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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 록스타의 삶

by Wood-Stock 2016. 8. 30.

그가 죽자 '사랑의 시대'도 끝났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0615


<지미 헨드릭스 : 록스타의 삶>
1968년 미국은 그 시절의 모순에 골머리를 앓았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을 휩쓸었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사망했다. 응축된 불만이 시위로, 히피 문화로, 마약 남용으로 나타났다. 이 해, 줄곧 거리의 밑바닥을 전전하다 바다 건너 런던에서 새로운 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고향 시애틀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시애틀을 찾았던 1961년, 그는 먹고살기 위해 입대를 결정했고, 그 결정을 후회하던 군인이었다. 헨드릭스는 록스타가 되어 7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오랜만에 만나본 아버지 알은 몰라보게 늙었다. 허리띠로 자식을 매질하던 폭군의 모습은 사라졌다. 가족의 사랑을 받던 동생 레온은 스무 살의 청년이 되었다. 불행히도, 그는 먹고살기 위해 남창이 되었다. 그가 알던 친구 대부분이 베트남의 정글을 헤매고 있었다. 모교의 10대 후배들은 (주로 중산층 백인인) 히피의 사랑을 받은 그의 음악과 패션을 야유했다.

헨드릭스는 이제 과거 자신을 감싸던 따뜻한 고향의 품을 떠나, (주로 백인 록 팬이 위주인) 세계의 넓은 품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흑인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했다. 대스타가 된 자식 앞에 작아지는 가족, 대스타가 된 자신을 경멸하는 고향의 흑인 사회. 헨드릭스는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모순에 압도되어 내성적이고 언제나 위축되곤 하던 어린 시절의 그로 돌아갔다.

<지미 헨드릭스 : 록스타의 삶>(찰스 R. 크로스 지음, 이경준 옮김, 1984 펴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이 장면은 신화화되어 오히려 흐릿해지기 쉬운 헨드릭스의 삶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이 평전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지난 2013년 개봉한 영화 <올 이즈 바이 마이 사이드(All Is by My Side)>는 헨드릭스가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새로운 기타 영웅으로 떠오르고,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던 미국을 정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가 끝난 후에 벌어진, 결국 미국에서도 스타가 되고 나서 시애틀에서 헨드릭스가 겪은 이 일들은 흑인으로서 그가 견뎌야 했던 유년기 삶과 무명 시절의 괴로움, 스타가 된 후 약물과 함께 흔들리며 죽음으로 질주한 필연적 요인을 응축했다. 헨드릭스 개인의 서사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평전 <헤비어 댄 헤븐(Havier Than Heaven)>의 저자이기도 한 록 칼럼니스트 찰스 R. 크로스는 4년에 걸친 인터뷰로 이 책을 완성했다. 덕분에 책은 밥 말리(Bob Marley)도 울고 갈 헨드릭스의 여성 편력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그의 거짓 인터뷰나 (대개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사용한) 거짓말의 실체를 되짚어 신이 아닌 인간 헨드릭스의 내면을 추적한다. 그의 끔찍하게 힘겨웠던 어린 시절 삶과 마약으로 흔들리는 록스타의 삶을 상세히 기록해 책의 신뢰도를 높였다. 이 책은 비단 헨드릭스의 팬이 아니라손 치더라도, 1960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해석과 사실로 가득하다.


역시 집착적으로 남성과의 하룻밤을 원했던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과 헨드릭스가 무대 뒤편에서 몸을 섞는 순간(여러 명과의 인터뷰 결과 저자는 둘이 섹스했으리라고 확신한다)을 책은 두 거장의 삶에 영화 같은 순간으로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채 무대에 난입해 난리를 피우는 짐 모리슨(Jim Morrison)과 헨드릭스가 말다툼하는 광경은 훗날 불가사의할 정도로 닮은 '신성한 3J(헨드릭스, 조플린, 모리슨)'의 죽음과 대비되어, 역설적으로 셋의 삶에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헨드릭스의 주변에는 인재와 도움의 손길이 몰렸다. 젊은 시절부터 특유의 '끼'를 부리던 헨드릭스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의 여자친구였던 린다 키스(Linda Keith)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 애니멀스(the Animals)의 베이시스트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ian 'Chas' Chandler)가 헨드릭스의 매니저가 되었다.

미국에서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던 헨드릭스는 두 영국인의 도움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단 1년 만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 제프 벡(Jeff Beck), 에릭 버든(Eric Burdon) 등을 모두 포로로 만들었다. 미국 흑인의 블루스를 훔친 후, 그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던 영국의 로큰롤러들은, 분리는 답이 아니라며 블루스와 록, 사이키델릭, 펑크를 마구 뒤섞은 괴물 같은 기타리스트의 첫 번째 숭배자들이었다. 헨드릭스가 스타가 되는 광경은 필연적으로까지 보이며, 그가 당시 시대정신의 아바타였으리라는 생각마저 하게끔 독자를 이끈다.

"그의 출현은 에릭 (클랩튼)에겐 난감했던 문제임에 틀림없었어요. 왜냐하면 에릭은 '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그를 불태워 버린 거죠." (…) 런던에 온 지 불과 8일 만에 지미는 신과 조우했고, 그를 화형에 처해 버렸다. (1966년 10월 1일 크림(Cream)의 폴리테크닉 공연 중)

가수 테리 리드(Terry Reid)는 전에 익스피리언스의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이렇게 그려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기타리스트가 나타난 것 같았어요." 공연장에서 테리는 옆자리에 폴 매카트니가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매카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 공연 본 적 있어요? 기막힌 녀석이에요." (…) 그날 화장실을 다녀오던 리드는 브라이언 존스와 마주쳤다.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자리 완전히 젖어 있는 것 봤어?" "무슨 소리야? 물이라곤 없던데." 리드는 답했다. "기타리스트들이 흘린 눈물로 다 젖었더군." 존스가 말했다. (1967년 1월 11일 런던 백 오네일 클럽 공연 중)

손가락의 마왕 헨드릭스, 기타의 절대지존. (폴 매카트니, <멜로디 메이커>에 쓴 '퍼플 헤이즈(Purple Haze)' 리뷰에서)


헨드릭스는 엘리트 교육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라디오가 그의 스승이었고, 음반이 그의 전부였다. 독학은 헨드릭스를 새로운 차원의 기타리스트로 만들었다. 그는 블루스에 푹 빠졌으나, 그만큼 백인의 노래도 즐겨 들었다. 밥 딜런(Bob Dylan)은 헨드릭스의 신앙이었다. 그는 다른 흑인 아이들과 달랐다. 귀로 듣고 머리로 상상한 사운드의 개성을 살리는 건 분명 다른 문제다. 상상을 표현할 만큼 긴 시간을 연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처럼 삶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지만, 헨드릭스는 오직 기타만은 사랑했다. 헨드릭스는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타 연습에 푹 빠져 청년기를 보냈다.

그 결과, 매끈하고 애절하며 농익은 블루스의 영역을 헨드릭스는 진작 벗어났다. 그는 대신 고의로 만든 잡음을 엄청난 출력에 실어 청중의 귀에 짓이기듯 밀어 넣었고, 일부러 뭉개진 디스토션 사운드를 강조해 솔로 연주를 했다. 여러 가지 페달을 사용해 기타 한 대만으로 당대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블루스와 결합했다. 이 모든 시도가 지금은 록 사운드의 표본이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아니었다. 이 혼돈이야말로 1960년대 히피들이 찾아 헤매던 시대정신의 음악적 표현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고려해야 헨드릭스가 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여태 회자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기타를 불에 태우거나, 외설적인 몸짓으로 사운드를 표현한 그의 쇼맨십은 일종의 양념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입이 쫙 벌어졌어요. 지미와 클랩튼, 제프 벡, 알빈 리를 포함한 수많은 영국 기타리스트 사이엔 차이점이 있었어요. 클랩튼과 벡의 연주를 들으면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게 뭔지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영국에는 비비 킹, 앨버트 킹, 프레디 킹의 추종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지미는 그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새로운 연주를 하고 있었던 거죠." (브라이언 오거)


1967년 봄, 드디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데뷔 앨범 [아 유 익스피리언스드?(Are You Experienced?)]가 나왔다. 앨범은 영국 차트 2위까지 올랐다. 1위는 당연히 비틀스(the Beatles)의 몫이었으니, 앨범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잠잘 곳도 없어 공사 중인 집에 몰래 들어가 눈을 붙이고, 음식을 훔쳐 먹으며 자란 시애틀의 깡마른 소년은 언론의 일면을 도배하는 현상(Mr. Phenomonon)이 되었다.

헨드릭스를 설명할 때 그의 피부색은 피할 수 없는 논쟁의 주제가 된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패밀리'와 함께 히피 커뮤니티에 의해 소비되었다. 헨드릭스는 운 좋게 1960년대 민권 운동기에 정점을 보냈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그의 재능을 알아줄 사람이 있었다. 헨드릭스의 패션과 외모, 그리고 청중을 홀리는 신기의 연주는 그를 젊은 음악팬의 제왕으로 군림케 했다. 1967년 영국 고별 콘서트의 첫 곡으로 커버한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니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뭉개버린 국가 연주 등은 헨드릭스를 추상의 신의 자리가 아닌, 당대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의 하나로 기억되도록 했다.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이후, 지미는 객석의 수많은 백인 여성들이 그의 인종을 무시하고 육체를 원하도록 만든 역사상 첫 번째 흑인 남성이었다. (빌 그레이엄)


▲ <지미 헨드릭스 : 록스타의 삶>(찰스 R. 크로스 지음, 이경준 옮김, 1984 펴냄) 

헨드릭스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그의 주법 하나하나가 록의 교범이 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후대에 미친 이는 대중음악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후대의 모든 록 기타리스트는 헨드릭스의 제자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까지 구원한 건 아니었다. 그가 속했던 커뮤니티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헨드릭스의 일생은 히피 무브먼트 자체였다.

1970년 9월 18일, 그가 마약 남용으로 인한 토사물에 질식해 27년의 짧은 생을 런던에서 마감한 순간에도 동생 레온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헨드릭스의 사망 사흘 후, 마치 예고된 듯 재니스 조플린이 역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인해 숨졌다. 9개월 후에는 진작에 폐인이 된 짐 모리슨도 파리에서 숨졌다.

플라워 무브먼트가 끝나고, 히피 커뮤니티는 예고된 종말을 맞았다. 블루스와 록이 뒤섞이며 공존하던 헨드릭스의 시대가 끝나자, 록은 블루스와 완전한 이별을 고했다. 기성의 질서와 젊은 세대의 울부짖음이 공존하던 시대가 지나고, 히피들은 여피가 되어 제도권에 안착했고, 기존의 모든 혼란과 작별을 고했다.

"그 급행 열차는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그 이후로도 그들은 행복하고 펑키하게 살았다. 아, 잠깐만. 내가 타고 가야 할 열차가 들어오는 것 같네." (지미 헨드릭스가 쓴 마지막 노래의 가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