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한 2012년, 가장 짜임새 있고 활기찬 무대
빈 필하모닉은 해마다 1월 1일 전세계 40개국의 4억여 시청자에게 생중계되는 ‘신년 음악회’로 유명하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기 직전, 지휘자와 빈필 단원들은 청중을 향해 인사말를 건넨다. “빈 필하모닉과 제가 여러분께 새해 인사 드립니다.” 마지막 곡인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할 때는 청중들도 박수로 호응한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한해를 시작하며, 다함께 벽을 허물고 평화를 이루자고 기원하는 시간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2016년 신년음악회 (지휘 마리스 얀손스)
https://youtu.be/S_fk5aoEfl4
올해는 라트비아 출신의 거장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봉을 잡았다. 2006년, 2012년에 이어 세 번째다. 빈 필하모닉은 철저히 단원 자치로 운영되며 지휘자도 단원 회의에서 결정한다. 따라서 빈필 신년음악회에 초빙된다는 것은 클라이버, 무티, 아바도, 주빈 메타 등 세계적인 지휘자에게도 큰 영예로 받아들여진다.
빈필은 1842년 창단된 이래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동한 ‘세계 음악의 수도’ 빈의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06년 다큐멘터리 <비엔나의 선율-마음에서 마음으로>를 제작할 때 만난 단원들은 모두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스승에서 스승으로 200년 넘게 이어져 온 음악 전통을 강조했다. 클라리넷 주자 페터 슈미들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빈필 단원이었고, 특히 할아버지가 대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친구였다는 점을 자랑했다. 당시 루체른에서 만난 지휘자 아르농쿠르에게 빈필의 특성을 묻자 간단히 “200년 넘게 이어져 온 고전 시대의 음악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빈필 신년음악회는 1939년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기획으로 시작된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 수차례의 과거 청산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빈 필하모닉의 가장 큰 특징인 ‘음악 사랑’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빈에서 구한 음악 책을 보니 놀랍게도 빈필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써 있었다. 세계 최고의 악단이 ‘아마추어’라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와 같은 순수한 ‘음악 사랑’으로 연주한다는 뜻이다.
베토벤이 <장엄미사> 표지에 써 넣은 ‘마음에서 마음으로’란 말은 빈 필하모닉의 슬로건이 됐다. 음악에 담긴 선한 마음을 청중과 나누고 온 인류에게 선사하는 일에 그들은 행복해 했다. 빈에서 인터뷰한 당시 단장 클레멘스 헬스버그는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전세계의 인간 공동체를 위해 음악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계화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럴수록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이 구호는 연주할 때 우리의 기본자세입니다.”
빈 왈츠는 19세기 초, 혁명과 전쟁에 지친 신흥 시민 계급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유행했다. 메테르니히의 반동 체제 성립과 빈 왈츠의 탄생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내내 바그너와 브람스 등 심각한 작곡가들이 음악의 미래를 치열하게 모색하는 다른 한편에서 빈 왈츠는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는 요한 슈트라우스고, 모차르트는 2등이다.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는 빈 사람들에게는 대중음악인 셈이다.
▲ 2016 빈필 신년음악회 도중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에게 지휘봉을 배달해 주는 우편부
이 음악회의 레퍼토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왈츠와 폴카 위주로 구성하고 다른 작곡가의 작품들을 조금 안배하는 방식이었는데, 올해는 그 동안 잘 연주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선보이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번에 연주된 미하엘 치러(1843~1922), 에밀 발트토이펠(1837~1915), 요젭 헬메스버거(1855~1907) 등 생소한 작곡가들의 작품은 19세기에는 무척 큰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음악사에서 한때 널리 사랑받다가 이렇게 잊혀진 작품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이 든다. 빈필의 이러한 노력은 음악사를 복원해서 풍요롭게 만드는 의미도 있으므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잊혀졌던 수많은 작품들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빈 숲속의 이야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능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빈필 신년음악회는 일종의 딜레마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해서 소개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기존의 레퍼토리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만 연주하는 결과가 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한 올해 빈필 신년음악회를 보면서, 그가 지휘한 2006년과 2012년 연주회가 더 낫지 않았나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빈필 신년음악회는 해마다 신기한 악기가 등장하고 단원들이 코믹한 장면을 연출해서 흥미를 더한다. TV로 세계에 중계하기 때문에 발레와 야외회면 등 볼거리를 제공하며 늘 새로운 카메라 연출 기법을 선보이기도 한다. 해마다 어떤 기발한 영상이 나올까 기대하며 보게 되는 이유다. 빈필 신년음악회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갈지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인상깊었던 명장면들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빈필의 악장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55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년간 지휘를 맡았는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흥겹게 지휘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쉽게도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찾을 수 없다. 카라얀이 지휘를 맡은 1987년 빈필 신년음악회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가 단연 압권이었다. 사망 2년 전의 79세 카라얀과 소프라노 배틀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이 왈츠를 독립 성악곡으로 격상시킨 명연주였다.
“종달새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 부드러운 바람, 사랑스런 숨결은 들판에 입 맞추며 봄을 깨우네 / 만물은 봄과 함께 빛을 더해 가고 / 아, 모든 고난은 이제 끝났어라 / 슬픔은 사라지고 행복한 기대가 피어나네 / 아, 만물은 웃음으로 다시 깨어나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봄의 소리> 왈츠, 1987년 신년음악회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ttps://youtu.be/XN54SabJgW4
카라얀이 지휘하던 손을 멈추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미소 짓는다. 늘 근엄하게 눈 감고 지휘하기로 유명한 카라얀이 웃음을 보이다니, 희귀한 장면이다. 캐슬린 배틀 뒤에서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도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지휘자와 성악가,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 함께 음악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청중들도 그 순간 똑같은 행복감을 맛보았으리라.
바렌보임이 지휘한 2009년 신년음악회에서는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피날레가 인상적이었다. 바렌보임이 열심히 지휘하는 동안 빈필 단원들이 한명씩 자리를 뜬다. 새해를 축하한다는 듯 샴페인 잔을 쳐들며 나가는 단원의 몸짓에 청중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영문을 모르면서 지휘를 계속하던 바렌보임은 마지막 바이올린 주자만 남자 사랑스러 죽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하이든 <고별> 교향곡 4악장, 2009년 빈필 신년음악회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http://youtu.be/uICvLchS2kg
이 교향곡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1772년, 하이든이 섬기고 있던 니콜라스 에스테르하지 공은 헝가리의 호반에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고 여름 내내 그곳에서 음악을 즐겼다. 10월이 왔는데도 에스터하치 공은 단원들을 고향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단원들은 향수병에 걸릴 지경이 됐다. 단원들의 불만은 자칫 소요사태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분위기를 알아챈 하이든은 새 교향곡을 작곡, 에스테르하지 공 앞에서 연주했다. 하이든은 피날레에서 각 파트가 자기 연주를 끝내면 촛불을 끄고 차례차례 퇴장하여 바이올린 두 사람만 남는 걸로 음악을 구성했다. “가족에게 보내 달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스터하치 공의 노여움을 살 수 있었기에 음악으로 넌지시 표현한 것.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챈 에스터하치 공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바렌보임과 빈필 단원들은 이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재연하여 웃음을 선사했다.
가장 짜임새 있고 활기찬 무대는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한 2012년 신년음악회였다.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와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찬 롬비(1810~1874)까지 레퍼토리를 확장하여 역동성을 주었다. 특히 롬비(Lumbye)의 <코펜하겐 증기기차>는 단원들이 기차 승무원과 역무원 복장으로 나와 이색적인 악기들을 선보였고, 지휘자 얀손스도 호각을 불며 함께 흥겨워했다.
한스 크리스찬 롬비 <코펜하겐 증기기차>, 2012년 빈필 신년음악회 (마리스 얀손스 지휘)
https://youtu.be/gdsgKp-ku0k
빈 소년합창단이 오케스트라 위의 난간 위에서 <트리치트라치> 폴카를 노래했는데,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한 연출이 근사했다. 2016년에도 똑같은 연출을 선보였지만 2012년의 첫 시도가 훨씬 더 신선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트리치트라치> 폴카, 2012년 신년음악회 (마리스 얀손스 지휘)
https://youtu.be/SZWm1pI-KZ8
발레의 안무도 2012년이 더 뛰어났다. 요젭 슈트라우스의 폴카 <불타는 사랑>이 흐를 때 클림트의 그림 <키스>가 화면에 가득 차고, 두 남녀가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사랑의 이인무를 춘다. 빈 사람들만 떠올릴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부럽기만 했다.
요젭 슈트라우스 <불타는 사랑>, 2012년 신년음악회 (마리스 얀손스 지휘)
https://youtu.be/J6RxxqdM1Zw
빈 사람들이 영원히 사랑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빈을 여행 중인 젊은 남녀가 벨베데레 궁에 들어가면 무용수 5쌍의 발레가 환상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무용수들의 푸른 옷은 도나우강의 색채를 표현하는 듯하다. 발레가 끝나고 두 남녀가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 왈츠가 끝난다. 마지막 <라데츠키> 행진곡, 지휘대로 걸어 나오면서 드럼 연주자에게 큐를 주는 거장 얀손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빈 필하모닉 단원들은 이 곡들을 수도 없이 연주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지휘자든 빈필 단원들이 지켜 온 템포와 표정을 존중해 준다. 특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와 <라데츠키> 행진곡은 소리만 들어서는 누가 지휘하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1992년 카를로스 클라이버만 유달리 빠른 템포를 택했기 때문에 표시가 날 뿐, 다른 지휘자들은 모두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자율성을 앞세운다. 올해, 지휘자 얀손스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지휘하던 중 무대 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가 없는 동안에도 음악은 잘도 흘러갔고 청중들도 알아서 박자를 맞췄다. 빈필 단원들이 알아서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코믹 이벤트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라데츠키> 행진곡, 2016년 신년음악회 (지휘 마리스 얀손스)
https://youtu.be/xItxJ-3M9_I
밤의 여왕은 왜 슬펐을까?
1984년 개봉되어 전세계에 모차르트 붐을 일으킨 영화 <아마데우스> 중 가장 재치 있게 연출된 장면을 보자. (물론 픽션이지만) 영화에서 모차르트는 허구헌 날 술에 취해 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아내 콘스탄체는 집을 나갔다. 장모인 체칠리아 베버가 모차르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깩깩대는 장모의 잔소리는 <마술피리> 2막, 밤의 여왕 아리아 ‘지옥의 복수는 내 가슴에서 끓어오르고’로 연결된다. 이 노래는 누구나 좋아하는, 귀에 익은 멜로디다. 늘 잔소리를 해 대는 장모와 어둠의 상징인 밤의 여왕을 연결시킨 상상력이 무척 기발하다.
영화 <아마데우스> 중 밤의 여왕 아리아 장면
https://youtu.be/5wfp8EB179g
(사실은 어땠을까? 모차르트는 와인을 즐겼지만 알콜 중독은 아니었다. 아내는 바덴에 요양을 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모차르트는 그 사이에도 일자리를 구하러 독일을 두 번 여행했다. 모차르트와 장모는 사이가 좋았다. 모차르트는 장모를 찾아갈 때 늘 과자를 사 갔고, 그때마다 장모는 아주 기뻐했다. 장모는 남편 프리돌린 베버가 죽은 뒤 네 딸을 혼자 돌보았는데, 외로워서 그랬는지 술을 많이 마셔서 알콜 중독 혐의가 있었다. 그러나 요리 솜씨가 좋아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빈에 왔을 때 그녀가 차려 준 식사에 만족했다고 전해진다.)
이 아리아는 얼핏 들으면 은빛으로 반짝이듯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이지만, 내용을 알고 들으면 무시무시하다.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외친다.
“지옥의 복수는 내 맘속에 끓어오르고 죽음과 절망이 사방에서 불타오른다. 네 손으로 자라스트로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도록 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내 딸이 아니다. 영원히 추방되고, 저주받고, 모든 자연의 인연은 끊어질 것이다. 네 손으로 자라스트로를 죽여라. 복수의 신이여, 들으소서! 이 어미의 맹세를!”
빛의 사제 자라스트로는 파미나 공주를 납치해 갔다. “여자는 남자의 지도를 받아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마초스런 생각에서 벌인 일이었다. 밤의 여왕 입장에서는 미칠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미나를 구하러 떠난 타미노 왕자가 돌아오지 않자 밤의 여왕은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서 은밀히 파미나를 찾아온다. 그런데 딸 파미나 공주는 자라스트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밤의 여왕은 분노에 온몸의 피가 뒤집어질 지경이 된다. 이 노래는 모차르트가 분노, 증오, 복수를 표현할 때 즐겨 사용한 D단조의 ‘악마적’ 조성으로 돼 있다.
그녀는 딸이 자기 원수를 갚아 주고,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에게 살인을 명령할 정도로 그녀의 분노는 격렬하다. 밤의 여왕이 누구인가? 세상의 절반인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여왕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불타는 증오와 함께 초자연적인 냉정함과 카리스마를 요구한다. F장조로 바뀐 대목에서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높은 F음까지 올라가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만 부를 수 있는 난곡이다.
▲ 1791년 초연 당시 <마술피리> 밤의 여왕 장면 무대 디자인
초연 때는 모차르트의 처형인 요제파 호퍼가 밤의 여왕을 맡았는데, 어떻게 불렀는지 엿보게 해 줄 연주평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조수미도 이 역을 여러 차례 맡아서 호평을 받았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조수미의 목소리는 이 역을 소화하기에 손색이 없었지만,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 상상했음직한 초자연적인 카리스마는 아무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크리스티나 도이테콤, 에디타 그루베로바, 루치아 폽, 루치아나 세라, 디아나 담라우 등 쟁쟁한 소프라노들이 훌륭한 녹음을 남겼는데, 어떤 네티즌이 40명의 소프라노가 부른 이 노래를 편집해서 유투브에 올렸다.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맘에 드는지 한번 비교해서 감상해 보자.
<마술피리> 중 2막 밤의 여왕 아리아 (40명의 소프라노 모음)
https://youtu.be/6Pe9UTxyGbk
각각 다른 개성과 매력을 들려주는 이 성악가들을 비교해서 평가하는 것은 무례하고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가령, 루치아 폽은 날카롭고 기품있는 아름다움을 들려주기 때문에 무척 매력적이다. 굳이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초자연적인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 도이테콤이 아무래도 모차르트의 이상에 가깝지 않나 싶다. 1968년 그녀가 뉴욕에서 밤의 여왕을 맡았을 때 뉴욕 타임즈는 그녀를 가리켜 ‘우리 시대 최고의 밤의 여왕’이라고 썼는데, 수긍할 만한 평가였다.
<마술피리> 중 2막 밤의 여왕 아리아 : 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도이테콤 (1931~2014)
https://youtu.be/YQpTGKXAxqA
지금 활동 중인 소프라노 중에서는 독일의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가 최고의 경지를 들려주는 것 같다. 전세계 15개 오페라 하우스에서 밤의 여왕으로 출연한 그녀는 테크닉, 연기력과 카리스마에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후반부(링크 1:58이후)에서 초자연적인 느낌보다 인간적인 느낌이 배어나온 게 흠이라면 흠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최상의 밤의 여왕이라 할 수 있다.
<마술피리> 중 2막 밤의 여왕 아리아 :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1971생)
https://youtu.be/dpVV9jShEzU
밤의 여왕은 결국 빛의 사제 자라스트로에게 패배하고 파멸한다. <마술피리>가 초연된 1791년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만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계몽군주 요젭 2세는 터키와의 전쟁터에서 죽었고, 뒤를 이은 레오폴트 2세는 공안통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의 여왕은 전제군주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고, 그녀의 파멸은 곧 구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술피리>는 시민계급의 환호를 받았고, 휘발성이 높은 불온한 작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밤의 여왕은 아무래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로 보인다. 1막 아리아 ‘오 떨지 마오, 나의 아들이여’에서 타미노 왕자에게 아픔을 호소하는 밤의 여왕의 노랫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상처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노래는 모차르트가 비극적 정서를 표현할 때 즐겨 사용한 G단조로 돼 있다.
“오 떨지 마오, 나의 아들이여. 그대는 결백하고 슬기롭고 정직하오. 그대는 깊은 시름에 잠긴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오. 고통은 나의 타고난 운명, 내 딸을 잃는 순간 나의 행복은 모두 사라졌소. 악마가 내 딸을 빼앗아 갔소. 딸이 무서워서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하오. “살려달라”는 딸의 외마디도 아무 소용없었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소. 나의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오.”
<마술피리> 중 1막 밤의 여왕 아리아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https://youtu.be/ov1hRqPnm58
1막에서 억울한 피해자로 등장한 밤의 여왕은 2막에서 분노와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해 버린다. 이 점은 <마술피리> 대본의 결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동화다. 어린 타미노 왕자가 밤의 여왕의 아픔에 공감할 때 그녀는 상처입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타미노가 빛의 사제의 가르침을 따라 침묵의 시련을 통과하기로 입장을 바꾸는 순간 그녀는 어둠의 유혹자로 변해 버린 것이다. 즉 어린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밤의 여왕이 변모했을 뿐, 굳이 대본의 결함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페라는 어느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고 듣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들린다. 밤의 여왕은 1막에서 슬펐다. 2막에서 그녀는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찾지 못해 괴로워 하다가 결국 파멸한다. 밤의 여왕의 슬픔은 점점 커져 가지만 오페라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밤의 여왕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보면 그 슬픔마저 함께 느낄 수 있다.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속 어딘가에서
베토벤의 마지막 순간과 마지막 작품
“내 모토는 항상 이거야. 한 줄도 쓰지 않는 날이 없도록! 때때로 내 뮤즈가 잠들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그녀가 잠이 깰 때 언제나 더 활발해지지 때문이지. 나는 지금도 몇 곡을 더 쓰고 싶어. 그 다음에는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속 어딘가에서 지구 위의 내 여정을 마치고 싶네.”
베토벤이 친구 베겔러에서 이렇게 쓴 것은 1826년 12월 7일이었다. 젊은 시절, 베토벤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음악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바쳐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고향 친구 베겔러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베토벤은 이미 위중한 상태였다. 입대를 앞둔 조카 카를이 병상을 지키며 시중을 들었다. 카를은 그해, 베토벤의 지나친 집착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났다. 베토벤이 죽음의 병상에 누운 뒤 어린 조카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폭풍 같았던 그의 삶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각혈을 했고, 숨쉬기가 어려웠고, 옆구리 통증 때문에 누워 있기도 고통스러웠다. 12월 20일, 25파운드(약 11Kg)의 복수를 빼냈다. 3월까지 다섯 배에 달하는 복수를 더 빼냈다. 그러나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3월 24일, 베토벤은 비서 신틀러와 피아니스트 모셀레스 앞에서 말했다. “박수를 쳐라, 친구들이여, 희극은 끝났으니.” 그날 친구 쇼트가 보낸 와인이 도착하자 베토벤은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어!” 혼수상태에 빠진 베토벤은 3월 26일, 천둥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늦은 오후 잠깐 눈을 뜨고 오른팔을 치켜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을 다시 내려놓는 순간 그의 숨은 멎고 말았다.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다투었던 제수 요한나 라이스였다. 베토벤은 그녀를 증오하여 ‘밤의 여왕’이라고 불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은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고 부모의 무덤을 찾아가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78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베토벤은 가정의 따뜻함을 맛보지 못했다.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마저 떠난 1812년, 베토벤은 일기에 썼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네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너의 예술 속에서만 살아라. 그것만이 너의 실존이다.” 그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게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따뜻한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다. 조카 카를과 함께 살게 된 1817년 그는 자나타시오에게 말했다. “저는 어엿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내가 없을 뿐이지만….”
▲ 베토벤 데드마스크 ▲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열린 베토벤의 장례식
베토벤이 임종한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의 방에는 그가 평생 존경한 할아버지 루트비히 베토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머리맡에는 하이든의 출생지 로라우를 새긴 석판화가 놓여 있었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 하이든과 갈등을 빚었지만 마지막 나날, “이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작은 집”을 보며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의 유물에는 대화수첩 4묶음, 자필 악보와 편지들, 안경과 보청기, 상아에 새긴 줄리에타 기차르티와 안토니 브렌타노 - 메너드 솔로몬이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한 여성 - 의 초상,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와 1812년 ‘불멸의 연인’에게 쓴 세 통의 편지가 포함돼 있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베토벤의 생애 뿐 아니라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언제든지 죽음을 마다하지 않지만, 자기 안에서 움트는 예술을 내놓기 전에는 결코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자각…. 그후 25년간 베토벤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숭고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음악은 지금도 상처입은 사람,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3월 29일,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1만명이 넘는 인파가 빈 중심가를 메웠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조사가 낭송됐고, 빈의 음악가들이 횃불을 들고 운구 행렬을 따랐다. 이 행렬 속에는 다음해에 세상을 떠날 슈베르트도 걷고 있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현악사중주곡 F장조 Op.135로 알려져 있다. 1826년 가을, 베토벤은 자살 미수로 머리를 다친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별장에 석달 동안 머물렀는데, 이 사중주곡은 그 때 작곡했다. 앞선 네 곡의 현악사중주곡은 차례차례 악장 수를 하나씩 늘려가며 깊은 내면을 탐구한 음악이었다. Eb장조 Op.127은 네 악장, A단조 Op.132는 다섯 악장, Bb장조 Op.130은 여섯 악장, C#단조 Op.131은 일곱 악장으로 돼 있었다. 이 무렵 베토벤은 제자 홀츠에게 “뭔가 새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고 말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내면의 소리, 미래를 향한 새로운 음악이 열리고 있었다.
▲ 린제이 사중주단이 녹음한 베토벤의 말기 현악사중주곡 앨범
베토벤은 고전적인 전통에 언제나 작별을 고했지만, 완전히 그 전통을 떠난 적도 없었다. (메너드 솔로몬 <루트비히 판 베토벤> 2권, p.391) 마지막 F장조 사중주곡은 다시 고전의 전통으로 돌아온 작품이었다. 길이도 제일 짧고 유머러스하다. 기분 좋은 농담같은 1악장 알레그레토, 미소를 머금은 듯한 2악장 스케르초…. ‘충분히 느리게, 노래하듯 고요하게’라고 돼 있는 3악장은 달빛처럼 청초한 느낌으로 지난 삶을 돌이켜 보는 듯하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5번 F장조 Op.135 https://youtu.be/cSFtJYJExqA
4악장의 자필악보에는 유명한 메모가 써 있다. 서주에서는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야만 했을까?”(Muss es sein?) 알레그로에서는 확신에 찬 대답이 이어진다. “그래야만 했어!” (Es muss sein!) 이 대목은 베토벤이 고뇌로 가득했던 자기 삶을 돌아보며 자문자답하는 걸로 해석돼 왔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는 제수 요한나 라이스와의 갈등을 회고하는 말로 해석되기도 했다. 한 달 전 자살을 기도했다가 회복 중인 조카 카를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해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어느 경우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껴안고 삶을 긍정하는 작곡가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지막 사중주곡은 베토벤의 표현처럼 “친절한 사람들 속 어딘가에서”, “늙은 아이처럼” 노래하며 떠나는 사람의 음악으로 들린다.
이 작품을 완성한 뒤 베토벤은 Bb장조 현악사중주곡의 피날레를 새로 썼다. 이미 발표한 피날레는 길이 20분에 달하는 푸가였는데, 대중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어려웠다. 초연 당시 2악장 프레스토와 4악장 독일무곡은 앵콜을 받았지만 6악장 대푸가는 “중국말처럼 이해 불가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 소식에 베토벤은 청중들을 가리켜 “짐승들! 멍청이들!”이라며 분개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르타리아 출판사에서 좀 더 쉽고 단순한 피날레를 새로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베토벤이 순순히 동의한 것은 의외였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Bb장조 Op.130 (5악장 카바티나 23:28, 피날레 알레그로 30:39)
베토벤은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Op.130의 6악장 알레그로를 새로 썼다. 대푸가는 Op.135로 따로 출판했고, 네 손을 위한 피아노로 편곡한 대푸가는 Op.134가 됐다. 따라서 Op.130의 사중주를 위해 새로 쓴 피날레가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곡은 세속의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즐거움 자체를 노래한다. 베토벤은 아름다운 5악장 카바티나에서 6악장 알레그로로 넘어갈 때 “쉬지 말고 곧장 연결해서 연주하라”고 말했다. 최상의 아름다움에서 지고의 즐거움으로! 평생 ‘고뇌에서 환희로’ 투쟁해 온 베토벤은 생애 마지막 순간,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으로’ 자신을 고양시키고 눈을 감았다.
베토벤은 만 56년과 100일 동안 지상에 머물렀다. 1770년 12월 16일부터 1827년 3월 26일까지 날짜수를 세어보면 알 수 있다. 1월 22일, 오늘은 내겐 각별한 날이다. 오늘을 기해 만 56살하고 100일이 되기 때문이다. 베토벤보다 더 오래 살다니….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이만 먹었다. 게다가 대푸가보다 새 피날레를 더 좋아하니, 베토벤이 보면 나는 ‘짐승’이고 ‘멍청이’에 불과할 것이다. 중학생 때부터 나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베토벤에게 좀 더 감사하며 겸허히 살다 가야지, 생각해 본다.
엘리제를 위하여? 테레제를 위하여?
한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런 선율,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쳐 봤을 곡, 자동차 후진음으로 거리에서 요즘도 자주 들려오는 소리, 바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입니다.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베토벤을 말할 때 거의 언급되지 않는 곡이지요.
베토벤이 <엘리제를 위하여>를 바친 것으로 알려져 온 테레제 말파티(1792–1851)
베토벤의 음악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승리를 구가하는 뜨거운 베토벤, 또 하나는 한 남자로서 사랑을 갈구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이지요. <엘리제를 위하여>는 두 번째 얼굴을 보여주는 곡으로, 가장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베토벤의 여린 속마음을 느끼기에 가장 적합한 곡일 수 있습니다. 그는 1802년 10월에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자신이 괴팍하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괴롭다고 토로했습니다. 자신의 상냥하고 따뜻한 측면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지요. 따라서, 이 곡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마음으로 느껴보는 게 좋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https://www.youtube.com/watch?v=GjbSqDgh1B4
베토벤이 이 곡을 바친 엘리제는 누구일까요? 청순한 소녀의 이름 같지요? 성냥팔이소녀처럼 가난한 집 아이일 것 같기도 하지요? 불행히도 우리는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1867년 이 곡을 처음 발견한 루트비히 놀(Ludwig Nohl)은 작곡 날짜가 1810년 4월 27일이며, 자필 악보에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라고 베토벤이 직접 써 넣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베토벤이 알고 지낸 사람 중 ‘엘리제’란 이름은 없었습니다. 반론이 제기됐습니다. 1810년 베토벤은 자신의 주치의인 말파티 박사의 조카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fati)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테레제는 검은 곱슬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베토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요. 음악학자 막스 웅어(Max Unger)는 베토벤이 이 곡을 테레제에게 바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제목이 ‘엘리제’가 된 것은 루트비히 놀이 악보를 옮겨 적을 때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꽤 설득력 있어 보이는 주장이지만 베토벤의 자필악보가 실종됐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2012년 캐나다의 음악학자 리타 스테블린(Rita Steblin)은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1810년 당시 ‘신동 피아니스트’로 불리며 연주 여행을 다니던 율리아네 카테리네 엘리자베트 바렌스펠트(Juliane Katharine Elisabet Barensfeld)가 빈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름을 간략히 줄여서 ‘엘리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3살 난 그녀는 빈에서 살리에리에게 성악 레슨을, 베토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는데, 베토벤이 그녀를 위해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죠. 이 또한 그럴싸한 주장이지만, 스테블린 자신이 ‘가설’에 불과하다고 인정했군요.
우리는 ‘엘리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 곡에 담긴 베토벤의 따뜻한 마음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A-B-A-C-A 형식으로, 애틋한 마음 가득한 A부분의 주제에 이어 장조로 바뀌어 정답게 어우러지는 B부분, 단조로 바뀌어 격정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C부분으로 흘러갑니다. 두 옥타브에 걸쳐 분산화음을 펼친 뒤 다시 A주제로 돌아와서 고요히 마무리합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중 <테레제를 위하여>란 곡이 있습니다. 1809년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공하기 직전, <고별> 소나타와 함께 작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토벤은 따뜻한 우정을 맺었던 테레제 브룬스비크(Therese Brunsvik, 1775~1867)에게 이 곡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꼽힌 적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테레제는 탁아소를 설립, 아이들을 돌보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연정이든 우정이든, 테레제에게 바친 F#장조 소나타 Op.78은 따뜻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두 악장으로 된 짧은 곡이지만 베토벤은 <열정> 소나타와 함께 이 곡을 가장 좋아한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군요. 짧은 서주에 이어 사랑에 가득 찬 첫 주제가 나오지요. 첫 주제의 후반부는 애틋한 마음을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 같네요.
피아노 소나타 24번 F#장조 Op.78 <테레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 다니엘 바렌보임
https://www.youtube.com/watch?v=_wHH-p3Zvmc
테레제는 동생 요제피네 다임(Josephine Deym)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베토벤은 두 자매에게 하루 4시간씩 16일간 무료로 피아노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베토벤은 동생인 요제피네에게 열렬히 구애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요제피네가 “저를 너무 많이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아름답고 정다운 ‘안단테 파보리’는 요제피네에게 바친 곡입니다. 원래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느린 악장으로 작곡했지만, 너무 길어서 청중들이 힘들어 할 거라는 얘기에 짧은 간주곡을 새로 써서 넣고 이 안단테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즐겨 연주했고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안단테 파보리’(인기있는 안단테)란 제목이 붙었군요. 요제피네는 남편 다임 백작이 세상을 떠난 뒤 슈타켈베르크 남작과 재혼하여 네 아이를 키웠습니다. 피아노 실력이 아주 뛰어났던 그녀는 불행히도 몸이 너무 약해서 1821년, 4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안단테 파보리’ WoO57 피아노 연주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https://www.youtube.com/watch?v=iEmaEgWPphc
<엘리제를 위하여>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베토벤이 1812년 10살 난 소녀 에밀리에(Emilie)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집니다. 이 글을 보면 베토벤이 어린이를 대할 때 얼마나 따뜻하고 자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밀리에는 아마도 음악을 공부하는 어린이었나 봅니다. 베토벤을 숭배했던 에밀리에는 손수 뜨개질한 작은 가방을 베토벤에게 선물하며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과 나란히 베토벤의 이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토벤은 ‘나의 착한 에밀리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가 보내준 가방은 여러 사람들이 내게 선사한 분에 넘치는 다른 존경의 표지들 사이에 보관하고 있다”고 감사를 표합니다. 그는 소녀의 칭찬에 이렇게 답합니다. “헨델과 하이든, 모차르트에게서 월계관을 빼앗지 말거라. 그 월계관은 그 분들의 것이지 아직 내 것은 아니란다.” 베토벤은 어린 에밀리에에게 예술의 길이 더 높은 인간의 길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진지하게 조언합니다. “예술을 익히는 데 그치지 말고, 예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야 해. 예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오직 예술과 학문만이 인간을 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랑하는 에밀리에, 필요한 게 떠오르면 나를 믿고 말해 주렴. 진정한 예술가는 예술에 끝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결코 자만하지 않아.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목표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어렴풋이 느낀단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며 감탄할 때도 그는 더 나은 창조 정신이 먼 햇빛처럼 빛나는 그 곳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고 슬퍼한단다.” (발터 리츨러 <베토벤> p.66~67)
피아노를 위한 에로이카, 베토벤 ‘발트슈타인’ 소나타
어머니와 라인강을 그리워 하며… 피아노와 연주자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확장한 작품
어릴적 놀던 고향 시냇가에 잔물결이 반짝입니다.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동요 선율이 떠오릅니다. ‘과꽃’도 좋고, ‘고향의 봄’도 좋겠지요. 들킬까봐 마음 졸이며 딸기서리 하던 추억도 있고, 아버지 막걸리 받으러 먼 양조장을 다녀온 일도 기억나네요.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3악장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았습니다. 오른손이 연주하는 분산화음은 햇살에 반짝이는 라인강의 물결입니다. 왼손이 노래하는 멜로디는 어릴 적 들은 라인 지방의 민요입니다. 강물과 노래는 한데 어울려 용솟음치기도 하고, 나지막히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아련히 흘러갑니다. 어린 베토벤은 개구쟁이였지요. 집주인 피셔씨네 닭장에서 계란 서리하다가 들켰을 때 능청스레 둘러댄 기록이 있어요. (이덕희 『왜 베토벤인가?』, 문예출판사 p.141~142 참고) 베토벤과 두 동생은 만취한 아버지를 일으켜서 손잡고 집에 돌아온 적도 있고, 야경꾼한테 아버지가 잡혀갈 뻔 했을 때는 결사적으로 가로막기도 했지요. 어린 베토벤은 고된 연습 틈틈이 다락방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멀리 라인강의 물결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베토벤은 언제나 어머니를 “열렬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회상했지요. 베토벤은 어머니에 대해 “정직하고 선량한 여성”, “나에게는 정말 훌륭하고 친절한 어머니이자 최고의 친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1787년, 베토벤이 17살 때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지요. 이 무렵 베토벤은 아우구스부르크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습니다. “아아! 어머니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아직 부를 수 있고 그 부름에 대답해 줄 사람이 있던 때보다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제 누구에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메이너드 솔로몬 『루트비히 판 베토벤』1권 p.87~88)
베토벤은 22살 때 빈(Wien)으로 온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한 번도 고향 본(Bonn)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50살을 넘길 무렵부터는 고향에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를 찾아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낀 그 곳은 내 눈앞에 언제나 아름답고 또렷하게 보인다. 내가 그 곳을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베토벤은 1801년 고향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지요. 1804년 완성한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3악장에 이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 중 3악장 (링크 15:46부터) 피아노 연주 다니엘 바렌보임
https://www.youtube.com/watch?v=J3l18HTo5rY
https://www.youtube.com/watch?v=8xl7VcMfj-g
이 곡은 다른 의미에서도 각별합니다.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뒤 “이제부터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쓸 것”이라고 다짐했지요. 그 결과, 그때까지 세상에 나온 어떤 교향곡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담한 발상으로 ‘에로이카’ 교향곡을 썼습니다. 이 소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어떤 소나타보다 규모가 크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장대하고 화려한 음향을 들려줍니다. 피아노라는 악기와 연주자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확장한 작품이지요. 비평가 빌헬름 폰 렌츠는 이 소나타를 가리켜 ‘피아노를 위한 에로이카 교향곡’이라고 불렀습니다. (메이너드 솔로몬 『루트비히 판 베토벤』2권 p.136)
첫 악장부터 들어볼까요? 청중을 압도하는 호탕한 연주 스타일 때문에 ‘사자왕’이란 별명으로 불린 독일의 거장 빌헬름 바크하우스(1884~1969)가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음반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는데, 이 분의 녹음은 아직도 중요한 전범(典範)으로 꼽히지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 중 전악장
피아노 연주 빌헬름 바크하우스 (0:10부터 1악장, 8:55부터 2악장, 12:06부터 3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eSWwn6fNaGI
▲ 빌헬름 바크하우스가 남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앨범 (10CD, 1952년부터 1969년까지 녹음)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생기있게), 첫 주제는 성숙한 베토벤답게 당당하고 씩씩합니다.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해야만 제 맛이 날 것 같지요? 두 번째 주제(링크 1:14부터)는 조용한 저녁 기도처럼 내면을 돌아보는 느낌입니다. 역동적인 첫 주제와 대조를 이루지요. 끝부분에서는 제2주제가 먼저 나오고 제1주제가 이어진 뒤 마무리합니다.
2악장 아다지오 몰토(아주 느리게)는 3악장을 열어 주는 서주에 해당됩니다. 베토벤은 원래 느린 악장으로 아름다운 안단테를 썼지만, 곡 전체가 너무 길다는 지적이 나오자 안단테를 따로 출판하기로 하고 - 그 곡은 ‘안단테 파보리’(인기있는 안단테)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 이 서주를 새로 썼습니다. 베토벤 역시 그리움에 가득 찬 3악장이 이 소나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요?
3악장 론도 알레그레토 모데라토(론도, 조금 빠르게)에서는 따뜻하고 정다운 베토벤의 마음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주제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지만, 나약하거나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지요. 끝부분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단호하게 마무리합니다.
베토벤이 이 곡을 헌정한 발트슈타인 백작(1762~1823)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잘 친 독일의 귀족으로, 1788년 본에서 일하게 된 뒤 베토벤을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젊은 베토벤을 하이든에게 소개한 사람도, 베토벤의 빈 데뷔를 뒤에서 지원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1792년 고향을 떠나는 베토벤을 그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 본(Bonn)시절부터 베토벤을 후원하고 격려한 발트슈타인 백작
"사랑하는 베토벤, 이제 빈으로 가서 오랜 꿈을 실현하게. 빈은 아직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 흘리고 있네. 모차르트의 창조적 정신을 아쉬워 하며 아직도 슬퍼하고 있네. 천재의 영혼은 하이든에게 피난처를 구하고 있지만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네. 자네는 쉼없는 노력으로 하이든에게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아야 해.” - 1792년 베토벤의 ‘우정수첩’에 발트슈타인이 쓴 메모
베토벤은 오래지 않아 빈 음악계의 왕자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제2의 모차르트’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모차르트’인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과는 달랐습니다.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하이든에게서 받은 모차르트의 정신’이 아니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베토벤의 정신’으로 빛납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단 하나뿐인 예술가의 개성을 담고 있는데, 이 곡 또한 그러합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무렵 발트슈타인 백작은 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토벤이 이 곡을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바친 것은, 그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영원히 남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 같군요.
신영복과 베토벤의 내면의 풍경, <열정> 소나타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신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혼자 소리 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지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니, 독방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게 된다고 합니다. 청각 상실로 고독의 길을 걸어야 했던 베토벤도 그러했나 봅니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열정’…. 폭풍우 몰아치는 밤, 베토벤은 극한의 고독 속에서 내면을 응시하며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1악장 ‘충분히 빠르게’(알레그로 아사이, 링크 처음부터)의 첫 대목, ‘아주 여리게’(pp) 하강하는 세 음표는 베토벤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어서 상승하는 패시지는 답변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네가 이겨낸 바로 그 만큼의 존재일 것이다.” 첫 대목을 이렇게 말로 치환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베토벤은 “말로 표현된 생각보다 음악으로 표현된 내면의 직관이 훨씬 더 깊고 넓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을 말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모두 헛된 일이겠지요. 그냥 음악을 듣는 게 낫겠습니다.
베토벤 ‘열정’ 소나타 Op.57 (빌헬름 바크하우스 1959 녹음)
https://www.youtube.com/watch?v=wEXS3u64Yco
이 곡은 여러모로 교향곡 5번 ‘운명’과 흡사합니다. 나지막한 질문과 대답에 이어 네 개의 음표로 된 ‘운명’의 모티브가 나타나지요. 이 모티브는 극단적인 강약의 대비를 이루며 격정적으로 펼쳐집니다. 이렇게 엄청난 강약의 대비는 피아노 음악의 역사에서 처음 보는 것으로, 교향곡 5번 ‘운명’처럼 격정적인 베토벤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첫 주제를 뒤집어 놓은 듯한 두 번째 주제는 침통한 마음을 억누른 채 나지막히 흘러갑니다. 두 개의 주제는 탁월한 음악적 조형미를 이루며 발전해 나갑니다.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며 시작한 첫 악장은 폭풍, 천둥, 번개의 시련을 통과하고 마지막 코다*에서 다시 격렬하게 폭발한 뒤 ‘극히 여리게’(ppp) 마무리됩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이 정적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감사의 노래’를 두 번 썼지요. 교향곡 6번 ‘전원’에서는 4악장 ‘천둥과 번개’가 휩쓸고 지나간 뒤 5악장 ‘폭풍우가 지난 뒤 양치기가 드리는 감사의 노래’가 이어지지요. 말년에 작곡한 A단조 현악사중주곡의 3악장은 ‘위장병이 나은 뒤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 소나타의 격렬한 1악장이 정적 속으로 사라진 뒤에는 ‘감사의 노래’가 흐르지 않습니다. 이 정적은 밤새 태풍이 몰아친 뒤 폐허만 남아 있는 섬찟한 아침 풍경 같습니다. 베토벤은 아직 ‘고뇌를 너머 환희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2악장 ‘천천히 걷듯, 평온하게’(안단테 콘 모토, 링크 9:30부터)는 주제와 4개의 변주곡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들을 때 베토벤의 토르소와 데드마스크가 떠오릅니다. 베토벤이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잠시 평화가 흐르지만 아직 ‘감사의 노래’는 아닙니다. 얼어붙은 베토벤의 얼굴, ‘운명’과의 투쟁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휴식 없이 이어지는 피날레를 들으면 알 수 있지요.
▲ ‘사자왕’으로 불린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남긴 ‘열정’ 소나타 음반(1959)
3악장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치 않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링크 15:23부터)는 불길한 화음에 이어 단호하게 전투 개시를 선언합니다. “이제 투쟁과 전진 뿐”이라고 일갈한 뒤 베토벤은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듭니다. 끝없이 몰려오는 고뇌의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베토벤의 강인한 모습입니다. 코다는 가장 빠른 템포로 질주한 뒤 단호하게 마무리합니다. 이 무렵 베토벤의 심경을 로맹 롤랑(Romain Roland, 1866~1944)은 이렇게 표현했지요. “베토벤은 항상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베토벤은 거듭 상처를 입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고 적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로맹 롤랑 <괴테와 베토벤>, 웅진닷컴, p.78)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마음 속에 솟아오르는 예술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쓴 뒤 이렇게 덧붙였지요. “죽음이여,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라. 나는 그대를 용감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는 나를 이 끝없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까.” 죽음의 배수진을 치고 삶을 끌어안은 베토벤의 불굴의 의지를 이 피날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 피날레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용감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열정’(Appassionata)이란 제목은 출판업자 크란츠가 베토벤 사후인 1838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을 출판할 때 붙였습니다. 베토벤은 1804년에 이 곡의 악상을 처음 떠올렸고 1805년 4월에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의 엄청난 음역과 음량은 베토벤이 그 무렵 갖게 된 프랑스 에라르사의 최신 피아노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 곡에 몰두해 있던 베토벤의 모습을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가 증언했습니다. 베토벤은 리스와 함께 되블링의 숲속을 산책하던 중 폭풍우 몰아치는 듯한 피날레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산책하는 내내 베토벤은 음을 읊조리거나 때때로 큰 소리로 부르기도 했지만 특정한 선율은 없었습니다.” 리스가 무슨 곡이냐고 묻자 베토벤은 “새로 쓴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줄곧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 곡은 베토벤과 늘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던 프란츠 브룬스비크 백작(1777~1849)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는 첼로를 잘 연주했고, 베토벤의 음악에 깊이 심취했던 사람이지요. 베토벤은 그의 누나인 테레제(1775~1861)와 동생 요제피네(1779~1821)에게 뜨거운 마음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춘기 시절 이 곡을 듣고 삶의 엄숙함과 인간의 위대한 의지를 느끼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지요. ‘열정’ 소나타는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코다(Coda) : ‘꼬리’라는 뜻. 소나타 형식의 음악을 마무리하는 종지부를 가리킨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와 베토벤 C#단조 사중주
영화 ‘마지막 사중주’(Late Quartet)를 보셨나요?
‘푸가’ 사중주단의 첼로 주자 피터가 파킨슨씨병에 걸렸습니다. 사중주단의 최고령자인 그는 다가올 창단 25주년 연주회가 자신의 고별 무대가 될 거라고 선언합니다. 앙상블의 주춧돌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 된 거죠. 사중주단의 미래를 놓고 이견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로버트(제2바이올린)는 앞으로 자기도 가끔 제1바이올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량이 떨어지지 않는데도 그늘에서 다니엘(제1바이올린)을 뒷받침만 하기는 싫다는 거죠. 다니엘과 줄리엣(비올라)은 “기량 문제가 아니라 역할 문제”라며 반대합니다. 부부 사이인 줄리엣과 로버트 사이에 갈등이 증폭됩니다. 설상가상, 두 사람의 딸 알렉스가 다니엘(제1바이올린, 알렉스의 바이올린 선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버트는 격분하여 다니엘에게 주먹을 날립니다. ‘푸가’ 사중주단은 연주회를 앞두고 회복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집니다.
최대한 간략히 줄거리를 요약하려 했는데 좀 길어졌네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4명의 주인공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화가 현악사중주를 닮았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음악가들의 내면의 움직임을 아주 따뜻하고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얼핏 통속적인 줄거리 같지만, 네 사람이 자기 삶을 직면하는 태도, 음악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전편에 깔려 있는 베토벤 현악사중주곡이 관객들의 마음에 고요히 스며듭니다.
▲ 영화 ‘마지막 사중주’의 극중 인물들. 왼쪽부터 다니엘(제1바이올린), 로버트(제2바이올린), 피터(첼로), 줄리엣(비올라)
아,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됐냐구요? 알렉스는 다니엘에게 작별을 선언하고, ‘푸가’ 사중주단은 마지막 힘을 모아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줍니다. 첼로 주자 피터는 피날레를 연주하기 직전 연주를 중단하고 청중들에게 고별인사를 건네지요. 줄리엣은 존경의 눈물로 그를 떠나보내고, 피터의 후임자가 등장해 그의 빈자리를 메우죠. 고독하고 위엄 있는 피날레가 흐르며 영화는 암전됩니다.
이 영화에서 ‘푸가’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곡은 하필이면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14번 C#단조입니다. 7개의 악장으로 돼 있어서 구조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처음부터 끝까지 휴식이 없으니 연주하는 이들이 무척 힘들어 한답니다. 저처럼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제 경우, 베토벤의 다른 사중주곡은 어릴 때 듣고 곧 감동할 수 있었지만, 유독 이 곡만은 어른이 된 뒤에도 저 멀리 빛나는 별처럼 범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연륜이 있으니 좀 들리기 시작하는구나, 생각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베토벤의 드높고 고독한 정신세계는 저 멀리 있을 뿐입니다.
이 곡을 분석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이고, 특히 1악장이 느린 푸가로 돼 있어서 첫 걸음을 내딛기조차 버겁습니다. 베토벤한테 따귀 맞을 각오*하고, 7악장으로 된 이 곡을 제가 어떻게 접시에 담아서 먹었는지, 비결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먼저, 가장 짧은 3악장과 6악장을 잘라서 내려놓습니다. 3악장은 11마디밖에 안 되는 대목으로 다음 악장의 서주라 할 수 있습니다. 6악장도 여러 선율이 나오지만 연주 시간이 1분 30초 정도의 간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두 악장을 제외하면 크게 보아 1, 2, 4, 5, 7의 다섯 악장으로 된 곡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악장 수를 줄여놓고 보면 큰 구조를 파악하기 쉬워지지요.
곡 전체의 중심에 있는 게 4악장(링크 10:27)입니다. 주제와 6개의 변주곡으로 된 아름다운 부분으로, 길이도 13분 정도로 가장 길지요. 이 중심을 둘러싸고 생기 있게 흘러가는 2악장(링크 6:39)과 환상적인 스케르초 5악장(링크 23:10)이 대비를 이룹니다. 끝으로, 느린 푸가인 1악장(링크 처음)과 소나타 형식의 위엄 있는 7악장(링크 30:00)이 곡 전체의 알파와 오메가를 이룹니다. 두 악장은 중심 조성인 C#단조로, 서로 연결되지요. 자, 이제 큰 줄기를 파악했으면 아까 내려놓았던 3악장(링크 9:39)과 6악장(링크 28:36)을 다시 넣어볼까요? 7악장으로 된 곡 전체가 완성되지요? 이제 처음부터 잘 들어보기로 하죠.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4번 C#단조 Op.131 (연주 알반 베르크 현악사중주단)
훌륭한 목수는 못질한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C#단조 사중주곡은 이렇게 연결자국 하나 없는 완벽한 조형물이 됐습니다. 전통적인 4악장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했나 했더니 뜻밖에 새로운 형식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지요. “베토벤은 여기서 해체를 너무나 멀리 밀고 나간 끝에 그 반대편, 즉 위대한 응집과 심오한 통합성으로 되돌아온다. 베토벤의 작품 중 가장 완벽한 천의무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메이너드 솔로몬, <루트비히 판 베토벤> p.399)
베토벤은 마지막 현악사중주곡 중 앞의 세 곡 - 12번 Eb장조, 15번 A단조, 13번 Bb장조 - 을 갈리친 공작의 주문을 받고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번 C#단조 사중주곡은 다른 사람의 주문이 아니라, 베토벤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충동에 이끌려서 써 내려갔습니다. 이 무렵 베토벤은 제자 홀츠와 산책하던 중 기쁨에 넘쳐 “또다시 뭔가 내게 일어났다”고 외쳤지요. 홀츠는 베토벤이 “이 창조의 파도로부터 새로운 악상이 너무나 풍부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C#단조와 F장조 사중주를 써 내려갔다“고 증언했습니다. (메이너드 솔로몬, p.390)
이 무렵 작곡된 현악사중주곡은 모두 나름대로 위대하지만, 베토벤 자신은 이 C#단조 사중주곡이 가장 나은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슈베르트가 죽기 닷새 전 이 곡을 듣고 너무나 흥분하고 열광했기 때문에 친구들이 걱정할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지요. 프랑스의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은 이 작품이 심지어 “9번 교향곡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이라고 했군요. (롤랑 마뉘엘 ‘음악의 기쁨-2’ p.343)
다시 영화로 돌아갈까요? ‘마지막 사중주’가 감동적인 이유는, 파킨슨병 때문에 오랜 음악가 생활을 접어야 하는 첼로 주자 피터의 모습에 만년의 베토벤의 예술혼이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풍 같은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한 높은 정신세계가 담긴 베토벤의 C#단조 현악사중주를, 가장 어려운 작품인데도, 용기 있게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대중적 흥행만 추구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발상이지요. 영화 끝부분, 미술관에서 늙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던 피터와 줄리엣이 대화를 나눕니다.
줄리엣, “렘브란트가 선생님에게 무슨 얘기를 해 주나요?”
피터, “난 화가 중에 최고다, 난 정말 위대하다. 늙어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나는 전성기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눈빛이 정말 강렬하지. 황금색 옷 때문에 자기가 좀 웃겨 보이는 건 알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아직 그를 배반하지 않았어.”
피터는 이 대사로 렘브란트의 그림에 자신을 투사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C#단조 사중주곡을 작곡할 무렵의 베토벤 얘기 같기도 해서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마지막 장면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습니다. 사중주곡의 피날레가 연주될 때 피터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스와 함께 객석에 앉아서 음악을 듣지요. 황혼의 피터와 청춘의 알렉스가 손잡고 음악에 몰입하는 이 장면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습니다.
“현재와 과거는 아마 미래의 시간 속에 있을 것이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이미 들어 있을 것이고…. 모든 시간이 영원한 현재라면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아니, 시작보다 끝이 먼저 있다고 해야 할까? 끝과 시작은 늘 그 곳에 있었고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 언제나 현재가 있다.”
▲ 영화 ‘마지막 사중주’의 연주를 맡은 브렌타노 현악사중주단
시인 T. S. 엘리어트는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곡에 네 편의 시를 바쳤는데, 이 영화에 한 구절이 인용돼 있어요. 베토벤 음악도 어려운데, 엘리어트의 시는 더 어려운 것 같지요? “늙음을 너무 슬퍼 말라, 아름다움과 몰아지경에서 젊음과 늙음의 구별은 무의미할 것이니….” 이렇게 쉽게 읽어도 좋을 것 같군요. 영화 <마지막 사중주>와 베토벤의 C#단조 현악사중주곡, 둘 다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는 베토벤에게서 따귀를 맞을 뻔한 경험을 기록했다. 1804년 ‘에로이카’ 교향곡 리허설 때였다. 1악장 재현부가 시작되기 전에 호른 주자가 주제를 연주하자 리스는 호른이 실수로 너무 일찍 나왔다고 판단하여 큰 소리로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불같이 화를 내며 리스를 노려보았고, 이 순간 리스는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겁에 질렸다고 한다. 호른 주자는 베토벤이 악보에 써 넣은 대로 잘 연주한 건데, 리스가 베토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
“귀족·공작은 수천이지만 베토벤은 한 명 뿐이다”
언제 가장 깊은 슬픔을 느끼시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삶의 정점에서 죽음을 예감할 때?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는 이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침내 따뜻한 위안을 줍니다.
베토벤은 빈(Wien) 음악계의 새로운 왕자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790년대 초, 빈에는 300명이 넘는 전문 피아니스트가 활약했고 6,000명 가량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베토벤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지요. (제레미 시프먼 <베토벤, 그 삶과 음악> p.27) 슈타이벨트, 겔리네크, 뵐플 등과 실력을 겨룰 때 그가 보여준 즉흥연주 솜씨는 빈 청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이미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795년 Bb장조 협주곡을 직접 초연했고, 수많은 피아노곡과 실내악곡을 발표했습니다. C장조 협주곡을 초연할 때는 피아노가 반음 낮게 조율되어 있었는데, 오케스트라와 음정을 맞추기 위해 피아노를 반음 높은 C#장조로 연주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 빈 시절 초기의 베토벤
베토벤은 10여년 전의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빈에서 ‘성공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1797년 새해초, 베토벤은 일기에 썼습니다. “용기를! 육체가 아무리 허약하더라도 정신이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올해는 모든 것을 이뤄야 한다. 무엇이든 미완성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비창’ 소나타는 이 무렵인 1798년 작곡했습니다. 왜 하필 ‘성공의 정점’에서 ‘비창’ 소나타가 나왔을까요? 인간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즐거워 보여도 가슴 속엔 슬픔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을 두 손에 움켜쥔 것처럼 보일 때 상실감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베토벤이 ‘비창’ 소나타를 작곡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청각 상실’과 연관지어 얘기하는 것은 무척 상투적이고 안일한 해석이 될 위험이 있으므로 경계해야겠지요. 하지만 1796년 무렵 발병하여 1798년 무렵 ‘자칫 불치의 병이 될지도 모른다’고 베토벤이 느꼈다면,* 그 무렵 작곡한 이 소나타에 베토벤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슬픔과 비장미로 가득한 이 작품이 실존을 향한 극한의 열정과 닿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 피아노 연주 빌헬름 켐프
유투브 검색어 Beethoven Pathetique Kempf
1악장은 ‘심각하게’ (그라베), 장중한 느낌의 첫 대목은 단순한 서주가 아니라 1악장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빠르고 힘차게’로 표시된 제1주제는 2분의 2박자로, ‘만하임 로케트’* 처럼 정열적으로 솟구칩니다. 제2주제는 양손을 교차하며 질주하듯 앞으로 나아가며 제1주제와 얽히지요. 그라베의 비극적 모티브는 발전부와 코다 부분에서 다시 나타나 1악장 전체를 어두운 빛깔로 물들입니다.
▲ 거장 빌헬름 켐프(1895~1991)가 녹음한 ‘비창’ 소나타는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힌다.
2악장 ‘느리게 노래하듯’ (아다지오 칸타빌레, 링크 7:18부터)은 그때까지 베토벤이 작곡한 느린 악장 중 아마도 가장 우아하고 평온할 것 같군요. 아름답고 서정적인 첫 주제(A)가 흐르는 사이사이 달콤하게 꿈꾸는 듯한 에피소드(B), 애수와 절규가 교차하는 에피소드(C)가 등장하는 A-B-A-C-A의 론도* 형식입니다. 루이스 터커의 ‘미드나이트 블루’ 주제로 사용되어 팝송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대목이지요. 3악장은 피아노를 배운 사람들은 누구나 쳐 보았을 ‘론도 알레그로’입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친숙한 선율이지요. (링크 12:13부터)
모든 작곡가들은 시대의 아들이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자기만의 개성과 창조력을 펼쳤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비창’ 소나타는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다져놓은 빈 고전파의 전통 속에 있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베토벤의 개성을 보여준 첫 작품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월광’, ‘발트슈타인’, ‘열정’, ‘고별’, 그리고 ‘함머클라비어’를 포함한 위대한 후기 소나타….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32곡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진정 베토벤다운 첫 작품이 바로 ‘비창’ 소나타입니다.
초판 악보에는 ‘비장한 대소나타’(Grande sonate pathétique)라고 써 있었는데, 출판업자가 이렇게 제목을 붙이자 베토벤은 맘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베토벤 자신이 제목을 붙이거나 승인한 것은 이 곡과 26번 ‘고별’ 소나타, 두 곡 뿐입니다.
이 곡을 모차르트의 C단조 소나타 K.457과 비교해서 얘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같은 C단조의 곡이니까 비교할 만 하고,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때 모차르트의 C단조 소나타를 떠올렸음을 가능성은 있겠지요. 그러나 두 작품은 위대한 두 작곡가의 개성만큼 판이한 정서를 들려줍니다. 모차르트의 C단조는 ‘영웅적 슬픔’이지만 베토벤의 C단조는 운명과 맞싸우는 비타협적인 삶의 의지입니다.
1악장 첫머리 ‘그라베’의 모티브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1악장의 서주 모티브와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쓰면서 같은 제목의 베토벤 작품에 대해 경의(homage)를 표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의 역사는 이렇게 촘촘히 얽혀서 비밀스런 수수께끼를 넌지시 던지곤 하는군요.
베토벤은 이 작품을 칼 리히노프스키 공작(1761~1814)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는 1789년 모차르트와 함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를 거쳐 베를린을 여행했는데, 그 때 꿔 준 1,415 플로린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1791년 10월 모차르트를 고소한 적이 있군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베토벤을 열렬히 후원했습니다. 그는 1796년 베토벤과 함께 프라하를 여행했고, 1800년부터는 해마다 600플로린을 제공했습니다.
베토벤은 공작의 집에 드나들 때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이를 알게 된 공작은 베토벤의 자유로운 출입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인에게 지시했다지요. 신분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이지만,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와 베토벤이 살던 시대는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베토벤이 공작 사이는 결국 1806년 경 금이 가고 맙니다. 공작이 프랑스 장교들 앞에서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자 베토벤은 격노하여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이 때 베토벤이 남겨놓은 유명한 메모가 전해집니다. “이 세상에 귀족과 공작은 수천명이지만 베토벤은 한 명 뿐이다.”
두 사람이 서로 아끼던 시절,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비창’ 소나타 뿐 아니라 첫 피아노 트리오 세 곡, Ab장조 소나타 Op.26, 교향곡 2번 D장조도 헌정했습니다.
* 베토벤은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6년 전부터 귓병을 앓아 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1796년에 처음 귓병이 생겼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1801년 고향 친구 베겔러에게 쓴 편지에는 “3년 전 귓병이 악화됐다”고 했다. 따라서 귓병이 심각해진 것은 1798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796년에 발병한 베토벤의 귓병은 온갖 민간 치료도 소용없이 점점 악화됐고, 1798년 무렵 베토벤은 “영영 치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결론짓는 게 타당할 것이다.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 중 첫 작품은?
“우리는 머잖아 베토벤을 발견하게 될 것”
베토벤은 교향곡의 역사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의 아홉 교향곡에서 우리는 운명과의 투쟁, 자연에 대한 사랑, 프로메테우스 예찬, 신성한 춤과 도취, 형제애와 인류 평화 등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인간 정신의 도약을 목격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슈베르트, 브루크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까지 19세기 낭만시대의 거의 모든 교향곡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왕관인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또는 <환희의 송가>) 등 제목이 붙은 작품은 많은 분들이 기억하지만, 나머지 곡들은 생소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제목이 안 붙어 있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지요? 32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베토벤의 영혼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교향곡, 그 중 첫 곡은 어떤 작품일까요? 음악 평론가 조지 그로브의 말을 소개합니다.
“음악의 가장 위대한 기념비로 남게 될 불멸의 아홉 교향곡 중 첫 작품이라는 걸 잊지 말자. 만약 베토벤이 교향곡을 이 곡 하나만 남기고 죽었다면 후세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작품은 좀 더 음미되고, 더 평가받고, 더 사랑받았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이 한 곡 밖에 없다고 상상해 볼까요? 이 곡은 베토벤은 만 30살을 앞둔 1800년 초에 완성했습니다. 10곡의 피아노소나타, 2곡의 피아노협주곡, 그리고 6곡의 현악사중주곡 등 이미 수많은 작품을 쓴 베토벤이지만 교향곡만은 유난히 늦은 감이 있습니다. 이 곡에 착수한 게 1795년이니 베토벤이 무척 공들여서, 신중하게 작곡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요.
베토벤 교향곡 1번 C장조 Op.21 -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빈필하모닉 관현악단 연주
https://youtu.be/5RC_bYr3cPc
영국의 평론가 에드윈 에반스는 “(이 곡에서) 베토벤은 동시대 작곡가들보다 너무 앞서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고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혼자 연주할 피아노 소나타는 큰 부담 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었습니다.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처럼 형식적인 실험도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음악가가 연주하는 교향곡은 ‘여럿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반걸음만 앞서 가야 했습니다. 아직은 교향곡에서 급진적인 실험을 할 때가 아니었지요. 이 C장조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선배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물려준 형식의 틀을 존중했습니다. 다만, 곡 전체에 흘러넘치는 생기와 에너지는 분명 베토벤의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선배에게 배우며 성숙해 가는 20대 베토벤의 총결산으로, 알을 깨고 나오려고 의욕을 불사르는 젊은 천재의 모습입니다. 베를리오즈의 말입니다. “이 곡은 베토벤답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머잖아 그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받는다.”
1악장 첫 주제가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을, 2악장 주제가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를 닮았다 해서 화제가 되곤 하지요. 멜로디 형태가 비슷하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르므로 표절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20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곡에서 선배 모차르트에게 오마주를 표하려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반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했는데, 이 분은 모차르트에게 바흐와 헨델 악보를 빌려줬고, 1789년 모차르트의 예약연주회가 흥행에 실패해서 취소됐을 때 홀로 표를 구입한 사람이었고,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장례를 맡아서 치러 주기도 했지요. 이렇게 모차르트와 인연이 깊은 분에게 헌정한 작품이니 모차르트 오마주를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네요. 기록이나 증언이 전혀 없으니, 베토벤이 살아 있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군요.
청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뒤에 완성했지만, 처음 착상한 1795년 무렵의 파릇파릇한 꿈과 패기가 살아 있습니다. 1악장은 뭔가 질문하면서 모색하는 듯, 느린 서주로 시작합니다. 명암과 강약을 대비시키며 곡 전체의 중심을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활기찬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생기있게)는 젊은 베토벤의 씩씩한 얼굴을 보는 것 같아 무척 즐겁습니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모토(노래하며 걸어가듯 평온하게, 링크 10:00부터)는 아름답고 평화롭게 흐릅니다. 베토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요?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함께 노래하는 음색이 매혹적이고, 팀파니가 나지막히 울리는 대목도 근사합니다. 3악장(링크 19:00부터)은 ‘메뉴엣’이라고 표기돼 있지만,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우아한 메뉴엣과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스케르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베토벤은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지요. 4악장(링크 22:10부터)에는 짧은 서주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씩 상승하는 음계로 시작하여 한 옥타브 빠르게 상승하는 주제로 넘어갑니다.
아,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악장의 주제가 상승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3악장과 4악장의 주제는 아주 빠르게, 거침없이 올라갑니다. 음악은 심장에서 나오고, 젊고 뜨거운 심장은 필연적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선율로 이어지는 걸까요? 이 곡은 운명과 혈투를 벌이기 전, 젊고 순박한 베토벤의 모습입니다.
1800년 4월 2일,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됐습니다. 베토벤은 C장조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능숙한 즉흥연주를 선보였고, 이어서 이 교향곡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베토벤이 부르크테아터를 혼자 지배하고 있었다”고 전한 뒤 이 교향곡을 평했습니다. “무척 발전된 기법을 선보였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넘쳤다. 다만, 관악기가 너무 많이 사용되어 오케스트라다운 앙상블이라기보다 군악대의 음악처럼 들린 게 작은 흠이었다.” 1악장 끝부분, 당당하게 상승하는 트럼펫과 호른이 목관의 화음과 어우러지는 대목이 ‘군악대 음악’ 비슷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군요.
베토벤 교향곡 2번 D장조 Op.36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날의 찬란한 빛이여!
한 작품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작곡가가 인생의 어떤 길을 걷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베토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지요. 사람들은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위대했지만 인간으로서 더 위대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을 때 우리는 인간 베토벤의 모습을 떠올리고, 인간 베토벤을 생각하며 다시 음악을 듣게 되는 거지요.
씩씩하고 당당한 교향곡 2번을 작곡한 게 180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라는 사실을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기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음악가에게 최악의 저주인 청력 상실,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택해야 했던 고독…. 베토벤이 이 무렵 느꼈을 비통한 마음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작곡한 교향곡 2번이 찬란한 빛과 생기로 가득차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 그는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한결 성숙한 작곡가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고, 사랑을 갈망했고, 자기 천재성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불행은 이미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는 삶과 사랑과 예술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교향곡 2번은 불행의 그림자가 그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바로 그 순간, 자기의 젊은 시절에 바치는 찬란한 오마주(Homage)라고 말하고 싶네요.
교향곡 1번을 발표한 직후 처음 스케치를 썼고, 2년 만에 완성했군요. 베토벤은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진행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헷갈려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지요. 이 기간에 그는 피아노 소나타 <월광>과 <템페스트>, 바이올린 소나타 <봄>, 현악오중주곡 C장조 등 많은 작품을 쓰며 이 교향곡의 아이디어를 성숙시켰습니다. 교향곡 1번과 똑같은 악기 편성이지만 음악의 규모, 깊이, 기법이 크게 확대됐고, 환희와 열광, 낭만적 도취감이 넘칩니다.
베토벤 교향곡 2번 D장조 Op.36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 연주)
1악장은 드라마틱한 서주로 시작합니다. 고뇌의 그림자가 살짝 고개를 쳐들고 긴장이 고조된 뒤 교향곡 9번의 1악장 주제와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링크 2:10).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듯, 베토벤이 어두운 마음을 내비친 거지요.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생기있게)의 제1주제는 찬란하고 당당합니다. 언뜻 비치는 비극적인 느낌은 열광과 도취의 격류에 휩쓸려 사라져 버립니다. 이어지는 제2주제가 이 교향곡에서 제일 멋진 대목이라고 말하고 싶군요(링크 3:58). 목관이 먼저 주제를 연주하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큰 소리로 받아줍니다. 오늘의 고민과 내일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음악은 거침없고 당당합니다. 베토벤이 얼마나 올곧고 씩씩한 젊은이였는지, 이 대목을 들으면 저절로 느끼게 됩니다. 전개부와 재현부를 거쳐 열광적인 코다로 힘차게 마무리합니다.
2악장 라르게토(링크 12:20)는 베토벤이 이 무렵 작곡한 모든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울 것입니다. 바이올린을 위한 로망스 F장조를 연상케 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이 시냇물처럼 흐르지요. 특히 첫 주제는 조두남이 작곡한 우리 가곡 <그리움>(기약 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 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과 선율이 비슷해서 기억하기 좋겠군요. 베토벤 당시에도 성악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고 하는군요. 이 대목을 클라리넷이 연주하니 따뜻한 느낌이 짙게 배어납니다. 사랑과 동경을 담아 바이올린이 고음으로 노래하는 제2주제는 더욱 매혹적이지요.
이 교향곡의 3악장에서 베토벤은 처음 ‘스케르초’를 도입했습니다. 궁정 무용인 메뉴엣을 버리고 시민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자유로운 악장을 넣은 거지요. ‘스케르초’라는 말은 원래 ‘농담’이란 뜻으로, 가볍고 재치있는 간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3박자로 돼 있지만 한 마디를 한 박자로 지휘해야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음악이지요. 4악장 피날레는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젊음의 찬가입니다. 역동적인 대조와 예상치 못한 조바꿈으로 가득한 이 피날레는 젊은 베토벤의 심장에서 자연스레 용솟음쳐 나온 음악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음악평론가 로흘리츠(Rochlitz)의 말입니다. “이 교향곡은 열정적인 작품이며, 지금 유행하고 있는 숱한 아류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더라도 홀로 살아남을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게 머지않아 증명될 것이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Romain Roland)의 말입니다. “이 곡은 쾌활하고 동경에 차 있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욕구,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이것은 한편의 시이며, 곧 개화될 천재적 정신을 감추고 있는 작품이다.”
1803년 4월 5일 안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습니다. 이 교향곡은 미증유의 음악적 항해를 떠나기 직전, 베토벤이 과거의 음악 전통에 작별을 고하는 인사처럼 들립니다. 베토벤은 고난 가득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을 떼며 젊은 시절의 찬란한 빛을 예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 곡을 듣노라니 엉뚱하게도 보들레르의 <가을의 노래> 첫 구절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네요.
우리 이제 차디찬 어둠 속에 잠기리니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날의 찬란한 빛이여!
프로메테우스의 축제… ‘듣도 보도 못한’ 괴물 같은 교향곡, 에로이카
베토벤은 왜 에로이카의 표지를 찢었을까
음악은 정치와 무관할까요? 음악이 현실에 대해 얘기하면 ‘순수’하지 못한 걸까요? 이런 생각은 “정치는 추하고 음악은 고상한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나온 편견일 것입니다. 정치든 음악이든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의 희로애락과 뗄 수 없습니다. 정치를 개선해 나가는 일에 많은 사람이 직접 참여할수록 정치는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음악을 깊이 알아 갈수록 음악이 우리의 모든 생활감정에 깊이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때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성찰에서 태어나 저 멀리 빛나는 이상을 향해 도약합니다. <에로이카> 교향곡이 그러합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바치기 위해 <에로이카>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1798년 빈에 근무하던 프랑스 공사 베르나도트 장군으로부터 나폴레옹에 대한 얘기를 들은 베토벤은 그에게 깊은 관심과 존경을 표했습니다. 평민 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정치를 평정한 뒤 민주주의와 공화제의 기치를 들고 혁명 전쟁에 나섰습니다. 베토벤은 열광하며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에 비교했습니다. 귀족 사회의 차별과 속박을 걷어내고 자유와 평등을 가져 올 영웅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헤겔이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고 예찬한 나폴레옹. 베토벤은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에로이카>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그가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보나파르트’라고 써 놓은 표지를 찢어버렸다.
나폴레옹의 거침없는 진격에 전제군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비참한 삶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많은 가정에서는 십자가상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나폴레옹 초상을 걸기도 했지요. 베토벤은 그에게 헌정할 거대한 교향곡을 1804년 초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5월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토벤은 격분해서 ‘보나파르트’라고 써 놓은 표지를 찢어 버렸지요.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가 전한 베토벤의 말입니다. “그 역시 평범한 속물에 불과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오로지 자기 야망에만 탐닉하겠다는 것인가?”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원래 제목 대신 ‘한 위대한 인물의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곡함’이라고 써 넣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Eb장조 Op.55 <에로이카>
▲ 프란스 브뤼헨 지휘 18세기 오케스트라의 <에로이카> 음반
이 작품은 두 가지 의미에서 교향곡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작품입니다. 첫째, 혁명의 이상을 예찬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둘째, 교향곡의 새로운 지평을 단숨에 열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초연 당시의 악기를 그대로 사용한 프란스 브뤼헨 지휘 ‘18세기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그 시절로 돌아가 ‘교향곡의 혁명’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브루크너, 말러의 대교향곡을 경험한 지금은 베토벤의 <에로이카>를 별 충격 없이 들을 수 있지만, 초연 당시 청중들이 경험했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앞의 두 교향곡에는 선배인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3번 <에로이카>는 우주를 향해 포효하는 거대한 인간 베토벤의 모습입니다. 우선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당시 청중들은 ‘듣도 보도 못한’ 괴물 같은 교향곡에 맞닥뜨린 것이지요.
1804년 12월 로브코비츠 공의 저택에서 비공개 초연될 때 청중들이 느꼈음직한 충격이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의 영화 <에로이카>에 잘 묘사돼 있습니다.
영화 <에로이카>(감독 사이먼 셀란 존스, 영어 자막)
https://youtu.be/UtA7m3viB70
▲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의 영화 <에로이카>(2003, BBC)
과거 교향곡의 두 배가 넘는 규모로, 이해하기 힘든 불협화음이 자꾸 나와서 연주자들을 당황시켰습니다. 베토벤이 악보를 잘못 써 넣은 게 아니냐는 질문이 여러 차례 나왔다고 하지요. 두 개의 퉁명스런 화음으로 시작되는데, 이렇게 파격적으로 시작하는 교향곡은 전례가 없었습니다. 첫 주제는 이 화음을 펼쳐 놓았을 뿐, 이렇다 할 선율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연주자들이 “음악이 너무 거칠다”고 불평하자 베토벤은 “더 대담하게, 음표 하나하나에 액센트를 줘서 연주하라”고 주문하죠. “좀 천천히 연주하면 안 되냐”고 한 단원이 묻자 베토벤은 단호히 거부하며 “긴박하게 연주하라”고 강조합니다.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이 현장에서 베토벤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을 뻔한 일화를 전했습니다. 재현부가 시작되기 직전 느닷없이 호른이 주제를 연주하는데, 리스는 호른 주자가 너무 일찍 나왔다고 큰 소리로 지적했지요. 그 순간 베토벤은 불같이 화를 내며 리스를 노려보았고, 리스는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겁에 질렸다고 합니다. 호른 주자는 베토벤이 악보에 써 넣은 대로 정확히 연주한 건데, 리스가 베토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거죠.
2악장은 예기치 못한 ‘장송행진곡’입니다. 베토벤은 Ab장조 소나타 Op.26의 3악장에 장송행진곡을 넣은 적이 있지만, 당시 청중들은 1악장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 장송행진곡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베토벤이 영웅의 탄생과 부활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미 염두에 둔 걸까요?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베토벤은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며 이 ‘장송행진곡’을 상기시켰지요.
3악장은 장대한 스케르초입니다. A-B-A 형식으로,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한 스타카토가 이어지는 A부분에 이어 B부분에서는 3대의 호른이 사냥 나팔처럼 묵직한 화음을 연주합니다. 이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영웅’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호른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깊고 풍부한 울림을 지닌 호른 3대가 트럼펫과 함께 힘차게 연주할 때면 당당한 영웅의 이미지가 절로 떠오릅니다.” (최은규 <웅장한 ‘베토벤 사운드’의 비밀>
4악장 피날레는 서주가 딸린 웅장한 변주곡입니다. 이 피날레에서 베토벤은 거침없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예찬합니다. 이미 작곡해 둔 발레 모음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1801)의 마지막 곡에서 주제를 가져왔는데, 베토벤은 이 주제로 <에로이카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이미 작곡했지요. 같은 주제를 이렇게 여러 곡에 사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베토벤이 얼마나 이 프로메테우스의 주제를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케 합니다.
인간에게 불을 갖다 준 프로메테우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무릅쓰고 인간의 편에서 자유를 옹호한 그는 베토벤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에로이카> 교향곡은 자신의 불행과 고뇌를 이겨내고 인류에게 고귀한 음악을 선사한 베토벤의 자화상 같기도 합니다. 베토벤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꿈을 굳게 간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에게는 환멸을 느꼈지만, 인류의 영원한 자유를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베토벤은 찬란한 월계관을 씌워준 것입니다. 이 피날레는 ‘프로메테우스의 축제’라고 부를 만 합니다.
당시 한 비평가는 평소 베토벤을 숭배해 왔음을 밝힌 뒤 썼습니다. “이 긴 작품은 연주가 극히 어렵고,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고,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곡 전체의 파악을 방해하는 기괴한 요소들이 너무 많다. 통일감을 거의 잃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베토벤은 “내가 한 시간이 걸리는 교향곡을 써도 짧다고 느끼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응수했지요.
영화 <에로이카>에서 이 교향곡의 비공개 초연을 지켜본 하이든은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상당히 길고 복잡하군. 못 듣던 음악이야. 다른 어느 작곡가도 이런 걸 시도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의 질문 공세에 짧게 소감을 말한 하이든은 두어 걸음 옮긴 뒤 덧붙입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구나.” 이 작품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교향곡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 교향곡을 들은 베를리오즈의 말입니다. “착상과 처리가 아주 힘차며, 양식에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시적인 영감이 넘치는 이 곡을 들으면 헤아릴 길 없는 슬픔에 잠긴다.” 바그너의 평입니다. “완벽한 인격에서 우러난 작품으로, 유연한 감정과 강렬한 힘이 결합돼 있다. 완벽을 향한 정진,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영웅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합창> 환상곡 가사를 쓴 시인 쿠프너(Christoph Kuffner)는 1817년 베토벤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쿠프너 : 선생님의 교향곡 중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베토벤 : 아, 아, 에로이카!
쿠프너 : 저는 C단조 교향곡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베토벤 : 아니요, 에로이카요.
모차르트 피아노 오중주곡 Eb장조 K.452
“지금까지 내가 쓴 작품들 중 최고”
피아노와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을 위한 오중주곡은 아주 특이합니다. 악기 편성도 전례가 없지만, 피아노와 관악기들 사이의 관계가 아주 절묘하지요. 솔로 피아노 입장에서 보면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네 관악기가 한 묶음으로 오케스트라 역할을 하니까요. 모차르트는 빈에서 작곡한 첫 피아노협주곡들을 언급하며, “오케스트라 대신 실내 앙상블로 협연해도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곡은 오케스트라 대신 관악 앙상블이 연주하게 만든 ‘피아노협주곡’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네 명의 관악기 연주자 입장에서 보면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인 셈입니다.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처럼 들리는 거지요. 이 곡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어떤 악기를 맡든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역할도 아주 공정하게 배분되어 있습니다.
이 곡은, 어찌 보면 근대 민주주의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각 파트가 주체로 참여하여 평화와 조화를 이루니까요. 게다가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악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1784년 3월 30일 완성됐고, 이틀 뒤인 4월 1일 부르크테아터에서 모차르트 자신이 피아노를 맡아 초연됐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날 피아노협주곡 Bb장조 K.450과 D장조 K.451도 연이어 초연하며 기염을 토했지요. 이 세 곡의 피아노 파트는 거장다운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넘칩니다. ‘성공의 정점’에 오른 모차르트의 당당한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지요. 모차르트는 1784년 4월 10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오중주곡을 가리켜 “지금까지 제가 쓴 작품들 중 최고”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곡을 들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였는지요!”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협주곡의 경계선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 선을 넘지 않는 감정의 섬세함은 정말 놀랍다”며, “어떤 작품도 이 오중주곡을 능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피아노 오중주곡 Eb장조 K.452
1악장은 내면을 성찰하는 듯 라르고의 신비스런 서주로 시작, 활기찬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이어집니다. 네 관악기가 함께 피아노와 주고받는 대화, 네 관악기가 서로 눈을 맞추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상대의 노래를 들어주는 정다운 대화에 귀 기울여 보셔요. 2악장 라르게토는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중간 부분,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클라리넷, 오보에, 호른, 파곳이 애수에 잠겨 차례차례 노래하는 대목에 마음을 맡겨 보셔요. 3악장 론도 알레그레토는 경쾌하고 발랄하지요. 끝부분에 카덴차 표시가 돼 있는데, 초연 당시 모차르트가 즉흥연주를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요즘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아노 파트는 어느 지점에서든 서두르지 않고 앙상블의 중심을 잡아주는 ‘선생님’ 역할도 하는 것 같군요. 아,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파곳의 소리를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분도 계시다고요? 오보에는 ‘높은 목관악기’란 뜻이죠. 동그란 음색으로 가늘고 애절한 소리를 냅니다. 클라리넷은 18세기에 개발된 악기로, 소리가 부드럽고 따뜻해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는 것 같지요.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이 악기를 처음 접하고 열광한 뒤, ‘사랑’의 느낌을 표현할 때 클라리넷을 즐겨 썼습니다. 파곳은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낮은 소리를 내는데, 때로 익살스레 들리기도 하지요. 모차르트는 슬픔을 노래할 때 이 악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꿈꾸는 듯한 소리를 내는 호른을 무척 좋아했지요. 이 오중주곡에서 유일한 금관악기지만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울림으로 앙상블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지요.
이 곡을 쓸 무렵인 1784년부터 약 3년 동안 모차르트는 작곡가로서 ‘성공의 정점’을 누렸습니다. 이 때 그의 일과는 어땠을까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9시까지 작곡을 하고, 오후 1시까지 레슨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초대되는 경우가 아니면 2~3시 경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5시까지 작곡을 조금 더 하고, 저녁때는 연주를 하든지 밤 9시까지 작곡을 했습니다. 급한 일거리가 있으면 새벽 1시까지 작곡하기도 했지만 다음날은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무척 부지런히 살았지요?
당시 모차르트는 해마다 3천 플로린이 넘는 돈을 벌었는데, 이는 에스터하지 궁정악장 하이든의 연봉에 비해 3배가 넘었다고 합니다. 사치품인 당구대를 샀고, 카드게임을 즐겼고, 앵무새와 애완견을 키웠고, 하인을 고용하여 여유를 누렸지요.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도 즐겼습니다. 저녁에는 빈의 프라터 공원을 산책했고, 밤새 무도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1784년 9월에 태어난 둘째 칼 토마스는 건강히 자라 주었지요.
모차르트는 이 오중주곡 직전에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14번 K.449부터 스스로 작품번호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의 정점’에서 자기 관리를 할 필요성을 느낀 거지요. 이는 음악사상 저작권 개념이 처음 발생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 매기기는 이내 흐지부지됩니다. 작품으로 돈을 벌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만 모차르에게 돈을 위해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 앞이라면 몇 시간이고 기꺼이 연주해 주는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자기 작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이 사용 못하게 하려 들진 않았을 것 같군요.
삶의 찬가, 말러의 ‘아다지에토’
말러(1860~1911)는 19살 연하의 알마 신틀러와 결혼할 때 아름다운 <아다지에토>를 선물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꿈꾸듯 노래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이 곡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부드럽고, 따뜻하고, 애틋하고, 안타깝고…? 사랑하는 마음처럼, 음악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다. 작곡자 말러의 말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한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냥 말로 하지, 왜 구태여 작곡을 하겠는가?”
<아다지에토>는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인데, 무척 아름다워서 별도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미국에서는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추도하는 음악으로 TV에 등장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이 곡을 들으면 그를 기억하며 슬퍼한다고 한다. 이 곡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삽입돼서 더 유명해졌다. 열병에 걸린 예술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미소년 타지오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볼 때 이 곡이 흐른다. 사랑이 깊어 갈수록 죽음의 짙은 예감에 휩싸이는 예술가, 그 내면의 풍경이다.
고르디에바의 ‘삶의 찬가’ (1996)
러시아 출신의 피겨 여왕 에카테리나 고르디에바도 말러의 <아다지에토>에 맞춰 연기했다. 1996년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이날 공연의 제목은 <삶의 찬가>(Celebration of a Life). 24살 고르디에바는 혼자 춤춘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어려 있다. 관객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그녀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공연이 끝난 뒤 그녀는 말했다. “세르게이가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가 곁에 있기 때문에 저는 두 배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세르게이 그린코프(1967~1995)는 누구일까? 그는 고르디에바의 모든 것이었다.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두 사람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게이는 15살, 고르디에바는 11살이었다.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가 호흡을 맞춘 음악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어린 두 사람의 완벽한 연기는 놀라웠고, 특히 꼬마 고르디에바의 앳된 모습은 세계인의 화제가 됐다. 세계의 스포츠 캐스터들은 입을 모았다. “고르디에바는 4살 때 스케이트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소련에는 이 꼬마한테 맞는 스케이트가 없어서 양말을 여러 겹 껴 신어야 했다지요?”
1984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국제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세계 피겨 스케이팅의 미래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그들은 1988년 캘거리,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네 차례의 세계 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고르디에바는 해가 갈수록 키가 커졌고, 그와 비례하여 세르게이에 대한 사랑도 쑥쑥 자라났다. 1988년 새해 축하 공연에서 첫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은 1991년 4월 드디어 결혼했다. 이듬해 9월엔 딸 다리야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세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젊음과 행복의 절정에 서 있었다.
▲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베토벤의 <월광>에 맞춰 연기하고 있는 고르디에바와 그린코프.
세르게이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95년 11월 20일, 뉴욕 플래시드 호수에서 연습하던 그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르게이는 28살, 고르디에바는 24살이었다. 고르디에바는 그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왜 여전히 살아 있는 걸까? 세상은 어째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사랑하던 세르게이는 사라졌지만 젊은 그녀는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살 난 딸 다리야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석 달 뒤, 그녀는 빙판 위로 돌아왔다. 죽은 남편에게 바치는 공연이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세르게이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세르게이는 빙판 위에, <아다지에토> 선율 속에 살아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이날 공연은 TV로 생중계됐고, 고르디에바는 그날의 기록을 <나의 세르게이 : 러브 스토리>란 책으로 남겼다. 그녀는 1998년 <다리야를 위한 일기>를 펴냈고, 새 남편과 함께 스케이터의 삶을 이어가고 있고, 한국도 방문했다.
인간은 슬픔을 통해서 고결함을 얻는 걸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고르디에바의 <삶의 찬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슬픔의 위대한 힘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점차 엷어져 간다. ‘진보’를 믿던 문명이 수명을 다했다는 조한혜정 교수의 진단도 나왔다. 그래도 우리네 목숨은 붙어 있다. 세월호 참사 2년, 유족들은 슬픔의 힘으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총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자”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
“이 성스런 전당에는 복수라는 게 없다. 곤궁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건 인간의 의무. 우리는 친구의 손을 잡고 기꺼이 더 좋은 나라로 간다. 이 성스런 전당에선 모두 서로 사랑한다. 배신은 없고 원수는 용서받는다. 이 가르침에 기뻐하지 않으면 사람의 자격이 없다.”
<마술피리>에서 어둠을 지배하는 밤의 여왕과 빛의 사제 자라스트로는 철전지 원수지요.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에게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주며 자라스트로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고뇌에 빠진 파미나 앞에 자라스트로가 나타나서, 장중한 베이스 목소리로 화해와 용서를 노래하는 장면이지요. 아리아 ‘이 성스러운 전당’은 세상이 거칠고 사나울수록 평화의 꿈을 잃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마술피리> 중 자라스트로의 아리아 ‘이 성스러운 전당’
https://youtu.be/xA0htB1ziHw (베이스 르네 파페)
프란츠가 우주 공간에 머무는 동안에 딸아이가 태어나지요. 예쁜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평화롭기를 갈망하는 우주비행사 프란츠의 마음이 깊이 와 닿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 우주비행사들은 한결같이 평화주의자가 되지요. 1971년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에드가 미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와, 저게 나의 별이구나, 내 몸이 저 별과 이어져 있구나,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지구로 돌아오는 내내 창밖을 내다보며 대단한 황홀경을 경험했지요.” 지구로 돌아오는 길은 생명의 품에 안기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첼은 이 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저 푸른 별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떠올리며 그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전쟁은 정말 싫습니다. 국경 분쟁 때문에, 자기 신이 더 훌륭하다며 인간이 서로 죽인다는 사실이 너무 혐오스럽습니다. 그건 문명인의 행동이 아니지요. 원시적인 ‘약육강식’의 태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데, 우리 인간은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평화를 예찬한 모차르트의 노래가 또 있습니다. <마술피리>를 작곡하던 도중 잠깐 틈을 내서 작곡한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입니다.
“무한한 우주의 창조자를 찬양하는 그대! 여호와라 하든, 브라만이라 하든, 모두의 주인이신 그 분의 트럼펫 소리, 그 말씀을 들어라! 이 영원한 음악은 지구와 달과 태양을 가로질러 흐른다! 들어라, 사람들아, 함께 들어라!”
이 노래에서 모차르트는 “형제들의 피를 쏟게 한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고 힘주어 노래합니다. 자유, 평등, 우애를 기치로 내건 프리메이슨의 평화 사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거죠.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
1790년, 프랑크푸르트 장터에서 프랑스 혁명 1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때가 왔다, 자유를 쟁취하자”, “압제에 신음해 온 민중이여, 노예의 멍에를 던지고 일어나라”는 구호가 넘쳐흘렀고 ‘천부인권’이 새겨진 손수건, ‘자유냐 죽음이냐’ 외치는 유인물이 난무했습니다. 취업을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 모차르트는 이 장터에서 당대의 계몽사상가 프란츠 치겐하겐Franz Ziegenhagen(1753~1806)을 만났습니다. 그는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노예 착취와 여성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지요. 모차르트는 그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이듬해 그의 시에 노래를 붙이게 됩니다.
“기만의 굴레을 끊어라, 편견의 베일을 찢어라! 사람들을 패거리 짓는 헛된 옷을 벗어라! 인간들의 피를 쏟게 한 그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 형제들의 가슴에 치명적인 납덩이를 퍼부었던 그 검은 화약으로 압제의 바위를 깨뜨리자!”
▲ 모차르트가 열성적으로 참여한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우애를 예찬했다.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모차르트.
루소보다 더 시대를 앞선 사람으로 평가되는 교육자 치겐하겐의 사상은 오늘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올바로 관계 맺고 조화롭게 산다면 우리는 모두 세 배나 행복해 질 것이다. 힘없는 동료 인간을 팔고 사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탐욕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남의 나라 땅을 탐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헛된 야심이 자연스런 우정의 끈을 파괴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중략)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잘 배운 우리 모두 고귀하고 세련되게 자기 성취를 이룰 것이다.” - G. 슈타이너 <프란츠 치겐하겐, 그의 관계학>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할 때 잠깐 시간을 내서 이 노래를 만들었고, 1791년 10월 열린 프리메이슨 행사에서 초연했습니다. 피아노 반주의 독창곡으로, 테너나 소프라노가 부르지요. 첫 피아노 반주는 피아노협주곡 C장조 K.503의 첫 주제와 비슷한 프리메이슨 팡파레입니다. 열정적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알레그로에 이어서 차분한 안단테로 돌아옵니다. 끝부분 알레그로는 악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승리와 환희를 노래합니다.
“오직 현명하게, 힘차게 서서 모두 형제가 되어라!”
모차르트, 성공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다
빈 시절의 피아노 협주곡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통치자인 콜로레도 대주교의 부관 아르코 백작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다. 음악사상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막막한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그는 오로지 자기 재능으로 성공을 거머쥐어야 했다.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는 가장 효과적인 악기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귀족 계층과 신흥 시민계급을 망라한 고객들을 위해 그는 예약음악회(Akademie)를 계획했고, 여기서 선보인 가장 중요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빈 시절의 첫 피아노 협주곡인 F장조 K.413, A장조 K.414, C장조 K.415 등 세 곡에 대해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 협주곡들은 매우 화려하여 귀를 만족시킵니다.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고, 꼭 중간쯤 됩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공허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패시지들이 여기저기 있는데, 이 대목들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이유를 모르는 채 즐거워하게 됩니다.” (1782년 12월 28일 빈에서)
그는 일단 성공해야 했다. 어떤 음악에 사람들이 환호할지 그는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세 협주곡은 당시 귀족과 시민들의 취향에 잘 맞도록 배려해서 만든 곡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곡들이 “길거리의 마부들도 휘파람으로 부를 수 있는 곡”이라며, “오케스트라 부분은 현악사중주가 맡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신흥 시민계급의 가정에 피아노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든 친지와 함께 집에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 시대의 자식이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예술 작품들만 후세에 기억되는 법이다. 빈 시절의 첫 피아노 협주곡들은 흥행을 우선 고려했기 때문에 비교적 온건하게 시대의 한계 속에 머물고 있었다. 이 협주곡들은 지금은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 않지만, 당시에는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음악사의 역설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흥행을 위해 예술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들이 “전문가들의 취향도 만족시킬 수 있는 곡”이라고 자신 있게 덧붙였다. 이 협주곡들이 ‘고급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활동한 시기는 음악사에서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대였다. ‘가장 쉬운 고급음악’이자 ‘가장 뛰어난 대중음악’이 자유음악가 모차르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12번 A장조 K.414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A장조 K.414는 이 세 곡 중 첫 작품이다. 클라리넷 협주곡이나 피아노협주곡 23번처럼 A장조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화사하다. 1782년 11월 3일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아우어른하머의 집에서 초연됐고, 이듬해 봄 예약연주회에서도 연주됐다. 1악장 전개부에서는 애절하게 마음을 호소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링크 5:40~6:25) 모차르트의 속마음을 내비친 이 아름다운 패시지는 청중들의 마음 속에 애틋한 교감을 일으켰을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13번 C장조 K.415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같은 시기에 작곡한 K.415는 <주피터> 교향곡과 피아노협주곡 25번처럼 위풍당당한 C장조로, 오케스트라에 트럼펫, 팀파니가 포함된 대편성이다. 이 곡의 3악장 론도가 특히 흥미롭다. 신선하게 빛나는 6/8박자의 첫 부분에 이어서 뜻밖에 C단조의 아다지오가 펼쳐진다. (링크 20:16~21:13) 모차르트는 원래 2악장을 C단조로 작곡하려다가 생각을 바꿔서 우아한 F장조로 완성했다고 한다. 자기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청중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고친 셈이다. 이 또한 흥행을 우선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2악장에서 지워 버린 슬픔의 흔적이 3악장에서 잠깐 고개를 쳐든다. 이 론도는 C단조의 아다지오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에 뚜렷한 대조와 함께 생동감이 배가된다. 듣는 이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이 3악장에서 빛난다. 1783년 3월 23일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이 곡이 연주될 때는 황제 요젭 2세도 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1784년 봄, 모차르트는 빈 음악계의 스타가 돼 있었다. 자유음악가로 활동한지 3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 해 3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시간이 없어서 자주 편지를 보낼 수 없는 걸 용서해 달라”고 한다. 곧 세 차례의 예약연주회가 있는데 이미 100명 넘는 사람이 예약했다, 새 작품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작곡을 멈출 수 없다, 오전 내내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다, 매일 밤마다 연주를 해야 한다…. 즐거운 비명이었다. 예약연주회를 위한 새 작품은 역시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1784년 한 해에 모차르트는 무려 6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고 초연했다. 그는 새로 구입한 안톤 발터(Anton Walter)의 피아노를 연주회장으로 가져가서 연주했다. 그의 예약연주회는 매번 큰 성황을 이뤘고, 연수익은 해마다 증가하여 1785년에는 3,700굴덴이 이르렀다. 같은 시기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에게서 받던 연봉의 세 배를 넘은 액수였다. 모차르트는 빈 중심가에 고급 주택을 얻었고, 당구대를 들여놓았고, 강아지와 찌르레기 같은 애완동물을 키웠다. 자유음악가로 첫 걸음을 내딛고 3년만에 모차르트는 성공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빈의 모차르트 박물관에 있는 발터 피아노
이 무렵 모차르트는 자기 작품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음악사에서 저작권의 개념이 희미하게나마 처음 싹트는 순간이었다. ‘자작 목록’에 처음 오른 건 피아노협주곡 14번 Eb장조 K.449, 15번 Bb장조 K.450, 16번 D장조 K.451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세 곡을 3월 17일, 24일, 31일에 차례차례 한곡씩 초연하며 기염을 토했다. 1783년에 발표한 세 곡처럼 오케스트라의 악기편성은 “관악기는 생략해도 괜찮다”고 했다. 실내악 형태로 가정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K.449는 모차르트가 직접 초연했고, 얼마 뒤 제자인 바르바라 플로이어가 연주했다. 뛰어난 대가가 아니라도 연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작곡했다는 뜻이다.
Bb장조 K.450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청중들의 열렬한 호응에 자신감을 얻은 모차르트는 좀 더 깊이 있는 곡을 선보이고 싶었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커졌고, 피아니스트에게 화려한 테크닉과 대가다운 카리스마를 요구하고 있다. 모차르트도 이 곡이 특별하다고 편지에서 밝혔다. “모두 땀 흘려 만든 협주곡이지만 연주의 난이도로 보면 이 곡이 D장조(K.451)보다 한 수 위입니다. 리히터씨가 듣고 감동한 작품은 바로 이 곡입니다.” (1784년 6월 6일, 아버지에게)
1악장, 관악합주가 연주하는 단순한 첫 주제는 무궁무진한 변화와 발전의 씨앗이다. 이렇다 할 멜로디라고 할 수도 없는 “미파#파솔”을 반복하며 서주가 시작될 때, 피아노에 앉아 있는 대가는 “그래, 우리 한번 (음악으로) 놀아볼까?” 자신감 넘치게 웃어 보이는 것 같다. 모차르트가 이 곡을 직접 초연한 1784년 3월 24일, 트라트너의 저택은 얼마나 흥분과 경이로 가득했을까?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피아노협주곡 15번 Bb장조 K.450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인간이 기계만 못하다고?”
인공지능 시대, 모차르트의 메시지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1936), 자동화된 공정에서 나사 조이는 일을 맡은 떠돌이 채플린은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거대한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기계문명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된 20세기를 풍자한 명장면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사람의 화두가 된 요즘, 이 장면은 더욱 생생한 공감을 일으킨다.
▲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기계에 빨려 들어간 떠돌이 채플린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인류는 점점 더 똑똑해졌지만 개인은 덜 똑똑해졌다. 인간은 개미와 벌을 닮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이에 비례해서 인간이 점점 더 기계를 닮아가는 게 아닌지 경고한 것이다. 뇌과학자 김대식은 최근 저서 <기계 vs 인간>에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인간이 기계 같은 삶을 산다면 기계한테 100퍼센트 진다. 내가 하는 일이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서 실직 사태가 만연하고, 소득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 것도 구매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기본소득제가 곧 절박한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한 과학자는 “곧 모든 사람이 놀고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인간 사회가 먼저 평등하고 정의로워져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기술문명의 발전에 기계처럼 순응한다면, 로봇이 인간을 두드려 패며 통제하는 디스토피아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는 인간에게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감성과 공감력이 있다고 말해 준다. 1781년 12월 24일, 새로 취임한 계몽군주 요젭 2세는 모차르트를 호프부르크 궁으로 부른다. 마침 빈을 방문하고 있던 영국의 피아노 대가 클레멘티와 경연을 준비한 것이다.
클레멘티는 베르사이유에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연주했고, 뮌헨, 잘츠부르크의 팬들을 열광시킨 뒤 빈에 도착했다. 모차르트는 그해 6월 잘츠부르크의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쫓겨난 뒤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새롭게 출발하고 있었다. 요젭 2세가 불러 줄 날을 기다려 온 모차르트에게 이날은 화려하게 데뷔할 기회였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빈의 왕족과 귀족들은 물론, 러시아의 외교사절들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최고 피아니스트가 마주한 이 날 경연은, 스포츠로 치면 국제경기 A매치와 같았다. 황제는 피아노 경연이 벌어질 거라고 두 사람에게 예고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의연히 받아들였다.
▲ 모차르트(1756~1791)와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
황제가 등장해서 말했다. “여기 두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있으니 연주를 청해 듣기로 합시다. 클레멘티가 먼저 연주하시오.” 클레멘티는 자신의 신작 소나타 Bb장조를 연주했고, 뒷부분에서는 즉흥 연주도 선보였다. 청중들은 환호했다. 이어서 클레멘티는 당시 무척 인기있던 곡 <토카타>를 연주했다. 요즘은 잘 연주되지 않지만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테크닉을 선보인 쇼케이스로, 3도 음정으로 진행되는 대목에서 ‘악마적인’ 기교가 필요하다고 한다. 클레멘티의 놀라운 테크닉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클레멘티 소나타 Bb장조 op.24-2 (피아노 발라쥬 쇼콜라이)
클레멘티 <토카타> Op.11(포르테피아노 콘스탄티노 마스트로프리미아노)
모차르트는 어떤 곡을 연주했을까? 기대감에 차 있는 청중들 앞에서 피아노에 앉은 그는 느린 템포의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카프리치오 C장조 K.395였다. 기교보다는 음악성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모차르트 <카프리치오> K.395 (포르테피아노 로날드 브라우티검)
이어서 모차르트는 아주 포퓰러한 주제로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를 주제로 한 변주곡, 누구나 아는 선율이었고, 이 단순한 선율이 다채로운 변주로 이어지자 모두 기뻐했다.
모차르트 <반짝반짝 작은별> 주제에 의한 변주곡 K.265 (피아노 발터 기제킹)
이 주제는 모차르트가 1778년 파리 여행 때 들은 유행가 <엄마에게 말해 드릴께요> (Ah, vous-dirais je, maman)다. 원래 가사는 이렇다. “엄마,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제 마음은 요동치고 있어요. 아빠는 저더러 어른스럽게 처신하라지만, 저는 어른스런 추론보다 달콤한 봉봉과자가 더 좋거든요.” 사랑 앞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젊은 처녀의 하소연이다. 이 노랫말은 모차르트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 시대의 룰에 따라 봉건 영주 밑에서 평탄하고 안전하게 살라고 아버지는 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당시 상식으로는 그게 이성적인 태도였지만, 모차르트는 고초를 마다않고 자유음악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연이 끝났다. 누가 이겼을까? 황제는 무승부를 선언했다. 참석자 모두를 흡족케 하려는 외교적 행동이었다.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 준 파이지엘로의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테크닉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 아버지에게 보낸 모차르트의 편지에 나오는 구절. “클레멘티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죠. 그의 오른손은 무척 훌륭하고 특히 3도, 6도 진행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기교를 제외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 한푼의 취향도, 느낌도 없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술자(mechanicus)일 뿐입니다.”
황제 요젭 2세는 이 날의 음악 경연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황제가 궁정음악가 디터스도르프에게 물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어본 적 있나?”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폐하.” “어땠나?” “음악애호가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클레멘티 연주도 들어봤나?” “네, 그렇습니다.” “모차르트보다 클레멘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대의 의견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클레멘티의 연주는 기술인 반면 모차르트는 예술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오늘날, 모차르트 음악이 클레멘티보다 훨씬 더 자주 연주되는 건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시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근대 세계가 태어날 무렵, 인간의 자유와 감성을 옹호한 모차르트. 그의 음악은 근대가 저물어가고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모차르트는 왜 가난해졌을까?
최고의 오페라에서 자유 평등 노래하다, 불온한 음악가로 고립돼
자유음악가 모차르트는 1785년 ‘성공의 정점’을 기록했다. 이 해 그의 연수익은 3,700굴덴으로, 에스터하치가의 하인 신분이었던 하이든에 비해 3배가 넘었다. 귀족과 시민은 물론 계몽군주 요젭 2세도 모차르트에 열광했다. 그는 더 이상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자신감을 얻었다.
2월 11일 초연된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는 모차르트의 맨얼굴을 보여준 최초의 걸작이었다. 인간 실존의 검은 심연을 직시하는 듯, 전율을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모차르트 자신의 삶을 표상하듯, 검붉은 D단조의 알레그로로 시작하는 이 협주곡은 따뜻한 2악장 로망스와 격렬한 피날레에 이어서 인간 승리를 예찬하는 당당한 D장조의 코다로 마무리한다. 초연이 끝나자 요젭 2세도 자리에서 일어나 “브라보, 모차르트!”를 외쳤다. 이와 비슷한 피아노협주곡이 세상에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며 들어보자.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 K.466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1악장 알레그로 00:55~15:15, 2악장 로망스 15:40~24:38, 3악장 알레그로 아사이 24:38~32:38)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슬로건을 모차르트가 한발 앞서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을 특별히 좋아한 베토벤은 1795년 이 곡을 연주했을 뿐 아니라 1악장의 카덴차를 자기가 써 넣기도 했다.
2월 11일은 요젭 하이든이 프리메이슨 지부 ‘콩코드’에 가입하는 날이었다. 모차르트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바로 D단조 협주곡의 초연 때문이었다. 다음날,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집으로 초청해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의 현악사중주곡 세 곡 - K.458, K.464, K.465 - 이 연주됐다. 제1바이올린 하이든, 제2바이올린 디터스도로프, 비올라 모차르트, 첼로 반할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 그는 전날 빈에 도착하여 피아노협주곡 D단조 초연을 참관했다 - 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은 지금까지 내가 직접 알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고, 작곡에 대한 깊은 지식에 통달해 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꿈은 이루어졌다. 아들과 소원해져 있던 아버지는, 아들이 성공의 정점에 도달한 이 순간에 기꺼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화해는 다음 달 열린 음악회에서 완결됐다. 3월 10일 부르크테아터에서 모차르트는 피아노협주곡 21번 C장조를 초연했다. 군대행진곡 풍의 당당한 1악장에 이어서 꿈처럼 아름다운 2악장 안단테가 펼쳐졌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으로 널리 알려진 이 안단테에서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경의를 표했다. 제2주제에 이어지는 경과구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의 소나타 C장조를 인용한 것이다. 이 대목의 왼손 부분은 아버지의 작품과 똑같은데, 이렇게 인용함으로써 존경을 표하는 ‘오마주’ 기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링크 3:31부터)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C장조 K.467 중 2악장 안단테
레오폴트는 이 날 연주가 끝난 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성공의 정점’에서 이뤄진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 그 기념비에 해당되는 작품이 바로 이 C장조 협주곡의 아름다운 안단테였다. 아버지는 그해 4월 25일 흡족한 마음으로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2년 뒤 레오폴트는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모습을 안 보고 간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까?
1786년 5월,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피가로의 결혼>이 막을 올렸다. 이 위대한 오페라가 모차르트의 경제적 몰락을 자초할 줄은 아버지도, 아들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마르세의 원작은 프랑스에서 이미 불온한 작품으로 찍혔지만 계몽군주 요젭 2세는 그해 개막작으로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를 선택했다. 시민의 시선에서 귀족을 풍자하는 내용이었지만, 절대군주의 권위가 튼튼하다면 괜찮다고 보았던 걸까. 이 작품에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했지만 귀족들은 등을 돌렸다. 특히 알마비바 백작이 부인과 하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에 귀족들은 ‘역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가 된 지 5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아직은 귀족 중심이었다. 청중들의 취향은 아직은 귀족들이 결정했고, 시민들은 이를 따르는 분위기였다. 모차르트는 그냥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노래했을 뿐이지만,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무렵인 만큼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불온한 음악가로 낙인찍혔고, <피가로의 결혼>은 9번 상영된 뒤 막을 내려야 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그해 겨울, 정치적 변방인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프라하 사람들은 모두 피가로의 아리아를 하나쯤 불렀고, 무도회장에서는 이 오페라를 편곡한 춤곡이 흘러넘쳤고, 모차르트는 프라하 시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기뻐했다. 이듬해, 프라하 극장은 모차르트에게 새 오페라를 주문했고, 그 결과 나온 <돈조반니>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프라하에서 1787년 10월 29일 막을 올린 이 작품은 대성공이었다. 바람둥이를 응징하는 내용이지만, 귀족의 악행을 심판하는 것으로 읽힐 소지가 다분했다. <돈조반니>에 열광한 프라하의 청중들은 무척 리버럴했다. 돈조반니가 무대에 나타나면 여성들이 기절할 듯 비명을 질렀고, 체를리나가 등장하면 남성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돈조반니>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지만, 모차르트의 경제적 생존에 치명타를 날린 작품이기도 했다. 이듬해 5월 빈에서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모차르트에게 돌아온 건 싸늘한 눈길뿐이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백작이 무릎 꿇고 사과하자 백작 부인이 용서해 주고 모두 평화를 되찾는다. <돈조반니>에서는? 귀족 돈조반니가 끝까지 뉘우치지 않자 결국 기사장의 대리석상이 그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뜨린다. 게다가 1막 피날레에서는 돈조반니의 선창으로 모든 출연자들이 “자유 만만세!”(Viva la liberta)를 외친 건 또 무슨 의도인가? 이 작품은 <피가로의 결혼>보다 더 불온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 모차르트는 정치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정치적으로 해석됐다. <돈조반니> 1막 끝무렵, 모든 출연자들이 ‘자유 만만세’(Viva la liberta)를 외치는데, 이는 시민 봉기의 풍경이었다. <돈조반니>가 초연된 것은 프랑스 혁명 2년 전이었다. 사실, 1781년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의 길을 선택한 것부터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돈조반니>가 빈에서 초연된 뒤 뒷풀이 자리 풍경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을 비방하고 있었다. 추잡하고 비도덕적이다, 음표가 너무 많다…. 이 자리에 하이든이 있었다. 한참 모차르트를 비방하던 사람들이 하이든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이든이 대답했다. “제가 이 논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점입니다.” 하이든의 이 말로 논란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돈조반니> 이후 빈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모차르트를 챙겨준 사람은 황제 요젭2세였다. 1787년 가을, 궁정악장이던 글루크가 사망하자 모차르트에게 궁정 실내악 작곡가 지위와 함께 연봉 800 플로린을 주기로 한 것이다. 6살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는 요젭2세는 평생 모차르트에 대해 호감을 유지했다. 하지만 궁정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한 것은, 불온한 오페라는 그만 두고 듣기 편안한 춤곡이나 작곡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1788년 빈에 경제 불황이 닥치고, 빵 폭동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터키를 침공하자 황제 요젭2세는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터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황제가 거금을 내놓으면 귀족들도 따라서 많은 돈을 내야 했다. 경제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문화비용을 줄이는 건 예나제나 마찬가지일까. 모차르트는 1789년, 빈 시절 초기처럼 예약연주회(Akademie)를 계획했지만 예약을 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반 슈비텐 남작 뿐이었고, 연주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1790년 초, 황제 요젭2세가 터키와의 전쟁 중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빽’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프리메이슨 동료들뿐이었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푸흐베르크 등 프리메이슨 친구들에게 돈을 꿔 달라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새 일자리를 찾아 베를린, 드레스덴, 뮌헨 등지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이 여행에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동행했는데, 모차르트는 이 사람에게도 여행 경비와 연주회 준비를 위해 돈을 꿨다. 다음해까지 모차르트가 그 돈을 갚지 못하자,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모차르트를 고발하기도 했다.
이해타산에 어두웠던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다가 불온한 음악가로 낙인찍혔다. 모차르트는 얼떨결에 붉은 깃발을 들고 앞장서는 <모던타임즈>의 떠돌이 채플린을 닮았다.
이해타산에 어두웠던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다가 불온한 음악가로 낙인찍혔다. 모차르트는 얼떨결에 붉은 깃발을 들고 앞장서는 <모던타임즈>의 떠돌이 채플린을 닮았다.
영화 <모던 타임즈>(1936) 중 ‘붉은 깃발’ 장면
1791년, 35년 생애의 마지막 해, 모차르트는 열심히 일했다. 오페라 <황제 티토의 자비>와 <마술피리>를 연이어 작곡했다. 1년에 오페라를 두 개나 쓴 건 처음이었다. 프라하에서 열린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서 공연된 <황제 티토의 자비>를 새 황제와 그의 부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 티토의 최측근인 세스토가 모반을 꾸며서 티토를 살해하려 하고,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하지만, 쿠데타를 시도하는 설정 자체가 아무래도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그해 9월 30일 빈에서 개막된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에게 마지막 성공과 함께 경제적 회생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마술피리>는 200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모차르트는 초연 후 두 달 남짓 지난 12월 5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레퀴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모차르트의 사인도 영구 미제로 남았다.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소비자가 확대되어 - 피아노의 보급과 악보 출판 활성화 - 지속적인 성공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너무 일찍 자유음악가가 됐던 모차르트는 자기뜻과 관계없이 불온한 작곡가로 찍혀서 외면당했고 경제적 파멸을 자초했다. 모차르트를 혁명적 음악가로 부른다면, 그는 얼떨결에 붉은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행진한 <모던 타임즈>의 떠돌이 채플린을 닮았다고나 할까.
모차르트 즉흥연주는 어땠을까?
환상곡 D단조 K.397과 C단조 K.475
전문음악가들은, 일반인들이 책을 읽듯 쉽게 악보를 읽는다. 처음 보는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것을 ‘초견 연주’라 한다. PD시절, 한동일(피아니스트), 김영욱(바이올리니스트), 양성원(첼리스트)이 모여서 베토벤 피아노트리오를 초견으로 유창하게 연주하는 걸 보고 무척 놀란 게 기억난다. 2006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있었다. 첫 리허설 시작, 나는 당연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를 예습해서 올 줄 알았다. 모차르트 하프너 세레나데의 6악장은 내가 알기론 한국에서 처음 연주하는 곡이었고, 단원들은 이 곡을 모를테니…. 그러나 놀랍게도 단원들은 처음 보는 이 악보를 그냥 척척 연주해 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버벅거렸지만 2~3번 연습하니 앙상블이 이뤄졌다!) 그날 리허설에서 악보를 읽으며 진땀 빼는 사람은 지휘자인 나 한명 뿐이었다!
전문음악가가 초견으로 연주하는 것은, 문학인이 처음 보는 시를 낭송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고은의 <백두산>이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처음 본 사람이 대중 앞에서 우렁차게, 또는 마음에 와닿는 목소리로 정겹게 이 시를 낭독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음악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 연주자가 처음 접하는 작품의 정신, 형식, 디테일을 한눈에 파악하고 작곡자의 마음이 되어 그 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초견 연주 실력은 테크닉은 물론, 음악적 지성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전문음악가 사이에도 초견 연주 실력은 차이가 있는데, 모차르트는 이 분야에서 누구보다 탁월했나보다.
어떤 평론가는 모차르트의 초견 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그의 초견 연주 실력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곡을 몇 차례 연습한 뒤에 친다 하더라도 초견 연주 때보다 더 잘 칠 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그나츠 우므라우프라는 작곡가가 자기 오페라 악보를 들고 왔을 때 모차르트가 피아노로 죽 쳐 본 적이 있다. 모차르트의 초견 연주 실력에 넋이 나간 이그나츠는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는 머리에, 팔꿈치에, 손가락에 악마가 들어있는 게 분명해. 내가 읽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지저분하게 그린 악보를, 마치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유창하게 연주해 버리다니!”
‘즉흥 연주’는 요즘은 재즈에서나 맛볼 수 있을 뿐, 클래식 음악에서는 들을 기회가 드물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 ‘즉흥 연주’ 실력은 음악가의 자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모차르트의 즉흥연주 솜씨는 전설이었다. 빈 시절, 모차르트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직접 연주해서 환호를 받았는데, 그는 즉흥연주로 청중들의 환호에 답하곤 했다. 1783년 3월 두 곡의 협주곡을 초연한 뒤 환상곡 D단조를 연주하자 청중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어나서 환호했다. 빈의 한 신문은 “음악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씨는 쇼팽 콩쿨 1차 본선에서 이 곡을 선택했다. 모차르트가 즉흥연주하는 모습을 눈감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모차르트 환상곡 D단조 K.397 (피아노 조성진)
(링크 1:00~7:00)
1785년 3월 10일, C장조 협주곡 K.467을 연주해서 엄청난 박수를 받은 모차르트는 새로 개발한 페달을 피아노에 달고 두 옥타브나 높은 소리로 즉흥 연주를 해서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프라하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1787년 1월, 프라하 연주회에서 요한 다니엘 프라이슬러라는 사람은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조그만 인간, 위대한 거장은 두 번 즉흥연주를 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너무나 멋진 연주여서 나는 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가장 어려운 패시지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시켜서 연주했다.” 같은 연주회에 대해 니메첵은 좀 더 자세히 기록했다.
“극장이 이렇게 꽉 찬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날 모차르트의 성스런 연주에 청중들이 일치해서 보낸 환호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음악회는 없다! 최고의 작곡가가 최고의 연주로 들려준 음악이었으니까. 그날의 인상은 ‘달콤한 요술’에 걸린 것과 같았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연주회 마지막 부분에서 모차르트는 혼자 30분이 넘도록 즉흥 연주를 했는데, 이때 청중들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는 감동에 겨운 나머지 크게 환호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 즉흥 연주는 흔히 얘기하는 포르테피아노 연주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가장 탁월한 작곡 재능을 가진 사람이 가장 완벽한 실력으로 연주하는 음악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의 즉흥연주를 들어 볼 수 없다. 레코딩이 없던 시절, 그가 즉흥연주를 일일이 악보로 남기지 않은 건 아쉽기 짝이 없다. 그나마 환상곡 C단조 K.457가 있으니 모차르트의 즉흥연주 스타일을 짐작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 K.475 (피아노 발렌티나 리시차)
‘환상곡’답게 특정한 형식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음악이다. 굳이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은 일곱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셈이다. ❶ 아다지오, 깊은 슬픔을 억누른 C단조의 유니슨 ❷ 다소 빨라지며 변화무쌍한 조바꿈이 펼쳐지고 ❸ 아름답고 서정적인 D장조의 노래 (2:30부터) ❹ 격렬한 트레몰로와 감정의 토로 (4:10부터) ❺ 안단티노, 마음을 가다듬고 내면을 돌아본다 (5:51부터) ❻ 자유로운 펼침화음을 거쳐 원래의 C단조로 이동 (8:01부터), 베토벤 <열정> 소나타를 연상시키는 경과구 (9:30부터) ❼ C단조의 아다지오로 돌아와 마무리 (9:50부터)
모차르트와 동시대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는 “모차르트는 기발하고 아름다운 악상이 너무나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다 듣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이 곡은 디터스도르프와 같은 평범한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체험한 우리들는 이 곡이 모차르트 작품들 중 낭만적 서정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곡으로 들린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만 쓸 수 있는 곡인 셈이다.
즉흥연주 실력은 왜 중요할까? 작곡 기량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흥연주를 잘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작곡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다는 뜻이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주제 뒤에 이어져야 할 바로 그 음을 찾아내는 특별한 재능”이 바로 작곡가의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의 즐거움>, p.80) “가장 적확한 음은 물론, 가장 적확한 리듬과 클라이맥스와 화음과 악기 편성을 찾아내는 일”, 이 복잡한 과제를 즉흥적으로 해 낸다면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였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즉흥연주에 능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C단조 환상곡은 같은 조성인 C단조 소나타 K.457과 함께 모차르트의 제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 테레제 폰 트라트너에게 헌정했다. 모차르트의 G단조가 ‘비극적’이고 D단조가 ‘악마적’이라면, C단조는 ‘영웅적’ 슬픔을 고귀하게 노래한다. 이 C단조 환상곡과 소나타는 함께 묶어서 출판됐고, 요즘도 함께 연주되곤 한다. 19세기의 뛰어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은 C단조 소나타를 무척 좋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C단조 소나타는 너무 훌륭해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2악장의 아다지오는 마음을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드는 것 같아, 이걸 치고 있으면 천국의 기쁨이 온몸에 흘러내립니다. 이런 사람이 이전에 살아 있었다니요. 나는 지금 온 세상을 꼭 안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C단조 K.457 (피아노 마리아 조앙 피레스, 2악장 8:13부터)
모차르트, ‘성공의 정점’에서 아버지와 화해하다
#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 K.466
1785년 2월 11일, 모차르트의 새 피아노협주곡이 초연됐습니다. 이렇게 강렬하고 비극적인 협주곡은 음악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이 곡은 그때까지 협주곡에서 기대되던 밝고 화려한 느낌 대신 모차르트 내면의 실존적 고뇌와 어두운 열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낮은 현의 셋잇단꾸밈음에 실려서 D단조의 주제가 등장할 때 청중들은 전율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영웅적 카리스마로 피아노 파트를 종횡무진 누볐습니다. 2악장 로망스는 달콤했지만 어느새 G단조의 격렬한 패시지로 바뀌어 있습니다. 3악장은 힘차게 상승하는 D단조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고, 당당한 D장조로 힘차게 마무리합니다.
빈의 멜그루베 카지노(지금은 앰버서더 호텔)에서 이뤄진 초연에서는 모차르트가 직접 피아노를 맡았습니다. 계몽군주 요젭 2세는 연주가 끝나자 “브라보 모차르트!”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 레오폴트도 와 있었는데, 아버지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성공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걸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지요. 이날 요젭 하이든의 프리메이슨 가입 축하 행사가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이 연주회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인 2월 12일,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집으로 초청하여 새 현악사중주곡들을 함께 연주하지요. 이 자리에서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말합니다. “신 앞에서 정직한 인간으로서 맹세하고 말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내가 만났거나 이름을 아는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로 불립니다. 그녀가 연주하면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하스킬의 연주를 들으며 초연 당시를 상상해 볼까요?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피아노 클라라 하스킬)
훗날 베토벤은 이 D단조 협주곡을 찬탄하여 즐겨 연주했고, 카덴차를 직접 써 넣기도 했습니다. ‘고뇌를 너머 환희로’, 베토벤의 모토가 된 이 긍정의 형식을 모차르트가 한발 앞서 보여준 셈입니다. 이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과거의 모든 협주곡과 결별하여, 낭만시대 협주곡의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훔멜, 알캉, 브람스, 부조니, 클라라 슈만도 이 곡을 연주할 때 자신의 카덴차를 썼다고 하니, 낭만시대에 이 곡이 널리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 살리에리가 정신병원 로비에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라” 읊으며 걸어갈 때 2악장 로망스가 흐릅니다. 상처 입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음악이지요. 이 20번 D단조부터 27번 Bb장조까지, 모차르트 빈 시대의 마지막 여덟 피아노협주곡은 단 한 곡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 서막을 여는 게 바로 이 D단조 협주곡이지요.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1785년, 아들이 성공의 정점에 오를 무렵 작곡한 피아노협주곡으로 마침내 화해하게 된다.
# 피아노협주곡 21번 C장조 K.467
이 C장조 협주곡의 아름다운 안단테는 영화 <엘비라 마디간>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지요. 아름다운 선율 사이사이에 슬픔이 언듯언듯 얼굴을 드러냅니다. “피로에 지친 삶, 안단테의 속도로 걸어가다가 피안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 이윽고 빗방울이 그치고 햇살이 비친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남아 있다.” 2006년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에서 이 안단테를 묘사한 적이 있지만, 언어란 것은 음악의 감동을 표현하기에 언제나 미흡하군요.
이 안단테를 통해 모차르트와 아버지가 완전히 화해하게 된 사연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군요. 7년전 파리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아들이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원망했지요. 4년전 아들이 자유음악가로 새롭게 출발할 때 아버지는 뜯어말리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이 결혼을 강행했을 때 두 사람은 거의 남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들은 ‘성공의 정점’에 올랐고,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곡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와의 긴 불화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습니다.
1785년 3월 10일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모차르트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로 초연할 때 아버지 레오폴트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안단테의 피아노 파트에서 왼손으로 연주하는 셋잇단음표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피아노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과 똑같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지요. 연주가 끝나자 레오폴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안단테는 아버지에 대한 모차르트의 존경과 사랑에 바친 오마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은 아버지와 갈등하고 불화하던 시절의 아픈 추억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안단테 : 링크 14:01부터)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피아노 머레이 페라이아)
1악장 ‘빠르고 장엄하게’(알레그로 마에스토조)는 화려하고 당당한 행진곡입니다. 트럼펫과 플루트가 팀파니와 연주하는 패시지들은 군대행진곡을 연상케 하지요. 재미있는 점은, 중간에 피아노가 교향곡 40번의 G단조 주제와 비슷한 선율(링크 3:25), 그리고 1787년 작곡한 호른 협주곡 Eb장조 K.447의 에피소드와 비슷한 선율(링크 3:45)을 연주한다는 점입니다. 얼핏 자기 표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곡에 모차르트의 절절한 감정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F장조의 안단테에 이어서 피날레 ‘충분히 빠르고 생기있게’(알레그로 비바체 아사이)는 코믹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신나고 경쾌하게 펼쳐집니다.
모차르트의 정신을 담은 기적의 작품들
모차르트의 마지막 세 교향곡
# 39번 Eb장조 K.543
마지막 세 교향곡은 ‘삼태성’처럼 나란히 반짝이는 기적의 작품입니다. ‘백조의 노래’란 제목처럼 행복하게 빛나는 39번 Eb장조, 아름다움과 슬픔의 고귀한 결정체인 40번 G단조, 당당하고 위엄있는 41번 C장조 <주피터>…. 모차르트 교향곡의 최고봉일 뿐 아니라, 음악사 전체에서 결코 빛바래지 않을 완벽한 작품들입니다. 그때까지 교향곡에 작곡자의 존재와 내면을 담는 경우가 별로 없었지만, 이 작품에서 우리는 찬란히 빛나는 모차르트의 정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는 가난이 엄습한 1788년 6월부터 8월까지 두 달 사이에 이 곡들을 차례로 썼는데, 언제 어디서 연주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40번 G단조는 모차르트가 죽던 해인 1791 4월 살리에리의 지휘로 빈에서 연주됐고 이를 위해 클라리넷 두 대를 추가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 자신이 이 곡을 지휘한 기록은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이 곡들을 갖고 런던에 갈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음악학자도 있습니다. 하이든이 파리에서 연주하려고 작곡한 교향곡 82번 C장조, 83번 G단조, 84번 Eb장조와 모차르트의 세 곡이 같은 조성이기 때문이라는데, 빈약한 추론입니다. 새로 문을 연 슈피겔가쎄의 카지노에서 연주하려고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 연주가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에 짙은 안개가 뒤덮여 있어서 함부로 다가서는 걸 허락하지 않는 산 같군요.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이 곡을 주문한 기록도 없고, 작곡 의도를 밝힌 글도 없다. 있는 것은 영원을 향한 호소 뿐이다.”
39번 Eb장조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현의 우아한 질감,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관능미, 파곳과 호른의 영롱한 화음, 트럼펫과 팀파니의 생기있는 리듬으로 빛납니다. 아름다움이 극한에 이르면 에로틱한 느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Eb장조 교향곡이 ‘에로이카’(Eroica)라면 이 곡은 ‘에로티카’(Erotica)로 부르는 게 맞다며 친구들과 킥킥거린 기억이 나네요.
교향곡 39번 Eb장조 K.543 (조지 셀 지휘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1악장은 아다지오의 장대한 서주로 시작합니다. <돈조반니> 서곡처럼 고뇌에 찬 불협화음을 통과한 뒤 3/4박자의 알레그로가 이어집니다. 이 곡을 듣노라면 행복감에 얼굴이 발그래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2악장 ‘느리고 평온하게’(안단테 콘 모토)는 달콤하고 평화로운 추억 같습니다. 강렬한 파토스의 F단조로 변하지만 곧 조용히 꿈꾸는 Ab장조로 돌아오지요. 3악장 메뉴엣은 발랄하고 활달합니다. 트리오(중간 부분)에서는 두 대의 클라리넷이 뽀송뽀송 노래하고, 호른이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4악장 알레그로는 행복감의 극치입니다. 모든 악기들이 거침없이 질주하고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이 관능미를 한껏 뽐냅니다.
# 40번 G단조 K.550
“음악을 해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슈만의 말입니다. 얘기하기 민망하지만, 저는 이 G단조 교향곡을 두 번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해서 글을 써 본 적은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곡에 착수할 무렵인 1788년 6월 29일, 넷째 아이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차르트는 당연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맛보았겠지요. 딸을 잃은 슬픔이 곧 이 교향곡에 반영됐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극한의 슬픔을 당당하고 고귀하게 마주하는 모차르트의 맨얼굴을 느끼게 합니다. 앞의 Eb장조와 뒤의 C장조보다 더 적나라한 모차르트의 내면이지요. 베토벤, 브루크너, 말러의 대교향곡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완벽한 조형미과 비극적 서정미가 어우러진 최고의 교향곡이다, 이런 무딘 말밖에 할 수 없군요.
▲ 브루노 발터 지휘 콜럼비아 교향악단의 모차르트 교향곡집 앨범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프란스 브뤼헨 지휘 18세기 오케스트라)
1악장 아주 빠르게(알레그로 몰토)는 과거의 교향곡에서 볼 수 없었던 몇 가지 파격적인 기법을 선보입니다. 1악장 주제는 “따라라~따라라~”, 단2도로 이뤄져 있는데, 이 모티브가 끊임없이 나타나며 발전합니다. 2006년에 인터뷰한 지휘자 이윤국은 “이런 기법은 당시 작곡가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라며 찬탄했지요. 베토벤의 <운명>에서 다시 나타나는 새로운 기법입니다. 1악장 첫머리, 바이올린이 첫 주제를 연주하기 전에 비올라가 검붉은 화음으로 바탕을 깔아주는데, 이 또한 교향곡 역사상 처음 보는 수법입니다. 전개부는 깊은 내면을 돌아보며 비극적 정서를 더하고, 재현부는 더욱 높이 승화된 슬픔을 고귀하게 노래합니다. 마지막 코다는 제2바이올린, 제1바이올린, 비올라이 차례로 연주하는 푸가입니다. 슈만은 이 1악장을 듣고 “고대 그리스 건축의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고 말했지요.
2악장 안단테는 어린이의 꿈처럼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악장을 듣고 “천사의 노래처럼 아름답다”고 했군요. 3악장 메뉴엣은 ‘헤미올라’입니다. 3박자의 주선율이 2박자의 보조 선율과 어울려 고뇌에 몸부림치는 이미지를 들려줍니다. 트리오(중간 부분)에서는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의 서정적인 선율에 이어 호른이 목가적인 화음을 노래합니다. 4악장 ‘충분히 빠르게’(알레그로 아싸이)는 격렬하게 상승하는 제1주제와 서정적인 제2주제가 대조를 이루며 귀기어린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전개부에서는 변화무쌍한 조성의 푸가가 전개되고, 누구도 예상 못한 침묵(General Pause)이 이어집니다. 모차르트 당시 청중들에겐 말로 표현 못할 공포심을 일으킨 대목이지요. 재현부에서는 타악기 효과를 내는 호른의 포효가 섬찟하게 느껴집니다.
1악장 주제는 1970년 대 실비 바르탕의 팝송 ‘사랑해요 모차르트’(Caro Mozart)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한 여성이 모차르트와 함께 세상 끝까지 여행하고 싶다는 가사였지요. 일본의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슬픔은 질주한다. 눈물은 그 슬픔을 따라잡을 수 없다.”
# 41번 C장조 K.551 <주피터>
최고의 신 ‘주피터’에 걸맞는 힘과 위엄이 넘치는 곡, 내용과 형식의 일치, 진 · 선 · 미(眞善美)의 이상을 통일한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입니다. <주피터>란 제목은 영국의 기획자 페터 잘로몬이 악보를 출판할 때 붙였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대관식> 미사, 교회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 21번과 25번처럼 당당하고 위엄있는 곡에서 C장조를 자주 썼는데, 이 곡이 모차르트 C장조의 정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향곡 41번 C장조 K.551 <주피터> (브루노 발터 지휘 콜럼비아 교향악단)
1악장 ‘빠르고 생기있게’(알레그로 비바체)의 첫 주제가 곧 주피터의 이미지입니다. 짜임새있는 주제 배치, 선명한 강약 대비, 명료한 리듬선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부드러운 제2주제의 가볍고 사랑스런 종결부 멜로디는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 ‘그녀 손에 입맞춤’(Un Bacio di Mano) K.541에도 나옵니다. 엄숙한 <주피터>의 선율이 연애 타령에 나오다니, 꽤 놀란 기억이 있군요.
2악장 ‘느리게 노래하듯’(안단테 칸타빌레)는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주제를 연주하고 우아하고 위엄있게 흘러갑니다. 이와 비견할 만한 아름다움은 훗날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의 느린 악장에서나 다시 들을 수 있지요. 3악장은 평화로운 메뉴엣입니다. 트리오(중간 부분)에서 오보에의 사랑스런 노래에 이어 투티*로 A단조로 ‘#솔~라~도~시~~’ 커다란 선을 연주하는데, 이것은 피날레 4악장의 주제를 미리 살짝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4악장 ‘아주 빠르게’(몰토 알레그로)는 모차르트 교향곡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나타 형식으로, 주제가 차례로 제시된 뒤 장대하고 화려한 푸가*(fuga)로 발전합니다. <주피터>란 제목을 받아들인다면 이 피날레는 ‘올림포스의 대축제’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피날레가 교향곡 전체의 중심이 되는 것은 <주피터>가 역사상 처음으로, 베토벤의 3번 <영웅>, 5번 <운명>에서 다시 나타나는 구성 방식입니다. 법열과 환희의 극치에 도달한 푸가는 트럼펫과 팀파니의 팡파레와 함께 장엄하게 마무리합니다.
* 투티(tutti) : ‘전체’, ‘다 함께’란 뜻으로,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모두 연주하는 대목.
* 푸가(fuga) : 서로 닮은 주제가 달아나고 쫓아가며 어우러지는 음악 양식.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의 세 정점
23번 A장조 K.488
“23번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중 내가 제일 자주 듣는 곡이다. 이 곡에서는 눈부신 생명을 느낀다. 어릴 때 처음 듣고 느낀 것은 ‘이 곡에서 하얀색과 핑크색의 빛이 난다’는 것이었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버릴 음표가 하나도 없다. 터져 버릴 것 같은 생명력으로 가득차서 풍만하기 이를데 없는 이 곡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주름살이 하나도 없는 미인과 같다.”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에 쓴 이 느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1악장 알레그로는 우아한 A장조로, 천상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듯 매혹적이다. 빈 시절 초기의 협주곡들이 폭넓은 청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즐거운 음악이었다면, 이 곡은 비루한 일상을 너머 저 멀리 빛나는 유토피아의 비전을 보여준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에 몰두하던 1786년 3월에 쓴 작품답게 원숙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오케스트라 파트에 모난 악기인 트럼펫과 팀파니가 없고, 오보에 대신 클라리넷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울림을 들려준다.
피아노협주곡 23번 A장조 K.488
▲ 모차르트가 빈 시절 사용한 발터 피아노. 그는 예약연주회가 열리는 장소로 이 피아노를 가져가서 연주했다.
2악장, F#단조의 아다지오(링크 11:15)는 모차르트의 작품 중 아주 드물게 ‘멜랑콜릭’한 대목이다. 피아노 독주자는 가슴 가득 눈물을 안고, 눈가엔 한 방울의 눈물을 머금은 채 달콤하게 노래한다. 앞 뒤 악장이 갓 태어난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어서인지 아다지오도 마냥 어둡게 들리지는 않는다. F#단조지만 달콤한 핑크색이라고 할까. 오케스트라의 플루트가 연주하는 D#음을 예기치 않게 피아노 독주가 짚어내는 부분(링크 17:10)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3악장 알레그로 아사이(충분히 빠르게, 링크 18:30)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찬란한 대화다.
24번 C단조 K.491
“토요일 저녁, 거리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이 생각났다.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단조로 된 두 곡 - D단조 K.466과 C단조 K.491 - 은 그리 자주 듣지는 않지만 정말 가끔,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열병을 앓는 듯한 정열을 속에 감춘 채 듣는 이의 가슴을 에이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넋나간 사람처럼 C단조 협주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피아노를 치고 지휘를 하면서 걸어가다가 ‘모차르트를 들으면서 죽고 싶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호미, p.98)
젊은 시절처럼 이렇게 거리를 배회하진 않지만, 이 곡이 주는 느낌은 그때 그대로다. 1악장 알레그로, 파곳과 현악기들이 유니슨(unison, 여러 악기가 같은 음을 동시에 연주)으로 첫 주제를 연주할 때 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불길한 어둠이 드리운다. 오보에와 호른의 화음이 슬며시 더해지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팀파니를 포함한 모든 악기들이 포르테(forte, 강하게)로 주제를 반복한다. 바이올린이 미친 듯 울부짖을 때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다시 평정을 되찾은 뒤 오보에, 파곳, 플루트가 차례로 노래할 때 작은 빛줄기가 영롱하게 반짝인다.
이윽고 피아노 솔로 부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 아닐까. 첫 주제가 크게 울려 퍼지고, 이를 변형한 멜로디가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비단실처럼 한땀한땀 뽑아져 나온다. 절제된 피아노의 노래는 위엄 있는 아픔으로 아름답게 반짝인다. 피아노가 제2주제를 연주할 때, 듣는 이는 어두운 심연 끝에서 따뜻한 안식을 발견한다.
피아노협주곡 24번 C단조 K.491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2악장, Eb장조의 라르게토(링크 14:38)는 달콤하고 정답지만 검은 심연을 응시하는 C단조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망스풍인데도 어둡다. 특히 목관이 노래하는 중간 부분은 끝없이 아름다우며 끝없이 어둡다. 검은 바탕 위에 엷게 칠한 흰색이라고 할까. 3악장, C단조 알레그레토(링크 23:00)는 주제와 8개의 변주곡이다.
이 곡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은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다. 오케스트라 파트, 특히 1악장의 서주는 교향곡처럼 울린다. 모든 악기가 등장하는 대규모 편성이며, 특히 목관악기의 활약이 눈부시다. 피아노 파트는 무궁무진한 즉흥연주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베토벤은 피아니스트 존 크라머와 함께 이 곡을 듣고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베토벤의 협주곡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이 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5번 C장조 K.503
“모차르트 협주곡을 이해하려면 오페라를 먼저 보세요.” 많은 모차르트 전문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년에 만난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도 같은 말을 했다. 모차르트는 무엇보다 오페라 작곡가였고, 등장인물들이 갈등하며 해결을 찾아가는 오페라의 구조는 솔로 악기가 관현악단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우러지는 협주곡의 드라마틱한 구조와 비슷하다.
<피가로의 결혼> 중 백작부인이나 수잔나의 아리아를 들은 뒤 피아노협주곡 G장조 K.453, F장조 K.459, 또는 C단조 K.491의 느린 악장을 들어 보자. 협주곡의 목관이 오페라의 목관과 비슷하게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는 방식도 비슷하다. 때로 함께 노래하고 때로 엇갈리면서 갈등하고 화해한다.
피아노협주곡 25번 C장조 K.503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리카르도 무티 지휘 빈필하모닉)
<돈조반니> 1막에 나오는 돈오타비오의 아리아 ‘그대의 평화를 위하여’(Dalla Sua Pace)를 들은 뒤 C장조 협주곡의 2악장(링크 15:10)를 들어 보자. 이 안단테는 가사가 없는데도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돈 오타비오와 비슷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3악장은 오페라를 더 닮았다. 첫 주제는 때로 고음의 익살스런 얼굴로, 때로 저음의 응큼한 표정으로 등장하며, 오케스트라과 대결하고 도망가고 약올리고 쫓아가며 한껏 즐겁게 논다. 오케스트라의 패시지 중에는 심지어 오페라의 장면전환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나온다. (링크 26:04) 모차르트 협주곡 중 가장 오페라를 닮은 곡이 바로 이 곡이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조’(빠르고 장엄하게)는 화려한 세 개의 화음으로 시작하는데, 프리메이슨 행사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레를 닮았다. 당당한 행진곡풍의 두 번째 주제에 앞서 네 개의 음표가 등장하는데(링크 1:33),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첫 주제와 비슷한 느낌이다. 차분히 문을 두드리는 듯한 네 개의 음표는 다양한 형태로 곡에 긴장과 활력을 주며, 전개부에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내면을 돌아보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링크 6:55) 장대한 이 협주곡은 24번 C단조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의 최고점을 이룬다. 1786년 12월,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위해 프라하로 떠날 무렵에 열린 예약연주회에서 모차르트가 피아노 솔로를 맡아서 초연했다.
이사도라 던컨의 춤과 사랑 (1) 고전발레를 혐오했던 현대무용의 '어머니'
“발끝으로 서보라고요? 왜 그래야 되죠?”
“선생님과 제가 아이를 낳으면 선생님처럼 머리 좋고 저처럼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날 거에요.” - 어떤 여성 예술가
“그대 같은 머리에 저 같은 외모를 가진 아이가 나오면 어떡하지요?” - 조지 버너드 쇼
버너드 쇼의 재치 있는 대답에 41살의 사람 좋은 이 여자는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녀는 성격이 불합리했고, 논리적 사고능력이 모자랐고, 무분별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해서 물의를 빚곤 했다. 그녀의 지식 수준은 언제나 피상적이었고, 정신적으로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한 남루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사랑했고, 본능에 충실했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순수한 품성을 갖고 불꽃의 삶을 살았다. 버너드 쇼는 말했다. “그녀를 우리 시대 최고 예술가 반열에 두는 데 한 점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은 ‘이시스의 선물’, 곧 이사도라 던컨이었다.
“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이다.”
춤에 대한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의 소신은 확고했다. 그녀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 아니라 음악 자체를 몸으로 표현했다. 춤은 음악처럼 자연스레 영혼에서 흘러나와야 했다. 이러한 그녀의 소신은 춤의 미래를 밝히는 비전이 됐다. 그녀는 춤을 발레의 규범에서 해방시켜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 불린다. 러시아 현대무용의 대부로 불리는 디아길레프는 말했다. “이사도라가 러시아에 오지 않았다면 디아길레프 발레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사도라 던컨
1924년, 47살의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의 춤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숭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친구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녀가 앞에 나섰다. 한 참석자의 증언. “그녀는 음악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으나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춤을 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서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만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음악과 춤의 정수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녀가 우리를 전율케 한 춤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영혼의 힘만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내면 깊숙한 곳의 자아가 불현듯 깨어나는 순간이 왔다. 그녀의 팔이 올라가는 것도,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모두 이 힘에 이끌린 움직임이었다. 쇼팽이 음악으로 인간의 영혼을 포착하여 눈물짓게 했다면 이사도라는 장엄한 침묵 속에 실재하는 영혼을 자신의 몸으로 일깨워 주었다.
이사도라의 뛰어난 음악성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메리 도라에게서, 자유분방한 품성은 아버지 조셉 던컨에게서 왔다. 그녀는 평생 세 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 니체, 바그너…. 음악 자체에 자신을 완전히 매몰시켜 춤추는 것, 그것이 디오니소스의 춤이다. 춤의 기운을 심사숙고하면서 하나의 이야기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것, 그것이 아폴론의 춤이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디오니소스의 춤이었다. 춤이란 다시 살아나고자 죽는 모든 것들의 리듬이었다. 춤이란 무한히 반복되며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이사도라 던컨, 베토벤 교향곡 7번 (영화 발췌)
그때까지 쇼팽의 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즈 등 춤 형태의 음악을 무용에 사용하는 건 자연스러웠지만 베토벤의 교향곡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급진적인 일이었다. 근엄한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가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베토벤 교향곡 7번에 맞춰서 춤추는 모습을 본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그러했다. “그녀는 음악에 의존해서 춤을 추며, 초대받지 않은 음악으로 자신을 속여서 판다.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은 그녀의 동행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사도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 몸이 음악의 신성한 조화를 표현하는 도구 이외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이사도라는 고전 발레를 혐오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20세기 초 러시아 발레의 최고 스타 안나 파블로바가 열연한 <지젤>을 보고, 그녀는 적절한 존경을 표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는 강철과 용수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순교자의 준엄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트레이닝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체조 동작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안나 파블로바는 발끈하는 대신 담담히 응답했다. “이사도라는 춤추기 위해 살지만 저는 살기 위해 춤을 추지요.”
그녀에게 발레는 퇴폐이자, 살아있는 죽음의 표현이었다. 발레리나는 끊임없이 서고 뛰고 구부리지만, 결국 인간의 육신은 날 수 없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었다. 그녀가 볼 때 발레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불모의 동작뿐이었다. 그녀의 과격한 표현을 옮기면, 발레는 “중력의 법칙이 자기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속임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몇몇 예외를 빼곤, 일종의 복잡하고 심오한 곡예”에 불과했다. 발레는 명백히 18세기의 유물이었다.
특히 발레리나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망가뜨리며 테크닉을 연마하는 것은 춤의 본성에 어긋나며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ET발’을 많은 분들이 기억한다. 세계 최고의 드라마틱 발레리나 강수진, 그녀의 상처 입은 발은 치열한 노력의 증거로, 무한한 찬탄과 외경을 바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사도라가 보았다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발레리나들의 타이스 속을 들여다보면, 기형이 되어 버린 근육이 춤을 추고 있다. 그 근육의 속에는 기형적으로 변형된 뼈가 있다. 발레는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훼손해서 기형으로 망쳐놓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여기에는 어떠한 역사적 이유도, 어떤 안무상의 이유도 변명이 될 수 없다.”
고전발레의 구성요소인 팬터마임을 이사도라는 극히 싫어했다. “인간의 몸짓은 정서의 표현이며, 그 자체로 서정적이다. 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팬터마임은 춤의 예술도 아니고 배우의 예술도 아닌 정체불명의 불모지로 이끈다. ‘당신’이란 말을 전하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가슴을 누르고, 이런 것들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자연스러운 춤에 대한 열망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내면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고향 샌프란시스코에서 발레 학교에 처음 갔을 때를 회고한다. 선생님이 “발가락 끝으로 서 보라”고 지시하자 어린 이사도라는 당돌하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하죠?” 선생님은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름다우니까.” 이사도라는 되받았다. “그건 자연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흉해요.” 그녀는 세 차례 레슨을 받은 뒤 교습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평생 받은 무용 교육의 전부였다. 마린스키의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목격한 이사도라는 탄식하며 말했다. “어린 학생들은 여러 시간 동안 줄을 지어서 발가락 끝으로 서 있었는데, 이들은 잔인하고 불필요한 종교재판의 수많은 희생자들과 같았다. 너무 거대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무용실은 마치 고문실 같았다.”
그녀는 독일의 그뤼넨발트, 프랑스의 벨뷔, 소련의 모스크바 등 세 곳에 무용 아카데미를 열면서 거듭 강조했다. “나의 학교는 춤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학교가 될 것입니다. 어린 소녀들에게 기성의 몸짓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만의 몸짓을 만들어 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테크닉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진실이 먼저고 테크닉은 그 다음이었다. 그녀의 춤에는 곡예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자연스런 몸짓이란, 보통의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한 트레이닝을 받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그런 몸짓이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뽑을 때, 자연의 마음과 훈련받지 않은 몸을 원했다. 그녀는 소녀들에게 자연을 스케치하도록 교육했다. 바람에 나부끼며 휘어진 나무와 풀들은 무용수들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그 메시지를 느끼고 몸으로 표현하라…. 그녀는 제자들 중 여섯 명은 훗날 ‘이사도라블’(Isadorables)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이사도라의 춤을 널리 알렸다. 그녀가 학생들에게 언제나 입버릇처럼 던진 말이다.
“오직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바란다. 지상의 모든 숭고함을 위해 영혼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음악은 진심어린 포옹에서 나오는 것이다. 음악 자체가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절대 잊지 말아라.”
이사도라는 “음악은 예술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깊이 매료됐다. 그녀에게 음악과 춤은 하나였다. “사람 몸의 움직임은 그 형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모든 움직임은 다른 움직임을 이끌어 낼 근원이 되는 씨앗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의 작곡과 즉흥연주의 원리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음악에서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어떤 동작을 취하는 게 적절한지 찾아내는 게 언제나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사도라는 때로 무용가라 불리는 걸 거부하기도 했다.
“저는 춤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작가가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듯, 나는 내 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나를 춤추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 이 글은 <이사도라 던컨, 매혹적인 삶>(피터 커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익출판사)를 주로 참고했고,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이사도라 던컨의 춤과 사랑 (2) “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다”
이사도라는 정형화된 방식과 작위적인 창조성에 격렬히 반대했으며, 춤이라는 예술을 모든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요소에서 해방시켜 자연스런 움직임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러한 그녀의 의지는 고대 그리스 무용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녀는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스 도자기와 조각을 보며 고대 그리스의 무용을 상상하고 재현했다. 큐피트 청동상의 춤추는 모습은 토실토실한 발과 팔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발바닥을 땅에 붙이고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들고 있는 모습은 어른의 자세라면 추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어린이에겐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기에 아름다웠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녀가 찾아낸 춤은 ‘기도’였다. 춤은 한때 모든 예술 중 가장 고귀한 것이었고 앞으로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춤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추락하기 전의 고결한 곳으로 다시 날아오르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스러움을 되살린 이사도라의 노력은 진정 춤의 혁명이었고, 현대 무용의 르네상스였다. “나의 춤은 내가 창조해 낸 게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깨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춤과 음악이 영혼 안에서 자연스레 합일하는 데에 거슬리는 것이면 그녀는 무엇이든 던져버렸다. 그녀는 속옷을 입지 않은 채 그리스풍의 튜닉 하나를 두르고 춤을 추었다. 어린 시절의 자유분방하고 구속 없는 삶 속에서 이미 이러한 자유로운 예술혼은 싹트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녀의 회고다. “신발이나 옷은 나를 방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돼서 해변에서 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들이 나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걸 느끼곤 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은 그리스의 무용 자세와 연결된다. “흙을 밟고 서서 나체로 춤을 추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스 예술에 나타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스의 자세야말로 흙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의 움직임이야말로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문명화의 종착점에 도착한 인간은 이제 옷을 벗고 나체로 돌아가야 했다. 지나친 노출에 대한 비난이 일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의 몸은 제 예술의 성전입니다.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의 뜻으로 몸을 노출한 것입니다.”
그리스의 정신에 심취한 그녀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아프로디테의 음식인 굴과 포도주의 영향으로 나는 어머니 자궁 속에서부터 춤을 추었다.”
이사도라 던컨 안무의 춤들 (쇼팽, 슈베르트)
이사도라 던컨 안무의 <남국의 장미> (요한 슈트라우스 곡)
https://youtu.be/V7H31cnTICM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해, 제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유럽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 그 해, 36살 이사도라에게 가장 아픈 일이 일어났다. 7살 난 딸 데어드르와 3살 난 아들 패트릭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 이미 신경쇠약을 앓고 있던 이사도라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내면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린 주검을 팔로 끌어안은 채 주저하듯 느린 걸음으로 마지막 안식처를 향하는 생명체, 이사도라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자아는 아이들과 함께 죽어버렸다. 그녀는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차에 탄채 빠져 죽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러지는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며 다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아기를 잃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돕기 위해 더 용감해질 것이다. 자식을 잃은 여인, 전쟁에 희생되는 노인들, 헐벗고 굶주린 고아들을 위해 춤을 출 것이다.”
▲ 이사도라 던컨과 두 아이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한때 그녀에게 열광했던 프랑스, 독일, 미국에서 그녀는 더 이상 무용을 계속하고 후학을 가르칠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다. 서구 사회의 속물성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한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소식에 열광했다.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날 밤, 그녀는 열렬한 기쁨으로 환호하며 거리로 나가 춤을 추었다. 1905년 러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러시아 민중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그녀로서는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그녀는 혁명의 이상에는 본능적으로 공감했지만, 혁명의 어두운 그늘과 잔인한 실상은 알지 못했다.
파리에 와 있던 소련 관리가 그녀에게 “모스크바로 오면 훌륭한 무용 학교를 세워주겠다”며 접근했고, 그녀는 이에 응했다.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문화 부문을 책임지던 루나차르스키가 이 약속을 보증해 주었다. 하지만 1921년 여름, 그녀가 도착한 모스크바는 황량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그녀에게 보여준 최신 춤들은 조악했다. 그녀는 말했다. “여러분이 추고 있는 춤은 노예의 춤이에요. 모든 동작이 땅을 향해 움직이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유인의 춤을 배워야 해요. 머리를 높이 들고 팔을 넓게 뻗어요. 마치 우주 전체를 껴안듯….” 1,000명의 소녀들을 모집해 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반혁명 세력과 내전을 치르며 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소비에트 정부로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일단 40명의 소녀를 뽑아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이사도라를 소련으로 불러들인 것은 레닌의 재가를 받은 일이었다. 레닌은 그녀의 예술이 인민을 혁명에 동원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며, 서방 세계에 신생 소비에트를 선전할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레닌의 말. “그녀는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이 아니다. 이사도라가 만일 지나친 행동을 보이면 충고를 해서 그녀의 행동을 고쳐 주되,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가 하는 일에 우리가 깊이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다.” 그해 11월, 이사도라는 레닌과 소비에트 고위층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볼쇼이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선보였고, 자기가 모스크바에서 가르친 아이들을 출연시켜 ‘인터내셔널가’를 춤추게 했다. 레닌은 감동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고, 이사도라의 춤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 장면은 사진과 함께 이스베스챠의 톱기사로 보도됐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소련 공연을 재연한 영화)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사도라의 춤에 검열을 가하려 들었다. 집시가 등장하는 춤은 반혁명 요소가 있으니 조심하라 했고, 리허설 때 차르 찬가 음악이 들리자 이유가 뭔지 추궁했다. 표현에도 한계가 있다는 검열관의 말에 이사도라는 대답했다. “제 예술에는 한계가 없어요.” 소련도 그녀가 영원히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 무렵 이사도라는 혁명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18살 연하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사랑에 빠졌다. 죽은 아들 패트릭이 어른이 됐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예세닌에게 서구사회를 보여주고 싶어서 해외여행을 신청했는데,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허가해 줄 수 있다는 당국의 답신을 받았다. 이사도라는 이 결혼에 동의했다. 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그녀가, 예세닌을 해외에 데려가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혼이란 ‘형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 젊은 남편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사도라를 구타하고 폭언을 일삼았다. 이사도라의 영혼은 돌이킬 수 없이 상처를 입었다.
이사도라의 남성 편력은 그녀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메뉴다. 그녀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를 사랑해서 딸 데어드르를 낳았다. 자신을 여신으로 숭배한 백만장자 패리스 싱어를 받아들여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하지만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두 아이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1913년 겨울 우연히 만난 젊은 조각가 로마넬리 - 이사도라가 존경하던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 - 와 함께 밤을 보낸 뒤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는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그녀는 탁월한 피아니스트 발터 룸멜을 오래도록 사랑했다. 젊고 난폭한 예세닌은 고든 크레이그, 패리스 싱어, 발터 룸멜에 이어 그녀가 깊이 사랑한 네 번째 남자인 셈이었다. 이 밖에도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라피타’(즉흥적으로 사귄 연인)들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1927년 9월 14일 저녁 9시경, 그녀는 새로 만난 ‘세라피타’인 정비공 팔체티가 몰던 2인용 스포츠카를 탔다. 그녀는 신난다는 듯 외쳤다. “안녕, 내 친구들, 나는 승천하노라!” 차가 출발하자마자 그녀가 두르고 있던 빨간 숄이 뒷바퀴 축에 끼었고, 그녀는 목이 졸렸고, 허공을 가로지른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차체와 바퀴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녀의 말을 인정한다면 이 많은 사랑을 윤리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게 어리석어 보인다. 그녀는 뜨겁게 삶을 사랑했다. 그녀가 사랑한 건 남자의 몸이라기보다 생명의 아름다움, 빛나는 예술적 열정이었다. 그녀는 “고뇌의 눈물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완전한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의 사랑과 춤에는 고뇌의 눈물이 맺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했어. 춤을 추면서 그들에게 나의 영혼을 주었어. 이 아름다움은 결코 죽지 않을 거야. 세상 어딘가에 영원히 남아 있다고 전해 줘.”
그녀의 별명은 ‘맨발의 이사도라’였다. 어느 공연 직전,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샌들에 술병을 엎지른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맨발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뜻밖에 모든 이들이 이 발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고, 이렇게 해서 ‘맨발의 이사도라’가 탄생한 것이다. 그녀의 춤처럼 그녀의 삶도 맨발이었다. 그녀는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이 돈을 썼다. 뜨겁게 삶을 즐겼고, 제자들을 키웠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 그녀의 춤은 ‘음악의 혼’ 자체였고, 잠시나마 지상의 모든 추한 것들을 압도해 버렸다. 그녀는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작은 아이들이 쓰레기더미 위에 쪼그리고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을 보았어요. 만일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면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귀여운 아이들이 고통 받도록 방치하는 한 이 세상에는 어떤 진정한 사랑도 존재하지 않아요.”
※ 이 글은 <이사도라 던컨, 매혹적인 삶>(피터 커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익출판사)를 주로 참고했고,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Art & Culture > 문화예술 관련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미 헨드릭스 : 록스타의 삶 (0) | 2016.08.30 |
---|---|
조선만담 창시자 신불출 (0) | 2016.02.28 |
이채훈의 힐링 클래식 - 미디어오늘 (2015) (0) | 2015.06.23 |
이효리 인터뷰 (0) | 2014.12.22 |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 - 오마이뉴스 (0) | 2013.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