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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 오마이뉴스

by Wood-Stock 2013. 12. 8.

ohmynews

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싸이 말춤에서 백남준의 기마사상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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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광란의 해프닝을 벌여왔다. 왜 그랬을까. 그는 소통이 없는 숨 막히는 세상과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만든 근대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깨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세상을 혁명이 아니라 예술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는 1984<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후 무후한 위성아트라는 예술품을 발명했다. 인터넷과 SNS의 원조가 되는 전자초고속도로를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경계 없이 축제의 삶을 누리며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기원했다.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다소 난해하고 낯선 백남준의 생애와 예술을 보다 쉽게 풀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지난 130,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을 만났다.

 

김 관장은 1980년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바라 툴 여사의 소개로 백남준을 만난 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불문학도였던 그가 미술사로 전공을 바꿨고 결국 백남준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은 백남준 전문가로 전위미술과 미디어아트전문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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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0대에 철학적으로 맑스, 예술적으로 쇤베르크가 스승이었다. 이 영상은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129-630)하는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한다> 중 한 장면. 백남준의 인터뷰를 장 폴 파르지에가 1990년 편집한 것인데 자막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 한국에서 맑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A cette epoque en Coree il etait dangereux d'etre marxiste)"

 

-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 백남준은 10대에 막강한 독서가였고 쇤베르크, 마르크스도 섭렵했는데요.

"당대 최고 부잣집(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막내로 태어난 백 선생은 집안도 좋았지만 워낙 타고난 기인이에요. 일찍이 아방가르드 기질이 있었어요. 10대에 이미 쇤베르크 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헤맸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마르크스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 지성인과 엘리트들이 다 마르크시스트였으니까, 그런 정서가 어린 그에게도 전파됐고. 그 나이에 그걸 받아들인 게 백남준이죠."

 

-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백남준은 쇤베르크 논문으로 동경대를 마치고 독일 뮌헨 음대로 유학을 갔죠. 공부를 하는데 전통음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어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존재하는 음이 없을까 하며 피아노를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로 치는 것도 발상하죠. 이렇게 고전음악에 대한 돌파구를 찾다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 사상에 매료되는데, 그가 말하는 음악철학은 음악이 소리의 조직이지 멜로디나 하모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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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의 누드첼로연주. 저드 얄커트,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비디오 510초 걸러와 흑백 무성 편집본 1967년 작.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129-630) . 백남준은 음악에 섹스행위를 집어넣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이분법적 근대가치와 부르주아적 정형을 깨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으로 보시는데.

"음악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중복되어 만나는 제3의 영역 즉 '인터미디어(융합매체)'의 성격이 있죠. '플럭서스(백남준이 함께한 전위미술운동)'도 그렇지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인터미디어에요. 백남준은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넘어갈 때 그 해프닝 자체가 인터미디어죠. 매체만 행위에서 TV나 전자비디오로 바뀐 거지 거기에 깔린 미학은 같아요.

 

제가 그런 차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이라고 본 거예요. 1958년 백남준 편지에 해프닝을 작곡하면서 TV 3대를 포함시키고 오토바이소리, 7살 소녀의 울음소리 이런 생소리를 함께 채집한다고 나와 있어요. 1959'존 케이지 바치는 경의'에서 실제로 그가 채집한 녹음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수탉소리와 오토바이소리를 등장시켜 공연하죠. 백남준은 모든 게 다 음악의 소스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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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찍은 것으로 백남준이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백남준 모습 백남준이 1960'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사진: 클라우스 바리쉬(K. Barisch)

 

- 백남준, 성상 파괴하는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있어요.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피아노는 음악적 권위의 상징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의 상징인데 그것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쳤죠. 예술적 테러리스트인 백남준은 그런 맥락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 잘랐고요. 이건 다 새로운 미술을 재창조하기 위한 파괴였죠."

 

- 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전시에서 '참여 TV'라고 TV에 자석을 붙여놓은 건데 TV의 내부회로 보여주는 영상을 관객이 좌석으로 전자파 조작과정으로 이미지 바뀌고 그 다음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관객이 육성을 집어넣으면 파장이 변해요. 이건 관객이 전시에 참여해서 전시를 완성시킨다는 뜻이 담겨있죠. 비디오아트를 '참여 TV'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백남준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이 이해가 돼요."

 

총알처럼 이분법적 위계를 깨는 '랜덤액세스'

 

- 백남준 미학의 핵심이 되는 '랜덤액세스'가 뭔가요?

"백남준 작품은 기존의 전제주의나 획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동서의 이분법, 장르적 이분법, 남녀의 이분법,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 등 모든 이분법을 깨는 게 바로 비선형 다시 말해 비디오가 TV의 일방적인 걸 쌍방적으로 바꾸는 방식이죠. 그렇게 이분법적인 위계를 총알처럼 깨는 데 최고 무기가 된 것이 바로 '랜덤액세스(Random Access 임의접속)'예요.

 

존 케이지가 말한 우연성 같은 방식이죠. 그래서 무목적적이고 비의도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이게 바로 과거예술의 정형, 완성, 정통성, 하나뿐인 걸 깨는 거죠. 백남준만 아니라 플럭서스라든가. 새로운 걸 창안하는 그 이전의 아방가르드인 다다나 초현실주의도 시도한 것으로 기존의 위계를 깬다는 면에서 같죠. 백남준은 특히 자신만의 구체적 예술매체인 비디오아트, 액션뮤직을 통해서 그걸 추구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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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당통(Danton)'[오른쪽] 1989.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작품.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소장

 

- 서양인들 비디오를 예술화 꿈도 못 꿨죠?

"이를 잘 설명한 게 이어령 선생의 탁월한 비유인데요, "비디오를 발명한 건 미국이고 이를 소형화(상업화)한 건 일본이고 이걸 예술화시킨 것이 백남준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죠. 테크놀로지의 인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건데 사람이 기술의 노예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1965년에 '로봇 K-456'을 만들고 사람이 배설을 하듯 길거리를 걷다가 리모콘을 작동하면 콩이 똥처럼 떨어지고 또 오페라도 부르고 정말 환상적인 작품이었죠. 이게 백남준 최초의 로봇이에요. 나중에 구형 카메라, TV, 전축을 가지고 만든 TV로봇조각의 원형이죠."

 

- 80년대 넘어가서 처음 백 선생을 어떻게 만나셨죠?

"79년 남편이 뉴욕 한국문화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980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어요. 어떻게 인연이 되었냐면 당시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버라 툴 여사를 내가 외교단을 통해 가깝게 알고 지냈는데 툴 부부가 우리 부부를 아방가르드 명소인 키친아트센터에 초대한 거예요. 거기서 백남준이 바이올린과 전축 판을 깨고 부수고 하는 해프닝을 처음 봤고 조각난 걸 모아 거기에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 인연이 되었어요."

 

- 백남준을 통찰과 혜안을 갖춘 예술가로 보셨는데.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작품은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선()사상을 합친 것인데 그런 방식이 아방가르드정신이죠. 아방가르드의 핵심어가 바로 통찰과 혜안(선견지명)이에요. 마르셀 뒤샹도 남이 못 본 걸 미리 보는 혜안을 가지고 현대미술을 탄생시켰잖아요. 세상을 바꾸는 아방가르드들은 항상 그 특징이 앞을 미리 내다보는 예술적 비저너리((Visionary)들이잖아요. 백남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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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백남준 작업실'을 재현한 모습 그의 창작은 그야말로 랜덤액세스방식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는 발명가 같은 예술가였다

 

- 백남준은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로 봤나요?

"전자산업의 성공을 미리 예견하지 않고 누가 비디오가 예술이 된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런 건 하루아침 되는 것이 아니에요. 백 선생이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냐면 백 선생은 항상 정보를 끼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라는 통찰력은 정보의 힘에서 나온 거예요. 온 세계 신문을 다 보고 월가 주식을 다 알고 프랑스 치즈가 몇 가지인 것까지 삶과 관련된 디테일 정보를 꿰차고 있었죠. 건강이 좋은 때는 오전 내내 신문을 보면서 한국 신문까지. 내가 당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등에 연재기사를 썼는데 그걸 다 읽으시고 그 기사에 직접 드로잉을 해서 저에게 보내줘 깜짝 놀랐죠. 제가 지금도 가보처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온 세계 신문을 보면서 풍부한 정보를 소화했기에 선견지명이 나올 수 있었죠. 젊은 작가들도 성공하려면 정보가 많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 8411'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영됐는데 어떤 평가를 하시나요?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8411일 백남준의 '위성오페라' 총진행을 보다

 

- 김 관장 부부가 그 중계 과정을 파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한 후라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1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 파리, 독일에서 송출된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순식간에 편집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보내는 거죠.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데 한 사람이었죠. 정말 그런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어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조수 등에게 저녁을 한턱냈죠."

 

- 그 해 백 선생 35년 만에 귀국해 '고등사기론'을 펼쳤는데요.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게 어떤 확립된 고정관념이 아니거든요. 진실에 한쪽 다른 면에는 그 진실 우습게 보는 관점이 있어야죠. 답이 하나가 아니잖아요. 사기란 뜻은 고의로 상대방에게 사실을 왜곡시켜 착오하게 하는 것인데 사실 미술은 바로 착각의 예술이에요. 평면에 화면을 깊이를 넣은 원급법이 그렇고, 솔거가 담징의 벽화에 그린 그림이 그렇고 그게 '눈속임'인데 그게 미술의 기본이에요.

 

비디오는 미술의 속성을 극대화한 영상예술로 한 가지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양하고 복합한 걸 다 담잖아요. 하나의 진리만 추구했던 것과 다른 패러다임이죠. 사람에게 예술적 방편을 통해서 어떤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고 유희적인 놀이로 보여 사람들은 더 착각에 빠지죠. 예술은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고등사기죠. 과학은 명증적인 것만 주장하지만 예술은 명증 이외에 여러 복합적 양면가치를 제시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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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커버에 실린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사진. 백남준은 이미 10년에 예언했다

 

- 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 개념을 제시했는데요?

"엘 고어 부대통령이 '정보초고속도로'를 이야기하기 10년 전에 이미 백남준은 '전자초고속도로'를 발상했죠. 그러니까 지구가 통신기술을 가지고 인터넷 같은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될 때 백 선생의 역할이 컸죠. 그때 특별전으로 제가 '인포아트(InfoART)'을 맡게 됐고 그래서 그 제목이 '테크놀로지아트''비디오아트'도 아니고 '인포아트'. 이건 결국 (하이)미디어아트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거기서 백남준 덕분에 처음으로 미디어아트가 뭐고, 큐레이터가 뭔지를 알게 된 셈이죠."

 

- '인포아트(Info ART)'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기록되나요?

"인포아트(Info Art 정보예술)는 지금은 멀티미디어 혹은 하이미디어아트라고 하죠. 전엔 '혼합매체(Mixed Media)'로 페인팅에 다른 것 넣는 것이지만, 지금은 전자기술이 들어간 '전자매체'라 그 차원이 다르죠. 정보, 소통, 컴퓨터기술이 다 합쳐진 그래서 멀티아트죠. 이걸 '인포아트(정보예술)'라고 명명했죠. 그 해 월간미술 주최로 백남준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나온 '비빔밥'이 바로 인터미디어예요. 그의 비디오아트에 춤, 공연, 영상, 사운드 등 별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비빔밥아트죠."

 

- 90년대 뇌졸중 극복하고 2000년 구겐하임 전에서 '레이저아트'를 선보였죠?

"그런데 백 선생은 레이저아트를 21세기에 한 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발상을 했어요. 당시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안 된 거죠. 그걸 집대성해서 작품화한 것이 2천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선보인 레이저아트인 '야곱의 사다리'. 그래서 60년대를 '프리비디오(TV)시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비디오시대', 2000년대를 '포스트 비디오시대'라고 하죠. 레이저아트와 홀로그램아트 등이 후기에 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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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사진. 왼쪽 백남준에 <서울랩소디>가 보이는데 이런 국제미디어행사와 잘 어울린다


- 시립미술관 소장품 '서울랩소디' 설명 좀 부탁해요. 대단한 하이테크라고 하던데.

"작품의 뒷부분 가보면 굉장히 복잡해요. '서울랩소디'는 매년 여기에서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요. 이 작품의 주제는 백남준 선생이 첨단의 하이테크로 가는 서울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현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면서 서울의 미디어적 양상과 특징을 잘 반영한 작품이에요."

 

- 지난해 10,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 끝으로 백남준은 문화가 사회 안전벨트라고 했는데 우울증사회에서 앞서가는 미술관을 지향하는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백남준의 비전에 동의하는 방안이 있는지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앞서가는 포스트뮤지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골자는 대중과 소통하는 지역별 거점화, 공간별 특성화예요. '남서울미술관' 생활예술(Living art) 공예 디자인 전용관으로 하고 '서울시지정 인간문화재 초대'전을, 7월에 개관하는 '북서울미술관'은 주민참여 형 공공미술(Public Art)로 하게 되죠.

 

'서소문 본관'은 기획전시와 글로벌한 전시로 '한국대만교류전'이 있고 그리고 '고갱과 그 이후전' 한국일보와 본 미술관 공동기획으로 하고 고갱과 고갱의 주제를 다른 5-7명 현대작가 같이 전시해요. '북유럽공공건축과 디자인전'과 한불비교문화를 주제로 한국전통 ''과 프랑스19세기 '트렁크' 등을 비교하는 '루이 뷔통전'도 있고요. 내년에는 '아프리카전'도 있어요. 난지창작센터는 로컬에서 글로벌로 바꿔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소통과 참여의 정신을 최대로 중시한 백남준의 예술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누구인가

 

기사 관련 사진1979년 남편(천호선, 예술행정가)을 따라 뉴욕에 갔던 김 관장은 1980년 백남준을 만나 큰 감동을 받고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지 10년 만에 뉴욕 헌터칼리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한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캐나다 몬트리올 콘코디어 대학에서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다시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사박사를 마쳤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InfoART)'를 비롯하여 2000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2006년부터 경기도 미술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다. 저서로는 <페미니즘과 비디오미술>(1998), <백남준과 그의 예술>(2002) <현대미술 담론과 현장:여성과 미술, 한국화단과 현대미술>(2003), <굿모닝 미스터 백>(2007) 등이 있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백남준 시대가 왔지만 백남준 연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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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금남로에 있는 아시아문회개발원 원장실에서 인터뷰하는 이영철 원장. 샤먼패션이 특이했다


백남준이 30살 때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는 서구의 한복판에서 세계예술계를 통째로 쓸어버리겠다는 그의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백남준만큼 자신의 긍지와 자부심을 보여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백남준은 천재적 예술가이면서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푸코'도 자신을 고래에 비유하며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조정 당하지 않는 '사유의 잠수자'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바다표면의 잔물고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심해의 철학자다.

가장 깊은 곳을 내려가는 존재이기에 그는 가장 멀리 볼 수 있었다. TV는 '멀리 본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철학을 예술화했다. 비디오아트는 그래서 놀라운 발상이다. 유튜브, 인터넷, 스마트폰, SNS 심지어 노래방까지 그의 아이디어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비디오아트 탄생 50주년을 맞아 이런 예술세계를 펼치는 데 열정을 바쳐온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을 지난 2일 광주에서 만났다. 그는 2015년 개관예정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콘텐츠 구성과 운영에 대한 총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를 종일 쫓아다니며 백남준에 대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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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자화상' 혼합재료 61×69×40cm 1989. '혁명'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다


- 백남준 선생과 이영철 관장이 좀 닮아 보이는데요?
"아 글쎄요. 박수 무당과 대샤먼의 차이겠지요. 백 선생께서 예술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라고 했는데, 전 공감해요. 목적론적인 '무엇으로부터 자유'보다 '자유를 위한 자유'가 더 좋거든요. 전 생각만 도발적인데 백 선생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시차가 없이 특히 예술에서는 완전한 도발 그 자체이지요.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으로 3년간 일하면서 온통 그의 세계에 빠졌어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그분에 대해 생각하며 일합니다. 제가 발견한 건 아주 넓고 깊은 그분의 사유와 예술 속에 일정한 코드가 있다는 거예요. 차츰 이야기하죠." 

- 백남준은 직접 뵌 적이 있는지 그의 이름은 언제 알게 되었나요?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학부에서 사회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했지만, 대학 1학년 때부터 미술에 관심 많아, 당시 북아현동에 공간을 마련해 '무제'라는 미술 비전공자 친구들과 동호인 서클을 만들었어요. 그 무렵 처음 백남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비평가의 말에 그게 예술이 되나 싶었어요. 

70년대 <독서생활>이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 백남준이 TV에 얼굴 내밀고 있는 흑백사진의 이미지가 낯설었어요. TV로 하는 예술, 그건 조상이 없는 예술이잖아요. 당시엔 '앨런 카프로우'같은 해프닝아트와 '개념, 논리,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미술'이 확산될 때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어요."

- 미국의 저명 미술사가 중 백남준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몇 년 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축소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전위예술단체)의 한 멤버로만 봐요. 백남준의 해프닝아트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 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시각 예술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백남준이 안 보이는 거죠. 음악계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고요.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예술의 범위 안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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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월에 이영철관장이 기획한 <신화의 전시-전자 테크놀로지>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
"백남준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가 컸어요. 이에 앞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도 95%가 그의 공로입니다. 그해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열었고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에서 미디어아트란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제자나 외국 동료작가를 데려와 선보였어요. 백남준은 이미 오래전에 세계 최초로 미디어아트 정교수가 되었고, 미국 내 미술대학에 미디어아트학과나 그 관련스튜디오가 생길 때마다 자문역을 도맡아 해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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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슈톡하우젠의 괴짜[오리기날레]에게 바치는 비디오(Video still from Nam June Paik's contribution to Karl Stockhausen's Original performances)' 제작: Wolfgang Ramsbott 1961.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예술가이면서 사상가다운 면모를 선보인 영상물. ⓒ Nam June Paik


- 당시 진보미술계는 백남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하던데요?
"백남준에 대해 진보 쪽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기술의 발전이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이라는 '기술결정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 타자, 소수자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세상의 어둔 면을 개선하려는 면이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진보 쪽에서는 백남준을 '맥루한'(미디어학자)주의자 본 거죠.

당시 유럽에선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가 지식계의 축을 뒤흔들었고 '노버트 위너(N. Wiener)'의 사이버네틱스이론 등이 한참 영향을 미칠 때죠. 또한 서구문명의 몰락에 절규하며 새 문화를 그리려 한 잔혹극의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A. Artaud)'도 있었고요. 백남준은 이렇듯 당대 가장 선진적 관점에 관심이 많았어요." 

-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백남준은 초국적인 장기프로젝트입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생겨 그 위원장 등을 만찬에 초대해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하고도 설득했지만 힘이 없더라고요.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국립미술관 수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올해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탄생된 지 50주년인데도 정부는 몰라요.

국내외에 그에 대한 연구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사람들은 많아도 그를 정작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너무 드문 것 같아요. 지구촌의 많은 젊은이들도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 백남준을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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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연구자들을 위해 펴낸 <백남준의 귀환> 개관 전 행사 도록과 합본형식으로 출간된 A4 대형판의 658쪽. 이제까지 출간된 백남준 서적 중에 가장 전문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절판


- 백남준아트센터 관장하실 때 편저로 <백남준의 귀환>을 내셨는데 왜 저서로 만들지를 않았는지요?
"양심상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남준이 그렇게 중요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걸 모은 책이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저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내서라도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어설픈 저서는 정말 곤란하다가 봐요. 

백남준은 미국에서 40년 살았는데 그 나라에선 백남준에 대한 단일 연구 서적이 단 한 권도 없어요. <피드백>이라는 중요한 책이 있지만, 백남준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앞서 간 연구서입니다. 그 외엔 없어요. 

뉴욕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한 '존 핸아르트' 큐레이터가 다른 연구자들 글을 모아 전시하도록을 자신의 책처럼 출간했는데, 솔직히 내용이 엉망이에요. 그리고 프랑스에도 없고요. 독일에선 백남준 주제로 박사논문을 출간한 저서가 한 권 나왔지만, 그 이후 저자가 상당히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연구서는 없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도록만 더러 있어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한국에선 잘 모르면서 그에 대한 저서는 여러 권 나와 있어요. 백남준 자신이 남긴 중요한 글, 인터뷰가 많은데 제가 이 책을 내기 전까지는 그분 자신에 관한 책은 한 권도 나온 게 없었어요.

백남준을 가장 존경하는 독일에선 백남준의 글 모음집은 몇 권 나와 있습니다. 비엔나현대미술관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리바이벌하며 만든 훌륭한 도록이 있고요. '미디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뒤샹'보다 어렵지요.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서적은 위험천만합니다. 

정말 이제 한국이 21세기를 생각한다면 백남준 연구를 위한 국제적인 학술협회 같은 펠로우십 제도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하려고 노력하다가 중도하차했죠. 백남준의 첫 전시를 분석하는 책을 저서로 낼 예정입니다. 일본어와 영어로 낼 겁니다"

- 백남준을 '샤먼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왜 그에게 '굿'이 중요한가요?
"죽은 자와 산 자가 소통하는 매체가 굿이잖아요. 중세 때 미디어(media)는 '영매'를 가리켰다고 해요. 백남준은 굿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의 샤먼이었어요. 하늘과 지상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지요. 

고조선 단군의 본뜻은 '하늘'입니다. 몽골어로 '탱그리 칸'(天王)'라고 하구요. 탱그리가 백남준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아야 백남준 코드도 알 수 있어요. 백남준을 '몽골의 대장장이 샤먼'으로 보면 많은 게 쉽게 이해되지요. 주술과 예술은 원래 같은 뿌리고 테크놀로지는 그 매개역할을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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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TV 피아노(TV Piano)' 1988. AK 플라자 소장. 백남준의 예술은 음악인지 미술인지 혼돈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의 예술은 장르의 경계도 파괴하다


- 왜 백남준은 모든 걸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왜 백남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파괴적이냐고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거죠.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죠.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죠.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 없이 창조 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어요. 창조자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을 부숴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자가 바로 창조적인 야만인이죠.

'1회 백남준예술상'을 수상한 프랑스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B. Latour)'는 백남준은 근대에 대한 강박이 없던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어요. 백남준은 탈모던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비(非)모던' 예술가입니다. 로컬리티의 중요함도 함께 실천한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이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현대미술사는 다시 써야 합니다."

- 백남준의 '랜덤액세스'를 일상에서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흔히 '랜덤액세스'는 무작위의 접속을 말하는데 이제 누구나 그것을 하고 사는 인터넷 세상이 왔잖아요.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르는 걸 반복하며 사는 거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어떤 일로 어떻게 만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예술을 하려면 그런 비상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라 봐요. 선불교의 화두집에 온통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고요. 백남준이 남긴 드로잉 가운데 '삼계무법(마음이 곧 부처, 부처가 곧 사람)'이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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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운 홀에서 퍼포먼스중인 백남준의 즉흥연주 1968. 백남준은 피아노를 잘 쳤지만 머리와 손등으로도 피아노를 쳤다. 부르주아 교양취미에 대한 반항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영상물 촬영


- 백남준이 증오한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뭔지 한마디 해주시죠?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뭐냐면 항상 좋은 자리에 참석하여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 그러면 백남준이 '몸'을 중시한 것이 여기서 나오나요?
"백남준이 이런 '부르주아 교양취미'를 부수는 데 사용한 무기가 바로 '몸'이죠. 그래서 예술에 몸을 도입해 행위음악, 해프닝아트가 생긴 거고요. 그런데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가 말하는 몸 예술은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전혀 달라요. 그건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방식으로 철학이 없는 그저 우아한 몸짓일 뿐이거든요.

백남준은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깨달음과 각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고 봐요. 백남준을 관념주의자 '헤겔'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해요. 독일 유학할 때 교과 과정에서도 있었고 독일친구들과 니체를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백남준이 예술에 몸을 대입하는 방식이 예술이론보다는 우선적으로 몸이 먼저입니다. 예술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그는 몸으로 춤을 추는 철학을 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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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전시 중



- 백남준과 존 케이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어떤 관계인지요?
"백남준에겐 스승이 없어요.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스승이 아니에요. 케이지가 가르쳐 준 것도 없고요. 그냥 백남준이 그의 공연에서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고, 감동했을 뿐, 백남준이 일본음악전문지의 통신원(기고자)할 때 케이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에 대해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묻곤 했어요.

케이지의 선지식이 나이브했던 것에 백남준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더욱이 케이지 뿐 아니라 서양인에게 크게 알려졌던 일본의 선(禪)지식인 '스즈키(Suzuki)'에 대해 세일즈맨이라며 질타했어요. 일본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미국에서는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위선을 백남준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봤죠. 

케이지가 선불교로 반문명적 예술행위를 포장했다면, '요셉 보이스'는 2차 대전 전투조정사로 출전했다 추락해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줬다는 타타르족 이야기를 지어내 자신의 비합리적 정치예술을 포장했어요. 그런데 보이스 예술탄생의 내막에 백남준이라는 귀재의 상상력과 착상이 작동한 게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어요. 

- 이야기를 바꿔 백남준은 자신이 '황색재앙'이라 했는데, 21세기를 여는 문화칭기즈칸을 꿈꾼 건가요? 
"1962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칭기즈칸'입니다. 그 해가 바로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이라 몽골에서 성대한 축제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그와 관련된 국제스포츠행사도 많았어요. 시사에 민감하던 백남준이 충분히 그것을 활용한 겁니다. 농담처럼 백남준이 말했지만 그것은 반농담반진담이었죠. 

텃세가 판을 치던 인터내셔널리즘 시대의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아트의 세상을 연 백남준은 지금부터 860년 전에 이미 최초의 글로벌 세상을 살았던 그 몽골리언의 세상으로 날아가 정보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예술계로 끌어들인 겁니다.

성인 칭기즈칸이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한 말을 백남준이 계승해 전자세계를 이용해 대륙을 잇는 위성아트를 한 거죠.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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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즈칸의 복원(The Rehabilitation of Genghis-Khan)'[뒷면] 1993.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된 백남준 작품 중 하나.



- 어느 글에서 백남준의 유토피아를 '해원상생(평화공존)'로 보셨는데요?
합리적이고 직선적인 선형적 시간의 매듭 끝자리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온통 다 끊어진 것을 이어놓은 회로로서의 유토피아, 그건 올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있는 평화세상으로서의 유토피아지요. 그래서 2009년 '고르디아스 매듭 다시 묶기'라는 주제와 '백남준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국제세미나를 열었어요.

정주민의 왕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지방을 정벌했을 때 기둥에 묶여 있던 매듭을 무력(칼)으로 잘라내서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는 게 바로 '고르디아스 매듭'이야긴데요, 칼로 베지 않고는 풀지 못하는 정주민의 무력에 맞서 유목민처럼 그걸 치유하고 다시 연결하는 정신이 지금 필요하지 않겠냐는 관점이었지요.

백남준은 처음부터 그걸 알았고 평생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동과 서를 연결시키려 한 게 바로 '바이 바이 키플링', '글로벌 그루브' 등의 작품이죠. 이를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창안해야 합니다. 

- 이제 결론적으로 백남준과 그의 예술에 대해 한마디 더 하신다면?
"하늘의 이치(天理)와 마음의 이치(心理)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믿음, 백남준 비밀코드의 열쇠입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끈이죠. 오늘날엔 '인터페이스'라는 말을 쓰죠. 일방형보단 쌍방형을, 결과보단 과정을, 수직보단 수평을 중시하는 '자유를 위한 자유', 사람 간에 접촉과 대화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남준 선생이 좋아하는 선시 중에 '무봉탑'이 있어요. 이음새가 없는 탑을 말합니다. 요즘 모바일, 유튜브, SNS 등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의 진리를 담은 단지 조각이 아닌 '스투파(큰 사리탑)'가 되는 거죠. 그것이 너무 크고 넓어 모든 인간을 담고도 남아도는 탑으로서의 예술이죠. 

끝으로 이 시대에 백남준은 하나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86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칭기즈칸, 그가 바로 백남준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지금과 같은 다중 시대에 백남준식의 정치적 감각, 예술적 사유, 창조적 실험정신은 훨씬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영철 아시아문화개발원장 및 대표이사는 누구(?)

 

이영철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을 하다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현대미술사 박사과정을 다니던 중에 2회 광주비엔날레 일을 위해 도중에 귀국하였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아시아문화개발원'(대통령령 특별법 28조 근거)의 원장(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위한 싱크탱크역할을 담당하는 정부기관. 그는 2회 광주비엔날레와 1회 부산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역임했고,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창립 총감독, 백남준 국제아트페스티벌 총감독을 역임했다, 저서로 평론집 <상황과 인식>, <현대 미술과 문화 정치학 총서> 백남준 자료집 <백남준의 귀환> 등이 있다.

 

[참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사업은 2002년 고 노무현대통령이 '광주 문화수도육성' 선거공약으로 발표(12.14)로 시작되었고 올해 11년째를 맞고 있다. 2015년에 개관할 예정이다. (홈페이지 http://www.acc04.com)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 백남준아트센터 박만우 관장

"추모하는 사당은 안돼... 백남준이 오래 살 집이어야"


기사 관련 사진백남준은 첫 전시 제목이 왜 '음악의 전시'이며 첫 전시에서 피아노, TV, 비디오, 소머리가 걸리는지. 왜 욕조에 뮤즈를 훼손시켰고 음악의 가시화, 시각화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먹통의 상징 같은 TV가 어떻게 소통을 대변하는 예술매체가 됐는지 등을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을 그의 관장실에서 지난 2월 25일 인터뷰했다. 


- 백남준 선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제가 무슨 인연으로 백남준아트센터에 와서 일하고 있나 싶죠. 저는 백 선생을 비교적 일찍 뵌 편이지요. 1983년 '굿모닝 미스터오웰' 프로젝트 때문에 30여 년 만에 처음 한국에 오셨잖습니까. 전 당시 대학원을 졸업하고 KBS 교육제작국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거기 로비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제가 '전통문화강좌', 'TV미술관' 등을 만들며 구성작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오웰' 할 때 그걸 생생하게 지켜봤었죠. 그럼에도 내가 저분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고 그저 흥분에 휩싸였죠. 

제가 1985년 12월 파리에 갔을 때, 눈이 오는 어느 추운 날이었어요. 세미나를 같이 듣는, 전에 영상 원장 하시던 최민 선생이 '아르데코(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백남준 특강이 있다고 하면서 같이 듣자고 해 갔었어요. 영어로 하는데 영어도 영어지만 '분자생물학' 뭐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니까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근데 당시 동유럽 유고아티스트들도 쫓아왔었어요. 크림치즈, 무스 같은 것을 얼굴에 뿌리고 해프닝 아트하고…. 그때 파리에서 또 뵈었죠. 대학, 대학원 시절 은사인 임명방 교수와 이우환 선생도 그랬지만, 백남준에 대해 많이 언급해 얘기는 많이 들었죠. 당시 저는 아직 젊은 학생이니까 백남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 2006년에도 그와 어떤 인연이 있었다고요? 
"백남준 선생이 2006년 초 돌아가셨잖아요. 당시 제가 부산비엔날레 총감독할 때였는데 파리 출장을 갔다가 바스티유 '메종 로즈(Maison Rose)'에서 비디오 아트 컬렉터 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오프닝 하는 날, 영국 큐레이터 소개로 페스티벌과 아트페어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비디오 아트를 기획하는 '바르셀로나 루프(Loop)' 팀을 만났어요.

이 팀은 바르셀로나 시 주최로 2006년 봄, 비디오 페스티벌 차원에서 최초로 백남준 추모 국제 세미나를 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날 보고 미디어 아트 관련 글도 쓰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 한국인으로서 아시아를 대표해 한 분야를 발표하라고 해 얼떨결에 승낙했지요. 나중에 보니 발표자들의 면면이 대단했어요. 

서울로 오면서 뭘 발표해야지 고민이 많았어요. 귀국해보니 마침 백남준 아트센터 기공식이 있었죠. 고궁박물관에선 백남준의 뉴욕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를 만들어놓고, 미국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도 소개됐어요. 그중 백남준 유작 '엄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백남준 후반기 비디오 작업에 있어 모국 또는 모성이미지의 매트릭스'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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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의 '음악전시회_전자텔레비전' 흑백사진 24×30cm 1963. 사진: 만프레드 레베. 국립현대미술관소장.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에 TV를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만프레드 레베 박사는 1997년 과천전시 때 한국에도 왔었다


- 올해가 '비디오 아트 50주년'이죠. 독일 첫 전시인 음악, 피아노, TV, 소머리도 들어가는 '음악의 전시',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실 백남준 비디오 아트 50주년을 맞아 올 4월 26일 백남준아트센터 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데 바로 그 주제로 하게 되지요. 미술사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발아를 보여준 태동의 잠재력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백남준이 참여와 소통을 강조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1963년이라는 시점이 굉장히 많은 걸 암시해요. 

그가 왜 동시대 미술의 획을 긋고, 정말 미술사에 새 장을 연 사람인지, 왜냐하면 백남준은 이미 초기에 동시대 작가와는 또 다른 의제와 핵심적 이슈를 건드렸거든요. 첫 전시회에 TV를 도입한 것은 물론이고요. 백남준 21세기 전개될 새로운 사회구조와 문화의 방향성을 다 예견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정말 그 직관력이 뛰어났죠. 

이에 대한 답변으로 4월 26일 국제학술대회 구성과 참여인사의 면모와 세부적 주제들 설명 하는 것이 낫겠네요. 구성 멤버가 잘 짜였어요. '사이먼 밀러' 교수는 누구보다도 음악과 미술 관계에서 전문가고요. 또 미국 워싱턴 대 '루츠 쾨프닉' 교수는 중요한 문화연구가예요. 이 분은 최근 저서인 'TV의 문화사'에 가장 중요한 챕터가 '플럭서스 TV'인데요 TV아트를 이런 문화이론의 큰 틀에서 짝 조명해주실 거예요.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인데요. 독일어 'Ausstellung'가 아닌 영어 'exposition' 쓴 게 의미심장해요. 이 단어는 노출시키거나 가시화한다는 뜻도 담겨 있잖아요. "태양광선의 소통이 와서 닿는다"라고도 해석이 되고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음악의 가시화나 시각화'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백남준은 아무리 '존 케이지' 류의 실험적 전위 음악을 할지라도 그보다 더 급진적 제스처를 쓰지 않았다면 외국에서 생존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백남준이 고민한 것 중 하나가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건 선불교 말하는 극단적 깨달음과도 통하는 것이지요. 

저도 대학 다닐 때 선방 많이 쫓아다니고 한때 '성찰' 스님 계도도 받아봤지만, 그때보면 공안을 주고 기존사유의 범주를 완전히 깨부수잖아요. '동자가 소를 타고 폭포수를 지나가는데 폭포수소리가 보이느냐?' 시각과 청각의 혼용을 넘다드는 그래서 일상적 사유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런 자극을 주는 원리와 같은 것이죠." 

'음악의 전시' 시각과 청각의 경계 넘기

- 이런 극단의 선불교적 예술이 서구 미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의 예술에 액션이 들어가게 된 배경은 본격적으로 2차 대전이후에 미술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걸 넘어서려고 했는데 작가들의 고민은 1963년이 되었지만, 예술의 상품화는 더 심화되고 그래서 시장에서 내다팔 수 없는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비물질화'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표적 예술이 바로 '액션음악, 퍼포먼스, 해프닝'입니다. 백남준은 바로 그런 요소를 공유한 거죠.

그 다음에 하나가 음악의 미래는 전자음악이라고 봤고 그래서 전자공학도 중요하게 생각했죠. 독학으로 혹은 베를린공대 드나들면서 배웠어요. 바로 그때 음악과 미술을 뒤섞는 아트가 되는데 가장 강력한 시청각매체는 TV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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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스마트폰에 담은 2010년 3월에 <백남준_랜덤 액세스전> 홍보게시물


- 이런 것이 다 백남준의 '랜덤액세스'와도 관련이 있지요? 
"그렇죠. 백남준에게 있어 '랜덤액세스'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1963년 첫 전시에서 나온 건데요. 랜덤액세스 즉 '임의접속' 언제 어디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시공간 넘어서잖아요. 지금 다 어디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면 다 접속이 되는 '유비쿼터스' 세상이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가능해진 겁니다. 

과학적 측면만 아니라 인문적, 문화사적 차원이나 현대소통이론에서도 그렇고 모든 아트 커뮤니케이션의 분기점이 되는 건 바로 정보에 있어 '제공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당연히 여기지만 '수용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수용자의 공간 참여, 신체개입이 현대미술을 전환시키는 축이잖아요. 더 이상 미술이 객관적 관조의 대상 아닌 거예요. 이건 결국 환경미술이나 설치미술과도 연결되는데, 환경미술은 여기서 '감상자의 신체를 에워싼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뜻합니다.

문화사로 보면 비디오아트도 백남준 천재가 그냥 태어나는 것 어디 있어요. 주변 지적토양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고, 1963년 당시 <누벨바그> 영화가 나오면서 '장 뤽 고다르'의 '카메라의 만년필화' 그래서 결국 수용자가 'UCC'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와야 영화가 돈과 자본과 권력이 조작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 해방적 소통매체가 된다는 것. 이게 다 백남준과 같은 문맥입니다. 결국은 수용자의 참여가 관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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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북구 비엔날레로 111(용봉동)에 있는 광주비엔날레 주전시장 입구


- 백남준 글로벌 작가로 '정보사회'에 큰 아이디어를 주었지만, 90년대 이후 '광주비엔날레' 등 우리문화예술계에도 큰 선물 보따리를 주셨다고요? 
"백남준은 예술가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에서 21세까지 걸쳐간 사람으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한 사람이죠.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죠.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의 족적을 알면 알수록 고국에 대한 사랑 굉장했구나 싶어요. 애국심의 발로만 아니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와 기원이 이게 결국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증명해 보인 게 바로 백남준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정권 때 광주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를 모아놓고 5·18 보상을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 한 분이 "비엔날레요" 그래서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로 비엔날레가 생겼죠. 광주비엔날레가 그 아이디어로 그렇고 '인포아트'도 다 백 선생이 직접 섭외하고, 아는 외국작가를 섭외했잖아요. 어떤 파장이 올지 결국 고국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이를 기획하여 구체적 플랜까지 생각하며 실현한 거예요.

이보다 2002년에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한 백남준이 미국에서 받은 상금 (요즘 돈으로 약 3억 원 해당)을 휘트니 관장 찾아가서 "한국은 아직도 동시대 미술을 모르고 유화로 꽃, 나비를 그리고 있으니, 내가 그 돈을 다 낼 테니까 한국에 꼭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거잖아요. 그렇게 그 전시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온 거죠. 

2003년 처음 보는 낯선 형태의 전시인데도 전 파리에 있었고, 아내가 보고 와서 그러는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20대, 30대 부부 등 25만 명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나라에 세계현대미술의 흐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가 직접 코디네이션 한 것입니다. 그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보답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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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포스터. 백남준이 말한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 "세계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우리 스스로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정신적 바탕의 배경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런 방식의 말은 백남준의 자신감과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정말 백남준 사유가 독특한 하나는 어떤 방식이든 이분법이나 대립적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현실까지도 끌어들이면서 그게 문화예술이지만 제3의 영역을 만들어 내었죠. 

서구의 테크놀로지가 엄청난 진화와 진보를 보였지만 사실 동양사회는 전통적으로 자연과 문화의 공존과 친화적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바로 이런 걸 동시에 결합시켜 서구인에게는 충격을 준 거죠. 백남준 세계관 자체가 조명돼야 할 것이 많은데요. 이런 면에서 동서양 미학과 철학이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 백남준 연구와 그에게 접근하는데 유의할 점이 있다면요?
"조금은 필요한 게 아직까지는 잘 알다시피 서구에서도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백남준의 예술적 정신적 유산을 깊이 있게 해석해낼 만큼 전문연구인력 형성과 이에 대한 관심촉발이 아직 덜 되어 있고요. 또 하나는 특히 국내환경에 적용돼야 하는데 백남준의 '신화화'에서 탈피해야 하고 전설적인 인물로만 접근하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감정 섞인 개인적 숭배에서 벗어나 연구중심을 일단 미술사에 근거해야지요. 

서양의 '발터 벤야민'의 경우도 그의 전기적 삶과 그의 철학적 사상을 혼돈한 나머지 그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어떻게 21세기 예술과 미학적 사유를 위해서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배태했는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다 '비판적 이해(critical understanding)'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서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견해를 취해는 거죠. 여기가 인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돼야지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되어서는 안 되죠." 

백남준 편집기술에 대한 연구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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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TV침대' 1972.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6월 30일까지)>에서 소개된 'TV침대'. 모니터에 담긴 내용과 그 독특한 리듬감, 템포감 등에 대해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 백남준 선생도 내 작업은 '음악기반의 예술'이라 하셨지요?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셨어요. 백남준 예술은 흔히 '시간예술(time based art)'라고 하죠. 해프닝, 기존미술에서 탈피한 퍼포먼스 심지어 내러티브가 포함된 영상예술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추상적 시간철학이 아니라 백남준의 시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쉬운 건 백남준의 시간예술에서 몽타주 편집기술이 핵심인데 이에 관심을 둔 연구소가 한 군데도 없어요. 

잘 아시다시피 엄청나게 많은 '기존영상(footage)'이나 방송필름 재활용하면서 본인이 다 편집을 했잖아요. 1930-1940년대 '레비-스트로스'가 16mm로 찍은 아마존에 원시부족의 춤추는 모습 등 인류학자의 아카이브도 활용하고, 일본 닛산 차, 펩시광고 때로 험프리 보가드가 나오는 영화 등을 샘플링, 재조합, 재편집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편집이 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을 미술사적으로 디테일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50대 미디어작가들이 요즘 하는 걸 백남준은 이미 오래 전에 시도했으니 놀랍죠.

백남준의 예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의 텍스트에만 너무 의존하지는 말고 콘텍스트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칸딘스키 '점선면' 이론도 그 사람의 저술일 뿐 작품과는 분리해 봐야하듯 백남준의 미술사도 내재적 분석이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글로벌 그루브'에서 부채춤이 왜 나오고 비디오아트에서 탭댄스, 왜 중요하고 그게 무슨 의도인지 알아야하죠. 그게 단순히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남준은 설치 비디오아트에서 '공간과 신체와 관계'를 다루고 있는 거죠. 

백남준에 보기에 인간의 만든 가장 중요한 문명의 이기가운데 인간의 삶을 스스로 황폐하게 하지 않는데 기여한 악기라고 본 거죠. 첨단공학이 들어간 과학적 산물인 악기, '샬럿 무어먼(백남준 예술파트너)'의 첼로 같은 것을 신체의 영장으로 TV나 비디오와 같은 맥락으로 봤어요. 이를 이해 못하면 비디오아트를 알 수 없습니다. 

악기의 연장으로 소리를 시각화한 백남준의 TV아트, 이것은 결국 영상, 리듬감, 소리의 시각화하면서 사운드와 비주얼 통합하는 것인데 기존의 영화방식이나 영상과는 전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제3의 탁월한 리듬감과 템포감을 발굴한 거죠.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음악전공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디아스포라 예술가로서의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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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디아 카비-린케 I '아니오' 2012. 위 작품은 지금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년 6월 16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끈질긴 후렴>에 소개되는 튀니지 작가 '나디아 카비-린케'의 영상작품 중 한 장면. 그는 백남준의 후예답게 약자의 힘이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 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인도인, 유태인, 우리나라 안산 외국이주민 등 이런 떠돌이들, 그들은 집을 언제라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말뚝을 박고 살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바로 21세기에 소프트파워가 됩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거죠. 백남준이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백남준아트센터가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끝으로 한마디 더 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아트센터이면서 미술관이기 때문에 가장 큰 얼이자 정체성이 되는 게 바로 컬렉션인데요.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멈췄기 때문에 인간에 비유하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로 넘어가는데 부양이 잘 안 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여건만 탓할 수 없고 좀 더 장기적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국내외 개인소장자로부터 주요작품을 가져와서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그런 네트워크도 넓히고 신뢰도도 높여야죠. 경쟁력 있는 학예연구를 통해 진전된 재해석과 훌륭한 전시도 내놓아야 합니다.

국제학술대회와 NJP 학술서적을 지속 간행하여 전문역량을 키우고 이와 동시에 멀티미디어 환경 등을 통해 대중화에도 힘을 써야죠. 백남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하고 후원받기 위해서 다양한 접촉도 필요합니다."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미니프로필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나와 파리1대학교 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국내외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해왔으며, 2001년 광주 비엔날레전시부장을 거쳐 2005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냈다.

 

2008년에는 '독일 하노버 엑스포 문화행사 현대미술전' 큐레이터로 2010년에는 '프랑스 팔레 드 도쿄 국제교류' 초빙 디렉터로 활동했다그해 1월부터는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로 일해 왔고, 지난 20103월부터는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으로 부임해 3년째 일하고 있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

"어려서 남준네 가면 '색시 왔네' 했어요"


이경희 여사는 백남준과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었던 '애국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백남준 집에 그 차가 한 대 있었는데 이 여사는 그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는 정혼을 맺어 이 여사가 백남준 집에 놀러 가면 "남준이 색시 왔네"라고 말했단다.

이경희 여사는 서울대에서 약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2학년 때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어 KBS 라디오 '스무고개' '재치문답' 등과 KBS TV '나는 누구일까요'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후에 세계여행을 주제로 한 기행수필가로 변신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꼭두극'을 알리는 문화대사 몫도 톡톡히 했다.

35년 만에 백남준이 귀국했을 때 첫 마디가 "유치원친구 경희를 만나고 싶다"였다는 이야기였다. 또 백남준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여 전 마이애미로 백남준을 찾아갔다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부인 시게코 때문에 힘들기도 했단다. 이경희 여사는 백남준 관련 서적 두 권을 냈다. 그를 통해 인간 백남준을 알기 위해 지난 3월 23일 자택을 찾았다.

- 백남준 관련 행사에 거의 안 빠지시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원래 제가 전시에 참석하거나 학술강의 듣는 걸 좋아해서 그런 곳에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과 관련되는 곳이니까 더 가게 되지요. 생존에 백남준 본인이 자기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내게 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사후에도 그 연장으로 백남준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행사에 참석하게 됩니다.

나는 무남독녀로 형제 없이 혼자 자라 몸이 보통 약한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폐문임파선을 앓아서 거의 학교를 못 가 6학년을 재수했어요. 나이 들어서도 매년행사처럼 1년에 한 번씩 입원을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백남준은 외국에 있으면서도 그걸 알았더군요. 그러니 지금도 그의 행사에 빠질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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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백남준과 함께 다녔던 애국유치원은 명당성당 건너편에 있었는데 그 때 찍은 졸업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백남준, 가운뎃줄 오른쪽으로 7번째가 이경희 여사다



- 세계적인 예술가를 유치원 친구로 두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 같은 세계적 천재를 유치원친구로 두었다는 건 나에게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35년을 지내다 돌아와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줬다는 게 기뻤습니다. 나는 백남준의 예술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강의나 글을 읽고 차츰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난해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던 예술이 우리사회에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가 맨 처음 한국에 와 나와 인터뷰할 때 '나의 예술이 지금은 난해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하며 따라할 거야'라고 했는데 실제로 요즘 광고 등에 응용되는 걸 봅니다. TV모니터를 비스듬히 들고 거기에 얼굴을 내밀거나 거기서 연속문양을 사용하는 게 참 많습니다."

- 백남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백남준은 창작활동에서 유치원 때 기억이 꽤 많이 아이디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영감을 창출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렸을 1930년 후반에는 유치원 다니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가 동덕여중을 나온 신여성이라 딸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면서 을지로 2가 명동성당까지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같은 창신동에 살았던 백남준 집에는 그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었던 시절 백남준 집에는 그 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차를 타고 같이 유치원엘 다녔습니다. 백남준 집은 대문이 커서 창신동에서 '큰대문집'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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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슈투스(Toni Stooss)와 토마스 켈라인(Thomas Kellein)이 공동 저술한 <백남준의 비디오 시간-비디오 스페이스(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 1992)>의 한 페이지. 여기에 이경희 여사가 1971년에 쓴 수필 <왕자와 공주>가 독일어로 번역돼 실려 있다. 상단은 금강산에서 찍은 백남준 가족사진이고, 하단은 백남준이 물음표로 나란히 거꾸로 그려 이 여사에게 보낸 사랑의 하트사인이다



남준이와 나는 모래를 가지고 놀길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는 다른 애들이 하는 모래장난대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고 하며 젖은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곤 했는데 백남준이 내가 만든 집을 깨트리거나 다른 이상한 걸 만드는 겁니다. 뭔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도 일종의 퍼포먼스를 한 것 같아요. 

백남준 집 뒷동산에 벚나무가 많아 벚꽃이 지고 버찌가 달리면 우리는 그 검은 열매를 따먹곤 했습니다. 백남준은 입가에 시커멓게 물을 묻혀 나를 웃기곤 했지요. 어느 날 백남준 사촌들과 함께 숨바꼭질하다가 백남준이 내 손을 잡고 함께 숨는다고 창고 뒤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만 창고 지붕에 씌운 도당에 이마가 찢겼어요. 남준이 피가 나는 걸 보고 겁을 내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백남준은 그게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40여 년 간 그걸 미안하게 생각했더라고요. 

그런데 백남준이 1968년 국내 <공간>(8월호) 잡지에 '뉴욕 단상'이란 제목으로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 내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 중에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이마를 다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어린나이에 여자 친구에게서 '춘(春)'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느꼈다는 말인데 얼마나 성숙한 일입니까. 모차르트가 그랬듯 천재는 일찍 성이 발달한다고 하는데 백남준도 그랬나봅니다."

- 백남준은 유치원 시절을 '유토피아'로 봤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유치원은 일종의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1963년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의 포스터에 보면 16개 주제가 네모 칸에 적혀있는데 그 첫 주제가 바로 '어른을 위한 유치원(Kindergarten der Alten)'입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 직접 쓴 글에서도 '지금이 곧 유토피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의 '지금'이라는 건 아이처럼 깨어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돼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걸 유치원 시절의 특권으로 본 것이죠."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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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 각자의 궤도를 돌다 1984년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나는 남준이를 늘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남준이는 나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백남준 작은 누님이 동생은 외국에 돌아다니면서 힘든 전위예술인지 뭔지를 한다고 해서 날 기억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외국에서 정말 멋진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것이고요.(웃음)

그래서 나는 백남준이 6월 22일 밤에 공항에 들어오는 걸 TV로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먼 산 보듯 그저 담담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에 백남준이 유치원 친구 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도대체 기자들이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전혀 예상치 않은 대답을 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남준이 처음 아니냐며 주변에서 역시 천재는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 백남준은 기지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좋아하시는 게 있다면?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사람,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뿐이다' 등입니다. 백남준은 자신을 '어릿광대'로 비유하며 자기의 예술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84년에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에 <손에, 손잡고>같은 위성아트연작을 남긴 것 같아요. <손에, 손잡고>는 구소련과 중국이 참가해서 아주 큰 이슈가 됐습니다. 구소련에서는 사전검열 없이 생방송되어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고요. 세계적으로 히트 하려면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정도로 재미있게 대중예술 위주로 편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로, 난 '꼭두극'으로 한국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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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희 여사가 만든 말뚝이꼭두를 받고 좋아하는 백남준. 1985년 청담동 백남준 작은누이 댁에서 찍은 사진.


- 백남준은 '작곡가'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경희 여사는 '약학도'에서 '꼭두극 연출가'로 변신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두 분 비슷한 점이 많네요? 
"글쎄요. 그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낼 때 우연이기는 하지만 우리 둘은 많은 면에서 닮아있어 거기에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꼭두극·사물놀이·남사당 풍물패 유럽공연을 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셈인데 그런 것이 백남준의 예술적 시도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내가 꼭두극단을 만들고 자문을 얻어 '인형극'이 아니라 꼭두놀음패 '어릿광대'라고 지었는데 백남준은 스스로를 '무당'이나 '어릿광대'라는 비유했잖아요.

더군다나 백남준이 한국에 온 첫 해인 1984년 내가 제작한 꼭두극 '양주별산대'를 가지고 동독 드레스덴에서 열린 '세계꼭두극페스티벌'에 참석하게 됐는데 당시로는 동구권참가라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일이었지요. 국가지원 없이 나 혼자서 해나가기가 힘들다니까, 백남준은 '경희가 굉장한 일을 하는데 내가 뭘 도와줄까?' 하더니, 마침 자기가 조금 후에 문공부장관을 만나러 가니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아니, 고국에 돌아와서 문공부장관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자기의 유치원 친구를 도와달라고 한다니 그게 말이 안 되지요. 1984년 유럽공연을 잘 마쳤더니 연말에 백남준이 나에게 '구라파 순회공연 축하!'라고 쓴 엽서를 보내줬어요. 우린 이상할 정도로 상통하는 데가 많아 보입니다."

- 백남준은 아이디어가 많은 천재인데 왜 머리보다 몸을 중시했나요?
"왜 몸이냐고요? 백남준은 인간의 본능을 그대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 온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전기스파크 같은 불꽃을 일으켜도 그는 몸을 먼저 주제로 삼은 것 같아요.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몸으로 실현하고 행위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그래요. 그가 삶에서 보인 즉흥적 해결법이나 번갯불 같은 발상은 놀라워요. 1984년 귀국 후 두 번째 만나는 날에 처음 인터뷰에서 그가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하다 빚을 많이 졌다는 말이 안쓰러워 내가 봉투에 200달러를 넣고 갔어요. 그리고는 이것으로 빚 갚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글을 쪽지에 쓰고는 이 쪽지를 내가 간 다음에 없애달라고 했어요. 그는 '내가 한국에서 달러를 가지고 나가면 안 되지. 이 돈, 경희가 가지고 있다가 내가 달랠 때줘' 하고는 내 손을 붙잡고 화장실 문을 열더니 변기 속에 쪽지를 넣고 물을 내리는 거예요. 나에게 쪽지를 없앴다는 확인을 시켜주는 그런 번갯불 같은 기지를 나는 모르고 화장실 문을 열기에 당황했던 일이 있어요."

'남준이 색시'라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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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에 이경희 여사가 출간한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의 표지. 아래 백남준 사진은 이 여사가 1984년 6년 29일 워커일 '펄 빌라'에서 찍은 것으로 누가 사진을 잘 찍는지 내기를 했는데 나는 백남준을 제대로 찍었는데 그가 찍은 내 사진은 얼굴이 흐리게 나와 속상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일부러 흔들어서 그렇게 찍은 거였다.

▲  백남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창신동 자리에서 프랑스 TV '카날 플뤼(CANAL+)'에서 촬영한 영상필름의 스틸 컷. 백남준이 살았던 부잣집을 상징하는 창신동 '큰대문집'이 나온다. 백남준의 흰 도포차림과 갓 그리고 이경희 여사의 한복이 인상적이다. 백남준 집안은 음력시월상달에 굿판을 벌였단다. 부잣집답게 동네사람들 다 모아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크게 대접을 했단다. 이런 경험은 그의 '굿 미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 10여 년 간격으로 백남준 관련 책을 두 권 내셨는데 그의 차이점은 뭔가요? 
"백남준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자기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로는 '나와 남준 같은 사적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에도 백남준은 어린애처럼 몇 번이나 조르듯 떼를 쓰며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을 때 보니 백남준이 나를 금방 못 알아보는 거예요. 처음엔 비디오아트전시라 내부가 좀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백남준이 당뇨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런 세계적 회고전을 열 수 있다니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가 내게 부탁한 책을 낸다 해도 읽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그해 다급하게 낸 책이 바로 <백남준 이야기>(2000)입니다. 

이 책은 백남준과의 어릴 적 이야기며, 40여 년 전 만에 만나 함께 지냈던 이야기 등 사사로운 내용이 주입니다. 그리고 백남준이 세상 떠난 후,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세계에도 접근하고자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를 썼습니다. 

내가 백남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는 그의 흔적을 진실 되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건 유치원 친구인 날 그토록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어려서 '남준이 색시'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역사에 남는 영웅이나 천재예술가 이야기에는 항상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후세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자료나 증거가 발견돼 그제야 수정되는 게 허다하지요. 특히 사람들이 제일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이 사랑이나 남녀문제인데 백남준에 대해 내가 아는 진실을 꼼꼼히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백남준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이들을 위해 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실었습니다."


- 백남준은 왜 '굿의 예술화', '민속학' 등을 중시했는데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전통, 민속놀이 같은 것이 많이 소재로 돼 있습니다. 어려서 '큰대문집'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굿을 했는데 그 때 본 무당에 강한 인상이 어른이 돼 비디오 아트에도 많은 소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무당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무당'이었다며 애꾸무당의 얼굴이 TV프레임 속에 있는 스케치를 그 자리에서 그려 주는 순발력을 보고 함께 있던 분들도 놀랬어요.

동서양의 만남과 소통을 주제로 한 <바이, 바이 키플링>에 나오는 장면 중 남대문시장의 미꾸라지장사·옷 장사 등의 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후진국 모습을 담았냐고 비난을 하니까 '궂은 것을 피하면 후진을 벗지 못한다, 남대문시장 풍경은 미국에 없는 퍼포먼스여서 재미있어 찍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백남준의 이런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경희 여사가 본 백남준의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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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고 추위를 많이 타 겨울만 되면 마이애미 자택에 거주했다. 이경희 여사는 2004년 12월 6일 마이애미에서 백남준을 극적으로 만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간병인과 그의 부인도 보인다



- 끝으로 백남준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는지요? 
"마지막으로 본 게 그가 죽기 거의 1년 전인 2004년 12월 6일입니다. 백남준이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쿠바여행을 핑계로 백남준에게 전화를 걸고 가겠다고 했더니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시게코에게도 알렸고요.

호텔에 도착에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안 받아 또 걸었는데 누가 전화를 받기는 하는데 끊어졌어요. 그때 아마 백남준은 내 팩스를 못 받고 부인 시게코가 알지만 집에 있으면서도 안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남편한테 어렵고 허락을 받아놓고도 백남준을 못 만나고 귀국하면 어쩌나싶어 신경안정제까지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바닷가를 나갔어요. 백남준을 못 만났지만 백남준이 있는 마이애미 아침바다라 감격스러웠습니다. 길 건너 멀리 노천카페가 보였고요. 그런데 어떤 남자가 정상적이지 않는 소리를 지르기에 누가 장난을 치나 아니면 어제 밤에 본 불량배인가 무서워 안 돌아봤는데 또 더 크게 소리치는 거예요. 돌아보니 파라솔카페 아래 시게코가 있었고 그 옆에 기적처럼 백남준이 있지 않겠어요.

백남준 나를 알아보고 괴성을 질렀어요. 시게코와 인사하는 동안도 계속됐고요. '당신이 와서 너무 흥분돼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의사도 흥분하면 뇌혈관 파열이 될 수 있어 조심하라'고 했는데 나는 왈칵 겁이 나 그가 절규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꽉 껴안았어요. 시게코도 '소리치면 주인이 더 못 오게 한 대요'라며 그를 다그쳤고요. 그런데 백남준은 뜻밖에도 나에게 난생처음 존댓말을 쓰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백남준과의 마지막 포옹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경희, 옛날하고 똑같아'라고 두 번이나 말하잖아요. 유치원 때처럼 날 예쁘게 본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시게코에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왜 통화가 안 됐나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아야할 이유가 뭐냐'며 화를 버럭 내더니 백남준의 휠체어를 확 빼가지고 그대로 가버렸지요. 그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이제 백남준을 마지막으로 보는가 싶어 급하게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그의 뒷모습을 찍었지요."


수필가이자 한국 꼭두극의 선구자 이경희 여사

 

기사 관련 사진유사(唯史) 이경희(李京姬)193212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2학년 재학시절부터,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 등의 프로그램에 '박사'로 출연하기 시작하여 KBS TV'나는 누구일까요?' '나의 직업은'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1970년 첫 수필집 <산귀래(山歸來)>로 문단활동을 시작하면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영문일간지 <The Korea Herald>'Women's Pattern'이라는 타이틀의 주간칼럼을 씀으로써 한국여성의 고유한 정서를 외국인독자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등 1960년대부터의 여행이 그녀의 삶의 테마가 되어 '기행수필'이라는 장르의 수필세계를 만들어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월간 춤>지에 연속해서 글을 썼다. 특히 그녀의 수필 중 <현이의 연극>은 중학교 국정국어교과서에 선정되어 30년 가까이 실리고 있다.

 

이 여사는 또한 70년대 말부터 척박한 한국의 꼭두극(마리오네트)을 개척해 유럽 등 꼭두극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9'국제꼭두극연맹(유니마 UNIMA)'에 가입해 한국본부를 두고 회장을 맡았다. 현재 이 연맹의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전문지 <계간 꼭두극>을 펴내고 꼭두극단 '어릿광대'를 창설해 '꼭두극 양주별산대'로 주목을 받았다. 88년에는 '서울국제꼭두극페스티벌'을 유치했다.

 

동갑인 남편 고 오수인(吳壽寅)사이에 네 딸을 두었고,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등 문인단체에 적을 두고 있다. 저서로 <산귀래>(1970), <뜰이 보이는 창>(1972), <현이의 연극>(1973), <백남준 이야기>(2000), <이경희 기행수필>(2009),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 외 여럿이 있으며 영문번역집 (1994)이 있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백남준의 청년기(1932~1956)

'재벌가' 막내아들은 왜 마르크스에 빠졌을까


백남준은 일제식민시대인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준은 자신의 생일에 일어난 세기적 사건, 예컨대 1929년 케네디 미 대통령 부인 재클린 여사 탄생, 1944년 히틀러 암살 시도, 1969년 미국 우주비행사의 달 착륙 등을 재치 있게 작품화했다.

백남준 집안은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는 시절 캐딜락이 한 대 있을 정도로 큰 부자였다. 어려서 산 창신동 집 대문이 커다란 솟을대문으로 돼 있어 '큰 대문 집'이라 불렸다. 그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는 이와 관련한 얘기는 이미 인터뷰에서 일부 소개(기사 보기)했지만 그녀가 쓴 <백남준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재벌 막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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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맨 왼쪽이 백남준이고 그 뒤로 부친 백낙승이다.


백남준의 부친인 백낙승씨는 한국 최초의 재벌로 일본의 니혼대 상과와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다. 1920년대부터 1300여 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경영했고 홍콩과도 무역했다. 또한 그의 조부 백윤수씨는 당시 종로·동대문 일대 포목점 중 50~70%를 독점했고 조선말 왕실의 상복·제복 등을 도맡았다.

백남준은 선친으로부터 사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반드시 훌륭한 사업가 돼야 한다는 다짐을 받아왔다. 그래서 두 형은 모두 사업가가 됐지만, 막내인 백남준은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집안의 자랑이 아니라 사고뭉치 내지 말썽쟁이가 되고 만 셈이다.

1964년 익살맞은 백남준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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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태내기 자서전' 1981. 이 작품은 1932년 4월 14일자 <뉴욕타임스>에 영어로 쓴 백남준의 엄마 뱃속 자서전으로 여기서도 자신과 비디오아트를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엄마는 말했다. 너는 비디오아트를 시작할 것이다(Mother said, you will start a Video Art)"라고 적고 있다.

▲ 백남준 I '7월 20일' 1985.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큰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 물음표에서 반전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는 표시가 재미있다



'태내기자서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1년 작품(위 사진)에는 백남준이 자기 출생과 관련해 <뉴욕타임스> 지면에 영어로 쓴 것이다. 이 작품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1964년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잉태과정과 그 미래적 전망까지 함께하면서 예술가는 시간과 싸우는 존재라는 점을 익살맞은 반어법으로 기술했다. 

"1931년 9월 31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최고의 쾌락을 음미하는 동안 잉태됐다. (중략)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0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00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10만 살이 될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전쟁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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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전시에 소개된 백남준 어린 시절 사진들. 4살 때 백남준(왼쪽) 3살 때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오른쪽 상단) 애국유치원 다닐 때 찍은 사진(오른쪽 하단)



고은 시인은 "우리 세대는 절반이 죽었다"라고 했지만 그보다 한 살 위인 백남준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2009년 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현실문화연구 발행인 김수기씨는 백남준의 청년기를 '전쟁 세대'로 규정한다. 백남준이 예술적으로 극단적이고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백남준의 청년기를 보면 사실 거의 '전쟁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전쟁으로 점철됐다. 백남준이 태어난 지 1년 전인 1931년 만주사변이, 1937년 중일전쟁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중략) 특히 6·25 피난과정에서 겪은 상처로 삶과 예술의 뭔지를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됐다."

성장기에 피아노·독서·외국어에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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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중학교 다니던 시절인 1948년 급우들과 찍은 사진. 맨 앞줄에서 2번째가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어려서 애국유치원과 수송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백남준의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여간 특권층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건 남자가 하는 게 아니라는 부친의 엄한 훈계로 큰누이 백희득씨가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 어깨 너머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시작한 건 1945년 경기중학교(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다. 당시 이 학교에는 큰누이를 가르친 신재덕 선생과 이건우 선생이 재직했는데, 피아노는 신재덕 선생에게서, 작곡은 이건우 선생에게서 배웠다. 백남준은 또한 이건우 선생을 통해 민주적 '12음법'을 시도한 작곡가 '쇤베르크'도 알게 됐다.

백남준은 후에 조벽암 선생의 시 <향수>에 곡을 붙일 만큼 작곡에 재능을 보였고, 그 후로 전부 5곡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한 곡을 독일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인지 방에 틀어박혀 '세계문학전집'(일어판)을 읽은 독서광이었다. 그때 프랑스어도 배웠고 홍콩·일본·독일 유학 그리고 뉴욕 생활로 중국어·일어·독어·영어를 익혔다. 그래서 백남준은 자신을 "3개의 서양어와 3개의 동양어를 배우고 카이로를 거쳐 독일로 온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청년 백남준, 쇤베르크와 마르크스에 빠지다 


백남준은 예술적으로는 '쇤베르크', 철학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과학적 논리를 제공한 마르크스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기에 현대 음악의 마르크스 격인 쇤베르크를 좋아했다. 1947년 백남준은 쇤베르크 레코드를 수소문해 어렵사리 구하기도 했다. 

그는 쇤베르크의 관련해선 바르토크·스트라빈스키·힌데미트·시벨리우스에도 알고 있었고, 마르크스에 관련해서는 바쿠닌·부하린·프루동·프랑스노동조합운동·페이비언 사회주의도 알고 있었다. 하긴 그땐 막시스트가 아니면 지성인 행세를 못했다.

백남준은 왜 쇤베르크와 마르크스를 좋아했는지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을 쓴 미술평론가 이용우(세계비엔날레협회 회장)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의 쇤베르크 발견은 아마도 마르크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 상황은 은연중 지식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크스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이를테면 지식인의 열병이었다. 쇤베르크가 극단주의자였다면 그가 전통음악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급진주의자가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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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 때 벽에 적혀있는 마르크스의 명구다.



백남준은 경기중학교에 재직한 철학자 안병욱 선생과 민족사학자 최관우 선생에게서 마르크스를 배웠다고 술회한다. 백남준 아트센터 이유진 큐레이터는 '부드러운 교란'전에서 백남준이 <자본론>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한다. 

백남준은 '소외와 착취'라는 개념을 발명한 마르크스를 좋아해 돈에 대한 혐오도 심했다. 심지어 백씨 집안은 망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일제와 타협해 못쓸 방법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했고 포목 상품을 독점하고 무기 장사를 한 부친을 못마땅해했다. 

백남준은 당시 말뿐만 아니라 적극적 행동도 보였다. 1995년 8월 15일 MBC와 광복절 50주년 특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씨가 이끈 1946년 '대구사건'에서 경기중학교 행동 대장이었고, 해방공간에서 그의 집은 5당 회의 주역인 박헌영, 여운형, 한민당과 한독당 대표가 모이는 장소였다고 밝혔다. 

이러다 보니 대자본가의 아들인 백남준은 우익 상급생에게 며칠 학교를 가지 못할 정도로 얻어맞았다고 그의 동창인 서재웅씨는 증언한다. 그래서 백남준은 학교에 가길 꺼렸다고 한다. 

홍콩유학과 귀국 후 이상한 피난법 

그의 부친은 좌파 성향을 보이며 마르크스주의에 빠진 말썽쟁이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1949년 경기중학교 4학년 후반기에 홍콩에 있는 영국계 로이덴(Royden) 스쿨로 전학시킨다. 백남준은 이걸 스스로 '화려한 정치 망명'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부친과 함께 받은 백남준의 비자를 보면 그의 직업란에는 '통역원'이라고 적혀 있다. 하긴 당시 10대에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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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가 그린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 초상화

▲ 백남준이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은 17살 때다. 백남준 부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 6번이고, 백남준은 7번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설명 때 사용한 영상화면을 찍은 것이다.



백남준은 1950년 5월 홍콩에서 조카 백일잔치를 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그때 마침 한국전쟁이 터져 집안 식구들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2차 피난대열에 합류할 뜻인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이상주의자 백남준은 북한군에 대한 공포감이나 적대감이 적었는지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혼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은 모두 무너졌다. 백남준 집을 점령한 북한군은 세간을 다 뒤져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실망한 백남준은 맨 마지막으로, 마치 망명자처럼 부산으로 내려갔고 7월 27일 밀항을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동경에는 이미 그의 집이 있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그의 생애 중 17년만 한국에서 살았다.

부친과 갈등 속 일본·독일 유학 

부자지간의 갈등, 이건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백남준은 1952년 동경(도쿄)대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학 및 예술사를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졸업 논문도 '쇤베르크 연구'였다. 동경대를 졸업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백남준은 파리로 유학가려 했으나 부친이 파리는 퇴폐적 도시라고 말리자 결국 방향을 틀어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1956년 뮌헨대 입학 허가를 받고 첫해 음악사 등을 공부했으나 학교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라 다음 해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 음대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학기에 열리는 '젊은 작곡가를 위한 음악제'에도 참석했다. 그 후 백남준은 쾰른대 철학과에 입학해 니체와 헤겔 등을 공부했다.

단군 이래 그와 비견할 인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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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프랙탈 거북선' 350×670×400cm 1993. 1993년 대전엑스포 때 출품된 작품으로 400여개의 TV모니터와 100여개의 오브제가 혼합되어 있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백남준의 존경이 담겨 있다

▲ 백남준 I '로봇 정약용' 1993. 이 전자로봇 역시 백남준의 정약용선생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독일 유학을 계기로 그는 전자매체를 활용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단군 이래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첫 인물이다. 왕립언어연구소격인 '집현전'을 만들어 빛나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나 거북선을 만든 발명가·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이나 조선의 천재사상가 정약용도 있지만, 이들을 백남준과 비견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백남준은 1995년 독일 <캐피탈>이 뽑은 세계 100대 예술가 중 5위로 선정됐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뛰는 시대, 인터페이스개념을 도입해 행위 음악과 전자미술을 융합시켰다. 그는 셔먼의 정신을 현대예술로 재해석해 하이테크 아트의 제왕이 됐다. 또한 그는 비디오 아트를 위성 아트와 레이저 아트로 발전시켰다. 


백남준과 관련된 일화① 일본에서의 첫사랑


1953년 백남준은 일본에서 같은 동경대 불문과 학생 시브사와 미치코(步澤道子)와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똑똑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이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백남준은 그녀 앞에 서면 얼굴을 붉어졌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끙끙 앓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 대학생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가 연주하는 바르토크 첼로연주회 티켓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너무 비싼 표라 마음에 걸려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백남준의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백남준이 사는 곳은 동경에서도 최고급 주택가가 모여있는 부촌이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남준이 나왔고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차림은 허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형들과 여기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연주회에 못 간다고 하니까 백남준이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같이 가게 된다. 차도 같이 마시며 데이트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애인에게 돌아갔고 백남준의 애틋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초대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이 3년 전 일본 출장을 갔다가 그녀를 만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 스마트한 미인이라고 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와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은 이 여사에게 독일에서 첫 전시 후 1964년 동경에서 첫 번째 퍼포먼스를 했는데 미치코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걸 깜박 잊어버려 끝난 다음에야 그 생각이 났다고 말했단다. 또한 뉴욕시절 백남준이 콜롬비아대 다니던 미치코의 여자 친구를 만났는데 미치코가 자기 얘기를 했다는 걸 들었다며 마치 영화이야기처럼 말했단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백남준의 독일 쾰른 유학시절(1957-1961)

백남준도끼로 피아노 부수려 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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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백남준 이론가인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초청 강연할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이다.



지난번 기사인 '재벌가 막내아들은 왜 마르크스에 빠졌을까'에서 소개한 대로, 백남준은 1956년에 독일 뮌헨대에서 공부하던 중 보다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음대로 대학을 옮겼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작곡가로 남은 '볼프강 포르트너'를 지도교수로 맞이한다.

한번은 지도교수가 백남준에게 작품을 보여 달라고 하니, 백남준이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피아노를 부수려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피아노 부수는 소리도 음악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교수는, 자네는 내 방향과 다른 것 같으니 전자음악 등 새로운 흐름을 찾는 '쾰른라디오방송국(WDR)'에서 일해보라고 추천서를 써준다. 

백남준은 이 무렵부터 '듣는 음악'보다 '보는 음악'에 더 관심을 두게 됐다. 이는 음을 빛으로 표현하는, 다시 말해 '음의 시각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별로 없다. 60년대 그의 전시에 이미 TV가 등장하고, 70년대에는 비디오로 피아노를 치면 어떤 화면이 나오는지 그가 실험한 이유이다.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강좌에 참석한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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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신음악' 하기강좌에서 강의 중인 슈톡하우젠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있는 다름슈타트에선 '음악의 바우하우스'라 불리는 국제 '신음악(Neue Musik)' 하기(夏期) 강좌 및 축제가 매년 열렸다. 1946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신음악'의 영역을 개척하고 전위음악과 실험음악을 모색하는 자리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전세계 교수, 학생, 작곡가, 이론가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첨단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이 이 축제에 빠질 리 없었다. 그는 1957년부터 이 축제에 참석했고 거기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전위작곡가 '슈톡하우젠(K. Stokhausen)'을 만났다. 슈톡하우젠은 피아노연주 같은 전통적 화성법에서 벗어나, 음렬과 전자음으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등 음악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작곡가였다. 

당시 전위 음악가들은 성공여부를 떠나 '구체음악'과 '전자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백남준도 그랬다. 그래서 피아노 두 대를 사서 그 음을 서로 어긋나게 조율하여 기존 화성음을 교란시키는 등 '엉뚱한' 음악을 즐겼다. 이런 도전과 실험 없이는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해외통신원이던 백남준, 천재 작곡가 윤이상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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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기 강좌에서 참가한 백남준, 윤이상, 프란체스코, 요시오 노무라 1958.


백남준은 1957년부터 해외통신원으로 일본의 음악전문지 '음악학'과 '음악예술'에 유럽음악을 알렸고, 1958년과 1959년에는 형이 운영하던 국내 '자유신문'에 구체음악의 창시자 '피에르 셰페르'를 5차례나 소개하기도 했다. 1957년 10월 백남준이 '음악예술'에 기고한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참관기'를 보자.

"슈톡하우젠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고, '힌데미트'는 물론 '스트라빈스키'도 인정하지 않은 '아도르노' 교수는 "현대음악에는 오직 한 길밖에 없다"며 청중과 논쟁을 벌였다. 사람들은 '바흐'를 마지막으로 음악이 종말을 맞았으나 '쇤베르크'가 등장하여 이를 되살려 놨다고들 한다. 이런 와중 속에서 평론가(작곡가) '노노'가 한 말, "개인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예술가는 겸허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또한 거기서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천재적 작곡가 윤이상도 만난다. 1958년 9월 7일 윤이상이 그의 부인 이수자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백남준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어울리는지 실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참가자들은 모두 터무니없는 곡을 쓰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장선 선수들이다. 나는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음악을 쓰기 싫고 여기 모인 괴짜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소. 아니 그들보다 더 엉뚱한 짓으로 세인(世人)을 더 놀라게 할 수 있으나 난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머물고 싶고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소.

그러나 여기 같이 있는 백남준은 다행히 머리가 좋고 또 그런 심미안 있는 이 같소. 그는 유리를 깨고 무대 위에서 피스톨을 쏘며 그 유리 깨지는 소리와 피아노소리가 서로 어울리는지 실제로 실험해보려고 하오. 나는 그에게 그 방면의 장래를 맡길 수밖에 없소. 백군 스스로도 음악이라는 용어를 여기서부터 해체시켜야겠다고 말했소."

26살에 만난 존 케이지, 그때부터 시작된 '침묵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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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연구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 1984년 코펜하겐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사진



그러던 백남준은 1958년 9월 다름슈타트축제에서 '존 케이지(1912-1992)'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남준은 이후 "나의 지난 14년간 작업은, 결국 다름슈타트의 어느 잊을 수 없는 저녁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충격이 컸다고 한다. 그는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이 예전부터 좋아한 음악인 '쇤베르크'의 제자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기준으로 역법을 만든다. 그를 만나기 1년 전인 1957년을 '기원전(Before Cage)'이라고 했고 그가 죽은 1년 후인 1993년을 '기원후' 1년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절대적 무음은 없다"는 음악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 존 케이지는, 자신의 철학을 담아 내놓은 첫 결과물이 '4분33초'였다. 이 작품은 1952년 동료 피아니스트 '튜더(D. Tudor)'에 의해 우드스탁에서 초연된다. 3악장 악보엔 '조용히(tacet)'라는 악상만 적혀 있다. 4분33초 동안 연주는 없고 관객의 기침소리, 연주장의 정적만 있을 뿐이다.

백남준은 패기 넘치는 젊은 작곡가답게, 또 존 케이지의 이런 침묵음악에 고무되어 당시 음악의 경계를 넘는 음악, 기존음악을 무화(無化)시키는 '무음악(a-music)'에 관심을 둔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시각적 공간성을 도입하려 한다. 그리고 초기작곡 '신라향가'에서 보여준 민족주의적 색채는 던져버린다.

동양철학을 서양음악에 담은 존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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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소개되고 있는 음양오행 및 주역사전 중 하나



존 케이지는 또한 기존음악의 돌파구로 '주역'과 같은 동양사상이나 '선(禪)불교' 등을 서양음악에 도입한다. 예컨대 '공(空)'과 '무(無)' 같은 불교사상도 음악언어로 바꾼다. 백남준은 처음 이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의 음악회에 참석하면서 거기에 빠져들었고 연주가 끝났을 때 백남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존 케이지는 자신의 음악철학에 대해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의 귀에 들리는 건 대부분 소음이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한다면 소음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가 그걸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를 드디어 알게 된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 가장 자연스러운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백남준도 종종 고전작품을 피아노로 우아하게 연주하다가는 갑자기 피아노를 때려 부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싶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피아노를 칠 때 나는 소리도 음악이지만, 그는 피아노를 때려 부술 때 나는 소음도 음악으로 봤기 때문이다.

'무조성-무작곡-무음악'과 그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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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이 쾰른작업실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준비하는 한스 G. 헬름스, 백남준, 실바노 부소티 1959.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백남준이 심취했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이 바로 그것이다.

백남준의 '무음악'은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해프닝 아트'의 성격이 강한 이 음악은 '액션음악'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음악은 매사 심각한 독일인에게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줬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아트'는 '비디오아트'로 연장된다. 둘의 공통점은 장벽을 허물고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거기엔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를 하나로 만나게 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런 철학은 80년대 '위성아트'가 발표되고 나서야 이해된다. 다시 말해, 전 지구적 차원의 소통방식인 인터넷시대를 그가 예고한 셈이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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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22' 앞에 서 있는 백남준. 여기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Hommage a John Cage)를 선보인다. 

'갤러리22'는 당시 화가들이 전시하고 싶은 곳이었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때 사용된 사진을 찍은 것임



백남준은 당시 존경받았던 레지스탕스출신 '장 피에르 빌헬름'이 운영하는 '갤러리22'에서, 1959년 11월경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와 함께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와 '녹음기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초연한다. 

녹음기에서는 독일 가곡,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등과 함께 동물소리, 모터소리, 복권당첨이 발표될 때 나는 소리, 사이렌소리 등이 나오고 또한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며, 그 파편이 계란과 장난감차를 치도록 만들어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라는 통념도 없애고 그런 장벽도 허문다.

존 케이지는 여기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도 훗날 형제처럼 각별한 사이가 된 '요셉 보이스'도 만났다. 이 해프닝에서 백남준은 그만의 특이한 괴력을 발휘하여 피아노 등 악기를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선두주자로 부각되는 장을 마련한다.

백남준, 존경하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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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이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연주 중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1960.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넘어서려한 것인가. 1960년 백남준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쾰른작업실에서 그의 신작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 느닷없이 무대에서 내려와 눈을 부릅뜨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악명 높은 해프닝을 벌인다.

왜 백남준은 그가 존경하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을까? 해석은 분분하다. 이건 쾰른 지방축제에서 여성이 남성의 넥타이를 자르는 축제의 영향이라는 말도 있고, 수동적인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계획된 제스처 내지 선동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서구의 이성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도발이라는 해석도 있다. 

추가하자면 당시 존 케이지가 맨 넥타이는 일본의 선사상가 '스즈키'로부터 받은 것인데 백남준이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넥타이를 잘랐다는 해석도 있었다. 아무튼 백남준은 불교적 '단'의 정신으로, 거장마저도 넘어서려는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1961년, '관객 참여적' 예술 초안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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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초고악보(스코어)에는 1961년 봄 쾰른에서 작성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영어와 독일어로 적혀 있다(Sinfonie[Symphony] for 20 rooms, first sketch, 1961 spring, Cologne, Nam June Paik). 이 악보는 실제로 공연되진 않았지만 이후 해프닝아트의 표본처럼 활용된다



그리고 그 해, 관객의 참여를 통해 행위음악을 구현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의 '악보(스코어)'도 작성했다. 백남준은 여기서 관객의 자유로운 출입을 전제로 한다. 때로는 예술가가 연주를 하지 않아 관객이 연주해야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 관객이 작가로부터 공격에 받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둔다.

20개의 방 중 어떤 방에는 벽에 걸린 골동품시계가 똑딱거리는 가운데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진다. 녹음기에서는 언어화하기 힘든 소음들, 예컨대 자명종소리나 부엌용구, 유리조각, 달걀껍질 등이 어지럽게 부딪칠 때 생기는 소리도 들린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소리와 소음을 콜라주해 이를 시각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또 다른 방에는 닭장 속에 수탉이 꼬꼬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텍스트를 낭독한다. 관객은 이런 20개의 방을 순회하며 예기치 않은 소리를 접하고 우연한 사건을 경험케 된다. 백남준은 관객 나름대로 작곡도 즉흥적으로 할 수 있도록 종용하고, 이런 방식을 통해 전시와 공연에 참여도를 더욱 높이려 했다.

'괴짜들'에서 '해프닝아트'의 귀재로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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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공연된 '괴짜들' 백남준 왼쪽에 작곡가 슈톡하우젠이 보인다. 그밖에도 바우어마이스터, 카스켈, 포이스너, 튜더, 헬름스 등이 참석했다. 이 작품은 1964년 뉴욕, 1990년 샌프란시스코, 2007년에 다시 공연된다.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끝으로 백남준이 '액션음악' 분야를 도맡아 큰 주목을 받고 그의 유명한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인 '괴짜들'에 대해 알아보자. 이 작품은 슈톡하우젠 작곡으로 1961년 가을 쾰른 '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원제가 '오르기날레(Die Originale)'인건 '독립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를 되살려내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게 백남준의 설명이다.

광기 어린 그의 '해프닝아트'는 서구예술가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그 기저에는 그가 동서양에 정통했고 그의 예술적 스펙터클은 그만큼 넓고 깊었으며, 문명 이전과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를 연결시키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백남준의 등장은 서구예술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비선형'과' 비위계'로 서구의 근대서사를 격파한다. 그래서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백남준의 지도교수도 그를 "보기 드문 아주 비상한 현상"이라 했으며, 미국의 저명비평가 '프레더릭 제임슨'도 "백남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징표적 인물의 하나"라고 평가하지 않았던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이란 무엇인가

 

기사 관련 사진'구체음악'2차 대전 후 1948년에 프랑스의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 사진)와 그의 방송동료들의 해서 창안된 것으로 녹음된 다양한 '자연의 소리와 기계의 음향(objet sonore)'을 재료로 그 소리를 조작하고 조합해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악기법을 말한다. 셰페르는 창작과정에서 작곡가와 청중의 소통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녹음된 소리를 역순으로 재생시키거나 테이프를 짧게 자르거나 확대시키며, 에코효과를 집어넣거나 음높이와 강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전자음악과 컴퓨터음악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948년 셰페르에 이어 1952년에 불레즈나 메시앙이 구체음악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 뒤를 이어 바레이즈, 슈톡하우젠, 라마티, 크세나키스, 페라리 등도 이 방식으로 작곡한다. 전자음과 소년의 노랫소리를 소재로 한 1956년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인 '소년의 노래'가 성공함으로써 이런 장르의 음악도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백남준의 '폭탄선언'(1961-1962)

서른에 '문화 칭기즈 칸표방한 백남준의 패기 


백남준은 무신론자지만 꽤 선불교적이었다. 선문답이 쌍방형이고 무상보다는 경이로움에서 깨달음을 얻고 일체의 벽을 허물며 길 없는 길을 가고 화두를 던져 답을 찾은 방식이라 그런가. 1960년대 '머리를 위한 선' '바람을 위한 선' '걸음을 위한 선' '접촉을 위한 선' '필름을 위한 선'과 같이 '선' 연작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선'의 양면을 봤기에 선이 "아시아의 전쟁과 빈곤에도 책임이 있다"와 같은 비판도 할 수 있었다. 선불교가 마치 세계에서 일본 것인양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 면도 있다고 백남준은 말한다.

그 예로 백남준은 일본 선불교의 전설적 인물인 '스즈키'가 쓴 글을 든다. 영어판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일어판에는 만주사변을 정당하고 선을 일본 황국의 본류로 기술했다는 것. 이는 마치 히틀러가 신(神)이 자기 편이라고 한 말과 같은 사례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선을 차원 높은 창조적 영감과 에너지로 받아들인다. 서양의 아방가르드를 동양의 선으로 정화시키고 서구의 속도문화를 동양의 명상 문화로 제어한다. 그러면서 서구의 테크놀로지를 단지 기술주의에 함몰시키지 않으면서 기술로 기술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인간화하고 예술화한다.

백남준, 20대 후반 '벽암록' 등 선어록에 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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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에서 불경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사진촬영: 클라우스 바리슈) 1961. 백남준은 <임제록>과 <벽암록> 등 같은 선어록을 즐겨 읽었다. 백남준아트센터(2012)에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소개된 영상을 찍은 것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이 이야기는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당나라 대종(代宗)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로 황제가 "내가 국사를 위해서 뭘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국사는 "저를 위해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형체도 이음새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봉탑이라. 이는 결국 황제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모든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세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런 선문답에 매료된 백남준은 예술동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병풍에 직접 한자로 써서 선물할 정도였다. 

가장 멀리 보고 가장 깊게 사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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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심플'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중 허긴스의 '위험한 음악 2번' 퍼포먼스. 사진: 하르트무트 레코르트. 오른쪽에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영문이 보인다


백남준은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이론가인 딕 히긴스가 기획한 '위험한 음악 2번'에 참가해 정장으로 아기욕조에 들어가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고 외치며 온몸에 물을 붓고 신발에 물을 담아 마시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 장면을 이영철 미술비평가는 "난 바다 깊은 곳에 잠수하면 누구도 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조정 받지 않으면서 더 심오하고 일관성 있는 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한 '푸코'의 말을 인용하며 "백남준은 심해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해석한다. 

백남준은 이렇게 보면 푸코가 말한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곳에서 깊이 '사유하는 자'이기도 하고, TV가 '멀리 본다'는 뜻이지만 랭보가 말한 것처럼 그냥 보는 자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가장 멀리 내다보는 '견자'(voyant)기도 했다. 

융합된 사고가 총체적 예술을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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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총체(조작된) 피아노' 1958-1963. 백남준은 연주도 하지만 피아노의 금기를 깨고 그걸 밟고 부수기도 하고 때론 오브제로도 활용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백남준은 동서양의 학문과 예술·철학과 과학을 꿰뚫고 있었기에 동서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방식으로 연결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당시론 매우 드물게 동서양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상호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백남준은 또한 물아일체라는 동양의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통합적으로 봤다. 그러기에 서양의 첨단기술과 동양의 정신세계를 사상과 이념·인종과 지역의 경계 없이 그물망처럼 요즘말로 네트워킹 방식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인가. 

동양에서 음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그에게는 음악과 미술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음악전공자인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그가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종합적 사고는 총체적 예술(art for all senses)을 낳는다. 시각예술인 미술에 청각과 촉각적 요소도 도입한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공간예술인 미술을 융합시키고 전자 빛으로 그리는 TV개념을 도입한다. 거기에 몸을 붓처럼 사용한 행위예술도 포함시킨다. 그런 예술에서는 '자연·기계·인간'도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만 서른에...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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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1993)' 뒤로 백남준이 영어, 프랑스어 등 친필로 쓴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가 보인다. 이 말은 그의 유명한 말 "세계역사의 게임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야 한다"도 연상시킨다


백남준은 1962년 만 서른에 문화제왕으로서 포부를 밝히며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프랑스 절대왕정시절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자신의 출현을 13세기 몽골제국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에 비유하며 유럽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이건 구호가 아니라 1984년 1월 1일 '위성아트'로 실현했다. 실제로 백남준은 칭기즈 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문화 칭기즈 칸'이 됐다.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북방민족의 후손으로서 그 긍지와 자부심을 되찾아줬다는 점이다.

이 선언은 백인주도사회를 향해 야심찬 포부와 기개를 거침없이 드러낸 그만의 '커밍아웃'으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고등사기나 완전 범죄처럼 보였을 것이다. 서양과학의 산물로 서구인이 신성시하는 피아노를 관객 앞에서 박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남준은 이처럼 기가 엄청 세고 자부심으로 넘치는 작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1992년 백남준의 회갑전이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릴 때 도올 김용옥이 그와 한 대담에서도 그런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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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피아호텔(1992.08.16)에 도올 김용옥이 백남준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장면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 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뿐만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사람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 위 나달나달하는 페인팅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다, 루벤스다 하는데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박물관에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이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야.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중략)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가 행세를 해버린 거야." 

위 인터뷰에서 보면 우리가 근현대기 4대강국에 끼여 식민과 분단과 독재에 치여 방황하는 동안 백남준은 17살에 한반도를 떠난 후 여러 나라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한반도에만 갇히지 않고 몽골까지도 우리의 계보로 보는 큰 안목을 갖췄다.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가 난 좋다, 내가 쇤베르크처럼 극단적인 건 이 때문이다"라고 한 백남준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는 또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고 텃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도 타국에서 서구적 우월감에 많이 시달렸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백남준을 그들을 항상 유머와 지성으로 압도했다.

백남준은 또 "선사시대, 우랄 알타이족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한국·네팔·라플란드(핀란드 등 북유럽)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 새 지평선을 봤다"며 우리 혈통과 원류를 더 멀게 넓게 포괄적으로 봤다. 

1960년대에 '플럭서스', 파격적 전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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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위한 선(禪)'(Zen for Head)'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공연에서 잉크와 토마토주스를 사용한 먹으로 그린 행위음악

▲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이야기하면서 떼놓을 수 없는 미술운동이 바로 '플럭서스'다. 이 단어에는 '흐름'(flux)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고대철학자 헤라클레토스가 주장한 "만물은 창조의 흐름에서 유전한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 운동은 1961년 뉴욕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1931~1978)에 의해 발원된다. 

이 운동은 1960년대 권위적 기존미술과 전통에 벗어나 위에서 보듯 급진적이고 실험적이고 미술운동으로 '반예술'적이었다. 또 당시 냉전 이후 이념 대립의 팽배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교란시키며 그 위계를 깼다. 게다가 아나키즘·보헤미안 취향·도가의 무위사상까지도 수용한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예술이 상업화·대상화·물질화되는 걸 반대하고 대립되는 갈등이나 충돌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창조적 발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을 없애고 삶과 예술의 경계도 허물고 일상과 대중성도 받아들이고 타 장르도 포용한다. 또한 즉흥성·우연성·상호성·비결정성·비위계성을 중시하며 노이지를 포함한 사운드·이미지·일상에서 발견하는 오브제와 텍스트를 활용하고 재미·풍자·유머를 가미해 더 단순하고 간결한 놀이방식을 취했다.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한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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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딕 하긴스의 '그래피스 119'. 1962년 플럭서스 공연 중 하나로 하긴스,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보이스, 슈미트, 클린트베르크, 포스텔, 놀즈, 스포에리 등이 참가했다.


이 운동은 마치우나스가 1962년 서독 미 공군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그 중심지가 뉴욕에서 비스바덴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음악가도 많았고, 이미 실험음악과 행위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해 9월 비스바덴에서 첫 공연의 닻을 올린다. 

회원으로는 음악가인 라 몬테 영·존 케이지·디 히긴스와 알리슨 놀스 부부·백남준·시게코 오노·조지 브레히트·시인 잭슨 맬로·베이스연주자 페터슨·종합예술가 보스텔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동서가 같이 한 최초의 국제주의 미술운동이다. 회원 중 하벨과 란즈베르기스은 훗날 체코와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뉴욕과 달리 독일과 유럽에선 여러 도시를 순회한다. 9월 독일 비스바덴에 이어 10월에 암스테르담, 11월에 코펜하겐·런던·쾰른·파리 등에서 공연했다. 백남준은 이 단체의 기관지 <데 꼴라주>의 편집도 맡는데 이 책에 나오는 '플럭서스 섬'을 보면 당시 백남준과 그 회원들이 생각한 이상향이 뭔지 알 수 있다.

마치우나스는 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를 창설하고, 그해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며 "죽은 예술, 모방·인위적 예술·추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수학적인 예술을 추방하라, '유럽주의'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게시했다. 

백남준과 호형호제하던 요셉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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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 출연한 도쿄공연(1984.6.2)에서 둘이 피아노 치는 모습. 서울시립미술관(2013.01.30) 본관1층에서 전시회 때 찍은 사진


끝으로 백남준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절친 이었던 요셉 보이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두 사람은 같이 '플럭서스' 회원이었고 예술적 동반자로 그 우정은 평생 유지됐다.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할 때 보이스가 이를 방해하는 관객을 끌어낸 후론 더 가까워졌다. 보이스는 백남준의 낯선 독일생활을 각별히 보살폈다. 백남준의 인덕도 대단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하게 보인다.

문화민주주의자인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며 인간의 타고난 창조력과 가능성을 옹호했다. 백남준도 "19세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시각예술로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없었으나, 카메라가 나옴으로써 누구나 작품을 할 수 있게 됐고 사람들의 창조 욕망이 높아져 미술시장이 활성화됐다"며 보이스의 생각에 동조한다.

요셉 보이스가 공연에서 빠지지 않는 게 담요인데 이는 전후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감싸고 덮어주려는 의도였다. 또한 양극화된 사상과 사회체제가 충돌하는 곳에서 그 상처를 씻어주고 치유하는 상징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조각(Social Sculpture)'이라는 개념도 제창한다. 

그의 전반기 대표작은 역시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1965)이다.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르고, 양쪽 발에는 펠트와 쇠로 밑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약 3시간 동안 토끼에게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을 설명해주면 인간과 동물의 소통이 가능함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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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보이스 I '죽은 토기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 1965년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전시된 그와 관련서적 전시 중에서 찍은 것임

▲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1971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안에 무료 '자유국제대학(FIU)'을 설립하고 거기서 강연하는 모습.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토끼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보이스는 "토끼가 가장 연약한 자연을 뜻하면서 부활도 상징하기 때문"이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기가 자신의 이익과 이권을 쫓고 있다면 토끼는 자연이기에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보이스는 2차 대전 중 비행기에서 추락해 의식을 잃고 죽을 뻔한 경험은 했고 마침 타타르족에게 발견돼 지방(脂肪)과 펠트 천로 치료받는다. 그런데 이 경험이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 우리 '굿'에서 칼·거울·방울이 나오듯 그의 작품에 생명을 살리고 추위를 녹이는 상징으로 지방과 펠트 천이 단골로 등장한다. 

그리고 1974년 후반기 대표작인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가 뉴욕 르네 블록갤러리로 열렸고 그 전시장 바닥에는 잡초더미와 펠트 천 등이 수북이 깔려 있었다. 보이스는 여기서 코요테와 3일 동안 동거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코요테는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신성시하던 동물로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결국 아메리카를 점령한 백인이 코요테를 비천하고 교활한 동물로 낙인찍었다며 이런 점이 시정돼야 잃어버린 미국의 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독일에서 최고작가로 추앙받는 요셉 보이스 누구?

 

1921512일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나 개념미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는 어려서 클레베에서 자랐다. 동식물·조각·과학과 기술 등에 흥미가 많았고, 소아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다. 194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2차 대전이 터져 독일공군에 입대, 폭격기부조종사로 복무한다.

 

1943, 그가 탄 JU-87기가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격추됐다. 의식불명상태에서 유목민 타타르(Tatar)족이 발견돼 구조되고, 동물 지방과 펠트 천으로 치료를 받는다. 1945년에는 독일 내 연합군수용소에 수감됐다가 다음해 풀려난다.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조각을 공부한다.

 

1950년대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1953년 부퍼탈에 있는 폰 더 하이트(Von der Heydt) 박물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조각과 교수로 임명됐다. 1962년에는 플럭서스에 참여하고 백남준과 가까이 지내며 다음해 그 페스티벌에서 첫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1967년에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독일학생당'(DSP)을 창당했고 1972'카셀 도큐멘타'에서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조직'을 만들어 100일간 민주주의, 예술에 대해 강연을 하고 관객과 토론도 했다. 1976년에는 독일북서주 의원선거에, 1979년에는 유럽의회 녹색당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971년 교육민주화의 실천가인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안에 '자유국제대학'(FIU)을 둬 누구나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 문제로 대학과 갈등을 빚어 다음해 결국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79년 뉴욕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려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1982년 그는 '카셀 도쿠멘타'에서 전시장 주변에 7000그루 나무를 심는 퍼포먼스를 벌렸다. 이는 역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공공미술이었다. 이를 통해 그의 확장된 예술개념인 '사회조각'도 구현한다. 보이스는 19861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러자 다음해 그의 아들 벤젤(Wenzel)7000번째 나무를 심어 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백남준의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1963)

첫 전시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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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이 29살인 1961년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에 참가했을 때 모습.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은 '플럭서스'와 1961년 '오리기날레' 공연 등에서 메타한 해프닝을 펼쳐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않고 "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다"며 전자매체를 활용한 실험예술을 꿈꾼다. '원(元)화랑'에서 1986년 열린 '백남준전' 도록엔 "난 당시 입시생처럼 전자공학과 물리학, TV관련 책자만 봤다"고 적혀 있다.

백남준은 60년대 초부터 전자음악을 소개한 쾰른서독방송(WDR)을 출입하면서 그런 경향을 보인다. 때론 베를린공대에서 강연도 들었고 위험천만한 1만5천 볼트 전기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TV를 악기처럼 예술의 도구로 상상한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재산몰수로 가계가 기울고 유학비가 안 와 백남준의 독일생활은 빈궁해졌다.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1년을 보냈기도 했다. 그런데 운 좋게 그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꼐 비디오합성기를 발명한 '슈야 아베'를 만나 전자아트에 도움을 받는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 선보일, 당시론 엄청나게 비싼 13대의 TV를 사기 위해 때로는 점심도 굶어가며 돈을 모았다. 이에 만족치 않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증권에도 투자, 2번은 실패했으나 1번은 오스트리아은행을 통해 큰 이득을 보기도 한다.

1992년 백남준은 김용옥과 인터뷰에서 유럽의 음악과 미술수준에 크게 실망했으나 고딕성당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공간처리와 외부에서 투과된 빛이 연출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비디오아트가 바로 그런 광채에서 받는 영감을 기반으로 해서 착안했는지 모른다.

시공간을 넘어 음악이 미술이 되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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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쿠바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다.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가 나온다. 기존의 시각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다시 재현하기 힘든 전후 무후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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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전시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년 봄)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 경향신문 4월 27일자 4면에는 '사월혁명'을 기리는 '문화계 여러분이 보내온 글'과 조지훈, 정비석 등의 독재종식촉구와 희생학생 애도의 글과 안의섭(두꺼비)화백은 복간만화가 실려 있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백남준의 첫 전시는 이처럼 뒤샹의 반미술과 쇤베르크의 반음악을 합친 것 같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고 상상하기 힘든 전시였다. 특히 흥미로운 건 갤러리입구의 정원과 현관, 화장실 욕조와 지하실까지도 복합적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작가만 아니라 포스터도 직접 제작하는 그래픽디자이너로 전시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터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자로 또한 개념미술가로 그 몫도 다 했다.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나고 있단다.

그가 만든 포스터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데 16개 주제가 나온다. 지상천국을 연상케 하는 '성인을 위한 유치원'(1), 관념주의를 경고한 '이데아의 물신세계'(2), 사물의 음향까지도 언급한 '소리 나는 오브제'(3), 선불교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선 수행을 위한 도구'(4), 토론 주제 같은 '비인과성과 원리로서 동시성'(15), 일상 속 축제를 강조하는 것 같은 '독일 바보학에 대한 연구'(16) 등이 그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포스터에서 대문자로 강조한 알파벳만 따오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뜻은 불분명하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양미술을 추방한다는 뜻인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건 백남준의 첫 전시 전단지를 1960년 4월에 발행된 <경향신문> 위에 인쇄했다는 점이다. 1962년 10월 독일에선 나중에 무죄로 석방됐지만 <슈피겔지> 편집국장이 체포되는 언론탄압이 있었다. 이런 저런 사건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하여간 1980년 이후 백남준과 지인이 된 전 문화행정가 천호선씨의 말에 의하면 첫 전시회를 기획할 때 한국에서 일어난 '사월혁명'으로 <경향신문> 폐간·복간 소식을 알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형에게 복간호를 비롯한 경향신문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보내달라고 해서 거기에 일일이 낱장으로 인쇄해서 만들었단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해 폐간됐다가 4월 19일을 계기로 4월 27일 다시 복간된다. 백남준은 <경향신문> 1960년 4월 27일과 29일, 1961년 3월 13일자 위에 전단지를 만든다. 백남준은 세계미술계의 일대 혁명이 될 비디오아트와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동일시하는 관점도 엿보인다. 

이렇게 전단지 하나 만드는 방식도 기존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정치성이 들통 나지 않게 하고 그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적 메타포와 의도가 뭔지를 후대에야 깨닫게 되는 고단수였다.

칭기즈칸의 기개로 도전한 전자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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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입구 소머리와 함께 백남준과 페터 브뢰츠만 등등 1963. 사진: 룰프 예를링. 백남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백남준은 남다른 명석함과 해박한 지식과 동서철학을 섭렵한 인물인 동시에 칭기즈칸의 기개와 몽골셔먼의 기질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몽골유전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몽골은 우리와 3천 년 전 헤어졌는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 걸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배경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내건 건, 백남준이 셔먼아티스트로서 한국의 터줏대감을 이곳에 모셔와 텃세부리는 서양인의 기를 꺾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인가. 백남준은 대감놀이를 이쪽 신을 저쪽 신으로 보내 의견을 나누고 저쪽 신을 이쪽으로 초대해 융숭히 대접한 후 돌려보내는 소통의 장본인으로 봤다.

하여간 소머리에서 냄새가 진동하자 전시가 시작되기 3일 전 독일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거하게 된다. 독일엔 두개골동물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법이 있단다. 

1963년 세계예술계에 투하한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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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요셉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 개막식에 나타나 도끼로 부순 피아노 1963.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 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피아노를 대신할 악기로 도입한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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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TV전시가 어떻게 비디오아트의 기원이 되냐는 사람도 있지만 모니터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시발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디오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품으로 계속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인류의 영원한 질병인 우상숭배의 파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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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욕조의 마네킹 바리타지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히치콕의 소름끼치는 공포영화 '사이코'나 아르토의 '잔혹극'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연상된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고 했는데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를 부순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듯 서양뮤즈가 욕조 속에서 양 팔다리가 잘린 채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이런 이미지는 서양미술숭배에 대한 파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편견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많은가.

19세기 과학혁명으로 유럽이 산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원 확보와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개척과 제국주의에로 박차를 가한다. 거기서 얻은 이득으로 호사와 권력을 누릴 때 랭보는 그들을 향해 야만의 문화라고 선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백남준의 포스터에 적힌 '추방'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렇다.

동서를 넘어 랭보와 백남준은 시대의 우상파괴자라는 면에서 같다. 서구문명을 비판하는데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이 시도한 건 드문 일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 등을 부수고, 서구적 가치를 뒤흔들고 서구문명을 희화시키면서 'TV아트'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원론에 갇힌 그들의 난제를 풀어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관객에 초점을 둔 문화민주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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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음반꼬치 1963. 바리타지 인화흑백사진.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백남준의 첫 전시에서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 중 하나는 '랜덤 액세스(음악)'다. 막대꼬치에 꽂혀 있는 레코드를 관객이 즉석에서 마음대로 골라 변형해 작곡할 수 있는 방식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1968년 <저자의 죽음>에서 한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그는 이렇게 작가중심의 수직적 전시에서 관객중심의 수평적 전시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래서 마침내 '대중예술가'시대, '문화민주주의'시대를 연 셈이다. '랜덤액세스'란 이처럼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백남준은 이렇듯 작가지만 관객에 초점을 두고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TV>로, 70년대엔 신디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아트>로,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아트>로 진화된다.

현대예술의 매체확장과 지평 넓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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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입으로 듣는 음악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은 드디어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백남준이 발명한 TV회화는 그 어떤 기존회화과 비교가 안 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 "다빈치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라고 한 백남준 말이 이를 반증한다. 

현대서양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오브제아트를 백남준은 피아노 등에까지 확대하고 그 범위를 넓혀나간다. 또한 침묵이나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인 '화이트 노이즈'까지도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백남준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 자료집)>을 낸 저자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비디오아트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샹은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걸 다 이루었다. 그는 입구는 크게 만들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었다. 그 작은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라며 자신이 창안한 예술의 독자성을 명쾌하게 풀이했다.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전시 <백남준의 주파수로: 스코틀랜드전 외전>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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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을 받은 <백남준의 주파수로: 스코틀랜드 외전>전 오프닝행사에서 연설하는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백남준아트센터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전시 <백남준의 주파수로:스코틀랜드 외전>이 현지 시각 88일 오후6시 에든버러대학 탤봇라이스 갤러리에서 막을 올렸다. 영국과 인연이 적은 백남준은 1963년 스코틀랜드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는데, 이번 전시는 이 전시의 5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날 전시 개막식에는 조나단 밀스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총감독, 티모시 오시어 에든버러대학 총장, 팻 피셔 탤봇라이스갤러리 관장,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사이먼 그룸 스코틀랜드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400여명이 참석했고, BBC의 예술 전문 온라인 매체인 <더스페이스>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조나단 밀스 총감독은 "2013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을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백남준 전시에서 예술사의 표준이 되고 예술창작의 기초개념을 제공해주는 레퍼런스를 만나게 되며, 이 전시를 통해 페스티벌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했고 또한 티모시 오시어 에든버러대학 총장은 "TV와 전기를 발명한 에든버러대학에서 TV를 예술로 처음 활용한 백남준의 전시를 열게 된 것은 매우 의미 깊다"고 언급했다(백남준아트센터 보도자료 참고).

 

직접 이번 행사에 참가하고 있는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는 <한겨레> 기고문에서 백남준 전을 이번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로 주저 없이 꼽는 관객도 봤다고 적었다. 또한 <인디펜던트>지 비평가 찰스 다웬트는 "백남준의 로봇 조각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봤다"고 평가했고, 리버풀 미디어아트센터 디렉터인 마이크 스텁스는 "대형 회고전보다 훨씬 촘촘하게 느껴지는 흥미로운 전시"라고 기술했단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백남준 '뉴욕시대'를 맞이하다(1964-1967)

그 남자는 어떻게 첼리스트의 드레스를 벗겼나


기사 관련 사진 ▲ '로봇 K-456'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은 1963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전시장 입구에 걸고 전자매체인 TV와 고전악기인 피아노를 도입한 전시로 서구미술계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전시를 본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세계미술사에서 파문을 던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이고 독창한 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백남준은 왜 1964년 일본으로 갔을까. 백남준은 독일에서 부친 사망 후 250달러 정도로 생활했는데 첫 전시에 당시로는 고가인 TV 13대와 피아노 3대 등을 구입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쓰다 보니 돈이 바닥이 났다. 보다 못한 백남준의 형이 동생에게 돈도 절약하고 일본 전자기술도 배울 겸 일본으로 올 걸 권했다.

그래서 백남준은 1964년 독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백남준 이미 이름이 나 있었기에 당대 최고 엔지니어인 '우치다 히데오'도 만났고, 그를 통해 비디오 편집기를 만드는 데 큰 공로자인 전자기술자 '아베 슈아'도 만날 수 있었다. 백남준은 이 기술자와 손을 잡고 그의 분신 같은 '로봇 K-456'을 만들기도 했다. 

이 흥미로운 '휴먼로봇'은 백남준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총동원한 것이었다. 걷는 것뿐만 아니라 배설 기능까지 갖췄고 케네디 대통령 취임사를 읊고 다녀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뉴욕에서 백남준이 전시할 때마다 단골손님이 됐다. 

이 '로봇'은 탄생한 지 19년 만인 1982년, '백남준 회고전'이 열린 휘트니미국미술관 앞 메디슨가(街)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형식으로 해체된다. 백남준은 이를 두고 21세기의 재앙이라고 익살을 부렸다. 백남준이 이 로봇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인류가 기술을 통제해야지, 기술이 인류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어떻게 뉴욕에 정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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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K-456'과 함께 1964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이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피터무어(Peter Moore)

▲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 모습.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다시 이야기를 바꿔, 백남준이 어떻게 미국 뉴욕에 정착하게 됐는지 알아보자.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1964년 미국은 인종 분리를 끝내는 '시민권법'이 제정되어 민주주의가 더 고조되는 시기였다. 1년 전 문화예술계에선 전위예술의 총집합한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이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에 의해 출범됐다.

샬럿 무어먼은 1964년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을 맞아 그 위상을 높이려 두루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존 케이지'와 '슈톡하우젠(독일 전자음악작곡가)'이 백남준을 중요인물로 천거하자 그를 초대키로 한 것이다. 백남준은 1961년 독일에서 공연한 '괴짜들' 중 '머리를 위한 선' 등으로 이미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무어먼은 백남준을 초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케네디공항으로 나갔다. 그때가 백남준이 32살, 샬럿은 31살이었다. 그녀는 그를 크게 환영하며 극진하게 대우했다. 하긴 이런 미인의 간청을 어떤 남자가 거절하겠는가.

백남준은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1달간만 머물려다 정착한다. 하긴 시대를 꿰뚫고 있었던 그가 뉴욕이 세계문화의 중심지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게다가 1963년엔 케이지로부터 미국 초청을 받았고, 독일에서 만난 플럭서스 동지인 마치우나스, 카프로, G. 브레히트, B. 패터슨, 라몽트 영, 엘리슨 놀즈 등도 지원했다.

백남준과 그 주변여성들 


예술가의 전기를 보면 흔히 작가의 연인이 회자되는데 백남준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여자가 샬럿 무어먼이다. 둘은 미스터리하다. 1963년 백남준이 동경에 잠시 머물렀을 때 만난 '오노 요코'의 소개로 샬럿의 이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오노와 샬럿은 뉴욕의 한 아파트 룸메이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1964년 이전 독일에서 백남준은 예술파트너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백남준보다 2살 아래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이다. 그녀는 1960년대 초 독일 전위예술계의 프리마돈나였고 백남준이 독일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많이 도와줬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주최 국제세미나에 참석해 백남준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이밖에도 일본에서 첫 사랑이었던 동경대 불문과 출신의 '시브사와 미치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또 4살 아래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도 있다. 백남준은 그녀를 1964년 5월 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점인 쇼게츠 홀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7월 뉴욕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백남준 서거 때 사회를 본 '오노 요코' 등도 있다. 

여기서 '시게코'가 뉴욕에 온 다음 해인 1965년에 벌린 악명 높았던 퍼포먼스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뉴욕 전위예술계를 들쑤셨는데 팬티에 붓을 꽂고 그리는 '버자이너(vagina) 페인팅'을 그녀가 선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해프닝은 백남준이 기획한 것으로 남자의 성기론 그걸 할 수 없다며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다.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환상적 예술파트너 

백남준은 뉴욕에서 운 좋게 행위음악을 구현할 최고의 예술파트너를 만났다. 그녀의 앞에서 소개한 '샬럿 무어먼'이다. 그들이 꽃 피운 해프닝은 마치 소설 같다. 

그럼 샬럿 무어만은 누구인가. 그녀는 배포가 큰 첼로연주자로 그리스조각 같은 몸매를 갖췄고 '줄리아드'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뉴욕에서 무명의 백남준을 호랑이로 만들었고 무어먼 역시 백남준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과 같은 명성을 누리기 어려웠다. 마침 유대인 출신이라 백남준이 유대인 중심인 미국미술계에 접근하기도 쉬웠다.

백남준이 하고 싶어 하는 '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수행할 파트너에게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최고의 미인이어야 하고, 둘째는 최고의 지성인이어야 하고, 셋째는 고전음악연주자이어야 했다. 게다가 옷도 다 벗을 수 있는 과감성도 있어야 한다. 샬럿은 이 조건을 다 갖춘 하늘이 내려준 파트너였다. 

백남준은 "샬럿이 없었더라면 난 음악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가 첼로를 연주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섹스와 연결된 적이 없었던 음악을 이제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둘은 서로의 다른 입장과 관점을 존중해줬고 각자의 예술적 재능과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왔다.

무어먼이 옷을 벗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 출신인 무어먼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옷을 벗은 건 아니다. 우연이지만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가 쓴 <백남준의 귀환>과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가 쓴 <나의 사랑 백남준>에도 언급돼 있다. 

둘이 만난 지 1년이 된 1965년 5월에 파리주재 미국문화원에서 '표현의 자유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둘은 1년간 호흡을 잘 맞춰 왔기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일 리허설도 잘 마쳤고 그날은 정장을 입기로 했다. 

그런데 샬럿이 갑자기 검은 드레스를 호텔에 두고 온 게 아닌가. 개막 30분 전이라 밖을 내다보니 교통체증이 극심해 도무지 갔다 올 시간이 안 됐다. 백남준은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막이 둘둘 말린 걸 보고, 저걸 이브닝 드레스로 입으면 어떻겠냐고 말하자 샬럿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백남준의 설득 끝에 속이 훤히 보이는 비닐을 몸에 두르고, 맨 정신으로는 어려워 위스키를 한잔 하고 프랑스 관객 앞에 섰다. 그들은 환호했다. 격정적 연주가 시작되고 그러나 술기운인지 긴장 탓인지 쓰러지고 만다. 그날부터 그녀는 '나신'의 연주자가 된다.

백남준은 왜 '성'을 주제로 삼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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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백남준이 1962년에 작곡한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가 쾰른예술협회에서 시연되는 장면. 사진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ve)


그런데 백남준은 왜 평생 '성'을 주제로 하는 행위음악을 하려 했나. 백남준은 "문학이나 시각예술에서는 다 허용되는데 왜 음악에만 '성'이 주제가 못 되느냐"며 불만을 토로했고 음악이 다른 장르보다 시대정신에 50년 뒤진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부터 이미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시도했다. 일본의 전위음악가 '시오미 미에코'에게 누드공연을 청했으나 퇴짜 맞았다. 1962년엔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 그녀에게 아홉 겹 팬티를 입히고 스트립쇼 하듯 하나씩 속옷을 벗어 관객 입에 집어넣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나 연주가 아니라 일회로 끝난다.

그리고 그해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를 작곡한다. 이는 혈기왕성한 남자 10명이 벽 뒤에 서 있다가 한 사람씩 성기를 꺼내 종이 벽을 뚫는 해프닝이다. 이 작품은 바로 시연 못하고 1987년 8월 31일에야 쾰른예술협회에서 실행된다. 젊은 남자를 모아놓고 페니스로 벽을 뚫게 하는 백남준의 괴력은 어디서 오나.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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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2월 9일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 포스터. 오페라를 섹스 하듯 연주하다

▲ 제3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에서 '백남준의 생상변주곡(1964)'를 공연하고 있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무어먼은 생상스의 변주곡을 연주하다 더 과격하고 에로틱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고 물탱크로 들어갔다 나와 젖은 몸으로 연주했다. 후에 무어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이 작업을 즐겼다. 나는 전갈좌이고 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이런 '성'을 주제로 한 연주로 1965년 '첼로소나타 1번'에서는 '성인용'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유명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66년 독일 아헨에서 초연된 바 있었다. 그때도 샬럿은 물론 누드였다. 그러나 1967년 뉴욕공연에서 반응은 전혀 달랐다.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이 전시포스터에 "진지함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음악에서 성을 제거한 건 도리어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것이다. 음악도 문학도 미술과 동등한 위치의 고전예술이다. 따라서 음악도 음악계의 '로렌스', '프로이트'가 필요해"라고 적었다. 

미리 신고한 이 공연, 주최 측도 경찰이 음란한 공연으로 볼 수도 있기에 200명 사람만을 엄선해 초대장을 보냈고 일반인은 입장을 금했다. 그 순서는 1막 '전자 비키니 입기', 2막 '상의 벗기', 3막 '하의 벗기', 4막 '완전누드'로 연주하기였다. 


그런데 2막이 시작되고 샬럿이 가슴을 드러내자 사복경찰 3명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그녀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고 즉각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공연의 작곡가이자 제작자인 백남준도 연행됐으나 공연장에 양복 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 훈방 조치됐고, 샬럿도 나중 풀려났지만 외설혐의로 재판에 붙여졌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논쟁으로 확대되어 미국예술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샬럿이 법정에 서자, 애가 탄 백남준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 예술가뿐 아니라 프랑스 시인인 '장 자크 르벨(J. J. Level)'에까지 편지를 보내 뉴욕주지사에게 그녀의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마침 '르벨'로부터 긍정적 반응이 오자 백남준은 1 다음에 숫자 0을 길게 늘이는 재치 있는 감사의 답신을 보내며 파리에선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켜달라고 말한다. 전 세계 유명전위작가와 예술비평가들도 백남준에게 지지를 보냈다. 

빈털터리인 백남준은 더 적극적으로 변호사 비용을 얻기 위해 1968년 뉴욕타운 홀에서 '재판기금모금연주회'를 열었고, 백남준은 누이를 통해 알게 된 가야금연주자 황병기씨를 뉴욕까지 불러내 연주하게 했다. 황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복을 입고 연주했는데 샬럿은 비키니를 입고 자루를 들락날락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단다.

미국법원은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백남준의 말을 받아들여 샬럿에게 유예판결이 내리자, 뉴욕예술계는 환호하며 이 법적 투쟁의 두 승자를 축하해줬다. 그 이후 그녀는 '토플리스 첼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 분야의 아이콘으로 행위예술의 '잔 다르크' 아니 '자유의 여신'이 되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청교도 전통으로 성에 강박관념이 심한 미국사회의 촌스러움을 걷어낸다.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돌 같은 분위기를 휘저어놓고 싶었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삼는 기존사회의 통념을 깨는 예술적 교란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 'G. 바타이유(1897-1962)'도 "성(에로티시즘)은 죽음 속에서도 삶을 찬양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지만 성 혹은 에로티시즘은 생사의 넘어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자 인간이 추구할 행복의 근간이 아닌가. 

백남준이 독일에서 신화적 인물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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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뒤셀도르프 시내전차에 그려진 백남준 얼굴. 그는 독일에서 거의 신화적 존재로 대우받는다. 그의 해학과 풍자가 담긴 말 "너무 완벽하면 신이 화를 낸다"는 문구가 전차에 적혀있다. ⓒ Estate of Nam June Paik(Museum Kunst Palast, Dusseldorf)


이런 백남준의 예술철학에는 "가장 잘 노는 사람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여기서 잘 논다는 건 일상을 축제로 바꾸며 문화예술을 창조하는 일을 가리킨다. 백남준이 이런 생각을 처음 실험한 곳은 바로 독일이었다. 

유럽도 그렇지만 독일은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20세기 내내 놀지 못했다. 게다가 세계대전으로 인한 심적 상처도 컸다. 독일인에게 큰 위로가 필요할 때 느닷없이 동양에서 온 한 예술가가 나타나 천개 손도 모자라는 '천수관음보살'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보이스'와 함께 신화적 인물이 된 이유다.

백남준은 서구의 '합리주의·과학주의·이성주의'가 괴물 같은 나치즘을 낳았다며 서구사회 눈먼 허위의식과 모순을 들통 낸다. 정신과 관념보다는 몸과 일상을 중시하고 야생의 사고와 생명감 넘치는 원시성을 부추겼다. 서구의 이원론적이고 분열적 사고에 동양의 '인간·기계·자연(천지인)'은 하나라는 통합적 사상을 도입한다. 

서구철학에서 그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으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있고, 서구미술에서는 마네, 피카소, 뒤샹 등이 있는데 백남준은 이마저도 뛰어넘었다. 몸과 악기, 시간과 공간,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신체아트'로 시작해 '매체아트'로 또 '위성아트'로 도약하며 '인터페이스'의 개념을 창시한다. 

백남준은 TV와 로봇과 기계와도 사람처럼 소통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서구의 룰을 깬 사람이다. 백남준의 얼굴이 독일 뮌헨거리나 뒤셀도르프 전차 위에 새겨진 이유이다. 만약 한국에 어떤 외국작가가 와 우리가 도무지 풀 수 없는 남북문제, 학벌숭배, 지역차별 등 난제를 깨는 예술을 했다면 우리라도 반가우리라.

돈도 섹스도 뛰어넘는 축제적 삶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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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바디아트(body art)'로 백남준과 무어먼에 의해 연주되는 존 케이지 작곡인 '인간 첼로(Human Cello)' 1967. 2013년 국제문화교류재단에서 열린 백남준 특강 때 찍은 사진


유희적 인간의 전형이자 축제주의자인 백남준은 샬럿과 함께 '로미오 남준과 줄리엣 샬롯'이 되어 액션음악으로 '섹스'를 했다. 이런 '바디아트'를 통해 돈에 의해 성이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백남준은 돈과 성에 놀아나는 게 아니라 돈과 성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유쾌하게 놀 줄 아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다.

또한 셔먼 아티스트인 백남준은 지구도 굿판을 벌리듯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인터넷의 기원이 되는 '위성아트'도 발명한다. 그렇게 된 데는 "돈보다 축제가 우선"이라는 그의 철학이 깔려 있다. 백남준과 샬럿은 뉴욕에서 돈 나눠주는 퍼포먼스도 했는데 이 또한 돈은 인간에게 하나의 방편일 뿐임을 시사한다.

백남준은 뉴욕에서 가난한 작가로 살았지만 돈에 대해서는 대범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어려서 캐딜락과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있는 최고 부잣집 아들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친의 재력에는 친일의 행각이 관련돼 있다는 걸 목격하는 등 부자로서 보통사람은 겪을 수 없는 '쓴맛(vanitas)'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1990년 노벨문학상수상자)'는 사랑도 투쟁이라며, 태초의 세상에서 돈이나 사회적 억압 혹은 경제적 차별로 뺏긴 첫 키스와 첫 정사를 되돌려달라고 절규했듯, 백남준도 왜곡되고 위선적인 윤리도덕의 잣대에서 벗어나 진정 인간이 해방되고 축제가 나눠지는 공동체를 열망한 것이리라.



 '더그 에이트킨전'과 '백남준 온 스테이지' (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11.6-2014.2.9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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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전시중인 '백남준 온 스테이지'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 온 스테이지(Nam June Paik on Stage)]展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전과 함께 열린다. '존 케이지를 대한 경의(1959)', '머리를 위한 선(1960)', '엘리슨을 위한 세레나데(1962)', '로봇오페라(1964)',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6)',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1969)' 등 백남준의 60년대 주요 퍼포먼스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위 작품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는 음악과 신체와 전자매체가 만나는 '비디오아트'를 낳게 하는 다리역할을 한다. 세계적 미디어학자 '맥루한'도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라고 했지만, '인간 첼로'에서는 인간의 몸이 악기가 되고, 행위음악에서는 연주자의 신체가 노출돼 음악이 시각화된다. 

[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수장작가 '더그 에이트킨']展 또한 같은 장소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연다. '더그 에이트킨(Doug Aitken)는 1968년 태어난 미국의 미디어작가로 사진, 출판, 조각, 영화, 설치, 해프닝, 다채널비디오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부제는 작품명인 '전기기구'이다. 

그의 전략은 영화(비디오)의 스토리 전개를 해체하고 복수의 화면을 시간차를 두거나 연기(延期)하는 등 비동시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간성'을 획득한다.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자로, 대표작 '전기기구(Electric Earth)'가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다. [더그 에이트킨 작가 홈페이지] http://www.dougaitkenworkshop.com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자 '더그 에이트킨'특별전과 '백남준 온 스테이지'전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11.6-2014.2.9일까지. 입장료 성인:4000원, 초중고생: 2000원 [참고] 홈페이지: http://www.njpartcenter.kr/kr [관람정보 및 교통편] http://www.njpartcenter.kr/kr/about/visi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