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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by Wood-Stock 2010. 12. 7.

 

"선생님! 나의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가르침대로 살겠습니다"

기사입력 2010-12-06 오전 10:54:14

 

선생님은 내게 마르크스를 처음 알게 해준 분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대학원에서 <자본론>을 강의한다. 유물변증법의 세계관으로 인생을 살며 학문을 하고 있다. 그저 정의감 하나로 학문에 세계에 도전한 내게 선생님의 가르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출발이 선생님이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선생님은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공사의 구분도 지나치리만큼 철저하셨다. 자식이나 제자에게도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제자들 취직하는데 부탁 한번 하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선생님이 내가 대학에 자리를 잡을 때 추천서를 써주셨다. 지금은 그만둔 당시 한일신학대학교 교무처장에게 공식적으로, 그리고 총장에게 사신으로 추천서를 보내신 것이다.


그 대학에 지원하는 걸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서류를 제출한 지 한참 지난 후 갑자기 학교에서 리영희 선생님 추천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선생님은 그 대학 총장을 모른다며 써줄 수 없다고 하셨다. 미리 상의 드리지 않은 괘씸죄였다. 사실은 민중 신학자인 김용복 총장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며칠 고생을 시키더니 미국을 떠나시는 날 아침 전화를 해서 추천서를 써놓았다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교수초빙 담당 부서 책임자인 교무처장에게 보내는 공식추천서와 더불어 특별히 총장에게 나의 채용을 부탁하는 사신까지 써놓으셨다. 이런 거 공개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총장은 결정해놓고 선생님 추천서를 받아보고 싶어서 사실상 비공식적인 절차를 뒤늦게 요구한 것이니 무방할 것이다. 그 대학교수가 돼서는 김용복 총장과 막역하게 지냈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추천서를 복사해서 내게 주셨다. 지금 읽어보니 새삼 선생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추천서와 편지의 서체와 내용에는 선생님의 성품이 녹아있다.

추천서의 내용은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의 지침서와도 같았다. "아직 높은 수준의 학문, 전공적 영역에는 당연히 미달일 수 있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형인 까닭에 교수직이 요구하는 적절한 소장학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성실히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선생님은 또 "그는 서적을 통한 이론적 추구에 못지않게, 그 이론과학적 정신을 실천적 영역에서 합일시키려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지식인입니다. 지난 군사독재 언론탄압 시기에 그는 민주사회의 언론자유를 위해서 학문적 이론을 실천적 정신으로 구현하고자 애썼습니다." 라고 하셨다. 나는 이 지침에 따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난 10월 17일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나는 인생에 아무런 회한도 없다. 다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가는 게 너무 힘들다." 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선생님...선생님...나의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지침대로,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동민 동아대 강사


 

"내 유일한 사치는 만년필…글은 피로 쓰는 것"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Live simple, Think High!"

기사입력 2010-12-06 오전 10:54:39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상징인 리영희 선생님이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긴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생님의 숨겨진 측면을 개인적 일화를 중심으로 몇 가지 회상하면서 선생님을 보내드릴까 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 것은 71년 박정희 정권이 발동한 위수령으로 대학을 잘려서 낭인으로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 역시 통신사에게 해직되어 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대학 동기인 이근성 <프레시안> 고문,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 등과 한국일보 근처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자주 선생님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 2003년 3월 국회 앞에서 열린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나와 발언하고 있는 리영희 선생. ⓒ프레시안(김하영)
▲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영정 ⓒ뉴시스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오셔서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묻자 "이번에 원고료를 타서 처음으로 책상을 샀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서 물어보자 좁은 집에 노모까지 모시고 사는데다가 생활도 어려워 집에서 글을 쓸 때 가족들이 밥을 먹는 작은 앉은뱅이 밥상을 식사 후 닦아서 책상으로 써왔는데 이번에 책상을 샀다는 이야기이었습니다.

<우상과 이성>과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변변한 책상도 아니고 밥상에서 쓰였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너무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검소한 생활철학에 다시 한 번 존경심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의 철학이 "Live simple, think high!(사는 것은 소박하게, 생각은 높게!)"이라며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철학과 정반대로 물질문명과 소비의 시대 속에 "소비하고 사는 것은 높게 살면서,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낮게 하면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선생님의 그 말씀은 선생님이 여러 책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구체적인 지식과 문제의식 이상으로 중요한,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지식인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물질적 유혹에 흔들릴 때면 항상 선생님의 그 말을 되씹어 보곤 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말 뒤에 이어진 선생님의 또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호철아, 그래도 나도 사치가 하나 있어. 먹물의 사치인데 그것만은 못 버릴 것 같고 안 버릴꺼야." 궁금해서 목이 빠지며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는 저에게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글을 쓸 때 반드시 좋은 만년필로 쓰는 것이야. 난 죽어도 볼펜으로 글을 못 써. 글은 자신의 피로 쓰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직접 나의 피가 펜에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펜촉을 닦고, 잉크가 다 소모되면 내 피가 그만큼 나갔구나 생각하고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해서 써야지, 어떻게 볼펜처럼 대량생산된 소모품으로 글을 써. 그리고 만년필 중 하필 좋은 만년필이어야 하는 이유는 글을 많이 쓰니 손목이 아파서 글이 잘 나가야 하기 때문이고."

선생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나는, 사치라고 해서 무언가 거창한 것이 나올 것인가 하고 기대했다가 기껏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시는 선생님의 검소한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만년필로 글을 써야 하는 이유로 밝히신 그 이유, 즉 글은 피로 쓰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글은 피로 쓰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말입니까?

노무현 정부가 정권 초기 이라크파병을 강행하고 있을 때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으로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면서 사안이 사안인지라 몸이 불편하신 줄 알지만, 댁으로 찾아가 "도와주십사"라고 부탁을 드려 선생님을 모시고 집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예전에 함께 술을 들던 이야기를 하며 빨리 건강해져서 다시 약주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빈다고 하자 "와인 한잔 정도는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제가 사는 분당에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좋은 술집이 있어 한번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후 몇 번 뵈었지만, 그 약속은 거짓 약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Live simple, think high!"
"글은 피로 쓰는 것이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리영희의 전쟁-한반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

기사입력 2010-12-07 오전 8:22:29

 

아래 소개하는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는 올해 초 나온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펴냄)에 실린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의 글이다.

고(故)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20세기 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전쟁'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리 교수의 이런 작업이 갖는 의미를 짚으며 오늘날 우리의 학문적, 실천적 과제를 제시한다.


김동춘 교수와 사계절출판사의 동의를 얻어서 이 글을 전재한다. 이 글이 실린 <리영희 프리즘>은 고병권, 김현진, 안수찬, 오길영, 은수미, 이대근, 이찬수, 천정환, 한윤형 등 당대의 지식인이 각자가 선 자리에서 리영희 교수의 사상을 성찰한 글을 묶은 것이다.

<편집자>

 

▲ <리영희 프리즘>(고병권 외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고(故)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김하영)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모든 것의 왕이고 노예와 자유로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즉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 중에서 전쟁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배와 피지배 관계, 즉 정치의 기본 질서를 좌우한다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전쟁은 물질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은 일종의 혁명이지만, 가장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관계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전쟁은 문명 전파와 문명 이식의 촉매제였다.

 

나폴레옹은 독일과 러시아를 침략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수출하였다. 영국은 19세기의 인도 폭동에 대한 잔인한 진압 작전, 아프리카 쟁탈 전쟁과 보어전쟁을 치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고, 미국은 필리핀 침략을 시작으로 태평양·대서양 연안 양측에서 동시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을 대신하는 제국으로 등장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겪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민족 해방을 성취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강대국 간의 전쟁에서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조선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되고 말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초토화됨과 동시에 휴전 협정으로 남북한 대결 체제가 고착화되었다. 오늘의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남북한 대결 체제, 남북한의 대립되는 정치경제 체제는 모두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아직 한국은 북한과 전쟁 상태에 있다.

그리고 조선인은 태평양전쟁기 식민 국가인 일본의 군 위안부, 병사와 군속, 노동자로 동원되어 노예의 삶을 살았고, 20세기 역사상 가장 참혹한 동족 간의 살상인 한국전쟁을 3년 동안이나 겪었다. 그 후 한국의 젊은이들은 1965년부터 1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의 전쟁인 베트남전쟁에 동원되었다. 한국전쟁기에 징집되어 상이용사가 된 증조할아버지나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피해자가 되어 보상 한 푼 받지 못한 한국의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자신의 증손자와 손자가 군대에 입대하여 이라크에 파병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그래서 강대국이 주도해 온 세계사는 전쟁사를 빼고서는 한 페이지도 쓸 수 없으며, 20세기 세계사와 그 와중에 버텨 온 한국 현대사 역시 이들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전쟁 프로젝트의 귀결이었다. 비록 근대 이후 한국인들이 외세를 침략하여 전쟁을 벌인 적은 없지만,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를 모르면 오늘의 국제 정치의 연원, 한반도 분단과 남북 관계의 연원을 알 수가 없다. 또 스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휩쓸려 간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전쟁을 변수로 포함시키지 않는 사회과학, 한국전쟁의 정치학을 중요한 설명 변수로 고려하지 않는 국제정치학,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동시에 살펴보지 않는 동아시아 역사 서술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걸쳐 살아오면서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 그리고 미국이 개입했던 동아시아 전쟁들이 오늘의 각국 현실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 지식인은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과연 그렇다면 한국인들 중 누가 이 20세기 한반도와 한국인들의 운명을 가장 심대하게 좌우했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다음, 그것을 필생의 작업 과제로 받아들였는가? 비록 베트남전쟁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였지만, '자유 세계'의 최전선임을 자처했던 한국의 군대가 베트남에 파병하게 된 현실과 대면하였던 1960년대의 젊은 리영희가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통역장교로 복무한 것을 포함하여 무려 7년 동안 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진하게 체험한 전쟁 세대였다. 그는 '한국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미군의 지휘권 아래에 놓인 한국군으로 체험함으로써 한미 관계, 남북 관계, 한국 정치의 큰 물줄기와 만났다. 그러한 체험을 기초로 하여 이후 기자로서 베트남전쟁을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베트남전쟁이 확대되고 한국이 참전하게 되었을 때 지배하던 담론은 '보은론', 즉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어 자유를 찾았으니 우리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리영희는 여기서 매우 명백한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의 은혜로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난 영국은 왜 단 6명의 의장대만 베트남에 보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미 관계를 설명하는 '혈맹론',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했던 '보은론'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한미 관계의 실상을 드러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개입했던 베트남전쟁은 사실상 베트남 이전의 전쟁(The War before Vietnam)인 한국전쟁의 연장이었으며,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이전의 한국전쟁, 나아가 동아시아와 한미 관계의 정치학, 한국의 정치와 사회 그 자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국내적으로는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의 정치 실정에서 남북한 분단, 한미 관계, 그리고 한국 정치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베트남이라는 우회로를 거쳤던 것이다.

사실 '국가'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1960년대의 남베트남과 한국은 분명 북베트남과 북한으로부터 공산화 위협을 당하는 공통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헛되이 미국과 한 몸이라고 보았던 당시의 '제1세계론'의 시각을 벗어던지고 보면, 베트남전쟁은 프랑스·일본·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민족 해방 투쟁의 일환이었다. 남베트남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군사 독재와 부패, 그리고 종속국이라는 베트남의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자기가 살던 땅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약소국의 백성에 불과했다. 식민 통치의 대리자들이 또다시 지배자로 군림하는 나라의 독재, 부패, 부정의 현실을 '자유'라고 말한다면 언어의 유희도 도가 지나친 것이리라. 이 오염된 언어, 잘못된 이름 붙이기에 대해 발끈하지 않는 지식인이라면 역시 거짓 지식인일 것이다.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 식민지의 야만적 폭력에서 벗어난 지 5년도 안 된 시점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정면으로 대결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현실이었으며, 리영희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듯이 반인간성, 비인간성, 비생명성 그 자체였다. 전쟁에서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군대에 대한 증오감 등을 느끼면서 그는 평화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렬해졌다.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은 그것을 뼈와 살로 겪은 소수의 맑은 사람들에게는 필생의 숙제를 던져 주었다.

정치로서의 전쟁

전쟁은 언제나 단순한 군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평화 역시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이상이 아니라, 전쟁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지배 질서의 변혁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매우 구체적 목표다. 전시에 사용되는 무기는 인간의 손의 힘이 직접 가해지는 돌, 창, 화살에서 완전히 기계화되고 첨단화된 전투로봇, 무인정찰기로 진화해 왔지만 언제나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키는 주체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들이며, 그 정치가들을 사실상 뒤에서 움직이는 대자본, 경제적 이해 집단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전쟁은 기계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집단이 판단하고 결정하며, 전쟁에서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승자와 패자, 가해자와 피해자, 돈 버는 사람과 패망하는 사람이 갈라진다는 법칙은 유사 이래로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면서 한편에서는 만세의 영웅이 만들어지고 다른 편에서는 무명용사, 피학살자, 성폭력 희생자, 신체장애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진다는 전쟁의 논리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침략의 기획자들은 언제나 전쟁을 신성한 명분과 고상한 가치로 포장한다. 그리고 이제 장차 닥쳐올 전투에서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이 어린 병사들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가족들은 국가가 선전하는 이 고상한 대의와 가치, 펄럭이는 깃발과 애국가 합창에 스스로를 위무하고, 국가가 주는 알량한 급료와 사망자 위로금에 자위하면서 이 엄연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 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전승탑, 기념탑, 충혼탑, 위령탑이 만들어지지만 백성들은 그 탑들 앞에서 고개 숙일 여유도 없고, 또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자신에게 겨냥될 총탄을 만드는 일에 동원된다. 설사 그 총탄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전멸시킬 무기라고 해도, 약간의 급료와 보너스, 주식 배당액을 챙길 수 있다면 자청해서 그 일을 하려 한다.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사람은 가능하면 자신이 겪은 전쟁을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려 하며, 한번도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삼국지와 수호지, 나폴레옹과 이순신을 연상하거나, 심지어는 전자 오락게임과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 그래서 전쟁으로 발생한 비극과 상처, 전쟁이 가져온 파괴는 살아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되고, 집단적 망각 속에서 힘을 가진 집단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듯이,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만 직접 전쟁에서 죽을 확률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은 20세기의 거의 모든 전쟁에 관여했지만, 한 세기 동안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죽은 미군 병사의 총수는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 죽은 한국인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 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죽을 확률이 0.1%에도 미치지 않는 군인과 죽을 확률이 10%가 넘는 사람을 같은 군인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를 전쟁의 피해자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전쟁, 비상계엄 선포로 작전 지역 내의 민간인과 병사들에 대한 권한이 거의 군주의 반열까지 오르는 현장 지휘관의 처지가 보급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민간인의 쌀독과 가축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병사들과 같은 정도로 비인간화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인간 세상에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가장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19세기의 나폴레옹 전쟁과 20세기의 제1차 세계 대전은 사용된 무기의 성능과 질, 살상된 비전투 민간인의 수, 피침략국의 지성인들이 그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 전쟁 이후 변화된 정치 체제가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참전한 전쟁이지만, 유럽의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의 제2차 세계 대전은 달랐다. 한쪽에서는 미군이 주로 공중전에 의존하면서 지상전에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투입되었고 핵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미군이 지상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핵이 사용되었고 인종주의 원칙이 전쟁 과정에서 작동하였다. 파시즘 군국주의를 부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미군 지휘관들은 공산주의와 대결한다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나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흰 옷 입은 민족 구성인들끼리 싸우는 내전에 왜 자신들이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왜 그렇게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왜 그 전쟁이 그렇게 지연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잔병이 된 일본군의 처지는 비참했지만, 더 비참한 것은 남의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들이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일본군의 구타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전쟁터에 내던져진 나이 어린 미군들의 처지도 비참했지만, 자기 나라 군과 경찰의 일상적 테러와 폭력에 노출되고 외국 공군기가 퍼부은 폭탄 세례를 받고 자기 집 안방에서 죽어 갔던 한국 민간인들의 처지는 그들보다 몇 십 배 비참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동원되어 천 리 길을 굶으면서 걸어 내려가다 더러는 동사하고, 더러는 병에 걸려 죽은 국민방위군의 처지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리영희는 이 국민방위군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전쟁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근무했던 부대 인근에서 벌어진, 한국 측 군경과 인민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면, 아니면 한국군에 징집되어 그러한 일에 동원되었다면, 그 전쟁에 대해 더욱더 크게 좌절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리영희가 체험한 한국전쟁, 그리고 기자로서 취재하고 분석했던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도 가장 정치적인 전쟁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쟁의 주역이 아니었다. '전쟁 만들기'의 주역인 제국주의는 '문명'으로 대량의 살상을 포장하지만, 어떠한 가치로도 인도되지 않은 군대는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화의 기제를 갖고 있지 않다. 리영희는 한국전쟁 시기 군인들의 타락한 규율과 부정적인 모습, 후방에서의 환락과 사치, 극단적 이기주의를 체험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족성을 개탄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제국이 아니라 아류 제국인 옛 일본의 천황 군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한국군의 실체, 즉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 야만적인 일본 군대의 폭력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휘관들, 그 사디즘 체계의 최말단에서 신음하던 사병들의 비참한 처지를 주목하였다. 한국전쟁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힘없는 부모의 자식들이 죽음의 최전방에 서게 되고, '빽'이 있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도 살아남고 돈도 버는 현실이 있었다. 또한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처지 뒤에는 이승만 정부의 반인륜적인 행태와 전시에 민초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있었다. 그는 미군 통역을 하면서 미군의 참전은 결국 그들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위해서라는 것과, 미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정부와 한국의 적나라한 처지를 이해하였다. 결국 그가 본 한국전쟁은 그의 국가관, 전쟁관, 미국관, 한국 정치관, 사회관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경험보다 더 좋은 교사는 없는 법이다.

과연 전쟁터로 변한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 있는 '자유 세계'라고 불렀던 당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세상을 정직하게 본 것일까? 이 당연한 의문에서 출발한 리영희의 일련의 베트남전쟁 관련 논문과 에세이는 베트남전쟁을 통해 국제 냉전 질서, 한미 관계의 국제정치학, 새 패권 국가이자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 제3세계 민중들의 처지, 그리고 바로 그 자신과 한국 사람들이 겪은 한국전쟁과 한국 정치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우회적으로 다시 보려는 지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베트남전쟁은 확실히 베트남 사람들의 전쟁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들의 전쟁이었다. 1960년대에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양심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다. 오로지 한국인들만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러한 국제적 논란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으며, 한국의 지식인들만 그러한 논란이 한국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은 "현대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었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냉전 체제, 미소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한국 사람들이 그 전쟁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북한의 침략'이라는 매우 익숙한 공식으로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쟁 체험을 일방적으로 해석한 한국전쟁관은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만 굴절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도 굴절시켰다. 남베트남을 '월맹의 침략'을 받은 '자유 우방'이 아니라, 식민지화의 역사를 청산하려는 항불·항일·항미 운동의 주체로 본다면 문제는 완전히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리영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진입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종전과 함께 한국에 군대를 진주시킨 상황"으로 이해하였으며,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지배 세력이 변화된 이후에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명분은 도미노이론, 즉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다른 나라가 연쇄적으로 공산화된다는 논리였는데, 이 논리는 사실상 한국전쟁기 미군 투입의 명분이기도 했다. 한국은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지만, 미국이 한국을 방관할 경우 미국의 의중을 시험한 전 세계의 공산주의 세력이 파상적으로 공격을 해올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의 방위는 미국의 '자유세계' 방위의 시험대였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베트남전쟁기의 국방장관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들이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전쟁에 개입하였다고 실토하였고, 베트남전쟁 당시 대학 교수였던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역시 당시 학생들이 왜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소련 사회주의가 망한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가 유지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과거의 무지를 실토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의 청년 지식인들이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노력이나 우회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지적으로 성실하기만 했다면 말이다.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은 정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냉전 체제

어쨌든 1970년대 이후 미·소의 화해, 일본 부흥, 월남 패망이라는 전환기적 사실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어도 냉전의 단세포적 인식에 머물러 있던 남한에서는 '유신'의 억압이 세상을 보는 눈을 더욱 외골수로 만들었고, 주체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화시키는 북한의 대남 강경 노선과 맞물려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패망과 더욱 경직된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전쟁은 국제적 문제가 아니라 과거부터 지속되던 남북한 간 냉전 체제의 해체 문제로 점점 더 다가오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리영희의 관심이 이제 중국의 변화, 일본의 우경화와 침략주의,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 체제, 북한의 핵무장 문제 등 주로 한반도 내부와 주변의 문제로 관점이 이전하는 이유도 이제 지구적 냉전은 한미 관계, 남북 관계 문제로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쟁점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여 남북한 냉전 체제를 지속시키려는 세력 문제로 집약되었다. 여기에는 군사 정권의 지배 하에서라도 한국의 군사적·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북한의 입지가 약화되었다는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전제로 깔려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은 아직 농업 국가였던 베트남이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가 되었다. 북한은 경제력에서는 물론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었지만,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 내부의 군사주의도 크게 후퇴하였고 자체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룩한 한국 사회에서 전쟁은 저 먼 과거의 일이거나 우리 주변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느끼는 냉전 이데올로기는 남한 내부의 지배를 위해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래서 리영희는 이제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불평등한 한미 관계, 남한 내부의 냉전 이데올로기,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과대 포장을 일삼는 남한 내부의 전쟁 지속론에 맞서서 한미 관계의 정상화, 냉전이데올로기의 극복,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일련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집약하면 민주화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냉전 질서를 유지 존속시킴으로써 지배 체제를 유지하려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에 맞서서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 냉전 논리의 뿌리, 즉 미국 혈맹론과 미국 의존 불가피론, 북한 군사 위협론, 북한 핵 위협론 등에 대한 비판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협을 과장하고, 전쟁 지속을 강조하는 논리와 체제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남한 기득권 세력의 경제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 즉 남한 사회가 진정으로 전쟁의 흔적을 지우고 폭력의 논리 대신에 법의 논리가 작동하는 문명국가로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냉전도 사실상의 전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냉전 체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덧칠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체제다. 냉전 체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조차 국가의 적으로 모는 자본 독재 체제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작동하더라도, 매카시즘이라는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반공과 국가 안보의 폭력과 고문,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의 권력화, 이들 정보기관이 지목하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과 감시가 지속되는 체제다. 그래서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된 1987년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양산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여전히 제약을 받았다. 남북한의 경계를 넘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체포되었다. 노골적인 고문과 폭력은 사라졌으나 '빨갱이 사냥'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제는 국정원, 기무사 등 사찰 기관 대신 여론을 독점하고 있는 언론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군사 정권하에서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민주화된 이후에도 투옥되었다. 민주화는 반공 이데올로기, 즉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정지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북한의 핵개발 관련 의제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또, 2006년 용산의 미군 기지 평택 이전을 둘러싸고 한국인들 내부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전쟁 상태는 외적인 전쟁 상태가 내부에서 진행된 것일 따름이었다. 각종 시민단체 집회에 나타나서 '힘'을 행사해 판을 깨는 '열혈 노인'들의 행태나, 신문의 하단을 장식하는 우익단체 광고에서 나타나는 '험악하고 전투적인 언사'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총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적을 없애야 내가 산다는 논리, 여차하면 동족을 살해할 수 있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시장과 전쟁

열전이든 냉전이든 전쟁은 탐욕이 활개를 치는 공간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장 확보와 원료 약탈의 탐욕, 절대 권력을 누리려는 군주나 총통의 권력욕, 자신과 종교와 핏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적대와 증오가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약탈이고 성폭력이고 안면 몰수의 부도덕과 무도덕 그 자체이며, 무법과 불법과 탈법이며, 약삭빠른 인간, 무지하고 난폭한 인간이 제 세상 만난 듯이 설치고 양심과 지조와 소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완전히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는 거대한 약육강식과 이전투구의 난장판이다. 그래서 지난 1989년 이전의 냉전의 역사 역시 국제 무역, 해외 투자, 금융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탐욕이 여과 없이 표출되었던 또 다른 전쟁터이기도 했다. 또 공산 독재의 붕괴 이후에 다가온 자본의 독재, 군사 독재 대신 등장한 '시장의 독재'도 냉전 이후의 새로운 전쟁 체제의 시작을 의미했다.

확실히 시장과 전쟁은 형제지간이다. 전시에 민간인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언제나 '군사적 필요'의 급박성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일본에 핵을 터트리는 것이 '군사적 필요'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밝혔으며, 이라크를 침략한 부시도 자신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를 놓치면 21세기의 패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었다. 중국 역시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석유 자원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한다. 군사적 필요의 급박성은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기업의 논리와 동일하다. 지구적인 무한 경쟁은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던 기업을 완전경쟁에 노출시켰으며, 최소한의 양심과 공정거래의 규범을 벗어던지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자유주의하의 무한 경쟁 시장에서도 법과 규범은 사치가 된다.

지구화, 신자유주의하에서 강화된 시장과 경쟁의 논리,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 더 이상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의 오만, 민주화된 이후 탈냉전의 정치적 해빙에 두려움을 느낀 구냉전 세력의 공격적인 대응 등이 199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여과 없이 나타났다. 지구적 탈냉전과 한국 냉전 체제의 불일치, 지구화된 자본주의 질서의 압박 속에서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중의 삶은 경제 전쟁 속에서 더욱 피폐해졌다.

반공, 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한국전쟁 후 60년 동안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을 자신의 방식대로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져 왔다. 한국전쟁은 약소국의 서러움, 강대국이 짜놓은 장기판의 졸이 된 민족의 불행한 처지, 반공/친공 이데올로기의 허망함, 학살과 폭력의 야만성에 대한 절절한 반성과 남북 화해와 평화에 대한 열망, 외세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는 방식으로 체험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휴전 체제로 끝난 전쟁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맹목적인 반공주의, 권력순응주의,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성, 국가지상주의 등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도 체험되고 해석되었다.

물론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사망하였다. 특히 일제 말, 즉 제2차 세계 대전의 궁핍과 한국전쟁의 고통을 철이 든 다음 겪은 80대 이상의 사람들의 수는 더욱 적어졌다. 이들은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던 두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그 누구보다 공포와 충격, 고통과 배고픔, 절망과 소외, 차별과 억압, 굴욕과 분노, 무기력감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어떤 처지에서 어떻게 겪었는가, 그리고 전쟁 후에 어떤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는 사람마다 천지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전쟁 체험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한국 사회 주류의 체험과 해석은 평화의 열망보다는 "원수를 쳐부수고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자"는 식의 북한과의 전쟁불사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북한을 침략의 책임자, 전쟁범죄자, 악의 원천으로 보고 오로지 북한만 없어지면 선에 도달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을 미워한 나머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의 국익에 신경을 쓰는 월남한 '반공' 투사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한국 거대 신문과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시각의 소유자들이다.

리영희가 평생 싸워 왔고, 또 그로 인해 피해를 당해 온 것이 바로 이 반공과 반북, 그리고 국가주의라는 우상이지만, 이 우상은 60년 동안 세를 유지해 왔고 아직도 건재해 있다.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인 대만과 중국 간의 화해도 급진전되고 있으며, 급기야 미국이라는 우산 속에서 전후 60년 체제를 유지해 온 일본조차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권을 내세우고 '국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비정상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이 너무도 오래 정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압도해 왔다.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오늘날 미국이 개입한 이후 최대의 서방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나토(NATO)도 철수를 서두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사회'와의 공조 운운하면서 한국인 보호를 위해 파병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외교부 수장의 모습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나라인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20세기 내내 제국주의 강대국에 시달린 나라이고, 영국·소련·미국 등 강대국의 이해 다툼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전쟁 상태에 있는 나라이자 심각한 내적 균열과 정치적 부패가 만연한 나라다. 외신은 2009년 5월 4일 아프가니스탄 그라나이(Granai)의 이슬람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140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일곱 살 노리아(Noria)는 두 명의 언니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은 60여 년 전 한국의 노근리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부패한 카르자이 정부가 국제적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며, 이제 다시 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탈레반은 UN 소속 민간인 지원단에게까지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에게는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온 UN 소속 사람들, '개념 없는' 한국 선교자들은 모두 문명의 이름으로 자기 땅을 침략하려는 외세와 그 하수인들에 불과하다.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참여하는 한국 기업도 세 번이나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오바마의 미국도 부시가 만든 용어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충실한 우방 한국은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을 사용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들러리를 자처하고 있다.

리영희는 이미 1980년대에 이스라엘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문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분단 한국의 처지에서 분석한 매우 선각자적인 평론이었다. 냉전의 우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외교관들이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는 팔레스타인 문제나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오로지 '미국의 관점'에서만 보일 것이다. 여전히 한국 언론의 '국제'면은 미국발 보도의 번역판이다. 응당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탐욕과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무지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가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잘 보고 와서도 일본의 기술과 생산력 발전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인 선비들이나, 청나라가 지배한다는 점만 중시했지 중국의 새로운 기술과 지식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 외교관들이나 지식인들의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 의식과 무지몽매함은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 주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부모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을 목격하고 가산이 불에 타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과, 오직 남의 땅에 가서 전쟁을 하다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병사들을 통해서만 전쟁을 체험한 '제국'의 사람들이 과연 전쟁을 같은 무게와 깊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제국주의는 언제나 자신이 대량의 살상 무기를 개발하지만, 주로 남의 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데 사용할 뿐이고, 식민지 종속국은 언제나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자신의 혈육이 살해당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한다는 비극을 안고 있다.

위구르, 티베트의 소수민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중국의 신군사주의와 '촌스러운' 제국주의는 21세기 우리의 일차적 경계 대상이다. 일본의 탈미 자주독립 노선, 하토야마의 아시아주의도 또 하나의 위협이다. 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의 역사와 전쟁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극우 반공주의의 전쟁 위협 조장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냉전 시기 미국의 프로젝트였다. 물론 그 프로젝트의 우산 속에서 지금까지 한국이 얻은 경제적 성취가 놀라운 것도 사실이고 중산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궁핍에서 벗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리영희가 언제나 강조하였듯이 군사 외교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면 힘없는 백성들의 '생명'은 외세의 무력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리고 시장과 자본주의의 미덕을 과도하게 찬양하거나 도그마로 받아들이면 시장의 실패자, 사회 내의 약자는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

경제를 그렇게 강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여 순수하게 경제적인 득실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남북한을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득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남북한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끝내고,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이 남측의 자본과 결합하여 북한 주민들이 물질적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남한은 새로운 내수 시장을 창출하는 것 이상으로 더 획기적인 경제적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과연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에서, 중국·미국·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전쟁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채 남한이 21세기의 세계 문명을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국가라는 우상, 시장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민중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리영희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이렇게 집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


 

2000대 학번이 바라본 리영희 선생님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선생님은 화석화된 아이콘이 아닙니다

기사입력 2010-12-07 오전 9:43:01

 

고 리영희 선생님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선생께서 이룩한 지적 성취와 실천적 양심을 흠모하는 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까지 선생의 영정 사진 앞에 분향을 하며 작별인사와 다짐들을 했을 것이다.

살아생전 선생님을 추억하고 기리는 조문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영정 사진 속 선생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엄혹했던 냉전독재 시절 무수한 해직과 투옥의 시련 앞에서도 민주와 평화, 인간지향적 정론 직필을 고집했던 실천적 지성이라는 후배들의 찬사가 과찬이라고 손사래를 치고 계실 것이다.

사상적 실천에는 추상같으면서도 젊은 시절 고생시켜 미안한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마다하지 않는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에는 "녀석들 날 놀리는구먼!" 하시면서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해지셨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다수 조문객들은 한탄할 것이다. 선생께서 바라고 실천하신 냉전의 구름이 걷힌 평화로운 한반도는 이 정부 들어 먼 이야기가 되었다고, 선생께서 아직 더 하실 일이 있는데 이렇게 가셔서 안타깝다고 말이다. 영정 사진 속 선생께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런 머저리들!! 그런 푸념일랑 집어 치우라"고….

80년대생이며 2000년대 학번인 나는 사실 리영희 선생님을 알 기회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위 전론세대(70년대 리영희 선생의 저작 '전환 시대의 논리'를 통해 분단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깨닫고 사회적 실천에 나선 세대)와 같이 선생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통한 감동을 맛볼 기회는 없었다.

나는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상징하듯 남북관계가 숨통이 트여가던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고, 그때 내가 관심을 보였던 사회과학 분야에서 소장 학자들의 학술저작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리영희 선생을 접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민주화 운동 세대의 사상의 은사로서 리영희 선생으로부터 받은 지대한 사회과학적 영향 혹은 생활 학문적으로 리영희 선생과의 추억을 회고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늦은 입대를 앞두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 '반세기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군대를 늦게 가는 만큼 대학을 마치고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남북관계를 더 공부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펼쳐 본 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리영희 선생님에 관심으로 선생님의 저작과 선생님에 대한 소식을 오늘에까지 접하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평가는 한결같다. 프랑스 르몽드지가 평가했듯 반공의 장막으로 가려진 냉전사회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 그는 사상의 은사였다. 이성의 불완전함은 직접 실천으로 보완해가며 참 지성인으로 살아갔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던 모 라디오 인터뷰 내용 중 후회되는 삶은 없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공적으로는 후회할 만한 일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만큼 자타가 인정한 그를 20세기 한반도에서 살아간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인의 제자가 추도사에 표현했듯 고인은 이제 역사의 육신이 되었고, 고인의 학문적 사상적 성취를 계승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의 학문적·사상적·인간적 성취를 계승하려는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사상과 실천은 70년대 80년대 민주화 시기를 정점으로 이루어졌다. 남은 이들의 계승작업은 자칫하면 90년대 후일담 소설처럼 리영희 선생님 주변의 몇몇 지인들의 넋두리와 회고로 화석화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물론 전론세대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리영희 선생님의 학문적 사상적 성취의 현재적 의미를 돌아보는 출판사업이 진행된 바도 있으나 <리영희 선생님 80세 기념 문집 (리영희 프리즘 ) 발간> 여전히 리영희 선생님은 21세기 젊은 세대에게는 장준하 혹은 함석헌 선생같이 훌륭하다고 들었지만 무얼 했는지 잘 모르는 역사적 인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슬픔을 뒤로하고, 이제 곧 후배 학자들과 시민 사회 활동가들은 리영희 추모사업회를 만들고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출판사업을 펼칠 것이다. 또한 언론계에서는 개인의 일신과 영달보다 사회적 책무에 충실한 정론직필의 언론인을 기리는 리영희 기자상을 제정할지도 모른다. 아울러 학계에서는 한반도 분단과 냉전 해소를 위해 노력한 고인의 평화지향적 글쓰기에 대한 커리큘럼을 신설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고인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통해 지사다운 풍모 이면의 냉전으로 인한 비극적 가족사와 옥바라지로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 등 인간적인 내면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고인을 친근하게 어필시키려는 선생님의 지인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르고 소박했던 선생님의 성품으로는 역정 낼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루뭉술하게 진보의 아이콘으로 화석화하기에는 고인이 남긴 학문적 실천적 유산이 깊고 풍부하다.

 

/이동철 동국대학생


1993년 재야 인사들의 한 모임 장면. 앞줄 왼쪽부터 리영희 선생, 이돈명 변호사, 문익환 목사, 송건호 전 한겨레 사장, 박형규 목사, 김찬국 목사.

뒷줄 왼쪽부터 박정기씨(고 박종철 열사 아버지), 김승균 사상계 편집장, 강만길 교수, 고은 시인, 한승헌 변호사,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 김중배 전 한겨레신문 사장.


 

"곡필 언론이 새로운 우상을 만들고 나라를 망치는 지금…"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이제 좌우의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소서"

기사입력 2010-12-07 오전 10:39:06

 

리영희 선생님은 70년대 학번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준 선지자이셨다. 유신정권의 폭압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당시의 젊은 학생들에게 리영희 선생님이 던진 화두는 의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셨다. 민주화의 열망 하나만으로 극악한 독재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의식의 힘'이 총칼보다 강함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당시 우리는 '불온의 표상'인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감옥행을 택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단지 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는지. 리영희 선생님은 훗날 자신의 책 때문에 감옥행을 택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셨지만 우리는 '리영희 의식'의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70년대 학번 젊은이들은 잇달아 출간된 리영희 선생님의 저서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탐독하며 독재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에 찌들었던 반쪽짜리 이성의 나머지 반쪽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패망한 베트남'은 '통일된 베트남'으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죽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중공은 세계 속에 나래를 편 중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훗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지적하셨던 리영희 선생님의 올바른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군사독재 시절 억압과 부조리에 맞서 펜의 힘으로 신화를 일구어낸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셨다.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선생님의 굳센 의지는 분단과 독재의 시대를 살아온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권력의 물리적 폭압으로 감옥에 갇히고 정든 직장에서 쫓겨나더라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버릴 수 없다는 불굴의 의지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평생 4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을 마다하지 않고 올곧은 신념을 지키신 리영희 선생님은 문자 그대로 '사상의 은사'이자 '겨레의 스승'이셨다.

리영희 선생님은 '겨레의 스승'이기 이전에 '참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현역 언론인 시절 곡필을 마다하고 직필을 택하신 대가로 독재정권의 폭압에 시달리셨지만, 한 번도 소신을 저버린 적이 없으셨다. 온갖 필화사건으로 몸이 피폐해지더라도 '참 언론'을 소중하게 지켜 오셨다. 현역을 떠나 강단에 선 뒤에는 후학들에게 올곧은 언론인이 되기를 가르치셨다. 후배 언론인들은 지금도 언론 현장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기자 혼'을 되새기고 있다. 한국기자협회가 제1회 '기자의 혼' 상으로 선생님을 선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생님은 물불 가리지 않고 사익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작금의 언론계에도 따끔한 일침을 남기셨다. 언론을 사익추구의 도구로 사용하는 언론사주는 물론이려니와 권력에 아첨하며 곡필을 휘두르는 '사이비 언론인'들이 언론을 망치고 있다는 지적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양심을 팔아 부와 권력을 탐하는 곡필 언론인이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8.15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권력의 상징조작에 줄곧 비판의 날을 세워 오셨다. 2006년 발간된 선생님의 저작 전집을 관통하는 한 마디는 '동굴의 우상'을 깨뜨리고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금언이었다. 분단시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시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반공'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어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선생님은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오셨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이라크전 파병반대 목소리를 높이셨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인권의 퇴보를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1990년대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내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 하셨지만, 현실의 참담함은 선생님을 나서시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이명박 정부의 1년 반을 진단하시면서 '파시즘 초기단계'라고 우려하셨다. 또 전시작전권 전환을 연기한 이후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경술국치 직후 상황과 흡사하다"며 "이승만 정권보다 더한 노예정권"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오면서 '절필선언'을 하셨다. 그러나 거꾸로 돌아가는 현 정치상황은 선생님을 편안히 쉬실 수 있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남 다른 자상함과 안온함을 지니고 계셨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경기도 안산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수리산의 정기를 받으며 안락함을 즐기셨다. 선생님은 "가정생활에서 아내와 가족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켰다"며 따뜻한 가정적 면모를 보이셨다. 사모님을 대신해 설거지도 해주시고 사모님 손을 잡고 외출하기도 했다. 어느 때 보다도 인자한 노부부의 안온한 삶이 수리산 자락에 펼쳐졌다. 사시사철 변하는 수리산의 변화는 선생님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선생님은 가끔 찾아가는 제자와 후배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지팡이를 짚은 채 어려운 걸음으로 아파트 문을 나서 어렵사리 승용차에 오르셨다. 거동이 어려운 데다 손목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지만, 제자들을 뒷자리에 태운 채 스스로 운전대를 잡았다. 안산 저수지 근처의 허름한 매운탕 집에서 막걸리 잔을 돌리며 세상살이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아닌 리영희의 '주막수훈'도 들려 주셨다. 때로는 인근의 오리고기집을 '개발'하셨다며 함께 몰려가 포도주를 곁들여 훈제 오리를 들었다. 그러곤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셨다.

리영희 선생님을 생전 마지막으로 뵙던 날. 10월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신촌의 아드님 댁 정원에 앉아서 제자 후배들과 덕담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해 병원에서 복수를 뺀 뒤 힘든 몸으로 정원에 나오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마지막까지 제자들과 후배들이 찾아와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선생님의 기(氣)가 전해져 왔다.

리영희 선생님은 겨레의 스승이자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의식의 세례'를 받았으니까. 선생님은 자신이 꿈꾸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편안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남북이 갈라져 서로 포를 쏴대는, 그래서 양쪽 날개가 서로의 날개를 부수려는 현실의 대한민국을 놓아 둔 채 선생님은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선생님께서 남겨두신 과제는 이제 우리 몫이 되었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선생님, 이제 꿈속에서나마 그리시던 통일된 민주국가의 하늘 위를 새처럼 좌우의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소서. 속세의 아픔일랑 후배들에게 남겨 두시고 하나 된 민족의 땅 덩어리 위를 마음껏 좌우의 날갯짓으로 힘차게 날아오르소서. 선생님은 외롭지 않으십니다. 이제 이웃이 되신 망월동 민주영령들이 벗이 되어 줄 겁니다.

ⓒ김봉준

* 필자 김주언은 <한국일보> 기자 시절이던 1986년, <말>지를 통해 전두환 정권이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 국가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영국과 미국의 인권, 언론단체들에까지 알려져 석방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검찰의 무리한 법적용은 9년여의 재판과정 끝에 무죄 확정판결로 이어졌다. 김주언은 이후 한국기자협회 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김주언 언론인


 

조봉암, 조용수, 그리고 리영희

[다산 포럼] 이견에 대한 포용성 결핍은 여전해

기사입력 2010-12-07 오전 10:53:29

 

조선공산당 창당요원인 조봉암은 광복 이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뛰쳐나왔다.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려면 강건한 조직체를 결성해야 한다고 생각해 공산당 창당에 가담했지만,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그는 공산주의 노선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진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물론 중도 민족주의자들마저 외면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농림장관으로 참여해. 현안이던 토지개혁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골자로 한 농지개혁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보수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점진적 개혁론, 중립화 통일론, 체제수렴 통일론

그 뒤 조봉암은 더욱 온건하고 신중해졌다. 그는 진보당을 창당하면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강령조차 수용하기를 주저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중한 개혁노선은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는 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패했지만 표차는 크지 않았다.

조봉암이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로 부상하자 이승만 정부는 그를 간첩으로 몰았다. 1심 법원은 국가변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2,3심에서는 모두 유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조봉암의 재심청구마저 기각했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59년 7월 31일 그를 처형했다.

조봉암이 죽은 지 1년이 되지 않아 4·19혁명이 났다. 이미 뿌리 뽑힌 줄 알았던 진보주의가 다시 요원의 불길처럼 지식인사회에 퍼져갔다. 그런 상황에서 조용수가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이 역설한 것이 중립화통일론이다. 중립화통일론은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론과는 확연히 달랐다. 연방제가 남북이 공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주장한 것이라면 중립론은 좌와 우를 초절(超絶)하는 제3의 통합을 상정한 것이었다.

<민족일보>는 중립화통일론을 펴면서도 반소(反蘇) 반(反)김일성 노선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자'로 하여금 단독정부를 세우게 하였다면, 소련 역시 '김일성과 같은 괴뢰적 인물'을 내세워 영토와 인민의 분열을 조장했으며, 재통일을 방해했고, 더구나 전쟁까지 도발했다고 몰아세웠다. <민족일보>가 미국이나 이승만 세력에 비판적이었다면 소련과 김일성 정권에는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군부는 <민족일보>를 폐간조치하고 조용수를 재판에 회부했다. 사법당국은 중립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그 기본노선이 같다고 규정하고, 조용수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정부는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1년 12월 21일 그를 처형했다.

이견(異見)에 대한 포용성 결핍은 여전해

조봉암이나 조용수와 비슷한 사상적 족적을 보인 이가 지난 5일 타계한 리영희 교수다. 그의 통일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는 남북이 자체 수정을 거쳐 서로 닮아가는 과정을 밟아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체제수렴 통일론을 주장했다. 그는 남북이 상대방의 장점을 수렴할 때 국가통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남북 국민의 사회통합의 길도 열린다고 강조했다. 그가 상정한 이상사회는 친북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개인주의적 시장주의 요소와 공동체적 사회주의 요소가 융합한 사회민주주의 사회였다.

이런 타협주의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빨갱이 중에서도 상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박정희 군부는 조용수를 처형했다. 문필활동에 치중한 리영희는 극형은 면했지만 쫓겨나고 갇히기를 거듭했다. 이제 그런 강퍅한 시대는 갔다고들 하지만 지식인사회에서조차 이견에 대한 포용성 결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가 발행하는 다산포럼(www.edasan.org)에 실렸던 글입니다.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다산연구소 대표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그에게 감화되지 않은 지성인 누가 있으랴"

기사입력 2010-12-06 오후 2:38:32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켰더니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걸린 '리영희 선생 타계'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잠시 멍했습니다. 신문에 실린 활짝 웃는 사진을 보고 나서 메일함을 열어보니, 번역서 교정 작업 때문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일본의 문예지 <신쵸(新潮)> 편집장 야노 유타카 씨로부터 12월 5일 0시 27분 43초에 메일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시 신문에서 추도 기사를 읽다 보니 공교롭게도 그 시간은 리영희 선생께서 이승에서 마지막 호흡을 정지하려던 순간, 2010년 12월 5일 0시 40분 무렵에 전송된 것이었습니다.

답장을 보내기 전에 야후 재팬에서 '李泳禧(리영희)'를 넣고 검색해 보았습니다. 정연주 선생이 2010년 창비 여름호(통권 148호)에 기고하신 '사상의 은사' <리영희 프리즘> 서평이 일어로 번역된 글이 올라왔습니다. 야노 씨한테 답장을 쓰면서, 맨 마지막에 "오늘 지성·사상계의 거성이 떨어진 날입니다. 지성·사상계 사람들 중에 그에게 감화되지 않은 자 드물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일본 야후 사이트에서 검색된 <리영희 프리즘>을 링크해서 메일을 발신하며 마지막에 음력 날짜를 적어 넣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다른 때와는 달리 맨 앞에 '한국'의 라는 수식어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메일함으로 돌아와 <한겨레>에서 일하셨던 어느 선생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33년간 언론인으로 일하신 그 분의 생신이 공교롭게도 12월 5일이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착잡한 기분과 함께, 그래도 생신 축하드린다는 메일을 보내고 잠시 먹먹해졌습니다. 다시 추도 기사들을 읽다가 12월 5일 부고가 난 선생님과 12월 5일 생신을 맞이한 선생님과 동시에 인연이 있는 미스홍콩 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한겨레>가 맨 처음 창간되던 시절의 어지럽고 뜨거웠던 시간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썼습니다.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나서 삼각산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김민웅 선생의 리영희 선생 인터뷰를 일어로 읽은 신쵸 편집장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사실 나는 내 글이 문학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을 쓰도록 노력해왔다. 그래서 200자 원고지에 혹 같은 낱말이 들어있으면 다른 낱말로 대체하고, 한 문장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세 줄 정도를 넘지 않도록 신경을 써왔다.

문장은 가능하면 짧게 하고, 긴 문장이 나온 뒤에는 짧은 문장이 두세 개쯤 나와서 독자가 한숨 돌릴 수 있도록 구성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은 좀 긴 문장을 쓰고, 핵심을 담고 있는 문장은 짧게 끊어서 쓰곤 했다.

문장이 길면 읽는 사람의 호흡이 가쁘고, 앞뒤 의미의 연결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지."

(2005년 3월 29일 <프레시안>,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와의 인터뷰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바로가기)중 발췌.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일어판에 실린 문장의 번역은 와타나베 나오키(渡邊直紀)가 했다.)

오늘따라 소나무 숲길은 어두웠고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서너 시간을 숲 속에서 거닐며 1987년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사이 미스홍콩 님한테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라고, 그래서 "아프다"고, "한 분의 기일이 또 한 분의 생일인 날, 아프지 말라"고 답장이 왔습니다. 마음이 몹시도 아픈 그런 하루를 보냈습니다. 편히 쉬세요, 리영희 선생님. 남기고 가신 글들은 두고두고 읽겠습니다.

 

/김정복 미술평론가·번역가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선생님의 '왜?'와 만나야 합니다

기사입력 2010-12-07 오전 8:22:47

 

리영희 선생님,

선생님은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개인적인 인연이 없더라도 누구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니 부르고 싶은 몇 안 되는 분 중의 한 분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엄혹한 시절에 선생님의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을 떴던 모든 사람들에게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과 일면식도 없는 저에게도 선생님이었습니다. 모두들 귀와 눈을 가린 채 살아야 했던, 그래서 더욱 세상 소식에 굶주려 있던 70년대 중반, <창작과비평> 과월호에 실렸던 선생님의 베트남전 글을 읽고 받은 충격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선생님의 '역설의 변증'을 읽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가슴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러한 개인적인 독서인연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사로운 관계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타계는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을 읽었던 몇몇 사람들만의 슬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010년 12월, 연평도 대포소리에 대포폰은 날아가고, 천안함 의문은 가라앉고, 서해에 미국 항공모함이 뜬 상태에서 한미fta가 타결되고, 안보에서 통일,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망가질 대로 망가진 mb정부의 이 퇴행적 상황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선생님은 선생님의 책을 읽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 속에 서계셔야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선생님이 전두환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되어 한창 고생을 겪고 계시던 나이, 저도 바로 그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원고지 매수만큼 세상은 변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청년실업 100만 시대에 88만원세대는, 그리고 비정규직 800만 시대에 미래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민들은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이제 다시 읽혀져야 합니다. 굳이 선생님의 책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이 시대의 많은 소시민들은 선생님 뒤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시민들은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작은 이익에 울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들이 선생님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전쟁 때 목격했던 힘없는 백성들에 대한 뜨거운 인간애, 쌀부대를 빼돌리던 하사관의 뺨을 때리던 그 심정의 바닥, 팩트를 찾아 밤을 지새던 열정의 바닥이 무엇인지 거기서 다시 만나야 합니다.

지금은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무엇이 진짜 행복한 삶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질문이 실종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늘 가지고 계셨을 '왜?'와 만나야 합니다. 바로 거기가 바닥일 테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의 'simple life, high thinking'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닥과 바닥끼리 연대해야 합니다. 조중동의 요사스런 선동질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닥으로 내려가 뿌리끼리 연대해야 합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바닥에서부터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저는 이 험난한 한반도 정세를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그러한 흔들리지 않는 민주주의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타계는 그러한 맥락에 놓여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 차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상을 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이제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가 선생님과 다시 만나렵니다. 선생님의 그림자가 아닌 바닥의 리영희가 되어 다시 만나렵니다.

한평생 지셨던 짐일랑 이제 풀어놓으시고 부디 편안한 길 가십시오.

 

/어떤 시민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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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이성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리영희 선생님"

 

리영희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생각하면 맨 먼저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 시절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부장으로, 저는 기자로 여러 해 함께 일하면서 지내다가 해직됐습니다.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는 베트남 전쟁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시절 저는 선생님이 이 전쟁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제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선생님의 글을 읽고 눈을 열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을 돌아보며 선생님의 영면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과 함께 일하면서 언론인이 어떠해야 하며 지식인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지식인인은 자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의 시대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진실을 알려면 모든 고정관념을 버려 자유로워야 하며 앞과 뒤와 옆은 물론 깊이까지 철저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진실을 두려워하는 권력이 어떻게 선생님을 박해하는가를 법정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중공’에서도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산다고 썼다가, 모택동이 진시황 이래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라고 썼다가 다섯 번이나 구치소에 끌려가고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이라 하고 ‘진실’을 뜨겁게 사랑하는 불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을 요약하면 선생님은 ‘뜨거운 얼음’이 될 터인데, 저는 여기에 ‘따뜻한 가슴’이라는 말을 보태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선생님이 유머와 재치가 많고 매우 따뜻하며 다정다감한 눈물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낣은 윤전기에서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신문을 들고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진실’과 ‘이성’이란 두 말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특히 언론에 그러합니다. 이성을 잃고 광기마저 드러내며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는 오늘의 언론을 보면서 이 말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진실을 말했다고 박해하는 못된 권력이 없고, 분단의 아픔도 전쟁의 위험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원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12월 08일 (수) 11:13:43 / 신홍범 두레출판사 대표


 

"나날이 깨어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지식인과 민중의 선생님, 우리 리영희 선생님과 작별하면서 선생님께 삼가 사랑과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지금 저희는 이 시대 양심의 떨림으로 눈물겨운 이별의 순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한시대가 맡긴 소명을 완수’하신 홀가분으로 자유롭게 훌훌 떠나셨을 선생님을 저희는 왜 이리 담담하고 기쁘게 보내드리지 못하고 슬픔을 못이기는지요?

 

아마도 저희가 외롭고 황당해서인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의 진전을 위해 생애를 바치신 선생님 가시는 길에 다시금 짙은 구름이 끼여 있는 분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염원하시던 평화는 고사하고 위기가 일상화되고 있는 이 터무니없는 시절에 선생님을 가시게 한 죄스러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고군분투로 미신을 밝혀내고 우상에 도전하여 확보해 놓으신 결실을 다시 교묘하게 갉아 먹히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역주행사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억압과 차별의 악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판입니다.

 

이 시대가 일겉는 선생님의 호칭과 규정은 참 많습니다. 만인의 스승, 위대한 선비의 사표, 사상의 은사, 고난의 지식인, 이성의 시대개척자, 실천지성의 표상, 선각자의 길을 걸으신 분. 그 모든 지칭이 다 리영희 선생님이지만 어느 하나로는 미진하여 그저 ‘선생님’이라고만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이 삭막한 시대에 한번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민중과 지식인들이 한 점 거리낌 없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맘 속 깊이 모시게 되는 사건은 신비한 시대적 경험입니다. 진정한 마으로 우리가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선생님의 땀과 아픔과 애정이 묻어있는 글들을 양식 삼아 그 엄혹한 시대에도 무엇이 우상이고 실상인지를 배웠고, 초강대국들의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의 본질을 알게 되었으며, 세계차원의 인식과 지식을 선물 받았습니다. 감추어진 놀라운 사회적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눈이 뜨이고 누가 진실을 두려워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싸움의 아름다음도 절감하였으며, 서로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비전과 ‘존경받는 훌륭한 국가’의 모습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고난의 사회적 삶을 살아내시는 동안 스스로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고단하셨습니까? ‘민중에게 환원하는 글쓰기’에 뼈골이 빠지는 고통을 감내하시며, 수없이 거듭된 해직과 투옥과 참담한 가난 속에서 평생 건강을 빼앗기고 가족들께는 폐를 끼치며 한없이 미안하셨을 선생님, 그러한 선생님을 위로하고 거들어드리기는커녕 선생님의 가르침만 끝없이 요구한 저희들의 이기심을 반성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고난의 여정과 순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좋은 위로와 축복을 주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누가 감히 선생님께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선생님 가심을 맞아 저희는 한 시대가 끝나가는 것을 실감하면서 저희 자신을 새삼 돌아봅니다. 회한과 부끄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천하의 리영희 선생님’이 여기 계셔서 진실을 더 보여주시기를 갈망하는 욕심은 이제 버려야겠습니다. 저희가 비틀거림 없이 진실과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저희가 부족하지만 한 가닥 한 가닥의 사랑을 그물처럼 엮어 이 사회 맨 밑바닥에 깔아가는 정성을 다시금 모아야겠습니다.

 

저희 모두 사는 날까지 선생님이 그러하셨듯 ‘인간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반인간중심적 가치관을 제압하기 위해 스스로 ‘의식화’하고 이웃도 의식화하면서 나날이 깨어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거시는 희망이며 엄중한 지침으로 들립니다.

 

그리운 선생님, 아름다운 선생님!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2010년 12월 08일 (수) 11:15:15 /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행동하는 지식인의 등대는 누가 밝히실 건가요"

 

리영희 선생님 영전에 마음으로 흰 국화꽃 한송이를 바칩니다. 이제 행동하는 지식인의 등대는 누가 밝히실 것인지요?

 

그저께 제가 조문을 다녀온 후 막막한 심정 가눌 길 없어 트위터에 선생님의 부음을 전했더니 heavenful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시민이 제 글에 단 댓글입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국화꽃 한송이 바치려는 사람이 어찌 그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온 국민이, 온 시대가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던 시절에, 선생님은 세 번 해직 당하고 다섯 번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많은 언론인들과 지식인이 한 끼 밥을 위하여,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곡학아세할 때에도, 선생님은 그 밥상을 차버리고, 비오고 찬바람 부는 길거리에 나가 바른 소리, 의로운 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야만의 시대에 이성의 잣대를, 허위의 시대에 진실의 빛을, 불의의 시대에 정의의 깃발을 높이 세워주셨던 리영희 선생님!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진실과 정의를 희구하는 동시대인들에게, 의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게 만들었던 리영희 선생님!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자 삶의 좌표였던 바로 그 리영희 선생님이 먼 길 떠나셨습니다. 글자 한자 허투루 쓰지 않았고,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허위와 불의, 굴종을 참지 않으셨던, 청죽 같던 선비와 그의 시대가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냥 슬퍼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선생님이 평생 맞닥뜨렸던 그 야만, 그 허위, 그 불의의 벽이 아직도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평생 괴롭혔던 민족의 모순, 이데올로기의 망령, 사대주의와 자본의 우상, 대결과 갈등의 그림자가 아직도 우리 머리 위를 유령처럼 떠돌기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주신 바다와 같은 지혜, 용광고 같은 열정, 얼음칼 같은 냉철함으로 우리는 이 슬픔과 절망의 벽을 넘어 선생님이 한평생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꿈꾸었던 그 세상을 기필코 열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통절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마음속에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곧은 비석 하나 세워야 합니다.

 

그 비문에 우리 마음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 민족의 분열을 평화적인 통합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전진하는 민주주의로, 가난한 사람의 고단한 삶을 고르게 잘사는 삶으로, 바꾸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며, 아름다운 민주사회를 더불어 꽃피우겠다고 새겨야 합니다.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훈훈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불끈 솟구치게 하던 리영희 선생님. 이제 당신 평생 짊어졌던 그 무거운 짐을 남은 우리들에게 내려놓고 깊이 영면하소서!


2010년 12월 08일 (수) 11:17:45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 고 은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지금 만인의 입 하나하나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캄캄한 슬픔으로 울먹이는데
마음 한쪽 가다듬어
이 따위 넋두리 쓸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만인이 선생님이라 선생이라 고개 숙이는데
당신께 형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이제 막 이 이승의 끝과
저승의 처음이 있어야겠기에
황진 몰려오는 날
돌아봅니다
당신의 단호한 각성의 영상
당신의 치열한 형상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선생 병중 자서전도우미 ‘인연’…기억력과 정신력 감탄스러웠다

 

무교동 뒷골목에 식당 이름으로는 생소한 ‘레지스탕스’가 문을 연 것은 1971년이었다. 주인은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1963년 대선 직전 학원사찰 목표의 극우청년 비밀조직) 폭로로 유명했던 송철원 선생. 군부독재 및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합동통신 리영희 외신부장이 해직당한 때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에 이어 두 번째로 해직된 이 기자는 줄창 ‘레지스탕스’에서 주사 한번 하는 일 없이 밥 대신 술을 즐겼다. 외신부장 시절에 인사드린 적이 있었던 내가 월간 <다리>에 실을 원고를 청탁하러 갔던 곳이다.

 

중국 혁명을 다룬 명문인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가 인연이 되어 리 선생님은 ‘으악새 모임’의 일원이 되신다. 이 모임엔 <다리>의 고문 김상현 전 의원과 발행인 윤형두 사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국제앰네스티 한국본부를 창립했던 윤현 목사, 작고한 장을병 전 총장, 이상두 선생과 말석엔 최연소인 필자도 끼어 있었다.

 

뒤늦게 한완상 전 부총리까지 가세한 ‘으악새’들은 모두 고단한 처지였지만 신명떨이 술판을 정기적으로 벌이곤 했는데, 어쩌다 가무음주가 가능한 곳으로 가면 리 선생님은 “부르주아적인 퇴폐”라며 가무보다는 음주에 전념하시곤 했다.

 

그렇다고 가무에 소질이 없진 않았던 것이 심포지엄이나 각종 행사 뒤풀이에서 어깨춤 독무와 특유의 기발한 유머를 쏟아붓는 선생님에겐 북방 남성다운 한량 기질이 넘쳤으니 말이다. 고 박현채 교수가 ‘말갈족의 추장’이란 별호를 부여하지 않았던가.

 

1980년대에 한길사가 유행시킨 역사 문학기행이 ‘운동’으로 이어져, 월간 <사회와 사상>이 1988년 9월에 창간되었다. 리영희·강만길 선생님과 고 박현채, 김진균 선생님, 그리고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는데 세상을 경악시킨 리 선생님의 각종 논문에 얽힌 비화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86년 박원순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원경 스님, 서중석 교수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역사문제연구소를 열었을 때나,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 일을 맡게 되었을 때도 나는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더 남달라진 것은 지난 10년간이다. 1962년 제기동에 처음으로 단독주택을 가지게 된 선생님은 화양동을 거쳐 1994년 산본 수리산 밑 아파트로 이사하셨는데, 그 이듬해에 나도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10년간 선생님과 한동네에 살았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선생님이 위기를 막 넘기셨을 무렵,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언제 다시 건강이 악화될지 모르는 선생님의 자서전 도우미로 나를 지목했다.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었다. 하루 2시간 대화가 가까스로 가능했던 상황에서 선생님 댁과 우리 집을 번갈아 오가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30분 말씀하고 1시간 쉬다가 그대로 중단해야 되는 날도 많았다. 건강은 여의치 않았지만 기억력만은 비상하셨다. 선생님의 모든 저서와 찬찬히 대조를 해봐도 틀린 데가 없었다. 대담 이후가 더 놀라웠다. 아직 젓가락을 잡기도 어려운 손놀림으로 녹취 자료를 교열하시는 선생님의 인내와 정신력은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마치 새 저서를 집필하시듯이 2년에 걸쳐 수정, 재수정하셔서 탄생한 게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대화> 출간 이후 선생님은 환후를 털어버리고 회복하셨다. 얼마 전까지 선생님은 체중이 늘어 걱정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다. 손수 운전대를 잡고 가까운 온천장과 서울 나들이를 하시는 모습에 <대화> 속편을 직접 집필해보시라고 권할 정도였다.

뜻밖의 입원 소식을 듣고 아드님이 근무하는 유성의 한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만 해도 복수가 차오른 괴로운 몸으로 시국을 개탄하며 세상에 독침을 놓으시던 선생님.

 

병실에서 의식이 가물거리는 선생님의 작고 메마른 손을 잡은 사모님이 “이 작은 손 하나로 그 오랜 세월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렸다우”라며 “아이들이 ‘아버님, 그 많은 지식, 멋진 영어 우리한테 물려주고 가시면 안 돼?’ 했었다”는 말씀하실 때 목이 메었다. 갓 리모델링한 아파트에서 그리도 즐기시던 수리산 산책으로 1년만이라도 더 사모님 곁에 쉬시다가 가실 수 있었다면….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고 리영희 선생 영전에 / 백낙청
곧은 선비이자 따뜻한 인간이던 선생님... 당신의 희생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결국 이렇게 떠나십니까. 중풍으로 두 번씩이나 쓰러지고도 재기하셨고 간경화로 복수가 찬 상태로도 한참을 꿋꿋이 버티셨는데, 드디어 저희들과의 인연을 마감하고 떠나시는군요.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황망하고 서럽습니다.

 

선생님은 겨레가 남의 종살이를 하던 시절에 태어나서 일제 말기의 험한 세월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로 이어지는 시대를 사셨습니다. 일단 민주화가 된 뒤에도 정의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남북의 화해를 두려워하는 훼방꾼들이 선생님을 괴롭히기 일쑤였습니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시대는 의로운 인간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고, 시대와의 불화와 그에 따른 온갖 수난을 마다않은 분이 당신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감내하셔야 했던 거듭된 구속과 투옥과 해직의 이력을 여기서 굳이 나열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중년까지도 살림살이는 늘 쪼들렸고,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직위조차 당신께만은 안정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한 치의 타협 없이 올곧은 선비와 지식인의 길을 고집하셨으니 선생님 자신의 고난도 고난이려니와 식구들의 고생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그런 비통한 이야기만 하지는 않으렵니다. 선생님이 사신 세월이 비록 모질고 험난했으나 동시에 당신이 외치신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는 수많은 독자들과 당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잇따라 나오는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분단의 제약 속에서도 민주화를 달성하고 민간통일운동의 공간을 쟁취하는 한국 현대사의 일대 장관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선생님이 계셨고 선생님의 고난이 보람을 찾았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고난의 행적과 서릿발 같은 바른말의 유산 외에 따뜻한 인간 리영희의 기억을 남기고 가십니다. 당신은 결코 맷집 좋은 투사가 아니었고, 우스개 잘하고 벗들과 놀기 좋아하며 다정다감하고 때로는 턱없이 천진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단지 거짓과 속박과 폭력을 뼛속까지 싫어했고 거기에 눈 감고 입 다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온갖 싸움에 시달리고 자유생활을 박탈당하기도 하셨습니다만, 싸움은 언제나 마지못한 싸움이요 빼앗긴 것은 누구 못지않게 즐길 줄 아는 생활이었기에 당신의 헌신이 더욱 값졌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목소리가 더욱 심금을 울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잘 모르는 선생님의 또다른 일면은, 이런 싸움과 즐김을 모두 여읜 종교의 세계로 깊숙이 찾아들려는 갈망을 늘상 품고 계셨던 점입니다. 민주화로 시대현실이 조금 덜 각박해지면서 당신께서는 불교계와 여러 인연을 쌓으셨고, 뇌출혈 이후 절필을 선언하시고는 종교적 성찰에 한층 골몰하셨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험난해진 현실은 선생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현실만 탓할 게 아니라 우리 후진들의 책임도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오래오래 살아 계시기만 해도, 병을 달래면서 의연하게 견디시기만 해도 우리 사회의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으련만, 여전히 선생님이 앞장서서 세상을 꾸짖고 우리의 답답함을 달래주기를 바라는 후진들의 과욕과 게으름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생님,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실제로 오늘의 현실은 선생님이 힘겹게 추구해오신 길에서 너무나 엇나가고 있습니다. 병상에서도 파시즘의 복귀를 경고하고 나라가 다시 남의 식민지로 떨어질까 염려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삶이 헛되지 않으셨기에, 못난 후학들이지만 저희 또한 당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는 백여 년 전과는 판다른 역량을 지녔고 파시즘을 그리워하는 무리가 적지 않아도 저들이 끝내 성공할 확률은 태무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대명천지가 활짝 열릴 때를 앞두고 낮도깨비들이 활개치는 마지막 굿판이 벌어진 형국입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큰 몫을 당신께서 해주셨고, 덕분에 밝은 세상 여는 일을 한결 수월케 해놓으신 것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이제야말로 온갖 시름과 애착을 다 여의시고 고이 잠드시옵소서.

2010년 12월 9일 불초 후학 백낙청 올립니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창작과비평> 편집인



리영희와 나 / 김삼웅

진실만을 좇았던 투사의 삶, 그 불꽃 꺼지지 않을겁니다

 

김수환·노무현·김대중·법정·리영희, 위정자의 덕이 부족해서일까요 민초들의 복이 없어서일까요. 믿음과 경애의 분들이 줄줄이 떠남에 가슴아팠는데 선생님마저 가시다니요. 병환에 위중하셨지만 그리 빨리 가실 줄 몰랐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본 30여년, 한결같았습니다. 오직 시선을 역사에 맞추고 고난의 길, 고통의 삶을 의롭게 살아오셨습니다. 세월의 나이테가 두껍게 쌓여도 고목이 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이성으로 거목의 청렬한 모습이었습니다. 광신적 반공주의와 맹목적 냉전사상을 비판하고 민족분단의 영구화 정책을 반대하면서 힘든 세월 우상들과 싸웠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 가길 밥 먹듯이 하면서도 신념을 지키고 삿된 쪽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속물적 귀족언론 간부들이 정관계를 좇아다니며, 혹은 언론사의 터줏대감이 되어 지성을 농락할 때 선생님은 감투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은 단순하게 생각은 깊게”란 에머슨의 철학을 가훈삼은 담백한 삶이었지요.

 

나이 60이 돼서야 온수가 나온 문명의 혜택을 입은 ‘후진’, 잘나가던 기자 신분에도 아버지 회갑을 차려드리지 못한 ‘무능’, 감옥에서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 자식들에게 외식 한끼 사주지 못한 ‘청빈’의 길을 걸으셨지요. 그러면서 한국 쪽을 향해 침 한 번 뱉지 않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지은 죗값으로 홀로 장학금을 보내셨지요.

 

» 1989년 8월 방북 취재 계획을 이유로 구속돼 5번째 옥고를 치르다가 집행유예로 출감한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사 고문에게 부인 윤영자씨가 두부를 먹이는 ‘액땜 행사’를 하고 있다.

 

4월혁명 때 언론인으로서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고, 시민들과 경무대 앞까지 시위하고, <워싱턴 포스트>에 한국 실정을 기고하면서 ‘1인분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셨지요. 박정희의 비정을 샅샅이 고발하고 신문사에서 쫓겨나서 월부책 장사를 하면서도 펜을 굽히지 않으셨지요. ‘광주폭동’의 배후로 지목돼 혹독한 시련을 겪고도 뜻을 바꾸지 않으셨지요.

 

민주화에 땀 한방울 보태지 않은 언론·지식인들이 민주화에 무임승차하며 기세도명할 때도 양지를 지향하지 않으셨습니다. 비판적 목소리를 잃은 적이 한순간도 없었지만 자신이 정치화되지는 않았지요. 그 때문에 선생님의 글에는 정의가 샘솟고 말씀에는 진실이 꿈틀거렸습니다. 그만큼 말과 글의 생명이 깁니다.

 

흔히 냉철한 이성주의자, 완고한 합리주의자들은 차갑고 쌀쌀한 데 비해 선생님은 정이 깊고 배려하는 마음이 웅숭깊었습니다. <김구 평전> <신채호 평전> 등을 보냈더니 꼼꼼히 읽으시고 몇 군데 지적을 해주시는 자상함, 환중에도 후배들에게 ‘떨림체’로 꼭꼭 저서에 서명을 해주시는 정성을 후학들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몇 해 전 건강상 이유로 절필을 선언하신 기사를 보고 외람되이 ‘리영희 생제문(生祭文)’을 신문에 썼더니, 과분하다고 겸연쩍어 하시던 천진한 모습, 다시 평전을 쓰겠다 말씀드렸더니 “내 어찌 그분들의 반열에” 하시며 만류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곡필을 반성하지 않은 언론인들이 다시 제 세상 만난 듯이 어용의 칼춤을 추고, 반세기 전 냉전의식에서 사고가 멈춰버린 수구 지식인들이 새 완장을 차고 설쳐대는 우상전성시대에 선생님마저 홀연히 가셨으니, 이 땅 언론·지성의 무대는 당분간 저들의 춤판이 되겠지요.

 

지식인은 인간 정신의 심해를 탐사하는 잠수부인 동시에 거리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그 말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고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는 치열한 글쓰기 정신, ‘지식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신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결곡한 삶의 궤적과 늠연한 선비 같은 마음결, 남기신 많은 글의 뜨거운 현재성을 잇고자 하는 후학·후배들이 많습니다. 셈해지지 않은 더 많은 독자가 있습니다. 남기신 이성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만대에 드리울 이름이니, 누가 공께서 죽었다 하랴, 늠름하여 여전히 살아있는 듯한데.”(주희의 비명에 쓴 양계초의 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리영희 평전> 저자


 

자유인 리영희

 

부음을 듣고 내내 마음이 울적하다. 육친도 아니고, 특별한 사적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장일순,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만, 그때에 비해서도 상실감이 더 크다. 연평도 사건 이후 더 급박해진 위기상황 때문일까. 십년 전 서해상에서 남북간 충돌이 발생했을 때 ‘북방한계선’의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주신 선생님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 않았을까.

 

서둘러 빈소를 찾고 싶었으나 자신을 광고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을 것 같아 미루고, 대신 오랜만에 선생님의 책을 몇 권 꺼내서 두서없이 읽기 시작했다. 이내 특유의 치밀하고 견실한 문장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행복을 누렸다. 낯익은 문장이 대부분이지만, 다시 보니 의미가 새롭고, 세월에 관계없이 지금도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 표현과 생각이 풍부했다.

 

리영희는 탁월한 언론인,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내가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힘차고 정밀한 문체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 세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직업적 문필가들의 문장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아니었다. 새 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한다는 글들이 매우 비논리적이거나 감상적인 문체였다. 그 상황에서 리영희라는 한 외신기자의 문장은 나와 같은 문학도가 질투를 느끼며 흉내를 내고 싶은 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문장에는 지적 태만과 후진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이 없었다.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사태의 근저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강인한 지적 체력에서 리영희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글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니라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뒷받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경미 교수의 말처럼 “그 일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결정판이자 사회적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의 생애는 가장 수준 높은 지식인의 일생이었다. 지식인이란, 리영희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자주적 정신과 양심에 의거하여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충성하는 ‘자유인’이다. 근 50년에 걸친 치열한 언술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끊임없는 수난은, 본질적으로 이 자유인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인간적 위엄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리영희에게 그것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억누를 수 없는 생리적인 욕구였다. 군사통치하에서 그는 무엇보다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노예의 삶이었다.

 

그러나 리영희가 바란 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으나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용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어디서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몰상식과 비이성이었다. 민주정부 십년 동안에도 그는 권력에 비판적이었다.

 

리영희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철저한 무사(無私)의 정신이다. 20대 통역장교 시절 진주기생 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지적·정신적 강인성을 뒷받침하는 근본 에너지가 무엇이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근원적 겸허함, 소박함이었다. 비슷한 연배였던 장일순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리영희였다. 장일순과의 교유 탓도 있겠지만, 만년에 이를수록 리영희는 ‘문명’의 위기 증상에 예민한 관심을 드러냈다. 부탁도 드리지 않았는데 <녹색평론>에 원고를 자진해서 보내주신 것 등은 그런 관심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리영희라는 위대한 정신이 남겨놓은 사상적 유산은 크고 깊다.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


 

리 선생이 가르친 길

 

내가 리영희 선생에 대해 처음 잘 알게 된 것은 1979년 말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 출판 건으로 체포됐을 때였다. 나는 당시 <일-한 연대운동 뉴스>에 ‘진실이 궤변으로 보일 때-이영희와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 뒤 1980년 <월간 대화>의 논문집을 편집할 때는 선생의 논문 ‘광복 32주년의 반성’(1977년 8월호 게재)을 선별해서 내가 번역했다. 그 논문은 엄정한 자기반성의 주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식민지주의와 제도가 우리들을 부정했다. 그 부정을 지금부터 다시한번 우리들의 의지로 내부적으로 부정하는 데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선생을 정말로 존경했다. 그러므로 1984년 말 선생이 출국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굉장히 기뻤다.

 

내가 일하는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외국인 연구원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추진했다. 내가 선생의 숙소가 정해진 도미사카의 기독교센터에서 기다리고 있자 선생은 부인과 함께 도착하셨다. 나는 전설적인 불굴의 투쟁하는 지식인과 대면했다. 이 선생님은 딱딱한 얼굴을 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했으나 얼굴에 웃음이 터져나오자 친절하고 개방적인 인품이 전해졌다. 숙소 근처의 술집에 가서 선생과 술을 마셨다. 선생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일본 정치인의 망언은 매섭게 비판하셨으나 일본인에게는 반감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에 대해 그리움을 담아 말씀하셨다.

 

<한겨레> 신문이 북한에 특파기자단을 보내는 일을 선생이 고안하셔서 나에게 협력을 요청해 야스에 료스케(전 <세계> 편집장·이와나미서점 사장)씨에게 부탁했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이야기였다.

 

선생은 또 나에게 베트남을 방문해보고 싶다며 베트남대사관과의 가교를 요청하셨다. 일등서기관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본국에 연락해주게 됐다.

 

1989년 봄 베트남으로부터 받아들이겠다는 연락이 온 직후, 선생은 기자단의 방북계획 건으로 민주화된 한국에서 체포됐다. 선생이 결박된 모습을 신문에서 봤을 때의 충격과 슬픔은 잊을 수 없다.


1990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갈 수 있게 됐다. 방문 첫날 선생이 나를 만나러 롯데호텔에 와주셨다.

 

그때부터 20년간 한국에 가면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자동차 운전을 배워서 나를 태우고 한강을 보여주셨다. 그때 “이제 선생이라 부르는 것은 관두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친구로서 사귀자는 생각이었다.

 

위안부 문제(일본의 민간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해 군대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해주자는 방안으로 와다 교수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로 한국의 지인들과 긴장관계가 됐을 때 선생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조언하셨다.

 

선생이 저작집을 내시고 이제 집필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직 선생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계속 발언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의 부음을 듣기 전날 나는 다시 선생의 북방한계선(NLL)에 관한 저명한 논문을 다시 읽고 병상에 있는 선생을 생각했다.

 

오늘 선생의 1974년 말씀이 상기된다. “인간 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디에서든 독선에 대한 회의가, 권위에 대한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오랜 투쟁의 반복이다.”

 

선생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다”라는 소년의 용기를 칭찬하기보다 그 소년이 갖고 있던 사람들의 ‘인간적 타락, 사회적 타락, 지적 후퇴’를 고발해 마지않았다.

 

나는 숙연하게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우리들은 선생이 가르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해도.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야만의 시대’에 맞선 ‘이성의 시대’ 개척자

 

리영희 ‘정론직필’ 여든한해의 삶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지난 5월 위중한 중에도 딸에게 구술한 <한겨레> 창간 22돌 격려 메시지에서 리영희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자신의 퇴임사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이 19세기 말 풍자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한 장군을 존경하진 않는다며 그는 “20여년 전의 상황과 같은 험난한 현실”이 다시 찾아왔는데도 “여러분과 동석하지 못함을 몹시 슬퍼한다”고 했다.

 

그가 ‘야만의 시대’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미몽을 깨운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1999년 <연세대학원신문> 조사 등)이요,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한 자들에겐 ‘의식화의 주범’이었던 리영희는 마침내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대화>, 2005년)

 

대한민국 지성의 코페르니쿠스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현실 발가벗긴 지적 충격 “좌우를 뛰어넘는 재산”

 

40년 전에 리영희는 상식조차 범죄가 되는 이 땅의 현실을 ‘조건반사의 토끼’에 비유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중공(中共)’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 등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조건반사의 토끼들. 1970년대 한국 사회에 강력한 지적 충격파를 가하며 리영희의 존재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첫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 재수록된 ‘조건반사의 토끼’(1971년 발표)에서 그는 토끼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의 글에서 ‘중공’ 대신 ‘북한’을 넣어보라. 지금 우리는 과연 그 토끼장에서 벗어났을까. 그 글을 쓸 무렵 그는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가담했다가 언론사에서 두 번째 강제해직을 당한 터였다. 이듬해(1972년)에 박정희 유신독재체제가 시작됐고, 그 3년 뒤 <전환시대의 논리>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발표해야 했던 코페르니쿠스처럼 역시 ‘가설의 해설서’임을 서문에 적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1977년에 나온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토끼장에 갇히기를 거부한 그를 반공법의 이름으로 2년간 감옥에 가두는 구실이 된다. 그리고 1980년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 그해 다시 교수직에서 해직(1976년에 1차 해직),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반통일적 교과서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구속, 1989년 <한겨레> 창간기념 북한취재단 방북기획 건으로 구속 등 모두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1000일을 넘긴 세 번의 징역살이…. 그 후유증으로 그는 쓸개를 떼어내야 했고, 만성기관지염으로 고생했으며, 성한 이빨이 없었다. 2000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마비가 돼 고생하다 최근 간 기능 악화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저물녘까지 꼿꼿 ‘사상의 은사’ 시장·냉전 모순 집요한 비판
그를 두려워한 자들에겐 “의식화 주범” 공격받기도

 

1968년 소설가 선우휘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자마자, 외신(국제)부장을 맡고 있던 리영희를 난데없이 조사부장으로 발령냈다. 1년 뒤에는 직제에도 없던 심의부라는 걸 만들어 다시 거기로 보냈다. 나가라는 얘기였다. 사표 제출을 거부하는 그에게 선우휘는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부의 언론사 외신부장들 현지시찰 주선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고 회사와 정부의 반공정책에도 어긋난다며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통고했다. 이후 거듭되는 언론사·교수직 해직의 시작이었다. 그 사건 뒤에는 특별대우를 약속하며 리영희에게 베트남행을 요구한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그 4년 전인 1964년엔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비동맹그룹)가 남북한을 동시 초청해 유엔 동시가입 가능성을 토의할 것이라는 특종을 썼다가 ‘국가기밀을 누설한 이적행위’(반공법 위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61년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첫 미국 방문 수행기자로 갔다가 도중에 본국으로 조기소환당했다. 역시 특종보도 때문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박정희-케네디 회담에서 미국이 군사원조도 하고 경제원조도 하고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해주기로 했다는 ‘박정희 외교의 대성과’를 선전했을 때, 리영희는 케네디 쪽이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조속한 한-일 국교 정상화, 베트남사태 협력 등을 촉구했다는 ‘놀라운’ 내용을 타전했다. ‘특종 기자’, ‘진짜 기자’ 리영희의 특종 행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오랫동안 미신처럼 남한 사회에서 믿어오던 ‘허위’와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정치적·사상적 우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라고 했고, ‘리영희 저작집’ 마지막 제12권 <21세기 아침의 사색>(2006년), 50여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와 집필 생활의 마지막 마무리이기도 했던 그 책에서도 말했다. “난 휴머니스트입니다. 인도주의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이고, 덧붙인다면 우상파괴자!” 그렇다. 타협을 몰랐던 선비 리영희, 그는 한국 현대사 최강의 우상 파괴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이었다. 그를 가둔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그 자신을 일평생 고통 속에 몰아넣은 괴물은 ‘진실’이었다. 그 빛에 비춰 보면, 그의 생애를 관통했던 고난이 곧 그의 영광이었다.

 

해직기자, 저항교수, 실천지식인

‘진실’을 썼다는 이유로 광주항쟁 배후 혐의로 다섯번 구속, 세번의 징역

 

리영희는 1929년 금광으로 유명했던 평안북도 운산군의 북진면이란 외진 곳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로 자란 곳은 5살 때 영림서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옮겨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이다. 김소월이 “물로 사흘 배 사흘 … 산너머 먼 육천리”(<삭주구성>)라고 노래했던 대관은 말년의 그가 “오늘까지도 해가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추억”(<역정> 1988년)이 서린 고향이었다. 거기에 남은 형과 작은누이를 그는 끝내 이승에선 다시 만나지 못했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초등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공립공업학교 전기과에 들어갔다. 동창도 친구도 없이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외로운 그 시절, 오직 스스로를 단련하고 키워야 했던 고달픈 서울 유학생활이 연줄을 거부하고 타협을 물리쳤던 나중의 ‘외로운 호랑이’ 리영희의 탄생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1946년 그가 국립해양대학 항해과(2기)를 택한 것도 그런 간난과 무관하지 않다.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가 부담한다는 모집공고를 보고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재학시절 ‘여순반란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백범 김구에 경도됐던 리영희는 졸업 뒤 친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경북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가 됐으며, 전쟁이 터진 뒤 영어교사를 우대한다는 미군 상대의 연락(통역)장교 모집에 응했다. 이후 7년 백발백중의 권총 명사수였던 그는 군의 부패와 폭력, 병무행정의 난맥상, 미국의 이면을 무참하게 경험하면서 “국가관과 전쟁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 앞으로의 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에,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리영희가 언론사 기자가 된 계기는 말년 통역장교 시절 부산 양정동의 8평짜리 셋집 변소에서 우연히 신문 밑바닥 기자모집 광고를 본 것이었다. 1957년 리영희는 남다른 영어 실력을 밑천 삼아 당시 한국 최대 통신사였던 <합동통신>에 입사했고, 통신사 일을 하면서 1959~61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의 통신원(4·19혁명 전까지는 익명)으로 활약했다. 지금도 <워싱턴 포스트>를 뒤지면 나오는 그의 기사들은 미국 사회에 당시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이승만 독재정권 치하의 한국 실정 제대로 알리기를 한 셈이 됐고 그것은 이승만 하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활약 덕에 1959년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귀로에 들른 일본 도쿄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들 중의 하나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장지락)의 생애를 담은 그 책은 리영희가 본격적인 중국 연구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야만의 시대’에 맞선 ‘전사’, ‘의식화의 교사’가 됐지만 리영희는 `타고난 투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은 결코 아니었다.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비례한다”는 영국 속담까지 인용할 정도로 시끄러운 것을 못 견뎌 하고 행동의 절제를 미덕으로 안 그는 자신이 소심한 사람이라며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문익환 목사처럼 낭만주의자가 못 되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다만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대화>) 그는 결코 대세나 주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주류가 아무런 근본적 인식 없이 그냥 거죽만 보고 한 방향으로 쏠릴 때 나는 항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인터뷰 때 리영희는 “미국이 장차 동북아에서 강대해지는 중국과, 과거 소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하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으로선 그 때문에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필요하고 남한은 거기에 ‘0.5 군사국가’로 덧붙이려 한다. 특히 강대국으로 행세했던 일본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지극히 강하다. 지금의 이런 동북아 상황은 1930년대 초와 아주 흡사하다”는 준열한 정세인식과 함께 그들에게 동조하는 국내 기득권세력의 지배욕을 비판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정신은 쉬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이 1980년 1월 반공법 위반으로 광주교도소에서 2년 복역한 뒤 출소하면서 부인과 포옹하고 있다. 뒤에는 함께 마중나온 한승헌 변호사

리영희 선생이 1989년 8월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사건으로 구속돼 포승에 묶인 채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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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책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유신시대 금서 ‘전환시대의 논리’ 스테디셀러로 퍼져나가
“글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 추구에서 시작되고 그친다”

“나는 그 책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서울대 교수)

 

‘그 책’을 읽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대학 조희연 교수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했다.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아시아·중국·한국>. 리영희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 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은 1970년대 유신 전체주의 억압체제하에서 “‘전논’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졌다.”(김삼웅 <리영희 평전>) 금서가 된 이 스테디셀러는 이처럼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떠돌고 회자되면서 20세기 말 한국사회 격동을 예비했다. 87년체제와 민주정부 탄생이 상징하는 한국 민주화와 변혁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주역들 다수가 그 세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는 분명히 ‘의식화의 원흉’이요 ‘주범’이었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보도태도를 부각시키고,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미국사회를 분열과 해체상태로 몰아가던 반공주의세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의 언로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그 책 제1장은 이후 평생 변하지 않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예시였다. 코페르니쿠스처럼 ‘가설’임을 전제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그 책은 중국에 대한 접근을 축으로 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연쇄반응인 주한미군 감축, 그 자리를 대신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 그것이 야기할 한반도 정세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권력과 외세의 조종에 놀아나던 한국인들에게 토끼장에서 벗어나라고 절규한다. 그가 전한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그것은 결연하고 처연했던 그 뒤 한국사회의 변혁을 예고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선언적 머리말이 실린 <우상과 이성>(1977년, 한길사)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이후의 세상변화까지 담은 그 책의 ‘속편’적 성격을 지니면서 그 책과 더불어 리영희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32주년의 반성과 중국이란 나라,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통일문제 등을 담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이 책 두달 전에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가 나왔다. 1974년에 한양대가 설립한 ‘중국문제연구소’를 맡은 리영희의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인과의 대화>는 해외 중국 전문가들 저술의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약 2달만인 그해 11월1일 중장정보부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그 책이 판금당한 바로 그날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당국은 그 이념적 배후로 리영희를 지목했고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그를 반공법으로 옭아넣는 구실이 됐다. “1977년 11월23일 아침 7시, 나는 집에서 세 사람의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서재로 올라가 수백 권의 책을 훑어 꾸린 다음 ‘잠깐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1980년 초에야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는 이스라엘-아랍 등 제3세계로 그의 시선을 더욱 넓히는 한편, 문화적 접근단계를 넘어 군사협력체제로 나아가던 한-일 보수정권 유착관계의 진화와 이를 뒤에서 조종한 미국의 세계정책 구상 분석을 중심으로 핵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그의 ‘80년대’ 저작들이다. 이들 80년대 저작 중에서 특별한 책 하나가 그의 탄생부터 5·16쿠데타 직후 그의 30대까지의 삶을 뒤돌아본 <역정>(1988년, 창비)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말년까지 그가 여러 글과 책에서 회고하고 재인용한 그의 삶의 형적들의 원형을 이룬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가난했던 서울 유학시절, 문사기질의 그가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와 국립해양대 항해과에 들어가게 된 삶의 궤적과 백범 김구를 연모하며 4·19혁명에 뛰어들었던 얘기, 미군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한 7년간의 군대생활, 그때 목도한 군과 국가의 부패와 부도덕이 그의 인생지침을 돌려놓게 되는 과정, 언론사 입문 과정 등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장교 시절 군인들이 불쏘시개로 삼던 신흥사 목판경전들을 구한 얘기, 술 마신 기분에 호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준엄한 꾸중을 듣고 무릎꿇고 사죄해야 했던 어느 진주 기생의 기개와 인간적 무게를 보며 깨친 생각 등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自由人, 자유인>(1990년, 범우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스핑크스의 코>(1998년, 까치),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년, 삼인)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된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리영희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의 1970년대적 시선과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유지되며 종교·문화·언론·통일문제를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199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한 뒤 쓴 <스핑크스의 코>는 지식·문화·종교·예술·정서 등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 것만을 내세우며 약자에게 이를 강요한 지배적 문명, 그 폭력숭배와 잔인성, 반지성, 반문화, 몽매와 독단이 이집트 스핑크스의 코를 무참하게 뭉개버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의 한국사회와 대비시킨다.

 

2005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이다. 리영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임 교수의 주도면밀한 진행에 따라 리영희의 삶과 기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풍부하게 종합된다. 원숙과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까지 느낄 수 있는 <대화>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 세상과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당도한 변증법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

 

2006년에 한길사가 기존 저서에 담지 못한 글들을 모은 새 책 <21세기 아침의 사색>을 포함한 총 12권의 ‘리영희 저작집’을 냈는데,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1982년, 전예원)는 번역·편역·주해서라는 이유로,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범우사)와 <동굴속의 독백>(1999년, 나남) 등은 기존 저서들에 담긴 내용들과의 중복이나 재수록을 이유로 제외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리영희의 저서 : 80년대엔 핵·통일로 관심 확대, 90년대엔 ‘사회주의 붕괴’ 성찰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독재 항거에 ‘지적 대들보’로

 

“나는 그 책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서울대 교수)

 

‘그 책’을 읽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대학 조희연 교수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했다.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아시아·중국·한국>. 리영희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 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은 1970년대 유신 전체주의 억압체제하에서 “‘전논’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졌다.”(김삼웅 <리영희 평전>) 금서가 된 이 스테디셀러는 이처럼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떠돌고 회자되면서 20세기 말 한국사회 격동을 예비했다. 87년체제와 민주정부 탄생이 상징하는 한국 민주화와 변혁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주역들 다수가 그 세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는 분명히 ‘의식화의 원흉’이요 ‘주범’이었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보도태도,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미국사회를 분열과 해체상태로 몰아가던 반공주의세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의 언로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그 책 제1장은 이후 평생 변하지 않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예시였다. 코페르니쿠스처럼 ‘가설’임을 전제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그 책은 중국에 대한 접근을 축으로 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연쇄반응인 주한미군 감축, 그 자리를 대신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 그것이 야기할 한반도 정세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권력과 외세의 조종에 놀아나던 한국인들에게 토끼장에서 벗어나라고 절규한다. 그가 전한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그것은 결연하고 처연했던 그 뒤 한국사회의 변혁을 예고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선언적 머리말이 실린 <우상과 이성>(1977년, 한길사)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이후의 세상변화까지 담은 그 책의 ‘속편’적 성격을 지니면서 그 책과 더불어 리영희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32주년의 반성과 중국이란 나라,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통일문제 등을 담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이 책 두달 전에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가 나왔다. 1974년에 한양대가 설립한 ‘중국문제연구소’를 맡은 리영희의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인과의 대화>는 해외 중국 전문가들 저술의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약 2달만인 그해 11월1일 중장정보부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그 책이 판금당한 바로 그날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당국은 그 이념적 배후로 리영희를 지목했고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그를 반공법으로 옭아넣는 구실이 됐다. “1977년 11월23일 아침 7시, 나는 집에서 세 사람의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서재로 올라가 수백 권의 책을 훑어 꾸린 다음 ‘잠깐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1980년 초에야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는 이스라엘-아랍 등 제3세계로 그의 시선을 더욱 넓히는 한편, 문화적 접근단계를 넘어 군사협력체제로 나아가던 한-일 보수정권 유착관계의 진화와 이를 뒤에서 조종한 미국의 세계정책 구상 분석을 중심으로 핵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그의 ‘80년대’ 저작들이다. 이들 80년대 저작 중에서 특별한 책 하나가 그의 탄생부터 5·16쿠데타 직후 그의 30대까지의 삶을 뒤돌아본 <역정>(1988년, 창비)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말년까지 그가 여러 글과 책에서 회고하고 재인용한 그의 삶의 형적들의 원형을 이룬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가난했던 서울 유학시절, 문사기질의 그가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와 국립해양대 항해과에 들어가게 삶의 궤적과 백범 김구를 연모하며 4·19혁명에 뛰어들었던 얘기, 미군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한 7년간의 군대생활, 그때 목도한 군과 국가의 부패와 부도덕이 그의 인생지침을 돌려놓게 되는 과정, 언론사 입문 과정 등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장교 시절 군인들이 불쏘시개로 삼던 신흥사 목판경전들을 구한 얘기, 술 마신 기분에 호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준엄한 꾸중을 듣고 무릎꿇고 사죄해야 했던 어느 진주 기생의 기개와 인간적 무게를 보며 깨친 생각 등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自由人, 자유인>(1990년, 범우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스핑크스의 코>(1998년, 까치),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년, 삼인)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된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리영희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의 1970년대적 시선과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유지되며 종교·문화·언론·통일문제를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199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한 뒤 쓴 <스핑크스의 코>는 지식·문화·종교·예술·정서 등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 것만을 내세우며 약자에게 이를 강요한 지배적 문명, 그 폭력숭배와 잔인성, 반지성, 반문화, 몽매와 독단이 이집트 스핑크스의 코를 무참하게 뭉개버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의 한국사회를 대비시킨다.

 

2005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이다. 리영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임 교수의 주도면밀한 진행에 따라 리영희의 삶과 기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풍부하게 종합된다. 원숙과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까지 느낄 수 있는 <대화>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 세상과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당도한 변증법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

 

2006년에 한길사가 기존 저서에 담지 못한 글들을 모은 새 책 <21세기 아침의 사색>을 포함한 총 12권의 ‘리영희 저작집’을 냈는데,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1982년, 전예원)는 번역·편역·주해서라는 이유로,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범우사)와 <동굴속의 독백>(1999년, 나남) 등은 기존 저서들에 담긴 내용들과의 중복이나 재수록을 이유로 제외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시론] 지식인과 자유의 실천 ~ 하워드 진과 리영희를 보내며

기사입력 2011-01-14 오전 11:08:24

 

모든 개인의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 있지 않은가. 회화나 건축이 미술품인데, 어째서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 미셸 푸코

작년(2010년)에 우리는 우리시대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 두 사람을 잃었다. 한사람은 1월에 강연여행 중 숨을 거둔 미국의 역사가 하워드 진, 또 한사람은 12월에 이 세상을 떠난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였던 리영희.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각자의 주어진 사회적·개인적 현실에 대응하며 살았으나 그들의 생애가 그려 보여주는 궤적에는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흡사한 정신적 경향, 세계인식, 삶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그러한 공통성은 동시대인이었기에 물론 가능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지식인의 본분에 극히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사람은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의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또 한. 사람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온 동아시아 분단국가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지적·실천적 삶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차이였을 뿐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두 지식인의 삶에는 온갖 개인적 역경과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에서 오랫동안 축적되고, 전승되어온 보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선양하기 위한 일관된 노력의 자취가 역력히 드러난다. 지식인이란, 간단히 말하면, 보편적인 인간가치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성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식인의 일차적인 과업은 가능한 한 철저히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이 이 과업을 방기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이 지켜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식인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심히 허망하고 누추해지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하여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는 하워드 진은 뉴욕 빈민가의 유태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책 한권, 잡지 하나도 구경할 수 없었던 가난한 집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문학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성장했고, 청년기에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유럽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다음에 그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전쟁 중에 자신이 네이팜을 포함한 폭탄을 투하했던 지역을 찾아가보았다. 그때 그는 미군당국이 발표했던 것과는 달리 네이팜탄 투하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또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에 대하여 자행된 무자비한 공습이 대부분 실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군부 지휘관들의 개인적 출세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무고한 인명을 학살하고도 정부와 군부는 언제나 '불가피한 사고' 혹은 '부수적 손상'이라는 용어를 태연히 쓰면서 진실을 호도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 발견으로 '국가'에 대한 그의 순진한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옛 유럽전선 재방(再訪) 경험은 확실히 하워드 진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타고난 자질 탓이기도 했겠지만, 정의에 대한 그의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끝없는 동정적 관심의 뿌리에는 전쟁 중에, 비록 군(軍)의 명령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그가 저지른 살상행위에 대한 쓰라린 죄책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 하워드 진의 일생은 평생에 걸쳐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1960년대부터 흑인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민권운동, 여성 및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시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서는 최전선에 서서 미국의 전쟁범죄를 끊임없이 규탄했다.

베트남전쟁 동안에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하노이를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확인한 다음에, 《철병(撤兵)의 논리》(1967)라는 책을 써서 베트남에서 왜 미군이 즉각적으로 물러나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의한 침략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국정부의 논리는 패권주의적 지배를 은폐하는 기만적인 언어일 뿐이었다. 촘스키의 기억에 의하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기본적으로 범죄적이며 따라서 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발언한 최초의 미국 지식인이 하워드 진이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전쟁수행을 규탄했다고 해서, 한국의 리영희가 감옥으로 가야 했듯이, 하워드 진이 감옥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기본적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 치하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워드 진의 행동이 쉽게 용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훨씬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FBI는 그에 대한 파일을 작성하여 "국가안보에 대한 큰 위험요소"로 분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사회도 그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촘스키는 하워드 진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철병의 논리》가 출판되어 나왔던 당시에 이 책에 대한 단 한편의 리뷰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워드 진의 단호한 메시지가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늘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쩌면 일반 시민들보다도 더 국가가 만들어낸 신화(神話)나 '국익'이라는 상투적인 관념 속에 안주하는 편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영희나 하워드 진은 결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외신기자 리영희가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냉전시대의 폐색상황이 강요하는 지적 불구화와 사상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고투였고, 그 덕분에 한국사회는 적어도 정신적인 호흡정지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영희는 자주 그가 바라는 것이 단지 "상식이 통하고,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사회가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불려도 좋고, '인간적인 사회주의'로 불려도 좋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결코 도식적인 도그마에 매달려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하워드 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였으나, 그가 믿는 사회주의란 "소련에 의해서 그 이름이 오염되기 이전의"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좀더 친절하고, 좀더 부드러운" 사회를 뜻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사회란 사람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사회,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생산을 하는 경제시스템"이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생애 마지막 무렵에 행한 발언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리영희는 거의 최후의 공식 인터뷰에서 자신이 평생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었으며,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언제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하워드 진 역시 자신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느낌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말할 것도 없이, 그 희망은 '진실'의 힘에 의해 발효되고 배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식인이 진실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말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 개인의 삶을 위엄있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지식인이 자기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지식인

리영희나 하워드 진과 같은 지식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간절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그들이 보여준 강인한 정신과 양심적인 행동을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 나라 안팎의 상황은 한마디로 벼랑끝이다. 세계는 인류 전체가 합심하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고, 우리사회는 민주주의가 어이없이 망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은 단지 선거에 의해서 집권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자기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채, 시민들의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국가기구를 철저히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전락시키면서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원리인 삼권분립마저 사실상 무력화시켜버렸다. 그 결과 이 사회는 지금 행정부 수장의 권력만 활개를 칠 뿐, 독립적인 입법, 사법이 존재하지 않는 흡사 식민지사회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 정부는 연평도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지난 이십년간 애써 구축해온 남북간 화해·협력을 기조로 한 평화구조를 관리하는 데 극히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상심하고, 무력감 내지는 좌절감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질 수 있느냐며 분노와 슬픔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 이러한 무력감, 좌절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가 심각히 손상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전부 예외없이 민주주의가 회복돼야만 제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나라의 현재와 장래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4대강 보호문제와 남북간 화해·협력체제의 재구축이 그렇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현재의 집권세력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권력남용이 상당수 국민의 동조 내지는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회에서 대중의 지적 수준이나 정치적 교양에 관련하여 궁극적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학자, 전문가, 언론인, 즉 지식인들이 결국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4대강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해온 소수의 학자, 전문가들의 노고를 잊을 수는 없다. 사실 이들의 양심적이고 성실한 노력 덕분에 그나마 종교계, 시민운동가, 일반 시민들이 정부에 4대강 공사의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빠른 속도로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결국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대의견을 학계의 극히 일부 의견일 뿐이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학자·전문가치고 4대강 공사의 무모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말은 안하고 있지만, 멀쩡한 강이 단순한 수로(水路)로 변형되고 있는 이 사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목·수문학을 비롯하여 관련학계가 전부 나서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개인 자격으로, 또 학회의 이름으로 나서서 이 공사의 부당성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말해야 한다. 공학자만이 아니라 물리학자, 생물학자, 법학자, 정치학자, 인문학자들이 모두 나서서,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공사는 나라 전체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올 어리석은 만행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발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 전문가들이 말한다고 해서 귀담아 들을 권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촘스키가 말했듯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준다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무익한 노력"일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들을 마음이 없는 귀에 무슨 말을 한들 들어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발언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발언에 의해 권력자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워드 진이나 리영희가 개인적 삶을 희생하면서 '진실'을 끈질기게 천착한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자기반성을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국가권력의 남용에 의해서 우리사회에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4대강 문제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얘기지만, 4대강 공사는 대운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을 일절 거부한 채, 정부는 수질개선과 홍수방지라는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말만 되뇌며 서둘러 강과 유역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열중해 있다. 대체 강바닥을 다 파헤쳐놓고, 모래톱과 여울과 수변생태계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수질정화의 자연적 기능을 온통 망가뜨려놓은 다음에 어떻게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인가. 국민 전부를 바보로 여기지 않는다면 감히 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사라지는 농경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세월 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강변 둔치는 옥토 중의 옥토이다. 그 둔치들이 지금 무참히 잘려나가고 있다. 또한, 수많은 농지가 준설토 적치장으로 변하면서 농지로서의 기능상실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도 못 볼 노릇이다. 정부가 예상하는 대로 몇년 후에 과연 이 농지들이 농지로서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실은 매우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이라는 아마도 급조한 것이 분명한 이름으로 정부는 농지를 훼손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우리나라는 자원빈국이라는 상투적인 말은 따져보면 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자원이 없기는커녕, 우리나라야말로 원래 좋은 기후, 비옥한 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생존·생활조건이 갖추어진 천혜의 자원부국이다. 자원이 없다는 것은 예컨대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지만, 석유시대는 지금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농사도 석유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 구조가 걱정이지만, 어떻든 이 구조는 바뀌어야 할 것이지 언제까지나 석유를 믿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탈석유시대를 대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땅을 최대한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석유시대가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경제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우리의 논밭 하나하나는 그 어떤 유전(油田)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나 정부 사람들이 사태의 진상을 모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합리적인 설명을 끝끝내 거부하는 것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지식인들은 시민들을 위해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지금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합리적 의사소통 공간의 재생을 위해서 지식인들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은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민주주의의 소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에서 민주주의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회복 없이는 4대강을 보호한다는 것도, 남북간 화해·협력체제 구축을 통해서 평화구조를 확립한다는 것도 사실상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자유의 실천, 자기배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더 많은 지식인들에 의한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기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최근에 출판된 책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를 읽어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천안함 침몰사건에 관련하여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내용에 드러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온 재미 물리학자 이승헌 교수가 쓴 일기체 기록이다. 그는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 시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거의 매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매우 귀중한 역사적 증언을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과학자들이 대부분 과학연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별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국가나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과학을 단지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다운 삶에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을 보호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모략이 아니다.

이승헌 교수의 책에는 천안함 '피격'의 증거로 정부 측이 제시한 결정적 자료, 즉 '1번 표시 어뢰추진체'의 신빙성 여부를 밝히는 과학적 검토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과학계의 동료, 선후배, 스승들에게 이 작업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는 이승헌 교수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있고, 또한 그 호소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과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한결같이 동참불가라는 것이다. 끝내 답변을 주지 않고 침묵을 고집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이승헌의 실험결과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두려워서", "해봐야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답변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빠져있는 가장 큰 함정은 역시 국익이라는 관념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침묵이나 회피가 결과적으로는 '국익논리'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기는, 안락한 연구실 환경에 익숙한 오늘의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성가신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이 범인이라는 정부와 극우언론의 '결론'을 거스를지도 모를 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면 사실 불안할 것이다. 게다가 연구비 생각을 하면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승헌 교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이 문제의 '1번 어뢰추진체'가 결국은 출처불명의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용기있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해외 거주 과학자들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해외 거주 과학자라고 해서 모두 과학적 양심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늘의 현실에서 예외적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실력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승헌은 그의 일기 속에서 극히 부실한 증거를 가지고 국제사회를 설득하려 한 정부의 무모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감추어야 할 치부를 갖게 된 한국정부가 앞으로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경제적·도덕적 손실을 끼칠 것인가"라고 탄식한다. 이러한 고뇌는 정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고결한 인간이 아니면 기대할 수 없다. 상투적인 국익논리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정신적 자세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적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 일찍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서 진지하게 물었던 루이스 코저는 《지식인과 사회》(1965)라는 고전적인 저서에서 "오늘날 대학교수를 지식인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들의 시야가 너무나 좁다. 그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신랄한 말은 그대로 오늘의 한국 대학사회에 적용하더라도 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지식인이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사회적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지식인 자신이 위엄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한, 그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고자 한다면 그 자유는 실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자유의 실천이야말로 아마도 공자가 말한 인(仁)의 실천이며, 철학자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 이 글은 <녹색평론> 1ㆍ2월호에 실린 것으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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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리영희 산문선

 

인간 리영희의 속깊은 고백들 

 

1960~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를 몸으로 헤쳐내 본 적이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 ‘지식인 리영희’는 먼 이름이다. ‘시대의 스승’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어딘지 강직하고 딱딱한 느낌이 커 쉽게 다다가기 힘들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 리영희 선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선생의 사후 그가 남긴 속깊은 에세이들을 본 뒤였다.

 

지난해 12월5일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한겨레>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그가 남긴 칼럼과 에세이들을 검색해봤다. 이목을 잡아끈 것은 리 선생이 1998년 11월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리영희 교수의 못다 이룬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고향 방문기였다. “나의 북한 방문이 4년만 일찍 이루어졌어도 52년6개월간을 꿈에도 그리던 순희 누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선생의 글에는 그의 세대가 겪어야 했던 전쟁과 이산의 아픔, 그리고 혈육의 힘으로도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체제의 차이 앞에서 느낀 깊은 좌절 등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하다 돌아가셨구나?”

“아니에요. 경애하는 장군님과 당이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보내주어서 고생은 전혀 없었시요. 우리는 부족을 모르고 살았시요. 요 몇해는 조금 어렵지만….”

 

그는 자신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리고 정나미 떨어지는 조카가 전하는 누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편하게 돌아가셨다니, 다행이다”라는 말을 연발하고 만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펴낸 <희망-리영희 산문선> 속에서도 지식인이기에 앞서 한 여자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던, 그리고 감방 생활의 고통과 추위 앞에 몸서리쳤던 한 사내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의 생활글에서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것은 깔끔했던 성격의 선생이 겪어야 했던 옥살이의 괴로움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기억’이라는 글에서 그는 일제 때 형무소 사동 복도에도 있던 스팀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뜯겨 나간 것을 보고 “나는 이게 누구의 정부인가, 차라리 일제보다도 못한 정권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그곳에서 더러운 대나무 젓가락으로 콩밥을 먹고 여름엔 구더기, 겨울엔 동상과 벗삼아 한해를 나야 했던 인간적인 괴로움에 대해 쓴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상이 책상물림의 지적 허영이 아니라 현실과 부딪히고 상처 입는 과정을 거쳐 단련된 한 지성의 불굴의 의지의 산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내 윤영자와 나’는 선생이 <우상과 이성> 등을 집필한 대가로 2년 형을 선고받던 순간, 선생의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는 과정을 통해 재구성한 글이다. 그는 “(평범했던) 아내가 (강연 등에 참석해 얻는 교훈을 통해) 나의 세계로 다가오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꺼꾸로 아내의 세계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책은 지난 2005년 리 선생의 자서전적 성격을 갖는 대담집 <대화>의 속편으로 기획됐다. 엮은이는 책을 펴낸 이유로 “민족사적인 당면과제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분석력을 보여줬던 (리 선생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풍요로운 인문학적인 소양과 인간중심주의 사상이 깔려 있었음을 강조해야 할 절박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썼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참 지식인 리영희 선생의 성찰·실천

90년대 초반 학번인 기자가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입학 직후였다. 한 선배의 책선물 때문이었다. 그 선배는 딱히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지 않은, 말하자면 ‘생각있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선물받은 책은 한동안 책상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도 지정된 양서(良書)지만, 당시만 해도 리 선생의 책은 왠지 섣불리 읽어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을 풍겼기 때문이다.

1년 정도 지나 우연히 읽게 됐다. 특히 남북 군사력 비교에 관한 글이 흥미로웠다. 1980년대 들어서 이미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압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이라면 온 국민이 벌벌 떨었던 시절이었기에 수치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한 내용 자체가 충격이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전쟁이 날 거라며 라면을 사재기 하던 때가 있었는데, 기자가 라면을 사재기 안한 것은 전적으로 리 선생 덕분이었다. 북방한계선(NLL)의 존재와 그 역사성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기자의 짧은 지식의 일부분은 리 선생에게 기대고 있다.

지난해 12월5일 리 선생이 지병 악화로 타계했다. 언론의 조명이 이어졌다. 분단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 우리 시대 사상의 은사, 시대의 양심 등. 하지만 의외로 리 선생의 글을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 두꺼운 사회과학 저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리 선생의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편집한 산문집이다. 2006년 나온 12권의 ‘리영희저작집’ 중 문장이 뛰어난 대표적 산문을 골라 한권의 책으로 다시 만들었다. 산문이지만 신변잡기만 담은 것은 아니다. 민족과 역사, 인간과 사회, 문화예술, 신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섭렵했다.

첫번째 글인 ‘D검사와 이 교수의 하루’는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생생하다. 77년 반공법 위반으로 검찰에 끌려가서 공안검사와 대질심문을 벌였던 장면을, 10년 후인 87년에 회상하는 내용이다. 리 선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가는 논리를 만든 뒤 흡족해하다가, 리 선생의 반박에 흔들리는 공안검사의 표정과 심리 묘사력은 소설가를 뺨칠 정도다.

전체 6장으로 되어 있다. 1장과 5장은 개인적 체험과 정신적 이력을 다룬 글이고, 2~4장은 종교,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주제와 쟁점을 다룬 글이다. 6장은 감옥에서 기소의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상고 이유서’로 리 선생의 사상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책을 엮은 임헌영은 “이 위대한 인문주의자가 성찰하고 실천한 행로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2만2000원

김준일 기자 ant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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