서 그러는 거 아냐?” (????????)


뭐, 이런 종류의 얘기가 끝도 없이 펼쳐지자 유권자들은 “그 X이 그 X”이라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방송 장악의 효과가 십분 발휘된다. 청와대의 발표가 톱이고, 여야 정쟁 기사가 둘째다. 청와대가 물타고 방송사가 물탄다. 역시 방송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하신 VIP의 혜안이 빛을 발한다. 진실은 하나인데,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흘러만 간다. 

 

 

악몽을 묘사한 훌리오 데 디에고의 그림


음악의 농담

이윽고 악몽에서 깨어난다. 악몽 속 VIP의 ‘I’는 ‘Immoral’? ‘Intolerable’? ‘Inexplicable’? 나도 잘 모르겠다. 암튼 ‘Immortal’한 개념 실종, 그리고 뻔뻔함의 극치인 건 분명하다. <아이네 클라이네 ‘니히트’무직>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황당한 민간인 불법사찰과 은폐공작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음악이다. 이 음악이 웃기는 이유는 모차르트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엉뚱한 멜로디들이 매우 천연덕스럽게, 당당하게, 뻔뻔하게 튀어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모차르트 선율은 끊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하나뿐이다. 온갖 소음들이 난무해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은 밝혀질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를 작곡하던 그 해 <음악의 농담>이라는 희한한 곡을 썼다. 무능한 작곡가가 쓴 곡을 형편없는 시골 악사들이 연주하는 풍경이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곡인 줄도 모르고, 자기 연주가 형편없다는 것을 눈치도 못 채고 천연덕스럽게 연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음악은 구성부터 기형이다. 1악장이 짧고, 2악장 메뉴엣이 부자연스레 길다. 1악장은 잰체하는 ‘바보스런’ 모티브들이 삐걱거리며 진행한다. 메뉴엣 중간 부분에는 호른이 술 취한 듯 갈지자걸음을 한다. 느린 악장에서는 엉터리 음계가 나온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모든 현악이 낑낑대며 달려가고 호른이 허둥대며 따라간다. 결국 모두 쓰러져 엉망으로 끝난다. 4악장 프레스토(서두르듯, 매우 빠르게)만 감상해 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lLjRDlnbyOw&feature=related

 

 

모차르트가 지금 한국의 상황을 보았다면 어떤 곡을 썼을까. 비장한 음악을 썼을까, 아니면 거대한 ‘음악의 농담’을 썼을까. 천상의 모차르트 음악을 혼탁한 한국 현실과 연결 지은 것, 모차르트에게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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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펠리아’, 인형 하나 때문에 벌어진 소동

 

 

“생명의 본질은 사랑”, 피그말리온의 신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여성의 결점을 너무 많이 알게 되자 여성 혐오증에 빠져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한다. ‘지상의 헤파이스토스’라 불릴 정도로 조각 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아무 결점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하여 함께 지낸다. 그는 조각상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옷을 입히고 목걸이를 걸어주고 어루만지며 온갖 정성을 다해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고, 실제 인간이 그리웠다. 피그말리온은 신들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똑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여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그 대상에게 변화를 일으켜 그대로 실현되는 긍정적 효과를 말한다. 사랑과 진정성이 있을 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기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기가 만든 인형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언젠가 사람으로 살아나리라 믿었던 한 노인이 있었다. 레오 들리브가 작곡한 코믹 발레 <코펠리아> 이야기다.

 

 

 

 


발레 <코펠리아>의 줄거리

인형을 만드는 괴퍅한 노인 코펠리우스 박사. 그는 자기가 만든 밀랍인형 코펠리아가 언젠가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예쁜 인형 코펠리아는 언제나 발코니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이웃 처녀 스와닐다는 자기를 아는 체도 안 하고 책만 보는 코펠리아의 정체가 궁금하다. 어느날, 약혼자 프란츠가 코펠리아에게 구애하는 광경을 본 스와닐다는 마음이 상한다.  

코펠리우스 박사는 저녁마다 문을 잠그고 한잔 하러 나간다. 열쇠를 손에 넣은 스와닐다와 마을 처녀들은 코펠리아를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서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간다. 스와닐다는 코펠리아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한다. 그런데 어느새 코펠리우스 박사가 돌아왔다. 꼼짝없이 들키게 된 스와닐다는 코펠리아의 옷을 입고 자기가 인형인 척 한다. 린 벤자민이 스와닐다 역을 맡은 로열 발레 공연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sR7m9UT3u-8&feature=relmfu

 

사람이 인형 흉내를 낸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인형이 사람으로 변하는 줄 착각한다. 인형이 사람인지, 사람이 인형인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장면이 발레 <코펠리아>에서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다. 2막, 여주인공 스와닐다가 밀랍인형 코펠리아를 흉내내고, 코펠리우스 박사는 오래도록 기다렸던 ‘그 순간’이 드디어 왔다고 생각, 프란츠의 기(氣)를 열심히 ‘인형’에게 주입한다. 그 이후 줄거리는 생략. 물론 해피엔딩이다.

 

 

인형이 사람인지, 사람이 인형인지

호프만의 원작 단편소설 <모래인간>을 생 레옹이 안무하고 레옹 들리브가 작곡, 1870년 5월 25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이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에 탄생한 셈이다. 초연 직후 어려운 정치 · 경제 상황 때문에 성공이 어려울 걸로 예상됐으나, 결국 프랑스의 오페라 가르니에 무대에 가장 자주 오르는 작품이 되었다. 19세기 발레 중 헝가리 차르다슈, 폴란드 마주르카, 슬라브 주제, 중국 춤곡 등 여러 나라의 춤을 선보인 건 이 작품이 처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처럼 천진한 등장인물의 성격, 그리고 이를 잘 살려주는 레오 들리브(1836~1891)의 한없이 맑고 사랑스런 음악이다. 이 작품은 작곡자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서곡과 1막 도입 부분. 
http://www.youtube.com/watch?v=IIGrhRHVPDs&feature=related

 

맨 처음, 은은한 호른의 화음이 들려오고, 현악의 신비스런 멜로디가 이어진다. 이건 코펠리우스 박사가 인형 코펠리아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는) 대목의 모티브다. 자기가 만든 조각상에 사랑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피그말리온의 테마’라고 이름 붙일 만한 주제다. 앞의 링크에서 이미 들으신 바 있다. 이어지는 빠른 템포의 선율이 ‘마주르카’다. (링크 2분 30초) 발레 <코펠리아> 중 가장 유명한 선율이지 싶다. 막이 오른 뒤 5분 35초 지점, 스와닐다의 솔로가 펼쳐진다. 앞의 ‘마주르카’와 함께 이 발레에서 가장 친숙한 곡일 것이다. 꽤 오래 전, KBS 1FM의 시그널로 사용된 적이 있다. 맑디맑은 음색과 각 파트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시길….

긴 설명 없이 계속 발레를 편안히 감상하시면 될 듯. 아래 링크 3분 12초 지점에서 폴란드 민속음악 ‘마주르카’가 흥겹게 펼쳐진다. 마을 처녀 총각들의 군무다. 끝나는 지점의 팀파니 소리가 재미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K5VgnfdokOs 

 

젊은이들의 춤판이 이어진다. 아래 링크 48초부터는 스와닐다와 프란츠의 우아한 2인무다. 이어서 3분 지점부터 ‘슬라브 주제와 변주’다. 이 발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다. 특히 4분 30초, 첼로가 부드럽게 노래할 때 바이올린이 빠른 패시지를 연주하는 대목, 얼마나 아름다운가!

http://www.youtube.com/watch?v=PQw0SUvIcx0&feature=relmfu

 

 

가장 맑고 아름다운 대목, ‘슬라브 주제와 변주곡’

이 발레는 1985년 신입 PD 시절, <차인태의 출발 새아침>이란 프로그램에서 취재한 적이 있다. 갓 귀국한 문훈숙이 주연을 맡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이었다. 생전 처음 실제 무대에서 발레를 본 셈인데, 위 슬라브 주제가 홀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순간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당시 리포터였던 한정실 아나운서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정말 좋지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득한 옛날이구나…. 그 뒤 여러 발레를 알고 좋아하게 됐지만, 이 대목만큼 맑고 아름다운 음악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시 <코펠리아>로 돌아가자. 헝가리 농민들이 추수 축제 때 즐겨 춘다는 ‘차르다슈’.  
http://www.youtube.com/watch?v=CWMayOHsOOY

 

2막 첫 부분. 동네 처녀들이 코펠리우스 박사의 집에 들어가서 인형의 비밀을 발견하는 대목. 순진한 처녀들의 연기가 귀여워서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7분 17초부터 ‘중국 인형의 춤’과 ‘인형들의 군무’ 가 이어진다. 어린이들이 보면 제일 좋아할 대목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kIUJaoeE4GE&feature=relmfu

 

다음은 아주 최근인 2011년, 러시아 국립 볼쇼이 아카데미 공연. 무대가 아주 예쁘고 화질도 뛰어나다. 공연 현장 갔다고 치고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지 않을까? 
1막 http://www.youtube.com/watch?v=KmP7wcVAJsw&feature=related
2막 http://www.youtube.com/watch?v=eTgmywigsZc&feature=related
3막 http://www.youtube.com/watch?v=uCj9V8Sua2w&feature=related

 

 


‘아바타’여, 인간으로 돌아오라!


봄이 오긴 왔나보다. 뜻밖의 편지가 MBC 전 사원 앞으로 날아왔다. 편지를 기다려 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그의 ‘진의’와 ‘허심탄회한 소회’를 기대하며 편지를 읽는다. 늘 일방적 통고만 하던 이가 갑자기 보낸 다정한 편지. 

“공정방송 함께 하자. 제도가 있고 의지가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격적 경영을 위해 주말도 휴일도 없이 뛰다 보니 법인카드를 많이 쓰게 됐다. 노조가 이를 폭로한 것은 나의 도덕적 가치에 손상을 주려 한 행동이다. 할 일이 태산이고 선거방송이 코앞이다. 내부의 갈등을 풀어 소통과 대화합을 이루자….” 아무리 봐도 이 정도로 요약되는 내용, 도무지 ‘우리 모두의 봄’은 올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했던 새로운 소식, ‘역시나’ 없다. 자진 사퇴 얘기는 물론, 해고 · 가압류 철회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아내를 흠씬 두드려 패서 빈손으로 쫓아 낸 뒤 “사랑하니까 때렸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폭력 남편이 떠오른다. 상대방을 두 번 짓밟는 짓이다. 그러니 대다수 사원들이 냉소할 뿐이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니 역시 ‘아바타’가 맞는 것 같다. “정당한 절차로 임명된 내가 낙하산이고 정권의 나팔수라면 MBC의 역대 사장은 모두 정권의 나팔수였고 낙하산이었다”는 편지 구절, 일단 역대 사장에 대한 심각한 결례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이 말이 진심이라면 이 ‘아바타’의 두뇌 회로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원래 자신이 ‘아바타’였고, 이른바 ‘합법적 선임절차’는 이러한 실상을 은폐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점을 몰라서 하는 얘기인가. 

4월이지만 찬바람이 거세다. ‘아바타’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진정성이 없으니 ‘아바타’가 사람으로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타까움만 더해가는 나날이다. ‘아바타’는 스스로 물러날 때 비로소 인간으로 환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반짝이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신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는 편지 구절, MBC 곳곳에 반짝이는 아이디어. “OUT!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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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의 항쟁과 승리,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1. 마를레 오케스트라의 빛나는 단결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러시아 시골에 메아리치는 평화를 향한 기도, 침략에 고통받던 농민들이 반격을 위해 일어선다. 격렬한 전투 끝에 전쟁은 끝나고, 드디어 평온한 농촌 풍경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젠 행진곡이다.”

영화 <노다메 칸타빌레>,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설명하는 지휘자 치아키 신이치(타마키 히로시 분)의 대사다. 잘 아시다시피 젊은 피아니스트 노다 메구미를 비롯, 유럽에 유학 중인 젊은 음악가들의 사랑과 애환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원작 만화영화는 귀에 익은 음악을 잘 활용해서 선풍적인 클래식 붐을 일으켰고,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1812년 서곡>을 연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연주회장에 헐레벌떡 늦게 도착했지만 이윽고 음악에 몰입하는 노다 메구미(우에노 주리 분)도 보인다.

http://www.youtube.com/watch?v=-6KlaC_Aty8

 

영화에 나오는 마를레 오케스트라는 130년 전통을 지녔지만 오랜 운영난으로 바닥을 헤매다 급기야 해체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젊은 상임지휘자 치아키를 중심으로 모든 단원이 힘을 합쳐 일류 오케스트라로 우뚝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단원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딛고 음악으로 희망을 키워 나간다. 

오케스트라에서 제대로 보수가 나오지 않으니 단원들은 따로 직업을 가져야만 생계를 꾸릴 수 있다. 지휘자 치아키의 요구대로 리허설을 오래 하면 가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단원들은 어려움을 숨긴 채 연습에 몰두하고, 결국 한 마음으로 음악의 승리를 일궈낸다. 노다메와 치아키의 사랑 이야기도 풋풋하다. 그러나 평범한 음악가들이 젊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열정을 모아 완벽한 화음을 이뤄내는 과정, 그 자체가 진한 감동을 준다. 

#2. ‘시끄럽고 예술성 없는’ 작품 (?)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1882년, 모스크바 예술 산업 박람회의 개막 축전에서 연주할 음악을 의뢰받았고, 이에 응해서 두 주 만에 <1812년 서곡>(또는 <장엄서곡 1812년>)을 썼다. 

차이코프스키는 심각한 음악 뿐 아니라 대중적 음악도 얼마든지 작곡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조건이 괜찮다면’ 어떤 음악을 주문해도 다 써 줄 수 있는 ‘프로페셔널 작곡가’라고 스스로 자랑한 바 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이 작품을 창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경제관념이 희박해 빚을 지기 일쑤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곡을 쓰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는 자기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축제를 위해 작곡하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 곡은 별다른 열정과 사랑도 없이 쓴 곡이라 별 가치가 없습니다. 시끄럽고, 예술적 강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자기 작품을 다른 누구보다 더 혹독하게 평가한다는 말이 있다. 차이코프스키도 이러한 ‘솔직한 예술가’ 축에 드는 모양이다. 쑥스러운 나머지 자기 작품을 다소 과장되게 폄하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곡은 언제나 청중들을 사로잡는 인기 레퍼토리였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받으며 세계 곳곳에서 자주 연주된다. 아무리 각박하게 평가해도, 작곡가의 고백보다는 훨씬 뛰어난 작품임이 분명하다. 

<1812년 서곡>은 19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애국적 감정에 강하게 호소한 걸작이다. 현악기들이 숨죽인 채 연주하는 첫 대목은 제정 러시아의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선율이다. 전쟁의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가까이 다가오고, 마침내 전쟁이 펼쳐진다. 4개의 러시아 민요 선율은 러시아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격렬하게 여러 선율들이 얽히고, 어느덧 러시아 민요가 ‘라 마르세예즈’를 압도하며 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간다.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선율이 포르티시모로 울려 퍼지고, 찬란한 크레믈린의 종소리와 16발의 대포 소리가 힘을 더해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나폴레옹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탈환한 러시아 민중의 기쁨과 환호가 들리는 듯하다.  

#3. 1812년, 6개월의 항쟁과 승리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한 프랑스의 65만 대군을 물리친 일은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역사적 사건 중 하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관현악 작곡가의 뛰어난 기량을 모두 발휘, 이 저항과 승리의 과정을 그림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지금부터 꼭 200년 전, 1812년에 일어난 전쟁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http://www.youtube.com/watch?v=T7xrM6spwaQ

 

유럽 정벌의 야심에 사로잡힌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려고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러시아가 이 일방적인 요구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65만 대군을 동원, 러시아를 침략한다.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무장력이었다. 프랑스군은 보로디노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한다. 쿠투조프 장군은 러시아군 병력을 남쪽으로 후퇴시키며 모스크바를 파괴할 것을 명한다. 1812년 6월 24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프랑스군이 점령한 모스크바는 텅 빈 채 불타고 있는 폐허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로마저 차단됐다. 시간이 흐르며 지리한 교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왔다. 영하 40도의 혹한에 프랑스군의 대포는 모두 땅에 얼어붙었다. 나폴레옹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9일에 시작된 퇴각은 그 해 12월 14일까지 이어졌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지 꼭 6개월만이었다. 프랑스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져 갔고, 추격해 온 러시아군에게 도륙당했다. 50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의 젊은 목숨이 스러져 갔다. 나폴레옹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멜로디의 천재’로 불리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그는 <1812년 서곡>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 1812년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혹독한 러시아의 날씨 탓에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운 것은 러시아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쿠투조프 장군과 나폴레옹의 전략 싸움이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도 있다. 보급로를 소홀히 한 채 주력 부대를 모스크바에 진입시킨 나폴레옹의 전략은 실패였고. 나폴레옹을 모스크바로 유인한 뒤 식량과 탄환의 보급을 차단한 쿠투조프의 전략이 성공했다는 후세의 평가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 민중들이 강철같이 단결하여 러시아군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러시아 민중들의 간절한 기도와 실천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프랑스군이 장악한 모스크바는 한 개의 점에 불과했지만, 살아있는 러시아 민중은 모스크바를 둘러싼 바다와 같았다. 

6개월 동안 추위와 굶주림, 죽음같은 고통을 견딘 러시아 민중들, 그리고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음악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버리지 않은 결과 130년 전통의 오케스트라를 확고한 위치에 올린 마를레 오케스트라 단원들…. <1812년 서곡>은 그 고통 뒤에 찾아온 기쁨과 긍지, 그리고 평온을 맛보게 해준다. 그것이 어디 200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랴.  

이 곡은 당시 신축될 모스크바 중앙 대성당 앞 광장에서 초연할 계획이었다. 야외에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모스크바 시내 모든 성당의 종들을 울리고, 러시아 포병대의 대포를 쏘아서 장엄한 효과를 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초연은 기대만큼 거창하지 않았다. 그 해 3월,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었기 때문이었다. 1882년, 모스크바 예술 산업 박람회 개막 때 오케스트라만으로 실내에서 초연했다.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부분을 합창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W42NXCgNyMI    http://www.youtube.com/watch?v=IyGNF9jsR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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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신비, 모차르트의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양심이 실종된 이 시대, 산소 같은 음악


“MB는 ‘멘붕’의 약자(略字)야.” 선배의 우스개에 폭소를 터뜨린다. 가장 부패한 자가 대통령 될 때부터 우려했던 바, 그의 임기 말인 요즘 온 세상이 ‘멘붕’ (멘탈 붕괴 : 개념 실종, 자아 상실? 품위 없는 속어를 써서 죄송^^ 암튼 최근 국어사전에도 올랐다) 상태가 되고 말았다. 부패 천지인 세상에 대해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필시 가장 힘 있는 자가 부도덕해서 생겨난 지옥도(地獄圖)인데, 그들이 방송을 손아귀에 쥐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이상한 ‘유체이탈’ 현상이 여기저기 번지고 있다. X누리당은 자기들이 X나라당이 아니라고 한다. 통합진보당은 이게 진짜 현실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내홍을 겪고 있다. 한 개인이 ‘멘붕’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MBC 사장으로 알려진 분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혹시 OOO 사장님 아니세요?”라고 묻자 “OOO이 누구예요? 저 그 사람 모릅니다.” 했단다. 이런 현상을 자꾸 접하다 보니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립과 증오, 그리고 무력감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피로와 우울을 잔뜩 짊어진 채 정릉산방에 돌아오면 그래도 음악이 맞아주니 위안이 된다. 모차르트의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는 요즘 내가 가장 자주 듣는 곡 중 하나다. 특히 2악장 메뉴엣은 꿈처럼 평화로운 안식을 준다. 모차르트의 수많은 메뉴엣 중 가장 기품 있고 단정한 곡이다. 요즘 일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살벌해도 이 음악이 있으니 숨은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 듣고 나면 ‘멘붕’의 트라우마가 위안을 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음악을 들어보자.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K.19d, 2악장 메뉴엣.

http://youtu.be/i-asBLGm1OY (처음 ~ 4분 3초)

 

이 짧은 소나타는 이른바 ‘고전주의’ 소나타의 기본 형식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대다수 ‘고전주의’ 소나타가 그러하듯, 이 곡도 세 개의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1악장 알레그로. 단정한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전개부-재현부로 구성돼 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링크 2분 33초부터 펼쳐지는 전개부. 아득히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olTfOWarlpg

3악장 론도. 제1주제가 네 번 되풀이 등장하고, 그 사이사이에 제2주제와 제3주제가 삽입되는 형식이다. ‘론도’는 영어 ‘라운드’(round)와 어원이 같다. ‘돌고 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나오는 유명한 <그랑 파르티타> K.361의 피날레와 비슷한 제1주제가 펼쳐지고 사이사이에 재미있는 악절들이 생동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i-asBLGm1OY&feature=relmfu (링크 4분 5초부터)

 

두 명의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호흡을 맞추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네 손의 조화는 두 손보다 더 풍요롭고 섬세하다. 모차르트는 3악장의 한 대목에서 고음을 맡은 연주자의 왼손과 저음을 맡은 연주자의 오른손이 교차하도록 작곡했다. 연주하는 두 사람이 마음을 공유하는 이 대목은 듣는 이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도 준다. 악보를 보며 음악을 들어보자. 4손을 위한 곡 중 이렇게  손이 교차하는 대목이 나오는 건 이 곡 뿐이다. 누나 난네를과 볼프강이 함께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대목을 그린 회화가 있다. 작자 미상의 이 그림을 보며 음악을 한 번 더 들어보자. (위 링크 4분 25초-4분 32초) 

 

 

이 곡을 모차르트가 9살 때 작곡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이 정리한 쾨헬 목록에 따르면 이 곡은 모차르트가 런던에 머물 때 누나 난네를과 함께 연주하기 위해 1765년 7월 9일에 완성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꼬마 모차르트가 작곡한 이 음악이 50을 넘긴 내게 변함없이 감동을 준다는 점이다. 1악장 전개부의 애절한 갈망, 2악장 메뉴엣의 기품과 자신감은 어린이의 정서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1780~1781년 그려진 모차르트 가족 초상. 어머니는 파리 여행 중이던 1778년 사망했기 때문에 초상화만 걸려 있다.

볼프강의 오른손과 난네를의 왼손이 교차하고 있는 걸로 보아 이 소나타 K.19d의 3악장을 연주하는 포즈를 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7살 모차르트.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준 황실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어린 모차르트는 연주하기 전에 늘 “저를 사랑하세요?”라 묻곤 했다.

아버지 친구 샤흐트너가 장난으로 “아니”라고 하자 어린 모차르트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9살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셰익스피어와 대등하다”

 

영국의 왕립 학술원에는 어린 모차르트를 관찰한 유일한 ‘객관적’ 보고서가 남아 있다. 실증적인 영국인들은 당시 런던에 머물던 9살 모차르트의 재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자 했다. 처음 보는 악보를 주고 모차르트가 연주할 수 있는지 보았다. 주제를 주고 변주곡을 즉석에서 연주할 수 있는지 보았다. 당시 모차르트를 관찰하고 기록한 판사 바링턴의 보고서.

 

“이 어린이는 낯선 신포니아를 아주 능숙하게 연주했다. 노래 솜씨도 놀라웠다. 어린 아이의 앳된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가 노래하는 스타일만큼은 거장다웠다. 즉흥 연주 솜씨도 신기에 가까웠다. 폭발할 듯 건반을 두드리는가 하면, ‘분노’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미친 듯이 격렬하게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믿을 수 없어서 혹시 나이를 속인 게 아닌가 자기 눈을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분명했다. 다시 보고서의 내용.

 

“모차르트는 자기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방에 들어오자 연주를 멈추고 쫓아가서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를 다시 피아노 앞에 끌어다 앉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낀 채 마녀 놀이를 하며 방안을 콩콩거리고 뛰어다녔다. 철부지 어린이가 분명했다.”  

 

 

판사 바링턴은 영국인 특유의 신중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몇 차례의 테스트를 했는데도 마지막 결론을 유보했다. 왕립 학술원의 조사단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까지 찾아가 나이를 직접 확인하고 5년 뒤에야 보고서를 출간했다. 바링턴은 결국 모차르트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시험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셰익스피어와 대등하다고 결론지었다.” 영국인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9살 모차르트를 나란히 놓은 것이다. (참고 : ‘바링턴 보고서’ 관련 부분은 <MBC스페셜 - 모차르트> 방송 내용을 요약했다) 

 

 

괴테가 본 어린 모차르트

 

“음악의 재능은 아마 가장 빨리 나타나는 재능일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전적으로 타고나는 것, 본래적인 것이어서 밖에서 주어지는 양분도, 인생의 경험도 별로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의 출현은 언제까지나 풀 수 없는 기적이다. 만약 이렇게 불가사의한, 위대한 인물이 가끔 출현하지 않는다면, 신이 도처에서 기적을 행한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괴테(1749~1832)가 어린 모차르트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음악을 문학, 미술 등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해 보면 이 말은 100% 지당하다. 인생 경험과 후천적 공부 없이 훌륭한 소설이나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모차르트는 5살 때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했고, 배우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척척 연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불가사의한 기적이 일어나는 예술 장르는 음악뿐인 것 같다.

 

 

천재는 끝없이 배우는 능력?

 

그러나 모차르트(1756~1791) 또한 사람인지라 나이가 들수록 음악이 성숙해갔다. 그의 어릴 적 소품들을 만년의 오페라, 교향곡에 견줄 수 있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35년의 짧은 인생 마지막까지 그의 음악이 끊임없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등 당대의 모든 음악 사조를 흡수해서 더욱 깊이 있고 풍요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이렇게 보면 천재란 ‘저절로 피어나는 능력’이 아니라 ‘무한히 배우는 능력’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보듯, 재능 있는 음악가들은 ‘아무리 연습해도 싫증내지 않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모차르트도 피아노를 엄청나게 열심히 연습한 것 같다. 빈에서 자유 음악가로 활약하던 1784년 4월 28일 아버지에게 쓴 편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리히터 앞에서 연주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제 손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더군요.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연습하고 땀 흘려도 도저히 박수 받기는 글렀다는 생각만 드는데, 자네는 어떻게 애들 곡 치듯 그렇게 쉽게 칠 수 있나?”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그래, 나도 열심히 연습해야 했어. 더 이상 연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야.”    
                            
괴테는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작곡할 수 있는 적임자는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차르트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을 애석해 했다. 다시 괴테의 말. 

“충격, 거부감, 두려움, 이런 것들을 음악으로 여기저기 표현해야 할 텐데, 이런 것들은 시류에 반하거든. 음악은 성격상 <돈 조반니>가 되어야지. 모차르트가 <파우스트>를 작곡했어야 했는데….”   (출처 http://www.gosinga.net/archives/1001)

 

그의 때이른 죽음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지 미욱한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이기적인 집착일 뿐이다. 모차르트는 모든 음악을 아낌없이 주고 갔다. 우리는 거저 주어진 이 선물을 충분히 즐길 줄도 모르면서 그가 너무 일찍 죽었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

 

이 곡은 ‘네 손을 위한 소나타’로는 음악사 최초의 곡이다. 꼬마 모차르트는 런던에 머물 때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막내 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1782)와 음악을 나누었다. 9살 모차르트는 30살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무릎 사이에 앉아서 연주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꼬마 모차르트는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네 손을 위한 소나타’를 먼저 작곡한 사람은 꼬마 모차르트였다.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같은 장르의 곡을 쓴 건 10년 뒤인 1775년이었다. 

 

 

1991년,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을 기념해 발매된 전집. 2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과 네손을 위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파울바두라 스코다와 외르크 데무스의 연주가 쏙 맘에 든다.

 

 

9살 꼬마가 만든 음악이 50살 넘긴 내게 변함없이 감동을 주고 있다는 이 기적을 나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 천재도 사람인지라 늘 성장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그의 아이덴티티는 나이와 상관없이 살아서 빛나는 게 아닌가 싶다. 숨죽인 겨울 내내 언제 필까 기다렸던 꽃들은 올해도 변함없이 앞 다퉈 피어났다. 모차르트가 9살에 작곡한 이 작은 음악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당당하게 피어있는 봄꽃과 같다. 인간 사회는 날이 갈수록 탐욕과 거짓과 불평과 분노로 혼탁해질 뿐이다. 아무 불평도 원망도 없이 조용히 피었다 지는 꽃들, 그리고 9살 천진한 모차르트가 선물해 준 이 예쁜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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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옥쇄파업 3년, 살아남은 모두에게 바치는 이 음악

“함께 삽시다! 인간의 세상을 만듭시다!”

 

 

“미안합니다”

차마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는 이 말을 이제야 가까스로 내뱉습니다. 꼭 3년 전인 2009년 5월 22일, 여러분의 옥쇄파업이 시작됐습니다. 77일간의 항쟁, 잔인한 진압,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져 온 죽음의 행렬…. 3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쌍용자동차의 투쟁을 ‘남의 일’로 여겨왔음을 고백합니다. 22명의 죽음에 나의 무관심이 일조했다는 뒤늦은 자각,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이 타락하고 부패한 맘몬의 시대, 그 한복판에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 피 흘리며 걸어 온 게 바로 여러분임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MBC 파업이 100일을 넘길 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청자들은 왜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걸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힘을 모아 파업에 집중하면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왜 이리 어려운 걸까? 파업에 힘을 보태주지 않는 무심한 시민들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편협한 생각에 불과했음을 곧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쌍용자동차 여러분에게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저 또한 무심한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방송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절박한 생존 투쟁을 벌였습니다. 파업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초, 갈등, 번민을 끌어안은 채 여기까지 걸어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투쟁의 깊은 상처가 독이 되어 꽃다운 목숨들을 앗아갔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여러분의 적(敵)은 저희 방송 노동자들의 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헐값에 쌍용차를 인수해 신기술만 뽑아먹고 도망간 ‘먹튀자본’ 상하이차(車), 돈이 된다면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안 쓰는 채권단, ‘무급휴직자 복직’ 등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미안하다 말도 없는 이유일 등 경영진, 관리감독 책임을 방기한 채 나 몰라라 하는 금융당국, 쌍용차 정리해고는 자기와 무관하다며 외면하는 현 소유주 마힌드라, 모두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 시대 돈벌레 군상입니다. ‘노동 유연성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며 정리해고를 부추기고 폭력 진압을 지시한 ‘돈벌레 우두머리’, 청와대의 아무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인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들은 노동자를 인간으로 여기는 언행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후배가 만든 <MBC스페셜 - 타인의 정리해고>(2009. 6. 19 방송 / 김종우 연출), <PD수첩 - 우리는 살고 싶다>(2011. 4. 19 방송 / 이우환 · 김동희 연출)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들은 한솥밥을 먹던 노동자들 중 절반을 딱 잘라냈습니다. 그 기준이 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제가 명단에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모두 똑같이 일했으니까요” “빗자루에 쓸리듯 쓸려나갑니다. 잔업 하라면 하고, 특근 하라면 하고, 쉬라니까 쉬고, 그러더니 그만 둬라, 노동자는 쓰레기입니까?” 인간 취급을 못 받는 것은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상처를 입었습니다. “누가 나를 잘랐을까?” 아무리 자문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형, 동생’ 하며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을 딱 갈라서게 하고, 등에 비수를 꽂게 한 반인륜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요. “더 이상 노동자를 편가르지 말라”는 호소는 마이동풍이었습니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였는데, 나중에 어떻게 보려고 그러세요? 당신들도 언제 정리해고 될지 모릅니다.” 어제의 동료들에게 하소연해 보지만, 이 또한 내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분들도 똑같이 피 흘리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돌아가신 분들 중엔 정리해고 명단에 안 들었던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사측은 손해배상 소송에 가압류까지,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몰았습니다. 여러분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용직,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역 기업들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재취업 길을 막고, 수원지검은 ‘유전자 검사’를 합네 하며 범죄자 취급을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PTSD, 우울증, 기억장애 등 정신적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정혜신 박사는 여러분의 상태가 “정신적으로 방사능 피폭상태와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없습니다. ‘죽을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열 받아서 죽어라, 죽어라 하는 세상,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무력감…. “쌍용자동차 노동자 중 자살 시도 한번 안 해본 사람 없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나왔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 목도하는 그대로입니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인간을 소모품 취급하고, 실제 죽음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비정한 자본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해맑은 아이들의 상처, 죄없는 아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질 건가요? 최소한의 인간성이 살아 있다면 어찌 이렇게 냉혹할 수 있을까요?

<KBS스페셜 - 심리치유 8주간의 기록>을 보니 스웨덴의 경우 부득이 정리해고를 할 경우 6개월 전에 통보하고 재취업을 알선하고 직업 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한국의 돈벌레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척박한 한국사회의 풍토가 돈벌레들이 활개 치기 좋은 조건이 됐고, 결국 죄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통탄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보던 중, 아내들의 눈물에 저도 덩달아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퇴근해서 보면 작업복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렇게 일한 사람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굴뚝과 지상을 연결하는 줄을 끊었어요. 물과 식량을 전해 줘야 하는데…. 70미터 굴뚝 위에 바람이 불면 굴뚝이 흔들려서 어지럽대요. 그런데 단식까지 한다니….” 아내들은 한결같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더군요.

노사정위원회를 주선한 평택시장에게도 아내들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정리해고 막아 주십시오, 공권력 투입 막아주십시오, 책임지고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더 잘 살 수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어느 부인의 눈물은 단순히 쌍용자동차 가족들의 눈물만이 아니었습니다. 돈벌레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한국의 모든 가족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절절한 증거였습니다.   

더 이상 지난 일을 되짚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고, 해묵은 상처를 건드리는 바보짓이겠지요. 여러분은 “함께 살자”라는 간명한 구호를 내걸었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삭감이란 훌륭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여기에 귀 기울이며 조금이라도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로 임했다면 이 모든 아픔은 없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지금도 해법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무수히 많은 피해자가 있지만 가해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가 공지영씨는 “쌍용자동차 투쟁은 유령과의 싸움”이라고 했나 봅니다. 우리들의 무관심이 사태를 악화시켰으므로 ‘사회적 살인’이란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가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사회적 책임’이란 애매한 말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는 이선옥씨의 지적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함께 살자”란 여러분의 첫 구호가 여전히 유효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첫 구호를 이번엔 제가 목청껏 외치고 싶군요.

“함께 삽시다! 더 이상 죽지 말고, 힘을 모아 인간의 세상을 만듭시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여러분과 아픔을 함께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쌍용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해 심리치유 프로젝트 ‘와락’을 만든 분들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고 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유명인 100여명이 여러분과 함께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두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게 단순히 100여명 뿐이겠습니까. 부도덕한 자본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서, 평범한 인간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작은 힘을 보태려는 사람들이 무수히 살아 있습니다.

방송 파업도 녹록치는 않습니다. MBC 김재철 측은 파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용(試用) 기자’를 뽑는다는군요. 1년 계약 이후 괜찮으면 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시험 삼아 한번 써 본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그들은 추악한 비리가 드러나서 궁지에 몰리자 노조 집행부를 구속하는 등 마지막 폭압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파업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낙하산은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하산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겠지요. 부패한 우리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피 흘리며 걸어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여러분을 기억하며, 이 땅의 고통 받는 분들 편에 서서 훨씬 더 치열하게 방송해야 할 것입니다.   

자본의 분할 지배가 아직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가 따로따로 어두운 칸막이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 아침이 밝아옵니다. 저의 ‘깜냥’은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게 ‘음악편지’를 보내는 것뿐입니다. 옥쇄파업 3년을 뒤로 하고 여전히 살아 계신 여러분에게 제 마음을 담아 음악 한 곡 보내드립니다.  

2012. 5. 22
MBC 이채훈 올림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2막, ‘곧 아침이 밝아 오리라’

http://www.youtube.com/watch?v=g1km_1_SDVU&feature=related

(세 소년) 곧 아침이 밝아 오리라 / 태양이 떠올라 황금빛 길을 비추면 / 미신은 곧 사라지고 지혜로운 자가 승리하리라 / 달콤한 평화여, 우리에게 내려와 / 사람들의 가슴 속에 돌아와 다오 / 천상의 왕국이 지상에서 이뤄지고 / 유한한 우리들은 신처럼 되리. 

(세 소년, 파미나를 발견하고) 하지만 저기 봐, 파미나가 절망으로 고통 받고 있네 / 그녀가 어디 있지? 넋이 나가 있네 / 무시당한 사랑의 아픔이 그녀를 찌르고 있네 / 불쌍한 소녀를 위로해 주자 / 그래, 그녀의 운명을 외면할 수는 없어 / 그녀의 왕자님이 여기 있기만 하다면! 그녀가 오네 / 옆에 비켜서서 그녀가 뭘 하는지 지켜보자.  

(파미나, 칼을 들고) 그대가 나의 신랑이 되겠군요 / 그대의 도움으로 내 비탄을 끝내리라. 
(세 소년) 이 무슨 끔찍한 말인가! 이 불쌍한 소녀는 거의 미쳤구나. 

(파미나) 소중한 그대, 잠깐만 계셔요 / 저는 그대 것입니다 / 우리는 곧 다시 합칠 거에요
(세 소년) 광기가 그녀 마음을 뒤덮고 있네 / 자살하겠다고 얼굴에 쓰여 있잖아 

(세 소년, 파미나에게 다가서며) 어여쁜 소녀여, 우리를 봐요.
(파미나) 저는 죽을 거에요 / 제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 분이 진정한 사랑을 이렇게 저버리다니! 어머니가 주신 칼이에요.

(세 소년) 자살을 하면 하느님이 벌하실 거에요.
(파미나) 사랑의 고통으로 시들어 가느니 / 이 날카로운 칼로 죽는 게 낫지 / 어머니, 저는 당신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 당신의 저주가 저를 따라다녀요.

(세 소년) 소녀여,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파미나) 아, 내 슬픔의 잔은 가득 찼네 / 무심한 왕자님, 안녕! 파미나는 당신 때문에 죽습니다! 이 칼날이 저를 죽일 거에요.

(세 소년) 멈춰요, 불행한 소녀여 / 당신의 왕자님이 이 모습을 보시면 마음이 아파 죽을 거에요 / 그는 당신만을 사랑하니까요. (파미나) 뭐라고? 그 분이 나만을 사랑한다고? 그러면서 감정을 숨기고 나를 외면하신 거라고? 그 분은 왜 내게 아무 얘기도 안 하신거지?

(세 소년) 그건 밝힐 수 없어요 / 하지만 그 분을 보여드릴 수는 있어요 / 그가 온 마음을 당신께 바치고 있다는 걸 알면 놀라실 거에요 /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과 직면하고 계시죠 / 자, 우리와 함께 갑시다! (파미나) 그 분께 데려다 줘 / 보아야겠어.

(파미나와 세 소년) 사랑으로 불타는 두 가슴은 /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뗄 수 없는 것 / 적대적인 음모는 결코 성공할 수 없어 / 신들이 지켜주시니까.   

위 링크는 음악과 영상이 가장 좋지만 자막이 없어서 다른 비디오를 참고해서 제가 가사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파미나 공주가 자살하려고 하자 세 소년이 그녀를 위로하며 쓰다듬어 줍니다. 주인공 파미나 공주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타미노 왕자가 자기를 외면하고 아무 대꾸도 않자 절망에 빠집니다. 파미나 공주는 10대 소녀입니다. 비록 극중 인물이지만 딸 아이 또래인 파미나가 절망할 때 한없이 가여워서 눈물이 납니다. 그녀가 다시 희망을 찾고 사랑을 찾아 나설 때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위 링크 3분 34초에서 4분 32초 사이, ‘파-미-레-도-시--’ 이렇게 하강하는 다섯 개의 음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세어보니 6번 나오네요. 파미나의 아픈 가슴을 세 소년이 쓰다듬어 줍니다.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손동작과 음악의 진행이 일치합니다. 이 대목을 듣노라면 우리 마음의 상처도 어느 새 아물어 가는 듯 합니다. 공감과 대화, 그리고 치유…. 신비롭지 않습니까?  

 

 

 그녀가 절망에 빠지는 이유와 과정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페라 <마술피리> 전체에 대해 얘기하는 건 너무 거창한 일입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오면 함께 얘기할 수 있기 바랄 뿐입니다. 파미나 공주가 절망에 빠졌다가 이를 이겨내는 과정은 <마술피리> 2막을 차분히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도 훌륭한 연주입니다. 
 
   

간략히 주석을 붙이면, 위 링크에서

* 21분 9초 ~ 밤의 여왕의 아리아 ‘지옥의 복수는 내 가슴에서 끓어오르고’ 
<마술피리>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파미나의 어머니 밤의 여왕이 파미나에게 칼을 주며, “이 칼로 원수 자라스트로를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내 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어머니의 명령을 이행할 수 없는 파미나는 절망에 빠진다. 
 
* 27분 53초 ~ 모노스타토스와 파미나의 레시타티보
무어인 모노스타토스는 자라스트로의 부하인데 피부가 검다고 파미나를 사랑할 권리가 없음을 한탄하다가 강제 추행을 시도한다. 이런 끔찍한 체험도 파미나에게 상처가 됐을 것이다. 

* 39분 37초 ~ 파미나의 아리아 ‘아, 나는 느끼겠네’
타미노의 피리소리를 듣고 파미나 등장한다. 그러나 타미노는 ‘침묵의 시련’ 중이라 말을 할 수 없다. 파미나는 타미노가 변심했다고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노래한다.

* 51분 38초 ~ 타미노, 파미나, 자라스트로의 ‘이별의 3중창’ 
타미노와 파미나가 실제로 헤어지는 시련을 겪는다. 시련을 딛고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니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파미나와 타미노는 작별인사를 나눈다.  

* 1시간 19초 ~ 파미나와 세 소년, ‘곧 아침이 밝아오리라’ 

* 1시간 11분 32초 ~ 타미노와 파미나의 행진곡. 불과 물의 시련
“음악의 힘으로 우리는 죽음의 어둠을 기꺼이 헤쳐 나가리.” 타미노와 파미나는 마술피리의 힘에 기대어 불과 물의 시련을 이겨낸다. 음악에 대한 모차르트의 신념이 전면에 드러난 유일한 대목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적 유언’이라 할 수 있다.

 

 

 

 

‘멘붕’의 벽을 쳐부수고 희망의 문을 엽시다

 

야만의 시대, 김중배 선생님께 올리는 음악 한잔

 

 

김중배 선생님!

선생님께 음악 한잔 올리려니 서투른 글 꺼내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22일, 파업 중인 KBS, MBC, YTN, 연합뉴스 노동자들이 함께 농성하고 있는 여의도 희망텐트를 찾아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이런 시절을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오히려 사과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만들기 위한 이 투쟁, 맨 뒤에서 따라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집회장을 나와서는 ‘월급 못 받는 후배들’에게 밥을 사 주셨습니다. 

선생님을 뵙는 순간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못 뵈온 아버지의 품…. 기쁨과 통탄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셔서 다시 뵐 수 있게 되니 기뻤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언론계의 참혹한 현실, 팔순을 코앞에 둔 선생님께서 차마 그냥 보고 계실 수 없어서 일어나게 만든 것,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김중배 언론광장 공동대표

 

 

선생님을 감히 ‘선배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길을 잇는 ‘후배’를 자칭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낱 직함에 불과한 ‘사장’으로 제한하는 것은 선생님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제가 아는 유일한 존칭 ‘선생님’으로 부르렵니다. 
  
선생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인 57년에 기자가 되셔서 지금까지 한국 언론의 굴곡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4 · 19 혁명과 5 · 16 쿠데타, 유신의 동아 · 조선 탄압, 전두환 정권의 ‘당근과 채찍’을 모두 겪으시며 한 번도 직필을 꺾으신 적이 없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인 1991년, “이제 자본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하며 사표를 던지셨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누구도 예측 못한 패악질이 언론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낙하산이 여기저기 떨어지더니 언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공영방송은 자본 권력의 앵무새가 됐고, 이에 저항하는 후배들의 몸부림이 다섯 달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선생님의 언론 인생에서 어느 한 순간인들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황당하고 힘겨운 시절은 없으셨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자본과의 투쟁’을 선언하신 선생님의 통찰을 후배들이 치열하게 실천하지 못한 결과,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언론계에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이 자본에 질식되어 빈사상태가 됐습니다. 가혹하고 비정한 생존경쟁의 논리가 언론의 넋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MBC 사장으로 계실 때 가까운 곳에서 선생님을 모셨던 분이 MBC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 선생님은 말을 아끼셨습니다. 대신, 요즘 유행어 ‘멘붕’ 얘기를 하셨습니다. 현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회사 내부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청와대의 아무개, 그 극단적인 뻔뻔함이 ‘멘붕’의 근원일 것입니다. 낙하산 투하를 직접 지휘한 방통위의 최아무개, 청와대와 입을 맞춘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정치권의 박아무개는 ‘멘붕’의 주범입니다. 사태 해결의 법적 권한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권의 눈치만 보는 아바타들, 도둑은 안 잡아가고 신고한 사람들만 구속하려 드는 검찰과 경찰, 모두 ‘멘붕’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언론계뿐이 아닙니다. 경쟁의 수레바퀴에 깔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살자”라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절규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미 22명이 실제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에 돌아온 대답은 농성 텐트 철거였습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세상입니다. 용산참사 현장, 삼성반도체와 한국타이어 사업장에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도 돈벌레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가장 부패한 자가 최고 권력을 잡을 때 이미 우려했던 바, 그의 집권 마지막 해인 요즘, 사회가 통째로 썩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흉악한 폭력과 신종 사기가 뉴스에 넘쳐납니다. 범죄 당사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이런 사태에 책임 의식을 갖고 나서는 사람은 점점 찾아보기 힘듭니다.  

선생님은 “지금 우리는 모두 칸막이 속에 갇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경쟁에 내몰리다 보니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공통의 적이 누구인지 헷갈려 하는 분도 많습니다. 자본이 우리를 칸막이 속에 가둬 놓고, 그럼으로써 자본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정신적 패닉 상태를 조장했다고 할까요? 

선생님은 단호하게 덧붙이셨습니다. “멘붕 시대지만, 그래도 인간을 살려야 한다.” 어이없는 일이 반복되면서 상식이 붕괴되고, 옳고 그름의 단순한 판단 기준이 사라지고, 최소한의 사회 정의(正義)가 무너지고, 그리하여 인간이 숨 쉬며 살 수 있는 산소가 희박해져 버린 것, 이게 ‘멘붕’이라면 해답은 하나일 것입니다. ‘멘붕’을 해소하려면 ‘멘붕’의 근원을 도려내야 합니다. 그 방법도 하나, ‘인간과 인간의 연대’ 뿐일 것입니다. 

‘멘붕’은 노동자의 연대를 교란하는 자본의 간악한 ‘요술’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는데서 비로소 연대는 시작될 것입니다. 

돈벌레가 보낸 낙하산이 KBS, MBC, YTN, 연합뉴스를 장악하고 있지만 각사의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하고 있는 것은 소중한 ‘연대’의 발견입니다. 선생님께서 격려해 주신 대로 “사회 곳곳을 ‘멘붕’ 상태로 만드는 권력과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게 바로 파업하는 언론 노동자들”입니다. 새로운 연대를 건설하는데 우리 언론인들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파업을 마무리하고 올라간 뒤 치열한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언론자유를 요구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살리려면 지금 이 ‘멘붕’의 벽을 쳐부숴서 열어야 한다.” 선생님의 기개를 좀 더 많은 후배들이 공유할 때, 인간과 희망을 살리는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쳐부숴서 열어제끼는” 음악 한 곡을 올립니다. 말러 교향곡 5번 C#단조, 2악장 ‘폭풍처럼 움직여서’(Stürmisch Bewegt). 아래 링크 23분 37초 지점부터 펼쳐지는 관악기와 팀파니, 심벌즈의 코랄을 들어 보십시오.  

http://www.youtube.com/watch?v=h4hk1jUMzAQ&feature=fvwrel



비통하게 흐르던 음악이 벽에 부딪치자 갑자기 먹구름 사이를 뚫고 찬란한 햇살이 쏟아집니다. 음악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적 갈등이 심화되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순간 극적인 반전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지평이 열리곤 하는데, 이 기법을 ‘개파’(Durchbruchsform)라고 합니다. “쳐부숴서 열어제낀다”는 뜻이지요. 

위 링크 13분 5초 지점부터 2악장이 시작합니다. 격렬하게 흘러가던 음악은 막다른 벽에 부딪치면 꼬리를 내리며 추락을 거듭합니다. (14분 15초, 16분 17초, 16분 50초). 특히 20분 40초 지점에서는 클라이맥스로 이어질 듯 하더니 다시 추락하고 맙니다. 고통스레 몸부림치던 음악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통곡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23분 40초, 예상치 못한 거대한 팡파레로 폭발합니다. 어둠을 한 순간에 몰아내고 찬란한 빛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과 희망을 되살리려는 우리의 고통스런 몸짓, 그리고 마침내 이뤄질 우리들의 꿈과 기막히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낙관하며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군요.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처럼 건강히, 오래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다음 뵈올 때는 “소주가 미디어”인지, “술이 미디어”인지 헷갈리지 않게 한 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씀 인용한 것, 무례하지 않았는지요? 좀 더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생각을 따르고 실천해야 이 시대에 인간과 희망을 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못 한 채 이것저것 자꾸 달라고만 하는 못난 후배를 용서하십시오. 

선생님, 곧 다시 뵙고 싶습니다. 다음엔 평화롭고 즐거운 음악 한잔 올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셔요.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5번 C#단조'는 초겨울의 얼어붙은 햇살이고, 성숙한 인간이 느끼는 우수다. 하지만 그 싸늘한 오후의 햇살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고통스런 몸부림 끝에 솟구쳐 올라 삶을 긍정하는 금관의 포효는 얼마나 씩씩하고 찬란한가! 

“나의 교향곡은 내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나의 교향곡에는 나의 경험, 나의 고통, 나의 존재, 나의 모든 인생관이 들어있다. 나의 불안, 나의 공포….” 

웅대한 자연시에서 질풍노도의 피날레로 이어지는 1번, 죽음과 부활의 고통스런 변증법인 2번,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주는 공포에서 시작해 자연과 인간과 절대자의 교감을 발견하는 3번, 어린이가 보는 천국의 행복을 노래한 4번. 앞의 네 곡은 분명 젊은 사람의 음악이다. 극단적인 고뇌와 환희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캐묻는 모습은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하지만 5번에서 말러는 더 이상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고뇌는 이미 확인된 고뇌이고, 환희 또한 이미 확인된 환희이다. 이것은 성숙한 인간의 음악이다. 모든 정서는 더욱 탄탄히 압축된, 정제된 형태로 표현된다. 앞의 작품들에서는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성악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5번은 순수한 기악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말러가 이 곡을 작곡한 1901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빈국립가극장의 감독으로 4년째 일하며 지휘자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고, ‘괴짜’, ‘이방인’이라는 편견을 벗고 작곡가로서도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스무 살의 아름답고 총명한 알마 신틀러를 만나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그 해 여름에 작곡하기 시작한 이 곡은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 비록 쓰디쓴 맛일지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적나라한 얼굴을 그리고 있다. 알마와 함께 행복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홀로 짊어지고 가야했던 고독한 내면의 고백이다.  

1악장 ‘장송행진곡, 침착한 걸음으로’. 어린 시절 들은 군대 나팔 소리의 추억에서 끌어낸 트럼펫의 팡파르로 시작한다. 처절한 장송곡의 리듬과 격렬하고 사나운 절망과 슬픔의 기나긴 패시지가 교차한다. 

2악장 ‘폭풍처럼 움직여서, 가장 격렬하게’.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1악장과 비슷한 분위기의 고뇌가 더욱 사납게 물결친다. 종반에서는 금관의 찬란한 코랄이 잠시 펼쳐진다. 얼어붙은 하늘을 뚫고 한순간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말러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찬란한 대목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대목 역시 유령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다시 눌려버리고 만다. 

3악장 ‘스케르초, 힘있게, 너무 빠르지 않게’. 오스트리아 민속춤인 랜틀러풍의 선율과 빈 왈츠가 어우러지는 밝은 분위기로, 곡 전체의 ‘2부’에 해당된다. 

4악장 ‘아다지에토, 아주 느리게’.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와서 유명해진 부분이다. 관악기들은 쉬고 현악 파트와 하프만 연주하는 매우 아름답고 고요한 악장이다. 폭풍 사이에 환상처럼 잠시 맛보는 평화라고 할까? 하지만 싸늘한 햇살 속에서 꾸는 피곤한 꿈처럼 쉽게 깰 것만 같은 안타까운 아름다움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CFQQsu6VBYA

5악장 ‘론도-피날레, 빠르게’. 4악장에 이어서 휴식 없이 연주되는 이 당당한 피날레에서 말러의 회의와 공포와 불확실성은 모두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럴까? 1, 2악장의 그림자는 3, 4, 5악장이 끝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교향곡의 풀 스코어를 사보한 알마가 “금관 파트가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하자 말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빼고 싶은 부분이 눈에 띄면 빼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음악에 관한 한 타협을 몰랐던 말러지만 알마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이 더 강했던 걸까. “구스타프는 어떤 형태로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낸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알마가 회상한 것은 아주 먼 훗날이었다.

 

 

해고 2년, 이근행 PD에게 주는 음악 한 송이

<뉴스타파>는 우리 시대 ‘자유의 노래’

 

 

근행아, 축하한다.

‘이달의 PD상’에 <뉴스타파>가 선정됐다는 건 보도를 통해 알았다만, 6월 1일 시상식이 있다는 건 미처 몰랐어. 나중에 들어보니 네가 “쑥스럽다, 알리지 말라” 했더구나. 참 너답다는 생각이 들더군. 지상파 저널리즘이 질식사한 지금, <뉴스타파>의 소중한 의미에 공감하고 제작진의 열정을 기리고자 하는 PD들의 마음이 담긴 상,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데…. 

<뉴스타파>는 비록 인터넷 방송이지만 바른 언론의 나침반이 됐고, 우리의 비겁에 경종을 울렸어. 선관위 디도스 공격, 강정마을 해군기지, 민간인 불법사찰,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22번째 죽음, 두 번 정리해고된 콜트콜텍 노동자…. 이 시대의 가장 아픈 주제에 정면으로 부딪쳤어. 권력의 눈치 안 보고 사태의 심장부를 향해 곧바로 뛰어들었어. 솔직한 답변을 회피하는 책임자들을 추궁할 때 너는 실제로 몸을 던졌어. 도망가는 책임자가 탄 차의 뒷바퀴에 발이 깔려 다치기도 했어.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다 소리 한번 없이 묵묵히 자기 몫을 했어. 이런 네게 나는 아무 도움도, 격려도 주지 못했구나. 늦었지만 네게, 그리고 <뉴스타파> 제작에 헌신한 노종면 위원장 등 모든 기자들과 PD들에게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어. 

 

엄중한 파업 상황, ‘내버려 두면 잘못될 거라는 사명감’에서 밀고 당기다가 약간의 상처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지. 그 뒤 한 동안 자괴감에 빠져 지내던 내게 오히려 너는 격려와 위안을 줬어. 서로 다른 나무들이 올곧게 자라서 결국 근사한 숲을 이루게 된다는 네 믿음,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어.  

“저 산의 나무처럼, 사람에게도 저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어서 절로 자라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옮겨 심을 수도 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돌보지 않더라도 잘 자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 [이근행의 편지] ‘절로 자란 나무가 더 아름답다’, <PD저널> 5월 16일.

6월 4일, 네가 해고된 지 벌써 만 2년이구나. 2010년, MBC 노조 위원장을 맡을 때 이미 너는 해고를 각오하고 있었지. 잘 알면서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졌고, ‘청와대 쪼인트’ 사장의 무책임한 말바꾸기에 파업으로 저항한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로부터 2년, 무척 긴 어둠의 날들이었지. 

너는 요즘도 잠을 못 잔다고 했어. 불의가 득세해서 모든 가치관이 거꾸로 뒤집힌 세상, 이 부정과 모순의 나날에 누가 편히 잠들 수 있겠니. 하지만 그 한가운데서 피 흘리는 너의 아픔을 나는 가늠하기 어렵구나. 딸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고, 가족이 힘들 걸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겠지. 비상식이 상식을 완강히 억누르는 현실에 힘이 빠지기도 하겠지. 하지만 너는 웃고 있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 사사로운 걱정과 속된 집착을 훌훌 털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의 당당한 웃음…. 

네 말대로, 나무가 자라는 건 보이지 않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 높이 자라니까 나무인 거야. 딸아이도 자라고, 너도 자라고, 나도 자라고, 우리 모두 자라서 멋진 숲을 이룰 거라고 믿는다.  

자랑스런 네 가슴에 ‘음악의 꽃’ 한 송이 달아 주고 싶어. 모차르트의 가곡 <자유의 노래> K.506…. 근행이 네가 ‘해고’ 이후 더 치열하고 자유로운 PD로 성장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이 노래를 보내는 거야. 낑낑대며 가사 번역한 선배의 노고를 조금은 인정해 주셔. 미국의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의 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zBvecyo7loM



Lied der Freiheit 자유의 노래 
(Johannes Aloys Blumauer 요하네스 알로이스 블루마이어) 


Wer unter eines Mädchens Hand 어떤 소녀의 손아귀에 
Sind als ein Sklave schmiegt 노예로 사로잡힌 사람, 
Und, von der Liebe festgebannt, 사랑의 덫에 걸려 
In schnöden Fesseln liegt, 옴짝달짝 못하게 된 사람, 
Weh dem! der ist ein armer Wicht, 안 됐어, 비참한 사람! 그는 
Er kennt die gold'ne Freiheit nicht. 황금처럼 빛나는 자유를 모르죠. 

Wer sich um Fürstengunst und Rang 권력과 영예를 얻으려고 
Mit saurem Schweiss bemüht 땀에 절어 전전긍긍하는 사람, 
Und, eingespannt sein Leben lang, 평생 멍에를 쓴 채 
Am Pflug des Staates zieht, 출세하려고 애쓰는 사람, 
Weh dem! der is ein armer Wicht, 안 됐어, 비참한 사람! 그는 
Er kennt die gold'ne Freiheit nicht. 황금처럼 빛나는 자유를 모르죠. 

Wer um ein schimmerndes Metall 반짝이는 쇳덩어리가 좋다고 
Dem bösen Mammon dient 돈만 숭배하는 사람, 
Und seiner vollen Stärke Zahl 고집스런 탐욕에 가득 차 
Nur zu vermehren sinnt, 돈 불릴 궁리만 하는 사람, 
Weh dem! der is ein armer Wicht, 안 됐어, 비참한 사람! 그는 
Er kennt die gold'ne Freiheit nicht. 황금처럼 빛나는 자유를 모르죠. 

Doch wer dies alles leicht entbehrt, 이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고
Wonach der Tor nur strebt, 오직 진실을 향해 정진하고, 
Und froh bei seinem eig'nen Herd 마음 깊이 기뻐하는 사람, 
Nur sich, nicht andern lebt, 헛된 걸 버리고 참된 나를 위하는 사람, 
Der ist's allein, der sagen kann: 오직 그런 사람만 스스로 
Wohl mir, ich bin ein freier Mann! “나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죠. 

모차르트는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에 공감, 1784년 빈의 프리메이슨에 가입했고 핵심 멤버로 활동했어. 모차르트의 음악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에서 영양분을 취해 더욱 풍요로워졌어. 이 곡은 프리메이슨 동료 요하네스 알로이스 블루마우어(1755~1798)의 풍자시에 선율을 붙여서 만든, 4절로 된 노래야. 한 절 당 30초 정도로 짧은 이 곡은 1785년 말 작곡한 걸로 추정될 뿐, 그 밖의 스토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The Cambridge Mozart Encyclopedia, p.342) 이 작은 노래에서도 프리메이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주제의 형태가 프리메이슨 칸타타 K.429 <우주의 영혼, 그대에게>를 닮았다는 거야. (The Masonic Thread in Mozart, Katharine Thomson, London, p.66)

모차르트는 최초의 자유 음악가였어. 당시 음악가는 권력자의 하인 취급을 받았어. 잘츠부르크를 통치한 콜로레도 대주교는 식사 때 모차르트와 요리사를 나란히 앉게 했어. 여행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았어. 자기의 음악적 이상이 봉건적 속박에 질식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자유를 요구했고, 이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해고’로 응수했어. 부관 아르코 백작을 시켜서 글자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모차르트를 쫓아냈지. 

모차르트가 ‘해고’된 1781년 6월 8일은 역설적이게도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야. 그날 이후 10년 동안 자유 음악가 모차르트는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걸작들을 쓸 수 있었으니까. 권력자의 취향에 맞는 음악만 만들도록 강요됐다면, 박제된 천재 모차르트는 인간을 위한 소명을 다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그의 위대한 마지막 교향곡들, 협주곡들, 오페라들은 모차르트가 자유로웠기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어두운 터널도 언젠가 끝날 거야. 다시 현장에 섰을 때 우리가 얼마나 치열히 프로그램을 제작할 것인가, 이 기나긴 투쟁의 진정한 성패는 거기에 달려 있겠지. 너를 포함한 모든 해고 동지들도 곧 현장에 돌아오게 될 거야. <뉴스타파>에 배어 있는 치열한 의지를 고스란히 몸에 간직한 채…. 바람 부는 광야에 서 있든, 방송사 안에서 땀 흘리든, 너의 자유로운 PD정신은 흔들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해. 제작 현장에 돌아갈 때, 우리는 모두 너와 함께 <뉴스타파> 제작진이 되어야 할 거야. 

2012년 6월 이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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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대필 조작사건, 강기훈에게 보내는 음악 편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

 

 

강기훈씨, 만나 뵌 적도 없는데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무례하다 생각지 마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MBC의 프로듀서고,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음악 나누는 일’이 제 깜냥임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한겨레 칼럼에서 당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야만의 시대, 그 한복판에 당신이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큰 수술을 받으셨군요. “생존확률 50%”…. 아무 것도 해 드릴 수 없는 저로서는 그냥 멀리서 쾌유를 바랄 뿐입니다. 어서 쾌유하셔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꼭 보셔야 합니다. 

한겨레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6943.html

“2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어. 특히 그 사건이 터진 5월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아파”라 하셨군요. 저도 아픕니다. 황당한 누명을 덮어 쓴 채 20년 넘게 견뎌 온 강기훈씨의 아픔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음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또래입니다. 제가 서너 살 위인 것 같군요. 죄 없는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뻔뻔함…. 거짓이 진실을 뒤덮은 이 어둠은 왜 이렇게 긴 걸까요? 

91년, 당시 29살이던 당신을 TV에서 보았습니다. 그때 인상은 “참 환하게 잘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지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당신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작곡을 꿈꾸는, 섬세한 감성의 젊은이였다고요. ‘유서대필’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 아니, 소설이 될 만한 개연성도 없는 황당한 거짓말이 당신의 꿈을 아직도 목 조르고 있습니다. 21년이 지났는데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50살이 된 당신은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다고요. 통탄할 일입니다.  

그때 얘기를 되새기는 게 괴로운 일인 줄 잘 알지만, 간략히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지대 신입생이던 강경대 군이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게 91년 4월 26일. 노태우 정권은 젊은 전경 몇 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넘어가려 했고, 아무도 강경대 군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당시 MBC노조 집행부였던 저도 거의 매일 거리에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자”고 호소했지만 청년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죽지 말아요!! 살아서 함께 싸워요!!” 연세대 교정에 쩌렁쩌렁 울리던 문익환 목사의 절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시인 김지하가 5월 6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는 젊은 목숨이 스러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에 나선 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 서강대 박홍 총장이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배후세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기설씨의 죽음과 유서…. 검찰은 당신을 자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유서를 대필했다”고 우겼습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서 정권의 위기를 넘겨보려는 꼼수였습니다. 

검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인 국과수의 필적 감정이 엉터리임이 밝혀졌는데도 그들은 거짓말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람이 죽는다는데 유서를 대신 써 주는 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은 무시됐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가장 앞장서서 비난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민주 인사들의 항변도 묵살됐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검찰 출두하는 것은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당신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식 있는 사람들은 모두 확신했습니다. “강기훈은 무죄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뻔뻔함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이 선고됐고, 형이 집행됐습니다. 

1, 2, 3심 판사들이 검찰의 손을 들어 준 것은 “모든 민주 인사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선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에 대한 유죄 선고는 모든 상식 있는 국민들에 대한 명예훼손과 다름없었습니다.   

출소 후 진실을 밝히려는 당신의 노력은 계속됐습니다. 검찰, 국과수, 법원,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 양심 없는 그들의 완고한 카르텔에 홀로 맞선 긴 세월,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지 저는 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몰상식과 파렴치의 이 시대, 침묵조차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시절입니다.  

당신을 TV에서 다시 본 건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월, 죽음의 배후’ 편에서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의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을 의뢰하여 “유서를 대필한 게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고(故) 김기설씨의 아버지도 출연, “유서의 필적은 기설이 것이 분명하다”고 증언했습니다. 후배 홍상운 PD가 만든 이 다큐에서 당신은 40살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큰 피해자는 기설이죠.” 한결 성숙하고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91년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힘든 길을 가고 계시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한 시간 다큐로 진실을 말했는데도 대답 없는 메아리였습니다. 허위 조작의 당사자인 노태우 정권만 나쁜 게 아니구나, 3년형을 다 살게 한 김영삼 정권, 10년이 지났는데도 진상규명을 외면하는 김대중 정권 모두 똑같이 나쁘구나, 생각했습니다. “유죄가 확정됐고 실형을 살았으니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무책임의 공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1991년 5월 강기훈 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을 실연해 보이고 있다.

 

 

그로부터 세월이 또 흘러 2009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을 이끌어 내셨군요. 검찰은 이례적으로 즉시 재항고했고, 사건은 양창수 대법관에게 배당됐다고요.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대법원은 감감무소식이라니…. 변호사가 “빨리 결정해 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고, 기자들이 취재 차원에서 진행 상황을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대법원은 한 마디 대꾸도 없다고요. 유무죄를 다투는 ‘재심 판결’이 아니라 ‘재심 개시’ 결정을 해 달라는 건데, 특별한 이유 없이 3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한겨레 기사를 읽으면서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회 정의(正義)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대법원의 한심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딱 한 걸음 남았을 뿐입니다. 양심의 최후 보루 대법원이 신속히 응답하기를 저도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91년, 악마의 조작 사건이 벌어진 그 해와 지금 2012년, 세상이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비정한 권력과 자본의 세상, 수많은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인간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진실이 햇빛 아래 드러나는 날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내고 손을 잡읍시다.     

요즘 클라리넷 음악을 좋아하신다고요. 모차르트는 언제나 클라리넷을 통해 따뜻한 마음을 표현했지요. 오페라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담아 노래할 때 꼭 클라리넷 소리가 납니다. 클라리넷은 높은 음역에서는 찬란하게 빛나고, 낮은 음역에서는 깊이 있게 울립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습니다. 

이미 아시는 음악이겠지만,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의 느린 악장을 보내 드립니다. 당시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친구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쓴 곡입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이 음악, 강기훈씨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2악장 라르게토 http://www.youtube.com/watch?v=SNqPrF1-ULU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도 들어보셔요. 이 곡도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사망하던 해인 1791년 10월에 작곡했습니다. 그가 완성한 마지막 협주곡인데,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백조의 노래’라 부르기도 하죠. 2악장 아다지오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온 적도 있어요. 알프레드 프린츠의 클라리넷, 칼 뵘 지휘 빈 필하모닉 연주입니다. 차분한 템포가 맘에 듭니다. 클라리넷의 아름다운 음색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는 연주입니다.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아다지오, 3악장 알레그로
http://www.youtube.com/watch?v=GApVePLnVeY&feature=related



따님이 호른을 전공하신다고요. 다음엔 따님과 함께 들으실 호른 음악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수험생 따님이 음악을 진정 사랑하는 훌륭한 음악가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음악을 하고 싶었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잘 가꿔서 언젠가 따님과 함께 클라리넷과 호른의 듀오를 연주하셔야 합니다. 

진실이 고음의 클라리넷처럼 명료하게 반짝이는 그날, 강기훈씨의 이름 앞에서 ‘유서 대필’이라는 주홍 글씨는 사라질 것입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 강기훈의 이름을 곧 되찾게 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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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쳐라, 공장을 돌려라!”

두 번 정리해고된 콜트 콜텍 노동자들께 기타 음악 한 곡

 

저는 MBC의 이채훈 PD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석달 학원 다녀서 ‘로망스’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까지 쳤습니다. 여섯 줄이 기타 몸통에 울려서 나오는 아름다운 화음, 브릿지 가까이서 단단한 소리가 나고 줄 가운데서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다양한 음색이 매혹적이었습니다. 기타를 만드는 여러분께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뉴스타파>에서 여러분 얘기를 보았습니다. 그간 간헐적으로 ‘콜트 콜텍 해고노동자 26명’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화면으로 보니 새삼 여러분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 MBC 노조의 파업이 만 5달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쉬운 싸움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도무지 언론인이라 할 수 없는 몰상식한 자들이라 대화로 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복직 투쟁은 벌써 만 5년을 넘겼군요. 그 동안 여러분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방송에서 여러분의 투쟁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 사과드립니다. 뒤늦은 격려와 연대의 손길이지만 뿌리치지 말고 잡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기나긴 투쟁 끝에 지난 2월 23일, 대법원의 ‘정리해고 무효’ 판결을 받았습니다. 자랑스런 투쟁이 승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여러분은 복직되고, 공장은 다시 가동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콜트 콜텍의 경영진은 “공장이 외국에 있기 때문에 복직시킬 수 없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콜트 콜텍은 세계 기타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판매량 세계 1위, 당기 순이익 100억을 기록한 회사입니다. 당연히 국내 공장을 재가동할 여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박영호 등 경영진은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채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여기 (대법 판결문에) ‘해고는 무효, 복직시키고 임금 주라’고 써 있잖아? 너희들 법 좋아하잖아. 늘 ‘법대로 하자’ 그랬잖아? 말 좀 해 봐.”

여러분들의 절규에 돌아온 대답은 다시 정리해고한다는 일방적 통보였습니다. 5월 31일이었죠. 그들은 복직을 전제로 한 교섭을 거부한 채 돈 몇 푼으로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이 땅의 사법 정의를 무시한 채 자기 배만 불리겠다는 파렴치한 짓이었습니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두 번의 정리해고…. 그들은 여러분을 두 번 죽였습니다. 

73년 창립된 콜트 악기는 여러분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세계 수준의 기타 제조업체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은 먼지를 마시고, 칠에 중독되고, 심지어 기계톱날에 손등을 다쳐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에도 여러분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나날이 번창하는 것을 보며 묵묵히 참으셨지요. 여러분이 만든 악기가 선남선녀의 손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쏟아내는 순간을 상상하며 흐뭇해 하셨지요. 

여러분은 30년 안팎 기타를 만들어 온 최고 기술자들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을 콜트 콜텍 경영진은 ‘가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동남아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서는 순간, 하루아침에 여러분을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2007년 4월 12일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그해 8월 31일 부평공장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 뒤 5년이 넘도록 그들은 아는 체도 안 하고, 여러분을 보면 도망 다니기 바빴습니다. 

지난 세월 여러분이 겪은 고초를 돌아보는 것, 그 또한 괴로운 일입니다. 생계의 벼랑에 몰렸을 때는 눈앞이 캄캄하셨지요. 아이들 학비가 없어서 휴학시켜야 할 때는 마음이 울컥하셨지요. 부인이 “이혼하자” 하셨을 때는 하소연할 곳 없어 외로우셨지요. 이 모든 괴로움을 딛고 대법원의 복직 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는 저들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잊으셨을 겁니다. 

 

자본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 같다고 할까요? 노동자의 피를 다 빨아먹고 나 몰라라 하는 ‘흡혈귀’ 같다고 할까요? 쌍용자동차의 경우, 공장은 한국에 있지만 소유주가 국경을 넘어 다닙니다. 중국 상하이 자동차에서 인도 마힌드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한국에 남아 있는 2646명의 생존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콜트 콜텍은 소유주는 한국에 있지만 공장이 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경영진은 공장이 중국과 동남아에 있다는 이유로 26명 노동자의 정당한 복직 요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대우자동차, 재능교육, 유성기업 등 장기 투쟁 사업장은 사회적 문제이므로 정부가 나서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돈벌레’의 우두머리라서 해결이 난망입니다. 권력자가 불법 비리 그 자체이니, 경영하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법을 무시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정부와 경영진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니 우리의 투쟁은 불가피합니다. 자본은 국경이 없지만 우리 노동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요즘입니다. 그 벽을 넘어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음악은 그 벽을 넘어 날아갑니다. 여러분은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음악은 콜트 콜텍의 희망, 우리 모두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참 명쾌한 음악입니다. 

“기타를 쳐라! 공장을 돌려라!”

‘기타의 베토벤’으로 불리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안’ (L'Encouragement) Op.34를 보내 드립니다. 첫 부분 ‘칸타빌레’, 둘째 부분 ‘주제와 변주’, 마지막 부분 ‘왈츠’로 이뤄진 이중주곡입니다. 불가리아의 쌍둥이 자매 보야나 스토야노바, 케티 스토야노바가 연주하는 모습이 정답습니다. 특히, ‘노래하듯’ 연주하는 칸타빌레에서 두 대의 기타가 애절하게 대화하며 서로 교차하는 대목이 맘에 들어서 여러 차례 방송에 쓴 일이 있습니다. 

링크 2분 22초 지점, 외로울 때 언제나 위안이 되어준 대목입니다. 이 곡이 여러분께 잠시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이어주고, 이 ‘연대의 힘’이 콜트 콜텍 공장을 다시 돌리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칸타빌레 (노래하듯) http://www.youtube.com/watch?v=nB5B65Gojtk

주제와 변주 http://www.youtube.com/watch?v=lBgyntsYKz0&feature=related
왈츠 http://www.youtube.com/watch?v=ApSezmgK4EI&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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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진실의힘’ 선생님들께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중 3악장

 

 

김양기, 김태룡, 박동운, 최양준 선생님! 지난 5월 여의도 방송파업 희망텐트에서 뵈었던 MBC 이채훈 PD입니다. 선생님들은 저희들에게 밥을 사주시고 격려해 주셨죠. ‘진실의힘’에서 준비해 오신 떡을 진도 박동운 선생님이 가져오신 꿀에 찍어서 먹었는데, 정말 기막히게 맛있었지요.

 

선생님들은 말씀하셨죠. “우리가 억울할 때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 언론인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공정방송을 위해 파업 중이라 하니 격려하려고 왔습니다. 우리같이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언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생님들은 박정희 ․ 전두환 시절, 모진 고문으로 억울하게 ‘간첩’이 되어 오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가촉천민, ‘간첩’이라는 누명 때문에 사람들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 나날을 보내셨지요.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삶까지 망가졌지만, 억울함을 호소할 상대 한명 찾아보기 어려운 세월이었죠. 

 

 

박정희 ․ 전두환 독재 정권 때 고문 조작으로 ‘간첩’이 되었다가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오히려 ‘상처입은 치유자’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는 ‘진실의힘’ 선생님들

고문 생존자 선생님들은 ‘진실의힘 치유학교’를 통해 마침내 ‘상처입은 치유자’로 우뚝섰다. 왼쪽부터 김장호, 김양기, 김태룡, 박동운 선생님.

뒷줄 왼쪽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 오른쪽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수밖에 없는 것, 선생님들은 결국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여전히 절망이었습니다. 뒤늦게 무죄가 입증됐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의 잃어버린 세월이 회복될 수 있나? 우리를 고문해서 ‘간첩’으로 만든 자들은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게 아닌가? 어느새 늙은이가 됐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음 같은 고문과 감옥살이, 그 눈물과 핏값, 망가져버린 인생의 댓가로 국가로부터 받아낸 배상금을 모아서 ‘진실의힘’ 재단을 만드셨습니다. 동지들과 출연금을 내서 이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나셨습니다. 가장 큰 고통을 겪은 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누구보다 큰 상처를 입으셨으니 어떤 사람의 상처도 다 이해하실 수 있는 게 바로 선생님들입니다. 제일 큰 절망을 이겨내셨으니, 누구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게 바로 선생님들입니다. 선생님들은 고문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통에서 돋아난 새로운 삶으로 이 시대 인간의 존엄성을 밝혀주는 횃불로 거듭나셨습니다.

 

김장호 선생님의 말씀. “우리가 치유한다는 것은 선생으로서가 아니죠. 학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어루만져 주는 거에요.” 김태룡 선생님의 말씀.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와 준 사람이 없었잖아요. 이제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통은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하죠. 지금 사는 이 인생은 덤으로 산다고 생각해요.” 박동운 선생님의 말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쓰러져 죽는 사람 안아주고, 그 사람 대신 맞아주고, 마음 그대로 진실하게 말하고 듣는 것이지요. 이젠 전국 어느 곳이든, 어느 때든 가서 한번 해 보자!” 
   
선생님들은 22명이 목숨을 잃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와락’ 프로젝트에 앞장서셨습니다. 선생님들이 상처 입은 그들을 ‘와락’ 껴안아 주셨을 때 마술처럼 희망의 꽃이 피어났습니다. (아래 박스 참조) 선생님들은 자본의 거대한 탄압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대우자동차부품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저희 방송 노동자들을 방문해서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이름입니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본의 욕망은 온 사회를 물신숭배에 빠뜨렸습니다. 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면서 곳곳에서 인간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최소한 인간답게 대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절망은 깊어가고, 온 사회가 ‘멘붕’ 상태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들이 판치는 맘몬의 세상, 선생님들이 만드신 ‘진실의힘’은 희망의 빛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대통령도, 국회도, 법원도 아니고, 바로 ‘진실’ 그 자체입니다.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 자체의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선생님들이 옆에 계시기에 우리는 절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국가폭력의 생존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다시는 잔인한 고문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선생님들을 비롯, 우리나라의 고문생존자들이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이날을 기념하며 고(故) 김근태 선생에게 ‘진실의힘 인권상’을 드리고, ‘국가폭력피해 치유를 위한 씨앗기금’을 마련한다지요.

 

그동안 ‘간첩’으로 내몰려 세상에서 가장 따갑고 차가운 눈초리로 외면당했던 선생님들입니다. 이제 선생님들이 체온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낮은 곳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여생을 즐기시는 선생님들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은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내고 이렇게 살아남아서, 세상을 조금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이 세상에 온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온 삶이, 그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어 살아갈 이유가 된다면, 그처럼 보람차고 행복한 삶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 인생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이제 스스로 황혼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더 솔직한 표현으로는 ‘서산에 지는 해’로 비유한다. 잃어버린 나의 세월, 다시 찾을 길은 없지만, 높은 창공을 날고 허공에 들뜬 마음은 이제는 사뿐히 내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낮은 곳에서 그리고 까만 숯덩이에도 불을 지펴 타 오르도록 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생을 즐기도록 노력하겠다.”  
    - ‘진실의힘’ 김성규,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 - ‘진실의힘’에 내 이름 하나 얹으며> 
 
선생님들의 건승을 빌며 음악 한 곡 올립니다.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상처입은 치유자’였던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악성’(樂聖) 베토벤은 30살 넘어가면서 ‘음악가의 목숨’과도 같은 청력을 잃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베토벤은 32살 되던 1802년, 빈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씁니다.

 

“사람들에게 ‘더 크게 말해 주세요, 저는 귀가 먹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었어.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극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아는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그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나는 그럴 수 없어. 너희들과 기꺼이 어울려야 할 때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것을 용서해다오. 나의 이 불행은 내겐 이중으로 괴롭단다. 왜냐하면 이 불행 때문에 나는 오해받고 있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서로 심정 토로도 할 수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 1802년 10월 6일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그러나 베토벤은 침통한 마음으로 두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면서도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바로 그것뿐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베토벤은 결국 음악가에게 저주라 할 수 있는 청각상실을 딛고 불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이 음악들은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슬픈 사람들에게 위안을 줍니다. 베토벤은 선생님들과 똑같은 ‘상처입은 치유자’인 것이지요.

 

베토벤이 남긴 9곡의 교향곡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환희의 송가>라 불리는 4악장이 제일 유명합니다. 독일 시인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음악을 붙여 온 인류의 형제애를 노래했습니다. 교향곡에 합창이 등장한 건 이 곡이 처음이었습니다. 곡 전체를 연주하는데 7~80분이 걸리는 엄청난 규모, 그때까지의 교향곡에서 볼 수 없었던 감정적 깊이 때문에 초연 당시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교향곡 중 제일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지요.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이 곡을 연주하며 평화를 기원하지요.

 

폭풍 몰아치듯 고뇌로 가득했던 인생을 회상하는 1악장, 팀파니 솔로와 호른의 맹활약으로 초연 당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2악장 - 지휘를 하던 베토벤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못 들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단원들이 알려줘서 비로소 뒤를 돌아봤다지요! - 도 모두 위대한 음악입니다.

 

 

베토벤(1770~1827). 그는 음악가로서‘사형선고’라 할 수 있는 청각 상실의 절망을 이겨내고 인류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위대한 음악을 남겼다. 베토벤, 그 또한 ‘상처입은 치유자’다.

 

 

하지만 오늘은 고요한 3악장을 보내드립니다. 고뇌와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너머 54살의 나이에 도달한 평화, 따뜻함, 숭고함이 매 순간 묻어납니다. 제가 학생 시절, “죽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듣고 싶은 음악”으로 이 느린 악장을 꼽았었지요. ‘아다지오 몰토 에 칸타빌레’ (Adagio molto e Cantabile), ‘아주 느리게, 노래하듯’ 연주합니다.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1979년 연주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9v6t-a7L5Ho&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embed/9v6t-a7L5Ho

 

고요히 명상에 잠겨 노래하지요. 4분 20초 지점, 두 번째 주제는 “고통에 가득 찼던 삶, 그래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회상하는 것 같아요. 현악기들이 노래하면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 등 목관악기들이 “그래, 그래야만 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대답하듯 함께 노래합니다.

 

9분 57초 지점, 호른이 꿈꾸듯 노래하는 대목도 참 좋아요. 54.살 베토벤이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이어지는 현악기의 다소 빠른 선율, 참 아름답지요. 13분 15초, 모든 학기가 다함께 함성을 질러요. “나의 삶은 절망을 누르고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것 같지요. 14분 28초, 다시 한 번 승리의 함성이 이어지면 음악은 마무리를 향해 갑니다. 단조의 화음이 인생의 회한을 떠올리듯 살짝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그래도 삶은 아름다웠어” 확인하며 끝납니다. 

 

지휘자 번스타인은 참 유쾌한 사람이지요.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친 멋진 분이죠. TV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많이 했어요. 이분 지휘할 때 쇼맨십이 심한데, 위선이 아니라 진심으로 음악을 느끼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어요. 이 분 표정 보면서 음악 들으셔도 재미있을 거에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이 분은 <환희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로 개사(改詞)해서 지휘하기도 했지요. 무척 길지만, 전곡 다 들으시려면 다음 링크 열어보셔요.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 Op.125 <환희의 송가> 
http://www.youtube.com/watch?v=DcGQV1hRHJ4&feature=related

 

1악장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다소 장엄하게 (처음부터)
2악장 아주 생기있게 (16분 30초부터)
3악장 아주 느리게, 노래하듯 (28분부터)
4악장 <환희의 송가> (46분 18초부터) 격렬한 서주가 나오고 50분 지점부터 모두 아시는 멜로디가 계속 나오니 어렵지 않아요.^^

 

선생님,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부디 건강히 오래 사셔요. 자본이 판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선생님들이 이 시대의 고통을 짊어진 채 저희를 격려해 주시니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진실의힘’에서 왔습니다. 

 

우리들은 7,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때 안기부, 보안사 등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잔인한 고문을 당한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십수년 감옥살이를 했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간첩’이라고 경찰의 감시와 이웃의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재심재판을 청구하여 무죄를 받은 다음,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와락’ 개소식 하는 날, 이렇게 축하의 말씀을 드리려 그 힘든 세월을 버텨왔나 봅니다. 반갑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했다고 믿을 수도 없는 그런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여러분들처럼 내 가족, 내 자식, 내 일터만 알던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땅이나 알고 하늘이나 알던 농부였고, 바다길이나 알던 고기잡이 어부였습니다.

 

5, 60일 햇빛한점 들지 않는 지하실의 어두운 조사실에서 단 1초도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다가 살기위해 허위자백을 하고나니 그때는 이미 옴싹달싹 할 수 없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간첩’이 되고 말았습니다.

 

10년, 20년…. 단 하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옥살이를 견뎠습니다. 아침이면 눈뜨지 않고 차라리 잠든 채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면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가족들은 ‘간첩’ 가족이 되어 사회로부터 냉대와 차별을 당하면서 마음깊이 고통을 아로새긴 채 살아야 했습니다. 가족들은 남편만, 아버지만 출소하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10, 20년 만에 세상에 돌아온 우리들은 고문후유증과 간첩낙인으로 더 가파른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우리들과 가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겪은 고통이 바로 고문후유증이고 그것을 치유하지 않는 한, 단 한 발자국도 현실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자녀, 가족들과 마음을 주고받지 못하는 것은 성격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랜 격리 때문이 아니라, 바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 상처는 제대로 치유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실의힘’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이 고문과 고립, 차별, 냉대의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동굴 속에서 고통스러워 홀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진실의힘’을 만들었습니다. ‘진실의힘’을 만든 우리는 지금,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삶을 사는 것만 같습니다. ‘진실의힘’은 우리들과 가족들이 살아온 세월, 피눈물에 값하는 이름이요, 간첩이라 따돌림 당하던 우리와 가족들이 우리 인생의 주인공으로 태어난 제2의 생일날이기도 합니다 .

 

우리들은 그동안 출소하면, 혹은 진실을 밝히면, 혹은 내가 무죄를 받으면, 저절로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출소했다 해서, 무죄를 받았다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문후유증은 내가 무덤에 들어가야 끝이 날 것 같고, 억울하고 고통스런 내 젊은 시절은 다시 찾을 길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진실의힘’을 만들고, 여전히 고문후유증으로 고통당하는 동지들을 한사람씩 찾아 나서고 그 동지들과 함께 고문고통을 치유해 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들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 어떤 조건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고통스런 사람들을 찾아가고 함께 울어주는 우리의 삶 자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최고로 보람차고 행복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와락’은 오늘 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와락’에 참여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그랬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세상으로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세상과 문을 닫고, 동지들로부터 피해서 나 혼자만의 동굴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일어선 동지들이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동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수없이 찾아가고 만나서 일으켜 세우며 수 십년의 세월을 같이 걸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들은 ‘진실의힘’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와락’ 역시 그러리라, 우리들은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이 바로 내 곁의 동지들을 ‘와락’ 껴안고, 열 명의 동지를, 백 명의 동지를 껴안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지들을 이곳 ‘와락’으로 모이게 합시다.

 

모여서 ‘와락’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밥 지어 먹는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봅시다. 그런 ‘와락’을 만들어 나가도록 ‘진실의힘’도 늘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0월 30일 재단법인 ‘진실의힘’

 

 

 

 

MBC ‘오라누이’ 동지들에게 바치는 행진곡

모차르트 교향곡 17번 G장조 K.129

 

 

MBC 입사 20년차 이상의 고참 노조원들을 가리키는 ‘오라누이’들…. 오라버니와 누이를 합친 이름이죠.

지난주 목요일, 그들은 참 행복했지요. MBC 노래패 ‘노래사랑’이 그들을 위해 특별 공연을 해 주었습니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피켓 시위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행주산성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파업 기간 동안 많이 친해졌지요. 정년을 코앞에 둔 안성일 선배는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메라맨 함윤수 선배는 퇴직 후에도 만남을 이어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식사 후에는 족구 대회가 열렸죠. 50 넘은 사내들이 아이처럼 떠들며 공을 찼습니다. 라디오의 정찬형 선배는 신들린 듯 온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많은 웃음을 주셨죠.

머리 희끗희끗한 ‘오라누이’의 농성은 과거 어느 파업에서도 볼 수 없던 진풍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찬란한 젊은 시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5년 전, 군부독재에 맞서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 외치며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방송인이 무슨 노조냐, 월급 더 받겠다는 거냐?”는 물음에 당당히 대답했지요. “공정방송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입니다!” 그들은 20년 전, 구속을 두려워 않고 50일 파업을 벌여 노동조합을 부활시켰습니다. 뜨거운 단결로 안성일, 김평호 두 해고동지를 살려 놓았고 민주방송의 제도를 되찾았습니다.

올해, 불통 정권이 방송을 장악한 현실에 맞서 후배들이 떨쳐 일어났습니다. 구호는 25년 전과 똑같이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였습니다. “공정방송이 우리의 근로조건”이라고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험난한 민주방송의 길이지요. 헌법 파괴, 언론자유 말살, 표현의 자유 억압, 그리고 선후배 동료 징계 해고 등 인간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욕에 후배들은 결연히 저항했습니다. ‘오라누이’는 후배들의 투쟁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피켓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오라누이’는 오늘날 MBC의 자유롭고 책임있는 조직문화를 만든 주역입니다. 평생 가꿔 온 자랑스런 MBC의 민주주의 전통이 한 줌도 안 되는 자들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일어섰습니다. 저들은 “MBC의 유전자를 바꿔버리겠다”는 무지막지한 얘기를 했다지요. 그들, ‘오라누이’가 바로 MBC의 유전자입니다. 그들 한명 한명이 바로 MBC입니다.

‘오라누이’ 대열의 조합원들은 모두 자기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입니다. 20~30년 한결같이 올곧은 저널리즘을 실천한 자랑스런 기자들, 탐사저널리즘의 대표 PD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민요 전문가도 있고, 라디오의 히트 프로그램을 도맡아 기획한 천재 PD도 있었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중계 현장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최상의 화면을 위해 뛰어 온 흰 머리카락의 카메라맨들, 엔지니어들이 있었습니다. 최상의 세트와 CG로 시청자에게 봉사해 온 미술인들, 평생 묵묵히 제작을 뒷받침 해 주신 경영인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모두 다 보직 부장과 국장을 역임했고, 심지어 본부장을 지낸 분도 계셨습니다. 저 또한 현대사 진상규명에 일조했고 클래식 음악 다큐로 조금은 인정받은 PD라고 자부합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나는 ‘오라누이’, 그들을 이제 ‘우리’라고 부르렵니다.

자격 없는 이들이 이러한 우리를 징계·해고하고 대기발령하더군요. 그런들 우리가 꿈쩍이나 하겠습니까? 87년 노조 결성, 92년 파업…. 그 초심을 잃지 않은 우리들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회사 직위가 올라갔다고 태도를 바꾼 사람들은 우리들을 ‘바보’라 하겠지요. 그러나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 방송인의 진정한 자존심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경륜이 쌓이면서 진실과 허위, 민주와 반민주를 판단하는 분별력이 더 또렷해진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의 단순한 진실은 저쪽에 붙어 있는 자들의 어떠한 궤변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점심시간 우리 대화는 탑골공원의 노인들처럼 이런저런 잡담으로 흐르기도 했지요. 안성일 선배와 최상일 선배의 논쟁, 창조냐 진화냐….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토론이 중단될 것 같아 안타깝네요. 저는 창조론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 점에서 자연 선택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안성일 선배에 공감했지요. 하지만 영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야 한다,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어메리칸 인디언의 삶에서 배워야 한다는 최선배의 말씀에도 공감했거든요.

상황에 따라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전혀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선배랍시고 노조 집행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죠. 집행부가 도움을 청할 때 담담히 실행할 뿐이었죠. 생각건대, 예기치 못한 이번 파업 덕분에 우리가 매일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고통스런 파업이었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이번 파업이 준 뜻밖의 선물이요, 축복이었습니다. 먼 훗날에도 올해 파업 중의 만남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아무 말 없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얼핏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침묵은 피를 토하는 마음을 꾹 억누른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길 것입니다. 징계, 해고, 대기발령 등 저들의 도발은 웅변보다 강한 우리들의 침묵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퇴직할 때까지, 후배들과 힘을 합쳐 MBC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남았군요. MBC를 떠날 때 맘 편할 수 있도록, 우리의 남은 힘을 보태야만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로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겠죠.

‘오라누이’란 이름, 정말 아무렇게나 붙인 시시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민주방송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우리들이기에 굳이 멋진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박한 우리들을 위해 작은 음악을 하나 골라 보았습니다. 모차르트 교향곡 17번 K.129 중 2악장 안단테입니다. 부드러운 행진곡 같지요? 아주 단순합니다. 삶의 고통과 기쁨, 빛과 그림자를 모두 껴안고 승화시켜 얻어낸 단순함입니다. 아주 따뜻합니다. 서로 맞잡은 우리들의 손처럼, 인간과 인간의 연대에서 느끼는 따뜻함입니다. “우리 서로 마주보며 얘기하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노래하는 것 같지요?

 

http://www.youtube.com/watch?v=C3uaEvM3BiQ

 

‘노래사랑’이 ‘오라누이’를 위해 불러 준 노래 <희망은 있다>의 가사입니다. 노래패의 조진영이 알려줬어요. 우리 모두의 노래입니다. 따뜻하고 단순한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들으며 낭독해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희망은 있다

캄캄한 숲길을 걷듯
앞이 보이지 않는 삶에 지친 그대여
그대여 밤새 헤메일 지라도 숲 사이로 아침은 온다.

그대 눈살 찌푸리며 한숨 짓지만
오늘도 축복받는 새생명이 있고
아직 우리에겐 살 같은 벗들이
시작하는 연인들의 사랑도 있다오

그래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그대 눈빛 빛나고 있는 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그대 진실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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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노동자들의 위대한 단결을 기리며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Op.92

 

 

1. 서주, 신성한 축제의 시작 

이것은 신성한 축제다. 신호탄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첫 음, 웅크린 채 숨죽여 노래하는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그 아래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끓고 있다. 바이올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승을 시작한다. 이어지는 대폭발…. 신들이 머무는 저 산 꼭대기를 향해 불기둥이 솟구친다. 파란 하늘을 한 순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화산…. 오보에와 바이올린의 대화, 잠시 숨을 고른 귀 불기둥은 다시 한 번 폭발한다.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솟아오르는 함성, 이제는 우주를 향한 인간의 거침없는 도약이다. 디오니소스의 성스런 축제가 시작된다. (링크 처음 ~ 4분 45초)  

분노는 결국 폭발했다. <PD수첩>이 ‘피떡수첩’이 되고 뉴스데스크가 외눈박이 편파보도로 얼룩질 때 이미 저항은 예고되고 있었다. 2010년, ‘청와대 조인트’ 사장의 말바꾸기가 39일 파업을 유발했다. 그로부터 2년, 저들은 제 손으로 방송을 망가뜨리기 바빴다. 무죄가 확정된 프로그램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고 PD들을 징계한 것은 오직 청와대를 향한 충성 맹세였다. ‘국장책임제’ 등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는 모두 불구가 됐고, 그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패악이 자행됐다. 정당한 아이템은 휴지통에 들어갔고, 멀쩡한 리포트는 삭제되거나 손발이 뒤틀린 채 방송됐다. 대화는 불가능했다. 로봇같은 하수인들이 모든 보직을 장악했고, 대화로 해결을 시도한 PD ․ 기자들은 한직으로 쫓겨났다. 

MBC 노조원들은 온몸으로 거부했다. 이 모든 패악의 근원인 아바타 사장이 물러나지 않으면 공정방송도 사내민주화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노조원들은 모두 깨닫고 있었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끝까지 투쟁이다! 1월 30일 시작된 파업 투쟁은 한겨울 추위를 뜨겁게 달구었다. 저들이 ‘정치파업’이라 매도했지만, 4 ․ 11 총선 이후 투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그리고 장마와 불볕더위가 교차하는 7월 18일, MBC의 자랑스런 노조원들은 강철같은 단결력을 유지하며 현장에 복귀했다. 이미 생명이 다한 아바타 사장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170일 동안 흔들림 없었던 파업 투쟁의 결기를 보도 ․ 제작 현장의 치열한 실천으로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랑스런 MBC 노조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진짜 투쟁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2. 오케스트라, 최고 예술가들의 빛나는 단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42년 창단된 이 오케스트라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스승에서 스승으로’ 이어져 온 음악 전통을 자랑한다. 부드럽고 윤기있는 현악 파트의 음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플루트의 볼프강 슐츠, 클라리넷의 페터 슈미들 등 관악 파트의 연주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솔로이스트들이다. 빼어난 음악가들이 돌출하지 않고 각자 자기 파트를 충실히 연주하여 거대한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이 악단은 철저한 단원 자치 원칙에 따라 투명하게 운영된다. 단장, 기획 담당, 회계 담당, 홍보 담당 모두 돌아가며 한다. 연주회 레퍼토리도 단원 회의로 결정한다.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빛나는 단결은 이러한 민주주의에서 나온다. 

이 악단은 지휘자도 그때그때 단원들이 선정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청소년 음악회’로 널리 알려진 명지휘자다. 그는 단원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템포를 정해 주고 디테일 표현을 요구한 뒤 오케스트라의 응원단장처럼 열심히 지휘할 뿐이다. 단원들은 그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트럼펫, 팀파니…. 최상의 연주자들이 각자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지휘자와 호흡을 맞춰서 가장 멋진 심포니를 연주하는 것이다. 

MBC가 ‘주인 없는 회사’라고? 모르는 말씀이다. MBC 구성원들은 어느 회사 직원들보다 더 강한 주인의식을 갖고 있다. 9시에 출근해서 맡은 일만 하고 6시에 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좀 더 창의적이고 생동감 있게 하려고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의식의 원천이 바로 MBC 노동조합이다. 

MBC가 ‘노영방송’이라고? 이 또한 모르는 말씀이다. 노조 집행부가 인사권을 갖고 회사를 경영하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게 노동조합의 존재 덕분이라면, ‘노영방송’은 좋은 게 아닐까?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방송 언론인의 기본자세를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이렇게 좋은 방송사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보도 부문, 편성제작 부문, 기술 부문, 미술영상 부문, 경영 부문…. 각 파트의 조합원들은 모두 자기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집행부를 중심으로 힘차게 단결했다. 파업 초기에 집행부가 강조했듯, 조합원들은 누가 시켜서 파업을 한 게 아니라 스스로 떨쳐 일어난 것이다. 모두 자발적이었고 민주적이었다. 정영하 위원장, 강지웅 사무처장, 이용마 홍보국장 등 집행부는 십자가를 진 채 앞장섰고, 노조원들은 이들을 신뢰하고 사랑했다. 집행부는 피흘리면서도 노조원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파업 시작할 때의 튼튼한 대오는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그 단결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보도 ․ 제작 현장에 다시 선 것이다.  

다시 음악을 듣자. 1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빠르고 생기있게, 링크 4분 45초부터).
http://www.youtube.com/watch?v=AZUXn40ssYw

1악장은 시종일관 ‘딴~따다, 딴~따다’ 6/8박자 리듬의 향연이다. 링크 4분 45초, 플루트와 오보에가 유쾌한 첫 주제를 연주하면 모든 연주자들이 엄청난 에너지로 화답한다. 5분 35초, 제1주제가 발전할 때 약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광기와 도취의 이면에 깃든 슬픔과 우울이다. 6분 24초, 두 번째 주제다. 같은 리듬이 다양한 선율에 실려서 되풀이된다. 제시부가 반복되면 9분 26초, 전개부다. 6/8박자 리듬은 더욱 사납고 격렬하게 발전하여 10분 55초 지점, 모든 금관악기가 포효하며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11분 22초부터 재현부다. 제시부 때와 달리 모든 악기가 함께 제1주제를 연주한다. 11분 52초,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이 이어 달리듯 주고받으며 노래한다. 이때 제1주제는 단조로 바뀌어 있다. 슬픔과 우수의 그림자가 매우 짙다. 13분 45초부터 코다 부분이다. 네 대의 호른이 거침없이 울부짖은 뒤 끝난다.   

3. 알레그레토, 기만과 굴종을 영원히 장사지내다

http://www.youtube.com/watch?v=AZUXn40ssYw
2악장 알레그레토, 링크 15분 10초부터.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의 낮은 목소리가 첫 주제 앞부분을 연주한다. 제2바이올린이 첫 주제의 앞부분을 받아서 연주할 때 비올라가 첫 주제 뒷부분을 제시하며 돌림노래로 어우러진다. 장송행진곡의 규모는 점점 커진다. 제1바이올린이 가세해서 첫 주제를 연주한다. 이어서 팀파니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모든 관악기가 함께 비통하게 노래한다. 18분 36초부터 회상하듯 평화로운 제2주제가 등장한다. 20분 06초, 감상적인 추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고 다시 애도의 행진곡이다. 새삼스레 흥분할 건 없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담담히 노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한 번 더 회상의 멜로디를 노래하여 떠나는 이들을 위로하고, 행진곡은 마무리된다. 
 
170일의 파업, MBC 역사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아픔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입장을 밝혀야 했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필사적으로 자기 합리화의 논리를 만들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의 변명들, 모두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자기 걸 지키면서 궁색한 입장을 합리화하는 궤변이기 일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파업 노동자들뿐이었다. 모든 걸 버릴 각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한한 절망의 힘이 징계 ․ 해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국민의 힘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기에 승리를 확신했던 것이다. 

이제 방송장악 세력과 적당한 타협은 없다. “계선조직으로 들어가니 어쩔 수 없었노라”는 변명은 이제 국민 앞에 통하지 않는다. 25년 전, 6월항쟁에 무임승차한 원죄를 이번 파업으로 비로소 갚았다. 이제 우리는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 그것뿐이다. 전제조건은 단 하나, 제작 현장에서 굴종과 기만과 궤변의 사슬을 영원히 장사지내는 것뿐이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모든 비겁한 것, 비굴한 것, 비열한 것을 불살라서 떠나보내는 우리의 장엄한 행진곡이다.     

4. 신성한 축제, 그 완성

3악장 스케르초 프레스토(밀어붙이듯 빠르게, 24분 10초부터)는 거침없이 달려가는 목관과 현의 첫 부분, 그리고 트럼펫과 팀파니가 호탕하게 큰소리를 주고받는 중간 부분이 대조를 이룬다. 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힘차게, 33분 20초부터)는 신성한 축제의 완결이다. 광기는 이 피날레에서 극에 이른다. 거칠게 포효하는 금관과 함께 숨쉴 틈을 주지 않고 속도를 더하며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대단원을 이룬다. 
http://www.youtube.com/watch?v=AZUXn40ssYw

“나는 인류를 위하여 향기로운 포도주를 빚는 바쿠스이다. 사람들에게 거룩한 도취감을 주는 것은 바로 나다.” 


1812년, 베토벤이 마흔두 살 때 작곡한 이 교향곡은 숭고한 도취를 통한 삶의 카타르시스다. 라이프치히에서 이 곡을 들은 대부분의 청중들은 “술에 취한 사람이 작곡한 음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이 이제 정말 정신 병원에 갈 때가 됐군”이라고 했다. 베토벤 자신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통념도, 인습도, 사람들의 쑥덕거림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기의 기질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천재성과 힘의 자각에서 오는 기쁨, 그 힘을 거침없이 분출하려는 욕망이 있을 뿐이었다. 혁명기의 유럽은 시성 괴테와 함께 악성 베토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이 곡에 가장 열광한 사람은 바그너였다. 그는 이 곡의 피날레를 ‘디오니소스의 축제’라 부르고,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다. 

“음악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솟아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토벤의 이 말은 교향곡 7번에 그대로 적용된다. 광기와 취기가 일으키는 불꽃, 그것은 벌거벗은 자아를 다시 찾는 불의 세례이며, 무한한 우주를 향해 자기 존재를 알리는 인간 존엄성의 표현이며, 고통을 통해 환희로 나아가는 인생길의 터닝 포인트다. 

오늘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포도주에 취하자. 거룩한 도취감을 맛보고 다시 깨어나자. 자아를 잊은 헌신, 그 진정성이 배어 있는 방송…. 파업이 우리들의 축제, 그 시작이었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그 축제를 완성해야만 한다. 저들이 처참히 망가뜨린 MBC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진정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려는 우리의 불꽃같은 노력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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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서 꽃핀 음악 (1)

모차르트와 죄놈, 피아노협주곡 9번 Eb장조

 

모차르트는 27곡의 피아노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9번 Eb장조 K.271은 매우 독특하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아직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있을 때인 1777년 1월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훗날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활약할 때 수많은 피아노협주곡을 통해 작곡가 겸 연주자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뽐내게 된다. 그런데 이 9번 협주곡은 봉건 영주 콜로레도 아래서 작곡했다. 그러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작품이다. 규모도 훗날의 걸작들을 능가한다. 먼저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
피아노 : 알프레드 브렌델 http://www.youtube.com/watch?v=IcEQuxSagFY

 

피아노와 관현악단이 동등하게 대화하며 발전하는 협주곡의 낭만적 이상형이 바로 이 곡에서 출발했다.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함께 해방시키고 그들이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든 자유정신의 작곡자…. 이 협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모차르트의 위대한 오페라들이 섞여서 지나간다. 소리 없는 협주곡에 말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대화가 있다는 느낌이다.
 
1악장 시작 부분, 오케스트라가 팡파레를 연주하면 독주 피아노가 이에 화답한다. 처음부터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협주곡 역사상 이 곡이 최초다. 이러한 대담한 출발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에서야 다시 볼 수 있다. 이 곡의 놀라운 독창성을 살펴보기 위해 좀 꼼꼼히 들어보자. 

1악장 첫 주제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 생기있고 아름답다. 링크 1분 7초, 제2주제는 수줍은 듯 미소 짓다가 행복한 함박웃음으로 발전한다. 링크 1분 45초 지검,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나고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대목(독일어로 ‘아인강’ Eingang)에서 오케스트라의 속삭임에 피아노의 트릴이 화답한다. 오케스트라의 팡파레에 피아노가 한 번 더 대답하고, 음악은 자유롭게 발전한다. 2분 33초 지점의 경과구(經過句)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다. 3분 13초 지점, 제2주제를 오보에가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반주를 한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솔로를 맡고 피아노가 반주하는 것은 협주곡 역사상 이 대목이 최초다.

전개부의 폭과 깊이 또한 주목할 만하다. 4분 44초 이후 제1주제가 발전하는 부분은 모차르트가 훗날 쓴 3대 교향곡의 원숙함을 예감케 한다. 팡파레의 주제가 단조로 변형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5분 30초 지점부터는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대등한 규모로 활약한다. 5분 47초, 재현부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아예 역할을 바꿔서 대화를 나눈다. 19세기 낭만파 협주곡을 능가하는 자유분방함이다. 놀랍지 않은가?  

재현부 또한 단순히 제시부의 반복이 아니다. 제1주제는 예기치 못한 감정의 변화를 안고 흘러간다. 6분 30초 지점의 경과구(經過句)에서는 호른이 피아노와 함께 노래한다. 즐겁게 흐르던 음악은 화려한 카덴차(협주곡에서 독주 악기가 자유롭게 기량을 뽐내는 대목)로 이어진다. 종결부에서는 제시부와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의 속삼임에 피아노의 트릴이 화답하고, 이어서 피아노의 선창에 오케스트라가 합창으로 응답한 뒤 다함께 어우러져 음악을 마무리한다. 

 

 

 

내가 중학교 때 처음 들은 음반은 바로 아슈케나지의 이 연주 였다. 8번 C장조, 론도 A장조 K.386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협주곡 9번을 ‘은밀히’ 사랑하며 들곤 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각별히 공을 들여서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곡을 가리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했다. “온전히 모차르트 자기의 모습, 대중에게 영합한 작품이 아니라 독창성과 대담성으로 대중을 휘어잡으려 한 작품이다.” (Alfred Einstein, <Mozart, His Character, His Work>, Oxford University Press, p.294) 

모차르트가 이러한 걸작을 쓰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프랑스의 여류 피아니스트 빅투아르 죄놈(Victoire Jeunehomme / 1749~1812)을 위해서 쓴 곡이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차르트보다 7살 연상이다. 모차르트 아버지의 친구인 발레 교사 장 조르쥬 노베르의 딸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1776년말 잘츠부르크를 방문했고, 이듬해 1월 모차르트가 이 곡을 썼다. 모차르트의 편지에는 그녀의 이름이 두 번 나온다. 

“저는 오페라를 1막만 쓸 게 아니라 2막까지 다 쓸 거에요. 1막 대본은 벌써 나왔어요. 노베르씨가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을 총괄하고 있어요. 그분 집에는 제가 원하면 언제든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지요. 오페라의 제목은 <알렉산더와 록사네>입니다. 예노미양(Jenomy, 모차르트가 그녀를 부를 때 쓴 애칭)도 지금 파리에 있어요. - 1778년 4월 5일, 파리에서 아버지에게.

제 협주곡 중 죄놈양을 위해 쓴 곡, 뤼츠토프 백작 부인을 위해 쓴 곡, 그리고 Bb장조 곡까지 세 곡을 팔려고 해요. 그가 현금을 준다면 말이죠. 돈을 충분히 많이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한 푼도 못 버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 1778년 9월 11일, 파리에서 아버지에게.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에서는 “모차르트가 죄놈에게 잘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쓴 것 같다”고 농담조로 언급했지만, 실제 그녀가 어떤 연주자였길래 모차르트에게 이처럼 강력한 영감을 주었는지 알려 줄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아인슈타인 또한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그녀는 전설적인 인물일 뿐”이라 했다. (같은 책, p.295)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세 악장 간의 심오한 대비, 더 높은 통합,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긴밀한 관계 등을 볼 때 이 Eb장조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영웅교향곡’이다. 오케스트라 자체도 과거보다 훨씬 더 생기있고 섬세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진정 교향악적 스타일로 쓰여졌다.”

2악장은 베토벤 ‘영웅교향곡’의 ‘장송행진곡’과 같은 C단조의 안단티노(조금 느리게)다. 깊은 비탄에 잠겨 노래하는 제1주제, 행복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제2주제(링크 1분 54초부터)가 어우러져 발전한다. 피아니스트 강충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제2주제를 가리켜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는데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한 바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aaIk7UZgJV0

3악장 프레스토(아주 빠르게)는 과감한 형식파괴가 놀랍다. 크게 봐서 론도 형식이지만 중간에 메뉴엣과 4개의 변주곡이 삽입되어 있는 것(링크 3분 58초부터). 음악은 화려하고, 심각하고, 우아하고, 장엄하고, 섬세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jvScin-1cQE

 

6번 Bb장조, 8번 C장조를 좋아했던 당시 사람들은 놀랍고 독창적인 이 9번 Eb장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곡은 1777년 1월 죄놈의 독주로 초연됐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해 10월 4일 모차르트 자신이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출판업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 음악을 대중이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모차르트 사후인 1793년에야 비로소 출판됐고, 자필악보는 베를린 도서관에 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만큼의 ‘우주’를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게 만드는 곡이다. 모차르트와 죄놈의 만남은 신비의 베일 속에 갇혀 있지만 그 만남이 낳은 이 행복한 음악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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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으로 꽃핀 음악 (2)

‘유쾌한 바보’ 로이트겝을 위해 쓴 호른 협주곡

 

 

호른, 곱창처럼 생겼다. 관 길이가 3.7미터(F 호른) 또는 2.3미터(Bb 호른), 이 길고 구불구불한 관에 숨을 불어넣어서 연주하는 게 가능하다니 놀랍다. 호른 주자는 연습을 많이 하면 입술이 부르터서 피가 난다고 한다. 좁은 리드로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하는 오보에와 더불어 호른은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라고 한다.   

모차르트는 ‘꿈꾸는 듯한 소리’가 나는 호른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과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에서 호른이 빠진 적이 없다. 모차르트는 호른을 당당한 독주악기로 격상시켜 근사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부드러운 노래, 신나는 사냥 뿔피리 소리, 오케스트라와의 익살스런 대화가 있다.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1번 D장조 K.412를 들어보자. 느린 악장 없이 알레그로와 론도의 두 악장으로 되어 있고, 전체 연주시간 9분 정도. 짧으니 부담이 없다. 알레그로의 주제는 오래전 화장품 CF에 나온 적이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0g4SlqjORM4

 

 


모차르트가 남긴 4곡의 호른 협주곡은 잘츠부르크 출신의 호른 연주자 요제프 로이트겝(1735~1811)과의 우정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는 1번 D장조 K.412의 자필 악보에 ‘바보 로이트겝’, ‘잠깐 쉬어’, ‘아이구, 이제 끝이군’ 같은 농담을 써 놓았다. 2번 Eb장조 K.417에는 “당나귀, 황소, 바보 로이트겝을 긍휼히 여기며, 1783년 5월 27일”이라고 써 넣었다. 사람 좋은 로이트겝은 21살 아래인 모차르트가 ‘바보’라고 놀려도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했나보다. 모차르트도 이 순박한 호른 주자 아저씨를 좋아했기에 이렇게 토닥토닥 장난을 친 게 분명하다. 

 

 

로이트겝이 악보를 받으러 찾아왔을 때, 완성된 악보들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로이트겝이 난처해하자 모차르트는 “알아서 정리할 수 있나 한번 보자”며 놀렸다고 한다.

로이트겝은 1777년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이사한 뒤 조그마한 치즈 가게를 운영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 따르면 ‘달팽이 껍질만한’ 가게였다고 한다. 로이트겝은 레오폴트에게 꾼 돈을 끝내 갚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금전 관계는 모차르트와 로이트겝 사이의 우정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로이트겝은 장사를 하면서도 호른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이트겝을 변명한 적도 있다. “그의 처지를 아신다면, 그가 얼마나 힘겹게 지내는지 생각하신다면 가여워 하실 거에요.” (1782년 5월 8일, 빈에서)  

두 사람의 우정은 모차르트가 11살 때부터 35살, 마지막 해까지 지속됐다. 모차르트가 마지막 해에 쓴 편지에는 로이트겝이 세 번, 아주 짧게 나온다. 1791년 여름,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는 바덴에서 요양 중이었다. 작곡에 집중을 못 하는 밤이면 모차르트는 로이트겝의 집에서 묵기도 했다. 콘스탄체에게 보낸 1791년 6월 5일자 편지에 “오늘은 로이트겝의 집에서 잘 거”라고 썼다. 6월 25일자 편지에서는 “로이트겝과 점심 약속이 있어서 편지를 급히 마무리한다”고 썼다. 그해 10월 8일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마술피리> 공연장에 로이트겝을 두 번 태우고 갔다”라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단편적인 언급을 아무리 모아도 로이트겝의 전모를 그려내기 어렵다. 

모차르트는 4번 Eb장조 K.495의 악보를 빨강, 파랑, 검정, 녹색 잉크로 그려서 미술작품처럼 만들어 놓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형편없는 연주자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해 장난을 친 것”으로 해석했다. (Alfred Einstein, <Mozart, His Character, His W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45) 하지만 고도의 연주 기량이 필요한 이 협주곡을 연주한 로이트겝이 실제로 “형편없는 연주자”였을 리는 없다. 모차르트 당시의 호른은 밸브와 키가 없는 ‘자연 호른’이었다고 한다. ‘자연 호른’으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은 요즘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로이트겝은 뛰어난 연주자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연주 기법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로이트겝은 노래하듯 연주하는 ‘칸타빌레’가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연주한 느린 악장들은 특히나 아름다웠을 것이다. 마지막 악장의 경쾌한 사냥 뿔피리 소리를 ‘로이트겝 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이 협주곡들을 가리켜 ‘로이트겝스러운 것’(Das Leutgebische)이라 했다. 단순 소박하고 유쾌한 것, 이 협주곡들이 바로 로이트겝의 모습 아닐까? 이 곡을 연주한 로이트겝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바보 로이트겝’의 연주를 들으며 모차르트는 얼마나 즐거워 했을까? 두 사람의 즐거운 만남이 지금도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 하다.

 

네 곡의 협주곡은 네 형제(자매)처럼 서로 닮았고, 개성이 있다. 2번의 1악장은 ‘빠르고 장엄하게’ 정색을 하고 있다. 3번과 4번은 쌍동이같다. 두 곡 모두 느린 악장은 다정한 로망스고, 론도에서는 사냥 뿔피리 소리가 나온다. 4번이 좀 더 화려하다면 3번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최근 고증 결과 1번 D장조가 제일 나중에 작곡된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짧고 원숙한 음악이다. 모차르트가 죽던 해인 1791년 작곡했다. 따라서, 작곡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2번(1783년), 4번(1786년), 3번(1787년), 1번(1791년)이다. 

2번 Eb장조 K.417 (알레그로 마에스트소 - 안단테 - 론도)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endscreen&NR=1&v=xzCiVyWx-Tk

3번 Eb장조 K.447 (알레그로 - 로망스, 라르게토 - 론도)
http://www.youtube.com/watch?v=xrNoe7HEbd8&feature=relmfu

4번 Eb장조 K.495 (알레그로 모데라토 - 로망스, 안단테 - 론도 알레그로 비바체)
http://www.youtube.com/watch?v=VEJFuWgkG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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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체조 요정 손연재가 연기할 때 고른 그 음악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중 ‘대 이인무’

 

 

올림픽이 끝났다. ‘자택 대기발령’을 받은 나는 올림픽 덕분에 폭염의 나날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좋은 올림픽 방송을 위해 최선을 다한 많은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물론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았다. 올림픽 방송 열기 때문에 주요한 정치 사회 이슈들이 뉴스에서 실종된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올림픽 자체가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잃고 국제 자본의 돈잔치로 변질했다는 지적도 새겨둘 일이다.    

방송에 국한하여 한 가지, 꼭 함께 돌이켜볼 점이 있다. 유난히 잦았던 MBC의 방송사고와 수치스런 조작 논란은 논외로 하자. 이번 올림픽 방송도 어김없이 국가주의 컬트로 흘렀다. 일부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지나친 괴성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우리나라가 이기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좀 더 많은 메달을 따는 것도 흐뭇한 일이지만, 승부욕에 눈이 먼 나머지 중계를 하는지 응원을 하는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너무 많았다. 침착하게 중계하고, 우리편이든 상대편이든 최선을 다한 선수를 칭찬해 주는 성숙한 태도가 아쉬웠다. 

‘객관성’이라는 방송의 미덕은 왜 올림픽 방송에서는 예외 없이 실종될까? 맹목적으로 국가주의를 선동하는 우리 방송의 후진적인 관행은 이번에도 전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금메달 13개, 선수들의 노력과 투혼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선수들의 분전에 비해 우리 방송 수준은 부끄러웠다. 메달 순위에서 우리 스포츠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우리 방송 진행자들이 좀 더 품격 있는 태도를 모색할 때다. 김주언 선배의 지적대로, “지나친 국가주의는 승리했을 때의 기쁨도 격을 낮춘다.” (김주언, <올림픽 이후, 이명박에겐 이제 ‘내림픽’ 밖에 없다>, 미디어오늘)   

이러한 국가주의 컬트가 남자축구 한일전에서 절정에 달했고, 대통령이란 분이 이런 국가주의 열풍에 편승해 독도를 방문, 영토 논란을 자초한 일도 여기서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김종철 선배가 훌륭히 분석하셨으니 덧붙일 게 없다. (김종철, <“뼛속까지 친일”… MB의 독도 이벤트 의미는>, 미디어오늘)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클래식 음악이 등장한 종목은 손연재 선수의 리듬체조 경기였다. 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지만 손연재, 정말 훌륭했다. 저자 거리에서, 식당가에서 확인한 손연재 선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후프, 볼, 곤봉, 리본을 이용해서 인간 능력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곤봉에서 아쉽게도 실수를 범했는데, 이 실수마저 “손연재도 역시 인간이구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8살 어린 나이로 앞으로 노력하면 더 잘 하리라는 기대를 한껏 높여주었다. 

손연재 리듬체조 예선 (후프)

http://sportstv.afreeca.com/london/highlight.php?board=vod&c_id=london_highlight&b_no=19318&control=view&szFrom=naver

 


차이코프스키 작곡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 중 ‘대 이인무’(Grand Pas de Deux)다. 런던에 간 MBC의 한 시용기자는 ‘호두깎기 인형’이라고 소개했는데(8월 10일, 930뉴스), 사과나 배는 ‘깎아서’ 먹지만, 호두나 땅콩 등 견과류는 ‘까서’ 먹는다. 영어로 ‘Nutcracker’, ‘호두까기 인형’이 맞다.  

실제 발레에서는 이 음악이 어떤 장면에 나오는지 보자. 왕자 역에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클라라 역에 젤시 커크랜드, 어메리컨 발레 시어터 공연이다. ‘대 이인무’, 아래 링크 1:07:53 지점부터.
http://www.youtube.com/watch?v=5RcMV091Ifk&feature=related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로 꼽히는 이 작품은 1891년 작곡했으니 그의 마지막 발레 음악이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작곡을 의뢰받았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쓸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피콜로, 하프, 첼레스타(철금) 등 재미있는 악기를 잘 활용, 어린이들의 즐거운 환상을 자극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맛있는 과자와 재미있는 인형이 많이 나오는 이 발레는 세계 각국에서 크리스마스 때 즐겨 공연된다. 
 
1막 줄거리 : 클라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는다. 개구쟁이 오빠 프란츠가 인형을 망가뜨려 버린다. 클라라는 다친 인형을 어루만지다가 잠이 든다. 악몽…. 생쥐떼가 나타나 집안을 휘저어 놓는다. 그러자 호두까기 인형이 일어나 대항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돼 있던 과자와 인형들이 힘을 보탠다. 하지만, 생쥐떼의 위세가 강해서 호두까기 인형이 위태로워진다. 결국 클라라가 직접 뛰어들어 생쥐왕을 쓰러뜨린다. 치명상을 입었던 호두까기 인형은 곧 멋진 왕자로 되살아난다. 왕자와 클라라는 과자와 장난감의 요정이 있는 크리스마스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흰 눈이 펄펄 내리고 합창과 함께 눈송이의 왈츠가 펼쳐진다. 

2막 줄거리 : 왕자와 클라라는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까지 여행한다. 생쥐떼가 다시 나타나 불안하지만 왕자는 이들을 가볍게 물리친다. 클라라와 왕자를 위한 춤판이 벌어진다. 스페인춤, 아라비아춤, 중국춤, 러시아춤이 이어지고, 화려한 꽃의 왈츠에 이어 왕자와 클라라의 ‘대 이인무’가 펼쳐진다. 클라라는 꿈에서 깨어나고, 어느새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15곡의 춤곡을 엮어서 발레 모음곡으로 연주하기도 하는데, 다음 장면들의 음악이 특히 재미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5RcMV091Ifk&feature=related

행진곡 (링크 처음부터) 귀엽고 발랄한 행진곡으로, 이 발레의 주제곡에 해당한다.
 
생쥐왕과의 결투 (링크 23:30)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에 맞춰 쥐들이 등장할 때 불안한 분위기가 감돈다. 날카로운 피콜로 소리가 공포를 자아낸다. 음악이 고조되고 호두까기 인형이 칼을 뽑아들자 생쥐왕이 나타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1812년 서곡’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전투 끝에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왕은 동시에 쓰러진다. 결국 호두까기 인형은 다시 일어나서 왕자로 변한다. 키로프 발레단 출신으로 74년 미국에 망명한 바리쉬니코프의 춤이 압권이다. 

눈송이의 왈츠 (링크 35:20) 1막 피날레에 해당하는 이 대목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환상이 넘치는 멋진 장면이다. 플루트, 피콜로, 하프의 설레는 화음에 실려 하얀 눈송이의 요정들이 사뿐사뿐 춤춘다. 눈이 쌓여가면 어느덧 합창이 울려 퍼진다. 눈의 나라에 클라라와 왕자가 도착한다.  
   
생쥐와의 싸움 (링크 45:27) 과자 요정과 장난감의 나라까지 생쥐의 악몽이 따라온다. 그러나 왕자는 생쥐를 장풍으로 가볍게 물리친다. 

중국 인형의 춤 (링크 49:02) 한때 과자 CF에 나와서 아주 유명해진 곡이다. 피콜로의 선율에 현의 피치카토가 응답하며 재미있게 흘러간다. 
 
갈대 피리의 춤 (링크 52:50) 부드러운 플루트의 선율에 맞춰 정다운 이인무가 펼쳐진다. 중간 부분에 불안한 음악과 함께 생쥐의 악몽이 잠깐 되살아난다. 정말 집요한 생쥐의 준동이다. 그러나 결국 남자 요정이 생쥐 가면을 쓰고 장난쳤음이 밝혀지며 즐겁게 끝난다. 
 
꽃의 왈츠 (링크 56:30) 이 발레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목관의 서주에 이어 하프가 화려하게 무대를 수놓고 왈츠가 시작된다. 여러 악기들의 다양한 음색이 교차하며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청중들을 이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도 있다. 듣는 이의 다채로운 환상을 유발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Uss3NHf0l6U

 

봉봉과자 요정의 춤 (링크 1:04:10) 첼레스타(철금) 소리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설탕에 절인 자두의 맛처럼 달콤하다. 

‘대 이인무’ (Grand Pas de Deux, 링크 1:07:53) 
손연재 선수가 리듬체조 ‘후프’ 종목에서 사용한 음악이다. 클라라와 왕자가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을 언약하는 아름다운 이인무다. 손연재 선수의 멋진 연기를 기억할 때 이 곡도 함께 기억해 보자. 

보너스 하나! 이 ‘대 이인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곡이 또 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주인공 오로라 공주의 생일장면. ‘장미의 아다지오’라고도 부르는 이 장면은 모든 발레 중 음악과 춤이 가장 화려하다. 프리마 발레리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대목이다. 네 명의 왕자가 오로라 공주에게 청혼을 한다. 끝 장면, 네 왕자의 손에 차례차례 체중을 얹고 한 바퀴씩, 모두 네 바퀴를 도는 묘기에 주목해 보자. 자칫 몸의 균형을 잃을 수 있는 이 대목을 완벽하게 연기하려면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할까? ‘발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 대목은 흡사 올림픽 체조의 명장면을 보는 것 같다. 키로프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는 정말 금메달감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장미의 아다지오’ (아래 링크 44:30부터)
http://www.youtube.com/watch?v=e-a4HjwuuEs&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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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기

84살 제르킨이 연주한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나이 50 넘기면서 ‘죽으면 어떻게 이 몸을 처리할까’ 가끔 생각한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게 분명하니 풍장을 하는 게 제일 낫겠다고 생각한다. 일본 영화 <너를 보내는 숲>처럼, 자기 죽을 곳을 찾아서 땅을 파고 들어가서 관도 없이 벌거벗고 누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흠, 누가 흙을 덮어주지? 기술적으로 조금 난감하긴 하다. 그렇다고 숲 속 아무데나 누워서 눈을 감으면 누군가 발견하고 깜짝 놀랄까 걱정된다. 아무튼, 온전히 비우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이 많다고 젊은이보다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할 수도 있다.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날카롭게 지적했을 때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90을 넘긴 지센린 선생은 〈다 지나간다>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을 쓴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별로 해 줄 얘기가 없는 것은 대부분 인생을 헛살았기 때문이다.” 50 갓 넘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후배에게 무슨 얘기를 해 주기보다는 “너나 잘 하세요” 스스로 타이르는 게 낫지 싶다. - 졸고 <승준이의 온고지신>, PD저널, 2010년 8월. 

 

참 곱게 늙기 힘들다. 방송을 다 망쳐놓고도 허허 웃고 있는 방통위원장과 방문진 이사장을 보니 역겹다. X 싸 놓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늙은이들이다. 비리와 논문표절이 들통 났는데도 시치미 떼며 버티는 탐욕과 파렴치…. 저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다. MBC의 그 자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 <PD수첩>을 짓밟고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을 형해화한 편성제작본부장·편성국장·시사제작국장·교양제작국장 등 주요 책임자들…. 헛되고 부질없는 일에 왜 인생을 거는 걸까? 대다수 후배들과의 소통을 외면한 채 힘으로 억누르는 게 과연 상식에 맞는 일인가? 조직의 일원으로 윗선의 지시만 충실히 수행하는 게 인생의 유일한 가치인가? 그게 바로 ‘좀비’ 아닌가? 

보헤미아 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1903~1991), 88살에 돌아가셨으니 꽤 오래 사셨다. 이 분이 84살 때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 31번 Ab장조의 1악장이다. ‘보통 빠르기, 짙은 표정으로 노래하듯’(Moderato cantabile molto espressivo). 베토벤은 악보 첫머리에 ‘따뜻한 마음으로’(Con Amabilita)라고 써 놓았다. 
http://www.youtube.com/watch?v=V89Z1z9rYqc



늙어서 앙상해진 손, 거기서 이토록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나오다니, 놀랍지 않은가. 기력은 젊은이에 비해 떨어지지만, 마음만은 삿됨이 없는 순수 그 자체다. 오직 음악을 위해 평생 기량을 갈고 닦은 구도자의 모습이다. 84살 나이에 도달한 신선의 경지다. 베토벤에 대한 외경심이 오롯이 담긴 감동적인 연주, 우리에게 “착하게 늙어라, 지혜롭게 늙어라, 아름답게 늙어라”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루돌프 제르킨은 1903년 보헤미아의 유태계 러시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으니 80년 넘게 피아노만 치면서 살았다. 9살 때 빈에 가서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고, 17살 때부터 전문 연주자로 활동했다. 베를린 데뷔 때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의 건반을 맡았는데, 청중들의 앙코르 요구에 화답하여 50분에 달하는 바흐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해서 화제가 됐다. 나치가 집권하자 유태인 탄압을 피해 1939년 미국으로 망명, 베토벤 등 빈 음악의 본질을 잘 표현한 섬세한 연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부쉬,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연주한 앙상블도 명연주로 기억된다. 말보로 음악제를 이끌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60년에 내한 연주를 했다는데, 그때 나는 갓난아기였다…. (-_-)

다시 음악을 듣자. 베토벤의 소나타 32번 C단조의 2악장, ‘아리에타, 아주  느리게, 단순한 마음으로 노래하듯’(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다. 84살 노대가의 마지막 녹음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KsLojxzbuFM    
http://www.youtube.com/watch?v=TGbkUcjs_pM

 


1822년 1월에 완성했으니, 베토벤이 나보다 한 살 아래일 때 썼다. 마지막 소나타답다. 인생을 달관한 듯, 모든 고뇌를 초월해서 찾아낸 단순한 아름다움이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와 마지막 현악사중주곡들에서 볼 수 있는, 폭풍 뒤의 안식이다. 

9/16박자의 아리에타는 생각에 잠겨 고요히 노래한다. 다섯 개의 변주곡이 이어지며 감정이 점점 고조된다. 제1변주(링크 A 4:19부터), 아리에타 주제가 셋잇단 16분 음표의 파도를 타고 춤추듯 펼쳐진다. 제2변주(링크 A 6:12부터), 더욱 정교한 리듬으로 속도를 더한다. 후반부에서는 삶에 대한 사랑과 고통이 안타깝게 교차한다. 제3변주(링크 B 처음부터)와 제4변주(링크 B 3:04부터)에서는 안개처럼 뿌연 꿈과 추억을 더듬는다. 아득한 과거를 되새기는 느낌으로, 두 변주 사이의 경계도 모호하다. 제5변주(링크 B 5:25부터)에서는 아리에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클라이맥스를 넘어 피안에 도달한다. 아리에타 선율이 트릴에 실려 흘러가면 코다가 시작된다(링크 B 7:50부터). 인생 전체를 거울에 비추어 돌아보듯, 점점 고요해지며 음악이 끝난다.  

이 곡은 여느 소나타들과 달리 두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아리에타와 변주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소나타 중 마지막 악장이다. 제자 안톤 신틀러가 ‘왜 3악장을 쓰지 않았냐’고 묻자 베토벤은 ‘시간이 부족해서 못 썼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변주에서 베토벤의 정신이 요동쳐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더 이상 새 악장을 덧붙일 필요가 없음을 실감케 된다.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베토벤>, 음악세계 참조)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 그는 32곡의 피아노소나타 중 마지막 작품에서 모든 고뇌를 초월한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굳이 ‘명반’이란 말을 쓴다면 이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3곡을 84살 노 대가 루돌프 제르킨이 연주했다. 제르킨의 마지막 녹음이다.

 

 

루돌프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주라는 ‘기능’보다 음악에 담긴 위대한 천재의 영혼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링크 B 6:02부터 다시 들어보자. 클라이맥스, 최고조에 이른 감정은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된다. 유례없이 아름다운 대목이다. 진정 지혜롭게 늙은 자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 

52살 베토벤이 마지막 소나타에서 도달한 고귀한 정신세계다. 위대한 작곡가에 대한 경의를 담아 헌신적인 열정으로 연주하는 84살 노대가 제르킨의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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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쉬렴, 어여쁜 내 사람”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모차르트

 

 

“부드럽게 쉬렴, 어여쁜 내 사람 / 행복한 아침이 너를 깨울 때까지 / 그리고 눈을 뜨면 내 초상이 / 상냥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렴 / 달콤한 꿈이여, 이 분을 흔들어 재우고 / 때가 오면 이 분의 바람이 / 이 분이 가슴속에서 소중히 키워온 꿈이 / 마침내 이뤄지게 해 다오.” (오페라 <차이데> K.344 중, 작사 : 샤흐트너) 


http://www.youtube.com/watch?v=1yHrmNgMX88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 <차이데> K.344에 나오는 이 단순한 아리아는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노래를 통해서 비로소 불멸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낸다. 모차르트라면 바로 이렇게 부르기를 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를 위해 만든 아리아 ‘제 감사를 받아 주세요’ K.383이 들려온다.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언니. 모차르트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뒤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우리는 길 위의 새들이에요, 우리는 떠나야만 해요.” 멀리 연주 여행을 떠나는 음악가가 고향의 후원자들에게 바치는 이 인사의 노래는 따뜻한 우정과 작별의 아픔을 노래한다. 상냥한 미소에 한 순간 어리는 눈물방울이 엠마 커크비의 노래에서 반짝인다. 

 

모차르트의 성악곡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콘서트 아리아 ‘내 마음에서 그대를 지우라고요?’ K.505. 엠마 커크비는 지나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이 엄격한 음악만으로 사랑의 아픔과 그리움을 차분하게 노래한다. 36명의 연주자로 이루어진 고음악 아카데미(The Academy of Ancient Music)의 반주와 포르테피아노의 속삭임이 커크비의 노래와 어우러져 만드는 앙상블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부드럽게 쉬렴’이 실려 있는 앨범은 원래 L’Oiseax-Lyre 레이블의 ‘Mozart Arias’라는 LP인데, 최근 Decca에서 헨델, 하이든의 노래와 묶어서 2CD 저가 앨범으로 나왔다. 모차르트의 주옥같은 아리아 8곡이 실려 있다. 성악곡이지만 목소리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처럼 들리는 음악들이다. 2006년 모차르트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그녀를 인터뷰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 앨범에 대한 그녀의 얘기. 

“저는 청중들에게 가능한 한 조용하게 다가서려고 노력합니다. 큰 소리로 그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아요. 모차르트의 노래는 저의 이런 생각에 잘 맞습니다.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녹음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과 잘 어울리는 작은 규모의 악단이거든요.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큰 오케스트라와 함께 노래해야 한다면 아주 큰 소리를 내야 하잖아요. 하지만 조용한 악기들이 주변에 있다면 제 목소리를 더 잘 낼 수 있어요.”

음악에서 곡 자체보다 특정한 연주를 더 소중하게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물며 모차르트에서야…. 하지만 엠마 커크비는 특별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평론가들은 그의 노래가 ‘천상의 목소리’라고 한다. 분명 그렇다. 에디트 마티스, 캐슬린 배틀, 바바라 보니, 조수미 등 탁월한 성악가를 부를 때 손쉽게 쓰는 의례적인 찬사인가? 아니다. ‘천상의 목소리’라는 표현은 엠마 커크비에 관한 한 ‘찬사’가 아니라 그의 음악이 지닌 독특한 매력을 ‘냉정하게’ 요약한 단어이다.

“음악이 인간으로 하여금 천사의 환희를 엿보게 해주는 수단이라면 음악가는 시름을 달래주고 ‘무거운 영혼’을 위안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 1990년, 엠마 커크비 

이 말을 들어보면 커크비 자신도 ‘천상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엠마 커크비는 옥스포드에서 고전학을 공부한 뒤 제시카 캐시에게서 노래 수업을 받았다. 고전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자기의 음악에 대해서도 주관이 뚜렷하다. 평론가 노엘 오리건은 그의 음악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스타다. 왜? 어째서 한 성악가가 다른 많은 훌륭한 성악가들 중에서 더욱 뛰어나게 보이는 걸까? 대답은 물론 질문 속에 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우선 성악가로서의 테크닉 - 소리의 유연함과 정확성, 그리고 이 모든 요소를 노래에 맞도록 적절히 구성하는 능력 - 을 꼽을 수 있다. 둘째, 그의 지성과 학식과 통찰력에서 나오는 탁월한 해석도 빠뜨릴 수 없다. 셋째, 명료한 발음, 모든 단어에 정확한 무게를 실어주는 섬세함, 자유로운 언어 구사 능력(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세 프랑스어, 라틴어)도 한몫을 한다. 끝으로 목소리 그 자체! 그의 목소리는 바로 그의 성품을 느끼게 해준다. 신선하고, 열려있고, 솔직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주 선량한 사람일 거라는 느낌이 들고, 실제로 그는 아주 선량한 사람이다.” 

엠마 커크비의 레퍼토리는 12세기의 힐데가르트 빙엔 등 중세 음악, 존 다울랜드 · 토머스 탈리스 등 영국 르네상스 음악, 비발디 · 바흐 · 헨델 등 바로크 칸타타와 종교 음악들, 모차르트의 아리아와 모테트 · 미사곡 등에 걸쳐 있다. 모차르트의 종교 음악도 엠마 커크비의 목소리로 들어 볼 수 있으니 기쁜 일이다. 성가곡 ‘라우다테 도미눔’ (Laudate Domunum), 힘겨울 때 위안이 되는 음악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hl1jJNfhbF8 

 


모차르트의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 행복한 영혼이여’ (Exsultate Jubilate) K.165를 듣고 싶은데 어떤 연주가 좋을지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주저 없이 엠마 커크비가 노래한 것을 고르시기 바란다. 엠마의 모차르트는 특별하니까. (L’Oisaeux Lyre 레이블, 1984년) 종교음악이 아니라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라 생각하고 들어도 무방하다. 아래 블로그에서 감상할 수 있다.(http://blog.daum.net/ych7340)

1악장 알레그로 : Exsultate, jubilate (환호하라, 기뻐하라), 4번 트랙 처음부터. 
2악장 레시타티보 : Fulget amica dies (따뜻한 햇살이 빛나고), 03:38부터. 
3악장 안단테 : Tu, virginum corona (그대, 처녀들의 왕), 04:19부터. 
4악장 몰토 알레그로 : Alleluja (알렐루야), 09:51부터.

 

가장 깨끗한 목소리로 부른 종교 음악이 가장 달콤한 연가처럼 들리는 것은 자못 역설적이다. 하지만 절대자의 사랑 안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세속적인 사랑이 주는 기쁨을 음악에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엠마 커크비는 어떻게 생각할까?

PD, “당신이 부른 <엑술타테 유빌라테>, 특히 3악장 ‘그대, 처녀들의 왕’(Tu, virginum corona)은 종교음악인데도 어느 세속음악보다 더 에로틱하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엠마, “왜냐하면, 솔직하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 곡은 초자연적이고, 아름답고, 온순하지만 동시에 아주 에로틱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숙한 처녀가 모든 사람에게 깊고 놀랄 정도의 에로틱한 느낌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의외잖아요. 그러나 이러한 에로틱한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아주 미세할 뿐이에요. 그것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그녀의 생각. 

“모차르트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대표적인 작곡가입니다. 그의 음악은 우리의 영혼에게 말을 걸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줍니다. 친절하고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그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고, 그의 마음을 닮게 되는 거죠.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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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눈물,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나는 진정한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평생 세 명 만났다. 아인슈타인, 처칠, 그리고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자.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4번 C단조 K.491 중 1악장 빠르게(Allegro), 3/4박자.
http://www.youtube.com/watch?v=WHRgiTELG6A 

 

베토벤이 듣고 “나 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어!”라고 외친 바로 그 곡이다. 

파곳과 현악기들이 유니슨(unison, 여러 악기가 같은 음정을 동시에 연주)으로 첫 주제를 연주할 때 불길한 어둠이 드리운다. 작곡자 모차르트와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함께 검은 심연을 응시하고 있다. 오보에와 호른의 화음이 슬며시 더해지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팀파니를 포함한 모든 악기들이 포르테(forte, 강하게)로 주제를 반복한다. 바이올린이 미친 듯 울부짖을 때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다시 평정심을 찾는다. 오보에와 파곳의 노래를 플루트가 이어갈 때 어둠 속에서 작은 빛줄기가 다가온다. 플루트와 파곳의 화음에 담긴 그 빛은 슬픔과 고뇌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수정처럼 영롱히 빛난다. 다시 첫 주제가 등장하고, 모차르트와 하스킬은 격렬한 감정을 목구멍 안으로 삼킨다. 이윽고 피아노 솔로 부분, (2분 13초부터)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이다. 여기 클라라 하스킬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진다. 

첫 주제가 크게 울려 퍼지고, 이를 변형한 멜로디가 클라라 하스킬의 손끝에서 비단실처럼 뽑아져 나온다. (2분 45초부터) 절제된 소리 하나하나가 위엄 있는 자의 아픔을 머금은 채 아름답게 반짝인다. 피아노가 제2주제를 연주할 때, 모차르트와 하스킬은 어두운 심연 끝에서 따뜻한 안식을 발견한다. (3분 17초부터) 이제 음악의 흐름에 마음을 맡기면 된다. 

모차르트가 자유 음악가로 인기의 정점에 있던 1786년 작곡한 협주곡. 65살 하스킬이 이 곡을 연주할 때 모차르트가 직접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식 없고 소박한 그녀의 예술혼이 집약된 연주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여 빚어내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한다.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의 피아니스트였던 미하엘 켈리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모차르트가 연주할 때의 섬세한 느낌, 민첩한 손놀림, 특히 왼손의 힘 있고 당당한 베이스, 그리고 조바꿈할 때의 절묘한 분위기 반전은 나를 경악케 했다.” 모차르트의 전기를 제일 먼저 쓴 니메첵은 이렇게 말했다. “빈에서 그의 피아노 솜씨는 어딜 가나 찬탄의 대상이었다. 자유자재로 건반을 누비는 그의 놀라운 테크닉, 특히 왼손의 베이스는 독보적인 것이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력은 그의 연주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모차르트에게 보낸 이 찬사를 클라라 하스킬에게 바쳐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모차르트는 훌륭한 연주는 ‘좋은 감성과 느낌으로, 작곡가가 직접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편지에 쓴 바 있다.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가 그러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연주를 가리켜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라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모 타치야나 니콜라예바는 카라얀을 만나러 잘츠부르크에 간 적이 있다. 그날 음악회에서는 클라라 하스킬이라는 낯선 이름의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를 연주했다. 니콜라예바의 증언. 

“하스킬이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구부정한 자세에 희끗희끗한 백발은 흡사 마녀 같았고, 마치 무언가에 홀려 있는 사람 같았다. 오케스트라의 서주는 훌륭하게 시작됐지만 그녀는 오케스트라 소리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클라라 하스킬이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는 순간, 카라얀의 존재는 내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를 발견한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노태헌, 살림, 2012. p.22) 

EBS의 <지식채널-e>에서 그녀를 소개한 바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5uL3geIq1-M  

 

클라라 하스킬은 1895년 1월 7일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5살 되던 해, 악보를 읽을 줄 몰랐던 그녀는 한번 들은 모차르트 소나타 한 악장을 외워서 연주했고, 조(調)를 바꿔서 한 번 더 연주했다. 이 놀라운 재능에 감동한 친척이 7살의 하스킬을 빈에 데려가 뛰어난 피아노 교수인 리하르트 로베르트의 지도를 받게 했다. 11살에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당시 이 ‘신동’을 가르쳤던 거장 알프레드 코르토는 석달 만에 “더 가르칠 게 없다”고 말했다. 하스킬은 입학 4년 만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부문 수석으로 파리 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 외젠느 이자이,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 당대 최고의 거장들과 함께 연주하며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혜성처럼 떠올랐다. 

 

다발성 신경경화증을 앓기 전의 클라라 하스킬


눈부신 재능, 그리고 탁월한 감성과 지성…. 피아노 세계의 미래는 하스킬, 젊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18살, 한창 피어나던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불행이 닥친다. ‘다발성 신경경화증’(Multiple Sclerosis)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게 된 것. 뼈와 근육, 그리고 세포가 엉겨 붙는 이 무서운 병에 맞서 하스킬은 4년 동안 온몸에 깁스를 한 채 견뎌야 했다. 그녀의 허리는 계속 굽어서 결국 꼽추가 됐고, 20대의 아름다운 외모는 노파 같은 얼굴로 변해 버렸다. 그녀를 돌보던 어머니조차 1918년, 그녀 나이 23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 같은 고독과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음악의 위대한 힘이 그녀를 살려 낸 걸까. 하스킬은 1921년 모차르트를 연주하며 다시 무대에 돌아왔고,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들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곱아드는 손가락 끝으로 한땀한땀 영롱한 소리를 엮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 ‘기적’이었다. 1924년부터는 미국, 캐나다, 영국을 종횡무진하며 왕성히 활동했다. 

하스킬의 몸은 본능적으로 전쟁을 거부했던 걸까. 1차 대전 내내 투병 생활을 했던 그녀는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또 한 번 병마(病魔)와 싸워야 했다.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그녀는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마르세이유로 피신해야 했고, 이 가혹한 운명은 그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뇌졸중이 급습했고, 뇌와 척수에 종양이 생겼다. 게다가 뇌종양은 시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웠고, 실명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대수술은 다행히 성공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기어이 회복한 그녀는 종전 후인 1947년,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노태헌, 같은 책 참조)

이로부터 1960년까지 10여년, 하스킬은 연주자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불후의 명연주를 남긴다. 가장 소중한 음반은 맨 앞에 링크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4번 C단조, 그리고 <지식채널-e>의 배경음악으로 깔린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가 함께 들어 있는 LP다. 아래 링크에서 클라라 하스킬이 마지막으로 녹음한 모차르트 협주곡 20번과 24번 전곡을 들을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2ps-Dd3h3qg&feature=related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0:00:00~0:30:05)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 (0:32:05~0:59:45)

 

52살에 재기한 하스킬은 26살 아래인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루미오와 음악 단짝이 됐다. 그녀가 10대였을 때 함께 연주했던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 외젠느 이자이의 계보를 잇는 젊은 그루미오, 그 역시 맑고 따뜻한 음색과 섬세한 해석으로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녹음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특히 E단조 K.304는 비할 데 없는 명연주다. 과장된 감정 없이 담백하게 슬픔을 노래할 때 고귀한 조형미가 느껴진다. 하스킬의 청초하고 순수한 피아노, 그루미오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바이올린이 만든 앙상블은 이보다 더 완벽한 조화는 불가능할 거라는 느낌을 준다.

아르쿠르 그루미오와 함께 녹음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 2악장 ‘메뉴엣의 속도로’ (Tempo di Menuet).

http://www.youtube.com/watch?v=26gyS5zxvHM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이 죽던 해인 1960년의 마지막 녹음,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 파리 콩세르 라무뢰 관현악단의 협연.

 

모차르트가 파리에 머물던 1778년 6월말, 함께 왔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E단조 소나타는 그 때의 아픔을 담고 있는 곡이다. 모차르트는 자기가 소홀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는 자책감을 느꼈다. 슬픔과 회한이 범벅된 마음, 그러나 모차르트는 큰 소리로 울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고 내면의 아픔을 담담히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하스킬과 그루미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모차르트의 의연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스킬은 자신의 연주에 대해 무서우리만큼 객관적이었다. 녹음이 끝나고 몇 주, 몇 달이 지나 냉정한 거리를 되찾게 된 다음에야 자기 음반을 듣고 평가했다. “방금 모차르트 K.271과 K.466을 들었는데, 모두 너무 실망스러워. 내 평생 진정 만족할 만한 음반은 하나도 못 만들고 죽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루미오와 함께 녹음한 모차르트 소나타, 특히 K.304는 꽤 괜찮은 연주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노태헌, 같은 책 p.21~p.23) 

클라라 하스킬은 1960년 12월 6일 브뤼셀 지하철의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가다 현기증을 일으켜 굴러 떨어졌고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다음날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루미오와 연주가 예정돼 있었다. 병원에서 잠시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동생 잔느와 릴에게 말했다.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구나. 그루미오씨에게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모른다고 전해 주렴.” 

66회 생일을 한 달 앞둔 12월 7일 아침, 하스킬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다시 병상에서 일어나 연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클라라 하스킬이 남긴 마지막 말. “그래도 손은 다치지 않았잖니!” 

그녀의 주요 레퍼토리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에 걸쳐 있다. 스카를라티, 바흐, 힌데미트도 있다. 그녀가 쇼팽을 한 곡도 녹음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녀의 연주는 과장이 없고 순수하며, 맑고 투명하다. 단정하고 섬세한 프레이징은 바이올린을 전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열정적이고 격렬한 감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점차 연주에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해 나갔다. 그녀는 뛰어난 기교를 과시하기보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기쁨과 슬픔, 그 정제된 감정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클라라 하스킬, 그녀의 음악은 강하다. 그 순수한 내면의 힘은 몇 차례의 치명적인 병마를 이겨내며 오랜 세월 다져진 음악혼 아니었을까. 모차르트 C단조 협주곡과 E단조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슬픔…. 그것은 험한 세상의 역경을 이겨 낸 천사의 영혼, 그 깊은 곳에 맺혀 있는 고요한 눈물 아니었을까. 

“건반 하나 누르는 것조차 고통이었던 가혹한 운명의 비르투오소(virtuoso, 거장) 클라라 하스킬. 티끌 하나 없이 영롱한 그녀의 모차르트 선율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매 순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았던 하스킬에게는 모든 연주가 곧 마지막 연주였다. 섬세하고 청아한 터치가 다시 들을 수 없을 듯 깊은 여운으로 남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을 것이다. 천형(天刑)의 아픔을 천상의 소리로 승화시켜낸 클라라 하스킬. 재능은 신이 내린 것이었으나 육신의 한계를 넘은 것은 인간의 의지였기에 그녀의 피아노는 더욱 숭고하게 울린다.”  (유투브, Woman Ahead Time - Clara Haskil, Handsome3416) 
http://www.youtube.com/watch?v=eREkeqKp94U&feature=relm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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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다른 이름, 루빈슈타인

95살을 ‘영원한 청년’으로 살며 연주하다

 

“행복의 비결은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죠.”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1886~1982)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폴로네즈 Ab장조 Op.53, ‘영웅’을 들어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nsl7XDTBaJo

경이로운 연주다. 특히 끝부분, 왼손을 머리 위까지 번쩍 들어올려 건반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공중제비 타건’은 탄성을 자아낸다. 그의 엄청나게 큰 손은 호랑이가 먹이를 낚아채듯 건반 위로 수직 하강한다. 거인과 같은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압도해버리는 옛 시대 거장의 카리스마…. 어떤 대목에서는 의자에서 들썩들썩 일어났다 앉으며 몸무게를 실어서 연주한다. 완벽한 포르티시모,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밝음 그 자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그의 테크닉은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탁월한 전달력이다. 초인적인 포르티시모에 이어서 펼쳐지는 서정적인 패시지는 비할 바 없이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구조와 논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혼의 정수를 명료하게 청중의 마음으로 전달한다. 지성과 감성의 완벽한 조화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쇼팽이 있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민속 춤곡인 폴로네즈. 쇼팽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이 춤곡의 리듬에 담아서 독자적인 폴로네즈의 세계를 구축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폴란드 민중의 정서를 담은 곡들도 있고, 찬란하게 빛나는 폴란드의 꿈을 거침없이 노래한 곡들도 있다. ‘영웅’ 폴로네즈는 후자에 속한다. 쇼팽의 폴로네즈 중 가장 웅장하고 완숙한 경지를 들려주는 곡이다.    

루빈슈타인은 이 곡을 연주회의 마지막에 즐겨 배치했다. 끝 부분의 화려한 테크닉은 자연스레 청중의 환호와 열광을 이끌어냈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루빈슈타인의 조국이기도 했다.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피아노 연주사(史)의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정통 폴란드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의 쇼팽은 알프레드 코르토의 쇼팽보다 덜 귀족적이지만 훨씬 인간적이었고, 그만큼 폴란드 민중의 정서에 가까웠다. 음악 칼럼니스트 박제성은 루빈슈타인을 가리켜 ‘쇼팽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다. (네이버, 클래식 ABC, 명연주자 열전 - 루빈슈타인) 

루빈슈타인이 각별히 사랑했던 쇼팽의 왈츠 C#단조 Op.64-2를 들어보자. 그는 청중들이 앙코르를 외치면 이 곡을 즐겨 연주했다. 폴로네즈에서 보여준 엄청난 힘과 빛, 카리스마 대신 따뜻하고 섬세한 감수성, 아름답게 노래하는 마음이 돋보인다. 
http://www.youtube.com/watch?v=ehSKhRburRQ

 

루빈슈타인은 1886년 폴란드의 로지에서 직조업을 하는 유태인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 한번 들은 멜로디를 척척 연주하고 조옮김까지 해 내는 신동이었다. 꼬마 루빈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본 요제프 요하임(브람스의 친구이자 바이올린의 거장)은 “6살때까지는 평범한 아이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겠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7살 때 폴란드에서 데뷔 연주회를 한 뒤, 베를린 · 파리 · 뉴욕을 넘나드는 연주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페루치오 부조니, 외젠느 이자이, 자크 티보, 파데레프스키 등 위대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젊은 루빈슈타인은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시가(cigar)와 와인을 즐겼고, 연습도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몇 가지를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틀릴 위험이 있는 어려운 패시지는 살짝 고쳐서 쉽게 연주하곤 했죠. 저는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다. 빠른 패시지나 분산화음을 완벽하게 연습하려고 몇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그냥 연주회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지요.” (노태현,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살림, p.11)   

젊은 루빈슈타인에게 유럽과 미국의 청중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평가들은 언제나 냉담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테크닉이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음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 

루빈슈타인이 진정 위대한 거장으로 거듭난 것은 40살 무렵이었다. 1920년대, 요제프 호프만의 연주를 들은 뒤 쇼팽 연주의 새로운 경지를 깨닫고 연습에 매진하게 된 것.

“훗날 사람들이 나를 두고 ‘좀 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지 않을까? ‘내 아내와 자식에게 남길 것이 이 정도의 명예 뿐이었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날부터 피아니스트로서 내 삶이 다시 시작됐고, 훗날 큰 결실을 거두었다. 나는 즉흥연주자에서 순수주의자로 바뀐 것이다.” (노태헌, 같은 책, p.11~12)

 

그의 뒤늦은 노력은 1936년 미국 공연에서 빛을 발했다. 비평가들은 “6개의 손과 30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란 표현으로 그의 연주를 극찬했다. 그러나 그가 연주한 쇼팽은 여전히 비평가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데레프스키, 호프만,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낭만주의 계열의 거장들과 연주 방식이 달랐던 것. 루빈슈타인의 말.

 

젊은 시절의 루빈슈타인. 그는 자기 재능만 믿고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는 어릴 적부터 쇼팽의 음악을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지루하고 형편없는 연주  뿐이었습니다. 다들 쇼팽에 대한 과장된 신화를 신봉했기 때문이죠. 쇼팽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음악가로 인식됐고, 감상적인 여자들을 위해 야상곡이나 작곡하는 낭만주의자로 여겨졌어요. 이런 어이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으니 쇼팽을 형편없이 연주할 수밖에….”

반대로, 그의 쇼팽은 무미건조하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루빈슈타인은 스스로 기교는 불완전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완벽하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은 반대였다. 

“나는 고집스레 쇼팽을 프로그램에 넣었습니다. 비평가들 또한 지겹도록 똑같은 평을 써 댔죠. 한참 후에야 내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쇼팽을 내 방식대로 청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루빈슈타인은 낭만주의의 기치를 내건 마지막 피아니스트였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의 저속한 면은 피하고 좋은 면만 모두 취한 현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선율의 흐름을 끊거나 리듬을 엿가락처럼 늘이고 줄이지 않았다. 기본 템포를 유지했으며 급작스런 감정 몰입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감성을 표현했다. 기품 있는 루바토를 구사하여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할 것,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균형 위에서 아름답게 노래할 것, 영혼의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의 정서와 의미를 드러낼 것. 루빈슈타인의 쇼팽 해석, 그 출발점이다. 

루빈슈타인의 말. “음악에서 진정한 예술성은, 음표를 정확히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의 쉼표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 G단조 Op.37-1을 들어보자. 첫 음만 들어보자.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고 잠시 멈춰 있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매는 느낌이다. 순간의 침묵이 음표보다 더 많은 것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http://www.youtube.com/watch?v=9PB3bYaWosM

 

그는 영원한 젊은이였다. 진정한 비르투오소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강인한 정신력과 음향을 보여주는 걸까. 루빈스타인은 70세, 75세, 80세, 85세를 넘기면서 생명력과 힘을 점점 더해갔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그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젊습니다. 그러니 음악 또한 젊은 게 당연하죠. 그는 모든 음악을 마치 처음 연주하듯 연주합니다.” 

1894년, 7살때 폴란드에서 가진 데뷔 리사이틀부터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1976년 런던 위그모어 홀까지, 그는 80여년 동안 전세계 청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평생 라이벌로 꼽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다. 쇼팽을 제외하면 레퍼토리도 거의 겹치지 않았다. 호로비츠가 밤의 세계를 지배했다면 루빈슈타인은 언제나 태양 아래서 빛났다. 그는 호로비츠의 경이로운 테크닉을 찬탄하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했다. 그러나 루빈슈타인은 자신이 ‘더 나은 음악가’라고 말했다. 타당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는 평생 독주, 협연, 앙상블을 통해 음악의 모든 것을 즐겼다. 그는 술, 여행, 미술, 사랑 등 인생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나눈, 멋진 이웃이었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루빈슈타인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직접적인 음향을 만들 수 없었다. 
    
루빈슈타인은 자기 영달만 추구한 양심 없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2차 대전 때는 나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입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적십자를 돕기 위해 많은 연주회를 열었다. 전쟁 후 미국에서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매진이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약했다. TV 음악회에도 많이 출연했다. 그는 돈방석에 앉았다.

“내가 연주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들은 보잘 것 없는 돈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연주회와 레코딩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죠. 그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현실입니까.” 

영원한 청년, 영원한 로맨티스트였던 루빈슈타인. 그가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번 E단조는 단연 최고다. 쇼팽의 사랑과 열정, 꿈과 우수…. 80살 노대가의 연주에서 20살 쇼팽의 마음이 고귀한 모습으로 빛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nP_VQ63o_JI

 

(이 글은 박제성의 ‘명연주자 열전 - 루빈슈타인’ (네이버, 클래식 ABC)와 노태헌의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살림, 2012) 내용을 참고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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