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M – 한 제작자의 예술적 직관이 만든 아름다운 세계
중국의 전국 시대 초나라에는 유백아라는 거문고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음악으로 표현할 줄 아는 명인이었죠. 하지만 그는 고독했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여행 중 한 나루터에서 거문고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자기라는 이름의 나무꾼이었습니다. 자신의 음악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을 처음 만나 감동한 유백아는 나무꾼을 친구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종자기는 병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백아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에 통곡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후 거문고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입니다. 보통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말하는 지음(知音)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고사지요. 하지만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지음(知音)은 의미 그대로 나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연주자에게 연주를 계속할 힘을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음악을 잘 이해하는 지음은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음반 제작자야말로 가장 종자기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연주자의 음악을 누구보다 제일 먼저 듣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연주자 자신도 모르는 장점이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하죠. 그래서 연주자가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는 음반 제작을 통해 연주자와 감상자를 연결하기도 합니다.
음반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여러 훌륭한 제작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음악을 널리 알렸습니다. ECM 레이블의 설립자이자 제작자인 맨프레드 아이허도 그런 제작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런데 이 독일 제작자는 다른 제작자들과는 조금은 다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의 제작자들이 연주자들의 장점을 찾아내고 이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집중했다면 맨프레드 아이허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연주자에게 자신의 취향을 투영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ECM에서 제작된 1600여장의 앨범들은 각각 연주자들의 개성을 담고 있는 한편 전체적으로는 맨프레드 아이허라는 제작자의 음악 세계를 대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음악 세계가 널리 사랑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특정 연주자가 아닌 레이블 자체에 매혹되어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 앨범들을 수집하려 합니다.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연주자들이 맨프레드 아이허의 지휘하에 앨범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의 음악 세계가 이해하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죠. 위대한 예술가는 시류와 상관없이 확고한 예술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자를 매혹합니다.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꿈꾸게 합니다. 저는 맨프레드 아이허에게 앨범 제작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정성으로 음악은 물론 사운드, 커버 이미지 등에서의 미적인 통일감을 지닌 음반을 만듭니다. 그 세심한 정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통했기에 수많은 독립 레이블이 경제 논리에 의해 사라지거나 거대 레이블에 흡수된 것과 달리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자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직관적 만남들
ECM은 1969년 독일에서 설립되었습니다. 레이블을 만들기 전까지 맨프레드 아이허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었습니다. 그리고 재즈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그는 타인의 연주를 듣고 감식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음반 제작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ECM의 미래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중에 돈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레이블을 설립할 당시 갖고 있던 돈 16,000마르크는 앨범 서너 장을 제작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작한 앨범들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으면서 앨범 제작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레이블의 첫 앨범은 말 왈드론의 <Free At Last>였습니다. 맨프레드 아이허는 평소 비밥부터 아방가르드를 가로지르는 활동을 했던 이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마침 이 미국 출신 연주자는 1969년 당시 독일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폴 블레이, 칙 코리아, 게리 버튼, 키스 자렛, 팻 메시니, 랄프 타우너, 돈 체리 등의 미국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해 나갔습니다. 그가 이들 연주자들을 불렀던 것은 단지 그들이 유명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초반의 몇 연주자는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연주자들을 부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의 음악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공연과 앨범 감상을 통해 이들 연주자들이 지닌 상상력과 서정성에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상자로서 좋아하던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한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연주자와 그 음악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뛰어난 직관을 바탕으로 연주자에게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칙 코리아와 게리 버튼이 만나 듀오로 녹음한 <Crystal Silence>같은 앨범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그는 피아노와 비브라폰의 듀오 앨범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칙 코리아와 게리 버튼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주저 없이 앨범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팻 메시니가 10대에 첫 앨범을 녹음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리 버튼 그룹에서 믹 구드릭 다음의 세컨드 기타 연주자로 활동하던 이 젊은이의 가능성을 그는 단번에 간파했던 것입니다.
키스 자렛 트리오의 탄생도 그의 직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처음 키스 자렛에게 앨범을 제작하고 싶다고 편지를 쓰면서 피아노 트리오 앨범을 제안했습니다. 키스 자렛이 아직은 시기 상조라 하여 뒤로 미루게 되었지만 당시 그가 생각했던 트리오 멤버는 키스 자렛-게리 피콕-잭 드조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983년 트리오가 활동을 시작하기 10여 년 전에 이미 그는 이 트리오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유럽 연주자들의 발굴에서 그의 직관은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얀 가바렉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당시 조지 러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었던 이 색소폰 연주자는 맨프레드 아이허를 만난 이후 안정적으로 앨범 활동을 이어가며 ECM을 대표하는 세계적 연주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테르예 립달, 아릴드 안데르센, 욘 크리스텐센, 에버하르트 베버, 존 서먼 등의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지역을 중심으로만 활동하고 있었던 이들 연주자들은 ECM을 통해 음악적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어 토드 구스타프센, 크리스티안 봘룸뢰드, 지오바니 구이디, 트릭베 세임, 마티아스 에익 등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떠한 연주자건 장기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기 계약을 하게 될 경우 제작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앨범을 발매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심지어 ECM의 대표 연주자인 키스 자렛도 앨범 단위로 계약을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대형 음반사가 탐을 내는 이 피아노 연주자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제작자에 대한 음악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화를 가로지르는 현대성
맨프레드 아이허는 연주자의 지명도, 국적 등과 상관없이 음악이 자신의 마음을 울리면 앨범 제작을 결심합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클래식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를 발굴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1977년 그는 아르메니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르보 페르트가 작곡한 ‘Tabula Rasa’의 초연을 들었습니다. 이 곡에서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이 작곡가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몇 년간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1984년에 이르러 키스 자렛의 피아노와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 협연으로 앨범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앨범은 동유럽 작곡가를 세계에 알리는 한편 기존의 즉흥 연주 중심의 카탈로그와는 다른, 클래식을 중심으로 하는 뉴 시리즈의 탄생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물론 그가 제작한 앨범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레이블의 이름 ECM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CM은 ‘Edition of Contemporary Music, 현대 음악 총서’를 의미합니다. 즉, 무엇보다 그에게 말을 거는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현대적 음악이란 단지 지금 이 시각에 만들어진 음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재를 미래까지 지속시킬 수 있는 음악, 즉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음악을 의미합니다. 전형 혹은 표준을 거부하고 연주자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음악적 욕망이 자유로이 드러난 음악,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창조적 음악, 이곳이 아닌 새로운 곳을 향하고 다시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음악 말입니다.
그가 연주자의 개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재즈, 그것도 스스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자 했던 진보적인 재즈에 애착을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장르적 개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그의 음악적 관심은 민속 음악, 전자 음악, 클래식, 영화 음악 등을 아우르고 미국과 유럽은 물론 동양까지 가로지릅니다. 그 결과 에그베르토 기스몬티, 나나 바스콘셀로스, 아누아 브라헴, 디노 살루지, 자키르 후세인, 아미나 알라위, 카이안 칼호, 사비나 야나투, 시니카 랑엘랑 등의 다양한 음악적 성향의 연주자들이 ECM에서 앨범을 녹음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각기 다른 음악적 배경을 지닌 연주자들이 만나 지도 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민속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에도 적극 지원했습니다. 파키스탄 연주자와 함께 하는 얀 가바렉, 존 서먼, 데이브 홀랜드와 연주하는 아누아 브라헴, 콜린 월코트, 돈 체리, 나나 바스콘셀로스가 함께 했던 그룹 코도나 등의 앨범들이 그 예입니다.
한편 현대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새로 만들어진 곡, 새로운 스타일만을 원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1984년 맨프레드 아이허는 클래식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ECM 뉴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악보를 이상(Idea)으로 두는 클래식도 연주자의 개성, 새로움을 담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바흐가 되었건 모차르트가 되었건 아니면 말러가 되었건 간에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것, 연주자가 무화(蕪化)되어 작곡가의 의도만을 반영한 연주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꼭 재즈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곡에는 연주자의 개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연주자의 개입이 현대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뉴 시리즈의 시작에는 위에서 언급한 아르보 페르트의 앨범 제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형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사원의 대형 오르간을 연주하는 키스 자렛, 미니멀리즘 음악을 대표하는 스티브 라이히 등의 앨범을 제작했던 경험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뉴 시리즈’의 카탈로그에는 기존 클래식 앨범 제작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시도를 담은 앨범들이 눈에 띕니다. <Officium>(1993), <Officium Novum>(2009) 등의 앨범에서 얀 가바렉의 색소폰과 힐리어드 앙상블의 성스러운 노래의 어울림,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존 셔먼, 베이스 연주자 배리 가이와 테너 존 포터가 함께 <In Darkness Let Me Dwell>(1999)에서 최신 앨범 <Night Sessions>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에서 보여주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존 다울랜드의 곡에 대한 색다른 해석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음악을 앨범으로 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연주자를 발굴하는 것을 즐깁니다. 공연을 직접 보거나 여행 중 라디오를 듣다가 새로운 연주자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로 많은 연주자들이 CD나 영상을 보내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실제 그는 여러 공식 석상에서 데모 음원을 보내지 말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기 자리에서 연주에 충실하고 있으면 자신이 알아서 찾아가겠다고 합니다.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
ECM이 개성이 강한 레이블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다른 레이블과 차별되는 사운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교하게 제어된 사운드는 ECM의 앨범들에 일종의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레이블을 여러 연주자들의 앨범 묶음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체처럼 바라보게 합니다.
ECM에서 제작된 앨범들에서는 무엇보다 공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이 공간감은 악기와 악기 사이에 있는 여백이자, 음(音)들 사이에 있는 침묵으로 음악적 효과를 발생합니다. 그래서 감상자들은 앨범을 감상하면서 멜로디, 리듬, 화성을 듣는 것에서 나아가 음악을 감싸는 투명한 공간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신비로운 몽상에 빠지곤 합니다.
레이블을 만들기 전 맨프레드 아이허는 임펄스나 ESP 레이블에서 제작된 진보적인 재즈 앨범들을 즐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은 마음에 들었지만 제작에서 늘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악기의 미묘한 질감, 연주의 섬세한 강약과 음량이 잘 반영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음악에 내재한 메시지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ECM을 설립하면서 그는 모든 악기들이 명쾌하게 들리는 사운드, 음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실내악적인 색채가 반영된 재즈 앨범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실내악적 울림을 반영할 수 있는 연주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녹음에서도 (많은 예외가 있지만) 가급적 빠르지 않은 음악, 음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음악, 그래서 절제된 음들 사이의 공간적 여백이 있는 음악으로 연주자들을 이끌곤 했습니다.
모든 악기들이 명쾌하게 들리며 실내악적 울림이 있는 사운드를 추구한 결과 악기가 정확하게 배치되었고, 스테레오 이미지가 정교하게 손질되었으며, 악기들의 미묘한 음색이 잘 드러났고, 섬세하게 조절된 공간감이 살아 있는 사운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재즈 앨범 녹음과 비교했을 때 색다름을 넘어 하나의 도발 혹은 위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감상자와 평론가들은 개별 연주자들의 음악과 함께 이를 감싸고 있는 사운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차가운 북구의 사운드’, ‘얼음 같은 미학’, ‘부유(浮遊)하는 재즈’ 등의 표현이 ECM의 앨범들을 이야기할 때 등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캐나다의 음악잡지 CODA가 1971년에 ECM 레이블에서 제작된 앨범들을 리뷰하면서 사용한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ECM의 음악과 사운드를 이야기할 때 모토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상적 공간을 찾아서
여러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ECM 사운드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잔향(殘響, Reverberation)입니다. 잔향은 메아리의 일종이지만 원래의 소리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고 섞여서 원래의 소리를 풍성하게 하고 공간감을 만들어 냅니다. 쉬운 예로 목욕탕에서 노래할 때 소리를 풍성하게 하는 약간의 울림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목욕탕 타일에 반사되어 원래의 목소리와 섞이는 잔향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괜히 다른 곳에서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잔향이 너무 많으면 원래의 소리가 오히려 잘 들리지 않게 됩니다. 공간이 소리를 집어삼키는 것이죠. 집안의 목욕탕에서 울리는 나의 목소리, 콘서트 홀에서 울리는 나의 목소리, 동굴에서 울리는 나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잔향의 다른 양 때문입니다.
맨프레드 아이허가 잔향을 적극 사용하게 된 데에는 어디까지나 음악에 이상적인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폴 블레이, 아누아 브라헴, 얀 가바렉과 힐리어드 앙상블 등의 앨범이 녹음된 오스트리아의 상크 제롤드 수도원처럼 음향 조건이 뛰어난 장소에서 녹음한다면 그는 특별히 인공 잔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조하고 특별한 색을 느낄 수 없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한다면 음악에 어울리는 공간과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잔향을 인공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ECM 이전에도 재즈 앨범 녹음에서 잔향은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악기의 소리를 풍성하게 해주려는 의도로 조금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맨프레드 아이허는 잔향을 적극 사용하여 악기들과 그 음악을 색다른 공간 속에 위치하게 했습니다. 그 공간은 각 악기들이 서로 겹쳐지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들리며, 느리고 부드러운 연주 사이의 여백으로 평온한 곳입니다.
완벽한 공간 연출을 위해서는 악기 별로 마이크를 가까이 배치해 녹음하는 클로즈드 마이킹(Closed Miking) 방식이 적합합니다. 최대한 악기의 원음을 잡아낸 뒤 믹싱 과정에서 음악에 어울리는 공간감을 부여하는 것이죠. 지금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재즈 녹음이 한두 개의 마이크로 전체 사운드를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이 또한 상당히 진보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음악에 담긴 풍경
그렇다면 투명한 공간감이 드러나는 사운드의 어떤 부분이 많은 감상자들을 매료시켰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음악감상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 맨프레드 아이허가 연출한 공간은 레이블 설립 당시 의도했던 대로 음악의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나게 합니다. 여기서 음악의 진면모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악기 소리가 명확하게 들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악기의 합이 만들어 낸 음악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음악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고 할까요? 감상자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큰 공간 속에 여유롭게 자리잡은 음악의 처음과 끝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공간감은 조금만 집중하면 첫 곡을 듣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70,80년대 원래 LP로 발매되었던 앨범 말고 CD로만 제작된 앨범을 하나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CD를 플레이어에 걸면 음악이 바로 들리지 않고 5초 후에 들릴 것입니다. 보통의 CD는 길어야 3초 정도의 침묵이 있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소리의 크기를 막대 그래프 등 시각적으로 표현해주는 VU(Volume Unit)미터가 있는 기기에 CD를 다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3초의 침묵 후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서도 VU 미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VU 미터가 있는 기기가 없다면 볼륨을 크게 설정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3초의 절대적 침묵 후에 부드럽게 부유하는 듯한 공기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이것이 바로 잔향을 사용해 설정한 공간의 소리입니다. 사실 우리 귀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라는 것은 0데시벨이 아니라 20데시벨 가량의 소리입니다. 다만 우리 귀가 이를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 침묵이나 20데시벨 정도의 현실적 침묵이나 모두 같지만 후자의 침묵은 음악을 보다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맨프레드 아이허는 이 현실적 침묵으로 음악을 감싼 것입니다. 때로는 곡과 곡 사이의 휴지기에도 이 현실적 침묵은 그대로 유지되곤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앨범 녹음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곡들이 한 공간에서 풍경 혹은 서사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상자들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맨프레드 아이허는 종종 레이블을 설명하기 위해 이번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한 ‘귀를 눈처럼 생각하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미국 출신 여성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했다는 ‘작가는 눈으로 글을 쓰고 화가는 귀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라는 말을 응용한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그가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음악과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앨범들 가운데 장 뤽 고다르 영화의 오디오 부분을 그대로 담아낸 앨범, 테오 앙헬로풀로스,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과 관련된 앨범들이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해줍니다.
녹음과 믹싱 만큼이나 곡들의 배열에도 많은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에게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순서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이야기 만들기와도 같습니다. 컴필레이션 제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잘 알려진 곡을 모으기보다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곡들을 선택, 배열합니다. 최근 6장으로 구성된 박스 세트 앨범으로 발매된 <Selected Sign III-VIII>을 보면 그는 여러 연주자의 음악을 모아 놓은 것임에도 앨범에 따라 10곡 이상의 곡을 한 연주자의 곡으로 선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연결이 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처럼 개별 곡 외에 앨범을 이루는 전체 곡들의 배열에도 신경을 쓰는 만큼 그는 최근의 음악 감상이 개별 곡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입니다. 앨범 전체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듣는 것이 적어도 ECM 앨범들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 말합니다.
한편 음반의 커버 이미지야말로 음악과 이미지의 결합에 대한 제작자의 의도가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그가 직접 선택한 시적인 분위기의 커버 이미지는 다양한 문화를 가로지르는 음악, 음악에 최적화된 공간감을 지닌 사운드와 함께 ECM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바라 보이어쉬를 시작으로 얀 에들리츠카, 디에터 렘, 마요 부허, 사샤 클라이스 등의 사진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화가, 디자이너 등에 의해 만들어진, 모노톤의 풍경 사진과 한쪽에 작게 배치된 깔끔한 글자로 이루어진 커버는 멀리서도 단번에 ECM의 앨범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아직 앨범을 듣지 못한 감상자에게 그 안에 담긴 음악을 상상하게 하고 나아가 ECM이라는 레이블에 대한 이미지를 막연하게나마 그리게 합니다. 또한 CD를 마치 하나의 미술품처럼 바라보게 하여 소유욕을 자극합니다. 감상자가 보통 앨범을 듣지 않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앨범 커버야말로 제일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ECM의 커버 이미지는 음악과 별개로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Sleeves of Desire>, <Windfall Light>같은 커버 이미지를 주제로 한 책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정의할 수 없는 신비
위에서 저는 잔향이니 클로즈드 마이킹이니 하면서 ECM 사운드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맨프레드 아이허는 ECM 사운드는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ECM 사운드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ECM을 동경하는 많은 연주자와 제작자들에 의해 ECM에서 제작된 듯한 앨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도 그는 ECM 사운드를 규정하기를 거부합니다.
물론 그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ECM 사운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통 ECM 사운드로 이야기되는 투명한 질감에 공간적으로 펼쳐진 사운드만이 ECM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ECM의 카탈로그를 보면 차갑고 투명한 공간감이 돋보이는 사운드를 들려주는 앨범들이 다수를 이루지만 그렇지 않은 앨범들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의 앨범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ECM 사운드를 담은 앨범들도 실제로는 그 안에 다양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음악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건축하기 위해 잔향을 각기 다르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아노를 사용해도 연주자에 따라 그 음색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실제 레이블의 초기 시절에 녹음된 키스 자렛의 <Facing You>, 칙 코리아의 <Piano Improvisation Vol. 1 & 2>, 스티브 쿤의 <Ecstasy> 등의 피아노 솔로 앨범을 들어보면 모두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벤딕센 스튜디오에서 얀 에릭 콩샤우그에 의해 녹음되었지만 각기 다른 음질과 분위기로 다가옵니다. 모두 피아노 소리 하나만 녹음하면 되는 것인데 어째서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음악 때문입니다. 같은 피아노 솔로 연주지만 키스 자렛, 칙 코리아, 스티브 쿤의 연주와 음악이 달랐기 때문에 각기 다른 녹음, 믹싱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 다른 사운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ECM이 다른 레이블과 명확히 구분되는 개성 강한 사운드를 지녔다고 거시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슨 공식처럼 잔향의 양을 수치적으로 정해 놓거나 하나의 이상적 공간을 설정해 놓고 음악을 그 안에 집어넣은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매번 차이를 만들어 왔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ECM 사운드의 매력은 하나의 정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 속에서 매번 차이를 만들어 내는, 그래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신비로운 생명력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음악에서 다시 음악으로
결국 앨범마다 사운드가 다른 것은 음악이 사운드를 결정하지 사운드가 음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ECM 사운드가 꼭 얀 에릭 콩샤우그가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동안 맨프레드 아이허는 레인보우 스튜디오 외에 아바타 스튜디오, 라 뷔손 스튜디오, 톤 스튜디오 등 여러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녹음하고 믹싱했습니다. 엔지니어 역시 얀 에릭 콩샤우그 외에도 마틴 빌란트, 제임스 파버, 피터 라엔거, 스테판 쉘만, 마르쿠스 하일랜드, 제자르 드 하로, 마틴 피어슨 등 많은 엔지니어와 함께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스튜디오가 어디고 엔지니어가 누구인가에 상관 없이 음악에 맞는 이상적인 공간, 이상적인 사운드를 매번 만들어 왔습니다.
게다가 맨프레드 아이허와 연주자들은 스튜디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섬세하게 제어된 사운드를 보면 오랜 기간 스튜디오에서 씨름할 것 같지만 ECM의 앨범들은 아무리 뛰어난 앨범이라도 보통 이틀의 녹음과 하루의 믹싱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이를 위해 그는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마이크 설치, 녹음 중에 연주자들이 듣게 될 모니터의 음량 조절은 기본이고 템포, 음색, 프레이징 등 연주 과정과 궁극적인 미학적 선택에 관해 연주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눕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녹음을 어떻게 할 것인지, 믹싱에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둘 것인지를 미리 결정합니다. 결국 연주자와 제작자는 앨범에 담길 음악과 사운드를 명확히 그려놓은 상태에서 녹음을 하고 믹싱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짧은 시간 동안 그 음악에 맞는 사운드를 담은 앨범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담은 앨범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레이블이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라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만든 앨범들은 세계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재즈의 지형도를 바꾸었고 장르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음악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식도 제시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개인적 만족에서 앨범 제작을 시작하는 맨프레드 아이허의 방식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맨프레드 아이허가 없는 ECM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영국 출신으로 1978년부터 ECM에 합류한 스티브 레이크가 제작한 앨범들, 찰스 로이드 같은 연주자가 직접 제작을 담당한 앨범들이 카탈로그에 다수 포함되어 있음에도 말이죠. 실제 그는 이 많은 앨범들에 각각 특별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ECM의 초기 앨범들에 대해서도 정확한 상황 설명을 하곤 합니다. ECM을 Eicher’s Contemporary Music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퇴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올해 맨프레드 아이허는 우리 나이로 71세입니다. 일찌감치 은퇴해 연금을 받으며 편안한 생을 누려야 할 때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 곳곳을 돌며 새로운 음악을 찾아내고 새로운 앨범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실 음악을 좋아하는 일에 은퇴가 있을까요? 더 이상 듣고 싶은 음악이 없다면 모를까 그의 제작 활동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71세의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닌 만큼 그의 건강을 바랍니다. 그의 건강이 곧 ECM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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