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세상 이야기

금기에 도전하는 파란만장한 배우 김부선

by Wood-Stock 2010. 11. 11.

금기에 도전하는 파란만장한 배우 김부선

“촛불 50번 들었건만 돌아온 건…”

 

 

 

 

어, 이게 뭐야. 두어 달 전이다. 배우 김부선 아침방송 출연해 심경 고백, “대마초 손댄 것 평생 후회된다.” 2010년 접한 연예 뉴스 중 가장 뜻밖의 소식이었다. 마약 전력에 미혼모인 에로배우가 이제는 나이 먹어 여식 장래에 혹여 방해될까 싶어, 혹은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다 마침내 굴복해, 공개 반성한 거구만 뭐. 그리 생각한 이들 적지 않았을 게다. 6년 전 그를 만나 장시간 인터뷰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후 그의 행보를 오랜 시간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리 여기고 말았을 게다.

 

그러나 그건 내가 아는 김부선이 아니다.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눈물 흘리며 했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불새>와 <말죽거리 잔혹사>로 오랜만에 재기를 꿈꾸다 다시 대마초로 고초를 겪던 시절, 그는 아는 기자들 만나 “대마초는 마약이 아냐. 마약은 히로뽕, 코카인, 헤로인이야. 그건 내가 어릴 때 중독돼 6년 걸려 끊었어. 그때 오히려 대마초가 도움이 됐어. 대마초는 마약이 아니야. 이건 악법이야”라며 자신의 말을 그대로 기사화해 달라 했단다. 그러자 그들이 그랬단다. 절대 안 된다고. 그랬다간 큰일 난다고. 재기하고 싶지 않으냐고. 그럼 몇 년만 입 다물고 있으라고.

 

그때 그는 그들에게 이리 대들며 통곡했다 한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어디 있어? 야, 이 나쁜 것들아. 니들은 참 치사한 것들이야. 가장 진보적인 글쟁이들이, 참 비겁하구나. 진짜 꼰대들처럼 사는구나.” 그러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금기인 마약에 관한 사회인식에 최초로, 단신으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다, 그가. 근데 그런 우는소리를 했다고. 그건 김부선을 몰라도 한참 몰라 하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 촛불집회 때 거리에서다. 모두가 두려워할 때 맨몸으로 ‘대마 비범죄화’를 이 땅에서 이슈화해낸 그가, 자신의 타고난 성정과 상극에 해당되는 이 이명박 시대는, 대체 어찌 버텨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하여 배우 김부선을, 다시 만났다.

 

 

그녀와 마주 앉아 제대로 말을 섞어본 이들이라면 알 게다. 일단 입을 열면 어떤 소재라도 즉석에서 재현 마임까지 곁들여 기승전결 갖춘 하나의 콩트로 요리하는 그 특유의 극장식 화술을. 난 그걸 ‘의식의 흐름’ 활극화법이라 부른다. 무슨 액자소설 자동발생기처럼 그 콩트들이 도무지 끝도 없이, 역동적으로, 시공 넘나들며, 키워드 바이 키워드로 무한 링크되기 때문이다.

 

열이면 열, 그 휘몰아치는 입담에 취해 낄낄거리다 애초 만남의 이유는 시나브로 잊게 마련이다. 게다가 가식과 위선 따윈 지나가는 개에게나 던져주란 기세로 어찌나 있는 그대로를 거침없이 쏟아내는지, 결국 풀어놓은 이바구 모두를 지면에 옮기지도 못하고 만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감당이 안 돼서. 이번에도 삼성 이건희 회장의 인척부터 유력 정치인까지 종횡무진 거론되었으나 역시 다 옮기진 못한다. 그러다간 일이 너무 커져서. 그렇게 더 끌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치게 토로해서 고민되게 만드는 인터뷰이는 이 양반이 유일하다. 이 점 감안들 하시고, 자 가 보자.

 

단골이라는 국립극장 건물 한구석의 레스토랑에 마주 앉자마자 어찌된 거냐고 물었다. 바로 리턴 되는 거두절미 답변. “다 거짓말이야. 다 편집된 거야. 난 대마초가 아니라 강성마약 한 걸 후회한다고 한 거야. 그건 정말 무지막지하게 사람 작살내는 거거든. 히로뽕 말이야. 지난번(6년 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대목서 28년 전, 그러니까 1982년으로 단숨에 점프, 박 대통령의 아들과 당시 보사부 장관 아들과 경희대 기계체육 출신이었단 첫 애인까지 과거의 “뽕 동지들” 일거에 소환되어 한참을 등장인물로 부려진다. 시대배경이 그러하다 보니 그 틈틈이 딸의 생부까지 덩달아 불려나와 무지하게 욕먹다 퇴장당하고. 이게 바로 청산유수에 파란만장을 비빈 다음 무한 링크를 파죽지세로 걸어주면 완성되는 극장식 의식의 흐름 활극화법. 넋 놓고 듣다 20분 만에 겨우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이 편집됐냐고. 스스로 대견하다. 그 격동의 일대 구라 속에서도 질문의 논리적 순서를 기억해 내다니. 그러자 2010년으로 순간 이동한 그녀, 다시 한 번 망설임 없이 속사포다.


“대마초, 의료용으로 합법화해야 한다는 거지.(대마의 약효를 언급했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캐나다 맥길대학의 연구결과가 올 8월 캐나다 의사협회저널에 게재되었다. 만성신경통증에 큰 효과 있다고.) 그리고 단순 흡연자들은 비범죄화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지. 오바마 대통령도 대마초 비범죄화 지지했잖아. 캘리포니아에선 의료용은 이미 합법이야. 합법화 주민투표까지 한다잖아. 세계보건기구도 중독성이 커피보다도 낮고 의존성이나 내성 없다고 했어. 내가 진술할 게 있어서 남양주 경찰서에 얼마 전 갔었는데 형사들조차 수긍해요. 자기네들도 동의한다는 거야. 대마초가 마약이 아닌 거는. 자기들도 안다는 거예요.”

 

근데 왜 잡아간다고 하던가. “괜히 이의 제기하면 자기한테는 생기는 것도 없으면서 골치 아프고 시끄럽고 불이익이나 당하니까. 그냥 까라면 까는 거지. 국가보안법이나 대마법이나 간통법, 다 그런 법이잖아. 하지만 나처럼 평생 당한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대검찰청 마약반이나 국과수 같은 곳에서 대마가 어떻게 나쁜지, 정부 차원에서 제대로 연구한 적도 없어. 그냥 미국 따라 만든 법이라고. 내가 그랬어. 술·담배·커피하고 비교하자. 그래서 대마가 정말 더 해롭다면, 더 세게 벌을 줘라. 10년, 20년 감옥 가둬라.”

 

여기서 이야기는 그 불이익으로 인한 그의 궁박한 처지에 대한 하소연으로 넘어가 몇 년 전 갑자기 나타나 딸 유학시켜 준다고 했다가 또다시 잠적해버린 생부의 탈세 이야기가 디테일하게 펼쳐지다가, 못 믿을 게 남자란 키워드를 연결고리로 지난 대선 직전 만난 “변호사 출신의 피부 깨끗한” 한 정치인과의 인연 이야기로 숨 가쁘게 워프한다. 아, 이 스펙터클. 게다가 그 술회는 또 얼마나 적나라한지.

 

“총각이라는데 그 인생 스토리가 참 짠하더라고. 인천 앞바다에서 연인들처럼 사진 찍고 지가 내 가방 메주고 그러면서 데이트했지. 어머, 대선 안 바쁘세요, 하니까 하나도 안 바쁘대.(폭소) 그러고서는 같이 잤지 뭐. 며칠 안 가서. 난 그때 급했으니까.(폭소) 얼마 만인지 몰라. 내가 쓸데없이 자존심은 세 가지고 아무리 힘들어도 정말 오랜 세월 혼자 외롭게 보냈거든. 그렇게 나한테 적극적인 남자는 없었어. 진짜 행복하더라.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땐 고마웠어. 여자로서.”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전이다. “그런데 그 새끼가(폭소), 다음날 아침에 내가 해 주는 밥이라도 먹고 가는 게 내 시나리오인데 바로 옷을 주섬주섬 입는 거야. 그래서 내가 농담처럼 여우 같은 처자와 토끼 같은 자식 있는 거 아니에요, 했는데 답이 없네. 하늘이 무너지는 거지. 유부남이었던 거야, 그 새끼가(폭소). 발소리도 안 내고 도망가더라고.” 이후 갖은 곡절로 이어지던 줄거리는 그 ‘남자’로부터 다시는 정치하지 않겠단 약조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나 싶다가 결국 그 ‘남자’가 지난 지방선거 출마해 당선됐단 걸로 맺음 된다. 후, 숨차다. 듣고 보니 유명 정치인이다. 하지만 실명은 내지 말란다. 그가 가진 권력으로 자신을 괴롭힐 거라고. 그저 말하지 않고선 억울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했단다.

 

그 지점에서 스토리는 정치를 고리로 다시 한 번 “이명박 대통령 되고 나서 얼마나 촛불집회를 많이 다녔는지”로 숨 가쁘게 내닫는다. 촛불 참석 횟수 무려 50회란다. 주차비만 몇 백이었단다. “그렇게 많은 촛불과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 민주화가 이런 거구나, 직접 체험을 한 거야. 좋아졌다고 말만 했지 우리 같은 사람들 의식은 늘 70, 80년대를 살고 있었거든.” 왜 그렇게까지 많이 나갔냐. “너무 비겁한 거야. 이 새끼들이 정권 바뀌자마자 한다는 게 겨우 그따윈 거야. 부시한테 잘 보이려고, 에프티에이(FTA) 성사시키려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깐깐하게 지켜놓은 걸 말이야.”

 

 

 

그냥 참석만 하지 왜 무대 올라 발언까지 했나. “아니 참여연대 박원석씨가 한마디 해줄 수 있냐 하더라고. 처음엔 싫다 그랬지. 근데 김장훈, 윤도현도 온다는 거야. 난 김장훈이 이명박 취임식 갔다고 해서 나쁜 새끼라고 했었거든.(폭소) 그런데 온다네. 오, 멋진 놈이네. 편협하게 바라본 걸 반성하면서, 아 걔들도 와요? 그럼 제가 한번 해볼까요.(폭소) 그날이 마침 5월17일이야. 그래서 광주 이야기 하면서 지금 우리가 광장에서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그분들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김부선이가 빨갱이냐고. 아니지 않으냐고. 끝까지 잘 해보자고. 그런데 나이 먹은 여배우가 그 정도 이야기하면, 윤도현·김장훈은 아우, 엠비(MB) 죽어라,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 자식들이 한마디도 안 하네.(폭소)”

 

그렇게 촛불집회 참석하고 발언한 덕에 또다른 불이익은 없었나. “엠비시(MBC), 케이비에스(KBS) 연달아 들어왔던 드라마에서 계속 잘렸지. 그때 한참 드라마 제안 들어올 땐데, 피디와 작가가 다 알아봤는데 공식적으로 출연 안 되는 사람은 이모, 황모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직접 국장한테 갔어. 북한산 국립공원 연회비 3만원짜리 입장권 그 앞에 던지면서 그랬어. 나 이런 사람이다. 나 낼모레 50인데. 우리나라에서 영화배우 이 나이쯤 되면 호텔 클럽 다니고 골프 치러 다닌다. 하지만 나 호텔이고 골프고 다 모르고 그저 내 자식 하나 지키려고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내가 전 국민한테 대마초 피우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처벌 위주의 지금 방식은 옳지 않다고 비범죄화하자고 한 건데 이건 너무 치사하고 가혹한 거 아니냐. 그랬더니 국장이 자기 혼자 그런 게 아니래. 다른 국장들과도 의논한 거래. 아우, 비겁해서 정말.”

 

이후 다른 드라마 배역 확정됐다가 마지막 순간 엎어진 사례들이 한참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피디와 국장들의 실명들. 하도 답답해 자신이 아는 인맥 죄다 동원해 그 이유 추적했단다. 결국 친했던 한나라당 모 의원 통해 그 연유 들어본 즉, “김부선이 너무 찍혔더래. 정치적인 발언 너무 많이 해서. 그러면서 너 왜 쇠고기집회 나가서 그런 이야기 했냐고 그러더라고.” 이 대목에서 그런데 아침방송은 왜 그 발언들을 편집을 했던 거냐고, 무려 한 시간 반 만에, 이어 물었다. 다시 한 번 스스로 대견해진다. “시사프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성마약인지 연성마약인지 구분해 설명해줄 필요를 못 느꼈대요.” 그러면서 제대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내가 80년대 살벌한 전두환 시절부터 대마초는 마약 아니라고 고개 빳빳이 들었던 사람인데, 이제 와서 겨우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밥벌이나 하자고 나 자신을 부정하라고. 난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 않았다고. 그건 나에 대한 모독이야. 난 누가 뭐래도 내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았다고. 그래서 김부선이 대마초 후회한다는 왜곡기사 낸 국제방송인가, 그 가스통 언론사 고발했다고.” 그러다가 채널은 또다시 돌아간다. 노회찬 전 대표와 함께 아무도 찾지 않는 전인권 면회 간 사연부터 안티 이명박 카페에 첫 회원으로 가입한 에피소드까지 쉼도 없이 이어진다. 아, 무지하게 재밌다.

 

 

  

 

 

그의 주장은 언제나 감정적이고 일방적이며 좌충우돌이다. 그건 틀림없다. 그러나 난 대선후보의 정연한 비장 출사표는 면전에서 반박할지언정 그의 두서없는 격정은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그의 말이 언제나 옳아서는 아니다. 거기 흠결과 하자가 왜 없겠나. 허나 웬만해선 토 달지 않는다. 왜.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구현하며 육탄으로 살아내는 그가, 하도 우아해서. 그 거칠고 불안정한 액면가의 삶이, 온갖 규범과 비겁에 포박된 품위와 체면보다, 백배는 더 격조 있어서. 책 속엔 없는, 원시적이며 자생적인 진보가 당대의 금기와 벌이는 그 치열한 육박전이, 거의 장엄하기까지 해서. 게다가 그로 인한 손실은 철저히 그만의 것이었고, 그로 획득된 이익은 고스란히 사회화되어 오지 않았는가. 그 정도 쟁투 앞에서 알량한 율법과 논리로 깐죽대는 건 예의가 아닌 게다. 하여 난 언제나, 언제까지고, 편파적으로, 김부선의 편일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김부선, 만세!

 

PS - 이 뒤죽박죽 인터뷰를, 왜곡 기사와 먹튀 수컷에 작렬 직전까지 간 그의 복장에 바치는 바이다. 이상.

 

글 딴지일보 총수·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고개를 숙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고개 든 김부선




시작은 1983년이었다. 대입 재수를 하겠다며 상경했다가 패션모델로 활동하게 된 스물한살의 제주도 아가씨는, “모델 역할이니 연기를 못해도 된다”는 감독의 말에 속아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가 된다. 여기까지도 이미 스펙터클한데, 같은 해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평범했던 처녀는 졸지에 대중의 관심사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고개를 푹 숙이거나 옷깃을 잔뜩 세워 얼굴을 감추는 여느 연예인들과는 달리, 그는 경찰서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클로즈업을 들이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이상하리만치 고개를 든 여배우 김부선의 행보는 그렇게 시작됐다.

<대마를 위한 변명>의 저자 유현은 2004년 김부선을 옹호하는 글에서 그를 ‘불굴의 대마적 여배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참 얄궂게도, 벌금형으로 풀려난 이 ‘대마적 배우’의 다음 작품은 ‘말을 사랑하는(愛馬) 여인’이라는 뜻의 제목으론 심의를 통과할 수 없자 한 자만 살짝 비틀어 ‘대마를 사랑하는(愛麻) 여인’으로 심의를 통과한 <애마부인> 3편(1985)이었다. 김부선은 안소영과 오수비의 뒤를 이으며 뭇 남성들의 꿈의 여인인 ‘애마’가 되었고, 몇 편의 성인멜로물에 더 출연하며 스타덤에 올렸다. 허나 그도 오래가진 않았다. 1986년 여름, 청와대 파티에 초대받은 김부선은 “내가 기생이냐”며 초대를 거절했고, 얼마 뒤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본인은 “재벌가의 파티에는 몇 차례 갔는데 청와대를 안 갔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에게 밉보인 탓에 보복성 밀고를 당한 것이라 생각한다”지만, 세상은 이른바 ‘벗는’ 여배우의 상습적인 마약 복용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심지어 신문조차 ‘육체를 앞세운 여배우’, ‘무절제한 사생활’ 운운하며 비아냥에 일조했다.

“소위 벗기는 영화 붐에 편승, 84년 데뷔한 김부선양은 그동안의 출연작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여자가 남자를 쏘았다>, <애마부인3>, <토요일은 밤이 없다>를 보더라도 정통 연기자라기보다 육체를 앞세운 여배우. (중략) 결국 ‘김양은 무절제한 사생활과 함께 뜬구름을 쫓는 쾌락에 몸을 내던진 결과’라고 연예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1986년 10월23일, <경향신문> 김양삼 기자. ‘연예계 또 독버섯 쇼크 마약 왜 상습 복용하나’ 중)

본인은 “어처구니없이 외로웠다. 섹시한 건 연기일 뿐인데 그걸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으나, 세상은 작품의 이미지로만 그를 판단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말 타는 것 외에는 뭐 하나 연기다운 연기를 하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성인영화만 찍던 그였고, 밤에는 <애마부인> 심야 상영을 즐기다가도 낮에는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며 밤에 봤던 여배우들을 멸시하던 시대였으니까. ‘마약 하고 집단 혼음이라도 한 것 아니냐’는 비웃음을 들으며, 김부선은 1986년 처음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꿀 이들을 만난다. 건대 사태로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같은 교도소를 쓰게 된 것이다.

학생들 앞에서 김부선은 부끄러웠다고 한다. 자신은 재벌가의 파티에서 필로폰을 투약하는 동안, 누군가는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겐 생경했던 것이다. 첫 경찰 출두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청와대의 부름에 기분이 나쁘다며 ‘등청’을 거부했다는 일화만 봐도 김부선은 원래도 쉽게 수그리는 이는 아니었다. 여기에 사회를 비판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시야가 더해지면서, 자신이 옳다 믿는 사안에 있어선 좀처럼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오늘날의 김부선이 완성됐다. 과장 같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단칸방에 살던 시절 수배 중이던 학생을 3개월간 숨겨주었다거나, 여성주의 운동권 영화에 무료로 출연했던 일화는 훗날 보여지는 ‘액티비스트’ 김부선의 면모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른바 ‘벗는 여배우’의 마약 복용에 조소를 날렸지만 
그는 옳다 믿는 일에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대마초 비범죄화’ 투쟁에 나서고 ‘최진실법’ 등에도 목소리를 냈다 
‘난방비 비리’로 대중이 보낸 지지는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에게 보내는 조금 늦은 감사인사일지 모른다

연기 서적을 읽고 독학해가며 견딘 오랜 단역 생활 끝에, 김부선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다시 대중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의 팬을 자처한 유하 감독이, 주인공 현수(권상우)의 첫 경험을 앗아가다시피 하는 떡볶이집 여주인 역할에 김부선을 캐스팅한 것이다. 감독은 김부선이 몸풀기 차원으로 임한 첫 테이크에 오케이 사인을 냈고, 배우 본인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그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은 전율했다. 인터뷰가 쇄도했고, 점차 과거의 성인영화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 역할들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선덩어리 상류층 귀부인을 연기한 문화방송(MBC) <불새>(2004), 전도연의 우체국 동료 직원을 연기한 <인어공주>(2004), 정우성의 철없는 엄마 역할로 출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까지, 배우로의 재기는 순탄해 보였다. 같은 해 다시 대마초 투약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랜 무명 끝에 간신히 은막으로 복귀하려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배우라면 보통 어떤 선택을 내릴까? 어떻게든 기회를 다시 잡아보기 위해 납작 엎드리지 않을까? 놀랍게도 김부선은 선처를 요구하는 대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제청 신청을 제기하는 쪽을 택한다. 이미 세계보건기구와 수많은 학자들이 ‘대마보다 담배나 술이 더 위험하다’고 증언해 왔지만, 아무도 김부선처럼 소리 높여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하진 않았던 시절이었다. ‘죄를 지었으니 네 죄를 알라’는 세상에 대고 ‘이건 죄가 아니다’라고 맞받아치는 초유의 여배우. 그의 투쟁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한국마약범죄학회 학술이사 문성호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1976년 이후 근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론화의 포문을 연 것이 김부선이라며 감사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수많은 대중문화 인사들의 지지 속에 시작한 대마초 비범죄화 투쟁은 결국 위헌법률심판 기각과 헌법소원 기각으로 끝나고 만다. 이쯤 되면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김부선은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와 한-미 자유무역 협정 체결 반대 투쟁에 동참했고, 혼자 딸을 키우면서도 호적엔 양모로 올라가 있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되새기며 ‘최진실법’ 제정 촉구 투쟁에 나섰다. 제주 4·3 사건 때 첫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는 어머니의 아픔을 생각하며 4·3 위원회 폐지 반대에 앞장섰으며, 고 장자연씨 사건으로 연예계 성상납이 이슈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겪었던 일화들을 이야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배우를 선뜻 쓰기는 어려웠던 걸까. 2007년 <황진이>를 마지막으로 그의 장편 상업영화 출연작은 7년 가까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늘 입버릇처럼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연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김부선은, 그럼에도 자신이 보기에 정의롭지 못하다 싶은 사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싶은 사안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혔다. 왜 그렇게 싸움을 멈추지 않느냐며 자신을 비난하는 세상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일을 내 일처럼 도왔을 뿐인데, 그런 내가 생업인 연기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로 사회의 암적인 존재냐”고 반문하면서.(문화방송 <놀러와>, 2011)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념과 생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잠시 고민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곤 한다. 그리고 그게 세상 사는 법이라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요구하곤 한다. 목소리 높이지 말라고, 나라고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화평론가 허지웅의 지적처럼, 한국의 현대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은 건 많은 경우 “꼴사납게 자기 면 깎아가며” 시민의 권리를 지켜준 “드센 사람들”이다. 그러니 최근 아파트 난방비 비리 문제를 밝히려다 동네 주민과 시비가 붙어 뉴스에 오르내린 김부선에게 대중이 보내는 지지는, 어쩌면 온통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질린 사람들이 보내는 조금 늦은 감사 인사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원하는 배우의 삶을 위해서라면 한번쯤 눈을 감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꾸준히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에게 보내는 인사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55963.html


--------------------------------------------------------------------------------------------------------------------------------


벽을 뚫는 여자, 김부선




‘난방비 0원’의 현실과 투쟁하며 겪은 억울·분노·자조·슬픔·희열에 관하여 

지난가을 영화배우 김부선(53)은 한국 사회 ‘생활 진보’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공동주택 거주 인구 70%에 육박하는 한국 사회는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람은 많지만 감시가 부재한 공간이 아파트 자치단체들이다. 그곳에서 김부선씨는 난방비 비리를 추적해왔다. 배우로서 몸을 사릴 법도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한겨레>는 지난달 27일 김씨를 서울 옥수동 자택에서 어렵게 만났다. 그는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서 기자들과의 개별 접촉을 피해왔다. 구조적 문제인 난방비 비리를 외면하고 주민과의 폭행 장면만을 강조하던 첫 언론 보도에 그는 이미지가 생명인 배우로서 인격살인을 당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제 조금 용기를 낸 걸까. 김씨는 지난 11년간 서울 옥수동 아파트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와의 인터뷰 속에서 생활 진보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또 그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살필 수 있었다. 시민단체 한국투명성기구는 김부선씨를 올해의 ‘투명사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4일 발표했다. 지난달 27일 옥수동 자택 거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부선씨의 모습. 김씨는 주민과 갈등을 겪은 일을 설명할 때 힘겨운 듯 자주 눈물을 보였다.

김부선씨는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인터뷰 내내 감정의 기복이 잦았다. 난방비 비리와 싸우는 과정에서 시달림을 많이 당해 대인기피 증세까지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한 대중의 격려가 쏟아지고 있지만 김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져줄 ‘치유의 과정’일지 모른다. 맨 위 작은 사진은 김부선씨가 2012년 3월 난방 비리 관련 주민간담회를 요청하며 아파트 단지 안에 붙인 전단지.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부선씨 제공

▶ 2004년 배우 김부선을 제2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그가 고등학생(권상우)을 꾀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김부선씨의 인생 철학이 담긴 대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사는 동네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모두에 나서서 행동하는 걸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김부선씨의 말을 전하되 민감한 내용은 사실관계 확인을 거친 뒤 실었음을 밝힙니다.

“양심껏 난방비 다 내고 마을잔치 열어 화해하자”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단어는 양심 자체가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이다. 침묵하는 양심은 세상을 관조하거나 비판할 뿐이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은 부조리를 직접 대면한다. 맞서 싸운다. 상처도 입지만 주변을 변화시킨다. 연예인 김부선(53)씨는 침묵하는 양심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에 속한다.

그의 고발과 행동으로 우리 사회는 ‘아파트 공화국’의 각종 불투명함에 대한 감시의 부재를 깨달았다. 국회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입법 경쟁에 들어갔다.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외롭게 분투하던 ‘전국의 김부선’들은 모처럼 용기를 내고 있다.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한국투명성기구는 김부선씨를 올해 ‘투명사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4일 발표했다.

지난달 27일 김부선씨를 서울 옥수동 자택에서 만났다. 앞서 22일 <한겨레>에 실린 옥수동 아파트 난방비 비리 관련 기사(친절한 기자들 ‘김부선 아파트, 보일러 튼 건 귀신일까요?’)를 보고 김씨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겨레>는 경찰이 난방비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던 주민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했지만, 경찰에 ‘난방비 0원’인 사유를 제대로 소명하지 못한 옥수동 ㅈ아파트 11가구에 동 대표 등 전·현직 주민 간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열량계 조작이 실제로 존재했음이 의심되는 정황들도 지적했다. 자신의 문제제기를 진실공방처럼 다루는 듯한 언론 보도들에 김부선씨는 지쳐가고 있었다고 했다.

김씨를 만나 난방 비리를 파헤치게 된 과정 등 세간에서 김씨에게 궁금해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옥수동 아파트 난방 비리 사건에는 주민 감시기구의 부재, 김부선이라는 사람에 대한 주민들의 편견, 언론의 선정적인 접근 등이 실뭉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동호대교와 한강이 창밖으로 널찍하게 보이는 김씨의 아파트 거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첫달 관리비 고지서 받고 눈을 의심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도 우리 사회는 침묵을 권해요. 더구나 저는 배우니까 더 침묵하고 살라는 거죠. 그러면 안 돼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에 침묵하니까 세월호 사고가 생기고, 용산 참사가 생기는 거예요. 비리를 목격하면 알리고 책임자를 아웃시켜야지요.”

‘왜 아파트 난방 비리 문제를 이렇게까지 추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수 방미가 ‘김부선은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 글을 언급하자 김씨는 기자에게 반문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침묵하고 살아서 우리 사회가 좋아진 적 있나요?”

-난방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뭔가요?

“서울 옥수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온 게 11년 전이에요. 영화계 지인의 소개로 42평(138.843㎡)형 이 아파트를 샀어요. 첫달 관리비 고지서를 받고 눈을 의심했어요. 난방비가 50만원이 넘게 나온 거예요.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비슷한 평수의 집에 살았을 때 난방비가 20만원이었어요. 이웃들에게 수소문해보니 다섯 식구가 사는 앞집은 그달 난방비가 3300원, 윗집은 1만원이 부과됐더라고요.”

옥수동 아파트는 중앙난방 시스템이어서 어느 가구가 난방비를 실제 사용량보다 적게 내면 다른 가구가 난방비를 떠안게 될 수 있는 구조였다. 김씨는 동 대표를 찾아가 물었다.

“동 대표가 여기 난방비 안 내는 사람들 많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열량기 자체가 그렇다고. 그래서 제가 관리사무소를 찾아갔어요. 관리비 관련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안 주더라고요. 그때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참고 살았어요.”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2012년 1월께였나. 아파트 관리소장이 그제야 얘기하는 거예요. 사실은 ‘난방비 0원’인 가구가 100가구가 넘어 조처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9년 동안 못 밝힌 난방 비리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들은 거죠.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하셨나요?

“아파트 단지 곳곳에 벽보를 붙여서 주민간담회를 열자고 했어요. 난방비 부과 방법에 대해 논의하자고 했지요. 서울시에 진정서도 냈어요. 그러고 있으니까 성동구청이 감사에 들어가더군요. 언젠가는 결과가 나오겠지 했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집 앞의 부동산에서 감사가 끝났다는 얘기를 올해 초에 들었어요. 관리사무소에 가서 감사 자료 달라니까 ‘개인정보가 들어 있어서 안 된다’고 안 줬어요. 성동구청에 갔더니 ‘정보공개 청구하면 주민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료’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 얘기를 다시 관리사무소장에게 하니 그제야 주는 거예요.”

김씨가 살고 있는 옥수동 ㅈ아파트 단지에는 536가구가 살고 있다. 감사 자료에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동절기(12·1·2·3월) 27개월간 ‘난방비 0원’인 경우가 300건으로 확인됐다. 69가구는 난방비 0원인 경우가 2회 이상이었고, 10회 이상인 경우도 세 가구가 있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김씨는 입수한 감사 자료를 복사해 주민들에게 돌렸다. 베일에 둘러싸여 있던 난방 비리 문제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듯했다.

김부선씨가 2012년 3월 난방 비리 관련 주민간담회를 요청하며 아파트 단지 안에 붙인 전단지.

주민들은 들끓었다. 열량계는 조작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열량계의 배터리를 고의로 빼놓으면 난방비를 0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옥수동 아파트에 설치된 열량계는 검정 기준이 강화되기 이전인 2012년 7월 이전 제품이어서 충분히 조작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의 판단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흐르는 동안 기존의 부녀회나 입주자대표회의는 뭘 했나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주민 대표들이 더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런 모습이 없어요. 뭔가 난방 비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올해 2월 29명의 주민이 모여 5만원씩 걷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어요. 대표는 제가 맡았고요. 제가 성동구청도 오가고 하면서 계속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지요.”

-좀 이상한 건 주민들이 중앙난방 시스템에서 개별난방으로 전환하자고 하는데 김부선씨가 여기에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개별난방 전환에 반대한 게 아니라, 그 시기와 방법을 놓고 의견을 달리한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편법으로 난방비를 내지 않은 가구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어서 개별난방 전환 비용을 충당하거나 아파트 증개축을 하면 자연스럽게 개별난방 전환이 될 거니까 그런 방식으로 해보자는 거였어요. 개별난방 전환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비리를 덮고 급한 불부터 끄려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방비 0원’에 동 대표 등 포함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
열량계 조작 의심 정황도 지적
자신의 문제제기를 진실공방으로 모는 여론에 그는 지쳐가는 중

“절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는데 저도 경고합니다, 무고죄가 있어요 불의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비리 저지른 사람들 난방비 내세요 그걸로 떡볶이잔치 열어 화해해요”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2’ 찍는 느낌

-9월12일 문제의 폭행 사건은 왜 벌어진 건가요?

“그날 저희 단지에 두 개의 회의가 예정돼 있었어요. 하나는 제가 모임을 제안한 거고, 하나는 입주자대표회의(동 대표 중심)에서 제안한 거예요. 저는 단지 내에 안내문을 붙여서 오후 6시까지 모여 ‘아파트 증개축, 개별난방 전환 비용, 엘이디(LED) 교체 건, 구청 지원금 등을 논의하자’고 했어요. 입주자대표회의는 개별난방 전환에 대해 논의하자고 저녁 8시에 주민회의를 소집했고요. 저녁 7시30분쯤인가 제가 관리사무소에 모여 있던 주민 10여명을 상대로 설명하고 있었어요. 성동구청이 경찰에 난방비 안 낸 가구들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하려 했어요. 그때 전 부녀회장 윤아무개씨 등이 ‘개별난방 전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며 저를 막더군요. 그래서 제가 ‘뭔 소리냐. 지금은 내가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니까 개별난방 전환 회의는 저녁 8시부터 하라’고 맞섰죠.”

말싸움이 계속되던 중 김부선씨는 ‘괴물 같은 ×’이라고 윤씨 등에게 욕설을 했다. 윤씨 등 일부 주민들도 김씨에게 ‘대마초 피우는 ×’ ‘방송기자들 불러’라며 흥분했다. 결국 양쪽은 서로를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난방비 비리를 파헤치는 것에 반감을 가져온 사람들이 제 회의를 방해하려 한다고 느꼈어요. 제가 그냥 회의장을 나가버렸어요. 한 주민이 ‘저런 건 연예부 기자를 불러 방송을 다 태워버려야 해(방송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뜻)’라고 폭언을 하더군요. 연예인은 방송국이 직장이에요. 직장에서 해고당하게 하겠다는 말과 같은 거죠. 저는 인격 살인을 당하는 느낌이었어요. 아파트에서 일어난 비리들을 밝혀내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주민들에게 사과를 먼저 해야 해요. 개별난방 전환 비용도 그들이 감당해야 해요. 왜 선량한 주민들이 그 돈을 내야 합니까. 지금까지 피해를 본 것도 속상한데요. 요즘 내가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년 개봉작) 2를 찍는 느낌이에요.”

<한겨레>는 폭행 사건의 또다른 당사자인 윤씨와도 접촉했다. 그는 자신의 말은 아무것도 쓰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한겨레> 취재 결과, 폭언이 오가는 몸싸움은 양쪽 모두 벌였다. 경찰은 쌍방폭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벌이고 있다.

김씨는 폭력 사건에 대한 해명을 할 때 호흡이 빨랐고 말이 길었다.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씨가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해졌을 때 ‘그래도 폭력은 나쁘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저는 그날의 몸싸움을 후회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무조건 참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불이익을 많이 겪고 사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때리면 나도 가만 안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파트 주민 비리 파헤치는 과정에서 폭력과 폭언이 없다면 좋겠지만 그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국회에서는 몸싸움 안 하나요? 그렇지만 몸싸움이 본질은 아니잖아요. 언론들은 왜 거기에만 집중하는 거죠?”

몸싸움 사건을 다룬 최초 언론보도는 선정적이었다. 한 종편 방송사는 지난 9월15일 이를 김부선씨의 단순 폭행 사건처럼 보도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에서 김씨가 주민을 폭행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난방비 관련 문제나 아파트 증개축 문제 등에 대한 설명은 충실하지 않았다. 방송사는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지만 김씨는 배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기자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저더러 주민을 때렸는지 여부만 묻더군요. 제가 왜 이 싸움이 일어나게 된 건지 설명했지만 난방비 비리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 회의 시간에 몰려온 주민들이 제게 어떤 폭언을 했는지 녹취록도 건네줬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주민을 폭행한 것처럼 보도했어요. 보도를 늦추어 달라고 해도 부장이 보도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어요.” 이에 대해 해당 기사를 보도한 기자는 <한겨레>에 “그날 폭행 사건의 핵심은 난방비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난방비 비리를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볼 근거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김씨는 언론을 불신하게 됐다. 언론 대신 자신의 페이스북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난방비 0원 가구’ 관련 감사 자료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서울시가 뒤이어 ‘김부선씨가 제기한 난방 비리 의혹은 실제 감사가 진행된 사안’이라고 밝혀 여론은 반전됐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김부선씨가 10월27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아파트 난방 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러나 경찰은 지난달 17일 난방 열량계 조작(사기 혐의) 의심 가구에 대해 최종 무혐의 처분했다. 경찰은 보도자료에서 “옥수동 아파트 11세대(38건)는 난방량이 ‘0’인 이유가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조작’의 의심을 떨칠 수 없으나, 구체적인 행위자를 특정할 수 없는 등 형사입건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경찰 수사 결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주민들 불러다 놓고 범죄를 자백하라고 말만 하면 누가 솔직하게 말하겠어요? 난방비 0원이 나온 이유로 오랫동안 집을 비워서라고 설명했다면 전기세와 수도세도 안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또 10만원, 20만원씩 나와요. 집을 비웠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 아닌가요? 왜 형사입건시키지 않는 거죠?”

-김부선씨도 난방비 0원이 나온 적 있지요. 일부 주민들은 ‘난방비 폭로 사건의 주역인 김부선 본인도 계량기 검침량이 0입니다’라고 쓴 펼침막도 내걸었는데?

“맞아요. 2013년 초에 제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열량계에 고장이 난 건지. 그래서 제가 관리소장을 찾아가 왜 이러냐고 바로 따졌어요. 그러니까 소장이 저더러 열량계를 바로 고치겠다고 안 하고 그냥 쓰라는 거예요. 난방비는 지난해 평균 요금만 내래요. 그래서 그달(난방비 0원으로 나온 달)에는 평균 요금을 낸 거예요. 난방비를 안 낸 게 아니고요. 그걸 두고 마치 저도 난방비를 안 낸 파렴치한 주민인 것처럼 뭍타기를 하다니요.”

본질과 상관없는 비난들 난무
“누구든 자유토론 할 수 있는데 대마초 해서 얼굴 찌든 사람과 마주하며 살고 싶지 않다”며 적대감 드러내는 일부 주민들

“‘여대생 공기총 살인 사건’에서 청부살인 지시한 부잣집 사모님 역할을 배우로서 해보고 싶어
옥수동에서 그런 고관대작 부인들을 많이 만나봤기에”

‘난방 열사’로 불리고 싶지 않아

경찰 수사 결과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열량계 봉인지 관리에 대한 기록이 관리사무소에 남아 있지 않는 등 주민들을 사기 혐의로 입건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지만 ‘난방비 0원’인 이유를 경찰에 제대로 소명하지 못한 주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해 검찰과 법원에서 판단을 더 구해보는 게 좋지 않았겠냐는 주장도 나온다.

김씨가 2004년 12월9일 ‘대마 합법화를 요구하는 문화예술인 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경찰 수사가 유야무야되면, 고발에 나섰던 주민들은 이제 역으로 소송에 시달리게 된다. 신창섭 아파트선진화운동본부 감사는 <한겨레>에 “고소고발 사건 중 70~80%가 증거불충분 무혐의 처리된다. 문제를 제기한 주민은 명예훼손 피소를 당하거나 주민단체에서 배척되는 보복을 당한다”고 말했다. 김부선씨도 이미 몇몇 주민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상태다.

“경찰이 무혐의 처리한 것을 두고 저를 주민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고 하는데 저도 경고합니다. 무고죄라는 게 있어요.” 김씨는 또 한번 일전을 치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저는 불의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저를 만만하게 봤다면 잘못 본 겁니다. 저는 ‘대마초 금지를 반대하는 헌법소원’까지 냈던 사람입니다. 난방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이 양심껏 그동안 안 낸 난방비를 내고, 그 돈으로 마을잔치 열어 떡볶이 해서 같이 먹고 서로 화해하고 끝냈으면 해요.”

‘김부선 아파트 난방비 비리 사건’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김부선씨의 주장과 김씨의 뜻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주장, 그리고 경찰 수사 결과 등을 종합해 판단해보면, 이번 사건을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만 살펴보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경찰 수사 결과만으로는 이 아파트에 난방비 비리가 조직적이고 광범위했다는 증거가 없다. 주민들이 의도적으로 열량계를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열량계가 고장 났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일부는 ‘난방을 아껴 썼다’ ‘집을 비웠다’며 경찰에 거짓 해명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수사기관이 명확한 판단을 하지 않아 진실을 정확히 알 순 없다.

‘선의 평범성’과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있다. 선행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의외로 무척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러한 행동의 근원에는 그 시대 사회구조와 인과관계가 있다는 분석에서 나온 사회학 용어다. 옥수동 아파트 사건을 ‘김부선이라는 선’과 ‘파렴치한 주민이라는 악’의 대립으로 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문제를 바로잡는 대안을 고민하는 게 중요할 수 있다.

김부선씨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저는 난방 열사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제가 난방비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이고요. 소시민으로서 딸과 함께 제가 쓴 만큼 난방비 내고 따뜻한 겨울을 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아파트 비리를 막을 수 있는 감시 제도를 만들어주었으면 해요. 대통령이 비리 척결 한마디만 하면 경찰도 이렇게 수사를 종결하진 않을 거예요. 국민의 70%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어요.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입니다.”

김부선씨와의 인터뷰는 계속됐다. 김씨는 애초 한 시간 정도 난방비 문제에 대해 해명하겠다고 인터뷰에 응했으나 기자는 ‘김부선이라는 사람’을 더 탐구하고 싶다고 인터뷰를 더 하자고 청했다. 결국 그와 10시간가량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씨의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들이 많았다. 억울, 분노, 자조, 슬픔, 희열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파노라마 사진 속의 다채로운 풍경들처럼 김씨의 얼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감정이 격해질 땐 목소리가 높아졌다. 때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내 몸 한토막 한토막이 잘려 나가는 것 같아 슬퍼요.” 김부선씨는 1983년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스물네살 때의 일이다. 이어 <애마부인 3>의 주연을 맡았다. 80년대는 에로신을 가미한 성인영화들의 전성기였다.

김부선씨에게는 ‘성인영화 배우’라는 꼬리표가 오랫동안 붙어다녔다. 김부선씨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대중에게 기억되는 것이 몸이 잘려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배우가 장르를 가리고 영화에 출연하나요. 저는 예술을 하고 있는 건데 포르노 배우 취급 하는 거잖아요.” 김씨가 웃으며 말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김부선씨에게 붙어다니는 또다른 꼬리표는 ‘대마초’다. 난방 비리 문제를 지적하는 김씨에게 일부 옥수동 주민들은 ‘대마초 피우는 여자’라고 맞선다. 개별난방 전환 방식을 둘러싸고 김씨와 대립한 한 주민은 기자에게 “누구든 자유토론은 할 수 있는데 난 대마초 해서 얼굴 찌든 사람은 마주하며 살고 싶지 않다. 자식 교육에 방해된다”며 적개감을 드러냈다.

김부선씨는 아파트 난방 비리를 알리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김씨 앞에는 ‘대마초·미혼모·애마부인 배우’라는 편견의 벽이 놓여 있다. 지난달 27일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김씨가 우연히 마주친 한 주민과 서로 손가락질하며 말싸움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는 명대사

문제의 본질과 상관없는 비난들이 난무하는 것은 김씨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그만큼 뿌리깊다는 방증일 것이다. 옥수동에서 김씨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난방 비리뿐 아니라 ‘무지와 편견’이라는 숲을 거느린 거대한 산이다.

과거 김부선씨가 대마초 때문에 구속된 경험이 있는 건 사실이다. 배우로서의 삶이 끝장날 뻔했다. 2004년 김씨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이건 그가 대마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대마초를 금지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어서였다.

“대마초는 중독성이 술과 담배보다 약해요. 세계 각국에서 비범죄화 토론이 활발해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비범죄화를 지지하고 있어요. 왜 우리는 미국처럼 이러한 대마초에 대한 과학적 논의조차 하지 않는 거죠?”

1989년 구치소에 들어갈 때 김씨는 고개를 숙이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티브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죄가 없잖아요”라고 외쳤다. 대마초에 대한 확신은 그때와 같다. 쾌락을 향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김부선씨는 대마초를 피워서가 아니라 권력과 제도에 길들여지길 거부해 표적이 된 것일 수 있다. 1986년 한창 절정의 배우 생활을 이어가던 때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이 자신에게 ‘청와대 파티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여배우들이 청와대에 불려가 기생처럼 다뤄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김씨는 거절했다. 얼마 안 가 김씨는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됐다.

“저를 수사한 검사가 언젠가 한번은 교도소로 찾아왔어요.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다더군요. 그때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대마초 피운 게 무슨 죄냐’고 그러더군요. ‘아무리 마약 하는 건달들을 붙잡아도 신문에 보도되지 않으니까 저를 이렇게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욕을 엄청 해줬어요. 당신 때문에 제가 어떤 삶을 살게 됐는데….”(당사자인 검사 출신 변호사는 <한겨레>의 사실 확인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웬만한 연예인이라면 권력에 고개 숙이는 게 세상을 사는 법이라고 이해했을지 모른다. 김부선은 달랐다. 효순·미선 장갑차 압살 사건(2002년), 김선일 추모 시위(2004년), 미국 쇠고기 반대 시위(2008년), 장자연 성상납 의혹 사건(2009년) 등이 있을 때마다 거리에 섰다. 아파트 난방 비리로 세상이 시끄럽기 불과 얼마 전에도 김부선씨는 억울하게 일을 그만두게 된 경비 아저씨를 위해 대거리를 하며 관리사무소와 다투기도 했다. ‘옥수동 김 반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다. 그의 무엇이 그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일까.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갔을 때 거기에 대학생들이 들어와 있었어요. 서울대생들이 농민들이 힘들다고 곡괭이를 어깨에 멘 거를 그림에 그렸다고 빨갱이로 몰려서 들어와 있더라고요. 충격 받았아요. 엘리트 대학생들이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하면서 약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어요. 그냥 잘나가는 특권층 자제들하고 대마초나 피우면서 놀다가 어떤 돈 많은 남자 하나 잘 만나 결혼할 생각 정도 하던 저를 반성하게 됐어요.”

그는 1988년 아이를 가졌다. 당시 유명 극장주의 아들이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가진 김부선을 멀리했다. 아이를 낳아도 돌보지 않았다.

“제가 너무 슬퍼서 울고 있었어요. 엄마가 제게 ‘애아빠 찾을 생각 말라’면서 해줄 얘기가 있다는 거예요. 내 아버지가 엄마의 첫 남편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주 4·3 때 엄마의 남편을 국군이 잡아가서 죽였고 엄마는 그 이후 사람이 소중해졌대요. 악착같이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대요. 그 이야기를 30년간 숨기고 살다가 제게 해준 거예요. 그러면서 저더러 언젠가는 착한 남자가 나타날 거니 아이만 보고 살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딴마음 안 먹고 아이를 위해 강하게 살기로 마음먹었어요.”

김부선씨는 딸 미소를 낳았다. 미혼모라는 손가락질도 당당히 이겨냈다. 여배우이기 이전에 한 생명의 따뜻한 어머니임을 자각했다. 그렇게 키운 딸이 이제는 당당히 엄마처럼 영화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미소가 <응답하라 1994>에 (극 중 ‘칠봉이’의 야구부 매니저 역으로) 나왔어요. 얼마 전에는 (영화 <남과 여>에서) 공유 부인 역으로 캐스팅됐어요. 내 딸이 너무 자랑스럽고 예뻐요. 키우면서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는데 스스로 오디션 보고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요.” 김씨의 딸 자랑은 한참 계속됐다. 그의 집 냉장고에는 딸이 아이, 청소년, 어른으로 변해가던 시기에 찍힌 각각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김부선씨는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했다. 김씨는 여자친구에게 차인 고등학생(권상우 역)을 위로하는 ‘떡볶이집 아줌마’ 역을 맡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고 고등학생에게 말한다. 떡볶이집 아줌마는 과감하게 고등학생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이끈다. 이 대사와 장면은 김씨의 순간적인 재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건 김씨의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 애드리브일지 모른다.

“대본에 없는 말이었는데, 그냥 그 순간 그렇게 말하고 싶더라고요. 사실 저도 처음 대본 받고 아줌마가 고등학생을 유혹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극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고등학생도 충분히 아줌마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음 고쳐먹고 연기를 한 거죠. 제가 미혼모와 대마초쟁이라고 주홍글씨처럼 손가락질당하며 살았으니까 이런 대사도 할 수 있었던 거겠지요. 난초처럼 취급받는 여배우였다면 못 했을 텐데….”

‘배우 김부선’으로 기억되고 싶다

김부선. ‘연꽃 부’(芙)와 ‘베풀 선’(宣)의 한자를 쓴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도 아주 잘 자라 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진흙에 발을 딛고 있지만 진흙에 파묻히지 않는다. 연꽃의 특징을 ‘배우 김부선’은 기막히게 닮았다. 그렇기에 겉으로 강인한 듯 보이는 김부선씨는 속으로 많이 아프다.

힘들 때 자살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곤 한다고 한다. 옥수동 아파트 주민들과의 마찰은 힘겹다.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았지만 정작 눈을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건 그가 싸웠던 아파트 주민들이다. 옥수동에서 김씨는 외로워 보였다. 배우로서 채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영영 잊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두렵다. 사회적 발언을 할수록 대중은 열광하지만 자본은 싸늘했다.

그럼에도 김부선씨가 대중에게 기억되고 싶은 방식은 ‘배우 김부선’이다.

“‘여대생 공기총 살인 사건’(사위인 판사가 여대생과 불륜관계에 있다고 의심한 장모가 여대생을 공기총으로 살해하도록 청부한 사건)에서 여대생 청부살인을 지시한 부잣집 사모님과 같은 역을 배우로서 하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사회 고관대작 부인들의 괴물 같은 모습과 인간성을 고발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 모습을 보면서 소름 끼치게 만들고 싶어요. 올해 옥수동에서 그런 고관대작 부인들을 많이 만나봤기에 이 경험들이 곧 보석처럼 승화할 거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자살하고 싶을 때마다 저에게 최면을 걸어요. ‘부선아. 네가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이니? 진흙 속의 연꽃처럼 언젠가는 우아하게 연기로 이 세상을 고발할 때가 올 거야. 그때를 기다리자.’”

김씨는 현재 에스비에스(SBS) 주말극 <모던파머>에서 늘 술에 찌들어 사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엄마(이용녀)로 열연하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7779.html


--------------------------------------------------------------------------------------------------------------------------------


‘난방투사’ 김부선 불의에 맞선 생활진보운동가




[원희복의 인물탐구] 배우 김부선

2010년 스테판 에셀이 쓴 책 <분노하라>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전직 레지스탕스이자 외교관이던 93세 노인이 쓴 이 책은 ‘현실에 분노하라!’고 요구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약자를 억압하는 사회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하는 세력, 금권 만능에 저항하라”고 주문했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공감했고,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으로 이어졌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서 한 50대 여성이 불의에 분노했다. 아니 그의 분노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단지 그를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난방비를 내지 않는 ‘가진 자들’의 추악하고 찌질한 민낯을 까발렸다. 반발도 적지 않았다. 가진 자들은 보수언론과 합세해 본질에서 벗어난 역공을 가했다. 치열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에로배우, 미혼모, 대마초 

그는 김부선(본명 김근희·54)이다. 1980년대 한창때 <애마부인 3>의 헤로인으로 뭇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던 에로스타 바로 그다. 하지만 그는 미혼모라는 당시로선 곱지 않은 시선을 받다가 급기야 대마초를 피우다 구속됐다. 보통 사람들은 그를 ‘철없이’ 물의를 빚고 은막에서 밀려난 그렇고 그런 배우로 기억할 뿐이었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순간, 아니 그를 탐구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꼼꼼히 따져보면서 기자의 선입관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가방끈(학력)이 지성의 척도가 아니지만, 대학 문턱조차 가보지 않은(그는 제주 모슬포 대정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매우 박식했으며 논리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울음을 보일 정도로 솔직했지만 당당히 분노할 줄 아는 시민이었다. 

그는 난방비 싸움에서 예기치 않게 보수언론이라는 복병을 만났다. 그의 말마따나 “연예인에게 갑(甲) 중에서도 슈퍼갑인 언론”과 싸우기란 무척 벅찬 게 사실이다.(상자기사 참조) 그는 “내가 수년 전부터 아파트 난방비 문제를 사건화해달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모두 모르는 척했다”면서 “이제야 뻔질나게 인터뷰를 요청하는데 대부분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실 김부선씨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지금이야 미혼모라는 말이 흔하다 못해 ‘당당한 여성’이라는 뉘앙스까지 주지만, 20년 전에는 ‘범죄시’됐다. 그는 유부남인지 모르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아기를 낳았으나 버림받았다. 보통 여자 같으면 돈 많은 아빠에게 아기를 넘겼을 텐데 그는 치열한 투쟁 끝에 아기를 찾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그것도 사생활이 중요한 연예인으로서. 그는 이 대목에서 “열아홉 섬소녀가 서울 올라와 세속적인 것에 눈을 떠 돈 많은 남자 만나 잘살아 보겠다고 하다가 깨졌다”면서 “그런 달콤한 유혹, 그걸 싫어할 사람 누가 있겠나”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의 담담한 회상은 이어졌다.

“의사가 심장병으로 아이를 낳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데도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남자는 아무런 연락도 없어 혼자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엄마가 숨겨왔던 비밀을 얘기하더라. 남편이 제주 4·3 때 총 맞아 죽고, 아이 딸린 과부가 새로운 남자 만나 지금껏 숨기며 살아왔다고. 그때 엄마의 고백을 듣고 스물여덟 먹은 내가 애 하나 못 키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강인하게 살아야 한다고. 엄마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감방서 운동권 여대생 만나 ‘의식화’

돈 많고 명문대 나온 육지 남자는 섬에서 온 어린 처녀에게 몹쓸 짓을 했고, 우리 현대사도 그의 가족에게 참담한 짓을 했다. 아마 ‘가진 자’ ‘권력자’에 대한 그의 노기는 이런 슬픈 가족사가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제주 비바리답게 슬픔을 당당히 이겨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욕망 덩어리 서울땅에서 아주 추악한 사람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하지만 나는 보통 여배우처럼 우아한 척, 교양 있는 척하며 살지 않았다. 그런 불의를 못 보겠더라”고 말했다.

20년 전 당당하게 미혼모를 자처하고, 스스로 불이익을 안았다. 대마초 문제도 그렇다. 그는 대마초를 피웠다가 1989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8개월간 감방생활을 했다. 그가 감방에서 얻은 한 가지 소득이라면 사고의 변화다. 그때 감방에 신참으로 들어온 운동권 여대생을 통해 체계적인 ‘의식화’ 수업을 받았다. 그는 출감 후 쫓기던 운동권 여대생을 3개월간 집에 숨겨줬다. 당시는 수배 중인 학생을 숨겨주는 것만으로도 범인 은닉죄로 엄하게 처벌되던 시절이었다. <애마부인 3>를 촬영할 때였다. 나중에 이런 사실이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려졌다. 그때 그는 많은 여성학자, 시민운동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그때 많은 여성·시민운동가들, 이른바 ‘빨갱이 여자’들에게 역사의식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험한 육지는 순진한 19세 섬처녀를 점점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대마초를 정치권력이 대중문화 예술인을 옭아매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2004년 10월 그는 당당히 대마초를 마약으로 규정한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헌이라며 위헌법률심판과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는 “네덜란드는 40년 전부터 대마초를 합법화했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대마초 합법화를 대선 공약으로 삼았다”면서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들은 누구를 해치거나 뭘 훔치지 않는다. 단지 마음이 아픈 환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개인의 행복추구권보다 국민의 보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기각했다. 김씨에 따르면 헌재도 최근 들어 대마초 흡연이 국민의 행복추구권 범주에 든다는 쪽으로 판단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시기의 차이일 뿐 우리도 대마초를 합법화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SNS 큰손, 투명사회상 수상자로 선정

이후 김부선은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이·미선이 사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시국문제와 관련해 말을 아끼지 않았다. 진보신당 알리미역을 하기도 했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노란리본을 달고 다닌다. 자신이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기화로 그를 ‘난방투사’니 ‘생활진보’니 하는데, 그는 이미 이런 소소한 것을 넘어 기본권 신장을 위한 진보운동가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외면하는 기성언론에 대항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도 터득했다. 그는 페이스북 친구가 4600명이 넘고, 4만6000여명이 그의 페이스북을 팔로어(구독)할 정도로 SNS 상에서 ‘큰손’이다. 

그의 예명 부선(연꽃 부(芙) 베풀 선(宣))은 고향의 한 스님이 ‘기생 팔자를 면하려면 진흙 속에서 핀 연꽃같이 힘든 사람에게 많이 베풀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그는 “제 삶이 돈도 명예도 없이 허벌나게 싸우고…”라며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때 횃불을 들고 엎어버려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국투명성기구가 주는 ‘투명사회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환경재단이 시상하는 ‘2014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상을 받았다. 그는 당당히 세상을 밝히는 운동가로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슬픈 운동가이다. 에로배우‘, ’미혼모‘, ’대마초‘ 등등 그에게 씌워진 천형 같은 ’주홍글씨‘를 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절규하듯 이렇게 말했다.

“난 피해의식이 많은 여자다. 내가 노무현·김대중 지지했지만 대놓고 지지 못했다. 왜? 내가 공개적으로 노무현 지지하면 그분이 안 될 것 같았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연예인도 진보적 입장 밝힐 수 있지 않나. 그게 다양성 아닌가. 우리 사회도 외국 같이 그럴 수 없는가. 세월호 노란리본 하나 때문에 그나마 들어왔던 CF 모두 취소됐다. 왜 이러느냐.”

그는 돈 많은 찌질한 육지 남자에게 차이고, 탐욕스런 이 사회 권력으로부터 보복을 받았다. 잔인한 보수언론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지친 듯 “고향 제주에 내려가 편안한 게스트하우스 하면서 조용하게 살고 싶다. 좋은 남자를 만나고도 싶고…”라고 말했다. 우리 육지는 꿈 많던 제주 섬처녀 하나 따뜻하게 안아줄 여유조차 없는 것일까. 

“배우는 대중의 심리를 읽고 위로하는 직업”

이번 난방비 싸움에서 갑자기 보수신문과 치열하게 싸운 이유는 무엇인가.

“조·중·동은 잔인하다. 원시시대 동물 잡을 때 굴 속에 몰아넣고 연기를 피우지 않나. 사회적으로 네티즌이 열광하고, 난방투사니 뭐니 하니까 오로지 시청률을 위해 나를 인터뷰하려고 저급한 행위를 했다. 화장도 안 한 무방비 상태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걸 거부하니 ’김부선도 난방비 안 냈다더라‘라는 본질과 다른 문제를 들춰내 새로운 뉴스거리로 삼았다. 너무 유치하고 저급했다.”

연예인은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나도 연예인인데 안 싸우고 싶다. 하지만 자기네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거… 그건 못 견디겠다. 아이~× 내가 연예계에서 무슨 돈을 벌고 명예를 누렸다고….”(그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렸다)

왜 투사 칭호까지 얻은 사람이 눈물을 보이나.

“오늘 안 울려고 했는데, 난 투사도 아니고 겁도 되게 많은 여자다.” 

난방비 문제를 제기했지만 경찰은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구청 주택과에서 문제가 많은 69가구를 추려 경찰에 신고했다. 거기서 10여 세대는 공소시효 7년이 넘었고, 동 대표 등 몇몇은 변명으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경찰에서 고민한 흔적이 전직 관리소장 3명을 기소했다는 것이다. 2년 전부터 난방비리가 많아 계량기를 봉인했다. 그래서 이 69가구 계량기 봉인만 확인해보면 된다. 그런데 봉인 확인을 위해 강제로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다.”

부정에 대해 당당히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조건이다.

“연예인은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무서운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 연예인들은 공적인 발언을 하면 안 된다? 이 무슨 ×같은 소리냐, 연예인이 공인이라면 이런 공적인 일에 나서줘야지.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지. 더구나 배우는 대중의 심리를 읽고 위로하는 직업이다.”

시국 문제에 할 말은 하는 연예인들, 보복당하고 있지 않나.

“우리 사회 1%에 속하는 한 여성이 나에게 ’바보 같다.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해 언론에 찍히냐. 로비도 해야 한다‘고 하더라. 섬찍한 얘기다. 그게 우리 사회에 있는 자들의 민낯이다. 이런 소리 들으면 ’나도 저래야지‘ 하는 생각이 아닌, ’나쁜 ×들, 저것들, 언제 깨어나려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 하나라도 싸워야지‘라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이라고 보기보다 거의 시민운동가, 진보운동가 수준이다.

“그런가? 진보가 뭔가?”

세상을 좀 옳게 변화시켜 보자는 것 아닌가.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고.

“그런 기준이라면 나는 진보이다.”

이른바 의식화가 많이 됐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는 튀면 찍히고 전체주의를 요구한다. 이승만 독재, 군사독재 기간 옳은 말을 하면 잡아갔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민중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끊임없이 다양한 곳에서 김부선의 소리가 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대마초 합법화 헌법소원은 행복추구권 회복이라는 매우 선진적인 시민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용필, 싸이, 이승철 등 톱스타 대부분이 대마초로 피해 본 사람들이다. 그 스타들이 함께해주면 얼마나 파급력이 있겠나. 근데 안 해주더라. 조용필 선배, 그러면 안 된다.(조용필 이름은 꼭 써달라고 요청한다) 남자들이 모두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전인권 오빠에게 부탁했다. 전인권 오빠가 ‘나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멋진 여자가 있는 줄 몰랐다. 돕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나마 파급력이 컸다.”

제주도에서 넓은 바다를 보고 살다가 육지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너무 후지다. 너무 찌질하다. 한양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민낯이 이거였어? 에이 후진 ×들. 혼자 이러고 자위하고 논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271436331&code=960100







'Art & Culture >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문제와 독도밀약  (0) 2011.05.15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0) 2010.12.07
백제의 중국 요서진출  (0) 2010.10.13
일본의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0) 2010.08.14
민노당 대표 이정희  (0) 201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