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by Wood-Stock 2011. 6. 18.

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6000원

“봉기하라!” 세계 흔든 95살 레지스탕스

나치서 사형선고 받았던 에셀 34쪽짜리 책써 200만부 ‘신드롬’

약자 멸시·경쟁 부추기는 현실 “평화적 방법으로 저항을” 강조

 

 

분노하라! 90대 노투사의 외침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고,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한 영세 출판사에서 초판 8000부를 찍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그 뒤 7개월 만에 무려 200만부를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켰고(<한겨레> 2011년 1월5일치 24면), 세계 각국으로 판권이 팔려 나갔다.

 

표지를 포함해 34쪽에 불과한 이 ‘팸플릿’의 지은이는 올해 세는 나이로 아흔다섯인 스테판 에셀. 그는 2차대전 당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집행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전력의 소유자다. 그 뒤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와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역임하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그가 망백(望百)을 넘어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목소리를 높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에셀이 보기에 2010년의 프랑스는 자신이 레지스탕스로 싸우면서 꿈꾸었던 자유 프랑스의 모습에서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1944년 3월, 그가 속했던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는 나치에서 해방된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를 담은 개혁안을 작성했다.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퇴직연금제도 △각종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 거대 은행들의 국유화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의 언론의 독립 △교육권 보장 등을 담은 그 개혁안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현실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60여년 뒤 프랑스의 현실은 그런 레지스탕스의 이상과는 거꾸로 된 길을 가고 있는 듯했다.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의 핵심이 바로 ‘분노’였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물론, 나치라는 악과 자유 프랑스라는 선의 구분이 분명했던 60여년 전에 비해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 오늘날 분노의 대상이 불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에셀 자신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소한다. 주변을 둘러보라고. 그러면 분노의 대상이 보일 것이라고.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참여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표와도 같은 앙가주망(참여)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인데, 실제로 사르트르는 에셀이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 같은 선배’였다.

 

이렇듯 분노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에셀이 보기에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분노와 참여를 차단하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그는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번역자와 행한 이메일 인터뷰에서도 젊은이들이 일단 지지 정당에 투표할 것과 시민단체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7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두 6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책자의 한 장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할애되었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외교관 여권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전쟁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했다.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역설하면서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이어야 하며 그쪽에 더 희망이 있다고 에셀은 힘주어 말한다. 그는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선배 사르트르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넬슨 만델라와 마틴 루서 킹 같은 이들의 비폭력 저항에서 교훈을 찾고자 한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기도 한 ‘평화적 봉기’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선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


‘분노하라!’ 프랑스 뒤흔든 ‘30쪽의 외침’


93살 레지스탕스 영웅 스테판 에셀 책 60만부 팔려
자본 폭력에 대한 저항·민주주의 수호 촉구 ‘반향’

 

 

30쪽짜리 작은 책 하나가 프랑스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앵디녜 부!>(Indignez vous!). 우리말로 ‘분노하라’는 제목의 소책자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스테판 에셀(93·왼쪽)이다.


지난해 10월 초판 8000부가 출간된 이 책은 석달 새 무려 60만권이 팔려나갔고, 크리스마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데 힘입어 새로 20만권을 증쇄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3일 전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레지스탕스 영웅은 이 책에서 프랑스인과 다른 모든 세계인들에게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고 촉구한다. 광고문구와 주석을 뺀 본문은 13쪽에 불과해, 책이라기보다 격정적인 정치 팸플릿(레드북)에 가깝다.


다분히 선동적인 이 책이 판매부수 2위의 소설책보다 8배나 많이 팔릴 만큼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은 단지 3유로(약 4500원)라는 저렴한 책값과 읽기에 부담 없는 분량 덕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독창적이거나 깊이 있는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장에 대한 맹신과 자본의 폭력에 ‘분노’하라는 칼칼한 외침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은이와 출판사는 “시장독재와 은행가들의 보너스와 재정위기가 전후 복지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대에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민감한 신경을 정면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노 신드롬’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해석되는 이유다.


에셀은 신년 메시지에서 자신의 책이 성공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이) 1940년대에 나치즘에 맞섰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도 정치·경제·금융 권력의 공모에 맞서, 2세기에 걸쳐 이룩한 민주적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노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프랑스에선 미묘한 정치적 파장까지 일고 있다. 지은이가 일깨운 프랑스적 가치인 ‘레지스탕스’(저항)가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의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책의 한 대목은 이렇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


분노하라!


5월6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서울지역 한 고등학교의 ‘성적 카스트’ 기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게 “분노하라!”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이 최근에 펴내 인구에 회자된 책 제목이다.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분노의 능력을 인간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로 꼽았는데, 우리가 분노를 잃으면 그 당연한 귀결로 앙가주망(참여)도 함께 잃는다고 경고한다. 젊은 시절에 분노 때문에 저항운동에 참여했다는 그가 93살에 이른 오늘 “분노하라!”고 선동적인 책을 펴낸 것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더욱 벌어지는 간극, 날로 추락하는 인권과 지구 전체의 상황 때문이다. 아직 인간이어서일까, 전교생을 “알짜(1~50등), 예비(51~100등), 잉여(101등 이하)”로 구분한다는 기사 앞에서 나는 분노에 떨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한국판 5월호는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특집을 꾸렸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프리모 레비의 “이게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할 지경에 이른 듯하다. 르디플로 특집에 실린 “등록금은 미치지 않았다. 뻔뻔할 뿐”이라는 글처럼, 우리가 흔히 미쳤다고 말하는 교육도 뻔뻔하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분노할 줄 모르는 토양에서 피어오르는 게 뻔뻔함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인간적 횡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더욱 거세진 경쟁과 효율의 구호는 이미 “교육의 목표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있다”거나 “학교는 더불어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라는 수사조차 지워버렸다. ‘선택과 집중’은 본디 인간인 학생이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학과목을 선택하여 집중한다는 뜻인데, 이젠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여 ‘알짜’만 집중하여 특별반을 편성하고 각종 특혜, 심지어는 교사 선택권까지 주고, 나머지는 ‘예비’하거나 ‘잉여’로 내버린다는 뜻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율학습실과 기숙사를 성적에 따라 자격을 주고, 좌석 배치는 물론 사물함, 책상 크기, 컴퓨터 설치 등 각종 학습 환경에서까지 차별하고, 성적 우수자에게만 토론대회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곳이 아닌 학교에서!


이런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익힐까? 지독한 ‘지적 인종주의’를 학습하여 차별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뻔뻔한’ 대학등록금 문제에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학생들에게는 대물림 구조에 의해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점과 함께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의식이 작용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중하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버림받아 주체화에 이르기 어렵다는 게 작용한다. 선택된 자든 버림받은 자든 인간성 훼손의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진보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듯이 인간성의 훼손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추락할 때 분노할 줄 몰라 익숙해지면 다시 또 추락하고 또 익숙해지면서 기어이 파국에 이르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게 “이게 인간인가”라고 묻게 한 나치즘도 그런 경로를 밟았다. 특목고 우대와 자사고 확대, 고교선택제, 수능성적 공개, 학교 줄 세우기와 국민세금 차등 사용 등 경쟁만능주의 교육정책들이 하나하나 수용되고 익숙해지면서 마침내 학생들을 ‘알짜, 예비, 잉여’로 나누는 괴물학교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곧 저항이며, 저항하는 것, 그것이 곧 창조다”라는 말로 끝맺는다. 나는 먼저 서울시민들에게 모레(5월11일) 마감되는 학생인권조례 발기인 서명에 동참해달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우리 학교가 조금이라도 덜 흉물스럽게 하기 위해.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

 

분노하라, 전세계 뒤흔든 외침

ㆍ노 레지스탕스 대원이 젊은이에 전하는 메시지
ㆍ불평등 심해지는 한국 ‘참여·저항의 가치’ 시사

“젊은이들이여,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참지 말아야 하는 게 어떤 것인지 곧 알게 된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하겠어? 내 일이나 잘해야지…’라는 태도다. 그러면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의 하나인 분노의 힘을 잃게 된다. ‘참여’의 기회도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약했던 94세 노인 스테판 에셀은 20여쪽짜리 소책자(팸플릿)에서 젊은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분노하라’고 말한다. 책 제목도 분노하라는 뜻의 <앵디녜 부!(Indignez-vous!)>이다. 지난해 10월 직원 2명의 작은 출판사에서 초판 6000권으로 시작한 이 책은 현재 프랑스에서만 200만부 가까이 팔렸고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미국, 일본, 브라질 등에 이어 곧 한국어로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에셀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각자 분노의 동기를 찾되 폭력을 거부하자는 제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뭔가에 분노할 때 투사가 되어 역사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더 많은 정의와 자유가 생긴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화가 서로 화해하는 시대”에 폭력을 멈추게 하는 확실한 수단은 ‘비폭력’ 평화적 봉기라고 그는 말한다.

‘분노하라’는 메시지 외에 깊이 있는 분석도, 새로운 내용도, 구체적인 행동계획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세계는 왜 이 책에 열광하는 것일까.

영국 일간 가디언은 에셀의 책이 니콜라 사르코지 우파 정권에서 발생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강한 분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영국 번역판의 편집자 찰스 글래스는 미국 주간지 더 네이션에 “사르코지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 정신은 미국, 영국의 청년들도 다를 것이 없다”고 진단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2008년의 위기는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라 문명의 위기”라고 지적하면서 시장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에셀이 꼽은 분노의 첫 번째 대상은 빈부격차다. 그는 “서구의 생산 집착적인 사고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프로그램과 독립된 언론, 차별 없는 교육 등 과거 레지스탕스가 얻은 사회적 성과가 대부분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둘째는 전 지구적으로 보편적 인권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에셀은 인권가치의 퇴보에 분노할 것을 촉구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5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책은 94세의 노 혁명투사가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현대사에 대해 고뇌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키우라고 던지는 메시지”라며 “프랑스보다 분노할 게 더 많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스테판 에셀… 나치에 저항한 인권활동가

 

<앵디녜 부> 열풍의 가장 큰 배경은 저자인 스테판 에셀 자신이다. ‘분노하라’는 메시지와 어울리는 영화 같은 삶 자체로 울림을 준다는 평가다.


1917년 독일 베를린 태생의 에셀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한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두 남자의 동침을 다룬 앙리 피에르 로셰의 53년 소설 <쥴과 짐>은 실제 에셀의 부모님을 모티브로 했다.

24년 가족은 파리로 이민했다. 1937년 파리 고등보통학교(ENS)에 입학한 그는 <구토> <존재와 무> 등을 읽으며 장 폴 사르트르를 사숙했다. 개인의 책임과 참여 의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41년 드골 장군의 런던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고 3년 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돼 고문을 당한다. 사형 집행 하루 전 다른 수용소로 옮겨지는 동안 다른 수감자와 신분을 바꿔 탈출에 성공한다.

전후에는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48년 유엔 비서로서 세계 인권선언문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레바논 침공과 가자지구 공격 등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인권에 대한 범죄라고 규탄해왔다.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


[94세 할아버지의 피 끓는 절규] 20대여 "분노하라, 봉기하라!"

한국 상륙한 '분노' 열풍, 등록금 '폭탄'에 불 붙이나!

기사입력 2011-06-17 오후 6:19:32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는 그 내용이 아니라 독특한 형식으로 인해 일찍이 출판계와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치 독일의 점령기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올해 94세의 역전의 용사가 특히 젊은 세대를 상대로 '분노하라'는 메시지를 담아 쓴 한 권의 얇은 팸플릿. 그리고 그 책자가 불러온 엄청난 폭풍.

 

국내 번역본을 낸 출판사 돌베개에 따르면,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 후 7개월간 200만 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의 원문은 광고 문구와 표지 등을 빼면 13쪽에 불과하다.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분량의 작은 책자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 곁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분노하라!".

 

한국어판으로도 이 책의 본문은 고작 31쪽에 지나지 않으므로, 잠시 그 내용을 요약해 보자.

 

에셀은 나치로부터 레지스탕스가 프랑스를 해방시키던 그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를 움직이게 했던 동기, 즉 분노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찾기 바란다." (15쪽)

 

그 분노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무관심을 떨쳐내며, 그것을 팔레스타인의 평화주의자들처럼 비폭력이라는 더 나은 수단을 통해 표현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부조리 앞에서 무관심하지 마라, 분노하라'고 외치는 책이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집단에게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록 에셀이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분노를 회복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 당시 뿌려졌던 숱한 팸플릿과 달리, 이 책은 총과 칼을 차고 거리로 뛰쳐나와 왕의 군대를 쏘아죽일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따라 평화롭게 걸으며 매주 (이스라엘의 표현을 따르자면) '비폭력 테러리즘'을 수행하는 빌린의 시민들처럼,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33쪽)인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 에셀의 확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단호한 비폭력주의는 이 책이 보편적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 중 하나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좌파'라고 믿는 특정한 집단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통한 세상에의 개입은 물론 '정답'이지만, 모든 정답들이 그러하듯이 너무도 옳다. 지적으로건 정서적으로건 좀 더 자극적인 책을 원하는, 심장이 뛰고 두뇌가 달아오르며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읽던 책을 던져버리고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바라던 일부 열혈 청춘들 혹은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의 결론은 싱겁거나 심심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슬라보예 지젝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혁명적 좌파 지식인'들이 레닌을 복권시키고 스탈린주의를 재평가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책 <분노하라>를 조금 더 섬세하게 읽고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지젝이 레닌을 재평가하고 알랭 바디우가 민주주의를 "오늘날 실로 궁극의 적"이라고까지 말하는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투표를 통한 참여와 비폭력 투쟁을 이야기하는 이 책 <분노하라>는 왜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으며,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분노하라>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우리는 에셀에게서 레지스탕스 투사가 아니라 차라리 돈키호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월드. 자본의 보편성이 금융의 날개를 달고 국경을 넘어 시세차익을 노리며 식량 투기를 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시대. 이 난해한 세상과 맞서기 위해, 앞서 언급한 '첨단의 이론가'들은 더욱 난해한 이론과 논리와 문체를 꺼내들었다. 반면 1917년 태어나 90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이렇게 외친다.

 

"세 단어로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62쪽)

 

앞서 나는 에셀을 '돈키호테'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나치 독일과 싸우던 그 시대와 달리, 21세기가 시작되고 벌써 10년도 넘은 지금은 그저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인으로서 태어나고 살아온 그는 프랑스의 건국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가 보편적 이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비(非) 프랑스 인'으로 살아야 했던 프란츠 파농과 그의 후예들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책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적 문제'들에 대해 어떤 뚜렷한 해법을 건네주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서 갑자기 21세기로 건너온 듯한 이 돈키호테가 세상을 향해, 혹은 젊은 세대들을 향해 지르는 함성 속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또 지금 여기 이 순간에서 유의미한 책이 되게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우리는 이른바 '감정 노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어느 순간은 '고객님'이 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줌마'가 되는 그런 세상이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턱없는 등록금을 요구받아 울분이 치솟을 때, 서점의 자기 계발 코너에 꽂힌 책들은 울컥하는 우리들을 '긍정적으로' 꾸짖는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혹은 당장 한국에서 벌어지는 노동력 착취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냉소적인 사람들은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간다. 네 손에 들려있는 아이폰은? 그거 만드는 중국 공장 직원들 자살하는 거 몰라? 너만 깨끗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냐?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화되고 있는 자본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진화한 모습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분노하라>가 유의미해지는 지점과 맞닥뜨리게 된다. 앞서 우리가 언급한 첨단의 이론가들은 이런 세상에 대해 더욱 두꺼운 책, 더욱 현란한 인용과 각주와 대중문화 비평과 사도 바울에 대한 재해석과 문헌적 비틀기로 맞서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극복과 자유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거대한 혁명을 희구하지만, 실천적으로 완성될 가능성이 희박한 그 혁명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다.

 

반면 21세기에 도착한 20세기의 돈키호테는 그저 이렇게 외칠 뿐이다. 감정까지 팔아가며 노동해야 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라!", 긍정을 강요하며 우리에게 일그러진 웃음의 탈을 씌우는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 , 세상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복합체라면서 그저 냉소할 뿐인 저들을 향해 "분노하라!".

 

이 소박한 결론의 아래에는 이른바 '현대적 조류'와는 사뭇 동떨어진, 그래서 검토할 만한 가치를 새삼 지니게 된 어떤 철학적 입장이 깔려 있다. 에셀은 자신을 참여로 이끄는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에서 생겨"(18쪽)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혹은 문제가 아닌지 알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무언가에 대해 '참여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에셀은 세계의 문제들이 너무도 복잡하게 꼬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어떤 복잡하고 현란한 논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22쪽)라고 부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런데 그 인식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의지를 형성시켜준다.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분노하고 참여할 수 있는 힘)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22쪽)고 에셀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를 의지를 통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의 문제를 모르거나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의지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의지가 먼저인가 인식이 먼저인가?

 

이것은 명백한 순환논증이지만 저자는 그 모순을 이론적으로 해결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저자 스스로가 말하듯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낙관론적 역사철학을 견지하며,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씩 진보한다"(19쪽)는 믿음을 잃지 않고, 이 상호연관적인 복잡한 세상 속에서 명백하게 참여를 요구하는 지점을 발견하고야 말 뿐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1960년대 이후의 '신좌파'적 입장과 불협화음을 내는 입장이다. 에셀 자신이 메를로-퐁티의 강연을 들었지만 그보다는 헤겔에게 더 끌린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탈목적론적 역사철학을 커다란 전제로 깔고 인간의 이성을 통한 역사의 단계적 발전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현대 좌파 철학은 스테판 에셀이 보여주는 낙관주의 및 그에서 비롯한 분노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즉 우리는 이 책을 '현대 철학 이전의 현대 철학'의 복귀로 이해할 수 있다. 직업적 철학자가 쓴 책도 아니고,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분량으로 영화, 문학 등을 인용하며 자신의 현학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란한 이론 속에서 실천적 무기력에 빠져 있기보다는 세계를 잘 살펴보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분노하라는, 즉 참여하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담긴 이 책이 이른바 '현대 좌파 이론'의 본산지인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고 그 여파가 이제 대한민국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한 권의 책으로 바뀌지 않듯이, 우리의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지적·철학적 분위기 역시 단번에 뒤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모든 불의에 맞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답해주지 못하는 세상, 혹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수백 쪽에 이르는 책을 써내는 철학자가 '좌파'의 아이콘으로 등극해버린 세상 속에서, 고작 몇 십 쪽도 안 되는 팸플릿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급한 예견은 자제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분노에 찬 200만 마리의 제비가 날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분노하라>, '분노' 신드롬 낳을까?

 

"'정의'를 고민하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실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할 일은 오직 '분노'뿐인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출간 소식을 듣고 한 출판계 관계자가 툭 던진 말이다. 실제로 지난 7일부터 서점에 깔린 <분노하라>가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펴냄)를 잇는 또 다른 신드롬을 낳을지가 관심거리다.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다. 초판 1쇄 2만 부를 찍은 <분노하라>는 17일 기준으로 1만6000부가 출고되었다. 출판사 돌베개 관계자는 "현재의 판매 추이라면 다음 주 초에 2쇄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일단 5만 부 판매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 얼마나 폭발력이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망했다.

 

 

이 책의 성공 여부를 놓고 출판계 안팎의 시선도 엇갈린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2010년 10월 출간된 <분노하라>가 프랑스에서 불과 7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팔리는 성공을 거뒀고, 더 나아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경험이 다른 한국에서도 그런 폭발력을 가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의 성공 가능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이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 경험의 다름을 강조한다. 한 언론인은 "에셀은 자유로운 프랑스를 만들려고 파시스트와 싸웠던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분노'라고 강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며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강조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무엇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 언론인은 "독립 운동의 한 축이었던 좌파가 거세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백범 김구 정도인데, 그 역시 친일 독재 세력에 의해서 축출되고 말았다"며 "사실 책을 읽는 동안 에셀이 레지스탕스 정신을 강조할 때마다 친일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한 일군의 한국 지식인들이 겹쳐서 참담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책의 성공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출판 기획자는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성공이나 최근 대학생의 등록금 인하 운동 등을 염두에 두면 지금 한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책이 바로 <분노하라>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 출판 기획자는 "프랑스에서 그토록 젊은이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분노하라>가 한국에서 외면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진지하게 분석해볼 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 출판계에서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이 책을 계기로 제2, 3의 한국 판 <분노하라>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경우처럼 구매력이 있는 40대 독자로부터 <분노하라> 열풍이 시작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분노해서 쟁취한 경험이 있는, 하지만 지금은 다분히 속물이 된 이른바 '386 세대'가 <분노하라>를 매개로 한 번 더 20대~30대 후배 세대에게 연대의 손을 내미는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

 

 

<분노하라>, 한국어판 출간되기까지

 

몇 개월 전부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책이라 한국어판 출간 과정을 둘러싸고도 뒷말이 많다.

 

우선 이 책의 번역서 판권을 확보하고자 국내 30개 이상의 출판사가 스테판 에셀과 프랑스 출판사에 접촉했다. 그 중에서 몇몇 출판사는 상당히 높은 금액의 선인세를 제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판권을 따낸 돌베개는 "터무니없이 높은 선인세와 같은 무리한 계약 조건은 없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돌베개 관계자는 "에셀과 프랑스 출판사 측에 진보적인 사회과학 출판사로서 돌베개의 역사와 그간 출간한 책을 제시하며 설득했고 그것이 계약 성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체적인 계약 금액까지 밝힐 수 없지만 가장 높은 선인세를 제시한 출판사의 3분의 2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계약이 되고 나서도 고민이 많았다. 원서가 13쪽에 불과한 팸플릿이라서 책의 꼴을 만드는 것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랑스 출판사는 계약을 할 때 5유로(약 7600원) 이하로만 가격을 매겨야 한다는 조건까지 제시했다. 3유로에 불과한 프랑스 원서를 염두에 둔 값싼 책값을 강제한 것이다.

 

돌베개 관계자는 "<분노하라>의 출간 의도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맥락에 맞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며 "그래서 한국 독자들이 책이 놓인 프랑스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스테판 에셀과의 인터뷰와 조국 교수의 한국어판 해설을 넣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어판 책값으로 6000원을 매긴 데에도 사정이 있다.

 

돌베개 관계자는 "어차피 7500원 이하로 책값을 매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의 수익과 독자의 이익을 고려해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결정하려고 노력했다"며 "6000원 미만으로 책값을 책정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10퍼센트 할인을 받아 책을 사는 독자는 두 권을 사도 책이 1만 원 이하가 돼 배송비를 부담해야 하는 사정까지 고려한 가격"이라고 설명했다. (강양구 기자)

 

/최수태 문화평론가

----------------------------------------------------------------------------------------------------------------------------------

 

[서평] 스테판 에셀 저 <분노하라>...한국도 분노하길 바란다

200만부나 팔렸다는 책, 읽고 나니 화가 났다

 

대학에 입학한 1989년. 생각해보면 나의 20대는 분노의 시작이었다. 부패한 사학 재단의 횡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그 분노가 이후 비합법 운동 조직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처음 맞이한 학원자주화 투쟁.

 

열악한 학내 복지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한 첫날, 나는 또 다른 분노의 대상을 만났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치며 투쟁하는 가운데, 본관 옆 테니스장에서 들려오는 공 치는 소리와 남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왜 분노하지 않을까. 왜 모두의 문제인데 우리만 분노하는 것일까. 그 후, 10여 일이 넘는 처절한 싸움 끝에 우리는 학생식당의 질적 개선을 비롯한 몇가지 요구안에 대해 적지 않은 성과물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물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테니스장의 그들도 함께 누렸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동지들과 폭음하며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2년여가 지난 지금, 살면서 민주주의와 이웃의 인권을 위해 1분 1초도 분노하지 않는 채, 다만 그 성과물에 대해서는 공짜로 함께 누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는 테니스장의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레지스탕스 출신 늙은 투사의 '분노'론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이었던 저자 스테판 에셀이 쓴 책 <분노하라>는 그래서 나에게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책이었다. 저자의 머리말과 직접 쓴 본문을 포함, 불과 34페이지밖에 안 되는, 그래서 사실 책이라고 하기 보다는 팸플릿에 가까운 아주 가벼운 분량의 책이다. 물론 한국어판을 내면서 나눈 저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 등 이 책을 추천하는 이들의 추천사를 포함하면 전체 분량은 80여 페이지로 늘어나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저절로 밑줄을 긋게 되었다. 가슴에 와닿는 문맥을 읽으며 서평에 인용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읽다보니 어느덧 나는 거의 모든 문장에 줄을 긋고 있었다. 그만큼 '분노하라'는 대부분의 구절이 버릴 것 하나 없이 유익했으며 기억할 가치가 풍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와닿은 문맥은 이러했다.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만일 우리가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의 진정한 후예였다면, 이런 모든 일들에 암묵적인 찬동자가 되기를 단연코 거부했으련만.

 

인권운동가의 관점에서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생각했다. 프랑스 사람인 저자가 프랑스 젊은이에게 던져주는 문제 제기인데, 짚어내는 모든 내용이 사실은 2011년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한 반인권적인 단속이 그러했고 전체 외국인 체류자에 대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극우세력의 추방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무상급식 논란 과정에서 제기되는 포퓰리즘 비판에서부터 언론 종편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불거진 재벌과 거대 언론사의 독식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올해 아흔을 훌쩍 넘긴 그의 '열정적 분노'에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즉흥연설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책 <분노하라>

 

이 책이 출간된 과정 역시 특이했다. 먼저 저자 스테판 에셀이 지나온 삶의 궤적부터 그랬다. 에셀은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에서 출생한 사람이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프랑스로 이주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그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드골(1959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가입,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나치에 저항하며 싸우던 중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프랑스에서 영향력 있는 외교관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특히 그의 활동 중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대목은 그가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문의 초안 작성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이다. 에셀이 가진 사상적, 이념적 배경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17년생인 에셀이 아흔두 살이 되던 2009년, '레지스탕스의 발언' 연례 모임에서 행한 즉흥 연설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 자리에서 에셀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즉흥 연설을 했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함께했던,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에 위치한 앵디젠 출판사의 실비 크로스만 등이 에셀의 즉흥 연설에 감동해서, 그에게 연설 주제를 가지고 책을 낼 것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책 <분노하라>는 프랑스에서만 7개월여간 무려 200만 부가 팔렸다. 그리고 프랑스 젊은이들의 각성을 촉구한 이 책은 그 후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전 세계에 이른바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장에서 만난 '건강한 분노'가 고맙다

 

6월 10일, 나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개최된, 반값 등록금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사회 문제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비판받아온 요즘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그 현장에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대했던 것처럼 집회 현장은 재기 발랄한 학생들의 목소리로 출렁거렸다. 그들의 위트 넘치는 구호와 엄청난 분노 에너지를 느끼며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등록금 반값하고 정치는 제값해라!

돈 없는 우리도 대학 좀 다녀보자!

00대학교 등록금 반값 특공대!

 

매년 올리고 올리고 또 올리는, 그래서 두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자신이 없었던 어느 50대 가장의 자살사건을 접하면서 느꼈던 분노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세상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는 것을 지난 역사속에서 확인했기에 촛불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의 '건강한 분노'에 나는 행복했다. 그들이 가진 건강한 분노, 그리고 실천하는 분노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셀은 '분노와 참여를 차단하는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러한 무관심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우리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에셀은 이러한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두가지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지지 정당에 투표할 것과 시민단체에 참여할 것이 그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분노 덕에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권리를 누리고 있음을 수시로 망각한다. 지하철 등 공공요금을 정부가 제멋대로 인상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심검문에 불응하면 형사 처벌하겠다는 황당한 경찰의 법 개정이 결국 무산 될 수 있었던 점 등이 바로 그렇다. 환경, 소비자 권리, 인권을 위해 싸우는 누군가의 분노가 있었음을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고 망각한다는 것이다. 

 

에셀은 말한다, "이제 당신이 분노할 때"

 

에셀은 이 책에서 '이제 당신이 그 의무를 행사할 때'임을 강조하고 있다. 생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말처럼, 독재정권에 대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고 하신 것처럼 분노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아가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에셀의 말하는 분노는 공익적이다. 그래서 좋다. 소위 "사회적 불의는 잘 참고 개인의 불이익은 못 참는" 그런 치졸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드는 촛불과 같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 '평화적 봉기를 통한 분노'가 6월 초부터 지금까지 서울 청계광장에서 내내 계속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촛불처럼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그리고 희망적으로 흘러가도록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신한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것이 이기는 길'임을, 그리고 그 평화적 봉기를 통해 세상이 정의롭게 '창조'되며 그 창조를 위해 저항하라는 사실을 알려준 저자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를 통해 '정의로운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기를 기대한다. 에셀이 말한 실천처럼 오늘, 나는 그들의 정당한 분노에 함께하기 위해 촛불을 들 것이다

 

2011.6.19 / Ohmynews 고상만 (rights11) 기자

----------------------------------------------------------------------------------------------------------------------------------

 

정치는 고귀한 것…젊은이들이여, 분노하라

[기고]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93세의 프랑스 노인이 출간한 팸플릿 형태의 책 <Indignez vous!, 분노하라>가 프랑스를 뒤흔든 데 이어 한국에도 출간됐다. 이 짧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인도한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오늘날 분개해야 할 이유가 덜 분명해졌고 이 세상이 더욱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다. 누가 명령을 내리고 누가 결정을 하는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모든 종류의 흐름을 구별한다는 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선 잘 바라보고 찾아야 한다. 난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찾아보시오, 분명히 찾을 것이오.' 가장 나쁜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슨 방법이 없잖아, 나 혼자 알아서 처리해야지 뭐.' 당신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잃고 있는데, 그것은 분개하는 능력과 그 결과로 이어지는 앙가주망(참여)이다."

그러면 우리는 분개할 현실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2011년 광화문 광장을 뜨겁게 달군 ‘미친 등록금’에 대한 분노가 대표적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등록금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행렬에 뛰어드는 대신 함께 모여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매우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에셀이 지적했듯이 무관심과 고립, 체념 대신 분노를 택하는 순간 우리는 변화를 꿈꾸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친 등록금’ 이외에도 우리가 분노할 현실은 프랑스보다 우리가 훨씬 더 많다.

외환위기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대북 문제 등에서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걸맞은 패러다임과 게임 규칙을 우리는 확립하지 못했다. 그 결과 많은 중산층 서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큰 경제적 고통을 겪게 됐다. 조금만 살펴봐도 이를 보여주는 온갖 악성 지표들로 가득하다.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수준, 극심한 청년실업, 자살률 급증과 출산율 급감, 고령화 속도 세계 1위,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 세계 최고 수준,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율과 OECD 최장 노동시간,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주택가격, 경제력 대비 지나치게 높은 생활물가, 공공도서관 수 선진국의 10분의 1 수준, 사회복지 등 공적사회복지지출 비용 OECD국가 3분의 1 수준, GDP 대비 교육재정 투자 세계경제포럼 조사 대상국 127개국,  가운데 71위, 이로 인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대학등록금 등 조금만 훑어봐도 정말 일반 서민들이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경제 및 사회 구조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전방위적인 불량국가이자, 엽기적인 나라다.

이런 엽기적 현실이 사람들을 좌절에 빠져들게 했다. 엽기적 현실에 따른 고통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인 서민들에게 집중됐다. 서민들은 민생고를 해결해달라고 거듭 아우성쳤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정부는 서민들의 고충을 해소하지 못했다.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걸맞은 건전한 경제구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낡은 기득권세력과 상당 부분 타협하고 굴종했다. 물론 그만큼 기득권 세력의 힘이 강고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정부가 대다수 국민들이 바라는 '진짜 개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은 분명하다.   

진짜 개혁의 좌절과 서민 경제의 지속되는 악화는 정치적 반동을 가져왔다. 독일이 1차대전의 전쟁부채에 시달리다 결국 선거를 통해 히틀러를 택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 또한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나는 2007년 대선 결과에 대해 "배가 고프다고 쓰레기통을 뒤진 격"이라고 통탄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엽기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 현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됐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화된 형태로 말이다. 사실 현 정부는 아마추어도 이만저만한 아마추어가 아니며,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는 점에서 사기꾼 기질이 유전자에 각인된 정부라고 본다. 이들을 단순히 '실용정부'나 '중도 우파 정부'라고 본다면 그것은 오해요, 착각이다. 

이들은 과격한 '우파 기득권 혁명세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과 지지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관철시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집단이라는 점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자신들 세력을 결집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미네르바 등 네티즌 논객을 구속하고 용산참화의 희생자들에게 사과는커녕 테러리스트 진압하듯 물리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정상적 판단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결과 현 정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이뤄온 민주주의와 인권, 대북정책의 성과를 빠른 속도로 갉아먹고 있다. 국정원, 검찰, 경찰 등은 시간이 갈수록 권위주의 시절 마냥 정권의 주구로 변질되고 있다. 낡은 틀을 벗지 못한 정부 관료들 또한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거듭되는 정책실패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사법 체계 또한 삼성에버랜드 사건 대법원 판결 등에서 보듯 법의 잣대를 기득권층에 유리하게 구부리는 경향이 여전하다.

정치와 더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언론이다. 여전히 신문시장에서 현 정권과 유착한 기득권 언론이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가운데, 현 정부의 집요한 방송장악 시도로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 정부는 2010년 마지막 날 '조중동매연'을 종합편성 및 보도전문채널 사업자로 지정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들을 보수 일색이라 여론의 편향성이 우려된다고 했지만, 이들은 단순히 보수신문이 아니라 재벌광고주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기득권 언론들일 뿐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아온 이들 언론이 여론시장을 지배하고 이 나라를 베를루스코니 치하에서 3류 국가로 전락한 이탈리아처럼 만들겠다는 기득권 세력들의 기획이 노골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납세하는 사람만 '봉'이 되는 현실은 또 어떤가.  이건희 회장은 특검에서만 4조 5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세금 한 푼이 내지 않았다. 지하철 무임승차를 해도 30배의 과태료가 붙고, 급식 대상자가 아닌 학생이 급식을 받으면 ‘도식(盜食)’이라는 명목으로 50배의 과태료를 내지만 한화, 태광, CJ 등 재벌그룹들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탈세한 사실이 밝혀져도 가산세 한 푼 물지 않는다. 부동산과 주식에서 수천만, 수억 원의 양도차익을 얻은 사람들도 세금 한 푼 안 내는데, 연봉 수천만 원인 근로소득자는 연간 수백만 원의 세금을 원천징수 당한다. 고소득 자영자들의 탈세도 매우 심각하다. 더구나 부패와 각종 비자금의 온상인 건설업계에서는 매년 10조~20조원씩 비자금이 조성돼 수조 원의 탈세가 횡행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정책으로 오히려 전속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국세 수입의 3대 축 가운데 법인세, 소득세 수입은 주는데 모든 국민이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내는 세금인 부가가치세 부담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서민경제 지원을 위한 세제 개편안'이라고 떠벌렸던 감세정책 이후 고소득자의 조세 부담은 확 준 반면 저소득층의 부담은 확연히 늘고 있다. 저소득층 세금 부담을 늘리면서 '친서민'이니 '공정사회'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납세자들만 '봉'이 되는 현실,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왜 현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떠나 이 근원적인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재정 낭비도 매우 심각하다. 일부 정치권이 '망국적인 복지 포퓰리즘'을 운운하지만 OECD 국가 가운데 공공사회복지 지출이 가장 낮은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실제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망국적 토건 개발 포퓰리즘'이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 지방의 유령공항들, 서해안 시대라며 지어졌으나 텅텅 비어있는 서해안의 항구들과 차이나타운, 제조업의 무더기 해외 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계속 들어서는 산업단지들... 우리 아이들 의무급식 예산과 영유아 예방 접종 예산을 깎아 수천억원 규모의 ‘형님예산’을 남발하고 22조원을 4대강 바닥에 쏟아 붓는 엽기적인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은 전세계의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가운데도 가뜩이나 막대한 부동산 거품을 더욱 부풀리고 있다.
 
이처럼 낡고 부패한 정치, 시대착오적이며 대한민국 최대의 이권단체로 전락한 관료체제, 편파왜곡보도에 찌든 기득권 언론, 서민과 특권층을 차별하고 전관을 예우하는 사법체계, 정직하고 성실한 납세자만 쥐어짜는 불공평한 조세구조를 두고 한국 경제가 건전한 선진경제로 도약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개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 전반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연대의 자본집약적 산업구조에서 첨단기술산업 위주로 한국의 산업구조는 확 바뀌었다. 이 같은 경제 및 산업구조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해야 한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지 않고 자산경제와 생산경제가 조화롭게 선순환하며 성장하는 나라. 지식정보화시대를 선도하고 창의적인 인재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는 나라. 공정한 게임 규칙에 따라 출신과 배경이 아닌, 능력과 노력이 성공의 핵심이 되는 나라. 건전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적 변화를 국민 대다수가 갈구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명박 정부로 대변되는 시대적 반동에 굴복하고 새 희망을 가꾸지 못한다면 한국은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여기까지 전진해온 우리 국민의 저력을 생각하면 이 나라가 쉽게 주저앉을 리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많은 이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나도 눈물을 흘렸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마음도 있었지만, 전직 대통령마저 비운에 가야 하는 이 땅의 서글픈 현실 때문에 울었다. 나는 그를 많이 비판했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타파 등을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과 열의는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부동산 문제에 관해서는 그의 말과는 달리 건설족 관료들에게 임기 내내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한숨짓고 분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지지층에 버림받고 결국 정권까지 놓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부동산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는 지금 시대착오적인 정권 치하에 살고 있다.

이처럼 형편없는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건전한 공동체의 토양이 되는 경제 패러다임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정치권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확립할 구체적 정책과 대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정치권은 여야 가리지 않고 '민생'을 외쳤지만, 문제 해결의 근본적 해법은 제시하지 못했다.

'4대강 사업'이라는 토건개발사업 말고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아이디어도 없어 보이는 이명박 정부는 그렇다 치고 국민이 만들어준 과반수 정당의 우위 속에서도 '진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던 민주당(과거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다.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4.27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지만 이를 민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로 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명박 정부보다는 낫다' '그래도 현 정부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당장은 민주당을 밀어야 한다'는 여론이 반영된 정도로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거듭된 실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박근혜와 야권의 일곱 난쟁이 현상'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으며, ‘박근혜 당선이 정권교체’라는 대중 여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의 거듭된 실정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게 역사를 퇴보시킨 현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민주당 등 야권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야권의 맏형이라는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4.27재보선에서 또 다시 부동산 포퓰리즘에 기반한 아파트 수직증축 리모델링 방안을 내놓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 가계의 민생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비전과 역량 없이 뭉쳐서 이기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인가. 지금 민주당을 중심으로 기성 야권의 상당수는 정책역량 업그레이드보다는 여전히 지방선거나 4.27 재보선과 같은 선거구도를 만들어 승리하는데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현재의 민생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 없이 정권교체만 하면 서민들의 삶이 자동적으로 개선되는 것인가. 

나는 현 정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쓰레기같은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이 분명 야당의 역할이지만,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유권자의 고충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 비전과 솔루션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야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 사회는 지금 두 가지 핵심 과제에 직면해 있다. 현 정부 들어 퇴보한 민주주의와 인권, 대북정책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과제가 하나라면 집값 거품과 사교육비 부담, 세계 최고의 대학등록금, 열악한 보육환경, 고령화에 따른 노후세대 복지문제 등 민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또 다른 과제다. 현 야권이 집권하면 첫 번째 과제는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과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유권자들은 이 물음을 애타게 요구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정권을 이렇게 형편없는 정부에 빼앗기고 나서도 아직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 번 물어보자. 무지와 무능, 사악함으로 점철된 현 정부가 물러간다고 '믿을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정치 세력이 있는가.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지금 한국이 당면한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할 문제 해결 역량을 갖춘 정치 세력이 있는가. 선뜻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기력감을 느끼는 대신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 이 나라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정치세력, 기득권 세력들만이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는 불공정한 게임 규칙이 아닌 탄탄한 공동체 기반 위에 건전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우뚝 세울 정치세력이 지금 없다면 결국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한 변화와 기적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20대에서 40대 전반의 젊은 세대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변혁을 주도한 것은 젊은 세대였지, 결코 기성세대가 아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가 국가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 당장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부터 47세에 당선된 젊은 대통령이다. 지금처럼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낡은 시대의 경륜과 관록보다는 속도감 있는 변화와 창발적인 개혁을 세상은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의 60,70대 '올드보이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제대로 대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주도할 수 있는 세대는 젊은 세대다.

더구나 낡은 경제 패러다임과 불공정한 게임규칙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욱 고통 받는 세대 또한 젊은 세대다. 2000년대 내내 부동산 거품에 돈이 묶여 생산경제에 돈이 돌지 않은 탓에 우리 20대 젊은이들은 이미 ‘88만원세대’ ‘6무세대(일자리, 소득, 집, 사랑과 결혼, 아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세대)’로 전락했다. 한국경제의 기득권 구조는 취업자의 절반을 비정규직이라는 ‘내부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30대는 대부분 치솟는 집값을 바라보며 손만 빨고 있어야 한다. 개발연대의 획일적 사고방식에 갇혀 제대로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자기계발시간도 없이 세계 최장시간의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기득권 세력들은 그들의 과오와 탐욕 때문에 젊은이들이 재능을 발휘할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정치권은 반성과 사과는 할 줄 모르고 젊은이들만 눈이 높다고 윽박지른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에 결혼도 하기 힘든 젊은이들의 초임까지 깎고, 일자리 만든다며 젊은 세대가 나중에 쓸 돈을 끌어와 각종 단기 '알바' 자리를 양산하고서는 생색을 낸다.

더구나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닫는 현실을 개선하기는커녕 현 정부는 미래세대의 호주머니를 털어 토건 및 부동산 부양책에 탕진하며 출범 이후 400조원에 가까운 공공부채를 쌓아올렸다. 이전 10년간 늘어난 공공부채보다 더 많은 액수로 이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을 '빚쟁이 대통령'으로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경제대통령'이라고 온갖 너스레를 다 떨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소중히 쓰일 자원은 파렴치하게 마구 가져다 쓰면서도 젊은이들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OECD국가들 가운데 고등교육재정 지출 비중이 뒤에서 두 번째인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국공립대 등록금 14년 치인 22조원을 4대강 강바닥에 처박으면서도 우리 젊은이들의 말랑말랑한 두뇌에는 투자할 줄을 모른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4대강 옆에서 삽질을 하고 있으란 말인가.

한 술 더 떠 국토해양부는 2019년까지 국가 기간도로망 구축 사업에 190조 원이나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토건개발 사업에는 마구잡이로 지르는 정부와 정치권이 교육 투자 확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 와서는 '반값 등록금' 여론에 마지못해 정부와 정치권이 끌려가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재정 여력이 부족하다며 꺼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것이 입만 열면 '교육입국'이니 '인재가 자원인 나라'라고 떠드는 나라의 현실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경제의 앞바다에는 저출산 고령화 충격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밀어닥치고 있다. 향후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노후세대를 부양할 부담 또한 우리 젊은이들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떨어지게 돼 있다. 

이처럼 낡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젊은 세대가 왜 번번이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이 막대한 희생만 강요하는 정책결정을 왜 소수 기성세대가 하도록 빤히 보고 있어야 하는가.

젊은 세대에게 호소한다. 제발 정치를 멀리하지 마라. 정치는 더러운 것, 사기치는 것, 뻔뻔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버려라. 필자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유학하는 동안 느꼈던 문화적 충격 가운데 하나는 '정치는 고귀한 책무'라는 인식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정치 선진국에서 온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는 개인이 국가와 지역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공봉사(public service)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스쿨의 교수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물론 공중을 위한 봉사가 늘 정치일 필요는 없다. 몸담은 곳이 언론이든, 시민단체든, 정부든, 또는 기업이든 공중을 위한 봉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거꾸로 그것이 정치라고 해서 피할 필요가 없다. 정치는 사이코나 철면피, 또는 강심장들이나 한다는 생각을 제발 버려라.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만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치는 더럽다'는 인식을 더욱 조장한다. '정치는 더럽다'는 인식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정치에 발을 담그는 것을 회피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양상이다. 물론 현실의 한국 정치는 온갖 적폐로 넘쳐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능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젊은 인재들이 정치를 멀리하면 할수록 정치의 수준은 더욱 더 떨어진다.

과거 기자로서 지켜본 정치판 인력(=정치인과 그 보좌진 및 정치인 지망생들)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도덕성으로 볼 때는 한국사회의 평균 수준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물론 개중에는 매우 능력 있고, 뛰어난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더럽고 낡은 기성 정치판에 좀 더 잘 적응하는 인물들일 뿐이다. 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치를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맡겨놓는가.

한 번 생각해보라. 자신의 각종 생색내기 개발사업에는 매년 수조 원씩 쓰면서도 초등학교 아이들 친환경 식단으로 골고루 밥 좀 먹이자는 예산 700억 원이 아깝다며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짖는 오세훈 서울시장만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게 '떼잡이들'이라는 폭언을 퍼붓는 반면 1200억 원 짜리 호화 구청사를 턴키로 발주해 건설업자들에게 퍼주었던 지난 용산구청장보다 서민들을 배려하지 못하겠는가.

입법권은 정부가 만들어온 법을 대신 발의하거나 당론에 따른 거수기 투표를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예산심의권은 지난해 말 예산안 날치기 통과 과정에서 봤듯이 지역구 개발사업 따내는 권한 정도로만 생각하며, 때 되면 권력의 향배를 좇아 우르르 몰려다니며 패거리 짓는 다수의 국회의원들보다 당신이 못할 것이 무언가. 우리가 낸 소중한 세금을 겨울방학 동안 결식아동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이 땅의 영유아들에 대한 예방접종 기회를 확대하는데 쓰는 대신 '형님'과 '안주인' 예산 챙기는 데만 혈안이 된 한나라당 의원들보다 못할 것이 뭔가.

전례없는 경기 침체 와중에 87조 원의 부자감세에다 4대강 바닥에 22조 원의 혈세와 공공부채를 쏟아 붓고 이 돈을 뽑아내기 위해 4대강 주변을 '부동산 투기 특별구역'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명박 대통령만큼 기득권 편향적일 수 있겠는가. 왜 시대착오적인 '올드보이'들이 마르고 닳도록 권력을 누리면서 이 나라를 퇴행의 늪으로 빠지도록 놔두는가.

필자가 아내와 함께 2년 전쯤 본 드라마 '시티홀'에서 작은 지방도시의 시장에 당선된 '신미래'가 바로 진짜 정치인이다. 거대한 건설토목사업에 헛돈 쓰지 않고, 작더라도 서민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신미래가 진짜 주민들에게 필요한 정치인이다. 정치술수에 닳아빠지고 지역 토호들과 유착된 정치인보다는 서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시장 커피 타던 30대 젊은 여성이 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 검은 돈을 받지 않고, 중앙권력에 줄서지 않으며, 서민들의 민생고를 더 잘 해결해주는 정치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점점 전문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전문적 역량을 대중적으로 검증받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금 정치판 인력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역량과 도덕성을 갖춘 많은 젊은이들이 정치를 경원시하는 것은 안타깝다. 새로운 시대적 감수성을 갖추고 도덕성과 전문 역량으로 뭉친 인재들이 지자체와 지방의회, 중앙 정치무대를 주도할 때 한국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 왜 썩어빠진 낡은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놓고서 그들이 우리 뜻대로 안 한다고 욕 하는가. 이제 도덕성과 전문성으로 중무장한 젊은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젊은 세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치적 행동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첫째, 현실적으로는 각종 선거에서 청년세대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선의 대안이 없다면 '차선의 선택', 경우에 따라서는 '차악의 선택'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둘째,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 기존 정치권이 이를 반영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국공립대학 전면 의무교육과 국민연금 개혁 등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투쟁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또한 정치세력은 아니지만, 10대에서 30대 전반 젊은층의 세대별 노조를 지향하는 '청년유니온'의 태동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 분야에서 청년층의 욕구와 의사를 집약해 표출하는 조직이 나오면 이들의 요구를 대변하기 위한 정치적 흐름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청년층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선거연령을 현재의 19세 이상에서 18세 이상으로 낮추고 각 정당의 비례대표 상위권에 20대 의석 배분을 요구하거나 각 정당의 청년조직의 정책 제안이 중앙당 정책 결정에 상당 부분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세 가지 정치적 행동은 상호강화작용을 하며 청년세대가 느끼는 정치적 효능감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결코 꿈이 아니다. 얼마 전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우리 대학생들의 요구에 정치권이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대 청년층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목소리를 낼 때 얼마나 큰 파괴력이 있을지를 정치권이 직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년층이 제대로 결집하면 정치적 파워는 가히 파괴적일 것이라는 것을 지난 '4·27재보선' 결과가 보여주었다. 이처럼 젊은 층의 목소리는 제대로 결집만 된다면 매우 큰 정치적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조국 교수가 표현한대로 "88만원 세대가 88% 투표하면 세상은 88% 바뀐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부모세대에게도 호소한다. 세대 간 갈등과 대립을 조장할 생각은 없다. 나는 부모 세대가 자식세대의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흘린 피와 땀, 눈물을 잘 안다. 나의 부모님만 하더라도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뜨거운 뙤약볕 아래 그을리고 손발이 부르터가며 농사를 지어 자식들 교육을 시켰다. 그 분들이 그 같은 고생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은 당신들보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더 밝은 내일을 만들어 주기 위해 헌신했다. 부모세대의 헌신과 노력의 결과 한국경제가 보릿고개를 넘어 이 정도라도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부모세대들이 자식세대가 잘 되는 것을 위해 언제든지 양보하고 물러날 자세가 돼 있다고 믿는다.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탐욕에 눈이 멀어 낡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일 뿐이다.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 때문에 국민 전체가 바보 취급당하며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식세대가 끌고 부모세대가 밀어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멀쩡한 국민들을 바보 취급하는 기득권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 전 국민이 합심해 그들을 바보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을 믿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그동안 기득권의 게임 규칙에 갇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뿐 결코 역량이 없는 세대가 아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세계를 선도할 잠재력을 가진 세대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주축이 돼 인터넷에서, SNS에서 함께 만들어 내는 집단지성의 힘을 보라. 얼마나 대단한가. 이 힘들을 모으고 축적한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기적을 만드는데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함께 힘을 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0여 년 전 '나는 꿈이 있다'고 한 말이 지금 미국에서 현실이 됐듯이, 우리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부르짖는다. 분노하자, 그리고 함께 바꾸자.

세금혁명당 www.facebook.com/taxre

----------------------------------------------------------------------------------------------------------------------------------


분노하라!


출간 7개월 만에 2백만 부를 돌파하며 프랑스와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레지스탕스 출신의 인권·환경 운동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화제다.

“불 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한 사회, 금권이 전에 없이 거대하고 오만해진 사회, 은행의 주주와 경영진이 고액 배당과 연봉에나 신경 쓸 뿐 일반 대중의 이익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역사상 가장 크게 벌어진 사회,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극도로 부추기는 사회….”

권력에 영혼 판 일부 언론에도 분노해야


그가 분노하라고 외치는 프랑스 사회의 병폐들은 우리 사회의 병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거기에 덧붙여 최근 우리 대학생들의 최대 현안인 대학등록금, 청년실업, 열악한 보육환경, 고령화에 따른 노년 복지,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대북정책, 도덕적 해이를 넘어 불법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금융 사태가 그것이다.

또한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공무원들의 부패와 비리, 재벌광고주와 권력에 영혼을 팔아버린 일부 언론 등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갖가지 이슈들에 대한 분노가 전국 도처에서 들끓고 있다.

분명 이 책은 공정 사회를 향한 ‘정의’의 열망에 휩싸인 우리에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무엇’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지 가장 중요한 화두를 적절한 시기에 던져 주었다.

최 근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는 이 책에 대해 저자가 말하는 분노는 ‘분개를 위한 분개’라고 평가절하하며 선동성을 띤 책이라고 비판했다. 우리 사회에도 이 책을 그런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현 정권과 유착된 일부 보수 언론이나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이 책에 대해 교묘하고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저자가 얘기하는 분노가 우리 사회의 잠재된 폭력성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이나 그 질서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분노하고 증오하며 적개심을 품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 나 이 책은 폭력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저자는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인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얘기한 분노란 저항을 품은 분노, 생산적인 분노, 창조적인 분노이다. 따라서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분노해야 할 것 제시


이처럼 민주주의의 가치와 비폭력 투쟁을 이야기하는 이 책이 2011년의 한국 사회에서 왜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을까?

아마도 분노의 표적을 잃은 채 혼란스러운 증오에 휩싸여 있는 우리에게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얘기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언론 매체들이 제때에 제대로 분노해 주었더라면 바뀌었을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94세의 외국인 노 투사가 진지하고도 뜨거운 글로 우리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대안매체를 뜨겁게 달구던 수많은 이슈들에 대해 침묵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기존 언론매체를 대신해서 간단명료한 해법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해봤자 바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상황이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는 저자의 낙관성은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준다. 과연 “분노하라, 그러면 바뀔 것이다”라는 희망은 유효한 것일까?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

-------------------------------------------------------------------------------------------------------------------------------------------------------


분노하라, 외쳐라, 연대하라

누구나 평균적인 삶을 꿈꿀 권리가 있다. 월스트리트의 ‘살찐 고양이들’이 탐욕의 분탕질 끝에 초래한 글로벌 경제위기 3년차, 지구촌 곳곳에서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말 등록금 상한을 과감하게 3배나 올린 보수·자민 연합정부에 반발한 영국 대학생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석사학위를 받아도 계약직, 임시직에 머무르기 십상인 한계상황이다. 등록금마저 올리자 분노의 뚜껑이 열린 것이다.

올 들어 전혀 새로운 성격의 시위는 지난달 15일 스페인 마드리드 도심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비롯됐다.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노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순식간에 5만여명으로 불어났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모이고, 외치며, 연대한 청년들이다. 종래의 시위가 아니었다. 시위이자 축제이며 새로운 사회를 열기 위한 향연에 가까웠다. 어떠한 기성정당이나 거대 노동조합도 배제된 이유다. 그들에겐 보수 인민당은 물론 진보를 표방하지만 뼛속까지 부패한 사회당도 더이상 대안이 아니다.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을 대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관계망에서 정한 양대 원칙은 자발적, 비폭력적 시위다. 인디그나노스의 온라인 지도부인 ‘진짜 민주주의’는 이를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이라고 선언했다. 긴축 및 부패에 대한 투쟁, 정치 시스템의 개혁, 시민적인 미디어 등의 강령도 발표했다. 같은 이름, 같은 정신의 시위는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프랑스 ‘분노의 시위’는 지난달 29일 열흘 뒤 바스티유 광장에서 3000여명의 청년이 모이면서 전국 50여개 도시로 퍼지고 있다. 재정위기를 겪는 그리스에서는 지난달 25일 분노의 시위가 열리더니 열흘쯤 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50만명이 운집했다. 22일 동안 이어오던 비폭력 평화시위가 지난 15일 그리스 공공부문 노조의 총파업과 경찰의 과잉진압이 맞물리면서 변질됐지만 원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스페인 시위에 참여하는 200여개의 단체 가운데 ‘미래 없는 젊음’이라는 단체명이 이를 대변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중심줄기다. 성난 청년들과 실업자, 서민들만 거리로 나오는 게 아니다. 살림이 푼푼한 중산층은 물론 일부 기업인도 지지하고 있다.

분노의 배경에는 물론 전 세계적인 경제난이 놓여 있다. 유럽언론은 여기에 지난해 말 출간돼 200만부 이상 팔린 노(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소책자 <분노하라>가 지침이 되고 있다고 전한다. 올해 초부터 아랍권을 달구는 ‘재스민 혁명’과 고립된 청년들에게 연대의 날개를 달아준 사회적관계망도 한몫을 했다. 인간이고 싶으면 분노하라, 분노하되 격분하지 말라는 에셀의 메시지가 울림을 주고 있다.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글로벌 풍경이다.

지난달 29일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타난 대학생 200여명이 불붙인 반값 등록금 투쟁이 현재진행형이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 학업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시달리는 청년들이다. 졸업 뒤 일자리 걱정도 태산이다. “내가 내는 세금으로 옆집 대학생 학비를 더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인사가 밥을 버는 수구언론,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육당국, 사립대학의 게으른 탐욕, 필수적 현안을 방치해온 정치권이 공동정범이다.

사회협약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국협의회나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지난 정권 시절 노·사·정 협의회로 시도를 한 바 있다. 불행히도 집권여당이 주도하면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지 못했다. 의제도 노동문제로 제한됐다. 이번엔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 학생, 시민사회가 하나의 원탁에 앉아 머리를 맞대야 할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다. 재벌도 포함해야 한다. 국가가 갈 방향에 대한 큰 틀의 공감대를 이루고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교육, 복지개혁, 경제개발의 속도와 성격 등을 하위주제로 설정해야 한다. 정치적 아젠다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또 다시 방향을 잃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받을 권리는 기본권인가, 개인의 책임인가. 등록금 경감은 부자의 돈을 강탈해 빈자에게 주는 포퓰리스트적 발상인가, 경제적인 문제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기본권인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시해놓은 대한민국 헌법이 논의의 출발점일 수 있다.

대선까지는 18개월이나 남았다. 국민적 토론의 결과물을 담아내야 진정한 공약이 된다. 비폭력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촛불을 무서워만 할 일은 아니다. 청년들이 죽어간다. 자칫 모두가 무너질 수도, 모두가 일어설 수도 있는 문제다. 우리는 경계에 서 있다.

<경향신문 김진호 국제부장>

-------------------------------------------------------------------------------------------------------------------------------------------------------

지금 프랑스 베스트셀러는 “분노하라”


분노라는 감정은 파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해 때로는 상대에 대해 분노할 때 분노는 단순히 감정이 아닌 행동을 수반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종종 부정적인 측면을 불러일으키기에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경계한다. 그러나 분노가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사회적 구조를 향할 때 이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스테판 에셀의 책 < 분노하라 > 는 분노의 정치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에서 분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이 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니는 걸까?

지난해 10월2일에 출판된 책 한 권이 지난 연말과 2011년 벽두 프랑스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유로(약 4500원)라는 착한 가격에 30여 쪽에 불과한 이 소책자가 80만 부 이상 팔리면서 이 책은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93세 노령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이 쓴 < 분노하라 > 의 성공에 프랑스 남쪽에 위치한 이 책의 출판사도 놀랐다고 한다. 편집자 실비 크로스만에 따르면 책이 발간된 후 이 책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편지,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 강연회 등 반응이 뜨거웠다. 크로스만 편집자는 AFP 인터뷰에서 이 책의 성공을 에셀이라는 인물의 독특한 삶과 개인적 아우라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스테판 에셀이 역사적인 레지스탕스와 일상적인 작은 레지스탕스 간 다리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미디어는 < 분노하라 > 의 성공을 두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담 없는 가격, 스테판 에셀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 이 책의 제목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 등을 꼽기도 했다. 아무튼 이 책은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재한 무언가에 호소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레지스탕스 영웅의 삶에서 나온 울림


1917년에 태어난 스테판 에셀은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면서 1941년 런던에서 드골과 조우했다. 전쟁이 끝난 1948년 '인권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유엔에서 활동했다. 1981년 미테랑 정부 시절에는 외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프랑스 현대사 일부이다. 그는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나치에게서 프랑스를 구하는 투쟁에서부터 프랑스 사회의 미덕이라 불리는 의료보험, 은행 국유화, 독립언론 체제 구축에까지 기여한 것이다.

그런 만큼 스테판 에셀이 현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은 누구보다 호소력을 지닌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수호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시장경제라는 독재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제는 국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이후 불법 체류자 및 이민 정책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대우, 은퇴 연령 연장, 의료보험 제도 후퇴 등 민주주의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레지스탕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회적 받침대가 오늘날 시장에 의해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생산성으로 부가 축적되었지만 문화적·사회적으로 점점 가난해지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질문한다. 국가는 더 이상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릴 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셀은 평화적 봉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자


스테판 에셀의 글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는 현상은 프랑스의 현재 상황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은퇴 연령 연장을 골자로 한 은퇴법 개정안 반대를 위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젊은 층까지 대거 참여하며 정치권을 긴장시킨 이 시위는 결국 개정법이 통과되면서 실패한 투쟁으로 평가되었다. 그 뒤 시민들은 다시 일터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프랑스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은 내면화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라는 도발적인 외침으로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분노가 레지스탕스의 존재 이유였음을 말하는 그는 오늘날이야말로 다시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환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이제 문제는 '분노하라, 시도하라, 행동하라'는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가 추상적인 울림이 아닌 구체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수호한 것처럼. 비록 분노가 선거 프로그램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는 2012년 대선 후보로 사회당 후보인 마르틴 오브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20세기의 분노는 21세기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가 정권교체 도울까?


프랑스 사회를 휩쓴 <분노하라> 신드롬을 해석하기 위해 사회학자 제라르 모제(사진)를 만났다. 모제는 국립과학연구센터 디렉터로 2005년 프랑스 외곽에서 일어난 폭동 사태를 다룬 <11월의 폭동>을 썼다. 현재 피에르 부르디외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이 성공한 데 대해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다. 그만큼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적이면서 인텔리적인 책이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 같은 성공의 배경에는 최근 경제와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높아진 관심이 있다. 스테판 에셀 책 이전에 유럽의 위기와 빚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저술한 <깜짝 놀랄 경제학자의 시위>가 4만 부가량, <사회학의 모임>은 10만 부가량 팔렸다. 또 다른 이유는 ‘분노하라’라는 제목이 갖는 힘 때문이다. 분노할 자격이 있는 저자가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말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는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최근 사회보장 제도 등 공공 서비스가 파괴되는 현실에서 이런 제도적 가치를 부여한 사람의 글이 더욱 호소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분노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이처럼 어필하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동안 유럽의 권력은 유니크 팡세(유일한 사유)를 사람들에게 요구해왔다. 유니크 팡세란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태도를 말하는데, 이것이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작용해왔다. 권력은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며 정년 연장을 주장하고,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했다. 그런데 스테판 에셀은 이 같은 ‘유일한 대안’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깨뜨린 것이다.

<분노하라>가 실천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2012년 프랑스 대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선거는 정치적 유희다. 그런데 정권을 바꾸기 위해서는 분노를 넘어 정치적인 힘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2012년 정권을 바꿀 수 있을지 비관적이다. 아직 정권을 바꿀 만큼 좌파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운동 세력 역시 정치화된 세력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2011.2.15 / 시사IN

-----------------------------------------------------------------------------------------------------

늙은 투사의 마지막 노래, ‘분노하라’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



인문서로서 2010년 최고의 화제작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덕분에 ‘정의사회’ 같은 관제적 구호 혹은 ‘사법 정의’ 같은 전문가 용어에서나 구경하던 ‘정의’를 한국 사회의 언중이 되찾아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토론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낳을 수 있는 효과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대를 모은 건 ‘정의 이후’였는데, 독자들의 선택은 정의에 대한 사회 관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처지를 돌보는 쪽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보이는 젊은 세대의 호응은 공적인 관심과 사적인 고민 사이에 놓인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던지는 조언과 위무의 수신자이고자 했다. 사적인 고민에 매몰된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홀로 선’ 청춘들이 공감의 공동체로 묶일 가능성도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 공감이란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 ‘사회적 고통’이기도 하다는 인식까지는 한 걸음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은 우리 시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이다. 그것은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다. 대졸자가 80%를 넘어가는 사회에서 등록금 투쟁은 곧 사회 전체의 투쟁이다. 단순히 ‘반값’의 쟁취가 핵심인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사느냐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이러한 고민과 투쟁에 힘을 보태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로 읽힌다.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가 넘게 팔린 이 소책자에서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는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과거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세상에서 비켜났다고 비판한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며, 노동이 창출한 부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이 스테판 에셀 같은 이들이 기획한 사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없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사회’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할밖에…”라고 말하는 것은 최악의 태도라고 에셀은 질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다. 자연스러운 분노이면서 동시에 자각적인 분노.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가 바로 분노였다고 말하면서 에셀은 그 정신을 되살릴 것을 젊은 세대에게 호소한다.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한국어 번역판은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총대’라고 할 만하다. 사실 분노의 용도라면 사르코지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많은 게 우리의 자랑 아닌 자랑 아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한 에셀은 분노를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격분을 경계한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이며 그 격분의 한 표출 방식이 테러리즘이다. 그가 테러리즘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적인 투쟁과 평화적인 봉기를 권유한다. 그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폭력은 희망의 폭력 혹은 폭력적인 희망이다.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빌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93세의 노투사가 희망을 노래한다면 우리에게도 절망은 없다.


2011.6.27 / 시사IN / 이현우(도서평론가)

-------------------------------------------------------------------------------------------------------------------------------------------------------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평화적으로 봉기하라


분노하라! 90대 노투사의 외침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고,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한 영세 출판사에서 초판 8천 부를 찍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그 뒤 7개월 만에 무려 200만 부를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세계 각국으로 판권이 팔려나갔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표지를 포함해 34쪽에 불과한 이 ‘팸플릿’의 지은이는 올해 세는 나이로 아흔다섯인 스테판 에셀.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집행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전력의 소유자다. 그가 망백(望百)을 넘어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목소리를 높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에셀이 보기에 2010년의 프랑스는 자신이 레지스탕스로 싸우면서 꿈꾸었던 자유 프랑스의 모습에서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물론, 나치라는 악과 자유 프랑스라는 선의 구분이 분명하던 60여 년 전에 비해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 오늘날 분노의 대상이 불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에셀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호소한다. 주변을 둘러보라고. 그러면 분노의 대상이 보일 것이라고. 에셀이 말하는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참여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표와도 같은 앙가주망(참여)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인데, 실제로 사르트르는 에셀이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 같은 선배’였다.


이렇듯 분노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에셀이 보기에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분노와 참여를 차단하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그는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번역자와 행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도 젊은이들이 일단 지지 정당에 투표할 것과 시민단체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7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두 6개 장으로 이뤄진 이 소책자의 한 장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할애됐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외교관 여권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전쟁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했다.

 

창조의 저항, 저항의 창조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역설하면서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이어야 하며 그쪽에 더 희망이 있다고 에셀은 힘주어 말한다. 그는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선배 사르트르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기도 한 ‘평화적 봉기’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선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2011.7.9 / 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 bong@hani.co.kr

-------------------------------------------------------------------------------------------------------------------------------------------------------

 

<분노하라>, 걸작의 어머니다...역공에 대처하려면?

문성근과 김여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프랑스의 93세 할아버지가 쓴 31쪽짜리 책 한 권이 화제다. <분노하라>. 이 짧은 제목과 함께, 레지스탕스 출신의 인권운동가라는 저자 스테판 에셀의 이력만 알아도 이 책의 내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와 비시정권에 맞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출발이 '분노'였듯이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조리들(부의 양극화나 여전한 인권의 문제에서부터 팔레스타인 문제에 이르기까지)에 맞서 저자는 일단 분노하고 비폭력 봉기에 나서라고 '선동'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생뚱맞게도 시오노 나나미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11권 '종말의 시작'편에 보면 시오노 나나미는 제정으로 접어든 1세기의 로마를 간략히 설명하면서 "제정 시대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타키투스의 저술은 무엇이든 비관적으로 보는 시점 때문에 질려버릴 정도지만, 그래도 우국지사의 외침인 것은 사실이다. 분노는 걸작의 어머니다"라고 썼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내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들 중에서 '나만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은 모두 그 어머니가 '분노'였다. 물론 그 분노를 잉태한 것은 타키투스에게는 가면을 쓴 제정황제였고 나에게는 부조리한 한국 사회였다.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바꾸어 온 출발점이 대중의 분노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물론 이때의 분노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분노가 아닌, '공분'이나 '의분'이다). 비시정권 아래서 레지스탕스를 했던 에셀이 그랬고, 그보다 150여 년 전 루이16세의 목을 기요틴으로 내려친 그의 선조들이 그랬다.

 

에셀과 그의 선조들이 느꼈던 분노를 우리는 멀게는 동학혁명군이나 3·1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서 이미 느껴보았고, 4·19혁명와 5·18광주항쟁,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우리의 가슴과 함께했다. 맨주먹 말고는 가진 게 없는 피지배 민중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단합된 분노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분노는 단지 작가에게만 걸작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에도 걸작의 어머니임에 틀림없다.

 

민중의 무기 '분노'...그리고 분노를 잠재우려는 지배층

 

피지배층의 분노가 인류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온 한편으로 지배계층은 이들의 분노를 무력화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에 크게 두 가지 무기가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대중들의 분노가 조작되었다고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광주항쟁이 "북의 지령을 받은 일부 빨갱이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의 계엄확대와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를 느꼈을 법한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좌익세력의 선동에 의한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여론조작은 분노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유효한 술수였다.

 

"지금 당신의 분노는 빨갱이나 좌익 혹은 좌파에 의해 배후조종된 것이다"라는 속삭임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촛불시위가 한반도를 휩쓸었을 때도 큰 힘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내 생각을 조종한다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MB의 지지자들조차 등을 돌려 한때 70%를 넘나들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은 <조선일보>가 작심하고 좌우파 편 가르기에 뛰어든 결과 진정되기 시작했다.

 

흔히 보수언론은 노무현 정부가 편 가르기를 심하게 했다고 하지만, 사실 자기들의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좌파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편을 가른 것은 그들이었다. "나도 MB 지지자이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그런 분노는 조작된 것이며 결국 당신은 좌파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협박은 잘 먹힌다.

 

우파이면서도 MB의 정책을 비판하는 영역을 완전히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MB의 한두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이제부터 나는 저쪽 편에 서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분노를 무력화하는 확실한 방법... "그놈이 그놈"

 

분노를 무력화하는 또 다른 수단은 분노를 일으켜 세상을 뒤집어봐야 결국 새로운 분노가 생길 뿐이라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유포하는 것이다. 지금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결국 권력을 쥐고 나면 똑같은 모순과 부조리에 빠지고 만다면, 분노하여 봉기에 나선 사람들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노를 잠재우는 허무주의를 유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에게 비슷하거나 더 심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 미국의 노동운동이 몰락한 데에는 여자와 돈이 있었다. 보수언론이 386 출신들의 도덕성을 유난히 물고 늘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시절에 경찰청장까지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현재 철도공사 사장에 오른 허준영은 "소주 먹던 청와대 386이 곧 양주만 찾더라"고 고발했고 <조선일보>는 이를 사설로 옮겼다. 보수 세력의 이런 계략이 절정을 이룬 것은 물론 노무현에 대한 비리수사와 이에 저항한 그의 죽음이었다. 노무현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명숙은 "의자가 돈을 받았네", "국기를 모독했네" 하면서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요즘은 택시를 타면 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이나 모두 다 도둑놈들이라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꼭 말끝에는 "민주당이 돼도 다 똑같아요. 어차피 그놈들이 그놈들이잖아요"라는 결론이 붙어 다닌다. 물론 민주당이 믿음과 희망을 주는 정당이 아닌 면도 많지만, 설령 그 어떤 뛰어난 야당이 있다고 할지라도 비슷한 결론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노무현이 살아서 계속 검찰에 불려 다니고 재판정에 서고 수갑 차고 수의라도 입고 수감까지 되었다면,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은 훨씬 더 큰 힘을 얻었을 것이고, 그만큼 현 정부나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큰 힘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사람들은 기를 쓰고 없는 죄라도 만들어 내려고 했다. 노무현이 몸을 던진 이유는 그게 싫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

 

분노와 봉기 사이의 '두세 발자국'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호소한다.

 

그러나 사실 분노와 봉기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의 강물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단 우리의 분노를 무력화시킬 막강한 이데올로기와 매체와 수단이 저편에 존재한다. 또한 분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반면 봉기에 나서려면 목적의식적인 기획과 큰 용기가 필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분노와 봉기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대단히 좁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들과 함께 처음으로 데모라는 것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점은 시위대와 구경꾼 사이의 거리가 불과 두세 발자국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심에서도 그랬지만 같은 대학생들이 함께 있는 교내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신입생 때는 시위대일 때보다는 구경꾼일 때가 훨씬 많았다. 구경꾼이라고 해서 시위대가 느끼는 의분을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슷한 분노를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구경꾼과 시위대를 가르는 그 두세 발자국의 거리는 분노의 공감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이다. 분노와 봉기의 그 좁고도 큰 간격은 이후 학생운동을 하는 내내 나의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봉기가 얼마나 즐겁고 평화로운 비폭력의 축제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스마트폰과 SNS가 급격하게 퍼지면서 작년과 올해에는 그 축제가 또 다시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중동을 휩쓴 자스민혁명은 수십 년 동안 하지 못했던 역사적 과업을 불과 몇 달 며칠 만에 해치워버렸다. 한국에서는 김여진이 이끄는 '날라리패'나 문성근이 주도하는 민란이 봉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분노와 저항과 창조가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셀이 <분노하라>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쓴 것처럼 말이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김여진과 문성근을 (우연히도 둘 다 배우다) 봉기에 나서게 한 분노가 그들이 '날라리'와 '민란'이라는 최고의 걸작 다큐멘터리를 찍게 만든 어머니일 것이다.

 

 

 

 

 

분노를 간직한고 있다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 

 

분노가 봉기로 이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대체로 두 가지 갈림길에 들어선다. 하나는 분노를 잊지 않고 선량한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2008년 5월, 고등학생들이 시작한 촛불시위를 뒤에서 끝까지 지켜주었던 것은 언젠가는 행동에 나서지 않은 마음의 빚을 갚고자 했던 어른들이었다. 지금의 반값등록금 시위에 동참하는 학부모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분노가 남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잊어버리거나,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잊히는 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망각된 분노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은폐하면서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분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분노를 잊지 않는 것, 그렇게 선량한 부채의식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분노를 우리가 가슴 한 켠에 간직하고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값어치를 할 기회가 온다.

 

날라리들과 함께 김치를 싸들고 청소 아주머니를 찾아갈 수도 있고 외롭게 높은 크레인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하는 어느 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해줄 수도 있고, 주권자인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민란의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진보가 '깨어 있는 시민'들과 만나면서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분노가 다른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생 최대의 걸작이 그 속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옥동자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타키투스가 로마시대 최고의 역사가가 될 수 있었던 그 비결과 함께.

 

"분노는 걸작의 어머니다."

 

2011.6.26 / Ohmynews / 이종필 기자

-------------------------------------------------------------------------------------------------------------------------------------------------------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은 <분노하라>

한국의 레지스탕스 '김진숙'을 환기하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가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 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분노하라'고 말한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 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 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 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 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 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2011.7.5 / Ohmynews / 윤성의 기자

-------------------------------------------------------------------------------------------------------------------------------------------------------


스테판 에셀, 비처럼 쏟아진 오마주


<분노하라>의 작가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그를 향한 오마주가 프랑스 전역에 비처럼 쏟아졌다. 95년 동안 행복하고 환하게 타오르던 그 촛불이 꺼진 자리는 컸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메우느라 저마다 촛불을 하나씩 켜들었다. 지난 3년간,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이 남자는 가장 많은 사랑과 희망을 건네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날 바스티유 광장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고, 신문지면들은 온통 이 놀라운 인물의 생에 대한 저마다의 애틋한 술회로 넘쳐났다.

1917년 베를린생. 7살에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절친과 사랑에 빠져, 그가 살고 있는 파리로 이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했고, 두 남자 사이의 우정은 건재했다. 영화 <줄과 짐>을 통해 전설이 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을 부모로 둔 스테판 에셀에게, ‘질투하지 않는 충만한 사랑’은 필생의 가르침이었다. 18살에 프랑스 국적을 얻고, 에콜노말에서 공부한 직후, 2차대전이 발발한다. 나치라는 반이성이 유럽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주저없이 드골을 따라 레지스탕스가 되는 길에 나선다. 나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갔던 그는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해방된 프랑스에서 외교관이 된다. 


이후 그의 인생은 더 많은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한 투쟁의 삶이었다. 외교관으로서 그가 시도한 대부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들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은퇴 이후 본격적으로 인권운동가, 환경운동가로서 활약하면서도 실패는 더 익숙하게 찾아오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행복한 시지프스’가 될 것을 모두에게 말한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행복할 수 없으며, 분노하는 것,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치에 다시 ‘윤리’의 미덕을 구축한 사람, 분노해야 할 이유를 젊은 세대에게 일깨워준 거인,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된 사람, 우아한 삶과 투쟁하는 삶을 조화시킨 사람, 그리고 스스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의 전형이라고 하는 에셀은 말한다. “수조원을 소유한 사람들과 하루 1~2달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우린 분노해야만 한다”고. 단지 좌파의 간판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뿐 아니라, 90이 넘은 레지스탕스 영웅도, <줄과 짐>의 아들도, 이토록 추하게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함께 분노로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에서만 200만권이 팔린 <분노하라>(2010) 이후 그는 7권의 책을 더 써낸다. 마지막 책은 다음주 출간 예정인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 촛불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한 조각 행복의 밀알을 다음 세대에게 전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경이로움은 ‘사랑’이었다고 이 백전노장은 주저없이 말한다. “사랑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할 때,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내가 전 인생을 통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고, 그리고 언제나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하고, 행복을 주는 것. 내가 행복해짐으로써 남까지 행복하게 하는 것.” 강연 때마다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그가,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내기 위해 마음에 켜들었던 촛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시들이었다.

시와 사랑, 행복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자유·평화·인권을 위한 투쟁과 공존하는 것임을 눈부시게 일깨워준 이 영원한 젊음의 투사, 그의 향기로운 영혼이 천지에 온기를 불어넣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파리에 봄이 다가왔다. 봄 향기가 진동한다. 7일(현지시간) 스테판 에셀은 몽파르나스 묘지,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있는 그곳에 묻힌다.


2013.3.5 / 목수정 | 작가, 파리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