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열광했던 19세기 한국 모습, 어땠을까?
발레 '코레아의 新婦' 자료 발굴이 의미하는 것
지난해 11월 말, 한국인의 애국심을 소재로 한 발레가 19세기 유럽 예술의 수도 빈에서 5년간 정식 레퍼토리로 공연되어 대중적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악보와 관련 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코레아의 신부(新婦)'라는 제목의 이 발레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나비부인'이나 '투란도트'보다도 앞서서 유럽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프레시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으로 이 자료를 발굴한 박희석 박사(베를린 자유대 한국학과 박사 후 연구원)가 이 발굴의 과정과 의미에 관해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
얼마 전 한국에 알려진 발레 '코레아의 신부(新婦)'는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오페라하우스(현 빈 국립오페라하우스)에서 1897년 5월22일에 초연이 있은 후 1901년까지 5년간 정식 레퍼토리로 공연되었던 작품이다.
한국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던 시기인 19세기 말에 유럽 음악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빈에서 한국이라는 이름 및 이야기 배경을 가진 발레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료 조사에 따라 이 발레가 잠시 나왔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시 시즌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고 평단의 예외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발레의 주요 무곡이 발췌되어 판매될 정도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발굴된 발레 '코레아의 신부'는 단순히 지금까지 잊혀 있던 한 주변적인 발레 역사가 아니라, 한국 음악 및 무용(사)학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료로 보인다. 또한 한국 문화의 해외로의 순환이라는 점에서 보면, 초기 한국의 유럽 수용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용의 신빙성을 위해 아래에 인용한 부분들("~")은 독일어로 된 글을 직역한 것으로, 이 발레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 1982년의 박사 논문 Ruth Matzinger의 'Die Geschichte des Ballettes der Wiener Hofoper 1869-1918' ('1869년부터 1918년까지의 빈 궁정오페라하우스의 발레 역사') 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에 찾은 사료의 총 내용을 보면, 우선 발레의 줄거리인 담시 '발레텍스트'가 있는데, 서지 목록에는 레겔(Heinrich Regel)이 1895년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리브레토의 인쇄 표지에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나와 있듯 일본의 모습이 확연한데, 그 가운데서 놀랍게도 돛의 정상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배가 그려져 있다.
ⓒStaatsbibliothek zu Berlin, Berlin |
그 밖에 초연이 있은 다음 판매를 위해 인쇄되어 나온 '중요 무곡의 악보' 6개가 있다. 이 악보는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위한 악보로 되어 있는데, 이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M)에 소재하는 음악 전문출판사 '로버트 리나우'(Robert Lienau)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발견된 '발레 의상도안' 1부가 있다. 색이 가미된 연필로 그려진 이 스케치에는 하얀 면한복을 입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 나와 있다. 이는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에 있는 게르만 박물관(Germanisches Museum) 중 그래픽 모음관(Graphische Sammlung)에 소장되어 있다.
ⓒGermanisches Nationalmuseum, Nürnberg |
그런데 이번 발굴 사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수필로 작성된 543면의 '발레음악 총보'(Partitur)이다.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이 추적 작업은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결과로, 소유주인 리나우 음악 출판사 자체도 몰랐던 악보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발굴된 '코레아의 신부' 총보는 수필로 되어 있는데 이 출판사의 악보 전문가 피카르(Edith Picard) 씨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작곡가 및 지휘자가 쓰는 총보가 단 하나인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쓰인 이 총보는 1897년에 만들어졌던 그 총보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그런 이 총보가 그동안 잊힌 채 약 100여 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Musikverlag Robert Lienau, Frankfurt/Main |
어떻게 이 총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자료는 없다. 하지만 리나우 출판사의 역사와 관련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빈에서 발레 '코레아의 신부' 초연이 있은 후 베를린에 있던 슐레징어(Schlesinger) 음악 출판사가 위에 언급한 발레의 주요 무곡을 뽑아 인쇄해서 판매했다. 이때에 작곡가 바이어 (Josef Bayer)와 이 출판사 간에는 계약이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후 작곡가가 사망한 뒤, 혹은 아직 생존했던 동안에 이 총보를 출판사가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1810년에 슐레징어(Adolf Martin Schlesinger)가 세운 이 슐레징어 출판사는 이미 1864년에 그곳에서 일을 배웠던 리나우(Robert Emil Lienau)가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인수했던 회사였다. 이 출판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의 많은 회사들이 그랬듯이 베를린을 떠났고, 지금의 프랑크푸르트로 옮기면서 이름도 로버트 리나우로 바꿨다. 이런 와중에 베를린에 있던 출판사의 모든 자산들과 함께 이 총보도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그래서 옮겨진 대량의 자료들 중 여러 부분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상되지 않은 채 이 출판사의 보관창고에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개방 정책을 시작하며 유럽과 문화적 교환을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이미 잘 알려진 중국과 더불어 유럽에는 소위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1873년 빈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에 일본이 전시된 이후로 소위 '일본주의'(Japonismus) 라는 개념이 나올 정도로 이 이국적인 섬나라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 듯 흥겨운 소극인 오페레타로 1873년에 '일본여자'(Die Japaneserin)라는 작품이 있었고, 그 뒤 1886년 9월에는 1년 전 영국 런던에서 초연이 있었던 '미카도'(Mikado)를 독일어로 번안한 작품이 빈의 카를 연극장(Carltheater)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빈 궁정오페라하우스는 1895년을 전후하여 "대성공을 가져 올 수 있는 발레"를 구상했다. 심혈을 기울인 대작을 완성하겠다는 오페라하우스의 포부였다. 실패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는 이 대 프로젝트의 주제로, 오페라하우스는 그때 유행이었던 일본이나 늘 많은 관심을 얻고 있던 중국의 사랑 이야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몇몇 유럽인이 쓴 여행기 내지는 체험기 안에서 다만 작은 자리만을 차지했던 조선에 시선이 모아졌다.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는 이것은, 레겔의 '코레아의 신부' 텍스트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안에는 얼마 전 끝난 중일전쟁이 발레 줄거리의 배경이라 명시되어 있다. 레겔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전쟁에서 이 담시의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전쟁의 직접 주인공도 아닌 조선이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 이 전쟁에 관한 보도에 전쟁 상황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가져 올 수 있는 조선의 운명까지 언급됐을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은 이 전쟁에서 지면서 그때까지 행사했었던 조선에 대한 오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일본은 반대로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그들의 야심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었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창 위용을 과시한 때이기에 유럽은 일본의 의도를 직시한 것이다. 이렇게 청일전쟁의 소식을 따라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조선의 운명이 유럽에까지 전해져 빈에서 발레 예술이라는 장을 통해 시사된 것으로 보인다.
발레 '코레아의 신부' 줄거리는 전쟁에 참여하는 조선의 왕자와 한 신하의 딸 사이의 사랑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전장으로 막 떠나기 직전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 다시 만나 즉석에서 혼인한다. 왕자의 아내가 된, '대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새 신부가 온갖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쓴 채 포로가 된 신랑을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대사의 꾐에 빠져 바닥에 쓰러진 일본 장군을 뒤로하고는 왕자와 신부가 서울로 돌아와 행복하게 다시 결혼한다는 것으로 발레는 막을 내린다.
오페라의 주제인 이런 멜로드라마 뒤에는 당시 그들이 이해한 한국의 모습이 들어있다. 가령 위험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투에 나가려하는 용감한 조선의 젊은 청년들 같은 것들. 결혼을 한 남자만이 전쟁에 나갈 수 있다는 한국의 풍습 때문에 바닷가에 숨어 있다가 조개를 따고 나오는 해녀를 순식간에 자기 아내로 만들고는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준비가 된 신부, 평민의 모습으로 백성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는 왕자, 그리고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싸우려는 젊은 청년들의 모습이 전체 줄거리의 맥을 이룬다. 이렇듯 이 발레 안에는 한국에 대한 호감이 선명하게 묻어나온다.
총 12면 정도의 간략한 이 발레텍스트를 기반으로 작곡가 바이어가 곡을 만들었다. 원래 궁전오페라하우스의 계획은 1896년 10월에 초연을 올리는 곳으로 되어 있었지만, 하스라이터 (Josef Hassreiter)가 연출한 발레 무대장치 및 의상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높아 잠시 중단되었다가 1년 뒤인 1897년 5월 22일에 초연되었다. 기록에서는 그때까지 있었던 발레 또는 오페라 공연과는 비교될 수 없는 화려한 공연이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무대장치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놀라움이 드러나는 표현이 발견된다.
"3개의 대형 무대 배경화, 8개의 대 아치형 건축, 4개의 대형 암벽, 그리고 수십 개의 장면 데코레이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을 유발한 발레 의상이 모두 312벌이었다."
이 무대의상 비용은 이 발레 총 비용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아마 발레에 나오는 한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전통의상을 그들이 이해한 모습으로 완성한 것 같다. 이 초연의 상황과 관련한 보도의 글을 보면, "그 날 저녁 오페라하우스는 만원을 이루었고, 공연은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위에 기술된 무대장치와 찬란했을 무대의상을 상상해 보면 그 당시에 발레 '코레아의 신부'가 대성공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확신하기 위해 그때의 평단에서 나온 공연 비평을 위에 언급한 논문에서 빌려온다. :
"이 발레 '코레아의 신부'는 당시 비평가들에 의해 오페라까지 포함해서 그 시즌 공연되었던 것 중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Sullivan의 'Mikado'와 비교해서 볼 때 빈 사람들은 이 '코레아의 신부'를 더 선호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 모습을 연상시키는 자연경치와 전통의상 때문이었다. 줄거리는 세계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와는 별 상관이 없다. 기생으로 등장한 베소니의 '기생 춤'은 정말 한국적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큰 박수를 받은 장면은 '사랑의 여신'들이 대각선 모양으로 늘어선 채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또한 제 6장면의 끝에 나오는 '분열 행진'은 최고의 군사사열로 인정받았고, 결혼식 삽입곡이 나올 때는 넋을 빼앗는 듯한 색광으로 관중을 사로잡았으며, 마지막 결혼식 장면은 수평으로 늘어선 머리 층들로 쌓여진 피라미드로 끝났다.
더군다나 한 비평가는 이 연출에 정치적인 대립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민간인 발레' 와 '군사 발레'가 서로 대조를 이루며 표현되었다는 것인데, 곧 '한국의 춤'이 '일본의 행군'과 교체되면서 나타났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발레를 동작이나 무대의상 또는 줄거리로 평가하지 않고, 발레의 연출을 분석해서 그 발레의 특징을 끄집어내는 이런 대단한 찬사는 지금까지 비엔나 궁정오페라하우스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발레 '코레아의 신부'의 춤과 무대장치 그리고 발레 줄거리가 평단과 관객에게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남겼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그 당시 빈의 평단이 내린 시각적인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의 극찬이니 더욱 두드러진다.
대단한 찬사를 받기로는 작곡가 바이어의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
"비록 빈의 왈츠음악풍이 전체 악보에 깔려있지만, 이 음악 안에는 한국의 전통음색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런 낯선 소리가 이 발레음악의 성공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첫 공연이 끝나자 곧장 두 개의 왈츠 곡('대사', '사랑의 여신')에 대한 판매를 위해 베를린에 있는 슐레징어 음악 출판사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피카르 씨의 말을 빌리면, 당시 이 베를린의 출판사가 발레 '코레아의 신부'가 나오자마자 몇몇 무곡의 악보를 개별적으로 인쇄해서 팔았다는 것은 그때에 이 발레의 무곡이 처음부터 대중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개인들이 이 악보를 사서는 집이나 모임 등에서 여기 나온 곡들을 피아노 혹은 다른 악기로 연주하려 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무곡들이 당시에 빈과 독일 등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발레 '코레아의 신부'는 우리가 몰랐던 시기 빈 국립오페라하우스가 심혈을 기울여 기획한 작품이자 발레음악과 무용 그리고 무대장치 및 의상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대성공을 가져왔던 작품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발레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생각해 본다. 이런 점에서 이번 발굴은 한국의 음악 및 발레계에 숙제를 가져다 준 셈이다.
또한 19세기 말 일본의 침략 정책 앞에서 한 가닥 불빛 같았던 한국의 운명이 무대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 비평가의 글에 나타났듯 '일본의 군사무용'과 '한국의 민간무용'이라는 두 나라의 성격적 대비는 유럽에 비친 당시 한국의 모습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가진 한국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미 빈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상반된 한국과 일본의 이미지가 이 발레에 잘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발레를 통해서 빈과 유럽에 한국과 일본의 상이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한국(조선)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점에서 이 발레 '코레아의 신부'는 한국과 한국인 내지는 한국 문화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초창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위의 비평에 나오는 "실제 모습의 한국 경치와 전통의상", 그리고 "정말 한국적"이라는 발레리나 베소니의 '기생 춤', 또한 작곡가 바이어가 창조한 "한국음색"이 어떠했는지 무척 궁금할 따름이다. 그것을 밝혀내는 일은 이제 전문가들의 몫이다.
2013.1.3 / 박희석 베를린 자유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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