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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명작 스캔들 - Classic

by Wood-Stock 2011. 8. 7.

 

 

 

 


 

1. 멘델스존의 뒤에는 ‘대필 작곡가’가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세상을 깨우는 멘델스존의 <봄노래>는 통통 튀는 봄의 환희를 귀엽게 표현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산뜻한 봄의 풀냄새와 꽃향기,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겹쳐진다.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피아노곡 49곡으로 이뤄진 <무언가 Song without words>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바로 <봄노래>다. 특히 <무언가(無言歌)>는 말 그대로 가사는 없고 멜로디에 충실한 피아노곡으로 ‘멘델스존’이 처음 쓰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런데 “‘멘델스존’에게 대필 작곡가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 됐다. ‘멘델스존’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는 그의 자서전에서 ‘멘델스존’의 <무언가> 49곡 중 대부분이 누이 ‘파니’의 작품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실제로도 ‘파니’의 작품 중 6곡은 남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천재 음악가였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악보를 찾아낸 발굴자였으며, 음악교육자로 38년의 짧은 생을 화려하게 살다간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평론가들이 뽑은 음악사 최고의 천재 작곡가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선율 뒤에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펠릭스 멘델스존’의 화려하고 섬세한 작품에서 느껴지는 여성성이 이러한 의혹을 낳은 것은 아닐까? 시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소품들은 매우 서정적인 피아노곡이다. 서로 끔찍하게 위했던 오누이는 죽음도 함께 했다. 1847년 누나 ‘파니’가 42세로 사망하자 마치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멘델스존’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말처럼 둘은 영혼의 교류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Mendelssohn : Song without words No.30 in A Major, Op.62/6 'Spring song' (Piano Version & String Version)


2.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은 최면요법으로 탄생됐다? 

 

1979년 12월, 영국의 한 의학전문지에 실린 논문 중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라흐마니노프’가 최면 치료를 받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했다”는 내용이 화제가 됐다. ‘라흐마니노프’의 우울증은 교향곡 1번의 초연과 함께 시작됐는데 그 때 그의 나이 스물네 살, 전도유망한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중요한 시기였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은 앞서 발표한 교향곡 1번의 실패, 특히 음악평론가 ‘세자르 퀴’의 악평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은 사촌 ‘사티나’와의 결혼 실패. 당시 러시아는 결혼을 하려면 정교회의 승인이 필요했고 특히 근친간의 결혼은 엄격하게 금기시되고 있었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벌어진 일과 사랑의 실패는 그를 무기력증에 빠트렸고, 작곡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라흐마니노프’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최면 전문가인 ‘니콜라이 달’ 박사. 그의 치료는 ‘작곡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암시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3개월 후, ‘라흐마니노프’는 오랜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나와 불후의 명작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완성한다. 오래도록 눌러왔던 감정들이 작품 속에 녹아난 것일까? 시작 부분의 피아노 터치가 인상적인 곡으로 크렘린의 종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장중하고 아름답다. 누가 들어도 단번에 러시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울증으로 3년이나 작곡을 하지 못하던 ‘라흐마니노프’가 최면 치료를 받은 끝에 슬럼프를 극복하고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 한 예술가의 고뇌는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 중의 하나로 승화된 것이다.
 

Rachmaninoff : Piano concerto No.2 Op.18 in C minor, 1st. Allegro Moderato


3. 슈베르트의 <마왕>은 슈베르트의 작품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수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마왕>이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이 곡이 자신의 곡이 아니며, 나는 이런 졸작을 쓴 기억이 전혀 없다’고 편지에서 밝혔다. “‘슈베르트’의 <마왕>은 ‘슈베르트’의 작품이 아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얘기의 진실은 무엇일까? 하지만 가곡 <마왕>은 ‘슈베르트’의 작품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있다. ‘슈베르트’의 친구 ‘슈파운’은 “어느 날 친구의 집에 찾아갔는데 그가 들뜬 사람처럼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책상에서 펜을 들더니 그 기막힌 작품 <마왕>을 순식간에 악보 위에 적어 내려갔다.”고 <마왕>의 탄생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18세의 이름 없는 작곡가 ‘슈베르트’는 <마왕> 악보를 출판사로 보냈다. 그러나 쉬운 멜로디의 가곡이 유행하던 당시로선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다며 출판이 거절됐다. 문제는 ‘슈베르트’가 보낸 <마왕>의 악보가 출판사의 실수로 동명이인 다른 ‘슈베르트’에게 잘못 전달되면서 이 편지가 남겨진 것이다. 실제로 독일에는 당시 유명한 궁정악사로 베이시스트 겸 작곡가인 ‘슈베르트’가 드레스덴에 있었다. 무명 ‘슈베르트’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출판사가 악보를 잘못 되돌려 보낸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곡의 왕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슈베르트’도 1815년 당시에는 아직 단 한 곡도 출판하지 못한 이름 없는 작곡가였을 뿐이었다. 결국 <마왕>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한동안 ‘슈베르트’의 친구들만이 들을 수 있는 숨겨진 곡이 되었다. 그렇다면 출판사는 왜 ‘슈베르트’의 <마왕>을 거절했던 것일까? 쉬운 멜로디가 반복되던 당대의 가곡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복잡하고 파격적인 작품이라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곡 <마왕>, 이는 ‘슈베르트’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은 아닐까? 

*
Schubert : Der Erlkönig / Baritone: Dietrich Fischer-Dieskau / Piano : Evgeny Kissin


4.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알비노니 작품이 아니다? 

애수 어린 분위기와 장중한 울림이 뛰어나 유독 전쟁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쓰인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 바로크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칭송 받고 있다. 지금은 원 제목보다 작곡가 ‘알비노니’의 이름을 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이 곡의 작곡가가 따로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탈리아 음악학자 ‘지아조토’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폭격 당한 드레스덴 도서관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 알비노니의 g단조 소나타 제2악장의 콘티누오 단편들을 모아 적당히 편곡해서 발표한 곡이라 밝힌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악보집 서문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드레스덴 도서관 측은 폭격을 받은 사실이나 알비노니의 악보를 보관한 적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스위스 음악학자 니콜라 슈나이더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드레스덴 기록보관소 직인이 찍힌 ‘지아조토’의 악보 원본을 발견하면서 진실은 또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 의문에 대해 기록보관소 측은 악보에 찍힌 도장이 보관소 직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악보는 필사본일 뿐이며 원본이 존재했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 악보는 누가 만든 것일까? 6마디가 남아있지만 누가 만든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악보! 분명한 것은 그 악보의 6마디와 베이스 부분이 일치하는 작품을 ‘지아조토’가 만들어 냈다는 사실 뿐이다. ‘지아조토’의 말대로 ‘알비노니’가 작곡한 6마디일까? 아니면 그저 ‘알비노니’의 이름만 차용한 것일까? 그 정답은 오직 ‘지아조토’만이 알고 있다.

Albinoni : Adagio in G minor


5. 쇼팽의 연습곡 <이별의 곡>은 “애국”을 노래한 곡이다?

드라마 속 연인들의 배경음악으로 흔히 등장하는 쇼팽의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3>. 사람들은 이 곡을 이별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쇼팽이 첫사랑과 헤어지면서 그 슬픔을 담은 곡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쇼팽이 이 연습곡에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고 해석한다. 폴란드를 떠난 후 숨을 거둘 때까지 단 한 번도 고향땅을 밟지 못했던 쇼팽. 그의 향수를 달래준 건 친구들이 선물로 준 한 줌의 흙뿐이었다. 쇼팽이 고국을 떠나던 해 폴란드는 혁명을 일으키지만 러시아에 무참히 진압당하고 만다. 멀리서 조국의 아픔을 그저 바라 보기만 해야 했던 쇼팽은 고국에 대한 마음을 담아 곡을 쓰기 시작한다. 폴로네즈와 마주르카 등 그의 작품 곳곳에는 폴란드 민속음악의 리듬이 살아 있다. 쇼팽에게 조국은 음악적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쇼팽은 서른아홉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 위에는 평생 고이 간직해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 고국으로 돌아간 건 그의 심장뿐! 멀리서 고향을 그리던 쇼팽에게 음악은 또 다른 모습의 조국이었는지도 모른다.

Chopin: Étude Op.10, No.3 in E Major 'Tristesse'  ~ Lang Lang


6.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독립 운동가였다? 

성악가가 아니어도 능숙하게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노래할 줄 아는 이탈리아 사람들. 이탈리아인들의 말처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정말 이탈리아 독립 운동가였을까? 오페라 <나부코>가 발표된 1842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조각조각 나뉜 국토와외세의 폭정, 이탈리아 민중은 그 무엇보다도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열망했다. 때마침 발표된 오페라 <나부코>는 그런 이탈리아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성서 속에 등장하는 바빌론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독립운동가로 불렀을까? 두 편의 오페라가 잇따라 실패한데다 아내의 죽음으로 창작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베르디를 끌어당긴 건 바로 대본의 한 구절이었다. ‘Va, pensiero, sull'ali dorate 가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이 말은 베르디의 창작 의욕에 다시 불을 붙였고, 이탈리아 민중의 마음에 독립을 열망하는 불을 지피는 곡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발견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독립운동가처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오페라 <나부코>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대중을 상대로 출판됐던 악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 집집마다 한 권씩은 가지고 있던 악보, 우리 돈 약 760원짜리 값싼 악보,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베르디가 나부코를 발표한 지 약 170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지금도 여전히 이탈리아의 국민 찬가로 사랑받고 있다. 

Verdi : Nabucco - Va, pensiero, sull'ali dorate (Hebrew Slave Chorus)


7.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최초의 BGM이다?

각종 영화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익숙한 선율 <짐노페디>가 최초의 BGM이라는 말이 사실일까? ‘사티’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사티’도 그들 중 하나였다. ‘에릭 사티’는 21세부터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세 개의 중요한 피아노 연작인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그노시엔느>(1890)를 작곡한다. <짐노페디>는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티의 곡이 되었다. 생전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를 재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영화 `<도깨비불`> 배경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작품을 사용했다. 사후 38년 후에야 그의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에 세상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래 <짐노페디>란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행사인 제전의 하나로, 나체의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신을 찬양한 것을 말한다. ‘사티’의 <짐노페디>는 1888년 작곡된 3곡의 모음곡이다. 그는 이 고대 제전의 춤을 3곡으로 된 피아노 모음곡으로 그려냈다. 처음엔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어 단순한 듯 들리나 절제된 선율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또 말년엔 이런 개념을 구체화시켜 방안의 가구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 <가구음악>도 발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구음악>은 공기 진동을 일으킬 뿐이며 그것은 빛과 열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구처럼 얌전하게 호젓하게 들어야 할 음악이라는 것이다. 요즘 말하는 환경음악의 시조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Satie: Gymnopédies  No.1 & No.3


8.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만 출판된 이유는 악플러 때문이다?

‘생상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동물의 사육제>, 그런데 총 14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이 그의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출판될 수 있었다. 생상스가 14곡 중 ‘백조’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곡들에 대해 출판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왜 ‘생상스’는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던 것일까? 19세기 프랑스는 음악적 변혁기였다. 오페라만을 최고로 여기던 프랑스는 특히 기악곡 분야에서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생상스’는 당시 독일의 선진 음악과 작곡가 ‘바그너’를 프랑스에 소개한다. 그런데 1870년, 상황이 급변했다. 보불전쟁으로 인해 반 독일정서가 프랑스에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바그너’를 프랑스에 소개한 ‘생상스’는 ‘반애국자’로 낙인이 찍혔다. 오명을 씻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돌연 한 권의 책을 발표한다. 갑작스럽게 ‘바그너’를 비롯한 독일음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독일음악 추종자들의 비난이 빗발쳤고, 일부 과격주의자들은 ‘생상스’의 연주회까지도 무산시켰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동물의 사육제>였다. 결국 ‘생상스’는 비난이 두려워 작품을 묻어 두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13번째곡 ‘백조’만은 출판을 허락한다. 유유히 노닐며 헤엄치는 백조의 모습을 첼로 선율로 표현해낸 ‘생상스’.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총 14곡의 <동물의 사육제> 중 유일하게 ‘백조’를 출판한 이유는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Saint-Saëns: The Carnival of the Animals, No.13 'The Swan' ~ Julian Lloyd Weber(Cello)


9. <세비야 이발사> 서곡은 재활용 곡이다? 

당대의 작곡가들이 극찬했던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특히 경쾌한 리듬으로 막을 여는 서곡은 오페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오페라의 서곡이 불과 몇 개월 전에 발표됐던 곡이었을 뿐 아니라 3년 전에 이미 발표했던 또 다른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의 서곡에도 사용됐던 재활용 곡이었다. 게다가 곡 전반에 걸친 음의 흐름도 흡사하다. ‘로시니’는 표절과 전용(轉用)의 상습자로, 베토벤의 제8번 교향곡의 1절을 무단 차용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서곡 외에도 몇 가지 전용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으니 순진한 로시니의 태평스러운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재미있다. 이는 로시니의 성격일 뿐 아니라 당시에는 저작물에 대한 통념이 관대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시니는 왜 자신의 서곡을 여러 오페라에 다시 썼을까? 로시니는 불후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단 13일 만에 작곡했는데, 시간에 쫓기던 그가 결국 이미 흥행에 실패했던 자신의 오페라 서곡을 재사용했던 게 아닐까 추측된다. 그렇다면 상습적인 재활용일까? 아니면 공들여 작곡한 자신의 곡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여하튼 단기간에 작곡되었지만 비극과 희극을 관통하는 ‘로시니’만의 관현악법 매력이 여지없이 살아있다. 사람들을 흥겹게 하는 로시니표 크레센도 특유의 매력과 명쾌하고 기지에 넘치는 주제의 전개가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이 곡을 자리매김 해준다. 명작 <세비야의 이발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서곡으로서 풍자적이고 생기에 찬 극적인 박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Rossini: Le Barbier de Séville 'Overture'


10. 브람스의 <현악 6중주곡 제2번>에는 암호가 숨겨져 있다?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의 브람스 현악 6중주곡 제2번, 이 곡에 암호가 숨겨져 있다? 1악장에서 세 번 반복되는 선율, 이 다섯 음에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 담겨 있다. 음악 속에 숨겨진 암호는 음표로 만들어진 이름 ‘아가테’, 멜로디로 A, G, A, H, E가 된다. 곡 속에서 이 멜로디는 매우 서정적으로 나타난다. 1858년, 스물다섯 살의 브람스는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독일 괴팅겐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 ‘아가테 폰 지볼트’를 만난다. ‘브람스’와 ‘아가테’는 곧 사랑에 빠졌고, 만난 지 몇 달 만에 약혼을 한다. 하지만 구속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브람스’는 ‘아가테’를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망설이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파혼한다. 그리고 브람스는 당시 작곡 중이던 현악 6중주곡 제2번에 ‘아가테’의 이름을 담는다. 현악 6중주곡 제2번은 전체 4악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목가적인 분위기로, 제1악장의 코데타에서 2개의 바이올린이 A-G-A-D-H-E로 아가테(Agathe)이름을 담은 선율을 세 번 연주한다. "아가테 테마"라고 하는 것은 ‘아가테 폰 지볼트’의 이름인 agathe를 소리 나는대로 A-G-A-[T]H-E (라-솔-라-시-미)의 음으로 제1바이올린과 제1비올라가 연주하는 것이다. ‘브람스’는 ‘아가테’란 이름을 선율로 만들어 떠나간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뒤이어 오는 선율엔 독일어로 안녕이란 뜻의 ‘Ade(아데)’란 단어를 넣어 곡을 완성한다. 음악을 통해 이루지 못한 사랑에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브람스’는 속박이 싫어 첫사랑을 떠나보내고, 한평생 연상의 여인이자 스승의 아내인 ‘클라라’를 향한 사모의 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홀로 지냈다.

Brahms: String sextet No.2 in G Major, Op.36 1st.


11.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엘리제를 위해서 만든 곡이 아니다?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쳐봤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이 곡의 제목은 베토벤이 악보에 남긴 글귀에서 비롯됐다.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피아노 소품곡 중의 하나 <엘리제를 위하여>, 이 곡의 주인공 ‘엘리제’는 과연 누굴까? 수많은 여인들에게 연정을 품었던 베토벤, 그는 연인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곡을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연인 중에는 엘리제란 애칭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베토벤 연구자들은 엘리제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말한다. 1925년, 독일의 한 음악 학자는 엘리제가 ‘테레제(Therese Malfatti,1792~1851)’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테레제 말파티, 베토벤 주치의의 조카이자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여성이다. 그렇다면 왜 테레제가 아닌 엘리제가 됐을까? 글씨를 마구 휘갈겨 쓰기로 유명한 베토벤, 악보를 출판한 사람이 테레제의 T를 엘리제의 E로 착각했을 것이란 추측이 대세다. 베토벤 사망 후 4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발표된 <엘리제를 위하여>, 이 사랑스런 곡의 주인공을 아는 건 오직 베토벤 자신뿐이다. 

Beethoven: Für Elise


12. <환상교향곡>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못 쳤다?


<환상 교향곡>은 음악사에서 신기원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통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교향곡과는 매우 다른, 소위 ‘드라마틱 교향곡’을 선보였다. 그가 이 곡에서 시도한 오케스트라의 편성은 파격 그 자체였다. ‘환상 교향곡’은 5악장이라는 구성뿐만 아니라 ‘고정악상’, 그러니까 똑같은 멜로디가 매 악장마다 약간씩 변형되어 나오는 특이한 형식의 기악곡이다. 그러나 이 곡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 곡에 얽힌 작곡가 자신의 에피소드다. 음악에 이야기를 담은 표제음악의 개척자 ‘베를리오즈’가 피아노를 전혀 못 쳤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반대로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피아노를 못 쳤던 베를리오즈는 어떻게 그 엄청난 교향곡을 작곡했을까? 완고한 아버지 때문에 음악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던 베를리오즈, 그는 아주 정확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독학으로 작곡법을 익히고, 머리로 음을 떠올려가며 5악장 형식의 교향곡을 작곡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4악장의 전통형식을 무시한 베를리오즈의 교향곡은 환영받지 못했다.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고 피아노조차 칠 줄 몰랐던 베를리오즈, 그러나 남들과 달랐기에 형식에서 벗어난 과감한 곡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 Rêveries-Passions : 1악장 (Part 1 & 2) ~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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