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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중국의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by Wood-Stock 2012. 1. 13.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중국 또 하나의 보물 - 중국·북한 2개국 군가 작곡

 

하얼빈(哈爾賓)에서는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관 이외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있다.

 

그곳은 ‘정율성 기념관’(鄭律成記念館)이다. 정식 명칭은 ‘인민음악가 정율성 생애사적 전시관’이다. 이름 그대로 이 곳은 정율성 음악가(1914~1976)가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안중근 의사가 총으로 직접 적을 쓰러뜨렸다면 정율성 음악가는 노래의 선율로 인민해방군의 심장을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이다.

 

정율성 음악가와 하얼빈과의 인연은 깊다. 해방후 정율성과 중국인 부인인 딩쉐쑹(丁雪松)은 하얼빈에서 농공업생산 현장에서 일하면서 ‘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興安嶺上雪花飄,) ‘행복한 농장’ ‘소흥안령’ 등 향토적이고 노동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남겨 흑룡강 주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가져온 건설의 노래소리, 노래소리가 넓디넓은 삼림에 울려퍼지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에 뒤덮힌 기복이룬 삼림, 삼림은 은색의 해양을 방불케 하네.

적설에 깔린 삼림에서 솟아오르는 태양, 삼림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가. 채벌노동자들은 산위에서 영차영차 일하기에 바쁘다네.

눈치우는 차는 산마루에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트랙터와 기차도 쉼없이 달리네, 건설의 열정은 하늘을 찌르고 노동의 노래소리 멀리멀리 우렁차네.

강인한 사람들은 찬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찬바람은 우리들의 노동의 열정을 날려보내지 못한다네. 강인한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추운 겨울은 우리들의 애국의 뜨거운 피를 식히지 못한다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가져온 건설의 노래소리, 노래소리가 끝없이 넓은 삼림에 울려퍼지네.

<‘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 (興安嶺上雪花飄,) 가사 중에서>

 

   
하얼빈 쑹화장(松花江)변에 있는 '정율성기념관' 외벽에 인민해방군 군가의 악보가 '向前, 向前, 向前'이란 가사와 함께 설치돼 있다.ⓒ하성봉
 

하얼빈에 정율성 기념관이 있게 된 것은 서학동(徐學東) 하얼빈 시정부 문화부 부국장과 강월화(康月華)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관장의 공이 컸다. 서 부국장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정율성 가족들과 협의해 2009년 5월 문을 연 기념관에 정 음악가의 유품들을 모두 모셔왔다.

 

쑹화장 강변에 ‘정율성 기념관’ 위치…강물의 흐름과 함께 흐르는 선율

 

   
하얼빈 정율성 기념관 입구에서 인민해방군군가가 울려퍼지고 있다.ⓒ하성봉
 

정율성 기념관은 쑹화장(松花江) 강변과 가깝다. 짙은 청색 기와를 얹은 지상 2층, 건축면적 1350㎡의 규모로 하얼빈시 군사령부 바로 옆에 있다. 이곳에는 정율성 음악가의 사진과 친필 악보, 피아노, 그물과 낚시도구, 옷, 책 등 220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1933년 5월 중국으로 건너갈 당시 가져간 세계명곡전집과 레코드판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정 음악가의 낭만적이면서도 치열했던 일생과 그와 함께한 격동의 현대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丁雪松)의 젊은 시절 모습.ⓒ하성봉
 

기념관 2층에서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정 음악가가 생전에 고향을 그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즐겨 불렀던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되는 ‘메기의 추억’이  흘러 나온다. 1933년 19살의 정율성이 중국에 와서 1976년 숨질 때까지 타향에서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곡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게 된다.

 

중국에서 더 인정받는 조선인 음악가…‘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혀

 

중국 사람에게 정율성 음악가를 물어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실제 13억의 중국 인구중 80%이상인 10억의 인구는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를 최소 1곡 이상은 알고 있다. 정율성은 중국 국가(國歌)를 작곡한 네얼(聶耳,1912~1935)과 황하대합창을 창작한 셴싱하이(先星海,1905~1945)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린다. 정율성은 2009년 건국 60주년때 ‘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혔다.

 

   
정율성 음악가가 직접 사용하던 피아노가 유품으로 전시돼 있다.ⓒ하성봉
 

정율성은 일생동안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및 오페라음악을 포함한 360여 곡을 남겼다. 그중 중국이 인정하는 정율성의 최대 공로는 ‘연안송’(延安頌)과 ‘중국인민해방군군가’(中國人民解放軍軍歌) 두 곡이다. 이 두곡은 중국 현대음악사에서 큰 줄기를 형성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외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我們多麽幸福)는 아직까지도 초등학교에서 불리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군가’는 중국 국가(國歌) 다음의 위상을 갖고 있다.  정율성 기념관에 들어서면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육해공 인민해방군인들이 행진하는 영상과 함께 장중하면서도 힘찬 ‘인민해방군군가’가 흘러나온다.

 

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짋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복은 없다. 영특하고 용맹하게 전투해서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들어라! 바람이 외치고 신호나팔 소리가 울려온다. 들어라! 혁명의 노래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동지들 발맞춰 조국의 변강으로 달려가자,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마지막 승리를 향하고, 전국의 해방을 향한다!

(출처:  ‘중국인민해방군군가’)

 

중국 정부의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다. 중국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정율성은 중국의 걸출한 작곡가이다. 또한 유명한 국제주의 전사이다. 그중에 인민해방군군가는 순박간결한 언어와 울림이 있으면서도 힘있고 장엄하고 호방한 곡조를 담고있다. 인민군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새겼다. 인민군대의 무한한 전투품격과 산이 첩첩이 줄을 서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를 보여준다. 진군의 나팔소리와 같이 인민군대 성장의 장대함과 인민전쟁승리의 역정에 따라서 중국인민해방군전투역량과 정치적업무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정율성 기념관을 방문한 중국인들중 팔로군 출신의 옛 병사들은 이 영상을 보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샹첸!(向前) 샹첸!(向前) 샹첸!(向前)~” 이란 곡조를 듣다보면 항일 당시의 치열성과 긴장감이 온몸에 전해온다. 중국 대륙을 삼키려는 일본에 대항해 죽음을 각오한 인민해방군들에게 이 노래는 심장의 피를 끓게 하고 곧바로 전쟁터로 달려가도록 만드는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이 곡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와 함께 했다. 이 노래는 홍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베이징에 입성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정율성 음악가는 1937년 10월에 연안에 가게 된다. 이름도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완성(成)하겠다”란 의미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고쳤다.

 

   
정율성 음악가가 옌안(延安)에서 연안송을 지휘하는 장면으로 부인 딩쉐쑹도 대열의 왼쪽에 서 있다. 출처=중국포털 사이트 바이두
 

그가 ‘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한 것은 1939년 가을로 25살 때였다. 정율성은 공목(公木)과 연안에서 총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하였고 <팔로군행진곡>은 그중의 대표곡이다. 이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 2월 1일 <인민해방군군가>로 이름을 바꾸면서 가사에 약간의 변경이 있었다.

 

그 뒤 1953년 5월 1일 <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고쳤다가 1965년에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7월 25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반포되었고 그뒤 군대의 모든 행사, 각종 집체의식 및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유행중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때도 울렸고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때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도 울려퍼졌다. 또 매년 건국기념일 열병식 때마다 톈안먼 광장에서 들을 수 있다.

   
정율성 음악가가 작성한 연안송 친필악보.ⓒ하성봉
 

 

이와함께 중국 공산당의 혁명기지였던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 도착뒤 1년이 안된 1938년 4월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석양의 빛은 산봉우리 탑을 비추고, 달빛은 강가의 반딧불을 비춰주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古城), 여기저기에 항전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 뜨거운 피가 너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네.

 

천만 청년의 마음, 적들에 대한 원한을 품었네, 산야와 논밭의 길고긴 행렬에서 견고한 전선을 이루었네. 봐라! 군중들은 이제 머리를 들었노라, 봐라! 군중들은 이제 손을 들어올리노라. 무수한 사람과 무수한 마음, 적들에 대해 분노의 포효를  하고 있네. 사병들은 총구를 겨냥하고, 적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성벽, 견고한 항일의 전선을 구축하였고 너의 이름을 만고에 남길 것이며,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리!

<‘연안송’(延安頌)에서)

 

=>연안송 듣기 http://www.gzhsjyw.com/ewebeditor/uploadfile/music/yas.mp3

 

 ‘연안송’은 발표뒤 옌안(延安) 뿐만 아니라 항일 기지는 물론이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피끓는 젊은 청년들을 연안으로 끌어들이는 촉발제가 됐다. 연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서양의 서정성과 한민족의 음악 특징이 유기적으로 조화되어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실제 연안송은 요즘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K팝’과 같은 인기를 당시 중국대륙에서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연안은 혁명의 근거지였고 연안송은 혁명의 의지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연안에서 전국 각지로 번지면서 젊은 청년들이 연안으로 모여드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렀던 것이 연안송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율성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율성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만약 군중들의 노랫소리가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면 정율성은 바로 한 점의 불씨였다. 그가 가는 곳은 바로 불같이 일어나는 노랫소리에 불을 당기는 지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중국포털 바이두에서>

 

하얼빈 ‘정율성 기념관’에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실내 계단에 이르면 ‘연안송’이 흘러나온다. 계단 옆의 벽에는 당시 토굴속에서 어렵게 생활했던 옌안의 풍경이 재현돼 있다.

 

혁명중 부인과 애뜻한 ‘러브 스토리’…바이올린 팔아 살린 딸 이름도 ‘샤오티’

 

   
정율성 음악가는 부인 딩쉐쑹에게 들꽃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책으로 연정을 표시하면서 사랑을 이루게 된다.ⓒ하성봉
 

정율성 음악가는 1938년 옌안(延安) 루쉰(魯迅)예술학교 음악학부에 입학하면서  딩쉐쑹(丁雪松)과 인연을 맺게 된다. 딩쉐쑹은 1938년 옌안 여자대학에 입학하였고 학교구락부 주임을 맡고 있었다. 정율성은 당시 팔로군 여전사였던 딩쉐쑹의 책상에 들꽃을 꽂아놓고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 책과 ‘작은 여전사에게-정율성’이라 적은 쪽지를 놓아두는 방식으로 연심(戀心)을 표시한다. 책을 받은뒤 딩쉐쑹의 마음이 흔들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얼빈의 정율성 기념관에는 당시 딩쉐쑹이 사용한 책상위에 당시의 책, 들꽃이 놓여져 있다.

 

   
정율성 음악가는 옌안(延安)시절 하모니커,만돌린,북 등 세악기를 함께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연주를 할 때 그의 프로그램은 아주 특별했다. 철사로 입앞에 하모니카를 고정시켜서 불고 만돌린을 안고 켜면서 발 아래는 타악기(북)를 치면서 한 개의 몸이 세가지 악기를 다루고 있었다. 어떤 때는 고음의 노래를 크게 불렀다. 서정적인 낭랑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무대에 올라가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대합창을 지휘했다. 어떤 때는 석양이 지는 속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은 그의 얼굴 윤곽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딩쉐쑹 여사의 연안시절 정율성 음악가에 대한 첫 인상이다. 이러한 호감으로 정율성 음악가와 딩쉐쑹 여사는 1941년 결혼하게 된다.

 

   
정율성 음악가의 가족사진으로 가운데가 딸 딩샤오티(丁小提)의 어릴 때 모습.ⓒ하성봉
 

당시 정율성은 <연안송> 등을 작곡했음에도 조선인으로 사상적인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장정(長征)에 참가한 팔로군포단 단장 무정(武亭) 장군이 옌안에 회의참석차 왔다가 신원보장을 하고 둘을 연결시켜서 이들의 결혼이 성사되게 됐다. 정율성은 당시 사냥을 좋아했는데 결혼하기 전 주덕(朱德)장군이 준 장총으로 두 마리 산양을 잡아서 한 마리는 팔아 떡을 사고 한 마리는 구워서 손님들을 초청해서 먹었다.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의 포스터.ⓒ하성봉
 

2001년 가을 베이징에서는 둘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됐다. 이 영화는 2010년 9월 베이징에서 또다시 재상영돼 30만명이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딩쉐쑹 여사는 1979년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네덜란드에 부임했으며 1982년 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딩쉐쑹 여사는 2011년 5월 93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정율성 음악가와 딩쉐쑹 여사와의 사이에는 외동딸 딩샤오티(丁小提,69살)가 있는데 이름에 사연이 있다. 옌안에서 딩쉐쑹 여사가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정율성은 자신이 보물같이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분유를 산다. 그래서 딸의 이름을 ‘바이올린’(violin), 중국말로 ‘샤오티’(小提)라고 짖게 된다. 정샤오티는 현재 베이징 바로크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정율성 음악가는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중국 남쪽의 소수민족이 많은 윈난(雲南)을 네차례나 방문해 사학가이자 민간문학가인 쉬자루이(徐嘉瑞,1895~1977) 선생과 손잡고 나무꾼과 공주사이의 슬픈 사랑을 그린 백족 설화를 다룬 망부운(望夫雲)이라는 5막8장의 대형민족가극을 만들어 냈다. 이 극은 1962년 중앙가극무극원이 베이징에서 첫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삶의 현장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던 정율성은 조선족은 물론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쓰촨(四川), 네이멍구(內蒙古) 등지의 소수민족 지역을 직접 방문해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풍부하고 이채로운 작품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 음악가가 고기를 잡기위해 그물을 던지고 있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정율성은 1959년 중국반우파정치운동 기간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썼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특무(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돼 음악활동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1976년 문화화대혁명이 끝난 뒤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취미인 그물고기잡이를 하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 사후 1년째인 1977년 베이징에서 ‘정율성선생 추모1주년 기념작품음악회’가 열렸으며  당시 유명 작곡가 리환즈(李換之)가 지휘를 맡았다.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들이 묻히는 스징산루(石景山路) 바바오산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에 묻혀 있으며 비문에 그의 공적이 적혀 있다.

 

중·북 2개국 군가 독보적…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때 ‘조선인민군행진곡’ 울려

 

중국 음악계는 정율성 음악가가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한다. 정율성은 해방뒤 팔로군총부 6호의 명령에 따라 무정 사령관 통솔하의 조선의용대에 소속돼 가족이 1945년 조선으로 가게 된다.

 

   
김일성 주석이 1948년 2월 정율성 음악가에게 수여한 표창장으로 정율성 기념관에 비치되어 있으며 윗상단에 인공기가 아닌 태극기가 표시되어 있다. ⓒ하성봉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국가보안대(조선인민군 전신) 구락부(군 문화부 부장에 해당), 조선노동당 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중에 조선인민의 투쟁과 중조우의를 담은 <조선인민군행진곡> <중조우의>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을 때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연주했다. 북한은 1992년 대형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을 출품하는 등 정율성에 대해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북한에서 1992년 상영된 '음악가 정률성'의 홍보 포스터.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1950년 9월 부인 딩쉐쑹이 북한에서 귀국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북한내 연안파의 숙청을 우려해 친필로 김일성 주석에게 정율성을 중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으며 김 주석의 동의하에 정율성은 중국으로 돌아가 음악 창작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KBS 다큐 ‘정율성 편’ 거듭 방송불방…한국은 ‘이념’ 때문에 제 대접 못받아

 

 

 
정율성 음악가의 조선인민군행진곡 친필 기록.ⓒ하성봉
 

 

한국은 1996년 10월 서초동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정율성 작품 발표회’가 국내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부인 딩쉐쑹 여사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뒤 2005년 정율성의 고향인 전남 광주에서 ‘정율성국제음악회’가 처음으로 열린뒤 2011년 10월 7회째를 기록했다. 그간 광주에서는 정율성 기념사업회 현판식과 사진 전시회, 흉상 제막식, 정율성로(路) 개통과 생가터 표지판 건립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과 각종 논문발표 등 학술적인 연구까지 진행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2011년 8월에는 하얼빈, 베이징 등 정율성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주쪽의 이러한 노력에 따라 200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을 맞아 베이징 음악청(北京音樂廳)에서 중국 문화부 주관과 광주시 협력으로 ‘우호평화행진곡 정율성 작품음악회’가 열린 적이 있다. 또 2011년 8월에는 하얼빈에서 ‘정율성음악제와 광주의 밤’이 열렸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정율성에 대한 높은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국내에서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 KBS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행적을 문제삼아 2011년 8월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키로 한 정율성 편을 11월로 연기한뒤 또다시 2012년 1월로 방영을 미룬 바 있다.

 

사실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2002년과 2004년에 걸쳐 4차례나 국내 방송에서 다뤄졌음에도 KBS는 정율성 음악가가 북한의 군가를 작곡했고 한국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사실을 들어 방송을 못하게 한 것이다.

 

정율성은 조선인으로 생의 대부분을 항일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음악을 무기로 활동한 예술가이다. 올해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많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정율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확대하는 것은 양국간 관계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2011.1. / 미디어오늘 / 하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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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음악가 정율성, 그는 왜 군가를 작곡했나

70여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정율성'

 

 

최근 조선인 출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한 정율성(鄭律成) 음악가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KBS1 TV에서 방영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북한에서의 인민군행진곡 작곡 등 그의 행적과 관련해 국내에서의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율성 음악가가 작곡한 ‘연안송’(延安頌) 등 다수의 곡들은 중국에서 여전히 높은 음악적 평가와 함께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음악은 상대의 귀를 열어 억지로 듣게 한다고 해서 명곡이 될 수 없다. 마음에 와닿는 음악이라면 청중들이 스스로 귀를 기울여 듣고 가슴에 고이 간직하게 마련이다.

 

정율성 음악도 마찬가지다. 항일 혁명시기에 작곡된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이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도 중국인들에게는 큰 역사적 의미와 함께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음악적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인들은 한 조선인 출신의 정율성 음악가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또한 정율성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실현했는지 정리해보았다.

 

자료는 <작곡가 정율성>(부인 딩쉐쑹<鄭雪松> 등 지음),  <태양을 향한 노래>(왕허핑<王和平> 지음) 등을 주로 참고했다. <편집자주>

 

음악은 생활과 시대의 산물…옌안(延安)은 당시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 같아

 

중국인들은 정율성 음악가가 작곡한 ‘연안송’을 듣고 부르면서 중국적이지도 않으면서 낭만적인 서양음악의 선율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인들은 연안송이 서정성과 전투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곡을 들어보면 전반부가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로 잔잔하게 흐르다가 중간에 발랄하고 빠른 곡으로 진행된뒤 마지막 부분에서 또다시 잔잔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율성 음악가가 당시 서양 고전음악을 기조로 삼으면서도 중간에 행진곡풍을 더하면서 다른 중국인 음악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연안송’이 낭만적인 송가(頌歌)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대해 20세기초 한반도가 서양문물의 영양분을 풍부하게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중국인들은 분석한다. 또한 정율성이 당시 행진곡 등 군가를 많이 창작한 것은 항일투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생활과 시대의 산물이다.

 

정율성 음악가가 옌안(延安)에 갔을 때는 1937년 10월로 일본 침략이 최고조화되고 무력충돌이 극대화하던 시기였다. 항일이 시대의 조류가 된 상황에서 군가외에 다른 음악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옌안은 당시 중국공산당 혁명의 근거지로 수만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병영(兵營)이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 군인으로 소속돼 생활하면서 뜨거운 혁명의 열기를 음악의 선율로 담아낸 것이다.

 

정율성은 왜 군가를 작곡했는가?

 

당시 옌안(延安)에는 많은 와호장룡(臥虎藏龍)급의 음악가들이 몰려 들었다. 셴싱하이(诜星海), 리환즈(李煥之), 스러멍(時樂濛), 마커(馬可) 등 모두 뛰어난 창작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그럼에도 25살이었던 정율성 음악가가 불후의 군가를 남긴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평가한다.

 

'팔로군행진곡'(이후 '인민해방군군가'로 개명)이 큰 인기를 얻자 옌안의 공산당선전부장은 술과 돼지고기 '홍샤오러우'(紅焼肉)로

정율성과 궁무를 융성하게 대접해 일화로 남아있다.

 

 

우선 정율성 음악가의 항일 정신을 꼽는다. 정율성 음악가는 일본 침략자들의 피압박자로서 강적과 맞서 싸우는 군대에 대해 존경심과 숭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 정율성 음악가는 당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의 혁명성지인 옌안(延安)과 정의로운 역량에 대해 커다란 놀라움과 신선함을 갖고 있었고 강한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실제 중국인들은 ‘중국인민해방군군가’속에는 수많은 다른 스타급 음악가들이 강렬한 창작충동을 느꼈지만 만들지 못해던 웅장함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중국인민해방군가 듣기→ http://blog.sina.com.cn/s/blog_6d4eafe80100mhln.html

 

정율성 음악가 자신 또한 “전심 전력을 다해 음악으로써 민족해방전쟁의 이 위대한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음악사에 큰 공백을 남기는 것”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옌안은 수만명이 모인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다. 또한 이곳에는 병력이 모이면 노래로 행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부르면 저곳에서 따라부르고 수만명이 합창을 하면 옌안 전체가 울려 퍼졌다. 당시 옌안은 서북의 작은 산성(山城)이었지만 노래소리로 가득찬 ‘음악의 도시’였으며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또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연설과 청년들이 미래의 이상을 논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정율성은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속에서 정율성은 가슴속에 이전에 갖지못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연안송과 군가를 만들어 냈다.

 

실제 정율성 음악가는 연안에 있던 4년동안이 그의 일생을 통해 창작활동에서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약 50수를 썼으며 특히 옌안 도착직후 2년동안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연수요’(延水謠) 등 대표작 3곡을 창작했다. 정율성은 이 3곡을 통해 송가, 진행곡과 민가 등 세분야에서 중국현대음악사상 개척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적인 서정성이 녹아 있는 노래 연수요(延水謠)

 

중국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율성의 음악속에는 강한 서정성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연수요’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깊은 한국적인 한이 느껴진다.

 

연수요 듣기→ http://blog.sina.com.cn/s/blog_6d4eafe80100nqzr.html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나의 님인 오빠는 출정하여 전사되러 가네. (아) 출정하면 항일군이 되어야지, 좋은 쇠가 아니면 못도 못박는다네. 곡괭이를 들면 밭일 하기 쉬워지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네.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이 동생이 오빠를 바래러 가네. 오빠야 고향을 떠나 싸움터에 나아가 침략군들과 생사를 투쟁해야 하지. 나는야 베를 짜고 밭을 일구니, 겨울에는 면옷 있고 여름엔 양식 있으니 나 때문에 걱정일랑 하지마.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나의 님인 오빠는 출정하여 전사되러 가네.
(출처: 연수요<延水謠> 중에서)

 

‘연수요’는 당시 옌안이 위치해 있던 산시(陝西) 북부지역 민가(民歌)의 가락을 취해서 정율성이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새롭게 작곡해낸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연수요’는 ‘산베이 민가’(陝北民歌)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국적인 색깔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1939년에 창작된 ‘연수요’는 ‘연안송’의 자매편으로 한편으로는 서양풍의 송가형식과 한편으로는 산베이(陝北) 민족의 농밀한 서정풍이 어린 곡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노래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는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또 곡조가 매우 밝으면서 넓다. 또 가사중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나의 님인 오빠는 출정하여 전사되러 가네 延水濁, 延水淸, 情郞哥哥去當兵”’ 이란 내용이 사람의 심금을 사로잡는 힘이 느껴질 정도로 서정풍이 강하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모두 좋아한다. 이는 정율성 음악가가 민가(民歌)에서 영양을 흡수하는 재능이 탁월했음을 말해주며 일생동안 창작에 있어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정율성은 1952년부터 윈난(雲南)등 중국의 소수민족 지역을 찾아 민가(民歌)를 채집해 서정성이 짙은 곡을 많이 작곡한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실제 정율성 음악가는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63년까지 쓰촨(四川), 헤이룽장(黑龍江), 저장(浙江), 후난(湖南),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푸젠(福建), 장시(江西)성 등지를 다니면서 민가(民歌)를 수집하고 인민의 정서를 반영한 창작활동을 했다. 이에따라 그의 창작의욕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았다.

 

이 당시의 노래들은 대부분 노동가곡, 아동가곡와 합창곡을 작곡하게 된다. 당시의 곡은 다음과 같다.

‘강위의 노래’(江上的歌聲), ‘평화의 비둘기’(和平鴿), ‘소흥안령송’(小興安嶺頌), ‘유송합창’(流送合唱),’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興安嶺上雪花飄),’채벌가’(採伐歌),’행복한 농장’(幸福的農庄),’강대한 함대가 바다를 달리네’(强大的艦隊在海上進行),’바다 고기잡이 노래’(海上漁歌), ‘포정대대 출동가’(炮艇大隊出動了),’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我們多麽幸福),’우의와 평화 행진곡’(友誼和平進行曲),’소년운동원의 노래’(少年運動員之歌),’아름다운 칭다오’(美麗的靑島),’철도노동자의 노래’(鐵路工人歌),’즐거운 어린시절’(快樂的童年),’망부운’(望夫雲),’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용과 같네’(灣灣河水像條龍),’장강대교’(長江大橋),’아가씨는 누구 집으로 달려가나요’(姑嫏你跑向誰家),’바다의 초병’(海防哨兵),’비행원의 노래’(飛行員之歌)
등을 작곡했다.

 

독학으로 일군 대음악가의 쾌거…조선인 출신 이방인 청년으로서 불가사의한 일

 

정율성 음악가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맨손으로 넒은 대륙의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는데 있다. 그것도 조선인 출신의 이방인 청년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평가된다. 정율성은 당시 먹을 것과 잠 잘 데도 없고 학비도 없는 상황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순전히 독학으로 중국인들이 마음을 뒤흔드는 위대한 음악을 일궈냈다.

 

정율성은 중국에 도착한 이듬해인 1934년 의열단(義烈團)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뒤 비밀공작대원으로 난징(南京)고루(鼓樓)전화국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했다. 당시 신분 은폐를 겸해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주 한차례 상하이(上海)에 성악을 배우러 갔을 뿐이다.

 

정율성은 1937년 10월 옌안에 와서 샨베이공쉐(陝北公學), 루신예술대(魯迅藝術大), 캉다(抗大: 중국인민 항일군사 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의 준말) 등 학교에서 학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대학들도 전문 음악학교가 아닌데다 갓 설립된 것이어서 명목상의 학교에 불과했다. 당시 옌안에는 피아노는 고사하고 오르간도 하나 없었다.

 

정율성은 음악에 관한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은 당시의 중국 혁명군중과 항일 전쟁속에서 획득되고 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율성의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음악은 ‘항일 혁명의 무기’

 

정율성은 중국으로 온 목적이 항일투쟁이었지만 음악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목사인 외삼촌을 좋아해서 항상 그 집에가서 놀곤했다. 그 집에는 서양의 많은 명곡음반이 있었고 유성기(留聲機)도 있어서 날마다 가서 듣곤했다.

 

이것이 어릴 때 정율성의 음악적인 소양을 길러준 것으로 보인다. 또 둘째 형이 준 만다린은 이후 정율성이 음악을 작곡하는데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며 한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그는 1933년 5월 만다린과 세계명곡음반을 소중히 간직한 채 중국 땅을 밟는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음악공부 자금 지원…크릴로바 교수가 인생 행로 바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도운 이들이 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상하이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 정율성은 러시아출신 여성 외국교수 크릴로바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게 된다. 정율성이 스승에게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율성이 유명한 작곡가가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크릴로바 여교수이다.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의 자질을 알아보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권하지만 정율성은 항일 운동을 위해 거부한다.

 

당시 매주 교수에게서 받는 한번의 수업료는 한달 생활비와 맞먹었다. 이 사실을 걱정하자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에게 무료로 수업을 받는 대신 매번 수업때마다 생화를 사오도록 했다. 그래서 정율성은 매번 꽃을 사들고 성악수업을 들으러갔다.

 

정율성은 몇 개월동안 상하이를 오가면서 성악을 배웠고, 난징에서는 매일 새벽 어두울 때 계명사(鷄鳴寺)에 가서 적막한 하늘을 향해 성악연습을 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정율성은 자신만의 발성법을 터득하게 된다.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에게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 명곡음악회에 남자 고음 가수로 출연할 것을 제의받고 참가해 관중들에게서 큰 갈채를 받는다. 이때 닦은 성악 실력은 정율성이 옌안에서 음악가로 인정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음속 우상’ 셴싱하이(诜星海)와의  만남…음악활동에 커다란 자극제로 작용

 

정율성이 당시 유명한 작곡가로 활약한 셴싱하이(诜星海)를 만난 것도 음악 인생의 촉매제가 됐다. 1936년 가을 김원봉은 정율성이 중국 ‘좌익’ 진보단체와 접촉이 긴밀한 사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자금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더 이상 상하이로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율성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와서 중화먼 화루강(中華門 花露岗)의 사당안에서 혼자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정율성은 당시 먹고 자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만 음악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그의 이름을 정부은(鄭富恩)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바꾼다.

 

정율성은 1936년 봄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서 정식으로 회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친구의 소개로 이 단체에 가입해 음악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젊은층들이 많이 참가했던 이 단체의 활동에서 정율성은 노래로써 주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일으킨뒤 중국공산당이 전국을 향해 일본에 항전을 선포했을 때 정율성은 옛동지 뤄칭(羅靑)을 만나러 난징중양판뎬(南京中央飯店)에 갔을 때 루칭이 당시의 대음악가인 셴싱하이를 소개해 둘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행운을 얻게 된다. 당시 셴싱하이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당시의 대스타였다.

 

셴싱하이는 당시 ‘적을 만나면 뒤로 돌아간다’(到敵人後方去), ‘길은 우리가 연다’(路是我們開) 등 작곡한 노래가 전국에 퍼져있었고 음반판매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정율성은 셴싱하이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면서 마음속의 우상으로 삼았다. 훤출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웃음을 머금은 셴싱하이를 보고 정율성은 바로 좋아하게 되었다.

 

정율성은 그 자리에서 셴싱하이가 작곡한 ‘구국군가’(救國軍歌)를 부르자 셴싱하이가 놀라며 정율성의 팔을 꼭 붙잡고 흥분해서 영화에 노래를 삽입하고 레코드 취입 등 음악으로 함께 항일운동을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1937년 9월 일본의 공격이 강화되고 셴싱하이와 연출팀들은 상하이를 떠나 장쑤(江蘇), 저장(浙江), 허난(河南) 등지로 항전선전활동에 나서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을 작곡해 인민음악가로 칭송받는 셴싱하이(诜星海)는 정율성 음악가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정율성이 1933년 5월 중국에 가져갔으며 음악활동의 원천이 된 세계고전명곡 음반.

 

 

항일 혁명의 열정안고 옌안으로 발걸음…만다린, 바이올린과 세계명곡집과 동행

 

정율성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을 때 상하이부녀구제회 지도자이자 “좌련”(左聯)의 여성회원인 두군혜(杜君慧)가 옌안으로 갈 것을 제의한다. 정율성의 제부인 박건웅과 두군혜는 상의한 끝에 정율성을 옌안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두군혜의 소개로 정율성은 상하이에 있는 팔로군 사무실에 가서 소개장을 받아 옌안으로 가게 된다.

 

정율성은 옌안에 가면서 만다린, 바이올린을 등에 메고 한국에서 가져온 ‘세계명곡집’을 가지고 가게 된다. 이것은 정율성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지 않고 옌안으로 가면서 정율성의 음악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1937년 10월 정율성은 옌안에 도착해서 산베이공쉐(陝北公學)에 입학을 한다.졸업뒤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들어가 음악과 항일운동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음악 작가사 궁무(公木)와 모예와의 만남…조선인과 중국인의 완벽한 합작 예술품

 

정율성은 옌안에서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작곡을 하려면 작사자가 필요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요한 작사자 두명을 만나는데 ‘중국인민해방군군가’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의 작사자인 모예(莫耶) 등 2명이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사자인 궁무(公木)는 정율성과 아주 가까웠고 많은 곡을 함께 만들었다.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延安頌)의 여성작사자 모예(莫耶)의 옌안시절 모습.

 

 

정율성은 셴싱하이가 작곡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에 자극을 받아 궁무와의 합작아래 ‘팔로군행진곡’(이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창작하게 된다.

 

궁무의 본명은 장쑹루(張松如)로 정율성과는 친형제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다. 궁무는 1910년 허베이 신지베이멍(河北辛集北孟)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나서 1938년 8월 항일전선에서 옌안으로 오게 되어 정율성과 만나게 된다. 옌안 시절 정율성은 캉다(抗大,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맡고 있었다.

 

당시 궁무와 바로 옆에 거주했으며 항상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율성은 우연히 궁무의 책상에서 시가 적힌 노트를 발견하고 곧바로 ‘자야강병송’(子夜岡兵頌:한밤중의 보초병)에 곡을 붙인 것을 계기로 궁무와 급속히 가까워진다. 정율성은 1939년 5월 궁무에게 “팔로군대합창” (八路軍大合唱)을 쓰자고 제안한 뒤 8월에 곡을 완성하게 된다.

 

옌안에는 피아노가 한대도 없었는데 당시 정율성은 손짓이나 세숫대야, 탁자, 돌맹이 심지어 허벅지를 두드리거나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곡을 만들었다. 정율성이 노래를 부르면 궁무가 들었는데 정율성이 9월에 루쉰예술음악과(魯迅藝術音樂科)로 옮겨가면서 10월에 완전히 곡을 마치게 된다. 

 

‘팔로군대합창’의 모든 가곡은 소책자로 인쇄되어 옌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 할 것없이 배포돼 울려퍼졌다. 1940년 5월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이 <팔로군군정잡지>에 게재되는데 이는 중앙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정율성과 궁무의 공로를 인정한 것을 의미했다. 당시 먹을 것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총정선전부 부장(總政宣傳部部長)인 샤오샹룽(肖向榮)은 정율성과 궁무를 초청해 술과 함께 훙샤오러우(紅焼肉,돼지고기 찜)을 대접한 것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연안송’의 작사자는 당시 루쉰예술학원문학과의 모예(莫耶)로 옌안을 칭송한 한편의 시가 정율성이 작곡한 아름다운 선율로 옷을 입으면서 동시에 유명해졌다. 당시 모예는 연안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여성 시인이었다. 그녀는 ‘기념 12.8’을 썼으며 샹위(向隅)에 의해 곡이 붙여져 연안에서 반향이 좋았다.

 

1938년 봄에 옌안에 루쉰예술학원이 건립이 되었는데 정율성이 옮겨 오면서 서로 알게 됐다. 정율성은 오후 5시만되면 옌안에서 회의가 끝나고 수많은 대열들이 흩어지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모예에게 가사를 써 달라고 여러 차례 졸랐다.

 

모예는 당시 무엇을 써야할 지 몰랐는데 정율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옌안의 웅장한 고성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도록 하면서 시심(詩心)이 폭발했다고 말한다. 모예는 연필을 급하게 꺼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단숨에 써내려 갔는데 이것이 바로 ‘연안송’의 가사로 됐다.

 

정율성은 1938년 봄 옌안 대강당에서 저녁회의 첫 행사로 ‘가송연안’(歌頌延安, 뒤에 ‘연안송’으로 불림)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여자 고음(高音)가수인 탕룽메이(唐榮枚)와 같이 불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이 자리에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뒤 크게 웃고 박수를 치면서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지도부에 뚜렷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율성과 옌안(延安)의 대강당에서 '연안송'을 같이 불렀던 탕룽메이(唐榮枚)의 당시 모습. / 쓰촨성(四川) 충칭(重慶) 출신인 부인 딩쉐쑹의 앳된 시절의 모습.

 

 

국경을 넘은 ‘사랑의 힘’…정치지도자 아닌 조선인 음악가와 사랑

 

정율성의 창작 활동은 부인이 된 딩쉐쑹(丁雪松,2011년 작고) 여사와의 ‘사랑의 힘’도 작용했다.

 

딩쉐쑹은 1918년 5월 27일 창장(長江)의 항구인 충칭 무둥전(重慶 木洞鎭) 에서 태어 났으며 어릴 때부터 산위에서 창장을 오가는 배를 바라보며 바깥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된다. 1938년 항일전쟁이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상우르바오>(商務日報)에 게재된 “하늘아래 흥망은, 백성들도 책임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라는 “옥이 되어 부서질 지 언정, 기와로 오래 살지 않는다”(寧爲玉碎, 勿爲瓦全)라는 제목의 글을 접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19살 때 충칭시 부녀구국회(重慶市婦女救國會)의 상임위원으로 있다가 대혁명시기 공산당원인 치루위(漆魯魚)의 영향을 받고 옌안으로 와서 혁명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0살에 캉다오대대여성대장(抗大五大隊女性隊長)이 되어 강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딩쉐쑹은 만물이 소생하던 1938년 봄 다른 여성동지들과 길을 걷고 있다가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율성을 처음 만났다. 정율성은 당시 루쉰예술음악과에 다니고 있었다.

 

정율성은 1938년 봄 연안 강변에서 딩쉐쑹과 처음 단둘이 만났으며 그 무렵 ‘연안송’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9년 새해에 딩쉐쑹이 정율성에게 이름과 같은 ‘설송’(雪松)이 인쇄된 신년카드를 보내면서 둘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졌는데 바로 1월 정율성은 ‘팔로군대합창’을 완성한 후 불후의 음악작품이 되었다.

 

이외에도 딩쉐쑹과 사랑을 나누는 기간동안에 정율성은 ‘시월혁명행진곡’ ‘항전돌격운동가’ ‘연수요’ ‘생산요’ ‘기어아랑’(寄語阿朗) ‘재삼림중’(在森林中)등 다수의 작품을 쏟아냈다. 딩쉐쑹은 나중에 정율성은 “잘 생겼고 작곡뿐 아니라 노래도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옌안에서는 이름높은 정치 간부들이 많았지만 딩쉐쑹은 솔직하고 쾌활한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연인으로 택했다.

 

딩쉐쑹(丁雪松)여사는 진실하고 쾌활한 조선인 음악가인 정율성을 사랑했다.

 

딩쉐쑹 역시 고향인 충칭의 교회에서 음악을 배웠을 정도로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딩쉐쑹는 피리를 불고 오르간을 칠 줄 알았으며 같은 취미가 둘의 사랑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대약진때 반대발언으로 ‘우경’으로 몰려…문화대혁명으로 창작활동 못해

 

1957년에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운동때 정율성은 당과 첨예한 마찰을 빚게 된다. 부인 딩쉐쑹은 이때 외국의 네덜란드, 덴마크(아일랜드 겸임) 대사를 지내면서 외교적인 일로 매우 바빴다. 이때 그녀는 정직한 성격의 정율성이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두려웠다. 그래서 딩쉐쑹은 정율성에게 “‘우경’(右傾)을 경계하라”고 했고 “절대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톈안먼(天安門) 광장 행사에서 감격에 젖어있는 정율성 음악가와 부인 딩쉐쑹(丁雪松) 여사의 모습.정율성은 대약진때 '우경'으로 몰려 곤경에 처한다.

 

이에대해 정율성은 “나는 항상 나라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라며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정율성은 대약진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결과적으로 “반우투쟁”중에 “우경”으로 몰려 비판의 중심대상이 되었다. 당조직은 그에 대해 ‘반당’(反黨)의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탈당을 요구했지만 완강하게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1959년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정율성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궁에 처했다. 그러나 1962년 당조직은 그에게 평범한 반대의견을 냈다는 결론을 내리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 정율성에게 더욱 큰 시련이 다가왔다.

 

1966년 8월 홍위병들의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자료가 유실됐다. 그가 쓰고 싶었던 <정강산대합창>(井冈山大合唱)은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인 딩쉐쑹에게 “어떻게 토지혁명때 지주계급에게 하던 태도를 혁명영도간부에게 할 수 있는가”라며 “이것이 무슨 문화대혁명이냐, 이것은 문화대학대”라고 탄식했다.

 

강가에 나가 고기잡는 취미는 그 때 생긴 것이다. 그는 주덕(朱德) 총사령관과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겠다고 여러 차례 의견을 표시했고 후야오방(胡耀邦)집에도 자주 가서 불평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마다 고기잡이로 위안을 삼았다. 정율성은 반당집단인 ‘4인방’을 위해서는 한곡도 쓰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지만 1970년 마오쩌둥의 시가 20수에 곡을 붙이는 것을 완성했는데 발표는 하지 못했다.

 

정율성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음악의 샘을 가지고 있었다. 생전 360곡을 창작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을 뺀 시간동안 이뤄진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이 없었다면 한민족의 정서가 담긴 더 많은 작품들을 중국땅에 남겼을 것이다. 그점에서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2012.1.20 / 미디어오늘 / 하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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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이 고향 광주로 못가고 북으로 간 까닭은

공산당 소속 당 명령…제2의 음악활동 펼쳐

 

 정율성 음악가(1914~1976)는 62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5년 정도를 북한에서 생활했다. 북한에 있을 동안 정율성은 ‘인민군행진곡’ 등 북한 군가와 한민족의 가락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은 해방뒤 역사의 격동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갈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이었던 정율성은 당의 명령에 따라 북쪽의 조선땅을 밟게 된다.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에서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은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정리한다. 이것이 정율성 음악가의 음악 인생속에서 그를 폭넓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정율성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속에서도 매순간 작곡가로서 열정을 다해 선율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자료는 <작곡가 정율성>(부인 딩쉐쑹<丁雪松> 등 지음), <태양을 향한 노래>(왕허핑<王和平> 지음)등을 참고했다. /편집자 주

 

 

옌안(延安)에서 3개월여 동안 걸어 평양 도착…북한에서 제2의 음악활동 시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옌안(延安) 팔로군본부는 무정(武亭) 사령관의 인솔하에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와 부인 딩쉐쑹과 2살난 딸 샤오티(小提) 등 가족들도 같이 조선으로 향한다. 부인 딩쉐쑹은 당시 중국 공산당내에서 여전사로 이름을 떨쳐 발전가능성이 높았지만 남편 정율성의 뜻에 따라 조선행을 흔쾌히 승락한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승리후 조선의용군 전체인원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촬영한 모습. 맨앞줄 가운데에 정율성과 딸 샤오티의  모습이 보인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延安)은 기쁨에 겨워 사흘동안 대축제 분위기였다. 폭죽과 함께 나팔소리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고 남은 음식을 서로 나누는 축제가 계속됐다. 정율성을 포함해 수백명의 조선인 혁명가들도 “조선독립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위대한 항일전쟁만세!”라는 구호를 연이어 외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중국은 8년동안의 항일전쟁이 마감되었고 조선은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약 400명이었는데 떠나는 날 모두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을 부르고 옌안에 우뚝 솟은 바오타산(寶塔山)을 바라보면서 서운해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의 주머니에 대추와 사과를 넣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정율성은 당시 귀국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조국을 향하여 전진’(向祖國前進)이란 노래를 작곡했는데 의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옌안을 떠났다.

 

“건장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이여, 오늘 화북지역을 넘어서 내일은 만주를 지나서 길위의 장애물을 뚫고, 조국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투쟁해갈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열은 며칠 걸려 황허(黃河)에 도착해서 거친 물살의 위험속에 강을 건넌뒤 산시(山西)지역의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속에 높은 산을 넘었다. 일행중 나이 어린 아이가 추위에 얼어 숨지기도 했다.

 

정율성과 딩쉐쑹은 모든 옷을 딸 샤오티에게 입히고 당나귀의 등에 얹은 나무상자에 샤오티를 담아서 어렵게 전진을 했다. 갑자기 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고 폭 50㎝ 정도의 꼬불꼬불한 길 밖에 없었다. 이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는데 나무상자를 얹은 당나귀가 지나가기는 더욱 힘든 길이었다.

 

한번 실족을 하게 되면 샤오티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율성은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 앞에서 당나귀의 고삐를 잡도록하고 뒤쪽에는 전우(戰友)이자 시인인 곽소천(郭小川)에게 나무 상자와 당나귀의 꼬리를 잡게 해 간신히 이 길을 벗어났다.

 

일행은 장자커우(張家口), 화이더(懷德), 청더(承德), 진저우(錦州) 등을 거쳐 당시 동북공업중심지인 선양(審陽)에 도착했다. 3개월여 걸린 고난의 행군끝에 1945년 12월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丹東>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음)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에도 정율성은 ‘3.1행진곡’(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조선해방진행곡’ 등 2곡을 지었다.

 

한반도는 이미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당적을 조선노동당으로 옮기고 첫 단란한 생활

 

2차전이 끝난뒤 소련과 미국의 협상에 의해 북위 38도의 위쪽으로는 소련이 관할하고 남쪽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정율성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는 이미 남북으로 나눠진 상태였다.

 

조선의 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에 의해 소련과 중국공산당에 각각 참가해 활동해왔다. 이에따라 1945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조선공산당(이듬해 노동당으로 개칭)이 수립되었다.

 

1950년대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 부부가 베이징 이화원(頤和園)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옌안에서 북한으로 복귀한 공산당원들은 초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직무에 편성이 되었다. 정율성과 딩쉐쑹의 당적도 조선노동당으로 옮겨졌다.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딩쉐쑹은 조선말을 몰라서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을 도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정율성이 해주(海州)에서 토지개혁후 선거업무를 할 때 딩쉐쑹은 옌안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설문을 작성해 내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딩쉐쑹은 당시 김밥, 된장찌개, 김치 등 한국음식에 익숙해지며 한명의 일본인 보모를 둘 정도로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휴일에는 정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족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놀기도 했으며 사냥감을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샤오티는 당시 3살이었는데 보모에게서 일본어, 러시아에서 항일운동한 이웃에게서 러시아어와 딩쉐쑹의 중국어와 정율성의 조선어 등 간단한 4개 국어를 한 두마디씩 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인 딩쉐쑹은 중국에서 식량지원 받는데 성공…평양 신화사(新華社) 분사 사장에 임명

 

1946년 2월에 정율성과 딩쉐쑹은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30대 중반의 김일성 위원장(1912~1994)은 각 방면의 역량을 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 지도자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북만주에서 식량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남한은 식량 기지였는데 당시 남북이 막힌 상태에서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딩쉐쑹은 하얼빈(哈爾賓)으로 가서 서북지역의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당시 임시로 동북국(東北局) 부서기를 맡은 가오강(高崗)과 서만분국(西滿分局) 서기 리부춘(李富春)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동북국 평양사무실의 책임자인 주리즈(朱理治)가 1947년 6월 27일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3만톤의 양식을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딩쉐쑹이 식량특사로 일을 할 때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을 극진히 대접하는데 딩쉐쑹은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 김 위원장의 집에서 묵게 된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임무를 완수하자 큰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일본군에게서 거둔 흰색 비단낙하산을 기념선물로 선사한다. 이 낙하산은 비단실로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는데 딩쉐쑹은 이 낙하산으로 정율성에게 한벌의 와이셔츠를 만들고 자신과 딸용으로 치마를 만들어 기념으로 간직한다.

 

정율성은 부인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김일성 위원장을 접견한 뒤 옌안시절 지도자였던 김두봉(金枓奉)과 대동강변에서 샴페인으로 경축파티를 열었다. 당시 동북지역의 전쟁 상황은 소련과 국민당이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어 일본에게서 뺏은 철도와 성시(城市)를 국민당에게 넘겨주기로 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국민당은 동북지역으로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쓰핑(四平)전쟁뒤 국민당에 창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내주고 쑹화장(松花江) 북쪽까지 전세가 밀리고 있었으며 북한을 은폐된 후방으로 삼아 남만작전(南滿作戰)을 펼 때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북국은 1946년 6월 북만분국(北滿分局) 비서장인 주리즈(朱理治)를 동북국 주평양 전권대사로 부임시켰으며 소련과 미국의 이목을 피해서 대동강 서안 채관리(釵貫里) 104번지에 “평양이민회사’(平壤利民公司)란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다.

 

주리즈는 옌안의 오랜 혁명동지로 정율성의 곡을 아주 좋아할 정도로 친한 관계였다. 주리즈가 책임자로 있을 때 딩쉐쑹은 평양이민회사에 소속돼 2년동안 물자와 부상병 운반 등 업무에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딩쉐쑹과 동북국 평양사무소가 돌본 부상병과 가족 등을 합한 수가 1만8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북한의 도로를 이용해서 북만주의 곡물, 면화, 석탄 등 물자를 다롄(大連)으로 옮겨갔으며 동북지역의 부대가 긴급히 요구해 보낸 식염(食鹽), 포목과 약품, 의료기계, 공업연료 등은 1947년 21만톤, 1948년에 30만톤에 달했다.

 

북한은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이 남긴 전략물자중 2000여 차량분을 중국에 무상 혹은 교환방식을 통해 지원했다.

 

북한은 당시 남북만(南北滿)과 해상을 통해 베이징으로 가는 인력들의 중간 통과지였으며 통과인원은 1946년 3천명, 1947년과 1948년은 각각 1만명에 가까웠다. 딩쉐쑹의 탁월한 업무성과에 따라 조선노동당중앙은 1946년 가을 딩쉐쑹을 조선노동당중앙교무(僑務, 화교업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5~6만명의 중국 화교가 있었고 북쪽에만 2만여명이 있었다. 딩쉐쑹은 1949년초 화교업무가 중국상업대표단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 일을 맡는다. 딩쉐쑹은 1949년 신화사(新華社)주평양분사 사장에 임명된다.

 

정율성은 문화부장으로 음악창작 새로 시작…‘조선인민군행진곡’ 등 30여곡 창작

 

정율성은 황해도위 선전부장뒤 1946년 평양의 조선보안대(조선인민군의 전신) 클럽 부장(중국군의 문화 부장에 해당)으로 명령이 내려져 바쁘게 활동을 하게 된다. 정율성은 당시 본인이 원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인민군협주단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종사한다.

 

그래서 단원들을 선택하고 악곡을 창작하고 지휘업무를 하게되며 평양이민회사를 통해 다롄에 가서 교향악기를 구입했다. 협주단을 만든 뒤에는 전국각지의 순회연주를 해서 김일성 주석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정율성 음악가의 평양시절 당시의 모습 / 정율성 음악가가 작곡한 북한의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친필 원고로 하얼빈의 정율성 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김일성 주석은 100여명의 전문협주단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정율성은 음악창작의 두번째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정율성은 1947년과 1948년에는 집에 별로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1950년까지 30여곡을 만들었다.

 

당시의 음악은 북조선의 군민(軍民)을 위한 곡으로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 10여편의 작품을 지었다. 또 옌안시절 연출하지 못한 ‘항일기병대’ 대합창을 다시 작곡하고 평양과 각지에서 200여 차례 공연과 방송을 했다.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북한의 군가가 된다. 중국음악평론가와 작곡가들이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예는 세계음악사상 유례가 없다”고 평가하게 된 이유다.

 

이 당시의 곡들은 옌안 당시의 창작 기풍을 답습했고 한민족 음악의 새로운 품격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정율성은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받게 된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모범노동자’의  칭호를 얻는다.

 

정율성은 그뒤 평양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에 임명되었다. 정율성은 총성과 포성중에 미군기가 공습하는 위험한 시각에도 창작활동을 계속했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그는 당시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탄생을 선포한 지 1주일뒤 중조 양국은 외교관계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조중우의’(朝中友誼)라는 곡을 만든데 이어 ‘신중국을 찬양하는 노래’(歌頌新中國)를 작곡했다.
 
연안파 숙청 바람에 인민군에서 따돌림…부인 딩쉐쑹은 딸과 함께 먼저 중국으로 귀국

 

북한에서 제2의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정율성은 나중에 인민군정위원회 김일(金一)이 그를 찾아와서 “당신의 부인은 중국인이다. 당신은 인민군의 일에 부적합하다”라는 통보를 한다. 정율성은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좌천되는데 실제로 정치적인 신임을 받지 못하고 중요한 직무에서 떨려 나가게 된다.

 

맨오른쪽이 연안파의 사령관 무정(武亭)이고 맨 왼쪽이 정율성. 연안파는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간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당시 연안파인 무정(武亭, 1905~1952년) 장군도 힘을 잃은 상황에서 연안파 출신들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부인 딩쉐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신화사분사 사장을 계속하고 중국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평양에 계속 남았다면 정율성에게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본다. 정율성은 북한의 주류사회에 융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록 내가 조선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고 조선 국적을 가지고 노동당원으로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했더라도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을 볼 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남편과 각자가 갈라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부부사이는 관계가 너무 깊었다.”

 

정율성이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정율성은 중국 생활을 10여년 동안 했고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했으며 쓰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참가했고 많은 친구들이 있으며 중국의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즉 해방전쟁 시기에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썼으며 중국으로 가더라도 조선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딩쉐쑹은 당시 자신들의 생각이 매우 천진했다고 회고한다.

 

정율성은 당시 “나는 한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내 현실은 정치적인 집권을 놓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딩쉐쑹은 주평양 중국대사관이 설치된 뒤 대사관을 통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부부의 중국귀국과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국적 취득을 요구하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붓으로 쓴 친필 서신을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며 김일성의 허락하에 딩쉐쑹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김 주석은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들을 배양해 줬는데 정율성 한명을 데려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호방하게 승낙했다.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는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직접 배웠으며 현재 베이징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1950년 9월초에 딩쉐쑹은 상업대표단이 정율성에게 준 피아노를 가지고 딸 샤오티와 단둥을 거쳐 먼저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정무참사관인 차이청원(柴成文)도 동행한다.

 

정율성은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의 친필과 김일성 주석의 귀국 허가서를 갖춰 중국외무성에 비자신청을 해놓고 있었는데 심정이 매우 복잡했다. 당시 외무성 직원에게 “우리 동포들이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데 조선을 떠나게 되어 심정이 매우 불안하다”고 말했다. 외무성 직원은 이전 항일전쟁에 함께 참가한 동지로 정율성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편지까지 보내 돌아갈 수 있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라”면서 “중국으로 돌아간 뒤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서 중국 음악가의 신분으로 다시 와서 조선을 도우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김일성 주석은 한국전쟁 발발뒤 미군이 개입하자 1950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친필을 보내 중국인민군의 출병지원을 요청한다.

 

1950년 9월 중순 미군의 인천상륙이 실시되고 평양이 전화에 휩싸이면서 북한은 중국쪽에 지원요청을 한다. 그해 10월 1일 조선내무상 박일우(朴一禹)가 김일성 위원장의 서신을 가지고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중국인민군의 출병지원을 요청한다. 전세가 극히 불리해진 10월 10일 주평양 중국대사관은 조선외무성의 통지에 따라 긴급 철수하게 된다.

77살 고령의 어머니와 중국행…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국적 바꿔

정율성도 당시 성냥, 소금과 마른 식량을 준비해서 77살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중국대사관의 정무참사관인 차이청원은 특별히 지프차를 보내 정율성의 철수를 도왔다. 중국정부는 당시 정율성 모자외에 다른 한명과 함께 지프차로 신의주까지 모시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보냈다.

 

정율성 음악가의 모친 최영온(崔泳溫)씨와 친손녀 정샤오티(鄭小提)의 청소년기때 모습.

 

정율성은 효자였다. 북한에서 그의 생활이 약간 안정이 된 1948년 여름 모친 최영온(崔泳溫, 당시 75세)씨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 모친이 도착한 날 정율성은 감격해서 어머니를 피아노 옆에 앉히고 “어머니, 어릴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부를게요”라며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이후 정율성을 떠난 적이 없다. 평양에서 베이징에 와서 줄곧 정율성 부부와 함께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근면성실했다. 1963년 낙상을 당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골절은 피했지만 외출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율성은 중의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를 원했는데 항상 어머니를 부축해 모시고 다녔다. 회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녹창을 막기위해 몸을 돌려 눕혀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1964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에 정율성의 조카 정상훈(鄭祥勛)이 유골을 전라남도 광주에 안장했다.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날 때 정율성은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운전기사석 바로 옆 앞자리에 앉아서 운전기사에게 길을 알려주며 철수를 도왔다. 당시 저공비행하는 전투기 소리와 멀리 번쩍이는 조명탄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운전기사는 회고했다.

 

낮에는 전투기 공격 때문에 차를 위장한 채 세워두고 저녁에 출발해 한밤중을 달려서 갔는데 길가에 민가들이 불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이틀밤을 꼬박 달려서 신의주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베이징인민예술극원(藝術劇園)에 배치를 받게된다. 이때부터 정율성은 국적이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된다.

 

정율성은 딸 샤오티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는데 중국으로 간 뒤 피아노를 가르쳤다. 샤오티(69세)는 명문대인 중앙음악학원에 입학하여 현재 베이징 바로크 실내합창단 단장을 맞고 있다.

 

2개월뒤 인민지원군으로 조선땅 다시 밟아…폐허속에서 조선궁정음악 악보 찾아 기증

 

정율성은 그러나 2개월뒤인 1950년 12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돼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의 성원으로 류바이위(劉白羽) 등 작가 4명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창작팀으로 다시 북한에 도착한 정율성과 작사자들 모습.

 

 

당시 이들은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의 열렬한 접대를 받았다. 비록 바깥은 연일 포성이 울리고 평양은 이미 포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지하실은 안전했고 창에 커튼이 처져있었으며 작은 원탁테이블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정율성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점심과 저녁때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영도들이 오찬과 만찬을 제공했고 김일성 주석과 정율성은 조선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1951년 1월 초순에 중국지원군은 제3차 작전에 들어갔는데 9일동안의 연속작전에 의해 37도선 이남으로 내려갔고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인천항까지 들어갔다. 이때 정율성은 지원군을 따라서 서울까지 내려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을 헤집고 조선궁정음악의 악보중에서 모두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냈다. 부인 딩쉐쑹은 1996년 방한해서 이 악보를 기증해 한국음악사상 진귀한 문헌으로 보존되고 있다.

 

정율성은 한강 남단의 백운산에서 류바이위와 함께 ‘백운산을 노래한다’(唱歌白雲山), 웨이웨이(魏巍)와는 당시 ‘사랑하는 군대, 사랑하는 사람’(親愛的軍隊親愛的人)을 지었다. 또 어우양산쭌(歐陽山尊)과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과 ‘지원군 십대 찬가(志願軍十贊)를 썼고, 링쯔펑(凌子風)과는 빠른 선율의 ‘한강소창’(漢江小唱) 등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율성이 중국 국적의 인민지원군 신분으로 창작한 곡들이다. 이 곡들은 현재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에 전시되어 있다.

 

2012.1.26 / 미디어 오늘 / 하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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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중국에선 '창건 영웅', 한국에선 '국익 해치는 빨갱이'

중국인들이 일부러 광주를 찾는 까닭

  광주에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 입구에 서있는 정율성상. 이 흉상은 중국에서 만들어 그의 생가가 있는 광주로 보냈다.

 

광주천 따라 걷기 3구간인 옛 남광주역 터에서 푸른길 공원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남광교를 만난다. 폐선이 된 철로를 품은 이 다리를 지나면 한 음악가의 거리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동판으로 만든 거리전시관 방명록엔 유독 한자로 이름을 쓴 이들이 많다. 중국인들이다. 사실 광주는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아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일부러 광주를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리전시관의 정식 명칭은 '정율성 거리전시관'. 새주소로 등록된 거리 이름도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다. 전시관 초입엔 한 젊은 음악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바로 정율성이다.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은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한 음악가다. 중국사회과학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 인구 가운데 3억명 이상이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며, 10억명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알고 있다고 한다. 

평생 360곡을 작곡한 그의 대표작으로는 <팔로군 행진곡> <옌안송 延安頌> <연수요 延水謠> 등이 있다. 그가 1939년 작곡한 <팔로군가>는 중국 정부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지정되어 1992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곡으로 연주되었다. <옌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며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중 하나다. <연수요>는 중국의 전통 민가의 원형을 이끌어내 전투적 서정성을 겸비한 곡이라며 극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율성은 행진곡과 송가, 민가 분야에서 등 중국 현대음악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중국인이 뽑은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뜨거운 추앙을 받는 정율성을 기리는 거리전시관이 광주에 있는 까닭은 그가 광주 태생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16-7이 그의 생가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낡고 오래된 그의 생가를 방문하려고 해마다 많은 수의 중국인이 일부러 광주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정율성 거리전시관에 있는 동판 방명록엔 연인들의 애교어린 방명록과 함께 일부러 광주를 방문한 중국인들의 방명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해마다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해 동아시아 음악사에 남긴 그의 족적을 기리고 있다. 또 생가 주변 거리에 길이 233미터의 길거리 전시관을 만들어 그의 이력과 악보 동판, 그의 대표곡을 들을 수 있는 영상물을 준비해놓고 있다.

하지만 그를 기리는 일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KBS 스페셜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천재음악가'로 칭송받는 정율성을 주제로 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방영 역시 숱한 논란 끝에 가까스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 여당추천 위원들은 "정율성은 6·25에 참전한 공산주의자로 KBS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3차례 내보낸 것은 부적절하다"며 제재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율성이 "국익을 해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는 이 다큐멘터리가 공정성을 위반했는지 방송관련 학회에 의견을 물은 뒤 제재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중국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음악가가 한국에선 "국익을 해치는 빨갱이"로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정율성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항일운동가였다. 1933년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니던 정율성은 독립운동을 하던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해 5월 8일 난징(南京)에 있던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그를 동지들은 주말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때 상하이에서 정율성에게 음악을 가르친 이가 러시아 출신의 크릴로바 교수. 정율성의 천재성을 알아본 크릴로바 교수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한다. 정율성은 거부했다. 이유는 한 가지,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크릴로바 교수는 젊은 조선인 항일운동가가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수업료를 걱정하자 수업료 대신 수업 때마다 생화를 사오도록 했다. 매주 생화 한 송이로 수업료를 대신하는 각별한 배려를 베푼 것이다.

 

  233미터 길이의 '정율성 거리전시관' 풍경.

 

해방이 되자 정율성은 고향이 있는 남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당시 한반도 이남이 미 군정 치하에 있어 위험하다며 그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북한에 머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하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 (周恩來) 총리가 부르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그의 중국에서의 활동이력이 1966년에서 멈춘 것은 문화대혁명기에 그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이때 "이것이 무슨 문화 대혁명이냐, 이것은 문화 대학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 '문화 대학대'였던 문화대혁명이 1976년 종결됐다. 그는 바로 명예회복을 이뤘으나 고혈압으로 숨지고 만다.

정율성 거리전시관은 233m. 그 짧은 전시관이 길이보다 심한 역사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자유를 옥죄고 있다. 처음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한다고 했을 때 KBS 사측이 이를 반대하자 KBS 스페셜 PD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의 80%이상이 사회주의 계열이었음은 이미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사회주의 전력을 문제 삼아 독립운동가들을 다룰 수 없다면 우리는 실존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80%를 역사 속에서 지워야 한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정율성로 16-7번지에 있는 천재음악가 정율성 생가.

2013.1.29 / 오마이뉴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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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박건 KBS PD “친일·독재 정권의 냉전 이데올로기 이제는 벗어나자”

 

KBS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 음악가 정율성> 편은 결국 방송이 나갔다. 방송 전에 제작후기를 부탁받고 사실 난감했다. 이념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8.15 광복절 특집으로 나갔어야할 프로그램이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5개월 만에 방송이 되니, 외부에서 보면 당연히 담당 제작자인 내가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내가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전날 더빙을 마치고 나니 나에게는 이상하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됐다. 경과야 어찌 됐건 내가 할 말은 1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온전히 담겨있고, 그것이 방송나간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진하고 아쉬웠던 부분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내가 정율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온전히 그 프로그램에 다 담겨있다.

 

나머지 이야기도 사실 하고 싶진 않다. 이미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사내 게시판에 두 번에 걸쳐서, 또 개인적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방송이 나갈 수 있게 된 건 KBS의 양대 노조와 PD협회의 물러서지 않은 싸움 덕분이었다. 그리고 동료 PD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고, 보직을 걸고 방송을 촉구한 선배들의 저항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은, 또한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길은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프로그램은 6월초에 기획됐다. 방송시점 2개월을 앞두고 있어서 제작자 입장에선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6월 하순에 중국출장을 이틀 앞두고 있을 때 이례적으로 당시 콘텐츠 본부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중간간부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고, 8월 초순에 한창 마무리 촬영과 편집중일땐 또 이례적으로 사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본부장님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하지만 제작을 중단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잘 마무리하라는 언급만 있었다. 그리고 방송 4일전이면서 프로그램 시사를 하루 앞둔 날, 전격적으로 방송 불발이 결정됐다. 내가 들은 이유는 이승만, 백선엽 등의 인물프로그램들의 방송여부를 두고 그 논란이 한창인 시점에서 정율성 편이 방송된다면 KBS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KBS 이사회의 이사장과 이사가 보직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개별 프로그램을, 이례적으로 이사회가 막아서서 방송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감사까지 이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더더욱 공영방송인가하는 노조까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방송을 반대했다. 노조까지 막아선 이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두 번까지 방송이 불발되자, 사실 내가 15년 넘게 몸담고 있던 방송국이 낯설게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방송제작의 원칙과 상식이 애초에 그 존재가 없었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가 PD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낯설었고, 더더구나 15년 넘게 PD로 근무했다는 것도 우스웠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해준건 동료 피디들이었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심정이었을 때, 다가와 팔을 내밀진 않았지만, 동료들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바랬고, 내가 계속 주저앉아있기 민망해서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에야 그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조용히 다독여줬다. 어떻게든 싸우자고, 어떻게든 방송을 내보내자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내가 몸소 겪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슬픈 사실 하나. 이 방송을 어떻게든 내보내겠다고 노력한 선배 한분은 지방으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사실 이분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기획과 제작단계에서 이분이 그 보직에 계셨던 것도 아니고, 운 나쁘게 방송 불발이 결정될 때 하필 그 보직에 계셨다. 하지만 이분은 어떻게든 방송을 내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려 했고, 보직을 걸고서라고 방송을 내고자 했다. 그 결과는 좌천성 지방발령이었다. 이분에게는 미안하고, 그래서 슬프다.

 

슬픈 사실 둘. 내가 불명예스러운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또 한번 확인하게 됐다. 이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것 같다. 영리한 사람들이 정율성의 고향이 광주이고, 내 고향이 목포라서 ‘전라도 출신들은 다 그래’라고 매치시켜준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율성 선생에겐 부끄러웠고, 내 아들에겐 얼굴보기가 참담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두자. 한때 내가 닮고 싶어 했던 PD선배들은 경상도 출신이 더 많다. 회사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아서, 또 내가 대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PD란 이래야한다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거나, 프로그램으로 알려준 선배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타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았다. 내가 그나마 다큐멘터리 모양새라도 갖춘 프로그램이라도 만든다면 경상도 선배들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정율성 다큐라고 왜 아니겠는가.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고 도움을 준 분들을 생각해보니, 강원도, 경상도, 서울, 경기도, 충청도 분들이 다 섞여있다. 이분들에겐 정율성을 어떻게 매치시킬 것인가. 그러니 제발 그만하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 두 마디 문장을 앵무새처럼 외워서 떠들며 이념공세를 펼치는 분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다. 3대 세습을 해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이겠는가? 절대 아니다. 대다수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있겠지만, 북한 체제를 옹호하며 남한을 절대악처럼 여기며 3대 세습을 떠받치는 앵무새 떠벌이들의 과잉충성과 그 충성으로 얻는 떡고물이 어떻게든 이 괴상한 북한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오버랩 된다. 어떻게든 체제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체제수호에 앞장서고 싶다. 하지만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때마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여전히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부역을 청산하고, 박정희 독재 하에 비명조차 못 지른 민주화,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을 제대로 역사적 사실로 알리고, 광주학살을 제대로 규명하고, 최근 MB의 부도덕한 집권행위까지 제대로 규명하는,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그런 체제다. 케케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끌어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며, 부도덕한 정권으로부터의 떡고물을 목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분들은 이상하게 내가 방금 말한 사실들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부끄럽지 않은 걸까. 진정으로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새가 맞는 모양이다.

 

2012.1.16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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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율성 선생 妻, 정설송(丁雪松) 여사 타계

 

 중국 3대 음악가 중의 한 분인 광주출신 정율성 선생의 처 정설송 여사가 지난 5월29일 오전 9시55분 97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타계했다.

 

 정설송 여사는 주은래 전 주석의 양녀이자 비서로 네덜란드․폴란드 주재 중국 대사를 지냈으며, 1941년 정율성 선생과 결혼하여 정율성 선생이 팔로군에서 항일투쟁과 연안송을 비롯한 360여 곡의 작곡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사망한 1976년까지(사망당시 62세) 35년간을 동고동락해 온 내조자이며 동지로 슬하에 딸 정소제(67세) 여사를 두고 있다.

 

 정율성 선생은 2009년 중국이 건국 60주년을 맞아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1914년 불로동에서 태어났으며, 능주초등학교, 숭일학교, 전주신흥중학교를 다녔으며, 1933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러시아의 음악가 ‘크리노와’로부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다.

 

 또, 중한 양국이 일제 침략자들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히던 항일 전쟁 시기에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등을 작곡해 수많은 항일 투사들에게 큰 격려를 준 음악가로 중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민족 정서’ 선율로 일깨운 정율성의 항일 활동 - 이이화

 

 

 

시안에서 두번째 방문지는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팔로주섬판사처(八路駐陝辦事處) 기념관이었다. 이곳은 국민당 정부와 맞서 투쟁을 벌이고 또 국민당과 합작으로 일본군에 저항하면서 팔로군(홍군)을 지휘한 저우언라이·덩샤오핑 등이 사용한 아지트의 하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에 쓰던 무선기 등 모든 기구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옌안송’이라 쓰인 걸개 앞에 섰다. 걸개에는 ‘옌안송’의 가사가 적혀 있었고 그 곁에는 ‘애국청년 작곡가 정율성’에 대한 간단한 약력이 적혀 있었다. ‘조선족 청년 정율성은 난징에 있다가 선협부의 도움을 받아 시안에 왔다. 그는 홍군의 군가를 많이 작곡했다. 팔로군 판사처를 거쳐 옌안으로 들어간 애국청년이다.’

 

나는 이미 연길에서 그에 관한 기록들을 수집해 놓았다. 이 기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서 그에 관한 약전을 써서 <사회평론>(92년)에 발표했는데 최초의 소개였지만 약간의 오류도 있었다.

 

정율성에 대해 좀더 소개해보자. 그는 1918년 광주 양림동 출신으로 처음 이름은 ‘부은’이었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진학한 뒤 음악도의 꿈을 키우면서 이름을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다. 그즈음 그의 두 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가로, 셋째 형과 누이는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셋째 형이 국내로 잠입했다가 돌아갈 때 따라간 그는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항일단체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음악 공부에 열중했다.

 

37년 일제가 상하이를 점령한 데 이어 난징까지 위협하자 정율성은 다른 선배들과 함께 옌안으로 갔다. 이때 그의 나이 19살. 어느날 동료인 중국인 문학소녀 막야에게 옌안의 정서와 의지를 담은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이 가사를 가지고 ‘옌안송’을 작곡했던 것이다. 이게 그의 첫 작품이었다. 그는 항일군정학교 강당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중국인 여자가수와 함께 중창으로 이 곡을 처음 소개했다. 그 덕분에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마오쩌둥의 격찬을 받았고 주더(주덕) 총사령관의 집에도 초대받았다. 그의 데뷔는 너무 화려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연달아 군가·행진곡 등을 발표했다.

 

이 무렵 그는 팔로군 전사로 군정학교 대대장인 중국인 정설송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인데도 무정이 태항산 지구에서 항일활동을 벌이자 그곳으로 따라갔다. 마침 폐병에 걸려 냇물에서 잡은 물고기 피를 마시면서 영양을 보충해 살아났다. 이 시기 그의 민족혼이 살아났다. ‘조선의용군 행진곡’, ‘조국을 향해 나가자’ 등을 작사·작곡했다. ‘미나리 타령’은 이화림 작사, 정율성 작곡인데, 가사는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였다. 이게 민족정서 아닌가? 이게 바로 ‘민족주의 리얼리즘’일 것이다. 그는 ‘노들강변’ ‘방아타령’ 등 우리의 민요를 조선의용군에게 가르쳤다.

 

해방된 뒤 북한에 가서 음악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한국전쟁 때 인민지원군의 악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이때 한강까지 내려왔으나, 그리고 그리던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는 베이징에서 다시 눈부신 음악활동을 벌여 600여곡을 남겼고 중국 공산당의 주요 행사 때마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는 때때로 연길의 동포들과 어울렸는데 많은 일화를 남기고 6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래서 그를 중국에서는 ‘3대 현대음악가’로 추앙하고 있으며 연변자치주에서는 ‘민족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우리는 그를 민족음악가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광주에서는 그의 작품을 해마다 연주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고 그의 고향을 찾아오는 중국 관광객도 많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그의 딸도 행사 때마다 광주에 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출생지를 두고 광주 양림동설(유족 증언)과 불로동설(호적에 근거)로 갈라져 다툼질을 벌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작은 ‘지역이기’ 탓인 모양이다.

 

2011.1.14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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