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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즈 이야기

by Wood-Stock 2011. 10. 1.

바람이 불어온다, 재즈가 익어간다

 

북적이는 인파와 시끌벅적한 술집 거리 한복판을 비집고 들어선다. 드문드문 촛불 낮게 깔린 재즈바다. 불빛보다 낮고 묵직한 재즈 선율이 어둑한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은 어떤 고독을 쓰다듬기도 했고 또다른 행복을 북돋우기도 했다. 재즈바에 모여 앉은 이들은 저마다 다른 심정을 노래에 의지한 채 이즈음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재즈 가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렇게 심각하게 가사 들어볼 일 없어요.” 어두운 불빛 아래 가사집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이에게, 재즈바 주인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마음속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훨씬 편할 거예요. 어떤 장면이든…!” 먼 나라의 한가로운 바닷가를 떠올렸다. 대기업에 다니다 재즈가 좋아 편하게 음악을 즐길 공간을 마련했다는 주인장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겨다녔다. 재즈에 마음을 맡긴 사람들은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얻었다. 그렇게 엘라 피츠제럴드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난 게 10여년 전 일이다.

 

같은 노래라도 누가 부르냐에 따라 묘미는 천차만별이다. 한 곡이 수만가지의 버전으로 새롭게 태어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매력적이라는 사실. 또 하나의 매력은 같은 노래라도 각자 처한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들려온다는 거다. 10년 전의 ‘마이 퍼니 밸런타인’과 오늘 듣고 있는 그 노래는 같은 노래가 아니다.

 

미묘한 매력에 한발 다가서자 저만치 뒷걸음질하는 음악이 재즈다. 때로 원망스럽다. 뭐 그리 까다로운 거냐고. 어쩌면 재즈가 더 억울할지도 모른다. ‘정색하고 책과 펜을 들고 달려드는 당신들이 더 까다로운 것 아니냐’고. 재즈가 마니아나 아티스트 그들만의 것일 리 없다. 지치고 괴로운 당신에게, 설렘에 달뜬 당신에게 이미 넓은 어깨를 내주고 있다.

 

가을 달밤 아래, 달콤 쌉싸름한 재즈 선율이 서늘한 공기 속에 너울진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자라섬재즈페스티벌(10월1~3일)을 앞두고 설렘은 더해 간다. 지난여름 뮤직 페스티벌의 열기 속에서 환호했던 사람들이라면 재즈의 은근하지만 깊은, 그래서 더 오래 유지되는 열기를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꼭 페스티벌이 아니어도 좋다. 단단한 실력을 갖춘 재즈 연주자들이 재즈클럽 무대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가을, 음악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재즈의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음악의 지도 밖으로 떠나는 여행 같은 것

다양한 변주의 낯선 매력이 묘미…어렵다는 편견 버려야 재즈 다가와

 

재즈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크게 유행한 적이 없다. 국내에 재즈가 처음 울려 퍼진 게 벌써 90여년이지만, 재즈가 대중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재즈가 마냥 귀에 선 것만도 아니다. 재즈는 우리 곁에 너무나도 가까이 있다. 레스토랑이나 커피전문점에서, 와인바나 가장 대중적이고 익숙한 음악을 선호하는 광고음악에서도 재즈는 늘 자리를 지켜왔다. 멀고도 가까운 음악인 셈이다. 재즈는 어렵다는 인식 또는 편견, 한국 사람만 그런 걸까? 그나마 아시아에서 재즈가 가장 발달한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본 음반 시장에서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5% 정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2일 목요일 재즈클럽 에반스의 10돌 기념 공연 무대에 오른 ‘메인스트리트’.

‘칠드런스 파크’(Children’s Park)라는 제목의 자작곡을 시작으로 1시간 동안 열정적인 공연을 펼쳤다.

 

재즈는 태생을 보면 어려울 수 없는 음악이었다. 재즈 음반을 500여장 프로듀싱한 기마타 마코토는 재즈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면화를 따면서 기분전환으로 흥얼거렸던 가락. 또는 작은 은혜를 신에게 기원하면서 읊조렸던 노동가이자 기도가였다. 그런 소박한 멜로디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우여곡절과 함께 많은 음악가들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 재즈다. 결코 어렵지 않고 이론적인 것도 아니다.”

 

멀고도 가까운 음악…어렵다는 건 편견일까

 

꼭 이 수준의 재즈 지식을 갖고 지난 21일 저녁 서울 역삼동 엘지아트센터를 찾았다. 기마타가 발굴해 널리 인기를 얻었고, 벌써 9년째 해마다 한국 공연을 펼치는 네덜란드 출신의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공연장이었다.

 

이들은 꾸준한 국내 공연 활동과 활발한 연주 활동으로 국내에서도 팬이 꽤나 많다. 과연 그 인기답게 1100여석 규모의 공연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는 찰나, 잠시 어깨가 굳는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리듬의 난해함이 어색하리라는 편견 탓이었을까.

 

재즈밴드 ‘더 버드’의 색소폰 연주자인 이상하가 에반스의 무대에서 멋진 연주를 선보였다.

 

그러나 긴장은 이내 풀렸다. ‘어, 어디서 들어본 건데?’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고요한 조화는 편안함을 선물했고, 익숙한 멜로디에 반가운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흥겨운 기분마저 찾아왔다.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는 클래식과 팝 등 다양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널리 알려진 음악을 재즈로 재해석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할 뿐이다. 클래식이나 팝, 여기에 다양한 민속 음악도 포함된다.” 피아노 연주를 맡은 마르크 판 론은 간단히 설명했다. 재즈음악가 하면 떠올리는 모종의 ‘고집스러움’보다는 포용력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과연, 이들은 공연을 마치고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아리랑’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환호하며 고마워했다.

 

이튿날 저녁 서울 홍대 앞 재즈클럽 ‘에반스’에서는 클럽 공연 특유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에반스는 2001년 문을 열어 올해로 10돌을 맞았다. 이날은 30일까지 이어지는 1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더 버드’와 ‘메인스트리트’가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창문을 통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가 바라보이자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어 들어왔고, 재즈 선율은 그 위에 실려 다녔다. 목요일인데도 클럽 안엔 관객이 꽉 들어찼다. 10년 전만 해도 평일에는 이렇게까지 관객이 들지 않았단다. 신나는 리듬이 클럽 안에 울려 퍼질 때면 관객들은 간간이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클럽 공연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 있었군!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내한공연 장면

 

클래식·팝 등 장르 구분 무의미…공부보다 즐기기가 우선

 

공연이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피아노와 드럼이 덩그러니 무대 위에 놓여 있었으나 음율은 환청처럼, 이명처럼 아련했다. 에반스의 홍세존 대표와 메인스트리트 멤버들을 따라나섰다. 와인이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들은 소주 한잔 걸치러 가는 길이다.

 

“재즈는 왜 들어야 할까요? 뭐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우문에 현답을 해준 이는 메인스트리트를 이끄는 드러머 서준혁씨였다. “재즈를 꼭 들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거예요. 음악을 듣는 것은 여행 같은 거죠. 어디를 가느냐, 패키지냐, 자유여행이냐 등등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른 거잖아요. 재즈는 아마 배낭여행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 지도에 표시된 곳을 벗어나 떠나는 거죠. ‘지도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재즈는 음악여행 중에서도 지도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 될 법해요.” 같은 음악이라도 변주를 통해 다양하고도 낯선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재즈의 묘미를 경험하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시, 재즈는 누구나의 음악이다. 공부? 할 필요 없다. 다만 재즈 공연이 펼쳐지는 현장은 즐겨볼 만하다. 재즈가 수많은 음악 장르의 기원이라거나, 뿌리를 꼭 알아야 음악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불필요한 편견을 더 굳게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이 벽이 된다면 내팽개칠 일이다. 우선은 즐길 것! 그러고 나면 공부는 그냥 하고 싶어질걸?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 알아두면 좋아요 | 날마다 밤마다 재즈 즐겨요

 

 재즈 앤 더 시티 |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올레 스퀘어의 드림홀에서 매주 3차례 펼쳐지는 재즈 공연. 다양한 재즈 장르와 신진 음악가들의 공연이 단돈 1000원.(cafe.naver.com/jazzandthecity)

 

 ◎ 재즈페스티벌 재즈 홀릭 | 재즈 1세대 음악가부터 신세대 재즈 아티스트까지 30여팀 100명이 내년 1월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30분 공연을 올린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아르떼홀(arte.co.kr)에서 이어진다. 공연 영상은 아르떼티브이에서 볼 수 있다.

 

 ◎ 재즈클럽 에반스 | 서울 홍익대 앞에 자리잡은 재즈클럽으로 10돌을 맞았다. 날마다 다채로운 재즈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에반스 플레이어’를 통해 신진 재즈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공연 기회를 줘 참신함을 잃지 않는다. 누리집(clubevans.com)에서 공연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재즈클럽 문글로우 | 신관웅, 최선배 등 대한민국 재즈 1세대의 공연이 매주 목요일마다 펼쳐진다. 재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의 공연을 매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공간이다. 누리집(moonglow.co.kr)에서 공연 스케줄을 제공한다.

 

 ◎ 재즈클럽 올 댓 재즈 | 1976년 문을 연 역사 깊은 재즈클럽이다. 한국 최초의 재즈클럽으로 기록됐는데, 공연의 높은 수준 또한 꾸준히 유지돼 재즈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서울 이태원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있던 곳에서 자리를 조금 옮겨 지난 7월 중순 다시 문을 열었다. 공연 정보는 전화(02-795-5701)로 문의.

 

 

재즈 1세대의 고행 없었더라면

근현대사 질곡 함께한 재즈…대한민국 재즈 역사 90년

 

우리나라 재즈는 2000년대 들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연주자가 늘어났고 탄탄한 실력까지 더해진 덕분이다. 대중음악에 견줘서는 미약하지만, 매년 100여장에 이르는 재즈 앨범이 발표되고 있다. 연주자들의 활동은 활발하다. 대한민국 재즈 1세대는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로 재조명받았고,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는 전통가요 ‘동백아가씨’를 재즈로 편곡해 발표하면서 한국적 재즈의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앨범 판매 수위에 오르고 있는 나윤선의 선전, 일본 시장을 오랫동안 공략해온 웅산의 성공은 우리 재즈가 세계 시장에서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재즈는 1920년대 말 새로운 서양문물로 소개됐다. 대중들은 트로트나 창가와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데, 당시 유행인 스윙 재즈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으로 지금에 견줘 훨씬 대중적이었다. 당시 국내 연주자들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곡을 바로 들여와 사랑을 받았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가 요즘 세대보다 재즈에 대한 소양이 많다는 걸 간혹 확인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의 모든 문화를 막게 된다. 광복과 한국전쟁 때까지 재즈의 암흑기였다. 김해송, 엄토미, 김광수, 이정식(현재 활동하는 이정식과는 동명이인) 등 재즈의 전설들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전의 일이다. 휴전으로 재즈를 비롯한 대중음악 신은 미8군 무대가 중요한 활동기반이자 공급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1955년 미8군 사령부가 용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1960년대 손석우,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 최세진 등 거장들이 재즈의 뿌리를 내렸다.

 

유신시대를 맞이한 1970년대 대한민국 재즈는 획일화된 대중음악 신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인디 정신으로 독립한 연주자들이 중심이 되어 돌파구를 찾게 된다. 1976년 재즈클럽 ‘올 댓 재즈’와 1978년 ‘야누스’가 문을 열면서다. 국내 최초의 재즈클럽인 올 댓 재즈는 중국계 미국인 마명덕이 문을 열었고 1986년부터 진낙원이 인수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이 문을 연 첫 재즈클럽은 야누스다. 재즈 1세대 주축으로 신촌역 앞 시장골목에서 시작했다. 야누스의 역사는 곧 한국 재즈의 역사와 다름없는데, 보컬리스트 박성연을 중심으로 홍덕표, 이판근, 김수열, 최선배, 이동기, 류복성, 신관웅(사진) 등이 연주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뒤로는 야누스에서 1세대들의 연주를 보고 들으면서 익힌 2세대 이정식, 최광철, 양준호, 이영경, 임인건, 방병조 등이 국내 재즈 신을 건강하게 구축해 나간다. 1990년대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차인표가 출연한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의 선풍적인 인기로 재즈 거품이 부풀어오르기도 했다.

 

당시 드라마 배경이 된 클럽 올 댓 재즈는 관광 명소가 됐고, 재즈 감상을 넘어 색소폰 배우기 열풍까지 불었다. 그리고 앞서 1980년대에 유학길에 올라 1990년대 초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광민, 한충완, 정원영, 한상원 등 미국 버클리 유학파들이 국내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졌다. 이런 열기는 음반 녹음과 발매, 해외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으로 이어지면서 재즈팬의 양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수많은 재즈 학도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국내 재즈 신의 성장 단초를 마련했고, 더불어 국내 교육과정으로도 흡수됐다. 1988년 서울예대 실용음악과가 신입생을 받은 뒤 서울재즈아카데미를 비롯해 수많은 학교에 대중음악, 실용음악 관련 학과들이 생겨났다.

 

김광현/월간 <재즈피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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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타 마코토(68). 1970년대부터 40여년 동안 재즈 음반 500여장을 제작·발표한 일본의 세계적인 프로듀서이다. 아트 블레이키, 케니 드루, 쳇 베이커 등의 앨범을 제작했고,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직접 발굴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재즈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재즈 음반만 고집스럽게 만들어왔던 그가 이번에는 연필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즈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나섰다. 지난 40여년간 유명 재즈 음악가들과 만나 음반을 제작하며 겪은 일화를 그가 직접 소개한다. ‘재즈는 편안한 선율’임을 강조하는 기마타 마코토. 선율과 함께하는 가을 여행이 더욱 편안해지도록 이제 그가 다섯 차례에 걸쳐 길을 안내한다.

 

열린 마음으로 뮤지션 알아보는 심미안
기마타 마코토는 누구?…‘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발굴·재즈 음반 500장 제작

 

 “그분이 프로듀싱한 음악가들의 면면도 대단하지만, 기마타 마코토씨의 겸손함은 잊을 수가 없지요.”

 

재즈 보컬리스트 윤희정은 기마타 마코토와 2008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당시 ‘줄리어드 재즈 올스타’와의 협동 공연에 이어, 2009년 카럴 불레이 트리오 공연을 통해서였다. 기마타 마코토가 이들의 음반을 제작한 데서 출발한 공연이었다. 윤희정의 20여년 재즈 인생에서 보면, 그 후반기에 기마타 마코토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어린 학생처럼 재즈 음반 제작의 거장을 우러러본다. “음반, 그것도 재즈 음반을 500여장이나 제작하신 분이잖아요. 수백명의 재즈 음악가들의 독특함, 개성을 꿰뚫는 능력이 있는 거죠. 국적은 일본이지만 재즈 본고장인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수많은 음악가를 발굴해왔거든요.”

 

32년 동안 재즈 음반을 제작해 온 사람과 한국 재즈 보컬리스트의 관계는 다소 사무적이거나 계산적일 법하지만 윤희정은 정작 재밌는 사람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공연 전 리허설 때나 무대 밖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 느꼈는데, 사람을 굉장히 편하게 해주시는 재주가 있어요. 음반을 제작하는 분으로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예민한 부분은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데는 전혀 거리감이 없었죠.”

 

  재즈 피아니스트 사이러스 체스트넛과 다정한 포즈를 취한 기마타 마코토.

 

지난 21일 한국 공연을 마친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는 기마타 마코토와 인연이 더욱 깊다. 1990년 이들 그룹의 발굴과 첫 앨범 제작을 기마타 마코토가 진행했다. “그는 유럽의 젊은 재즈 트리오를 찾고 싶어했죠. 그와 함께 첫 앨범 <노르웨이의 숲>을 만들었고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어 공연을 하러 일본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어요.” 이제 벌써 그들이 데뷔한 지도 22년째이지만, 그와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21일 한국 공연을 마치고 일본에 가서 기마타 마코토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꺼냈다.

 

그들이 이처럼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데는 역시 기마타 마코토의 성품이 영향을 미쳤다. 이 트리오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프란스 판 데르 후번은 “그는 모든 음악 장르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는 자세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서로 영감을 줄 수 있는 다른 성향의 음악가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고 말했다. 이런 성품이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가 재즈 클래식에 다가서게 된 계기도 기마타 마코토의 제안 때문이었다. 이들은 “기마타 마코토가 없었으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① 세계적인 재즈 프로듀서 기마타 마코토, 전설의 재즈맨 아트 블레이키와 만나다

 

기마타 마코토의 제안으로 세계적인 재즈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는 함께 연주했던 옛 멤버를 모아 ‘아트 블레이키 & 올스타 재즈 메신저스’ 스페셜 앨범을 리코딩했다.

 

 

재즈에 내가 처음으로 매혹을 느낀 것은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를 초등학교 때 만나면서부터였다. 아름다운 멜로디, 즐거운 리듬, 매력적인 하모니…. 이런 사운드에 완전히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것을 계기로 베니 굿맨,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등 당시의 유명한 빅밴드를 가리지 않고 들었다.

 

초등학교·중학교 친구 중에 레코드가게집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가게 창고에 몰래 들어갔던 일이 있다. 안에는 많은 레코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재즈 레코드도 몇 장인가 찾을 수 있었다. 제리 말리건, 쳇 베이커, 아트 블레이키, 클리퍼드 브라운, 맥스 로치 등 당시의 쟁쟁한 뮤지션들과의 만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현재의 재즈 프로듀서의 출발점이 아니었나 한다. 그들이 대단한 재즈 뮤지션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레코드를 다 갖고 싶었지만 물론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겨우 한 장을 산 것이 <브라운과 로치의 베이슨 스트리트>(CLIFFORD BROWN and MAX ROACH at Basin Street)였다.

 

다 갖고 싶다! 여기서 악동 기질이 전개됐다. 당시 나는 야구 소년이었고 투수에 4번 타자였다. 레코드점 아들도 같은 팀이었다. “다음 시합 때 4번 타자 양보할 테니까 레코드하고 교환하자.” 친구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4장의 레코드를 손에 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소년 야구는 아이들끼리 결성을 해서 감독이나 지도자도 없이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내 마음대로였다. 지금은 시효가 지나서 어둠의 뒷거래도 밝힐 수 있지만 지금은 그 친구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다.

 

당시는 흑인 재즈와 백인 재즈가 분명히 나뉘어 있었다.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트 코스트는 흑인이 우세했고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웨스트 코스트는 백인 지역으로 명확하게 갈려 있었다. 흑인 재즈의 리더로는 디지 길레스피,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치, 호러스 실버, 백인 리더로는 제리 말리건, 쳇 베이커, 빌 퍼킨스 등이 활약을 하면서 재즈계를 이끌었다. 그 이후 흑인 뮤지션들이 서서히 세를 넓히게 되면서 웨스트 코스트를 압도하게 된다. 그 선두에서 활약을 한 것이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였다.

 

 

4번 타자 양보하고 손에 넣은 재즈 레코드판


1954년 아트 블레이키는 호러스 실버와 만난다. 그리고 클리퍼드 브라운, 루 도널드슨, 컬리 러셀과 새로운 퀸텟을 결성한다. 바로 이 그룹이 재즈 메신저스 탄생의 실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몇 번의 멤버 교체를 거쳐 1958년부터 아트 블레이키와 재즈 메신저스의 세계 제패가 시작된다.

 

리더인 아트 블레이키의 목표는 젊은 뮤지션을 기용하고 육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차세대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던 트럼펫의 리 모건이나 피아노의 바비 티먼스, 테너색소폰의 베니 골슨, 웨인 쇼터 등을 기용하면서 재즈 메신저스로서의 길을 확실하게 다져 나갔다. 1958년 펑키재즈 붐의 발화점이 된 곡인 ‘모닌’(Moanin)을 ‘블루노트’에서 리코딩했는데 발매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즈 메신저스가 만들어내는 멋진 멜로디에 열광하게 되었다.

 

내가 블레이키와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 뒤인 1982년이다. 재즈 메신저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10년 이상 질풍같이 세계를 누비며,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펑키 붐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일렉트릭 사운드, 퓨전뮤직이 등장하자 인기는 나날이 떨어져 갔다. 그래도 블레이키는 오로지 자신의 길만 걸어갔지만, 재즈 메신저스한테 1970년대는 암흑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 유행의 바람이 변하면서, 재즈 메신저스한테도 적잖은 순풍이 불어왔다. 블레이키는 또다시 적극적으로 젊은 신인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윈턴 마살리스, 테런스 블랜차드, 케니 개릿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내가 블레이키와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예전의 기가 막힌 연주를 잊을 수 없었던 나는 어느 날 리코딩 작업을 하면서 베니 골슨에게 제안했다. “올스타 재즈 메신저스 편성으로 앨범 1장만 스페셜 에디션으로 프로듀스 하고 싶은데. 혹시 도와줄 수 없을까요?” 그 뒤 베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블레이키가 ‘재밌는 기획이다, 꼭 하자’고 합니다.” 나는 다른 멤버들은 어떨지 물었다. “다들 바쁜 녀석들이지만, 아트(블레이키)가 하자고 하면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베니는 자신한테 맡기라고 했다. “내가 멤버들 스케줄은 조정할게요.” 이렇게 해서 1982년 4월 드디어 뉴욕의 에이앤아르(A&R)스튜디오에서 리코딩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음악감독은 베니 골슨. 앨범 타이틀은 <아트 블레이키 & 올스타 재즈 메신저스>로, ‘Moanin’, ‘City Bound’, ‘Blues March’, ‘Night in Tunisia’ 등이 실렸다.

 

 

도쿄에서 만난 아트 블레이키, 사고로 죽은 클리퍼드 못 잊어

 

아트 블레이키의 당시 첫인상은 지금도 강렬하다.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가면서 전원에게 최고의 연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강한 집념의 모습이 지금도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리더란 어떤 것인지 그 전형을 아트 블레이키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다. 그래서 3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재즈 메신저스의 역사를 쌓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아트 블레이키도 일을 떠나서는 자애로움이 가득하고 재치가 넘치는 성품이었다.

 

1984년 겨울, ‘아트 블레이키 & 올스타 재즈 메신저스’ 팀은 일본 투어를 위해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다. 2월의 어느 날,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커피숍에서 베니 골슨과 그의 다음 리코딩에 대해 미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트 블레이키가 말을 건네왔다. “합석해도 될까요?”

 

그와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예전 이야기나 지금까지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들, 이번에 특별 편성한 올스타 재즈 메신저스에 관한 얘기 등을 한 시간 이상에 걸쳐 들을 수 있었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뭐죠?” 내가 물었다. “클리퍼드(클리퍼드 브라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클리퍼드와는 언젠가 함께 그룹을 결성할 생각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웠어요. 그 뒤 리 모건이나 프레디 허버드 등 훌륭한 트럼펫 연주자가 나왔지만 그들의 롤모델은 브라운이었어요.” 블레이키는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당시 리코딩에 대한 느낌을 물었더니, 경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주 즐거웠어요. 모두가 메신저스 출신이고 지금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라 음악이 환상적인 것은 당연하겠죠. 게다가 연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다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연주하는 사람이 즐기지 못하는데 듣는 사람이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재즈의 에센스랍니다. 생큐, 기마타!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꼭 리코딩 합시다.”

 

 

② 무작정 쓴 한 통의 편지, 32년 자유분방한 프로듀서의 길을 열다

베니 골슨, 재즈 인생에서 만난 첫 귀인

 

본격적으로 재즈 앨범 제작을 시작한 것은 1979년. 아르시에이(RCA)레코드 선전부의 최고책임자로서 우치야마다 히로시와 쿨 파이브 등 일본 아티스트들과 존 덴버, 대릴 홀 앤드 존 오츠 등 팝 계열 음악가들의 노래를 히트시키는 데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오래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어느날 큰마음을 먹고 상사에게 제안했다. “7년 이상 선전부 일을 해왔습니다만, 최근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쯤 새로운 일을 했으면 합니다만…. 재즈 앨범 제작을 하고 싶습니다!” “안 돼. 재즈는 큰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출도 별로 기대할 수 없어.” 상사의 한마디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1년만이라도 좋으니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그 안에 성과가 없으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1년만!” 결국 상사는 고집을 못 꺾고 허락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와 어떤 앨범을 만들까에 대해선 전혀 계획이 없었다. 잘도 허풍을 쳤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재즈 본고장인 미국 음악가와의 작업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전혀 접촉이 없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 그 첫번째가 베니 골슨(아래 사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작품인 ‘I Remember Clifford’, ‘Whisper Not’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산다는 건 알았지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전화번호부였다. 그곳에 살던 지인에게 베니 골슨이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2~3일 뒤 연락을 받았다. “한 명 있어. 우선 연락을 해보지 그래.”

 

나는 바로 편지를 썼다.

 

베니 골슨씨에게

 

저는 재즈를 매우 좋아하는 일본의 한 음반회사 직원입니다. 최근에 퓨전이나 일렉트릭 재즈에 밀려 여러분이 예전에 크게 발전시켜서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스트레이트 어헤드(Straight Ahead)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재즈 메신저스나 클리퍼드 브라운, 맥스 로치가 걸었던 그 재즈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요. 다시 한번 그 다이내믹하고 그루비한 비밥(bebop)을 되살리고자 재즈 제작 부문을 신설했습니다. 부디 제 꿈에 뜻을 같이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베니 골슨에게 답장이 왔다.

 

기마타씨, 당신이 말한 것처럼 지금 스트레이트 어헤드 재즈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퓨전 뮤직 아티스트로 시비에스(CBS)와 계약한 상태입니다만, 스트레이트 어헤드를 리코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은 저와 어떤 앨범을 만들고 싶습니까? 그 아이디어가 제 뜻과 맞는다면 꼭 같이 해 봅시다.

 

 

베니 골슨은 기마타 마코토와 인연을 맺은 뒤 재즈 앨범 12장을 함께 냈다.

그가 세계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에디 헨더슨(사진 왼쪽)과 함께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


 

첫 제작 재즈앨범 연간 6만장 팔려 대성공

 

이 한 통의 편지로 재즈 프로듀서 ‘기마타 마코토’의 본격적인 재즈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는 많은 뮤지션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아트 블레이키를 필두로 재즈 메신저스의 면면들과 아트 파머, 냇 애덜리, 파로아 샌더스, 케니 배런, 론 카터, 우디 쇼 등. 베니 골슨이야말로 나를 지금의 재즈 프로듀서로 키워준 커다란 은인 중 한 사람이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내 첫 프로젝트인 스즈키 쇼지와 리듬 에이스의 <플라타너스 길>도 대성공이었다. 1980년 봄 발매해 연말까지 6만장이 넘게 팔렸다. 대부분 아날로그 녹음이었지만 당시 최신 기술인 디지털 리코딩을 바로 시험하겠다고 결심했고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전개해 당시 방송 뉴스를 주도하던 <엔에이치케이>(NHK) 9시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뤄졌다.

 

베니 골슨과는 <캘리포니아 메시지>라는 앨범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미국 첫 현지 녹음이었다. 이 작품을 리코딩할 때 그가 내게 물었다. “앨범 타이틀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생각중인데, 뭔가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떠오른 게 ‘캘리포니아 메시지’였다. 베니 골슨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었다. “기마타씨, 나쁘지 않네요. 그 아이디어 사용해도 될까요?” 이 작품의 결과는, 1981년 봄 발매 뒤 수개월 만에 1만3000장 판매. 대히트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자 처음에는 재즈 앨범 제작을 반대했던 사장 이하 모든 동료가 태도를 바꿨다. “기마타군, 재즈도 이렇게 팔리는구먼. 야, 허락하길 잘했어.” 나의 자유분방함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자유분방함은 앨범을 만드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앨범을 기획할 때 우선 타이틀을 결정하고 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베니 골슨도 나의 기획과 리코딩 방식을 흡족해했고 그와는 12장의 앨범을 만들었다. 그는 많은 음악가들에게 나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기마타의 아이디어는 재미있어.” 그런 베니 골슨을 단 한번이었지만 매우 슬프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82년 12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도시 전체가 화려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때, 뉴저지의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리코딩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시작은 됐다. 이 작품은 요절한 천재 트럼페터 클리퍼드 브라운의 추모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주인공이 될 신곡은 베니가 작곡한 ‘Time Speaks’였다. 노래 제목은 이 앨범의 타이틀이기도 하다. 연주 시간이 13분이나 되는 대작. 당시는 아직 시디(CD)보다는 엘피(LP)가 주류여서 좀 길다고 생각했다. “이 곡은 너무 기니까 베니 당신이 빠지고 프레디 허버드와 우디 쇼의 트럼펫 배틀로 가고 싶은데….” 내 제안에 그는 절대 이 곡에서 빠질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 색소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때까지 나는 주먹구구식 영어로 일을 진행하면서도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데 자만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확실하게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한 뒤에야 간신히 이해를 시켰던 씁쓸한 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베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에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반성하고 있다. 이 곡은 서로 많은 토론을 거친 끝에 결국 베니도 참가해서 최고의 완성곡이 만들어졌다. 이 앨범은 내가 만든 앨범 가운데서도 베스트 5에 들 정도다.

 

 

순수한 마음으로 오선지 대하면 진정성 있는 곡 나와

 

베니는 1960년대에 재즈텟(Jazztet)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재즈텟은 베니의 테너 색소폰, 아트 파머의 플뤼겔호른, 톰 매킨토시의 트롬본 등 3개의 관악기가 엮어내는 멜로디와 조화로운 연주로 신선한 재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재연할 목적으로 베니 골슨과 1983년 11월 뉴 재즈텟을 재결성해 앨범 1장을 만들었다. 그 당시 베니의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자질, 그리고 편곡자로서 탁월한 사운드 제작에 대해 직접 물었다. “베니, 당신은 인상적이고 훌륭한 멜로디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뭔가 작곡에 대한 당신 나름의 신조 같은 게 있는 건가요?” 베니는 말했다. “신조 같은 건 없어요. 만약 있다고 한다면 진정성이라고나 할까… 하하. 나의 작품은 모두 내 기억, 인상, 생각들이 동기가 되고 있죠. 그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지금 그것이 어떤 형태의 기억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지…. 단지 그것뿐이죠.” “그렇다면 결국 곡을 만들 때는 진정성을 어떻게 반영하느냐를 생각한다는 뜻인가요?” 또다시 물었고 답은 금방 돌아왔다. “기마타씨,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오선지를 대하는 것이죠.”

 

 

③ 한국 투어 앞두고 잠든 케니 드루, 잠들지 않을 음악세계를 추억하며

희로애락의 선율 편안한 변주

 

1980년 봄, 도쿄 시나가와의 한 호텔에서 한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내가 오랜 세월 앨범 제작을 맡았고, 내가 프로듀서로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케니 드루였다. 처음에는 그런 관계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케니가 ‘조니 그리핀 콰르텟’의 일원으로 일본에 왔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재즈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내가 추구하는 ‘재즈는 편안한 선율’과 딱 맞았고, 상당히 재미있는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

 

1980년대 초입. 당시는 전위파가 등장하여 혼돈스러웠던 1960년대, 재즈와 록의 크로스오버 음악이 등장했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재즈가 어떻게 변해갈지 예상할 수 없는 때였다. 특히 전위파는 기존 재즈의 개념을 타파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론을 모색했고,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적잖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지나치게 과격해 재즈 팬들에게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만을 남기게 된다. ‘재즈는 철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러한 경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전위파 재즈는 자연도태되었고, 재즈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하지만 1980년대는 오랜 시간 쓸쓸한 시대를 지내온 ‘스트레이트 어헤드’가 재인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 피아노 앞에서 젊은 시절의 기마타 마코토와 함께 웃고 있는 케니 드루

 

이런 때 일본 재즈시장에 등장한 이들이 ‘케니 드루 트리오’였다. 그는 버드 파월과 맥을 같이하는 하드 밥(Hard bop) 피아니스트로,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어느 정도 인정받은 음악가였다. 1980년 봄 그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했더니 케니로부터 긍정적 답이 돌아왔다. “나는 매트릭스라는 레이블을 갖고 있지만, 기마타씨가 프로듀스한 작품을 매트릭스 레이블로 유럽에서 발매할 수 있다면 꼭 함께 해봅시다.” 나 역시 답장을 보냈다. “단 한가지, 저에게는 제가 추구하는 레이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즈는 편안한 선율’이라는 콘셉트입니다. 흐르는 음악이 방해가 안 되고 귀에 거슬리지도 않고, 들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들으면 충분히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재즈, 그런 레이블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만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재즈는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죠. 그런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재즈의 재미있는 점이죠. ‘어떻게 하면 그런 표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그런 생각으로 피아노를 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해 11월 케니와의 첫 작품 <애프터눈 인 유럽>이 탄생했다.

 

 

전위파 재즈 도태된 때 케니 드루 등장

 

코펜하겐에서 케니와 나는 추억이 많다. 1983년 6월 <판타지아>(사진)의 리코딩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코펜하겐에 경마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를 즐기던 나는 “경마장에 가본 적 있냐”고 물었고, 그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를 설득해 결국 둘이서 경마장으로 향했다. 경주 전 패덕(말의 상태를 살피는 곳)을 들렀지만, 우리 둘은 당연히 말을 보는 안목이 없었다. “3번 말이 이길 것 같은데.” 케니가 말했다. “5번과 8번도 강할 듯한데.” 내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우리는 말없이 말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케니가 말했다. “마코토!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1번부터 8번까지 전부 사는 거죠.” 케니의 발상에 기가 막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전부 사면 말을 고르고 예상하는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모두 잃지는 않죠.” 결국 8마리를 모두 사서 1000엔이 조금 못 미쳤다. 결과는 5번 말이 이겨서 배당금은 300엔 정도 되었다. “이겼다! 5번 말이 이겼어요, 마코토도 이겼어요?”라며 케니는 아우성이다. “그래도 결국 손해잖아요.” 내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약간의 손해로 끝나서 다행이잖아요.” 황당한 케니의 일면을 봤던 그리운 추억이다. <판타지아>는 그 뒤 반년 만에 5만장이 팔려나갔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빌 에번스도 이루지 못했던 기록일 것이다.

 

케니는 도수 높은 술을 즐겨 마셨다. 그중에서도 위스키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였다. 언제나 행복한 표정으로 즐겼다. 그런 그도 리코딩이 시작되기 10일 전부터는 금주를 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알코올 효과가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죠. 자신의 음악을 순수한 기분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위험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밤새 마시고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아요.(웃음) 하지만 리코딩에서는 갈고닦은 집중력이 필요하죠.”

 

 

» 케니 드루 트리오의 연주 장면.

 


위스키 마니아지만 녹음 열흘 전부턴 절대 금주

 

어느 날 나는 케니에게 그의 음악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것만은 꼭 지키고 싶다’, ‘이런 부분은 충분히 신경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뭔가가 있나요?” “우선 테크닉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거죠. 프로 피아니스트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초기교’라고 말하는 테크닉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잘 숨기고, 누구나 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할 표현 방법이 있을까 연구해요. 이것이 내 연주에 있어서의 신조이기도 하죠. 그리고 하나 더, 음과 음의 사이, 즉 음간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 음간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거 정도라고나 할까요?”

 

1993년 3월 케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마코토,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이 있어요. 실은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유감스럽게도 5월 리코딩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리코딩 일정을 조금 연기해 주었으면 해요. 8월에는 아마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을 일본과 한국 투어는 아마도 무리일 것 같아요. 의사가 약을 추천해 주었는데 부작용으로 손가락 움직임이 나빠질 위험성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중이에요. 그런 사정이니까 아무쪼록 이해해 주세요. 케니로부터.

 

마지막 편지였다. 1993년 8월4일 코펜하겐 시내 병원에서 그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8월5일 닐스(케니 드루 트리오의 베이시스트)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그때 뉴욕에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은데 하루만 연장할 수 없을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어려워요. 마코토씨가 보내주신 꽃은 케니에게 헌화하도록 할게요. 뉴욕에서 애도해 주세요.” 닐스가 말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그해 10월 코펜하겐을 방문해서 그의 무덤에 꽃을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Kenny’s Music Still Live on’(케니의 음악은 여전히 계속된다)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에 돌아와서 얼마 있지 않아 케니의 아들 케니 드루 주니어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피아노 위에 ‘파시오나타’(Passionata)라는 미완성 악보가 있어요. 이것은 어쩌면 다음 작품의 신곡이 아닌지요?” 5월 리코딩 예정이던 앨범 타이틀이었다. “주니어, 아버지 신작 ‘파시오나타’를 완성시켜서 헌정앨범을 리코딩하지 않겠나?” 주니어는 “꼭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뒤인 1995년 2월 케니의 추모앨범 <파시오나타>가 완성됐다.

 


 

④ 비운의 재즈맨 쳇 베이커,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정말 파멸이었을까

 

마침 벚꽃이 피는 계절도 끝나가는 1985년 4월 어느 날 네덜란드에서 전화가 왔다. 유럽에서 일을 돕던 빔 비흐트였다. “쳇 베이커에 흥미 있어요?” “전설적인 뮤지션이니만큼 흥미가 없지는 않지만 왜 그러시죠?” 내가 물었다. “사실은 리코딩 제안이 있어서요.” “그는 리코딩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클럽에 출연하면 거의 테이프를 튼다던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죠…. 사실은 쳇이 일본에 가고 싶어 해요.” “일본 프로듀서와 일을 하고 싶다는 건가요? 하지만 마약과 관련된 얘기들이 너무 알려져 있어서 일본에 들어올 수 있을지….”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르시에이(RCA)와 타임리스레이블의 합동 제작으로 한 장 만들어 줄 수 없겠어요?”

 

쳇 베이커는 1950년대에 마일스 데이비스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트럼피터로,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정도로 멋진 용모와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사운드로 재즈계에서는 드물게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왜 자학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인생을 걷게 되었을까?

 

1952년 당시 재즈계의 최고봉에 서 있던 찰리 파커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단번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후 제리 말리건의 그룹에 참여해 착실하게 재즈 트럼피터로서의 지위를 굳혀 가게 된다. 1953년에는 전설이 된 <쳇 베이커/싱스>를 리코딩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1955년에는 카네기홀에도 출연하는 등 인기가 재즈 팬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특히 그의 보컬은 많은 여성들이 듣고 도취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입증하는, 보사노바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쳇 베이커의 노래가 나의 보사노바 창법을 확립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모른다. 부드러우면서 마음에 스며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나른함…. 그것이 보사노바의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주앙은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다. “당신과 나와 쳇 베이커 셋이서 트리오를 만들어서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를 계속 부르면 세상의 커플들은 모두 행복해질 거야.”

 

그런 그가 왜? 나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왔던 뮤지션들에게 꽤 깊은 질문을 하곤 했다. 케니 드루, 맬 월드론, 아트 블레이키, 프레디 허버드 등. 그중에는 마약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쳇 베이커에게도 단단히 마음먹고 물어봤다. 아마 2번째 리코딩이 끝나고 갔던 네덜란드 몬스터르에 있는 중국요리집에서였을 것이다. 솔직히 그에게 마약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상당히 망설였고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저런 잡담을 한 뒤 결국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담배처럼 손댄 마약, 자학의 시작이었나


“어떻게 마약에 손을 대게 됐나요?” “내가 재즈계에 있던 1950년대엔 (마약 복용이)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어요. 선배들 대부분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마약도 가지고 다녔어요.” “계기는?” “잊어버렸어요. 내가 좋아했던 피아니스트 딕 트와르직과 유럽 투어에 나가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건 확실해요. 유럽은 뉴욕보다 질이 좋은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어서 “지금은 어때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쳇, 50년대에는 마일스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재즈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렸다죠?” “난 그런 자각이 없었어요. 그때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같은 기분으로 담담하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에요. 그런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쁘고… 어떤 세계든 찬반 양론이 있어요.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여러가지 변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여러가지 있었죠. 가정도 없어졌고 이도 없어졌고…(웃음) 하지만 이것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할 뿐이에요. 그러면 먹고살 수는 있어요. 올해(1986년)는 일본에도 갔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나요?” 내가 물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한 사람이라도 즐겁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요.” “미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좋은 추억이 없어서인가…?” 내가 쳇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쳇 베이커는 마약과 가정불화 등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아이돌로 추앙받던 젊은 날의 쳇 베이커

 

어떤 사람은 그를 ‘비운의 재즈맨’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파괴적, 자학적인 일생을 보낸 보기 드문 뮤지션’이라고도 한다. 그의 음악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들으면 납득이 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면서 마약과도 같은 여운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신기한 면이 그의 음악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넷 콜먼이 이런 얘기를 했다. “노래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데 마음에 남는…. 도대체 뭘까 그의 노래는.” 확실히 쳇은 장래를 촉망받았던 것만큼 그 이후의 삶과의 낙차가 너무나 커서인지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웬 참견이야, 내버려 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 음악을 ‘애수’(哀愁)라든가 ‘앙뉘’(ennui·권태를 뜻하는 문예 용어로 생활에 대한 정열을 상실한 따분한 정신상태)라는 말로 극찬을 했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그런 감상적인 의식도 없었던 게 아닐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에게서 받은 솔직한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스트링스 오케스트라와 협연 앞두고 벌어진 비극

 

내가 쳇과 만났던 것은 그의 만년, 불과 3년 정도였다. 처음에 이야기가 들어왔을 때는 그의 리코딩에 대해서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리코딩을 각지에서 했고 그것도 상당히 질이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였다. 하지만 결국 3장의 앨범(<싱스>, <러브 송>, <싱잉 인 더 미드나이트>)을 제작했고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름 마음에 드는 앨범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장, 콤필레이션 앨범이 있다. 이 기획에는 뒷얘기가 있다. 1987년 일본에 왔을 때의 일이다. 다음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스트링스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연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런 얘기가 진행돼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픽업 멤버를 기용하기에 이르렀다. 타이틀은 <마이 페이버릿 송스>. 녹음은 1988년 7월 아니면 8월이었다.

 

1988년 2월 어느 날 네덜란드에서 전화가 왔다. “편곡도 끝났고 괜찮은 얘기가 있어요. 하노버의 라디오 방송국이 특별 방송을 편성하고 싶다고 해요. 리허설에 이 리코딩 기획을 그대로 얹을까 해요. 뒤에는 하노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4월에 수록할 거예요. 기대하세요.” 수록이 끝난 다음달 5월13일, 설마 그런 비극(암스테르담에서의 투신자살)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의 기획은 하노버 라디오 방송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쳇은 갔지만 그가 완성을 학수고대했던 기획을 우리도 실현시키고 싶었다. 결국 내가 프로듀스한 것들 중 사용하지 않은 테이크에서 좋은 것들을 골라 <쳇 베이커 위드 스트링스>라는 타이틀로 발행하게 되었다.

 

쳇도 드디어 마약에서 해방되어 한숨 놓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⑤ 마지막회. ‘재즈=편안한 선율’ 증명하려 콘셉트 잡고 신인 발굴

내 꿈의 완성판,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잠재력이 높은 싹수가 있는 젊은 뮤지션을 찾아내서 키우고 싶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을 발굴해서 스타로 키우고 싶다….’

 

프로듀서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법이다. 이는 또한 프로듀서의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다. 나도 1980년대에 케니 드루 트리오, 토미 플래너건 슈퍼 재즈 트리오 등 나름대로 히트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신인을 육성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 신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운 좋게도 케니 드루나 아트 블레이키뿐 아니라 프레디 허버드, 베니 골슨, 쳇 베이커 등의 다수의 히트 앨범을 발표했고,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매되었다. 재즈 프로듀서로서의 지명도도 상당히 높아져 갔다. 그런 시기여서인지 젊은 뮤지션들의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모여들었다.

 

1980년대 중반 그 무렵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트리오가 자아내는 분위기와 이 트리오의 앨범 이미지도 명확하게 내 마음속에 그릴 수가 있었다. 무릎을 쳤다. ‘맞아!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만들자! 유럽에서 자신들만의 재즈를 열심히 키우려고 노력하는 젊은 음악가들을 찾자!’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지난 9월 공연 모습. 이들은 9년째 해마다 한국을 찾아 재즈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이미지는 ‘유럽의 귀공자들’.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근함을 줄 수 있는, 젊은 여성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련된 재즈, 그야말로 ‘편안한 선율 재즈’를 증명하는 트리오라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피아노 트리오인지 기타를 중심으로 한 트리오인지도 정하지 않은 채 음악가를 찾아 나섰다. 이름과 콘셉트만을 앞세운 것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리오의 중심이 되는 음악가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의 이미지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할지 최종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을 정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네덜란드의 파트너였던 빔 비흐트가 3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카럴 불레이, 프란스 후번, 로이 다퀴스였다. 사진과 함께 ‘이들은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같이 연주하고 있는 그룹이고 서로 호흡도 잘 맞는다’는 내용의 메모와 그들의 음원도 보내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외모와 재주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의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와 상당히 가까웠다. ‘좋아! 이걸로 가는 거야!’

 

앨범의 방향도 머릿속에서는 대충 윤곽이 잡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노르웨이의 숲>(사진)이었다.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이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내가 생각했던 앨범 이미지의 타이틀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1989년 봄에 발매된 데뷔 앨범은 대성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인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히트였다.

 


1989년 데뷔 앨범 대성공…90년대부터는 클래식을 재즈로

 

이렇게 되면 두번째 작품에서 이들의 가치가 평가를 받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에 편승한 우연한 히트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내 심복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온 하라 데쓰오 디렉터(현 비너스 레코드의 사장 겸 프로듀서)와 검토를 거듭해서 정해진 앨범 타이틀이 <스웨덴의 성>(Chateau en Suede)이었다. 내 발상은 북유럽 3부작이었는데 같은 시기에 케니 드루 트리오도 유럽 3부작(<파리북역 인상>, <유럽 기행>, <여정의 끝에>)을 기획해서 진행중이었다. 그 히트가 이번 앨범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렇게 발매한 두번째 작품도 데뷔 판을 뛰어넘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인기는 일본 안에만 머물렀고, 미국과 그들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지만 데뷔한 지 4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피아니스트 카럴 불레이가 “퓨전 쪽, 일렉트릭 사운드에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리는 이미지와 맞지 않았고, 그런 참에 그들은 활동을 끝내기로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는 “재즈 트리오로 부르기에는 너무 약하다. 세련된 이지 리스닝 뮤직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마타 재즈는 재즈의 본질을 잃고 있다. 상업주의에 치우쳐 있고 팔리기만 하면 다가 아니다. 재즈 레코드가 2만~3만장씩 팔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도 했다.

 

어떤 비판을 받아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결코 거기에 반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프로듀서로서의 신념이다. 작품을 사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따로 내가 반론을 하지 않아도 그 평가는 시장이 무너뜨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2대 피아니스트 마르크 판 론의 연주 모습

 

20년 재즈 프로듀서 인생의 큰 자랑이자 훈장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해산 뒤 2년 정도 지난 추운 어느 날이었다. 로이와 프란스는 “재결성할 수 없는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찾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들이 찾아낸 피아니스트는 마르크 판 론이었다. 녹음을 들어보니 역량은 문제가 없었다. 외모도 준수했다. 단지 재결성한다면 분위기와 색깔을 바꾸고 싶었다. 카럴 시절의 분위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말하자면 정통 피아노 재즈와 같은 타입이었다. 예상치 못한 멜로디를 그려 내는 의외성도 있었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교도 부리는, 말하자면 화려한 트리오였다.

 

다른 표정의 트리오로 만들고 싶었다. 베이스와 드럼은 피아노가 자아내는 표정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면서 마르크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려니 예전과는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의 피아노는 정돈되어 있었고 서정적이면서 냉정하게 자신의 음악과 마주하는 타입이었다. 카럴이 표현하는 뜨거운 감동과는 또다른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멜로디를 연주하는 음색에는 투명함이 있어서 아름다웠다. 새로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탄생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그들에게 연락을 했다. “오케이! 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만듭시다!”

 

1995년 6월 재기작은 <메모리스 오브 리버풀>이었다. 비틀스에서 영감을 얻은 앨범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생각도 들었다. ‘마르크의 잠재력을 좀더 발휘시키려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클래식 명곡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다. 그렇게 나온 앨범이 <이모털 빌러브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 21번을 편곡한 노래가 포함됐다. 이후 그들의 손에 클래식 명곡이 차례차례 재즈로 만들어졌다. 역시 찬반양론이 있었지만 진심 어린 평론가들은 새로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에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었다. 어떤 평론가는 “기마타 마코토도 멤버로 봐야 한다. 그는 연주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 하나의 테이스트가 플러스되고 표현에 일종의 색깔이 반영된다.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재즈 유닛은 없었다”고 의견을 냈다. 다른 평론가는 “기마타가 하면 그 뮤지션에 새로운 특성을 더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맛을 표현하게 만든다. 마치 마술사와 같다”고 칭찬해줬다.

 

클래식 레퍼토리를 접목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나의 의도를 마르크, 프란스, 로이가 나름대로 소화해서 훌륭하게 재생해 주었다. 지금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 중국에도 팬이 늘었다. 특히 한국에는 매년 투어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렇게 길게 함께한 재즈 그룹은 ‘아트 블레이키 앤 재즈 메신저스’ 외에는 없었다.

 

20년 정도 지나면 어떤 음악에도 황혼이 온다. 지금까지 내가 제작한 앨범은 25작품. 20년이라는 궤적을 남기고 이대로 막을 내려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단계로 눈을 돌려 새로운 스텝을 밟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는 틀림없이 내 꿈을 이뤄주었다는 것이다. 나의 프로듀서 생활에서의 큰 훈장이고 또한 프로듀서로서 나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끝>

 

글 기마타 마코토/재즈 프로듀서·사진 제공 컨텐츠팩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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