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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아름다운 배우, 자랑스런 배우 김여진

by Wood-Stock 2011. 6. 20.

김여진은 왜 시대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나

 

2007년 232명, 2008년 332명, 2009년 268명 등 매년 200~300명의 대학생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생을 마감했다. 자살 원인 대부분은 등록금과 관계가 있었다. 이번 달 9일에는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고민하던 50대 가장이 자살했다. 학자금대출 신용불량자는 이미 3만명을 넘어선 형편이다. 등록금 문제는 이미 20대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지 오래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청년세대가 가장 보고 싶어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선배

 

그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생들의 한가운데 김여진, 김제동, 박혜경 등 연예인이 버티고 있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지만 슬픈 일이기도 하다. 2010년 한 시사평론가는 '20대를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2011년 지난 3월 500회 특집으로 마련된 MBC < 100분 토론 > '오늘 대한민국, 희망을 말한다' 편에 출연한 패널들은 20대를 질타하거나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 날 방송에서 전원책 변호사는 '20대의 깊이 없음'을 질타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 전까지 대학생의 엄혹한 현실에 대해 대학생의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그들이 왜 스펙에 몰두하고,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지 이해해준 기성세대는 없었다. 이 날 방송에서 청년들의 현실에 대해 주목한 패널은 박경철과 김여진 뿐이었다.

그래서 김여진은 특별하다. 김여진은 홍대 청소 노동자 정리 해고와 처우 개선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활동하며 인터넷상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여진은 당시 인터넷에서 농성 중이던 청소 노동자에게 시험 공부에 방해가 되니 농성을 자제해달라는 입장으로 인해 큰 비난을 받은 홍대 총학생회장에게 블로그를 통해 "밥이나 먹자"고 오히려 위로와 격려의 뜻을 피력했다. 당시 김여진은 밑반찬을 싸들고 농성장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난 그 학생회장이 청소 노동자들이 차려준 밥도 못 먹는 것을 보고 "무엇이 널 그렇게 복잡하게, 힘들게 만들었을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김여진은 자신의 주장과 다르더라도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청년들에게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태도를 취했다. 기성세대 중심의 미디어가 20대를 무기력하다고 힐난하거나 박태환과 김연아같은 '엄친아'나 '엄친딸'로 양분하는 것과 달리, 김여진은 20대의 입장을 바라본 것이다.

김여진의 이런 언행이 알려진 뒤 많은 청년들이 김여진을 신뢰하고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 3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자본주의 연구회' 대학생들이 연행된 것과 관련해 항의 방문한 대학생 40여명이 모두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자 연행된 대학생의 지인들은 김여진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국대학생연합과 한국대학문화연대는 고려대 새내기 콘서트를 준비하며 김여진에게 응원 메시지를 부탁했고, '2011 희망공감 청춘 콘서트'에서는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법륜스님 등과 함께 멘토로 참여했다. 청년세대와는 너무 거리감이 있는 '어른'들과 달리, 김여진은 지금 청년 세대가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선배'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더 복잡한 갈등의 한복판에서

 

김여진의 사회 활동은 점점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는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최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 정리 해고에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희망버스' 행사에 참여,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한진중공업 회장에게 호소했다. 홍대 청소 노동자 정리 해고 문제나 반값 등록금 시위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정리해고 문제는 훨씬 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다. 보수매체인 조선일보에서 칼럼을 통해 김여진을 비롯한 소셜테이너를 거론하며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정파적인 문제보다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이슈부터 관심을 갖는건 어떨까'라는 입장을 피력한 것도 이 때부터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의 대부분이 쉽게 정리해고 당한다. 이 현실을 생각하면 김여진이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정리해고 문제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건 사회에 관한 일관적인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첨예한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김여진의 활동은 보다 커다란 벽에 막힐 수도 있다. 당장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편견과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의 묵묵부답, 또는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달라지면서 생길 수도 있는 문제, 더 나아가서는 첨예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 탓에 어떤 실수와 작은 흠결조차 공격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정책 자문위원은 트위터에서 김여진에게 욕설을 섞으며 비난했고,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한 패션 칼럼니스트는 김여진의 외모를 비하하고, 허위 사실까지 유포하기도 했다.

서로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김여진은 불이익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15일 미디어몽구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거니까, 걱정마세요"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정책 자문위원의 트윗에는 "(미친X) 맞을지도"라는 답을 돌려줬고, 패션 칼럼니스트에게는 "그래도 당신이 차별을 받을 때 함께 싸워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첨예한 갈등의 한복판에서 김여진이 맞닥뜨릴 벽은 한 사람의 개인이 견뎌낼 수 없는 크기와 무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여진의 사회활동에 대한 찬반의 입장과 별개로, 그가 20대의 현실과 사회 문제에 뛰어든 이유는 기성세대가 주목할만하다. "외롭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러는 게 더 행복하니까" 기성세대 중 누구도 쉽게 자신의 이름과 커리어를 걸고 20대 의 현실을 돌아봐주지 않는 시대. 이런 시대에 "외롭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현실에 뛰어든 사람이 자신의 직업에 상관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사회가 해야할 일 아닐까. 김여진이 직업 때문에 입을 닫고, 현실적인 압박 때문에 소신을 지키지 못하게 내버려둔다면 청년들은 다시 그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여줄 몇 안 되는 기성 세대 중 한 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건 우리가 진보-보수 갈등 때문에 더 큰 시민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 조금씩 우리 모두가 외롭지 않게 서로를 지켜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 김명현 기자 eighte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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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테이너를 보는 왜곡된 시선 - 제인 폰다는 되고 김여진은 안된다?

 

배우 김여진은 요즘 화제의 인물이다. 그야말로 인터넷을 달구는 연예인으로 '등극'했다. 본업으로가 아니라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활약 때문이다. 지난 12일에는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농성자들을 응원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 이전 부당해고에 맞선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했고, 최근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여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김여진은 '소셜테이너(socialtainer=social+entertainerㆍ사회적 이슈에 관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연예인)'의 대표적 인물로 지지를 얻는 한편 너무하다 싶은 욕설도 듣고 있다. 트위터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겨냥 "아무리 발버둥쳐도, 당신은 학살자"라고 했다가 한나라당 자문위원으로부터 '미친X' 소리를 들은 건 약과다. "연예인 본분에나 충실하라"는 어쭙잖은 충고 뒤에서 그가 느낄 자괴감은 원색적인 욕설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김여진을 비난하는 글들은 소셜테이너를 대하는 편협하고 전근대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난과 비아냥의 대부분은 "딴따라가 그저 사람들 즐겁게나 해줄 일이지 뭘 안다고 나서느냐"는 거다. 보수신문도 나서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정파적인 문제보다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이슈부터 관심을 가지라'고 점잖게 거들며 '아슬아슬'하다고 경고를 보낸다. 반전운동가인 제인 폰다, 수단 다푸르 지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해 온 조지 클루니, 빈곤 퇴치와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해 온 록그룹 U2의 보노 등 외국 유명 연예인들의 사회활동과 정치참여는 높게 평가하면서 우리 연예인들의 사회 활동은 고까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예인들은 작은 논쟁거리라도 생기면 일단 바짝 엎드린다. 최근 '햄버거 모욕 논란'에 휩싸인 방송인 김제동도 별다른 잘못이 없었는데도 바로 사과했다. 8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집회 참여 대학생들에게 성금 500만원을 전달하며 전의경을 위해서도 쓰였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학생들이 절반의 돈으로 햄버거를 사서 전하는 과정에서 전의경들이 모욕감을 느꼈는다는 것이다. 김제동이 얼른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려 했다면 그걸 꼬투리 잡아 논란은 더 확산됐을 게 뻔하다.

 

소셜테이너들이 단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연예인이란 이유로 시민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제약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가 돼 시시각각 퍼져나가지만, 대중으로 하여금 그가 선 장소에 관심을 갖도록 유인하는 효과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대중은 소셜테이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옳고 그름은 스스로 판단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의견이나 주장은 도태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더 퍼져나간다. 여론은 자정능력이 있다.

올해 노동계에서 유일하게 이긴 싸움으로 평가되는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는 김여진이 조직한 '날라리 외부세력'의 후원이 큰 보탬이 됐다. 당당한 소셜테이너들의 활약은 사회에도 활력이 된다. 더 많은 소셜테이너들의 출현을 위해 김여진의 건투를 빈다.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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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김여진이 있다

 

"솔직히 그날 가서 조르고 싶었습니다. 그만 내려오시라고. 그분은 '먼저 죽어간 세 사람의 동료 때문에 99번 쓰러져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조남호 회장에게 99번, 990번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다치지 않게 제발 대화해 주세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제발 관심을 가져 주세요. 저에게 법적조치를 취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는 걸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한 여배우가 운다. 눈물이 화장을 지우는지 마는지 신경쓰지도 않고, 누가 쳐다보든지 말든지, 아니 제발 내 얼굴을 보고 내 말을 들어 달라고 한 여배우가 운다. 보도된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어색한 눈물이 아니다. 이 영광은 스탭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울먹이는 감격의 눈물도 아니다. 재벌 그룹의 회장에게, 지금껏 그 부를 쌓아올리는데 일익을 담당했을 노동자들의 해고 철회를 위해 160일이 넘도록 허공 위에 붙들려 있는 한 여성 노동자와 제발 대화라도 해 달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무사히 내려오게 해 달라고 빌면서 운다. 무슨 거창한 사회 변혁의 요구도 아니고,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 제발 좀 말이라도 듣고, 이야기라도 섞어 달라고 한 여배우가 운다.

 

참담하고 슬프다. 기업주에게 당장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 주라도 아니고 제발 대화라도 해 달라는 말에 눈물을 보태야 하는 내 사는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지역과 나이를 넘어 뜻 맞고 즐거워 친해진 한 사람을 만나려는데 용역으로 가로막고 시설 보호를 신청하고 그 장벽을 넘은 이들을 몽땅 중죄인으로 몰아가려는 오늘이 참담하다.

 

그러나 오늘 나는 기쁘다. 벅차도록 뿌듯하다. 눈물이 나도록 흐뭇하다. 헐리웃 영화에 당당하게 맞장을 뜨고 세계 3대 영화제를 골고루 석권했던 한국 영화의 위상 위에, 이제는 우리도 이런 여배우를 갖게 되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화려한 조명 받으며 몇 억대 CF를 찍으며 대기업 회장님의 자제분들과 염문을 뿌리다가 가끔 아프리카를 찾아가 불쌍한 아이들을 품에 안고 눈시울을 붉히는 여배우들들은 많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을 걸고, 그를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여배우를 드디어 우리도 갖게 되었다는 포만감 때문이다. 영화의 영원한 고향 헐리우드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보유하게 된 자랑스러움 때문이다.


헐리웃 영화계에서 '좌파 사냥'이 시작된 것은 1947년부터였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주적의 이름은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바뀌었고, 이 분위기에 편승한 월트 디즈니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이들은 "영화계의 좌파 침투에 대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여 나간다. 게리 쿠퍼가 선봉에 섰고,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의 명감독도 빨갱이 사냥꾼이 됐다. 저 잘생긴 미남 로버트 테일러도 나섰다. <에덴의 동쪽>의 명감독이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엘리어 카잔은 앞장서서 빨갱이들의 이름을 댔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의 불명예를 얻는다.) 그리고 의회에서 조직된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이들 10명을 중심으로 일종의 블랙 리스트가 작성된다. 이른바 헐리우드 텐이었다. 영화사 사장들은 이들을 해고하고 다시는 일거리를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자칫하면 최고의 스타에서 최악의 빨갱이로 낙인 찍혀 배우로서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맞선 배우들이 있었다. 그레고리 펙, 험프리 보가트 등 추억의 별들이 그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로렌 바콜도 있었다. 그들은 의회까지 날아가 조사위원회가 부당하게 헐리우드를 탄압하고 있다며 행진했다. 레지스탕스의 아내가 된 옛 연인을 도와 목숨을 걸던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 옆에서 로렌 바콜은 의연하게 행진한다. 미국의 자유를 외치면서. 미국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섹스 심벌로 이름 높고, 케네디를 비롯한 숱한 남자와 염문을 뿌렸던 마릴린 먼로. 또 슈퍼스타 조 디마지오를 비롯 여러 남자의 부인이 되었던 그녀는 '밀러 부인'으로서 가장 긴 세월을 살았다.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희곡을 쓰기도 했던 극작가 아서 밀러 역시 빨갱이 사냥의 광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들은 1956년 결혼했는데 바로 그 해는 아서 밀러가 비미활동위원회에 불려간 해였다. 그리고 결혼 기념일은 바로 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인 어느 날이었다.

 

아서 밀러는 빨갱이 동료의 이름을 대라는 의회의 요구에 꿋꿋이 저항하며 함구했다. 그 댓가로 벌금을 물고 여권이 말소됐으며 구금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 살벌한 청문회에서 외로이 싸우는 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마릴린 먼로였다. 좌파로 낙인찍힌 극작가와 하필이면 그가 청문회에 불려다니던 즈음 결혼을 결행했던 것은 대단한 용기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렵다. FBI는 당연히 그녀를 공산주의자 파일에 넣어 두었다.

 

 

수전 서랜든은 또 어떤가. 그녀는 자신의 아카데미상 트로피, 황금의 오스카를 팔아먹으려 다가 아카데미와 마찰을 빚었다. 그녀가 빈한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그를 상징적으로 팔아 그 수익으로 전쟁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트로피를 받던 순간에도 아이티 난민 처리의 문제를 지적하다가 아카데미 시상식 참여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압박은 아카데미상 조직 위원회같이 점잖은 곳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전에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던 즈음, 그녀는 '빈 라덴의 애인'으로 불리우며 자신과 그 가족들에게까지 가해지는 살해 협박을 견뎌야 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전쟁의 진실을 숨기는 언론에게 일갈했다. "부끄러움을 알아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하노이에 가서 북베트남 병사와 포즈를 취하던 제인 폰다까지는 들지 않겠다. 지금까지 얘기한 이 셋만으로도 나는 부러움이 차고 넘쳤다.  우리 나라 연예계에서 인형의 눈망울과 악세사리의 반짝임을 지닌 여배우야 빗자루로 쓸어낼 정도로 흔했고, 심후한 연기력을 지니고 혼신의 연기를 통해 감동을 주는 여배우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대권 주자의 출정식에 병풍으로 서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지지해요 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 말고, 이 사회의 모순 앞에서 정면으로 항거할 줄 알고, 나를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하지만 제발 이것만은 해 달라고 외칠 줄 아는 여배우를 이전에 본 적이 있는가.

 

온 나라가 빨갱이 사냥의 광기에 휘말리던 때 헐리우드 텐을 구하라고 마치 레드 카펫 위처럼 도도하게 행진하던 여배우, 기꺼이 빨갱이로 몰리기 직전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그 남편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장면을 자랑스럽게 지켜 볼 줄 알던 섹스 심벌, 배우로서 평생의 명예라 할 황금 오스카를 팔아 반전 운동에 보태려던 여배우, 살해 협박을 받으면서도 언론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 줄 아는 여배우를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가.

 

오늘에사 나는 그런 여배우를 목격한 기쁨에 온몸이 떨린다.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도 좋고 베를린 영화게 황금곰도 기깔나고 베니스의 황금 사자도 폼나지만, 나는 오늘 이런 여배우가 우리 앞에 있음이 자랑스럽다. 한류가 프랑스에서 몇천 명을 흥분시켰든 이란에서 대장금이 시청률이 몇 퍼센트가 나왔든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고, 그로 인한 불이익에 주눅 들지 아니하며,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인간에 대한 부당한 봉쇄와 억압에 항거할 줄 아는 한 여배우의 국적이 한국임이 자랑스럽다. 더 이상 나는 로렌 바콜이, 마릴린 먼로가, 수잔 서렌든이 부럽지 않다. 그래 우리에겐 김여진이 있다.

 

http://nasanha.egloos.com/10727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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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막’ 하다보면, 세상이 바뀐다니깐!

배우 겸 ‘언니’ 김여진의 재잘거림 “등록금 집회 못 나가면 어때요, 집 창문에 피켓 걸어봐요”

 

지진이 무서운 건 ‘여진’ 때문이다. 배우 김여진은 한국 사회의 여진과 같은 존재다. 이슈가 터지면 앞장서서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옆에서 ‘깐죽’거리는 듯하다. 시간만 나면 트위터를 통해 사회 기득권층이 듣기 싫어할 말들을 ‘재잘’거린다. 김여진 스스로 “사회에 금을 긋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벽이 무너진단다. 이번 청춘 상담은 정리가 힘들 정도로 ‘수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많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식 호칭은 ‘언니’였다. 새벽에 녹즙 배달을 하면서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 김현진, 청년유니온 위원장 김영경, 논객 조윤호. 여기에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연극영화과 학생 이혜주가 ‘수다’에 동참했다. 인터뷰 뒤인 지난 12일 김여진은 파업 투쟁중인 부산 한진중공업에 녹화 마치고 ‘놀러’ 갔다가 연행됐다. 경찰은 형사처벌을 고심중이다. 정말 못 말리는 언니다.

 

우연히 데뷔한 연극의 교훈 “안 되면 불 끄자”

 

이혜주 독어독문과 출신이잖아요.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됐나요?

 

김여진 학교 다닐 때 연극 한번도 안 해봤어요. 할 마음도 전혀 없었고요. 소위 말하는 ‘운동’을 좀 했죠. 학점도 안 좋고, 기소도 한번 당해보고 했으니 ‘취직은 안 될 거다’라는 생각이 있긴 했어요. 4학년 2학기 겨울방학 때 우연히 혼자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란 연극을 보게 됐어요. 난생처음 본 연극이었어요.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어요. 텅 빈 객석에 한참을 앉아 있었어요. 연극이 이런 거라면 ‘포스터’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극단 관계자분께 말했더니 “내일 오세요” 하더라고요. 보통 다음날 아무도 오지 않는대요. 전 다음날 진짜로 찾아갔어요. 곧장 한달 반 정도 포스터 붙이고 전단 나눠주고 표 끊는 일을 했어요. 그러면서 날마다 두번씩 그 연극을 봤어요. 대사를 저절로 다 외워버렸죠.

 





김현진 어떻게 첫 연극에서 주연을 했어요?

 

김여진 연극 주인공이었던 배우가 ‘펑크’를 냈어요. 당시 방송사 탤런트 공채가 되고 나서 잠적을 해버린 거예요. 더블 캐스팅이었던 다른 배우는 지방에서 촬영이 있었고요. 객석은 꽉 찼는데 난리가 난 거죠. 극단 대표님이 “너 대사 외우지? 일단 나가라” 하시더라고요.

 

이혜주 무작정 뛰어드는 게 겁날 때가 많아요. 안 떨리셨어요?


김여진 당연히 떨렸죠. 그런데 대표님이 “해보고 안 되면 불 끌게” 하시더라고요. 하하. 그 뒤로 제 인생의 모토가 바뀌었어요. 못하면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관두면 되잖아요. 망설이는 성격에서 한번 해보자는 쪽이 된 거죠. 일단 하세요. 잠시 ‘쪽팔리면’ 되잖아요. 하하.

 

김영경 사회문제에 발언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김여진 연기를 시작하면서 뉴스도 안 보고 살았어요. 연기만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사회문제를 외면하니 제 문제가 더 버거워지더라고요. 바깥일에 신경을 끄니 내 문제가 커지는 거죠. 최진실씨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정토회 법륜 스님을 만나면서 마음을 관찰하는 훈련을 하게 됐어요. 그 뒤 여러 사회활동을 시작했죠.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에 찾아가서 생활하기도 하고요, 4대강 반대운동도 100일 정도 꽤 적극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왜 안 보였느냐? 그땐 트위터를 안 했거든요. 하하. 트위터를 하면서 일종의 날개를 단 거죠.

 

이혜주 누군가가 “왜 우리나라 여배우는 냉장고 광고만 찍느냐”며 한탄하더라고요. 연예인들의 사회적 발언이 적은 거 같아요.

 

김여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발언을 했을 때 보호 장치가 없어요. 정권이 바뀔 때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또 연예인에 대한 사회의 시각도 문제예요. 최근 ‘맷값 폭력’으로 물의를 빚었던 최철원씨는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는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같이 사회적 지탄을 받은 신정환씨는 실형을 받았어요. 이런 식의 이중적 잣대에선 ‘입 다물고 가만있어’가 될 수밖에 없어요.

 

조윤호 누나가 학생이었을 때 느꼈던 사회구조의 문제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어요. 학생이었을 때 바라보던 시각과 각종 경험을 하고 난 지금의 시각이 좀 다를 거 같아요.

 

김여진 많이 달라졌어요. 거의 반대라고 봐도 될 정도로요. 예전에는 분노의 힘으로 투쟁을 했다면,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싸우는 거 같아요. 돈하고 행복하고 싸우면 행복이 이긴다고 봐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을 대체하는 돈을 찾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게 진정으로 무엇인지 아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말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거죠. 그게 혁명이라고 봐요. 작지만 계속 금을 긋는 거죠. 젊은 친구들이 ‘막’ 했으면 좋겠어요. “저런 미친 것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요. 안 되면 어떡하냐고요? 불 끄면 되죠!

 

버틸 수 있는 ‘선’을 정하라

 

김영경 기성세대를 쫓아가기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사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어요. 언니가 조직한 ‘날라리 외부세력’도 마찬가지 흐름이라고 봐요.

 

김여진 20대들에게 묻고 싶어요. 자기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성찰을 해봤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행복한지 말이에요.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두려움’이 되면 곤란해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공부한다는 건 결국 남 눈치만 보다가 죽는다는 소리예요. 한 발짝만 벗어나면 돼요. 살려달라는 사람 보면 외면하지 말고 손 내밀어서 살려주면 되는 거예요. 잠깐이라도 멈추면 연대가 생기고 해결책이 생겨요.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미래의 것들 대부분은 미신에 가까워요. 대부분 해결될 수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세요.

 

김현진 얼마 전 서른이 됐거든요. 그런데 제겐 아무것도 없어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도 없어요.

 





김여진 저도 그 나이 때 ‘집도 절도’ 없었어요.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하고 <박하사탕>찍고 서른이 됐거든요. 돌아보니 여전히 작은 원룸 전세방에 살고 있더라고요. 인생이 바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버지 사업은 망해서 가족들이 빚더미에 앉았어요. 여기에 남자친구한테 ‘완전’ 차이기까지 했죠. 한마디로 ‘썩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웬만한 일들에 대해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거죠. 올해 40대로 접어드는데, 30대 때보다 제 마음이 더 커진 거 같아요. 사람의 ‘폭’이 커지면 상대적으로 밖의 문제가 작아져요.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궁리해봤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자기가 버틸 수 있는 ‘선’을 정해놓는 거죠. ‘죽어도 지하 단칸방은 못 살겠다. 최소한 원룸에서 살고 싶다’라면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나오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일찌감치 ‘제 집’을 살 생각을 포기했어요. 그러니 오히려 많은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김현진 주위에서 왜 시집 안 가냐고 자꾸 묻는데 미치겠어요.

 

김여진 어른들 눈에는 여자 혼자 사는 게 위험해 보이는 게 당연해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아야 마음이 놓이는 거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봐요. 역사적으로 외세 침공 등으로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잖아요. 그러니 무리지어서 비슷비슷하게 살아야 안전하다고 느낀 거겠죠. 어른들에게 그런 말 들었다고 상처받지는 말아요. 그냥 가볍게 넘겨요. “언제 갈까요? 내일 갈까요?”라고 웃으면서 되물어 보세요.

 

김영경 남자들은 이른바 ‘형님들의 연대’가 견고한데 여자들은 연대하기가 쉬운 거 같지 않아요.

 

김여진 남자들의 연대라는 걸 부러워한 적이 없어서…. 남자들이 참 ‘안 되는 방식’을 계속 고집하고 있어 여자들이 좀 낫다고 생각해요. 하하. 여자들은 서로 마음에 안 들면 속으로 ‘재수 없어’ 하면서도 자기 할 거 다 하잖아요. 그러면서 다양성이 생기고요. 반면, 남자들은 의리·군기 등을 내세우면서 안 되는 거 계속해요. 많이 안타깝죠. 그런데 저는 극단적인 부분을 빼놓고 한국의 성차별에선 여성들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김현진 어떤 면에서요?

 

김여진 연애를 예로 들어보면 너무 수동적이에요. 여자들은 ‘나는 사랑받아야 해’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한 송이 꽃이 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김영경 언니들이랍시고 하는 충고가 ‘남자는 돈을 잘 벌어야 한다’라는 것들이죠.

 

김여진 세상에 공짜란 없어요. 남자한테 받으려고만 하면 결국 남자에게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소리예요.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 이런 여자가 돼야 한다는 거죠. ‘내’가 사랑의 주체가 돼야 해요. ‘저 남자 내가 예뻐해줄래’라고 생각해보세요. 남자가 예뻐 보이면 밥도 사주고 선물도 해줘 봐요. 자꾸 사랑받으려고 안달복달하니깐 더 멀어지는 거죠. 여성들이 연애를 하면서 더 성숙하고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이혜주 남자한테 차이고 ‘찌질’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여진 빨리 물러나 주세요. 사랑과 집착에 대해 구분이 필요해요. 누굴 좋아하면 행복해요. 집착하면 괴롭죠. 잘 구분해야 해요. 차라리 멀리 가세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나마 가능성을 높여줄 거라고 봐요. 애정을 구걸하는 건 폭압이에요.

 

어른 아닌 ‘자기의 눈’으로 세상 봐야

 

김영경 얼마 전 트위터에서 언니 외모를 지적하면서 막말을 한 시답지 않은 한 아저씨 때문에 해프닝을 겪으셨죠?

 

김여진 그 아저씨한테 뭐라 할 수도 없는 게, 제가 뭐라 한들 그분 인생이 고쳐지겠어요? 하하. 신경 끄고 안 놀면 돼요. 어떻게 보면 그 아저씨는 자기가 얼마나 추한지 스스로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고. 그런 분들하고 안 노는 게 상책이에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조윤호 누나가 홍익대 청소용역노동자 투쟁할 때, “면학분위기 해친다”며 비난한 총학생회장에게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 학생이 특별하기보다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슈화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투쟁도 정말 어려운 친구들은 아르바이트하느라 시위 참석 못 해요.

 

김여진 한꺼번에 대단한 것을 하려고 하면 안 돼요.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석 못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잖아요. 트위터나 문자 같은 수단도 있고요. 꼭 어디 광장에서 수만의 인파가 모여야 시위가 아니에요. 시위 문화도 바꿀 수 있잖아요. 1인 시위도 꼭 어디 광장에 갈 필요 없어요. 자기 집 창문, 베란다에 피켓 하나 걸어놓는 거예요. 여러 실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너무 세상을 고치려고 애쓰지 말고 고쳐가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그 안에서 창의력이 나오고 그러면 사람들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김영경 어렵게 사는 청년에겐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란 비난이 쏟아져요.

 

김여진 그건 어른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들이에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잖아요. 왜 사회 엘리트들이 최근 자살을 많이 할까요? 변호사? 의사? 삼성 직원? 과연 행복할까요? 그건 답이 아니에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해요. 우리가 미국에서 사는 백인 상류층도 아닌데, 이 구조에서 어떻게 ‘승자’가 될 수 있겠어요. 현재의 ‘신자유주의’식 논리라면 승자가 되기 위해 지구 말아먹자는 얘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될 가능성도 없고요. 세계 초일류? 어떻게 보면 그게 진짜 ‘꿈’이에요.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물론 여기서 한가지 두려움이 있어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데, 흔쾌히 받아들이세요.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빨리 버리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창조적인 일을 해나가세요. 세계 일류가 안 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언니들 덕분에 살 만하다

 

이주노동자 추방에 맞선 시위에 참여해서 뉴스 카메라에 대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프랑스가 부끄럽다”고 가차 없이 쏘아붙인 여배우 에마뉘엘 베아르는 <마농의 샘>의 말없는 마농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사실 우리에게도 에마뉘엘 베아르가 부럽지 않을 당당한 여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여진, 아니 여진 언니다. ‘트위터’라는 날개를 달고 사람과 사람들 틈새로 부지런히 날아다니고 날아오르며 또 같이 날자고 외친다. 그러면서 힘내라고, 힘내자고 속삭이고 때로는 눈물 흘리고 우는 사람을 다독인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김여진을 가장 김여진답게 하는 핵심, 그만 “언니님” 하고 와락 엎드려 경배라도 올리고 싶은 언니이게 하는 매혹, 하여튼 그가 가진 이 모든 매력의 근원은 나를 남이 좌지우지하게끔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였다. 사실 우리 모두 그게 참 안 된다. 나 자신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라는 언니의 조언은 이기적으로 살라는 자기계발적 멘트와는 격이 달랐다.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내 이득 칼같이 챙기면서 나, 내 몸, 내 돈, 내 밥그릇, 내 식구, 내 새끼, 하여튼 그저 내 것만 아득바득 챙기면서 살라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언제 즐거운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고민하고 사색하고 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요 좁은 한반도 땅에서 비비적대면서 다들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고 분주해서 그거 참 힘들다. 복닥거리면서 우리가 제일 즐기기 쉬운 오락은 남 어떻게 사는지 요모조모 보면서 뒷말하는 것이고 가장 빠지기 쉬운 자학은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것밖에 안 되네, 하는 것이다. 그리 쪼잔히 살지 말라면서 겁먹지 마라, 쫄지 마라, 너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남이 좌지우지하게끔 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김여진은 화통하고 거침없고 다정했다.

 

이런 언니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아직 살 만하다. 서른 넘고 심란했던 마음이 폭 가라앉았다. 잘 먹으면 나이란 건 보약처럼 먹고 튼튼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거였다. 잘 먹어야지. 김현진

 

가슴에 불을 붙인 ‘젊은 정신’

김여진 언니는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며 마음이 시키는 일에 무작정 뛰어들고 보는 ‘젊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 내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언니의 움직임을 주목하면 움츠려 있던 무언가를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혜주

 

야성을 일깨운 청량감

청량제 열 알을 한 입에 털어 넣고, 한 알씩 톡톡 깨물어 먹은 기분이다. 그 시원스러운 청량감에 잠들어 있던 야성이 기지개를 켠 느낌이랄까! 왜 여진 언니, 여진 언니 하는지 알 것같았다. 10대에도 어떤 연예인의 팬이 되어본 적 없던 나지만, 이 한번의 만남으로 여진 언니의 왕팬이 되어 버렸다^^. 김영경

 

이런 유쾌함이라면 천하무적!

김여진 누나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동참한죄다. 만나기 전까지 누나의 활동이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누나가 걱정되지 않는다. 이런 자신감과 유쾌함이라면 무엇이든 이겨내리라 믿는다. 누나가 말하는 연대가 또 한번 빛을 발하기를 기원한다. 조윤호

 

진행·정리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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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라도 무릎 꿇겠다”  김여진 ‘내 마음이 들리니’

 

검찰 출석 요구에 기자회견에서 고공크레인에 있는 이가 무사히 내려온다면…”

“법적 조치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만나러 가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님, 저는 정말 당신 앞에 아흔아홉번, 아니 구백구십번, 구천구백번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제발 그 사람 다치지 않고 내려올 수 있도록 대화해주십시요.”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버스’의 한진중공업 노조 파업 지원과 관련해 경찰의 출석 요구서를 받은 배우 김여진(38)씨는 15일 오후 2시 30분 서울 종로구 청운동 청와대 앞에서 희망버스 참가자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조 회장에게 대화로 사태를 해결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 사람’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 85호에서 15일 현재 161일째 사쪽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장기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다.

 

12일 새벽 김 위원과 희망과 연대의 대화를 나눈 김씨는 “트위터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그는 제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고 있고, 매력적인 분”이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이어 “그분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저 역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날 솔직하게 그만 내려오시라고 조르고 싶었다”면서 “그러나 그분은 죽어간 세 사람의 동지와 지금 해고를 당하고 있는 동료들 때문에 아흔아홉번 쓰러지더라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권에게도 사태해결을 호소했다.

 

“한 사람이 160일 넘게 혼자서 고공에 있어요. 어떻게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18살 버스 안내양부터 안 했던 노동이 없던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 제발 관심을 가져주세요.”  

 

김씨는 경찰의 소환조사에 대해 자진출석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경찰은 애초 김씨의 소환조사에 신중한 입장을 취했으나 한진중공업쪽에서 김씨 등 5명을 집단 건조물침입 혐의로 고소함에 따라 15일 김씨 등에게 출석요서를 보냈다.

 

“저에게 법적 조처가 내려진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법을 어겼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도, 그 사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트위터리언들도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상처입니다. 제발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김여진 기자회견 발언 전문

 

트위터를 통해서 오늘로 161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님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반했습니다. 제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고 계시구요, 정말 매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전 트위터를 통해서 그 사람과 친구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이 걱정됐습니다. 아마 희망버스를 타고 갔던 많은 분들이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160일 동안 고공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걸 누군가는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스스로 문을 부수고 올라간 분입니다. 스스로는 내려가실 수가 없습니다. 정말 솔직하게 그날 저는 조르고 싶었습니다. 그만 내려오시라고. 만약 그분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저 역시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어간 세 사람의 동지와 지금 해고를 당하고 있는 그분들, 그 동료들 때문에 아흔아홉번 쓰러지더라도 무릎 꿇을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요, 저는 그분을 위해서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번 아니, 구백구십번, 구천구백번이라도 조남호 회장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제발 그 사람 다치지 않고 내려올 수 있도록 대화해주십시오. 저는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아침 용역들이 거기에 있는 조합원들을 방패로 찍고 때리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가서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조남호 회장이 거기 오시길 바랐습니다. 와서 사람들 때리지 말라고, 우리 회사를 같이 만든 회사의 주인이라고 말해주시길 바랐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김진숙씨가 무사히 내려오시길 바랍니다. 조남호 회장님, 저는 정말 당신 앞에 몇 십번 몇 천번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대화해 주십시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제발 관심을 가져주세요. 한 사람이 160일이 혼자서 고공에 있어요. 어떻게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18살 버스 안내양부터 안 했던 노동이 없던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 제발 관심을 가져주세요. 정치 하시는 분들, 대통령 각하 부탁드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할 겁니다. 저에게 법적 조치가 내려진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법을 어겼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도, 그 사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트위터리언들도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상처입니다. 제발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홍대부터 한진중공업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큰 날라리’를 만나다

“무모한 일?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배우입니다”

 

“보여요?”(여진)

“다들 멋지다!!!”(진숙)

“정문쪽 길 건너편에 있어요.… 둘이서 얘기나 했음 좋겠어요!”(여진)

“당신이랑 있으니까 좋다. 진짜 좋다!”(진숙)

 

살짝 훔쳐본 김여진씨의 휴대폰 문자메시지 창에는 ‘희망 버스’ 인파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지척에 닿았던 12일 새벽 1시께부터 오전 11시40분께까지, 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나눈 메시지가 빼곡했다.

 

한 사람은 35m 크레인 꼭대기 “한 평 남짓한 철판”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 사람은 멀찍이 조선소 정문 밖에서 안으로, 다시 크레인 철계단으로, 점점 다가갔다. 물리적 거리 탓에 파묻히는 입 말 대신 트위트(트위터에 올린 글)와 문자메시지가 교감과 연대의 도구였다.

 

배우 김여진씨가 부산 한진중 파업현장 앞에 닿은 건 전날인 11일 저녁 8시 반.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 촬영이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 정문 앞, 경찰에 에워싸여 발을 동동거리다 새벽 1시께 희망버스 인파에 힘입어 조선소에 들어갔다. 오전 10시40분께 시위현장을 나온 김씨는 한 시간 뒤 경찰에 연행됐다. 이런 여정은 8만9천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그의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한진중 문제는 ‘리트위트’를 통해 퍼져나갔다.

 

올 1월 홍대청소노동자의 해고 철회 투쟁에서부터 6월 등록금 투쟁과 한진중 노동자 투쟁까지 뜨거운 시위현장에서 전방위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 김여진씨. 12일 영도경찰서에서 훈방조처된 뒤 서울로 돌아온 김씨를 13일 밤 홍대 앞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손 씻을 공간이 필요합니다” 듣고 홍대로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배우로서 김씨의 행보는, 지난 4월10일 파업농성장을 찾은 그를 두고 김 위원이 걱정했듯이 “몹시 무모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김씨는 “배우이기 때문에 (외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저는 배우잖아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고 이해하고. 그 일로 십수년 밥을 먹어온 사람이에요. 저는 공감하는 것이 기술인 사람입니다. 어떤 마음일까. 조금만 상상해 보면 마음이 아파서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다들 멋지다”는 김 위원의 문자메시지는 김여진씨와 ‘날라리 외부세력’을 두고 한 말이다. 12일도 30여명이 함께했다. 이 ‘외부세력’은 올 1월 초 김씨가 홍익대 청소노동자 농성에 동참하면서 트위터를 통해 꾸린 ‘트위터 당’이다. 10대에서 60대까지 250여명, 학생, 출판인, 의사, 약사, 자영업자, 주부 등 직업도 다양하다. 트위터당이란 이름도 김씨가 지었다. “현장에만 가면 외부세력은 나가달라고 하잖아요. 그래요, 우린 외부세력인데, 그 분들 편을 들겠다는 겁니다.”

 

김씨는 “손 씻을 공간이 필요합니다”라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접하는 순간, 그 농성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대사 한 마디에서 지나온 삶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손도 못 씻고 버스 타고 집에 가고. 하루 11시간 노동에 월급 80만원도 못 받으면서, 남들이 어지럽혀 놓은 것 치웠잖아요. 손 씻을 공간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잖아요.”

 

“어디신가요?” “호송차 안 (^^).”

 

그는 한진중 해고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에 함께하는 까닭을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150여일째 고공에 매달려 있어요. 왜? 그 사람의 인생과 절박함에 대해 저는 궁금해요. 그 분은 혼자가 아니라 172명 한진 해고노동자를 위해서 거기 있는 겁니다.”

 

그는 10분을 찍으려고 10시간을 기다리는 직업이 배우라고 했다. 기다리는 시간에 트위터를 했고, 김 위원은 그의 ‘트위트 친구’다. 두 사람의 이날 마지막 문자는 김씨가 경찰에 연행되던 중에 송수신됐다. “어디신가요?” 35m 공중에서 김 위원이 물었다. “호송차 안 (^^).” 김 위원의 답신은 “홧팅! 웃으며, 함께, 끝까지!”

 

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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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거니까, 걱정마세요"

미디어몽구 인터뷰, '정치할거냐' 시선에 "약자 메신저하며 힘이 생겨"

 

홍익대 청소노동자, 반값등록금,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등 약자들의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는 배우  김여진씨가 최근 ‘정치를 하고 싶은 거냐’는 등의 삐딱한 냉소에 대해 “지금하는 일들이 행복하고 힘이 나기 때문”이라며 “이에 따르는 불이익과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할 마음이 돼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 16일 ‘미디어몽구’라는 현장형 블로거로 알려진 김정환씨와의 동영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트위터를 통해 대신 말씀해드리는 것이 기쁨이고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 보다 자신이 얘길하면 많은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김씨의 말은 지난 15일 김씨의 인터뷰 동영상 촬영을 했던 미디어몽구는 김씨에게 ‘왜 이렇게 사회참여활동을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3분여 짜리의 대답이었다.

 

김씨는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돼 온 것 같다”며 연기인생과 지금의 활동을 연결지었다.

 

“연기를 한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거잖아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직업인으로서 음악인은 귀가 예민하듯이 연기하는 사람은 감정이 예민해져요. 훨씬 잘 느낄 수 있고, 잘 울고요, 잘 웃고요. 그런가하면 또 굉장히 허망하죠. 늘 경쟁해야 하고,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게 연예인이잖아요. 그 허망함을 이기기 위해 많은 분들이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쇼핑도 하고, 이렇게 지내는 데. 그러다가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워요. 그게 저희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도 그럴 때가 있었구요. 우울하고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JTS라는 구호 단체를 통해서 활동을 시작했죠.”

 

김씨는 이렇게 사회활동에 입문했다. 그러면서 연기자로서의 허망함과 우울함을 떨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 눈을 돌리니까 제 문제는 작아지더라구요. 별 개 아니게 되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트위터와 홍대 노동자를 만나게 됐다. 김씨는 “그런 와중에 트위터라는 게 생겼구요. 트위터를 보니까 정말 세상에 수많은 어려운 사람의 얘기가 다 올라와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얘기가 올라오고 특히 기사가 아니라 그 사람들 목소리가 다 들려요.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고 슬플 수밖에 없어요. 제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어요”라며 “그래서 홍대를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분 대신해서 말씀해드리는 거에요. 트위터를 통해서. 왜냐면 제 얘기는 좀 더 들으시니까, 그 분들 얘기보다.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게 저에게는 기쁨이고 자부심입니다. 그걸 외면하면 모른척 했으면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을 거같아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한 최근 자신이 이런 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두고 ‘정치하려느냐’ ‘연기에서 잘나가지 못하니 떠 보려는 것이냐’는 등의 삐딱한 시선에 대해 이렇게 답을 했다.

 

“저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어떤 목적이나 다른 게 있는 게 아니구요. 제가 행복하자고.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그렇게 하는 게 제가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서 그에 따르는 불이익이라는가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할 마음이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서 커밍아웃한 성적소수자(게이)이면서 유명 패셔니스트로 알려진 황의건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김씨에 대해 “몇 년 사이 변했는지 아니면 원래 기회주의자인지, 연기에 뜻이 없는 건지, 정치를 하고 싶은 건지 당최 헷갈린다”며 “연예뉴스에 한번도 못나온 대신 아홉시 뉴스에 매일 나오는 밥집 아줌마처럼 생긴 여진족”이라고 폄훼해 누리꾼들의 많은 질타를 받았다.

 

한편, 김씨를 인터뷰했던 ‘미디어몽구’ 김정환씨는 17일 “김씨의 사회활동에 대해 삐딱하게 보기에 이에 대한 김씨의 솔직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여진씨와 미디어몽구는 홍익대 청소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김여진씨가 홍대 노동자 현장에 처음 가게 된 것은 미디어몽구의 제의였다고 한다. 미디어몽구 김정환씨는 “김여진씨가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제가 ‘아예 홍대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홍대에 데려갔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며 “김여진씨도 이번 인터뷰 중간중간에 ‘그 때 홍대에 안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씨가 여기저기 자꾸 나서는 것에 대해 내가 ‘그러다 드라마 출연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김씨는 늘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곤 했다”며 “이번 인터뷰 외에도 지난 주 한진중공업에 갔을 때 펑펑 울었던 김씨의 모습과 여러 장면들을 영상에 담아 곧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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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가 만난 사람]시대와 소통하는 소셜테이너 김여진

ㆍ"사회를 모른 척하고 행복해지는 건 불가능"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기대를 배반당하면 사람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실망하거나 놀라거나…. 지난 6월 21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여진을 인터뷰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 연초부터 지금까지 반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김여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별로 뜨지 않은' 엔터테이너에서 '가장 강력한' 소셜테이너로 대중과 역동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 문제, 반값 등록금 정책, 한진중공업 사태 등에서 보듯이 그가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그 사안은 폭발적인 정치·사회적 이슈가 됐다. 그 놀라운 영향력의 비밀이 궁금했다.

관심과 주목을 받으면 그 인물은 재평가된다. 그 역시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계기와 그걸 내려놓은 사연, 연예계에 데뷔한 과정 등 그가 소셜테이너로 나선 배경이 알려졌다. '마음이 아름다운 배우' '개념 있는 배우'라는 찬사와 '폴리테이너' '미친년'이라는 비하가 오갔다. 어떤 인물이든 주목을 받고 영향력을 가지면 으레 겪게 되는 현상쯤으로 가볍게 보았다.

그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잘못된 기대를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 대한 기대는 번번이 배반당했다. 이를테면 무거운 줄 알았는데 가벼웠고, 가벼운 줄 알았는데 무거웠다. 말이 되지 않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 역시 말이 되니 기막힐 노릇이다.

홍익대 청소노동자 분들과 함께 한 뒤부터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도 어리둥절하고 다른 분들도 아마 어리둥절하실 거예요.(웃음)"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다. 그다지 별난 얘기가 아닌데도 튀게 느껴지는 까닭이 뭘까. 갑자기 스스로를 객관화시킨 어법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어…(잠깐 생각한 뒤)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축이 바뀐 거죠. 의도를 하거나 어떤 대단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고요.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조금씩 그 다음 발걸음을 가고 있는 거예요."

그는 지금의 사회참여가 4년 전 JTS(Join Together Society)라는 구호단체 활동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JTS 활동을 하다 보니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래서 홍익대 청소노동자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또 그 때문에 대학 문제를 들을 기회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등록금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한 걸음씩 가다 보니 예까지 왔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생겼어요. 여기저기서 요청도 많고 와달라는 분도 많고 강연해 달라, 만나보자는 곳이 있었죠. 제 힘 닿는 데까지 만났거든요. 거기서 들은 얘기를 MBC < 100분토론 > 에서 하게 됐고, 저도 깜짝 놀랄 만큼 반향이 있었어요. 반값 등록금 1인 시위처럼 저랑 생각이 맞고 뜻이 맞고 시간이 맞으면 '예, 할게요!' 했던 거죠. 참 묘하게도 다 그런 식으로 이슈가 됐어요."

그의 소통 공간은 트위터(@yohjini)다. 트윗을 통해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접하고, 트윗이나 리트윗(RT)으로 그 내용을 팔로어에게 전파하는 것이 그의 활동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다. 팔로어는 현재 9만여명으로 연예인 치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은 가히 대선주자급(?)이라고 할 만하다.

"트위터에서 사람들의 호소를 듣죠. 듣다보면 가보고 싶어요. 거기가 좀 다른 지점이에요. 저는 가서 직접 들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가면 제가 갔다는 것 때문에 기자분들이 써주시는 거죠.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되어온 것 같아요."

 

연예인으로서 그런 활동이 부담이 되거나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면 못 하죠. 할 이유도 없거든요. 힘들지 않고 좋으니까 하는 거겠죠. 힘들면 또 잠시 쉬면 되는 거고… 사실은 가볍게 생각해요. 함께 해주시는 분들도 제가 그런 걸 알죠. 대단한 뜻이 있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이걸 반드시 이루어야 하며…', 이런 게 없어요. 가볍게 그냥 놀듯이 하시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함께 와주신 거죠."

여기서 '우리'는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트위터 모임을 말한다. 김여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의 활동을 응원하는 모임으로서, 당(黨)을 자처하는 것이 이채롭다. 홍익대 사태 때 개설되어 현재 120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지원 요청이 있을 텐데 일일이 다 신경 쓰기 어렵지 않습니까.

"하루에 몇백 개가 되는데 다 답해줄 수는 없죠. 어떤 기준을 갖고 하는 건 아니고, 그것도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해요. 제가 다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다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 홍익대 사태 때 거의 전국 학교에서 다 왔어요. 저는 거기 다 가는 것보다 홍익대 한 군데를 끝까지 해서 성과를 낸 게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홍익대 사태가 해결되고 난 뒤 이화여대·연세대·고려대 등 각 대학의 청소노동자 문제가 비교적 쉽게 풀렸다. 그냥, 가볍게, 내키는 대로, 놀듯이… 그는 이런 말을 즐겨 썼다. 홍익대 사태 때 그가 사용한 구호인 '웃으며, 함께, 끝까지'와도 통하는 말이다. 방식은 가볍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이어지는 말이 뒷받침해준다.

"꼭 끝까지 가서 이긴다, 이것도 아니에요.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지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해요. 저는 전 국민이 다 1인 1문제 해결을 봤으면 좋겠어요. 이 문제 갔다 저 문제 갔다, 여기 화냈다 저기 화냈다, 이러지 마시고 그 중에 제일 관심 가는 것 딱 하나 잡고 그 싸움을 끝까지 보는 거예요. 같이 싸워줄 필요도 없어요. 거기 무슨 일이 있는지 얘기를 계속하면 누군가 보게 되고 언젠가 풀려요. 그렇게 믿어요. 그렇지 않고 자꾸 매일매일의 문제에 휩싸이다 보면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고 쌓여만 있게 되죠."

정치권이나 언론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맞장구치며) 그러니까요! 그게 저는 제일 큰 문제 같아요. 정치권이나 언론도 국민이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국민이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시간만 지나면 관심에서 멀어져 끝난다고 생각하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정치적으로도 인기가 상당해서 내년 4월 총선에 나오면 그냥 될 거라고들 하더군요.

"(크게 웃으며) 그럴 생각 없어요."

오늘 경향신문에 우석훈씨가 '김여진 구속시키면 대통령 후보 된다'고 썼던데….

"(다시 크게 웃으며) 참 나… 아이고 어쩌나… 저는 사실 정당정치에 크게 관심 없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투표가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고요…."

그는 민감한 정치 얘기를 하면서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기성 정치권을 향해 개혁을 요구하기보다 유권자의 각성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저는 투표해서 누가 당선되느냐보다 투표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대가 지금처럼 암담해진 이유 중 하나가 투표율이에요. 정치인이라면 무조건 표가 가는 대로 움직이잖아요. 정책도 그렇고요. 20대 투표율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반드시 어느 당이든 비슷비슷하게 20대를 위한 정책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출발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통령 하나 뽑으면 그걸로 다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다음에 실망해요. 확 실망하고 저쪽으로 확 옮겨갔다가 또 실망해요. 누구든 뽑아놓고 그 다음이 더 중요하죠.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는지 시민이 감시하고 제안하고… 그런 게 아주 습관이 되어버리면 진보든 보수든 정책의 갭이 점점점 더 줄어들 거다, 점점점 더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이쪽과 저쪽이 다 같이 와줄 거라는 거죠. 그런 것에 더 관심이 있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군요.

"어떻게 보면 저는 이미 제 정치를 하고 있어요. 너무나 다행히도 트위터라든가 SNS가 생겼잖아요. 굳이 건물을 짓고 회의하고 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아무 것도 없어요. 트위터 하나거든요. 제 트위터 팔로어가 다른 스타들처럼 많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한테 공감을 가지는 힘이 되잖아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얘기죠. 스타가 아니어도, 유명인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죠."

정당으로부터 러브콜이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국회에 가면 국회의원 한 사람인 건데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활동보다 지금 제가 하는 방식이 훨씬 힘을 발휘할 거라고 봐요. 나중에 몰라요. 정~ 하다 안 되면 제가 당을 만들 수는 있어요. 날라리 외부세력당….(웃음)"

소셜테이너로 활동하면서 현 정권이나 특정 당을 지지 또는 비판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당이어서 비판한 적도, 지지한 적도 없어요. 늘 변해요. 생각도 변하고, 정책도 변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싫어도 찍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정파적으로 보지 않습니까.

"의견이 분분하죠.(웃음) 민주당이다, 친노다, 친노 아니다에서부터 민노당, 진보신당까지…. 제가 암만 아니라고 해봐야 안 믿을 것이기 때문에 싸우실 분들끼리 싸우게 두면 되죠.(웃음) 저는 그 어느 당도 100% 찬성하지 않아요. 다 허점이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고 또 훌륭한 점도 있고요."

연예인이 정치적 입장을 밝히거나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데 대해 요즘 여러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솔직하게 딱 까놓고 자기 맘에 드냐, 안 드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냥 한 마디로 너 왜 내 맘에 안 드는 얘기 하니, 그거죠. 그건 그 사람 마음이기 때문에 신경 안 써요. 칭찬을 하는 것도 사실은 그닥 달갑지는 않거든요. 자기 마음에 드는 얘기를 했나 보죠.(웃음) 연예인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이고 당연히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있다고 봐요. 지금처럼 특히나 이렇게 SNS가 발달하고 그게 손 안에 있고 그걸 써서 자기 얘기를 하는 건데 뭐라고 하실 거면 하라고 하죠.(웃음)"

기대를 배반한, 아니 예상을 뛰어넘은 '개념 배우'의 또 하나 배반은 외모였다. 화면에서 접한 그의 얼굴은 미색보다 개성미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실물'은 정반대처럼 보였다. 바비인형처럼 찍어낸 듯한 서구형 미인의 얼굴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와는 거리가 먼 동양적 미색이 화면 밖에서는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실물이 더 예쁘다, 화면발을 잘 받는다는 말 중에 어떤 게 더 마음에 듭니까.

"저는 100% 실물이 더 낫다는 얘기를 들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화면이 참 이쁘게 나온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죠.(웃음) 왜냐하면 그걸로 밥먹고 사니까… 그렇다고 어머, 화면보다 좀 그러시네, 그러면 그것도 기분 나쁘겠죠. 근데 뭐 화면이 좀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사회문제와 부딪치면서 연기자로 살아가는 걸 얼마 동안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알 게 뭐예요.(웃음) 제가 내키는 대로… 지금의 제 생각은 이래요. 저는 행복이 제 삶의 기준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타인과 사회를 모르는 척하고는 행복해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나만 행복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분명히 마음이 불편해요. 가서 보고 아는 척하는 게 마음이 편해요.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랑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거는 다르거든요.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건 아무 미련이 없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가볍게 '못해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방식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기대를 배반당해 실망했는가. 그것은 놀라움을 안겨준 유쾌한 배반이었다.

<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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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우는 배우, 여자, 사람이다

“매일매일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불쌍해 죽겠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배운 여자’라……. 나는 지금 배우지 못한 한 여자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있는데.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굳건한 의지와 논리, 따뜻한 마음, 그리고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떤 책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강의가 아니라 사는 모습 그 자체로 메시지인 사람. 내가 강의실과 책과 무대와 카메라를 통과하고 뒤늦게 트위터를 익히고 진짜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가 닿을 수 있었던 천상의 사람.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촬영을 기다리는 내내, 트위터 타임라인에 보이지 않는 그녀 때문에 계속 눈앞이 흐려지는 지금,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1. 그는 ‘손 씻을 공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2010년 가을, 나는 영화 <아이들>을 촬영하고 있었고, 연극 <엄마를 부탁해>를 연습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연극 연습이 오히려 내 안의 기운을 북돋워 주고 있었다. 오전에는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국립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 매일 연극 연습을 했다. 같이 작품을 하던 손숙 선생님과는 친구마냥 친했고, 박물관 안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영화촬영은 비와 더위를 보내고 날이 선선해진 것만으로 힘든 줄을 몰랐다. 한마디로 쾌적한 나날이었다.

 

다만 두 작품이 모두 슬픈 내용이어서 매일 많이 울어야만 했다는 것만 빼고 다, 모든 것이 좋을 때였다. 나는 영화 <아이들>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엄마의 슬픔을 연기했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엄마를 잃어버린 딸을 연기했다. 매일같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가슴이 말캉말캉해진다. 그래서 그즈음 막 시작한 트위터에서 보는 수많은 소식들, 기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내 말랑한 마음에 들어와 콕콕 잘도 박히곤 했다. 그 중의 하나, 서울대학병원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쉴 곳도, 밥 먹을 곳도, 씻을 곳도 마땅치 않은 환경. 관리소장이라는 사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언. ‘노조’를 만들자 결국 해고……. 사진 한 장, 글 한 줄이 모두 내 가슴에 박혀 심장을 쿵쿵 요동치게 했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 지나고 겨울, 세상은 온통 성탄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서울시 환경미화원 한 분이 ‘손 씻을 공간이 필요합니다’라는 푯말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 기억이 있다. ‘연말만 되면 멀쩡한 인도며, 도로 뜯어내는 데 세금 쓰지 말고 저런 분들을 위한 공간 좀 마련해 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것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은 조금씩 ‘청소하는 사람들’에게로 기울어져 갔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엄마는 우리 보고 늘 꿈을 찾아가라고 하셨는데, 엄마에게 어떤 꿈이 있었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라고 생각했을까?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대사를 매일 하다 보니 ‘엄마’에 대해, ‘세상의 엄마들’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 노고와 희생이, 보잘 것 없는 대우와 무시가 원래부터 그 사람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눈길을 주게 되었다. 해가 바뀌고 홍대에서도 청소노동자 분들이 해고되었다. 이유는 역시 노조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는 직접 고용의 형태가 아니라 용역 회사를 통해 고용하는 방식으로 ‘청소부’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이들이 노조를 만들자 전원 해고를 해 버린 것이다. 새해가 밝은 2011년 1월 2일, 직장을 잃어버린 백칠십 분은 그 추운 겨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먹고 자는 농성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루 점심값 300원, 11시간 근무에 월 75만원. 그런데 그런 분들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비인간적인 모욕과 막말’이라고 하셨다. 농성 현장의 사진이 트위터에 올라오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쌀과 김치가 떨어져간다는 것……. 그 글을 보고 리트윗을 하고 한마디씩 거들다가 결국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양손에는 밑반찬을 가득 들고……. 그렇게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2. ‘연예인’이라는 생각에 갇혀 있는 나를 보았다

 

사람들을 만났다.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 사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는 대학가서 운동하다 보니 자연히 멀어졌고, 대학 때 사귄 친구는 (남자 친구 포함) 운동 그만두고 연극하다 보니 멀어졌다. 또 연극할 때 만나던 사람들은 영화와 텔레비전에 출연하다 보니 멀어졌다. 그리고 ‘연예인’이 되고 나서는 아예 친구 사귀는 일을 포기했다.

 

물론 한두 선배가 나를 아껴 주고 예뻐해 주긴 하셨지만 간혹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성격 또한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 틀어 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더더욱 누군가를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다 보니 내게는 일하는 것 자체가 놀이에 가까웠다. 일을 하면서 즐거웠고, 일하면서 만나는 동료들은 그저 일만 같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공통점을 찾기도 어려웠고 굳이 친해지고 싶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고립되어갔다.

 

일이 뜻대로 안될 때, 하고 싶은 역을 맡지 못했거나 받고 싶은 대우를 받지 못했을 때, 나는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았다.

 

마음에 점점 더 날이 서고, 눈물 흘리지 않고 우는 날이 많아졌다. 여행을 다니고 공부를 해 봐도 마음속의 날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제구호단체 JTS(Join Together Society)에서 주관하는 거리모금에 참여하면서 나는 황폐한 내 마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모금함을 들고 있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비수를 꽂는 것만 같았다. 부끄럽고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왜 이것 밖에 안 되는가, 연기경력이 10년이나 되는데 어째서 이것밖에 안 되는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뭐지? 이곳에 있기 싫다면 그냥 가면 된다. 그런데도 나는 왜 여기서 이 수모를 겪고 있는가. 그것은 굶주리고 아프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연예인’이라는 생각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나의 눈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를 보았다. 작은 아픔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절대적인 고통에 눈 돌리지 못하는 나를 보았다. ‘아……’ 하는 각성의 순간과 함께 ‘배움’이 찾아왔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이곳에 온 처음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으면 한 아이가 일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담배 한 갑 값이면 한 가족이 이틀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사람들에게 열심히 모금상자를 들이밀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한두 사람이라도 모금함에 돈을 넣어 주면 그냥 고마웠다.

 

그렇게 ‘사람’속에서 ‘사람’으로 하루를 보내고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 자원봉사자들을 만나 함께 일하고, 촬영이 없는 날은 JTS 사무실에 나갔다. 회의를 하고, 일을 나누고, 모금 행사도 직접 준비했다. 기업행사 모금을 위한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인도의 불가촉천민촌 둥게스와리도 다녀왔다.

 

나는 조금씩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집에 틀어 박혀 책 보고 음악 듣고 혼자 뒹굴 거리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만나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갔다. 그러고 나니 혼자 있는 기쁨도 더욱 커졌다. 이제 내게 일이 없을 때의 초조함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촬영이 있을 때는 촬영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또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 사람들 속에서 나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3. 35미터 상공에 살고 있는 사람, 여성, 노동자, 김진숙

 

트위터 속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김진숙.’

 

35미터 상공에 살고 있는 쉰 살도 넘은 여성, 그리고 노동자……. 그녀가 트위터에 있었다.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내가 먼저 그녀를 팔로우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냥 보기만 했다. 고구마를 주로 먹는구나, 정말 씩씩하구나, 시원시원한 사람이구나. 어느 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분. 잘 계신가요?’ 그녀는 하하 웃으며 잘 있다고 대답해 왔다. 내가 스마트폰에 깔린 어플이 어딘가 신통치 않다고 하면 ‘아이고, 내가 니빠 들고 가서 고쳐줘야 하는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배고프다’고 하면 고구마 사진을 올려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영화 같이 봐요’라고 말하자 가슴이 뛸 정도로 좋다며 꼭 살아 내려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 말이 내 가슴을 쳤다. 아, 이 사람 목숨을 걸고 있구나…….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은 이미 두 분의 열사가 돌아가신 곳이다. 그녀는 지금 정리해고 철회, 합의서 이행, 딱 이 두 가지를 회사에 요구하고 있다. 합의서는 두 사람의 열사를 잃으면서 받아낸 약속이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합의서를 내팽개치고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회사는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다고 했지만 주주들은 176억 원의 배당금을 챙겨갔다.

 

조금 예전 이야기지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에서 ‘복직’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직되지 못하고 계속 회사와 싸워야만 했다. 그 와중에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냥 심장이 멎어 죽는 사람도 생겼다. 열다섯 명…….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 해고로 목숨을 잃었다. 해고는 정말 살인이었다.

 

내 이야기를 해 본다. 연극만 할 때 내 연봉은 백만 원 정도였다. 걸어 다니고 얻어먹고 다니긴 했지만, 마냥 좋았다. 아버지가 조금씩은 도와 주셨다. 그런데 IMF가 터졌다. 그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구조조정’을 당했다. 내 아버지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 후로 십 년, 우리 가족은 아버지뿐 아니라 온 식구들이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평생을 일한 직장을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시도했던 일이 잘 되지 않고, 빚이 늘고, 내가 감당해야 할 몫도 커져만 갔다. 최대한 자식들에게 신세지지 않으려 애썼던 아버지, 끝까지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어머니. 결혼한 동생네 가족도 경제적으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능력도 한계가 있었다. 서로 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우리는 어느새 서로의 가슴에 조금씩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전화가 오면 덜컥 겁부터 났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해고에 따른 힘든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해고는 살인이다.’ 맞다. 해고는 살인이었다. 때로는 그 거센 바람에 한 가족이 완전히 휩쓸려 갈 수도 있었다.

 

김진숙 그녀 자신도 한진 중공업 해고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 그 높은 크레인에 올라 간 것이 아니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대상자 백칠십 명, 조합원들을 위해 그곳에 올라간 것이었다. 그녀는 이번 정리해고가 시작에 불과할 뿐인 것 같다고 했다. 결국은 공장을 모두 정리해서 필리핀 수빅으로 갈 심산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이 기업의 생리 아닌가. 결국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옮겨가겠지.’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듯, 다른 사람들도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 노동자가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에 의한 해고는 어쩔 수 없다고.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 긴급한 경영상의 이유……. 그런데 경영을 잘하지 못해서 상황이 긴급해졌다면 그런 상황을 초래한 ‘경영자’를 가장 먼저 잘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애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던가. 어째서 가장 열심히 일한 성실한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삶의 터전을 잃어야만 하는가. 이 땅에는 셈법을 알 수 없는 숫자놀음보다는 땀 흘려 일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그 사람들이 왜 늘 ‘약자’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진숙은 내게 이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트위터에서 ‘대화’를 할 뿐이었다. 춥다, 힘들다, 아프다 같은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내게 춥지 않냐, 배고프지 않냐, 아프지 않냐고 물어왔다. 칭찬해 줬다. 그녀는 홍대 청소노동자 어머님들과 신나게 놀고 온 나와 ‘날라리 외부세력’을 진심으로 감탄하며 칭찬해 주었다. 그분들을 찾아 주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보다 몇 술 더 뜬 오지랖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추운지를 잊어버리곤 했다. 그녀의 그 아무렇지 않음 때문에……. 나는 그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통해서 그녀의 주장과 한진중공업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홍대 청소노동자 분들의 투쟁이 끝나고 나와 ‘날라리 외부세력’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부산에 갔다. 크레인 중간까지 올라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조금 소리를 높여 짧게 몇 마디 대화도 나눴다. 그뿐이었다.

 

크레인 아래에 있는 다른 조합원들과 밥을 먹고, 고구마를 먹고,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 주었다. 우리가 그렇게 즐겁게 떠들고 노는 것을 그녀는 저 위에서 지켜만 보았다. 크레인 위에서 그녀의 식사인 죽과 고구마를 나르던 주머니가 줄에 매달려 내려왔다. 주머니를 열어 보니 거기에는 그녀가 보내준 책과 사탕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 그냥 웃고 떠들고 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짧은 만남, 그 어떤 연설도 하소연도 없었던 그 만남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곳에, 그곳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곳의 사람들도 우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았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서 타임라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말투 그대로 부산사투리와 귀여운 변형 욕설 섞어가며 우리와 함께 트위터에서 놀았다. 자기들끼리도 놀았다. 한 사람은 공장 안 생활관에서, 한 사람은 크레인 밑에서 ‘튓질’을 했다. 거기에 서울에 있는 우리가 끼어들어 같이 낄낄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 정이 들고 말았다. 서로에게 애틋한 친구가 되었다.

 

4. ‘희망버스’는 ‘사람’을 태우고 달린다

 

트위터에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사태를 알게 된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탔다.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절한 버스에 붙인 이름이다. 연합뉴스 오수희 기자는 이런 우리를 ‘외부노동세력’이라 표현했다. 기자라면 이름 정도는 똑바로 알아야지. 우리는 ‘날라리 외부세력’이다.

 

우리가 가는 날 회사 측은 아침부터 용역들을 동원해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맨손의 조합원들에게 방패를 휘두르는 사진이 트위터에 올라온 순간, 나도 다른 트위터리안들도 이성을 잃었다. 나는 촬영 중이었다. 촬영이 끝나는 시간을 봐서 희망버스를 탈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사진을 보고 또 동영상을 보고 계속해서 눈물만 흘렸다. 화장이 지워져서 몇 번이나 화장을 고치느라 촬영이 자꾸만 늦어졌다. 희망버스를 타기로 약속한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버렸다.

 

결국 나는 기차를 타고 그곳에 갔다. 버스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무사히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축제와 위로의 밤, 나는 그저 그녀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나왔다. 그런데 연행이 되었다. 그로 인해 신문과 뉴스에 연일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무사히 걸어서 내려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5. 우리 모두가 불쌍해 죽겠다, 그리고 그녀가 그립다

 

현재 한진중공업 회사 측은 법적효력이 없는 합의서, 정리해고에 대한 입장도 그녀와 조합원들의 신상에 대한 내용도 없는 합의서를, 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회장과 함께 독단적으로 작성한 다음 언론에 뿌렸다. 우리나라는 산별 노조 체제이므로 지회장은 합의는 할 수 있어도 체결은 할 수 없다. 그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그렇게 하고 말았다.

 

연합뉴스 오수희 기자는 이것을 ‘한진 노사 극적 타결’이라는 제목으로 속보를 냈다. 바로 그 시간에 행정집달관으로 변신한 용역들과 (그곳에서 오랫동안 대치중이었던 낯익은 용역들이 행정집달관의 조끼를 입었다) 경찰 천오백여 명이 공장을 둘러싸고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서로의 몸을 묶어 저항하던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끌려 나오는 모습을 그녀는 85호 크레인에서 묵묵히 지켜봤다. 세상 사람들은 언론의 보도를 믿고 한진 노사 간의 ‘극적 타결’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후 크레인은 고립되었고, 용역들은 공장을 24시간 지키며 그녀에게 올라가는 음식과 속옷까지 낱낱이 검사하고 있다. 전기를 끊고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그녀가 트위터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물과 음식, 그리고 스마트폰이 아닌 구형 핸드폰 배터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회사 측과 합의해 주었다.

 

그녀는 지금 깜깜한 어둠 속에 앉아있다. 구형 핸드폰의 배터리를 아껴 아껴 간혹 문자를 주고받는다. 트위터를 할 수도, 밤이면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울분이 넘쳐난다.

 

누가, 무슨 권리로, 그녀의 말할 권리를 빼앗는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목숨 걸고 말하려는 사람의 입조차 틀어막아 버리는 이곳에서 우리, 안녕히 살아갈 수 있을까.

 

말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국가 경쟁력을 위해 어떤 고난도 참아내며 그렇게 매일매일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불쌍해 죽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그립다.

 

6. 내 맘대로 살 거다, 한 번 사는 내 인생이다

 

‘배운 여자’란 제목으로 글을 써 달랬는데 나는 지금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홍대 청소노동자 분들, 그분들과 함께해 준 트위터 친구들, JTS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김진숙과 한진의 사람들. 그들에게서 요즘 나는 배우는 중이다.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나는 우리 사회의 좌표 어디쯤에 서 있는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과연 나는 어떨 때 행복한지…….

 

내가 사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들, 그래서 그것들을 외면하고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때, 나는 괜찮지가 않았다. 불안과 질투와 욕심을 온통 가슴 속에 끌어안고 멋진 척, 쿨한 척까지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직면하고 그 안으로 풍덩 뛰어들어 보니 그 안에서 오히려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웃으니 더 이상 외롭고 두렵지가 않았다. 이제 나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으면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겠다는 배짱이 생겼다. 누구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원망도 미움도 없다. 물론 가끔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그냥 ‘그것이 그 사람의 입장이구나’ 하고 넘어간다.

 

다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 거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러지 말라’고 협박해도 소용없다. 나는 내 맘대로 살 거다. 내 인생이다. 한 번 사는 내 인생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인생들과 교류하고, 구경하고, 같이 놀고, 배우며 그렇게 살 거다. 그래서 나는 배우는, 배우, 여자, 사람이다.

김여진 영화배우,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해서 영화 <박하사탕>, <취화선>, 드라마 <대장금>, <이산>, <그들이 사는 세상>, <내 마음이 들리니>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수상경력으로는 청룡영화제 신인상,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 등이 있다.

2011-07-08 /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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