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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by Wood-Stock 201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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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청년들이여, 두려워하지 말자" 

기사입력 2011-11-10 오전 8:26:41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를 만났다. 그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핵심 축을 담당했던 민중가요,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창립멤버였다. 그리고 지금은 성공회대 교수 노래패인 '더숲트리오'를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 그를 부르는 곳, 그가 가야할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노래를 부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80년과 90년을 지나 2000년 된 지금까지도 노래를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일까?

"한국사회는 여전히 극우 헤게모니가 남아있고, 그것이 정권이 바뀌어도 한국사회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게 하는 이유다. 현재로서는 그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먼저 광범위한 시민사회적 연대를 통해서 최대한 조중동과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극우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그 다음에 상식적 진보와 상식적 보수가 경쟁하는 구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 일단은 광범위한 시민사회적 연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한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노래로 시대를 빚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철저하게 승자독식구조이다. 정치나 경제, 특히 문화가 그렇다. 소수의 승자. 메이저리그만이 남아있는 사회이고, 마이너리그가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마이너리그가 풍부하게 살아날 때 주류라는 메이저리그도 지속가능할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의 문화적 스펙트럼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의 마이너리그를 키우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으로 주류와 비주류 음악이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어 궁극적으로 한국의 음반시장과 대중음악계의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다.

"기성세대 문화와 신세대 청소년 문화는 담론적으로는 서로 갈등을 하지만 사실상 시장에서는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적대적 공생관계다. 기성세대는 그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또 청소년 문화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수립한다. 청소년들은 그들의 문화를 통해 저항의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결국 그들은 기성세대의 경제적 기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기성세대의 문화와 청소년의 문화가 각축하는 사이에서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 세대의 문화는 사라졌다. 대학생들도 사실상 10대 청소년들 문화의 주변부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청년세대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내가 몇 년 전부터 갖는 중요한 고민이다. 이것이 한국사회 문화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모색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70 · 80년대 청년문화가 한국 사회 변혁을 이끌어오던 시대를 지나와서일까. 생존 경쟁 속에 문화를 창출하기는커녕 향유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청년들에 대한, 그리고 이들의 청년세대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누구보다 깊고 무겁다.

그의 청년 시절은 어땠을까. "청년시절은 아시다시피 한국사회가 군사독재 억압 속에서 암울했던 시기였고,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의 가사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돌아 앉아 있는' 불만스러운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이 사회 체제에 적응을 해서 잘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순간에도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라는 자의식을 항상 느껴야만 되는 시기였다." 늘 밝게 웃으며 답하던 그가 이 대목에서 살짝 무거워진다. 이 대답을 들으면서 문득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떠올랐던 건 왜일까.

"청년세대가 겪는 두려움이란 아마도 모두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나 홀로 버스에서 내렸을 때의 적막함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면 충분히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있고, 또 새롭게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청년들에게 아등바등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졸업을 할 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건 깨지고 외롭고, 아플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 뒤에 학교와 교수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가 큰 힘이 되어 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함께 아파해 줄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기성세대로서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다."

그래! 그래서인가보다. 인터뷰 중간에도 그가 아끼는 제자인 탁현민 교수의 공연 섭외 요청에 "그래! 해보자"라며 쑥스럽게 씩 웃는 이유가 말이다.


▲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근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있다면?

요즘 신영복 선생님과 함께 내가 속한 더숲트리오가 강연 콘서트 투어를 하고 있다. 강릉, 양산, 인천에서 했고 서울, 수원, 광주 등 여러 군데서 더 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 맡은 일들이 있어서 그와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으로서 내년 시상식을 준비하고 있고, 한국대중음악학회 회장을 맡고 있어 학회를 꾸리고 저널을 내는 일을 한다. 대중음악 연구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학회를 끌어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데 몇몇 헌신적인 연구자들 덕에 그럭저럭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 웹툰, 웹만화에 대한 책을 한 권 내려고 준비 중이다. 생각보다 진도가 많이 나가진 못했다. 학기 중에는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수업에 쫓기다보니 방학 때 해야지 하면서 미루는데, 막상 방학 때도 일들이 많이 생겨서 평소나 방학 때나 별 차이 없이 지나간다. 내가 원래 게으른 성정이어서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하고 있다.(웃음)

"더숲트리오" 강연 콘서트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2009년에 시민단체에서 신영복 선생님과 더숲트리오가 함께 하는 강연콘서트를 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다. 사실 신영복 선생님께 강의 요청이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온다. 신영복 선생님이 모든 강의를 다 가실 수도 없고 어디는 가고 어디는 안 가고 할 수도 없어서 대체로 거절하시는 편이다. 시민단체들이, 지역별로 모아서 자리를 만들 테니 한번씩 와주십사 부탁하면서 강연콘서트가 마련되었다.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2월까지 7개 도시에서 강연콘서트를 했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는데, 그 공연이 그동안 다소 힘이 빠져 있던 시민 사회 여러분들이 새롭게 만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로서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보람을 많이 느꼈다. 올해도 희망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어서 다시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이 강연을 하시고, 우리가 대화를 하면서 공연을 진행한 후 마지막에는 신영복 선생님과 더숲트리오 멤버 모두가 앉아서 대화하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

성공회대 교수 노래패 "더숲트리오"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들도 1년에 한 두 번씩 수련회를 간다. 가면 이런저런 세미나를 하기도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밤에는 술 마시고 논다. 그럴 때마다 내가 기타를 들고 가서 같이 술 마시며 노래를 부르며 논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많고 비교적 비슷한 경험을 하고 살아와서 공감대도 있고 재미있다. 마치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거의 밤을 새며 노래를 부르고 논다. 그러다보면 항상 세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 세 사람이 더숲트리오가 멤버가 된 것이다. 우리가 처음 공개 무대에 선 것은 2004년 샤우트 아시아 공연 때다. 아시아 지역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불러서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모금을 위해 공연을 열었던 것인데 그 때 YB(윤도현 밴드), 강산에, 김C, 더숲트리오, 그리고 성공회대 교수 몇 분이 무대에 섰다.

첫 무대는 어떠했나?

아! 엄청나게 폭발적인 반응이었다.(웃음) 학생들이 많이 좋아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매 학기 한번씩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다. 우리 학교 교양과목 중 가수 이지상씨가 강의하는 과목이 있다.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라는 과목인데 매 학기 종강시간에 우리가 출연한다. 가수가 강의하고 교수가 노래하는 시간인데 학생들이 아주 좋아한다.

최근 대학생 등록금 문제 관련 서화전을 기획,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2007년에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학생 등록금 문제와 관련 근본적 해결방안이 있다고 보는지?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우리 대학 교수서예회(수서회)에서 지난 8월말에 등록금을 못내는 미등록 학생들을 위한 서화전을 열었다. 이와 관련해서 기자들이 등록금 해결을 위해 교수들이 나섰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등록금 문제는 그런 식의 일시적 모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등록금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고, 한국 대학교육 전반의 문제이다. 대학교육의 기본적인 방향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그에 따른 교육전반의 재구성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 장학금이나 모금 형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교육 전체의 공공성이라는 차원에서, 이 공공성을 어떻게 회복해야하는가라는 장기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 대학이 80% 이상 사립학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학교육이 국가 백년대계라는 차원이 아니라 사업으로, 장사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결국 그 부분이 바뀌어야 되고, 그런 차원에서 장기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에 한진중공업과 명동 마리에 용역으로 투입된 사람들 가운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용역 일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신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기사였다. 결국 대학 등록금, 청년실업,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등록금 문제 하나만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대학 교육의 방향과 성격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정책비전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노동하기 좋은 나라', 또는 '노동자로 사는 것이 떳떳한 나라'가 되어야 궁극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관련하여 등록금문제, 취업문제, 정체성의 문제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청년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두려움이다.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그 불안함 속에서 배타적인 자기개발에 몰두하는 동안 한국사회에서 청년의 역할이 거세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현재 사회 시스템 상위에 있는 기득권들에 이익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조장된 두려움을 통한 사회소통의 배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청년다운 색깔을 상실하게 만든다. 청년들이 과감하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위로하고 소통하며 나아간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런 의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청년세대의 문제는 혼자 고민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

청년세대가 겪는 두려움이란 아마도 모두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나 홀로 버스에서 내렸을 때의 적막함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면 충분히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있고, 또 새롭게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유로 살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그렇게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 가야한다.

물론 청년들에게 아등바등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취업이라는 당장의 어려움과 그로부터 오는 고통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인지 나 스스로도 모순을 많이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늘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놓지 말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정당하게 분노하되 현실적 삶을 추구해야하는 이중고에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더라도 힘을 내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졸업을 할 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건 깨지고 외롭고, 아플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 뒤에 학교와 교수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가 큰 힘이 되어 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함께 아파해 줄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기성세대로서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다.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2004년도부터 한국대중음악상을 제정해 계속 시상해온 것으로 아는데, 한국대중음악상은 어떤 상인가, 그 상을 만든 이유가 있다면?

대중음악상의 가장 중요한 취지는 음악적 성취를 평가해서 상을 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상은 대중성과 상업성을 기준으로 상을 주었다. 이런 지점에서 음악적 평가를 통해서 주는 상이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관심 있는 평론가들, 기자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류방송매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위 인디음악이 아무래도 상을 많이 받게 된다. 웬 '듣보잡' 상이냐, 비주류 음악상 아니냐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주류권의 음악인들도 상을 많이 받았다. 상대적으로 다른 상에 비해서 비주류 음악인들이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대중의 입장에서 잘 모르는 이름이 많이 나오다보니 오해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음반이 팔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좋은 음악이냐, 아니냐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상이다. 이 대중음악상에서 현재 비주류 음악이 많은 상을 받는다는 것은 주류음악에서 새로운 음악적 성취가 이루지지 않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대중음악상 자체가 비주류 음악상처럼 인식이 되니까 주류매체에서 외면하고, 거의 적대시하다시피 한다. 그런 가운데서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초반에는 문화일보에서 주관을 해서 큰 걱정은 없었는데 문화일보와 손을 놓고, 독자적으로 시작하면서 문화관광부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정부가 들어오면서 지원이 끊어져서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최근에 한겨레신문의 지원으로 다시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일련의 이런 과정을 겪다보니 대표로써 고심을 많이 했고, 힘들었다. 내가 다른 능력은 뛰어난데 돈 만드는 능력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다.(웃음)

대부분의 대중이 주로 방송매체를 통해 주류권의 음악만을 접하게 된다. 수많은 음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중은 그 음악을 접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음악상이 그늘진 곳에 머물고 있는 좋은 음악을 대중들에게 전할 수 있고, 소개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대중과 음악인들 사이에 새로운 매개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의미가 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주류방송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음악적 경험의 폭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비주류 음악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롭게 대중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80~90년대 했던 문화운동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상자가 있다면?

주류권의 메인 스타인 엄정화씨가 이상을 받고 기뻐하면서 가장 받고 싶었던 상이라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빅뱅의 태양도 기억에 남는다. 주류권의 아이돌들이 대중음악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2009년도에 우리가 지원금을 못 받아서 원래 예정되어 있던 장소를 취소하고,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관계자들만 모여서 시상식을 했었는데, 장기하, 언니네이발관 등 많은 음악인들이 수상소감 등을 통해서 대중음악상을 응원해주고, 당시 문화관광부의 처사에 대해서 함께 분노해주었다.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가수가 아닌 음반과 곡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아닌 작품의 질로 선정함으로써 주류와 비주류 음악 간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한국대중음악상'을 만든 사람으로서 요즘 대중음악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나는 가수다' 열풍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예능프로라고 생각한다. 예능이라는 틀을 씌움으로써 가수들의 음악에 대해서 많은 대중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꼭 예능이라는 형태를 빌어야만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가라는 점에서 다소 씁쓸하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도 열심히 보았다.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취하니까 매회 탈락하지 않기 위해 누구나 들어도 아는 가수들이 최선을 다한다. 대중들의 입장에선 그런 모습 자체가 볼거리이고,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수다를 보고 있는 것이 피곤해졌다. 뛰어난 가수들이 서바이벌을 위해 자기 개성을 버리면서까지 점수를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음원들이 잘 팔리는 것에 대해 뭐랄 수는 없지만, 그 음악들만이 음원차트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날 아이돌 중심의 음악 세상을 만든 주범 중 하나가 방송인데, 음악성 있는 가수들도 방송, 그것도 서바이벌 예능을 통해서만 생존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대중음악 역대 명반 1위서부터 3위, 딱 3장의 명반을 선정한다면?

내 개인적인 인연과 주관으로 선정을 한다면, 하나는 김민기씨의 1971년 독집 음반이다. 이 음반은 한국대중음악사에 최고 명반이라고 늘 생각한다. 내가 김민기씨와 개인적인 인연도 있고,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내가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 1984년 노찾사 1집이다. 내 젊은 시절의 피와 땀이 일부 녹아있는 음반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처음으로 소위 운동권 민중가요 자원들이 합법적인 형태로 표현된 음반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나오자마자 바로 매장되기는 했지만…. 다음으로는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1,2) 음반이다. 광석이는, 그 친구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냥 가수가 되고 싶은 대학생이었는데 만나서 함께 노래팀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가수가 되기 전까지 함께했던 아끼던 후배였는데, 보컬로서의 광석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나름의 음악적 경험이 녹아있는 음반이 다시 부르기 음반인 것 같다.

가수 김광석과 같이 활동을 했었나? 관련해서 김광석에 대한 기억을 잠깐 듣고 싶다.

광석이가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나서는 사실 자주 못 만났다. 어느 날 시내에서 내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차 한 대가 뒤따라 들어왔다. 따라온 차에서 광석이가 내렸는데 길에서 내가 차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쫓아 온 것이었다. 내가 "어. 왠일이냐"라고 물었더니 "그냥 형 얼굴 못 본지 오래 돼서, 반가워서 인사나 하려고 쫓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둘이 주차장에 서서 담배 하나씩 나눠 피고, 광석이가 "갈께요"하고 갔다. 그게 내가 본 광석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영화 세 편을 추천한다면?

하나는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 1948년도 영화이다. 전후 이탈리아의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이다.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기도 하고 내 인생의 걸작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다. 1982년 영화인데 소위 포스트모던 인문학 담론에 관련해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SF영화로도 재미있고, 철학적 이야기 거리도 풍부한 영화이다. 또 하나는 캔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다. 1996년도 영화인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영국인의 이야기이고, 스페인 내전의 세계사적 의미와 함께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대중문화의 변화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봐왔는데, 70년대,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와 현재 대중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 보는지?

70~80년대 대중문화를 규정하는 가장 큰 힘은 정치권력이었다. 대중문화의 거의 모든 부분이 철저한 검열을 통해야만 나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고,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다시 정치적 억압을 통해 가위질을 당하거나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대중가요의 경우, 사전에 악보와 가사를 검열 받아야 했다. 개작 지시를 받거나 수정지시를 받으면 다시 수정을 해서 심의를 받고 나서야 음반이 나올 수 있었다. 음반이 나오면 다시 그것을 납본해서 제대로 나왔는지 확인을 받아야 했고, 레코드 자켓은 자켓대로 검열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음반으로 나온 후에도 방송에 나가는 것이 적합한지 또 심의를 통해 허가를 받아야 방송에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는 젊은 세대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적 의지가 대중문화를 통해 표현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70년대 초반에는 청년문화라는 것이 있었고, 나름대로 그 안에서 젊은 세대의 낭만, 자유주의 등이 표현되기도 했다. 물론 70년대 세시봉 세대 청년문화는 사실 청년세대 문화라고는 하지만 청년 엘리트들의 문화였고, 청년 대학생들의 문화였다.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 밖에 되지 않았고, 그만큼 대학생이 일종의 선택받은 집단이었다. 통기타 음악도 사실 청년세대 전체를 대표한다기보다 대학생들의 청년문화로 볼 수 있다. 80년대 민중문화 시대가 오면 대학생들의 세계관 자체가 변화하면서 소위 농활도 하고 공활도 하고, 노동자로 존재이전을 하면서 노동계급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이런 요소들이 대학생 문화에 수용되면서 중요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70년대 청년문화와 80년대 민중문화는 같은 청년세대의 문화라 하더라도 상당한 세계관의 차이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75년도에 크게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한 가지는 대중가요 재심사였다. 그때까지 나온 모든 가요를 다시 한 번 검열을 한 것이다. 그 해만 223곡을 금지시켰다. 또 하나는 대마초 파동이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있었던 통기타 가수들이나 영화감독이 대마초를 피웠다는 이유로 활동을 완전히 못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이런 청년문화 조차 사라진 시대가 된다. 청년문화가 강제 퇴출된 70년대 말 이후로는 언더그라운드에 운동권 문화 혹은 민중문화라 불린 새로운 대학문화가 생겨난다. 80년대 내내 대학은 이른바 운동권 문화, 민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지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70년대, 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90년대가 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정치적 억압이 약화되는 대신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대중문화를 지배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대중문화 시장이 상업주의의 장이 되었다. 가장 적극적인 소비층인 10대 중심의 대중문화 판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면서 한국사회 문화적 지형은 소위 기성세대가 만들어 내고 향유하는 문화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문화로 양분되게 되었다. 청소년 문화는 나름대로 그들의 에너지를 담고는 있지만 시장에서는 주류가 된다. 담론적으로는 비주류지만 시장에서는 주류라는 모순이야말로 90년대 신세대 문화의 핵심적 성격을 말해준다. 기성세대 문화와 신세대 청소년 문화는 담론적으로는 서로 갈등을 하지만 사실상 시장에서는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적대적 공생관계다. 기성세대는 그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또 청소년 문화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수립한다. 청소년들은 그들의 문화를 통해 저항의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결국 그들은 기성세대의 경제적 기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세대가 문화를 통해 나름의 불만을 표현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서 놀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한편, 기성세대의 문화와 청소년의 문화가 각축하는 사이에서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 세대의 문화는 사라졌다. 대학생들도 사실상 10대 청소년들 문화의 주변부에 놓이게 된다. 청년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생각이나 세계관을 표현하는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70~80년대 문화와 지금의 문화가 갖는 가장 큰 차이인 것 같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청년세대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내가 몇 년 전부터 갖는 중요한 고민이다. 이것이 한국사회 문화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모색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청년문화의 성격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78학번인데 유신 말기와 5공화국 초기의 질식할 듯한 시기에 대학시절을 보냈다.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서 대학 내 문화운동에 발을 디디게 된 셈이다. 졸업을 하면서 친구들과 대학내 노래운동을 대학 밖으로까지 연장하고 확산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 같은 그룹도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공연 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 주로 글을 쓰면서 노래운동을 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활동을 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소위 민중문화권에서 언더그라운드로만 존재하던 민중가요가 노찾사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합법적인 음반으로 나오고 방송도 하게 되었다. 또 공연을 통해서 많은 대중을 만나는 시기를 굉장히 감동적으로 경험 했었다. 90년대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한국의 사회적 정치지형이 굉장히 빠르게 변화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80년대의 대결의 논리 또는 이념논리로 대중을 모으기가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신세대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 새로운 세대에게 80년대의 민중문화는 무언가 촌스럽고, 무겁고, 억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지나치게 비장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서태지 같은 새로운 스타들이 그 세대의 에너지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면서 대학문화도 그 방향으로 포섭이 되고, 결국 민중문화의 근거지였던 대학이라는 공간의 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노찾사를 비롯한 80년대의 진보적 민중문화도 사실상 과거와 같은 활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생각에 80년대의 청년세대가 가졌던 민중문화의 핵심은 결국 나 개인이 아닌 역사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전망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나한다. 이에 비해 서태지 이후 신세대들의 문화는 개인에 대한 발견, 개인의 욕망과 행복과 같은 가치 추구로 볼 수 있겠다. 결국 이 두 가지의 접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80년대 민중문화도 아니고 90년대 신세대 문화도 아닌, 80년대 공동체적 관심과 90년대 개인의 발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형태의 새로운 문화적 공간을 대학이 다시금 창출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편향된 대중문화 시장, 새로운 청년문화?

요즘 대중문화 시장을 보면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승자독식구조가 강하게 드러난다. 대중가요로 이야기하면 아이돌이 90%를 갖고, 홍대 앞 수많은 인디밴드들이 10%를 갖는 그런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채 청소년 문화의 주변부 시장으로 되어있다.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 공약이 축제 때 아이돌 스타 데려오는 거라지 않나. 대학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단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창조적 자극이 사라진다는 의미와 같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디음악이나 독립영화와 같은 나름의 사회성과 저항성, 그리고 실험성과 진보성을 가지고 있는 비주류 문화의 자원들을 대학이 수용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주류 문화의 입장에서는 시장을 갖게 되는 것이고, 대학문화의 입장에서는 주류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효과를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비주류문화가 튼튼한 재생산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며, 대학문화는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방향이 새로운 시대 청년문화의 모색 중 한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학문화의 중요성과 역할

과거에는 대학이 진보적인 청년문화, 민중문화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고 그것이 대중문화 전반에 나름의 창조적 활력을 제공했다. 지금은 대학문화가 죽어있는 상황에서 자본의 시장논리만이 주류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어서 창조적 활력이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학의 청년문화를 살려야 한국의 대중문화가 전반적으로 창조적인 활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어떤 친구가 "아직도 대학에 희망을 걸고 계십니까?" 하더라. 물론이다. 아니면 어디서 희망을 찾겠나.

사실 문화예술인만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없다. 하지만 시대가 억압적일수록 가장 먼저 그 분위기에 반응하거나 상처를 입는 것 또한 문화예술인들일 것 같다. 70~80년대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답답한 상황 속에서 대중문화계에서는 그러한 억압에 대한 저항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나?

당시 체제에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육체적인 죽음일 수도 있고, 활동의 중단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적인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70년대에는 김민기씨나 한대수씨 등 일부의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저항적 의지를 보였었고, 그 바람에 그 분들은 80년대 말까지 사실상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대 대부분의 대중예술인들은 속은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 매체질서나 미디어 시장질서 자체가 너무 획일적인 건 부정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민주화가 되고,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었다는 지금에도 저항적 성격의 내용을 표현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워낙 비주류 시장 자체가 작고, 메이저 시스템에서의 탈락은 곧 활동의 근거를 대부분 잃어버리게 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연예인조차도 소박한 수준의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해야 하는 것이 MB시대의 현실 아닌가.

한편으로 요즘 김제동, 김여진, 박혜경 등 문화예술인들의 사회 참여가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의 사회 참여로 많은 청년들이 사회 참여하는 것에 대해 더 호감을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여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김제동씨는 성공회대 학생이기도 한데, 이 분들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마음들이 드는지 궁금하다.

문화라는 것이 사실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변화의 대상인 것 같다. 문화란 우리의 무의식과 일상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이나 정치적 의식보다 어찌 보면 가장 근원적인 욕망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잠깐 동안 정치적 권력의 변화를 경험해 보았지만 그것은 정치권력의 표면만이 변화한 것이지, 우리의 일상과 무의식적인 욕망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체계를 변화시키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결국 사회변화와 관련해서 가장 궁극적으로 남는 것이 문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문화적 삶과 욕망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논리적 주장이나 수사보다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적으로 만나는 연예인들의 한 마디, 그들의 모습, 삶의 멘토링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이다.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아주 좋은 제자들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이다. 김제동, 윤도현, 또 요즘 공연기획자로 잘 나가는 탁현민과 같은 친구들이 제자라는 것이 나로서는 참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외에도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있지만 유명한 친구들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웃음)

나는 이른바 소셜테이너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그래도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진보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대중적 인기를 지닌 엔터테이너들 가운데 그래도 일부나마 나름의 정치적 소신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근거 및 모델들이 조금씩이라도 생겨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궁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이 문화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문화의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공감이라는 것이 결국 다른 이의 처지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또 그 처지가 되어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런 능력에 가장 민감한 존재들이 연예인들이다. 연예인들이 이러한 공감의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공감의 폭을 넓히고, 경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 같다.

김여진씨가 홍대 청소노동자들을 위해 날라리 세력을 만들어 활동을 한 것이나, 박혜경씨가 레몬트리 공작단을 조성하여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문화 운동의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변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여진, 박혜경, 김미화 씨의 낮은 곳으로 다가가는 따뜻한 모습들, 그리고 권해효 같은 친구가 보여주는 용기 있는 모습, 그리고 김제동이나 윤도현이 각자의 자리에서 공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들. 이런 것들이 나는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난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인은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연예인은 그냥 유명인일 뿐이다. 따라서 연예인에게 공인 수준의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는 건 옳지 않다. 그렇다고 연예인들의 사회적 영향이 없다는 게 아니다. 연예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연예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연예인이 음주음전을 했다거나 군대를 안 가려고 발치를 한다고 해서 일반 대중이 그런 면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 선행을 하거나 기부를 하거나 약자를 돕는 것과 같은 모습은 큰 공감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연예인들의 긍정적인 역할이 늘어야 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소셜테이너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에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의 역할도 매우 컸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근에 트위터와 같은 SNS가 등장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공감이 좀 더 확산되는 것 같다. 과거처럼 매체가 독점되어 있는 상황에서라면 요즘과 같은 소셜테이너들의 활동은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공중파와 주류 매체에서 퇴출이 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트위터와 같은 SNS라는 매체 수단이 생기면서 나름의 목소리를 계속 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해도 결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낼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SNS 매체의 역할도 크게 작용한 것이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인 인터뷰의 특징이 인터뷰이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물어보는 것이다.(웃음)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

그냥 평범했다. 가정적으로 그렇게 행복한 어린 시절은 아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했다. 또 어린 시절부터 만화책 보고 라디오로 가요 듣고, 극장 가서 영화보고, TV보고 하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내 세계관이 정립이 되었던 시기는 대학시기였고,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였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고, 그 시절의 친구들과 지금도 만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대학시절이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다는 생각을 한다.

청년 김창남의 가슴에 품었던 꿈은 무엇이었나? 또 청년 김창남에게 있어서 낭만,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면?

청년시절은 아시다시피 한국사회가 군사독재 억압 속에서 암울했던 시기였고, 늘 불만과 불안을 안고 살았던 시기였다.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 가사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돌아 앉아 있는' 불만스러운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이 사회 체제에 적응을 해서 잘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가 나로서는 굉장히 불만스러웠다. 마음이 흔쾌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느 순간 연애를 하고, 즐거운 순간에도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라는 자의식을 항상 느껴야만 되는 시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다운 낭만도 사실은 경험을 못했던 것이다. 낭만이라는 것도 일종의 죄의식을 갖게 만드는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다. 나보고 누군가 20대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난 단연코 싫다고 얘기할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알고 돌아가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다시 그 시절의 답답한 상황으로 나를 집어넣는다면 결국 나는 똑같은 삶을 살겠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청춘들과는 또 다른 고통스러운 청춘이었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함께 하던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홀로 스펙을 쌓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서울대학교 메아리,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원년 멤버이이기도 하다. 노래를 원래 좋아했나? 그리고 스스로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였나?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노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지금까지 연결이 된 것 같다. 대학교수가 되어서 아직도 더숲트리오 같은 활동을 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소통 하고,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다. 노래는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즐거움이다.

살아오면서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언제인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 행복하다. 개인적으로 지금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고, 일과 취미가 일치하는 흔치 않은 경우이기도 하다. 성공회대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도 너무나 고맙고, 또 아내와 아이들과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가족 간에 음악에 대해서, 영화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책도 돌려보고 한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또는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강원도의 주문진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났던 내 친구가 자기 큰 아버지가 한국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람이라고 늘 자랑을 했다. 당시 나는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서 그 분이 장준하 선생이란 것을 알았다. 그 분이 돌아가신 이후지만 관심이 많이 생겨서 책도 읽고,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은 무언가 나에게 남다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다가오신 분이다.

영향을 받은 분으로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김민기 선배가 있다. 당시 노동문제를 다룬 <공장의 불빛>이라는 불법음반을 제작하는 과정에 나도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줄곧 만나고, 그분에 대한 책도 만들기도 했다. 대학시절부터 80년대를 함께 보낸 작곡가 문승현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친구였지만 음악적으로는 내게 스승과도 같은 친구였다.

또 한분은 신영복 선생이다. 성공회대에 와서 동료로서도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나 삶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이런 분을 가깝게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라 늘 생각한다.

광석이도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이 난다. 대학 시절과 이후 80년대 내내 함께 일하고 고생하고 했던 친구들이 적지 않다. 여전히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다소 소원해진 친구들도 있다. 그들 모두가 나를 만들어준 잊지 못할 사람들이다.

가족밴드를 꾸리고도 남을 것 같다.(웃음) 가족밴드를 할 의향은 없는지?

가족밴드는 워낙 서로 음악세계가 달라서 어렵겠지만, 가족 콘서트는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큰 아들은 밴드에서 노래를 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취미삼아 일렉트로닉스 음악 작곡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내는 노찾사에서 가수 활동을 했고, 개인 독집 음반을 내기도 했다. 농담 삼아 우리 가족콘서트 한 번 해보자고 가끔 이야기하는데 두 아들이 비협조적이다.(웃음) 가족콘서트하면 게스트로 나와 주겠다는 사람도 많다.(웃음)


지금 꿈이 있다면?

한국사회가 그야말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극우 헤게모니가 남아있고, 그것이 정권이 바뀌어도 한국사회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게 하는 이유다. 현재로서는 그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현재 진보정치를 구현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현실이다. 먼저 광범위한 시민사회적 연대를 통해서 최대한 조중동과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극우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그 다음에 상식적 진보와 상식적 보수가 경쟁하는 구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 일단은 광범위한 시민사회적 연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한다.

희망하는 한국사회의 미래상이 있다면?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될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한다면 사회구성원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보장되고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가 아닐까한다. 굳이 각박한 경쟁에서 승자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삶이 가능한 시스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욕망을 갖고 시스템 속에서 아등바등 싸워서 승자가 되어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그런 것에서 벗어나도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공감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승리 이데올로기만을 가르쳐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된다. 양극화 해소도 불가능하고 수많은 삶의 고통도 해결이 안 된다. 이런 부분을 조금씩 해소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감과 소통이라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철저하게 승자독식구조이다. 정치나 경제, 특히 문화가 그렇다. 소수의 승자. 메이저리그만이 남아있는 사회이고, 마이너리그가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마이너리그가 풍부하게 살아날 때 주류라는 메이저리그도 지속가능할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의 문화적 스펙트럼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의 마이너리그를 키우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내게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인디밴드를 하겠다고 하고, 또 하나는 영상원을 다니고 있다. 작년에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가 죽고, 또 인디무대에서 활동 하던 달빛요정 이진원이 죽는 상황을 보면서 남의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영화를 하고, 음악을 하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라면만 먹다 좌절하거나, 아니면 메이저 스타로 뜨거나 둘 중 하나다. 메이저 스타가 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극히 낮은 일이고, 대부분 어렵게 유지하다 나이 서른 넘어 다른 길을 찾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부분이 문제라는 것이다. 꼭 메이저 스타가 되지 않더라도 로컬 문화 내부에서 최소한의 재생산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용자 대중의 입장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중이 될 필요가 있다. 주류 매체를 통해 주어지는 것 밖에서 좀 더 다양한 문화적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매체들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공짜로 다운로드를 받아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문제도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앨범과 영화는 돈을 주고 사서 듣고, 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태도가 필요하고, 이러한 태도는 장기적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또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창남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란 자기의 이유로 사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기도 한데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그것이 자유다. 남들의 이유와 남들의 논리가 아닌 내 자신의 이유와 내 자신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가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인 경우가 많다. 남들에 의해, 또 환경을 통해 가치와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분을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으로 이야기 해 본다면, 내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과연 나의 선택인가를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정말 왜 이 가수를 좋아하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볼 때, 정말 나의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나의 이유가 없다는 뜻이고 결코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많은 소스 중에서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 내가 좋아할 이유가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나의 문화인 것이고, 자유롭게 스스로 문화적 주체가 되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 생각한다.

가끔 여러 단체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 질문을 받는다. 질문하시는 분들이 나름대로 안타까워하면서 질문을 한다. 우리 아이가 듣는 음악을 들어보면 매일 소녀시대 음악만 듣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좀 더 생각 있는 음악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질문들을 하신다. 이 음악을 듣지 말고, 다른 것을 들으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너는 왜 소녀시대를 좋아하니? 라는 질문을 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고 답을 해준다. 자기 이유를 갖는 것은 스스로 문화적 주체로 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라 생각한다.

결국 자유로울 때 주체가 될 수 있고, 자기의 이유를 가질 때 자신의 문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양태성, 임지은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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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주년 맞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 김창남 교수

"제2의 싸이가 나와야 한다? 그건 아니다"

 

1월 29일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가 열 번째 수상 후보를 공개했다. 싸이와 버스커버스커, f(x) 등 지난 한 해를 빛낸 음악인들이 각 부문별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음악을 소비하지 않는 이에게는 생소한 이름인 404, 메써드, 정차식, 김대중 등도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다.

10년 전, 음악평론가와 교수, 기자, PD 등이 뭉쳐 만든 한국대중음악상은 아이돌로, 곧 특정 장르음악으로 획일화된 한국대중음악계에 제대로 된 시상식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한편에선 '한국의 그래미'라는 별명이, 다른 한편에서는 "인디음악상"이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추락도 있었다. 지난 2009년 정부는 갑작스레 지원 중단을 일방 통보해 파문을 낳았다. 당시 한국대중음악상은 정상적인 시상식을 열기 힘든 수준으로까지 위기에 몰렸다.

어느덧 10주년을 맞은 한국대중음악상의 과거를 그리고, 이 상의 의의를 되짚어보기 위해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으로서 이 시상식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봐왔다. 김 교수는 한국 민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립멤버였으며, 지금은 성공회대 교수 노래패인 '더숲트리오'의 멤버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11년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 : 
바로 가기)에서 철저하게 승자독식구조로 재편된 한국 사회에서 대중음악 역시 같은 지배체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메이저리그만이 살아남고, 그 기반이 돼야 할 마이너리그는 숨도 쉬기 힘든 상황이라는 얘기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김 위원장은 이 점을 다시금 짚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음악환경이 바로 10년 전 한국대중음악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과거 기억에 남은 시상식 에피소드를 되짚고, 인디와 한류로 양분되는 대중음악 현실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대중음악상의 의미와 역할을 밝혔다. 물론, "인디음악상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반론 역시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인터뷰는 10회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자가 발표된 1월 29일 오후 2시, 성공회대 교수연구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김창남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대중음악은 한 시대의 기록

프레시안 : 한국대중음악상이 10주년을 맞았다. 이 상의 의의에 대해 설명해 달라.

김창남 : 한국 대중음악계가 지나치게 불균형 발전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대중음악을 단순히 오락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산업적인 가치로만 보는 시각은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대중음악은 물론 오락이지만, 그 전에 대중예술이며 한 시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을 예술로 보는, 대중음악인을 아티스트로 보는 관점의 시상식이 필요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따라서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 판매량에 따른 등수 매기기 등의 기준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음악인이 만든 결과물의 음악적 성취만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고 출발했다.

프레시안 : 한국대중음악상이 얻은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창남 : 일정 정도는 대중음악에 대한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국대중음악상을 통해 새로운 뮤지션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이후 대중음악의 강한 지지층이 되거나, 대중음악을 좀 더 폭넓게 소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역할을 실감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단도 성장했다. 1회 때는 15명이던 선정위원이 올해는 71명으로 늘어났다. 대중음악계에서 전문성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대부분은 선정위원단에 망라돼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기존의 다른 시상식의 경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일었다. 이른바 '기획사 차별'이라는 저급한 논란까지 생길 정도였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상대적으로 '공정한 심사과정'을 강조한다. 수상자가 어떤 절차를 밟아 선정되는지 알려 달라.

김창남 : 연말이 되면 후보자를 추리기 위한 선정절차가 시작된다. 선정위원들이 각자의 전문분야에 따라 분과를 나눈다. 보통 한 선정위원이 두 분과 정도에 참여한다. A 선정위원은 랩&힙합과 알앤비&소울 분과를, B 선정위원은 록과 모던록 분과를 맡는 식이다.

우선 각 분과별 투표를 통해 선정위원들이 자신이 맡은 장르의 후보작을 추천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의 분과별 회의와 재투표를 거쳐 각 분과 후보를 결정한다. 이들이 장르별 후보작이다. 이후 이 장르별 후보를 바탕으로 다시금 투표와 회의를 거쳐 종합분야 후보를 결정한다. 오늘(29일) 발표한 종합분야, 분과별 분야 후보작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이후 선정위원단은 다시금 최종투표와 회의에 들어가 분야별 수상자를 결정한다.

선정위원 각자의 음악적 견해가 다르다. 자연히 선정의 기준은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내는가'에 있다. 모든 사람이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결과란 없다. 다양한 견해가 섞이면서 최대한의 공통집합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단순한 숫자대결로서 투표만이 아니라 토론도 필요하다. 자연히 격론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프레시안 : 기억에 남을 정도로 치열한 토론이 이어진 사례가 있나?

김창남 : 아무래도 선정위원의 수가 적었던 시절에 특히 토론이 중요했다. 이제는 선정위원단이 커지다보니, 그만큼 후보작 중에서 표차가 예전보다 더 크게 나기 마련이다. 투표 결과를 온전히 무시하고 수상자를 결정하긴 어렵다.

선정위원의 수가 적을 때는 투표 결과 두 후보의 득표수가 동점이 되거나, 한 표 차가 나는 사례가 많았다. 2005년의 2회 시상식으로 기억하는데, 마이 앤트 메리와 허클베리 핀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서너 번 정도 재투표를 했는데도 계속 동점이 나올 정도로 치열했다. (편집자 : 이해 올해의 음반은 마이 앤트 메리의 [저스트 팝](Just Pop)이 차지했다.)

프레시안 : 1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도 준비 중이다. 어떤 내용인가?

김창남 :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오는 26일부터 1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연다. 수상자들의 앨범과 기념 사진, 기억할 만한 수상 소감, 언론 보도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그리고 시상식 다음날인 3월 1일에는 1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수상자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여러 팀을 섭외하는 중인데, 4~5팀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확정된 팀은 없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열악한 재정환경을 딛고 열 번째 시상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8회 시상식에서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을 수상한 미스에이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원 중단 논란에서 뮤지션의 격려까지…10년의 기억

프레시안 : 특별히 기억에 남는 '10년의 기억'을 꼽아본다면?

김창남 : 아무래도 6회 시상식 당시 정부가 시상식을 코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지원을 중단한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학전소극장에서 조그맣게, 뮤지션만 초청해서 시상식을 이어갔다.

역시 6회였나? 기자 한 분이 "사전에 수상 결과를 알려 달라"고 했던 일도 있었다. 이를 거절했더니 "무슨 대단한 시상식이라고 잘난 척하느냐"고 큰소리로 얘기했다. 그 순간에 '욱'하고 치밀어 올랐으나 참았다. 지금은 후회한다. 당시 공개적으로 톡톡히 망신을 줬어야 하는데. (웃음)

한번은 수상 후보 중 하나가 "시상식 축하공연을 하겠다"고 먼저 나서준 일이 있었다. 고맙게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상을 안 주면 못하겠다"고 해 공연 섭외가 어그러졌다. 매니저는 "우리 같은 팀에 상을 안 주니까 비주류 시상식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니냐"고까지 하더라.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이른바 주류 뮤지션들이 적극적으로 시상식에 참여해줬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4회 시상식에서 엄정화는 "가장 받고 싶었던 상"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승철, 조규찬 등의 격려도 기억에 생생하다.

더러는 불쾌했던 순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후보에 오른 뮤지션들이 이 상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한 장면에 대한 기억이 많다.

프레시안 : 특히 기억에 남는 수상 소감이 있나?

김창남 : 정부 지원이 중단된 6회 시상식에서 장기하가 "함께 분노하겠다"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다. 1회 때는 데프콘이 '최우수 힙합' 부문을 수상했는데, 당시 멘트가 우리 상의 의의를 잘 보여줬다고 본다. "음악이 잘 안돼서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려 했는데, 이 상을 받으면서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예능인으로서 더 잘나가지만(웃음), 그가 음악 활동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우리가 조금은 줬다고 믿는다.

프레시안 : 한국대중음악상의 존재 의의를 잘 보여준 수상자로 누구를 꼽고 싶나?

김창남 : 최근 <나는 가수다> 등 TV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된 팀들이 몇 있다. 국카스텐, 바비 킴, 거미 등이다. 사실 이런 분들이 크게 알려지기 전에 우리 상을 받았다. 정엽, 게이트 플라워즈, 이승열, 다이나믹 듀오, 검정치마, 전제덕, 10cm 등도 이런 사례다.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상을 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후보자는 없나?

김창남 : 예전에 김연우가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는데, 결국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적이 있다. 아쉬움이 남았다. 또 하나는 개인적인 소회인데, 1980년대 민중음악의 연장선상에서 여전히 현장을 찾아다니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손병휘, 이지상, 문진오, 꽃다지, 백자 같은 뮤지션들이다. 이런 친구들의 음악이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을 주지 못해 아쉽다.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노랫말이 성취하는 시대적 가치다. 이들의 음악은 그런 점에서 우리 대중음악계의 중요한 자산이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 한국대중음악상이 나아갈 길

프레시안 : 결국 2009년 6회 시상식 개최를 둘러싼 정부 지원 중단 논란이 한국대중음악상의 10년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게 된 것 같다. 당시 전후 과정을 다시금 설명해 달라.

김창남
 : 그 전해까지 3, 4년 정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왔다. 그래서 당시 우리는 그해에도 당연히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담당부서에서도 지원 사업을 추진 중이었던 걸로 안다. 그런데 시상식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갑작스레 지원을 중단한다는 일방 통보를 받았다. (편집자 : 정부는 당초 예정된 시상식을 일주일 앞둔 이해 2월 19일, 지원 중단을 밝혔다.) 결국 시상식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을 중단한 특별한 이유는 듣지 못했다.

프레시안 : 지원이 중단되면 시상식 개최가 불투명할 정도로 열악한 재정 상황이 큰 문제다.

김창남 : 그렇다. '과연 올해는 시상식을 개최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을 안고 있다. 매년 '올해는 어느 매체, 어느 기업의 지원을 받아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이 점에 대해 선정위원장으로서 무능을 통감한다.

몇 년 전부터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정부 지원을 끊은 후 매해 후원자가 바뀌었다. 안정적인 재원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큰 과제다. 다만 시상식에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기업, 곧 음반사, 프로덕션의 후원은 받을 수 없다는 원칙은 지켜가야 한다.

프레시안 : 아무래도 노무현 정부 때 이 상이 출발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지원이 끊겼기에 현 정부의 문화정책 방향과 한국대중음악상의 지향점이 다를 것이라는 의견이 나올 여지가 생긴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5년간 추진한 문화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가온차트를 만들고, 대중음악 관련 시상식을 만들기로 하는 등의 정책을 내놓긴 했다.

김창남 : 이명박 정부는 시장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대중음악 정책에도 이런 철학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는 소위 '잘나가는' 뮤지션만 대접하는 시상식은 아니니까 정부로서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부족하게나마 비주류에 대한 약간의 관심은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면서 없어졌다.

박근혜 정부는 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잘나가는 쪽만 더 잘나가도록 하는 지원보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마이너리그가 잘돼야 메이저리그 수준도 올라가지 않겠나?

프레시안 : 정부 탓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한국대중음악상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든 근원에는 우리나라 대중문화 소비시장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현실이 작용하는 것 아닌가? 당장 아이돌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면, TV에서 대중음악 관련 프로그램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김창남 : 당연히 그 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대개 비슷하지 않나? 30대만 넘어가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은 끊고, 음반을 구입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의 음반시장이 세계 10위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음원시장 유통구조가 갑작스레 변화하면서, 음반 산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음악산업 자체의 문제도 있다. 나이 든 세대를 시장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생산이 이뤄졌다. 그러니 팬 입장에서는 듣고 싶은 음악이 없어졌다. 한편으로 음악산업계는 음반소비자가 십대밖에 없으니, 그들 취향에 맞는 시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뤄졌다.

결국 대중음악 저변을 얼마나 넓히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이 접하는 음악환경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팬들 역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찾으려는 수용 자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한대음? 인디음악상 아냐?

프레시안 : 많은 사람이 '인디음악상 아니냐'고 한다. 수상 후보자가 발표되면 으레 나오는 지적이다. 반면 특히 아이돌 가수가 수상자가 된 이후, 일부에선 '대중과 타협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선정위원장의 생각을 듣고 싶다.

김창남 : 어떤 의견이든 나올 수 있다. 이 상이 존재하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상이 기본적으로 다른 시상식에 비해 음악성에 더 강한 방점을 둔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창작성, 음악적 활력은 비주류가 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디음악상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주류를 역차별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간 수상자 리스트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중성과 타협했다는 지적은 맞지 않다고 본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당연히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의 상태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해야 한다. 주류에서 좋은 음악이 나온다면 거기 주목하는 건 당연하다.

다양한 비평은 언제나 고맙게 받아들인다. 다만 우리의 기본적인 원칙은 바꾸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주류음악과 언더그라운드음악의 넓은 간극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싸이 현상'이 과연 한국 가요계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이 현상이 이른바 '인디음악상'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한국대중음악상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하다. ⓒ뉴시스
프레시안
 : 한류 열풍이 일어난 후, 아이돌을 수상 후보에 의식적으로 올릴 필요가 있다고 보나? 일각에서는 '아이돌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만 넣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김창남 :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이 생긴 게 그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대중음악상은 대중음악의 트렌드를 담아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주류음악계다. 주류음악이 너무 협소하다. 우리 주류음악계의 지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돌은 한 장르에 특화돼 있다. 우리 상의 수상 대상으로 보면 댄스&일렉트로닉 단 한 분과에 국한된다. 결국 대중이 보기에 대중음악의 전부는 아이돌인데, 우리 상의 수상 기준으로 보면 저 많은 가수들이 여러 음악장르 중 단 한 장르의 수상 후보에 불과하다는 괴리가 생긴다. 다양화하지 못하고, 특정 장르에만 갇혀 있다. 한국대중음악상이 닫혀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한국대중음악상이 음악성을 선정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현재의 트렌드를 담아야 한다'는 선정위원장의 생각도 그렇고, 후보 추천 결과를 봐도 '대중음악이 자리한 그 시대의 오늘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음악성 외에 대중음악이 한국 사회 속에서 가지는 시대성도 선정 기준이 되는 것 아닌가.

김창남 : 음악성이란 게 오선지에 갇힌 좁은 의미의 음악적 구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음악은 당연히 시대의 산물이고 기록이다. 어떤 음악이 새롭고 창조적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음악이 처한 시대적 맥락, 한국 사회와 대중음악이 맺고 있는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성이라는 말 속에 이미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프레시안 : 심사위원장은 아이돌을 어떻게 보나?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김창남 : 내 취향은 아니다. (웃음) 음악적으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글로벌 시장에서 '케이팝'이라는 존재감을 만들어낸 게 아이돌이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소중한 존재다. 개중에도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뮤지션이 있고, 이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 아이돌이라는 특정한 집단이 우리 대중음악 시장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고, 그 부분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환경이 문제다. 아이돌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돌 중심의 획일화된 대중음악 구조가 문제다.

프레시안 : 올해 특히 싸이 열풍이 뜨거웠다.

김창남 : 얼마 전 독일에 몇 달 체류했다. 거기서도 싸이 열풍을 느꼈다. 내가 살던 집 앞에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하루에 두 번씩은 <강남스타일>이 나오더라.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젊은 친구들이 바로 싸이 얘기를 하고 말춤 추더라. 놀라운 일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싸이 열풍이 한국 대중음악의 창조적 역동성을 나타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렵다. 벌써 '제2의 싸이가 나와야 한다'는 구호까지 난무하는데, 이건 아니다. 제2의 싸이는 있을 수도 없고, 그런 식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싸이라는 뮤지션은 기존 아이돌과 조금 거리가 있는, 오랜 기간 자신의 세계에 천착한 사람이다. 아이돌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과 싸이 현상은 다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아주 개성적인, 자기 색깔을 가진 뮤지션이 오랜 기간 활동한 결과 얻어낸 성과라는 점이 좀 더 조명되어야 한다. 물론 아이돌 케이팝의 글로벌한 성장이 싸이가 낸 성과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은 발전했나

프레시안 : 지난 10년간 대중음악이 발전했다고 느끼나?

김창남 : 변화는 분명히 읽힌다. 좀 더 새로운 음악을 하고자 하는 젊은 음악인들의 활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를 발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어 <나는 가수다>에 우리 상을 받은 비주류 음악인들이 출연해 스타로 뜨는 모습은 반갑다. 그러나 '나가수' 음원이 여전히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대중음악이 여전히 방송의 힘에 예속된 상태임을 드러낸 결과다.

인디음악의 경우도 발전이라 말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독립적인 시장구조를 만들어내서, 마이너리그(인디음악)가 자생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이 돼야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 스타가 나오고 글로벌화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프레시안 :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자의 상당수는 홍대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 '홍대씬' 안에서도 인디와 오버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홍대음악을 어떻게 보나?


김창남 : 내 아들이 인디밴드를 하고 있다. 나이가 스물여덟 살인데, 부모로서는 '과연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지만 '저 친구의 삶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싶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 때문에라도 마이너리그의 활성화가 중요하다. 홍대음악인의 일부가 스타가 되는 게 인디의 발전이 아니다. 인디씬 자체가 자기 기반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몇 사람의 스타가 등장하는 가운데 나이 서른까지 라면만 먹고 버티다가 좌절하는 뮤지션이 속출해선 안 된다. 대중적으로는 크게 안 알려지더라도 오랜 기간 고정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뮤지션이 많아지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

프레시안 : 스스로 부여한 건 아니지만, 일각에서는 한국대중음악상을 두고 '한국의 그래미'라고 한다.

김창남 :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다. 그래미가 가진 역사와 권위와 영향력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다만 아직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그래미와 비교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어찌됐든 이 상이 한국 대중음악을 상징하고, 대중음악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 제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프레시안 / 기사입력 2013-02-01 / 이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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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의 고백 |문화운동가,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나를 키운 8할은 허접한 B급문화였다

지난 2월의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3호선버터플라이가 올해의 음반상을, 싸이가 올해의 음악인상을, 김민기가 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화제가 넘친 행사였습니다. 그날의 풍성함은 이명박 정부의 급작스런 지원 중단으로 한때 존폐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방송사나 매니지먼트사의 상업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음악적 완성도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원칙을 지켜온 뚝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10년의 힘겨운 여정 내내 선정위원장으로 중심을 잡아온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70년대 후반 노래패 ‘메아리’에서 시작해 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거쳐 2000년대의 한국대중음악상에 이르기까지 문화운동의 한 흐름을 조용히 주도해온 사람입니다. 연구년 후반부를 보내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의 출국을 앞둔 그를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만났습니다. 노래 한 곡을 부탁받은 그는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사람’과 ‘찔레꽃’을 불러주었습니다. 그의 동선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마치 작은 콘서트에 참석한 느낌이었습니다.


지난달 22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학교 내 연구실에서 만난 김창남 교수가 인터뷰 시작 전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방에 2대의 기타를 두고 수시로 연주를 한다는 그는 음반을 낼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전설로 남고 싶어서”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장의 불빛’으로 밝힌 메아리의 성공

-예전에는 노래 요청을 받으면 ‘금관의 예수’를 자주 부르셨죠? 79년 제작된 메아리 테이프에서도 그 노래를 부르셨고요. 얼마 전 트위터에 ‘대학시절부터 좋아한 이 노래를 더 부를 수 없을 것 같다’고 적었던데, 작사자인 김지하 시인의 변화 때문인가요?

“뛰어난 곡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고 내 인생의 노래 중 하나인데, 시인 스스로 부정해버린 역사를 제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더 부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슬픈 일이죠.”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의 역할이라면?

“71명의 선정위원이 있는데 다들 전문적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라 고집이 세요. 회의하다 보면 굉장히 많이 부딪히는데, 그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제 역할이죠. 스폰서를 구하는 것도 제 책임인데 그 부분은 제가 너무 무능해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기본적으로는 다수결인데 투표 결과를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강력한 이의가 들어오면 다시 토론하고 재투표하면서 방향을 잡아가요.”

-국카스텐, 바비 킴, 거미 등 나중에 스타가 된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을 많이 발굴했죠?

“부문별로 심사하고 선정하는데, 아무래도 언더, 인디 쪽 장르가 다양하다 보니 그쪽 사람들이 상을 많이 받았어요. 주류 음악은 댄스와 발라드로 한정되지만 비주류 음악은 다양한 뮤지션이 존재하니까요.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뮤지션들 사이에 자랑스러운 상이라는 생각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에 보람을 느껴요.”

-음악뿐만 아니라 만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문화비평 영역을 개척했고, ‘더숲 트리오’ 공연 등 활동영역도 매우 넓은데, 요즘은 주로 어디에 ‘꽂혀’ 지내시나요?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부르주아 시대의 유럽 문화 풍경을 세부적이고 광범위하게 묘사한 책인데 어떻게 한 개인이 그런 방대한 책을 썼을까 감탄했죠. 그걸 읽으며 한국문화사를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제가 성장하고 경험한 개발독재시기를 중심으로 우리 세대의 내면 풍경을 정리해보고 싶어요. 이발소에서 봤던 <선데이 서울>, 무협지, 온갖 종류의 허접한 B급 수기류 등. 혹시 <꿀단지>라고 아세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게 뭐죠?

“포르노라고 해야 하나, 우리 세대가 돌려보던, 수기를 가장한 소설. 아주 유명한데 모르시는군요. 그런 B급 문화 자료들을 수집한 분을 최근에 만났어요.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을 만든 7~8할은 대단한 경전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B급 문화들이거든요. 유행가도 그렇고요. 그런 것을 어떻게 정리할까 구상중이에요.”

196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김창남은 지방행정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임지 변경에 따라 초등학교를 다섯 곳이나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몸이 아프셨던 어머니를 위해 눈을 뜨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접수부터 시키고 등교하는 일이 잦았던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거북이’였습니다.

“몸이 느리고, 말도 머리에서 입까지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그래서 100분토론 같은데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느리다기보다는 굼뜬 거지. 그런데 어려서부터 텔레비전 보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 읽는 것에 대한 집착 같은 건 있었어요. 문간방에 세 든 신혼부부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밤마다 그 집에 앉아서 같이 봤어요. 신혼부부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걸 느끼면서도 애국가 나올 때까지 버텼죠. 나 때문인지 신혼부부가 곧 이사를 가버린 다음에는 텔레비전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또 그랬어요. 그 친구와 제일 친한 애들은 안방 윗목에 앉고, 조금 친한 애들은 마루에, 안 친한 애들은 마당에 서서 봐야 했는데, 저는 마당 쪽이었죠. 맨날 서서 보는데도 끝까지 버티곤 했어요.”

“상과대학에 가서 동생들을 돌보라”는 어머니의 유언 같은 한마디를 들은 김창남은 ‘취직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서울대 경영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유신 말기의 대학은 살벌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언더’ 학회에 가보니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걸 읽고 토론하는데, 나로서는 너무 모르는 얘기였고, 이미 그런 걸 잘 아는 친구가 따로 있더라고요, 유시민 같은. 열등감도 느끼고 재미도 없어서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간 게 메아리였죠.”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동아리 ‘메아리’는 문승현, 김창남 등 78학번들의 참여로 활기를 얻었습니다. 그해 겨울, 선배들의 연락을 받은 그들은 신촌 근방의 어느 다방에서 김민기를 처음 만났고, 바로 그날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로 직행해 녹음한 것이 이제는 전설이 된 ‘공장의 불빛’입니다. 불법으로 유통되던 ‘공장의 불빛’의 성공에 힘을 얻은 메아리의 “골수”들은 뒤이어 79년의 메아리 1집과 80년의 2집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지하에서 몰래 유통되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알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영화·책, 텔레비전 보는 것에 집착
밤마다 문간방 신혼부부 집서 애국가 나올 때까지 버텨
못 견딘 신혼부부 이사 간 뒤 친구 집 마당에 서서 끝까지…

전선 명확하던 때의 노래운동 억압받은 만큼 박수도 받아
민주화 이후 변화 적응 못한 노찾사는 80년대 시대정신 안고 장렬히 사라지는 게 맞았을 것

월세 2만원에 하숙시켜준 그 고마운 분들

“79~80년을 거치면서 참 갑갑했어요. 내가 한 거라고는 노래운동밖에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되는데 답은 나오지 않고, 몸은 말라가고 건강도 상하고 돈도 없고, 직업운동가의 길에 들어설 용기는 없고. 5·17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된 때에는 한동안 도망도 다녀야 했어요. 대낮에도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지하실에서 친구랑 둘이 자취를 하던 시절인데 좁고 습기 찬 공간에 거의 매일 열댓명이 찾아와 술·담배에 절어 사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추운 시기였지만, 참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던 따뜻한 시기이기도 해요.”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셨죠?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해서 일단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 앞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는데 그게 광명이었죠. 복덕방 아저씨가 굉장히 호의적으로 여기저기 전화하며 방을 구해줬는데, 알고 보니 그 아저씨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다녀온 분이었어요. 그분 덕분에 월세를 깎아 들어간 집은 방 두 칸 중에 하나를 세놓은, 별로 넉넉하지 않은 집이었어요. 자취하겠다고 들어갔지만 밥을 주로 사먹을 생각에 아무 준비도 없었고요. 그런데 제가 밥을 해먹는 기색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차려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루이틀 얻어먹다 보니 한달이 지나갔어요. 월세 2만원 내고 사실상 하숙을 한 거죠. 초등학생 둘을 키우던 40대 부부였는데, 제가 너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니까, 아주머니께서 ‘그냥 식구로, 동생처럼 생각할 테니까, 그대로 2만원만 내고 이렇게 살자’고 하셨어요. 밥, 청소, 꼭꼭 숨겨놓은 빨래까지 다 해주시고, 술 먹고 늦게 들어가면 식혜까지 머리맡에 한 그릇 놓아주시고, 결국 대학 졸업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제가 대학원 입학시험 치르고 집에 들어가니 아저씨께서 그제야 ‘사실은 시골에서 조카가 올라오게 되어 있었는데, 시험 준비에 방해가 될까봐 이야기를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대학원 들어가고 대방동에 방을 얻어 나왔는데, 아주머니께서 거기까지 고추장을 가져다주시곤 했어요. 그 집 아들이 해외지사 발령을 받아 요즘 네덜란드에 있어요. 제가 작년 가을 독일에 있을 때 마침 아주머니가 와 계셔서 찾아뵈었죠. 아주머니께서 또 식혜를 담가주셨어요. 그 시절 그 집 식구들이 살던 안방보다 내 방 연탄불이 꺼질까 봐 더 걱정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안방 연탄불이 꺼지면 네 식구가 함께 사니 덜 춥지만 내 방 불이 꺼지면 혼자서 얼마나 추울까 싶어서 그러셨다고.”

-감동적인 얘기네요.

“아주머니는 아침마다 요구르트 배달을 하셨어요. 결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면서 제게 그토록 많은 걸 베풀어주신 거죠. 우연히 만난 인연이 나를 살린 거예요. 고비마다 그분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인연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한때는 아이돌 스타? 실제론 소심한 모범생

-운동가요의 시대가 길지 못했던 이유는?

“전선이 명확하던 시대에는 억압을 받은 만큼 박수와 조명도 많이 받았죠. 민주화 초창기에는 잠겨 있던 것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노찾사가 그 흐름을 탔고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는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노찾사는 운동단체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다 보니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 면이 있죠. 대중들의 관심 자체가 빨리 사라졌고요. 저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음악을 바꾸기보다는 8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안고 가다가 장렬하게 사라지는 게 노찾사에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성공회대에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이 모인 것은 준비된 기획이었나요?

“학위 받고 2년간 다른 학교에 수도 없이 지원했다가 떨어졌어요. 기획은 전혀 아니고, 성공회대는 다른 학교와 좋은 교수 뽑는 기준이 좀 달랐던 것뿐이죠.”

-메아리 부회장이었던 조경옥과 연애결혼을 하셨죠. 노래 잘하는 우수에 찬 모습이라 평생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 시대에는 일종의 아이돌 스타 아니었나요?

“하하하(폭소). 아이고 무슨.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족집게처럼 집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김 교수님만큼이나 소심한 모범생 범주를 못 벗어나는 사람이에요.”

-보수적인 정부하에서 어떻게 지낼 계획이세요?

“당분간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상적 활동을 추구하게 될 거예요. 조금 더 깊고 멀리 보는 정치적 전망을 가져야겠죠. 저는 일단 제가 하는 문화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해명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르는 그의 말과 노래에는 절제된 자유가 담겨 있었습니다. 고비마다 좋은 인연을 만난 이유도 아마 김창남 자신이 맑고 따뜻한 사람이었던 까닭일 겁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봄소식과 그의 백발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