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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이승만 우상화 - 정운현

by Wood-Stock 2011. 6. 14.

이승만 우상화(상) -잇따른 동상 수난사

이승만 동상? 이순신 장군·세종대왕께 물어봐라

 

지난 (2011.6) 3일 부산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에 누군가 붉은 페인트를 뿌려 볼썽사나운 광경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최근 KBS의 '이승만 특집' 추진 및 일각에서의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와중에 발생한 것이어서 주목됩니다.
 
이승만은 일제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건국에 기여한 공로가 있음에도 대통령 재임시절의 독재로 인해 4.19혁명 후 민중들에게 권좌에서 쫓겨난 장본인입니다. 이번 페인트 투척사태를 계기로 이승만 동상의 잇따른 수난사, 1955년 그의 80회 생일 맞아 벌어진 갖가지 찬양 행사, 그리고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승만 대통령 동상에 뿌려진 붉은 페인트

 

최근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논란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역사 인물은 두 전직 대통령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 모두 여러 차례 대통령을 지내면서 10년 이상 장기집권을 했으며, 말로는 모두 비참했습니다.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후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 박정희는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삶을 마감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역사에서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들어 두 사람이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5.16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일부 보수언론들은 마치 낡은 레코드판을 틀 듯 '박정희 살리기'를 외쳤습니다. 이승만도 마찬가집니다. 공영방송 KBS는 '이승만 특집'을 현재 제작중이며, 그의 양자 이인수씨는 4.19혁명 51주년을 맞아 수유리 4.19묘지 참배 및 유족들과의 화해를 돌연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비참한 말로가 모두 무리한 정권 연장 획책에서 비롯했듯이 이들에 대한 무리한 우상화 역시 무리수를 낳았습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독재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세운 동상이 수난을 당한 사례는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박정희는 물론 이승만도 마찬가지입니다.   

 

▲ 부산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페인트 훼손 3일 오전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정부 기념관 앞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붉은색 페인트로 훼손돼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지난 3일 오전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거리'의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습니다. 이 동상(입상)은 부산 서구청이 4.19혁명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난 4월초에 세운 것입니다. 3일 누군가 이 동상에 뿌린 붉은색 페인트는 황금색 동상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려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인 후 왼쪽 가슴을 타고 흘러 내렸는데, 마치 머리를 크게 다쳐 피를 흘리고 선 모습처럼 보기에 흉측합니다. 급기야 서구청에서 동상을 비닐로 감싸고 이를 노끈으로 다시 묶었는데 흉측하기는 매한가지더군요.

 

이승만 동상의 수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60년 4.19혁명으로 쫓겨나기까지 12년간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아부꾼들은 그를 '국부(國父)', '국보적 존재' 운운하며 곳곳에 그의 동상 건립은 물론 각종 기념행사 등 우상화 작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모두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종로 탑골공원과 남산에 있던 동상 철거입니다. 그러면 이 두 동상은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세웠으며 현재는 어떤 상황일까요?

 

4.19 혁명 후 탑골공원 동상, 거리에 끌려 다녀

 

먼저 탑골공원 동상.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을 전개하는 이순우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동상은 1956년 3월 31일 준공되었으며, 2m40cm 높이에 기단까지 합쳐 6m에 달하는 크기였고, 대한소년화랑단이 건립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경향신문> 1956. 4. 2) 4.19혁명으로 이승만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민중들은 그가 하야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이 동상을 끌어내려 쇠줄에 묶어 종로 거리에 끌고 다녔습니다.

 

 

▲ 철거된 탑골공원 이승만 동상 4.19혁명 일주일 뒤인 4월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남산 분수대 자리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기중기에 의해 철거되는 광경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 동상은 한동안 길거리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해 8월 17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용산경찰서에서는 이 동상의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급기야 상급기관인 서울시경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용산경찰서는 4.19 당시 군중들이 끌고 다니다가 길바닥에 내던져 둔 동상을 발견해 이를 용산경찰서 뒷마당에 보관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재자의 동상을 계속해서 보관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함부로 부서버릴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나 봅니다.

 

남산동상을 바로 철거하지 못한 이유, '너무 컸기 때문에'

 

다음은 남산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탄신(1955. 3. 26)을 맞아 구성된 '이승만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동상의 준공식은 1956년 8월 15일이었는데, 이날은 제3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틀 뒤인 8월 17일자에서 <경향신문>은 준공식 당일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 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 개월에 걸쳐 7만여 명의 인원과 총 공사비 2억 600만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

 

▲ 철거된 남산의 이승만 동상 높이 25미터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라는 주장이 나온 남산 중턱의 이승만 동상

 

이 동상이 서 있던 자리는 남산중턱의 현재 분수대 자리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조선신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서울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정상과 함께 남산의 상징과도 같은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상의 크기(높이)는 본체 7m, 기단부를 합치면 25m에 달하는 초대형으로, 당시로선 세계 최대 규모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오른손을 들고 서 있는 형상은 그가 중앙청 마당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선서문을 낭독할 당시의 모습을 조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탑골공원 동상이 하야 발표 당일 철거된 것과 달리 이 동상은 그해 8월 말에야 철거됐는데 이는 순전히 큰 덩치 때문이었습니다. 공사비 2억여 원을 들여 연인원 7만여 명이 10여 개월에 걸쳐 만든 것인 만큼 철거에도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해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동상 철거가 결정됐습니다. 그 다음날 <동아일보>는 '권세와 아부로 남산에 세운 이박사 동상도 하야하기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굳이 세워 본인에게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민중의 뜻에 의하여 그의 우상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이승만의 동상은 건립된 지 4년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서울시 당국은 13일 내무부로부터 동상 철거 지시를 받고서 8월 19일부터 철거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 날짜 <경향신문>은 "23일까지 철거작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며,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졸도들이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세운 이 동상의 무게는 10톤"이라고 밝혔습니다. 철거반은 기중기 등 중장비를 동원해 동상 해체작업에 들어가 그달 30일 철거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동상 철거에 소요된 비용은 170만환이었습니다. 독재자 이승만 동상이 섰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들어섰습니다.

 

철거된 두 동상, 현재 서울시내 민가에 방치

 

한편, 이 두 동상들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요? 결론을 앞세우면 천덕꾸러기로 떠돌다가 현재도 서울시내 한 민가에 방치된 상태입니다. 그 사연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19 혁명 후 철거된 이들 두 동상은 역사 속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고철 덩어리 자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이 동상들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5년 7월 19일 그가 하와이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 직후였습니다. <경향신문>은 이틀 뒤인 7월 21일자 기사에서 이 두 동상들의 행방에 대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방직 간부로 근무하고 있던 홍윤후씨는 1963년 6월 어느날 지인에게서 이승만 동상이 영영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둘러 서울 종암동에 있던 서울시 창고로 달려갔더니 철거된 이승만 동상이 전기톱으로 분해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홍씨는 모 기관으로부터 이 동상들을 불하받아 해체작업을 벌이고 있던 그 사람을 설득하여 50만 원을 주고 이를 인수하여 명륜동 자택 정원에 보관하였습니다. 홍씨는 '불온한' 이 동상들 때문에 한동안 불안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단독주택에 방치된 2개의 이승만 동상. 4.19 혁명 때 시민들이

서울 탑골공원과 남산에서 끌어내린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을 유족이 인수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동상들 얘기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70년 <코리아 라이프>라는 한 잡지를 통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홍씨에 이어 자유당 시절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지낸 김주홍(金周洪)씨가 이 집으로 이사와 이 동상들을 관리해 왔으나 그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다시 방치됐습니다.

 

2010년 4월 18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유족 측이 이 동상들을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으나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으나 이 동상들을 챙기는 사람은 여태 없나 보군요.

 

이승만 연고지에 하나둘씩 동상 세워져

 

4.19혁명 후 이승만의 우상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한동안 이승만 동상은 화제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얘기가 나온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인데요, 모두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4.19 이후 제일 먼저 이승만 동상을 세운 곳은 인하대였습니다. '인하'대라는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에서 따온 것인데, 하와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노동자 중 90%는 인천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 기숙학교를 설립했는데, 그때 이승만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해방 후 이들이 낸 성금으로 1954년 인하대의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하게 된 것입니다. 인하대는 1979년 2월 24일 이승만 동상을 세웠는데, 1983년 10월 일부 학생들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간 학교측은 동상을 보관해오다가 작년 9월 동상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곳은 배재고등학교입니다. 이승만은 배재고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졸업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배재고는 1984년 2월 28일 교정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해방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을 맞아 하와이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2년 뒤 87년 2월에는 대전에 있는 배재대, 그 이듬해인 88년에는 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인하대-배재고-하와이-배재대-이화장 순으로 그와의 연고를 기반으로 해서 그의 동상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6월 5일 배재대학교 재직 교수 및 재학생, 졸업생들이 이승만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배재대에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동상을 세우던 87년 그해 '6월항쟁'을 계기로 학생들이 교내에 있던 그의 동상을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학교 측이 동상을 다시 세우자 학생들이 계란과 페인트를 끼얹는 등 철거시위를 벌여 1997년 또 다시 철거됐습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8년 학교측은 교수,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 번째로 이승만 동상을 다시 학교에 세웠습니다. 동상 건립에 반대해 온 교수 및 재학생, 졸업동문들은 이날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독재자 이승만 동상 건립 웬말이냐?"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광화문에 세우려거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게 먼저 물어보라

 

이승만과의 인연을 앞세워 교육기관에서 앞다퉈 그의 동상을 세우고 있고 심지어는 과거에 철거된 동상마저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로 남산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이 4.19 민중혁명 후에 철거된 것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추종자들은 광화문 네거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반열에 올리고 싶은가 봅니다(어쩌면 그 다음 순서로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분들에게 고(告)합니다. 꼭 그곳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고 한다면 사전에 그곳의 터줏대감격인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승만 동상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중간이나 아니면 이순신 장군 앞에 세워도 좋겠느냐구요. 그래서 그분들이 흔쾌히 동의할 경우 그땐 세우십시오. 그땐 저도 이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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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우상화(중) - '80회 탄신' 종합선물세트

"고마우신 이 대통령, 생신엔 집집마다 태극기를"

 

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 년 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전단지는 말하자면 '초대장'입니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입니다.

 

주최 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전단지(사실상 초대장)를 지참하고 참석하랍니다. 대체 무슨 행사기에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요?

 

▲ '이승만 송수탑' 제막식 초청장 행사일시는 1955년 6월 15일, 행사장소는 남한산성이며, 초청인은 이익흥 당시 경기도지사였다.

 

<대한뉴스> 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습니다. <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각료와 내빈들이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했고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가 송수탑 건립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습니다"라고 보도했더군요.

 

위키백과와 네이버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4월 18일, 음력으로는 3월 26일생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1955년이면 이승만이 80세가 되는 해입니다. 바로 이 해에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경축행사가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 경축'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老)대통령의 건강을 비는 게 허물이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송축(頌祝) 차원을 넘어 아부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남한산성 서장대에 세워졌던 '이승만 송수탑'. 꼭대기에 청동으로 만든 봉황새를 올린 것으로,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했다.

 

대통령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까지

 

80회 생일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송수탑(頌壽塔)'은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이 만든 것으로, 날개를 펼친 봉황새를 탑 꼭대기에 조각해 얹었는데 이 역시 '80세 탄신' 경축행사의 일환이었습니다.

 

송수탑을 세운 경기도지사 이익흥은 일제 때 친일경찰을 지낸 인물로 흔히 아첨꾼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어느 핸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하러 갔다가 생리현상으로 방귀를 '뿡!' 하고 뀌자 이익흥이 이를 낼름 받아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를 떨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승만이 몇 번 들른 것 말고는 별다른 연고도 없는 남한산성에 송수탑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승만 우상화는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시작됐으나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부터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학교 교실에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린 것은 국가원수이니 그 시절엔 그랬다고 쳐도,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단 것은 예우 차원을 넘은 '우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우표와 화폐에 이승만의 얼굴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서울시내 요소에 이승만 동상도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탑골공원을 비롯해 남산 중턱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또 전국 각지에서는 소위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승만 우상화는 '80세 탄신'인 1955년에 극치를 보였습니다. 우선 이승만이 80세 생일을 맞은 3월 26일 당일 벌어졌던 각종 경축행사를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도 아니고 대통령의 80회 생일잔치를 이처럼 요란하게 치른 경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일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제54호)에 따르면, 당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온 내외의 방문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외교사절로는 '80회 탄신'을 맞아 특별히 내한한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중국대사 등이 잇따라 경무대를 예방하였습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경무대를 찾아 그의 '80회 탄신'을 축하하였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80회 생신'이니 축하인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미풍양속입니다.

 

▲ '80회 탄신' 서울운동장 경축행사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뜻하는 '80'이란 숫자를 만든 주위로 '만수무강' 네 글자가 보인다.

 

 

운동장엔 "만수무강", 서울 시내엔 '꽃전차'

 

방문객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날 오전 이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운동장에서는 숙명여고,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으며, 이들 주위로는 '만수무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 군인들도 이날 경축행사에 대거 동원됐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경축행사가 열릴 때 하늘에서는 공군이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습니다.

 

KBS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영상실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행진에는 마치 국군의 날 기념행사처럼 기갑부대도 등장했더군요. 이 '영상실록'을 소개하는 내레이터는 "대통령의 생일이 국경일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했습니다. 

 

이날 경축행사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당일 저녁에는 이승만 탄신 경축음악회를 위해 특별초청을 받고 25년 만에 귀국한 작곡가 안익태가 지휘하는 경축음악회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안익태는 4월 18일 정부로부터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80회 탄신' 경축기념식수와 경축경로회가 벌어졌으며, 당일 열린 전국무술대회에는 이 대통령이 현장에 구경을 나오기도 했더군요. 또 3월 26~27일 이틀에 걸쳐 서울 시내 전차들은 '80회 탄신' 경축 꽃을 달고 다녔는데 당시 이를 '꽃전차'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2대, 3대 대통령 취임기념을 비롯해 80회, 81회 탄신기념 우표 등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얼굴이 담긴 우표는 모두 6종이 발행됐습니다. 기념우표에 이어 심지어 생존인물인 그가 화폐에도 등장하였습니다. 1953년 지폐에 한복 차림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957년부터는 한복 대신 양복 차림으로 바뀌었다가 4·19혁명 뒤인 1962년부터는 지폐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이밖에 '80회 탄신'을 경축하여 공보실에서는 현상문예를 공모하였고, 정부기관지 격이었던 서울신문사에서는 축하글을 묶어 '헌수송(獻壽頌)'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또 그 무렵부터 전국에는 이른바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며, 몇몇 문인들은 그의 '60회 탄신'을 경축하면서 낯간지러운 축시를 써댔습니다. 흔히 '민족시인'으로 불려온 노산 이은상(李殷相)은 그해 <희망> 4월호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를 실었습니다.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이기붕 찬가'에 이어 전해오는 '이승만 찬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르는 큰길의 이름은 세종로(世宗路)를 비롯해 충무로(忠武路), 다산로(茶山路), 율곡로(栗谷路) 등 우리 역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아호 등을 딴 도로명이 서울 시내엔 적지 않습니다. 이승만의 호는 '우남(雩南)'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호를 딴 '우남로' 같은 도로명이나 그 외 기념물은 없었을까요?

 

'80회 탄신' 그해(1955년) 6월 15일 남한산성에서 '송수탑' 제막식을 가진 함태영 부통령 등 일행은 식후에 행사를 따로 하나 더 가졌습니다. 바로 '우남로' 개통식 참석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남로란 경기도 광주에서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도로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우남'을 따서 붙인 이름은 이밖에도 한 둘이 아닙니다. 우남정(亭), 우남공원, 우남도서관, 우남회관 등이 그것입니다.

 

▲ 남산의 '우남정' 1959년부터 남산의 '팔각정'을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정'으로 고쳐부르기 시작했다.

 

이승만 동상 세우려면, '4·19혁명'이 '4·19난동' 돼야

 

'80회 탄신' 이듬해인 1956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제3대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남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남산 정상에 있던 팔각정도 '우남정'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남산 분수대 자리는 일제 때는 조선신궁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승만 시절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으며, 현재는 이 일대에 백범 김구 동상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시대의 변화를 절감케 합니다).   

 

이밖에도 두 건의 '우남' 기념물이 더 있는데, 우남도서관과 우남회관이 그것입니다. '우남도서관'은 1958년에 서울이 아니라 대전에 건립됐는데, 현재 대전 중구청 뒤켠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대전시립 연정국악원 건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남도서관' 역시 이승만 탄신 8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건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건축과정을 살펴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 세종로 소재 세종문화회관은 그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이 1972년 화재로 전소되자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시민회관의 전신이 바로 '우남회관'입니다.

 

해방 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 건물을 국회의사당 등으로 사용하면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지은 것으로, 1956년 6월 20일 기공식을 한 후 5년 뒤 1961년 10월 31일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기공식은 이승만 정권 때였으나 준공식 테이프는 이승만이 아니라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끊었습니다.

 

▲ '우남회관' 상량식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세워졌던 '우남회관'의 명칭 역시 이승만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냉혹합니다. 그래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인물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혹평도, 과장된 미화도 금물입니다. 독재 권력의 힘을 빌려 세우거나 특정 집단들이 주도해 세운 동상들은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근자에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학계를 중심으로 한 '이승만 재평가' 활동은 몰라도 최근 일각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 동상 건립은 온당치 않습니다.

 

▲ 서울 수유리 4.19국립묘지

 

광화문 네거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면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4·19혁명'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또 '4·19국립묘지'를 '수유리 공원묘지'로 바꿔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승만이 '4·19혁명'을 밟고 넘어가 '4·19'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저도 이승만 동상 건립에 미력이나마 보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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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우상화(하) 이승만 찬양·미화의 종결자

"서울시를 '이승만'시로"... <조선>은 한술 더 떴다

 

'1등 신문' <조선일보>가 이승만 전 대통령 '띄우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살아서 권좌에 있을 때는 '찬양'에 앞장서더니 이제는 죽은 이승만 '살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적어도 <조선일보>가 공기(公器)를 표방한다면 최고 권력자는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물론 그런 적이 전혀 없진 않았죠.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임시절이나 사후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칼날을 들이대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도 포함)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찬양 보도로 일관하면서 이승만 홍보 매체를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일보>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 사례 몇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

 

앞서 '중' 편에서 이승만의 '80회 탄신'(1955. 3. 26) 때 각종 기발한 탄신 경축행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날 <조선일보>는 이를 어찌 보도했을지가 궁금해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당일자 마이크로필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제호 옆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선 대형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에 '제80회 탄신일을 맞은 이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더군요. 그리고 사진 옆에는 미국 뉴욕에서 많은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하모임을 가졌다고 큼지막하게 보도했습니다.

 

▲ 권력자 찬사로 일관된 <조선일보> 왼쪽은 일황 부부 사진을 실은 1940년 1월 1일자 신년호,

오른쪽은 이승만 '80회 탄신일'에 이 대통령 부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은 1면 모습

 

이 사진을 보면서 저는 문득 일제 말 <조선일보>의 지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옆에는 용(龍) 한 마리와 일황 부부의 사진을 실은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민족지'라고 떠들어대는 신문이 민족 전체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작태를 보였습니다. 이 지면 하나로 <조선일보>의 정체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최고 권력자에 대한 아부와 찬사로 일관하는 편집 방침은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3월 26일 당일자만 그랬을까요? 서울운동장에서 국경일에 버금갈 만한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행사가 있은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지면을 꾸렸습니다. 사회면도 아닌, 1면에 서울운동장 행사 장면을 찍은 항공사진을 싣고는 제호 옆에 '이 대통령의 제80회 탄신일을 경축'이라는 대형 제목을 달았습니다. 관련 사설은요? 당연히 있죠. 이날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축하함'이라는 사설에서 이승만을 한껏 치켜세웠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 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통일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도 싶습니다만 사족을 그린다면,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아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고 한 대목이 우선 눈에 거슬립니다. 이승만은 민주공화국 체제하에서 선거로 뽑은 선출직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은 군신(君臣), 혹은 주종(主從) 관계와 같은 봉건적인 자세로 일각에서 그를 '국부(國父)'로 칭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이미 80세인 이승만을 향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고 한 것 역시 과거 왕조시대에 '천세(千歲)', '만세(萬歲)' 하던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왕'이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성'이라는 셈이지요.

 

서울시, '우남시'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요즘도 어린이용 <소년조선일보>를 간행하고 있는데요, 이 신문은 일제 때도 있었고 이승만 시절에도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 <소년조선일보>는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그냥 지나쳤을까요? 그럴리가요, 당연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습니다. 3월 27일자 1면 제호 아래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경축식장' 행사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 '여든 돌 맞이하신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어린 시절의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나란히 실었습니다. 얼핏 보면 북한 <노동신문>의 지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80회 탄신' 이튿날 <소년조선일보> 1면에 실린 경축행사 사진과 기사들

 

앞에서 이승만의 호가 '우남(雩南)'이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아첨꾼들이 그의 호를 따서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 우남회관, 우남도서관 등등을 명명했다는 얘기도 소개했구요). 그런데 이승만의 호 '우남'을 갖고 장난질을 한 최대 사기극이 뭔 줄 아십니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명칭을 '우남'으로 바꾸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만약 그때 이 일이 성사됐더라면 '서울시'는 잠시나마 '우남시'라는 명칭을 갖게 됐을 것입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 당시의 수도 명칭인 '경성(京城)'을 폐기하고 '서울'을 새 수도의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미군정이 수도의 새 명칭으로 '서울'을 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앞서 한성, 한양 등의 명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를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우남시'로의 명칭 변경 논의는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승만은 '서울'이 지명이 아니라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서울' 대신 다른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대통령이승만박사 담화집(제2집)>, 1956년)

 

대통령이 한 마디 하자 다들 알아서 기기 시작했습니다. 실체도 불분명한 소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조직이 꾸려지고 명분 축적을 위해 여론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여론조사라고 해야 요즘 같은 전문 여론조사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편접수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믿을 만하겠습니까? 묘하게도 위원회가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 1위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로 나왔습니다. 접수된 편지 3천여 통 가운데 절반가량이 '서울시' 대신 '우남시'를 선택했다는 얘긴데요, 이 편지들은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요? (* 구체적인 통계는 우남(雩南)-1,423명, 한양(漢陽)-1,117명, 한경(韓京)-631명, 한성(漢城)-331명임)

 

'서울시' 대신 '우남시'로 바꾸자는 여론이 1위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56.1.19)

 

그럼에도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지 못한 데는 정치권과 언론 등 여론의 반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야당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민주당 소속 소장파 김영삼 의원(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이 대통령의 행동(우남시 변경/필자)은 알젠틴의 후안 페론의 자찬(自讚)과 같은 것으로 이 대통령은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경향신문> 1956. 8. 25)고 비판했습니다. 이밖에 언론의 반대 목소리도 컸습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남시'로의 변경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조선일보>는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실체도 불분명한 위원회의 조사결과('우남시'가 1위)를 1956년 1월 7일자에 보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19일자에 다시 반복해서 실었습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적극적인 찬성을 밝힌 바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아>나 <경향>처럼 반대 기사를 실은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남시(雩南市)가 1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두 차례나 게재하면서 부제를 달리한 걸 보면 이는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간접적인 '찬성'으로 보면 무리일까요?

 

이승만 동상 건립이 <조선>의 책무인가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는 이로부터 40년 뒤인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다시 부활했습니다. 자사 지면을 통해서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사업부서에서는 대대적인 특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전시회 명칭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인데, 얼핏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서 세웠다는 식으로 착각이 들게 합니다(이는 경제개발을 박정희가 혼자서 다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 해 2월 5일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우남시' 명칭 개정을 반대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참석했었습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시회 개막식 후 전시장을 들러보는 김영삼 대통령(왼쪽 첫번째)

 

전시회 개막 2일 전 <조선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시회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습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은 불굴의 항일투사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선견의 정치가로, 세계열강들 가운데서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평생을 나라를 재건하고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대통령, 4·19를 유발한 독재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말년의 과오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1875~1965)가 한국의 근대사였고 역사를 개척한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바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리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고'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두고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 건국, 6·25전쟁, 전후 복구, 4·19의거, 하야, 망명지 하와이에서의 별세, 유해환국, 국립묘지 안장 등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바탕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더군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승만의 생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시기는 그가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4·19로 하야할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이 시기에 발생한 각종 실정(失政)은 소홀히 다룬 채 일제하 행적이나 한국전쟁 관련 부분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선>이 특별전을 마친 후 펴낸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화보집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전시회 후 펴낸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화보집

 

 [목차]

 임정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 이승만 90년 / 방상훈 = 4

 이승만론 / 김학준 = 20

 언론인 이승만 / 정진석 = 28

 망명·독립운동·임시정부 / 윤병석 = 42

 미 군정에서 대한민국 건국 / 진덕규 = 88

 공산침략과 자유수호 / 안병만 = 116

 전후복구와 권위주의 통치 / 김호진 = 164

 거인의 생애 90년 / 이택휘 = 194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 이한우 = 204

 우남의 한시와 서예 / 이병주 = 208

 거인의 황혼, 하와이 망명생활 / 이인수 = 212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 로버트 올리버 = 216

 이승만의 유품들 = 218

 이승만 연보 = 226

 

얼핏 봐도 이승만의 생애 가운데 부정적인 것은 외면했다는 인상이 드는군요. 각종 '권위주의 통치'는 전후복구 항목 속에 포함돼 있고, 4·19혁명을 유발케 한 '독재' 관련 부분은 2쪽에 불과합니다. 반면 부인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그가 남긴 한시와 서예, 심지어 하와이 망명생활 등을 각각 4쪽이나 할애했으며, 유품도 8쪽에 걸쳐 다뤘습니다. 이래놓고도 과연 '사고'에서 밝힌 대로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조선>이 말하는 "재평가의 출발점"이 아니라 "미화의 출발점"인 게지요. 그러니 그 귀착점은 안 봐도 뻔할 뻔잡니다. 최근 다시 불을 붙이고 있는 '이승만 동상 건립'이 바로 그것이지요.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는 지난 4월 21일자 "간악한 黑心이라 해도 좋다"는 제하의 칼럼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라며 MB정부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 하나도 없는 주장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일보>는 이 같은 주장을 해왔으니까요.

 

2000년대 들어서도 <조선>은 사내 필진은 물론 교수들의 기고를 통해 틈만 나면 이승만 동상 건립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이 펼쳐온 주장의 요지는 '건국 대통령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홀하다'는 것인데요, 그들의 눈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의 칼럼(2011. 4. 21)

 

특정인이나 특정 매체가 특정 역사인물에 대해 호불호(好不好)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필자가 백범 김구 선생이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듯이 <조선일보>나 그 부류(조갑제 등)들이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대상인물을 균형 있게 그려내고 또 그의 단점이나 어두운 구석에 대해서도 눈감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기(公器)인 언론매체라면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로 외눈박이라는 얘깁니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이승만을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찬양·미화한다면 이는 <조선일보>가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凶器)임를 자처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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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일본 땅" 근거는 이승만이 제공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독도와 釣魚島

 

독도와 釣魚島

일본은 섬나라라서 국경 분쟁을 가질 곳이 별로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 극우파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제기한 국경 문제는 세 방향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와 사이에 북방 4도,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사이에 독도 그리고 남쪽으로 타이완(및 중국)과 사이에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다.

북방 4도 문제는 우리가 봐도 공감이 간다. 1855년의 첫 러-일 조약 이래 양국 간의 국경은 상황에 따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했다. 홋카이도 바로 바깥의 북방 4도는 늘 일본령이던 것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 소련이 빼앗아갔다. 아직까지 러시아계 정착 인구도 별로 없으니 근래 일본으로의 반환이 진척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와 댜오위다오 문제는 전연 다르다. 독도야 우리가 잘 아는 일이지만 댜오위다오는 어떠한가. 댜오위다오는 타이완 해안에서 130킬로미터, 중국 본토 해안에서 250킬로미터, 오키나와의 중심지 나하에서는 500킬로미터, 규슈 해안에서는 1000킬로미터 가량의 거리에 있다. 위치로 보아 중국이나 타이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원래 오키나와는 유구(琉球)라는 이름의 독립국으로서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것을 메이지(明治) 시대에 일본이 정복해(1877년) 병탄한 것이다. 얼마 후 청일 전쟁의 결과로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됐으니(1895년) 타이완과 오키나와 사이에 있는 댜오위다오는 따질 겨를도 없이 일본 지배에 들어갔다. 후에 일본은 이 섬을 제멋대로 오키나와 현에 소속시켰다.

중국은 타이완과 적대하는 상황이고 댜오위다오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타이완을 도와주고 있다. 언제든 타이완을 되찾을 때 어차피 묻어 들어올 것이니 느긋하게 타이완에게 맡겨둔다는 속셈인지 모른다.

일본 눈치를 살피느라 독도의 선착장 준공식도 제대로 못하고 장관에게 옐로카드나 띄우는 우리 정부가 딱하다. 독도와 댜오위다오는 같은 문제다. 우리 정부가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만-중국 측을 거들고 독도 문제에 그쪽 도움 받을 생각을 왜 않는지 알 수 없다.

1994년 판 대한민국 수로국 발행 해도에 댜오위다오가 'Sento Shosho'로 표시돼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중국에서 찍는 지도에 독도를 '竹島'라 표시한들 무슨 낯으로 항의할 것인가. (1997년 11월)

ⓒearth.google.com

터키의 서해안은 에게 해에 면해 있다. 그런데 바로 연안에 붙어 있는 섬들까지, 섬이란 섬은 모두 그리스 땅이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진도, 완도, 거금도 같은 섬들이 모두 중국 땅인 격이랄까? 터키 제국이 수백 년간 다스리던 섬들을 20세기 들어 빼앗긴 결과다. 본토는 잘라내기 힘들어도 섬들은 있는 대로 탈탈 털어갔다.

전쟁에 이기면 영토를 빼앗고 지면 빼앗기는 것이 고래의 관습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 관습이 계속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방면의 엄청난 영토를 빼앗겼고, 이탈리아도 아드리아 해의 섬들을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방면의 상당한 영토를 내놓았다. 심지어 루마니아조차 베사라비아를 소련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전쟁 책임이 독일 다음으로 큰 일본만은 영토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침략했던 땅을 뱉어놓은 외에는 러시아에게 북방에서 밀린 정도뿐이었다. 섬나라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이유만이 아니다. 오키나와는 수백 년간 독립국이던 유구를 불과 70년 전에 병탄한 것인데, 그조차 결국 일본 땅으로 남았다.

문제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성격에 있었다. 다른 패전국의 배상과 영토조정은 1946~1947년간의 조약으로 처리되었다. 연합국 사이의 합의를 통한 처리 방침이었다. 미국, 소련, 영국, 3국의 합의가 기본이었고 중국과 프랑스도 더러 발언권을 가졌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소련과 중국은 완전히 빠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렀다.

미국은 1951년 당시에 일본을 아시아 방면의 가장 중요한 보루로 확보할 방침이었다. 이미 천황제 존속 등의 조치를 통해 일본을 편으로 삼을 뜻을 확실히 하고 있던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아시아 방면이 불안해진 만큼 더욱더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은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리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등 일본의 침략 피해가 큰 나라들의 반발을 미국이 다른 보상을 통해 대신 무마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장 피해가 큰 두 나라의 불만은 묵살해 버렸다.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전쟁 중이었고, 한국은 미국에게 꼼짝 못하니까.

패전 전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극우파가 전후 일본에서 세력을 지킨 중요한 이유 하나는 미국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 준 데 있다. 독일과 독일인에게 처참한 파국을 가져온 나치는 독일에서 고개를 들 여지가 없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꿀릴 데가 없다. 그들이 한국인에게만 근대화시켜 준 공치사를 하겠는가? 침략과 전쟁을 통해 일본인의 능력과 근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전후의 경제 번영도 가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 승전국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국가"로 간주되어 참여를 거부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아무 역할도 없었던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힘을 지켜주고 그 환심을 사기 위해 희생시킨 것이 한국과 중국의 이익이었고, 그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 독도와 댜우위다오다. 댜우위다오의 경우 타이완이 1971년 유엔에서 축출되고 미국이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까지는 중국도 타이완도 문제를 제기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반면 독도 문제를 지금까지 깨끗이 해결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형편없는 외교력과 함께 미국에 대한 심한 종속성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 극우파의 주장에는 두 개 측면이 있다. 역사적 배경과 국제법적 관계다. 1970년대까지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주장이 많았는데, 1980년대 들어 한국 학계의 조사 능력도 발전하고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도 그 무리한 점을 지적하면서 잦아들었다. 시마네 현의 향토사 차원에서 지역 여론을 선동하는 데나 쓰일 정도이지, 대외적인 설득력이 별로 없게 되었다.

국제법적 관계의 근거로 일본 극우파가 내놓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다. 편을 잘못 골랐다고 '후회'할 뿐이다. 패전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편을 바꿀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미국이 중국이나 한국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타났다고 믿는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는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초청받지 못했다.

정두언 의원이 누군가를 겨냥한 "개나 소나 독도"란 말로 주목을 끌었는데, 사실 정치인들 중에 독도의 의미를 쥐뿔도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다. 비슷한 풍조가 1951년에도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 극우파에게 꼬투리를 남기기도 했다.

미국이 준비한 대일 강화 조약 문안 중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제2조 a항)는 내용이 있었다. 주미 대사 양유찬이 이끌었던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쓰시마(대마도)까지 보탤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독도와 파랑도를 넣을 것을 다시 요구했다가 또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은 두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구를 제출했던 일등서기관 한표욱은 위치의 질문에 "일본해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be h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ungdo.)

독도의 위치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다케시마'란 이름만 댔으면 바로 확인됐을 것이다. 그런데 전설의 섬 파랑도와 함께 "그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요구하는 쪽에서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는데 요구받는 쪽에서 알뜰히 찾아줄 리가 없다. 독도 표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에서 이런 경위를 밝힌 다음 762~763쪽에 이런 논평을 붙였다.

한국 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년 7월 19일)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 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 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 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 협의(1951년 7월 19일)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부터 그렇다. 그런 일본인을 이 글에서도 자꾸 '극우파'로 표기하게 된다. 그러나 극우파 아닌 일본인도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1951년 7월 한미 간의 협의 내용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만이 일본에서 횡행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문제고, 또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 주장하고 싶은 방향에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미워하기만 하기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욕을 하는 데도 선후를 가릴 필요가 있다. 일본 극우파야 어느 사회에나 독단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니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국민에게 '반일'을 팔아먹으면서 독도에 대해서고 무엇에 대해서고 아무 진지한 생각 없이 일본 극우파의 주장 근거만 만들어준 이승만 매국정권이 정말 한심한 존재다.

 

기사입력 2011-08-10 오전 8:24:33 /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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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독립의 ‘훼방꾼’ / 김자동

이승만의 고집 때문에 임시정부 대표단이 유엔 창립총회에 참가할 기회가 박탈되고 말았던 것이다

 

국민의 시청료를 받아 운영되고 있는 <한국방송>(KBS)이 일련의 반민족적 방송을 계획하는 것을 보고 침묵을 지킬 수 없어 몇 자 적어 보려 한다.

 

한국방송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것은 우리의 헌법을 무시한 행동이다. 1987년의 민주혁명으로 선출된 새 국회는 그해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했다. 여기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우리나라의 법통과 이념을 명시해 놓았다. 4·19 민주혁명은 바로 이승만의 폭정에 항거한 것이며 이때 이승만 독재정권은 타도되었으며 그의 동상은 시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선엽의 미화에 이어 이승만 찬양방송 특집 5부작을 제작한 것은 대한민국의 항일투쟁과 4·19 민주이념을 말살하려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폭거인 것이다.

 

이승만의 죄행 중 상당부분은 이미 알려져 있으나 나는 이승만 미화 공작에 대응하여 그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우리 독립에 ‘훼방’을 한 일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주미한국위원회(대표부)를 설치하며 이승만을 대표로 임명했다. 그때 임시정부에서는 그가 독선적이며 고립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주 한인 항일세력들은 이승만에게 호감을 갖지 않은 사람까지도 위원회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이승만은 이들의 협력을 거절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의에 참가한 미국·영국·중국 3국 지도자는 “세 나라는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에 따라서’(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제대로 임무를 수행했다면 적어도 루스벨트에게 한국은 일제에 강제 병탄되기 전까지 오랜 독립국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과 우리 국민은 충분한 독립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했다.

 

1945년 4월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유엔) 회의가 열려 유엔헌장이 채택되고 이에 따라서 유엔이 창립됐다. 이 회의의 참석자들은 거의 전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쪽에 가담했던 국가들이었다. 특히 국토가 독일 점령 아래 있는 런던의 망명정부들도 대부분 회의에 초청되었다. 중국국민정부의 주장대로 임시정부의 대표도 초청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부주석인 김규식 박사, 부단장은 조소앙 외무부장, 단원은 정환범 차장으로, 3인은 중국정부에서 발급한 여권도 받았으며 중국정부로부터 필요한 미화 대부 승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데 미 국무부 당국에서는 임시정부의 참여를 위해 재미 한인이 구성한 연합체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사실 임시정부에서는 당시 무엇 때문에 미국이 한국의 참여를 반대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 나는 1978년 서울의 판문출판사에서 발간됐으나 일반 판매는 안 된 <이승만과 미국의 한국참여, 1942~1960>(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이란 영문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승만을 가장 존경했으며 경무대의 고문관으로 있었던 로버트 T. 올리버였다. 여기에 한국의 유엔 창립 참여가 무산된 경위에 관한 부분(위의 책 15쪽)을 그대로 옮긴다.

 

“한국의 여러 민족주의 분파는 국무부의 고무와 실제적 협조 하에 ‘통합한인위원회’로 편입되도록 한다. 여기서 기대하는 바는 전 한국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을 얻는 데 있다. 충칭에서는 김구가 중국정부의 상당한 지지 하에 한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다. 옌안에는 조선독립동맹이 활동하고 있다. 이곳 미국에는 한길수와 김용중이 한국의 어떠한 정권이든 수립하는 데 있어서 미국과 유엔의 지지를 받기 위한 연합 형태에 찬동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런 연합체는 한국을 공산주의자에게 내주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통합한인위원회와의 관계를 끊었다. 한과 김의 연합체 구상은 동시에 미국의 정책이었으므로 통합위원회는 이(승만)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박사는 미 국무부의 비난과 한인 반대자들의 심한 질타를 받으며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이승만의 이런 고집 때문에 미주지역 한인 전체의 지지를 받는 임시정부 대표단이 유엔 창립총회에 참가할 기회가 박탈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유엔의 창립회원이 되었다면 임시정부는 소련을 포함한 유엔 참여 각국으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받았을 것이다. 군사작전상 미·소가 한국을 분할 점령했더라도, 임시정부는 미·소 등에 있는 망명 한인 대표와 국내의 각계 지도자를 포함하는 재조직은 필요했을 수 있지만 유일 합법정부로 국내에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신탁통치를 한다는 말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며 통일된 한국정부는 자동적으로 승전국으로 대일강화조약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훼방’ 때문에 우리는 신생독립국의 대열에서 빠진 상태로 두 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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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국민회 분열, 이승만 ‘자산 사유화’가 씨앗”

사료수집가 로버타 장, 하와이 부동산 등기자료 추적
“국민회 자금으로 부동산 구입 담보대출 상환책임도 떠넘겨...

한인들이 준 독립운동자금 단 한번도 전달된 적 없어...

자기이익 챙긴게 그의 실체”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7200여명의 한국인들이 갤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 여러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한 이 대규모 노동이민은 그 뒤 크게 불어날 미국 한인사회의 계기가 됐다. 특히 1909년 만들어진 ‘국민회’는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각각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모국을 잃어버린 하와이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올 독립을 바라며 국민회에 성금을 냈다. 1912년 네브래스카대에서 군사공부를 한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초청해 국민회 임원을 맡기고 소년병학교를 지원했던 것은 당시 한인들의 바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1913년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이승만에게 하와이 시절은 미국 사회에 한인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린 시기이지만, 하와이 한인들에겐 분열과 반목, 대립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하와이 동포 2세이자 사료 수집가인 로버타 장(80)씨는 “한인사회의 분열은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한다. 하와이 이민 100년사를 정리한 책 <하와이의 한인들>을 펴내기도 했던 장씨는 지난 6월 귀국한 뒤 기자와 인터뷰했고, 이달 초엔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연구자료를 <한겨레>에 보내왔다.

 

» 국민회와 하와이 이민사에 관련된 사료를 수집해 온 하와이 한인 2세 로버타 장씨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호놀룰루 신문 등 당시 자료를 보여주며 국민회의 활동과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법정소송 자료, 당시 한인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한 신문기사 등 다양한 기록들이 이미 나와 있다. 또 흔히 무력투쟁을 강조한 박용만파와 외교 노선을 강조한 이승만파의 대립이 분열의 중심이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씨는 한인사회 분열의 정확한 실체를 보기 위해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국민회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들여다본 것이다. 하와이 등기소에서 찾아낸 기록들과 법정송사 기록 등을 꿰어보면, 당시 한인사회를 분열로 몰아간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1915년은 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시기로 꼽힌다. 당시 회장이었던 김종학과 박용만 등 주요 간부들은 자금 횡령의 의혹을 받고 남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 뒤 홍한식 목사가 새 회장직을 맡는 등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민회 주요 간부직을 접수했다. 로버타 장씨는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1914년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1914년 7월16일 여학교 기숙사를 만들기 위해 한인사회에서 거둬들인 자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같은 날 그 부동산을 담보로 연리 8%로 1400달러를 대출받았다. 1년 뒤인 상환일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회를 장악한 것이다. 실제로 국민회를 장악한 직후인 1915년 7월27일 국민회는 국민회 자산인 여학교를 1달러에 이승만에게 매각했다. 그러나 대출받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상환의 책임은 국민회에 있었다.

 

이처럼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줄곧 국민회의 그림자를 지우고 국민회 자산과 한인사회 공동의 자산을 자신의 것처럼 쓸 수 있도록 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이를 위해 한인사회를 극심한 분열로 몰고 갔다고 장씨는 주장한다. 부동산 등기 기록과 법정소송 기록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1916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4500달러에 사들인 부동산과 여학생 기숙사를 담보로 삼아 4250달러를 대출받았고, 국민회 자산인 남학교를 양도받아 이를 담보로도 3500달러를 대출받았다. 그러나 대출금을 어디에 썼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상환 책임은 국민회에 떠넘기는 패턴이 계속됐다고 한다. 이에 반대했던 새 국민회 회장 홍한식 목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섬으로 전출을 갔고 다른 이승만파 국민회 간부들이 이를 승인했다. 1918년에는 이승만이 주도한 자금 집행에 의문을 품고 반발한 국민회 회원들이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장씨의 기록을 보면, 이런 패턴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이 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1921년 뒤에도 계속된다. 임시정부 수반의 권위로 국민회를 해체하고 ‘교민단’이라는 새로운 한인단체를 세운 이승만은 “마치 부동산업자처럼 끊임없이 부동산을 사고팔았”고, 1918년 자신이 독자적으로 만든 ‘한인기독학원’에 국민회 자산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재정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짜 임원들로 구성된 이사회로 부동산 매각을 승인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패턴에 이승만 지지자들도 결국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새로운 한인촌 개간, 벌목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기 위해 이승만이 주도해 만든 ‘동지식산회사’를 두고 벌어진 폭동이 대표적이라 한다. 동지식산회사가 잇따른 사업 실패로 파산에 이르자, 여기에 투자했던 이승만 지지자들마저 크고 작은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 국민회가 지원한 군사학교에서 한인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 하와이에 온 박용만은 한인소년병학교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치려 했으나 한인사회의 극심한 분열로 좌절했다.

 

무엇보다도 장씨가 문제로 삼는 것은, 하와이 한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선뜻 냈던 자금이 독립운동에 쓰이기는커녕 출처도 제대로 알 수 없이 쓰였다는 점이다. 장씨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 투사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려던 것이 국민회의 본뜻이었는데, 이승만이 한인사회를 장악한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자금이 전달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장씨는 “한인사회를 분열시켜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긴 것이 이승만이란 인물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장씨의 자료를 검토한 재미한인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안형주씨는 “기존의 연구성과에 더해 부동산 기록을 통해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직접적으로 밝혀줬다”며 “이 부분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연구를 집중해 이승만의 실체적인 모습을 더욱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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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고종 밀사설’ 깨졌다

1905년 루스벨트 만나 “일진회 대변인” 자처
대한제국 부정하고 반러·친일 노선 드러내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와 함께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여름 백악관을 찾아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을 앞둔 시점에 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 유지에 힘써달라’는 뜻을 전달한 이 사건은 이승만 대미외교 노선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다만 당시 이들이 어떤 자격으로 루스벨트를 만났는지는 뚜렷하지 않아, ‘고종의 밀사였다’는 등 설이 많았다.

 

최근 <한겨레>가 당시 미국 신문기사들을 검색한 결과, 이승만과 윤병구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하고, “일진회의 대변인”을 자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등 일본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사실도 나타났다. 옛 독립협회, 동학 계열 세력들이 1904년 결성한 일진회는 당시 한반도에서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 활동했으며, 1905년 11월 일본에 조선의 외교권을 맡기는 데 찬성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단체로 바뀐다. 이 자료들은 미 의회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신문검색 서비스(chroniclingamerica.loc.gov)를 활용해 찾아냈다.

 

» 1905년 윤병구와 이승만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면담 내용을 보도한 <워싱턴 데일리 트리뷴> 등 당시 미국 신문 기사들

 

<뉴욕 데일리 트리뷴> 1905년 8월4일치 7면에 실린 ‘오이스터 베이의 한국인들’이란 제목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는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온 윤병구와 이승만이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할 것을 위임받았다”고 말한 것을 인용·보도했다. 기사는 또 이들이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며 “수천명의 회원들로 이뤄진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구실을 할 것”(will take hold of affairs and conduct the government)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 8월8일치는 “윤병구와 이승만은 자신들이 러시아 영향력 아래 놓인 황제를 대표하고 있지 않으며, 힘있는 단체인 ‘일진회’의 대변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고, <워싱턴 타임스> 8월4일치는 “이들은 ‘일진회’로 알려진 한국의 거대 진보정당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매체들은 러시아와 일본 두 열강의 위협을 함께 우려하면서도 일본에 더욱 우호적인 이들의 태도에 주목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이 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을 빌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전자(일본)를 주인(masters)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거의 없다”고 보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는 같은 내용의 기사에 아예 ‘한국은 삼켜질 것을 주저하고 있지만,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목구멍을 선호한다’는 제목을 달았다.

 

이런 자료들은 기존 ‘고종 밀사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병구·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러 일본으로 향하던 육군 장관 태프트가 하와이 한인 대표인 윤병구에게 써준 소개장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뚜렷한 대표성을 내세우기 어려웠기에, 실질적 연관은 없지만 신흥 정치세력인 일진회를 내세워 취약한 대표성을 보강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이들의 당시 노선은 뚜렷하게 ‘반대한제국, 반고종, 반러시아, 친일본’ 등이었다.

 

이승만은 자서전 등을 통해 “루스벨트는 ‘공식 외교 채널로 청원서를 보내라’고 했으나, 주미공사였던 김윤정이 ‘친일’로 돌아서서 여기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기사들을 보면, 대한제국 관리인 김윤정으로서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부정하는 윤병구·이승만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대한제국과 황제를 철저히 부정하고 당시 이미 일본 쪽에 기울어져 있던 미국에 (이승만이) 일본 입장을 편든 것이, 제대로 된 ‘국권 수호’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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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화는 주권자 국민 모독

국민의 저항으로 축출된 독재자를 부활시키겠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자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뿐

 

<한국방송>(KBS)은 논란 속에 이승만 특집을 강행하면서 ‘이승만은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건국자 이승만 때문에 존재한다는 발상이다. 그에 따라 이승만의 행적을 꾸미고 포장하여 긍정적으로 부각시키고, 비판받아 온 부분은 교묘하게 변명했다.

 

방송에서 부정적인 견해도 여러차례 소개해 객관적 균형을 갖춘 듯했지만 구색에 지나지 않았다. 큰 줄기는 이승만이 남긴 기록을 비롯해 그 주변 인물들의 주관적 의견과 우호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내세워 구성했다. 심지어 4·19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승만이 스스로 사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4·19 항쟁조차 그의 공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과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역사에는 늘 고비가 있고 그때마다 소임을 떠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침 이승만은 민족사의 가장 큰 시련기에 활동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민족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과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위상 때문에 그는 늘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우선 이승만은 빈번한 정치적 암살을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무고한 수많은 인명 살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들을 결집하여 방어에 나서기는커녕 야반도주하면서 서둘러 대부분 이념과는 무관하게 동원하여 억지로 가입시킨 보도연맹원들을 수만명이나 집단학살했다. 적이 점령했을 때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예방책으로 미리 제거한 것이라고 했다. 문명사회에 이런 잔인한 경우가 또 있을는지.

 

이승만이 주장한 외교독립론도 기실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만일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이 합심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었더라면 어땠을까 추론해 보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의 일생을 통해 가는 곳마다 갈등과 분란을 야기했으며, 일찍이 3·1 운동에 나타난 독립을 향한 전민족적 열망을 저버리고 위임통치안을 들고 열강들에게 간절히 청원한 바도 있다.

 

이승만은 1954년에 이미 노쇠하여 공적인 업무를 원활히 처리할 수 있는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간행된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그해 육사를 방문하여 사관생도들의 사열을 받고는 동석한 국방장관에게 여기가 어디고 뭐 하는 곳이냐고 마이크가 켜진 상태로 모두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 혼미한 인지력의 상태로도 권력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은 아랑곳 않고 헌법을 누더기로 뜯어고쳐 7년이나 더 권좌를 차지했으며 무자비한 인명살상의 독재를 행했다. 그래도 부족해서 또다시 엽기적인 방법으로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4·19, 5·18 광주항쟁, 6월항쟁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구축해온 반공을 빙자한 극우 폭력사회에서 점차 탈각할 수 있었다. 반면에 위기에 처하게 된 수구 기득권층은 그러한 시대 흐름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승만을 건국 시조로 내세워 반전을 꾀하려는 것이다. 과거 인물을 들춰내 억지로 미화하고 숭배한다면 이는 역사 영역 밖의 폐쇄적 우상화이거나 신앙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철거된 동상을 다시 세우고 마치 왕조시대처럼 그를 조상신으로 추앙하면서 찬양하고 있다. 그의 행적을 신비화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극우적 색깔로 재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4·19 항쟁이라는 거대한 국민 저항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축출된 독재자일 뿐이다. 4·19는 정부 수립 이후 오로지 자신의 권좌 유지를 위해 국가와 역사를 파탄 낸 범죄적 행동에 대한 엄정한 심판이었고 역사의 거스를 수 없는 평가였다. 그렇게 국민의 저항으로 축출된 독재자를 부활시키겠다는 것은 주권자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역사를 부인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으로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역사의 의미는 미래 지향의 가치관을 가지고 과거를 성찰하는 데 있다.


2011.10.3 /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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