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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힐링 클래식 - 미디어오늘 (~2014)

by Wood-Stock 2013. 1. 11.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86

 

 <이채훈의 힐링 클래식>을 시작하며

올 겨울은 유난히 춥군요. 상처 입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고공 철탑에 계신 분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MB 정권에 장악된 방송은 고스란히 수구 세력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재벌과 검찰 개혁도 지지부진합니다. 조 · 중 · 동은 의기양양합니다. 하지만 실의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 힘들 때면 언제나 음악이 저를 위로해 줬다는 걸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할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영혼의 위안입니다. 음악은 홀로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고,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지친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비를 내려 생기를 줍니다. 춥고 어두운 이 시대, 따뜻한 담요가 되어 차가운 마음을 덮어줍니다.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함께 나누고 격려하면서 살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모차르트가 <마술피리>에서 노래했듯, “우리는 음악의 힘으로 죽음의 어둠을 기꺼이 헤쳐나갈 것”입니다.

이 글들은 초보자를 위한 음악 입문서 구실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에 익은 선율들을 엄선해서 가장 훌륭한 연주를 링크할 것입니다. 하루에 한 곡씩 마음의 귀로 듣다보면 어느새 클래식 음악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누구나 제목을 알지만 정작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곡들, 가령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같은 곡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석 같은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을 알면 클래식이 보인다>라는 책도 있지요? 결코 어렵지 않은 두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을 비교적 많이 소개하려 합니다.


글을 읽는 것보다 음악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음악은 ‘지식’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음악에 관한 한 “아는 만큼 들리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아는 것”입니다. 음악을 알려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음악 모른다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음악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음악의 노예가 되어서는 곤란하니까요. 일단 마음의 문을 열고 즐기시면 어느덧 귀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치유가 대세라고 합니다. 너도나도 ‘힐링’ 마케팅을 하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상처입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지요. 음악 몇 곡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프고 피로한 영혼에게 음악은 작은 위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로가 쌓여서 마음의 새 살이 돋고, 어느덧 삶의 활력이 넘쳐나게 되면 그게 바로 치유겠지요.


음악은 공감과 연대를 낳습니다. 음악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서로 연결해 줍니다. 단순히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소통하는 게 음악입니다. 베토벤이 장엄미사 표지에 써 넣은 이 말은, 빈 필하모닉의 슬로건이자 제가 진행하는 ‘진실의힘 음악여행’의 모토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따뜻한 세상, 자본과 권력의 횡포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필자 소개>

이채훈은 문화방송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현대사 다큐, <모차르트>, <정트리오> 등 음악 다큐를 다수 연출했고 지금은 ‘진실의 힘 음악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슈베르트 가곡 <음악에게> -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끄는 음악의 힘

           
  너 아름다운 예술이여, 세상이 어두울 때마다,
  삶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옥죌 때마다,
  너는 내 마음에 따뜻한 사랑의 불을 지폈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지!
 
  너의 하프에서는 종종 한숨도 흘러나왔지.
  너는 언제나 달콤하고 신성한 화음으로
  더 나은 시절의 천국을 내게 열어주었지.
  아름다운 예술이여, 네게 감사할 뿐.


 

http://www.youtube.com/watch?v=FOs9Gpe27Ew                          10대 시절 슈베르트

 

 

 

음악은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슈베르트(1797~1828)가 스무살 때 작곡한 이 노래는 음악이 주는 위안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650여곡의 노래를 작곡하여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지만, 그의 31살 짧은 인생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주 아팠고, 첫사랑 테레제 그로프와 헤어진 뒤엔 와인을 많이 마셨습니다. 20대에 벌써 뚱뚱한 아저씨 몸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우울한 ‘방랑자’ 기질은 이미 10대에 나타났습니다. 음악가로서 돈과 명성을 쥐려면 오페라가 히트해야 하는데, 그가 손댄 17편의 오페라는 단 한편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음악가로서 불우했던 거지요.

 

그는 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즐겁게 한 상냥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면 두 손을 입에 대고 황홀해 하는 순박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슬프고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음악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가곡 <음악에게>는 슈베르트가 홀로 있는 시간에 조용히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언제나 위안이 되어 준 게 음악이었음을 깨닫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한 곡입니다.
 
노랫말은 친구 프란츠 폰 쇼버가 썼습니다. 1816년 12월, 쇼버의 어머니는 빈에서 넓은 집을 마련했고, 슈베르트는 교직을 떠나 그 집 신세를 지면서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슈베르트의 후원자를 자처한 친구 쇼버 덕에 좋은 여건이 된 거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슈베르트는 ‘밤의 사나이’ 쇼버를 따라다니다 그만 매독에 걸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결국 슈베르트가 일찍 죽게 된 셈이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슈베르트가 힘들 때마다 마음에 따뜻한 사랑의 불을 지펴 주었던 음악…. 그는 31살 짧은 방랑을 마치고 떠났지만, 이 음악은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삶의 잔인한 현실이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지만, 이 노래가 흐를 때 우리의 한숨도 어느덧 잦아드는 것 같지 않습니까? 36살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1930~1966), 그의 목소리가 슈베르트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코렐리 ‘라 폴리아’ 변주곡 -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리움의 선율

 

“그리움이 제일 가혹한 형벌이야.” 군사독재 시절, 차가운 감옥에서 겨울을 나야했던 친구의 말입니다. 추운 것, 배고픈 것,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 이 모든 고통을 내 몫으로 감당할 수 있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게 가장 아팠다고 합니다. 코렐리의 <라 폴리아> 변주곡은 아득한 그리움을 노래합니다. 저는 첫사랑에게 이 곡을 녹음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라 폴리아는 원래 포르투갈의 민속 무곡으로, 비발디·살리에리도 이 선율을 주제로 곡을 썼지만 지금은 코렐리의 작품이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애절한 주제에 이어 22개의 변주곡이 펼쳐집니다. 열정적이면서 기품을 잃지 않는 선율들이 가슴을 적십니다. 프란스 브뤼헨의 레코더(앞으로 부는 플루트, 불어로 flûte a bec) 연주가 일품입니다. 거장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쳄발로, 안너 빌스마가 첼로를 맡아 열심히 반주하지요.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는 바로크 바이올린 음악의 기초를 다진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헨델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취미는 돈이 안 드는 그림 감상 뿐”이었습니다. 그는 귀족들에게 늘 공손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연주하는데 한 손님이 옆 사람과 잡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코렐리는 바이올린을 놓고 객석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제 연주가 저 분들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베토벤은 청중들의 태도가 불량하면 그냥 피아노를 쾅 닫고 나가버렸다지요. 이에 비하면 코렐리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jTTguuXbeU8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음색이 우아하고, 표정이 풍부하고, 운궁(運弓, 활 쓰는 법)이 다채로웠다고 합니다(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1997, p.36~37). <라 폴리아> 변주곡은 원래 1700년에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Op.5 중 마지막 곡인 12번이었습니다. 이 곡은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큰 도전이라고 합니다. 이 곡을 연습하는 학생의 절반 정도가 아예 바이올린을 포기해 버린다고 하네요. 그런데, 프란스 브뤼헨이 레코더로 연주한 게 어느 바이올린 연주보다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레코더 소리 하나하나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대상도 알 수 없는 원초적 그리움을 불러냅니다. 바이올린 전공자들이 굴욕을 느낄까봐 걱정되는군요.^^

 

300여년 전에 나온 이 음악이 오늘날 우리 마음에 이렇게 생생하게 울린다는 게 신기합니다. 옛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겠지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도 이 곡을 아주 좋아하는군요. 그가 블로그에 남긴 말입니다. “이 곡을 들으면 영혼에 쓰나미가 밀려오는 느낌을 받아요. 삶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떠안고 가는 모습이랄까, 슬픈데 내색하지 않고, 그것조차 동반자인 듯 말이죠.”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로 들어볼까요?

 

◎ 용어
Op : 라틴어 Opus(작품)의 준말로, 한 작곡가의 작품이 출판된 순서대로 매긴 일련번호.

 

 

 

타르티니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파릇파릇한 봄의 새싹처럼 싱그러운 음악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의 작품 중 제일 친숙한 선율은? KBS 1FM <명연주 명음반>의 시그널 음악, 바로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코렐리의 작품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후배 작곡가 타르티니가 코렐리의 선율을 주제로 만든 변주곡입니다.

타르티니(1692~1770)는 <악마의 트릴>로 유명한 ‘바이올린의 귀재’입니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코렐리의 선율을 바탕으로 50개의 변주곡을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린의 기교를 맘껏 뽐낼 수 있도록 발전시킨 거였죠. 하지만, 50개나 되는 변주곡은 장황한 느낌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20세기 이탈리아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지노 프란체스카티(1902~1991)가 이 중 5개를 추려서 아담한 독주곡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란체스카티는 ‘바이올린의 귀재’ 파가니니의 대를 잇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크게 보면 코렐리-타르티니-파가니니-프란체스카티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바이올린의 위대한 전통이 이 한 곡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지요.

 

변주곡이란?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템포·리듬·멜로디·조성에 다양한 변화를 주어서 만든 음악 양식입니다. 타르티니가 이 멜로디를 변주곡의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원곡은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F장조 Op.5-10 중 4악장, ‘가보타’(Gavotta)입니다. 선율이 재미있고, 길이도 30초 정도로 아주 짧습니다. 변주곡의 주제로 안성마춤이었던 거죠. 코렐리가 세상을 떠난 뒤 ‘대박’난 선율입니다.

코렐리가 이런 ‘대박’을 예상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내가 무심코 뿌린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묵묵히 씨를 뿌리는 사이에 어느덧 세월이 흘러 뜻밖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법이지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이른 봄,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순간처럼 싱그러운 음악입니다. 타르티니가 작곡했고 프란체스카티가 연주한 이 변주곡, 코렐리가 담고 싶었던 느낌을 코렐리보다 더 정확하게 짚어낸 것 아닐까요? 음악은 이렇듯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군요.

 

 

 

 

 

◎ 용어
가보타(gavotta) : 가보트(Gavotte), 17세기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민속 춤. 2박자의 차분한 속도.

 

 

http://www.youtube.com/watch?v=Mf8yuPrvB9M&feature=endscreen&NR=1

 

 

 

 

파헬벨 ‘카논’ - 혼탁한 세상, 맑은 선율로 치유한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입니다. 누군가 돌을 던졌나보군요.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갑니다. 동심원은 점점 커져서, 결국 호수가 넘쳐날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물결이 아무리 거세져도 물은 처음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점입니다.

파헬벨의 <카논>은 음악 역사상 가장 맑은 음악일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 조용히 흐르는 이 음악에 마음을 맡기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마음도 맑아지며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카논은 원래 ‘규칙’이나 ‘표준’을 뜻하는 라틴말인데, 하나의 성부가 주제를 연주하면 다른 성부가 이를 모방하며 따라오는 음악 형식입니다. 음악 시간에 배운 ‘돌림노래’가 바로 카논이지요.

샌프란시스코의 고음악 앙상블이 연주합니다. 각 성부가 어떻게 서로 모방하며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오르간, 첼로, 기타는 시종일관 같은 선율을 노래합니다. 음악을 건축에 비유한다면 기초를 놓아주는 셈이지요. 이어서 세 대의 바이올린이 돌림노래를 시작합니다. 주제 선율이 조금씩 변형되며 음악은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빛깔로 반짝입니다.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점점 더 커집니다. 하지만 맑고 평온한 느낌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JvNQLJ1_HQ0

 

 

요한 파헬벨(1653~1706)은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로, 빈 슈테판 성당과 아이제나흐 궁정에서 일하며 수많은 오르간곡과 실내악곡을 썼습니다. 그는 생전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작품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음악의 기쁨>, <음악적 죽음을 생각함> 등 극히 일부분만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카논>은 1694년,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찬 바흐의 큰형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결혼식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파헬벨 자신이 이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때 <카논>이 연주됐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죽은 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이 곡은 1940년, 아서 피들러가 지휘한 보스톤 팝스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뒤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어느덧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곡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요즘은 클래식 뿐 아니라 팝송과 영화음악, 뉴에이지 음악에서도 이 선율을 즐겨 차용하고 있습니다. 파헬벨의 <카논>에 담긴 순수한 마음은 세월과 장르의 벽을 넘어 우리 마음에 가랑비처럼 스며들고, 어느덧 흠뻑 적셔줍니다.

 

 

 

비탈리 ‘샤콘느’ - 고통을 치유하는 ‘가장 슬픈 음악’

 

“빛바랜 풍경 하나가 이 곡에 있다. 봄이었고,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모든 대화나 시나 철학을 너머, 다른 그 무엇을 통해 울어버리고 싶었다. 언어 이외의 것으로 말이다. 우리는 말없이 담배를 한 대씩 붙여 물었다. 그때 오르간의 저음이 흘러나오고, 마침내 그 카랑카랑한 바이올린의 절규가 쏟아졌다. 그날 우리는 술 한 잔 걸치지 않은 맨정신으로 말 한 마디 없이 울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이 곡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곡’이라는 점을 긍정한 셈이 되었다.” - 조희창, 하이페츠 연주 비탈리 <사콘느> 음반 해설지

비탈리의 <샤콘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꼽힙니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의 절제된 연주, 오히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슬픔을 정교하게 전해 줍니다. 담담한 변주곡으로 진행되다가 후반부에서 절규와 흐느낌으로 이어지고, 격렬한 감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 다시 샤콘느 주제로 돌아와 끝맺습니다. 하이페츠는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가 오르간 반주로 편곡한 것을 연주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97xlBipnzG8

 

 

샤콘느는 17~18세기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 유행한 4분의 3박자의 장중한 춤곡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기악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비탈리의 <샤콘느>는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에 나오는 <샤콘느>와 더불어 이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바흐의 작품이 ‘영원을 향한 끝없는 비상(飛上)’이라면, 비탈리의 작품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장 슬픈 음악’으로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1663~1711)는 바로크 볼로냐 악파를 대표하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습니다. 볼로냐 아카데미아 필하모니를 창설했고 모데나 궁정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바이올린 소나타와 실내악곡 몇 곡이 전해질 뿐입니다.

비탈리의 <샤콘느>는 진위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로크 시대 음악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강렬한 정서 때문에 의문이 제기됐던 것이지요. 게다가, 자필 악보가 없습니다. 사후 150년이 지난 1867년,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드 다비드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해서 발표하면서 “원래 작곡자가 비탈리”라고 밝혔을 뿐, 증거가 없습니다. 비탈리가 남긴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진위를 가릴 자료도 부족합니다. 아무튼, 이게 비탈리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 또한 없으니, 여전히 비탈리의 <샤콘느>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슬픈 음악’이므로 슬프고 외로울 때 들으면 위안이 됩니다. 무릇, 비극이 슬픈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고 마음을 정화(淨化)해 주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라장의 연주를 들어볼까요? 그녀의 연주는 한국인의 슬픔의 정서를 극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달콤한 슬픔’(Sweet Sorrow), 사라장의 연주는 하이페츠보다 한결 부드럽고 따뜻하게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loBa9SPM7U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D단조 - 300년 전 선율에 담긴 마음의 위안

 

오보에는 불어로 hautbois, ‘높은 소리의 목관악기’란 뜻이지요. 소리를 내는 구멍이 아주 작아서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렷하고 청아한 소리 때문에 다른 악기 소리에 묻히지 않고 잘 들립니다. 오보에 연주자는 리드의 상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늘 칼로 리드를 다듬는 ‘목공예’를 해야 하지요. 알비노니, 비발디, 텔레만, 르클레르 등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이 오보에 협주곡을 남겼는데, 마르첼로의 작품이 가장 유명합니다.

1악장 안단테 에 스피카토(느리게, 스피카토로)는 거장다운 위엄과 기품이 느껴집니다. 바이올린이 유니슨으로 먼저 말을 걸면 오보에 솔로가 대답합니다. 오보에와 현악 합주는 서두르지 않고 우수어린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일반적인 바로크 협주곡과는 다른 형식이지요. 2악장 아다지오(아주 느리게)는 애끊는 선율이 가슴에 오래 남습니다. 현악 합주가 숨죽여 반주하면 오보에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 그리움에 가득한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바로크 아다지오’라는 별명을 널리 알려진 선율입니다. 3악장 프레스토(아주 빠르게)는 빛과 그림자가 열정적으로 교차하는 피날레입니다. 

 

 

http://youtu.be/vE2O_yfgtBU

 

베네치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알레산드로 마르첼로(1669~1747)는 계몽사상의 소유자로, 수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작곡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은 뒤에도 23살 연하인 타르티니에게서 음악 수업을 받은 딜레탕트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소나타, 협주곡, 칸타타 등 많은 작품을 썼는데, 이 오보에 협주곡 D단조는 지금도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비발디를 높이 평가해서 그의 악보를 연구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요. 바흐는 마르첼로의 이 작품을 필사했고, 쳄발로 독주곡으로 편곡까지 했습니다. 천재의 작품을 천재가 알아본 셈이지요. 바흐 덕분에 조금 더 유명해진 곡입니다. 바흐가 편곡한 마르첼로 협주곡, 조금만 들어 보시지요.


 

http://youtu.be/GH2Yce4rfgA


이 곡은 오랜 세월 비발디 작품으로 알려져 왔고, 한 동안 동생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작품으로 오인됐고, 최근에야 주인을 바로 찾았다고 합니다. 동생 베네데토도 작곡가, 시인, 풍자작가로 명성을 날린 재주꾼이었습니다. 그가 쓴 <테아트로 알라 모다>(Il Teatro alla moda)는 초기 오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문헌이라고 합니다. 마르첼로 형제에겐 르네상스 거장인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풍모가 남아 있었던 것 같지요? 르네상스 예술의 수도(首都) 베네치아를 수놓았던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300년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에 깊이 와 닿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알비노니 ‘아다지오’ - 전쟁의 참화도 멈추게 한 첼로의 선율… 

 

악양 사는 착한 시인 박남준이 밤새 웁니다. 동갑내기 친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그제, 추위에 얼어 터진 구들장을 고쳐주고 즐겁게 소주 한잔 나눴는데…. 새로 지은 황토방에서 자다가 갑자기 질식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곡을 틀어놓고 순박한 친구를 추억하며 밤새 오열합니다. 시인이 슬플 때마다 듣는다는 이 음악, 알비노니 <아다지오> G단조입니다.

오르간이 나지막히 명상에 잠겨 노래합니다. 바이올린이 우수어린 선율을 위엄있게 연주합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애도하는 것 같습니다. 슬픔을 억누른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 같습니다. 선율이 반복되면 중간 부분입니다. 오르간이 탄식하고, 솔로 바이올린이 고요히 내면을 응시합니다. 열정을 다해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아다지오, 오르간의 은은한 화음이 높이 울리면 바이올린이 회상하듯 청초한 슬픔으로 화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그와 함께 한 따뜻한 기억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슬픔을 슬픔 그대로, 내 삶의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일상은 비루할지 모르지만 삶은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PEzuXJ0rOJM


토마소 지오반니 알비노니(1671~1751)는 베네치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노래와 바이올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교회에 고용되지 않고 음악을 즐겼습니다. ‘딜레탕트’ 예술가였지요. 그는 9권의 기악곡집을 남겼고, 50여 편의 오페라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아다지오>는 엄밀히 말해 알비노니의 작품이 아니라고 합니다. 2차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음악학자 레모 지아조토(1910~1998)가 드레스덴의 색슨 주립도서관에서 알비노니 소나타의 자필 악보 일부를 발견했고, 이를 오르간과 현악합주를 위한 곡으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비노니의 원래 악보에는 통주저음 표시밖에 없었고, 작곡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곡의 정확한 제목은 레모 지아조토 작곡, <알비노니 주제에 의한 아다지오>입니다.

지아조토는 알비노니의 작품 목록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이 <아다지오>의 토대가 된 알비노니의 작품은 1738년 경 작곡된 교회 소나타 Op.4의 일부분일 거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아쉽게도 악보가 없으니 원곡을 들을 방법이 없군요.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고 부르는 이 곡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영화, 드라마, 광고에 수없이 많이 쓰인 이 곡에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이 잔인한 살육으로 치닫던 1992년 5월, 사라예보 거리에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죽은 22명의 무고한 시민을 애도하는 첼로의 선율…. 검은 옷을 입은 연주자는 사라예보 필하모닉의 첼로 주자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ilovic)였습니다.

세르비아 민병대도, 보스니아 저격수도 사격을 멈췄습니다. 공포와 슬픔에 젖어 숨어있던 시민들이 연주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피에 젖은 거리에 잠시나마 평화를 가져온 음악, 바로 알비노니 <아디지오> G단조였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음악은 이렇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알비노니 <아다지오>를 연주하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RV.356 - 귀에 익숙한 ‘환승 협주곡’ 속으로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 선율,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의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입니다. 서울 지하철에서 늘 나오는 곡이죠. 바이올린과 현악합주가 아득한 슬픔과 그리움을 주고 받습니다. 시종일관 우아하고 품위 있습니다. 원래 부제가 없는데, 장난꾸러기 조윤범씨가 ‘환승 협주곡’이라고 별명을 붙였네요. “환승역이나 종점에서 자주 나오는 음악”이기 때문이랍니다(조윤범, <파워 클래식> 2권, p.22).

사라 장의 연주, 멜랑콜릭한 감정 표현이 뛰어나지요? 450곡이 넘는 비발디의 기악곡 대부분은 바이올린 협주곡이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이 곡입니다.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쯤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합니다.

 

 

http://youtu.be/X_csfSEPKjw

 

 

‘빨강머리의 신부’(prete rosso)로 알려진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25살 때 사제 서품을 받고 베네치아의 산 피에타 성당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남녀 사이의 풍기문란이 아주 심했던 모양입니다. 성당에 속한 피에타 자선원은 길에 버려진 사생아들을 수천명 수용하고 있었고, 이들 중 엄선한 40명 안팎의 소녀들이 합주를 했다고 합니다. 비발디의 협주곡을 제일 먼저 연주한 게 바로 이 소녀들이었습니다. 비발디는 이 소녀들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37살 때 정식 악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비발디는 이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음악을 썼다고 합니다.  

 

금남의 집이었던 이 자선원의 음악실에서 늘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다지요. 그런데 이 소녀들은 평소 쇠창살 속에 갇혀서 지냈다는군요. 불우한 이 소녀들 중에는 애꾸도 있고, 천연두로 망가진 얼굴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천사처럼 노래했고, 어떤 악기도 두려움 없이 척척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우아함과 정확성으로 박자를 맞추었다”고 합니다(롤랑 드 캉트 <비발디>, 중앙M&B, 1995, p.19).

이들에게는 음악을 연습하고 연주하러 나가는 시간이야말로 햇살을 보는 해방의 시간이었고, 비발디의 음악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 주는 축복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비발디 음악이 유일한 기쁨과 희망이었으니 아주 열심히 연습했고, 그래서 연주 실력이 출중했던 거겠지요. 이들의 연주를 상상하며 이 협주곡, 3악장을 들어볼까요?

http://youtu.be/GH2Yce4rfgA (3악장 프레스토, 연주 사라 장)

3악장 프레스토(아주 빠르게)는 제가 들어 본 비발디 협주곡 중 가장 뜨겁습니다. 비발디는 피에타 자선원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지로와 오래도록 서로 아끼는 사이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비발디의 마음이 이랬을까요? 단조와 장조,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열정적인 음악입니다.

‘빨강머리 신부님’은 미사보다는 음악에 미쳐 있었군요. 미사 도중에도 신도들 눈에 안 띄게 슬쩍슬쩍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3년 8개월 만에 미사 집전을 그만두게 됩니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종교재판소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미사 집전을 금지시킨 거죠. 비발디는 오히려 “음악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습니다. ‘김재철의 MBC’에서 해고된 뒤 맘껏 음악편지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한 저랑 비슷하군요. 눈 덮인 정릉산방, 비발디 협주곡이 있으니 따뜻합니다.    

◎ 용어
RV : Riom Verzeichnis, 비발디의 작품 목록을 정리한 음악학자 리옴의 이름을 딴 번호.

 

 

 

비발디 ‘사계’ 중 봄 & 여름 - 봄과 여름, 그 계절 그 느낌 그대로…

 

‘봄’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
“드디어 봄이 왔다! 새들은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그러나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잠시 후 하늘은 맑게 개고 새들은 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바이올린과 현악합주로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각 악장마다 비발디 자신이 소네트를 써 넣었는데, 1악장을 들어보면 소네트가 묘사한 대로 즐거운 새들의 노래, 부드러운 산들바람과 시냇물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중간 부분, 천둥과 번개가 몰려오면 새들이 놀라서 날개를 파닥이고 음악은 우수에 잠기지요. 이윽고 파란 하늘이 밝아오면 만물이 다시 흥겹게 노래합니다.

 

 

http://youtu.be/EkWxbharIoA

 

2악장 라르고(느리게)
“예쁜 꽃이 가득 핀 풀밭 위에 나뭇잎과 가지들의 상쾌한 속삼임을 들으며 양치기는 한가로이 잠이 든다. 충실한 개를 옆에 두고.” 나른하고 한가로운 봄날 오후의 풍경이지요. 낮은 현은 목동의 순둥이 개가 무심히 컹컹 짖는 소리입니다. 멀리 아지랑이도 보이는 것 같지요?

3악장 알레그로(빠르게)
“소박한 백파이프의 흥겨운 선율에 맞춰 목동과 요정들은 화사한 봄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춤을 춘다.” 순박한 목동과 요정들이 화사한 봄 햇살 아래에서 둥글게 춤추는 가운데 봄이 무르익습니다.  

<사계>는 새가 노래하는 ‘봄’, 천둥 번개가 치는 ‘여름’, 사냥꾼의 뿔피리가 울려퍼지는 ‘가을’, 이가 덜덜 떨리는 ‘겨울’을 묘사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입니다.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8에 포함된 12곡 중 맨 앞의 네 곡입니다. 비발디는 이 작품을 출판하면서 헌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소네트에 의해 매우 사실적으로, 명확하게 묘사된 작품들입니다. 새로운 작품다운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으로 믿습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소품집 제목도 <사계>지요. 하지만 비발디의 <사계>가 제일 유명합니다. 비발디가 남긴 450여곡의 협주곡들은 바로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전형이 됐고,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랜 세월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다시 빛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협주곡 하나로 400곡 넘게 변주곡만 쓴 사람”이라고 혹평했다지요. 모두 고만고만한 내용과 형식에 길이까지 비슷하다는 지적이지요. 하지만, <사계>에 포함된 네 곡을 들어보면 하나하나 뚜렷한 개성을 지닌 명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사계> 음반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느 젊은 음악 애호가는 “아무리 뛰어난 연주가 나온대도 <사계> 디스크는 더 이상 사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군요. 그 정도로 이미 훌륭한 녹음이 숱하게 나와 있고 지금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p.42~43). 사라 장의 최근 연주, 깔끔하고 맵시있는 표정이 돋보이지요. ‘여름’도 들어볼까요?

‘여름’

여름은 우울한 서정미가 뛰어난 곡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여름-휴가, 해수욕, 계곡-과는 다른 정서지요. 만물이 지쳐 있고, 예기치 못한 찬바람과 소나기에 사람들은 슬퍼집니다. 비발디는 풍요로운 가을을 맞으려면 기나긴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걸까요? 

 

 

http://youtu.be/WQ1T0Io6ZBM

 

 

1악장 알레그로 논 몰토(빠르게, 지나치지 않게)
“불타는 태양의 열기 속에 사람도 가축도 모두 지쳤다. 소나무조차 붉게 시들었다. 뻐꾸기가 노래한다. 산비둘기와 오색방울새도 노래한다. 산들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오지만 갑자기 북쪽에서 찬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내려 목동을 당황케 한다.”

2악장 아다지오(느리게)
“공포와 불안에 목동은 지친다. 번개는 달리고 뇌성은 울린다. 파리와 말벌이 미친듯이 떼지어 날아다닌다.” 3악장 프레스토(급히, 빠르게),“아, 참으로 무서운 뇌성과 벼락이 보리 이삭을 꺾고 곡식을 쓰러뜨린다.”

 

 

비발디 ‘사계’ 중 가을과 겨울 - 바이올린 현으로 느끼는 계절의 신비로움 

 

이런 비발디를 비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법률가이자 극작가였던 카를로 골도니(1707~1793)는 “비발디는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 사제로서는 빵점”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비발디는 “골도니는 험담가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 법률가로는 빵점”이라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재치있는 댓거리죠? 아무튼, 누구도 비발디의 바이올린 실력을 부정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계> ‘가을’을 바이올린 독주자에게 꽤 어려운 곡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매우 근사한 선율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가을 풍경과 비발디의 멋진 연주를 상상하며 ‘가을’을 들어볼까요?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풍년을 축하하고, 술의 신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맘껏 들이킨다. 그들은 기쁨으로 잠에 빠져든다” 첫 주제는 풍요로운 가을을 맘껏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링크 1:04 지점은 유쾌하고 익살스럽지요. 2:27 부분이 가장 멋집니다. 애수어린 달콤한 멜로디로 시작하여, 곧 명랑한 미소를 되찾습니다. 바이올린 솔로가 아주 운치 있지요?

2악장 아다지오(느리게)
“축제 뒤에 흐르는 평화로운 적막,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멈추었다. 이 가을은 만물을 달콤하기 그지없는 잠의 즐거움으로 초대한다” 꿈꾸는 듯 평온하게 노래합니다. 비틀즈의 노래 ‘왜냐면’(Because)처럼 달콤한 환상을 머금은 채 조용히 흐르는 음악입니다.

3악장 알레그로(빠르게)
“새벽이 밝아오면 사냥꾼들은 뿔피리와 총을 매고 개와 함께 길을 나선다. 잠에서 깨어난 숲속의 동물들은 놀라 도망가고 사냥꾼의 추적은 시작된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놀란 동물들은 두려움에 떤다. 총에 맞아 상처가 나서 도망치지만 불쌍한 동물들은 결국 쓰러져 죽는다” 사냥의 리듬에 가을의 풍성한 정취를 가득 담은 멋진 곡입니다.


 

http://youtu.be/hBT31dFvVZA (가을)


 

단풍 물든 늦가을의 공원, 낙엽 한 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코끝으로 느끼는 듯한 그윽한 정취가 가득합니다. 비발디의 ‘가을’은 PD로서 각별한 추억이 있습니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취재했을 때,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에 ‘가을’ 1악장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기억이 납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또 추운 겨울이 오겠지요?

‘겨울’

1악장 알레그로 논 몰토(빠르게, 지나치지 않게)
“잔인한 바람의 매서운 입김 아래, 소름끼치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끊임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너무 추워 이를 부딪친다” 현의 꾸밈음, 트릴, 트레몰로는 추워서 덜덜 떠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바이올린 솔로는 고통에 못 이겨 절규합니다.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많이 나오는데, 이 또한 고통스런 느낌입니다. 2:15 지점에서 바이올린 솔로가 목을 길게 빼고 따스한 햇살이 어디 있을까 사방을 둘러봅니다. 하지만 곧 불협화음의 트레몰로가 햇살을 삼켜버립니다. 2:25 지점, “으으, 손 시려” 하며 움츠러듭니다. 


 

http://youtu.be/sRgaBqD2tmw

 

2악장 라르고 에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
“밖에는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따뜻한 난롯가에서 둘러앉아 즐거웠던 나날들을 떠올린다.”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선율이 참 따뜻합니다. 모든 파트가 피치카토로 반주하는데, 이건 창 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되고, 화로 속 나무가 불타는 소리라 해도 좋습니다. 아늑한 난롯가 풍경입니다. 멜로디가 쉽고 단순해서 휘파람으로 불기 안성마춤입니다.

3악장 알레그로(빠르게)
“넘어질까 두려워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음 위를 걷는다. 힘차게 한번 걸었더니 미끄러져 넘어지고, 다시 얼음 위로 뛰어가 보지만 이번엔 얼음이 깨지고 무너진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바람들이 전쟁을 하듯 돌진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겨울이고, 또한 겨울이 주는 즐거움 아닌가”

어느 대목에서 얼음 위를 살살 걷는지, 미끄러져 넘어지는지, 얼음이 깨지고 무너지는지 상상하며 들어볼까요? 5:47 지점에서 겨울에 대한 상념에 잠깁니다. 6:21부터 꽁꽁 얼어붙은 길을 걷기 시작하고, 7:00부터 찬바람에 몸과 마음이 아파 옵니다. 7:50부터 클로징입니다. 춥고 힘들지만 그래도 겨울은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혹독한 겨울이지만 음악이 있고 친구가 있으니 견딜 만 하다고, 비발디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 용어
-피치카토(pizzicato) : 현악기를 활로 연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주법.
-트레몰로(tremolo) : ‘떤다’는 뜻. 현악기에서 한 음을 급속히 반복해서 연주, 떠는 듯한 효과를 내는 기법.



비발디 만돌린 협주곡 C장조 RV.425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

 

금속으로 된 8개의 현을 ‘쥐어뜯어서’ 소리 내는 만돌린…. 하프처럼 요염하거나 우아하지도 않고, 기타처럼 화음이 깊이 있게 울리지도 않아요. 솔직히 말해, 아마추어든 전문 음악가든 좀 우습게 여기는 악기지요. 비발디는 이 악기를 위해 아주 근사한 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만돌린 특유의 스타카토 주법을 잘 활용, 경쾌하고 싱그러운 음악을 만든 것이지요.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는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나온 영화 <크레머 대 크레머>(1979)에 삽입되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만돌린 소리가 현악 반주와 어우러져 달콤하게 마음을 파고 듭니다. 이 곡 덕분에 완성도가 높아진 영화는, 1980년 아카데미상에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제치고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 여우 조연상, 각색상을 휩쓸었습니다.

 

 

http://youtu.be/-utT-BD0obk 

 
영화 제작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지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 공원 한 모퉁이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이 곡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감독 로버트 벤튼은 이 곡이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 즉시 주제음악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거리의 악사들을 현장에서 섭외하여 영화에 출연시켰습니다.


이 곡은 영화가 히트한 뒤 일기예보 시그널, 게임기 광고음악으로 쓰이면서 더욱 친숙해졌습니다. 2악장 라르고(느리고 장중하게)에서는 현악 합주가 피치카토로 반주하고 만돌린이 내면의 독백을 속삭입니다. 이윽고 현의 화음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만돌린과 합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1악장과 대조되는 차분하고 명상적인 음악으로, 기교를 과시하지 않으면서 세련된 품위를 유지합니다. 3악장 알레그로(빠르게), 네 개의 단순한 음표로 이뤄진 주제가 빠르게 펼쳐지면서 맑고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거리의 악사를 우습게 보면 안 되지요. 돈 없고 무식하다고 사람을 멸시하면 큰 코 다치지요. 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변두리에 있던 악기 만돌린이 비발디의 손으로 주인공이 되어 한껏 매력을 뽐냅니다. 이 악기는 그 뒤 모차르트의 <돈조반니>, 베르디의 <오텔로>, 말러의 교향곡 7번에 다시 등장합니다. 아주 가끔 자태를 드러내지만, 그때마다 매력적인 소리로 듣는 이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걸 비발디의 만돌린 협주곡이 다시 일깨워주네요.

◎ 용어
스타카토(staccato) : 음표를 똑똑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 음표를 부드럽게 연결해서 연주하는 레가토(legato)와 대비된다.

 

 

비발디 플루트 협주곡 D장조 <홍방울새> RV.428

상쾌한 ‘아침의 음악’속으로

 

아침에 창문을 활짝 열면 예쁜 새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웁니다. 상쾌한 마음으로 청소를 합니다. 즐거운 새의 노래, 비발디(1678~1741)의 플루트 협주곡 3번 <홍방울새>(Il Gardellino)입니다. 하하, 사실은 집에 정원도 없고 아직 청소도 하지 않았어요. 아직 추운 겨울, 몸과 마음을 웅크리기 쉬운 요즘입니다. 하지만 순수하고 매혹적인 이 협주곡을 들으면 마음이 밝아지고 몸도 덩달아 기지개를 켭니다.  

플루트를 생각하면 새의 노래가 떠오르는 게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베토벤도 <전원> 교향곡에서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묘사할 때 클라리넷과 함께 플루트를 썼지요. 비발디의 이 협주곡은 클래식 음악에서 새소리의 ‘원조’ 격입니다. 1악장 알레그로(빠르게), 경쾌하게 상승하는 플루트가 작은 새의 날개짓 같습니다. 플루트 솔로가 카덴차처럼 혼자 노래하고 화려한 트릴을 펼칠 때 예쁜 새가 뛰노는 듯 합니다.

 

 

http://youtu.be/h0b8iwaG2Mc

 

2악장 칸타빌레(노래하듯) 6/8박자, 시칠리아 무곡 풍의 정답고 평화로운 노래입니다. 뛰어놀던 새가 잠시 나뭇가지에 앉아 졸고 있군요. 3악장 알레그로(빠르게), 새 소리를 변형한 트릴의 재미있는 모티브가 되풀이 나옵니다. 어린 아기새를 거느린 어미새들의 바쁜 날개짓인 듯 하군요. 서로 마주보며 지저귀는 즐거운 새 가족입니다.

<홍방울새>는 베네치아 피에타 자선원의 소녀들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초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72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6곡의 플루트 협주곡 Op.10 중 세 번째 곡입니다. 첫 곡은 <바다의 폭풍>, 둘째 곡은 <밤>이란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폭풍 치던 어제 오후, 그리고 기나긴 밤, 이윽고 이어지는 <홍방울새>의 노래…. 상쾌한 아침의 음악입니다.

◎ 용어
카텐차(Cadenza) : 협주곡 악장의 끝부분에서 독주 악기가 혼자 기량을 맘껏 발휘하는 대목.
트릴(trill) : 떤꾸밈음. 두 개 이상의 음을 계속 되풀이 떨게 하는 연주 기법.

 

 

비발디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RV.630 

우리네 삶은 ‘번민과 고뇌’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고통에서 자유로운 평화,
순결하고 진실된 평화는
달콤한 예수, 그대 안에 있을 뿐.
번민과 고뇌 속에 살아가는 영혼이여,
순결한 사랑의 희망으로 만족하라.


비발디(1678~1741)의 모테트 E장조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는 죄악으로 가득한 불완전한 세상, 오직 예수만 평화를 줄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네 삶은 ‘번민과 고뇌’의 연속입니다. 춥고 어두운 요즘, 우리에게 ‘사랑의 희망’을 주고, ‘순결한 평화’를 주는 것은 예수라기보다는 바로 이 음악입니다. 작자 미상의 이 가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발디의 음악은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위로합니다. “세상에 참 평화가 없다”고 탄식하는 노래에서 잠시 평화를 맛볼 수 있다는 것, 참 역설적이지요? 영혼을 위로하는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우리의 시름을 덜어줍니다.


 

http://youtu.be/rMrcCT8wruo   영혼을 위로하는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


비발디는 주로 협주곡을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100편 가까운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비롯, 수많은 성악곡을 남겼습니다. 비발디는 카톨릭 사제로서 독창과 합창이 등장하는 미사곡을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스런 사랑만 고집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오페라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19편은 세속적 사랑을 그린 작품들입니다. 그의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을 대비시켜 수록한 ‘성스런 사랑 & 세속적 사랑’(Amor Sacro & Amor Profano)이란 음반도 나왔습니다(도이치 그라모폰). 비발디는 하나의 틀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큰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를 굳이 종교적인 태도로 들을 필요는 없겠지요. 소프라노 독창, 두 바이올린, 비올라와 통주저음을 위한 이 작품은 비발디의 성악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꼽힙니다. 영화 <샤인>(1996)에서 주인공 데이빗 헬프갓이 허공을 가르며 뛰어오르는 장면에서 이 곡이 나오지요. 천재 피아니스트는 가족과 결별한 채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그의 갈등과 고뇌가 심해지는 대목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이 나옵니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를 씻고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대단원에서는 비발디의 이 곡이 울려 퍼집니다. 주인공 헬프갓이 비로소 얻어낸 마음의 평화, 영상보다 음악이 더 설득력 있게 묘사해 줍니다.    

◎ 용어
- 모테트(motet) : 카톨릭 문헌을 가사로 사용한 성가곡. 어원은 ‘말씀’이란 뜻.  
- 레시타티보(recitativo) : 오페라나 칸타타에서 노래가 아닌 간략한 선율로 대사를 읊는 대목.
- 아리아(aria) :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 극음악에 나오는 완결된 노래. 레시타티보로 전개되던 극이 음악적 돌파구를 찾아서 나오면 아리아가 되는 것이다. 아리아가 나올 동안 극의 전개는 일시 중지된다.  
- 통주저음(basso continuo) : 바로크 합주곡의 기초를 담당하는 저음 파트. 쳄발로와 첼로, 또는 오르간과 첼로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 -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고결한 분이여!
 어린 저의 간청을 들어 주소서,
 거칠고 험한 이 바위에서
 제 기도가 당신께 이르기를!
 잔인하게 모욕당하고 쫓겨났지만,
 아침까지 저희가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마리아여, 저희를 보살펴 주소서.
 성모여, 어린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딸아이가 이제 다 컸습니다. 비싼 등록금, 자기가 마련해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닙니다. 안쓰러워하는 제게 활달히 웃어 보이며 “아빠나 건강 잘 챙기세요” 한 마디 툭 던지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가슴이 울컥합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어린 딸이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노래입니다.

 

 

http://youtu.be/l5cF5GGqVWo

 

슈베르트는 월터 스코트의 서사시 <호수 위의 여인>을 가사로 7곡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이 중 6번째 곡입니다. 원래 제목은 ‘엘렌의 노래’이었는데,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내용 때문에 자연스레 <아베 마리아>로 불리게 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추방된 처녀 엘렌이 호숫가 바위 위의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아버지에게 평화로운 잠을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하프 소리 같은 피아노 반주는 고요한 호수의 물결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음악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서사시의 향취가 어려 있는 문학적인 곡입니다. 슈베르트가 1825년 4월 작곡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슈베르트 자신도 즐겨 연주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빌헬미(1845~1908)가 편곡한 바이올린 독주곡으로도 널리 연주됩니다.  
 
2006년, 소프라노 조수미는 파리 독창회에서 이 곡을 절절하게 불렀습니다. 노래에 몰입한 조수미는, 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이내 고개를 숙였습니다. 서울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열릴 무렵이었던 거죠. 조수미는 노래를 마친 뒤 결국 눈물을 흘렸고, 청중들은 2분간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아베 마리아,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라는 가사와 선율이 아버지에게 가 닿기를 조수미는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노래가 2절, 3절로 이어집니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가사를 음미하며 들으면 고즈넉한 호반의 풍경과 어린 소녀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릅니다. 딸아이가 훗날 아버지를 생각하며 ‘선한 눈매, 선한 웃음, 선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죄 많은 아버지, 남은 기간이라도 딸아이를 잘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베 마리아, 티없는 분이여!
  우리가 이 바위에 쓰러지더라도
  잠들 때까지 당신이 지켜 주시면
  이 험한 바위도 부드러워 집니다.
  당신의 성스런 위로가 우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를 위해 간청하는 저를 향해
  당신의 친절한 눈빛이 내리기를,
  아베 마리아!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이 통하는 선율 -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은총이 가득하신 복된 그대여,
 여자들 중 오직 당신 홀로 예수의 어머니가 되셨네.
 성모 마리아여, 더렵혀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살아 있는 이 날도, 죽을 때에도…. 아멘.

          
프랑스의 작곡가 샤를르 구노(1818~1893)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첫 곡인 C장조 프렐류드를 들으며 성모 마리아의 고결한 영혼을 떠올렸고, 바흐의 원곡에 새로운 선율을 얹어서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습니다. 바흐의 원곡은 피아노 반주가 됐고, 구노의 선율은 노래가 된 거죠. 그래서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아베 마리아’는 성서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고지를 하면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경건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꼭 종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가수 조영남은 <아베 마리아>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찬양하는 노래”라고 했습니다.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은 통하는 거니까요. “신(神)이 모든 곳에 올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보낸 것”이란 말도 있지요.

 

 

http://youtu.be/N6jtO5-Q0YY

 

이 곡이 우리나라와 관계가 있다는 흥미있는 스토리가 전해집니다. 구노는 파리 외방선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했는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동창생 앙베르 주교가 선교를 위해 ‘죽음의 땅’ 조선에 갔다는 것입니다. 구노는 늘 친구의 안전을 염려했는데, 어느 날 기어이 그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참을 수 없었던 구노가 친구를 애도하며 만든 곡이 바로 <아베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1852년 어느날 밤, 구노는 친구들과 음악을 즐기다가 바흐의 프렐류드를 연주하던 도중에 이 곡을 즉흥적으로 작곡했습니다. 로잘리라는 여성을 짝사랑한 구노는 이 곡에 라마르틴느의 시를 붙여서 그녀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이 악보를 본 로잘리의 어머니는 바흐의 곡에 연애시를 붙인 건 어울리지 않으니 ‘아베 마리아’로 하면 어떻겠냐고 슬쩍 권했습니다.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이렇게 탄생했으며, 조선에서 순교한 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는 이 곡이 아니라 ‘카톨릭 성가 284번’이라는 것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beautiful-sori)

탄생 배경이 어떠하든,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잔잔히 위로해 줍니다. 바흐의 순수 기악곡에 종교 색칠을 해 버린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평균율 C장조에서 ‘간절함’을 읽어낸 구노의 마음이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20세기 최고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입니다.

 

 

‘다수(多數)가 범하는 오류’속에도 진실은 살아 있어 - 바빌로프 ‘아베 마리아’

 

“당신은 기도하기 위해 혼자가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말, 기독교도가 아닌 제가 봐도 공감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축재하는 게 말이 되나요? 도대체 뭘 ‘소망’하는 건가요? 겸손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참된 기도는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겠다는 작은 염원의 기도,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알려진 곡입니다.

슬픔에 잠겨 조용히 노래합니다. 홀로 기도하며 마리아의 상처를 아파하는 진실된 인간의 마음입니다. 기도가 진행될 때 감정이 고조될 법 하지만, 결코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한 모금의 슬픔을 삼키며 고요히 끝마칩니다. 간절한 기도 끝에 모든 고통과 슬픔을 뛰어넘어 도달한 숭고함입니다. 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베 마리아’입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마리아의 슬픔, 더 이상 어떤 가사가 필요할까요? 1995년 이네사 갈란테의 앨범 <데뷔>에 실린 뒤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이 노래, 듣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어 적셔주는 이네사의 표현력이 일품입니다.

 

 

http://youtu.be/QvEQ8pw84mg       바빌로프의 <아베 마리아>가 ‘작자 미상’으로 수록된 멜로디아 음반(1970).

 

 

로마 출신인 줄리오 카치니(1546~1618)는 18세 때 피렌체 메디치가의 궁정가수로 초빙된 뛰어난 성악가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로운 창법에 매료됐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오페라 운동의 중심이었던 ‘카메라타’ 회원으로서 <에우리디체>(1600)를 작곡, 몬테베르디와 함께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남깁니다. ‘400년 전에 나온 곡’이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다니, 참 놀랍지요?

그러나 이 노래는 카치니의 작품이 아니라, 소련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1925~1973)가 1970년에 만든 곡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음대를 졸업한 뒤 류트와 기타를 연주하며 작곡도 하던 음악가로, 당시 소련에서 싹트기 시작한 고음악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자기 작품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 이름으로 발표하곤 했습니다. 옛 거장들의 업적을 숭배한 나머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랬다는군요. 무명 작곡가의 작품이라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겠지요. 그는 이 작품을 ‘작자 미상’이라고 발표했는데, 얼마 뒤 그가 죽자 동료 한명이 ‘카치니의 곡’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오류가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소련에서 나온 바빌로프의 <아베 마리아>, 슈베르트와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달리 E단조로 된 슬프고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세 사람의 곡을 ‘3대 <아베 마리아>’라 불러도 좋겠군요. 바빌로프가 이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어도 이렇게 히트했을까요? 모를 일이지요. 한 명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세상, 많은 걸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황당한 세상, 세상 사람들은 어찌됐든 유명한 사람만 따라다니는 경향이 있으니 카치니의 이름을 빌어서 쓴 바빌로프의 전략이 지혜로웠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가난뱅이들이 부자에게 또 몰표를 주었군요. ‘다수(多數)가 범하는 오류’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실제 작곡자가 바빌로프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 곡을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고 부를 것 같습니다. 48살 한창 나이에 가난 속에서 죽어 간 바빌로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집니다. 세상은 카치니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이 곡을 듣는 저는 바빌로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중 전주곡 C장조 

 

제목이 어렵지요? 하하, 겁먹지 말고 그냥 들어보셔요. 아주 쉬운 음악입니다. 피아노 소리가 아주 맑지요? 한 마디에 음표 8개씩, ♬도미솔도미솔도미, 도레라레파라레파~♪ 일렁이는 파도처럼 펼쳐집니다. 이 음표들은 아름다운 분산화음을 만들면서 굽이굽이 흘러갑니다. 바닷속에 잠시 잠겼다가 파란 하늘을 향해 치솟기도 합니다. 구름 위에서 찬란한 햇살을 만난 뒤 조용히 끝납니다. 고작 2분 동안의 짧은 시간에 8개의 음표를 변화무쌍하게 활용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바흐의 천재성이 놀랍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중 첫 곡입니다. 바흐는 1720년 첫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고 난 뒤 일에서 위안을 찾았는데, 그 일은 주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행이 닥쳐올 때마다 본능적으로 일을 통해 마음의 평정과 균형을 유지하곤 했지요. 그 결과로 건반 음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이 태어난 셈입니다. 하지만, 너무 엄숙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http://youtu.be/0KQW2YnCUrE

 

바흐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유용하게 쓰도록, 나아가 이미 피아노에 숙달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안이 되라고 이 곡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첫 곡은 아주 쉬워서, 저처럼 피아노를 못 배운 사람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제1집은 바흐가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한 이듬해인 1722년 완성됐습니다. 건반 악기 연주 가능성의 한계에 도전하여 바흐 건반 음악의 정점이 된 이 작품은 당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잘 연습한 사람은 그로부터 얼마든지 혼자서 공부해 나갈 수 있다고 하지요.

 

바흐는 20년 뒤, 라이프치히에서 똑같은 원칙에 따라 24곡의 새로운 전주곡과 푸가를 쓰게 되는데, 이것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입니다. 19세기의 명지휘자 한스 폰 뷔로는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신약’, 바흐의 이 작품집을 ‘구약’이라고 불렀지요.

‘평균율’이란 말이 좀 어렵네요. 낮은 C에서 높은 C까지를 한 옥타브라 하고, 한 옥타브를 12등분하면 정확히 반음으로 쪼개집니다. C, C#, D, Eb, E, F, F#, G, Ab, A, Bb, B, C 이렇게 나눠지지요. 각 음을 기본음으로 하면 12개의 장조(長調)와 12개의 단조(短調), 도합 24개의 조성이 생깁니다. 우리가 C장조, F#단조 등등으로 부르는 조성이 이렇게 나온 것이지요. 바흐는 24개의 조성에 한 곡씩, 모두 24곡의 전주곡과 푸가를 만들어서 한권으로 묶었습니다. 이게 바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인데, 2권으로 되어 있으니 도합 48곡의 전주곡과 푸가입니다.

베토벤은 바흐(Bach)의 이 곡을 접하고 “이건 시냇물(Bach)이 아니라 바다야!”라고 찬탄했습니다. 쇼팽은 이 곡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제자를 가르칠 때 최고의 교본으로 활용했습니다. 한 음악학자가 말했다지요. “만약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만 남는다면 재건할 수 있다.” (신동헌, <재미있는 음악사 이야기>, 서울미디어, p.152).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곡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미 피아노에 숙달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안이 되라고” 작곡한 음악, 그냥 평화롭게 감상하셔도 좋겠습니다. 비평가 후고 리만은 C장조의 첫 곡을 가리켜 ‘올림피아의 맑고 평온함’이라 했습니다. 위대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곡이지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 2권 (피아노 :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http://youtu.be/Ej5rGGTHy54

◎용어
-샵(#), 플랫(b) : 음표 앞에 샵(#)이 붙으면 반음 올려서, 플랫(b)이 붙으면 반음 내려서 연주하라는 뜻. 따라서 C#=Db, D#=Eb, F#=Gb, G#=Ab, A#=Bb이 된다.
-푸가(fuga, fugue) : 하나의 주제를 여러 파트가 모방하고 따라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음악 양식. 14세기 교회음악에서 태동, 바흐의 손에서 활짝 꽃피었다. 바흐는 <푸가의 기법>이란 작품도 썼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등 위대한 작곡가들이 바흐의 푸가를 공부하여 자신의 음악을 풍요롭게 했다.  
-평균율과 순정률 : 평균율은 한 옥타브를 12등분하여 정확히 반음 간격의 음정만 사용한다. 따라서 그 사이의 애매한 음들은 오류로 간주한다. 그러나 순정률은 두 음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음정이 있음을 인정하고, 실제 음악에서 활용한다. 한국 전통 음악은 순정률을 운치있게 활용하여 흥을 돋운다. 서양음악에서도 글리산도 주법(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어서 연주하는 기법)을 쓸 때는 순정율을 인정하는 셈이다.  
  

 

 

오늘 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바흐 메뉴엣 G장조,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에서

 

바흐 음악 중 가장 단순하고 귀여운 곡, 한석규와 전도연이 나온 영화 <접속>(1997)으로 우리나라에서 한때 크게 유행했고 세계 각국에서 팝송으로 즐겨 부르는 멜로디, 바흐의 메뉴엣 G장조입니다.

“그 분의 집은 마치 비둘기집 같았고, 생기 넘치는 것도 완전히 비둘기집 자체였습니다.”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전기 작가 포르켈에서 쓴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바흐의 가족애는 대단했고, 그의 가정은 따뜻한 애정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부모를 잃었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바흐가 9살 때, 아버지 암브로지우스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바흐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에게 의지해서 음악을 공부하며 성장했습니다. 외로운 그에게 음악은 자연스레 평생의 벗이 되었을 거고, 훗날 인생의 반려가 된 아내에 대한 사랑도 극진했을 것입니다. 바흐는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다 행복했습니다.
 
“그의 두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안나 막달레나는 모두 그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한 개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발휘할 때 비로소 샘솟을 수 있는 심오한 행복을 그에게 준 것이다. 바흐 역시 두 부인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사랑과 부성애를 주었다. 그는 남편과 가장으로서 행복했으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바흐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욕구불만, 적응력 결핍, 자기애적 보상, 정신적 미성숙, 그리고 고독의 위기를 배회하는 이른바 ‘독신형’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기분 언짢을 때 진정시키기 위해서 아내가 늘 필요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내를 두지 않는 '가짜 남편'도 아니었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김원명 옮김, 경성대 출판부, P.37)
 

 

http://youtu.be/kCnpGQGO49o

 

 

바흐는 18살 때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했는데, 당시 여성의 출입을 금하는 성가대석에서 바흐의 반주에 맞춰 당당히 노래를 부른 젊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흐와 6촌 사이(할아버지의 동생의 손녀), 위대한 음악 가문의 일원답게 노래를 아주 잘 했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는 1707년 그녀와 결혼하여 5남 2녀를 낳았습니다. 그 중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아버지 바흐를 계승한 뛰어난 음악가가 됐죠. 불행히도 마리아 바르바라는 일찍 바흐 곁을 떠났습니다.

행복했던 쾨텐 시절, 레오폴트 후작이 칼스바트로 휴양을 떠날 때면 악장 바흐와 악사들도 동행하곤 했습니다. 1720년 5월부터 7월까지 레오폴트를 수행하여 칼스바트에 다녀온 바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탄에 빠진 네 명의 자식뿐이었습니다. 바흐는 집 문턱을 넘어서야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달 전 출발할 때 건강하고 생기 있던 아내가 죽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장례도 이미 끝난 뒤였다니 바흐의 슬픔은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흐는 고통 속에서 계속 허우적댈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남은 인생을 살아야 했던 그는 이듬해 12월, 궁정의 젊은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 뷔르켄과 재혼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음악을 잘 이해할 음악적 소양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프라노였는데, 마음씨도 목소리처럼 고왔던 모양이지요? 그녀는 생모를 잃은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알았던 그녀는, 예쁜 패랭이꽃을 잘 손질해서 새 가정을 아늑하게 단장했습니다. 바흐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가족음악회도 열 수 있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이고 있으며, 지금은 가족이 하나 되어 성악과 기악이 등장하는 음악회를 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아내는 아주 아름다운 소프라노이고, 장녀*도 노래를 꽤 잘 합니다.” (친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 1730. 10. 28)
 
안나 막달레나는 13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거의 언제나 임신 상태였군요. 하지만, 그것을 괴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막내 요한 크리스찬(1735~1782)은 훗날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여 ‘밀라노의 바흐’, ‘런던의 바흐’로 불렸고, 9살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요.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첫 아들 고트프리트 하인리히는 음악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음악적 재능이 특출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그를 ‘천재’라고 불렀고, 바흐는 이 아이가 자기와 대등한, 아니 자기를 능가하는 음악가가 되리라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아이는 정신박약아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넘치는 재능을 어린 두뇌로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요?

안나 막달레나는 사보 솜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받아 적은 바흐의 악보는 남편 것과 구별할 수 없어서 후세의 바흐 연구자들에게 혼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바흐는 사랑하는 아내 막달레나에게 두 권의 작품집을 증정했는데, 1725년 완성된 제2집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으로 전해집니다. 바흐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엿보게 해 주는 45개의 소품들로, 아내 막달레나가 적어 넣은 것도 있고 차남 필립 엠마누엘의 곡도 있습니다. 바흐 일가가 긴 세월 동안 함께 만들어 간 음악수첩이라고 할까요? 이 소곡집에는 바흐가 아내를 위해 직접 쓴 가곡도 한 곡 들어 있었습니다.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 난 죽음에 이르러 안식을 찾을 때까지 / 기쁘게 살 것이네. / 오, 나의 마지막은 얼마나 즐거울까 / 그대의 아름다운 두 손이 / 내 충실한 눈을 감겨 준다면!”

유명한 ‘메뉴엣’ G장조는 이 소곡집에 4번째로 써 넣은 곡입니다. 아주 단순해서 금세 흥얼거리게 되는 이 곡, 어린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유쾌함이 넘치네요. 바흐는 음악 때문에 늘 바빴지만, 이 소곡집을 보면 가정의 행복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을 수없이 작곡한 바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따뜻한 가정을 꾸리며 음악에 재능 있는 자식들을 많이 만든 것도 꽤 흐뭇했나 봅니다.

G장조의 메뉴엣은 음악이 끊이지 않았던 그 시절 바흐의 집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것 같습니다. 넓은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거실, 아내가 노래하고 크고 작은 아이들이 클라비어를 연주합니다. 떠들썩하게 웃으며 서로 묻고 답하는 바흐 가족의 평화로운 한 때가 펼쳐집니다. 오늘 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 곡을 들어보시면 참 좋지 않을까요?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1708~1774)는 노래를 아주 잘 했다고 한다. 새엄마 안나 막달레나와 나이 차이가 7살밖에 안 됐지만 원만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연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연습한 노력의 결과물

바흐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

 

코미디 프로그램에 가끔 나오던 음악이죠? 출연자가 파국에 빠지면 운명의 팡파레처럼 울려 퍼지는 선율,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입니다. 하지만 이 곡은 결코 코미디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습니다. 바흐에게 이런 정열적인 면이 있었던가, 깜짝 놀라게 하는 음악입니다. 그러나 음표 하나하나는 모두 완벽하고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즉흥적인 연주가 자유분방하게 펼쳐지지만, 음표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거의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두 발은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페달 위를 날아다녔다. 천둥이 치는 듯한 힘찬 음향이 교회에 울려 퍼졌다.”

바흐의 오르간 연주를 듣는 이들은 그의 즉흥적인 페달 테크닉에 놀라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오르간을 연주할 때 엄지손가락을 본격적으로 사용,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합니다. 바흐는 18살 때부터 약 4년간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는데, 이 때 만든 곡입니다. 이 시절, 바흐는 이미 오르간의 거장이었지만 혈기왕성한 젊은이기도 했습니다. 시원찮은 오르간 연주자에게 가발을 벗어 던지며 “차라리 구두 수선공이 되는 게 낫겠다”고 소리 질렀다지요? 성의없이 연주하는 파곳 연주자를 모욕했다가 칼을 뽑아들고 싸운 일도 있었답니다. 
 

 

http://youtu.be/P9AS0Hpud18 (헬무트 발하* 연주)

 


분방한 충동과 상상력은 젊은이들에게 잘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거의 공격적인 시위라 할 수 있는 이 열정은 분명 젊은이의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바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젊은 힘과 억센 개성이 넘치는 곡입니다. 다행히도, 이 열정 때문에 당시의 가장 엄격한 ‘형식’은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분석도 가능치 않은, 대담한 음향이 넘쳐납니다. 격렬한 토카타에 이어 02:42부터 장대한 푸가입니다.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에 대해 “태고의 침묵, 온통 주위가 캄캄한데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나온다. 눈먼 미물을 심연에서 건져 올려 공간을 만들어 주고, 눈부신 빛으로 밤을 몰아낸다”고 썼습니다.

천재는 타고 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물음입니다. 둘 다 맞겠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취욕, 그리고 재능은 타고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재는 무한히 배우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천재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과거의 유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 자기의 고유한 개성을 덧붙여 불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요. 바흐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흐는 10살 때 고아가 된 뒤, 오르트루프에 있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에 의지해 살게 됩니다. 큰형은 어린 바흐에게 오르간과 클라비어를 가르쳐 주었지요. 바흐는 악보란 악보는 모두 뒤졌고 악기란 악기는 모두 다 배우려 했습니다. 당시 큰형은 스승 파헬벨을 비롯, 프로베르거와 케를 등 옛 오르간 거장들의 귀한 악보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보물들을 책장 안에 잠궈 두고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바흐는 그 악보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동생이 공부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어느 날 밤, 바흐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 책장의 격자문 사이로 손을 넣어 악보를 둘둘 말아 꺼냈습니다. 그는 이 악보를 달빛 아래서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짜릿한 순간이었을까요? 어린 바흐는 기쁘고 설레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6달이 걸려 필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그만 큰형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형은 동생이 힘겹게 옮겨 적은 악보를 모두 빼앗았고, 끝까지 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흐가 이때 눈이 나빠져서 결국 만년에 실명하게 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른슈타트 시절 바흐가 사용한 오르간.

 

바흐는 20살 되던 해, 아른슈타트에서 뤼벡까지 400Km를 걸어서 오르간의 거장 북스테후데(1637~1707)를 만나러 간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북스테후데의 유명한 ‘아벤트무직’을 들었고, 그의 오르간 작곡 기법을 완전히 익혔습니다. 북스테후데는 바흐가 자기 딸인 안나 마가레타와 결혼하면 마리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했다지요. 그 때문에 사랑하던 마리아 바르바라가 떠올랐던 걸까요? 바흐는 한달 휴가 내고 떠난 아른슈타트로 석달만에 돌아옵니다. 아른슈타트 시의회 사람들은 펄펄 뛰며 바흐를 나무랐지요. 바흐는 배움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이러한 배움의 열정은 평생 식지 않았습니다. 바흐가 20대 초반에 작곡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는 이러한 끊임없는 배움의 결과였습니다.  

“저는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처럼 노력하면 누구라도 이만큼은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르켈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p.115) 누군가 자신의 경이로운 연주 기량을 찬탄하면 바흐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지요. “더 이상 연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고 말한 모차르트와 똑같군요.

바흐는 오르간 감식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르간을 시험할 때면 먼저 “기계가 좋은 폐를 갖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 했다는군요. 건강한 오르간의 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바흐의 열정적인 숨결을 느끼게 해 주는 곡입니다. 파국적 사랑을 그린 영화 <페드라>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고, 대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관현악으로 편곡해서 연주,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http://youtu.be/ax9C29_Gcms

 

* 헬무트 발하(Helmuth Walcha, 1907~1991)


바흐가 생애 후반을 보낸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았던 그는 16살 때 천연두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완전히 시각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 바흐가 칸토르로 있었던 성토마스 교회의 악장 귄터 라민에게 배웠다. 22살 때 프랑크푸르트의 프리덴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평생 일했다. 바흐와의 뗄 수 없는 인연을 자각한 듯 그는 바흐 오르간 음악 전곡을 두 번 녹음했고, 바흐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인 <푸가의 기법>을 직접 완성하여 두 번째 전집에 수록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가 연주한 바흐를 제일 좋아했지만, 그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슬픔과 벅찬 감동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바흐 음악에 대한 열정과 무한히 배우는 능력, 그리고 바흐의 정신을 꿰뚫어 보는 내면의 눈이 있었기에 그는 장애를 넘어 위대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 토카타 (toccata) : ‘닿다’, ‘접촉하다’란 뜻의 토카레(toccare)에서 유래한 말로, 북부 독일의 북스테후데(1637~1707)가 개발한 악곡 형식. 건반악기의 즉흥연주를 발전시킨 것으로, 풍부한 화음과 빠른 패시지로 격렬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정답게 대화하며 웃음꽃 피우는 선율 

바흐 무제트 D장조,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에서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친 바흐…. 음악에 대한 책은 물론, 친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을 빼면 이렇다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저술(?)은 1735년에 쓴 ‘바흐 가문의 계보’ 정도입니다. 고조할아버지 파이트 바흐에서 자기 자신을 거쳐 아들들까지 6대에 걸친 53명의 약력을 정리해 놓은 가족 약사(略史)입니다. ‘바흐’(Bach)는 독일말로 ‘시냇물’이란 뜻인데, 당시 동유럽에서는 여러 지역을 돌면서 음악 공연을 하는 ‘순회 음악가’란 뜻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조할아버지 파이트 바흐(Veit Bach)는 1545년 경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을 떠나 독일로 이주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동유럽은 영주의 신앙에 따라 천주교 지역과 개신교 지역이 나뉘어졌는데, 파이트 바흐는 개신교를 찾아 루터의 고향 근처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방앗간에서 밀을 빻으며 틈틈이 치터를 연주한 음악가로, 7대에 걸친 위대한 음악 가문의 시조가 됩니다. 바흐는 세계 음악사에서 전례가 없는 엄청난 음악 가족의 일원이었던 것을 자랑스레 생각했고, 행복한 가정에서 아이들 음악 교육에 열심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http://youtu.be/4YI6Ea51aS8 

 

“바흐는 일생 동안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며, 항상 어린이들의 야단법석과 더불어 지냈다. 아마도 그에게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그의 자식들이 상당수가 죽었지만 그는 끈질기게 또 낳았다. 바흐는 온갖 종류의 음악을 만드느라 집이 떠들썩한 것이 좋았다. 바흐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을 때뿐이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아이들이 노래를 좀 더 잘 부르고, 작곡을 좀 더 잘하고, 또 악기를 좀 더 잘 다루게 되는 것이었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p.18)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에 포함된 45개의 소품 중에는 귀에 익은 멜로디가 하나 더 있지요. <무제트> D장조, 1분 남짓 되는 짧은 곡입니다. 앞의 두 마디가 즐겁게 노래하면 다음 두 마디가 딴청하듯 익살스럽게 대답합니다.

중간 부분의 열두 마디는 함께 손잡고 걸어가며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 바흐와 귀여운 자녀들이 정답게 대화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것 같지요?
 
◎ 무제트(musette) : 스코틀랜드 군악대에서 사용하는 목관악기 ‘백파이프’의 일종. 바람 주머니에 공기를 불어넣고 겨드랑이로 눌러서 연주한다. 프랑스 시골에서는 이 악기 반주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는데, 바흐의 <무제트>는 이 민속 춤곡에 해당한다.



우주에 들려주는 인류의 첫 번째 메시지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F장조 BWV 1047

 

지구를 대표하여 외계인에게 인간의 음악을 알려 줄 첫 곡은? 바로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F장조의 첫 악장입니다. 1977년 발사된 뒤, 초속 17Km로 태양계 끝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호에 이 곡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64억Km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보이저 1호가 보내 온 사진의 ‘창백한 푸른 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입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참으로 작디작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미지의 문명과 만날 것을 꿈꾸며 광활한 우주를 향해 보이저 호를 쏘아 보낸 위대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보이저 호에 내장된 골든 레코드에는 한국말 “안녕하세요”를 포함 세계 59개 언어로 된 인사말, 지구의 자연과 문화를 알려 줄 115장의 사진, 그리고 지구인의 소리를 들려 줄 27곡의 음악이 들어 있습니다. 이 중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의 1악장이 맨 앞에 수록되어 있으니, 인류를 대표하는 음악인 셈입니다.


 

http://youtu.be/qTpCD2Xvh_s
 

바흐는 1717년부터 쾨텐 궁정 악장으로 일했는데, 그 때 쓴 협주곡들 중 6곡을 추려서 프로이센 왕가의 음악애호가 브란덴부르크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래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코렐리에서 비발디를 거쳐 바흐로 이어진 바로크 협주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바흐 관현악곡 중 지금도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경쾌하고 신나는 2번 F장조는 일반적인 바로크 협주곡처럼 3악장으로 돼 있습니다. 보이저 호에 실린 1악장은 바이올린, 레코더, 오보에, 트럼펫 등 4명의 독주자가 즉흥 연주처럼 자유분방한 선율을 노래합니다. 특히 높은 음역의 화려한 트럼펫이 맹활약합니다. 아쉽게도, 트럼펫 파트가 너무 어려워서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는군요.


http://youtu.be/2MtZxQ4m_jQ

이어서 2악장 안단테(느리게)는 D단조의 애수어린 분위기로, 트럼펫이 잠시 쉬는 가운데 레코더, 오보에, 바이올린이 부드러운 선율을 차례로 노래합니다.

http://youtu.be/vLsNzCx1ots

3악장 알레그로 아사이(충분히 빠르게)는 가장 신나는 대목입니다. 트럼펫, 오보에, 레코더, 바이올린이 높은 음역에서 멋진 푸가를 펼쳐 보입니다. 앵콜에서 레코더 연주자가 피콜로 레코더로 악기를 바꿔서 곡예하듯 연주하는 것도 재미있지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볼로냐 모차르트 합주단의 연주인데, 역시나 목소리 큰 트럼펫 연주자가 단연 인기군요.   

보이저호는 지구에서 190억 Km쯤 날아갔다고 하네요. 참 멀리도 갔지요. 그런데, 이 거리는 빛이 18시간 날아간 거리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외계 문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별 중 제일 가까운 게 4만 광년이라니, 우주의 ‘이웃’이 너무 멀군요.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우주, 외계인이 보이저 호를 수거해서 이 곡을 듣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태평양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도 언젠가 외계인이 보이저 호를 찾아내서 바흐의 이 협주곡을 듣고, 지구라는 푸른 별에 꽤 멋진 이웃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보이저 1호와 2호는 1977년 8월 같은 날 발사될 예정이었는데, 1호는 이상이 발견되어 9월로 발사가 연기됐습니다. 2호가 먼저, 1호가 나중이지요. 두 대의 보이저호에 내장된 ‘골든 레코드’에는 지구의 소리 - 화산, 지진, 천둥, 비, 바람, 파도는 물론 귀뚜라미, 개구리, 침팬지, 말, 개, 버스, 기차, 비행기 등등 -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음악도 들어 있습니다.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호주의 원시 음악을 비롯, 각 나라의 민속 음악이 들어 있고 클래식 음악으로는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F장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 중 ‘전주곡과 푸가’,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3번 E장조 중 ‘가보트와 론도’,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2막 아리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중 1악장,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중 ‘카바티나’,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중 ‘제물의 춤’ 등 7곡이 포함됐습니다.
 


바로크 협주곡의 최고를 만나다 -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G장조 BWV 1049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4번 G장조의 1악장입니다. 바흐 음악의 기쁨에 처음 눈뜨게 해 준 곡이지요. 두 명 레코더와 바이올린 솔로의 상쾌한 선율이 가슴 시리도록 즐겁습니다. 첫 주제는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 널리 사용되어 귀에 익은 멜로디입니다. 1:28부터 펼쳐지는 바이올린 솔로의 현란한 패시지, 근사하지요?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음표 하나하나가 화창한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습니다. 3:15 지점, 쏜살처럼 달려 나가는 바이올린의 빠른 패시지, 참 놀랍죠? 바흐 해석의 대가 칼 리히터의 지휘 동영상이 있다니, 참 반갑습니다.  

 


http://youtu.be/eWlfmepsUuQ (1악장 알레그로, 칼 리히터 지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이른바 바로크 시대는 오페라가 등장한 1600년 경 - 카치니의 <에우리디체>(1600)와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 - 부터 바흐가 서거한 1750년까지 150년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바로크’란 말은 ‘일그러진 진주’란 뜻입니다. 르네상스 음악 양식의 틀을 뛰어넘어 기악곡과 성악곡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한 시기라서 과거 기준으로 보면 ‘일그러진 음악’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요. 이 시대에는 도시마다 다양한 편성의 악단들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 실험된 작곡 기법과 연주 방식의 모든 성과를 수렴하여 ‘거대한 바다’가 된 사람,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 ~ 1750)입니다.  

 

그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바로크 협주곡의 최고봉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바흐는 쾨텐 시절 작곡한 수많은 협주곡 중 6곡을 골라서 프로이센 왕가의 브란덴부르크 공에게 헌정했습니다. 음악애호가인 브란덴부르크 공은 자기만의 소규모 악단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흐는 1721년, 이 곡의 자필 총보에 프랑스어로 헌사를 써 넣었습니다.

“2년 전 전하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누렸지요. 전하는 하늘이 제게 내려주신 보잘 것 없는 음악적 재능을 기뻐하셨고, 제가 만든 몇몇 작품을 전하께 바칠 수 있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 협주곡들을 바침으로써 전하에 대한 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바흐와 브란덴부르크 공 사이의 인연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곡을 그에게 헌정한 것은 ‘취업’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1720년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난 뒤 바흐는 함부르크 성 야코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 지원했습니다. 바흐의 오르간 실력은 다른 어떤 지원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지만 결국 낙방하고 맙니다. 기부금을 더 많이 낸 사람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관행 때문이었죠. 1721년에 접어들자 군비 확장 때문에 쾨텐 궁정의 음악 예산이 축소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레오폴트 후작의 새 신부 프레데리카 헨리에타는 음악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바흐는 쾨텐을 아주 떠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새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공을 통한 취업 시도도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바흐가 어떤 기준으로 6곡을 골랐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선 악기 편성이 모두 다릅니다. 바흐 당대에 사용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악기 편성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자유로운 악기 편성과 변화무쌍한 형식을 볼 때 “바흐는 노예처럼 어떤 원칙에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대담한 소리를 자유롭게 펼쳐내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김원명 옮김, 경성대 출판부, p.97)

바흐는 이 협주곡에서 비올라 파트를 즐겨 연주했다고 합니다. 비올라의 음향을 특별히 좋아했을 뿐 아니라, 중간의 음역을 연주하며 고음과 저음을 동시에 듣는 것을 즐겼던 거죠. 아바도 지휘 볼로냐 모차르트 합주단의 연주로 전곡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1번 F장조(00:15 ~ 18:05)는 오보에 3명, 사냥 호른 2명, 파곳 1명, 피콜로 바이올린 1명 등 모두 7명의 독주자가 등장, 다채로운 음색을 들려줍니다. 일반적인 협주곡을 이루는 세 악장(알레그로 - 아다지오 - 알레그로)에 이어 커다란 메뉴엣이 붙어 있기 때문에 ‘관현악 모음곡’으로 봐도 무방한 대곡입니다. 2악장에서는 보통 바이올린보다 단3도 높게 조율된 ‘피콜로 바이올린’의 활약이 도드라집니다. 각 파트가 조화를 이루어 통일감과 균형미가 뛰어납니다.
 

 

http://youtu.be/p777LGgYYXw

 


 

2번 F장조 (18:10 ~ 37:00, 3악장 앵콜 포함)는 앞의 글 참조.

3번 G장조 (37:25 ~ 47:50)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각각 3성부로 나뉘어져 있는 현악 합주곡입니다. 현악 앙상블의 풍부함을 맛볼 수 있는 게 이 곡의 매력입니다. 세 악장(알레그로 -  아다지오 - 알레그로)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당당한 1악장에 이어서 2악장에서는 쳄발로가 짧은 카덴차를 연주합니다. 바흐는 2악장에 ‘아다지오’라고 템포를 지정하고 두 개의 화음만 써 넣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대개 쳄발로의 카덴차로 대체합니다. 휴식 없이 3악장으로 넘어가면 현악기들이 차례차례 주제를 모방하면서 흥겹게 마무리합니다.

4번 G장조(47:50 ~ 1:03:52)의 1악장 알레그로는 더없이 상쾌하고 즐겁습니다. 2악장 안단테는 E단조의 애수어린 대목으로, 투티와 솔로의 강약이 대비되며 메아리 같은 효과를 냅니다. 3악장 프레스토는 속도와 리듬이 재미있는 푸가입니다.    

5번 D장조 (1:04:00 ~ 1:23:05)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곡으로, 플루트, 바이올린, 쳄발로가 독주 악기로 활약합니다. 1악장 알레그로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매력적인 첫 주제가 종횡무진 변화하며 등장합니다. 특히, 끝 부분에는 65마디에 이르는 쳄발로의 근사한 카덴차(1:09:57부터)가 붙어 있습니다. 1719년 쾨텐 궁정에 새로 쳄발로가 들어왔는데, 이에 대한 바흐의 기쁨을 표현한 걸로 추정됩니다. 합주 파트에서 주로 비올라를 맡았던 바흐는, 이 곡을 연주할 때만은 직접 쳄발로를 쳤다고 합니다. 2악장 아페투오소(affetuoso : 애정으로, 우아하게)는 B단조의 구슬픈 대목입니다. 합주 파트가 침묵하는 동안 세 명의 독주자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3악장 알레그로는 톡톡 튀는 발랄한 제1주제와 아름답게 노래하는 B단조의 제2주제가 교차하는 푸가입니다.  

6번 Bb장조(1:23:09 ~ 1:39:35)는 현악 합주인데, 바이올린이 제외된 게 아주 특이합니다. 바이올린의 생생하고 화려한 느낌 대신, 비올라와 첼로의 수수하고 우아한 질감을 한껏 즐길 수 있습니다. 햇살이 은은히 스며드는 오후, 아늑한 거실에서 들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쾨텐에서 연주할 때는 바흐가 비올라 솔로를 맡았다고 합니다. 알레그로 - 아다지오 마 논 탄토(느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 알레그로의 세 악장으로 돼 있습니다.
 
◎ 용어
리토르넬로(ritornello) : ‘돌아온다’는 뜻으로, 같은 소재에 바탕을 둔 솔로와 투티가 교차하는 바로크 시대 음악 형식. 
  


 

 

이상적인 협주곡의 선율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BWV 1041 / 2번 E장조 BWV 1042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바흐의 협주곡은 최소한 대여섯 곡이 있었을 걸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단 두 곡만 전해집니다. 그 중 두 번째 곡인 E장조의 알레그로, 참 싱그러운 음악이지요? 첫 주제가 울려 퍼지고 00:35 지점 솔로 바이올린이 변형된 주제를 연주하면 1:23 지점, 약동하듯 솟구치는 패시지가 등장합니다. 주제가 되풀이 나오고 사이사이에 새로운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리토르넬로(ritornello) 형식입니다. 비발디가 즐겨 사용한 형식을 바흐가 받아들인 것이지요. 생동하는 음악, 34살 꽃다운 시절의 정경화가 연주합니다. 참 화사하지요?  

“음악이 없다면 세상이 있을 수가 없죠. 클래식 음악이 없던 시기도 있긴 했죠. 하지만 옛날 역사 어디를 봐도 소리로 커뮤니케이션을 했고, 감정·노여움을 표현했잖아요. 서양 음악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조화를 만들어 내는 데에 항상 음악이 있었어요. 음악 교육을 안 받으면 인격에 균형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http://youtu.be/iWqcpxCAHWM 2번 E장조 1악장, 정경화

 

 

1999년, 정경화가 인터뷰 도중 제게 해 준 얘기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조화를 만들어 내고 인격에 균형을 주는 음악’, 바흐를 빼고 얘기할 수 없겠지요.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솔로 악기와 현악 합주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 되는 이상적인 협주곡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프레스코발디, 코렐리, 알비노니, 마르첼로, 비발디로 발전해 온 바로크 협주곡은 바흐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협주곡에서 배운 것은 ‘합리적 형식, 명료한 구성, 절제된 테마, 부드러운 멜로디, 우아한 화성’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식의 틀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내용이 그때그때 몸에 맞는 유연한 형식을 찾아내곤 했던 거지요. 바흐의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은 그 후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근대 협주곡의 물줄기로 이어졌습니다. 바흐라는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 자리한 아름다운 섬, 바로 이 협주곡이지요.

 

바흐의 중요한 기악곡들은 대부분 쾨텐 시절(1717 ~1723)에 작곡됐습니다. 쾨텐의 23살 영주 레오폴트 후작은 음악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바리톤 음성의 소유자였고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클라비어를 연주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17명으로 된 우수한 악단을 갖고 있었고, 새 악장 바흐를 극진히 우대했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레오폴트 후작은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쾨텐 악단의 일원으로 연주에 참여했습니다. 바흐는 그를 가리켜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음악을 아는 후작”이라고 불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쾨텐 궁정이 캘빈파여서 복잡한 교회음악을 금지했다는 점입니다. 바흐는 자신의 천재성을 모두 발휘하여 세속음악의 작곡에 몰두했고, 그 결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등 위대한 기악곡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쾨텐 시절이 없었다면 바흐는 합창곡, 오르간곡 등 종교음악만 남긴 근엄한 작곡가로 역사에 기록됐을지도 모릅니다.

2번 E장조보다 1번 A단조가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이 곡은 바흐 음악으로는 드물게 ‘비극적 서정미’를 담고 있습니다. 달콤하고 애수어린 1악장 알레그로, 투티와 솔로가 교차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입니다. 역시 정경화의 연주입니다.

http://youtu.be/Qo-fN7Qs_nM

E장조 협주곡의 3악장은 1970년, 영화 <러브 스토리>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에릭 시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부잣집 아들 올리버와 가난한 이민자 출신 제니퍼의 슬픈 사랑 이야기지요. 가족의 반대에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지만, 제니퍼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나는 모차르트, 바하, 비틀즈 그리고 너를 사랑해,” “사랑한다는 건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등 명대사가 나왔고, 주제곡 ‘러브 스토리’와 삽입곡 ‘눈장난’(snow frolic)이 크게 히트했었지요. 음악을 전공한 여주인공 제니퍼가 동료 학생들과 함께 리허설하는 장면에 나오는 곡이 바로 이 협주곡의 3악장입니다.

http://youtu.be/dWnJDGE2C7s

같은 곡이지만 쓰임새에 따라, 연주자에 따라 감상하는 맛이 달라집니다. 듣는 사람의 결에 따라 음악은 다채롭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음악의 진정한 고갱이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울림으로 퍼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비록 단 두 곡이지만 300년이 다 되도록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지요.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동료들과 주고 받는 이야기 같은 선율 

바흐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장조 BWV 1064 

 

거리마다 친절이 넘쳐납니다. 편의점 직원, “거스름돈이 500원이십니다.” 은행 창구 직원, “수수료가 1,000원이신데, 괜찮으세요?” 치과 간호사, “잇사이에 음식이 끼시면 치간 칫솔을 쓰세요.” @@어딜 가나 돈한테 존댓말, 물건한테 존댓말입니다. 고객한테 친절해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행여 불친절하다고 고객이 항의라도 하면 일자리가 위태로울 거고, 그러다보니 아무데나 존댓말을 붙입니다. 그래야 안전하지요. 서비스 직종의 말단 직원들, 고달플 것입니다. 하지만 존댓말을 남발하는 요즘 세태,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을 찾아보기 힘들어 안타깝습니다. 당당해야 할 젊은 세대가 점점 위축되어 수동적인 기계로 변해 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바흐의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세 파트는 마치 동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같습니다. 때로는 침묵하며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분별없고 무례한 말참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되어 말할 때는 활기 있고 자유롭습니다.


 

http://youtu.be/xB-q13shvA4 (1악장 알레그로, 서울 바로크합주단)


1악장 알레그로, 얼핏 들으면 기계적인 음악 같습니다. 8분 음표와 16분 음표의 길이도 자로 잰 듯 똑같고, 스케일도 엄밀한 비례와 대칭으로 진행됩니다. 다른 어떤 협주곡보다 더 수학적인 곡이지요. 하지만, 이 곡에 쾌활하고 싱싱한 마음이 넘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되겠지요.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서주에 이어 3명의 솔로가 생기있는 주제를 연주하고 나면 1:31 지점, 제3솔로가 애수어린 마음을 노래합니다. 첫 주제가 다시 나온 뒤 2:03부터 제2솔로와 제1솔로, 제1솔로와 제3솔로가 정답게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3:40부터 3명의 솔로가 동시에 연주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줍니다.


쾨텐 시절에 작곡한 것으로 보이지만 라이프치히 시절인 1730년대, 바흐 자신과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칼 필립 엠마누엘이 솔로를 맡아 함께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곡은 바흐가 수학적인 작곡 기법에 능통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담을 수 있었기에 바흐가 진정 위대했던 거지요. 이 곡엔 유머러스한 대목도 있습니다. 05:00 지점, 제1솔로가 긴 패시지를 연주하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면 갑자기 추락하고, 제2솔로와 제3솔로가 이를 받아서 계속 추락합니다. 힘들 때 정직하게 “어휴, 힘들어!”하며 씩 웃어 보이는 넉넉함이 느껴집니다. 1악장은 이 미소를 신호로 행복하게 마무리됩니다.   

이 곡을 들으면 활달하게 일 잘 하는 젊은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엔 구김살이 없고 행동엔 가식이 없고 말은 단순명료합니다. 선의로 가득한 친절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소통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소탈하고 정직한 젊은이입니다. 2012년 9월 서울 바로크합주단의 연주, 유럽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합니다. 유재원, 이원식, 이현애…. 세 명의 독주자가 모두 젊은이군요. 이들의 연주는 바흐의 마음처럼 정직하고 단순명료합니다.   

치과에 가니 간호사, “아, 입 크게 벌리실께요.” 은행 창구 직원, “여기 존함 써 주실께요.” 아, 그렇게 비비 꼬아서 얘기하는 건 고문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입 벌리세요”, “성함 써 주세요”라 해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우리말입니다. 곧고 명료하게 벋어나가는 바흐의 음률처럼, 서울 바로크합주단의 소탈한 연주처럼 편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참 편하겠습니다.

 


빛나는 춤곡, 매혹적인 플루트 선율에 흠뻑

바흐 ‘바디네리’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 BWV 1067

 

톡톡 튀는 경쾌한 플루트의 선율, 귀에 익지요? 매우 짧은 바디네리(Badinerie), ‘농담’이란 뜻입니다. 바흐 관현악 모음곡 2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입니다. 바흐가 남긴 4곡의 관현악 모음곡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함께 그의 관현악곡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이 중 2번 B단조는 플루트 솔로와 현악합주가 연주하는 기품 있고 아름다운 곡이지요. 이 모음곡에 나오는 폴로네즈, 바흐 음악이 너무 근엄하게 느껴지는 분들께는 팬 플루트로 연주한 걸 권해드리고 싶군요. 70년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잉카 음악 그룹 로스 차코스의 연주입니다. 근사하지요? http://youtu.be/wSdn6Yjj3lI


 

http://youtu.be/afrmEWN-G4Y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은 프랑스 궁정음악 풍의 웅대한 서곡으로 시작, 독일 민초들 속에서 오래도록 발전해 온 춤곡들로 엮었습니다. 원래는 그냥 ‘서곡’(Over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서곡과 그에 이어지는 춤곡들’이란 뜻인데, 편의상 줄여서 그렇게 부른 거지요. 장엄한 서곡에 이어서 오페라나 발레를 공연하던 프랑스의 전통은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은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9)에서 비롯 됐습니다. 바흐는 륄리의 프랑스 양식을 받아들여서 연주회용 모음곡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곡 중간 부분을 장식하는 빠른 푸가는 오직 바흐만 작곡할 수 있는 다성 음악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자필 악보가 소실되어 작곡한 연대와 배경을 알 수 없지만, 1730년대 중반 라이프치히 콜레기움 무지쿰에서 바흐 자신의 지휘로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플루트 솔로의 매혹적인 선율로 가득찬 2번 B단조는 바흐가 쾨텐에 있던 1721년 경 작곡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플루트 솔로가 등장하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다는 거지요. 칼 리히터 지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연주로 전곡을 들어 보십시오.

http://youtu.be/768Y9_VTBpw 서곡(00:00~09:18)은 느리고 비장하게 시작하지만, 플루트 소리 덕분에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습니다. 중간의 빠른 푸가는 현악 합주와 플루트 솔로가 대조되며 활기있게 교차하는 게 매력적입니다. 제2곡 롱도(09:18~11:11)는 엄밀히 말하면 ‘론도 형식의 가보트’입니다. 우수 어린 멜로디지만 기품을 잃지 않습니다. 제3곡 사라방드(11:11~15:11)에서는 고음과 통주저음 사이에서 아름다운 캐논이 펼쳐집니다. 제4곡 부레(15:11~17:20)는 긴박한 느낌을 주는 빠른 춤곡입니다.

제5곡 폴로네즈(17:20~20:50)는 이 모음곡에서 가장 유명한 멜로디지요. 당당하고 위엄있는 플루트의 선율이 매혹적입니다. 제6곡 미뉴엣(20:50~22:18)은 플루트와 현악 합주가 평화롭고 달콤하게 노래합니다. 멜로디를 기억하기 쉽지요. 제7곡 바디네리(22:18~23:45)는 경쾌한 피날레입니다. ‘농담’이란 뜻의 바디네리, 일종의 표제음악으로 볼 수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바흐는 마지막 곡에서 이렇게 흥겨운 모습을 즐겨 보여주었습니다. 진주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춤곡들, 모두 짧고 쉬워서 친해지기 쉽습니다. 매혹적인 플루트의 선율, 휘파람으로 불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 용어
롱도(rondo) : 둥글게 추는 윤무(輪舞)로, 짧게 반복되는 악구에 따라 춤추며 노래했다고 한다. 음악 형식으로서의 론도는 첫 주제가 되풀이 등장하는 사이사이에 새로운 주제들이 삽입되는 형식을 말한다. 고전시대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 많이 등장한다.
사라방드(sarabande) : 3박자로 된 17~18세기 스페인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
부레(bourree) : 2박자로 된 17세기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춤곡.
폴로네즈(polonaise) : 18세기부터 널리 유행한 폴란드의 민속 춤곡. 3박자, 보통 빠르기. 훗날 쇼팽은 폴란드의 혼을 상징하는 피아노곡으로 폴로네즈를 승화시켰다.  
메뉴엣(menuet) : 17세기에 널리 보급된 프랑스의 민속 춤곡. ‘작은 스텝의 춤’이란 뜻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교향곡 3악장에 자주 쓰였다.

 

 

아름다운 여인의 우아한 자태와 같은 음악

바흐 ‘G선 위의 아리아’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 1068

 

아리아, 아름다운 선율이 있는 곡을 뜻하지요. 19세기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트 빌헬미가 독주 바이올린의 가장 낮은 현인 G선만으로 연주하도록 편곡해서 <G선 위의 아리아>로 알려진 곡, 바흐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의 두 번째 곡 ‘아리아’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우아한 자태가 멀리서 나타나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고요히 설레던 마음이 차츰 고조되고, 아득한 동경으로 승화됩니다. 바흐의 이 아리아는 숭고하고 엄숙한 사랑의 마음을 현악 합주로 노래합니다. 


바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장르인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 관점에서 보면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들을 넓은 의미의 교향곡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꼽히는 바흐, 하지만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옛날 음악’으로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는 바이마르 시절, 맘대로 쾨텐 궁정악장에 취임했다는 이유로 한 달 동안 감옥에 가기도 했지요. 봉건적 속박을 넘어선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음악도 ‘옛날 음악’일 수밖에요.


http://youtu.be/eUtCC5VPwBs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바흐의 ‘교향곡’ 3번 C장조라 생각하고 들어볼까요?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주단이 연주합니다. 참고로, 바흐의 ‘신포니아’는 교향곡이 아니라 3성 인벤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http://youtu.be/bDTdPo033Bo


제1곡 서곡(00:00 ~ 07:39)은 그라베(장중하게)-비바체(생기있게)-그라베로 이어집니다. 다른 관현악 모음곡들과 마찬가지로 곡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부분입니다. 트럼펫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첫 부분, 투티와 솔로가 빠르게 엇갈리는 푸가 부분에 이어 원래의 느린 템포로 돌아와서 마무리합니다. 오보에 둘, 트럼펫 셋, 팀파니와 현악합주로 연주하는 이 서곡은 악기 편성이 크고 음악이 당당해서 교향곡의 첫 악장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1830년 멘델스존이 이 서곡을 피아노로 들려주자 “이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곡을 듣고 있으니 멋지게 치장한 사람들의 행렬이 커다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지요.


제2곡 아리아(07:39 ~ 12:37)는 이 모음곡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율입니다. 춤곡 형태이긴 한데 특정한 리듬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제1바이올린의 선율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그냥 ‘아리아’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군요. 저음 반주부에서 이따금 대위 선율이 나타나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생동감 넘치는 제3곡 가보트(12:37 ~ 16:13), 선율이 명쾌하고 리듬이 재미있는 제4곡 부레(16:13 ~ 17:29), 푸가 없이 흥겹게 마무리하는 제5곡 지그(17:29 ~ 20:25)까지, 모두 5곡으로 된 모음곡입니다.


이 곡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완전히 잊혀졌다가 1829년 마태수난곡과 함께 멘델스존이 발굴, 이 세상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바흐에 대한 인식은 ‘기계적 음악가’, ‘음악적 수학자’ 정도였는데, 멘델스존의 노력으로 바흐의 위대한 전모가 비로소 알려진 것입니다. 바흐에 심취했던 알버트 슈바이처(1875 ~ 1965)는 “이 모음곡에 수록된 갖가지 춤곡들은 사라져 버린 아름답고 우아한 세계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것은 로코코 시대의 이상적인 음악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험악한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답고 우아한 세계의 모습’이 바흐의 이 아리아에서 잔잔히 펼쳐집니다. 이 곡을 찾아내고 되살려서 들을 수 있게 해 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 용어
가보트(gavotte) : 17세기 프랑스 도피네 지방에서 발생한 춤곡. 보통 빠르기, 2박자. 
지그(gigue) : 16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3박자의 빠른 춤. 바로크 시대 모음곡의 마지막 곡으로 자주 쓰였다. 

 

 

클래식이라는 숲에 들어가는 정말 좋은 길 - 하이든 현악사중주곡 ‘농담’

 

http://youtu.be/Cxy0paQP8p8

 

어느날 ‘신천교육대’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조윤범씨가 이곳에서 음악 강연을 하던 도중 그가 이끄는 ‘쿼르텟 X’가 하이든의 현악사중주곡을 연주한 것입니다. 경쾌하게 흐르던 피날레가 끝났나? (위 링크 17:00부터) 연주자들이 인사하려고 일어서는 듯 싶어서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다시 주저앉더니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이젠 진짜 끝났겠지, 또 박수를 치는데, 이 분들 또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음악이 또 한 번 멈추자 “이번엔 안 속아….” 영리한 ‘신천교육생’들은 이번에는 박수를 안 쳤습니다. 그런데, 진짜 음악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방송인들과 연주자들이 함께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했습니다. 하이든의 현악사중주곡 <농담>이었습니다. 

 

조윤범이 이끄는 ‘쿼르텟 X'

 

MBC ‘신천교육대’….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MBC 사장은 파업에 참여한 사원들 100여명을 짧게 3개월, 길게 9개월 동안 잠실 신천에 있는 MBC 아카데미로 보냈습니다. 한창 일할 대표적인 기자, PD, 아나운서들의 일을 빼앗았으니 사장이 앞장서서 MBC를 3류 방송으로 전락시킨 거지요.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사실상의 ‘유배’ 조치를 ‘교육’으로 포장해서 미화했다는 거지요. 당연히 ‘신천교육대’의 분위기는 침통했습니다.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하이든, 그리고 장난꾸러기 조윤범씨가 MBC의 상처 입은 방송인들에게 멋진 ‘힐링 클래식’을 선사한 것이지요.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현악사중주곡의 아버지’기도 했습니다. 4악장으로 완성된 교향곡의 소나타 형식은 현악사중주곡에도 똑같이 적용됐습니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 4대의 현악기를 합하면 피아노의 음역과 화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의 소리는 해머가 줄을 때릴 때 발생한 뒤 곧 사라지지만, 현악기의 소리는 활로 현을 켜는 동안 지속됩니다. 따라서 현악사중주는 피아노보다 더 꽉 찬 사운드를 낼 잠재력이 있습니다. 4대의 현악기를 하나의 악기로 간주하여 작곡하고, 연주하고, 감상할 때 새로운 음악의 지평이 활짝 열리는 것이지요. 

조윤범은 현악사중주가 “클래식 음악이라는 숲에 들어가기에 정말 좋은 길”이라고 지적하고, “4라는 숫자는 음악을 이루는 기본이자 결정체다. 현악사중주에는 네 명의 독주자가 있으며, 100명 이상의 오케스트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윤범 <파워클래식>, 살림, p.10) 하이든은 현악사중주가 실내악의 이상적 형태임을 깨닫고, 이 장르에서 83곡에 이르는 많은 곡을 썼습니다.     

Op.33에 포함된 6곡의 사중주곡(1781)은 러시아 대공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헌정됐기 때문에 ‘러시아 사중주곡’이라고 부릅니다. 하이든은 이 곡을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기법’으로 작곡한 역작이라고 강조했고, 이전 작품에 비해 많은 보수를 받고 출판하려고 했습니다. 음악학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빈 고전악파 현악사중주곡의 양식이 완성됐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 무렵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가 6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써서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도 이 작품에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이든의 현악사중주곡 중 가장 유명한 곡, 핸드폰 연결음으로 널리 쓰이는 <세레나데>일까요? 

http://youtu.be/6jmQ2IXtdTE

맑고 청순한 이 멜로디를 사랑하는 분이 참 많은데, 하이든의 곡이 아니라 당시 수도원의 신부였던 호프슈테터(Hoffstetter, 1742~1815)란 분이 취미삼아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요즘 발매되는 음반에도 여전히 ‘하이든의 세레나데’라고 써 있지만, 원작자 호프슈테터의 이름을 병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1790년에 작곡한 <종달새> Op.64-5, 이른 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화사한 종달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곡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요즘 들으면 참 좋겠지요? 

 

http://youtu.be/zTH74JxaKCQ

 

 

자유로움, 엄격함, 즉흥성, 형식미가 완벽히 결합된 위대한 작품

바흐 ‘샤콘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D단조 BWV 1004

 

영국 레븐햄의 피터 앤 폴 성당,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가 홀로 무대에 섰습니다. 48살 정경화가 연주한 곡은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D단조. 오케스트라도 피아노 반주도 없는 절대 고독의 시간, 바이올린 연주자가 이 곡을 연주하려면 홀로 자신의 내면과 직면해야만 합니다. 청중들 중엔 50회 생일을 맞은 찰스 황태자도 있었습니다. 알레망드 - 쿠랑트 - 사라방드 - 지그에 이어 마지막 악장 ‘샤콘느’가 성당을 가득 채울 때, 청중들은 정경화의 연주에 압도되어 숨소리를 죽였습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연주했기 때문에 정경화의 귀고리가 땅에 떨어졌지요. 찰스 황태자가 주워서 정경화에게 돌려주는 해프닝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1996년 정경화에 대한 다큐를 촬영할 때 이 감동의 연주를 듣고 바흐 음악에 대해 인터뷰하는 행운을 누렸지요. 

“바흐 ‘샤콘느’는 세상이 끝나도 존재할 음악 같아요. 파고들면 들수록 더 깊이 있는 곡이에요.” 정경화에게 바흐 음악은 신앙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대가답게 늘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는데, 특히 바흐에서는 한 치의 부족함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26살 때인 1974년 데카에서 녹음한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은 두루 호평을 받은 음반이었지만 정작 정경화 본인은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레코딩 프로듀서 크리스토프 레이번의 제안에 황급히 녹음한 게 두고두고 맘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쉬웠던 거죠. 

 

젊은 시절, 정경화는 국제무대에서 ‘현(絃)의 마녀’, ‘암호랑이’로 불렸습니다. 크고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연주로 청중을 압도했기 때문이지요. 정경화는 “여자 바이올리니스트는 소리가 작다”는 평을 듣기 싫어서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초기 음반들이 훌륭한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거칠게 들리는 대목들이 들리는 이유지요. 48살 정경화는 1974년 녹음에 비해 한결 둥글고 안정되고 무게 있는, 거장다운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그만큼 원숙해진 증거였지요. 그런데, 정경화는 이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나 봅니다. “바흐 파르티타, 언제 또 녹음하실 거죠?” PD의 질문에 “어휴, 아직 멀었어요.” 손사래를 치더군요. 

아무튼,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하는 건 그녀 필생의 목표였습니다. “그 때 녹음하고 10년 있다가 다시 해야지, 생각했는데 벌써 20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엄두가 안 나요. 하지만, 원하는 만큼 하려면 끝도 없이 기다려야 되니 언젠가는 해야겠다 싶어요.”   

정경화가 이 곡을 처음 녹음한지 이제 근 40년, 영국 레븐햄에서 한결 성숙한 연주를 들려준 지 17년…. 드디어 새 음반이 나올 것 같군요. 그녀는 2012년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바흐의 소나타 3곡과 파르티타 3곡을 모두 연주했고, 유니버설 레코드와 녹음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녀 필생의 숙원이 곧 이뤄진다니 저도 가슴이 설렙니다. 정경화의 영혼이 담긴 바흐,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연주사에 정점을 찍게 될 새 음반이 기다려지는군요. 

“바이올린을 잡은 후 단 하루도 바흐를 연주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이보다 더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음악은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 귀와 마음에는 바흐 곡의 모든 성부를 자유롭게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http://youtu.be/lkH-lCcz8po & http://youtu.be/V1vnna1iiNg

 

정경화가 “모든 음악의 으뜸”이라고 단언하는 곡, 그녀가 “내가 죽으면 틀어주길 바라는 음악”이라고 20대 때부터 얘기해 온 곡, 바흐 ‘샤콘느’ D단조입니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3곡의 소나타와 3곡의 파르티타의 한가운데 왕관처럼 우뚝 솟아 있습니다. 비탈리의 샤콘느가 ‘가장 슬픈 음악’이라면 바흐의 이 곡은 ‘영원을 향한 인간 정신의 끝없는 비상(飛上)’입니다. 파르티타 2번 D단조의 앞부분 네 곡(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을 다 합한 것보다 더 규모가 큰 마지막 악장으로, 주제에 이어 30개의 변주곡이 펼쳐집니다. 도합 256마디, 크게 보아 단조 - 장조 - 단조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자유로움과 엄격함, 즉흥성과 형식미가 완벽하게 결합된 위대한 작품입니다.  

바흐 주변엔 피젠델(Pisendel)이나 비버(Biber)같은 바이올린의 대가가 있었지만, 누구를 위해 어떤 이유로 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랑했던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음악학자들은 바흐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쾨텐 궁정악단에는 이 어려운 곡을 연주할 사람이 바흐밖에 없었을 거고, 자필 악보에 써 넣은 손가락 지시는 바흐 자신을 위한 메모로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너무 규모가 크고 어려워서 바흐 사후엔 거의 연주되지 않은 채 잊혀졌습니다. 181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버터 가게, 포장지로 쓰던 낡은 종이 뭉치 틈에서 이 곡의 자필악보를 발견했다는 얘기가 있군요. 19세기 후반 바이올린의 거장 요제프 요아힘이 연주했고, 브람스가 “가장 깊은 생각과 가장 강렬한 느낌의 완전한 세계”라고 격찬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곡을 페루치오 부조니(1866~1924)는 피아노 독주용으로,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는 클래식 기타로 각각 편곡했습니다. 무반주 바이올린 음악의 최고봉인 바흐 ‘샤콘느’, 바이올린 뿐 아니라 다른 악기로도 널리 연주되고 있으니 앞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잊혀질 일은 없을 것 같군요.


http://youtu.be/xPGfbQHGXdo (피아노 편곡 부조니, 연주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http://youtu.be/81tG8L_vg1Q (클래식 기타 편곡 세고비아, 연주 줄리언 브림)

바흐의 첫 전기를 쓴 포르켈은 이 곡의 생명력을 아주 근사하게 묘사했습니다. “바흐의 선율은 결코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의 선율은 그것을 만들어 낸 자연 자체처럼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젊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형식을 떠나 예술의 내적 원천에서 솟아난 선 율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은  더욱 새롭고 신선하며, 마치 어제 갓 태어난 것 같다.” (포르켈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강해근 번역, 한양대 출판부, p.89)

정경화가 연주한 ‘샤콘느’ 얘기를 하고 보니, 바흐의 파르티타가 모두 근엄한 음악일 거라는 편견이 생길까봐 우려되네요. 3번 E장조는 아주 즐거운데, 프렐류드 부분만들어볼까요? 20세기 바이올린의 최고 테크니션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 그리고 줄리언 브림의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들어 보셔요. 위대한 ‘샤콘느’ 때문에 바흐 음악이 두려워지면 안 되겠지요.^^    

http://youtu.be/tAVXJQDXItI (바이올린 연주 하이페츠)
http://youtu.be/htjsTp8oQos (클래식 기타 줄리언 브림)

 

 

바흐 선율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첼로의 향연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BWV 1007

 

“우리는 부두 가까이에 있는 어떤 고악보 서점에 들렀습니다. 나는 악보 뭉치를 뒤져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오래돼 변색되고 구겨진 익보 다발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이었습니다. 첼로 독주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 나는 놀라서 그걸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마술과 신비가 이 언어 속에 숨겨져 있을까?”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엮음, 김병화 옮김, 한길 아트, p.63

13살 카잘스가 처음 풀사이즈 첼로를 갖게 된 날,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만난 순간을 회상한 글입니다. 바흐 서거 후 수백 년 간 잊혀져 왔던 곡을 소년 카잘스가 재발견했다고 읽힌 대목이지요. 그건 멋진 오류였습니다. 이 곡의 악보는 1824년 파리에서 출판된 이래 모음곡 형태가 아닌 단일 악곡으로 이미 자주 연주돼 왔습니다. 따라서, 이 곡을 발굴한 사람이 카잘스라는 얘기는 잘못 알려진 에피소드죠. 

아무튼, 이 곡을 불후의 명곡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분명합니다. 이 모음곡은 소년 카잘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고, 이 곡에 대한 카잘스의 경외감은 점점 더 자라났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이 곡을 연습한 끝에 25살 되던 해인 1901년, 드디어 공개 무대에서 연주했습니다. ‘학술적이며, 기계적이며, 따뜻한 느낌이 없는 곡’으로 여겨졌던 이 곡들은 카잘스의 손에서 ‘폭넓고 시적인 광휘(光輝)로 가득찬 곡’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로스트로포비치 · 미샤 마이스키 · 피에르 푸르니에 · 모리스 장드롱 · 야노스 스타커 등 첼로의 명인들이 남긴 위대한 음반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끼 낀 듯 오래된 카잘스의 녹음이 각별한 감동을 주는 건 바로 그 ‘원초성’ 때문입니다. 

 

반주 없이 첼로 혼자 선율을 연주합니다. 얼핏 무미건조하게 들립니다. 연주자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곡이고, 듣는 이에게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어려운 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흐 선율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점에 이 곡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바흐는 선율에 독특한 움직임을 줌으로써 완벽한 전조(轉調)에 필요한 음들을 모두 단 하나의 성부(聲部) 안으로 통합시켰다. 따라서 제2의 성부는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포르켈, <바흐의 생애, 예술, 그리고 작품>, 강해근 옮김, 한양대 출판부, p.88)  

1720년 작품으로 추정할 뿐, 어떤 계기로 누구를 위해 작곡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흐 선율의 대향연이라 할 수 있는 6곡의 첼로 모음곡, 그 중 첫 곡 G장조는 전주곡 (0:00~02:05)-알레망드 (02:05~05:32)-쿠랑트(05:32~08:07)-사라방드(08:07~10:35)-메뉴엣(10:35~14:00)-지그(14:00~15:02) 등 6개의 소곡으로 돼 있습니다. 바흐 음악에서 특정 부분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저는 세 번째 곡 쿠랑트를 특히 좋아합니다. 너무 즐겁고 정다운 음악이지요. 프라다의 한 카톨릭 수도원에서 77살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하는 모습입니다. 노대가가 들려주는 선율, 포르켈의 표현을 빌면, 카잘스의 선율은 그것을 만들어 낸 자연 자체처럼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젊습니다. 

25살 때 처음 이 곡을 연주한 카잘스는 85살 되던 해 미국 백악관의 존 F. 케네디에게도 이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카잘스는 늙어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하며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만년의 카잘스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지요. “선생님의 연주는 이미 완벽한데, 왜 힘들게 계속 연습을 하시나요?” 카잘스의 대답, “연습을 하고 나면 제 실력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걸 느끼니까요.” 

 

http://youtu.be/KX1YtvFZOj0

 

위대한 첼리스트 카잘스가 평생 갈고 닦아도 바흐가 펼쳐 놓은 선율, 그 완벽의 경지에 이르기는 참으로 어려웠나 봅니다. 저는 이 곡을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클래식 기타로 편곡한 것을 듣고 처음 좋아하게 됐습니다. 구불구불한 첼로의 선율, 기타로 연주하면 소리 하나하나가 길게 울려서 한 마디씩 펼침화음이 됩니다. 단성의 선율이 아니라 화음이 곁들여진, 좀 더 풍성한 음악이 되는 셈이죠. 클래식 기타로 연주한 바흐, 아직 음악에 익숙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겠군요. 
http://youtu.be/CyPvr8AKVJQ (프렐류드, 안드레 세고비아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C장조의 프렐류드와 알레망드,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연주입니다. 음악을 저보다 훨씬 많이 아는 친구 박제성이 추천한 연주입니다. 
http://youtu.be/HcuAU0vysRI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 김재철 사장 ‘아웃’ 축하곡

 

김재철이 아웃됐군요. 모두 기뻐할 일이지만 그가 저지른 패악질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슬퍼지려 합니다. 진작 아웃됐으면 MBC 상처가 이렇게 크지 않았을텐데, 아쉬움도 크고요. 갈길 멀고 험하지만 일단 신나는 축하 음악 한 곡 함께 들어보지요. 

누구나 잘 아는 멜로디지요? MBC가 잘 나가던 시절,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20여년 동안 방송했던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입니다.진행을 맡았던 차인태 아나운서가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군요. 긴 세월이 흘렀고 그 뒤 수많은 퀴즈 프로그램이 선보였지만 <장학퀴즈>만큼 친근한 프로그램은 없었습니다. TV 프로그램은 탄생과 소멸을 계속하지만, 이 경쾌한 시그널 음악만큼은 시청자들 마음속에 참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http://youtu.be/ASB6hFUat4g (3악장, 트럼펫 : 티네 팅 헬세트)

 

하이든이 쓴 수많은 협주곡 -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바스, 오보에, 호른 등 - 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1796년, 빈 궁정의 트럼펫 연주자 안톤 바이딩어를 위해 썼습니다. 당시는 악기의 개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바이딩어는 5개의 키가 달린 트럼펫을 직접 개발했는데, 하이든은 이 새로운 악기의 특성을 살려서 멋진 협주곡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주자의 기량으로 연주하기엔 꽤 어려운 곡이었나 봅니다. 바이딩어는 1798년 크리스마스 연주회 때 자기가 발명한 키 달린 트럼펫을 들고 청중 앞에 섰지만, 하이든의 이 곡을 연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삼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151) 그는 혼자 열심히 연습한 끝에 1800년 3월 빈에서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비로소 이 곡을 초연했습니다. 

트렘펫은 금속성의 소리가 죽죽 벋어나가는 씩씩한 악기로, 군악대에 잘 어울리지요. 하이든 시대엔 키와 밸브가 없던 자연 트럼펫(natural trumpet)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때도 군대의 팡파레나 기상나팔로 주로 활약했습니다. 귀가 아주 섬세했던 어린 모차르트는 트럼펫 소리를 아주 싫어해서, 아버지의 친구가 코앞에서 이 악기를 불자 기절할 뻔 했다지요.

이 ‘남성적인’ 악기를 위해 하이든이 작곡한 협주곡, 놀랍게도 젊은 여성이 참 잘도 부네요. 87년생, 올해 26살인 티네 팅 헬세트(Tine Thing Helseth)가 너무나 쉽게 이 곡을 연주하니까 트럼펫이 마치 장난감 같습니다. 노르웨이의 헬세트, 영국의 알리손 발솜, 미국의 라헬 존스튼 등 여성 연주자들이 트럼펫의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극히 ‘마초스런’ 악기를 연약한 여성이 근사하게 연주하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요. 기묘한 카타르시스입니다.  

1악장 알레그로 http://youtu.be/xgBJAkp4TcM 원숙한 하이든답게 매우 절제된 소나타 형식으로 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조화를 이끌어 냅니다. 2악장 안단테 & 3악장 알레그로 http://youtu.be/FCcZ90NWHZM 2악장 안단테, ‘황제 찬가’와 비슷한 선율을 따뜻하게 노래합니다. 3악장은 가장 생기있고 화려한 부분으로, 트럼펫이 여러 차례 멋지고 시원한 팡파레를 들려줍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완벽한 예술의 모범 - 훔멜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보다 더 신나는 곡이죠? 노르웨이의 여성 트럼펫 연주자 티네 팅 헬세트의 놀라운 연주,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입니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에 이어 3년 만에 나온 이 곡 또한 빈 궁정의 트럼펫 연주자 안톤 바이딩어에게 헌정됐습니다. 하이든의 후임으로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2세의 악장이 된 훔멜은 1804년 새해 첫날 에스터하치 궁정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이 곡을 초연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거장 하이든의 자리를 잇는 영광된 자리, 이 힘차고 화려한 음악으로 자신을 축하하고 싶었나 봅니다. 
  
훔멜은 4살 때 악보를 읽었고 5살 때 바이올린을, 6살 때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신동이었죠. 그의 아버지는 1786년, 8살 난 훔멜을 데리고 빈의 모차르트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린 훔멜의 재능에 반해서 1년 가량 아무 보수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며 연주와 작곡을 가르쳤습니다. 훔멜은 1791년 런던에서 하이든을 만나 연주 실력을 인정받았고, 훗날 빈에서 하이든에게 오르간을,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하이든의 추천으로 에스터하치 공의 악장이 됐고, 그 때 이 곡을 만든 것입니다.

 

그는 직무태만으로 1808년에 해고됐지만 하이든의 간청으로 복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던 그는 결국 1811년에 에스터하치를 떠나 자유 음악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스스로 연주하기 위해 8곡의 협주곡과 10곡의 소나타를 비롯, 수많은 피아노 곡들을 썼습니다. 그는 교향곡을 쓰지 않았지만 8곡의 피아노 트리오 등 실내악곡과 22개의 오페라를 쓰는 등 작곡가로서 의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많은 작품 중 트럼펫 협주곡만 널리 알려져 있는 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전설적이었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이중 트릴’을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밀치고 난리였다고 합니다. ‘야상곡의 창시자’로 유명한 존 필드는 한 연주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건 악마 아니면 훔멜이야!”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훔멜의 연주라는 걸 알고 있었겠죠. 그는 베토벤과 음악으로 교류했고, 괴테와도 각별한 친분을 쌓았습니다. 바이마르에서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프라하> 등 여러 작품을 실내악으로 편곡하여 대문호 괴테 앞에서 연주했고, 괴테는 훔멜의 음악을 ‘가장 자연스럽고 완벽한 예술의 모범’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훔멜은 차츰 낡은 음악가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1830년대,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차르트의 제자’ 훔멜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1837년 그가 사망함으로써 ‘고전시대’의 마지막 불꽃은 꺼져 버렸습니다. 음악사가들은 모차르트와 쇼팽 사이의 간극을 이어 준 인물로 훔멜을 기억할 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음악애호가들이 기억하는 그의 작품은 트럼펫 협주곡 하나 뿐입니다. 

 

 

http://youtu.be/hR8H8CSojis (3악장 알레그로)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1악장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는 모차르트 <하프너> 교향곡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당당한 서주에 이어 트럼펫과 오케스트라가 충실한 대화를 이어갑니다.  

http://youtu.be/IPwoYVOVrNs

하이든 협주곡에 못지않은 음악 수준을 이룸으로써 대선배 하이든의 명성에 값닿는 후배가 되려는 존경의 마음(hommage)이 읽힙니다. 2악장 안단테는 애수어린 서주와 트럼펫의 첫 트릴부터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트럼펫 애호가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낭만적이고 ‘멜랑콜릭’한 선율로 가득차 있습니다. 트럼펫에는 두 얼굴이 있지요. 3악장 알레그로가 거침없이 곧고 힘차게 뻗어가는 트럼펫이라면 2악장 안단테는 깊은 사색에 잠긴 부드럽고 웅혼한 트럼펫입니다.

http://youtu.be/skJS-ozIyZk


그가 ‘위대한 음악가’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음악사가들의 오류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재능과 대중들의 환호에 취해서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일까요? 잊혀진 천재 훔멜, 그가 남긴 작품들엔 모차르트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모차르트는 아닙니다. 쇼팽을 예감케 하는 대목도 보이지만 쇼팽은 아닙니다. 그의 인간과 세계는 결국 그가 남긴 작품에서 찾는 수밖에 없으니, 트럼펫 협주곡 이외의 그의 작품들을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짙은 우수와 그리움을 머금고 있지만… 바흐 류트 모음곡 1번 E단조 BWV 996

 

혼자일 때가 있습니다. 최근까지 자주 만났던 친구들, 오늘따라 문자도 카톡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연락 없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잘 지내는지, 한명 한명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별 용건도 없이 불쑥 연락하는 게 머슥합니다. 책을 좀 읽다가 덮습니다.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지요. 누군가 곁에 있어도 지워지지 않을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지요. 때로는 홀로 있는 막막함을 벗 삼아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때 음악이 있으니 감사하고, 잊을 만하면 찾아주는 벗이 언젠가 있을 터이니 그 또한 감사합니다.

 

줄리안 브림이 연주하는 고독한 류트의 독백을 듣습니다. 유투브에 없는 이 곡, 어느 네티즌의 블로그에서 찾았습니다. 짙은 우수와 그리움을 머금고 있지만 장중하고 기품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또 듣노라니 어느 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바흐 음악 중 ‘숨겨진 보석’ 같은 곡, 류트 모음곡 1번 E단조입니다. 

바흐는 류트라는 악기와 친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 수난곡>, <마태 수난곡> 등 종교음악의 노래에 류트 반주가 나옵니다. 1717년 이전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네 곡의 류트 모음곡은 이따금 쳄발로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바흐가 ‘류트의 음색’을 생각하며 작곡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바흐는 1737년,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의 소개로 유명한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레오폴트 바이스(Leopold Weiss, 1686~1750)를 알게 됩니다. 바흐보다 한 살 아래인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군요. 바흐는 이 사람과 자연스레 류트 음악을 주고받으며 교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스가 자기 곡을 연주해 보인 다음, 바흐의 류트 조곡을 연주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우정이 꽃피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훌륭한 음악이 한 연주자의 개성 있는 해석을 통해 불멸의 빛을 더하는 경우가 있지요. 바흐이 이 모음곡은 브림의 멋진 연주로 또 하나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1933년 런던에서 태어난 줄리안 브림은 14살 때 안드레스 세고비아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혜성처럼 데뷔합니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와 바로크 류트를 익혔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기타는 천대받는 악기였기 때문에 브림이 기타리스트로 선풍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스타일과 밀도 있는 음색은 듣는 이를 감동시켰고, 빌라 로보스 · 윌리엄 월튼 · 벤자민 브리튼 등 유명한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기타곡을 만들었습니다. 연주자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빛나는 노력으로 기타 음악의 위상을 높인 것이지요.  

 

 

http://jsuh.tistory.com/3247

 

그가 바흐 류트 모음곡을 처음 녹음한 것은 1956년이었습니다. <바흐 기타 리사이틀>이란 제목의 웨스트민스터 연주 실황이었죠. 이어서 그는 1965년 바흐 모음곡 1번과 2번 전곡이 수록된 LP를 냈는데, 이것이 바흐 류트 음악 연주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음반이 됐습니다. E단조 모음곡은 일반 기타로 연주하기에 아주 편리한 조성입니다. 제일 낮은 1번 현이 E음이고 4, 5, 6번 현이 E단조의 으뜸 화음을 이루기 때문이지요. 브림은 이 곡이 “기타에 행복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곡”이라 했고, 첫 부분인 ‘프렐류드와 푸가’에 대해서는 “류트의 특성을 대담하게 형상화한 곡”이라고 평했습니다. 

멋진 프렐류드는 6년전, 제가 <MBC프라임>이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첫 회를 만들 때 시그널로 선곡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시그널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푸가는 비장미가 넘칩니다. 줄리안 브림의 선 굵은 연주가 일품입니다. 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부레, 지그 등 이어지는 무곡들, 하나하나 근사하지요. 우울한 오늘, 바흐의 이 곡이 퍽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의 별처럼 멀고 아득하군요.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볼까 생각해 봅니다. 하하, 그냥 닥치고 음악만 듣는 게 낫겠군요. 알버트 슈바이처가 말했지요. “바흐 작품에 대해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얘기는 듣고, 연주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입 다물라는 것입니다.”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유 -  헨델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제국주의 종주국 영국…. 사람들은 런던을 주저 없이 ‘세계의 수도’라 불렀습니다. 18세기 초, 런던의 음악활동은 더 이상 궁정 안에 머물지 않고 극장, 연주장, 유원지, 개인 저택에서 널리 이뤄졌습니다. 1705년 문을 연 ‘여왕의 극장’(Queen's Theater)을 필두로, 링컨즈 인 필즈, 드루리 레인, 코벤트 가든 등 오페라 극장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다양한 오페라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국왕과 귀족들만 호사스런 음악을 누린 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시기 발렌티노, 니콜리니 등 뛰어난 카스트라토들은 대중의 우상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화로 잘 알려진 파리넬리(1705~1782)가 런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참 후입니다.

헨델은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 시절 이미 <알미라>, <네로> 등 여러 오페라를 작곡했고,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코렐리, 스카를라티 등 바로크 음악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몸에 익혔습니다. 헨델은 25살 되던 1710년, 단도직입적으로 ‘세계의 수도’ 런던행을 택했습니다. 오페라로 단번에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거죠. 이탈리아에서 헨델의 오페라를 보고 감명을 받은 영국 대사가 그의 런던행을 도왔습니다. 함부르크 시절의 동료 마테존(Johann Matheson, 1681~1764)*이 잘 표현했죠. “이 시대, 음악으로 이익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영국으로 가야 한다!” 

얼마 전 헨델을 궁정 악장에 임명했던 하노버 선제후는 “적절한 시점에 돌아온다”는 조건 하에 그의 런던행을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하노버가 아니라 런던에서였지요! 천재에게만 허용되는 특별한 자유, 헨델은 주저 없이 그 자유를 누렸고 자기 능력으로 성공을 이룬 것이죠.    

 

 “울게 하소서, 잔인한 내 운명!
  내가 오직 자유만을 갈망한다는 것, 
  내 마음속 아픔을 잊게 하소서, 
  고통의 굴레를 벗게 하소서!” 


영국에서 처음 히트한 헨델의 오페라는 <리날도>입니다. 1711년 2월 초연되어 6월까지 무려 15회나 공연했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요술 오페라’는 천둥, 번개, 불꽃놀이 뿐 아니라 진짜 새떼가 등장하는 등 대단한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파리넬리가 부르는 노래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는 2막에서 마녀에게 잡힌 십자군 대장의 딸 알미레나가 부르는 아리아입니다. 유동근과 황신혜가 출연한 드라마 <애인>에 삽입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지요. 제라르 꼬르비오 감독의 영화 <파리넬리>에서 스테파노 디오니시가 이 노래를 부르는 대목, 헨델의 시대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한 곡만 들어도 왜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부르는지 알 것 같지요?   

 

 

당대의 스타 파리넬리는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꽉 찬, 밝은 목소리”였고, “그의 억양은 순결했고, 그의 트릴은 아름다웠고, 그의 호흡조절은 탁월했고, 그의 목청은 기민했고, 장식음을 포함하여 모든 악절을 믿을 수 없이 쉽고 확실하게 노래했다”고 합니다. 성악가에게 바칠 수 있는 모든 찬사가 그에게 쏟아진 거죠. 그와 실력을 겨루려던 한 성악가가 그의 노래를 듣고 기절해 버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수퍼스타 파리넬리는 한 시즌에 5,000파운드 이상 벌어들였는데, 이는 헨델의 연 수입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는군요. 

그는 위대한 헨델에게 굴욕을 안겨준 일이 있군요. 오페라 흥행에 모든 것을 건 헨델은 1730년 파리넬리를 캐스팅하려고 베네치아를 방문했는데, 결국 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스타 중의 스타’ 파리넬리, 제 아무리 헨델이라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거죠. 파리넬리는 1734년부터 1737년까지 3년 동안 런던에서 활약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헨델이 소속된 ‘제2 아카데미’와 경쟁 관계에 있던 ‘귀족 오페라’(Opera of the Nobility)에서 주로 노래했습니다. 그는 당시 명성이 높았던 하세(Johann Adolph Hasse)와 포르포라(Nicola Porpora)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헨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런던에 머물던 시절의 파리넬리(1735)

 

공교롭게도 파리넬리가 떠날 무렵 런던의 오페라 열기도 사그러들기 시작했고, 헨델의 ‘제2 아카데미’도 파산해 버렸습니다. 파리넬리는 스승 포르포라를 돕기 위해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헨델의 작품에 출연하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자기 인기에 취해서 헨델의 위대한 음악을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음악을 이해하는 능력과 출중한 노래 실력,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파리넬리가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를 실제로 불렀다면 얼마나 멋졌을까요?

 

팝 스타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것도 아주 좋군요.  http://youtu.be/DVZf2l3RFrI 

뮤지컬의 ‘디바’ 사라 브라이트만도 이 곡을 녹음했습니다.  http://youtu.be/rDTFdX4OjOQ
 
*요한 마테존(Johann Matheson, 1681~1764) : 헨델의 친구이자 동료 작곡가. 함부르크 시절 그와 헨델이 싸움을 벌였다는 일화가 있다. 함부르크 시절, 마테존은 자신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주인공 안토니우스역을 맡았고, 헨델이 쳄발로를 치며 지휘했다. 그는 무대 위의 역할이 끝나자 쳄발로를 연주하던 헨델을 밀어내며 자기가 지휘하겠다고 했는데 헨델은 이를 거절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마테존은 헨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마테존의 칼이 헨델의 가슴을 찔렀는데, 헨델은 간발의 차이로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칼끝이 헨델의 조끼 단추에 부딪쳤다는 얘기도 있고, 조끼 주머니에 꽂혀 있던 오페라 악보 덕분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화해했고, 평생 사이좋게 지냈다.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일화지만, 음악에 관해 타협이 없는 헨델의 성격을 엿보게 한다. 

◎ 용어 
카스트라토(castrato) : ‘거세된 가수’란 뜻. 16~18세기 유럽에는 소년의 고운 목소리가 어른 목소리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노래 잘하는 소년을 거세하는 관행이 있었다. 후두는 소년이지만 폐활량은 어른이기 때문에 소리가 힘차고 음역이 넓어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소년 시절 빈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에서 노래한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도 17살 변성기가 닥쳤을 때 자칫 카스트라토가 될 뻔 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황제 티토의 자비>(1791)의 세스토 역을 카스트라토가 담당한 이후 음악사에서 자취를 감췄고, 요즘은 대개 메조 소프라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팔세토’(falsetto, 가성)를 활용한 남성 알토인 카운터 테너가 카스트라토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죽음마저 위로하는 바흐의 위대한 선율 - 바흐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
  내 마음의 위안, 생명수.
  내 고통에 맞서주고
  내 삶에 힘이 되는 예수,
  내 눈의 즐거움과 태양,
  내 마음의 보배와 환희. 
  내 가슴과 얼굴에서
  당신을 놓치지 않으렵니다.  


지난 한 해, 어떻게 지내셨나요? 열심히 살았지만 돈은 별로 벌지 못하셨나요? 양심을 속인 적은 없나요? 거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나요? 한해의 목표에 모든 걸 바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너무 자책하지는 말지요.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왔으면 그냥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모(歲暮)의 추운 거리에 언제나 따뜻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바흐의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입니다. 


 

 


바흐의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 BWV 147 중 6곡과 10곡에 해당하는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Jesus bleibt meine Freude), 한 해를 돌이켜보며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떠올리게 하는 평온한 음악입니다. 순수한 마음, 정직한 입, 용감한 행동, 그리고 생명을 바치는 헌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의 덕목들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새겨둠직 한 제목의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에서 가장 유명한 선율이지요. 영국의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가 피아노로 편곡했습니다.

‘칸타타’(Cantata)는 이탈리아어의 ‘칸타레’(cantare, 노래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성악곡’을 가리킵니다. 기악곡에 해당하는 ‘소나타’(sonata)가 ‘소나레’(sonare, 울리다)에서 나온 것과 같은 이치지요. 17세기초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칸타타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 반주의 독창, 중창, 합창으로 이뤄집니다. 

바흐는 18살때부터 32살때까지 아른슈타트, 묄하우젠, 바이마르의 교회에서 일했는데 이미 그 때부터 규칙적으로 교회를 위한 칸타타를 썼습니다. 초기 칸타타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이지요. 38살때 라이프치히의 ‘칸토르’(음악감독, ‘노래하는 사람’이란 뜻)로 부임한 뒤에는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를 위해 일주일에 평균 한 곡씩, 도합 295곡의 칸타타를 썼습니다. 후기 칸타타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작품들, 엄청난 분량이지요? 당시 예배 의식은 4시간 정도 걸렸는데, 일요일과 축일에는 언제나 새로운 칸타타를 연주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 끔찍한 의무사항 때문에 바흐의 엄청난 양의 칸타타가 세상에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작품의 양이 아니라 한곡 한곡이 모두 질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신(神)에게 봉사한다는 보다 높은 차원의 사명감에서 나온 곡들이라 그렇겠지요. 바흐는 음악감독이란 직책에 대단한 가치를 두고 있었으며, 이 도시의 주요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자신이 만들고 있다는 데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는 라이프치히 시절 초기인 1723년, 성모 마리아 방문 축일 때 연주했습니다. 원곡을 들어볼까요? 

http://youtu.be/d9EN27Zh_vg
  
이 곡의 연주에 얽힌 마음 아픈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1917~1950)는 임파선의 악성 종양 때문에 33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0년 9월 16일 브장송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는 눈물로 뒤덮였습니다. 병마와의 싸움에 지칠대로 지친 그는 예정했던 쇼팽 왈츠를 다 연주하지 못한 채 쓰러져 버렸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일어난 그는 다시 무대 위로 나와 작별의 곡을 연주했습니다. 바흐의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의 안타까운 마지막 연주, 죽음마저 위로하는 바흐의 위대한 선율에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을 위안하며 눈물짓게 합니다.


헨델 ‘물위의 음악’… 프랑스풍 장엄한 서곡에 형형색색 관현악의 향연

영국왕의 노여움을 풀었다는 사연을 가진 곡?


영국 왕실의 우아한 춤, 메뉴엣입니다. 두 번째 메뉴엣, 플루트가 가세하니까 음악이 갑자기 요염한 빛깔을 띄지요? 헨델의 <물위의 음악>, 프랑스 풍의 장엄한 서곡에 이어 메뉴엣, 부레, 아리아 등 형형색색 관현악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말, 잘 아시지요? 사람의 일생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위대한 예술 작품은 오래 살아남아 인류를 풍요롭게 해 줍니다. 불멸의 예술을 남긴 사람의 이름은 그 작품과 함께 기억됩니다. <물위의 음악>을 작곡한 헨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이 음악을 연주하라고 명령한 영국 왕 조지 1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인생은 짧고, 권력은 무상한 거지요. 

 

조지 1세와 헨델의 인연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헨델의 명성이 높아지자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는 1710년 봄, 그를 궁정 작곡가 겸 지휘자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하노버는 멋진 궁정극장과 뛰어난 악단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25살 헨델에게 좋은 직장이 생긴 셈이죠. 하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고 있던 헨델은 하노버라는 답답한 시골구석에 주저앉을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헨델은 겨울 휴가를 이용, ‘세계의 중심’ 런던으로 가서 오페라 <리날도>를 성공시켰고, 이 작품을 15회 지휘하느라 하노버에 늦게 돌아왔습니다. 하노버 선제후는 직무를 게을리 한 헨델이 괘씸했지만 그의 재능을 봐서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헨델은 또 한 번 영국행을 단행했습니다. 잠깐 다녀온다며 선제후의 허락을 받았지만, 헨델은 이번엔 아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노버 선제후는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헨델이 출세를 위해 계약 의무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셈이니까요. 그런데 두 사람은 3년 뒤 재회하게 됩니다. 하노버가 아니라 런던에서였죠. 1714년 앤 여왕이 죽자, 할아버지가 영국인이었던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조지’ 1세는 독일말로 ‘게오르크’, 다름아닌 하노버 선제후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배신행위 때문에 양심이 불편했던 헨델, 이제 큰일 났습니다! 

 

http://youtu.be/4yurw5Cf4HY (제3모음곡 G장조 중 ‘메뉴엣’ 등)

 

하지만 조지 1세는 헨델을 문책하기는 커녕, 오히려 많은 곡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헨델은 왕의 노여움을 완전히 풀어 줄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당시 왕실에서는 뱃놀이를 자주 했는데, 헨델은 배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만들고 지휘하여 왕을 기분 좋게 해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게 바로 <물위의 음악>이라는 얘기입니다. 

 

  템즈강 위의 조지1세와 헨델.

 

다른 스토리도 있습니다. 하노버 선제후는 앤 여왕이 죽으면 결국 자기가 영국 왕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고, 그래서 헨델에게 미리 런던에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조지 1세는 즉위 후 얼마 안 돼서 헨델의 연금을 두 배로 올려주었습니다. <물위의 음악>을 연주하기 훨씬 전에 이미 헨델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증거가 없으니 어느 쪽이 맞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믿고 싶어하니까 앞의 이야기가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1717년 7월 17일 왕의 유람선 행렬이 화이트홀에서 첼시까지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 때 이 곡이 연주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왕과 수많은 귀족, 귀부인들이 큰 바지선을 탔고, 악단이 탄 바지선이 나란히 가며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 일간지의 보도입니다. 

“악단을 태우고 가기 위해 시티 회사의 유람선을 사용했다. 이 행사를 위해 헨델씨가 특별히 작곡한 가장 훌륭한 심포니를 50명의 악사들이 온갖 종류의 악기들을 동원, 줄곧 연주하였다. 왕은 이를 무척 좋아하셔서,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모두 세 번이나 다시 연주하도록 분부하셨다.” 

조지 1세는 음악에 크게 만족하여 되풀이 연주할 것을 요청했고, 밤늦게 뱃놀이가 끝날 무렵, 악사들은 모두 파김치가 됐다고 합니다. <물위의 음악>은 F장조, D장조, G장조의 세 모음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히 제2모음곡에 나오는 ‘호른파이프’는 수 십 년 동안 영국 TV의 시그널 음악으로 쓰였고 수많은 광고 음악에 등장하여 매우 잘 알려진 대목입니다.   

http://youtu.be/6fa2wZEsRWM (제2모음곡 D장조 중 ‘호른파이프’ 등) 

하하, “인생은 짧고 즐겨야 할 레저는 많다”는 광고가 있네요. 헨델의 <물위의 음악>이 세상에 나온 지 거의 300년, 누구든지 이 근사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이기주의와 찰나주의가 판치는 삭막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생계 걱정만 내려놓으면 누구나 조지 1세 못지않은 호사스런 왕이 될 수 있는 요즘입니다. 

http://youtu.be/jJyTfttQvdA (제1모음곡 F장조, 2012 Proms)
http://youtu.be/664QhBOhBgc (제2모음곡 D장조, 2012 Proms)
http://youtu.be/wQ9IymF3SzI (제3조곡 G장조, 2012 Proms)

 

 

바흐의 ‘따뜻한 유머’를 느낄 수 있는 선율

바흐 ‘사냥’ 칸타타 중 ‘양들은 편안히 풀을 뜯고’


바흐가 종교음악을 주로 쓴 엄숙한 작곡가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요? 그의 ‘세속 칸타타’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따뜻한 유머가 넘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흐는 오페라를 쓰지 않았지만 <커피> <결혼>, <농민>, <사냥>같은 ‘세속 칸타타’들은 오페라처럼 재미있습니다. 익살스런 스토리가 있고, 레시타티보와 아리아, 이중창·삼중창, 합창이 나오니 오페라와 별로 다를 게 없지요. 

‘작은 파리’(kleines Paris)로 불린 라이프치히는 베를린, 함부르크, 드레스덴과 더불어 독일의 대표적인 음악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시 당국자들과 성직자들은 바흐 음악의 위대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임명되기 전에 심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텔레만, 그라우프너, 파슈 중 한명을 후임자로 영입하려 했던 시의회는 여의치 않자 바흐를 뽑았습니다. 시의원 아브라함 플라츠는 “우리는 최고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학교 책임자들과 검열관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13개조의 까다로운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쾨텐 궁정에서 ‘해고 증명서’를 떼서 제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흐는 묵묵히 굴욕을 감수해야 했지요. 

 

시의회는 바흐의 천재적인 오르간 실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칸토르’는 오르간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바흐는 의무에 따라 라이프치히의 교회를 위해 일주일에 한편씩 칸타타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교회인 성 바울 교회에서 바흐의 음악은 배제됐습니다. 자기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칸토르’ 노릇을 하는 것은 바흐에겐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바흐를 카리켜 ‘칸토르’라 부른다면 그는 무덤 속에서도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칸토르’ 직은 바흐의 가장 아픈 곳이었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p.129) 
  
그러나 진정한 음악 애호가들은 바흐의 음악에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학생들은 그에게 ‘세속 칸타타’를 끊임없이 의뢰했고, 궁정과 교회의 음악가들은 이 ‘세속 칸타타’ 연주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작은 규모의 오페라라 할 수 있는 ‘세속 칸타타’는 주로 귀족이나 교수의 개인 행사 때 공연했다고 합니다.

흔히 <커피> 칸타타로 알려져 있는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멈추세요!>(1732)는 당시 독일 곳곳에 생기기 시작한 커피하우스의 홍보 행사에서 연주됐습니다. 커피를 찬양하는 내용을 익살스런 스토리에 담았습니다.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주단의 연주입니다. http://youtu.be/YC5KpmK6oOs 내레이터 역의 테너가 커피하우스 손님들을 향해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멈추세요!” 외치며 시작합니다. 

 

 

http://youtu.be/TYjqnlc7MRw

 

커피에 미친 딸 리스헨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 슐레드리안이 실랑이를 벌입니다. “커피를 그렇게 마셔대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아버지가 협박하자 딸은 굴복하는 체 하지만, 결혼 계약서에 ‘커피 맘대로 마시기’라는 조항을 슬쩍 써 넣지요. 화 잘 내고 투박한 성격의 아버지는 허둥대는 음악으로, 영리하고 재치있는 딸의 음악은 상큼하고 명랑한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바흐 음악이 이렇게 익살스럽다니, 뜻밖이지요? (최은규, 바흐 <커피> 칸타타, 네이버캐스트 참조) 

<농민> 칸타타로 불리는 <나는 새로운 영주님을 맞았다>(1742)는 라이프치히 근교의 한 마을, 새로운 영주 칼 하인리히 폰 디스카우를 환영하는 축제에서 연주됐습니다. 순박한 농민들은 “우리들의 새 영주님, 정말 멋있어” 큰 소리로 아첨한 다음, “영주님은 좋지만 세금 받는 놈은 싫어! 영주님, 너무 지독하게 굴지는 마셔요”라고 은근히 속마음을 노래합니다. 

http://youtu.be/GMaJJbuS_bQ


<결혼> 칸타타로 알려진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는 쾨텐 시절인 1720년 전후 지인의 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추정될 뿐, 언제 어디서 작곡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첫 아내 바르바라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던 바흐 자신의 마음을 투사한 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링크 13:38부터 오보에 반주의 소프라노 아리아입니다. http://youtu.be/-2zzpINYE_E “사랑의 연습과 장난스런 포옹, 봄꽃의 허망한 즐거움보다 좋아라” 즐겁게 노래합니다. 바흐 시대의 젊은 연인들도 요즘처럼 사랑하고 기뻐했군요. 

귀에 익은 선율, ‘양들은 편안히 풀을 뜯고’는 바이마르 시절에 작곡한 일명 <사냥> 칸타타, <나의 즐거움은 신나는 사냥 뿐>(1713) 중 파레스의 아리아를 편곡한 것입니다. 작센의 영주 크리스티안 공의 생일잔치에서 초연됐다고 합니다. 사냥을 좋아하는 영주를 즐겁게 해 주려고 신화 속의 인물을 등장시켜 사냥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좋은 양치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들은 평화롭게 즐기리라”는 가사는 영주의 선정(善政)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원곡은 링크 16:35부터, 앙드레 리외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주단 연주입니다. 

http://youtu.be/Y2Vt7EOaBgI
  
바흐의 ‘세속 칸타타’를 듣다 보니 18세기 독일의 아득한 풍경들이 눈앞에 차례차례 펼쳐집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 문을 연 커피하우스에 손님들이 북적이고, 새 영주가 도착해서 농민들의 축제가 열리고, 선남선녀의 결혼식장이 떠들썩하고, 영주의 사냥길을 구경나온 사람들이 수군댑니다. 아버지와 딸, 영주와 농민…. 사람들이 사랑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동서고금(東西古今),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바흐 칸타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타르티니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악마의 트릴’

악마에까지 이른 치열한 갈망이 낳은 명작


http://youtu.be/S79cz-quRAY (알레그로 아싸이, 이다 헨델)


88만원 세대, 4천원 인생…. 젊은이들의 취업이 갈수록 어렵습니다. 대학생이 된 두 아이도 벌써 취업 걱정이 태산입니다. “취업을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어느 젊은이의 한 마디가 머리를 맴돕니다. 승자독식의 세상, 많이 갖고도 혼자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정 돈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일까요?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주세페 타르티니(1692~1770)입니다. 거의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익힌 그는 새로운 연주법을 개발하여 100곡이 넘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습니다. 스무살을 갓 넘긴 1713년 어느날 밤, 그의 꿈에 악마가 나타나서 제안합니다.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영혼을 팔아다오.” 겁에 질린 타르티니는 “악마가 과연 어떻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지 궁금하다”며 바이올린을 건네주었습니다. 악마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초인적인 기교로 놀랍게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황홀한 곡이었습니다. 타르티니가 프랑스의 천문학자 제롬 라랑드에게 해 준 얘기라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타르티니는 방금 들은 ‘악마의 곡’을 되살리며 악보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꿈에 들은 음악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낭패한 타르티니는 “내가 쓴 건 꿈에서 들은 곡의 감흥에 훨씬 못 미친다”고 했고, 심지어 자기가 음악에 재능이 없다고 자책하며 “다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악기를 부숴 버리고 음악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정신없이 써 내려간 G단조 소나타는 타르티니의 곡 중 가장 뛰어난 명곡이 됐습니다. 초인적인 기교를 요구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극히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꼽힙니다. <악마의 트릴>이라는 제목을 타르티니 자신이 붙였으므로 이 꿈 이야기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http://youtu.be/gHdb2HGm4pc

구소련의 바이올린 거장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의 1950년 녹음, 화려한 음색과 폭넓은 스케일이 펼쳐지는 명연주입니다. 지직거리는 LP의 정겨운 숨결이 살아 있군요. 15분 길이의 이 소나타는 휴식 없이 연주됩니다. 첫 부분 ‘라르게토 아페투오소’(다소 느리게, 정감있게)는 꿈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두렵고 황홀한 꿈의 감흥을 되새기듯, 차분히 노래합니다. 2:52부터 2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에네르지코’(침착하고 빠르게, 힘차게), 악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곁에 다가와 괴기스런 춤을 춥니다. 6:46부터 3악장 ‘안단테 그라베’(느리고 심각하게), 악마와 거래가 시작됩니다.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영혼을 팔아라!” “악마가 어떻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지 궁금하다!” 

7:49부터 4악장 ‘알레그로 아싸이’(충분히 빠르게), 드디어 악마가 연주를 시작합니다. 사람 세상에서 들을 수 없었던 숨막히는 악마의 트릴에 온몸이 전율합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진정 공포와 닿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손을 뻗쳐서 이 아름다움의 실체를 움켜쥐려 하지만 악마는 헛된 노력을 비웃듯 자꾸 저만치 달아납니다. 12:23부터 코다(coda, 마무리)입니다. 악마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이제 꿈은 사라져 갑니다. 악마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며 “결국 네 스스로 노력해서 아름다움을 찾아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악마의 트릴>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강력하고 본질적인지 보여주는 곡입니다. ‘악마’란 어떤 타자(他者)가 아니라 바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나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악마’로 변한 것이지요. 꿈속에서도 선율을 찾아 헤맨 젊은 타르티니, 그 간절한 몰입이 있었기에 이 아름다운 선율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치열한 갈망이 그를 꿈속의 악마에게 인도했지만, 그의 예술은 결국 자신의 열정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얘기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천재를 따라다닙니다. 타르티니보다 100년쯤 뒤에 태어난 바이올린의 귀재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도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늘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1821~1867)는 “악마, 내 슬픔의 후견인”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타르티니는 종교음악도 많이 쓰고 후학 양성에도 힘쓴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23살 위인 알레산드로 마르첼로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도 했군요. 

간절히 소망한다고 누구에게나 길이 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 갈망의 힘이 있기 때문에 비루한 일상을 이겨낼 수 있고, 한 발자국이라도 꿈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아름다운 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 외롭지 않습니다. 악마에까지 이른 치열한 갈망으로 오늘 이 바이올린 연주를 맛보게 해 준 타르티니에게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이 곡 어떠세요?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F장조 BWV 971


유럽 사람들은 ‘이탈리아’ 하면 파란 하늘, 화창한 햇살, 쾌활하고 수다스런 사람들을 떠올리나 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상곡>,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 모두 가장 밝고 명랑한 곡이지요. 시성(詩聖) 괴테도 마음이 침체됐을 때 이탈리아 여행에서 활력을 되찾곤 했다지요. 요즘도 여름에 이탈리아에 가면 가슴을 다 내놓은 채 일광욕을 하는 북유럽의 남녀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도 예외가 아닙니다. 1년에 절반 흐린 날씨가 이어지는 독일의 무거운 하늘이 아니라, 남쪽 나라의 맑고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경쾌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1735년 출판된 <클라비어 연습곡집> 2부에 프랑스풍 모음곡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곡의 악보 표지에 바흐는 “이탈리아 풍의 협주곡과 프랑스 양식의 서곡, 2단 건반의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 제2부, 애호가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써 넣었습니다.


바흐는 이탈리아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프레스코발디, 코렐리, 알비노니, 마르첼로, 비발디 등 이탈리아 거장들의 음악에서 이탈리아의 화사한 햇살을 본 것이지요. 그는 오랜 세월 이들의 악보를 검토하고, 필사하고, 편곡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바흐는 독일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르트루프 시절, 프랑스에서 추방된 위그노인들로부터 프랑스 궁정음악을 전수받았고, 특히 프랑수아 쿠프랭의 화사하고 우아한 선율에 매혹됐습니다. 바흐는 헨리 퍼셀, 찰스 디외파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등 영국에서 활약한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모음곡>과 <영국 모음곡>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흐는 프랑스식, 영국식, 이탈리아식 등 여러 방식으로 작품을 써 보는 가운데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풍부하게 해 나갔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p.12) 

베토벤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접하고 “바흐는 ‘시냇물’(Bach)가 아니라 큰 바다(Meer)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지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음악은 바흐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세계가 그를 향해 흘러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흐의 협주곡은 특히 비발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비발디 식으로 ‘빠르게 - 느리게 - 빠르게’ 세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협주곡>은 독주 악기로 연주하지만, 협주곡처럼 튜티와 솔로가 교대하고, 강약과 음질의 대비가 이어집니다. 바흐 전문가로 각광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젊은 피아니스트 안드레아 바케티(1977생)의 연주, 생기있고 유려한 이 작품의 멋을 한껏 살려주고 있습니다. 3악장은 한때 KBS-FM의 시그널 음악으로 쓰여서 귀에 익은 멜로디지요.     

그의 클라비어곡들은 ‘연습곡’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이 ‘연습곡’을 아름답고 표현력 있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고 늘 공을 들였습니다. 오늘날 이 <이탈리아 협주곡>을 단순히 ‘연습곡’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지요. 가장 높은 차원의 예술성을 가진 작품이니까요. 바흐는 본인의 자녀들을 비롯, 제자들이 늘 많았습니다. 그는 학생들이 연습할 곡을 먼저 연주해 보여준 뒤 “이런 소리가 나도록 해야 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기계적인 연습을 강요한 게 아니라 모범을 보이고, 제자들이 스스로 느끼며 음악을 다듬어 가도록 유도한 거지요.

“애호가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이 곡, 어떠세요? 따스한 한줌 햇살이 마음 깊이 들어와 어루만져 주는 느낌, 드시나요? 바흐 음악이 위대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백작에게 바흐가 작곡한 곡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험한 세상, 술 한 잔 안 하면 잠을 못 주무신다고요? 그러다가 몸 상하시면 어쩌지요? 억울한 일, 화나는 일, 생계 걱정…. 도무지 잠을 못 이루신다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1742)을 틀어놓고 눈을 붙여 보십시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작품 중 제일 인기 있는 곡으로, 졸음을 부르는데 특효약이라고 합니다. 바흐의 전기를 쓴 포르켈에 따르면 이 곡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드레스덴에 머물던 러시아 대사 카이절링 백작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골드베르크라는 쳄발로 연주자를 고용하여 밤마다 잠들 때까지 옆방에서 쳄발로를 연주하게 했다. 하지만 그의 불면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백작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바흐에게 잠을 부르는 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바흐가 작곡한 게 바로 이 변주곡이다. 카이절링 백작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골드베르크를 불러서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했다. 백작은 이곡에 대한 사례로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서 바흐에게 주었다. 이것은 바흐의 1년 봉급을 웃도는 금액으로, 바흐가 평생 받은 사례비 중 제일 많았다.” (포르켈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강해근 번역, 한양대 출판부, p.127)

 

http://youtu.be/N2YMSt3yfko (피아노 : 글렌 굴드, 1981년 녹음)


카이절링 백작의 쳄발로 연주자였던 요한 고틀립 골드베르크(당시 15세)가 초연했기 때문에 ‘골드베르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곡은 ‘부드럽고 생기 있는 자장가’입니다. 바흐는 이 곡의 악보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변주곡은 기본 화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재미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졸리게 만들기에는 최고로 좋은 방법이지.” 이 곡이 실제 불면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듣다가 그냥 잠들기에 너무나 훌륭한 선율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 역설이지요? 

주로 교회 음악을 써야 했던 라이프치히 시절, 바흐가 건반음악의 세계를 맘껏 펼쳐 보인 원숙한 작품입니다. 이 곡을 수없이 연주한 15살 골드베르크에겐 훌륭한 손가락 연습이 됐겠지요? 프랑스풍 아리아에 30개의 변주곡이 이어지고 다시 아리아로 돌아와서 끝납니다. 아리아는 우아하고 고결한 느낌을 주는 사라방드입니다. 이어지는 변주곡들은 하나하나 밝고, 화사하고, 유머러스합니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 시대를 아파하느라 잠 못 이루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음악입니다. 원래 작곡 의도대로 이 음악이 잠을 재촉한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지요. 반대로,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마음이 즐거워진다면 이 또한 감사할 일이지요. 어려울 때일수록 매사에 감사하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캐나다의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이 곡을 두 번 녹음했습니다. 1955년의 첫 녹음은 바흐 연주사에 혁명을 일으킨 음반이지요. 그 때까지는 옛날 악기인 쳄발로로 연주하는 게 대세였는데, 이 음반 이후 피아노로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의 두 번째 녹음은 아마 모든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제일 인기가 높은 음반일 것입니다. 신나는 첫 변주곡(링크 2:53부터),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두 번째 변주곡(4:03), 공기의 요정처럼 춤추는 세 번째 변주곡(4:52)을 차례차례 들어보십시오. 뽀송뽀송한 음색, 경쾌한 율동, 요염한 표정이 넘쳐흐릅니다. 굴드는 연주 도중 허밍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기벽으로 유명한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한 이 분의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일 많지요. 그래서 이 연주를 ‘굴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1991)에서 한니발 렉터(앤소니 홉킨스 분)가 사람의 머리를 깨물어 죽일 때마다 이 곡의 아리아가 나왔지요. 제일 무시무시한 장면에서 이렇게 우아한 음악이 나오다니, 정말 충격적이었지요. 이 곡 들으면서 꿈나라 가시라고, 좀 길지만 48분 전곡을 링크했습니다. 푹 주무셔요.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니까요! 

◎용어 해설
* 변주곡(Variations) : 하나의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 발전시켜서 만든 곡. 
* 쳄발로(Cembalo) : 피아노의 전신으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널리 사용된 건반악기. 독일어로 쳄발로, 영어로 하프시코드 (Harpshchord), 불어로 클라브생 (Clavecin)이라 한다. 
* 클라비어(Klavier) : 피아노를 가리키는 독일말. 바흐 시대엔 건반악기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 사라방드 (Sarabande) :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3/4박자나 2/3박자의 장중한 춤곡.


한 편의 매혹적인 풍경화를 떠올리게 하는 선율
헨델 오르간 협주곡 F장조 ‘뻐꾸기와 나이팅게일’

<개그 콘서트>의 한 코너처럼 얘기해 볼까요? 저는 위대한 천재 헨델을 고발합니다! 사춘기 시절, 헨델의 재능에 압도되고 주눅 들어서 음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 잘났습니다!!! 

헨델은 9살 때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 17살 때 할레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됐습니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거장 반열에 올랐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피아노를 독학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곧 포기했고, 17살 때는 작곡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음악 전공의 꿈을 버렸습니다. 헨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자기 꿈을 살려 위대한 음악가가 됐습니다. 제 선친께서도 못다 이룬 법관의 꿈을 아들이 이뤄주기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법관이 돼서 아버지를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음악가가 돼서 자신을 만족시키지도 못했습니다. 헨델은 25살 때 하노버 궁정 악장이 됐고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에 진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칩니다. 그런데, 흑흑, 저는 25살에 월급쟁이가 되었고 지금까지 음악을 ‘듣기만 하며’ 살아 왔습니다! 


 

http://youtu.be/JpjWceljcFo (2악장 알레그로)


하지만 문화방송의 PD로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음악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 본 적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감히 헨델을 닮고 싶었던 꿈 많은 사춘기 소년을 이제는 웃으며 회상할 수 있습니다. 50살 넘은 지금, 헨델의 음악에 대해 무딘 글이나마 쓸 수 있어서 위안이 됩니다.  

헨델은 1709년, 로마에서 동갑내기 거장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57)와 건반 악기 연주 실력을 겨룬 일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하프시코드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고, 스카를라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르간 연주에서 스카를라티는 헨델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주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화려했고, 손가락 기교는 완벽했다고 합니다.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 오르간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압도됐다고 합니다. 오르간에 관한 한 바흐를 제외하면 겨룰 이가 없었던 헨델이 오르간 독주곡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건 조금 이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오르간 협주곡에서 헨델의 거장다운 면모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헨델은 런던에서 6곡씩 세 묶음, 도합 18곡의 오르간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미완성 작품까지 합치면 20곡이 넘습니다. 오보에 협주곡 셋, 바이올린 협주곡 하나, 하프 협주곡 하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죠. 오르간 협주곡의 두 번째 묶음 중 첫 곡인 13번 F장조는 2악장에 새소리를 묘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뻐꾸기와 나이팅게일> 협주곡이 됐고, 이 별명 덕분에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헨델은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의 막간에 흥을 돋우기 위해 오르간 즉흥연주를 선보이곤 했는데, 나중에 이를 독립된 협주곡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곡은 1739년 4월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의 간주곡으로 처음 연주됐습니다. 헨델은 자신의 다른 곡에서 주제를 따 와서 오르간 협주곡에 즐겨 사용했습니다. 자기 음악을 대중에게 좀 더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려 노력한 거죠. 이 곡의 1악장과 4악장은 같은 해 작곡한 트리오 소나타 F장조 Op.5-6에서 주제를 따 왔습니다.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이 나오는 2악장 ‘알레그로’는 이듬해 합주협주곡 F장조 Op.6-9에 다시 사용했군요.


코벤트 가든 극장 내부. 헨델이 사용하던 오르간이 있다. 

이제 뻐꾸기와 나이팅게일 소리가 나오는 2악장 뿐 아니라 곡 전체를 들어볼까요? 네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톤 쿠프만 연주 1, 2악장 http://youtu.be/rRIi1GjmbbA, 3, 4악장 http://youtu.be/tIL22RjWMeA 장엄한 1악장 라르게토(조금 느리게)에 이어 밝고 명랑한 2악장 알레그로에서는 오르간이 뻐꾸기 소리를 모방하고 나이팅게일의 서정적인 노래를 부릅니다. 오르간 독주와 현악합주는 계속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우수에 잠긴 3악장 라르게토와 즐겁고 평화로운 4악장 알레그로가 이어집니다.


 헨델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나이팅게일 합창’  http://youtu.be/yfngXbp9E64

헨델 음악 중 새소리가 나는 게 하나 더 있죠. 오라토리오 <솔로몬> 1막 끝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합창’입니다. 헨델이 합창을 다루는 솜씨는 능수능란하지요. 헨델의 묘사 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 속을 깊게 파고드는 정밀화 같습니다. 한편의 매혹적인 풍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 ‘라스트콘서트’ 주인공처럼 요절한 피아니스트 ‘리파티’

바흐 피아노를 위한 파르티타 1번 Bb장조 BWV825


33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디누 리파티(1917~1950)…. 그의 마지막 연주회가 스위스 브장송에서 열린 1950년 9월 16일, 우리 나라는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남침, 국군의 후퇴와 보도연맹 학살, 미군 등 UN군의 개입과 인천상륙작전, 인민군의 후퇴와 보복학살, 국군의 부역자 색출 등 비극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모두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던 시절, 리파티가 임파선 종양이 악화되어 마지막 연주회 도중 쓰러진 사건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주 실황 녹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때 그 음악을 들을 수 있고, 60여년 세월의 거리를 뛰어넘어 그 시대를 다시 여행할 수 있습니다. 


리파티가 앵콜곡으로 바흐의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을 연주했던 그 리사이틀, 1부의 레퍼토리는 바흐의 파르티타 1번 Bb장조였습니다. 리파티가 마지막 순간까지 바흐 음악을 경외하며 온 마음을 다해 연주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르티타는 이탈리아말로 ‘모음곡’이란 뜻입니다. 바흐는 기악 모음곡을 쓸 때 언제나 6곡을 한 세트로 묶었습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6곡, 영국 모음곡과 프랑스 모음곡도 6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곡도 파르티타와 소나타를 합쳐서 6곡, 심지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6곡입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파르티타’라고 부른 이 피아노 모음곡도 6곡입니다. 6곡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조성과 기법을 선보이며 통일성을 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프치히 교회 음악감독으로 있던 1726년~1731년 사이, 바흐는 파르티타를 1년에 평균 한곡씩 차근차근 발표했습니다. ‘클라비어 연습곡’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파르티타, 바흐 자신이 악보 표지에 “애호가들을 마음 깊이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써 넣었습니다.

1번 Bb장조는 6곡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사랑스러운 곡으로, 요즘도 자주 연주 무대에 오릅니다. 프렐류드는 조용히 시작해서 푸가로 발전하고, 단조로 변화하며 풍성해지고, 점점 규모와 음량이 커진 뒤 끝납니다. 링크 1:40부터 빠르고 즐거운 알레망드(독일 무곡), 4:20부터 매혹적인 쿠랑트(‘달리다’란 말에서 유래한 프랑스 춤곡)입니다. 7:08부터 깊이 명상에 잠긴 듯한 장중한 사라방드(스페인 춤곡), 12:15부터 익살스러우면서도 기품있는 메뉴엣(3박자로 된 프랑스 궁정의 춤곡)입니다. 14:40부터 마지막 곡 지그(영국 춤곡)는 가장 유머러스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들으면 웬지 만화영화 <톰과 제리>, 작은 생쥐가 덩치 큰 고양이를 약올리고 혼내주는 우스운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http://youtu.be/EYMJ1a-GdJk (피아노 연주 디누 리파티)


바흐는 나이 41살 때인 1726년이 돼서야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판 인쇄가 비싸기는 했지만, 그 전에 만든 작품들도 얼마든지 출판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늦어졌군요. 그 진정한 이유는 “완벽에의 희망이었고, 바흐 자신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세바스찬 바흐>, 김원명 옮김, 경성대 출판부, p.175) 이전에 써 놓았던 작품을 고치고 다듬어서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출판을 보류해 왔다는 것입니다. 최초로 출판된 바흐의 작품, 바로 이 파르티타 1번 Bb장조입니다.   

1950년, 먼 나라의 독주회 무대에서 쓰러진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가 우리를 바흐 곁으로 안내합니다. 가장 규모가 작고 사랑스러운 이 곡에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들면 나머지 다섯 곡도 차근차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소개해 드릴 수 없지만, 바흐가 영국 신사를 위해 작곡했다는 6곡의 영국 모음곡, 제목의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우아하고 기품있는 6곡의 프랑스 모음곡도 모두 “듣는 이의 마음을 깊이 위로하는” 작품입니다. 

파르티타 6번 E단조 http://youtu.be/Zjv4ESS2LqY (피아노 타치야나 니콜라예바)
영국 모음곡 5번 E단조 http://youtu.be/kFi9rTNpQrg (피아노 안드라스 시프)
프랑스 모음곡 전곡 http://youtu.be/QeBz6BMQVOo (피아노 안드라스 시프)



 왕에 대한 낯간지러운 찬양의 배경이 있지만, 음악만은 최고

비발디 ‘세느강의 축제’ RV 693


런던의 템즈강에 헨델의 <물위의 음악>이 흘렀다면, 파리의 세느강은 비발디의 <세느강의 축제>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습니다. 헨델이 조지 1세를 위해 <물위의 음악>을 작곡할 즈음,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프랑스의 루이 15세(1710~1774)의 대관식을 위해 세레나타 <세느강의 축제>를 작곡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 루이 15세는 5살 때 왕으로 지목되어 친척들의 보호 아래 교육을 받았습니다. 12살 되던 1722년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와 이듬해인 1723년 대관식을 갖고, 비록 섭정이지만 정식 왕의 신분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발디의 이 작품은 루이 15세를 기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세레나타’는 오페라와 칸타타 중간쯤 되는 극음악을 가리켰습니다. 이 작품에는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가 ‘세느강’, ‘황금시대’, ‘덕’이라는 세 상징적 인물을 맡아 노래합니다. ‘세느강’이 강변에서 ‘황금시대’와 ‘덕’을 맞이하여 대관식이 열리는 베르사이유 궁으로 함께 갑니다. 세 인물은 루이 15세의 자비롭고 정의로운 품성과 깊은 신앙심을 찬양합니다. 도메니코 랄리의 대본은 어린 왕에 대한 낯간지러운 찬양 일색이지만, 비발디의 음악은 아주 근사합니다.

베르사이유의 루이 15세 대관식에 앞서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걸로 추정됩니다. 비발디는 직접 파리에 가지 않고,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를 통해 악보를 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헨델의 음악이 조지 1세의 권력보다 위대했듯, 비발디의 이 곡도 화려한 베르사이유의 루이 15세보다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미디어오늘에 게시되었다가 사라진 글 >




마음으로 노래하는 진정한 피아노 선율 - 바흐 2성 인벤션 & 3성 인벤션(신포니아)


이 곡은 피아노 연습곡이지만, 궁극적으로 작곡을 훈련하기 위한 작품입니다. 바흐가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 작곡했습니다. 프리데만은 1710년생, 이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20년, 열 살 난 프리데만이 이 곡을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바흐는 자필 악보에 다음과 같은 표제를 적어 놓았습니다. 

“솔직한 안내서. 이를 통해 클라비어 애호가, 특히 클라비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1) 2성부를 깨끗하게 연주하고 (2) 3개의 성부를 정확하고 쾌적하게 연주하고, (3) 이를 통해 좋은 착상을 얻을 뿐 아니라 그것을 무리 없이 전개할 수 있도록 하고, (4) 무엇보다 *칸타빌레 주법을 터득하여 작곡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끔 확실한 방법을 제공한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1723년


2성 인벤션 15곡, 3성 인벤션 15곡, 도합 30곡의 소품입니다. 3성 인벤션의 자필악보에는 ‘신포니아’(sinfonia)라고 바흐가 직접 적어 놓았습니다. 그냥 ‘다성 음악’이라는 뜻이지요. 앞에 링크한 2성 인벤션 13번 A단조처럼 비극적인 정서를 담은 곡도 있고, 14번 Bb장조처럼 귀에 익은 즐거운 선율도 있습니다.

http://youtu.be/O4xfapPKEN4 (피아노 글렌 굴드)

바흐는 연주 기법을 가르칠 때 음악적 취향을 고양시키고 창작으로 이어지도록 배려했습니다. 좋은 주제에 착상하고, 이를 잘 전개하도록 훈련하여 궁극적으로 ‘작곡’에 강한 흥미를 느끼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어려운 곡들을 기교 중심으로 익히게 하는 오늘날의 교육법과는 대조적이지요? 

‘칸타빌레’라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클라비어로는 화음이나 빠른 패시지밖에 연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바흐는 클라비어 연주에서도 ‘내면의 노래’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연주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진정한 음악이라는 뜻이지요.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작곡 전공자에게 참 좋은 교재겠군요. 그냥 음악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서 전체를 이루는지, 귀 기울여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전곡을 들어볼까요? 명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4번(5:10~8:11), 티없이 맑고 즐거운 5번(8:11~9:33), 톡톡 튀듯 달려가는 7번(40:48~41:51), 모두 좋지요?

 

http://youtu.be/hPxs3np5oJo (피아노 안드라스 시프)
바흐 2성 인벤션 & 3성 인벤션 http://youtu.be/ZII_OWJcUfY (피아노 글렌 굴드)

◎ 용어
* 칸타빌레(cantabile) : ‘노래하듯’ 연주하라는 뜻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쪽을 더 좋으신가요?
바흐 vs 헨델,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음악 경연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둘 다 1685년생, 동갑입니다. 장난꾸러기 조윤범씨가 퀴즈를 냈군요. “만약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이 결혼한다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누구일까요?” 답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아니라, ‘음악’입니다.^^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1권, p.25) 아무튼 두 사람 이전에도 음악은 있었으니, 이 별칭은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근대 음악도 없었다”고 할 만큼 영향력이 큰 위대한 작곡가란 뜻일 겁니다. 

 바흐와 헨델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우표.

헨델은 남자인데 왜 ‘어머니’라 부르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두 사람의 음악 성향이 달랐기 때문에 호칭도 달라진 것 아닐까요? 바흐는 엄격하게 정제된 기악곡과 신(神)에게 헌신하는 종교음악을 주로 쓴 데 반해, 헨델은 큰 무대에서 청중들을 열광시키는 오페라와 화려한 기악곡을 주로 썼습니다. 음식으로 친다면 바흐는 깊고 담백한 맛, 헨델은 양념 잘한 푸짐한 맛이라고 할까요? 바흐에 비해 헨델 쪽이 좀 더 부드럽게 느껴졌기에 ‘어머니’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으니 자식을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루터교 신자였지만, 살아 간 길은 사뭇 달랐지요. 헨델은 당시 바흐보다 훨씬 더 빛나는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와 영국 등 국제무대를 누비며 활약했고, 특히 1712년 영국에 정착한 뒤에는 영국인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헨델은 1726년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지금도 헨델이 영국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헨델은 대규모 연주 이벤트를 벌여 돈도 많이 벌었지요.

이에 비해 바흐는 독일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고,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에서 악장 노릇을 한 수수한 경력의 음악가였습니다. 가족을 굶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큰 돈을 벌어 본 적도 없지요.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발로 그친 것은 이러한 지위 차이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포르켈이 쓴 전기에 따르면 바흐는 헨델을 아주 존경하여 몇 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바흐는 동시대 작곡가 텔레만(그 또한 생전에 바흐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음악가였습니다)의 전언으로 헨델이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 알고 있었던 거지요. 주변 사람들도 두 거장이 만나서 기량을 겨루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이 너무 바빠서 그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영국 시민이 된 헨델은 고향 할레를 세 번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는 1719년, 런던에서 활동할 오페라 가수를 발굴하러 헨델이 독일에 왔습니다. 당시 바흐는 할레에서 불과 4마일 떨어진 쾨텐에 있었습니다. 바흐는 헨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일각의 지체도 없이 그를 찾아갔는데, “방금 그가 떠났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헨델이 10여년 뒤 두 번째 할레를 찾았을 때, 불행히도 바흐는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헨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을 보내서 그를 라이프치히 자택으로 정중히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유감스럽지만 일정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헨델의 세 번째 귀향은 1752~1753년 즈음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헨델을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는 바흐의 소망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헨델이 바흐를 못 봐서 아쉬워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바흐와 헨델은 말년에 시력을 잃은 채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군요. 바흐는 1749년 봄, 뇌출혈을 일으킨 뒤 급속히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이듬해 3월, 영국의 저명한 안과의사 존 테일러는 라이프치히에 온 김에 바흐를 진료했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수술은 실패했고, 바흐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채 그해 7월 28일 6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의사 테일러는 2년 후, 시력이 악화된 헨델을 수술해서 완전히 실명시키고 말았다는군요. 헨델은 남은 기간 투병하다가 1759년 4월 14일 74세의 나이로 사망, 웨스트민스터에 안장됐습니다. 같은 의사의 손에서 ‘음악의 아버지’와 ‘음악의 어머니’가 둘 다 실명했다니 참 씁쓸한 우연입니다. 

아래 도표를 보며 두 거장의 가상 음악 경연을 펼쳐 볼까요? 

연도(나이)요한 세바스찬 바흐
(1685 ~ 1750)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685 ~ 1759)
1703 (18세) 아른슈타트 교회 오르간 연주자,  
 성가대 지휘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 쳄발로, 
 바이올린 연주자
1711 (26세) 오르간을 위한 작품들, 교회 음악
 http://youtu.be/P9AS0Hpud18
 오페라 <리날도>, 런던 입성
 http://youtu.be/TUOiJ1_P0Ds
1717 (32세)<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 기악곡
 http://youtu.be/eWlfmepsUuQ
 <물위의 음악>
 http://youtu.be/4yurw5Cf4HY
1727 (42세)<마태 수난곡>
 http://youtu.be/M_LLFfFXaUA
 <아드메토> 등 오페라 작곡 전념
 http://youtu.be/09X4y6LgiTY
1739 (54세)쳄발로 협주곡들
 http://youtu.be/FF-p_RGVjUQ
 오르간 협주곡 <뻐꾸기와 나이팅게일>
 http://youtu.be/JpjWceljcFo
1742(57세)<골드베르크 변주곡> 
 http://youtu.be/N2YMSt3yfko
 오라토리오 <메시아>
 http://youtu.be/C3TUWU_yg4s
1749(64세)<푸가의 기법> (미완성)
 http://youtu.be/RDkJK7mWitI
 <왕궁의 불꽃놀이>
http://youtu.be/bDa3J2KJqxM

대부분의 헨델 작품은 작곡되고 초연된 날짜가 분명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시기 바흐의 작품들(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 시절 모두)은 정확히 언제 작곡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사람의 사회적 위상과 주목도가 그만큼 차이가 컸다는 증거지요.

바흐와 헨델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당시에 비해 많이 달라졌습니다. 후세 음악에 미친 영향은 아무래도 바흐 쪽이 훨씬 더 큰 것 같지요? 하지만 개인의 취향은 자유입니다. 두 위대한 작곡가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는지요?


아름다운 노래와 대사에 숨이 멎을 정도의 오페라
음악사상 최초의 오페라,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요즘 음악회장에 가면 연주 시작 전 “핸드폰 전원을 꺼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주의 방송이 나오지요? 음악사상 최초의 오페라 <오르페오>, 막이 오르면 음악의 상징인 ‘무지카’가 등장해서 바로 이런 멘트를 합니다. “제가 오르페오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뭇가지의 새 한 마리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도록, 또한 강둑의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토머스 포리스트 <음악의 첫날밤>*, 김병화 옮김, 황금가지, p.90) 400년 전 음악회장의 안내 멘트가 요즘 음악회장의 딱딱한 주의 멘트보다 훨씬 더 운치있고 예술적이지요?

트럼펫과 팀파니가 화려한 팡파레를 세 차례 연주합니다.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 만토바 공작의 도착을 알리고, 음악이 시작된다는 신호를 주는 거죠. ‘무지카’가 청중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저는 음악입니다. 어떤 괴로운 마음이라도 이 달콤한 액센트로 달래 줄 수 있지요. 열정에 가득찬 고귀한 마음에 불을 붙이는 예술입니다.” 이어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http://youtu.be/dBsXbn0clbU (호르디 사발 지휘)

(1막) 양치기와 요정들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사랑을 축하합니다. 다 함께 지상의 행복을 노래하고, 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바칩니다. (2막) 갑자기 요정 실비아가 외칩니다. “아아, 끔찍한 소식입니다.” 에우리디체가 독사에 물려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음악이 충격적으로 변합니다. 격한 흐느낌, 쓰라린 화음, 끔찍한 비탄의 선율이 이어집니다. “그대가 죽었는데 나는 숨을 쉬고 있는가?” 슬픔과 분노의 절정에서 오르페오는 어떤 인간도 가 보지 못한 곳에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저승에서 에우리디체를 구해 오든지, 아니면 함께 죽겠다는 것입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 음악의 힘으로 죽음을 뛰어넘어 불멸의 존재가 된 오르페오Orfeo(그리스말로 오르페우스Orpheus) 이야기입니다. ‘태양의 신’ 아폴론과 파르나소스 산의 뮤즈Muse(음악을 가리키는 music의 어원)가 낳은 오르페오, 그가 리라를 연주하면 동물이 따라왔고 나무와 바위가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는 물의 요정 에우리디체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전설적인 음악의 천재 오르페오가 주인공이므로 ‘최상의 음악’이 등장해야겠지요? 몬테베르디(1567~1643)는 이 작품에서 오르페오가 자기 이름에 손색없는 매혹적인 선율로 노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르페오>는 1607년 초연 당시 일종의 전위음악이었습니다. 아직 ‘오페라’라는 장르가 없었기 때문에 악보엔 ‘음악적 우화’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란 뜻이지요. 르네상스 가곡인 마드리갈*, 화려한 합창, 생기 있는 춤곡, 현악 · 리코더 · 트럼펫 · 트럼본 · 코르넷 등 이례적인 대편성의 기악 합주…. 당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모두 구사한 수준 높은 드라마, 결국 최초의 오페라가 된 것입니다. 1607년 2월 24일, 만토바의 빈첸초 곤차가 공작 저택에서 초연됐고, 200명 가량의 아카데미아 회원들이 객석을 메웠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

(3막)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체를 찾아 저승으로 떠납니다. 그는 죽음의 강에 이르러 뱃사공 카론을 설득합니다. “여기는 어둡군요. 강력한 혼령이여, 힘센 신이시여. 당신 없이는 아무도 저편 기슭에 건너갈 수 없습니다.” 카론의 대답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려는 자여,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죽음과 절망의 어둠,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게 가능할까요? 음악의 힘으로 내딛은 용감한 한 걸음, 오르페오는 카론을 감동시켜 강을 건넙니다. 왕비 페르세포네도 그의 음악에 매료되어 저승의 왕 하데스를 설득,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지상으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상으로 가는 길에 절대 에우리디체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막) 행복한 노래를 부르며 지상의 세계로 돌아오던 중, 오르페오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에우리디체는 잘 따라오고 있을까? 혹시 내가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는 결국 뒤를 돌아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여, 마침내 내가 그대를 보았구나!” 에우리디체는 다시 어둠 속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고통스런 작별을 짧게 노래합니다. “아아, 너무나 달콤한 모습이여, 너무나 쓰라린 모습이여!” 에우리디체는 사라지고 오르페오는 지상의 빛 속으로 밀려 올라갑니다. 비장한 합창이 울려 퍼집니다. “오르페오는 연옥을 정복했지만 자기의 열정에 정복당했네 / 영원한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는 오직 자신을 정복한 사람 뿐 / 덧없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하면 안 된다.” 

(5막) 망연자실한 오르페오가 “산도 슬퍼하고 돌도 우네” 노래합니다. 아폴론이 천상에서 내려와 오르페오를 하늘로 데려가며 말합니다. “에우리디체와 함께 영원히, 변치않는 별들의 조화 속에 머물라.”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트라키아의 여인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신도들을 시켜 오르페우스를 갈갈이 찢어 죽였습니다. 그가 디오니소스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아폴론을 더 존경했기 때문에 복수한 것입니다. 그의 머리는 레스보스로 떠내려가는 도중에도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레스보스의 여자들은 오랜 세월 오르페우스를 신(神)으로 섬겼습니다. 몬테베르디의 이 작품에서 오르페오는 하늘로 올라가 에우리디체와 함께 있는 걸로 돼 있습니다.

젊은 시인이자 만토바 궁정의 비서 알레산드로 스트리조가 대본을 썼습니다. “음악과 시(詩)를 어떻게 잘 녹여낼 수 있을까”란 근본적인 물음에 몬테베르디는 이 작품으로 대답했습니다. 초연 당시 음악에 감동한 만토바의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편지입니다. “연극은 공연됐고 모든 청중은 지극히 만족했다.” 카르멜회 신부 케루비노 페라리의 말입니다. “시의 내용은 아름답고, 그 형태는 더욱 아름다우며, 소리 내어 읊으면 최고로 아름답다. 음악은 자기 몫을 다하면서도 시와 정말 잘 어울린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노래와 대사가 있는 작품, 21세기의 우리들도 감동시킬 정도로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오페라입니다. 몬테베르디에 이어 글루크, 하이든 등 위대한 작곡가들이 ‘최상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이 작품에 도전했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도 오르페우스 전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마술피리를 불면 맹수들이 춤을 추고, 악당들이 착하게 변하고, 불과 물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마술피리>의 설정은 음악의 힘으로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에 닿아 있습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삶과 죽음, 사랑과 열정, 감정과 이성의 이야기입니다. 오르페오의 감정은 그의 이성을 이기지만, 그 승리의 댓가는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입니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체를 영원히 잃게 될 때, 청중들은 모두 오르페우스가 되어 함께 슬퍼합니다. 

세상에 나온지 400년이 지난 이 작품, 인류가 존속하는 한 언제나 살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르페오>가 만토바의 소수 귀족 집단인 아카데미아를 뛰어넘어 시간을 초월한 작품이 된 것은 오직 몬테베르디의 천재성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책, p.69) 몬테베르디가 만토바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작품에 대해 작곡자가 품었던 엄청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공작 전하의 수호별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고요한 은총의 빛으로 이 작품의 생명에 축복을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감히 바라건대, 전하의 은혜에 힘입어 이 작품이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같은 책, p.74)
 
*마드리갈(madrigal): 16세기 르네상스와 초기 바로크 시대의 노래. 이탈리아에서 태동하여 영국, 독일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17세기 오페라의 아리아로 발전했다. 

*<음악의 첫날밤>(토머스 포리스트 지음, 김병화 옮김): 이 글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들은 이 책을 참조했다.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헨델 <메시아>, 베토벤 9번 교향곡,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등 다섯 작품의 초연에 얽힌 이야기를 실증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오르페오>의 초연과 관련, ① 만토바 시절 몬테베르디는 업무가 과중했지만 보수는 열악했고 ② 초연된 장소는 아카데미 델라 인바기티(‘사랑에 빠진자’, ‘매혹된 자’라는 뜻)의 회합 장소로, 가로 8.5m 세로 11.8m의 아담한 방이었고 ③ 당시 귀족들의 음악 소양이 꽤 뛰어났기 때문에 이 작품을 잘 이해했고 ④ 만토바의 성악가가 모자라서 다른 지역에서 카스트라토를 ‘꿔 왔고’ ⑤ 남성 귀족들의 모임인 아카데미아의 성격상 출연진이 모두 남자였다는 점 등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오르페오>와 최초의 오페라를 겨루는 최고의 작품 - 카치니 ‘에우리디체’

최초의 오페라가 어떤 작품이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159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귀족 및 예술가 모임 ‘카메라타’(Camerata)에서 노래가 있는 드라마 <다프네>(Daphne)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 ‘최초의 오페라’로 부르기 어렵습니다. 악보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1600년 피렌체에서 초연된 <에우리디체>(Euridice)입니다. 프랑스 앙리 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작품으로, 오타비오 리누치니의 대본에 자코모 페리와 줄리오 카치니가 각각 음악을 붙였습니다. 이 작품을 최초의 오페라로 간주하고, 이 작품이 초연된 1600년을 바로크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려는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나 <에우리디체>는 몇 대의 류트와 하프시코드가 무대 뒤에서 반주하는 단조로운 모노디*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오페라’로 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7년 만에 선보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같은 소재를 다뤘지만, <에우리디체>와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모습을 보입니다. 곡 자체와 연주자의 규모, 시와 음악과 드라마의 유기적 결합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할 때 이 작품을 최초의 오페라로 보는 게 옳다고 여러 음악학자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만토바에서 초연한 <오르페오>에서 몬테베르디는 40대 가량의 다양한 악기를 동원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초창기의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통상 10-20명 정도 인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르페오>는 음악을 단순한 장식 수준에서 작품의 일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최초의 비중 있는 오페라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용숙 <몬테베르디>, 오페라교실 32, 네이버캐스트)
    
http://youtu.be/Ac4HEs6cAvo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가디너 지휘)

 

앞부분만 살짝 들어봐도 <에우리디체>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요? 17세기 초, 만토바와 피렌체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라이벌이었습니다. <오르페오>는 같은 스토리를 토대로 한 피렌체의 작품에 대한 만토바의 대답이었습니다. 페리와 카치니의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에서 희망의 신 스페란차(Speranza)로 바뀌어서 나옵니다.

“만토바의 <오르페오>는 피렌체의 <에우리디체>를 곁눈질했는데,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토머스 포리스트, 같은 책, p.66)

‘최초의 오페라’라는 영광된 지위를 다투는 두 작품, ‘음악의 천재’ 오르페우스를 주인공으로 최상의 음악을 담고자 했다는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 모노디 (monidy) : 단선율의 음악. 16~17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기악 반주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이든과 에스터하치의 지혜… 백 마디 말보다 한 곡의 음악이 주는 감동
교향곡 45번 F#단조 ‘고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집이 그리웠고, 아내가 보고 싶었습니다. 2월에 이곳에 왔는데 벌써 11월이 됐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은 새로 지은 에스터하차 궁전에 여름에만 머문다고 했습니다. 단원들은 여름 한철, 가족이 있는 아이젠슈타트를 떠나 이곳에서 저녁마다 공작을 위해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름이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헝가리 영토인 페르퇴드에 지은 이 궁전은 ‘동유럽의 베르사이유’라 할 정도로 웅장했는데, 에스터하치 공은 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궁전을 좋아한 나머지 좀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772년, 가을이 깊어가자 단원들은 가족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자칫 감봉 당하거나 해고 될까봐 공작에게 항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의 여름 궁전인 에스터하차. 프랑스의 베르사이유를 빼면 유럽에서 이만큼 장엄하고 사치스런 궁전은 없었다고 한다. /


‘파파 하이든’은 이런 분위기를 알아채고 새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를 마친 에스터하치 공과 신하들이 듣는 가운데 연주가 시작됩니다. 1악장은 F#단조, 서주도 없이 슬픔에 가득찬 선율이 터져 나오다니? 조금 이례적입니다. 2악장 아다지오와 3악장 메뉴엣은 부드럽고 평화롭습니다. 4악장, 원래의 조성인 F#단조로 돌아옵니다. 매력적인 피날레, 별로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끝날 것 같던 음악이 갑자기 멈추더니 느린 아다지오로 변합니다. (링크 3:05)

“어? 이런 건 처음 들어 보네?” 에스터하치 공은 바짝 귀를 기울입니다.

http://youtu.be/uICvLchS2kg (4악장, 프레스토-아다지오)

그런데 음악가들은 한 명 한 명 자기 파트 연주를 마치고 촛불을 끈 뒤 자리를 떠납니다. (링크 4:15) 호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바스가 차례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퇴장합니다.

에스터하치 공은 어리둥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

결국 모든 연주자가 떠나고 바이올리니스트 두 명만 남아 가냘픈 선율을 연주합니다. 음악이 끝나자 두 사람마저 촛불을 끄고 퇴장합니다.

에스터하치 공은 그제야 음악의 뜻을 알아차립니다. “음악가들이 모두 떠난다면 나도 떠나야겠군….” 

다음날, 에스터하치 공은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결국 그해 12월 6일 가족이 있는 겨울 궁전 아이젠슈타트로 모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칫 소요사태와 대량 징계로 번질 수 있었던 위기, ‘파파 하이든’의 재치로 평화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마지막 아다지오, 단원들이 자리를 뜨면서 연주하는 음악은 상냥하고 따뜻합니다. 인간 본성의 착한 측면을 자극하는 이 음악이 에스터하치 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마음을 담은 음악 한 곡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28살 때부터 58살 때까지 30년 동안 에스터하치 공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의 종이 아니라 충실한 ‘음악의 종’이었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의 궁전에서 그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어떤 게 감동을 주고 어떤 게 취약한지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고, 신경에 거슬리거나 방해할 사람도 없었다. 그랬으니 독창성을 발휘해야 할 밖에.” 

<고별> 교향곡이 초연된 에스터하차 궁전의 홀.

에스터하치 공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 하이든의 고유한 음악이 탄생했고 전 유럽이 그의 음악에 열광하게 된 것이지요. 하이든의 재능을 인정하고 창작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 에스터하치 공의 배려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하이든의 음악을 들을 때 에스터하치 공의 지혜를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지’ 오페라로 부자가된 극작가 게이와 리치의 이야기
헨델에게 굴욕을 안겨 준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

헨델의 동갑내기였던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1685~1732)는 1728년 런던에서 <거지 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18세기 런던의 거지와 창녀들의 삶을 익살스레 묘사한 이 작품은 영어로 돼 있고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전통 선율을 가져다 썼기 때문에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게다가 정부, 귀족 사회, 결혼 제도를 풍자하는 내용이라 관객들을 아주 유쾌하게 해 주었습니다.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날리던 헨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작품이지요. 흥행 성적만 보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거지 오페라>는 초연된 1728년 뿐 아니라, 18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입니다.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게이였고, 공연을 주선한 사람은 리치였습니다. 그래서 “게이는 리치해졌고, 리치는 게이해졌다”, 즉 “게이는 부자가 됐고, 리치는 즐거워졌다”는 말까지 유행했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아무래도 귀족과 식자층의 전유물이었죠. 존 게이는 이 작품으로 서민들에게 직접 다가섰고, 그것이 ‘대박’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치 풍자가 어찌나 신랄했던지, 당시 영국 총리는 이 작품의 속편격인 <폴리>의 공연을 금지했다는군요.

 
런던에서 공연중인 <거지 오페라> & 존 게이(1685~1732)

그런데 이 작품은 1727년, 헨델의 오페라 공연 때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을 비꼬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거지 오페라>에는 한 남자 맥히스를 놓고 두 여자 폴리와 루시가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으며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헨델의 오페라 <아드메토>에서 주역을 맡으려고 경쟁하던 두 소프라노가 공연 도중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싸운 사건을 풍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리허설 중 두 여자의 갈등이 심상치 않자 헨델은 아주 ‘공정하게’, 음표의 개수와 연주 시간이 완전히 똑같은 아리아 두 곡을 작곡하여 두 사람을 달래 주었지요. 그런데, 두 여자는 결국 공연 도중 서로 머리를 잡아 뜯으며 몸싸움을 벌였고, 청중들의 야유와 고함 속에 막이 내렸다고 합니다. 
     
“청중을 즐겁게 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내 작품이 그들을 변화시키길 원해.”
 
헨델의 말입니다. 그는 늘 오페라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1723년 <오토네> 연습 중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너무 어려워서 이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고 버텼답니다. 기존에 늘 부르던 노래와 차원이 달랐던 거지요. 헨델은 “그러면 창밖으로 집어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해서 소프라노를 굴복시켰다고 합니다. 헨델은 대중들이 새로운 취향의 작품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고양되기를 원했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대중들은 헨델이 원하던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고, 존 게이의 새롭고 즐거운 풍자극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거지 오페라>를 반짝 화제가 됐다가 사라진 값싼 유행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습니다.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글루크, 모차르트로 이어지는 오페라의 공식 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는 18세기 대히트 이후 잊혀졌지만 다른 경로(經路)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시인 김정환의 진지한 주장입니다. 

“대중은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 더 재미있는 것, 더 손쉬운 것을 찾고 있으며, 그 속에서 다시 대중들만 가능한 새로운 문화의 싹을 키워낸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문화의 싹은 진지한 예술가의 창조 정신과 만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중략) 진지한 예술은 그 싹을 키워내고 자기 것을 보태서 다음 시대의 더욱 우월한 예술을 창조해 낸다. 진지한 예술은 대중 예술을 수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질적인 영향력으로 규정짓는다. <거지 오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정환 <클래식은 내 친구>, 웅진출판, p.88~89) 

<거지 오페라>는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효시가 됐고, 정확히 200년 건너뛰어 1928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이 만든 <서푼짜리 오페라>의 모태가 됐습니다. 게다가 <마술피리>, <후궁 탈출> 등 모차르트의 위대한 징슈필에도 그 영향이 스며들었습니다. 다시 시인 김정환의 말입니다. 

“영국 귀족의 외제 취향에 맞서 중산층 및 노동 계층의 ‘영국 민족’적 취향을 이끌었던 이 오페라의 값싼 인기는 독일로 건너가 모차르트를 만나게 된다. 모차르트의 위대한 징슈필들은 <거지 오페라>의 성공에 자극되어 좀 더 ‘독일 민족’적인 오페라를 만들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김정환, 같은 책, p.89)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알려주는 아리아
헨델 오페라 ‘세르세’ 중 ‘라르고’

내 사랑하는 나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잎사귀여, 
운명이 네게 친절히 미소 짓길, 천둥, 번개, 폭풍이 
네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길, 바람이 너를 모욕하지 않길.
달콤하고 사랑스런 그대의 시원한 그늘.

보통 ‘라르고’라고 알려진 노래,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1738) 서곡에 이어 1막 첫머리에 나오는 아리아 ‘시원한 그늘’입니다. 한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에 다시 발견되어 헨델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됐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이탈리아의 한 악단이 연주하고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노래하네요. 천천히, 명상에 잠겨서 흐르는 이 아리아에 사람들은 간절함, 애틋함 등 다양한 감정을 투영하며 자그마한 위안을 받습니다. 이 아리아 하나만으로도 헨델은 인류에게 큰 선물을 한 것 같습니다.  오페라 속의 명장면은 아니겠지만, 언제나 잔잔한 감동을 주는 노래입니다.  

1738년 4월 ‘왕의 극장’(King's Theater)에서 초연된 <세르세>는 완전히 실패였습니다. 청중들은 이 작품을 외면했고, 겨우 5번 공연한 뒤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헨델은 기존 오페라 세리아와 달리 이 작품에 코믹한 요소를 넣었습니다. 페르시아 왕 세르세가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해결을 그렸는데, 여주인공 아마스트레가 남장을 하고, 아르사메네의 하인이 꽃장사로 변장을 하는 등 오해와 착각에서 빚어지는 코믹한 상황을 넣은 거죠. 

17세기 베네치아 오페라에서 간혹 사용했고 훗날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 <돈 조반니>에서도 나타나는 수법입니다. 하지만, 런던의 오페라 애호가들은 오페라 세리아는 시종일관 심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코믹한 요소에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 음악학자 찰스 버니는 이 작품이 오페라 작법의 기본 규칙을 어겼다고 말했습니다. “이 오페라의 대본 작가가 누구인지 찾아낼 수 없었지만, 헨델이 쓴 작품 중 최악 중 하나라고 아니할 수 없다. 대본이 취약할 뿐 아니라 비극과 희극, 심지어 소극(笑劇)까지 마구 섞어 놓았다.” 

기존의 오페라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지요? 헨델 시대의 오페라 아리아는 매우 길었습니다. 세 부분으로 된 다 카포 아리아가 주류였기 때문이지요. 가수의 기교를 맘껏 즐길 수 있고, 레코드가 없던 시절이니 같은 주제를 되풀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 오페라는 짧은 아리아 위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음악의 특징은 ‘응축’(Verdichtung), 즉 ‘불필요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한 음악적 에너지의 표현, 충만한 음악적 상징’이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응축’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 모차르트 오페라를 들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 강해근 옮김, 음악세계, p.132~136) 그렇다면 헨델이 <세르세>에서 선보인 간결한 아리아들은 모차르트가 보여준 오페라의 이상(理想)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대하고 화려한 아리아에 열광했던 당시 청중들은 이 작품이 싱겁다고 느꼈고,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세르세>는 <줄리오 체사레>와 함께 오늘날 가장 잘 연주되는 헨델의 오페라입니다. 엄숙한 내용에 코믹한 요소를 넣었고 아리아가 간결하다는 점이 헨델 당시와 반대로 오늘날 청중들에게 어필하기 때문이지요. ‘라르고’로 알려진 ‘시원한 그늘’은 원래 소프라노 카스트라토를 위한 노래지만, 오늘날은 카운터 테너, 알토, 메조 소프라노가 맡아서 부릅니다. 제목은 ‘라르고’인데 실제 악보에는 ‘라르게토’(조금 느리게)라고 써 있습니다. 서곡에 이어 ‘라르고’까지 들어볼까요? http://youtu.be/l25f4YOXg3I

1738년, 헨델의 오페라가 사양길에 접어들었을 때 나와서 오랜 세월 잊혀졌던 작품입니다. ‘라르고’, 이 한 곡 때문에 <세르세>라는 작품이 오늘도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기나긴 여정이 늘 아름답고 위대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어느 한 순간, 한 기억만으로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는 걸 이 아리아가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 용어

*다 카포(da capo) : ‘처음부터’ 되풀이 하라는 뜻.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하는 경우도 있고 ‘끝’(fine)라고 써 있는 부분까지 다시 하는 경우도 있다. 악보에는 약어로 D.C.라고 쓴다. ‘다 카포 아리아’는 이미 다 노래한 대목을 다시 한 번 부르는 형식의 아리아.



KBS FM 일기예보 배경음악이었다고?

헨델 하프협주곡 Bb장조 Op.4-6


햇살 아래 흐르는 시냇물처럼 유려하게 빛나는 헨델의 하프 협주곡, KBS-1FM의 시그널과 일기예보 배경음악으로 아주 친숙한 선율입니다. 가족이 다함께 식사할 때면 꼭 이 곡을 틀어놓는 동네 형님이 계십니다. 가난하지만 임금님 부럽지 않은 풍성한 식탁이겠지요? 
   
1736년 2월 19일, 런던 ‘왕의 극장’(King's Theater)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헨델의 작품 네 곡이 초연됐습니다. 그 멋진 연주회의 현장으로 함께 가 볼까요?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http://youtu.be/VmX-8TNgpTU이 중심 레퍼토리였고, 막간에 합주 협주곡 C장조 http://youtu.be/ZiAioQKrb0c, 오르간 협주곡 G단조 Op.4-1 http://youtu.be/5m48D1CZMMs, 그리고 이 하프 협주곡 Bb장조가 연주됐습니다. 헨델은 기나 긴 오라토리오의 막간에 합주 협주곡과 오르간 즉흥연주를 삽입해서 청중들을 즐겁게 했는데, 이 유명한 하프 협주곡은 <알렉산더의 향연>이 초연되던 그날 명 하피스트 파엘이 연주했습니다. 

원래 ‘류트 또는 하프를 위해 쓴’ 이 곡을 헨델은 오르간 협주곡으로 개작, 1738년 오르간 협주곡 첫 묶음 Op.4의 마지막 곡으로 출판했습니다. 이 곡을 오르간 협주곡 중 하나로 간주한다면 <뻐꾸기와 나이팅게일>보다 더 유명한 곡이겠만, 요즘은 하프로 더 자주 연주합니다.

스페인 출생의 하피스트 니카노르 자발레타(1907~1993)의 1967년 녹음은 세월이 흘러도 단연 돋보입니다. 그의 연주를 들은 라벨은 “단지 하프 연주자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라고 격찬했지요. 한 주제가 여러 악장에서 변형되어 나타나는 기법을 선보인 독특한 작품으로, 화사한 1악장의 주제가 느린 2악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http://youtu.be/fc-Vz9l0U0M (하프 : 니카노르 자발레타)


하프 음악에 조금 더 매료되고 싶은 분들에게 자발레타가 연주한 헨델의 하프 곡 하나 더 추천합니다. 그가 녹음한 앨범에 함께 들어 있는 ‘주제와 변주곡 G단조’입니다. 헨델 작품이라는데, 불행히도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단서가 붙어 있네요. 하지만 고요하고 기품있는 하프의 아름다움이 짙게 느껴지는, 멋진 곡입니다. 이게 헨델 작품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작곡한 걸까요? http://youtu.be/dJFInFsTQjk



‘오페라보다 더 오페라다운’ 헨델의 오라토리오

헨델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귀환’


영어로 된 풍자 오페라 <거지 오페라>(1728)가 선풍을 일으킨 뒤, 팬들은 이탈리아 말로 된 헨델의 오페라를 비교적 어려운 음악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1735년 <알시나>의 성공을 고비로 런던의 오페라 열기는 점점 시들해졌습니다. 이 무렵, 정치 문제로 귀족들이 헨델의 오페라 극장 운영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헨델은 1,200 파운드의 빚을 진 채 파산합니다. 1730년대 중반부터 헨델은 오페라보다 좀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 작곡에 점점 더 집중하게 되지요. 

‘오라토리오’(oratorio)는 ‘기도 드리는 장소’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입니다. 오라토리오로 장르를 바꾸는 건 헨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리아, 레시타티보, 합창으로 이뤄진 오라토리오는 그가 평생 작곡해 온 오페라와 음악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고, 늘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그리스 신화의 영웅 대신 성서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만 하면 됐습니다. 헨델은 비용이 많이 드는 오페라보다 효율적인 오라토리오로 작곡의 중심추를 옮기게 됩니다. 오라토리오는 이를테면 ‘영어로 된 종교적 오페라’로, 대중들에게 한결 쉽게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헨델은 어떤 형태로든 오페라를 떠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지요. 


 

http://youtu.be/iTJ41_83llQ  / 무대에 오른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1739년 ‘왕의 극장’에서 연주된 <사울>은 헨델의 어느 오페라보다 더 극적입니다. 3대의 트럼본, 카리용(종), 그리고 런던탑에서 꺼내 온 거대한 팀파니를 사용하여 음악적 긴장감을 높였습니다. 오라토리오 <사울> 중 유명한 3막 ‘장송 행진곡’에 이 거대한 팀파니가 등장합니다. http://youtu.be/22BdaFiInrc 요즘 바로크 시대 음악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유럽에서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아예 오페라로 간주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합니다. 


헨델의 묘사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 속에 파고드는 정밀화 같습니다. 오라토리오 <솔로몬>(1749) 1막 끝부분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합창’은 자연을 묘사한 한편의 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3막의 거대한 8부 합창 “쨍쨍거리는 칼들의 부딪침과 종마들의 울부짖음”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무대에 올리기 적합한 음악입니다. <솔로몬>의 3막 첫 장면에 나오는 ‘시바 여왕의 귀환’은 아주 친숙한 곡이지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오보에 연주자 알브레히트 마이어가 열심히 연주하며 지휘합니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씨는 이 분이 세계 최고의 오보이스트라고 단언하는군요. (유정우 등 7명 공저 <행복한 클라시쿠스>, 생각정원, p.163~p.167) http://youtu.be/-TGKJ9MgCOQ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1747) 중 합창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는 베르디의 <아이다>에 나오는 ‘개선 행진곡’ 만큼이나 시각적입니다. 전장에서 돌아오는 용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http://youtu.be/Yeqso4CX2f4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무대 장치만 생략한 ‘오페라 갈라’ 연주와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겠군요. 

<세멜레>(1744)는 오라토리오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사용한 영어 오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대본을 쓴 헨델의 친구 찰스 제넨스는 이 작품을 가리켜 “오라토리오가 아니라 음란한 오페라다. 영어로 된 오페라일 뿐인데 바보들은 이를 ‘오라토리오’라 부르며, 코벤트 가든 같은 곳에서 연주한다”고 험한 말로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적 연출로 무대에 올린 걸 보니까 ‘음란한 오페라’란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군요.^^  http://youtu.be/mmR6ewx387w



평화를 상징하는 야외음악 사상 최고의 걸작 - 헨델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메뉴엣 1, 2 http://youtu.be/bDa3J2KJqxM 
환희(La Rejouissance) http://youtu.be/S5ov8iBDZp4 
(스타니슬라브 스크로바체브스키 지휘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자꾸 혼자 움츠려드는 마음, 벌떡 일어나 불꽃놀이 구경이라도 갈까요?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연인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환상적인 불꽃이 펼쳐질 때 멋진 음악이 함께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런던 템즈 강변의 불꽃놀이 현장, 불꽃의 폭음과 함께 호른, 트럼펫, 팀파니, 드럼이 연주하는 우렁찬 메뉴엣이 밤하늘에 펼쳐집니다. 목관과 현악기가 우수어린 메뉴엣을 연주하면 달콤한 밤이 깊어갑니다. 곧 사라져 버릴 불꽃이지만 잠깐의 환희, 그 추억은 오래 남겠지요.     

한쪽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할 때 다른 한쪽에선 이권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군요. 인간이란 동물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전쟁을 벌였습니다. 1740년부터 8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1748년 10월, 액스 라 샤펠(Aix la Chapelle, 지금의 독일 아헨) 조약으로 마무리됩니다.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평화 성립을 기념하는 축제를 위해 작곡됐습니다. 


 


영국 왕실은 이듬해 봄, 거대한 불꽃놀이를 계획하고 헨델에게 이를 위한 음악을 의뢰했습니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 헨델은 화려한 축제 분위기에 맞게 트럼펫 9대, 호른 9대, 오보에 24대, 파곳 12대, 팀파니 세 쌍, 작은 북 두 개 등 57명의 엄청난 악단을 위해 5악장으로 된 거창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헨델의 새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가 엄청났던 걸까요? 축제를 일주일 앞두고 런던 시내 스프링 가든에서 예행연습이 열렸는데 12,0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마차가 뒤엉겨서 3시간 동안 꼼짝도 못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불꽃놀이 축제를 하면 교통이 엉망이 되지요? 떠들썩한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건 동서고금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축제 당일인 4월 27일, 그린 파크에서 열린 축제는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나 봅니다. 먼저,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중 ‘서곡’이 근사하게 연주됐고, 이어서 101발의 축포가 울려 퍼졌습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축포에 이어 지체없이 불꽃놀이를 시작해서 하늘에 대성당 무늬를 그려야 했는데, 모양이 엉망이 돼 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불꽃이 엉뚱한 데로 튀어서 행사장 오른쪽에 있던 건물에 불이 붙어 버렸습니다. 불꽃을 담당한 세르반도니는 이성을 잃고 마구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헨델은 “저 건물의 불꽃이나 하늘의 불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단원들을 진정시키고 의연히 음악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불꽃놀이는 지리멸렬해서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하지만 헨델의 새로운 음악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결국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음악사상 야외 음악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헨델에게 마지막으로 화려한 성공을 안겨주었습니다. 축제가 끝난 뒤 헨델은 이 곡의 현악기 파트를 보강하여 연주회용 음악으로 개작했습니다. 헨델은 <평화의 찬가>를 작곡, 불꽃놀이 축제 이틀 전 성제임스 궁전에서 연주했습니다. 이 또한 전쟁 종결과 평화를 축하한 음악이었죠. 이미 64살이 된 헨델, 3년 뒤에는 완전히 실명하여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지요. 

고귀한 음악은 그 시대를 향해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원으로 가는 길을 가리킵니다. 평화에 굶주린 사람들이 지금도 세상에 넘쳐납니다. 저 또한 평화가 그립습니다. 전쟁의 종결을 축하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작은 평화가 우리 곁을 찾아올 때마다 축하의 불꽃놀이를 하며 함께 이 곡을 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군요. 

2012년 BBC 프롬스에서 이 곡을 헨델 당시의 악기로 연주했습니다. 헨델 음악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존경과 열정이 짙게 느껴집니다. 1749년, 그 옛날의 불꽃놀이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듯합니다. http://youtu.be/fNqJ8mED1VE 맨 처음 ‘서곡’은 드럼의 트레몰로로 장중하게 시작, 경쾌한 알레그로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곡 ‘부레’(Bourrée)는 프랑스 풍의 빠른 춤곡입니다. 세 번째 곡 ‘평화, 시칠리아노 풍으로’는 평화를 예찬하는 노래로, 귀에 익은 선율입니다. 네 번째 곡 ‘환희, 빠르게’와 마지막 곡 ‘메뉴엣(Menuet) 1&2’는 불꽃놀이가 무르익어 갈수록 점점 더 웅장하게 하늘을 수놓습니다.



합창 음악의 백미 ‘할렐루야’를 들어보셨나요? -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


1730년대 중반 런던 오페라가 침체에 빠진 뒤 헨델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사이에서 좌고우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흥행은 계속 부진했고, 헨델이 속한 오페라단 ‘제2 아카데미’는 1737년 문을 닫게 됩니다. 그 무렵, 설상가상으로 헨델은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어 걷거나 말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예전처럼 빨리 작곡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모차르트의 표현대로, “헨델은 한번 치기로 마음먹으면 천둥번개처럼 칩니다.” 헨델은 초인적인 의지로 되살아나, 오라토리오 <메시아>(1742)로 단번에 재기에 성공합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서곡, 레시타티보, 아리아 등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합창만은 달랐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합창의 역할이 미미했지만, 헨델의 오라토리오에서 합창은 자주 나올 뿐 아니라 극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헨델의 최고 걸작 <메시아>는 극적인 재미는 없지만, ‘헨델이 영국에서 배운 가장 큰 깨우침’인 합창 음악의 숭고한 세계를 한껏 보여줍니다. 

  
http://youtu.be/C3TUWU_yg4s (할렐루야)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할렐루야’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합창 음악의 백미입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니, 크리스트의 왕국이 이 땅에 이뤄졌네. 왕 중의 왕, 그의 통치는 영원하리라!” 이런 가사 때문에 연말이면 세계 곳곳의 교회마다 울려 퍼지는 노래입니다. 트럼펫과 팀파니의 우렁찬 포효가 합창과 함께 어우러지는 클라이맥스, 인간 세상이 구원의 빛으로 가득 찬 그 순간의 환희를 거침없이 노래합니다. 

이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될 때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지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가 공연되던 중, ‘할렐루야’ 합창에서 “왕 중의 왕”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영국 왕 조지 2세가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관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지 2세가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고 그를 맞이하려고 청중들이 모두 일어났는데, 마침 그 때 ‘할렐루야’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서곡과 전체 3부, 53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삶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라, 구약의 예언에 따른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하는 1부, 메시아의 강림과 수난과 속죄를 다룬 2부, 예수의 부활과 신에 대한 찬가인 3부로 이뤄져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2부의 마지막인 44번째 곡으로, 음악을 최고조로 고양시키며 청중들을 뜨거운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메시아>는 1741년 더블린의 초대에 응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찰즈 제넨스(Charles Jennens, 1700~1773)는 ‘성서 모음’(Scripture Collection)이라는 대본을 만들어 헨델에게 주었습니다. 극적인 재미는 없지만 헨델에게 폭넓은 감정 표현의 스펙트럼을 제공한 대본이었습니다. 제넨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습니다. “헨델이 그의 재능과 솜씨를 기울여 이전의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쓰게 되기 바랍니다. 이 대본의 주제가 다른 모든 주제를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바로 <메시아>가 됐습니다. 종교적인 주제였지만 음악 자체는 특별히 종교적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훌륭한 여흥거리”라고 한 제넨스의 말은 본질을 꿰뚫은 것이었습니다. 

헨델은 Op.6의 합주협주곡 12곡을 한 달 만에 다 쓸 정도로 작곡 속도가 빨랐습니다. 그런데 총보 354페이지나 되는 대작 <메시아>를 헨델은 1741년 8월말에 착수, 3주만에 완성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지요? 이 작품을 쓸 동안 헨델은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했다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나 깊은 감동에 사로잡혀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곤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헨델은 “‘할렐루야’ 합창 부분을 작곡할 때 하늘이 열리며 위대한 신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습니다. 헨델이 무서운 열정과 집중력으로 이 작품을 썼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의 헨델 기념비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닐 음악홀’(Neal's Music Hall)의 자선 음악회에서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신문 <포크너>지는 “청중들의 기쁨과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과 귀를 사로잡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격찬했습니다. 청중이 몰려들어 극장이 매일 초만원을 이루자 신문에서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부풀린 치마를 입고 오지 말 것”을 여성들에게 당부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런던에서 공연됐을 때 일반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극장에서 공연한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네요. 헨델은 ‘새로운 종교 오라토리오’라고 홍보해서 이러한 비난을 피해 가려 했지만, 일반인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메시아>에는 크리스마스 때 거리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합창이 하나 더 나오지요. ‘우리에게 아기 나셨네’, <메시아>의 12번째 곡입니다. “우리에게 아기 나셨네, 우리에게 아들 오셨네. 그의 어깨에 나라가 있네. 그의 이름은 멋진 지도자, 전능한 신,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자!” (이사야서 9장 6절) 화려한 푸가를 자유자재로 구사, ‘할렐루야’와 함께 합창 음악의 기쁨을 한껏 맛보게 해 줍니다. http://youtu.be/LFBIJgkj_-g 

<메시아>를 통해 헨델은 완전히 재기했습니다. 헨델은 이 작품을 32차례나 직접 지휘, 과거의 명성을 단숨에 회복했습니다. 자선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당시 한 평론가의 말입니다.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키웠을까!”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쓰러졌습니다. 헨델은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병상에 누웠고, 1주일 뒤 74살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됐습니다. 

바흐와 모차르트 등 위대한 천재는 세상을 떠난 뒤 대중들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헨델의 인기는 음악사에서 한 번도 식어 본 적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규모는 헨델이 세상을 떠난 뒤 점점 커져 갔습니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등 후배 작곡가들은 근대적인 관현악과 합창을 활용, <메시아>를  편곡했습니다. 유진 구센스 경은 모차르트의 편곡본에 호른, 트럼본, 트라이앵글, 심벌즈, 하프 등 여러 악기를 추가, 더욱 웅장하고 화려한 편곡본을 내놓았습니다. 

흔히 연주자의 규모가 가장 큰 작품으로 말러의 <천인>(千人) 교향곡을 꼽지요? 교향악단과 어른 합창, 어린이 합창까지 포함,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연주한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그런데, 1791년, 하이든이 런던에서 목격한 헨델 음악 축제 때 이미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등장해서 <메시아>를 연주한 바 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낙소스북스, p.115) 게다가 1859년 헨델 서거 100주년 축제 땐 500개의 오케스트라, 5,000명의 합창단이 모여서 헨델 음악을 앞다투어 연주했고, 9만 명에 육박하는 청중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천인> 교향곡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연주자가 <메시아>를 연주했을 테니, 어마어마했겠지요? 

하지만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수백명의 합창단의 물량공세는 오히려 음악적 감동을 반감시킨다. 헨델 작곡 당시의 소규모 오케스트라 편성과 작은 합창단을 되살린 소박한 원전 연주를 들어보면 오히려 <메시아>에 담긴 가사의 의미가 더욱 아름답게 마음에 새겨짐을 느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용숙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 샘터, p.113)

런던에서 <메시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하이든은 “직접 들어보기 전에는 헨델 음악의 위력을 절반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이든은 헨델의 <메시아>에서 영감을 받아 최대 역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썼습니다. 베토벤은 “헨델의 음악은 진리 그 자체다. 그는 모든 작곡가들 중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고, 대화 도중에 헨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무릎을 굽히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헨델의 비문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났던 음악가, 그의 음악은 단순한 소리를 뛰어넘은 감성의 언어였고, 인간의 수많은 열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마저 모두 초월한 것이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나요?

글루크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중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사랑하는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이 비탄, 그대 없이 어디로 갈까?
에우리디체! 나는 영원히 그대의 참된 사랑!
오 하늘이시여, 대답해 주세요,
어둠 속을 헤매는 나, 땅에도 하늘에도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으까요? 죽음마저 초월한 사랑의 힘을 그린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1762년 10월 빈에서 초연됐습니다. 최초의 오페라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나오고 150여년이 흐른 뒤 글루크가 같은 소재의 오페라에 도전했군요. 이 아리아는 3막, 에우리디체를 저승에서 구해 오다 실패한 오르페우스가 비탄에 잠겨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원래 카스트라토가 불렀지만 요즘은 카운터 테너나 메조 소프라노가 부릅니다.  

오르페우스는 신화 속 인물인지 실재 인물이지 애매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음악의 신(神) 아폴론의 아들로 여겨졌고,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물의 요정이었던 에우리디체를 만나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한 쌍이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숲에 놀러갔던 에우리디체가 독사에게 물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http://youtu.be/C1B85UQT4AY (메조 소프라노 자넷 베이커)


(1막) 사랑하는 에우리디체의 시신이 꽃에 덮여 있습니다. 비탄에 잠긴 오르페우스 주위에서 양치기와 요정들이 애도의 춤을 춥니다. 큐피드가 나타나 저승에서 에우리디체를 데려오라고 노래합니다. 다만, 이승으로 돌아올 때 에우리디체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조건입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를 찾아 저승으로 갑니다. 

(2막) 분노의 정령들이 저승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자 이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이 펼쳐집니다. 지옥의 신 하데스와 복수의 신 네메시스마저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감동합니다. 그는 에우리디체를 다시 만납니다.  

(3막)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 오르페우스가 아무 말도 없고 자기를 돌아보지도 않자 에우리디체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노래합니다. 에우리디체의 비탄에 마음이 찢어진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봅니다. 에우리디체는 다시 저승으로 사라지고, 지상에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와 함께 있기 위해 자살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한 큐피드가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려내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합합니다.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는 모차르트를 질시했던 살리에리보다 먼저 빈 궁정 악장을 지낸 작곡가입니다. 그는 파리 청중들을 열광시켰고 로마 교황청의 ‘황금박차 훈장’을 받으며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대중스타였던 카스트라토의 묘기 경연장 같았는데, 글루크는 드라마의 질서를 강조하여 오페라 개혁에 나섰습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5막으로 되어 있었는데, 글루크는 스토리를 좀 더 긴밀하게 압축해서 3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오페라 개혁의 일환이었던 거죠. 민중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그의 오페라들이 프랑스 혁명을 앞당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몬테베르디 작품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아폴론의 손에 이끌려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에우리디체와 함께 별이 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반면, 글루크의 이 작품은 에우리디체가 되살아나 지상에서 두 사람이 결합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페라에서 즐거운 결말을 요구한 당시 궁정의 관행을 따른 것이지요. 원래 신화는 오르페우스가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 손에 갈기갈기 찢어져 죽는 처절한 비극인데, 몬테베르디와 글루크는 청중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결말을 조금 바꾼 셈입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글루크의 ‘극도로 섬세하고 완벽한 선율’을 찬양하고,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적하며 그를 위대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 오페라는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대의 관례와 빈 궁정이 해피엔딩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에우리디체를 하데스에게 돌려보내고 오르페우스가 절망으로 갈갈이 찢어져 죽게 했을 것”입니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 강해근 옮김, 음악세계, p.68~69) 

오르페우스 얘기를 하니까 ‘모르페우스’가 떠오르네요. 모차르트는 자기 음악에 사람들이 감동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스스로 ‘모르페우스’(Morpheus)라 부르기도 했지요. 그는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피리를 불면 사나운 짐승들이 춤을 추고 악당들이 착하게 바뀌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불과 물의 시련도 음악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바로 오르페우스의 전설과 통하는 거지요. 오르페우스가 저승에서 에우리디체를 데려올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한 것도 <마술피리>의 타미노 왕자가 겪는 ‘침묵의 시련’을 연상시킵니다. 글루크의 이 오페라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의 ‘모르페우스’는 6살 꼬마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 시작했군요.

모차르트의 위대한 오페라들을 알고 있는 지금, 글루크의 오페라는 옛날 음악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차르트는 글루크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모차르트는 1780년대 초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글루크의 독일어 오페라 리허설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보았습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모차르트는 글루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글루크의 선율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같은 책)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에 나오는 돈나 안나의 아리아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특히 끝부분은 글루크의 이 아리아와 분위기가 아주 비슷합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중 돈나 안나의 아리아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http://youtu.be/dAPg4v7SazQ  모차르트는 오페라에 극적 질서를 부여한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을 진전시켜, 음악의 혼이 드라마를 이끌고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시(詩)는 언제나 음악에 순종하는 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음악의 천재 중 가장 옛 사람인 오르페우스, 많은 작곡가들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최고의 음악 천재를 주인공으로 최고의 오페라를 쓰겠다는 충동, 위대한 작곡가라면 한 번 쯤 가져 봄직한 꿈이겠죠? 오페라의 태동기에 나온 페리와 카치니의 <에우리디체>(1600),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우스>(1607), 하이든의 <철학자의 영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1791), 그리고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가들이 오르페우스라는 주제에 도전했는데, 그 중 글루크의 이 작품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오페라에는 아주 아름다운 음악이 하나 더 나오지요. 2막, 저승에서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자 펼쳐지는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입니다. http://youtu.be/0GF46cFVKmM (플루트 장 피에르 랑팔) 현악합주와 플루트가 연주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선율입니다. 

사랑의 힘과 음악의 힘, 어느 쪽이 더 위대할까요? 알 수 없지요. 사랑의 힘으로 음악은 강렬해지고 음악의 힘으로 사랑은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에게 음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신에게 보내는 축복과 아픔은… 하이든 ‘살베 레지나’ G단조


20대 초반의 하이든에게 첫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생계를 위해 테레제에게 음악을 가르쳤는데, 어느새 깊은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입니다. 그런데, 테레제의 부모는 그녀를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이든의 가슴앓이는 말도 못 했습니다. 그녀도 하이든을 좋아했지만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1755년 수녀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공식 서원식을 치릅니다. 하이든은 테레제의 수녀 서원식을 위해 <살베 레지나>(성모여, 우리를 구하소서) G단조를 작곡했고, 1756년 5월 12일 직접 지휘했습니다. 
  
모든 게 전능한 신의 뜻임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택한 성스러운 길을 축복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신의 품으로 보내는 하이든의 아픔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녀에게 바치는 축하의 음악이지만 그녀의 마음도 하이든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이 곡은 젊은 그들에게는 차라리 <레퀴엠>과 같았을 것입니다. 눈물을 속으로 가라앉히고 의연한 동작으로 지휘하는 젊은 하이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이든은 이 곡의 악보에 1756년이라고 날짜를 써 넣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이 작품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 말입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28)


‘교향곡의 아버지’ 요젭 하이든(1732~1809)은 어릴 적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노래를 좋아했지요. 하이든은 8살 때 슈테판 성당 소년 합창단(지금의 빈 소년 합창단)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배웠습니다. 그는 고음역의 수석 독창자가 됐고, 17살 때에는 그의 노래 실력에 감탄한 교장 선생님의 제안으로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자 성악가)가 될 뻔 했습니다. 

1741년 빈 슈테판 성당에서 열린 비발디(1678~1741)의 장례식에서는 9살 하이든도 다른 단원들과 함께 노래했습니다. 바흐(1685~1750)가 세상을 떠날 무렵, 18살 하이든은 변성기가 와서 슈테판 성당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요젭 하이든은 이제 노래하는 게 아니라 꽥꽥거리는군” 퉁명스레 말했다고 합니다. (같은 책, p.19) 아직 어린 하이든은 눈앞이 캄캄했겠지요. 그는 혼자 생계를 해결하고 음악 공부도 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이 됐습니다. 이렇게 바로크 시대는 지나고 음악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훗날 하이든의 회상입니다. 

“목소리가 변성기에 이른 뒤, 나는 장장 8년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필요에 의해 일상의 빵을 벌어야 하는 비참한 사정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수많은 천재들이 망가지곤 했다. 내게도 똑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밤을 새워 작곡에 대한 열정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내 변변찮은 업적도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행히 포르포라, 메타스타지오 등 당대의 거장을 만나 제대로 작곡을 배울 수 있었고, 그들의 소개로 글루크, 바겐자일 등 중요한 작곡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법, 포르포라는 하이든을 고용하여 제자들 교습 때 피아노 반주를 시켰고, 여름 휴가를 보낼 때 젊은 하이든을 시종처럼 부려먹으며 까다로운 일을 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하이든의 회상입니다. “포르포라는 전적으로 얼간이, 멍청이인데다가 행실이 개차반인 불한당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기꺼이 참아냈다. 노래와 작곡과 이탈리아어를 배웠으니 그에게서 얻은 게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같은 책, p.25)


 

http://youtu.be/fPA2yqh9iFU


1750년대 중반부터는 사정이 좀 나아졌습니다. 수녀원 성당 등 여러 곳에서 지휘했고, 오르간을 연주했고, 특히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한 건반악기 소나타와 삼중주는 대부분 교습용 교재로, 제자들의 능력에 맞춰서 작곡한 것입니다. (같은 책, p.27) 테레제를 위해 <살베 레지나>를 작곡한 이듬해인 1757년, 25살 하이든은 귀족 모르친 백작의 궁정 음악감독이 됐습니다. 드디어 마음껏 작곡하는 일이 공식 임무가 된 것입니다. 한 해 동안 10곡이 넘는 교향곡, 그리고 건반악기 독주곡과 삼중주, 사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기악곡을 썼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하이든은 테레제가 수녀원에 들어간 5년 뒤인 1760년, 그녀의 언니 마리아 안나와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랑했던 테레제와 가장 닮았기 때문에 마음이 끌린 걸까요?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합니다. 동생 테레제와는 작별이 불행이었지만 언니 마리아와는 만남이 불행이었군요.

하이든은 젊은 시절 고생을 했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쾌활한 청년이었고, 그의 이러한 온화하고 유쾌한 품성은 평생 음악으로 표출됐습니다. 또한, 그는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담고 있는 <살베 레지나>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바로크 시대가 끝나고 고전주의 시대가 시작할 무렵의 풍경입니다. 

하이든 <살베 레지나> 전곡 http://youtu.be/dHLzF9aV07s
 
(라슬로 헬타이 지휘, 아르고 채임버 오케스트라 연주)



내 음악이 누군가에게 아침이 되어주고 저녁이 되어 준다면…

하이든 교향곡 ‘아침, 점심, 저녁’


바다를 처음 보았습니다. 1791년 첫날, 하이든은 런던을 향해 도버해협을 건넜습니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습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갑판에 서서 바다라는 ‘거대한 괴물’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이든은 28살 때부터 그때까지 30년 동안 에스터하치 가문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습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인 아이젠슈타트와 에스터하차 궁전(에스터하치 공의 여름궁전)을 떠난 적이 별로 없었던 그는 늙어서야 바다를 처음 본 것입니다. 

하이든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공*이 떠올랐겠지요? 그를 모신 추억은 그때까지 하이든의 생애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공작은 하이든이 하는 일에 흡족해 했습니다. 1776년, 당대 오스트리아 문화와 사교계의 인명록인 <오스트리아의 학자>에 실릴 글에서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가문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그들을 섬기면서 살다가 죽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하이든은 ‘음악의 종’이었지 ‘귀족의 종’은 아니었습니다. 외부 세계와 고립된 상황은 오히려 그의 독창성을 보장해 주었고, 많은 곡을 만들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이 되어 주었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의 궁전에서 그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어떤 게 감동을 주고 어떤 게 취약한지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고, 신경에 거슬리거나 방해할 사람도 없었다. 그랬으니 독창성을 발휘해야 할 밖에.”

에스터하치 공작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 하이든의 고유한 음악이 탄생했고 이제 전 유럽이 그의 음악에 열광하게 된 것이지요.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인 <아침>, <점심>, <저녁>은 에스터하치 가문과 함께 보낸 긴 세월을 시작할 때 쓴 작품입니다. 1761년 갓 취임한 부악장 하이든은 “하루의 네 시간인 아침, 정오, 저녁, 밤중을 주제로 음악을 써 보라”는 파울 안톤 에스터하치 공의 요청에 화답, 열성을 다해서 이 교향곡들을 작곡했습니다. 현악기와 목관악기 독주 파트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바로크 시대의 ‘합주 협주곡’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지만, 4악장으로 구성된 ‘고전파’ 교향곡의 맹아를 보여줍니다.


 

6번 D장조 <아침> http://youtu.be/fdvqofWDWKo


하이든이 평생 만든 104곡의 교향곡 중 <아침>, <점심>, <저녁>부터 92번 <옥스포드>까지, 90곡 가까운 곡이 에스터하치 시절에 나왔습니다. 초기 교향곡에서 그가 사용한 형식은 훗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첫 자식들, <아침>은 해돋이를 묘사하는 느린 서주로 시작하여 상쾌한 플루트 독주가 첫 주제를 연주합니다.


7번 C장조 <점심> http://youtu.be/u1ZhFVc2X7s <점심>은 밝은 대낮에 걸맞게 악기편성과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합니다. 오페라의 한 대목 같은 2악장을 포함, 모두 5악장으로 돼 있습니다.  <저녁>은 여름의 폭풍을 묘사한 4악장이 특히 재미있습니다.

8번 G장조 <저녁> http://youtu.be/SaWQvXdBLWM 

바로크 시대는 유럽 전역에 걸쳐 온갖 종류의 음악 실험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각 도시의 귀족이 거느리던 악단은 악기 편성이 저마다 달랐고, ‘합주 협주곡’의 구성과 형식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다양성은 하나의 표준을 향해 수렴되고 있었고, 바로 그 시점에 하이든이 등장한 것입니다. 

하이든은 현악합주에 목관과 금관을 더한 2관 편성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게 그 후 교향악단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이든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악장으로 된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의 틀에 귀족 취향의 메뉴엣을 끼워 넣었고, 이것이 4악장으로 된 고전 교향곡의 기본 형식으로 정착됐습니다. 교향곡 자체를 하이든이 창시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교향곡의 기본 틀을 하이든이 다듬었기 때문에 그를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에스터하치 공작을 섬기던 30년 세월, 그는 ‘귀족의 종’으로 음악가 생활을 했지만, 본질적으로 ‘음악의 종’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에스타하치 공작이 밥 먹을 때 연주했을까요? 자존심 강한 음악가들은 식사하는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기를 제일 싫어한다지요. 그러나 하이든 시절엔 음악가들이 귀족의 식사를 위해 연주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곡을 들으며 18세기 중반 유럽의 귀족처럼 잠깐 호사를 누리셔도 좋겠습니다. 내 음악이 누군가의 아침이 되어주고 저녁도 되어주는 게 행복했던 하이든의 친절한 마음도 함께 느껴보시면 좋겠지요. 
  
*하이든은 4대에 걸쳐 에스터하치 공의 궁정 악단에서 일했다. 1761년 파울 안톤 에스터하치 궁정악단의 부악장으로 취임한 뒤, 1762년부터 1790년까지 그의 동생인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의 정식 악장으로 일했다. 1790년 니콜라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 하이든은 공식적으로는 안톤, 니콜라우스 2세에게 고용된 신분을 유지했지만 런던과 빈을 오가며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했다.



교향곡 <멍청이>와 <철학자>

해고 위협에 처한 음악가들을 보호해 준 ‘파파 하이든’


 교향곡 60번 C장조 <멍청이> http://youtu.be/-ue1Uul5Lf4
 교향곡 22번 Eb장조 <철학자> http://youtu.be/sDao1KAJ01Q

에스터히치 시절, ‘파파 하이든’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습니다. 그는 연주자들의 결혼식에서 증인이 돼 주었고, 신랑 들러리를 서 주었고, 자녀들의 대부가 돼 주었습니다. 그는 단원들이 해고 위협에 처했을 때 웬만하면 나서서 보호해 줬습니다. 1765년, 플루트 주자인 프란츠 지글이 공작 소유의 집 근처에서 장난을 치다가 큰 불을 낸 일이 있습니다. 지글은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해고됐지만, 하이든의 청원으로 3년 뒤 복직됐습니다. 1768년 크리스마스 직전, 공작의 장원(莊園) 지배인 라이허가 단원 두 명을 해고 목록에 올리자 하이든은 “음악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만류했습니다. 1769년 라이허가 “공작의 허락 없이 동료 가수와 결혼하려 했다”는 이유로 연주자 한명을 해고하려 했을 때도 하이든이 개입해서 보호해 줬습니다. 


하이든은 단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한 악장이었습니다. 그가 강제하지 않아도 음악가들이 스스로 존경하며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의 총애를 받는 걸 질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주자들이 걸핏하면 무단결근한다”, “궁정의 음악서적과 악기가 없어지곤 한다”며 하이든의 느슨한 운영 방식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는 하이든에게 전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이 이뤄낸 음악 수준에 만족했기 때문이지요.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이 더욱 왕성하게 작곡에 전념할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늘 신경을 썼습니다.

에스터하치 시절, 하이든의 삶이 언제나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64년 말,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공에게 약을 사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심각하게 아팠습니다.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여러 번 상태가 나빠졌고, 전보다 훨씬 더 심해졌습니다.” 음악가에게 약을 사 주는 건 선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에스터하치 공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 비용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하이든은 이듬해 봄, 드디어 회복됐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이든이 모차르트보다 더 젊은 나이에 죽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 시절, 불은 왜 그리 자주 났을까요? 1768년 8월, 아이젠슈타트에 큰 불이 나서 19채만 남고 온 마을이 다 타 버렸습니다. 돈을 꿔서 장만한 하이든의 집도 타 버렸습니다. 악보와 살림살이가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린 하이든 가족은 사실상 알거지가 된 거죠.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의 집을 다시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1776년엔 더 큰 불이 났고, 두 시간 만에 아이젠슈타트 전체가 타 버렸고 사람이 16명 죽었습니다. 하이든의 집은 또 불탔고, 소중한 악보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공작은 이번에도 복구 비용을 모두 대 주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45~72 내용 참고)


 


흠…. 매우 너그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모든 걸 귀족이 혼자 갖고 있었다는 증거도 되겠네요.^^ 아무튼,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에게 감사하며 마음을 바친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이든과 에스터하치 공 사이엔 친절과 신뢰의 선순환 구조가 이뤄져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음악으로 에스터하치 공을 섬겼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을 철저히 뒷받침하고 자율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결국 하이든이 ‘귀족의 종’이 아니라 ‘음악의 종’이 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건 결국 에스터하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죠.


1774년, 하이든의 교향곡 60번 <멍청이>가 초연됐습니다. 당시 인기 있던 연극 <멍청이> 공연에 삽입한 음악을 6악장으로 엮어서 만든 신나는 교향곡, 꽤 파격적인 형식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이 <멍청이> 교향곡의 작곡자 하이든의 ‘위트, 이성, 바른 정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즐거움 음악 속에 지혜가 숨어 있었다고 할까요?

이에 앞서 1764년, 그의 교향곡 22번 <철학자>가 초연됐습니다. 이 별명은 하이든이 아니라, 그의 생전에 이름 모를 출판업자가 붙였습니다. 1악장 프렌치 호른과 잉글리시 호른이 주고받는 느린 대화가 철학자의 문답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1악장의 철학적 대화가 끝나면 2악장, 경쾌한 프레스토가 이어집니다. 철학적 깨달음이 작은 즐거움을 낳은 걸까요? 철학적 지혜와 순수한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위트, 이성, 바른 정신’으로 찬양받은 ‘파파 하이든’, 그는 에스터하치 공이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든 즐겁게 공존하며 언제나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음악을 통한 즐거운 만남, 하이든의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죠?



‘첼로 신동’ 장한나의 추억 - 하이든 첼로협주곡 1번 C장조


1995년 봄, 장한나가 온 국민의 환호 속에 개선했습니다. 그 전해, 11살의 나이로 로스트로포비치 콩쿨을 석권한 장한나에게 세계의 첼로 거장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자기 키보다 더 큰 첼로를 들고 나온 꼬마가 이렇게 훌륭하게 연주하다니,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한나를 처음 본 순간을 회상했습니다. 심사위원이었던 한스 헬머손은 “한나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했고, 미샤 마이스키는 “장한나를 본 뒤 ‘환생’을 믿게 됐다”고 했습니다. 지휘자 고(故) 주세페 시노폴리는 장한나에 대한 매스컴의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며 “그가 철학과 교양이 있는 큰 음악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장한나의 ‘개선 연주회’, 하이든의 첼로협주곡 C장조가 울려 퍼졌습니다. 주세페 시노폴리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협연이었습니다. 당시 장한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이 연주는 제가 들은 하이든 협주곡 중 가장 훌륭했습니다. 자클린느 뒤프레,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도 12살 장한나처럼 청중을 압도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http://youtu.be/8WLIDa9U9Ug 1악장 모데라토에서 한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음악을 주도했고, http://youtu.be/IBro_0lxljo 2악장 아다지오에서는 따뜻한 내면의 목소리와 애절한 노래로 청중을 압도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음악에 몰입했습니다. 첫 주제는 듣는 이의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중간 부분의 애끊는 선율, 인생의 아픔을 느끼고 끌어안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음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12살 어린이의 연주지만 이미 영원을 살아 낸 ‘오래된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http://youtu.be/-aoUxKfHS9I 3악장 알레그로 몰토에서 한나는 자유자재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한껏 뛰놀았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지휘자 시노폴리도 장한나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12살 장한나의 비망록으로 남을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에 대한 PD의 애정과 경의가 가득 배어 있습니다. 장한나의 고된 첼로 수업 과정을 묘사한 대목과 클로징 부분에 하이든 협주곡 2악장의 선율이 흐릅니다. 훌륭한 음악이 있었기에 다큐의 이 장면이 잘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장한나는 그 뒤 어린이를 위해 클래식 음악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 싶어했고, 저와 의기투합하여 MBC의 <로그인 싱싱뉴스>를 통해 ‘장한나와 함께 떠나는 상상의 음악여행’을 12차례 방송했습니다. 그 동안 격려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게 보답하기 위해서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돌려준다는 장한나의 뜻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성공적인 방송에 한나도, 저도 즐거워했습니다. 

이제 30살을 넘긴 장한나, 그 동안 성장을 거듭하며 하이든은 물론, 비발디 · 생상스 · 차이코프스키 · 프로코피에프 · 쇼스타코비치 등 훌륭한 음반을 많이 냈습니다. 그러나 12살 때 연주한 하이든의 인상이 워낙 강했기 때문인지 어느 곡에서도 그때를 뛰어넘는 감동을 발견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링크한 이온 마린 지휘의 하이든, 장한나가 좀 더 나이 든 뒤의 연주입니다. 기량이 후퇴했을 리는 없지만 1995년 연주와 같은 생기, 활력, 집중력이 다소 아쉽습니다.


 

2악장 아다지오 http://youtu.be/IBro_0lxljo  (첼로 장한나, 이온 마린 지휘 베를린 신포니에타 필하모닉)


장한나는 2007년 지휘자로 데뷔했습니다. 장한나는 위대한 인류 문화유산인 베토벤의 교향곡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고, 저 또한 한나의 뜻에 공감하여 발벗고 나섰습니다. ‘장한나 지휘 데뷔 프로젝트’는 천신만고 끝에 성사됐고, 장한나는 ‘마에스트라’가 됐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를 아끼던 사람들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요. 아직 첼로를 더 갈고 닦아야 할 때 아니냐는 거였죠. 그러나 나이가 젊고 인생 경륜이 부족하다 해서 지휘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구스타보 두다멜, 유럽을 주름잡는 다니엘 하딩은 20대에 이미 탁월한 지휘자가 됐습니다. 따라서 장한나가 지휘를 하는 건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에 헌신하는 마음가짐,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하는 겸허한 자세겠지요. 


지휘자가 됨으로써 장한나는 첼리스트의 커리어를 반쯤 내려놓았습니다.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는 아직 반쯤 진행 중입니다. 장한나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의 미래는 그가 만들어 나갈 몫입니다. 장한나가 생명력과 음악혼이 넘쳤던 12살 때의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랄 뿐입니다.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C장조 2악장, 따뜻한 첫 주제를 들으니 장한나 다큐를 만들 때의 행복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중간 부분 애절한 선율에서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한 장한나의 고뇌가 떠오릅니다. 그가 원숙한 음악가로 잘 성장하고, 개인으로서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을 위해 일하던 초기인 1760년대 초에 작곡한 이 곡은,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서 200년 동안 잠자다가 지난 1961년 발견되어 비로소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작품답게 바로크 협주곡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악장은 비발디가 즐겨 사용한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하지만 음악적 아이디어와 선율들은 하이든 작품답게 상쾌하고 당당합니다. 이에 비해 1783년에 작곡한 첼로 협주곡 2번 D장조는 아주 우아한 작품으로, 좀 더 원숙한 하이든의 모습입니다. 탄탄한 고전주의 양식에 바탕한 이 곡은 테크닉 면에서도 근대 협주곡에 한 발짝 다가서 있기 때문에 슈만, 드보르작의 작품과 더불어 ‘3대 첼로 협주곡’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장한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가 직접 지휘하며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 보기 좋군요. 

하이든 첼로협주곡 2번 D장조 1악장 http://youtu.be/TF_ai27A9_U 
(첼로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성 마틴 필즈 아카데미)



하이든의 곡 중 ‘놀람 교향곡’에 ‘놀람’이 붙게 된 사연은?

하이든 ‘놀람’교향곡


하이든은 1791년 초, 런던에 도착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현지 언론은 “그런 명예를 받은 사람은 50년 내에 없었을 것”이라며 놀랐습니다. 하이든의 회상입니다. “내가 도착하자 도시 전체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사흘 동안 연달아 온갖 신문에 내 소식이 실렸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고 싶어했다.” 1월 8일 성 제임스 궁에서 열린 첫 연주회에 참석한 황태자는 입장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이든에게 인사를 해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영국왕 조지 3세는 하이든이 런던에 남아있도록 설득하려고 애를 썼고, 왕비는 그에게 윈저성에 머물라고 제안했습니다. 헨델 이래 이렇게 열렬히 영국 왕실의 환대를 받은 사람은 하이든이 처음이었습니다. 

런던의 교향악단은 에스터하치 공의 악단보다 2배 정도 규모가 컸고, 하이든은 이에 걸맞는 대(大)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런던의 팬들을 위해 하이든은 연주회 2부의 첫 곡으로 늘 교향곡을 연주했고, 청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음악사가 찰스 바니는 “청중들은 거의 광란이라고 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도 연주회 도중 조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하이든은 94번 교향곡의 2악장에서 특유의 유머러스한 장난을 칩니다. 첫 주제를 조용히 연주합니다. 조금 단조로운 선율이지요? 주제를 좀 더 작은 소리로 반복합니다. 한가로운 청중들 중 일부가 이제 졸 준비를 하는 찰나, 오케스트라 전체가 ‘꽝~’ 큰 소리로 졸음을 쫓아 버립니다. 이 대목 때문에 <놀람> 교향곡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주제는 나중에 오라토리오 <사계>에서 일손 바쁜 농민들의 즐거운 노래가 됩니다.  


하이든이 런던 청중들을 위해 쓴 교향곡은 모두 12곡으로, 이 곡을 의뢰한 음악 기획가 잘로몬의 이름을 따서 ‘잘로몬 시리즈’라고도 합니다. 하이든이 남긴 104개 교향곡의 대미(大尾)을 장식하는 이 곡들은 내용이나 규모가 가장 충실해서 하이든 교향곡의 최고봉을 이룹니다. 하이든은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각 작품마다 재미있는 특징을 하나씩 집어넣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이든 작품에는 <놀람>, <군대>, <시계>, 심지어 <곰>, <암탉>, <철학자> 같은 별명이 붙은 곡이 유난히 많습니다. 
 
대개 작곡가 자신이 아니라 청중들이 재미있다고 느껴서 자연스레 별명을 붙였지요. 출판업자들은 별명을 상업적으로 이용했고, 그 덕분에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그 전통인지, 지금도 하이든의 교향곡이나 현악사중주곡에 붙일 새로운 별명을 공모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한국의 장난꾸러기 조윤범씨는 하이든 현악사중주곡에 ‘병아리의 춤’, ‘다람쥐’, ‘오아시스’, ‘결심’ 같은 별명을 맘대로 붙이며 재미있어 했지요.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 살림, p.43~p.47)

96번 <기적>은 별명이 잘못 붙은 경우입니다. 하이든은 두 번째 런던 체류 중인 1795년 개막 공연 때 교향곡 102번 Bb장조를 초연했는데, 연주 도중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바람에 연주회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음악 자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기적>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엉뚱하게도 이 별명은 96번 교향곡에 붙어버렸습니다. 하이든이 영국에서 제일 먼저 초연한 게 96번이었고 그만큼 인구에 많이 회자되다 보니, 이 에피소드가 그 쪽으로 따라간 게 아닌가 짐작합니다.    

100번 <군대>는 매력적인 악상이 넘쳐나는 곡입니다. 2악장과 4악장에서는 팀파니 뿐 아니라 큰 북, 심벌즈, 트라이앵클을 사용해서 화려한 색채감을 더해 줍니다. 2악장은 평화시의 멋진 군대 행진곡인데, http://youtu.be/vrf3XF__jhQ 링크 4:58부터 진군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벌이 시작될 무렵이라 군대풍의 음악은 청중들에게 호소력이 강했겠지요? 4악장에서는 팀파니가 솔로 악기로 깜짝 등장해서 음악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모닝 크로니클>은 2악장에 대해 “전쟁의 지옥 같은 고함소리가 무시무시한 숭고함의 절정으로 높아진다”고 묘사했습니다. 


 

http://youtu.be/d_6mrLc_mEw (링크 9:35부터)


101번 <시계>는 2악장에서 제1바이올린이 주제를 연주할 때 반주하는 목관악기 소리가 시계 소리 같다고 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한때 KBS-FM 심야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였지요. <모닝 크로니클>은 “저 끝도 없이 경이롭고 숭고한 하이든!”이라고 격찬했습니다. http://youtu.be/7p8MwpIvvos 


103번 <북소리>는 1악장 서주에서 팀파니 솔로가 긴 트릴을 혼자 연주합니다. 매우 이색적인 출발인데, 서주의 모티브가 중간부에 나오고, 팀파니의 트릴이 1악장 끝부분에 다시 등장합니다. 서론와 본론을 섞어 놓은 기발한 구성이지요. http://youtu.be/DcpWifRc8aQ 2악장은 정겹고 재기발랄한 변주곡으로, 초연 때 앙코르 연주됐다고 합니다. 톤 쿠프만 지휘의 이 링크에서도 2악장이 끝나니까 박수가 나오는군요. <더 선>은 “하이든의 새 교향곡이 많은 갈채를 받았고 장대함과 환상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고 전했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런던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 교향곡 104번 <런던>은 하이든의 교향곡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거장 마리스 얀손스 지휘, 바이에른 라디오 방송 교향악단 연주입니다. http://youtu.be/ffBK-EYjs90 1악장은 장엄한 서주로 시작, 약동하는 알레그로로 이어집니다. 4악장 피날레 스피리토소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예감케 하듯 에너지가 넘칩니다. 하이든은 자필 악보에 “이것이 내가 영국에서 작곡한 12번째 작품”이라고 자랑스럽게 써 넣었고, 런던 <모닝 크로니클>은 “그의 다른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곡“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원숙한 하이든은 ‘질풍노도’ 운동과 거리를 두고, 대중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여러 방법을 구사했습니다. 이런 음악을 처음 듣는 평민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배려한 탁월한 기교가 이 시절 하이든 음악에 섬세하게 자리하고 있는 거지요. 하이든은 자기를 환영해 준 영국 팬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내 평생 지난 한해만큼 많은 곡을 써 본 적이 없어요.” 1792년, 지인에게 쓴 편지 대목입니다. 런던에서 알게 된 연인 베카 슈뢰더는 하이든이 과로로 건강을 상할까봐 몹시 걱정했습니다. 

두 번째 런던 체류 기간인 1795년 2월 1일, 영국왕 조지 3세는 하이든의 노고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습니다. “하이든 선생, 당신은 참 많은 곡을 썼지요?” 이에 대해 하이든은 특유의 겸손과 유머로 대답했습니다. “네, 전하, 그저그런 곡도 참 많이 썼습니다.” 이에 대한 왕의 대답. “아, 아니요,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132)

하이든은 훗날,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평생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맘껏 재능을 발휘해서 최선을 다할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이든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현악사중주곡 중 최고 걸작의 선율


“성당의 벽, 유리창, 기둥은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커다란 등불 하나가 이 장엄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정오에 문이 굳게 닫히면 의례가 시작됐다. 사제는 제단에 올라가서 일곱 말씀 중 첫 말씀을 읽고 이에 대해 강론을 했다. 그는 다시 제단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음악이 침묵의 공간을 채웠다. 사제는 다시 제단에 올라 두 번째, 세 번째 말씀을 읽었고 그 사이사이에 오케스트라가 내 음악을 연주했다.”  (하이든, 1801년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출판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머리말)

하이든의 작품 중 아주 특이한 곡이 하나 있습니다. 이 곡은 교향곡이 아니면서 ‘교향곡 중 최고 걸작’이고, 현악사중주곡이 아니면서 ‘현악사중주곡 중 최고 걸작’이고, 피아노 소나타가 아니면서 ‘피아노 소나타 중 최고 걸작’입니다. 하이든은 훗날 이 곡을 오라토리오로도 편곡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을 주제로 만든 작품입니다. 
 

  
 
 

하이든은 1785년, 스페인 카디즈 성당의 성 금요일 미사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합니다. 플루트 2, 오보에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를 위한 관현악곡입니다. 맨 앞에 서곡이 있고, 십자가에서 예수가 남긴 일곱 개의 말씀에 해당하는 일곱 개의 악장이 있고, 맨 뒤에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 일어난 지진을 묘사한 에필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도합 9악장으로 된 교향곡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호르디 사발이 지휘한 전곡 연주, 음악의 분위기를 잘 살린 동영상입니다. http://youtu.be/m7iLwHDmuzs (관현악 원본, 전곡) 말러의 교향곡 3번과 <대지의 노래>가 6개의 악장으로 돼 있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이 11개 악장으로 돼 있는 걸 감안하면, 지금 우리 기준으로 볼 때 하이든의 이 곡을 ‘교향곡’으로 간주하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삶을 긍정하는 예수의 의연함을 묘사한 이 음악, 곡의 규모나 감정의 깊이로 볼 때 단연 하이든 ‘교향곡’ 중 최고 걸작입니다. 

하이든은 이 곡에 대해 유달리 깊은 애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악기 편성으로 개작했습니다. 1787년 현악사중주곡으로 편곡한 악보는 빈, 런던, 파리는 물론 베를린, 나폴리에서도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연주됐습니다.

http://youtu.be/zjIi6MwmPMM (현악사중주 편곡판, 전곡)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 중 13번 Bb장조 Op.130이 6악장, 14번 C#단조 Op.131이 7악장으로 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9악장으로 된 하이든의 이 곡을 ‘현악사중주곡’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요. 하이든의 어떤 현악사중주곡보다 장대한 이 곡은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곡의 심오한 깊이에 이미 도달한 느낌입니다. 오늘날도 관현악 판보다 현악사중주 판이 더 널리 연주됩니다.


http://youtu.be/3CsM4UxPkxI (현악사중주 편곡판 서주, 느리고 장엄하게)


출판업자 한 명이 이 곡의 피아노 편곡판을 갖고 있었습니다. 1787년, 이를 알게 된 하이든은 악보를 감수한 뒤 출판을 승인했습니다. 서주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 7개의 소나타인 셈입니다. http://youtu.be/xIkYBVwEi1k (피아노 판, 전곡) 한 악장으로 된 소나타들, 바로크 시대 스카를라티의 작품보다 후기 낭만시대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에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소나타 모음’입니다. 


어둡고 격정적인 정서가 넘치는 작품으로, 하이든은 “음악을 처음 듣는 이에게도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곡”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서주(느리고 장엄하게)에 이어 예수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할 때 남긴 일곱 말씀에 해당하는 일곱 곡의 소나타가 이어집니다. ① 라르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② 그라베 칸타빌레, (사도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③ 그라베,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자)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④ 라르고,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⑤ 아다지오, “목 마르다.” ⑥ 렌토, “이제 다 이루어졌다.” ⑦ 라르고,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어서 피날레 ‘지진’(地震), 아주 격렬한 프레스토로 마무리합니다. 
  
요즘도 교회나 성당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사제가 성서 구절을 읽고 꿇어앉으면 오케스트라나 현악사중주단이 해당 악장을 하나씩 연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례를 떠나 순수한 음악으로 연주하고 감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떠나서 들어도, 한 고귀한 인간의 생애를 음악만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1801년 출판된 악보의 머리말에서 하이든은 “약 10분 동안 지속되는 일곱 개의 느린 악장을 차례차례 연주하면서 듣는 이가 지치지 않도록 작곡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이 곡에 시간 제한을 두는 것은 내겐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강한 열정에 사로잡혔으면 한 악장이 끝나는 걸 작곡자 자신이 상상조차 못했을까요? 실제로, 일곱 개의 느린 악장이 계속되지만 격렬한 감정이 교차하는 이 음악은 절대로 지루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이든이 그때까지 만든 어느 작품보다 더 공들여서 작곡했다는 증거지요. 

이 곡은 하이든의 손에 의해 오라토리오로 개작됐습니다. 1795년, 두 번째 런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사우에 들른 하이든은 이 작품을 그곳 성당 악장 요젭 프리베르트가 성악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연주가 맘에 들었던 하이든은, 가사가 있는 오라토리오로 이 작품을 개작해야겠다는 의욕을 느꼈고, 프리베르트의 가사를 받아서 성악 파트를 새로 썼습니다. (이용숙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 샘터, p.119~p.120) 

하이든은 이 곡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겨, 런던과 빈에서 기회 닿는 대로 이 곡을 지휘했습니다. ‘음악의 종’ 하이든 생애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면 이 곡의 서주를 주제 음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하이든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를 못 쓴 채 세상을 떠났다면 이 곡은 교향곡, 현악사중주곡, 오라토리오 등 모든 장르를 통틀어 하이든의 최고 걸작으로 주목받았을 것입니다. http://youtu.be/-cPchmU-pB4 (오라토리오 판, 전곡) 



하이든의 음악적 정열이 그대로 녹아 있는 최고의 걸작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중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 그의 손이 빚은 작품은 창공을 가리키네. 어두운 밤은 사라지고 새날이 밝아오네. 온 세상이 입을 모아 선포하는 주의 말씀, 모든 존재의 귓가에 울려퍼지네.” 
  
1808년 3월,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가 빈 대학에서 열렸습니다. 도심에는 경찰이 통제해야 할 정도로 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하이든은 트럼펫과 작은 북의 팡파레에 맞춰 행사장에 입장했고, 군중들은 “하이든 만세!”를 외쳤습니다. 살리에리가 <천지창조>를 지휘했고, 감동한 하이든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이든을 기리는 시가 낭송됐고, 모든 이가 보는 가운데 살리에리는 그를 포옹했습니다. 베토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습니다. 기력이 약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없었던 하이든은 1부 마지막 곡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까지 들은 뒤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받으며 연주회장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대중 앞에 나타난 하이든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175~p.176)


<천지창조>를 작곡할 때 하이든은 신들린 듯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작곡에 착수할 무렵인 1796년 말, 음악이론가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버거*가 베토벤에게 쓴 편지입니다.

“어제 하이든이 날 찾아왔는데, 그의 머릿속은 온통 대작 오라토리오의 악상으로 가득차 있더군. 제목은 <천지창조>로 예정돼 있는데, 하루 빨리 완성하고 싶어했어. 내 앞에서 일부를 연주해 주었는데, 내 생각으로는 아주 훌륭한 것 같았어.” 

이 작품은 하이든의 영혼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 발효된 뒤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이든은 1791년 5월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린 헨델 음악 축제에 참석하여 <메시아>, <에집트의 이스라엘인>, <유다스 마카베우스>의 발췌곡을 들었는데, 출연자 수가 1,000명을 넘는 큰 규모의 오라토리오에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하이든은 한 친구에게 “헨델의 음악을 안지는 오래됐지만, 직접 들어보기 전에는 그 위력을 절반도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하이든의 전기를 쓴 주세페 카르파니는 헨델 음악을 접한 하이든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는 막 공부를 시작한 초보자로 되돌아간 듯,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음표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숙고했고, 진정 장대한 음악의 정수를 뽑아내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하이든의 가슴에 “새로운 오라토리오를 쓰겠다”는 의욕과 영감을 심어 준 것입니다. 하이든이 속된 경쟁심에서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와 같은 작품을 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김정환 <클래식은 내 친구>, 웅진, p.119) 

두 번째 영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기 직전인 1795년 8월, 런던의 흥행사 잘로몬은 <천지창조>란 제목의 오라토리오 영어 대본을 하이든에게 주었습니다. 익명의 저자가 밀턴의 <실락원>을 바탕으로 쓴 대본이었습니다. 헨델이 영국에서 오라토리오를 썼듯, 하이든은 고국에서 자신의 오라토리오를 발표하고 싶었습니다. 

빈 황실도서관장으로 바흐와 헨델 음악의 열렬한 찬미자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은 하이든에게 헨델의 정신을 살린 대 오라토리오를 써 보라고 권유했고, 영어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하이든은 1796년 가을 <천지창조>를 스케치했고, 1797년 한 해 내내 이 오라토리오에 집중했습니다. 반 슈비텐 남작이 수시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이에 대해 토론하느라 작곡은 상당히 느리게 진행됐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같은 책, p.143)


 

http://youtu.be/7jf6debB7Rw 번스타인


1798년, <천지창조> 비공개 초연 뒤 하이든은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탈진하여 한동안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그는 때늦은 산후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매일 아침 세상은 나의 새 작품이 피워 낸 불꽃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어떤 긴장과 노고를 감수해야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어떤 날은 쇠약해진 기억력과 신경이 주는 압박감이 심해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런 뒤에는 여러 날 동안 악상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기도 하지요.”  


<천지창조>는 두말할 것 없이 하이든의 최고 걸작입니다. 이 곡을 작곡할 때 하이든은 누구보다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이든 자신의 절대적 기준으로 완벽한 음악이었습니다. 평생 음악만을 섬긴 하이든의 삶은 이 곡으로 완성됐습니다. 1799년 3월 부르크테아터에서 열린 공개 초연, 하이든이 직접 지휘했고 살리에리가 포르테피아노를 맡았습니다. 음악에 압도된 청중들은 숨소리를 죽였고, 쥐가 기어다니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http://youtu.be/am5WE0QbLWY 청중들은 빛의 탄생을 묘사한 대목에서 경악했습니다. 라파엘(바리톤)이 하늘과 땅의 분할을 알리고 합창이 ‘빛의 창조’를 노래합니다. (위 링크 0:09:00부터) <천지창조> 공개 리허설을 참관한 스웨덴 외교관 실버스토플의 증언입니다. “이 대목이 울려 퍼질 때의 하이든의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수줍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소중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애써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처음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작곡가의 불타는 눈에서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라파엘이 땅과 바다의 구분을 알리고 산하의 정경을 오케스트라가 묘사하는 대목, 폭풍우 같은 아리아 ‘솟구치는 거품에 휘둘리며’에 대해서 하이든이 직접 설명했습니다. “음표들이 파도처럼 솟구치는 걸 봐요. 저기, 깊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산들이 보이지요?” (위 링크 19:57부터) 가브리엘(소프라노)이 초목의 탄생을 알리는 아리아는 1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위 링크 25:40부터) 하늘, 땅, 바다, 초목에 이어 해, 달, 별을 창조한 신의 위업을 찬미하는 1부의 마지막곡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는 3중창이 딸린 숭고한 합창곡으로, 하이든이 원숙한 화성법과 대위법을 유감없이 구사한 걸작입니다. (링크 38:12 ~ 42:22)  

초연 당시 빈의 한 작가의 증언은 이 곡의 요체를 설명해 줍니다. “오직 음악만으로 천둥과 번개를 그려내다니! 비가 내리고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 심지어 땅 위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소리도 음악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극장을 떠나면서 이날만큼 만족한 적이 없었다. 밤새도록 나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 꿈꾸었다.” (데이비드 비커스, 같은 책, p.152) 


창조의 첫날부터 넷째 날까지 하늘·바다·땅의 생성을 묘사한 1부, 온갖 생물과 인간이 창조된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을 노래한 2부, 아담과 이브가 무한한 사랑과 신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3부로 이뤄져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되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천사 우리엘이 신의 모습과 비슷한 인간 남녀의 창조를 알리고, 남자 곁에 있는 아내의 모습을 소박한 선율로 노래합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기쁨은 곱절이 된다.” (위 링크 1:09:35부터) 천사 우리엘은 행복에 겨운 인류 최초의 남녀를 보며 “참으로 행복한 한 쌍이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하고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그릇된 망상에 유혹 당하지만 않으면 영원히 행복할텐데”라는 말로 인간이 결국 죄에 빠질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용숙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 샘터, p.37~p.38)

시인 김정환은 <천지창조>를 듣고, 절대자 앞에서 무한히 겸손한 하이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천지창조>는 헨델의 <메시아>처럼 힘차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헨델의 화려한 화음에 맞서 싸우지 않고 겸손하게 <메시아>를 보충합니다. 

“아, 맞아, 하느님은 아침 햇살처럼 소박하시지. 하늘을 찌를듯한 웅장한 교회 건물은 사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뜻 아니겠는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지저귀는 종달새, 푸른 숲, 그런 것들은 휘황찬란하지 않고 다만 대낮의 색깔과 모양으로 하느님을 드러낼 뿐이다.” (김정환, 같은 책, p.120) 

창조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신의 모습으로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 음악에서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65살 노년에 접어든 하이든이 모든 정열을 쏟아넣어 작곡한 <천지창조>, 연주 시간 2시간의 음악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 그 전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음악의 착한 종’ 하이든은 이 작품으로 자기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것입니다. 하이든은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그리징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천지창조>를 쓸 때만큼 경건한 마음가짐이 된 적이 없었어요. 매일 무릎을 꿇고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버틸 힘을 달라고 신에게 간청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같은 책, p.145~p.146)

하이든은 <천지창조>의 수익금을 내놓아 죽은 음악가들의 부인과 자녀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1800년 <천지창조> 악보가 출판되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영국 왕 조지 3세, 아이젠슈타트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2세 등 하이든을 사랑하는 유럽 전역의 음악 애호가들이 악보를 주문했습니다. 

그 해 아내 마리아 안나가 세상을 떠났고 하이든은 바덴에 가서 그녀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 사이가 좋은 부부가 아니었지만 하이든은 끝까지 아내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1801년 마지막 오라토리오 <사계>를 완성하고 초연한 뒤 5월 5일 유서를 썼고, 실제로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갓 30살을 넘긴 베토벤의 첫 교향곡이 빈에서 초연됐습니다. 하이든의 시대는 저물고, 젊은 반항아 베토벤이 세계 음악의 수도 빈의 새로운 왕자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버거(1736~1809) : 당대의 뛰어난 대위법 이론가로, 1792년부터 빈 슈테판 성당의 악장을 지냈다. 친구 하이든의 부탁에 따라 베토벤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가르쳤다. 그는 훔멜, 모셀레스, 프란츠 자버 모차르트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1733~1803) : 1777년부터 죽을 때까지 빈 황실도서관 관장을 지냈다. 그는 바흐와 헨델의 열렬한 팬으로,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음악회를 열었다. 1781년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이 음악회에 매회 참석했고, 슈비텐이 베를린에서 수집해서 온 바흐와 헨델의 악보를 공부했다. 모차르트가 <주피터> 교향곡과 <레퀴엠>에서 자유자재로 대위법을 구사한 것은 이때 바흐를 공부한 결과였다. 모차르트는 바흐의 푸가를 실내악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780대 후반 음악 후원자 그룹을 결성하여 헨델 오라토리오 공연을 지원했다. 모차르트는 이 공연을 위해 헨델의 <메시아>, <아치스와 갈라테아>, <알랙산더의 향연>, <성 체칠리아 찬가>를 편곡했는데, 영어에 능통했던 슈비텐 남작은 헨델 오라토리오의 가사를 독일말로 번역했다. 


그는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오라토리오 판의 가사를 교정해 주었다. 그는 영어로 된 <천지창조>의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하이든이 음악을 완성한 뒤에는 이 음악에 맞게 새로 영어 가사를 썼다. 하이든이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준 것도 그였다. 베토벤도 빈 초기 시절에 그의 후원을 받았고, 슈비텐 남작이 소장한 바흐와 헨델 악보를 맘껏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바흐, 헨델의 유산을 제공해 준 슈비텐 남작은 음악사에 실로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의 증언. “베토벤은 모든 작곡가 중 모차르트, 헨델, 바흐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누군가의 악보를 그가 들고 있거나 책상 위에 놓아 둔 것을 보면 언제나 이 세 사람 중 한 명의 작품이었다.” 베토벤은 그의 첫 교향곡 C장조를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했다. 



24살의 나이차를 뛰어 넘는 두 음악가의 우정

하이든과 모차르트① - 현악사중주곡


18세기에는 뛰어난 음악가들이 직접 만나 실력을 겨루는 게 커다란 흥미거리였습니다. 즉흥 연주 실력은 한 음악가의 내공을 보여주는 가늠자였습니다. 바흐와 즉흥연주를 겨루기로 했던 루이 마르샹이 줄행랑을 놓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헨델과 스카를라티가 쳄발로와 오르간 실력을 겨뤘는데, 쳄발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지만 오르간은 헨델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당대의 비르투오소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즉흥연주 실력을 겨룬 적이 있는데, “그의 테크닉은 완벽하다. 특히 3도와 6도 진행은 놀랍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느낌이 없다. 그는 기계처럼 연주한다”고 상대를 평하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하이든(1732~1809)과 모차르트(1756~1791)는 어땠을까요. 두 사람은 실력을 겨루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하이든을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대하며 ‘파파 하이든’이라고 친근하게 불렀습니다. 하이든은 언제나 “모차르트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1762년 모차르트가 6살 때 떠난 3년간의 유럽 여행 중에는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하이든은 에스타하치 공의 부악장으로 취임한 직후였고, 모차르트의 여행은 하이든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으니까요. 1784년 말의 크리스마스 자선 연주회 때 두 사람의 음악이 모두 연주됐으니 그 때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83~84)


 

모차르트 현악사중주곡 14번 G장조 K.387 http://youtu.be/5BS_rG_XZ0Y


두 사람은 상대방의 명성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고, 악보를 통해 상대방의 음악을 이해하며 찬탄한 게 분명합니다. 하이든은 1784년 말 프리메이슨 ‘참된 융화를 위해’ (Zur wahren Eintracht)에 가입했습니다.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 동지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 모임에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1785년 1월 28일,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프리메이슨 가입 의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 하이든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이든은 2월 11일 다시 열린 가입 의식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모차르트가 다른 곳에 연주회가 있어서 불참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답게 두 사람은 바빠서 만나기가 어려웠던 거죠. 


모차르트는 이튿날 하이든을 위한 현악사중주 파티를 열었고 드디어 1785년 2월 12일, 두 사람의 음악적 만남이 이뤄집니다. 이날,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현악사중주곡 3곡이 연주됐습니다. 제1바이올린 하이든, 제2바이올린 디터스도르프, 첼로 반할, 그리고 모차르트가 비올라를 맡았습니다. 하이든의 ‘러시아 사중주곡’ Op.33에 자극받은 젊은 모차르트가 3년 동안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 초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하이든에게도 떨리고 긴장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뛰어난 천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칫 자기와 모차르트가 비교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하이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최고임을 흔쾌히 인정했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말했습니다.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은 지금까지 내가 직접 알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고, 작곡에 대한 깊은 지식에 통달해 있습니다.”

모차르트도 자기 작품이 하이든을 능가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박한 자기과시로 존경하는 선배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자기가 공들여 만든 작품을 함께 연주하고 선배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이든은 빈 궁정에서 모차르트를 질시하고 깎아내리려 했던 살리에리 일파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해타산을 뛰어넘어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인정해 준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칭찬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해 9월, 모차르트는 6개의 사중주곡을 ‘매우 뛰어난 인물의 보호와 지도를 받도록 떠나보내는 자식들’에 비유하며 하이든에게 정중히 헌정했습니다. 

“당신이 이들을 친절히 받아주시고, 이들의 아버지, 안내자,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부터 저는 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당신에게 양도하며, 이들이 가진 결함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제 눈은 그런 결함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이든의 사중주곡은 모차르트에게 영감(靈感)과 함께 새로운 도전의식을 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의 성취를 제대로 볼 줄 알았고, 그걸 자신의 풍요로운 자산으로 소화·흡수 할 줄 알았습니다. 어떤 음악적 유산도 자기 토양으로 받아들여 독창적인 음악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는 데에 모차르트의 진정한 천재성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모차르트 음악이 하이든에게 영향을 미친 점도 있을까요? 단언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모차르트의 존재 자체가 하이든에게 자극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이든이 절정기의 모차르트 악보를 입수해서 연구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특히 현악사중주곡에서 모차르트가 들려준 불협화음과 반음계적 화성은 그 뒤의 하이든 음악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모차르트가 그에게 헌정한 현악사중주곡 C장조의 느린 도입부가 아니었다면 하이든은 아마도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제1곡 ‘혼돈의 표현’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제레미 시프먼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임선근 옮김, 낙소스북스, p.205) 모차르트 현악사중주곡 19번 C장조 K.465 <불협화음> 1악장 아다지오 : 알레그로  http://youtu.be/6Zcy-zs9jmw

모차르트가 이 작품을 공들여서 만든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평소 스타일과 달리 이 작품들만 진땀을 빼며 작곡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이든이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기법’으로 작곡했다는 ‘러시아 사중주곡’, 모차르트는 선배의 노작(勞作)을 너무 쉽게 능가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즉시 알아보았고, 그가 이미 자신보다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할 인간적인 용기와 지혜와 솔직함이 있었습니다. 자칫 강퍅한 음악 경연으로 흐를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의 만남, 24살 나이차를 뛰어넘는 소탈한 우정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서로의 음악 존경하며 경쟁한 하이든과 모차르트

하이든과 모차르트② - 오페라


하이든이 당대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였다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요? 그가 여름에 일했던 에스터하차 궁전에는 2개의 오페라 극장이 있었고, 하이든은 여기서 공연할 오페라를 작곡하고 감독했습니다. 특히 1773년에 작곡한 <오판된 부정>의 큰 성공은 에스터하치 공의 신임을 얻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오판된 부정>(L'infidelta Delussa)  http://youtu.be/2vQfnnSf_eA (전곡) 1776년, 하이든은 당시 문화계의 주요 인물들의 약전(略傳)인 <오스트리아의 학자>에 실릴 자신의 대표작 목록을 만들었는데, 여기엔 오페라 <약제사>, <오판된 부정>, <뜻밖의 만남>이 포함된 반면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781년,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 관계자가 자기 오페라를 극찬했다는 얘기를 들은 하이든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내 오페레타 <무인도>와 최근에 쓴 오페라 <보상받은 충성>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말이요. 장담컨대 파리나 빈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작품이 연주된 적이 없을 거요.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시골이니, 그게 나의 불운이지요.”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시절 초기부터 계속 오페라를 썼고, 자기 오페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하이든을 ‘음악의 셰익스피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하이든의 오페라를 꽤 자주 무대에 올리고 있으니 하이든 오페라 르네상스가 올지도 모르겠군요. 하이든이 자랑스럽게 생각한 오페라, 분위기만 조금 맛볼까요?
<무인도>(L'isola Disabitata) http://youtu.be/n-zh0Z98xpA (1779, 발췌)
<보상받은 충성>(La Fedelta Premiata) http://youtu.be/-2Uq7ryhyHA (1781, 전곡)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하이든은 1784년 2월 <아르미다>를 작곡한 뒤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가 오페라의 모든 것을 다 이뤘다 여겼기 때문일까요? 하이든은 1774년 에스터하치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에집트왕 타모스>를 지휘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모차르트를 별로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최근 작품인 <이도메네오>(1780)와 <후궁탈출>(1781)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하이든의 오페라 창작 의욕을 꺾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직접 만난 1784년 말 이후 오페라를 쓰지 않았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처음 만난 것은 1784년말~1785년초입니다. 하이든이 오페라에서 손을 뗀 것은 바로 그 직후입니다. 그 기간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 등 오페라 역사상 최고 걸작들을 내놓은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시기, 하이든이 몹시 바빴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르미다>, <무인도>, <보상받은 충성> 등 그의 오페라는 에스터하차에서 해마다 공연됐고 빈, 프레스부르크 등 유럽 각지에서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을 발표했습니다. 게다가 치마로사, 파이지엘로 등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들도 한 해에 100회 가량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빴다 해도, 하이든이 모든 열정을 쏟았던 오페라를 중단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1787년, 프라하 오페라 극장 관계자는 하이든에게 오페라 부파를 하나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하이든은 프라하에서 그해 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뒀고 10월에 새 오페라 <돈조반니> 공연이 예정돼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프라하를 위해 완전히 새 오페라를 쓰는 것은 좋지만 이미 쓴 작품을 보낼 수는 없다”며 완곡히 사양했습니다. “제 오페라는 모두 에스터하차 궁전의 특수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다른 극장에서는 공연 장소에 맞도록 면밀하게 계산해 둔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슬쩍 덧붙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들으시겠다면 코믹 오페라 하나를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지만, 무대에서 상연할 거라면 귀하의 요청에 응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 하이든의 진심을 보여줍니다. “프라하에 제 작품을 보내면 저는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위대한 모차르트와 비교되는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제 작품이 모든 음악 친구들, 특히 신분 높은 분들 마음에 인상을 남길 수 있을 정도 수준이라면,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음악적 지성이 가득하고,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합니다. 프라하는 서둘러 그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보상을 하십시오. 보상이 없다면 위대한 천재의 역사는 정말 슬퍼집니다.” 


모차르트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전혀 시샘하지 않고 오히려 모차르트를 챙겨 준 하이든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하이든은 1788년 5월 특별 허가를 받아 빈에서 공연되는 <돈조반니>를 들으러 갔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하이든은 라주모프스키 공작 주최의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차르트의 이 오페라를 헐뜯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하이든의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하이든의 짧은 대답에 사람들은 모두 말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제가 논란을 해결할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91~p.93)

1789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총보가 에스터하차에 도착했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이 걸작을 직접 지휘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공연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1790년 초, 빈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코시 판 투테> 리허설을 참관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헤어지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1790년 말, 런던행 준비를 마친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식사를 함께 합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놀립니다. “당신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곧 돌아오실 거에요. 이제 젊지도 않잖아요.” 하이든은 대답합니다. “아니야, 난 여전히 기운도 있고 건강해.” 모차르트는 24살 연상의 하이든을 또 놀립니다. “파파 하이든은 할 줄 아는 외국어도 없잖아요. 여행길에서 고생하실 거에요.” 하이든은 능청스레 대답합니다. “내 언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듣지.”

장난을 치던 모차르트는 작별의 순간이 오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이든이 런던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먼저 세상을 뜬 사람은 모차르트였습니다. 이듬해 12월 모차르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든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비탄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인물을 하느님이 저 세상에 데려가다니, 믿을 수 없어.” 하이든은 “후세는 100년 이내에 그같은 천재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음 시즌에 모차르트를 런던에 데려오려던 하이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1780년대 초, 하이든의 음악이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준 건 분명합니다. 하이든에게 바친 여섯 개의 현악사중주곡이 이를 증명합니다. 1784년 말 두 사람이 만난 뒤, 거꾸로 모차르트의 음악이 하이든에게 일정한 자극과 영향을 준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든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찬탄한 만큼, 모차르트의 존재 자체가 하이든에게 지속적으로 자극과 영감을 주었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런던의 한 악보상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가 팔려고 내놓은 미편집 악보 초고를 사는 게 좋을지 하이든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대답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악보를 사시오. 그는 진정 위대한 음악가였소. 친구들이 나더러 천재성이 있다고 칭찬해서 나도 가끔 우쭐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같은 책, p.119~121) 1807년 말, 콘스탄체가 연로한 하이든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도 ‘파파 하이든’은 모차르트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작별한 뒤 런던에서 마지막 오페라 <철학자의 영혼 -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를 썼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연하지 못했습니다. 



바로크 기타음악바로크 기타음악 그리고 ‘누나의 추억’


바로크 기타 음악은 누나의 추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나는 클래식 기타를 했고, 누나가 직접 연주하거나 LP로 듣던 곡들을 저도 늘 함께 들었습니다. 누나가 돌아가신 뒤, 저는 음악을 전공해서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못 이룬 법관의 꿈을 제가 이뤄주기를 바라셨지요. “피아노는 기지배들이나 하는 거야.”
 
집에 피아노가 없는데도 독학으로 피아노를 하려고 발버둥을 쳤지요. 헨델도 거의 독학으로 위대한 음악가가 됐는데 나라고 못 할게 뭐야, 헨델만큼 안 되더라도 난 음악가가 되고 말 거야, 사춘기 소년의 오기였습니다. 레코드 틀어놓고 혼자 지휘 연습을 하고, 어설프게 작곡도 해 보았지요. 예고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밴드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작곡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고, 음대 진학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음악의 꿈을 접어버린 걸 눈치 채신 걸까요? 좀 딱해 보이셨는지 “사내놈이 기타 뚱땅거리며 노래하는 건 좋아 보이더라”, 기타 배우는 건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꿩 대신 닭이었을까요? 기타도 음악은 음악이니 광화문의 학원을 다니며 <로망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까지 쳤습니다. 하지만 이 악기는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 입시도 다가오고, 몇 달 만에 그만두었죠.
 
어떤 악기든 실제로 배운 사람은 그 악기의 특성을 알기 때문에 좀 더 정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악기의 레퍼토리에 관한 한 일반인보다 많이 알 수 있지요.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 연주회에 간 적이 많은데, 그 친구들은 분명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음악 칼럼을 쓰는 분들 중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은 분명 저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음악을 들을 줄 알 것입니다. 시창 · 청음과 연주 테크닉 등 전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 전공자의 ‘귀’를 따라갈 수는 없지요. 


클래식 기타 음악은 그래도 조금 배웠다는 인연 때문에 제겐 각별합니다. 남들보다 듣는 귀가 발달했다는 게 아니라, E조, A조, D조가 비교적 기타의 특성에 맞는다는 점을 알고, 일반인들이 잘 안 듣는 기타 레퍼토리를 가까이 접해 보았다는 거지요. 어린 시절 누나 곁에서 들었던 몇몇 곡들은 평생 제 곁에 있습니다. 프레토리우스의 <발레>와 <라 볼타>는 아는 분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입니다. <발레>는 누나 곁에서 들을 때마다 아득한 그리움과 석양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라 볼타>는 아주 즐거워서 어릴 적에 자주 따라 불렀던 곡입니다. 지금 들어도 같은 느낌인데, 누나의 추억이 묻어나서 더욱 애틋합니다. 낡은 LP 자켓, 존 윌리엄스의 기타 연주였습니다.  
 
http://youtu.be/thvM2zeo1Bg 미하엘 프레토리우스(1571~1621)는 음악을 통해 카톨릭과 개신교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고 16세기 교회 음악을 결산한 독일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천곡이 넘는 성가와 춤곡집 <터프시코레>(Terpsichore)를 남겼는데, <발레>와 <라 볼타>는 이 춤곡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발레>는 아득한 그리움을 노래하듯 위엄 있게 흐르는 춤곡입니다. <라 볼타>는 남자 무용수가 여자 무용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격렬한 춤으로, 3박자로 된 왈츠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아득한 옛날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음악에 맞춰 춤추며 즐거워했군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57)는 바흐, 헨델과 동갑입니다. 그는 1709년 로마에서 헨델과 오르간 · 쳄발로 실력을 겨룬 일이 있는데, 쳄발로 실력은 헨델보다 오히려 나았다고 하지요? 그는 한 악장으로 된 소나타를 555곡 남겼는데, 모두 고르게 뛰어난 작품들이라 10곡 정도만 알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쇼팽 · 브람스 · 바르토크 · 쇼스타코비치 등 수많은 거장들이 스카를라티를 찬탄하며 즐겨 연주했습니다. 클래식 기타로 편곡 된 것 세 곡을 링크합니다. E단조 소나타에서는 거장 안드레 세고비아(1893~1987)의 연주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G장조와 A장조 소나타는 매우 기품있고 청아한 음악입니다. 


스카를라티 소나타 E단조 http://youtu.be/Eql_S0w6k0o  
스카를라티 소나타 G장조 http://youtu.be/Dhx2jyR-6LM
스카를라티 소나타 A장조 http://youtu.be/rE686euGY7c
 
세고비아는 헨델의 유명한 사라방드도 기타로 편곡해서 연주했습니다. 원래 하프시코드를 위한 모음곡 D단조에 들어있던 곡입니다. 느리고 장중한 춤곡, 기타로 연주해도 충분히 느낌이 살아나지요?

 

http://youtu.be/gUeKQXnVS2A 헨델의 소나타 D단조, 레코더 소나타를 편곡한 건데 원래 기타를 위한 곡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거장 세고비아의 연주를 옆에서 듣는 것 같은 훌륭한 녹음입니다. http://youtu.be/RdCMV892DoM
 
바흐, 퍼셀, 프레스코발티…. 바로크 시대 음악을 기타로 편곡한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군요.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얼마나 많은 곡을 남겼는지, 편곡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 연주자들이 기량을 갈고 닦아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려고 애썼는지 생각하니 아득합니다. 무한한 음악의 유산, 그 만분의 일을 누리기에도 인생은 짧은 것 같습니다.     



보케리니 메뉴엣 E장조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곡, 보케리니(1743~1805)의 메뉴엣입니다.
http://youtu.be/PWtTqSjtqL0 
어릴 적, 라디오 방송의 시그널로 이 곡이 나왔는데 언제나 즐겁고 신선한 느낌이었고, 뭔가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아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친근해서 오히려 찾아듣지 않았던 곡, 다시 들으니 어릴 적처럼 설레는군요.
 
루이지 보케리니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첼리스트로, ‘하이든의 아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네요. 하이든의 고전 양식에 충실하면서 로코코 풍의 유쾌하고 매력적인 선율을 담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는 140곡이 넘는 현악오중주곡, 100곡 가까운 현악사중주곡, 30곡 안팎의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뛰어난 콘트라바스 연주자였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도는 5살 난 루이지에게 첼로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이 된 루이지는 첼로 실력이 대단해서, 어려운 바이올린 곡을 첼로로 쉽게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의 현악오중주곡은 바이올린 둘, 비올라 하나, 첼로 둘로 이뤄져 있는데, 늘 반주 역할만 하던 첼로가 독주 악기로 활약하는 게 특징입니다. ‘현악사중주 반주의 첼로 협주곡’ 같은 느낌이지요. 첼로의 대가답게 그는 19곡의 첼로 소나타와 12곡의 첼로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그는 인생 후반기, ‘기타의 나라’ 스페인에 머물면서 12곡의 기타오중주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상쾌한 보케리니의 메뉴엣, 그의 현악오중주곡 E장조 Op.11-5에 나오는 곡입니다. A-B-A 형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첫부분 메뉴엣에 이어 중간 부분(1:26부터)에서는 상승하는 음계와 하강하는 음계가 재미있게 교차하고, 다시 메뉴엣(3:10)으로 돌아와서 단정하게 마무리합니다. 이 곡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어린이 오케스트라의 합주곡으로도 많이 연주하지요. <MBC스페셜>(연출 김인수, 2010년 10월)에서 방송한 ‘우당탕탕 오케스트라’편에서 지적장애 어린이들의 ‘하트-하트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했지요. 

보케리니의 음악 중 귀에 익은 선율 또 하나, 첼로협주곡 Bb장조도 들어볼까요? 언제 들어도 상쾌한 보케리니의 선율, 켜켜히 쌓인 세월의 먼지를 닦아주는 것 같습니다. http://youtu.be/CprhL_YJzAk



애증의 ‘사제관계’에서 두 음악가의 진심을 읽다 - 하이든과 베토벤


1804년 12월,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가 비공개 초연되는 현장. 72세 하이든은 젊은 반항아 베토벤의 새 교향곡을 듣고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상당히 길고 복잡하군. 못 듣던 음악이야. 어떤 작곡가도 이런 걸 시도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히 소란스러워. 하지만, 정말 새롭긴 하군.” 소감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한 하이든은 두어 걸음 옮긴 뒤 덧붙입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구나.”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의 영화 <에로이카> 중 한 장면(링크 1분 50초)에서 이 극적인 순간이 묘사됩니다. 베토벤 역은 아이언 하트가 맡았고, 엘리엇 가디너 지휘, ‘혁명과 낭만’ 관현악단이 연주합니다. <에로이카>에서 베토벤이 창조한 세계는 하이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다”는 하이든의 반응은, 자기 시대는 갔고 베토벤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으로 들립니다.


 

http://youtu.be/NkVuv0kLqNM


하이든(1732~1809)과 베토벤(1770~1827)의 관계는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서로 아끼고 격려해 주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밝고 환한 관계와 좀 달랐던 거죠. 하이든은 영국의 기획자 잘로몬과 함께 런던으로 가던 중인 1790년 말 본(Bonn, 베토벤의 고향이자 잘로몬의 고향)에 이틀 머물렀고, 이때 20살 베토벤을 처음 소개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든은 1792년 7월,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근교에서 베토벤을 다시 만납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뛰어난 재능에 감명받은 게 분명합니다. 1793년 시즌에 런던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니까요. 


그해 12월 베토벤이 빈에 정착한 뒤 하이든은 1년 가량 베토벤의 스승을 자임했습니다. 베토벤도 무서운 기세로 배우고자 했습니다. “하이든의 손을 통해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우라”는 발트슈타인의 조언을 베토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작곡가’ 하이든이 너무 바빴던 걸까요? 베토벤에게 과제를 내 주었지만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게 서운했는지 베토벤은 훗날 제자 리스에게 “나는 하이든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역정을 내며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베토벤을 여전히 자기 제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인 1793년 말, 하이든이 쾰른 선제후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베토벤은 앞으로 유럽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명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며, 나는 한때 그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 사이가 소원해진 탓인지 1794년 초, 하이든은 베토벤을 그냥 둔 채 혼자 런던으로 떠나 버립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관계없이 요한 솅크와 알브레히츠버거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베토벤을 여전히 아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돌아 온 뒤인 1795년 12월 빈의 레두텐잘에서 <군대> 등 런던에서 작곡한 교향곡 3곡을 연주했는데, 이 때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2번 Bb장조를 초연하도록 배려했습니다. 하이든은 빈의 가면무도회에서 사용할 춤곡과 메뉴엣을 베토벤이 작곡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 1795년 첫 피아노 트리오를 출판할 때, 하이든은 작곡자 이름 아래 ‘하이든의 제자’라고 써 넣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반항아는 코웃음을 치며 노스승의 제안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http://youtu.be/gkyKm1UXyPs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1번 Eb장조 Op.1-1, 1악장)

하이든이 마지막 오라토리오 <사계>를 완성하고 유서를 쓴 1801년, 갓 30살을 넘긴 베토벤의 첫 교향곡 C장조가 빈에서 초연됐습니다. 하이든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고, 베토벤이 ‘계몽과 혁명’ 시대의 주역으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친절한 배려는 젊은 베토벤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이 추구한 음악세계는 ‘음악의 착한 종’ 하이든과 달리 혁명과 자유를 향해 저 멀리 도약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하이든의 음악에서 고전 음악의 양식을 배운 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숭고함, 자유분방함 등 베토벤 음악의 본질은 하이든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기질이 거의 정반대였기 때문에 소원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몽사상에 심취했고 혁명에 열광했던 베토벤은 하이든이 평생 귀족의 후원 아래 활동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빈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하이든을 ‘경쟁자’로 여겼고, 자기 독창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1800년 즈음에는 이 대선배의 가르침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데 질곡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새로운 길은 하이든의 취향과 맞지 않으며, 자기 음악이 하이든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습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무서운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신참일 뿐인 베토벤이 신속하게 빈의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인정받는 데 대해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베토벤의 천재성이 빛나기 시작할 즈음엔 그가 자신을 스승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곤혹스러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이든이 베토벤을 앉혀놓고 직접 가르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존재와 음악 자체가 베토벤 음악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 협주곡, 소타나, 실내악곡이 하이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하이든의 영향은 베토벤의 초기 작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말기 현악사중주곡, 그 심오한 세계는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장엄미사> 또한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후기 미사곡들이 있었기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세월이 흘러 성숙해질수록 하이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누그러졌고, 늙은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하이든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은 베토벤에게도 어색한 일이었겠죠. 자신이 젊고 생산력이 왕성한데 비해 스승이 늙어 가며 일을 못하게 됐다는 점에 마음 한편으로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메이너드 솔로몬 <루드비히 판 베토벤>, 김병화 역, 한길아트, p.210) 두 사람의 화해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야 이뤄졌습니다. 


베토벤은 1808년 3월, 하이든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연주된 뒤,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하이든에 대해 말할 때 과거의 원망과 괴로움 없이 언제나 따스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하이든을 헨델, 바흐, 글루크, 모차르트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고 자신은 그 인물들 옆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1809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완전히 새로운 음악, 곧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습니다.  


베토벤 <에로이카> 악보 표지.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표지에서 ‘보나파르트’라고 쓴 부분을 찢어버렸다.

하이든과 베토벤은 애증이 얽힌 사제지간이었고, 결국 시간과 더불어 해피엔딩이 다가 온 셈입니다. 음악에서 타협을 몰랐지만 속마음은 따뜻했던 베토벤이었기에 자연스레 화해의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뒤 물러나야 할 때를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인 하이든의 지혜를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모차르트 부자의 위대한 음악적 역사의 시작

레오폴트 모차르트 ‘장난감’ 교향곡


아버지…. 당신께서 이루지 못한 법관의 꿈을 자식이 이뤄주기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뜻대로 되는 자식은 별로 없지요. 자식은 아버지와 한 몸이 아니니까요. 어린 자식의 눈에 아버지의 등은 큰 산처럼 보였습니다. 가부장 체질이 몸에 밴 아버지에게 자식들은 ‘반파쇼적 파쇼’라는 불경스런 별명을 붙여 드렸죠. 독재자를 증오하셨지만 집에서는 제왕이셨으니까요. 자식이 커 가면서 아버지의 등은 점점 여위어 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흠씬 두드려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맞으면서 생각하니까 별로 아프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기운이 예전 같지 않구나…. 


 

http://youtu.be/72DMLagfx5I  아마데우스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 그의 바이올린 교본 표지에 실린 그림.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험한 시절, 당신의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실 틈조차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여느 아버지처럼 술 한 잔과 젓가락 장단에 젊음과 아픔을 실어 보내셨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섰습니다.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는 휑하니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알맹이는 자식이 오롯이 다 빼 먹었고, 아버지는 텅 빈 가부장의 껍질 속에서 늙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생명을 주고, 먹여서 키워 주고, 공부시켜 주셨다는 사실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자식, 임종 직전의 아버지 손을 잡아드리며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 우리는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아버지로 그를 기억합니다. 그의 부인 안나 마리아는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두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여섯째인 딸 마리아 안나(애칭 난넬, 1751~1829)와 막내 볼프강, 아버지는 이 아이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아이는 다행히 잘 자라 주었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특히 막내 볼프강은 3살 때 누나 흉내를 내며 피아노 3도 음정을 짚었고, 5살 때는 배우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척척 연주했습니다. 1/8 음정 틀린 것을 지적할 정도로 음감이 뛰어났던 5살 꼬마는 이미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아이가 진정 제 자식이란 말입니까?” 볼프강의 놀라운 재능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레오폴트는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천재를 잘 키우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의무가 아니라 ‘신의 소명’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볼프강이 태어났을 때 레오폴트는 37살, 인생의 정점에서 빛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 해 레오폴트가 출판한 <바이올린 교본>은 “18세기 후반에 독일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모두 그 책으로 공부했다”고 할 정도로 명저였습니다. 오늘날도 18세기 바이올린 연주법에 관심 있는 음악가들은 이 책을 참고한다고 합니다. 그는 잘츠부르크 궁전의 부악장으로, 이미 독일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다수 궁정 아첨꾼들보다 지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적 사건에 활발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서신들이 입증하듯이 세상의 모든 궁정에서 돌아가는 일을 놀랄 만치 정확하게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박미애 옮김, 문학동네, p.102~103) 

이러한 그가 음악가로서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포기하고 자식의 교육에 인생 전부를 던진 것입니다. 1762년 이후 그는 바이올린 강습과 작곡을 모두 그만두고 두 자녀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납니다. 이러한 선택이 자식들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아니면 자식 덕에 돈과 명예를 거머쥐겠다는 탐욕이었는지 숱한 논란을 낳았습니다.

건반을 가린 채 피아노를 치고, 처음 듣는 주제로 즉흥 연주를 척척 해 내는 두 어린의의 놀라운 재능에 당시 유럽 귀족들은 경악했습니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기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돈을 좀 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누구라도 이왕이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신동’의 소문에 비해, 은근히 기대했던 금전적 이득은 별로 없었습니다. 난넬이 “아버지는 우리를 서커스단 아이들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불평한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평범한 어린이가 누려야 할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여행은 아이들에겐 매우 고된 일정이었습니다.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네덜란드에서 두 아이는 천연두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3년간의 여행은 볼프강에게 엄청난 교육이었습니다. 당시 빈, 파리, 런던의 궁정에는 유럽의 최고 음악가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어린 볼프강은 이들과 한 자리에서 연주하고 대화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습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던 궁정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최상의 음악 교육을 받은 거지요. 레오폴트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습니다. 아들 덕분에 자기 명성도 덩달아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볼프강의 교육이었고, 이 지점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아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자기자신과 불화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종종 스스로 선택한, 그에게 이미 충만한 의무, 가혹한 훈련과 노동을 통해 아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아들에 대한 동정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같은 책, p.104)     

레오폴트는 자신이 아들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버지와 아들처럼 두 사람도 숙명적인 갈등과 위기를 맞게 됩니다. 볼프강이 콜로레도 대주교의 봉건적 속박과 결별하던 1781년, 아버지는 구질서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봉건 질서에 대한 볼프강의 반항은 곧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콜로레도 대주교가 있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고 아들을 설득하고 위협했지만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단의 순간에 볼프강은 주저없이 자유를 택했고, 자유 음악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폴트도 여느 아버지처럼 아들이 순탄한 삶을 살기 바랬을 뿐, 볼프강의 재능이 잘츠부르크라는 변두리에서 질식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볼프강은 결국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성공했고, 1784년 말경에 아버지와 화해를 이룹니다. 이 시절 두 사람의 갈등과 배경, 그 과정은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글 ‘모차르트의 반란’ (같은 책, p.157~184)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린 볼프강에게 아버지 레오폴트는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습니다. 볼프강의 음악은 나이를 먹을수록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6살 때 온 가족이 함께 떠난 3년간의 유럽 여행, 그리고 아버지와 단 둘이 떠난 세 차례 이탈리아 여행 기간 내내 그의 음악은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어른이 되어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25살 이후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무르익어 갑니다. 천재는 새로운 것을 끝없이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지요. 레오폴트는 타고난 천재 볼프강이 무한히 배우도록 드넓은 세계로 이끌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스스로 공부하며 성숙해 가는 진정한 천재가 될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 준 것입니다. 

볼프강은 음악가를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천재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훌륭한 재능도 혼자서 저절로 익어가는 법은 없다는 걸, 빛이 있으면 그 빛을 밝혀 줄 어둠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결국 네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걸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모차르트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음악적 식견으로 어린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 길에서 끝없이 등불을 밝혀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이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닌 ‘작곡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생각할 차례군요.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제본사의 아들로, 어릴 적에 합창단에서 노래했고 음악극에 출연했습니다. 18살 때 잘츠부르크에 와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지만 출석 불량으로 퇴학당한 뒤 21살 때인 1740년, 직업 음악가로 데뷔합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도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돌아왔나 봅니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젊은 시절, 얼마나 많은 방황과 고뇌가 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는 1743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악단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취업했고, 1747년 안나 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오랜 세월 하이든의 작품으로 오해된 <장난감> 교향곡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곡 뿐 아니라 <농부의 결혼식>, <썰매타기>, <사냥> 교향곡 등 소박하고 즐거운 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서민에 대한 상냥한 마음이 배어 있고 뻐꾸기 소리, 딱총 소리, 백파이프 소리 등 익살스런 악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소나타와 미사곡, 오라토리오도 쓸 수 있는 유능한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이 볼프강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고, 반대로 레오폴트 작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볼프강 것인 경우도 있습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 교향곡 <농부의 결혼식> http://youtu.be/4L3Df4YwdxM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앙상블)

1787년 레오폴트가 세상을 떠날 무렵, 볼프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극적인 현악오중주곡 G단조 K.516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 이상하게도 <음악의 농담> K.522 같은 즐거운 곡도 썼습니다. 친구 야크빈에게 쓴 편지를 보면 당시 볼프강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설픈 시골악사들이 연주하다가 달려가고 쫓아가며 결국 엉망으로 끝나버리는 유머러스한 곡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하필 이런 곡을 쓴 이유가 뭘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슬퍼서 미친 듯 한번 웃어 보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 레오폴트의 유쾌한 음악과 비슷한 분위기의 곡으로 아버지에게 경의(hommage)를 표하려 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싶어지는군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음악의 농담> K.522, 4악장 프레스토 http://youtu.be/lLjRDlnbyOw (귀도 칸텔리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모차르트에게 바흐를 전해 준 후원자, 반 슈비텐 남작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C장조 K.551 ‘주피터’ 중 4악장 ‘몰토 알레그로’


바흐와 모차르트가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두 사람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는 점입니다! 바흐가 달빛 아래서 옛 거장들의 악보를 베껴서 공부했고, 북스테후데(1637~1707)의 오르간 음악을 배우기 위해 아른슈타트에서 뤼벡까지 400Km를 걸어서 그를 만나러 간 일은 잘 알려져 있지요. 

모차르트도 바흐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경이로운 연주 실력에 놀란 동료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칠 수 있나?” 물어보자 “더 이상 연습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연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수많은 여행을 통해 유럽의 모든 음악 사조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란 말이 있지요? 바흐와 모차르트를 볼 때, 천재란 끝없이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yRUlzJn8UeU 


모차르트와 바흐 가문의 인연은 길고도 깊습니다. 모차르트는 9살 때 런던에서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4~1782, 바흐의 막내 아들)를 만나 22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음악 친구가 됐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였던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14~1788, 바흐의 차남)의 악보를 연구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를 찬탄하며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그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와 모차르트의 관계는? 바흐는 세상을 떠난 뒤 거의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몇몇 사람들은 바흐의 위대성을 간파하고 그의 악보를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모차르트에게 바흐 음악을 건네준 사람,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도 그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저는 매주 일요일 정오 슈비텐 남작을 만나러 갑니다. 그의 집에서는 바흐와 헨델만 연주합니다.”

-1782. 4. 10 빈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슈비텐 남작은 자기가 수집한 바흐와 헨델의 악보를 모차르트가 집에 가져가서 연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빈에 정착한 직후 모차르트는 바흐 풍의 푸가를 여러 곡 작곡합니다. 모차르트 환상곡과 푸가 C장조 K.394 (환상곡 : 처음 ~ 5:07, 푸가 5:07 ~ 끝) 이 곡의 기원에 대해 모차르트 자신이 설명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m9vVu8rNON4 

“반 슈비텐 남작은 헨델과 바흐의 작품을 - 그의 앞에서 내가 연주한 다음 - 집에 가져가서 보라고 주었어. 콘스탄체(주 :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는 바흐의 푸가들을 듣자마자 홀딱 반했지. 그녀는 푸가, 특히 바흐와 헨델 곡 이외에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나온 푸가를 몇 번 연주해 주니까 그녀는 악보에 적어 두었냐고 묻더군. 아직 안 했다니까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나무라면서, 이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음악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했어. 그녀의 끝없는 간청에 결국 그녀를 위해 푸가를 하나 썼지. 그래서 이 곡이 태어나게 된 거야.”

-1782년 4월 20일 빈에서 누나 난넬에게


모차르트 교향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걸작 <주피터>의 피날레는 약동하는 푸가의 대향연입니다. 모차르트가 바흐의 푸가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곡, 따지고 보면 반 슈비텐 남작이 모차르트에게 바흐의 악보를 빌려주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곡이지요. 천재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무궁무진한 노력,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에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위대한 걸작에 대해 얘기할 때 반 슈비텐 남작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반 슈비텐 남작(1733~1803)은 1777년부터 죽을 때까지 빈 황실 도서관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바흐와 헨델의 열렬한 팬이자 아마추어 작곡가로, 매주 일요일 오후에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1781년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이 음악회에 매회 참석, 바흐의 푸가를 실내악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했습니다. 슈비텐 남작은 1780대 후반 음악 후원자 그룹을 결성하여 헨델 오라토리오 공연을 지원했는데, 모차르트는 이 공연을 위해 헨델의 <메시아>, <아치스와 갈라테아>, <알랙산더의 향연>, <성 체칠리아 찬가>를 편곡했습니다. 영어에 능통했던 슈비텐 남작은 헨델 오라토리오의 가사를 독일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 뿐 아니라 하이든과 베토벤에게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오라토리오 판의 가사를 교정해 주었고, 영어로 된 <천지창조>의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하이든이 음악을 완성한 뒤에는 이 음악에 맞게 새로 영어 가사를 썼습니다. 하이든이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준 것도 그였습니다. 베토벤도 빈 초기 시절에 슈비텐 남작의 후원을 받았고, 그가 소장한 바흐와 헨델 악보를 맘껏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첫 교향곡 C장조를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하여 존경을 표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1번 C장조 Op.21 http://www.youtube.com/watch?v=17GHtYvfoWw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을 돕고 바흐의 악보를 전해 줘서 천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준 후원자 슈비텐 남작, 오늘만큼은 모차르트 <주피터>도, 베토벤 교향곡 1번도 모두 그를 기리며 듣고 싶군요.^^ 



‘상처입은 치유자’ 베토벤을 칭송하고 그를 존경한 루돌프 대공의 우정

피아노 트리오 Bb장조 ‘대공’


최근, ‘진실의힘’* 행사에서 베토벤의 <대공>(大公) 트리오가 울려퍼졌습니다. 인권 단체 행사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지요. 6월 26일, UN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행사로, ‘진실의힘’을 후원하는 분들이 객석을 메웠습니다. 젊은 연주자 3명이 마음을 바쳐 정성스레 연주했습니다. 무대의 스크린에는 이 곡을 설명하는 자막이 펼쳐졌습니다.

“청각상실의 고통을 딛고 음악으로 인류를 위로하는 ‘상처입은 치유자’ 베토벤, / 루돌프 대공을 비롯한 후원자들의 오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한 사람의 고문생존자가 존엄성을 회복하고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공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은 이미 ‘대공’입니다. /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곡, 베토벤 피아노 3중주 Op.97 <대공> (Archduke)”

 
http://youtu.be/GCS9bURe3y8 (첼로 파블로 카잘스, 바이올린 자크 티보, 피아노 알프레드 코르토)

음악사의 모든 피아노 트리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대공> 트리오, 베토벤이 이 곡을 바친 루돌프 대공(1788~1831)은 누구일까요?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아들로, 이어서 황제가 된 프란츠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1809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는데, 음악성이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로드와 함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을 초연한 뒤 호평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피아노 파트가 바이올린보다 훨씬 훌륭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정신을 더 잘 소화해 더욱 풍부한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을 숭배해서, 100통이 넘는 베토벤의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1808년 베스트팔리아 궁정이 베토벤을 초청하자, 루돌프 대공 등 빈의 귀족들은 베토벤이 빈을 떠날 것을 우려하여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생계의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위대하고 숭고한 작품을 창조하며 오직 그 분야에 헌신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이 빈에 머물기로 하자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은 발을 뺐고, 약속대로 베토벤을 후원한 사람은 루돌프 대공뿐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대공> 트리오 뿐 아니라 피아노협주곡 <황제>, 피아노소나타  <고별>과 <함머클라비어>, <장엄미사> Op.123 등 중요한 작품 11곡을 헌정해서 감사를 표했습니다. 베토벤이 불멸의 예술혼을 담아 써내려간 걸작들입니다.

두 사람은 단순히 예술가와 후원자로 머물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우정을 나눴습니다. 베토벤은 1812년, ‘불멸의 연인’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했습니다. 이 무렵의 심경을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습니다. “일요일 이후 나는 많이 아팠습니다. 물론 그 병은 신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차례차례 일어나서 저는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렸습니다.”

당시 베토벤의 일기입니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만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이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사랑은 번번히 실패했지만 루돌프 대공의 우정이 있었기에 베토벤은 다시 삶과 예술을 긍정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었습니다. 1812년 테플리츠에서 괴테와 함께 산책하다가 루돌프 대공의 행렬과 마주친 일화가 전해집니다. 베토벤의 회상입니다. “제왕과 군주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위대한 인간을, 높이 치솟아 오르는 고귀한 정신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괴테와 내가 함께 있으면 군주들도 우리들의 위대함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 어제,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황실의 행렬을 만났습니다. 괴테는 잡고 있던 내 팔을 놓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길가에 도열하는 게 아니겠어요?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코트를 목 위로 추켜올리고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지요. (…) 루돌프 대공이 나를 알아보고 모자를 벗고 인사했지요. 공비(公妃)도 내게 먼저 인사했고요.” 군중 속의 한명으로 ‘대공’을 만난 게 아니라 개인 베토벤과 개인 루돌프로 만난 것입니다.
 
<대공> 트리오는 1811년 3월에 완성됐고 1814년에 초연됐습니다. 네 악장, 1,200마디로 된 큰 곡입니다.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 자크 티보의 바이올린, 알프레드 코르토의 피아노가 어우러진 역사적 명연주, 1928년 녹음이라 음질이 썩 좋지는 않지만 세 거장의 호흡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각 파트는 자유분방하게 노닐면서도 섬세하게 어우러져 완벽한 앙상블을 이룹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템포, 우아하게 빛나는 선율들, 절제된 고상함과 여유…. 베토벤이 이 곡에서 그리고자 했던 루돌프 대공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 ‘진실의힘’은 박정희 ·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모진 고문 끝에 ‘간첩’ 누명을 쓴 분들이 잇따라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국가의 배상금을 출연해서 만든 치유공동체입니다.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를 입은 분들이 힘을 모아 이 시대의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죠. 과거 고문조작으로 ‘간첩’이 된 선생님들은 이제 베토벤처럼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 ‘집착없는 사랑’ ①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2악장 ‘아다지오’


한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이 아름다울 때 ‘백조의 노래’라는 별명을 붙이곤 한다. 백조는 평생 침묵하다가 죽기 직전, 단 한 번 아름다운 목청으로 노래한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협주곡이자 클라리넷을 위해 쓴 오직 하나의 협주곡, 그 2악장 ‘아다지오’가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아름답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중학교 때 처음 산 이 곡 LP 표지에 백조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부터 이 곡을 모차르트의 ‘백조의 노래’라고 생각해 왔다. 


맑고 투명한 멜로디다. 지극히 단순한 8마디의 첫 주제를 클라리넷이 연주하고 오케스트라가 응답한다. 다시 8마디로 된 주제 뒷부분을 클라리넷이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이어 받는다. 플루트, 파곳, 호른이 포함된 오케스트라 음색이 찬란히 빛난다. 담담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사랑하는 세상을 떠나는 슬픔이 마음 속 깊이 고여 있다. 

모차르트가 죽기 두 달 전인 1791년 10월 초에 완성했다. 그는 9월 30일부터 새 오페라 <마술피리>를 10번 가량 지휘한 다음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집에 누워 있게 된다. 이제 <레퀴엠>을 완성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일할 차례였다. 클라리넷 협주곡은 이 무렵에 작곡했다.  
  
“지금 내 상태를 보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내 재능을 더 발휘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이 올 것만 같아. 하지만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내 삶은 그토록 멋진 행운의 별들 아래에서 시작했지. 하지만 아무도 자기의 운명을 맘대로 할 수 없고 앞으로 며칠이나 살지 알 수 없는 법. 운명은 받아 들여야 할 뿐이야. 섭리가 정한 일은 오게 마련이야.” -1791년 9월, 다 폰테에게 쓴 편지*
  
모차르트는 병상에서 자기의 35년 일생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6살 때부터 온 유럽이 내 연주에 환호했지. 이탈리아 여행은 참 재미있었지만, 파리 여행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자유로운 음악이 나의 소명이라 생각했고, 범상한 음악가로 잘츠부르크에 갇혀 있기 싫었어. 콜로레도 대주교의 속박을 걷어차고 넓은 세상에 뛰어들었을 때는 정말 신났어. 내 오페라와 협주곡에 빈 청중들이 열광할 때 세상은 내 것이었어. 한때 빈 청중들이 나를 외면했지만 이제 <마술피리>가 꾸준히 호응을 받고 있어. 그런데 열이 나고 기운이 하나도 없구나. 정녕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일까? <레퀴엠>을 빨리 완성해야 하는데….  


 

http://youtu.be/JcIyTiKwDvU


모차르트는 죽음을 몇 시간 앞둔 자리에서 아내 콘스탄체에게 말했다. “나 자신을 위해 <레퀴엠>을 작곡하고 있다고 당신에게 이미 얘기하지 않았소?” (처제 소피의 증언, 졸고 <레퀴엠과 모차르트의 죽음>). 클라리넷 협주곡을 쓸 때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곡을 들으면 모차르트가 이미 마지막 순간을 예견하며, 사랑하는 세상과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달관의 마음을 단순하게 노래한다.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지만, 엉엉 울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는다. 투명한 아름다움 속에 조용히 흐를 뿐이다. ‘집착 없는 사랑’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으리라. 차이코프스키가 마지막 작품인 <비창> 교향곡에서 큰 소리로 탄식하며 울부짖었음을 기억한다. 말러가 마지막 교향곡인 10번에서 아내 알마를 뜻하는 ‘A’ 음을 길게 외치며 고통스레 몸부림쳤음을 기억한다. 모차르트를 숭배한 두 사람의 마지막 교향곡, 둘 다 위대한 작품이지만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모차르트도 사람인지라 죽기 전날 친구들 앞에서 잠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처제 조피에게 아내 콘스탄체를 잘 돌봐 달라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곧 맑은 미소를 되찾았다. 이 미소가 바로 클라리넷 협주곡의 아다지오가 노래한 ‘집착 없는 사랑’인 것이다.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 그의 음악은 듣는 이도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자기 감정을 강요하거나 몰아붙이지 않는다. 친절하고 상냥한 그의 음악은 맑디맑은 거울과 같다. 이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0년이 훌쩍 지난 요즘, 그의 음악은 어느 때보다 널리 소비되고 있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핸드폰 신호음에서 우리는 날마다 모차르트를 들으며 살고 있다. 혼탁한 세상, 바쁜 사람들 틈에서 그는 여전히 외로울 것 같다. 


이 곡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와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와 카렌(메릴 스트립)의 사랑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http://youtu.be/aAt_UqHaBe4
   
영화를 다시 보니, 일부 장면이 적지 않게 거슬린다. 경비행기를 타고 시끄럽게 새들 위로 날아가는 장면이 무례하고, 호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이 잔인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시종일관 소도구처럼 취급하는 데서 백인중심주의 냄새가 난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노래한 ‘집착 없는 사랑’과 영화 속 두 사람의 사랑은 닮은 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근사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고른 것뿐이겠지…. 이 음악 덕분에 영화 속의 사랑이 빛났다면 모차르트는 불평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당시 새로운 악기였던 클라리넷과 바셋 호른*을 아주 좋아했다. 그의 오페라나 협주곡에서 ‘따뜻한 마음’을 표현할 때는 언제나 클라리넷 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 오페라 <황제 티토의 자비>에서는 여주인공 비텔리아의 마음을 묘사하기 위해 클라리넷 솔로가 종횡무진 활약하기도 한다. 

클라리넷은 높은 음역과 낮은 음역의 음색이 달라서 매우 화려한 효과를 낼 수 있는데, 이러한 악기의 특성을 완벽하게 살려낸 곡이다. 당대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작곡했다. 전곡을 들어보자. <돈조반니>를 초연했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무대가 된 프라하 에스타테스 극장이다. 클라리넷 샤론 캄, 체코 필하모닉 연주. 1악장, 오케스트라의 서주부터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감동과 놀라움을 맛볼 수 있다. 


http://youtu.be/u3EWzyFWyBM (1악장 알레그로 4/4박자, 2악장 D장조 아다지오 3/4박자, 3악장 론도 알레그로 6/8박자)  
 
◎ 필자 주

* 1791년 9월, 다 폰테에게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 <레퀴엠>이 작곡된 과정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을 쓴 벨기에의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모차르트의 편지 중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이 편지를 10월에 썼다면 설득력이 있겠지만 9월에 썼다는 건 이상하다. 9월 30일 <마술피리>가 초연됐을 때, 모차르트는 곧 죽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 본문 중 <레퀴엠>을 가리켜 모차르트가 직접 ‘백조의 노래’라 부른 것도 좀 어색해 보인다.

* 바셋 호른 : 1770년 경 독일의 마이어호퍼가 개발한 목관악기로, 클라리넷의 형뻘 된다. 모차르트는 <그랑 파르티타> K.361과 <레퀴엠> K.626에서 이 악기를 썼고 훗날 멘델스존과 R. 슈트라우스도 이 악기를 위한 작품을 남겼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 안톤 슈타틀러 (Anton Stadler, 1753~1812) 모차르트의 친구로 당대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 모차르트는 그를 위해 클라리넷 5중주곡과 클라리넷 협주곡을 썼다. 그뿐 아니라, 원래 클라리넷이 포함되지 않았던 교향곡 40번 G단조를 개작, 두 대의 클라리넷을 포함시켰다. 1791년 봄 빈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안톤 슈타틀러와, 역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동생 요한 슈타틀러가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 



모차르트, ‘집착없는 사랑’ ② 현악오중주곡 G단조 K.516 


“마음이 없는 천재라는 것은 넌센스다. 천재란 위대한 지성이나 탁월한 상상력, 심지어 이 두 가지를 합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천재를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뿐이다.”   -1787. 4. 11 친구 야크빈이 모차르트 방명록에 남긴 말


“음악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시죠?” 1996년 지휘자 주빈 메타를 인터뷰하던 중 단도직입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모든 음악에는 사랑이 들어 있지요.” 맞아,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당시 그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모음곡>을 연주했는데,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 들어 있었다. 사라장이 협연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달콤하고 멜랑콜릭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는? 그의 음악이 특별하다고 느낀다면 어떤 사랑이 들어있기에 그럴까? 2006년 모차르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모차르트에 대한 책을 쓸 때도 이 물음에 충분히 답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른 모든 작곡가들의 음악에도 사랑은 담겨 있는데, 나는 왜 하필 모차르트에만 빠져 있는가? ‘집착 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일 때 모차르트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http://youtu.be/nSTNuPowH9g


모차르트가 5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35년 동안 전문가가 베끼지도 못할 만큼 많은 작품을 썼고, 한곡 한곡이 모두 완벽하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1787년, 아버지 레오폴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쓴 편지의 한 대목.


“죽음이란 것은 우리 삶의 마지막 목적지이고, 저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좋은, 참된 벗인 죽음과 이미 친숙해졌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이 두렵기는커녕 반대로 위안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저는 아직 젊지만 잘 때마다 ‘오늘밤에 잠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 때문에 제가 침울해 보인다거나 슬퍼 보인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1787년 4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에서 6번 가족의 죽음을 겪었다. 22살 때 어머니, 3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 중 4명이 죽었다. 민감한 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어디에 ‘집착’이 발붙일 자리가 있었겠는가. 당연한 귀결로 그는 살아있는 날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나누는 게 유한한 인간들의 가장 큰 축복이라는 점을 체득하고 있었다. ‘집착 없는 사랑’ 이 바로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인 것이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 이별의 느낌을 담고 있는 노래 <라우라에게 보내는 저녁 상념> K.523, 아리아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K.513 같은 작품도 썼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 K.525나 <음악의 유머> K.522처럼 즐거운 작품도 썼다. 이 점은 내게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잘 알다시피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최대 스승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모차르트의 교사이자, 헙력자이자, 조언자이자, 간호사이자, 비서이자, 흥행사이자, 홍보관이자, 응원단장이었다.” (피터 게이 <모차르트, 음악은 언제나 찬란한 기쁨이다!>, 정영목 옮김, 푸른숲 p.48) 하늘같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마당에 어떻게 그런 곡을 썼을까? 

따뜻하고 상냥한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죽음에 냉담했을 리 없다. 당시 모차르트는 친구에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이처럼 즐거운 음악을 쓸 수 있었을까? 결론은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죽음조차 음악으로 승화해 냈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음악이었고, 모든 ‘집착’이 부질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버님의 병이 나아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모든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으신다면, 더 편찮아지신다면, 부디, 부디 저에게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사람이 낼 수 있는 제일 빠른 속도로 달려가서 아버님을 안을 수 있게…”  -모차르트, 같은 편지에서


모차르트가 이 편지를 쓴 직후에 작곡한 게 바로 G단조 현악오중주곡이다. 그의 음악은 가장 밝고 명랑한 순간에 슬픔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지만, 반대로 가장 슬픈 음악에서 언제나 가장 따뜻한 위안과 긍정을 속삭인다. 빈에 정착해서 살던 마지막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모차르트. 그가 결코 감상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 당당하고 고귀한 자세로 삶에 맞서고 있었음을 이 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1악장 알레그로는 삶에 지친 한 인간의 독백에서 시작한다. “난 피곤해, 난 슬퍼…” 잠시 후 탄식 소리가 되풀이 된다. “삶이란 건 언제나 슬펐어. 삶에서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어?” 모차르트는 칭얼대거나 고함치는 대신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노래한다. 이어지는 독백. “하지만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언제나 삶을 사랑했어.”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 “그래, 나는 하느님과 화해했어, 나는 삶을 긍정할 수 있었어!” 재현부로 돌아오면 삶을 긍정하는 대목마저 단조로 나온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 “여전히 슬퍼. 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삶을 사랑해.”  

죽음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를 모차르트 음악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베토벤에게 <운명> 교향곡이 있다면 모차르트에겐 이 현악오중주곡이 있다. 베토벤이 청각상실이란 저주를 딛고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어 승리를 쟁취했다면, 모차르트는 ‘집착없는 사랑’을 통해 삶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모차르트는 체념한 운명주의자처럼 노예의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고 말한다. 때로는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에 자유의 출발점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비극적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 진정 즐거운 사람”이라는 말은 모차르트에게 완벽히 적용된다.


“모차르트는 자기의 깊은 우울을 봐 달라고 듣는 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늘 의기소침해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빚에 시달리며 슬픔과 공허함을 한탄하던 시절에도 순간순간 정말 기운차게 사는 사람이었다.” (피터 게이, 같은 책, p.176)  

G단조 교향곡 K.550이 C장조 교향곡 <주피터> K.551과 짝을 짓고 있듯, 이 G단조 오중주곡 K.516은 C장조 오중주곡 K.515와 한 묶음이다. 바이올린 둘, 비올라 둘, 첼로 하나가 등장한다. 비올라의 소박하고 수수한 음색이 곡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곡을 ‘비올라 오중주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비올라 파트를 즐겨 맡아서 연주했는데, 이 곡에서 비올라는 우울하고 괴로운 음색을 들려준다. ‘위대한 비극’인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우울’로부터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예다. (같은 책, p.167) 피터 게이는 “이 시절 모차르트 인생의 기본 색조가 비올라의 음색을 닮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멋지게 덧붙였다. (같은 책, p.176)


전곡을 들어보자. http://youtu.be/pGe4o2jk2-E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메뉴엣 알레그레토, 3악장 아다지오 마 논 트로포(느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4악장 아다지오 - 알레그로)



알에서 깨어난 천재, 5살 모차르트 - 메뉴엣 G장조 K.1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를 낳은 도시 잘츠부르크, 이 곳 대성당에서는 날마다 정오가 되면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첫 작품, 메뉴엣 G장조다. 어느 작곡가에게나 첫 작품은 소중하겠지만, 5살 꼬마 모차르트가 쓴 이 곡은 유달리 궁금하다.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 같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는 세상, 모든 게 경이롭다. 모든 게 처음이다. 첫 충격, 첫 사랑…. 
  
다섯 살 위 누나 난넬(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 솜씨가 뛰어났다. 아버지는 재능 있는 딸을 위해 ‘난넬을 위한 노트북’을 만들었다. 딸이 연습하기 좋은 피아노 소곡을 모아 놓은 악보집이었다.


 

http://youtu.be/KK97qrf_Hs8 (피아노 연주 발터 클리언)


막내 볼프강의 재주가 심상치 않았다. 누나가 연습하다 자리를 뜨면 세 살 볼프강은 피아노 앞에 앉아 누나 흉내를 내며 기분 좋은 3도, 5도 화음을 짚어냈다.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자리를 옮길 때면 반드시 음악이 있어야 했다. 볼프강은 아버지와 친구들이 연주하는 걸 듣다가 “음정이 1/8 틀렸어요” 지적하지 않나, 배우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척척 연주하지 않나, 믿을 수 없는 재능을 보였다. 게다가 스스로 작곡에 손을 대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레오폴트는 ‘난넬을 위한 노트북’에 5살 볼프강이 만든 곡들을 실었다. 그 첫 곡이 바로 이 메뉴엣이었다. 레오폴트가 기보(記譜)를 도와주었겠지만, 5살 꼬마의 반짝이는 느낌 그대로다. 이 순수함은 모차르트가 35살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5살 때그가 보여 준 재능은 그 뒤 30년 동안 변화무쌍하게 발전하며 무르익어 갔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초의 신선한 빛을 잃은 적이 결코 없다.   


몇 달 뒤 작곡한 메뉴엣 F장조를 보자. 첫 곡보다 훨씬 성숙한 느낌이다. 메뉴엣 F장조 K.5 http://youtu.be/NvHO_y6CG5Y 특히 나를 매혹시키는 대목은 15마디~18마디 부분이다. C장조로 된 5마디~8마디의 음형을 원래 조성인 F장조로 변화시켰다. 왼손이 “솔.솔.파.미.레.도” 하강할 때 오른손이 분산화음을 연주한다. 똑같은 음형인데 17~18마디는 15~16마디보다 한 옥타브 높다. 낮은 음계에서 한 번 연주한 뒤 한 옥타브 높게 한 번 연주한다. 귀를 쫑긋 세우고 음악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꼬마 모차르트의 모습, 얼마나 귀여운가! 얼마나 경이로운가! 5살 때 작곡한 이 대목은 훗날 자유 음악가로 우뚝 서서 소나타와 협주곡으로 무한한 재능을 펼치는, 성숙한 모차르트를 예견케 한다. 

모차르트가 ‘조숙한’ 천재였다는 점은 놀랍다. 그가 ‘끝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천재였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유능한 작곡가였다. 볼프강이 태어난 해인 1756년에 ‘바이올린 교본’을 출판, 전 유럽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자기 커리어를 모두 접었다. 꼬마 볼프강이 6살 되던 1762년, 기나긴 유럽 여행이 시작됐다. 빈,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모두 방문했다. 모차르트 가족은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됐고, 환대를 받았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전 유럽에 알리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 비난할 일은 아니다. 이 여행이 꼬마 볼프강에게 훌륭한 교육 기회라는 점을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가 이 여행을 통해 당시 유럽 음악의 조류를 모두 흡수해서 어엿한 음악가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레오폴트가 이 점을 얼마나 면밀히 생각하고 계획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최초의 긴 여행이 볼프강에게 훌륭한 교육이 됐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끝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천재의 일생, 그 출발점에서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 볼프강을 이끌며 함께 했다.
      
◎ 필자 주
* 모차르트의 어릴 적 일화들을 포함,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모두 생략한다. 모차르트에 대한 훌륭한 전기가 이미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피터 게이 <모차르트, 음악은 언제나 찬란한 기쁨이다!>(푸른숲),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문학동네), 제레미 시프먼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포노), 셋 다 훌륭한 전기다. 모차르트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는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문학세계),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호미)가 있다.



볼프강이 난넬에게 ①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K.19d 중 2악장 ‘메뉴엣’


누나, 안녕? 정확히 225년만에 쓰는 편지네.*

누나는 어린 나의 우상이었어. 아버지가 7살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 나도 다 듣고 있었던 것, 누나도 알고 있었어? 누나가 연주하는 3도, 5도 화음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누나 흉내 내는 게 재미있었어. 누나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피아노 건반을 짚으니까 사람들이 신기하다 했지. 우리는 언제나 음악과 함께 지냈지. 우리가 장난감을 갖고 옆방으로 갈 때 손이 자유로운 사람은 악기를 연주해야 했지.   

아버지는 누나 연습하라고 작은 악보집을 만들었고, 거기에 내가 만든 곡도 적어 넣었어. 나는 뛸 듯이 기뻤어! 왜 그랬는지 알아? 고백컨대, 누나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처음 여행한 곳은 뮌헨의 바바리아성이었어. 내가 6살, 누나가 11살이었지? 잘츠부르크도 아름답지만 처음 본 바깥세상은 참 근사했어!


 

http://youtu.be/i-asBLGm1OY  / 피아노 앞의 어린이가 7살 볼프강, 노래하는 이가 12살 누나 난넬. 


우리는 피아노 건반을 천으로 덮거나 눈을 가린 채 연주했지. 어려운 곡을 한 손가락으로 연주하기도 했지. 누나는 이미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지. 그런데 사람들은 땅꼬마인 내가 더 신기했나봐. 모두 나를 안고 뽀뽀했지만 누나에게는 의례적인 인사만 했어. 빈에서 만난 황태자 요제프 2세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연주하게 했지.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자가 입던 드레스를 내게 선물했지. 내가 넘어졌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 세워 줬는데, 내가 기뻐서 “결혼하자”고 하니까 모두 깔깔 웃었지. 누나는 그냥 뒷전에 서서 얌전히 미소 짓고 있었어. 

  
다음해, 1763년부터 3년 반의 긴 여행이 시작됐지. 돌이켜 생각하니 누나와 함께 다닌 그 여행이 내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어. 아버지 고향인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세 번 음악회를 열었지. 아버지는 아주 흐뭇해 하셨어.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파리 등 어디서나 갈채를 받으며 런던까지 갔지. 누나는 노래도 잘 했어. “어린이의 앳된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가 노래하는 스타일만큼은 거장다웠다”는 평, 기억 나? 나도 덩달아 우쭐했지. 누나를 칭찬한 말이었는데, 사람들은 내 얘기로 착각했어. 런던 사람들은 모두 내 얘기만 했지. 


런던에서 나는 9살, 누나는 14살이 됐어. 판사 바링턴이란 사람 기억 나? 그 분은 내 재능을 믿을 수 없어서 혹시 나이를 속인 게 아닌가 의심을 품었나봐. 우리가 잘츠부르크로 돌아 온 다음, 조사단을 보내서 내 나이를 확인했잖아. 보고서 내용을 보니, 런던에 머물던 시절이 그립네. 

“이 어린이는 낯선 신포니아를 아주 능숙하게 연주했다. 즉흥 연주 솜씨도 신기에 가까웠다. 폭발할 듯 건반을 두드리는가 하면, ‘분노’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미친 듯이 격렬하게 연주하기도 했다.” 

모차르트 <런던 스케치북> 중 디베르티멘토 G단조. http://youtu.be/XwE-UyBsjys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이 곡, 내가 좋아하는 G단조로 만들었어. 누나도 이 곡 연주한 적 있잖아? 누나는 사람들이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지. 누나가 다른 누구보다 나를 귀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 잘 알아. 고마워….

여행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사실 힘들었어. 돌아오는 길, 프랑스 릴에서 우린 둘 다 천연두로 앓아누웠지. 그 때 아팠던 흔적이 남아서 난 살짝 곰보가 됐지만, 누나는 진짜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잖아! “아버지가 우리를 서커스단처럼 끌고 다녔다”는 누나의 말, 나도 충분히 공감해. 아버지는 유럽 전체에 우리를 알리고, 가장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셨어. 이 점 무한히 감사해. 하지만, 우리는 남들 같은 어린 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 우린 언제나 어른들 틈에서 음악을 했어. 우린 여행 마차 안에서 어린이의 나라를 상상하곤 했지. 매혹적인 그 나라의 어린이들은 모두 착했고, 서로 사랑했지. 누나는 여왕이고 나는 왕이었어.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은 모두 누나와 함께 한 것뿐이야. 음악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가치였지. 누나는 뛰어난 재능의 음악가였기 때문에 내 재능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겨줬어. 누나와 나는 서로 격려해 준 음악 동료였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 누나가 오직 하나 뿐인 내 친구였다는 점이야. 누나는 어때?


런던에서 작곡한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우리가 이 곡을 함께 연주할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생각 나? 우리는 음악으로 대화했어. 누나가 질문하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놀리며 도망가면 누나가 쫓아왔지.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K.19d 중 2악장 ‘메뉴엣’ http://youtu.be/i-asBLGm1OY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찬 바흐 아저씨 기억 나? 이 분은 이탈리아풍의 아름다운 선율이 뛰어났지. 이 분과 내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으면 사람들은 내가 너무 작아서 안 보인다고 했어. 하지만 ‘네 손을 위한 소나타’는 내가 그 분보다 먼저 작곡했어. 누나랑 연주하면 분명히 재미있으리라는 걸 알았지. 이 곡은 음악사상 최초의 ‘네 손을 위한 소나타’야. 

소나타, 협주곡, 오페라 등 내 작품들은 모두 ‘대화’라 할 수 있는데, 내 음악 인생에서 처음 ‘대화’를 나눈 사람이 바로 누나야. 그래서 내 음악에는 언제나 누나가 들어 있는 거야. 누나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따뜻하고 상냥했지. 2악장 메뉴엣은 그런 누나의 미소를 닮았어. 이 곡 3악장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나오지. 우리가 함께 연주하는 포즈를 취한 이 그림, 누나의 왼손과 내 오른손이 교차하고 있잖아? 바로 이 곡 3악장을 연주하는 모습이지. (링크 4분 25초부터) 우리가 한 마음이 돼서 이 대목을 연주할 때 얼마나 즐거웠던지! 
    
*난넬: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1751~1829)의 애칭.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일곱 명의 아기를 낳았는데, 이 중 난넬과 볼프강만 살아남아 어른이 됐다. 난넬은 10살에 이미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됐고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18살 때 아버지의 결정으로 음악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글은 동생 볼프강이 누나 난넬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다. 모차르트는 1782년 콘스탄체와 결혼한 이후 누나와 소원해졌다. 둘 사이의 편지 왕래는 점점 뜸해지다가 1788년에 끝난다. 1788년에서 225년 흐른 2013년에 이 가상의 편지가 나왔다.




난넬이 볼프강에게 ① <난넬> 7중주 D장조 K.251 중 ‘안단티노’


볼프강, 너는 참 다정다감한 아이였지. 사람들은 너를 ‘잘츠부르크의 기적’이라고 불렀고, 나 또한 네 재능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지. 하지만 너는 내겐 천재이기에 앞서 사랑스런 동생이었단다. 네가 4살 때 잉크를 뚝뚝 흘리며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던 모습도 기억나는구나. 아버지는 놀라서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너무 어려워서 연주할 수 없으니 쓸모없는 작품 아니야?” 하셨지. 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지. “이 곡은 협주곡이라서 어려운 거에요.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연습해야 해요.” 얼마나 귀여웠는지, 너는 잘 모를 거야!

너는 누구나 상냥하고 쾌활하게 대했어.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아버지에게 노래를 불러드렸지. 아버지에게 베이스를 맡아 달라고 해서 함께 부르곤 했지. 이 작은 의식이 끝나면 아버지 이마에 정답게 입 맞추고 만족해서 잠들곤 했어.


첫 여행, 뮌헨과 빈에서 너는 음악 뿐 아니라 한없이 사랑스런 태도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단다. 나도 언제나 너를 찬탄하며 갈채를 보냈어. 빈에 다녀올 때 세관을 통과하던 장면이 떠오르는구나. 마차에 값진 선물을 잔뜩 싣고 세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네 덕이었어. 6살 꼬마는 세관원에게 자기 클라비어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가 하면 작은 바이올린으로 메뉴엣을 연주해 보이고, 우리를 찾아 달라고 초대의 말을 건네며 끊임없이 친밀감을 표현했지. 세관원은 이 꼬마의 친절한 초대에 응하기 위해 주소를 받아 적기도 했어. 그게 다였고, 우리는 무사통과할 수 있었지. (제레미 시프먼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임선근 옮김, 포노 p.18~32)

빈에 다녀온 직후 너는 성홍열에 걸려서 두 주일 동안 앓아누웠지. 네가 가여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어린 볼프강이 얼른 낫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몰라. 너는 언제나 사랑을 갈구했어. 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 묻곤 했지. 한번은 내가 농담으로 “아니”라고 답하니까 너의 작은 눈에 눈물이 글썽였어. 네 가슴은 그만큼 예민하고 다정다감했어. 

너는 3년 반 동안 가족이 함께 여행한 게 제일 즐거운 추억이라고 했지? 두말할 것 없이 내게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란다. 우린 함께 연주했고, 때로 함께 작곡도 했지. 함께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어. 내겐 그게 마지막 연주 여행이었어. 네 재능은 무럭무럭 자랐고 이제 이탈리아 오페라만 익히면 완벽한 대가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거야. 나 또한 어엿한 음악가로 활동할 준비가 돼 있었어.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단다. 네가 살아있을 때 입 밖에 내지 않은 얘기가 있어.* 네가 13살 되던 해, 아버지는 너만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나셨지.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어. “넌 18살, 여자가 결혼할 나이가 됐으니 집에 있어라.” 이게 무슨 뜻이지? 잘 이해할 수 없었어. 네가 출발하고 난 뒤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너랑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게 슬프기도 했지만, 사실은 함께 못 가는 게 절망이었어. 울면서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실 뿐이었어. 

왜 여자는 나이가 들면 집에만 있어야 해? 신(神)이 주신 재능을 남자는 살릴 수 있는데 왜 여자는 안 되는 거야? 난 피아니스트로 전성기에 이르렀고 작곡도 할 수 있는데… 볼프강도 내 작품이 좋다고 칭찬해 주었는데*, 왜? 왜?  

너는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게 분명해. 이탈리아에서 가는 곳마다 풍경과 사람과 음식 얘기를 눈에 보이듯 상세히 써서 보내 줬잖아. 마치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산 피에트로 성당에서 교황 만나는 장면, 베수비오 화산이 연기 뿜는 광경, 베네치아 오페라 극장의 분위기를 모두 내게 보여줬잖아. 얼마나 고마웠는지, 편지를 볼 때마다 “역시 내 동생 볼프강”이라고 대견해 했어. 

하지만, 번번이 눈물이 나더구나. 어떨 땐 네가 보고 싶어서 우는 건지, 함께 못 간 내가 서러워서 우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 분명한 건, 네 음악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를 기쁘게 했다는 점이야. 집안에 갇혀 있는 신세지만 빛나는 네 성취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할까? 밀라노에서 <미트리다테>가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에 나도 박수를 쳤단다. 너는 로마 음악원에서 황금박차 훈장을 받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지. 너를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를 어느 때보다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단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지? 한번은 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한 다음 “이 곡을 쓴 사람은 누나에요”라고 밝힌 적이 있었지. 그 뒤로 아버지는 내가 작곡하는 걸 금지하셨어. 참 이상한 일이었어. 아버지는 나를 미워하시는 걸까? 그래서 내 재능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걸까? 난 끝내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못 했어. 아버지를 거역하는 걸로 비칠까봐 두려웠으니까. 아무튼, 아버지의 추상같은 명령 때문에 나는 작곡을 그만둬야 했어. 공개 석상에서 연주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벌었는데, 모두 너와 아버지의 여행 경비로 보냈어. 차츰 음악가로서 내 길을 포기하며, 너의 성공만을 바라게 된 거야.


1781년, 이폴트님*이 청혼하셨을 때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단다. 그 분은 내 인생을 맡길 만 하다고 생각했고, 그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이 청혼을 거절하셨어.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지만 역시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단다. 그 때도 볼프강, 너는 내 편이 되어 주었어. “누나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맞아.” 여자로 태어난 게 천벌을 받을 죄일까? 네가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슬픔으로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나의 25살 명명일을 위해 너는 디베르티멘토 하나를 작곡했어. 오보에, 호른 2개, 바이올린 2개, 비올라, 콘트라바스를 위한 7중주곡, 사람들은 이 곡에 내 이름을 붙여서 <난넬> 7중주곡이라 부르는구나. 음악가로서 좌절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슬픔에 잠겨 있던 내게 그 곡은 큰 위안이었어. 난 평생 그 곡을 소중하게 간직했단다. 예쁜 오보에 솔로가 나오는 3악장 ‘안단티노’를 특히 좋아해. 언제나 상냥했던 너의 미소 같은 곡이야.   

<난넬> 7중주 D장조 K.251 전곡. http://youtu.be/O5v6XYF1Xpw

 

* 이 글은 누나 난넬이 동생 볼프강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다. 아버지와 동생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을 때 혼자 남겨진 난넬이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은 없다. 따라서 이 대목은 필자의 상상이다. 난넬은 모차르트가 죽은 뒤인 1792년, “아버지와 아들은 저희들끼리 여행을 떠났다”고 회고했다. (p.54, <Mozart's Women>, Jane Glover, Harper Collins) 생전에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뒤늦게 밝힌 것이다. 볼프강이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탈리아 곳곳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함께 오지 못한 누나를 특별히 배려해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1770년 4월 14일자 편지에 “누나가 로마에 우리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얘기하는 대목이 나오긴 한다. (p.12, <Letters of Wolfgang Amadeus Mozart>, Edited by Hans Mersmann, Dover)  

* 볼프강의 편지에는 누나의 작품을 칭찬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가령, 1770년 7월 17일자 편지의 한 구절, “누나가 작곡을 그렇게 잘 하다니, 정말 놀랐어. 한 마디로 이 노래는 참 아름다워.” (Hans Mersmann, 같은 책, p.16)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트는 딸의 작품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마리아 안나의 작품은 한 곡도 전해지지 않는다. 

* 프란츠 디폴트(Franz d’Ippold) : 대위 출신 가정교사로, 마리아 안나를 사랑했으나 아버지 레오폴트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다. 볼프강은 스스로 판단해서 원하는 쪽을 선택하라고 누나를 격려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디폴트는 난넬보다 22살 위인 52살이었다. 난넬은 30살, 젊은 나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미 ‘노처녀’였다.




볼프강이 난넬에게 ②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b장조 K.365


사랑하는 누나, 내가 언제나 누나의 행복을 기도했고 누나의 재능이 활짝 피어나기만 바랐다는 것, 잘 알지? 이 협주곡은 우리가 함께 한 찬란한 ‘음악 대화’의 마지막 곡이 되고 말았어. 이 곡을 잘츠부르크에서 연주할 땐 결코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화려하고 생기 있는 협주곡, 어느 구석에 ‘마지막’의 우울한 그림자가 스며들 수 있겠어?

1781년 여름 이폴트씨가 누나에게 청혼했을 때, 잘 되길 바랬어. 누나가 자꾸 아프니까 난 “이럴 때는 남편이 명약”이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제 내 마음은 정말 심각했어. 누나가 이폴트씨를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그 암담한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오길 바랬으니까. 빈이라면 누나가 맘껏 연주할 수 있고, 얼마든지 레슨으로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누나의 재능을 의심해 본 적이 나는 한 번도 없었어. 난 그해 6월 콜로레도*의 억압을 걷어차고 의기양양하게 ‘자유 음악가’의 삶을 시작했고 얼마든지 누나를 도와 줄 수 있었어. 오직 한 사람, 아버지가 장벽이었어. 난 고민 끝에 아버지도 함께 빈으로 오시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지. 이 꿈은 이뤄지지 않았어. 아버지가 이폴트씨의 청혼을 거절하셔서 모든 게 허사가 됐으니까. 아버지는 결코 잘츠부르크 궁정을 떠날 수 없는 분이셨으니까. 

그 뒤 누나는 희망을 잃은 것 같았어. 행복을 포기한 건 물론, 무엇보다 음악을 계속하겠다는 용기를 잃은 것 같았어. 나는 빈에서 새 삶을 꾸릴 때 누나를 잊은 적이 없어.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누나를 부축해 줄 수 없었어… 미안해.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부질없는 얘기지만, 누나가 빈에 와서 가까이 살았다면 우리 삶은 달라졌을 거야. 난 그 무렵 콘스탄체*를 사랑하게 됐지. 소박하고 따뜻한 동반자였어. 그는 나와 결혼하면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될 거고,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겠지. 그런데, 아버지와 누나는 그를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어.


 

http://youtu.be/bYOEyBdzgqE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 다니엘 바렌보임) /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애칭 ‘난넬’ (1751~1829)


아버지와 누나에게 나 볼프강이 소중한 것과 똑같이, 아버지와 누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 죽은 뒤에도 변할 수 없는 진실이야. 콘스탄체와 결혼한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내 사랑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난 확신했지. 오히려 콘스탄체가 우리 가족이 되면,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이중창*처럼 “아들 모차르트 또 한명, 딸 모차르트 또 한명” (Dann wieder einen Papageno! Dann wieder eine Papagena!) 태어나는 행복한 꿈을 꾸었지. 하지만 아버지와 누나는 콘스탄체의 등장이 재앙이라고 생각했어. 


* 콜로레도 대주교 (1732~1812) : 모차르트가 16살 되던 1772년에 잘츠부르크 통치자로 부임했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온건 개혁 정책을 폈으나 모차르트 부자의 여행을 금지하는 등 음악가를 하인 취급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별로 상식을 벗어난 조치가 아니었지만, 이미 유럽 음악을 평정한 모차르트는 그의 속박 아래 잘츠부르크에 갇혀 산다면 자기의 음악적 소명을 다할 수 없다고 느꼈다.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그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다가 1781년 6월 8일, 결국 부관 아르코 백작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채 쫓겨난다. 최초의 자유 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 (1762~1842)

*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 2막 끝 부분,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만나 기쁨에 겨워서 부르는 이중창에 이 가사가 나온다. 모차르트는 임종 전 친구들 앞에서 “나는 새잡이(파파게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마술피리> 중 “파, 파, 파…” http://youtu.be/17fGOC0IC9I



볼프강이 난넬에게 ③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르게토와 알레그로’ Eb장조 K.Deest*


아버지는 음악가로서의 자기 인생을 버리고 내 교육에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어른이 되어 독립하자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셨어. 아버지는 껍질밖에 안 남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가엾은 누나… 아버지와 내가 단 둘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순간, 누나는 음악가의 길을 절반쯤 포기해 버렸지. 내가 음악가로 성숙해 갈수록 누나는 자기를 버린 채 나의 성공만 바라보게 됐어. 시간이 흐를수록 누나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아버지를 닮아 갔어. 
   
바로 이 때 콘스탄체가 나타났지. 누나 입장에선 콘스탄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나타나서 목숨처럼 소중한 존재를 빼앗아 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던 거야.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때는 참 답답하기도 했어. 누가 옳고 그른지 뒤늦게 따지자는 얘기는 아니야. 한 사람이 어른이 돼서 사랑하는 짝을 만나면 가정을 이루려 하는 게 당연하고, 이 순리를 받아들일 때 모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지는 거고….  


아버지와 누나를 설득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 콘스탄체의 권유로 푸가 C장조*를 쓰게 된 경위를 누나에게 설명했지.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될 만한 음악 소양을 콘스탄체가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콘스탄체도 용기를 내서 누나에게 편지를 썼지만, 차갑게 굳어있는 누나의 마음을 녹이기에는 모자랐어. 1782년, 아버지와 누나의 축복 없이 결혼식을 올릴 때 콘스탄체는 많이 울었어. 

다음해, 첫 아이 라이문트 레오폴트가 태어났지. 존경하는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야. 콘스탄체와 나는 아버지와 누나의 축복을 받으려고 잘츠부르크로 갔어. 내가 태어났을 때 세례하고 축하해 준 잘츠부르크 대성당, 바로 그 곳에서 미사 C단조를 초연했어. 콘스탄체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고> (Et Incarnatus Est)*를 아름답게 불렀지. 빈에 두고 온 아기를 봐서라도 우리 결혼을 축하해 달라는 뜻이었어. 하지만 우리는 끝내 용서와 축복을 못 받은 채 우울하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어. 빈에 돌아와서 보니 라이문트는 죽어 있었어.

누나가 잘못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누나의 아픔을 지금 어느 때보다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 누나가 빈에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와 함께든 이폴트씨와 함께든 누나가 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빈에서 두 피아노를 위한 곡을 쓸 때 언제나 누나가 떠올랐다는 걸 믿어 줘. 소나타 K.448*, K.497, K.521, 그리고 Eb장조의 ‘라르게토와 알레그로’*를 연주할 때 언제나 누나가 곁에 있다고 느꼈다는 걸 기억해 줘. 누나가 가까이 있었다면 두 피아노를 위해 멋진 곡을 더 많이 작곡하면서 즐거워했으리란 점, 누나도 알지?

누나의 아픈 일생, ‘라르게토와 알레그로’를 우리가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조금 위로가 될까?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르게토와 알레그로’ Eb장조 K.Deest 서주가 붙어 있는 소나타의 첫 악장으로 보인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다른 악장의 스케치는 남아 있지 않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작곡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작곡 경위와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품 있고 아름다운 곡으로, 모차르트의 ‘숨어있는 보석’이라 부를 만하다. 최근 국내에서도 간혹 연주되고 있다. K.Deest는 라틴어로, ‘쾨헬번호 없는 작품’이란 뜻이다.


 

http://youtu.be/QMKVr99j50A  (피아노 : 파울 바두라 스코다, 외르크 데무스)

볼프강과 난넬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1719~1787). 아들 볼프강의 교육에 모든 걸 바쳤지만 딸 난넬에겐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볼프강은 자유를 위해 아버지에게 때로 반항했지만 난넬은 그러지 못했다.


* 환상곡과 푸가 C장조 K.394 http://youtu.be/m9vVu8rNON4 이 곡의 기원에 대해 모차르트 자신이 누나에게 설명했다. “반 슈비텐 남작은 헨델과 바흐의 작품을 그의 앞에서 내가 연주한 다음, 집에 가져가서 보라고 악보를 주었어. 콘스탄체는 바흐의 푸가들을 듣자마자 홀딱 반했지. 그녀는 푸가, 특히 바흐와 헨델 곡 이외에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나온 푸가를 몇 번 연주해 주니까 그녀는 악보에 적어 두었냐고 묻더군. 아직 안 했다니까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나무라면서, 이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음악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했어. 그녀의 끝없는 간청에 결국 푸가를 하나 썼지. 그래서 이 곡이 태어나게 된 거야.” (1782년 4월 20일 빈에서 누나 난넬에게) 


이 편지에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편지를 동봉했다. “아직 당신을 알지 못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동생의 누님인 당신을 저는 이미 존경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며, 감히 우정을 청하고 싶습니다. 건방진 얘기가 아니길 바라지만, 저는 감히 그 우정을 받을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며, 더 완벽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콘스탄체가 난넬에게, <Letters of Wolfgang Amadeus Mozart>, p.195~196) 그러나 난넬은 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 대미사 C단조 K.427중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고> (Et Incarnatus Est)
http://youtu.be/E2LGb9HWSUU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큰 미사곡을 쓰겠다고 약속했고, 그 결과 이 곡이 나왔다.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느린 협주곡이라 할 수 있는데, 플루트 · 오보에 · 파곳의 음색과 소프라노가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들려준다. 음악으로 아버지와 누나를 감동시켜 축복을 얻어내고자 한 모차르트의 바램도 있었을 것이다. 이 곡을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연주할 때 콘스탄체가 독창을 맡았음을 생각하면, 그는 꽤 뛰어난 소프라노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벨기에에 사는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다섯 페이지에 걸쳐 이 곡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이건 목소리가 아니야. 날개지. 인간의 숨결도 아니야. 구름 사이로 살랑거리는 바람이지. 한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야. 모든 여자의 목소리, 어머니들과 누이들과 아내들과 연인들의 목소리지. 하긴 이런 비유가 다 무슨 소용이야. 존재의 기적을 찬양하고 있는데.”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 김민정 옮김, 문학세계사, p.91~95)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 K.448 http://youtu.be/tT9gT5bqi6Y 1781년 빈에서 제자 아우어른하머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 1993년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 연구팀의 실험 결과 ‘머리 좋아지는 음악’으로 널리 알려졌고, 엄청난 CD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실험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새로운 논문들이 숱하게 발표된 바 있다. 단순히 음악을 듣기만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점도 의심스럽고, 수많은 곡들 중 특별히 이 곡만 머리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입증할 방법도 없다. 진짜 머리가 좋아지는지, 시험 삼아 여러 번 들어 보시길 권한다.^^ 찬란하고 생기있는 이 곡이 혈액 순환을 돕고 머리를 맑게 해 주는 건 분명 사실일 것이다.



난넬이 볼프강에게 ② 아리아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K.513


사랑하는 볼프강!

1787년 5월 28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 난 네게 연락하지 않았어. 연락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 네가 편지에 썼듯, 아버지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을 뿐이야. 네가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우뚝 섰으니 아버지와 나의 소원은 이미 이뤄진 셈이었어. 넌 그해 <돈조반니> 작곡에 온 영혼을 바치고 있었지. 난 영혼이 마비된 채 몇 날 몇 달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지. 네 성공을 함께 기도하며 지켜보던 아버지가 떠나셨으니 이젠 정말 혼자였어. 

볼프강과 난넬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1719~1787). 아들 볼프강의 교육에 모든 걸 바쳤지만 딸 난넬에겐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볼프강은 자유를 위해 아버지에게 때로 반항했지만 난넬은 그러지 못했다. 


http://youtu.be/He2iBil5QlU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


그때 네가 이 아리아를 작곡했더구나.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너는 임종 직전의 아버지 마음속에 들어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슬픔에 떠는 아버지의 마음을 네가 노래하고 있었어. 나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고, 아버지는 생전 처음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셨지. 이 노래에서 바로 네가 그 말을 하더구나. 슬픔에 잠겨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음악, 네가 언제나 변함없이 아버지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느끼고 큰 위안을 받았어.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내 가슴은 슬픔에 찢어지는구나.
  오, 잔인한 이별이여,
  나는 비탄에 잠겨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구나.
  나는 떠난다. 너는 울고 있구나.
  오, 신이여, 오직 한 순간이라도
  네 곁에 더 있고 싶구나.
  나는 떠난다, 안녕, 내 딸이여!
  아, 가슴이 찢어지네.”


네가 콘스탄체와 함께 다녀 간 잘츠부르크는 공허하고 적막했어. 너희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지도 못했고, 돌이키지도 못했지. 콘스탄체에게 너를 빼앗겼다는 상실감, 지금 보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너는 이미 콘스탄체의 것이었고, 30년 동안 너만 사랑한 아버지와 나는 껍데기만 남은 유령이었지. 그 뒤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었어.


1784년 여름, 네가 빈에서 성공의 정점에 오른 바로 그 때, 나는 결혼했어. 그건 음악가 마리아 안나의 죽음을 뜻했어. 남편 조넨부르크씨*는 이미 두 번 상처(喪妻)해서 다섯 명의 아이가 딸린 사람이었어.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 이미 행복을 포기한지 오래였으니까. 넌 나의 행복을 바란다고 편지에 썼지. 한때 나도 너처럼 자유로운 음악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어. 네가 있는 빈으로 가서 음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너무 늦었지. 음악을 빼앗긴 나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었어. 

너는 홀로 되신 아버지를 걱정했어. 우리 부부가 있는 상크트 길겐으로 가시든지 아니면 네가 있는 빈에서 함께 사시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지.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이미 과거에 파묻혀 살고 계셨어. 아버지는 나의 첫 아기 레오폴트를 잘츠부르크에서 혼자 키우셨단다. 아버지는 아기에게서 어릴 적 네 모습을 찾고 계셨던 게 아닐까? 애가 두 살도 되기 전에 음악을 가르치려 하셨으니까… 너는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하며 다음해 봄에 우리를 한번 찾아오겠다고 했지.* 너를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 하지만 너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지.

* 모차르트의 친구였던 고트프리트 폰 야크빈(1767~1792)이 초연했다. 야크빈은 아마추어 작곡자이자 성악가로, 모차르트는 그와 함께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누이동생 프란치스카(1769~1850)은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케겔슈타트> 3중주곡 K.498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521은 그녀를 위해 만든 곡이다. 

* 베르히톨트 폰 조넨부르크 (1736~1801) : 잘츠부르크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상크트 길겐의 행정관. 두 번 상처(喪妻)하여 다섯 아이를 거느린 상태에서 난넬과 1784년 8월 23일 결혼, 3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이 중 전처의 아이 1명과 난넬의 아이 1명이 어려서 죽었다. 1801년 그가 사망한 뒤 난넬은 남은 여섯 아이를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피아노 교습을 하며 살았다. 
 
* 1784년 8월 18일 모차르트가 난넬에게 쓴 편지. <Letters of Mozart>, Hans Mersmann, Dover, p.224



난넬이 볼프강에게 ③ 아리아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K.513


사랑하는 볼프강!

난 결혼한 뒤 조넨부르크씨의 다섯 아이를 키우느라 피아노 앞에 앉을 시간도 없었단다. 가끔 아버지가 네 소식을 전해 주셨어. <후궁탈출>이 대성공이었다는 걸 알았고, 하이든 선생이 네 현악사중주를 극찬하며 ‘최고의 작곡가’로 찬양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피가로의 결혼>이 프라하에서 환호 속에 공연됐다는 것도 알았어. 살리에리 일파가 이 오페라를 방해했다는 소식에 나도 분개했단다. 네가 런던 여행 계획을 얘기하며 두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 네 아이들을 내가 대신 맡을까 잠시 생각했었다는 걸 넌 모르지? 하지만 아버지께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어. 노여워 하실까봐 두려웠던 거지. 


상크트 길겐에서는 네 소식을 듣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어. 네가 보내 준 악보를 가끔 들여다보는 게 내 휴식이었어. 우리가 함께 연주하던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었어.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네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어. 아버지는 네 근황을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내가 부탁할 때마다 너의 최신 악보들을 보내주셨거든. 그런데… 4년 뒤, 너마저 세상을 떠나버렸구나. 청천벽력 같은 그 소식을 들은 건 네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 지나서였어. 네가 최고의 작곡가로 더 훌륭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리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1798년 니메첵*씨가 쓴 전기를 보고서야 네가 마지막 3년 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게 됐단다. 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직 30살도 채 안 된 콘스탄체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상상해 보았단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지. 세월이 흘러 1820년, 콘스탄체가 새 남편 니센씨*와 함께 잘츠부르크로 이사왔더구나. 네 아내였던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네 전기를 쓰는 게 제일 큰 목적이라 하더군. 콘스탄체와 나는 37년 만에 마주 앉았어. 나는 69살, 콘스탄체는 58살… 모든 아픔은 다 지나갔고, 우리는 담담하게, 예의바르게 얘기를 나눴단다.


 

http://youtu.be/He2iBil5QlU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 /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


네 전기를 준비하면서 콘스탄체와 나는 화해한 셈이야. 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네 음악은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 줄 거라고 우리는 얘기했어. 네 편지, 네가 보내 준 악보를 모두 콘스탄체에게 주었어.* <너를 떠나는 지금, 내 딸이여>, 이 노래를 다시 듣고 싶구나. 이 아리아에서 너와 나, 아버지는 다시 하나가 된 것 같아. 네가 남긴 불멸의 음악 한 구석에 내 사랑도 살아 숨쉬기 바래. 그 희망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기에 슬픈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해, 볼프강.

* 니메첵 (1766~1849) : 1797년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를 쓴 사람. 1791년 모차르트의 마지막 프라하 여행 때 알게 된 사이. 콘스탄체의 증언에 주로 의존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대목이 많다는 평을 듣지만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 니센 (1761~1826) : 덴마크 외교관으로, 1797년 콘스탄체를 처음 만나 1809년에 결혼했다. 1820년 은퇴한 뒤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 위해 콘스탄체와 함께 잘츠부르크로 옮겼다. 그가 죽은 뒤 출판된 <W. A. 모차르트 전기>는 부정확한 대목과 모순된 기술이 있지만 후대의 모차르트 전기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됐다.
  
* 난넬이 콘스탄체에게 준 자료에는 볼프강이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 일체, 빈 시절에 쓴 피아노곡의 자필 악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게 다 들어 있었던 셈. 모차르트 협주곡의 몇몇 카덴차들은 난넬 덕분에 오늘까지 전해진다. 


난넬은 1825년 눈이 멀었고, 1829년 78살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해 난넬을 찾아온 전기 작가 메리 노벨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외로운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기운 없이 축 쳐져 있었고, 말도 없었다.” 노벨로는 난넬이 매우 가난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약간의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모차르트 초기 교향곡들은 ‘습작’인가? - 교향곡 1번 C장조 K.16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년을 취재하러 빈에 갔을 때 특이한 음악회를 경험했다.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이 선택한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의 첫 교향곡과 마지막 교향곡 <주피터>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두 곡 다 C장조였다. 신기한 것은, 첫 교향곡의 느린 악장 주제(도-레-파-미-, 링크 6분 35초부터)가 <주피터> 마지막 악장의 주제와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http://youtu.be/rETZaTRFHe8

모차르트는 런던에 머물던 1764년말, 만 9살 되기 직전에 이 교향곡을 작곡했다. 마지막 교향곡인 <주피터>를 작곡한 건 24년 뒤인 1788년 8월. 모차르트는 자기 교향곡의 최고봉 <주피터>의 피날레를 작곡할 때 첫 교향곡을 의식하고 있었을까? 첫 교향곡과 마지막 교향곡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더 많을까, 다른 점이 더 많을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 연주회였다. 주빈 메타와 빈 필하모닉도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레퍼토리를 고른 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교향곡 1번 C장조 K.16 http://youtu.be/i6SLkDSlAIM


모차르트의 첫 교향곡은 어린이의 음악인가, 어른의 음악인가? 지금 들으면 8살 꼬마의 작품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때 기준으로는 어른의 작품으로 들렸을 것이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찬 바흐, 조반니 바티스타 사마르티니 등 당시 교향곡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이런 작품을 쓰고 있었으니까.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자였던 아버지 레오폴트의 집중 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어릴 때부터 작곡을 했고, 즉흥연주를 거뜬히 해 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어디까지나 음악을 배우는 어린이였다. 그가 공부한 방법은?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부지런히 모방하고 편곡하는 것이었다. 첫 교향곡을 포함, 초기 교향곡들 - K.16, K.19, K.22 - 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 세 부분으로 이뤄진 이탈리아 서곡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런던에서 알게 된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교향곡과 구성 · 길이는 물론 분위기까지 비슷하다. 8살 나이에 어른들과 대등한 수준의 작품을 쓴 모차르트의 재능은 놀랍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의 독자성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이 수준에 머물렀다면 후대는 이 작품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꾸준히 성장하여 해가 거듭할수록 더 훌륭한 곡을 썼고, 끝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우리는 그의 첫 교향곡을 궁금해 하는 것이다. 


1772년 5월 잘츠부르크에서 쓴 교향곡 17번 G장조 K.129, 역시 ‘빠르게-느리게-빠르게’로 이뤄진 이탈리아 서곡 형식이다. 중간 부분 ‘안단테’를 들어보자. 따뜻하고 상냥한 분위기의 행진곡이다. http://youtu.be/C3uaEvM3BiQ 
 
훗날의 대교향곡에 비할 수 없이 단순하지만 이미 모차르트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사랑으로 가득한 소년 모차르트의 얼굴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이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에 한 걸음 들어서 있다. 

백진현 선생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두 단계로 구분했다. 진정 성숙한 작곡가로 활동한 것은 18살 뒤였고, 그 앞의 작품들은 모두 ‘습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백진현 <만들어진 모차르트 신화>, 뮤직디스크, p.184 ~ p.203) 백 선생의 통찰에 대부분 공감하며 박수를 보내지만, 모차르트만의 개성과 완성미를 보여주는 이 작품을 ‘습작’이라 부르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18살 때 쓴 A장조 교향곡 K.201은 ‘작품’이고, 17살 때 쓴 G단조 교향곡 K.183은 ‘습작’이 되는데, 설득력이 없다. <하프너> K.385, <린츠> K.425, <프라하> K.504와 마지막 3대 교향곡 - Eb장조 K.543, G단조 K.550, C장조 K.551 - 이전 작품들을 모두 ‘습작’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니, 모차르트는 35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음악 수준이 계속 향상되고 있었으니 평생 공부하며 배웠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아무려면 어떠랴. 8살 꼬마의 작품, 16살 소년의 작품은 그 나이에 걸맞는 매력을 갖고 있으니 ‘습작’이라 하든 ‘초기 교향곡’이라 부르든, 듣고 즐기면 그만이다. 16살 모차르트는 이미 이탈리아 여행을 두 번 다녀온 뒤였다. 마르티니 신부에게서 대위법을 배웠고, 오페라 작곡가로 갈채를 받았고, 황금박차 훈장과 기사 작위까지 받은 마에스트로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어렸다. 봉건사회와 갈등을 겪으리라고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과의 불화를 몰랐기에 그의 음악은 어린 시절의 평온함과 순진무구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아직 비극이나 희극으로 변모할 갈등과 모순을 품고 있지 않았다. 철학 용어를 빌리면 ‘즉자적’(卽自的)이며, 키에르케고르처럼 말하면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다음 해, 극적인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1773년,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모차르트는 자유 없이 살 수 없음을 자각하고 당당한 인간임을 처음으로 선언한다. G단조 교향곡 K.183이었다.




“모차르트, 용서해 주게! 자네를 죽인 건 바로 날세”

자유를 향한 외침,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모차르트, 용서해 주게! 자네를 죽인 건 바로 날세.”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장면,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던 살리에리가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살리에리가 면도칼로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 충격적인 이 순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다.* http://youtu.be/hXBXlfqDjpA (1:55부터)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우리나라 음악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G단조 교향곡, 그때까지 모차르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비극적 감정이 폭발한다. 몸부림치듯 격동하는 당김음으로 시작한다. 4대의 호른이 곡에 육중한 무게를 더한다. 음악학자들은 당시 유럽에 번지고 있던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영향을 지적한다. “그 동안 모차르트 안에서 몇 번씩 불타올랐던 정열적이고 염세적인 기분이 가장 격하게 표현됐다.” (H. 아베르트) “기적과 같은 작품이다. 완전히 개인적인 고뇌의 체험에서 나온 감정으로, 모든 악장에서 이러한 특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http://youtu.be/7lC1lRz5Z_s / 콜로레도 대주교. 그가 모차르트의 여행을 제한한 것은 당시로서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격렬히 반발했다.


모차르트가 17살 때인 1773년 10월에 작곡했다.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는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고 외치는 걸까? 봉건 영주의 속박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걸까? 모차르트는 그해 3월,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왔다. 바로 그때, 모차르트의 생애를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하나 생긴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슈라텐바흐(1698~1771)의 후임으로 3월 12일 콜로레도(1732~1812)가 부임해 온 것. 


슈라텐바흐는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모차르트 가족의 여행에 대해서 너그러웠다. 모차르트 가족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면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 이렇다 할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기적’ 모차르트가 유럽 곳곳을 누비며 홍보 사절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슈라텐바흐보다 훨씬 젊은 콜로레도는 좀 달랐다. 그는 계몽 군주로서 잘츠부르크의 교회, 학교, 법원, 의료, 행정을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봉건제도의 틀을 엄격히 지키는 테두리 안의 개혁이었다. 그는 당시 귀족의 하인에 불과했던 음악가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음악을 꽤 좋아해서, 궁정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를 늘 가까이 붙들어두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를 궁정 부악장에 임명하며 보수를 세 배 올려주었지만, 대신 여행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해 버렸다. 

모차르트 부자(父子)는 그해 7월부터 두 달 동안 빈에 다녀온다. 신임 대주교에게 밝히지 않은 여행의 목적은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패였다. 모차르트가 G단조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는 자기의 음악적 소명을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라는 작은 도시에 자신의 음악을 가두어 두는 것은 이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콜로레도가 지배하는 잘츠부르크에 평생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외부 세계의 압력, 특히 정치권력의 족쇄를 처음 실감나게 경험했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G단조 교향곡이다.


* 영화 <아마데우스>는 1823년 겨울,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살리에리가 자살을 기도한 뒤 신부에게 자기가 모차르트를 살해한 이유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첫 장면부터 픽션이다. 실제로 1823년, 살리에리는 노환으로 빈 근교 알저포어슈타트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해 10월 베토벤의 제자 이그나츠 모셸레스가 살리에리를 문병했다. 살리에리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해명했다.

“나는 곧 죽을 게 분명해. 하지만, 내 명예를 걸고 얘기하겠네. 내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그 터무니없는 소문 말일세. 아니야, 악의로, 순전히 악의로 꾸며낸 얘기야. 모셸레스,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게. 곧 죽어 갈 늙은 살리에리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말일세….”

이 사실을 작가 페터 샤퍼나 밀로스 포먼 감독이 몰랐을 리 없다. 처음부터 감독과 작가는 이 영화가 픽션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모차르트 독살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실제 현실 사이의 차이는 졸고 <영화 아마데우스, 어디까지 사실일까?>(<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호미, p.149~p.165)에 정리해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써 본 글이다. 백진현 선생의 지적대로 이 영화는 허구일 뿐이니 그냥 영화로 보면 된다. “영화가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사실에 기반을 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이야기인 영화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백진현 <만들어진 모차르트 신화>, 뮤직디스크, p.57) 참고로 영화 맨 앞, 두 개의 장엄한 불협화음은 G단조 교향곡이 아니라 <돈조반니> 서곡 첫 부분이다.



기억 속 ‘천사들의 합창’이라 불려도 좋을 선율

‘하프너’ 세레나데 K.250 중 6악장 ‘안단테’


딸 아이 명연이가 오늘로 만 스무살이다. <스무살 넘어서 다시 읽는 동화>를 보라고 줬다. 낯설고 떨리는 사랑의 경험이 딸 아이에게 분명히 찾아올 테니, 상대방과 자기를 존중하며 지혜롭게 만나는 법을 생각해 보라는 바램이었다. 명연이 대답, “네, 감사합니다~” 도통 쓸데없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다. 하긴, 아버지가 염려하기 훨씬 전에 이미 사랑은 명연이의 생활 반경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법이야 명연이가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으니 아버지 세대의 ‘지혜’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10년 전, 딸 아이가 10살 되던 해에 참 많이 들었던 <하프너> 세레나데를 지금 함께 듣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10년 전 썼던 글을 꺼내서 다시 본다. 그때 SG워너비를 좋아한 명연이는 요즘도 클래식을 거의 듣지 않는다. 아무렴 어떠랴, 아버지와 딸은 다른 개체일 뿐인데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 놀랍고 기쁘다. <하프너> 세레나데의 추억을 명연이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건 분명하고, 참 소중한 일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그랬던가. 천사들이 모여서 신을 섬길 때는 바흐를 연주하겠지만, 천사들이 가장 행복한 시간에 자기들끼리 놀 때에는 모차르트를 들을 거라고. 이 말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곡이 <하프너> 세레나데 K.250의 6악장 안단테다. 음악을 자주 듣지 못한 요즘, 모처럼 CD꽂이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집어드는 게 바로 이 곡이다. 모차르트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 때때로 바뀌는데,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곡은 바로 이 곡인가보다. 


‘하프너’ 세레나데는 잘츠부르크의 시장이자 대부호 지그문트 하프너의 딸 엘리자베트 하프너의 결혼식을 위해서 만든 곡이다. 1776년 7월 21 저녁, 결혼식 전야제. 모차르트가 이끄는 악단은 하프너 시장 저택의 큰 정원으로 행진곡 D장조 K.249 를 연주하며 걸어서 입장했다. http://youtu.be/xmu04n2EF8w 이어서 8악장으로 된 이 세레나데가 여름 하늘을 수놓았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 연주는 그야말로 ‘음악의 대향연’이었다고 한다. 
  
악사들이 모두 서서 연주했으므로 이 곡에는 첼로 파트가 없다. 2, 3, 4악장에 나오는 바이올린 솔로는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했다. 이 세 악장만 떼어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연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4악장 ‘론도’는 나중에 크라이슬러가 피아노 반주로 편곡해서 연주한 뒤 크게 유명해졌다. http://youtu.be/fwOWKyvPJGY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연습곡처럼 되어 있다. 이 세 악장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악장만 따로 묶어서 ‘교향곡’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도 작품번호는 역시 K.250이다. K.385의 <하프너> 교향곡과는 다른 곡이니 혼동하지 말기. 

‘천사들의 합창’이라고 불러도 좋을 6악장 ‘안단테’는 형식도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론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 주제가 나올 때마다 변주곡처럼 바뀐 형태로 나온다. 론도 풍의 변주곡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첫 주제가 마지막으로 변주되어 나오는 부분 (위 링크 6:28부터),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피치카토로 반주하고 호른과 오보에, 제1바이올린이 함께 노래하며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이 대목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대목은 슬프기까지 하다.


 

http://youtu.be/r4tFiVdv8ew


언젠가 한강 고수부지에 놀러갔다 돌아올 때 명연이가 숨이 차도록 열심히 불러 제낀 멜로디는 바로 이 곡의 주제였다. 명연이는 요즘은 이 음악을 틀어줘도 그냥 덤덤한 표정이다. 하지만 명연이의 기억 속에서 이 멜로디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 언젠가 명연이가 이 곡을 다시 들으며 지금 내가 느낀 행복감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아빠도 나처럼 느꼈을 거야’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2003년 3월 8일)


10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보니, 모차르트가 작곡한 축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가운데 결혼식 전야제를 한 엘리자베트 하프너, 부모인 지그문트 하프너와 그의 부인, 이름 모를 신랑, 그리고 수많은 하객들이 부럽기 짝이 없다. 모차르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휘를 했다니!!! 그들은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린 걸까, 아득할 뿐이다. 이 결혼 축하 음악이 얼마나 위대했고, 그 현장에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들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이제 누구든 DVD로, CD로, 유투브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으니 부러움을 접는 게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베트 하프너와 그의 신랑은 모차르트가 음악으로 축하한 결혼식에 걸맞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을까?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다. 그의 음악 덕분에 누구든 엘리자베트 하프너와 그의 신랑만큼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요즘이다. 2006년 9월 2일, 박물관 시민음악회를 지휘할 때 이 곡을 레퍼토리에 포함시킨 것은 딸 명연이를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딸은 이 음악으로 행복했으니 그걸로 족하다. 유전자의 절반을 나눠 가진 개체들은 정말 어쩔 수 없다… ㅋ (2013년 10월 2일)



첫 주제부터 천국이 열리는 기쁨을 맛보다

‘모차르트의 에로이카’, 피아노협주곡 9번 Eb장조


이 곡을 처음 들은 것은 40여년 전, 중학교 시절이었다. 첫 주제에서 천국이 열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현악 파트의 트레몰로는 사춘기에 접어드는 꼬마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수줍은 듯한 2주제(01:03부터)에 이어 상쾌한 불협화음(1:31)에서는 얼굴이 빨개졌다. 행복하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이 곡을 사랑한다는 건 비밀이었다. 

돌아가신 누나가 남겨 놓은 LP 컬렉션에 있었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연주로, 피아노협주곡 8번 C장조 K.246과 론도 A장조 K.386이 함께 들어 있는 데카 레이블의 원판이었다. 당시 누구도 이 곡을 주목하지 않았다. 어떤 음악 해설서도 이 곡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모차르트였으니까…. 이 곡을 수많은 평론가들과 음악애호가들이 높게 평가하기 시작한 건 한참 뒤였다. 


모차르트가 남긴 27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9번 Eb장조 K.271은 놀라운 작품이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있을 때인 1777년 1월 작곡했는데, 봉건 시대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규모도 이전 작품들*의 두배에 육박한다. 훗날 모차르트는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활약하며 수많은 피아노협주곡으로 기량을 뽐내게 되는데, 이 곡은 후기 협주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작이다. 

베토벤의 <에로이카>가 교향곡의 역사에 혁명을 가져왔다면 모차르트의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의 혁명이라 할 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곡을 ‘모차르트의 에로이카’라 부르기도 한다. 1악장 시작 부분, 오케스트라가 팡파레를 연주하면 독주 피아노가 화답한다. 곡 첫머리에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협주곡 역사상 이 곡이 최초다. 이러한 대담한 출발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G장조와 5번 <황제>에서야 다시 볼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 독주자가 평등하게 대화하며 발전하는 협주곡의 낭만적 이상형이 바로 이 곡에서 출발했다. 

1악장 알레그로
첫 주제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 생기있고 아름답다. 링크 1분04초, 제2주제는 수줍은 듯 미소 짓다가 행복한 함박웃음으로 발전한다. 1분59초 지점,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나고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대목(독일어로 ‘아인강’ Eingang)에서 오케스트라의 속삭임에 피아노가 트릴*로 화답한다. 오케스트라의 팡파레에 피아노가 한 번 더 대답하고, 음악은 자유롭게 발전한다. 

2분45초 지점의 경과구(經過句)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다. 3분22초 지점, 제2주제를 오보에가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반주를 한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솔로를 맡고 피아노가 반주하는 것도 협주곡 역사상 이 대목이 처음이다.


 

http://youtu.be/f8HBMePlRXw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제프리 테이트 지휘 영국 실내 관현악단)


전개부의 폭과 깊이 또한 주목할 만하다. 4분55초 이후 제1주제가 발전하는 부분은 모차르트가 훗날 쓴 3대 교향곡의 깊이를 예감케 한다. 팡파레의 주제가 단조로 변형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5분39초 지점부터는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대등한 규모로 활약한다. 5분 57초, 재현부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아예 역할을 바꿔서 대화를 나눈다. 19세기 낭만파 협주곡을 능가하는 자유분방함이다. 


2악장 안단티노 (10:33부터) 
이처럼 깊은 비탄의 정서를 거침없이 노래한 것도 이 곡이 처음이다. 베토벤 <에로이카> 교향곡의 ‘장송행진곡’과 같은 C단조의 안단티노(조금 느리게)다. 짙은 비애 속에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제1주제, 행복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제2주제가 어우러져 발전한다. (12분 35초부터) 피아니스트 강충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제2주제를 가리켜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는데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한 바 있다.

3악장 프레스토(22:12부터)
매우 화려한 피아노의 질주로 시작한다. 3악장은 과감한 형식파괴가 놀랍다. 크게 봐서 론도 형식이지만 중간에 메뉴엣과 4개의 변주곡이 삽입되어 있다. (25분47초부터). 음악은 대담하고 변화무쌍하다. 화려하고, 심각하고, 우아하고, 장엄하고, 섬세하고, 당당하게 흘러간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각별히 공을 들여서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곡을 가리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했다. “온전히 모차르트 자기의 모습이다. 대중에게 영합한 작품이 아니라 독창성과 대담성으로 대중을 휘어잡으려 한 작품이다.” (Alfred Einstein, <Mozart, His Character, His Work>, Oxford University Press, p.294)   

모차르트가 이러한 걸작을 쓰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빅투아르 죄놈(Victoire Jeunehomme, 1749~1812),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차르트보다 7살 연상이다. 모차르트 아버지의 친구인 발레 교사 장 조르쥬 노베르의 딸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녀는 1776년말 잘츠부르크를 방문했고, 이듬해 1월 모차르트가 이 곡을 썼다.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에서는 “모차르트가 죄놈에게 잘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쓴 것 같다”고 농담조로 언급했지만, 실제 그녀가 어떤 연주자였길래 모차르트에게 이처럼 강력한 영감을 주었는지 알려 줄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모차르트의 편지에 두 번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 뿐이다. 아인슈타인 또한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그녀는 전설적인 인물일 뿐”이라 했다. 

1777년 1월 죄놈의 독주로 초연됐고, 그해 10월 4일 모차르트 자신이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놀랍고 독창적인 이 9번 Eb장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출판업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 음악을 대중이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모차르트 사후인 1793년에야 비로소 출판됐고, 자필악보는 베를린 도서관에 있다. 자유 음악가로 거듭나기 전의 작품이지만, 모차르트는 이 곡에서 이미 봉건 시대의 속박을 훌쩍 뛰어넘어 자유로운 음악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 피아노협주곡은 모차르트가 평생 작곡한 음악 장르였다. 4살 때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는 모습을 아버지와 친구 샤흐트너가 목격했다고 하지만, 그리 믿을 만한 얘기가 아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11살 때 호나우어, 라우파흐, 에카르트, 쇼베르트의 작품을 편곡한 것이다. K.107에 포함된 3곡의 협주곡은 16살 때인 1772년에 썼다. 이 또한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작품을 편곡한 ‘습작’이다. 모차르트가 본격적으로 피아노협주곡을 쓰기까지 기나긴 수업 기간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첫 피아노협주곡은 5번 D장조 K.175로, 17살 되던 1773년 12월에 썼다. 이 곡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뒤 3악장 론도를 새로 써서 연주하기도 했다. 6번 Bb장조와 8번 C장조는 사랑스러운 작품이지만 아직 그 시대 전통의 틀에 머무르고 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F장조 K.242는 로드론 백작부인과 두딸을 위해 쓴 화려한 작품이다. 요즘은 세 명의 거장이 한데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아주 가끔 연주될 뿐이다. 
http://youtu.be/3ztEjqpSaJA 10번 Eb장조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누나 마리아 안나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

* 빈에 정착한 뒤에 쓴 11번~13번(K.413~K.415)에 대해 모차르트는 직접 설명했다. “이 협주곡들은 매우 화려하여 귀를 만족시킵니다.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고, 꼭 중간쯤 됩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공허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패시지들이 여기저기 있는데, 이 대목들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이유를 모르는 채 즐거워하게 됩니다.”  -1782년 12월 28일 빈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4번~16번(K.449~K.451)은 협주곡으로도, 실내악곡으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했다. 세곡씩 한 묶음으로, 점차 확대 심화되는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여기까지 빈 청중들의 기호에 맞춰서 작곡했다면 17번 G장조 K.453, 18번 Bb장조 K.456, 19번 F장조 K.459의 세 곡에서는 모차르트의 개성이 점점 더 전면에 드러난다.

20번 D단조 K.466은 피아노협주곡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인간 내면의 고뇌와 환희를 이렇게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은 이 D단조 협주곡이 처음이었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찬탄하여 카덴차를 직접 쓰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후기 협주곡’을 굳이 분류하자면, 20번 D단조부터 세상을 떠나던 해에 작곡한 27번 Bb장조까지 8곡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 뚜렷한 개성을 가진 걸작들이다.



모차르트의 가벼움(?), 우리가 너무 무거운 건 아닐까? ①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K.216*


대학시절 ‘첫사랑’을 만났다. 흠, ‘첫사랑’이라 일방적으로 규정하면 실례일 것 같긴 하다. 무엇보다 두 사람 다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렇게 규정하는 건 속박이 분명하다. 그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면서 ‘첫사랑’ 운운하는 건 자기중심적 태도이자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가 나스타샤를 대하듯 그를 대했다. 망가진 운명에 상처입은 나스타샤…. 소설 속에서 ‘백치’ 무이시킨 공작은 그를 이성(異性)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 그의 아픔에 본능적으로 이끌린 것이다. 봄 햇살 같은 아글라야와 상처투성이 나스타샤 사이에서 ‘백치’는 나스타샤를 선택한다. 

내 현실 속에서 ‘첫사랑’은 어쩌면 아글라야였고, 자기를 아글라야로 대해 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를 혹시 폭력적으로 대한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안 보고 자기 환상을 투사해서 보는 건 일종의 폭력이니까. 어느날 그는 “약혼반지를 가져오라”,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고, 나는 물론 약혼반지를 가져가지 않았고, 그는 얼마 후 자기 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http://youtu.be/wD4OEtFH9r4  (바이올린 아르투르 그루미오, 콜린 데이비스 지휘 런던 심포니 관현악단)


아무튼,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열심히 녹음해서 그에게 갖다 주는 게 당시 내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음악을 듣고 공감해 주면 무척 기뻤다. 그는 브람스 교향곡 4번,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코렐리 라폴리아 변주곡을 좋아했다. 우수어린 내면의 노래들이었다. 그는 <세레나타 노투르나>처럼 가벼운 모차르트 음악을 혐오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살 젊은 나이지만 그의 음악 취향은 이미 확고했으니, 모차르트는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대명사였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갖다 준 모차르트 음악은 피아노협주곡 D단조와 C단조,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미사 C단조, 프리메이슨 장송음악 C단조처럼 슬픈 곡 일색이었다. 그는 이 곡들을 듣고 “좋았다”고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었다. 내게 헨델 바이올린 소나타,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쇼송 <시곡> 같은 걸 알려주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연습한 적이 있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이 곡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기 때문인지 별로 거부감이 없다고 했다. 그와 내가 공감한 모차르트 음악 중 유일하게 장조로 된 곡,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K.216였다.   

1악장 알레그로
오케스트라가 첫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모든 현악기가 도약하는 대목(링크 00:20)부터 행복감을 느낀다. 오보에와 호른이 연주하는 2주제(00:35)에서 잠시 편히 쉬나 하는데, 순결한 현악기의 노래가 이어진다. (00:43) 얼마 안 가 바이올린이 예쁘게 속삭이고 첼로가 부드럽게 받쳐주는 대목(00:50~01:03)에서 천국의 문이 열린다. 이 대목들의 매혹적인 느낌은 곡 전체로 이어진다. 
  
2악장 아다지오 (링크 08:39부터)
이 아다지오는 엄마 품처럼 따뜻하다. 오랜 세월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2006년 다큐멘터리 ‘모차르트 2부작’을 만들 때 모차르트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 2악장의 선율을 사용했다. 평생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유지했던 모차르트의 모습에 이 곡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오케스트라의 현악 파트는 약음기를 끼고 조용히 노래한다. 두 대의 플루트가 어우러진다. (10:15부터 2주제) 다큐멘터리 중 그가 몰이해와 푸대접으로 아픔을 느끼는 대목에서는 단조로 변형된 주제를 썼다. (11:21부터) ‘천사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 아닐까? 


3악장 론도 알레그로
마지막 악장은 천진한 어린이가 뛰노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아주 단순한 곡이니 형식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먼저, 첫 주제가 나오는 대목이 어디인지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16:15, 17:40, 18:45, 20:13, 21:08) 이탈리아말 ‘론도’(Rondo)는 영어로 ‘라운드’(Round), ‘돌고 도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메인 주제가 되풀이 나오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하고 재미있는 악절들이 삽입된다. A-B-A-C-A-B-A, 고전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자주 쓰이는 형식이다. 

중간 중간 삽입된 대목들의 매력도 느껴보자. 단조로 구슬프게 흘러가는 대목(17:50), 스트링의 피치카토(pizzicato, 현악기를 활로 연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주법) 위에서 솔로가 노래하는 대목(19:09)이 매혹적이다. 아예 귀여운 동요가 나오는 대목도 있다. (19:36) “♬도.도.도.레.미.미.미.도.레.레.레.시.도시도레도!♬”는 “♬밥.상.위.에.젓.가.락.이.나˜란히나˜란히나.란.히!♬”,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노래랑 거의 똑같다! 

* 모차르트가 19살 때인 1775년, 고향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루네티를 위해 작곡했다. 모차르트 자신도 물론 연주했다. 1773년에 첫 바이올린 협주곡 Bb장조 K.207을 썼고 1775년에 2번 D장조 K.211, 3번 G장조 K.216, 4번 D장조 K.218, 5번 A장조 K.219 등 네 곡을 차례로 작곡했다. 1번부터 5번까지 차례로 들어보면 모차르트의 작곡 기량이 짧은 기간에도 꾸준히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번 Bb장조가 가장 앳된 반면 5번 A장조가 가장 원숙한 느낌을 준다. 

한없이 아름다운 5번 A장조, 1악장 바이올린 솔로가 등장하는 아인강(Eingang, 도입부. 01:13~02:02)은 거장다운 느낌을 한껏 살렸다. 3악장(18:56부터)에 이국적인 느낌의 패시지가 나오기 때문에 <터키풍>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2:16부터) ‘A-B-A-C-A-B-A’의 론도 형식에서 C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아르투르 그루미오의 깨끗하고 단정하고 동그란 연주. 
http://youtu.be/Ji53wNZJwWY




모차르트의 가벼움(?), 우리가 너무 무거운 건 아닐까? ②


이 곡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한때 클래식 음악은 ‘유한계층이나 즐기는 것’, ‘생존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겐 너무 한가한 여흥’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나 안 듣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가령, 책을 읽다가 ‘칼 마르크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좋아했다’, ‘북한에서는 쇼팽을 진보적인 음악가로 높이 평가한다’ 같은 대목이 눈에 띄면 “어, 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으니까. 뿔 달린 사람이 어떻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수 있을까, 해묵은 편견이었다. 하긴, 나도 뿔 달린 사람이던 시절이니까. 군부독재와 이를 악물고 싸우던 80년대,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 비슷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 편견에서 나를 끌어내 준 사람은 89년 당시 노동자문화운동연합 의장을 맡고 있던 김정환 형이었다.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 예수>, <기차에 대하여> 등 20권이 넘는 시집을 냈고,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 등 음악 에세이를 많이 썼고, 지금은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하고 있는 아주 소탈하고 뚝심 있는 시인이다. 소설가 공지영에 따르면 정환 형은 ‘우리 문단의 유일한 천재’다. 


89년 어느 날, 정환 형 댁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런데, 당산동 댁 앞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어디선가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다른 집에서 나오는 소리 아닌지 귀를 의심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방을 꽉 채운 게 바로 이 바이올린 협주곡 G장조였다. 어리둥절한 내가 질문했다. “아니, 노동자 문화운동 하시는 분이 모차르트가 웬 말이요?” 정환 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노동자가 모차르트 들으면 안 되냐? 좋은 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나는 정환형의 ‘뻔뻔함’(?)과 ‘대담함’을 존경하게 됐고, 죄책감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데는 빈부의 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다시 ‘가벼움’에 대하여. 이 곡이 어렵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초등학교 1학년 동요 수준이라니, 이렇게 가벼울 수가! ‘첫사랑’ 이후에도 “모차르트 음악이 너무 가벼워서 별로”라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누구나 아는 모차르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싱겁다. 메세나 협회를 이끌고 있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의 농담. “말러 정도는 들어야 뭔가 있어 보이지, 모차르트는 좀….” 정작 말러는 죽기 직전 “모차르트…” 중얼거렸는데, 쩝.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을 쓴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도 젊은 시절 모차르트를 멀리한 적이 있다. 토론하고 경쟁하는 지식인 사회에서 “모차르트 좋아한다”고 말하면 바보 취급을 받기 딱 좋았다는 것. 

MBC 대선배로 사장(社長)까지 하신 멋쟁이 이긍희 화백님. “모차르트는 너무 가볍고, 베토벤은 다들 위대하다 하니 덩달아 좋아하기 싫고…” 사람들 얼굴이 모두 다르듯, 음악 취향도 모두 다르다. 화백님의 개성을 존중하니 “네, 그러시군요” 끄덕일 뿐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럴 땐 화백님 좋아하시는 푸치니를 함께 듣는 게 상책이지. 하지만 모차르트 음악이 꼭 가볍지만은 않다는 점을 언젠가 납득하게 해 드려야지, 오기가 발동한 게 사실이다. 미욱한 내 머리로 뾰죽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서울시향(SPO) 편집장 진회숙의 책에서 뜻밖의 힌트를 발견했다!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저자는 모차르트의 가벼움을 “참을 수 있다”고 했다. “모차르트는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얼굴 뒤에 섬광과 같은 천재성을 숨기고 있는 작곡가였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가벼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음악을 가볍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동안 우리 귀가 너무 ‘무거운’ 음악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진회숙, p.159)

진회숙은 블루칼라 노동자였던 한 사람을 예로 든다. 그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가벼움과 육체노동의 버거움이 어떻게 합치될 수 있을까? 매일 힘겨운 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모차르트 음악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이 블루칼라의 역설적인 고백은 무슨 뜻일까? 진회숙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음악의 본질에 가장 접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라울 뒤피 <모차르트 오마쥬> (1915)
 

“육체는 존재의 본질이다. 이런 육체를 움직이면서 하는 노동은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노동을 하면서 겪는 육체의 고단함은 정직하고도 본질적인 고통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로 이 본질에 접근한다. 모차르트 음악에 숨은 의도 따위는 없다. 그는 그냥 음악으로 말한다.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을 가볍다고 여기는 것은 그 동안 비본질적인 것을 과도하게 짊어진 과체중의 음악에 짓눌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가뿐하게 벗어던진 모차르트의 음악이 ‘가벼움’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회숙, p.166~167)

놀라운 통찰이다. “모차르트 음악이 가볍지 않다”고 주장하는 대신 “우리가 너무 무겁다”는 한 마디로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의 한 챕터인 ‘모차르트와 뒤피, 그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은 모차르트를 사랑한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 1877~1953)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이 화가와 모차르트의 ‘산뜻함’을 예찬한다. 진회숙은 음악을 통해 미술을 ‘듣고’, 미술을 통해 음악을 ‘본다’. 뒤피의 그림에서 파란색의 청신한 소리와 리드미컬한 율동성을 ‘듣는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담백하고 투명한 수채화를 ‘본다’. 

진회숙은 겸손하게도 “나는 글을 산뜻하게 못 쓴다”(p.155)고 말문을 열었지만, 나는 근래에 이렇게 잘 쓴 글을 본 기억이 없다. 이 책은 미술관, 오페라 등 온갖 고상한 것을 끌어 모아 자기를 과시하는 속물 취향이 절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을 배웠고, 전혀 몰랐던 라울 뒤피의 그림을 접했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허덕이는 우리 인생을 보았다. 진회숙의 글을 읽고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다시 들어보자. 새롭게 들리지 않을까? 음악에 대해, 미술에 대해, 인생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신 진회숙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음악으로 그린 로자 칸나비히의 초상화 - 피아노 소나타 K.309 안단테


35년의 짧은 삶 동안 600곡이 넘는 작품을 쓴 모차르트. 전문 음악가가 35년 동안 베껴도 불가능한 분량이라고 한다. 이 많은 작품들이 저마다 자기 맛을 지니고 있고, 겹치지도 않는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이 많은 곡을 만들어냈을까.

“저는 운율에 맞게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능숙하게 다뤄서 제 마음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화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짓과 손짓으로 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무용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음악가이기 때문입니다.”
                                                           - 1777년 11월 8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는 선율의 바다였다. 그 바다에서 건져 올리면 곡이 되었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느낌이나 감정도 음악으로 표현했다. ‘음악의 초상화가’ 모차르트는 실제로 사람을 음악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http://youtu.be/0NzSmbQsMEY(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 요한 슈타미츠의 뒤를 이어 만하임 악파를 이끈 크리스찬 칸나비히(1731~1798). 모차르트는 “칸나비히씨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른다”고 썼다.


1777년 10월말, 모차르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만하임에 갔다. 아버지는 실직하지 않으려고 잘츠부르크에 머물렀고, 대신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동행했다. 이곳의 오케스트라에 모차르트는 열광했다.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으로, “바이올린 연주자가 30명을 넘었고,” “클라리넷이 놀라운 효과를 내고 있었고,” “단원들이 모두 장군으로 이뤄진 군대 같았다.” 이 오케스트라는 역동적으로 상승하는 음계가 일품이었고, 한 음표 안에서 크레센도*를 연주해서 놀라운 효과를 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이곳의 지휘자 크리스찬 칸나비히(1731~1798)와 친하게 어울렸다. 1763년, 7살 꼬마 모차르트를 보고 경탄했던 칸나비히는 어른이 돼서 다시 만난 모차르트를 크게 반겼고, 25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로 지냈다. 모차르트는 그의 지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가 본 지휘자 중 최고”라고 썼다. 하지만 작곡가로서는 그리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그의 교향곡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느린 템포의 유니슨*이죠.” 모차르트는 “칸나비히씨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모차르트는 그의 딸 로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칸나비히씨의 큰 딸 로자는 15살로, 아주 예쁘고 매력적입니다. 매우 총명하고 나이에 비해 침착합니다. 진지해서 말이 적지만, 일단 말을 하면 유쾌하고 다정합니다. 어제도 그는 제게 엄청난 기쁨을 주었습니다. 제 소나타* 전체를 아주 잘 쳤고, 특히 안단테는 표정을 잘 담아서 연주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곡을 작곡했냐” 묻더군요. 로자양의 성격에 꼭 맞게 작곡했다고 대답해 주었지요. 로자양은 이 안단테와 똑같아요.”
                                                            - 1777년 12월 6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5살 로자를 위해 쓴 이 안단테는 모차르트의 표현대로 진지하고, 유쾌하고, 다정하다. 그림처럼 사람 얼굴을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로자가 어떤 느낌의 사람인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훌륭한 연주로 모차르트에게 기쁨을 준 그는 “아주 예쁘고, 총명하고,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이 곡은 음악으로 그린 로자 칸나비히의 초상화다. 

로자 칸나비히는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6번 Bb장조를 연주했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K.242를 연주할 때 참여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지만 꽤 뛰어난 실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비슷한 시기 작곡한 소나타 K.311의 느린 악장도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로자 칸나비히의 초상화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Robert Marshall <Mozart Speaks>, Shirmer Books, p.187)

피아노 소나타 9번 D장조 K.311 중 2악장, 느리게 표정을 담아서 
http://youtu.be/UGd3dIkuQew(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모차르트 시대의 피아노는 지금과 달랐다. 18세기 중반에는 하프시코드(독어로 쳄발로, 불어로 클라브생)가 주류였는데, 피아노의 전신인 포르테피아노가 막 개발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1777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만든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해 보고 그 뛰어난 성능과 소리에 깊이 매혹된다. 이 소나타는 새로운 포르테피아노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첫 작품이다.   

* 크레센도(crescendo) : 점점 더 크게
* 유니슨(unison) : 여러 파트가 똑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것.
* 피아노 소나타 7번 C장조 K.309를 가리킨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또 한 곡인 9번 D장조 K.311는 로자 칸나비히를 위해서 썼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뮌헨의 프라이징엔 집안의 주문을 받고 써서 보낸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친구를 사귀면 생명과 재산을 모두 주려 하는 아이

아리아 '어디서 오는지, 나는 모르겠네'(Non so d’onde viene) K.294


“볼프강은 친구를 사귀면 자기 목숨과 재산을 다 내주려 하는 아이에요.” 

만하임에서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남편 레오폴트에게 썼다. 이 시절, 모차르트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나눴다. 그가 통째로 마음을 주고 있던 사람은 젊은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였다. 악보 필경사 프리돌린 베버의 둘째 딸인 그에게 모차르트는 성악을 가르쳤다. 

“베버양은 정말 놀랍도록 노래를 잘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랑스럽고 순결합니다. 그에게 미흡한 점이 있다면 극적인 표현력인데, 이 점만 보완하면 그는 어느 무대에서든 프리마 돈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16살에 지나지 않습니다.” - 1778년 1월 17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화려하게 데뷔시킬 궁리까지 했다.

“베버양의 노래는 마음을 파고듭니다. 그는 칸타빌레로 노래하는 게 장기인데, 이탈리아에 가면 브라부라(bravura*) 아리아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학생이 아니라 대가처럼 노래합니다.” - 1778년 2월 19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를 위해 아리아를 여러 곡 썼다. 아리아 <어디서 오는지, 난 모르겠네>(Non so d’onde viene) K.294는 “베버양의 목소리에 꼭 맞게”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는 로자 칸나비히를 위한 소나타처럼 알로이지아의 성격을 묘사한 곡은 아니다. 알로이지아의 노래 스타일을 짐작하게 해 주는 단서가 될 뿐이다. 

 

알로이지아 베버(1761~1839) 알로이지아의 남편 요제프 랑에가 그린 ‘피아노 앞의 모차르트’ (미완성)

<어디서 오는지, 난 모르겠네> K.294 (가사)

“알칸드로, 제 고백을 들어보세요. 
나 자신이 놀라워요. 그 사람의 
얼굴, 눈빛, 목소리는 내 심장에 
뜻밖의 불을 붙였고 내 핏줄을 가득 
채우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오 정의로운 신들이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어디서 오는지, 난 모르겠네, 
내 가슴속의 이 따뜻한 느낌, 
이 생소한 격정, 내 핏줄 속을 
달리는 이 얼음. 이 강렬한 대조는 
내 가슴을 찌르네, 동정만으로 
잠재울 수 없는 이 아픔.” 


http://youtu.be/U2jb8eOhS5Q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

“(이 노래는) 베버양 같은 성악가가 노래해야만 진가를 알 수 있거든요. 다른 누구에게도 그 악보를 주지 마세요. 그 곡은 오직 그녀를 위해서, 그녀 몸에 꼭 맞게 재단한 옷처럼 그녀에게만 어울리는 노래라서 다른 사람과는 맞지 않을 테니까요.” - 1777년 12월 3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알로이지아의 출현은 아버지와 아들의 숙명적인 갈등, 그 서곡이었다. 아버지가 볼 때 볼프강이 알로이지아를 사랑하게 됐다는 건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유일한 희망인 아들을 미심쩍은 가문의 젊은 여자에게 빼앗길 위기 아닌가. 게다가 그녀와 함께 이탈리아에 가겠다는 볼프강의 계획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들은 이 여자에 대한 칭찬만 늘어놓고 있으니 아버지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는 베버양에게 말했죠. “이 아리아를 외우세요. 당신 생각과 느낌 흘러가는 대로 노래하세요. 그러면 나중에 제가 듣고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맘에 안 드는지 솔직히 얘기해 드릴께요.” 이틀 뒤 베버씨 집에 갔고, 베버양은 스스로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그녀는 제가 원한 그대로 정확하게 노래했고, 내가 그녀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그대로 스스로 노래를 소화해 냈습니다.” - 1778년 2월 28일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훗날 빈에서 알로이지아의 노래를 들은 레오폴트는 평했다. “그녀의 노래가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너무 작다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크다 하는데, 둘 다 맞다. 내 취향에 그녀의 노래는 대조가 너무 심하다. 보통 규모의 연주홀에서 그녀가 크게 노래하면 귀가 아프고, 작게 노래하면 잘 안 들려서 주의를 집중해야만 한다.” 별로 호의적인 평가는 아닌 듯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첫 갈등에서는 아버지가 이겼다. 볼프강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명령대로 1778년 봄, 파리를 향해 떠난다. 모차르트가 파리행을 원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느꼈고, 이를 위해서는 파리보다 이탈리아가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알로이지아와 함께 머무르며 음악을 나누겠다는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로이지아에게 모차르트는 음악 선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불행했던 1778년, 파리 여행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고 어머니를 잃은 채 상심해서 돌아온 모차르트…. 그는 뮌헨에서 알로이지아를 다시 만났다. 그러나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했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녀를 이제 떠나겠네.” 

알로이지아는 1780년 연극 배우 요제프 랑에와 결혼했다. 랑에는 햄릿과 로미오 역을 아주 잘했고, 그림에도 재주가 뛰어나 훗날 ‘피아노 앞의 모차르트’(미완성)를 그렸다. 알로이지아는 빈에서 <돈조반니>의 돈나 안나 역을 맡는 등 음악 동료로 모차르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모차르트는 1782년 알로이지아의 동생이자 베버 가문의 셋째 딸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 브라부라(bravura) : 정교하고 화려한 이탈리아 풍의 아리아. 매우 숙련된 기교를 필요로 한다.




G단조, 모차르트의 맨얼굴 -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http://youtu.be/rDZWJJXX9gQ 

(칼 뵘 지휘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힘차게) - 2악장 안단테 - 3악장 메뉴엣 - 4악장 알레그로)


많은 슬픔약간의 즐거움그리고 몇 가지 참을 수 없는 일로 이뤄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 1778 12 31뮌헨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오페라 작곡가로 우뚝 서겠다는 모차르트의 꿈은 확고했다그러나 잘츠부르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알바의 아스카니오>, <루치오 실라>를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 마에스트로였다콜로레도 대주교는 대중 집회를 위한 극장을 새로 지었지만오페라 극장으로 활용되던 잘츠부르크 대학 강당을 폐쇄해 버렸다이래저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벗어나야만 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이 G단조 교향곡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여느 때처럼 즐겁고 편안한 음악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격렬한 음악이 나오자 당황했을까불쾌해 하며 모차르트의 의도를 잠시 생각해 보았을까알 수 없다분명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훗날 모차르트가 자유 음악가의 길을 선택할 무렵아버지와 아들은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이 무렵아버지와 아들은 의기투합해서 새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그들이 추구한 것은 잘츠부르크보다 더 큰 도시의 궁정 악장 자리였을 뿐봉건제도와의 결별은 아직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튼모차르트는 이미 배우는 어린이가 아니었다이탈리아 오페라를 체득했고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대위법을 배웠다두 달 동안의 빈 여행에서 바겐자일디터스도르프살리에리반할 등 빈에서 활약하던 탁월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섭렵했다무엇보다도 당대 최고의 작곡가 하이든의 음악을 접하여 질풍노도의 정신과 단조로 된 교향곡의 묘미를 배웠다 G단조 교향곡이 하이든의 단조 교향곡들 - 39 G단조, 44 E단조 <애도>, 45 F#단조 <고별>, 52 C단조 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그러나 자아를 의식하고 있는 모차르트 본인의 열정과 고뇌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차르트는 1778년 마지막날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많은 슬픔,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 가지 참을 수 없는 일로 이뤄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1악장의 템포 지시어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힘차게), 매우 이례적이다모차르트가 이 지시어를 사용한 것은 이 곡 뿐이다각별한 의지를 담아서 작곡했음을 알 수 있다.훗날 베토벤이 <영웅> <운명첫 악장 등에서 즐겨 쓴 지시어로 된 곡하이든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베토벤을 예감케 한다.


모차르트의 35살 음악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슈바이처가 바흐 음악에 대해 말했듯모차르트를 그냥 듣고연주하고사랑하고존경하고입 다무는 것 나을 것이다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이 교향곡을 작곡한 1773년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이 무렵모차르트는 선배 작곡가를 베끼고 편곡하며 공부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이때 이후로 그가 작곡한 거의 모든 음악은 틀림없는 그만의 것이었다그는 더 이상 자기보다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았다.” (제레미 시프먼, <모차르트그 삶과 음악임선근 옮김,포노, p.77~p.78)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 번호가 붙어 있는 41개 중 단조로 된 곡은 25 K.183 40 K.550 두 곡 뿐이다.둘 다 비극적 조성인 G단조로 돼 있는데, 25번을 작은 G단조’, 40번을  G단조라 부르기도 한다자유를 갈망했지만 아직 봉건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던 시절에 만든 작은 G단조’, 자유 음악가로 인생의 정점에 있었지만 고독했던 시절에 만든  G단조언제나 많은 슬픔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았던 모차르트의 맨 얼굴’ 아닐까?



쇼팽이 가장 사랑했던, 발라드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영하의 추위가 다가오고, 우리 마음도 얼어 붙는다. 붉은 단풍이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쇼팽의 이 곡은 낙엽 지는 가을이다. 

1835년,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쇼팽은 친구의 집에서 자신의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끝까지 듣고 난 동갑내기 작곡가 슈만이 말했다. “자네의 작품 중에 나는 이 곡이 제일 맘에 드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쇼팽이 대답했다. “아주 기쁜 일이군. 실은 나도 이 곡이 제일 좋아.” 쇼팽이 연주한 곡은 발라드 1번 G단조 Op. 23이었다. 


이 곡의 악상을 얻은 것은 쇼팽이 스물두 살 되던 해였다. 이 곡을 듣고 조국인 폴란드를 막 떠난 젊은 쇼팽의 상실감을 떠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때 폴란드 민중들은 러시아의 압제에 봉기했지만, 곧 진압 당한다. 방금 바르샤바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쇼팽은 여행지인 빈에서 극심한 분노와 시름에 잠긴 채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1번 G단조는 다른 세 곡에 비해 ‘서사시’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G단조의 첫 주제, 그리고 장조로 전개되던 선율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우면서 단조로 바뀌는 부분들은 젊은 쇼팽이 늘 느끼던 고독과 우수를 말해준다. 

쇼팽을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른다면 그가 남긴 4곡의 발라드(‘담시곡(譚詩曲)’이라고 흔히 번역)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파리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의 시인 미츠키에비츠의 ‘콘라드 와렌로트’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표제 음악처럼 이 시의 내용을 묘사한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음악 자체가 한 편의 시로서, 듣는 이의 가슴에 시심을 불러 일으킨다. 발라드는 원래 ‘이야기를 담은 성악곡’을 가리키는 말인데 쇼팽에 의해 기악곡으로 자리잡았으며 브람스와 포레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남겼다. 

 

http://youtu.be/sXZ70ykfDn0 (아슈케나지 연주)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태인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쇼팽과 조르쥬 상드의 연애를 그린 영화 <쇼팽의 연인>(원제는 <즉흥곡>, Impromptu)에서 상드가 쇼팽에 대한 연심을 느낄 때마다 이 곡이 나온다. 다른 세 곡은 어떨까

2번 F장조 Op. 38은 '여름의 오후'다. 미츠키에비츠의 시 ‘비리스 호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8분의 6 박자의 첫 주제는 신기하게도 숲의 그늘이 드리운 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킨다. 조용한 주제가 끝나면 갑자기 포르티시모의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온갖 환상이 펼쳐진다. 장르는 다르지만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이나 말러 교향곡 7번 ‘세레나데’가 들려주는 매혹적인 여름 밤의 서정을 맛보게 해준다.

3번 Ab장조 Op. 47는 일정한 형식을 찾아내는 게 곤란할 정도로 자유로운 흐름을 취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네 곡 가운데 가장 세련된 균형미를 느끼게 해준다. 이 곡은 ‘물의 요정’이란 시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매혹적인 선율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쇼팽의 음악은 그 자체가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한다”며 구체적인 해설을 회피한다. 이 곡을 듣고 영국의 화가 비어즐리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우아한 숙녀를 그렸다고 한다.

4번 F단조 Op. 52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쇼팽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다. 쇼팽이 서른두 살 되던 1832년에 만든 이 곡은 소나타 형식과 변주곡 형식이 서로 얽히며 서서히 거대한 구조를 만들고, 우아한 클라이맥스를 거쳐 비극적인 느낌으로 끝난다. 원숙한 쇼팽이 구사하는 현란한 화성과 대위법을 한껏 맛볼 수 있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연주는 쇼팽에 관한 한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연주자들의 낭만적인 쇼팽 해석에 반기를 들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20세기 연주자의 모범이 된 그의 앨범을 권하고 싶다.(RCA, 1959년 녹음·1985년 CD 발매) 발라드에선 좀 더 짙은 시정을 느끼게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베트남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쇼팽이라면 바로 저렇게 연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유연한 연주를 들려준다.(서울음반 라이선스, 1995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는 디테일에서 충분한 루바토*를 구사해 시적인 느낌을 진하게 표현한 훌륭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Decca, 1978∼1985년 사이 녹음)


* 루바토 : ‘잃어버린 시간’이란 뜻으로 연주할 때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시간을 늦추는 기법이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모차르트와 쇼팽은 오른손으로 섬세한 루바토를 구사했고, 이때도 왼손은 박자를 정확히 유지했다.



“어두운 시절, 좌절하지 말자”후배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음악, 쇼팽 스케르초 2번


http://youtu.be/HfbZCPUbcjY (피아노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지금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하는 건 ‘똥밭에 구르는 짓’이에요” 어제 만난 한 후배가 울분을 토했다. “똥밭에서 구르는 경험도 해 봐야 하는 거야”라고 덧붙이며 냉소했다.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점령당해 방송의 자유를 빼앗긴 후배들의 탄식…. 생각보다 깊고 아팠다. “개똥밭에 굴러도 사는 게 낫다”, “여럿이 함께 구르니 견딜 수 있지 않은가” 격려의 말을 건넸지만 큰 위로가 되진 않은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이슈들 뿐 아니라 더 넓은 가치관을 모색하는 프로그램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지만, 부질없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쇼팽의 스케르초 2번 Bb단조 Op.31은 잿빛 하늘이다. 이 곡은 낮은 목소리의 질문과 포르티시모의 응답으로 시작한다. (링크 처음 ~ 33초) 쇼팽은 불안하고 우울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묻는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분노에 차서 스스로 대답한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이 대목에서, 쇼팽은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조국 폴란드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제자 폰 렌츠가 전한 쇼팽의 말. “이 질문은 아무리 물어도 충분치 않았다. 무덤 같은 분위기, 납골당에 지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음악은 차가운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이다. 모욕 당한 채 질식해 버린 나의 사랑, 나의 자유! 쇼팽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그리워하며 예찬한다. 3분 2초부터, 세도막 형식의 중간 부분이다. 쇼팽은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히 내면을 돌아본다. 3분 54초부터 다시 비애가 밀려온다. 4분 21초 지점, 이 비애는 찬란한 햇살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수놓듯 승화된다. 끝부분은 힘차고, 열정적이며, 승리에 빛난다. 이 곡을 들은 슈만은 이렇게 평했다. 

“정열적이고 매력적인 곡이다. 달콤함, 대담함, 사랑스러움, 증오심이 가득 차 있어서 바이런의 시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곡이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 쇼팽> (음악세계) p.74~75

‘스케르초’는 농담, 해학을 뜻하며, 베토벤 이후 교향곡과 소나타의 3악장에서 많이 사용된 음악 양식이다. 하지만 쇼팽의 스케르초는 농담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슈만의 말. “만약 ‘농담’이 검은 옷을 입고 다닌다면 ‘진담’은 어떤 색 옷을 입어야 할까?” 쇼팽은 스케르초에서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토로한다. 여기엔 우울함과 반항심 - 개인적이건 민족적이건 - 이 엿보인다. 쇼팽과 함께 유럽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활약한 프란츠 리스트의 말이다.

“(에튀드와) 스케르초는 대부분 격렬한 분노와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신랄한 빈정거림으로, 때로는 완고한 자존심으로 나타난다. 쇼팽의 이러한 측면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붙임성있고, 조용하고, 쾌활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 쇼팽> (음악세계) p.71

쇼팽은 발라드, 즉흥곡과 마찬가지로 스케르초도 4곡을 남겼다. 1831년부터 평균 4년 간격으로 한 곡씩 작곡했다. 쇼팽 스케르초 전곡을 들어 보자. http://youtu.be/R4tunPrY22A (피아노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1번 B단조 Op.20은 쇼팽이 조국을 떠난 이듬해,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듣고 격렬한 분노와 열정을 담아 작곡했다. 같은 시기에 작곡한 <혁명> 에튀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혁명>이 격렬하게 하강하는 음계 위주라면 이 곡은 똑같이 격렬하게 상승하는 음계 위주다. 링크 4분 12초부터 서정적인 노래가 이어진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마음 속 노래는 살아있어” 쇼팽이 우리에게 속삭여 주는 것 같다. 

3번 C#단조 Op.39 (링크 19:40부터)는 1839년, 조르쥬 상드와 함께 머물던 스페인 남부 해안의 마요르카에서 작곡했다. 이 곡의 도입부는 매우 병적이고 불안하다. 마요르카 시절 건강이 악화됐고,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일까? 그해 3월 19일 친구 폰타나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이 스케르초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언제 완성될지 모르기 때문이야. 나는 어지러워서 아직 작곡을 할 수가 없어”라고 써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중간 부분(링크 21:00부터)은 꿈처럼 달콤하고 시적이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4번 E장조 Op.54 (링크 26:25부터)는 1842년 작곡했다. 앞의 세 곡에 비해 밝고, 경쾌하고, 행복한 느낌이다. 쇼팽은 해가 갈수록 결핵이 심해졌지만 정신 상태는 허약해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영웅> 폴로네즈와 함께 쇼팽의 작품 중 가장 당당하고 씩씩한 곡으로 꼽힌다. (링크 29:56부터) 중간 부분은 조용하고 섬세한 시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곡에서 가장 찬란한 대목은 마지막 코다 부분이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한다. 분노가 분노를 달랜다. 개똥밭을 구르는 어두운 시절….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사랑하고, 새로운 생명은 태어난다. 이번 주말엔 후배 채원이의 결혼식이 있다. 힘겹게 방송 현장을 지키고 있는 후배들에게 쇼팽의 스케르초가 위로가 되길 바란다. 



첫눈에게 바치는 환상의 선율 - 쇼팽 왈츠 C#단조 Op.64-2


http://youtu.be/ehSKhRburRQ 


정릉골에 첫눈이 내린다. 여의도에도, 일산에도, 광화문에도, 삼성동에도, 청량리에도 눈이 온다고 카톡이 요란하다. 어른들이 아이처럼 모두 첫눈을 기뻐한다. 세상이 얼어붙는 겨울이지만 노래는 있고 시심(詩心)은 살아 있다. 

쇼팽의 C#단조 왈츠, 나는 40년 넘게 음악을 들었지만 이 왈츠보다 매혹적인 곡을 알지 못한다. 애수어린 주제가 반복되고 공기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춤춘다. 담담히 생각에 잠겨 노래하는 중간 부분에 이어 다시 매혹적인 주제로 돌아온다. 쇼팽이 이 곡 단 하나만 남겼더라도 난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95살을 영원한 청년으로 살며 연주한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도 이 곡을 사랑하여 앵콜곡으로 즐겨 연주했다. 

19세기 전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유럽은 향락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풍조가 넘쳐났고,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빙빙 도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인기 절정이었다. 쇼팽은 1830년 빈에 머물 때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들었는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지 “빈의 왈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쇼팽의 왈츠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언제나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 한 쇼팽, 이 곡은 왈츠보다 폴란드 시골 춤곡인 마주르카에 가깝다. 


슈만은 “쇼팽의 왈츠는 그의 몸과 마음이 춤추는 음악”이며, “여기에 맞춰 함께 춤 출 파트너는 백작부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빈의 왈츠에 비해 훨씬 더 우아하고 세련된 작품이란 뜻이다. 우울한 슬라브 정서가 깔려 있는 이 왈츠는, 쇼팽이 좋아한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의 노래처럼 매끄럽게 흐른다. 매혹적인 이 곡은 실제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브루농빌이 안무한 최초의 낭만적 발레 <공기의 요정> (Les Sylphides)에서 중심이 되는 곡이다. 

발레 <공기의 요정> http://youtu.be/DvDoMNpNlzY (16:27부터 왈츠 C#단조)

쇼팽의 첫 왈츠인 <화려한 대왈츠> Eb장조는, 쇼팽의 모든 음악 중 가장 즐겁다. 쇼팽 자신도 이 곡을 사랑하여 “(이 곡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http://youtu.be/LG-E4PVGQSI (피아노 발렌티나 리시차) 

곱게 치장한 폴란드 농촌의 젊은 남녀가 환한 표정으로 군무를 추는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위대한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의 연주도 섬세하고 훌륭하지만,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 동영상도 멋지다. 생동하는 3박자의 리듬을 느끼며 감상하시길…. 이 곡은 쇼팽의 말처럼 “춤추는 사람을 그 파도 속으로 점점 깊이 끌어들인다.”

쇼팽의 작품 중 가장 짧고 단순한 왈츠 A단조도 들어보자. 
http://youtu.be/mZJt-oWDD7U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가장 단순하다는 것은? 아무 꾸밈이나 허세가 없다는 것, 가장 진솔한 내면의 소리를 홀로 노래했다는 뜻이다. <어린이를 위한 쇼팽> 같은 악보집에 실려 있는 이 단순한 왈츠에서 쇼팽의 그리움이 가장 사무치게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링크 22초와 32초 지점, 피아노가 고음으로 치닫는 대목에서 쇼팽은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다. 

19살 쇼팽은 사랑하던 콘스탄차마저 뒤로 하고 조국을 떠난다.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 한 줌을 그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그 뒤 쇼팽은 한 번도 폴란드에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마주르카나 폴로네즈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20년의 객지 생활, 쇼팽은 3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긴다. “몸은 파리에 매장하더라도 심장만은 조국 폴란드에 보내 주세요.” 이 유언에 따라 누나 루드비카가 조국에 가져온 쇼팽의 심장은 지금도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돼 있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Fryderyk Franciszek Chopin) 2002년 개봉한 예르지 안트차크 감독의 영화 ‘쇼팽 : 디자이어 포 러브’ 포스터.


이 곡은 쇼팽이 세상을 떠난 뒤 출판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49년에 촬영한 유일한 사진, 병색이 완연한 그의 얼굴에 마음이 아파진다. MBC의 국제시사 프로그램 <W>에서 쇼팽 탄생 200년을 기념하는 바르샤바를 취재한 일이 있는데, 이 왈츠를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쇼팽과 조르쥬 상드의 사랑을 그린 에르지 안차크 감독의 영화 <쇼팽, 사랑에의 갈망>(Chopin, Desire for Love)에서도 주제곡으로 나온다. 




쇼팽의 영혼에 몰아치는 회오리 바람 - 에튀드 A단조 Op.25-11 <겨울바람>


에튀드 A단조 Op.25-11 <겨울바람> http://youtu.be/tx6-Z0nsWnw 

자정이 다 됐는데 천둥, 번개가 친다. 담배 한 대 물고 멍하니 밖을 본다. 짚 앞 가로등 아래, 젖은 나뭇잎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회사를 떠난 지 만 1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나 자신도 노력했지만, 여러 벗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 가슴이 아려진다.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좋아하던 보들레르의 시 한 자락이 생뚱맞게 떠오른다. 

“머잖아 우리는 차디찬 어둠 속에 잠기리니 / 안녕! 너무 짧았던 여름날의 찬란한 빛이여 / 
나는 이미 듣네, 구슬픈 부딪침 소리와 함께 / 안마당 포석에 나무쪽 떨어져 울리는 소리 /
겨울의 모든 것이 내 몸속에 되돌아오리니 / 역정과 증오, 두려움과 떨림, 강요된 고역에 / 
내 심장은 북극의 지옥에 떨어진 태양처럼 / 시뻘겋게 얼어붙은 덩어리가 되리.”
- 보들레르 <가을의 노래> 중

막걸리 한잔 따라 놓고 쇼팽의 <겨울바람>을 듣는다. 여름엔 이열치열(以熱治熱)이 더위를 이기는 지혜라지만, 겨울에 이한치한(以寒治寒)은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외풍 때문에 머리가 시리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음악에 마음을 맡긴다. 느린 행진곡 풍의 비장한 주제를 나지막히 음미한다. 왼손이 포르티시모로 주제를 연주할 때 오른손의 차가운 화음들이 폭풍우처럼 쏟아진다. 


<겨울바람>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 음악을 들으면 누구든 납득할 수 있다. 쇼팽은 파리에서 마리아 보진스카와 사랑하게 됐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인간 쇼팽을 좋아했지만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과 딸이 결혼하게 둘 수 없다”며 거절했다. 쇼팽은 보진스카의 편지를 평생 소중히 보관했다. 그 편지 묶음에는 ‘나의 아픔’이라고 써 놓았다. 결핵이 시작되고 사랑이 멀어진 시기에 작곡했기 때문일까? 쇼팽의 영혼에 <겨울바람>이 마구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겨울바람이란 얼마나 매서운 극약이었을까? 오른손에서는 피할 곳 없는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왼손의 리듬은, 그 바람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의지다. 이것은 단순한 겨울바람을 묘사한 게 아니라, 그 겨울바람에 피아노로 맞선 쇼팽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이다. 

불어 ‘에튀드’(Etude)는 영어 ‘스터디’(Study), 음악 용어로는 ‘연습곡’이다. 연주 기술을 갈고닦기 위한 곡이다. 쇼팽의 에튀드는 피아노 연주 기술을 한 차원 끌어올린 곡으로, 멜로디, 하모니, 리듬 뿐 아니라 감정 표현을 위한 연습곡이다. 단순히 기교 연습에 머물지 않고 독창적인 예술 장르로 승화되어 있다. 쇼팽은 모두 27곡의 에튀드를 남겼는데 - Op.10의 12곡, Op.25의 12곡, 유작 <3개의 작은 에튀드> - 프란츠 리스트의 설명처럼 “격렬한 분노와 절망감을 표현한 곡”이 적지 않다. 이 <겨울바람> 또한 혁명의 열정을 담고 있는 곡으로 여겨진다. 

피아노 전공자들은 이 곡이 “극악하게 어렵다”고 한다. 베토벤의 ‘환상곡 풍의 소나타’에 <월광>이란 별명을 붙여서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의 말. “손가락이 비뚤어진 사람이 이 곡을 연습하면 손가락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기술적으로 어렵지만 그만큼 멋진 곡이다.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풍부한 소리를 들려주지만, 오케스트라의 느낌이 아니라 완벽한 의미의 피아노 음악이다.”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 동영상, 세련된 감각의 연주가 돋보이고, 화질과 음질이 우수하다. 올해 40살 된 리시차는 유투브에서 가장 인기있는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에튀드를 조금 더 들어보자. 

에튀드 C단조 Op.10-12 <혁명> http://youtu.be/Gi5VTBdKbFM 

쇼팽이 1831년 폴란드를 떠나 파리로 향하던 중 슈투트가르트에 잠시 머물 때 작곡했다. 러시아군이 바르샤바 봉기를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혀 단숨에 쳐 내려간 곡이다. 왼손의 격정적인 패시지와 오른손의 고통스런 절규가 빠르게 교차한다.

에튀드 E장조 Op.10-3 <이별의 노래> http://youtu.be/mpiJbQvBP8A 

마음 속에 슬픔을 안은 채 따뜻하고 정답게 노래한다. 제자 구트만에 따르면, 쇼팽 스스로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은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쇼팽이 조국을 떠날 때 첫사랑 콘스탄차를 생각하며 작곡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여러 사람이 이 아름다운 선율에 가사를 붙여 ‘슬픔’(Tristess), 또는 ‘이별의 노래’로 부르고 있다. 소니 밀러가 시를 쓰고 소프라노 레슬리 개릿이 부른 <이별의 노래>가 마음을 적신다. http://youtu.be/WoconW7DpT0 

“밤은 깊은데 달도 없네 / 나를 위로할 정다운 별빛도 없네 / 이 깊은 밤, 나 홀로 빛을 기다리네 / 밤은 왜 이리 깊은지 / 나 홀로 곰곰히 생각하네.”




겨울비 내리는 날 쇼팽 프렐류드 ‘빗방울’ - 쇼팽 빗방울 전주곡


http://youtu.be/J_6APTb3RNQ (피아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겨울 초입에 비가 자꾸 내린다. 이런 날은 쇼팽의 전주곡 <빗방울>도 좋을 것이다. 오른손이 맑고 투명한 선율을 노래할 때, 왼손이 연주하는 8분음표가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어우러진다. 1분 35초부터 단조로 바뀌면 음악이 점점 격렬해진다. 왼손이 포르테로 선율을 받아서 연주하면 오른손이 8분음표로 화답한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점점 더 세게 부딪친다.


쇼팽은 표제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쇼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곡의 느낌에 따라 별명을 갖다 붙이곤 했다. 이 곡은 쇼팽이 조르쥬 상드와 함께 스페인 남쪽 도시 마요르카에서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상드의 <회고록>에 따르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상드는 쇼팽을 혼자 남겨둔 채 외출했다. 밤늦게 돌아와 보니 쇼팽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그 피아노 소리가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같았다는 것. 


상드가 전한 이 일화는 이 곡이 아니라 6번 B단조 http://youtu.be/uUpQzgyr988 (피아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는 얘기도 있다. 왼손이 우울한 선율을 노래할 때 오른손이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8분 음표를 연달아 연주한다. 상드는 이 곡이 “두려움과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곡 모두 마요르카가 아니라 파리에서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내가 듣기에, 밤에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엔 이 두 곡보다 프렐류드 4번 E단조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http://youtu.be/tdhwqjhx-Xc (피아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오른손이 쓸쓸하고 우울한 선율을 느리게 노래할 때 왼손이 8분음표의 화음으로 반주한다. 매우 짧지만 인상적인 곡…. 쇼팽이 세상을 떠난 뒤 열린 파리 마들렌느 성당의 장례 미사에서 오르간 편곡으로 연주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기타 반주의 플루트가 연주하기도 한다. 

쇼팽의 전주곡은 오페라나 발레의 전주곡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조성이 모두 다른 24개의 소품들로, 간결한 형식 속에 음악적 상념을 하나씩 담고 있다. 쇼팽은 제자를 가르칠 때 ‘피아노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 전주곡집은 ‘조성이 모두 다른 24개의 전주곡과 푸가’인 바흐의 <평균율>에 대한 오마쥬가 아닌가 생각된다. 


쇼팽의 경우 푸가를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전주곡집’이 되어 버린 셈이다. 구성상의 차이가 있다면, 바흐의 평균율이 C장조 - C단조 - C#장조 - C#단조의 순서인 반면 쇼팽의 프렐류드는 C장조 - A단조 - G장조 - E단조 등 샵(#)을 하나씩 추가한 뒤, Bb장조 - G단조 - F장조 - D단조 등 플랫(b)을 하나씩 줄여가는 순서를 취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24개의 전주곡은 C장조에서 시작하여 D단조로 끝나는 유기적 통일성을 보여준다.

쇼팽의 음악 중 빗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세 곡이 모두 프렐류드라는 점은 흥미롭다. 매우 짧고 간결한 7번 A장조는 비갠 뒤의 아침 하늘처럼 맑은 곡이다. 오래전 KBS-FM의 시그널음악으로 쓰인 적이 있어서 귀에 익은 멜로디다. http://youtu.be/8YE1X4rAX5A (피아노 니키타 마갈로프) 어두운 세상, 비오는 늦은 오후…, 맑은 하늘을 상상하며 들어본다. 



쇼팽의 초상화에 얽힌 사랑의 사연 - 즉흥환상곡 C#단조 Op.66


http://youtu.be/twIQYQgPzaE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피아니스트의 두 손이 환상적인 패시지를 빠르게 연주한다. 늦가을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것 같기도 하고, 초겨울 하늘에 펄펄 내리는 눈 같기도 하다. 이어서 1분 10초 지점, 보통 빠르기의 ‘칸타빌레’(노래하듯 연주)이다. 쇼팽이 작곡한 피아노곡 중 가장 달콤한 대목…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사랑을 그린 영화 <쇼팽의 연인>(Impromptu), 그 대미를 장식하기에 제격인 아름다운 선율 아닐까?

쇼팽의 키는 170Cm, 몸무게는 45Kg…. 무척 가냘픈 모습이었다. 작곡가 모셀레스에 따르면 쇼팽의 얼굴은 “그의 음악처럼 생겼다”고 한다.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음악은 섬세하고 매혹적이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을 갖고 있는데, 쇼팽의 얼굴 또한 그러했다는 것. 그는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상류사회에 들어가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 등 부유한 파리의 후원자들이 앞다퉈 그를 초청했다. 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쇼팽 때문에 모든 숙녀들은 넋이 나갔고 모든 남편들은 질투에 불탔다”고 한다. (<쇼팽, 그 삶과 음악> Page 91, 제레미 니콜러스 지음, 임희근 옮김, 포노)  

쇼팽에게 매혹된 파리 사교계의 여성들은 많았지만 쇼팽은 마리아 보진스카라는 폴란드 가문의 소녀에게만 마음을 주었다. 마리아는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할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고 쇼팽의 초상화를 그린 재능 있는 화가였다. 마리아의 가족들도 모두 쇼팽을 사랑했다. 쇼팽은 1837년 2월 마리아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딸이 시집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고심 끝에 결론지었다. 마리아와의 사랑이 싹틀 무렵, 공교롭게도 쇼팽은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곧 결핵이 발병했고 이 때문에 사랑마저 잃게 된 것이다. 마리아 보진스카가 보낸 편지 묶음에 쇼팽은 ‘모야 비에다’ 곧 ‘나의 슬픔’이라고 써 놓고 평생 간직했다. 


쇼팽과 상드가 만난 것은 이 직후였다. 쇼팽보다 6살 위인 조르쥬 상드는 남자의 필명으로 소설을 썼고, 바지 차림에 시가를 문 채 사교계에 나타났고, 자유분방한 연애로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두 사람은 이미 만난 적이 있지만 쇼팽은 상드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1838년 5월의 한 파티 장소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은 상드는 열렬한 사랑에 바졌고, 쇼팽도 상드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상드는 새 연인 쇼팽을 ‘작은 사람’이라 부르며 엄마처럼 부드럽게 배려해 주었다. 그의 곁에서 쇼팽은 편안했고, 자기 생각을 다 털어놓을 수 있었으며 육체적으로 끌리기까지 했다.

 

▲ 마리아 보진스카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 / ▲ 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왼쪽)과 상드(오른쪽). 원래는 한폭의 그림이었지만, 둘로 쪼개져서 쇼팽은 파리 루브르에, 상드는 덴마크 박물관에 갔다.

상드의 말. “쇼팽은 천사야. 착하고 부드럽고 참을성이 많아서 때로는 걱정이 될 정도야. 그 사람은 너무 셈세하고 예민해서 이 투박하고 힘겨운 세속 생활을 오래 견뎌내지 못할 것 같기도 해” 쇼팽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내가 지금 그녀를 아는 것처럼 너도 알게 된다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될 거야”


흡연에 대해 관대했던 그 시절, 상드는 기침하는 쇼팽 옆에서 시가를 피우기도 했다. 상드는 쇼팽의 건강을 위해 스페인 남부의 마요르카로 함께 가기도 했지만, 쇼팽의 결핵은 악화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동거하는 연인보다는 예술적 동지가 되고자 했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상드는 딸 솔랑쥬와 늘 불화했는데, 쇼팽이 어린 솔랑쥬 편을 들자 격분하여 절교를 선언하는데 9년간의 사랑에 석양이 드리운 것이다. 쇼팽은 “그 동안 함께 해 줘서 고맙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그 또한 고맙다”라고 편지에 썼다. 

쇼팽은 상드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한 데 대해 분노했던 것 같다. 헤어진 지 3년 뒤인 1849년, 쇼팽이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자리에 상드가 보낸 대리인이 왔지만 쇼팽은 만나지 않았다. 화가 들라크로아가 두 사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쇼팽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상드가 매혹된 표정으로 곁에 앉아 있는 모습.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캔버스가 두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쇼팽의 얼굴은 파리 루브르로 갔고, 상드의 얼굴은 덴마크로 갔다. 두 사람은 죽어서도 화해하지 못한 것만 같다. 

상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조르쥬 상드가 문학 작품을 얻어내기 위해 쇼팽을 장난감처럼 이용했다”며 “쇼팽에게 정서적으로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난 뒤에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다”라며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단순히 결론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즉흥환상곡을 들어보자. 3분 55초, 달콤한 칸타빌레 선율을 왼손이 낮게 노래하며 마친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철지난 유행가 한 자락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만나기 전인 1834년에 작곡했지만, 아름답고 달콤했던 두 사람의 사랑을 기리는 음악으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어두운 밤의 서정, 쇼팽의 녹턴 - 쇼팽 녹턴 C#단조 (유작)


쇼팽 녹턴 C#단조 (유작) http://youtu.be/m5qeuVOIbHk (피아노 아슈케나지)

쇼팽은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는 허세를 싫어했고, 과장된 칭찬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쇼팽은 다른 피아니스트를 입에 발린 말로 추켜세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안느 벨르빌(Anne Belleville)은 쇼팽이 극찬한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바르샤바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은 쇼팽의 말. “여기 피아노를 가볍고도 우아하게, 매우 잘 치는 벨르빌이란 프랑스 여자가 있습니다.” 쇼팽은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하여, 10여년이 지난 1840년 왈츠 한 곡을 헌정했다. 왈츠 F단조 Op.70-2 http://youtu.be/euLyQCJmCfs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이 곡을 벨르빌에게 헌정하며 쇼팽이 쓴 편지. 

“이 조그마한 왈츠는 당신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나는 이 왈츠를 당신이 갖고 있기 원할 뿐,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이 왈츠를 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음악 하나에 마음 한 조각을 담아서 오직 한 사람에게 준, 순수한 정성이 느껴진다. 이 곡은 쇼팽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작’으로 남았다. 누군가에게 헌정했는데,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서 쓴 곡이기 때문에 ‘유작’으로 전해진 곡은 또 있다. 매혹적인 선율에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노래한 녹턴 C#단조. http://youtu.be/m5qeuVOIbHk (느리게, 풍부한 표정으로, 피아노 아슈케나지) 1830년, 고향을 떠난 직후 빈에서 작곡하여 누나 루드비카에게 보낸 곡이다. 

선율이 몹시 아름다운 이 곡은, ‘노래하는 악기’인 바이올린 독주곡으로도 널리 연주된다. 쇼팽 자신은 이 곡을 ‘녹턴’이라 부르지 않았다. 출판업자가 “녹턴이라 해야 악보가 잘 팔린다”고 누나 루드비카를 설득한 결과 ‘녹턴’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쇼팽 시절에는 ‘녹턴’이 인기 있는 장르였다는 것. ‘녹턴’은 보통 ‘야상곡’으로 번역하는데, 카톨릭 기도서에서는 ‘밤에 봉헌하는 미사’를 뜻한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선율에 밤의 매혹적인 상념을 담은 세도막 형식의 독주곡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고전시대의 ‘세레나데’나 ‘노투르나’와는 관계가 없다. 


쇼팽 녹턴 1번 C#단조 Op.9-1 http://youtu.be/WnFs85pLmj4 (피아노 루빈슈타인)

이유를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이 곡이 가장 ‘전형적인’ 녹턴이라고 생각해 왔다. 저녁 시간의 달콤한 서정을 이렇게 매혹적으로 표현한 곡이 없는 것 같다. 감상에 잘도 빠지던 중학 시절, 저녁때면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이 곡을 몇 번이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표지에 밀로의 비너스상이 있는 파란 색깔의 LP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의 연주다. 

쇼팽 녹턴 Db장조 Op.27-2 http://youtu.be/E_2PjSzZO9o (피아노 루빈슈타인)

이 곡 또한 전형적인 녹턴이라 할 만 하다. 어린 내게 Db장조라는 ‘희한한’ 조성도 신기해 보였고, 멜로디 선이 조금 뒤틀려서 흘러가는 게 절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단조로 변하는 대목은 열정적이었고, 후반부에서 차분히 노래하는 대목은 정다운 대화처럼 들렸다. 이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모습을 TV에서 본 일이 있는데,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쇼팽 녹턴 2번 Eb장조 Op.9-2 http://youtu.be/Nu48Z45ibxQ (피아노 루빈슈타인)

쇼팽의 녹턴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그냥 ‘쇼팽의 녹턴’ 하면 이 곡을 가리키는 걸로 이해된다. 따뜻하고 달콤한 선율, 곁에서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 작곡을 시작, 파리에 도착한 뒤 완성했다. 그가 파리의 살롱에서 인기를 누리는데 큰 보탬이 된 곡이라고 한다. 쇼팽의 녹턴은 순수한 터치로, 지나친 감정에 빠지지 않고 연주하면 절대 진부하지 않다. 쇼팽 음악의 본질, 특히 선율과 장식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도록 잘 이해하고 연주하면 살롱 스타일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쇼팽>, 음악세계, p.160) 

 

▲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 녹턴이라는 피아노 소품 양식을 고안하여 그가 작곡한 20곡 가까운 녹턴은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 쇼팽에 의해서 정교하고 세련된 피아노 소품으로 완성됐다.


쇼팽은 21곡의 녹턴을 작곡했는데, 초기 녹턴들은 더블린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존 필드의 녹턴에서 자극을 받아 만들었다. 왼손이 화음으로 반주할 때 오른손이 우아한 선율을 노래하는 쇼팽 녹턴의 특징은 존 필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쇼팽의 녹턴은 형식과 내용에서 존 필드의 작품을 뛰어넘고 있다. 존 필드가 보여주지 못한 열정을 담고 있으며, 표현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평론가 하네커의 말. “쇼팽은 필드가 창안한 형식을 한층 발전시켜 극적인 숨결과 정열과 웅장함을 부여했다.”


쇼팽의 녹턴에 직접 영향을 미친 존 필드(1782~1837)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모차르트와 실력을 겨룬 바 있는 거장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의 제자였다. 장사에 능했던 클레멘티는, 팔려고 진열해 놓은 피아노 앞에서 필드가 하루 종일 연주하게 했다. 키 크고 창백한 피아니스트 존 필드의 경력은 피아노 판촉사원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20살 되던 해인 1802년부터 파리, 빈, 페테르부르크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두며 인기 절정의 연주자로 우뚝 섰고, 일생의 절반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1831년 쇼팽이 처음 파리에 나타났을 때 존 필드의 명성은 따를 자가 없었다. 쇼팽은 자기가 필드와 비교되는 것을 자랑스레 얘기한 일이 있다. “내게서 배운 학생들은 내가 필드만큼 훌륭하다고 얘기해요.” 이 무렵 쇼팽의 연주를 들은 존 필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병실의 재주꾼에 불과하군.” 쇼팽의 음악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첫 인상을 거칠게 내뱉은 걸로 보인다. 

아무튼, 당시 사람들은 필드의 연주를 평하며 ‘꿈꾸는 듯한 비애’가 서려 있고,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취향(taste)’을 갖고 있고, ‘불변의 우아함과 섬세함, 감정적 표현’이 뛰어나고, ‘벨벳 위의 진주’처럼 흘러간다고 극찬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존 필드는 쇼팽과 같은 독특한 음색과 섬세한 다이내믹을 갖고 있었던 걸로 여겨지며, 이런 의미에서 “쇼팽을 예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해럴드 숀버그 <위대한 피아니스트>, 나남, p.147) 그는 게으르고, 예의 없고, 음주벽이 심했다고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소명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종의 자리에서 목사와 나눈 대화.

“신교도입니까?” 
“아니요.”
“카톨릭이시군요.” 
“상관하지 마세요.”
“캘빈파(Calvinist)입니까?” 
“아니요, 저는 캘비니스트(Calvinist)가 아니라 클라브새니스트(Clavecinist, 피아니스트)입니다.”

쇼팽의 녹턴이 존 필드의 녹턴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필드는 훗날 자신의 녹턴이 무시당하는데 반해 쇼팽의 녹턴이 인기가 높은 것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럴드 숀버그, 같은 책, p.147) 존 필드의 녹턴, 같은 아일랜드 출신 피아니스트 존 오코너의 연주로 들어보자. 아늑한 분위기에서 부담 없이 들을 만한, 가벼운 살롱음악 같다. 
http://www.youtube.com/watch?v=3yIp6t-0lMA&feature=share&list=PL9D2736529BA73225

다시 쇼팽의 녹턴. 쇼팽의 음악은 어떤 장르의 곡이든 조국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담고 있는데, 녹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향수>라는 별명이 붙은 G단조 Op.37-1. http://youtu.be/9PB3bYaWosM 거장 루빈슈타인의 연주, 첫 음에서 목이 멘다. 눈물을 머금은 채 우수에 잠겨 끝없이 걸어가는 쇼팽의 모습이다. 중간 부분(링크 2분 34초부터)에서는 아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간다. 이 곡에 표현된 내면의 목소리와 절제된 슬픔, 이미 존 필드와 비교할 수 없는 쇼팽만의 개성이다. 




‘쇼팽의 또 다른 이름’,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폴로네즈
영원한 젊은이,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http://youtu.be/MxxDKLW5GWY 


95살까지 영원한 젊은이로 살다 간 위대한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그가 가장 즐겨 연주한 곡은 바로 쇼팽의 폴로네즈 Ab장조, <영웅>이었다. 놀라운 테크닉과 열정에 입이 떡 벌어지는 연주다. 특히 끝부분, 왼손을 머리 위까지 번쩍 들어올려 건반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공중제비 타건’은 탄성을 자아낸다. 그의 엄청나게 큰 손은 호랑이가 먹이를 낚아채듯 건반 위로 수직 하강한다. 거인과 같은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압도해버리는 옛 거장의 카리스마…. 

루빈슈타인(1886~1982)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쇼팽과 같은 폴란드 출신인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비르튜오소였다. 그는 쇼팽을 멋대로 연주하는 낭만주의적 해석에 반대, ‘악보대로 연주할 것’을 강조하여 20세기 쇼팽 연주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1886~1982) 폴란드 피아니스트.

폴란드의 대표적인 민속 춤곡인 폴로네즈. 쇼팽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이 춤곡의 리듬에 담아서 독자적인 폴로네즈의 세계를 구축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폴란드 민중의 정서를 담은 곡들도 있고, 찬란하게 빛나는 폴란드의 꿈을 거침없이 노래한 곡들도 있다. ‘영웅’ 폴로네즈는 후자에 속한다. 쇼팽의 폴로네즈 중 가장 웅장하고 완숙한 경지를 들려주는 곡이다. 견고한 구성, 탄탄한 리듬감, 화려한 색채와 악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곡을 듣노라면 쇼팽의 품성이 지극히 고결하고 당당했음을 알게 된다. 

루빈슈타인은 이 곡을 연주회의 마지막에 즐겨 배치했다. 끝 부분의 화려한 테크닉은 자연스레 청중의 환호와 열광을 이끌어냈다. 같은 부류에 속하는 곡으로 <군대> 폴로네즈가 있다. http://youtu.be/PC9-35ZPKn8 (피아노 루빈슈타인)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루빈슈타인의 조국이기도 했다.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피아노 연주사(史)의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정통 폴란드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의 쇼팽은 알프레드 코르토의 쇼팽보다 덜 귀족적이지만 훨씬 인간적이었고, 그만큼 폴란드 민중의 정서에 가까웠다. 음악 칼럼니스트 박제성은 루빈슈타인을 가리켜 ‘쇼팽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다. 

폴란드 민중의 슬픈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은 20대 중반에 작곡한 1번 C#단조다. http://youtu.be/6oig433L2DE (피아노 루빈슈타인) 힘찬 4마디의 전주로 시작하여 고귀하고 웅장한 선율로 이어진다. 슬픈 사랑의 마음이랄까, 비통한 느낌이지만 결코 고결함을 잃지 않는 쇼팽의 모습이다. 중간 부분은 매우 단순하고 아름답다. 쇼팽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기회가 있다면 이 곡을 맨 앞에 써야지 생각한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폴로네즈는 쇼팽이 평생 작곡한 장르였다. 쇼팽의 첫 작품, 7살 때 작곡한 폴로네즈 G단조다. http://youtu.be/L5ilAeNOGi4 전형적인 폴로네즈 리듬을 바탕으로 멜랑콜릭한 악상이 펼쳐진다. 이미 성숙한 쇼팽의 씨앗을 엿볼 수 있다. 어린 쇼팽이 악보를 그릴 줄 몰라서 스승 지브니가 받아 적었다고 한다. 당시 바르샤바의 한 음악잡지에 실린 평. “이 어린 작곡가는 피아노를 칠 때 어떤 어려운 곡도 무서울 정도로 쉽고 재미있게 연주해 버린다. 그는 지금까지 몇 곡의 춤곡과 변주곡도 작곡했다. 만약 그가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유명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릴 적 작곡한 폴로네즈를 차례로 들어보면 그의 독특한 개성이 형성되고 작곡 기량이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7살 때 작곡한 폴로네즈 Bb장조, http://youtu.be/QKGF9cR98i8 모차르트가 그 나이에 쓴 작품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11살 때 작곡한 폴로네즈 Ab장조, http://youtu.be/h7BbTcbseZU 앞의 곡들보다 규모가 커졌고 우아한 악상과 산뜻한 대비가 돋보인다. 12살 때 작곡한 폴로네즈 G#단조, http://youtu.be/KomTT_Le3VE 우수에 잠긴 악상이 이미 쇼팽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16살 때 작곡한 폴로네즈 Bb단조, http://youtu.be/JnZyGFjr5lU 이쯤 되면 누가 들어도 쇼팽의 작품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악보 중간 부분에 ‘안녕’이라고 써 놓았다. 학생 시절 친구 콜베르크에게 준 곡인데, 그와 함께 본 로시니 오페라 <도둑까치>의 카바티나에서 중간 부분 주제를 따 왔다. 

쇼팽의 마지막 폴로네즈 Ab장조, <환상 폴로네즈>라고 불리는 이 곡은 조르쥬 상드와 헤어진 뒤인 1846년에 작곡했다. http://youtu.be/3aAmxwai3W4 ‘쇼팽의 또 다른 이름’,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의 연주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엄격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흘러간다. 상처 입은 우수, 남모르는 비탄, 희망이 사라진 허탈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쇼팽의 작품에 간혹 드러나던 가냘픈 감상은 전혀 없고, 담담한 걸음으로 피안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폴란드 풍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는 건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다. 쇼팽이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폴로네즈를 더 썼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 베토벤 - 베토벤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http://youtu.be/R3YfBGR-WSo

베토벤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브루노 발터 지휘 콜럼비아 심포니 관현악단)

12월 17일은 베토벤이 태어난 날이다. 1770년이니, 243년 전이다. 인류가 얼마나 지구상에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인류 역사와 함께 살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이 남긴 9곡의 교향곡들은 슈만의 말처럼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새롭게 외경과 경탄을 느끼게 하는 곡”으로, “음악의 세계가 지속되는 한 몇 세기가 지나도 남아 있을 것이다.”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환희의 송가>는 인류 음악사에 획을 그은 ‘혁명적’ 작품이다. 교향곡 6번 <전원>은 5번 <운명>과 같은 날, 1808년 12월 22일 같은 곳에서 초연됐다. 쌍둥이로 세상에 나온 이 두 곡은 아주 대조적이다. 5번이 비극적 운명에 당당히 맞서 승리를 외친 베토벤의 강한 얼굴이라면 6번은 인간과 자연을 무한히 사랑한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마음이다.

베토벤은 1802년 가을 비통한 마음으로 유서를 썼던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8년에 요양하고 있었는데, 이 때 쓴 작품이다. 이 때 일과는 아침이 밝으면 일어나서 오후 2시까지 일을 한 후 저녁때까지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때로는 어둠이 내린 뒤까지 산책만 할 때도 있었다. 귓병 때문에 사람과 만나는 걸 두려워한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을 누렸던 것 같다. 그는 때로 “사람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절망에 빠진 베토벤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심어 준 자연에 대해 사랑을 고백한 노래가 바로 이 곡이다. 모차르트 다큐 촬영을 위해, 빈 필하모닉 취재를 위해, 장한나 지휘 데뷔 다큐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들를 때마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찾아서 베토벤의 발길이 닿았음직한 산책로를 걸어다녔다. 베토벤의 유물과 자필 악보가 있는 작은 박물관, 그리고 새로 담근 와인을 맛볼 수 있는 호이리게스(heuriges)가 있을 뿐, 베토벤이 나이팅게일과 지빠귀새의 노랫소리 들으며 <시냇가의 풍경> 악상을 떠올렸음직한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일리겐슈타트의 텅 빈 산책로를 채운 건 내가 흥얼대는 <전원> 교향곡 휘파람 뿐이었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때였다. 월트 디즈니가 1940년 만든 <판타지아>를 60년대 한국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에서 방송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매혹됐던 기억이 또렷하다. 올림포스산의 하루를 묘사한 이 영화에는 뿔 하나 달린 유니콘, 반인반수인 켄타우루스, 하늘을 나는 말들, 그리고 아기 요정들이 나와서 한껏 뛰논다. 3악장 ‘시골 축제’, 4악장 ‘천둥과 폭풍’의 영상이 특히 재미있다. http://youtu.be/dh8vuxyL6X8

베토벤은 자필악보 표지에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었고, 각 악장에도 표제를 붙였다. 이 때문에 이 곡을 ‘표제음악의 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 자연 현상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유쾌한 느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2악장, 시냇가의 풍경 (안단테 몰토 모소 = 느리게, 매우 생동감 있게). 3악장, 시골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스케르초 알레그로 = 해학곡, 빠르게). 4악장, 천둥과 폭풍 (알레그로 = 빠르게).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알레그레토 = 약간 빠르게). 

베토벤이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하더라도 난 그를 제일 위대한 작곡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이 태어난 오늘,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기억하고 싶다. 가곡 <아델라이데>, <로망스> 2번 F장조, 피아노소나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 피아노소나타 24번 F#장조 <테레제를 위하여>, 바가텔 A단조 <엘리제를 위하여> 등이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얼굴을 보여준다. 



영화가 더 좋아! 발레가 더 좋아! -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호두까기 인형>(2010)를 아직 못 본 분이 계시면 꼭 권해 드리고 싶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에서 아디이어를 가져와 만화 같은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만든 뮤지컬 영화다. 제작비 9,000만 달러의 대작답게 컴퓨터 그래픽 영상이 빼어나고, 영화 곳곳에 알기 쉬운 노래로 편곡된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이 흥겹다. http://youtu.be/R6dCjr7J4U8

알버트 삼촌으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메리는 꿈에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속으로 환상의 여행을 떠난다. 호두까기 인형은 원래 왕자인데, 쥐 마왕의 마법에 걸려 인형으로 변했다. 이 사실을 메리가 믿어주자 인형은 마법이 풀려 왕자로 돌아온다. 왕자의 나라는 쥐 마왕이 지배하고 있는데, 그는 어린이들의 장난감을 불태워 태양빛을 가려야 살 수 있다. 메리와 왕자는 힘을 합쳐 쥐 마왕과 전쟁을 벌이고, 결국 자유와 평화를 쟁취한다. 기력이 다한 왕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메리의 눈물이 왕자를 살려낸다. 


<호두까기 인형>(1891)은 원래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왕>을 바탕으로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2막 발레다. 크리스마스 이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 클라라가 잠들자 꿈에 쥐떼가 나타나는데, 호두까기 인형이 나타나서 구해준다. 클라라는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의 나라를 여행한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인>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로 꼽히며, ‘꽃의 왈츠’, ‘눈꽃송이의 춤’, ‘봉봉과자의 춤’ 등이 유명하다. 세계 각국에서 크리스마스 때 즐겨 공연된다. 

 

http://youtu.be/clWKDT4TQIk 1891년 작곡했으니 그의 마지막 발레 음악이다. 폰 메크 부인과의 우정이 끝나고 차이코프스키가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이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작곡을 의뢰받았을 때 그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쓸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피콜로, 하프, 첼레스타(철금) 등 재미있는 악기를 잘 활용, 어린이들의 즐거운 환상을 자극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아픔 속에서 끌어낸 아름다운 환상인 셈이다. 

영화가 더 근사한지, 원래 발레가 더 좋은지 비교해서 감상하기, 크리스마스 무렵에 각별히 재미있는 일이다. 최근 <진실의힘 음악여행>*에서 영화와 발레를 비교해서 감상했는데, 모두 어린이처럼 즐거워 하셨다. 영화 첫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발레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봉봉과자의 춤’(발레 1:29:05)이다. 이 선율은 삼촌 알버트가 메리에게 인형을 선물하며 부르는 노래 <상대성 이론>(영화 0:09:15)에 다시 나온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인형이지만 인형에게도 엄연히 생명이 있다는 것.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건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영화와 발레에서 압권은 <눈꽃송이의 춤>이다. (영화 링크 25:20, 발레 링크 44:30) 발레 1막의 마지막 곡으로, 왕자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가장 멋진 대목이다. 영화에서 인형이 왕자로 변하는 대목은 <꽃의 왈츠>다. (영화 28:10) 발레 <호두까기 인형>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발레 1:13:35) 이 왈츠가 끝나면 발레의 꽃인 그랑 빠드되(대 이인무)가 이어진다. 2011년 세계리듬체조 선수권대회에서 손연재가 후프 연기를 할 때 사용한 음악이다. http://youtu.be/LLNwY5YzzW4


영화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 뿐 아니라 교향곡과 협주곡도 나온다. 메리가 진심을 고백하는 대목(영화 43:10)에서는 교향곡 5번, 느린 악장의 아름다운 주제가 흐른다. 쥐 마왕이 의기양양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노래(영화 1:00:35)는 교향곡 6번 <비창>의 3악장, 당당한 행진곡이다. 왕자와 메리가 쥐떼를 물리치고 자유를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영화 링크 1:22:30)은 피아노 협주곡의 1악장 주제다. 이 협주곡이 자유의 찬가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결국 쥐떼의 압제를 물리치는 스토리,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추운 겨울, 어두운 시절이지만 어린이의 꿈과 환상이 우리 마음에 살아있다는 건 희망이다. 

* (재) 진실의 힘 : 박정희 ·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억울하게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된 분들이 만든 인권단체다. 누구보다 큰 상처를 입은 분들이 이 시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치유 공동체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보상금을 출연해서 만들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듣는 환희의 송가, 눈물나는 이유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시름 많은 세상 위로하는 “고뇌를 넘어 환희로”


http://youtu.be/sJQ32q2k8Uo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해마다 이맘때면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교향곡,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다. 세상은 갈등과 증오로 가득하지만, 한해를 보내는 순간만이라도 인간의 자유와 평화, 형제애를 다함께 나누자는 뜻일 것이다. 링크한 연주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다. 2011년, 임진각에서 우리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이 곡을 연주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환희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빛이여, 엘리지움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하여 너의 성스런 땅을 내딛네. 너의 마술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네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는 두말할 것 없이 베토벤의 최고 걸작이다. ‘고뇌를 넘어 환희로’ 가는 그의 인생 역정이 이 곡에 집약되어 있다. 이 곡을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니, 악성(樂聖) 베토벤이 온 생애와 영혼을 바쳐 작곡한 셈이다. 1악장(빠르게, 지나치지 않게, 장엄하게)은 폭풍과 같았던 인생을 회상한다. 하필이면 가장 뛰어난 음악 천재가 청력을 상실했을까.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절망과 고뇌로 가득하다. 

“사람들에게 ‘더 크게 말해 주세요, 저는 귀가 먹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었어.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이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이 불행은 내겐 이중으로 괴롭단다. 이 불행 때문에 나는 오해받고 있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심정을 토로할 수도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베토벤은 ‘상처입은 치유자’였다. 그는 말하자면, 신(神)의 손으로 고문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불굴의 의지로 삶을 긍정한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예수가 그러했듯, 베토벤은 누구보다 큰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위대한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는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승리했다. 링크 9:28 지점, 오케스트라 전체가 고뇌로 요동치는 대목은 1악장의 클라이맥스다. 청력 상실의 저주, 그래도 엄숙한 인생을 움켜쥐고 서 있는 베토벤의 모습이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1802. 10. 6)에서

2악장(18:00, 아주 생기있게)은 팀파니가 맹활약하는 스케르초(해학곡)다. 여느 스케르초와 달리 숭고하며, 귀기(鬼氣)를 느끼게 한다. 3박자의 리듬은 어깨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매우 흥겹다. 초연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지휘대에 서 있던 베토벤이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소프라노가 뒤를 돌아보라 일러주었다. 실제 지휘는 움라우트가 맡았다.


3악장(30:00, 아주 느리게, 노래하듯)은 베토벤이 작곡한 모든 곡들 중 가장 아름답다. “고통에 가득 찼던 삶, 그래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회상하는 것 같다. 현악기들이 노래하면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 등 목관악기들이 “그래, 그래야만 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대답하듯 함께 노래한다. 호른이 꿈꾸듯 노래하는 대목은 54살 베토벤이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다. 모든 악기가 다함께 함성을 지를 때 “나의 삶은 절망을 누르고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죽기 전에 다시 듣고 싶은 곡이 바로 이 3악장이었다. 고문 피해자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나신 <진실의힘> 선생님들께 존경을 담아 이 곡을 들려드린 일이 있다. 클래식 음악을 별로 접해보지 못한 선생님들이지만 이 곡의 메시지를 아주 잘 이해하신 게 기억난다. 

4악장(47:50), 이 작품에서 가장 위대한 부분일 것이다. 교향곡 역사상 처음으로 합창을 넣어서 인간과 대지의 숭고함을 찬양한다.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사용했다. 천지개벽과 같은 팡파레에 이어 1, 2, 3악장의 주제가 차례로 등장한다.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그 선율 말고 더 좋은 거” 노래한다. 이어서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낮은 목소리로 <환희의 송가> 주제를 연주한다. 비올라가 이 선율을 받으면 점차 규모가 커지고 모든 악기가 가세한다. 팡파레가 한번 더 울리면 바리톤이 등장한다. 

“오 친구들아, 이런 곡조들 말고 좀 더 즐거운 걸 노래하자꾸나. 환희! 환희를!” 

어제, 예술의전당에서 이 곡을 들으며 두 번 눈물을 흘렸다. 환희의 주제를 모든 악기가 연주할 때, 그리고 트럼본, 피콜로, 심벌즈, 트라이앵글, 큰 북이 가세하여 환희의 절정에서 끝마칠 때…. 시름으로 가득한 세상이 떠올랐고, 고뇌로 가득했던 베토벤의 삶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아픔을 딛고 이뤄낸 환희가 진정 눈물겨웠던 것이다. 



“의롭게 완성된 故 이종남 씨 영전에 바치는 음악”

고(故) 이남종씨 영전에 바치는 음악,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http://youtu.be/GZeLYLCgfmw (로린 마젤 지휘 바바리아 라디오 교향악단)


연말연시, 몹시 아팠다. 첫날 눈을 뜨자마자 접한 이남종씨 분신 소식에 마음이 쓰라렸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부도 묻기 힘든 상황입니다.” 유서에 또박또박 써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한 쿠데타 정부입니다. 공권력의 대선개입 (…) 책임져야 할 분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고가도로에 내건 펼침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 

경찰은 “이남종씨가 부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대선 직전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이 없었다”고 발표한 바로 그 경찰이다. 박종철 고문치사가 드러나자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한 5공 시절 경찰을 어쩌면 그렇게 빼닮았을까. 이남종씨가 부채에 시달렸고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분신의 이유였다고 몰아가는 것은 왜곡일 뿐이다. 


“저항세력에게 굽히지 않는 것이 불통(不通)이라면 임기 내내 불통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건 자랑스런 불통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라는 자의 의기양양한 발언에 숨이 턱 막힌다. 이런 불통이 이남종씨의 분신을 강요한 게 아닐까? 80년대부터 91년까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몸을 불살랐는지 기억한다. 피눈물로 이룬 민주주의가 처참히 유린되고 있다. 앞으로 이 정권 4년, 얼마나 많은 이남종씨가 생겨날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불통(不通)을 자랑스러워하는 저들은 코웃음만 치겠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교향곡은 보통 4개의 악장으로 이뤄지지만 이 곡은 두 악장으로 되어 있다. 24살 되던 1822년 가을에 쓰기 시작해서 다음해 4월, 3악장을 20마디까지 쓰다가 중단했다. 그는 왜 이 곡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신비로운 슬픔의 1악장, 세상의 번뇌를 초월한 것처럼 평화롭고 달콤한 2악장… 두 악장으로 이미 완성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3, 4악장을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미완성>은 모든 교향곡 중 가장 완성미가 뛰어난 곡”이라는 역설적인 평가가 있다. 

1악장은 깊은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콘트라바스의 선율로 시작한다. 불안하고 격정적인 현의 반주에 맞춰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첫 주제를 연주한다. 고통스런 비명에 이어 호른의 팡파레가 울려퍼지면 첼로가 서정적인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한다. 전개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솟구치는 열정으로 벽을 돌파한다. 제시부로 돌아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탄식하며 끝난다.

2악장(링크 14:20)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곡들 중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3박자의 주제가 흐른다. 들꽃 가득 핀 봄의 벌판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깊은 산속 옹달샘”과 비슷한 선율이 등장하는 게 재미있다. 두 번째 주제는 고뇌의 추억처럼 아련하게 펼쳐진다. 꿈꾸는 듯한 호른의 화음이 낭만의 향기를 더한다. 달콤한 꿈의 여운을 지긋이 느끼며 마무리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환희의 송가>보다 조금 먼저 작곡됐는데,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 선배 작곡가와 다른, 슈베르트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오케스트레이션도 뛰어나다. 현의 화음은 투명하고 상쾌하며, 관악기의 색채감은 화려하며, 강약 대비는 매우 역동적이다. 2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불완전하다는 느낌은 없다. 짙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에 오히려 깊은 완성미를 맛보게 한다. 


“나는 즐거운 음악이란 걸 모릅니다.” 31살 짧은 생애 내내 ‘방랑자’라는 자의식을 달고 다녔던 슬픈 영혼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시정(詩情)을 오롯이 담아낸 낭만 교향곡의 꽃이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됐던 이 악보는 그가 죽은 뒤 한참 뒤인 1865년 발견되어 비로소 빛을 보았고 베토벤의 <운명>,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와 함께 이른바 ‘세계 4대 교향곡’의 하나로 사랑받았다. 

40살 꽃다운 나이에 온몸을 던져 불의에 항거한 이남종씨. 때 이른 그의 죽음은 통탄할 일이지만 그의 삶은 의롭게 완성됐다. 학생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고, 마트 관리와 퀵서비스 일을 했다고 한다. 일상은 궁핍하고 초라했지만 그의 영혼은 살아 있었다.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다 하는 그의 마지막 외침은 오래도록 우리의 각성을 촉구하며 빛을 발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용산참사 5주년, 악몽을 쫓아내는 추모 음악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중 ‘마녀들의 축제’


http://youtu.be/FkCj-kJMXIg


오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만 5년 되는 날이다. 유족과 진상규명위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용산참사 5주기 추모주간에는 토론회 · 콘서트 · 영화시사회가 열리고 18일 참사 현장의 범국민추모대회와 20일 마석 모란공원의 희생자 추모제가 이어질 예정이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다. 지난 일도 쉬 잊어버린다. 비정한 자본이 우리를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며 잊으라고 강요했기 때문일까. 유족들의 지적대로, “용산이 잊혀지는 만큼 국가폭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것을 우리는 지난 5년간 쌍용, 강정, 밀양 등 곳곳에서 경험했다.” 새해, 철도 사유화에 이어 돈벌이 의료가 코앞에 닥쳤다. 우리가 무관심의 타성에 빠져 있는 사이, 자본의 칼날이 내 코앞을 겨누고 있음을 깨닫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2009년 그날 아침, 이명박 정부의 경찰은 생존권을 외치며 농성하던 철거민 5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세월이 흘러 박근혜 정권은 이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철저히 무시했을 뿐 아니라 살인진압의 책임자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을 인천공항공사 사장에 임명했다. 유족들은 칼바람 부는 거리에서 항의했지만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유족들의 상처는 깊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하루아침에 죽어가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인(死因)도 석연치 않다. 경찰 발표와 달리 일부 희생자는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한 게 아니냐는 것. (재)진실의힘에서는 용산 희생자 유족들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듬기 위해 작년 말 6차례에 걸쳐 꿈치유를 시도했다. 치유전문가 고혜경 박사가 성심껏 노력했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치유가 쉽지 않아 보였다.

유족들의 시계가 2009년 1월 20일에 멈춰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 하나가 이 분들의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건 가당치도 않겠지만,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드리고 싶다. 씻김굿의 위안 비슷한 걸 드릴 수 있을지…

음산한 폐허, 모두 두려움에 숨죽이는 가운데 (1:35)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마녀들이 춤이 펼쳐진다. 삶과 희망이 사라진,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분위기가 점점 더 짙어진다. (3:07) 

조종(弔鐘)이 울려퍼지고 (3:34) ‘진노의 날’을 알리는 금관의 코랄이 이어진다. 이 선율은 사악한 기운과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는데 (8:44) 콜레뇨 주법*으로 끈적끈적 달라붙는 마녀의 손길을 마침내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며 끝난다. 

  
▲ 베를리오즈 (Louis-Hector Berlioz 1803.12.11 ~ 1869.03.08)
 

베를리오즈(1803~1869)는 파리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열연한 영국의 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열렬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당대의 스타 스미드슨은 무명 작곡가인 베를리오즈의 구애를 무시했고, 구혼 편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5악장으로 된 <환상> 교향곡은 그녀에 대한 병적인 사랑이 꿈에 투영되어 나타난 고통스런 음악이다. 열에 들뜬 사랑의 테마가 모든 악장에 나타나는데, 바로 해리엇 스미드슨의 이미지다. 베를리오즈는 이 테마를 ‘고정관념’ (Idée fixé)이라고 불렀다. 

1악장은 ‘꿈과 정열’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분노와 질투, 눈물과 평화, 종교적 위로 등 좌절된 사랑이 낳은 모든 감정이 펼쳐진다. 2악장 ‘무도회’, 꿈에서 장면이 바뀌듯 어느새 화사한 무도회장에 와 있다.

스미드슨의 모습이 살짝 미소 짓더니 사라져 버린다. 3악장 ‘전원 풍경’, 목가적인 시골 풍경에서 평화를 맛보나 했더니 이내 불안해진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온 뒤 다시 적막이 감돈다. 누군가 사라져 버렸고, 이미 때는 늦었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음독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무시무시한 발걸음으로 사형대를 향해 끌려간다. 스미드슨의 모습이 마지막 추억처럼 나타나지만 오케스트라의 결정적인 일격이 모든 것을 끝내버린다. 5악장, 마녀들의 춤은 ‘고정관념’, 곧 해리엇 스미드슨의 주제를 일그러뜨려서 만든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1830년 이 곡을 완성하고 3년 뒤 스미드슨과 결혼하지만, 그 또한 악몽이었다. 그녀가 일깨운 악몽에서 태어난 <환상> 교향곡은 낭만시대 교향곡의 금자탑이 되었다. 색채감 넘치고 자유분방한 관현악법은 리스트,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여파는 훗날 말러, 스크리아빈, 림스키 코르사코프까지 이어졌다. 이 곡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 3년 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존경했던 베토벤의 작곡 기법을 이미 훌쩍 뛰어넘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 콜레뇨(Col Legno) : ‘나무로’라는 뜻. 활등으로 현을 두드려 연주하는 기법. 음량은 작지만 실로폰 소리같은 특수한 효과를 낸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전주곡이다.

MBC 징계무효 판결에 부치는 음악, 리스트 교향시 <전주곡>


http://youtu.be/doJxtcGzMZQ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바이마르 오케스트라)


2012년 MBC 파업 해고자 6명을 비롯, 44명의 노조원에 대한 중징계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모처럼 듣는 반가운 소식, 함께 기뻐할 따름이다. 나도 덩달아 지인들의 축하 문자를 받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사필귀정, 막힌 것은 뚫리고 굽은 것은 펴지기 마련이다. 

김재철이 망가뜨린 MBC를 되살리려면 갈 길이 멀다. 부당징계와 시용 채용 등 인사조치가 잘못됐다면 누군가 책임져야 할텐데, 모두들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수치스런 비리로 고발된 김재철에 대해 검찰은 수사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끝없이 추락하여 바닥을 헤매고 있는 MBC의 신뢰도가 회복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판결 이후 MBC 경영진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보면 기대난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 사회의 상식도 살아 있다. 이번 판결을 보며 이토록 감동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상식에 굶주려 있었다는 반증 아닐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나온 징계무효 조치, “다함께 힘내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170일 파업의 열정이 조금 더 치열한 현장 실천으로 이어져야 우리가 진정 살아있는 거”라고 알려주는 게 아닐까? 

리스트의 <전주곡>… 오페라나 발레의 전주곡도 아니고, 쇼팽의 프렐류드와 같은 독주곡 장르도 아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시와 교향악을 버무린 ‘교향시’를 13곡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의 제목이 바로 <전주곡>이다. “삶은 죽음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염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곡의 악보에는 라마르틴느의 시(詩)를 바탕으로 카롤리네 공작부인이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우리의 인생이란 죽음에 의해 엄숙한 첫 음이 연주되는 미지의 찬가에 대한 전주곡이 아니겠는가?” 

맞는 말일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누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음악을 들어보면 삶의 강력한 긍정이 느껴진다. 기나긴 죽음을 명상하는 엄숙한 서주에 이어, 오케스트라의 찬란한 포효(2:35)가 울려퍼진다. 광막한 우주를 향해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죽음이 영원하다면 삶 또한 영원하다고 선언하는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모든 생명은 생명 아닌 것에서 태어났다. 우주 137억년, 지구 45억년의 세월에서 우리가 아는 생명이 존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먼 과거, 우주 어딘가에서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어 갔을 것이다. 삶과 죽음, 생물과 무생물은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니, 우리는 리스트와 반대로 “죽음 또한 삶의 전주곡”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힘차고 장엄한 삶의 긍정에 이어서 네 개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3:20) 첼로와 호른의 평온한 칸타빌레는 사랑과 행복의 나날을 묘사한다. (6:40) 알레그로, 인생의 시련이 폭풍처럼 격렬하게 몰아친다. (10:10) 파스토랄레, 호른과 목관이 전원의 휴식을 정겹게 노래한다. (11:35) 칸타빌레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서 고조되고 모든 주제가 함께 어우러진 뒤 (14:53) 모든 악기가 힘차게 삶을 긍정하며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불리며 화려한 테크닉으로 인기를 누린 리스트, 그는 음악사상 최초로 매니저를 거느리고 연주 여행을 다닌 비르튜오소로 꼽힌다. <전주곡>의 서문을 쓴 비트겐슈타인 카롤리네 공작부인은 리스트가 내면을 돌아보도록 감화시킨 여성이다. 리스트는 그와 사랑하게 된 1848년부터 부와 명성을 뒤로 하고 인생의 의미를 탐구했으며, 그와 사랑을 이룰 수 없음이 확인된 1865년 카톨릭 신부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몰두했다. 

교향시 <전주곡>은 굴절이 심했던 그의 인생 한가운데 자리한 기념비와 같다. 문학과 음악의 융합, 그것은 낭만시대 음악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 자극받아 더욱 문학성 높은 교향시를 창안했고, 문학과 음악을 대등하게 취급한 바그너의 초기 악극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교향시는 스메타나,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의 모태가 되었다. 

인고의 세월이 길었다. 얼마나 더 길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억눌린 것은 다시 일어서고, 뒤틀린 것은 다시 펴질 것이다. 지금 겪고 있고, 앞으로 더 겪어야 할 고통은 찬란한 기쁨을 위한 전주곡일 것이다. 리스트의 <전주곡>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죽음은 삶의 전주곡”일 뿐이라고. 



얼어붙은 강, 그래도 생명은 흐른다 -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중 2번, 왈츠


http://youtu.be/vauo4o-ExoY (앙드레 리외 악단, 2011년 마스트리히트 공연)


앙드레 리외 악단이 흥겹게 연주하는 이 왈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예찬하는 것 같다. 새해 축하 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는 이 곡, 슬픈 사랑의 이야기에도 잘 어울릴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 선율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용산 참사 만5년, 주차장으로 변한 남일당 자리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두 젊은이가 아코디언과 기타로 연주한 이 왈츠,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고달팠다. 1930년대 소련,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당한 공포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 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절이었다. 문화 예술은 무조건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고,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형식주의’라는 비난과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고,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실제로 체포 일보직전까지 갔는데, 자기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타악기의 향연은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라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굳센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06~1975)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D단조 Op.47 4악장 http://youtu.be/RGI936ViabI 
(구스타보 두다멜 지휘, 이스라엘 필하모닉 관현악단)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반골 기질을 풍자와 야유로 표현하는 궁정 광대, ‘유로지비’로 해석되기도 했다.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가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1941년,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대항하여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했고, 이듬해 포연에 휩싸인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평화를 호소한 이 음악회는 연합국 내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토벤의 9번에 필적하는 걸작을 기대한 것.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유머러스한 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즈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이 독재자를 미화하는 저열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쇼스타코비치는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을 요약했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1938년, 엄혹한 시절에 작곡한 이 왈츠는 세월을 너머 2014년 동토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말해 준다. “아무리 험한 시련이 찾아와도 인간은 살아간다”고. “우리가 사랑하고 기뻐할 능력이 있는 한 어떤 고통스런 세월도 이겨낼 수 있다”고. 3박자의 흥겨운 리듬에 실린 애수어린 선율은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힘주어 결론 짓는다. 



아픈 사람과 공감하는 게 ‘봄’ 아닐까? - 모차르트 동요 <봄을 기다림> K.596


http://youtu.be/9URYugPt1RU (노래 : 나나 무스쿠리)


봄이 그립다. 2월 4일, 입춘이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두어 차례 있겠지만 우수 · 경칩, 이제 따뜻해질 일만 남았다. 그리스의 팝스타 나나 무스쿠리가 사랑한 노래 <봄을 기다림> K.596.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1월에 작곡한 동요다. 그 해 가을, 모차르트는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존재의 신비와 경이를 노래한다. 이에 앞서 1월, 그는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모차르트가 마지막 해를 어린이의 노래로 시작한 건 우연일까? <봄> K.597 · <우리 어린이들> K.598과 함께 그의 마지막 동요 3부작을 이루는 <봄을 기다림>, 작곡한 이유와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 F장조 6/8박자, ‘즐겁게’ (fröhlich)라고 악보에 써 있다. 당시 ‘작은 어린이 문고’(Kleine Kinderbiblioth다)에 실려 있었다는 크리스찬 오버벡의 시. 

<봄을 기다림>

(1절) 아름다운 5월아, 다시 돌아와 수풀을 푸르게 해 주렴 / 시냇가에 나가서 작은 제비꽃 피는 걸 보게 해 주렴 / 얼마나 제비꽃을 다시 보고 싶었는지! / 아름다운 5월아, 얼마나 다시 산책을 나가고 싶었는지! 

(2절) 겨울에도 재미있는 일이 많긴 하지 / 눈밭을 걷기도 하고 저녁때는 여러 놀이를 하지 / 아름다운 들판에서 썰매도 실컷 탈 수 있지 / 하지만 새들이 노래할 때 푸른 잔디 위를 신나게 달리는 것, 그게 훨씬 더 좋아. 

(4절) 무엇보다 로트헨이 마음 아픈 게 나는 제일 슬퍼 / 불쌍한 이 소녀는 꽃이 필 날만 기다리고 있지 / 나는 걔가 심심하지 말라고 장난감을 갖다 줬지만 소용이 없어 / 걔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조그만 자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5절) 아, 바깥이 조금만 더 따뜻하고 푸르렀으면! / 아름다운 오월아,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서 와 주길 간절히 기도할게 / 누구보다도 우리들에게 먼저 와 주렴 / 제비꽃이 많이많이 피게 해 주고 / 나이팅게일도 많이 데리고 오렴 / 예쁜 뻐꾸기도 데리고 오렴. 

(시 : 크리스찬 오버벡)


가사를 음미해 보면, 노래의 주인공 프리츠 - 시의 원래 제목은 ‘5월의 꼬마 프리츠’ (Fritzchen an den Mai) - 는 가난한 집 어린이라는 생각이 든다. 푸르른 봄이 오면 산책 나가서 제비꽃을 보고 싶고, 겨울에는 눈밭을 걷고 썰매를 타는 게 즐겁다. 돈 안 들이고 그저 밖에서 뛰노는 것 밖에 모르는 어린이다. 프리츠는 어머니 말을 잘 듣는 순진한 꼬마인가 보다. 3절에 “내 목마는 저 구석에 있어야 돼, 개울 저편에 가면 안 돼”라는 귀절이 나오는데, 필시 어머니가 단단히 주의를 주셨나보다. 이 꼬마에게 어머니의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法)인 셈이다. 

프리츠는 이웃 소녀 로트헨이 아파서 슬프다. 꽃이 필 날만 기다리며 ‘알을 품은 암탉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로트헨, 어린이는 이 소녀를 위해서 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노래한다. 프리츠는 로트헨에게 장난감을 갖다 주었는데, 아마 자기 물건 중 제일 소중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픈 사람에게 공감하고 치유를 비는 어린이의 마음, 이 4절이야말로 노래 전체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 꼬마는 봄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제일 먼저 와 달라고 간절히 노래한다. 제비꽃, 나이팅게일, 예쁜 뻐꾸기 모두 로트헨에게, 내게, 그리고 모든 어린이들에게 성큼 달려와 주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예쁜 선율은 모차르트가 그해 1월 5일 완성한 피아노협주곡 27번 Bb장조 K.595의 3악장의 주제를 닮았다. http://youtu.be/7vqBBRVRwSg (피아노 : 머레이 페라이아) 깡충깡충 뛰는 6/8박자의 주제를 들으면 정다운 오빠를 따라서 달리며 깔깔 웃는 어린 누이가 떠오른다. 

독일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 노래, 7살 꼬마 가수 지씨의 뮤직비디오로 감상해 보자. http://youtu.be/Vt7pKT_ZfnA 귀에 익은 이 선율은 오보에 독주로 편곡되어 KBS 1FM의 SB음악으로 나온 적이 있다. 클래식과 동요와 팝의 경계를 너머, 인종과 국가와 계층의 벽을 너머,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미국의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의 노래  http://youtu.be/32S53cOuvYA 

독일의 바리톤 오이겐 힐티의 노래 http://youtu.be/RJzXw-s3rCY 


아픈 사람들이 많은 시대다. 죄 없는 어린이들의 아픔은 눈물을 자아낸다. 아직은 추운 겨울, 봄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아픈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게 봄 아닐까? 활짝 핀 꽃과 새들의 지저귐,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평화를 누리는 게 봄 아닐까? 싸늘한 탐욕과 경쟁 대신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치유하는 따뜻한 마음이 봄을 앞당길 것이다. 어린이가 노래한 <봄을 기다림>은 이 시대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 봄을 그리워한 35살 모차르트… 그는 “어린이로 돌아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1791년에도 봄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그해 봄은 모차르트에게 마지막 봄이 되고 말았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 그 찬란한 기념비 -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54


http://youtu.be/Ynky7qoPnUU 
(피아노 마르타 아르헤리치, 리카르도 샤이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이 곡은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열렬한 사랑 고백이다. 1악장 첫 투티에 이어서 오보에가 노래하는 ‘클라라의 모토’는 가장 달콤한 속삭임이다. 이 주제는 곡 전체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슈만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두 축, 행동하는 인간 ‘플로레스탄’과 꿈꾸는 인간 ‘오이제비우스’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클라라의 모토’를 발전시킨다. 당대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의 실력에 걸맞게 뛰어난 테크닉을 요구하지만, 낭만적인 시심과 즉흥적인 감상으로 가득한 매력적인 곡이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부터 작곡 영역을 확대한다. 피아노 독주곡과 가곡만 써 온 슈만은 그 해부터 두 개의 교향곡을 비롯, 관현악곡과 합창곡까지 손을 넓힌다. 클라라는 “그의 상상력을 피아노에만 가둬 둘 수 없다”고 말했고, 슈만은 이에 화답하여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환상곡(Konzert-Fantasie)’ A단조를 작곡했다. 이 곡이 아주 맘에 들었던 클라라는 아예 제대로 된 협주곡으로 개작해 달라고 요구했고, 슈만은 4년 뒤인 1845년 간주곡과 피날레를 덧붙여 오늘의 형태로 완성했다. 

슈만의 피아노협주곡 A단조는 아주 난산이었다. 1829년에 F단조 협주곡, 1831년에 F장조 협주곡, 1833년에 D단조 협주곡을 스케치한 적이 있지만 매번 첫 부분만 쓰다가 중단했다. 1839년 슈만은 고백했다. “훌륭한 독주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떤 협주곡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거라면 쓸 수 있지만….” 이토록 소심했던 슈만이 결혼한 뒤 비로소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격려 덕분이었을까? 


낭만시대의 작곡가이자 평론가로 활약했던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뒤늦게 전문 피아니스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살 전후이던 1829년부터 1831년까지 프리드리히 빅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10대 소녀였던 큰 딸 클라라 빅스(1819~1896)는 ‘피아노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클라라는 14살 때 이미 피아노협주곡 A단조를 작곡하는 등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슈만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와서 완성한 이 협주곡을 그녀는 16살 때 스스로 초연했다. 슈만은 불행히도 손을 다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클라라는 슈만의 음악을 대신 연주해서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너는 나의 오른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는 자연스레 사랑으로 발전했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반대에 맞서 두 사람은 법정투쟁까지 벌여야 했다. 간신히 결혼에 성공하기 전 해인 1839년, 슈만은 썼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많은 작품들을 출판할 것입니다. 후손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된 우리의 작품 중 어느 게 내 것이고 어느 게 당신 것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두 사람은 함께 작곡을 했고, 함께 일기를 쓸 정도로 모든 것을 나눈 행복한 부부였다. 결혼 1년, 만삭의 21살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한 환상곡을 1841년 8월 13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했다. 이 곡이 낭만 시대 최고 수준의 시적 감수성을 가진 곡이라는 걸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클라라였다. 1845년 협주곡으로 완성된 이 곡을 클라라는 그해 12월 드레스덴에서 초연했고, 이듬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신년 음악회를 필두로 유럽 전역에서 환호를 받으며 50여 차례나 연주했다. 

결혼 생활이 10년을 넘길 무렵, 슈만은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라인강에 투신하는 등 불행한 말년을 향해 달려갔다. 클라라는 아이들이 8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점점 작곡과 멀어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별로 곡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작곡이 자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창조의 기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작곡을 통해서만 자신을 잊을 수 있습니다.” 슈만도 이 점을 잘 이해했고, 미안하게 생각했다. “클라라는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상상 속에서만 사는 남편 곁에 있는 생활은 작곡과 양립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클라라는 규칙적으로 작곡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떠오른 심오한 아이디어들이 기록되지 않고 사라졌음을 생각하면 착잡할 뿐이다.” 


클라라는 남편이 죽은 뒤 40년을 더 살며 이 A단조 협주곡을 계속 연주했다.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 런던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하자 클라라는 크게 낙담했다.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3악장 피날레를 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아힘은 지혜롭게도 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 곡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슈만이므로 자신이 손을 댈 수 없다는 것. 

클라라는 결국 남편의 손길이 오롯이 남아 있는 원곡대로 이 협주곡을 평생 연주했다.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기억되는 클라라 슈만, 그녀에게 이 곡은 슈만의 뜨거운 사랑과 아픈 추억, 그 자체였을까? 

1악장 알레그로 아페투오소 (빠르게, 부드러운, 따뜻한, 사랑스런 마음으로). 원래 독립된 환상곡이었다. ‘클라라의 모토’가 전곡을 지배한다. 전통적인 협주곡 양식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전개된다. 

2악장 인터메조 (간주곡, 링크 15:25), F장조, 3부 형식. 슈만의 가장 내밀한 부드러운 마음을 들려주는 부분이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중간 부분, 피아노 독주의 반주로 첼로가 노래하는 대목이 특히 아름답다. 첫 주제를 상기시키는 모티브 나온 뒤 휴식 없이 피날레로 넘어간다.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빠르고 생기있게, 링크 20:58). 햇빛 찬란한, 생기 넘치는 피날레다. 첫 주제는 1악장 첫 주제를 변형한 것이다. 2주제는 신코페이션으로, 3/4박자에서 3/2박자로 넘어가는 복수 리듬을 들려준다. 



‘무죄 판결’ 강기훈씨에게 드리는 음악

오래 살아남아 빛나는 곡, 프레토리우스의 <발레>


오래 살아남아 빛나는 곡, 프레토리우스의 <발레>
http://youtu.be/thvM2zeo1Bg

무죄다. ‘유서대필’ 조작의 유령이 덮친 1991년에도 무죄였고, 상식과 진실이 이긴 2014년에도 무죄다. 여러 언론이 “판결의 순간 강기훈 씨가 무표정했다”며 이상하다는 듯 보도했다. 너무 당연한 판결이기에 울 일도 없고 웃을 일도 없었던 것이다. 

“제가 이깁니다!” 23년전, 법정에 나가면서 외치는 젊은 강기훈 씨는 진실의 힘을 믿고 있었다. “진실은 승리한다, 강기훈을 석방하라!” 감옥 밖의 젊은 피들도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거짓의 카르텔은 예상보다 강했다. 강기훈 씨에게 3년 징역형이 선고됐고, 세월이 흘러 그는 50대가 됐다. “무죄 판결 받으면 뭐하나?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평범한 관객들은 기뻐하면서도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보다 만감이 교차한 건 강기훈 씨 자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본질은 아니다. 강기훈 씨의 말 속에 핵심이 있었다.


“이건 제 재판이 아닙니다. 사법부와 검찰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에 상식에 따른 판단을 내린 판사에게 아낌없이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무고한 인생을 짓밟은 사법부의 과거 잘못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너무 나약했고, 강기훈 씨가 암투병 중인 줄 알면서도 재판을 오래 끈 것은 너무 소심했다. 담당 검사는 판사의 고뇌에 찬 판결을 존중, 상고를 포기하고 이제 강기훈씨를 놓아 주어야 한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개”란 별명이 검사에게 언제나 명예로운 건 아니다. 파렴치한 범죄를 고발하라는 것이지, 무고한 사람을 분별없이 물어 뜯으라는 게 아니다. 강기훈 씨가 수난과 희생으로 만들어 준 ‘인간 될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이번 판결에 조선일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자살 배후설’의 진원지가 된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1991. 5. 5)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자기의 칼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죽음의 배후’를 직접 언급한 박홍 신부는 잠깐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있을까? 김기춘, 강기욱, 남기춘, 윤석만, 곽상도…. 출세를 위해 눈 하나 깜짝 않고 ‘유서대필’을 조작한 당사자들은 지금도 박근혜 정권 언저리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 

강기훈씨는 ‘악의 평범성’이란 점잖은 표현을 썼다. 예루살렘 전범 재판은 “자기 직분을 다한다는 이유로 더 큰 악(惡)을 용인하는 것은 죄”라고 규정하고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들이 ‘악의 평범성’에 탐닉하는 사이, ‘악의 꽃’은 하늘에 닿도록 자라난다. 제 욕심을 채우려고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건 ‘악의 평범성’을 모두들 너무 쉽게 눈감아 주기 때문이다. 

황당한 조작에 대해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한 언론은 없었다. 우리 언론도 ‘악의 평범성’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의가 실종되고 거짓이 판치는 세상, 우리 모두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23년 시간,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더 아파한 동료들에게 이 판결이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강기훈씨는 비겁하게 침묵해 온 우리들을 오히려 위로한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수난의 세월을 뒤로 하고 ‘상처입은 치유자’로 우리 곁에 돌아온 강기훈씨, ‘공식적으로’ 그의 무죄가 확인됐지만 세상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23년 전만큼 어둡기만 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무거운 우리의 발걸음… 강기훈씨가 함께 걷고 있으니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판을 기다리던 어느 지리한 날, 강기훈씨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클래식 기타를 꺼내 들었다. 20대에 즐겨 연주한 곡이 손톱 끝에서 다시 울려나올 때, 그는 삶의 아름다움을 사무치게 느꼈을 것이다. 브람스의 깊은 우수를 사랑하던 강기훈은 요즘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에 마음이 끌린다고 한다. 고대하던 무죄 선고를 받은 날 저녁, 강기훈씨는 기타 하나만 달랑 들고 아무도 없는 시골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빛나는 기타 음악 한 곡을 강기훈씨에게 드리고 싶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 <발레>, 그의 대표작인 <터프시코레·무곡집>에 나오는 선율을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가 기타 독주로 편곡했다. 뮤즈 ‘춤의 환희’가 영감을 준 옛 음악, 400년 전인 1612년에 작곡했다니 내가 아는 기타 음악 중 가장 오래됐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먼 옛날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따뜻한 선율과 부드러운 화음, 기품 있는 표정이다. 그 기품에 짙은 고독이 서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강기훈씨의 고독은 소중하다. 그가 이 시대에 우리 가까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오롯이 혼자 이겨낸 그의 고독한 세월에 경의를 표한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1571~1621)는 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작곡가, 음악학자, 오르가니스트로 카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를 위해 많은 음악을 썼다. 터프시코레(Terpsichor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9명의 뮤즈 중 하나로, ‘춤의 환희’를 상징한다. 프레토리우스의 <터프시코레 무곡집> 전곡. 

http://youtu.be/01i4hrXZcVk (<발레>의 모태가 된 선율은 링크 13:08부터)




김연아의 마지막 탱고, 최상의 무대에 어울리는 최상의 음악

“아디오스, 김연아!”… 피겨 여왕의 고별무대 장식한 피아졸라 '아디오스 노니노'


http://www.youtube.com/watch?v=ccY5IcwWyV8
피아졸라, 1989년 영국 BBC 출연, 생방송 공연


김연아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게 팬들은 못내 아쉽다. 경기가 끝나고 일주일이 돼 가는데도 편파 판정 얘기가 사그러들 줄 모른다. 재심을 촉구하는 서명이 300만명에 육박했고, 익명의 심판이 양심선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결과 발표 후 30분 안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돼 있는데 관계자들은 뭘 하고 있었냐는 질타가 이어졌다. 

채점 규정을 잘 모르지만 내 눈에도 김연아가 나아 보였다. 소트니코바는 고난도 묘기를 나름 잘 소화해 냈지만 김연아의 예술적 표현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상 밖의 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화면에 비친 김연아 자신은 의연했다. 김연아라고 메달 순위에 무관심할 리 없었다. 아니, 마지막 무대를 금메달로 화려하게 매듭짓고 싶다는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을 것이다. 

김연아는 그냥 담담히 미소 짓고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이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순위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기량을 맘껏 발휘했으니 당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받는 모습 ⓒ 연합뉴스
 

언론은 늘 메달 순위가 관심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소감을 기자들이 물어볼 때마다 김연아는 그냥 “메달이구나…” 대답, 멋진 말을 기대했던 기자들을 머슥하게 만들었다. 언론은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를 이겨야 한다고 언제나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정작 김연아는 아사다와 경쟁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절대와 완벽을 향한 무한 노력 앞에 타인과의 경쟁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2분 50초의 쇼트 프로그램과 4분 10초의 프리 스케이팅, 그 최고의 7분을 위해 김연아는 13년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연습했다. 어린 김연아가 자기를 이기기 위해 쏟은 노력은 우리 평범한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김연아의 7분 드라마>에 나오는 한 구절. 

“훈련을 하다 보면 늘 한계가 온다. 근육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순간.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하자’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유혹에 문득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확신에 찬 김연아의 이어지는 말, 다시 들어도 우리를 숙연케 한다. 

“하지만 이 때 포기하면 안한 것과 다를 바 없다. 99도까지 열심히 올려놓아도 1도를 올리지 못한다면 물은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마지막 1도를 참아내는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야 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김연아가 마지막 프리 경기에서 사용한 음악은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의 <아디오스 노니노>, 최상의 무대에 어울리는 최상의 음악이었다. 

1959년 10월, ‘아르헨티나 탱고단’을 이끌고 푸에르토리코에서 공연하고 있던 피아졸라는 아버지 빈첸테의 부음을 듣고 뉴욕에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써 내려갔다. 5년 전 파리에서 작곡한 <아버지>(Nonino)의 선율을 살려 추억과 애도의 마음을 담았다. 이 곡을 ‘탱고의 레퀴엠’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녕, 아버지…” 아들 아스토르가 탱고를 하도록 이끌어 주었고, 8살 난 아들에게 19달러 짜리 반도네온을 사 주었고, ‘아르헨티나 사람’이 되라고 늘 가르쳐 주신 아버지…. 그의 죽음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이 거듭나는 전환점이 된다. 그 동안 키워 온 클래식과 재즈에 대한 사랑을 탱고와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 

<아디오스 노니노>는 20여 종류로 편곡되고 수천 번 연주되어 ‘보석 중의 보석’이란 명성을 얻었다. 여러 악기 편성으로 연주되지만,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5중주(반도네온, 바이올린, 베이스, 피아노, 전자 기타)를 가장 좋아했다. 이 곡에 대해 피아졸라는 말했다. “아마도 나는 천사들에 둘러싸였던 것 같다. 나는 최상의 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보다 나은 곡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 우승했으면 화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연아는 아름다웠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최선을 다하는 김연아는 자기 절대 기준으로 언제나 최고였다. 남들보다 앞서야 살아남고, 상대를 짓밟고 올라가야 성공했다고 칭찬하는 속물스런 세상에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는 신선한 빛을 던져주었다. 캐스터와 각 언론은 입을 모아 클로징을 날렸다. “아디오스, 김연아!”




‘재가 된 내 심장의 꽃’, 베토벤 <아델라이데> Op.46 - 들꽃처럼 가득 피어난 봄노래들


http://youtu.be/hU1CidBKZGQ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햇살에 / 부드럽게 둘러싸인 봄의 들판에서 / 나는 외로이 방황하네, 아델라이데! / 거울 같은 강물에서, 알프스의 눈 속에서 / 저물녘의 황금빛 구름에서 / 밤하늘에 뿌려진 별밭에서 / 네 모습이 빛나네, 아델라이데! / 오, 언젠가 내 무덤에서는 재가 된 내 심장의 꽃이 피어날 거야 / 보랏빛 꽃잎 하나하나에 / 네 이름이 또렷이 빛나네, 아델라이데!” (시 : 프리드리히 폰 마티손) 

봄은 역시 사랑의 계절이다. 봄을 노래한 대부분의 음악은 ‘사랑 타령’이다. 왜 그럴까? 사랑하는 마음과 노래하는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라 해 두자.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삶을 긍정했고 시민혁명의 힘찬 전진에 열광했던 베토벤, 그에게도 여리고 따뜻한 면이 있었다. 가곡 <아델라이데>는 젊은 베토벤의 마음을 담은 봄노래다.
 
아델라이데는 봄이 오면 알프스 산록에 피어나는 보랏빛의 키 작은 야생화로, 귀엽고 청초한 여자아이 이름으로 쓰인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이 꽃의 이미지가 어느 유럽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노랫말이 인생의 봄 한가운데 있던 스물다섯 살 베토벤을 매혹시켰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바로 <아델라이데>다. 

당시 베토벤은 빈에서 사자와 같은 호탕한 타법과 자유분방한 즉흥 연주로 이름을 날리는 피아니스트였고, 자신의 천재성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는 작곡가였다. “용기를 내자. 내 육체가 닳아 없어지더라도 나의 천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나도 스물다섯, 이 나이면 인간으로 완성되어 있어야 할 때다. 아무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이미 모든 것을 성취했어야 할 나이다.” 

대담하고 정열적인 베토벤은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마음 약한 남자였다. 그가 특정한 여성을 염두에 두고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불멸의 연인’으로 거론된 여성들 - <월광>소나타를 바친 줄리에타 기차르디, F#장조 소나타 <테레제를 위하여>를 바친 테레제 폰 브룬스빅,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바친 안토니 브렌타노 등 - 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는 사회생활에 서툰 만큼이나 연애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예술을 남기는 게 역사의 공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베토벤이야말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랑타령’은 모두 실패한 사랑이 낳은 자식들이니까. 

<아델라이데>는 첫사랑을 꿈꾸는 듯한 설렘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베토벤의 이러한 정서는 30여년 뒤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불멸의 연인’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델라이데>의 마지막 노랫말은 베토벤의 변함없는 마음이 아닐까? 

“오, 언젠가 내 무덤에서는 / 재가 된 내 심장의 꽃이 피어날 거야 / 보랏빛 꽃잎 하나하나에 / 네 이름이 또렷이 빛나네, 아델라이데!” 


베토벤의 가곡은 우리나라에선 슈베르트만큼 널리 불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발라드의 황제‘로 불리는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인용된 <그대를 사랑해>는 아주 귀에 익은 선율이다. http://youtu.be/rnNyhx0oj3o (테너 페터 슈라이어)

“나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네 / 아침이나 저녁이나 / 우리가 걱정을 나누지 않은 날은 없었네 (중략) 하느님의 크신 은총, 그대에게 내리시라 / 그대 내 삶의 기쁨이여 / 하느님이 그대를 보호하고 내 곁에 있게 하기를 / 우리가 함께 머물게 하기를!”

대부분의 노래가 사랑타령인 건 대중가요나 클래식이나 별 차이가 없다. 운명의 뒷덜미를 붙잡고 투쟁한 베토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60여곡에 이르는 베토벤의 가곡들은 <죽은 푸들을 위한 애가> 등 몇 곡을 제외하면 모두 사랑노래다. 사랑의 온도와 색깔은 나이와 함께 변해갔지만 베토벤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이 40살이 넘은 베토벤은 가곡 <연인에게>를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바쳤다. 펄펄 끓는 정열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 http://youtu.be/3xgXdM3HK9k (테너 페터 슈라이어)

“그대 고요한 눈빛, 사랑스런 얼굴에 눈물이 흐르네 / 그 눈물이 땅을 적시기 전에 내가 말려 드려야지” 

봄을 노래한 아름다운 음악이 봄의 들꽃처럼 여기저기 피어난다. 모차르트 <봄을 기다림>(Sehensucht nach dem Frühling), 슈베르트 <봄의 신앙>(Frühlingsglaube), 슈만 <아름다운 오월에>(In der Wunderschönen Monat Mai) 등 예쁜 노래들이 들판 가득 피어난다. 기악곡으로는 하이든의 현악사중주곡 <종달새>, 멘델스존 무언가 중 <봄노래>,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봄의 소리>가 떠오른다. 


여러 작곡가의 <사계> 중 ‘봄’을 빼놓을 수 없다. 비발디 협주곡 <사계>는 새들이 날고 시냇물이 흐르는 따스한 풍경이고, 하이든 오라토리오 <사계>는 밭일 나가는 농부의 정겹고 활기찬 모습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집 <사계>는 달마다 짧은 시(詩)가 붙어 있는데, 4월의 표제는 ‘눈방울’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겨울이 길어서 그런지 짧은 봄 햇살을 더욱 애틋하게 느꼈나보다. 

“푸르고 순결한 눈방울꽃이 피어나고, 그 옆에는 마지막 눈이 내리네. 지나간 슬픔이 남긴 마지막 눈물, 새로운 행복의 첫번째 꿈….” (마이코프)




쇼팽의 심장은 조국과 첫사랑에 대한 사랑이다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유럽으로 확산됐고, 정치적 혁명이 끊임없이 요동쳤다. 쇼팽은 짧은 생애의 전반부를 조국에서, 후반부를 객지에서 살았다.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난 1830년, 러시아의 압제에 반대하는 폴란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한 이듬해인 1832년, <레 미제라블>을 통해 잘 알려진 6월 학생봉기가 일어났다. 

유럽은 뜨거운 혁명의 열정으로 붉었고, 민중이 흘린 피 때문에 더욱 붉었다. 쇼팽이 죽기 전해인 1848년, 유럽 전역은 다시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쇼팽과 상드의 친구 드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바로 이 시대를 묘사한 것이다. 쇼팽과 조르쥬 상드의 동거는 이미 한해 전에 끝났다. 상드는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글을 썼지만 쇼팽은 폐결핵이 악화되어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제인 스털링의 손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영국을 떠돌고 있었다. 


 

▲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바르샤바 봉기. 러시아군은 1831년 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상드는 “쇼팽이 사랑한 여인은 오직 그의 어머니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쇼팽이 20살 이후 후반생 내내 그리워 한 것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조국 폴란드였다. 1830년 쇼팽이 고향을 떠날 때 친구들은 은잔에 폴란드의 흙을 담아 그에게 선물했다. 쇼팽은 그 흙을 평생 간직했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음악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결핵이 절망적으로 악화됐을 때 쇼팽은 누나 루드비카에게 썼다. “이번에 아픈 게 나으면 정말 폴란드에 돌아가고 싶어.” 


이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쇼팽은 184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파리의 페르 라섀즈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그의 유언대로 조국 폴란드로 돌아왔다. 누나 루드비카가 가져온 쇼팽의 심장은 지금도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돼 있다. 예르치 안차크 감독의 영화 <쇼팽, 사랑의 열망>(2002)은 러시아의 압제에 신음하는 폴란드를 그리워하는 쇼팽의 마음을 그렸다. 이 영화의 주제곡은 ‘가장 단순해서 가장 아름다운’ 왈츠 A단조였다. 

http://youtu.be/mZJt-oWDD7U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1830년 11월, 쇼팽이 빈에 도착한지 1주일만에 바르샤바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쇼팽은 조국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당시 빈에서 친구 마친스키에게 쓴 편지. “나는 어쩌면 좋을까. 부모님이 내 결정에 맡긴다고 하셨는데, 자네의 의견과 지시를 따르고 싶네. 파리로 갈 것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곳의 지인들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라고 하지만…. 자살을 할까. 아, 이젠 자네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아버지와 친구들은 이를 만류했다. 쇼팽의 가냘픈 몸으로는 견디기 어렵고, 총칼이 아니라 예술로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쇼팽은 안타까웠다. 봉기의 대열 한 귀퉁이에서 북이라도 쳐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때의 쇼팽의 분노와 열정, 안타까운 심정은 <혁명> 에튀드에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http://youtu.be/Gi5VTBdKbFM (피아노 : 발렌티나 리시차)


쇼팽이 조국을 떠나기 어려웠던 이유는 또 있었다.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가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던 것. 콘스탄차는 뛰어난 소프라노로, 바르샤바 음악원의 동기였다. 쇼팽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쇼팽은 콘스탄차가 혁명의 와중에 어떤 일을 겪게될 지 몹시 걱정했다. “콘스탄차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인들이 욕보이고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납치해 갔을지도 모른다. 아아, 나의 생명이여!” (슈투트가르트 일기) 쇼팽은 친구 마친스키에게 썼다. “어쩌면 좋을지 제발 말해 줘.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강한 힘을 줬던 사람(콘스탄차)의 의견을 들어서 적어 보내 줘. 그의 말에 따라 내 태도를 결정하겠어.”

쇼팽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운명을 이미 예감했을까? 아직 바르샤바에 있을 때 친구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 “난 바르샤바를 영원히 떠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못 견디겠어.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 자기가 태어난 곳이 아닌 이국에서 죽는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이 편지에도 콘스탄차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랑을 남기고 떠날 거야. 빈에서는 영원한 한숨과 고독을 맛보게 될 거야.” (1830. 9. 4. 친구 티투스에게)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기 전 세 차례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 중 마지막 연주회에서 피아노협주곡 1번 E단조를 직접 연주했다. 이 곡, 특히 맑은 동경과 그리움으로 가득찬 2악장 로만체는 콘스탄차를 생각하며 쓴 곡이었다. 젊은 시절의 쇼팽, 그가 심장을 바쳐서 만든 곡이다. “수많은 즐거운 추억들을 조용하고 낭만적인, 반쯤 우울한 마음으로 떠올리는 곡”으로, “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스며드는 밤처럼, 약음기를 단 바이올린이 반주하도록 작곡했어.” 
http://youtu.be/afVd7qrxoO4 (피아노 :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 쇼팽이 죽은 해인 1849년 촬영한 유일한 사진. ▲ 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 (1810~1889) 

▲ ‘쇼팽의 다른 이름’이라 불리는 루빈슈타인이 녹음한 쇼팽 전집

이 고별 콘서트의 2부에서는 콘스탄차도 출연해서 로시니의 <돈나 델 라고>의 카바티나를 불렀다. 이어서 쇼팽은 <폴란드 민요에 의한 환상곡>을 연주했다. 폴란드와 작별하는 마지막 연주를 폴란드 민요로 장식한 것이다. 쇼팽은 이 연주회에서 단 한명의 청중, 콘스탄차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콘스탄차가 이렇게 훌륭하게 노래하는 걸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다”고 썼다. 연주가 끝난 뒤 쇼팽은 콘스탄차에게 반지를 주었고, 콘스탄차는 쇼팽에게 리본을 주었다. 이 리본은 훗날 쇼팽이 친구 티투스의 편지를 묶어서 보내는 데 썼다고 한다. 이 마지막 만남에서 쇼팽은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어떤 약속의 말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쇼팽은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콘스탄차를 그리워했다. “우린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재회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한없이 괴로워.” 그러나 1832년, 누이동생 이사벨라가 콘스탄차의 결혼 소식을 전해 주었다. 쇼팽은 크게 실망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이렇게 무감각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아름다운 저택이 그렇게 큰 매력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젠 알았다.” 쇼팽은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을까? 자기 열정과 이상을 상대에게 투사하기 십상인 첫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현실 속의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데에 미숙한 게 모든 첫사랑의 공통점이고, 쇼팽도 예외가 아니었던 걸까?

콘스탄차는 큰 부자인 요제프 그라보스키와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35살에 실명한 뒤 79살까지 살았다. 쇼팽이 죽고 난 뒤 친구 한 명이 눈 먼 콘스탄차에게 쇼팽의 전기를 읽어주었다. 쇼팽이 자기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콘스탄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쇼팽은 나의 정직한 요제프만큼 좋은 남편이 되지는 못했을 거에요.” 

1830년, 조국과 사랑을 뒤로 하고 슈투트가르트에 머물던 쇼팽은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공포와 절망을 써내려갔다.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일기’의 한 대목. “신이여,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은 아직도 러시아인들의 범죄가 싫증나지 않으십니까? 러시아인들이 당신의 딸들을 뼈까지 할퀴는 걸 보려고 아이를 낳으셨습니까? 우리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시려고 우리를 낳으셨습니까?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건 올바른 일이다. 죽음의 세계에 머무는 게 내겐 왜 허락되지 않는가?”

칠흑처럼 검은 절망이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쇼팽은 파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는 다시 친구 마친스키에게 썼다.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같은 거야. 그녀가 나를 잊었다면 난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외롭지 않게 살고 있다고 전해 줘. 그녀가 친절하게 내 안부를 묻거든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줘. 아니,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너무 외롭고 불행하다고 전해 줘. 아니, 내가 죽고 난 뒤 내 뼛가루는 그녀 발밑에 뿌려져야 한다고 전해 줘.”


쇼팽의 이 고백을 콘스탄차가 알았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남아 있는 건 음악 뿐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그의 사랑, 특히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에게 바친 그의 심장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kk7GyPtDfIo&list=PL8DFA944D88105749&feature=share 

(피아노 :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숨은 주인공은? - '비창' 교향곡과 폰 메크 부인


http://youtu.be/MNscliD-cHE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 마린스키 관현악단)


“작년 12월, 나는 표제가 있는 교향곡을 구상했어. 하지만 그 표제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야 해. 마음대로 추측하라고 해! 주제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가득 차 있어. 나는 영혼으로 작곡했고, 작곡 도중에 자꾸 눈물을 흘려야 했어. 나는 엄청나게 집중해서 작곡했어. 첫 악장은 나흘 만에 완성했고, 나머지 세 악장도 모두 머릿속에 들어 있어.” - 차이크프스키가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1893년 2월 10일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 걸작인 <비창> 교향곡을 조카 다비도프에게 헌정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는 53살 생애 마지막 시간, 젊은 조카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다비도프는 이러한 삼촌의 태도를 다소 곤혹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교향곡에 마지막 손질을 가하면서 차이코프스키는 조카에게 또 편지를 썼다. 

“이 교향곡은 내 모든 작품들 가운데 가장 좋은 곡, 최소한 가장 진지한 곡이 분명해. 이 작품처럼 내가 사랑한 곡은 지금까지 없었어.” 

그 해 10월 16일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다음날 동생 모데스트가 ‘비창’(Pathetique)이란 제목을 제안했고, 차이코프스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후 8일이 지난 10월 25일, 차이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동생이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서 콜레라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살했을 거라는 추측이 오랜 세월 이어졌다. 70년대 소련 당국은 그의 사인을 재조사했는데, 그의 동성애 취향을 수치스럽게 여긴 법대 동료들이 ‘명예 재판’을 열어 자살을 강요했다고 결론내렸다. 정확한 사인은 아무도 모르지만, 이 곡을 쓸 당시 차이코프스키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건 분명하다. 조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했던 걸까?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 자기의 모든 삶을 쏟아 넣었고, 이 곡을 완성한 뒤 죽음과 홀로 마주섰다. 

  
▲ 차이코프스키(좌)와 폰 메크 부인(우)


차이코프스키의 좌절에는 다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50살 무렵부터 노화가 급속히 진행됐고 53살로 세상을 떠날 무렵엔 완전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음악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과 결별한 게 이 급속한 쇠락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까? 


1876년,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싶다며, “절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이상한 조건을 걸었다.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해마다 거금 6천 루블을 보내주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두 번 마주쳤는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지나쳤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의 편지는 처음에는 사무적인 투였지만,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났다. “당신에 대해 품고 있는 저의 사랑은 운명과 같아서 제 의지는 그 사랑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음악을 들을 때면 당신에게 완전히 굴복합니다. 당신은 제겐 신 같은 존재예요.” 차이코프스키도 그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고, 우정은 10년 넘게 지속된다. “제 영혼이 힘닿는 데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제 인생으로 불러온 운명을 매 순간 축복하고 있어요.”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을 아주 좋아해서 ‘우리들의 교향곡’이라 불렀다. 차이코프스키가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 실의에 빠질 때면 언제나 격려해서 힘을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폰 메크 부인은 1890년 연금을 갑자기 중단했고, 편지 교환이 멈추면서 우정마저 끝나 버렸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천재 작곡가는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었다.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폰 메크 부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분노한 것이다. 


“진짜, 진짜, 진짜 기분이 나쁘네요. 그가 후하게 기부해 주었을 때 저는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부끄럽습니다. 이 모든 게 알고 보니 멍청하고 추잡한 짓이었네요.”


폰 메크 부인은 막강한 재력으로 이 천재 음악가를 지배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사랑한 건 사실일 것이다. 그의 후원으로 차이코프스키가 편안하게 작곡에 몰두한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기억보다 상처의 아픔이 더 크고 깊었다. 음악에 대한 사랑을 공유했지만 둘 사이에 돈을 매개로 한 권력 관계가 끼어들었고, 그것이 두 사람의 우정을 불가피한 파탄으로 몰고 간 게 아니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죽기 직전에도 폰 메크의 이름을 부르며 분개하고 책망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적 ‘유리로 만든 아이’라 불릴 정도로 섬세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죽을 때까지 별로 바뀌지 않았다. 폰 메크 부인과의 우정이 끝난 1890년부터 차이코프스키는 급속히 쇠약해졌고, 1893년 가을 <비창>교향곡을 지휘한 뒤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폰 메크 부인도 두 달 뒤인 1894년 1월 사망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뒤를 따라 간 걸까? 모를 일이다. <비창> 교향곡은 폰 메크 부인과 직접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그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차이코프스키의 영혼에 남긴 상처가 배어 있는 게 분명하다. 

1악장, 아다지오(느리게)의 도입부는 깊은 심연에서 울려나온다. 알레그로 논 트로포(빠르게, 지나치지 않게)의 첫 주제는 불안한 조성으로 변화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고요히 노래하는 제2주제는 위안을 주지만 슬픔과 동경을 머금고 있다. 전개부는 쓰디쓴 갈등의 연속으로, 여러 차례 히스테리를 일으키다가 다시 클라이맥스에 이른 뒤 체념과 이별의 느낌으로 마무리한다. 

2악장, 알레그로 콘 그라치아(빠르고 우아하게)는 5/4박자로, ‘다리가 세 개 달린 왈츠’라 부르기도 한다. 가볍고 부드러운 악장이지만 중간 부분과 끝부분은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빠르고 아주 생기있게)는 이 교향곡에서 가장 찬란한 부분이다. 현과 관이 빠르게 속삭이면서 시작, 의기양양한 행진곡으로 발전한다. 상승하고 하강하는 음계가 격렬하게 교차하면서 들불 번지듯 펼쳐진다. 실제 연주회장에서 이 신나는 3악장이 끝나면 박수가 터져 나오곤 한다. ‘비창’이란 제목을 무색케 하는 해프닝인데, 극도로 비통한 4악장이 시작되기 전에 분위기를 다잡으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4악장 피날레는 음악 사상 가장 우울한 곡일 것이다. 아다지오 라멘토소(아주 느리게, 비탄에 잠겨서)는 교향곡 전체의 성공적인 종합이 아니라 땅이 꺼지는 탄식과 한숨일 뿐이다. 고통에 가득한 현의 울음으로 시작한다. 1악장의 주제를 뒤집어서 단조로 바꿔놓은 모양새다. 제2주제는 화해와 자학 사이에서 방황한다. 첫 주제가 다시 나타나서 비극적 분위기를 더하고, 공(gong) 소리가 전율을 일으킨다. 음악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30년 우정의 결실, 브람스 이중협주곡 A단조

요하네스 브람스와 요젭 요아힘의 우정이 만든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http://youtu.be/CjxZxtHPxBs 
(바이올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첼로 피에르 푸르니에, 알체오 갈리에라 지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내 계획에 대해 말해 보겠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이네. 요아힘과 멀어졌기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네. 다행히 우리는 예술적인 면에 관한 한 변함없이 친구로 남아 있으니까…. 그와 다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를 기대해도 좋을까?” 

1887년 8월, 브람스는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이렇게 썼다. 브람스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와 요젭 요아힘(1831~1907)의 30년 우정이 낳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했을 뿐 아니라, 브람스가 피아노 협주곡 D단조를 초연할 때 지휘를 맡기도 했다. 1853년 브람스가 슈만을 만나도록 등을 떠민 사람도 요아힘이었다. 요아힘은 작곡가로도 활약했는데, 1857년 리스트, 바그너가 이끄는 새로운 음악 운동과 결별하고 슈만, 브람스와 가까워졌다. 1860년, 브람스와 요아힘은 ‘신독일악파’에 대항하는 음악 선언문을 함께 쓰기도 했다.

  
▲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1831~1907·좌)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우)


그런데 1880년, 요아힘이 이혼 수속을 밟고 있을 때 브람스는 부인 아말리에를 편들었고 그 일로 두 사람의 우정은 금이 가고 말았다. 요아힘은 브람스의 음악을 계속 연주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게 됐다. 브람스는 소중한 우정에 금이 간 데 마음이 쓰였고, 이 곡을 통해 우정을 회복하고자 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쓰겠다는 구상을 요아힘에게 1887년 7월 19일 편지로 전했다. “당신께 음악 뉴스 하나를 전하고 싶습니다. 흥미를 가져 주시면 좋겠지만….” 두 사람이 서먹해지고 7년이 흐른 뒤였다. 

요아힘은 오랜 친구이자 존경하는 음악 동료인 브람스의 제안에 따뜻한 마음과 기대가 담긴 편지로 답했다. 7월 24일, 브람스는 요아힘에게 이 곡의 구상을 정식으로 밝혔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작품을 쓰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군요. 여기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요아힘은 바이올린 파트에 대해 기꺼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심한 산고를 겪었다.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답답한 마음을 피력했다. “이 작품은 저보다 바이올린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써야 합니다. 피아노처럼 제가 확실히 아는 악기를 위해 쓰는 것과 조금밖에 모르는 바이올린을 위해 쓰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클라라 슈만은 격려의 글로 답했다. “그렇게 훌륭한 교향곡,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를 쓰신 분이니까 당연히 바이올린과 첼로라는 악기의 비밀을 잘 아시잖아요.” 

우여곡절 끝에 1887년 8월에 완성된 이 곡은 10월 18일 쾰른에서 초연됐다. 요아힘에게 바친 헌정의 말은 브람스의 소심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 곡이 그를 위해 쓰여 진 바로 그 사람에게.” 

브람스가 지휘했고 바이올린은 요아힘, 첼로는 하우스만이 맡았다. 요아힘 4중주단의 첼로 주자였던 하우스만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Op.99을 초연한 사람이다. 브람스는 하우스만에게 첼로협주곡 써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이 협주곡으로 약속을 반쯤 지킨 셈이 됐다. 

이 작품은 브람스가 쓴 4곡의 협주곡 중 마지막 작품이며,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 중에서도 마지막 곡이다. 1885년 말에 쓴 교향곡 E단조, 1886년 여름에 쓴 첼로 소나타 F장조, 바이올린소나타 A장조, 피아노 트리오 C단조에 이어서 작곡했다. 바이올린과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곡이니, 브람스가 말년에 사용했던 악기 편성을 모두 종합한 곡이라 할 수 있다.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Bb장조에서 시도했던 4악장의 ‘교향적 협주곡’의 개념을 버리고 바로크 시대의 콘체르토 그로소 형식으로 돌아갔다. 이 곡은 3악장의 전형적인 고전 협주곡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클라라 슈만은 이 곡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초연 후 클라라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함께 놓는 게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연주자가 동시에 충분히 제 기량을 선보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미래에는 별로 연주되지 않을 거에요. 이 작품은 매우 재미있고 독창적이긴 하지만 브람스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신선하고 따뜻한 느낌이 없어요.” 

클라라 슈만의 평가가 틀렸음을 오늘 우리는 알고 있다. 브람스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54살 때의 작품으로, 매혹적인 선율과 화음, 풍부하고 유려한 음색으로 가득찬 곡이다. 고전주의자 브람스의 원숙한 내면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악장 알레그로. 관현악의 투티(모든 악기가 함께 연주)에 이어 첼로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 존재를 알린다. 두 솔로 악기의 대화, 갈등, 조화의 과정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관현악의 불협화음이 해소되어 조화를 이루는 멋진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멀티 스토핑(한 번에 여러 현을 연주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풍부한 음색을 들려준다. 

2악장 안단테 (16:10부터), 호른과 목관이 네 개의 기본음(A-D-E-A)을 연주하며 시작한다. 두 악기가 유니슨으로 연주하는 부드럽고 근사한 멜로디는 초로에 접어든 두 예술가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듯하다. 삶의 무게와 우정의 깊이가 느껴진다. 

3악장 비바체 논 트로포 (생기있게, 너무 지나치지 않게. 24:25부터). 스케르초 풍의 주제는 가곡집 ‘치고이너리더’ Op.103에 나오는 집시 멜로디와 비슷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서로 쫓고 쫓기며 어우러지다가 찬란한 대단원에 이른다. 

MBC에 계속 있었다면 올해 30년, 무수한 추억이 있다. 30년 알고 지낸 동료들 중 멀어진 이들이 있다. 방송이 두 쪽으로 갈라질 때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서로 다른 쪽을 택한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라는 더 큰 배를 타고 있으니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긴 오는 걸까? 부질없는 바람인 것 같다. 브람스와 요아힘, 두 사람의 30년 우정을 다시 이어 준 음악 사랑처럼 품위 있는 가치는 눈을 비비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요즘이다. 



“총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자” -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http://youtu.be/JDyaqpsPgTE

4월, 봄꽃이 만발했다. 통일의 꿈을 안고 죽어 간 4·3 혼령들, 꿈 꿀 여유도 없이 생존을 위해 산간을 헤매다 스러져간 더 많은 민초들이 떠오른다. 결국 죽음이 기다릴 뿐인 생명을 다시 싹틔우는 4월은 그래서 잔인한 걸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마비된 뿌리를 봄비로 흔들어 깨우네. 
        - T. S. 엘리엇 <황무지>에서


▲ 강요배 화백의 <천명>


4월은 시인 신동엽(1930~1969)의 달이기도 하다. 30살 되던 해 4·19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모든 시심(詩心)을 다 바쳐 민주주의를 예찬했다. 강퍅한 분단 세상을 오래 살기에 그는 너무 순결했던 걸까? 39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쓴 시는 지금도 여전히 젊고 싱싱한 목소리로 통일을 외친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시인 신동엽은 <아사녀>에서 4.19혁명을 노래했다.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 진달래. 개나리. 복사.” 


생명을 싹틔우고 ‘모오든 쇠붙이’를 녹여버리는 4월을 꿈꾼 게 어디 신동엽 뿐이랴. 모차르트(1756~1791)는 35살 생애의 마지막 해, “형제들의 피를 쏟게 한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고 힘주어 노래했다. 자유, 평등, 우애를 기치로 내건 프리메이슨의 평화 사상을 선포한 가사였다. 당대의 계몽사상가 치겐하겐(1753~1806)이 시를 썼다. 

무한한 우주의 창조자를 찬양하는 그대 / 여호와라 하든, 브라만이라 하든 / 
모두의 주인이신 그 분의 트럼펫 소리, 그 말씀을 들어라! / 
이 영원한 음악은 지구와 달과 태양을 가로질러 흐른다! / 들어라, 사람들아, 함께 들어라! 


▲ 모차르트가 열성적으로 참여한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우애를 예찬했다.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모차르트.


1790년, 프랑크푸르트 장터에서 프랑스 혁명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때가 왔다, 자유를 쟁취하자”, “압제에 신음해 온 민중이여, 노예의 멍에를 던지고 일어나라”는 구호가 넘쳐흘렀다. ‘천부인권’이 새겨진 손수건, ‘자유냐 죽음이냐’ 외치는 유인물이 난무했다. 모차르트는 이 장터를 방문, 프리츠 하인리히 치겐하겐을 만났다. 그는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노예 착취와 여성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모차르트는 치겐하겐의 사상에 공감했고, 이듬해 가을 그의 시에 곡조를 붙였다. 이 노래의 후반부는 진실된 우정과 형제애를 찬양한 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한다. 

기만의 굴레을 끊어라, 편견의 베일을 찢어라 / 사람들을 패거리 짓는 헛된 옷을 벗어라 / 
인간들의 피를 쏟게 한 그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 / 
형제들의 가슴에 치명적인 납덩이를 퍼부었던 그 검은 화약으로 압제의 바위를 깨뜨리자! 


루소보다 더 시대를 앞선 사람으로 평가되는 교육자 치겐하겐의 사상은 오늘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 아름다운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올바른 관계 맺고 조화롭게 산다면 우리는 모두 세 배나 행복해 질 것이다. 힘없는 동료 인간을 팔고 사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탐욕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남의 나라 땅을 탐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헛된 야심이 자연스런 우정의 끈을 파괴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중략)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잘 배운 우리 모두 고귀하고 세련되게 자기 성취를 이룰 것이다” 
                                                         - G. 슈타이너 <프란츠 하인리히 치겐하겐, 그의 관계학>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할 때 잠깐 시간을 내서 이 노래를 만들었고, 1791년 10월 열린 프리메이슨 행사에서 초연했다. 피아노 반주의 독창곡으로, 테너나 소프라노가 부른다. 첫 피아노 반주는 피아노협주곡 C장조 K.503의 첫 주제와 비슷한 프리메이슨의 팡파레다. 이어지는 안단테는 휴머니스트 모차르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열정적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알레그로에 이어서 차분한 안단테로 돌아온다. “오직 현명하게, 힘차게 서서 모두 형제가 되어라!” 끝부분 알레그로는 악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승리와 환희를 노래한다. 

대지에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4월, 미워하며 싸우기보다 함께 노래하며 밭을 갈러 나갈 때가 아닌가.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는 모차르트의 호소에 다함께 마음을 열어 보면 좋지 않겠는가. 



모차르트, 지구의 평화를 노래하다

오페라 <마술피리> 중 ‘ 이 성스런 전당에는’


http://youtu.be/2ovce8a-Pb0

다큐멘터리 <모차르트 쿠겔>(2006, 와인슈타인 감독)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주비행사 한명은 <마술피리>의 악보와 달콤한 모차르트 초콜렛을 갖고 우주 공간으로 나간다. 멀리서 바라본 지구는 경이로웠다. 이 아름다운 별 위에서 사람들이 국익과 이념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푸르런 지구의 위용과 함께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아가 펼쳐진다.


“이 성스런 전당에는 복수라는 게 없다 
곤궁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건 인간의 의무 
우리는 친구의 손을 잡고 기꺼이 더 좋은 나라로 간다
이 성스런 전당에선 모두 서로 사랑한다
배신은 없고 원수는 용서받는다 
이 가르침에 기뻐하지 않으면 사람의 자격이 없다” 


<마술피리>에서 어둠을 지배하는 밤의 여왕과 빛의 사제 자라스트로는 철천지 원수다.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에게 날이 시퍼런 칼을 주며 자라스트로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고뇌에 빠진 파미나 앞에 자라스트로가 나타나, 장중한 베이스 목소리로 화해와 용서를 노래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지구라는 성스런 전당에 증오와 분노 대신 우정과 사랑이 넘치기를 바라는 염원이 넘쳐난다. 음악 다큐에서 본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파라과이의 친구 라파엘과 함께 보는 <마술피리>

낯선 문명의 첫 만남,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남미 6개국의 방송인 9명이 지난주부터 한국PD교육원에서 초청연수를 받고 있다. 한류의 산실을 직접 체험하고 한국의 역사 · 문화 · 산업 현장을 둘러보는 게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다. 10일엔 ‘남미 방송인들과 함께 하는 미디어 데이’에서 자기 나라의 최근 방송을 소개하고 한국 방송인들과 토론하는 시간도 가졌다. 

중남미 근대사는 스페인 정복자들과 원주민들의 첫 만남에서 시작됐다. 1492년 콜럼버스의 상륙으로 시작된 두 문명의 만남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진취성과 용감성을 찬양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인류 보편의 상식으로 볼 때 천인공노할 살육과 파괴와 약탈의 역사였다. 

친절한 원주민들은 흰 얼굴의 이방인들에게 먹을 것은 물론,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지 다 주려 했다. 그러나 황금에 굶주린 스페인 정복자들은 안데스 산맥의 눈이 모두 황금으로 변해도 만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황금이 부족하면 원주민들의 팔을 잘라버리고, 불질러 죽이고, 강간을 일삼았다. 그들은 아즈텍과 잉카의 찬란한 문명을 역사에서 말살해 버렸다. 

  
▲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백인과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 피를 섞으며 살아 왔다. 오늘날 남미 사람들은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힘을 합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남미 방송인들은 한국 PD들과의 우정과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남미 근대사의 첫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 완전히 다른 두 문명이 부딪쳐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졌는데,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번에 온 파라과이의 라파엘 군셋(Rafael Gunsett)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그는 파라과이가 자랑하는 작곡가 아구스틴 바리오스를 소개했고, 자기 작품 <가난한 자를 위한 병원> 하이라이트 동영상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을 배경음악으로 썼다. 낯선 존재와의 첫 만남,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어떻게 묘사됐을까? 클래식을 사랑하는 라파엘과 함께 들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http://youtu.be/n4Uq3wvXoOI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1막 중 파파게노와 모노스타토스가 마주치는 장면)


‘새잡이’ 파파게노와 ‘무어인’ 모노스타토스가 처음 마주치는 장면이다. 파미나 공주를 감시하고 있는 모노스타토스는 생김새가 험악하다. 파미나 공주를 구하러 온 파파게노는 새처럼 생겼다. 파파게노와 모노스타토스는 얼굴도 다르고, 살아온 문화도 다르다. 갑자기 마주친 두 사람은 상대방의 ‘괴상한’ 얼굴에 충격을 받는다. 두 사람은 덜덜 떨며 서로 “귀신이다!” 외친다. 


오페라에서 코믹하게 처리된 장면이지만, 실제 인간 사이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16세기 스페인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야 침략과 약탈을 정당화하고, 양심의 가책을 덜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세풀베다 신부는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인 원주민을 정복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주권 국가를 ‘악의 축’이라 규정하며 침략 전쟁을 일으킨 21세기의 조지 부시까지 이어졌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처음엔 낯선 백인들이 하늘에서 온 신(神)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인간임을 곧 깨달았다. 백인들의 끝없는 탐욕에 놀란 일부 원주민들은 이들이 ‘악마’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유럽 제국주의가 맨얼굴을 드러낸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공감되는 생각이다. 오늘날도 미 제국주의를 악마로 보는 사람들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

낯선 문화가 처음 마주칠 때 한쪽이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냥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경계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의를 갖고 친절하게 대할 때 이를 무시하고 짓밟는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마술피리>로 돌아가자. ‘새잡이’ 파파게노와 주인공 타미노 왕자가 만나는 장면이다. <마술피리> 막이 오르면 왕자는 괴물에게 쫓기고 있다. 세 시녀가 나타나 괴물을 죽이고 왕자를 구한다. 왕자가 기절해서 누워 있는데, 파파게노가 나타나 아리아 ‘나는 새잡이’를 신나게 부른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1막 중 파파게노 아리아 <나는 새잡이>)


 

▲ 모노스타토스와 파파게노. 상대방의 괴상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덜덜 떨면서 “귀신이다!” 외친다.

▲ 타미노 왕자와 파파게노.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두 사람을 합친 게 곧 모차르트라고 해석했다.


타미노 왕자가 깨어나 파파게노에게 묻는다. “즐거운 친구, 당신은 누구요?” 파파게노의 단순명쾌한 대답. “내가 누구냐구요?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지요.”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서로 인간임을 흔쾌히 인정하자 곧 우정이 싹튼다. <마술피리>는 역사와 문화가 달라도 서로 친절과 선의로 대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말해 준다. <마술피리>에서 타미노 왕자는 사랑과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다. 파파게노는 먹고 마실 게 있고 사랑을 나눌 짝이 있으면 아무 고민도 없는 ‘자연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파미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위험한 여행에서 두 사람을 지켜주는 게 바로 마술피리, 곧 음악의 힘이다. 

지구 반대편 남미에서 온 친구와 <마술피리>를 함께 듣고 공감하는 건, 똑같은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한국 방송인과 남미 방송인의 새로운 우정에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 하기를 기대해 본다.



세월호, 침묵만도 못한 음악


지난 주말, 많은 시민단체들이 예정된 행사를 취소했다고 한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무슨 행사를 할 수 있었을까.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금요일로 예정됐던 음악치유 프로그램을 하지 않았다. ‘음악을 통해 모두 행복해지고 세상과 소통하는’ 음악치유 프로그램은 5·18 생존자와 가족이 마음속 상처를 노래에 실어 훨훨 날리는 자리다.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한 신문 칼럼에 썼다. 

“세월호에서 어린 학생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노래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 5·18 유족들은, 가슴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져서 말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음악치유 노래 대신, 어린 생명들이 힘든 시간을 잘 버티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고,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의 소중한 생명이 다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얘기 나눌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용주 센터장은 5·18 때 실종된 호영이의 엄마 이근례씨(77) 얘기를 전했다. 그는 TV를 보며 내내 우셨다고 했다. 이 생떼 같은 학생들을 어쩔거나, 그 차가운 바닷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시신이 바다에 떠내려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19살 꽃다운 호영이는 80년 5월 26일 동생을 찾으러 집을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근례씨는 TV에 나오는 ‘실종자’ 자막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진도에서 애타게 자식을 기다리는 세월호의 ‘실종자’ 엄마가 되어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다. 

강 센터장이 볼 때 5·18 행불자 호영이와 세월호 참사의 어린 희생자들은 똑같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긴 커녕, 행복을 앗아가고 생명마저 빼앗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학생들이 바닷속에 가라앉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는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는 정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시스템 부재, 매뉴얼 부재로 이런 참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 센터장의 지적은 이 분노와 슬픔 속에서 우리가 입을 열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성적 발언이다.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이 정도 상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두 변명과 남 탓하기에 바쁘다. 현장에 얼굴을 비칠까 저울질하던 정치인들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심각하자 지방선거 유보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지난 정권의 규제완화가 이 비극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돈밖에 모른다는 점은 이 정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 동안 보여준 언행으로 볼 때 기껏해야 “재발하면 엄단하겠다”는 전시성 엄포가 전부일 것 같다. 




말이란 건 부질없다. 이 비극 앞에 어떤 말을 보탤 것인가. 대다수의 희생자들이 어린 학생이기에 더욱 참담하다. 캄캄한 절망이 사방을 옥죄어 올 때 어떤 학생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사랑을 기억하기에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걸까. 한 지인은, TV를 보던 아들이 느닷없이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기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린 학생들이 볼 때 이번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기도 언제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세상, 아이들은 얼마나 춥고 불안할까.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위로의 음악조차 부질없다. 필시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자는 음악인데,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끝없이 비극을 재생산하는 이 세상에서 음악이 뭐를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음악을 듣는다. 한없는 슬픔을 노래할 때도 음악은 사랑을 담고 있어서 그나마 들어 줄 만 한 걸까. 

모차르트의 음악 한 곡을 틀어놓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 1785년,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한 음악이다. 검은색의 C단조, 깊은 추도의 묵념으로 시작한다. 꽃상여가 천천히 움직일 때 아름다운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유가족도 조문객도 사람인지라 오열하지 않을 수 없다. 한없이 맑고 파란 하늘, 티없는 영혼이 슬프게 미소 짓는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일 때 음악도 조용히 사라져 간다. 

아, 이 무슨 부적절한 해설이란 말인가. 침묵만도 못한 음악 아닌가.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 많고, 희생자들을 떠나보낼 수 있는 때가 아니다. 따라서 이 곡은 장례음악이 아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한다는 희미한 믿음뿐이다. 어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 속에 계신 분들에게 가당치 않은 음악 한 곡 보낸다. 훗날에라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


http://youtu.be/HF8W8_2sRNk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장례음악 C단조 K.477)



아, 대한민국


http://youtu.be/apeJBz0pCO8 정태춘 <아, 대한민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세월호의 비극 앞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망연자실한 머릿속에 정태춘의 처량한 노래 하나가 맴돌 뿐이다. 단 한명이라도 살아 돌아오기를 온 국민이 염원했다. 대통령도 그러했으리라. 사태 초기에 “대통령이 책임진다”는 말 한 마디만 해 주었다면 이렇게 우왕좌왕하진 않았을 것이다. 탐욕의 고삐를 풀어준 규제 완화가 총체적 부실로 이어졌으니, 이 비극에 대통령의 책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명이라도 살아 돌아왔다면 너그러운 국민들은 모두 용서했을 것이다. 매뉴얼 부재, 시스템 부재, 책임 부재….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한 번 더 믿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난망이었다 대통령은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빼고…”란 말은 언제나 그랬듯 괄호 속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대통령은 진노’했고 관계자들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진심으로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은 선장을 ‘살인범’으로 규정했고, 이 말에 공감하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승객을 구하지 않고 먼저 도망친 선장을 ‘학살범’으로 단죄한 외국 사례도 있다. 그러나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발언으로 외국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선장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저 멀리 비켜서 있으려는 꼼수가 아닌지 의심을 낳았다. 

청와대로 가겠다는 유족들을 전투경찰이 막아섰다. 당국의 무책임에 분노한 사람들의 말은 ‘무책임한 선동’으로 매도됐다. 4월 23일치 <한겨레 그림판>은 이러한 당국의 태도를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선내 방송에 빗대서 풍자했다. ‘한국호’가 처한 상황을 작가의 직관과 상상력으로 표현한 만화는 “도를 넘은 비판 아니냐”는 으름장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겨레 그림판>을 탄압한다면, 이 만화의 메시지가 옳았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닐까? 

  
▲ 4월 23일 한겨레 그림판
 

선장의 모습에서 딱 떠오른 것은 6.25 인민군 남침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태였다. 그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거짓 방송을 하고 제일 먼저 부산으로 도망갔다. 한강다리를 끊어서 수많은 피난민이 한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는 사과한 적이 없다. 아, 대한민국…. 세월호의 선장과 한국호의 선장은 어쩌면 그렇게 국부(國父)의 유전자를 빼다 박았을까. 

“국민들이 미개하다”는 발언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기득권층의 속내를 드러낸 게 아닐까? 돈만 알고 목숨을 경시하는 그들은 이번 참사를 진심으로 슬퍼하기나 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칸방에서, 노동현장에서 죽어갔는가. 용산 참사 현장에서, 남대문 고가도로에서 불길에 휩싸인 채 “생존권을 보장하라”,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울부짖는 목소리에 이들은 한번이라도 귀 기울여 보았는가. 해방 이후 현대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정한 총칼과 사법 살인 앞에서 죽어갔는지 보여준다. 기득권층은 이들의 무고한 죽음 앞에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는가. 

  
▲ jtbc 손석희 앵커의 세월호 참사 보도
 

이번 참사 보도에서 jtbc 손석희 앵커의 ‘10초의 침묵’은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함께 아파하는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MBC는 처음부터 보험금 얘기로 빈축을 샀다. 돈 문제에 제일 민감한 꼴이 기득권층을 빼닮았다. MBC 사장은 “효순 · 미선양 때 방송이 절제를 잃고 선동적이었던 반면, 이번 방송은 국민정서와 교감하고 한국사회의 격을 높였다”고 자평했다. 여기서 ‘국민’이란 ‘권력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현장을 누빈 기자와 스탭들의 순수한 노고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다수 시청자들의 정서와 거리가 먼 사장의 인식은 오히려 사원들에게 자괴감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우려된다. jtbc뉴스가 4%를 넘어섰을 때 MBC뉴스는 5%대로 추락했는데, 아예 역전되지 않은 걸 축하라도 하자는 걸까? 이 마당에 기자들에게 격려금 지급을 검토했다니 어이가 없다. 세월호보다 먼저 바닥까지 침몰해 버린 MBC호의 참상이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던 4월 25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전시작전권을 2020년까지 미국에게 양도하고 대북 군사공조를 강화하기로 했다. 세월호의 비극에 가려서 이 큰 뉴스가 작게 취급된 걸 속으로 기뻐한 사람은 없었을까?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자기가 직접 미국 국민들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해 준 것 같지는 않다. 

“제가 남 탓을 할 수 없는 까닭은,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안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 오바마 대통령, 2009년 성탄절 테러 미수사건 당시

  
▲ 4월 25일(금)부터 26일(토)까지 방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 사진=청와대
 

<아, 대한민국>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한, 이 노래는 아무래도 ‘클래식’의 한 켠을 차지해야 할 것 같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드보르작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http://youtu.be/4ZMRk1MdNDM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늙으신 어머니 내개 이 노래 가르쳐 주실 때 두 눈에 눈물이 곱게 맺혔었네.
이제 내 어린 딸에게 이 노래 들려주려니 내 그을린 두 뺨 위로 한없이 눈물 흘러내리네.”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은 세 아이를 저 세상으로 보낸 뒤인 1880년 이 노래를 작곡했다. 이 노래를 들어야 할 아이들은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가르쳐 주며 눈물 흘리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추억 속에 살아 있었다. 어머니는 슬픔에 잠긴 아들을 말없이 안고 함께 울어 주었다. 독일 시인 아돌프 하이두크의 시에 애잔한 선율을 붙이며 드보르작은 울고 또 울었다. 

<집시의 노래> Op.55 중 네 번째 노래인 이 곡에서 드보르작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을 어머니의 추억으로 승화시켰다. 가사는 나이 들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지만, 자식을 잃은 드보르작 자신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 셈이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댄 드보르작, 그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리라. 


 

▲ 드보르작과 아내 안나 / ▲ 고향 넬라호제베스에 있는 드보르작의 생가 / ▲ 고향을 떠난 직후의 드보르작


32살 때 결혼한 젊은 가장 드보르작은 아직 작곡가로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소시민들이 사는 임대주택을 빌렸고,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틈틈이 피아노 레슨까지 해야 아기들을 키울 수 있었다. 결혼 3년째인 1875년, 드보르작은 빈 정부가 ‘젊고, 재능 있고, 가난한’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당대의 거장 요하네스 브람스가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이제 드보르작에겐 작곡가로 활짝 피어날 길이 열렸고, 세 아이의 앞날도 남부럽지 않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예기치 못할 때 문 앞에 들이닥치는 법, 세 아이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첫 아기 요제파가 죽었을 때 드보르작 부부는 종교에서 위안을 찾고자 했다. <스타바트 마터>, 십자가에 못 막힌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노래한 성가곡…. 부부는 힘을 내어 새롭게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1년 반 뒤, 둘째딸 루제나와 첫아들 오타카르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젊은 부부는 넋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 그 추억이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시골 넬라호제베스에서 14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고, 이 가업을 맏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덕분에 드보르작은 정육점 면허를 가진 유일한 위대한 작곡가가 됐다. 그런데 아버지는 치터 연주를 잘 했고, 직접 춤곡을 작곡해서 연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결국 드보르작은 아버지로부터 가업 대신 음악 재능을 물려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어머니 안나 즈덴코바는? 지방 군주인 로브코비츠 집안 집사의 딸로, 품위 있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드보르작이 어머니의 어떤 모습, 어떤 성격을 닮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그녀의 모습은 빛바랜 그림 한 장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쿠르트 호놀카 <드보르자크>, 이순희 옮김, 한길사) 두 외삼촌은 각각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 트럼펫 연주자였다고 하니, 어머니 안나도 음악에 친숙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드보르작에게 음악 재능을 물려주었는지 여부는 전혀 알 수 없다. 여느 어머니처럼 그녀도 아기 드보르작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을 것이다. 평범한 어머니, 아니, 평범하기 때문에 위대한 모든 어머니…. 훗날 아들이 가장 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부드럽게 일으켜 세워 준 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시골아이’ 드보르작은 16살 때 고향을 떠나 프라하, 런던, 뉴욕을 오가며 활동했다. 뉴욕 음악원 교장으로 일할 때 작곡한 교향곡 <신세계에서>, 첼로협주곡 B단조, 현악사중주곡 <아메리카>는 그의 기악곡 중 최고 걸작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는 미국 인디언들과 흑인의 선율을 음악 속에 용해시킬 정도로 진취적인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언제나 조국 체코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베토벤, 쇼팽 등 선배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드보르작에겐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동의어였다. 

우리는 어른이지만, 세상이 너무 힘들고 슬플 때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엉엉 울고 싶어지는 어린이기도 하다. 여느 해처럼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할 아이들의 고운 손, 해맑은 눈빛은 어디로 갔을까. 슬픈 카네이션 같은 음악….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미국 원주민들의 선율에 담아 작곡한 드보르작의 현악사중주곡 <아메리카>, 2악장이다. 


http://youtu.be/muCGueV3fbE (클리블랜드 사중주단)




말러 ‘아이들은 잠깐 놀러 나갔을 뿐이야’

“죽음은 강하다. 그러나 사랑은 더 힘이 세다”


http://youtu.be/JRegVSmWooM (바리톤 토마스 햄슨, 번스타인 지휘 빈 필하모닉)


“아이들은 잠깐 놀러 나갔을 뿐이야.
나는 생각하곤 하지, 곧 돌아올 거라고. 
햇살 화창하니 걱정하지 말자, 
아이들은 잠깐 산책을 간 거야. 
저 언넉 너머 잠시 여행 중이야.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가고 있으니,
아직 집에 올 생각을 안 하는 게지. 
저 언덕 너머 가면 만날 거야, 
저 언덕 너머, 햇살 화창한 날에.”
- 말러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중 ‘아이들은 잠깐 놀러 나갔을 뿐이야’


음악 소개하는 일이 요즘처럼 부질없게 느껴진 적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한다고 누가 말했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모두 연주해도 달라질 건 없다. 아이들은 대답이 없고, 음악은 기적을 만들 힘이 없다.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될까? 소통과 공감을 모르는 자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어린 손에 “잊지 않겠다”는 종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학생들이 애틋하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분들의 곁에 있어주는, 먼저 아이를 찾은 부모들이 눈물겹다. 이 슬픔의 힘으로 반드시 일궈낼 인간의 세상…. 그러나 아이들은 말이 없다. 


대한민국의 민낯이 모두 드러났고, 해결책도 이미 나왔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 매우 단순한 이 철칙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 온 게 아닌가. 풀뿌리에서 타오르는 이 깨달음을 기득권층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 눈치만 보는 군상들은 여전히 우리를 절망케 한다. 타인의 상처에 둔감한 그들은, 울부짖는 부모와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불온하다고 한다. 그들은 눈물 흘리는 사람을 위로하는 체 하며 “잊으라, 잊으라” 한다. 

소통과 공감을 모르는 자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어린 손에 “잊지 않겠다”는 종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학생들이 애틋하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분들의 곁에 있어주는, 먼저 아이를 찾은 부모들이 눈물겹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이 없다. 5월 중순,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야속하다.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1788~1866)는 45살 되던 1833년 두 아이를 잃었다. 어린 나이에 성홍열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이들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하루 한편씩 시를 썼고, 눈물처럼 고인 시(詩)는 2년 동안 428편이 됐다. 두 아이를 앞세운 뤼케르트는 이 시들을 출판할 생각이 없었지만,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로 세상에 나왔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이 시집에서 다섯 편의 시를 골라 연가곡을 만들었다. 음울한 첫 곡은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픔을 노래한다. 태양 아래 정의는 없는 걸까? 죄 많은 나는 여전히 눈을 들어 빛을 바라보는데, 어째서 순결한 아이는 먼저 눈을 감았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도 왜 세상은 그대로일까? 

“간밤의 끔직한 일을 모르는 듯
태양은 다시 밝게 떠오르네
재앙은 내게만 일어났는데
태양은 어째서 골고루 비추는 걸까.”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5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날씨에, 폭풍 거친 날에’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이다. 왜 나는 아이가 집을 나설 때 말리지 않았을까? 

“이 날씨에, 폭풍 거친 날에
아이들을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군가 아이들을 끌어냈고
나는 조심하라 말도 못 전했구나.”


말러는 이 연가곡을 1901년~1904년 사이에 작곡했다. 알마와 결혼했고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된 직후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시기에 이렇게 어두운 곡을 쓴 것은 불가사의였다. 가족의 연이은 죽음이 그의 생애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해석이 가능할 뿐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숨을 거두었고, 빈에 정착할 무렵 아버지와 동생들이 잇따라 세상을 하직한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알마는 신혼초에 남편이 이런 곡을 쓰는 게 불길했다. 1907년, 큰 딸 마리아 안나가 4살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던 말러에게 안나의 죽음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해 말러는 심장병이 도졌고, 빈 국립오페라 감독직도 잃어버렸다. “운명의 해머가 그를 세 번 내리쳤고, 그는 거대한 나무처럼 땅에 쓰러졌다.” 켄 러셀의 <말러>나 애들론의 <말러의 황혼> 등 영화는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어린 딸의 죽음을 연결지어 묘사했다. 그러나, 말러가 이 노래를 작곡하며 딸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은 극적인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 어린 딸 마리아 안나와 아버지 구스타프 말러

말러는 “이 다섯 노래는 뗄 수 없는 유기체로, 곡들의 일관성이 흐트러지지 않게 연주해야 한다”고 썼다. 마지막 노래는 고뇌와 체념에 젖어 있지만, 초탈한 느낌의 장조로 끝난다.


http://youtu.be/l5GQZKzUyyw 


쓰라린 탄식의 5번째 노래 ‘이 날씨에, 폭풍 거친 날에’, 마지막 첼로 선율은 3번 교향곡 피날레 ‘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의 첫 주제를 닮았다. 음악학자 캐런 페인터는 이 시들이 “슬픈 운명과 점점 친숙해지며 평화와 위안의 세계를 찾게 해 준다”고 설명했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노래한다. 

“죽음은 강하다. 그러나 사랑은 더 힘이 세다.”



한국은 ‘임을 위한 행진곡’ 핀란드는 ‘핀란디아’


“가자, 조국의 아이들이여, 영광의 날이 왔다.
압제자가 앞에 있고, 피의 깃발은 올랐다.
시민들아, 무기를 들고 줄지어 나가자! 
사랑하는 자유여, 우리의 깃발 아래 승리가 있다.”


http://youtu.be/4K1q9Ntcr5g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유>

1792년, 나폴레옹은 아직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혁명군에 참여한 마르세이유 의용군을 위해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이 하룻밤에 이 노래를 작곡했다. 전선에서 널리 불린 이 노래는 1795년 프랑스의 정식 국가가 됐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뒤 “폭군을 쓰러뜨리자”는 가사 때문에 잠시 금지됐지만, 1830년 7월 혁명 이후 다시 국가로 인정됐다. 노래 가사가 살벌하다고 딴죽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래에는 생명이 숨쉰다. <라 마르세이유>가 프랑스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한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어렵고, 전제정치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이 노래를 공식석상에서 못 부르게 한다면 민주주의와 조국의 자존감을 모욕한 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http://youtu.be/G5o7caWR5yQ <임을 위한 행진곡>


올해 5·18 기념식이 반쪽이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하자 유족들과 5월 단체들이 참석을 거부했다. 상이군경회 사람들, 사복경찰들, 합창단이 빈자리를 메웠다.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총리가 대신 자리를 지켰다. 옆에는 이 노래를 금지한 정권의 말단 하수인 박승춘 보훈처장관이 앉아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민주화운동 기념곡 지정에 워낙 강한 반대 여론이 있어서 잘못하면 국론이 분열될 수 있다.” 

4월 국회에서 총리가 한 말이다. 박승춘도 여러 번 ‘국론 분열’을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국론을 분열시킨 사람이 누구일까? 이 노래를 금지하는 것은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것이고, 민주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이들은 대놓고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으니 야금야금 민주주의의 기반을 훼손하여 결국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무엇인가? 80년 5월,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시민들이 결연히 저항한 사건 아닌가. 신군부의 잔인한 살육에도 굴하지 않고 시민들이 합심하여 해방 공동체를 이룬 빛나는 역사 아닌가.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는가. 단시일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국제사회가 부러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5·18 민주화운동 덕분 아닌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하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영령들을 욕보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는 짓이다. 이들은 광주 시민들의 아픔을 모르듯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도 모른다. 대통령에게 아첨을 일삼으며 남의 핑계 대기 바쁘다. “워낙 강한 반대 여론이 있어서…” 5·18 기념곡 지정에 찬성하는 국민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런 자들에게 정권의 운명을 맡기고 있는 대통령이 불쌍할 지경이다. 

광주는 80년 5월에 고립된 섬이었다. 2014년 5월에도 광주를 외롭게 그냥 둘 것인가. 5·18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은 자기 나라 군인들이 자기 나라 국민들을 총칼로 짓밟는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엄숙한 의례다. 따라서, 이것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이 입을 모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러야 할 때다. 말 한 마디로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대통령이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가가 아닌데도 꼭 함께 불러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들어보시기 바란다. 시벨리우스(1865~1957)의 조국 핀란드는 19세기 후반, 이웃 러시아의 압제에 허덕였다. 러시아 황제는 핀란드의 자치권을 폐지하고 언론을 탄압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등 온갖 핍박을 가했다. 


시벨리우스는 상처 입은 조국에 대한 피끓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1899년, 그는 ‘수오미’(호수의 나라)란 제목으로 이 곡을 발표하여 핀란드 국민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핀란드인의 저항을 호소하듯 사납고 열정적인 음률이 넘쳐나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연주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1904년 핀란드 국민이 일으킨 대파업에 러시아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섰고, 이 곡도 해금되어 <핀란디아>란 이름으로 당당히 연주할 수 있게 됐다.


▲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시벨리우스 조각


http://youtu.be/0lCnguTtsSQ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헬싱키 필하모닉 연주


“오 핀란드여, 보아라, 날이 밝아온다. 
밤의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고, 하늘도 기뻐 노래하네.
나 태어난 이 땅에 아침이 밝아오네.
핀란드여 높이 일어나라, 
노예의 굴레를 벗은 그대, 
압제에 굴하지 않은 그대,
오 핀란드, 나의 조국….” 


핀란드 사람들은 지금도 수많은 행사에서 이 ‘핀란드 송가’를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공유한다. 그러나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다. 이 노래를 새로운 국가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했으나 기존 국가와 혼동할 우려가 있어서 채택되지 않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리랑처럼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노래, 애국가처럼 누구나 아는 노래, 이제 미얀마 · 태국 · 일본 · 중국 등 세계가 함께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쓴 백기완 선생은 말했다. “나는 이 노래에 대해 저작권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땅에서 새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것이 됐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하자는 게 아니다. 5·18 기념식에서 자연스레 부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다



KBS 길환영 사장이 사람 되는 법 - 폴 뒤카 <마술사의 제자>


미꾸라지는 진흙탕에서도 잘 산다. 온 국민이 진흙탕을 물로 착각하며 사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이 그러하다. 이 나라는 미꾸라지 같은 기회주의자의 천국이다. 물이 더럽다며 몸부림친 사람들은 이내 지쳐서 패배주의에 빠진다. 깨끗한 물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고 이게 바로 물이라고 기만하는 게 누구인가? 대한한국의 공영방송이다. 수질 오염과 거짓말의 악순환을 조장하는 권력의 확성기, 그게 바로 KBS로 대표되는 이 나라의 공영방송이다. 

세월호의 비극은 나라 전체에 X-레이를 비췄고, 청와대 하수인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KBS와 MBC의 일부 중간간부들이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다. ‘깃털’에 불과한 이들 뒤에 허울 뿐인 사장이 있었고, 그 뒤에 ‘몸통’ 격인 청와대가 있음을 온 국민이 알게 됐다.

KBS 사장은 이미 죽었다. 28일 이사회 표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결과와 관계없이 길환영은 사장 자격을 잃었다. ‘좌파 노조’란 말을 썼지만, 본부장과 홍보팀을 포함한 KBS의 전 구성원이 등을 돌렸다. 청와대는 길환영을 퇴진시킬 수밖에 없겠지만, 선거를 앞두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길환영에게 기회가 한번 있었다. 김시곤이 몰상식한 발언으로 세월호의 상처를 모독했을 때 두말없이 파면했다면 살 수 있었다. 청와대의 지시 없이 스스로 판단했다면 이렇게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시곤이 무엇을 폭로하든 헛소리라고 묵살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청와대 핑계를 대며 비루한 눈물을 보였을 때 그는 자기 무덤을 팠다. 독사같은 김시곤에게 물렸고, KBS 전사원의 반발에 직면했고, 청와대에게 부담을 안겨서 스스로 퇴로를 막아버렸다. 

그는 ‘직종이기주의’란 말을 썼다. “내가 기자 출신이라도 이랬을까?” 김시곤의 반격으로 모든 기자들이 등을 돌렸을 때 그의 머리에 떠올랐음직한 생각이다. PD 출신답게 권력과의 끈도 시원치 않고, 보도국 내에 자기를 밀어주는 파벌도 없으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청와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이외엔 살 길을 도모할 방법이 안 보였을 것이다. 이런 그의 행태는 기자와 PD 전체에 대한 모독이었다. 권력과의 끈이나 파벌을 자랑스레 여기는 기자는 그리 많지 않다. “PD라서 보도를 잘 모른다”고 했는데, 청와대의 의중에 맞춰 뉴스를 농단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대다수 PD들은 잘 안다. PD연합회는 뒤늦게 그를 제명했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에 PD로서 죽어 있었다. 

길환영의 행태는, 재작년 MBC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김재철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명박에게 발탁된 김재철은 정권에 부담이 될 만한 시사 프로그램을 짓밟고 눈에 거슬리는 진행자들을 퇴출시켰다. 비리가 끝없이 드러났고, 상식 있는 MBC 구성원들은 그의 퇴진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김재철은 온몸이 토막토막 잘려도 살아서 꿈틀대는 괴물처럼 끈질기게 버텼다. 해고와 징계의 칼바람으로 응수했다. 대선 이후 용도폐기된 김재철은 버림받았고, 그의 잔당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하이에나 떼를 능가하는 파렴치와 몰상식이었다. 영혼 없는 로봇이 인간을 마구 살상하는 MBC, 구성원들의 냉소는 깊어만 갔다. 

길환영에게 MBC의 김재철은 성공 사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식의 죽음, 양심의 죽음, 예의의 죽음, 이성의 죽음을 대가로 이룬 헛된 성공임을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것은 분별력의 죽음이기도 하다. 상식과 양심과 예의와 이성이 없는 괴물을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쇼는 아주 단순한 공식으로 연출된다. 임금님은 발가벗고 있는데, 간신배들은 아니라고 한다. 대통령은 “방송을 장악할 생각도 없고, 법에 저촉되므로 그럴 수도 없다”고 확언한다. 그런데도 전화는 오갔고 청와대의 의중대로 방송은 이뤄졌다. 길환영은 청와대 명령에 따른 적이 없다고 하니 그저 자동으로 알아서 움직인 게 분명하다. 아무 성찰 없이 주인 뜻대로 행동하는 동물을 우리는 개라고 부른다. 청와대의 주인은 그 개가 자기 집 개가 아니라고 한다. 주인을 몰라보는 개, 개를 몰라보는 주인…. 이 추잡한 난장판 속에서 혼탁한 물을 마신 국민만 골병이 들어간다. 

길환영이 평범한 PD로 남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깜냥에 맞지 않는 직책을 탐하다가 대통령부터 민초까지 온 국민에게 누를 끼치고 자멸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길환영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 딱 하나 남아 있다. 이사회의 표결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나면 된다. 김시곤이 폭로했듯, 외압의 실상을 국민에게 밝히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 


참담한 방송현실에 어울리는 음악이 별로 없다. 슬픔으로 슬픔을 위로하고 아름다움으로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음악은 한국 방송의 아사리판에서 사치품일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을 지키려고 대다수 KBS 구성원들이 일어난 것을 보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분들께 폴 뒤카의 교향시 <마술사의 제자>, 디즈니 만화영화를 소개한다. 


http://youtu.be/98VVhvfadYw

미키마우스는 주인 마술사 몰래 빗자루에 마술을 건다. 힘 안 들이고 물을 얻기 위해 빗자루가 물을 떠 오도록 한다. 미키마우스는 마술을 푸는 방법을 모른다. 빗자루들이 떠 온 물은 방에 넘쳐흐르고, 걷잡을 수 없는 홍수가 된다. 주인이 알아채기 전에 수습해야 하지만 불가능하다. 결국 주인인 마술사가 직접 나서 빗자루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대홍수를 진정시킨다.

프랑스의 작곡가 폴 뒤카(1865~1935)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프랑스 음악계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서 논쟁을 벌일 때 그는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양자의 장점을 취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음악 평론가로 활약했고, 파리 음악원 작곡과 교수를 지냈다. 오페라, 교향곡, 발레곡, 피아노곡 등 여러 작품을 썼지만, <마술사의 제자>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오르페우스,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

글루크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중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


http://youtu.be/xTZgMQ7TVes


“죽음은 개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일본의 어느 생물학자가 한 말이 머리에 콕 박혔다. 책 제목은 잊었지만 이 말은 오래 기억난다. 한밤에 날아든 나방이 아침에 죽어 있다. 불빛 때문일까, 좋아할 만한 먹이도 없는 방에 나방은 왜 굳이 들어와서 죽었을까. 이미 경계가 없어진 나방은 푸석푸석 말라가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흙으로 돌아간 생명체는 모두 섞이고, 이윽고 새로운 개체로 태어난다. 뒷산에 쓰러진 나무에서 버섯이 자라고 벌레가 꼬물거린다. 개체는 윤회하지 않지만, 전체 생태계는 돌고 돈다. 생물과 무생물이 순환하는 가이아의 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고, 우리는 모두 섞인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맨 나중에 나왔다.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한 세상, 희망이 있기에 그나마 살 수 있다는 신화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희망을 관 속까지 가져간다는 말도 있다. 희망은 때로 죽음보다 더 강한가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의 신(神) 아폴론의 아들이었던 오르페우스…. 그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사랑하는 에우리디체를 살려 낸다. 글루크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다. 

 

▲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 ▲ 장 델빌의 <오르페우스> (1893)

오르페우스는 물의 요정이었던 에우리디체를 만나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한 쌍이 된다. 어느 날, 숲에 놀러갔던 에우리디체가 독사에게 물려서 죽는다. 비탄에 잠긴 오르페우스 앞에 큐피드가 나타나 저승에서 에우리디체를 데려오라고 노래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를 찾아 저승으로 떠난다.

2막, 오르페우스는 죽음의 강에 도착한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말한다. “여기에 들어가려는 자여,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음악의 힘으로 내딛은 용감한 한 걸음, 오르페오는 카론을 감동시켜 강을 건넌다. 분노의 정령들이 저승 입구를 막고 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자 이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이 때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이 펼쳐진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선율이다. 지옥의 신 하데스와 복수의 신 네메시스마저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감동하여 에우리디체를 지상으로 보내준다.

3막,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 오르페우스가 아무 말도 없고 자기를 돌아보지도 않자 에우리디체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노래한다. 마음이 찢어진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체는 다시 저승으로 사라진다. 지상에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와 함께 있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한 큐피드가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려내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합한다. 

원래 신화는 오르페우스가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 손에 갈기갈기 찢어져 죽는 처절한 비극이다. 이들은 오르페우스에게 노래를 청하며 간절히 구애했는데, 비탄에 잠긴 오르페우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노한 여신도들은 오르페우스를 죽여서 헤브루스강에 던져버렸는데, 그의 머리와 리라는 지중해 연안의 레스보스까지 떠내려가면서 계속 슬픈 노래를 불렀다.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는 모차르트를 질시했던 살리에리보다 먼저 빈 궁정 악장을 지냈다. 당시 오페라는 대중스타였던 카스트라토의 묘기 경연장 같았는데, 글루크는 드라마의 질서를 강조하여 오페라 개혁에 나섰다. 민중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그의 오페라들이 프랑스 혁명을 앞당겼다는 얘기도 있다. 글루크의 대표작인 이 오페라는 비극적인 신화를 조금 고쳐서 당시 궁정의 관행에 맞게 해피엔딩으로 했다.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 중간 부분의 애수어린 선율은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으로 편곡한 것을 요즘도 자주 연주한다. 글루크의 <멜로디>라고 부른다. 


http://youtu.be/4UYxPae5O8o (바이올린 레오니드 코간)




“지휘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브루노 발터 지휘 콜럼비아 교향악단
http://youtu.be/A84sVKiu6_o

“원칙을 지키는 불통은 자랑스런 불통”이란 명언을 남긴 이정현이 청와대 홍보수석을 그만뒀다. 불통 대통령이란 오명을 벗고 국민과 소통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0.00001%라도 있을까 했더니, 역시 아니다. 윤두현은 YTN노조가 뽑은 ‘오적’ 중의 한 명, 함량미달의 해바라기 인사다. 민경욱이 온갖 미사려구로 칭찬하는 것 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심증이 더욱 굳어진다. 

정치 지도자에게 좋은 지휘자가 되길 기대하는 건 전체주의 발상으로 흐르기 쉽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영도자(Führer)의 단호한 지휘 아래 전국민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길 꿈꿨다. 정명훈이 이명박에게 지휘봉을 선물한 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정치적 행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박근혜가 훌륭한 지휘자가 되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는 모든 지휘자가 독재자이던 시대에 따뜻한 수평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이들수록 지휘가 더 어렵다고 했다.


개념 없는 지도자와 무능한 지휘자는 똑같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음악적 아이디어도 없고, 템포도 엉망이고, 소통도 안 될 경우 단원들이 애를 먹는 게 불가피하고, 그 결과인 음악이 좋을 수도 없다. 정치 지도자가 엉터리일 경우 국민이 고생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국민은 불행히도 아무 생각 없는 지휘자를 앞세우고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 꼴이다. 다행히 정치 현실은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지도자가 아무 비전 없이 국민 여론에 역행할 경우 저항과 불복종은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이다.

오케스트라의 세계는 정치 현실과 다르다. 지휘자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 앞에서 지휘봉을 휘두를 때 누구는 따르고 누구는 안 따른다면 음악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능력과 인품이 현저히 떨어지는 지휘자를 단원들이 거부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아무리 팔푼이라도 일단 지휘대에 선 이상 단원들이 맞춰줘야만 어떤 형태로든 음악이 이뤄질 수 있다. 

최근 진행을 맡은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청취자가 질문했다. “지휘자에 따라 곡 해석이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해석에 따라 연주가 달라진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그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 건지 청중이 미리 알고 있어야 되는 건가요?” 

모든 지휘자는 개성이 있다. 오선지 뒤에 있는 작곡자의 감정과 의도를 읽어내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이게 바로 지휘자의 해석이다. 개성 있는 해석은 음악의 생명이기도 하다. 누가 지휘하든 음악이 똑같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메트로놈을 틀어놓고 기계처럼 연주한다면 이건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소통과 공감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카로 모차르트> (사랑해요, 모차르트)는 귀에 익은 선율이다.

http://youtu.be/lxS35kIpth0 


이 선율은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1악장의 주제다. 모차르트는 악보에 그냥 ‘몰토 알레그로’ (매우 빠르게)라고 써 놓았고, 드문드문 포르테(강하게), 피아노(여리게)라고 표시했을 뿐 복잡한 악상 기호를 전혀 쓰지 않았다. 지휘자가 해석해야 할 몫을 많이 남겨놓은 셈이다. 같은 곡이 지휘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템포다. 


▲ 칼 뵘(왼쪽)과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지휘자에 따라 같은 곡도 완전히 다르게 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휘자 칼 뵘은 메트로놈 96 (4분음표 하나가 1분에 96번 나오는 템포) 정도의 꽤 유장한 템포로 지휘했다. 

http://youtu.be/nOrtj-GterY 비극적 서정미, 인생의 아픔을 강조한 연주다. 칼 뵘은 지휘하는 표정도 매우 근엄하고 비장하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지휘, 같은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연주다. 메트로놈 130 정도의 무척 빠른 속도다. 

http://youtu.be/2HbMzu1aQW8 이 곡이 처음 연주됐을 때의 공포, 긴장, 열정, 놀라움을 생생히 살리려는 의도가 보인다. 아르농쿠르는 눈도 땡그랗게 뜨고 지휘한다.


어떤 연주가 더 맘에 드는가? 정답은 없다. 어느 쪽에 공감하는지, 어느 해석이 감동적인지 판단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내 경우, 칼 뵘의 지휘는 감정 표현에 치중하다보니 음악의 생동감을 희생시켰다는 아쉬움이 있고, 아르농쿠르 지휘는 사운드 밸런스가 무척 좋지만 너무 빠른 것 같다. 모차르트가 지나치게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걸 무척 싫어했음을 생각하면, 아르농쿠르의 서두르는 템포는 공감하기 어렵다. 


같은 지휘자도 연주할 때마다 해석이 달라진다. 칼 뵘이 젊었을 때 지휘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메트로놈 110 정도의 템포다. http://youtu.be/MLpY59Dt0mc


실비 바르탕의 노래와 비슷한 템포다. 자연스레 노래할 수 있고, 슬픔과 아름다움이 합일하는 경지를 잘 표현했기 때문에 맘에 든다. 이건 나의 느낌일 뿐,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지휘자는 템포 뿐 아니라 음악의 모든 세부 사항을 일일이 연구하고 해석한다. 지휘자의 판단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공감을 얻어야만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있고,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데뷔할 때의 일화가 있다. 로르칭의 곡을 신나게 지휘한 젊은 발터는 갈채를 받으며 무대 뒤로 나왔고, 박수를 보내는 스승 멩엘베르크에게 흥분하여 농담을 던졌다. “선생님, 지휘가 이렇게 쉬운 건지 미처 몰랐어요.” 멩엘베르크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쉿, 그건 우리끼리 직업 비밀이야.” 발터가 지휘의 어려움을 강조한 건 나이 60살이 넘어서였다. 

지휘자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은, 소리내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지 지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휘자는 음악의 혼을 정확히 밝혀주고 단원들의 조화를 이끌어 낼 뿐, 실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노년의 발터는 이 점이 어렵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휘자가 모두 독재자이던 시절에 발터는 단원들을 친구로 대하는 따뜻한 수평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지휘자를 닮은 정치 지도자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잉카 음악 ‘엘 콘도르 파사’

브라질 월드컵 스페인 vs 칠레 경기를 앞두고


http://youtu.be/UNza_jj57_I (연주 : 로스 잉카스)


정부는 지상파와 유선방송 사업자에게 공문을 보내 “월드컵 방송이 중단될 경우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공문은 “우리 국민은 최근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큰 슬픔을 느꼈고, 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국민의 아픔을 달래줄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축제를 혹시 TV에서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업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를 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부는 굳이 세월호를 언급하며 월드컵 시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월드컵에 국민이 열광하는 동안 세월호 정국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속마음을 비친 게 아닌지, 조건반사처럼 의심이 간다.

월드컵은 순수한 스포츠 제전이다. 하지만 월드컵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영향을 미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월드컵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몰입시켜 현안 이슈를 잠재워 버린다. 정부가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 하는 건 불순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민 입장에서는 이 숨은 의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또한 당연하니, 정부는 그게 아니라고 펄쩍 뛸 일도 없다. 

월드컵은 애국주의가 끓어오르는 용광로다. 1962년 칠레 월드컵 8강전에서 만난 군부독재의 칠레와 공산 종주국 소련은 애국심에 이데올로기 대립까지 더해져 난투극으로 경기를 마쳤다. 1969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맞붙은 앙숙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세 차례의 경기가 점점 과열되어 실제로 전쟁을 벌였다. 2,000명이 죽었고 수십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한국은 다른 팀은 몰라도 일본에게 지면 절대 안 된다. 일본은 보통 때는 조신한 ‘니혼’이지만 월드컵만 열리면 살벌한 ‘니뽄’으로 돌변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격돌해서 스페인이 5:1로 침몰했는데, 대서양의 패권을 다툰 오랜 라이벌 의식 때문에 스페인 관중들은 더욱 허탈했을 것이다. MBC는 이 경기에 세 꼭지를 할애해서 보도했는데, 그 정도로 중요한 뉴스였는지는 물론 의심스럽다.


19일 새벽에는 스페인과 칠레의 경기가 펼쳐진다. 한국과 일본 사이와는 다른 미묘한 감정이 두 나라 사이에 있을 것이다. 칠레는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들이 볼 때 스페인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유럽 제국주의의 원조일 것이다. 칠레 사람들에겐 스페인 조상들의 피도 섞여있고, 스페인 말을 쓸 정도로 동화되어 있으니 딱히 미워할 수만도 없는 상반된 감정이 얽혀 있을 것 같다. 

잉카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은 칠레 사람들에겐 생생한 역사일 것이다.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1475~1541)가 이끄는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잉카 제국에 진입했다. 엄청난 인파가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호위하며 광장을 메웠다. 스페인 선교사는 아타우알파 황제에게 성서를 내밀며 “그리스도의 율법에 복종하고 스페인 왕의 지배를 받으라”고 요구했고, 잉카 황제는 황당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 성서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걸 신호로 스페인 병사들은 일제히 총을 쏘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시작했다. 비무장의 잉카 사람 7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황제 알타우알파는 포로로 잡혔다. 끔찍한 학살과 함께 유럽인이 옮긴 천연두로 잉카 원주민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스페인은 잉카 제국의 모든 황금을 약탈해 갔다. 

로스 잉카스가 연주한 <엘 콘도르 파사>…. 슬픈 잉카의 운명을 떠올리면 더욱 애틋하게 들리는 음악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안데스의 땅을 짓밟았지만 영혼의 소리인 음악은 빼앗아 가지 못했다. 콘도르는 성스런 안데스 산맥에 서식하는, 지구에서 가장 큰 독수리다. 콘도르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상징한다. 잉카인들은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부활한다고 믿는다. 

<엘 콘도르 파사>에서는 잉카의 피리 격인 캐나의 선율이 영혼의 소리처럼 심금을 울린다. 로스 잉카스는 7명으로 된 안데스 음악 연주단체로, 캐나, 차랑고, 잔포니아, 론다도르 등 안데스 전통 악기와 기타로 연주한다. 이 7인조 악단은 사이먼과 가푼컬의 히트곡 <엘 콘도르 파사>를 직접 반주해서 이름을 알렸다. 


http://youtu.be/VfHOJf3c8qQ  사이먼과 가푼컬 <엘 콘도르 파사>


 


잉카 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단체로는 로스 차코스도 있다. 남자 4명, 여자 2명으로 된 프랑스의 6인조 그룹 로스 차코스가 연주하는 바흐 <폴로네이즈>를 들어보자. 1970년대에 크게 히트했던 이 연주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바흐의 원곡이 무척 유명해졌다. 


http://youtu.be/wSdn6Yjj3lI  바흐 <폴로네이즈>, 로스 차코스 연주


<폴로네이즈>는 원래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2번에 나온다. 바흐가 쾨텐 시절에 작곡한 4곡의 관현악 모음곡 중 두 번째 곡으로, 매혹적인 플루트 독주가 활약한다. 잉카 악기 연주와 비교해서 원곡을 들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http://youtu.be/gUvBEcGDMTk  바흐 <폴로네이즈>,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16세기 스페인이 멸망시킨 잉카 제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칠레 사람과 스페인 사람은 더 이상 앙숙이 아니며, 유럽 사람들과 남미 사람들은 지구촌의 대등한 구성원이다. 잉카 음악은 몇몇 단체의 노력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지하철역 구내에서 간혹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상품화된 음악이 넘쳐나는 요즘, 진정한 음악 다양성은 생물 다양성만큼 심각하게 훼손된 게 분명하다. 유투브에 잉카 음악의 잔향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 할까. 



‘상처 입은 치유자’, 내면의 독백

슈베르트 즉흥곡 3번 Gb장조 Op.90-3


http://youtu.be/KkqDEh-fXVI  슈베르트 즉흥곡 3번 Gb장조 Op.90-3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UN Day in Support of Torture Victims)이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인내해 온 분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이날, (재)진실의힘은 작은 기념식을 열고, 정성을 담아 인권상을 드린다. 고문 없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인권 향상에 기여한 분을 기리는 것이다. 

첫해인 2011년, 진실의힘 인권상은 서승 선생에게 돌아갔다. 1971년, 조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학생 서승을 공항에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됐다. 보안사에서 조사받던 중 그는 고문에 굴복해서 허위자백을 하게 될까봐 난로를 뒤집어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입은 처참한 화상이 평생 얼굴에 남았다. 그는 19년 옥살이를 마친뒤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가 됐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뛰고 있다. 

두 번째 인권상의 주인공은 고(故) 김근태 선생이었다. 전두환 때인 1985년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여 군부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다. 전두환 정권은 혹독한 고문으로 민주화 의지를 잠재우려 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군부독재의 야수와 같은 고문을 세계에 알렸고, 국민의 저항은 들불처럼 번져 결국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2011년 세상을 떠났고, 부인 인재근 의원이 대신 상을 받았다. 

지난해는 홍성우 변호사가 수상했다. 박정희 정권 때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에서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홍변호사는 동일방직과 YH노조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옹호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권인숙 성고문 사건, 보도지침 폭로 사건 등 시국 사건을 기꺼이 무료로 변론했다. 그는 방대한 재판기록을 남겨 군부독재와의 투쟁이 역사 속에 기억되게 만들었다. 


올해 진실의힘 인권상은 국경을 너머 버마 민주화운동의 기수 고(故) 우윈틴 선생과 ‘한타와디 우윈틴 재단’에게 갔다. 미얀마는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이후 50년 넘게 군부독재로 신음해 왔다. 1988년 민중봉기로 군부정권을 몰아내려 했으나 다시 총칼로 진압당했다. 대쪽같은 언론인이자 섬세한 감성의 문학도였던 우윈틴 선생은 그때부터 민주화운동에 직접 뛰어들었다. 아웅산 수치여사와 함께 전국민주동맹(NLD를 결성, 타협 없는 투쟁에 나셨다. 

버마 군부는 그를 투옥하고 고문했다. 군용견이 있는 차가운 감옥에 넣고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19년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뒤, 그는 쇠약해진 몸으로 정치범들을 돕기 위해 ‘한타와디 우윈틴 재단’을 만들었다. 버마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냐, 군부독재 연장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현행 헌법 아래서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니 헌법을 고쳐야 한다. 군부가 선거 결과를 거부할 위험이 있으니 민중을 조직해야 한다. 이 엄중한 시점에서 우윈틴 선생은 지난 4월 21일, 84세를 일기를 눈을 감았다.


http://youtu.be/ZwAGxrdKu3o <버마의 세야(SAYA), 우윈틴 선생의 삶> (재) 진실의힘 제작 


군부독재 아래서 우리가 힘들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외국 인권운동가들의 격려 메시지 하나가 큰 힘이 됐음을 기억한다. 진실의힘 인권상은 고(故) 우윈틴 선생의 뜻을 기리는 동시에 민주화를 열망하는 버마 민중들에게 작으나마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재)진실의힘은 어떤 단체인가?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된 분들이 있다. 이들은 고문과 구타로 심신이 망가졌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수십년 피눈물을 삼키며 살아야 했다. 결국 이 분들은 국가에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를 받아냈고, 배상금을 출연해서 작은 재단을 만들었다. 국가의 고문과 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자가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재)진실의힘이 탄생한 것이다.

진실의힘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다른 이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분들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용산참사 유족들, 수없는 조작 사건의 희생자들…. 선생님들은 이 시대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을 찾아다니며 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자신의 상처를 이겨낸 분들이 다른 이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며 진정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난 것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은 ‘상처입은 치유자’들 곁에 있는 음악이다. 선생님들이 고통스런 경험을 털어놓고 나누는 ‘진실의힘 마이데이’ 행사에 함께 한 이 곡은 버마 우윈틴 선생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동영상에도 삽입됐다. 국경을 너머 마음을 이어주는 음악의 힘을 느끼게 한다. 31살로 세상을 떠난 외로운 영혼 슈베르트,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슈베르트는 피아노마저 고요히 노래하게 만든다. 차분하게 내면을 돌아보는 느낌으로 시작한다. 중간부분, 단조로 바뀌며 아픈 상처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01:48부터). 이마저 따뜻한 선율 속에 부드럽게 녹아든다. 특정한 형식 없이 내면에서 솟아나는 시정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음악은 깊은 고뇌를 안고 있지만 결코 모나지 않게 흘러간다. 음악이 끝날 무렵 공감과 위안이 찾아온다. 즉흥곡 3번은 깊은 내면의 독백이자 조용한 소통이다. 굳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듣는 이는 이 곡이 ‘상처입은 치유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임을 알아차린다. 

슈베르트는 20여곡의 소나타, 8곡의 즉흥곡, <방랑자> 환상곡, <악흥의 순간> 등 적지 않은 피아노곡을 남겼다. <군대 행진곡>을 비롯한 30여 곡의 피아노 2중주곡도 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들은 화려한 연주회를 위한 곡이 아니라 혼자 내면을 성찰하거나 친구들과의 우정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다. 작품 90으로 묶어서 출판한 네 곡의 즉흥곡은 하나하나 개성이 뚜렷하다. 첫 곡 C단조는 슈베르트의 ‘방랑자 의식’을 들려준다. 2번 Eb장조는 따뜻하고 서정적이다. 풀밭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 그 주변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떠오른다. 마지막 곡 Ab단조는 화음과 색채감이 다채롭게 변화하는 매혹적인 곡이다. 


http://youtu.be/QDVJkxGz_Tc 
(슈베르트 즉흥곡 Op.90, 마리아 호앙 피레스 연주. 1번 C단조, 2번 Eb장조, 3번 Gb장조, 4번 Ab단조)



멘델스존의 행복, 모차르트의 슬픔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http://youtu.be/o1dBg__wsuo  바이올린 힐러리 한, 파보 예르비 지휘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교향악단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와 더불어 음악사의 가장 뛰어난 천재로 꼽힌다. 두 사람의 음악은 듣는 이를 괴롭히지 않으며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흐른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음악은 무척 대조적이다. 모차르트는 행복한 느낌을 노래할 때조차 언제나 바탕에 슬픔이 배어 있다. 반대로 멘델스존의 음악은 슬픔과 애수를 노래할 때조차 언제나 행복하다. 이 차이는 도대체 뭘까? 

멘델스존의 음악 중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들어보자. 모든 바이올린 협주곡 중 가장 귀에 익은 선율이다. 베토벤, 브람스의 작품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로 꼽히는 이 곡은 우울한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준다. 미국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파보 예르비가 호흡을 맞춘 훌륭한 연주다. 

바이올린이 첫 주제를 멜랑콜릭하게 노래하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받아서 격정을 더한다. 분위기가 진정되면 3분 지점에서 목관이 제2주제를 아름답게 연주한다. 바이올린이 화답하여 격정적으로 노래하면 4분 30초 지점부터 제1주제가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생글생글 웃음 짓듯 명랑한 장조로 바뀌어 있다. 

1악장이 끝나고 휴식없이 이어지는 2악장(13:20부터)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제2주제는 다시 애조를 띄지만 비단처럼 결이 곱다. 바이올린의 애수 띈 독백(20:50부터)에 이어 금관의 팡파레와 바이올린의 애교스런 대답으로 시작하는 3악장은 행복감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멘델스존의 곡들은 모두 우아하고 부드럽다. 그의 열정은 도를 지나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온유한 감정을 노래한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 표현된 정열과 멜랑콜리도 달콤하고 따뜻하다. E단조의 슬픈 조성이지만 듣는 이는 행복감을 느낀다. 



▲ 모차르트(왼쪽, 1756~1791)와 멘델스존(1809~1847). 모차르트는 아름다움 속에 슬픔을 감추고 있는 반면 멘델스존은 슬픔과 애수를 노래할 때조차 행복한 느낌이다.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의 겉과 속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이 차이는 왜 생겼을까?


이번엔 모차르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인 클라리넷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들어 보자.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시드니 폴락 감독, 1985)의 주제곡이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있었기에 빛을 더할 수 있었다. 


http://youtu.be/Rjzf_cWzlp8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중 2악장 아다지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가장 슬프다는 역설을 얘기할 때 꼭 이 곡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세상과 이별하며 아름다운 순간들을 회상하지만, 엉엉 울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는다. 고요히 미소 짓지만, 슬픈 마음이 눈빛에 서려있다. 이 슬픔이야말로 모차르트의 맨 얼굴이 아니었을까. 1778년 마지막날 편지에 섰듯, 그의 삶은 “많은 슬픔,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 가지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뤄져 있었다. 

다시 펠릭스 멘델스존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이름 펠릭스(Felix)부터 ‘행복’이란 단어와 어원이 같다.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슬픔과 애수를 노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바탕에 깔린 색채는 따뜻하고 행복하다. 이러한 행복한 정서를 그의 삶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은 매우 거칠고 조잡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이 이 특징을 결정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었을 것이다. 이 곡이 초연된 1845년, 그는 명성의 정점에 있었지만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외로웠고 피곤했다. 쉬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수없이 하소연했지만 쏟아지는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2년 후, 1847년 5월 누나 파니가 세상을 뜨자 펠릭스는 삶의 의지를 잃고 무너져 내려 같은 해 11월 숨을 거둔다. 

38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행복한 정서는 변함이 없었다. 30살에 작곡한 피아노 트리오 D단조를 들어도 이 점은 확인할 수 있다. 멘델스존의 D단조는 불안과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모차르트의 D단조를 닮았다. 격정적인 첫 주제가 되풀이되고 2분 10초부터 첼로가 연주하는 제2주제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멘델스존 음악의 기본 정서인 행복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4악장(21분부터)도 마찬가지다. 긴장된 첫 부분에 이어지는 첼로의 노래(24:50부터)는 한없이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http://youtu.be/jZqPReE9uS0 


슈만은 멘델스존을 가리켜 “19세기의 모차르트, 가장 뛰어난 음악가, 시대의 모순을 가장 명료하게 꿰뚫어보고 그것과 최초로 화해한 사람”이라고 했다. 앞부분은 맞는 말이지만, 뒷부분을 “시대의 모순과 화해했다”고 읽으면 갸우뚱하게 된다. 시대의 모순을 행복한 주관으로 그냥 지워버린 게 아닐까? 

모차르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봉건 영주 콜로레도의 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유음악가로 홀로 선 그의 마지막 10년은 멘델스존처럼 ‘시대의 모순’과 화해할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봉건시대와 결별했으면서도 기득권층의 인정을 받아야만 살 수 있었다. 그의 일생은 불안하고 괴로웠고, 두려웠다. 멘델스존의 트리오처럼 D단조로 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고통, 불안, 공포를 극대화하여 존재의 심연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언뜻언뜻 햇살처럼 비치는 행복의 흔적조차 없다. 

멘델스존과 모차르트, 두 사람의 생애를 통해 음악의 특징을 비교할 수는 없다. 어차피 다른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에서 싹튼 개인의 자유는 베토벤에 이르러 승리하기 시작했고, 멘델스존의 낭만시대에 활짝 꽃을 피웠다. 1845년에 발표된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낭만시대 협주곡의 한 떨기 향기로운 꽃이다. 열정과 애수로 가득 차 있지만 우아하게 미소 짓는 멘델스존의 얼굴이 보인다. 멘델스존의 행복한 미소는 봉건 시대의 끝자락을 힘겹게 살아 낸 모차르트에게 빚진 바가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17살 천재 멘델스존의 사랑과 환상 - <한여름 밤의 꿈> 서곡


온유하고 달콤한 멘델스존(1809~1847)의 음악, 그 중 가장 귀에 익은 곡은 <결혼 행진곡>일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흔히 듣는 피아노 연주도 좋지만, 두 남녀의 결혼을 제대로 축하하려면 화려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토대로 1843년에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온다.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 http://youtu.be/z0wmzoHd6yo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은 고대 아테네가 무대다. 스토리가 비슷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지만, <한여름 밤의 꿈>은 희극이다. 서로 사랑하는 헤르미아와 뤼산드로스는 부모의 반대를 피해 숲속으로 도망간다. 요정의 세계, 귀족의 세계, 서민의 세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꿈과 환상이 펼쳐지고, 사랑하는 세 쌍의 남녀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난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세계관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여, <한여름 밤의 꿈>을 통해 이성과 감성, 비극과 희극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 <한여름 밤의 꿈> 중 ‘요정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논쟁’ 장면, 조셉 노엘 파톤 그림.


멘델스존이 <한여름 밤의 꿈>을 처음 읽은 것은 17살 때인 1826년이었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희곡에 매료된 멘델스존은 즉시 멋진 서곡을 작곡했다. 17년 뒤인 1843년, 프러시아의 빌헬름 4세는 연극 <한여름 밤의 꿈> 공연 때 연주할 극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멘델스존에게 요청한다. 서곡, 요정의 행진, 결혼 행진곡, 광대의 춤 등 12곡으로 이뤄진 이 음악은 무려 17년 걸려서 완성한 셈이다. 17살 때 작곡한 서곡을 그대로 사용해서 34살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서곡은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다른 곡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멘델스존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곡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을 감상해 보자. 꿈꾸는 듯한 목관의 화음 네 개가 펼쳐지고, 요정들이 바삐 날갯짓하며 여름밤의 환상을 속삭인다.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서곡 http://youtu.be/qh50Pqp92Tg (오토 클렘페러 지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어린 시절, 멘델스존은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천재로 평가됐다.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17살 모차르트보다 뛰어났던 17살 멘델스존의 걸작이다. 두 천재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괴테는 말했다. “멘델스존이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짤배기 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그 자리에 있던 음악가들도 이 평가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멘델스존은 죽을 때까지 정체된 천재였던 반면 모차르트는 평생 공부하며 발전한 천재였다는 결론이 된다. 모차르트는 G단조로 된 교향곡을 두 곡 썼는데, 17살 때인 1773년에 쓴 K.183을 ‘작은 G단조’, 32살 때인 1788년에 쓴 K.550을 ‘큰 G단조’라고 부른다. 두 곡 모두 훌륭하지만, 나중에 쓴 게 곡의 규모나 정서의 깊이에서 훨씬 뛰어난 걸작이다. 

두 개의 G단조 교향곡 사이에 놓인 15년 동안 모차르트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반 슈비텐 남작에게서 빌린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악보를 열심히 연구했다. 바흐의 푸가를 현악사중주곡으로 편곡했을 뿐 아니라 직접 푸가를 작곡했다. 바흐 푸가의 영향은 ‘큰 G단조’ 교향곡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이 기간에 모차르트는 <후궁 탈출>,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등 거대한 오페라를 작곡하며 사랑과 갈등, 용서와 화해, 투쟁과 파국 등 인간 본성의 깊고 섬세한 측면을 탐구했다. 음악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꾸준한 성찰이 있었기에 G단조 교향곡 K.550의 비극적 서정미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간의 한복판인 1781년, 모차르트가 스스로 봉건 질서를 박차고 나와서 천재의 예술혼을 해방시켰다는 점이었다. 천재의 비결은 끝없이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걸 창조하는 열정 아닐까? 무한히 샘솟는 모차르트의 생산력은 지칠 줄 모르는 목마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멘델스존도 물론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10대에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완전히 소화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유럽 전역을 수없이 여행했다. 최초의 근대적 지휘자로 활약한 그는 20살 때인 1829년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부활시켜 서양음악사를 새로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음악은 시대를 뛰어넘는 웅대한 날갯짓을 보여주지 못했다. 19세기를 주름잡은 리스트, 바그너, 베를리오즈 등 음악의 개혁가들과 거리를 둔 채 보수적 색채를 유지했다. 

19세기 산업사회의 천재 멘델스존은 상품으로 끊임없이 소비됐을 뿐, 이 재능을 가꿔나갈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충분히 가질 수 없었다. 어떤 짓궂은 음악가는 “모차르트는 1류 중 최고, 멘델스존은 2류 중 최고”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동의하든 안 하든 멘델스존이 38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대의 재능을 뛰어넘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문득 꿈에서 깨니 현실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짓밟아서 질식시키는 세상이다. 학교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다. 말이 안 되는 자를 교육부 수장으로 지명하는 몰상식, 이를 넙죽 받아 물고 늘어지는 파렴치가 볼썽사납다. MBC의 해직자들은 ‘근로자 지위’를 인정한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고도 회사의 저지로 출근하지 못했다. 양심과 기개와 능력이 있는 방송인들을 불구대천의 원수인양 배척하는 MBC 임원들이 안쓰럽다. 왜곡과 퇴행으로 신음하는 세상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사족이다. 사랑과 꿈이 있는 음악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아무리 쓸모없고 비천한 것이라도 
사랑은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니까.”
-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1막1장



잊혀진 천재 파니를 위한 ‘제망매가(祭亡妹歌)’

펠릭스 멘델스존 <독일의 옛날 봄노래> Op.86-6


펠릭스 멘델스존 <독일의 옛날 봄노래> Op.86-6 http://youtu.be/GuxR-T-3KBY  (바리톤 토마스 햄슨) 


‘19세기의 모차르트’로 불린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에겐 4살 위 누나 파니 멘델스존(1805~1847)이 있었다. 파니는 연주와 작곡은 물론 기억력에서도 동생을 능가하는 천재였다. 어린 시절, 펠릭스가 작곡에 착수하면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 곡이 완성돼 있었다고 한다. 펠릭스가 13살 때, 파니는 애정과 자부심과 뒤섞인 기분으로 썼다. 

“난 언제나 동생의 유일한 음악 조언자였어. 펠릭스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기 전에는 어떤 악상도 써 나가지 않았어. 예컨대, 나는 그가 오페라를 악보에 적기도 전에 모조리 외우고 있었어.”

어린 남매는 함께 작곡하고 제목을 붙이며 놀았다. 훗날 두 사람이 작곡한 <무언가>는 어린 시절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그들은 <가든 타임즈>, <차와 눈> 등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잡지를 만들며 즐거운 놀이와 재치 있는 농담으로 가득한 꿈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모도 쌍둥이처럼 닮았던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공유했다. 파니 멘델스존의 야상곡 G단조를 들어보자. 따뜻하고 멜랑콜릭한 두 사람의 작품은 웬만큼 예민한 귀로 들어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파니 멘델스존 녹턴 G단조 http://youtu.be/ti1eZ2B63Ro  (피아노 히더 슈미트)


파니는 스스로 작곡했을 뿐 아니라 동생의 창작에 참여했다. 펠릭스는 초기 걸작인 8중주곡 Eb장조의 씨앗을 <파우스트>에서 얻었다고 누나에게만 귀띰했다. 17살 때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두 남매의 피아노 이중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펠릭스는 누나를 ‘나의 칸토르(음악 선생님)’라 부르며 따랐다. 두 남매의 이런 관계는 평생 지속됐다. 펠릭스는 1836년 필생의 역작인 오라토리오 <성 바울> 작곡한 뒤엔 그녀의 ‘혹평’을 보내달라며 간절히 조언을 구했다.


 

▲ 어린 시절의 펠릭스 멘델스존과 4살 위 누나 파니 멘델스존 / ▲ 결혼할 무렵의 파니 멘델스존 (1805~1847)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와 똑같았다. “여자가 있을 자리는 살롱”이라며, 여자가 사교생활의 장식품 이상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1820년, 펠릭스만 데리고 파리로 떠난 아버지는 15살 난 딸 파니에게 썼다.

“펠릭스에게는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지만, 네게는 그저 장식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네 명예는 네 처신과 분별에서 얻어야 한다. 펠릭스가 찬사를 받을 때 너도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 너도 똑같이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 거란 뜻이니 그렇게 느끼고 처신하도록 해라. 이것이 여성성이며, 진정한 여성성만이 너희 여자들을 빛나게 할 수 있다.”

18세기,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15살 난 딸 난넬의 연주를 금지하며 뱉은 말과 거의 똑같지 않은가! 모차르트의 5살 위 누나 난넬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음악가의 길을 접어야 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그녀의 재능을 질식시켰는데, 50여년 뒤 태어난 펠릭스의 누나 파니도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한 것이다. 

8년 뒤 결혼을 앞둔 파니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은 한 번 더 못 박는다. “너의 진정한 소명, 젊은 여성의 소명을 따라라. 즉,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란 말이다.” 인습이라는 괴물을 위해 개성과 재능을 희생하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남편 헨젤은 하필 음치(!)였고, 결혼은 천재 음악가 파니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파니는 작곡을 향한 열정을 완전히 접을 수 없었다. 

1827년에 발표된 <12개의 노래>은 그냥 ‘멘델스존 작곡’이라 돼 있었는데, 파니의 작품도 세 곡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남매간의 표절 시비가 붙을 수 있는 일이지만 파니에겐 성차별의 벽을 넘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였고, 펠릭스도 이에 기꺼이 동의했다. 당시 이 가곡집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곡은 파니가 쓴 <이탈리아인>이었다.


파니는 결혼 뒤에도 작곡을 계속하여 4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대부분 가곡과 피아노 소품이었다. 그녀는 죽기 몇 달 전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단 한번 출판했을 뿐, 대중 앞에 음악가로 등장한 적이 없다. 얼핏 초라한 성과로 보이지만, 파니가 평생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런던의 한 언론은 1838년, “파니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그 재능이 전세계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기에 처신의 제약이 심했고, 그 때문에 아까운 재능을 파묻어야 했다는 것. 


파니 멘델스존의 삶과 음악을 그린 다큐멘터리 <파니를 위한 진혼곡>(Requiem for Fanny) 
http://youtu.be/udncoYOVysk


딸 파니를 희생시킨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아들 펠릭스에겐 축복이었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늘 ‘남자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1834년, 과로에 지친 펠릭스가 뒤셀도로프 음악감독직을 사임했을 때 아브라함은 심하게 나무랐다. 

“저주받을 고집불통 때문에 너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큰 피해를 자초했다. 아울러, 네가 키우다가 생각 없이 버린 이 악단을 통째로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점이 더 심각하다.”

펠릭스는 늘 일에 치어 있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초청은 점점 더 많아졌고, 책임감 때문에 어떤 요청도 거절 못했다. 본인도 자기가 무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 모든 게 자신의 삶과 힘을 잡아먹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스스로 떠안은 멍에를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기력이 소진된 멘델스존은 고백한다. 

“나는 감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못해. 내가 선택한 대의에 피해를 입힐 테니까.” 

뒤셀도르프 음악감독직을 그만뒀을 때 아버지가 던진 경고를 스스로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1835년 11월 19일 사망했고, 펠릭스는 “나의 젊은 시절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썼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향은 평생 남아 있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의무와 도덕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의 평화로운 삶도 빼앗는다. 멘델스존이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이와 아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최후의 대작 <엘리야>를 작곡한 뒤 탈진했다. 지인들에 따르면 “지친 표정, 평소와 다른 아주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1846년 말, <엘리야> 1부를 파니 앞에서 연주했는데, 그게 남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파니는 1847년 5월 14일, 베를린의 일요음악회를 연습하다가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날 저녁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서둘러 달려왔지만, 장례식과 추도식이 끝난 뒤였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늙고, 슬프고, 구부정한’ 모습이 된 그는 여름을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요양하며 보냈다. 

파니와 펠릭스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영혼으로 된 ‘샴쌍둥이’였을까? 펠릭스는 누나의 죽음으로 음악의 샘마저 말라버린 걸까? 누나가 떠난 세상을 살아 낼 기력이 없었을까? 9월말, 베를린에 가서 파니의 빈 방을 본 펠릭스는 다시 무너졌고, 11월 4일 세상을 떠났고, 고향 데사우의 가족 묘역에서 누나 곁에 묻혔다. 

그는 마지막 작품인 가곡 <독일의 옛날 봄노래>에서 비통하게 누나를 그리워한다. 

“나는 홀로 고통스러워 하네 / 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 /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 / 아아, 사랑하는 이여, 헤어져야 했으니.”



모차르트의 파리 여행과 어머니의 죽음

피아노 소나타 A단조 K.310


http://youtu.be/WumZcW953W0 (1악장 빠르고 장엄하게,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22살 모차르트가 도착한 파리는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멋 옛날, 7살 신동 모차르트를 환대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던 파리는 원숙한 음악가 모차르트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꼬마 천재가 누렸던 상품 가치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에서 화려한 도약을 꿈꾸던 그는 당혹스러웠다. 샤보 부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풍경이다. 

“저는 도착해서 30분 동안 크고 온기라고는 없는 방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샤보 백작 부인이 들어오더니 대뜸 연주를 해보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꽁꽁 언 손으로 가련하고도 비참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가 막힌 일은, 그 부인과 신사 양반들이 음악은 듣지 않은 채 스케치에 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의자와 탁자를 향해 연주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씁쓸한 일들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 텐데요….”                                                     - 아버지에게, 1778년 5월 1일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피아노 레슨을 하고, 극장용 발레의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파리의 인간과 분위기에 실망한 모차르트는 이 도시를 가리켜 “음악에 관한 한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며 진저리를 쳤다.

불운했던 파리 시절,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 찾아왔다. 남편 레오폴트 대신 아들과 동행해서 파리에 온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엄격하고 치밀했던 아버지에 비해 따뜻하고 유머를 즐겼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때까지 모차르트가 겪은 시련 중 가장 아픈 것이었다. 어머니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창문이 어두운 거리를 향하고 있는 작은방에 앉아 있어요. 불빛도 거의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아들은 일이 잘 안 풀려서 헤매느라 차분히 어머니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말이 안 통하는 프랑스 의사의 진료를 거부했다. 독일말을 잘 하는 의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어머니는 끝내 남편에게 작별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날 임종을 마친 볼프강은 잘츠부르크로 보낼 두 통의 편지를 쓴다. 아버지에게 쓴 첫 편지는 충격적인 소식을 감춘 채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담아 보냈다. 아버지가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1720~1778) 



▲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잘츠부르크에서 그린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


“매우 슬프고도 우울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며칠 낮밤을 보내면서 저는 오직 신의 의지에만 매달렸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일은 우리 눈에 아무리 낯설더라도 언제나 가장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제 희망을 가집시다. 너무 많이는 말고요.”                                            - 아버지에게, 1778년 7월 3일 파리에서

두 번째 편지는 가족의 오랜 친구였던 아베 불링어에게 보낸 것으로,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잘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크나큰 슬픔 속에서도 침착하게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쓴 작품인 피아노 소나타 A단조 K.310은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 중 전기적인 배경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에 해당한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빠르고 장엄하게)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한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에스프레시오네(느리게 노래하듯, 표정을 담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http://youtu.be/BLbunvM4s0k 


이 느린 악장에 대한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의 느낌을 들어 보자.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모차르트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있는 거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달간 그들은 같이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충분하게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내의 뜻밖의 죽음에 크게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런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고, 급기야 볼프강이 어머니를 방치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던 모차르트는 생전 처음 ‘깊은 우울증’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츠부르크로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들은 전제군주 콜로레도의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사랑하는 알로이지아가 있는 뮌헨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방탕한 꿈’을 꾼다고 나무랬다. 모차르트는 애정이 담뿍 담긴 편지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린 다음 완곡하게 이렇게 항의한다.

“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겁니다. 이 땅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필 방탕한 꿈이라니요! 평화로운, 달콤한, 상쾌한 꿈이라고 하셔야지요!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몇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말입니다!”                 

- 아버지에게, 1778년 12월 31일 뮌헨에서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http://youtu.be/s_xS8OLQYI0 (크리스탄 틸레만 지휘, 빈필하모닉 관현악단, 2010)


재보선, 답답하지만 관심을 끊을 수 없다. 사방이 꽉 막힌 세상이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만드는 유일한 합법 절차가 선거 아닌가. 최선의 후보를 뽑으면 좋지만 여야가 오십보백보니 - 그게 꽤 큰 차이라는 의견도 물론 타당하다 - 최악의 후보를 떨어뜨려서 위안을 찾자는 심정으로 투표소를 향한 게 이미 오래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휴가를 갔단다. 말로는 “잊지 않겠다” 하면서 속으로는 “잊으라, 잊으라” 하는 거짓의 몸통이다. ‘미개한’ 서민을 속이지 않으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 그들은, 일제히 휴가를 떠남으로써 세월호 논란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속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대한민국 현실을 조금 돌아보니, 벌써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혼탁해진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음악가에게 저주라 할 수 있는 청력 상실이 하필이면 가장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에게 찾아왔을까? 물론 베토벤은 속세의 잡다한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그 결과 누구보다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일 뿐, 젊은 베토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비극이었다. 

베토벤에게 청력 상실은 이중의 고통이었다. 치료하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릴 수 없었다. 다정다감한 그였지만 사람을 피하게 됐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1802년 10월, 그는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비통하게 호소했다.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그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마음을 토로할 수도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 1802년 10월 6일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베토벤을 일으켜 세운 것은 예술이었고, 인류에 대한 사명감이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베토벤은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일어나 불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지치고 절망한 그는 대자연의 품에서 힘과 위안을 얻었다. 베토벤은 1808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할 때 <전원>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오후 2시까지 일을 한 뒤 저녁이 되도록 산책을 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베토벤은 자필악보 표지에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고, 각 악장에 표제를 붙였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기분’, 2악장 ‘시냇가의 풍경’, 3악장 ‘시골 축제’, 4악장 ‘천둥과 폭풍’,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3, 4, 5악장은 휴식없이 연주된다. 

월트 디즈니는 이 곡을 올림포스 산의 하루에 빗대어 만화영화 <판타지아>를 만들었다. 뿔 하나 달린 유니콘, 반인반수인 켄타우루스, 하늘을 나는 말들, 그리고 아기 요정들이 나와서 어울리는데, 그 중 4악장 ‘천둥과 폭풍’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판타지아>(1940) 중 <전원> 교향곡 4악장 ‘천둥과 폭풍’, 5악장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http://youtu.be/UlIbtvuzdrc


다섯 악장을 통해 완결된 스토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곡을 ‘표제음악의 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 자연 현상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808년 동짓날,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저녁 6시반에 시작해서 10시반까지 이어진 이 어마어마한 연주회에서 베토벤은 1부 첫곡으로 교향곡 6번 <전원>교향곡을, 2부 첫곡으로 교향곡 5번 C단조를 지휘했다. 두 곡은 같은 날 세상에 나온 쌍둥이인 셈인데, 베토벤의 대조적인 두 얼굴을 보여준다. 5번은 비극적인 운명과 투쟁하여 승리하는 베토벤, 6번은 무한히 자연을 사랑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이다. <운명>보다 <전원>이 먼저 연주됐지만, 악보 출판할 때 순서가 바뀌어 <운명>이 5번이 되고 <전원>이 6번이 됐다. 

혼탁한 나날, 대자연의 힐링이 절실하다. 자연의 품에서 잠시 쉴 때, 베토벤 <전원> 교향곡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자연을 예찬하지만, 결국 인간을 위로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다. 베토벤이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하더라도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을 것이다.



21살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여행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90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90
http://youtu.be/_HX_jF1_Tgc (파보 예르비 지휘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교향악단)


“드디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이제 시작됐고, 나는 이미 그 속에 푹 빠져들었다.”

1830년 10월 10일, 멘델스존은 마침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멘델스존은 티치아노의 그림을 맘껏 보았다. 특히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인 <성모승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옛 거장의 그림은 젊은 멘델스존의 마음속에 음악으로 메아리쳤다. 산마르코 광장, 통곡의 다리, 가면 축제…. <이탈리아> 교향곡의 첫 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빠르고 생기있게)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행복감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있는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 / ▲ 멘델스존이 그린 피렌체 풍경,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 성당이 보인다


그는 피렌체로 발길을 돌렸다. 르네상스의 영광이 살아 숨쉬는 피렌체는 멘델스존의 눈에 푸른빛으로 보였다.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멘델스존은 이 도시의 풍경을 수채화에 담았다. “계곡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았는데, 도시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멘델스존은 로마에서 겨울을 났다. 로마의 첫인상은 밝게 빛나는 달빛 같았다. 그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햇빛 잘 드는 아파트를 전세 낸 뒤 일과표대로 규칙적으로 지냈다. 정오까지는 작곡에 몰두했고, 오후에는 로마의 명소를 관람했고, 저녁때는 카페 그레코를 찾아 독일 출신 화가들과 어울렸다. 손님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고, 이탈리아의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유복했던 멘델스존의 여행은 모차르트의 그것과 달랐다. 직업을 구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견문을 넓히기 위한 관광 여행이었다. 이 21살 청년은 위대한 철학자 모세 멘델스존의 손자였고, 부유한 은행가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아들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가까운 곳에서 본 게 난생 처음이었다. 카필라 성 밖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처음 목격한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젊은 그는 마음이 아팠다. 

“수많은 거지들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모습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았다.”

이탈리아는 지저분하고, 벼룩이 들끓고, 바가지 상혼이 극성이었다. 그는 소매치기 당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해야 했고, 이탈리아 말로 얘기해서 외국인이 아닌 체 했다. “역겨운 사기꾼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속임수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장사꾼들이 접근하면 그 물건을 안 산다고 대답해야 했다.” 나폴리에서는 종교 행렬을 목격했다. 슬픔에 잠겨서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멘델스존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달콤하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멘델스존은 여느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안고 여행을 떠났다. 1830년 5월 베를린 출발, 바이마르에서 괴테를 만났다. 일찌기 어린 멘델스존의 재능을 찬탄했던 괴테는 40여년 전 자기가 보고 느낀 이탈리아 얘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음악의 수도 빈과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들렀는데, 뼈아픈 실망을 느껴야 했다. 그 곳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와 요젭 라너의 왈츠에 열광하고 있었을 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음악의 성지에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통속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까지 순진하게 품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했다. 

찬란한 르네상스의 중심, 바로크 음악의 위대한 거장들을 낳은 이탈리아는 좀 다를까? 마찬가지였다! 멘델스존이 고전음악을 찬미하면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웃어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음악에 대해 무지했고, 음악가들을 존중할 줄 몰랐다. 오케스트라는 선율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았고, 합창단의 화음은 엉망이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의 유산인 베키오 궁전의 바닥에 침을 뱉었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품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으려고 연필과 칼을 들이댔다. 

“사람들은 종교가 있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교황과 정부를 가졌지만 그것들을 조롱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졌지만 거기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가 로마에 머물 때 교황 비오 8세가 죽었는데, 교황의 죽음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충격이었다. “장례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이 은근히 즐거워하는 모습은 나를 몹시 불쾌하게 했다. 교황의 시신 주변에 사제들이 둘러서서 끊임없이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는 관에 못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탈리아 여행은 21살 멘델스존을 조금 더 성숙시켰다. 그는 평범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맨얼굴을 보고 실망했지만, 그만큼 실제의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카프리섬의 아름다운 바다에서 위안을 맛보았고, 무엇보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의 위대한 문화유산에서 예술적 자극을 받았다. 

“로마의 과거는 내게 역사 그 자체로 다가왔다. 로마 시대의 유적은 내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후세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이룩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매우 흡족했다.”

그의 <이탈리아> 교향곡은 이 여행에서 얻은 인간적 성숙의 기록이다. 경건한 D단조로 된 2악장 ‘순례자의 행진’은 나폴리에서 본 종교 행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아한 3악장 콘 모토 모데라토(평온하게, 보통 빠르기)에 이어지는 4악장 프레스토 (아주 빠르게)는 이탈리아의 전통 무용인 살타렐로다. 격렬한 크레센도로 끝나는 이 피날레는 이탈리아의 태양과 열정에 바치는 오마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에 머물 때 착수한 이 교향곡은 만 2년이 걸려 완성했고, 1833년 5월 13일 런던에서 초연했다. 


멘델스존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2~4악장 
http://youtu.be/hxhq34CXx6U (폴커 하르퉁 지휘 쾰른 뉴 필하모닉 관현악단)



 로마에서 만난 멘델스존과 베를리오즈 


1831년 3월, 멘델스존은 로마를 찾은 베를리오즈를 만났다. 그는 멘델스존보다 6살 위로, 전해에 발표한 <환상>교향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아직은 무명이었다. 로마대상을 받아서 전업 작곡가로 이제 막 발돋움하려는 참이었다. 이에 비하면 멘델스존은 이미 유럽 전역에 천재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두 젊은 천재는 의기투합해서 타소의 무덤을 찾아갔고, 카라칼라 목욕장의 폐허를 함께 보았다. 두 사람은 기질이 무척 달랐다.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의 지나친 허세와 감정분출이 거슬렸고,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이 너무 얌전하다고 느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로마대상 수상작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첫 부분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고 실토했다. 멘델스존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난 당신이 그 곡을 좋아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솔직히 그 곡은 아주 형편없어요.” 베를리오즈는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베를리오즈는 신을 조롱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순간 멘델스존이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굴렀다.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농담을 던졌다. “신성한 정의가 이뤄졌도다! 내가 신성모독을 하니까 자네가 굴러 떨어지지 않았나.” 


▲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좌)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우)

베를리오즈는 작곡가 멘델스존을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그의 취향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떨칠 수 없었다. 12년 뒤 그는 “멘델스존은 죽은 자들(=선배 작곡가들)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다. 베를리오즈 자신의 급진적인 음악관에 비하면 멘델스존의 보수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를리오즈에 비해 온건했던 슈만은 멘델스존이 “바흐, 베토벤 등 위대한 거장들의 유산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시대를 열 작곡가”라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같은 시대의 베를리오즈와 바그너는 정치와 예술의 혁명을 꿈꾸었지만, 멘델스존은 전통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2009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해 음악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활발히 논의했지만, 그의 음악 행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슈만의 기대처럼 “제2의 베토벤을 예견케 한 19세기의 모차르트”였는지, 한스 폰 뷜로의 말처럼 “천재로 태어났으나 재주꾼으로 끝난” 평범한 작곡가였는지,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의 38살 인생은 음악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큰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 짧았다.



“멘델스존은 19세기의 모차르트”

피아노 트리오 D단조와 슈만의 비평


http://youtu.be/GtaJ9bStLRs (연주 : 보자르 트리오)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D단조는 그의 실내악곡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베토벤의 <대공>, 차이코프스키의 <어느 예술가의 추억>, 드보르작의 <둠키>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 중 가장 널리 연주된다. D단조의 슬픈 서정성과 우수가 배어 있지만 멘델스존 특유의 우아하고 유려한 표정이 넘친다. 

이 곡을 들으면 사라장을 취재할 때가 떠오른다. 사라장은 1995년 애스펜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브루크 스미스, 첼리스트 린 해럴과 함께 이 곡을 연주했는데, 촬영이 허용된 시간은 20분이었다. 음악제 홍보담당 데비 에어가 옆에서 시간을 재며 감시하는 악역을 맡았다. 나는 뻘쭘한 분위기를 깨려고 “너와 함께 음악을 들으니 참 아름다운 저녁”이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이 말에 데비가 깔깔 웃은 게 기억난다. 4악장에서 첼로가 우아한 코다를 연주하는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데비는 아름답게 노래하는 2악장이 제일 좋다고 했다. 애스펜 음악제의 추억, 그 행복한 빛깔과 이 곡의 분위기가 기막히게 일치한다. 



▲ 펠릭스 멘델스존 (좌·1809~1847)과 로베르트 슈만 (우·1810~1866)


멘델스존은 1835년 아버지를 여의었고, 1837년 세실 장르노와 결혼했고, 1839년 이 곡을 작곡했다. 이제 30살, 성숙하여 무르익는 멘델스존의 모습이 담긴 곡이다. 슈만은 이 D단조 트리오를 평하며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그는 스스로 고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를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영리한 작곡가입니다. 이 시대의 모순을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화해시키려고 처음으로 노력한 사람입니다.” 
- 슈만,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문집>. 이미배 등 공저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음악세계) p.280 재인용


슈만이 생각한 ‘19세기의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일까? 10대의 멘델스존이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천재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피아노 트리오의 맑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도 공감할 만하다. “이 시대의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슈만의 말은, 멘델스존이 과거의 위대한 음악 전통을 딛고 서서 19세기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진정한 천재라는 뜻이었다.


슈만은 작곡가이기 전에 음악 비평가로 활약했다. 그는 1834년부터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통해 글을 발표, 동시대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쇼팽을 발견한 뒤 “여러분,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춥시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베를리오즈의 비범한 천재성을 찬미한 것도, 후배 브람스를 세상에 알린 것도 <음악신보>였다. 슈만이 애정과 기대를 표현한 또래 작곡가 중에는 멘델스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온 뒤 처음 만났고, 1847년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슈만은 비평으로 멘델스존의 이해를 도왔고, 멘델스존은 슈만 교향곡을 지휘하여 세상에 알렸다. 슈만이 발굴한 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를 멘델스존이 지휘해서 음악사에 복원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슈만은 ‘다비드동맹’(Davidbund)이라는 가상의 음악 모임을 만들어 비평을 전개했는데,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분신이었다. 플로레스탄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면모라면, 오이제비우스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면모였다. 멘델스존은 다비드동맹에 ‘메리티스’(Meritis)란 가명으로 등장한다. 

슈만의 비평은 음악작품이나 작곡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신흥 부르조아는 급속히 보수화되고 있었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스타 연주자를 구경하려고 연주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연주회장은 상류층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사교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정작 음악이 시작되면 지루해 하며 졸기 일쑤였다. 

슈만에게 속물이란 ‘금박 입힌 문화인’의 동의어였다. 화려하고 고상하게 껍데기를 치장했지만 속마음은 고귀한 예술혼과 거리가 먼 신흥 부르조아를 슈만은 혐오했다. 슈만은 “평온함과 안락함을 생활신조로 삼고 가정의 행복과 탈없는 일생을 바라는” 19세기 부르조아의 세계관을 비판했고, 다비드 동맹에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입을 빌어 19세기의 속물들을 질타했다. 슈만에게 멘델스존은 새로운 베토벤의 길을 열어 줄 ‘19세기의 모차르트’였다. 

“그는 (음악사에서) 마지막 작곡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후에 베토벤이 왔듯, 이 현대의 모차르트 뒤에는 새로운 베토벤이 따라올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태어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슈만, 같은 글.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 p.280


슈만이 상상한 ‘새로운 베토벤’은 누구였을까? 19세기의 천재들에게 베토벤은 가장 위대한 음악가의 이상이었고, 도전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베를리오즈, 바그너, 브람스, 말러가 각각 다른 길로 베토벤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그 시도가 모두 실패였다고 섣불리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분명한 것은 베토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베토벤 자신이었듯, 19세기의 천재들도 베토벤과 비교하기 전에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모차르트가 열어 놓은 자유음악가의 길에서 ‘인류를 위한 바커스’ 베토벤이 탄생했고, 베토벤 이후의 자유로운 천재들은 모두 자기 개성을 꽃피웠다. 수많은 꽃이 만개해 있을 때 어느 꽃이 더 가치있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멘델스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한스 폰 뷜로는 “멘델스존은 천재로 태어났지만 재주꾼으로 끝났다”고 혹평했고, 20세기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멘델스존은) 부유한 독일 부르조아의 상징”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슈만의 평가는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1838년 클라라 비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만은 멘델스존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어찌 멘델스존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난 아직 수년간 그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 배울 점이 있겠지요. 내가 멘델스존처럼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로 성장하도록 운명 지어진 환경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그를 능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슈만은 원치 않는 법학 공부를 하다가 음악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지 못해 뒤늦게 전공을 바꾼 아픔이 있었다. 20대 초까지 그는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생활비도 없이 공부해야 했다. 클라라 비크를 사랑했지만 그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상태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한 가문에서 자라난 멘델스존을 생각하면 자기의 처지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라 부를 때, 슈만은 어쩌면 새로운 베토벤이 되어 있을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멘델스존이 죽은 해인 1847년, 슈만은 피아노 트리오 한곡을 작곡해서 아내 클라라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 클라라는 첫 악장을 가리켜 “내가 아는 곡 중 가장 사랑으로 가득 찬 작품”이라고 했다. 멘델스존의 트리오와 똑같은 D단조, 두 곡은 잘 어울리는 짝꿍 같다. 두 사람은 좋은 친구였을 뿐,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관계는 아니었지 싶다. 


슈만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 Op.63 http://youtu.be/-QpEDDKqyYQ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교황이 남긴 음악

교황이 떠난 자리에 맴도는 음악, 모차르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http://youtu.be/6KUDs8KJc_c 
(번스타인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 연주)


주류 언론이 짠맛을 잃은 요즘, 제 정신 있는 기자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SBS의 윤창현 기자는 SNS에 올린 글에서 “온갖 휘장과 총, 칼을 찬 군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열을 하며 최고의 예우를 갖춰 교황 방한을 환영했다”고 묘사한 뒤, “일체의 격식과 권위를 배격하고 낮은 곳을 찾았던 분 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휘장과 총, 그리고 칼을 찬 군인들을 동원한 예의가 얼마나 반가웠을지 의문”이라고 느낌을 밝혔다. 


상식 있는 눈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다. “의전이란 게 양측이 합의해서 이뤄지는 거”라는 비판도 있었다. 규칙과 관행에 눈이 멀어서 단순한 진리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의장대의 젊은 병사들마저 축복해야겠다는 생각이 교황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은 것은 윤 기자의 지적대로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교황 방한을 결산하는 리포트 중 돋보이는 게 있어서 기자 이름을 보니, 역시 윤창현이었다. 

그는 “교황에게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리더십,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4박 5일간 교황의 미소를 바라보며 취한 듯 위안을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엔, 다시 휑한 구멍이 뚫릴지 모른다”고 지적한 뒤, “그 구멍을 메워줄 리더십과 신뢰를 우리 사회 지도층이 갖출 수 있을지, 교황은 무거운 숙제를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고 결론지었다. 교황이 떠난 지금,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리포트라고 생각한다.


http://w3.sbs.co.kr/news/newsEndPage.do?news_id=N1002541763 
힘들 때 기댈 ‘참 리더’… 교황이 남긴 숙제


이 리포트의 배경에 흐른 음악은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였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합창곡이다. 생애 마지막 해인 1791년,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와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었다. 몸이 허약한 아내가 요양을 위해 빈 근교의 바덴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편지를 쓸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해 6월, 모차르트는 콘스탄체를 만나러 바덴을 찾았고, 그 곳 합창단의 지휘자 안톤 슈톨(Anton Stoll)의 부탁으로 이 모테트를 작곡했다. 

“성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몸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옆구리에서 귀한 피 흘리셨네.
우리 죽을 때 그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


바덴에서 막내 아들 프란츠 자버가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다섯 아이 중 네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아기는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차르트는 연민에 가득한 아버지의 눈으로 갓난아기를 바라보았으리라. 옆구리에 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눈빛도 그러했을까.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고통 가득한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들을 위한 축복의 노래다. 이 곡을 작곡할 때 모차르트는 자신이 바로 그해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대가 없는 사랑을 말없는 슬픔으로 노래한다. 브뤼셀에 사는 인기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잔뜩 사 들고 백화점을 나선다. 그는 선물 받은 이가 기뻐하며 칭찬할 것을 상상하며 혼자 흐뭇해한다. 거리에서 노인 합창단이 <아베 베룸 코르푸스>을 부르고 있다. 순간 그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는 예수가 수난을 겪고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노래의 거울에 비쳐 본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값진 선물을 준비하며 오직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만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에릭은 문득 자기 마음에 켜켜히 쌓인 이기심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에 몸을 떤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바꾼 순간, 선물들은 다시 축복으로 돌아온다.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에서)

생명은 하나하나 소중하다. 세상의 빛을 향해 눈을 뜨는 모든 아기는 경이롭다. 그런데 왜 세상은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걸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이명원 교수는 자신의 삶과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삶이 4월 16일을 기점으로 갈라졌다고 말한다. (이명원 <인간의 권리, 인간에 대한 예의>, 한겨레, 2014. 8. 18) 304명이 허망하게 사라져 간 그날 이후, 생명의 상실은 회복될 수 없었다. 죽은 이를 살려내라는 통절한 절규를 속으로 삼키며 오직 ‘진상규명’을 요구할 뿐이었다. 

이명원 교수의 글을 뒤집어 보면, 4월 16일을 기점으로 내가 김영오씨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공감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유족들의 아픔을 방관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목숨을 건 단식이 계속되고 있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박대통령이 유족과 함께 진심으로 울었다면 세월호 법안 처리가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법안 처리도 ‘골든 타임’을 놓쳤다. 

교황이 달고 있던 세월호 추모 리본을 보고 어떤 이는 “중립을 지켜야 하니 떼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말에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중립이 뭔가? 객관성의 외피를 뒤집어 쓴 냉담이고, 결국 얄팍한 타산 아닌가? 상처 입은 이들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중립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교황이 떠난 뒤 달라진 게 있을까? 세상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하다. 눈물과 하소연은 공허하게 메아리치고, 상처 입은 유족들의 옆구리는 여전히 피 흘리고 있다. 교황이 떠난 자리에 여운처럼 울리는 음악,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말없이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다. 


http://youtu.be/TKX_cCkHO9I
모차르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빈 소년합창단 노래)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인가?

음악사를 균형 있게 보기 위한 작은 성찰


바흐 <마태수난곡> 중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 http://youtu.be/aPAiH9XhTHc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무엇보다 ‘음악가의 아버지’다. 그는 두 번 결혼해서 2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 요한 크리스찬은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남겼다. 거대한 음악가문의 일원인 것을 자랑스레 여겨 집안의 음악족보를 만든 바흐는 자신이 ‘음악가의 아버지’라는 건 흔쾌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갑내기 작곡가 헨델(1685~1759)이 유럽 음악계를 석권한 최고의 스타였던 반면, 바흐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진보적인 작곡가 텔레만(1681~1767)의 활약과 명성이 훨씬 두드러졌다. 바흐는 궁정과 교회를 위한 음악을 만들며 조용히 살았다. 그는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음악을 배웠고, 비발디의 협주곡 악보를 구해서 공부했다. 누군가 자기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바흐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에구, 별 말씀을… 제가 음악의 ‘아버지’면, 비발디는 음악의 ‘할아버지’게요?”



▲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동년배 작곡가들이 있다. 이들의 음악을 기억하고 즐겨야 ‘음악의 편식’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왼쪽부터 바흐(1685~1750), 텔레만(1681~1767), 스카를라티(1685~1767), 헨델(1685~1759)


바흐는 세상을 떠난 뒤 음악애호가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 오히려 아들인 칼 필립 엠마누엘이나 요한 크리스찬이 18세기 고전음악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걸로 평가됐다. 물론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몇몇 위대한 작곡가들이 바흐 음악의 가치를 알아보긴 했다.


모차르트는 빈 도서관장 반 슈비텐 남작에게서 바흐의 악보를 빌려서 공부했고, 바흐의 푸가를 현악사중주로 편곡했다. 베토벤의 책상 위에는 늘 바흐의 악보가 있었다. ‘바흐’(Bach)는 독일말로 ‘시냇물’이란 뜻인데, 베토벤은 “바흐는 시냇물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라고 말했다. 쇼팽은 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습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교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흐의 종교음악은 19세기 초에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된 것은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발굴해서 무대에 올린 뒤였다. 이 연주회는 음악사의 전설적인 사건이 됐다. 15살 생일 때 외할머니 벨라 잘로몬으로부터 <마태수난곡> 악보를 선물 받은 멘델스존은 20세 되던 1829년 3월 11일 드디어 이 곡을 부활시켰다. 이 대곡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였다.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연주회장 앞에서 발길 돌린 사람이 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지휘봉을 들고 침착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수난곡>을 되살린 것은 음악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힌다. 그러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떠받든 것은 신흥 개신교 세력의 음모라는 시각도 있다.


알토 파트를 맡아 노래한 누나 파니 멘델스존의 증언이다. “음악은 연주회장보다 교회에 어울릴 법한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의 말이다. “영원히 위대하고 무한히 기적적인, 강력하고 고귀한 작품이다. 이토록 완벽한 공연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멘델스존은 헌신과 특출한 재능으로 비범한 일을 해냈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바흐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부활했고, 어느새 ‘음악의 아버지’ 자리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 칭호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정설이 됐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최근 강연에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른 것은 유럽 개신교 세력의 엄청난 음모였다”고 질타했다. 산업혁명 이후 부를 거머쥔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자신의 문화를 대변할 아이콘을 찾다가 독실한 개신교도 바흐를 발견하고 떠받들게 됐다는 것이다. 하긴, 연주 시간 3시간에 이르는 <마태 수난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건 기독교도가 아니라면 무척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멘델스존은 유태인 명문가 출신이었다. 멘델스존은 7살 때인 1816년 기독교로 개종한 뒤 평생 루터교 신앙 속에서 살았다. 하이네의 말에 따르면 유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 수난곡>을 발굴, 지휘한 것은 유럽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흐의 종교음악을 부활시켜서 음악사의 큰 공백을 메운 멘델스존의 노력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게 특정 세력의 ‘조직적인 음모’라는 주장은 조금 지나친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남자인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란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가발 쓴 헨델의 초상을 보고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동갑내기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67)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는 현실도 아쉽다. 지금 들으면 스카를라티가 바흐보다 더 ‘근대적인 음악’으로 들린다. 바흐에 열중하다 보니, 동시대의 거장 텔레만의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 것도 안타깝다.


바로크 음악의 모든 시냇물이 바흐에게 흘러들어가 거대한 바다가 된 것은 사실이다. “만약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만 남는다면 재건할 수 있다”는 어느 음악학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떠받들다 보니, 음악사 전체를 균형 있게 보기 어려워졌고 음악을 편식하는 부작용이 생겨난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



포레의 ‘파반느’는 어디로 갔을까?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사랑도 흘러간다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죽은 아이들이 돌아올까?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비극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스코트 피츠제랄드 원작, 브래드 피트 주연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에서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뉴올리언즈 역의 시계 바늘은 거꾸로 돈다. 화면이 리와인드(rewind)되며 전쟁에서 스러져 간 젊은이들이 다시 일어나고, 부모와 헤어지던 순간은 만남의 순간이 된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을 아픈 경험들이 모두 백지화된다. 이 기적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거꾸로 돌아가는 화면은 보는 이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벤자민은 바로 이때 태어난다. 그런데, 이 아기의 얼굴은 84살 먹은 노인이다. 보통 어린이는 점점 커져서 어른이 된 다음 늙어서 죽는 반면, 벤자민은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고, 아기로 돌아가서 죽는다. 데이지와 벤자민은 평생 사랑한 사이였다. 영화에서 관객은 데이지의 시선으로 벤자민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트레일러 http://youtu.be/rAYtpZgelAM


벤자민과 데이지는 사랑의 네 계절을 경험한다. 키작은 노인 벤자민과 6살 소녀 데이지는 정다운 친구가 된다. 벤자민은 선원 생활을 하며 떠돌다가 2차대전에 참전한 뒤 돌아오는데, 나이는 27살이지만 용모는 50대 아저씨다. 뉴욕시티발레에서 활약하는 발레리나 데이지는 인생의 풍상을 겪은 중후한 신사 벤자민에게 매력을 느낀다. 데이지와 벤자민은 세월이 흘러 뉴올리언즈에서 다시 만나는데, 이때 두 사람 다 30대 후반, 인생의 정점이다.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딸 캐롤라인을 낳을 무렵, 데이지는 이미 ‘연상의 여인’이다. 데이지가 행복의 정점에 취해 있을 때, 벤자민은 그녀 곁을 떠난다. 자신은 곧 어린이가 될 거고, 그녀는 홀로 두 아기를 키우는 싱글맘이 될 게 뻔했다. 인도로 훌쩍 떠난 벤자민은 10여년 뒤, 어린 소년이 되어 돌아온다. 데이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고 딸 캐롤라인은 벤자민 또래의 여학생이다. 다시 10년이 흘러 홀몸이 된 데이지는 아기 벤자민을 보듬어 안아 준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80대 늙은 아기 벤자민은 데이지의 품속에서 평화롭게 잠든다.     
    
인생의 사계절은 아름답다. 법륜 스님은 에세이 <행복하게 늙어가려면>에서 말했다. “새로 돋아나는 연두빛 새 잎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은 초록대로, 울긋불긋한 단풍은 단풍대로,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낙엽대로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늙음도 단풍처럼 아름다움의 하나입니다.” 사계절에 따라 사랑의 빛깔도 달라지지만 모두 아름답다. 이 영화에 나오는 벤자민의 대사 하나가 오래 남는다.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원하는 사랑을 하는 데에 너무 늦은 법은 없습니다.”


이 영화에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파반느>가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한 음악 칼럼니스트가 일간지의 <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에 그렇게 썼고, ‘영화 속 명곡’ CD 앨범에 단골 메뉴로 들어갔고, 심지어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기획음악회 ‘현을 위한 영화음악’(Film Music for Strings)의 레퍼토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에는 포레의 <파반느>가 나오지 않는다. 한 음악 칼럼니스트가 착각으로 그렇게 썼고, 인쇄된 글에 설마 황당한 오류가 있겠느냐 생각한 음반 제작사가 받아 적었고, 연주단체도 아무 의심 없이 음악회에 활용했다. 그 결과 잘못된 인식이 널리 확산된 것이다.


가브리엘 포레 <파반느> http://youtu.be/HhiVuIRw4tM            
(사이먼 래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


혹시 내가 착각했을까, 영화를 거꾸로 돌려보았지만 포레의 음악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레의 <파반느>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건 사실이니, 음악 칼럼니스트가 착각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데플라(Alexandre Desplat)다. 그가 만든 음악은 포레의 표절은 아니지만 느낌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음악은 가능한 한 은근한 게 좋아요. 부드럽게 흘러가야죠. 감정이 고조되면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자연스레 들리다가 조용히 사라져야 합니다.” 헐리웃 영화음악은 대개 에너지가 넘치고 웅장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음악은 언제나 부드럽고 잔잔하게 흐른다. 60명~90명의 꽤 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지만 실내악처럼 고요하다.  


포레의 <파반느>는 프랑스 향수를 뿌린 듯한 섬세한 아름다움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듯한 신비를 듬뿍 머금고 있다. 모나지 않은 감수성에 우아한 환상이 고요히 흐른다. 포레의 음악을 듣노라면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헤어진다. 당신들은 삶의 길로, 나는 죽음의 길로.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아무도 모른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여 역설적으로 사랑의 깊은 의미를 보여주는데, 포레의 <파반느>는 이 영화의 신비스런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


파반느는 16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 궁정에서 유행한 3박자의 느린 춤곡이다. 이탈리아의 파도바에서 시작됐다는 말도 있고, 공작을 뜻하는 스페인어 ‘파본’(pavón)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꼬리를 활짝 편 공작처럼 화려하고 기품 있다. 포레는 1887년 피아노를 위해 이 곡을 작곡한 뒤 “우아하지만, 다른 특별한 의미는 없는 곡”이라고 스스로 설명했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널리 사랑받는 이 곡은 포레 시절에는 요즘처럼 선선한 저녁, 야외에서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음악의 방랑자’ 슈베르트의 텅 빈 피아노

피아노 소나타 Bb장조 D.960


피아노 소나타 Bb장조 D.960 http://youtu.be/0CAtqP8esPQ


슈베르트(1797~1828)는 31살 짧은 생애에 엄청나게 많은 곡을 썼다. 650곡의 노래를 남겨 ‘가곡의 왕’으로 불리며 오페라, 종교음악,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모든 장르에서 숱한 걸작을 남겼다. 음악사에서 모차르트를 제외하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슈베르트의 마음은 언제나 선율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로 인정받기 위해 밤낮없이 애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침마다 곡을 쓴다. 한 곡을 완성하자마자 또 다른 곡에 착수한다.”  


슈베르트는 10대 시절 임시 교사 생활을 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16살 되던 1814년 가을, 첫사랑이 찾아왔다. 그가 활동하던 교회 성가대의 소프라노 테레제 그로프였다. 슈베르트는 1815년 한해에만 <마왕>, <들장미>, <달에게 부침>, <소녀의 탄식> 등 무려 144곡이나 되는 빼어난 가곡을 썼고, 작곡하는 내내 테레제를 그리워했다. 이 많은 노래는 단 한 푼도 현금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내면의 방랑자’ 슈베르트는 꿈과 음악에서 충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사랑의 상처마저 달콤한 선율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은 언제나 그를 빗겨갔다. 당시 음악가는 오페라로 성공해야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는데, 그가 작곡한 17편의 오페라는 모두 인기가 없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피아노 소나타를 썼지만,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 있는 빈 음악계에 자기 작품을 내밀지 못했다. <군대> 행진곡 등 네 손을 위한 작품을 40여 곡 썼지만, 친구들의 모임에서 연주하는데 그쳤을 뿐, 대중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   


음악 친구들의 모임 ‘슈베르티아데’의 한 친구는 훗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슈베르트가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위대한 천재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슈베르트는 평생 경제적으로 불우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작곡가들은 교회와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두 ‘자유 음악가’가 됐지만, 안정된 생계를 꾸리는 일은 오히려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무한경쟁와 승자독식 시대가 시작됐고,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판업자들은 언제나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었다. 대중에게 낯선 슈베르트에게 작곡료를 치르는 것은 출판업자들에게는 모험이었다. 18살 되던 1816년 7월 17일 그는 일기에 썼다.


“오늘 처음 작곡으로 돈을 벌었다. 칸타타 한 곡의 작곡료로 100굴덴을 받았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의 혁명 전쟁이 막을 내리고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가 들어서고 있었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신흥 부르주아는 떠들썩한 왈츠와 유흥 음악에 탐닉했다. 슈베르트는 이러한 사회의 세속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내면의 깊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 고립감 속에서 오히려 마음속의 황홀한 빛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선배 작곡가 모차르트나 베토벤에서 볼 수 없었던 낭만주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됐다. 그는 해가 갈수록 더 치열하게 노력했다.


주어진 수명이 몇 해 남지 않았음을 슈베르트도 예견한 것일까. 그는 매우 급하게 작품을 썼다. 한 나절이면 한 곡을 완성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초인적인 집중력이었다. 1822년, 매독에 걸린 해부터 슈베르트가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역설이다. 그는 여전히 무일푼이었다. 작곡료를 받기만 하면 친구들과 만찬을 벌여 모두 써 버리곤 했다. 낭만과 공상에 빠져 평생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 슈베르트는 31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완성> 교향곡과 <대교향곡> C장조는 그의 사후 발견됐다. 그가 남긴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 슈베르트가 교향악과 피아노 음악의 대가로 인정받은 건 그가 사망하고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마지막 해, 목숨을 건 작곡은 계속됐다. 소심한 성격의 슈베르트는 대중 연주회를 기피했지만, 1828년 3월 처음 공개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뒀다. 슈베르트는 이 연주회로 꽤 큰 돈을 벌었고, 생전 처음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그가 죽던 해에 쓴 세 곡의 소나타(D.958, 959, 960. ‘도이치 번호’로 불리는 ‘D’는, 1951년 슈베르트의 작품을 정리해서 목록을 만든 음악학자 오토 도이치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슈베르트의 특징인 ‘방랑자 의식’을 담고 있는데, 깊은 영혼의 울림과 서정성을 들려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31살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 소나타를 슈베르트는 어렵게 장만한 자기 소유의 피아노를 쳐 가며 작곡했을 것이다.  Bb장조로 된 마지막 소나타 D.960은 외로운 천재 슈베르트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이라 할 수 있다. 방랑자의 시정을 담은 한 프레이즈가 끝날 때마다 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트릴이 이어지는데, 작곡 당시 슈베르트의 어두운 심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슈베르트는 가난하던 시절, 일기에 썼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는 그저 작곡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한번 살다 갈 인생의 여행길,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사방에 가득하다. 음악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작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슈베르트는 마지막 가곡 <바위 위의 목동>에서 노래했다. “봄이 왔다. 봄, 나의 기쁨.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꿈꾸는 방랑자는 텅 빈 피아노를 남겨두고 봄을 찾아 떠났다.



음악에 우열이 있을까?  -  비틀즈 <비코즈>와 비발디 <가을>


비틀즈 <비코즈>  http://youtu.be/dWlLPJG9Cvg


“세상은 둥글기 때문에 나를 돌게 하지. 바람이 세차니까 내 마음 속에 불어오지. 하늘이 푸르니까 눈물이 흐르지.”




비틀즈의 <비코즈>, 가사를 음미하니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마음이 아려지며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후렴이 살짝 이어진다. “사랑은 모든 것, 사랑은 바로 너.” 이 노래는 가사 뿐 아니라 애수어린 분위기가 비발디 <가을>의 2악장과 닮았다. 비발디는 <사계>의 각 악장마다 소네트를 하나씩 써 넣었다.


“축제 뒤에 흐르는 평화로운 적막,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멈추었다. 이 가을은 만물을 달콤하기 그지없는 잠의 즐거움으로 초대한다.” - <가을> 2악장


비발디 <가을> 중 2악장  http://youtu.be/QxqfxDWgxQE



▲ <사계>를 작곡한 ‘빨강머리 신부’ 비발디 (1678~1741)


클래식 음악을 소개한답시고 가을에 비발디의 <가을>을 말하는 것처럼 바보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나 축제니, 춤과 노래니, 달콤한 잠은 커녕, 불통의 정치에 화낼 기운조차 없는 요즘, 수십일 굶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 피자와 치킨을 먹어대는 반인간적 행태 앞에 말도 하기 싫어지는 이 야만의 계절에….


클래식을 소개하다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문할 때가 있다. 듣는 이가 필요로 하는 게 이게 아닐텐데, 하는 회의랄까…. 실제 생활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힐링’이란 건 이러한 현실을 제쳐두고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일종의 여흥이다. 그렇다면 이미 좋아하는 곡을 듣는 게 ‘힐링’이지,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오히려 피곤한 일 아닐까.


클래식 해설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음악에 서열을 짓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클래식은 수준 높고 대중음악은 열등하다,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클래식이 훨씬 더 좋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무의식중에라도 이런 전제를 깔고 있다면 오만한 일이다. 이런 속내를 숨기고 겸손한 체 한다면 그건 위선이다. 클래식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별별 전략을 다 쓴다.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클래식을 활용하거나, 작곡자의 사랑이 작품으로 이어진 에피소드를 들려주거나, 대중가요와 선율이 비슷한 클래식을 골라서 흥미를 유발하는 등 무척 애를 쓴다. 그러나 클래식의 장벽은 좀체 낮아지지 않는다.   


듣는 이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뭔가 고상한 걸 들려주나 보다, 좋긴 한데 그리 대단한지는 모르겠다, 질문을 하려니 “그것도 모르냐” 무안을 당할 것 같아서 손들기가 망설여진다…. 클래식의 권위 앞에 지레 주눅드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음악 강연’을 하거나 팟캐스트를 할 때 “클래식은 고상 떠는 게 아니다,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 아픈 사람들을 위안할 수 있어야 진정한 클래식이다” 수없이 얘기하지만 이 간극은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나 또한 클래식 음악 제일주의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닌지, 그게 과연 옳고 정당한 일인지 한번쯤 심각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동안 문화부 기자를 지낸 조우석씨의 <굿바이 클래식>(동아시아, 2008)을 최근에야 읽었다. “클래식 해설하는 분들이 인문학적 소양이 모자라는 게 아닌가” 누군가 지적한 게 기억나는데, 이 책은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 이야기’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내용은 ‘음악책=안내서’라는 통념을 훌쩍 뛰어넘었다. 클래식 우월주의에 대한 단호한 ‘사형선고’였다. ‘클래식 울렁증’의 뿌리를 해부하여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하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서열을 파괴하여 음악을 해방시키려는 래디컬한 꿈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서양 클래식이 신비화, 우상화된 역사와 메커니즘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19세기 음악학자들은 천재 신화를 조작, 유포하여 작곡가(聖父)를 신격화했다. 이들의 드높은 영혼이 담긴 악보I聖子)는 신성불가침의 문서다. 수십명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이 이룬 서양 고전음악(聖靈)은 인간 정신의 보고로, 다른 모든 음악과 차별화된다. 이러한 클래식의 성 삼위일체 신화는 헤겔, 아도르노, 벤야민 등 철학자들에 의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됐다. 저자는 음악의 서열을 해체하고 작곡가보다는 연주자 중심으로 돌아가야 음악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클래식 음악을 넓고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 분명하므로, 이러한 그의 논지는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나는 조우석씨의 논지에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클래식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귀족적 태도, 클래식 종사자들의 퇴행적 문화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최근 숙대 작곡과 사태가 보여준 음악계의 해묵은 비리, 넘쳐나는 클래식 해설서들의 천편일률적인 몰역사성, 서양에서 건너온 특정 종교가 클래식 음악계를 지배하며 세상과 담을 쌓는 현실 등 한국적 현상들은 조우석씨의 진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조우석씨처럼 쿨하게 “굿바이 클래식!”을 외칠 수는 없다. 클래식 음악계의 전반적인 퇴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나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셰익스피어나 도스토예프스키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위대한 예술이다. 크게 보아, 클래식 음악의 창작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즈음에 숨을 거뒀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기존 작품의 연주와 감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 폄하한다면 지나친 ‘문화혁명’ 아닐까? 조우석씨의 바람대로 클래식을 둘러싼 거품을 가뿐히 거둬낸 뒤 자연스레 향유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음악의 위계와 서열부터 일단 깨 보자. 클래식이 우월하고 대중음악이 저열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이 가을, 비틀즈의 <비코즈>와 비발디의 <가을>을 들어보자. 어느 쪽이 더 맘에 드는가? 듣는 이의 자유다.



새로 발견된 모차르트 자필 악보


피아노 소나타 A장조 K.331 중 3악장 <터키 행진곡>
http://youtu.be/XwRc7ULepDA (피아노 졸탄 코지츠)


모차르트가 스타는 스타인 모양이다. 그가 직접 쓴 악보 4장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언론이 떠들썩하다. 어떤 작품의 악보일까, 음악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서 외신을 모두 뒤져 보았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K.331의 뒷부분 자필 악보 4장이라고 한다. 이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은 유명한 <터키 행진곡>인데, 자필 악보는 맨 마지막 1장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 보관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필사본을 인쇄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4장과 기존의 1장을 합치면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의 자필악보가 완성되는 셈이며, 이것을 연주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그대로 <터키 행진곡>을 처음 듣게 된다니, 그를 사랑하는 팬으로서는 설레는 일이다.    


 

▲ 새로 발견된 모차르트 K.331 자필 악보 / ▲ 헝가리 셰체니 국립 도서관의 음악문서 담당 발라즈 미쿠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국립 셰체니 도서관, 한구석에서 잠자던 이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이 도서관의 음악 문서 담당인 발라즈 미쿠시(42)란 분이다. 그는 컴컴한 서고 사이에서 문서를 정리하다가 빛바랜 노란 악보를 집어들었다. AFP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 “딱 보니까 모차르트 필적과 비슷해 보였지요. 악보를 읽어보니 모차르트의 유명한 A장조 소나타였고, 저는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이 도서관에 부임한 그는, 지난 5년 동안 구석구석 먼지 쌓인 악보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모차르트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악보를 발견한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지요.” 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마지막 1장과 새로 발견한 4장을 연결해 보았고, 세계 각처의 모차르트 전문가들에게 사진을 보내 확인을 요청했다. 진짜가 맞다는 확답을 받았다.


A장조 소나타 K.331은 무척 유명한 곡이다. 특히 3악장 ‘터키 풍의 론도’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이나 40번 교향곡의 첫 주제처럼 딱 들으면 누구나 “아, 그 곡!” 할 수 있는 친숙한 선율이다. 프랑스의 음악학자 조르쥬 생푸아는 모차르트가 파리에 머물던 1778년에 이 곡을 작곡했다고 주장했다. 우아한 분위기의 1악장 ‘주제와 변주’, 프랑스 살롱 풍의 2악장 ‘메뉴엣’, 프랑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국 취향의 3악장 ‘터키 풍의 론도’ 때문이었다. 소나타 형식의 악장이 하나도 없는 프랑스 모음곡 풍의 구성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악보 용지와 잉크 연도를 분석한 결과 이 주장은 틀렸다는 게 밝혀졌다.


모차르트는 1782년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는데, 아버지와 누나가 강력히 반대하자 가족의 동의 없이 빈 슈테판 성당에서 식을 올렸다. 이듬해 3월, 모차르트는 <대미사> C단조를 비롯한 새 작품들을 갖고 고향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다. 결혼에 대한 가족들의 사후승인을 구하는 게 제일 큰 목적이었다. 이 소나타는 모차르트 부부가 잘츠부르크에 머물던 1783년 3월에서 11월 사이에 작곡한 걸로 결론이 났다. 자필악보의 마지막 한 장이 잘츠부르크에서 발견된 것도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4장의 자필악보는 어떻게 헝가리로 가게 됐을까? 모차르트는 헝가리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미스테리다. 당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하나였다. 하이든이 일한 에스터하차 궁전은 지금 헝가리 영토고, 이번에 악보를 발견한 발라즈 미쿠시가 하이든 전문가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누가 어떤 경로로 이 악보를 부다페스트까지 가져갔는지 알려줄 단서는 아직 없다.


셰체니 도서관은 1802년 부유한 귀족인 페렌츠 셰체니 백작이 설립했다. 발라즈 미쿠시의 의견이다. “셰체니 백작은 빈의 음악계를 잘 알고 교류도 했습니다. 악보 1장과 나머지 4장이 따로 있는 것은, 부유한 후원자에게 모차르트가 악보를 기념품으로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헝가리에서 누군가 잘츠부르크로 와서 이 악보를 받아갔는지, 다른 어떤 사연이 있는지, 좀 더 정밀한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악보는 9월 26일, 이 도서관 6층 행사장에서 열린 <연구자의 밤>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발라즈 미쿠시는 <모차르트와 헝가리>란 주제로 강연했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울리히 라이징어 박사가 새 악보의 내용과 의의를 해설했고, 피아니스트 졸탄 코시츠가 새 악보를 사용해서, 모차르트 시대와 똑같은 발터 포르테피아노로 이 소나타 전 악장을 연주했다고 한다. 강연 내용과 연주 동영상은 아직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다.


발라즈 미쿠시의 말이다. “새 악보로 연주하면 음표와 리듬의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곡에 대한 평가를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모차르트가 원했던 표현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로 발견된 4장의 악보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 있는 마지막 1장과 합쳐서 사본을 뜬 뒤, 다시 셰체니 도서관에서 보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9월 26일, 모차르트가 초연한 그대로 이 곡을 한 번 더 초연한 분은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졸탄 코지츠였다. 이 연주 동영상을 아직 볼 수 없으니, 이 분이 기존 악보로 연주한 K.331을 감상하면서 새 연주를 기다려 보면 어떨까. 모차르트(1756~1791) 연구는 참 멀고 복잡한 길이다. 그가 태어난 지 258년, 세상을 떠난지 22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모르는 게 이렇게 많다니….



‘클래식 울렁증’을 해소하는 역설적 방법

테츨라프 사중주단과 소프라노 서예리가 들려준 현대음악


지난주, LG아트센터에서 재미있는 음악회가 연이어 열렸다. 10월 2일에는 독일의 테츨라프 현악사중주단, 3일에는 유럽에서 활약하는 소프라노 서예리가 무대에 올랐다. 두 연주회의 공통점은 레퍼토리에 현대음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테츨라프 사중주단의 연주회.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무대에 오른 곡은 1973년 독일 태생의 외르그 비트만(Jörg Widmann) 작곡 <사냥>이었다. 이날 연주곡 중 단연 재미있는 건 바로 이 곡이었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머리 아픈데 웬 현대음악?” 하실 분도 계실 테니, 아주 쉽고 간단하게 내 생각을 얘기해 볼까 한다. 


외르크 비트만 <사냥> 사중주곡  http://youtu.be/lMDao769Krc (연주 라가체 사중주단)



▲ 현대음악 <사냥>을 들려준 테츨라프 사중주단


비트만의 곡은 연주자가 활을 휘두르고, 악기의 몸통을 두드리고, 온갖 주법을 동원해서 희한한 소리를 낸다. 심지어 연주자가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이 곡을 잘 이해하려면 고도로 훈련된 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종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 유쾌한 사운드를 들려준 건 분명하니, 어렵다고 생각하며 겁먹고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 활을 휘두르는 대목과 연주자가 소리 지르는 대목은 무척 파격적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아무렴 어떠랴. 이 곡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을지는 듣는 이의 자유다. 


다음날 무대에 오른 서예리는 현대음악과 고음악이라는, 얼핏 보면 상극인 레퍼토리를 함께 노래하는 성악가다. 그는 몬테베르디, 쿠프랭, 헨델 등 바로크 음악과 함께 윤이상, 리게티, 진은숙 등 현대음악을 들려주었다.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공부한 그는 “천년을 아우르는 목소리”란 평을 듣는다. 고음악의 대가인 르네 야콥스, 필립 헤레베헤 등이 그를 캐스팅했고, 현대음악의 거장 피에르 불레즈가 그를 찬양했다. 
     
원래 그의 전공은 고음악도 현대 음악도 아닌 벨칸토 오페라였다고 한다. 그를 인터뷰한 적이 없어서 단언할 수 없지만, 그가 고음악과 현대음악의 양 극단을 붙잡고 있는 건 유럽 음악계의 최근 추세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스탠스는 우리에겐 무척 독특해 보이지만, 꺼져가는 현대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 동시에 고음악의 보물창고에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아내려는 유럽인들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안톤 베버른 칸타타 Op.31 (2013 루체른 페스티벌 연주, 소프라노 서예리 출연)
http://youtu.be/bjHp0NsY5pI



▲ 현대음악과 고음악의 양극단을 들려주는 서예리 소프라노


20세기 후반 서양 현대음악은 궁지에 몰렸고, “클래식 음악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연주자들은 현대음악에서 레퍼토리를 찾기보다 과거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고음악 열풍’이 일기 시작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 음악계는 몬테베르디, 프레스코발디, 텔레만,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등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뤘던 옛 작곡가들을 재평가하고 비발디, 헨델, 하이든의 오페라를 앞다투어 무대에 올리고 있다. ‘고음악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대음악이 대중과 멀어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유럽 음악계의 자구책이라는 가설이 성립한다.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곡은 조성을 파괴했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리듬을 파괴했고,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악기의 존재를 부정했다. 20세기 음악의 혁명가들은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고자 분투했다. 그들은 대중이 당장은 새로운 음악을 낯설어 할지 몰라도 때가 되면 이해될 거라고 믿었다. 뛰어난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지만 후대에 불멸의 걸작으로 기록된다는 신화였다. 그러나, 이 믿음은 글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말러 등 위대한 작곡가들은 때때로 논란을 낳았을지 몰라도 생전에 청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이 혁명가들은 전통 음악의 기둥을 하나씩 제거하며 그들만의 리그로 흘러갔다. 선배들의 영향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후배 작곡가들은 “무조음악을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무조음악을 해야만 한다”는 불문율의 감옥에 갇혀 버렸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작곡가들은 재즈, 영화음악, 대중 뮤지컬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해체됐고, 무조음악의 규율을 고수한 ‘정통 음악’은 대중들로부터 치명적으로 외면당했다. 쇤베르크는 만년에 “내가 조성음악의 발전을 가로막은 게 아닌가” 반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곡은 창작되고 있으며, 듣는 이와 소통하려는 연주자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이 죽었다”는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몸짓일까.  


20세기 음악의 특징은 한번 듣고 나면 일부러 다시 찾아서 듣고 싶은 마음이 좀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라이브로 한번 들을 때만은 무척 재미있다. 전통적 의미의 음악회가 아니라 흥미로운 이벤트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어떤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어도 좋다. 음악 감상의 ‘별미’라 할 수 있으니까. 


클래식 음악도 탄생과 죽음이 있고, 그 역사는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00여년의 그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보석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클래식 울렁증이 해소되는 것 같지 않은가. 내 입장에서는, 기존의 레퍼토리들은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지만 현대음악이 단 한번 연주되는 자리는 놓치고 싶지 않다. 이미 잘 아는 곡을 라이브로 듣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연주자와 듣는 이가 한 공간에서 호흡하며 교감하는 연주회의 즐거움에 옛날 곡과 요즘 곡이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연주의 일회성을 만끽하기에 ‘현대음악’만큼 좋은 게 없다. 인간의 창조력이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10월

성유보 선생 영전에 드리는 음악 한 송이


언론계의 대선배 성유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후배를 대하셨지만, 언론자유를 향한 의지는 철석보다 강한 분이셨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뒤 40년을 해직기자로 사셨는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성유보 선생의 희생적인 투쟁에 크게 빚지고 있다. 


1980년대 말 방송노조의 깃발을 처음 들었을 때, <방송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란 소논문을 쓰며 선생의 말씀을 인용한 게 기억난다. 시민민주주의란 모든 사회 구성원의 표현의 자유와 다양한 의견의 공존을 보장하자는 이념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언론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소박한 모토였다. 그 목표가 거의 이뤄진 것처럼 보였을 때, 더욱 심각한 과제가 우리 앞에 등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진정 보장되고 있는가? 만일 완벽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그 뒤에 드러난 이 사회구성원의 적나라한 모습은 무엇인가? 선생은 이 문제를 동료, 후배들과 고민하며 해결을 모색하다가 갑자기 떠나셨다.


 ▲ 성유보 전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


광주비엔날레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것을 우리 모두 목격했다.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광주 5·18 희생자들을 폄훼하고 세월호 농성장에서 폭식투쟁을 일삼는 패륜의 현장도 나타났다. 선생께서 추구하신 언론자유가 단순히 말할 권리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보장하는 따뜻한 사회의 기본 조건이었다면, 선생은 필시 ‘표현의 자유’가 오용되고 남용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아파하셨을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선생을 기억하는 정서와 온도는 모두 다를 것이다. 독립PD 박정남은 퇴원하시면 인터뷰 하자고 약속한 직후 선생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안수찬 기자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 성유보 선배를 추억하며 오열했다. 동아투위 선배들의 감회는 더 애절할 것이다. 40년 풍상을 함께 해 온 믿음직한 동료가 떠난 빈자리는 훨씬 더 허전하고 차가울 것이다. 하지만 선생을 떠나보내기 어려운 마음은 선배들이나 젊은 후배들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선생의 영전에 작은 음악을 하나 바친다. 


사람들은 살다 가지만, 1년 사시사철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그 중 10월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12곡의 피아노 소품집인데, 러시아판 악보에는 곡마다 그 달을 묘사하는 시구가 붙어있다. 10월 ‘가을의 노래’는 톨스토이의 짧은 시편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지만, 그림엽서 같은 두 행의 노래가 음악과 함께 가슴을 두드린다. 낙엽 지는 가을이라 더욱 아픈…. 


“우리 가난한 과수원에 내리는 가을…. 노란 낙엽이 바람에 날리네.”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10월 (피아노 : 아나톨리 자틴)  http://youtu.be/AxzD-bOLYyM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온다. 하지만 어느 계절이든 슬픔을 벗어날 수 없다. 4월에는 눈이 녹아내리고 꽃이 피어난다. 눈은 녹아서 눈물이 되지만, 그래도 꽃은 피어서 미소 짓는다.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다. 4월 ‘눈방울’은 마이코프의 시다.  


“푸르고 순결한 눈방울꽃이 피어나고, 그 옆에는 마지막 눈이 내리네. 지나간 슬픔이 남긴 마지막 눈물, 새로운 행복의 첫번째 꿈….”


여름이 온다. <사계>에서 가장 귀에 익은 선율은 6월 ‘뱃노래’일 것이다. 원래 피아노곡이지만,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강수진이 주연한 발레 <오네긴>에 삽입되기도 했다. 결투로 목숨을 잃는 비운의 젊은 시인 렌스키가 발랄한 시골 처녀 올가와 함께 추는 아름다운 이인무에 나온다. 플레세이어의 아름다운 시가 붙어 있다. 


“바닷가로 가자,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입 맞출 거야. 신비로워라, 별들은 우리에게 슬픈 눈빛을 던지네.”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6월  http://youtu.be/3xLQW5rm92s                         


곧 11월이다. <사계> 중 11월 ‘삼두마차’에는 러시아 농민들을 깊이 사랑한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가 붙어 있다. 권력과 영예를 쫓지 말고 네 중심을 잡으라는 엄숙한 내용이다. 외로움을 자꾸 피하려 하면 더욱 나약해질 뿐이니, 어려울수록 네 운명을 사랑하고 껴안으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외롭다고 길을 바라보지 마라. 삼두마차를 따라서 달려가지 마라. 그냥 그리워하라. 홀로됨의 두려움을 단숨에, 영원히 네 가슴 속에서 질식시켜라.”  (네크라소프)


차이코프스키의 11월을 듣다 보니, “오늘날 언론은 27년 전보다 나아졌는가” 질타하신 성유보 선생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언론자유는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다시 권언유착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한 언론은 박근혜 정권에서는 아예 관변화되고 있다. 특히 방송의 정권 예속화가 심각하다.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은 ‘청영방송’(靑營放送)이라 불릴 지경이다.”    - 성유보 <길을 찾아서>, 한겨레신문 2014. 5. 26 


어디 6월 항쟁 이후의 27년뿐이겠는가. 선생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행렬을 목격하셨고, 박정희 ·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40여년을 살아내신 한국현대사의 증인이다. 우리 사는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진 걸까? 선생께서 꿈꾸던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못 보고 떠나신 게 애통하다. 


세상의 변화는 더디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늙어가고, ‘큰 숲’처럼 우리 곁에 계셨던 어른이 떠나신 가을…. 슬픔에 잠겨서 자포자기하고 싶지만 선생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선생은 가셨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선생의 유전자를 나눠 갖고 있다. 따라서 선생은 우리 곁을 아주 떠나신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선생의 명복을 빈다. 



첼로가 그리워지는 이 가을에  -  오펜바흐 ‘자클린느의 눈물’


첼로의 따뜻한 선율과 부드러운 화음이 그리운 요즘이다. 첼로란 악기는? 일단 우아하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는 첼로가 제격이다. 첼로는 친근하고 편안하다. 모양과 크기가 사람의 몸통 비슷하다. 앉아서 끌어안고 연주하는 모습은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첼로의 4줄 중 3번째 현인 G선은 바리톤 음역의 사람 목소리와 흡사해, 대화를 나누는 듯 푸근한 친숙감을 더한다.


첼로의 기원을 생각하면 좀 더 친근한 느낌이 들 것이다. 현악기는 구석기 말~신석기 초에 사냥할 때 쓰던 활에서 유래했다. 활을 쏠 때 ‘퉁’ 하는 소리가 났는데 작은 활은 높은 음, 큰 활은 낮은 음을 냈다. 둘 이상의 활이 내는 소리는 때로 화음을 이루기도 했다. 줄은 뜯거나 퉁겨도 소리가 났고, 문질러도 소리가 났다. 


인류의 조상은 단풍나무와 가문비나무로 울림통을 개발하여 악기를 발전시켰다. 기타, 하프 등 손으로 뜯는 악기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 등 활로 켜는 악기가 분화했다. 첼로 줄은 요즘은 금속이나 나일론을 쓰지만, 원래는 사냥한 동물의 내장을 말려서 사용했다. 영어로 ‘gut’(내장)라 하는 건 그 흔적이다. 줄을 켜는 활은 말꼬리털을 사용하는데, 영어로는 ‘hair’라 한다. 




현악기는 나라와 문명마다 다르게 진화해 왔다. 가야금은 보통 12현이지만 18, 22, 25현 가야금도 있다. 우리나라의 아쟁은 7현 또는 9현이고, 중국의 얼후는 2현이다. 유럽에서는 1823년, 6현 첼로가 개발되기도 했다. 슈베르트가 작곡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에서 ‘아르페지오네’는 바로 6현 첼로의 이름이다. 이 악기는 연주하기가 조금 불편해서 곧 무대에서 사라졌고,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소나타는 요즘은 4현으로 된 첼로나 비올라로 연주한다. 그러나 아르페지오네는 유럽의 고음악 열풍을 타고 2001년에 되살아났다. 악기 생김새를 볼 겸, 음악을 들어보자.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1악장 - ‘생기있게, 절제하여’ (알레그로 모데라토)
http://youtu.be/do9UgdfwM5Q  (아르페지오네 니콜라 델타이유, 포르테피아노 알랭 루디에)


지난 (2014.10) 14일, 서울첼로오케스트라(단장 김금란)의 두 번째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같은 날, 고급 음악팬들은 러시아의 신예 피아노 스타 다닐 트리포노프의 리사이틀을 찾았겠지만 나는 첼로만의 앙상블이 재미있을 것 같고 연주회의 취지가 좋은 것 같아서 기꺼이 이 연주회의 해설을 맡았다. 젊고 의욕적인 지휘자 신은혜가 바톤을 잡았다. 연주회의 제목은 <10월애(愛) 힐링클래식>. 


이 악단은 28명의 첼로 연주자로 이뤄진 독특한 악단이다. 베를린필 12첼리스트만큼 연주 기량이 빼어나지는 못하지만,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가리지 않고 첼로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뭉친 실력파 악단이다. 첼로는 유난히 음역의 폭이 넓은 악기라 고음, 중음, 저음을 모두 낼 수 있다. 첼로 군단이 모이면 오케스트라처럼 중후한 화음을 만들 수 있다. 네 파트 중 제1첼로는 바이올린의 영역을 첼로가 연주하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한다. 실수하기 쉽고, 많은 경험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음, 중음, 저음이 적절히 어울려 균형 잡힌 사운드로 오케스트라 화음을 내는, 첼로 오케스트라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연주자들은 작년 창단연주회 때보다 더 떨린다고 했다. 아마, 더 좋은 연주를 들려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소품들, 알비노니 <아다지오>, 차이코프스키 <어린이의 앨범>, 비발디 협주곡 등 비교적 단순하고 친숙한 곡 위주였기 때문에 청중들은 무척 즐거워했고, 연주자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날 가을 저녁을 수놓은 레퍼토리 중 백미는 오펜바흐(1819~1880)의 <자클린느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첼리스트 홍성은(단국대 관현악과 교수)이 솔로를 맡았다. 애끊는 슬픔을 내면으로 삼키는 듯한 이 곡을 홍성은 선생은 마음을 가득 담아 연주했다.  




오펜바흐 <자클린느의 눈물>, 이 곡에서 자클린느는 누구일까? 천재 첼리스트로 온 세상의 기대를 받던 영국의 첼리스트 자클린느 뒤프레(1945~1987)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음악성을 운명이 시샘한 걸까? 자클린느는 한창 세계무대를 누비던 26살 때부터 다발성 경화증이란 무서운 병을 앓게 됐고, 연주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남편인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도 그녀를 소홀히 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로웠지만 첼로 교본을 쓰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등 첼로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다가 42살에 세상을 떠났다. 


오펜바흐 <자클린느의 눈물>  http://youtu.be/1pmBJLI4kVw (첼로 자클린느 뒤프레)                                      


오펜바흐는 19세기 사람이고 자클린느는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곡은 오펜바흐가 자클린느 뒤프레에게 바친 곡이 아니다. 토마스 베르너라는 젊은 첼리스트가 오펜바흐의 미발표 악보를 연구하다가 이 곡을 발견, 직접 연주하여 세상에 알렸다. 자클린느 뒤프레도 애절하고 아름다운 이 곡을 사랑하여 훌륭한 녹음을 남겼다. 이 곡을 녹음할 때만 해도 자클린느는 아프지 않았고 <자클린느의 눈물>이란 제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곡이 그녀의 슬픈 운명을 불러오기라도 한 걸까? 얼마 후,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이 생겨 연주를 영영 포기하고 만다. 토마스 베르너는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느를 기리기 위해 이 곡에 <자클린느의 눈물>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 곡을 오펜바흐는 왜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을까? 확인하기 어렵다. 뛰어난 첼리스트였던 그는 무척 소중한 사람을 그리며 이 곡을 작곡했고, 떠들썩한 세상에 이 곡을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걸까? 혼자만의 슬픔과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걸까? 이 가을, <자클린느의 눈물>에 어린 사연이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실크로드 앙상블이 몰고 온 음악의 새 바람


10월의 끝자락에 무척 재미있는 음악회가 열린다. 카만테, 산투르, 가이타, 바우 등 이름도 생소한 악기들로 이뤄진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의 연주회다. 27일 기자간담회에서 맛뵈기 음악을 선보였는데, 가야금과 바이올린 · 첼로 등 동서양 현악기가 뒤섞였고 장구와 인도의 타악기 타블라가 장단을 맞췄다. 이들은 ‘우화의 경로’(Paths of Parables), ‘아버지, 아들 그리고 당나귀’(Father, Son & Donkey) 등 옛 이야기의 지혜를 소재로 한 곡들을 들려 주고, 한국의 단원들과 함께 <아리랑>을 연주할 예정이다.  


<날아오르는 새> http://youtu.be/OqpYJS1kwOY   


실크로드 앙상블이 연주한 <날아오르는 새>를 들어보자. 페르시아 민속 설화를 소재로 한 곡이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던 새는 결국 불에 타 죽지만, 용감한 도전으로 불멸의 영적 삶을 얻는다고 한다. 유럽 클래식 음악이 세계 음악의 주류로 군림하는 지금, 동양 여러 나라의 악기들로 근사한 앙상블을 이룬 것은 참 신나는 일이다. 실크로드 앙상블의 참신한 시도는 서양음악사의 큰 흐름을 바꾸진 못 하더라도 <날아오르는 새>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 앙상블은 2,000년 전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를 따라 존재하는 여러 나라 - 터키, 이란, 우즈베키스탄, 타지크스탄, 중국, 한국, 일본 등 - 의 전통 악기 연주자들로 이뤄져 있다. 1998년 이 악단을 만든 첼리스트 요요마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크로드 앙상블은 서양의 아름다운 선율과 동양의 즐거운 흥을 조화시켜, 놀랍도록 흥겨운 무대를 선사한다. 여러 나라의 전통 악기가 펄펄 살아서 앙상블을 이룬다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전 세계는 하나입니다. 서로 영감을 공유하고 공존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실크로드 앙상블이 탄생했습니다.” 


세계화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요요마는 음악을 통해 바람직한 세계화의 모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에볼라 바이러스, 기후 변화 등의 문제는 한 나라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크로드 앙상블 같은, 국경을 초월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거죠. 전통적인 시각과 새로운 사고방식, 그리고 최첨단 기술을 합쳐서 모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열어주면 인류가 협력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요?”


 

▲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장구를 들고 한국 음악의 우수성을 얘기하는 첼리스트 요요마. 


실크로드 앙상블은 다양한 악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독창적이다. 각 연주자들은 자기 나라에서 전통 악기의 연주 기법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연주회에 앞서 우리나라의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 어린이들에게 각국의 전통악기를 체험하게 하고, 무료로 연주를 가르쳐 주는 워크샵을 열었다. 요요마는 “어린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주고 싶다”며,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실크로드 앙상블의 <아시아 여행> http://youtu.be/OYDyiF44LSg


어린이들은 우리 전통악기인 비파 대신 중국의 피파(pipa)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이 앙상블에서 활약하는 중국의 비파(pipa) 연주자 우만(Wu Man)에게 눈길이 머문다. “비파는 2,000년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에서 발달해서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졌죠. 저희 앙상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악기죠. 다섯 손가락으로 연주하는데, 대나무 플랫이 붙어 있어서 기타처럼 음정을 잡아줍니다.”


우리나라의 해금처럼 생긴 악기는 이란의 전통악기 카만체(kamancheh)다. 연주자 카이안 칼로르(Kayhan Kalhor)의 설명이다. “활은 한 방향으로 움직여 켜는데, 줄이 활에 골고루 닿게 하기 위해 악기를 살살 돌리면서 연주하지요. 서양의 바이올린과 다르게 생겼지만, 결국 같은 개념이죠. 이 악기도 페르시아에서 생겨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건너가며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실크로드 앙상블은 동서양 음악의 갭을 메우며 전세계를 여행한다. 다시 카이안의 말. “다양한 음악은 곧 새로운 언어죠. 언어와 문화가 다르지만, 더욱 화려한 음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음악 문화가 아닌 더 큰 틀에서 세상을 보고 넓은 세상과 만나 친구가 되는 거죠.” 이들은 <실크로드 여행, 지평을 너머>(Silk Road Journey, Beyond the Horizon) 등 5종의 음반을 냈고, 서양 음악의 중심지인 뉴욕의 링컨센터 무대에 서고, 탱클우드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서양 음악가들과 어울린다. 실크로드를 따라 발달한 동양 음악이 결코 세계 음악의 ‘마이너’가 아니며, 음악에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실크로드 앙상블, 2009 링컨센터 공연> http://youtu.be/i08x6OeqC3Y


악기도 생물처럼 진화하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우리 전통 악기인 퉁소를 보급하려고 애쓰는 정상모 선배는 대중과 매스컴의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셨다. 비파는 어떨까? 4현 또는 5현으로 된 이 악기는 손으로 뜯어서 연주하므로 서양의 류트와 원리가 같다. 이웃 나라에도 비슷한 악기가 있는데, 중국의 피파(pipa)와 일본의 비와(biwa)는 널리 연주되는데 반해 한국의 비파만 멸종 위기라고 한다. 우리 사는 이 나라는 무척 척박한 땅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퉁소를 아끼는 정 선배님을 포함, 국악인 여러분께 좌절하지 말라고 얘기해 드리고 싶다. 우리의 퉁소와 비파가 세계무대에서 사랑받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쓰디쓴 커피 같은 브람스, 투박한 껍질 속의 달콤한 열매

교향곡 4번 E단조 Op. 98.


브람스, 투박한 껍질 속의 달콤한 열매 - 교향곡 4번 E단조 Op.98  http://youtu.be/wxB5vkZy7nM 


1853년, 스무 살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슈만과 클라라의 집을 처음 방문한 건 낙엽 지는 가을이었다. 그는 갓 작곡한 소나타 1번을 연주해 보였다. 슈만은 <새로운 길>이란 평론에서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나타난 거장”이라며 브람스를 격찬했다. 이 글 덕분에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선배의 큰 기대는 젊은 브람스를 무척 부담스럽게 했다. 슈만의 의도와 달리 브람스는 극도로 긴장했고, 자기 비판적인 성격이 더욱 굳어졌다.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은 낭만시대 작곡가들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환희의 송가>로 교향곡의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는 미래를 향해 날아갔다. 새로운 관현악법의 교향시와 거대한 악극으로 베토벤과 다른 세계를 열어 보였다. 브람스는 과거로 걸어갔다.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를 너머 팔레스트리나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옛 음악을 연구했다. 옛 거장들의 유산 속에 음악적 자산이 이미 다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교향곡에서 베토벤과 비교되는 운명을 피해 갈 수 있는 작곡가는 없었다.


브람스는 교향곡을 섣불리 내놓지 않았다. 1876년 첫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0년의 산고를 겪었다. 그 기간, 브람스는 베토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했다. 첫 교향곡은 C단조의 조성이 베토벤 5번과 같았고, 4악장의 웅대한 행진이 베토벤 9번의 피날레를 연상시켰다. 이 곡이 초연되자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드디어 베토벤 교향곡 10번을 얻었다”며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이러한 평가에 브람스는 물론 기뻐했지만, 마음 한켠이 씁쓸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며 칭찬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 사람만 못하다는 말 아닌가. 


브람스는 이미 빈 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인사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과 비교하는, 칭찬인지 아첨인지 모를 평론가들의 입방아는 계속됐다. 한스 폰 뷜로는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위대한 3B”라고 치켜세웠다. 브람스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필생의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교향곡 중 베토벤과 비교되지 않은 건 마지막 작품인 4번 E단조, 단 하나였다. 


브람스는 ‘고통을 넘어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전형을 버리고, 마지막 4악장마저 어두운 색조로 칠해 놓았다. 이 피날레는 형식마저 바흐, 헨델의 파사칼리아를 연상케 하는 춤곡과 짧은 변주들로 이뤄져 있다. 트럼본이 힘차게 제시하는 샤콘느 주제가 무궁무진하게 변주되며 음악적 갈등이 심화되고,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숨가쁘게 치닫는다. 브람스의 복고 취향은 느린 2악장에도 나타난다. 호른이 연주하는 도입부는 중세 그레고리아 성가의 기법인 프리지아 선법으로 돼 있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호른 시그널을 클라리넷이 받아서 차분하고 엄숙한 색채를 더한다. 현악기의 서정적인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3악장의 지시어는 브람스로서는 파격적인 알레그로 지오코소(생기있게 뛰놀듯)다. 베토벤 교향곡 7번처럼 자유분방하며, ‘바커스의 축제’라 불릴 정도로 화려하고 힘차다. 피콜로와 트라이앵글까지 등장하여 화려한 색채를 더한다. 하지만 형식만큼은 전통적인 스케르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 20살 무렵의 브람스(1853), 1894년 무렵의 브람스


이 곡에는 낙엽 지는 늦가을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짙게 배어 있다. 브람스의 우수어린 색조는 만년이 될수록 짙어져 갔다. 평생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살다 간 브람스는 이 곡에서 완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다. 슈만은 브람스를 처음 만난 뒤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부인 클라라 슈만(1819~1896)은 평생 브람스의 음악적 연인으로 살았다. 브람스가 걸어간 인생길에 여러 여성이 교차했지만 40년 넘도록 한결같이 존중하고 아낀 소울메이트는 클라라뿐이었다. 
  
그녀는 “브람스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열매”라고 했다. 브람스는 4번 교향곡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산골 뮈르츠추슐라크(Mürzzuschlag)에서 말했다. “이 작품이 기후 영향을 받는 게 아닌지 두렵네. 여기서 생산되는 버찌는 결코 단맛을 내는 법이 없어.” 브람스는 아침마다 아주 진하고 독한 블랙커피를 마셨는데, 이 교향곡 또한 쓰디쓴 커피 맛을 닮은 게 아닐까. 그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무뚝뚝한 태도와 엉뚱한 언행으로 가린 채 살았다. 이 투박한 껍질은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4번 교향곡의 달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클라라 슈만 아니었을까?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낙엽 뒹구는 1895년 가을의 아침, 브람스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벌써 40년이 넘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인터메조를 연주했고, 브람스는 묵묵히 들었다. 77세 할머니가 된 클라라, 63세 초로의 브람스…. 두 사람은 지난 세월을 되새기며 힘없는 미소를 나누었다. 이듬해 5월,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브람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서둘러 출발했지만 그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이미 숨이 멎은 그녀를 보며 브람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떠나는 길을 향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장례가 끝난 뒤 브람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을 묻었다네.”  


▲ 브람스 교향곡 4번의 자필 악보


브람스는 4번 교향곡 자필 악보 1악장의 첫머리, ‘BG---EC---’ 음표 아래에 “오, 죽음이여, 죽음이여”라고 써넣었다. 이 곡을 클라라의 죽음에 바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비탄에 젖어 말했다. “이렇게 고독한데,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브람스는 이듬해, 1897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 두 개의 사랑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 두 개의 사랑  http://youtu.be/AD5jmO9TA1I (피에르 몽퇴 지휘, 북독일 라디오 방송교향악단)


<환상> 교향곡에 얽힌 이야기는 환상적이다. 

베를리오즈는 혁명에 열광했다. 1830년 7월 혁명, 그는 ‘성스런 시민들’과 함께 총을 들고 새벽까지 거리를 누볐다. 시위대의 목쉰 함성에서 그는 음악을 들었다. “온 파리 시민이 해일처럼 일어났네. 구슬프게 울리는 구식 포성에 발을 구르며 마르세예즈 노래로 맞서네.” 그는 로마대상에 출품할 칸타타 <사르다나팔루스>을 막 완성한 뒤였다. 유탄이 날아와 작곡가의 창가를 두드렸다. 


그는 민중의 광기에 치를 떨기도 했다. 음악가를 널리 후원했던 리히노프스키 공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농민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무발의 총탄이 그의 몸을 뚫었고, 칼과 도끼와 낫으로 걸레처럼 분해된 그의 시신은 거꾸로 매달렸다. “인간은 얼마나 파렴치하고 추악한가! 혁명의 광기와 흉측한 모습은 보르네오 밀림의 오랑우탄이나 개코원숭이보다 수백 배 더 어리석고 사납지 않은가!” (베를리오즈 <음악여행자의 책>, p.55)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셰익스피어의 오필리아와 줄리에트를 연기한 영국 여배우 해리어트 스미드슨이 그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셰익스피어는 불시에 떨어진 충격이었고, 스미드슨이 보여준 극적 재능은 셰익스피어를 능가했다. 어떤 연극배우도 그녀만큼 관객을 사로잡고 감동시키지 못했다. 베를리오즈는 그녀에게 자기도 극적 재능이 있는 예술가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 영국 평론가는 연극 리뷰에 그의 말을 인용했다.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그녀의 연극을 바탕으로 대작의 교향곡을 쓸 것이다.”



▲ 32살 무렵의 베를리오즈 (왼쪽)과 <환상> 교향곡에 영감을 준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드슨 (오른쪽)


그러나 인기 정점에 있던 스미드슨은 무명 작곡가 베를리오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활기를 잃고 시름시름 환상에 빠졌다. 목적지도 없이 거리와 들판을 배회했다. 우울과 고통, 절망적 사랑, 잔인한 냉소, 막막한 공상, 찢어지는 가슴, 광기, 눈물…. 사랑과 죽음의 절망적인 투쟁 속에서 그는 탈진했다. <환상> 교향곡으로 미칠듯한 사랑을 승화시키면서 그는 서서히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발견하는 3악장 ‘들판에서’는 난산이었다. 그는 이 대목을 쓰며 3주 동안 끙끙 앓았다. 교수대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4악장은 하룻밤에 일사천리로 썼다. 


5악장으로 된 <환상> 교향곡에는 헤리엇 스미드슨의 모습이 모든 악장에 등장한다. 그녀의 이미지를 베를리오즈는 ‘고정 관념’(idée fixé)이라 불렀다. 1악장 ‘꿈과 열정’은 환각에 빠진 예술가의 내면이다. 우울한 몽상 속에 분노와 질투, 눈물과 갈구, 평화와 위안이 교차한다. 2악장 ‘무도회’, 예술가는 떠들썩한 축제의 한가운데 있다. 그녀의 환상이 나타나자 그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3악장 ‘들판에서’, 평화로운 석양 풍경이 펼쳐지고 두 명의 목동이 피리를 분다. 멀리 천둥소리가 울릴 때 피리를 부는 목동은 한명 뿐이다. 예술가는 그녀가 죽었음을 깨닫는다. 4악장 ‘교수대로의 행진’, 음독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애인을 죽인 죄로 교수대로 끌려간다. 비명과 절규도 아랑곳 않고 기요틴은 가차 없이 그의 목을 잘라버린다. 5악장 ‘마녀들의 축제’,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마녀들의 춤 한가운데 그녀가 있다.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어 그레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이 울려 퍼진다. 


1830년 12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초연했다. 헤리엇 스미드슨은 오지 않았다. 단 두 번의 리허설로 완벽한 연주는 불가능했지만 베를리오즈는 “그런대로 무난한 연주였다”고 자평했다. (같은 책, p.173). ‘무도회’와 ‘마녀들의 축제’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들판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교수대로의 행진’은 청중들을 모두 뒤집어 놓았다. 음악의 혁명아 프란츠 리스트는 열렬한 갈채를 보냈지만, 보수적인 파리 음악원장 케루비니는 ‘혐오스런 작품’이라고 했다.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 여행 중 이 곡을 손질하고 다듬었다. 


2년 뒤 파리에서 다시 연주할 때는 헤리엇 스미드슨이 왔다. 베를리오즈는 그녀를 직접 초대할 용기가 없었는데, 엉거주춤하고 있는 그녀를 친구들이 등을 떠밀어 데려온 것. 그녀는 교향곡의 각 악장의 주제에 조금 놀랐다. “이 열렬한 작품, 뜨겁게 타오르는 멜로디, 사랑의 탄식, 격렬한  돌진과 진동을 바로 앞에서 들은 그녀의 예민한 감각과 시적 상상력은 예기치 못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같은 책, p.235) 이 낯선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가슴이 요동쳤다. <환상> 교향곡에 이어서 속편 격인 모노드라마 <렐리오 - 삶으로 돌아오다>가 연주됐다. 렐리오 역을 맡은 보카쥬라는 가수가 노래를 시작했다. 노골적인 사랑 고백이었다. “아, 터질 듯한 가슴으로 이름만 불러보는 나의 줄리엣, 나의 오필리아. 그녀를 찾을 수 있다면 사랑의 슬픔과 기쁨에 취할 수 있을텐데!”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연인 사이가 됐고, 베를리오즈는 그 날짜를  평생 기억했다. 1832년 12월 9일이었다. 


두 사람은 양가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10월 결혼을 강행했다. 당연히 예상된 일이지만, 결혼과 함께 ‘환상’도 깨졌다. 새색시는 배우로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결혼 당일에도 빚 걱정뿐이었다. 두 사람 다 불같은 성격이었으니 날이면 날마다 다투었다. 헤리엇은 인기가 시들어가면서 알콜 중독이 됐다. 두 사람은 결국 1844년 이혼했는데, 베를리오즈는 평생 그녀의 생활비를 대 주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결혼 초기, 동료 음악가들의 우정이 큰 보탬이 됐다. 헤리엇의 공연 수익을 올려주기 위해 쇼팽과 리스트가 찬조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했다. 두 음악가는 “빚을 갚으라”며 개런티를 모두 신혼부부에게 주었다.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를 위해 비올라 솔로가 들어있는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를 썼다. 파가니니는 솔로 부분의 분량이 적어서 실망했지만, “죽은 베토벤을 되살릴 사람은 베를리오즈 뿐”이라는 찬사와 함께 무려 2만 프랑의 거액을 사례로 내놓았다. 베를리오즈 또한 크게 감사하며 ‘대선배’ 파가니니에게 무한한 존경을 바쳤다. 낭만주의 초기, 사랑과 우정이 넘치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런데도 베를리오즈는 “우리 시대는 시적인 상상이 메말랐다”고 한탄하고 있으니(같은 책, p.11), 그가 21세기의 강퍅한 세태를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베를리오즈에게 음악은 첫사랑과 함께 찾아왔다. 해마다 여름을 보내던 알프스 산자락의 메일랑이란 마을에서 12살 베를리오즈는 18살 난 에스텔을 짝사랑했다. 벼락을 맞은 충격에 잠 못 이루는 소년의 마음을 에스텔은 곧 눈치챘다. 그녀는 베를리오즈를 무척 귀여워했고, 어린 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숨긴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베를리오즈는 훗날 “첫사랑의 흔적은 절대 지우지 못한다”고 썼다. 소년 베를리오즈는 에스텔에 대한 사랑을 담아 연가를 썼는데, 그 주제가 <환상> 교향곡 1악장 ‘꿈과 열정’의 서주에 나온다. 제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이 선율은 “감당 못할 사랑에 짓눌려 괴로움에 빠진 어린 마음을 표현했다.” (같은 책, p.29)




슬픔의 위대한 힘, 고르디에바 ‘아다지에토’


슬픔의 위대한 힘, 고르디에바 <아다지에토>  http://youtu.be/7vbIGjZXeAQ                                   

 

말러(1860~1911)는 19살 연하의 알마 신틀러와 결혼할 때 아름다운 <아다지에토>를 선물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꿈꾸듯 노래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이 곡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부드럽고, 따뜻하고, 애틋하고, 안타깝고…? 사랑하는 마음처럼, 음악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다. 작곡자 말러의 말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한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냥 말로 하지, 왜 구태여 작곡을 하겠는가?”


<아다지에토>는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인데, 무척 아름다워서 별도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미국에서는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추도하는 음악으로 TV에 등장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이 곡을 들으면 그를 기억하며 슬퍼한다고 한다. 이 곡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삽입돼서 더 유명해졌다. 열병에 걸린 예술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미소년 타지오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볼 때 이 곡이 흐른다. 죽음을 예감하는 예술가의 안타까운 사랑이다. 


피겨 여왕 에카테리나 고르디에바도 말러의 <아다지에토>에 맞춰 연기했다. 1996년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이날 공연의 제목은 <삶의 찬가>(Celebration of a Life). 24살 고르디에바는 혼자 춤춘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어려 있다. 관객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그녀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공연이 끝난 뒤 그녀는 말했다. “세르게이가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가 곁에 있기 때문에 저는 두 배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세르게이 그린코프(1967~1995)는 누구일까? 그는 고르디에바의 모든 것이었다.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두 사람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게이는 15살, 고르디에바는 11살이었다.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가 호흡을 맞춘 음악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어린 두 사람의 완벽한 연기는 놀라웠고, 특히 꼬마 고르디에바의 앳된 모습은 세계인의 화제가 됐다. 세계의 스포츠 캐스터들은 입을 모았다. “고르디에바는 4살 때 스케이트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소련에는 이 꼬마한테 맞는 스케이트가 없어서 양말을 여러 겹 껴 신어야 했다지요?” 


세계 피겨 스케이팅의 미래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그들은 1988년 캘거리,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네 차례의 세계 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고르디에바는 해가 갈수록 키가 커졌고, 그와 비례하여 세르게이에 대한 사랑도 쑥쑥 자라났다. 1988년 새해 축하 공연에서 첫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은 1991년 4월 드디어 결혼했다. 이듬해 9월엔 딸 다리야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세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젊음과 행복의 절정에 서 있었다.   



▲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베토벤의 <월광>에 맞춰 연기하고 있는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세르게이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95년 11월 20일, 뉴욕 플래시드 호수에서 연습하던 그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르게이는 28살, 고르디에바는 24살이었다. 고르디에바는 그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왜 여전히 살아 있는 걸까? 세상은 어째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사랑하던 세르게이는 사라졌지만 젊은 그녀는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살 난 딸 다리야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석 달 뒤, 그녀는 빙판 위로 돌아왔다. 죽은 남편에게 바치는 공연이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세르게이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세르게이는 빙판 위에, <아다지에토> 선율 속에 살아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이날 공연은 TV로 생중계됐고, 고르디에바는 그날의 기록을 <나의 세르게이 : 러브 스토리>란 책으로 남겼다. 


인간은 슬픔을 통해서 고결함을 얻는 걸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고르디에바의 <삶의 찬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슬픔의 위대한 힘이다. 삶은 계속된다. 그녀는 1998년 <다리야를 위한 일기>를 펴냈고, 새 남편과 함께 스케이터의 삶을 이어가고 있고, 한국도 방문했다.  
 
※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국제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http://youtu.be/AF98R57oQ9s 




빅히스토리, 새로운 음악사를 모색한다

클래식 음악의 삶과 죽음


작곡가 이건용 선생은 <현대음악 강의>를 모차르트에서 시작했는데, 나는 이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차르트는 ‘옛날 음악’으로 들리지 않는다. ‘요즘 음악’으로 들리는 모든 클래식 중 가장 오래된 음악이 바로 모차르트다. 그 이전의 모든 작곡가들 - 하이든, 헨델, 바흐, 비발디 등등 - 은 숙명적으로 ‘옛날 음악’처럼 들린다. 이 차이는 뭘까? 


일단, 시대 배경에 주목할 수 있다. 모차르트가 살던 18세기 후반은 산업혁명과 시민민주주의혁명이 폭발한 시대였다. 그 뒤 인류는 실패한 공산주의 실험을 겪었고 가파른 인터넷 혁명을 목도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18세기말에 시작된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 있다. 모차르트는 근대 세계가 탄생한 바로 그 순간에 ‘빅뱅’의 섬광처럼 나타난 천재였다. 


그때까지 음악가는 귀족과 교회의 하인이었다. 바흐는 쾨텐 영주 레오폴트 공작의 사랑을 받았지만 이내 애완견처럼 버림받았다. 런던의 수퍼스타 헨델도 왕실의 후원이 끊기자 휘청거리며 오페라를 중단해야 했다.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공의 충실한 하인이었지만 워낙 유능했기 때문에 ‘귀족의 종’ 대신 ‘음악의 종’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모차르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요리사와 같은 등급의 하인으로 취급받는 걸 거듭 불평했다.   


“어제는 정오 무렵에 식사를 했습니다. 대주교의 시중을 드는 시종 둘, 요리사 둘, 그리고 제가 함께 앉았습니다. 시종들이 상석을 차지했고 저는 가까스로 요리사 윗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들의 홀대를 참고 있을 수 없었어요.”   - 1781년 3월 17일 빈에서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의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의 봉급을 올려주었지만 여행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통념으로 볼 때 봉건 영주가 ‘하인’인 음악가에게 ‘명령’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적 이상이 봉건적 속박 아래 질식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끝가지 자유를 요구했고, 이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해고로 응수했다. 부관 아르코 백작을 시켜서 글자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모차르트를 쫓아낸 것이다. 


모차르트가 해고된 1781년 6월 8일은 역설적이게도 음악사에서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 됐다. 그날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영원히 남을 걸작들을 맘껏 써내려 갔다. 권력자의 취향에 맞는 음악만 만들도록 강요됐다면, 모차르트는 인간을 위한 소명을 다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들, 협주곡들, 오페라들은 그가 자유롭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 모차르트가 엉덩이를 걷어차여 해고된 1781년 6월 8일은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 됐다. 이 날을 기준으로 음악사를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 엘리아스 노베르트의 지적처럼, 모차르트는 귀족과 성직자로부터 독립했지만 그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역설적 상황에 빠졌다. 신흥 시민계급은 그의 음악에 열광했지만, 안정된 환경을 보장해 줄 만큼 튼튼히 성장하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반 슈비텐 남작 등 몇몇 프리메이슨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말년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세상을 떠났고 1년 뒤인 1792년 베토벤이 빈 음악계의 새로운 태양으로 떠올랐다. 모차르트보다 14살 아래인 베토벤에 이르러 자유음악가는 귀족 계급에게 승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신흥 부르주아가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자유음악가가 됐기 때문에 베토벤에 비해 고전해야 했다. 


이건용 선생은 음악사 전체에서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없었던 유일한 시대가 바로 모차르트의 시대였다고 지적했다. 세련된 교양을 갖춘 귀족들을 위해 작곡된 과거의 음악이 비교적 어려웠다면, 모차르트 음악은 서민들의 단순한 춤의 선율과 리듬을 활용했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빈에서 처음 발표한 피아노협주곡 K.413, K.414, K.415에 대해 모차르트는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 누구라도 만족할 수 있게 작곡했다”고 직접 밝히고 있다.


당시 오페라는 식자층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탈리아말로 돼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일반 서민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독일어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자유로운 음악혼이 집약된 독일어 오페라 <마술피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경제적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아쉽기 짝이 없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파파게노의 아리아 ‘나는 새잡이’
http://youtu.be/5-Qq-DeEXhw


모차르트는 말하자면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벽을 허물어 버렸는데, 베토벤부터 클래식 음악은 다시 어렵고 무거워졌으며, 이 흐름은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의 사망선고가 나올 정도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베토벤 이후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은 모차르트에서 음악의 자양분을 얻었다. 드보르작은 프라하에서 학생들에게 작곡법을 강의하다가 혼잣말처럼 “모차르트 음악이 뭐라고 생각하는가?”질문했다. 학생들이 머뭇거리자 드보르작은 창문을 열고 하늘을 가리키며 “모차르트는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베토벤, 쇼팽,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말러, 쇤베르크, 메시앙 등 모든 뛰어난 작곡가들은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흔쾌히 인정했다.


빅히스토리에서 인류의 역사는 농업혁명 이전의 원시시대와 농업혁명 이후의 문명시대로 나뉘며, 문명시대는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근대와 전근대로 구분된다. 이 기준에서 음악사를 다시 쓴다면 이름이 M으로 시작하는 4명의 작곡가를 랜드마크로 기억하면 된다. (1) ‘클래식’으로 분류되어 온 ‘옛날 음악’을 포함하고, 지금까지 ‘현대음악’이라 불린 20세기 음악까지 확장하면 몬테베르디(1567~1643)부터 메시앙(1908~1992)까지다. 대략 400년 동안 유럽에서 작곡되고 연주되어 온 모든 클래식 음악이 여기에 해당된다. (2) 좁게 보면, 요즘도 자주 연주되고 널리 사랑받는 모차르트(1756~1791)부터 말러(1860~1911)까지 12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대부분의 유명한 클래식 음악이 생산됐다. 몬테베르디(Monteverdi) - 모차르트(Mozart) - 말러(Mahler) - 메시앙(Messiaen)은 서양음악사의 ‘4M’이다. 


클래식 음악은 시작과 끝이 있다. 셰익스피어 전집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10여권의 책에 들어가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도 유한한 숫자의 음반 속에 넣을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은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지만, 무한하거나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그 전모를 파악하고 향유할 수 있는 규모란 얘기다. 따라서 너무 겁먹거나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쇤베르크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Schonberg?)


쇤베르크 <달에 홀린 피에로> (Pierro Lunair) http://youtu.be/bd2cBUJmDr8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바꿔가려는 작은 노력을 누군가 하고 있는 한 함부로 희망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 김선우의 빨강 <소리쳐 불러본다>, 한겨레 11월 18일


시인의 한 마디가 따끔하다. 희망 없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 왔다. 막장으로 질주하는 자본, 개념 없는 대통령, 돌아오지 않는 세월호의 아이들…. 실낱같은 희망도 찾기 힘든 요즘이지만, 그래도 시인의 말에 정신을 차려 본다.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음악은 죽었다”, 이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렸다. 대중들의 ‘클래식 울렁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클래식 음악은 영원한, 지고지순한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싶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런 취지였다. “스트라빈스키가 리듬을 파괴하고 쇤베르크가 조성을 해체하고 존 케이지가 악기를 내버리면서 현대 음악은 대중과 멀어져 왔다. 일부 작곡가들은 영화 음악, 뮤지컬, 다양한 팝 음악으로 흩어지며 활로를 모색했다. 클래식 음악도 역사 속에서 태어나 진화하고 소멸하는 유기체와 같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음악일 뿐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음악을 모색하며 소통하려고 애쓰는 음악가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이 분들에겐 무척 예의 없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한 주제에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을 모두 파괴하려 들다니, 무척 오만한 말이었다. 


11월 26일, 아주 소중한 음악회가 KU시네마테크에서 열렸다. “동시대 예술의 최전선을 만난다”는 취지로 프로듀서 김정호와 디자이너 한경훈이 기획한 <컨템포러리 웬스데이>, 피아니스트 김미나의 해설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1912)가 한국 초연됐다. 지휘자 정나라, 연극배우 이승비, 그리고 6명의 연주자가 8개의 악기로 연주했다. 21편의 시로 된 이 작품은 “달에 취해 눈으로 들이키는 술”을 노래하며 시작, ‘그 시절 옛 향기’에 취하여 축복받은 해방을 꿈꾸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시는 7편씩 세 묶음으로 돼 있다. 첫 부분은 사랑 · 섹스 · 종교를, 둘째 부분은 폭력 · 범죄 · 신성모독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부분은 고향 베르가모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을 노래한다. 


이 작품은 역설로 가득하다. 피에로는 영웅이지만 바보이며, 남자 캐릭터지만 여자가 연기한다. 기악 연주자들은 솔로인 동시에 오케스트라며, 보이스(Voice)는 노래인 동시에 연설이다. 이 날 한국 초연은 보이스를 연극 대사로 처리하여 음악의 완성도가 떨어진 게 아쉬웠지만 시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의미를 잘 전달한 것은 훌륭했다. 무척 정성스레 준비한 연주회라는 느낌을 주었다.  


40분 가량의 연주가 끝난 뒤 대담이 이어졌다. 무대에 오른 하지현 교수는 “음악을 잘 모르고, 쇤베르크 음악은 더군다나 모른다”고 전제한 뒤 질문했다. “음악의 조성(調性, tonality)은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까?” 피아니스트 김미나씨가 대답했다. “서양 음악이 처음부터 조성 음악은 아니었어요.” 이 질문과 대답이 쇤베르크 음악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조성 체계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확립됐으니,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 음악의 역사에서 조성 없는 음악이 훨씬 더 오래된 게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에 쇤베르크가 시도한 무조 음악도 얼마든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진화를 거듭해 온 음악이 일정한 시점에서 조성음악으로 정착됐다면 그것 또한 인간 본성이 자연스레 발현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쇤베르크의 궁극적인 고민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시도했고, “언젠가 평범한 사람들이 내 음악을 흥얼거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인류가 초인(Übermensch)으로 진화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이 조성을 갖고 진화할 때 작곡가들은 음악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 쇤베르크를 아낀 구스타프 말러는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 예언은 실현됐다. 그의 교향곡은 이제 베토벤만큼 자주 연주되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운명은 달라 보인다. 그는 무조음악을 시도했지만 그것을 규범(canon)으로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후배 음악가들은 대부분 그의 선례를 따랐다. 쇤베르크는 만년에 자신의 무조음악이 조성음악의 발전을 저해한 게 아닐까 회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음악은 그 시대에는 모두 ‘현대음악’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현대음악’은 발표하는 즉시 받아들여졌고, 좀 어렵더라도 얼마 뒤엔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100년 전에 생겨난 과거의 음악인데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음악’이 ‘이해할 수 없는 음악’과 동의어가 돼 버린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대담 말미에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질문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꼴이 됐고,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 자꾸 튀어나왔다.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조성음악의 해체를 ‘세기말’(fin de ciècl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밀히 말해 퇴폐와 허무주의의 ‘세기말’은 19세기말 하나뿐이었다. 모차르트가 활약하고 베토벤이 등장한 18세기말에는 새로운 시대가 동트고 있었다. 이 때 시작된 산업혁명과 시민민주주의 혁명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분기’(great divergence)로 인한 빈부격차와 계급투쟁은 19세기 내내 악화일로를 걸었지만, 그 시대의 첫걸음을 내딛은 18세기말에는 일말의 낙관주의가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세기말’의 우울과 피로와 염세주의가 유럽을 덮쳤다. 그리고 20세기, 나아진 게 있는가? ‘세기말’이 예고한 비극과 재앙이 인류를 강타하지 않았는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곡 2번 - 무조 음악의 첫 대표작 - 이 나온 게 1913년이었으니 1차 세계대전 전야였다. 현대음악의 선구자들은 어두운 시대를 예언한 ‘동굴 속의 카나리아’였을까? 이들이 추구한 음악의 혁신은 파국의 시대를 미리 보여준 파국의 음악 아니었을까? 이건용 선생이 <현대음악 강의>를 모차르트에서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의 역사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차곡차곡 몰락해 온 역사가 아닐까?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음악의 선구자들은 불가능에 도전한 비극적 영웅들 아닐까? 


또 100년이 흘러 21세기가 됐다. 빙하에 부딛쳐 침몰하는 타이타닉처럼 세계 자본은 마지막 파국을 향해 매순간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100년 전 음악이 여전히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이상한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대담을 진행한 김미나씨는 “20세기의 모든 작곡가들이 새로운 음악을 모색했지만, 쇤베르크만큼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20세기 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대표적 작곡가’로 쇤베르크를 선정한 취지라고 할 수 있었다. 쇤베르크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하면 그를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를 제대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쇤베르크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Schönberg?)” 아직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현대음악의 미래는 낙관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서울시향이 “좀 더 즐거운 것”을 노래하기 바라며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http://youtu.be/aODv2YnYKaE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 2009 송년음악회)                             


올 연말도 어김없이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질 것이다.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한해를 보낼 때만이라도 사랑과 평화를 나누자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연주한다. 이 곡의 피날레, 베토벤은 교향곡 사상 처음으로 합창을 넣어서 숭고한 형제애를 예찬했다. 천지개벽의 팡파레에 이어 1, 2, 3악장의 주제가 차례로 등장한다.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고개를 저으며 요구한다. “아니, 그 선율 말고 더 좋은 거!” <환희의 송가> 주제가 나지막히 등장하고, 비올라가 이 선율을 받아서 노래하고, 모든 악기가 가세한다. 팡파레가 한번 더 울리면 바리톤이 등장한다. 


“오 친구들아, 이런 곡조들 말고 좀 더 즐거운 걸 노래하자꾸나. 환희! 환희를!”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도 해마다 이맘때면 이 곡을 연주했다. 내가 MBC에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을 촬영하던 2006년 말도 그랬다. 서울시향은 새 음악감독 정명훈을 맞아 베토벤, 브람스, 말러 교향곡 사이클에 의욕적으로 도전했고, 세계적 연주자들을 초청해서 협연했다. ‘찾아가는 음악회’로 대중들에게 다가셨고, 상주작곡가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를 통해 현대음악 보급에 앞장섰다. 유럽 순회 연주를 성공리에 마쳤고,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을 냈다.   


추위가 유난히 길어지는 올 연말, 서울시향이 극심한 내홍에 휩싸였다. 여러 당사자가 얽힌 복잡한 논란에 한 마디 얹을 생각은 없다. 박현정 대표의 ‘폭언’은 많은 사람의 공분을 일으켰다. ‘갑’의 횡포와 ‘을’의 비애가 넘쳐나는 요즘, 수많은 ‘을’들이 박 대표의 ‘폭언’을 ‘갑질’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지탄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기자회견을 보면 사건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향이 지휘자 정명훈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적지않은 난맥상이 있었고 예산 집행의 과정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건 재작년의 뜨거운 논쟁으로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정명훈 감독의 보수가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엄정하고 투명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박 대표는 이러한 적폐를 시정하려다가 정명훈 감독과 갈등을 빚게 됐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번 논란의 당사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본 정명훈 감독은 쪼잔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기자회견이나 TV 인터뷰를 보니 박 대표도 거짓말을 일삼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단순한 인상으로 어떻게 그리 얘기하냐고 항의하실 독자들이 계실 것 같아 덧붙이자면, 형사관계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듯 이런 논란 앞에서는 일단 당사자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정명훈과 박원순의 합작이라든지, 정명훈이 사무처 직원들을 사주했다는 말은 과장돼 보인다. 그러나 궁지에 몰렸다고 느끼는 사람이 과격하게 말한다 해서 그런 정황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질 높은 음악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게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표와 음악감독이 처음부터 지혜를 모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좋은 음악과 합리적 경영이 결합하여 시너지를 낳았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양비론으로 오해될까 염려되지만, 정 감독은 예술가의 자유만 강조하여 불합리한 경영을 악화시켰고 박 대표는 너무 경영 측면만 집착하여 직원들과 공감대를 잃은 게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이치열 기자


박 대표는 “어떤 분(지휘자)이 계시든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의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고 말했다. 2006년 다큐 촬영할 때 정명훈 감독이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오케스트라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근력을 키우려면 20년은 잡아야 하는데, 저는 한 10년 정도에 해 보려 하니까, 허허….” 두 사람이 추구한 목적은 거의 비슷했다는 결론 아닌가. 정명훈 감독이 취임한 뒤 아직 10년이 안 됐는데, 서울시향은 그 수준에 도달했을까? 스스로 그 단계를 향해 노력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을까?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인 서울시향의 단원들이 대답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번 논란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첨예한 상황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까지 사분오열되어 갈등을 빚으면 퇴로 없는 파국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연합뉴스



정명훈 감독은 올해 말로 계약기간이 끝난다고 한다. 박 대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 대표가 퇴진하지 않으면 재계약은 물 건너가고, 정 감독과 서울시향의 관계는 올해 말로 끝나게 된다. 따라서 오래 끌지 말고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는 당시의 음악가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결코 훌륭한 음악가가 아니다. 당신들은 오직 음악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음악에는 음악가의 인간관, 세계관, 역사관이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오직 음악밖에 모른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고결해 보이지만 자칫 자기 음악이 빈약하다는 고백이 될 위험도 있다. 공교롭게도 정명훈 감독은 “오직 음악밖에 모른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1996년 다큐멘터리 <마에스트로 정명훈>을 만들 때 묻지도 않는 내게 그렇게 말했고, 재작년 예산의 불투명성이 문제됐을 때도 언론에 그렇게 공언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 박현정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 ⓒ 노컷뉴스


 

박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정명훈 감독은 박원순 시장을 찾아가서 재계약의 조건으로 박 대표의 퇴진을 요구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음악뿐 아니라 정치도 조금 아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명훈 감독은 권력과 명예를 누린 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사회에 책임질 줄도 아는 훌륭한 음악가라고 믿고 싶다. 박 대표도 스스로 밝혔듯 책임질 건 흔쾌히 책임지고, 잘못의 대가를 치르리라 생각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서울시향이 더 좋은 오케스트라로 발전하는 것이다.


다시 베토벤을 생각하자. 베토벤은 신(神)의 손으로 고문받은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가장 뛰어난 음악 천재에게 청력 상실이란 재앙이 닥쳤을까. 그는 절망했다. 그러나 절망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삶을 긍정했다. 누구보다 큰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위대할 수 있었다.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였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 동생 칼과 요한에게, 1802. 10. 6


상처 입은 서울시향의 여러 직원들에게 멀리서나마 위로를 보내고 싶다. 이번 진통이 <환희의 송가> 노랫말처럼 “좀 더 즐거운 것”을 노래하기 위한 잠깐의 아픔이기를 기대한다. 아니, 서울시향이 이 아픔을 딛고 “좀 더 즐거운 것”을 노래하는 것을 꼭 보고 싶다. 


“환희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빛이여, 엘리지움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하여 너의 성스런 땅을 딛네. 
 너의 마술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네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네!” -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음악밖에 모르는” 정명훈 감독의 사퇴를 권한다

20년 동안 그를 지켜본 PD의 공개편지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전주곡 
http://youtu.be/wAlagqFsBto (노래 안드레아 보첼리, 지휘 정명훈)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 이름을 보고, “아, 그런 PD가 있었지” 정도 떠올리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 서울시향의 극심한 내홍을 지켜보며, 정명훈 감독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침묵할 수 없어서 글 올립니다. 정 감독에게 직접 쓰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20년 전 이맘때, 정 감독은 파리 바스티유 음악감독 자리를 내놓으셨습니다. 프랑스 정치의 좌우대립에 휘말려 강제로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지요. 당시 저는 MBC <문화집중>에서 정 감독의 동향을 세 차례 시청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40대 초반의 유망한 지휘자 정명훈의 앞날을 시청자들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지요. 바스티유에서 물러나 귀국하신 뒤, MBC 스튜디오에서 한 시간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고, 그 말은 아름다운 반향을 낳았습니다. 순수하게 예술에만 헌신한 분이 추악한 정치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고, 저는 대다수 시청자들과 함께 정 감독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냈습니다.  


그 뒤 정 감독은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셨고, 두 차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저를 만나셨습니다. 1996년 <정상의 음악가족 정트리오 - 마에스트로 정명훈>, 2007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 편이었지요. 1996년 다큐를 보신 뒤, 다큐 자체보다는 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장면을 언급하며 “내가 피아노를 저렇게 잘 쳤나?” 하셨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2007년 다큐를 촬영할 때, 다음해가 메시앙 탄생 100년이니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한국에서 연주하면 좋지 않겠느냐 얘기했고, 제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서울시향은 정 감독의 지휘로 이 대곡을 멋지게 연주했습니다. 저는 정 감독과 함께 하는 메시앙 다큐를 MBC에서 추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지요. 
    
이번에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군요. 2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이 말씀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갖게 된다는 점, 잘 아시겠지요? 생애 마지막 해에 피아노를 장만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 간 슈베르트가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면 모두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실컷 누리다가 나치 부역 혐의를 받게 된 카라얀이 “음악밖에 몰랐다”고 얘기하면 설득력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정 감독께서 프랑스 정치의 희생양이 됐을 때와 한국에서 돈과 권력을 누리는 지금은, 같은 말이라도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에도 무수한 예가 있지요. 같은 A음이라도 말러 교향곡 10번에 나오는 트럼펫의 절규와 모차르트 협주곡에 나오는 우아한 목관의 A음은 같을 수가 없지요.

  

  

▲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돌이켜 보니 이 말씀의 역사가 무척 길군요. 1996년 다큐 촬영할 때, 묻지도 않는데 자꾸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자랑도 아닌데 왜 이러실까 의아했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년전 서울시향의 재정운영이 불투명하다고 여론의 비판을 받았을 때,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아닌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 감독의 보수에 관해서는, 액수도 잘 모르고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인 서울시 예산이 투입되는 단체인 만큼 투명하게 집행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시는 것은 책임있는 태도가 아니지요. 3년전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쓴 내용을 되풀이할 수 없으니 당시 글 링크합니다.


<진중권 김상수 논쟁에 부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64
  
박현정 대표의 폭언은 물론 비난받을 만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향이 정명훈의 사조직처럼 운영돼 왔다”는 그의 말을 덮어두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정 감독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주, 아주 완곡하게 진언하는 글을 썼습니다. 서울시향의 내홍이 악화될대로 악화된 지금, 설마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시향이 “좀 더 즐거운 것”을 노래하기 바라며>,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509 


그런데, 이번에도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군요. 12월 10일 서울시향 리허설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음악 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강조하셨네요.  


“난 원래는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집안에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누가 내게 누구냐고 물으면 첫째로 나는 인간, 둘째로 음악가라고 해요.” 


LP판 튀듯 되풀이되는 말에 무척 실망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음악밖에 모른다”는 말씀은 무책임의 극치입니다. 박현정 대표는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향후 서울시향이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 감독이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셔야죠. 


정 감독께서는 “인권문제”를 거론하며 박 대표를 압박하셨습니다. 재계약 체결 이전에 하루빨리 박 대표를 몰아내기 위해 일종의 여론 정치를 펼친 것으로 보이는군요. 박 대표가 “인권침해”를 한 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 감독이 평소에 인권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한번쯤 돌이켜 보셔야죠. 서울시향 단원들에 대한 오디션은 물론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그 결과 하루아침에 쫓겨난 분들이 느꼈을 굴욕과 좌절을 배려한 적이 있었나요? 해체 위기의 국립합창단이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왜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셨나요? 


불행히도 정 감독께서는 “음악밖에 모른다”는 코스프레 뒤에서 지나친 이권을 누리는 게 아닌지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아무 근거가 없는 의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정 감독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전두환 · 이명박 등 ‘수퍼갑’의 위선을 닮았습니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을 학살할 때 직접 총질을 하지 않았지요. 이명박은 4대강을 파헤칠 때 직접 삽질을 하지 않았지요.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는 자기 손에 오물을 묻히지 않고 대중 앞에 우아하게 나타납니다. 정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는 주술로 악단 운영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수퍼갑’의 특권을 누리겠다는 뜻 아닌지요?    


박원순 시장이 가세하니 더욱 가관입니다. 정 감독께서 기자들을 만나신 바로 다음날, 박원순 시장은 “박현정 대표가 부적격”이라며 노골적으로 퇴진을 요구했군요. 박 대표의 ‘갑질’은 물론 나빴지만, 이를 빌미로 정 감독과 박 시장이라는 두 ‘수퍼갑’이 고스톱 짜고 치듯 여론몰이에 나서는 건 아름답지 못합니다. 


박 시장은 “사장이 공석일 때 2~3명 추천이 올라와 정명훈 지휘자에게 물었더니 싫다고 해서 1년 동안 공석이 이어진 적이 있었다”며 “박현정 사장을 추천했더니 (정 감독이) 좋다고 합의해 선임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울 시장이 시향 사장을 선임할 때 음악감독의 추인을 받았다니, 좀 이상한 일 아닌가요? 지금의 난맥상은 처음부터 잉태되어 있었다는 얘기군요.


정 감독께서는 “언제든 퇴진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는데, 정작 지금 퇴진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그만둔다”는 말은 일종의 협박처럼 들립니다. 박 시장은 정 감독이 정말 그만둘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군요. 그래서 재계약 체결 전에 박현정 대표를 정리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모양새입니다. 


박 시장은 “정 감독처럼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지휘자가 문제가 좀 있다고 배제해버리면 그 대안이 있냐?”고 하셨는데, 너무 안일한 발언인 것 같습니다. 정 감독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국민 세금이 투여되는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은 ‘문제가 좀 있으면’ 곤란한 자리 아닌가요? 박 시장은 대안이 있냐 하셨는데, 정 감독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 감독께서는 2007년 서울시향을 맡으실 때 “선배로서” “학생 가르치는 마음으로” 악단을 훈련시키겠다고 하셔서 제가 뜨악했던 적이 있습니다. 촬영 원본이 MBC에 있을테니 찾으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차라리 재능기부를 하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정 감독은 한 차례만 더 계약 연장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시향이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10년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아직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 좀 더 일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 감독 아니면 안 된다”는 일부의 인식은 설득력 없어 보입니다.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최근 한국에 번역된 <거장신화>에서 클래식 음악도 상업주의에 휘둘린다고 지적했습니다. 지휘자의 역할도 20세기 전반처럼 악단의 조련사가 아니라 대중들을 불러 모으는 간판, 즉 마케팅 수단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국에서 정명훈이 누리는 인기는 물론 음악 역량 때문이겠지만, ‘한국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라는 명성도 크게 작용했다는 점,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애국주의에 기대어 정 감독이 특혜를 누려온 측면이 크다는 점을 부인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결국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화 후진국의 특성에 다름 아닙니다. 


정 감독이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지휘자라는 건 의심할 바 없습니다. 정 감독이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녹음한 성가곡집은 500만장이 판매되어 음반 역사상 흥행 6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에는 못 미치지만 메타, 오자와, 바렌보임, 아르농쿠르에 앞섭니다. 다른 분들은 교향곡과 오페라로 베스트셀러가 된 반면, 정 감독은 보첼리를 반주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군요. 유럽에서 좀 더 활약하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정 감독이 서울시향의 기량 향상을 위해 쏟은 노력과 공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정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 감독이 지휘하신 서울시향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서울시향의 음악가들은 다른 지휘자와 함께 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음악을 들려 줄 역량이 있습니다. 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췄습니다. 정 감독의 대안으로 꼭 한국 사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빈 필하모닉처럼 단원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기를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겠지만, 한번쯤 단원들의 의견을 모아 보는 것도 좋겠지요. 


제가 볼 때, 재계약을 포기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박 대표가 물러난 뒤 정 감독이 유임된다면, ‘정명훈의 사조직’으로 의심받는 현체제를 유지한다는 뜻인데 이건 서울시향을 위해서나, 서울 시민을 위해서나, 정 감독 자신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수치는 사람이 많을 때 떠나시는 게 현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동짓밤, 정명훈의 베토벤을 생각한다


동짓밤,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실로 태어난 헌법재판소…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라고 만든 바로 그 헌재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짓밟았다. 헌재 판정의 위헌성은 누가 심판할까? 


추운 나날이다. 하루가 멀게 흉폭한 ‘갑질’이 이어진다.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곁눈질조차 하지 않는 무감각의 세월이다.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쌍용차와 C&M의 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십자가를 맨 앞에서 짊어진 예수 아닐까?


이 암담한 때에 무슨 얼어죽을 클래식이란 말인가? 서울시향 논란마저 저급한 진영논리로 전락하는 척박한 땅이다. TV조선과 채널A 등 종편들이 정명훈 감독을 자꾸 때리는 건 박원순 시장을 깎아내리려는 정치공세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난 주 <“음악밖에 모르는” 정명훈 감독의 사퇴를 권한다>는 글을 쓴 뒤 서울시향 직원들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느닷없는 글이 그분들의 상처를 덧나게 한 게 아닌지 염려됐다. 박현정 대표가 물러나야 하고, 그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그만 둔 직원들이 원상회복돼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정명훈 감독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며 불미스런 의혹에 대한 그의 책임있는 태도를 촉구했을 뿐이다.   


<시사인> 고재열 기자는 <음악적 성과는 주목받지 못한 정명훈 감독>이란 기사에서 진영논리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했다. 정명훈 감독의 음악적 성취를 잘 살펴야 하며, ‘지휘자와 단원들의 호흡’이 유럽에서 인정받는다면 이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논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흥행 성적이 곧 음악적 성과”인지 좀 더 따져볼 여지가 있고, “정명훈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은 그 동안 정명훈 감독이 추구해 온 ‘서울시향의 자생력’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역설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고재열 기자의 진단은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서울시향이 지금의 아픔을 이겨내고 계속 발전한다면 우리 사회에 희망의 빛을 한 줄기 더해줄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 Op.67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 2013. 1. 17 예술의 전당)
http://youtu.be/POVjeuef0RY


음악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1808년 12월 22일, 역사적인 음악회가 열렸다. 밤이 가장 길던 그날,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6번이 세상에서 처음 연주됐다.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해서 10시 30분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진 이 음악회는 정말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이 제일 먼저 연주됐다. 이어서, 베토벤은 작곡자로서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며 5번 C단조를 지휘했다. 당시 청중들은 5번 C단조보다 6번 <전원>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크리스트>를 지휘한 베토벤은 피아노 앞에 앉아 협주곡 4번 G장조를 연주했고, 이어서 <합창 환상곡> C단조까지 내쳐 연주했다. 


이 엄청난 연주회를 지켜본 라인하르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우리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 6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그 곳에 앉아,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장점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격언을 확인했습니다. 여러 가지 작은 실수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긴 했지만, 음악회가 끝나기 전에 일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5번 C단조는 ‘청각 상실’이라는 비극적 운명과 마주하여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베토벤의 얼굴이다. 그는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6번 F장조는 자연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 고백이다. 귓병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한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 그는 때로 “사람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운명>과 <전원> 교향곡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후세 사람들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운다. 베토벤은 ‘상처입은 치유자’로 우뚝섰고, 그의 음악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용기와 위안을 준다. 인류에게 오래도록 빛을 던져주는 이 두 곡이 가장 어두운 동짓밤에 초연된 건 우연일까?  


▲ 베토벤이 지휘하는 모습. 5번 교향곡을 초연할 때 리허설을 단 한 번밖에 못 했다고 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는 칼럼 <서울시향과 ‘조율’>에서 “음악(樂)을 통해 마음의 벽을 허물고 ‘같음’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공자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라고 운을 뗀 뒤, “진정한 의미의 조율은 서로 다른 악기,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영논리의 유혹에 쉽게 빠지곤 하는 모든 이들이 귀담아 들을 말이다. 서울시향의 갈등은 ‘조율’로 해결될 단계는 지난 것으로 보인다. 


기나긴 동짓밤이 지나면 조금씩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진다. 더 이상 어두워질 수 없는 밤, 우리는 내일부터 햇빛이 길어진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서울시향의 모든 단원들과 직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박 대표는 더 이상 서울시향 직원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지 말고 사퇴해야 마땅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 베토벤은 단 한번도 “음악밖에 모른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정명훈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며 사태의 원인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할 게 아니라 ‘서울시향’을 중심에 놓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베토벤의 숭고한 음악혼을 나보다 훨씬 잘 아실 정 감독께서 지금의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실 줄 믿는다. 1808년 동짓밤 베토벤이 지휘한 위대한 음악회가 마무리된 건 10시 반이었고,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는 나의 시계도 10시 반을 향해 간다.



음악이여, 침을 뱉어라!

저무는 2014년, 정명훈을 떠나보내며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Op.23  http://youtu.be/5PPs0eg34hQ (피아노 정명훈, 2013, 마리아 칼라스 홀)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며 읽어주시기 바란다. 슈만이 듣고 “쇼팽 곡 중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고 쇼팽 자신도 동의했던 곡, 발라드 1번 G단조다. 정명훈도 이 곡을 무척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1994년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마련한 송별회 자리에서, 2013년 음반 홍보를 위해 모인 기자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했으니까. 


이 연주를 좋아하시는지, 각자 판단에 맡기겠다. 시심(詩心) 가득하면서 드라마틱한 정서가 흐르는 곡인데, 나는 정명훈의 연주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기계처럼 피아노를 두드릴 뿐인데, 그나마 전혀 매끄럽지 않아서 소음처럼 들렸다. 음악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 정식 연주회도 아니고, 기자들 앞에서 맛뵈기로 조금 들려준 걸 갖고 뭘 그러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다. 다큐멘터리 PD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1996년 다큐를 만들 때 정명훈이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조금 넣은 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녹음으로 이어갔다. 아슈케나지 연주가 훨씬 더 섬세하고 시정이 넘치기 때문이었다. 그 다큐에서는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장면을 최초로 입수하여 소개했는데, 다큐를 본 정명훈은 “내가 저렇게 피아노를 잘 쳤었나?” 놀랐다고 전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피아노 연주가 퇴보했다면 지휘자 생활로 바빴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27일 예술의 전당 독주회는 가지 않았는데, 비싼 티켓을 사는 건 내겐 도박이었다. 음반 홍보하는 자리에서 들려준 성의 없는 연주보다 좀 더 나은 걸 기대할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비슷한 수준의 음악을 참고 들어야 한다면 보통 낭패가 아닐 터…. 언론의 연주평이 찬양 일색인 걸 보니 “도박을 할 걸 그랬다” 싶기도 하지만, 링크한 그의 쇼팽은 “피아노는 내게 진짜 음악”이라고 강조하신 분이 들려준 ‘진짜 음악’ 치고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의 지휘에 맞춰 열심히 연주한 서울시향의 음악가들이 “피아노야말로 진짜 음악”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지,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의 무신경이 불쾌했다.      


이런 무신경은 최근 서울시향 논란에 뛰어든 사람들의 글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진중권은 “정명훈 자체가 우리한테는 사치”라며 “세종문화회관 옆을 지나는 돈 없는 서민들에게 클래식이 다 뭡니까?” 덧붙였다. 반어적인 표현이지만, ‘클래식을 좀 아는’ 사람의 오만이 묻어난다. “저렴한 지휘자 갖다 씁시다. 그 자리 노리는 자칭 지휘자들 쌔고 쌨거든요.” 이 귀절을 본 다른 지휘자들이 느꼈을 모멸감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정명훈 이외의 지휘자는 모두 ‘갖다 쓰는’ 메트로놈인가?   


이글루스의 블로그 <어쩌다보니>에 올라온 글도 비슷하다. ‘진보’를 자처하는 필자는 - ‘진보’가 익명 뒤로 숨은 게 좀 이상한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 하는 사람 같다 - 정명훈처럼 “피라미드 상부로 올라간 사람이 쏟아부은 노력과 치열함은 일반인의 것과는 다르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그들의 예술적 성취에 뭐 하나 보태준 것 있나요? 그들이 악보를 사거나 오선지 사는데 누가 십원 한장 보태준 적 있나요? 그 사람들 조국에 빚진 거 하나도 없습니다.” 승자독식을 합리화하며,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책임인 정당한 비판을 봉쇄하는 독재자의 논리를 닮았다. 


게다가 틀렸다. 정명훈은 조국에 빚진 게 있다. 오랜 세월 그가 국적을 유지했던 미국에 대해서는 빚진 게 별로 없겠지만, 그를 낳아주고 사랑해 준 한국에는 빚진 게 무척 많다. 1996년 다큐 촬영할 때 프랑스 언론은 그를 “한국 출신의 미국 지휘자”라고 했다. 이태리 시에나의 지휘 매스터클래스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조금 늦게 도착한 촬영팀을 가리키며 전세계 수십 명의 젊은 지휘자들 앞에서 정명훈은 “저게 바로 코리안 타임”(That's the Korean Time)이라고 말해서 나를 경악케 한 적이 있다. 그에게 한국은 참 편리하고 만만한 나라일 것이다. 그가 유럽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지휘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에게 이토록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김상수씨는 정명훈이 국민의 세금인 서울시향 예산을 불투명하게 사용(詐用)해 온 것을 비판해 왔는데, 익명의 필자는 그를 도가 지나치게 모욕했다. 일일이 지적할 지면도 시간도 없으니 생략하지만, 김상수씨를 가리켜 “고졸 학력과 경력미달의 자칭 예술가”라고 비아냥댄 대목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배운 자들이 제 구실을 못 해서 나라가 이 꼴인데, 대학 안 나온 사람이 나름 올바른 원칙의 회복을 주장한다면 칭찬은 못 하더라도 그렇게 가볍게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학 졸업장 없이 연극, 영화, 미술에서 그가 해낸 ‘창작’은, 음악대학원 나온 사람이 쓴 ‘클래식 칼럼’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익명의 필자는 목수정씨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 뭘 모르시는 분인 것 같다”고 운을 뗐는데, 이 대목이 내겐 가장 거슬린다. 반대 입장을 펴는 사람에게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딱지부터 붙이는 걸 보니 클래식 음악을 아는 게 대단한 우월성의 증거라도 되는 모양이다. 나도 클래식 음악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하지만, 클래식 음악만 거룩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클래식 또한 역사 속에서 태어나 진화하고 사멸하는 여러 종류의 음악 중 하나일 뿐이다. 클래식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깔보는 건 천박한 엘리트주의다.      


논리의 비약이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클래식을 안다”며 자기만족을 내비치는 건 “음악밖에 모른다”며 순수 예술가의 아우라(aura)를 과시하는 정명훈의 태도와 상통한다.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를 하나 더 들어보자. 드뷔시의 <달빛>인데, 5분이 넘는 곡을 기자들 앞에서 2분 정도만 연주했다. 어차피 한국 기자들은 음악을 모르니 아무렇게나 연주해도 환호할 거라고 여기는 걸까? 이 연주가 맘에 드시는가?


드뷔시 <달빛> http://youtu.be/9HEst7strDs (피아노 정명훈, 2014. 9. 25 / 명동성당 마리아홀)


  
▲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클래식 음악에는 드뷔시의 <달빛>처럼 자연의 인상을 묘사한 곡도 있지만 사랑과 동경, 실존과 고뇌, 생명의 예찬이 있고 자유를 향한 갈망, 불의에 대한 분노, 정의와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베토벤과 말러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모두 그러하다. 다시 인용하거니와, 드뷔시는 말했다. “당신들은 결코 훌륭한 음악가가 아니다. 당신들은 오직 음악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고, 핍박받는 동시대인의 고통을 아파할 줄 모르고, 자기 성공을 기원하며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훌륭한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엄밀한 분석이 필요한 질문이지만, 나는 아니라는 쪽에 한표 던진다.   


서울시향의 음악가들은 왜 침묵하는가? 정명훈이란 간판을 앞세우고 만들어 낸 흥행 성적*이 좋아서 그냥 안주하려는 것인가? 당신들의 자존심인 음악 역량, 어느 정도 갖춰진 운영 시스템을 갖고 스스로 일어설 의지는 없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자생력 없는 악단’이라는 수치스런 말을 듣는 게 아닐까?  


‘갑질’에 대해 마땅히 책임져야 할 박현정 대표는 29일 사임했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 ‘수퍼갑’ 정명훈은 재계약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피아노든 지휘든 음악을 처음 시작한 5살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초심을 되찾을 의지는 없어 보인다. 피아노가 ‘진짜 음악’이라고 말했지만, 피아니스트의 고된 삶을 시작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 추하다. 비겁하고 우둔하고 저열하다. 


음악이여, 침을 뱉어라! 슬프고 아팠던 2014년이여,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