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골목 건물 보기 건축학개론 1장
서울의 또다른 매력 발견하는 현대건축물 탐방 여행
“자기가 사는 동네 골목을 여행해 보세요. 사는 곳부터 애정을 가지고 잘 알아보는 것,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최근 개봉한, 건축을 소재로 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건축학개론>. 1학년 ‘건축학개론’ 첫 강의에서 ‘강 교수’는 이렇게 말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줍니다. 각자 자기 동네를 여행하며, 골목과 건물들을 관찰해 사진 찍고 기록해 오라는 거지요. 스무살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은 정릉 산동네 주변을 둘러보다 마주치면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됩니다.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고 관찰한다는 건 강 교수님 말씀처럼 ‘건축학개론’의 시작이면서, 또 ‘사람살이’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사는 곳 주변엔 마을과 도시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인 수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햇살 따스한 봄날, 각자 자신이 사는 동네를 탐방하며 매력적인 건축물들과 사랑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홍대 앞 서교동 골목 ‘옐로 다이아몬드’
동대문구청 진행 고교생 대상 건축물 탐방 프로그램 인기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는 조선시대 건물부터 현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뒤섞여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복합건축도시입니다. 정도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 수도 서울은 더욱 그렇지요. 이 복잡하게 얽힌 무수한 건축물들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이 권하는 일반적인 건축물 테마여행은 고건축물, 근대 건축물, 현대 건축물로 나눠 살피는 시대별 건축물 탐방입니다. 물론 지역별로 코스를 정해 고금을 망라한 갖가지 건축물을 살펴볼 수도 있고요. 고궁이나 고택 등을 대상으로 한 탐방 프로그램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이미 활성화돼 있습니다. 최근엔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 탐방이 새로운 지역여행 방식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지요.
그럼 최근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은 어떤가요. ‘현대 건축물’이란 단어 자체부터가 무겁고 진지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이 ‘부동산’이 여행의 한 테마가 될 수 있을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건물’ 하면 ‘돈다발’부터 떠오른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하지만 도시란 애초 무수한 길과 건축물로 이뤄진 커다란 구조물입니다. 해마다 새로운 건축물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기도 하지요. 늘 보며 지나치던 곳, 늘 그 안에 머물던 곳, 멀리서 바라만 보던 곳 이런 것들이 모두 관찰하고 탐방하는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건축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건축물을 거주의 공간, 경제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건축물을 하나의 조각이나 그림처럼 감상하며 느끼고 즐기는 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 홍대 앞 걷고 싶은 길의 ‘상상마당’
젊은 건축가 신창훈(43)씨는 “도시를 구성하는 건물들은 이제 단순한 거주 공간을 벗어나, 하나하나가 도시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도시민 삶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견인차”라고 말합니다. 건축 관련 단체나 정부, 지자체에서 해마다 새로 지어지는, 개성적이면서도 조화로운 건축물들을 선정해 갖가지 상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이런 도시 구성물을 둘러보며 감상하는 일이, 수업 과제를 위해 탐방하는 건축학도들의 전유물은 아닐 겁니다. 건축물에 쓰인 재료, 공간 구성, 다양한 각도에서의 구조 등을 눈여겨 살피다 보면, 건축학개론을 몰라도 나름의 안목이 트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입니다.
강남 신사동 도산공원 앞 ‘폴 스미스’(왼쪽) 신사동 도산공원 앞 ‘SKⅡ 부띠끄 스파’(오른쪽)
테헤란로, 도산대로 등 서울 곳곳 세계적 건축가들 작품 빼곡
현대 건축물 탐방은 이제 서울의 또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여행 방식으로 자리잡아갈 전망입니다. 서울 동대문구청에선 지난달부터 매달 한번씩 관내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건축물 탐방 프로그램 ‘건축가와 함께하는 멋진 건축물 둘러보기’를 시작했습니다. 현대 건축물에 낯선 일반인 대상 탐방 프로그램은 서울에서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획한 동대문구청 곽석권 건축과장은 “학생·교사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앞으로 본격적인 어른 대상의 현대 건축물 탐방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나라 도시의 경우는 어떨까요. 일본이나 유럽, 미국 등의 주요 도시들에선 고건축물, 현대 건축물을 막론하고 다채로운 탐방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건축전문가들이 해설을 맡는 건 물론이고요. 테마별 건축물 지도가 지역마다 나와 있어 개별적 탐방도 어렵지 않다고 하네요.
그러나 전문가들은 건축물에 관한 한 서울만큼 특별한 지형도를 보여주는 도시도 드물다고 말합니다. 건축물을 테마로 한 여행의 시작을 굳이 외국 도시에서 먼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인데요. 유명 건축가들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강남 테헤란로 주변 등 서울 곳곳엔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가들의 ‘작품’이 들어서 있고 또 건축중에 있습니다. 일본의 한 건축가는 지난해 말 요코하마에서 열린 ‘한국 건축의 지평’전을 둘러본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울은 정말 변화무쌍한 색깔을 가진 도시다. 강과 산과 언덕이 어우러진 자연 지형, 역사성, 변화 가능성 등에서 건축가에겐 매력적인 실험공간이다. 이런 조건이 한국 건축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색깔의 원동력인 듯하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서울이야말로 건축물 탐방의 적지라는 이야기도 되겠죠.
서울 거리 구석구석에 각양각색으로 들어선 건축물들을 만나 보세요. 낯설었던 건물들이 숨겨뒀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멋진 건축물들, 그리고 이들이 조직해내는 도시 경관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우리 삶의 환경도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골목골목 건물 여행. 첫사랑처럼 풋풋한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에르메스·폴 스미스 등 명품 매장 들어서며 건축 트렌드 이끄는 강남 도산공원 앞 거리
서울 거리에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고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 현대건축물을 제대로 탐방해볼 만한 코스는 어딜까. esc가 신창훈(43)·홍선관(47) 두 건축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눈길 끄는 현대건축물이 몰린 강남 신사동 도산공원 앞 거리와 강북 홍대 앞 거리를 함께 탐방했다. 추천 배경은 이렇다.
1. ‘건축물 생초보’도 거닐며 느끼고 즐길 만한, 2. 형태적·공간적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한, 3. 최근에 다양한 재료로 지어진, 4. 중급 규모(4~10층) 현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곳. 두 지역은 각종 건축상을 받은 건축물이 늘어선 곳이면서, 서로 다른 문화적·도시환경적 특성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안창호 선생을 기려 만든 도산공원 정문 앞. 기자로선 생소한 ‘현대건축물 탐방’을 시작했다. 지난 4일 오전 두 건축 전공자는 만나는 건물마다 매개공간이니, 성큰이니, 매스 분절이니, 노출콘크리트에 쪽널이니 하는 건축용어들을 퍼부으며 건축·자재·부동산에 문외한인 기자를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한집 한집 구경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신창훈
영남대 건축과, 서울시립대 건축대학원 졸. 건축가그룹 ‘운생동’ 공동대표. 예화랑·옐로다이아몬드·케이티앤지(KT&G)복합센터 등 설계. 서울시건축상·건축문화대상·건축가협회상 등 다수 수상.
홍선관
홍익대 건축과 졸. 하버드대·컬럼비아대 부동산개발 석사, 도쿄대 도시공학 박사 수료. 서울사이버대 부동산학과 교수. 조각전문 모란미술관 부관장. 저서 <체계적으로 접근한 부동산개발론> 등 다수.
신창훈: ‘패션명품’ 매장 즐비한 이 거리가 바로 국내의 대표적인 럭셔리 건축 트렌드를 이끄는 곳 중 하나다. 청담동 명품 거리가 포화 상태를 이루자, 에르메스가 먼저 이곳에 터를 잡은 뒤 형성되기 시작한 호화 건축물 전시장이다. 평범한 주택가·상가가 몇년 새 확 바뀌었다.
기자: 여긴 건물 자체도 명품이란 말인가?
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최상위층 건축주들은 돈이 많이 들더라도 개성적인 작품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땅값·건축비·마감재·인테리어 등에서 최상급이다.
“폴 스미스 매장은 설계자가 브랜드 특성을 이해하고 만든 건물이다”
홍선관: 나는 이 공원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입구가 하나뿐이고 담으로 꽉 막힌 구조다. 시민을 위한 공간도 아니고, 오히려 도시환경·미관을 해치는 존재다. 공원도 건축물도 주민 삶과 공존하는 형식이어야 한다.
신: 동감이다.
(인기 연예인 배용준이 운영한다는 식당 ‘고릴라 인더키친’이 들어선 회색 건물이 다가왔다.)
신: 이건 콘크리트와 내구성 강판을 사용한 건물로, 승효상의 작품이다. 외벽과 내부 사이 (계단이 설치된) 매개공간이 실용적으로 짜였다. 건물 내부를 거치지 않고 2, 3층으로 올라간다. 합리적 구축, 디테일에 엄격한 설계자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
홍: 바닥재로는 오래된 목재를 갖다 쓴 모양이다.
신: 시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건축물을 추구한 셈이다. 외벽과 창틀을 봐라.
기자: 창틀이 우묵하기도 하고 튀어나오기도 한 모습인데? 외벽 석재는 현무암인 것 같다.
신: 창틀은 두께의 질감이 느껴지게 한 것이고, 외벽 돌판들은 서로 틈을 일정하지 않게 배치해, 중후하면서도 틀에 박히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골목 안으로 드니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게 장식된 식당 카페들이 줄을 이었다. 왼쪽으로 구름 같기도 하고 우주선 같기도 한 흰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패션 브랜드 ‘폴 스미스’ 매장이다.)
기자: 건물이라기보다 조각품처럼 보인다.
신: 곡선으로 이뤄져 형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창문도 없고, 층수도 알 수 없게 했다. 벽과 천장의 구분도 없는 한덩어리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4층 건물이다. 2층까지는 곡선 계단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밖에서 봤던 곡선 벽면이 안쪽 벽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지하층 한쪽엔 자연채광 공간(성큰)이 마련돼 있어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신: 설계자가 브랜드의 특성을 이해하고 만든 건물이라는 생각이다. 폴 스미스는 완전한 정장도 아니고 완전 캐주얼도 아닌 중간적 브랜드다. 자유로운 곡선으로 이뤄졌으면서도 다소 엄격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나?
(전람회 그림 구경하듯, 발길은 다음 건물로 이어졌다. 패션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다. 건물은 평범해 보였다.)
신: 마크 제이콥스는 파격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데, 이 건물과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홍: 그렇다. 지어진 건물에 입점한 듯하다.
(두 사람은 이어서 회색빛 건물 파크뷰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신: 이 건물은 지은 지 10년이 넘은, 상대적으로 꽤 오래된 건물이다. 외벽이 노출콘크리트 형식이다.
홍: 쪽널(나무판 거푸집)을 대어 콘크리트에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나도록 했다. 이런 양식이 10년 전 크게 유행했었다. 콘크리트를 많이 쓴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영향도 있다.
신: 석재와 콘크리트 등 재료의 물성(재료의 성질)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한 골목 돌아 다음 골목으로 들어섰다.)
신: 이 골목 구성이 재미있다. 잘 봐라. 이건 모던한 건물, 저건 보통 건물, 그 옆엔 나무 재질의 건물, 그다음은 외벽을 식물로 덮은 건물까지 다양하게 보인다.
(외벽에 식물을 심어 자라게 한 초록빛 건물, 벨기에 디자이너 브랜드인 앤 드뮐러미스터 매장이 이채롭게 다가왔다.)
홍: 벽면 녹화, 컬러 노출콘크리트 혼용 형식이다. 요즘은 자연친화적, 친환경적 건축물도 눈에 많이 띈다.
기자: 외벽을 풀로 덮었다고 친환경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나?
홍: 그렇지는 않다. 모든 건축물은 사실 태생적으로 반환경적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연과 좀더 가까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위한 관심과 노력들이 늘고 있다. 건축 방식, 재료 사용 등에서 자연친화적 관점으로 다가가는 것, 건축가들의 과제다.
“모든 건축물은 태생적으로 반환경적, 최근 들어 환경과 조화 이루려는 관심과 노력 늘고 있다”
신: 외벽도 그렇고, 둥근 유리창, 곡선 외부 계단 등 특이한 시도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식물의 특성을 이용해 계절에 따라 건물 표정도 달라지게 했다. 외벽 녹화는 단열효과도 있다.
(골목을 나와 ‘모던한 명품 건물’들을 만난다. ‘에스케이투(SKⅡ) 부띠끄 스파’ ‘에르메스’ ‘호림아트센터’ ‘313 아트 프로젝트’ 들이다.)
신: 부띠끄 스파 외벽을 보자. 붉은 벽에 구멍 뚫린 철판을 일정한 모양으로 잇댄 ‘더블 스킨’ 형식이다. 보이는 각도에 따라, 또 낮과 밤에 따라 질감이 달라져 아주 다이내믹한 느낌을 준다. 스킨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다.
홍: 에르메스도 더블 스킨이다. 10층 건물 전체가 황금빛인데, 유리벽에 노란 띠를 무수히 두른 유리를 덧댄 모습이다.
신: 은은한 빛이 건물 안으로 스며들게 한 형식이다. 여기에도 브랜드의 특성이 녹아 있다. 에르메스는 노란색 계통을 많이 쓰는 브랜드다.
(안으로 들면, 유리를 통해 밖이 내다보이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다. 부드러운 나선형 계단도 이런 느낌을 키워준다. 지하 1층 카페 옆엔 에르메스 제품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
신: 육중해 보이는 이 ‘313 아트 프로젝트’는 주변에서 가장 최근(2010년)에 선보인 개성적인 갤러리 건물이다. 실내 공간도 창문이 없는 외부처럼 심플하지 않은가.
기자: 호림아트센터 구성 건물들은 멀리서 바라보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신: 세개의 매스(덩어리)를 기본으로, 다양한 곡선과 직선을 혼용시켜 구축한 건물이다. 건물의 상부·하부·측면의 매스를 분절시켜 다른 모습으로 표현했다. 주변 건물들이 심플한 데 비해 아주 복잡한 매스를 보여준다.
홍: 건물 사이 공간 활용도 돋보인다.
신: 자, 여기까지다. 첫 현대건축물 탐방 소감은?
기자: 솔직히, 아직 어렵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 간판 위주로만 봐오던 건물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됐다. 건물들이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줄 몰랐다. 특히 설명을 들으며 바라보니 건축물 구성요소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도산공원 앞 짤막한 골목 두세곳의 건물 아홉곳을 둘러보는 데 약 2시간이 걸렸다.)
신: 그럼, 전혀 다른 분위기가 기다리는 홍대 앞으로 가보자.
상상사진관·옐로다이아몬드·상상마당·aA뮤지엄 등 젊은 기운 불어넣는 홍대앞 건축물들
4일 오후 서울 홍익대 정문 앞. 거리가 활기에 넘친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밝고 어지럽다. 오전에 둘러본 도산공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홍씨가 먼저 홍대 정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홍선관: 저것 좀 봐봐라.
신창훈: 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교문!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내 고마 안 볼란다!
홍: 교문 구실을 하는 건축물인데, 미대 등 예술분야 학과로 이름난 대학의 ‘얼굴’로선 아쉬움이 많은 건물이다.
기자: 미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얘긴가?
신: 스케일은 좋은데 디테일이 못 따라간다고나 할까.
(신씨가 얼핏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아담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상사진관이다.)
신: 아주 아기자기하고 매스가 특이하게 구현된 건물이다. ㄱ자로 꺾인 터를 잘 이용해 효율적 공간을 연출한 7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홍: 주변 건물들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신: 건물 옆쪽 골목으로 들어가 보자. 골목에서 보는 측면도 마치 건물의 정면처럼 보이지 않나?
기자: 그렇다. 두 곳 모두 건물의 정면 같다.
신: 이 건물을 설계한 문훈은 아주 특이하고 개성적인 건축가인데, 이건 좀 평범한 수준이긴 하다.
(길 건너편의, 지은 지 30여년 됐는데도 디자인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는 국민은행 서교지점 건물을 바라보면서, 열차처럼 아기자기하고 작은 집들이 늘어선, 이른바 ‘서교365’ 앞을 걸었다.)
홍: 이 골목은 작은 가게들이 제각각 무작위로 들어섰으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신: 홍대 앞 거리·건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랜드마크 중 하나다. 무질서가 만들어낸 조화다.
(거리에서 마주친 여학생 2명에게 물었다.)
기자: 홍대 앞은 한마디로 어떤 곳인가?
학생들: 밤이 한낮인 곳? 젊다면 뭘 해도 용서받는 곳?
신: 내게도 물어보라. 내겐 쓰러져가는 쪽방들과 초현대식 건물이 서로 기대고 있는 ‘건축물 잡화점’으로 보인다.
홍: 여긴 솔라즈빌딩이다. 콘크리트와 폴리카보네이트(플라스틱 계열), 알루미늄 등을 사용했다.
신: 여러 재료를 써서 외형의 변화를 추구했다. 옆쪽엔 작은 대나무정원을 들이고 매스를 분절시켜 형태적 변화도 꾀했다.
“스케일 큰 홍대 정문 예술분야 유명대학 얼굴로는 많이 아쉬워”
홍: 간판이 어지러워 건물 본모습이 가려지는 듯하다. 역시 간판이 건물의 얼굴인 걸 알겠다.
(한 골목 돌아가니 눈부신 노란색 유리건물이 확 다가왔다.)
홍: 이게 옐로 다이아몬드다. 건물 벽면을 모두 유리로 장식해 다이아몬드를 형상화한, 최근 홍대 앞에 지어진 가장 핫한 건물이다. 직접 설계한 신씨 얘길 들어보자.(웃음)
신: 쑥스럽지만 얘기해 보자. 몇개의 작은 택지를 묶어 터를 닦았는데, 건물 1층에 옛 골목 모습을 그대로 살려 ㄱ자형 공공 통로(필로티)를 만들었다. 특징 중 하나가 지상 건물(5층) 높이보다 지하 공간(3층) 깊이가 더 깊다는 거다. 땅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기자: 이색적 형태인데도 주변과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는 듯하다.
신: 들쭉날쭉하고 복잡한 주변 경관을 고려해 건물 형태도 들쭉날쭉하고 아기자기하게 디자인했다. 유리 색을 노란색 계통으로 한 것도 같은 의도다.
(다시 액세서리 매장 즐비한 서교365 거리 거쳐 상상마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 상상마당은 홍대 앞 문화거리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건물이란 평가를 받는, 잘 알려진 건물이다. 콘크리트와 곡선 유리창을 통해 나비 날개를 형상화한 외벽이 돋보인다.
홍: 건물이 트인 쪽을 향하고 있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신: 오늘 투어가 막바지에 이르는데, 이 기자가 저 건물(W&H빌딩) 외관에 대해 설명해볼 텐가?
기자: 노출 콘크리트 외벽에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다. 그러나 건물을 크고 작은 2개의 매스로 분절시켜, 여러 덩어리로 나뉜 주변 건물과 조화를 꾀한 모습이다. 그런가?
신: 하하, 그렇다. 본건물과 계단실을 분리해 하나의 프레임으로 짜고 그 안에 공간을 배치했다.
홍: 입점한 가게가 그 건물을 돋보이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 건물도 카페 겸 서점, 갤러리가 들어와 그런 구실을 하는 것 같다.
신: 다음은 가장 원초적인 매스를 보러 가자.
(골목을 돌아 들어가자 창문 하나 보이지 않는 육중한 네모꼴 건물이 나타났다.)
홍: 이런 건물은 건축주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사례다. 개성이 너무 강해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aA뮤지엄처럼 인테리어와 건축물 비슷한 톤일 때 편안함, 감동 느끼게 된다”
신: 단순한 박스 형태로 주변과 차별화한 두킴사옥(엉뚱상상)이다. 노출 콘크리트의 물성을 강조해 어두워 보이지만, 내부를 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높이 8m는 돼 보이는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울 줄 알았던 실내가 상당히 밝았다. 내부는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
기자: 창문이 하나도 없는데 실내 조명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신: 여기 이 ‘탑 라이트 형식의 중정’(건물 가운데 설치한 위가 트인 깊은 공간) 때문이다. 자연광을 이용해 드라마틱한 내부 공간을 연출했다. 빛과의 결합을 잘 활용한 건물이다.
(골목을 되돌아 나오니, 멀리 당인리발전소 굴뚝이 보였다.)
홍: 홍대 앞 문화거리가 저 발전소 쪽으로 확대되고 있다. 조만간 새로운 개성적인 건축물들이 선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신: 이제 마지막으로 에이에이(aA)디자인뮤지엄으로 가보자. 거칠고 색도 짙은 노출 콘크리트에 어딘가 습한 느낌, 무거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홍: 공간 배치나 기둥, 가구 등이 유럽 중세식이어서 그런 듯하다. 1층 카페의 경우 천장이 높아 습한 분위기를 보완해준다.
신: 인테리어와 건축물이 비슷한 톤일 때 보는 이가 편안함,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건물이 그런 느낌이다.
(널찍하고도 높직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탐방을 마무리했다.)
aA디자인뮤지엄 지하 가구전시장
기자: 홍대 앞의 거리와 건물들은 도산공원 앞 거리에 비해 확실히 자유분방한 느낌, 좀더 활기차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 길도 건물도, 찾아오는 이들도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도산공원 앞이 잘 구획된, 럭셔리하고 보수적인 거리라면, 홍대 앞은 무질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젊고 자유롭고 트렌디한 공간이다.
홍: 그런 분위기 역시 앞으로 부단히 새롭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게 바로 홍대 앞 문화다.
기자: 오늘 수고 많으셨다. 건축물에 실눈이나마 뜨게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린다.
(홍대 앞 건물 탐방엔 2시간30분가량이 걸렸다. 건물 하나하나가 스토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서울이 얽히고설킨 아주 끔찍한 전깃줄 도시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알면 더 잘 보이는 건축용어 ▣ 중정(中庭) 한옥의 경우 안채·바깥채 사이에 마련된 작은 뜰. 일반 건축에선 자연 환기와 채광 등 친환경 설계를 위해 건물의 중앙부에 외부공간을 설치하는 걸 말한다. ▣ 매스(mass) 건축에서 외부 형태를 규정하는 덩어리를 말한다. 건축디자인에서 형태에 대해 연구할 때 ‘매스 스터디’란 표현을 쓴다. ▣ 이중스킨(double skin) 건축물의 외피를 가리켜 ‘스킨’이라는 말을 쓴다. 이중스킨은 디자인의 차별화 또는 친환경을 위한 스킨으로, 빛과 열 차단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 공용공간(public space) 전용 부분을 제외한 복도·계단·입구의 홀 등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공간. 현대 건축디자인에서는 공용공간의 디자인 차별화를 통해 좋은 건축이 만들어진다. ▣ 성큰(sunken) ‘움푹 들어간’, ‘가라앉은’의 뜻으로 지하에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공간을 말한다. 지하의 휴식공간, 정원으로 이용된다. ▣ 필로티(piloti) 건물 1층 또는 저층부에 벽을 없애고 조성한 개방공간. 주차장, 통행인의 동선 등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한다. 도움말 신창훈 |
막막한 입문자라면 주요 건축상 받은 건물부터 찾아가보길
테헤란로·가로수길·삼청동도 강추
어떤 건물이 눈여겨볼 만한 건축물일까? 건축전문가들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건물이 좋은 건물”이라고 말한다. 무겁고 어렵게 다가가지 말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물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건축가 신창훈씨는 “어떤 건물이 시선을 잡아끈다면, 거기 건축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건축물이 드러내고 있는 다른 부분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는 설명이다. 시선 가는 건물을, 그림 감상하듯이 있는 대로 관찰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가볍게 즐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상업적 이용 측면이나 기능적 면에서만 건축물을 바라봐선 안 된다”며 “이런 시각은 현대건축물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현대 건축물 탐방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먼저, 각종 상을 받은 건축물들을 골라 탐방해 보는 것이다. 한국건축문화대상·서울시건축상·건축가협회상·젊은건축가상 등 해마다 개성적이고 가치있는 건축물들을 선정해 상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 건축물의 특징과 흐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안목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이다.
다음은 현대식 건축물들이 집중된 지역을 선택해 탐방하는 방식이다. 현대 건축물이 몰린 도심 지역은, 이미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실험 경연장이 돼 있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도시환경·미관까지 관심을 가져볼 수 있는 방법이다. 강남삼성타운, 부띠끄 모나코, 포스틸타워, 강남파이낸스센터, 지에스강남타워, 데이콤 사옥 등 화려하고도 실험적인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강남 테헤란로(사진)가 대표적. 크고 작은 건축물들과 인테리어의 조화가 돋보이는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금호미술관·학고재·국제갤러리·가회헌과 하겐다즈 플래그십 스토어, 몽인아트센터 등 개성적인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삼청동도 탐방해볼 만한 코스다.
유명 건축가의 건축물들을 따라 여행하는 방식도 있다. 건축물에 대해 이해가 어느 정도 깊어졌다면, 특정 작가의 경향과 변화과정을 추적해볼 만하다. 신씨는 “예컨대 김수근의 작품인 서울 경동교회, 부여박물관, 구미문화회관, 마산 양덕성당 등을 도는 전국투어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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