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86
<이채훈의 힐링 클래식>을 시작하며
이 글들은 초보자를 위한 음악 입문서 구실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에 익은 선율들을 엄선해서 가장 훌륭한 연주를 링크할 것입니다. 하루에 한 곡씩 마음의 귀로 듣다보면 어느새 클래식 음악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누구나 제목을 알지만 정작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곡들, 가령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같은 곡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석 같은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을 알면 클래식이 보인다>라는 책도 있지요? 결코 어렵지 않은 두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을 비교적 많이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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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채훈은 문화방송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현대사 다큐, <모차르트>, <정트리오> 등 음악 다큐를 다수 연출했고 지금은 ‘진실의 힘 음악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
“봄이 올 때까지 봄을 노래해!” - 막말 없는 새해를 기원하며
새해에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2015년 초입이나 2014년 말이나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 차가운 겨울, 클래식은 무엇을 노래할 수 있을까. 독재에 대항할 때 자주 부르던 노래 <물가에 심은 나무>가 떠오른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흔들리잖게!” 이 노래의 2절은 “자유 올 때까지 자유 외쳐라”, 3절은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로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봄이 올 때까지 봄을 노래해!” 외칠 수 있지 않을까.
봄을 노래한 클래식 음악은 무수히 많다. 사랑과 자유, 젊음과 생명, 그리고 따뜻한 마음…. 음악혼의 정수를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봄과 관계되니 위대한 작곡가들은 너나없이 훌륭한 봄노래를 남겼다. 이 중 가장 천진하고 단순한 노래, 모차르트의 <봄을 기다림>을 다시 듣는다. 모차르트가 35살로 세상을 떠난 1791년 1월에 작곡한 이 노래는 동요다. 어린이는 어서 봄이 와서 “시냇가로 산책을 나가 예쁜 제비꽃을 보고 싶다”고 노래한다. 이 어린이는 가난한 집 아이 같다. 돈 드는 놀이보다 “새들이 노래할 때 푸른 잔디 위를 신나게 달리는 게” 훨씬 더 좋다고 노래한다.
모차르트 동요 <봄을 기다림> K.596 http://youtu.be/9URYugPt1RU (노래 나나 무스쿠리)
4절에서 어린이는 이웃집 소녀 로트헨이 아픈 게 제일 슬프다고 노래한다. “불쌍한 이 소녀는 꽃이 필 날만 기다리고 있지. 나는 걔가 심심해하지 말라고 장난감을 갖다줬지만 소용이 없어. 걔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조그만 자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마지막 5절에서 어린이는 따뜻한 봄이 어린이들에게 제일 먼저 왔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아, 바깥이 조금만 더 따뜻하고 푸르렀으면!
아름다운 오월아, 우리들에게 먼저 와 주렴.
제비꽃이 많이많이 피게 해 주고
나이팅게일도 많이 데리고 오렴
예쁜 뻐꾸기도 데리고 오렴
새해 아침, 순진무구한 이 노래를 듣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봄이란 무엇일까? 마음 아픈 사람들이 치유되어 활짝 웃을 수 있게 되는 게 봄 아닐까. 이 춥고 험한 세상에서 각자의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 아닐까.
▲ 30살 무렵의 베토벤. 그의 초기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들에서는 봄의 생명이 약동한다
베토벤이 20대에 작곡한 음악에서는 봄의 약동이 느껴진다. 음악은 작곡가의 가슴과 머리에서 창작되지만, 가슴과 머리 또한 몸의 일부분이며, 결국 젊은 몸에서 나온 음악은 봄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피끓는 젊음은 언제나 봄의 음악을 샘솟게 했다. 그의 초기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들은 모두 봄을 찬양하는 것처럼 들린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의 3악장, 베토벤이 작곡한 개별 악장 중 가장 짧은 이 곡에서도 약동하는 봄이 느껴진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쫓고 쫓기며 대화하는데, 어릴 적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개구리가 폴짝 뛰어올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 새 두 마리가 바쁘게 날개짓하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풍경을 상상하곤 했다. 클래식 음악이 길어서 어렵다고 느끼시는 분은 이 곡부터 시작하셔도 좋지 않을까? 1분 남짓한 짧은 곡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3악장
http://youtu.be/O5zh1OLgZDc (바이올린 헨릭 셰링,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강수진의 ‘오네긴’을 기다리며
추위가 이어지는 요즘, 러시아 시골을 무대로 한 발레 <오네긴>은 어떨까?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발레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지 않을까? 푸시킨 원작, 차이코프스키 음악, 존 크랑코 안무의 발레 <오네긴>, 줄거리는 이렇다.
문학소녀인 타치야나는 도시 지식인 오네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오네긴은 아직 풋내기인 타치야나의 구애를 ‘타이르듯’ 거절한다. 오네긴은 타치야나의 동생 올가를 희롱하고, 올가가 장난스레 이에 화답하자 격분한 애인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 결국 오네긴의 총에 맞아 죽는다. 10년 후, 오랜 방황 끝에 잘못을 뉘우친 오네긴은 성숙한 타치야나를 보고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 그레민 공의 부인이 된 타치야나는 애틋한 정을 느끼면서도 그의 구애를 단호히 거절한다.
1997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수진은 <오네긴>의 타치야나 역을 처음 맡아 열연했는데, 이때 그녀의 다큐를 만드는 행운을 누렸다. 강수진은 <로미오와 줄리엣>,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주역을 맡아 이미 프리마 발레리나로 등극해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자랑하는 <오네긴>의 타치야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역할이었다. 3막이 끝날 무렵 수많은 독일의 팬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현지 언론이 “(단장) 마르시아 하이데 이래 최고의 타치야나”라고 평가한, 훌륭한 공연이었다. 무대 뒤에서 만난 강수진은 “다음번엔 좀더 잘 해야 할텐데….” 뻘쭘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늘 그날의 무대에 모든 것을 바치는 그녀의 참모습이었다.
▲ 발레 <오네긴> 중 3막 ‘규방의 이인무’에서 열연하는 강수진.
<오네긴>의 백미는 3막의 마지막, ‘규방의 이인무’다. 10년만에 다시 만난 오네긴과 타치야나의 격렬한 감정이 몸동작으로 얽히며 고뇌에 몸부림친다. 세월의 무게, 회한의 아픔…. 발레리나의 몸동작 하나가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니, 참 신기하지 않은가.
http://pann.nate.com/video/15881670 강수진 주연 <오네긴> 중 3막 ‘규방의 이인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때문이기도 하다. 발레 <오네긴>에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나오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목록에는 <오네긴>이 없다. 존 크랑코가 차이코프스키 음악에서 선곡했기 때문이다. 강수진이 주역을 맡은 아름다운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는 쇼팽의 피아노곡에서 선곡했다. 쇼팽의 매혹적인 음악들이 슬프고 청초한 마르그리트의 이미지를 잘 살려주지만, 이곡저곡 짜깁기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반면, <오네긴>은 전혀 선곡했다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매끄럽게 엮었다. 강수진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 <오네긴>과 <카멜리아 레이디>, 선곡에 관한 한 <오네긴> 쪽이 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곡만 들어보자.
* 1막, 러시아 시골의 순박한 처녀들이 춤출 때 펼쳐지는 우수어린 곡은 폴카 B단조 Op.51-2다.
http://youtu.be/ujPHHKf1iZY?list=PLCd5All9AaSttDklOmcEEKpjunw3sQLCw
* 비운의 시인 렌스키와 발랄한 처녀 올가가 추는 사랑의 이인무는 피아노 모음곡 <사계> 중 6월, ‘뱃노래’다.
http://youtu.be/3xLQW5rm92s?list=PL7DE2D27C69BCCF83
* 결투를 앞둔 렌스키가 고뇌와 회한에 사로잡혀 춤추는 독무에는 녹턴 C#단조가 흐른다. 애절한 첼로의 선율이 가슴을 적신다.
http://youtu.be/zr2jOp2j2Oo?list=PL7DE2D27C69BCCF83
연말, 강수진의 남편 툰츠 쇠크만이 연하장을 보내왔다. 1997년 강수진 다큐를 취재할 때 안내를 해 준 그를 나는 툰츠 아비(아비는 터키말로 ‘형’)라 불렀다. 그의 반가운 소식에 수많은 추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는 예술가답게 섬세하고, 정의감이 있고, 쿨한 사람이었다. 나치 스킨헤드들이 취재 차량을 주먹으로 때리자 용감하게 맞선 그의 모습은 멋있었다. 선배 무용수 베아트리스 알메이다가 발목이 부러져 입원했을 때 나는 “촬영하면 좋겠다…”며 우물거렸다. 다친 사람을 찍자고 하는 게 무례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선 것이다. 툰츠는 “발레리나들의 힘든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라며 베아트리스에게 전화해서 즉시 섭외해 주었다. 강수진이 함께 간 건 물론이다.
▲ 강수진과 남편 툰츠 쇠크만
발레리나의 삶은 외롭고, 고달프고, 부상의 연속이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무용을 계속할 수 없었던 툰츠는 강수진의 매니저 역을 하고 있었다. 15살 때 모나코로 건너간 뒤 혹독한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던 강수진에게 그는 따뜻한 벗이 되어 주었다. 다큐는 인생의 정점에서 활짝 피어난 강수진의 발레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굳이 사적인 이야기를 담으려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사랑하는 사이가 분명했다. 다큐가 방송되고 2년 뒤, 강수진이 뼈에 부상을 입고 좌절하고 있을 때 격려하고 부축하여 다시 일으켜 준 사람도 바로 툰츠였다. 국립발레단을 맡아 올해도 열심히 일할 강수진, 그리고 언제나 곁에서 ‘무보수 어드바이저’로 함께 할 툰츠 아비가 올해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강수진은 내년 7월 22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네긴>의 타치야나 역으로 은퇴 무대를 갖는다고 한다. 그날은 툰츠 쇠크만의 생일, 강수진의 남편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짐작할 수 있다. 강수진은 jTBC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오늘 은퇴해도 괜찮아요. 매일 매일 백퍼센트 사니까 후회가 없어요. 만약 제가 오늘 은퇴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할 거에요. 오늘도 하고 있잖아요. 살고 있잖아요.”
순수한 노력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다운 말이다. 오네긴은 강수진의 말대로 그녀의 스타일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다. 강수진은 극적인 표현력이 서양의 어느 발레리나보다 뛰어나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에 <오네긴>보다 더 어울리는 작품은 없을 것 같다. 강수진은 올해 11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방한 무대에서 <오네긴>의 타치야나를 세 번 선보인다고 한다.
겨울의 끝, 얼어붙은 세상을 위로하는 음악
슈베르트의 겨울여행과 노찾사의 산하
1월 20일, 용산 참사 6주기다. 살기 위해 올라간 사람들이 죽어서 내려왔다. 남일당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갑작스런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무리한 진압이 낳은 참사가 분명했다. 그러나 진압 책임자인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공직을 이어가고 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박근혜의 대선 공약이었지만, 취임 뒤 약속을 지키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용산참사 6주기, <뉴스K> 보도 http://youtu.be/a9V-MS6-c40
유족들은 이맘때가 되면 트라우마가 도져서 고통에 몸부림친다. 6년 내내 진상규명을 외쳤지만 책임질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침묵의 카르텔은 완강하며, 거기에서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사건은 잊혀지고, 유족들은 여위어 간다. <한겨레>에 따르면, 남일당 철거민들의 삶은 ‘강등’됐고, 소득은 반토막이 됐다. “자기 집에 살던 이는 전세나 월세, 임대주택으로 한 계단 또는 몇 계단씩 내려앉았다. 지상에서 살던 사람도 반지하로 내려갔다. 가족과 함께 살던 이들 가운데는 뿔뿔이 흩어져 홀로 사는 이도 있었다.” - <‘용산참사’ 6년, 시계방 사장님은 경비원이 됐다> 한겨레, 2015. 1. 19
이게 어디 용산참사 유족들만의 문제인가. TV카메라 앞에서 눈물 흘리는 쇼를 벌였지만 세월호는 아직 인양도 안 하고 있다.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담배값 인상과 ‘13월의 세금폭탄’으로 서민 생계가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냉혹한 자본을 닮아가는 걸까. ‘갑’들의 막말에 이어, 4살 어린이에게 KO펀치를 날리는 보육원 교사의 모습에 할 말을 잊는다. 분노와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한 세상은 폭발의 임계점에서 얼어붙어 있다.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여행> http://youtu.be/DLsaSm5iG9o?list=PL2FEA1645BA0A5D3B
제1곡 ‘잘 자요’ (Gute Nacht), 제5곡 ‘보리수’ (Lindenbaum), 제11곡 ‘봄의 꿈’, (Frühlingstraum), 제24곡 ‘거리의 악사’ (Leiermann).
▲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피아니스트 안스네스와 함께 녹음한 슈베르트 <겨울여행>
▲ 노찾사의 첫 앨범에 들어있는 <바람 씽씽>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도 봄을 그리워한다.
얼어붙은 세상에 음악이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용산참사 유족들, 세월호 유족들, 그리고 긴긴 겨울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음악을 바칠 수 있을까. 슈베르트(1797~1828)가 죽음을 1년 앞두고 작곡한 <겨울여행>…. 차디찬 겨울밤, 그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로 노래는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고 유리창에 ‘잘 자요’(Gute Nacht), 써 놓고 눈 덮인 길을 떠난다. “홀로 왔던 길을 이제 홀로 떠나네. 꽃 만발한 5월 그녀와 사랑을 다짐했지만 이젠 캄캄한 세상, 눈 덮인 길 뿐…. 잘자요, 그녀 유리창에 써 놓고 꿈 깨지 말라고 조용히 떠나네.”
이 겨울에 아예 세상을 떠나려는 걸까? 여리고 섬세한 그의 감성은 험악한 세상을 견디기가 어렵다. 가난한 그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돌아올 계획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눈 덮인 길을 가는데, 눈물이 자꾸 흘러서 얼어붙는다. 5번째 곡 ‘보리수’는 지나간 봄을 회상한다. “마을 입구 우물가의 보리수,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지. 나무줄기에 사랑의 말을 새겼었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이 나무 아래….” 그러나 세상은 어둡다. “지금은 깊은 밤의 고요 속에 그 곁을 지나야 하지, 캄캄한 어둠 속에 두 눈을 감네….”
<겨울여행>(Winterreise)은 빌헬름 뮐러(1794~1827)의 24편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막 시작된 무한경쟁에 젊은 예술가들은 힘겨워했다. 이 곡이 작곡된 1827년, 시인 뮐러는 33살로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 자신도 이듬해 31살로 세상을 떠났다. <겨울여행>은 그의 슬픈 ‘방랑자 의식’이 가장 짙게 드러난 작품이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꾼 그의 예술혼은 이른바 ‘낭만주의’의 씨앗이 됐다.
다시 <겨울여행>, 눈물이 다시 흐르더니 마침내 홍수가 된다. 아무리 추워도 봄을 꿈꾸는 게 인간인가. 11번째 곡은 <봄의 꿈>이다. “꿈속에서 아름다운 5월의 꽃을 보았네. 닭소리에 잠을 깨니 어두운 지붕위에 까마귀가 울고 있네. 눈을 감으니 아직도 가슴이 뛰고 있네. 내 잎새 언제 다시 푸르러져 그녀를 껴안을 수 있을까.” 정처 없는 여행의 막바지, 슈베르트는 마을 변두리에서 ‘거리의 악사’를 발견한다.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타는 늙은 악사, 듣는 이 보는 이 아무도 없고 개들만 늙은 악사를 쫓아다니네.” 슈베르트는 늙은 ‘거리의 악사’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돈과 명성은 언제나 그를 빗겨 갔다. 슈베르트는 홀로 창작에서 구원의 빛을 찾아야 했다. “나는 오로지 작곡을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어.”
<겨울여행>을 들으니, 어두운 군부독재 시절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 노래가 떠오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1984)에 들어있던 <산하>,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이 겨울의 끝은 어디일까. 이 산하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산하>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길게 누운 이 산하는 여윈 몸을 뒤척이네.
피고 지는 네 얼굴에, 터질 듯한 그 입술에
굵은 비가 몰아치면, 혼자 외로이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http://youtu.be/kk08cqq1YDs (노래를 찾는 사람들)
아람 하차투리안 ‘스파르타쿠스’ - 사랑하는 후배 권성민 PD에게
MBC가 권성민 PD를 해고했다는 소식에 한숨이 나온다. 권 PD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양심과 열정과 순수를 지닌 후배가 분명하다. 불의한 경영진을 비판하고, 모순된 현실을 고발해서 불이익을 받았으니 말이다. 권 PD는 ‘자유와 창의과 책임’으로 요약되는 MBC PD의 전통을 이어갈 자랑스런 후배다.
권 PD의 고교시절 은사님이 ‘해고 철회’ 서명을 제안하며 묘사한 권 PD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 듯하다. 수능이 끝난 뒤 교회에서 뮤지컬을 연출했고, 대학시절엔 고교 후배들의 연극을 다듬어 주었고, 군 복무 중에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한 우물 파주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은사님은 권 PD를 “제자라기보다 젊은 벗”이라 불렀고, 이런 그가 ‘오늘의 유머’에 올린 웹툰 때문에 해고됐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MBC 경영진은 이미 정직 6개월을 받은 권 PD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했으니 해고가 불가피하다는 형식논리에 갇혀 있는 듯하다. 똑같은 형식논리로, 정직 6개월이 부당징계였다면 이번 해고 조치는 더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재판으로 가면 부당해고 판결이 나올 게 확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사 내의 표현의 자유는 일반 기업보다 더 넓게 인정돼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하지만 MBC 경영진은 일단 해고하면 임기 중에는 권 PD를 안 볼 수 있다고 계산한 것 같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격언을 실감케 한다. MBC 경영진은 자기 인생이 하루살이처럼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1월 28일 재심에서 해고 조치를 백지화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지 않겠는가?
MBC 경영진은 짧고, PD의 연출 인생은 길다. 권 PD는 시청자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게 사명인 예능 PD다. “삶의 비극적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 진정 유쾌한 사람”이란 말이 있다. 작금의 시련은 권 PD가 더욱 뛰어난 예능 PD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후배 권성민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발레 <스파르타쿠스>를 보낸다.
1954년, 소련의 인민예술가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 음악을 만들고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하여 발레 <스파르타쿠스>가 탄생했다. 이 발레는 웅장한 남성 군무가 장관이다. 크라수스 군대의 도도한 춤과 노예들의 고통스런 몸짓에 이어 검투사 대결 장면이 펼쳐진다. 향락과 사치에 빠진 로마 지배층은 노예끼리 결투를 시키고, 이를 즐겼다. 노예들은 자기가 살려면 동료를 죽여야 했다. 이기면 당장은 살아남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동료를 찔러 죽인 스파르타쿠스는 더 이상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결심한다. 스파르타쿠스의 고통스런 독무에 이어, 쇠사슬을 끊고 떨쳐 일어나는 노예들의 군무가 이어진다.
발레 <스파르타쿠스> 1막 (2008 볼쇼이 공연, 파리 가르니에 궁전) http://youtu.be/v0VACj3bKCU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의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순간 자유인으로 거듭났다. 1950년,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소설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렇게 썼다.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 그는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군대다. 쉽게 말해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들은 국가, 도시, 전리품, 권력, 특정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여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있다.”
스파르타쿠스(BC 109 ~ BC 71)는 BC 73년, 70여명의 노예들과 함께 카푸아 근교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 로마 각지의 농노와 광부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 정부가 보낸 진압군을 두 차례나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로마 지배층을 공포에 떨게 했다. 로마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더욱 강력해진 그의 군대는 최대 12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BC 71년 원로원이 파견한 크라수스의 대군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때 병사 6,000명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됐다고 하니,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된 것보다 훨씬 더 큰 사건이었다.
발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무장 봉기는 성공하는 듯 보인다. 크라수스와의 첫 대결에서 그를 생포한 것.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용서하고 풀어준다. 자존심이 상한 크라수스는 복수를 꿈꾼다. 아내 에기나가 간계를 꾸민다. 여자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잠입, 반란군들을 유혹하여 술을 먹이는 것이다. 모두 환락에 취해 넋을 놓은 틈을 타서 진압군이 반란군 캠프를 급습한다. 반란군은 무자비하게 살육되고, 스파르타쿠스는 수십 개의 창에 찔려 숨을 거둔다.
발레 <스파르타쿠스> 3막 http://youtu.be/vjYilf6cwwU
애도의 합창이 울려 퍼지면 프리기아가 비탄에 잠겨 처절하게 춤춘다. 눈물을 억제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이다. 죽은 스파르타쿠스의 가슴에서 프리기아가 꽃처럼 피어난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스파르타쿠스의 이상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프리기아는 스파르타쿠스가 사용했던 방패를 그의 가슴에 얹어 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평등하지는 않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샅샅이 털어가고, 이에 항의하면 종북 딱지를 붙여 침묵을 강요한다. 갑질이 전 사회에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사람다운 사람은 해고를 각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시대를 너머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켜 왔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앞으로도 이 비극적인 발레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비발디의 ‘봄’과 리토르넬로 - 권성민 PD를 해고한 MBC 경영진에게
2월 4일은 입춘이다. 권성민 PD를 해고한 MBC 경영진에게 특별히 비발디의 <봄>을 들려드리고자 한다. 입춘이라서 봄을 노래하자는 게 아니다. 악곡 형식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즐겁게 봄을 노래하는 주제(A)가 되풀이 나오고, 그 사이사이에 바이올린 독주의 새로운 에피소드(b,c,d,e)가 등장한다. 비발디는 <사계>의 악장마다 직접 소네트를 써 넣었다. <봄> 1악장의 소네트가 음악의 어느 대목에 해당되는지 메모했으니 참고하며 들으시기 바란다.
비발디 <봄> 1악장 분석
http://youtu.be/Yro42zd5XtM (연주 이무지치 합주단)
A. 리토르넬로 1 (합주, E장조, 00:20~00:52)
드디어 봄이 왔다!
b. 에피소드 1 (솔로, E장조, 00:52~01:24)
새들은 매우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A. 리토르넬로 2 (합주, E장조, 01:24~01:32, 다 함께 봄을 예찬)
c. 에피소드 2 (솔로, E장조, 01:32~01:55)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A'. 리토르넬로 3 (합주, B장조, 01:55~02:22, 조성 변경, 어두운 분위기 예고)
d. 에피소드 3 (솔로, B장조-E장조-C#단조, 02:22~02:29)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A''. 리토르넬로 4 (합주, C#단조, 02:29~02:37, 봄이 왔지만 슬프다)
e. 에피소드 4 (솔로, C#단조-E장조, 02:37~03:18)
잠시 후 하늘은 다시 파랗게 개고
A. 리토르넬로 5 (합주, E장조, 03:18~03:41)
새들은 또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리토르넬로(ritornello)는 ‘돌아온다’(return)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작은 복귀’! 음악은 인간정신을 반영하여 발전했다. 음악은 중간 부분에 발전, 갈등을 겪은 뒤 마침내 해결돼야만 듣는 이에게 만족감을 주게 된다. 첫 주제는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끝부분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완결된 느낌을 줄 수 있다. 비발디 협주곡의 빠른 악장은 거의 모두 리토르넬로 형식이다. <봄>의 형식을 분석하면 A-b-A-c-A'-d-A''-e-A가 된다. 사필귀정의 음악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비발디 <봄> 1악장 주제 (A)
리토르넬로 형식은 권성민 PD가 언젠가 MBC로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는데도 MBC 경영진은 기어이 권 PD를 해고했다. 일단 해고하면 임기 중에는 권 PD를 안 볼 수 있다고 계산한 것 같다. 그렇다면, 권 PD는 아마도 현 경영진이 MBC를 떠난 뒤 돌아올텐데, 누구의 인생이 더 길겠는가? 전문가들은 재판으로 가면 부당해고 판결이 나올 게 확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사 내의 표현의 자유는 일반 기업보다 더 넓게 인정돼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MBC 경영진이 해고를 감행한 것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격언을 실감케 한다. 자기 인생이 하루살이처럼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다시 비발디를 들어보자. 전반부 A-b-A-c-A는 시청자의 사랑을 받던 시절의 MBC를 노래하는 것 같다. “드디어 봄이 왔다! 새들은 매우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세 번째 에피소드(d)는 MBC의 시련을 묘사하는 셈이다.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하지만, 그 시련은 결국 해소된다. 사필귀정,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결론이다. “잠시 후 하늘은 다시 파랗게 개고 새들은 또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비발디(1678~1741)는 협주곡의 중간 부분, 리토르넬로의 조성을 바꿔서 좀 더 풍성한 변화를 주었다. 비발디가 확립한 이 형식을 텔레만, 바흐, 헨델이 이어받아 널리 사용한 결과 리토르넬로 형식은 18세기 협주곡의 표준양식이 됐다. 고전 시대에 확립된 소나타 형식도 주제가 발전하고, 갈등과 긴장을 겪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마무리한다. 리토르넬로 뿐 아니라 인간 정신을 반영한 모든 음악 형식이 그러하다.
세상일은 음악처럼 명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해 보자. 엘리자베트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 200명을 인터뷰해서 <인생수업>을 썼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인하고(그럴 리가 없어), 분노하고(왜 하필 나만?), 타협한다(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그러나 예외없이 네 번째 단계인 우울의 시간을 겪은 뒤 체념하고 수용한다. 우리는 시한부 진단을 받지 않아도 내 삶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을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인생수업>의 결론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치를 두고 살아온 것들이 과연 나의 마지막 순간에도 의미 있는 게 될 수 있을까?”
MBC 경영진에게 묻는다. 당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지금 권 PD를 해고한 당신의 행동이 의미 있다고 마지막 순간에도 확신할 수 있겠는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고대 로마에서는 승리한 장군을 따라다니며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대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 이 말은 MBC 경영진에게 내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봄을 앞두고 천둥과 번개가 길기도 하다. 시청자들이 외면한 MBC에는 한숨과 눈물과 냉소가 흐른다. 많은 사람들이 해고, 징계됐다. 유배된 걸 유배됐다고 말한 젊은 PD가 해고됐다. 권 PD의 웹툰을 찾아보니, 정말 잘 그렸다. 따뜻하고 순수하고 성찰이 있다. MBC 경영진은 좋은 기자, PD만 골라서 징계하는 꼴이다.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권 PD는 MBC로 돌아올 것이다. 권 PD가 더 훌륭한 PD로 커 가는데 이번 시련은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
세기의 피아노 경연, 모차르트 vs 클레멘티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 오스트리아 황제 요젭 2세(1741~1790)의 궁전에서 세기의 음악 경연이 벌어졌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던 두 사람, 모차르트와 클레멘티가 실력을 겨룬 것이다. 이 만남은 피아노 음악이 활짝 꽃피기 시작한 바로 그 위대한 시기에 이뤄졌다.
‘근대 피아노 연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는 3년 일정으로 유럽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당시 그는 유럽에서 하이든 다음으로 유명한 음악가였다. 클레멘티는 베르사이유에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연주했고, 뮌헨, 잘츠부르크의 팬들을 열광시킨 뒤 빈에 도착했다. 모차르트(1756~1791)는 그해 6월 잘츠부르크의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사표를 던진 뒤 자유음악가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었다. 요젭 2세는 두 사람을 초청하면서, 피아노 경연이 벌어질 거라고 예고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궁전에는 왕족과 귀족이 가득 모여 있었다. 청중들이 자기들의 경연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곧 의연히 받아들였다.
▲ 모차르트 (1756~1791, 왼쪽)와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 오른쪽)
황제가 등장해서 말했다. “여기 두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있으니 연주를 청해 듣기로 합시다. 클레멘티가 먼저 연주하시오.” 클레멘티는 자신의 신작 소나타 Bb장조를 연주했고, 뒷부분에서는 즉흥 연주도 선보였다. 청중들은 환호했다. 이어서 클레멘티는 당시 무척 인기있던 곡 <토카타>를 연주했다. 이 곡은 요즘은 잘 연주되지 않지만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테크닉을 선보인 쇼케이스로, 특히 3도 음정으로 진행되는 대목에서 ‘악마적인’ 기교가 필요하다고 한다. 클레멘티의 놀라운 테크닉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클레멘티 소나타 Bb장조 op.24-2 http://youtu.be/uxwxhDsZtIA (피아노 발라쥬 쇼콜라이)
클레멘티 <토카타> Op.11 http://youtu.be/A6gIT7SIEzQ (포르테피아노 콘스탄티노 마스트로프리미아노)
모차르트는 어떤 곡을 연주했을까? 기대감에 차 있는 청중들 앞에서 피아노에 앉은 그는 느린 템포의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카프리치오 C장조 K.395였다. 기교보다는 음악성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모차르트 <카프리치오> K.395 http://youtu.be/BJZ1gdvPnQg (포르테피아노 로날드 브라우티검)
이어서 모차르트는 아주 포퓰러한 주제로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를 주제로 한 변주곡, 누구나 아는 선율이기 때문에 모두 공감했고, 단순한 선율이 다채로운 변주로 이어지자 모두 환호했다.
이 노래는 모차르트가 1778년 파리 여행 때 들은 유행가 <엄마에게 말해 드릴께요> (Ah, vous-dirais je, maman)였다. 원래 가사는 이렇다. “엄마,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제 마음은 요동치고 있어요. 아빠는 저더러 어른스럽게 처신하라지만, 저는 어른스런 추론보다 달콤한 봉봉과자가 더 좋거든요.” 사랑 앞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젊은 처녀의 하소연인 셈이다. 이 노랫말은 모차르트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 시대의 룰에 따라 봉건 영주 밑에서 평탄하고 안전하게 살라고 아버지는 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당시 상식으로는 그게 이성적인 일이었지만, 모차르트는 고초를 마다않고 자유음악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모차르트 <반짝반짝 작은별> 주제에 의한 변주곡 K.265 http://youtu.be/RcXO1_1DpYQ (피아노 발터 기제킹)
경연이 끝났다. 누가 이겼을까? 황제는 무승부를 선언했다. 참석자 모두를 흡족케 하려는 외교적 행동이었다.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 준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테크닉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 아버지에게 보낸 모차르트의 편지에 나오는 구절. “클레멘티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죠. 그의 오른손은 무척 훌륭하고 특히 3도, 6도 진행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기교를 제외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 한푼의 취향도, 느낌도 없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술자(mechanicus)일 뿐입니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혹평했지만 이날 경연에서 배운 것도 있었다. 1786년 작곡한 변주곡 K.500에는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피아노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명백히 클레멘티의 영향이었다. 이날 클레멘티가 연주한 소나타 Bb장조의 주제를 모차르트는 8년 뒤 오페라 <마술피리>의 서곡에 활용하기도 했다.
황제 요젭 2세는 이 날의 음악 경연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황제가 궁정음악가 디터스도르프에게 물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어본 적 있나?”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폐하.” “어땠나?” “음악애호가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클레멘티 연주도 들어봤나?” “네, 그렇습니다.” “모차르트보다 클레멘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대의 의견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클레멘티의 연주는 기술인 반면 모차르트는 예술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오늘날, 모차르트 음악이 클레멘티보다 훨씬 더 자주 연주되는 건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클레멘티도 간혹 연주되며, 어린이들을 위한 소나티네 앨범에도 빠지지 않는다. 클레멘티는 그 뒤 피아노 판매, 악보출판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클레멘티의 피아노 기법은 존 필드, 크라머, 모셀레스 등 제자들을 통해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로 전해졌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의 경연 이후 50년 정도 흐른 뒤 쇼팽과 리스트가 피아노계의 왕자로 등장했다. 피아노 음악사에서 모차르트는 쇼팽, 클레멘티는 리스트의 연주 스타일을 예견케 한다는 데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헬게 안토니가 연주하고 해설한 다큐멘터리 <Mozart vs Clementi>는 이 역사적 경연을 실제 연주와 함께 소개한다.
다큐멘터리 <모차르트 vs 클레멘티>
http://youtu.be/OBmNPP1jpx8 http://youtu.be/ws-cR5lc7Co
모차르트와 공자(孔子) |
낙이불음 애이불상,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한 음악가가 바로 모짜르트다? |
‘모차르트 머슴’을 자처하는 이종윤 선생은 예악(禮樂)에 대한 공자(孔子, BC551~479)의 가르침을 실현한 음악가가 바로 모차르트라고 주장했다. 모차르트는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즐겁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다치지 않는다)이라는 공자의 음악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한 음악가라는 것이다. 이 선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에 전한 공자의 사상이 유럽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모차르트 음악이 나오게 됐다고 보았다.
이 추론은 다소 비약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공자는 군신(君臣)의 위계질서가 확립된 주공시대를 이상향으로 간주한 보수적인 사상가였다. 이 점에서, 프랑스 혁명에 열광한 모차르트와는 정치 성향이 같을 수 없었다. ‘공자 사상 - 유럽 계몽주의 - 모차르트 음악’으로 연결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두 사람이 알고 있던 음악은 무척 달랐을 것이다. 동서양의 차이는 물론 2,200년 세월의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윤 선생의 견해는 모차르트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왜 그런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낙이불음(樂而不淫)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http://youtu.be/2oNnugi3yLU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인 1791년 가을, 클라리넷 연주자인 친구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작곡한 협주곡.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며,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와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악장으로 돼 있다.
애이불상(哀而不傷) :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http://youtu.be/JTc1mDieQI8
모차르트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1788년 여름에 39번 Eb장조, 41번 <주피터>와 함께 작곡한 교향곡. 이 곡을 완성할 무렵 넷째 아이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났다. 삶의 비극적 의미와 죽음에 대한 상념을 깊은 서정미로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 빠르게-천천히 걷는듯-다소 빠른 메뉴엣-충분히 빠르게, 네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공자 시대의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음악을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평가했다. 정직하고 올바른 친구, 너그럽고 착한 친구,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친구는 내게 도움이 된다. 군자(君子)가 바로 이런 친구다. 편파적인 친구, 마음 약한 친구, 말이 앞서는 친구는 내게 해를 준다. 소인(小人)이 바로 이런 친구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정직하고 너그럽고 깊이 있는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해롭다. 공자는 음악도 사람처럼 선(善)해야 하고 예(禮)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종윤 선생이 “모차르트 음악은 선하다”, “모차르트는 예의바른 음악이다” 강조하신 건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 1790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 모차르트. 공자의 사상에 비추어 모차르트 음악을 ‘선하고 예의바른 음악’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시경>에 나오는 ‘관저’는 공자가 좋아한 노래 중 하나였다고 한다. 어느 임금과 요조숙녀 사이의 사랑을 읊은 노랫말. “여기저기 자라난 물냉이, 오른쪽에서 따고 왼쪽에서 따네.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깨었을 때도 잠들었을 때도 같은 소망이네.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칠현금을 갖고 그 곁에 서자꾸나.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북과 종을 갖고 아가씨에게 즐거움을.”
사랑에 빠진 임금은 거칠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속의 여인을 북돋워 주고 즐겁게 해 주려고 할 뿐이다. 공자는 정나라 음악이 말초적인 즐거움만 준다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정나라 남녀들은 강가에 모여 “서로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관능을 즐겁게 해 주었고, 현악기의 교묘한 조작이 욕망을 부채질했다.” 공자가 볼 때 이 음악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을 담고 있었다. 공자는 안회에게 “이 음악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했다.
공자가 가장 사랑한 음악은 <소>라는 옛 음악이었다고 한다. 순 임금의 조정에서 연주한 이 곡은 순 임금의 즉위 과정을 담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깊은 산속에 살면서도 덕에 대한 사랑이 격류보다 강한 순(舜)’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욕망을 담지도 않았고 열정적인 음악도 아니었지만, 귀신도 새도 짐승도 끌어들여 굴복시키는 힘을 가진 음악이었다. <서경>에 따르면, 순 임금 앞에서 이 음악을 연주할 때, “아홉 개 악장이 끝나갈 무렵 봉황이 짝을 지어 날아 내려왔다”고 한다.
그가 볼 때, 주나라 무왕의 업적을 찬양한 <무> 음악은 아름답지만, 선하지는 않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무기를 들고 정복에 나서는 내용이기 때문에 선할 수 없었다. 반면, 순 임금은 무기를 들지도 않았고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평화의 길을 통해 천자의 지위에 올랐고, 도덕적 힘을 통해 천하를 얻었다. 따라서 공자가 볼 때 아름다우면서 완벽하게 선한 음악은 <소>뿐이었다.
공자는 “예(禮)는 악(樂)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음악이 문화의 궁극적 열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은 개인의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정치질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맹자에 따르면, “공자의 일생은 완벽하게 맞춰진 하나의 연주처럼 시작 종소리에서 마지막 옥피리 소리까지 이어지는 내면의 질서가 있었다.”
공자는 늘 소인을 폄하했지만, 대다수 민중을 구성하는 소인을 멸시한 게 아니라, 소인이 군자 행세를 하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었다. (김시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웅진지식하우스, p.118) 소인들이 국가와 언론을 장악한 이 나라, 예(禮) · 의(義) · 염(廉) · 치(恥)가 실종된 척박한 땅에서 착하고 예의바른 음악이 설 자리가 있을까.
※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안핑친 <공자평전> (김기협 옮김, 돌베게, p.202~p.209)을 주로 참고했다.
간첩으로 몰렸던 비운의 음악가, 윤이상을 아시나요?
주요음 기법 창시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 그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독일에 머물던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고문 끝에 ‘동베를린 간첩단’으로 조작된 사람. 국제 여론의 압력으로 풀려난 뒤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비운의 음악가. 우리 현대사에서 알려진 윤이상은 이 정도일 뿐, 정작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찬찬히 돌아보면, 윤이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음악가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는 궁지에 몰린 서양 음악에 동양의 혼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력을 창조했고, 비틀거리던 현대음악에 ‘주요음’과 ‘주요음향’ 기법을 도입하여 중심을 찾아 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다시 조명해야 한다.
그는 39살 되던 1956년에 유럽으로 떠났다. 무척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그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우리말로 된 동요집을 작곡했다. 해방 이후 전쟁고아를 돌보고 음악교사로 일하며 새나라의 어린 세대를 위해 교가를 작곡했다. 이 기나긴 우회로에서 그는 한 순간도 음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작곡 기법을 거의 독학으로 체득한 그는, 국내에서 뛰어난 음악가로 인정받은 뒤 비로소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을 향한 것이다.
▲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사진=부산문화회관 홈페이지 | ||
단순히 배우기 위해 떠난 유학이 아니었다. 12음 기법에 이미 통달한 그는, 유럽의 첨단 음악 조류를 직접 체험한 뒤 자기만의 음악어법을 개발할 준비가 돼 있었다. 보리스 블라허 교수를 통해 현대음악의 이론적 토대를 확인한 그는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참가, 26개국에서 온 200여명의 현대음악 작곡가와 이론가들을 보았다. 음악인지 아닌지 모를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목격한 윤이상은 부인 이수자 여사에게 편지를 쓴다.
“존 케이지라는 미국사람의 피아노 작품을 들었는데, 멜로디는 전혀 없고 한참 만에 문득 생각난 듯이 건반 하나씩을 누르는 거였소.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건 얼마 안 되고 그나마 장구 치듯이 손바닥으로 피아노 뚜껑을 탁 치더니 다시 뚜껑을 덮고, 또 팔꿈치로 건반을 꽝 치더니 가끔 장난감 호각을 불고, 옆에 라디오를 설치해 놓고 라디오 소리를 내고, 이런 것이 연주의 전부였소. 나는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음악을 쓰기는 싫소. 아니, 그들보다 더 엉뚱한 짓으로 세인을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나는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순수하게 머물고 싶으며,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소.”
현대음악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쇤베르크가 선보인 무조음악은 음악계의 규범이었는데, 모든 작곡가들이 조성을 파괴하자 음악에서 인간의 감정이 사라졌다. 재능 있는 음악가들은 언제나 새로운 기법을 모색했는데, 그럴수록 음악은 난해해졌고 대중과 멀어졌다. 첨단 음악이 경연하는 다름슈타트에서는 쇤베르크마저 낡은 음악으로 여겨졌다. 존 케이지는 조성 음악은 물론 무조 음악까지 거부했는데, 이것은 클래식 음악의 죽음을 뜻했다.
윤이상은 존 케이지처럼 음악의 죽음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20세기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꼽히는 독일의 슈토크하우젠, 이탈리아의 루이지 노노, 프랑스의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에 매료됐지만, 이 또한 자신의 길은 아니었다. 이 분들의 작품이 “교묘한 형태의 현대식 고층건물” 같다며, 그런 작품을 쓸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야 했다. 1959년 부인 이수자 여사에게 쓴 편지.
“여보, 내가 생각하는 이 길이 지금 현대음악의 막다른 골목을 타개하는 새로운 개척자가 될지 안 될지 아직은 미지수요. 그러나 모든 학문이나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찾아야 할 것이며, 나의 이 길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아무튼 탐구해 보겠소.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오.”
그가 추구한 음악은 노자의 철학과 같은 환상의 세계였다. 동양 사상이 들어간 12음 기법은 윤이상의 ‘주요음’ 기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서양 음악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이뤄진 도형이다. 반대로, 동양음악은 한 획으로 이뤄져 있으며 굵기가 계속 변한다. 한 음을 중심으로 변화하며 꺾이는 자신의 작곡 방식을 그는 ‘주요음’ 기법이라고 불렀다.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발표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이 기법을 사용한 첫 작품으로, 청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그는 세 번이나 무대 위로 불려나갔다. 1960년 쾰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현악사중주곡 3번에 대해 그가 직접 설명했다. “12음렬에 의해 작곡되었으나 벌써 동양의 음, 굴곡선이 길게 뽑아나가는 음형과 파열음 등을 써서 나의 개성적 스타일의 모색을 시도한 곡이다.”
1966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예악>은 이 ‘주요음’ 기법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목관 연주자 12명, 금관 연주자 10명, 30개 이상의 타악기, 하프 두 대, 그리고 현악기가 등장하는 이 곡은 무한의 시간 속에서 흐르는 소리의 향연이다. 윤이상의 새로운 시도는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극도의 추상성, 고도의 지능화, 소리의 계산화로 중심을 잃고 표류하던 서양 음악은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의 손으로 새로운 생명의 샘을 찾게 됐다. ‘영감’, ‘감성’, ‘민족성’이란 말이 배척되던 음악계에 그는 인간의 숨결을 되살려 놓았다.
일본의 작곡가 니시무라 아키라는 이 곡을 설명하며 “우리 동아시아 작곡가들이 언제나 돌아가서 배워야 할 차원 높은 출발점”이라고 했다. 일본의 평론가 야노 토오루는 동양적 의미를 서양음악의 수법으로 표현하는 윤이상의 특성을 ‘양양성’(兩洋性)이라고 불렀다. 그는 “유럽 음악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길 아시아 출신 작곡가는 윤이상 뿐”이라며, “윤이상이 있다는 걸 아시아 사람들은 자랑스레 생각해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p.246)
윤이상 선생의 20주기를 맞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3월 27일~4월 5일)에서 모처럼 <예악>을 들을 수 있다. 4월 5일(일) 오후 3시 폐막 공연에서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지휘 크리스토프 포펜)가 이 기념비적 작품을 연주한다니 반갑다. 윤이상도 이 곡을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나의 조국이 나에게 준 음악적인 보재(寶材)에 최선을 다한 곡으로, 후일 나의 작곡 노선에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이수자 p.10)
올해 통영 음악제에서는 윤이상의 작품을 네 차례 선보인다. 3월 27일(금) 개막 콘서트에서는 바이올린 협주곡 3번(바이올린 유미 황-윌리엄스, 지휘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 3월 29일(일)에는 오보에 사중주곡(바젤 오보에 콰르텟 연주), 4월 4일(토)에는 <에스파체1>(첼로 크리스틴 라우, 피아노 인소향)이 각각 연주될 예정이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윤이상과 박정희, 그리고 ‘나비의 꿈’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음악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작곡가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서 정치를 하도록 등을 떠민 셈이었다. 윤이상은 훗날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실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그 뒤로부터 나는 정치성 있는 음악을 썼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윤이상 <회수록>(回首錄),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하, p.14~p.15)
윤이상은 박정희는 1917년생, 동갑이었다. 윤이상은 <나와 박정희>라는 에세이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씁쓸하게 회고한다. 1964년, 박정희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환영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낙양>(洛陽)을 연주했다. 이어진 커피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박대통령은 아무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박정희, 뤼프케의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를 가운데 두고 윤이상에게만 자꾸 말을 걸었다.
“뤼프케는 좀 전에 연주된 나의 곡에 관해 상당한 이해력으로 분석적인 의견을 펴놓았다. 그리고 곡의 동양적 요소에 대해서도…. 좌중이 모두 그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실상 흥미가 없다 할지라도 대통령이 얘기하고 있으니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 45분 동안이나 나와의 대화가 중단됐다가도 계속되곤 하였다. 그 동안 박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윤이상 <나와 박정희>,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 p.258)
박정희가 침묵을 지킨 이 시간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국가원수인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꼈을까? 서독 대통령이 자기를 모욕하려고 윤이상이란 자를 앞세운 거라고 넘겨짚었을까? 박정희가 윤이상과의 첫 만남을 그다지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윤이상은 공교롭게도 서독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교포들의 환영행사를 직접 주관해야 했다. 서독에 머물던 한인 음악가들을 불러 모아 환영 음악회를 열었고, 교민들을 대표해서 환영사를 읽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좋아할 수 없었다.
서독 방문 기간 중 두 사람은 세 차례 마주쳤지만, 박정희는 윤이상에게 단 한 번의 미소도,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윤이상 또한 박정희에게 활짝 웃어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윤이상은 서독 대통령이 마련한 커피 타임에서 박정희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덕(德)이나 인(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둡고 강직하고 치밀하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형’적인 인상까지 풍겼다.”
불길한 첫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유럽에 거주하는 예술가, 교수, 의사, 공무원, 외교관 등 무려 194명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D-데이는 6월 18일이었다. (김형욱 <대륙에의 가교>,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 p.264 참고) 체포된 사람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 뿐 아니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도 있었다.
윤이상은 1963년 겨울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일제 때 함께 자취했던 친구 최상한을 만나고, 강서고분의 사신도(四神圖)를 보는 게 목적이었다. 전쟁 이후 조국의 반쪽인 북한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첩이란 누명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윤이상을 조사한 중앙정보부 요원들도 윤이상의 방북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 요원의 심문이 시작되자 윤이상은 순진하게도 “1963년에 북조선에 갔었다”고 묻지도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북한을 다녀온 게 그토록 엄청난 꼬투리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깜짝 놀랐고, 이내 윤이상을 간첩 수괴로 몰기 시작했다.
예술가로 성공하여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동포들의 환영 속에서 귀국하겠다는 그의 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백주에 서독에서 납치되어 서울로 끌려온 윤이상을 기다린 건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들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를 도살장의 소나 돼지처럼 매단 채 물고문을 가했다. 뾰족한 각목과 방망이로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너는 북조선의 거물 정탐꾼이다, 특무다, 공산주의자다, 당원이다, 너는 조직의 왕초다….”
정권 안보를 위해서는 예술이고 문화고 안중에도 없는 야수들의 행태였다. 아끼고 보호하고 격려해야 할 자랑스런 예술가를 군화발로 짓이기는 무지막지한 폭거였다. 엄청난 조작을 하려니 조연들이 필요했다.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마저 한국으로 납치하여 구치소에 가뒀다. 어린 두 아이를 돌봐야 할 어머니까지 구금한 한국 정부의 행태에 서독의 여론이 좋을 리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두 자녀마저 납치해 올까 검토했지만, 지나친 무리수라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했다.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는 자신의 삶을 서러워하며 정신을 잃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한국 군부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윤이상이 처한 위험을 알리는 무료 음악회가 잇따라 열렸고,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기부금을 모았다. 윤이상을 석방하라는 호소문에는 181명의 세계적 음악가들이 서명했다. 그 중에는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 리게티, 클렘페러, 카라얀도 포함돼 있었다. 칠레의 뛰어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 표시로 서울 연주회를 취소했다. 서독 정부도 발벗고 나섰다. 한국 정부가 야만적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문화 교류는 물론, 예정돼 있던 차관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자살을 기도한 윤이상.
박정희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납치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재판의 세부사항을 언급하지 말 것,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언사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이를 무시할 경우 “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협박한 뒤 윤이상을 한국에서 추방했다. 맨발로 지옥의 가시밭길을 지나 정신과 육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윤이상은, 1969년 3월 30일 밤 10시경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의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1967년 가을부터 1968년 2월까지 5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작곡됐다. 감옥의 늦가을과 겨울은 추웠다. 그는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음표를 써내려갔다. 심한 현기증 때문에 쓰러지지 않도록 벽에 기대어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차가운 형무소에 앉아 있는 게 현실이 아니라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국가반역, 간첩, 국가전복 음모, 이런 어마어마한 정치적 조작극에 대해서 “허튼 소리 말라! 모두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외치고 싶었다. 그는 기막힌 이 현실을 스스로 한 마리 나비가 된 것처럼 은유로 표현한 것이다.
막이 오르면 나비의 군무가 펼쳐지고 합창이 울려 퍼진다. “백년광음은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고, 오늘 봄이면 내일 꽃이 시든다.” 노자는 장자에게, 나비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집, 가족, 직업에서 자기 몸을 해방시키라고 권한다. “나비는 죽어서 결국 먼지가 되어 자유로운 혼이 된다. 그 혼은 다른 거처를 구하여 장자 속에 들어갔다.” 장자는 방랑길을 떠난다. 그는 수레에 앉아 책을 읽으며 가고 아내는 살림도구를 수레에 얹은 채 울고불고 푸념하면서 따라간다. 오페라는 삶과 죽음을 너머 너와 내가 합일하는 무위(無爲)의 태도, 자생자화(自生自化)를 노래한다. 합창 <나비의 꿈의 노래>가 흐를 때 그늘진 커튼에서 형형색색 나비들이 춤춘다.
윤이상은 이 오페라의 악보가 후세에 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압수해서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보는 당국의 검열 끝에 살아남았고, 부인 이수자 여사가 독일로 가져갔다. 1969년 2월 뉘른베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초연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청중들의 갈채 때문에 31차례나 막이 다시 올라갔고, 뉘른베르크는 축제의 밤이 됐다. 윤이상은 아직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나비의 미망인>, 그 역사적인 초연을 볼 수 없었다.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죽음을 당한 김형욱, 부하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박정희…. 두 사람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 세상의 부귀영화가 나비의 꿈처럼 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윤이상은 궁지에 몰린 서양 음악을 동양 사상으로 살려냈다. 그는 유럽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유럽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한국의 음악혼을 알게 됐다. 윤이상을 간첩으로 조작한 박정희 군부독재의 야만성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에게 확산되고 내면화되어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이상의 음악관이 형성된 배경에 독재자 박정희와의 악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씁쓸한 아이러니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민족)의 모든 예술적 · 철학적 ·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 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格調)와 순도(純度)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 p.12)
지구 반대편에서 음악으로 증언한 1980년 5월 광주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에서
윤이상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한 뒤 용의 꿈을 꾸었다. 꿈 속의 용은 지리산 하늘 구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상처를 입어서 높이 날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놀라서 깨어났고, 잉태한 아이의 운명을 암시하는 꿈이라 생각하여 몹시 걱정했다.
어머니의 꿈은 결국 예지몽이었던 걸까? 윤이상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가 된 것은 50살 때였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가 정권안보를 위해 조작한 이 사건으로 윤이상은 심한 고문을 당했고, 유리 재떨이로 자기 머리를 쳐서 자살하려 했다. 위대한 예술혼을 짓밟은 이 폭거는 중년을 넘긴 윤이상의 몸과 마음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윤이상은 폭력에 무릎 꿇지 않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트라우마를 겪으면 그 사람의 삶, 육체, 정신은 망가진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를 뛰어넘어 마음의 질적인 성장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를‘외상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 한다(강용주 <세월호 증후군>, 법보신문). 이 분들은 누구보다 심한 상처를 겪었고 이를 통해 삶의 깊은 차원을 체득했기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난다. 음악사에서 대표적인 ‘상처입은 치유자’로 베토벤을 꼽는데, 여기에 우리는 윤이상의 이름을 추가할 수 있다.
작곡가 윤이상은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독일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존경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전에서 그의 새 오페라 <심청전>이 공연됐다. 동양적인 효(孝), 희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적, 그리고 세상의 눈먼 자들이 모두 눈을 뜨는 해방의 세계…. 이 오페라는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세계인의 환호를 받았다. 독일의 평론가들은 말했다. “윤이상 선생, 당신이 그때 한국에서 죽었다면 세계의 음악 역사는 얼마나 손해를 봤으며 가난했겠습니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감격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쾌거였다. 그러나 조국은 옹졸했다. 뮌헨 올림픽이 열린 1972년 가을,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란 쿠데타를 단행하여 영구집권을 선언했다. 이듬해,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 살해하려 했다. 6년 전 윤이상이 겪은 것과 똑같은 야만적인 납치극 아닌가. 게다가 김대중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사실상 이긴 것과 다름없는 야당 지도자 아닌가. 윤이상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해외 민주화운동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윤이상의 태도는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윤이상의 본령은 여전히 음악이었다. 그는 분단의 벽에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고통스런 마음을 첼로 협주곡에 담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음악회를 잇따라 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은 상처 입은 채 피 흘리고 있었다. 독재 정권은 분단의 비극에 기생하여 질기게도 명맥을 유지했다.
1980년 5월 18일, 베를린의 집에 있던 그는 모든 일을 중단한 채 라디오와 TV 앞에서 가슴 조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무참히 곤봉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노인, 부녀자 가릴 것 없이 살상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윤이상은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그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의 예술혼과 정의감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심중을 작품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20년 뒤 일어난 광주 학살을 보며 그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그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마침 서독 방송사인 WDR에서 그에게 대관현악곡을 써달라고 위촉했다. 윤이상은 광주 학살이란 악마적 사건을 인류 역사에 남기고 자신의 분노를 전세계에 알림으로써 모든 독재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이렇게 태어난 <광주여 영원히!>는 광주 학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81년 5월, 쾰른의 WDR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세계 초연됐다.
윤이상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https://youtu.be/dHoDw-PupYs
이 작품은 예술성을 유지하면서도 음악만 들으면 누구나 광주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작곡했다. 1부는 궐기와 학살이다. 시작하는 C음은 용감한 젊은이들의 궐기를 의미한다. 조류처럼 파도쳐 오르내리는 현악기군은 궐기한 민중을 의미한다. 이들은 서로 엉키어서 곡을 절정으로 이끌어간다. 2부는 기나긴 진혼으로, 묘지의 정적과 슬픔의 조사(弔詞)다. 3부는 한국의 민주와 정의를 향해 가슴 속에 고동치는 새로운 투쟁, 곧 ‘재행진’이다.
<광주여 영원히!>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들려준다. 윤이상 자신의 말처럼, 광주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자유와 정의가 말살되고 독재와 거짓이 횡행하는 한 우리는 행진해야 한다. 최후의 ‘재행진’ 부분은 우리들의 가슴에 이미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윤이상은 이 곡의 의미를 직접 설명했다.
“<광주여 영원히!>, 너의 이름은 모든 민중의 심장에 새겨져 영원히 남을 것이다. 너의 선량한 의지에 의해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은 양심있는 모든 동족들뿐 아니라 양심있는 인류의 가슴에 따뜻하고 뜨거운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 윤이상 <양심의 외침>(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
(이 글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쓴 <내 남편 윤이상>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리스트를 잘 치면서 모차르트도 잘 친다고?
경이로운 손가락, 소탈한 카리스마… 발렌티나 리시차 연주회를 다녀와서
손가락은 왜 하필 다섯 개일까? 파충류와 포유류의 발가락이 다섯 개인 이유는, “무게를 지탱하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의 손가락이 정교하게 발달한 것은 두 발로 서서 걷고, 도구를 써서 뭔가를 만들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놀라운 건 아마도 피아노 치는 일 아닐까?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네 개라면 바흐의 삼중 푸가를 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익살스레 말하며, 바흐나 스카를라티가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한 손에 여덟 개씩 손가락을 갖게 됐다면 피아니스트들의 운동피질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거라고 덧붙였다(스티븐 제이 굴드 <여덟 마리 새끼돼지>). 바이엘부터 리스트까지, 대부분의 피아노곡은 열 손가락으로 연주하기에 알맞도록 작곡됐다. 피아노란 악기는 인간이 두 손, 두 발로 연주하기에 적합한 크기와 구조로 돼 있다. 피아노로 연주한 음악이 인간의 뇌와 심장을 가장 충실히 만족시킨다는 것도 신기하다. 피아노 음악은 인간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예술이라 할 만하다.
지난 주말, 봄나들이 겸해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발렌티나 리시차의 피아노 독주회에 다녀오는 사치를 누렸다. 오후 5시에 시작한 이날 연주회는 베토벤-슈만-브람스-리스트-쇼팽 등 준비된 레퍼토리를 마치고 마지막 앵콜곡인 파가니니-리스트의 <라캄파넬라>로 이어졌다. 밤 9시를 넘겨서 연주회장을 나올 때까지 인간의 손가락이 이렇게 경이로울 수 있나, 놀라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 발렌티나 리시차는 ‘피아노의 검투사’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연주는 도도한 카리스마보다는 쾌활하고 소탈한 품성을 느끼게 한다.
<라 캄파넬라>는 ‘종’(鐘)이란 뜻으로, 현악기의 높은 현을 개방현으로 둔 채 낮은 현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특수 주법이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의 3악장인데,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하여 종소리의 빛나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발렌티나 리시차는 이 곡을 앵콜곡으로 즐겨 연주하며, 청중들은 언제나 큰 소리로 환호한다.
파가니니-리스트 <라 캄파넬라> (2013년 11월 25일 예술의 전당)
이날 연주한 레퍼토리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소감을 적을 수 없다. 베토벤의 <템페스트> 소나타는 폭풍처럼 몰아치기보다는 내면을 응시하는 진지한 해석을 보여 주었다.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다소 빠른 템포로 전체의 구조를 드러내며 찬란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들려주었다.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 12번은 대단한 난곡으로, 손가락이 건반에 어떻게 이토록 착착 달라붙는지, 경외감을 일으켰다. 클라라 슈만이 ‘정체 모를 소음’이라며 연주를 꺼렸던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는 집에서 감상하기는 부담스럽지만, 라이브 연주답게 연주자의 호흡에서 리스트 자신의 내면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연주였다. 쇼팽의 에튀드들은 과거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노래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별>을 연주할 때는 눈물이 날 뻔했다. 40살을 넘기며 더욱 원숙한 세계를 모색하는 예술가의 노고를 느낄 수 있는 연주회였다.
쇼팽 에튀드 E장조 Op.10-3 <이별> https://youtu.be/mpiJbQvBP8A
발렌티나 리시차는 어린 시절 체스 챔피언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음악에 재능이 뛰어나서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남자친구 알렉세이 쿠즈네초프 - 지금 남편 - 의 권유로 전문음악가의 길을 택하게 됐다. 열린 성품의 그녀는 거리 음악회를 열었고, 유투브에 자신의 연주를 올리곤 했다. 미국 데뷔 때 언론들은 “러시아의 금발 미녀가 한 명 또 왔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그녀의 연주를 목격한 뒤 실력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유투브에 올린 쇼팽의 에튀드는 조회수 6,000만을 기록했고, 그녀는 ‘유투브의 여왕’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리시차는 ‘피아노의 검투사’, ‘건반의 마녀’란 별명이 말해주듯 놀라운 테크닉을 자랑한다. 2013년 한국을 찾았을 때 3시간이 넘는 연주로 젊은 팬들을 열광시켰고 새벽 1시까지 팬들의 사인 요청에 일일이 답한 바 있다. 리시차는 듣는 이와 마음으로 소통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2008년 서울시향과 협연한 뒤 앵콜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한 그녀는 다시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서, 놀랍게도 가장 쉽고 단순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다. 뜻밖의 선택에 청중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나, 곧 음악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현란한 기교에 탐닉하는 게 아니라 자유분방한 젊음을 바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생생한 예술적 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 (2008년 예술의 전당) https://youtu.be/yAsDLGjMhFI
리시차의 연주는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한 카리스마보다는 쾌활하고 소탈한 품성을 느끼게 한다. 실제 성격도 유쾌하고 꾸밈이 없다고 한다. 한국의 젊은 청중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환호는 우상에 대한 열광이라기보다,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마음의 응원처럼 들린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소탈한 모습을 보면 다른 세계에 있는 스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동호회 친구 한 명이 앞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 내 친구 중에 저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있다니….
리시차는 하루에 10~14 시간 연습하는 노력파이기도 한데, 이번 한국 방문 중에는 식중독을 앓아서 죽과 효소차로 허기를 면하며 연주에 임했다고 한다.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데도 4시간에 걸친 어머어마한 연주에 몸과 마음을 쏟아 부은 그 열정과 책임감이 놀랍다. 그녀는 팬들의 사인 요청에 10시반까지 일일이 환한 미소로 응했다. 리시차는 역동적이고 열정 넘치는 한국의 음악팬들을 사랑한다고 했다.
리시차는 피아노로 인간 능력의 극한을 표현하며 소통하는 음악가다. 그녀는 레코드사의 상업주의에 휘둘려서 평준화의 길을 걷는 수많은 젊은 피아니스트와 달리 의연히 자기 개성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보기 드문 아티스트다. 그녀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환상곡 C단조를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무척 훌륭했다. 리스트를 잘 치는 사람이 모차르트도 잘 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않은 모차르트를 리시차의 연주로 들을 날도 머지않아 올 것이다.
죽고 난 뒤에야 고향 땅을 찾은 윤이상의 음악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통영 국제음악제를 다녀와서
통일에 대한 윤이상의 열망은 백범 김구를 닮았다. 그는 조국의 분단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드높은 문화의 힘으로 인류의 빛이 될 수 있었다.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윤이상은 28살의 피끓는 청년이었다. 그는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에서 자라났지만, 남쪽이나 북쪽이나 똑같이 그의 조국이었다. 남과 북, 어느 한쪽만 조국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를 현실정치에 눈뜨게 한 것은 박정희였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야수적인 고문과 조작, 이에 항거하는 자살시도 끝에 윤이상은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윤이상 <회수록> 중)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일삼고 이를 은폐하려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국민들을 속이는 이들이야말로, 백범 김구의 표현을 빌면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듯 통일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탄압하여 조국의 문화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그들이야말로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는 박테리아였다.
▲ 윤이상은 분단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고, 남이나 북이나 똑같은 고국의 반쪽이었다.
조국의 남쪽은 그를 학대하고 추방했다. 1982년,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가 윤이상 음악의 밤을 마련했다. 그의 음악이 남쪽에서 15년만에 부활하게 됐지만, 정작 작곡자는 입국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남에서 배척한 그를 북쪽이 불러서 융숭히 대접했다. 평양의 국립교향악단이 혼신의 열정을 다해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1984년에는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윤이상은 순박한 심성의 음악가였다. 자기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며 아낌없이 후원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과 친근함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그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는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윤이상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이었다. 이 작품은 통일된 조국에서 연주하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부득이 평양에서 초연됐다. 남쪽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뽑아낸 구절들을 ‘역사-현실(1)-현실(2)-미래’의 네 부분으로 윤이상이 직접 구성하고 음악을 붙였다. 조국은 신체의 중간이 묶여서 피가 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의 양심이 민족의 아픔을 말로 표현하고, 통일을 부르짖는 북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휴전선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동방에 나라 있어 거기 사람이 살고 있다 하라 / 때가 오면 어둠에 지친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가 머리를 감고 / 밝은 웃음과 노래로 새로운 하늘과 땅을 경배하리니 / 오오 그날이 오면 겨울이 가르쳐준 모든 언어 모든 진리로 영광을 빛내자 / 북을 쳐라 바다여 춤춰라 오 영광의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통일이여!” (정희성 시)
이 작품의 마지막 노랫말이다. 이게 요즘말로 ‘종북’인가? 1994년, 남쪽의 몇몇 뜻있는 분들이 윤이상 음악제를 추진했다. 77살 노인이 된 윤이상은 조건이 허락되면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해외에서 지낸 38년 동안 돌보지 못한 조상의 묘를 걱정했다.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자식의 도리고, 예술가로서 짓밟힌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늙은 윤이상은 가슴이 설렜다.
한국은 지긋지긋한 군부독재가 끝나고,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다시 찾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저열했다. 윤이상은 방한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는 편지를 대통령 앞으로 보내야 했다. 윤이상은 이를 받아들여, 대통령의 결단을 간청하는 절절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답장인지, 이홍구 당시 총리가 팩스를 보내왔다.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것,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윤이상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동베를린 간첩사건이라는 국가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39살까지 조국에서 살았고, 그 후 39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했다. 영혼이란 게 있다면, 윤이상의 혼은 지금도 한반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고국의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안녕히….”
지난 주말, 통영에서 윤이상 선생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었다. 윤이상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자필 악보, 작곡메모, 안경, 시계, 펜, 그리고 선생이 연주하시던 첼로와 바이올린을 보았다. 전시실에 흐르는 <낙양>의 아득한 선율과 황홀한 색채에 젖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가 되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음악제와 기념관에서 윤이상이란 이름마저 지워야 직성이 풀리는 야만의 거리는 황폐했지만, 음악은 봄햇살과 함께 긴 여운을 남겼다. 4월 5일, 음악제 마지막 날엔 윤이상의 <예악>을 들으러 갈 것이다.
▲ 올해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원래 윤이상 국제음악제로 출범하려 했지만 이념적 이유로 ‘윤이상’이란 이름을 삭제했다고 한다.
세월호 1년, 아직 추도음악을 연주할 때가 아니다
<나의 작은 조국> (트럼펫 티네 팅 헬세트, 2012 노르웨이 우토야섬 총기사건 추도 음악회 중)
https://youtu.be/gcFTgej55A0
노르웨이의 젊은 트럼펫 연주자 헬세트가 오슬로 시청 옥상에서 <나의 작은 조국>을 유장하게 연주한다. 광장에 모인 5만명의 시민들은 숙연한 감회에 젖는다. 2012년 7월 22일 노르웨이 TV로 생중계된 이 연주회는 바로 1년 전 일어난 ‘우토야섬 총기학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자리였다.
2011년 7월 22일, 한 극우 청년이 우토야섬에서 열린 노르웨이 노동당 청소년 캠프 참가자 69명을 총기로 살해했다. 노르웨이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분히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언론, 정당, 시민단체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지지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은 생존 청소년과 유족들의 애도 작업을 돕고, 지속적인 심리 상담을 진행하고, 가해자에 대한 소송에 증인으로 참가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어요. 숨지 말고 함께 괴로움을 나눠요!” 피해자와 유족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여 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지난 주말, 세월호 유족들과 광화문까지 걸었다. 유족 한분의 말씀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1년이 지나니 이제야 아이가 없다는 걸 실감하겠어요.” 1년 내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른 채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참사 1주기가 다가오니 비로소 상처가 아프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년이 돼 가는데도 유족들이 삭발을 한 채 영정을 들고 행진을 벌여야 하는 나라. 295명이 억울하게 죽었고 9명은 아직도 차가운 바다속에 있는데,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으로 오히려 진상조사를 방해하는 나라.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걸린 ‘국민행복시대’라는 공허한 대형 플래카드는 반쯤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실종자 9명은 여전히 차가운 바다 속에 있다. 선체 인양은 시신을 수습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박근혜는 유족들의 피눈물을 방치하다가 여론이 나빠지니까 인양을 검토한단다. 해수부 장관이란 자는 여론 조사로 인양 여부를 결정하겠단다. 이미 70%의 여론이 인양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아니, 이 문제는 여론을 물어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 당연한 국가의 의무다. 선체 인양에 소요되는 예산은 최대 2,000억원이란다. 4대강 바닥을 파고 콘크리트 쳐바르는 데 20조원 썼는데, 그 100분의 1에 불과하다.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이고 이 일을 위해서 내는 세금이라면 아깝지 않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훑어보니 기가 막힌다. 정부가 이미 조사한 내용만 검토할 수 있게 했고, 조사 주체의 핵심에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대거 배치하도록 했다. 정부 요원더러 정부 조사 결과만 검토하라는 것이니, 진실 규명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 정부는 하는 짓이 왜 다 이 모양인가. 진정성 없이 표를 의식해서 쇼를 하려니까 이런 뻘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유족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배웠는데,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 투사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들을 1년 내내 거리에서 울부짖게 만드는 나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게 국가의 기본 의무라는 것도 모르는 자들이 대통령, 장관이랍시고 앉아있는 한심한 나라…. 유족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성의 있게 지켜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온 국민이 관심을 가져 달라며, 힘을 모아 달라며, 오열하고 있다.
이건,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집단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셈이다. 당국의 부패와 무능 때문에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모두 죽어가는 과정을 우리 모두 TV를 통해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사태 수습과정에서 정부의 무책임을 목격하며 1년 내내 모두 절망해야 했다. 9명의 실종자들은 차가운 바닷속 뻘에 파묻혀 이미 물고기와 갑각류의 먹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엉터리 시행령을 폐기하고, 세월호를 인양하고, 9명의 실종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
집회장에서 만난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상상한다고 했다. 다시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요즘, 바람에 날리는 벚꽃에도 까르르 웃음 터뜨렸을 ‘단원 고딩’들과 함께 수학여행 떠나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이 못다 한 수학여행을 마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배를 타고 떠나는 ‘제주도 치유여행’을 제안했다. 치유의 힘으로 성장한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전 사회적 지지 속에 못다 한 수학여행을 하는 날, 비로소 세월호 참사는 치유의 첫 장을 넘기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을 때 치유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이 여행에 어떤 음악이 함께 하면 좋을까?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추도음악 C단조 K.477 (네빌 메리너 지휘, 성마틴필즈 아카데미)
https://youtu.be/okFlNAl7HQQ
1년 전, 캄캄한 절망이 사방을 옥죄어 오는 배 안에서 어떤 학생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아이들은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모차르트의 이 음악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이 외친 가장 맑은 사랑의 목소리가 아닐까. 1785년,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했다. 검은색의 C단조, 깊은 추도의 묵념으로 시작한다. 순수한 영혼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 꽃상여가 천천히 움직일 때 아름다운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한없이 맑고 파란 하늘, 티없는 영혼이 슬프게 미소 짓는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일 때 음악도 조용히 사라져 간다.
9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 추도음악을 연주할 때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1년, 유가족들은 이제야 상처가 아프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온통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이지만, 이 음악은 인간은 결국 선한 존재이니 마지막 희망을 놓지 말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다.
어머니의 눈물,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터’
할 말이 별로 없다. 세월호 1년이 다가오면서 유가족의 상처가 깊어 가는데, 이 정부의 뻔뻔함을 목도하고 할 말을 잊는다. 오열하는 유가족들에게 캡사이신 최루액을 뿌린 이 정부는, 세월호 인양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저울질하며 눈치를 보고 있다. 16일 추모집회는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겠다며, ‘국민안전다짐대회’라는 맞불 관변집회를 열겠단다. 박근혜는 그날 외국 순방을 떠난다니, 국민의 아픈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뻔뻔함이다.
성완종 사건을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썩은 정부다. 게다가 돈을 받은 당사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거짓말을 한다. 야당을 끌어들여 적당히 물타기 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속셈이 벌써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 철면피일 수 있는가. 이 모든 거짓말의 몸통은 박근혜다. 언론은 “성역없이 수사하라”는 그의 말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그가 성완종 메모를 ‘해괴한 소문’으로 규정했다는 점은 아무도 전하지 않았다. 면피용 수사를 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정해 준 거나 다름없는데,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주먹질을 해 댄 그들은 성완종 메모로 드러난 썩어빠진 거짓말쟁이들과 결국 같은 사람들 아닌가. 돈 받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자들에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호소하는 건 애초부터 지나친 꿈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절이 되풀이되면 우울증이 생긴다. 세월호 유가족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우울증에 걸릴 판이다. 블루 오션…. 우울의 바다.
슬픔에 할 말을 잊은 요즘, 봄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지난 한주 내내 이 산천은 꽃대궐을 이뤘다. 자연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인간의 슬픔은 왜 끝이 없는지…. 시를 노래하는 가수 박경하의 음반을 꺼내 듣는다. 백창우가 시를 쓰고 곡을 붙인 <꽃뫼>.
아가, 이제 눈을 뜨렴 햇살 고운 아침이구나
오랜만에 하늘 푸른 아침이구나
아가, 고운 옷 갈아입고 집을 나서자꾸나
열두 구비 고개 넘어 꽃뫼 찾아 가자꾸나
어젯밤 꿈엔 함박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리더구나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는지
아가, 이제 잠을 깨렴 활짝 개인 아침이구나
오랜만에 햇볕 따스한 아침이구나
박경하 <꽃뫼> (백창우 시/곡) https://youtu.be/qtF-p9aNTfg
박경하의 따스한 노래가 오히려 가슴 시리다. 어제 오늘은 비가 내려서 벚꽃이 지기 시작한다. 부질없는 말을 뱉기 싫은 요즘, 음악이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기에 이 우울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터>를 듣는다. 스타바트 마터(Stabat Mater)는 라틴말로 ‘어머니는 서 계시고’란 뜻이다. 예수는 가시 면류관을 쓴 채 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렸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탄식하는 어머니의 마음, 날카로운 칼이 뚫고 지나갔네.
존귀한 어머니 애통해 하실 때 함께 울지 않을 사람 누구 있으리?
이토록 깊은 어머니의 고통에 함께 통곡하지 않을 사람 누구 있으리?
사랑의 원천이신 성모여, 내 영혼을 어루만져 당신과 함께 슬퍼하게 하소서.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터> https://youtu.be/KA4KIZ1YO_Q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랑을 설파하는 아들이 어머니 마리아는 늘 염려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아들은 기득권 세력과 충돌했고, 민중에게 버림받아 십자가로 끌려 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보며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극한의 슬픔, 현실에서 체념할 수밖에 없지만 영원 속에 새겨져 빛나는 모성, 바로 성모 마리아다.
‘내 육신이 죽을 때’(Quando Corpus Morietur)에 이어서, 끝 부분의 ‘아멘’이 어머니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준다. 13세기 이탈리아 시인 야코포네 다 토디가 가사를 썼고 여러 작곡가가 이 시에 음악을 붙였는데, 특히 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1710 ~1736)의 작품이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삽입된 곡 중 모차르트 작품이 아닌 것은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터> 단 한 곡으로, 살리에리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에 나온다. 35살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보다 더 꽃다운 나이에 죽은 천재에 대한 오마주(homage)였을까? 페르골레지의 이 작품은 18세기 중반에 장례 미사곡으로 널리 연주됐다고 한다.
페르골레지는 26살 젊은 나이에 죽은 천재 작곡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를 절었다. 10대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린 그는 바이올린 즉흥연주 솜씨가 사람들을 경악시킬 정도였다. 그는 <사랑에 빠진 수도승>, <콧대 높은 죄수>, <마님이 된 하녀> 등의 오페라가 성공하여 ‘오페라 부파’의 선구자로 역사에 기록됐고, 바이올린 소나타와 협주곡 등 기악곡,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등 종교음악도 많이 남겼다.
한때 귀부인 마리아 스파넬리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는, 폐결핵이 점점 악화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나폴리 근교 포추올리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26살 젊은 나이, 적막한 수도원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써 내려간 이 곡이 바로 그의 마지막 작품 <스타바트 마터>다. 이 곡을 쓸 때 페르골레지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것만 같다.
1년 전,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엄마에게 “사랑해” 마지막 문자를 보낸 아이들의 맑은 넋을 생각하니 또 할 말을 잊는다.
화해와 용서를 노래한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
그래도 일상은 계속된다. 비 내리는 4월 19일, 한 음악친구의 초대로 모차르트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를 봤다. 국립오페라단의 공연, 출연 성악가들이나 오케스트라의 기량은 모차르트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기엔 미흡했지만 그런대로 열과 성을 다한 무대였다.
이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이상(理想)이었던 화해와 용서를 노래한다. 무대는 18세기 터키의 하렘(후궁), 줄거리는 이렇다. 영국 귀족의 딸 콘스탄체가 터키 후궁에 노예로 잡혀와 있다. 권력자 파샤 셀림은 콘스탄체를 잘 대접하며 열렬히 구애한다. 하지만 콘스탄체에게는 사랑을 맹세한 연인 벨몬테가 있다. 그녀는 파샤 셀림에게 존경을 느끼지만 그의 구애를 단호히 거절한다. 이때 벨몬테가 콘스탄체를 구하기 위해 후궁으로 잠입한다. 일행은 계획대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경비대장 오스민에게 체포된다.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벨몬테와 콘스탄체는 함께 죽게 되어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두 사람의 극진한 사랑에 감동한 파샤 셀림은 두 사람을 풀어주며 축복한다.
화해와 용서…. 가슴 저미도록 우리가 갈망하는 주제 아닌가. 돈과 탐욕에 사로잡혀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할 줄 모르는 요즘 세상, 모차르트의 선한 메시지는 구원의 소리처럼 다가온다. 모차르트 음악은 언제나 선하지만, 이 오페라는 특히 선한 음향으로 가득 차 있다. 서곡이 울려 퍼질 때부터 듣는 이는 행복한 결말을 예감한다.
<후궁에서 구출하기>(1782)는 모차르트가 빈에 정착하여 처음 발표한 오페라다.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슬픔도, 아버지와 소원해진 빈 자리도,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외면당한 아픔도 모두 뒤로 하고 모차르트는 자유음악가의 길을 새롭게 출발하고 있었다. 빈 초기 시절은 모차르트의 35년 생애 중 가장 활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이었다. 이 무렵 작곡한 음악들은 자유음악가로 첫발을 내딛는 모차르트의 빛나는 창조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터키 하렘이 무대인만큼 터키풍의 음악이 등장하는 게 흥미롭다. 터키 근위병인 예니세리의 군악을 표현하기 위해 드럼, 심벌, 트라이앵글을 도입했고, ‘짠짠짠짠짠~~’ 다섯 개의 음표로 된 터키풍의 리듬을 사용하여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막 파샤 셀림이 등장할 때 나오는 ‘예니세리의 합창’과 3막 모든 이가 화해하고 어우러지는 ‘터키풍의 피날레’는 이 오페라에서 가장 신나는 대목일 것이다.
<후궁탈출> 1막, ‘예니세리의 합창’과 3막 ‘터키풍의 피날레’ https://youtu.be/91GucyYA1RA
2막, 파샤 셀림은 자신의 구애를 거듭 거절하는 콘스탄체를 향해 “한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한다. 콘스탄체가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하자 파샤 셀림은 “죽이는 대신 살려둔 채 가장 고통스런 고문을 가하겠다”고 대답한다. 이 대목에서 콘스탄체가 부르는 아리아 <어떤 고문을 가할지라도>는 이 오페라의 중심에 놓인 초석과 같다. 오케스트라의 솔로 악기가 어우러질 때 콘스탄체의 순결하고 단호한 노래가 펼쳐진다. 브라부라 풍의 이 화려한 아리아는 영화 <아마데우스>에 잠깐 등장한 바 있다. 실제 초연 때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카발리에리가 노래하는 장면에 바로 이 아리아가 나온다.
<후궁탈출> 2막, 콘스탄체의 아리아 <어떤 고문을 가할지라도>
https://youtu.be/ruM8d4vcGec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
콘스탄체의 아리아에 파샤 셀림은 깊이 감동하지만, 그녀를 차지하고픈 욕구를 떨칠 수 없다. 3막, 탈출에 실패하여 잡혀 온 벨몬테와 콘스탄체는 함께 죽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파샤 셀림은 드디어 모든 걸 포기하고 두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선언한다. 힘있는 자가 한발 물러서자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벨몬테, 콘스탄체, 페드릴로, 블론데가 파샤 셀림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피날레 부분을 들어보자. 경비대장 오스민은 끝까지 증오와 분노로 펄펄 뛰지만 평화의 대단원을 거스를 수 없다. 터키풍의 합창이 힘차게 울려 퍼지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 3막 피날레 https://youtu.be/Tw84smtNE1Q
오페라에서 벨몬테는 터키의 적국 왕자로 설정되어 있다. 파샤 셀림은 원수의 자식을 용서했기 때문에 더욱 너그러워 보인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젭 2세는 1782년, 모차르트에게 독일말로 된 이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요청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의 적국이었던 터키의 군주를 예찬하는 내용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리버럴한 정치를 할 줄 알았다. 계몽군주 요젭 2세가 전쟁을 그만두지 못하여 1789년 터키와 싸우다가 사망한 건 아이러니다.
공연이 끝나고 예술의 전당을 나올 때 우리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음이 아파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유가족들의 피눈물 나는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졌다면 4월은 이토록 잔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5월이 돼도 이 땅의 위정자들이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김선우 시인이 칼럼에서 쓴 대로 “이쯤 되면 물이 요동쳐 배를 엎어버려야 하지 않겠나” 싶다. “엎어버려야 할 배와 건져 올려야 할 배 사이, 물방울 하나씩부터 꿈틀거려야 한다.” (한겨레 <김선우의 빨강>, 2015년 4월 19일)
* 이 오페라의 제목처럼 번역하기 까다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독일말로 <Entführung aus dem Serail>인데, Entführung이란 말을 도주, 유괴, 탈출 등 다양하게 번역해 왔다. 정확히 분석하면 Führung란 명사는 ‘데리고 간다’는 뜻이고, Ent란 접두사는 ‘안에서 밖으로’란 뉘앙스가 있으니 Entführung은 ‘구출’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클래식 기타는 어떨까요?
베토벤은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다. 6개의 현(E-A-D-G-B-E)으로 다양한 화음을 만들고, 높은 선율과 낮은 선율을 다 연주할 수 있다. 브리지 근처를 퉁기면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줄 중간 쪽을 퉁기면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하모닉스 등 특수주법으로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고 몸통을 두드려 타악기 효과도 낼 수 있으니 약간의 과장을 허용한다면 ‘작은 오케스트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기타는 소리가 작다. 그러나 멀리까지 들린다.” 이건 슈베르트의 말이다. 기타는 혼자서 연주할 수도 있고 노래를 반주할 수도 있으니 피아노에 버금가는 구실을 하는데,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으니 피아노보다 편리하다. ‘기타 하나, 은전 한잎’이란 노래도 있었으니 기타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벗 삼기 좋은 악기다. 배워서 익히기도 비교적 수월하니 기타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악기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 음악 전공의 꿈을 포기한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들이 딱해 보이셨는지, 아버지께서 “사내 놈들이 기타 뚱땅거리면서 노래하는 건 좋아 보이더라”며 기타 학원 다니는 걸 허락하셨다. <로망스>, <알함브라 궁전이 추억> 같은 곡을 칠 수 있게 됐지만, 줄리아니의 소나타를 연주할 실력은 안 된 상태에서 학원을 접었다. 입시가 다가왔고, 고개를 숙인 채 깔짝대며 줄을 뜯는 이 악기가 아무래도 기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알량한 실력이지만 기타 연주를 써먹을 기회도 있었다. 까마득한 옛이야기지만, 92년 MBC 파업 집회에서 권오형 PD와 함께 나가서 슈베르트의 <밤과 꿈>을 연주했는데, 강퍅한 파업 중에 울려 퍼진 기타의 고운 소리가 꽤나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내가 선율을 연주하고 권오형이 반주를 했는데, 반주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밤늦게 FM을 틀면 폼포니오와 자라테가 연주한 이 곡이 자주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보다 훨씬 기타를 잘 친 권오형은 영화 <디어 헌터>에 나온 스탠리 마이어의 <카바티나>도 곧잘 연주했다. 이 곡의 악보를 구할 수 없던 시절, 그는 비디오 카세트로 영화를 되풀이 틀며 악보를 받아 적어서 연주했다고 한다. 요즘은 악보 구하기가 쉬울 것이다. 팝송으로 편곡되어 널리 사랑받는, 무척 따뜻한 곡이다.
영화 <디어헌터> 중 <카바티나>(스탠리 마이어 작곡) https://youtu.be/c6gpa8nUa70
바흐 음악에 눈뜨게 해 준 것도 기타였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 선율의 정수’라고 하지만, 화음 없이 선율만 구부구불 흘러가기 때문에 단조롭게 들릴 수 있다. 반면, 세고비아가 기타로 편곡한 것은 음표 하나하나의 잔향이 어우러져 일정한 화음을 이루기 때문에 좀 더 달콤하게 들린다. 광고 음악과 핸드폰 신호음으로 쓰여서 귀에 익은 선율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프렐류드 (안드레 세고비아의 기타 편곡) https://youtu.be/vXbH62Eea5c
고등학교 시절, 이 곡 덕분에 바흐 음악이 얼마나 즐거운지 처음 깨닫게 되었으니 기타에게 감사, 세고비아에게 감사….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이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로 바흐에 입문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뛰어난 류트 연주자던 레오폴트 바이스(1687~1750)가 바흐와 친밀하게 교류했고, 그 결과 바흐가 4곡의 류트 모음곡을 쓰게 된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됐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귀재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기타 음악을 작곡했다. 기타 반주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는 <모래시계>에서 혜린의 테마로 등장, 널리 알려졌다. 파가니니의 그랜드 소나타 A장조는 기타를 클래식 음악의 당당한 독립 악기로 격상시킨 걸작이다. 크로아티아의 젊은 기타리스트 안나 비도비치(1980년 생)의 연주가 훌륭하다. 한땀한땀 단정하고 정확히 연주하지만, 기계 같은 느낌이 아니라 섬세한 감정과 표현력이 돋보인다.
파가니니 그랜드 소나타 A장조 중 1악장 ‘빠르고 단호하게’ (안나 비도비치 연주) https://youtu.be/NQoh45IpWeQ
일본의 무라지 가오리, 크로아티아의 안나 비도비치, 불가리아의 스토야노바 자매 등 젊은 기타리스트들의 활약이 흐뭇하다. 한국의 박규희도 빼놓을 수 없다.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음대와 빈 국립음대로 유학한 그녀는 스페인의 알함브라 콩쿠르에 입상하는 등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주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어보자. 주선율을 트레몰로로 연주하고 엄지 손가락으로 반주하는 곡으로, 클래식 기타의 명곡 중의 명곡이다. 트레몰로는 기타 연주에서 특별히 어려운 기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음 하나하나를 고르고 단정하게 연주하기는 쉽지 않다. 적절한 템포로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연주다.
타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박규희) https://youtu.be/DvpPc8ru2io
▲ 클래식 기타의 거장 세고비아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기타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한국 팬들을 만나는 순간이 제일 떨린다고 한다. 그녀의 연주를 통해 클래식에 입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박규희는 유럽에서 되풀이 콩쿠르에 도전하던 시절 음악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아무 기쁨도 없이 테크닉만 보여주는 콩쿠르,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상금을 타고 싶었는데 연주 자체가 목적이 아니어서 순수하지 못했고 스스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밥 지어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 13시간을 연습했고, 손을 다칠까봐 요리를 하지 않아서 변변히 먹지도 못한 채 무대에 오르곤 했다. 박규희는 1년 남짓 계속된 슬럼프를 이겨낸 뒤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리처드 용재 오닐이 비올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처럼, 클래식 기타로 한국의 음악팬들에게 다가서고 싶다고 말한다.
“음악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연주자가 행복하지 못하면, 연주도 행복하지 못하죠. 그걸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졌죠.”
잔인했던 4월이 간다. 클래식 음악이 마음을 위로한다면, 클래식 기타는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박규희가 연주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한 번 더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5월에 듣는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올해는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1865~1957) 탄생 150년이다. 김대진 지휘 수원시향이 이달부터 11월까지 매월 한 차례, 그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 시벨리우스는 베토벤과 말러처럼 교향곡을 통해 자기 인생관과 세계관을 세상에 알린 작곡가였다. 그가 남긴 7곡의 교향곡은 핀란드 정서에 뿌리를 두고 북유럽의 고요하고 서늘한 정서를 담아냈다.
20세기에 작품을 썼지만 19세기 낭만시대의 음악어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시대에 뒤쳐졌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작곡가들이 오묘한 칵테일을 권하던 시대에 그는 차갑고 맑은 물을 제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음악은 핀란드 민족정서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핀란드 사람들은 2011년부터 그의 생일인 12월 8일을 ‘핀란드 음악의 날’로 기념한다.
시벨리우스의 조국 핀란드는 ‘숲과 호수의 나라’로 불린다. 이 나라는 전국토의 70퍼센트가 원시림으로 덮여있고 크고 작은 호수가 6만개나 된다. 시벨리우스가 태어나서 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핀란드는 이웃 러시아의 압제에 허덕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를 러시아에 병합하려고 자치권을 폐지하고, 의회와 언론을 탄압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등 온갖 핍박을 가했다. 암울한 시대의 한복판, 시벨리우스는 상처 입은 조국에 대한 피끓는 사랑을 담아 <핀란디아>를 작곡했다.
1900년 7월 2일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헬싱키 필하모닉의 연주로 초연됐다. 당시 ‘수오미’(호수의 나라)란 제목으로 발표하여 핀란드 국민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는데, 러시아 정부는 내용이 너무 선동적이라며 연주 금지령을 내렸다. 마침내 1904년, 핀란드 국민이 일으킨 대파업에 러시아 정부는 충격을 받고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이 곡도 해금되어 제목도 <핀란디아>로 당당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됐다.
▲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
이 음악을 들으면 짙은 안개에 잠긴 호수와 깊은 숲의 정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곡은 결코 핀란드의 웅장한 자연을 묘사한 음악이 아니다. 여기에는 핀란드를 짓누르는 암울한 공기, 그리고 이를 단숨에 씻어내려는 민중의 뜨거운 열정이 있다.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https://youtu.be/0lCnguTtsSQ
금관의 묵직한 포효, 팀파니의 격정적인 박동으로 시작한다.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함성으로 폭발한다. 회오리바람처럼 솟아오르는 현악의 몸부림이 가세하고 당당한 민중의 행진이 시작된다. 금관의 거침없는 포효, 햇살처럼 찬란한 심벌의 환호는 현악의 거대한 소용돌이와 만나고, 이윽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합창과 목관이 차분히 생각에 잠겨 ‘핀란드 찬가’를 노래한다.
“오 핀란드여, 보아라, 날이 밝아온다.
밤의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고, 하늘도 기뻐 노래하네.
나 태어난 이 땅에 아침이 밝아오네.
핀란드여 높이 일어나라, 노예의 굴레를 벗은 그대,
압제에 굴하지 않은 그대, 오 핀란드, 나의 조국….”
핀란드 사람들은 지금도 수많은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되새긴다. 그러나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다. 이 노래를 새로운 국가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했으나 기존 국가와 혼동할 우려가 있어서 채택되지 않았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나라, 국민의 아픔을 함께 하는 대통령을 갖지 못한 황량한 나라. 유가족들은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라고 배웠는데,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 엉터리 시행령으로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선체 인양이 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돈으로 유가족들을 모독해 온 사람들…. 그들은 성완종 메모에 이름이 오른 자들과 필시 같은 사람들이다.
유가족들의 피눈물 나는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졌다면 4월은 이토록 잔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5월이 돼도 이 땅의 위정자들이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9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유가족들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간다. 강요된 애국심은 가짜일 뿐, 국민들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할 수 있는 조국은 없다.
보훈처는 4·3 기념식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대신 <비목>을 부르게 했다고 한다. 5월이 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올해도 5·18 기념식은 반쪽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했고, 이에 항의하여 유족들과 5월 단체들은 기념식 참석을 거부할 게 예상된다. 상이군경회 노인들, 사복경찰들, 관제합창단이 썰렁한 행사장을 메울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무엇인가? 80년 5월,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시민들이 결연히 저항한 사건 아닌가. 신군부의 잔인한 살육에도 굴하지 않고 시민들이 합심하여 해방 공동체를 이룬 빛나는 역사 아닌가.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는가. 단시일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국제사회가 부러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5·18 민주화운동 덕분 아닌가.
임을 위한 행진곡 - 어떤 결혼식 https://youtu.be/ERE2-FWh164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하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영령들을 욕보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는 짓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하자는 게 아니다. 5·18 기념식에서 자연스레 부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다.
어머니를 위한 클래식, 베토벤 <발트슈타인> 소나타 3악장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친구 강용주 얘기를 하려니 나도 뻘쭘하고, 강용주는 더 뻘쭘해 할 것 같다. 80년 5월, 대학 3학년이던 나는 매일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 강용주는 고등학교 3학년, 전남도청 앞에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집에 가라는 어른들의 명령에 넋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살아남았는데, 이 때문에 오랜 세월 죄책감에 시달렸다. 84년, 나는 땡전뉴스가 뭔지도 모른 채 MBC에 입사했다. 용주는 학살자가 대통령으로 있는 현실을 참을 수 없어서 시위에 앞장서다가 85년,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구미유학생 간첩으로 조작되고 말았다. 나는 98년 MBC의 <화제집중>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으로 양심수 어머니들의 아픔을 방송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뒤늦은 방송이었다. 그때 용주의 어머니 조순선 여사를 만났다.
용주는 14년째 꽃다운 나이를 감옥에서 보내고 있었다. 조순선 여사는 아들을 면회 가서 “전향만 하면 금새 나올 수 있다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간첩도 아니고 북한 추종자도 아닌 용주는 전향할 이유가 없었다.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어도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향공작에 협력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그런 말씀 하려면 오지 마세요.”
98년, 김대중 정부는 억울한 양심수들을 사면해 주면서 ‘준법서약’을 요구했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으로서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맹세하면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한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오히려 반성문을 요구하는 격이었으니, 용주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을 하루빨리 품에 안고 싶었지만 준법서약 하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슬쩍 물어 보았다. “준법서약이란 게 뭐냐?”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챈 아들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오래오래만 살아주세요.” 감옥 생활을 더 할테니 어머니도 힘내서 아들이 당당히 석방되는 날을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이듬해인 1999년 용주는 드디어 석방됐고, 늦깍이 의대생으로 공부를 계속하게 됐다. 당시 용주의 모습을 김환균 PD(언론노조 위원장)이 취재해서 방송한 적이 있다. 김 PD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병원 문 두드리는 사람 있으면 꼭 열어주어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 아무리 돈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다면 꼭 치료해 주어라.” 용주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면목동에서 가정의학 전문의로 일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공간인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 조순선 여사는 올해 90살 되셨는데, 옥중의 아들이 건넨 덕담(?) 때문인지 지금도 건강하시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참 다른 길을 걸었다. 50중반에 접어든 지금, 늦깍이 친구가 된 용주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잘 해 준다. 내가 MBC에서 해고된 뒤 용주는 언제나 곁에서 위로해 주었다.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차디찬 감옥에 있는 동안 아들 대신 잠시 어머니 곁에 있어 드렸기 때문일까.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신 나로서는 용주 어머니 곁에 있는 게 그냥 푸근했을 뿐인데….
지난주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5·18 희생자 어머니들을 만났다. 김점례 어머니, 김길자 어머니, 임금단 어머니…. 5월이 오면 자식 생각에 상처가 덧난다고 한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기념일 증후군’을 앓는 것이다.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클래식 음악으로 위로해 드린다는 게 가당찮게 느껴졌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세상에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그 또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도 어머니가 있었다. 따라서, 어느 작곡가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음악이 반드시 있다. 그래, ‘어머니를 위한 클래식’이니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만든 음악을 들려드리자!
가장 힘들 때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은 어머니의 추억이다. 쇼팽, 드보르작, 페르골레지가 그러했고, 베토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 하필 가장 뛰어난 음악가에게 청각 상실의 비극이 찾아왔을까. 그는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삶을 긍정했다.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상처입은 치유자’ 베토벤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다. 테너 가수였던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었다.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려고 혹독한 연습을 강요했다. 밤늦게 취해서 들어와 어린 베토벤을 닦달했다. 베토벤은 10대부터 가장 노릇을 하며 두 동생을 키워야 했다. 베토벤은 22살 때인 1792년 빈에 데뷔했는데, 57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번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번번히 버림받고 외로웠던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악보 표지에는 ‘대소나타’라고 써 있었다. 빈에 처음 도착한 22살 베토벤에게 “하이든을 통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우라”고 말해 준 후원자가 발트슈타인 백작이었는데, 바로 그에게 헌정했다. <에로이카> 교향곡이 교향곡의 역사에 혁명을 일으킨 대작이었다면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소나타의 역사에서 커다란 도약을 이룬 곡이다.
이 소나타의 3악장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분산화음으로 펼쳐지는 반주는 고향 마을 앞에 흐르던 라인강의 반짝이는 물살이다. 이 물살은 잔잔히 빛나다가 거세게 물결치기도 한다. 추억에 잠겨 노래하는 선율은 어릴 적 들은 라인 강변의 민요다.
베토벤 발트슈타인 소나타 3악장 https://youtu.be/J3l18HTo5rY
(피아노 다니엘 바렌보임, 링크 15:46부터)
클래식을 거의 처음 듣는 어머니들이지만 이 소나타에 아주 깊이 공감해 주셨다. 어머니들의 열렬한 박수에 연주자 바렌보임 대신 내가 답례를 했다. 어머니들의 손을 잡으며 작별인사를 할 때 울컥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자유 만만세”, <돈조반니>의 혁명적 코드
고전(古典)이란 게 뭘까? 사전을 보니 “과거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이라 했다. “어떤 분야의 초창기에 나름 완성도를 이룩해 후대에 전범(典範)으로 평가 받는 창작물”이라고도 했다. <단테 신곡 강의>를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고전을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영혼의 근력을 키워주는 작품”이라고 정의했다.
‘문사철’(文史哲) 뿐 아니라 음악에도 고전이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발레의 고전이고 <환희의 송가>는 교향곡의 고전이다. 수많은 오페라 중 <돈조반니>가 먼저 떠오른다. 모차르트가 프랑스 혁명 2년 전인 1787년 작곡한 이 오페라는 음악의 대향연일 뿐 아니라 다양한 인물군상이 펼치는 인간성의 대파노라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정독하려면 하루가 걸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를 읽으려면 일주일, <일리아드>나 <신곡>을 읽으려면 한 달을 잡아야 한다. 이에 비해 오페라 <돈조반니>를 감상하는 건 불과 3시간이면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요즘, 웃음과 슬픔과 분노와 성찰이 있는 이 오페라를 감상해 보면 어떨까.
거장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동영상이다. 청중없이 녹화했기 때문에 라이브 무대의 호흡과 생동감을 느낄 수 없지만, 체자레 시에피, 안톤 데르모타, 리자 델라 카사, 발터 베리 등 20세기 최고의 성악가들이 총출동한 불후의 명연주다.
<돈조반니> 전곡 (영어 자막) https://youtu.be/XPYjqz7nToY
이 오페라는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음악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고, 대사 있는 연극으로 텍스트를 살펴보자.
<돈조반니>에는 세 개의 코드(code)가 있다. 첫째 코드는 선과 악의 대립이다. 희대의 바람동이 돈조반니는 악당이다. 그는 돈나 안나의 침실에 잠입하고, 소동에 뛰어나온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을 결투 끝에 살해한다. 자기를 쫓아온 돈나 엘비라를 속여서 위기를 모면한 그는 시골 결혼식장의 새신부 체를리나를 유혹한다. 피해자들은 보통사람들이다. 돈나 안나와 약혼자 돈오타비오, 체를리나와 신랑 마제토는 돈나 엘비라와 함께 돈조반니를 추적한다. 악당이 결국 심판받고 선남선녀들이 일상과 평화를 되찾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이 시각에서 보면 이 오페라는 희극(opera buffa)이다.
돈 조반니가 유혹한 여성은 하인 레포렐로가 ‘카탈로그의 노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640명, 독일에 231명, 프랑스에 100명, 터키에 91명, 그리고 스페인에 무려 1,003명”이다. 그는 “농촌 처녀, 도시 처녀, 하녀, 백작부인, 남작부인, 후작부인, 공주님 등 모든 계층, 모든 용모, 모든 연령의 여성들”을 유혹한다. 이 황당한 유혹의 기록이 웃음의 원천이 된다. 오페라 내내 돈조반니는 새로운 유혹에 실패하며 좌충우돌하는데, 이 과정을 고소해 하며 맘껏 웃어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 코드는 돈조반니를 일종의 영웅으로 보는 시각이다. 돈 조반니는 부도덕하다. 윤리적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유혹자가 도덕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자유와 생명력을 예찬하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1787년 프라하 초연 당시 젊은 처녀 체를리나가 등장하면 남성들이 휘파람으로 환호했고 돈조반니가 등장하면 여성들이 괴성을 질렀다니, 리버럴한 당시 청중들에게는 돈조반니를 일종의 영웅으로 보는 시각이 아주 설득력이 없진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해석의 대표자는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다.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한 챕터를 할애해 이 오페라를 예찬했다.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는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괴테의 <파우스트>를 능가하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돈조반니와 만난 여성들은 단순히 피해 여성이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사랑과 실존을 직면했다. 주인공 돈조반니는 단순한 바람동이가 아니라 ‘정열과 감성의 천재’며, 선악을 뛰어넘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돈조반니>는 일종의 비극이 된다. 그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2막 ‘기사장의 심판’ 장면에서 이 오페라는 사실상 끝나는 셈이며, 선남선녀들의 마지막 합창은 사족에 불과하다.
▲ <돈조반니> 1막 피날레에서 모차르트가 “자유 만만세”를 외친 것은 프랑스 혁명 2년전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오페라 해설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혁명의 코드다. 1막 끝부분, 돈조반니는 선남선녀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벌인다. 복수를 위해 그를 추적하던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연회장에 도착하자 돈조반니는 “자유 만만세”(Viva la liberta)를 선창한다. 맘껏 즐기라며 손님들을 환영하는 셈인데, 돈조반니 입장에서는 자기의 방종을 예찬하는 꼴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유 만만세”를 합창할 때 이것은 자연스레 혁명의 구호가 된다. (링크 1:22:05부터)
이 오페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혁명의 코드는 특히 하인 레포렐로의 대사에서 감지할 수 있다. 레포렐로는 등장인물 중 청중들과 가장 가까이 교감하는 캐릭터다. 그는 가장 흔해빠진 인간상으로, 먹고살기 위해 돈조반니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돈조반니가 자기 마누라를 건드렸다는 걸 알고도 항의하지 못하는 속물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럭저럭 현실과 타협하고 사는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불평 섞인 대사들은 봉건 귀족들의 억압에 신음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킨다. 1막 첫 장면부터 그는 “주인이 즐기는 동안 보초나 서고 있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2막 첫 장면에서 “더 이상 못해 먹겠다”며 떠나겠다고 주인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의 속물적인 행태에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의 평범한 행태에 공감하기 때문에 “자유 만만세”의 외침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믿음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곧 아침이 밝아오리니’
우울한 시국 덕분인지, 올봄엔 김중배 선생님을 뵐 기회가 많았다. 선생께서는 “어린 아이가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느냐” 말씀하시며 웃음지어 보이신다. ‘재방 금지’ 서약을 깨고, 만날 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신다. 우리 뒤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 잇몸에 고운 이가 자라나는 한 우리 어른들은 절망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래,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이라도 쓸모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윤민석 작사, 작곡) https://youtu.be/pt8uiRFbtiU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말해준다. 삶이 아무리 잔인해도 포기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어찌 보면 종교적 신념 같은 얘기지만,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믿지 않으면 살아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작곡했는데, 2년 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루이 16세가 생존하여 일종의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던 때임을 기억해야 한다. 혁명과 반혁명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그 무렵, 절대왕정의 어둠이 가고 자유 · 평등 · 우애의 빛이 활짝 열렸음을 선언한 작품인 것이다.
주인공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는 10대 소년, 소녀다. 두 사람은 침묵의 시련, 이별의 시련, 불과 물의 시련을 겪은 뒤 빛의 사원에 들어서게 된다. 이 모험의 과정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영원히 헤어질지도 모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롭고 아름답다. 두 어린 주인공은 굳은 신념과 결단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면서 내면의 성장을 겪게 되는데, 이 시련의 길에 음악의 힘이 함께 하여 두 사람을 지켜준다.
▲ <마술피리>에서 절망에 빠진 파미나 공주는 세 소년의 위로 덕분에 삶의 기쁨을 되찾는다 | ||
<마술피리> 2막 후반부, 파미나가 절망에 빠지는 대목이 나온다. 그녀는 어머니 밤의 여왕에게 버림받았다. 침묵의 시련을 지나고 있는 타미노 왕자가 자기에게 말을 하지 않자 그가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이때 지혜의 정령인 세 소년이 그녀를 위로하여 살려낸다. 피날레 첫 곡인 <곧 아침이 밝아오리니>, 세 소년과 파미나가 함께 부르는 노래다.
<마술피리> 중 파미나와 세 소년의 노래 ‘곧 아침이 밝아오리니’
https://youtu.be/u9wI7on0eUc (링크 23:24부터, 소프라노 루치아 폽)
(세 소년) 곧 아침이 밝아 오리라. 태양이 떠올라 황금빛 길을 비추면, 미신은 곧 사라지고 지혜로운 자가 승리하리라. 달콤한 평화여, 우리 가슴 속에 돌아와 다오.
(세 소년, 파미나를 발견하고) 저기 봐, 파미나가 절망으로 고통 받고 있네. 무시당한 사랑의 아픔이 그녀를 찌르고 있네. 불쌍한 소녀를 위로해 주자. 그녀의 운명을 외면할 수 없어.
(파미나, 칼을 들고) 그대가 나의 신랑이 되겠군요, 그대의 도움으로 내 비탄을 끝내리라. (세 소년) 이 무슨 끔찍한 말인가! 이 불쌍한 소녀는 거의 미쳤구나, 광기가 그녀 마음을 뒤덮고 있네.
(세 소년, 파미나에게 다가서며) 어여쁜 소녀여, 우리를 봐요.
(파미나) 저는 죽을 거에요, 제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 분이 진정한 사랑을 이렇게 저버리다니! 어머니가 주신 칼이에요. 사랑의 고통으로 시들어 가느니 이 날카로운 칼로 죽는 게 낫지. 어머니, 저는 당신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당신의 저주가 저를 따라다녀요.
(세 소년) 소녀여,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파미나) 아, 내 슬픔의 잔은 가득 찼네. 무심한 왕자님, 안녕! 파미나는 당신 때문에 죽습니다!
가엾은 소녀 파미나가 절망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세 소년이 곁에 있어 줬기 때문에 그녀는 살 수 있었다. 타미노가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녀가 밝게 미소지을 때 관객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이 노래 후반부, 세 소년이 파미나를 위로할 때 “파미레도시~” 다섯 개의 하강하는 음표가 나온다. 아픈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손동작과 음악의 진행이 일치한다.
파미나는 왜 절망했을까? 어머니 밤의 여왕에게 버림받았다. 밤의 여왕은 어둠의 상징이다. 프랑스 혁명기, 그녀는 프리메이슨을 탄압한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묘사한 걸로 해석됐다. 그녀와 대비되는 계몽의 상징 자라스트로는 빛의 사제다. 밤의 여왕은 빛을 관장하는 일곱 해무리 장식을 자라스트로에게 빼앗겼다. 자라스트로는 딸 파미나를 자기가 교육해야 한다며 어머니에게서 강제로 데려갔다. 밤의 여왕은 악역이지만, 입장을 바꿔서 보면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아무튼,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에게 날이 시퍼런 칼을 주며 펄펄 뛴다. “이 칼로 자라스트로를 죽여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들어라, 복수의 신이여, 이 어미의 분노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 ‘지옥의 복수는 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고’
https://youtu.be/bygmjUaafH4 (링크 15:32부터, 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도이테콤)
빛의 사제 자라스트로를 이미 존경하고 있는 파미나는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명령을 실행할 수 없다. 어머니는 딸을 버린다. 타미노의 피리 소리를 듣고 달려온 그녀는 타미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한다. 슬픔에 빠진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 ‘아, 나는 느끼겠네’.
<마술피리> 중 파미나의 아리아 ‘아, 나는 느끼겠네’
https://youtu.be/u9wI7on0eUc (링크 00:10부터, 소프라노 루치아 폽)
“아, 나는 느끼겠네, 모든 게 끝났음을. 사랑의 기쁨은 영원히 갔네. 내 가슴을 가득 채운 축복의 순간들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타미노, 제 눈물을 보세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흐르는 이 눈물.”
“낙관의 단서는 있다” - <마술피리>의 메시지
사방이 꽉 막힌 어둠이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엽기적인 뉴스가 이어진다. 국정원이 법관 후보자를 면접하고, 노인회가 노년 연령을 70살로 올리자고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 권력자들이 늘 얘기하는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이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대법원은 국가폭력의 손해배상을 백지화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은 것도 모자라, “70년대 동아일보가 박정희 정권의 압력을 받아 기자들을 해고했다”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마저 뒤집어 버렸다. 언론학살의 배후를 밝혀낼 책임이 피해자들에게 있다는 말인가.
“법이라는 칼날에 민주정치가 죽어가고 있다.” (강기석 <법이 죽이는 정치>.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 www.kopf.kr) 불공정한 경쟁을 얘기할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을 쓴다. 지금은 운동장이 기울어졌을 뿐 아니라, 국정원과 사법부라는 부정선수가 대놓고 뛰는 형국이다. 언론마저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우리가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불신과 냉소의 찬바람만 휑하니 부는 요즘이다.
이 어둠 속에서 ‘낙관의 단서’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해 주는 동화 같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자. 타미노 왕자는 억울하게 잡혀간 파미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그녀의 어머니 밤의 여왕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파미나 공주는 악당 자라스트로에게 납치됐다. 밤의 여왕은 타미노 왕자에게 파미나를 구해 오라고 명령하며, “그녀를 구해오면 네 짝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밤의 여왕 1막 아리아 ‘오, 떨지 마라, 내 아들이여’ https://youtu.be/5YK3JjXfLGc
(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도이테콤, 17:42~22:45)
타미노 왕자는 지혜의 정령인 세 소년의 안내로 자라스트로의 사원 앞에 도착한다. 입구에는 ‘지혜, 이성, 자연’이라 써 있다. 왕자가 들어가려 하자 멀리서 “물러서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당황한 왕자 앞에 사제 한명이 나타나, 자라스트로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순진한 왕자는 혼란에 빠진다. 밤의 여왕의 말이 맞는지, 사제의 말이 맞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미노 왕자는 묻는다. 멀리서 합창 소리가 대답한다.
http://youtu.be/S1T0tSWnfpc (16:25부터)
(타미노) 이 영원한 밤! 언제 밤이 끝날까? 언제 나는 밝은 빛을 보게 될까?
(합창) 곧! 곧, 젊은이여, 아니면 결코!
(타미노) 곧 본다고요? 아니면 결코 못 본다고요?
보이지 않는 당신들, 말씀해 주세요. 파미나는 살아 있나요?
(합창) 파미나는 아직 살아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유일한 ‘낙관의 단서’다. <마술피리>를 영화로 만든 감독 잉마르 베르히만은 이 대목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대목은 아마도 이 오페라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일 것이다. 파미나가 살아 있다는 말에 타미노 왕자가 감사의 마음으로 마술피리를 불자 맹수들이 즐거워 춤을 춘다. (18:15부터) “오 마술피리여, 네 소리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왕자는 노래를 이어간다. “오직 파미나만 나타나지 않네. 어디서 그녀를 찾아야 할까?” 그러자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난다. 파미나와 파파게노(그는 사원 안에 먼저 들어가 파미나와 함께 있다)가 멀리서 마술피리 소리를 듣고 왕자의 도착을 알게 된 것. 파미나와 파파게노는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원을 지키는 악당 모노스타토스에게 들켜서 붙잡힌다. 파파게노가 “밑져야 본전”이라며 마술 종을 울리는 순간, 악당들이 착한 사람으로 변해서 춤을 춘다.
“이 멋진 소리, 이 아름다운 소리, 라라라 라라라,
이런 소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네, 라라라 라라라~”
▲ 타미노가 피리를 불자 사나운 짐승들이 즐거워 춤을 춘다. 파미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타미노에게는 낙관의 단서가 된다
타미노 왕자는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건다. 파미나도 위기의 순간에 의연히 진실을 마주한다. 탈출 직전, 자라스트로의 도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파파게노는 겁에 질린다. “아이구, 이젠 죽었구나,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지?” 쩔쩔매는 파파게노에게 파미나 공주가 말한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면 되지요.” (24:25부터) 이해타산을 저울질하거나 구차한 변명을 앞세우지 않는 주인공의 의연한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마술피리>는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해 준다. 1막 앞부분, 새잡이 파파게노는 거짓말한 대가로 입에 자물통을 차게 된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음, 음, 음’ 답답하게 노래하여 웃음을 자아내는데, 거짓이 횡행하는 요즘 세상에서 이 코믹한 대목마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자라스트로의 사원에서 타미노 왕자는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침묵의 시련, 이별의 시련, 그리고 불과 물을 건너는 죽음의 시련…. 목숨을 건 시련을 통해서 주인공은 더욱 강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 간다.
타미노와 파미나, 불과 물의 시련 https://youtu.be/21EeV3hJYwA (6:48부터)
(타미노와 파미나) 우리는 음악의 힘으로 죽음의 어두운 밤을 기꺼이 헤쳐 가리!
(타미노와 파미나, 불을 통과한 뒤) 우리는 불 속을 지났고 용감하게 위험과 싸웠네.
그대의 소리는 홍수 속에서도 불 속에서처럼 우리를 지켜 주리.
(타미노와 파미나, 물을 통과한 뒤) 신들이여, 이 얼마나 기쁜 순간인가!
이시스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셨네.
이 어둠의 시대는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련 아닐까. 아무리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도 함께 아파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동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험난한 길에 <마술피리>가 있다면 우리는 빛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피가로의 결혼’과 모짜르트의 혁명
마리 앙투와네트와의 절묘한 인연… 프랑스 혁명과 단두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프랑스 혁명 전야, 굶주리는 민중이 속출하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국민의 아픔을 외면한 채 툭하면 유체이탈을 일삼는 21세기 한국의 아무개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녀를 미워하던 당시 사람들이 수군대며 지어낸 말이라는 것. 후세에 이와 비슷한 헛소문이 남겨질까 염려된다. “2015년 한국에 메르스 공포가 확산되자 그녀는 ‘젊은이여, 모두 중동으로 가라’고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은 오스트리아 왕가 출신의 그녀를 몹시 미워한 게 사실이다. 그녀는 현실을 모르는 발언을 일삼았고, 공문서에서 프랑스말 철자를 잘못 쓰기 일쑤였고, 루이 16세가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장본인으로 지목됐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국가 재원이 거덜났는데,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런 생활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 1년 전, 큰 흉작으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문제의 ‘케이크 발언’이 유포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호화스레 지낸 건 사실이겠지만, 그게 재정 파탄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성난 민중은 그녀를 구체제(Ancien Régime)의 상징으로 간주, 증오하고 저주했다. 그녀의 잘못도 작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음을 기억하자.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다. 두 사람은 1762년 쇤부른 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6살 음악 신동 모차르트는 황족들이 모여 있는 궁전의 홀 안으로 들어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달려가서 일으켜 세워줬다고 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발딱 일어서서 그녀를 향해 “결혼하자”고 외쳤고, 이 순간 홀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1살 때 프랑스 왕자 루이 오귀스트와 약혼했다. 7년 전쟁이 시작된 1756년,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흥 프로이센과 맞싸우기 위해 숙적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를 위해 왕가의 결혼을 약속한 것. 따라서 꼬마 모차르트의 갑작스런 청혼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셈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도 장벽이었지만, 그녀가 이미 6년 전 약혼한 사실을 꼬마 모차르트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녀는 만 14살 때인 1770년 결혼하여 베르사이유로 갔고, 1774년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18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그녀는 빈 궁정악장이던 글루크에게 음악을 배워서 하프와 플루트를 잘 연주했다. 하지만, 그리 지적(知的)인 왕비는 못 됐던 것 같다. 불어와 이태리말은 물론 독일어 철자도 틀리기 일쑤였다. “그녀와의 대화는 의례적이고 지루했다”는 증언이 있다.
모차르트와 그녀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악연’을 맺게 된다. 이 작품이 초연된 1786년은 혁명 전야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알마비바 백작은 하인 피가로의 약혼녀인 수잔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초야권’이라는 옛 관습을 부활시키려 한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백작은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면서 타인의 잘못은 용서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인간이다. 피가로는 백작의 이기적 행태를 풍자하며 반발하지만 역부족이다. 농민들은 백작을 야유하고 백작부인을 따뜻하게 위로하지만 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백작은 새신부 수잔나를 수풀로 불러내서 밀회를 즐기려 하는데, 백작 부인과 수잔나가 꾀를 내어 옷을 바꿔 입고 현장에 나간다. 꼼짝없이 잘못을 들킨 백작은 부인에게 무릎꿇고 사과한다. 부인이 용서하자 모두 기뻐하며 화해한다.
▲ 쳄발로 앞에 앉은 13살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음악을 잘 했지만 그리 지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피가로의 결혼> 3막, 민중들이 슬픔에 빠진 백작부인에게 꽃을 바치며 위로한다. 이 오페라는 따뜻한 유머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배 계급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보마르셰의 원작 희곡은 1781년에 이미 완성돼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당신들 대영주는 신분, 재산,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나 태어나는 고통을 빼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당신들이 한 게 무엇이요?” 프랑스의 지배층은 이러한 노골적인 표현이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보마르셰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친 뒤 1784년 가까스로 이 연극을 파리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격분한 귀족과 시민이 충돌해 사상자가 생길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이 직후인 1786년 5월, 빈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초연했다. 그해 시즌 개막 작품 후보로 살리에리의 <악수르>가 경합했는데, 계몽군주 요젭 2세는 놀랍게도 <피가로의 결혼>을 선택했다. 프랑스 왕비였던 누이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를 통해 이 작품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요젭 2세로서는 무척 대담한 결정이었다. 모차르트는 보마르셰의 원작에서 정치적인 부분을 완화하고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 계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앞서 인용한 원작의 대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4막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인민이 무장한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혁명을 계획한 사람도 없었고, 목적의식을 갖고 이끈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계몽의 빛(불어 Lumière, 영어 Enlightenment, 독어 Aufklärung)은 이미 각계각층에 스며들어 있었다. 갓 성장한 시민 계급의 지식인은 물론, 상당수 귀족과 관료, 심지어 절대군주인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젭 2세마저 계몽의 세례를 받았다.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미성년 상태란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이용할 능력이 없는 것”을 뜻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제도와 관습은 자연스레 비판의 표적이 됐고, 계몽의 빛 속에서 혁명의 기관차는 이미 거칠게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가 기나긴 인과의 고리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과 연결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피가로의 결혼>이 세상에 나오고 3년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올랐다. 이 오페라가 혁명을 앞당겼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을 쓴 보마르셰처럼 모차르트도 이 오페라를 통해 자기 나름의 혁명을 한 게 분명하다. 계몽의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돈조반니와 세 여자
돈 조반니가 정복한 여성은 믿지 못할(?) 통계에 따르면 모두 2065명이란다. 그는 농촌 처녀, 도시 처녀, 하녀, 백작부인, 남작부인, 후작부인, 공주님 등 모든 계층, 모든 용모, 모든 연령의 여성들을 유혹한다. 금발의 여자는 세련됐다고 칭찬하고, 은발 여자는 달콤하다고 칭찬하고, 갈색머리 여자는 마음이 진실되다고 칭찬한다. 늙은 여자를 유혹하는 건 목록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다. 그가 가장 열중하는 상대는 순진한 처녀다.
<돈조반니> 1막, 레포렐로 아리아 <카탈로그의 노래>
https://youtu.be/XPYjqz7nToY (링크 28:30부터, 바리톤 오토 에델만)
1. 체를리나
오페라에서 돈조반니가 가장 탐내며 집착하는 여자는 유쾌한 시골 새색시 체를리나다. 돈조반니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 도착하여 그녀를 유혹한다. 돈조반니와 그녀가 함께 부르는 이중창 ‘손잡고 저곳으로’(La ci darem la mano), 체를리나는 갑작스런 유혹에 저항하지만 결국 무너지기 일보직전까지 간다. (링크 42:48) 질투에 빠진 약혼자 마제토를 달래는 노래, ‘저를 때려주세요’(Batti, batti o bel Masetto)도 달콤하기 이를데 없다. (링크 1:05:51) 이 노래에는 첼로 솔로 반주가 나온다. 젊은 선남선녀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설레는 느낌이 첼로 소리에서 샘솟는다. 아름다운 약혼자가 이렇게 노래하는데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남자가 있겠는가.
2막에서 마제토는 돈조반니를 추적하다가 오히려 얻어터져서 온몸에 상처를 입는다. 전신이 아프지만, 평민이기 때문에 귀족에게 당하는 설움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때 체를리나가 마제토를 위로해 주는 노래 ‘당신은 아시게 될 거에요’(Vedrai carino)도 매우 달콤하고 에로틱하다. (링크 1:48:46) 끝부분의 다섯 음표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과 음악이 일치한다. 대표적인 치유의 음악인 셈이다.
1787년 10월 프라하 초연 때는 돈조반니가 등장하면 여성들이 비명을 질렀고 체를리나가 등장하면 남성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고 하니 지금보다 훨씬 더 리버럴한 분위기였나보다.
▲ <돈조반니>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서로 다른 음악적 성격을 파악해야 음악이 들린다
2. 돈나 안나
돈나 안나는 자존심이 몹시 강한 귀족 처녀다. 1막 맨 첫 부분, 어둠을 틈타 침실에 잠입한 돈조반니를 약혼자로 착각한 그녀는 어느 순간 - 정확히 어느 순간인지는 알 수 없다 -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그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한다.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돈조반니를 그녀가 붙들고 늘어지자 큰 소동이 일어나고,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이 쫓아나온다. 돈조반니는 내키지 않는 결투에 응하여 결국 기사장을 찔러죽인다.
그녀의 노래에는 가슴을 에는 듯한 슬픔과 영혼의 깊은 떨림이 있다. 그녀는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는 약혼자 돈오타비오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요구한다. ‘내 명예를 빼앗으려 한 자를’(Or sai chi l'onore)깊은 분노와 아픔으로 듣는 이의 숨을 앗아가는 아리아다. (링크 58:55부터) 돈 오타비오는 그녀를 위해 돈조반니를 정의의 법정에 세우겠다고 노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돈 오타비오를 ‘윤리적인 것’을 대표하는 범상한 인물이라고 깎아내렸지만 귀족 중심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고결한 인물이며, 그의 2막 아리아 ‘내가 다녀올 때까지’(Il mio tesoro intanto)는 이러한 그의 품성에 걸맞는 영웅적인 노래다. (링크 2:04:23부터)
낭만시대 독일 작가인 E.T.A. 호프만(1776~1822)는 1813년 발표한 단편 소설에서 “돈나 안나가 짧은 만남에서 돈조반니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그 때문에 돈오타비오에게 끝내 마음을 주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낯선 남자가 귓가에 속삭인 말, 잠깐의 손길 때문에 여자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 해석을 받아들일 경우, 돈나 안나의 슬픔은 더 극적인 떨림을 갖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악당을 사랑하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돈나 안나는 끝까지 돈오타비오의 접근을 거절하는데, ‘잔인하다’고 말하는 약혼자를 향해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Non mi dir, bell'idol mio)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로 가득하다. (링크 2:24:15)
1788년 빈에서 <돈조반니>를 초연할 때 돈나 안나를 맡은 사람은 모차르트가 한때 사랑했던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의 언니)였다. 그녀가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라고 노래했다면, 그 노래는 알로이지아가 모차르트를 향해 노래하도록 작곡한 게 아니었을까?
3. 돈나 엘비라
레포렐로가 <카탈로그의 노래>를 들려준 상대는 가장 고결한 여성인 돈나 엘비라였다. 돈조반니가 ‘여자 냄새’를 맡고 접근한 여성은 공교롭게도 이미 버린 엘비라였다. 레포렐로는 그녀를 향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려주려고” 이 노래를 부른다. 돈조반니의 명령이었다. 엘비라는 수녀원에 있다가 돈조반니에게 유혹당해 속세로 돌아온 여성이다. 결혼하자는 달콤한 약속을 믿었지만, 그녀가 마음을 주자마자 돈조반니는 도망쳤다. 그녀는 자기를 속이고 배반한 돈조반니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가 위험에 처하면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돈조반니의 영혼을 깊이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그녀를 향해 “이렇게 나쁜 놈이니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그녀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기도 하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다 바친 남자가 이따위 인간이라니!
오페라가 진행되면서 돈조반니는 그녀를 점점 더 심하게 모욕한다. 그러나 엘비라의 의지는 그녀의 신앙만큼이나 굳건하다. 2막 종반에 나오는 엘비라의 아리아 ‘고마움을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Mi tradi quell’alma ingrata)은 신 앞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마음을 들려준다. (링크 2:09:18) 오페라 전체에서 가장 숭고한 아리아다.
모든 피해자들은 돈조반니를 추적하여 ‘인간의 법정’에 세우고자 하지만 계속 실패한다. 돈나 엘비라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청중들은 돈조반니가 고결한 그녀를 또 한 번 모욕할 경우 ‘신의 법정’에서 천벌을 면할 수 없을 거라고 예감한다. 오페라의 결말에서 돈조반니는 결국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심판받고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진다.
‘건달할배’ 채현국과 베토벤 교향곡
“쓴 맛이 사는 맛”과 “고통을 넘어 환희로”
나이 먹을수록 완고하고 뻔뻔해지기 쉽다. 한잔 걸치면 옛날 무용담 늘어놓고, 억울한 사람들의 상처에 소금 뿌리고, 선거 때면 젊은이들 앞날을 방해하는 투표를 일삼는다. 채현국 선생은 껍데기로 사람 평가하는 걸 싫어하신다. ‘위대하다’는 말도 싫고, ‘풍운아’란 말도 거북하고, 그냥 ‘건달’로 불러 달라고 하신다. 탐욕과 집착 없이 그날그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건달’이 낫다는 것이다.
“쓴맛이 사는 맛”
효암학원 교정의 바위에 새겨진 이 말은, 채 선생이 학생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한 마디란다. “쓴 맛이 인생의 다는 아니지. 쓴 맛도 사는 맛 중 하나인데, 좀 괴롭고 아프고, 그 덕에 사람이 좀 깊어지잖아. 그게 진짜 사는 맛이라는 거야.” 인생은 희노애락으로 가득하니 유독 쓴 맛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단 맛, 고소한 맛, 떫은 맛 등 온갖 맛이 있을 거고, 쓴 맛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쓴맛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전하고 밋밋할까. 채 선생은 상처투성이 현대사에서 온갖 쓴 맛을 보았고, 용기 있게 이를 직면하여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기에 ‘어른다운 어른’이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닐까.
▲ ‘쓴 맛이 사는 맛’은 채현국 선생의 지론이다. “좀 괴롭고 아프고, 그 덕에 사람이 좀 깊어지잖아. 그게 진짜 사는 맛이라는 거야.” ⓒ 경남도민일보
“고뇌를 너머 환희로”라는 베토벤의 모토가 떠오른다. 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따뜻한 선의로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과 소년 가장의 힘든 나날을 보내며 이미 인생의 쓴 맛을 알고 있었다. 빈에 데뷔하여 음악계의 총아로 떠오른 뒤 찾아온 귓병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쓰디쓴 고통이었다. 하필 가장 뛰어난 음악 천재에게 청력 상실의 저주가 왔을까.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지만 혼자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6년간의 투병에도 귀가 호전될 기미가 없자 그는 1802년 10월 절망의 심연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다. 두 동생 칼과 요한에게 “잘 있거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마무리하려던 베토벤은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갖고 있는 예술적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동안은 설령 내 운명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죽고 싶지 않다. 내 재능이 충분히 꽃필 때까지 삶을 열망하고 싶다. 그러나 죽음이 일찍 찾아온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그러면 이 무한한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은가. 죽음이여, 언제든 오라. 나는 감연히 네 앞으로 가서 너를 맞으리라.”
인생의 쓴 맛을 통해 부쩍 성숙한 베토벤은 보통 사람들이 귀로 듣기 어려운 내면의 소리, 우주의 신비 속에 감춰져 울리는 섭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이후 작곡한 그의 교향곡들은 날이 갈수록 더 삶을 강하게 긍정하는 성숙의 기록이었다.
교향곡 5번의 1악장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뜻으로 알려진 네 음표로 시작한다. 이 음표는 교향곡의 전 악장에서 변형되어 나타난다. 마지막 악장은 승리와 긍정과 환희의 찬가로, 우리에게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한 대목을 읽어주는 것 같다.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대들과 똑같은 처지의 한 인간이 자연의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자기 역량을 다하여 마침내 예술가, 빛나는 인간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기억하고 위로를 얻으라.”
“고뇌를 너머 환희로”라는 모토는 후세 교향곡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두루 흔적을 남겼다. 모든 음악 형식은 인간의 정신을 반영한다. 어둡게 시작한 교향곡이 환희와 긍정으로 마무리하는 사례는 무척 많은데, 인생의 쓴 맛 덕분에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난 작곡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은 장송행진곡(1악장)과 고뇌의 몸부림(2악장)으로 시작하지만 당당한 승리의 노래로 끝난다.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도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고뇌를 너머 환희로”란 슬로건은 교향곡 구성의 ‘원칙’까지는 아니지만, 뚜렷한 ‘경향’을 이루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인생의 쓴 맛은 베토벤을 계속 찾아왔다. 줄리에타 기차르디, 테레제 말파티, 안나 마리 에르되디, 안토니 브렌타노 등 여러 여성을 사랑했지만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했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청력 상실이었다. 그는 지인에게 “제가 열렬히 사랑한 여성들 중 그 누구도 제 아내가 되지 않은 게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일기에는 비통하게 썼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그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 1808년 12월, 교향곡 5번을 지휘하고 있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는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는 그의 인생역정, 그 결정판이다. 1악장은 고뇌로 가득했던 폭풍우 같은 인생을 묘사한다. 4악장, 벼락 같은 팡파레에 이어 1, 2, 3악장의 주제를 회고한 뒤 ‘환희의 송가’가 펼쳐진다. 후배 작곡가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뛰어넘고자 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모든 쓴 맛을 다 본 뒤에도 변함없이 삶을 껴안는 건 위대한 작곡가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듯, 교향곡도 언제나 승리와 환희를 노래하며 마칠 수는 없다. 교향곡을 9번까지만 작곡하고 세상을 뜨는 것은 음악사에서 유명한 징크스였다. 베토벤에 이어 슈베르트, 브루크너, 드보르작이 그러했다. 말러는 9번째 교향곡이 될 <대지의 노래>에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9번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이 곡을 완성한 뒤에도 자기가 살아 있음을 발견한 말러는 용기를 내어 교향곡 9번을 작곡했다. <대지의 노래> 마지막 선율을 9번 교향곡의 맨 앞 도입부에 사용했다. 말러는 베토벤처럼 삶을 힘차게 긍정하는 대신 삶과 죽음을 달관한 듯한 초연한 아다지오로 곡을 마무리했다. 그는 교향곡 10번에 착수했지만 1악장까지만 완성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스케치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9번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베토벤 마지막 현악사중주곡에 대한 단상
힘들게 내린 결심, 단순한 기쁨… 가장 아름답고 명랑한 작품들
베토벤은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로 폭풍 같았던 그의 인생을 총결산한 것으로 보였다.
“환희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빛이여, 엘리지움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하여 너의 성스런 땅을 딛네. 너의 마술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네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네!” -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4악장은 교향곡 역사상 처음으로 합창을 넣어서 신성한 도취와 드넓은 형제애를 노래했다. 천지개벽의 팡파레에 이어 목관악기가 1, 2, 3악장의 주제를 차례로 회상한다.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 선율 말고 더 좋은 거”를 요구한다. <환희의 송가> 주제가 나지막히 등장하고 비올라가 이 선율을 받아서 노래한다. 점차 규모가 커지고 모든 악기가 가세한다.
베토벤은 네 명의 독창자와 웅대한 합창, 피콜로 · 심벌 · 트라이앵글 등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벅차게 환희를 노래했고, 이로써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는 그의 위대한 음악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1824년 5월 <환희의 송가>를 초연한 뒤, 50대 중반을 너머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내면을 5곡의 현악사중주곡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좀 더 내밀한 마음을 좀 더 작은 악기편성에 담아낸 것이다. 하이든, 모차르트가 어엿한 예술장르로 승격시킨 장르인 현악사중주곡은 베토벤의 손으로 극한까지 발전했고, 이후 낭만시대 모든 현악사중주곡의 전범이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 베토벤의 달관한 정신세계를 담아낸 걸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곡들을 듣고 또 들으며 감동받는 것이다.
이 곡들은 인간 지혜의 극치를 들려준다. 이미 지나간 비극을 되새기며 상심하는 것은 필요없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현재를 망치는 것도 어리석다. 오직 현재에 살고 기뻐하면 된다. 인생의 막이 내리는 순간을 앞두고 이 단순함에 도달한 베토벤의 모습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 린제이 사중주단이 연주한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집. 인생의 온갖 신고(辛苦)를 겪은 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고 명랑했다.
5곡의 후기 현악사중주곡,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16번 F장조에서 베토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답한다. 마지막 악장 앞머리에 그는 ‘힘들게 내린 결심’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첫 부분, ‘그라베’(grave)라고 표시된 엄숙한 서주의 악보에 베토벤은 써 넣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Muss es sein?)” 이어지는 알레그로(allegro)는 밝고 명랑하게 장난치는 듯한 느낌이다. 이 대목의 악보에 그는 이렇게 써 넣었다. “그래야만 했어! (Es muss sein)" 자문자답하는 이 동기들은 곡의 마지막 부분에 격렬하게 충돌하지만, 바이올린의 익살스런 독백에 이어 다 함께 단정하게 마무리한다. “희극은 끝났다.” 베토벤이 죽음의 병상에서 남겼다는 말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한 피날레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6번 F장조 Op.135중 4악장
https://youtu.be/4GmF1RdcRdg (연주 사이프러스 현악사중주단)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들은 내면의 흐름에 따라 유유자적하며 작곡한 듯, 고전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곡한 순서대로 보면 12번 Eb장조 - 15번 A단조 - 13번 Bb장조 - 14번 C#단조 - 16번 F장조인데, 12번은 네 악장, 15번은 다섯 악장, 13번은 여섯 악장, 14번은 일곱 악장으로, 악장 수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구성도 점점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마지막 16번 F장조는 다시 네 악장의 구성을 취했고, 규모도 무척 작다. 인생에 대해 뭐,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인생의 온갖 신고(辛苦)를 겪은 뒤 힘들게 내린 결론은 가장 단순하고 명랑했다.
그런데, 이 16번 사중주곡은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다. 이미 발표한 13번 사중주곡의 피날레를 다시 써야 했기 때문이다. 6악장으로 된 13번의 피날레는 특이하게도 ‘대푸가’였다. 청중들은 이 ‘대푸가’가 너무 길고 어렵다고 생각했고, 아르타리아 출판사 측에서도 악보 판매가 저조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베토벤은 “제일 좋은 게 바로 그 대목인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역정을 냈지만, 이순(耳順)의 경지에 접어든 인간답게 이 요구에 응해서 좀 더 단순한 피날레를 새로 작곡해 주었다. ‘대푸가’는 Op.133으로 따로 출판했다. 13번 사중주곡 Bb장조의 새 피날레야말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인 셈인데, 이 곡은 베토벤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즐겁다. 어두운 그림자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명랑한 이 작품이 베토벤의 마지막 노래였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중 6악장
https://youtu.be/gu8CJ9Q_sB0 (탈리히 현악사중주단)
이 피날레 직전에 있는 5악장 ‘카바티나’는 베토벤의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인류를 대표하는 클래식 곡 중 하나로 보이저호에 탑재되어 이제 막 태양계를 벗어나서 날고 있는 이 ‘카바티나’를 들어보자.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중 5악장
https://youtu.be/MAttnQupeeg (탈리히 현악사중주단)
‘카바티나’는 짧고 단순한 노래란 뜻이다. 베토벤은 이 5악장에서 가장 순박한 마음으로 인생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행복을 위한 또 하나의 지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베토벤은 이 무렵 체득한 게 분명하다. 고뇌와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이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는지! 베토벤은 충만한 가슴으로 감사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15번 A단조의 3악장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이 느린 악장의 악보에 ‘병이 나은 이가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라고 써 넣었다.
오늘도 세상은 깊이 병들어 있다. 자본은 혼탁한 아귀다툼으로 시끌벅적하다. 필시 권력 있는 자의 아집이 이 병든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해답의 실마리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베토벤의 사중주곡이 말해 주는 지혜를 들을 귀도, 느낄 가슴도, 배울 머리도 없는 걸까.
베토벤 교향곡 7번에 대한 단상
베토벤(1770~1827)은 어릴 적 친구였던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나는 예술을 오직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만을 위해 창조할 생각이오.”
‘상처입은 치유자’ 베토벤은 외로웠다.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그는 삶을 긍정했다. 그를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예술이었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비통한 마음을 딛고 이렇게 외쳤을 때 그는 혼자였다.
그 후 10년 동안 베토벤은 교향곡 <에로이카>, <운명>, <전원> 등 불멸의 예술을 인류에게 선사했지만 점점 더 외로워졌다. 1812년,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와의 사랑이 좌절됐다.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을 진정 사랑했지만 착한 남편 프란츠를 괴롭힐 수 없었기 때문에 베토벤을 두고 떠나게 된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예술가로서의 베토벤보다 인간 베토벤은 한층 더 위대했다.” 베토벤은 안토니 브렌타노와 멀어진 뒤 일기에 썼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그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1813년 초연된 교향곡 7번은 거침없는 리듬의 향연이다. 숭고한 도취를 통한 삶의 카타르시스다. 혼자임을 인정한 천재는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인류를 위하여 향기로운 포도주를 빚는 바쿠스이다. 사람들에게 거룩한 도취감을 주는 것은 바로 나다.” 사자는 단추를 풀어헤쳤다. 빈의 대다수 청중들은 이 교향곡을 듣고 놀라서 “술에 취한 사람이 작곡한 음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이 이제 정말 정신 병원에 갈 때가 됐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개의치 않았다.
“음악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솟아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악장의 서주는 디오니소스의 성스런 축제를 예고한다. 알레그로 비바체의 1악장은 시종일관 ‘딴~따다, 딴~따다’ 6/8박자 리듬의 향연이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유쾌한 첫 주제를 연주하면 모든 연주자들이 폭발적인 에너지로 화답한다. 제1주제가 발전할 때 약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광기와 도취의 이면에 깃든 슬픔과 우울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 <7번 교향곡> 1부(1악장) https://youtu.be/U_Fk_uAQqp4
이 교향곡에 가장 열광한 사람은 바그너였다. 그는 이 곡의 피날레를 ‘디오니소스의 축제’라 부르고,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다. ‘춤의 신격화’란 별명을 얻은 이 교향곡은 발레로 다시 탄생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우베 숄츠(Uwe Scholtz)가 안무한 발레 <7번 교향곡>은 작년 한국에서 공연된 바 있다.
▲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7번 교향곡>. 리듬의 대향연인 베토벤의 이 교향곡은 초연 당시 “술 취한 사람이 작곡한 음악”이라는 평을 들었다.
베토벤이 사랑의 희망을 포기한 1812년은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하여 몰락의 길로 접어든 바로 그 해였다. 베토벤은 50만 프랑스 대군이 퇴각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젊은 시절 내내 그의 피를 끓게 했던 혁명의 불꽃은 꺼져 가고 있었다. 2악장 알레그레토는 전장에서 죽어간 프랑스 병사들의 운구행렬을 떠올리며 작곡했다는 말이 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슬퍼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 황제로 등극하여 세속적 야심을 드러낸 나폴레옹에게 크게 실망하여 <에로이카> 교향곡 표지의 헌사를 찢어버린 그가 아닌가. 이 곡과 함께 초연된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는 나폴레옹군의 패배를 축하하는 음악이 아니던가.
하지만 베토벤은 덧없이 스러져간 젊은 목숨들을 애통해 했을 것이다. 힘없이 꺼져 가는 혁명의 불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2악장 알레그레토는 젊은 시절의 혁명과 사랑을 떠나보내는 베토벤 자신의 장송행진곡이었다.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의 낮은 목소리가 첫 주제를 연주한다. 장송행진곡의 규모는 점점 커진다. 팀파니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모든 관악기가 비통하게 노래한다. 광기와 통곡의 2악장은 차라리 고독한 베토벤의 절규라 할 만하다. 초연 때 앵콜 연주된 2악장은 오늘날도 가장 귀에 익숙한 대목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 <7번 교향곡> 2부(2악장) https://youtu.be/_ITMwLYTgkE
3악장 스케르초와 4악장 프레스토는 더욱 강렬한 도취와 광란이다. 베토벤은 통념도, 인습도, 사람들의 쑥덕거림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기의 기질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천재성과 힘의 자각에서 오는 기쁨, 그 힘을 거침없이 분출하려는 욕망이 있을 뿐이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 <7번 교향곡> 3부(3, 4악장) https://youtu.be/NpNrGxqyeBA
사랑도 가고 혁명도 갔다. 부르조아 계급이 혁명성을 갖고 있던 유일한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유럽의 권력자들은 보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준비했고, 시민계급은 급속히 보수화되고 있었다. 혁명과 정치에 대한 피로감이 급속히 확산됐다.
대중들은 베토벤의 음악이 너무 어렵고 심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가볍고 유쾌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젭 라너의 왈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빈의 음악팬들은 베토벤의 위대성을 인정했지만 로시니의 경쾌하고 재기발랄한 음악을 선호했다. 음악사에서 이른바 비더마이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독일어로 “성실하다, 점잖다”는 뜻의 형용사 비더(bieder)에 가장 평범한 남자 이름인 마이어(Meier)를 이어붙인 ‘비더마이어’는 보수적인 소시민들이 부담없이 즐기는 ‘소박한 예술’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이 속물의 전성시대에 베토벤은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7번 교향곡을 작곡한 뒤 베토벤은 내면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곡들은 깊은 내면의 독백이다. 이 작품들은 당시 음악팬들에게 어렵게 느껴졌는데, 요즘도 대중적인 레퍼토리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30년 넘게 무르익어 온 실러의 <환희의 송가>는 교향곡 9번의 피날레에서 드디어 폭발했다. 인류의 형제애를 예찬한 이 교향곡은 베토벤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 준 영원한 평화의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오늘도 탐욕과 갈등의 진흙탕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다.
연주 시작 전 지휘자는 어디를 쳐다봐야 할까
“지휘자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 마에스트로 구자범 강연에서 배운 것
교향악단 연주회에 가면 코러스석에 앉기를 좋아한다. 코러스석이 음향 밸런스가 엉망이라는 건 물론 안다. 금관악기 소리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팀파니 쿵쾅거리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모든 악기의 소리가 균형 있게 들리는 자리는 2층 맨앞, 또는 1층 중간쯤이라고 한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음악감독을 맡은 지휘자 서희태씨는 지휘자 서 있는 자리가 최고라고 했다.
하지만, 코러스석은 오케스트라 단원의 시선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커다란 매력이 있다. 팀파니 뒤에 앉으면 팀파니스트에게, 콘트라바스 뒤에 앉으면 콘트라바스 연주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코러스석은 다른 좌석에 비해 저렴하다. 비교적 싼 티켓으로 오케스트라 단원을 체험할 수 있으니 멋지지 않은가. 미국의 음악 비지니스맨들은 나처럼 코러스석을 선호하는 청중이 많다는 점을 간파한 듯하다. 작년에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말러 7번을 들으려고 코러스석 티켓을 샀는데, 한국처럼 저렴하려니 기대했건만, 아뿔싸! S석을 웃도는 가격이었다. 코러스석이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지휘자의 동작과 표정을 보며 음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틸슨 토마스 같은 스타 지휘자를 정면에서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티켓이 그렇게 비싼 게 분명했다.
지난 주, PD교육원이 마련한 글쓰기 캠프에서 지휘자 구자범의 특강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 제목은 <지휘자의 몸>! 지휘자의 귀, 눈, 입, 손을 차례차례 검토하며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한지 성찰해 본 흥미로운 강연이었다. 코러스석에서 교향악을 들을 때 알아두면 요긴한 정보로 가득했다. 10여명의 캠프 참가자들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내용이라 간략히 요약해 드리고 싶다.
▲ 지휘자 구자범은 “지휘자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라고 말했다. 인간과 시대를 성찰하는 탁월한 음악가 구자범이 다시 지휘대에 오를 날을 기다린다. | ||
지휘자에겐 물론 귀가 중요할 것이다. 소리의 미세한 뉘앙스를 포착해 내는 예민한 귀가 없으면 지휘대에 설 수 없다. 구자범씨의 우스개에 따르면 지휘자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상대음감이 있는 지휘자, 둘째, 절대음감이 있는 지휘자, 셋째,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ㅋㅋ. 흔히 ‘음악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과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여기는데, 구자범씨에 따르면 절대음감이란 것은 소리의 피치(pitch)를 기억하는 능력일 뿐, 음악성과는 관계가 없다.
구자범씨는 절대음감이지만, 절대음감이 없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상대음감이야말로 음악성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상대음감이 둔한 사람이 지휘대에 서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귀신같이 알아챈다. 이런 사람이 단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음악을 이끄는 건 불가능하다.
구자범씨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틀리게 연주했을 때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했다. 연주자가 틀렸을 때 지휘자가 즉각 지적하면, 그 연주자는 위축돼서 더 좋은 연주를 하기가 어렵다. 그냥 모르는 체 넘어가고, 다음 대목을 연주할 때 슬쩍 바라보는 게 낫다. 구자범씨가 일본의 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클라리넷 연주자가 틀렸다. 가만히 있다가 다음 대목에서 슬쩍 쳐다보았는데, 그 연주자는 클라리넷을 열심히 불며 ‘스미마셍~’ 하듯 고개 숙여 절을 하더란다. 다 알면서도 너그럽게 용기를 북돋워 주면 단원들이 지휘자를 존경하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음악을 함께 느끼며 눈을 마주칠 때 음악가들은 행복을 느낀다. 실내악에서 연주자들은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는데, 오케스트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려운 프레이즈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극적인 감정 전환이 일어날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와 눈을 맞추며 만족스러워 한다. 지휘봉과 눈이 따로 움직이면 연주자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지휘봉과 눈빛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카라얀은 눈을 감고 지휘하기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생긴 숱한 일화는 생략한다.
입도 중요하다. 리허설 때 가급적 말을 적게 하는 게 효율적이겠지만, 꼭 필요한 말은 해야 한다. 지휘자의 입모양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심리에 즉각 영향을 미친다. 트럼펫 연주자가 온힘을 다해 어려운 패시지를 불고 있을 때 지휘자가 입을 꽉 다문 채 바라보면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줘야 연주자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지휘자의 손(또는 지휘봉)은 마술사의 손이다. 오케스트라는 100명 가까운 인격체로 이뤄진 악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지휘자는 손동작으로 이 거대한 악기에 마술을 걸어 음악을 이끌어낸다. 청중들 또한 마술에 걸린 듯 신비로운 음악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휘자의 손이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처럼 지휘봉을 별로 안 쓰고 눈빛만으로 지휘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휘자는 단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크고 정확한 동작으로 음악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지휘자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일까? 구자범씨는 심장(Herz)과 폐(Lung)라고 결론지었다. 음악의 한 악절(phrase)은 호흡과 일치한다. 지휘자의 호흡 하나에 맞춰 음악의 기본단위가 생겨나는 것이다. 리듬과 박자(beat)는 심장의 고동에서 나온다. 지휘자의 심장은 절대 박자를 파악하는 기준이 된다. 지휘자는 템포를 결정하는데, 템포(tempo)는 속도가 아니라 ‘시간’이란 뜻이다. 지휘자는 시간을 창조함으로써 음악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마술사다. 시간을 창조하는 그의 행위는 손이 아니라 심장에서 비롯된다.
청중들도 지휘자의 손에서 그의 심장을 느낄 때 비로소 음악의 정수에 다가설 수 있다. 베토벤이 장엄미사 표지에 써 넣은 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게 음악 아닌가. 구자범씨는 강연에서 재미있는 퀴즈를 던졌다. 100명 가량의 연주자들이 투티(tutti, 다함께)로 시작하는 곡에서 첫 박자를 주기 직전, 지휘자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정답은 ‘지휘봉’이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바라볼 때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도 모두 지휘봉에 집중한다. 지휘자의 심장이 눈빛을 통해 지휘봉에 담기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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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에 대한 짧은 소묘
음악사에서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없던 유일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시기를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가 된 1781년에서 베토벤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1815년까지 약 30여년으로 본다. 이 기간은 유럽 역사에서 부르주아가 혁명성을 갖고 있던 유일한 시대에 해당된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처음 발표한 세 곡의 피아노협주곡(K.413, K.414, K.415)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곡들은 아주 쉬워서 마부들도 휘파람으로 불 수 있지만, 전문 연주자가 보아도 만족할 수 있게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2번 A장조 K.414
https://youtu.be/b2pa9WmJ-78
이 음악은 고급 음악으로서는 가장 쉽고, 대중음악으로서는 가장 질이 높은 셈이다. 음악의 위계를 파괴한 것은 모차르트가 자유 음악가로 거듭난 것과 관계가 있다. 1781년 6월 8일,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의 부관 아르코 백작은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이날 이후 모차르트는 귀족과 성직자를 위해 음악을 써야 하는 의무를 벗어나 모든 시민들을 위한 음악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새로 성장한 시민 계급은 웬만하면 집에 피아노 한 대씩 장만했다.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빈 시절 초기의 모차르트 음악은 평범한 부르주아를 위한 음악이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활약한 시기(1781~1791)는 부르주아가 혁명성을 갖고 있던 유일한 시기였다. 처음 발표한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는 평범한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독일말 대본을 사용했다. 계몽군주 요젭 2세는 대중들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모차르트가 자기의 세계관을 직접 드러낸 장르는 오페라였다. 사랑과 자유의 음악혼을 아낌없이 노래한 <피가로의 결혼>과 <돈조반니>는 혁명적 부르주아의 음악이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다시 독일어로 돌아왔다. 황제의 요청이 아니라 프리메이슨 동지였던 시카네더와 모차르트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시민들의 음악이었다. 빛이 어둠을 이기고 평등의 세상이 온다는 이 오페라의 메시지는 계몽과 혁명의 이념을 담고 있었다. 오페라와 뮤지컬의 경계에 있는 이 작품에 유럽의 시민들은 열광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당대의 현대음악이자, 대중음악이자, 고급음악이었다.
모차르트는 생애 마지막 시절 ‘불온한’ 작곡가로 낙인찍혔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혁명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급속히 반동화됐다. 음악가 모차르트는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큰 혁명가로 의심 받았다. 그에 대한 독살설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매트 리스의 소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는 황제의 비밀경찰이 프리메이슨 동료 프란츠 호프데멜을 사주해서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개연성이 있는 상상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792년 베토벤이 빈에 데뷔했다. 음악의 왕자(王者)가 자연스레 바톤 터치된 것이다. 모차르트가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다면 베토벤은 교향곡 작곡가였다. 모차르트 이상으로 혁명에 열광한 베토벤은 자기의 인생관을 교향곡에 담았다.
1804년에 완성한 그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는 혁명의 교향곡이자 교향곡의 혁명이었다. 베토벤의 동갑내기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을 가리켜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 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해서 그에게 바치는 헌사를 찢어버렸다. 교향곡 5번은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삶을 긍정한 열정적인 베토벤의 모습이다. 교향곡 6번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노래한 따뜻한 베토벤의 얼굴이다. 1812년, 나폴레옹이 몰락할 무렵, 베토벤은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미치광이의 음악, 술주정뱅이의 음악으로 여겨졌다. 베토벤은 외로웠다. 음악이 주는 성스런 도취 속에서 그는 홀로 위대했다.
1812년 베토벤이 괴테와 함께 테플리츠를 산책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루돌프 대공(황제 프란츠의 동생)의 마차가 다가오자 베토벤은 “우리처럼 위대한 두 천재가 함께 있으면 대공이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며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괴테는 다른 군중들과 함께 모자를 벗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베토벤을 발견한 루돌프 대공이 마차에서 내려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졌다. 괴테가 볼 때 베토벤은 무례한 야생마였다. 베토벤이 볼 때 괴테는 소심한 속물이었다.
베토벤은 1824년 마지막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발표했다. 이 곡은 인류의 자유와 형제애를 노래한 거대한 화산과 같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미 자기만의 내면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Op.101, Op.106, Op.109, Op.110, Op.111)와 현악사중주곡(Op. 127, Op.130, Op.131, Op.132, Op.135)는 내면의 독백이었고, 대중들은 이 곡들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혁명과 사랑은 가고, 대중들은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르주아는 급속히 혁명성을 잃고 속물화되었다. 베토벤이 절대 고독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시기는 메테르니히의 반동 체제가 성립된 시기와 일치한다.
모차르트에서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허물어졌는데, 베토벤에서 다시 그 경계가 생겨났다. 베토벤 이후, 숱한 천재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극복하기 위해 실험정신을 선보였는데, 그 결과 음악은 점점 더 대중과 멀어졌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의 벽은 더욱 완강해졌다. 그러나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더마이어 음악도 뚜렷한 전통을 이어왔다. 독일어로 “성실하다, 점잖다”는 뜻의 형용사 비더(bieder)에 가장 평범한 남자 이름인 마이어(Meier)를 이어붙인 ‘비더마이어’는 보수적인 소시민들이 부담없이 즐기는 ‘소박한 예술’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빈 체제가 성립될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젭 라너의 왈츠는 빈필 신년음악회로 전해진다. 대중적인 클래식으로 인기몰이를 한 앙드레 리외도 이 전통 위에 있다. 우리나라의 <열린 음악회> 또한 이 계열에 속한다. 혁명적 부르주아의 음악인 모차르트와 베토벤, 부르주아가 혁명성을 잃은 뒤에 나타난 비더마이어 음악…. 이 두 가지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발트토이펠 <스케이터즈 왈츠> (앙드레 리외 지휘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
https://youtu.be/PdcKE4U9_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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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의 새로운 시대구분을 위한 시론
첫째, 클래식 음악도 역사 속에서 탄생하여 진화하고 소멸하는 음악이란 뜻이다. 클래식은 문턱이 높은 고급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음악이 결코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어느날 진화를 멈춘다 해도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작품들은 여전히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클래식의 전모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그 진화의 역사를 단순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클래식을 객관화시켜 놓고 바라볼 때 ‘클래식 콤플렉스’ - 이는 올해 방송대상 TV문화예술부문 작품상에 선정된 다큐멘터리(MBC경남 전우석 PD 연출)의 제목이기도 하다 - 를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둘째, 클래식 음악의 범위를 가급적 좁게 놓고 보아야 접근하기가 쉽다. 나는 클래식 음악이 최초의 오페라 <오르페오>(몬테베르디)와 함께 1607년에 시작됐다고 본다. 칼로 두부 자르듯 어느 한 해에 클래식 음악이 갑자기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렌체의 카메라타를 중심으로 소나타, 칸타타 등 여러 종류의 음악 양식이 진화하고 있었으며, 만토바에서 <오르페오>가 탄생한 1607년은 상징적인 랜드마크일 뿐이다. 그 이전의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와 한국음악,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음악도 클래식의 범위에서 일단 제껴놓자. 그 음악들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보통 클래식이라 부르는 근대 유럽의 음악에 한정하여 고찰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유럽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대항해의 시대’는 클래식이 발전할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코르테즈와 피자로의 정복 등 대항해시대에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을 약탈하고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며 자본주의의 토대를 만들어 갔다. 클래식 음악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잉태된 것이다. 또 하나는 요인은 종교개혁이다. 유럽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고, 이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자각도 싹트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이 횡행하고, 조르다노 브루노가 화형당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부인하여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암흑의 시대였지만 인본주의의 여명은 이미 피어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르네상스였다.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기 이전의 그리스 문화를 다시 발견하여 인간성의 회복을 꾀하는 움직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그리스 비극이 음악과 함께 공연됐음을 발견하고 이를 지금 시대에 맞게 재현하려고 했다. 최초의 오페라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1781년 6월 8일은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된다. 모차르트(1756~1791)가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쫓겨난 그날은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었다. 이 날이 음악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주장한다면 웃을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그 상징적 의미에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계몽사상이 유럽을 휩쓸었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태동한 시대였다. 비발디,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음악도 물론 훌륭하지만 대체로 봉건귀족과 성직자들을 위한 음악으로, 지금 들으면 숙명적으로 과거의 음악으로 들린다. 반면, 모차르트가 마지막 10년 동안 세상에 내놓은 음악은 작곡가 이건용 선생의 지적대로 ‘최초의 현대음악’이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시대는 대중음악과 고급음악의 경계가 사라진 유일한 시대였다. 그 시대의 ‘현대음악’이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즉각 대중의 열광과 환호를 이끌어냈다. 최초의 현대음악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베토벤(1770~1827)도 마찬가지였다. 베토벤에 이르러 자유음악가의 정신은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빛나는 도약을 이루게 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는 유럽 역사에서 시민계급이 혁명성을 갖고 있던 유일한 시대였고, 두 위대한 천재는 이러한 시대정신에 걸맞게 인간 정신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모차르트는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다.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 등 대표적인 오페라에서 모차르트는 자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랑과 자유의 음악혼이었다. 베토벤은 교향곡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껏 드러냈다. 교향곡의 혁명이자 혁명의 교향곡인 3번 <에로이카>, 운명과의 투쟁과 승리를 그린 5번 C단조,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노래한 6번 <전원>, 춤과 리듬의 대향연이자 디오니소스의 축제인 7번 A장조, 그리고 인류의 형제애와 환희를 찬양한 9번 <환희의 송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않는, 클래식 음악의 최고봉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베토벤의 교향곡은 클래식 음악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자, 클래식 음악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한 1815년 무렵 시민계급 또한 보수화되었고, 고독해진 베토벤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들과 현악사중주곡들은 대중들에게 어려웠다. 대중들은 클래식 음악과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고, 창조적인 작품들은 즉시 이해되고 수용되기 어려워졌다. 일종의 ‘타임 래그’가 다반사가 된 것이다. 낭만시대의 천재들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는데, 이 과정은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말러(1860~1911)에서 교향곡은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대중들은 이 거대한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러는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1970년대를 지나며 말러의 시대가 왔다.
1908년 12월 21일은 음악사에서 또 하나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이날 초연된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 2번에서 무조음악이 전면에 등장했다. 음악에서 조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조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쇤베르크 이후 20세기 음악은 감정을 담지 않은 순수한 사운드의 세계로 질주했다. 쇤베르크는 “나의 음악을 대중들이 흥얼거리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100년이 지나도록 그 시대는 오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100년전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음악’은 이해할 수 없는 음악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쇤베르크는 훗날 자기의 무조음악 실험이 조성음악의 발전을 저해한 게 아닌가 되물었는데, 음악사의 큰 흐름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나 무조음악의 탄생을 클래식 음악의 종말로 단정할 수는 없다. 쇤베르크 이후에도 위대한 천재들은 새로운 작품들을 계속 내놓았다. 사회주의권의 쇼스타코비치(1906~1975), 쿠르트 바일, 한스 아이슬러, 파울 데사우를 빼놓을 수 없다. 음악에 인간의 영혼을 되살려 놓은 메시앙(1908~1992), 서양의 음악어법에 동양사상을 담은 윤이상(1917~1995)을 외면한 채 우리 시대의 음악을 얘기할 수 없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의 진화과정을 요약하려면 20세기말까지 살펴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태어난 1607년부터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신 1995년까지 대략 400년을 클래식 음악의 생애라고 정의하려 한다. 이 사이사이에 무수히 다양한 변주가 있었음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빈필 신년음악회, 앙드레 리외, 한국의 열린음악회 등 대중들이 즐길 만한 가볍고 편안한 비더마이어 전통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클래식 음악의 주류에서 이탈하여 영화음악 등 실용음악으로 방향을 돌린 분들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변주를 인정하되, 큰 흐름만 요약하면 ‘클래식 400년’이 된다.
클래식 음악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하루라고 치자.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에 이르는 기간은 오전에 해당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정오의 음악이며, 말기 베토벤과 슈베르트부터 20세기 음악까지는 음악의 오후다. 해뜨는 새벽부터 해저무는 저녁까지, 클래식 음악의 하루는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400년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찾은 보물
로린도 알메이다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여름 저녁, 기타와 여성의 목소리가 이루는 앙상블은 어떨까? 브라질 노래 <부아 붐바>, 로린도 알메이다가 기타를 치고 싱그러운 목소리의 메조 소프라노 샐리 테리가 노래한다.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 풍의 바흐> 5번은 원래 8대의 첼로와 목소리를 위한 곡이지만, 작곡자 자신이 목소리와 기타를 위한 이중주로 개작했다. 어릴 적에 이 음반을 들은 탓인지, 지금도 여덟 첼로가 반주하는 것보다 기타 반주의 이 편곡이 더 친근하다. 기타와 플루트도 환상의 궁합을 보여준다. 알메이다의 기타와 마르틴 루더만의 플루트가 어우러지는 자크 이베르의 <간주곡>, 이거야말로 매혹적인 여름 저녁의 시정이 아닐까 싶다.
보물과 같은 음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Duets with Spanish Guitar)가 내 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돌아가신 누님이 모아놓은 LP 중에 이 앨범이 있었다. 그게 1972년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연주자들이 어떻게 이토록 멋진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지 늘 신비롭게 여겨졌다. 누나가 돌아가신 뒤 20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듣곤 하던 이 음반은, 아뿔싸, 결혼 후 이사하던 중 곤돌라에서 LP 꾸러미가 떨어질 때 그 속에 있다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국내에서 구할 수도 없었고, 인터넷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또 흘러 재작년, PD교육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저녁때 유니온 스퀘어 근처의 한 중고 레코드샵에 들렀다. 비틀즈, 레드 제플린, 스콜피온즈 같은 아티스트의 LP는 100달러가 넘는 경우도 많았지만 클래식 LP는 모두 ‘1달러 플랫’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클래식 음반을 별로 찾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헐값에 내놓은 게 분명했다. 웬 횡재냐, 눈에 불을 켜고 이것저것 고르던 중, 바로 이 음반, 40여년 전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가 눈에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1달러’ 가격표를 붙인 채 진열대 한구석에 이 보물을 방치해 놓는 것은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말없이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선 나는 기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이 보물을 단돈 1달러에 가져가면서 얼마나 미안한 마음인지, 계산대의 순박한 미국 젊은이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 로린도 알메이다의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샌프란시스코의 중고 레코드점에서 이 보물을 찾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제일 기쁜 순간은 친구들과 함께 이 음반을 틀어놓고 한잔 홀짝이며 대화를 나눈 날이었다. 클래식 기타를 잘 치는 강기훈씨도 이 음반을 좋아하게 됐다. 유부트를 검색해 보니 누군가 이 음반의 수록곡을 모두 올려놓았다. zondebok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인데, 국적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처럼 이 음반을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유부트 링크 덕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분들께 이 음반을 알릴 수 있어서 매우 흡족하다.
수백년간 기타는 정통 클래식의 변두리에 머물렀지만 포크 음악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기타는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사람 목소리나 다른 악기의 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효과를 내곤 했다. 이 음반에서 로린도 알메이다(Laurindo Almeida, 1917~1995, 브라질 태생의 미국 기타리스트)는 메조 소프라노와 플루트를 파트너로 선정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준다.
<스패니시 기타와의 이중주> (검색어 Almeida Duets Spanish Guitar) https://youtu.be/dl45IXag-6s
이 앨범에서 샐리 테리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브라질 전통에서 나온 곡들이다. 작곡자들이 브라질에 대해 느낀 사랑과 동질감을 표현한 노래들로, 브라질 민속음악의 리듬과 선율을 차용하고 있다. 발데미르 엔리케의 <부아 붐바>(링크 5:37)는 아프리카계 브라질 사람들의 전통 노래로, 성스런 소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파우리요 바로소의 <니냐르를 위하여>(링크 11:17)는 사랑스런 자장가로, 잠든 아기 곁에 다가 온 귀신을 쫓아내는 내용이다. 브라질의 대표적 작곡가인 에이토르 빌라-로보스(1887~1959)는 바흐 음악이 진실로 보편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브라질 풍의 바흐> 5번(링크 22:12)은 바흐의 음악 어법과 브라질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역작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할 것이다.
샐리 테리(1922~1996, 영국 출신의 미국 성악가)의 목소리는 단정하면서 표정이 풍부하고, 관능적이면서 상쾌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1958년에 발매된 이 음반은 이듬해인 1959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우수 녹음상을 받았고, 이 때 샐리 테리도 클래식 부문 최우수 가수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작곡가 빌라 로보스는 샐리가 부른 <브라질 풍의 바흐> 5번을 듣고 “음반으로 나온 이 곡의 연주 가운데 최고”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기타와 플루트의 듀엣들은 주로 프랑스 작곡가들의 매혹적인 선율을 듀엣으로 편곡한 것이다. 프랑수아 고세크(1734~1829)의 <탬버린>(링크 4:09)은 프로방스 지방의 춤곡이다. 기타의 몸통을 두드리면 탬버린 소리가 나는데, 이 특수 주법을 활용하여 흥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시칠리엔느>(링크 7:15)는 6/8박자로 된 시칠리아풍의 춤곡인데, 애수어린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해 주는 곡이다. 자크 이베르(1890~1962)는 에릭 사티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20세기 작곡가로, 특별히 사랑한 악기인 플루트를 위해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그의 <간주곡>(링크 19:01)은 17세기 프랑스 극장 음악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향기 높은 작품이다.
쇼팽의 프렐류드 E단조(링크 31:35)는 원래 피아노 독주곡인데, 쇼팽이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파리 마들렌느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 때 오르간 솔로로 연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곡은 내겐 기타 반주, 플루트 독주의 구슬픈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이 음반이 남긴 강한 인상 때문이다.
음반을 처음부터 들어보면 기타는 계속 앉아 있고 메조 소프라노와 플루트가 교대로 등장하여 한곡씩 번갈아 연주한다. 아늑한 살롱 음악회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여름 저녁, 친구나 가족과 함께 이 음반을 들으며 충만한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 이 글을 쓸 때 음반 뒷면의 영문 해설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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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스의 신비’ 주제와 변주
요젭 겔리넥 작곡, ‘이시스의 신비’ 주제와 변주
https://youtu.be/UrGnSFX8PHM (피아노 시프리앙 카차리스)
은방울처럼 영롱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정겹다. 그런데 제목이 낯설다. ‘이시스의 신비’라니? 이시스는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에게 살해당한 오빠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그의 아내가 된 여신으로, 신성한 어머니를 상징한다. 음악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파파게노의 아리아가 분명한데 ‘이시스의 신비’라고 부른 건 어찌된 일일까? <마술피리>는 이집트를 무대로 했고, 2막에 ‘이시스와 오시리스여’라는 노래가 나온다. 하지만, 이시스는 <마술피리>의 주제도, 주인공도 아니다.
2006년 파리에서 시프리앙 카차리스 - 이 곡을 직접 녹음한 피아니스트 - 를 만났을 때 어찌된 사연인지 물어 보았다. 모차르트가 죽은 뒤 파리에서 그의 <마술피리>를 개작하여 ‘이시스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는데, 이게 큰 인기를 끌었다는 설명이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8년이 지난 1799년, 프랑스의 파리 오페라는 <마술피리>의 플롯을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인물을 집어넣고, 기존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모차르트의 다른 오페라 <돈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황제 티토의 자비>에 나오는 노래를 집어넣고, 심지어 하이든의 교향곡의 주제들을 짜깁기해서 무대에 올렸다. 이 잡탕 오락물은 1809년까지 약 10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는데, 제목이 ‘이시스의 신비’(Mystères d’Isis)였다.
신흥 부르주아의 속물스런 행태를 혐오했던 베를리오즈는 격분했다. “이런 끔찍한 혼합물을 만들어 놓고 ‘이시스의 신비’란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공연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모차르트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 바보의 이름, 신성모독자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라흐니히트’(Rachnicht)라고.” (베를리오즈 회고록 <음악여행자의 책>)
당시 오페라 제작자들은 흥행을 위해 이러한 개작을 서슴지 않았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는 파리에서 ‘로빈 후드’로 공연됐다. 런던 코벤트가든의 음악감독 헨리 비숍 - 잘 알려진 <즐거운 나의 집>을 작곡한 사람 - 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로시니의 <체네렌톨라>를 공연하며 서슴없이 자기 음악을 끼워 넣었다. 오늘날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흥행을 위해 문학작품을 맘대로 각색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오페라의 대본을 자르고, 편집하고, 섞어버리는 것은 19세기 초에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오페라의 상업화를 엄청나게 부채질했다. 누구든 극장을 열고 어떤 오페라든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오페라 극장은 신흥 시민계급의 사교 무대였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관광 명소였다. 부자들은 자기 과시를 위해 오페라 극장을 이용했다. 그들이 즐겨 앉던 무대 좌우의 박스석에서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관객들이 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파리의 공연장들은 부자가 자기를 과시하고 부자 아닌 이들이 입을 떡 벌린 채 부자들을 찬탄하는 무대였다. 부자들 자신이 공연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 <마술피리>를 통속적으로 개작한 ‘이시스의 신비’는 프랑스에서 지금도 공연된다. 2013년, 오페라 툴롱의 광고 포스터
▲ 시프리앙 카차리스의 앨범 <모차르티아나>는 모차르트의 주제로 후대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들을 담고 있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분위기도 요즘 기준으로 보면 엉망이었다. “군중의 소리가 공연자들의 노래를 압도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애완동물들은 아무데나 똥오줌을 갈기면서 날뛰었고, 무장경비원들은 난폭한 행동을 저지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중략) 사방을 에워싼 작은 벽장마다 나무 양동이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었다. 그 악취는 여간해서는 참기 힘들었다.”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 제1권, p.446)
당시 오페라는 돈이 몰리는 런던과 파리에서 대박이 나야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주류였고, 독일어로 된 징슈필(Singspiel)은 시민 계급이 선호하는 다소 저급한 장르로 여겨졌다. 연극 대사 사이사이에 노래가 들어가는 징슈필은 훗날 가벼운 오페라인 ‘오페레타’와 좀 더 대중적인 뮤지컬로 진화하게 된다. <마술피리>는 대표적인 징슈필로, 모차르트의 생애 마지막 해에 크게 성공하여 돈과 명성을 회복하게 해 준 작품이다. 그가 35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마술피리>는 유럽 곳곳에서 공연됐는데, 파리에서 <마술피리>가 소비된 방식은 막 꽃피기 시작한 상업주의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페라는 돈이 많이 드는 비즈니스였다. 세트, 의상, 분장은 물론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천장에서 전차가 내려오게 하거나 항해 장면의 파도를 묘사하기 위해 특수 무대장치를 사용했다. 출연자들 뿐 아니라 작곡가, 대본작가, 지휘자, 오케스트라 단원, 의상 · 소도구 담당자, 무대 스탭 등 많은 사람들에게 보수를 줘야 했다. 특히, 인기 절정의 디바(Diva, 여자 성악가에 대한 최고의 찬사)들은 엄청난 개런티를 받았다. 드레스덴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칼로리네 빌만의 개런티는 작곡자 칼 마리아 폰 베버가 받는 연봉의 3배가 넘었다. 파리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말리브란은 연수입이 9만4천 프랑이었는데, 루브르에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예나제나 오페라 티켓이 비싼 건 엄청난 제작비 때문이니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밖에 없다. 스폰서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적자를 면하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기지개를 켠 19세기 초, 오페라 제작자들은 흥행을 위해 원작을 뜯어고치는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행은 로시니의 작품이 청중들을 사로잡은 1820년대부터 뜸해지기 시작했고, 청중들이 무대 위의 작품에 집중하는 에티켓도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정착됐다.
그때까지 파리 오페라를 주름잡은 최고의 인기 작곡가는 도메니코 치마로사(1749~1801)였다. 그의 희극 오페라 <비밀 결혼>은 빈, 밀라노, 런던을 휩쓴 뒤 파리에서 10년 이상 찬사를 받으며 공연됐다. 화가였던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의 재능은 위대한 모차르트를 능가하네.” 지나친 칭찬에 불편해진 치마로사가 재치 있게 대답했다. “누가 자네더러 라파엘로를 능가하는 화가라고 한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치마로사는 최소한의 분별과 지성을 갖춘 음악가였나 보다.
1778년, 22살의 모차르트에게 쓰라린 좌절을 안겨 준 도시 파리…. 그가 “음악에 관한 한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며 몸서리친 이곳의 오페라 극장은 모차르트가 죽은 뒤 <마술피리>를 그렇게 소비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출신의 작곡가 요젭 겔리넥(1758~1825)은 파리에서 ‘이시스의 신비’가 공연되고 있던 1800년 무렵 이 주제와 변주를 작곡했다. 시프리앙 카차리스의 멋진 연주에 귀 기울이는 동안만큼은 당시 파리 오페라의 착잡한 풍경을 떠올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 글은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뿌리와 이파리, 2006) 제1권의 내용을 주로 참고했다)
괴테의 저주, 파우스트의 저주
파우스트는 중세에 실존한 마법사의 이름이다. 인간이 아무 속박 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될까?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힐지라도 내면의 열정에 충실하다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파우스트의 전설은 유랑극단의 연극과 인형극으로 18세기까지 전해졌다. 괴테(1749~1832)는 젊은 시절부터 이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흐린 날 들판’(1772)에서 파우스트를 처음 언급했고, ‘초고 파우스트’(1775), ‘단편 파우스트’(1790), ‘파우스트 제1부’(1808), ‘파우스트 제2부’(1832)를 차례차례 썼다. 23살 때 착상해서 83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완성했으니 무려 60년, 어른이 된 뒤 모든 세월을 쏟아 부은 셈이다.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책과 연금술을 익혔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는 우주, 자연과 합일되는 삶을 꿈꾸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무력감에 빠진다. 메피스토텔레스가 검은 개로 변장하고 파우스트를 찾아와 영원으로 통하는 초월의 한 순간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영원의 한 순간이 지나면 메피스토텔레스의 노예가 되어 평생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파우스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고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파우스트의 운명, 후대는 이를 ‘파우스트의 저주’라 불렀다.
괴테는 시적(詩的) 자서전인 이 작품이 음악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그는 ‘파우스트’를 음악으로 만든다면 두렵고 끔찍하고 충동적인 대목들이 삽입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평범한 음악과는 성질이 달랐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음악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낭만시대의 수많은 작곡가들이 ‘파우스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괴테의 기대수준에 도달한 작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괴테는 마이어베어 정도가 그 작업을 해 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만년에는 그 희망을 포기했다. 그는 1829년 2월 12일 에커만에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파우스트를 작곡했어야 해.” 어떤 음악사가들은 이를 ‘괴테의 저주’라 부른다.
합리성이 지배하리라는 계몽시대의 꿈이 스러지고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뜬 19세기, ‘파우스트’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된 운명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파우스트’의 대사를 사용해서 가곡을 만들었다. 이 작품을 본격적인 대편성의 음악으로 처음 만든 사람은 베를리오즈(1803~1869)였다. 하지만, 그가 1828년에 발표한 ‘파우스트로부터의 8개 장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괴테 자신도 이 작품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개작하여 ‘파우스트의 저주’란 제목으로 1846년 초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877년 파리에서 다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를리오즈가 죽은 지 8년 뒤였다. ‘괴테의 저주’, 그 첫 케이스라고 할까.
이 작품은 무대 공연이 아니라 연주회용으로 만든 오페라다.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극적 전설’이라고 불렀다. ‘파우스트’에서 음악적으로 처리하기 적합한 장면 24개를 골라서 3명의 독창자,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도록 만들었다. 이 가운데 ‘라코치 행진곡’이 귀에 익숙하다.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저주> 중 ‘라코치 행진곡’ https://youtu.be/fuqu_eNO51M
(연주 마이클 틸슨 토마스 지휘 유투브 교향악단)
프랑스의 샤를르 구노(1818~1893)는 이 작품을 5막의 오페라로 만들어 1859년 파리에서 초연했다. 하지만, 화사한 살롱풍의 이 작품은 괴테가 생각한 ‘파우스트’의 음악, 즉 ‘영적(靈的)인 것의 악마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곡 중 발레 음악, ‘병사들의 합창’, 그리고 파우스트의 3막 아리아 ‘정결한 집’(원제 Salut, demure chaste et pure 안녕, 순결하게, 순수하게 살기를)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 “모차르트가 파우스트를 작곡했어야 해.” 이 ‘괴테의 저주’를 넘어 파우스트를 가장 잘 묘사한 작곡가는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일 것이다. 두 사람은 파우스트를 닮았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파우스트’를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리스트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교향곡은 파우스트, 그레첸, 메피스토펠레스 등 세 악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마지막 악장에는 ‘신비의 합창’이 포함돼 있다. 리스트는 연주시간 무려 80분에 달하는 이 대곡을 잉태해서 완성하기까지 50년 세월이 필요했다.
이 작품의 산파는 다름 아닌 베를리오즈였다. 1830년, 파리에 살던 리스트는 ‘환상 교향곡’의 초연을 하루 앞둔 베를리오즈를 방문한다. 베를리오즈로부터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그는,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파우스트’를 읽자마자 심취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 인생의 의미, 구원의 문제를 파고든 그 내용은 그의 뇌리를 평생 지배하게 된다. 리스트는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으나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1852년, 바이마르에서 베를리오즈가 ‘파우스트의 저주’를 직접 지휘한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로소 용기를 낸 리스트는 1854년 이 작품을 완성하여 이듬해 초연했고, 베를리오즈에게 헌정했다. (참고 : 황장원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네이버캐스트 2011. 10. 24)
이것이 ‘파우스트’ 교향곡의 제1버전인데, 리스트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어서 대폭 손질했다. 1857년에 완성한 제2버전에서는 트럼펫과 트롬본, 오르간과 타악기 등의 악기들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여전히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리스트는 결국 1861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제2버전을 수정 보완하고 나서야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베를리오즈를 통해 ‘파우스트’를 알게 된 지 꼭 50년만이었다. (참고 : 최은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네이버캐스트 2015. 8. 14)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https://youtu.be/m30ybpo3MUY
(연주 : 블라디미르 유로브스키 지휘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 연주)
낭만시대의 전형적 작곡가인 리스트가 파우스트를 닮았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화려한 여성 편력을 거쳐 말년에는 사제로서 신과의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프란츠 리스트. 그러나 그는 방대한 지식을 섭렵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처럼 계속해서 사랑과 예술을 향한 끝없는 열망을 불태웠다. 그토록 파우스트와 닮았던 리스트가 파우스트에게 이끌려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최은규, 같은 글)
‘파우스트’에 도전한 작곡가는 수없이 많다. 슈만도 ‘파우스트의 장면들’이란 대곡을 썼다. 100년 이상 잊혀졌던 이 작품은 1970년대에 발굴되어 이제는 슈만의 초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千人)의 2부가 ‘파우스트’를 텍스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낭만시대 작곡가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모든 고통을 껴안은 파우스트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8월 25일, 음악으로 탄생한 괴테의 ‘파우스트’가 한국의 청중들을 만나는 소중한 연주회가 열렸다. 임헌정씨가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가 베를리오즈, 구노, 리스트의 작품들을 연주하고 음악칼럼니스트 최은규씨가 해설한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 인문학적 주제를 음악과 연결해서 소개하는 이 기획은 작년 10월 31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개 말했다’로 문을 열었고, 두 번째 주제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선정한 것이다.
낭만시대의 심각한 곡들은 자주 듣기 어렵다.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살며 이 대곡들을 감상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판을 깔아 주면 기꺼이 들을 수 있다. 코리안 심포니의 참신한 기획은 이런 희귀한 기회를 제공했다. 열과 성을 다한 연주, 그리고 최은규씨의 성실한 해설은 음악을 좀 더 잘 이해하며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를리오즈, 슈만, 리스트, 말러가 표현한 파우스트를 좀 더 들으며 ‘괴테의 저주’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참신한 기획으로 파우스트를 공부할 기회를 준 코리안 심포니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길 위의 새들, 길 위의 오케스트라
“우리는 길 위의 새들이에요, 우리는 떠나야만 해요.”
모차르트의 아리아 ‘제 감사를 받아 주세요’ K.383은 음악가들을 ‘길 위의 새들’이라 불렀다. 멀리 연주 여행을 떠나는 음악가가 고향의 후원자들에게 바치는 이 노래는 따뜻한 우정과 작별의 아픔을 노래한다. 당시 음악가들은 마차를 타고 다녔고 유럽을 벗어날 수 없었다.
모차르트 ‘제 감사를 받아 주세요’ K.383 https://youtu.be/RF8AwIDY_ok (소프라노 신시아 지덴)
요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은 대형 여객기를 타고 세계를 누빈다. <길 위의 오케스트라>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LSO)의 플루트 연주자 가레스 데이비스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LSO의 단원들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길 위의 새들’이다. 전세계가 직장이고 여행 시간이 출퇴근 시간이라 치면 평균 20년을 길에서 보내는 셈이다. 빡빡한 연주일정 때문에 식당과 쇼핑 이외의 관광을 즐기기 어렵지만, 음악과 함께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는 이들의 삶은 무척 근사해 보인다.
가레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추억을 풀어놓는다. 서울은 뉴욕과 런던을 합쳐놓은 것처럼 활기찬 곳이었다. 잠들지 않는 도시가 아니라 아예 앉을 생각도 하지 않는 도시 같았다. 그는 야시장의 활력에 놀랐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에서 묘하게 편안함을 느꼈고 환영받는 느낌을 받았다. 음식점에서 주문을 못해서 당혹스러워 하자 처음 보는 한국인들이 잽싸게 다가와서 도와주었다. 그들은 거대한 주전자에 담긴 무언가를 주문해 주었는데 - 막걸리! - 어느새 함께 웃으며 떠들었고 몇몇은 식탁 위에서 춤까지 췄다. 새벽 3시, 처음에 음식 주문을 도와주었던 한국 사람들은 기어이 돈까지 내겠다고 했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날 밤 친구가 되어 헤어진 것이다.
가레스는 정많고 역동적인 한국 사람도 감동이었지만 정확하고 예의바른 일본 사람들도 놀라웠다. 모든 시설이 새롭고 거대한 중국은 완전히 외계의 별 같았다. 우리에게 유럽이 신기한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동아시아의 세 나라는 별천지였다. 여행은 때로 몹시 피곤하다. 24시간 내내 이동할 때고 있고, 아이슬랜드 화산 폭발로 공항이 폐쇄됐을 때처럼 엄청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오래 집을 떠나 있으니 외로울 때도 많다. 그러나 가레스는 음악의 사절로 세계를 누비는 오케스트라의 삶이 즐겁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가레스는 뉴욕 카네시홀 기록보관서에서 1912년 LSO의 첫 미국 순회연주 기록을 찾아냈다. 게다가 100년전 LSO의 팀파니 연주자였던 찰스 터너와 플루트 연주자 헨리 니스벳의 일기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가레스의 연주여행기는 이제 LSO의 역사의 일부가 되어 책으로 남을 가치가 있었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하와 충돌해서 침몰한 바로 그 해, LSO 단원들은 발틱호를 탔기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대서양에 익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는 여객기가 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을 건너려면 8일 동안 멀미와 싸워야 했다. 뉴욕에 도착할 때 대부분의 단원들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최초의 근대적 지휘자로 꼽히는 아르투르 니키슈는 미국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미국의 흥행업자들이 초청한 것은 니키슈였고, LSO는 니키슈가 자기 재량으로 선택한 오케스트라였다. 슈퍼스타 지휘자들이 청중의 인기와 흠모를 독차지하며 콘서트 마케팅의 주역이 되는 세상은 이미 오고 있었다. 뉴욕 연주는 비교적 성공이었다. 그러나 보스톤에서 LSO 단원들은 쓴맛을 봐야 했다. 보스톤의 언론들은 니키슈의 시적 표현력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LSO는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적대시했다. LSO의 첫 미국 연주여행은 피곤했다.
가레스는 최근 LSO를 이끌어 온 콜린 데이비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존 엘리엇 가디너, 발레리 게르기에프 등 마에스트로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LSO의 단원들은 지휘자와 매우 예민하게 교감하기 때문에 지휘봉을 크게 휘두를 필요가 없다. 눈썹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레스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원하는 소리를 이끌어 내는 콜린 데이비스를 찬탄한다. 하이팅크는 말이 적지만 한 마디로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는 슈베르트 교향곡 5번을 리허설 할 때 되풀이 연주하라고 요구하며 점점 동작을 작게 했다. 그가 단원들에게 말했다. “내가 동작을 취하지 않을수록 소리가 더 좋아요.” 이러한 하이팅크를 LSO 단원들은 사랑한다. 가레스는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지 놀랍다고 한다. 가디너가 지휘봉을 들면 스위치가 찰칵 켜지면서 전혀 다른 오케스트라가 된다. 가디너의 지휘봉 아래서 베토벤의 교향곡은 초연 때 일으켰을 게 분명한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게르기에프는 어떤 곡도 똑같이 지휘하는 법이 없다. 그는 손을 파르르 떨며 지휘하는 걸로 유명한데, 이 손짓을 LSO 단원들이 어떻게 따라가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사실은 나도 몹시 궁금했다!) 가레스는 익살스레 썼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1파운드씩 받았다면 지금쯤 나는 백만장자가 됐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여러분은 그의 손을 주시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그의 눈이다.”
음악은 인류 공통의 언어다. 1790년, 하이든이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 모차르트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연로한데다 영어도 할 줄 모르니 고생하실 거라고 말한다. 하이든이 능청맞게 대답한다. “내 음악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지.”
LSO의 중국 투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LSO의 단원들은 베이징 중앙음악원에서 매스터클래스를 열었다. LSO 단원들은 중국말을 못 했고 학생들은 영어가 서툴렀는데, 통역마저 없었다. ‘에스프레시보?’(표정을 담아서?) ‘몰토 에스프레시보!’(많은 표정을 담아서!) 이탈리아말로 된 음악 용어만으로 대화하며 3시간 동안 연습했다. 연습을 마칠 때가 되자 모두 환하게 웃었다. 엄청난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LSO 단원들과 중국 학생들은 음악을 통해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맑고 푸른 가을하늘로 수많은 ‘길 위의 새들’이 날아 올 것이다. 언어와 국경과 이념과 계층을 넘는 음악혼이 인류를 좀 더 가깝게 이어 줄 수 있을까.
평생 독신이었던 베토벤, ‘불멸의 연인’은 누구였을까?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친구 아내설 등 추측만 무성, 신분차이·청각장애 등 걸림돌 된 듯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결혼하지 않았다. 베토벤에게 호감을 느끼던 귀족 여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평민 출신인 그를 피해서 달아나곤 했다. 무엇보다 천형과 같은 청각장애가 문제였다. 더 이상 결혼을 꿈꾸지 않을 나이인 47살이 됐을 때 베토벤은 지인에게 말했다.
“제 경험에 따르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들 중 그 누구도 제 아내가 되지 않은 게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버너드 로즈 감독의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일 속에 가려진 베토벤의 진정한 연인을 추적한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 유물 속에서 3통의 편지가 나왔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나의 진정한 자신…” 열렬한 고백이 담긴 이 편지는 온천지 테플리츠에서 썼고 7월 6일과 7월 7일이란 날짜가 표시돼 있을 뿐, 연도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수신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전기 작가들은 모든 정황을 종합, 베토벤이 이 편지를 쓴 건 1812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편지의 수취인은 오랜 세월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영화에서는 베토벤의 비서 안톤 신틀러가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베토벤의 유산을 그녀에게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은 줄리에타 기차르디였다. 베토벤이 1802년 <월광> 소나타를 바친 여성이다. 베토벤은 이 곡을 원래 ‘환상곡 풍의 소나타’라 불렀는데, 출판업자 렐슈타프가 1악장의 분위기를 설명하며 “호수에 비친 달빛 같다”고 한 뒤 <월광>이란 제목이 붙었다. 베토벤은 정열적인 이 곡의 3악장을 누구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마음을 모두 담아서 연주하면 피아노가 박살날 거라는 뜻이었으니, 베토벤이 이 곡에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베토벤은 청혼까지 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인 줄리에타는 평민 출신인 베토벤과 결혼할 수 없었다.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도 장애 요인이 됐다. 그녀는 이듬해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한 뒤 나폴리로 이주해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1812년에 쓴 이 편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영화가 완전한 픽션임이 드러나는 셈이다.
불멸의 연인, 그 두 번째 후보는 헝가리 출신의 귀족 안나 마리 에르되디 부인이다.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늘 어머니처럼 베토벤의 편이 되어 주었다. 영화에서 베토벤이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초연하는 도중 실의에 빠지자 위로해준 게 바로 그녀다. 베토벤은 에르되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 사랑, 사랑…” 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정은 연애로 불타서 사라지는 대신 따뜻한 우정으로 오래 살아남았다.
영화는 뜻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죽은 동생 카스파르의 아내 요한나 라이스가 바로 ‘불멸의 연인’이라는 것. 베토벤은 동생이 죽자 그의 아들인 조카 칼의 교육에 몹시 집착했다. 베토벤과 제수 요한나는 칼의 교육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고, 심지어 양육권을 놓고 소송까지 벌였다. 그런데, 로즈 감독은 베토벤과 요한나가 사실상의 부부이며, 칼이 바로 두 사람의 자식이었다고 넘겨짚는다. 극적인 반전이 아니라, 있을 법하지 않은 추측으로 판을 뒤엎어 버린 셈이다.
▲ (왼쪽부터) 줄리에타 기차르디(1782~1856), 안나 마리 에르되디(1779~1837), 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
메너드 솔로몬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 안토니 브렌타노였다고 결론지었다. (솔로몬 <루드비히 판 베토벤 2> pp.59~121) 베토벤의 친구 프란츠와 아내 안토니는 1809년부터 1812년까지 빈에 머물렀고,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이 싹텄다. 베토벤에 따르면 안토니는 ‘다정한 마음, 빛나는 영혼’을 가진 ‘자연스럽고 단순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안토니는 네 아이의 어머니였는데, 몸이 허약해서 자주 아팠다. 메너드 솔로몬에 따르면 “베토벤은 브렌타노 집의 난롯가에서 몸을 녹였고, 그들의 가족생활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녀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었을까? 편지의 수취인은 1812년 여름 칼스바트를 방문해서 베토벤을 만났는데, 그럴 개연성이 있는 사람은 안토니 브렌타노 한 명뿐이었다. 또 하나, 베토벤의 가곡 <연인에게>는 기타(Guitar) 반주로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인데 베토벤이 아는 여성 중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은 안토니뿐이었다.
“오 그대 고요한 눈빛, 사랑스런 모습!
그대 뺨에 흐른 눈물이 땅을 적시기 전에
내가 들이마셔야겠네, 그대의 고통은 나의 것.”
반론도 없지 않았다. 베토벤의 높은 도덕성을 볼 때 친구의 아내와 연애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프란츠와 안토니 부부는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토니는 프란츠에 대해 “최고의 남편”, “나의 훌륭한 프란츠”, “모든 남자들 중 최고”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베토벤과 안토니가 불륜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게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전기작가 앤 베이커는 “안토니는 베토벤을 진심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었다”며, “베토벤은 프란츠와의 우정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고 지적했다.
베토벤은 안토니 브렌타노를 오래도록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1812년의 격정이 지나가고 5년 뒤인 1817년, 베토벤을 만난 파니 자나타시오는 일기에 썼다. “베토벤은 5년 전에 만난 한 여성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베토벤이 자나타시오 가족에게 편지에서 “제가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들 중 그 누구도 제 아내가 되지 않은 게 기쁘기 그지없다”고 밝힌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812년 가을, 베토벤은 일기에 썼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만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그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종교음악인데 왜 이렇게 에로틱할까
모차르트 ‘기뻐하라 환호하라’ K.165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이해하려면 오페라를 먼저 보는 게 좋다고 한다. 협주곡의 주제는 오페라 등장인물처럼 나름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어울리고 갈등한 뒤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되는 과정이 오페라의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다. 그는 1778년, 만하임에서 아버지에게 썼다. “제 머릿속에는 오페라 생각 뿐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 독일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모차르트는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할 때도 누가 “지금 뭐 하고 있냐?” 물어보면 “오페라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의 주목적이던 오페라 <루치오 실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 작품은 청중들의 환호 속에 밀라노에서 26차례 공연됐는데, ‘빛나는 대목들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평범한 작품’이란 미지근한 평을 들었다. 모차르트는 더 이상 새로운 오페라를 주문받지 못했다. 세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오래 머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모차르트는 <루치오 실라>의 주인공 체칠리오 역을 맡았던 카스트라토 베난치오 라우치니(Venanzio Rauzzini)에게 모테트 <기뻐하라 환호하라>(Exultate Jubilate)를 선물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포르타가 쓴 라틴어 가사가 실종됐는데, 뮌헨 궁정 가수로 일하던 라우치니가 마침 그 가사를 갖고 있었다. 라우치니는 자기가 부르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부탁했고, 모차르트가 기꺼이 응했다.
▲ 엠마 커크비가 노래한 모차르트 종교음악집. <기뻐하라 환호하라>는 종교음악이지만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처럼 들린다.
이 작품은 분명히 종교음악이다. ‘모테트’는 성서의 말씀에 바탕을 둔 성가곡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곡은, 종교적인 가사를 사용했지만 음악은 화려한 선율과 풍부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오페라 아리아 모음 같다. 이 작품을 쓸 때 모차르트는 가사의 거룩한 아우라를 뛰어넘어 오페라 쓰는 기분으로 작곡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모테트를 이루는 세 곡의 노래는 협주곡의 세 악장처럼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레시타티보를 제외하면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1773년 1월 17일, 밀라노의 산 안토니오 성당에서 라우치니는 이 곡을 열창하여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증언에 따르면 “라우치니의 노래는 천사와 같았다”고 한다. 첫 악장 알레그로, ‘기뻐하라 환호하라’를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맑은 목소리로 들어보자. 여느 협주곡처럼 1악장 끝부분에는 카덴차도 나온다. 라틴어 가사는 이런 뜻이다.
기뻐하라, 환호하라, 오 너희 축복받은 영혼들이여!
달콤한 찬가를 노래하라. 그대들의 노래에 화답하여,
하늘도 나와 함께 송가를 부르리니.
1악장 알레그로 ‘기뻐하라 환호하라’ https://youtu.be/w4EuQHYEs4U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
1악장이 끝나면 레시타티보가 이어진다. 오르간 반주 위에서 소프라노가 차분히 읊조린다.
친근한 햇살이 빛나고, 구름과 폭풍우도 이제 물러갔네.
정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예기치 못한 평온이 찾아왔네.
어두운 밤이 사방을 뒤덮었으나, 이제까지 두려움에 떨었던 너희,
마침내 기쁨으로 떨치고 일어나라, 그리고 즐거이 바치라,
행복한 새벽에, 한 아름의 백합을.
이어지는 2악장 ‘그대, 처녀들의 왕’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템포는 안단테, 협주곡의 느린 악장에 해당되는데, 현악 반주만으로 부드럽게 진행된다.
모든 처녀들의 왕이시여, 우리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당신은 마음에 탄식을 일으키는 슬픔을 달래주십니다.
2악장 안단테, ‘그대, 처녀들의 왕이여’ https://youtu.be/KpmCQFkiacQ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
마지막 악장은 유명한 ‘알렐루야’로, 소프라노가 빠른 스케일을 화려하게 노래하며 삶의 행복을 예찬한다. 가사는 그냥 ‘알렐루야’ 뿐이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밀라노에서 초연한 뒤 고향 잘츠부르크에서도 두 차례 더 연주했다. 밀라노판의 오케스트라에는 오보에가 둘 있는 반면, 잘츠부르크판은 오보에 대신 플루트가 연주한다. 당시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 오보에 연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영혼을 위로하는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가 노래한 음반은 잘츠부르크판이다.
모차르트 탄생 250년을 맞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런던에서 엠마 커크비를 만난 적이 있다. 이 곡에 대한 그녀의 느낌을 물어보았다.
이채훈 PD : 당신이 부른 <엑술타테, 유빌라테>, 특히 2악장 ‘그대, 처녀들의 왕이여’는 종교음악인데도 어느 세속음악보다도 더 에로틱하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엠마 커크비 : 솔직하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 곡은 초자연적이고 아름답고 온순하지만, 동시에 아주 에로틱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숙한 한 처녀가 모든 사람에게 깊고 놀랄 정도의 색정적인 느낌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의외잖아요. 그러나 이러한 색욕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경계선은 아주 미묘한 것일 뿐이에요. 그것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음악 안에서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모차르트의 <기뻐하라 환호하라>는 인간의 영혼이 성과 속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엠마 커크비는 ‘솔직하게’ 노래함으로써 ‘자유’라는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을 것이다.
드보르작 ‘신세계’는 왜 몽금포 타령과 비슷할까
그리움의 음악, 드보르작 교향곡 9번 E단조 Op.95 ‘신세계에서’
이번 주말부터 추석 연휴다. 찾아 뵐 부모님이 안 계신 사람도 많을 거고, 밀린 월급 못 받아서 더 서러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에서>는 드보르작이 미국에 머물며 고향 보헤미아를 그리워하며 작곡했다.
드보르작은 우리 나라에서 좀 더 인기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미국에서 작곡한 음악들은 인디언의 전통 선율과 흑인 영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멜로디를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 전통 5음계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가령, 첼로협주곡 1악장의 두 번째 주제는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 간다” 우리나라의 뱃노래 선율같다.
드보르작 첼로협주곡 B단조 Op.104 https://youtu.be/gbbajuSywtk (2:20부터)
신세계 교향곡 4악장 주제도 무척 귀에 익숙하다. 신입생 환영회같은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시키면서 “노래야 나와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빰빰빰~~” 하던 선율이다.
드보르작 교향곡 9번 E단조 Op.95 (마리스 얀손스 지휘 바이에른 라디오 방송교향악단)
https://youtu.be/I-zqMPERF-s (31:42부터)
드보르작은 누구나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선율을 사용해서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어냈다. <신세계> 교향곡은 1893년 12월 15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 초연된 이래 100여년 지난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랑받는 교향곡 중 하나다. 짙은 향수로 붉게 물든 이 음악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1악장은 느린 서주로 시작한다. 호른의 시그널과 투티는 낯선 땅에 도착한 불안한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알레그로의 본론에서 호른이 연주하는 첫 주제는 2, 3, 4악장에서도 계속 변형되어 나온다. 두 번째 주제는 흑인 영가풍의 애수어린 선율인데, 드보르작은 이 주제를 다른 노래에서 따 온게 아니라 새로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플루트가 연주하는 G장조의 선율은 <Swing Low, Sweet Chariot>라는 흑인 영가를 닮았다.
2악장 라르고는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주제는 누구나 알 것이다. 윌리엄 암스 피셔는 이 주제에 가사를 붙여서 <Going Home>(우리말로 “꿈속에 그리는 내 고향”)이란 노래를 만들어서 유행시켰다. 3악장 스케르초, 인디언의 축제처럼 흥겨운 리듬이 가득하고 중간 부분에 우리 몽금포타령 비슷한 선율이 나온다. 4악장 피날레는 ‘빠르고 격정적으로’, 앞의 세 악장을 모두 종합한 듯 발그스레한 향수를 가득 머금은 채 마무리한다.
▲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 ▲ 드보르작을 미국에 초청한 자넷 서버 여사(1851~1946)
이 곡에 미국의 음악팬들은 열광했다. 드보르작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그 전해, 1892년 9월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미국 음악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조지 거슈인이나 아론 코플랜드 같은 미국 작곡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드보르작을 초청한 사람은 뉴욕의 자넷 서버(Thuber)라는 분이었다. 이 분은 미국 음악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뉴욕 콘서바토리를 세웠고, 드보르작을 학장으로 초빙했다. 미국 클래식 음악의 시조가 되어 달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자넷 서버가 제시한 연봉은 15,000달러였는데, 이 금액은 당시 환율로 치면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는 연봉의 25배였다고 한다. 드보르작이 미국에 도착한 18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1492년에서 꼭 400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 언론들은 “400년전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세계에 음악의 신세계가 도착하다” 란 제목의 기사로 그를 환영했다.
자넷 서버 여사는 드보르작에게 미국 시인 롱펠로우의 서사시 <하이어워사의 노래>를 오페라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버팔로 빌 같은 인디언 공연을 보여주는 등, 드보르작에게 미국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했다. 드보르작은 미국 음악은 니그로 멜로디에서 무궁무진하게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흑인들의 노래는 부드럽고 열정적이고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대담하고 유쾌하다”고 예찬하며, 이 교향곡에 그러한 요소를 담아 내서 시범을 보인 셈이다. 이 곡이 초연된 뒤 미국 언론들은 “드디어 우리도 미국의 교향곡을 갖게 됐다”고 썼다. 하지만 드보르작은 “이 곡은 뼛속까지 보헤미아의 음악”이라고 말했다.
드보르작은 푸줏간 겸 여인숙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업을 장남 드보르작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음악에 재능이 뛰어난 걸 알고는 열심히 뒷바라지해 주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맏아들이 음악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지만 어머니와 외삼촌이 설득하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드보르작은 위대한 작곡가 중 푸줏간 면허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훗날 영국 언론은 드보르작을 인터뷰 하면서 제목을 “드보르작, 푸줏간의 칼 대신 지휘봉을 잡다” 이렇게 뽑기도 했다.
5살 꼬마 드보르작은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면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귀여움을 받았다. 사람들이 동전을 주면 쪼르르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드리곤 했다. 12살 때 아버지를 도우려고 송아지를 끌고 오다가 진흙탕에 쓰러지기도 했다. 1850년에 드보르작의 고향인 넬라호베제스란 촌동네에 증기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드보르작은 평생 기차 구경하는 게 제일 큰 취미였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6살에 드디어 음악가의 꿈을 품고 프라하로 가게 된다. 이때 아버지와 아들은 손수레에 짐을 싣고, 프라하까지 35Km 함께 길을 걸어서 갔다고 하니, 무척 정겨운 풍경이다. 드보르작이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할 때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도 떠올렸을 것만 같다.
드보르작의 미국 체류는 3년으로 그쳤다. 1893년 뉴욕 증시 붕괴로 공황상태가 됐고, 그를 초청한 자넷 서버 여사가 파산해 버린 것. 드보르작에게 약속한 연봉의 1/4밖에 줄 수 없게 된 서버 여사는 그를 더 잡아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드보르작은 미국 클래식 음악의 탄생에 커다란 자극을 준 게 분명하다. 헨리 크레빌이란 언론인은 이렇게 썼다. “미국 음악계에 1892년~1895년의 기간은 우리 미국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천사와 함께 기거한 세월이었다” 서버 여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 중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드보르작 박사를 미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음악으로 그린 로자 칸나비히의 초상화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309의 안단테
“저는 운율에 맞게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능숙하게 다뤄서 제 마음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화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짓과 손짓으로 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무용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음악가이기 때문입니다.”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7. 11. 8)
모차르트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작곡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오페라 작곡에 열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릿속에 온통 오페라 뿐이라고 썼습니다.
“아버지, 저는 작곡가이자 카펠마이스터가 돼야 할 사람입니다. 신이 주신 이 재능 -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 을 개인 교습으로 소모해 버리기는 싫습니다. 작곡과 비교하자면 피아노는 무시해도 좋습니다. 피아노는, 비록 돈이 되긴 하지만, 제게 액세서리 같은 것입니다. 요즘 제 머리는 오페라 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독일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 (만하임에서 아버지에게, 1778. 2. 7)
오페라에 대한 모차르트의 열정은 기악곡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오페라의 등장인물을 묘사하듯, 모차르트는 기악곡에서도 종종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그렸습니다. ‘음악의 초상화가’ 모차르트가 실제로 사람을 음악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곡이 있습니다.
1777년 10월말, 모차르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만하임에 갔습니다. 아버지는 실직하지 않으려고 잘츠부르크에 머물렀고, 대신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동행했습니다.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으로, “바이올린 연주자가 30명을 넘었고,” “클라리넷이 놀라운 효과를 내고 있었고,” ‘단원들이 모두 장군으로 이뤄진 군대’ 같았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역동적으로 상승하는 음계가 일품이었고, 한 음표 안에서 크레센도*를 연주해서 이른바 ‘만하임 크레센도’ 혹은 ‘만하임 로케트’라 불리는 놀라운 효과를 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이곳의 오케스트라에 열광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곳의 지휘자 크리스찬 칸나비히(1731~1798)와 친하게 어울렸습니다. 1763년, 7살 꼬마 모차르트를 보고 경탄했던 칸나비히는 어른이 돼서 만하임을 찾아온 모차르트를 크게 반겼습니다. 두 사람은 25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로 지냈지요. 모차르트는 그의 지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가 본 지휘자 중 최고”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는 그리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 합니다. “그의 교향곡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느린 템포의 유니슨*이죠.” 하지만 모차르트는 “칸나비히씨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칸나비히씨 집에서 모차르트는 가정 음악회를 열고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6곡 - K.279부터 K.284까지, 최초로 쓴 6곡의 소나타 묶음 - 을 모두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 요한 슈타미츠의 뒤를 이어 만하임 악파를 이끈 크리스찬 칸나비히(1731~1798). 모차르트는 “칸나비히씨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른다”고 썼다
모차르트는 그의 딸 로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작곡에 비하면 피아노 개인 교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모차르트는 로자의 피아노 교습에 무척 공을 들인 듯 합니다. 로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6번 Bb장조를 연주했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K.242 연주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꽤 뛰어난 실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에게 쓴 편지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지요.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309의 안단테는 15살 로자 칸나비히의 초상화와 같은 곡입니다.
“칸나비히씨의 큰 딸 로자는 15살로, 아주 예쁘고 매력적입니다. 총명하고 나이에 비해 침착합니다. 진지해서 말이 적지만, 일단 말을 하면 유쾌하고 다정합니다. 어제도 그는 제게 엄청난 기쁨을 주었습니다. 제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잘 쳤고, 특히 안단테는 표정을 잘 담아서 연주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곡을 작곡했냐” 묻더군요. 로자양의 성격에 꼭 맞게 작곡했다고 대답해 주었지요. 로자양은 이 안단테와 똑같아요.”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7. 12. 6)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309 안단테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http://youtu.be/0NzSmbQsMEY
이 곡에 ‘로자 칸나비히’란 부제가 붙어있지 않은 게 이상하군요. 이 안단테는 진지하고, 유쾌하고, 다정합니다. 그림은 아니지만, 로자가 어떤 느낌의 사람인지 눈에 보이는 것 같지요? 선율이 사람의 성격을 닮았다는 건 모차르트 음악의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모차르트 이후의 근대 음악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과거의 음악과 다르게 들리는 것입니다. <현대음악강의>를 모차르트에서 시작한 작곡가 이건용 선생의 지적입니다. “모차르트의 선율은 생기와 개성이 있고, 한 사람의 살아있는 인물을 보는 듯 합니다. 너무나 쉽게 그 음악의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표정 있는 선율을 사용한다는 건 음악에 등장인물, 즉 캐릭터를 출현시킨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음악 작품은 자신의 고유한 성격과 개성과 운명과 역사를 갖게 됩니다.” (이건용 <현대음악강의> p.27~p.29)
로자 칸나비히에 대한 모차르트의 언급을 보면 피아노 선생으로서 모차르트가 어떤 점을 중요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오른손은 뛰어나지만 왼손이 아주 망가져 있다고 지적합니다. “로자는 재능이 있지만 연주 습관이 잘못돼 있습니다. 그녀는 바른 템포로 연주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철칙을 어릴 적부터 무시하며 피아노를 배워 온 거지요. 하지만 잘 가르치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더군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치면 아무 가망이 없어요. 이런 자세로는 정확한 템포를 지킬 수가 없거든요.” (만하임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7. 11. 14)
모차르트는 로자 칸나비히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제가 그녀의 정규 음악 교사였다면 일단 그녀가 치던 모든 악보를 덮어 버리고, 건반에 손수건을 덮은 채 연습시켰을 거에요. 처음에는 오른손만, 다음에는 왼손만 따로 연습하게 하고, 패시지, 트릴*, 꾸밈음을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빠르게 하도록 하고, 결국 양손이 완벽하게 훈련될 때까지 연습시키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저는 그녀를 일류 피아니스트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러지 못한 게 굉장히 아쉽군요. 로자는 재능이 뛰어나고, 악보를 잘 읽고, 자연스런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감정을 넣어서 연주할 줄 알거든요.” (만하임에서 아버지에게, 1777. 11. 8)
아무튼, 두세 달 돌봐 주니까 로자 칸나비히는 누구 앞에서든 잘 연주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14살 나이의 아마추어 연주자 치고는 그 정도면 꽤 잘 친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모차르트는 “만하임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 으쓱했습니다. “그녀는 곧 ‘세련된 취향’을 갖게 됐고, 트릴도 잘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그녀는 속도 감각도 훨씬 더 예민해졌고, 손가락 놀리는 것도 많이 좋아졌지요. 그 전에는 잘 할 줄 몰랐던 것들입니다. (파리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8. 3. 24)
모차르트 시대에 피아노는 빠르게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1698년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Cristofori)가 최초의 피아노를 발명했습니다. 아직은 하프시코드(독어로 쳄발로, 불어로 클라브생)가 주류였지만, 피아노의 초기 형태인 포르테피아노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1777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만든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해 보고 그 뛰어난 성능과 소리에 깊이 매혹됐는데, 이 C장조 소나타는 새로운 포르테피아노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첫 작품입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은 어땠을까요? 그는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템포를 안정되게 유지하는 왼손 기술이 뛰어났고, 섬세한 느낌을 살린 즉흥 연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하엘 켈리의 증언입니다. “모차르트가 연주할 때의 섬세한 느낌, 민첩한 손놀림, 특히 왼손의 힘있고 당당한 베이스, 그리고 조바꿈할 때의 절묘한 분위기 반전은 나를 경악케 했다.” 모차르트의 전기를 제일 먼저 쓴 니메첵도 이렇게 얘기했지요. “빈에서 그의 피아노 솜씨는 어딜 가나 찬탄의 대상이었다. 자유자재로 건반을 누비는 그의 놀라운 테크닉, 특히 왼손의 베이스는 독보적인 것이었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력은 가장 큰 매력이었다.”
오른손이 감정 표현을 위해 루바토*를 구사할 때도 왼손은 엄격하게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모차르트의 확고한 원칙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으며, 편안하고 자연스런 표정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어떤 연주가 좋은 연주라고 생각했을까요? 한 마디로, “적절한 표정과 감성(taste)을 잘 살려서 마치 자기가 그 곡을 작곡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연주하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만하임에 있을 때 아베 포글러(1749~1814)가 협주곡 C장조 K.246을 연주하는 장면을 본 모차르트는 험한 말로 그를 혹평합니다. “그 사람은 1악장을 ‘프레스토’로 하더니 2악장은 ‘알레그로’로 하더군요. 기가 막혀서 3악장을 어떻게 하나 들어보니까, 맙소사, ‘프레스티시모’로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음표도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았어요. 왼손이 연주하는 베이스를 내가 쓴 악보와 다르게 하지 않나, 심지어 화음과 멜로디까지 악보와 다르게 창작해서 연주하더군요. 아무튼, 그런 속도로 연주하면 뭐가 나오겠어요? 청중들 눈에는 음악도 안 보이고 연주하는 손도 안 보이겠지만, 제가 볼 때 그런 식으로 연주하는 거는 ‘똥 싸는 거’나 마찬가지죠.”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이 말했지요. “모차르트는 어린이가 취기엔 너무 쉽지만 전문 피아니스트가 치기엔 너무 어렵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들 중에는 모차르트가 밉다는 사람이 적지 않더군요. “자기가 잘 친다고 이렇게 어렵게 작곡하다니!” 음정, 박자, 음색, 호흡…. 뭐든 조금만 넘치거나 부족해도 숨을 곳이 없다고 하죠.
모차르트는 자기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연습한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클라비어 연주자 게오르크 리히터(1759~1789) 앞에서 연주한 적이 있는데, 모차르트의 손가락 놀림을 뚫어지게 쳐다 보던 리히터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열심히 땀 흘리며 연습해도 아무 박수도 못 받는데, 모차르트씨, 당신은 애들 노래처럼 그렇게 쉽게 연주하시다니….” 모차르트의 대답입니다. “그래요, 저도 열심히 연습했지요. 더 이상 열심히 안 해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 유니슨 unison : 하나의 선율을 둘 이상의 악기가 똑같이 연주하는 대목을 가리킴.
* 트릴 trill : ‘떤꾸밈음’으로 번역한다. 2도 음정을 빠르게 되풀이 연주하면 떨리는 느낌을 주며, 화려한 장식음의 효과를 낸다.
* 루바토 rubato : 도둑맞은 시간이란 뜻. 감정을 싣기 위해 잠깐 템포를 느리게 잡는 연주를 말한다. 모차르트는 루바토 직후에 바로 원래 템포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츠부르크 관현악의 최고봉
<하프너> 세레나데 K.250
1776년 7월 21 저녁, 잘츠부르크 롤레트 교회의 앞뜰. 잘츠부르크 시장을 지낸 지그문트 하프너씨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축하 음악회가 열렸다. 신랑은 남부 티롤 출신의 상인 프란츠 슈페트. 많은 하객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모차르트가 이끄는 악단이 입장했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당당하고 상쾌한 행진곡 D장조였다.
모차르트 행진곡 D장조 K.249 (야노슈 롤라 지휘 프란츠 리스트 쳄버 오케스트라)
이어서 8악장으로 된 D장조의 세레나데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 연주는 그야말로 ‘음악의 대향연’이었다고 한다. 악사들은 모두 서서 연주했다. 이 곡에는 콘트라바스는 있지만 첼로 파트가 없는데, 첼로는 서서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할 때 아예 빼 버린 것이다. 결혼식 전야제에 어울리는 화려한 팡파레가 울려 퍼진다. 생기있고 발랄한 알레그로 몰토, 결혼식 전야제의 즐거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어지는 2악장 안단테, 3악장 메뉴엣, 4악장 론도에는 바이올린 솔로가 등장하는데, 모차르트가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휘했다.
2악장 안단테, 밤하늘을 수놓는 바이올린의 노래와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상상해 보자. 행복한 결혼 전야제의 분위기를 만끽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3악장은 축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G단조로 돼 있는데, 변화와 대조의 아름다움을 살려서 곡 전체에 탄력을 준다. 중간 부분에는 산뜻한 바이올린 솔로가 활약한다. 4악장은 유명한 ‘론도’, 크라이슬러가 피아노 반주의 바이올린 솔로로 편곡한 뒤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은 모두 이 곡을 연습한다. 바이올린 솔로가 마냥 귀엽고 발랄하게 뛰어노는 것 같다.
이 세 악장은 따로 떼어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연주하기에 손색이 없다. 전체 8악장 중 이 세 악장을 제외한 다섯 악장만 교향곡으로 녹음한 음반도 있다. 이 경우도 작품번호는 K.250이다. <하프너>란 제목으로 알려진 교향곡 35번 D장조 K.385는 6년 뒤인 1782년, 지그문트 하프너씨의 아들이 귀족 작위를 받는 행사를 위해 작곡했다. 이 <하프너> 세레나데와는 다른 곡이니 헷갈리지 마시길….
이어지는 네 악장은 메뉴엣, 안단테, 메뉴엣, 그리고 축제풍의 화려한 피날레다. 이 가운데 6악장 안단테는 매우 특별한 대목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다. 천사들이 모여서 신을 섬길 때는 바흐를 연주하겠지만, 천사들이 행복한 시간에 자기들끼리 놀 때에는 모차르트를 들을 거라고. 이 말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곡이 바로 이 6악장 안단테다.
<하프너> 세레나데 6악장 안단테 (야노슈 롤라 지휘 프란츠 리스트 쳄버 오케스트라)
‘천사들의 합창’이라고 불러도 좋을 6악장은 형식도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론도 형식인데, 첫 주제가 매번 변주곡처럼 바뀌어서 나오니 ‘론도 풍의 변주곡’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첫 주제가 마지막으로 변주되어 나오는 부분(링크 6:19부터),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피치카토로 반주하고 호른과 오보에, 제1바이올린이 차례차례 노래하는 이 대목은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다. 그래서 이 대목은 슬프기까지 하지요. 아름다움의 극치가 슬픔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확인하곤 한다.
<포스트혼> 세레나데 K.320
세레나데는 원래 연인의 창가에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토셀리의 세레나데는 모두 애타게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하면 오페라 <돈조반니>에서 만돌린 반주로 돈조반니가 부르는 노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데’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모차르트의 작품은 대부분 기악 합주곡이다. 잘 아시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Eine kleine Nachtmusik)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세레나데다. 세레나데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하프너>처럼 높은 가문의 결혼식에서 연주한 곡도 있고, 콜로레도 대주교의 영명축일 등 공식 행사의 축하 음악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포스트혼> 세레나데는 잘츠부르크 대학의 수료식을 축하하며 연주한 이른바 ‘졸업 음악’(Finalmusik)이다. 6악장 메뉴엣의 두 번째 트리오에 우편나팔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포스트혼>이란 제목이 붙었는데, 학창시절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뜻이었다.
행진곡 D장조 K.335 & <포스트혼> 세레나데 K.320 (야노슈 롤라 지휘 프란츠 리스트 쳄버 오케스트라)
잘츠부르트 대학 졸업식이 열리던 날, 악사들은 신나는 행진곡 D장조를 연주하며 잘츠부르크 거리를 활보했다. 그래서 이 곡에는 첼로 파트가 없다. 요즘 음악회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는 첼로 파트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떠들썩한 행진을 마치고 행사장에 도착한 악단이 이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시간은 졸업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지휘하는 멋진 세레나데가 젊은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니, 얼마나 근사했을까?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하늘에 별따기인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이 음악이 격려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혼> 세레나데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세레나데 중 마지막 작품으로, 그때까지 모차르트가 작곡한 모든 관현악곡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1779년 8월 3일에 완성된 이 곡은 어떤 교향곡보다 규모가 크며, 7악장으로 되어 있는데도 완벽한 형식미를 보여 준다. 3악장과 4악장은 플루트, 오보에, 파곳이 독주악기로 활약하는 협주교향곡으로, 곡 전체를 풍요롭게 해 준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작곡하기 전 해인 1778년 유럽 최고였던 만하임 궁정악단을 체험했고, 파리에서 유행하던 협주교향곡을 익혀서 직접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 K.297b를 쓰기도 했다. 당시 관현악법에 통달했던 모차르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3, 4악장은 이 세레나데에서 가장 뛰어난 대목이다. 모차르트는 자유음악가가 된 뒤인 1783년 3월,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이 3, 4악장만 떼어서 ‘협주교향곡’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2악장과 6악장은 생동감 있는 메뉴엣인데, 특히 6악장의 두 트리오에서는 피콜로와 포스트혼이 차례로 등장하여 다채로운 색깔을 선보인다. 5악장은 어두운 D단조의 안단티노인데, 축제 음악의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인생이 언제나 쉽고 즐겁지만은 않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장중한 팡파레로 시작하여 경쾌하게 흐르는 1악장부터 피날레답게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7악장까지, 이 곡은 완벽한 균형과 완성미를 보여준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통치 아래 머물렀지만 이미 음악으로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있다. 교향곡이 아닌데도 교향곡을 뛰어넘는 <포스트혼> 세레나데…. 귀족의 하인이 만든 작품인데도 이 곡은 이미 드넓은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도약하고 있다.
‘세계평화 오케스트라’를 아시나요?
지휘자 게오르그 숄티(1912~1997)
“우리 음악가들은 유럽 연합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정치인들은 못 하는 거죠?”
헝가리 태생의 지휘자 게오르그 숄티(1912~1997)는 1992년 버킹검 궁에서 열린 80회 생일 축하음악회에서 말했다. 그를 존경하는 세계의 음악가 13명이 함께 바그너 <지그프리트의 목가>를 연주한 직후였다. 정치인을 질타하는 노대가의 느닷없는 발언에 찰스 황태자 등 참석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숄티의 발언은 깊은 여운을 남겼고, 1995년 세계평화 오케스트라(World Orchestra for Peace) 창단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분쟁으로 얼룩진 세상이지만, 24개국 40여개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음악가들로 이뤄진 ‘세계평화 오케스트라’는 해마다 음악의 힘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연주회를 열고 있다.
http://youtu.be/BF4gN7j0Ow8 세계평화 오케스트라 - 숄티의 비전
게오르그 숄티는 유태인으로, 2차대전 중에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에서 지냈다. 잘 알려진 대로, 히틀러는 바그너를 숭배하여 독일민족 우월주의의 아이콘으로 그의 음악을 활용했다. 따라서 바그너 음악은 유태인 학살의 악몽과 결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사람은 유태인인 숄티였다. 정치와 이념을 떠나 오직 음악에 헌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빈필을 지휘하여 녹음한 20장 짜리 LP는 지금도 역사적 명연으로 남아 있다.
그는 전쟁 중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다녀야 했고, 소련이 점령한 헝가리에서는 공산당의 폭력을 목격했다.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평화에 대한 갈망이었다. 숄티의 필생의 꿈 ‘세계평화 오케스트라’가 태어난 1995년은 UN 창립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해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첫 연주회에서는 로시니 <빌헬름 텔> 서곡, 바르톡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베토벤 <피델리오> 2막 피날레가 연주됐다. 선곡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빌헬름 텔> 서곡은 개최국 스위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의 작품은 동서양의 화합을 기원하기 위해서, 베토벤 <피델리오>는 인간의 자유와 형제애를 기리기 위해서 선곡했다. “전쟁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면, 평화를 지키려는 의지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건설해야 한다.” UN 헌장의 이 구절은 곧 숄티의 신념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숄티는 두 번째 연주회를 지휘하지 못하고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러시아의 마에스트로 발레리 게르기에프였다. 그는 숄티의 정신에 깊이 공감하여, 다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바덴바덴으로 달려와 지휘대에 섰다. 이번에는 25개국 51개 오케스트라에서 85명의 음악가가 모였다. 바쁜 음악가들을 전세계에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세계평화 오케스트라는 처음에는 2~3년에 한번 가까스로 모였지만 숄티 서거 10주년인 2007년 비로소 안정된 운영체계를 갖추고 네덜란드, 헝가리, 벨지움,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 게오르크 숄티 경은 80회 생일 기념 음악회에서 말했다. “우리 음악가들은 유럽 연합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정치인들은 못 하는 거죠?”
▲ 1997년부터 세계평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 게르기에프
2010년에는 창단 15년 겸 말러 탄생 150년을 기념하여 런던과 잘츠부르크에서 말러 교향곡 4번과 5번을 연주했고, 2012년에는 숄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존경하는 안젤라 게오르규 등 세계적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기념 음악회를 열였다. 2013년부터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문호를 열어 젊은이들이 스스로 평화로운 미래를 가꿔나가는 마당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운영방식도 평화롭다. 뛰어난 연주자라고 더 대접해 주는 게 없다. 연주자들은 골고루 돌아가며 자리를 배정받고, 섹션 리더도 곡마다 바꾼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도 무척 어렵다고 한다. 전세계 악단마다 다른 피치로 연주하는 나름의 습관과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조율 과정 자체가 평화를 만드는 일인 셈이다. 단원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이 악단의 살아있는 정신을 동료 음악가들에게 전파한다. 작년에는 영국의 BBC 프롬스에서 말러 6번 <비극적>을 연주했다. 처음 만난 단원들이 호흡을 맞춰서 이 대곡을 연주한다는 건 웬만한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http://youtu.be/wp_CAXClplM 말러 교향곡 6번 A단조 <비극적>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 세계평화 오케스트라 연주)
(곡 해설 : 이 곡을 작곡한 1904년, 말러는 인생의 정점에 있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받았고, 아름다운 부인 알마와 사랑하는 두 딸이 있었으니 인생의 행복을 거의 다 이룬 셈이었다. 말러는 하필 그 때 왜 이렇게 비극적인 교향곡을 썼을까? 알마는 훗날 <회상록>에서 밝혔다. “교향곡 6번은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며 예언적인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의 인생을 음악적으로 예견했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세 번의 타격을 받았고, 세 번째 타격은 그를 쓰러뜨렸다.” 4악장에는 운명의 해머 소리가 세 번 나온다. 딸의 갑작스런 죽음, 빈 오페라 감독직 상실, 그리고 심장병의 발병…. 말러는 자신에게 닥쳐올 비극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지구촌을 순회하며 음악의 힘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세계평화 오케스트라…. 음악에 담긴 사랑, 평화, 자유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느낄 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다. 1995년 창단 연주회 때 게오르그 숄티가 밝힌 메시지는 지금도 이 오케스트라의 화음과 더불어 메아리친다.
“우리는 이렇게 조화롭게 살며 이토록 아름답게 연주합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인들도, 좌든 우든, 같은 일을 하기 바랍니다.”
창단 20년을 맞는 올해 세계평화 오케스트라는 안타깝게도 연주회를 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세계가 갈등과 상처로 신음하고 있는 이 가을, 이 오케스트라의 침묵이 유달리 허전하다.
“파리는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곳”
모차르트의 파리 여행과 협주교향곡 Eb장조
모차르트의 삶에서 가장 우스꽝스런, 씁쓸한, 아니 무척 화나는 풍경이 있다. 1778년, 22살 모차르트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사랑하는 알로이지아와 생이별을 한 채 어머니와 함께 그해 3월 파리에 도착했다. 샤보 백작부인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의 일이다.
“저는 도착해서 30분 동안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큰 방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샤보 부인이 들어오더니 대뜸 연주를 해 보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꽁꽁 언 손으로 가련하고도 비참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가 막힌 일은, 그 부인과 신사 양반들이 음악은 듣지도 않고 스케치에 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의자와 탁자를 향해 연주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 파리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8. 5. 1
파리의 귀족들은 갑(甲)이었고 모차르트는 을(乙)이었다. 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어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듣는 이의 태도가 불량하면 베토벤처럼 피아노를 쾅 닫고 나갈, 그런 입장이 아니었다. 샤보 부인 일행의 무례한 행동에 모차르트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냥 참고 피아노를 쳤다. 이때 연주한 곡은 피셔의 메뉴엣 주제에 의한 변주곡 K.179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무도 음악을 듣지 않자 절반쯤 치고 나서 그냥 일어서려 했다. “이 피아노로는 잘 연주할 수가 없군요. 좀 더 나은 악기를 준비해 주시면 다시 날을 잡아서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모차르트의 변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장황하게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피셔의 메뉴엣 주제에 의한 변주곡 K.179
https://youtu.be/GskaK-Cqpb8 (피아노 클라라 뷔르츠)
누구든 자기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면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쳐 줄 수 있는 소탈한 모차르트였지만, 이렇게 “음악은 듣지도 않고 스케치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음악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파리의 귀족들은 어엿한 어른이 된 모차르트의 음악을 귀로 듣지 않았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았다. 7살 신동 모차르트의 묘기에 환호했던 파리 사람들은 22살 모차르트의 원숙한 음악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편지는 이어진다.
“이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씁쓸한 일들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텐데요.”
파리에 도착한 지 한 달 남짓, 모차르트는 이미 황당한 일을 겪고 있었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직후 서둘러 작곡한 협주교향곡 K.297b의 악보가 실종되어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재능에 위협을 느낀 파리의 음악가들이 꾸민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파리에는 여러 명의 독주자가 등장하는 협주교향곡 형식이 유행이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장르의 곡으로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대 최고의 연주자였던 플루트의 요한 벤틀링, 오보에의 프리드리히 람, 바순의 게오르크 리터, 호른의 지오반니 푼토 등이 마침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도 모차르트의 새 작품을 무척 설레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 직전에 확인해 보니, 나흘 전에 복사를 맡긴 악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극장 관계자들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출신의 극장 악단장인 캄비니가 꾸민 음모라고 의심했지만, 진상을 밝힐 수 없었다.
이 불쾌한 사건은 훗날 모차르트가 “파리는 음악에 관한 한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며 진저리를 치게 한 원인이 됐다. 모차르트는 이 협주교향곡이 연주되지 않은 것은 콩세르 스피리튀엘의 매니저인 르그로에게도 엄청난 손해라고 주장했다. “이 곡은 크게 성공했을 거에요. 지금은 아무리 원해도 이 곡을 연주할 수 없지요. 그렇게 훌륭한 연주자 4명을 어떻게 또 모을 수 있겠어요?” - 파리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1778. 7. 9
네 명의 솔로이스트들은 유럽의 정상급 음악가였다. 당시 유럽 최고 악단인 만하임 악단의 수석 플루티스트 벤틀링, 모차르트가 사중주곡 K.370을 작곡해 줄 정도로 뛰어난 오보이스트였던 프리드리히 람, 만하임 바순 악파의 시조로 모차르트가 가장 좋아한 바순 연주자 리터, 이 세 사람은 1777년 만하임에서 모차르트와 만나서 친구가 된 사이였다. 푼토는 체코 출신의 호른 연주자로, 모차르트는 “이 사람의 연주가 근사하다”고 편지에 쓴 바 있다. 훗날 베토벤도 이 사람을 위해 호른 소나타 Op.17을 작곡했다.
이 곡의 자필 악보는 지금까지 실종 상태다. 20세기초, 전기작가 오토 얀의 유품 중에서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의 필사본이 나왔는데, 이게 바로 파리에서 실종된 것과 같은 작품이라는 의견이 대두했다. 모차르트는 1778년 10월 3일자 편지에서 “이 작품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악기 편성이 바뀐 것은 연주 상황에 맞게 모차르트가 개작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 독주 악기에 포함됐던 플루트가 없고, 대신 클라리넷이 들어가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음악학자 프리드리히 블루메는 이 곡의 모든 대목에서 모차르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각 악기의 특성을 잘 살렸다. 무엇보다 각 연주자들이 대등한 주인공으로서 맘껏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공평하게 안배한 솜씨가 모차르트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모차르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 Eb장조 K.297b
https://youtu.be/786txTJf8ns (바렌보임 지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류재준의 발견, 무조음악은 따분하다는 편견을 버려라
글로리아 아르티스 훈장, 11월에는 류재준을 만나러 가자
조성진의 쇼팽 콩쿨 우승에 모두 환호하는 가운데, 폴란드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낭보가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드 정부가 주는 글로리아 아르티스상이 한국의 작곡가 류재준에게 돌아간 것. 이 상은 20세기 작곡계의 거장인 펜데레츠키와 피에르 불레즈, 지휘의 황제 발레리 게르기에프, 피아니스트 부흐빈더와 윤디리, 영화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 등 세계 예술을 이끄는 분들이 받은 영광의 훈장이다. 유럽에서 실력파 작곡가로 활약해 온 류재준이 이제 최고 수준의 작곡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유능한 작곡가가 드물고 이들이 재능을 펼칠 마당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 이 소식은 우리 음악계에 커다란 자극을 줄 수 있는 사건이 분명하다.
류재준은 재작년 홍난파 음악상을 거부해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호도하는 행사에 들러리가 되기 싫다는 이유였다. 인간과 시대에 대해 고뇌하는 의식 있는 작곡가의 음악세계가 궁금했다. 지난 10월 20일(화) 오후, 서초구의 앙상블 오푸스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11월 1일 세계초연 예정)와 ‘마림바 협주곡’(11월 29일 세계초연 예정)의 작곡을 마친 뒤였다.
▲ 류재준 작곡가 / 2008년 03월05일 제 12회 베토벤 이스터 페스티벌 류재준 진혼 교향곡 초연 공연 실황
- 글로리아 아르티스 훈장, 축하합니다. 수상 소식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제가 요즘 많이 지쳤어요. 외국에서 위촉받은 작품으로 돈을 벌어서 한국에서 연주회 만들면서 돈을 쓰고, 이러면서 살고 있거든요. 근데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으면 이런 게 한번 와요. 그럼 또 계속 하고… 채찍이죠.” (웃음)
- 재작년 홍난파 음악상 거부하셨는데, 그 때문에 음악계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으셨나요?
“저는 제가 쓴 곡이 오래 남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거기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은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도전한다, 싸움 건다, 그래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제 입장에서 옳은 말을 했을 뿐인데요. ‘Do right thing!’ 이게 다에요. 돌 맞는다고 말 바꿀 수는 없잖아요.”
-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가 11월 1일(일) 오후 5시 예술의 전당에서 세계 초연될 예정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쉽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너무 불행한 시대입니다. 작년에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냥 파묻어 두고 지나가려 하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고, 남한과 북한 모두 전체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DNA가 다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 스스로 뭔가 헤쳐나갈 용기를 갖기 위해 작곡했습니다.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환희’를 표현하려 한 거죠.”
- 선생님은 한 곡마다 하나씩 메시지를 담으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이번에 연주할 신포니에타는 어두운 시절에 ‘환희’를 일깨워드리고 싶어서 쓴 작품이고요, 가령 첼로 소나타는, 제가 94년에 체첸에 가서 전쟁의 참상을 본 적이 있어요. 모든 게 파괴됐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더군요. 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 상상할 수 있으세요? 그 폐허 옆에 호수가 있었는데, 전쟁만 없었다면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겠죠. 첼로 소나타는 전쟁 나기 전 체첸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작곡했어요. 고요한 호숫가에 아이들이 뛰놀고, 노부부가 앉아 있고,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이 곡도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려 했는데, 결국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에 대한 아픔을 담고 있어요. 체첸 얘기를 모르면 이 첼로 소나타를 연주하기 어려울 거에요. 왜냐, 첼로 소리에 절규를 담고 있거든요. 처음 시작할 때 하이톤이 나와요. 첼로 연주자가 묻더군요. ‘왜 바이올린 음역을 첼로로 하나?’ 바이올린으로 하면 절규하는 느낌이 안 나오거든요. 첼로로 해야 긴장감이 있지요.”
류재준 첼로 소나타 (첼로 요하네스 모저, 피아노 윌리엄 윤)
- 아무래도 현대음악이니까 어렵지 않을까요?
“이 힘든 시기에 어렵게 시간 내서 음악 들으러 왔는데 “저게 뭐야?” 그러면 곤란하죠. 시간이 아깝게 만들면 안 되지요. 일부 작곡가들이 자기중심적 음악 어법으로 작곡하는 거, 물론 존중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 철학을 표현하는 데 그칠 뿐, 전달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음악(音樂)이지 음학(音學)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많은 작곡가들이 음악을 학문으로 가져가 버리죠.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음악? 그건 소용이 없잖아요. 모든 사람이 듣고 행복을 느끼고 함께 나누는 그 테두리를 넘지 않으려고 해요.“
- 시간 내서 음악 들으러 온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말씀, 정말 맘에 드는데요. 하지만, 류선생님 음악도 무조음악이니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무조음악 맞아요. 하지만 제 음악은 조성적이라고들 해요, 감정도 있고요. 들으면 즐거울 거에요. 현대음악도 여러 가지 있잖아요. 아르보 페르트도 있고, 영화 음악도 있고요... 평론가나 기자들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음악을 너무 카테고리로 나눠서 설명해 버리는 거죠. ‘쇤베르크는 12음 기법’, 이렇게 설명하면 사람들은 쇤베르크를 안 들으려 하죠.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는 바그너, 말러 저리가라 할 정도로 좋은 음악인데, 사람들이 안 들어요.
- 저는 음악 해설할 때, “20세기 음악을 실제 음악회장에서 연주하면 가서 들어라, 재미있는 실험이 나오거든, 하지만 집에서 혼자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 왔는데요.
“제 음악은 집에서 되풀이 들어도 될 음악이에요. 현대음악 하면 ‘아방가르드’를 생각하는데, 물론 전위적인 실험으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음의 소재를 확대한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절대 ‘아방가르드’가 현대음악의 전부가 아니거든요. 제 이름 아는 사람 중에도 제 음악 들으신 분들이 별로 없어요.”
(이 대목에서 류재준은 나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 막 작곡을 마친 마림바 협주곡 - 올 11월 29일 서울 바로크합주단 창립 50주년 연주회에서 세계 초연될 작품 - 의 3악장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들려주었다. 악보를 보니 무조음악이 분명한데, 톡톡 튀며 생동하는 마림바의 움직임과 산뜻한 음색의 대비가 즐거웠다. 실제 오케스트라가 마림바와 어우러지는 음악회장에서 들으면 무척 근사할 것 같았다. 감상을 마치고 다시 얘기를 나눴다.)
- 무조음악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무척 놀랐어요. 대단하십니다.
“제발 청중들이 좀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안 오니까 한국에선 음악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아무리 좋은 걸 가져와서 떠들어 봐야 반응이 없으니까요. 저는 제 음악이 좋거든요. 같이 들으면 좋아하실 거에요.”
- 스승인 펜데레츠키 선생의 영향이 강한가요?
“펜데레츠키 선생님은 저한테 레슨을 해 주신 적이 없어요. 그냥 옆에 데리고 다니셨죠. 해외를 같이 가시며 제 비행기표, 호텔비 대 주시고 그냥 데리고 다니기만 하셨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것을 계속 보여주기만 하셨죠. 작곡은 가르칠 수가 없다, 내가 네게 작곡을 가르치면 제2의 펜데레츠키가 될 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선문답 같군요.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들이 쌓이니까 충분히 소화하기가 어렵더라구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그 말씀들을 소화해 내려고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무조음악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 물으셨는데, 그걸 제가 20년 동안 공부한 거에요. 저는 재능이 없어요. 은숙이 누나(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작곡가 진은숙)처럼 귀가 좋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당구도 못 치고, 바둑도 못 두고, 고스톱도 못 쳐요. 정말 아무 것도 못 해요. 다행히 저는 책 읽고, 글 쓰고, 오래 앉아 있는 건 잘 해요. 저는 한곡 쓰는데 최소 6~7개월이 걸리거든요. 작은 곡이든 큰 곡이든...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요. 음표 하나 써 넣을 때마다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저는 천재가 아니에요. 죽어라, 죽어라 할 뿐이지...”
▲ 류재준 작곡가와 김민 음악감독, 아르토 노라스 첼리스트, 보르코프스키 지휘자
- (류재준은 고3때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와 9번 <환희의 송가>를 카세트 테입이 늘어지도록 들은 뒤 음악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고3때 음악 시작해서 바로 서울음대에 합격했고, 거의 독학으로 세계 정상급 작곡가가 된 분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믿을까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저는 작곡도 연습을 해요. 오늘도 이선생님 오시기 전에 바흐 <샤콘느> 필사하면서 연습했어요.”
- 공부와 연습은 다른 건가요?
“네, <샤콘느>를 이렇게 써 보고 저렇게 써보고 하는 게 제 연습이에요. 베토벤 대푸가를 이렇게 저렇게 써 보고... 음악은 품위가 있어야 해요. 고급스럽다는 것과 품위있다는 건 다르지요.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심지어 거지도 품위가 있어야 해요. 인간의 존엄이랄까, 품위는 꾸밀 수가 없는 거죠. 바흐 악보를 필사하다 보면 화음 하나하나를 품위 있게 하려고 얼마나 바흐가 열정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어요.”
- 엄청나게 노력하는 능력이 곧 천재라고 주장하고 싶은데요? 무명 시절에 막노동을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96~97년, 폴란드 유학 다녀온 뒤 막노동을 했어요. 숙소가 없어서 남성 전용 찜질방에서 묵은 적도 있어요. 저 장애인이에요. AID 아파트에 이삿짐 나를 때, 제일 무거운 게 뭐냐 하면 문 두 개 달린 냉장고, 당시 주부들의 로망이었죠, 이거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서 지금도 아파요.”
- 정말 고생의 연속이었군요.
“네, 아직도 한국에선 제가 마련한 음악회 아니면 제 작품을 별로 연주 안 해요. 외국은 좀 다르죠. 제가 유럽에선 돈을 꽤 많이 벌어요. 작품 위촉료, 저작권료 굉장히 크거든요. 그런데 그걸 한국에서 다 써요. 11월 1일 연주회도 마이너스 3,000만원이에요. 아무튼, 외국이든 한국이든 인정받고 못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연주자들이 좋아하고 청중들이 좋아하면 되는 거죠.”
- 맘 편하게 작곡에 전념하시면 좋을텐데요.
“사실, 독일, 폴란드 등 자기 나라로 국적 옮기라는 나라들이 있어요. 근데, 제 나이가 딱 어줍잖은 애국심 가질 나이거든요. 국민교육헌장 안 외면 맞던 세대고, 선생님들이 유신 찬양하는 거 듣고 자랐어요. 아, 끔찍하죠.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것들인데… 아무튼 제가 국적을 유지하는 이유는 첫째, 세계 작곡계에 한국 국적 작곡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거, 또 하나는 제가 갖고 있는 유럽의 소사이어티와 한국 음악계가 관계를 유지하려면 통로가 있어야 하고, 당분간은 제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해요.”
▲ 2013년 서울국제음악제, 류재준 작곡가와 첼리스트 아르토 노라스와 함께 / ▲ 2015 서울국제음악제. 첼리스트 백나영과 함께
인터뷰는 인근 찻집으로 옮겨서 두 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의 음악세계에 대한 얘기는 물론 로스트로포비치, 루돌프 부흐빈더, 아르토 노라스 등 세계적 연주자들과의 만남에 얽힌 일화 등 흥미진진한 얘기를 많이 해 주었다. 놀랍도록 솔직하고 열정적인 그의 말들은 내게 그의 음악 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대해 큰 공부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청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중들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아주 작은 노력을 그에게 돌려 줄 때가 된 게 아닐까? 11월 1일 예술의 전당에서 또 만나기로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쇼팽 콩쿨 우승, 조성진과 윤디리
#1. 도이치 그라모폰이 11월 발매한 조성진의 ‘2015 쇼팽 콩쿠르 우승 실황’ 앨범은 인터넷 음반 판매 차트에서 아이유 등 톱 아이돌 가수의 새 음반을 제치고 1위에 올랐고, 내년 2월 2일로 예정된 ‘쇼팽 콩쿠르 우승자 갈라 콘서트’는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50분만에 좌석 2500석이 매진됐다.
▲ 11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조성진의 쇼팽 콩쿨 연주 실황 음반
#2. 10월 30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윤디리(33)는 시드니 심포니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면서 1악장 초반부터 음표를 빼먹고 박자를 앞당겨 치더니 급기야 오케스트라와 어긋나면서 연주를 멈춰버렸다.
조성진의 쇼팽 콩쿨 우승에 모두 환호했다. 이 낭보에 젊은층에서 쇼팽 붐이 일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이어졌다. 조성진은 폴리니, 아르헤리치, 당타이손, 치머만 등 피아노 음악의 빛나는 별들과 나란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공통되게 지적하듯, 콩쿨 우승이 피아니스트의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미츠코 우치다 등 쇼팽 콩쿨에서 우승을 놓친 분들이 빛나는 연주 경력을 보여준 경우도 많다. 반대로, 동서냉전이 심하던 1958년 미국인으로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뒤 팬들의 환호에 정신을 놓은 반 클라이번도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윤디리가 연주 중에 대형 사고를 냈다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 클라이번처럼 추락의 길을 가는 거라고 속단하면 안 되겠지만, 젊고 발랄한 그의 연주를 사랑해 온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윤디리가 누구인가? 2,000년 쇼팽 콩쿨에서 18살 나이로 최연소 우승의 기록을 세운 피아니스트 아닌가? 당시 쇼팽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피아노협주곡 1번을 완벽하게 연주하여 세계인을 매혹시킨 젊은이 아닌가? 무엇보다, 이번 쇼팽 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조성진을 채점한 사람 아닌가?
▲ 2000년 쇼팽 콩쿨 우승자 윤디리
▲ 2015년 쇼팽 콩쿨 우승자 조성진
그는 조성진에게 꽤 후한 점수를 주었다. 25점 만점인 세 차례의 예선에서 매번 24점을 주었고, 10점 만점인 결선에서는 9점을 주었다. 다시 말해, “무척 잘 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다, 우승하더라도 2% 부족하니 앞으로 열심히 해라”,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점수였다. 이런 그가 한국의 음악팬들 앞에서 큰 사고를 저질렀으니,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인가. 그날 연주회 자리에 있지 않았기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음악팬들은 윤디리의 실수를 곱게 봐 주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연주에 대해 지휘자를 탓하는 듯한 동작을 취한 점, 그날 밤 페이스북에 할로윈 복장의 사진을 올린 점에 대해 가차없이 비난이 쏟아졌다.
다시 조성진을 생각한다. 예술가의 길은 외롭고 험난하다. 끝없는 자기 연마가 있을 뿐, 한눈을 팔거나 정신을 놓는 순간 추락이 있을 뿐이다. ‘팬’들은 어떠한가? 나를 포함, 이른바 ‘팬’들은 변덕스럽고 무책임하다. 조성진이 우승한 지금은 이렇게 환호하지만, 만약에 그가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 언제든지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젊은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더 외로울 것인가.
2013년 월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주목받는 유망한 연주자’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주목받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는 믿을 사람은 자기자신 뿐이라는 쓰디쓴 진실을 어린 나이에 이미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조성진은 “진짜 음악가가 되는 건 지금부터”라며, “음악은 감정적 깊이가 있어야 하므로 아직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으니 일단 든든하다.
조성진은 쇼팽을 ‘고귀하게, 극적으로, 시적으로’ 연주해야 하며 ‘노스탈자’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렇게 연주해서 인정받았다. 그는 “쇼팽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하며, 쇼팽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쇼팽의 음악혼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콩쿨 우승이란 영예로 자연스레 연결된 셈이다. 심사위원 중 한명인 드미트리 알렉세예프는 “테크닉과 사운드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느끼는 미적 감각이 더 중요하며, 쇼팽 음악의 영혼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조성진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켰다. 이번에 거둔 성과를 잘 살려서 그만의 개성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https://youtu.be/614oSsDS734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 E단조 Op.11 (조성진, 2015 쇼팽 콩쿨 결선 연주 실황)
“어쨌든 쇼팽은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을 거에요”
쇼팽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 피아노 협주곡 1번… 이제 조성진의 연주로 듣자
조성진의 쇼팽콩쿨 실황음반이 판매 차트에서 인기 아이돌 그룹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내년 2월로 예정된 그의 귀국 연주회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조성진의 쾌거로 우리나라에 클래식 붐이 일고 있다니 반갑다. 조성진이 이번 콩쿨 결선에서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어떤 곡일까? 최소한의 사전지식을 갖고 들으면 좀 더 잘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성진을 아끼는 마음으로, 쇼팽에 대한 사랑도 함께 키워 나가기 바라며 이 곡에 얽힌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한다.
조성진의 쇼팽 해석
조성진은 쇼팽을 ‘고귀하게, 극적으로, 시적으로’ 연주해야 하며 ‘노스탈자’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쇼팽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하며, 쇼팽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Op.11 (연주 조성진, 2015 쇼팽 콩쿨 결선 실황)
https://youtu.be/614oSsDS734
이 곡에 담긴 쇼팽의 마음
쇼팽(1810~1849)은 39살의 짧은 생애 중 전반부는 폴란드에서, 후반부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가 숨을 거둔 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매장됐지만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장에 안치됐다. 언제나 고국을 그리워 한 그의 유언에 따라 누나 루드비카가 그의 심장을 폴란드로 가져온 것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생애 한 가운데, 즉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 초연한 곡이다. 이 곡에는 러시아의 압제에 허덕이는 조국 폴란드의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첫사랑인 음악학교 동급생 콘스탄차 그와드코프스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 국립극장. 쇼팽의 고별 연주회가 열렸다. 만 20살이 된 그는 더 넓은 세계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쇼팽은 이 곡에 온 마음을 담아서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특히 동경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2악장 로망스는 콘스탄차를 생각하며 쓴 부분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2악장에 대해 직접 설명했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낭만적인, 반쯤 우울한 마음으로 수많은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는 느낌을 살리려 했어. 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스며드는 밤처럼, 약음기를 단 바이올린이 반주하도록 작곡했어.” 폴란드 민속 무곡풍의 빠른 피날레가 끝나자 쇼팽을 사랑하는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 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차 그와드코프스카 (1810~1889). 바르샤바 음악원의 동급생으로 뛰어난 소프라노였다.
이 콘서트의 2부에서는 콘스탄차가 출연해서 로시니의 '돈나 델 라고'의 카바티나를 불렀다. 쇼팽은 “콘스탄차가 이렇게 훌륭하게 노래하는 걸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다”고 썼다. 쇼팽은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라와 '폴란드 민요에 의한 환상곡'을 연주했다. 사랑하는 조국과 작별하는 마지막 연주를 폴란드 민요로 장식한 것이다.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은잔에 가득 담아 쇼팽에게 선물했다. 친구들을 기억해 줘, 조국을 잊지 말아 줘…. 조국을 떠나야 하는 쇼팽의 마음은 콘스탄차 생각에 무거웠다. 쇼팽은 그녀를 처음 만난 뒤 “이상형을 발견했고,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꾸었다”고 했지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이날 연주가 끝난 뒤 쇼팽은 콘스탄차에게 반지를 주었다. 이 선물이 무슨 뜻이었는지 콘스탄차는 몰랐을 것이다. 콘스탄차는 쇼팽에게 장식용 리본을 주었다. 두 사람은 어떤 약속의 말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고, 그녀가 준 리본은 훗날 쇼팽이 친구 티투스의 편지를 묶어서 보관하는 데 썼다고 한다.
1830년 11월, 쇼팽이 빈에 도착한지 1주일만에 바르샤바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쇼팽은 조국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당시 빈에서 친구 마친스키에게 쓴 편지. “나는 어쩌면 좋을까. 부모님이 내 결정에 맡긴다고 하셨는데, 자네의 의견과 지시를 따르고 싶네. 파리로 갈 것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곳의 지인들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라고 하지만…. 자살을 할까. 아, 이젠 자네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아버지와 친구들은 만류했다. 쇼팽의 가냘픈 몸으로는 견디기 어렵고, 총칼이 아니라 예술로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쇼팽은 안타까웠다. 봉기의 대열 한 귀퉁이에서 북이라도 쳐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쇼팽은 콘스탄차가 혁명의 와중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몹시 걱정했다. 슈투트가르트 일기의 한 구절. “콘스탄차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인들이 욕보이고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납치해 갔을지도 모른다. 아아, 나의 생명이여!” 쇼팽은 친구 마친스키에게 썼다. “어쩌면 좋을지 제발 말해 줘.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강한 힘을 줬던 사람(콘스탄차)의 의견을 들어서 적어 보내 줘. 그의 말에 따라 내 태도를 결정하겠어.”
폴란드 민중의 봉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총칼에 짓밟혔다는 소식에 쇼팽은 미칠듯 하느님을 저주했다. 통곡과 눈물을 거두고 쇼팽은 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쇼팽은 여전히 콘스탄차를 그리워했다. “우린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재회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한없이 괴로워.” 그는 친구 마친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눈물을 억누르며 콘스탄차의 안부를 물었다.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같은 거야. 그녀가 나를 잊었다면 난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외롭지 않게 살고 있다고 전해 줘. 그녀가 친절하게 내 안부를 묻거든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줘. 아니,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너무 외롭고 불행하다고 전해 줘. 아니, 내가 죽고 난 뒤 내 뼛가루는 그녀 발밑에 뿌려져야 한다고 전해 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구성
♬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조 (빠르고 장엄하게, 처음~21:00) : 가장 긴 악장이지만, 쇼팽의 시심에 마음을 맡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젖어들게 된다. 관현악의 서주로 시작, 4:58 지점에서 피아노가 영웅적인 첫 주제를 연주한다. 5:28 지점, 첫 주제의 후반부는 고귀한 슬픔을 노래하며 찬란하게 펼쳐진다. 7:35 지점은 E장조의 제2주제, 따뜻한 햇살처럼 빛나며 달콤한 상념에 젖게 한다.
♬ 2악장 로망스 라르게토 (로망스, 다소 느리게, 21:20~30:42) : 현악기가 꿈꾸는 듯 고요한 서주를 연주하면 호른의 부드러운 화음을 배경으로 22:10부터 피아노의 맑디맑은 노래가 펼쳐진다. “콘스탄차에 대한 쇼팽의 사랑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나도 그런 마음 알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 3악장 론도 비바체 (생기있게, 30:42~끝) : 크라코프 지방의 민속춤인 크라코비야크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찬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점점 고조된다. 조국에 대한 쇼팽의 노스탈자는 애수어린 색깔을 띄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저류에는 이토록 찬란한 기쁨이 살아 있었다는 걸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몇 가지 상식
이 곡은 1번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두 번째 협주곡이다. 한 해전인 1829년 작곡하여 1830년 3월 초연한 첫 협주곡 F단조가 나중에 출판됐기 때문에 2번이 됐다. 1번 E단조는 1833년, 2번 F단조는 1836년에 각각 출판됐다. 쇼팽은 피아노 연주기법을 극한까지 개발한 천재였지만 관현악 작곡은 다소 서툴렀던 모양이다. 1번의 경우, 오케스트라 파트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타우지히(Karl Tausig, 1841~871)가 손질했고, 요즘도 이 판본을 주로 사용한다.
쇼팽과 콘스탄차, 뒷얘기
1832년, 콘스탄차가 큰 부자인 요제프 그라보스키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누이동생 이사벨라가 전해 주었다. 쇼팽은 크게 실망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이렇게 무감각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아름다운 저택이 그렇게 큰 매력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젠 알았다.” 쇼팽은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아픈 마음을 달랜 걸까? 자기 열정과 이상을 상대에게 투사하기 쉽고, 그래서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첫사랑…. 쇼팽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콘스탄차는 결혼한 뒤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35살에 실명한 뒤 79살까지 살았다. 쇼팽이 죽고 난 뒤 친구 한 명이 눈 먼 콘스탄차에게 쇼팽의 전기를 읽어주었다. 쇼팽이 자기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콘스탄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쇼팽은 나의 정직한 요제프만큼 좋은 남편이 되지는 못했을 거에요.”
‘주피터’ 교향곡처럼 찬란한 교회 소나타 C장조
교회 소나타라는 장르는 다소 생소하다. 모차르트가 쓴 17곡의 교회 소나타(Church Sonata, 또는 복음 소나타 Epistle Sonata)는 한 악장으로 된 기악 합주곡이다. 이 중 16번 C장조는 <주피터> 교향곡을 무색케 하는 찬란한 작품이다.
모차르트 교회 소나타 16번 C장조 K.329 (베르트랑 드 비유이 지휘 비엔나 라디오 교향악단 연주)
https://youtu.be/kh3W8uKC_t8
파리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본 모차르트는 결국 잘츠부르크로 돌아온다. 뮌헨에서 재회한 알로이지아 베버는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백작의 속박 아래 있었다. 이 C장조 교회 소나타는 1779년 봄, 잘츠부르크 성당의 미사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
이 작품은 바흐와 헨델 시대의 종교음악과 달랐다. 옛 종교음악이 “주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노래했다면 모차르트는 “주여, 우리에게 생(生)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한다. 바흐의 음악이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얘기했다면 모차르트의 교회 소나타는 하늘에서 음악이 쏟아져 내린다. <주피터> 교향곡처럼 당당하게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속박을 훌쩍 넘어 하늘과 땅을 넘나들며 자유를 예찬한다. 언뜻언뜻 들리는 오르간 소리는 잘츠부르크 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반짝인다.
▲ 모차르트가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한 잘츠부르크 대성당. 이 곳에서 모차르트의 미사곡과 교회 소나타가 연주되곤 했다.
C장조 교회 소나타는 빛나는 삶의 긍정으로, 콜로레도 대주교로 상징되는 봉건 속박과의 마지막 결별을 예고하는 듯하다. 잘츠부르크 시절의 끝물에 쓴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는 종교음악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였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지배와 굴종의 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신의 사랑 안에서 자유를 노래하며 도약한다. 바이올린이 8도, 12도를 넘나들며 노래할 때 인간과 신은 대립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되어 어울린다.
교회 소나타는 잘츠부르크 성당의 미사에서 복음서나 사도 서한을 낭독하기 전에 연주했다고 한다. 이 C장조 소나타는 대관식 미사 C장조 K.317이 초연된 1779년 4월, 함께 연주된 것으로 보인다. 오보에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바이올린 두 파트, 콘트라바스, 오르간으로 편성된 대규모 악단이 연주하는 이 곡은 생동감이 넘치며 화려한 색채감을 맛보게 해 준다.
▲ 모차르트가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한 잘츠부르크 대성당. 이 곳에서 모차르트의 미사곡과 교회 소나타가 연주되곤 했다.
▲ 모차르트가 연주할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한 파이프 오르간
오르간 협주곡을 닮은 마지막 교회 소나타
16번 소나타가 모든 경계를 너머 솟구치는 인간 정신의 비상(飛上)이라면, 마지막 교회 소나타인 17번 C장조 K.336는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다. ‘대화’가 바탕이 되는 협주곡에 심취했던 모차르트는 성당에서 연주할 음악마저 협주곡 양식으로 작곡했다. 1780년 이 오르간 협주곡을 연주하며 모차르트는 크게 만족하여 이렇게 기도했을 것 같다. “주여, 이 멋진 곡으로 당신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차르트 교회 소나타 17번 C장조 K.336 (헬무트 빈셔만 지휘 도이체 바흐 졸리스텐 연주)
https://youtu.be/MVxjYroPmF8
관현악곡인데 왜 소나타라고 부를까? 바로크 시대에 성악곡인 칸타타(Cantata)는 종교 칸타타와 세속 칸타타, 두 갈래로 나뉘어서 발전했다. 기악곡인 소나타(Sonata)도 마찬가지로 세속 소나타와 교회 소나타의 두 갈래로 발전했다. 17세기에 태동한 세속 소나타는 매우 복잡하게 분화하며 모차르트의 시대에 다양한 독주곡과 교향곡으로 진화했다. 반면, 교회 소나타는 미사곡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모든 성당에서 연주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1781년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난 뒤 콜로레도 대주교는 교회 소나타를 폐지하고 대신 합창으로 된 모테트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더 이상 교회 소나타를 창작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18세기까지 다른 성당에서 교회 소나타가 연주된 경우가 있긴 하겠지만, 모차르트의 작품만 오늘까지 살아서 전해진다.
얼어붙은 강 아래 흐르는 핀란드의 민족혼
김대진과 수원시향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암울한 시대, 음악은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는 강력한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시벨리우스(1865~1959)는 러시아의 압제 아래 있던 20세기 초, 핀란드인의 긍지와 자존심을 살려 낸 작곡가로 존경받는다. 올해, 시벨리우스 탄생 150년을 맞아 지휘자 김대진과 수원시향이 그의 교향곡 전곡에 도전했다. 우리가 즐길 만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넓혀 준 고마운 시도였다. 10월 23일에는 교향곡 2번을 연주했는데, 특히 피날레는 완벽한 호흡으로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 되는, 벅찬 감동의 순간을 연출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D장조 Op.43
https://youtu.be/ehzVw4iavXY (2악장 9:20부터, 3악장 22:14부터, 4악장 27:06부터)
1902년 3월 8일, 헬싱키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 D장조가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의 자치권을 폐지하고, 의회와 언론을 탄압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등 핍박을 가하고 있었다. 2년 전 초연된 교향시 <핀란디아>는 아직 연주 금지였다. 핀란드 민중을 선동한다는 이유였다. 차디찬 억압의 나날이었지만 핀란드 사람들의 혼은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처럼 살아 있었다.
새 교향곡의 피날레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평론가들은 “절대적인 걸작”, “모든 예상을 뛰어넘은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곡은 그의 일곱 교향곡 중 지금도 가장 널리 사랑받는다.
1901년 2월, 시벨리우스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의 라팔로를 여행했다. 우울한 나날, 몸과 마음이 엉망이었던 그는 이탈리아 해안의 휴양지에서 휴식을 찾았다. 교향곡 2번은 그때 착수했다. 남쪽 나라의 자연에서 잉태된 작품이라 해서 이 곡을 시벨리우스의 ‘전원’ 교향곡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변에 흐르는 우수어린 분위기, 강렬한 피날레로 통합되는 전체의 구성으로 볼 때 당시 핀란드 현실에 대한 작곡가의 단호한 응답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1악장은 현악기와 목관의 대화로 시작한다. 목가적인 분위기지만, 한숨과 탄식을 속으로 삼키는 느낌도 있다. 핀란드의 자연을 노래하는 듯한 모티브들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뒤 우수어린 첫 주제로 돌아온다. 2악장은 현의 피치카토와 목관의 민요가 어우러지고, 변화무쌍한 템포와 강약으로 핀란드 민중의 아픔을 노래한다. 3악장은 마지막 피날레를 이끄는 전주곡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빠른 패시지에 이어 ‘느리고 부드럽게’(Lento e soave)라고 표시된 부분에서는 호른을 배경으로 오보에, 플루트, 첼로가 차례로 노래한다. (23:48, 26:24) 조용한 선율에 이토록 깊은 사랑을 담았다니, 이 교향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아닐까?
앞의 세 악장을 지배하던 우수어린 분위기는 마지막 피날레에서 걷잡을 수 없는 환희로 폭발한다. 현악이 주제를 노래하면 거대한 심호흡에 이어 금관이 찬란하게 포효한다. 구름을 뚫고 솟구쳐 파란 하늘을 마주한 기쁨이랄까, 눈물이 범벅된 채 웃고 있는 얼굴이라고 할까. 이 대목의 금관은 우리의 ‘아리랑’과 비슷한 느낌이라 더욱 흥미롭다. 브루크너의 피날레를 연상케 하는 엄청난 클라이맥스에 이어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아래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첫 주제를 행진곡처럼 수놓고 금관이 가세하는 끝부분은 환희의 극치다.
이 피날레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시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과 같은 느낌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상당히 무식한 해설로 보일 수 있지만, 이 교향곡을 처음 녹음한 지휘자 로베르트 카자누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시벨리우스의 친구인 그의 해석은 작곡자 자신의 걸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당국의 검열 앞에서 작곡 의도를 공공연히 밝히기 어려웠던 시벨리우스가 친구 카자누스에게 자기 속마음을 설명했을 개연성이 있다. 이 곡에 붙은 ‘독립’(Independence)라는 별명은 엉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1900년 무렵의 시벨리우스
시벨리우스의 일곱 교향곡은 어떤 점이 가장 큰 특징일까? 그는 1907년, 헬싱키에서 구스타프 말러(1860~1911)를 만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우리 둘 다 최근 발표한 교향곡(시벨리우스 3번, 말러 6번) 때문에 청중들을 많이 잃었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시벨리우스가 말했다. “다양한 모티브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교향곡의 엄격한 형식과 논리가 중요합니다.” 말러가 대답했다. “아니요,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합니다.” 말러는 모든 것을 넣다 보니 교향곡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진 반면, 시벨리우스는 같은 내용이라도 엄격한 논리로 다듬다보니 교향곡이 압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1번과 2번이 비교적 긴 반면, 3번 이후의 작품은 다소 짧다. 3번과 5번은 악장도 세 개로 줄었고, 7번은 아예 한 악장으로 돼 있다. 각 악장의 템포 지시도 굉장히 복잡해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정교하게 엮어놓은 결과일 것이다.
시벨리우스 교향곡은 어떤 순서로 듣는 게 좋을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2번을 제일 먼저 들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친숙한 작품인 <핀란디아>와 내면적으로 연결돼 있고, 낭만시대 교향곡을 조금 들어보신 분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곡이다. 이어서 2번의 앞뒤에 있는 1번과 3번을 듣고, 마지막으로 4, 5, 6, 7번을 듣는 게 나을 것 같다.
6차례에 걸친 김대진과 수원시향의 시벨리우스 대장정이 이제 막바지다.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곡 프로젝트를 통해 탄탄한 호흡을 쌓아 온 김대진과 수원시향은, 올해 시벨리우스 사이클에서 숨은 걸작들을 청중들 앞에 내놓았다. 지휘자 김대진은 “새로운 곡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지만, 존재감 있는 오케스트라의 필수 덕목”이라고 말했다.
11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마지막 연주회에서는 교향시 <핀란디아>와 교향곡 1번을 연주한다. 시벨리우스 교향곡에 대한 김대진의 설명. “시벨리우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었다가 마지막에 터뜨리는 사람입니다. 그 강렬한 마지막이 시벨리우스 교향곡의 매력이죠.”
피아노는 어떻게 악기의 왕이 됐을까?
베토벤에게 혼쭐난 슈타이벨트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쳐 낭만시대로 음악이 확장되면서 피아노는 단연 악기의 왕으로 떠올랐다. 17세기초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1655-1731)가 처음 발명한 피아노는 정식 이름이 ‘그라비쳄발로 콜 피아노 에 포르테’(크게도 작게도 연주할 수 있는 그라비쳄발로)였다. 이 때문에 초기 피아노는 ‘피아노포르테’나 ‘포르테피아노’로 불린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피아노의 성능이 개선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피아노를 위한 음악도 엄청나게 풍요로워졌다. 낭만주의 음악의 탄생은 피아노의 발달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초의 피아노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소리를 냈을까? 피아노를 위해 쓴 최초의 작품으로 꼽히는 로도비코 지우스티니(Lodovico Giustini, 1685-1743)의 전주곡을 들어보자. 신동석씨가 연주하는 악기는 현존하는 피아노 중 가장 오래된 크리스토포리의 1720년제 포르테피아노다. 소리가 기대 이상으로 맑고 따뜻하다.
https://youtu.be/H3JJjCTetHY (포르테피아노 연주 신동석)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도 생전에 피아노를 만져 볼 기회가 있었다. 1736년 드레스덴을 방문한 바흐는 질버만이 갓 제작한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해 본 뒤 “음색이 평범하고 높은 음역의 소리가 약하며 액션*이 너무 뻣뻣하다”고 혹평했다. 질버만은 무척 서운했지만, 곧 단점을 보완하여 바흐의 인정을 받았다.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자였던 바흐는 특별히 피아노를 위해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피아노 음악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그의 두 아들이었다. ‘북독일의 바흐’로 불린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1714~1788)은 1742년부터 1787년까지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고, <클라비어 연주교본>을 써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런던의 바흐’로 불린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찬(1735~1782)은 1768년 대중 앞에서 처음 피아노를 연주하여 피아노 붐을 일으켰다.
피아노는 유럽 각처에서 급속히 받아들여졌다. 1777년, 런던에는 브로드우드(Broadwood)의 피아노 공장이 들어섰고, 파리에는 에라르(Erard)의 명품 피아노가 등장했다. 모차르트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슈타인(Johann Andreas Stein)의 피아노를 보고 매료된 것도 1777년 10월이었다. 모차르트는 “(슈타인의 피아노는) 소리가 언제나 고르고, 삐걱거리지 않고, 건반을 누른 뒤 아무 소음이 나지 않는다”고 찬탄했다.
“뮌헨에서 저는 여섯 곡의 소나타를 외워서 연주했습니다. 마지막 D장조 소나타는 슈타인의 피아노로 치니까 훨씬 절묘하게 들렸어요. 무릎으로 작동하는 장치 덕분에 이 악기는 다른 악기보다 훨씬 우수했죠.”
2년 전 슈페트(Späth)의 포르테피아노를 위해 쓴 6곡의 소나타(K.279~K.284)를 슈타인의 피아노로 연주해 보니 훨씬 만족스러웠다는 것이다. 슈타인의 피아노는 페달을 발이 아니라 무릎으로 누르도록 돼 있었다. 슈타인이 이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설명한 모차르트는 “좀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모차르트는 이 피아노를 살 돈이 없어서 입맛만 다셔야 했다. 1781년 크리스마스 전야, 모차르트와 클레멘티가 빈에서 만나 역사적인 경연을 벌일 때도 포르테피아노를 사용했다.
자유음악가로 성공의 정점에 오른 1784년, 모차르트는 안톤 발터(Anton Walter)의 피아노를 구입했다. 7년 사이에 슈타인의 피아노보다 더 좋은 게 등장했다는 뜻이니, 피아노 제작 기술이 얼마나 빨리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발터의 피아노는 다섯 옥타브였고, 요즘처럼 발로 누르는 페달이 붙어 있었다. 모차르트의 D단조 협주곡과 C단조 소나타 이후의 피아노곡들은 대부분 이 피아노를 위해 쓴 곡들이다. 하이든도 1790년 무렵, “더 이상 하프시코드를 치지 않으니 대신 피아노를 사라”고 친구에게 충고한 적이 있다.
슈타인의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한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과 엠마누엘 바흐의 작품
https://youtu.be/kC_PQFzaCKI
▲ 크리스토포리가 개발한 초기 피아노 ▲ 본의 베토벤 생가에 보관돼 있는 브로드우드의 그랜드 피아노
베토벤이 빈에 데뷔한 1792년, 피아노는 악기의 왕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열정적이고 호탕한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연주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힘과 호소력과 인간미가 있었다. 그는 거대한 파도처럼 질주하는 즉흥연주로 대중을 압도했다. 베토벤은 당시 빈에서 가장 많은 피아노를 망가뜨린 피아니스트였다. 이그나츠 자이프리트(Ignaz Seyfried)가 슈포어(Spohr)에게 한 말. “한번은 음악회에서 베토벤이 무슨 이유인지 화가 난 듯 첫 화음을 두드렸는데 한꺼번에 피아노 줄이 6개나 끊어졌어요.” 베토벤이 협주곡을 연주할 때 악보 넘기는 역할을 맡았던 안톤 라이햐(Anton Reicha)의 증언.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퉁겨진 피아노 줄을 잡아 올리고 끊어진 줄 사이에 낀 해머를 제자리로 돌려놓느라고 더 바빴습니다. 베토벤이 연주를 마칠 무렵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줄을 잡아당기고 엉킨 해머를 풀고 페이지를 넘겨야 했기 때문에 베토벤보다 제가 더 열심히 연주한 셈이었어요.” 베토벤의 ‘거장다운’ 연주를 찬탄한 칼 체르니는 “베토벤에겐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피아노가 필요하다”며 사람들의 양해를 구했다. 이 말은 베토벤이 피아노를 때려 부수듯 연주한다는 것을 듣기 좋게 표현한 것이었다. (아놀드 숀버그 <위대한 피아니스트> p.105~125)
베토벤이 ‘훨씬 더 좋은 피아노’를 갖게 된 건 청력을 완전히 잃은 1818년이었다. 영국의 토마스 브로드우드는 음역이 여섯 옥타브가 넘는 훌륭한 그랜드 피아노를 베토벤에게 선물했다. 오늘날의 피아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멋진 제품을 베토벤이라는 거장에게 선물한 것 자체가 홍보 효과가 컸는데, 베토벤이 몹시 기뻐하여 감사의 말을 남겼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피아노는 내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제물을 아폴론 신에게 바칠 제단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 ‘제단’ 앞에 앉아 틀린 음들을 두드리곤 했다. 여리게 연주할 때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강하게 연주할 때는 줄이 끊어졌다. 이 신성한 ‘제단’은 끊어진 줄들이 엉켜서, 폭풍우가 휘저어 놓은 가시덩쿨이 되고 말았다. 베토벤이 1818년 완성한 어마어마한 대곡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실제로 이 그랜드 피아노를 치면서 작곡한 게 아니라, 마음의 귀에 울려 퍼진 피아노 소리를 받아 적은 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Op.106 (연주 파울 바두라 스코다, 1815년 브로드우드 피아노)
https://youtu.be/NFPQ9LxLw3s
1800년, 일반음악신문(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를 치고 모든 사람들이 음악을 배운다”고 썼다. 신흥 시민계급의 집집마다 피아노가 있었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지 여부가 교양의 척도였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프란츠 리스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비르튜오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크라머, 두섹, 훔멜, 겔리넥, 뵐플, 스타이벨트 등의 인기는 이미 리스트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요젭 뵐플(1773~1812)은 유쾌하고 낙천적인 품성의 소유자로, 청중들을 즐겁게 해 주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피아노로 동물의 소리를 흉내내고 ‘고요한 바다, 폭풍 · 천둥 · 번개, 다시 고요한 바다’를 묘사하여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다니엘 슈타이벨트(1765~1823)도 엄청나게 인기를 끈 엔터테이너였는데, 음악적 깊이는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트레몰로 주법으로 청중들의 넋을 빼 놓는 동안, 함께 무대에 오른 영국 여자가 탬버린을 미친 듯 흔들어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슈타이벨트의 부인으로 소개된 이 여자는 가는 곳마다 탬버린 레슨으로 돈을 벌었는데, 이 때문에 프라하에서는 엄청난 양의 탬버린이 팔렸다고 한다. 팬들의 환호에 취해서 거들먹거리던 슈타이벨트가 1800년, 베토벤과 실력을 겨루다가 혼쭐이 난 얘기가 전해진다.
베토벤 vs 슈타이벨트 (영국 방송에서 재연)
https://youtu.be/qT8cBX893ic
슈타이벨트는 첫 대면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악보를 대충 훑어본 뒤 “제법이군”, 내뱉듯 말했고, 이 거만한 태도가 베토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며칠 후 정식으로 즉흥연주 경연이 열렸다. 당시 귀족들은 뛰어난 연주자들의 경연을 무척 즐겼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을 후원하고 로브코비츠 공작이 슈타이벨트를 후원했다. 두 연주자는 한 곡씩 번갈아 연주하고, 우열을 가릴 때까지 점점 더 어려운 기교를 선보여야 했다.
▲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과 다니엘 슈타이벨트(1765~1823)
도전자인 슈타이벨트가 먼저 연주했다. 그는 자기 곡의 악보를 옆에 내려놓은 채 으르렁거리는 폭풍을 멋지게 묘사했다. 청중들은 환호하며 베토벤에게 시선을 돌렸고, 베토벤은 심호흡을 하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옆에 놓인 슈타이벨트의 악보를 휙 훑어보고 청중들에게 주욱 보여준 뒤, 보면대에 거꾸로 올려놓았다. 앞 부분 네 마디를 무뚝뚝하게 연주한 베토벤은, 이 주제를 뒤집고, 변주하고, 어마어마한 즉흥연주를 덧붙여서 청중을 압도했다. 슈타이벨트는 판정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패배한 게 분명했고, 베토벤이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베토벤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줄행랑을 놓은 그는, 로브코비츠 공작이 황급히 따라가서 붙잡으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이란 사람이 빈에 있는 한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다시는 빈에 나타나지 않았다.
베토벤이 경쟁자들을 모두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대한 건 아니었다. 독일 혈통의 영국인 요한 크라머(1771~1858)도 베토벤과 실력을 겨룬 적이 있는데, “감정 표현은 베토벤이 뛰어났지만 테크닉은 크라머가 더 완벽했다”는 평을 받았다. 베토벤도 그가 “테크닉에 관한 한 최고”라고 흔쾌히 인정했다. 크라머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C단조 피아노협주곡을 듣고 나오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진다. “나 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만들지 못할 거야!” 베토벤은 허세와 위선을 참지 못했을 뿐, 정직한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했다.
* 피아노는 연주자가 건반을 치면 해머가 줄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므로 건반과 해머를 연결하는 기계 장치가 필요한데, 이것을 ‘액션’이라 부른다.
베토벤과 쇼팽의 협주곡은 왜 이렇게 다를까
낭만시대 초기의 잊혀진 피아니스트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약 50년 동안 피아노는 엄청난 속도로 진화했고, 이에 비례하여 피아노 음악도 풍성해졌다. 베토벤의 <황제> 이후에 나온 피아노 협주곡, 하면 일단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떠오르는데, 이 두 곡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 사이에는 어떤 피아노 음악들이 세상에 나왔을까? 이 시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는 모차르트, 클레멘티, 베토벤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베토벤 이후의 피아니스트는? 쇼팽과 리스트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 이전에 활약한 피아니스트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피아노 교본을 써서 누구나 아는 칼 체르니, 모차르트의 제자로 이중 트릴의 명수였던 요한 네포무크 훔멜, 쇼팽의 ‘녹턴’에 영향을 준 영국 출신의 존 필드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피아노 음악은 21세기 스마트폰 기종만큼이나 현란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헤쳐간 피아니스트 중에는 변화 자체를 거부한 존 크라머 같은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한 이그나츠 모셸레스도 있었다.
▲ 존 크라머(1771~1858)는 87살이나 살며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모두 목격했다. 한때 베토벤을 능가하는 테크닉을 자랑한 그는, 낭만시대의 새로운 연주기법에 적응하기를 거부했다.
▲ 이그나츠 모셸레스(1794~1870)는 급격히 변하는 피아노의 첨단 유행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존 필드(1782~1837)는 쇼팽의 녹턴이 자기 작품의 인기를 앞지르자 질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독일 혈통의 영국인 존 크라머(1771~1858)는 당대의 거장 클레멘티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한때 “베토벤보다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은 크라머는 훗날 영국에서 악보 출판업을 했는데, 베토벤의 협주곡 5번을 출판하며 ‘황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87살까지 장수를 누리며 고전 시대와 낭만시대를 모두 겪은 그는, 낭만시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스타일이 너무 저속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하여 ‘기름처럼 매끄럽게 흐르는’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당시 모든 피아니스트들은 작곡가를 겸하고 있었다. 크라머는 200곡의 소나타와 9곡의 협주곡 등 많은 피아노곡을 썼지만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가로 여겨졌고, 살아 있을 때 이미 세상에서 잊혀졌다.
이그나츠 모셸레스(1794~1870)는 죽음을 앞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소연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예민한 감성의 음악가’이자 ‘고상하고 신사다운 인간’으로, 크라머처럼 장수하며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겪었다. 그는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기 위해 세 번이나 연주 스타일을 바꾸었다. 젊은 시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숭배한 고전주의자 모셸레스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들을 동료 음악가들에게 열심히 알렸다. 그는 쇼팽, 리스트, 탈베르크의 음악을 알게 된 뒤 자기 테크닉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효과에 위축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오랜 전통의 가장 좋은 요소들을 유지하면서 두 악파 사이의 중용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하며 테크닉을 계속 연마했다. “쇼팽의 음악이 너무 달콤하고 연약하여 심오한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던 그는, 쇼팽 자신의 연주를 들은 뒤 생각을 바꿨다. “쇼팽의 조바꿈은 아마추어가 쓴 것처럼 어렵고 비예술적으로 보였지만, 그 자신이 요정 같은 손가락으로 매끄럽게 연주하는 걸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쇼팽은 음악 연주의 세계에서 오직 한 명뿐인 독특한 존재다.”
모셸레스는 살리에리, 베토벤이 신뢰한 후배였고 어린 멘델스존의 스승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나누었다. 그는 8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썼지만 쇼팽과 리스트의 그늘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악가인 동시에 너그러운 인격자였던 그는, 급변하는 피아노의 세계를 포용하려고 꾸준히 연습했지만 힘에 부쳤다. 말년에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주식’으로, 때로 현대음악을 ‘간식’으로 취하며 조용히 지냈다.
존 필드(1782~1837)는 쇼팽의 녹턴(야상곡)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적인 연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스타일도 쇼팽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거장 클레멘티의 수제자였다. 돈계산이 빨랐던 클레멘티는 어김없이 수업료를 챙겼고, 피아노 회사를 차린 뒤엔 제자에게 하루 종일 매점에서 피아노를 치며 홍보하는 일을 시켰다. 키가 크고 창백한 존 필드는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낸 셈인데, 그가 무뚝뚝한 성격을 갖게 된 건 이런 수업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교가 완벽했고 ‘꿈꾸는 듯한 비애’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연주할 때 표정과 쇼맨십이 전혀 없었고 불필요한 동작을 거의 취하지 않았는데, 이를 본 프란츠 리스트는 “클레멘티가 손등에 동전을 얹어놓고 가르친 게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며 비꼬았다. 그는 파리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었지만 “병실에서 갓 나온 재주꾼”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파리에 갓 데뷔한 쇼팽에게 쏟아진 찬사 중 하나는 “존 필드만큼 훌륭하다”는 평이었다. 존 필드는 1814년부터 녹턴(야상곡)을 발표해서 인기가 높았는데, 1830년 이후 쇼팽의 녹턴이 자기 작품보다 더 사랑받게 되자 몹시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아놀드 숀버그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p.141~147)
존 필드 녹턴 2번 C단조
https://youtu.be/2bx66RJ1m94 (피아노 존 오코너)
녹턴은 파리 살롱에서 즐겨 연주된 레퍼토리였고, 악보도 가장 잘 팔렸다고 한다. 유작으로 남은 쇼팽의 ‘녹턴’ C#단조는 처음부터 녹턴은 아니었다. 1830년의 자필 악보에는 그냥 ‘느리게, 짙은 표정으로’(Lento con gran espreessione)라고 돼 있었는데, 쇼팽이 죽은 뒤 누나 루드비카가 출판업자에게 보여주면서 ‘녹턴풍의 렌토’라고 써 넣었기 때문에 ‘녹턴’으로 분류됐다고 한다.
쇼팽 녹턴 C#단조 (유작)
https://youtu.be/m5qeuVOIbHk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멜랑콜릭한 정서로 가득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협주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들려준다. 훔멜, 필드, 모셸레스,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피아니스트들은 작곡가를 겸했는데, 이들이 쓴 피아노 협주곡들도 한결 같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비슷한 우수어린 느낌이다. 19세기 전반, 낭만시대 초기의 음악가들이 공유한 정서, 그것은 ‘멜랑콜리’가 아니었을까?
슈타미츠, 살리에리, 디터스도르프 등 18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은 대체로 갈랑트 스타일*의 화사한 작품을 썼다. 그것은 고전시대 초기 궁정 음악에서 기대되던 일반적인 정서였고, 자연스레 ‘음악의 규범’(norm of music) 또는 ‘보통 음악’(normal music)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초에는 이 멜랑콜리가 ‘음악의 규범’이자 ‘보통 음악’의 특징이 된 게 아닐까? 이 시기, 음악가들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이었지만 성공의 문은 좁았고 생존은 불안했다. 갑자기 펼쳐진 자본주의와 시민사회에서 음악가들은 마음속에 꿈과 사랑을 잃지 않으려 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팍팍한 현실의 충돌이 결국 ‘멜랑콜리’라는 정서로 표출된 게 아닐까?
모셸레스 피아노 협주곡 3번 G단조
https://youtu.be/WmILM1ruuFE (피아노 미하엘 폰티)
미학자 김동규는 ‘멜랑콜리’를 한 마디로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심미적 감정이자, 서구 예술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 정조”라고 정의했다.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시작된다.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광적인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탄생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은 누구나 멜랑콜리커가 될 수 있다. 멜랑콜리커는 격렬한 정념의 힘을 통해서 일상인의 사유범위와 상상력의 한계를 초과하는 영역에 접근한다.”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p.357~p.358) 서구 예술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낭만시대 초기 음악의 특징이며, 특히 이 시기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예술가는 시대의 자식이지만, 그 시대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발휘할 때만 살아남고 기억된다. 18세기 후반, 얼핏 비슷하게 들리는 수많은 음악 중 모차르트 음악이 군계일학처럼 뛰어났다면, 19세기 전반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오늘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널리 연주되지만 이와 흡사한 정조를 들려주는 훔멜, 필드, 모셸레스,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다른 작곡가들의 협주곡들은 거의 다 잊혀졌다.
* 갈랑트(gallant) 스타일 : 18세기 중반, 귀족 중심의 어럽고 복잡한 푸가를 버리고 노래하기 쉽고 단순명료한, 선율 위주의 음악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찬 바흐, 요한 슈타미츠 등이 이끈 이 새로운 흐름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흡수되어 근대 음악의 씨앗으로 발전했다. ‘갈랑트’란 말은 ‘감각있고, 섬세하고, 교양있다’는 뜻의 형용사로, ‘이성에게 멋지게 보여서 사랑을 구한다’란 뉘앙스도 있다고 한다. 19세기 초 낭만시대의 협주곡들이 들려주는 멜랑콜릭한 분위기도 일종의 ‘구애하는’ 느낌 아닌가 생각되어 흥미롭다.
프란츠 리스트와 최초의 리사이틀
그의 ‘의역’ 작품들로 보는 19세기 음악 풍경
피아노 음악의 역사에서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비르튜오소였다. 오늘날 ‘리사이틀’이라 부르는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연 사람이 바로 리스트였다. 그때까지 음악회는 여러 음악가가 함께 출연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840년 6월 9일,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리스트는 혼자 무대에 올랐다. 그는 후원자의 도움 없이 연주 생활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역사상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리사이틀’이란 말도 충격이었다. ‘리사이틀’이란 말은 성서 구절을 낭송한다는 뜻인데, 피아노 연주회가 ‘리사이틀’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의 자기 고백이라도 된단 말인가? 리스트는 대중들을 향해 말했다. “연주회, 그것은 나 자신이다.” 1839년에는 이런 말도 했다. “내 작품을 연주하는 나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나는 혼자다. 내 음악회는 독백(soliloquy)이다.” 이듬해인 1840년 ‘독백’이란 단어를 버리고 사용한 게 바로 ‘리사이틀’이란 말이었다.
피아노를 옆으로 놓아 청중들이 피아니스트의 옆모습을 보도록 한 것도, 피아노 뚜껑에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해 가도록 한 것도, 피아니스트가 무대 측면에서 등장하도록 연출한 것도 리스트가 처음이었다. 그의 ‘리사이틀’에는 3,0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고, 이런 ‘리사이틀’이 1,000번 넘게 열었다. 리스트에 대한 팬들의 열광을 시인 하이네는 ‘리스트 열병’(Lisztomania)이라 불렀다.
그의 화려한 연주는 청중들을 압도했다. 여성들이 그의 연주에 까무러치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가 녹색 장갑을 낀 채 무대에 서면 여성들이 몰려와서 옷과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고, 그가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나 끊어진 피아노줄을 집어가려고 다퉜고, 그가 마시다 남은 홍차를 향수병에 담아 가려고 줄을 섰다. 리스트 자신이 말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회장을 연주한다.” 그는 매니저를 데리고 다닌 최초의 연주자였다. 여섯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스페인에서 러시아까지 전 유럽을 누빈 그는 오늘날의 락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던 훔멜에게 배우려 했지만 수업료가 너무 비쌌다.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무보수로 지도해 준 사람은 살리에리와 체르니였다. 1819년, 8살 난 리스트를 처음 본 체르니의 회상. “병약해 보이는 그 아이는 피아노 앞에서 술 취한 듯 흐느적거렸기 때문에 바닥에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의 연주는 불규칙하고, 단정치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건반 여기저기를 손가락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자연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내가 준 악보가 무엇이든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는 이미 자연이 내려준 피아니스트였다.”
1823년, 12살의 리스트는 빈의 레두텐잘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베토벤도 와 있었다. 베토벤은 ‘신동’을 찬양하는 세상 사람들의 수다를 싫어했지만, 며칠 전 비서 안톤 신틀러의 소개로 만난 이 소년에게 매료된 듯 하다. 이날 연주회가 끝난 뒤 베토벤은 무대에 올라가서 리스트를 안아 올린 뒤 볼에 뽀뽀를 해 주었고, 리스트는 이 사실을 평생 자랑스럽게 회상했다.
리스트는 스무살 때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됐다. 그의 연주 인생은 1838년 헝가리 페스트의 대홍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자선연주회를 열면서 본 궤도에 올랐다. 그는 빈에서 자신이 피아노로 편곡한 베토벤 <전원> 교향곡을 연주했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와 <디아벨리> 변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원래 여섯 차례 계획했던 연주회는 청중들의 요청으로 네 번이나 더 연장해야 했다. 그는 피아노에 머물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2만4000 플로린은 개인이 낸 수재민 구호성금 중 가장 큰 액수였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리스트는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이 됐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는 말했다. “리스트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를 화려한 비르튜오소로만 보는 것은 피상적인 인식이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성직자가 될 생각을 했다. 결국,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1847년에 은퇴하지 않았는가.”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의 작품 중에는 러시아, 체코,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가를 피아노로 편곡한 것도 있다. 연주여행을 위해 방문한 나라마다 국가를 연주해 주었기 때문이다.
리스트는 당연히 자기가 쓴 작품들을 연주했지만, 바흐부터 쇼팽까지 피아노 레퍼토리 전체를 무대에 올렸다. 오늘날의 리사이틀과 같은 선곡 형태를 그가 최초로 선보인 셈이다.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한 것도 중요한 레퍼토리였다. 그는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했는데, 이 피아노 편곡판들은 “오케스트라보다 더 오케스트라답다”는 다소 과장된 평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편곡은 영어로 Transcription, 우리말로 ‘옮겨적기’라 하는데, ‘19세기의 레코드’ 기능을 했다. 정식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하는 걸 자주 들을 수 없던 그 시절, 리스트의 피아노 편곡은 위대한 교향곡들을 널리 보급하는 효과가 컸다.
리스트는 헨델, 모차르트, 슈베르트, 파가니니, 슈만, 바그너,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의 작품들을 피아노로 재창조하여 연주했다. 인기 있는 곡을 대중들이 즐기기 좋게 선보였고, 선배 동료 작곡가들의 훌륭한 작품을 발굴해서 널리 알렸다. 이미 존재하는 선율에 리스트의 음악혼을 담아서 새롭게 작곡한 이 작품들은 영어로 Paraphrase, 문학용어를 빌면 ‘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역’은 편곡자의 환상이 허용될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옮겨적기’와 구별된다. 이 곡들을 들으려면 유투브에서 리스트(Liszt)와 원래 작곡자의 이름(가령 Verdi)만 검색하면 된다.
리스트가 직접 쓴 곡들도 피아노 음악에서 불멸의 레퍼토리지만, 내가 볼 때 이 ‘의역’(Paraphrase) 작품들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들을 들으면 19세기 전반의 음악 풍경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손열음이 연주한 <라 캄파넬라>를 들어보자. <라 캄파넬라>는 ‘종’(鐘)이란 뜻으로, 현악기의 높은 현을 개방현으로 둔 채 낮은 현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특수 주법이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의 3악장인데,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의역’하여 종소리의 빛나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파가니니-리스트 <라 캄파넬라>
https://youtu.be/ey4Ettm3goI (피아노 손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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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지만 마음이 춥다. 쉬운 해고, 평생 비정규직 노동개악을 노동개혁이라 부르는 이상한 세상이다. 구 인권위원회 옥상에서 200일 가까이 농성하고 있는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을 비롯, 서울에서만 세 군데서 고공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MBC 노동조합도 존폐의 기로에 몰렸다. 임금협상 도중에 집행부에게 업무복귀 명령을 내리자 22일부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 조능희 위원장이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눈물겹다. 음악 몇 곡을 권해 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모두 힘내기 바랄 뿐이다.
노르웨이의 젊은 여성 트럼펫 연주자 티네 팅 헬세트는 요즘 오슬로 필하모닉과 함께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열고 있다. 노르웨이 국민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온 그녀가 연주하는 <이 황량한 겨울에>, 우리의 추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않을까.
올해는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도 잘 들리지 않는다. 이유인 즉, 새로 나온 캐럴 앨범에 대한 저작권 문제 때문이란다. 가수와 연주자도 먹고 살아야 하니 저작권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저작권, 정확히 말해 ‘저작인접권’을 너무 깐깐히 챙기면 세상이 더 삭막해질 것이다. 미국에서 돈방석에 앉은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의 말도 기억하자.
“제가 연주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들은 보잘 것 없는 돈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주회와 레코딩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죠. 그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현실입니까.”
캐럴의 명곡 <오 거룩한 밤>을 작곡한 아돌프 아당은 저작권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노래를 멋지게 부른 캘틱 우먼에게 감사하며, 함께 들어보자.
“오 거룩한 밤! / 별들이 환하게 빛나네, 우리 주 나신 밤 / 악과 오류로 가득한 세상,
그가 나타나 영혼을 일깨우네 / 지친 영혼은 희망에 떨며 기뻐하네 / 저 멀리 영광된 새아침이 밝아오고”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빼놓을 수 없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두까기인형>, 올해도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리고 있는데, 온가족이 함께 보기 좋은 공연이라 티켓 구하기가 쉽지 않다. 독일의 낭만파 작가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인형과 생쥐왕>을 바탕으로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2막 발레다. 크리스마스 이브, 호두까기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 클라라가 잠들자 꿈에 쥐떼가 나타나는데, 호두까기 인형이 나타나서 구해준다. 클라라는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의 나라를 여행한다. 1막의 마지막 장면, 밤이 깊어갈 때 눈이 펄펄 내리고 ‘눈꽃요정의 춤’이 펼쳐진다. 이 곡에는 여성 합창이 등장, 환상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머릿속 상상일 뿐이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들어보자.
헨델 <메시아> 중 ‘우리에게 아기 나셨네’ https://youtu.be/LFBIJgkj_-g
25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단숨에 세계 오페라를 제패한 헨델은 1730년대 중반부터 불경기를 맞게 된다. 헨델은 비싼 무대장치와 출연료가 들어가는 오페라보다 제작비가 적은 오라토리오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성서에서 따 온 스토리로 만든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처럼 극적인 효과가 있었고, 독창보다 합창이 더 많아서 음악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1737년, 헨델은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어 걷거나 말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더욱 괴로운 것은 예전처럼 빨리 작곡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훗날 모차르트의 표현대로, “헨델은 한번 치기로 마음먹으면 천둥번개처럼 칩니다.” 헨델은 초인적인 의지로 되살아나, 단 3주만에 이 대작 오라토리오 <메시아>(1742)를 작곡하여 재기에 성공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할렐루야’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합창 음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니, 크리스트의 왕국이 이 땅에 이뤄졌네. 왕 중의 왕, 그의 통치는 영원하리라!”
신정국가를 예찬하면 곤란할 것이다.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다스리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그립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헨델의 음악만큼은 진정 위대하니까.
이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될 때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가 공연되던 중, ‘할렐루야’ 합창에서 “왕 중의 왕”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영국 왕 조지 2세가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관례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지 2세가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고 그를 맞이하려고 청중들이 모두 일어났는데, 마침 그 때 ‘할렐루야’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헨델 <메시아> 중 ‘할렐루야’ https://youtu.be/KnQGs24U1e8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닐 음악홀’(Neal's Music Hall)의 자선 음악회에서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청중이 몰려들어 극장이 매일 초만원을 이루자 신문에서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부풀린 치마를 입고 오지 말 것”을 여성들에게 당부까지 했다.
이 자선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당시 한 평론가의 말.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키웠을까!”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쓰러졌다. 헨델은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병상에 누웠고, 1주일 뒤 74살의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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