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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독도문제와 독도밀약

by Wood-Stock 2011. 5. 15.
독도문제 빌미된 ‘친일 군인’ 박정희의 ‘독도밀약’


5·16 쿠데타 50년…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의 부끄러운 친일 행적
일본통 경제학자가 쓴 <독도밀약>…대일 저자세외교 낱낱이 파헤쳐


16일은 육군소장 박정희가 김종필 등 일단의 청년장교를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쿠데타 성공 반세기, 사망 32년의 지난 지금도 박정희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더 좋은 민주주의연구소(소장 백원우 민주당 의원)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9~10일 이틀간 자동응답방식 여론조사를 통해 990명을 대상으로 전·현직 대통령이 재출마했을 경우 지지의향을 물을 결과(복수 응답) 57.5%의 지지율을 얻어 노무현(47.4%) 김대중(39.3%) 이명박(16.1%)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박정희는 재출마시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견에서도 가장 낮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차기 대권주자 후보 지지도를 묻는 각종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에 힘입은 바가 크다.



» 박정희는 일본 극우파의 정치사상을 빌려왔다. 그는 일본 청년 장교들의 2.26 사건을 참고해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 ‘박정희 신화’의 이면


‘조국근대화와 경제회생의 지도자’라는 박정희 이미지가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색바라지 않은채 어떤 면에서는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해 일본정부로부터 자금(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조국근대화의 종잣돈을 마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때부터 14년만에 타결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타결은 일본쪽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가였다.


16일 발간되는 책 <독도밀약>은 박정희의 한일 회담을 둘러싼 저자세외교, 친일행적,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빌미 제공 행위 등 박정희의 신화 이면에 숨은 또다른 실체를 낱낱이 폭로해 눈길을 끈다.


일본통 정치경제학자가 쓴 <독도밀약>
한일회담 둘러싼 박정희의 친일행적 폭로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 다니엘이 지은 이 책에 따르면 쿠데타에 성공한 지 5개월이 채지나지 않은 1961년 11월12일 박정희는 이케다 하야토 당시 총리와의 공식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완수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은 한-일 양국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정부는 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한일 회담이 조기에 타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일문제에 대해 마음으로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의 지원 자금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보인 것이다. 노 다니엘은 “이같은 박정희의 말은 이케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뉴스였음에 틀림없었다”면서 “이렇게 양국 정상의 회담은 간결했지만 이후 국교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의 기본정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뒤이어 일본 정계거물이 한자리에 모인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 오찬 회동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바른 일본식 인사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젊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습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요.”지은이 노 다니엘은 “유창한 일본어 인사는 일국의 지도자가 아니라 후배의 그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정상회담에서 일본 지도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친일 경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한국쪽은 정상회담 만찬 자리에 박정희의 만주신경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나구모 신이치로(1886~1963)이라는 예비역 중장을 참석시켜 은사와 자제의 아름다운 재회의 모습을 연출시켜 정해 약한 일본 정치가들의 가슴을 울려 경계심을 풀게 했다는 게 노 다니엘의 주장이다.

나구모가 교장시절인 1944년 박정희는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게 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위에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견습 사관’으로 있을 때의 모습.


나구모는 이렇게 인삿말을 했다고 한다. “제자 중에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나온 것에 대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박 장군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박 장군은 번번이 고려인삼을 보내주셔서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지냅니다.”

박정희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는 박정희를 요정 가즈오로 초대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박정희가 했다는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박정희, 군사혁명 때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려”


“자기들 젊은 육군의 군인들이 군사혁명으로 일어난 것은 구국의 일념으로 타올랐기 때문이며,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배인 요시다 쇼인 선생과 다카스키 신사쿠, 그리고 구사키 겐즈이 등 처럼 했다고”

지은이는 이에 대해 “박정희는 기시를 비롯해 일본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바쿠후 말기 지사들의 정신을 배워 ‘그들처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상응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전개하고 싶다는 야망을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1948~1950, 1958~1963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서 옛 일본군의 쿠데타를 모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급장교들은 1930년 초반 일본 청년장교 집단이 일본의 문관정치에 대해 실력행사를 한 쿠테타를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한일회담 최대 걸림돌 독도문제…독도밀약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박정희가 한일회담에 얼마나 서둘렀는지는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이른바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을 시도한 일본정부와 독도밀약을 체결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박정희는 외무장관, 주일 한국대사 등 공식 협상창구를 배제한 채 김종필의 친형으로 일본통인 김종락을 동원해서 막후협상을 맡겨서 결국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성사시켰다고 노 다니엘은 이 책에서 폭로했다.

 


»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6·3세대’는 이후 유신독재 타도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특히 독도밀약 1항은 “양국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고 허용함으로써 일본정부에 결국 독도밀약을 근거로 매년 영유권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정희는 1965년 2월17일 한일회담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의 환영 만찬 때 장군들을 응원단으로 동원하기 까지 했다.

 


노 다니엘은 “5·16 주도세력과 12·12 주도세력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다 ‘박정희 팬클럽’에 가까운 모임으로서 박정희의 가치관과 세계관, 특히 일본에 대한 관념을 공유했다”고 지적했다. 하나회 멤버들인 12·12주도 세력은 무엇보다 박정희가 보여준 일본식 군인정신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여류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장편소설 <불모지대>를 애독하고, 그 주인공의 실제모델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2차세계대전 당시 작전 참모)를 존경했다.


군인 친일주의자들의 독도밀약 정신은 노태우까지 이어져


실제 세지마는 하나회 출신의 전두환, 노태우에게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록인 <이쿠산가>에서 술회했다.

“쇼와 55년(1980년) 3월께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와 ‘한번 꼭 방한하셔서 군의 선배로서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격려하시고 조언을 해주기 바란다.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으니 도큐 그룹회장 고토 노보루씨도 동행하셨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해왔다. 고토씨도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해 6월 둘리서 방한했다. 우리의 안내역은 권익현(당시 삼성물산 상무, 육사 11기로 나중에 민주정의당 대표)씨로 그의 안내로 전 장군, 노 장군을 만났다”

 


노 다니엘은 ‘군인 친일주의’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노태의 두 군사정권이 존속한 1993년까지 소위 군인 친일주의는 지속됐다. 그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직업군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일주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만주군관학교나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일본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관념이었다”

독도밀약의 정신이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이어졌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고 노 다니엘은 강조했다.




 <독도밀약> 노 다니엘 지음, 김철훈 옮김/한울ㆍ2만4천원

 

 1965년 1월11일 저녁 서울 성북동 범양상선 소유주 박건석의 저택 홈바. 일본 국무대신의 밀사인 우노 소스케 중의원 의원(나 중에 총리), 정일권 한국 국무총리와 김종락(김종필씨의 형) 한일은행 상무, 문덕주 외무차관, 시마모토 겐로(<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 등 다섯 명이 모였다. 14년간 진행해온 한일회담 타결의 최대 쟁점이었던 ‘독도 문제’에 관한 밀약이 최종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5개월 뒤 일본의 대한 지원과 한일강제병합조약 무효화 선언 등을 담은 한-일 기본조약이 공식 체결돼 두 나라 국교가 마침내 정상화된다.


 “독도·다케시마 문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한-일 정부 간 영유권 해결을 미뤄놓은 독도밀약은 2007년에 처음 공개돼 한-일 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 다니엘씨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밀사로 한-일협상 막후에서 활동했던 김종락씨와 일본 쪽 연락책인 시마모토 겐로 등 주요 관계자들을 직접 취재해 확인한 내용이었다.

 

노 다니엘이 쓴 <독도밀약>은 이 독도밀약의 내용과 진행 과정, 배경을 풍부한 자료와 인터뷰로 현대사 다큐멘터리처럼 재구성한 책이다. 일본에서 먼저 발간된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16일 출간된다. 지은이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다케시마에 관한 어떤 약속이 있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귀띔에서 독도밀약을 취재하기 시작해 5년 가까이 이 문제를 파고들어 책을 썼다.

책을 읽다 보면 1996년 6월 김영삼 정부가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할 때까지 한-일 두나라 정부가 왜 조용한 외교로 일관했는지를 뒤늦게 유추해볼 수 있다. “양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는 독도밀약 첫 조항이 상당 기간 유효하게 지켜진 것이다.


 책은 당시 한국이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의 자금이 필요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제공한 박정희 정권의 대일 밀실외교의 흑막을 폭로한다. 한국 외무장관과 주일 한국대사가 밀약 사실을 모른 채 실무 협상에서 독도영유권 주장을 하다 밀약의 실체를 아는 일본 쪽 외교관들의 조롱을 사는 장면도 부끄럽지만 엄연한 우리의 현대사다. 2차대전 이후 연합국과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령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독도를 일본이 반환해야 하는 영토대상에서 빼내는 과정 등을 보면 일본 정부가 얼마나 강력한 외교활동과 역사자료 조사를 실시했는지 알게 된다.


 한국 군사정권들이 독도밀약을 끝까지 지켰던 것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주군관학교나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일본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관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부터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시점까지 독도밀약의 정신은 전승되고, 결과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던 셈이다.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트위터 @ai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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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독도와 釣魚島

"독도는 일본 땅" 근거는 이승만이 제공했다!

독도와 釣魚島

일본은 섬나라라서 국경 분쟁을 가질 곳이 별로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 극우파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제기한 국경 문제는 세 방향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와 사이에 북방 4도,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사이에 독도 그리고 남쪽으로 타이완(및 중국)과 사이에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다.

북방 4도 문제는 우리가 봐도 공감이 간다. 1855년의 첫 러-일 조약 이래 양국 간의 국경은 상황에 따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했다. 홋카이도 바로 바깥의 북방 4도는 늘 일본령이던 것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 소련이 빼앗아갔다. 아직까지 러시아계 정착 인구도 별로 없으니 근래 일본으로의 반환이 진척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와 댜오위다오 문제는 전연 다르다. 독도야 우리가 잘 아는 일이지만 댜오위다오는 어떠한가. 댜오위다오는 타이완 해안에서 130킬로미터, 중국 본토 해안에서 250킬로미터, 오키나와의 중심지 나하에서는 500킬로미터, 규슈 해안에서는 1000킬로미터 가량의 거리에 있다. 위치로 보아 중국이나 타이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원래 오키나와는 유구(琉球)라는 이름의 독립국으로서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것을 메이지(明治) 시대에 일본이 정복해(1877년) 병탄한 것이다. 얼마 후 청일 전쟁의 결과로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됐으니(1895년) 타이완과 오키나와 사이에 있는 댜오위다오는 따질 겨를도 없이 일본 지배에 들어갔다. 후에 일본은 이 섬을 제멋대로 오키나와 현에 소속시켰다.

중국은 타이완과 적대하는 상황이고 댜오위다오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타이완을 도와주고 있다. 언제든 타이완을 되찾을 때 어차피 묻어 들어올 것이니 느긋하게 타이완에게 맡겨둔다는 속셈인지 모른다.

일본 눈치를 살피느라 독도의 선착장 준공식도 제대로 못하고 장관에게 옐로카드나 띄우는 우리 정부가 딱하다. 독도와 댜오위다오는 같은 문제다. 우리 정부가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만-중국 측을 거들고 독도 문제에 그쪽 도움 받을 생각을 왜 않는지 알 수 없다.

1994년 판 대한민국 수로국 발행 해도에 댜오위다오가 'Sento Shosho'로 표시돼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중국에서 찍는 지도에 독도를 '竹島'라 표시한들 무슨 낯으로 항의할 것인가. (1997년 11월)

ⓒearth.google.com

터키의 서해안은 에게 해에 면해 있다. 그런데 바로 연안에 붙어 있는 섬들까지, 섬이란 섬은 모두 그리스 땅이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진도, 완도, 거금도 같은 섬들이 모두 중국 땅인 격이랄까? 터키 제국이 수백 년간 다스리던 섬들을 20세기 들어 빼앗긴 결과다. 본토는 잘라내기 힘들어도 섬들은 있는 대로 탈탈 털어갔다.

전쟁에 이기면 영토를 빼앗고 지면 빼앗기는 것이 고래의 관습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 관습이 계속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방면의 엄청난 영토를 빼앗겼고, 이탈리아도 아드리아 해의 섬들을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방면의 상당한 영토를 내놓았다. 심지어 루마니아조차 베사라비아를 소련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전쟁 책임이 독일 다음으로 큰 일본만은 영토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침략했던 땅을 뱉어놓은 외에는 러시아에게 북방에서 밀린 정도뿐이었다. 섬나라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이유만이 아니다. 오키나와는 수백 년간 독립국이던 유구를 불과 70년 전에 병탄한 것인데, 그조차 결국 일본 땅으로 남았다.

문제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성격에 있었다. 다른 패전국의 배상과 영토조정은 1946~1947년간의 조약으로 처리되었다. 연합국 사이의 합의를 통한 처리 방침이었다. 미국, 소련, 영국, 3국의 합의가 기본이었고 중국과 프랑스도 더러 발언권을 가졌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소련과 중국은 완전히 빠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렀다.

미국은 1951년 당시에 일본을 아시아 방면의 가장 중요한 보루로 확보할 방침이었다. 이미 천황제 존속 등의 조치를 통해 일본을 편으로 삼을 뜻을 확실히 하고 있던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아시아 방면이 불안해진 만큼 더욱더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은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리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등 일본의 침략 피해가 큰 나라들의 반발을 미국이 다른 보상을 통해 대신 무마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장 피해가 큰 두 나라의 불만은 묵살해 버렸다.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전쟁 중이었고, 한국은 미국에게 꼼짝 못하니까.

패전 전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극우파가 전후 일본에서 세력을 지킨 중요한 이유 하나는 미국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 준 데 있다. 독일과 독일인에게 처참한 파국을 가져온 나치는 독일에서 고개를 들 여지가 없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꿀릴 데가 없다. 그들이 한국인에게만 근대화시켜 준 공치사를 하겠는가? 침략과 전쟁을 통해 일본인의 능력과 근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전후의 경제 번영도 가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 승전국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국가"로 간주되어 참여를 거부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아무 역할도 없었던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힘을 지켜주고 그 환심을 사기 위해 희생시킨 것이 한국과 중국의 이익이었고, 그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 독도와 댜우위다오다. 댜우위다오의 경우 타이완이 1971년 유엔에서 축출되고 미국이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까지는 중국도 타이완도 문제를 제기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반면 독도 문제를 지금까지 깨끗이 해결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형편없는 외교력과 함께 미국에 대한 심한 종속성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 극우파의 주장에는 두 개 측면이 있다. 역사적 배경과 국제법적 관계다. 1970년대까지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주장이 많았는데, 1980년대 들어 한국 학계의 조사 능력도 발전하고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도 그 무리한 점을 지적하면서 잦아들었다. 시마네 현의 향토사 차원에서 지역 여론을 선동하는 데나 쓰일 정도이지, 대외적인 설득력이 별로 없게 되었다.

국제법적 관계의 근거로 일본 극우파가 내놓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다. 편을 잘못 골랐다고 '후회'할 뿐이다. 패전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편을 바꿀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미국이 중국이나 한국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타났다고 믿는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는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초청받지 못했다.

정두언 의원이 누군가를 겨냥한 "개나 소나 독도"란 말로 주목을 끌었는데, 사실 정치인들 중에 독도의 의미를 쥐뿔도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다. 비슷한 풍조가 1951년에도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 극우파에게 꼬투리를 남기기도 했다.

미국이 준비한 대일 강화 조약 문안 중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제2조 a항)는 내용이 있었다. 주미 대사 양유찬이 이끌었던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쓰시마(대마도)까지 보탤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독도와 파랑도를 넣을 것을 다시 요구했다가 또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은 두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구를 제출했던 일등서기관 한표욱은 위치의 질문에 "일본해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be h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ungdo.)

독도의 위치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다케시마'란 이름만 댔으면 바로 확인됐을 것이다. 그런데 전설의 섬 파랑도와 함께 "그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요구하는 쪽에서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는데 요구받는 쪽에서 알뜰히 찾아줄 리가 없다. 독도 표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에서 이런 경위를 밝힌 다음 762~763쪽에 이런 논평을 붙였다.

한국 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년 7월 19일)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 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 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 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 협의(1951년 7월 19일)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부터 그렇다. 그런 일본인을 이 글에서도 자꾸 '극우파'로 표기하게 된다. 그러나 극우파 아닌 일본인도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1951년 7월 한미 간의 협의 내용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만이 일본에서 횡행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문제고, 또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 주장하고 싶은 방향에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미워하기만 하기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욕을 하는 데도 선후를 가릴 필요가 있다. 일본 극우파야 어느 사회에나 독단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니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국민에게 '반일'을 팔아먹으면서 독도에 대해서고 무엇에 대해서고 아무 진지한 생각 없이 일본 극우파의 주장 근거만 만들어준 이승만 매국정권이 정말 한심한 존재다.

 

기사입력 2011-08-10 오전 8:24:33 /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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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 2011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나라'다!

 

박정희, 그는 역사 속의 고인이 아니다

박정희, 그는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로 남아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가혹한 탄압.

대결적 냉전 구도를 기반으로 국가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 이룩한 부는 오늘날 이 나라의 국제적 위상의 기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 부의 사회 경제적 본질은 무엇보다도 재벌 특권 체제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무겁고 질긴 멍에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박정희 체제의 후예 또는 정치적 혈통은 여전히 살아남아 이 나라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지배하려는 상황이다.

애초에는 민정 이양이요, 뭐요 하다가 결국 박정희 체제는 유신이라는 이름의 장기 집권과 독재 체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성공이 아니라 종국적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밑받침 삼아 그 자신이 구축한 절대 체제가 가져온 모순으로 마침내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만 비운의 독재자 박정희는 그런데 역사 속에 사라져간 고인이 아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이끈 군사 쿠데타는 이 나라의 현대사 그 중심을 기습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진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로써 우리는 박정희를 빼놓고 우리의 국가적, 역사적 자화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딸 박근혜는 지금 이 나라 정치의 중심부에서 대권의 근거리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정치적 비중과 위상은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없이 가능하지 않다.

혈연인 그녀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드리워진 박정희의 그림자는 실로 대단히 길고 짙다. 박정희를 넘어선 것 같지만 우린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자유나 인권, 또는 인간의 가치를 일정하게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의 경계선을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은 이런 시대적 현실에서 태어난 권력이며, 혹여 정권 교체가 된다고 해도 이 시대적 사고방식의 낡았지만 아직도 견고한 틀이 확실하게 깨진다는 보장은 없다.

전인권의 박정희 읽기

 

▲ <박정희 평전>(전인권 지음, 이학사 펴냄). ⓒ이학사
이런 고뇌 속에서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학사 펴냄)을 펴든다. 저자도 이미 고인이다. 이중섭 평전(<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펴냄))도 썼던 1957년생의 그는 살아 있었다면 전 방위적 중견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글과 말을 쏟아냈을 터였다.

전인권의 책이 새삼 주목되는 오늘의 현실도 현실이거니와, 그의 박정희 분석은 박정희에 대한 찬양과 비판적인 시선 그 사이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각도를 취하려 애쓴 점이 돋보이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건 한 인간의 고뇌와 역정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어떻게 엮어서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져 갔는가를 읽게 하는 진지함과 섬세함이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에게는 박정희의 어두운 심리적 상흔을 조명하는 박정희 내면 탐구라는 방식이 불만일 수 있고, 박정희 비판자들에게는 박정희 나름의 능력과 의지를 주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공적에 대한 일정한 지지로 읽힐 수 있는 것이 그의 책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처음부터 끝까지 선하다거나 또는 악하다고 할 수 없듯이, 박정희라는 인간 한 개인의 삶과 그가 거쳐 온 사연과 역사를 거리를 두고 하나하나 짚어내는 노력은 의미 있다. 그것은 단지 박정희라는 인물 하나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이 나라 현대사가 걸어오고 만들어온 자화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들 대부분도 '한때는 스스로가 박정희가 아닌 적이 없었던 적이 없진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이기도 하고,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과 관련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 박정희 넘어서기 또는 비판은 무력할 수 있다. 가난과 열패감에서 벗어나 능력 있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의지와 용기, 전망과 실력까지 갖춘다면 그런 개인은 남에게 모델이 될 수도 있다.

그에 더해 이걸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 일정하게 성과를 거둔다면 그건 당장의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희생과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평가 속에서 긍정적으로 정리될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박정희 체제의 운명은 이에 대해 그렇다고 쉽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전기적 접근

그러기에 우리는 박정희에 대한 연구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부국강병의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가던 역사 속에 내장된 폭력, 그리고 인간적 가치의 유기(遺棄), 한없는 욕망이 도달한 끝은 그걸 주도한 한 인물의 참혹한 죽음으로 마감되어졌기 때문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기 보다는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대한 "전기적 관점(傳記的/biographical approach)"을 중심에 놓고 접근한 작업의 소산이다. 그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박정희에 대한 가장 세세하고 방대한 작업을 한 것으로는 조갑제의 박정희 연구와 저서가 꼽히지만 그의 경우에는 박정희의 명백한 잘못도 그의 영웅적 면모의 발로처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된다. 그런 한편, 전인권은 박정희에 대해 '정치사상'이라는 가치를 주목하고 그것이 국가 통치와 경영에 일정하게 작동한 측면을 주시한다.

달리 말해, 전인권은 박정희 정치는 아무리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단지 그 개인의 권력욕이나 폭력적 정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바라보게 될 경우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박정희 자신의 나름의 진정성과 그 심리적 동기의 진상을 알지 못하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나 전모 파악에 지장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인권이 쓴 다음과 같은 대목은 간단히 읽어서는 안 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목표 지향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 사실 그는 목표 지향적 리더십이란 측면에서는 하나의 모범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투철한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목표를 잘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물과 상황이건 서너 가지로 간명하게 요약하는데 탁월한 능력 또는 경향을 보였고…"

"그는 공식적인 관계에서는 투명하고 명쾌했으며 부정부패를 몰랐고 단체의 재산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할 줄 몰랐다. 이런 경우 그는 공화주의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상당한 칭찬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문장 뒤에는 바로 이런 대목이 이어진다.

"그러나 공식적 업무 관계를 떠나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비밀주의로 일관하며 심복에게 특혜를 주었고, 지나치게 술을 즐기고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곤 하였다."

가치 박탈과 박정희 리더십

이런 박정희의 특성을 전인권은 그의 가족사가 드리운 불행과 그로 인해 받은 심리적 상처로부터 추적해낸다. 아버지의 억압과 형제들 사이의 어려움, 가난과 열패감 등이 겹쳐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과묵함과 어머니와의 높은 친밀도를 만들어 냈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박탈감이 그의 본래적 의지와 결합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 것을 전인권은 주목한다.

일종의 "심리적 고아" 상태로 있던 박정희의 유년과 소년기를 검토하면서 전인권은 박정희가 이런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형으로 자라났고 기회에 민감해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위해서라면 그가 누구이든 가차 없이 인간관계를 저버렸으며 자신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한 없이 인자하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종적 인간관계 집착형인 것을 분석하고 있다.

전인권은 박정희가 심리적 고아 상태와 빈곤의 틀에서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문제와 위기에 대한 안보 의식이 고도로 발달했고, 이것은 그에게 지도자로서의 영웅적 결단을 촉구하고 정당화하는 쪽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이해는 단순한 분석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박정희의 개인사나 가족사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화되어야 이런 전인권의 분석과 평가가 보다 명확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증언과 자료로 볼 때 그다지 어긋나지 않게 보인다.

"그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동기를 가치 박탈에 대한 보상 수단으로 보았던 헤럴드 라스웰의 견해에 잘 들어맞는 인간이다. 또한 그는 '가난의 극복'이란 가장 낮은 계층의 절박한 요구에 누구보다 민감했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자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추진하고 달성하는 과정은 엘리트주의적 계몽주의로 일관했으며, 종래에는 자신의 꿈과 불안을 지나치게 정치 과정에 투입하는 '고독한 영웅의 해결책'에 의존했다. 이와 같은 존재와 이상의 분열은 그의 생애 동안 영원한 것이었다. 이것이 현실과 불화하며 끊임없이 살아남아 지도자가 되려고 했던 박정희 행동론의 요체였다."

그랬기에 그는 이런 목표 지향의 정치를 위해서는 그 밖의 모든 것은 언제든 희생되어도 좋다고 여겼고, 무엇이든 이런 각도로 정당화하는 방식을 제도화해버린 셈이다. 그래서 전인권은 박정희가 "단순히 권력욕이 강해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몰랐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박정희의 생각은 "민주주의란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박정희의 생각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 또는 "일정한 희생과 문제가 있다 해도 경제 문제의 해결 능력이 있는 지도자 내지는 세력에게 권력이 가야한다"는 생각이 모두 그렇다.

따지고 보면,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가난과 좌절을 겪지 않은 세대는 없었고 이들의 가치 박탈은 누군가 영웅적 존재의 출현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갈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와 함께 확실한 목표를 제시하는 전망의 구체성과 프로젝트의 실천력이 겸비되어 있을 때 그것이 곧 권력의 기본적인 정당성과 효율성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는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실제로 엄청난 정확도와 현장성, 그리고 치밀한 확인 과정을 통해 박정희 근대화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이는 전인권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것이 갖고 있는 무서운 모순을 겪었고 알고 있다. 거대한 권력의 폭력성마저 용인되고 정당화되는 부의 축적은 더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권력의 독선도 이제는 도리어 경제적 효율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명박 체제는 이런 박정희 구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불행한 것은 전망의 제시와 대중적 열망을 일으키는 능력, 그리고 정책 집행의 탁월성 갈은 점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보 정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잘 살기를 바란다. 물론 그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나 그 갈망에 대해 진보 세력은 구체적이고 열정적인 실력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실존적 의지로 뿜어 나오지 못하면 그건 박정희에 비해 못 미치는 정치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박정희 모델을 현실에서 적용해보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고 실천력 자체가 부재한 경우다. 그러나 폭력적 독재자가 농민에게 인자하고 넉넉한 모습으로 다가갔고 그것이 농민들의 가슴을 울렸던 장면은 쉽게 넘어가고 말 일은 아니다.

무서운 독재자와 소박한 농민의 웃음, 이 사이를 오가며 이 나라 현대사의 중심을 움켜쥐었던 박정희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치 않다. 박정희에 대한 판에 박은 비판을 넘어서서 그가 이 나라 정치에서 차지했던 그 정서적, 정책적 실체의 내면을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 이 나라 서민들이 저 깊고 깊은 가슴 한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를 듣고 대답하는 작업에 일정하게 기여하게 해 줄 것이다.

인정할 만한 것은 인정하고, 반면교사로 삼을 것은 삼는 그런 자세에서.

 

기사입력 2011-05-13 오후 6:29:14 /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