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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by Wood-Stock 2011. 6. 8.

일제 맞선 광복군·독재 맞선 참스승… 올곧은 ‘90년 장정’

 

일제 학도병 징집뒤 탈출, 중국서 광복군으로 활동

정치권 러브콜 거절하고 평생을 중국연구 힘써

오명없는 지식인 표상 “나이 들수록 존경받던 분”

 

 

 

“우리 시대의 참스승을 잃었습니다.”

 

김영춘 민주당 최고위원은 7일 들려온 김준엽(91) 전 고려대 총장의 별세 소식에 황망해했다. 김 전 총장이 재직하던 시절인 1984년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김 최고위원은 그해 9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제적 위기에 처했다. “1984년 이전에는 학교에 군사정부의 산물인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이를 없애면서 총학생회가 부활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회장으로 당선된 학생을 제적하라고 학교 쪽을 압박했지요. 그런데 김 총장께서 정권의 요구를 석달 동안 거부했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대표를 뽑겠다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지요.”

 

김 최고위원은 그해 11월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뒤 제적됐고, 김 전 총장도 결국 1985년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학교 재단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총장으로서 치른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에서 김 전 총장이 남긴 말은 “사회의 부정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돼라”였다.

 

그 뒤 김 전 총장은 평생 ‘관직을 맡지 않겠다’는 소신을 지키며 야인으로 일관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년 국무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며 고사했다. 그 전에도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김종필씨한테서 공화당 사무총장직을, 197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통일원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한사코 물리쳤다.


학계 후배들에게도 김 전 총장은 여의기,에 너무나 애석한 원로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연세가 높아질수록 더 존경받은 분”이라고 김 전 총장을 회상했다. “지식인 가운데 독재정권에 협력하거나 부정부패에 끼어 있거나 권력남용 등을 안 한 사람이 드문데, 그분은 예외적인 존재였지요.”

 

김 전 총장은 이렇듯 독재정권 시절 양심을 지킨 지식인이자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그해 2월 중국 쉬저우에 주둔한 쓰카다 부대로 끌려갔다. 한달 뒤 일본군을 탈출한 김 전 총장은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시작한다. 그해 7월 역시 일본군을 탈출해 중국 유격대로 온 고 장준하 선생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6천리길을 걸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 당시 경험한 일을 김 전 총장은 1985~2001년 16년 동안 5권으로 정리한 회고록 <장정>에, 장준하 선생은 회고록 <돌베개>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 두 회고록은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로 평가된다. 김 전 총장은 1955~62년,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월간 <사상계> 편집위원·주간·부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벼슬’에 초연했던 김 전 총장은 1988년부터 현재까지 재단법인 사회과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연구를 지속했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한-중 관계였다. 해방 뒤 중국에 남아 1946년부터 3년간 베이징대의 전신인 중국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1948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귀국해서는 조교수를 시작으로 총장이 되기 전까지 33년간 고려대에서 중국 근대사를 가르쳤다. 1958년에 초판을 펴낸 <중국공산당사>(사상계)는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중국 연구서였다. 1957년 설립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부소장과 소장을 지냈다. 서양이나 일제가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바라보는 우리 나름의 견해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엔 중국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중국 베이징대 등 8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가 자리를 잡았다. 중국에 흩어진 우리의 옛 문화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복원하는 활동에도 주력했다. 김 전 총장은 상하이·충칭·항저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 윤봉길 의사기념비 확대 사업 등에도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숨 가빴던 한 세기를 살아낸 그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고려대 교우회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이가 나를 고대 총장직에서 쫓아냈을 때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어요. 역사에 대한 신뢰, 정의와 선 그리고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걸 믿었던 거죠. 나 쫓겨나고 전두환 정권 1년 만에 망했어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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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적 가치’ 몸소 실천한 민족주의 교육자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지난 두 주일 사이에 용태가 의외로 위중해짐에 예상은 했지만, 선생이 이렇게 급서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후학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접한 반세기 남짓 세월만큼이나 허망한 느낌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벅찹니다.

 

한 교정에서, 한 인문학의 범주 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두고 지켜본 선생은 타인을 감동시키는 매력을 상당히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 매력은 인간들의 비정상적 행태가 의외로 많은 현실의 암울함도 얼마큼 작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올곧은 선비의 흉내라도 내는 정상적인 지성인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의 풍토에서, 선생은 남달리 돋보이는 분이었습니다.

 

선생의 투철한 신념과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발군의 행동력은 일찍이 학병의 대열에서 탈출해 ‘독립군’으로 입대하던 장정의 신화를 낳았습니다. 애국 애족으로 드러나는 민족주의는 선생의 이념이자 신앙이었습니다.

 

학자로서 선생은 ‘중국근대사’를 더듬고, ‘한국공산주의사’를 훑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면서 역사를 이루는 정신인 그 철학을 선생은 바르게 체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바로 선생이 스스로 토로한 “역사의 신을 믿는다”는 언명이었습니다.

 

역사의 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인간들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가야 할 ‘보편적 이상’이 아니겠습니까?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절대적 신처럼 여기는 신념 속에서, 사학자는 누구보다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며, 그것을 저해하는 세태에 크게 저항하게 마련입니다. 선생은 이런 모습의 일단을 절대권위시대에 고려대 총장직을 맡았다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은 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인입니다.

 

노년에 들어 선생은 국무총리라는 관직의 제청을 받자 가볍게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선생은 관존민비 의식의 타파라고 밝히셨습니다만, 어디 그뿐이었겠습니까? 현대의 코스모폴리탄인 선생이 전근대 의식을 불식시키려 함은 당연하지만, 인류 문화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 양성이 곧 시대를 선도하는 작업이라는 교육의 가치에 대한 숙지 또한 작용하였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교직에 회의를 품는 교육자가 날로 늘어가는 오늘날, 교육의 가치를 고취하는 데 선생의 기여는 적지 않았습니다. 교육자의 외길을 지킨 지조로 해서 선생의 일생은 더욱 빛납니다.

 

중국에 산재한 임시정부의 유적과 애국 투사들의 족적을 광복군 출신인 선생이 서거한 뒤에는 누가 그리 알뜰하게 보살필지 걱정입니다. 중국의 수많은 대학에 건립한 ‘한국학연구소’에서는 오늘도 선생의 도움을 기리면서, 한국의 모든 측면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국학 연구 인력이 날로 급증함을 보면서, 저희는 이제 기뻐만 할 수 없는 착잡함에 빠지는 처지입니다.

 

굵직한 검은 테 안경 너머로, 줄담배를 피우시면서, 구순 넘어서도 반드시 반주를 곁들이던 선생의 풍치가 새삼 그립습니다. 항상 감추기만 하던 선생의 고뇌의 끈을 이제 저세상에서는 다 풀어 버리길 바랍니다. 편히 잠드소서.


윤사순/고려대 명예교수·한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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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꼿꼿한 지성’ 김준엽 

“전두환에게 굽실거릴 수 없다” … 노태우의 총리 제의 거절

 

일제강점기 학병(學兵) 탈출 1호,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투사, 해방 후 1세대 중국학·공산주의 전문가, 역사학자, 대학총장…. 예사롭지 않은 삶이었음을 일러주는 이력인데, 그 모든 화려한 호칭과 수식어보다 ‘지성의 절개’라는 담백한 표현이 잘 어울렸던 사람-.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만 90세 일기는 파란만장했지만 소박했다.

고인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좌우명처럼 살다 갔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 풍경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재학생과 졸업생이 총장 사퇴를 반대하는 시위 속에 식이 진행됐다. 82년 고대 총장이 된 고인은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압력에 그는 “내가 그만두겠다”고 버텼다.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1개월 넘게 이어졌다.

‘총장 사퇴하라’는 시위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매우 예외적 존재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김준엽 총장이 받은 많은 훈장 중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기억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1944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21세의 청년 김준엽은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번째 선택이었다. 회고록 『장정(長征)』(전5권·나남)에서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고 술회했다. 일본군 탈출 후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우리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과정은 대하드라마 그 자체다.

 

일제 강점 말기인 1945년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세 사람의 광복군 노능서·김준엽·장준하(왼쪽부터). 김준엽은 해방 이후 ‘사상계’ 발행인으로 유명해진 장준하에 대해 “학병 탈출 이후 중국 유격대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로서 함께 지냈다”며 “회고록 『장정』은 장준하와의 연인과 같은 우정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광복군 마지막 세대인 그는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받은 정예 독립투사였다. 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 지하공작원으로 진입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백범 김구는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다. 정치를 하자는 제안을 뒤로 하고 그는 학자의 길을 걷는다.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두 번째 선택이었다.

고인은 정치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을 펴냈다.

85년 고려대 총장직을 그만뒀지만 그에겐 ‘영원한 총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유혹은 많았으나 다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지조(志操)의 선비’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8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는 궁정동 안가로 김준엽을 초빙해 국무총리직을 제안한다. 그날의 대화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장정』 4권 참조). “첫째, 노태우 당선자를 두 번 만난 일은 있지만 잘 모른다. 덮어놓고 중책을 맡는 풍토는 고쳐져야 한다. 둘째,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씨에게 총리로서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가 전씨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양을 TV를 통해 보는 국민들, 특히 젊은층들은 실망할 것이다. 셋째, 나는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자를 찍었다. 넷째,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쳐야 한다. 좀 건방진 말이긴 하나,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줘야겠다.”

그는 평생 고위 공직을 제의받았다. 초대 총리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4·19 혁명 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5·16 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1974년 대통령 박정희의 통일원 장관 제의→노태우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 등이다. 모두 거절했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44∼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그는 그 시절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88년 이후엔 사회과학원을 설립해 한·중 우호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해 중국의 11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웠다. 중국 교육부로부터 문화훈장에 해당하는 ‘중국어언문화우의장(中國語言文化友誼奬)’을 받았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는 그가 처음이었다.

중앙일보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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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준엽, 12차례 관직 사양한 올곧은 지식인… 진보·보수 모두의 ‘참 스승’

ㆍ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1920~2011)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장에서는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학생들의 외침이 퍼졌다. 3개월 동안이나 학생들이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은 고려대가 유일했다. 군사정권 시절, 학교마다 학생들이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던 총장들에게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었던 고인은 정권 반대 운동을 벌인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력에 맞서다 결국 쫓겨났다.

국민훈장 모란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던 김 전 총장이지만, 생전에 그는 “이때 학생들의 퇴진 반대 시위가 인생 최대의 ‘훈장’이었다”고 말했다. 그 도덕성과 지조가 김 전 총장을 진보와 보수를 넘어 모두 존경하는 우리 사회의 드문 지식인이자 원로로 만들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는 것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정의·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다.

나라를 잃은 시대를 살아낸 김 전 총장에게는 그런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암울함에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신의주고보를 다닐 때 일본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귀로에서 일본말을 쓰는 조선인 학생과 난투극을 벌인 그였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시절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집된 김 전 총장은 학병으로서는 1호로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이때 평생의 친구이자 훗날 사상계 발행인이 되는 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된다.

장준하와 함께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000리의 장정’을 하는 동안 김 전 총장은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함께 절규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장준하와 함께 광복군을 찾아가 이청천·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고, 1945년 미군기를 타고 국내 진공 작전에 참가했으나 한국 진입 중지 명령을 받고 회항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김 전 총장은 회고록 <장정>에서 “과연 나는 못난 조상이라는 후세의 평을 면할 수 있겠는가 되돌아보게 된다”라고 썼다. 장정 때 스스로 다짐했던 그 말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했음이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생일상을 따로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벼슬을 안 하겠다는 것이 제 일생의 신조”라고 밝혔다. “생일날마다 일제치하에서의 아픔이 떠오르고, 두 동강 난 조국의 신음소리가 들려와 집에서 밥상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각계에서 두루 신망이 높았던 김 전 총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후보 1순위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해 12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고도 거절했다고 적었다. “사회적으로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다들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존민비의 폐습”이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최고의 성과를 가지고 엄정한 지식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평생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시간을 5·10분 단위로 쪼개 쓰면서” 공부와 집필에 몰두한 그는 ‘20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전5권·김창순 공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총장 사퇴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1985년 3월 총장 사퇴를 맞아 고별사를 하고 있다. 

칩거하며 집필 1985년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자택에 칩거하며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광복군 참가 이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공부했던 김 전 총장은 고려대 총장직에서 쫓겨난 이후 사회과학원을 설립하고 중국과의 학술교류에 평생을 바쳤다.

1985년 당시 총장 퇴진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2년 전 제자들과 마지막 점심자리에서의 김 전 총장을 회고한다. “총장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자네들 같은 학생들을 둔 것이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어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지켜주지 못해 지금까지 짐이라고, 자네들 덕분에 나라가 민주주의로 화해와 통일로, 선진국가로 바로 가는 걸 보니까 우리가 잘못 가르치지는 않았구나 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요.”

김 전 총장이 우리 시대의 원로이자 참 스승으로 꼽히는 이유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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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준엽 추도사]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현대의 선비

김준엽 선생은 91세의 나이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조국과 제자들의 곁을 떠났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깨우침을 줄 수 있는 큰어른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스승이었고, 스스로의 모범을 통해서 후진들에게 바른 행동을 촉구해 준 분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서거는 우리 사회의 슬픔이며 큰 손실이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공인으로서 그가 남긴 자취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사표였으며, 젊은 제자들에게 역할모델을 제공해 주던 우람한 나무였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학문의 길을 걸으며 빗나가려는 자신의 욕망을 누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인생의 스승이며 사표로 삼고자하는 이들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전통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오던 선비의 정신을 지켜준 분이었다. 학문의 중요함을 알고 실천했으며, 지난날 선비정신의 핵심이었던 ‘의리’를 현대사회의 정의감으로 계승해 준 분이었다. 그는 이미 청년시절 일제의 불의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정의를 지켜나간 현대의 선비였다.

또한 그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통일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부설로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 사회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연구자를 힘들여 양성했다. 그가 세운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우리나라 대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 연구소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서 그리고 아세아문제연구소를 통해서 학문을 일구어 나갔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향한 그의 학문적 열정은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대 당시 금기시되고 있던 공산주의 문제, 그리고 중립화통일론과 같은 문제들도 과감히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나 중국현대사의 연구는 그의 연구업적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김준엽 선생은 무엇보다도 인재를 아꼈으며,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군사독재에 맞서 고려대 총장이라는 직위를 걸고 강제 퇴직된 교수들을 복직시켰으며, 민주화를 주장하던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다. 이런 사정을 알던 당시의 학생들은 총장실 창 너머 길가에 모여서 광복군가를 불러주었고,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선비다운 의연함에 박수를 보냈다.

이제 고인이 된 김준엽 선생은 누구보다도 학문을 사랑했고, 이 때문에 학인(學人)으로서의 의연함을 끝까지 간직하고자 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수차례 국무총리를 제의받았고, 자신이 원했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관직에의 취임을 거부하면서 학자로서의 길을 후학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또 그렇게 하여 그는 현대사회의 선비로 우뚝 섰다.

물론 그는 학자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일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고, 이를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신(神)’을 믿었기 때문에 불의와 담을 쌓고, 부정의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이 키운 제자들에게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추모의 글을 쓰면서는 그 떠난 이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준엽 선생의 죽음 앞에선, 우리는 그의 떠남을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그 삶의 완성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구십 평생을 참선비이며, 스승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제자들은 그 삶의 크기에 감격하면서 그를 더욱 그리게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내 삶의 완성을 향한 그의 모범들을 결코 잊지 않기를 다짐하고자 한다.

<조광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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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준엽  

 

'김준엽'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우연히 장준하의 <돌베개> 를 읽고서였다. 이미 의문의 실족사로 장준하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돌베게>는 감동과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의 목숨 건 탈출, 상하이 임시정부를 향한 그 머나먼 중국 장정, 그리고 광복군으로서 독립운동과 해방공간에서의 좌절의 이야기가 큰 바위가 돼 머리를 쳤다. 미처 세상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고교생에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를 가르쳐 주었고, 참다운 가치와 용기와 애국심을 일깨웠으며, 누가 진정한 영웅들이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 영웅에게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가야 할 길이면 목숨 걸고 가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가지 않는다. 김준엽은 가야 할 길에서 단 한 번도 주저한 적이 없었다. 1920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4년 학병으로 입대한다. 끌려간 게 아니라 자원이었다. 십중팔구 중국전선에 배치될 것이고, 그러면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있는 곳으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입대 두 달 후 그는 탈출했고, 6,000리 대장정 끝에 장준하와 함께 광복군에 합류했다.

■ 조선의 아들이라면 독립운동은 당연하며, 독립은 말로만 되지 않고 행동으로 해야 한다며 시작한 그의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의 <장정>은 평생 흔들림이 없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역사가와 교육자로 살면서 그는 친일의 청산으로 민족의 정신과 역사를 바로 세우려 했고, 사회 정의와 대학의 학문의 자유를 훼손하려는 독재정권에 맞섰다. 그 때문에 1985년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고려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선과 정의와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현실에 연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살았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벼슬의 유혹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도 그를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총리직을 포함한 10여 번의 관직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일생의 신조를 그는 꿋꿋하게 지켰다. 어제까지 정부를 비판하다 장관 자리를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독재정권에 참여하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 하지 않고 정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양심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나는 과연 무엇을 했나 늘 반성하며 살아왔다"는 그가 7일 타계했다. 우리는 또 한 분의 참 영웅, 지성을 잃었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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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前 총장, 독립투사로 꼿꼿한 학자로 평생 한길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 별세
평생의 동지 장준하 만나 학도병 탈출, 광복군으로
총리 등 12차례 제안에도 선비로서의 삶 신조 지켜
총장 사임 후 낸 회고록서 "난 무엇을 했나 늘 반성"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지조 있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한 번도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오롯이 실천해 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무장항일운동은 이런 인생의 출발이었다. 1944년 그는 일본 게이오(慶應)대 동양사학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평생의 동지인 장준하(1918~75) 선생도 일본 도요(東洋)대 재학 중 같이 학도병이 됐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학도병을 탈출해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가 광복군이 됐다. 김 전 총장은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광복군 2지대장 등의 부관을 지냈고, 장 선생도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정도로 두 사람의 공로는 혁혁했다. 광복군에서 생사를 함께한 두 사람은 광복 후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형 동생하며 막역하게 지냈다. 김 전 총장이 자유당 독재 당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일을 하면서도 장 선생이 창간하고 한국 지성사의 획을 그었던 사상계의 주간을 맡았던 것도 이런 인연과 무관치 않다. 두 사람은 당시 사상계 동료들과 암울한 현실을 토론하며 기막힌 심정을 달랬다고 한다.

김 전 총장은 광복 후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과 공산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80년대 후반 이래 베이징(北京)대 등 중국의 11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중국 내 임시정부청사 복원 운동에 참여해 항저우(杭州) 충칭 상하이(上海) 등 임시정부 유적 복원을 위해 진력했다.

특히 김 전 총장은 광복 직후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종 관료직을 12차례나 제안 받았지만 꼿꼿하게 학자의 길만 걸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계속된 정치참여 요구를 뿌리친 대신, 그가 한 일은 국가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헌법 개정 때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헌법 전문에 명시케 하고, 민족 정기 양양을 위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 봉환과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건의해 관철시킨 게 대표적이다.

 

그는 회고록에서“아흔 나이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관료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학자로서 살겠다는 삶의 신조를 지켰을 뿐이다. 나 자신의 지사적 지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백규(조선 후기 학자)의 양심적 기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학자다”고 밝혔다. 또 고려대 총장 시절 총학생회 간부를 제적하라는 전두환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저항정신으로 인해 1985년 결국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사임 후 회고록 집필을 시작해 4년 만에 4권의 회고록을 냈는데 이처럼 짧은 기간에 회고록을 쓸 수 있었던 힘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대한 분노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5권짜리 <회고록 장정(長征)>을 발간했다. 이 회고록은 1, 2권이 광복군 시절, 3권이 고려대 총장 시절, 4권이 무직 시절을 담고 있다. 90년 4권 발간 후 11년 만에 발간된 5권에서는 49∼82년의 평교수 시절과 88년 사회과학원 설립 후의 시기를 정리했다. 그는 5권 머리말에서 “망국의 쓰라림과 민족 해방 투쟁, 6ㆍ25전쟁, 그리고 이런 역경을 딛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를 늘 반성하며 살아 왔다”고 밝히고 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민족의 위기국면에서 언제나 한결 같았던 그의 심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정원 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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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스승, 한국 최고의 중국통 김준엽 선생을 회상하며

 

(이필주 베이징특파원) '한국 최고의 중국통, 중국에서도 존경받은 인물이 우리 곁을 떠났다."

 

김준엽 선생의 타개에 대해 한 노학자는 이렇게 비통한 심경을 토해냈다.
중국 베이징 현지에서 김준엽 선생님이 타개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필자는 실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에 잠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행사에 선생님을 모실 생각에 들떠 있던 필자로서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선생님께서 일절 인터뷰를 사양하시던 지난해 6월 마지막으로 떼를 써서 인터뷰(서면)를 했었다. 아주경제 협력사인 중국 인민화보사(人民畵報社)의 월간 《중국》잡지 6월호에 ‘한·중 관계를 빛낸 인물’로 선생님을 모시려던 참이었다.

한국 최고의 중국통을 모시고 한중 20년 기념행사를 치른다는 설레임은 이제 통한의 그리움으로 남게 됐다.

선생님을 형용하는 말은 끝도없을 것이다. 어느 노학자의 말처럼 한반도 최고의 진정한 중국통이셨으며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실천적으로 인식하고 연구에 몸바친 분이셨다.

선생님은 중국 대학자인 계선림(季羨林)선생과도 교유할 정도로 심원한 학문의 세계를 가졌다.

김준엽 선생님의 제자인 베이징대 양통방 교수를 비롯한 중국의 젊은 학자들은 선생님을 '지조있는 선비요 위대한 독립군'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거론하면 선생님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지조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고귀한 투쟁이다' 시인 조지훈이 얘기한 지조론의 이 대목은 마치 선생님을 위해 예비해 둔 시어처럼 들린다.

선생님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위대한 독립군이셨다.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신 선생님은, 6000리 대장정(大長征) 끝에 독립군에 합류한 후 특수 공작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은 평생 독립군의 자세로 정의롭고 올 곧게 사셨다.

광복 후 선생님은 현지에 남아 학업에 정진하셨다. 1949년 귀국 후 고려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에는 정치권의 강권을 물리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셨다. 선생님은 고려대학 총장때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과 정면으로 대항했다.

선생님께서 권력에 대항하다 총장직을 사퇴하실 때 우리는‘총장 사퇴 결사 반대’를 외치며 한달간 시위를 벌였다. 선생님은 당시 우리들의 이런 행동을 최고의 훈장으로 가슴에 새기고 정든 캠퍼스를 떠나셨다.

또한 선생님은 한중관계사(韓中關係史)를 재정립하는데 헌신하신 우호사자(友好使者)이다. 평생 중국학에 정진하셨고 1988년 다시 중국을 찾은 이래 매년 10여회 중국 전역의 한·중 관계 상징물을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우는데 심혈을 쏟으셨다.

베이징(北京)대학과 저장(浙江)대학 등 중국 내 8대 명문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한 것도 선생님의 족적이다. 20년전 난징대학 제자 등 중국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선생님의 그같은 일들을 도왔다. 이런 공로가 인정돼 2000년 7월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中國語言文化友誼章)을 수상하였다.

선생님은 평소 "의로움을 잃지 말고 고매한 인격으로 나라의 참된 일꾼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작은 이해와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역사에 살라’고 강조하신 고인께서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다.

베이징 서재에서 서해 넘어 바라보니 나라는 어지럽고 한·중 관계의 앞날도 아직 아득한데 이제 누구에게 지혜를 구하고, 누구에게 가르침을 얻는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비통함이 가슴속을 저며온다.

 

최헌규 기자 chk@ajnews.co.kr 


 

[추도사]생애에 인간과 스승과 학자의 도리를 다한 선생님. 

영원한 참선비 김준엽 선생님의 영전(靈前)에서…

 

기사입력 2011-06-10 오전 10:48:01

 

시대의 사표(師表)라는 헌사가 무색치 않은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8시에 열린다. 9시 발인 후 김 전 총장은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일제 학병 신분에서 6000리 장정을 감행해 광복군에 투신하고, 해방 후에는 중국학과 사회주의 연구의 장을 열었고, 군부 독재 시기에는 정권에 맞서면서 학생들을 보호하는 교육자로, 총리 자리도 마다했던 김 전 총장의 90여 년 성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있다.

'가족장을 치르라'는 유지를 따라 조촐하게 진행된 장례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울림은 더 크다.

김 전 총장의 영결식을 앞두고 민주당 김영춘 최고위원이 추도문을 보내왔다. 김 전 총장과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김 최고위원의 연은 깊다. 1984년 부활한 민주적 학생회의 첫 총학생회장이었던 김 최고위원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력을 김 전 총장이 거부했던 것. 이는 이듬해 전무후무한 총장 퇴진 반대 시위로 까지 이어졌다.

김 전 총장과 인연을 회고하면서 존경을 표한 김 최고위원은 추도문에서 "선생님께서 병문안 온 이 정부의 고관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전했다. < 편집자 주>

▲ 세 사람의 광복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나남출판


"나는 자네들이 애국자라고 믿는다. 정부의 압력에 대해서는 총장과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 막을 테니 여러분도 학교의 명예를 지켜 달라"

이 말씀은 1984년 9월 고려대학교 총장실에서 김준엽 총장님이 당시 불법으로(?) 직선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이었던 전두환정부는 학도호국단을 임의로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부활시킨 고려대학교에 갖은 압력을 가했고, 그 첫번째 요구는 저를 제적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총장님은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이 압력을 거부했고, 오히려 학생들이 직선으로 뽑은 총학생회를 인정하는 것이 순리이며 교육적인 처사라고 정부 요로에 건의했습니다.

이같은 갈등의 결과 정부는 석달 후 제가 구속 기소되고 나서 겨울방학을 틈타 총장 퇴진을 강요했습니다. 1982년 총장 취임 직후에 대학 본관에 정보기관의 사찰 사무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장 철거를 지시하셨던 분인지라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미운 털이 박힐 대로 박힌 김 총장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가 봅니다. 방학 중에도, 그리고 신학기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은 연일 대대적인 총장 퇴진 반대시위를 벌였지만 군사정권의 '손봐주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김준엽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고, 나중에 "그것은 전두환 정권이 나에게 준 훈장이었다"라고 술회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강단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길러진 정의감과 애국적 결단성의 발로였습니다. 선생님은 일제 말기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중에 학병으로 강제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파병되었지만 한 달 만에 강소성 서주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투신하셨습니다. 당시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탈주병들의 목숨을 건 6천리 장정은 선생님이 총장 퇴진 후에 쓰신 회고록 <장정>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과연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으로 선생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8.15 광복 이후에는 투사가 아니라 철저히 학자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귀국한 후에도 홀로 중국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셨고, 194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적을 둔 이후로는 오직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일로 매진하셨습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창설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일찍이 1970년대에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의 설립에도 앞장섰습니다. 비전과 통찰력, 그리고 추진력이라는 면에서 당신은 학문공동체의 탁월한 경영자이셨습니다. 고려대 총장이 되신 것도 그러한 능력과 인품을 동시에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학문 외길의 자세는 총장 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당선자가 선생님을 자기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모시고자 3시간 가까이 설득을 하였으나 당신은 끝내 고사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정권들도 선생님을 총리로 모시고자 애썼으나 결과는 항상 실패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이유로 "얼굴마담이나 하는 대독총리가 뭐라고 학자의 명예를 더럽혀야 하느냐?", "우리 사회에 나 한 사람쯤이라도 벼슬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후학의 존경을 받는 원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국의 상황에서는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가 싸웠고, 나라를 되찾은 후에는 학문입국의 일념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정진하셨던 분, 저는 김준엽 선생님이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인간과 스승과 학자의 도리를 실천한 '참 선비'셨다고 추억합니다.

몇년 전부터는 연초 3일간 세배객들에게 명륜동 자택을 개방하던 오랜 전통을 닫으셨습니다. 그렇게도 강철같던 선생님의 건강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빠지신 탓이었지요. 그래도 담배만큼은 "난 깊이 삼키지 않으니까 괜찮아" 하시면서 끝까지 인생의 동무삼아 즐기시던 선생님의 직접 사인이 폐암이셨다니 황망할 따름입니다. 만 91세셨으니 장수하셨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좀더 오래 사셔서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후학들과 우리 사회의 큰 언덕으로 버텨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련남아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 병문안온 이 정부의 고관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이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몰아 말씀하시면서도 그분은 나라 걱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 분이 가셨으니 우리는 이 황막한 시대에 어디서 참선비, 참스승의 사표를 찾아야할 지 실로 막막할 따름입니다. 결국 저처럼 남은 후학들이 해야할 일은 턱없이 모자라는 역량과 인격이지만 선생님의 모범을 따라 애국과 후생(厚生)의 사업에 전력하는 길 뿐이리라 믿습니다.

김준엽 선생님, 이 나라의 현대사 그대로 파란많았던 한 생애 동안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제 천상에서 편안히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면서 우리 겨레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김영춘 민주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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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만나 쾌활한 모습으로 영원히 사세요”

“90살까지 장수하니 외롭다던 분”

 

김준엽 선생님. 얼마 전 제자들이 선생님의 90회 탄신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뵈었던 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되돌아보면 선생님의 그 밝고 호탕한 모습을 강의실에서 처음 뵈었던 것이 아마 1950년대 중반쯤이 아니었던가 합니다만, 그 후 같은 학과의 교수로 함께 근무하기도 했고 또 총장님으로 모시기도 한 세월이 어느새 60년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밝고 자상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대학 재학 중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광복군으로 가는 과정의 이야기는 몇 번 들어도 흥미진진한 모험담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광복군이 되어 게릴라로 국내에 투입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던 중에 일본이 패망을 했으니, 김구 주석도 <백범일지>에 썼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광복군 게릴라가 국내에 투입되어 활동했더라면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처지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권력 쪽에서 권한 장관이니 총리니 하는 자리를 거절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라 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남들은 못 받아서 한탄하는 자리를 거절하신 이유를 저는 알 만하다는 생각이어서 언젠가 선생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복군 출신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선생님은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우리 광복군의 적이었던 일본군 출신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정부의 별별 높은 자리를 다 차지했는데 자존심을 가진 광복군 출신이 그런 정부에서 맡을 만한 자리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선생님은 정부의 높은 자리는 다 거절했으면서도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자리는 흔쾌히 맡으셨습니다. 총장 재직 때 마침 독재권력에 의해 해직되었던 교수들의 복직이 허용되자 어느 대학보다도 먼저 서둘러 복직시킨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 대학총장 자리도 곧 독재권력에 의해 임기를 못 채우고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 학병 탈출 동료인 장준하 선생과 평생의 동지로 지낸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장준하 선생이 군사독재권력의 탄압으로 쫓겨 다닐 때 마지막에는 정말 갈 데가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선생님 댁에서 피신한 일을 저는 선생님에게 들어서 압니다.

 

흔히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일제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으니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일제의 교육밖에 못 받았으면서도 목숨을 걸고-전쟁터에서 탈출하다 실패하면 총살인데-일본군에서 탈출해서 광복군이 된 선생님 같은 분이야말로 우리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좋은 ‘교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또 세상이 다 아는 중국 전문가였습니다. 아마 우리 학계에서 한-중 관계로는 선생님만큼 활약하시고 또 존경받는 분은 없을 것이라 단언해도, 그리고 중국 학계에서도 학문적으로건 인적 교류 문제로건 선생님만큼 존경받는 분이 또 없다고 단언해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중국 학계 쪽에서도 최고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셨는데, 한-중 관계에서 선생님이 하신 일을 계승할 만한 후진이 빨리 나와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애주가였고 또 애연가였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전화로 문안을 드리면서 ‘아직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담배를 겨우 끊었지만 술은 아직도 즐기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 이제 저승에 가서는 아무 제한도 받지 말고 담배 실컷 피우고 술도 마음대로 잡수십시오.

 

90살까지 장수하니 친구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제 저승에 가셔서는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동지와 친구들을 만나서 그 쾌활하고도 당당한 모습으로 영원히 영원히 사십시오. 거듭거듭 선생님의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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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과 에셀, 두 '저항군'의 삶

'미친 소'이어 '미친 등록금'까지 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많다 

 

여기 낯익은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학도병인지 정규군인지 모를 복장을 하고 어깨에 경기관총을 멘 청년 셋.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이다.

 

▲ '마지막 광복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왼쪽부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이 빛바랜 '마지막 광복군' 사진은 8·15 해방 전에 찍은 사진이 아니다. 8·15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8월 20일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현(濰縣)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청년들의 표정에선 도무지 광복의 환희를 느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해방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3명의 광복군

 

세 청년은 중국 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支隊)에서 미국 정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지원하에 한반도 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마친 지하공작대(제1기생 50명)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 군사사절단(18명)이 탄 미군 수송기에 사령관 이범석과 함께 편승해 8월 18일 낮 12시 30분쯤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로서 가장 먼저 해방 조국의 땅을 밟은 영광도 잠시, 이들은 착검한 일본군에 포위되어 비행장에 연금된 채 이튿날 미군과 함께 추방된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일본 조선군사령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은 일본이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뒤에 재입국하라"는 거였다. 결국 선발대를 태운 미군기는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복귀 중에 연료가 떨어져 산둥성 웨이현에 불시착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위한 OSS특수훈련을 마치고서도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청년 3명이 시안의 제2지대로 복귀하기 전에 이국땅의 한 사진관에서 여의도비행장 착륙 당시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게 된 배경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이 아름다운 청년 중에서 가장 앳되고 무선 통신에 능했던 노능서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해운업에 종사했다. 이범석 장군 부관을 지낸 김준엽은 중국에 남아 학문의 길을 걸어 고려대 총장을 지냈으며, 장준하는 70년대 <사상계> 발행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일본군 소위 출신 대통령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의 평생 동지이자 '연인 같은 절친' 관계였던 김준엽(1920년생) 선생이 7일 91세로 영면했다.

 

고인은, 소설가 서해성의 말처럼 '삶을 교과서처럼 쓰신 분'이었다. 후학들에게 책에서 배우지 않는 걸 온 몸으로 가르쳐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 몸으로 돌파해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1943년 10월 일제가 '학도 지원병제'를 시행하자 유서를 써놓고 '자원 입대'한다. 중국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실제로 이듬해 입대 후 중국 서주(徐州) 근처의 경비중대에 배속된 지 한 달여 만에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첫 번째 결정적 선택이었다. 이후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장정(長征)에 오른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진정한 보수주의자 김준엽

 

두 번째 결정적 선택은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과 광복군이 귀국할 때 환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중국사를 공부한  것이다. 김구 주석은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고, 6000㎞ 장정과 생사를 함께 한 평생 동지 장준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당시 정계 투신과 학자의 길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후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회고록 <長征(장정)>에서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때의 나의 선택은 나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나는 고대(高大)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간 이때의 결심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지켜내려 왔고 수 차례의 벼슬 유혹이 있었으나 아무 거리낌 없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발전에 있어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차례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히 20대에 세운 가치관은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장정 1 - 나의 광복군 시절>, 452~453쪽)

 

고인은 20대에 선택한 학문의 길을 초지일관해 평생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중국공산당사>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 공저) 같은 기념비적 연구-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이 소장(1969~1982)으로 재직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고인의 고려대 총장 재임기간(1982~1985)은 짧았지만 그 시절을 함께 한 학생들에게는 '영원한 총장'으로 기억된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의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정권의 압력을 "내가 그만 두겠다"며 막아낸 버팀목이었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이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를 벌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고인은 이승만 정부에서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12회의 공직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대통령당선자로부터 6공화국 초대총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장정 4 - 나의 무직시절>에 남겼다. 그중 하나는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국정자문회의 의장인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이는 총리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제자와 학생이 아직 감옥에 있는데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인은 중국 및 공산권 전문가로서 국가를 위해 일해 달라는 정부의 부름에는 응해 UN총회 한국 대표를 두 번(61년과 74년)이나 지냈다. 고인은 평생 공산권 연구에 매진한 민족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 후학들은 물론, 과격한(?) 운동권 제자들도 따뜻하게 포용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주의자지만 좌와 우를 넘어서 존경받는 '시대의 스승'은 자신의 저서 <역사의 신>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영원한 광복군'이 운명한 날, '운명'처럼 한국에 상륙한 '분노하라'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이 90세 인생의 장정을 마감한 7일,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90대 노투사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외침을 담은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가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를 꿈꾼 '마지막 광복군'이 운명하던 날,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90대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은 공교로움을 넘어서 '운명'처럼 느껴진다.

 

1917년 독일 출생으로 7살에 유태계인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은 스무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 예비학교를 거쳐 1939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 해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돼 페탱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41년 드골 장군이 이끈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방첩·정보·행동 담당총국(BCRA)에서 일한다.

 

그는 44년 3월 '그레코'라는 암호명을 받아 비밀리에 프랑스로 파견된다.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세력이 연합군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영국에 관련 정보를 송출할 수 있도록 방송 포스트를 찾는 일을 지원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돼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전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에셀의 첫 직장은 국제연합(UN)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48년 UN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UN주재 프랑스 대사, UN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세계의 인권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한 영세 출판사에서 초판 8000부를 찍은 소책자가 7개월 만에 무려 200만부를 돌파한 것도 그의 열정에 세상이 감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르몽드>지가 서평 머리기사에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라고 제목을 뽑은 이 작은 책자가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확고하다.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 분노는 '자유 프랑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레지스탕스가 쟁취한 사회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

 

에셀과 그의 동지들의 '자유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따라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을 비롯해, 1944년 3월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채택한 개혁안은 지금 이상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분노'다. 그래서 에셀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분노하라>, 15쪽)

 

에셀은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강조하면서도,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같은책, 38~39쪽)

 

역자 임희근은 그의 이런 메시지를 "진정 행복하려면 제때에 분노할 줄 알라"는 한 마디로 표현한다. 공분(公憤)도 좋지만 먼저 자신의 행복과 변화를 위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레지스탕스'는 어때야 할까? 에셀은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가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들은 옛날 레지스탕스 당시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상의 각종 네트워크(SNS)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랍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일을 훌륭히 해냈고, 그리하여 독재자를 축출하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같은책, 63쪽)

 

신기할 만큼 닮은 두 '저항군'의 인생행로와 역정

 

70년 전 아시아는 일본과, 유럽은 독일과 전쟁을 치렀다. 그 전쟁은 불의에 대한 저항(레지스탕스)에서 출발했다. 김준엽과 에셀의 출발선과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격동의 20대에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1945년 8월)을 겪으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선택한 두 '저항군'의 인생행로와 역정은 신기할 만큼 닮은꼴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유학 중 '자원입대'해 일본군을 탈출,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해 항일 유격전∥독일 태생으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 페탱 군대를 떠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프랑스 해방전쟁에 참전 ▲광복군 지하공작대(레지스탕스) OSS특수훈련 마치고 국내정진군 활동∥연합군 상륙작전 지원 위한 레지스탕스 활동중 체포돼 사형선고 받고 탈출 ▲전후 중국 및 공산권 전문가로서 UN총회 한국 대표 역임∥외교관으로 UN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 참여, UN인권위 프랑스 대표 역임(김준엽∥스테판 에셀)

 

그런데 김준엽이 운명한 날, 에셀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으니 어찌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텐가. 그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미래 세대와 청년을 사랑한 점이 닮았다. 김준엽은 22살 때 유서를 쓴 결의와 소신에 대해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할 적에 항상 이때의 나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처신하였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신의 내용이 옳고 그르고는 다음의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의 정의에 불탄 당당한 태도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기성세대는 이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장정 1>, 27쪽)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면서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분노하라>, 26쪽)

 

그렇다. '미친 소'에 이어 '미친 4대강'과 '미친 등록금'까지,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너무 많다.

 

2011.6.12 / 오마이뉴스 김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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