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세상 이야기

공산당 창건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1) - 현이섭

by Wood-Stock 2011. 7. 8.

 

~~~~~~~~~~~~~~~~~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공산당 창건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1. 마오-장제스 천하다툼, 시대정신 관통이 승리열쇠였다

 

중국은 오는 7월 1일 공산당 창건 90주년을 맞는다. 중국공산당이 걸어 온 간난신고의 상징인 장정(長征) 77돌도 올해다. 중국은 또 올해 신중국의 모태가 된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는다. 중국은 지금, 오늘의 중국이 있기까지의 이런 기념비적 행사를 계기로 대대적인 민족단결과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로 신음하던 옛 중국은 이제 면모를 일신하고 미국과 어깨를 겨루며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붉은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세계 전역을 누비고 있다. 중국의 굴기(崛起)는 신 패권주의를 우려하는 중국 위협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끊임없는 역사공정과 해양영토 분쟁 등이 단적인 보기다. 이에 대해 중국은 조화롭고(和諧) 평화로운 세계(和平崛起)를 외치며 펄쩍 뛴다. 아직도 도광양회(韜光養晦)중이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한지 올해로 19년, 한국의 최대 수출대상 국가이자 최대 자본 투자 국가이다. 한국의 밥상은 이미 중국 농수산물이 점령한지 오래됐다. 중국 관광객은 한국에서 큰손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 남북정책의 산물로 중국은 최근 북한의 나선특구와 황금평 지역을 북한과 공동개발하기로 착공식을 열었다. 중국은 이제 21세기 태평양 세기의 전략적 요충지역인 한반도에 둥지를 틀고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동해 출항권 확보와 북한의 지하자원도 손에 넣게 되었다. 북한의 중국 예속화는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처럼 중국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무서운 속도로 급팽창하고 있다. 물론 중국사회도 부정부패, 양극화 심화, 인권, 민족갈등, 언론부재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중국의 폭발적 에너지는 다른 국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국 지도부는 수없이 많은 혁명 영도들과 전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토대위에 중국의 오늘과 미래가 연원하고 있음을 인민들에게 음수사원(飮水思源)케 한다. 90년 전 13명의 공산당 1대 대표들이 불을 붙인 공산당은 오늘날 세계 최대인 8천만 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다.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이었던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천하다툼은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쟁취했다. 기득권의 부정부패 척결과 더불어 사는 ‘토지혁명’의 시대정신을 해독한 결과였다. 혁명에 대한 순정한 열정과 희생, 피땀 어린 분투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음모와 배리, 갈등, 정권획득 이후의 잔혹한 권력투쟁과 숙청 등은 추구했던 혁명의 궁극적 목표와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가치에 대해 많은 물음을 던진다. 인류가 살아 온 궤적 또한 그러하다. 한국과 중국의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기대하며 중국의 표상, 마오쩌둥을 통해 중국의 어제를 들여다본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반면교사와 격물치치(格物致知)다. 마오쩌둥 평생 전기록(毛澤東生平全記錄/中央文獻出版社)’을 저본으로 해 관련 서적과 해제된 문건 등을 바탕으로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를 장기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가르침과 질정을 바란다. -편집자주

 

“우리나라 속담에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닫으면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제 그때가 왔다. 나는 한 평생 살면서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장제스와 수십 년 싸운 끝에 그를 섬(타이완)으로 내 쫒았다.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생전에 이 섬들도 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과 8년간 싸우면서 그들을 제 나라로 돌려보냈다. 여기에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 하나는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다. 헌데 옹호하는 사람들 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두 가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세대가 할 수 있도록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라가 평안할 때 같으면 좋은 데, 지금은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권력이양을)잘못하면 피바람이 인다." (주석 1)

 

신중국을 창시한 마오쩌둥은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자기로서는 미완의 이 일을 후대가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안정적인 권력이양이 이뤄져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마오로서는 결과적으로 10년 재앙이 된 문화대혁명을 둘러싸고 후계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눈에 환히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인인 장칭(江靑)을 중심으로 한 `4인방' 세력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고 대척점에 있던 덩샤오핑(鄧小平/당시 실각), 원수인 예젠잉(葉劍英) 등 국가 창건 원훈 세력들은 문화대혁명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평가 또한 후계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1976년 9월9일 0시10분. 일세를 풍미한 마오쩌둥은 온갖 시름을 접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마오 나이 83살이었다. 마오는 신중국 창시자, 무산자 혁명가, 걸출한 군사전략가, 시인이자 서법가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진시황, 철혈 독재자 등 무한 권력을 휘두른 ‘영원한 주석‘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사후 3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진행형으로,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의 초상화는 중국의 상징인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걸려 13억4천만 명의 인민들을 굽어보고 있고, 그의 주검은 미이라로 건너편 인민대회당에 안치돼 있다.

    
1913년의 마오쩌둥 / 마오쩌둥의 1919년 가족 사진.
 

샹탄 산골마을 농민 아들로 …공맹신도였던 어린 마오

 

마오쩌둥은 청나라 말엽인 1893년 후난성 샹탄 현 샤오산충(湖南省 湘潭縣 韶山冲)에서 태어났다. 중국 내륙의 배꼽 아래에 있는 샹탄 현 언저리에는 창장(長江)의 도도한 물결이 남동쪽으로 흐르다 만들어 놓은 중국 최대의 호수, 반죽(斑竹)의 고향 둥팅후(洞庭湖)가 펼쳐져있다. 사방 8백 여리에 이르는 일망무제의 호수다. 강 건너편 웨양(岳陽)에는 삼국시대 오나라 주유가 수군을 훈련시켰던 악양루가 있으며, 이백, 두보 등 헤아릴 수 없는 시인묵객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라는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산자수명한 샹탄은 후베이(湖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광둥(廣東), 장시(江西)성 등이 인접해 있으며, 수륙교통이 발달했다. 샹장(湘江), 쯔장(資江), 위안장(沅江), 펑장(灃江) 등 4개의 강이 교차하는 데, 샹장이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후난성은 예부터 인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근대이래 변법자강운동의 영수인 탄스통(譚嗣同), 탕차이창(唐才常)을 비롯해 신해혁명의 선구인 천톈화(陳天華), 추진(秋瑾), 쑹자오런(宋敎仁)등 무수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샹탄 현은 초나라 문화 발상지의 한 곳으로 경내 교통이 발달하고, 땅이 비옥해 남쪽지역의 곡창으로 유명해 큰 현으로 통했다. 마오는 샹탄 현 서북쪽으로 90리 남짓 떨어진 산골 마을인 샤오산충에서 농민인 아버지 마오쉬엔성(毛順生)과 어머니 원치메이(文七妹)에서 태어났다. 마오는 형이 두 명 있었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장남이 되었다.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두었다. 마오가 태어 난지 7개월 뒤 청일전쟁이 일어나 이긴 일본이 랴오동(遼東)반도를 할량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중국은 선진 지식인들인 캉여우웨이(康有爲), 량챠오챠오(梁啓超), 탄스통(譚嗣同), 옌푸(嚴復) 등 국가혁신을 위해 변법자강을 내세운 진보세력과 광쉬(光緖)황제, 쯔시(慈禧)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봉건세력이 충돌해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주석 2)

 

하지만 산골 마을인 샤오산충은 바깥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고 가난한데다 단절돼 있어, 외부에서 몰아치는 이런 거대한 파도의 물결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8년이 지나 두 아들을 강보에서 잃은 뒤 얻은 아들의 기쁨으로 외부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집안 형편은 중농이었으나 나중에 가세를 불려 대농이 되었다. 마오는 4살 때부터 둘째 외삼촌의 사숙에서 '방청생‘으로 '가범잠언(家範箴言)’ '3자경(三字經)‘ 같은 책들의 글을 줄줄 외워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9살 때 마오는 외가에서 샤오산으로 돌아와 6군데의 사숙에서 '논어’ '맹자‘ 등 4서5경의 유학 경전을 배웠다. 마오는 '좌전’ '춘추‘ '사기’ '강목‘ '일지록’ 등 6년여 동안 많은 고전을 읽었다. 학과시간 이외에는 '삼국연의‘ '수호지’ '손자병법‘ 악비전’ '수당연의‘등의 역사소설을 즐겨 보았다. 마오는 훗날 잘 이해를 못했으나 6년간 '공부자(孔夫子)‘공부에 심취했다고 술회한바 있다. 마오는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기 1년 3개월 전인 1920년 4월 창사(長沙)에서 벌이던 후난 군벌 자오헝티(趙恒惕)축출운동과 관련해 베이징에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돈이 떨어져 힘든데도 `공맹의 성지’인 산둥성 취푸(曲阜)와 쩌우쉬옌(芻縣)에 찾아가 공자와 맹자의 고거와 분묘를 배알했다. 마오는 “당시 공자의 제자들이 탁족했다는 개울도 가봤고, 공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공묘 부근의 큰 나무도 봤다. 또 공자의 유명한 제자 안회(顔回)가 살던 부근의 개울가에 머물기도 했다”고 회억했다. 하지만 이 해에 ‘공맹신도’였던 마오의 세계관이 크게 바뀌었다. 공자와 맹자의 절대 권위를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문화대혁명 시기 '비림비공(批林批孔) 때를 빼고는 평생 동안 유학경전을 즐겨 인용하고, 주석을 다는가 하면 공산당 중앙간부들에게 열독을 권하기도 했다. (주석 3)

 

마오는 기억력이 왕성한 유년시기에 역사소설의 영웅들의 이야기에 깊이 끌리었다. 몇 십 년 뒤 그가 철학이나 군사학을 강의할 때 읽었던 책의 줄거리를 잊지 않고 즐겨 인용했다. 마오는 이런 역사소설이 때론 어떤 중요한 문제를 사색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이런 류의 소설을 보면 씨 뿌리며 농사짓는 농민들은 없다. 모두가 무장, 문신, 서생이요, 농민이 주인공인 것은 없다. 나중에 내용을 분석해 보니, 숭앙받는 이들은 모두 무장과 인민의 통치자들인데, 이들은 씨를 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통제하면서 농민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씨를 뿌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농가 아이들이 그렇듯 그도 6살 때부터 소를 끌고 다니며 꼴을 먹이는 등의 집안일을 했다.  동무들과 노는데 팔여 종종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받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거칠면서 인색했고, 어머니는 순박하고 동정심이 많았다. 마오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마오의 아버지 사촌동생이 가난에 허덕여 손바닥만 한 밭뙈기로 힘들게 생활하다 그마저 팔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었다. 마오의 아버지는 주저 없이 그 땅을 샀다. 마오와 어머니는 혈육의 정으로 볼 때 밭을 사기 보다는 도움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가난한 사촌동생의 밭을 사는 것을 반대했다. 마오의 어머니는 전에도 사촌동생네 집에 틈틈이 쌀과 먹을 것들을 보내줬다. 하지만 마오의 아버지는 달랐다. 형제든 아니든 내 돈을 주고 밭을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1936년 마오가 옌안(延安)에서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우에게 털어 놓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별로 좋지 않았다. (주석 4)

어머니의 맑은 심성에 경외심 …아버지 대항 '공동전선'도

 

 “내가 글을 몇 자 알 때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장부를 기록하는 일을 시켰다. 나한테 주산을 배우도록 했다. 밤늦게 까지 장부 기록하는 일을 시키고 내가 쉬는 것을 그냥 보지 못했다. 만약에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농투성이가 돼 살라고 혼냈다. 아버지는 성질이 거칠고 포악스러웠다. 툭하면 나와 동생들을 때렸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푼의 돈도 주지 않고 먹는 것도 아꼈다. 머슴들에게는 일을 하기 때문에 매달 급료를 주는 15일엔 계란을 먹도록 했는데, 고기는 주지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고기는 물론 계란도 주지 않았다.”              
    
마오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배우지도 못했고 번듯한 이름도 없었지만 선량하고 착했다. 마오의 외갓집은 딸이 7명이어서 그저 순서대로 부르는 문 씨네 일곱 번째 딸이라는 뜻의 원치메이(文七妹)가 이름이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우가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을 쓰기 위해 마오를 취재하면서 어머니 이름을 물었을 때 '원치메이’라고 한 것을 발음이 같은 '원치메이(文其美)‘로 쓴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보다 3살 많은 13살 때 정혼을 했고, 정식 결혼은 18살 때 했다. 마오는 아버지가 거칠고 폭압적이며,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데 반해 어머니는 온화하고 선량하며, 이타적인 판이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마오는 이런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과도 같은 가정환경에서 단련이 되고 품성이 만들어 졌다. 아버지의 이런 성격으로 마오는 '반항아’가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저항하는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오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내가 13살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나를 질책할 때 경전에서 좋은 말을 끌어다 쓰는 방법을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나의 불효와 나태 등을 꾸짖으면서 이런 경전의 옛 글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해서 나도 경서에 나오는 ‘장자(長者)들은 반드시 좋은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글을 따, 아버지가 혼낼 때 저항의 수단으로 써먹었다.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당연히 나이가 적은 사람보다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 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다.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나이 때 되면, 아버지 보다 부지런히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불만은 더욱 많아졌다.

 

우리 집에서 변증법적인 투쟁도 부단히 발전돼 갔다. 13살 때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집에 많은 손님들을 모셨는데, 그분들 앞에서 아버지와 다툼을 벌였다. 아버지가 손님들 앞에서 내가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한 것이 발단이 됐다. 나는 격분해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집을 뛰쳐나갔다. 어머니가 나를 쫓아오시면서 돌아오라고 소리 쳤다. 아버지는 쫓아오시면서 한편으로는 욕하고, 또 한편으로는 돌아오라고 외쳐 됐다. 나는 연못가로 뛰어갔다. 가까이 오면 연못으로 뛰어들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내전'이 그치면서 '요구'와 '반 요구' 등 모든 것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뜻으로 절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때리지 않는다면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전쟁은 끝났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알았다. 내가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반항하니까 아버지께서는 유화적으로 나오셨다. 내가 만약 온순한 태도로 나왔더라면 아버지는 더욱 욕하고 때렸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전제적인 엄한 태도는 스스로 실패를 자초했다. 나는 점점 아버지를 경원시 했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에 대항해 일종의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됐다.” (주석 4) 

 

불효사건 '결혼항명'…봉건질서 혁파 믿음으로 자리

 

마오가 아버지에게 저지른 최대의 '불효사건‘은 '결혼항명’이었다. 마오가 14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당시 풍습에 따라 18살 난 뤄(羅)씨 성을 가진 며느리를 맞이하기로 했다. 마오는 펄펄뛰며 반대했다. 마오는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 일반적인 윤리강상에 비춰볼 때 '모반’이 아니며, 강압 더 나아가 인간을 착취하는 불평등현상이기 때문에 '관념적 모반‘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부모들 보다 당사자들의 의사가 전제되어야 하고,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마오의 사상적 논리 발전은 봉건중국의 모든 낡은 사회질서를 혁파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한걸음씩 나아갔다. 당시 봉건풍습에 따라 마오 집에 온 뤄씨는 끝내  화촉동방을 밝히지 못한 채 집안일만 거들다 21살 때 병사했다. 마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씨를 좋아했다. 어머니의 이런 풍모는 소년 마오의 마음 밭의 자양분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효자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집권당’에 대항하는 마오와 어머니, 동생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당‘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오는 뒷날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

 

 “우리 집은 아버지에 맞서 어머니를 포함해 모든 가족들이 통일전선을 이뤘다. 어떤 때는 머슴들까지도 가담했다. 헌데 반대당에 대한 통일전선 내부에 이견이 존재 한다. 어머니께서 간접적인 문제해결 방식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공개적이고 감정적으로 (아버지)대응하는 방식은 중국인의 방식이 아니라고 항상 한 발 물러 나신다.”

 

마오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대단했다. 1919년 10월 마오의 어머니가 52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마오는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군벌 축출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부음을 듣고 집으로 달려 왔지만 입관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마오는 비통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은덕과 자식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행장을 담은 장문의 '제모문(祭母文)‘을 지어 영전에 올렸다. 장사를 지내고 얼마 뒤 마오는 친구들에게 “세상에는 3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남에게 손해를 주면서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사람, 이기적이지만 남에게 손해를 주지 않는 사람, 자기는 손해 보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 데 우리어머니는 맨 끄트머리 부류에 속 한다”며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보였다. (주석 6)

 

(1)毛澤東生平全記錄下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下 逢先知, 金冲及 主編 中央文獻出版社
(2)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3)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4)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5)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6)毛澤東如何待幾前妻 理論頻道 新華網

 

-------------------------------------------------------------------------------------------------------------------------------------------------------

 

2. 기민폭동 맞선 폭압 통치에 '어린 청년' 마오 증오심이 …

 

마오가 17살 되던 1910년 봄에 창사에서 기민폭동(飢民暴動)이 일어났다. 전 해 큰물로 농사가 흉년이 든 틈을 타 지주와 투기 상인들이 폭리를 취했다. 외국계 회사들도 정부와 결탁해 사재기를 하면서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1만 여명을 훨씬 웃돌았다. 기민들이 한을 품고 샹장(湘江)에 뛰어들었다. 굶어 죽기 직전의 아이들과 함께 연못에 투신해 목숨을 끊는 일도 발생했다.

이 사건이 창사를 크게 뒤흔들었다. 죽음 문턱에 들어선 기민들이 대표를 뽑아 관아에 가서 구휼해 줄 것을 애걸복걸했으나, 문전박대를 받았다. 끝내 성난 기민들이 폭도로 돌변해 관아의 창고에서 곡식을 약탈하는가 하면 시내에 있는 영사관과 외국회사 등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영국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국가와 함께 한커우(漢口) 상하이 등지로부터 10여척의 군함을 끌고 와 무자비하게 폭동을 진압했다. 창사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많은 기민들이 체포되고, 관리들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을 효수했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마오는 폭압 통치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뼛속깊이 스며들었다. 마오는 훗날 이 사건이 나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빈부의 대물림·탐관 지주들의 부패에 사회 반항의 씨앗이 마음에

 

이 사건 얼마 뒤 마오의 고향 샤오산충에서도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부잣집의 곡식창고를 덮쳐 양식을 털어가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마오의 집도 털렸다. 마오는 “사람들이 쌀이 없잖아! 잘 털어갔다!”면서 화가 난 아버지를 위로하지 않았다. 일련의 이런 사건은 젊은 마오에게 많은 물음을 제기했다.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고, 부자는 계속 부자가 되는가. 지주와 탐관들은 나쁜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고 착실하게 일하는 선량한 백성들은 비참하게 억압당하고 도살당하는가.

사회에 대한 반항의 씨앗이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마오는 이 시기에 샤오산충에 돌아 온 개화사상을 가진 리수칭(李漱淸)선생을 만났다. 마오는 그로부터 1900년 중국을 침범한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 연합군들이 중국 국토를 유린하고, 이권 쟁탈전을 벌여 중국 국민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재난을 받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 등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된다. 정치의식이 개화한 마오는 국가의 앞날과 명운을 걱정하는 우국청년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마오의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이 공부보다는 시내 한 미곡상에 가 장사하는 법을 배워 앞으로 자신을 도와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주석 8)

 

하지만 큰 뜻을 품은 마오는 학교 진학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는 반대했다. 꾀를 낸 마오는 친척들과 동네의 명망 있는 어른들에게 아버지를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이 마오가 대처로 나가 공부하면 나중에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권유해 가까스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마오가 신천지로 나가는 전기가 됐다.

 

그해 가을 마오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학업을 위해 동산서원(東山書院)으로 갔다. 이 서원은 당시 과거가 폐지되면서 샹샹(湘鄕)현립 고등소학당으로 바뀌었다. 이 학교는 교장을 비롯해 대다수의 선생들이 진보적인 '유신파‘인사로서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유신의 영향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마오는 입학시험으로 출제된 '옌쯔(言志)’라는 작문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맹사상과 관련한 내용의 글을 쓴 것과 달리 농민들의 고통과 사회적 시폐, 민족의 위기와 조국의 앞날 등을 논하면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의 포부를 열정적으로 서술하였다. 교장 선생과 시험관들은 “우리 학교에 건국인재가 들어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오는 여기서 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마오는 특히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 글씨는 전교에서 뛰어난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마오는 청나라 때 유명한 주자학자인 고염무(顧炎武)가 말한 '천하흥망은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는 말을 폐부 깊숙이 간직하며 구국구민은 자기의 숭고한 책임이라는 뜻으로 '자임(子任)’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취하기도 했다. 다방면의 지식 습득에 각고면려한 마오는 신체단련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마오는 특히 수영을 좋아했다.

 

학업 중단 마오 부패한 청왕조 타도 위해 창사혁명군 사병으로

 

학교 쪽은 마오의 뛰어난 능력을 아껴 큰 도시로 나가 공부하기를 권했다. 1학기를 마친 마오는 1911년 봄, 그의 생활에서 더욱 새롭고, 더욱 풍부한 한 페이지를 활짝 연 성도인 창사 샹샹주성중학당(湘鄕駐省中學堂)에 들어갔다. 어느 날 후베이성 혁명군의 한 대표가 이 학교에 와서 '우창기의(武昌起義)‘에 대해 강연하면서 반청운동을 고취시켰다. 마오는 전율했다. 그는 부패하고 매국적인 청나라를 엎어버리는 것이 전 국민의 바람이라고 여겼다. 마오는 이 혁명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결심한 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 힘을 보태기로 했다. 당시 청 왕조는 인근 우한(武漢)에 군대를 파견해 혁명군을 포위 공격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오는 청 왕조 통치를 타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군인이 돼 우한 혁명군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 때 후난의 많은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학생군’이 조직되었다. 마오는 학생군 보다 정규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창사혁명군의 일반 사병으로 들어갔다. 신병중대에서 수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마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8)

 

“나는 신병중대에 들어간 뒤 우한으로 가 싸움은 못했지만,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마오는 병영생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병사들은 대부분 빈한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광부, 대장장이, 목수 등이었다. 마오는 그들이 우직하고 순박해 좋아했다. 가정사와 생활에 대해 기탄없이 이야기하며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들도 박학다식한 마오를 좋아 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글을 몰라 집에서 온 편지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 마오는 틈틈이 이들에게 시사문제 뿐 아니라 조국의 앞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주었다. 마오는 이때 월급으로 7원을 받았다. 3원으로 식비와 물을 사먹는 등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남은 돈은 신문을 구독하고 책을 사는데 썼다. 마오는 이를 통해 국내외 사정뿐만 아니라 혁명의 도리 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마오는 이들에게 자신이 분석한 시국상황 등을 들려주면서 청 왕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병사들은 열정적이고 성실하면서도 자신들을 도와주는 마오를 좋아하고 따랐다.

 

마오는 어느 날 신문에서 '사회주의’에 관해 쓴 한 편의 글을 읽었다. 마오는 이때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명사를 알게 됐다. 그는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으나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들 사병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후 마오는 장캉후(江亢虎)가 쓴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원론’이라는 소책자를 읽고, 친구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써 사회주의에 대해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자는 '사회주의’라고 선전했을 뿐 사회주의를 곡해한 사회개량주의에 관한 내용에 불과하였다. 무늬만 사회주의였지만 마오에게는 대단히 흥미 있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당시 신해혁명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였다. 
 
봉건 청 왕조 타도됐으나 혁명 과실은  위안스카이가

청왕조가 정권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양군벌 우두머리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황제를 겁박해 자신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위안스카이의 야욕에 반대하는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난징(南京)에 있는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베이징(北京)의 위안스카이 북양군벌간에 협상이 이뤄져 남북통일이 이뤄졌다. 267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청 왕조가 사라졌다. 이로써 2000 수백 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 오던 봉건왕조 시대가 끝났다. 위안스카이가 국민혁명의 과실을 따먹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신해혁명은 시나브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때 마오는 혁명이 끝난 것으로 보고 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다. 1912년 봄, 마오는 소대장의 만류를 뒤로하고 병영을 떠나 다시 학업의 길에 나섰다.

 

청년 마오는 몇 개 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그만두었다. 썩 내키지 않았으나 후난 성립1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국어 선생이 청나라 첸룽(乾隆)황제가 국가 문건을 처리하면서 결재하고 지시한 내용 등을 묶은 '어비통감집람(御批通鑑輯覽)'을 빌려 줘 읽고 차라리 독학을 하면서 연구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6개월 만에 학교를 때려 치웠다. 그는 청조 말께 건립한 후난 도서관을 다녔다. 1층에 열람실, 2층에는 장서각이 있는데 그가 일찍이 보지 못한 국내외 도서가 가득했다. 

 

도서관서 지식욕 불태우며 사상의 지평 넓혀

 

강렬한 지식욕에 굶주린 마오는 이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볼 때 마다 느끼는 새로운 체험과 희열은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마오는 훗날 이 시기를 소가 "채마밭에 들어가 죽어라하고 맛있는 푸성귀를 뜯어 먹는 것"에 비유했다.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으나 사회과학 서적을 가장 많이 봤다. 주로 18, 19세기 서구 계몽주의 학자들의 책으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 루소의 '민약론' 등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서적,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시, 소설 등의 문예작품을 보았다. 마오는 여기서 다량의 신지식을 섭취하면서 자신의 인식능력과 분석력을 살찌우고, 사상세계의 지평을 넓혀 갔다. (주석 8)

 

마오 나이 20살이 되던 1913년 봄, 위기가 찾아왔다. 독학을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아버지가 생활비를 끊은 데다, 임시로 머물고 있던 샹샹 현 출신들을 위해 지은 샹샹회관에서 툭하면 싸우는 등 숙소 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택을 고민하던 마오는 후난 제4사범학교(1년 뒤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로 통합됨)에 들어가 5년 동안 다녔다. 마오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후난 사범학교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학비가 면제고 숙식비가 쌌다. 내 두 친구가 입학을 권유했다. 이들은 내가 입학 작문을 써주기를 바랐다. 집에서 허락도 받았다. 나는 두 친구의 작문을 대신 써 주고, 내 것도 썼다. 셋이 다 합격해 실제적으로 나는 3차례 합격한 셈이다. 당시 나는 이런 행위가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우정의 문제라고 봤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일을 겪었고, 나의 정치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첫 사회경험을 얻었다.

학교에 학생들이 수염이 길어 '위안따후즈'(袁大胡子/원털보)라고 별명을 붙인 국어 선생이 계셨다. 그는 내 글을 기사문체라며 비웃었다. 내가 본보기로 삼았던 량치차오(梁啓超)를 깔보면서 그의 학식이 시원찮다고 평가했다. 나는 문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당송8대가인 한유의 문장을 연구하여 고문 표현법을 익혔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양창지(楊昌濟) 선생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 왔는데 나중에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는 윤리학을 가르친 유심론자였다. 도덕적인 품격이 높은 분으로 윤리학에 강한 믿음을 갖고 학생들이 공평 정직하고, 고상한 품격을 갖춰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써 가르쳤다. 그의 영향으로 나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번역한 윤리학 책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힘(心之力)'이란 글을 썼다. 나는 당시 유심주의자였었는데, 양창지 교수는 자신의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나의 글을 높이 평가해 100점을 주었다." (주석 9)

 

사범학교서 형설지공의 나날…기세 높은 시골청년이란 마오치 별명도

 

마오는 학생들 가운데서 인기가 높았다. 지적 탐구가 강해 밤늦께 까지 치열하게 공부했다. 학교 기숙사에 있었던 마오는 취침시간 때 불을 끄면 불빛이 있는 복도에 나가 책을 봤고, 어떤 때는 날밤을 새기도 했다. 형설지공의 나날이었다. 마오는 자기에게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한 학과 수업은 교칙을 어기면서 수강을 하지 않아 여러 차례 제적당할 뻔 했으나 그를 좋아하는 선생들 덕분으로 위기를 넘겼다. 마오는 당시 '마오치(毛奇)‘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오치는 프로이센 도이칠란트 제국의 총참모장이었다. 7개 국어에 능통하고 전투를 잘 했다. 그는 또 아름다운 산문을 잘 써 비스마르크 수상과 국방대신 론과 함께 프로이센 도이치란트 제국의 3거두였다. 학우들은 그의 성이 발음이 비슷한 '마오'인데다 기세 드높은 글을 잘 쓰고, 시골 샤오산충에서 올라 온 농촌 청년의 뜻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범하다는 '치런(奇人)’의 발음이 같은 '치'를 따와 합성해 '마오치' 라고 부른 것이다. (주석 10)

 

이 당시 중국 국내 상황은 군벌들 간에 혼전양상의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후난지방은 북양군벌이 3차에 걸쳐 통치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이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노리고 있었다. 또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피살되면서 발발한 세계 1차 대전이 격화하고 있었다. 마오는 늘 신문을 자세히 뜯어보면서 국내외 정세와 시사문제 등을 분석해 학우들에게 설명해줬다. 그들은 "우리는 같이 신문을 보는데 너처럼 명쾌하게 분석할 수 없으니 너의 두뇌는 정말로 특별한 것 같다"면서 놀라워했다. 마오는 "신문은 살아있는 역사"라면서 "신문을 보면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우들로부터 '시사통'으로 불린 마오는 복잡다단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열강들이 중국을 어떻게 침략했고, 중국은 침략을 당하면서도 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가’ 등의 문제를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청년들의 구국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설파했다. 그 때문에 마오는 나라를 근심 걱정하는 '우국청년'으로 불렸다.

 

사범학교서 일생에 영향을 준 선생들 '지우' 만나

 

마오는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를 다니던 이때 자신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잊지 못할 선생들의 지우를 얻었다. 윤리학을 가르쳤던 양창지는 신문화운동으로 신사조의 물결이 풍미하던 그 시절, 천두슈(陳獨秀)가 발행하던 '신청년' 잡지를 마오에게 보내주고, 투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양창지는 의지의 단련을 중요시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냉수욕을 했다. 마오의 냉수욕 습관은 이때 양창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마오의 실제적인 첫 부인인 양카이후이(楊開慧)의 아버지로 은사이자 장인이 됐다.

 

또 다른 선생은 쉬터리(徐特立)이다. 후난 지방의 유명한 교육자로 초등 교육계의 '창사왕(長沙王)'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는 창사에서 초등학교를 설립해 공부 때를 놓친 학생들을 학비면제로 가르치는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또 고아원을 만들어 원장으로 있으면서 고아들을 보살피고 가르쳤다.

그는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청 왕조 타도에 나섰다. 43살 때는 젊은 고학생들 틈에 끼어 프랑스에서 노동하면서 공부하는 `근공검학(勤工儉學)'으로 유학을 했다. 그는 57살 때 최 연장자로 2만5천리 창정(長征)에 참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오는 그에게 독서방법과 사유방식 등을 배웠다. 쉬터리는 독서를 할 때 꼭 메모를 하도록 했다. 마오는 책을 본 뒤 중요한 곳에 자신의 느낌을 쓰는 습관을 길렀다. 이는 마오가 평생 동안 당의 문건이나 국가의 중요정책에 자신의 의견을 달아 지적하고 비판하는 `피스정치(批示政治)'의 바탕이 여기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마오는 1937년 1월, 옌안(延安)에서 열린 쉬터리의 회갑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20년 전에 나의 선생님이셨고, 지금도 여전히 나의 선생님이시며, 앞으로도 분명코 나의 선생님이실 것입니다."

 

`위안털보' 별명의 위안지류(袁吉六)는 마오에게 중국 고전의 기초와 문장, 서법 등을 가르쳤다. 마오가 깊고 폭넓은 중국 문사철(文史哲)지식과 시서(詩書)에 해박한 일가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국어 선생인 위안은 청나라 말 후난성에서 과거인 거인(擧人)에 급제해 이 학교에 초빙됐다. 박학다식하고 고문에 정통하며, 서예 또한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급하고 거친 성격에다 엄격하고 까탈스러워 학생들은 그를 경원시했다. 마오도 작문을 썼다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찢기는 수모를 당했다. 마오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빼어난 실력에 끌려 서서히 빨려 들어가 존경하게 되었다.

이는 마오가 훗날 한 동창생에게 "위안 선생은 나에게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물어야한다"면서 "당송 8대가들의 문장과 고전들을 강독해 주고, 쉽게 빌릴 수 없는 책들을 빌려주는 등 많은 가르침을 줘 내가 한유(韓退之) 문장을 연구해 문풍을 바꾸고, 고문을 터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오는 신중국 창건 뒤 4차례에 걸쳐 위안 선생의 거처를 수소문한 끝에 이미 6년 전에 세상을 뜬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면서 은사를 기려 큰 글자의 힘 있는 필체로 묘비명을 썼다. (주석 11)

(7) 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8)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9)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10)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11)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

 

3. '친구 구한다' 벽보 구국구민 위한 신민학회 만들어

 

마오에게 영향을 준 또 한사람은 마오 보다 3살 많은 리진시(黎錦熙) 역사 선생이다. 사제지간이지만 나이 차이가 별로 없고 고향이 후난 샹탄으로 마오와 동향인데다 혈기방장하여 의기투합해 친구처럼 막역했다. 사제는 만나면 독서방법에서부터 사회개조, 중화민족의 명운 등에 대한 끝없는 대화와 진지하게 토론하는 등 열정을 발산했다. 마오는 그에게 많은 자문과 지도를 구했다.

마오는 1915년 9월 리진시가 베이징의 위안스카이 북양정부의 교육부에 근무하게 돼 헤어졌지만 서신교환을 통해 우의를 돈독히 했다. 1918년 9월, 마오가 베이징대학 도서관 보조원으로 힘든 생활을 할 때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았다. 그 후 마오가 공산당의 영도자로 간난신고의 투쟁의 길을 걸으면서 관계가 끊어 졌었다. 1948년 홍군이 베이핑(北平/베이징)을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리진시는 베이징 사범대학 문학원 원장으로 있었다.

   
  1919년 호남사범학우회.
 
당시 장제스 난징(南京)정부는 리진시에게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탈출할 것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다. 리진시는 가족들에게 "나는 여기에서 한 위대한 인물을 기다리겠다"며 서신을 찢어버렸다. 1949년 마오가 베이핑(베이징)을 무혈입성한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오는 리 진시를 찾아 베이징 사범대학 숙소로 찾아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마오가 "리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에, 리진시는 "주시(主席), 그러시면 안 됩니다"며 신중국의 지도자가 된 마오의 겸손에 대한 예의에 이렇게 황급히 답했다. 리진시는 이후 마오의 부탁으로 중국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 데 여생을 받쳤다.

 

마오는 후난 사범대학 시절 의지와 신체 단련에도 열심이었다. 그가 한 단련 방법은 냉수욕, 일광욕, 바람욕, 비욕, 수영, 등산, 노숙, 장거리 걷기, 체조, 권투 등 다양하다. 마오는 이처럼 바람과 비, 그리고 태양 등 자연환경을 이용했다. '비욕‘은 비를 맞으며 학교 뒤에 있는 웨루산(岳麓山) 꼭대기까지 뛰어갔다 오는 단련법이다. 마오는 특히 수영을 좋아했다. 북풍이 몰아치거나 차가운 날씨에도 강물에 뛰어들었다. 수영하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오는 “한 번 뱀에 물려 겁먹으면 10년 가도 새끼줄 보고도 겁난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의 장막‘시절 마오는 때때로 창장(長江)에서 수영하는 모습의 사진을 언론에 실어 자신의 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신체단련으로 운동을 좋아 한 마오는 1917년 4월1일에 출판된 '신청년‘ 잡지에 생애 첫 논문 ’체육의 연구‘를 '28획생(마오 이름의 전체 필획)이름으로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청나라 때 주자학의 대가인 고염무는 운동을 좋아해 노년에 들어 천하를 만유(漫游)했고, 한나라 대학자인 가의나 당나라 초기 문호 왕발 등은 일찍 죽었다며, 체육단련을 강조했다. 그는 ‘강건한 몸으로 나라를 지키자’는 논리를 폈다.

 

저잣거리 돌며 군중 속의 '현장 공부'에 열정

그는 혁명투쟁 기간 남정북전의 인간 한계에 도전한 장정 이후 젊은 시절의 신체단련이 큰 보탬이 됐다고 되뇌었다. 마오는 1951년 가을, 베이징에 온 후난성 교육계인사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홍루몽’의 두 주인공을 빗대면서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역설 했다.

 

“청년학생들의 체육단련을 중시해야 한다. 혁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을 말할 수 없다. 모두들 홍루몽을 보지 않았나. 두 주인공들은 별 볼일 없다. 부잣집 도련님인 가보옥은 손 하나 꼼짝 안하고 몸종들이 모든 수발을 든다. 임대옥은 쉽게 감상에 빠진다. 툭하면 눈물을 질질 짠다. 대관원의 큰 집에서 각혈하고 폐병에 걸린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혁명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을 가보옥이나 임대옥 같은 사람으로 키워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이런 청년들이 필요 없다. 우리들은 굳센 청년들, 신체와 의지가 모두 강인한 청년들이 필요하다.” (주석 14)

 

마오는 늘 학우들에게 '죽은 독서‘를 하지 말고 '살아있는 독서‘를 하라고 말했다. '글자 있는 책' 공부 뿐 아니라 '글자 없는 책‘ 공부, 즉 군중 속에 들어가 사회의 실제현상 등을 배우는 살아있는 공부(유학:游學)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국경일이나 휴일을 이용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사회 고찰과 조사 등을 하면서 군중 속에서 배우는 '유학‘을 하였다. 본시 '유학’은 왕조 사회 때 독서인들이 스승을 찾아 학문을 배우는 한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낙백한 문인들이 ‘유학’을 내세워 행세깨나 하는 집을 찾아다니며, 대련 등을 써주고 생계를 꾸려가는 변종된 ‘걸인 유학’도 있었다. 마오는 농촌을 돌아다니며 고찰해 농민의 생산, 생활형편에서부터 각 지역의 역사변천, 지리. 풍토인정, 풍속습관에 이르기까지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학습했다. 마오는 이때 ‘유학선생’이라고 불렸다.

 

마오는 1917년 여름방학 동안 친구 샤오즈성(蕭子升)과 함께 한달 가량 후난성  5개현을 도보로 돌아다녔다. 마오는 “우리는 돈 한 푼 없이 다녔는데 농민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유학하면서 농민들을 만나 농작물의 생산 현황과 생활상태 등을 묻고,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참상을 목도할 때는 울분을 터뜨리고 청 왕조를 성토했다.

이들은 또 학식 있는 선비들에게는 경전을 배우고 학문을 구했다. 스님을 만나서는 불교의 교리를 듣고, 토론했다. 방조제에서 노숙 할 때 마오는 "모래를 침상으로 삼고, 돌을 베게로 하고, 하늘을 이불 삼으며, 달빛을 호롱불로 한다"며 자연과의 몰아일체로 호연지기를 배웠다. 이들은 후난 지역을 걸어 다니면서 유적지와 사찰, 공자사당 등을 둘러보고, 산 넘고 강을 건너며 자연 풍경을 완상했다. 마오는 이듬해 여름, 친구 차이허선(蔡和森)과 둥팅후(洞庭湖) 부근을 '유학’했다. 마오는 이런 유학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고, 민중들의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을 피부로 느끼며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현장 공부'를 하는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

 

1915년 문예부흥을 기치로 한 ‘신청년’잡지 창간을 계기로 사그러진 신해혁명의 열기로 의기소침했던 사상계가 조금씩 활력을 찾아 반봉건적 신문화운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창사 시내 몇몇 학교와 성문 입구에 고전문체로 쓴 ‘친구를 구한다’는 제목의 벽보가 붙어 눈길을 끌었다. '새가 짹짹 지저귀면서 친구를 찾듯이 감히 인재를 알아보는 백락의 심정으로 벗을 구하고자 한다'고 시작한 글은 애국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의 연락을 바랐다. 글 내용은 '고생을 참아내며 애써 노력하고, 의지가 강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젊은이 여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벽보를 쓴 사람은 ‘28획생’, 마오였다. 마오는 이렇게 해 차이허선, 허쑤헝(何叔衡), 샤오쯔성, 뤄장룽(羅章龍) 등 10여명의 젊은이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들 중 허쑤헝은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 출신으로 마오 보다 17살이나 많았다. 이들은 나중에 중국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민학회를 만들어 핵심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 혁명의 전위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동아리 형태로 주로 가치관, 사회개혁, 중국의 앞날과 인류의 생활향상 등을 의제로 1915년에서 1917년 까지 100여 차례의 토론을 벌이면서 공감대를 넓혀갔다. 마오는 더욱 엄밀한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들과 함께 1918년 4월 구국구민을 위한 단체인 신민학회를 만들었다. 신민학회 회원은 70~80명으로 까지 불어났다. 신중국 탄생 과정에서 후난 지방이 공산주의자가 가장 많았던 이유 중의 하나도 이 학회 회원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주석 15)

 

'후난 청년 프랑스유학 근공검학' 위해 베이징행…사서보조원으로 사상계 흐름 접해

학회 성립 후 얼마 있다가 회장인 샤오쯔성이 프랑스로 ‘근공검학’ 유학을 떠나게 돼 마오가 실제 책임자를 맡았다. 마오는 단체를 더욱 확대발전시켜 신민학회는 1919년 베이징 대학생들이 일본에 저항한 ‘5.4운동‘이 일어났을 때 중국 정치무대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혁명단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근공검학‘은 학회가 성립된 뒤 가장 큰 사건이었다. 마오는 1918년 6월 베이징대 교수로 간 양창지한테서 서신을 통해 젊은이들이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프랑스 유학의 근공검학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오는 인재 양성과 학회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기회로 삼아 베이징에 가 주선한 끝에 상하이에 '후난 청년 프랑스유학 근공검학‘ 조직을 만들었다. 1920년 겨울, 신민학회 회원 18명이 대거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마오는 태어나고 자란 중국에서 민족 진흥의 길을 찾는 한편, 학회를 더욱 견실하게 다지기 위해 국내에 남기로 결심했다.

 

앞서 청년 마오 삶의 일대 전기가 된 난생 처음의 베이징 행은 1918년 후난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인 8월 중순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초의 고도(古都) 베이징은 북양군벌이 무력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었다. 허울뿐인 '국회‘ 의원들은 독재자의 뜻에 따라 투표하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베이징 거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었다. 특히 전국 각 지방에서 전란 소식이 끊임없이 베이징으로 날아와 민심이 흉흉해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옛 사상과 문화, 진부한 도덕을 깨자는 신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면서 베이징은 새로운 역사 조류의 발원지가 되었다. 신문화운동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 온  천두슈가 1915년 9월에 창간한 '청년(1년 뒤 신청년으로 바꿈)‘ 잡지를 통해 중국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신청년‘은 옛 관념이나 봉건적 사고를 깨는데 맹공을 펼치면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심어주는 요람 구실을 했다. 당시 잡지의 편집진이었던 천두슈, 리다자오(李大교), 루쉰(魯迅), 후스(胡適) 등 신문화 운동의 사상가들은 날카로운 글과 깊이 있는 사상, 두려움을 모르는 정신으로 우매하고, 낙후한 것들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중국인민들이 생소한 민주와 과학의 양면을 일깨우는 깃발을 고색창연한 베이징 하늘에 나부끼게 하였다. 후난 산골 청년 25살의 마오가 이때 프랑스 '근공검학‘ 유학을 준비하는 후난 신민학회 회원들을 인솔하고 베이징에 처음 간 것이었다.

마오는 1936년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옌안에 잠입한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에게 ‘신청년’을 이렇게 얘기했다.

 

“신청년은 신문화 운동에서 유명한 잡지였다. 천두슈가 주편을 맡고 있었으며, 나는 사범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후스와 천두슈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내가 이미 사상적으로 추종하기를 포기한 량치챠오와 캉여우웨이를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일거에 내 귀감 구실을 했다.” (주석 16)

 

마오는 베이징에서 존경하는 사범학교 은사인 양창지를 만난다. 그는 베이징대 윤리학 교수로 있었다. 앞서 양창지는 아끼는 제자 마오가 베이징대에 와서 공부하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기를 갈망해 편지를 보낸바 있다. 마오는 돈이 없어 한때 양창지의 집에서 묵다가 옮기는 등 베이징 생활은 대단히 힘들었다. 하지만 마오는 양창지의 집을 틈틈이 찾아갔을 때 만났던 그의 딸 양카이후이를 곁에서 볼 수 있어 기뻤다. 일자리가 필요한 마오는 양창지에게 직장 알선을 부탁했다. 양창지는 베이징대 총장인 차이위안페이에게 부탁해 차이 총장이 베이징대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에게 써준 소개장을 갖고 마오와 함께 찾아갔다.

 

훗날 '나의 진정한 선생’이라고 술회한 25살의 마오와 29살이었던 리다자오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마오는 1918년 10월부터 베이징 대학 홍루 1층의 리다자오 사무실 옆에 있는 제2열람실 사서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마오의 일은 새로 들어오는 신문들과 열람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월급은 8원을 받아 괜찮은 편이었다. 신문 보기를 좋아하는 마오는 만족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문화 운동의 기수들인 부스녠(傅斯年), 뤄자뤈(羅家倫), 후스 등을 보았다. 마오는 그들과 정치, 문화 등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마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오는 어느 날 후스의 강의를 청강하던 중 짙은 후난 사투리로 질문을 했으나, 후스는 그가 학생이 아닌 도서관 보조원인 것을 알고 응대조차 안했다. 마오는 이때 생활을 이렇게 회억했다.        

 

“내 직위가 낮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대단히 바쁜 사람들이었다. 남쪽 지방 사투리를 쓰는 일개 도서관 보조원의 말을 들을 틈이 없었다.” (주석 17)

 

마오는 생활도 어렵고, 환경도 낯선데다, 언어 장벽과 지위도 낮아 모든 것들이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감과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그나마 유구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베이징에서 그는 많은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 고궁(故宮)을 거닐면서 민족의 지혜가 응축된 웅혼한 건축양식을 보고 긍지를 느꼈다. 한 겨울엔 베이하이(北海)에 늘어선 버드나무 가지의 얼음 꽃을 보고 당나라 시인 진잠의 명귀인 “갑자기 한 밤에 봄바람이 불어오니, 온 나무에 배꽃이 피었구나”를 읊조리며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어쨌든 마오를 강렬하게 흡인한 것은 활발한 베이징의 사상계였다. 마오는 베이징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바에야 청강을 하면서 사상계의 흐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 베이징 대학은 신사상과 신문화를 배양하고 전파하는 산실이었다. 이에 따라 사상계가 백가쟁명으로 활기를 띄어 각종 학술단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베이징대 신사상 신문화 배양 산실 …리다자오 '볼세비키주의의 승리' 글에 전율

베이징 대학 교수진은 차이위엔페이 총장의 초빙으로 선진문물을 접하고, 해외에 유학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차이위엔페이는 청 왕조 광쉬(光緖)제 때 진사로 한림원 편수(編修)를 지낸 선비지만 청조 타도를 외치며 혁명의 길에 나섰다. 그는 1904년 혁명단체인 광복회 회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해 상하이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 후에는 쑨원이 그를 난징(南京) 임시정부의 교육 총장으로 임명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잡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16년 12월에 베이징 대학 총장이 되었다. 차이위엔페이는 천두슈를 베이징대 문과대학장으로 임명했다.

 

천두슈는 22살 때인 1901년부터 4차례에 걸쳐 일본에 유학한 바 있다. 그가 유학한 당시 일본은 중국 혁명가들의 총본산으로 쑨원, 차이위엔페이, 루쉰, 장스자오(章士교), 리다자오 등이 각양각색의 혁명 단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신문을 창간하고 책을 출판했다. 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던 천두슈는 일본에서 많은 혁명 서적을 통해 급진적인 사상을 길렀다. 신해혁명 뒤  한때 안후이성(安徽省) 도독부 비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잡자 쫓기는 몸이 되어 4번째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5년 일본에서 돌아 온 36살의 천두슈는 상하이에서 '사상으로 민중에 영향을 주고, 청년 계몽을 해야만 중국 혁명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진보 잡지 ‘청년’을 창간했다. 1년 뒤 제호를 ‘신청년’으로 바꿨는데 신사상과 신문화 사상을 전파해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주석 16)

 

저명한 문학 이론가이자 문자 음운학자로 유명한 첸쉔통(錢玄同)은 국문학 교수로 있었다.  신중국의 유명한 핵물리학자 첸싼창(錢三强)은 그의 아들이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후스도 천두슈의 추천으로 중국철학사 교수로 베이징 대학에 합류했다. 천두슈 보다 10살 아래로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리다자오는 후스가 부임한지 몇 개월 뒤인 1917년 11월에 이 대학에 들어왔다. 리다자오가 없었다면 마오도 없었을 것이라고 할 만큼 마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리다자오는 ‘신청년’을 통해 ‘북이남진(北李南陳:북쪽 베이징의 리다자오와 남쪽 상하이에 있는 천두슈을 가리킴)의 '북이‘로 급진적 사상의 '대명사‘였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으나 독학한 리우반농(劉半農)도 '신청년‘을 통해 알게 된 천두슈가 예과 교수로 초빙했다. 그의 임명은 학교 쪽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리우반농은 1920년 영국과 프랑스로 유학가 프랑스 국가 문학박사를 받았다. 이처럼 당대의 진보적 재사들이 베이징 대학에 둥우리를 틀고 '신청년‘을 전위로 한 문화단체가 출현하게 됐다.   

 

1918년 11월 리다자오는 ‘신청년’에 ‘서민의 승리’와 ‘볼세비키주의의 승리’라는 글을 실어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환호했다. 도서관에서 일하던 마오는 이 글을 읽고 전율했다. 마오는 이때부터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 러시아 10월 혁명의 기치가 된 마르크스주의를 잘 이해는 못했지만 그의 뇌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1919년 1월 베이징 대학에 양창지, 량수밍(梁漱溟), 후스 등이 발기해 철학연구회를 만들었다. 마오는 이 철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 명류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내로라하는 천두슈, 리다자오, 후스 등 사상가들의 철학과 학식의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신사상의 조류를 헤엄쳐 나갔다.

마오는 그해 3월12일 사상의 신세계에 눈을 떠 환골탈태 한 반년 동안의 베이징 생활을 청산하고 상하이를 거쳐 창사로 돌아갔다. 상하이에 간 것은 프랑스로 근공검학의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는 황푸(黃포)강 부둣가에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친구들이 탄 배를 향해 "열심히 공부해 나라를 구하자!"며 짙은 후난 발음의 큰 소리로 외쳤다. 묵직한 그의 목소리는 봄 바람결을 타고 저녁노을이 곱게 물든 황푸강 저편, 멀리까지 퍼져갔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 학생들이 중국내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 넘기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촉발된 ‘5.4운동’은 급기야 분노한 군중들이 가세해 반일, 북양군벌 타도로 번지면서 전 중국을 뒤흔들었다. 당시 쑨원은 광저우(廣州)에서 호법 정부(護法政府:위안스카이 사망 후 왕조 재건을 부르짖은 군벌이 의회를 해산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만든 혁명 정권)를 조직해 육군대원수를 맡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안푸파이(安福派) 북양군벌(허베이, 산둥, 랴오닝성 등 지배) 우두머리 두안치루이(段基瑞)는 쑨원에 대항해 베이징에 새로운 의회(위안스카이의 맥을 잇는 친일 정권 의회)를 조직하고 쉬스창(徐世昌)을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5.4운동의 진원지 베이징 대학은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북양군벌 정부는 총장 차이위엔페이를 살해하는 자에게는 3백만금을 포상한다는 현상수배를 내렸다. 차이위엔페이는 5월 9일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로 도피해 은거해 버렸다.

 

마오가 창사로 돌아 온 뒤 얼마 안 돼 5.4운동이 터졌다. 마오는 이 운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민중들에게 널리 선전하기 위한 매체를 만들기로 했다. 마오는 장뤄(張羅)와 함께 2개월을 죽어라하고 뛰어다녀 7월4일 ‘샹장핑뤈(湘江評論)’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 마오는 이 잡지에 ‘민중의 대연합’이라는 글을 실었다. 글은 쉬우면서도 힘찼으며, 애국열정으로 가득 찼다. 마오는 10월 러시아혁명, 특히 우리가 겪은 5.4운동은 노동인민이 인류사회 역사 변혁의 진정한 동력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인민군중이 연합하는 힘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중국인민의 대연합은 반드시 성공한다.

우리들은 반드시 노력하고, 반드시 목숨 걸고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들의 황금세계, 눈부시게 찬란한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외쳤다. 이 글은 진보적인 청년들의 눈길을 끌면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리다자오는 이 글에 주목하고 ‘신생활’지에 ‘대연합’ 제목의 단문을 실어 마오의 민중대연합의 주장에 찬동했다. 그는 “나는 전국 각종 직종과 단체, 모든 크고 작은 조직들이 한데 뭉쳐 진정한 민중대연합의 기초를 세우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 사람은 남쪽에, 또 한 사람은 북쪽에 산 넘고 물 건너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통했다. 마오는 대단히 기쁘고 위안을 느꼈다. (주석 19)

 

14)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15)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16) 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법 옮김  두레
17)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18)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19)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

 

 

4. 10월혁명 러시아 모델 '공산당 창건' 역설

 

1949년 3월23일 마오와 당중앙기관이 중국 내전(內戰)의 총괄 지휘부가 있던 허베이성 시바이포(河北省 西柏坡)에서 베이핑(베이징)에 입성했을 때, 마오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이렇게 술회했다.

 

“30년이 흘렀다. 30년 전 나는 구국구민의 진리를 찾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잘한 일이다. 나는 베이징에서 대단히 훌륭한 한 사람을 만났다. 리다자오 동지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한 사람의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대단히 애석하다. 그는 이미 혁명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받쳤다. 그는 나의 진정한 좋은 선생이다. 그의 지도와 가르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 어디에 있을지 모를 것이다.”

 

반군벌운동 위해 매체 만들어 큰 반향… 신민학회 마르크스 선전 기지로

 

마오가 리다자오의 이름을 안 것은 1916년 9월이다. 이때 리다자오는 일본에서 돌아와 ‘신청년’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글을 쓰고 있었다. 마오는 우연히 ‘신청년’에 실린 리다자오가 쓴 ‘청춘’이라는 글을 보았다. 리다자오는 청년들이 자각해 과거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부한 학설의 감옥을 깨뜨리자고 호소했다. 리다자오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세계문명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청춘인 내가 청춘의 가정, 청춘의 민족, 청춘의 지구, 청춘의 우주를 만들어 가는 것은 끝없는 즐거움의 삶”이라고 젊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오는 이 글을 극찬하면서 대단히 분발했다. 그는 이상(理想)을 세워 앞으로 일체의 언행을 이상에 맞춰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마오는 ‘신청년’의 열혈 독자가 됐고, 리다자오와 천두슈의 글을 반복해 가면서 열독했다. 마오는 ‘신청년’이 주창한 신문화, 백화문, 노동의 신성, 민주와 과학 등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구습타파, 생활착취, 봉건전제 등의 반대를 전폭 지지했다. (주석 20)

 

마오는 베이징 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원이 되면서 오랫동안 우러러 보던 도서관 주임 리다자오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명하고 인기 있는 교수였던 리다자오는 다른 사람들이 눈 여겨 보지 않았던 마오의 민첩성과 예기(銳氣)를 발견하고 아끼면서 친밀하게 지냈다. 리다자오는 마오를 '후난 학생 청년의 걸출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다. 마오는 1918년 11월 15일 베이징 대학이 톈안먼(天安門)앞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 리다자오가 행한 유명한 ‘서민의 승리’라는 연설을 들었다. 뒤이어 그가 발표한 ‘볼세비키주의의 승리’라는 글을 보고 중국의 희망을 보는 듯한 느낌에 흥분하기도 했다.

마오는 리다자오의 도움으로 신문학연구회 등 각종 진보 단체와 학생조직에 참가했다. 마오가 마르크스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준 리다자오는 그 후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공산당 대표로 쑨원과 수차례 회담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다. 리다자오는 베이징 러시아 대사관에 숨어들었다가 북양군벌의 안국군 총사령관인 장쭤린(張作霖)에 의해 1927년 3월 체포됐다. 군법회의에 회부 당한 리다자오는 4월 28일 사형선고를 받고 즉시 처형됐다. 그는 교수대에 오른 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리다자오는 죽음에 앞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 하더라도 결코 공산주의를 교수형에 처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많은 동지들을 양성했다. 붉은 꽃의 씨앗들인 그들은 천하를 뒤덮을 것이다.”

 

리다자오는 군벌들에게 공산당의 수괴로 낙인찍혔다. 이 때문에 그들의 보복으로 처형당할 때 다른 사람들이 20분 만에 교수된 데 비해 고통을 주기 위해 40분이 걸렸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주석 21)

 

1919년 3월, 후난으로 돌아 온 마오는 본격적으로 중국 현대사의 무대에 올라섰다. 시대조류의 맨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마오는 앞서 결성한 신민학회를 애국운동의 전위로 삼아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신민학회는 당시 독군(督軍)으로 포악한 짓을 일삼던 군벌 장찡야오(張敬堯) 구축(驅逐)운동을 맹렬하게 펼쳤다. 마오는 그때 '샹장핑뤈'의 편집장도 맡고 있었다. 그는 이 잡지에 ‘민중의 대연합’이란 글을 발표해 후난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리다자오와 천두슈, 후스 등 내로라하는 논객들로부터 호평을 받는 등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해 12월 마오는 첫 베이징 행 이후 1년여 만에 두 번째 베이징을 가게 된다. 그는 신민학회를 대표해 4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가 사회각계에 군벌 장찡야오를 타도하는 반 군벌운동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마오는 효과적인 반대활동을 펴기 위해 베이징에 있던 뤄장룽(羅章龍) 등 고향출신 학생들과 임시 머물던 숙소에 ‘평민통신사’라는 매체를 만들었다. 전국 각 신문과 잡지에 장찡야오를 규탄하는 기사를 만들어 배포했다. 기존 언론에 보도가 잇따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오는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를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마오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후스도 그의 면담을 거절하지 않았다. 장찡야오 축출 운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돼 베이징 북양정부가 장을 실각시켜 새 창사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마오는 이때 고궁 주변에서 거리시위를 하고, 각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는 바쁜 일정에서도 베이징에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이 날로 확대되고 마르크스주의의 전파가 광범하게 번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10월 혁명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구해 읽었다. 리다자오는 공산주의와 러시아혁명에 관한 중국책들을 추천해 주었다. 마오는 점점 마르크스주의에 경도하게 된다. 마오가 ‘공산당선언’을 처음 본 것도 이때였다. 마오는 1920년 4월 11일 시대조류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던지기로 다짐하며 상하이로 떠났다.

그는 상하이에서 신민학회 회의를 열어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걸맞은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신민학회를 ‘주의’를 선도하는 정치단체로 탈바꿈 시켰다. 신민학회를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선전하는 기지로 삼은 것이다. 1920년 7월, 창사로 돌아 온 마오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사조(新思潮)의 흐름을 반복적으로 연구, 비교 감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심화시켜 갔다. 차이허선과 마오는 회원들과의 사상교류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들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 모델을 따와 ‘러시아의 길’을 답습하고, 이를 위해 ‘공산당 창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해 겨울, 마오는 양카이후이(楊開慧)와 결혼했다. 양카이후이는 1920년 초 양창지가 베이징에서 병사하자 창사로 운구한 뒤 고향인 빤창(板倉)에 장사지냈다. 양카이후이는 그 후 창사 푸샹(福湘)여중에 들어갔다. 7월에 장찡야오 구축운동을 벌이고 창사로 돌아 온 마오는 학교로 양카이후이를 찾아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마오가 중국 공산당 창건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을 때였다. 양카이후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움에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 장례식 때 들어 온 부의금 일부분을 경비부족으로 혁명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오를 지원했다.

 

<< 양카이후이(楊開慧)

 

마오는 이 돈으로 ‘문화서사(文化書社)를 만들었다. 양카이후이는 이 문화서사의 일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노동자들과 군중들에게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통속적인 책이나 간행물들을 보내주는 일을 했다. 마오는 양카이후이의 도움으로 문화서사가 부단히 발전해 창사의 일부 지방에 판매부와 지사를 설립했다. 문화서사는 실제적으로 마오의 공산당 창건활동의 중요 연락 장소였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와 같이 일하면서 점차 혁명가로 바뀌어 결혼 무렵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후난지역의 단원이 되었다. 양카이후이는 꽃가마도 타지 않고 혼수품도 없이 달랑 책가방 하나만 들고 마오를 찾아가 결혼했다. 창사의 몇몇 친구들을 초청해 6원 정도 들어 간 만찬 자리를 마련해 자유롭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양카이후이는 나중에 중국인민들로부터 혁명열사로 추앙받고 있지만 한 여인으로, 지어미로, 또 어머니로서 온갖 풍상과 간난신고의 길을 걷는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마오 나이 27살, 양카이후이는 19살이었다. (주석 22)

 

마오, 양카이후이와 결혼…'뤈' '샤' 서신교환하며 사랑 키우고 혁명 부부로

마오가 양카이후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후난 사범에 다닐 때 양창지의 집을 드나들면서 부터였다. 어느 날 양창지가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들뜬 소리로 "대학에 마오쩌둥과 차이허선이라는 아주 훌륭한 두 학생이 다닌다. 특히 마오쩌둥은 앞으로 나라의 동량이 될 만큼 훌륭한 학생"이라고 말했다. 곁에서 이 말을 듣던 양카이후이는 양창지에게 "아빠, 어떻게 마오쩌둥이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을 알았느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양창지는 딸의 천진스러운 물음에 그냥 껄껄 웃었다. 양카이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그러면 어떻게 그를 우리 집에 한 번도 부르지 않으세요. 우리가 '나라의 동량'을 한 번 보게 해 주세요."

 

양창지는 손으로 딸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서두르지 마라라. 이후에 볼 수 있다"고 슬며시 웃었다. 마오의 이름이 처음으로 양카이후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는 하루 빨리 마오를 보고 싶어 했다. 양카이후이의 나이 열 서너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다. 어느 휴일날 몇 명의 청년 학생들이 양창지의 집에 몰려왔다. 학생들 중 키가 크고 몸에 푸른색의 긴 두루마기를 걸친 눈이 크고 총명해 보이는 한 학생이 앞으로 나와 "네가 사오샤(小霞)냐"고 양카이후이에게 물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청년이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자 뜨악해 하며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나온 양창지가 "내가 말한 마오쩌둥"이라며 딸에게 마오를 소개했다.

양카이후이는 수줍은 얼굴에 살포시 웃음을 머금고 안에 들어가 차를 타 내왔다. 학생들은 시국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늘 양창지의 집에 오면 구국구민(救國救民) 등 천하대세를 논하면서 밤늦게 까지 토론을 벌이다 돌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양카이후이는 곁에서 묵묵히 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점차 이들의 논전에 끼어들기도 했다. 마오는 어린 양카이후이에게 혁명의 도리 등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등 많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양카이후이는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마오의 학습태도나 사상사유 방식 등을 따라하면서 사유체계를 짜 나아갔다. 그녀는 심지어 구국운동에는 강건한 신체단련이 필요하다는 마오의 말에 따라 그가 즐겨하는 냉수욕, 심호흡 등 체육 단련의 방법을 배우는 등 마오의 생활방식을 부단히 받아들였다. 

 

마오와 양카이후이의 관계는 마오가 베이징 대학 도서관 보조원으로 있을 때 청춘남녀의 사이로 발전하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양카이후이는 이미 17살의 소녀로 성숙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을 때 편지를 보내면서 글 끝머리에 서로간의 칭호를 마오는 자신의 자인 뤈즈(潤之)의 '뤈', 양카이후이는 어릴 적 이름인 사오샤(小霞)의 '샤' 한 글자를 따다 써 연인관계의 친밀감을 더했다. 마오는 2차 베이징 행 때 군벌 장찡야오 축출운동의 바쁜 일과 중에서도 틈나는 대로 양카이후이와 고궁, 베이하이 공원 등을 거닐면서 사랑을 키우고, 혁명의 꿈을 나누는 등 날로 관계가 깊어 갔다. (주석 23) 

 

1921년 중국공산당이 탄생했을 때 마오는 13명의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양카이후이는 중국공산당 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당원이 됐다. 1922년 마오가 후난성에 공산당 성위원회인 중공상구위원회(中共湘區委員會)를 만들어 서기로 임명됐을 때 양카이후이는 기밀과 연락을 맡는 일을 했다. 양카이후이는 또 마오에게 자료를 수집해 주고, 각종 문건을 필사해 주는 등 마오의 조수가 되어 '혁명부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명저로 1847년 12월부터 1848년 1월에 걸쳐 공산주의자 동맹을 위해 기초한 강령인 '공산당 선언'을 중국에서 1920년 4월께 첫 완역한 천왕다오(陳望道)는 첫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 '공산당 선언'은 이론이 심오하고 언어구사가 치밀해 번역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마오의 친구 뤄장룽도 뒤에 독일어 원본으로 번역을 시도했으나 첫 문장의 해석 난이도가 높아 오랫동안 헤매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구절의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번역하더라도 도대체 딱 들어맞지 않았다. '유령'이라는 말은 중국어로 비하하는 의미이고 배회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뤄장룽도 어쩔 수 없이 천왕다오의 번역을 따르면서 "한 사조가 유럽 대륙에서 유행하고 있다. 반동파는 이를 홍수나 맹수처럼 봤다. 이것이 공산주의이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사상이며 공산당이 어떤 형태의 정당인지를 알도록 하는 입문서 구실을 했다. 특히 이 글은 드높은 기세, 세련된 언어로 쓴데다 문체가 화려하고 역동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제1지침서라 할 수 있었다. 당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이해 능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때까지 완역본은 중국에 없었다. 천왕다오는 저장성 출신으로 본명은 천찬이(陳參一)로 1919년 5월, 4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저장성 제일 사범학교에서 어학 교사로 있었다.

그는 신문화와 백화문 운동을 펼치면서 '일사풍조(一師風潮)'라는 쟁의를 벌이다 당국의 조사를 받은 뒤 학교를 떠났다. 천왕다오는 1920년 2월 하순 설을 쇠러 고향에 갔다가 그곳에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천두슈가 운영하고 있는 '신청년'에 편집자로 들어갔다. 그가 번역했던 '공산당 선언'은 애초 '싱치핑뤈(星期評論'에 실을 계획이었으나 정간되는 바람에 싣지 못했다. 나중에 천두슈와 러시아에서 코민테른 대표로 파견한 보이딘스키가 협의해 그해 8월 1천부를 찍어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곧바로 1천부의 재판을 찍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계기로 중국에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흘러 들어오면서 그런 '유령'이 상하이와 베이징을 중심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주역은 '북이남진(北李南陳', 즉 베이징의 리다자오와 상하이의 천두슈였으며, '신청년'이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구실을 했다. 전국 각지에 공산주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주석 24)

 

'신청년'은 마오가 베이징에 왔을 때 톈안먼 광장에서 직접 들었던 리다자오의 유명한 강연 '서민의 승리'의 요지를 싣고, 러시아

10월 혁명에 대한 평가를 온 천하에 알렸다.

 

"20세기 군중 운동은ㅡ 하나의 불가항력적인 위대한 사회력을 집중적으로 형성했다. 이 세계적 사회력은 인간 세계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 전 지역은 마치 바람과 구름이 휘몰아치며 산이 울고 계곡이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적인 잔재, 즉 무슨 황제, 귀족, 군벌, 관료, 군국주의, 자본주의 등은 모두 이 새로운 운동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폭발적인 역량으로 그들을 타도해야 한다.

그들은 감히 막을 수 없는 이러한 조류를 목도하고, 색이 누렇게 바랜 나뭇잎이 거센 가을 바람을 대하듯 하나하나 땅으로 날아 떨어지고 있다. 지금부터 도처에서 보이는 것은 모두 볼세비즘 승리의 깃발일 뿐이다. 도처에서 들리는 것은 볼세비키 개선의 소리이다. 인도주의의 종이 울리고 있다! 자유의 빛이 비치고 있다! 미래의 세계는 반드시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곳이 될 것이다!-자본주의는 실패하고 노동주의자는 승리한다.-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세계 혁명의 선봉이다. 그들의 투쟁은 계급전쟁이며 전 세계 무산 시민이 세계 자본가에 대항한 전쟁이다." (주석 25)

20)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毛澤東傳(上)
21)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2) 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23)마오쩌둥생평전기록하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모택동전(상)
24)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5)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

 

5.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 첫 발…당 창건 신호탄

 

1920년 겨울 마오와 허쑤헝의 영도 아래 창사 공산주의 소조(小組)가 만들어졌다. 이를 전후해 상하이, 베이징, 우한, 광저우, 지난(濟南) 등지에 잇따라 공산주의 소조가 생겨났다. 이는 중국 공산당 창립을 다지는 기초가 됐다. 가장 빨리 당 소조를 만든 천두슈와 리다(李達)가 이끄는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가 중국 공산당 창립을 발기하고 주비(籌備)하는 임무를 맡았다.

 

러 보이딘스키, 중국 혁명가 비밀 접촉 …공산당  창건 연대 손길

앞서 중국에서 거대한 물결의 5.4운동이 일어난 뒤인 1919년 6월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 구위원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퐁은 시베리아 구위원회에 '아시아국(아시아 민족부 라고도 함)'을 설립해 아시아 각국의 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고 이들 국가에 공산당을 건립하는 책임을 맡길 것을 러시아 공산당 중앙에 건의한바 있다.

 

러시아 공산당은 1920년 3월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설립을 비준해 극동 각국 혁명가들과의 전문적 연대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아시아 창구' 구실을 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블라디보스토크 분국'이 설립되면서 중국 혁명가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분국은 러시아인인 보이딘스키를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중국에 비밀리에 파견해 혁명가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대상자로는 단연 '북이남진'이었다. 이들이 베이징에 왔을 때 '남진'인 천두슈는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간 뒤여서 27살인 보이딘스키는 기자 신분으로 '북이'인 리다자오를 만났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베이징대학 학생인 뤄장룽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리다자오 선생은 공개적으로 10월 혁명을 찬양했으며 중국에서 최초로 공산주의를 선양한 대표적 인물로 당시 매우 높은 명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이딘스키가 베이징 대학으로 리 선생과 회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이딘스키는 회견을 마친 뒤 5.4운동과 신문화 운동에 참가한 학생들과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리 선생은 몇 명의 학생들을 불러 보이딘스키와 만나도록 주선했다.

 

나와 장꿔타오(張國燾), 류런징(劉仁靜), 리메이껑(李梅羹) 등이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의 맹원이 됐다. 보이딘스키는 베이징 대학에 온 뒤 좌담회 등을 열면서 소비에트 러시아 상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리다자오 선생을 존경했고, 우리들이 5.4운동에 참여하고 마르크스 학설을 연구하고 있으므로 중국 혁명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월 혁명을 이해하게 되면 중국도 반드시 공산당과 같은 조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를 잊지 않았다."

 

1924년경의 마오

 

리다자오는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이해하려면 신청년의 창간인이자 주편인 천두슈를 만나야 한다"고 권유했다. 보이딘스키는 리다자오가 쓴 편지를 갖고 천두슈를 만나러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동아시아 서기처의 설립 가능성을 고찰하라'는 밀명을 받은 보이딘스키는 러시아에서 중국 안내인으로 함께 온 양밍자이(楊明齋)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천두슈의 집에서 '남진'을 만났다. 이후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중국에 공산당을 건립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됐다. 보이딘스키는 상하이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기위해 영국 조계인 아이화더루(愛華德路)에 러시아의 '지즈나야 가제타' 기자 사무실이라는 팻말을 걸고 기자 신분으로 천두슈가 운영하는 '신청년' 편집진 등 많은 인사들과 접촉했다.

 

보이딘스키는 이들과 연계를 맺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공산당을 건립키로 했다. 그는 1920년 5월에 상하이에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만들었다. 책임자는 천두슈가 맡았고, 소조원은 리한쥔(李漢俊), 선쉬옌루(沈玄廬), 천왕다오, 위슈송(兪秀松), 리다, 저우푸하이(周佛海), 리치한(李啓漢), 린보취(林伯渠), 리중(李中), 리지(李季), 사오리즈(邵力子), 양밍자이, 시춴통(施存統), 마오둔(茅循), 선저민(沈澤民) 등 17명 이었다. 천두슈가 41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작가 마오둔의 동생인 선저민이 20살로 가장 어렸다. 이때 천왕다오가 번역한 `공산당 선언' 책이 출간돼 이들을 한껏 고무시켰다.

 

보이딘스키는 소조의 책임자를 러시아 공산당의 습관에 따라 '서기'로 부를 것을 제안해 천두슈가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의 최초의 서기가 됐다. 이로부터 '서기'는 중국 공산당에서 광범하게 쓰이는 용어가 됐다. '소조'가 생기고 '서기'가 결정됨에 따라 중국 공산당 최초의 정식 조직이 상하이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 건립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을 뜻한다. 이들은 '공산당'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리다가 주편을 맡았다.

 

이어 천두슈가 기초해 소조의 토론을 걸쳐 결정한 강령 형식의 '중국 공산당 선언' 초안이 나왔다. 소조는 당의 명칭을 '중국 공산당'으로 확정해 당 창건 작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는 전국 각 지역과 해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과 의견 교류 등 빈번한 접촉을 벌여 나갔다. 1920년 말께 마오는 사범학교 시절에 절친했고 신민학회를 조직할 때 열렬히 지지했으며, `근공검학'으로 프랑스에 유학갈 때 상하이 황푸강에서 배웅했던 차이허선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차이허선은 편지에서 공산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절절하게 적어 보냈다.

 

"나는 우선 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닌 공산당. 공산당은 바로 혁명운동의 발동자이며 선전자이고 선봉대이자 작전부이기 때문에 중국의 현재의 형국으로 볼 때 모름지기 먼저 당을 조직해야 하며 그 후에야 노동조합과 합작 단체들은 비로소 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습니다.-나는 당신이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같은 혁명을 중국에서 준비할 것을 원합니다. 중국에서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언은 90%가 맞다고 자신합니다. 때문에 당신이 국내에서 일찌감치 준비를 해야 합니다.-모스크바의 국제 공산당(코민테른)은 지난해 3월 성립됐습니다. 올 7월15일에 제2차 대회를 열었고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30여 개국에 이릅니다. 중국과 고려(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서도 각 2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터키와 인도에서는 각 5명의 대표가 참석했습니다.-현재 제2인터내셜은 이미 해체됐으며 이곳에서 탈퇴한 세력들이 새로운 국제적인 당, 즉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나는 2년 내에 주의가 분명하고 방법이 러시아와 일치하는 당을 성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사안이 중대하므로 당신의 주의를 바랍니다.-현재 중국에서 이 일을 조직하는 것은 비밀리에 진행돼야 합니다." (주석 26)

 

차이허선이 이 장문의 편지를 쓸 때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가 만들어지는 때였다.

마오는 1921년 1월 21에 차이허선에게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당신이 편지에서 보인 식견은 지극히 옳은 얘기로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당에 대한 문제는 천중푸(仲甫/천두슈의 자) 선생이 이미 조직을 진행시키고 있으며 출판물로는 상하이에서 나오는 '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대가 있는 그곳에서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천중푸 선생이 제창한 '기치를 선명히 하다'라는 구호에 부끄럽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오가 후난에서 공산주의 소조 건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둥팅후 북쪽인 후베이(湖北)에서도 동비우(董必武)가 '공산주의 연구 소조'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후베이성 황안현(黃安縣)출신인데 다비에산(大別山) 동쪽 자락의 가난한 벽촌이었다. 궁하면 변혁을 모색하듯이 이지방은 중국 공산당원들의 대본영이 됐다. 신중국 건국 뒤 동비우, 리셴녠(李先念) 등 두 명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배출했으며, 2백23명의 중국 인민해방군 장군이 나왔다. 동비우는 17살 때 과거시험인 수재(秀才)에 합격했고 28살 때 일본에 유학, 도쿄의 일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그 곳에서 쑨원을 만났으며 그의 영향으로 중화 혁명당(1919년 중국 국민당으로 바꿈)에 가입했다. 그러던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로 바뀐 것은 리한쥔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동비우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일본의 합작운동 등 각종의 이념들이 횡행했다. 내 머리는 이들 이념들이 서로 다투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리한쥔이 오고부터 모든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것을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석 27)

 

공산주의의 '유령'이 배회하면서 상하이, 베이징, 창사, 우한, 지난 지역 등에 공산주의 불씨를 퍼뜨리자 중국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광저우(廣州)에서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곳은 쑨원이 근거지로 삼은 중국 민주혁명의 근원지였다. 이곳은 베이징 대학 출신들로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저자인 천공푸(陳公璞)와 탄핑산(譚平山), 그리고 탄즈탕(譚植棠/탄핑산 조카) 등 3명이 광저우 공산주의 소조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천공푸는 '나와 공산당'이란 글에서 "당시 러시아에서 레닌의 혁명 성공에 고무된데다 베이징 대학에서의 천두슈 선생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나와 탄핑산, 탄즈탕 등은 천 선생의 주장에 많이 경도돼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세 사람에 의해 광저우 공산당은 설립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때 천두슈가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의 일은 리한쥔에게, '신청년'의 일은 천왕다오에게 맡기고 광저우에 내려와 이들과 함께 광저우의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보이딘스키가 파견한 러시아인 스토야노비치가 참여했다. 천두슈가 서기를 맡은 뒤 나중에 탄핑산이 이어받도록 했다. 천공푸는 조직을, 탄즈탕은 선전을 각각 책임졌다.

중 공산당 창립 1대 대표회의에 산파역 '북이남진' 참석 못해

 

당시 천두슈가 광저우에 온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부임을 위한 것이었다. 천두슈는 광둥(廣東) 성장이자 광둥 군 총사령관으로 그 당시 좌익 성향을 갖고 있었던 천지융밍(陳炯明)이 광둥성 교육위원회 위원장과 대학 예과 교장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천지융밍은 앞서 광둥성 군대를 이끌고 광시성(廣西省) 군대를 격파해 광저우를 점령했다. 천두슈는 광저우 행으로 역사적인 중국공산당 창립 1대 대표회의에 공산당 창당의 '산파역'이었으면서도 참석하지 못했다. 리다자오는 아예 1대 대표 명단에서 제외돼 '북이남진'이 모두 1대 대표회의에 빠지는 결과가 되었다.

 

공산당 창립 작업은 빠르게 국내에서 해외로 번져갔다. 동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프랑스 유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0년 6월, 일본에 온 쓰춴통과 저우푸하이가 일본 소조를 만들었다. 둘은 모두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에 가입한 바 있었다. 우푸하이(周佛海)는 처음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국민당 요원으로 변신했다. 나중에는 한간(漢奸) 왕징웨이(汪精衛) 괴뢰 정부의 고위관료가 되는 등 카멜레온과 같은 삶을 살았다. (주석 28)

 

1919년 봄부터 1920년 말까지 중국 청년들이 '근공검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간 학생들은 줄잡아 1천 5백여 명에 이른다. 그곳에는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의 최초 성원중의 한 명으로 당시 베이징 대학 강사를 맡고 있다가 리옹 대학 중국학원의 교수로 초빙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장선푸(張申府)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1921년 2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저우언라이는 1920년 11월 7일 상하이에서 우편선을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5.4운동에 참여해 감옥살이도 했고 리다자오와 교류를 맺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조상의 고향은 저장성 샤오싱(紹興)이지만 그는 쑤저우(蘇州) 북쪽의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이름 언라이(恩來)는 '은혜가 도래한다(恩惠到來)'에서 한자씩 따서 지었다다. 12살 되던 해 큰 아버지를 따라 동북지방의 선양(瀋陽)으로 갔다가 15살 때 다시 톈진(天津)가서 살았다. 저우언라이는 19살 되던 해 난카이(南開)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갔다. 저우는 2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끝낸 21살 때 중국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중국을 뒤흔든 1919년의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줴우서(覺悟社)를 만들어 톈진지역의 학생지도자가 됐다. 이때 베이징 대학 교수인 리다자오를 강연회 연사로 초청하면서 알게 됐다. 학생들의 시위 집회에는 저우가 앞장섰다. 경찰의 주요 감시 인물로 꼽힌 저우는 체포돼 1920년 1월29일부터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출옥한 뒤 베이징으로 가 리다자오를 만나고 유럽 유학을 결심했다. 애초에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갔으나 생활비가 비싸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독일로 간 뒤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가기로 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때 '줴우서' 맹원인 천샤오천(諶小岑)과 리이타오(李毅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상 변화과정을 솔직담백하게 썼다. (주석 29)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당신들이 현재 주장하는 주의에 대해 내가 대단히 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고칠 것이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줴우서'의 신조는 충분히 쓸 만하지는 않고 어딘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사실대로 말하면 코뮤니즘을 이용하면 충분할 것이다. 요컨대 주의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들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이제 정중하게 '우리들은 마땅히 공산주의 원리와 계급혁명, 그리고 무산계급 독재라는 양대 원칙을 믿고 실행의 수단은 일의 상황에 따라 적당한 조처를 취하는 것으로 한다!' 라는 한마디를 선언하는 바이다.

 

내가 이전에 말한 '주의에 대해 말할 때 내 가슴은 뛴다'는 표현은 유럽에 와서 모든 주의에 대해 연구 비교할 당시의 심리를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나는 이미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공산주의를 확실히 이해한 시간은 당신들보다 늦었다. 그 이유는 천성이 원래 조화로움을 중시하는 데다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이 극도로 넘쳤기 때문이다. 해서 아주 늦게 지난해 가을 이후에야 비로소 나의 목표를 결정했다."

 

리리산(李立三)도 이때 있었다. 마오쩌둥이 1936년 에드가 스노우와 대화할 때 거명한 인 물이다. 마오가 후난에서 '친구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을 때 얻은 '반쪽 친구'도 프랑스 유학을 온 것이다. 마오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공고를 통해 모두 3명 '반'으로부터 회답을 받았다. 회답의 하나는 뤄장룽에게 서 온 것으로 그는 후에 공산당에 참가했다가 전향했다. 그리고 두 회답은 후에 극단적 인 반동으로 변한 청년들한테서 온 것이었다. 나머지 반쪽의 회답은 명확하게 의견을 표 하지 않은 청년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리리산이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뒤 어떤 구체적 인 건의를 하지 않은 채 곧 가버렸다." (주석 30)

 

그가 마오에게 아무 말도 못한 것은 처음인데다 마오 보다 6살이 어렸고, 시골 현에서 성도인 창사에 온 시골뜨기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리산은 후난성 리링(醴陵) 사 람으로 1919년 11월 프랑스에 왔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와 자오스옌(趙世炎)은 노동학회를 설립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우리들은 원래 이를 ‘공산주의동맹’으로 하기로 결정했으나, 당시 회원 8명 중에는 아직 완전하게 마르크스주 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노동학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차이허선, 리리산 등은 중국 5.4운동 때 시위 전력으로 인해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돼 두 사람을 비롯한 104명의 중국 학생들이 우편선에 강제로 태워져 중국으로 추 방됐다. 이들 중 유일한 공산당원인 진공배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차이허선과 리리산 을 데리고 천두슈를 만났다. 두 사람은 중국 공산당 중앙의 동의를 얻어 당원이 됐 다.

 

이처럼 반년 남짓한 짧은 시일에 상하이, 베이징, 창사, 우한, 지난, 광저우, 일본, 프랑 스에서 8개의 공산주의 소조 설립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명칭은 다양했다. '공산당, '공 산당 지부', '공산당 소조' 하는 식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기획, 주비하고, 틀을 짠 것 은 러시아에서 온 보이딘스키였다. 이런 움직임은 다시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거슬 러 올라간다.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중국을 주목했다.

 

그는 혁명의 씨앗을 뿌리 기 위해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3갈래 방면으로 중국에 보냈다. 그중엔 네델란드 사람인 마링도 보이딘스키와 다르게 중국 공산화를 위해 맹렬하게 뛴 인물이다. 그는 볼세비키 는 아니었으나 레닌의 직접 지시를 받은 코민테른 대표로 지위는 보이딘스키 보다 상당 히 높았다. 광저우로 간 러시아인 메슬린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또한 공산혁명 의 전위였다. 산골짜기 계류가 흘러 대하장강(大河長江)을 이루듯, 1921년 7월 1일 (정확한 날짜는 7월 마지막 주인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공산당1대 대표대회가 열렸음) 중국공산당을 창건했다. 마오는 1937년 옌안(延安)에서 에드가 스노우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1년 5월 나는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이 조직에 천두슈와 리다자오가 지도적 구실을 맡았는데 두 사람은 중국에서 가장 명민한 지도 적 지식인이었다. 나는 베이징대학 사서 보조원으로 리다자오 밑에서 일하는 동안 마 르크스주의에 급속하게 눈을 떠갔고, 천두슈도 내가 그 방향으로 관심을 키워나갈 때 많 은 도움을 줬다. 내가 두 번째 상하이에 갔을 때 천두슈와 내가 읽은 마르크스주의의 책에 관해 얘기를 나눴는데 그의 확고한 신념은 내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상하이에서 열린 역사적인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후난 사람은 나 이외에 허쑤헝 뿐이었다. 그 밖의 참석자는 지금 홍군 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장꿔타오와 빠오훼이성(包惠僧, 저우푸하이(周佛海) 등이었다. 이회의 참석자는 모두 13명이었다. 이 회의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천두슈, 장꿔타오, 천공푸(陳公璞), 스춴통(施存統, 현재 난징정부의 관리), 선쉐엔루(沈玄廬), 리한쥔(李漢俊/1927년 우한서 살해됨), 리다(李達), 리쑨(李蓀/처형됨)이었다. 그해 10월 공산당 최초의 성지부가 후난에서 조직되어 나는 그 지부의 당원이 되었다. 다른 성과 도시에서도 지부가 만들어졌다. 후베이성에는 동비우(현재 바오안 공산당학교 교장), 쉬바이하오(許白昊), 스양(施洋/1923년 처형됨) 등이 참여했다.

 

산시성(山西省)에서는 가오쑹우(高崇武/가오깡<高崗으로 더 많이 알려졌음)와 유명한 학생지도자 몇 명이 당원으로 있었다. 베이징에는 리다자오, 뤄장룽, 류런징(劉仁靜/현재 트로츠키파로 있음) 등이 있었다. 광둥(廣東)에는 지금 소비에트 재정부장으로 있는 린보취(林伯渠)와 펑파이(彭湃/1927년 처형됨)가 당원으로 있었다. 왕진메이(王燼美), 덩언명(鄧恩銘)은 산둥성(山東省) 당지부를 창설한 사람들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근공검학'하는 유학생들이 중국공산당을 만들었는데 창립시기는 국내와 비슷했다.

 

이 당(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창설자는 저우언라이, 리리 산, 차이허선의 부인인 샹징즈(向警子) 등이었다. 뤄마이(羅邁/리웨이한<李維漢>으로 더 잘 알려졌음)와 차이허선은 프랑스지부의 창설자가 되었다. 중국공산당 지부는 독일에서도 조직되었는데 시기는 약간 늦다. 가오위한(高語罕), 주더(周德/현재 홍군 총사령), 장선푸(張申府/현재 칭화(淸華)대학 교수)가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추이추바이(瞿秋白), 일본에서는 저우푸하이가 각각 지부 창설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주석 31)

 

후난성 대표인 마오와 허쑤헝은 1921년 6월 29일 오후 6시 창사를 출발해 배편으로 우한으로 가서 다시 창장(長江/양자강)을 운항하는 기선으로 갈아타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후베이성 대표인 긴 수염을 달고 있는 동비우와 천탄추(陳潭秋)도 마오와 마찬가지로 우한에서 창장을 오가는 기선을 타고 상하이에 몸을 부렸다. 이어 일본에 있던 저우푸하이도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에 왔다.

 

베이징의 대표인 류런징은 같은 대표인 장꿔타오 보다 며칠 늦게 상하이에 도착했다. 제일 늦게 온 사람은 광저우 대표 천두슈가 참석하지 못해 대리인으로 뽑힌 바오훼이성(包惠僧/애초 우한 소조 대표)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장선푸, 저우언라이, 차이허선 등은 길이 먼데다 연락이 힘들어 참석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의 대표들이 잇따라 상하이에 은밀히 들어왔다. 15명의 대표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45살인 '하털보' 허쑤헝이었고, 최연소자는 류런징 이었다. 대표들의 평균 연령은 마오의 나이와 같은 28살 이었으며, 30살 이하가 9명으로 참석자의 5분의 3을 차지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제1대 대표대회는 젊은이들의 대회, 그 자체였다.

 

15명의 대표 중 외국인인 네델란드 사람 마링과 러시아인 니콜스키를 빼면 중국인은 13명이다. 지역별로는 이중 후베이성 5명, 후난성 4명으로 양호(兩湖) 출신이 9명이나 됐다. 또 1대 대표 13명의 그 후 행적을 보면 국가와 당을 위해 희생한 사람, 탈당해 국민당으로 떠난 사람, 한간(漢奸)의 길로 나아간 사람 등 공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당을 만들었지만 끝내는 가는 길이 서로 달랐다.

 

탈당과 출당 당한 사람이 7명으로 과반수가 넘었다. 제일 먼저 탈당해 국민당으로 간 천공푸(陳公璞)를 비롯해 리다(李達/탈당 뒤 신중국 건국후 복당했다가 문화대혁명 때 희생됨), 리한쥔(李漢俊/탈당), 저우푸하이(周佛海/한간), 바오후이성(包惠僧/탈당), 류런징(劉仁靜/출당), 장꿔타오(張國燾/출당) 등이다. 장제스에 희생된 인물은 덩언밍(鄧恩銘), 왕진메이(王盡美), 허쑤헝(何叔衡), 천탄추(陳潭秋) 등 4명이며, 마오쩌둥과 둥비우(董必武) 2명만이 죽을 때 까지 당을 지켰다.

 

25)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6)揭秘;是誰致信毛澤東最早提出建立中國共産黨 時政頻道 新華網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7)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8)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29)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30)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31)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6. 1921년 드디어 공산당 '1대' 젊은이의 대회

 

1921년 7월 20일 께 전국에서 온 대표들은 프랑스 조계인 바이얼루 389호(白爾路/현재 타이창루<太倉路>127호)에 자리 잡은 사립학교인 박문 여학교에 집결했다. 여름방학이라 학교는 교직원 1명과 주방 요원 1명만 있었다. 이 학교 황사오란(黃紹蘭)교장과 리다, 리한쥔 두 사람이 매우 친해 빌릴 수 있었다. 대회 개막식이 이 학교 2층에서 비밀리에 거행됐다. 공산당1대 대표대회의 정확한 개막일은 서로 달라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7월 말께 개최됐다는 설이 유력했다. 1938년 5월 옌안에 있던 1대 대표였던 마오와 동비우는 당의 많은 사람들이 창건일을 물어보자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창건일 논란…마오 · 동비우 7월1일로

그 두 사람은 논의 끝에 1921년 7월 1일로 정해 공산당 창건 기념일로 굳어졌다. 하지만 정확한 대회 날짜는 베이징의 인민해방군 호친쉐위안(後勤學院/후방 지원학교)에 근무하던 사오웨이정(邵維正)이 1980년 '중국 사회과학' 잡지에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소집일시와 참석 인원에 대한 고증'이란 논문을 실어 중국 공산당 1대는 1921년 7월23일 개막됐다고 밝혔 다. 그는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2등 훈장을 받았고, 중국사회과학원은 그의 논문에 이렇게 편집자 주를 달았다.

 

"본문의 저자는 국내외의 사료를 대량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수차례에 걸쳐 관련 인물을 직접 방문해 중국 공산당 '1대'의 개최일과 참석인원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와 고증을 했 다. 이 논문은 확실한 제1차 자료와 설득력 있는 분석을 통해 '1대'가 1921년 7월23일부 터 31일까지 열렸으며 회의 참석자는 13명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1대'에 대한 두 가지 난제는 해결됐다." (주석 32)

 

1921년 7월 23일 밤 8시 드디어 중국 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역사의 장이 활짝 펼쳐졌다. 마오는 기록을 담당했다. 전날의 준비모임에서 24살의 장꿔타오가 주석으로 선 출 됐다. 다른 사람 보다 사교적이고 활약이 커 대회를 주재하게 됐다. 대회의 의사일정, 당면한 정치상황, 당의 기본임무, 당장(黨章)과 조직문제 등이 제안됐다. 마링은 코민테른을 대표해 이렇게 치사를 했다.

 

전국 1차 대표 회의장

 

중국 공산당의 정식 성립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코민테른은 동방에 지부 하 나를 더 추가하게 됐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볼셰비키도 동방의 전우 하나를 더 얻었다. 코민테른은 세계 각국 공산당의 연맹일 뿐만 아니라 각국 공산당 사이에서 지도적 및 피지도적 상하급 관계를 이루는 고도의 통일 조직이다.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당의 형식적 통일로 각국의 무산자계급 즉 프로레타리아의 전투행동을 지휘한다. 각국 공산당은 바로 코민테른의 지부인 셈이다."

 

참석자들이 '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이며,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술렁이자 마링은 레닌을 들고 나왔다. 레닌의 중국에 대한 관심과 공산당 창설의 바람을 전한 다음 동방에서의 사회주의 제도의 건설 등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레닌의 절대적 권위에 분위기는 수그러들었다. 회의 개시이후 밀정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들어났다. 대회 참석자들은 안전을 고려해 대회 마지막 날 회의는 7월 31일 상하이 남쪽,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 자싱(嘉興))의 명소인 난후(南湖)에서 열기로 하고 비밀리에 이동했다. 이들은 회의를 위장하기 위해 유람선을 빌려 선상회의를 했다. 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의 강령을 통과시키고 당의 중심 임무는 노동자 계급을 조직해 노동운동을 펼쳐 나가기로 확정했다. 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통과시킨 '선언'의 대체적 내용은 이렇다.

 

"대회에서는 '중국 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의 선언' 초안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이 선언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로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계급이 반드시 궐기해 사회혁명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토론했다. 지금 비록 노동자 계급이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으로부터 이중의 착취와 압박을 당해 도탄에 빠져 있지만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혁명에 나서 정부를 무너뜨린 다음 노동자 독재국가를 수립하고 국내외 자본가의 자산몰수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남북 정부의 본질에 대해 분석하고 북양 정부를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쑨원의 국민정부에 대한 불만도 표시했다. 하지만 쑨원의 정부를 북양 정부보다 진보적이라고 인정했다. 선언의 마지막에 '노동자들이 잃는 것은 쇠사슬일 뿐이며 얻는 것은 전 세계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주석 33)

 

대표들은 당시 중국 공산당 당원이 50여 명에 불과하고 각 지역의 조직도 불완전하다는 점을 고려해 중앙위원회는 미뤄두고 '중앙국'만 세우기로 했다.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선거에서 대표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천두슈가 만장일치의 몰표를 받아 '중앙국'의 초대 서기로 뽑혔다. 1대를 주재한 장꿔타오가 조직 주임, 리다가 선전 주임으로 각각 뽑혀 이들 3인이 중앙국을 구성했다. 역사적인 중국공산당 1대 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끝났다. 마르크스주의의 1인자이자 중국공산당의 산파구실을 했던 리다자오가 1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표에 끼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해 베이징 대표였던 장꿔타오는 ‘나의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 지부는 두 사람의 대표를 대회에 파견해야만 했다. 각 지역 동지들의 경우는 리다자오 선생이 직접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그때는 베이징 대학이 학기말로 학내 일이 너무 많아 도저히 시간을 내서 갈 입장이 아니었다. 그 결과 류런징이 베이징 지부를 대표해서 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됐다.”

 

후난 지부 설립 … 마오 서기로 뽑혀

 

공산당 1대 대회가 끝난 뒤 후난으로 돌아 온 마오는 허쑤헝과 함께 후난 지방 당 조직 결성에 힘을 기울여 그해 10월 10일 정식으로 후난 지부를 설립했다. 마오가 서기로 뽑혔다. 중국 전역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공산당 지부가 되었다. 마오는 신민학회 회원과 사회주의 청년단을 중심으로 당원을 확충하면서 광범한 노동운동을 펼쳐 나갔다. 당원 확대대상은 학생에서부터 방직 노동자, 전기공, 조폐창, 광산 노동자, 미장이, 봉재공, 인쇄공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뤄졌다. 1921년 겨울부터 1922년 봄까지 헝양(衡陽), 핑장(平江), 안위안(安源), 웨저우(岳州), 창더(常德) 등지에서 30여 명의 당원을 가입시키고 어떤 지방에는 당 소조를 만들기도 했다. 마오는 이를 기반으로 해 5월에 중국공산당 샹취(湘區)집행위원회를 정식 설립하고 서기로 임명됐다.

 

앞서 마오는 1921년 11월 중순 안위안(安源) 탄광에 잠입해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현지 조사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했다. 공산당 1대는 노동운동을 당면한 중요사업으로 확정해 마오가 안위안 탄광을 택했다. 1922년 2월, 중국공산당 산업노동자의 한 지부로 안위안루쾅(安源路礦) 지부가 만들어졌고 리리산이 서기로 임명됐다. 9월에 류사오치(劉小奇)가 파업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안위안으로 파견됐다. 안위안루쾅 탄광노동자 파업은 훗날 공산당 최고 영도자들로서 애증이 엇갈리는 마오와 리리산, 류사오치 등 3인이 참여하는 기연을 맺었다.

마오는 창사에서 리리산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파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애처롭게 보여 사람을 움직이는(哀而動人)’ 전략을 쓸 것을 재차 권유했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 유발 전략인 셈이다. 마오는 이렇게 해야만 전체 노동자를 굳세게 하나로 묶어 자본가들과 싸울 때 정의를 위해 뒤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며, 사회 절대 다수의 동정을 얻을 수 있고, 사회여론의 지지를 쟁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석 34)

 

마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리리산과 류사오치는 9월 14일 전국을 흔든 안위안루쾅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파업의 구호는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는 밥을 먹고 싶다’ ‘우리는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최후 수단으로 파업을 벌인다’ ‘우리의 요구 조건은 정당하다, 우리는 죽더라도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싸울 것이다’ 등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안위안루쾅 대파업은 창사, 상하이, 베이징의 신문들이 보도하면서 전국으로 알려졌다. 각계의 성원과 지지가 잇따랐다. 현지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대비했으나 여론에 밀려 파업 5일 만인 9월 18일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류사오치는 파업을 총결하는 글에서 “이번 대파업은 5일 동안 질서 정연하게 이뤄졌고 엄격한 조직규율을 노동자들이 잘 따라 한 사람도 다치지 않는 등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 이것은 유아적인 중국 노동운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썼다. 파업이 끝난 뒤 리리산이 주임으로 있던 노동자구락부 회원은 애초 7백여 명이었으나 1만2천여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22년 1월, 후난성 성장인 군벌 자오헝티(趙恒惕)가 후난 제1방직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황아이(黃愛)와 팡런취안(龐仁銓)을 살해하자 그를 배격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원래 이들은 무정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후난 노동자연합회에 가입한 노동조합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마오와의 노선대립으로 큰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마오의 집요한 설득으로 이들은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해 마오와 함께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었다. 마오는 자오헝티를 축출하는 운동조직을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돼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대회가 리다의 집에서 열렸다. 이는 천두슈가 지난해 ‘중국공산당 중앙국 통고’에서 ‘내년 6월’에 열겠다고 한 대회였다. 7월 16일 열린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천두슈, 리다, 장꿔타오, 프랑스에서 추방된 차이허선 등 12명이었다. 마오는 상하이에 있으면서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2개월 전 리다를 후난 쯔슈(自修)대학으로 초청해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해 강의를 부탁했을 때 7월에 중국공산당 ‘2대’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바 있다. 이에 대해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주석 35)

 

“원래 나는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됐을 때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리는 장소를 잊어 먹은 데다 대회에 참석할 다른 동지들을 만나지 못해 그만 참석하지 못했다.”

 

3대 대회 전당 사상 통일…국공합작 기초 다져

 

마링은 ‘국공합작’이라는 중대한 전략을 제안해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의 중요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본인이다. 그는 중국공산당 당원들이 자신의 신분을 유지한다는 전제아래 국민당에 가입한 다음 지도부에 들어가면 당의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링은 이런 주장을 중국공산당 1대 회의 때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당시 이르크추크의 코민테른 극동 서기처는 직예 군벌인 우페이푸(吳佩孚)를 중시하고 중국공산당이 그와 합작하기를 희망했다. 반면 보이딘스키는 광시군벌인 천지융밍과 합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링은 쑨원에 관심을 보였다.

마링은 1921년 12월 23일 장타이뢰이(張太雷)를 대동하고 광시성 구이린(桂林)에서 쑨원을 만나 합작 가능성을 타진하고 긍정적 답변을 얻었다.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고서를 보내 쑨원과 합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집행위원회는 이를 추인했다. 마링은 1922년 3월 말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나 ‘국공합작’을 역설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두슈는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시후(西湖)회의’로 불리는 이틀간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의 의견을 접수하고 국공합작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922년 11월 5일부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코민테른 ‘4대’가 열렸다. 이 회의에 천두슈는 중국공산당, 류런징은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대표로 참가했다. 영어가 유창한 류런징이 중국공산당을 대표해 중요 발언을 했다.

 

“중국의 제국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당은 이미 이를 위해 국민당과의 통일전선 구축을 결정했다. 그 형식은 우리당의 당원들이 개인 명의로 국민당에 참가하는 것이다.” (주석 36)

 

이는 중국공산당이 처음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포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해서 1923년 6월 12일부터 20일까지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3대’회의는 전당 사상을 통일하고 첫 국공합작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 사상 중요한 회의로 기록되고 있다. 마오는 3일째 열린 회의에서 당이 도시 노동자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농민운동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22년 창사 제1방직공장과 1923년 징한(京漢) 파업을 예로 들면서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마오는 또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투쟁의 역량은 대단히 크다고 말했다. ‘3대’의 주요 의제인 ‘국공합작’을 놓고 1주일이상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회의를 주재한 천두슈는 당원이 많지 않고 역량도 강하지 못해 국공합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동자들의 각성이 높지 않아 혁명을 잘 이해하지 못해 혁명이론도 없고 심지어 노동자들이 나쁜 건달 기질이 있다고 멸시하기까지 했다. 천두슈는 “그렇기 때문에 국민당에 들어가 공산당을 발전시키기 위해 잠시 공산당의 독립적인 일은 접어야 한다”고 밝힌 뒤 “중국혁명은 국민당이 영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공산당 3대 중앙위원으로 마오 당선…공산당·국민당 정책 조율

 

장꿔타오는 국공합작을 반대했다. 그는 특히 전체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차이허선과 왕전이(王振一)가 장꿔타오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지식분자와 노동자들이 연합해 투쟁하면 중국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쉬매이퀀(徐梅坤)이 장꿔타오를 준열하게 힐책했다. 그는 화가 나 탁자를 치면서 벌떡 일어나 장꿔타오는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쉬매이퀀은 장꿔타오가 국공합작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소종파주의적 활동을 하기 때문에 제명해야한다며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마링이 쉬매이퀀을 지지하고 나서는 등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세 불리한 장꿔타오는 회의 4일째 되던 날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차이허선이 줄기차게 국공합작을 반대했는데 그의 부인 샹징위(向警予)가 반론을 펴는 등 부부가 심하게 다퉜다. 장타이레이가 격렬하게 국공합작을 주장했고, 마오도 찬성했다. 회의 마지막 날 국공합작문제 결의안을 거수로 투표했다. 차이허선과 왕전이가 반대했고, 장꿔타오는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다수결로 통과돼 공산당의 국공합작은 정식 채택됐다. 또 공산당 제3대 중앙위원은 투표결과 천두슈, 리다자오, 마오쩌둥, 탄핑산, 차이허선 등이 당선됐다. 천두슈가 서기를 맡고 마오가 조직, 추이추바이가 선전 책임자로 뽑혔다(나중에 차이허선으로 바뀜).

 

이 회의에 참석한 마오는 이렇게 에드가 스노우에게 말했다. (주석 37)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1923년 광저우에서 개최되었는데 국민당에 입당하여 함께 힘을 합쳐서 북방 군벌들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결성한다는 역사적 결의가 이루어졌다. 나는 상하이로 가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다음해 봄 나는 광저우로 가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했다. 3월에 나는 상하이로 되돌아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일과 상하이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일을 겸임했다. 당시 국민당 집행부의 위원으로는 왕징웨이(汪精衛)와 후한민(胡漢民)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공산당과 국민당의 정책을 상호 조정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여름에 황푸(黃埔)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갈렌이 이 학교의 고문으로 취임했고 다른 고문들도 러시아에서 도착해 국공합작은 전국적인 혁명운동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해 겨울 나는 휴양하기 위해 후난으로 돌아왔는데-나는 상하이에서 병에 걸렸다-이때 후난에 머물면서 나는 이 성에 대규모 농민운동의 핵심을 조직했다.”

 

32)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33)같은책, 마오쩌둥전(상)
34)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35)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36)중국의 붉은별(상)
37)중국현대사 장셰노, 프랑스와즈 르 바르비에, 마리-끌레르 베르제르 지음/신영준 옮김 도서출판 까치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

 

7. 국공합작 시동…마오 '농촌 대혁명' 불길 속으로

 

국민당은 1924년 광저우에서 1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어 정식으로 국공양당의 합작이 이뤄졌다. 쑨원은 반제국주의의 강령을 채택하고 연아(聯俄), 연공(聯共)을 확립하고, 노동자 농민 을 지원하는 등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새롭게 해석해 당 개조작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대회에서 쑨원이 주석으로 선출되고 후한민, 왕징웨이, 린선(林森), 셰츠(謝持), 리다자오 등 5명의 주석단이 구성됐다.

마오와 추이추바이, 장꿔타오 등은 중앙위집행위원 후보위원으로 당선됐다. 이렇게 해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정치무대에 공개적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국공합작과 연합전선을 중시해 중앙국 위원인 마오와 뤄장룽, 왕허보(王荷波) 3명을 국민당 상하이 집행부에 파견해 일 하도록 했다.

또 국민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리다자오와 탄핑산이 국민당 북방지역과 광저우에서 국민당의 개조사업을 돕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각 성과 시 지역의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들어가 당 확충 작업과 군대를 개조하는 사업에 참여토록 했다. 하지만 쑨원이 이끌고 있던 국민당의 3대 혁명정책은 국민당 내부 우파들의 끈질긴 반대와 방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를 한 축으로 한 세력과 국민당 우파사이에 끊임없는 내부 투쟁이 벌어졌다.

 

중 공산당 국공합작 발판 정치무대 공식 등장

 

1924년 가을, 직예 군벌 장쑤(江蘇) 독군 치시에위안(齊燮元)과 안후이성 군벌 저장(浙江) 독군 루융샹(盧永祥)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뒤이어 안후이 군벌과 동맹을 맺고 있는 펑톈(奉天) 군벌 장쭤린이 장쑤 군벌을 공격해 또 다시 전쟁이 터져 인민들이 전화에 휩싸였다.

9월 10일,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와 비서인 마오가 연명으로 공산당 중앙의 성명을 내어 "군벌들 간의 전쟁은 어떤 희망도 없으며, 오르지 국민혁명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면서 전쟁반대를 천명했다. 그해 12월, 쑨원은 중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북방 군벌과 회담하려 북상했다. 앞서 직예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페이푸(吳佩孚)를 제치고, 베이징을 점령한 뒤 대총통 차오퀀(曺錕)을 축출했다. 우페이푸는 할 수 없이 남은 직예파 군대를 이끌고 창장지역으로 후퇴했다.

안푸파이(安福派) 군벌 두안치루이(段祺瑞)와 만주 군벌 장쭤린, 그리고 펑위샹은 연합세력을 구축했다. 펑위샹은 쑨원의 베이징 방문을 요청했다. 쑨원의 북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국민회의 촉성회 운동이 광범하게 펼쳐졌다. 국민당 집행부의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은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지지하며, 반제 반봉건과 인민민주주의 권리를 쟁취하자는 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마오는 12월 말 국민당 우파의 배척을 받아 상하이를 떠나 후난으로 간 뒤 농민, 노동운동을 벌였다. 마오는 다시 광저우로 가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를 맡았다. 1924년 7월부터 1925년 말까지 공산당은 광저우에서 5차에 걸쳐 농민운동 강습소를 열어 광둥지역 등 농민운동 간부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4백여 명이 교육 훈련을 받은 뒤 각 지역 농촌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펼쳤다.

 

앙카이후이와 두 자녀

 

마오는 후난에서 동생인 마오쩌민(毛澤民) 등 50여명을 선발해 4, 5기 강습소에 보내 교육훈련을 받도록 했다. 마오는 이 강습소 6기 때는 직접 소장을 맡아 교육 대상 범위를 확대해 전국적으로 농민운동 간부들을 양성했다. 마오는 앞서 양병(養病)하기 위해 고향인 샤오산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면서도 20여개의 비밀 농민협회와 공개적인 혁명 조직인 '설치회(雪恥會)를 만들고 농민야학(夜學)을 운영하는 등 활발하게 농민운동을 벌였다. 마오의 부인 양카이후이가 적극적으로 이 일을 도왔다. 당과 마오의 영도아래 농민운동이 흥기하면서 1926년 6월에는 후난, 광둥, 광시, 후베이, 허난(河南), 산둥, 산시(陝西), 쓰촨(四川), 허베이(河北) 등 10여개 성에 60여만 명의 농민협회 회원들이 생겨났고, 후난성의 경우 44개 구(區)에 농민협회가 만들어졌다.

 

그 해 겨울,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전선 아래 역사적인 북벌군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농민운동도 폭풍우처럼 번져갔다. 농민운동은 빠른 속도로 중국의 중부, 남부와 북부의 각 성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뻗어나갔다. 후난성이 농민운동의 핵심구실을 했다. 후난의 경우 농민협회 회원만 1백 36만여 명에 이르고 이들이 이끄는 군중만도 6백만 명이 넘었다.

 

"농민들이 향리에서 혁명을 일으켜 횡포한 토호들의 단꿈을 깨자."

 

이들 농민조직과 농민들이 탐관오리와 토호, 악질 지주들에 대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에서 투쟁을 벌이면서 천지가 뒤집히는 ‘농촌대혁명’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토호와 지주, 국민당 우파, 북벌군의 우파 장교들이 농민운동에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천두슈조차도 후난 농민운동이 지나치다고 질책했다. 마오는 후난 농민운동 현장을 고찰하면서  현지 상황을 파악한 뒤 유언비어 날조와 중상 비방하는 이들 세력에 대해 논박하는 한편, 당내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했다.

마오는 옌안에서 에드가 스노우와의 대화에서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제스(張介石)가 광저우에서 첫 쿠데타를 기도했던 1926년 3월까지 그곳 국민당에서 계속 일했다. 나는 국민당 좌우파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결속이 재확인된 뒤인 1926년 봄에 상하이로 갔다. 국민당 2차 전국 대표대회가 장제스 주도아래 그 해 5월에 개최되었다.

나는 상하이에서 공산당 농민부를 이끌었는데 그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농민운동 조사관으로 후난에 파견되었다. 나는 창사, 리링(醴陵), 샹탄, 헝산(衡山), 샹샹 등 5개현의 농민조직과 정치상황을 조사해서 중앙위원회에 보고서(후난성 농민운동고찰보고)를 제출하면서 농민운동에 대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도록 촉구했다. 이듬해 초봄 나는 성간(省間) 농민회의가 열린 우한(武漢)에 도착, 회의에 참석해서 광범한 토지재분배를 권고하는 내용인 내 논문의 제안들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펑파이(彭湃), 팡쯔민(方志敏), 그리고 졸크와 볼렌이라는 두 소련 공산당원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 제출할 내 제안을 채택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주석 38)

 

마오의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 군중은 환영했으나…

 

마오가 작성한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는 광범한 공산당원과 혁명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천두슈와 그 추종자들의 반대에 부닥쳐 발간하지 못했다. 중공중앙위원 추이추바이가 이 '보고'의 중요성을 중시해 천두슈에게 잇따라 간행할 것을 요구했으나 천두슈는 "후난의 농민운동은 마오쩌둥이 큰 책임을 져야한다"고 소리치며 격노했다.

이 ‘보고’는 “순식간에 화중, 화남, 화북의 여러 성에서 수백만의 농민들이 거센 폭풍우처럼, 태풍처럼 일어났으며 그 힘은 너무나 빠르고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강한 세력도 그 힘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추이추바이가 상하이에서 우한에 와 마오의 '보고'를 읽은 뒤 매우 기뻐하며, 여러 차례 당내 투쟁을 거쳐 1927년 4월 마침내 `후난 농민혁명'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추이추바이는 직접 서문을 써 후난 농민혁명운동을 높이 찬양하고 마오쩌둥이 '농민운동의 왕'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은 장시성(江西省), 특히 장시 동북부 지역의 농민운동 간부들에게 ‘필독서’가 돼 이 지역 농민운동의 지침서 구실을 했다. (주석 39)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와의 옌안 대화에서 천두슈와의 갈등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7년 5월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우한에서 개최되었을 때 당은 여전히 천두슈의 지배하에 있었다. 장제스가 이미 반혁명을 일으키고 상하이와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두슈는 우한의 국민당에 대해 계속 자제하고 양보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온갖 반대를 억누르고, 우경화한 기회주의적 소부르조아 정책을 따랐다.

나는 그때 당 정책, 특히 농민운동이 지주에 대한 계급투쟁에서 더 철저한 조직과 무장을 갖추었더라면 소비에트 조직은 전국적으로 더 빨리, 또 훨씬 강력한 발전을 이룩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천두슈는 이에 대해 맹렬히 반대했다. 그는 농민의 혁명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 시기 농민들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했다. 이에 따라 대혁명에 위기가 임박한 상황에서 개최된 제5차 전국 대표대회는 적절한 토지계획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농민투쟁을 급속하게 강화시키자는 내 의견의 심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 대회는 50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지주로 규정함으로써 토지문제를 소홀하게 처리해 버렸다. 이러한 규정은 계급투쟁을 발전시켜 나갈 기초로서는 전혀 부적절하고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특수한 농촌경제의 성격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끝난 후 전국 농민협회가 조직되었고 내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주석 40)

 

국공합작으로 주요도시 탈환…장제스 4·12쿠데타로 공산당 소탕 나서

 

1926년 7월 국공합작의 국민혁명군이 북벌에 나선 뒤 1927년 봄 우페이푸와 쑨푸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물리치고 우한, 난징, 상하이 등 창장 유역의 중요 도시를 탈환했다. 이로써 국민혁명군은 남부와 중부, 그리고 동남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할하게 되었다.  이런 좋은 형세에 공산당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는 국민당내 우파인 장제스를 대표로하는 대지주와 대 자산계급들이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공산당 내 천두슈를 대표로하는 우경 투항주의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의 혁명의 열기는 급전직하로 식어갔다. 북벌 총사령관인 장제스는 이런 틈을 타 4월 12일 상하이에서 ‘4.12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청당(淸黨)을 내세워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민당은 우한에 좌파 우두머리인 왕징웨이(汪精衛)가 정부 수반을 맡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에 국민당 난징정부를 세웠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 좌파를 압박하자 왕징웨이, 탕성즈(唐生智) 등은 장제스에 머리를 조아리고 공산당 탄압에 나서 국공합작은 완전히 깨졌다. 국공합작을 주선하고 배후에서 지원했던 소련 고문들도 중국을 떠나 국민당과 소련과의 관계도 끝났다.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검거령과 백색테러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해 말까지 공산당원의 5분4에 이르는 3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와의 대화에서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4월 난징 반혁명운동이 벌어지면서 장제스 지휘아래 조직을 갖춘 노동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똑같은 학살이 광저우에서도 벌어졌다. 5월 21일 후난에서는 허커샹(許克祥)의 폭력적인 탄압이 자행되어 수십 명의 농민, 노동자들이 반동분자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 직후에 우한의 국민당 좌파 정부는 공산당과의 협약을 파기하고 국민당과 정부 내에서 공산당원들을 축출했는데 그 이후 우한 정부는 곧 소멸되었다. 그때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의 명령에 따라 중국을 떠나거나 소련으로 가거나 또는 상하이와 그 밖의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다.

나는 쓰촨성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천두슈에게 쓰촨 대신에 성위원회 서기로 후난성으로 보내달라고 설득했는데, 그는 불과 열흘 후 내가 우한의 지배자 탕성즈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즉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당의 업무는 그때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의 모든 당원들이 천두슈의 지도력과 기회주의적인 노선에 반대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우한에서 합작협정이 와해되면서 그는 몰락하고 말았다." (주석 41)

 

공산당 창당 인사 잇따라 학살…마오도 체포될 뻔

 

장제스의 공산당 소탕 과정에서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던 주요 인사들이 잇따라 학살당했다. 천두슈의 큰 아들이며 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서기인 천옌녠(陳延年), 둘째 아들인 공산당 제 5기 중앙위원 천쟈오녠(陳喬年)이 처형됐다. 이때 나이 각각 29살과 27살이었다. 중국 공산당 1대 대표였던 리한쥔과 첨대비는 한커우(漢口) 일본 조계 내 중제(中街)에서 장기를 두다 체포돼 4시간 만에 처형됐다. 중국 공산당 5대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뒤 후베이성 서기 장타이뢰이는 상하이에서 홍콩을 거쳐 11월 26일 광저우에 도착한 뒤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일시 점거했으나 12월 11일 광둥 군벌의 매복에 걸려 29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이때 상하이에서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파업을 벌여 외국 조계를 제외한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4.12쿠데타' 전날 밤 장제스 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쿠데타를 간파하지 못하고 군부대의 함정 초청에 걸려들어 체포됐으나 다음날 가까스로 풀려났다. 장제스의 공산당 소탕지시가 은밀하게 이뤄져 하부조직에서 잘 모른데다 국공합작이 유효한 상태에서 저우언라이의 지위가 높고 위로부터의 공식적인 체포통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긴 저우는 수 천여 명의 시위대를 조직해 체포된 노동자와 당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등을 벌였다. 그 뒤 저우는 장제스 군의 잔혹한 백색테러가 상하이를 들쑤시자 홍콩으로 탈출했다.

 

우창(武昌)에 있던 마오도 7월 15일 왕징웨이가 공산당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려 하마터면 체포될 뻔 했다. 마오가 집에 들어가기 위해 한커우 거리를 지나던 중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마오에게 다가오더니 마오쩌둥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마오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근처에 있는 골목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방금 저쪽으로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마오가 가리킨 쪽으로 쫓아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 온 마오는 당을 구하고 좌절된 국민혁명을 이루기 위해 우한을 떠나 농촌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결심했다. 마오는 우창에서 같이 살던 부인 양카이후이와 장모, 그리고 두 아들인 안잉(岸英), 안룽(岸龍)을 양카이후이의 고향인 창사 빤창으로 보냈다.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4.12쿠데타’로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행위가 전국적으로 자행되자 지하로 숨어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침체국면을 맞게 되었다. 공산당은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8월 1일 장시성 성도 난창(南昌)에서 국민당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저우언라이는 전선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국공합작으로 이 일대를 관할하던 국민당 좌파 군인들의 지원과 당원들로 구성된 국민 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봉기를 직접 지휘했다. 신중국 성립후 10대 원수가 된 주더(朱德), 허룽(賀龍), 류보청(劉伯承), 린뱌오(林彪)와 예팅(葉挺) 등이 지휘하는 2만여 명의 국민혁명군이 봉기에 참여했다.
 

38)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법 옮김 두레
39)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40)중국의 붉은 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41)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8. 비밀당원 주더의 합류…'주마오 홍군시대'의 개막

 

혁명위원회는 제국주의와 군벌에 대한 투쟁, 토지개혁 실시 등을 주장했으나 국민당 군에 밀려 봉기 5일 만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고문인 갈렌이 세운 계획에 따르면 군대는 난창 봉기 작전을 끝낸 뒤 곧바로 남하하여 광둥성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목표는 광둥성에서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고, 나아가 성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봉기는 바다 쪽으로부터 소련의 도움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갈렌의 계획이 잘 실현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장제스가 창장(長江/양쯔강) 중류와 하류 지역을 차지한 반면, 창장 북부와 남서 지방의 성들은 군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저우는 중국 남부를 기지로 삼아 그 지역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규합한 뒤 중국공산당의 지도에 따라 제2차 북벌을 단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 봉기군은 장시성에서 두 차례 전투를 치루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봉기군은 9월 말 잠시 항구도시인 산터우(汕頭) 등을 점령했으나 국민당 군의 강력한 공격에 괴멸되다시피 했다. 저우언라이는 녜룽전(聶榮臻), 예팅과 함께 홍콩으로 탈출했다. 주더와 천이(陳毅)는 남하 계획을 포기하고 후난기의를 일으켰다가 패전해 1천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나중에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갔다. 주더는 마오의 군대와 합류해 홍군(紅軍)을 만들어 주마오(朱毛)’ 홍군시대를 열어갔다. (주석 42)

 

마오보다 7살 위인 주더는 신중국 창건 뒤 10대 원수(元帥) 가운데 우두머리 원수로 중국 군부의 대부이자 인민해방군 창설 원훈이다. 그는 1886년 12월 1일 쓰촨성 이롱(儀隴)현 마안창린랑(馬鞍場琳琅) 서쪽 기슭 리자완(李家灣)에 사는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구사회의 많은 빈한한 가정이 그렇듯 주더 집안도 식구는 많고 살림은 찢어질 듯이 가난했다. 자그마치 식구가 13명이나 됐다.

 

주더는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모든 가족이 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주더 아버지는 주더가 태어나자 “아이고, 또 생구(生口) 하나가 늘었구나”하며 한탄했다. 주더는 5살 때부터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현지 사람들은 당시 외지에서 온 수공예 상인들이 휴식시간이면 그들을 빙 둘러싸고 그들로부터 바깥소식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홍수전(洪秀全)이 일으킨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에 관한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어린 주더도 귀를 쫑긋 세우고 즐겨 들었다. 옛날 얘기를 좋아 한 주더는 압제자들에 맞서 농민기의를 일으킨 지도자들을 동정하고 숭앙했다.

 

주더는 세상일을 알면서부터 봉건지주들이 농민들을 잔혹하게 착취하는 것을 수없이 봤다. 주더네 한 가족이 해뜨기 전 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 해 얻은 알곡은 지주들의 양곡창에 들어갔다. 품팔이로 빌은 얼마 안 되는 곡식은 고구마나 옥수수, 잡곡으로 바꿔야만 겨우 식구가 먹고살 수 있었다. 채소를 볶을 때 식용유를 살 수 없어 언제나 물을 넣고 볶아야 했다.

전가족의 남녀노소가 변변하게 걸칠 옷 한 벌도 없었다. 주더는 어느 날 어머니 생일에 소작을 부친 지주의 논에 주더네가 돈을 주고 사다 풀어 놓은 새끼 물고기가 자라서 이 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들이려고 잡아가다 지주네 하인에게 빼앗겼다. 하인은 지주 논에서 자란 물고기는 소작인들이 잡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 주더의 마음에 지주를 증오하는 씨앗이 뿌려졌다. 주더는 어느 여름날 굶주리다 지친 사람들이 지주들의 양곡을 털어 달아나다 관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기민들이 죽어나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고 구 사회에 대한 반항과 증오심을 더욱 키워갔다. 주더의 부모와 백부모는 집안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배움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끼고 먹고 입는 것을 더욱 줄여 주더를 공부시키기로 했다.

 

주더는 6살 되던 해 먼 친척이 운영하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다 10살에서 18살 때까지 학식이 높은 시궈전(席國珍)이 경영하는 사숙에서 형설의 공을 쌓았다. 주더는 이곳에서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의 주요한 시기를 보내면서 제국주의와 봉건제도의 폐해,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주더는 특히 남송시대의 장군 웨페이(岳飛)를 좋아 해 웨페이의 정충보국의 애국정신을 글로 지어 찬양했다.

 

 

 

 

주더는 ‘4서5경’, ‘사기’, ‘삼국지’ 등 중국 전통경전을 공부하다 신학문을 배웠다. 주더는 20살 되던 1906년에 난충(南充)현 관립고등소학당에 들어갔다. 이 학교 교장은 애국 민주인사로 유명한 장란(張瀾)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라가 망하면 멸종이 된다. 지금 어떠한 것도 관여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이다”라며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 온 류소우촨(劉壽川)은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약한 나라에서 강국으로 바뀌었다. 일본을 배워 변법을 실행해야 한다. 과학을 존숭해야만 출로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런 교육에 주더는 충격을 받았다. 주더의 사상도 크게 발전했다. 주더는 신해혁명과 쑨원의 동맹회 소식을 듣고 '혁명군' 등의 책을 읽으며,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는 뜻을 이해하게 됐다. 그의 사상은 점점 혁명 민주주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더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한테 들으니 동맹회 지도로 여러 차례 기의(起義)가 일어났는데 애석하게도 실패했다고 한다. 아편전쟁 이래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 보면 중국은 제국주의를 분쇄하고 청 왕조를 엎어버려야 한다. 반드시 무장투쟁을 하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 쓰촨 고등학당 부설 체육학당에 들어가 졸업한 뒤 군사공부를 하려고 한다."

 

주더는 쉰칭푸중학당을 졸업하면서 지은 시에 "조국의 안위는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 하늘을 찌르는 장대한 뜻을 나는 붕새에게 부친다"고 써 그의 호방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1907년 봄, 주더는 쓰촨성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이자, 각종 정치세력과 사회사조가 맞부딪치는 성도인 청두(城都) 쓰촨고등학당 부설 체육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졸업한 뒤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썩어 문들어진 청 왕조를 전복하기 위해 동맹회에 가입하려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으나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끈이 닿지 않았다.

주더는 시에 썼듯이 교사직을 버리고 군인의 길(投筆從戎去)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풍조는 군인을 경시하는 뿌리 깊은 사회적 관념이 있어 온 집안이 반대했다. 주더는 개의치 않고 군인이 되려고 장장 70여 일이나 걸어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갔다. 윈난 육군강무당에 시험 치어 좋은 성적을 받았으나 이 강무당(講武堂)은 윈난 지방에 사는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어 외지에서 온 주더는 뽑히지 못했다. 주더는 돈도 다 떨어지고 먹고 살기 위해 쓰촨으로 돌아가 쓰촨군 보병단 병사가 됐다. 주더의 뛰어난 능력을 아낀 지휘관의 추천으로 주더는 윈남육군강무당에 다시 시험 보게 됐다. 그는 이번엔 주소지를 윈난으로 속이고, 이름도 정식으로 '주더'로 바꿔 응시해 합격 했다. (주석 43)

 

주더는 합격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군인이 되고자 지원했다. 이 강무당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최신식 학교였다. 학생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다. 합격이 돼 대단히 기뻤다."

 

윈난 육군강무당은 중국 근대의 이름난 군사학교의 하나이다. 1909년에 개교해 톈진의 베이양(北洋)강무당, 펑톈(奉天)의 동북강무당과 함께 중국의 3대 강무당으로 손꼽혔다. 이 학교는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대거 들어와 교직원과 교관들의 골간을 이루고 있었다. 47명의 교직원 중 동맹회 회원이 17명이나 됐다. 주더는 1909년 동맹회에 가입했고, 1911년 8월 강무당을 졸업하면서 소위로 임관했다. 주더가 배치된 부대의 여단장은 주더보다 4살 많은 차이어(蔡鍔)였다. 그는 당시 ‘중국사관 3걸’ 중 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주더는 차이어가 대단히 엄격했지만 천재적인 지혜와 심모원려의 지휘관인 그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아 좋아 했다. 차이어도 주더를 아껴 주더가 찾아올 때 마다 몬테스큐의 '법의정신'이나 워싱턴, 피터대제, 일본 메이지유신 서적 등에 대해 설명해주고 청 왕조 전복의 혁명의식을 불어 넣어주었다. 주더는 1911년 10월 10일 청조 타도를 기치로 신해혁명의 불꽃이 된 쑨원의 우창기의(武昌起義)에 호응해 차이어가 쿤밍에서 일으킨 충지우(重九)기의에 중대장으로 참여해 공을 세웠다.

1912년 8월 동맹회와 다른 몇 개의 정치단체들이 모여 국민당을 만들어 쑨원이 총리가 되면서 동맹회 회원인 주더는 자연히 국민당 당원이 되었다. 주더는 1915년에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참칭하자 전국적인 반대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주더 상관인 차이어가 쿤밍에서 위안스카이 토벌 격문을 만천하에 공포하면서 '호국(護國)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주더는 이 전쟁에서 용맹을 떨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호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1917년 7월 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쓰촨 지역의 유명인사가 됐다.

 

호국전쟁이 승리하고 위안스카이가 병사했지만 중국 사회는 바뀐 것이 없었다. 베이양 군벌이 사분오열하면서 각파 간의 땅 따먹기 전쟁이 그치지 않아 민생은 도탄에 허덕였다. 윈난성의 장군인 주더는 여러 차례 군벌 간의 전투에 나가 이겼지만 기쁘기 보다는 회의가 들었다. 애초 구국구민 하기 위해 군에 들어 왔던 자신이 군벌쟁탈전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더는 이때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부(詩賦) 짓는 일에 몰입했다. 시는 모두가 군벌 패권전쟁으로 인해 피폐화하는 강산과 우국우민(憂國憂民)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절망과 방황은 급기야 주더가 아편에 손을 대게 되고 육체와 정신은 날로 황폐화 되어갔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주더에게 인생항로를 바꾸게 하는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베이징에서 불타오른 ‘5.4운동’이었다. 5.4운동은 마르크스주의를 촉진시켰고, 중국 전역에 전파되었다. 5.4운동의 물결은 쓰촨 지역에까지 밀려왔다. 학생, 노동자, 상인, 시민 등 각계 인사들이 잇따라 동맹휴학, 파업, 철시, 집회, 시위 등으로 베이징 대학생들의 애국운동을 성원하고 지지했다. 주더는 학생과 노동자, 상인들의 이런 애국행동을 전폭 지지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주더는 애초 구군대의 생활을 접고 친구 쑨빙원(孫炳文)과 함께 외국에 나가 신사조(新思潮)의 흐름을 배우면서 유학 할 작정이었다. 쿤밍 군벌 탕지야오(唐繼堯)를 축출한 뒤 사직을 요청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2년 봄, 쫒겨 났던 탕지야오가 쑨원의 북벌의 부름을 받고 권토중래해 쿤밍에 들어와 자신을 내쫒았던 주더 등 장령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주더는 군벌부대를 떠나 쓰촨으로 달아났다. 그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탕지야오의 독수(毒手)를 빌어 나를 대신해 구 군벌에 기속된 봉건관계를 완전히 잘나냈다”며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해 5월 충칭(重慶)에 온 주더는 쓰촨 군벌 류샹(劉湘)과 양선(楊森)의 환대를 받고 그들 부대의 사단장을 맡아 함께 일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상하이로 갔다.

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해 아편을 피우는 자신의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 처절한 자아와의 투쟁을 벌였다. 입원 기간 동안 친구들이 보내 준 책과 신문을 통해서 노동운동이 활기차게 일어나고 신생 중국공산당의 성향과 주장 등을 알게 됐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마음이 끌려 공산당에 가입해 중국 인민의 해방과 자유, 더 나아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 위한 생각에 빠져 피가 끓어올랐다. 주더는 퇴원 후 공산당에 가입하기 위해 상하이 곳곳을 찾아 나섰다. 주더는 공산당 소문은 들었으나 망망한 사람바다에서 공산당이 어디 있는 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친구 쑨빙원을 찾아가면 공산당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주더의 친구 쑨빙원은 쓰촨성 동향의 막역한 친구로 나이는 주더보다 1살 많았다. 그는 한 때 주더가 윈난 차이어 군벌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 주더의 참모로 함께 일 했다. 주더는 그때 쑨빙원으로부터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신사조의 흐름에 대해 좀 더 많은 지식을 배웠다. 또 신해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비교해 중국혁명을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혁명을 철저히 학습해야한다는 혁명사상의 일깨움도 받았다.

그를 통해 ‘신청년’, ‘매주평론’, ‘신조’ 등 진보적 서적과 루소의 ‘민약론’ 등 서구의 책들을 보게 됐다. 쑨빙원은 베이징 대학 전신인 징쓰따쉐탕(京師大學堂) 문과 예과반 출신으로 베이징과 톈진 지역 과격단체인 ‘철혈단(鐵血團)에 참가해 청 왕조 섭정 척살을 기도했다. 그는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베이징 역에서 비밀리에 무기를 운송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동맹회 기관지인 ’민국일보‘ 총편집을 맡아 위안스카이 황제 복벽에 반대하는 논조를 펴다 쫒기는 몸이 돼 쓰촨으로 달아났다가 그때 주더를 알게 됐다.

 

고생스레 베이징으로 쑨빙원을 찾아 온 주더는 1922년 8월 그와 함께 총총히 다시 상하이로 갔다. 공산당 책임자 천두슈가 상하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구이린과 윈난 군벌인 천지융밍(陳炯明)에 쫒겨 상하이에 와 있던 쑨원을 찾아갔다. 쑨원은 천지융밍을 칠 마땅한 장군을 찾지 못한 터에 주더가 찾아오자 가물에 단비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쑨원은 주더에게 거금 10만원의 군자금을 주며 천지융밍을 칠 것을 제안했다. 군벌싸움에 진저리를 치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작정한 주더는 오랫동안 앙모하던 쑨원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서구로 유학할 뜻을 내비췄다. 쑨원은 유학이라면 봉건배경이 없는 미국이 좋다고 추천했다. 주더가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한 유럽으로 가기로 했다고 말하자 쑨원은 더 이상 미국을 고집하지 않았다. (주석 44)

 

우여곡절 끝에 주더는 상하이 보통 주택가에 있는 공산당 최고 책임자 천두슈의 집을 찿아가 천두슈를 만났다. 주더는 자신의 이력으로 볼 때 공산당 가입이 이뤄져 새로운 혁명의 길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천두슈는 주더의 공산당 입당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두슈는 공산당에 가입하려면 노동자 신분으로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주더는 군벌의 장군을 지내 일정한 기간 학습과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며 당원 가입을 보류했다. 주더는 대단히 실망했다.

그렇다면 천두슈는 왜 주더의 입당을 거절했을까. 이는 공산당이 당원을 받아들이는데 규정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공산당 2대는 ‘중국공산당 장정’을 통과시킨바 있다. 이에 따르면 당원은 지방집행위원회에 있는 당원이 소개하고 지방집행위원회가 허가한 뒤 구(區)집행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구집행위원회는 또 중앙집행위원회에 보고하고 중앙집행위원회가 이를 최종 심사한 뒤 통과시켜야만 가능했다. 주더는 공산당의 선언과 당장(黨章)을 이해하지 못한데다 당원 가입절차를 몰라 소개인 없이 직접 천두슈에 가입신청을 했는데, 이는 공산당조직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주더가 입당이 좌절돼 낙심천만해 하며 돌아갈 때 천두슈는 몇 권의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주면서 학습하도록 했다.

 

1922년 9월, 주더와 쑨빙원은 프랑스 우편선을 타고 꿈에 그리던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40여 일 동안의 항해를 거쳐 10월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주더는 파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지난 6월 중국 유학생들이 ‘여구(旅歐)중국소년공산당’을 만들었고, ‘우하오(伍豪)’가 독일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와 중국‘이란 글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하오는 저우언라이의 가명이다. 주더와 쑨빙원은 베를린으로 가 자신들 보다 10여 살이나 아래인 저우언라이를 만난다. 저우는 이들이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이고, 구국구민의 열정과 공산당 입당에 대한 진정성 등을 높이 평가했다.

저우는 소개인으로 나서 입당절차를 밟아 중국공산당여아지부 책임자인 장선푸(張申府)의 동의를 받아 주더는 마침내 해외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게 됐다. 하지만 주더는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마지막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비준을 받아야만 정식 당원이 될 수 있었다. 천두슈는 고심 끝에 주더를 입당시키는 대신 대외적으로 주더의 신분을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해서 중국공산당 사상 주더가 비밀당원 1호가 됐고, 이때부터 비밀당원의 선례가 생겨났다.

 

주더의 비밀당원 효력은 구 군벌들을 북벌전쟁에 참가시키는데 힘을 발휘하였다. 1927년 7월, 소련에서 돌아 온 주더는 상하이에서 천두슈와 두 차례 만난 뒤 쓰촨 군벌 양선을 직계군벌 우페이푸와 분리시켜 북벌전쟁에 참가시키는 밀명을 받고 그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주더가 윈난 군벌 장군시절에 맺은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해 군벌 쑨푸팡의 실상을 조사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얻었다. (주석 45)

 

8월의 강상(江上)은 탁류가 온통 허공을 메운 듯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넘실넘실 흘러가고 있었다. 나룻배 한 척이 겹겹이 몰려오는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나아가자 파도에 부딪쳐 선체가 요동친다. 우한에서 한커우 장한관(江漢關) 쪽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버겁게 지쳐 나아가고 있었다.

급류가 철썩철썩 배를 때려 앞으로 밀어낸다. 갑자기 물보라가 뱃전을 파고들면 놀란 승객들이 허둥거리며 쏟아내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배 끄트머리에 상인 모습의 한 중년인이 망연히 물 흐름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바로 중공중앙후보위원으로 국민당 정부가 거금을 걸고 현상 수배해 체포하려는 마오였다. 그는 지금 중공중앙이 비밀리에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물은 세차게 솟구쳐 포효하면서 콸콸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마오의 심정은 큰 물결이 맞부딪쳐 출렁이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면 1년 동안의 중국혁명은 엄청나게 바뀌고 있었다. 문턱에서 깨져버린 중국혁명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온갖 상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손님, 다 왔습니다."

 

뱃사공의 소리에 후다닥 몸을 추스린 마오는 그때서야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내린 것을 알았다. 부두에 올라서니 어떤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컴컴한 밤이 되자 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계엄령이 내려져 일반인들은 감히 불 밝히고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한 싼전(三鎭)은 칙칙한 어둠으로 마치 음산한 묏터 와도 같았다. 주검 같은 고요만이 흘렀다. 어쩌다 들리는 거리를 질주하는 경찰차의 날카로운 경적이 귀를 찢었다. 마오는 후난회관 창가에 앉아 하릴없이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파리하게 야윈 얼굴에 준엄한 낯빛을 띈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침묵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중국사회가 복잡다단하고, 반동세력은 강대하다. 장제스, 왕징웨이 등 인간들은 음험하고 교활하다. 공산당 투쟁 경험은 부족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혁명이 좌절된 원인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당의 우경 투항주의의 해독이다. 당 총서기로서 천두슈의 책임은 회피할 수 없다."

 

42)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43)朱德入黨爲啥被陳獨秀拒絶遠赴歐洲找周恩來 中國共産黨 新聞網
44)朱德入黨爲啥被陳獨秀拒絶遠赴歐洲找周恩來 中國共産黨 新聞網
45)揭秘: 誰是中央黨史上的第一個臥英雄 人民網 文史頻道 朱德入堂

 

-------------------------------------------------------------------------------------------------------------------------------------------------------

 

9. 변계서 무장 추수폭동 지휘…민단 요원에 잡혔다 탈출하기도

 

마오는 얼마 전인 7월 4일에 열렸던 중공중앙상위 확대회의 때 자신이 제기했던 문제를 떠올렸다. 그 때 마오는 농민들을 무장해 산에 들어가 군사세력의 기초를 다져 무장투쟁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산에서 만이 역량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천두슈는 치지도외하며 일소에 부쳤다. 마오의 의견에 동의했던 추이추바이, 저우언라이, 차이허선, 런삐스(任弼時) 등 모두가 제지 또는 배척당했다. 

 

8월 5일(일설에는 6일), 중공중앙 연락원이 마오가 묵고 있는 후난회관에 찾아와 그를 회의장인 한커우 싼자오제 41호에 있는 이허신팡(怡和新房/현재 포양루 139호)으로 데리고 갔다. 이 건물은 서구식 3층 아파트로 옛 러시아 조계에 있다. 1820년에 지었고 국민당 농운(農運)고문인 소련인 뤄수모푸가 살던 집이다.

 

그는 20여일 전 소련 고문단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고 집에는 그의 부인만 있었다. 마오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중앙 비서처장인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에게 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줬다. 덩샤오핑에 따르면 회의는 원래 7월 28일에 열기로 했는데 백색테러가 심하고 교통이 막혀 외부에 있는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 각성의 대표들이 제때에 올 수 없어 8월 7일로 미뤄졌다.

덩샤오핑은 또 마오에게 이번 회의는 당의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청산하고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덩은 국민당 첩자와 조계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표들이 회의장에 들어온 뒤에는 외출할 수 없으며, 회의와 식사, 잠자리는 모두 이 안에서 해결한다고 말했다. 마오가 도착한 전후로 해 리웨이한, 추이추바이, 장타이레이, 덩중샤(鄧中夏), 차이허선, 런삐스와 공산국제(코민테른) 대표 등 20명이 참석했다. 8월 7일 회의가 정식 개회됐다. 공산당사에서 '8.7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당은 추이추우바이, 이웨이한 등으로 중국 공산당 임시 정치국을 구성했다. 당이 천두슈 대신 추이추우바이를 총서기로 임명해 중앙의 일을 주재토록했다. 천두슈는 이때부터 영도층에서 밀려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중국 공산당사에서 '기(期)‘수로만 보면 천두슈가 공산당 중앙을 주재한 것은 마오보다 많았다. 천은 공산당 1대부터 5대까지 공산당의 1인자로 당 중앙을 이끌었다. 이에 반해 마오는 7대에서 10대까지 4기에 걸쳐 당 중앙의 주석을 맡았다. 하지만 시간으로 보면 마오가 1935년부터 1976까지 41년간 당을 이끌었으며, 창당 원훈인 천두슈는 1921년부터 1927년까지 6년간 최고 지도자를 지냈다. 이때 천두슈의 나이 48살이었다. 

 

'8.7회의'에서 마오는 사자후를 토했다. 형상적 비유와 생동적인 언어, 그리고 신랄한 풍자로 회의장을 압도했다. 마오는 4가지 방면에 걸쳐 문제를 제기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우선 국민당 문제와 관련해 통일전선 과정에서 영도권 쟁탈을 둘러싸고 공산당이 줄곧 모호한 인식으로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국민당에 당하는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농민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1927년 1월 4일부터 2월 5일까지 장장 32일 동안 후난의 창사, 샹탄, 헝산, 리링, 샹샹 등 5개 현 1천4백여 리를 돌며 고찰, 조사 연구한 보고인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 가 후난 지방에 영향을 줘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당 중앙은 무질러 버렸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광대한 당내외의 군중들은 혁명을 필요로 했는데 당의 지도는 거꾸로 불혁명, 실제적으로는 반혁명의 혐의가 짙다"고 질타했다. 그는 또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종전에 우리 당은 늘 쑨중산(中山/쑨원의 호)의 군사운용에 대해 호되게 꾸짖었는데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장제스와 탕성즈 모두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혁명을 진압했다. 이에 대해 당 중앙은 보고도 못 본체 외면하고 있다. 군사투쟁의 중요성에 주의해야 하는데도 여전히 선명한 의식이 없다. 상임위원회는 시시때때로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정권은 총구(무력)에서 얻는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세계 각국에서 회자됐던 마오의 '정권(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 회의 때 나왔다.

 

마오는 훗날 자술(自述)에서 '창간쯔주의(槍杆子主義/무력주의)‘ 를 이렇게 풀었다.

 

"그때 내가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槍杆子里頭出政權)고 말하자 나에게 '총구(무력)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들은 정권이 어떻게 총구에서 나오느냐고 힐난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일이 없고, 책에도 그런 말이 나와 있지 않다.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총구주의'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확한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다(武裝奪取政權)'라는 말을 한바 있다. 내가 말한 뜻도 바로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결코 소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총(무력) 그곳에서 정권이 뛰쳐나온다." (주석 46)

 

마오는 무장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정권탈취를 거론하면서 깊고 예리하게 논단한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그저 보고 듣는 것이 새로울 뿐이었다. 마오는 4개월 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혁명은 밥을 사는 일이 아니다. 글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고 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점잖고 고상하거나, 온화, 선량, 공경, 검약, 양보 등의 미덕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혁명은 봉기이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하나의 계급을 엎어버리는 격렬한 행동이다. 농촌혁명은 농민계급이 봉건 지주계급의 권력을 뒤집는 것이다."

 

마오의 이 말은 많은 농민들의 좌우명이 되었다. 마오는 이날 회의에서 마지막으로 영도(領導)방법과 조직의 정책결정 문제에 관해 말했다. 이후 당의 상급기관은 널리 이익이 될 만한 의견을 구해 민주의식을 고취시키고 하급기관과 기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 또 군중들의 의견과 요구를 굳건하게 실천할 때만이 비로소 불혁명을 혁명으로 바꿀 수 있고, 부정확한 것을 정확한 것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오가 이렇게 4개 방면에 대해 말한 것은 그가 후에 반복해 논술한 ‘3대법보(法寶)’, 즉 통일전선, 무장투쟁, 당의 건설 등에 관한 최초의 구상을 뜻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혁명을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동력으로써 그 발언의 요체는 천두슈의 우경투항주의의 과오를 비판하고 실패한 대혁명의 경험과 교훈을 총결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당 지도방침, 당 중앙의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추이추우바이는 ‘최근 농민투쟁의결안’을 제출한 뒤 당내에서 농민투쟁 연구 전문가로 공인된 ‘농민왕’ 마오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마오는 토지문제는 농민 문제의 핵심으로 중국혁명의 주요 내용인데 토지혁명의 규정이 공허하다고 전제하고 4가지 수정안을 내놨다.

대중(大中)지주의 기준을 확정해 그 범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50무이상의 밭을 소유한 지주를 대중지주로 획정하고 토지를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 마오의 4가지 수정안은 빈농과 단결하고, 중농을 이끌면서 부농을 단속해 농촌에서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결성해 지주제도와 지주정권을 엎어야 한다는 것을 대강으로 하고 있다. 밤에 계속된 회의에서는 임시 정치국 구성과 관련해 코민테른이 제출한 후보명단에 대한 심의가 있었다.

차이허선은 장궈타오를 빼고 마오쩌둥을 넣을 것을 제안했다. 차이허선은 “중앙 핵심기관이 우경 투항주의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걸출한 인재의 새로운 피를 수혈해 새로운 정책을 관철해 나가야 한다”면서 “높은 이론수준과 풍부한 실천경험이 있고 당원 군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농민들이 존경하는 마오쩌둥을 정치국위원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대표들이 잇따라 찬동했다.

하지만 마오는 “동지들의 신임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한 뒤 “후난에 돌아가 추수봉기를 해야 하는 만큼 정치국원으로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고사했다. 대표들은 마오의 뜻을 존중해 그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뽑았다. ‘8.7회의’는 토지혁명과 반 국민당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농민을 발동한 추수봉기를 당면한 당의 주요 임무로 채택했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대혁명 실패를 딛고 토지혁명 전쟁의 새로운 투쟁의 길로 나섰다. 당은 마오에게 후난성에서 추수기의(秋收起義)를 이끌 것을 지시했다. 마오는 창사에 가 당 중앙에서 특파한 신분으로 후난, 장시변계(湘竷辺界 ) ‘추수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주석 47)

 

1927년 8월 하순, 공산당 후난성위원회는 ‘총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토지혁명을 실행’한다는 내용의 추수봉기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성위는 또 마오를 전적위위원회(前敵委員會) 서기로 임명하고, 마오가 9월 9일에 후난성과 장시성이 인접하는 변계지역에서 무장 추수폭동을 지휘할 것을 결정했다. 마오는 출정을 앞두고 굳건한 신념을 다지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처가 빤창을 다녀온 뒤 창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마오는 양카이후이에게 "후난성위원회가 나를 후난과 장시성 변계에 파견해 무장 추수폭동을 이끌 것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양카이후이는 마음이 밝지 못했다. 마오가 일개 서생으로 붓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총을 갖고 무력투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곳엔 흉(凶)한 일은 많지만 길(吉)한 일은 적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당신은 다른 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총 갖고 하는 일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양카이후이가 이렇게 말하자 마오는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양카이후이는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당신의 말은 맞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전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내가 반년동안 군 생활을 해봤고, 군벌들의 패잔병으로부터 무기도 노획한 일이 있소. 전투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소."

"저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요. 성위원회에서 당신의 일을 다시 검토했으면 해요."

"이 일은 이미 성위원회에서 결정했고, 우리는 마땅히 당 조직의 결정에 따라야 하오."

 

양카이후이는 마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떠나세요."

"모레 출발하오."

"그럼, 저는 내일 빤창으로 돌아갈 게요."

"바라다 주리다."

 

마오는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혁명부붑니다. 같은 배를 타고 만 7년 동안을 함께 왔어요. 당신이 많이 도와줬소. 큰 희생을 했어요. 지금 혁명은 내가 전선에 나가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집안일은 여전히 당신이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소. 장모님과 아이들을 부탁해요. 당연히 고향 농촌에서 혁명 활동에도 참가해야 되고-."

"여기 일은 마음 놓으시고 전선에 나아가 잘 하세요. 고향에 돌아가 비밀 농민운동을 하면서 어머니와 아이들을 잘 보살필 게요-."

 

다음 날 이른 아침, 마오는 짐을 꾸려 창사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양카이후이를 배웅하러 길을 나섰다. 그들 부부는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다. 마오는 다시 장모를 잘 봉양할 것과 아이들을 보살필 것을 부탁하면서 안정되는 대로 바로 편지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날씨 유의하시고, 항상 자신을 잘 보살피세요. 안전에 주의하세요. 꼭 편지하시구요."

 

양카이후이는 눈물을 머금은 체 마오가 갖고 있던 짐 꾸러미를 건네받으면서 몸에 지니고 있던 10여 원을 마오에게 주었다.

 

"이 돈은 꼭 몸에 지녔다가 급할 때 쓰세요. 당신 바쁘실 텐데,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항상 잘 준비하시구요. 저 갈래요!."

"조금 더 바라다 주리다."

"됐어요."

 

양카이후이는 머리를 돌린 뒤 앞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눈자위가 축축해진 마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양카이후이 모습이 살아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들 부부의 이날의 별리가 영원한 이별인 영결(永訣)이 될 줄을-.

 

전투를 앞두고 일반 지휘관들은 모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마오는 좀 달랐다.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면서 마작을 하는 여유를 부렸다. 전선에 나가기 전 추수폭동 행동위원회 서기인 이리롱(易禮容) 등과 함께 밤새워 마작을 했다. 이들은 두 패로 나눠 마작을 하면서 용병(用兵)하는 놀이를 했다.

한 패가 된 마오와 이리롱은 먼저 출전하는 마오와 뒤에 출전하는 이리롱이 상대편과 공수진퇴를 하면서 서로가 정찰과 공격 등의 호흡을 맞추며 적을 깨트리는 전략과 전술을 시연했다. 마오는 예의 그의 특기인 '조사연구'를 마작에도 원용했다. 확률을 따져보는 것이다. 마오는 마작을 통해 '전, 후방 폭동시 배합의 문제' 중, 특히 후방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마오는 이리롱에게 후방이 단독행동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환기시켰다. 후방을 책임 맡고 있는 이리롱은 전방의 군사공격이 진전이 없을 경우 경거망동한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마오에게 약속했다.

 

마오는 출발 기차시간이 다가오자 국민혁명군의 군관 복장을 벗고 허름한 농민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중공중앙 특파원 겸 '후난-장시' 변계 추수기의 전적(前敵)위원회 서기인 마오는 9월초 창사에서 안위안(安源)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 장자완(張子灣)에서 추수폭동 회의를 소집한 뒤 각 방면의 군사책임자가 참가하는 전적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했다. 마오는 또 부대 구성과 진격 목표 등 군사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1연대(團/퇀)는 슈수이(修水)에서 출발해 창서우제(長壽街)에서 핑장(平江)을 공격하도록 했다. 2연대는 안위안에서 핑샹(萍鄕), 리링(醴陵)으로 진격하면서 3연대와 류양(瀏陽)을 공격한다. 3연대는 통구(銅鼓)에서 출발해 류양을 압박하면서 2연대와 연합해 남북 협공으로 류양을 빼앗도록 했다. 이와 함께 창사의 노동자와 농민이 폭동으로 내응해 창사를 공격하도록 했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는 슈수이, 통구로 가기로 했다. 마오는 가는 길에 무장 경호대를 대동하지 않아 류양 경내에서 민단(民團)요원들에게 붙잡혔는데 기지를 발휘해 탈출했다. 그는 다행히 시간에 맞춰 3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통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주석 48)

 

“창사에서 벌일 내 활동계획은 다섯 가지 목표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는 성당(省黨)을 국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고, 둘째는 노동자, 농민 혁명군을 조직하며, 셋째 대지주는 물론, 중. 소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넷째 국민당과 별개인 공산당의 권력 기반을 후난에 구축하며, 다섯째는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것인데 코민테른이 반대했기 때문에 이 목표를 슬로건으로 표면화시킨 것은 얼마가 지난 후였다. "

노농혁명군은 농민과 한양(漢陽)지역 광부, 국민당의 반란군 등 세 곳에서 모집했다. 혁명군을 ‘노농 제1군 제1사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1사단의 1연대는 한양지역 광부들로 편성했고, 2연대는 후난성의 핑장, 류양, 리링과 다른 2개현의 농민보위대중에서 편성했다. 3연대는 왕징웨이에 반란을 일으킨 우한(武漢)수비대의 일부로 조직했다. 나는 국민당과 협력하는 민단에 붙잡혔었다.

당시 국민당의 테러행위는 그 절정에 이르러 공산주의자로 혐의를 받은 수백 명이 총살당했다. 나를 민단본부로 끌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그곳에 가면 살해당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호위병들에게 나를 풀어주도록 뇌물을 썼다. 일반 병사들은 용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나를 풀어주는 데 찬성했지만 담당 장교가 거부했다.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기회를 잡아 민단본부에서 2백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들판으로 달아났다. 나는 주위에 풀이 제법 높이 자란 연못 위의 높은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해가 질 때까지 숨어 있었다. 병사들이 나를 추적하다가 나중에는 농민들 몇 사람까지 동원해서 수색했다. 이들은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여러 차례나 가까이 다가 왔고, 한두 번은 몸이 닿을 정도까지 접근해 와서 이제 꼼짝없이 잡히는가 싶어 대여섯 차례나 희망을 포기했지만 용케도 발각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들은 수색을 포기했다.

나는 즉시 산을 넘어 밤새도록 걸었다. 신발이 없어서 두 발은 심하게 상처가 났다. 길에서 나는 어느 농부를 만났는데 그가 나를 도와 숨을 곳을 마련해 주고 나를 가까운 현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7원이 있었는데 이 돈으로 신과 우산을 사고 음식을 사먹었다. 마침내 나는 농민 보위대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45)揭秘: 誰是中央黨史上的第一個臥英雄 人民網 文史頻道 朱德入堂
46)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47)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10. 마오, 불퇴전의 투혼 품고 노농혁명군 이끌어

 

1927년 9월 9일 마오는 추수폭동의 불길을 당겼다. 이 소식은 중국을 뒤흔들었다. 작전계획대로 1연대는 핑장 창서우제를 공격해 들어갔다. 창서우제는 후난-장시 변계의 요충지로 성이 견고했으며 1개 연대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1연대는 10일 군중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돌진해 핑장현 룽먼창(龍門廠)을 점령했다. 이어 핑장현 성으로 진군하려 할 때 반란이 일어 난데다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연대장이 실종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류양을 공격하기로 한 2연대는 애초 핑샹으로 진격하기로 했으나 작전을 바꿔 라오관(老關)을 공격해 점령한 뒤 리링현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중무장한 병력의 반격을 받아 성에서 철수해 곧바로 류양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2연대 일부 지휘관이 적을 가볍게 본데다 재빨리 철수하지 못해 국민당 군 2개 연대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했다. 3연대는 2개 연대의 공격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마오는 처음 이끌었던 추수폭동이 경험부족과 국민당 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참담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마오는 창사 공격을 포기하고 기의(起義)부대들이 원자스(文家市)에 집결하도록 했다. 각 부대들은 악전고투 끝에 9월19일 후난성 류양현 원자스에 합류해 리런(里仁)학교에 주둔했다. 이날 밤 마오는 리런학교에서 전적위원회 회의를 열고 추수폭동의 실패원인을 분석한 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마오는 적의 병력이 강하고 기의부대들이 좌절을 겪어 혁명의 열기가 떨어진데다 적들의 주요 역량이 도시에 집중해 도시공격 중심의 전략이 어렵기 때문에 창사 공격계획을 바꿔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적의 통치 역량이 떨어지는 농촌으로 이동해 우리의 역량을 보존해 농촌에서 토지혁명을 심화시켜 농민대중과 함께 무장투쟁을 벌여 혁명 역량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7년의 마오쩌둥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하나.
마오는 학교에서 빌려 온 지도를 펼쳐 놓고 후난-장시 변계에 있는 산세가 가장 넓어 보이는 곳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눈썹모양처럼 생겼는데 뤄샤오(羅霄)산맥 중단에 위치해 우리가 머물 곳으로는 안성맞춤하다. 우리들이 이곳에 가 산사람(山大王/산적)이 되자. 뤄샤오 산맥은 후베이(湖北), 후난, 장시, 광둥(廣東) 등 4개성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장시와 후난성의 분계선을 이루고 있다. 북단은 지세가 중단처럼 험준하지 않아 대도시에 가까워 국민당 통치력이 비교적 강한 곳이다. 남단은 지세가 북단보다 좋지만 군중들의 지지기반이 중단만 못하다. 중단은 지세가 험준한 고산준령인데다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나아가 공격하기 좋고, 물러나 지키기 좋다. 또 대도시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 장제스의 통치역량이 비교적 약하다. 혁명의 일거수일투족이 후난과 장시성의 남부에 영향을 미쳐 정치적 의미가 아주 큰 곳이다. 이곳은 또 자급자족의 자연경제가 가능하고 비교적 대중들의 지지기반이 좋은 편이다. 특히 징강산(井岡山)지구는 군량과 마초를 저장하고, 군사를 기르고 무리를 모으며 혁명역량을 축적하는 데 아주 좋은 곳이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마오의 형세분석에 동의했으나 일부에서는 못마땅해 했다. 오랜 동안 혁명을 꿈꿔왔는데 산에 올라가 산적이 되자는 게 말이 되냐며 이런 게 무슨 혁명이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마오는“우리가 산사람(게릴라전)이 되자는 것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농무장이다. 중국은 정치가 통일 되지 않았고 경제발전이 불균형하며 모순이 대단히 많다. 우리는 적들의 빈틈을 찾아야한다”고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부대 총지휘를 맡고 있는 루더밍(盧德銘)이 강하게 마오를 지지했다. 그는 지금 창사를 공격한다면 전군이 전멸할 위기에 놓인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사단장인 위사두(余灑度)는 류양을 취한 뒤 창사를 공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마오는 군사모험주의라며 엄하게 비판했다. 총지휘 루더밍을 따르는 부하들이 잇따라 지지하고 나서 루더밍의 지지는 징강산 결정에 큰 구실을 했다. 얼마 뒤 위사두는 장제스 국민당에 투항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마오는 징강산 출발에 앞서 리런학교 운동장에서 혁명과 무장투쟁의 당위성을 내용으로 한 연설을 했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싸우는 노농무장 혁명군이다. 장제스는 혁명을 배반하고 노농군중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있다. 우리는 적들이 이런 피바람을 일으키는 도살에 저항하고 계속 혁명을 위해 끝까지 굳세게 투쟁해야 한다. 제2의 활로는 없다. 우리는 총을 가져야 한다. 지난날 우리들의 실패는 총의 이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우리는 꼭 무장투쟁을 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 원대한 이상과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번 추수기의는 비록 몇 차례 패전해 좌절을 맛 봤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됐다. 더욱 단결하고 용감하게 싸워나가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렵다. 혁명을 해야 한다.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석 49)

 

이날 오후 마오는 불퇴전의 투혼을 가슴에 품고 직접 노농혁명군을 영도해 뤄샤오 산맥에 자리한 징강산으로 출발했다. 마오의 부대는 남쪽으로 행군하다 루시(蘆溪)에서 국민당 군의 매복 기습공격을 당해 병력이 1천명도 채 되지 않았다. 마오는 장시성 융신(永新)현 경내의 싼완(三灣)에 도착해 곧바로 부대를 정비했다. 1개 사단을 1개 연대로 축소, 개편하고 노농혁명군을 제1군 제1사단 제1연대로 명명했다. 실제로는 2개 대대 7개 중대 규모에 불과했다. 간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지식분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일련의 좌절을 겪은 데다 위험을 무릅쓴 힘든 투쟁을 앞두고 놀라 허둥대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보고도 없이 부대를 이탈했다. 군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대를 추스르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해서 마오는 자유의사에 따라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도록 했다.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5원의 노잣돈을 주었다. 남은 자들은 전투와 고난으로 단련된 혁명가들로서 인원은 줄어들었지만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마오는 부대에 당의 각급 조직을 건립했다. 연대와 대대에는 당 위원회, 중대에는 지부를, 또 중대 이상에는 당 대표를 두도록 했다.

마오는 또 당의 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를 만들어 자신이 서기를 맡았다. 당이 부대를 절대적인 지배아래에 두는 조직체계를 이때 만들었다. 마오는 또 정치상 관병(官兵)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종전의 군대조직과는 달리 '사병위원회'를 구성해 장교들이 사병위원회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등 혁명적 조처를 취했다. 장교와 사병이 먹는 것과 입는 것도 동일하게 해 사병들의 권익을 크게 개선했다. 이는 극단적인 민주화와 평균주의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군벌시대의 악습을 타파하고 민주적인 작풍을 고취하면서 계급적 단결을 공고히 해 원만하게 극복하도록 했다. 이후 공산당은 '당이 군을 영도' 하는 등 이때의 개혁적인 조처를 '싼완 개편'이라고 부른다.

 

징강산 언저리인 융신현 싼완촌에 부대를 주둔시킨 마오는 징강산에 이미 무장한 산적들이 웅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안원차이(袁文才)와 왕줘(王佐)가 결의형제를 맺고 징강산 중단과 상단부에 산채를 엮어 각각 100여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산적두목(山大王)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들은 토끼가 우리 주변의 풀을 먹지 않는 전략을 세워 '부호를 죽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주나 토호, 관부를 공격해 징강산 주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마오는 둘레가 5백여 리 되는 징강산에 둥지를 틀기 위해서는 위안원차이 등 녹림 우두머리의 협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위안원차이와 닝깡현 당 조직 책임자인 룽차오칭(龍超淸)에 각각 편지를 보내 싼완에서 만나 혁명투쟁을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그날 닝깡현 마오핑(茅坪)에 있던 위안원차이도 군대로 보이는 패거리들이 싼완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뒤 위장한 국민당 군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어 자세한 정보를 캐기 위해 첩자를 내려 보냈다. 싼완에 잠입한 첩자는 노농혁명군이 붙여 놓은 표어를 몰래 떼어내 밤을 도와 산채로 달려왔다. 대소 두령들은 목을 빼고 '국민당 신 군벌을 타도하자!' '토호를 타도하고 토지를 나누자!'라고 씌어 진 표어를 보면서 의견이 분분했다.

 

이들은 위장한 국민당 군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소두령 위안딩주(袁丁珠)를 내려 보냈다. 몰래 잠입한 위안딩주는 서생원마냥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노농혁명군에게 붙잡혔다. 대대장 우중하오(伍中豪)가 심문했다.        

"누가 보냈나. 무엇을 했느냐?"
"묻지 마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당신들이 감히 나를 어떻게 할 거요!"

소두령은 내심으론 당황했지만 이렇게 희떱게 말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인 우 대대장은 이런 유의 인간들을 다루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에게 보고한 뒤 총살하겠다고 을러댔다. 마오는 보고를 받은 뒤 "어이, 총살하지 말고 그자를 이리로 데려오게. 상황을 물어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소두령이 들어오자 마오는 앉으라고 말한 뒤 유머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어제 표어를 붙혀 놨는데 밤사이에 없어졌다. 날개도 없는데 날아갔다. 어느 산꼭대기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는가?"

소두령이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가을바람이 그것을 산꼭대기로 보냈나 봅니다. 산채 형제들이 '토호를 타도하고 토지를 나누자'라는 구호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해서 저보고 한 번 내려가서 전말을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했어요."

마오는 앙천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들의 표어를 당신들이 떼어 갔구먼. 그렇다면 그대는 징강산에서 내려온 형제가 아닌가!"

소두령 위안딩주는 "예"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마오는 "우리는 공산당이 이끄는 노농혁명군이요. 당신이 산채로 돌아가 위안 대두령에게 내가 만나자고 하더라고 전해주시오."

 

이때 위안원차이 등 대소 두령들은 소두령의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보초가 모르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말인즉슨 싼완촌에서 위안 따꺼(큰형)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며 건넸다. 위안원차이가 편지를 보니 자기와 룽차오칭에게 보낸 것이었다.

위안원차이는 회의를 소집해 편지내용에 대해 대소 두령들과 토론을 했다. 그들 중에 천무핑(陳慕平)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우창(武昌) 중앙 농민운동강습소의 원생이었다. 천무핑은 편지에 쓴 마오의 서명을 보더니 "잘 됐다"고 기쁜 얼굴로 말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있을 때 몇몇 두령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천무핑은 "마오쩌둥은 내가 농민운동강습소에 다닐 때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오셨다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위안원차이 대두령에게 함께 마오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두령들은 우선 천무핑이 먼저 가 마오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다면 천무핑은 룽차오칭과 함께 마오를 만나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때 소두령 위안딩주가 마오핑에 돌아와 싼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보고했다. 룽차오칭도 마오핑에 와 마오의 편지를 보았다. 룽차오칭은 잘됐다며 위안원차이에게 함께 가자고 해 다음날 출발하기로 했다.

49)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11. 노농혁명군 징강산 근거지 마련 마오의 '통큰 설득' 주효

 

 

중국 공산당이 1927년 처음 농촌혁명근거지를 마련한 징강산.

 

마오는 마오핑에서 사람이 온다고 해서 그들을 맞으려 문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모르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마오, 선생님!"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오는 그를 맞으며 "당신이 누군데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 합니까"하고 물었다.

 

"천무핑입니다. 우창 중앙 농민운동강습소 학생입니다."

"아, 당신이구만! 그대는 수영할 줄 모르지. 모두들 당신보고 맥주병이라고 했지. 맞지요?"

"예! 예!"

 

천무핑은 계속 머리를 끄덕였다. 천무핑은 마오에게 룽차오칭을 소개했다. 천무핑은 징강산 상황을 얘기했고, 룽차오칭은 위안원차이가 얼마 전에 공산당에 가입한 당내 동지라고 설명했다. 마오는 추수폭동이 좌절된 것과 징강산에 오게 된 경위 등을 얘기했다. 양쪽은 의기투합해 이야기꽃이 피었다. 마오는 두 사람이 총을 갖고 있지 않은 원인을 물었다. 룽차오칭은 "우리 산채에서 총은 대단히 귀중하고 돈 주고도 사지 못해 밖에 나갈 때는 잃어버릴까봐 총을 휴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오는 "지금은 무장폭동 시대인 만큼 당신들은 돌아갈 때 총 1자루씩 갖고 가라"고 했다. 마오는 또 "우리 부대가 언제 닝깡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물었다. 룽차오칭은 "여기서 닝깡까지 30리 남짓하기 때문에 내일 닝깡 고성(古城)에 도착할 수 있다"면서 "우리가 먼저 돌아가 준비 하겠다"고 시원스럽게 말했다. 당시 총은 사람보다 귀했다. 사람 한 명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총은 1자루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다. 룽차오칭과 천무핑은 등에 총 한 자루씩 걸머지고 닝깡 고성으로 돌아갔다.

 

룽차오칭은 고성에 남아서 노농혁명군의 주둔지를 물색하고, 천무핑에게 산채가 있는 마오핑에 가 위안원차이 대두령에게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마오핑에 돌아 온 천무핑은 대소두령들에게 마오를 만난 상황을 보고했다. 노농혁명군들이 좋아 보이고 인원도 많으며 황푸군관학교 출신도 많다. 그들은 우리와 연합해 함께 혁명투쟁을 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대소 두령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먹어 치우려는 생각이 없는 만큼 안도하면서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화제가 천무핑이 갖고 온 총으로 옮겨갔다.

대두령 위안원차이는 총은 좋은 물건이라며 3가지 예찬론을 펼쳤다. 첫째 먹을거리를 찾을 수 있고, 둘째 자신을 보호하며, 셋째 복수를 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두령이 천무핑의 총을 만져보며 “좋구먼, 한양(漢陽)제”라고 부러운 듯 말했다. 몇몇 두령들이 다가와 총을 들고 조준을 해보는 등 수선을 피우다 “아깝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니”하며 아쉬워했다. 대두령 위안원차이는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해본다. 노농혁명군이 산채에 들면 국민당 추격군이 안 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들이 온다면 과연 내가 두목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는 산채식구들에게 마지막 결정을 이렇게 얘기했다.

 

“연합하는 것 당연히 좋다. 인원이 많으면 세력도 늘어나고, 총이 있으면 병력도 강해진다. 토호와 악질 지주들을 응징할 수 있다. 하지만 징강산 산촌과 산채는 작다. 밭도 적고, 생산하는 양곡도 많지 않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우선 그들에게 양식을 보내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등 잠시 도와 준 뒤 그들이 다른 큰 산을 찾아 떠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주석 50)

 

마오와 천하오(陳浩)가 이끄는 노농혁명군 제1사단 제1연대는 닝깡 고성에 머물면서 부대를 안돈시키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위안원차이가 보낸 대표가 마오에게 부대 급식에 쓸 수 있도록 자금 일부를 건넨 뒤 웅거할 다른 큰 산을 찾아 볼 것을 권유했다. 마오는 산채 대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함께 혁명투쟁을 벌일 것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오는 위안원차이가 토호와 악질 지주들에 반대하는 좋은 혁명동지로 힘을 합쳐 싸웠으면 하는 바람을 재고해 주길 요청했다.

위안원차이의 대표는 마오의 진지하고 성실한 설득에 많은 감명을 받고 산채로 돌아갔다. 마오는 위안원차이를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고 룽차오칭을 위안에게 보내 자신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회견 장소는 위안원차이에게 일임했다. 마오는 상견례 선물을 무엇으로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싼완에서 룽차오칭과 천무핑을 만났을 때 그들이 총을 가장 필요로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오는 위안원차이가 60여 정의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다면 화끈하게 100정의 총을 줘 그의 환심을 사는 게 회견 성공의 관건이 된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그런 뜻을 연대 간부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아연실색했다. 100정의 총은 부대가 보유하고 있는 총기의 7분의1로 전력차질을 우려했다. 마오는 징강산 근거지 확보와 그들의 믿음을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득해 간부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회견 장소는 마오군이 주둔하고 있는 닝깡 고성과 위안원차이 산채가 있는 마오핑의 중간지점 따창(大倉)촌으로 결정됐다.

 

연대장 천하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1개 소대병력을 이끌고 갈 것을 제안했다. 마오는 자신과 천하오, 그리고 경호원 1명 등 3명이 가면 된다고 했다. 인원이 많으면 오히려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는 것이다. 천하오는 녹림당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3명이라니 어이없어 했다. 마오는 “그들을 믿고 존중해야 한다. 더욱이 위안원차이가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음날 마오 일행은 룽차오칭의 길 안내를 받으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산채에서도 경호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군사상 방비를 철통같이 하는 게 좋다는 얘기였다. 위안원차이는 상대방에 대한 실례라며 마뜩찮아 했다. 한 두령이 헌책을 내어 “무장병력을 따창촌 뒤에 있는 숲에 매복해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위안원차이는 아미를 찌푸린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회견 장소에서 만난 마오와 위안원차이는 서로간의 인사말을 나눴다. 위안원차이가 말했다.

 

“마오 위원, 우리는 깊은 산중에 오랫동안 살알 보고들은 것이 적으니 먼저 우리에게 세상 돌아가는 시국상황을 말씀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오는 예의상 위안원차이가 먼저 말할 것을 권했다. 마오는 한번 사양한 뒤 대소 두령들에게 대혁명 실패 후의 형세를 설명했다. 마오는 당 중앙이 천두슈의 좌경투항주의의 과오를 바로 잡았고, ‘8.7회의’에서 토지혁명과 무장투쟁 방침을 확정한 사실 등을 알려줬다. 또 추수폭동이 실패해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 등을 얘기했다. 마오는 화제를 바꿔 이곳 상황을 물어봤다.

위안원차이는 “이곳은 한때 번창했었는데 시국이 바뀌는 바람에 산속으로 후퇴해 들어갔다. 지금 당신들이 닝깡에 왔으니 혁명폭동이 일어나고 시끄러울 것 같다”고 말끝을 흐렸다. 마오는 말을 받아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들의 지지를 받아 연합해 함께 혁명을 하고 싶어서다. 하나는 총(무력)에 의지하고, 또 하나는 광범한 군중들에 기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잘 결합해 토호들을 타도하고 토지를 고루 나누면 반동 통치를 엎어버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오는 위안원차이를 쳐다보며 “당신들은 이곳에 총이 몇 자루 있으며, 인원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위안원차이는 “1백60여 명이 있고 총은 60정이 있는데 어떤 것은 사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마오는 “당신들이 대혁명이 실패한 역경 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장을 확대하고, 혁명역량을 넓히려면 이런 양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렇게 하자. 우리가 1백정의 총을 선물로 주겠다”며 통 크게 나왔다. (주석 51) 

 

위안원차이는 자신이 잘못 듣지나 않았는지 얼떨떨해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모습으로 마오를 쳐다보았다. 다른 두령들도 반신반의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볼 뿐 이었다. 마오는 이런 정경을 훔쳐보고 힘찬 어조로 “당신들은 내일 롱스(礱市)로 사람을 보내 1백정의 총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이러자 대소 두령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위안원차이는 마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노농혁명군들이 급식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우리가 돈(7백원)을 조금 준비했다. 우선 급한 대로 보태 쓰고, 앞으로 힘 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오와 천하오는 매우 기뻤다. 천하오는 마오에게 눈을 찡끗했고, 마오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오는 위안원차이에게 “원차이 동지, 하나 상의할 게 있다. 우리들은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휴양할 수 있도록 마오핑에 야전병원과 막사를 짓고 싶은데 어떻겠는가”라며 의중을 타진했다. 여러 두령들은 이에 대한 준비가 없어 위안원차이만 쳐다보았다. 위안원차이는 좌중을 한번 훑어보고 “우리들은 즐거움을 함께 즐기고, 어려움도 함께 나눠야 한다. 노농혁명군의 마오핑 주둔을 환영하고, 마오핑에 야전병원과 막사를 짓는 것을 동의 한다”고 선선하게 말했다. 마오와 천하오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때 주안상이 들어왔다. 회의 자리는 이내 술판으로 바뀌어 권커니자커니 시끌벅적하며 한 덩어리가 되었다. 마오는 징강산 상단부에 산채를 얽은 왕줘의 합류를 위안원차이에게 맡겼다.

 

노농혁명군이 위안원차이 산채 식구들과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마오핑에 진주했다. 꽹과리와 북이 울려 퍼지고 폭죽이 일제히 터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길 양쪽에는 갓 잡은 돼지와 양의 피를 뿌렸다. 이런 의식은 이 지역 산촌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최대의 접대방식이었다. 위안원차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노농혁명군은 양식과 기름, 채소 등 부식 공급이 해결됐다.

엉성하지만 빠르게 야전병원과 막사를 지어 1백여 명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양병할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 노농혁명군이 마오핑에 초보적 주둔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마오는 녹림당이었던 왕줘와 위안원차이를 개조하고, 그의 무리들을 무장시켜 노농혁명군과 함께 유격전을 벌여 지주와 악질토호들을 응징했다.

또 주민들을 도와 소비에트 정권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공 전적위원회는 1928년 2월 중순께 위안원차이와 왕줘의 무장부대를 노농혁명군 제1사단 제2연대로 승격 개편했다. 위안원차이를 2연대 연대장 겸 1대대장으로, 왕줘를 2연대 부연대장 겸 2대대장으로, 허창공(何長工)을 2연대 당대표로 각각 임명했다. 당의 2연대 영도를 강화하기 위해 1연대에서 20여 명의 정훈간부들을 파견해 사상정치 공작을 펼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 노농혁명군의 역량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징강산 근거지를 세우는 그 기초를 다졌다.

50)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51)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중앙문헌출판사, 마오쩌둥전(상) 봉선지, 김충급 주편 중앙문헌출판사

 

-------------------------------------------------------------------------------------------------------------------------------------------------------

 

12. 주더-마오부대 연합…홍군 군사력 증강 박차

 

마오는 장제스 군의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에 맞서 1, 2연대 군사간부 회의를 소집해 신청(新城)을 공격하기로 했다. 3면에서 포위공격하고 1면에 매복한 뒤 운동전(運動戰)으로 적을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밤에 부대를 인솔해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작전계획에 따라 병력을 배치했다. 다음 날 새벽에 소두령 위안딩주가 융신에서 닝깡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끊었다.

장제스 군이 도수체조를 하고 있는 틈을 타 1, 2연대가 맹공을 퍼부었다. 격전 끝에 적군 1개 대대와 1개 정위단(靖衛團) 5백여 명을 전멸시켰다. 대대장을 사살하고 현장(縣長)을 생포했으며 감옥에 갇혀있던 30~4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구출했다. 신청전투는 대승을 거뒀다. 왕줘와 위안원차이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장제스 군의 대군도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마오가 자신들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더욱 더 마오를 우러러 봤다. 마오는 신청전투 후 롱스에서 닝깡현 군민 만인대회를 열어 국민당 현장(縣長)을 사형시키고 닝깡현 노농정부를 건립했다. 앞서 노농혁명군은 차링(茶陵), 수이촨(遂川) 두 현의 국민당 정권을 분쇄하고 노농정권을 세운바 있다. 이것은 농촌혁명근거지의 표상이 되었는데 징강산 근거지의 초보적 형태였다. (주석 52)

 

혁명의 정예부대가 징강산에 모여, 역량을 집중하니 더욱 굳세졌네, 홍군의 영도를 끌어 올려, 5차례에 걸친 포위 소탕전을 물리치고 확고하게 전장터를 지켰다. (革命雄師井岡, 集中力量更堅强, 紅軍領導提高後, 五破圍攻固戰場)

 

이 시는 주더가 징강산에서 부대 합류를 기념하여 뒷날 더욱 강해진 홍군의 기상을 담아낸 것이다. 주더와 천이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으켰던 난창기의가 실패하자 광둥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국민당 군과 전투를 벌이며 남진을 계속했다. 주더는 세가 불리하자 병력을 보존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윈난강무당 동기생인 국민당의 판스성(范石生) 부대 140연대에 왕카이(王楷)로 이름을 바꾸고 들어가 국민당 군 행세를 했다.

주더와 천이는 그 후 1928년 봄에 후난성 대지를 뜨겁게 달군 후난기의를 일으켰다. 7개현에 잇따라 소비에트 정권을 세운 뒤 후난성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했다. 노동자, 농민 등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지기반을 넓혀 갔으나 공산당 후난성위원회의 좌파적 과격정책이 타오르는 불에 찬물을 끼었는 꼴이 되어 급격히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일부 군중들이 공포 심리에 빠져 혁명대열에서 이탈해 갔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광둥과 광시(廣西), 후난성 군벌들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끝내고 결탁해 남, 북, 서쪽 3면에서 후난 쪽으로 주더 군을 포위 공격해 들어왔다.

 

이런 준엄한 상황에 직면한 주더는 혁명역량을 비축하기 위해 불리한 전투를 피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주더는 후난에서 지속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부분적인 병력을 남겨 놓고 주력부대와 새로 만든 농민군은 후난에서 철수해 징강산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앞서 마오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광저우(廣州)에서 광저우기의를 일으켰던 남쪽의 주더-천이 부대와 연계를 갖기 위해 허창공을 광저우로 파견한바 있다. 당시 국민당의 백색테러가 전국에서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허창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광저우에 잠입해 백방으로 주더 부대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때는 이미 광저우기의가 실패해 주더가 이름을 숨기고 윈난강무당 동기생인 판스성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고 있어 찾을 수가 없었다. 허창공은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광저우를 두 번째 잠입해 천신만고 끝에 적군의 입을 통해 샤오관(韶關)리푸터우(犁鋪頭)에 있던 주더를 찾을 수 있었다.


 

 

주더 & (왼쪽부터) 1944년의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주더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

 

 

허창공은 마오가 자신을 주더에게 파견하고, 마오가 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한 사실을 보고했다. 주더는 징강산의 무장상태와 지형과 산세, 도로교통, 경제상황, 지도자들의 근황에서부터 둔병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주더는 이후 징강산에서 부대를 합류해 혁명역량을 집중하기로 허창공에게 이야기했다. 허창공은 난창기의가 실패한 뒤 뿔뿔이 흩어진 패잔부대들을 징강산에 합류시키기 위해 3번째 동분서주하다 국민당 군에 잡혀 피살되기 직전 탈출해 생명을 건졌다.
 
그는 주더와 마오의 부대가 징강산에서 합류해 홍군의 ‘주마오’시대를 여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 주더는 징강산으로 마오를 찾아가기로 했다. 천이가 연락할 합당한 사람이 있다고 주더에게 말했다. 바로 마오의 친동생 마오쩌탄(毛澤覃)이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주더는 25사단에서 정치공작을 하던 마오쩌탄을 16군의 부관으로 변장시켜 장제스 군의 관할구역을 통해 징강산의 마오를 찾아가 부대합류(會師)를 논의토록 했다.

마오쩌탄은 마오핑에서 형인 마오를 만나 두 부대의 구체적인 합류문제를 매듭지었다. 헌데 날벼락 같은 일이 1928년 3월 상순께 벌어졌다. 공산당 후난특위에서 저우루(周魯)를 대표로 뽑아 징강산에 보냈다. 저우루는 중공중앙 임시정치국 확대회의 결의와 후난성위의 지시를 마오에게 전달했다. 마오가 전적위원회의 서기로서 ‘방화와 살인이 너무 적다(燒殺太少)’는 이유로 질책하고 중앙 임시정치국 후보위원직 박탈과 성위원회위원직 철회를 통보했다. 또 전적위원회를 폐지하고 마오를 사단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오가 징강산을 내려와 후난폭동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마오는 하산 후 후난 폭동현장으로 가지 않고 후난 링(酃)현 중촌에 집결했다. 마오는 이곳에서 부대를 정돈하고 훈련하면서 마오쩌탄에게 특무중대 병력을 딸려 보내 폭동현장의 주더와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3월 하순께 주더와 천이가 인솔한 후난 기의군이 광둥과 후난 군벌의 협공을 받아 후난에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마오는 급히 병력을 둘로 나눠 후난으로 진격했다. 마오가 지휘하는 노농혁명군 1연대는 구이동(桂東), 루청(汝城)으로 전진하고, 위안원차이와 허창공이 인솔하는 2연대는 펑공마오(彭公廟), 쯔싱(資興)으로 나아갔다.

 

주더는 3월말 후난 레이양(耒陽)에서 부대이동 준비를 끝내고 후난기의의 주력부대인 노농혁명군 제1사단과 새로 만든 4사단, 그리고 송차오성(宋喬生)이 이끄는 수이커우산(水口山) 노동자무장부대를 인솔해 마오쩌탄이 대동한 특무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4월 상순 안런(安仁)과 차링을 거쳐 링현의 미옌두(沔渡)에 도착했다. 천이는 천저우(郴州)에서 징강산으로 부대를 이동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 후난 농민군을 이끌고 쯔싱으로 부대를 이동해 위안원차이와 허창공이 인솔하는 2연대와 합류했다. 4월 중순 천이가 이끄는 노농혁명군 주력 일부와 후난 농민군 3사단, 7사단과 위안원차이, 허창공이 인솔한 2연대가 링현 미옌두에서 주더가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4월 24일을 전후해서 주더와 천이가 인솔한 기의 주력부대인 노농혁명군 제1사단과 후난 농민군 1만여 명이 장시성 롱스에 도착했다. 마오는 미옌현 일대에서 적의 추격을 저지해 주더 군을 엄호하면서 롱스로 회군했다. 마오와 주더, 천이는 룽장서원(龍江書院)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마오는 주더에게 축하의 포옹을 한 뒤 “이번 후난-장시, 두성의 적들이 끝내 당신들의 부대를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고 말했다. 주더는 매우 감격해 하며 “우리가 빠르게 부대이동을 한 것은 모두 당신들의 엄호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다음날 룽장서원 문성각에서 공산당 노농혁명군 제4군 1차 대표대회를 열고 마오, 주더, 천이 등 23명으로 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마오가 군사위원회 서기로 당선됐다.

 

5.4운동 9주년이 되는 5월 4일, 산자수명한 롱스가 유달리 시끄러웠다. 하늘이 희뿌연해지면서 사람들이 사면팔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롱장 강변 모래밭에 행사장이 마련됐다. 몇 개의 곡식통과 문짝으로 주석단을 만들고 대나무와 갈대로 엮은 자리 등으로 차양을 꾸몄다. 주석대 양쪽에는 각양각색의 깃발과 표어가 나붙었다. 전사들이 보무당당한 발걸음으로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닝깡, 수이촨, 융신, 링현 등지의 농민 군중들은 어깨에 긴 창을 둘러맨 채 홍기(紅旗)와 각종 표어가 적힌 자그마한 깃발을 들고 쉼 없이 흐르는 물처럼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마오와 주더 부대의 합류를 경축하는 흥겨운 행사장은 환호와 웃음꽃이 만발하는 환희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오전 10시께 마오, 주더, 천이, 왕얼쭤(王爾琢)와 근거지의 당정군 각 방면의 대표들이 주석단에 올랐다. 천이가 대회 시작을 선포하자 수십 명의 나팔수들의 장엄한 군악을 시작으로 폭죽이 일제히 터지면서 행사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천이는 두 부대합류 뒤 중국 노농혁명군 제4군의 개편을 선포하고 군단장에 주더, 당대표에 마오, 참모장에 왕얼쭤가 각각 임명되었음을 공표했다. 주더가 열렬한 박수소리를 받으며 주석대 앞에 나와 연설했다.

 

“우리당이 이끄는 두 부대 혁명무장의 승리적 합류는 중국 무장혁명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번 부대합류로 우리들의 역량이 크게 커졌다. 또 징강산의 근거지를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부단히 적들을 타격하고, 부단히 혁명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두 부대합류로 더욱 단결해 전투력을 높여 적들을 철저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노농혁명군은 반드시 홍색근거지를 보위하고, 군중의 이익을 보호할 것을 인민대중들에게 약속한다.”

 

이어 마오가 등단해 부대합류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아주 낙관적인 분석을 내놨다. (주석 53)

 

“우리는 비록 수적으로나 장비로 볼 때 적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있고, 인민의 지지가 있다. 적을 이기지 못한다고 해서 겁내지 않는다. 적들은 손오공이 아니다. 설사 그들이 손오공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대응할 방법이 있다. 우리는 석가여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적들의 약점을 찾아내 병력을 집중하고 그 부분에 대해 집중공격을 할 것이다. 10개의 손가락도 서로 크기가 다르다. 연꽃이 물위에 필 때도 높낮이가 서로 다르다. 적들도 강한 곳과 약한 곳이 있다. 적의 약한 곳을 파고들어 맹공을 퍼부으면 이긴다. 그런 뒤 우리는 적의 뒤로 물러나 술래잡기를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고, 적을 우리 손바닥에 놓고 갖고 놀 수 있다.”

 

5월 25일, 중공중앙은 ‘군사공작대강’을 공포하였다. 종전의 ‘노농혁명군’의 명칭을 정식으로 ‘홍군’으로 쓰기로 함에 따라 중국 노농혁명군 제4군은 ‘중국홍군 제4군’이 되었다. 통상 ‘홍4군’으로 줄여 불렀다. 징강산 ‘주-마오’부대의 합류는 주더와 마오가 각각 이끌었던 북벌전쟁의 빛나는 전통의 기의부대들이 한데 뭉쳐 중국 홍군을 창건해 징강산 혁명근거지의 군사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징강산 투쟁의 전성기를 열고 홍군건설과 혁명근거지를 확대 발전시켜 무장투쟁의 빛나는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53)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13. 마오와 17살 처녀 허쯔전의 운명의 만남

 

앞서 마오는 징강산에서 양카이후이가 ‘혁명부부’라면, 온갖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전쟁연대에 살면서 인간한계를 시험한 2만5천리 장정을 함께 한 ‘환난(患難)부부’ 허쯔전(賀子珍)을 만났다. 1927년 10월, 마오는 징강산에 갓 들어와 위안원차이, 왕줘의 녹림당과 무장투쟁 협력방안을 협하기 위해 이들의 초청을 받고 산채에 올라갔다가 위안원차이의 소개로 허쯔전을 알게 되었다.

마오는 이날 낡고 헤진 중산복에다 붉은 목수건을 목에 매었다. 그는 비쩍 말라 키가 더욱 커 보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머리칼은 길게 늘어졌다. 피부는 비교적 검었고 낯빛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으나 두 눈은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위안원차이가 산채의 대소 두령을 소개하면서 옆에 있는 17살의 허쯔전을 마오에게 인사시켰다. 마오는 힘들고 고달픈 투쟁환경의 징강산에 이런 젊은 처녀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우두머리 급 반열에 있어 마오는 매우 놀랐다. “융신현의 간부 허쯔전입니다.” 위안원차이가 허쯔전을 소개했다. “나는 당신의 딸이거나, 어느 동지의 가족인줄 알았습니다.”

 

마오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위안원차이는 “단지 17살 처녀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 공산당에 가입한 혁명 간부”라고 치켜세웠다. 허쯔전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마오는 “대단하오, 이후 우리 함께 잘 싸웁시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징강산에 왔을 때 다리에 부상을 당해 뿌윈산(步雲山)에서 치료하다 마오핑의 빠자아오러우(八角樓)로 옮겼다. 그곳은 위안원차이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마오는 때때로 마오핑 강변을 산책하는 등 집을 들고날 때 위안의 집 앞을 지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허쯔전은 위안의 부인과 아주 가까워 때때로 그의 집에서 머물기도 했었다. 그때 허쯔전은 학질에 걸려 몸이 허약했다. 어느 날 허쯔전이 위안원차이의 집 문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마오가 지나가다가 보고 그에게 다가가 병세를 묻는 등 몇 마디의 말을 나눴다. 그 후 마오와 허쯔전은 한가할 때 얘기를 나누면서 무람해졌다. 마오는 허쯔전의 신상과 그의 투쟁경력을 알게 됐다. 허쯔전은 징강산 산록의 융신현에서 태어났다. 때는 바야흐로 계수나무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을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계원(桂圓)’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허쯔전은 학교에 다닐 때 이름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착하고 진중하다는 뜻을 담은 ‘쯔전(自珍)’으로 했다가 다시 ‘쯔전(子珍)이라고 바꿨다. 허쯔전은 대혁명 당시 학교에 다닐 때 적극적인 좌파로 1925년에 공청단에 가입했다가 이듬해 공산당원이 됐다. 그녀는 당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해 당을 넘나들면서 현의 당무를 봤다. 부녀부장을 맡기도 했다. 허쯔전은 이후 위안원차이가 이끄는 농민자위군에 가입해 그들과 함께 ’융신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성공 얼마 뒤 후난과 장시의 국민당 군이 연합해 공격해 왔을 때 허쯔전은 적위대를 이끌고 융신현 남문성에서 적 1개 특무대대를 격파해 100여 정의 총을 노획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이 맹공을 퍼붓고, 백색테러가 횡행해 위안원차이 등 폭동부대가 징강산으로 들어갈 때 허쯔전도 따라갔다. 마오는 허쯔전의 용감한 혁명정신에 감탄하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 1928년 6월, 홍군이 제3차 융신을 공격했을 때 허쯔전은 공작대와 함께 융신현 시샹(西鄕) 탕볜(塘邊)촌에 와 토호들의 토지를 몰수해 분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후 마오가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허쯔전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혁명근거지를 막 건립해 어떻게 합리적으로 토지분배를 하야할 지 통일된 규정이 없었다. 마오는 통일적인 토지법을 만들기 위해 직접 융신현의 여러 촌락을 돌아다니며 조사연구를 하는 한편, 허쯔전과 공작대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등 허쯔전의 실무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허쯔전은 이때 마오와 일하면서 마오로부터 조사연구의 방식과 방법 등 체계적인 공부를 배워 자신의 능력을 계발시켰다. 마오와 허쯔전은 ‘탕볜사건’ 뒤 미묘한 관계로 발전했다. 어느 날 한 방의 총소리가 산림의 정적을 깨트렸다. 지주 보안대들이 탕볜을 습격했다. 마오를 잡아 장제스한테 상을 받자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마오와 허쯔전은 조사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허쯔전은 부근에 주둔해 있던 홍군 중대와 마오의 경호원들이 군중작업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허쯔전은 어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오를 쳐다보았다. 마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한 마오는 적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모험이라고 판단했다. 마오는 주민들에게 연락해 빨리 철수 할 것을 지시했다. 지주 보안대들은 마을에 쳐들어왔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것으로 알고 이것저것 약탈한 물건을 갖고 사라졌다.

전화(戰火)가 어지러이 날리는 시절에 비록 평범한 사건이었지만 허쯔전은 마오가 추호도 놀라지 않은 채 태연자약 하며 과단성 있게 일처리를 하는 혁명가적 기질을 보고 더욱 앙모하게 되었다. 이때의 허쯔전은 몸매가 날씬한데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큰 눈망울이 반짝거려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융신의 한 떨기 꽃이라는 ’일지화(一枝花)’의 이름을 얻었다.

 

어느 날 허쯔전이 마오의 방에 들어가려다 마오가 책상에 않아 무언가를 쓰고 있어 조용히 문지방에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마오는 붓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머리를 돌리는 순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허쯔전의 눈빛과 마주쳤다. 찰나의 ‘사랑의 바다’를 거닐던 마오는 허쯔전은 젊고, 질박하고, 순정하면서도 열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허쯔전도 곧바로 눈빛을 거두고 어쩔 줄 몰라 애꿎은 단추만 만지작거렸다. 노련한 마오가 침묵을 깼다. 마오는 급히 허쯔전을 앉게 한 뒤 짙은 후난 발음으로 “당신은 좋은 동지고, 좋은 처녀다. 나는 당신을 좋아 한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마오는 자신이 살아 온 이력과 신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34살이고 이미 결혼했으며, 후난의 집에 부인과 세 아이가 있다고 했다. 마오는 집안 얘기를 할 때 침통해 했다. 멀리 떨어져 연락이 끊긴지 오래 돼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마오는 또 부인 양카이후이가 후난의 반동분자들에게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했다. 그날 그들은 오랜 동안 이야기를 했고, 의기가 투합했다. 허쯔전은 마오의 솔직담백한 얘기에 감동했다. 서로 다른 이력과 서로 다른 신상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명을 일으켰다. 서로 애모(愛慕)하는 마음은 부지불식간에 한 덩어리가 되었다. 허쯔전은 마오가 일이 과중해 생활을 스스로 살피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는 마오를 존경하고 동정하면서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마오와 허쯔전은 날이 갈수록 서로 마음이 통하고, 정이 깊이 들면서 환란 중에 사랑이 싹터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54)

 

결혼식은 간단하게 치렀다. 마오나이 34살, 허쯔전 18살 이었다. 가장 기념할만한 선물은 허쯔전이 등잔불 밑에서 정성스럽게 한땀 한땀 수 놓은 마오가 어깨에 멜 수 있는 서류가방이었다. 이 수제품은 허쯔전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마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좋은 인연을 축원하는 결정체였다. 훗날 마오는 이 서류가방을 행군을 하거나 작전을 할 때 항상 어깨에 메고 다녔다. 허쯔전은 결혼 후 마오의 손발이 되어 징강산에서 구하기 힘든 신문들을 스크랩하고 마오가 글을 쓰거나 서류를 작성할 때 필요로 하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마오는 1931년 깐난(竷南)회의에서 잘못된 노선을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고 소비에트중앙국 대리 서기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닝뚜(寧都)회의에서 홍1방면군 총 정치위원 직을 해직 당해 묵묵부답의 우울한 세월을 보냈다. 허쯔전은 이때 막 아이를 낳아 허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마오가 심기일전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줜이(遵義)회의 이후 마오가 전당전군의 주요 영도자가 되면서 일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 허쯔전은 비서가 아니었지만 마오를 돕기 위해 전보를 필사하거나 서류를 정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무릎을 책상 삼아 일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허쯔전은 장정을 하면서 어린 아들인 마오마오(毛毛/실종됨)를 떼어 놓고 갈 수밖에 없었고, 장정 중 낳은 아이(실종됨)는 현지인에 맡길 수밖에 없는 등 어머니로서 험난한 삶을 살았다. 그는 5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죽고 실종돼 장정이 끝난 뒤 산베이(陝北)에서 낳은 쟈오쟈오(嬌嬌/훗날 마오가 리민<李敏>으로 개명함)만 슬하에 뒀다. 허쯔전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이 보장된 옌안에서 마오와 ‘환난 10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했다. 허쯔전이 마오와 통역비서간의 불륜을 들어 당에 조사를 요구한 사건 때문이었다.

54)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14. '평생의 숙적' 마오와 장제스의 20세기 '초한지'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南京)정부를 수립하고 국민당 좌파 정부인 왕징웨이의 우한(武漢)정부를 무너뜨려 권력을 오르지 하면서 베이징 북양군벌에 대한 3차 북벌에 나섰다. 장제스는 1928년 2월 허난성(河南省)일대를 장악한 군벌 펑위샹(馮玉祥), 산시성(山西省)을 기반으로 한 군벌 옌시산(閻錫山)과 연합해 당시 최대의 군벌인 펑톈(奉天)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공격했다.

일본의 조종을 받던 장쭤린은 일본이 지지를 철회하자, 이들 연합군에 패배해 베이징과 톈진을 포기하고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만주로 후퇴하던 중 6월 그가 탄 열차를 일본군이 폭파시켜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당에 합류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장제스는 겉으로 중국 전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장제스는 이때 북쪽의 수도라는 뜻의 베이징(北京)을 ‘북쪽의 평화’라는 의미로 베이핑(北平)으로 바꿨는데, 1949년 10월 마오가 신중국을 창건하면서 다시 베이징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장제스는 1928년 신해혁명 기념일인 10월 10일에 내란과 군벌시대의 종언을 선언해 난징정부가 중앙정부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중국 곳곳에서 군벌들의 통치가 여전했고, 북벌과정에서 새로운 군벌이 생겨나기도 했다. 마오가 말한 신군벌은 광시(廣西) 군벌로 급성장한 리종런(李宗仁)과 바이충시(白崇禧)로 근거지인 광시뿐만 아니라 구이저우, 후난, 후베이까지 장악했다.

군벌 리지천(李濟琛)은 광둥성을 통치하고 있었다. 구 군벌인 양선(楊森)은 쓰촨성, 옌시산은 산시성, 펑위샹은 허난성, 장쉐량은 만주 등을 관할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에 합류한 이들에 대한 지역 통치권을 사실상 인정해 군벌들의 할거양상은 그대로였다. 여기에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의 경우 윈난은 가로회(哥老會)의 우두머리였던 독군 룽윈(龍雲)이, 쓰촨 남부지역에서는 숙질간인 군벌 류샹(劉湘)과 류원후이(劉文輝), 티벳은 군벌 성스차이(盛世才)가 각각 장악해 난징정부의 통치 사각지대였다. (주석 55)

 

여기에 공산당은 ‘혁구(革區)’ ‘소비에트 근거지’ ‘혁명 근거지’ ‘해방구’ '공산당 근거지‘ 등의 이름으로 장악한 지역을 자치지역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최초의 근거지이자 가장 영향력이 큰 곳이 마오와 주더가 합류한 징강산 근거지였다. 이들은 6개현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고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추구하고, 소련의 지원과 영향력, 호감 등을 고려해 따다 쓴 것으로 이 지역 안에서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이때 공산당의 소비에트 구역은 징강산 이외에 후베이성 서부에서는 허룽(賀龍), 동부에서 출발한 쉬하이둥(徐海東)은 후베이, 허난, 안후이성, 즉 '어-위-환(鄂豫皖)' 변계에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나중에 장꿔타오, 쉬샹치옌(徐向前)이 이 지역을 관할했다. 팡쯔민(方志敏)과 샤오스핑(邵式平)은 푸젠성(福建省)에 인접한 장시성 동북경계지역에서, 펑파이(彭湃)는 광둥성 하이루펑(海陸豊)에서, 덩즈후이(鄧子恢), 장딩청(張鼎丞)은 푸젠성 서부에서 각각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이처럼 장제스의 4.12쿠데타 후 지하로 잠적했던 공산당들이 중국 각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장제스는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산당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녁은 징강산이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를 다툰 한초전(漢楚戰)이 20세기에 부활해  장장 2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평생의 숙적 마오와 장제스의  ’축록전(逐鹿戰)‘은 그 규모나 기간, 인명살상, 이념적인 면 등에서 역사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장제스는 마오 보다 6살 위로 1987년 저장성 소금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사숙에서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장제스는 톈진 바오딩(保定) 속성학당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학교인 전우(振武)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귀국해 1914년 쑨원의 국민당에 들어가 측근에서 일했다. 1919년 쑨원이 재조직한 국민당의 권력지형은 우익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후한민(胡漢民), 해외 자본가 출신의 아들인 랴오중카이(廖仲愷), 좌익을 대표하는 무정부주의자였던 왕징웨이(王精衛)로 3분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국민당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5월에 설립한 군 간부 양성학교인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을 맡았다. 8월에 랴오중카이가 암살되고, 그 배후로 지목된 후한민이 권력의 실세에서 멀어졌다. 국민당 내의 권력구조에서 우익을 대표하는 장제스의 입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주석 56)

 

1926년 여름, 국민당은 쑨원 사후 제2차 북벌에 나섰다. 공산당원과 좌익세력으로 구성한 북벌군은 예팅(葉된挺)과 소련 군사 고문 갈렌의 지휘를 받으며 광둥성에서 우한 쪽의 북서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또 북벌 총사령관인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군은 난징과 상하이로 향하는 북동쪽으로 진군했다. 우한을 점령한 북벌군은 왕징웨이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국민당 우한 좌파정부를 세웠다. 장제스는 장시성의 성도인 난창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장제스는 1920년대 상하이에서 증권 중개업을 한바 있어 친분이 있는 상하이 금융계 인사, 마피아인 청방(靑幇), 홍방(紅幇) 우두머리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로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영국, 프랑스 등 외국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또 1919년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상하이 마피아 청방은 많은 도시 노동자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18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가 주도하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80만의 노동자를 동원해 총파업을 벌였다. 4일 만에 노조 행동대원들은 상하이에 주둔한 북양군벌의 장종창(張宗昌) 부대를 북방으로 내쫒았다. 장제스의 북벌군은 전투가 끝난 3월 23일에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와 상하이 자본가 그룹, 청-홍방 등 상하이 마피아의 지원을 받아 4.12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의 최고 실세가 됐다. 장제스는 18일 쑨원의 국민당 정통성을 내세워 ’난징정부‘를 세우고, 3개월 만에 우한 좌파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려 국민당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다. 장제스는 그 뒤 북벌을 끝내고  공산당을 축출하기 위해 대규모의 포위소탕전에 돌입한 것이다.
     
마오가 처음 징강산에 들어갔을 때 병력이 1천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주더와 마오 군이 합류하면서 병력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이미 후난, 장시의 국민당 군이 여러 차례 포위공격을 해왔다. 홍군은 처음 3년 동안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다. 장제스가 5차례의 대규모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을 벌이기 직전 홍군의 병력은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제스는 1차 공격 때 10만 명, 2차 20만 명, 3차 30만 명, 4차 50만 명, 5차 50만 명 등 5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을 펼쳤다.

1930년 10월, 장제스가 제1차 포위 소탕전을 벌이기 전 마오는 동원 대회에서 전투 요령을 응집한 16자로 된 대련(對聯)을 써준 일이 있었다. 대련은 이러했다. (주석 57)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

“유격전에 승산이 있다. 빠르게 진격하고 퇴각한다(大步進退). 적을 깊숙이 유인한다(誘敵深入). 병력을 집중한다(集中兵力). 각개 격파한다(各個擊破). 운동전으로 적을 섬멸하자.”

 

홍군의 유명한 이 16자결(字訣)은 마오의 군사 전략적인 지도사상을 고도로 응집해 개괄한 것이다. ‘16자결’은 주더와 마오가 인솔한 홍군이 유격전을 벌이면서 겪은 것을 총결하면서 마오가 창안해 낸 것이다. 1928년 1월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마오가 수이촨(遂川)성에서 전적위원회와 완안(萬安)현 위원회 연석회의를 주재할 때 처음 거론했다. 그때에는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등 12자였다가 이후 16자 결로 완결됐다. 홍군이 3만여 명으로 늘어나고 적에 대항하는 힘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홍군은 유격전에서 운동전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후반부 16자결이 만들어졌다. 장시성 중앙 소비에트에 대한 장제스의 4차례 소탕전에 맞서 3차례는 마오가 부대를 지휘했다. 4차 때는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이끌었다. 이 네 번의 반 포위공격 소탕전은 모두 ‘적을 깊숙이 유인해 각개격파’하는 운동전을 벌여 승리했다.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런 전략 전술을 이렇게 털어놨다. (주석 58)

 

“징강산에서는 네 가지 16자결이 채택됐다. 이것은 유격전에 활용한 전법들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된다. 홍군은 바로 이런 전법을 활용한 유격전 속에서 성장했다. 4자씩 이뤄진 이 결(訣)들은 처음에 실전 경험이 있는 많은 군인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들은 그런 형태의 전술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체험 속에서 이 전술이 옳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홍군이 이런 전술에서 벗어나면 대체로 실패했다. 우리는 병력수가 적어서 적군보다 10배에서 20배까지 열세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자원과 전투물자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전과 유격전을 잘 배합시켜야만 우리보다 엄청나게 풍부하고 우세한 위치에서 싸우는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있었다. 홍군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전술은 과거나 현재나, 공격할 때는 주력을 집중시키고 공격이 끝나면 병력을 신속하게 갈라서 분리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곧 진지전을 피하고 이동 중에 있는 적의 부대를 궤멸시키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이런 전술을 바탕으로 홍군은 기동성과 신속하고 강력한 속도전을 발전시켰다. 홍군은 일반적으로 소비에트지구를 확대시켜 나가는 데, 약진이나 도약 형태처럼 점령한 지역을 뿌리 깊게 다지지 못하고 나가는 고르지 못한 전진보다는 파도 형태나 물결 형태의 전진을 찬성했다.
이런 방침은 실제적인 계획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군사적, 정치적 체험을 축적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은 리리산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모든 무기를 홍군의 수중에 집중시키고 모든 유격대를 흡수, 통합시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악한 지역을 견고하게 다지기보다는 공격을, 배후를 굳게 지키기보다는 전진을 원했고 봉기와 병행한 떠들썩한 대도시 공격과 극단주의를 추구했다.

 

당시 이런 리리산 노선이 당-소비에트지구 밖의-을 지배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발휘해 야전지휘관들의 판단과 어긋나는 그런 노선을 홍군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창사에 대한 공격이고 난창을 향한 진군이었다. 그러나 홍군은 이런 모험 중에도 유격대가 기존 위치를 고수하게 함으로써 후방을 적군에게 열어 놓는 일은 배격했다.”


 

 

타이완의 장제스.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중국사'  /  펑더화이

 


1928년 말, 신중국 건국 후 10대원수의 두 번째 자리에 오른 펑더화이(彭德懷)가 인솔한 국민당군의 대부대가 징강산에 합류해 홍군의 전력이 한층 강화됐다. 펑더화이는 앞서 7월 후난성 군벌 허젠(何健) 군단에서 근무하다 핑장(平江)에서 폭동을 일으켜 8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에 왔다. 펑더화이는 마오보다 5살 아래인 1898년 9월에 마오의 고향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후난성 샹탄(湘潭)현 한 농촌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읊었던 아름다운 샹장(湘江)의 푸른 물줄기가 가없이 흐르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6살 때 사숙에서 ‘삼자경’ ‘논어’ ‘맹자’ ‘대학’ 등을 배웠다.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병들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6개월 밖에 안 된 넷째 동생은 어머니가 숨진 뒤 1개월 만에 굶어 죽었다. 10살 때 집안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정월 초하루에는 집에 밥 지을 쌀이 없어 둘째 동생을 데리고 부잣집을 찾아가 동냥질하는 거지노릇도 했다. 어떤 때는 70살 된 할머니와 4살배기 셋째 동생을 데리고 구걸에 나선 적도 있었다. 산에가 나무를 해 시장에 팔아 근근이 연명했다. 펑더화이는 엄동설한에도 짚신을 신고 나무를 해 시장에 팔거나, 물고기를 잡아 팔거나, 탄을 캐다 팔거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펑더화이는 유년시절 같이 사는 큰 할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펑더화이는 큰 할아버지가 틈틈이 해주는 청나라 말 때 홍수전의 농민반란 ‘태평군’에 관한 이야기를 비분강개하며 들었다. 펑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두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들만 아는 토호나 악질 지주들을 타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펑은 10살 때부터 2년 동안은 부농인 류(劉)씨네 집에 가서 두 마리의 소를 봐주면서 꼴을 베는 일을 했다. 13살 때부터 2년 동안은 탄광에 가서 일했다. 펑은 탄광이 도산하자 광산주가 달아나 노임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펑더화이는 이때 부농과 자본가들이 일꾼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착취하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펑더화이가 15살이 되던 해 큰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각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대지주의 집에 찾아가 평상가격에 쌀을 팔 것을 간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를 지켜 본 펑더화이는 기민들과 함께 대지주의 창고를 털었다. 펑더화이는 살기 위해 외지로 도망가야 했다. 그는 달아난 샹인(湘陰)현에서 제방 공사장의 인부가 됐다. 제방 관리들의 임금착취가 얼마나 심한지를 몸으로 체험했다. 펑더화이는 훗날 이런 유, 소년기 때 빈한하고 힘들었던 생활이 자신을 단련시켰고, 항상 이때의 생활을 기억해 자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했으며 가난한 인민들의 생활을 잊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55)중국현대사 장세노, 프랑소와즈 르 바르베에, 마리-끌레르 베르제르 지음/ 신영준 옮김 도서출판 까치
56)중국현대사 쟝세노, 프랑소와즈 르 바르비에, 마리-끌레르 베르제르 지음/ 신영준 옮김 도서출판 까치
57)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58)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15. "일한 만큼 분배하고 계급착취 소멸 위해 분투해야"

 

펑더화이는 18살이 되던 1916년 3월에 후난 군(湘軍)에 사병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북양군벌 독군(督軍) 탕샹밍(湯薌銘)이 성장으로 있었는데 대혁명을 진압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후난 사람들이 축출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쑨중산(孫中山)과 광시 군대가 후난인을 도와 탕샹밍을 공격하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입대 동기에 대해 어떻게 부국강병을 해 나라를 구하겠는가 하는 기만적인 자산계급의 애국사상에 동감하고,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펑더화이는 후난 육군 제2사단 3여단 6연대 1대대 1중대에 이등병으로 들어가 원수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 2사단장은 반 쑨원파이고, 여단 연대장은 쑨원 옹호파였다. 1917년 북양군벌의 푸량줘(傅良佐)가 새로운 독군으로 후난에 와 헝산(衡山)일대에서 후난 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양 군 함대가 창장을 거슬러와 기습적으로 웨저우(岳州)를 점령했다.

1918년 1월 후난-광시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북양군벌인 장징야오(張敬堯), 우페이푸(吳佩孚), 펑위샹(馮玉祥)이 대거 후난에 진격해 광시-후난 연합군은 계속 후퇴했다. 펑더화이는 1918년 7월 대대장 위안즈(袁植)가 적진인 성도 창사에 들어가 북군(북양군벌)의 동향을 정탐해 오도록 지시해 정탐을 벌이다 붙잡혀 보름 남짓 갇혀있다 풀려났다. 펑더화이는 당시 상황을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한 시간 가량 온갖 고문을 당해야 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나의 발을 묶고 팔도 등 뒤로 묶은 뒤 손목에 밧줄을 감아서 나를 매달았다. 그런 뒤 그들은 큰 돌을 나의 등에 올려놓고는 둘러서서 발길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내가 자백할 것을 요구했다. 내게 불리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나는 고문이 끝날 때 마다 다음번에는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매번 다음 날 까지만 버텨보리라고 결심했다. 결국 그들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고, 놀랍게도 나는 석방됐다. 내 생애 중에 느낀 깊은 만족 중의 하나는 몇 년 후 우리들(홍군)이 창사를 점령하여 그 옛날의 고문실을 때려 부술 때 느낀 만족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갇혀있던 수백 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는데 그들 중의 태반이 매 맞고 잔인하게 학대당하고 굶주려 거의 반죽음 상태에 있었다.”

 

펑더화이는 후난 군이 4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북양군벌 장징야오를 거의 물리칠 즈음 정식으로 소대장이 되었다. 후난군(湘軍)은 후난을 되찾았지만 군 내부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펑더화이는 군 생활 6년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1922년 6~7월께 군대 동료이자 군내 비밀조직인 구빈회(救貧會)회원 황공뢔(黃公略), 리찬(李燦) 등이 잇따라 후난 육군 군관강무당에 함께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이들은 집에 까지 찾아와 설득했다.

펑더화이는 시험에 합격해 소정의 과정을 거쳐 졸업한 뒤 6연대 1중대장에 임명됐다. 1925년 가을에 들어서면서 후난 군벌 내부 갈등이 첨예화하기 시작했다. 자오헝티(趙恒척), 허야오주(賀耀祖) 등 군벌은 국민혁명군인 광둥의 북벌군과 탕성즈(唐生智)가 연계하는 것을 두려워해 탕성즈를 선제공격, 격파할 것을 논의하는 등 군내 분위기가 흉흉했다. 펑더화이 부대는 국민혁명군 탕성즈 군에 가담하게 됐고, 우창(武昌)성 남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우창성을 점령한 뒤 펑더화이 소속의 1사단은 35군단장 허젠(何鍵)의 부대에 배속됐다. 펑더화이는 북양군벌 우페이푸의 잔당들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받고 사단 정치비서장인 두안더창(段德昌)과 함께 위취안산(玉泉山)에 진주했다. 위취안산은 송백(松柏)이 울울창창하고 지세가 험요했다. 삼국연의에 묘사된 관운장이 현신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규모가 큰 관제묘(關帝廟)가 있었다. 펑더화이와 두안더창은 관우 사당에 배알하러 갔다. 두안이 펑더화이에게 관운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관우는 봉건통치자들의 도군데, 현재도 여전히 통치계급에 이용당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흥미가 없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뜻있다고 본다."
"국민혁명군의 최종 목적이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현재 매일 제국주의, 군벌, 탐관오리, 토호와 악덕지주를 타도하고 토지세를 25% 감세하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나는 당연히 경자유전(耕者有其田)원칙을 실행하고 감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경자유전 원칙을 즉각 실행한다. 생산방식을 사유제에서 공유제로 바꿔 수요에 따라 일한 만큼 배분하는 공산주의제도로 가야 한다. 공산당은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러시아 볼세비키는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끈 뒤 이미 일한 만큼 분배하는 제도를 실행해 계급착취를 소멸시키고 있다. 공산당원은 바로 이런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 분투한다. "

공산주의를 설명한 두안 정치비서장은 펑더화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국민당에 가입할 것인가."
"가입 안 한다. 가입할 생각이 없다."
"왜."
"당신, 이 자들을 보지 않았는가. 탕성즈, 허젠 등등. 모두 군벌 대지주다. 불교를 믿는 척하면서 사람을 기만하고 있다. 허젠 등은 아편을 흡입하고 팔면서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토지 감세도 반대하고 있다. 어느 구석에 혁명이 있는가."

두안 정치비서장은 묵묵부답이다. 펑더화이가 물었다.

 

"국민당 중앙당 상황은 어떤가."
"장제스, 후한민, 쑨커(孫科/쑨원 아들), 쑹쯔원(宋子文), 따이지타오(戴季陶) 등 모두가 가짜 혁명이고, 반혁명분자이다."

 

펑과 두안은 2시간여 동안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다. 펑은 훗날 이때의 대화가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줬고, 두안에게 고맙고 그를 존경하게 됐으며 때때로 그때의 대화가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펑과 두안의 대화는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대화내용은 펑더화이가 활동하고 있는 구빈회(救貧會) 회원들에게 전달됐다. 구빈회 회원들은 사병위원회(士兵委員會)를 조직해 야간학교 형식으로 운영했다.

실제적으로는 정치 시사문제 등 일종의 의식화 교육이었다. 두안더창 정치비서장을 초청하는 강좌가 가장 많았다. 1927년 펑더화이가 소속한 1사단이 웨이저우에 급파됐다. 며칠 뒤인 5월21일에 마일(馬日)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4.12쿠데타를 일으킨 장제스와 우한 국민당 좌파 정부수반 왕징웨이의 사주를 받은 쉬커샹(許克祥), 허젠 등 국민당 군벌이 후난성 창사를 포위 공격해 노동조합과 농민협회 공산당원과 회원 들을 검거해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1927년 9월 말 여단장이 된 펑더화이는 공산당 가입을 적극 모색했다. 10월 14일 황혼 무렵에 특별위원인 장쾅(張匡)이 펑을 찾아왔다. 나이는 스물 대여섯 살 되어보였다. 펑더화이는 "당신의 이름을 안지 오래 되었다"며 그에게 친근감을 표시한 뒤 그가 주도한 이틀 전 쌍십절 공작을 칭찬했다. 토호와 악질지주들에 대한 공격은 잘 한 일이다. 그러나 큰 모험이었다. 군내 당 조직의 비밀이 폭로될 수도 있다. 펑더화이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펑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다. 군대 내에서 다들 나 보고 국민당 좌파라고 한다. 나는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국민당에 가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월 기념식장에서 저우판(周磐)이 장교들은 모두 국민당 당원이라고 말했다. 회의도 없이 당비를 걷고 있지만 입당원서를 쓴 일이 없다."

 

장쾅이 긴장하는 빛을 보이자 펑더화이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 나는 공산당을 마음으로 지원하는 사람이다. 북벌전쟁 때 우창을 공격할 무렵부터 마르(馬日)사변 전까지 두안더창 동지와 비교적 친밀했다. 그는 당시 우리 사단 정치부 비서장이었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나는 그와 여러 차례 이야기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소개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공산당중앙이 8군에 공산당원 확장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보고 싶은데 마르사변 뒤 볼 수 없다. 나는 지금 공산당 가입이 절실하다. 국민당은 철두철미 반혁명집단이다."

 

-------------------------------------------------------------------------------------------------------------------------------------------------------

 

16. 포위망 뚫은 주더 부인의 기지…꽃다운 나이에 끝내 효시돼

 

며칠 뒤 장쾅이 펑을 찾아왔다. 두안더창 동지가 펑더화이의 공산당 가입을 추천했고, 특위위원들이 토론을 거쳐 공산당 입당을 통과시킨 뒤 성위원회에 보고했는데 비준하는 대로 다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1928년 2월 하순께 펑더화이는 입당식을 열고 공산당원이 됐다. 그는 군내에 공산당지부를 설치해 서기가 됐다. 이때 당원은 덩핑(鄧萍), 장룽성(張榮生), 리광(李光), 펑더화이 4명이었다.

나중에 리찬(李燦), 리리(李力)를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펑더화이 사단은 4월 말 핑장(平江)에 진주했다. 옌중루(閻仲儒) 여단은 현지의 토호와 지주들이 조직한 민단과 향단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공산당원과 군중들을 살육했다. 농민유격대들은 계속 저항했다. 옌 여단 부대원들과 민단 패거리들은 가옥에 불을 지르고, 소나 돼지, 닭 등 주민들의 가축을 약탈하는가 하면 농민들의 물건을 보는 대로 빼앗아 토비들보다도 악랄했다. 주민들은 이런 만행에 치를 떨면서도 두려움으로 펑더화이의 사단장 저우판이 핑장에 들어올 때 70여 만의 인파가 거리에 쏟아져 나와 '부모가 살아 다시 돌아 온 것'처럼 환영했다. 펑더화이는 잇따라 공산당원이 검거되고, 군 동료인 황공뢔 마저 체포되자, 후난성위에서 특파한 텅다위안(騰代遠)등과 함께 7월 22일 기의(起義)를 일으켜 핑장을 개혁하기로 결의했다. 펑더화이는 7월 22일 오전 10시 반 핑장 동문 밖 제1대대 연병장에서 핑장기의 출정식을 열었다. (주석 59)

 

펑더화이는 연단에 올라 사자후를 토했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에 복무하고, 노동자-농민-군인 혁명정부를 세우고 노농홍군을 창설한다. 장, 사병은 평등하고 장교는 사병위원회에서 선거한다. 중국공산당을 옹호하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경자유전 원칙을 실천한다. 지금 핑장 현청으로 진군해 경비단 등 국민당 군을 토멸하고 일체의 반혁명기관을 해산시킨다. 구속된 인민 군중을 석방하고 반혁명분자를 체포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한다. 우리는 용감하고 견결하게 혁명임무를 완수하자. 제국주의와 국민당 정부를 타도하자!."

 

펑더화이의 봉기군들은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오후 1시 현청으로 진격해 3시께 현청을 점령했다. 펑더화이는 23일 오후 텅다이위안을 홍5군 당대표로 성위원회에 건의했다. 다음 날 오전에 열린 사병위원회에서 펑더화이는 홍5군 군사령관 겸 13사단 사단장으로 선출 됐다. 덩핑은 참모장이 됐다. 25일 국민당 군이 핑장성으로 진군했다. 27일에는 성 밖에서 양쪽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펑은 다음 날 성으로 공격하던 국민당 군 3백여 명을 사상시켰으나 펑 쪽도 수십여 명이 죽었다. 펑더화이는 중과부적으로 핑장성을 내주고 철수하기로 했다. 펑더화이는 징강산의 ‘주마오’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8월 장시성 쪽으로 남하하면서 슈수이(修水)성을 공격해 장제스 군 1개 대대를 궤멸시키고 민단원 2백~3백명을 사살했다. 펑더화이는 국민당 군의 공격을 뿌리치고 8천여 명의 홍5군을 인솔해 징강산에 도착했다.

 

1929년 1월 초, 후난과 장시성의 국민당 군이 징강산 근거지에 대한 포위소탕전에 나섰다. 마오는 1월4일, 닝깡 바이루(柏路)촌에서 전적위원회, 각 현위원회, 홍군 제4, 5군 군사위원회 연석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이 자리에서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한다(圍魏救趙)’라는 전략을 세워 홍4군 주력 부대가 장시성 남쪽으로 우회한 뒤 적을 공격하기로 하고 홍5군과 홍4군 32연대가 징강산을 지키기로 했다.

1월 14일 마오와 주더, 천이는 3천6백여 명의 홍4군을 이끌고 츠핑(茨坪)을 출발해 장시성 남쪽으로 진군했다. 엄동설한의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행군 부대 앞쪽에는 장제스 군이 길을 막고 있고, 뒤에서는 적군이 추격하는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 주-마오 부대는 눈보라를 맞으며 산을 넘고 재를 넘는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매일 10여리를 진군했다. 어떤 때는 부대원들이 밥을 짓는 사이 적군이 들이닥쳐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2월 2일, 부대가 신우(尋烏)현 탄전(潭圳) 마을에 숙영했다. 다음 날 새벽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시성 국민당 군 류스이(劉士毅), 라이스황(賴世璜)이 인솔한 2개 연대가 마을을 포위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주더와 부인인 우뤄란(伍若蘭)은 방안에서 총소리를 듣고 포위당한 사실을 직감했다. 우뤄란은 주더에게 자신이 남아서 엄호할 테니 빨리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라고 재촉했다.

주더는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부인을 남겨 놓고 혼자 탈출할 수 없었다. 부부가 설왕설래 하는 사이 10여 명의 장제스 군들이 총을 들고 주더 부부가 묵고 있는 방 쪽으로 돌진해 왔다. 우뤄란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그들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 재빨리 주더의 모제르총을 빼앗아 주더를 겨냥하더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여태 여기에서 뭐 하느냐, 빨리 주더 군사령관에게 세수할 뜨거운 물을 갖다 드려라”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 주더는 몸을 빼 바깥으로 나가려 했으나 이들이 총으로 막았고, 다른 장교 차림의 군인이 우뤄란의 총을 빼앗았다.

 

 마오쩌둥과 주더

 

그는 우뤄란에게 주더를 손으로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우뤄란은 “취사반장”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주더를 보니 사병 군복을 입고 있는데다 얼굴이 수염투성이어서 높은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우뤄란에게 “주더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뤄란은 “뒤쪽 방에 있다”고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이들은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왔다며 “옳다구나”하고 후다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주더는 조그만 물통을 들고 방을 나갔다. 우뤄란도 뒤따라 나가려했으나 이들이 쏜 총탄에 다리를 맞아 그 자리에 쓰러져 붙잡혔다. 주더는 마오가 있는 군 지휘부(軍部)로 달려가 경호대와 함께 마오를 엄호하며 후문으로 탈출했다. 우뤄란은 1926년 공산당에 가입해 후난폭동에 참여한 뒤 주더와 함께 징강산에 들어왔다. 그녀는 전적위원회 노농운동위원으로 있으면서 군중 공작업무 뿐 아니라 전투도 용감하게 잘했다. 우뤄란은 항상 몸 좌우에 활을 차고 다녀 ‘노농홍군의 쌍권총 여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장제스 군들은 우뤄란에게 중요 기밀을 빼내기 위해 공중에 매달아 놓고 때리거나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는 등 온갖 고문을 했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다. 회유하기도 했다. 공산당을 탈당하고 주더와 부부관계를 끊는다는 공개성명을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우뤄란은 단호했다.

 

“꿈 깨라. 공산당원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면 서쪽에서 태양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깐(竷)강의 물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

 

2월 12일, 우뤄란은 깐저우성(竷州城)에서 총살됐다. 26살이었다. 장제스 군은 우뤄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빼내 칼로 저미는(肉醬)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주검은 깐저우성에 3일 동안 효시되었다. 주더는 눈꽃이 하늘 가득 춤출 때 한 줄기 난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겨울날, 우뤄란의 효시 소식을 듣고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뿌리며 부인을 추모하는 시를 썼다.

 

맑고 그윽한 난초꽃 향기 높은 나무 숲 아래 뿜어져 나오네. 변함없이 스스로 뭇 풀 곁에 뿌리를 휘어 감고 있구나. 설사 감상하는 사람 없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스스로 향기를 머금는 구나. (幽蘭吐喬林下, 仍自盤根衆草傍. 縱使無人見欣賞, 依然得地自含芳)

 

주더는 우뤄란의 처참한 죽음이 평생 한이 되어 고통 속에 살았다고 한다. 주더는 부인의 끝트머리 글자인 ‘난(蘭)’의 난초를 우뤄란으로 생각하며 평생 동안 지독하게 난을 사랑했다. 주더는 집에서는 물론 출장을 갈 때도 곁에 항상 난을 갖고 다니며 홀로 난을 보면서 부인을 그리워했다. (주석 60)

 

주-마오 부대는 1929년 3월 징강산을 떠나기로 했다. 징강산 지역이 빈한하고 홍군 합류부대가 늘어난 데다 국민당 군의 봉쇄로 식량과 물자공급 등이 어려워 새로운 근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 홍군은 장시와 푸젠성의 경계에 있는 광둥과 가까운 지역으로 가고 펑더화이가 징강산을 지키며 후위 방어를 하기로 했다.   
  
이때의 상황을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병력과 부대가 몰려오면서 징강산의 형편은 여러 모로 매우 어려워져 갔다. 몇 달 동안 우리는 사실상 호박으로 연명했다. 병사들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호박을 먹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가 곧 지주이자 지주들이 호박이었다. 펑더화이를 징강산에 남겨놓고 주더가 백군(장제스 군)의 봉쇄망을 돌파하고 나감으로써 방어진지를 갖춘 징강산에서의 첫 웅거는 1929년 1월로 끝났다. 제4군은 장시성 남부지역에서 운동을 벌여 급속한 성공을 거두어 나갔다. 우리 부대는 통구(銅鼓)에 소비에트를 수립하고 그 지역의 홍군들과 합류했다. 우리는 부대를 나눠 융딩(永定), 상항(上杭), 룽옌(龍巖)으로 밀고 나가면서 이 지역에 모두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홍군이 도착하기 전에 투쟁적인 대중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조직은 계속 성공을 거두었고, 또 소비에트가 매우 신속하게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 홍군의 영향력은 농민 대중운동과 유격대 활동을 통해 그 밖의 몇몇 현까지 뻗쳤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그런 지역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얼마간의 시일이 필요했다.” (주석 61)

 

59)彭德懷 自傳 解放軍文藝出版社
60)揭秘: 朱德的兩次歷險傳奇 人民政協報
61)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17. 홍4군 참패에 "마오가 있었다면…"

 

남녘의 봄바람은 온 산에 푸르름을 불어 넣고 있었다. 마오는 그런 계절인 1929년 3월, 홍4군을 이끌고 정들었던 징강산을 떠났다. 마오는 처음으로 남쪽인 푸젠성 쪽으로 홍4군을 전개하면서 꿔펑밍(郭鳳鳴)의 비군(匪軍) 3천여 명을 전멸시키고, 꿔를 죽였다. 마오는 승기를 잡아 창딩(長汀)성을 점령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푸젠 서쪽 지방의 모든 형세를 바꿔놓아 장제스 통치기반을 크게 흔들었다. 반면 공산당 지방당 조직과 인민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움추러 들었던 각종 혁명 활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룽옌(龍岩)현 위원회는 ‘홍군이 룽옌에 오는 것을 환영하고 천꿔후이(陳國輝)를 타도하자!’라는 플래카드를 걸어 놨다.

이에 놀란 천꿔후이는 밤을 도와 1개 여단을 바이투(白土)에 급파해 민란에 대비했다. 하지만 융딩의 시난(溪南), 진펑(金豊)의 무장세력은 후레이(湖雷)로 진격해 장제스 군을 내쫒았다. 마오의 홍4군은 5월에 두 번째 푸젠 서쪽 지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때 천꿔후이와 장쩐(張貞) 등 비군은 광둥 군벌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홍4군은 전광석화처럼 룽옌성과 칸스(坎市)를 각각 점령했다. 마오는 룽옌 제9중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연설하고, 룽옌 현위원회에 보병총 200여 정을 보내 룽옌 유격대의 전력을 증강시켰다. 홍4군은 상항으로 진격해 바이사(白沙)에 있는 루신밍(盧新銘)의 1개 연대를 궤멸시켰다.

다시 룽옌성을 공격해 천꿔후이 부대원 3천여 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천꿔후이는 겨우 몇 십 명의 부하만 거느리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로부터 푸젠성 서쪽지역이 크게 안정되어 푸젠의 공산혁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이 지역은 토지혁명 투쟁 강령을 만들어 토지분배, 부채탕감, 남녀평등, 혼인자유, 상점보호, 반혁명 숙청, 혁명위원회와 적위대 건립 등을 실현해 나갔다. 홍4군은 룽옌에서 제7차 당대표 대회를 열고 주더가 인솔한 2, 3군단은 다톈(大田), 더화(德化)로 진격했다. 1군단은 푸젠 서쪽지역인 융딩, 상항, 창딩 등에 병력을 나눠 주둔하면서 지방당과 무장세력을 도와 지주들의 무장대인 민단과 토비(土匪)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마오는 푸젠 서부당이 개최한 제1차 당대표 대회에서 근거지를 공고하게 장악하는 3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토지혁명을 심화시켜 실시하고, 둘째 철저하게 민단과 토비를 소멸해 노농무장을 발전시켜 물결이 번져가는 파도식으로 대외발전을 꾀하고, 셋째 당을 발전시켜 정부를 세우고 반혁명세력을 숙청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1929년, 20년대의 마지막 겨울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매섭게 몰아치는 삭풍이 쑤자포(蘇家坡) 산마루를 윙윙거리며 쉼 없이 핥고 지나간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들어 버린 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말려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에 흩날린다. 이파리가 하나 둘씩 물결에 실려 떠내려간다. 또 다시 추운 겨울이구나! 주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대원들에게 솜옷이나 입혀 겨울을 지낼 수 있는지. 천이가 상하이 중앙에 보고하러 간지도 벌써 4개월이 지났구나. 언제 쯤 돌아 올라나.

마오는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홰나무 당 누각아래를 거닐면서 담배를 피워 물고 깊은 상념에 젖어있었다. 마오가 홍4군과 전적위원회를 떠난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지난 7월 악성 학질에 걸려 여기저기 전전하다 쑤자포에서 몸조리를 하면서 지방 당의 일을 지도하고 있었다. 몇 차례 위중한 고비를 넘겼다. 한데 이즈음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본부는 마오가 ‘병사(病死)’ 한 것으로 잘못 알고 기관지인 영문판 ‘국제신문통신’에 부고를 실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부고 내용은 이렇다. (주석 62) 

 

“중국 소식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중국유격대의 창립자이며 중국홍군의 창건자의 한 사람인 마오쩌둥 동지가 오랜 동안 폐결핵으로 앓아오다 상태가 악화돼 푸젠 전선에서 서거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과 중국홍군 및 중국 혁명사업의 중대한 손실이다. 당연히 추호의 의심할 여지없이 적들은 기뻐할 것이다-.”

 

갑자기 덩쯔후이(鄧子恢)가 누각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천이 동지가 돌아왔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오는 “아-” 탄성을 지른 뒤 급히 편지 겉봉을 찢고 편지를 꺼내 읽었다.

 

“-중앙에서 돌아와 22일 사령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들간의 쟁론은 정확하게 해결되었습니다. 7차대회에서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8차대회 때 제가 끼어든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습니다. 편지를 보시고 귀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마중하러 사람을 파견하겠습니다.”

 

편지 글은 비록 몇 자였지만 마오는 그 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천이야, 천이! 7차대회 때 너희들의 그런 방법은 내가 동의할 수 없었다.”

 

내용은 이랬다. 홍4군의 주력부대가 징강산을 내려와 장시성 남쪽과 푸젠성 서쪽 지역을 전전하며 전투를 벌이면서 혁명근거지를 만들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발전 환경을 일궈왔다. 마오와 주더 등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군대의 경험을 어떻게 쌓을지를 이론과 경험에 근거해 이런 방식을 채택했었다. 그러나 인식이 일치하지 않아 늘 깊은 토론과 쟁론이 벌어 졌었다. 6개월여 전 홍4군은 중앙으로부터 ‘2월내신(二月來信)’을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객관적인 형세와 주관적인 역량을 평가해 볼 때 비관적이다. 홍4군을 소부대로 쪼개 후난, 장시성 변계의 각 향촌으로 보내라. 주더와 마오 두 사람은 결연히 대오를 떠나 큰 목표를 위해 몸을 숨겨라.”

 

‘2월내신’은 부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5월초 막 소련에서 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류안공(劉安恭)은 닝두(寧都)에 도착해 홍4군에 배속됐다. 그는 얼마 뒤 임시군사위원회 서기 겸 4군 정치부주임이 됐다. 류안공은 군사위원회를 주재하면서 “전적위원회는 행동문제에 대해서만 토론할 뿐 군대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라”면서 “마오가 ‘가부장적 전제’, ‘서기 독재’, ‘스스로 원칙을 만들고, 중앙지시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린뱌오(林彪)도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주더가 ‘봉건적’이라고 비난했다. 혁명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인 여론을 퍼뜨렸다. 류안공과 린뱌오의 이런 행위로 홍4군 간부와 전사들은 극도의 사상혼란을 겪었다. 심지어 파벌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때 마오는 린뱌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고 혁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작은 불씨가 광활한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 可以燎原)’는 내용의 편지를 린뱌오에게 보냈다.

 

전적위원회는 갈라진 의견을 해결하고 해이해 진 기강을 바로 잡기위해 7차 당 대표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자기가 주장한 당-군의 건립 방안이 받아 들여 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한 천이는 오히려 당-군을 이끌어 온 마오와 주더를 비판했다. 충직하고 온후한 성격의 주더는 듣기만 했다. 마오는 다시한번 각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한 뒤 "천이가 나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는 만큼 더 이상 변론을 하지 않겠다. 앞으로 어떤 방안이 맞는지 증명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중공중앙이 임명한 전적위원회 서기에 뽑히지 못하고 천이가 서기로 당선됐다. 마오는 화를 억누르고 홍4군을 떠나 병 치료에 나선 것이다. 천이도 중공중앙에 업무보고를 하러 상하이로 떠났다. 대리 전적위원회 서기가 된 주더는 8대 회의를 열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격렬한 논쟁을 벌여 갈등의 골만 깊게 패였다. 이런 상황에서 천이가 상하이에서 돌아와 자기의 잘못을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편지에 써 보낸 것이다. 마오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천이는 쏭위안(松源)에서 주더를 만났다. 천이는 마오가 옳았고, 그를 서기로 복직시키라는 것이 중앙의 지시라고 말했다. 이때 홍4군이 매이(梅)현을 공격하다, 광둥과 광시 군벌간의 전쟁이 끝나 회군하던 광둥군의 반격을 받아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군단 사령관 류안공은 전사했다. (주석 63)

 

홍4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해 큰 손실을 입었다. 간부들과 전사들은 마오를 그리워했다.

 

"만약 마오 대표가 있었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 대표가 있을 때 부대도 많았고, 전투도 잘 했고,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그런대 지금은-."

"우리는 마오쩌둥 동지가 4군에 돌아오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간부와 전사들의 호소가 전적위원회에 전달됐다. 주더의 마음은 무겁고 부끄러웠다.

 

"4군이 이럴게 되면 안 된다. '주-마오'로 있을 때는 혁명이 활기차게 전개됐었다. 분리된 뒤로는 좌절만 겪는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11월 28일 저녁 무렵, 마오는 말을 타고 딩저우에 도착해 주더와 천이를 반갑게 만났다. 환난을 같이 나눈 전우들의 한때의 서운한 마음은 봄날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날 소집된 전적확대회의에 천이가 전달한 '9월 내신'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먼저 농촌 홍군이고 뒤에 도시정권이다. 이것이 중국혁명의 특징이다. 이것은 중국 경제기초의 산물이다. 중국 홍군의 존재를 회의(懷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중국혁명의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홍4군을 쪼개 분산해서는 안 된다. 홍군 발전과 전국의 정치적 영향에 막대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당의 모든 권력은 전적위원회 지도기관에 집중된다. 이것이 정확한 것으로 절대 동요해서는 안 된다. 주-마오 동지는 전적위원회 공작을 수행한다. 마오 동지를 전적위원회 서기로 한다."

 

한 달 뒤인 12월 28일, 홍4군당(軍黨) 제9차 대표대회가 구톈(古田) 시베이(溪背)촌 수광(曙光) 소학교에서 열렸다. 마오는 정치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4군 당내에 비 무산자 계급사상이 존재해 당의 정확한 노선을 집행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철저하게 이런 사상을 바로 잡지 않으면 중국의 위대한 혁명투쟁의 임무를 부여받은 홍4군의 책임을 수행할 수 없다. 당의 조직 기초가 대부분 농민과 소자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의 영도기관이 당원들에게 이에 대한 정확한 노선의 교육을 시켜 단결해 견결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영도기관이 파당주의로 흘러 조직을 훼손시키고 당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연출해 당의 확대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영도기관의 정확한 사상의 결핍을 바로 잡아야 한다."

 

구톈회의에서 다시 전적위원회를 구성하고 선거를 통해 마오를 전적위원회 서기로 뽑았다. 이때의 상황을 마오는 에드가 스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64)

 

"이 대회에서는 장시성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듬해는 눈부신 성공을 거둔 해였다. 장시성 남부가 거의 전부 홍군의 수중에 장악됐다. 중앙 소비에트지역의 근거지가 수립된 셈이었다. 1930년 2월 7일 소비에트 장래 계획을 토의하기 위한 중요한 지방당 회의가 소집되었다. 당과 군, 정부의 지역 대표들이 참석해서 토지정책 문제를 장시간 논의했다. 이 논의과정에서 토지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기회주의'가 극복되었다. 결국 토지 재분배를 실행하고 소비에트 조직을 가속화하기로 결의했다. 그때까지 홍군은 지방이나 현 단위의 소비에트만을 조직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장시성 소비에트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새로운 계획에 대해 농민들은 뜨겁고 열렬한 지지를 보냈는데 이런 지지는 몇 달 뒤에 밀어닥친 국민당군의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62)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63)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紅軍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64)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20. 10만 대군에 맞선 홍군 4만…마오의 대승과 이간세력

 

홍1방면군의 창사공격 실패와 관련해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리리산 노선의 무모한 좌경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주석 69)

 

"창사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는 리리산 노선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그 때문에 홍군은 리리산이 계속 주장했고 또 실행했더라면 파멸적인 결과를 맞았을지 모를 우한(武漢)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홍군의 주요 과제는 새로운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 점령한 농촌지역을 소비에트화하며, 또 무엇보다도 그런 지역을 철저한 소비에트 권력아래 굳게 다지는 일이었다. 그러한 계획에 비춰볼 때 창사공격은 불필요한 것으로써 다분히 모험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 후난 실패와 홍군의 장시 복귀, 그리고 특히 지안 점령이후에 '리리산 주의'는 홍군 내에서 지양되었고 또 리리산 자신도 과오를 범했음이 입증되어 곧 당내 영향력을 상실했다."

 

리리산은 1929년부터 공산당 중앙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다가 1930년에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밀려나 소련에 파견돼 코민테른 중국대표를 맡았다.    
      
1930년 10월, 장제스는 군벌 펑위샹, 옌시산과 물고 물리는 전투를 휴전한 뒤 허잉친(何應欽)에게 10만 병력을 동원해 중앙 소비에트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명령했다.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으로 장시성 주석 겸 9로군 총지휘 루디핑(魯滌平)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장후이짠(張輝瓚)이 전선 총지휘를 맡도록 했다. 홍군은 4만 병력이었다. 장제스  군은 북쪽에서 남진하면서 서쪽은 뤄린(羅霖)의 77사단이, 지안(吉安) 동쪽은 류허딩(劉和鼎)의 56사단이 맡도록 했다.

그리고 8백리 가량 떨어진 동-서 사이에 좌, 우로군의 군병력을 투입해 진격했다. 좌로군은 주샤오량(朱紹良)이 지휘하는 마오빙원(毛炳文)의 8사단과 쉬커샹(許克祥)의 24사단 등 2개 사단으로 짜여졌다. 우로군은 총지휘인 장후이짠의 18사단과 탄다오위안(譚道源)의 50사단, 공빙판(公秉蕃)의 28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이뤄졌다. 12월 24일, 마오는 홍군이 집결하고 있는 닝두의 샤오부(小布)지구에서 군민 궐기대회를 열어 적을 섬멸할 것을 결의하는 등 전투분위기가 고조됐다. 

 

 1930년의 홍군의 모습

 

마오는 일찍이 겪어보지 않은 이번 대규모 전투에서 자신이 창안한 유격전과 운동전을 섞어  적을 아군의 진지에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는 전략을 쓰기로 했다. 12월 27일 밤 마오는 부대를 깐(竷)강 쪽으로 이동해 장수(樟樹), 푸저우(撫州) 지역에 도착한 뒤 위안수이(袁水)유역에 포진한 적을 공격하는 척하며 국민당 군을 괴롭혔다. 또 부대를 동구(東固), 난공(南龔), 룽깡(龍岡) 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장수, 푸저우를 거쳐 위안수이에 진을 치고 있는 국민당 군을 위장 공격하다 철수했다.

이처럼 두 차례 위장 공격을 하자 장제스 군들은 녹초가 되고 말았다. 홍군 쪽 전사들도 불만을 터뜨렸다. 적들이 코앞에 있는데 치는 시늉만 거푸 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우리가 위안터우에 큰 함정을 파놓고 적들이 이곳을 공격하도록 유인작전을 펴고 있는데 자신들의 우세지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때 우리가 공격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인내심 있게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한편 총 지휘관인 장짠후이는 사단본부와 2개 연대를 이끌고 동구에서 난공에 도착한 뒤 동쪽으로 행군할 태세를 보였다. 마오는 주력부대를 비밀리에 황피(黃陂) 서쪽에 있는 쥔부(君埠)일대에다 매복해 놨다. 그날 해가 질 무렵 장짠후이가 인솔한 부대가 쥔부에서 20리 떨어진 룽깡에 도착했다. 쥔부와 룽깡 사이에 황주링(黃竹岭)이라는 고개가 있다. 장제스 군들이 동쪽으로 진군하려면 이곳을 지나도록 되어 있어 마오는 이곳을 전장(戰場)으로 보고 이 일대에 주력군을 매복했다.

홍군은 홍3군, 홍12군이 좌로군으로 쥔부에서 룽깡으로 전진하고, 우로군인 홍4군과 홍3군단은 한샤(漢下)에서 샤구(下固)로 전진하기로 했다. 싱궈(興國)지구의 홍군 제35사단은 별동부대로 홍군 주력부대가 공격할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우회해 적의 배후를 치도록 했다. 주더와 마오는 황주링 뒤에 있는 조그만 산에 지휘부를 세우고 이곳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 장짠후이는 장시에서 홍군을 전멸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이때의 진세를 보면 독안에 갇힌 쥐의 형국이었다.

 

주더와 마오는 산 지휘부에서 전투상황을 살피며 피아간에 격렬하게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었다. 주더가 마오에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군이 적 1개 사단본부와 2개 연대를 완전히 포위했소이다. 1시간 전에 적들이 돌파를 시도하고 있으나 우리 군이 공격하고 있어요.”
“좋아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총공세를 펴 전멸을 시킵시다. 총사령관, 보시오. 정말로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어요. 3국 시대 제갈량은 동남풍을 빌어 적을 대파했는데 오늘 우리는 새벽안개를 틈타 적들을 섬멸합시다.”

 

주더와 마오는 박장대소했다. 날이 밝았으나 짙은 안개가 여전히 룽깡 주위 산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층층의 산봉우리가 안개 속에 묻혀 설핏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돌격”, “와!” 하는 소리와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온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장짠후이는 부대를 동쪽으로 틀면서 산쪽으로 오르려했으나 매복군의 질풍노도 같은 공격을 받고 부대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후 3시께 홍4군과 홍3군단이 룽깡 북쪽의 높은 산에서 일제히 뛰쳐나오면서 총공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일선 부대에서 장짠후이를 사로잡았다는 보고가 지휘부로 날아왔다. "장짠후이를 생포했다!"는 전사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던 안개가 사라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1931년의 마오쩌둥.

 


쪽빛 하늘 아래 쭉쭉 뻗어 오른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홍군의 기상인양 한결 돋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홍기가 바람 따라 춤추고 있었다. 산골짜기 마다 희희양양(喜喜洋洋)하는 홍군들이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 산 아래의 지휘부로 몰려들고 있었다. 홍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1개 사단본부와 2개 여단병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 한필 군사 한명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생포한 포로만도 9천여 명이 넘었다. 포위공격 소탕작전의 총지휘관 장짠후이는 후질근한 사병복장을 한 채 마오 앞에 끌려나와 "뤈즈(潤之)선생!"을 외치며 허리를 굽혀 절하고 경례하는 비굴함을 보였다.

룽깡 첫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탄다오위안 부대는 황망소조한 나머지 동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30년대 첫 해 새해인 1931년 1월 1일, 홍군주력부대는 탄다오위안 군을 추격해 동샤오(東韶)에서 수 천 명 을 섬멸하고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두 차례 전투로 사로잡은 포로는 1만여 명이 넘었다. 마오는 이날의 승리를 그해 봄날에 지은 시 '어가오 반제1차위초(漁家傲-反第一次圍剿)'에서 이렇게 읊었다. (주석 70)

 

빽빽히 들어찬 나무 추운겨울 붉은색(홍군)이 흐드러졌네, 천병의 노기가 하늘을 찌른다. 룽깡을 자욱하게 뒤덮은 안개 수많은 산봉우리 감추었네, 선봉에서 장짠후이를 사로잡았다고 일제히 소리친다.
(萬木霜天紅爛漫, 天兵怒氣冲霄漢. 霧滿龍岡千樟暗, 齊聲喚, 前頭捉張輝瓚)

 

대승을 거뒀지만 이 전투를 앞두고 홍군 내부에서 마오의 '양손을 펼쳐 적을 깊숙이 유인(放開兩手 誘敵深入)'하는 전략과 관련해 펑더화이가 이끌고 있는 3군단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펑더화이는 적을 근거지로 유인해 공격하는 전략방침은 심모원려의 전술이라면서 적극 찬성했다. 하지만 리리산 주의를 추종하는 장시성 행동위원회(성위)는 우경 기회주의고, 도망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마오가 이끄는 최고지휘부인 전적위원회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이간책을 들고 나왔다. 홍군 초기인 당시에 마오는 당의 핵심 영도자가 아니었다.  홍군은 보통 "마오, 주(더), 펑(더화이), 황(공뢔)"으로 부르는 병칭을 썼다. 펑더화이는 마오를 '슝장(兄長)' 또는 '뤈즈 형' 하는 식으로 불렀다. 3군내 리리산 추종자들이 행동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마오를 '주, 펑, 황' 등 세력과 분리하는 이간책을 퍼뜨렸다. '옹호 주-펑-황, 타도 마오쩌둥'이라는 표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이런 형세에서 펑더화이의 3군단은 깐 강을 건너 둥구(東固) 둥산(東山) 평원 일대에 주둔했다.

 

이때 중앙소비에트 지역에서는 'AB단' 에 대한 숙청이 벌어지고 있었다. 'AB단'은 1차 국공합작 당시의 대혁명 때 국민당 신우파의 반공조직으로 'AB'는 영문이니셜 Anti-Bolshevik(반 볼세비키)의 약자를 뜻한다. AB단은 당시 북벌군이 난창을 점령한 뒤 공산당이 장악한 장시성 국민당부의 지배권을 빼앗기 위해 국민당 중앙당 조직부장인 천궈푸(陳果夫)가 두안스펑(段錫朋) 등을 보내 1927년 1월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였다.

하지만 4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이끌었던 '4.2폭동'을 진압한 뒤 'AB단'은 조직 목적을 달성하고 해체되었다. 때문에 당시 마오가 벌였던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숙청을 하면서 'AB단'을 내세운 것은 허위라고 할 수 있었다.  'AB단' 숙청으로 포장된 당내 노선투쟁은 국민당 군의 1차 포위공격 소탕전을 눈앞에 두고, 끝내 푸톈(富田)에서 리리산 추종세력의 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

69)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70)中國人民解放軍演義 張濤之 著 新華出版社,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중앙문헌출판사

 

-------------------------------------------------------------------------------------------------------------------------------------------------------

 

21. 홍군 노린 'AB단'의 반란…마오 필적 위조 밝혀낸 펑더화이

 

1930년 10월, 홍군이 지안을 점령한 뒤 문건을 정리하던 중 1928년대 싱궈와 통구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지역 소비에트와 3군단의 기반을 마련해 장시성 성위 서기가 된 리원린(李文林)의 가족이 국민당 군과 연계한 사실을 밝혀내고, 12월에 리원린을 'AB단'인물로 체포했다. 마오가 이끄는 홍1방면군 전적위원회는 리원린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벌였던 리샤오지우(李韶九)를 푸톈으로 보내 장시성 성위가 숙청운동을 돕도록 지시했다.

쩡산(曾山)이 장시성 행동위원회(성위)위원 겸 소비에트 주석을, 천정런(陳正仁)이 장시성 행동위원회 선전부장 겸 대리 서기를 각각 맡고 있었다. 리샤오지우는 성위 대부분의 간부가 'AB단' 에 연루된바 이들을 처결하도록 쩡산과 천정런에 전적위원회의 뜻을 전달했다. 리샤오지우는 이어 전적위원회에서 특파한 마오의 비서 구바이(古柏)이와 함께 3군단 20군에 가서 사단장 류톄차오(劉鐵超)와 정치위원 쩡빙춴(曾炳春)에게 부대 내의 'AB단'을 숙청할 것을 요구했다.

리샤오지우와 쿠바이는 2개월 동안 군과 지방 소비에트에서 4천여 명의 간부를 체포했다. 이 숫자는 홍1방면군과 후난-장시 홍군 총수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 리샤오지우는 동향인 당시 20군 174연대 정치위원 류디(劉敵)를 찾아가 'AB단' 분자들이 류디를 'AB단' 인물이라고 진술했다는 뜻을 넌지시 알려줬다.

 

놀란 류디는 부대로 돌아온 뒤 참모들과 상의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류디는 1개 대대를 이끌고 군 본부를 포위한 뒤 사단장 류톄차오를 사로잡고 체포된 정치부 주임 셰한창(謝漢昌)을 석방시켰다. 셰한창은 홍20군을 이끌고 푸톈으로 진격해 장시성 소비에트 정부를 포위하고 'AB단 분자'로 체포된 100여 명을 석방했다. 리샤오지우는 도망가다 잡혔고, 쩡산과 구바이는 총소리에 놀라 밤을 도와 달아났다.

 

이때 장제스의 포위공격 소탕군(圍剿)은 이미 소비에트 지구 변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적을 눈앞에 둔 엄중한 상황에서 당과 홍군의 분열상은 3군단을 지휘하는 펑더후이의 향배에 눈길이 쏠렸다. 펑더화이가 위기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던 12월 중순 어느 날 밤. 홍3군단 전적위원회 비서장 저우까오차오(周高超)가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가 갖고 왔다는 편지 한 통을 들고 펑더화이를 찾아왔다.

 

편지는 마오가 그의 비서 구바이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편지글 중에 펑더화이가 'AB단' 소속 인물인 것으로 써 있었다. 편지와 별도로 '동지와 민중에 고함'이라는 책자에는 "당 내에 이미 대난(大難)이 도래했다, 마오쩌둥이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했다. 타도 마오쩌둥, 옹호 주(더), 펑(더화이), 황(공뢔)" 등이 씌어 있었다. 펑더화이는 편지를 보고 크게 놀랐다. 비서장 저우에게 편지를 갖고 온 사람을 데려 오라고 말했다. 저우가 나간 뒤 텅다이위안, 위안궈핑, 덩핑 등이 들어왔다. 편지를 돌려본 뒤 텅다이위안은 "가짜 편지 음모"라고 말했고, 위안궈핑은 "이간시키는 편지"라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편지의 필적이 마오의 필적을 위조한 것임을 알았다. 특히 마오는 날짜를 아라비아 숫자로 쓰지 않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쓴 것도 가짜 편지임을 뒷받침했다. 펑더화이는 급히 200자가 채 되지 않는 '홍3군단 선언'을 내어 "'타도 마오쩌둥, 옹호 주-펑-황'의 구호는 적들이 홍군을 분열하려는 음모다. 1, 3군단은 일치단결하여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총 전적위원회의 영도를 옹호한다"고 밝혔다.

펑더화이는 다음 날 홍3군단 전적위원회 긴급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장제스 군대의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해 총 전적위원회가 '적을 근거지로 깊이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은 우리가 군중과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어 이길 수 있는 전략으로 정확한 판단이다. 위조편지는 동지를 음해하고 1, 3군단 분열을 획책하는 것이다. 총 전적위원회와 마오를 옹호한다. 1, 3군단이 일치단결해 국민당군의 진군을 분쇄하자"고 선언한 뒤 마오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를 보냈다. (주석 71)

 

다음날 펑더화이는 3군단을 샤오부(小布)로 이동했다. 여기서 마오가 있는 황피의 총 전적위원회는 15리 남짓 떨어져 있었다. 펑더화이는 직접 마오를 찾아가 3군단 간부회의에 참석해 연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오는 흔쾌히 수락한 뒤 3군단에 와 간부들에게 공산혁명의 믿음을 심어줘 마오의 위상을 더욱 다졌다. 이때 국민당 군 총지휘 장짠후이는 홍군 내에 내분이 발생한 것으로 착각하고 빠르게 룽깡에 진격해 전멸을 당하는 꼴이 됐다. 마오는 이때의 상황을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72)

 

"제3군단의 일부가 리리산 노선을 추종하면서 3군단을 홍군에서 분리시키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이러한 경향과 맹렬한 투쟁을 벌여 제3군단의 통합성과 최고지도부에 대한 충성을 유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반란은 푸톈에서 일어났는데 푸톈은 당시 소비에트 지구의 중심인 지안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반란은 큰 물의를 일으켰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장래가 이 투쟁의 결과에 좌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란은 제3군의 충성과 당, 홍군 내부의 전반적인 단결, 그리고 농민들의 지지로 신속하게 진압됐다. 우리 노선이 재확인되고 리리산 주의가 완전히 억압되면서 소비에트 운동은 큰 성과를 얻었다. 1931년 1월까지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은 국민당군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나는 이 소탕전이 시작되기 직전 홍군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국민당군의 격퇴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 조건이란 첫째 제1군단과 제3군단을 중앙통제를 받는 지휘권 아래 통합시킨 점과 둘째 리리산 노선을 청산한 점, 셋째 당이 홍군 내부와 소비에트지구 안에 있던 반 볼세비키파와 그 밖의 다른 적극적인 반혁명분자들을 소탕한 점이다."

 

푸톈 사건과 관련해 서방 쪽 시각은 다르다. 이에 따르면 반혁명분자 활동을 분쇄한다는 주장아래 펼쳐진 숙청은 비단 반 볼세비키그룹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스파이로 의심받는 사람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으로 마오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 지도부 또한 숙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도부는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오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게 갈수록 분명해졌다. 반대 신문과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을 통해 숙청은 심리적,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역사가들은 이때 각 소비에트 기지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를 약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주석 73)

 

71)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전(상) 봉선지, 김충급 주편 중앙문헌출판사
72)중국의 붉은별(상)에드가 스노우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中國人民解放軍演義 張濤之 著 新華出版社
73)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富水河畔讀黨史 文祭 ‘AB'團肅反中冤死的紅軍 人民網-讀書頻道
마오쩌둥전(상) 봉선지, 김충급 주편 중앙문헌출판사
마오저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

 

22. 노선 투쟁의 회오리…농촌 투쟁 부정했던 왕밍 '도망주의'

 

또 한 차례 노선투쟁의 회오리바람이 소비에트지구에 몰아쳤다. 1931년 1월, 공산당 6차4중전회에서 왕밍(王明)(본명 천샤오위(陳紹禹))이 내 놓은 '두 가지 노선' 즉, '중공중앙이 더 가열찬 볼세비키 투쟁을 위하여'라는 소책자가 일파만파의 풍파를 불러 일으켰다. 이때는 마오가 주장했던 농촌 근거지의 무장투쟁 혁명 활동이 비교적 안정화하면서 잘 나가고 있었다.

헌데 '28인의 볼세비키'의 한 명인 왕밍(사진)은 좌파 교조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인 인사들을 대거 발탁해 중앙에 포진시키며 당 중앙의 영도권을 지배했다. 리리산 보다 더 좌경적 기회주의 노선을 취한 왕밍은 중간진영이나 제 3지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 현재 중국에는 홍군이나 노동자 농민을 대표하는 진정한 정부가 없다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중앙에서 파견한 왕밍 추종자들은 4월 소비에트지구에서 회의를 열어 소비에트지구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포기하고 대도시로 진격하는 모험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곧 마오 노선을 부정하는 의미였다.

 

왕밍(王明)(본명 천샤오위(陳紹禹))


왕밍 노선 추종세력 선발대인 '4중전회' 대표들은 중앙과 소비에트 지구를 조정하는 기구인 '소비에트 중앙국'을 장악하고 각 지역 각급의 영도기관이 왕밍 노선을 적극 추진하도록 독려했다. 이들은 전쟁을 몰랐고, 3년 동안 유격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피땀 흘려 일궈온 농촌 근거지 홍군지도자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당면한 국민당 군의 제2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중앙의 3월 지시인 왕밍 노선 선전에만 혈안이 되었다.

농촌 근거지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총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하이 고층건물에서 만들어 낸 허황한 주장, 그것도 상호 모순되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마오는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맞서 승리하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피아간의 전력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설명했다. 하지만 왕밍 노선의 추종자들은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중앙 소비에트지구를 쓰촨성으로 이전해 새로운 근거지 건립을 주장했다. 마오는 도망주의라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각 군 사령관과 정치위원, 홍3군단 총지휘, 총 정치위원 등이 참석한 확대회의가 열렸다. 마오는 국민당군의 반 2차 포위공격 소탕전의 전력분석과 전망을  설명했다.

 

"적군은 20만 명으로 병력은 많지만 장제스의 직계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내부 모순이 많다. 약점이 많고 보급운송이 힘든데다 지형에 익숙지 못하다. 반면 우리군은 사기왕성하고 상하단결과 싸우려는 마음이 간절하며 준비가 충분하다. 군중들은 홍군을 열렬히 옹호하고 적들에게는 원한을 품고 있다.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지난 1차 소탕전 때 보다 더 유리하다. 현재의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싸울 것이냐 아니냐다."

 

토론이 시작되자 홍군 고급간부들은 비분강개하며 굳건히 싸울 것을 주장했다. 특히 장시성 남부와 푸젠성 서쪽 지역의 간부들은 중앙의 소비에트지구 이전에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끝까지 싸울 것을 천명했다. 이처럼 싸워야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소비에트지구를 이전해야 한다는 왕밍 추종자들의 '도망주의'는 사그러들었다. 이것은 마오가 왕밍 노선을 제압한 첫 번째 논쟁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왕밍과의 노선투쟁은 1937년 5월 이후 전개되는 건곤일척의 대사상투쟁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마오는 이 노선투쟁의 승리로 국민당 군의 제2차 포위공격 소탕전을 분쇄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주석 74)

 

장제스의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 때 홍군이 장짠후이를 생포한 뒤 우로군 탄다오위안 부대를 격파하면서 15대의 무선통신기를 노획한 일이 있었다. 당시 무선통신기는 신병기에 해당할 정도로 상당히 귀하게 여겼다. 또 무선통신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홍군은 무선통신기 뿐 아니라 통신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 인력이 거의 없었다. 설령 통신기를 노획했더라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인력양성이 시급할 때였다. 홍군은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들 포로 가운데 집으로 돌아갈 사람에게는 노비(路費)로 3위안씩 주어서 보냈다. 군사령관 황공뢔는 노획한 15대의 무선통신기를 보고 대단히 만족했다. 그러나 통신기를 다룰 줄 아는 인력을 사로잡지 못해 아쉬워했다. 그는 주더에게 "무선통신기는 신과학의 장비로 일반 병사들은 다룰 줄 몰라 전문 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주더는 "무선통신기는 홍군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인데 우리들이 꼭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현재 몇몇 사람만 겨우 사용할 줄 아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포로 중에 통신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잔류시켜 홍군에 복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주더의 경호원이 포로 가운데 노비를 받아간 무선통신 전문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주더가 빨리 데리고 오라고 했다. 잠시 후 돌아 온 경호원은 그의 이름이 탄다오칭(譚道淸)인데 국민당군 50사단장 탄다오위안 집안의 동생으로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주더는 샤오허(蕭何)의 고사를 떠올리고 이렇게 말했다. (주석 75)

 

"서한 초기에 '소하 달빛아래 한신을 쫒다(蕭何月下追韓信)'라는 고사가 있다. 오늘이 마침 음력 11월 15일 보름이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달빛이 밝고 맑다. 우리는 홍군의 무선통신부대를 만들어야 한다. 마땅히 달빛을 밟으며 탄다오칭을 추격해 그를 데려와야 한다!"

 

경호원이 주더에게 직접 갈 필요가 없고, 자신들이 갔다 오겠다고 만류했다. 주더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탄다오칭이 무선통신의 중요한 인재인데 달밤이라도 내가 직접 가야 한다.  그에게 홍군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게다가 탄다오칭이 우리와 연루되는 것을 겁내 싫다고 한다면 더욱 더 내가 가서 홍군의 포로 우대정책을 설명하고 염려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더는 곧바로 말을 타고 쫒아 나섰다. 주더가 첫 초소에 도착했을 때 초병이 탄다오칭이 이곳을 떠난 지 2시간 가까이 된다며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주더는 "홍군 사전에는 '곤란(困難)' 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 나는 꼭 탄다오칭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한 뒤 말에 채찍을 가하며 질풍처럼 달렸다. 초소 몇 개를 더 통과한 뒤 마침내 탄다오칭을 따라 잡았다. 그 때는 이미 달이 기울어진 새벽녘이었다. 탄다오칭은 홍군 총사령관이 직접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주더 총사령관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주더는 끈질기고 성실하게 탄다오칭을 설득해 홍군에 끌어들였다. 인재를 중시하는 주더의 용인관(用人觀)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소하 달빛아래 한신을 쫒다' 고사는 기원전 3세기 한나라 유방(劉邦)이 한중왕이 되어 한중에 들어갈 때 소하가 한신을 중용하도록 유방에게 추천했으나 유방은 한신을 치속도위라는 하급 장교에 임명했다. 한신은 불만을 품고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소하가 밤을 도와 뒤 쫒아 한신을 설득해 데려왔다. 유방이 소하의 건의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한신은 항우와 유방의 천하쟁탈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 고사는 지도자들이 필요한 인재를 영입할 때 해야 할 마음 씀씀이를 보여 주는 전범이 되고 있다. 소하는 한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승상으로서 고종명한 그림자 처신의 상징적 인물로 2인자 행동거지의 표상이 되고 있다. 마오 그늘에서 25년간 총리를 한 저우언라이를 그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신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긴 비운의 인물로 비정한 권력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치부한다. 중국의 10대 원수로 국가창건 원훈이자 국방장관을 지낸 펑더화이도 한신의 전철을 밟아 한 많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74)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75)朱德總司令月下追韓信 中國共産黨新聞網

-------------------------------------------------------------------------------------------------------------------------------------------------------

 

23. 마오, 국민당군 20만군 전멸시켜 '장제스 통곡'

 

장제스는 제1차 포위공격 소탕전이 채 3개월도 되지 않은 1931년 4월 병력 20만을 동원해 제2차 포위소탕전에 나섰다. 허잉친(何應欽)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차이팅카이(蔡廷凱)의 제19로군, 쑨롄중(孫連仲)의 제26로군, 주사오량(朱紹良)의 8로군을 주력으로 중앙소비에트 지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제스 군은 이번엔 차근차근 곳곳에 진을 쳐가며 엄밀하게 방어하면서 전투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장제스 군의 기세가 자못 흉맹스럽자 홍군은 대응 전략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홍군 주력부대를 분산해 근거지 바깥에서 적을 둘러싸고 유격전을 펼치자는 작전전략이 나왔다. 마오는 견결하게 반대했다. 적의 세력이 비록 사나우나 약점을 갖고 있다. 차이, 쑨, 주의 부대는 비교적 강하나 나머지 부대들은 약하다.

왕진위(王金鈺)의 제5로군은 막 북방에서 도착해 두려움을 갖고 있고, 그 좌익인 궈화종(郭華宗), 하오멍링(학夢齡) 두 사단도 비슷하다. 주력군을 피하고 허약한 부대에 병력을 집중해 공격해야 한다. 먼저 왕진위 부대를 공격한다. 동쪽에서 밀고 들어가 섬멸하면서 적들을 각개 격파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싱궈에 있는 차이팅카이 부대가 룽깡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궈화종 부대가 바이푸(百富), 피샤(陂下)를 압박해 둥구 쪽으로 향할 때 홍군은 먼저 푸톈에 주둔한 왕진위 부대를 공격한 뒤 차이와 궈, 두 부대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국민당군

 

그 간격은 50리 남짓하다. 홍군은 닝두의 칭탕(靑塘)에서 친허의 동구까지 수 백리 산길을 행군해야 한다. 행군속도를 신속히 하고 추호의 빈틈없이 은폐해야 한다. 이른바 소뿔 사이를 뚫고 공격하는 '좐니우자오(鑽牛角)'전략이다. 이렇게 작전방침을 결정하고 칭탕에서 홍3군과 수천 명의 군중들이 참가한 군민 동원대회를 열었다. 마오는 적을 궤멸시킬 수 있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대회를 진행한 주석은 이렇게 연설했다.

 

"현재 적들의 위세가 대단히 방자하다. 첩자들의 활동이 창궐하고 있다. 우리 모두 경계심을 고양해야 한다. 며칠 전 국민당은 황공뢔 동지의 형을 보내 황 사령관이 투항하도록 유인했다. 황 사령관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반혁명의 형을 죽였다. 대의멸친이다. 이것은 우리 공산당원들의 혁명에 대한 굳센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들의 혁명 사업은 이러한 동지의 분투가 있는데 어찌 이룰 수 없겠는가?"

 

박수소리가 대회장을 뒤덮고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자' '목숨 걸고 홍색정권을 보위하자'는 구호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4월 20일, 홍군은 룽깡지구로 부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동구일대에 은밀히 병력을 집결해 은폐시켰다. 3만~4만의 병력을 협소한 지역에 매복해 몹시 붐볐다. 3면은 모두 적이었다. 5월 14일, 왕진위와 공빙판(公秉蕃)의 2개 사단이 각각 동구로 향했다. 홍군도 15일부터 부대를 이동해 우회하면서 적을 포위했다. 마오는 다음날 주더와 함께 바이윈산(白雲山)에 올라 전투를 지휘했다.

몇 차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민당 군이 산꼭대기로 맹렬하게 포를 쏘아댔다. 초연이 앞을 가리고 총탄과 돌덩이가 주위를 날아다녔다. 산 아래에 있던 국민당 군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오는 탄알을 아끼고 돌로 적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국민당군은 비오듯하는 돌덩이에 밀려 잠시 주춤하다가 "홍군이 총탄이 떨어졌다. 공격!"하는 구령소리와 함께 벌떼처럼 산위로 기어 올라갔다. 마오와 주더는 주위에 매복한 홍3군과 홍4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장제스

 

국민당 군은 홍군 주력부대의 협공에 걸려들었다. 불과 1시간 사이에 국민당 군은 전멸했다. 공빙판 부대의 28사단과 47사단 1개 연대 대부분이 궤멸됐다. 노획한 총이 5천여 정이었다. 승기를 잡은 홍군은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47사단 1개 연대 패잔병과 43사단 일부를 패퇴시켰다. 총기 4천여 정을 노획했다. 전투는 5월 16일에 시작되어 30일에 끝났다. 15일 동안 홍군은 장시 깐 강변의 구피(固陂), 푸톈에서 공격해 푸젠 젠링(建寧)에 이르기까지 장장 7백리를 휩쓸면서 5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국민당 군 3만여 명이 죽었다. 총기도 2만여 정을 노획했다. 마오는 '어자오(漁子傲)'에서 이때의 승리를 이렇게 읊었다. (주석 76)

 

7백리를 15일 동안 내 달렸네, 깐 강수 아득하고 푸젠산 푸르구나. 대규모 부대 일거에 휩쓸었네, 어떤 사람 눈물 흘리며, 촘촘하게 쌓은 진지 어찌할지 탄식한다
(七百里驅十五日. 竷水蒼茫閩山碧. 橫掃千軍如卷席, 有人泣, 爲營步步嗟何及)

 

이 시의 어떤 사람(有人)은 장제스를 말한다. 이때 장제스는 참패한 뒤 난창에서 소집한 고위 지휘관회의에서 부대의 무능을 크게 질타하고 통곡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76)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 가연 편저(상);중앙문헌출판사

------------------------------------------------------------------------------------------------------------------------------------------------------- 

 

24. "적을 홀려 섬멸하라" 인민해방군 전설로

 

장제스는 제2차 포위 소탕전에서 대패한 지 1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또다시 3차 포위 소탕전에 나섰다. 이번 포위 소탕전은 3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뿐 아니라 2차례에 포위 소탕전에 동원된 잡동사니 군대와 달리 장제스의 최강 직계부대 10만 명이 합류하고 장제스가 직접 총사령관을 맞아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

많은 외국의 군사고문들도 난창에 합류했다. 홍군은 '주력부대를 피하고 약한 곳을 찌르는' 전략과 함께 '맷돌'전술을 쓰기로 했다. 장제스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대군을 앞세워 일거에 홍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장제스 군은 3만여 명의 홍군 병력보다 10배가량 많았다. 게다가 홍군은 2차례의 포위 소탕전에 맞서 싸우느라 전력이 크게 떨어진데다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30만 명의 병력을 사면팔방에 배치해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호호탕탕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마오는 군사지휘 능력을 한껏 발휘해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약여하게 보여줬다. (주석 77)

 

마오는 홍군 주력부대를 장시성 남쪽 뒤에 집중 배치했다. 찌는 듯한 7월의 무더운 날씨에 부대 병력을 1천리나 떨어진 싱궈 동남쪽의 인컹(銀坑)지구로 이동해 집결시켰다. 장제스  군을 남쪽으로 유인한 뒤 빈틈을 보이는 후방을 겨냥해 치고 들어가는 전술을 구사했다.

홍군은 가오싱웨이(高興우), 싱궈 서북쪽의 라오잉판(老營盤)일대에서 푸톈을 공격하려 할 때 그곳에 장제스 군의 주력부대가 밀집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오는 공격을 포기하고 곧바로 부대를 밤을 틈타 동쪽으로 이동해 싱궈 동북쪽의 롄탕(蓮塘)에 주둔시켰다. 이 부대이동은 40리 사이를 두고 남과 북에 포진한 장제스 군의 한 복판을 뚫고 행군하는 아슬아슬한 작전이었다. 홍군은 롄탕에 도착한 뒤 북쪽에 비교적 약한 부대인 상관윈샹(上官雲上)의 잔여부대 47사단과 54사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오는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 2시간 만에 1개 여단을 궤멸하고 연대장 탄즈쥔(譚子鈞)을 사살했다. 승기를 잡은 홍군은 량춴(良村)을 공격해 54사단의 1개 연대를 격파하고 연대장을 총살했다. 상관윈샹과 하오멍링 두 사단장은 놀라서 그대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 장제스 군 3군단이 거의 무너졌다. 마오는 동쪽의 황피에서 마오빙원(毛炳文)의 8사단을 격멸시키자 서쪽의 장제스 군이 일제히 동쪽으로 이동했다.

홍군 주력부대가 장제스 군이 밀집한 틈새를 비집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홍군은 밤새 행군해 싱궈의 바이스(白石), 펑볜산(楓邊山)에 매복한 뒤 휴식을 취했다. 홍군으로서는 이 작전이 3차 포위 소탕전에서 가장 정채(精彩)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홍군은 이곳에서 보름동안 쉬면서 부대를 정비했다. 장제스 군이 기다리다 지쳐 피로해지자 철수하기 시작했다. 홍군은 바로 이때다 싶어 질풍같이 추격해 가오싱웨이, 라오잉판 등지에서 장제스 군 1개 여단 이상과 팡스링(方石嶺)에서 한더친(韓德勤)의 6개 여단, 장딩원(蔣鼎文) 사단의 일부를 섬멸했다. 이로써 장제스가 직접 지휘했던 제3차 포위 소탕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장제스의 3차례에 걸친 포위 소탕전을 쳐부수면서 개략적인 마오의 전략전술의 형체가 드러났다. 특히 3차 포위 소탕전은 마오의 전략전술을 응집한 결정판이었다. 이 전략전술은 일찍이 중국의 병가(兵家)들의 책에도, 외국의 군사서적에도 없었던 중국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인 전투를 통해서 축적한 산물이다. 이 전략전술의 핵심은 '운동전'과 '섬멸전'이었다. 운동전은 부단히 부대를 이동하면서 적들을 홀리면서 착각을 유발시켜 함정에 빠진 적을 섬멸하는 전술이다. 마오는 항상 이렇게 강조했다.

 

“적을 공격할 때 10개의 손가락을 상처 내봤자 손가락 하나를 확실하게 절단하는 만 못하다. 같은 이치로 적의 10개 사단을 흠집내봤자 1개 사단을 몰살시키는 만 못하다.”

 

 

 

이것은 마오 전술 중 가장 사납고 독랄(毒辣)한 수법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전략전술을 구사할 까. 첫째, 섬멸전은 적들에게 최대의 공포감을 줘 근본적으로 전투력을 잃게 한다. 둘째, 섬멸전은 상대방을 전멸시킴으로써 아군의 부족한 장비와 보급을 보충해 아군의 역량을 강화시켜준다. 해서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집중하고 우회하는 포위전술을 써야한다. 운동전과 섬멸전의 전략전술은 20여 년의 오랜 중국혁명 전쟁에서 더욱 발전해 중국 인민해방군의 특징이 되었다.

이 전략전술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법보(軍事法寶)’가 되어 운동전과 섬멸전은 점점 정채해지고 풍부해졌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휘관들이 운동전과 섬멸전을 운용하는 베테랑(能手)이 되었다. 이들은 이 전략전술로 중국의 광활한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상승군(常勝軍)의 위명을 떨쳤다. 펑더화이가 중국 서북부 전쟁터에서 싸울 때였다. 펑더화이의 병력은 고작 3만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장제스 군의 후종난(胡宗南)은 3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10대1의 엄청난 열세인 펑더화이 군은 운동전을 펼치면서 섬멸전을 계속 벌였다. 2년도 안 돼 기세등등했던 후종난 군은 서서히 무너지면서 장병들은 혼비백산해 산베이(陝北)지방 대 탈출극이 벌어졌다. 중국 전역의 다른 전쟁터도 이와 비슷했다. 인민해방군은 이렇게 해서 1백20만 병력으로 증강됐고, 그들은 야금야금 미국이 장제스 군에 지원했던 수백만 달러의 장비와 무기류를 먹어치웠다. 끝내는 장제스를 타이완으로 내쫒고 신중국을 세우는 위업을 달성했다. 중국은 지금도 군부에서 이 전략전술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보배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77)마오쩌둥생평전기록 가연 편저;중앙문헌출판사 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

 

25. 4년동안 당권 휘두른 왕밍…마오의 '암흑기'



1931년 1월 초순,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은 왕밍이 리리산의 뒤를 이어 6차4중전회에서 중공중앙의 영도자로 올라섰다. 리리산 보다 더 좌 쪽인 왕밍의 좌경주의가 4년 동안 무소불위의 당권을 휘두르는 시대가 도래 했다. 마오는 훗날 이 시기에 대해 "나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년 동안 중앙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4월 중순 상하이의 중공중앙 대표단(3인단)이 루이진(瑞金) 혁명근거지에 도착해 4중전회 결의사항을 전달하고 이를 관철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또 당과 홍군의 영도공작에 참가했다. 이어 8월 30일 상하이로부터 1만2천자에 달하는 ‘중앙이 소비에트 중앙국과 홍군 총 전적위원회에 보내는 지시편지’가 도착했다. 이 서신은 홍군과 중앙 혁명근거지 각 방면의 일처리에 대해 전면적으로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이런 내용을 강조했다.


“현재 당내의 주요 위험사상은 우경 기회주의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중앙 혁명근거지에 요구한다. 확고한 볼세비키에 대한 신념과 강고한 레닌주의로 코민테른과 중앙의 모든 지시를 집행하고, 그동안의 모든 과오를 고치면서 일체의 부정확한 경향에 반대하고 코민테른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8월30일, 중공중앙의 서신지시 정신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소비에트 제1차 대표대회(깐난회의(竷南會議)가 루이진(瑞金)현 예핑(葉坪)에서 열렸다. 중앙대표단이 회의를 주재하고 소비에트 중앙국을 대표해 마오가 보고했다. 회의는 대표단이 기초한 정치, 홍군, 당 건설, 청년단 공작, 소비에트 노동운동 등 5항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 마오쩌둥이 정확한 계급노선과 군중공작의 결핍으로 계급 이질분자, 즉 지주와 토호의  자제, 부농, 상인들을 혼재시켜 정부와 혁명조직을 구성하고, 간부 중에는 이런 이질분자들이 들끓고 있는 등 중앙근거지에서 매우 중대한 과오를 저질러 질책한다.

2. 토지분배 문제와 관련해 마오는 중앙이 제시한 ‘지주에게 토지를 나눠주지 않는다’, ‘부농에게는 나쁜 토지를 분배 한다’는 정책을 집행하지 않아 마오쩌둥을 질책한다. 그리고   중앙근거지에서 시행하고 있는 ‘많은 쪽에서 뽑아내어 적은 쪽에 보탠다(抽多補少)’ 정책은 토지혁명의 계급투쟁을 모호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부농노선’이며, 지주와 토호 및  부농들에게 양보하는 우경 기회주의를 범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3. 홍군 문제와 관련해 마오는 진정한 노농홍군을 만들지 않아 홍군이 지금까지 유격주의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마오가 제정한 전략전술은 ‘협애한 경험론’, ‘농민의 낙후사상’으로 ‘진지전(陣地戰), 시가전, 백병전’ 등등을 교련해야 한다.

4. 반혁명분자 숙청 문제와 관련해 중앙소비에트지구가 ‘군중동원을 하지 않는' 등 큰 과오를 저질러 지금 AB단, 개조파, 사회민주당 등 반혁명조직들이 근거지에 널리 퍼져있다.

5. 당 건설과 당내 투쟁문제와 관련해 중앙소비에트지구가 당내 교육훈련을 하면서 큰 차이가 발생해 이론수준과 정치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고 당내에 행정실무주의가 대단히 팽배해 있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협애한 경험론을 부정하는 ‘부정이론’이 존재해야 한다. 이에 따라 회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한다. 당 건설의 중심임무는 코민테른과 4중전회의 정신을 기초로 공작전반을 철저하게 전환하여 견결하게 집행한다. 당내에 폭넓은 사상투쟁을 전개하여 모든 잘못된 사상과 경향, 행정실무주의, 협애한 경험론, 농민의 낙후의식, 일체의 비무산자계급의 사상에 반대한다. 이와 함께 입으로는 코민테른의 노선이 정확하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면종복배(面縱腹背)하는 기회주의자를 온 힘을 다해 폭로한다. 실제 공작을 철저하게 전환하는 데 대해 방해하는 기회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한다.


회의는 “당의 두 노선투쟁을 최고도로 발전시켜 당의 눈앞에 있는 주요 위험, 즉 우경(右傾)을 반대하는 데 화력을 집중한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회의의 마지막 결정은 홍1방면군 총부기관의 편제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이 결정은 실제적으로 마오의 홍1방면군 총 전적위원회 서기와 총 정치위원의 직무 배제를 의미했다. 총괄하면 깐난회의 주요 칼끝은 마오쩌둥을 겨냥했고, 마오를 대표로 한 주장은 ‘협애한 경험론’, ‘농민의 낙후의식’, ‘부농노선’ 그리고 ‘심각한 우경기회주의’였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주석 78)


홍1방면군의 제3차 반 포위 소탕전의 승리 후 중공 임시중앙과 소비에트지구 중앙국은 여러 차례 깐저우(竷州), 지안, 난창, 지우장(九江) 등 깐(竷)강 유역의 중심도시를 점령할 것을 제기했다. 이것은 장시성과 그 인근 성 지역에서 첫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조처였다. 중국공산당은 11월 루이진(瑞金)에 중화소비에트정부 임시 중앙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노동자 농민 등 무산자 민주독재의 홍색정권(紅色政權)이 들어선 것이다.


마오는 11월 27일 열린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주석으로 선출됐다. 샹잉(項英), 장궈타오가 부주석으로 뽑혔다. 인민위원회는 중앙정부의 행정기관으로써 마오가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됐다. 이때의 '두 주석' 명칭이 '마오 주석'의 유래가 됐다.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 칭호가 장시 근거지에서 나왔다. 그때 마오가 중화소비에트 임시 중앙정부 주석이어서 그렇게 불렀는데, '마오 주석'은 인민들이 그에 대한 존경과 경애를 나타내는 뜻이 담겨있다"고 말한바 있다.

'45년 주석'의 마오는 1931년 11월27일부터 숨진 1976년 9월9일까지로, '주석' 두 글자는 '마오쩌둥 45년'을 동반했다. 1932년 1월 9일 임시중앙은 소비에트 중앙국에 ‘깐저우 긴급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임시중앙의 결의와 명령하달을 전후로 소비에트 중앙국은 루이진에서 회의를 열고 깐저우 공격문제를 반복적으로 검토했다. 마오는 견결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중앙국과 중국 혁명군사위원회의 다수의 영도자들은 중앙의 지시에 근거해 깐저우 공격을 견지했다.

33일 동안 전투를 벌였지만 깐저우 함락은 커녕 많은 사상자만 발생했다. 홍군 확대와 소비에트지구를 공고히 하고 확대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과 유리한 혁명 형세를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왕밍 좌경 모험주의노선이 중앙소비에트지구에 조성한 악과(惡果)의 시작이었다. 

78)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 마오저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중앙문헌출판사

-------------------------------------------------------------------------------------------------------------------------------------------------------


26. 중앙국과 격한 대립 끝에 병권 뺏긴 마오


홍군이 깐저우 포위를 풀은 뒤 마오는 홍군이 집중역량을 적의 통치역량이 약하고, 당과 군중기초가 비교적 좋으며, 지형조건이 유리한 장시성 동북지역과 푸젠성 북방지역 쪽으로 공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중앙국의 다수의 사람들은 임시 중앙의 주장을 견지하며 마오를 중심도시 탈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경 기회주의의 관념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계속 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역의 진출방침을 고수했다. 중국공산당 혁명군사위원회는 소비에트 중앙국의 결정에 따라 3월 18일 제1군단과 5군단을 중로군으로 개편해 깐강 동쪽지역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3군단을 또 서로군으로 해 깐강 서쪽지역에 머물다가 양로군이 깐강을 협공해 북쪽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6월 16일 50만 대군을 동원해 전국 각 소비에트지구와 홍군에 대해 제4차 포위 소탕전에 나서면서 이런 계획은 무산됐다.

장제스의 4차 포위 소탕전은 두 단계로 나눠졌다. 제1단계는 병력을 집중해 후베이, 허난, 안후이성(鄂豫皖)과 후난(湘), 후베이 서쪽 근거지로 진격해 홍군의 우한에 대한 위협을 해제시키면서 중앙근거지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공격을 하기로 했다. 제2단계는 다시 병력을 집중해 중앙근거지를 공격하기로 전략을 짰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중앙국은 홍1방면군을 7월 하순에 신펑(信豊), 난슝(南雄)을 거쳐 북쪽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8월 상순께 싱궈, 위두(于都)지구에 도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북상작전에 이견이 생겼다. 마오는 북상 후에 먼저 적의 수비가 약한 러안(樂安), 이황(宜黃), 난펑(南豊), 난청(南城) 등지를 공격해 북진하는 도로망을 확보해 장시성 동북쪽과 연락망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중앙국은 홍1방면군이 북상한  뒤 신속히 깐강 유역의 중심도시를 점령해 장시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중앙국의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중앙국 3인단으로 온 저우언라이는 직접 루이진에서 전선으로 달려가 7월 21일 1방면군 총사령부가 있는 신펑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가 전선에 나가자 런비스(任弼時)가 대리 소비에트 중앙국 서기를 맡았다. 이때 마오는 어떤 군사영도 직무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임시 중앙정부 주석의 신분으로 작전결정 과정과 지휘에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마오는 대단히 불편했다. 해서 저우언라이, 주더, 왕자샹(王稼祥)은 7월 25일 연명으로 “전방 작전지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정부 주석 직을 취소하고 총 정치위원회를 만들어 마오를 총 정치위원으로 임명하면 좋겠다”고 중앙국에 건의했다.

 

중앙국은 8월 8일, 저우 등의 제의를 받아들여 마오를 홍1방면군 총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1, 3. 5군단에 러안, 이황 전투를 명령했다. 중앙국은 또 전방에 저우언라이, 마오, 주더, 왕자샹 등 4명으로 최고 군사회의를 구성하고 저우를 주석으로 삼아 전방의 행동방침과 작전계획을 처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전투작전 계획을 놓고 ‘임시 중앙-소비에트지구 중앙국’과 전방의 저우, 마오, 주더, 왕자샹 등을 한 축으로 한 집단은 첨예한 갈등을 드러냈다. 9월 26일, 전방 지휘기관은 급속히 바뀌는 형세변화와 전장(戰場)의 실제 필요에 따라 후방 중앙국의 잘못된 의견을 배척하고 과감한 조처를 취했다. 홍1방면군 총사령관 주더와 총 정치위원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훈령’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임시 중앙, 소비에트지구 중앙국과 마오는 더욱 격렬한 논쟁을 벌여 양쪽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주석 79)


10월 상순, 전방인 닝두에서 중앙소비에트지구 중앙국 전체회의가 열렸다. 마오가 도시중심 공격을 배척하는 데 대해 불만을 품어 온 임시 중앙은 ‘닝두회의’에서 마오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질책했다. 닝두회의는 전선 최고 군사회의 제도를 취소하고, 저우언라이를 전쟁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마오를 후방으로 뻬 중앙정부 일을 하도록 결정했다. 저우는 전쟁경험이 풍부한 마오를 후방으로 돌리는 결정을 거부하고 두 가지 의견을 내놨다.

하나는 저우가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대신 마오를 ‘보조(助理)’로 쓰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오가 전쟁을 지휘하는 전 책임을 지고 저우가 행동방침의 집행을 감독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의에서는 마오를 저우의 ‘보조’로 쓰는 안을 통과시켰다. 조삼모사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마오에게 잠시 병가를 주고 필요할 때 전방에 보낸다는 방침이었다. 임시 중앙이 마오를 홍군 영도지위, 즉 병권(兵權)을 뺏기 위한 술책이었다. 10월 26일, 임시 중앙은 저우가 홍1방면군 총 정치위원을 겸하도록 임명했다. 마오는 이때부터 줜이(遵義)회의 때까지 전방에 돌아가지 못했다.

저우가 총 지휘한 반 4차 포위 소탕전도 홍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장제스가 제1단계 전략에 따라 비교적 공격이 쉬운 장궈타오의 '후베이-허난-안후이'근거지를 장악하면서 장궈타오와 쉬샹쳰(徐向前)이 이끄는 제4방면군은 쓰촨성으로 부대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또 후난과 후베이 서쪽에 웅거하던 허룽(賀龍)의 제2방면군도 '후베이-후난-쓰촨'의 변계지역으로 대이동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해 공산당은 창장(長江)유역의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이 일대를 버리고 생존을 위해 궁벽한 서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마오는 당시의 상황을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80)


"이 시기에 우리는 두 가지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하나는 푸젠성 난(亂)을 이끈 차이팅카이(蔡廷凱)군과 연합하지 못한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동전술을 포기하고 단순히 방어에만 전념한 그릇된 전략의 채택이었다. 엄청나게 우세한 난징군을 진지전으로 대적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홍군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진지전으로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실책과 장제스의 새로운 전술, 전략이 국민당 군의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우세와 연결되어 홍군은 1934년 급속하게 악화되는 장시에서의 존립여건을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밖에도 국내 정치상황이 주 활동 무대를 서북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만주와 상하이를 침략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미 1932년 2월에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국민당이 소비에트 정부를 봉쇄하고 포위하는 바람에 이 선전포고는 물론 실행할 수 없었지만, 이 포고에 뒤이어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중국내의 모든 무장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33년 초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 중지, 소비에트지역과 홍군에 대한 공격중지, 인민대중에 대한 시민적 자유권과 여러 가지 민주주의적 권리보장, 항일전쟁을 위한 인민의 무장화 등을 수락하는 조건하에서라면 어떠한 백군과도 협력하겠다고 선언했다."


79)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신판)
80)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

 

27. 보구·왕밍의 '공격' 모험주의, 장제스 토치카 전술에 당해

 

보구(博古/본명은 秦邦憲)가 이끌던 상하이의 공산당 임시 중앙은 장제스의 잇단 압박으로 1933년 1월 중화소비에트 임시 중앙정부가 있는 장시성 루이진으로 옮겼다. 보구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고 있는 소련 유학파인 '28인의 볼세비키'의 일원이다. 코민테른의 대표 독일 출신 오토 브라운(중국명 리더(李德))도 10월에 루이진으로 왔다.

군사문제에 관해 경험이 없는 보구는 리더를 군사고문으로 임명해 홍군의 사실상의 총사령관이 됐다. 이들이 도착한 뒤 중앙국은 임시 중앙과 합쳤다. 새로 성립된 당 중앙은 군 지휘계통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당 중앙은 5월, 군사위원회를 최전선에서 루이진으로 옮겼고, 샹잉을 사령관 대행으로 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종전 그대로 홍군의 총 정치위원이고, 주더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보구


1933년 말부터 시작된 장제스의 제5차 포위 소탕전에 대항해 홍군은 유격전과 유격전 성향의 운동전을 포기하고, 정규전으로 맞서는 군사전략을 채택했다. 이듬해 1월에 열린 6차5중전회는 “중국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즉각적인 혁명 상황이 존재한다”면서 “반 포위 소탕전 투쟁을 벌여 즉각 중국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자”고 선언했다.

 

이 회의에서는 왕밍이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총지휘하고 보구가 현장에서 집행하는 좌경 모험주의 노선이 맹위를 떨쳤다. 이른바 추이추바이, 리리산에 이은 왕밍의 3차 좌경노선이었다. 이들은 장제스 군에 비해 엄청나게 열세인 홍군의 전력을 감안하지 않고 진지전과 주력부대에 의존하는 정규전을 밀고 나갔다. 마오의 전략인 유인과 급할 때는 달아나는 ‘퇴각 도망주의’는 용도폐기 됐다. 공격 모험주의에 매달렸다. 장제스는 제5차 포위 소탕전에 1백만 대군을 동원해 중국 전역에 있는 소비에트지구에 대해 총공세에 들어갔다. 공산당 임시 중앙이 있는 장시성 루이진 포위 소탕전에는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장제스는 독일출신 장군이 제시한 ‘토치카 전술’을 사용했다. 이 전술은 점령지역을 마치 중세의 작은 성과 같은 요새와 요새를 잇는 선으로 연결한 뒤 그 안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각 요새는 전투지역이 서로 겹칠 정도로 촘촘하게 포진해 놓았다. 전진은 느렸지만 매번 전진할 때마다 참호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홍군의 기습공격을 손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전술은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장제스 군은 몇 달 동안 꾸준히 전진하면서 주요 거점들을 손에 넣었다. 장제스 군은 1월과 3월에 루이진을 향해 차근차근 진격해 들어갔다. 장제스 군은 4월이 되자 루이진의 관문에 해당하는 도시인 광창(廣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보구와 리더는 홍군을 6개군으로 나눠 장제스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를 당해 큰 손실을 입었다. 장제스 군은 광창을 점령한 뒤 곧바로 중앙소비에트 근거지인 루이진으로 진격했다. 풍전등화의 임시 중공중앙 지도부는 끝까지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지도부는 총서기인 보구와 리더, 저우언라이 등으로 짜여졌다.  ‘3인단’이다. 1934년 10월, 중공중앙 지도부는 갑자기 루이진 소비에트 근거지를 떠난다고 밝혔다. 지도부만의 은밀한 결정이었다. 홍군은 창졸간에 대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앞서 9월 초,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廬山)에서 비밀 군사회의를 열었다. 소비에트 공산당에 대한 제5차 포위 소탕전에 관한 전략회의였다. 이 비밀 군사회의는 웨이창(圩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강당에서 열렸는데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참석자는 장시, 후베이, 후난, 허난(河南), 산둥 등 5개성 주석과 군사령관, 사단장, 고급참모 등 2백여 명이었다. 장제스가 회의를 주재했고, 난창 임시병영 비서장 양융타이(楊永泰), 장시성 주석이자 임시병영 제1청 청장인 슝스후이(熊式輝)는 군 배치 등 구체적인 회의내용과 작전계획 등을 설명했다.

제5차 포위 소탕전 작전명은 ‘철통 포위 소탕전(鐵桶圍剿)'으로 장제스의 군사고문인 독일 출신 장군이 입안했다. 국민당 군이 1백만의 대군과 비행기 2백70대, 대포 2백문으로 루이진, 위두, 후이창(會昌), 싱궈 등 중앙소비에트 혁명근거지를 정해진 날짜에 사면팔방에서 동시에 기습 포위 소탕전을 벌이는 내용이었다. 포위 반경은 루이진에서 1백50킬로미터다. 벽에 걸린 작전지도에는 포위망이 거미줄처럼 물샐틈없이 겹겹으로 짜여져 포위공격  담당 부대들의 위치와 토치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탄약고, 식량과 여물창고, 병원, 포로수용소 등의 건립 위치도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매일 루이진을 향해 7~8리씩 진군하면서 1리 때마다 철조망을 치고 5리 간격으로 토치카를 세워 교차 봉쇄망을 그물망처럼 짜 놓았다. 루이진까지 토치카는 30겹으로 둘러싸고 곳곳마다 지뢰밭을 만들어 홍군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진(陣)을 치기로 했다. 또 돌발 상황에 대비해 기동력 있게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미군 군용트럭 1천대를 난창에 대기시켜 놓았다. 포위망을 구축하기 전에 홍군을 헷갈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12개 사단을 파견해 홍군을 공격하는 척하며 시간을 버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포위망이 완전히 구축되면 이 12개 사단을 철수하고 소비에트지구를 완전 봉쇄해 홍군의 물자 공급을 전면 차단하도록 했다. 장제스는 1주일간의 회의를 마친 뒤 “지금 포위 소탕전은 이미 승기를 잡았다. 각 부문 책임자들은 작전계획을 적극적으로 집행해 공을 세우라”고 격려했다. 2백여 명의 참석자들은 이번에야 말로 공산당을 완전 소탕하겠다며 굳건한 결의를 다졌다. 참석자들은 겉표지에 극비문건으로 표시된 소책자를 들고 각 부대로 돌아갔다. 이 책자에는 상세한 포위망 도표와 작전계획서, 진공노선, 장제스의 지시문건 등이 담겨있었다. (주석 81)

81) 蔣介石鐵桶圍剿計劃外泄始末  人民政協報

-------------------------------------------------------------------------------------------------------------------------------------------------------

 

28. 8만 홍군 목숨달린 장제스 극비 문서 전달 작전

 

루산회의에 참석한 장시깐베이(江西竷北)제4구(區)포위소탕전 보안사령관 모슝(莫雄)은 이 극비문서를 갖고 어둑어둑할 무렵 더안(德安)의 보안사령부로 돌아왔다.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 온 모슝은 식사도 거른 채 불도 켜지 않고 의자에 앉아 깊은 상념에 젖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주임 비서 류야푸(劉啞佛)가 모슝에게 다가와 “사령관님, 루 참모장이 오셨습니다”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슝은 들어오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보안사령부 기밀비서 샹위녠(項與年)과 루즈잉(盧志英)이 들어왔다. 모슝은 루즈잉과 손을 꽉 잡고 악수를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번에 공산당은 끝났다!”며 루산회의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슝은 이들에게 회의내용이 담긴 극비문서를 건넸다. 문건을 넘길 때마다 오른쪽 상단에 푸른색으로 ‘극비’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내용을 들춰 본 이들 세 사람은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홍군의 생사존망이 걸린 극비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인 이들 세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즈잉이 모슝과 굳게 악수를 나누며 “당을 대표해 당신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 사령관님, 모 따꺼(형님)! 홍군은 따꺼를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모슝은 일찍이 국민당내 군부에서 ‘모따꺼’, 또는 ‘5색 장군’으로 통했다. 5색 장군은 ‘3산(山) 5악(岳)’에 비유하는 말로 빨강, 노랑, 파랑, 흰색, 흑색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마당발에서 연유했다. 마오 보다 2살 위인 모슝은 16살 때인 1907년에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는 2년 뒤 광둥 신군(新軍)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광둥 북벌군 소대장, 중대장을 거쳤다. 광시군벌 천지융밍이 쑨원에 반기를 들었을 때 ‘서로 토적군’ 4만여 명을 이끌고 광저우에서 천지융밍 군을 깨뜨려 쑨원이 광저우에서 3차 혁명정부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모슝은 이 공로로 31살에 장군이 돼 여단을 이끌었다. 장제스는 북벌이 끝나자 모슝의 군권을 빼앗고 한직으로 보냈다. 불만을 품은 모슝은 장파구이(張發奎)가 장제스에 반기를 들었을 때 2차례 가담한 적도 있었다. 모슝은 1930년 쏭메이링(宋美齡/나중에 장제스 부인이 됨)의 오빠인 국민당 재정부장 쏭쯔원(宋子文)의 추천으로 상하이에서 국민당 정치주임으로 일했다.

모슝은 그때 우연히 공산당원인 류야푸, 샹위녠을 알게 됐다. 모슝은 당시 상하이에서 공산당 영도인 저우언라이, 리커농(李克農)과 연계를 맺고 여러 차례 공산당 가입을 요청했으나 공산당은 그가 당외에서 일해 줄 것을 설복했다. 모슝은 1934년에 장제스의 지낭(智囊)인 난창 임시병영 비서장 양융타이의 추천을 받아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모슝은 부임하기 전에 상하이 중공중앙과 협의해 10여명의 지하당원을 ‘군대 전우’라고 위장해 데리고 갔다. 모슝이 극비문건을 보여 준 세 사람은 이때 심은 공산당 당원이었다. (주석 82)

류야푸, 샹위녠, 루즈잉 등 3명의 공산당원은 즉시 행동개시에 나서 ‘철통 포위소탕전’계획서의 핵심부분을 급히 루이진 공산중앙에 전보로 알렸다. 그들은 또 극비문건의 상세한 내용을 비밀용어를 사용해 학생사전에 필사한 뒤 루이진에 보내기로 했다. 문제는 누가 갖고 갈 것이냐 였다. 죽음과 동행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진으로 가는 길은 이미 봉쇄작전이 실시돼 겹겹의 초소가 세워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죽고 죽이는 포위 소탕전으로 장제스 군은 핏발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발각되면 곧 죽음을 뜻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생사가 걸린 극비 정보가 아닌가. 누군가는 가야 했다. 세 사람은 서로 가겠다고 다투며 설왕설래했다. 샹위녠이 결연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안후이와 산둥 출신으로 장시성 말투가 아니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다. 일이 생겼을 때 개인이 죽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당의 생사문제는 큰 문제다. 장시성과 외지의 말을 다 구사하는 자신이 가야한다는 논리였다.

 

두 사람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샹위녠과 악수만 할 뿐이었다. 샹위녠은 4권의 사전을 꾸러미에 넣은 뒤 군복 대신 장삼을 입고 학교 선생님처럼 변장했다. 더안에서 루이진까지 가는 데는 중간에 융슈(永修), 신젠(新建), 난창, 펑청(豊城), 충런(崇仁), 러안, 링두, 쓰청(石城) 등 8개 현과 시를 거쳐야 한다. 산길로 2천리 떨어진 이 거리를, 오늘날 자동차를 타고 가더라도 이틀이 걸린다.

당시에는 이리와 표범, 호랑이가 출몰하고 높은 산과 급류가 흐르는 내천이 가로막아 매우 험난한 노정이었다. 혼자서 두 다리로 며칠 안에 걸어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문약한 선생으로 변장한 만큼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은 백군(장제스 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마음이 불타는 듯 급하고 초조했지만 낮에는 느긋하게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걷고, 밤에는 낮에 까먹은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산길을 택해 비호처럼 달려야 했다.

샹위녠은 루이진에 가까이 갈수록 검문초소가 늘어나 자신의 신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민으로 변장하자니 발음이 푸젠 서쪽지역의 짙은 음색이어서 수 천리 떨어진 외지 농민이 이곳에 왔다는 것도 의심을 살만했다. 선생 노릇을 계속하자니 홍군 중에는 지식분자가 적잖아 아무래도 꺼림찍했다. 게다가 밤에는 산길로 가다보니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몰골이 흉해 선생모습 같지도 않았다. 그동안 검문소에서 몇 차례 위기일발의 순간을 가까스로 기지로 넘긴 적도 있었다.

네 권의 사전도 골칫거리였다. 샹위녠은 거지로 변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권의 사전에 비밀용어로 발췌한 작전내용을 더욱 간추려 얇은 종이에 적은 뒤 신발 밑창에다 숨겼다. 사전은 다 버려 버렸다. 거지로 보이기 위해 벽돌조각으로 자신의 앞니 주위를 가격했다. 4개의 이가 부러지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두어 시간 뒤 한 거지가 매이(梅) 강가 낭떠러지 언저리에 나타났다. 입이 시퍼렇게 퉁퉁 붓고 피딱지가 더덕더덕 달라붙은 일그러진 얼굴에 봉두난발이었다. 저잣거리에 출현한 이 거지를 보고 행인들은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8만여 홍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극비문건 '철통포위 소탕전' 내용은 마침내 샹위녠의 손을 거쳐 홍군 총 정치위원이자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3인단'의 한 사람인 저우언라이에게 전달됐다. 장제스가 루산 비밀회의를 끝낸 지 채 1주일이 안 걸렸다. 이에 따라 8만여 명의 홍군은 철통 포위소탕전의 포위망이 완전히 구축되기 전에 장시 소비에트 루이진 근거지를 떠나 공전절후(空前絶後)의 2만5천리 장정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주석 83)

82)蔣介石鐵桶圍剿計劃外泄始末 人民政協報
83)蔣介石鐵桶圍剿計劃外泄始末 人民政協報

-------------------------------------------------------------------------------------------------------------------------------------------------------

 

29. 루이진 탈출, 마오 버리고 가려던 보구의 계략에…

 

임시 중공중앙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3인단'은 루이진 철수계획을 극비에 붙이고 업무를 나눠 비밀리에 준비에 들어갔다. 총서기인 보구가 정치부문, 리더가 군사부문, 저우언라이는 철수계획과 병참업무 부문을 각각 맡았다. 당과 군 고위 지도자들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통보를 받았다.

부대가 어디로 이동하는 지도 몰랐다.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는 지도, 어떤 기준에 따라 결정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우선 부상 장병과 여성, 어린이와 나이 든 사람들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홍군 주력이 탈출하기 위해서는 엄호 부대가 필요한 만큼 잔류병력 1만6천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이후 남방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일 군사 지도자도 남아야 했다. 샹잉과 부상 중인 천이, 탄쩐린(譚震林), 총서기를 지낸 추이추바이, 공산당 1대 대표의 한 사람으로 '하털보'로 잘 알려진 허쑤헝 등이 남기로 했다.

 

애초엔 마오도 잔류명단에 끼어 있었다. 마오보다 15살 아래인 보구와 리더는 마오를 스트레스를 주는 '짐 보따리(包보)'로 여겨 떨 구고 갈 작정이었다. 그때 보구의 공산당 내 위치는 총서기로, 코민테른 중국대표로 소련에 가 있는 왕밍의 자리를 이어받아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한 살 위인 모스크바 중산대학 동기생이자 28인 볼세비키 일원인 코민테른의 왕밍이 '태상황(太上皇)' 이라면 보구는 '금상(今上)'으로 당정군(黨政軍)의 막강한 권력을 오로지하는 정상에 있었다.

 

반면 마오는 국내 징강산 그룹으로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중국 제일이자 최고의 혁명근거지를 만들고 최강의 노농홍군을 보유해 중앙 영도기관에 '해방구'를 제공했지만 지금은 끈 떨어진 쪽박신세에 불과했다. 마오는 우경 기회주의, 유격주의, 부농노선 등의 총 두목으로 비판의 표적이 돼 허울뿐인 소비에트중앙 주석으로 기신하고 있었다. 그나마 소비에트지구 군민들이 마오를 '당대표' '총정위' '마오주석'으로 높여 부르는데다 장제스 군은 '비적 우두머리' 로 꼽아 보구는 마오를 아주 '팽(烹)'할 수 없는 처지였다. 보구가 회의를 주재할 때 마오는 말석에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수모도 당해야 했다.

 

보구의 군사고문 리더는 훗날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보구는 마오가 그를 추종하는 군 간부들에게 겉으로는 보구에 복종하되 속으로는 반대하라고 했다는 도청도설을 믿고 있어, 마오가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도광양회(韜光養晦) 계책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보구는 그런 마오가 짐이 돼 때를 봐서 호랑이를 산에서 유인해 허점을 이용해 공격하는 '조호이산(調虎離山)'계책을 쓰기로 했다. 보구와 리더는 한 때 마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앙의 고위층 활동에 거의 참가하지 못하자 마오를 소련에 보내 치료하라는 미명아래 자기들 곁에서 떼어내려 했다.

골칫거리를 먼 소련에 보내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오를 소련에 있는 왕밍과 코민테른, 스탈린의 감시아래 두게 돼 '뛰었자 벼룩'으로 '알 먹고 꿩 먹는' 격이어서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마오가 거부했고 코민테른 또한 장제스의 포위 소탕전이 한창 벌어지는 긴급 상황에서 마오를 근거지에서 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무산됐다. 보구와 리더는 헛물만 켰다.
보구는 루이진 대탈출을 앞둔 지금 상황이 '보따리'를 쳐버리는데 적기라고 생각했다. 코민테른도 마오가 근거지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어, 코민테른의 뜻에 따라 마오를 추이추바이, 허쑤헝과 함께 소비에트지구를 사수하도록 명령하면 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보구와 리더는 잔류명단에 마오를 넣고 함구했다. 출발을 얼마 앞두고 마오의 경호원이 군수공급처에서 장병들이 행군에 필요한 헝겊신발, 짚신, 각반, 배낭, 겨울에 입는 솜 군복 등 각종 장비 물자를 수령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경호원은 군수공급처에 달려가 마오와 자신의 군수품을 수령하기 위해 명단을 확인했으나 마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경호원은 중앙과 군사위원회에 가서 따졌다.

 

마오가 부대이동 명단에서 빠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의논이 분분했다. 당 중앙을 비판하는 여론도 높아졌다. 홍군 영도 간부와 당 책임자들이 당 중앙에 문제제기를 했고, 일부 간부들은 마오와 함께 남겠다고 격앙했다. 마오의 명망과 영향력 때문이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보구가 수습에 나섰으나 대세는 마오가 부대와 함께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마오가 중앙 소비에트지구와 홍군을 실제 적수공권으로 창건했는데 그를 빼놓고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보구는 안팎 상하가 혼란한데다 마오가 경험이 풍부하고 마오를 따르는 도당이 많아 마오가 일구고 발흥한 잔류지인 이곳에서 권토중래한다면 오히려 남겨놓고 가는 것이 부담이 될 듯싶었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는 '방호귀산(放虎歸山)꼴이 되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자 보구는 생각을 바꿨다.

보구와 리더는 차라리 마오를 자기들의 손바닥에 올려 놓고 중앙기관에서 마오의 역할을 끊어버리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여론을 수렴한 척 하면서 저우언라이와 장원톈(張文天)의 동의를 받아 마오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보구와 리더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속내와는 달리 마오가 학질을 앓았었기 때문에 중상을 입은 왕자샹(王稼祥)처럼 들것에 누워 갈 수 있도록 선심을 쓰기도 했다. (주석 84)                 

84)毛澤東在紅軍長征前夜的鬪爭 理論頻道 新華網 誰決定了毛澤東的領導地位 人民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30. 장제스 압박에 홍군 내부 '분열' …대장정 전야

 

장제스의 5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비해 맨 먼저 탈출한 홍군 부대는 7군단을 이끄는 팡즈민(方志敏)의 부대였다. 팡즈민은 '북상항일 선견대(北上抗日先遣隊'라는 이름을 내걸고 중국의 제일 남쪽 푸젠성 북부에서 장제스 군의 봉쇄선을 뚫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두 번째 부대는 샤오커(蕭克)가 지휘하는 홍 제6군단으로 징강산 지구에서 이동을 시작됐다.

샤오커는 후베이, 후난 변계지역에 있는 허룽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제2방면군을 결성하고 ‘후난-후베이-쓰촨’의 경계지역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했다. 세 번째 부대는 장제스 군의 제4차 포위소탕전 때 ‘후베이-허난-안후이’ 변계지역에서 근거지를 마련했던 장궈타오, 쉬샹첸, 리셴녠(李先念)부대로 이들은 쓰촨지역을 향해 대이동에 나섰다. 이곳에 잔류했던 쉬하이둥(徐海東)과 우환셴(吳煥先)이 인솔하는 홍 제25군은 후난-안후이 근거지를 떠나 산시(陝西)로 북진해 새로운 소비에트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장제스 군은 루이진의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대한 봉쇄와 공격을 더욱 강화하게 됐다. 당시 병권을 틀어쥐고 부대이동 계획을 총괄한 리더에 따르면 애초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7군단과 6군단이 장제스 군의 봉쇄선을 돌파해 탈출하면서 9월에 들어 장제스의 직계부대들이 본격 군사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홍군이 장제스 군의 남쪽 포위망을 책임지고 있는 광둥 군벌 천지탕(陳濟棠)과 비밀협상을 벌여 안전한 탈출로를 보장받게 되자 계획을 앞당겨 10월 상, 중순께 부대이동을 하기로 했다.

이런 중대한 군사정책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보구와 리더는 군사회의는 물론 중앙정치국에서 토론 한번 거치지 않고 둘이서 결정해 버렸다. 3인단의 멤버인 저우언라이의 견해는 보충의견 정도로 무시했다. 당시 중앙의 서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장원톈은 훗날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불만만 가득했다”고 되뇌였다. 리더는 나중에 독일에서 “마오가 이때의 상황을 이용하여 당의 영도자들을 비방했다. 마오는 특히 보구와 저우언라이에 대해 장정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책망했다”며 자신에 대한 마오의 비판과 책임을 은폐했다. 이때부터 보구와 저우언라이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10월 상순에 접어들면서 홍군의 탈출구인 소비에트 남쪽 전선에서 계속 긴급보고가 올라오면서 대탈출의 시각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리더는 이때의 상황을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중화민국 국경절인 신해혁명 23주년 기념일인 쌍십절 때였다. 홍도(紅都) 루이진은 중앙의 각 기관들이 철수 준비를 위해 전화선을 철거하고 배낭을 꾸리는 등 분주했다. 어떤 부대는 이미 출발을 시작했다. 이때 샹잉(項英)이 혼자 내 사무실에 들어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나와 샹잉은 거의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 했다. 우슈취안(伍修權/리더의 통역원)이 우리의 이야기를 통역했다. 잔류부대의 지휘를 맡은 천이는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 세 명 이외에 참석한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샹잉은 소비에트지구 투쟁의 앞날에 대해 낙관적으로 이야기 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홍군의 명운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려했다. 그는 이전처럼 경고했다. 마오가 당의 최고 영도층에 반대하며 벌이고 있는 파벌투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마오는 잠시 전술적 고려로 자제할 뿐이다. 마오는 큰 영향력, 특히 군대의 고위간부들에 의존하고 있다. 마오는 기회를 잡아 그들의 도움아래 군과 당의 영도권을 탈취해 자기 수중에 넣으려 한다. 나도 샹잉의 우려에 동의했다.” (주석 85)

 

이에 대해 샹잉이 보구, 리더와 헤어지면서 의례적으로 주는 말을 리더가 마오를 흠집 내기 위해 부풀렸다는 반론도 있다. 샹잉은 나이나 투쟁경력으로 볼 때 보구나 리더를 앞선다. 샹잉은 국내 계급투쟁이나 더욱이 당내투쟁 제1선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단련했다. 그는 특히 마오와 직접 싸우면서도 수년 동안 친분을 나눠왔다. 샹잉은 보구, 리더와 헤어지면서 의례적인 말로 그들에게 충성을 하는 만큼 자신을 최고 영도층에 중용해달라는 뜻 이외의 확대해석은 무리라는 얘기다.

이런 ‘암시’와 ‘경고’는 리더의 말대로 ‘이전처럼’이란 뜻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논리였다. 리더는 장정에 대해 계획대로 준비를 해왔다고 주장하나, 마오나 당군 고위 간부들이 보기에는 황망소조한 ‘도망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중공중앙의 핵심지도부 3인단이 8만여 명의 홍군의 진로에 대해 정확히 언제, 어디로, 어떻게 혁명역량을 보존 할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언제에 대해서는 신중국 10대 원수의 한 사람이며, 당시 홍1군단 정치위원이었던 녜룽전(葉榮臻)은 이렇게 말했다. (주석 86)

 

“1군단소속 부대들은 10월 16일부터 잇따라 루이진을 떠나 콴티옌(寬田), 링베이(嶺背)로 이동하면서 근거지 군중들에게 고별인사를 한 뒤 위두(于都)강을 건너 장정(長征)의 길에 올랐다. 위두강을 건널 때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도 많은 홍군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대단히 격해져 수도 없이 뒤돌아보며 중앙근거지의 산천을 보고 또 보며, 강변에 줄지어 서서 환송하는 전우와 군중들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이곳은 우리가 2년 10개월 동안 전투하며 머물렀던 곳으로 중앙근거지의 인민들은 중국을 위해 큰 희생과 공헌을 했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들 인민들은 우수한 자녀들을 홍군에 보내줬다. 홍군 전사의 대부분이 장시성과 푸젠성 출신이고, 근거지 인민들은 홍군에게 최대한의 물질적 지원과 정신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차마 떠날 수 없다는 격한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홍군 주력부대가 떠나면 근거지 인민과 잔류한 동지들이 적들에게 유린당할 것을 생각하니 그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별이 아쉬워  발걸음이 무거웠다. 앞에서 전령들이 '빨리 따라와!' 외치는 소리에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노정을 향해 달려갔다."

-------------------------------------------------------------------------------------------------------------------------------------------------------

 

31. 대장정의 조선인 영웅 양림 "중국해방 통해 조선 독립 가능"

 

어디로 갈 것인가도 보구와 리더는 당군 고위간부들과 협의 없이 푸젠성 북쪽을 거쳐 샹장(湘江)을 건넌 뒤 후난과 후베이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허룽의 2방면군과 합류해 새로운 소비에트 근거지를 만든다는 계획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홍군은 4개의 봉쇄선을 뚫어야 했다. 관건은 장제스의 최정예부대가 지키고 있는 4번째 샹장 봉쇄선 돌파에 달려 있었다. 이런 개략적인 홍군 대이동, 실제적으로는 '홍색국가'천도나 다름없는 장정 전야에 마오는 어린 아들 '마오마오(毛毛)를 잔류하는 허쯔전의 여동생에게 맡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허쯔전은 임신한 몸으로 부대를 따라 나섰고, 저우언라이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는 폐결핵을 앓는 상태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장정에 나선 여성은 30명에 그쳤다.

홍군의 장정(長征)대오 중에는 외국 국적의 홍군들도 참여했다. 그중에는 조선인 국적의 양림(楊林)이라고 불리는 김훈(金勛)과 무정(武亭)으로 부르는 김무정(金武亭)이 있었다. 양림은 당시 소비에트지구 중공중앙에서 조선인민을 대표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홍군대학(紅軍大學) 교무를 주관하고 있었다. 장정 때는 홍군대학을 간부여단(干部團)으로 개편하면서 여단 참모장을 맡았다. 무정은 펑더화이의 3군단에 있다가 소비에트지구 중공중앙 군사위원회가 직속 부대로 포병대대를 창설하자 초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양림은 선봉으로, 무정은 중국 '포병의 아버지(炮兵之父)'로 위명을 떨쳤다. (주석 87)

 

 

양림은 양주평(楊州平)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는데 장시 소비에트지구에 온 뒤 비스티(畢士悌)로 이름을 바꿨다. 양림은 구한말인 1901년 평안북도의 한 애국지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림이 10살 되던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삼켜버리고 가혹한 통치와 탄압을 해 어린 양림은 빼앗긴 나라의 설움을 겪으면서 광복염원의 불씨를 키워갔다.

그는 평양고보에 다닐 때 반일 애국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해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1919년 3월1일, 일제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림은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3.1만세 민중봉기에 참여했다. 일제는 만세운동 참가자를 살해하는 등 잔혹하게 3.1운동을 진압했다. 양림의 아버지는 그때 살해됐다. 그는 반일 애국단체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반일운동을 펼쳤다. 일제는 양림을 눈엣가시로 여겨 체포하려 하자 낌새를 챈 양림은 1919년 가을 중국으로 망명했다.

 

◀ 양림

 


양림은 그해 말 무장투쟁으로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간도지역으로 망명한 이회영 등 애국지사들이 지린성 통화현 합리하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군의 길을 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국내외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을 이끄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됐다. 교육과정은 하사관반 3개월, 장교반 6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등 3개 과정을 두었고 1920년 폐교될 때까지 2천1백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끈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갈무리하는 등 만주벌판 곳곳에서 벌어진 일제와의 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양림은 6개월간 군사훈련 과정을 마친 뒤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의 교관으로 있다가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해 과단성 있는 지휘와 용감하게 싸워 김좌진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주석 88)

 

청산리전투에 앞서 일제는 5월에 만주 군벌 장쭤린과 함께 조선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반일단체와 무장투쟁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양림이 소속된 반일 무장 세력은 중과부적으로 8월 백두산 밀림으로 이동하여 다른 항일 무장 세력과 합류했다.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양림이 소속한 반일 무장 세력은 19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지대로 이동하여 수림이 울창한 깊은 산골짜기에 매복했다.

양림은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좌, 우, 중간 3개의 진지 중 정면 진지를 맡았다. 20일 오전 8시께 일본군 선두부대 1천여 명이 한 갈래 밖에 없는 오솔길을 따라 양림의 부대가 매복한 지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양림 소속부대의 6백여 정의 보총과 6정의 중기관총, 2문의 박격포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김좌진이 이끈 항일 무장군은 일본군 1천5여 명을 섬멸하는 등 큰 전과를 거뒀다.

청산리 전투는 좁은 의미에서는 1920년 10월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러 침입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천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에서 전개한 크고 작은 10차례의 승첩을 통칭한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은 항일무장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인데다 항일무장 세력의 지도부의 붕괴로 양림의 소속부대는 시베리아로 퇴각했다. 양림은 중국 해방을 통해서만이 조선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군사학을 더 배우기로 했다. 양림은 1920년 말 중국 동북지역을 떠나 상하이, 광저우, 하이퐁 등 2천여 리의 길을 걷는 등 천신만고 끝에 1921년 초 윈난성 쿤밍(昆明)에 도착했다. 양림은 그곳에서 양저우핑(楊州平)이라고 이름을 바꾼 뒤 윈난강무학교 제16기 포병과에 들어가 1924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양림은 당시 군사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 중국혁명의 중심지 광저우에 가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는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가 교관으로 임명됐다.

양림은 1925년 2월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이었던 저우언라이가 인솔한 광시군벌 천지융밍에 대한 광둥 혁명정부군의 제1차 동정(東征) 때 제3기 학생대 대장으로 2개 학생연대를 이끌고 정면 진격에 나서 많은 적들을 섬멸하는 등 뛰어난 공을 세웠다. 6월에는 저우언라이의 제2차 동정군과 광저우에서 합류해 윈난 군벌 양희민과 광시 군벌 류진환의 반군을 격파하는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양림은 이때 공산당에 가입했고, 11월에 예팅(葉挺)이 이끌고 있던 광둥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연대에 파견돼 제3 대대장을 맡았다. 양림은 1926년 4월 황푸군관학교에 복귀해 중좌 기술주임 교관에 임명된 뒤 국민혁명군의 북벌과 광저우 폭동에도 참가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공산당원을 살해하고 검거선풍이 전국을 휩쓸자 당중앙은 양림을 부인 이추악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양림은 이곳에서 1년간 마르크스-레닌 등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한 뒤 육군 보병군정대학에 들어가 1년간 군사과학을 배웠다. 1930년 봄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 온 양림 부부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파견됐다. 성위원회는 양림을 동만주 특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파견해 군사부문의 공작을 맡겼다.

그는 동북에 온 뒤 적극적으로 농민무장을 조직했다. 연길, 화룡, 왕청 등지의 중-조 군중을 발동하여 악질지주와 군경의 무장을 탈취하고 반일 유격대를 조직했다. 1931년 일제가 본격적인 만주침공을 자행한 '9.18사변‘이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그해 12월 선양(沈陽)에서 하얼빈으로 옮겼다. 양림은 군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양림은 1933년 7월 중앙 소비에트지구로 가기까지 하얼빈에 10개월 정도 머물렀다.

87)哪些外國人參加了長征 理論頻道 新華網
양림열사 장백의 투사들 연변항일렬사전 연변인민출판사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장군 김순기 료녕민족출판사
彭德懷自傳 解放軍民藝出版社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 서명훈 저 민족출판사
88)양림열사 장백의 투사들 연변항일렬사전 연변인민출판사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 서명훈 저 민족출판사
-------------------------------------------------------------------------------------------------------------------------------------------------------

 

32. 홍군의 조선인, 양림 이추악 무정의 활약상

 

중공 만주성위는 동북 전역의 항일유격전을 지휘하였으며, 실질적으로 항일련군의 지휘부였다. 양림은 군사위 서기로 있으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매우 중시했다. 양림은 만주성위 서기 나등현을 도와 만주성위 회의를 열고 동북 당 조직의 중심임무는 반일 민족전쟁을 조직, 영도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성위는 각 지역 당 조직에 인민 군중을 무장하여 유격전쟁을 전개하고 모든 항일역량을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양림은 반석지구에서 반석 노농의용군을 창립했다.

이 무장대오는 그후 남만유격대로,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발전했다. 양림은 1933년 7월 중공중앙의 지시로 상하이에서 소집된 군사위원회의에 참석한 뒤 장시성 중앙소비에트지구에 가 노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에 임명되어 저우언라이 조직에서 포로 재교육과 신병훈련을 맡아 그들을 전선에 보내는 일을 했다. 양림의 부인 이추악(李秋岳)은 동북 만주벌판의 항일투쟁사에서 '항일 여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추악은 190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금주(金錦珠)이며, 항일투쟁을 하면서 장일지, 류옥명이라는 가명을 썼다. '3.1운동' 때 평양 숭실여학교에 다니던 이추악은 반일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선봉에 서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이때 양림과 뜻이 맞아 항일투쟁을 하며 평생을 같이하기로 언약했다.


 

 항일여영웅으로 불렸던 평안남도 출신의 이추악(왼쪽), 양림

 

 

이추악은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양림이 황푸군관학교에 있을 때 중국 광저우로 가 양림과 결혼했다. 이추악은 1925년 2월 광둥혁명군의 제1차 동정 때 선전대에서 영용하게 싸웠으며, 그해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이때 혁명 활동에 걸맞은 이름을 짓기 위해 중국의 근대 여걸인 추근(秋瑾)의 이름에서 '추'자를 따고, 남송의 충신인 장군 악비(岳飛)의 이름에서 '악'자를 따와 합자해 '추악'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김금주인 그는 이때부터 이추악으로 불렸다. 하얼빈에서 함께 지내던 남편 양림이 1933년 7월 장시 소비에트지구로 가면서 이추악은 계속 하얼빈에 남아 반일회, 반제동맹 등 혁명조직 활동을 하였다. 1934년 초, 만주성위 대표 하성상이 중앙소비에트 대표대회 때 루이진에 갔다가 마오로부터 이추악을 양림이 있는 중앙 소비에트로 보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만주성위는 리추악을 보내려 했으나 당시 장제스의 포위 소탕전이 벌어지는 등 형세가 험악해지자 보내지 못했다. 이추악은 그후 1936년 2월 통하지구에서 동북항일련군 제3군의 물자후원사업을 하는 등 근거지 창설작업을 추진하다 같은 동족인 안병수의 밀고로 체포됐다. 일본군은 이추악이 갖은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자 그해 9월 3일 통하현성 서문밖에서 총살했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주석 89)

 

무정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어린 무정도 이 운동에 참가했다. 중앙고보에 다니던 무정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공부도 중요하지만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에 가 독립운동을 하는 게 났다고 생각해 1923년 초 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압록강을 넘었다.

무정은 만주 군벌 장쭤린 부대에 붙잡혀 3년간 타이에 의한 군 생활을 한 뒤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무정은 1924년 톈진에 있는 바오딩(保定)육군 군관학교 포병과에 시험 쳐 들어갔다. 1925년 베이징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무정은 군관학교 시절인 1926년 국민당 북벌군과 펑톈(奉天) 군벌 장쭤린 부대가 격돌한 난커우(南口) 전투에 국민당 군으로 참가해 전투경험을 쌓았다. 당시 국민당 군은 제1차 국공합작 때였다. 군관학교를 졸업한 무정은 산시성(山西省) 군벌인 옌시산(閻錫山) 부대에 들어가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무정은 22살 때인 1927년 중위로 진급했다.

무정은 물고 물리는 군벌간의 전투에 염증을 느끼고 군적을 벌인 뒤 우한(武漢)으로 가 공산당 지하조직에서 일했다. 그는 우한에서 열린 '반일 대동맹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는데 1927년 장제스의 '4.12쿠데타'이후 우한 국민당 좌파정부가 무너지고 공산당원 검거선풍이 불면서 무정도 체포돼 투옥됐다. 이때 우한지역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1만여 명이 체포된 공산당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무정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우한정부는 무정을 풀어준 뒤 죽이려 했으나 마침 법원에 공산당원이 있어 이런 소식을 무정에게 알려줘 상하이로 달아날 수 있었다. (주석 90)

 

무정은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장쑤성(江蘇省)위원회 파난(法南)지부에 있는 한국인지부에서 일했다. 1928년 여름, 한국인지부 결성식에서 조봉암이 지부서기, 여운형은 부서기로 뽑혔다. 지부위원에는 무정을 비롯해 홍남표, 김원식, 구연흠, 김희원, 홍경천, 유준현, 최창익, 오명 등이 선출됐다. 이때 무정과 오명, 허추열 등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하이지부’를  발기해 만든 이 단체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돼 재정부장을 맡았다.

1929년 중공중앙 영도인 리리산이 주도하는 도시폭동의 좌파 모험주의가 극성을 떨 때 무정도 당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조선청년동맹’의 회원들을 규합해 ‘한인규찰대’를 만들어 중국공산당 규찰대과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영국 조계지에서 체포돼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무정은 그해 12월 석방되자 장제스의 백색테러를 피해 홍콩으로 도피했다가 공산당 지하당의 지시에 따라 장시성 중앙소비에트로 갔다. 무정은 그곳에서 토호와 악질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토지 혁명투쟁을 벌이다 펑더화이의 홍군 제3군단 포병 연대장이 되었다.

당시 홍군에서는 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펑더화이와 무정 정도였다. 중화기는 박격포가 고작이었으며 대포는 거의 없었다. 무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군지휘관으로서 남정북벌의 전장을 누비게 되었다. 무정이 소속한 펑더화이 부대가 1930년 7월초 후난성 웨저우(岳州)에 주둔한 장제스군 왕두위안(王東原)부대를 격파하고 웨저우를 점령했을 때 홍군은 75미리 야포 4문과 산포(山炮) 몇 문은 노획했다. 허울뿐인 포병연대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패퇴하는 왕두위안 부대를 엄호하며 둥팅후(洞庭湖) 쥔산(君山)으로 달아났던 영국, 미국, 일본의 연합함대들이 웨저우 성 반대편 강기슭에 집결해 포를 쏘아대는 등 맹렬하게 공격했다. 펑더화이와 무정은 노획한 포를 은폐시킨 뒤 적들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일제히 포격했다. 10여 발이 영, 미, 일 연합 함대를 명중시켰다.

놀란 함대들이 달아나 웨저우 성에 접근하지 못했다. 홍군은 앞서 벌어진 황스깡(黃石港) 전투에서는 포가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으나 이번엔 달랐던 것이다. 홍군 전사들은 외국 함대들이 포에 맞아 불붙은 채 달아나거나 침몰되는 모습을 보며 사기충천해 일제히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이날의 전투로 무정의 이름은 순식간에 홍군에 퍼졌다. 홍군은 무정이 귀신같은 재주를 지녔다고 해서 ‘신포수(神砲手)‘라고 떠받들었다. 무정은 이후 펑더화이의 군단에서 장제스의 4차례에 걸친 포위 소탕전에 대항해 여러 차례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둬 성가를 높였다. (주석 91)

89) 양림열사 장백의 투사들  연변항일렬사전 연변인민출판사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 서명훈 저 민족출판사
90)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장군 김순기 료녕민족출판사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91)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장군 김순기 료녕민족출판사
    彭德懷自傳 解放軍民藝出版社
-------------------------------------------------------------------------------------------------------------------------------------------------------

 

33. 국민당군 내부 기싸움에 홍군 '어부지리' 비밀 회담

 

광둥 군벌 천지탕(陳濟棠)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장제스가 홍군에 대한 제5차 포위 소탕전을 계획하면서 자기를 ‘남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광둥은 이미 나의 천하가 아닌가. 남들이 자기를 중국 남쪽을 지배하는 ‘난톈왕(南天王)’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동안 포위 소탕전이라는 명목으로 장제스로부터 매월 60만원을 끌어다 쓰고 있는데 홍군을 공격하지 않을 수도 없고, 공격하지니 우리 병력도 큰 손실이 불가피하고-. 장제스가 방휼지쟁(蚌鷸之爭)을 노려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겠다는 꼼수가 불 보듯 환한데 어쩐다? 그랬다.

 

당시 장제스는 ‘광둥-광시-후난((粤桂湘)’군대와 홍군이 전투를 벌이게 해 홍군을 소멸시키고 군벌들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일거양득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최강  직계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북쪽인 샹장(湘江)북안에 배치해 중앙홍군이 허룽 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는다는 미명아래 4번 째 봉쇄선을 맡아 병력소모를 줄일 속셈이었다. 이렇게 해 홍군이 중무장한 북쪽 보다는 군벌들의 이해타산으로 봉쇄망이 느슨한 남쪽을 택해 달아날 수 있도록 출로를 열어 놓아 홍군과 남쪽지방 군벌들 간에 전투를 벌이도록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꾀했다.

게다가 장제스는 광둥지방의 지배를 둘러싸고 천지탕과 각축을 벌였으나 호각지세로 ‘권력을 나눠 분할통치(均權分治)’할 수밖에 없어 광둥은 사실상 반 독립상태였다. 장제스는 차제에 암적 존재인 천지탕을 제거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천지탕은 부하들에게 근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들과 홍군의 이번 전쟁은 져도 안 되고, 이겨도 안 되는 전쟁이다. 만약에 우리가 져  홍군이 광둥으로 밀고 들어오면 장제스가 옳다구나 하고 우리를 대신해 홍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광둥으로 진격해 광둥을 통째로 먹게 된다. 우리가 이겨 홍군을 물리쳐도 싸움으로 우리 병력이 극도로 지친 틈을 타 광둥을 잘 통치하겠노라고 덤벼들면 어쩔 수 없이 광둥을 장제스에게 넘겨줘야 한다. 진퇴유곡이다.”

 

천지탕은 두 가지를 상정했다. 하나는 희망사항으로 홍군이 장제스 주력의 공격을 천연시켜 주면서 장제스 군이 장시에서 광둥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 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둘째는 우려사항으로 홍군이 천지탕 군의 허점을 노려 광둥 군에게 반격해 광둥 군이 양면작전에 걸려들어 불리한 상태에 놓이는 경우다. 심사숙고를 거듭하던 천지탕은 ‘쏭커(送客)’라는 묘책을 찾아냈다.

이른바 손님을 배웅하는 전략이다. 이는 한쪽으로 홍군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에 대한 방어공사를 하되 느릿느릿 쉬엄쉬엄 공사해 장제스가 잡고 있는 약점을 피하고, 또 한쪽으로는 토치카 봉쇄선을 불완전하게 구축해 홍군이 서쪽으로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계책이다. 홍군이 지나가는 앞을 막거나 허리를 자르지 않고 단지 꼬리부분만 공격하되 그나마도 후위부대에 ‘일찍 지나가라(送客早走)’고 주문하는 것이다. 천지탕은 이렇게 하면 홍군의 광둥 공격과 장제스가 자신에게 뻗치는 마수를 막을 수 있어 광둥지역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석 92)

 

그럼 어떻게 자기의 ‘호의’를 홍군이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천지탕은 생각 끝에 중간에 사람을 넣어 우선 홍군과 접촉해 홍군의 ‘카드(속내)’를 알아보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이 되느라 천지탕의 호위병 중에 홍군 9군단 군단장인 뤄빙후이(羅炳輝)의 손아래 처남을 알고 있는 병사가 있었다. 뤄빙후이의 처남은 광둥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타진결과 그들을 대신해 소비에트지구에 가 뜻을 전달하겠다고 선선히 응낙했다. 천지탕은 곧바로 저우언라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나는 귀당이 공동(국민당과 공산당)으로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나는 쌍방의 협조관계를 위해 참모장 양여우민(楊幼敏), 사단장 황쉬추(黃旭初, 황즈원(黃質文) 3인을 협상대표단으로 파견한다. 나는 귀당 쪽의 광둥-장시성 군구사령관인 쉬장콩(許長空)을 총대표로 파견해 비밀회담을 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한다. 지금 서신을 갖고 가는 사람에게 회담지점과 기타 관련사항을 상의해 알려주기 바란다.”

 

천지탕은 뤄빙후이 처남을 단독으로 직접 만나 “도중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잘못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꼭 저우언라이를 만나 직접 편지를 전해야 한다. 속히 돌아와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1934년 9월 하순, 밀사(뤄빙후이의 처남)는 홍군 보위국(保衛局) 국장 리커농(李克農)을 만난 뒤 그의 안내로 저우언라이와 주더를  비밀리에 만났다. 밀사는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당시 당내 최고 권력과 군권을 보구과 리더가 갖고 있어 저우언라이와 주더는 천지탕과 회담을 할지, 말지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저우와 주더는 이 사안을 보구, 리더와 상의했고, 보구는 저우와 주더가 전권을 갖고 회담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저우와 주더는 홍군 대표단을 고심 끝에 허장콩과 판한녠(潘漢年)을 대표로 확정했다. 허장콩은 장시-광둥 군구사령관과 정치위원, 장시-광둥 성위 상임위원이며 선전부장이다. 허장콩은 또 광둥 군과 가장 가까운 군구사령관으로 6개월 넘게 근무해 광둥 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어 적임이었다. 판한녠은 중공중앙국 선전부 부부장이며, 1년 전 중화소비에트 정부와 노농홍군 대표로 국민당 19로군 대표 쉬밍홍(徐名鴻)과 ‘항일반장(抗日反蔣)’문제에 대해 비밀회담을 벌인바 있어 풍부한 회담경험을 갖고 있었다. 판한녠과 쉬장콩은 10월 8일 비밀회담 장소인 우뤄탕(烏羅塘)진(鎭)에 도착해 3박3일 동안의 회담을 벌였다. 양쪽은 5개협의 사항에 합의했다. (주석 93)

 

1. 전쟁을 중지하고 모든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
2. 유선전화를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3. 봉쇄를 해제한다.
4. 양쪽은 서로 통상을 하며, 필요시에 홍군은 천지탕군 방어구역 후방에 병원을 세울 수 있다.
5. 필요시에 양쪽은 서로 길을 빌릴 수 있다. 홍군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천지탕 군에게 통보하면 천지탕 군은 40리를 철수한다. 홍군은 단지 길을 빌어 지나가며, 광둥 내지로 들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한다. 홍군 인원이 천지탕 군 방어구역으로 들어올 때는 천지탕 군이 발급한 신분증을 사용한다.

92)長征突圍‘南天王’陳濟棠爲何紅軍送軍火  中國共産黨新聞網
    蔣介石發電報催戰陳濟棠爲啥給紅軍讓道   時政頻道    新華網
93
)長征突圍‘南天王’陳濟棠爲何紅軍送軍火  中國共産黨新聞網
    蔣介石發電報催戰陳濟棠爲啥給紅軍讓道   時政頻道    新華網

----------------------------------------------------------------------------------------------------------------------------------

 

34. '대장정 시작' 길 열어주는 천지탕…

 

1934년 10월 10일 밤, 중앙홍군 5개 주력군단과 중앙, 군사위원회 종대 등 8만6천여 명이 앞날의 명운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통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장정(長征)의 길에 올랐다. 10월 14일 저녁 무렵에서 18일 땅거미가 질 때까지 위두(于都) 경내에 있는 중앙 주력홍군과 중앙 야전종대 등 8만 6천여 명은 장정에서 첫 번째 강인 위두강을 건너 포위망을 뚫고 대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홍1군단, 홍3군단, 홍5군단, 홍8군단, 홍9군단으로 나눠 강을 건너 집결했다. 중앙 ‘홍싱(紅星)‘ 종대(제1야전종대와 제2야전종대)는 중앙 영도기관 부속팀으로 편제를 개편해 짰는데, 18일 저녁 무렵에 위두현 청둥먼(城東門)에서 위두강을 도하해 리춴(利村), 상핑(上坪)을 거쳐 안위안(安遠) 허터우(合頭) 일대에 집결했다. 중공중앙과 중국 혁명군사위원회 영도들로 보구, 저우언라이, 리더, 마오쩌둥, 장원톈, 왕자샹 등이 이 종대에 편입됐다. 홍군 총사령부는 천지탕과 맺은 ’서로 길을 빌릴 수 있다‘라는 비밀협약에 따라 천지탕에게 전령을 보내 일부의 홍군들이 길을 빌리려(借道)한다고 통보했다.

 

중국 CCTV의 2001년 드라마 '마오쩌둥의 대장정' 중 한 장면.

 

천지탕 군은 비밀협약을 지켜 홍군이 행군하는 방향에서 40리를 철수해 ’비밀통로‘를 확보해 주고, 각 부대에 “적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말고, 적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총을 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10월 21일, 홍군 주력부대가 장시성 안위안과 신펑(信豊) 사이에서 포위망을 뚫는 전투가 벌어졌다. 광둥 군은 기본적으로 길을 빌려주는 방침을 지키면서 낮에 헛총을 쐈다. 그들은 싸우는 척하며 철수했다. 홍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장제스 군의 제1봉쇄선을 돌파해 광둥 북쪽인 난슝(南雄) 경내로 진입했다. 장제스는 홍군이 제1봉쇄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고 맥이 풀렸다.

 

 


장제스는 홍군의 행군 방향이 장시 남쪽에서 후난 남쪽이나 또는 후난 남쪽 뒤쪽으로 해 ’후베이-안후이‘ 소비에트지구로 다시 북진하기를 바랐다. 장제스는 홍군이 광둥 북쪽에서 돌파구를 찾아 이동하는 행군은 장제스의 최전방을 교란하는 것으로 작전상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장제스는 즉각 광둥 군 천지탕과 후난 군 허젠(何鍵) 두 부대에게 급히 출병해 진로를 막도록 지시했다. 장시와 후난 경내에 있는 모든 비행대의 항공기가 출격해 협동작전을 펼치면서 홍군을 제2, 제3 봉쇄선에서 막아 전멸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주석 94)

 

중공 혁명군사위원회는 10월 27일 1봉쇄선을 뚫은 홍군이 후난, 광동 변경으로 진격해 제2 봉쇄선을 돌파 하도록 명령했다. 천지탕은 북구 진무 주임에게 지시해 샤오관 잔취(韶關戰區)사령관 리한훤(李漢魂)이 인솔하는 독립 3사단, 독립 경위여단 부대를 런화(仁化), 러창(樂昌), 루청(汝城)으로 이동해 방비하도록 했다. 리한훤은 예하 군관들에게 “광둥군은 홍군과 상호 불가침 협약을 맺었다. 홍군이 서쪽으로 가도록 길을 열어 줘라. 부대장들은 협약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더욱 조심하기 바란다. 적이 우리를 사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총을 쏘지 말라. 적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 전장터의 기율을 엄격히 집행하기 바란다”며 홍군의 진로를 막지 않도록 했다. 홍군은 11월 4일 제2 봉쇄선을 돌파했다. 당시 ‘궈원저우바오(國聞周報)’신문은 대단히 비분강개한 문투로 보도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광둥군과 중앙군의 통일적이지 못한 작전조율의 약점을 비적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현재 비적부대들이 과연 봉쇄선을 돌파해 장시-광둥변경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원통한 일이다.”

 

중앙홍군이 제2 봉쇄선을 돌파한 뒤인 11월 6일 장제스는 난창 임시병영(行營)에서 ‘차단 소탕(堵剿)’하라는 긴급 전령을 각 부대에 내렸다. 이 전령은 홍군이 계속 이장(宜章)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판단해 3봉쇄선에 수백 개의 토치카를 세워 차단을 강화하도록 했다. 홍군은 장제스 군이 병력을 완전히 소집하기 전에 곧바로 천(郴)현을 공격해 장제스의 후난군을 견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장을 점령해 광둥 군을 저지하면서 주력부대가 중앙을 돌파해 자허(嘉禾), 린우(臨武)로 진군했다. 13일, 홍군은 일거에 이장현을 점령하고 15일에는 린우 현성을 공격했다. 홍군은 천지탕과의 협약을 지키기 위해 광둥 내지로 들어가지 않고 광둥, 후난, 장시 변계 서쪽으로 행군했다.

이렇게 해 홍군은 진군 중에 광둥 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제 3봉쇄선을 뚫을 수 있었다. 1개월도 안 돼 홍군이 신속하게 장제스가 온 힘을 기울여 구축한 3겹의 봉쇄선을 돌파해 장제스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봉쇄 부대들이 서서히 혼란에 빠졌다. 장제스는 천지탕이 자기 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명령을 집행하지 않은 것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장제스는 천지탕에게 보낸 전화 통지문에서 "이번에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 공비들이 서쪽으로 달아났다. 가로막아 공격하지 않아 우리 국민혁명군에 천추만세의 오점을 남겼다. 즉시 27개 여단을 란산(藍山), 자허, 린우 사이를 차단해 이제까지의 잘못을 만회해 속죄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본 위원장(장제스)이 법 집행으로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주석 95)

 

천지탕은 이후 장제스의 앙갚음에 대비해 신속히 홍군과 맺은 비밀협약 관련 서류들을 불태워 버리고, 예자오(葉肇), 리한훤, 리전치우(李振球) 등 사단장에게 후난으로 달아나는 홍군을 추적해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보고 장제스 참모인 난창 임시병영 제1청 부청장인 안다오강(晏道剛)은 '쏭커(送客)'식 추격이라고 씁쓸해했다.

----------------------------------------------------------------------------------------------------------------------------------

 

35. 홍군-장제스군, 7일간의 처절한 격전

 

홍군이 3번째 봉쇄선을 돌파하자 장제스는 40만 대군을 3로(路)로 나눠 후난 서쪽의 샹시(湘西)에 4차 봉쇄선을 구축한 뒤 홍군의 앞을 가로막고 뒤를 추격해 샹장(湘江) 언저리에서 섬멸하려 했다. 중공중앙 총서기인 보구와 군사 총책임자인 리더는 홍군이 장시, 광둥, 후난, 광시 변경에 다다르자 샹시에서 홍군2, 6군단과 합류하려 했다. 당시 '후난-후베이' 서쪽에는 허룽(賀龍)이 이끄는 2군단과 런비스(任弼時), 샤오커(肖克), 왕전(王震)이 인솔하는 6군단이 소비에트 혁명근거지를 일궈 활동하고 있었다.

신중국 건국 후 10대 원수가 된  허룽은 마오보다 3살 아래인 1896년 후난성 상스(桑植)현 홍자관(洪家關)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룽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인근 사숙에서 5년 동안 사서삼경 등 구학문을 공부했다. 허룽은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의를 중시하고 재물을 가볍게 보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리남아로 이름이 났다. 1911년 중국을 뒤흔든 신해혁명에 영향을 받은 허룽은 1914년 쑨원이 이끈는 중화혁명당에 가입해 후난성 상스, 스먼(石門), 완링(浣陵) 현 등지에서 반제반봉건 무장투쟁을 벌였다. 3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허룽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3년 동안 국민혁명시기에 쑨원의 '소련, 공산당과 연합하고 노동자, 농민을 지원하는(聯俄, 聯共, 扶助農工)' 3대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허룽은 제국주의와 군벌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1926년 여름 국민혁명군 제9군 1사단 사단장으로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좌파 장군으로 알려졌다. 허룽은 북벌전쟁 중 혁혁한 공을 세워 1927년 6월 국민혁명군 20군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허룽은 국민당 좌파인 군벌 장파구이(張發圭)휘하에 있었다.

허룽은 앞서 1927년 장제스가 '4.12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인사들을 대거 숙청하자 공산당과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서서 그해 8월 1일 봉기한 난창기의에 군대를 이끌고 저우언라이, 주더와 합세했다. 허룽은 난창 기의군(起義軍)이 광둥지역으로 남하했을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광둥에서 기의군이 패퇴하자 홍콩으로 탈출해 상하이를 거쳐 '후난-후베이'서쪽 지역으로 가서 징장(荊江)양안 녠관(年關)폭동과 샹시(湘西)기의를 일으켰다.

허룽은 두 자루의 식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 유명한 일화를 갖고 있다. 허룽이 1928년 초 어느 마을에 들어가 청나라 때 청조타도 비밀조직인 가로회(哥老會)회원들과 폭동거사를 논의하고 있을 때 국민당 징세원들이 이 마을에 들어왔다. 허룽은 두 자루의 식칼을 들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징세원들을 습격해 이들을 죽이고 호위병들의 무장을 해제 시킨 뒤 권총과 소총들을 빼앗아 농민군들을 무장시켜 폭동을 일으켰다는데서 연유하고 있다. 허룽은 저우이췬(周逸群), 두안더창(段德昌)과 이곳에 '후난-후베이 서쪽지역(湘鄂西)' 소비에트 혁명근거지를 만들었다. (주석 96)

 

중앙홍군은 허룽과 런비스가 이끄는 2, 6군단과 합류하기 위해 샹장 도하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홍군은 5~6배에 이르는 압도적인 병력과 중화기로 무장한 장제스 군의 강력한 공격에 부닥쳐 샹장을 피로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홍2, 6군단의 허룽과 런비스는 홍군의 도하작전을  돕기 위해 샹시에서 강력한 공세를 펼쳐 융쉰(永順), 다융(大庸), 상스, 탸오위안(桃源), 쯔리(慈利) 현 등을 잇따라 공격하고, 창더(常德)를 포위해 창사, 웨양(岳陽)을 위협하면서 기세를 크게 떨쳤다. 광시(廣西) 전현 남쪽인 샹장 동안에서는 1주일 동안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다.

 

◀ 무정


샹장 전투에서 중앙 군사위원회 직속의 포병부대를 이끌고 있던 조선인 무정(武亭)은 맹활약을 펼쳤다. 포병 대대장인 무정은 홍 3군단 제5사단을 엄호하면서 광시군의 공격을 막았다. 무정이 장시 깐난에서부터 갖고 온 독일제 75미리 4문의 산포가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무정이 이때 사용했던 산포는 구이저우로 들어간 뒤 투청(土城)에서 홍군이 패퇴해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경장(輕裝)차림으로 1차 츠수이 강을 건너기 위해 모두 강물에 던져버렸다. 무정은 이후 박격포로 전투를 벌였는데 홍군 지휘관들은 그의 뛰어난 포술을 잘 알고 있어 화력지원이 필요할 때 너도나도 무정을 찾아갔다고 한다. (주석 97)

96)黨史人物記念館 中國共産黨新聞 人民網 ,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중앙문헌출판사
97)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36. 홍군 대패 후유증…마오 뜻대로 구이저우 진군

 

중앙홍군은 11월 말 만신창이가 돼 최후 봉쇄선을 뚫고 힘겹게 샹장을 건넜지만 전투결과는 경천동지할만했다. 8만6천여 명으로 출발했던 중앙홍군이 3만여 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 대부대가 떠날 때부터 모든 계획을 극비에 부쳐 독단한 보구와 리더의 전략전술의 부재가 빚은 참화였다. 중앙홍군은 다먀오(大苗)산맥을 따라 북상하면서  여전히 홍2, 6군단과 합류하려 했다.

12월 11일, 중앙홍군은 후난과 광시 변계의 통다오(通道)성을 점령했다. 이때 장제스는 사전에 샹장 서구지역에 중앙홍군에 대한 '추격소탕전(追剿)'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장제스는 '추격소탕전 총사령관'에 후난 군벌인 허젠(何健)을 임명한 뒤 중앙홍군이 샹시 쪽으로 이동할 것으로 확신하고 4겹의 토치카 진지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허젠은 급히 후난군과 후난군의 장제스계인 '중앙군' 쉐웨(薛岳) 부대 등 15개 사단의 병력을 소집해 통다오성 북쪽 지구인 우깡(武岡), 수이닝(綏寧), 징쉬옌(靖縣), 후이통(會同), 즈장(芷江), 치이옌양(黔陽)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 중앙홍군을 차단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장제스는 또 급히 '중앙군' 저우훤위안(周渾元) 군단을 셴수이(咸水)에서 홍군을 추격하고, 광시군 제7군 군단장 랴오레이(廖磊)는 24사단을 이끌고 룽성(龍勝)으로 진격하며, 광시군 15군 군단장 샤웨이(夏威)는 부대를 인솔해 룽성, 시옌(西延)일대로 진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장제스 군의 각 노군(路軍)의 군세를 살펴 볼 때 유일하게 구이저우 동쪽(黔東)을 방비하고 있는 구이저우 군 쪽이 그나마 약한 편이었다. 

 

이런 장제스 군의 병력배치로 중앙홍군이 샹시에서 홍2, 6군단과 합류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전략적 이동 계획은 이미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러나 보구와 리더는 홍군이 샹시 전투에서 대패를 당해 엄청난 손실을 당한데다 장병들이 극도의 피곤에 지쳐 사기와 전투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도 홍2, 6군단과 합류하기 위해 샹시로 진군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밀고나갔다. 리더는 훗날 '중국기사(中國紀事)'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리핑(黎平)에 도착하기 전에 한 차례 간단한 회의를 했다. 이후의 작전방안이었다. 나는 원래의 계획을 설명하며 서쪽의 전략요충지를 향해 급히 진격하는 저우(周)부대와 다른 부대들은 우리 보다 우세하다. 우리는 그들을 등지고 북쪽으로 돌아 2군단과 연락을 갖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2군단의 근거지에 의존해 허룽, 샤오커의 부대와 합세하여 광활한 지역에서 적들을 공격해 갈 수 있다. 이곳은 아울러 후난과 구이저우, 쓰촨 등 3개 성의 3각지대로 큰 소비에트지구를 창건할 수 있다."

 

리더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 마오와 회의참석자들의 태도를 이렇게 기술했다. (주석 98)

 

"마오쩌둥은 또 거칠게 이 건의를 거절했다. 그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해 구이저우 내지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마오는 뤄푸(洛甫/장원톈의 자)와 왕자샹의 지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부대 대이동을 준비했던 '중앙 3인 소조'의 한 사람인 저우언라이의 지지도 받았다. 마오의 건의가 채택됐다. 마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대화방식으로 처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놨다. 그는 마땅히 창장(長江)이남과 2군단과 함께 소비에트지구를 건립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에 리더가 결정한 방안대로 부대를 이동했더라면 장제스 군이 겹겹으로 쌓은 토치카선인 '호구(虎口' 로 들어가 전군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마오는 홍2, 3군단과의 합류를 버리고 장제스 군의 방어가 약한 구이저우로 진군해 주도권을 잡고 부대가 휴식하며 정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해 중앙홍군은 통다오성에서 진군방향을 바꿔 돌연 구이저우 리핑으로 방향을 틀어 진군했다. 이에 따라 샹장 서쪽에서 홍군을 몰살하겠다고 별렀던 장제스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1934년 12월 14일, 홍군은 리핑 현성을 점령했다. 12월 18일, 중앙정치국은 리핑에서 회의를 열고 진군 방향문제를 토론했다. 이 회의는 마오가 주장한 구이저우로의 진군이 옳았고, 보구와 리더의 견해는 잘못됐다는 평가를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의 쓰촨-구이저우(川黔)변계에 새로운 근거지를 건립한다는 결의'가 통과됐다. 이 '결의'정신에 따라 홍군은 리핑에서 출발해 파죽지세로 구이저우로  진군해 잇따라 큰 현성(縣城)들을 공격했다. 홍군은 12월 말 즈다오(直搗) 우장(烏江)변에 있는 호우창(猴場)에 도착했다. 1935년 새해 1월 1일, 중앙정치국은 호우창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샹시로 가야한다'는 잘못된 의견을 부결하고 우장으로 갈 것을 결의했다.

 

중앙정치국은 '도강 후 새로운 행동방침에 관한 결정'에서 쓰촨-구이저우 지구에서 반격하기로 결정하고, 장제스 주력부대와 전투해 적의 포위소탕전을 분쇄한 뒤 '쓰촨-구이저우'에 새로운 소비에트근거지를 건립키로 했다. 중앙정치국은 이를 위해 먼저 준이(遵義)를 중심으로 한 구이저우 북쪽지역에서 쓰촨 남쪽지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당면한 가장 중심적인 임무라고 밝혔다.

장제스는 중앙홍군이 구이저우로 들어간 뒤 런비스, 샤오커, 왕전이 이끄는 홍6군단이 구이저우 북동쪽으로 에둘러 중앙홍군이 있는 곳으로 가 허룽 2군단과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장제스는 직계부대인 쉐웨에게 주력부대를 인솔해 후이통(會同), 즈장 일대를 경유해 구이저우로 진군토록 했다. 후난군과 구이저우군의 일부 부대가 리핑, 진핑(錦屛)으로 나아가 홍군의 후미를 공격해 중앙홍군이 홍2, 3군단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긴급명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이와 함께 허젠과 쓰촨-후베이 변계의 쉬위안취안(徐源泉) 10군단이 연합해 홍2, 6군단 포위공격을 강화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중앙홍군은 홍2, 6군단과 합류 할 수가 없게 됐다. 중앙홍군이 준이를 중심으로 한 구이저우 북부지역에 진군하게 되면, 곧 북쪽으로는 홍군 4방면군이 있고 동쪽으로는 홍2, 6군단이 주둔해 솥발형국(三角鼎力)을 이룰 수 있어 서로 호응하고, 협동할 수 있기 때문에 홍군발전에 더 없는 유리한 환경이었다. 구이저우는 비록 인력과 물자가 부족하고 전국의 정치 영향력 등 방면에서 불리하지만 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곳은 벽지로 산이 많은 데다 교통이 불편하고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장제스의 통치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게다가 장제스의 세력이 박약하고 계파가 많아 왕자리에(王家烈), 호우즈단(候之擔, 여우궈자이(猶國材), 장자이전(蔣在珍) 등 크고 작은 군벌들이 할거해 내부모순이 돌출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의 많은 군중들이 극빈에 시달려 혁명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고 있는 것도 근거지 조건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해서 중앙홍군이 우장을 건너 준이를 중심으로 한 쓰촨-구이저우 변계 근거지를 개척하는 것은 실제에 부합하다 하겠다.

 

중앙홍군은 3로로 부대를 나눠 우장(烏江) 도강을 강행해 1월 7일 구이저우성 북쪽의 큰 도시인 준이(遵義)를 점령했다. (주석 99)

98)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99)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37. '준이회의' 마오의 부활…당권 장악의 시작

 

중공중앙은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준이 옛성(遵義舊城)에 있는 군벌 바이후이장(柏輝章)의 공관 건물 2층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중앙정치국 위원인 보구,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주더, 장원톈, 천윈(陳雲), 그리고 정치국 후보위원인 왕자샹, 류샤오치(劉少奇), 덩파(鄧發), 카이펑(凱豊/본명은 何克全)이 참석했다.

또 총참모장 류보청(劉伯承), 총정치부 대리 주임 리푸춴(李富春), 1군단장 린뱌오(林彪), 1군단 정치위원 녜룽전, 3군단장 펑더화이, 3군단 정치위원 양상퀀(楊尙昆), 5군단 정치위원 리줘란(李卓然/회의시작 뒤 도착)이 참석했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鄧小平)은 당중앙 비서장 신분으로, 우슈취안(伍修權)은 리더의 통역원으로, 그리고 리더가 참석했다. 회의도중 펑더화이는 부대에 전투가 벌어져 일찍 떠났고 9군단장 뤄빙후이(羅炳輝)와 9군단 정치위원 차이수판(蔡樹藩)은 아직 우장을 건너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중앙정치국과 군사위원회가 낮에 군사와 일상 업무를 봐야하기 때문에 저녁식사 후에 열려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회의를 주재한 보구는 15일 회의에서 장제스의 5차 반 포위소탕전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해서 보고했다. 보구는 정치, 군사상 당의 영도는 정확했고, 군사상의 실패원인은 적의 역량이 우리보다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투의 자기변호에 급급했다.

저우언라이가 군사문제 부(副)보고 발언에 나섰다. 저우는 군사에 관한 총결 보고에서 ‘3인단’이 군사를 지휘하는데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기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책임을 인정했다. 이어 장원톈이 중앙 영도의 단순방어 군사노선에 반대한다는 '보고', 이른바 '반보고'를 했다. 참석자들은 경악했고, 보구와 리더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구는 잠시 휴회를 선언했다.

 

휴회 뒤 시작한 회의에서 첫 발언에 나선 마오는 이론에서부터 실천, 국내정세에서 군사정세, 중국공산당의 종지(宗旨)와 중국혁명 전쟁의 특징에서 정치군사책략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고전을 인용해,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고 유머스럽게 때로는 엄숙하고 진지하게 이야기 했다. 마오는 군사문제에 관해 좌경 모험주의의 소극방어와 방어에서 나타나는 보수주의, 즉 진공(進攻)시의 모험주의와 이동할 때의 도망주의를 비판했다.

마오는 리더의 군사지휘가 “전사들이 가는 길, 식사하는 것, 자는 것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가는 길이 산길인지, 평원인지, 또는 강길 인지조차 묻지 않는 ‘탁상지휘’”라며 날카롭게 힐책했다. 마오는 또 약도상에 표시하나 해놓고 제한된 전투(단병전)를 하게 하니 당연히 싸움에 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마오는 군사상 좌경 모험주의의 잘못된 주장을 실전에 집행해 반 5차 포위 소탕전을 실패로 이끌어 홍군이 장정 중에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했다고 지적했다.

 

근 1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진 마오의 발언은 참석자들의 생각과 정확한 의견을 반영해 대다수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4명이 긴 발언을 했지만 누구도 최고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도 앞으로 누가 당과 홍군의 최고 영도를 맡아야 하는 지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마오쩌둥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누가 이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왕자샹은 마오의 발언을 들은 뒤 더욱 마오를 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왕자샹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심한 통증으로 넘어질 뻔 했다. 그는 상처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격동적으로 발언했다. 왕자샹의 발언은 길지 않았지만 결연했다. 왕자샹은 보구, 리더의 군사지휘와 군사이론상의 문제를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3개의 의견을 내 놓았다. (주석 100)

 

1. 마오쩌둥의 발언에 완전히 찬동한다.
2. 홍군은 마오쩌둥처럼 실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지휘해야 한다.
3. 리더, 보구의 군사지휘권을 취소하고 3인단을 해산해야 한다.

 

 ◀ 구이저우의 '준이회의' 터를 둘러보는 관광객.

 

왕자샹의 폭탄발언은 보구와 리더를 아연실색케 했다. 왕자샹은 소련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로 왕밍과 보구와 같이 '28인의 볼세비키' 중의 한 사람으로 코민테른의 노선과 지시를 충실히 따른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왕자샹은 왕밍과 보구의 좌경 교조주의적 종파 진영에서 나온 첫 번째 사람으로 마오를 견결하게 지지함으로써 왕밍 좌경노선의 파산을 의미했다.

마오는 훗날 이와 관련해 "그(왕자샹)가 공을 세웠다. 그가 교조주의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와 나를 지지했다. 준이회의에서 절대 절명의 시기에 결정적인 1표를 던졌다"고 왕자샹을 높이 평가했다. 왕자샹의 발언 뒤 저우언라이, 주더, 펑더화이, 류샤오치, 녜룽전, 리푸춘 등이 잇따라 발언에 나서 마오를 지지했다. 린뱌오는 리더의 단병전을 지지했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보구, 리더, 카이펑은 고립됐다. 회의는 마오, 왕자샹, 장원톈 등 3인의 발언을 기초로 '결의'를 작성했다.

 

1. 제5차 반 포위소탕전은 군사지휘에 있어서 잘못을 저질렀다. 보구의 총결보고는 기본상     부정확하다. 우리가 제5차 반 포위소탕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제일 중요한 것은 군사     지휘상 전략전술의 기본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군사지휘의 과오를 저지른 원인은 우경 기회주의적 단순방어노선이다. 작전을 지휘하는데 있어서 1) 운동전 거부와 적의 측면 활동 2) 적색보루의 소모전으로 소비에트 보위기도 3) 적들의 6로(路) 분산 진공에 우리도 병력을 분산해 방어 하는 등으로 피동적 위치에 처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의 주력을 집중하지 않아 전선 곳곳에서 역량 부족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군사상 영도 과오는 A(리더 지칭), 보구, 저우언라이 세 동지에 있으며 A, 보구 동지가 주요 책임을 져야한다.
2. 회의는 중앙 영도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3인단과 보구, 리더의 군사지휘권을 취소한다. 주더와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최고 군사 수장으로서 군사를 지휘하며 저우언라이는  당이 위임한 군사문제를 최후 결정하는 책임자이다. 마오쩌둥을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임명하고 마오쩌둥 동지는 저우언라이 동지의 군사지휘를 보좌한다.
3. 장원톈은 준이회의 결의를 기초해 상임위원회에 보낸 뒤 심사를 거쳐 지부에 보내 토론에 부의토록 한다. 장원톈이 보구를 대신해 중앙의 모든 책임을 관장할 수 있도록 권한을 명확히 규정한다.

 

준이회의는 중국공산당 사상 처음으로 코민테른의 관여 없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자신들의 명운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공산당을 구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준이회의는 또 마오가 실질적으로 당과 홍군의 영도자 반열에 오르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와 함께 '보구-리더-저우언라이'로 구성되었던 '3인단'은 '왕자샹-저우언라이-마오쩌둥'으로 조직된 신'3인단'으로 대체되었다. (주석 101)   

준이회의는 코민테른파에게 하루아침에 병권을 빼앗긴 마오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과물이었다. 1934년 5월 하순, 보구는 중앙서기처 회의를 주재하면서 루이진 소비에트의 관문 구실을 한 광창(廣昌)을 장제스 군에 빼앗긴 뒤 반 포위소탕전의 전략방침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 회의에는 보구, 장원톈, 저우언라이, 샹잉(項英), 리더가 참석했다. 리더는 홍군이 마땅히 중앙 소비에트지구를 떠나 장제스 군의 포위망을 뚫고 다른 지방으로 부대를 이동해 새로운 광활한 작전구역을 확보하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회의는 더 좋은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이 건의를 받아들이고 주력부대가 중앙 소비에트지구를 철수하는 전략적 대이동을 진행하기로 했다. 보구는 코민테른에 보고했고, 6월25일 코민테른이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와 비밀리에 장정 준비의 서막이 올랐다. 서기처 회의에서는 보구, 리더, 저우언라이 등 3인을 '3인단'으로 팀을 짜 부대 대이동의 준비를 맡겼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구와 리더가 군사지휘 대권을 독단했다. 그들은 홍군의 전략적 대이동을 단순히 중앙기관을 루이진 소비에트지구에서 샹시(湘西)로 집을 '이사(搬家)'하는 수준으로 여겼다. 보구는 1943년 중앙정치국 회의 발언에서 "장정은 이사다. 홍군은 대단히 약화되어 있었다. 가마타고 가는 이사다. 당시 군사계획은 샹시로 가는 준비, 이사였다. 6군단이 선두부대였다"며 전략적 이동을 '이사'로 안이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에드가 스노우는 '서행만기(西行漫記)'에서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병기창은 철거해 텅 비고 공장은 해체되었으며 값어치가 있는 것들이라면 모두 노새와 당나귀 등에 실어 가져갔다. 기이한 대오를 만들었다."

100) 紅軍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誰決定了毛澤東的領導地位 人民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
101)遵義會議後毛澤東領袖地位如何確立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중앙문헌출판사
-----------------------------------------------------------------------------------------------------------------

 

38. 마오, 맹목적 교조주의와의 전면전 돌입하다

 

장제스는 1934년 11월 11일 홍군의 전략적 의도를 파악하고 12일 허젠을 '추격 포위소탕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직계부대를 이끌고 있는 쉐웨에게 전방을 총지휘하도록 하면서 샹장에 4차 봉쇄선을 구축했다. 샹장에서 홍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때 마오는 추격군 주력인 쉐웨와 저우훤위안 부대가 연합하기 전에 반격해 장제스 군 일부를 격파함으로써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중앙에 계책을 건의했다.

홍군 3군단장 펑더화이도 마오와 비슷한 생각을 해 장제스의 부서 개편을 틈타 기동전으로 적을 공격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을 중앙에 헌책했으나 모두 묵살 당했다. 보구와 리더는 싸울 엄두를 접은 채 샹장을 도하해 허룽의 부대와 합류하는 데만 목을 매었다. 결과는 샹장전투에서 공전의 대참패를 당해 3만여 명의 붉은 피를 샹장에 흘려보내야 했다. 장정 1개월 만에 무려 5만여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마오는 보구와 리더의 군사지휘는 공산혁명의 숨통을 끊어놓는 맹목적 교조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여겼다. 위기의식을 느낀 마오는 영도부를 바꾸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마오는 왕자샹과 장문톈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 들이기로 하고 먼저 왕자샹의 의중을 타진하기로 했다. (주석 102)

 

왕자샹은 '홍색교수'형의 인물로 일찍이 소련 유학을 다녀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조예가 깊었다. 1930년대 초 귀국한 뒤 빠르게 공산당 내 중요 직무를 맡았다. 장정 중인 이때 왕자샹은 비록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었지만 홍군 총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모스코바에서 돌아 온 보구, 장원톈과 함께 3명의 코민테른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왕자샹은 당과 홍군에서 여전히 발언권이 높았다. 1933년 4월 왕자샹은 비행기 공습을 받아 복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당시 의료환경이 열악해 마취약을 사용하지 않은 채 고통을 참아가며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끝내 파편을 적출하지 못하고 수술을 끝냈다. 해서 장정 길에 오르면서 들것을 이용해야 했다.

당시 마오도 학질을 앓은 뒤끝이라 몸이 허약해 장정 출발 때 들것을 이용하면서 왕자샹과 동행했다. 둘은 같이 숙영(宿營)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서로를 많이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왕자샹은 마오의 학식, 이론수양, 공산혁명에 대한 독특한 견해, 해박한 군사지식과 전투경험 등을 폭넓게 알게 되면서 중국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실천경험이 풍부한 마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은연중 마음속에 담아두게 됐다. 마오가 왕자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31년 4월께 였다. 그해 1월에 열린 중공6차 4중전회에서 왕밍이 실질적으로 중앙영도권을 장악했다. 왕밍은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자신의 좌경노선을 전파하기 위해 중공중앙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때 왕자샹은 단장인 런비스(任弼時)와 구줘린(顧作霖)과 함께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왔다.

 

1932년 10월, 닝두에서 중앙 소비에트지구 확대회의가 열려 장제스의 반 4차 포위소탕전에 관한 대응책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전방과 후방의 영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노출됐다. 회의는 마오에 대한 비판 일색으로 흘렀다. `중심도시 탈취 방침에 태업을 벌인다' '상산(上山)주의' '적을 유인한다는 미명아래 토끼가 와 죽어 주기를 바라는 수주대토(守株待兎)주의자' '적의 진공을 전문으로 기다리는 우경주의자' 이처럼 마오에 대한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심지어 마오를 전방에서 빼 후방으로 돌려야 한다고 몰아 부쳤다. 이때 왕자샹이 용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적을 앞두고 장수를 바꿔서는 안 된다. 중임을 맡겨 지휘하게 해야 한다. 그가 없으면 이룰 수 없다"며 마오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왕자샹의 지지가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마오는 그의 용기와 자신에 대한 지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왕자샹과 마오가 장정 길에 걷고 얘기하며 가까워질 무렵, 왕자샹의 친한 친구이며 모스크바 중산대학 동기동창인 뤄푸(洛甫)가 자주 찾아와 어울렸다. 세 사람은 점차 친밀감을 더해 갔다. 마오 보다 7살 아래인 장원톈이 마오를 알게 된 것은 1920년 초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마오와 장원톈은 거의 동시에 청년진보조직 단체인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했다. 그 소식이 1920년 2월에 출판된 '소년중국'에 실리면서 서로가 이름을 알게 됐다.

 

◀ 왕자샹


1931년2월, 장원톈은 소련에서 귀국한지 몇 개월이 안 돼 중공 임시중앙의 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장원톈은 이때부터 왕밍의 '좌경 중앙'의 주요 구성원이 됐다. 1933년 1월, 보구가 임시 중앙으로 루이진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온 뒤부터 장원톈은 보구를 도와 마오 공격에 힘을 보탰다. 그러다 얼마 뒤 광창을 빼앗기자 장원톈이 군사지휘 책임을 물어 보구, 리더를 비판하면서 그들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마오는 장원톈을 좌경 영도부에서 분리시키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오는 장정 전야에 장원톈과 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장원톈은 이때 마오에게 보구, 리더의 영도와 군사지휘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은 일이 있었다. 마오는 훗날 이때의 상황을 스저(師哲)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103)

 

"장원톈은 중앙 소비에트지구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의 지위나 신분뿐만 아니라 인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장정 길에서 인내심 있게 꾹 참으며 그에게 접근해 간곡하게 그를 일깨우고 설복했다. 장원톈을 얻으면 일의 절반은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장원톈은 1943년 '옌안정풍' 일기에서 "장정 출발 후 나와 마오쩌둥, 왕자샹 동지는 함께 지냈다. 마오쩌둥 동지는 우리에게 반 5차 포위 소탕전과 관련해 중앙의 군사영도의 과오를 설명했다. 나는 얼른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울러 정치국에서 리더, 보구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고 이런 상태가 준이회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샹장 전투이후 마오는 왕자샹과 장원톈에게 보구와 리더의 눈먼 지휘는 더 이상 안 된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1934년 말, 중앙홍군이 장정에 나선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왕자샹은 들것에 누워 곧 새해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103)遵義會議後毛澤東領袖地位如何確立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생편전기록(상) 가연 편저 중앙문헌출판사

-----------------------------------------------------------------------------------------------------------------

 

39. 당정군 최고 핵심기관 '3인단' 밀어내고 '신 3인단' 출범

 

"당과 홍군에게 새해의 새로운 1년에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왕자샹은 옆에 잔뜩 아미를 찌푸리고 있는 마오에게 작지만 단호한 소리로 "리더와 보구를 끌어내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왕자샹은 마오의 섬광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또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왕자샹은 마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리더와 보구에게 불만이 많지만 그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뒤에는 코민테른이 있어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오가 근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가능할까? 우리쪽 사람이 적다."
"준이에 도착해 회의를 열어 그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좋다. 나도 찬성이다. 단, 움직여야 한다(活動活動)"

 

왕자샹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왕자샹은 눈을 감고 어떤 사람을 찾아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저우언라이였다. 저우는 '3인단'의 한 사람이었지만 보구나 리더와는 달랐다. 위인이 정직하고 마오쩌둥을 십분 존경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저우와 여러 번 얘기해 봤지만 마오가 대단히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앞서 있었던 통다오 회의, 리핑 회의에서 저우는 이미 보구, 리더와 사이가 틀어져 자신의 건의를 지지할 것으로 여겼다.

 

다음에 주더를 생각했다. 주더는 마오가 홍군을 지휘하는 것을 지지해 왔다. 주더와 마오는 오랫동안 '주-마오, 주-마오' 라고 할 정도로 불가분의 관계이고, 수없는 전투를 하면서 승리를 해 '주마오 홍군'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왔다. 당연히 지지할 사람이라고 왕자샹은 확신했다. 뤄푸를 떠올렸다. 자기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유학 동기동창인데다 정의감이 강하고, 장정 길에 셋이 많은 얘기를 하면서 믿음을 굳혀왔다. 확신 그 자체였다. 왕자샹은 이어 병력을 지휘하는 장군들을 생각했다. 펑더화이, 류보청, 녜룽전-. 그들은 군사를 지휘하면서 리더에 대해 많은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오의 전략전술에 경의를 표한바 있다. 특히 펑더화이와 류보청은 리더와 여러 차례 충돌하지 않았던가.

 

주도면밀하게 주판알을 튀겨 본 왕자샹은 곧바로 장원톈을 찾아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보구와 리더를 쳐버리고 마오를 영도로 세우자. 네가 보기에 어떤가?"
"좋다. 홍군은 마오쩌둥을 떠날 수 없다. 그를 영도로 옹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좋아. 그럼 준이에서 회의를 열어 당의 군사노선에 대해 결판을 내자."

왕자샹은 저우언라이를 찾아갔다. 왕자샹은 대단히 완곡하게 저우에게 자기의 견해를 얘기했다.

"저우 부주석. 곧 준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군사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우는 이미 왕자샹의 의도를 간파했다. 저우는 흔쾌히 말했다.

"지난번 정치국에서 이미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지 않습니까. 바꿀 수 없어요. 내가 보기에 준이 회의는 잘 될 겁니다."

 

왕자샹은 한 시름을 놓았다. 저우언라이와 장원톈이 회의를 열기로 했으면 준이 회의는 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자샹은 곧바로 펑더화이와 류보청을 찾아가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마오도 움직였다. 마오는 장원톈을 찾아가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보고를 할 때 군사지휘의 잘못을 따지고 들것을 주문했다. 군사를 모르는 장원톈은 난색을 표했다.

마오는 "당신은 중앙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다. 또 대 수재(大秀才)다. 당신은 회의 보고에서 명정언순(名定言順)하게 해야 한다. 나와는 다르다. 그러나 내가 얘기는 한다. 보고는 당신이 작성해야 한다. 나와 자샹이 돕겠다"며 호주머니에서 군사관련 기록과 관련 문건들을 정리한 자료를 꺼내 장원톈에게 건넸다. 준이 회의에서 장원톈은 이 자료를 가지고 '반 보고(反報告)' 문건을 만들어 '보고'한 것이다. (주석 104)

 

중앙홍군은 준이 회의 이후 중공중앙의 사령탑인 영도부가 바뀌고 군사지휘권도 새롭게 정립하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중공중앙의 최고 권력인 총서기직을 보구 대신 장원톈이 행사하기로 했다. 군사지휘권은 저우언라이가 장악해 마오가 군사업무를 보좌하기로 했다. 당정군의 최고 핵심기관인 '3인단'은 없앴지만 '저우언라이-마오쩌둥-왕자오샹'을 축으로 한 비공식기구 '신 3인단'이 머리 구실을 했다. 저우가 형식적으로는 군권을 장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오가 전투를 총괄 지휘하는 시스템이었다. 3년여의 공백을 깨고 마오가 전투현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른바 산에서 내려온(出山) 마오는 곧바로 전투를 지휘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홍군이 우장(烏江) 도강을 강행해 준이 지구로 진군했을 때 장제스의 직계부대인 '중앙군'의 저우훤위안과 우치웨이(吳奇偉) 두 군단의 8개 사단 병력이 홍군의 오른쪽 측면을 따라 추격해 구이양(貴陽)을 거쳐 추칭(出淸)전(鎭)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또 후난군 류젠쉬(劉建緖)부대 4개 사단은 구이저우 동쪽인 우장 동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쓰촨-후베이 언저리에 있는 쉬위안취안(徐源泉) 부대는 여우양(酉陽), 슈산(秀山)에서 류젠쉬 부대와 연합해 중앙홍군이 동진(東進)해 홍2, 6군단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로 했다. 쓰촨 군벌 류샹(劉湘)은 쓰촨군을 쓰촨-구이저우 변계로 진입시켜 홍군의 북상을 저지키로 했다.

장제스는 또 윈난군 룽윈(龍雲)에게 구이저우로 병력을 파견해 헝장(橫江)을 봉쇄하도록 했다. 광시군 랴오레이 부대 3개 사단은 구이저우 남쪽의 두산(獨山), 두윈(都勻)을 방어하기로 했다. 구이저우 군 여우궈차이, 바이후이장 부대는 북쪽에서 우장을 도하해 준이를 압박하도록 했다. 이처럼 장제스는 쓰촨, 윈난, 후난, 광시, 구이저우성  등 각로 군벌과 장제스 직계의 '중앙군'과 연계해 사면팔방에서 홍군을 포위 공격해 들어가기로 했다. 중앙홍군은 창장과 우장의 중간 지점에 있어 구이저우 북쪽으로 선회할 여지가 없어지자 북쪽의 포위군을 공격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104)遵義會議後毛澤東領袖地位如何確立 理論頻道 新華網, 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 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40. 당권 잡은 마오의 첫 전투 쓴 패배로…

 

중공중앙과 마오는 장제스 군의 급속한 변화에 직면해 부득이 ‘쓰촨-구이저우’ 변계에 소비에트지구 근거지를 건립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 군이 완전 포위하기 전에 준이에서 북상해 북쪽에서 창장(長江)을 도하해 쓰촨 서쪽지역으로 들어가 장제스 군의 포위와 추격을 벗어나야 했다.

1월 19일, 중앙홍군은 준이(遵義)를 떠나 통즈(桐梓), 송칸(松坎)을 거쳐 구이저우(貴州), 쓰촨 변계의 츠수이(赤水)쪽으로 전진했다. 루저우(瀘州)와 이빈(宜賓) 사이에서 창장(長江)을 도하해 홍군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서 였다. 중앙홍군과 장제스 군은 모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츠수이 쟁탈전을 벌였다.

쓰촨 군벌 류샹(劉湘)의 최정예인 궈쉰치(郭勛褀) 부대와 산 하나를 사이를 두고 앞 다퉈 전진했다. 홍군은 험한 산길을, 장제스 군은 큰 도로를 따라 행군했다. 홍군은 투청(土城)에서 길을 막고 있던 호우즈단(侯之擔)의 3개 연대를 일거에 격파하고 투청으로 행군했다. 군중들이 도로 양쪽으로 줄지어 폭죽을 터뜨리며 홍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특히 이 지역은 군벌들의 인민들에 대한 착취가 심해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려 장제스 군을 증오했다. 투청전(土城鎭)은 같은 구이저우성 마오타이전(茅台鎭)의 명주인 마오타이 술(茅台酒)로 유명했다. 물 밑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맑고 투명한 츠수이 강의 물이 투청을 관통하며 흐른다.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수질이 좋은 이 물로 마오타이 술을 빗어왔다. 홍군 장병들은 모처럼 휴식을 취하며 마오타이를 흠뻑 마셨다. 술을 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급한 행군으로 부르트거나 상처 난 발에 부어 마오타이를 소독약으로 사용했다.

 

준이회의 이후 군사지휘권을 잡은 마오는 츠수이를 건너기 전에 홍군 후미를 추격하고 있는 궈쉰치 부대를 격파하기로 했다. 전투 장소는 구이저우 시수이(習水)현 투청전에 있는 칭강포(靑杠坡)였다. 칭강포는 투청에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홍군은 이곳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런데 장제스의 쓰촨 군이 길을 에돌아 홍군의 머리 위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잘못 입수한 결과였다. 형세가 크게 불리했다. 홍 3군단은 단지 남쪽에서 강공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홍군 총사령관인 주더는 화급한 나머지 직접 간부연대 진지로 달려가 전투를 지휘했다. 쌍방이 각각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전황은 홍군에게 불리했다. 중앙정치국과 군사위원회는 마오의 의견에 따라 철수키로 하고 서쪽에서 츠수이를 건너기로 했다. 준이회의 이후 마오의 첫 전투는 패전의 쓴맛을 봐야했다. 이때 보구는 “봐라. 견문이 좁은 경험론자는 이길 수 없다”며 마오를 조롱했다.

 

이 칭강포 전투는 중국 인민해방군 역사상 참전인원의 ‘급별(級別)’로는 최고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신중국 건국 후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2명의 공산당 1, 2대 영도자와 3명의 국가주석을 지낸 마오쩌둥, 류샤오치, 양상퀀 등이 참전했다. 또 국무원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 국방부 장관을 지낸 펑더화이, 린뱌오, 예젠잉(葉劍英), 껑뱌오(耿彪), 장아이핑(張愛萍)등 5명이 참가했다. 십대(十大)원수 가운데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류보청, 녜룽전, 뤄룽환(羅榮桓), 예젠잉 등 7명이 참전했고, 국가 원훈이었던 동비우(董必武), 린보취(林伯渠), 후야오방(胡耀邦)과 장군 출신 2백여 명이 참전한 초호화 전장판이었다. (주석 105)

1월20일, 홍군 총사령부는 '도강 작전계획'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야전군의 당면 기본방침은 구이저우 북부지역에서 쓰촨 남부지역을 경유해 창장을 건너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 뒤 4방면군과 협동해 쓰촨 서북방면에서 총 반격을 펼친다. 홍2, 6군단은 쓰촨, 구이저우, 후난, 후베이 교계(交界)에서 기동작전을 벌이면서 쓰촨 동남쪽을 포위하는 적들을 견제한다. 이후 합동작전으로 반격을 펼쳐 새로운 포위 소탕전을 분쇄하고 쓰촨을 적화(赤化)시킨다. 이 도강 작전계획이 창장연안에서 쓰촨 지역 적(敵) 부대들의 저지로 도강을 못할 경우 다른 방안을 실시한다. 즉, 우리 야전군은 쓰촨 남쪽 지역에서 잠시 전투를 벌이면서 진사장(金沙江) 도하 준비를 한다. 쉬저우(叙州 지금의 宜賓) 상류에서 도강한다."

 

1월22일, 중앙정치국과 중앙 군사위원회는 홍군 주력이 쓰촨으로 진격한다는 것을 홍4방면군에게 전화로 통보하면서 야전군이 쓰촨 서쪽으로 들어가 루저우(瀘州) 상류에서 도강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당시 당 중앙의 의도는 장제스의 주력군이 완전히 쓰촨에 들어가기 전에 쓰촨 서북지역으로 들어가 반격을 펼치면서 3로군과 협동작전을 벌여 먼저 쓰촨지역 적들을 격파한 뒤 쓰촨을 적화시킨다는 계획이다. 장제스는 홍군이 북쪽에서 도강할 것으로 예측하고 급히 쓰촨군 류샹(劉湘)에게 창장 남안(南岸)에 병력을 집중 배치해 홍군을 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 34년 장정 떠나기 전에 모인 홍군들


쓰촨 군벌 류샹은 홍군이 쓰촨에 진공해 홍 4방면군과 합류하여 쓰촨 전역을 공산화한다는 데 놀라 총력을 기울여 홍군을 막기 위해 북쪽을 지키고 남쪽을 공격한다는 '북수남공(北守南攻)'의 양면작전을 채택했다. 즉, 쓰촨 북쪽의 홍 4방면군에 대해서는 수세를 취하고, 쓰촨 남쪽으로 진입하려는 중앙홍군에게는 공세를 취했다.

 

류샹은 중앙홍군이 북쪽에서 도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쓰촨군 12개 여단 총 36개 연대의 병력을 소집해 창장 연안을 봉쇄, 철통같은 방어를 구축했다. 중앙홍군이 구이저우 북쪽에서 쓰촨 남쪽으로 진입할 경우 각로의 장제스 군도 동시에 쓰촨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중앙홍군은 원래 계획대로의 도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도강을 못한다면 중앙홍군은 창장 연안에서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 중앙과 마오는 홍군의 생존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도강계획을 접기로 결단을 하고 운동전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홍군 각 부대가 쓰촨, 윈난, 구이저우 변계에서 기동작전을 펴면서 쓰촨에서 남쪽으로 꺾어 윈난 동북쪽 자시(扎西)에 집결하도록 했다.

2월16일, 중공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는 '전체 홍색전사들에게 보내는 글'을 하달했다.

 

"지난 번 당 중앙과 중앙 군사위원회는 쓰촨 전역을 공산화하기 위해 4방면군과 밀접한 연락과 협력을 갖고 중앙홍군이 창장을 도강해 쓰촨 북쪽지역으로 전개하려 했다. 해서 준이를 중심으로 한 쓰촨, 구이저우 변계지구를 버리고 창장 연안으로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쓰촨, 윈난 군벌들이 창장의 천험을 이용해 병력을 집중 배치, 방어하면서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당 중앙과 군사위원회는 홍군의 생존역량의 희생을 막기 위해 쓰촨 북쪽지역 부대전개를 중지한다. 최종 결정은 윈난, 구이저우, 쓰촨 지구에 근거지를 건립하기로 했다." (주석 106)

105)軍史回眸 毛澤東最得意的戰役是哪一場 新華網  十元帥百將軍參加的戰爭 理論頻道  新華網
106)軍史回眸 毛澤東最得意的戰役是哪一場 新華網  十元帥百將軍參加的戰爭 理論頻道 新華網

-------------------------------------------------------------------------------------------------------------------------------------------------------

 

41. '허허실실' 츠수이 전투, 전략가 마오의 명승부

 

마오는 '이길 수 있으면 싸우고(打得贏就打) 질것 같으면 그냥 간다(打不贏就走)'는 기동력과 긴밀하고 민활한 운동전의 전략이 빛을 발한 츠수이(赤水) 강을 네 번씩 건너다니며 싸우는 '츠수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홍군이 윈난성 자시에 도착했을 때 장제스의 쓰촨, 구이저우, 윈난, 후난 군과 장제스의 직계 부대인 '중앙군'은 홍군을 일제히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추격군의 후방이 비어 있었다. 홍군은 두 번째 츠수이를 건너 후방이 빈틈을 타 신속하게 통즈를 점령했다. 이때 윈난성 군벌 왕자리예(王家烈)는 급히 준이와 주변 일대에 있는 부대를 동원해 로우산관(婁山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홍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홍 3군단 10, 11, 12, 13연대가 로우산관과 반차오(板橋) 사이에서 왕자리예 군을 격파하고 그날 밤에 준이를 두 번째 점령했다.

준이성에 있던 왕자리예는 자신의 군대가 패전한 지도, 홍군이 이미 준이성에 진주한 지도 몰랐다. 뒤늦게 준이성이 점령당한 것을 안 왕자리예는 허겁지겁 거의 맨몸으로 달아났다. 장제스는 분노가 치밀어 도망 온 윈난성 군벌이자 주석인 왕자리예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아편 주석' 이라 불린 그의 자리를 관료 정객인 우중신(吳忠信)에게 넘겼다.

 

이때 장제스 직계 '중앙군'을 이끌고 있던 쉐웨는 구이양(貴陽)에 있다가 홍군이 준이를 점령한 것을 알고 우치웨이 군단에 증원 요청을 했다. 홍 1, 3군단과 조선인 양림이 참모장으로 있던 간부여단이 란반덩(濫板凳)과 차이시(才溪/鴨溪)사이에서 안돈되지 않은 우치웨이 증원군을 맹공격한 뒤 라오야산(老鴉山) 부근에서 2개 사단 대부분을 섬멸했다. 홍군은 승기를 잡고 맹추격을 벌여 도주하는 패잔부대를 들쑤셔 놨다.

혼비백산한 패잔병들은 산지사방으로 달아나다 심지어는 홍군 부대를 우군(友軍) 부대로 착각하고 달려왔다 놀라서 다시 도주하다 잡히는 기상천외한 일도 일어났다. 홍군에 쫒긴 군단장 우치웨이는 참모 몇 사람만 대동하고 우장을 건너면서 부교(浮橋)를 매달은 동아줄을 끊어버려 급류에 부교가 휩쓸려 떠내려가 달아나려던 1천여 명의 패잔병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2차 츠수이 전투는 중앙홍군이 왕자리예 8개 연대와 우치웨이 2개 사단을 대파해 장정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주석 107)

 

장제스는 참패를 당하자 노기충천해 3월 24일 급히 충칭(重慶)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이양으로 달려와 자신이 직접 모든 부서를 통일지휘하기로 했다. 마오는 준이에서 런화이(仁懷)로 돌아 세 번째 츠수이를 도하했다. 장제스는 홍군이 창장을 도하 하려는 줄 알고 급히 쉐웨를 쓰촨 남쪽지역에 보내 요격하도록 하고, 쓰촨 군이 쉬융(叙永)일대를 방어하면서 통즈 이북을 지키도록 했다.

또 쓰촨 군 궈쉰치, 판줘(潘佐), 웨이카이(魏楷), 구이저우 군 장자이전(蔣在珍), 호우한여우(侯漢佑), 후난 군 왕둥위안(王東原) 및 ‘중앙군’ 저우훤위안, 우치웨이 등으로 5로 군단을 만들어 일제히 런화이를 압박, 진군하도록 했다. 장제스는 윈난 군이 비제(畢節)에서 후미를 추격토록 하는 한편, 통즈, 송칸, 지밍관(鷄鳴關), 야시, 탄창(譚廠), 런화이 사이와 츠수이, 투청 사이에 토치카 군(群)을 대거 수축했다.

준이, 통즈 서쪽과 츠수이 강 동쪽 일대에 큰 포위망을 구축해 홍군 스스로가 포위망에 걸리면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홍군은 런화이에서 세 번째 츠수이 강을 건너 장제스 군을 쓰촨 남쪽과 구이저우 북쪽 일대로 끌어들인 뒤 갑자기 뒤돌아 츠수이 강을 네 번째 건넜다. 장제스 군이 밤낮으로 만들었던 토치카 군(群)은 아무런 구실도 못했다. 단지 홍군이 즐기는 전리품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장제스의 득의만만했던 걸작품인 ‘포위망’은 말짱 도루묵이 됐다. (주석 108)

 

이때 마오는 홍군에게 장제스 군을 미혹시키기 위한 몇 개의 진(陣)을 펼치도록 했다. 일부 부대는 구이양을 거짓 공격하게 하고, 일부 부대는 또 가장 빠른 속도로 동쪽의 웡안(瓮安), 황핑(黃平)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 급히 홍 2방면군과 회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제 9군단은 런화이 일대에 남아 장제스 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홍군이 구이양을 거짓 공격을 할 때 구이양 주변은 텅텅 비어 단지 3개 연대가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중국 CCTV의 2001년 드라마 '마오쩌둥의 대장정' 중 한 장면


홍군이 구이양성에서 20리 남짓 떨어진 비행장을 점령했을 때 남편 장제스와 함께 구이양에 온 쑹메이링(宋美齡)은 혼비백산해 5만부의 1 군용지도를 훼손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급히 윈난 군벌 룽윈(龍云)부대에게 밤을 도와 구이양에 증원하도록 했다. 장제스는 또 중앙홍군이 홍 2군단과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상을 걸어 부대배치를 하는 등 벌집 쑤신 듯 난리를 피웠다.

홍군은 윈난 군벌 룽윈의 부대가 구이양 부근으로 이동하고, 바촨(把川), 구이저우, 후난 각 성 군벌과 쉐웨 부대가 구이저우 북, 동쪽, 그리고 후난 서쪽으로 전개하는 틈을 타 구이저우 남쪽으로 진군했다. 홍군은 3월 31일 두 번째로 우장(烏江)을 건너 딩판(定番/惠水), 창쉰(長順/長寨), 광신, 쯔윈, 안룽, 싱런, 싱이 등 현청을 잇따라 공략했다. 홍군은 무인지경으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구이저우 남쪽에서 윈난으로 들어갔다. 장제스는 뒤늦게 홍군의 윈난 진입을 알고 전군을 동원해 뒤 쫒게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닭 쫒던 개꼴이 되었다. 장제스는 그저 허탈한 모습으로 호호탕탕하게 윈난으로 들어간 홍군의 그림자만 쳐다 볼 뿐이었다.

 

홍군은 츠수이를 네 번 건너고 준이를 두 번 점령하는 동안 활보하며 전진하고 광범한 지역을 우회하는 등 고도의 긴밀하고 민활하게 움직이면서 유리한 시기를 잡으면 우세병력을 집중해 장제스 군을 격파했다. 군사들은 이 기간 동안 매일 몇 십 킬로씩 구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떤 때는 밤낮으로 1백 킬로미터 이상을 행군 했다. 중국에서는 츠수이 전투를 허허실실, 성동격서의 전술에 마오 군사사상의 백미인 기민하게 치고 빠지는 운동전을 종횡무진으로 펼친 명전투(名戰鬪)로 평가하고 있다.

마오는 1960년 5월 마오를 방문한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마오에게 평생 겪은 전투 가운데 만족할 만한 전투를 물은데 대해 마오는 ‘츠수이 전투(四渡赤水戰役)’라고 답할 정도 마오가 군사전략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준 전투로 손꼽히고 있다. 이로써 홍군은 진사장(金沙江) 상류에서 창장을 도강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107)軍史回眸 毛澤東最得意的戰役是哪一場 新華網   十元帥百將軍參加的戰爭 理論頻道 新華網
108)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

 

42. 공산당 기틀 마련했던 허쑤헝과 추이추바이의 죽음

 

중앙홍군 주력부대가 장정의 길에 나설 때 루이진 중앙 소비에트에 남아있던 홍군 1만6천여 명은 샹잉(項英), 천이(陳毅) 등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장제스 군을 저지하는 엄호 구실을 했다. 그들 속에 나이가 많아 잔류한 털보 허쑤헝과 병으로 허약한 추이추바이가 있었다. 중앙홍군이 구이저우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1935년 2월 중공중앙은 장시성 분국에 연로한 허쑤헝과 병들어 쇠약한 추이추바이, 임신한 샹잉의 부인 장량(張亮)을 덩쯔후이(鄧子恢)와 저우웨린(周月林)이 호위해 푸젠성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당 중앙은 그들에게 도피자금으로 1백원과 금을 주고 허쑤헝이 보관하도록 했다. 표고버섯 장사꾼으로 변장한 이들 5명은 험준한 산길을 뚫고 푸젠성 후이창(會昌)현 탕우(湯屋)에 들어섰을 때였다. 공산당 푸젠성 위원회에서 연발총으로 무장한 요원들을 보내 그들을 호위하도록 했다.

 

이들은 주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로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였다. 그들은 4월 23일(24일이라는 설도 있음) 새벽 상항(上杭)현 쭤톈(濯田)구 수이커우(水口)진 샤오진춴(小徑村)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밥을 먹다 마을 지주들이 운영하고 있는 ‘의용군’에 발각되고 말았다. ‘의용군’들은 수이커우 진에 주둔한 국민당의 지방 무장부대인 보안대 제14사단 2연대 연대장인 리위(李玉)에게 신고했다. 리위는 2연대를 이끌고 이들이 휴식하고 있는 샤오진춴을 포위했다. 낌새를 느낀 허쑤헝 등을 호위한 요원들이 총격을 가했다. 쌍방간에 불꽃 튀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호위요원들은 보안대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이들을 경호해 마을 남쪽의 산으로 달아났다.

나이가 많은데다 피로에 지친 허쑤헝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보안대에 쫒기게 되었다. 호위요원들과 보안대원들 간의 총격전 속에 허쑤헝은 총을 맞고 논구덩이에 쓰러졌다. 보안대원들은 허쑤헝이 죽은 줄 알고 몸수색을 하러 다가왔다. 돈과 금을 지니고 있던 허쑤헝은 온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보안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허쑤헝은 땅바닥에 쓸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이 59살이었다. 추이추바이와 장량도 체포되는 비운을 겪었다. (주석 109)

 

마오보다 17살이나 많으면서도 후난 제1사범 시절 무람하게 지냈던 허쑤헝은 청나라 때 과거시험을 합격한 수재(秀才)출신으로 중국공산당 1대 대표의 최 연장자로 천두슈 보다 3살이 더 많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사숙의 선생을 하던 37살의 나이에 후난 공립사범에 들어갔다가 제1사범으로 옮겨 마오를 알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아들벌이 되는 10~20대들과 한 걸상에 앉아 신학문을 공부하고 신민학회를 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팔자수염을 하고 다녀 ‘하털보’라는 별명을 얻은 허쑤헝은 1928년 쉬터리(徐特立) 등과 함께 당의 지시를 받고 하얼빈을 거쳐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6대 대회에 참석한 뒤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1937년 상하이로 돌아왔다 몇 개월 뒤 루이진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가서 노농경찰 인민위원부 부장과 내무 인민위원부 부장, 임시 법정주석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3년 마오와 마찬가지로 왕밍 좌경노선의 배척을 받아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마오보다 4살 위인 추이추바이는 1889년 장수성(江蘇省)에서 파산한 지주집안에서 태어났다. 추이추바이는 1920년 베이징 선바오(晨報)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갔다가 1921년 6월 22일에서 7월 12일까지 크렘린궁의 안드레이 홀에서 열린 코민테른 3대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공산당원이 아닌 추이추바이는 기자신분으로 코민테른 회의를 취재했다. 그는 개막식 때 울려 퍼진 시인 포티에르가 가사를 쓴 코민테른가 에 깊은 감명을 받고 여러 차례 코민테른가를 번역해 중국에 전파했다. 추이추바이는 코민테른 회의 때 연설한 레닌의 인상과 자기와의 만남을 이렇게 기사에 썼다.

 

"레닌은 3~4차례 걸쳐 출석해 발언했다. 그는 독어와 불어가 아주 유창했으며 말투는 침착하면서 과단스러웠다. 그는 연설할 때 결코 대학 교수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우며 진지하고 과단, 의연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와 우연히 복도에서 만나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동방문제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일러 줬고 일이 매우 바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추이추바이는 코민테른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대표로 연설한 장타이레이를 알게 된 뒤 그의 소개로 1922년 중국공산당 모스크바 지부에 당원으로 가입했다. 추이추바이는 코민테른 4대 대회 때 모스크바에 온 천두슈에 눈에 띄어 통역 겸 비서로 일하다 천두슈가 추이추바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27년 장제스의 '4.12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천두슈가 우경기회주의자로 당에서 배척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2대 총서기에 올랐다.

1927년 '8.7회의‘를 주재하면서 추수폭동을 지시하고 마오를 지지했으며, 마오가 작성한 '후난농민운동고찰보고'를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 총서기인 추이추바이는 1927년 12월 11일 광둥 폭동을 지시해 소비에트 정부를 선포했으나 군벌들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광둥 꼬뮨의 실패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후과를 가져와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1930년 상하이에서 국민당 정부를 강력 비판하는 좌익 작가연맹이 결성되었을 때 루쉰(魯迅), 마오둔(茅盾) 등과 참여해 활동하다 1934년 1월 루이진 중앙 소비에트지구에 가서 마오가 주석일 때 교육부장을 지냈다. 장제스는 추이추바이가 잡혔을 때 엄청 공을 들이며 그를 회유했지만 추이추바이는 태산처럼 우뚝했다. 1935년 6월18일 광저우 창딩먼청(長汀門城) 중산공원에서 추이추바이는 코민테른가를 부르며 총살을 당했다. 그때 나이 36살이었다. (주석 110)

109)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110)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 홍순도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

 

43. 마오와 홍군 진사장을 도강하다

 

1935년 4월 29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더는 윈난 쉰디옌(尋甸)현 샤오커우(哨口)촌에서 중국 혁명군사위원회 명의의 '야전군 진사장(金沙江) 도강 쓰촨서쪽 소비에트지구 건립에 관한 지시' 문건을 공표했다.

 

"2개월 동안 기동작전을 펼치면서 우리 야전군은 이미 서쪽에 유리한 조건을 쟁취했다. 그러나 적들이 이미 70개 여단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홍군은 더 이상 윈난에서 기동작전을 펼칠 필요가 없다. 진사장 양안(兩岸)이 비어있다. 중공중앙 정치국은 우리 야전군이 현재의 유리한 시기를 이용해 신속하게 진사장을 건너 쓰촨 서쪽으로 진입해 적을 섬멸하고 소비에트지구 근거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4월 30일, 마오와 군 지휘관들은 피곤을 무릅쓰고 쉰뎬현 단구이(丹桂)촌에서 진사장 도하 강행 행동계획 작전을 논의했다. 윈난성 산악지대를 지나는 진사장은 양안에 둘러싸고 있는 수천 미터에 이르는 산들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사이를 휘감으며 빠르게 흘러 급한 물살을 이루고 있었다. 장제스 군은 홍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이미 이 일대의 도하지점을 모두 점령한 뒤 운항하는 나룻배를 강 북안으로 끌어다 불태워 버렸다.

홍군은 주변의 산자락에서 대나무를 베어다 죽교(竹橋)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시일이 걸려 추격하는 장제스 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높았다. 마오가 준이회의 이후 군사지휘를 총괄하게 되자 다시 총참모장으로 복귀한 류보청(劉伯承)은 연안 북쪽 기슭 자오핑(皎平) 나루터에 있는 장제스 군이 이용하는 배를 빼앗기 위해 수비대를 점령하기로 했다.

 

홍군 간부여단 참모장 조선인 양림은 1개 대대를 이끌고 하루 1백여 리를 강행군해 다음날 저녁 무렵에 자오핑 나루터에 도착했다.

이들은 장제스 군 복장으로 위장한 뒤 수비대를 급습해 힘 안들이고 자오핑 나루터를 장악했다. 강 건너에 장제스 군 진영에 아직 파괴되지 않은 두 서너 척의 배가 보였다.

이들은 이 배를 끌어오기 위해 무장 해제시킨 장제스 군 장교를 강압해 정부군이 왔다고 전달한 뒤 의심 없이 보내 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다. 장제스 군으로 위장한 홍군은 수비대 초소에 들어가 힘 안들이고 그들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었다. 다음날 정오 무렵부터 홍군의 선두부대들이 자오핑 나루터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주석 111)     

 

1935년 5월3일, 장정에 나선 중앙홍군이 쓰촨, 윈난 변계에서 3개월 동안 장제스 군의 포위추격과 차단 전략에 기동전으로 뚫고 달아나는 숨바꼭질을 한 뒤 참모장 류보청 휘하의 간부연대의 조선인 양림이 이끄는 선봉부대가 교묘한 전략으로 진사장을 도강할 수 있는 자오핑 나루터를 빼앗아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배를 끌어 모았다.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 온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간부연대 연대장인 천껑(陳賡)의 호위를 받으며 5월 4일 여명 전 캄캄한 밤기운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어둠을 헤치고 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린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류보청을 찾았다. 그들은 도강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류보청은 먼저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했다. 류보청은 양림이 이끈 간부연대 부대가 교묘한 계책으로 자오핑 나루터를 빼앗아 진사장 도강 교두보를 마련했는데 배가 단 두 척뿐이라고 말했다.

 

이  두 척으로 아무리 빠르게 병력을 실어 나르더라도 왕복 40분이 걸리기 때문에 밤낮을 쉬지 않고 실어 나르더라도 1천2백 명 남짓했다. 이런 속도라면 전군이 다 도강하려면 한 달여가 족히 걸렸다. 그런데 나중에 인근에 사는 도사공 장차오서우(張朝壽) 등의 도움으로 배 4척을 찾아 비로소 도강작전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현재 18명의 사공은 너무 적어 사공을 더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사공들을 번갈아 쉬게 해야 수만 명의 홍군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조선인으로 대장정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웠던 양림 / 진사강 도하를 두고 방법을 논의 중인 마오쩌둥과 홍군

 

런 얘기를 듣고 난 마오가 “돼지와 양을 잡아 사공들을 잘 먹여야 한다. 품삯도 두둑하게 줘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와 류보청은 사공이 늘어나면 사공들이 쉴 수 있어 밤낮으로 실어 나르면 1만 명의 홍군을 도강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마오는 그렇다면 원래 홍 1군단은 룽제(龍街)에서, 홍 3군단은 홍먼(洪門)에서, 각각 도강하기로 한 계획을 바꾸는 게 좋을 듯싶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류보청에게 자오핑에서 배 몇 척을 찾았고, 하루에 얼마나 실어 나를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주더에게 알리라고 말했다. 류보청은 곧바로 주더에게 “자오핑 나루터에 배 6척이 있고, 하루 밤낮으로 1만 명을 실어 나를 수 있어 군사위원회 군단을 5일이면 도강시킬 수 있다”고 전통을 때렸다. 주더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류보청을 대동하고 자세하게 자오핑 나루터를 살폈다.
 
이때 진사장 북안에 있는 중우산(中武山) 산봉우리가 희뿌염하게 밝아지면서 연이어진 산등성이와 절벽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노을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동쪽 산꼭대기에서 마치 붉은 수레바퀴 같은 해가 사방에 빛을 뿌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부시면서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오는 나룻배들이 부지런히 홍군을 실어 나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룻배가 낡아 매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배 밑으로 물이 들어오자 사공들이 솜뭉치로 틈새를 틀어막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쓰촨 쪽으로 감돌아 흐르는 진사장의 북쪽은 온통 천야만야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오는 역암(礫石) 벽에 몇 대에 걸쳐 사공들이 파 놓은 산굴에서 진사장을 바라보니 흉맹스러운 물결이 세차게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마오가 산굴을 세어보니 11곳이었다. 곁에 있던 류보청이 설명했다.

 

“이곳 여름 날씨는 완전 찜통더위고 겨울은 엄동설한입니다. 사공들이 산굴을 파고 사는데 굴에는 산창(山窓)이라고 하는 창문이 있습니다. 여름에 강물이 불으면 나룻배를 직접 절벽의 산굴까지 댄다고 합니다.”

 

이때 주더가 강을 건너왔다. 주더는 마오의 경호원 천창펑(陳昌奉)을 보더니 마오를 어디에 쉬도록 했느냐고 물었다. 천창펑은 손으로 물이 흐르는 서쪽방향에 있는 바위에 뚫은 석굴을 가리키며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천창펑은 주더를 수행해 마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오와 주더는 전군이 신속하게 도강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장제스의 대군이 추격하고 있어 시간이 촉박했다. 마오는 류보청이 '도강수칙'을 만들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말한 뒤 제갈량의 남만 정벌당시를 얘기했다.

 

"삼국시대 때 제갈량이 3월에 청두(成都)를 출발해 남만 정벌에 들어가 5월에 루수이(瀘水)를 건너 불모지로 깊숙이 들어갔다. 루수이가 바로 지금의 진사장이다. 마대(馬岱)가 2천명을 이끌고 루수이를 건너다가 독수(毒水)로 1천5백여 명을 잃었다. 정말로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신기하다. 우리도 5월에 루수이를 건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한 사람 말 한필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에 무어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마오가 제갈량을 얘기할 때 전령이 달려와 사공 우두머리인 장차오서우가 진사장 양안 지역에서 18명의 뱃사공을 더 찾아 내 사공이 모두 36명으로 불어났고, 홍군이 어선 1척을 찾아 배가 7척이 됐다고 보고했다. 마오는 사공들의 대우를 잘 해주라고 거듭 말한 뒤 자기 에게 배정된 산굴로 돌아왔다. 마오는 우뚝 솟은 중우산 아래 진사장의 물결이 철썩철썩 절벽을 때리고 습기가 차 눅눅하고 물이 흥건히 고인 깎아지른 동굴에서 수만 홍군의 도강을 지휘했다. 3군단 13연대가 홍먼에서 건너려고 가설한 부교가 물에 떠내려가 마오와 주더는 즉시 3군단에 연락해 자오핑 나루터에서 도강하도록 지시했다.

 

5월3일, 마오는 쿤밍을 거짓 공격하던(佯攻) 홍 1군단에 전통을 보내 최대한 빨리 진사장에 회군해 도강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5월 7일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최고지휘부가 나룻터 지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5월 4일, 홍 1군단은 이틀간 쉬지 않고 행군해 도강지점인 룽제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없고 강폭이 넓은데다 강물의 물살이 세차고 장제스 군의 비행기들이 저공비행하면서 교란하고 있었다. 홍 1군단을 대나무로 죽교를 가설하려고 했으나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마오는 5월 5일 다시 전통을 내려 피로 불구하고 자오핑 나루터로 강행군 해 도강하지 못하면 끊길 위험이 있다고 재촉했다. 홍 1군단은 하룻밤에 48차례 급류를 건너고 1백20리에 걸친 미끄러운 돌길을 구보하다시피 행군해 시간에 맞춰 자오핑에서 도강할 수 있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주더, 류보청이 함께 지휘한 도강작전은 홍 1군단, 3군단, 5군단이 5월9일 모두 진사장을 도하해 아슬아슬하게 끝났다. 밤낮으로 아흐레가 걸린 도하작전이었다. 이와 함께 9군단은 윈난 후이저(會澤)서쪽 수제(樹節), 옌징핑(鹽井坪) 지구에서 무사히 도강을 마쳤다. 이렇게 해 중앙홍군은 장제스의 수십만 명의 포위차단 추격군을 따돌릴 수 있었다. 국민당 정부 중앙군인 쉐웨(薛岳)부대가 진사장 강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홍군이 강을 건넌지 1주일이 지난 16일이었다. 그저 멍하니 강만 바라보며 탄식할 뿐이었다.(주석 112)

112)마오쩌둥 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紅軍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

 

44. 류보청, 6개월간 현장 돈 뒤 공산당 가입

 

중앙홍군은 진사장을 도강한 뒤 장궈타오, 쉬샹첸이 이끌고 있는 홍 4방면군과 합류해 쓰촨 북쪽지역에 소비에트지구를 건립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다두허(大渡河)를 건너야 했다. 중앙 군사혁명위원회는 제1군단 주력부대가 루구(瀘沽)로 행군할 것을 명령하고 류보청을 선봉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류보청은 중국의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군신(軍神)이라 불릴 정도로 지략이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애꾸눈 장군으로도 유명한데 신중국 건국 후 티브이에 전쟁 드라마가 나오면 채널을 돌릴 정도로 평생 전쟁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류보청은 한 사람의 뛰어난 군사지휘관은 수만 명 장병들의 희생 속에 나오기 때문에 극구 명장으로 꼽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류보청은 마오보다 한 살 아래로, 1892년 12월4일 청나라 말기 광쉬제(光緖帝)18년 쓰촨성 카이(開)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고수로 광대였다. 아버지 류원빙(劉文炳)은 신분이 미천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 현청에서 베푸는 과거시험인 수재에 응시해 과거장에 나갔으나 볼품없는 집안이라 해서 쫒겨 나는 수모를 당했다. 과거를 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류보청의 아버지는 푸리허반(浦里河畔)의 낙척 문인으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희망을 자식인 류보청에 걸고 5살 된 아들을 사숙에 보냈다. 류보청은 그 후 수재 출신의 런시옌수(任賢書) 사숙에서 공부했다. 런시옌수는 제국주의 침략에 분개하고 부패한 청나라의 무능을 질타하는 등 우국지사였다. 그의 언행과 가르침은 류보청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류보청은 청조(淸朝)사회를 저항하고 개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싹텄다. 1904년 덩차오바(燈草패)에 있는 한시(漢西)서당으로 전학해 공부했다. 서당 선생인 류화잉(劉華英)은 유신양무(維新洋務)파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해 서양문화와 개량주의 사조 영향을 많이 받은 '교육구국' 논자였다.

그는 스스로 자금을 염출해 가난한 집안의 우수한 학생들을 데려와 학비면제 뿐 아니라 책과 문구류, 식사 등을 무료로 제공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류보청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류보청은 류화잉의 지원으로 진보적 교사들이 많은 고등소학당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진보적 사상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15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자 7남매 집안의 장남으로 집안을 꾸려나가기 위해 부득불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류보청의 청년시절은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이 잉태하던 그런 시기였다. 구국제민의 뜻을 품고 있던 류보청은 1910년 쑨원과 동맹회에 가입하기 위해 무작정 상하이를 찾아갔다. 시골뜨기인 그로서는 상하이는 망망대해였고 아는 사람도 한 사람이 없는 사고무친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주석113)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터지자 그는 강개한 어조로 "대장부는 마땅히 창검을 들고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해야 한다. 어찌 자기 일신의 부귀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하며 변발을 자르고 쑨원이 영도하는 민주혁명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는 군사구국(軍事求國)의 소망을 품고 충칭 수군(蜀軍)정부가 설립한 군사학교 장비옌(將弁)학당에 들어갔다.

류보청은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도박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등 모범생으로 통해 '보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매달 받는 월급은 책값 이외에는 모두 어머니에게 보냈다. 1912년 말, 군사학교를 졸업한 류보청은 소대장으로 임관해 평생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위안스카이(袁世凱)부대와 쓰촨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위안스카이와 한패인 후징이(胡景伊)가 검거령을 내리자 상하이로 달아났다. 다시 고향에 돌아 온 류보청은 위안스카이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반 위안스카이 조직을 만들어 펑제(奉節), 푸링(부陵) 등지의 혁명당원, 꺼라오후이(哥老會)수령과 유지들을 규합해 2백여 명의 기의 부대를 만들어 '쓰촨 호국군 제4지대'에 소속됐다.

류보청 부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과 전투를 벌여 유명해지면서 부대원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류보청은 1916년 3월 부대를 이끌고 펑두(豊都)에서 전투를 벌이다 오른쪽 눈에 총을 맞아 실명했다. 충칭진 수사(守使) 겸 제5사단 사단장 슝커우(熊克武)는 한 눈은 실명했지만 장재(將才)가 있는 류보청을 제9연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류보청의 용병술은 정교하고 근엄하며 대담하면서 늘 기묘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는 직접 일선에 나가 선두에서 돌격하는 등 용감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이었다. 류보청은 쓰촨지역에서 10여 년에 걸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쓰촨의 명장으로 널리 알져지면서 '외눈박이(獨眼龍)장군' 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전투 중 대퇴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은 류보청은 양병(養病)하면서 군벌간의 끝없는 전투로 민중들이 어육이 되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쓰촨의 새로운 군벌로 떠오른 류샹(劉湘)과 양선(楊森)은 류보청의 상관이었던 슝커우를 밀어내고 쓰촨의 패자가 되었다. 군벌들은 진보인사들을 혹독하게 탄압해 류보청은 친구이자 진보인사였던 우위장(吳玉章)의 제의를 받아들여 쓰촨을 떠나 직접 중국공산당의 형세를 살펴본 뒤 공산당 가입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1924년 늦가을, 류보청과 우위장은 구이저우, 후난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류보청은 1925년 2월 우위장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 우위장의 제자인 중공 베이징시위원회 책임자인 자오스옌(趙世炎)과 쓰촨 출신의 공산당원들을 만나 보았다. 우위장은 제자 자오스옌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류보청은 유보한 뒤 더 형세를 살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류보청은 자오스옌의 소개장을 갖고 다시 상하이로 가서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와 비서장 왕뤄페이(王若飛)를 만나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이때는 5.4운동의 열기가 계속 번져가던 시기로 중국공산당이 주도해 2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5만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하는 한편, 많은 상인들이 철시를 하면서 중국에 와있는 제국주의 세력들에 항거하고 있었다.

또 전국 수십여 개 도시에서 상하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연대파업을 벌였다. 류보청은 6개월 동안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현장을 고찰한 결과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구국구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자 1926년 5월13일 양안공(楊闇公)과 우위장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류보청은 이듬해인 1927년 8월1일 저우언라이, 주더 등과 함께 난창기의에 참가한 뒤 루이진 중앙 소비에트지구로 들어가 홍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선봉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류보청은 녜룽전과 함께 리저우(禮州)를 출발해 19일 밤에 몐닝(冕寧)현 경내인 송린(松林)에 도착했다.

113) 劉伯承與果基約達彛海삽血結盟 中國共産黨新聞 人民網

----------------------------------------------------------------------------------------------------------------------------------

 

45. '결의형제'로 이족의 마음 얻은 류보청

 

류보청 선봉부대는 송린(松林)을 거쳐 새벽에 루구전(瀘沽鎭)에 다다른 뒤 오후에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루구에서 다두허(大渡河)를 건너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샹잉(相營), 웨시(越西)를 거쳐 다수바오(大樹堡)에서 다두허를 도강하면 곧바로 쓰촨 서쪽 지역인 야안다다오(雅安大道)에 이른다. 두 번째는 몐닝 다챠오전(大橋鎭), 퉈우(拖烏)를 거쳐 안쉬창(安順場)에서 다두허를 건너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은 험한 산길로 행군하기 힘든데다 한족(漢族)들이 두려워하는 이족(彝族)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있었다. 지휘관들의 설왕설래 끝에 류보청이 최종 결정했다.

 

“적들은 이미 홍군이 시창(西昌)으로 가 다수바오에서 다두허를 건널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수바오 대안 푸린(富林)에 집중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홍군 주력부대는 몐닝에서 안쉰창으로 행군로를 바꿔야 한다. 즉각 군사위원회에 전통을 보내 이런 내용을 건의해야 한다.”

 

류보청과 녜룽전은 선봉부대 1여단을 몐닝 현청으로 보내 군사위원회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2여단은 줘취안(左權)이 인솔해 웨시에서 다수바오로 대대적인 행군을 시켜 홍군이 이곳에서 도하하는 것처럼 장제스 군을 미혹시키는 작전을 짰다. 오후에 줘취안, 류야러우(劉亞樓)가 제2연대를 인솔해 루구를 출발한 뒤 석양 무렵에 홍군 선봉대 1연대가 몐닝 현청으로 떠났다.

 

시창 북쪽에 있는 몐닝현은 주민 17만 명 가운데 이족들이 3분의 1 가량 차지하고 있다. 국민당 군벌과 지방 토호세력, 한족 극단주의자들은 이족을 착취하고 잔인하게 살해 해 이족들은 한족을 불신하고 적대시했다. 때문에 중앙홍군이 순조롭게 이족 집거지를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군은 21일 새벽 은밀하게 몐닝 현청에 진입해 성당에 지휘부를 설치했다.

이때 군사위원회에서 답신이 왔다. 군사위원회가 류보청 선봉 부대의 의견을 받아들여 홍군 주력의 행군노선을 몐닝에서 안쉰창(安順場)으로 가는 길로 바꿨다는 내용이었다. 홍군 주력부대는 장제스 군의 비행기 공습과 쓰촨의 찜통더위를 피하기 위해 대부분 야간행군을 하며 류보청 선두 부대를 뒤따랐다.

 

류보청은 회의를 소집해 이족(彝族)집거지 통과 문제를 세밀하게 검토했다. 이족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한족들이 비하해 뤄뤄족(倮倮族)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쓰촨, 윈난, 구이저우, 광시 등지에 살고 있다. 마오는 전 부대원들에게 이족은 우리 형제라며 멸칭인 ‘뤄뤄주’로 부르지 말고 ‘이주’로 부르도록 했다. 현지 정찰과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족(彝族)은 궈지(果基), 라오우(老五), 뤄홍(羅洪) 등 3개 지파(支派)로 나뉘어 경계를 이루며 관할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퉈우허(拖烏河)에서 난야허(南아河)를 건너면 곧바로 퉈우에 도착할 수 있다. 이 길은 노폭이 좁고 골짜기가 깊은데다 깎아지른 절벽들이 둘러싸고 있는 등 지세가 험악했다. 청나라 말엽 쩡궈판(曾國藩)은 홍수전이 세운 태평천국 농민군 10만 명을 이끌던 익왕(翼王) 쓰다카이(石達開) 군을 추격해 전멸시킨바 있다. 당시 쓰다카이는 북상을 위해 선두 부대가 안쉰창에 도착해 다두허 도강을 앞두고 있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 쓰다카이는 장병들에게 잔치를 벌여 호궤(犒饋)하는 등 사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추격군 쩡궈판 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홍군이 몐닝 도착 전야에 장제스는 이런 고사를 떠올리며 홍군을 '제2의 쓰다카이'의 제물로 만들자고 추격군 지휘관들을 독려했다. 장제스는 10만 병력을 동원해 남쪽에서 홍군을 추격하고 북쪽에서 막는 ‘다두허 회전(會戰)’을 구상해 진사장 북쪽, 다두허 남쪽, 야롱장(雅礱江) 동쪽 지구에 홍군을 몰아넣어 전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홍군은 장제스 군이 이런 포위망을 완전히 짜기 전에 다두허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갈 길이 바빴다. 이족 집거지를 이른 시간 안에 통과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달아나려는 중앙홍군과 추격하는 장제스 군의 상황이 '쩡궈판과 쓰다카이' 재판과 흡사했다. 류보청은 지휘관 회의에서 “우리는 쓰다카이의 실패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공산당원이다. 결코 제2의 쓰다카이가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녜룽전은 “우호적인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이족 지구를 순조롭게 통과하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간부들과 전사들을 교육시켜 민족단결의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22일 여명에 다차오전을 출발한 선봉대 1여단은 이족 집거지인 퉈우로 행군하면서 아이지(埃鷄), 어와(俄瓦)를 거쳐 베이사(北沙)촌 라마팡(喇嘛房)에 도착했다. 전위 중대들이 라마팡에 도착했을 때 무리를 지은 이족들이 큰 칼(大刀)을 휘두르고, 사냥총을 허공에 들어 올리는가 하면 긴창(長矛)을 메고, 화살을 쟁여 활을 쏘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밍허(鳴嗬)-.”라고 외치는 소리가 산속에서 들려왔다. 숲속에서 이족들이 우르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와 홍군의 갈 길을 막고 나섰다.

전위 중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설득하는 방법이외에는 달리 뾰족한 계책이 없었다. 부득불 행군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때 후위 중대 부대에서 전령을 보내 더욱 긴장할만한 소식을 전했다. 후미 중대 규모의 공병 부대가 다리를 놓는 기자재와 공구들을 이족들에게 습격당해 강탈당하고 몇 명의 전사들이 희생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류보청은 전군의 행군을 잠시 멈추고 홍군 전사들이 하이쯔판(海子畔) 초지에서 쉬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사방은 절벽과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고 숲속에서 이족들이 하이쯔판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류보청과 녜룽전이 조그만 언덕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통역원이 앞쪽은 궈지 계파, 동쪽은 라오우 계파, 서쪽은 뤄홍 계파로 홍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연대해 전투를 벌이려 한다고 말했다. 류보청은 부대원들에게 자위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녜룽전은 선전대원과 통역원을 데리고 이족들에게 다가가 당의 민족정책을 알리면서 선무공작을 펼쳤다. 통역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석 114)주석

 

“우리는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노농홍군이다. 우리는 이족인민들의 친형제이다. 우리는 국민당 반동파들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길을 빌려 북상하려고 한다. 절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대화와 정책선전을 펼치자 동쪽의 라오우 지파의 이족들이 중립을 표시하고 인마(人馬)들을 물렸다. 이때 산골짜기 입구 쪽에서 갑자기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몇 필의 노새가 하이쯔판 쪽으로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윤곽이 드러났다. 몸푸가 크고 흉맹스럽게 보이는 시커먼 노새에 체격이 장대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이족이 타고 있었다.

한 50살가량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연갈색의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양쪽 귀에는 은 귀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이 사내가 도착하자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던 이족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통역원이 샤오화(肖華)에게 “이 사람은 궈지 지파의 두령 궈지웨다(궈지웨다는 곧 ‘샤오예단(小葉丹)’을 일컬음. 궈지는 성이고 웨다는 이름임)의 네 번째 숙부입니다. 그가 궈지웨다를 대표해 홍군영도와 연락을 취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원래 궈지웨다는 홍군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궈지, 라오우, 뤄홍 3개 지파가 뭉쳐 전투를 벌이려고 할 때 넷째 숙부에게 한어(漢語)에 정통한 가노 사마얼(沙馬爾)을 데리고 홍군이 주둔한 라마팡에 가 군중 속에서 홍군을 관찰하도록 했었다.

홍군의 기율이 매우 엄격할 뿐만 아니라 추호의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등 절도가 있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장비도 좋았고, 솜씨도 보통이 아닌 듯 했다. 숙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궈지웨다는 사자를 보내 홍군과 연락을 취하려 한 것이다.

 

샤오화는 지휘부에 달려와 류보청과 녜룽전에게 상황을 보고한 뒤 “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류 사령관과 궈지웨다가 사쉐지예멍(歃血結盟(삽혈결맹)/옛날 제후들이나 협객들이 가축을 죽여 그 피를 입에 바르거나 술에 타 마셔 한 마음, 한 뜻의 굳건한 의지를 표현하는 의식)으로 결의형제를 맺으면 홍군들이 이족들을 대우하고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진정성을 보여 줘 그들의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사마얼이 통역에 나서 궈지웨다의 넷째 숙부에게 홍군 총사령관이 궈지웨다와 결의형제 맺는 것을 흔쾌히 동의했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는 대단히 감동해 기뻐하면서 비호같이 노새에 뛰어올라 노새 엉덩이에 채찍을 가한 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이족 집거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류보청은 결맹 장소인 하이쯔비옌(海子邊)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궈지웨다가 무리를 이끌고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류보청은 황급히 궈지웨다를 부축해 일으킨 뒤 “궈지웨다, 나의 친형제여!”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류보청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깊은 정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궈지웨다를 바라보며 열정적이고 간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길을 빌려 북상해 국민당 반동파들을 쓸어버릴려고 한다. 홍군과 각 부족 동포들은 모두 형제다.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해 이족 인민들이 외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줘 스스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맹의식은 하이쯔비옌에서 거행됐다. 쪽빛 하늘아래 해맑은 하이쯔비옌 언저리에 양탄자마냥 깔린 진 초록빛 초지에는 맑고 깨끗한 물을 담은 군용 차 탕관 하나와 씩씩하고 기운 펄펄한 큰 붉은 수탉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이것은 바로 이족(彝族)들의 습속에 따라 결맹서약 의식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결맹의식이 시작되자 사마얼이 왼쪽 손으로 큰 붉은 수탉을 잡아들어 올리고, 오른쪽 손은 번쩍번쩍하는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있었다.

사마얼은 맞은편에 어깨를 맞대고 무릎 꿇고 있는 류보청과 궈지웨다를 향해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주문을 왼 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비수로 수탉의 부리 아래 목덜미를 힘차게 찔렀다. 검붉은 피가 차 탕관에 뚝뚝 떨어졌다. 류보청은 ‘혈주(血酒’가 든 차 탕관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굳건하고 성실하게 밝고 낭랑한 목소리로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나 류보청은 궈지웨다와 오늘 이곳 하이쯔비옌에서 결의형제를 맺고자 합니다. 만일 나의 마음이 변하면 천벌을 내려 징치하여 주옵소서”라고 맹세했다. 류보청은 차 탕관 안에 있는 혈주를 반쯤 마셨다.

 

류보청과 샤오예단의 결의를 표현한 조형물

 

궈지웨다는 류보청이 들고 있는 차 탕관을 두 손으로 경건하게 받아 이마 한 복판까지 들어 올리고 격동한 목소리로 “딴 마음을 품으면 여기 닭과 같이 목을 끊어 죽게 하소소“라고 우렁우렁하게 맹세한 뒤 탕관의 혈주를 다 들이 마셨다. 이때 홍군 전사들은 열렬하게 박수를 쳤고, 이족들은 그들의 특이한 구호인 ”鳴嗬, 鳴嗬(밍허, 밍허-.)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삽혈결맹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류보청은 일어나 허리에 매고 있던 권총띠를 풀어 갖고 온 몇 정의 보총과 함께 궈지웨다에게 선물로 주었다. 궈지웨다는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답례로 류보청에게 주었다. 류보청은 궈지웨다를 홍군 진영으로 초대해 축하연을 베푼 뒤 ‘중국홍군 궈지지대(中國紅軍果基支隊 待)‘라고 쓴 홍기를 궈지웨다에게 건네 주었다. 류보청과 궈지웨다가 결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이족 집거지에 신속히 전파되면서 홍군은 연도에 나온 이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가볍고 빠른 발걸음으로 무사히 이족 집거지를 통과했다. 홍군은 이족 집거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족 청년들이 홍군에 가입해 병력을 충원하기도 했다.(주석 115)

 

114) 劉伯承與果基約達彛海血結盟 中國共産黨新聞 人民網
115) 劉伯承與果基約達彛海血結盟 中國共産黨新聞 人民網

----------------------------------------------------------------------------------------------------------------------------------

 

46. 천길 강물 위 루딩교 탈취 "우리는 승리했다"

 

다두허(大渡河)는 창장(長江) 상류의 지류로 쓰촨성에서 흐르는 민장(岷江)이 창장으로 흘러드는 일대의 강을 일컫는다. 강폭이 100미터, 수심 30미터, 유속(流速)이 매초 4미터 좌우로 대단히 큰 강이다. 멀리서도 거세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릴 정도다. 다두허는 홍군이 장정 이래 건너야 할 가장 물살이 세게 흐르는 강이다. 우장이나 진사장보다 급류다. 두 사람이 강가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여울이 많고 물살이 세찼다.

다두허를 건너려면 안쉬창(安順場)나루터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안쉰창 마을은 이미 장제스 군이 장악해 이 일대에 있던 배를 모두 강 건너 북쪽으로 끌고 가 일부는 불태우거나 부셔버렸다. 단지 안쉰창에 파견 수비대가 있어 강 건너 쓰촨군과 연락하기 위해 조그만 배 두 척만 있었다.

 

류보청은 우선 안쉰창을 점령해야 했다. 홍군은 자오핑 나루터를 빼앗을 때처럼 기습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홍1군단 양더즈(楊得志)가 10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수비대를 급습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제스 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하게 수비대원들을 제압한 뒤 수비대장이 머물고 있는 유곽을 덮쳤다. 이때 수비대장은 유곽 안방에서 아편을 피우면서 여주인과 색정을 나눌 생각에 흠뻑 빠져있었다.

 

류보청과 녜룽전은 다음 날인 5월 25일 여명 전에 도강하기로 결정했다. 류보청과 녜룽전은 조그만 언덕에 올라 강 건너 장제스 군의 진지를 살펴봤다. 중무장한 기관총 진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홍군은 2문의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다. 쌍방의 총격전으로 총알이 빗발쳤다. 홍군 17명의 전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엄호를 받으며 조그만 배를 타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돌격대는 장제스 군의 공격을 뚫고 강변에 설치한 기관총 진지를 점령했다. 후속 부대들이 엄호를 받으며 강을 건넜다. 하지만 배가 너무 적어 한 번에 40명 정도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가 높아 부교도 설치할 수 없었다. 그저 배 한척에 의존하는 게 고작이었다. 5월 26일, 1사단 2, 3연대가 안쉰창 나루터에 도착했다. 마오와 린뱌오도 왔다.

 

마오는 강가에서 회의를 열어 도하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루딩차오(瀘定橋)를 빼앗기로 결정했다. 대 부대가 이른 시일 안에 강을 건널 수 없을 경우 이미 진사장을 건넌 추격군인 리윈헝(李韞珩)의 53사단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홍군은 여전히 장제스 군의 사정권에 들어 전멸될 위험이 있었다. 마오는 부대를 개편해 진격로를 두 방향으로 잡았다. 류보청과 녜룽전은 1사단과 천껑(陳賡), 조선인 양림이 이끄는 간부연대를 통솔해 다두허 맞은편 동안에서 북상해 루딩차오로 가도록 했다.

또 린뱌오는 2사단 1군단 단부와 5군단을 이끌고 다두허 서안에서 북상해 루딩차오로 행군하도록 했다. 출발지점인 안쉰창(安順場)에서 루딩차오까지는 340리 길로 이틀 반 정도 걸린다. 마오는 류보청과 녜룽전에게 루딩차오를 빼앗으면 홍군 대부대가 다두허를 도강할 수 있어 쓰다카이(石達開)의 전철을 밟지 않고 쓰촨으로 들어가 4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다며 작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만일 실패할 경우 류보청과 녜룽전이 통솔하는 1개 사단은 쓰촨 서쪽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야 했다. 뤄루이칭(羅瑞卿)과 샤오화(肖華)도 이 부대에 합류했다. 녜룽전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2사단 4연대의 임무는 선두부대로 다두허 서안에서 북상해 루딩차오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우리들 두 갈래 영웅적인 부대들은 서로 지원을 하며 다두허를 끼고 북상했다. 당시의 정경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두 부대원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북상하면서 큰 소리로 얘기를 하는가 하면 손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등 서로를 격려했다. 포효하는 물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런 모습은 전사들을 고무하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모두가 발걸음을 빨리하며 루딩차오를 향해 행군했다."

 

4여단 연대장 왕카이샹(王開湘)과 정치위원 양청우(楊成武)는 5월 27일 새벽 안쉰창에서 출발해 비호같이 행군했다. 이들 부대는 행군하다 조우한 장제스 군과 전투를 벌여 물리치면서 북상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대대장과 중대장 등 수백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큰 비를 맞으면서 밤에는 횃불을 들고 밤낮없이 달렸다. 하루에 240리를 달리는 속도로 구보하다시피 행군해 29일 새벽 6시께 루딩차오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홍군의 루딩교 도하를 그린 그림

 

강물은 세차게 솟구치며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1935년 당시 루딩차오는 천리를 흐르는 다두허에 유일한 현수교(懸垂橋)였다. 루딩차오는 루딩현 서쪽에 13개의 쇠줄로 서안과 동안을 연결하고 있다. 양안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이 다리는 쓰촨에서 시캉(西康), 시장(西藏/티베트)으로 가는 교통요지였다. 13개의 쇠줄 가운데 4개의 쇠줄은 양쪽 난간을 지탱하도록 했고, 중간의 9개 쇠줄에 나무판을 깔아 90여 미터 남짓한 강을 가로 질러 매어 있었다.

이때는 이미 장제스 군이 나무판을 파괴해 9개의 쇠줄만이 허공에 걸쳐 있었다. 쇠줄만 걸려 있어 사람들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아찔아찔해 쓰러질 것 같았다. 홍군은 22명의 결사대를 조직했다. 5월 29일 오후 4시께 결사대들이 서안에서 쇠줄을 틀어쥐고 포복해, 전진할 태세를 갖추자 다리 건너 장제스 군 진지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어댔다. 콩 볶는 듯한 굉음과 함께 총알이 빗발쳤다. 결사대 선두들은 홍군의 엄호사격 속에 사격을 하며 조금씩 전진하고, 뒤쪽에서는 확보한 쇠줄에 나무판을 깔면서 진격했다. 쌍방의 격렬한 총격전 속에 앞서 가던 결사대 한 명이 총탄을 맞고 강물에 떨어졌다.

또 다른 결사대원 한, 두 명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낙하하며 포효하는 물소리에 파묻혔다. 결사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쇠줄에 배밀이를 하면서 장제스 군 진지 가까이 전진했다. 쌍방의 총격전이 더욱 격렬해졌다. 장제스 군이 주둔한 동안 근처에 채 철거하지 않은 나무판에 불을 부처 화염이 널름거리며 맹렬하게 타올랐다.(주석 116)

 

돌격대원의 전진이 주춤했다. 순간 한 결사대원이 불길을 뚫고 돌진해 장제스 군 진지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요란한 굉음과 불꽃이 일면서 진지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승기를 잡은 결사대들이 하나 둘씩 쇠줄을 매단 뭍 쪽에 다다르면서 허리와 등에 매어 단 수류탄을 잇따라 참호에 던졌다. 엄호하던 홍군 진영에서 일제히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사대들의 뒤를 따라 나무판을 깔면서 전진하던 홍군들이 계속 밀어닥쳤다. 세 불리한 장제스 군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도 가도 못한 1백여 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홍군은 2시간여의 격렬한 전투 끝에 기묘하고 아슬아슬하게 루딩차오를 탈취했다. 이때 1사단 2, 3연대와 몇 개 중대가 루딩 성 밖에 도착했다. 4연대는 장제스 군이 방화해 활활 타오르는 큰 불을 무릅쓰고 진격해 루딩 성을 점령하고 수비하던 장제스 군 28여단을 처부셨다. 포로와 1백여 정의 총과 탄약을 노획했다. 류보청과 녜룽전이 3연대를 인솔해 비를 맞으며 다두허 동안에서 루딩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밤중인 오전 2시였다. 류보청과 병이 난 녜룽전은 홍4여단 정치위원 양청우(楊成武)를 대동하고 루딩차오 피해상황 등을 조사하러 다리 한 가운데에 섰다. 양청우가 등불을 밝혀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류보청은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이렇게 외쳐댔다.

 

“루딩교야, 루딩교.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력을 쏟았고,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느냐. 지금 우리는 승리했다.”

 

류보청은 과거 이곳에서 전투를 한 일이 있어 루딩교가 험준해 탈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 마음이 복받쳤던 것이다. 녜룽전도 마음이 울컥해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라며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5군단과 린뱌오가 인솔한 1군단 본대에 이어 루딩차오를 빼앗은 3일 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중앙홍군 대부대가 도착했다. 홍군 주력부대가 물이 쉼 없이 흐르듯 루딩차오를 걸어 다두허를 건넜다. 이렇게 해 중앙홍군은 추격하던 장제스의 중앙군을 완전히 따돌리고 유유히 쓰촨성으로 들어갔다.

116)마오쩌둥 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紅軍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

 

47. 고행의 설산 행군, 홍4방면군과의 기쁜 조우

 

쓰촨지방에 들어 선 중앙홍군은 일단 장제스 군을 따돌려 급한 불을 껐다. 7개여 월 동안 장제스 군에 쫒겨 수없이 많은 인명을 잃었으나 혁명역량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또 다른 시련과 고난의 행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도전과 인간한계의 시험이었다. 이 일대는 쓰촨 서쪽 지방에서 최대의 오지였다. 태산준령의 험준한 산들이 가없이 파도물결을 일으키며 아스라이 펼쳐졌다. 때는 바야흐로 녹음방초의 6월이었다. 하지만 최고봉이 해발 4천9백여 미터가 넘는 설산(雪山) 자진산(夾金山/협금산) 봉우리는 흰 눈을 이고 있었다. 자진산은 자고이래 거의 넘은 사람들이 없었다. 현지 사람들은 자진산은 신선만이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선시옌산(神仙山)이라고 불렀다.

자진산은 바오싱(寶興)현청(縣城) 서북쪽, 마오공(懋功) 이남, 리현(理縣)의 서남쪽에 우뚝 솟아있었다. 또 다른 2개의 설산과 해발 3천6백여 미터가 넘는 치융라이(邛崍山) 멍삐산(夢筆山), 다쿠산(大鼓山) 등도 첩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낮 고원(高原)의 눈부신 햇빛은 피부에 화상을 입힐 정도로 강렬한 자외선을 뿜어댔다. 일기변화가 심해 순식간에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밤에는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영하 섭씨 20도로 떨어졌다. 장병들의 초라한 천막은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를 막지 못했다. 병기들은 얼어붙었다. 해발이 높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며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났다. 산소가 부족해 혈압이 높아 장병들은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주석 117)

 

홍군이 넘은 자진산

 

 

1935년 6월 상순 어느 날. 마오가 군사위원회 종대를 이끌고 어랑산(二郞山)을 넘어 깐주산(甘竹山)에 오를 때였다. 마오와 경호원 등 여러 전사들이 힘들게 산허리쯤 올라갔을 때 개활지가 펼쳐졌다. 마오가 쉬었다 가자고 했다. 전사들이 마오를 둘러싸고 앉아 웃고 떠들었다. 갑자기 마오의 경호반장 후창바오(胡昌保)가 조용히 하라고 손 신호를 보냈다. 이때 모두들 머리 위쪽에서 웡웡대는 모터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동남쪽 방향에서  비행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마오는 급히 은폐하라고 소리쳤다. 전사들이 은폐물을 찾아 뛰어가 숨기 전에 비행기가 급강하 하면서 몇 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휘이익-.”하며 폭탄이 땅에 떨어졌다. 이와 동시에 “콰아앙-.”하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요란했다. 경호반장 후창바오가 “주석-”하며 민첩한 동작으로 마오를 향해 돌진해 마오를 밀어냈다. 순간, 마오가 금방 쉬고 있던 곳에 연기 기둥이 피어올랐다.

모두들 뛰어가  둘러보니 후창바오가 두 눈을 꼭 감고 온 몸이 피투성인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오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흙먼지 투성이인 마오는 후창바오 옆에 쪼구리고 앉아 손으로 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샤오후(小胡), 창바오 동지-”하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 후창바오가 서서히 깨어나면서 실눈을 뜨고 마오를 바라보며 급히 물었다. (주석 118)

 

“주석, 부상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샤오후, 나는 괜찮아.”
“주석, 저는 안 되겠어요-.”
“창바오, 걱정하지마. 좋아져.”
“주석-저는 안 돼요. 저는 아무 걱정이 없어요. 단지, 다시 주석의 경호원을 할 수 없는 것   이-. 주석-, 몸 보중하세요. 주석을 따라- 목적지까지 갈 수 없어요!”

 

후창바오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잠시 후, 후는 얼굴을 돌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호원들을 향해 천천히 안간 힘을 다해 말했다.

“동지들, 힘들어 하지 마라! 나를 대신해 주석을 잘 보위해 주게!”.

 

경호원들은 “반장, 마음 놓으십시오! 우리들이 책임을 다해 주석을 잘 보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의 품속에 머리를 뉘인 후창바오는 모두를 훑어 본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꺾였다.

“반장! 반장!”

전우들이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홍군들이 자진산 꼭대기를 향해 행군했을 때 국민당 군 비행기들이 출격했으나 산 정상 지역을 날지 못하고 산허리를 맴돌다 돌아갔다. 장제스 군은 육로 추격을 정지했다. 홍군이 자진산에서 집단으로 굶어죽거나 영원히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장정 초기 중앙홍군은 장궈타오, 쉬샹쳰이 이끄는 홍4방면군과 부대 합류를 위해 단속적으로 무전연락을 해왔으나 이후 연락이 끊겼다. 양쪽은 소문이나 국민당 신문에 보도된 단편적 소식 등을 통해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 상대방의 상황을 추론할 뿐이었다. 중앙홍군은 홍4방면군이 대체로 쓰촨 서북쪽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으로 예측할 뿐 구체적 지점은 몰랐다. 실제적으로 1935년 6월 초 중앙홍군과 홍4방면군은 불과 1백 여리 떨어져 있었다. 설산이 가로막고 있어 서로 몰랐다. 이때 장궈타오는 리셴녠(李先念)을 파견해 중앙홍군을 찾도록했으나 중앙홍군이 있는 지점과 도착기일 등을 잘 알지 못했다. 리셴녠은 부대를 이끌고 설산 북록의 마오공(懋功)을 점령한 뒤 중앙홍군을 수소문했다. 중앙홍군도 이 일대에서 홍4방면군의 행적을 더듬고 있었다. (주석 119)  

 

중앙홍군은 가도 가도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태초의 원시 그대로였다. 산길은  없었다. 구불구불 빙빙 돌아 올라가며 길을 냈다. 구절양장이었다. 산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끝없는 절벽이 이어졌다. 홍군들은 짚신을 신고 행군했다. 어떤 전사들은 맨발로 걸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홍군들은 대부분 무덥고 습지대인 화중(華中), 화난(華南)지역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추위와 한기를 이기기 위해 고추를 삶은 물을 연신 마셔댔다. 행군도중 삽시간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가 뒤덮는가 하면 수시로 비가 내렸다. 폭풍설도 불어 닥쳤다. 수없이 많은 홍군들이 얼어 죽었다. 일부는 미끄러져 얼음 절벽에 떨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홍군들은 설맹(雪盲)과 산소결핍으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어떤 전사들은 한 번 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 전사는 눈으로 뒤덮인 큰 덩어리를 보았다. 이 눈 덩어리는 원래가 동사한 전우의 시체에 눈이 쌓여 만들어졌다. 홍군들이 천신만고 끝에 산 정상에 올랐다. 하늘이 껌껌해 지면서 닭알만한 우박이 쏟아져 머리가 터지기도 했다.

 

1935년 6월 12일부터 7일 동안 하늘이 잿빛구름으로 짙게 덮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연면히 이어진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은 거봉(巨峰) 사이로 홍군 장병들은 서로 부축하며 가늘지만 굳센 긴 줄을 이으며 행군하였다. 이런 고난의 장정은 일찍이 20세기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장한 정경을 연출했다. 중앙홍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구사일생으로 자진산을 넘기 시작했다. 6월 12일, 홍1군단 2사단 4연대 선두부대가 4, 5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설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 부대는 우장(烏江)을 돌파하고 루딩차오를 빼앗은 용맹을 떨쳤다. 이 부대가 하산하다 뜻밖으로 홍4방면군과 조우했다. 중앙홍군 선두부대와 홍4방면군 파견부대의 합류 소식은 장정 이래 온갖 고생을 겪은 장병들을 극도로 열광시켰다. 피로에 지쳐 파김치가 됐던 후속 부대 장병들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한발 한발 정상으로 향했다. 마오는 6월 14일 중앙 직속 종대와 함께 자진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어린아이 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져 방수포로 머리 위를 가리고 행군했다.

 

마오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탈진한 병사들이 서 너 명씩 무리를 지어 눈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마오는 "동지들, 여기서 쉬면 안 된다! 이곳은 공기가 희박하고 위험하다. 다시 한 번 힘을 내 산 아래로 내려가 4방면군과 합류하자!"고 격려했다. 6월 14일 밤, 마오는 주더, 저우언라이 등 중앙 영도들과 함께 따웨이(達維) 전(鎭)에 도착해 홍4방면군 장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홍1군 정치부 선전부장 덩샤오핑(鄧小平)도 6월 17일 중앙 종대를 따라 챠오치(교적)를 출발해 자진산을 넘었다. 덩샤오핑의 말은 자진산을 넘기 전에 지쳐 죽었다. 지쳐 쓰러진 사람들은 고추 삶은 물을 마시며 말꼬리에 매달려 가까스로 산을 넘었다. 한 군단은 수송용 말과 소를 3분의 2를 잃었다. 중앙홍군은 3개의 설산과 5개의 큰 산맥을 넘어 홍4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중앙홍군이 산을 넘을 때 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동네가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났다. 산촌(山村)마을 사람들은 산기슭에 쓰러질듯한 집과 움막을 짓고 살았다. 들짐승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하고 멸시당하며 사는 목축민과 농민, 수공예 기술자, 심마니 들이었다. 그들은 홍군을 본 일이 없었다. 어쩌다 대처에 나갔다 온 사람들이 군벌과 국민당 정부 관리들로부터 왜곡된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홍군은 검푸른 얼굴에 긴 이가 쑥 튀어나온 흉악한 인간이란 것이었다. 살인방화에 인육을 먹는다고 했다. 홍군들이 산간마을에 출현했을 때 복장은 군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의복이 남루한데다 수 없이 찢겨 기운 곳 투성이었다. 장사병 구별도 할 수 없었다. 다리는 피딱지로 얼룩졌고, 짚신에 나무껍질로 각반을 대신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대부분 뼈만 앙상하게 돌출한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홍군이 지나가면서 만난 산골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라 겁에 질려있었다.하지만 생김새와 옷 입은 태와는 달리 대단히 겸손했다. 마을 사람들의 마당이나 집 주위를 청소해 주고, 장작을 패 주면서 물도 길어다 주는 등 친절했다. 쌀이나 먹을 것들을 살 때 꼬박꼬박 돈을 주고 샀다. 마을 사람들은 백군(장제스 군이나 군벌 군)이 소나 돼지, 닭을 보면 총으로 쏴 죽인 뒤 돈도 내지 않고 강탈해 간 것과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껏 보아 왔던 군대와는 엄청 달랐다.

쓰촨성 사오진(小金)현 르룽(日隆)전 밍(明)씨네 집은 지금까지 5자오(角) 형상의 은으로 만든 머리 장식품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홍군이 지나가던 어느 날 이른 아침, 밍씨네 할아버지가 창가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 그 위에 은화 1원과 양털을 꼬아 만든 가는 죽간을 얹어 놓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주석 120)

 

“어르신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의 한 전사가 젓가락으로 쓰느라 어르신네 실 뽑는 용구를 절단했습니다. 또 어르신네 장작을 갔다 불태웠습니다. 배상금으로 은화 1원을 놓고 갑니다. 이것은 홍군의 기율이고, 홍군이 어르신네께 드리는 돈입니다.”

 

장족(藏族)인 밍씨네는 대단히 감동해 은세공 기술자에게 부탁해 홍군 군모에 있는 5각형 별 모양과 은화 1원은 장족 머리띠를 만들어 지금까지 가보로 전하고 있다고 한다.

 

117)汶川地震重災區夾金山下穿越世紀的傳奇故事 時政頻道 新華網
118)毛澤東生平全記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2009.10 新版)
毛澤東長征路上爲何數次落淚 理論頻道 新華網
119)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國文獻出版社 (2009. 10 新版)
120汶川地震重災區夾金山下穿越世紀的傳奇故事 時政頻道 新華網

----------------------------------------------------------------------------------------------------------------------------------

 

48. 마오, 공산당 1대 대표 장궈타오를 만나러 가다

 

마오는 라마교 사원에 도착한 뒤 홍4방면군 제 22사단 사단장 한둥산(韓東山)에게 4방면군 부대상황, 간부성분,  사상상황, 전사들의 생활, 훈련상태, 부대 전투력, 군민관계 등을 자세히 물었다. 한둥산은 마오에게 상세하게 보고한 뒤 "우리부대 장병들은 모두 '후베이, 허난, 안후이(鄂豫晥)'와 쓰촨성의 가난한 농민출신들로 매우 억세고 용감하다. 전장터에 나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그래! 그것은 바로 홍군의 태도다. 우리들은 장시에서 오는 날부터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적들이 추격해 왔지만 이처럼 돌파해 왔다!"고 흥겹게 말했다. 그날 밤, 중앙홍군과 홍4방면군은 마오공 따웨이전 밖 라마교 사원 부근 언덕배기에서 성대한 경축대회를 열었다. 저우언라이가 경축대회 사회를 맡고 마오, 주더, 4방면군 22사단 사단장 한둥산이 경축사를  했다.

마오는 "이번 부대합류는 위대한 역사적 의의로 홍군 전투사상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 반동 정부를 이기고 북상해 항일임무의 역량을 구현했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홍4방면군이 이룩한 성취와 중앙홍군의 장정 승리를 찬양했다.

 

마오는 "중앙홍군이 중앙소비에트를 떠난 그날부터 매일 우리보다 수배나 많은 적들의 작전을 돌파했다. 적들은 우리를 포위하고 추격하며 차단해 소탕하려 했지만 도리어 우리가 대량으로 적을 무찔렀다. 전투 중 사상자가 적지 않았지만 우리는 단련돼 더욱 더 굳세졌다. 우리는 또 혁명영향을 확대하고, 연도에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마지막으로 "부대합류의 승리는 우리 홍군이 무적임을 증명한다! 우리 1, 4방면군은 한 가족이다. 당중앙의 영도아래 장제스 반동파를 소탕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내쫒는데 공동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마오의 연설은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는 홍1, 4방면군의 부대합류를 매우 중시하고 평가했다. 마오는 당연히 앞으로도 많은 곤란과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는 한둥산에게 “중국의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다. 갈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투쟁도 대단히 복잡해 꼭 끊임없이 학습하고 부단히 전진하며 노력해야 한다. 당과 혁명을 위해 끝까지 분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날 마오와 주더, 저우언라이 등은 마오공으로 출발했다. 이때의 중국은 혁명 고조기의 전야였다. 홍군의 양대 주력부대의 합류는 중국혁명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을 의미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화북지방으로 깊숙이 침투해 중국민족의 위기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이런 형세아래 마오와 주더, 저우언라이 등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와 중화노농홍군 혁명군사위원회 명의로 ‘일본의 화북 병탄과 장제스 매국에 반대하는 선언’의 성명을 발표해 당중앙의 북상항일 방침을 밝혔다. 이 방침은 북상은 1, 4방면군 합류 후의 주요 행동방향, 홍군의 제 5차 반 포위소탕전 실패 뒤의 퇴각주의를 새로운 진공(進攻)으로 바꾸는 교묘한 결합을 밝힌 것이었다. (주석 121)

 

6월 16일, 마오는 마오공에 도착했다. 중앙홍군을 영접한 홍4방면군 제30군 정치위원 리셴녠을 만나 부대상황을 묻고, 홍4방면군 장병들의 배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마오는 군용지도를 땅바닥에 펼쳐놓고 리셴녠 등 홍4방면군 지휘관들에게 당시의 형세를 상세하게 분석해 설명했다. 마오는 “전국적으로 항일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어 모든 형세가 우리에게 아주 유리하다. 1, 4방면군은 당중앙의 통일 영도아래 상호 학습하고 친밀하게 단결해 당이 부여한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오는 또 “이후 4방면군의 행동방침은 바로 북상 항일을 하면서 촨싼간(川陝甘/쓰촨, 싼시, 간쑤성) 혁명근거지를 건립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항일분위기를 촉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주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톈 등의 명의로 “오늘 이후 1, 4방면군 모든 방침은 ‘촨싼간’ 3성을 점령해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중앙은 4방면군을 통솔하고 있는 장궈타오에게 이런 내용의 전통을 보내 홍군의 행동방향과 임무에 대해 정중하게 설명했다. 주석 122)

 

다음날 장궈타오는 당중앙에 보낸 전통에서 “(홍군의) 동, 북쪽 발전방침을 반대하고 쓰촨 서북쪽으로 나아가 아바(阿壩)에 주력을 집중한 뒤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쪽으로 진출할 것을 주장했다. 곤란할 경우 잠시 남쪽으로 진공(즉 서진 또는 남하)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로부터 중앙과 장궈타오 사이에 북상이냐, 남하냐 하는 논쟁이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전개되었다.

장궈타오가 주장하는 서진(西進) 또는 남하(南下)는 혁명의 형세를 비관적인 평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장궈타오는 제 5차 반 포위소탕전 실패를 1927년 대혁명 실패와 같은 엄중한 상황으로 보고 중국혁명이 침체상태로 들어가 '총퇴각'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장궈타오는 혁명의 앞날에 대한 비관과 실망으로 홍군이 소비에트 기치를 휘날리기 위해서는 중국 서북부 변계의 먼 지방으로 퇴각해 장제스 군과 휴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방침은 전략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홍군을 압박해 황허(黃河) 서쪽 지역으로 내몰아 홍군이 북쪽이나 동쪽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장제스가 홍군과 전국 혁명운동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해 홍군을 서쪽 변방에 고립무원 시키고 소탕하려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 지역은 산간벽지인데다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민족간의 장벽으로 홍군이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할 경우 각종 필요한 물자공급 뿐만 아니라 병력충원에도 많은 어려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서진이나 남하는 잘못된 방침이었다. (주석 122)

장궈타오

 

마오를 대표로 하는 당중앙이 북상해 '촨싼간' 근거지를 만들겠다는 방침은 중국혁명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도출한 전략이었다. 촨싼간 근거지론은 이 지역이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다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이 지역의 지리적 환경이 화북지방에 가까워 홍군이 항일전선을 꾸려나가는데 유리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둘째는 비교적 좋은 군중조건을 지니고 있어 홍군이 작전을 펴는데 유리했다. 셋째 이 지역에는 홍25군, 홍26군과 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중앙홍군이 이들과 부대합류를 할 경우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공고한 혁명근거지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전국 항일구국 운동의 중심을 일떠세울 수 있었다. 마오와 당중앙이 제기한 이 방침은 당시 유일 가능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자신의 주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장궈타오는 당의 '1대' 대표다.

마오보다 4살 아래인 장궈타오는 1897년 11월 26일 장시성(江西省) 지융(吉永)현 핑샹(萍鄕)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어와 자연과학을 좋아한 장궈타오는 베이징대 이학원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베이징대 문과학장을 맡고 있던 천두슈가 베이징 대학에서 발행한 잡지 ‘신청년’에 매료돼 사회과학에 관심을 쏟으면서 신사조운동에 뛰어들었다. 장궈타오는 1919년 중국 전역을 휩쓴 ‘5.4운동’의 핵심적 인물로 베이징대 시위대를 이끄는 등 진보적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타고난 사교술이 뛰어난 장궈타오는 베이징 대학에서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고임을 받아 각계 인사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적 네트워크와 사상의 지평을 넓혀갔다. 마오처럼 장궈타오도 리다자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면서 공산혁명 활동에 투신하게 됐다. 그는 천두슈가 상하이에서 공산당 창당 준비를 할 때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른바 ‘북이남진’의 연락책으로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공산당 결성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장궈타오는 리다자오와 함께 상하이에 이어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를 꾸려 제2의 공산당 조직 기반을 구축했다.

1921년 1월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는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 베이징 지부’가 되었다. 리다자오가 서기를, 장궈타오가 조직 책임자로 각각 선출됐다. 장궈타오는 공산당 1대 대표가 되어 공산당 창건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27년 8월 1일 난창기의에 이어 광저우 폭동에 참가했다. 장궈타오는 그 후 3년 동안 소련 모스크바에 있다가 1931년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후베이-허난-안후이(鄂豫皖)’ 지구 홍군 주석이 되어 홍4방면군을 통솔했다. 장제스 군의 포위공격 소탕전에 쫒겨 1934년 쓰촨성 서부지역으로 진출해 장정 중인 중앙홍군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엘리트의식이 강한 장궈타오는 마오가 당중앙 영도반열에 오른 1935년 1월의 준이(遵義)회의를 부정하고 있었던 차였다.

 

마오는 인내심을 갖고 원로 중공당원이자 홍4방면군의 영도자인 장궈타오가 홍1, 4방면군이 일치단결해 다른 부대들과 손을 맞잡고 촨싼간 근거지를 창건하기를 바랐다. 6월 18일, 당중앙과 마오는 다시 장궈타오에게 전통을 보내 북상방침을 알렸다. 당중앙과 마오는 20일 장궈타오에게 또 전통을 보내 마오공에와 전략방침을 상의할 것을 촉구했다. 마오와 주더, 저우언라이는 24일 장궈타오를 만나기 위해 량허커우(兩河口) 진에 도착했다. 중앙은 이곳에서 정치국회의를 열어 북상해 근거지를 건립하는 전략방침을 토론하기로 했다. 총정치부는 장궈타오를 영접하기 위하여 량허커우 진(鎭) 와이통(外通)에서 홍차오산(虹橋山) 방향의 큰 평지에 환영식장을 만들었다.

 

121)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122)毛澤東如何處理與張國燾之爭 理論頻道 新華網

----------------------------------------------------------------------------------------------------------------------------------

 

49. '일촉즉발' 마오와 장궈타오, 승자는?

 

25일 오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오와 당중앙 관계자들은 장궈타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궈타오가 흰색 준마를 타고 30여 명의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량허커우 진에 도착했다. 마오,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앙 영도층과 홍1방면군 지휘관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길옆에 쳐놓은 기름천막 아래서 장궈타오를 영접하기 위해 도열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오만한 태도로 말을 타고 질풍같이 달려왔다. 마오 등 대기하고 있던 영도들은 진흙탕 물을 뒤집어썼다. 장궈타오는 1, 4방면군 광범한 장사병들이 있는 환영식장 연설에서 “이곳은 광대한 지역에 약소민족(티베트족, 회족)이 거주하고, 지세도 좋아 우리들은 ‘촨캉신(四川, 西康, 新藏/쓰촨, 티베트, 신장)’지역에 근거지를 세울 좋은 구비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의 주장을 선포했다.

 

마오는 장궈타오를 환영하는 자리여서 반대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마오는 술자리에서 장궈타오에게 농담으로 “고추를 먹지 못하면 진짜 혁명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장궈타오는 못들은 채 무질러 버렸다. 중앙은 다음날 3일 일정의 정식 정치국회의를 열었다.

저우언라이가 중앙을 대표해 보고하고 이후의 전략방침은 북쪽으로 발전시켜 민산(岷山)산맥 이북 지역에 ‘촨싼간 근거지’를 세우는 게 마땅하다고 밝혔다. 저우는 또 이전에 홍4방면군이 서쪽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한다는 방침은 중앙의 전략방침과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우는 새로운 근거지 건립은 첫째, 우리들의 작전에 편리하고 둘째, 장제스 군 주력을 소멸시키는데 유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우는 새로운 근거지는 지역이 넓어야 하고, 선회할 여지가 커야 하며, 기동작전이 편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저우는 또 중앙은 군중조건이 좋고, 인구가 많으며, 경제조건이 양호한 '촨싼간 지역을 근거지로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의 발언에 동의했다. 그는 촨싼간 근거지는 소비에트운동을 펼쳐 그 기초를 더욱 공고하게 다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는 4방면군이 남하해 청두(成都)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마오는 "우리들의 전쟁은 방어나 도망이 아니라 진공(進攻)이다. 근거지를 세워 진공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산을 넘어 후종난(胡宗南)군을 물리치고 간쑤성 남동쪽을 점령해 신속하게 전진해 적들을 깨뜨린 뒤 근거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또 홍군은 고도의 기동력이 필요하고 병력을 집중해 주력을 공격하는 쪽에 집중 배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오는 후종난 군을 쳐부수고 신속히 전진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마오는 “오늘 결정하고, 내일 곧바로 행동해야 한다. 이 지역의 조건은 대단히 나쁘다. 후퇴에도 불리하다. 힘을 다해 6일 돌파한 뒤 송판(松藩)을 거쳐 결정한 지역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석 123)

 

장궈타오는 북상해 촨싼간 근거지를 건립하는데 반대했다. 장궈타오는 송판을 공격해 간쑤성 남쪽으로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도 의견을 달리 했다. 장궈타오는 "북쪽은 초지인데다 기후가 추워 행군에 불리하며, 후종난이 20여 여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간쑤성 남쪽에 거점을 마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궈타오는 우선 서남쪽으로 나아가 청두를 공격해 촨캉(川康)변계에 근거지를 세우는 계획을 내놨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마오와 저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주더는 송판을 공격한 뒤 간쑤성 남쪽인 간난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샤오치도 청두 공격을 반대했다. 장궈타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견해를 포기해야만 했다. 6월 28일 열린 회의는 만장일치로 ‘1, 4방면군 부대 합류 후 전략방침 결정에 관하여’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 안의 뼈대는 1, 4방면군 부대 합류 후 우리들의 전략방침은 주력을 집중해 북쪽으로 진공한다. 운동전으로 적군을 대량 궤멸시키고 먼저 간쑤성 남쪽을 점령해 촨싼간 근거지를 만든다. 중국 소비에트운동을 더욱 공고하고 더욱 넓게 기초를 다져 중국 서북 각 성을 차지한 뒤 전 중국의 승리를 이룩하자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장궈타오는 량허커우 회의에서 중앙의 결정에 대해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으나 여전히 마음속 깊이 남하를 주장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이때 1방면군이 장정과정에서 병력과 총 등 무기 손실이 많아 4방면군의 전력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병력은 거의 4방면군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무기(화력)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궈타오는 야심을 드러냈다. 1, 4방면군의 통일지휘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중앙과 군사위원회의 개조를 뜻했다. 장궈타오의 요구는 당연히 중앙에 의해 거부당했다. 회의기간 동안 장궈타오는 회의 이외의 활동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장궈타오는 펑더화이와 녜룽전에게 군대파견의 뜻을 표시하는 등 호의를 나타냈다.

또 비서를 펑더화이에게 보내 말린 쇠고기 몇 근과 쌀, 그리고 2, 3백원의 돈을 전달하는 등 선심공세를 폈다.세(勢) 불리기였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활동은 펑더화이를 비롯해 1방면군 지휘관들의 의심을 샀다. 장궈타오는 홍4방면군 지휘부가 있는 자꾸나오(雜谷腦)에 돌아가 교회당에서 사단장 이상급 간부회의를 열어 량허커우 회의정신을 빌어 자기의 주장을 선전했다.

6월 30일, 장궈타오는 중앙에 전문을 보내 다시 한 번 남하 방침을 제기하고 북상해 촨싼간 근거지를 건립하는 것을 반대했다. 장궈타오는 7월 1일에 다시 중앙에 보낸 전문에서 “우리군은 속히 통일지휘의 조직문제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궈타오가 다시 조직문제를 거론 한 것은 중앙에 대해 더 높은 직위를 요구하는 최후의 카드를 내보인 것이다. 해서 중앙과 장궈타오 사이의 투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도 마오는 장궈타오에 대한 설득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오는 또 장궈타오와 마찬가지로 홍4방면군의 많은 장사병들에 대해서도 단결하고 보살피며 신임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장궈타오는 4방면군 반혁명분자 숙청과 관련해 큰 과오를 저지른 전력이 있었다.

장궈타오는 1931년 거의 모든 여단장급 간부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장궈타오는 종파주의적인 간부노선을 취해 많은 우수한 간부들이 피해를 당했다. 실제로 쩡중성(曾中生)은 장궈타오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랜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쩡중성은 1, 4방면군이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중앙과 장궈타오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 석방을 요구하고, 당중앙에 면담을 호소한 뒤 중앙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쩡중성의 편지를 압수하고 중앙과의 면회를 금지시킨 뒤 비밀리에 그를 살해했다. 또 랴오청즈(廖承志)는 1933년 홍군에 가입해 홍4방면군 총정치부 비서장을 역임했다. 랴오청즈는 장궈타오가 왕밍(王明)의 좌경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불만을 터뜨리다 반혁명으로 몰려 당적을 박탈당한 일이 있었다. 마오는 1, 4방면군 부대 합류 후 3군단에 전통을 보내 4방면군에 병력을 파견해 랴오청즈를 찾도록 했다. 펑더화이는 샤오진광(蕭勁光)을 파견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일찍이 왕밍 좌경노선에 타격을 받았던 마오는 간부를 보살피고 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랴오청즈는 나중에 저우언라이가 노력해 구해낼 수 있었다. (주석 124)

123)毛澤東如何處理與張國燾之爭 理論頻道 新華網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2009.10신판)
124)毛澤東如何處理與張國燾之爭 理論頻道 新華網

----------------------------------------------------------------------------------------------------------------------------------

 

50. 장궈타오 야심 견제 나선 마오쩌둥

 

3군단은 장정 중 4방면군에서 낙오한 약 1개 소대의 사병들을 받아들였다. 당시 3군단장 펑더화이는 이 낙오부대원들을 데리고 북상하려고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모두 4방면군에 돌려보내도록 했다. 마오는 화목하지 않으면 나중에 좋은 얼굴로 대할 수 없고, 우리들은 4방면군 동지들을 믿어 앞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자기의 뜻을 접었다. 마오는 직접 그들에게 가서 북상 항일에 대해 이야기 한 뒤  4방면군에 복귀시켰다. 마오는 이처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1, 4방면군의 화합과 단결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중공중앙 상임위원회는 6월 29일 량허커우 회의 결정에 따라 저우언라이가 만든 ‘송판전투계획’을 통과시키고 송판지구에 출병하는 장제스 군의 후종난 부대가 안정화되기 전 초기에 공격해 북상통로인 송판지구를 탈취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또 장궈타오를 중앙 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했다. 중앙 혁명 군사위원회는 7월 초 송판 공격임무를 장궈타오에게 맡겼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통일지휘’와 ‘조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우며  고의로 4방면군의 행동을 지연시켜 북상을 저지했다.

장궈타오는 7월 9일 추동자들을 부추켜 ‘촨캉성위(川康省委)’의 명의로 중앙에 전문을 보내 ‘반드시 총사령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총사령부를 개조해 4방면군의 천창하오(陳昌浩)를 홍군 총정치위원에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천창하오는 한 술 더 떠 7월 18일 주더에게 전문을 보내 장궈타오를 군사주석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순조롭게 적을 물리칠 수 없다고 중앙을 강박했다. 권력을 탈취하려는 장궈타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다.

중앙은 당연히 거부했다. 마오와 당중앙은 대국적인 관점에서 4방면군 장사병들과의 단결과 장궈타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조직문제’ 해결 요구에 동의했다. 중앙정치국은 이날 다시 회의를 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 회의에서 큰 적을 앞에 놓고 단결이 우선이라며 자신의 직책인 홍군 총정치위원직을 내놨다. 장원톈도 총서기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마오는 총정치위원직을 장궈타오에게 줄 수 있으나 당중앙의 직위인 총서기직은 불가하다고 반대했다. 이는 훗날 장궈타오가 이른바 ‘중앙’을 참칭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마오의 정치적 안목과 심모원려의 도략(韜略)을 알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훗날 자신이 쓴 ‘자술(自述)'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주석 125)

 

“당시 장궈타오는 총서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총서기는 당신들이 하라. 지금은 싸울 때 라고 말했다. 만약 당시 총서기를 양보했더라면 장궈타오는 총서기 명의로 회의를 소집해 이후 만든 가짜 ‘중앙’을 합법화 했을 것이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다.”

 

군사위원회는 7월 18일 주더를 총사령관에, 장궈타오를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또 모든 군대는 중국노농홍군 총사령관과 총정치위원이 균등하게 직접 지휘를 통솔한다고 규정했다. 7월 21일, 군사위원회는 또 전적 총지휘부(前敵總指揮部)를 만들어 4방면군 수장인 쉬샹치옌(徐向前)을 총지휘, 천창하오를 정치위원에 각각 겸하도록 하고 예젠잉(葉劍英)을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중앙이 조직상 중대한 양보를 한 것이다.

시쳇말로 파워게임에서 장궈타오가 기선을 제압한 것을 의미했다. 그런대도 장궈타오는 여전히 투정을 부렸다. 장궈타오는 총정치위원에 임명된 뒤 1방면군을 통제하면서 각 군단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암호 책을 회수했다. 나중에 펑더화이는 3군단의 암호 책을 회수당해 전적 총지휘부에만 통보할 수 있을 뿐 중앙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1군단과는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때서야 장궈타오는 주더와 함께 4방면군을 인솔하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군사위원회는 당중앙과 마오가 통솔하는 1방면군을 우로군(右路軍)으로, 장궈타오와 주더가 이끄는 4방면군을 좌로군(左路軍)으로 나눴다. 분초를 다투는 시기에 속절없이 1개월이 그대로 흘러가버렸다. 8월 초, 후종난 부대는 동남쪽에서 핑우(平武)로 밀고 들어왔다. 홍군이 원래 계획대로 송판으로 북상했다가는 소탕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중앙혁명 군사위원회는 8월 3일 ‘샤허(夏河)-타오허(도河) 전투계획’을 세웠다. 홍군 주력의 절반이 서쪽으로 나아가 아후(阿胡)를 공격한 뒤 다시 북진해 간난(甘南)으로 진공하기로 했다.

 

마오쩌둥과 중앙의 다른 영도자들은 7월 말 마오얼까이(毛兒盖)이 도착했다. 마오얼까이 부근에 장족(藏族) 마을인 사워(沙窩)가 있다. 장궈타오는 이곳에서 또 정치국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정치노선’ 문제를 해결하자고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중앙은 8월 4일부터 6일까지 일정의 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장궈타오는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정확했는지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당중앙과 1방면군 영도층이 잘못을 저질렀다며 비판했다. 장궈타오는 또 강박에 의해 중앙이 북상해 촨싼간 근거지의 전략방침을 동의했다며 이 결의를 부정했다. 그는 사워회의에서 4방면군 간부 9명을 정치국위원으로 발탁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국원의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대 대표인 원로 당원 마오와 장궈타오가 또 다시 맞대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독군(민국초기 성의 최고 군사장관)단 회의"라고 일갈 했으나, 4방면군과 함께 북상하기 위해 마오와 중앙은 또 장궈타오에게 양보를 했다. 회의는 4방면군의 천창하오, 저우춴취안(周純全)을 정치국위원으로 임명하고,  천창하오를 홍군 정치부주임을 겸하도록 했다. 회의는 이와 함께 홍1방면군 총사령부를 다시 만들어 저우언라이를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이는 장궈타오의 야심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여서 장궈타오는 마오에게 큰 불만을 품었다. 중앙 정치국은 8월 20일 마오얼까이에서 회의를 열어 '중앙은 현재 전략방침의 보충결정에 관하여'를 통과시켰다. 이 결정은 홍군이 "신속히 민저우(岷州)를 중심으로 한 타오허 유역지역을 점령하여,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쪽으로 진공해 싼간(陝西, 甘肅省)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

 

51. 설산 이어 죽음의 늪지대, 자연과 싸웠던 대장정

 

중공중앙은 장궈타오가 남하(또는 서진) 주장을 견지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두 달 가량의 중요한 시기를 쟁론으로 허비해 버렸다. 이 두 달 동안 장제스는 홍군이 마오얼까이에 도착해 북상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30만 대군을 동원해 마오얼까이에서 서북방향의 모든 중요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3겹의 봉쇄선을 구축했다. 단지 홍군이 초지(草地/늪지대)를 통해서 북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전략적 의표를 찔러 초지를 통과해 북상한 뒤 싼간 지역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쓰촨 서북쪽 대초원은 실제적으로 늪지대인 거대한 소택(沼澤)이었다.

해마다 수초(水草)들이 무성하게 자라 뿌리가 휘감기고 줄기가 엉켜 소택을 덮어버린 저습지였다. 초지의 기후가 아주 나빠 때로 폭염으로 푹푹 찌다가, 때로 뇌성벽력을 친다. 또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진다. 매년 5월에서 9월까지는 우기다. 홍군이 이 초지를 지나야 할 시기는 8월로 온갖 꽃들이 만발한 시기다. 하지만 꽃이 핀 수면 아래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이 잠시 한 눈을 팔다 늪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버둥거릴수록 점점 늪 속으로 가라않는다. 수 분 후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홍군들이 사투를 벌이며 설산 등 험산준령을 넘었으나, 이제 그들 앞에 사방 수 백리에 걸치는 늪지대가 가없이 펼쳐져 아가리를 벌이고 있었다. 홍군의 시련은 계속됐다. 마오얼까이(毛兒盖), 보뤄쯔(波羅子)에 집결해 휴식을 취한 홍군은 또 다른 자연에 대한 도전을 대비해야 했다. 루딩차오를 빼앗은 양청우(楊成武)가 이끄는 연대가 선발대로 뽑혔다. 마오의 부름을 받은 양청우는 기병 정찰대원과 함께 보뤄 부근에서 당 중앙이 주둔한 마오얼까이로 질풍처럼 달렸다. 마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오얼까이에 도착한 양청우는 국가보위국 국장 덩파(鄧發)의 안내를 받아 마오가 묵고 있는 집으로 갔다. 이 집은 장족(藏族)이 나무로 만든 2층 집으로 아래층은 짐승우리가 있고, 위층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청우를 만난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주석 126)

 

“왔구나, 아주 좋아 보이는 구먼! 이번에 자네 4여단이 선발대가 되었다. 초지에 음습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초가 무더기로 자란다.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늪지대다. 자네 부대들은 꼭 망망한 초지에서 북상하는 행군로를 꼭 찾아야 한다.”

 

마오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북상 항일노선은 정확한 노선이다. 중앙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예의 분석해 내린 결정이다. 현재 후종난(胡宗南)이 송판(松潘)지구의 장라(漳臘), 룽후관(龍虎關) 일대에 4개 사단을 집결해 둘러싸고 있다. 동쪽의 쓰촨군도 민장(岷江) 동안 모두를 점령했다. 일부는 이미 민장 서안의 자구나오(雜谷腦)를 점령했다. 우리를 추격하는 류원후이(劉文輝) 부대가 이미 마오공(懋功)에 도착해 푸볜(撫邊)으로 전진하고 있다. 쉐웨(薛岳), 저우훤위안(周渾元) 부대가 야저우(雅州)에 집결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남하한다면 그것은 바로 도망하는 길이다. 그러면 혁명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로지 전진해야 한다. 적들은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초지를 가로질러 북쪽의 싼시(陝西), 간쑤(甘肅)로 가지 않고 동쪽에서 쓰촨으로 나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적들은 영원히 우리의 내심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적들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

 

마오는 또 양청우에게 “곤란을 극복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마닥뜨릴 수 있는 모든 곤란을 동지들에게 명확하게 말하고, 중앙이 왜 초지를 가로질러 북상해 항일투쟁을 해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동지들이 이런 것들을 알면, 나는 홍군 장병들이 어떠한 곤란이 있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양청우는 양식을 아끼고 연도에 있는 야채를 채취해 먹으면 초지를 건널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다만, 의복이 문제로 한 사람당 홑옷이 두벌밖에 없어 초지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마오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양식과 의복을 준비하고 초지를 행군하는 데 따르는 곤란한 문제를 줄여야 한다”며 거듭 강조했다. 마오는 또 길잡이를 물색했는지를 물었다.

양청우는 60여 살이 되는 장족의 길잡이를 구해 그를 들것에 태워 길 안내를 하도록 조처했다고 말했다. 마오는 “들것을 담당하는 동지들이 길잡이 노인을 안전하게 모시고, 모두가 소수민족을 존중하도록 교육해 그들과 단결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마오는 한참 생각한 뒤 “한 향도(길잡이)가 대부대의 행군을 해결할 수 없다. 자네들은 전진할 때 반드시 길을 표시하는 화살 표지를 만들어 갈랫길을 만나면 견고하게 하나씩 땅에 꼽아야 한다. 그래야 뒤에 따라가는 부대가 길 표시를 따라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다”고 했다. 마오는 양청우에게 엄숙한 말투로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서 “4방면군의 294여단이 이미 자네 여단에 편제돼 있으니 단결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단결은 당의 사업에 승리를 보증한다. 자네들은 부대개편 후의 단결을 잘 해야 한다. 바로 제1, 4방면군이 사이좋게 단결하는 상징이다”라고 거들 강조했다. 마오는 양청우에게 4방면군을 장궈타오와 함께 이끌고 있는 쉬샹치옌(徐向前) 총지휘에게 가서 구체적 지시를 받으라고 말했다.

 

8월 21일 새벽, 선발대인 4여단을 이끌고 있는 양청우는 초지를 향해 진군했다. 이때의 정경을 양청우는 ‘마오쩌둥생평전기록(毛澤東生平全紀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초지의 광경은 정말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가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초원이었다. 풀 더미에는 으스스하고 혼미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고 있어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었다. 수초 밑에는 하천이 교차해 물이 범람하고 있었다. 물은 진흙 빛깔을 띠었다. 산지사방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 광대무변한 수향(水鄕)에서 전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발밑에는 풀줄기와 썩은 풀로 수렁을 이뤘다. 밟으면 폭신폭신하지만 힘을 주면 발이 빠져 빼낼 수 없었다. 우리들은 단지 길잡이가 탄 들것을 따라 그가 가리키는 비교적 탄탄한 초지로 한 사람, 한 사람씩 힘들게 전진했다.”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초지에서 홍군 전사들은 열악한 자연조건 뿐 아니라 인체의 피로와의 싸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들은 초인적 힘으로 최대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아, 진창, 추위, 피로 등을 이겨내야 했다. 신체가 비교적 강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부축해 어깨곁고 나아갔다. 자기의 양식을 다른 동료들에게 주는 등 굳건한 동지애로 단결해 홍군은 초지를 한발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마오는 전사들과 동고동락했다. 밤엔 노천에서 숙영하고 낮엔 굶주림을 참아야 했다. 마오는 훗날 중공 8차2중전회의에서 "우리들이 장정할 때 초지를 지나면서 집이 없어 노숙하고, 우리들의 부대들은 양식이 없어 나무껍질, 나무 이파리를 먹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잔혹 무정한 초지는 수많은 인명을 삼켜버렸다. 지금까지 정확한 수치는 발표되지 않은 채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기록 하고 있다.

126)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009.10신판)

---------------------------------------------------------------------------------------------------------------------------------

 

52. 장궈타오와 당중앙의 '북상남하' 논쟁

 

홍군은 6일간의 사투 끝에 8월 26일 초지를 벗어나 바시(巴西)지구에 도착했다. 바시에서 간쑤성 남쪽에 도착한 중앙과 마오는 바오줘(包座)를 공격하기로 했다. 쉬샹쳰과 천창하오는 중앙의 건의를 받아들여 4방면군의 30군, 4군을 동원해 8월 29일에 전투를 벌여 30일에 바오줘를 점령했다. 1, 4방면군 부대합류 이후 첫 번째 승리로 홍군이 간쑤성 남쪽(간난/甘南)에서 북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바오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소집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마오는 유리한 전투상황을 틀어쥐어 간난으로 북상할 것을 제안했다. 중앙은 우로군(右路軍) 주력이 동쪽으로 진출해 장궈타오가 이끄는 좌로군(左路軍)이 도착한 뒤 소부대로 난핑(南坪), 원(文)현을 거짓공격하고, 주력을 집중해 동북방향의 우두(武都), 시구(西固), 민저우(岷州) 사이를 공격해 후종난 부대를 격파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장궈타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오는 쉬샹쳰, 천창하오와 상의해 장궈타오의 좌로군이 빨리 북상하도록 재촉했다. 마오는 쉬샹쳰, 천창하오와 공동 명의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좌로군이 남하할 경우 앞날이 극히 불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재차 부대를 이끌고 북상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1개 여단에 양식을 조달해 좌로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장제스는 이때 쉐웨(雪岳), 후종난의 전보를 받고 홍군이 이미 초지를 지나 바시에 도착해 바오줘 방어선을 돌파한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장제스는 홍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14사단을 새로 개편해 민현과 라즈커우(臘子口)를 방어토록하고 후종난 부대를 간쑤(甘肅)로 회군시켰다. 장제스는 또 왕쥔(王均)부대를 민현, 톈수이(天水). 우산(武山)지구에서 홍군을 막도록 준비시켰다.

마오는 9월 3일 장궈타오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장궈타오는 중앙에 전보를 보내 거취허(葛曲河)의 물이 불어 좌로군을 이끌고 가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빌미를 내세워 중앙의 계획에 따라 행군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홍군 총사령관의 명의로 또 전보를 보내 당중앙과 우로군이 남하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우로군 선봉인 1군단은 9월 4일 바시에서 북상해 5일 어졔(俄界/소련 경계지역)에 도착했다. 이 시기에 중앙은 매일 회의를 열어 장궈타오의 북상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전적총지휘부(前敵總指揮部)와 4군, 30군은 바시에 주둔했다. 마오, 장원톈, 보구 등은 이곳에 있었다. 병중인 저우언라이와 왕자샹은 전적총지휘부에서 15리가량 떨어진 펑더화이의 3군단이 주둔한 야농(牙弄)에 있었다.

 

9월 8일, 쉬샹쳰과 천창하오는 장궈타오에 전보를 보내 "우리들의 뜻은 주력부대와 분산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며, 좌로군이 북상하는 것이 상책이고 우로군이 남하하는 것은 하책"이라며 북상을 촉구했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곧바로 전보를 보내 쉬샹쳰과 천창하오가 우로군을 통솔해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 당중앙과 장궈타오의 '북상 남하' 쟁론은 끝내 첨예하게 맞서 홍군의 명운에 영향을 미쳐 앞날의 투쟁의 초점이 되었다. 천창하오는 장궈타오의 전보 내용을 쉬샹쳰과 상의하였다.

쉬샹쳰은 "이렇게 중대한 문제는 중앙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앙에 달려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천창하오는 곧바로 장원톈, 보구를 찾아갔고, 그날 밤 저우언라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의 비공식 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 쉬샹쳰, 천창하오, 마오쩌둥, 왕자샹 등 7인이 연명으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북상하도록 결정했다. 이들은 장궈타오에게 보낸 전문에서 "현재 홍군은 아주 엄중한 갈림길에 서있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신중하고 또 신속하게 고려하고 결정하였다. 만약 좌로군이 남하한다면 앞날은 대단히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주석 127)

 

9월 9일 장궈타오는 쉬샹쳰, 천창하오 등을 통해 중앙에 보낸 전문에서 다시 북진을 반대하고 남하를 주장했다. 천창하오가 장궈타오의 전보를 받고 태도를 바꿔 남하에 동의했다. 쉬샹쳰은 남하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4방면군이 분열하는 것을 원치 않아 남하하기로 했다.

그날 중앙은 다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천창하오가 말한 우로군의 남하 전보 명령은 중앙은 맞지 않다고 본다. 중앙은 현재 간절하게 지적한다. 현재 방침은 북상만이 출로가 있다. 남하는 적정, 지형, 주민, 급양 등 모두가 불리하다. 홍군이 전에 없었던 어려운 환경에 빠질 수 있다. 중앙은 북상방침을 절대 바꿀 수 없다. 좌로군은 신속히 북상해 동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리하면 서쪽으로 황허(黃河)를 건너 간쑤, 칭하이(靑海), 닝샤(寧夏) 새 지구를 점령한 뒤 동쪽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장궈타오는 중앙의 인내심있는 설복을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앙의 북상방침을 거부하고 도리어 이날 천창하오에 전보를 보내 우로군에 남하 명령을 내려 홍군을 분열시키고 중앙을 해코지하려 했다.

 

전적총지휘부 참모장 예졘잉(葉劍英)은 이런 전보를 입수하고 즉시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천창하오와 함께 있는 예졘잉이 위험에 처할 것을 고려해 예졘잉에게 냉정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마오는 중앙회의를 열어 1, 3군단을 먼저 북상토록 결정했다. 몸을 빼내는 계책(脫身之計)이다. 우로군을 총지휘하는 4방면군의 쉬샹쳰, 천창하오 세력의 ‘호구(虎口)를 벗어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곧바로 쉬-천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시치미를 떼고 쉬샹쳰과 천창하오를 찾아가 그들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마오는 쉬샹쳰의 거처로 찾아가 마당에서 쉬샹쳰의 속내를 살폈다. 쉬샹쳰은 1, 4방면군이 합류했는데 갈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4방면군이 두 쪽으로 나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마오는 쉬샹쳰의 얘기를 들은 뒤 일찍 쉬라고 말하고 작별했다.
 
마오는 또 천창하오를 찾아갔다. 천창하오는 마오에게 장궈타오가 남하하라고 보낸 전문 얘기를 했다. 사전에 예졘잉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내용을 알고 있는 마오는 모른 체 하고 더듬수를 썼다. 마오는 이미 이렇게 된 바에야 남하 문제를 중앙정치국 동지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저우언라이, 왕자샹 동지가 양병(養病)하느라 3군단에 있다. 나와 장원톈, 보구가 3군단 사령부로 가 회의를 열겠다고 했다. 이것은 천창하오가 통제하고 있는 전적지휘부에서 몸을 빼내기 위한 계책이었다. 천창하오와 헤어진 마오는 급히 바시 부근의 야농에 달려가 장원톈, 저우언라이, 보구와 함께 저우언라이 거처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중앙의 북상방침을 관철하고 홍군 내부에서 발생 가능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밤을 도와 1, 3군단과 군사위원회 종대 일부, 홍군학교 관계자들이 신속하게 북상해 간난(甘南)으로 행군하기로 했다. 마오는 부대 행동을 엄호하기 위하여 예졘잉을 천창하오에게 보내 부대가 남하해 초지를 지나려면 많은 양식이 필요한 만큼 내일 날 밝는 대로 부대를 동원해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천창하오를 안심시켰다. 10일 오전 2시 예졘잉은 1방면군 관계자와 간쑤성 지도를 몸에 지니고 몰래 전적총지휘부를 빠져나왔다.

 

127)毛澤東如何處理與張國道之爭 理論頻道 新華網

----------------------------------------------------------------------------------------------------------------------------------

 

53. 마오 '북상' 위한 첩보전… 조선인 무정의 활약

 

마오쩌둥과 펑더화이는 홍10여단과 함께 부대 후미에서 전진했다. 펑더화이가 마오에게 “만약 그들이(쉬샹쳰과 천창하오) 우리를 억류하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마오는 “그럴 경우 그들과 함께 남하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1, 3군단이 북상한 사실을 안 쉬샹쳰과 천창하오는 대경실색했다. 천창하오는 쉬샹쳰에게 “1방면군 부대가 이동했다. 우리가 부대를 파견해 그들을 추격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펄펄 뛰었다. 쉬샹쳰은 “어떻게 홍군이 홍군을 공격하는 게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공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천창하오는 4방면군 부참모장 리터(李特)가 일군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추격해 남하를 권유하도록 했다. 리터는 마오 부대를 추격해 큰 소리로 “원래의 4방면군 동지들은 돌아와라. 기회주의자들과 함께 북상해서는 안 된다. 남하해 쌀을 먹으러 가자”고 외쳤다.

마오는 리터를 길옆의 교회당으로 데리고 가 이야기했다. 리터는 “당신들은  도망하는 기회주의자”라고 힐난했다. 마오는 “북상은 중앙정치국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리터는 마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4방면군 장병들을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겁박했다. 마오는 리터한테 장궈타오와 천창하오에게 전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북상방침은 정확하다. 촨캉(川康/쓰촨-티베트)으로 남하하는 것을 불리하다. 형세를 바로 보아 부대를 인솔해 함께 가기를 희망한다. 만약에 일시적으로 생각이 미치지 않아 어쩔 수 없으면 나중에라도 깨달아 북상하면 중앙은 환영한다. 혁명의 대국적 상황을 중시하기 바란다. 어떤 의견이 있으면 수시로 전문으로 상의할 수 있다.”

 

마오는 마지막으로 리터에게 “너희들은 남하해도 좋다. 믿음을 가지면 이후 다시 합류할 기회가 온다”고 했다. 마오의 비서인 우슈치안(伍修權)은 자신의 회상록에서 이때의 상황을 “몇몇 동지들이 리터의 행위에 대해 대단히 화를 냈다. 하지만 마오는 줄로 묶어 논다고 부부가 될 수 없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그들을 돌려보내라고 했다. 마오는 이후 그들 스스로가 돌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해 북상하려는 사람들은 계속 북상하고, 남하를 하려는 사람들은 반여우(班佑)로 돌아갔다. 마오는 부대를 따라 바시허(巴西河)를 지나 새로운 전쟁 길에 나섰다.

 

이처럼 당중앙과 장궈타오 사이에 북상과 남하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무력충돌 상황으로까지 번질 위험이 있자 당시 바시(巴西)에 4, 5일 동안 주둔하고 있던 3군단장 펑더화이는 15리 여 떨어져 있는 전적총지휘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곳에 총서기 장원톈과 마오가 있어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마오가 머물고 있는 집 주변에 비밀리에 11여단을 숨겨놓았다. 전적총지휘부 참모장인 예젠잉은 펑더화이에게 린뱌오와 녜룽전이 이끄는 1군단이 어졔(俄界) 지구에 도착했는데 향방을 알 길이 없다고 초조해 했다. 장궈타오와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병력이 열세인 중앙으로서는 1군단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과의 연락이 매우 중요했다.

앞서 장궈타오는 자신이 직접 홍군을 통제하기 위해 각 군단끼리 연락할 수 없도록 무전 암호책을 모두 거둬들여 1군단과 3군단은 무전교신을 할 수 없었다. 망망 초원에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1군단의 종적을 찾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무선연락 복원업무를 맡고 있는 양상퀀(楊尙昆)과 3군단 정치위원 리푸춴(李富春)은 펑더화이에게 지원요청을 했다. 3군단은 송신기를 마련하고 무전교신 암호를 만든 책자를 1군단을 찾아 보내야 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화급하고 중대한 업무였다. (주석 128)

 

펑더화이는 심사숙고 끝에 이 중차대한 임무를 능력과 믿을 수 있는 ‘중국포병의 아버지’인 조선인 무정(武亭)에게 맡겼다. 무정은 나침반 하나만 들고 무작정 광대무변한 초원이 펼쳐진 북으로 달렸다. 물론 길잡이도 없고 인가도 없어 물어볼 곳도 없었다. 모래에서 사금 채취였다. 무정은 물을 찾아 나섰다. 많은 장병들이 이동한 만큼 물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실마리는 밥 지어먹은 흔적이었다.

홍군의 조선인 무정


먹어야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정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물구덩이란 물구덩이는 다 헤집고 다녔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에 가마뚜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을 대어보니 아직도 온기가 느껴졌다. 밥 지어먹은 지 얼마 안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정은 죽어라하고 달렸다. 그는 마침내 언덕 너머 1군단의 대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무정은 린뱌오와 녜룽전에게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무선암호 책을 전달했다. 1군단과 3군단의 교신이 이뤄졌다. 마오는 3군단에서 직접 무선통신을 통해 전문을 발송했다. 1군단장인 린뱌오와 정치위원 녜룽전에게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1군단이 현지에서 주둔하고 있으라’는 내용이 무전암호에 의해 해독(解讀)되고 있었다.  그제 서야 긴장을 풀은 무정은 중요 임무를 완수했다는 희열을 뒤로 하고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갔다.

 

이때의 급박한 상황은 마오가 쉬샹쳰에게 보낸 밀서(密信)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중국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쉬샹쳰은 회고록 ‘역사의 회고(歷史的回顧)’에서 1935년 9월 9일 깊은 밤, 중앙홍군이 마오의 통솔아래 장궈타오가 통제하고 있는 4방면군을 비밀리에 탈출해 북상한 사실을 뒤늦게 안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 오전, 전적지휘부가 끓어올랐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내 마음이 무척 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다 일어나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천창하오는 매우 흥분했다. 듣기조차 민망했다.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 우리들이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천창하오는 답신을 쓰고, 장궈타오에게 보고전문을 보냈다.”

 

당시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 지시했다’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당시 1방면군의사단 통신주임을 맡고 있던 쩡스위(曾思玉)였다. 그때 중앙은 쩡스위에게 1개 대대병력과 무전기 1대를 주어 홍4방면군이 주둔한 곳의 한 갈림길에서 마오의 친필을 쉬샹쳰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9월 10일, 이미 빠르게 초지를 벗어난 홍군 선두부대인 중앙홍군 1군단 2사단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전군(全軍)의 길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때 홍2사단 전체 장병들은 장궈타오가 당중앙을 위해(危害)하고 홍군을 분열시키려 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또 마오가 어젯밤 비밀리에 중앙홍군 3군단과 중앙종대를 이끌고 홍4방면군 주둔지를 떠나 급히 북상해 1군단 주둔지로 와 홍군의 북상항일을 통솔한다는 사실은 더욱 몰랐다.

128)彭德懷 自傳 解放軍文藝出版社

----------------------------------------------------------------------------------------------------------------------------------

 

54. 마오 편지 받은 쉬상쳰 "홍군이 홍군을 어찌…"

 

9월 11일 새벽,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대략 오전 8시께 일지 군마가 홍2사단 주둔지로 질풍처럼 달려왔다. 천광(陳光) 사단장, 샤오화(肖華) 정치위원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자샹, 장원톈, 보구, 린뱌오, 예졘잉, 녜룽전 등 영도자들을 영접한 뒤 머물고 있던 방으로 안내했다.

쩡스위 등 홍2사단 사령부 참모들은 이렇게 많은 중앙 영도자들이 갑자기 몰려와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보고 중대사건이 벌어졌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모두들 긴장하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랬다. 이때 당중앙 영도자들은 하나같이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태풍전야의 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얼마 있다가 사단장 천광이 밖으로 나와 다른 방에서 쩡스위를 불러 샤오화 정치위원과 함께 그에게 중요 임무를 부여했다. 천광은 쩡스위에게 엄숙한 어조로 "쩡 주임, 매우 중요한 임무를 너에게 주겠다. 대단히 급한 임무다"라며 편지 한 통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석 129)

 

"이것은 마오 주석이 4방면군 쉬샹쳰 전적총지휘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자네가 쉬 총지휘에게 화급히 이 편지를 전달할 것을 명령한다. 쩡 주임은 6여단 1대대와 사단에 있는 무전기를 갖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어제 지나 온 갈림길에 가라. 쉬 총지휘가 오늘 오후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그곳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는 꼭 그 갈림길에서 마오까이얼 지구로 갈 것이다. 쩡 주임은 쉬 총지휘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과 지점을 택해 있다가 편지를 전달하면 된다.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된다."

 

샤오화 정치위원도 쩡스위에게 "이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에 부닥칠 수 있다. 모두 융통성 있게 처리하고 모든 것을 피해 서신전달 임무에만 주력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사단장 천광은 이렇게 거듭 당부했다.

 

"어떻게 마오 주석의 친필 서신을 쉬 총지휘에게 전하느냐 하는 것은 당과 홍군의 앞날과 명운에 극히 중요한 일이다. 이 임무는 어렵고도 막중하며 곤란한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네는 오랜 동안 시련과 단련을 겪은 공산당원이고 홍군 간부다. 꼭 임무를 완성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만약 의외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서신을 쉬 총지휘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바란다."

 

쩡스위는 "아무리 곤란한 일이 많더라도 임무를 완성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런 연후에 두 사람은 쩡스위를 데리고 마오쩌둥 등 중앙 영도자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천광이 마오에게 쩡스위를 소개했다. 쩡스위는 마오에게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오는 책상위에 펼쳐진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쉬 총지휘가 동쪽에서 이 갈림길을 지나 마오얼까이로 갈 것이다. 쩡 주임은 꼭 시간에 대어 먼저 갈림길을 선점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쩡스위는 "마오 주석, 마음 놓으십시오. 견결하게 임무를 완성하겠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쉬상쳰


마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이 서신은 정말로 보통 편지가 아니다. 이 편지 전달은 큰 대가를 치루지 않을 수도 있지만, 피를 보는 희생을 치룰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쩡스위는 ”마오 주석, 주석과 함께 혁명을 하는 우리 홍군 전사들의 마음은 밝고 기쁩니다. 혁명사업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광영입니다!“라고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쩡스위는 집안 사촌형 뻘인 1대대장 쩡바오탕(曾保堂), 정치지도원 등과 함께 급히 출발했다. 이들은 강행군 해 오후 2시께 초지에 조그만 구릉을 이룬 지정한 갈림길에 도착했다. 쩡스위는 길의 동, 서 양쪽을 살펴보았다. 비가 오기 때문에 땅바닥이 질퍽거려 기마대가 지나갔을 경우 자국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말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아 쉬 총지휘가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쩡스위는 쩡바오탕 대대장에게 병력을 북쪽 언덕에 배치해 은폐시켜 돌발적 사태에 대비했다. 쩡스위는 간부를 관찰초소로 보내 깃발 신호로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쩡은 또 대동한 원시엔싱(溫先星), 뤄(羅)씨 성을 가진 홍군 전사와 함께 갈림길 설송(雪松) 밑에서 기다렸다. 오후 4시께 관찰초소의 깃발이 펄럭였다. 동쪽에서 일지 군마가 온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쩡스위는 쉬 총지휘의 군마라고 생각했다. 과연 몇 분 지나지 않아 몇 명의 선두 기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쩡스위는 앞으로 뛰어나가 “동지들, 정지, 정지”라고 고함을 친 뒤 “쉬 총지휘께서 오십니까?”라고 물었다. 질주하던 기병들이 말을 세웠다. 기병들 모두 참신한 군장을 갖추고 등에 신식 무기를 메고 있었다. 쩡스위는 이들이 홍4방면군의 군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았다. 기병들은 남루한 복장차림을 한 쩡스위를 보고 중앙홍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쩡스위는 “어느 분이 쉬 총지휘냐”고 물었다.

모제르 총을 갖고 있던 한 기병이 손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저분이 바로 쉬 총지휘”라고 대답했다. 쩡스위는 앞으로 뛰어가 쉬샹쳰에게 경례를 한 뒤 편지를 건넸다. 쉬샹쳰이 받아 보니 겉봉에 마오 주석의 친필로 ‘서총지휘수(徐總指揮收)’라고 씌어 있었다. 쉬 총지휘는 서신의 겉봉을 뜯어 읽다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빛을 엄숙히 하면서 “어떻게 홍군이 홍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버럭 화를 냈다.

쉬샹쳰 곁에 있던 쩡스위는 바짝 긴장했다. 쉬샹쳰을 바라보니 잔뜩 찌푸렸던 아미가 오랫동안 펴지지 않았다. 쩡스위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몸을 곧추세웠다. 쉬샹쳰은 얼굴을 들더니 멀리 광활하게 펼쳐진 초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쩡스위가 침묵을 깨고 “총지휘께 보고 드립니다. 회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쉬샹쳰은 조금 생각하더니 “회신은 없다. 편지를 받았다는 표시로 내 이름을 서명 하겠다”고 했다. 쉬샹쳰은 쩡스위의 직위를 물은 뒤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부주석 건강이 좋으냐”고 물었다.

쩡스위는 쉬샹쳰이 두 사람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곧바로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부주석, 중앙의 다른 영도들께서도 모두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쉬샹쳰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곁에 있는 홍군 전사가 들고 있던 종이와 붓을 받아들어 ‘마오 주석, 서신을 받았습니다’라고 적은 뒤 ‘쉬샹쳰’이라고 서명했다. 쩡스위는 이 종이를 건네받고 경례를 한 뒤 몸을 돌려 갈림길을 떠났다.

쉬샹쳰도 군마를 이끌고 질풍처럼 달렸다. 다음날 오전 쩡스위의 일지 군마는 부대에 도착했다. 당시 당중앙과 마오는 우로군을 이끌고 계속 북상해 장궈타오의 통제기반을 벗어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마오가 쉬샹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중앙홍군의 북상사실의 진상을 설명하고 쉬샹쳰에게 홍4방면군을 통솔해 북상할 것을 권유했다. 또 북상이 일시 어려울 경우 홍4방면군의 광범한 장병들이 단결해 이후 조건이 성숙되면 북상대오로 돌아오라고 했다. 절대로 친자(親者)를 마음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었다.(주석 130)

 

129)毛澤東給徐向前一封信 理論頻道 新華網
130)毛澤東給徐向前一封信 理論頻道 新華網

----------------------------------------------------------------------------------------------------------------------------------

 

55. 마오, 장궈타오 당적 박탈 만류 "남하는 출로가 없다"

 

쉬샹쳰은 1901년 산시성(山西省) 우타이시옌 융안춴(五臺縣 永安村)에서 태어났다. 10살 때부터 사숙(私塾)에 다니다 13살에 소학교에 들어갔다. 집안이 가난해 16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허베이(河北)에 가서 잡화점 점원 일을 했다. 19살 때 산시성 군벌 옌시산(閻錫山)이 세운 산시성립 국민사범학교 속성반에 들어갔다가 5.4운동의 영향으로 진보활동에 참여했다.

1921년 산시성 양취(陽曲)현과 우타이(五臺)현에서 소학교 선생으로 있다가 사직한 뒤 1924년 5월 황푸 군관학교 1기생으로 군문에 들어갔다. 9월에 쑨원(孫文)의 호위대에 편입돼 북벌에 참가했다. 1925년 광시 군벌 천지융밍(陳炯明)을 토벌하는 1차 동정(東征) 때 소대장이 되었다. 1927년 3월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파견으로 광저우(廣州)로 가 광저우 기의에 참가했다.

실패한 뒤 하이루펑(海陸豊) 지구로 갔다. 쉬샹쳰은 그곳에서 노농혁명군 제4사단 10연대 당대표, 사단참모장, 사단장을 지냈다. 펑파이(彭湃) 등과 함께 둥장(東江) 전투를 벌였다. 1929년 6월 중공중앙 군사위원회가 후베이(湖北) 동북지구에 파견해 쉬샹쳰은 그곳에서 노농혁명군 제11군 제31사단 부사단장, 후베이-허난 변계 혁명위원회 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30년 4월 홍1군 부군단 겸 제1사단장, 홍4군참모장에 임명됐다.

 

1931년 7월 홍4군 군단장에 임명됐고, 11월에 노농홍군 제4방면군 총지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쉬샹쳰은 장제스 군의 제3차 포위공격 소탕전 계획을 성공적으로 타격하고, ‘후베이-허난-안후이(鄂豫皖)’소비에트 지구를 확대했다. 그는 홍4방면군을 점차 발전시켜 홍군 3대 주력군의 하나로 키웠다. 쉬샹쳰은 장궈타오의 ‘쉬지 않고 진공(進攻)’하는 군사모험주의 노선으로 장제스 군의 제4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패퇴해 서쪽으로 이동하다 국민당 군의 포위망에 걸려 위험한 처지에 빠졌었다. 쉬샹쳰은 장궈타오의 분산유격전(分散遊擊戰) 주장을 물리치고 병력을 집중해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때 성공적으로 일거에 포위망을 돌파해 4방면군의 주력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쉬샹쳰은 또 순발력 있는 다양한 전술을 사용해 추격군을 따돌리고 친링(秦嶺), 따바산(大巴山)을 넘어 쓰촨성 통장(通江), 바중(巴中) 지구로 들어가 ‘쓰촨-싼시(川陝)’ 소비에트 지구를 개척했다. 그는 거의 매번 전투 때 마다 직접 최전선에 나가 지휘하면서 적정(敵情)과 배치, 작전행동 등을 연구해 대응하고 장병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그는 이때 서북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 등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1935년 봄, 중앙홍군의 북상 장정을 돕기 위해 협동작전을 벌여 자링장(嘉陵江) 전투를 지휘한 뒤 6월에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쉬샹쳰은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공산당원 검거 선풍과 백색테러가 횡행할 때 주변 사람들이 공산당을 떠나자 굳건한 신념을 갖고 ‘앞만 바라보고 가겠다(走向前)’는 뜻으로 원래의 이름 ‘쉬샹쳰(徐象謙)’과 발음이 같은 ‘쉬샹쳰(徐向前)으로 바꿨다. 쉬샹쳰은 신중국 건국후 10대 원수 중 유일한 북방인이며, 원수복장을 하지 않아 ’포의원수(布衣元帥)라는 별칭을 얻었다.

 

‘홍군이 어떻게 홍군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쉬샹쳰의 한마디로 숨 막혔던 위험한 순간은 마침내 지나갔다. 떠오르는 아침 태양 햇살을 받으며 바오줘(包座) 강변의 구절양장과도 같은 길을 걷는 마오와 8천6백여 명의 장병들은 항일북상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다. 9월 11일, 어졔(俄界)에서 1, 3군단이 합류했다. 중앙은 다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좌로군을 인솔해 반여우, 바시로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장궈타오는 다음날 답전을 보내 북상을 반대하고 남하해 쓰촨을 적화시키겠다고 주장했다.

9월 12일, 중앙은 간쑤성 디예부(迭部)현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회의에서 ‘4방면군 영도자와의 쟁론과 이후의 전략방침에 관한’ 보고를 했다. 많은 영도자들이 장궈타오의 반당과 홍군 분열의 죄상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장궈타오의 당적 삭제를 요구했다. 마오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장궈타오와의 투쟁은 현재 당내 2개 노선의 투쟁이다. 조직의 결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 장궈타오의 당적을 박탈하면 그가 여전히 수만 군대를 통솔하기 때문에 수만 군대를 기만하는 것이며, 이후 좋은 낯빛으로 그들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장궈타오가 어떻게 방해하고 파괴하든 온 힘을 다해 4방면군의 북상을 이끌어내야 한다. 남하는 출로가 없다.”

 

펑더화이는 마오의 장궈타오 당적 보류와 관련해 ‘자술(自述)’에서 “만약 당시 장궈타오의 당적을 박탈했다면 이후 4방면군이 초지를 지나는 데 많은 곤란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2, 4방면군이 간즈(甘孜) 합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홍군의 3대 주력군인 1, 2, 4방면군의 싼베이(陝北) 대 합류는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졔(俄界)회의는 ‘장궈타오 동지의 잘못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중앙위원들에게는 결정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전당(全黨)에 대해서는 공포하지 않았다. 회의는 또 1, 3군단과 중앙종대를 중국노농홍군 싼간(陝甘/싼시, 간쑤성) 지대로 개편했다. 펑더화이를 사령관, 마오를 정치위원, 린뱌오를 부사령관, 왕자샹을 정치부 주임으로 각각 임명했다. 여기서 마오,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린뱌오, 왕자샹 등 5인단을 구성했다. 이들이 홍군 영도와 모든 중대한 군사행동을 처리하는데 책임을 지도록 했다.

당중앙과 마오쩌둥은 다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남하명령을 취소하고 중앙의 명령에 복종해 북상할 것을 촉구했다. 장궈타오는 중앙의 북상항일 방침은 ‘우경 도망주의’, ‘기회주의’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장궈타오는 아바(阿壩)에서 이른바 ‘쓰촨성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중앙의 ‘어졔(俄界)회의’에 맞서면서 주더(朱德)를 공격했다. 이때 주더는 홍군 총사령관으로 마오까이얼에서 마오와 헤어져 좌로군에 편제돼 장궈타오와 함께 4방면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장궈타오의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궈타오는 9월 15일 ‘대거 남진정치 보장계획’ 을 제기한 뒤 10월 5일, 줘무댜오(卓木조)에서 이른바 ‘당중앙’을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 ‘중앙정부’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장궈타오는 중앙의 이름으로 결의안을 통과시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보구, 장원톈의 업무를 철회하고 그들의 중앙위원 직과 당적을 박탈하며 지명수배 한다”고 선포했다. 또 양상쿤과 예졘잉은 면직시키고 조사하여 처벌하기로 했다. 12월 5일, 장궈타오는 중앙에 전문을 보내 “너희들은 당의 북방국이다. 싼간(陝甘)정부와 북로군으로 다시는 ‘중앙’의 명의를 쓰지 말라”고 선언했다.(주석 131)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오와 중앙의 영도자들은 중앙과 장궈타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당에 공포하였다. 1936년 1월 22일, 당중앙 정치국은 ‘장궈타오 동지의 제2중앙 결성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당중앙은 장궈타오의 이런 행위는 스스로 당과 중국혁명을 배척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강력 비판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마오의 말대로 남하는 출로가 없었다. 1936년 2, 3월간 4방면군이 남하할 때 병력은 45개 여단 규모로 8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28개 여단이 사라져 4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남하해 근거지를 세우겠다는 전략은 처참하게 깨졌다. 점차 4방면군 장병들은 현실상황을 통해 각성했고 북상이 정확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량허커우(兩河口) 회의 근 1년 뒤 허룽이 통솔한 2방면군과 4방면군은 간즈(甘孜)에서 합류했다. 합류한 2, 4방면군은 주더, 런비스(任弼時), 허룽(賀龍) 등의 투쟁으로 장궈타오가 동의해 마침내 중앙이 있는 싼베이(陝北)로 북상, 합류하게 된다.

131)毛澤東如何處理與張國燾之爭 理論頻道 新華網

----------------------------------------------------------------------------------------------------------------------------------

 

56. 18개 산맥, 24개의 강 건넌 장정 "도착했다"

 

중앙홍군은 9월 중순 저녁 무렵, 라즈커우(臘子口)에서 얼마 안 떨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라즈커우는 간쑤, 쓰촨 두 성 변계의 천험의 관문으로 중앙홍군이 산베이로 가는 중요한 일관(一關)이었다. 9월 17일, 중앙홍군을 새로 개편한 싼간(陝甘)지대는 천험요새인 라즈커우를 돌파한 뒤 민산(岷山)을 넘어 9월 20일 간쑤 민현을 점령했다. 싼간지대는 민현과 시구(西固)사이에 있는 하다푸(哈達鋪)에 도착해 설산, 초지 지대를 완전히 벗어났다. 이것은 홍군 장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홍군은 하다푸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부대를 개편했다. 당중앙과 마오는 우체국에 있는 국민당이 발행하는 ‘다공바오(大公報), ’산시르바오(山西日報) 등 신문을 보고 홍25군과 싼베이 홍군이 합류한 사실을 알았다. 중앙과 마오는 싼베이 지구에 홍군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환호작약했다. 싼베이로 가 싼베이 홍군과 부대를 합류하기로 했다. 9월 26일, 싼간지대는 통웨이(通渭)현의 방뤄전(榜羅鎭)을 점령했다. 당중앙은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싼베이 홍군과 근거지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된 중앙은 방뤄진에서 회의를 열고 목전의 형세와 정치, 경제상황 등을 분석했다. 중앙은 싼간지대가 신속히 싼베이로 가 싼베이 홍군, 25군과 합류해 소비에트 근거지를 만들기로 했다. 회의는 어졔(俄界) 회의의 방침을 바꿔 홍군 장정의 마지막 귀착지를 싼베이로 채택하였다. 싼간지대는 빠르게 계속 북상해 잇따라 시안(西安), 란저우(蘭州)의 큰길(大道) 방어선을 돌파하고 류판산(六盤山)으로 행군했다.

 

류판산은 롱산(隴山)산맥의 갈래 봉(峰)으로 홍군이 싼베이로 가는데 넘어야 할 마지막 큰 산이었다. 류판산은 홍군이 넘었던 설산에 비해 크거나 높지는 않았지만 오르내리는 데 60리 길이다. 홍군은 산에 오를 때 나뭇가지를 붙잡고 행군해 힘을 비축했지만 7부 능선부터는 고사목과 관목, 키 작은 풀만 있어 행군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10월 7일, 중앙홍군이 류판산 주봉을 넘을 때 칭스줴이(靑石嘴)에서 국민당 군과 한차례 격전을 벌였다. 홍군은 2백여 명을 사살하고 근 1백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마오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둔하고 있던 껑완전(耿灣鎭) 밖에서 하룻밤 사이에 소리 소문도 없이 홍군 장병 3백여 명이 숨진 것이다. 초보적 판단은 식중독으로 나왔다. 분노가 치민 마오는 보위국에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홍군을 죽인 범인을 잡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홍군이 싼베이에 도착한 뒤 전문가를 현장에 파견해 수개월동안 조사했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었다. 50여 년이 지난 1989년 가을, 이 일대에 대한 수질검사 때 샘물과 개울에서 함량이 높은 칼륨 성분이 검출되고 다량의 시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밝혀냈다. 검사관들은 시안과 칼륨이 결합할 경우 청산가리 성분으로 바뀌어 결국 이 물을 마신 홍군 3백여 명이 죽은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 어쨌든 마오는 싼베이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류판산 정상에서 파노라마처럼 아스라이 펼쳐져있는 싼베이 지역을 바라보며 '청평락-류판산'이란 시를 지어 간난신고의 장정을 마무리하는 심회를 이렇게 읊었다.(주석 132)

 

높은 하늘에 엷은 구름이 흘러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아득히 멀어 보이지 않네.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2만 리의 노정일세. 류판산 높은 봉우리에, 홍기가 서쪽서 부는 바람을 받아 펄럭인다. 오늘 내 손에 있는 긴 끈, 어느 때 적장(장제스/필자 주)을 결박 지울 수 있을 거나?

(天高雲淡, 望斷南飛雁. 不到長城非好漢, 屈指行程二萬. 六盤山上高峰, 紅旗漫卷西風. 今日長纓在手, 何時搏住蒼龍?

 

삼국시대 때 촉나라 제갈량(諸葛亮)은 류판산(六盤山)을 넘어 위수(渭水)에서 남하해 위나라 수도인 시안(西安)을 공격하려는 담대한 전략을 펼치려고 기산(祁山)에 6번이나 진출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이렇게 시를 지어 제갈량을 애도했다.

 

번거로운 삼고초려 천하계책 받들어, 두 대를 거쳐 보필한 노신하의 마음.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 먼저 가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 흘려 옷깃 적시게 하네.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 류판산에 있는 마오쩌둥의 시비.

 

마오는 이때 스스로 류판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장제스에 쫒겨 궁벽진 만리장성의 언저리인 싼베이 지역으로 도망가면서 넘는 길이었다. 마오는 이 시에서 비록 지금은 쫒기는 몸이지만 장제스를 무너뜨릴 결기를 호방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쨌든 마오가 이 시에서 읊은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구절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홍군은 류판산을 넘어 간쑤성 회족지역으로 들어갔다. 회족들은 이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25군의 엄정한 기율 등으로 홍군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홍군이 환(環)현을 출발해 10여 리쯤 행군하다 민둥산에서 쉬고 있었다. 멀리서 5필의 전마(戰馬)가 황토먼지를 풀풀 흩날리며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20여 살 남짓한 젊은이들로 산 아래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이들은 큰 목소리로 “마오 주석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병들이 모두 호기심이 발동해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오의 경호원 천창펑(陳昌奉)이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들은 류즈단(劉志丹)부대에 소속된 홍군입니다. 마오 주석에게 드릴 서신을 갖고 왔습 니다. 마오 주석이 어디 계십니까?”

“당신들이 싼베이 홍군인가!”

“예.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정말 당신들을 보고 싶었다!”

“우리들도 정말 당신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들 가운데 비교적 나이가 많은 홍군이 천창펑에게 편지를 건넸다. 천창펑은 쏜살같이 마오에게 달려가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를 다 읽은 마오는 이들 5명의 홍25군 전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산 위 아래에 많은 부대들이 임시로 휴식을 하고 있었다. 마오는 큰 걸음으로 부대원들이 쉬고 있는 중간지점으로 가 선채로 손을 흔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즉석 연설을 했다.

 

“동지들! 우리들은 싼베이 근거지에 도착했다. 우리들의 홍25군과 26군이 동지들을 파견해 우리들을 마중하러 왔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적들의 2차에 걸친 포위소탕전을 물리쳤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천을 뒤흔드는 웃음소리도 터져 나왔다. 홍군들은 괴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홍군 장병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눈물을 흘렸다. 홍군들은 기쁨에 겨워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었다.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서로 끌어않고 얼굴을 부벼댔다. 중앙홍군은 홍25군 5명의 젊은이들의 향도로 간쑤와 싼시성의 경계인 분수령에 도착했다. 분수령인 산 정상에 우뚝 선 큰 경계비가 눈에 들어왔다. 간쑤와 싼시성 두 성의 경계선에 세워진 석비정면에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큰 글자가 쓰여 있었다.

홍군 전사들은 비 주변에서 휴식을 취했다. 마오는 석비(石碑) 뒷면을 살펴보다 흥분된 어조로 “우리들이 장시(江西)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10개의 성을 지났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11번 째 성인 싼시(陝西)성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근거지, 우리들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중앙홍군은 10월 19일 싼베이(陝北) 근거지인 우치전(吳起鎭)에 도착해 홍25군과 합류했다. 중앙홍군 1방면군이 1935년 10월 20일 장시성을 출발한지 1년 만에 수없이 많은 ‘도망 전투’와 인간한계를 시험하는 극한적 자연환경과 싸우면서 간난신고의 장정(長征)을 마무리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당시 세계는 경악했다. 애초 8만6천여 명의 홍군이 출발했으나 단지 10분의 1인 8천5백여 명만 우치전에 도착했다. 장정이 얼마나 비정하고 엄혹하고 혹독했던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별’에서 장정(長征)의 총결을 이렇게 묘사했다.(주석 133)

 

“통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장정은 인상적이다. 평균 잡아 하루에 거의 한 번씩 전선 어딘가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모두 15일 밤낮을 대접전으로 보낸 때도 있었다. 총 368일의 여정(旅程) 중에서 235일이 주간 행군이었고, 18일이 야간 행군으로 소비되었다. 주로 소규모 전투 때문에 모두 100일 동안 행군이 정지되었다. 그 가운데 56일은 쓰촨성 북서지방에서 보냈고 나머지 44일 동안에 무려 5,000마일의 거리를 이동했다. 달리 말하자면 평균 잡아 114마일을 행군하고는 한 번씩 쉰 셈이다. 그 빈약한 수송 수단으로 그처럼 대규모 군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험난한 지형을 그런 평균 속도로 행군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줘취안(左權)사령관이 나에게 제공해 준 자료에 의하면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었으며, 24개의 강을 건넜다-특히 그 18개의 산맥 중에서 5개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맥이었다. 그들이 통과한 성(省)이 12개, 점령한 도시와 마을이 62개, 돌파한 지방 군벌군의 포위망이 무려 10개 였다.-한니발의 알프스 원정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휴일의 소풍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로부터 나폴레옹군 후퇴와 비교해 보면 더 흥미롭겠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대군은 큰 타격을 입고 사기가 형편없이 저하되어 있었다.”

132)紅軍長征爲何8次改變落脚点 理論頻道 新華網 毛澤東傳(하) 主編 逢先知 金沖及 中央文獻出版社
133)중국의 붉은별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향노 신홍범 옮김 두레

----------------------------------------------------------------------------------------------------------------------------------

 

57. 류즈단의 위기와 마오의 결단 

 

1935년 8월, 척박한 황토고원이 가뭇없이 펼쳐진 싼베이(陝北) 지역. 쉬하이둥(徐海東), 청즈화(程子華)가 홍25군을 이끌고 ‘후베이-허난-안후이(鄂豫皖)’ 소비에트 근거지를 출발해 싼난(陝南)을 거쳐 장정 종착점인 싼베이(陝北)에 도착했다. 시중쉰(習仲勛/차기 중국 총서기 시진핑의 아버지)과 싼간(陝甘/싼시, 간쑤성)변계 군사위원회 주석 류징판(劉景范)이 융닝산(永寧山)에 나아가 반갑게 맞이했다.

 

싼베이 인민들은 홍25군을 대접하기 위해 쌀을 찧고 면을 빻느라 시끌벅쩍했다. 어떤 이들은 돼지와 양을 보내 홍군들을 뜨겁게 위로하고 환영했다. 9월에 홍25, 26, 27군을 합쳐 15군단으로 개편해 쉬하둥이 군단장, 류즈단(劉志丹)이 부군단장 겸 참모장에 각각 임명됐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은 간쑤성 지역으로 들어와 류판산을 넘고 있었다. 장제스는 10만 병력을 동원해 싼베이 지역에 대한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제3차 포위 소탕전(圍剿)에 나섰다. 장제스는 싼간(陝甘)과 싼베이(陝北) 홍색근거지를 일거에 쓸어버려 중앙홍군과 싼베이 군의 합류를 막으려 했다. 쉬하이둥과 류즈단은 15군단을 이끌고 옌안(延安) 이남의 라오산(勞山) 지구에서 장제스 군 1개 사단과 2개 대대를 섬멸하고 사단장 허리중(何立中)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런 중대 고비에서 좌경 기회주의자들이 반혁명분자를 숙청한다는 미명아래 류즈단을 국민당 군과 비밀리에 결탁한 우파분자라고 중상모략했다. 나중에는 류즈단을 ‘백군 군관’, ‘반혁명’ 이라는 딱지를 붙여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이런 속임수로 싼간 변계 근거지의 현 이상 간부와 홍26군 대대장 이상 간부들을 잡아들였다. 좌파들은 온갖 흉계를 꾸미며 총살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류즈단은 감옥에 갇힌 장병들에게 “우리는 죽더라도 거짓자백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검은 구름이 항상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태연자약했다. 지주와 부농, 반혁명분자들이 이런 틈을 타 근거지를 교란해 하루가 다르게 근거지가 축소되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 류즈단은 싼베이 지역에서 소비에트 지구를 개척한 선구자다. 싼시성(陝西省) 북서쪽 바오안(保安)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류즈단은 만리장성 아래에 있는 대상(隊商)들을 상대로 한 교역도시 위린(楡林)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광저우 황푸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26년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한 류즈단은 이듬해 국민당 북벌군에 참가해 한커우(漢口)까지 출정했다. (주석 134)

 

류즈단은 1927년 4월 장제스의 쿠데타 이후 상하이로 달아났다가 1928년 고향인 바오안으로 돌아와 민단 단장이 되었다. 민단은 해당 지역 지주나 토호들이 자체 방어를 위한 조직으로 장제스 군의 비호아래 있었다. 류즈단은 거꾸로 지주와 악질토호, 고리대금 업자 등 인민을 착취하는 자들을 체포, 처형해 지주와 토호들을 놀라게 했다. 류즈단은 이런 행위로 국민당 군에 체포되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풀려나 국민당 군의 장교가 되기도 했다.

류즈단은 여전히 악질 지주와 토호들을 응징해 끝내 국민당 군에 쫒기는 몸이 되었다. 류즈단은 바오안 일대에서 노농홍군을 조직해 1932년 싼시성 북부의 황토 구릉지대의 11개 현을 장악했다. 1933년 초 이 일대에 싼시성 최초의 소비에트가 만들어져 1935년 중반까지 싼간지구 22개 현을 지배하였다. 류즈단은 홍26, 27군의 5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면서 싼베이 일대에서 활동하다 9월에 쉬하이둥의 통솔한 홍25군과 합류한 것이다.

 

류즈단이 위기에 빠진 1935년 10월 19일 당중앙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중앙홍군을 이끌고 싼간 근거지 우치전(吳旗鎭)에 도착했다. 사건의 자초지종과 근거지 인민들의 분노 등 의 상황을 들은 마오는 체포자들에 대한 집행과 체포행위를 중지하도록 명령했다. 마오는 중앙대표단을 와야오바오(瓦窯堡)에 보내 좌경 기회주의자들이 장악한 보안국을 접수해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당중앙과 마오, 저우언라이는 이후 와야오바오에 가 류즈단과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토록하고 그들의 업무를 회복시켰다. 마오와 저우는 좌경 기회주의의 ‘미친듯이 날뛰는 병’을 엄히 추궁하고 비판했다. 저우언라이는 교활하게 변명하는 보안국장 다이지잉(戴季英)에게 “류즈단과 같은 이런 ‘반혁명’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너희들이 하는 이런 ‘진혁명(眞革命)은 하나도 없으면 좋다”고 강력 비판했다. 당중앙은 보안국장 다이지잉을 면직시키고 엄중 경고 처분했다. 얼마 뒤 당중앙은 류즈단을 서북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임(주임은 저우언라이 부주석이 겸직), 중앙 소재지인 와야오바오 경비사령관, 홍군북로 총지휘, 홍28군 군단장에 임명했다.

 

우치전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전보를 보내 "우치전은 소비에트 지구 변경이다. 이 지역 동쪽 홍색정권이 있는 바오안(保安) 성에 홍군이 있다. 그런데 우치전과 진탕(金湯) 전(鎭) 사이의 진푸핑(金佛坪)에 지주들이 무장해 지키고 있는 1백여 개의 보루가 있다. 그들을 소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오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싼간지대 총사령관 펑더화이를 우치전으로 불렀다. 우치전은 싼시 서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똑같이 옌안(延安)지구의 서북쪽에 있다.

우치전 서북쪽으로는 딩볜(定邊)현, 동남쪽으로는 즈단(志丹)현, 동북쪽엔 징볜(靖邊)현, 서남쪽으론 간쑤성 화츠(華池)현과 각각 인접해 있다. 우치전은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침략하는 길목에 있다. 기원전 272년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흉노족들의 남침을 막기 위해 이 일대에 장성을 쌓았다. 이곳은 황토고원이기 때문에 대부분 황토에 돌을 섞어 축성한 장성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

 

홍1방면군 선두부대가 우치전에 도착했을 때 홍군 후미부대를 추격하는 일단의 국민당 군이 있었다. 마홍빈(馬鴻賓), 마홍쿠이(馬鴻逵)와 동북군의 기병부대였다. 홍군 진영에서는 이들과의 전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전투 반대론자들은 홍군이 오랜 장정으로 장병들이 지쳐있는데다 주변 상황 또한 익숙하지 않아 섣부른 공격은 금물이라고 주장했다.

반대론자들은 이들을 소비에트지구로 유인해 좀 더 상황을 파악한 뒤 전투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마오쩌둥 등 전투론자들은 우리도 피로하지만 적들도 피곤하다. 우치전은 산간지역이다. 기병작전에 불리하다. 우리는 기병들을 물리친 경험이 있다. 이밖에 우리는 이미 싼베이 근거지에 도착했고, 군중들의 지지를 받는 등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해서 전투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설왕설래 끝에 홍군은 전투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전투를 하되 적군을 소비에트지구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중앙군사위원회의 배치에 따라 홍군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전투지휘는 펑더화이가 하기로 했다. 펑더화이는 정면에서 적과 대치하면서 주변 곳곳에 병력을 매복시켜 포위 공격하는 `자루전술(口袋戰術)을 구사하기로 했다.(주석 135)

134)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 中央文獻出版社(2009.10신판)
135)西北戰場上的 生死較量;胡宗南至死不知爲何敗給彭德懷 中國共産黨 新聞網
毛澤東贈詩彭德懷, 稱其爲;;唯我彭大將軍 中國共産黨 新聞網

----------------------------------------------------------------------------------------------------------------------------------

 

58. 장정 최후의 전투 대승으로 이끈 펑더화이

 

허롄완(何連灣)에 집결한 국민당 군은 10월 18일 새벽 기병을 앞세우고 보병이 뒤따르는 진(陣)을 세워 일제히 홍군 공격에 나섰다. 사단장 바이펑샹(白鳳翔)이 6사단의 3개 기병연대를, 부사단장 장청더(張誠德)가 3사단의 2개 기병연대를 각각 지휘했다. 선봉엔 지형지물에 익숙한 35사단 마페이칭(馬培淸) 기병여단을 배치했다. 이들은 홍군의 후미부대인 '꼬리'를 자르기 위해 죽더라도 홍군을 물고 늘어져 놓아주지 않는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10월 19일 밤, 국민당 군 선봉인 마페이칭 기병여단이 홍군과 불과 10여 리 떨어진 티예볜(鐵邊)성 부근에 진격해 숙영했다. 다음날인 20일, 25사단 기병여단이 중로(中路)로 길을 열고 측면 협공태세에 들어갔다. 사단장 바이펑샹은 2개 기병 사단을 정면에 배치하고 진군했다. 바이펑샹의 부대는 병력이 많고 장비도 최신식이어서 흉맹한 기세로 밀고 들어갔다.

황혼 무렵 국민당 군 3사단 2개 기병여단이 홍군이 펼쳐놓은 포위망으로 진입했다. 양청즈(楊城子) 산비탈에 매복한 홍군 1종대 4대대의 600여 명은 국민당 군이 부대를 정돈하기 전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두 시간여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홍군은 서전에서 국민당 군 400여 명을 사상시키고 100여 필의 전마(戰馬)를 노획하는 승전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뤄허(洛河) 서쪽의 핑타이산(平臺山/지금의 勝利山) 팥배나무 아래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전투를 독려했다.

 

다음날 오전 7시께 얼타오촨타얼완(二道川塔兒灣)에 매복했던 홍군 1종대 2대대가 국민당 군 35사단 기병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습당한 국민당 군은 혼란에 빠졌다. 혼비백산한 여단장 마페이칭은 10여 리쯤 달아나다 매복한 홍군 주력의 협공을 받아 호위중대가 궤멸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홍군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펑더화이


매복했던 홍군 좌우 양 날개의 협격(夾擊)으로 바이펑샹의 6사단 1개 기병여단이 퇴로가 막혀 전멸하다시피 했다. 바이펑샹은 줄행랑을 놨다. 홍군은 50여 리를 추격했다. 바이펑샹은 도주하다 또다시 매복한 홍군에 공격당해 많은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두 시간에 걸친 전투로 국민당 군 3사단 2개 기병연대와 6사단 1개 기병연대가 전멸했다.

또 6사단 2개 기병여단과 35사단 마페이칭 기병단은 궤멸했다. 홍군은 1000여 명의 포로와 전마 1600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또 박겨포 수 문과 중기관총 수십 정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중앙홍군이 장정 이래 끈질기게 추격하던 '꼬리'를 절단하고 장정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며 1년여의 기나긴 홍군의 전략적 대이동을 마무리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걸출한 군사지휘 재능을 찬양하고 영용무쌍한 작전을 표창했다. 마오는 즉석에서 펑더화이의 용맹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산 높고 길은 멀어 구덩이 깊은데, 대군이 산지사방에서 몰려온다. 누가 감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나의 펑 대장군 뿐이네! (山高路遠坑深 大軍縱橫馳奔 誰敢橫刀立馬? 唯我彭大將軍!)

 

펑더화이는 이 시를 받은 뒤 마지막 구절에 자신을 지칭하는 '유아팽대장군(唯我彭大將軍)'을 '유아공농홍군(唯我工農紅軍)'으로 바꿔 마오쩌둥에게 돌려보냈다. 승첩의 공로는 자신이 아니라 '노농홍군'이란 뜻으로 한껏 자신을 낮췄다.

그 뒤 1947년 8월 중순, 펑더화이는 중공중앙이 있는 싼베이를 초토화시키려는 후종난(胡宗南) 군의 3대 주력군 중의 하나 인 36사단 본부, 2개 여단과 사자디옌(沙家店)에서 전투를 벌여 6000여 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마오는 이 승전보를 듣고 펑더화이에게 다시 이 시를 써 보냈다.

----------------------------------------------------------------------------------------------------------------------------------

 

59. 2만리 길 제 2 장정… 허룽 "적의 후방을 노려라"

 

1935년 9월 12일, 중공중앙 정치국이 어졔(俄界)회의에서 장궈타오의 북상 반대를 비판하는 ‘장궈타오 동지의 잘못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당중앙은 일단 이런 내용을 전당(全黨)에 통보하지 않고 보류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홍2, 홍6군단을 이끌고 있는 허룽(賀龍), 런비스(任弼時)는 장궈타오의 당중앙에 대한 도전과 해당(害黨) 행위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앞서 6월에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이 합류했을 때 장궈타오가 홍군의 무선암호 책을 홍군 총사령부로 모두 회수해 어떤 부대도 당중앙과 직접 무선 교신을 할 수 없었다. 허룽과 런비스도 이때 중앙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어져 당중앙의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었다.   

 

1935년 9월 장제스는 140여 개 여단병력을 동원해 창장(長江) 유역 유일의 주력 홍군 근거지인 ‘샹-어-촨-치옌(湘鄂川黔/후난, 후베이, 쓰촨, 구이저우성) 지역에 대한 새로운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에 나섰다. 중앙홍군의 장정을 엄호하며 샹장(湘江)전투에서 맹위를 떨쳤던 허룽(賀龍)과 런비스 등 홍2, 6군 지휘자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제스 군의 매서운 공격에 주춤했다.

 

◀ 허룽


이들을 불리한 전황을 타파하기 위해 유리한 시기를 잡아 원래의 소비에트 지구와 동부 유격지구를 근거지로 해 빠르게 진격해 오는 동쪽의 장제스 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허룽과 런비스는 또 서쪽인 룽산(龍山), 상즈(桑植), 융쉰(永順) 등 협소한 지구에서 포위망을 죄며 밀고 들어오는 장제스 군을 무찌른 뒤 기동성을 확보해 운동전으로 다른 방향의 포위군들을 격퇴하기로 전략을 짰다. 이런 전투계획에 따라 홍2, 홍6군단은 9월 상순 진스(津市), 펑저우(灃州)에서 철수해 스먼(石門) 서북쪽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제스 군은 병력을 집중 배치해 차근차근 진격하면서 토치카를 조밀하게 세워 포위망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홍2, 6군단은 장제스 군을 공격할 유리한 시기를 포착하지 못했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근거지가 날로 협소해 지고 있었다. 허룽과 런비스는 형세가 점점 불리해져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던 중 9월 29일, 허룽과 런비스는 돌연 저우언라이가 공개 전신부호로 보낸 홍2, 6군단의 상황을 묻는 전보를 받았다.

허룽과 런비스는 비밀 암호로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랜 동안 연락이 끊겼다. 전보에 설명한 그간의 성위원회 위원 명단이 우리들의 관계를 증명할 것이다” 등의 내용을 담은 전문을 보냈다. 허룽과 런비스는 다음날 중국혁명 군사위원회 주석,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와 총정치위원 장궈타오(張國燾)가 공동 서명한 회신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29일 전보를 받았다. 당신들 성위(省委) 비스(弼時)동지 서기, 허룽, 샤시(夏曦), 관샹잉(關向應), 샤오커(肖克), 왕전(王震) 등 위원. 1, 4 양 방면군은 6월에 마오공에서 부대 합류를 했다. 중앙은 궈타오(國燾)를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우리들 이후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자.”

 

홍2, 6군단 영도자들은 당중앙이 이미 홍1, 3군단을 이끌고 북상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당중앙과의 전신 연락이 회복된 줄로만 알았다. 때문에 나중에 오랜 동안 부대 행동의 지시보고 등을 포함해 당중앙으로 보냈다고 생각한 전보가 모두 주더와 장궈타오에게 전송된 것이었다. 상황이 점점 홍2, 6군단에 불리해지자 ‘후난-후베이-쓰촨-구이저우’변계 성위원회와 군사위원회 분회는 거푸 토론을 벌여 근거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전보를 통해 주더와 장궈타오의 승인을 얻어 구이저우성 동쪽의 스치옌(石阡), 전위안(鎭運), 황핑(黃平)일대로 부대를 이동해 장제스 군의 진지가 없는 광대한 지역에서 운동전을 벌여 그 일대를 점령해 근거지를 만들기로 했다.  11월 상순, 홍2, 6군단은 상즈 지구에 병력을 집중 배치한 뒤 전략적 부대이동 준비에 들어갔다. 홍군은 행장을 가볍게 꾸리고 한 사람 당 양식은 3일분에 짚신 2~3켤레씩을 준비해 행군하기로 했다. 루이진(瑞金)에서 출발한 홍1방면군의 가장 먼 2만5천리 장정에 이어 두 번째로 긴 2만리 장정의 시작이었다. (주석 136)

 

허룽은 출발 하루 전 상즈현 류자핑(柳子坪)에서 2군단 전체대회를 열어 이렇게 연설했다.

 

“현재 우리 2군단은 이미 3개 사단 8개 연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6군단도 홍16사단을 만들었다. 우리 2개 군단은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부대를 합류했을 때 보다 1배 이상 늘어났다. 장제스는 140여  연대병력으로 우리를 포위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근거지에서 1년여 동안 투쟁을 벌였다. 인민들은 최선을 다해 홍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곳은 산이 많고 밭이 적은데다 적들이 방화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어 2만여 명의 홍군을 양병하는 데는 부족하다. 우리는 안에서 바깥쪽으로 이동해 적의 후방을 공격해야 한다.”

 

장제스 군 140여 개 여단이 가까이 포위 진격하고 있어 부대를 구이저우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룽은 부대가 곧바로 구이저우로 급히 이동할 경우 후미 부대가 바짝 추격하고 있는 10만여 명의 장제스 군에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허룽은 홍군이 먼저 샹중(湘中)으로 나아가 창사(長沙)를 위협해 적들이 샹중에 대병력을 투입하도록 유인하면서 포위공격 소탕전을 교란시킨 뒤 구이저우로 들어가 주도권을 잡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좋다고 군사위원회에 제의했다.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받은 허룽은 포위돌파 개시 이틀 뒤 펑수이(灃水 ) 봉쇄선을 뚫었었다. 허룽은 나흘째 되는 날 위안수이(沅水)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많은 국민당 군을 섬멸했다.

허룽은 11월 23일부터 28일까지 천시(辰溪), 푸스(浦市), 쉬푸(漵浦), 신화(新化), 란티옌(蘭田 /오늘날 漣源), 시쾅(錫礦) 등을 잇따라 점령해 후난 중서부의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허룽은 신속하게 군중을 동원해 항일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토호, 악질지주를 타격해 빼앗은 토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전투 물자와 경비를 조달했다. 전사 3천여 명을 이들 지역에서 새롭게 보충했다.

136)紅軍長征到底走了有多遠 ? 北京晩報  長征 ;黨史人物紀念館 中國共産黨新聞 人民網

----------------------------------------------------------------------------------------------------------------------------------

 

60. 지역 민주인사 포섭으로 홍군 기반 다진 허룽

 

홍군이 샹중(湘中)에서 승전(勝戰) 소식이 전해 질 때 허룽의 딸이 태어났다. 홍6군단 정치위원 왕전(王震)은 허룽에게 “홍군이 승리했다. 딸아이의 이름을 이겼다는 뜻으로 ‘지예성(捷勝)’으로 지으라”고 했다. 전투 중에 태어난 허룽의 딸, 지예성은 이후 강보에 싸인 채 2만리에 이르는 험난한 장정을 함께 했다.

홍군이 돌연 샹중으로 진격해 오자 놀란 국민당 군은 급히 7개 사단을 동원해 홍군을 추격하도록 하는 한편, 몇 개 사단을 차출해 그 뒤를 쫒도록 했다. 국민당 군은 후난 중서부 지역인 이곳에서 홍군을 섬멸할 작정이었다. 허룽은 부대를 둘로 나눠 동쪽을 향해 큰 원(圓)을 그리며 부대를 이동해 추격군을 끌어들여 빙빙 돌린 뒤 인마(人馬)가 피곤한 틈을 노려 반대 방향인 구이저우로 진격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1935년 12월 11일 작전개시에 나선 홍2, 6군단은 계속 9일 동안 동남쪽으로 급히 달아났다. 추격군들은 후난성 동남쪽 방향 한 곳으로 홍군의 꼬리를 쫒아 추격했다. 후난성 동남쪽으로 달아나던 홍군은 갑자기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엄동설한의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 겨울이었다. 홍군은 기아와 추위와 싸우며 고산준령을 넘어 질풍처럼 내달았다. 1936년 1월 1일, 즈장(芷江) 렁수이푸(冷水鋪) 일대로 들어 선 홍군은 국민당 군 각로(各路)의 추격군을 멀리 따돌렸다.

홍2, 6군은 이곳에서 새해를 보내고 1월 9일 스치옌(石阡) 지구에 도착했다. 전사가들은 이때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허허실실(虛虛實實)’을 한껏 발휘한 허룽의 작전지휘를 신출귀몰한 전략이라고 극찬했다.

 

스치옌 지구는 땅이 척박하고 주민들이 가난해 양식조달이 힘들어 장기간 두 군단의 급양과 보급물자를 댈 수 없는데다 지형조건도 운동전으로 싸우는 데 불리했다. 홍2, 6군단은 국민당 군 15개 사단이 계속 추격해 오고 있어 구이저우(貴州)의 서부 치옌시(黔西), 다딩(大定), 비지예(畢節) 지구에 근거지를 만들기로 했다.

허룽은 이곳으로 행군하는 동안 남쪽과 북쪽을 무시로 공격하면서 구이저우성과 구이양(貴陽)을 기습했다. 때론 우장(烏江) 도강을 강행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장제스는 허룽이 종전 중앙홍군의 1방면군이 지나간 길을 따라 북상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우장 주변에 병력을 대거 배치해 막도록 하는 한편, 준이(遵義)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증원했다.

 

그러나 2월 2일 허룽은 서쪽으로 부대를 이동해 교묘하게 야츠허(鴨池河)를 건너 구이저우 치옌시(黔西)현에 도착해 추격군들을 또 따돌렸다. 홍군은 치옌시, 다딩, 비지예 3개 현성과 주변 지구를 점령했다. 허룽을 주석으로 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쓰촨-윈난-구이저우(川滇黔)’성 혁명위원회, 각 현 소비에트와 95개 향(鄕), 진(鎭), 촌(村)의 홍색정권을 세웠다.

또 ‘구이저우 항일구국군’을 창설해 10여 명에서 수백여 명에 이르는 90여 개의 유격대와 1개 묘족(苗族)독립단을 만들었다. 홍군은 토호와 악질지주를 타격해 채무계약서를 불태우고 양식과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일대의 가난한 주민들은 처음으로 음식다운 식사를 했고 새 옷을 입었다. 홍군은 휴식을 취하면서 부대를 정비하고 훈련을 강화했다. 홍군은 이 일대에서  새로운 전사 5천여 명을 충원했다. 홍2, 6군은 1935년 11월 장정에 나서  1936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행군하면서 공방전을 벌여 장병들이 극도로 지쳐있었다. 허룽은 이 일대로 부대를 이동해 비교적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허룽은 혁명정권의 많은 일처리에 대단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영향력있는 민주인사들을 홍군의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여 군중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지예 성(城)에 57살의 저명한 애국민주인사인 저우수위안(周素園)이 살고 있었다. 저우수위안은 신해혁명 당시 구이저우에서 반청(反淸) 의거를 일으킨 지도자로 구이저우 군 정부 행정총리와 '윈난-쓰촨-구이저우' 총사령부 비서장을 지냈다.

때문에 그는 서남군 정계에서 상당한 위망(威望)을 얻고 있었다. 홍군이 비지예 성을 쳐들어오고 있을 때 국민당 고위 관계자들은 그에게 함께 피난할 것을 권유했다. 저우수위안은 그대로 남기로 했다. 홍군이 저우수위안의 집을 살펴본 바 고관을 지냈으면서도 이렇다 할 재물이 없고 서적만 가득했다.

그중에는 장제스 정부가 금서(禁書)로 엄격 통제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도 있었다. 책 속의 글 여기저기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주석을 빽빽이 달아 놓았다. 이런 보고를 받은 6군단 정치위원 왕전이 저우수위안을 찾아가 "저우 선생, 고관을 지내셨는데 왜 달아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우수위안은 "내가 큰 벼슬을 했지만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하지 않았고 불의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는데 왜 도망가야 하는가"라고 했다. 왕전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쑨중산(孫文)의 혁명이 실패해 중국이 이처럼 혼란에 빠져있다. 중국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 어디 있는가 찾아보다가 마르크스, 레닌 학설을 10년 동안 연구해 봤다. 마르크스가 한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늙었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다"고 탄식했다.

 

왕전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허룽은 주석 명의로 저우수위안을 ‘구이저우 항일구국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저우수위안은 일을 잘 처리해 비교적 순조롭게 이 지역 상부층 개명인사들과 단합을 이룰 수 있었다.

홍군이 비지예를 떠날 준비를 할 때 허룽은 “저우수위안이 나이가 많고 몸이 좋지 않아 우리와 함께 장정을 할 수 없다. 저우 선생은 강직하고 올곧고 영향력도 적지 않다. 홍콩으로 모셔 당을 위해 통일전선의 일에 그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당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이런 사실을 안 저우수위안은 격한 어조로 “나는 암흑세계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중국을 위해 무언가 기여를 해보려 했으나 벽에 부딪쳤다. 지금 홍군에 참가해 광명을 찾았다. 감히 허룽 동지와 여러 영도자들께 말한다. 나, 저우수위안은 죽더라도 홍군에서 죽겠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허룽은 대단히 감동해 “좋습니다. 기개가 있으십니다. 탄복합니다. 저는 선생님 같은 분을 좋아합니다. 나도 선생을 모시고 장정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함께 나누고 생사도 함께 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허룽은 전사 18명이 전투대신 저우수위안을 보살피도록 배려했다. 저우수위안은 장정 귀착지인 싼베이에 도착해 마오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마오는 그를 존경하는 친구이자 동지로 사귀었다.

 

허룽과 홍군이 구이저우 다딩, 비지예 지구에서 번성하자 당황한 장제스는 급히 비행기로 난징(南京)에서 구이양(貴陽)으로 날아와 홍2, 6군을 포위공격 소탕하기 위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장제스는 구이양 임시병영 주임 구주통(顧祝同)에게 5개 군단 병력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2개 군단은 동, 서 양쪽에서 방어하도록 했다. 쓰촨 군 양선(楊森), 리자위(李家鈺) 부대는 창장(長江)을 봉쇄하도록 했다.

장제스는 1백20개 여단으로 홍2, 6군단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장제스가 직접 독전해 각로 군은 태만할 수 없어 비록 수개월 동안 홍군의 유인작전으로 지쳐 전투력은 떨어졌지만 맹렬하게  홍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홍군은 진사장(金沙江), 싼중옌(三重堰) 이북 지구에서 두 차례 국민당 군을 기습 공격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민당 군은 점점 홍군을 에워싸며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허룽과 다른 영도자들은  포위공격을 벗어나기 위해 홍군이 구이저우 서남쪽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했다.(주석 137)

137)紅軍長征到底走了有多遠 北京晩報

----------------------------------------------------------------------------------------------------------------------------------

 

61. 말발굽 천으로 감싸고 적진 중앙 뚫은 탈출

 

2월 27일, 허룽은 홍2, 6군단을 이끌고 비지예를 떠나 우멍(烏蒙) 산간지역으로 들어갔다. 구이저우 산간지역의 2월은 하늘과 땅이 얼어붙고 칼바람이 부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대처에서 아득히 먼 궁벽진 산골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어 거의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1만여 명의 홍군들은 큰 산에 숨어들어 왔다갔다 할 수 밖에 없어 간난신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민당 군이 구이저우 서남쪽의 도로를 차단해 홍2, 6군단은 적의 반복적인 합동 포위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멍 산간지구 깊은 곳에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홍군은 거의 1개월 동안이나 산중에서 헤맸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면서 홍군의 선회지역도 자꾸 줄어들었다. 홍2, 6군단은 ‘후난-후베이-쓰촨-구이저우’ 변계 근거지를 떠나 장정에 나선 이후 가장 급박한 상황에 빠졌다.

허룽은 발바닥에 큰 상처를 입어 피가 줄줄 흐르고 통증이 심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험산준령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허룽은 자신의 말에는 부상병을 태우고 자신을 실을 들것은 다른 사람이 함께 이용하도록 했다. 허룽은 행군하다 산등성이에서 쉴 때 피가 흐르는 갈라진 발바닥 상처부위에 기름을 바른 뒤 불을 질러 태우는 쇼크요법을 썼다. 발바닥에 불이 붙는 순간 허룽은 통증을 입술을 깨물고 버티느라 얼굴은 새하얗게 변하고 머리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때 런비스(任弼時)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허룽은 마음이 조급해져 군의관과 간호사들에게 “너희들은 런 정치위원을 잘 보살펴야 한다. 그가 6군단에 없으면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기러기 신세다. 모두가 각별히 신경 써서 런 정치위원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런비스는 몸이 허약해 말을 탈 수 없어 허룽은 들것을 강권했으나 런비스는 전사들의 체력을 소모시킨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허룽이 샤오커(肖克), 관샹잉(關鄕應), 왕전(王震) 등 2군단 영도들을 동원해 설득을 하고 나서야 런비스가 들것에 올랐다. 허룽은 앞으로의 군사행동에 관한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군사위원회 분회를 소집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 하지만 적들의 1백여 여단은 더 좋지 않다. 그들은 후난, 후베이, 쓰촨에서부터 우리들에게 끌려다녀 더 힘들어 한다. 적들의 각개 군단이 구주통(顧祝同)의 지휘를 받고 있어 행동통일이 잘 되지 않는다. 포위망이 비록 좁혀지고 있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여전히 있다. 다시 한 번 적들이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 이 1개월 동안 우리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적들은 우리가 거의 무너질 것으로 보고 있어 더욱 교만해지고 있다. 지금, 때가 왔다. 우리는 갑작스런 번개소리에 귀 막을 사이가 없는 것처럼 적들이 미처 손 쓸 사이 없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적들이 접합하고 있는 부대와 부대 사이를 뚫고 윈난으로 진격해 룽윈(龍雲), 이 자의 벌집을 쑤셔 놓자.”

 

모두들 허룽의 제안에 찬성했다. 허룽은 두 개 군단 각 사단과 부분 연대 간부회의를 소집해 비밀리에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허룽은 부대 행동시 '반드시 은폐하고 불을 밝히거나 떠들어서는 안 된다. 또 말발굽을 헝겊으로 싸 소리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룽은 새벽에 적  부대와 부대의 틈새를 통과하는 만큼 소수의 적이 우리를 발견하더라도 총을 쏴서는 안 되며 아주 신속하게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홍2, 6군단은 허룽의 명령에 따라 밀집한 적들의 중간 사이를 뚫고 자오통(昭通)과 웨이닝(威寧) 사이를 넘어갔다. 이어 윈난 군 쑨두(孫渡) 군단의 방어선을 헤집어 놓고 윈난 동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홍2, 6군단의 이번 탈출은 1개월의 선회작전이 걸렸다. 윈난과 구이저우의 고원(高原)인 우멍산중에서 펼쳐졌다. 이 지구는 인적이 드물고 기후변화가 심했다. 산 높고 골 깊은 산중이어서 양식과 식수공급이 힘들었다.

 

게다가 장독이 성행했다. 여기에 각로의 국민당 군이 끈질기게 포위, 추격하고 차단하는 극히 험난한 시련 속에서 이뤄졌다. 군 지휘관들은 “허룽이 장정과정에서 펼친 ‘지휘예술’의 또 한 차례 신출귀몰한 작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3개 방면군의 부대합류 후 마오쩌둥은 바오안(保安)에서 홍2, 4방면군 영도들과 만났을 때 매우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 6군단이 우멍산(烏蒙山)에 들어가 싸우며 전전할 때 아슬아슬해 우리들은 혼이 나갔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정말로 돌아 나왔다! 구이저우에서 나와 우장(烏江)을 건넜다. 우리 1방면군은 장정 때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2, 6군단은 힘 안들이고 큰 피해 없이 도강했다. 당신들 1만여 명은 원래의 1만여 명 그대로다. 본전을 축내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이런 큰 경험을 총결해 모두 배워야 한다.”

 

1936년 3월 22일, 홍2, 6군단은 쉬옌웨이(宣威) 부근에 도착했다. 허룽은 현재의 형세에 비춰볼 때 ‘윈난-구이저우’ 변계의 남북 판장(盤江)지구에 근거지를 건립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허룽은 윈난 군 일부를 격퇴하고 28일 판(盤)현, 쯔콩(資孔)지구에 도착했다. 국민당 군 4개 군단이 북쪽 판장 왼쪽 강가를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윈난 군 1개 군단이 윈난 변경을 지키면서 홍6군단과 대치했다.

이때 홍2, 6군단은 국민당 군 5개 군단 50여 개 여단과 직접 맞닥뜨리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 그동안 홍군에 끌려 다녀 지친데다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비교적 행동이 적극적인 부대는 윈난 군 1개 군단이었지만 이들도 홍군이 윈난에 진격하는 것을 막는 것일 뿐 단독 공격은 꺼리고 있었다. 홍2, 6군단은 후난 상즈(桑植)에서 출발할 당시의 병력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었고, 윈난-구이저우 변계에 온 뒤 생활이 개선되고 장병들의 체력이 회복돼 사기가 왕성했다. 근거지의 정치, 경제, 자연조건도 홍군들이 활동하는데 유리했다. 허룽과 런비스는 판현 일대에 근거지 건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설령 근거지를 세울 수 없을 지라도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항일 분위기, 장제스와 광둥, 광시군벌과의 알력 등을 이용해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면 홍군의 역량을 확대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럴 경우 전략적으로 볼 때 창장(長江) 이남의 하나의 홍군 주력 부대와 창장 이북의 홍1, 4방면군이 서로 호응하면 전국적으로 혁명형세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허룽 등이 이런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주더, 장궈타오로부터 전보가 날아왔다. 내용은 홍2, 6군단이 3월에 북쪽에서 진사장(金沙江)을 도강해 홍군 총사령부와 합류하여 윈난-구이저우 변계에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보는 홍2, 6군단의 행동이나 지시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진사장을 어떻게 도강하느냐 하는 문제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2, 6군단의 이후 전략적 행동과 토지혁명 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허룽과 런비스, 관샹잉 등은 주더와 장궈타오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 3월 29일 홍군 총사령부에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주석 138)

 

1. 우리 군은 비지예를 떠난 후 니량(彝良), 전슝(鎭雄) 지구에서 곧바로 윈난 변경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양식곤란을 겪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운데다 인가가 드물어 급히 행군하면서 야영하느라 장병들이 상당히 지쳐있다. 병력 손실이 크다(저허(칙河), 저장바(clr章壩) 및 쉬옌웨이(宣威)성 북쪽 전투에서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낙오병까지 합치면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음). 요즘 들어 회복중이다.

2. 현재 적과 우리의 역량에 비춰볼 때 ‘윈난-구이저우-쓰촨’의 광대한 지구에서 우리가 운동전을 펼치면 적을 이길 수 있어 근거지 건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3. 우리들은 도하기술이 매우 유치한 편이다. 단, 제 3도하 지점(즈위안<指元> 모 지구) 또는 최후 노선을 봄물이 불어나기 전에 도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4. 최근 국내외의 새로운 상황발전을 잘 모른다. 총체적 전략상 우리 군의 북상 및 1, 4방면군이 앞으로 대거 북상한 후 우리 군의 창장 남안(南岸) 활동의 고립과 곤란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는 것이 두루 어렵다. 우리 군이 북상하여 합류하는 문제, 혹은 ‘윈난-구이저우-쓰촨’ 변계에서 활동하는 문제 등을 군사위원회에서 결정해 주기 바란다. 하루 이틀 안에 전보로 통보해 주기 바란다.”

138)紅軍長征到底走了有多遠? 北京晩報 長征 ;黨史紀念館 中國共産黨 新聞 人民網 

----------------------------------------------------------------------------------------------------------------------------------

 

62. 쿤밍성 가짜 공격에 장제스군 혼비백산…'신출귀몰' 극찬

 

월 30일, 주더와 장궈타오는 홍2, 6군단이 북쪽에서 진사장을 도강해 홍4방면군과 합류하라는 회신을 보냈다. 북상방침이 결정되자 허룽은 홍2, 6군단을 통솔해 31일 서쪽으로 행군하면서 윈난 방어선을 돌파해 푸두허(普渡河)로 급행군 하였다.

이때 장제스는 ‘윈난-구이저우 비적소탕(剿匪) 사령부’를 만들어 윈난성 주석 룽윈(龍雲)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윈난 군과 국민당 직계 4개 군단이 신속하게 홍군을 추격해 차단하도록 하는 한편 구주통을 자신을 대신해 독전(督戰)하도록 파견했다. 4월 6일, 홍군은 쉰디옌(尋甸)을 공격해 점령했다.

룽윈은 홍2, 6군단이 홍1방면군이 지나갔던 노선을 따라 위안모우(元謀)에서 도강할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근위대인 제1, 제2 여단과 공병대대, 경호 대대에 급히 명령을 내려 쿤밍(昆明)에서 푸두허 현수교로 서둘러 행군해 다리 양쪽에서 홍군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룽윈은 또 윈난 군 쑨두(孫渡) 군단에 명령해 푸두허 동안(東岸)에서 홍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중국 장가계 천자산 자연보호구역 내에 있는 허룽공원 내에 세워진 허룽의 동상.(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포스트리스트')

 

룽윈은 공격보다 전력을 기울여 허룽군이 자신이 관할하는 윈난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룽윈은 장제스를 엄청나게 경계했다. 룽윈은 지난해 홍1방면군이 구이저우에 진입하자 장제스가 대규모 직계 부대를 파견해 홍군 후미를 추격하면서 구이저우에 들어와 홍군과는 전투다운 전투도 벌이지 않고 구이저우 군벌인 성 주석 왕자리예(王家烈)를 내쫒고 그의 근거지를 빼앗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었다.

 

룽윈은 허룽 군이 윈난에 들어오면 장제스는 왕자리예에게 한 것처럼 직계 부대를 보내 자기를 내쫒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룽윈은 홍군을 방어하면서 장제스의 중앙군을 경계하였다. 이처럼 윈난 군이 죽기 살기로 병력을 총동원한데다 장제스의 직계 4개 군단이 가세하자 홍군은 푸두허에서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4월 9일, 허룽은 다른 지휘관들과 이후 작전에 대해 논의하면서 장제스의 4개 군단이 추격해 도착하기 전에 쿤밍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윈난 군의 주력을 따돌리자고 제의했다. 허룽의 작전계획은 이러했다.

 

“룽윈은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푸두허에 명운을 걸고 있다. 룽윈은 윈난성을 빈성(空城)으로 만들었다. 그는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를 쓰고 있다. 우리는 사마의(司馬懿)가 아니다. 그렇게 소심하지 않다. 우리가 쿤밍을 공격하면 룽윈은 놀래서 구주통에게 승인을 받아 병력을 이동하여 쿤밍을 방어하려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방향을 돌려 적을 따돌리고 쓰구(石鼓)로 가 리장(麗江)에서 진사장을 건넌다. 어찌 꼭 푸두허를 지나 위안모우에서 강을 건너야만 하는가?”

 

허룽의 이런 대담하고 교묘한 전략에 대해 지휘관들은 모두 찬성했다. 4월 10일 새벽, 홍군은 방향을 바꿔 남하해 쿤밍으로 돌진했다. 그날 홍군의 선두부대가 쿤밍의 북쪽 지역에 진군했다. 홍군의 선두부대는 소규모 부대를 쿤밍성 15리까지 진입시켰다. 다음날 홍2, 6군단은 쿤밍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푸민(富民)성에 진격해 쿤밍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쿤밍을 지키고 있던 소수병력은 놀라서 허둥거렸다. 구주통은 잇따라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룽윈은 군관학교 생도들을 모두 끌고 나와 수성전(守城戰)에 돌입하면서 푸두허를 방어하고 있는 윈난 군에게 당장 부대를 철수해 쿤밍을 구하도록 전통 명령을 내렸다. 윈난 군들은 분초를 다투며 쿤밍으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때 허룽은 홍군을 통솔해 윈난 군을 따돌리고 돌연 윈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진군했다. 홍군은 이로부터 좀 더 많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군 관계자들은 허룽이 쿤밍을 공격하는 척하며 장제스 군을 끌어들인 뒤 윈난 서쪽으로 진출해 활로를 찾은 것을 장정 중 세 번째 신출귀몰한 작전이었다고 극찬했다.

 

허룽은 홍2, 6군단을 두 갈래로 나눠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거의 하루에 1개  현청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윈난 서부지역으로 진격했다. 추슝(楚雄), 전난(鎭南), 샹윈(祥雲), 빈촨(賓川), 옌싱(鹽興), 모우딩(牟定), 야오안(姚安), 옌펑(鹽豊), 허칭(鶴慶) 등 현청은 모두 민단(民團)에서 방어하고 있었는데 홍군은 최소한의 병력손실로 이들 현청을 휩쓸었다.

홍군은 많은 노획물을 거둬 급양, 물자 보급 뿐 아니라 병력을 보충하는 등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월 17일, 허룽과 런비스, 관샹잉은 주더와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우리는 허칭을 취해 리장(麗江) 중간노선을 통해 전진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윈난 남쪽, 야오안 일대에 도착했다. 예측컨대 이르면 10일, 늦어도 2주면 진사장(金沙江) 강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창장(長江)상류에서 흐르는 강물이 쓰구(石鼓)에서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흐르는 이 일대 강을 진사장이라고 부른다.

진사장은 하바(哈巴) 설산과 위룽설산 사이에서 급류로 변해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 중의 하나인 후탸오샤(虎跳峽)를 통과한다. 티베트로 넘어가는 차마고도의 옛길이다. 4월 25일 밤, 허룽은 홍군을 이끌고 쓰구 등지에서 진사장을 도강하기 시작했다. 28일 황혼 무렵 전군 1만 7천여 명이 순조롭게 강을 건너 홍4방면군과 합류하는 길을 열었다. 가장 빠르게 홍군을 추격한 윈난 군 1개 연대가 진사장 강변에 도착했을 때 홍군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국민당 군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

 

63. 간쯔에서 합류한 2·4·6 홍군 "단결이 첫째다"

 

홍2, 6군단은 해발 5300 미터가 넘는 하바(哈巴) 설산을 넘어 5월 1일부터 3일 사이에 중디옌(中甸)성과 그 근교에 집결했다. 중디옌은 윈난 서북쪽의 캉장(康藏)고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고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주로 티베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라마교를 믿고 정교합일(政敎合一)의 농노제(農奴制) 사회에 살고 있다.

홍2, 6군단은 티베트인들이 사는 지역의 지리환경, 사회제도, 종교와 신앙, 말과 글, 생활습관, 풍속 등이 모두 낯설었다. 장제스와 지방 군벌들은 이 지역 귀족들과 결탁해 무장통치를 하고 있어 이들은 홍군에 저항하였다. 이 때문에 홍2, 6군단은 종래에 겪어 보지 못한 소수민족과의 전투를 하게 돼 허룽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디옌 성은 수백 호 정도의 티베트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홍군이  마을에 진입하자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산속으로 도망갔다. 성 밖에 구이화사(歸化寺)라는 라마교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이 지역의 통치중심지였다. 사찰의 주지는 홍군을 보자 몹시 놀라고 불안해하면서 사찰의 문을 닫고 엄히 방비하도록 했다.

 장궈타오(왼쪽), 허룽

 

허룽과 런비스는 홍군이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허룽의 명의로 ‘중화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 후난-후베이-쓰촨-구이저우-티베트 분회 공고’를 반포했다. 공고문은 “홍군은 이민족을 돕고 이민족의 고통을 없애며 이민족을 흥하게 하고 장제스를 멸망시켜 이민족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  홍군의 성격과 기율, 정책 등도 설명했다. 이와 함께 공고문은 티베트인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고 티베트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적극적으로 지도층인사들의 찬성과 지지를 얻기 위한 깊이 있는 정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홍군 1만여 명이 수백 호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는 조그만 현청에 온 뒤 사람을 죽이거나 총을 쏘지 않았고 남녀를 잡아간 일이 없었다. 주민들은 홍군을 두려워하면서도 홍군들의 이런 행동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이화사의 송번(松本) 활불(活佛)과 8대 노승들이 허룽을 초대해 융숭하게 접대했다. 이들은 홍군을 지지하고 홍군을 돕기 위한 조처를 내렸다. 5월 3~4일 이틀간 구이화사는 상인과 부호들에게 명령을 내려 창고를 열어 홍군들에게 쌀보리 3만여 근을 팔도록 하였다. 홍군은 이틀간 10만 근의 양식을 조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군이 4방면군과 합류할 간쯔(甘孜)까지 가는데 필요한 식량으로는 부족해 홍군은 일찍 티베트 주민 지구를 떠나기로 했다.
 
5월 5일, 홍2, 6군단은 좌우 2개종대로 나눠 중디옌을 출발했다. 허룽과 런비스는 좌로 종대인 홍2군단을 통솔해 더룽(德榮), 바탕(巴塘), 바이위(白玉)를 거쳐 간쯔로 행군하면서 대설산을 넘는 등 1개월 동안 진군했다. 홍2군단은 열악한 자연환경 뿐 아니라 양식이 부족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깊은 영향을 받은 일부 무장 티베트인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들이 사살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1936년 7월 1일 홍2, 6군단과 홍4방면군이 마침내 간쯔에서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홍4방면군은 허룽과 런비스가 이끄는 홍2, 6군단을 열렬히 환영했다. 4방면군 총지휘 쉬샹쳰(徐向前)은 부대합류를 환영하는 동원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주석 141)

 

“홍군은 한 집안이다. 1방면군이 큰 형이라면, 4방면군은 둘째고 2, 6군단은 셋째로 형제관계다. 지난 번 우리와 큰 형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형제간에 싸우면 외부로부터 수모를 당한다. 단결을 해야 한다. 분가를 해서는 안 된다. 부대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다. 서로가 배워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을 보충해야 한다. 단결을 더욱 강화해 한 마음으로 적에 대항해야 한다.”

 

홍2, 6군단도 부대 합류와 함께 부대원들에게 우애와 단결을 고취시키고 단결을 해치는 언행을 극도로 자제할 것을 촉구하며 기율 준수 교육을 강화하였다. 두 주력 홍군의 합류 후 당중앙은 축하 전문을 보내 “우리는 당신들의 승리적인 부대합류를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용감한 진군을 환영한다. 북쪽인 싼시-간쑤성(陝甘)으로 진격해 1방면군과 합류해 중국의 서북부에 중국혁명의 대본영을 건립하자”고 밝혔다. 7월 2일 간쯔에서 열린 두 부대 합류를 경축하는 환영회에서 홍군 총사령관 주더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설산을 무사히 넘어 홍4방면군과 합류하게 된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이곳은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계속 북상해야 한다. 북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치단결해야 한다. 단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우리가 북상을 위해 전진하는 길은 황량하여 인적이 없는 초지를 지나야 한다.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곤란을 극복해야 한다. 중앙은 지난해 1방면군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초지를 지나 항일 최전선인 싼간지구에 도착했다. 현재 싼간 변계의 근거지는 공고하고 광대하다. 홍군도 강대해 졌다.”

부대합류 후 주더, 장궈타오, 천창하오, 류보청 등이 달려와 홍2, 6군단의 허룽, 런비스, 관샹잉, 샤오커, 왕전 등을 반갑게 만났다. 허룽은 난창기의(南昌起義)를 함께 일으켰던 노 전우인 주더, 류보청과 장궈타오를 만나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우려하게 만드는 일이 그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앞서 6월 23일 홍6군단이 간쯔 부근의 푸위롱(浦玉隆)에 도달했을 때 주더는 서둘러 그곳에 가 샤오커, 왕전 등을 회견한데 이어 7월 1일 홍2군단이 간쯔의 간하이쯔에 도착했을 때 허룽과 런비스, 관샹잉을 찾아가 만났다. 주더는 이들과 두 차례 만나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이 합류했을 때의 상황과 이견, 그리고 장궈타오가 ‘중앙’을 세워 당과 홍군을 분열시킨 행위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주더는 또 이들에게 중앙정치국 량허커우(兩河口)와 마오얼까이 회의의 문건과 중앙이 장궈타오에게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도록 엄명한 전보 등을 보여주었다. 주더는 아울러 이들에게 장궈타오의 과오로 홍4방면군이 남하한 이후 많은 좌절을 겪어 어쩔 수 없이 간쯔 일대로 후퇴해 머물게 된 사연 등을 설명했다.

주더는 당중앙이 다시 비판하고 코민테른의 주선과 함께 자신과 류보청 쉬샹쳰 및 홍4방면군의 많은 지휘관들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장궈타오가 자신이 만든 불법적인 ‘중앙’을 취소하고 북상하기로 동의했다는 일련의 과정을 얘기해 주었다.

주더는 그러나 장궈타오가 여전히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 등 중앙의 주요 영도자들을 부정하고 있어 중앙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주더는 우리들이 단결하도록 노력하면서 장궈타오와 중앙이 합류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보청도 허룽과 런비스에게 “장궈타오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 화를 내면 분열된다. 중앙은 앞에 있고 이곳이 아니다”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장궈타오도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장궈타오는 홍2, 6군단에 공작조를 파견해 중앙에 대한 불만을 선동하고 ‘마오,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의 도망주의 노선에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뿌렸다. 허룽과 런비스는 강력하게 막아냈다. 런비스는 홍2군단 정치부주임 간스치(甘泗淇)에게 편지를 보내 “홍4방면군 간부들이 강연할 때 단결을 강조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중앙,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강연은 허락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허룽은 장궈타오가 사람을 파견해 보낸 ‘간부필독’의 소책자를 본 뒤 “장궈타오가 중앙을 분열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책자를 보내지 말라”고 엄숙히 경고했다. 허룽은 즉각 홍2, 6군단에 전화를 걸어 각 부대가 이 책자를 모두 수거하도록 명령했다. 장궈타오는 홍2, 4방면군 연석회의를 소집해 다수로 소수인 홍2, 6군단을 압박하려 했다. 런비스는 “누가 보고하고, 다른 의견이 있을 경우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며 연석회의를 거부했다. 장궈타오는 홍2, 6군단의 4개 사단이상의 정치위원을 바꾸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61년, 허룽은 관련인사들과의 대화에서 장궈타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주라오종(朱老總/주더에 대한 경칭), 보청(류보청)이 우리들에게 장궈타오의 분열적 행위를 말해줬다. 우리들은 이전에는 몰랐다. 장궈타오, 이 자는 내가 좀 안다. 난창기의 이틀 전 이었다. 중앙 대표로 난창에 와서 기의를 막으려 했다. 나는 장궈타오에 크게 화를 냈다. 간쯔에 왔을 때 그는 병력이 많았고, 우리는 적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그를 경계했다. 부대 합류를 경축하는 자리였다. 장궈타오는 홍군 총정치위원이었기 때문에 강연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주석대에서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막 일어나 강연하려고 할 때였다. 나는 농담 겸 진담으로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궈타오야! 단결을 말해라. 그렇지 않고 분열을 말하면 노부가 너에게 총을 쏠지 모르니 조심해라!’. 장궈타오는 감히 분열을 말할 수 없었다. 기실, 내가 그때 그에게 총을 쏜다고 했으니 그가 마음속에 어찌 딴 뜻을 품을 수 있었겠는가!”

 

주더는 훗날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허룽이 장궈타오에 대해 잘 대응을 하고 있었다. 다투지를 않았다. 허룽은  그에게 사람이 있고, 총이 있고, 실탄이 있다. 비록 병력은 적으나 1개 군단은 대적할 수 있다. 장궈타오는 허룽과 런비스를 두려워했다. 함께 북상해 중앙과 합류하는데 허룽이 큰 역할을 하였다."

----------------------------------------------------------------------------------------------------------------------------------

 

64. 애마 잡아 식량으로 나눈 허룽 "혁명에 한 필의 말을 아까워하랴"

 

1936년 7월 5일 싼베이에 있는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인사명령이 하달됐다. 홍2군, 6군, 32군을 2방면군으로 꾸려 허룽을 총지휘 겸 2군단장으로, 런비스를 정치위원 겸 2군단 정치위원으로, 샤오커(肖克)를 부총지휘, 관샹잉을 부정치위원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또 천보쥔(陳伯鈞)을 6군단장에, 왕전을 정치원으로 임명하였다.

 

7월 2일부터 10일까지 홍4방면군은 3로 군으로 부대를 나눠 간쯔(甘孜) 등지에서 간쑤성(甘肅省) 남쪽(甘南/간난)을 향해 출발했다. 홍2방면군도 2로 군으로 병력을 분산해 간쯔에서 홍4방면군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간쯔에서 간난까지는 아주 머나 먼 길이었다. 길도 없고 인적도 없었다. 공기가 희박하고 기후가 변화무쌍한데다 수초지(水草地)가 펼쳐있었다. 일망무제인 초지에는 소택(沼澤)이 곳곳에 있어 한눈을 팔다 발이 늪에 빠지면 곧바로 머리까지 물에 잠겨 익사할 수밖에 없었다.

 

홍군은 행군을 하면서 양식을 보충할 수 없어 애초 한 사람당 매일 3량(兩)의 쌀보리를 배급받아 허기를 때웠다. 나중에는 이마저도 끊겼다. 홍군은 들나물(野菜), 풀뿌리를 채취해 식사대용으로 하거나 소나 양 껍질을 물에 불려 끓여 먹었다. 이 또한 떨어져 굶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탈진해 쓰러져 죽거나, 잠시 쉰다고 앉았다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거나, 황량한 들풀에 잠들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전사들이 속출했다. 초지의 날씨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진눈깨비가 내리는가 하면 계란만한 우박이 행군하는 전사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홍군 6개 사단에서 174명이 희생됐다. 양식이 끊겨 굶주린 장병들이 독이 든 들나물을 캐먹다 죽는 사태도 잇따랐다. 초지 대부분의 들나물과 산나물은 독성을 품고 있었다. 이런 나물을 먹을 경우 빠르게 전신에 독성이 번지며 부종을 일으켜 끝내는 목숨을 빼앗겼다. 

 

허룽은 나물의 독성을 감별하는 검사조직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독성을 감별하는 실험장비가 없어 검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내걸고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채취한 각종 나물들을 조심스럽게 시식한 다음 이상이 없을 경우 전부대원들에게 먹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부 검사원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굶주린 수많은 홍군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물고기였다. 초지에는 내천이 여기저기 산재해 물고기들이 지천으로 있었다. 전인미답의 지역이어서 물고기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손만 넣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전사들은 물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행군했다.

 

홍2, 4방면군이 아바(阿巴)에서 홍위안(紅原) 현에 진입해 바이허(白河)를 건너 르간차오(日干喬) 대소택(大沼澤)을 지나 바오줘(包座)를 향할 때였다. 르간차오 대소택은 12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가없는 늪지대다. 해발 3600미터에 자리 해 밤낮의 온도차이가 큰데다 기후변화가 예측불허로 바뀌는 악천후의 연속이었다. 당시 당중앙 총서기 장원톈 부인 류잉(劉英)은 7일 동안 르간차오 초지를 건넌 뒤 "죽음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엄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장궈타오의 홍4방면군은 애초 남하할 때 8만여 명의 병력이었으나 6월에 북상하면서 초지를 건넜을 때는 4만여 명으로 절반이 줄어드는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었다. 물론 국민당 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고원(高原)의 악천후와 굶주림으로 죽거나 늪지대에서의 익사 등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주석 140) 

 

홍군 3대 주력 부대인 홍1방면군과 홍2, 홍4방면군의 장정 중 이 일대 초지를 지나다 사망한 숫자는 정확한 통계가 없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難以計數)'고 되어 있다. 다만 현지 아바저우(阿巴州) 당사 연구실에 따르면 장정 중 전투와 관계없이 설산과 초지를 지나다 사망한 홍군이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1960년 르간차오 대소택을 홍군이 지나간 대평원이란 뜻의 '홍위안(紅原)'이라고 명명하고 이곳에 '홍군이 장정을 하며 지나 간 초원(紅軍長征走過草原)'이라는 글귀를 큰 돌에 새겨 홍군의 기상을 전하고 있다.

 

대소택을 지나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허룽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말을 사살해 굶주린 전사들이 나눠 먹도록 하였다. 허룽의 말 사랑은 홍군 중에서 유명했다. 허룽의 대추 빛깔의 말과 그는 오랜 동안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말은 허룽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고 많은 부상병을 실어 날러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도 하였다. 해서 허룽은 말을 죽이기로 작정 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여야 했다. 경호원들 또한 비통해 하며 울었다. 허룽은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말라. 나는 10살이 안 돼 말을 방목했다. 10살이 넘어 마방(馬幇)을 따라 다녔다. 사람들은 말을 가족으로 대했고, 말도 사람들을 그처럼 따랐다. 우리들은 말을 사랑한다. 말도 우리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들과 말 모두 혁명을 열렬히 사랑한다. 우리들은 항상 말한다. 혁명이 필요로 할 때 우리들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 우리들이 어찌 한필의 말을 아까워해야 하겠는가?”

 

홍2, 4방면군이 북상 중에 당중앙은 7월 27일 서북국(西北局)을 만들어 장궈타오를 서기, 런비스를 부서기, 주더, 허룽, 관샹잉, 쉬샹쳰, 천창하오 등을 위원으로 임명해 홍2, 4방면군과 서북지구의 당 업무를 통일적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8월 3일,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와 정치부는 서방야전군(홍1방면군)과 각 군단, 각 군 영도들에게 전보를 보내 홍2, 4방면군을 맞이할 준비를 지시했다.

전보 내용은 “홍2, 4방면군 전부대가 8월 중순께 아시(阿西), 바시(巴西), 바오줘(包座) 이북으로 집중한다. 주력 부대는 톈수이(天水), 란저우(蘭州) 큰길(大道)로 진격해 홍1방면군과 협동작전으로 간쑤(甘肅)지역의 적들을 섬멸하도록 한다. 3개 방면군이 합류해 서북지역에서 항일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전보는 또 전 장병들에게 이런 소식을 신속하게 알리고 뜨거운 동지애로 그들을 환영할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지시했다.

140)紅軍過草地到底減員多少 華西都市報

----------------------------------------------------------------------------------------------------------------------------------

 

65. 홍군 운명 건 '이리' 후종난과의 한판

 

허룽 등이 통솔한 홍2방면군은 2개월의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9월 초 하다푸(哈達鋪), 리(禮)현 지구에 도착했다. 이때 라즈커우(臘子口), 다차오탄(大草灘), 하다푸, 린탄(臨潭), 장(漳)현, 웨이위안(渭源)과 통웨이(通渭) 지구는 막 초지를 지나 온 홍군에게 점령당했다.

또 서쪽으로 진군한 홍1방면군은 이미 딩볜(定邊), 옌츠(鹽池), 홍더(洪德), 통신(同心) 등 10여 개 성진(城鎭)을 점령해 3개 주력 홍군은 날로 가까워 졌다. 1936년 8월 10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확대회의를 열어 통일전선 공작 전개를 당과 홍군 전략의 제1의 임무로 결정하고 장제스를 압박해 항일전선 구축 방침을 제정하였다. 중공중앙은 8월 30일 ‘동계(冬季)이전 홍1, 2, 4방면군 행동방침에 관한 의견’을 선포하였다.

 

1. 장제스를 압박해 항일전선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각종 여러 조건을 조성해 국민당과 장제스 군이 우리들과 타협할 수 있도록 한다.

2. 긴밀하게 동북군(東北軍)과 연합하고, 아울러 서북 및 기타 각 부와 연합 담판을 진행한다.

 

장제스는 홍군의 3개 주력 부대가 이미 합류태세를 갖추자 급히 후종난(胡宗南)부대에 명령을 내려 남방에서 싼간(싼시와 간쑤)과 서북으로 되돌아 가 쓰촨 북부의 홍군을 공격해 홍군의 부대합류를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후종난은 장제스의 가장 유명한 상장군(上將軍)의 한 사람으로 황푸 군관학교 1기생이다.

저우언라이는 일찍이 "후종난은 장제스 군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지휘관"이라고 평가한바 있다. 후종난은 용맹스럽고 전투를 잘할 뿐 아니라 일처리가 노련하고 용의주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인심을 사는데 뛰어난 재주와 함께 교활하고 간사해 남을 속이는 재주 또한 남달랐다. 장제스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던 후종난은 비교적 짧은 10년의 군 생활에서 중국 서북부 지방을 빠르게 안정화 시켰다. 후종난은 서북지방의 일대 효웅(梟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9월 초, 중공중앙 군사위원회는 장제스의 전략전술에 맞서 하나의 작전계획을 홍군에 하달했다. 이 작전계획에 따르면 홍1방면군은 일부 병력을 나눠 싼간(陝甘) 소비에트 지구를 보위하고 주력 부대는 하위위안(海源), 징위안(靖遠), 구위안(固原) 및 그 이남 지구를 점령해 홍2, 4방면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도록 했다.

또 홍2, 4방면군을 양로(兩路)로 나눠 4방면군을 좌로군, 2방면군을 우로군으로 삼았다. 좌로군은 민저우(岷州), 우산(巫山) 등지와 얼호우(爾後)를 점령한 뒤 동쪽과 북쪽으로 나아가 홍1방면군과 함께 딩시(定西), 롱시(隴西) 및 시란(西蘭) 대도(大道)로 진격해 적 37군을 유인, 섬멸하도록 했다. 우로군은 청(成)현, 후이(徽)현, 량당(兩當), 캉(康)현, 펑(鳳)현과 바오지(寶鷄)를 점령해 소비에트 지구를 건립하도록 했다. 이렇게 진격해 홍군 주력 3개 방면군을 합류하게 한 뒤 후종난 군단을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지시했다.

 

후종난은 제1군을 이끌고 간쑤로 진격했다. 제1군은 국민당 군의 5대 주력 부대 중의 하나였다. 국민당 군의 정예부대로 '천하 제1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기도 최신식이었으며 병력도 막강했다. '서북왕'으로 불리는 후종난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간쑤로 진격한 뒤 홍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돌진했다.

홍군은 부득불 점령했던 후이닝, 징닝을 내주고 북쪽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승기를 잡은 후종난 군은 여세를 몰아 패주하는 홍군을 추격하며 맹위를 떨쳤다. 후종난이 제1군을 이끌고 2차로 간쑤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홍군 고위층 내부가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장궈타오는 일찍이 후종난 부대의 매서운 공격을 맛본 터라 상황이 위태롭다고 여기고 후종난 군 저지전략을 짜는데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중앙홍군도 후종난 군을 막는 것이 역부족이라며 은근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종난은 확실히 흉맹스러운 '이리(홍군은 후종난을 天狼이라고 불렀음)'로 홍군은 그를 상대하기가 매우 껄끄러웠다. 홍군 내에서 후종난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퍼지자 펑더화이가 '이리를 잡는' 중임을 맡았다.

펑더화이가 전적(前敵)총지휘 겸 정치위원으로서 홍3개 방면군의 작전을 총괄지휘하기로 하였다. 당시 홍군은 징위안(靖遠)까지 후퇴해 더 이상 물러날 퇴로가 없었다. 홍군이 징위안을 내 줄 경우 홍군은 남북에서 국민당 군의 협공을 받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주석 141)

 

장제스는 징위안의 군사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후종난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징위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것을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흉포한 '이리를 잡는' 계획으로 후종난이 홍군을 얕잡아보는 교만한 마음을 이용해 홍군 진영으로 깊숙이 유인하여 궤멸하는 '자루 전략(口袋)'을 쓰기로 했다.

펑더화이는 장병들에 대한 훈화에서 "후종난은 교활한 이리다. 홍군은 이리를 잡는 우수한 사냥꾼"이라며 전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후종난은 역시 노련했다. 적을 가볍게 보아 무모하게 돌진하지 않았다. 후종난은 여러 갈래에 병력을 배치해 병진(幷進)하면서 펑더화이가 쳐놓은 자루진(口袋陣)을 꿰뚫고 진격하였다. 후종난은 이와 병행해 또 다른 지점에서 병력을 투입해 징위안을 공격해 함락했다. 펑더화이가 후종난을 포위해 사로잡겠다는 전략은 남가일몽이 되고 말았다. 징위안을 빼앗긴 홍군은 동쪽을 향해 싸우면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후종난은 홍군이 '일격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후종난은 제1군을 추격군의 최전방에 배치하면서 병력을 3로(路)로 나눠 동쪽으로 패퇴하는 홍군을 추격하도록 했다. 후종난 군의 '이리떼'들이 한 번 물은 홍군을 놓지 않으려고 더욱 몰아쳤다.

펑더화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홍군이 다시 퇴각하게 되면 중공중앙 기관과 홍군 총사령부의 약점을 국민당 군에 드러내게 된다. 이는 홍군이 싼베이 근거지를 버리고 다시 장정(長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때 바오안(保安)에 있던 마오쩌둥이나 난징(南京)에 있던 장제스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필경 이 한 번의 전투가 홍군의 생사존망을 가름하기 때문이었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고빗길에서 마오는 거의 매일 여러 차례 펑더화이와 전화하면서 후종난 군을 격파할 수 있는 작전을 논의했다.

 

장제스는 더욱 더 후종난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후종난이 일거에 중공중앙과 홍군 총사령부가 있는 바오안으로 진격하도록 사기를 북돋웠다. 배수일전(背水一戰)에 몰린 펑더화이는 산청바오(山城堡)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후종난을 격멸할 계책을 꾸몄다. 쫒고 쫒기는 후종난과 펑더화이 부대의 거리는 하루, 이틀의 노정이었다.

홍군 장병들은 산청바오 주위에 매복하였다. 20일 황혼 무렵, 후종난 군 딩더롱(丁德隆)의 78사단이 홍군이 파놓은 매복 장소인 산청바오에 돌진했다. 다음날 저녁노을이 비낄 즈음 펑더화이는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렸다. 22일 오전 9시께 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매복전에 걸린 딩더롱 군은 소수만이 포위망을 탈출했을 뿐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펑더화이의 산청바오 매복 기습전은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홍군은 이 전투에서 후종난 군 1개 여단과 2개 연대를 섬멸했다. 기본적으로 후종난 제1군의 주력부대인 78사단을 박살낸 것이다. 산청바오 전투의 승리로 홍군은 극적인 대반전을 이뤄 기사회생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펑더화이는 훗날 이 전투의 승리가 곧이어 터진 시안사변(西安事變)의 한 요소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141)西北戰場上的生死較量 ;胡宗南至死不知爲何敗給彭德懷  中國共産黨 新聞網
----------------------------------------------------------------------------------------------------------------------------------

 

66. 홍군의 조선인 양림, 광복 못보고 죽음 맞아

 

허룽도 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9월 7일 하다푸에서 전투계획을 짜고, 8일 ‘제2방면군 기본명령’을 선포하였다. 이 '명령'은 간싼(甘陝/간쑤-싼시)의 국민당 군이 병력을 분산한 약점을 파고들어 봉쇄선을 통하여 청현, 후이현, 펑현, 뢔양(略陽), 캉현의 적들을 기습공격 해 임시 근거지를 건립하도록 하는것이었다. 또 홍1, 4방면군과 합동작전을 한 뒤 3개 방면군이 합류해 9월 말에 전투를 끝낸다는 계획이다.

9월 11일 홍2방면군의 각 부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서 20일까지 청현, 후이현, 량당, 캉현 등 4개 현과 뢔양, 펑현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9월 25일 장제스 군 제3군 2개 연대가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청현을 수복하기 위해 반격을 폈으나 홍2군, 홍32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국민당 군 수백여 명이 사상하고 3백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허룽은 9월 중순 청현 등 4개 현(縣)과 몇 개 지구에 혁명정권을 세우고 유격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전사 2000여 명을 충원하였다.

 

이때 홍1방면군은 이미 닝샤(寧夏)의 위왕(豫旺)일대를 출발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또 홍4방면군은 민저우, 타오저우, 시구(西固)지역에 도달해 3개 방면군이 남북에서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즉각 직계부대를 동원해 시란(西蘭) 도로를 빼앗아 홍군 3개 방면군의 부대합류를 막도록 했다. 또 쓰촨군, 서북군, 동북군과 닝샤, 칭하이(靑海)의 국민당 군에 명령해 홍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허룽의 2방면군은 '징후이(靜會)전투 강령'에 따라 후종난 부대를 공격했으나 합동작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오히려 협공에 걸려들었다. 홍2방면군은 할 수 없이 웨이허(渭河) 도강을 강행해 10월 22일 후이닝(會寧)현 장타이바오(將臺堡)에서 홍1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홍2방면군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허룽은 "제2방면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적들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악전고투를 했다. 우멍산(烏蒙山)과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날 때 보다 더 위험한 상태였다. 손실도 컸다.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고 비통해 하였다.

 

어쨌든 홍1방면군과의 부대합류는 홍2방면군이 성공적으로 장정(長征)을 완수했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홍2방면군의 장병들은 1년 동안 후난, 구이저우, 윈난, 티베트, 쓰촨, 칭하이, 간쑤, 싼시성 등 8개 성 2만여 리를 전전하며 1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애초 후난성 상즈에서 출발한 시점으로부터 계산하면 홍1방면군의 장정에 비해 1년여 늦었다.

그들이 장정할 때 장제스 군은 이미 홍군을 추격하고 차단하는 경험을 쌓아 대응했기 때문에 홍2방면군은 더욱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허룽 등 영도들의 뛰어난 지휘력과 장병들의 영용무쌍한 분투로 마침내 간난신고의 제2장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11월 19일, 중공중앙은 저우언라이를 파견해 홍2방면군과 홍4방면군을 위문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저우언라이와 허룽은 난창기의(南昌起義)가 실패한 뒤 헤어졌다가 8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앞서 1936년 2월 조선인 양림(楊林)은 홍1방면군 간부연대 참모장에서 홍 15군단 75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15군단은 황허(黃河)를 도강해 동정항일(東征抗日)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의 총지휘는 홍군 북로총지휘 겸 28군 군단장 류즈단(劉志丹)이었다. 동정항일군이 황허를 건너기 위해서는 국민당 산시성 군벌 옌시산(閻錫山)이 홍군의 북상항일을 막기 위해 황허의 동쪽 기슭에 설치한 천리봉쇄선을 돌파해야 했다. 이 봉쇄선은 1리마다 토치카를 세우는 등 온통 토치카로 그물망을 형성하며 천리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중심 토치카를 세워 서로 연계해 화력을 극대화하도록 했다. 또 중요 지점에는 토치카를 벌집처럼 총총히 설치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옌시산은 홍군의 기습을 방비하기 위해 강안과 모래섬에 순찰초소를 세워 밤낮으로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런 철통같은 봉쇄선으로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완벽한 방어시설에 황허의 천험을 이용할 수 있어 옌시산은 “황허의 방어는 금성철벽이다. 홍군이 새처럼 나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건널 수 없다”고 기고만장했다. 양림이 소속한 15군단은 청간현에 이르러 황허기슭인 고가촌 지대에 집결했다. 용맹무쌍한 양림이 도강의 선봉장으로 뽑혔다. 중앙군사위원회는 황허 도강 작전을 이렇게 하달했다.

 

“선두부대는 은밀하게 행동하여 깊은 밤에 불의의 습격을 감행한다. 단호하고도 민첩한 수단으로 적들의 토치카를 탈취하고, 적들의 통신연락선을 절단한다. 진지와 은폐 적들을 통제해 후속부대의 도하를 담보하며, 증원하는 적들과 싸울 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한다. 도하하다 적들에게 발견되면 즉시 도하를 강행한다.”

 

2월 22일 밤 10시에 도하명령이 떨어졌다. 75사단 참모장 양림은 223여단 제1대대를 이끌고 앞장서 도하에 나섰다. 양림이 이끈 1대대원들이 탄 배가 대안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옌시산 군에 적발됐다. 토치카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총알이 빗발쳤다. 양림은 부대원들에게 도하를 강행하도록 명령했다.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선봉대대는 마침내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하나, 둘씩 하가요 대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홍군은 불퇴전의 투혼으로 전우들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일제히 돌격해 토치카와 종심진지를 점령했다. 이들은 후속부대들의 상륙지점을 확보해 223여단과 75, 78사단, 군단 직속부대가 순조롭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양림은 종심진지를 공격해 들어갈 때 적이 쏜 총탄에 복부를 맞아 선혈을 뿜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양림은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전투상황을 물으면서 “나는 괜찮으니 빨리 진격하라!”며 명령한 뒤 혼절했다. 홍군 주력부대가 옌시산의 황허 방어사령부가 있는 의첩진을 공격하고 있을 때 중상을 입은 양림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장렬하게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6개월 뒤 그의 부인 이추악도 만주 동북항일련군 제3군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다 체포돼 총살당했다.       

 

홍군에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던 양림(왼쪽), 항일여영웅으로 불렸던 평안남도 출신의 이추악


1936년 10월, 홍군 3개 방면군이 간쑤 후이닝(會寧)에서 부대합류를 한 뒤 중앙군사위원회는 ‘10월 작전강령’에서 닝샤(寧夏)전투 계획을 세웠다. 홍4방면군 홍9군, 30군 그리고 홍1방면군의 홍5군이 홍4방면군 총부와 함께 황허(黃河)를 건넜다. 국민당 군이 병력을 대거 동원해 도강을 막는 바람에 홍31군은 황허를 건너지 못했다. 황허를 도강한 홍군 3개군 2만1천800명이 고립돼 닝샤 전투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홍군이 진퇴양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위기를 일거에 해소해주는 경천동지한 사건이 터졌다.

시안사변(西安事變)이었다. 12월 12일, 동북군 사령관이자 비적소탕 부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공산군 소탕중지, 정부개조, 항일출병’을 내세우며 시안 린통(臨潼) 화칭츠(華淸池)에서 장제스를 억류해 국내를 발칵 뒤집고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곤경에 처했던 홍군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격이었다. 앞서 12월 7일 중공중앙 혁명군사위원회는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펑더화이, 런비스, 허룽 등 7인으로 주석단을 구성하고 마오를 주석으로 선출했다. 마오가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중앙정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이 돼 명의상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당전군(全黨全軍)의 영도지위를 점차 확립하게 되었다.(주석 142)

142)毛澤東生平j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國中央文獻出版社(2009.10신판)

----------------------------------------------------------------------------------------------------------------------------------

 

67. '시안사변' 구금당한 장제스 "내전 중지하고 항일하라"

 

1936년 12월 초, 시안(西安). 서북군 공산당 포위소탕전(圍剿) 부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싼시(陝西)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은 본인이 직접 포위소탕전 사령관을 맡은 장제스가 이끌고 온 국민당 군 고위 군지휘관들의 소탕전 독전(督戰)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는 홍군 3개 방면군이 싼베이에서 합류하고 중공중앙이 바오안(保安)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함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장제스는 홍군을 소탕하기 위해 제6차 포위소탕전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장제스는 12월 4일 뤄양(洛陽)에서 국민당 군 고위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시안 비행장에 도착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장제스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먼저 국내를 안정화시킨 뒤 외적을 물리친다. 즉 공산당을 먼저 섬멸하고 일본과 싸운다는 구호)정책에 반대해 내전(內戰)을 중지하고 함께 일본과 싸워야한다는 뜻을 견지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1년 이른바 `9.18사변'으로 만주침략에 나서 동북3성을 강탈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내세워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운 뒤 중국침탈을 본격화해 이때는 몽골과 화중(華中)지역, 상하이 등 중국 내륙으로 침략의 마수(魔手)를 뻗치고 있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시안에 온 장제스를 만나 다시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건의하였으나 장제스는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주석143)

 

장제스는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과 애첩인 양귀비(楊貴妃)의 휴양 별궁이었던 린통(臨潼)의 화칭츠(華淸池)에 머물고 있었다. 화칭츠의 바깥 첫 번째 문 주변 경비는 장쉐량의 서북 포위소탕군 경호대 제1대대 제1중대가 맡고 있었다. 안쪽인 두 번째 문 주위는 장제스가 대동한 경호대가 지켰다.

 

양귀비의 별장 화칭츠


 

장제스는 화칭츠에서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압박했다. 첫째, 포위소탕 명령에 복종해 장쉐량의 동북군(東北軍)과 양후청의 17로군을 전부 싼간(陝甘/싼시-간쑤성) 전선 작전에 투입한다. 둘째, 포위소탕전을 원하지 않으면 동북군은 푸젠(福建), 17로군은 안후이(安徽)성으로 각각 이동하고 싼간을 중앙군(中央軍)에게 넘겨 포위소탕전을 벌인다.

장제스의 이런 양자택일 방안에 대해 장쉐량과 양후청은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홍군과 싸우거나 시안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홍군과 전투할 경우 자신들의 병력손실이 클 수밖에 없고, 서북지역을 떠나면 불원간 장제스가 부대개편을 하거나 아예 자신들의 부대를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해득실을 가늠한 뒤 첫째, 내전에 참가하지 않는다. 둘째, 서북을 떠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다시 한 번 굳힌 뒤 먼저 극력 간언(諫言)해 보고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장제스를 설득하기로 했다. 12월 10, 11일. 장쉐량은 두 차례 장제스가 묵고 있는 칭화츠에 찾아가 비분강개하며 때론 눈물을 뿌리며 간언하였다.

 

"국가민족의 존망이 이미 마지막 갈림길에 있습니다. 항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내전을 그치지 않으면 항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장제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철심장을 지닌 듯했다. 장제스는 잇따라 책상을 치며 고함을 쳤다.

 

"지금, 네가 바로 총으로 나를 쏴 죽여라. 나의 공산당 소탕전(剿共) 계획은 바꿀 수 없다!"

 

장쉐량은 하릴없이 화칭츠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양후청이 화칭츠에 들어가 간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장쉐량과 양후청이 번갈아가며 장제스를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앞서 12월 9일, 시안의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1.29 운동' 1주년을 기념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내전중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국민당 특무조직 일원이 쏜 총에 어린 학생이 부상당했다. 시위학생들은 크게 분개했다. 학생들은 50리가량 떨어진 린통(臨潼) 화칭츠에 머물고 있는 장제스를 찾아가 청원하기로 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급히 화칭츠 10리밖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배치해 시위대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장제스는 또 장쉐량에게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도록 했다. 장쉐량은 할 수 없이 시위현장에 나가 "1주일 안에 답을 주겠다"는 말로 학생들을 설득해 해산시켰다. 장제스는 학생들에게 큰 불만을 터뜨렸다. 어쨌든 장쉐량과 양후청은 장제스에게 여러 차례 '극간(苦諫)'하고 '곡간(哭諫)도 해봤으나 이런 부드러운 방법으로는 씨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방법인 무력으로 간언(兵諫) 하기로 마음먹었다.(주석 144)

 

 장제스와 마오쩌둥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은 동북군과 서북군을 인솔해 병란(兵變)을 일으켰다. 시안일대를 장악한 이들은 오전 6시께 동트기 직전 장쉐량의 친위병력을 화칭츠에 투입해 장제스의 경호대를 간단하게 제압했다.

잠결에 총소리에 놀란 장제스는 화칭츠 뒷산 뤼산(驪山) 등성이로 달아나 바위 밑에 숨어있다 군사들에 붙잡혀 구류되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8개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난징(南京)정부를 개편해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救國)정부로 재조직하고, 모든 내전을 정지하고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성명은 또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민중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일본침략에 대항해 거국적으로 전면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시안사변이 터지자 중국인들은 경악했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놀랐다. 국내외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시안은 세계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상황은 매우 복잡다단했다. 내전의 위기가 목전에 임박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바짝 긴장했다. 이들은 시안사변이 폭발한 새벽에 연명으로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중공대표가 시안에 와 항일구국 대계를 상론하고 구금한 장제스 문제를 풀어가자고 대표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날 오전 8시께 잠에서 깬 마오는 장쉐량이 자신과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를 보았다. 전보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중화민족과 항일의 앞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불구하고 오늘 이미 장(제스) 및 중요 장령(將領)인 천청(陳誠), 주자오량(朱紹良), 장딩원(蔣鼎文), 웨이리황(衛立煌) 등을 구류하여 애국인사 석방과 연합정부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형(兄) 등의 고견은 어떤지 빠른 답을 주기 바란다."

 

마오는 급히 중앙 영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 주더, 장궈타오 등이 잇따라 마오쩌둥의 동굴집(窯洞)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보를 돌려 본 뒤 시안사변 처리방침에 관해 논의했다. 모두들 흥분했다. 대부분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장궈타오의 '회억(回憶)'이란 회상록에 따르면 평소 온화하고 말이 별로 없는 주더(朱德)조차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비교적 냉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저우는"이 사건은 우리가 주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장쉐량과 양후청의 태도를 지켜보는 것"이라며 신중론을 폈다.

장궈타오는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면서 "통관(潼關)으로 치고 들어가자"고 말했다. 마오는 민족의 근본이익에서 출발해 국내외 복잡한 형세를 전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장궈타오의 주장을 비판했다. 마오는 또 "우리는 마땅히 뒤에 있고, 장쉐량과 양후청이 전면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장궈타오가 냉정을 찾은 뒤 "모스크바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장원톈, 보구, 왕자샹 등 모두가 찬동해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내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반응을 떠보기로 했다.

143)西安事變前夜, 誰激了張學良 ;從今天起我要做獅子了  散木 同舟共進(2010年 第7期)
  1937年的毛澤東 ;不能感情用事殺了蔣介石  人民網 文史頻道
144)西安事變 ;殺蔣與放蔣的艱難抉擇 人民網

----------------------------------------------------------------------------------------------------------------------------------

 

68. 시안사변이 부른 국공합작 55년동안 감금당한 장쉐량

 

시안사변 소식이 전해지자 홍군 각 부대는 갑자기 들끓었다. 바오안(保安)과 싼베이(陝北)는 환희의 바다로 변했다. 바오안에 있던 덩잉차오(鄧潁超/저우언라이 부인)는 "기뻐서 동지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를 부를려고 마당으로 뛰어나왔다"며 흥분했다. 덩잉차오와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앙이 장제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장제스를 죽여 수없이 많이 스러져간 동지들의 복수를 하고 중국혁명의 최대의 걸림돌을 치워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바오안에서 취재하고 있었던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는 "장제스의 구류 소식이 바오안에 전해지자 바오안은 군중대회를 열었다. 마오와 다른 간부들이 대회에 참석하여 강연을 했다. 회의에서는 장제스에 대해 공정한 심판을 요구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라고 묘사했다. 딩볜(定邊)에 있던 리웨이한(李維漢)은 "우리는 딩볜에서 이 소식을 듣고 미칠듯이 기뻐했다. 곧바로 큰 사원에서 까오깡(高崗)이 주재해 군중대회를 열었다. 군중들은 큰 소리로 '장제스를 총살하라'고 외쳐댔다. 회의가 끝난 뒤 당중앙에 군중들의 바람을 반영해줄 것을 바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 장쉐량이 마오에게 보낸 전보는 또 "장제스를 자신의 경호부대에 구금하고 있으며, 요원 매수를 방비하고 있다. 특히 다른 부대들이 지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동북군 주력을 시안, 핑량(平凉)일선에, 17로군 주력은 시안, 통관 일대에 각각 집중 배치했다"고 밝히고 "홍군은 시안(西安)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닝샤(寧夏), 롱둥(롱東) 일대의 후종난, 쩡완종(曾萬鍾), 마오빙원(毛炳文), 관린정(關麟征), 리시옌저우(李仙洲) 등의 중앙군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에게 항일과 내전종식 중 하나를 택하라고 권한 뒤 감금한 장쉐량

 

13일, 중공중앙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시안사변의 예측과 대책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주더, 마오, 저우언라이, 장원톈(洛甫), 장궈타오, 보구, 린뱌오 등 12명이 참석했다. 뤄푸(洛甫)가 회의를 주재했다. 마오가 당시 국민당의 외부공작(통일전선)의 책임자여서 먼저 보고를 했다.

마오는 “시안사변은 혁명적이고 역사적 사업으로 마땅히 옹호해야 한다”면서 “인민들 앞에서 장제스의 모든 악을 폭로하고 장제스를 파면해 인민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는 심지어 사견이라는 전제를 내걸고 “장제스를 제거하는 것은 어떤 방면에 비춰보더라 모두 장점이 있다”면서 “시안을 중심으로 전국을 영도해 난징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로 발언에 나선 저우언라이는 좀 더 신중한 상황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했다.(주석 145)

“중앙은 일본이 난징정부를 괴뢰정권으로 만드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당 내의 각종 정치계파의 태도를 중시해야 한다. 황푸계, cc파, 원로파, 구미(歐美)파의 지지를 얻어 그들이 시안사변을 찬성하도록 추동해야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린선(林森/국민당 정부 주석), 쑹즈원, 콩샹시(孔祥熙/행정원 부원장 겸 재정부 부장), 쑨커(쑨원의 아들), 펑위샹(대군벌) 등의 지지를 얻고 친일파인 국방부장 허잉친(何應欽)을 고립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군중을 동원해 시안을 항일의 중심지로 해야 한다. 항일구호를 내세워 옌시산(閻錫山/산시성 군벌), 류샹(劉湘/쓰촨성 군벌)과 연대해 우리의 양익(兩翼)으로 삼아야 한다. 더 나아가 광시성(桂系)군벌과 연합해 화동(華東)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동남 7개성은 난징의 세력권에 있지만 이들을 항일전선에 끌어들여야 한다. 중국 공산당은 난징정부와 맞설 필요가 없다. 실질적으로 영도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앞으로 시안이 다른 도시를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하면 대단히 유리하다. 우리당은 공개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지하당의 어려운 공작을 중요하게 추진하면서 군중운동을 발동해야 한다. 시안에 정권과 장제스 제거(除蔣)의 중심을 세우되, 장제스 심판(審蔣)은 공개적으로 표시할 필요는 없다.”

중공중앙은 15일 마오가 맨 먼저 서명한 '홍군 장령이 시안사변에 관해 국민당 정부에 보내는 전보'를 발표했다. 전보는 장쉐량과 양후청이 발동한 병간(兵諫)을 정의감에서 나온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전보는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장제스가 대외적으로 양보하고, 대내적으로 군사를 부리면서 민중을 압박하는 3대 과오정책의 당연한 결과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전보는 또 장, 양 두 사람이 요구한 8개항을 지체 없이 시행하고 내전 발동을 중지하라며 난징정부가 장쉐량, 양후청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장제스가 구류된 뒤 난징정부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국방부장 허잉친(何應欽)과 왕징웨이(汪精衛) 등 친일파들로 겉으론 장, 양 응징론을 내세우며 시안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면서 속내는 새로운 권력을 쫒는 호기로 삼았다. 또 하나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그의 오빠 쑹즈원(宋子文) 등 장제스 측근들로 장제스의 안위와 함께 권력의 추가 왕징웨이 쪽으로 기울어질 것을 우려해 시안출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공중앙이 발표한 전보는 시안사변은 전 국민의 바람인바 장제스를 파면해 재판에 회부하고, 홍군과 국민당 군이 연대해 민족혁명의 전장터로 나아가 조국의 자유해방을 위해 (일본과)혈전을 벌이자고 천명했다. 마오와 중앙영도들은 17일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하는 중공대표단을 시안으로 파견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언라이 동지, 전 세계, 전 중국이 모두 시안을 바라보고 있다. 시안문제는 대단히 복잡하다. 큰 방침이 확정됐지만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표단이 잘 처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저우언라이가 시안으로 떠난 뒤 마오 등 중앙영도자들은 형세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잇따라 회의를 열어 사태발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시안에 도착한 뒤 곧바로 장쉐량과 회담을 했다. 저우는 그날 밤 마오와 중앙에 보낸 전보에서 "국민당 중앙군이 이미 5개 사단을 통관(潼關)에 투입해 웨이난(渭南)을 압박하면서 대치하고 있다. 장쉐량은 양후청 부대가 시안을 통제하고 동북군 주력을 웨이수이(渭水) 북쪽에 집중 배치해 전투에 대비하고 있는 데 전투시 반드시 홍군이 참전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상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다음날 저우는 또 두 차례 전보 보고를 했다. 전보내용은 "난징 친일파들의 목적은 장제스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전을 조성하는 것이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에 편지를 보내 항일을 약속해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콩샹시(孔祥熙)가 조율하고 있으며, 쑹즈원(宋子文)이 정전을 조건으로 시안에 오고, 왕징웨이는 난징으로 돌아간다는 것 등"이었다. 이런 보고는 모두 중공중앙이 정책결정을 하는데 중요한 정보자료가 되었다. 중공중앙은 또다시 국민당 중앙에 전보를 보내 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고 항일 구국대회 소집을 제의하는 발 빠른 모습을 보였다.

12월 21일, 마오는 공산당 난징회담 대표 판한녠(潘漢年)에게 전보를 보내 국민당 쪽 대표 천리푸(陳立夫)에게 다음과 같은 5개항을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1. 몇 사람의 항일운동의 영수를 난징정부에 참여시킨다.

2.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시안 지위를 승인한다.

3. 공산당 소탕전을 중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한다.

4. 민주권리를 보장하고 중국 항일운동을 지지하는 국가와 협력관계를 맺는다.

5. 이런 조건들을 보증할 때 시안(장쉐량, 양후청)에 장제스 선생의 자유회복을 권고하고, 그(장제스)가 전국을 일치단결해 항일하면 협조한다.

마오는 이와 함께 저우언라이에게 전보를 보내 "국민당 서북의 황푸 군관학교계 고위 장령처에 사람을 파견해 국방부장 허잉친이 일본과 결탁해 장(제스)을 해치려 했다는 음모를 폭로하고 홍군은 담판을 원하고 있으며, 장제스의 자유를 회복하는 조건을 알려 줄 것"을 지시했다.

마오는 22일에 산시(山西) 군벌 옌시산(閻錫山)에 서신을 보내 옌시산이 시안사변과 관련해 내전을 반대한 것을 추켜세우고 공산당의 시안사변 평화적 해결 입장을 밝혔다. 마오는 또 옌시산이 중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 국민당 군과 장쉐량, 양후청 군이 맞서고 있는 '닝싼(寧陝/닝샤-싼시)' 문제에 나서줄 것을 희망했다. 시안사변 발생 열흘 째 되는 22일에 해결의 열쇄를 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그의 오빠 쑹즈원(宋子文) 등 난징 협상대표 일행이 시안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저우언라이는 중공 전권대표로서 장쉐량, 양후청과 쑹메이링, 쑹즈원 남매간에 벌이는 담판에 참여하였다.(주석 146)

저우언라이는 회담이 끝난 뒤 쑹메이링 남매와 함께 장제스를 만나러 갔다. 저우는 장제스를 면담한 뒤 중공중앙에 3차례 전보를 보내 "공산당 소탕전을 중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전쟁을 하기로 했다. 통일중국에 노력하며, 장제스의 지휘를 받는다. 장제스, 쑹 남매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들이 난징에 돌아간 뒤 내가(저우언라이) 직접 가서 담판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개괄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저우언라이는 24일 밤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장제스를 면담했다. 저우는 장제스에게 "10년 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많이 늙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10년 전 장제스가 황푸 군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그의 밑에서 저우언라이는 정치주임으로 있었다.

장제스는 "언라이, 자네는 옛날 나의 부하였다. 마땅히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저우는 "위원장(장제스)이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적과 싸운다(先安內後攘外)'는 잘못된 정책을 버린다면 나, 저우언라이는 위원장의 말을 들을 겁니다. 우리, 홍군도 위원장의 지휘에 따를 겁니다"라고 말했다. 저우는 또 매우 간절하게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항일(一致抗日)하는 것만이 유일한 출로라고 경고했다. 저우는 장제스에게 국민당 정부와 일본 침략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설명했다. 장제스는 이미 협의한 공산당 소탕전 중지와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공산당과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장제스는 또 저우언라이를 난징으로 초청해 직접 담판하겠다고 했다.

12월 25일 풀려난 장제스는 시안사변의 주동자인 장쉐량을 대동하고 뤄양을 거쳐 난징으로 돌아갔다. 함께 시안사변을 일으킨 양후청 등 장군들과 저우언라이는 장쉐량이 난징에 가면 장제스의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극구 말렸다. 장쉐량은 사변의 목적을 달성한데다 결과적으로 '항명'을 한 만큼 군인으로서 당당하게 처벌을 받겠다며 난징행을 택했다. 저우언라이는 설마 했다가 장쉐량이 시안비행장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만류하기 위해 급히 비행장으로 달려갔으나 비행기는 이미 기수를 동쪽으로 돌린 다음이었다. 장쉐량은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체포, 연금돼 중국 대륙과 타이완에서 5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동안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145)西安事變 ;殺蔣與放蔣的艱難抉擇   人民網
146)1937年的毛澤東 ;不能感情用事殺了蔣介石  人民網 文史頻道

----------------------------------------------------------------------------------------------------------------------------------

 

69. 마오 "항일은 대세다…장제스도 받아들일 것"

 

12월 27일, 중공중앙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시안사변은 국민당 10년의 잘못된 정책을 종결시켰다. 시안사변이 내전을 끝내게 했다. 이제 항전을 시작할 때"라며 시안사변을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은 이날 “장제스 석방후의 지시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중앙은 이 지시에서 장제스, 쑹즈원이 항일요구를 받아들여 장제스를 석방한다는 것과 전국이 내전을 종식하고 일치단결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다음 날인 28일 마오는 바오안에서 '장제스 성명에 관한 성명'을 내어 "장제스는 즉시 각 당파가 연합해 일치단결하여 항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마오는 그날 장제스가 장쉐량을 연금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저우언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제스,  이자가 장 장군을 어찌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 수가 있는가!"
"장 장군은 스스로 장제스를 수행해 난징으로 갔다. 인민들에게 항일구국의 일편단심을 보여줬다. 자신을 버렸다.-"

저우언라이는 애석해 하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니-. 생각컨대 장제스가 감히 장 장군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동북군의 머리가 없어 이후 적을 대항하는 데 응집력이 떨어질 듯하다."

"장 장군이 떠나기 전에 동북군의 일을 양후청 장군에게 부탁했다. 내 생각에는 17로군이 동북군과 잘 단결해 나갈 것으로 본다."

"17로군도 자신들을 지키기 어렵다. 만약 장쉐량이 가지 않았더라면 양 장군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협동작전을 벌이면 동북군이나 서북군 모두 보전할 수 있다. 헌데 지금은 양후청이 팔뚝을 잃었다. 동북군도 통솔이 잘 안 될듯 하고-." 


마오가 상황을 분석하며 밝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우리가 서북군에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저우언라이가 마오의 의견을 구했다.

"우선 전국적으로 통일전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각로(各路) 군이 모두 출로(出路)를 찾을 수 있다."

저우는 마오의 견해에 동의하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중공중앙은 인민들의 광범한 공감을 얻기 시작한 항일전선 구축을 위한 통일전선 국공합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해가 바뀐 1937년 1월 1일 새해에도 장제스의 난징정부를 계속 압박하고 나섰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이날 연명으로 난징에 있는 중공중앙 대표인 판한녠(潘漢年)에게 전보를 보내 "공산당은 국민당이 나라를 구하는 데 유리한 일체의 개혁을 지지하고 협조하며 천리푸(陳立夫), 쑹즈원, 쑨커(孫科), 펑위샹(馮玉祥) 등 각계 인사들과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2일에는 마오와 장원톈은 '장(쉐량), 양(후청) 양군과 홍군의 공고한 단결, 시국호전(好轉) 추동 지시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현재 전국(全局)의 중심은 장, 양 양군과 홍군 주위의 단결을 공고하게 하고 친일파에 대항하여 시국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난징 정부는 이간과 위협 수단으로 장, 양 양군을 탈취해 홍군을 고립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21일 다시 저우언라이와의 연명 전보를 난징에 있는 판한녠에게 보내 "회담 중에 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 후에 장제스가 다시 홍군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산군 소탕작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동의와 보장을 받도록 하라. 아울러 홍군에게 최소한도의 급양(給養)을 보증 받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판한녠은 상부의 지시를 관철하려고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안에 있는 저우언라이는 이날 마오에게 "장제스가 홀로 무력을 사용해 시안을 압박할 것에 대비해 동북군이 소장파 장교들의 선동으로 장제스와 결사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마오와 주더는 30일 전보 회신을 통해 "평화는 우리들의 기본방침이며, 이는 장(쉐량), 양(후청)의 기본방침이기도 하다. 우리들과 장, 양은 삼위일체다. 나아가면 같이 나아가고, 물러서면 같이 물러서야 한다. 우리는 장, 양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2월 10일, 국민당 5차2중전회가 열렸다. 중공중앙은 5개항 요구와 4개항 보장을 천명했다. 국민당은 이 회의에서 평화통일의 국내정책을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시안사건은 중국공산당의 투쟁을 통해서 평화적 해결에 이르게 되었다.

중공중앙은 10년 내전을 종식하고 항일을 기반으로 한 제2차 국공합작의 초보적 단계를 형성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마오는 당시 시안사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여러 차례 장제스를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압박과 함께 당, 홍군 내부와 인민들로부터 '죽여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적지 않은 번민을 하였다.

이와 관련해 마오는 홍군대학 강연에서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 "장제스를 죽여 원수를 갚고 한을 풀어야 한다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그럴수록 감정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장제스를 죽이면 대규모의 내전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중국인끼리 서로 죽이게 된다. 일본 침략군들이 전 중국을 점령하는데 어찌 쉽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더욱 큰 손실이 아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또 당과 홍군의 적지 않은 영도들은 만일 장제스가 장쉐량과 양후청이 요구한 항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제스는 마음이 독하고 하는 짓이 악랄해 신의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데 그를 놓아주면  항일(抗日)을 할 것 같은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마오의 답변은 이랬다.(주석 147)

 

"일본 침략자와 국민당내 친일파들은 우리가 장제스를 죽이지 않을까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다. 장제스도 죽을까봐 겁내고 있다. 생사(生死)가 넘나들고 있는 이 순간, 장제스는 항일만이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쑹씨 남매(쑹메이링, 쑹즈원)가 권유하고 있다. 장제스는 장, 양 두 장군이 요구한 항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싼베이(陝北)에 작은 당나귀가 많다. 짐을 실은 작은 당나귀가 산을 올라가지 않을 때 싼베이 사람들은 작은 당나귀가 산에 올라가도록 하는 3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끌고, 두 번째는 밀고, 세 번째는 때리는 것이다. 장제스가 항일 항전을 원치 않으면 작은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그를 끌고, 밀어야 한다. 그래도 가지 않을 때는 때려야 한다. 당연하다. 바짝 끌고, 힘 있게 밀고, 세게 때려야 한다. 그러면 당나귀는 산으로 올라간다. 장제스도 항일을 한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제국주의와 중화민족간의 모순은 주요 모순이다. 우리당이 인민을 항전으로 이끄는 것은 주요 모순의 중요한 부분이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다. 국공합작으로 일치단결해 항일하는 것은 대세의 흐름을 타고 있다. 단, 당나귀는 다리로 사람을 걷어차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합이고 투쟁이다."

147)西安事變 ;殺蔣與放蔣的艱難抉擇 人民網

----------------------------------------------------------------------------------------------------------------------------------

 

70. 시안사변 막전막후 장제스-장쉐량의 두뇌싸움

 

국내외를 뒤흔든 시안사건은 장제스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좌절을 안겨주면서 홍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앗아갔다. 마오에게는 무너져 내리는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 홍군병력을 보존하고 국공합작으로 활로를 열어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주었다. 이들의 명운을 바꾼 시안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장쉐량(張學良)은 1901년 마적출신의 펑톈(奉天)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맏아들로 랴오닝(遼寧)성 하이청(海城)현에서 태어났다. 동북3성 육군강무당 포병과 1기 출신이다.

 

친일성향으로 동북 3성을 석권한 장쭤린은 그를 지원했던 일본의 용도폐기로 장제스가 이끈 국민혁명군에 밀려 1928년 6월 만주로 철수하던 중 기차 안에서 일본군에 의해 폭살 당했다. 장쉐량은 장쭤린을 계승해 동북 3성을 통치하면서 ‘청년 원수(元帥)로 위명을 떨쳤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31년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 본격적인 중국침략에 나섰다. 일본에 패퇴한 장쉐량은 1933년 군직에서 물러 나 실의에 젖어 마약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청년 원수‘로서의 결기를 새롭게 다져 마약을 끊고 유럽의 선진문물을 돌아보고 온 뒤 1934년 ’후베이-허난-안후이(卾豫皖)‘ 비적소탕(剿匪) 부사령관으로 임명돼 공산당과 전투를 벌였다. 장쉐량은 시안사건 1년 전인 1935년 가을 서북 비적소탕(西北剿匪) 총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돼 시안에서 동북군을 통솔했다.

 

장쉐량은 군인으로서 비록 군 생활은 짧았지만 다양한 전투경험을 쌓았다. 그는 일본군과 싸웠고, 중국의 고위 장령으로 유일하게 소련 홍군(紅軍)과도 전투를 벌였다. 장쉐량은 또 베이양(北洋) 군벌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국민당 신 군벌, 그리고 공산당과 싸우는 등 폭넓은 전투전력을 갖고 있었다. 장쉐량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커 장제스가 일본침략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같은 민족인 공산당 소탕전에 몰두하는 것에 불만을 키워왔다. 게다가 10년 내전이 계속되면서 일본군이 화북 내륙까지 침공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 현장을 보면서 장제스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점점 깊어갔다. 장쉐량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주석 148)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한 ‘9.18사변’ 이후 학생들 뿐 만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항일정서가 크게 높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이 선동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백성들의 항일정서는 공산당이 부추킨게 아니라 인민들의 자발적인 항일정서로 공산당은 그 민의를 쫒아 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많은 전투를 해 보았지만 승패불문하고 가장 가치 없는 싸움은 홍군과의 전투라고 여겼다. 이른바 ‘비적소탕(剿匪)’이라는 이름의 홍군과의 전투는 정말로 마음을 아프게 했다. 비적을 소탕하는 군대는 모두 ‘견벽청야(堅壁淸野/주위의 주민이나 물자를 소개하고 적군들이 부근의 건물이나 수목 등을 이용할 수 없도록 제거 또는 불태워 버리는 것)’ 전술을 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집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군인들이 집에서 나온 물건들은 다 집어간다. 쑥대밭이 되어 사람이 살수 없게 만드는 것이 견벽청야다.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해서 나는 내전을 반대했다.”

 

내전에 회의를 느낀 장쉐량은 1934년 하반기 때부터 공산주의 서적을 일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공산당을 탈당한 리톈차이(黎天才, 본명은 李經天), 판원위(潘文郁, 본명은 潘東周), 우위밍(吳雨銘) 등 초기 고위 공산주의자 등 20여 명의 전 공산당원들이 포진해 마르크스 레닌 서적 등을 강론하는 등의 행동으로 장쉐량의 공산적 사상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장쉐량이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노선을 견지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장쉐량의 기밀팀장인 리톈차이는 베이징대 학생시절 리다자오(李大조) 교수 등이 만든 베이징대 마르크스 사상연구소 회원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공북방 당 조직의 초기 영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8년 공산당을 떠나 ‘9.18 사변’이후 장쉐량과 인연을 맺었다. 장쉐량은 그를 이용해 공산당 지하조직활동을 타격하기도 했다.

리톈차이는 장쉐량이 서북 비적소탕 부사령관일 때 정훈처 부처장의 요직을 맡고 있으면서 장쉐량과 양후청의 관계를 조율했다. 리톈차이는 실질적인 장쉐량의 책사로 중공중앙과 접촉해 장과 저우언라이의 비밀회담을 주선하고, 시안사변 당시 장-양의 8개 사항을 기초하는 등 시안사건의 막후인물로 활동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리톈차이의 실체를 알고 고도로 경계하면서 싼베이에 있는 장원톈과 마오, 펑더화이 등에 전보를 보내 ‘당을 배반한 요주의 인물’로 보고하기도 했다.(주석 149)

시안사변 전날인 12월 11일 밤. 장제스는 이날 밤 있었던 일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리톈차이가 갑자기 나를 보러 찾아왔다. 매우 뜻밖이었다. 리는 비적소탕(剿匪) 방침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했다. 어제 장쉐량이 말한 것과 같았다. 뼈저리게 꾸짖었다.”

 

내용은 이랬다. 장제스는 리톈차이와 악수하고 어깨를 같이하고 앉아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줄곧 자네를 동지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학생이다. 혁명가는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적에게 유화정책을 써서는 안 된다. 장 부사령관(장쉐량)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장제스는 얘기하면서 호주머니에서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보였다.

 

“자네, 여기에 있는 명단을 봐라.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다. 이 반동분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리톈차이가 명단을 보니 10명가량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리톈차이가 장제스에게 말했다.

 

“몇 사람은 제가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에 모두 공산당은 아닙니다. 그들을 (해외로) 내보내 몇 년 공부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제스가 리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리의 말을 끊으면서 큰 소리로 질책했다.

 

“완전히 낡은 관료적인 수법이구만. 나쁜 놈들을 장려하는 방법이다. 해외에 보내 공부시키자는 게 누구 생각인가. 먼저 공산당과 결탁해 간행물을 발행해 항일이라는 미명아래 나를 욕하는 게 아닌가. 자네가 이렇게 흐리멍텅한 친구인지 생각지도 못했다. 자네들과 17로군(양후청의 서북군)이 오해가 깊지 않은가? 지금은 어떤가.”

모두가 위원장(장제스)의 영도아래 복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지요?”

“내 영도아래? 어떤 게 나의 영도라고 들었는가? 명백하게 말하건대 공산당과 싸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다. 국가역량은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 너희들이 공산당의 선전과 음모에 부화뇌동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엄중한 범죄행위다. 자네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인가?”

“위원장께서 난창(南昌)에 계실 때 3푼은 군사고 7푼은 정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정세가 다릅니다. 마땅히 9푼을 정치에 두어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습니다. 군사는 1푼이면 충분합니다. 수이동(綏東)의 적들(일본군)이 이미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모든 응전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비행장에 계류하고 있는 그 많은 비행기들을 수이위안(綏遠) 전방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이 말이 장제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장제스는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주석 150)

 

“네가 하는 말은 어제 장쉐량이가 한 말과 똑같다. 네가 장쉐량의 영향을 받았나. 아니면, 장쉐량이 너의 영향을 받았나? 내가 말하건대 마음만 고쳐먹으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다. 독불장군은 용납할 수 없다. 내가 너희들의 영수라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나에게 복종하고 충실해야 한다. 오늘 이야기를 돌아가서 너희들의 부사령관(장쉐량)에 모두 이야기하라.”

 

리톈차이는 돌아가서 장쉐량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불에다 기름을 뿌린 꼴이 되었다. 그날 밤 장쉐량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부터 나는 사자(獅子)가 되겠다.”

장쉐량은 리톈차이에게 내일(12일) 새벽 6시에 행동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장쉐량은 또 리톈차이에게 거사후 난징정부와 각 성에 보낼 거사내용과 행동강령을 새벽 3시 전까지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역시 시안사건을 전후해 장제스도 장쉐량을 압박하기 위해 물밑에서 고도의 언론플레이를 펼쳤다. 장제스는 12월 9일 싼시성 정부 주석인 샤오리즈(邵力子)에게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편지내용은 이랬다.

 

"리즈 주석 형께 드립니다. 다음과 같은 소식(뉴스)을 싼베이에 주재하고 있는 '다공바오(大公報)' 기자에게 보도하도록 비밀리에 부탁드리기를 바랍니다. ‘장딩원(蔣鼎文), 웨이리황(衛立煌)이 잇따라 시안에 왔다. 장 위원장(장제스)은 이미 장딩원을 비적소탕(剿匪) 전적(前敵)총사령관에, 웨이리황을 진(晉/산시와 허베이성 남부), 싼시, 수우이(綏), 닝(寧/닝샤) 4성 변계 총지휘로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청(陳誠)이 싼베이에 와 장 위원장을 만나 군정부 차장 명의로 수이둥(綏東) 중앙군 각 부대를 지휘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 이 소식은 중앙사 및 다른 기자, 시안의 각 신문에게는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중정(中正/장제스 이름). 12월 9일.“

 

샤오리즈는 청나라 말 때 거인(擧人) 출신이다. 그는 과격한 급진파로 쑨원의 동맹회 회원이었다가 나중에 초기 공산당의 최고 당원의 한 사람이었다가 공산당을 떠났다. 이때 국민당의 싼시성 주석으로 있었다. 샤오리즈는 ‘다공바오’ 기자에게 기사화를 부탁했다. 다공바오는 12월 12일자에 ‘천청 수이동 군사 지휘, 장딩원 공산당 소탕(剿共) 서북 비적 전적총사령관에 임명. 웨이리황을 ’진-싼-간-수이‘ 4성 변계지구 총지휘에’라는 표제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12월 12일 새벽 장쉐량이 장제스를 체포함과 동시에 양청우의 17로군이 시안에서 군사행동에 나서 난징에서 온 국민당 군 고위 군 장성들을 구금했다. 17로군은 또 이날 샤오리즈 싼시성 주석을 체포, 연금할 때 샤오리즈 사무실에서 장제스가 보낸 이 서신을 압수해 그 보도경위의 내막이 밝혀진 것이다.

장제스는 당시 국내외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다공바오’에 먼저 군 고위 장성인사를 실어 여론을 조성한 뒤 기정사실화 해 말 안 듣는 장쉐량과 양우청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이런 언론플레이는 장제스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권력자들의 언론활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 지닌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

 

71. 55년 감금 장쉐량, 장제스에게 시계 선물하며…

 

시안사변에 대해 소련의 스탈린이나 코민테른의 총서기 지미터로푸의 생각은 바오안에 있던 중공중앙의 영도들과는 정반대였다. 사건발생 당일 중공중앙은 3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답을 기다렸다. 모스크바에 있던 코민테른 중공 대표단 단장 왕밍(王明)은 스탈린에게 장제스를 총살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과 지미터로푸 코민테른 총서기는 시안사변은 일본과 친일파인 왕징웨이(汪精衛)의 음모라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소련의 국가 이기주의가 우선한 것이다. 1936년을 전후해 소련의 형세는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히틀러가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소련을 위협했다.

소련은 애초 중국을 방패막이로  화근 덩어리인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이 ‘반공협정’을 맺는 바람에 안팎으로 적을 맞는 꼴이 되었다. 스탈린은 이들 국가의 위협을 막기 위해 세계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구축과 함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끌어들여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기에 스탈린에게는 시안사변이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소련은 12월 14일 당기관지 이즈베스타 사설을 통해 “시안사변은 장쉐량이 친일파 영수 왕징웨이와 결탁해 항일운동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 것으로 겉으로는 항일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분열하는 행위다. 중국이 계속 혼란 속으로 빠져들면 외국 강도들의 침략으로 희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시안사변을 맹비난했다. 터리얼의 ‘마오쩌둥 전’에는 이때 마오가 스탈린의 전보를 받고 벌컥 화를 내며 이 전보를 찢어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터리얼은 신중국 건국 후 황화(黃華) 외교부장으로부터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중국 명운의 큰 물줄기를 바꾼 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은 훗날 국민당이 공산당에 질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해 구술(口述)한 자료에서 ‘민심을 얻어야 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因得民心而得天下)’는 천고(千古)의 철칙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장제스가 성골(聖骨)과 잡골(雜骨)을 차별해 차도살인(借刀殺人)이란 꼼수로 군심(軍心)을 어지럽힌 것도 한 원인으로 꼽았다. 장제스는 잡골인 자파이쥔(雜牌軍)을 비적소탕전 전위에 동원하고, 성골인 중앙군은 후위에 배치해 병력손실을 막아 ‘잡패군’으로부터 큰 불만을 샀다고 토로했다.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불공평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홍군의 장정 때 길을 열어줬던 광둥-광시의 군벌 천지탕(陳濟棠), 칭하이성(靑海省) 마부팡(馬步芳), 닝샤성(寧夏省) 마홍쿠이(馬鴻逵), 신장성(新疆省) 성스차이(盛世才), 화베이(華北) 쑹저위안(宋哲元), 한푸취(韓復榘), 싼시성(陝西省) 양후청 등으로 그들 모두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잡패군으로 분류해 차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싸워봤자 자기들만 손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싸우는 시늉만 한 것이다. 장쉐량은 이처럼 장제스와 국민당의 실패의 요인에 대해 민심과 군심을 함께 잃은것과  당내의 부패, 장제스의 독재를 꼽았다. 그는 특히 장제스가 인재(人才)를 쓰지 않고 누차이(奴才)를 등용해 대사를 그르쳤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 ‘누차이’이는 보통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을 듣고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장쉐량은 인재는 인격이 있고, 배우지 않고도 깨우치는 양지(良知), 그리고 넓은 마음을 갖고 있는데 반해 ‘누차이’는 그 반대로 개인의 이익만을 만족시키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라고 구분했다.(주석 151)

 

시안사변을 결행하면서 ‘나는 36살로 죽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풍운아 장쉐량은 1936년 12월 25일 석방된 장제스와 함께 난징 비행장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돼 10년 형의 금고형을 받고 연금됐다. 장제스는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달아날 때 장쉐량을 끌고가 유폐시켰다. 세월은 덧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장제스의 생일날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장제스는 답례로 낚싯대를 보냈다. 장쉐량의 ‘시계선물’은 많은 시간이 흘러간 만큼 이제 연금을 해제해 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장제스는 달랐다. 아직도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는 뜻으로 낚싯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모진 인연이었다.

세월은 흘러 장제스도 떠났고, 대를 이은 총통이었던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도 스러졌다. 장쉐량은 리종런(李宗仁) 총통시절인 1990년 6월 1일 그의 생일날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연금 된지 55년 만이었다. 파파노인이 된 아흔 살이었다. 장쉐량은 1995년 타이완을 떠나 숨을 거둘 때까지 동생이 거주하던 미국 하와이에서 살았다. 장쉐량은 2001년 10월 14일 하와이 자택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 101살 이었다.

151)張學良談國民黨爲l什麽輸給共産黨  中國共産黨 新聞網 

----------------------------------------------------------------------------------------------------------------------------------

 

72. 샹잉·천이의 홍군 3년 간의 처절한 유격전

 

1934년 10월 홍1방면군 주력부대가 루이진(瑞金 서금) 중앙소비에트 지구를 떠나 장정에 나설 때 잔류한 1만6천여 명은 장정부대를 엄호하고 남방지구의 홍색혁명을 유지, 확장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중공중앙은 장정에 앞서 중공중앙 분국을 설치하고 샹잉(項英 항영)을 분국 서기, 중앙군구사령관 겸 중국혁명군사위원회 중앙소비에트지구 분회 주석으로, 천이(陳毅 진의)를 중앙소비에트공화국 중앙분국 위원 겸 정부판사처 주임으로 각각 임명했다.

11월 말 국민당 군의 거센 포위공격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샹잉과 천이가 통솔하는 홍군은 점차 부대를 쪼개 독립적으로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1935년 2월, 샹잉과 천이가 이끄는 홍군은 준이(遵義 준의)회의 이후 새로 개편한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9로(路)로 나눠 국민당 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방 8개 성(省) 15개 지구로 흩어져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주석 152)

 

샹잉은 1898년 5월 후베이(湖北 호북) 우창(武昌 무창)에서 태어났다. 샹잉은 15살 때 우창의 큰 공장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노동자 생활을 했다. 샹잉은 틈틈이 '라오동저우칸(勞動周刊)' 등 노동관련 신문과 서적 등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샹잉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통한 조직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신념아래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우한 방직공장 노동자 파업을 벌인 뒤 1921년 12월에는 우한 철도노동자 구락부를 만들었다. 1922년 4월에 공산당에 가입, 후베이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노동자 당원이 되었다.

샹잉은 그 후 우한과 상하이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면서 우한 지역 노동운동의 영도자로 인망이 높았다. 샹잉은 1926년 가을 우한에서 노동자규찰대 총대장으로 국민혁명군의 북벌군을 도와 치안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샹잉은 장정 전에 루이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부주석으로 있었다.

 

 샹잉(왼쪽), 천이.

 

신중국 건국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천이(陳毅 진의)는 1901년 8월 쓰촨성 러즈(樂至 낙지)현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사숙(私塾)에 다니다 9살에 소학교에 들어갔다. 17살 때 청두 갑종공업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뒤 1919년에 '노동하면서 공부하는' 근공검학(勤工儉學)의 일원이 되어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천이는 그곳에서 저우언라이, 차이허선(蔡和森 채화삼),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등을 만나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21년 프랑스에서 유학생 애국운동을 조직해 활동하다 프랑스 정부당국에 의해 볼세비키로 지목당해 그해 10월 중국으로 강제 출국됐다. 1923년 차이허선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천이는 1927년 우한(武漢 무한) 중앙 군사정치학교 중앙위원회 서기로 있다가 저우언라이, 주더가 일으킨 난창치이(南昌起義 남창기의)에 참가했다.

그 후 주더와 함께 광둥(廣東 광동)봉기에 참여했다 실패한 뒤 1928년 1월 후난기의 때 노농혁명군 제1사단 당대표에 임명됐다. 천이는 4월에 주더와 함께 징강산(井岡山 정강산)에 들어가 마오쩌둥 부대와 합류해 혁명투쟁을 벌였다. 1930년 홍6군(나중에 홍3군으로 바꿈) 정치위원, 홍22군 군단장, 장시(江西 강서)군구 총지휘 겸 정치위원 등 직을 맡았다. 천이는 이때 장제스의 포위공격 소탕전에 맞서 뛰어난 활약으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운바 있다.

 

샹잉과 천이가 이끈 홍군은 애초 홍1방면군의 장정(長征)을 엄호하면서 소비에트지구 방어 투쟁을 벌였으나 엄청난 병력열세와 빈약한 무기로 창장(長江 장강)이남의 8개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유격전(游擊戰)으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유격대는 장시(江西 강서), 푸졘(福建 복건), 저장(浙江 절강), 안후이(安徽 안휘), 허난(河南 하남), 후베이(湖北 호북), 후난(湖南 호남), 광둥(廣東 광동) 등 8개 성(省) 15개 지구에 분포해 1937년 10월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때 까지 3년여 동안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이들 유격대는 항일전쟁 시기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돼 항일전쟁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남방 근거지에 공산혁명의 씨앗을 뿌려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샹잉과 천이가 지휘한 유격대의 활약으로 국민당 군과 홍군의 전장(戰場)은 장정 중이던 북방지역과 이들을 엄호하던 남방지역으로 나뉘어졌다. 홍군 남방유격대들은 수십만의 국민당 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1방면군의 장정 소탕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아 1방면군의 군사적 압력을 크게 줄이는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들 유격대는 국민당 군의 철통같은 봉쇄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져 3년여 동안 극한적인 처절한 유격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각 지역 유격대들은 국민당 군의 철옹성 포위망으로 상호간의 교통수단이 차단 된데다 당중앙 및 상급 당 조직과의 연락이 끊겨 부득불 독립, 자주적으로 유격전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이들 유격대는 자신들의 병력보다 10배, 20배, 심지어는 50배나 많은 국민당 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었다.

이런 극한적 상황을 견디지 못해 홍군을 떠나 국민당으로 투항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들 배신자는 한 술 더 떠 토벌대의 전면에 나서 설치고 다녔다. 피아(彼我)구분이 안 돼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이 갈렸다. 의심암귀하는 불신과의 또 다른 전쟁을 벌여야 했다.

152) 關于南方3年遊擊戰爭硏究情況的回顧與分析  姜廷玉  中國共産黨新聞網
     未能忘記 陳毅項英在危難之時  時政頻道  新華網

----------------------------------------------------------------------------------------------------------------------------------

 

73. 장제스의 샹잉-천이 소탕작전, 매복지 밀고한 공추…

 

1935년 4월, 장제스는 샹잉과 천이가 '광둥-장시' 변경으로 부대를 이동한 것을 알고 곧바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소탕전(淸剿 청초)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직계부대 제 46사단, 광둥군 위한모우(余漢謀 여한모)의 제1군 3개 사단과 장시성의 무장한 보안단 등 3,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3겹의 봉쇄선을 구축했다. 제1봉쇄선은 광둥-장시 변계 동쪽의 타오장(桃江 도강), 서쪽 장수이(章水 장수), 남쪽 쩐수이(湞水 정수) 지역으로, 이 일대의 나루터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냇가 등을 물 샐틈 없이 통제하였다.
제2봉쇄선은 다위(大余 대여), 난슝(南雄 남웅), 난캉(南康 남강), 신펑(信豊 신풍)사이의 도로연변에 초소와 토치카를 세워 군대를 주둔시켜 밤낮으로 순찰을 돌도록 했다. 제3봉쇄선은 유격대근거지 주변의 폐허가 된 마을이나 촌락에 군대를 주둔시켜 토치카를 세워 요충지를 지키면서 수시로 유격대원들을 수색하거나 추격 소탕전을 펴도록 했다. 위한모우는 산속에 병력을 풀어 유격대 소탕작전에 나섰다.

 

홍군 유격대들은 깊은 산중에 매복하면서 오늘은 이쪽, 내일은 저쪽 하는 식으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어떤 때는 며칠씩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등 국민당 군과 숨바꼭질을 했다. 어느 날 오후 5시께 천이는 나무지팡이를 짚고 부상당한 다리를 질질 끌며 유격대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도중에 국민당 군과 조우해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먼 곳으로 달아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부근에 숨었다. 천이는 잘 걷지 못했기 때문에 경호원과 함께 길옆 도랑의 갈대숲에 숨었다. (주석 153)

 

국민당 군들은 왔다갔다하며 건성으로 수색했다. 중대장은 소대장에게, 소대장은 하사관에게, 하사관은 사병에게 수색명령을 내리는 식이었다. 쫄따구 사병은 마지못해 천이가 숨은 곳 가까이 가 수색하는 척 시늉만하고 돌아가 공비들이 다 도망갔다고 대충 보고했다.

중대장은 주변에서 신발 한 짝을 발견하고 분명히 갈대숲에 홍군 유격대원들이 숨었는데 제대로 수색하지 않았다고 소대장에게 욕을 하고, 소대장은 하사관에, 하사관은 사병들에게 욕을 하는 그런 식이었다. 열 받은 중대장은 자신이 직접 수색하겠노라고 큰 소리치고 갈대숲에 갔다가 겁먹고 돌아와 길옆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서성거렸다.

갈대숲에 숨은 천이와 경호원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을 꺼내들고 더욱 낮은 포복자세로 몸을 숨겼다. 이들은 해질녘까지 기다리다 철수했다. 천이와 경호원은 거짓 철수에 대비해 한 밤이 되어 갈대숲에서 나와 근거지로 달아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어제 갈대숲을 수색했던 국민당 군 중대원들이 다시 출동해 1, 2시간 동안 여기저기 갈대숲을 수색하면서 "안 나오면, 들어가 찾는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무런 동정이 없자 중대장은 신발 한 짝을 들고 "봐라. 다리에 총 맞아 죽었다. 물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한 뒤 부대원들을 철수했다. 당시 국민당 군의 군기와 규율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한 예다.

 

1935년 봄, 홍군 중앙군구 참모장 공추(龔楚 공초)가 24사단 72여단의 70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후난 유격지구를 향해 포위망을 돌파하다 이장(宜章 의장)에서 광둥 천지탕(陳濟棠 진제탕) 군에게 붙잡혔다.

 

포로가 된 공추는 홍군을 배신한 뒤 "샹잉과 천이가 난슝, 다위 일대에 있다. 우리와 헤어질 때 약속했던 곳"이라고 밀고했다. 천지탕은 공추를 '공산당 소탕 유격사령부 소장'으로 임명하고 샹잉과 천이를 잡아오도록 40명의 호위대와 무기 등을 지원했다. 또 1개 중대를 딸려 보내 후미에서 공추를 돕도록 했다. 그해 10월 공추는 호위대를 홍군 유격대원으로 위장하고 베이산(北山 북산) 룽시스(龍西石 용서석) 지구에서 광둥군 위한모우 부대와 거짓 전투를 벌이는 꼼수를 쓰면서 홍군 유격대로 위장해 샹잉과 천이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공추는 행군하다 공교롭게 홍군 비밀 연락소장인 허창린(何長林 하장림)을 만났다.

허창린은 공추가 참모장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비밀연락소로 안내했다. 허창린은 공추가 입고 있는 옷이 아주 새것인데다 부하들이 모두 광둥 말을 쓰는 것을 알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 눈치를 챈 공추가 흉악한 본색을 드러냈다. 공추는 허창린의 권총을 빼앗고 "나는 현재 국민당원이다. 천이와 샹잉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라. 그러면 죽이지는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허창린은 죽는 것이 두려워 곧바로 투항했다. 허창린은 "천이의 비서가 오늘 오후 7, 8명의 유격대원을 데리고 정보를 취합하고 양식을 타러 이곳에 온다. 그들을 붙잡아 길라잡이를 하면 샹잉과 천이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석 154)

 

과연, 천이가 파견한 유격대원들이 왔다. 공추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천이의 비서에게 "나는 수장(首長)을 만나러왔다. 샹잉과 천이 수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기 바란다. 나는 후난에서 아주 큰 유격지구를 확장했다. 오늘 대오를 대동해 두 수장을 그곳의 영도로 모시기 위해 왔다. 너희들 고생이 많다. 직접 쌀자루를 메고 가나-. 우리가 있는 곳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천이 비서는 "참모장, 대오들과 이곳에 계시면 제가 먼저 가서 보고하겠습니다. 먼저 보고하지 않으면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추는 "빨리 그들을 만나야 한다"면서 재촉했다. 비서는 할 수 없이 같이 온 일행들과 함께 쌀자루를 메고 앞장서 걸으면서 공추의 동정을 살폈다. 공추가 비서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병력이 얼마나 되나?"

"우리가 있는 곳은 병력이 많습니다. 50여 명이 됩니다. 또 기관총이 몇 정 있어요.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이겼습니다."

 

비서가 이렇게 허풍을 떨자, 공추는 겁이 났다. 공추는 2명의 호위대가 비서일행과 함께 앞에 가도록 하고 자신은 10여 미터 떨어져 쫒아갔다. 죽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천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까이 왔을 때였다. 허창린이 “이곳은 내가 잘 안다. 천이가 있는 곳이 여기서 얼마 안 된다. 10여 리 정도다. 이곳 지형은 아주 좋다. 대단히 험요하다. 그들 몇 명이 돌아가서 보고해도 늦지 않는다. 우리는 지름길로 가자”고 말했다.

공추(龔楚)가 동의하지 않았다. 허창린이 “꼭 큰 공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공추는 자기생각을 고수했다. 날이 저물어 새벽 4시께 되었을 때 천이가 파견한 몇 사람들이 잽싸게 모두 달아났다. 공추는 붙잡고 있는 경호원에게 “빨리 나를 천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네가 안 가면 총살하겠다. 나는 군민당 군 군관이다. 참모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경호원은 허창린도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데리고 천이가 거주하고 있는 쪽으로 갔다. 초병이 수하를 했다.

 

“누구냐.”

“총 쏘지마. 나야”

경호원이 말했다. 초병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한 사람씩 앞으로 오라”고 했다. 공추는 경호원을 불렀다. 경호원은 “잘 생각하십시오. 총 소리가 나면 천이가 달아납니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경호원이 산으로 냅다 뛰며 “이들은 반동분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초병은 앞에 있던 국민당 군들에게 총을 쏘았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소리가 나자 샹잉과 천이는 산으로 튀었다. 공추가 부대원들과 함께 초병진지로 돌진하자 초병도 달아났다. 공추는 이곳 지리가 험요하고 샹잉과 천이가 전투 대비를 했으리라 생각하고 철수했다. 공추는 다음날 1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끝내 샹잉과 천이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

 

74. 유격대 국공합작 설득한 천이 죽을 고비도 여러번…

 

1936년 6월, 광둥군벌 천지탕과 광시(廣西 광서) 신군벌 리종런(李宗仁 이종인),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가 장제스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외적을 물리친다, 즉 공산당을 소탕한 뒤 일본과 싸운다는 것)’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장항일(反蔣抗日; 장세스에 반대하고 일본에 대항한다)’의 구호를 내 건 ‘양광사변(兩廣事變/장제스에 반기를 든 광둥-광시군벌의 저항사건)을 일으켰다.

이들 군벌의 저항엔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는 틈을 타 자신들의 세력을 중원(中原)에 진출시켜 솥밭형세를 이룰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장제스는 이들 군벌보다 역시 한 수 위였다. 노회한 장제스는 이들을 이해(利害)로 구슬려 3개월도 안 돼 ’양광사변‘을 와해시켰다.

 

장제스는 곧바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광둥-장시 변계의 홍군 유격지구에 대한 새로운 소탕전(淸剿 청초)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직계부대인 46사단을 투입했다. 사단장 다이스샤(戴嗣夏 대사하)는 장제스로부터 ‘토치카 전문가’란 칭호를 듣는 장군이었다. 다이스샤는 토치카 전문가답게 유격지구를 진공(進攻)할 때 산길, 도로, 나루터 등 길이란 길 입구에는 모두 토치카를 세우고 중무장한 군대가 지키도록 했다.

 

또 연좌제인 보갑제(保甲制)를 실시해 10가구를 하나로 묶어 갑장(甲長)을 두고, 한 마을을 일보(一保)로 해 보장(保長)을 두었다. 한 집에서 홍페이(紅匪 홍비 /홍군)와 내통하면 10가구가 책임지도록 하는 연좌제로 마을 사람들을 철통같이 통제했다. 또 산골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하산시켜 집중 거주시키면서 16살에서 40살에 이르는 남자들은 장정대(壯丁隊)로 편성해 국민당 군이 홍군을 수색하거나 추격할 때 동원했다.

 

이처럼 물샐틈없는 거미줄과 같은 봉쇄선으로 홍군 유격대들은 생존과 활동에 큰 곤란을 받게 되었다. 그해 겨울 천이(陳毅 진의)는 다이스샤 46사단의 철통같은 봉쇄로 매이링(梅嶺 매령)의 깊은 밀림 속의 바위동굴(岩洞 암동)에서 20여 일을 살았다. 다행히 매이관(梅關 매관) 황컹(黃坑 황갱)에 사는 장치옌메이(張千妹 장천매)라는 아낙네가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먹을 것을 갖다 줘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그 아낙네마저 다이스샤의 부대원들에게 발각돼 발길이 끊기면서 천이 스스로가 구명도생해야 했다. 당시 천이뿐 아니라 다른 유격지구의 홍군들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하지 못하게 한 봉쇄로 산나물, 산딸기, 죽순 등을 채취하거나 뱀을 잡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들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얼마 후 장치옌메이가 먹을 것을 갖고 와 산 아래 적들이 모두 철수했다고 전해줬다. 장치옌메이를 따라 산을 내려온 천이는 국민당의 신문을 보고 적들이 왜 철수했는지를 알게 됐다. 시안사건이 터져 장제스가 억류됐다는 보도였다. (주석 155)

 

시안사변 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을 위해 싼베이에 근거지를 마련한 홍군주력 부대는 '바루쥔(八路軍; 8로군)'으로, 남방 8개성의 홍군 유격대는 '신스쥔(新四軍; 신사군)'으로 각각 개편됐다. 당시 홍군 유격대들은 곳곳의 산 속으로 흩어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중앙과 연락이 끊겨 당중앙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이해하지 못해 산을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천이는 연락병을 보내 유격대원들에게 당중앙의 뜻을 전하고 하산을 권유했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은 당이 배신한 것으로 오해해 연락병을 총살했다. 이런 사례가 자주 발생해 남방유격대를 '신사군'으로 개편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천이 자신도 '배반자'로 오해를 받아 목숨을 잃을 뻔했다. 후난 유격대 지대장 차오수량(曺樹良 조수량)이 후난-장시 변계의 유격대원을 사살한 사건도 발생했다. 홍군이 홍군을 사살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천이는 마음이 매우 조급해 졌다.

 

  천이(왼쪽)의 3년여에 걸친 유격전때의 모습.

 

1937년 11월 중순, 천이는 후난-장시 변계의 지우룽산(九龍山 구룡산) 유격지구를 찾아갔다. 천이는 후난-장시 변계 유격참모장 두안환징(段煥竟 단환경)과 정치부주임 류페이산(劉培善 유배선)을 만났다. 천이는 그들에게 중앙의 항일민족통일전선 건립에 관한 지시를 전달했다. 그들은 일리가 있다고 이해하면서도 장제스가 홍군 유격대를 섬멸하려는 망상을 꾸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잘 믿으려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시안사변 이후 이른바 '북화남초(北和南剿/싼베이의 공산당 중앙과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남쪽 유격대지구에서는 소탕전을 벌임)정책을 펼쳐 군대를 동원해 더욱 더 남방유격대를 옥죄며 소탕했다.

이 때문에 유격대원들은 통일전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두안과 류는 천이가 당 대표가 아니라 배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체포해 성위원회로 보냈다. 성위원회 서기 탄위바오(譚余保 담여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다음 날 탄위바오가 모제르총을 허리에 차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홍군 모자를 쓰고 천이 앞에 나타났다.

 

"당신이 탄위바오인가?"
천이가 물었다.

"내가 탄위바오다. 당신은 나를 안다!"
탄위바오가 대답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천이가 답했다. 탄위바오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알고 있다. 내가 징강산에 있을 때 당신이 단상에 올라 이야기를 했다. 의기양양했다. 우리들은 아래에 앉아서 들었다. 당신이 이야기한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무엇이라고 말했나!"

천이가 물었다.

"당신은 혁명에 대해 이야기 했다. 견결하게 말했다. 적에게 투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배반자가 됐다. 빨리 솔직하게 말하라.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너희들 영도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너희들이 남겨놓은 천홍스(陳洪時 진홍시), 이 반도(叛徒)가 이곳의 영도자다. 너는 지금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계급투쟁에 어떻게 협력이 가능한가. 너희들은 전부 가서 국민당과 합작해라. 나는 협력을 안 한다. 나는 끝까지 혁명을 하겠다."

탄위바오가 길게 말했다.

"탄위바오 동지, 당신은 자기만 생각하고 큰 국면을 보지 않는다. 반도(叛徒), 반도하는 데 당신은 공산당원이다. 당신은 조직을 믿어야 한다. 마오 주석과 주더 총사령관은 북방에서 항일협력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싸울 수 없다. 국민당 군과 싸우는 것은 당의 방침에 어긋나는 불일치다."

"너는 교활하게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너는 배반자다!"

탄위바오가 이렇게 말하자, 주위에 있던 홍군들이 천이가 대동한 사람들을 두둘겨 패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그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지구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폭행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천이가 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꾸짖었다. 탄위바오의 부하가 말했다.

“저들이 당신이 배신했다고 모두 불었다.”

“완전히 웃기는군. 어떤 배신자가 이렇게 어리석은가. 포승을 풀어라.”

“포승을 풀라고? 우리는 오늘 밤 네 목을 벨 텐데 풀어달라고?”

탄위바오가 비아냥거렸다.

“탄위바오 동지, 이러면 안 된다. 총살은 안 된다. 공산당원은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당신, 지안(吉安 길안), 난창(南昌 남창), 옌안(延安 연안)에 사람을 보내 내가 여기 온 것을 자세히 알아보라. 주더 총사령관은 난징에 갔다. 예졘잉은 우한, 샹잉은 며칠 전 난징에서 돌아왔다.”

“샹잉, 예졘잉은 고사하고 네가 스탈린, 마오쩌둥이 파견했더라도 나는 너를 체포할 수밖에 없다.”

“개새끼, 너는 비적 우두머리다. 나는 네가 공산당원이라고 생각해 오랫동안 참았다. 너희들의 많은 장병들이 견결해 나는 대단하게 생각했다. 당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아 너희들이 영광스러웠다. 오늘 너희들이 나를 반도라고 욕하는 것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다. 너희들이 의심하는 것 당연하다. 너희들이 계급적인 처지에서 볼 때 갑자기 통일전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 내가 샹잉을 말하고, 예졘잉, 주더가 파견했다고 얘기했는데 너는 나를 체포한다고 했다. 스탈린, 마오쩌둥이 파견했다고 해도 그런다고 했다. 마오쩌둥, 스탈린이 파견했는데 네가 어떻게 체포할 수 있겠는가? 너는 이미 당의 입장을 떠났다. 네가 어떻게 성위(省委) 서기인가? 우리 모두 확고한 계급적 입장을 세워야 한다. 유격전쟁은 당연하나, 토비(土匪)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탄위바오 너는 나를 총살해도 좋다. 너는 원래 나를 총살하려고 했다. 네가 공산당원이라면 나를 총살할 수 없다. 너는 비적 우두머리다. 총살해라!”

 

천이가 체포된 지 4일째 되는 날 천이를 지키는 유격대원이 천이에게 말했다.

“탄(위바오) 서기가 당신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잘 이야기해야 한다. 당신은 당을 배반한 경위를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 하라. 적과 어떻게 결탁해서 왔는지를 솔직하게 말하면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다.”

 

천이가 구류된 지 5일째 되던 날 탄위바오는 홍군 유격대를 집합시킨 뒤 장황하게 천이의 죄목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심판했다.

“오늘 천이(陳毅 진의)라고 하는 중요한 인물을 대면한다. 그는 당연히 고참 당원이다. 우리는 이 이름을 안다. 그는 지주고, 우리는 심사한다. 모두들 동요해서는 안 된다. 계급적 입장을 확고히 해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를  단죄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에는 소비에트가 정확하다고 했다가 지금은 소비에트가 필요 없다고 한다. 소비에트를 취소했다. 이것은 당연히 기회주의다! 둘째, 토지혁명을 하면서 그는 계급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홍군을 개편해 국민혁명군에 편제시켜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기회주의고 투항주의다. 지식분자들은 고생스러운 유격전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민당에 대한 환상이다. 우리는 확고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단, 그를 반도로 대해서도 안 된다.”

 

그날 밤 탄위바오는 천이를 찾아가 경호원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이렇게 말했다.

“이곳엔 아무도 없다. 당을 배반한 과정을 다 말하라. 비밀은 지키겠다. 너의 지위를 보장해 주겠다. 책임 있는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천이는 화를 내면서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생각해 봐라. 진짜 반도라면 이렇게 간단하겠나. 어떻게 매수하겠나?”

 

천이가 수감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산 아래의 국민당 군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유격대원들은 탄위바오에게 연락책을 지안(吉安 길안)에 보내 자세한 상황을 파악해 오도록 건의했다. 탄위바오도 산 아래 국민당 군이 토벌하러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철수한 사실을 알고 천이를 오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위바오는 연락책을 지안에 파견해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지안에 이미 신사군 통신처가 생겼고, 천이가 중공중앙의 대표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탄위바오는 “내가 경솔했다. 큰일을 그르칠 뻔 했다”며 사과를 전하고 천이를 풀어줬다. 천이는 또 한 번 저승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남방유격대는 국민당 군의 물샐 틈 없는 봉쇄와 대규모 정규군의 소탕작전에 맞서 소규모 전투단위로 산지사방에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는 고립된 상황에 처해 외부 정세변화에 어두워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불신이 판치는 살풍경한 시절이었다.

1935년 2월, 중앙 분국이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9로(路)로 나눠 루이진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때 마오의 둘째 동생 마오쩌탄(毛澤覃 모택담)은 일단의 홍군을 이끌고 푸젠성 쪽으로 달아나 중공 푸젠성 비서장을 맡았다. 4월에 유격대 제3지대(支隊) 지대장에 임명된 마오쩌탄은 푸젠 군구(軍區)가 스두(四都 사도) 지구에서 국민당 군에 겹겹이 포위당했을 때 지대를 이끌고 장시(江西 강서)로 탈출했다.

마오쩌탄은 4월 26일 루이진(瑞金 서금) 황산커우(黃膳口 황선구)의 홍린(紅林 홍림) 산간지역에서 국민당 군과 교전을 벌이다 사살됐다. 마오의 첫째 동생 마오쩌민(毛澤民 모택민)으로부터 마오쩌탄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은 마오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침상에 누워 계실 때 나를 불러 막내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큰 형으로서 구실을 못해 나의 책임이 크다”고 침통해 했다. (주석 156)

155) 陳毅被圍20天寫下絶筆詩作‘梅嶺三章’ 時政頻道 新華網 三年遊擊戰爭中 陳毅元帥五次脫險記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156) 毛澤東-共有多少位親屬爲革命獻出生命  浙江日報

----------------------------------------------------------------------------------------------------------------------------------

 

75. 당 장악 나선 마오, 류사오치와 손잡고…

 

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기반한 통일전선과 항일전쟁의 분위기가 뜨던 1937년 초, 마오쩌둥, 뤄푸(洛甫; 장원톈), 저우언라이, 보구 등 중공 영도자들은 당 운명의 결정적 전환에 고무되면서 앞날에 대한 대책마련에 분주했다. 이들은 국-공간의 10년 내전이 이미 끝났고, 국내의 평화실현으로 당이 원기를 회복해 앞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더 없이 귀중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마오는 숙고와 숙고를 거듭했다. 이 천재일우의 시기에 무엇을 하고, 우선적 처결사항은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한 것이다. 마오는 시안사변의 결과물인 국공합작과 통일전선 구축 협상작업이 탄력을 받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시안사변 이후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하는 중공중앙 대표단인 둥비우, 보구, 예젠잉 등이 시안에 머물면서 벌이고 있는 국민당 정부와의 협상은 밝은 전망을 보였다.

마오는 용의주도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저우언라이의 능력을 십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오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과 발전에 따라 당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를 상정했다. 하나는 통일전선 문제가 잘 안 풀릴 경우 좌경적 폐쇄주의가 돌출할 수 있고, 또 하나는 국공합작이 성공해 통일전선으로 갈 경우 우경적 투항주의가 쉽게 출현할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주석 157)

 

사색에 잠긴 마오는 1년여 전인 1935년 12월 와야오바오(瓦窯堡 와요보) 회의 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마오는 그때 "좌경 폐쇄주의는 당내의 주요한 위험요인이다. 우경 투항주의 또한 대단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마오는 천두슈의 우경 투항주의를 1927년 대혁명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왕밍의 좌경 폐쇄주의는 홍군이 전대미문의 장정으로 내몰리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런 우려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고 확신한 마오는 사전에 싹을 제거하기 위한 시기로 국민당과 담판이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평화적 협상국면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목적은 당군정(黨軍政)의 우월적인 장악이었다. 그러려면 당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입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신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깎을 수 없으니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마오는 오랫동안 눈여겨보았던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를 떠올렸다.

 

  뤄푸(洛甫; 장원톈), 류사오치.

 

당시 마오쩌둥은 중공군대의 주요 창건자이자 중공에서 최대의 근거지를 만든 중공소비에트지구의 개척자였다. 때문에 마오는 중앙홍군에서 폭넓은 간부들의 지지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대단히 두터운 권력의 정치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오는 일찍이 직접 중국공산당 창당 작업에 참여해 현재 얼마 남아있지 않은 1대 대표의 한 사람으로 당의 역사에서 우두머리 반열에 속했다. 군(軍)내에서는 징강산파를 필두로 해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1935-1936년 사이의 중국공산당 영도층에서 장궈타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마오와 어깨를 겨룰 수 없었다. 당의 최대 주주인 셈이었다.

마오는 당내의 자격과 경력, 지위 등을 내세워 당의 전국적인 방침과 정책, 기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기해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력구조의 기저에는 ‘볼세비키 28인’의 한 사람이자 당중앙 총서기인 뤄푸(洛甫; 장원톈)와의 밀접한 합작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한 예로 마오와 뤄푸의 정치적 결합의 제일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따로 파벌을 세워 당의 분열을 기도한 장궈타오를 물리쳤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마오와 뤄푸는 준이회의 이후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뤄푸는 마오를 십분 존경했다. 뤄푸는 당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거의 마오에게 먼저 의견을 구했다. 뤄푸와 마오가 당의 중요 문건에 관해 연명으로 발표할 때도 마오가 주도적 구실을 했다.

마오는 전력으로 군사를 지휘하면서도 당의 전국적인 일에 관해서도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다. 마오는 코민테른의 관련 기율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영도층의 단결에 노력하는 한편, 교묘하게 자기의 영향력을 높이며 매우 조심스럽게 당의 영도조직을 운용해 국부적 문제들을 조정했다. 당시 중앙 최고층에서 마오는 코민테른에 뿌리를 둔 교조적 종파분자들과의 합작을 계속 유지했다.

중공 6차 4중전회, 5중전회에서 이뤄진 정치국 구성원은 그대로였다. 이들은 사전에 코민테른의 비준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대부분 당의 선전부문이나 당의 실무, 지방 당 조직 등에서 일하고 있었다. 해서 이들 교조적 종파주의 집단은 마오가 틀어쥐고 있는 홍군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군의 중요 간부들은 정치국회의에 참석하도록 해 이런 형식이 점차 관례화가 되고 있었다.

 

마오는 장정 중 유명무실해진 국가 정치보위국을 ‘방면군 정치보위국’으로 바꿔 코민테른파인 국장 덩파(鄧發 등발)를 전보조처하고, 루이진 시절 자신의 비서였던 왕서우다오(王首道 왕수도)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각종 정보를 관장하는 핵심적 부서를 직접 자기의 관할아래에 둔 것이다. 마오는 이어 중공중앙 비서처를 원상회복시켜 중앙 군사위원회 기밀과, 중앙 사회부 기밀과, 그리고 당, 군 기밀공작 등을 이끌도록 해 자신의 엄격한 감독 아래 기밀조직을 직접 통일 관리했다.

마오는 이와 함께 코민테른 등 모스크바와의 통신연락 업무를 장악해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치밀성을 보였다. 하지만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어려운 문제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오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지난날의 정치노선에 대한 평가였다. ‘중공의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은 마오 앞에 가로놓여 있는 넘기 어려운 높은 산이었다.

이 결론은 모스크바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준이회의 참가자들이 일치 옹호하고 인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마오와 뤄푸의 정치결합의 기초이기도 했다. 장제스에 쫒겨 달아나는 군사적 압력을 극심하게 받던 1935년 1월 준이회의에서 마오는 장기적 목표아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이런 결론에 동의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1937년)에 이르러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마오는 ‘중공의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은 교조적 종파주의 집단의 정치적인 합법성을 인정하는 기반으로 반드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내에 만연하고 있는 교조적 종파주의 분위기를 타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순조롭게 당을 개혁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기 어렵고 자신의 지위 또한 온전히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주석 158)

 

하지만 이 결론을 뒤집어 엎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코민테른의 외부적 장애 뿐 아니라 총서기 뤄푸가 당내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뤄푸는 6차 4중전회에서 당의 영도로 선택됐고 교조적 종파주의와 실타래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었다. ‘중공의 정치노선이 정확하다’는 결론이 잘못됐다고 선언할 경우 뤄푸와 일단의 영도 간부들의 직접적 공격과 이에 따른 당내의 동요가 불가피했다. 당내에 미치는 영향 또한 심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뤄푸의 반발이 불 보듯 뻔했다. 1937년 초의 당내 역학과정에서 마오와 뤄푸의 정치합작과 마오의 사고 사이에서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오는 1931년 제4차 반 포위공격 소탕전 당시 왕밍(王明 왕명)이 주도하는 좌경 교조적 종파주의 노선에 맞섰다가 패퇴해 4년여 동안 겪었던 인고의 세월을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준이회의 이후 확립한 마오의 군(軍) 주도와 뤄푸의 당(黨) 관할의 권력구조에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마오의 지위는 점점 강화되는 반면에 뤄푸는 당의 이론과 선전 교육 등 실무적 수준에 그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정치적 협력관계가 밀착하고 있었다. 보구(博古)는 당의 영도그룹에서 자신의 역할에 자족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이미 당내투쟁에서 당중앙에 도전했다가 깨져 입지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처럼 당내 기류는 어느 때 보다 마오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자신이 직접 당의 노선을 평가하고 비판할 경우 뤄푸는 물론 당의 영도들과 정면충돌이 불가피해 위험부담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서 당의 노선을 바로잡지 않고 마지못해 묵인하면서 시간을 천연시킨다는 것 또한 묵과하기 힘들었다. 이런 딜레마에 빠졌을 때 류샤오치가 나타났다. 마오는 천석고황의 고민덩어리를 류샤오치를 통해 척결하려는 기회를 포착하고 치밀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끌어들여 류샤오치와의 합작시대를 열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는 또한 1942년 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옌안 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의 시원(始源)이 되기도 했다.

----------------------------------------------------------------------------------------------------------------------------------

 

76. 류사오치 '지난 10년'에 공격의 포문을 열다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는 마오보다 5살 아래인 1898년 마오의 고향과 가까운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닝샹(寧鄕 영향)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고향에서 사숙(私塾)과 소학교를 다닌 뒤 1919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에 마오가 후난에서 꾸린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이듬해인 1921년에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동자 공산주의 대학(중산대학)에 들어간 뒤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류샤오치는 1922년 귀국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중국노동조합 총연합회 전신인 중국노동조합 서기부에서 일했다. 류샤오치는 그해 9월 14일 마오가 총지휘해 전국을 뒤흔든 후난 접경에 있는 안위안루쾅(安源路礦 안원로광) 노동자구락부 주임으로 광산노동자 대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25년 5월,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중화 전국노동조합 총연합회 부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류샤오치는 1927년 5월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그해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뒤 류샤오치는 상하이, 톈진, 베이핑(베이징), 하얼빈 등지에서 지하 비밀공작 업무에 종사했다. 1931년 1월, 중공 6차 4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됐고 중화 전국노동자 총연합회 조직부장을 지냈다. 1932년 겨울에 루이진 중앙소비에트 혁명근거지에 들어가 중화 전국노동자 총연합회 소비에트지구 중앙집행국 위원장, 중공 푸젠성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1934년 10월 장정에 참여해 중국노농홍군 제8군단, 제5군단 중공중앙대표와 제3군단 정치주임을 지냈다. 1935년 1월 준이(遵義 준의)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1936년 봄, 화베이(華北)지방에서 중공중앙 대표로서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류샤오치는 1937년 2월 20일,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당 총서기인 뤄푸에게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지도원칙과 성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장장 1만여 자에 이르는 두 통의 서신을 전달했다. 류샤오치는 정치의견의 성격을 띤 이 장문의 서신에서 중공중앙의 다년간의 노선에 대해 자신의 회의적 시각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류샤오치는 대담하게도 코민테른과 준이회의에서 내려진 ‘중공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류샤오치는 1차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 이전과 이후, 특히 중공 6차 4중전회이후의 중공의 좌경적 과오에 대해 예리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류샤오치는 이 장문의 서신에서 중공중앙 기관의 3가지 금기사항을 건드렸다. (주석 159)

 

1. 류샤오치는 1927년 대혁명 실패의 주요원인은 ‘우경적인 천두슈(陳獨秀 진독수)주의’ 뿐만 아니라 우경 기회주의의 다른 일면의 과오, 즉 좌경 모험주의를 거론했다. 류샤오치는 자신이 직접 겪은 광저우(廣州 광주), 우한(武漢 무한) 시기의 노동자와 민중운동 과정에서 좌경의 열광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 맹렬하게 비난했다. 류샤오치의 견해는 코민테른과  중공 6대 이후의 여러 차례의 결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2. 류샤오치는 비록 중공이 10년래 집행했던 잘못된 정치노선을 직접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되풀이해 중공중앙이 10년래 좌경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10년의 과오가 이미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고 힐난했다. 류샤오치는 특히 중공의 10년 바이취(白區; 장제스 통치지역)공작 방침을 비난하면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0년의 정치노선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류샤오치는 당의 10년 역사에 대한 당내 공개토론을 요구하면서 창끝을 중공 6차 4중전회 후의 중공정치국에 겨누었다. 이것은 중앙 관련 영도들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암시했고, 중공 중앙영도기구의 개편 요구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류샤오치의 장문의 서신과 관련해 미리 마오의 의견을 구했다거나 마오의 격려가 있었다는 등의 사전 교감설에 대해 증명할 만한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여러 자료의 분석에 따르면 둘의 교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여러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1935년 12월 29일, 중공중앙 상임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류샤오치를 북방국 대표로 임명했다. 북방국은 애초 톈진에 있다가 1937년 초 베이핑으로 옮겼다. 1936년부터 마오가 있는 싼베이(陝北)와 북방국 사이에는 무선통신시설 뿐 아니라 밀사를 파견할 수 있는 등의 연락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와 류가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기본조건은 갖추고 있던 셈이었다.

 

류샤오치의 장문의 서신은 중공중앙 핵심 영도층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37년 3월 24일, 4월 24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두 차례 회의를 열어 바이취(白區 백구) 공작 업무 문제를 토론했다. 뤄푸는 류샤오치의 의견에 극력 반발했고, 일부 정치국원들은 뤄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들은 류샤오치의 대혁명실패 원인 분석은 천두슈의 과오를 물타기하는 것으로 류샤오치는 ‘반 코민테른, 반 중공중앙’의 천두슈의 ‘아바타’라고 강력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류샤오치가 장궈타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질책했다.

중앙정치국 대다수 구성원들은 류샤오치가 너무 과장해서 말했다고 공격했다. 류샤오치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마오는 ‘류샤오치가 중앙에 반대하는 야심’을 갖고 쓴 서신은 아니라며 중재에 나섰다. 마오는 구체적 문제의 쟁론에 직접 끼어들지 않고 류샤오치와 뤄푸의 충돌 무마에 진력했다. 류샤오치는 뤄푸의 준열한 비판을 받았으나 마오의 공명(共鳴)을 불러일으켰다. 마오의 이런 태도는 류샤오치를 고무시켰다. 힘을 얻은 류샤오치는 과감하게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류샤오치는 중공중앙이 소집한 5~6월 바이취공작 회의에서 뤄푸에 대해 맞대결 도전의 포문을 열었다. (주석 160)

 

159)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毛澤東因何替劉少奇講話   理論頻道  新華網
160)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毛澤東因何替劉少奇講話   理論頻道  新華網

----------------------------------------------------------------------------------------------------------------------------------

 

77. 바이취 공작회의, 류사오치 재능 간파한 마오

 

중공중앙은 1937년 5월 17일부터 6월 10일까지 옌안(延安 연안)에서 국민당 통치지역에서의 공산당 공작활동, 즉 바이취(白區 백구) 공작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류샤오치와 뤄푸간에 극렬한 논쟁이 벌어져 한 차례 중단됐다가 마오의 중재로 다시 열리는 등 파란을 일으켰다. 바이취 공작회의의 1단계라 할 수 있는 5월 17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회의는 류샤오치가 보고한 ‘바이취의 당과 군중공작에 관하여’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류샤오치 보고의 주요내용은 앞서 3월 4일 뤄푸에게 보낸 장문의 서신내용의 반복으로 10년 동안 당이 행한 바이취 지구의 지도노선인 ‘좌경’ 전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여기서 ‘좌경’은 취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 리리산(李立山 이립산), 왕밍(王明 왕명)으로 이어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노선과 모스크바 추종세력인 28인의 볼세비키파들의 노동자 중심의 도시거점 혁명 전략파들의 지도이념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오의 혁명 전략과 반대편에 있는 그룹인 셈이다. 성분으로써는 징강산(井崗山 정강산) 국내파와 코민테른의 해외파와의 대결양상이었다. 류샤오치가 좌경노선으로 바이취 공작은 거의 실패했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많은 대표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류샤오치를 공격했다. 이들은 바이취 공작의 ‘총 노선은 정확했다’고 평가했다. 회의가 격렬한 논쟁으로 아수라장이 되자 중앙서기처는 일시적으로 회의 중단을 선포했다.

 

6월 1일부터 3일까지 회의가 재개돼 바이취 공작회의에서 제기된 10년 동안의 바이취 공작에 대해 집중 토론을 벌였다. 마오는 얼마 전 류샤오치와 뤄푸의 논쟁 때 보였던 소극적 자세와는 달리 류샤오치의 보고는 ‘기본적으로 정확했다’고 류샤오치에게 힘을 실어준 뒤 류가 바이취에서 ‘풍부한 경험’으로 공작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칭찬했다. 마오는 3일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류샤오치의 중요발언을 지지했으나 10년 동안의 정치노선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6월 6일, 바이취 공작회의가 재개돼 회의는 2단계에 접어들었다. 뤄푸는 의식적으로 마오가 지난 번 회의에서 언급한 내용 중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끌어다 자기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중공중앙을 대표해서 ‘바이취에 대한 당의  현재의 중심임무’라는 보고를 했다.

 

“공작을 실천하다 나타나는 어떤 잘못은 피할 수 없다. 중공이 바이취에서 공작을 하다 범한 과오의 성질은 정치노선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확정된 정치노선 또는 정치경향이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범한 책략상의 과오다. 이러한 잘못은 군중 책략과 군중 공작방식을 이끄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 과오다. 총체적 영도의 잘못이 아니다. 당의 견결한 영도투쟁의 방침은 정확하다.”

 

뤄푸는 류샤오치의 중공중앙 바이취 공작에 대한 반대를 반박하면서 ‘합법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뤄푸는 ‘과거 당이 합법주의 투쟁에 반대한 것은 여전히 옳았다’는 견해를 견지하며 ‘지난날의 모든 비합법적 투쟁은 필요하고 정확했으며 과거 주요 투쟁의 방식은 비합법적인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뤄푸는 류샤오치가 매번 혁명투쟁 성패의 결과를 혁명투쟁의 가치로 판단해 ‘실패한 투쟁을 무의미한 투쟁’으로 매도하는 ‘맹동주의(盲動主義; 모험주의)’에 매몰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뤄푸는 또 류샤오치가 폐쇄주의, 모험주의를 무기로 삼아 중공 10년의 바이취 공작의 성취를 전면 부정하고 공허하게 간단히  '좌경 모험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야 말로 맹동주의고 모험주의며 기회주의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뤄푸의 보고는 바이취 공작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형세가 불리하자 류샤오치는 한 발 물러났다. 6월 9일과 10일, 류샤오치는 회의 결론보고에서 뤄푸의 보고에 동의표시를 하고 자아비판에 나섰다. 류샤오치는 "내가 보고에서 강조한 것은 '좌경 폐쇄주의와 모험주의‘"라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꼬리를 내렸다. 류샤오치는 구체적 분석이 부족해 보고가 지나쳤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류샤오치와 뤄푸가 당의 10년 역사와 바이취 공작 평가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은 어떤 실질적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류샤오치는 좌절을 맛보았으나 이 쟁론은 중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옌안 정풍운동의 전주곡으로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이후 마오와 류샤오치가 힘을 합쳐 6차 4중전회 정치노선을 전면 비판하고, 마오와 류는 이런 연대를 통해 왕밍 등 좌파들을 깨부수는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어쨌든 마오는 이번 논쟁을 통해 비록 자신의 당내 영향력이 커가고 있지만 반대세력도 만만찮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오의 가장 큰 소득은 '교조적인 종파분자'들이 당내에 광범하게 퍼져있어 그들을 일조일석에 쓸어버린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오는 '교조 종파집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고 조직상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샤오치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았다. 뤄푸와 류샤오치의 논쟁은 류의 당내 영향력과 지명도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류샤오치는 비록 당의 고참 영도자의 한 사람이지만 장기간 바이취 공작을 하느라 당의 영도층에서 멀리 떨어져 당의 중대한 군정(軍政)문제 정책 결정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중앙소비에트가 있었던 루이진 시기의 2년 동안도 전국 노동자총연합회 집행국을 이끄는 정도여서 당시 주요 정치 영도자인 저우언라이, 뤄푸 등과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했다. 이에 따라 류샤오치는 당과 군에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그런 류샤오치가 이번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심원한 사상과 이론수준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 것이다. 전당, 특히 당의 고급간부들이 류샤오치를 다시 볼 수 있는 하나의 전기가 됐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류샤오치의 이번 논쟁은 마오의 '정치적 동업자'로 발탁되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 반열에 오르는 일생일대의 획기적 운명의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겠는가. 30여 년 후에는 마오의 버림을 받아 홍위병(紅衛兵)의 핍박으로 세상을 떠나야하는 비운의 명운이 될 줄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야수적 속성과 무상함을 오늘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뤄푸와 류샤오치의 쟁론에 대해 마오의 태도는 명확하면서도 미묘했다. 논쟁 초기에 마오는 쟁론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면서 류샤오치를 마음속으로 지원해 류의 의견이 중앙 영도층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논쟁 후기에서는 류샤오치가 뤄푸와 당내의 거대한 압력을 견디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해서 6월 1~3일의 정치국 회의에서 류샤오치의 논점을 성원하는 연설을 했으나 반대가 많은 것을 간파하고 중재하는 선에서 머물렀다.

 

마오는 이러한 과정에서 류샤오치의 걸출한 재능을 발견했다. 우선 류샤오치가 바이취 공작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류샤오치가 뛰어난 이론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다. 류샤오치는 10년 동안 당의 좌경 전통과 근원을 분석하면서 '사상방법과 철학방법상의 과오', 즉 '형식논리'가 광범한 당원들의 사상방법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질타했다. 류샤오치는 '형식논리'가 허다한 과오의 근원을 조성하고 있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것은 마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마오는 자신의 위엄과 명망을 류샤오치 지지에 모든 것을 던지지 않았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뤄푸와의 합작을 강화해 뤄푸와 곧 귀국하게 되는 왕밍과의 새로운 결합을 막을 심산이었다. 마오는 바이취 공작회의가 끝난 뒤 류샤오치를 중공중앙 서기처(상임위원회)에 발탁하지 않고 베이핑에서 타이위안(太原 태원)으로 옮긴 중공중앙 북방국 서기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주석 161)

 

161)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毛澤東因何替劉少奇講話   理論頻道  新華網
----------------------------------------------------------------------------------------------------------------------------------

 

78. 홍군 본격 항일전쟁 돌입…8로군의 대승 

 

시안사변의 후속조처로 1937년 2월 19일 난징정부와 중공중앙은 항일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데 묵시적 협약을 체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소련과 중공중앙에 협조관계의 재확립을 공식 요청했다. 이는 앞서 중공중앙이 성명을 통해 밝힌 무력에 의한 국민당 정부 전복종식 선언에 대한 답신이었다. 중공중앙은 '소비에트 정부'를 '중화민국 특별지역'으로 변경해 이 지역에서 보통선거 제도를 시행하고 지주재산의 몰수정책을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당과 중공중앙 간에 느슨한 형태의 항일연합이 결성되었다.

이어 7월 7일 밤, 베이핑(베이징) 서남쪽에 있는 마르코폴로 다리로 불리는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에 주둔한 중국군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신호탄으로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이 터졌다. 일본의 30만 대군이 화베이(華北 화북) 지구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마오와 주더 등 홍군 영도자들은 장제스에 전문을 보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적과 싸워 국가를 보위하고 국토를 보전 하겠다"는 홍군 장병들의 바람을 전달했다. 7월 8일 최종 협약이 체결돼 국공 양당의 제2차 합작이 이뤄졌다.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장제스는 21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다음날인 14일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재편성되어 형식상으로는 산시(山西 산서) 군벌 옌시산(閻錫山 염석산)이 지휘하는 국민당 군 제3전구(戰區)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8로군은 사실상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 독립부대로 총사령관 주더(朱德 주덕), 부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의 지휘아래 홍군 4만 5000명의 3개 사단(115, 120, 129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중부지역 창장(長江 장강) 하류지방에는 샹잉(項英 항영)과 천이(陳毅 진의)가 이끌던 남방 유격대의 홍군이 10월 12일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됐다. 난창봉기의 주요 지도자였던 예팅(葉挺 엽정)과 샹잉은 각각 사령관과 부사령관에 임명돼 신사군을 지휘했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9월 22일 공식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했다.

 

1937년 8월 하순, 마오는 뤄촨(洛川 낙천)에서 열린 중공중앙 정치국확대회의에서 8로군의 통솔과 관련해 ‘독립 자주적이고 산지 유격전’에 전념하는 전략방침을 강조했다. 마오는 펑더화이가 건의한 산지 유격전을 원칙으로 하되 유리한 조건이 형성될 경우 배후에서 병력을 집중해 적의 병단을 소멸하는 전략에 추가로 동의했다. 산시(山西 산서) 전선에 투입된 8로군은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 일본 침략군의 오만한 기세를 꺾어 홍군의 위세를 드높였다. 8로군은 여세를 몰아 전국의 인민과 연전연패하는 국민당 군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본격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8로군의 전략적인 총지휘는 옌안에 있는 마오가 담당했다. 8로군의 첫 전장터가 된 곳은 핑싱관(平型關 평형관) 전투였다. 총사령관 주더는 8로군을 양로(兩路)로 나눠 일로는 허룽(賀龍 하룡), 런비스(任弼時 임필시)가 120사단을 인솔해 옌먼관(雁門關 안문관)을 급히 구원토록 했다. 또 다른 일로는 린뱌오(林彪 임표), 녜룽전(聶榮臻 섭영진)이 115사단을 이끌고 밤을 도와 산시성 동북쪽 핑싱관으로 급히 진격하도록 했다. (주석 162)

 

9월 16일, 옌시산은 일본군이 웨이(蔚 울)현에서 서진할 때 14개 여단을 동원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요량으로 주더에게 린뱌오가 이끄는 115사단의 참전을 요청했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전문을 보내 다시 한 번 정규전이 아닌 ‘유격전 방침 고수’를 강조하고 상황에 따라 기동성을 가미한 운동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애초 린뱌오의 115사단을 옌시산의 국민당 군 일부와 협동작전을 펼쳐 일본군이 화베이지역에 깊숙이 진입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링치우(靈丘 영구), 라이위안(淶源 내원), 광링(廣靈 광령), 웨이(蔚 울)현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그런 연후에 다통(大同 대동),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 베이핑선(北平線 북평선), 다통, 타이위안선(太原線 태원선), 베이핑, 스자좡선(石家庄線 석가장선)에 대해 대규모의 측면 기습전을 벌여 링치우, 라이위안, 광링, 웨이 4현에 근거지를 만들 작정이었다.

 

이 작전계획이 성공할 경우 8로군의 일부가 베이핑 북쪽의 러허(熱河 열하) 방향으로 진출해 화북항전의 새로운 국면을 조성해 상당기간 동안 지구전(持久戰)을 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일본군이 9월 22일 밤 핑싱관 진지를 기습 공격해 25일부터 전면 전투가 시작됨에 따라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린뱌오가 통솔한 115사단 주력은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24일 칠흑 같은 밤에 비를 무릅쓰고 핑싱관 동북쪽의 바이야타이(白崖臺 백애대)에 전진해 샤오자이(小寨 소채)촌에서 라오예먀오(老爺廟 노야묘)도로 부근의 산지에 매복했다. 핑싱관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을 지키는 관문의 하나인 중요 요충지로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링치우(靈丘 영구)현 경내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산길이 구절양장의 험로인데다 황토고원의 깊은 산간계곡이 구불구불 이어져 지형(地形)이 험요했다. 25일 오전 7시께 사가가끼(阪垣 판원)사단 제21여단의 후속부대 장병들이 탄 100여 대의 차량과 군수품을 실은 200여 대의 트럭이 8로군이 매복한 계곡으로 들어섰다.

 

8로군은 높은 곳에 위치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대포 등 우수한 병기를 갖고 있었지만 협소한 지형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포(炮)는 부각을 맞출 수 없어 무용지물이 됐다. 반면에 8로군이 갖고 있던 ‘띠과 수류탄(地瓜; 고구마처럼 생긴 수류탄)’은 맹위를 떨쳤다. 8로군이 돌격하면서 쌍방은 백병전의 혈전을 벌였다. 정규군인 일본군의 전투력도 막강했다. 8로군이 선점한 높은 지리적 위치에 있는 라오예먀오를 뺏으려는 일본군의 여러 차례 완강한 공격은 집요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뤘다. 일본군 1천여 명이 전멸했다. 8로군의 대승이었다. 핑싱관 전투는 화베이(華北 화북)지구에서 중국 군대가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던 만큼 상징적 의미가 커 전국의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홍군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대첩을 이끈 린뱌오는 일약 중국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린뱌오는 전투 전에 이곳의 지형지물을 자세히 살펴본 뒤 승리를 장담했다. 린뱌오는 전투가 끝나면 포획한 일본군 포로를 후방에 보내 군민(軍民)들, 특히 국민당 군정관들이 볼 수 있도록 해 그들에게 공산당의 전투력을 과시하고 연패하는 국민당 군을 부끄럽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린뱌오의 계획은 빗나갔다. 소수의 일본군이 탈출한 것 이외에 모두 전사해 한 명의 포로도 생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들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싸웠다.  부상당한 일본군들은 돌팔매질하고 물어뜯는 등 손, 발, 이빨 등 쓸 수 있는 신체부위를 죽을 때까지 다 써먹었다. 이들의 불굴의 저항으로 8로군도 적지 않게 희생당하는 등 악전고투했다. 일본군 부상병들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들것에 태우면 스스로 땅바닥으로 투신해  죽었고, 서로를 죽이는 아수라(阿修羅)의 잔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린뱌오는 전투가 끝난 뒤 총결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석 163)

 

“적들의 전투력은 확실히 강했다. 우리가 과거 북벌에서 소비에트 근거지 전쟁을 벌였지만 이런 강적을 만난 적이 없었다. 적들은 패해 부상당했으나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난 뒤 전쟁터에서 여기 저기 뒹굴고 있는 적의 시체를 볼 수 있을 뿐 생포할 포로는 없었다.-적들의 사격은 정확했다. 기동력 있는 은폐, 부대장악 모두가 뛰어났다. 우리가 만약 적을 가볍게 보았거나 경솔하게 행동했더라면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린뱌오(林彪 임표)는 신중국 건국 후 10대 원수 중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였지만 원수 서열 3위에 이르는 등 마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징강산 시절 린뱌오는 마오의 ‘와와(娃娃 와와: 어린애)’라고 할 정도로 마오가 무척 아꼈다. 린뱌오는 천재론을 내세워 마오를 개인숭배한 원조 인물이자 공산당사상 마오의 후계자로 당장(黨章)에 기록된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마오를 해하고 당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 나 1971년 13일 0시 헬리콥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다 새벽 3시께 외몽고에서 추락해 가족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었다.

마오보다 14살 아래인 린뱌오는 1907년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황깡(黃岡 황강)현 린자다완(林家大灣 임가대만)에서 공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사숙(私塾)에 다녔고 13살 때 쥔신(浚新 준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5살 때 우창(武昌 무창) 공진(共進 공진) 중학교에 전학해 다녔다.

1923년에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5.4운동의 영향으로 1925년 학생운동에 투신해 ‘공진도서사(共進圖書社)’를 만들어 진보서적을 간행했다. 후베이 학생연합회는 린뱌오를 상하이에서 열리는 전국 학생연합 제7차 대표대회에 참석하는 대표로 선출했다. 중학 졸업 후 고향에 돌아 온 린뱌오는 부모들이 인근 학교에 교사생활을 하면서 파산한 집안형편을 보살필 것을 바랐으나 부모들을 설득해 교사직 대신 평생을 군(軍)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는 광저우(廣州 광주)에 있는 황푸(黃埔 황포) 군관하교 4기생으로 들어가 원래의 이름 린줘다(林祚大 임조대)를 린뱌오로 바꿨다. 황푸 군관학교 때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6년 10월 졸업한 뒤 광저우에서 우한 북벌에 참가해 당시 국민혁명군 제4군 예팅(葉挺 엽정) 독립여단에서 견습 소대장을 지냈다. 1927년 국민혁명군 2차 북벌에 참여한 뒤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자 난창기의(南昌起義)에 참가했다. 기의 실패 후 73연대 3대대 7중대장으로 1928년 후난기의(湖南起義)에 참가했고, 개편된 노농홍군 제1사단 제1대대 2중대장으로 주더(朱德)를 따라 징강산에 들어갔다. 린뱌오는 노농홍군 제4군단 28여단 대대장, 여단장을 역임하면서 징강산 혁명근거지에서 반 포위공격 소탕전 전투에 참여했다.

 

1929년 1월 주더와 마오가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남쪽과 푸졘성(福建省 복건성) 서쪽으로 진격할 때 홍4군 제1종대 사령관이 됐으며, 1930년 6월 홍1군단 제4군 군단장에 임명됐다. 1932년 3월 1군단 총지휘(이후 군단장)를 맡아 국민당 군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벌이고 승리로 이끌어 위명을 떨쳤다. 이때 국민당 군은 1방면군 소리만 들어도 도망갈 정도로 린뱌오는 홍1방면군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혔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의 장정이 시작된 뒤 녜룽전과 함께 국민당 군 4겹 봉쇄선 돌파에 앞장섰고, 우장(烏江)도하 작전을 펼쳤다. 1935년 1월 준이회의 이후 홍1군단을 지휘해 4차례의 츠수이(赤水 적수) 전투, 진사장, 다두허 도하작전, 루딩차오 탈취 등의 작전을 펼쳤다. 중앙홍군이 싼베이에 도착한 뒤 홍1군단 군단장으로 서북혁명군사위원회 위원에 당선됐고, 즈뤄전(直羅鎭 직라진), 동정(東征)전투에 각각 참가했다. 린뱌오는 1937년 1월 홍군대학이 바오안(保安 보안: 현재 志丹 지단)에서 옌안으로 옮겨 ‘중국인민 항일 군사정치대학’으로 명칭을 바꾼 뒤 초대 교장과 정치위원으로 있다가 항일 전쟁이 터지면서 8로군 115사단 사단장으로 화베이 항일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마오는 핑싱관 전투 승리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9월 26일 주더와 펑더화이에게 ‘경축, 우리 군의 첫 승리’라는 축하 전문을 보내 만족을 표시하고 “헝산(恒山 항산)산맥과 그 동, 서, 북쪽 3 방향으로 돌격해 적들의 측면을 공격하는 유격 전략을 세워야 한다. 적들이 깊이 들어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유격전으로 후방이 비어있을 때 공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마오는 또 29일 주더와 저우언라이 등에게 전보를 보내 “옌시산은 반드시 산시군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우리와 협력해 또 한, 두 차례 전투를 벌이자고 요청할 것이다. 만약 확실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당연히 전투에 참가해도 좋다”고 했다. 마오는 “우리의 근본방침은 군중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군중 유격대를 조직해 이런 총 방침아래 작전을 집행하기 바란다”고 부연 설명했다. 마오는 철두철미 유격전을 견지하며 공산당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군중들의 지지기반을 넓혀 갈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마오가 이듬해 5월 자신의 전략전술의 철학을 담아 펴낸 ‘논 지구론(論持久戰)’에서 “기본은 유격전이다. 단, 유리한 조건하에서는 운동전을 펴는 것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162) 毛澤東生平全記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2009. 10 신판)     平型關之戰的難解之謎   人民網
163) 平型關之戰的難解之謎   人民網     毛澤東生平全記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2009.10 신판)

----------------------------------------------------------------------------------------------------------------------------------

 

79. 마오의 전략 따른 8로군의 거센 일본군 압박

 

10월 상순, 국민당 군은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요충지인 옌먼관(雁門關 안문관)에서 핑싱관에 이르는 만리장성 안쪽의 방어선을 포기하고 신커우(忻口 흔구)일대로 후퇴해 신커우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옌시산은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太原 태원)으로 돌아가 타이위안을 보위하기 위해 신커우 일대에 병력을 집중 배치해 대결전을 벌일 심산이었다. 옌시산은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곁에서 작전을 보좌하면서 8로군과 국민당 군이 협조해 공동작전을 펼칠 것을 요청했다.

타이위안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신커우는 산시 북쪽에서 타이위안으로 통하는 관문이자 타이위안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 진지였다. 일본군이 만리장성 방어선을 돌파하자 옌시산은 자신의 8만 병력과 막  산시성에 진주한 국민당 군 14집단군 총사령관 웨이리황(衛立煌 위립황)의 부대와 공동으로 신커우 회전(會戰)을 벌이기로 하고 웨이리황을 전적총지휘로 임명했다. 옌시산은 이와 함께 제2전구(戰區) 부사령관 황샤오홍(黃紹竑 황소횡)이 인솔한 수만 명의 병력을 동쪽의 냥쯔관(娘子關 낭자관)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일본군이 정타이루(正太路 정태로)에서 서진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

 

10월 6일, 살포시 하늘이 열리는 동틀 무렵에 옌안 펑황산(鳳凰山 봉황산) 자락의 마오가 살고 있는 집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오는 곧 돌입할 신커우 회전을 앞두고 긴장 속에서 옌시산의 작전계획을 샅샅이 뜯어보고 있었다. 산시 북방의 방어를 중시한 반면, 산시 동쪽 방면의 방어가 소홀해 보였다. 일본군이 스자좡(石家庄 석가장)을 점령했기 때문에 반드시 정타이루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올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마오는 이 점이 매우 걱정스러웠다. 마오는 붓을 들어 주더와 저우언라이에게 보낼 전보의 초안을 작성해 갔다. 마오의 화베이 작전의 전략 보충의견은 이랬다.

 

“적은 스자좡을 점령한 후 서쪽으로 진공할 것이다. 고로 룽취안관(龍泉關 용천관), 냥쯔관 두 곳에 중병(重兵)을 집결시켜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 주력군이 타이위안 북쪽에서 승리를 해야 한다. 이 전투의 관건은 아래 열거하는 3가지이다.
1.냥쯔관, 룽취안관을 견고하게 방어해야 한다.
2.정면에서 신커우 지구 수비와 출격(출격은 중요하다).
3.적 후방 파괴 등 3가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난징(南京 남경) 국민당 총사령부에 주력군 3~4개 사단을 냥쯔관에 긴급 증파를 요구해야 한다. 2)웨이리황 군 4개 사단이 정면 출격 병단의 주력을 맡고, 산시군 2개 사단이 협력 출격하면서 나머지 병력이 수비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3)8로군 115, 120 두 개 사단 주력은 동, 서 양면에서 적의 측면을 공격해 종심지구로 파괴해 들어가야 한다. 이밖에 난징에서 파견한 주력군 2개 사단을 라이위안(淶源 내원), 웨이(蔚 울)현에서 움직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주석 164)

 

마오의 생각은 이랬다. 산시로 진입한 일본군은 총 병력이 2.5사단 정도에 불과하다. 이미 점령한 산시 북쪽의 수십 현(縣)을 지키려면 최소한 1개 사단을 풀어야 한다. 그럴 경우 실제 타이위안을 공격하는 병력은 1.5사단 밖에 안 된다. 여기에 옌먼관 이남과 연도에 병력을 나눠 지키면 신커우 회전에 동원할 수 있는 일본군 병력은 1개 사단 안팎이다. 이미 우리가 3면을 포위하면서 만약 룽취안관, 냥쯔관을 1개월 정도 지키면 아군 병력 수와 전투력을 비교해 볼 때 적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깨뜨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8로군의 싱커우 전투 모습.

 

신커우 회전은 10월 13일 일본군이 신커우에 맹공을 퍼부으며 시작됐다. 신커우 회전은 항일 초기 화베이(華北 화북) 전장에서 21일 동안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2차 국공합작에 따라 비교적 국공간에 손발이 잘 맞은 1차 전투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신커우 회전은 국민당 군이 21일 동안 버텨주었기 때문에 8로군이 일본군의 측면과 배후에서 활발한 유격전을 펼칠 수 있었다. 8로군 115사단은 다이(代 대)현에서 핑싱관, 링치우,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에 이르는 일본군 배후에 있는 동로(東路)의 주요 교통도로를 완전히 파괴했다.

또 잇따라 판쯔(繁峙 번치), 핑싱관, 링치우, 웨이현, 양위안(陽原 양원), 라이위안 등지를 수복했으며, 깊숙이 허베이(河北 하북) 일부 지역까지 진입해 지난(冀南 기남; 허베이 남쪽) 수개 현을 빼앗아 바오딩(保定 보정)을 압박했다. 120사단은 일본군이 다이현에서 다통(大同 대동)으로 가는 교통도로를 끊어버리고 옌먼관을 점령한 뒤 옌베이(雁北 안북) 수개 현을 수복했다. 10월 18일 120사단 제358여단 제716연대는 옌먼관에서 매복 기습전을 벌여 일본군 차량 100여 대와 수백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막 산시에 진입한 129사단 선발대인 679연대는 궈(崞 곽)현과 다이현 사이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했다. 129사단 3대대의 주력은 19일 밤 다이현에 있는 양밍바오(陽明堡 양명보)의 일본군 비행장을 기습공격해 비행기 20여 대를 파괴하고 적 수비대 100여 명을 사살했다.

 

8로군은 핑싱관 대첩 이래 또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둬 인민들을 격동시켰다. 8로군은 일본군이 부득불 상당한 병력을 후방 수비에 돌리는 틈을 이용해 신커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국민당 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쟁형세는 마오가 예측했던 대로 산시 동쪽 방면의 냥쯔관 방어선이 엄중한 위험에 직면했다. 스자좡을 점령한 일본군 20사단, 109사단이 정타이루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해 동남쪽에서 타이위안을 위협했다.

냥쯔관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민당 군은 일본군에 의해 배후가 끊길 것을 두려워해 앞 다퉈 철수했다. 10월 26일 국민당 군은 어쩔 수 없이 냥쯔관을 버리고 후퇴했다. 일본군은 신속하게 핑딩(平定 평정), 양취안(陽泉 양천), 시양(昔陽 석양) 일선을 점령했다. 냥쯔관에서 철수한 국민당 군은 통일지휘가 흔들리면서 효과적인 방어능력을 구축하지 못해 패색이 짙어졌다. 11월 2일 웨이리황은 어쩔 수 없이 신커우 진지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11월 8일 타이위안이 함락됐다.

----------------------------------------------------------------------------------------------------------------------------------

 

80. '코민테른' 왕밍의 귀국, 마오의 숨고르기

 

1937년 11월 일본 제국주의가 잇따라 상하이, 타이위안을 함락시켜 광활한 국토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전국적으로 일본에 대한 항전에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국내적으로 친일파로 변신하는 민족투항주의가 고개를 들고, 공산당 안에서는 계급 투항주의가 꿈틀거렸다. 이런 때에 옌안에서 당의 활동분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상하이, 타이위안 함락이후 항일전쟁의 형세와 임무’ 라는 제목의 초청 강연을 했다. 마오는 무거운 마음으로 타이위안, 상하이 실함 이후의 엄중한 형세를 분석하고 편면적인 항전을 전면적 항전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들이 직면한 가장 긴박한 임무라고 말했다. 마오는 당 내외에 투항주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 투항주의와 당내의 계급 투항주의에 반대한다고 견결하게 말했다. 마오는 투항주의를 제어하지 못하면 전면 항전을 추동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항전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오의 일련의 연설은 각성제 구실을 해  전당, 특히 고급간부들이 투항주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 7일 왕밍(王明 왕명)이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귀국하면서 형세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오로서는 왕밍이 분란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주석 165)

 

왕밍은 마오보다 14살 아래인 1907년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 지역 유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천샤오위(陳紹禹 진소우)다. 1923년 상하이 대학에 들어가 1925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해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소련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코민테른의 지도자 미프를 만나 통역원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밍은 미프의 지원을 받아 이후 ‘28인의 볼세비키’로 알려진 중산대학 중국인 학생들의 영도자가 되었다.

 

 왕밍(왼쪽), 마오쩌둥

 

1931년 1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열린 제6차 4중전회에서 당시 중국공산당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단장인 미프의 도움으로 중공중앙 정치국원에 진입해 총서기로 선출된 향중파(向忠發 향충발)가 6개월 뒤 처형되자 24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왕밍은 그 해 9.18 만주사변 뒤 모스크바로 돌아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대표단 단장이 되었다. 왕밍은 또 코민테른 집행위원에 당선되어 주석단 위원과 서기처 서기에 임명됐다. 코민테른이라는 후광이 왕밍의 권위를 배가 시켰다. 왕밍은 자신의 총서기직을 이어받은 보구와 함께 ‘상왕(上王)’으로서 4년 동안 좌경적 공산혁명 노선을 부르짖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 기간 동안 마오는 권력 중심부에서 퇴출돼 암울한 세월을 보냈다.

 

1937년 11월 7일, 왕밍이 옌안에 도착할 때 마오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상방보검’을 가진 '흠차대신' 왕밍을 마중하러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는 옌안의 중공중앙과 군대 영도자들을 대동하고 옌안비행장으로 왕밍을 영접하러 나갔다. 마오는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의 직접 피해자였지만 이제까지 둘은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옌안비행장에서 처음으로 상면했다. 왕밍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릴 때 마오는 환영의 뜻으로 손을 뻗으며 “우리 산골짜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보내 준 당신을 환영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말속에 비수가 있었다. 의미심장한 환영사였다. 왕밍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마오와 왕밍이 악수하는 순간 그들 간의 투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분명해졌다. 공산혁명의 발전과정에 따라 마오는 착실하게 전당전군에서 영도자의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코민테른의 마오와 왕밍에 대한 태도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왕밍은 이런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오의 영도적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내심으로는 불복했다.

 

왕밍은 은밀하게 마오는 단지 공맹(孔孟)의 유가학설만 알 뿐이어서 공맹의 ‘수신(修身), 제가(齊家),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식의 방법론으로 국가를 경영하려고 할 뿐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지 못해 당의 영수가 될 수 없다고 헐뜯었다. 왕밍은 1935년 8월 1일 발표한 ‘항일구국을 위해 전국동포에 고(告)함; 8.1선언’에서 모스크바의 요구를 반영해 노동자, 농민, 소자본가, 민족 자본가들이 한데 뭉쳐 히틀러의 나치와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신정책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잣대를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마오는 “이른바 8.1선언은 우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하나의 근원일 뿐 항일민족통일전선과 국공합작의 ‘긴 흐름(長流 장류)’의 잣대는 아니다”며 모스크바 노선에 이견을 보인바 있다.

 

왕밍의 귀국은 중공중앙에 코민테른의 신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7년 8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중국의 정세와 중공중앙의 임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왕밍은 회의에서 고무적이고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왕밍은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공합작의 기초 위에서 전중국의 반일 각 당파가 항일 대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기초해 전중국의 통일적 국방정부와 전중국을 통일하는 민주공화국을 건립해야 한다. 아울러 전중국의 각종 무장 세력을 통합해 통일지휘, 통일기율, 통일공급, 통일무장, 통일군사계획 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왕밍은 “장제스의 진보적인 정책전환이 필요하고 중공은 국민당 정부를 진정한 중국통일의 국방정부로 승인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는 왕밍의 의견에 동의했다. 디미토로프는 “관건은 국공 통일전선의 건립문제다. 중공의 재력, 물력과 인원의 100분의 95이상을 소비에트지구에 집중했기 때문에 간부도 난징정부와의 무장투쟁과정에서 양성해야 한다. 노동자 성분의 사람들이 당과 홍군에서 비율이 아주 적다. 당의 정책과 책략을 백팔십도 확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미토로프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한다. 국제형세에 밝고 패기발랄한 사람이 가서 중공중앙을 도와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코민테른은 왕밍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파견한 것이다.

 

165)共産國際爲何放棄王明轉而選擇毛澤東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與王明的激烈爭論   理論頻道  新華網

----------------------------------------------------------------------------------------------------------------------------------

 

81. '우경 투항주의' 경계한 마오, 왕밍과 한판 승부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옌안에서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열렸다. 왕밍은 회의에서 ‘어떻게 전국 항전을 계속하고 항전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가’ 제목의 보고를 했다. 왕밍은 보고에서 항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 견지를 주장하면서 중공중앙과 마오를 비판했다. 왕밍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근본적 인식전환이 부족하고, 국민정부의 전국통일 국방정부의 구실과 국민혁명군의 전국통일 국방군 역할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왕밍은 또 “항일(抗日)은 모든 것들 가운데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민주, 민생문제 해결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면서 “‘모든 것은 항일이 우선한다는 원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왕밍은 중공중앙이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하고, 통일전선에 복종하는’ 공작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독립자주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왕밍은 “국민당 집행부가 편면적 항전노선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전제하고 “국공합작을 누가 영도하고,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왕밍은 국공합작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동책임이며, 공동영도라고 강조했다. 왕밍은 이런 관점에 비춰볼 때 마오가 뤄찬(洛川)회의에서 채택한 전략방침과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가 쓴 ‘항일유격전쟁에서의 약간의 기본문제’의 글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왕밍은 회의에서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공산당의 경전(經典)인 마르크스, 레닌주의 등을 들먹이며 끌어다 쓰는 치밀한 수사(修辭)로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박수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회의 참석자 다수는 시비를 가리지 않은 채 왕밍에 대해 맹목적 신뢰와 지지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은 왕밍이 제기한 관점에 따라 과거 통일전선 공작의 득실을 평가한 뒤 과거의 ‘협애한 관념’과 ‘전략부재’의 문제점들을 인정했다.

마오는 왕밍의 연설에 깜짝 놀랐다. 뜻밖의 발언에 마오는 잠시 넋을 잃었다. 마오는 만약에 왕밍이 제기한 주장대로 항일전쟁과 항일민족통일전선 공작을 전개한다면 이는 천두슈의 전철을 다시 밟아 대혁명실패의 역사적 비극을 재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오는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가 왕밍의 연설에 미혹돼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들과 왕밍을 구별해야 한다고 여겼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2보 전진을 위해선 1보 후퇴가 필요했다. 만약 지금 경솔하게 왕밍과 한판 붙는다면 후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마오는 판단했다.

 

그렇다고 묵묵부답일 수는 없었다. 마오는 절제된 언사로 원칙적 견해를 피력했다. 중공중앙의 독립자주와 독립자주적인 산지 유격전, 국민당 진영에 좌, 중, 우 3종류의 서로 다른 경향성의 문제를 얘기했다. 마오는 국공 양당의 주도권 문제, 통일전선에서의 화합과 투쟁, 타협주의 그리고 정부와 군대 개조의 필요성 등의 문제를 거론했다. 마오는 만약에 공산당이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국민당에 굴복하는 만큼 대단히 위험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마오는 왕밍이 비판한 뤄촨(洛川 낙천)회의의 전략방침과 공산당의 독립자주를 강조하는 것은 옳다고 날을 세웠다. (주석 168)
 

마오는 비록 종전의 통일전선에 관한 해법을 제시했지만 이때 정치와 조직상으로 국민당을 개조해 통일전선의 국방정부 건립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는 문제를 언급했다. 마오로서는 진일보한 견해였다. 이는 마오가 코민테른의 '공동책임, 공동영도'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오는 또 왕밍이 주장한 현재의 기초위에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협조와 개조에 관한 방법에  찬동했다. 이렇게 해 정치국 회의는 왕밍의 보고를 통과시켰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코민테른이 제시한 전술과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회의에서 왕밍의 보고를 결의(決議)로 채택하는 것을 미루는 지연전술에는 성공했다. 이유는 간단하고 충분했다. 전당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아직 통일되지 않아 급히 결의를 채택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경솔하게 결의를 채택하면 자칫 엄중한 후과를 조성할 수 있는 만큼 전당의 의식 제고와 의견통일을 기다렸다가 결의를 채택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정치국회의는 모스크바에서 온 왕밍과 천윈(陳雲 진운), 캉성(康生 강생)을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로 임명했다. 회의는 또 중앙인사와 관련해 코민테른의 의견을 받아들여 집단 영도체제를 실시해 장원톈은 당무 등 일상업무를, 마오는 군사문제, 왕밍은 통일전선 분야를 각각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도록 했다. 회의는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 예졘잉을 중공대표단으로 구성해 국민당과의 회담을 책임지도록 했다. 마오는 회의가 끝난 뒤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마오는 12월 24일 홍군이 우군(友軍)구역 내에서 통일전선의 원칙고수를 명확하게 지시했다. 통일전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동책임, 공동영도, 상호지원 등의 구호아래 국민당과의 협상공작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온힘을 기울여 그들의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항전 이익에서 출발해 그들을 설득해 우리들의 의견과 건의를 채택하도록 하고 만부득이 동의가 어려울 경우 강요보다는 잠시 양보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국공합작이후 통일전선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경 투항주의를 대단히 경계했다. 실 예로 홍군이 8로군으로 개편돼 전선에 투입된 뒤 얼마 안 돼 8로군의 아무개 고위 지휘관이 마오를 만나러 옌안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 지휘관이 마오에게 명함을 건넸는데 '국민혁명군 소장 000'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마오는 명함을 본 뒤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마오가 전방의 전황에 대해 물었으나 이 지휘관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오는 끝내 분노가 폭발했다. 마오는 이 지휘관에게 "된장인지 똥인지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게 무슨 '소장' 명함을 파 갖고 다닌다"고 크게 꾸짖었다. 당이나 홍군 내에서 국민당이 임명한 직책을 우쭐해 하는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이런 풍조를 우경 투항주의, 우경 기회주의로 분류했다. (주석 169)

왕밍은 공산당 대표단 일원으로 우한(武漢 무한)에 파견돼 중공중앙이 세운 창장국(長江局 장강국)에서 국공간의 통일전선 업무를 조율하면서 우경 투항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중공중앙의 동의나 협의 없이 독단으로 마오 이름의 담화를 발표했다. 왕밍은 중공중앙의 기율을 지키지 않고 국민당에 통일전선 공작과 관련해 양보하는 언사도 서슴지 않아 마오나 장원톈을 불안케 했다. 마오는 당의 단결과 통일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한 만큼 왕밍을 공개  비판도 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옌안에서 발행하는 주간 '지예팡(解放 해방)'에 왕밍의 언론활동을 공개적으로 싣기도 했다. 마오는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중공중앙은 1938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옌안에서 정치국회의를 열었다. 왕밍은 회의에서 계속 우경 투항주의적 관점에서 '통일지휘, 통일편제, 통일무장, 통일기율, 통일대우, 통일작전계획, 통일작전행동' 등을 주장했다. 왕밍의 이런 주장과 구호는 중공중앙이 독립 자주적으로 전개하는 유격전쟁의 입지를 줄이는 행위였다.

마오와 왕밍이 정면충돌은 벌이지 않았으나 수면하의 격렬한 투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내 참다못한 마오가 왕밍의 잘못된 주장을 견제하고 나섰다.  마오는 허베이(河北 하북)이 동쪽에 포진한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군구(軍區)를 한 예로 들었다. 허베이 동쪽(冀東 기동)의 지리적 위치는 대단히 중요했다. 예로부터 병가(兵家)들이 반드시 다툼을 벌이며 선점해야하는 곳이었다. 평원이 많고, 구릉도 많았다. 농업이 발달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했다. 물자가 풍족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허베이 동쪽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마오는 뤄촨회의에서 이곳을 항전 중 중요 지역으로 지목했다. 일본군들이 동북 3성을 점령한 뒤 전 중국을 삼키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허베이 동쪽에 마수를 뻗칠 것으로 내다봤다. 8로군이 당연히 선점해야 할 중요 지역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정치국회의에서 왕밍은 독립자주적인 유격전쟁을 반대했다. 마오는 그러나 1938년 2월 8로군 총사령부와 ‘산시-차하얼-허베이(晉察冀 진찰기)’군구에 전보를 보내 우링산(霧靈山 우령산)을 중심으로 한 구역을 확대 발전시킬 것을 지시했다. 특히 이 지역을 8로군의 독립작전구로 삼도록 했다. 녜룽전은 마오의 지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덩화(鄧華 등화) 지대를 파견해 허베이 동쪽 지역을 근거지로 개척했다. 마오는 바로 정치국회의에서 녜룽전이 적극적으로 독립 자주적인 유격전쟁을 벌인 성공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168) 毛澤東與王明的激烈爭論  理論頻道  新華網  共産國際爲何放棄王明轉而選擇毛澤東?  時政頻道  新華網

169) 毛澤東與王明的激烈爭論  理論頻道  新華網 ‘毛澤東之路-民族救星 1935-1945’ 張樹軍 雷國珍 高新民 /著 中央黨出版社

----------------------------------------------------------------------------------------------------------------------------------

 

82. 마오의 손 든 코민테른, 왕밍은 왜 '용도폐기' 되었나

 

마오는 중앙의 영도구실을 적극적으로 해 왕밍의 잘못된 주장을 제어할 결심을 굳혔다. 마오는 국민당이 영도적 위치에서 통일전선을 구실로 공산당을 야금야금 고립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마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서기처는 3월 25일  ‘중공중앙이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 보내는 축하전문’에서 왕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민주와 민생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공산당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왕밍은 불만을 품고 이 전문 공표를 보류했다.

 

왕밍은 또 국민당 자극을 겁내 마오의 치사 중 ‘헌정을 실시해 민의의 첫걸음을 떼어야 한다’ 등의 용어를 빼버렸다. 마오는 5월에 다시 공개적으로 공산당의 영도를 확고히 하면서 전 민족의 항전을 역설했다. 마오는 또 ‘논 지구전(論持久戰 )’ 을 발표하면서 8로군, 신사군 및 유격전쟁의 중요한 구실을 강조했다. 이것이 왕밍의 걱정과 불만의 도화선이 됐다.

 

우한에서 통일전선 업무를 맡고 있던 왕밍은 마오가 ‘논 지구론’을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에 발표하려 할 때 동의를 거부하고 소책자에 인쇄토록 했다. 왕밍은 비밀리에 우한에 있던 소련인을 찾아가 마오의 행태를 스탈린과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에게 전해주어 소련 영도자와 코민테른 대표가 갖고 있는 마오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코민테른이 조직에 관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부탁을 했다. 마오와 왕밍의 ’죽기 살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와 왕밍의 충돌이 부단히 격화되고 공개화하는 상황에서 3월의 정치국회의는 런비스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코민테른에 중국공산당의 상황과 항일전쟁의 형세를 보고하기 위한 조처였다. 런비스는 4월 14일 코민테른에 중공중앙이 작성한 ‘중국 항일전쟁의 형세와 중국공산당의 공작과 임무’ 제목의 서면보고를 제출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은 6월 11일 회의를 열어 항전 이래 중공의 정치노선이 정확했다고 추인했다.

 

얼마 뒤 런비스가 코민테른 중공 대표단 단장으로 모스크바에 있던 왕자샹의 임무를 대신하고 왕자샹은 귀국키로 했다.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는  왕자샹을 만나 중국공산당 전체 당원에게 마오쩌둥을 중공중앙의 영도자로 반드시 지지하도록 전해 줄 것을 지시했다. 디미토로프는 마오가 실제 투쟁하면서 단련되고 성장한 영도자라면 왕밍은 현장공작 경험이 부족해 영수로서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부연 설명했다. (주석 170)

귀국한 왕자샹은 1938년 9월 열린 중공중앙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디미토로프의 담화를 전달했다. 내용은 이랬다.

“오늘의 환경에서 중공 주요 책임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게 상당히 어렵다. 이로 인해 문제 발생이 더욱 쉽다. 영도기관은 마오쩌둥을 영수로 한 영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영도기관은 긴밀하게 단결하는 작풍을 일궈야 한다.”


왕자샹은 구두보고에서 디미토로프의 특별당부를 이렇게 전달했다.

“중공이 단결해야 만이 믿음을 세울 수 있다. 중국에서 항일통일전선은 중국인민 항전의 관건이다. 중공의 단결은 또 통일전선의 관건이다. 통일전선의 승리는 당의 일치와 영도자의 단결에 의존한다.”

승부는 끝났다. 희비가 갈렸다. 서슬 퍼렇던 왕밍의 ‘상방보검(尙方寶劍)’은 빛을 잃었다. 코민테른이라는 뒷배를 잃은 왕밍은 끈 떨어진 쪽박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은 마오는 공산당 내 영도자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됐다. 마오는 왕밍의 우경 투항주의를 척결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 했다. 중공중앙은 6차 6중전회를 옌안에서 열기로 했다. 왕밍은 중공중앙의 결정에 불복해 회의장소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우한(武漢 무한)으로 옮겨 회의를 열도록 요구했다. 마오와 중공중앙은 왕밍의 요구를 거절했다.

 

6중전회가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옌안에서 열렸다. 회의 장소는 옌안성 내의 옛 교회당으로 저우언라이와 시안사변의 주역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이 1차 비밀회담을 한 곳으로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공중앙위원, 후보위원 및 중앙 각 부문과 각 지구 영도간부 47명이 운집했다. 왕밍도 어쩔 수 없이 회의에 참석했다. 마오는 회의에서 ‘새로운 단계를 논한다(論新階段 논신계단)’라는 정치보고와 ‘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문제’, ‘전쟁과 전략문제’에 대한 총결보고를 했다.

“항전 15개월간의 경험이 증명하듯 항일전쟁은 장기전이지 단기전이 아니다. 따라서 전략방침은 지구전이며 속결전이 아니다. 최후승리는 중국인민의 것이며 비관론자들의 말은 추호의 근거도 없는 것이다. 중공중앙이 결정한 전면 항전노선은 중국의 실제에 부합한다. 이미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은 바야흐로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다. 즉, 전략적으로 서로 버티는 단계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의 임무는 바로 어려움을 극복해 일본제국주의를 이기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 전당 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성실하게 항일전쟁의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한다.”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마오쩌둥

 

마오는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오는 통일전선 문제에서의 폐쇄주의와 투항주의의 편향에 대해 날을 세웠다. 칼끝은 왕밍을 향했다. 마오는 왕밍이 주장했던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 ‘모든 것은 통일전선에 복종해야 한다’ 식의 논리를 준열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항일시기의 통일전선의 통일성과 독립성,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의 정확한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주석 171)

“장기 (국공)합작을 이끌어 장기전쟁(長期戰爭)을 지지하고, 계급투쟁은 반드시 항일민족투쟁에 복종하는 것이 통일전선의 근본원칙이다. 이런 원칙아래 당파와 계급적 독립성, 통일전선의 독립자주를 유지해야 한다. 합작과 통일이 당파와 계급적 필요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파와 계급의 일정 한도의 권리를 유지할 때 합작이 유리하고 이른바 합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합작은 뒤섞여 하나로 변질되면서 필연적으로 통일전선을 희생하게 된다. 국민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당으로 민중운동을 통제하고, 공산당의 발전을 제한하면서 각 당파의 평등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국민당은 공동의 정치 강령이나 통일전선상의 조직형식을 원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은 장제스, 옌시산으로 이뤄진 한쪽에 복종하는 것으로 자기를 속박해 자기의 손발에 차꼬를 채우는 것이다. 지금의 형세 하에서 우리는 마땅히 서로 다른 상황에 근거해 각각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마오의 현하지변은 계속됐다. 마오는 자신의 혁명 전략인 농촌을 근거지로 한 도시포위 공격론을 이죽거렸던 왕밍을 겨냥해 중국의 상황은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르다. 중국은 반식민지의 대국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새로운 정당, 군대와 인민이 있어 농촌에서 장기적인 광대한 전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항일전쟁을 총체적으로 볼 때 정규전이 중요하고 유격전은 보조적이다. 항일전쟁의 최종 결판은 정규전에서 판가름 난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서 끈질긴 유격 전쟁을 하지 않으면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이 때문에 유격 전쟁이 비록 전쟁의 전체적으로는 보조적 위치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는 중국의 실제적인 문제를 모르는 왕밍 등을 정면 조준해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마르크스주의는 반드시 민족형식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중국의 특징을 벗어난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추상적인 공허한 마르그스주의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잘 학습해야 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일반원칙과 국제 경험을 중국의 구체적 환경에 잘 적용해야 한다. 마오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며 외국을 따라하는 형식적이고 낡은 것을 폐지해 중국 인민들에게 환영받는 중국의 기풍과 기상인 신선하고 생동적인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마오는 마지막 철퇴를 내리쳤다. 당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왕밍을 겨냥해 당의 규율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마오는 개인은 조직에 복종하고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며 하급은 상급에 복종하고 전당은 중앙의 조직원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빗장을 질러버렸다. 이에 따라 전체회의는 관련 당규와 당법을 통과시켰다. 전체회의는 또 왕밍이 책임자로 있던 우한의 창장국(長江局 장강국)을 폐지하고 왕밍을 옌안으로 복귀하도록 조처했다. 하늘을 찌르던 왕밍의 권세는 화무십일홍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40여 명이 잇따라 발언하면서 마오가 제기한 각종 주장을 너도나도 지지했다. 왕밍은 자기변호를 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마오의 ‘영수 지위’를 인정했다. 왕밍은 ‘중앙과 마오 동지의 주위, 즉 북극성을 뭇 별들이 둘러싸듯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통일 단결’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일패도지다. 인심 또한 조변석개다. 회의가 후반에 접어들자 많은 사람들은 왕밍을 거명하거나 빗대면서 왕밍의 과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왕밍은 회의장을 일찍 빠져나와 이런 비판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왕밍은 이제 더 이상 마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왕밍은 왜 소련이나 코민테른으로부터 용도폐기가 됐을까. 우선 왕밍의 중국혁명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스탈린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서기 디미토로프는 왕밍이 실제적인 혁명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37년 11월 11일 스탈린이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에서 귀국하는 왕밍과 캉성(康生 강생), 왕자샹을 접견한 일이 있었다. 스탈린이 왕자샹에게 홍군 병력이 얼마나 되는 지를 물었다. 왕자샹은 싼베이에 약 3만 명의 병력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때 왕밍이 끼어들어 30만 명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서로 다른 숫자를 들었으나 장정에 직접 참가한 영도자의 한 사람인 왕자샹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회견자리에 동석했던 디미토로프는 그날의 일기장에 왕자샹이 말한 숫자를 믿는다고 쓰면서 ‘8로군은 30개 사단이 필요하지 3개 사단이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현재 남아있는 코민테른 문서에 따르면 왕밍이 공작활동에 표현한 일련의 내용들이 모호해 분명치 않아 의심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코민테른 문건에는 리리산의 입을 빌어 “왕밍이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와 다른 장소에서 사실과 숫자를 부풀려 말하고-” 라고 기록했다. 왕밍이 허풍이 심해 믿음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1938년 4월, 중공중앙이 류야러우(柳亞樓 유아루)를 코민테른에 중공공산당 역사와 현상 등을 보고하기 위해 파견할 때 마오는 자신이 쓴 ‘논 반대일본제국주의의 책략’,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실천론’, ‘모순론’ 등 몇 권의 책과 준이(遵義 준의)회의 결의를 류야러우에게 주어 디미토로프와 스탈린에게 증정하도록 했다. 이것은 마오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 이후의 코민테른의 또 다른 문건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당군정 부문에서 뛰어난 인물 26명을 분석한 자료에 ‘마오쩌둥은 확실히 중공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영도자’라고 한 반면에 왕밍에 대해서는 ‘당내 노 간부들 사이에서 아무런 위망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마오는 그동안 굴레가 되었던 코민테른으로부터 해방과 함께 지지를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공중앙의 1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70) 共産國際爲何放棄王明轉而選擇毛澤東?   時政頻道  新華網
171) ‘毛澤東之路-民族救星 1935-1945‘  張樹軍 雷國珍 高新民/ 著  中央黨出版社

----------------------------------------------------------------------------------------------------------------------------------

 

83. 마오 네번째 부인 장칭과의 운명적 만남

 

1937년 7월 어느 날 시안(西安 서안) 치시옌좡(七賢庄 칠현장)에 있는 8로군 사무실. 20대로 보이는 두 여성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장제스 통치구역인 시안에는 국공합작 이후 저우언라이, 보구,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 등영초) 등이 중공 대표단으로 머물면서 국민당과 업무를 조율하고 있었다.

이 두 여성은 공산당원 쉬밍칭(徐明淸 서명청)과 상하이에서 온 영화배우 란핑(藍苹 남평)이었다. 쉬밍칭은 일을 보고 있던 덩잉차오와 인사를 나눈 뒤 란핑을 소개했다. 란핑은 공손하게 덩잉차오에게 인사를 하고 가죽 가방을 열어 자신이 출연한 영화집을 건넸다. 덩잉차오는 란핑을 훑어본 뒤 "당신이 바로 상하이 영화계의 인기스타 란핑이구먼!"이라고 했다.

덩잉차오는 이어 "이 일은 보구 동지의 업무분야다. 마침 자리를 비웠다. 당신들은 영화집을 여기에 놓고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란핑은 이틀 뒤 혼자 8로군 사무실을 찾아갔다. 저녁 무렵 돌아온 란핑은 쉬밍칭에게 "보구 동지와 긴 얘기를 나눴다. 내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샤오위(小兪; 黃敬 황경을 말함) 얘기를 했다. 그가 승낙했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 란핑은 8로군 시안 사무실로 이사했다. 7월 하순 어느 날 란핑은 쉬밍칭을 찾아와 "내가 내일 옌안에 가게 됐다. 보구 동지가 알려줬다"며 기뻐했다. (주석 170)

 

란핑은 쌀을 실은 트럭을 타고 시안을 출발했다. 도중에 큰 비가 내려 도로가 끊기는 바람에 며칠을 기다렸다. 차량통행이 계속 미뤄졌다. 란핑은 할 수 없이 말로 갈아타고 노정에 나서 힘들게 옌안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뤄촨(洛川 낙천)에 저녁 무렵 도착했다. 이때는 마침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뤄촨에서 열려 끝난 날이었다. 이 지역 사령관 샤오진광(肖勁光 소경광)과 부인 주중즈(朱仲芷 주중지)가 란핑을 마오의 비서인 예즈룽(葉子龍 엽자룡)에게 인사시켰다. 예즈룽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171)

 

"중앙과 군사위원회 영도들이 회의가 끝나 각각 차를 나눠 타고 옌안에 갈 때 란핑은 마오쩌둥이 타고 있던 트럭을 타고 갔다. 마오는 운전석 옆에 앉고 란핑은 트럭 뒤 칸에 타고 옌안에 갔다."

 

옌안에 도착한 란핑은 옌안의 제3초대소에서 잠시 거주했다. 란핑은 신원확인 등의 심사를 받을 때 기록할 이름 난에 예명인 란핑이나 원래의 이름 리윈허(李雲鶴 이운학) 대신에 '장칭(江靑 강청)'이란 새로운 이름을 써넣었다. 어떤 사람들은 '장칭'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뜻을 품고 있다고 했다. '장칭'은 구절양장처럼 험난했던 자신의 기구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밝고 맑은 삶을 염원하는 뜻의 개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푸르름은 쪽에서 우러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靑出於藍而勝於藍 청출어람이승어람)'에서 예명인 란핑(藍苹)의 쪽인 '란(藍)'을 딛고 푸르름의 '칭(靑)'으로 거듭난다는 소망을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당나라 때의 고시에서 한 구절을 따온 '강물 위에 두드러진 푸른 봉우리(江上數峰靑 강상수봉청)'에서 '장(江)'과 '칭(靑)'을 따와 합자했다는 얘기다. '장칭'으로 개명한 '란핑'은 옌안에 온 다음날에 샤오진광의 부인 주중즈의 안내로 마오의 거처를 찾아가 때마침 마당에서 산책하던 마오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마오와 장칭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장칭은 이듬해 마오와 결혼해 40년 해로한 가장 오래 함께한 부인이었다. 21살의 나이 차였다. 마오는 만년에 네 번째 부인인 장칭을 '짐보따리(包보; 바오푸)'로 여길 정도로 평생 정치적 부담을 안고 살았다. 이들은 영욕(榮辱)을 함께 한 '영욕 부부'라 할 수 있다.

 

장칭은 1914년 산둥성(山東省 산동성) 주청(諸城 제성)현 둥관(東關 동관)의 목공 수공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칭이 소학교에 다닐 때 교장 선생이 키가 크고 몸매가 호리호리한데다 두 다리가 학처럼 가늘고 길어 '리윈허(李雲鶴 이운학)'라고 지어주자 '진하이(進孩 진해)' 대신에 이 이름을 썼다. 장칭의 아버지는 두 부인을 취했는데  장칭은 서출이다. 아버지는 성격이 거칠어 툭하면 장칭의 어머니를 손찌검했다.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12살의 장칭을 데리고 집을 나왔고 모녀는 친척에 의탁했다. 장칭은 친척을 따라 톈진(天津 천진)으로 갔다가 지난(濟南 제남)으로 옮겨 다녔다.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이자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이 란핑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배우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 마오쩌둥과 장칭

 

장칭은 그곳에서 극단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 등을 배웠다. 장칭은 극단 원장이자 칭다오(靑島 청도)대학 교무처장인 사회적 유력인사인 자오타이모우(趙太모)의 도움으로 칭다오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면서 중문과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장칭은 이때 물리학과에 다니던 19살의 위치웨이(兪啓威 유계위)를 만났다. 위치웨이는 자오타이모우의 처남으로, 그의 누나 위산(兪珊 유산)은 당시 중국 연극계의 유명한 배우였다. 장칭은 위산을 선망했고, 그를 찾아가 연극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위치웨이와 눈이 맞아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석 172)

1931년 '9.18 만주사변'이후 장제스의 일본침략에 대한 소극적 대응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일본침략 분쇄', '장제스의 부저항주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명문가 출신인 위치웨이는 이때 칭다오대학 학생들을 이끌며 동맹휴학을 일으키는 등 학생운동의 우두머리였다. 위치웨이는 그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장칭은 칭다오 좌익 연극원동맹 극단인 '하이오우쥐서(海鷗劇社 해구극사)'에 들어갔다.

열애에 빠진 위치웨이와 장칭은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장칭은 1933년 2월 위치웨이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7월 중공 칭다오시위원회 선전부장인 위치웨이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고, 장칭은 상하이로 도망갔다. 장칭은 위치웨이 누나 위산의 부탁으로 상하이 좌익 작가연맹, 희곡 작가연맹의 창시자이자 영도자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톈한(田漢 전한)의 문하에 들어갔다. 톈한의 동생 톈위안(田沅 전원)은 형의 부탁을 받고 장칭을 ‘선껑공쉐퇀(晨更工學團 신경공학단)에서 교원으로 일하도록 했다.

이즈음 위치웨이는 장칭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말미에 ’샤오위(小兪 소유)‘라고 썼는데 이후 ’황징(黃敬 황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신중국 건국 초기 톈진시장, 중공 톈진시위원회 서기가 되었다가 이후 철도부장을 역임했다. 선껑공쉐퇀은 비정규학교로 월급은 없고 숙식만 제공받았다. 장칭은 주로 톈한이 편극한 ‘너의 채찍을 놓아라’ 등의 연극을 인근 농촌에 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구국항일운동을 선전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공쉐퇀은 여성들이 적어 쉬밍칭, 장칭, 리수전(李素貞 이소정) 등 3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다락방에서 황소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공간에 침대도 없어 맨바닥에 거적을 깔고 잠을 자는 등 고단한 생활을 해야 했다. 장칭은 같이 생활을 하던 3살 위인 쉬밍칭을 따랐다.

당시 장칭은 단발머리에 쪽빛 치파오(旗袍 기포; 중국 여성의 전통 옷으로 다리 옆이 터졌음)를 즐겨 입었으며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활발한 성격으로 노래, 연기를 했고 극단원들과 잘 어울렸다. 1933년 겨울, 위치웨이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극단으로 찾아와 1934년 초 항일운동으로 또 다시 체포위기에 몰리자 함께 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으로 달아날 때 까지 장칭과 위치웨이는 봄날과도 같은 짧은 달콤한 사랑을 나눴다.

170) 江靑嫁毛澤東之前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171) 江靑和毛澤東第一次見面的眞實情況 王凡 人民網-文史頻道
172)江靑嫁毛澤東之前的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 

 

84. 상하이 영화배우 시절 지내고 옌안으로 향하는 장칭

 

베이핑에 갔던 장칭은 얼마 후 생활고로 혼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때 쉬밍칭은 푸둥(浦東 포동)의 여공(女工) 야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장칭도 쉬밍칭의 소개로 여공들에게 노래와 춤, 연극 등을 가르쳤다. 장칭은 리윈구(李雲古 이운고)라는 가명을 썼다. 장칭은 어느 날 상하이 거리에서 위치웨이와 함께 칭다오에서 혁명 활동을 했던 공산당원 러위홍(樂于泓 악우홍)을 만났다. 보통 ‘아러(阿樂 아락)’라고 불리는 그는 위치웨이가 체포됐을 때 장칭이 상하이로 달아날 수 있도록 배편을 주선해주는 등 도움을 줬다. 아러는 공개적으로 상하이 한 우체국의 출납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객지에서 고향의 지음(知音 지음)을 만난 장칭은 한없이 반갑고 기뻤다. 장칭은 자주 후친(胡琴 호금)을 연주하는 아러를 초청해 그의 후친 반주로 공연에 나섰다. 그러던 1934년 9월 어느 날 장칭은 여공야학에서 아러와 함께 공연하기 위해 상하이 자오펑(兆豊 조풍; 지금의 중산공원) 공원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중공중앙 상하이국의 한 연락책이 국민당 공안에 체포되는 바람에 아러의 정체가 드러났다. 비밀공안들은 아러를 쫓다가 이날 장칭과 아러가 만나는 장소에 잠복했다. 아러는 공원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미행하는 사실을 눈치채고 쏜살같이 영국 조계지 쪽으로 향하는 공원 문을 통해 달아났다.

장칭은 아러가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다른 쪽 공원 문으로 달아나다 길을 막는 비밀공안에 붙잡혔다. 장칭은 일생 중 처음으로 체포를 당한 것이다. 장칭은 유치장에서 마침 자신이 가르쳤던 곧 출소할 여공야학교 학생을 만나 자신이 체포된 사실을 쉬밍칭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비밀공안은 수없이 장칭을 취조했으나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한데다 쉬밍칭의 노력으로 장칭은 2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석 173)

 

쉬밍칭은 풀려난 장칭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은 핼쑥했고 저열에다 때때로 신경질 증세로 말소리의 높낮음이 심했다. 그동안 감옥에서 받은 충격과 자극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정신상태가 들쑥날쑥해진 것이다. 이때 쉬밍칭은 집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내용이었다. 쉬밍칭은 조직(공산당)에 보고하고 어머니한테 가기로 했다. 헌데 조직에서 요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가는 길에 장칭을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쉬밍칭은 장칭의 의사를 물었다. 의외로 장칭은 따라나서기로 했다. 출소 후 위치웨이의 집에 거주했던 장칭은 이때 마땅한 은신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유가적 잔재(儒家的 殘滓)가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명문세가인 위치웨이 집안에서 장칭은 며느리 감으론 언감생심이었다. 장칭은 ㅤㅉㅗㅈ겨났다. 위치웨이도 속수무책이었다. 때문에 장칭은 얼른 쉬밍칭과 함께 쉬의 고향으로 가기로 했다. 위치웨이도 궁색한 처지여서 장칭에게 쉬밍칭의 고향으로 가 있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쉬밍칭의 고향은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하이(海 해)현 난아오(南요)촌이었다. 현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으로 몇 십 가구가 살고 있는 동네였다. 산자수명한 강남의 조그만 산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쉬(徐)씨로 쉬씨 집거지 였다. 마을 사람들은 정확한 표준어 발음을 하는 북방의 처녀에 호기심이 많았다. 쉬밍칭은 마을 사람들에게 장칭을 자신의 친구로 소개하고 나를 대하듯 해주면 된다고 했다. 쉬밍칭의 아버지는 한의사(中醫 중의)였다. 몇 마지기 땅뙈기에 몇 칸짜리 질박한 집에 살았다.

 

장칭은 북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빼어난 산수의 강남 산촌의 풍경에 매료됐다. 게다가 자연환경이 그윽해 번다하지 않아 좋았다. 장칭의 마음도 점점 안정되면서 차분해 졌다. 칭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저혈압인데다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돌고 기침을 계속해 오랫동안 월경도 하지 않았다. 쉬밍칭의 아버지가 진찰해 보니 폐결핵이었다. 쉬밍칭의 아버지가 약재를 달여 먹인 뒤부터 장칭의 건강이 조금씩 좋아졌다. 그때 쉬밍칭의 당질(堂侄)이 결혼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와 있었다. 그 당질이 베이핑 의학원 서양의학과 학생이었다. 그가 쉬밍칭의 부탁을 받고 진료를 한 결과 역시 폐결핵이었다. 한약과 양약을 잘 복용하면서 장칭은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때 장칭에게 베이핑에 있던 위치웨이가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장칭에게 "건강이 좋아졌으니 베이핑으로 와 새해를 같이 지내자. 베이징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수학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칭이 베이핑으로 가겠다고 해 쉬밍칭은 먹을 것과 노잣돈을 챙겨주고 린하이(臨海 임해) 차부까지 데려 가 배웅했다. 1개월 뒤 쉬밍칭도 어머니의 건강이 좋아져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왔다. 그 당시 쉬밍칭의 눈에 비친 장칭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진보적이었다.  쉬밍칭은 장칭의 은인이었다. 장칭이 두 번에 걸쳐 좌절하고 힘들어 할 때 도움을 줘 장칭이 어려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5년 4월, 쉬밍칭도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돼 3개월의 수형생활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 1년여의 세월이 저편으로 달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색이 좋아보이는 장칭이 시안(西安 시안)에 있던 쉬밍칭을 찾아왔다. 쉬밍칭은 1년여 동안 연락이 끊겼던 장칭이 나타나 놀랍고도 반가웠다. 쉬밍칭이 물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니?”

“왕동뤄(王洞若 왕동약)가 알려줬어.”

 

장칭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탁자에 찻잔을 놓으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은 데에 대한 탄식이었다. 쉬밍칭은 자신을 시안으로 파견한 왕동뤄를 떠올렸다. 쉬밍칭은 장칭과 이것저것 얘기한 뒤 탕나(唐納 당납)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얘기하면 길어져!”

장칭은 또 한 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아주 개꼴이 됐어. 탕나와 헤어졌어. 이건 뭐 완전 날건달이야.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기실 그때 장칭은 위치웨이가 있던 베이핑으로 갔다가 일이 뜻대로 안 돼 상하이로 다시 내려왔다. 장칭은 상하이에서 영화배우로 일하면서 동료 배우인 탕나, 장민(章泯 장민)과 잇따라 동거해 상하이 황색신문들에 의해 대서특필되면서 연예계 뿐 아니라 사회의 여론이 좋지 않아 지탄대상이 되기도 했다. 장칭은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쉬밍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쉬밍칭은 화제를 돌렸다.

 

“너, 여전히 영화 찍고 있니?”

“아이고. 7.7사변(일본이 본격 중국침략을 위해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를 침탈한 사건)이 터진 뒤 상하이 상황이 불안정한데다 인심이 흉흉하다구. 그런 판에 누가 영화를 보겠느냐구. 지금 영화시장은 찬바람만 쌩쌩 불어. 상하이에 있어봤자 할 일이 없어요.”

“그럼, 너 어떻게 할 생각이냐?”

 

장칭은 비로소 자기가 쉬밍칭을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이빙(一 冰 일빙(쉬밍칭의 개명 전 이름으로 장칭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불렀음), 사실은 언니의 도움을 받으려고 시안에 왔어.”

“무슨 도움이 필요한데?”

“나, 옌안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언니가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봐줬으면 해서.”

 

당시 국공합작이 이뤄지면서 이른바 적도(赤都)로 불리는 옌안에 대한 국민당 군의 통제가 느슨해졌다. 1937년 초부터 외국기자들이 장정을 끝낸 마오나 홍군, 공산당의 실체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드는 통에 옌안 러시현상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좌익 문화계 인사들과 진보적인 청년 학생들이 너도나도 국민당 군의 봉쇄선을 뚫고 천리, 만리의 먼 길을 어렵다 생각않고 옌안으로 달려갔다. 장칭도 이들과 생각이 비슷했다. (주석 174)

 

“너, 상하이에서 올 때 소개장을 갖고 왔니?”

쉬밍칭이 말한 소개장은 중국공산당 상하이 당 조직이 발부한 소개장을 뜻한다.

 

“언니가 있는 데 방법이 있겠지 뭐. 샤오위(小兪 소유; 위치웨이를 일컬음)가 옌안에 갔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맞아. 5월에 열린 옌안회의에 참석차 갔었다고 들었어.”

 

위치웨이는 이때 황징(黃敬 황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장칭은 여전히 황징에 대해 미련이 남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장칭의 상하이 연예계 생활에 대해 세인들이 찧고 까부르는 소리가 어지럽게 떠돌았지만 장칭의 황징에 대한 감정은 남달랐다. 황징은 이때 린티예(林鐵 임철), 천보다(陳伯達 진백달)와 ‘베이핑 3인위원회’를 구성해 베이핑시 일상 업무를 주재하는 등 중공 베이핑 시위원회의 영도자로 올라섰다. 황징은 1937년 5월 2일부터 14일까지 옌안에서 열린 중공 소비에트 대표회의에 베이핑 대표로 참석했다. 황징은 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 ‘중국의 붉은 별’을 쓴 미국의 저명한 기자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인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를 동반했다. 님 웨일즈는 이때 옌안에서 중국공산혁명을 통한 조국의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 장지락)을 만나 나라를 빼앗긴 조선 청년이 중국 전역을 누비며 공산혁명에 투신해 조국광복을 염원한 내용을 담은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를 1941년에 출간했다.

173) 江靑嫁毛澤東之前的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174) 江靑嫁毛澤東之前的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

 

85. 옌안에 분 '춤바람' …반대 헤치고 장칭과 결혼한 마오

 

김산은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한 뒤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김산은 독립운동을 위해 이듬해인 1920년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최연소로 6개월간의 군사학 과정을 끝낸 뒤 1925년 7월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저우(廣州 광주)에서 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독립운동가 김원봉, 김성숙과 함께 분파적이고 파벌주의적 독립운동을 지양하는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광둥에서 혁명군을 총지휘한 장타이뢔(張太雷 장태뢰) 등과 무장봉기를 일으켜 광둥코뮌을 세웠다가 3일 만에 국민당 군의 공격으로 좌절된 뒤 하이루펑(海陸豊 해륙풍) 소비에트 지구에 들어가 혁명 활동을 벌였다.

1930년,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 체포돼 투옥된 바 있다. 1936년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고, 그 후 옌안에 들어가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근무하다 1938년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 강생)이 ‘일제 스파이’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처형 당했다. 김산은 캉성의 마수에 걸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33살의 한 많은 짧은 삶을 마감했다. 1983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조처를 내렸다. 한국정부는 뒤늦게나마 건국 60주년인 2008년 김산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앞서 에드가 스노우가 1936년 6월 마오쩌둥과 싼베이(陝北 섬북)지방을 취재하기 위해 옌안에 들어갈 때 쑨원(孫文 손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의 배려와 황징의 힘으로 성사된 바 있다. 장칭이 옌안에 들어가기 위해 시안에 머물때 황징은 5월 20일 이미 옌안을 떠나 베이핑으로 돌아갔다. 장칭이 옌안에 들어가려는 데엔  다른 뜻도 있었지만 황징의 행적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쉬밍칭은 장칭에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들에 대해 물었다. 장칭은 조그만 가죽 가방을 뒤적거려 ‘영화집’을 꺼내 “이 영화집이 나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영화집은 장칭이 출연했던 ‘나라(娜拉 나랍)’, ‘왕라오우(王老五 왕로오)’ ‘따위사자(打漁殺家 타어살가)등이었다. 쉬밍칭은 장칭을 데리고 시안 치시옌좡에 있는 8로군 사무실을 찾아가 덩잉차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장칭은 8월 말 옌안에 온 뒤 제3초대소(시베이뤼서; 西北旅社 서북여사)에 머물면서 당원심사를 받았다. 장칭은 10월 중순 자신의 입당 소개인 황징이 옌안에 와서 확인해줌에 따라 심사가 끝나 11월에 중앙당교(中央黨校)에 들어가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장칭은 1938년 4월 루쉰(魯迅 노신)예술학원이 설립되면서 이 학원의 연극 교사가 되었다. 장칭은 8월에 군사위원회 판공실의 비서가 되어 마오의 주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앞서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은 1937년 1월 13일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가 바오안에서 옌안으로 옮기면서 마오를 따라 이곳에 왔다. 허쯔전은 빠르게 변화하는 혁명형세를 이해하고 부족한 혁명이론에 대한 공부를 위해 허약해진 몸을 걱정하는 마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항일혁명대학에 들어가 공부했으나 끝내 쓰러져 학교를 중단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이때 황토고원의 살풍경한 회색의 조그만 고성(古城) 옌안은 국공합작으로 인한 화해무드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몰려들어 아연 젊고 싱싱한 도시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푸른 잿빛 군복일색의 칙칙한 도시가 울긋불긋한 분위기로 바뀌면서 밝고 발랄해진 분위기가 그득했다. 외국기자들도 취재차 구름처럼 찾아들었다.

 

1937년 1월 말 미국인 여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艾格妮絲 史沫特萊)가 옌안에 왔다. 에드가 스노우 기자가 싼베이를 취재한 이후 두 번째 찾아온 기자였다. 스메들리는 쑹칭링과 에드가 스노우의 소개로 7개월 동안 취재를 위해 방문해 중공중앙의 각별한 관심과 환영을 받았다.

스메들리는 당시 45살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자로 노련하면서도 활달했다. 노래는 잘 못하지만 춤 솜씨는 빼어났다. 그녀는 주더(朱德 주덕)를 만날 때 두 손으로 주더의 목을 감싸고 두 볼에 키스하는 인사를 하곤 했다. 주위 사람들은 기절초풍했다. 옌안에서 이런 인사법은 종전에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어서 경천동지 할만 했다. 자칭 ‘대지의 딸’ 스메들리의 행동거지는 이처럼 거침이 없었다. (주석 175)    

중국 공산당을 취재했던 미국의 여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저서 '대지의 딸'

 

 
스메들리가 양피 외투에다 담비 모피의 모자를 쓰고 목이 긴 말 장화를 신고 옌안에 나타났을 때 푸른 잿빛 군복을 입고 있던 옌안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그 옆에 찰랑찰랑한 긴 머리칼을 어깨에 늘어뜨린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동반하고 있어 보행하던 군인들과 여인네들은 ‘와~’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여성은 스메들리의 통역 겸 비서로 대학을 졸업한 뒤 시를 쓰고 신극(新劇)을 공연했던 우광웨이(吳光偉 오광위 또는 우리리 吳莉莉 오리리 라고도 부름)였다. 우연히 그들과 함께 한 다른 한 여성은 눈썹이 짙고 눈이 큰 문예 배우 딩링(丁玲 정령)이었다.

이들 ‘3인방’은  ‘장부의 기개로 결혼을 우습게 아는 여인들’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전통적인 결혼 방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개방적인 모습으로 모두 시집을 안 간 25~45살 사이의 층하였다. 3인방은 회오리바람처럼 각종 정치, 사교와 군중 장소를 헤집고 다녔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접대와 환영을 받았다.

 

옌안 초기에 사교춤은 주로 고급 간부들의 회식 때 오락적인 저녁 파티에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한정적 범위의 '시범성' 춤이었다. 펑황산(鳳凰山 봉황산) 동쪽기슭 야오동리(窯洞里 요동리) 스메들리가 머물고 있는 거처에 사적인 저녁 파티가 열리면 당연히 사교춤을 추었다. 밤만 되면 불야성을 이뤘다. 사교춤은 빠르게 번져갔다. 스메들리는 훗날 자신이 쓴 책 ‘중국의 전쟁노래’에서 사교춤과 관련해 홍군 영도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촌평했다.

 

“옌안에서 열린 1차 고위 군사간부회의 기간에 몇몇 간부들에게 춤추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열심히 배웠다. 매번 질문을 했다. 체면 깎이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주더는 나와 함께 사교춤 장면을 공개하는 등 ‘사교춤의 미신’을 타파했다. 저우언라이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우는 혼자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계산하면서 춤을 추었다. 펑더화이는 그저 춤추는 모습을 바라볼 뿐 한 번도 춤을 추려하지 않았다. 허룽은 나와 함께 푸른 벽돌이 깔린 땅위에서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춤을 췄다. 허룽은 몸이 유연하고 리듬 감각이 있는 유일의 춤꾼이었다. 마오는 자존심이 강해 사교춤을 배우지 않았다. 생리적으로 율동이 무뎠다.”

 

스메들리는 때때로 많은 사람을 초청해 저녁 파티를 하면서 편을 짜 서양식 사교춤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스메들리는 ‘중국의 전쟁노래’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옌안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군대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이란 악명을 얻었다. 사람들이 나를 경원시하면서 좋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한번은 주더가 나를 초청해 춤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거절했다. 주더는 내가 나약하다고 가볍게 책망하면서 ‘나는 오랫동안 봉건주의와 투쟁했다. 지금도 투쟁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민주(民主)의 이름으로 그와 함께 한 차례 춤을 추었다.”

 

사교춤은 슬금슬금 공개적인 저녁 파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옌안 고성의 종루 동쪽에 그리 크지 않은 교회당이 있었는데 중공중앙의 대강당으로 개조한 뒤 거의 매 주말마다 이곳에서 저녁 파티를 열거나 사교춤 모임이 열렸다. 홍군이 장정을 거쳐 싼베이로 오면서 혁명가요와 홍색혁명 춤이 빠르게 보급됐던 것이다. 이것은 서로간의 협동과 감화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춤이 지향하는 목표는 아름다운 사회생활의 집체적인 환상이다. 사교춤은 통상적으로 남녀가 서로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춘다. 이것은 개인생활의 정서적 함양을 추구했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장정(長征)했던 50명의 여장부들이 똘똘 뭉쳐 사교춤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 여장부는 분주한 군무(軍務) 생활과 공작으로 자신들의 용모를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이들은 혁명대오에서의 지위나 성망(聲望)을 향유할 뿐 신경을 써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려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화장을 하지 않았고, 긴 머리칼도 행동에 장애를 주기 때문에 면도로 머리를 짧게 밀어버리곤 했다. 헌데 이들 여장부들이 볼때 ‘3인방’을 비롯한 외지에서 온 여성들은 머리를 예쁘게 빚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 소부르주아 계급 냄새를 물씬 풍겼다. 게다가 남녀가 한 덩어리가 되어 뺑뺑이를 돌며 춤을 추고 있으니 어디 열불이 솟지 않았겠는가.

이들 여장부는 사교춤은 집단 정서를 해치는 외국의 악습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모반을 일으키는 것(反叛 반반)을 법제화해 막아야 한다고 종 주먹을 내질렀다. 이때를 마오는 다소 해학적으로 이렇게 회억했다. (주석 176)

 

“옌안에서 우리들도 자주 무도회를 열었다. 나도 춤판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때 나는 춤을 좋아했다. (저우)언라이, (런)비스도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주라오종(주더)은 체조하듯이 춤을 춰 배꼽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우리 마나님 허쯔전은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쯔전은 내가 춤을 추는 것을 아주 혐오스러워 했다.”

"춤은 바로 음악으로 향하여 가는 길이다."

마오쩌둥은 사교춤에 대하여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이렇게 얘기했다. 마오는 무도장을 즐겨 찾았지만 춤판에는 끼지 않았다. 하지만 스메들리와 우광웨이와는 매우 빈번하게 접촉했다. 스메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은 나와 나의 통역원인 우광웨이가 거처하고 있는 야오동(窯洞 요동; 움집)에 자주 찾아왔다. 우리 세 사람은 간편한 음식을 먹으며 몇 시간씩 이야기 했다. 마오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물어봤다. 우리들은 인도에 대해 얘기했고,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견해를 나눴다. 어떤 때 마오는 중국 고대 시인의 명구를 낭송했다. 때로 마오는 자신이 지은 율시를 낮은 목소리로 읇조렸다. 마오는 그의 첫 번째 부인(실제로는 두 번째 부인으로 양카이후이를 지칭함)을 그리워하는 추도시를 되 뇌이기도 했다. 그의 부인은 국민당이 살해했다. 마오는 후난 지방 어투로 베이징 표준어를 배운 나의 비서와 언어를 비교하기도 했다. 나는 마오에게 영어와 영어 노래를 가르쳤다."

 

마오가 이들과 빈번히 접촉하는데에 대해 허쯔전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허쯔전은 만년에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어느 날 스메들리가 머물고 있는 야오동에 찾아갔다. 마오쩌둥이 우광웨이와 아주 가깝게 앉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밀하고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어 뛰어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우광웨이가 일어나 나보고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허쯔전은 눈을 치켜뜨고 매섭게 우광웨이를 꾸짖었다. 야오동 안은 아연 팽팽한 긴장이 고조됐다. 마오는 어리둥절해 멍청히 허쯔전을 쳐다보았다. 우광웨이도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이었다. 허쯔전은 곧바로 마오를 향해 손을 휘저으면서 화를 내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허쯔전은 또 손가락으로 우광웨이를 향해 삿대질을 하다 귀와 볼을 건드렸다.

우광웨이는 “어, 사람 치네. 때려라”며 바락바락 대들며 싸웠다. 스메들리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마오는 난처해하다가 허쯔전을 잡아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광웨이는 관계기관에 허쯔전의 폭행사건을 진정했다. 관계기관은 어떤 처리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이른바 ‘우광웨이 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허쯔전은 관계기관에 ‘마오와 우광웨이 와의 간통혐의’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는 고발장을 냈다. 허쯔전은 또 '스메들리를 총살해야 한다'는 등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치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던 여장부들은 일제히 허쯔전을 극력 지지했다. 이 여장부들은 “한 외국인 여성이 자기가 거주하는 집에서 다른 사람의 사내와 오랜 시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물며 남녀가 늦은 밤에 함께 친밀하게 접촉한다는 것은 건전한 풍속을 해치는 자산계급의 타락한 생활방식이다. 화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스메들리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옌안은 한 순간에 ‘우광웨이 사건’으로 왁자지껄해졌고 온갖 소문이 파다하게 번졌다. 우광웨이는 1937년 7월 말께 소리 소문 없이 옌안을 떠났다. 허쯔전도 8월에 옌안을 떠나 양병(養病)하기 위해 시안을 거쳐 소련으로 갔다. 옌안에 사교춤을 보급했던 스메들리는 말에서 떨어져 일정 기간 몸조리를 하다 9월 초 옌안을 떠났다. 옌안의 사교춤 파문은 일단락 됐으나 ‘환란 부부’ 마오와 허쯔전은 이 사건의 여파로 결국 갈라서는 꼴이 됐다.

 

마오쩌둥과 그의 세번째 부인 허쯔전 / 마오쩌둥과 장칭


이즈음 옌안에 나타난 여성이 장칭이었다. 허쯔전과 장칭은 오가며 운명의 바톤터치를 한 셈이다. 마오와 장칭은 이듬해인 1938년 8월에 동거하다 11월에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에 대해 당의 고위 영도자들은 극력 반대했다. 장칭의 상하이 연예인 시절 문란한 생활이 황색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등 널리 알려져 마오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더 나아가 당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당 총서기인 장원톈(張文天)은 굳세게 마오와 장칭의 결혼을 반대했다. 장원톈은 고위 영도들의 뜻을 담아 당을 대표해 마오에게 장칭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마오는 편지를 본 뒤 탁자를 치며 벌컥 화를 내면서 “내가 결혼하는 데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모레 결혼 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중국 국가주석을 지낸 양상퀀(楊尙昆 양상곤)은 훗날 “결혼반대 편지사건은 마오 주석이 장원톈 총서기를 꺼리고 미워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면서 “그 전에 조직부장이던 천윈(陳雲 진운)이 장칭을 찾아가 마오 주석은 부인이 있고 이혼하지 않았으니 주의하라고 말했다.

장칭이 이 말을 마오에게 전했다. 마오는 천윈에게 전화를 걸어 '조직부장이 나의 집안일에 관여한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회상했다. 신사군 부군단장인 샹잉(項英 항영)도 마오에게 전보를 보내 장칭과의 결혼을 강력 반대했다. 장칭의 상하이 추문뿐 아니라 난핑(장칭)의 상황이 비교적 복잡하니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샹잉은 또 사회부장인 캉성에게 별도의 전보를 보내 장칭이 체포된 적이 있어 변절여부가 명확하지 않은데다 개인 생활의 문제점을 들어 주석과의 결혼은 적합하지 않다고 거듭 반대했다. (주석 177)

 

당사자인 마오가 막무가내로 주위의 반대를 무질러버리자 당중앙이 장칭이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등의 3가지 조건을 걸고 결혼을 추인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돌고 있다. 이른바 ‘약법3장(約法三章)이다. 근거는 1947년 3월 국민당 후중난(胡宗南 호종남)군이 옌안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왕뤄페이(王若飛 왕약비)의 일기장의 내용이다. 현재 ’약법3장’의 판본도 여러 가지다. 그중 타이완 국민당 정부 브라질 공사를 지낸 추이완치우(崔萬秋)가 쓴 ‘강청전전(江靑前傳)’에 기록된 약법3장이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한다. 내용은 이렇다. (주석 180)

 

1.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관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으면 장칭 동지는 마오쩌둥의 부인이 될 수 없다.

2. 장칭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보살피는 데 책임을 진다. 이후 누구도 당중앙에 대해 유사한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3. 장칭 동지는 단지 마오쩌둥 동지의 개인생활과 사무에만 관여한다. 20년 동안 당내의 어떤 직책도 맡는 것을 금지한다. 아울러 당내의 인사 및 정치생활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

이 판본의 약법3장 중 제1조는 마오와 허쯔전, 장칭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제2조는 장칭의 임무를 규정하고, 제3장은 장칭의 임무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176) 賀子珍負氣出走因毛澤東   人民網     賀子珍離開毛澤東是江靑 ‘揷足’造成的嗎?   人民網  文史頻道

177) 楊尙 昆回憶; 張文天反對毛澤東與江靑結婚忌恨   人民網  文史頻道
178) 毛澤東與江靑結婚, 中央究竟有無 ‘約法三章’?   葉永烈(文史學者, 作家) 
----------------------------------------------------------------------------------------------------------------------------------

 

86. 국민당 투항 시도 장궈타오…마오 "돌아오라" 

 

1938년 청명절(淸明節)인 4월 4일 황제릉(黃帝陵). 우리네 단군 할아버지처럼 중국인은 황제를 중화민족의 시조로 경배하고 있었다. 그 황제의 능이 중국 서북부 지역 ‘싼-간-닝(싼시, 간쑤, 닝샤성)’ 변계지구인 남쪽 중부(中部)현 베이차오산(北橋山 북교산)에 있다. 국민당 정부와 중공중앙은 시안사변 이후 청명절을 맞아 국공합작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애국주의 정서를 고취시키기 위해 황제릉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중공대표로는 ‘싼간닝’ 변계지구 부주석인 장궈타오(張國燾 장국도)가 참석했다. 장궈타오는 국민당의 시안(西安 서안)수정공서(綏靖公署) 주임 장딩원(蔣鼎文 장정문)과 함께 제례를 마친 뒤 비서와 경호원들에게 시안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올 테니 먼저 옌안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장궈타오의 경호원 장하이(張海 장해)가 “마오 주석이 제례가 끝나는 대로 옌안으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뜨악해 했다. 장궈타오는 “내가 시안에 가 린주한(林祖涵 임조함; 린보취(林伯渠 임보거)당시 싼간닝 변계지구 정부주석 겸 8로군 시안 판사처 주임을 맡고 있었음) 동지를 만나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한 뒤 장딩원의 세단에 올라탔다. 장궈타오를 보위할 책임이 있는 경호원 장하이는 장궈타오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시안공서 헌병 지프에 비집고 들어가 시안으로 따라갔다. (주석 179)

 

장궈타오가 누군가. 중국공산당 1대 대표로 당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마오와 더불어 공산당 최대 주주로 권력의 정상에 섰던 인물이 아닌가. 장궈타오는 난창봉기에 참여한 뒤 악예환(鄂豫晥; 후베이, 허난, 안후이성) 소비에트 근거지를 이끌면서 홍군의 3대 주력의 하나인 4방면군을 휘하에 거느렸다. 장궈타오는 모스크바에 3번 간 동안 중공 영도자로는 유일하게 레닌을 직접 만난 사람이다.

야심만만한 장궈타오는 한 때 별도의 '중앙'을 만들어 스스로 '주석'이 되는 등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싼베이에 돌아온 뒤 당을 분열 책동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져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 되었다. 막강했던 4방면군의 병권을 내놓은 채 한직인 '싼간닝' 변계지구 부주석으로 분노와 울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절치부심 끝에 장궈타오는  국민당에 투항하기로 결심했다. 때를 노렸다. 장궈타오는 주위의 참모는 물론 부인 양즈리예(楊子烈)에게 조차 함구했다. 황제릉 제례를 지내는 청명절이 디데이였다. 장궈타오는 제례의식이 끝난 뒤 마음먹은 대로 '남하(투항)'를 하기 위해 국민당 장딩원의 차를 타고 남쪽인 시안으로 내달린 것이다.

 

장딩원은 장궈타오를 호화 숙소인 시징(西京 서경)초대소에 묵도록 했고, 국민당 고위 관원들은 잇따라 장궈타오를 면담했다. 초대소 주위는 경비가 삼엄했다. 장궈타오는 4월 7일 국민당의 배려로 기차를 타고 한커우(漢口 한구)로 갔다. 당시 난징은 일본군에 함락돼 국민당 정부는 우한(武漢 우한)으로 천도해 군정기관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중국공산당도 국공합작 업무를 조율하기 위해 우한에 8로군 판사처(사무소)와 비밀리에 운영하는 중공중앙 창장국(長江局 장강국)을 만들었다. 장궈타오는 시안역을 떠날 때 황제릉에서부터 따라붙은 경호원 장하이에게 "린 주석(린보취)에게 전화를 걸어 역에서 만나자"라는 내용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황급히 기차역에 달려온 린보취는 장궈타오를 만났다. 장궈타오는 "옌안에서 비판을 받았다. 옌안에 멍청하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 우한에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린보취는 놀라 극력으로 장궈타오를 말렸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강경했다. 린보취는 설득을 할 수 없자 급히 판사처로 돌아와 중공중앙과 창장국에 전보를 띄웠다. 옌안의 중공중앙은 발칵 뒤집혔다. 중앙은 곧바로 우한에 있는 저우언라이 등에게 전보를 보냈다. 4월 8일 새벽, 중공중앙 창장국 비서 겸 기밀담당 과장인 통샤오펑(童小鵬 동소붕)은 저우언라이에게 린보취와 당중앙이 보낸 전보를 건넸다.

전보를 본 저우언라이는 경악했다. 빨리 전보를 왕밍과 보구 등에게 보내도록 통샤오펑에게 지시했다. 곧이어 창장국 비서장 리커눙(李克農 이극농)과 저우의 수행비서 지우난장(邱南章 구남장) 등이 저우언라이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저우언라이는 엄숙한 목소리로 "장궈타오가 줄곧 과오를 고치려하지 않는다. 국민당에 투항해 이미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우한에 온다. 모두 기차역에 달려가 장궈타오를 판사처로 데리고 와야 한다. 특수요원(特務 특무)을 대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저녁 7시께 리커눙 등 4명이 기차역 출구 주변에 포진해 장궈타오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찾지 못했다. 이들은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장궈타오를 찾았으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리커눙 등은 하릴없이 되돌아와 저우언라이에게 관련 사실을 보고했다. 리커눙은 장궈타오가 공산당 요원들의 접근을 꺼려 다시 시안으로 돌아갔다가 올 것으로 내다보고 계속 우한 기차역에서 잠복했다.

그러던 4월 11일 저녁 7시께 시안에서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맨 마지막 칸 앞자리에 앉은 한 중년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궈타오였다. 리커눙이 급히 달려갔다. 리커눙은 정중하게 "장 부주석, 우리들은 왕밍 동지와 저우 부주석이 마중해 모셔오라고 보낸 사람들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장궈타오는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장궈타오를 호위하던 2명의 국민당 정부 특수요원은 리커눙 뒤에 서있던 무장한 2명의 8로군 부관을 보고 흠찟해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리커눙은 장궈타오와 경호원 장하이를 열차에서 내리게 한 뒤 8로군 판사처로 데리고 가려했으나 장궈타오가 강력하게 거부했다. 리커눙은 할 수 없이 장한루(江漢路 강한로)에 있는 한 여관에 장궈타오를 투숙시켰다. 국민당 특수요원들은 상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계속 이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저우언라이, 보구, 동비우(董必武 동필무), 예졘잉이 여관을 찾아왔다. 이들은 장궈타오와 밤새워 이야기 했다. 장궈타오는 국민당과의 당파문제 해결 여부를 제의했다. 그는 '싼간닝(싼시-간쑤-닝샤)' 변계지구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이라고 했다. 장궈타오는 중앙이 자신에 대한 비판과 처분이 너무 지나쳤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또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싼간닝' 변계지구 부주석에 임명한 것도 불공평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주석 180)

저우언라이가 장궈타오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당신이 저지른 과오의 엄중성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당신은 홍군과 당을 거의 괴멸시켰다. 중앙이 당신에 대해 내린 비판과 처분이 무엇이 잘못됐는가. 당신은 어떤 의견이 있으면 중앙에 건의할 수 있다. 왜 중앙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가? 당신은 시안에 와서 우리 판사처를 찾아오지도 않았고, 린보취와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국민당의 장딩원과 내통하고 그들의 초대소에 묵었다. 또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한에 왔다. 우한에 와서도 우리 판사처를 찾지 않았다. 이런 행위가 옳은 일인가? 당신은 과오에 또 다른 과오를 저질렀다. 어떤 것이 조직의 기율인가?"

 

저우언라이 등은 마지막으로 장궈타오에게 8로군 판사처에 가자고 권유했다.  그곳에 가면 어떠한 문제도 상의해 처리할 수 있다고 구슬렀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강력하게 버텼다. 저우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는 대신 중앙에 사사로이 행동한 부분에 대한 과오와 이후의 업무지시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장궈타오는 마오와 뤄푸(장원톈)에게 보내는 전보내용을 써 저우언라이에게 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동생이 오늘 저녁 우한에 도착했습니다. 보고하지 않고 왔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한에 파견돼 일하고 싶습니다.-궈타오"

 

저우언라이는 전보내용을 본 뒤 장궈타오에게 "기왕에 우한에 왔으니 그럼 이곳에서 중앙의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이야기 하자"고 말한 뒤  헤어졌다. 4월 12일 중앙서기처에서 장궈타오에 보내는 전보가 왕밍, 저우언라이 등에게 도착했다.

 

"형이 간 뒤 대단히 그립습니다. 민족의 위기를 맞아 우리당 내부는 더욱 일치단결해 전당 전 인민에 모범이 되어 전국을 단결시켜 국가와 민족의 멸망을 구해야 합니다. 형께서 이에 이르러 애당애국을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정부의 일은 중요합니다. 이른 시일 안에 돌아오기 바랍니다. 매우 보고 싶습니다.-동생 마오쩌둥, 뤄푸, 캉성, 천윈, 류샤오치"

179) 張國燾叛徒始末; 周恩來通宵勸說不成帶其見蔣介石   人民網  文史頻道
     同張國燾鬪爭 毛澤東一生中最黑暗的時光   中國共産黨新聞網
180) 張國燾叛徒始末 ; 周恩來通宵勸說不成帶其見蔣介石 人民網 文史頻道

----------------------------------------------------------------------------------------------------------------------------------

 

87. 장궈타오 당적 제명…"꼬리가 드러났다"

 

4월 13일, 저우언라이는 전보를 갖고 장궈타오를 찾아가 전달한 뒤 형세를 정확히 판단해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말라고 설득했다. 저우는 지금 제일 좋은 것은 8로군 판사처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상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궈타오는 여전히 여관에서 묵겠다고 버텼다. 그는 저우에게 "나는 아주 소극적이 됐다. 내가 장시(江西 강서) 고향으로 돌아가 일반 백성이 되도록 허락해 줬으면 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나는 이후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14일 밤 저우언라이는 왕밍, 보구 리커눙 등을 동반해 장궈타오의 여관에 찾아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리커눙은 부드럽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억지로 장궈타오를 잡아 차에 태운 뒤 8로군 판사처로 데려왔다.

 

장궈타오는 판사처에 온 뒤 외출을 핑계로 밖으로 나돌면서 국민당 실력자인 천리푸(陳立夫 진립부), 저우푸하이(周佛海 주불해; 초기 공산당 지도자로 있다 변절해 국민당으로 갔다가 다시 일본에 붙어 왕징웨이 괴뢰정부에서 고위관료를 지낸 한간(漢奸), 그리고 1937년 7월 7일 발생한 누거우차오(蘆溝橋 노구교) 사건이후 국민당 감옥에서 풀려 난 중국공산당 최고의 원로이자 창당 설계자인 천두슈(陳獨秀 진독수)를 만났다.

장궈타오는 또 저우에게 장제스(蔣介石 장개석)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할 수 없이 4월 16일 오후 장궈타오를 대동해 강 건너 우창으로 장제스를 만나러 갔다. 장궈타오는 장제스를 만난 자리에서 "형제가 바깥에서 바보처럼 오래 살다보니-"라고 입을 떼자, 저우언라이는 곧바로 장궈타오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당신이 바보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라고 매우 화를 냈다. 장궈타오는 장제스에게 변계 정부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으나 준비 부족인데다 업무파악이 제대로 안 돼 두서가 없었다. 장제스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판사처로 돌아와 장궈타오에게 "(장제스를 만났을 때) 노예근성으로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고 엄히 비판했다.

그날 오후 장궈타오는 색안경을 끼고 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거리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리커눙은 우즈젠(吳志堅 오지견) 등 부하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장궈타오와  동행하되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장궈타오 일행은 판사처를 떠나 거리로 나갔다. 거리를 천천히 거닐던 장궈타오가 갑자기 죽어라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 때였다. 장궈타오는 막 뛰어가면서 강 건너 우창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간다고 소리쳤다. 장궈타오는 나룻배를 타기위해 달려갔다. 나룻배는 막 떠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단숨에 나룻배에 몸을 날려 올라탔다. 우즈젠도 할 수 없이 배를 타고 우창에 갔다. 날은 이미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우즈젠은 장궈타오에게 한커우(漢口 한구) 판사처로 가자고 했으나 장궈타오는 막무가내였다. 두 사람은 지치고 배가 고팠다. 둘은 조그만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우즈젠은 밥을 먹으면서도 장궈타오에게 한커우로 돌아가자고 설득했으나 장궈타오는 도리질을 쳤다.

우즈젠은 어쩔 수 없이 여관을 잡아 장궈타오를 쉬도록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우즈젠은 몰래 몇 자를 써서 인근 다방 주인에게 주면서 8로군 판사처에 전화를 걸어 쪽지에 적은 주소로 사람을 빨리 보내달라고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다방 주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판사처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곧바로 지우난장(邱南章 구남장)과 경호원들을 강 건너 우창으로 보냈다.

 

지우난장 등은 장궈타오를 강제로 나룻배에 태워 한커우로 돌아왔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판사처로 돌아가는 것을 강력 거부해 지우난장은 할 수 없이 중산루 타이핑양(太平洋 태평양) 호텔에 묵게 했다.

지우난장은 우즈젠을 판사처에 보내 저우언라이에게 상황을 보고토록 했다.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 등은 장궈타오가 당을 배반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을 알고 다음날 장궈타오를 만나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며 공개적인 담판을 하기로 했다.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는 함께 타이핑양 호텔로 장궈타오를 찾아갔다. 저우언라이는 장궈타오에게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판사처에 돌아가 당에 복귀해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희망하고 있다.

둘째, 잠시 당에 휴가를 내 일정기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셋째, 스스로 탈당 성명을 내고, 당은 당적 삭제를 공포하는 일이다. 장궈타오는 판사처에 돌아가지 않고 둘째와 셋째 제안에 대해 고려한 뒤 답을 주겠다며 이틀간의 시간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 등이 돌아가자 장궈타오는 국민당의 특무기관(軍統 군통;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약칭으로 대공 비밀첩보업무 총괄부서) 우두머리인 다이리(戴笠 대립)에게 전화를 걸어 국민당에 투항한다는 뜻을 전하면서 호텔로 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밤 두 대의 소형차가 타이핑양 호텔 정문에 갑자기 정차하더니 3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호텔로 들어서자 곧바로 장궈타오가 묵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

방문 앞에 있던 지우난장이 놀라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으나 이들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건장한 두 명의 사내가 지우난장을 간단히 제압했다. 또 다른 한 명의 사내가 재빨리 장궈타오의 방으로 들어가 장궈타오를 데리고 나왔다. 지우난장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두 명의 사내는 장궈타오가 차에 타자 지우난장을 풀어줬다. 두 대의 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우난장은 황급히 장궈타오의 방으로 달려갔다. 탁자에 장궈타오가 저우언라이에게 쓴 쪽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쪽지에는  글자 몇 자가 적혀 있었다. (주석 181)

 

“나는 이미 셋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사람을 파견해 찾을 필요가 없다.”

 

지우난장은 이 쪽지를 갖고 급히 판사처에 돌아가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창장국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앙에 보낼 장궈타오 행적의 전 과정을 담은 보고서를 채택했다. 4월 18일 새벽,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 3인의 명의로 중앙서기처에 장궈타오의 탈당상황을 보고했다.

3인은 또 중앙이 공개적으로 장궈타오의 당적을 박탈하고 이를 계기로 더욱 당과 군의 단결을 강화할 것을 건의했다. 그날 중공중앙은 ‘장궈타오 당적 박탈에 관한 결정’을 결의하고 이런 내용을 전당에 공표했다.

장궈타오는 이틀 뒤 성명을 내어 “중국공산당이 항전을 빌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전력을 다해 국민당 정부를 지지 하겠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은 5월 4일 항일군정대학 전체 학생들에 대한 보고에서 장궈타오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장궈타오가 옌안에 온 뒤 중앙은 회의를 열어 여러 차례 그를 비판했다. 장궈타오는 여러 번 과오를 인정했다. 단 꼬리는 여전히 남아 있어 반복을 거듭했다. 시종 양면적인 행위가 존재했다. 그는 원로 당원으로 지난 날 노동운동을 했다. 우리들은 인의도덕 문제를 말했다. 또 그가 변계지구 부주석으로 일을 하면서 그 꼬리를 자르기를 바랐다. 그는 꼬리를 잘랐다고 말했으나 실제적으로 긴 두루마기를 입고 그 속에 꼬리를 감췄다. 장궈타오는 이번에 싼시 중부의 황제릉에 제례를 지내러 갔다가 황제에 붙잡혀 묏터에 들어갔다. 우리들도 그의 당적을 제명할 수밖에 없었다.”

----------------------------------------------------------------------------------------------------------------------------------

 

88. 장궈타오, 담요 줍지 못해 얼어죽은 참혹한 말로

 

마음고생이 가장 심한 사람은 장궈타오의 부인 양즈리예(楊子烈 양자열)였다. 장궈타오가 국민당에 귀순한 지 거의 1개월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양즈리예에게 중앙당 조직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번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양즈리예는 조직부에 달려갔다. 조직부장 천윈(陳雲 진운)이 한 방으로 양즈리예를 안내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즈리예 동지, 알고 있소? 최근 당내에 전당을 깜짝 놀라게 한 큰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양즈리예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천윈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침통한 목소리로 "궈타오가 갔다!"고 하면서 한 통의 편지를 건넸다. 천윈은 "궈타오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가 한커우에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했다. 가겠는가?"라고 물었다. 양즈리예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머릿속에 장궈타오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또 한편으론 배신감이 복받쳐 곧바로 따라 나서고 싶은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보고픔과 미움이 교차했다. 양즈리예는 "생각해 보겠다"고 침울하게 답했다. 천윈은 양즈리예의 부풀어 오른 배를 보면서 "임신 몇 개월이냐"며 물었고, 그녀는 6개월이라고 했다. 천윈은 양즈리예에게 마음을 굳게 먹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며 양즈리예를 위로했다.

장궈타오의 편지는 간단했다.

 

"사랑하는 어진 부인에게. 이야기를 못한 채 헤어졌소. 나는 옌안에서 괴롭고 답답했소. 지금 한커우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사랑하는 아들 하이웨이(海威 해위)를 데리고 한커우에 오기를 바라오.-"

 

이 편지는 장궈타오가 4월 초에 시안에서 쓴 것인데 한 달여가 지난 5월 16일에 전달된 것이다. 양즈리예는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의 까닭을 알았다. 지난 날 친했던 동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냉담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종전에 웃음으로 대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원인도 알게 되었다. 양즈리예는 인정이란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잘 나갈 때는 사람이 몰려 다정다감하다가도 별 볼일 없어지면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냉담한 세태를 뼈저리게 느끼던 차였다. 염량세태였다.

양즈리예는 다음 날 마오와 장원톈, 류샤오치가 함께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 양즈리예는 이들에게 "왜 갔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한커우로 그를 찾으러 갔으면 한다. 명확한 것을 물어보고 그를 데려 오겠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장궈타오를 찾아 데리고 온다면, 당신은 공산당의 최대 공신"이라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최고라는 뜻으로 펴보였다. 류샤오치는 "즈리예! 내가 있는 곳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양즈리예는 훗날 "장원톈은 '긴장한 볼세비키 얼굴표정'을 지으며 마치 자신을 보지 않았던 것처럼 머리를 들어 위를 쳐다보며 서있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며칠이 지난 뒤 양즈리예는 조직부를 찾아가 리푸춘(李富春 이부춘)에게 한커우로 장궈타오를 찾아가겠다는 뜻을 정식으로 밝혔다. 리푸춘은 "중앙이 회의를 열어 결정한 뒤에 다시 통보해 주겠다"고 했다. 양즈리예는 중앙의 결정 통보가 올 때 까지 눈물범벅의 시간을 보냈다. 리푸춘은 양즈리예에게 "갈 필요가 없다. 아이는 앞으로 모스크바에 보내 공부시키겠다는 중앙의 결정"을 통보했다. 양즈리예는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안 돼! 나는 가야합니다! 나는 한커우에 가 장궈타오를 만나야 합니다"라며 통곡했다. (주석 182)

 

한 마디의 귀띔조차 없이 홀로 떠난 남편이 한스럽고 미웠지만 그래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자고 언약했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양즈리예는 중앙에 고향인 후베이(湖北 호북)에 돌아가 아이를 낳고 싶다는 뜻의 편지를 보냈다. 사나흘이 지났으나 종무소식이었다. 양즈리예는 조직부를 찾아가 물었다. 리푸춘은 순간 얼굴색이 파래지면서 거친 목소리로 "중앙 회의 때 마오 주석은 당신이 갈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조직부가 관여할 수 없다"고 했다.

양즈리예는 곧바로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몇 개의 언덕을 힘겹게 넘으며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양즈리예는 마오에게 "마오 주석, 나는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마오는 낮은 목소리로 "그것은 조직부 소관이다. 그들을 찾아가라"고 했다. 양즈리예는 "아니요. 나는 방금 조직부에서 왔습니다. 푸춘 동지가 당신이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주석은 그를 찾아가라하고 그는 주석을 찾아가라고 하니,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주석은 부풀은 내 배를 보시오. 왔다갔다, 실제로는 움직이기 힘듭니다! 주석, 지금 간단하게 편지 한 장 써주기 바랍니다"라고 읍소했다.

 

마오는 붓을 들어 "즈리예 동지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글을 쓰면서 양즈리예에게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궈타오의 잘못이요. 지금 궈타오는 이미 다이리(戴笠 대립)에게 잡혀갔어요. 당신은 알지요? 다이리는 국민당 비밀특무공작 업무를 관장하는 총책입니다! 당신이 한커우에 간 이후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비용은 당에서 책임을 지겠소. 당신은 언제라도 당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양즈리예는 아이와 여동생을 데리고 옌안을 떠났다.

우한에서 중국공산당을 떠나겠다며 탈당 성명을 발표한 장궈타오는 그 후 다이리가 총책인 국민당 특무조직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약칭 군통)'에서 '특종 정치문제 연구실'을 맡아 일했다. 장궈타오는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48년 겨울 부인 양즈리예 등 가족을 데리고 타이완으로 피신했다. 이때 국민당에 의해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은 장궈타오는 '군통'에서 조차 소 닭보듯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장궈타오는 어쩔 수 없이 1949년 겨울 홍콩으로 가 잡지 기고를 통해 생계를 꾸려갔다. 장제스가 무너지고 마오가 신중국을 세운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장궈타오는 화려한 공산당 경력으로 인해 '죽의 장막' 시절, 중국의 정보에 목말라하던 미국의 공산당 연구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장궈타오는 미국 캔자스대학의 의뢰를 받아 백만자에 이르는 '나의 회고'라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장궈타오는 곤궁했던 생활을 회고록 수입으로 그럭저럭 꾸려갔으나 나중에는 그마저도 신통찮아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장궈타오는 더 이상 생활을 지탱하기 힘들어 1968년 부인 양즈리예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무료 양노원에 지친 삶을 부렸다. 1976년에는 엎친데 덮친격으로 중풍으로 쓰러져 무료 노인병원에서 힘겹게 살아야 했다. 병들고 노쇠한 장궈타오는 1979년 12월 3일 병원에서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지만 불편한 몸으로 인해 다시 주워 덮지 못해 병상에서 얼어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82살이었다.(주석 183)

182) 張國燾叛徒始末 ; 周恩來通(宵勸說不成帶其見蔣介石   人民網  文史頻道
     張國燾脫黨後, 其妻楊子烈在延安的周折遭遇  傅國涌  文史參考
183)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 홍순도 옮김

----------------------------------------------------------------------------------------------------------------------------------

 

89. 중국 공산당의 설계자 천두슈와 저우푸하이의 일생

 

장궈타오가 우한에서 만난 천두슈(陳獨秀 진독수)와 저우푸하이(周佛海 주불해)는 중국공산당을 창립한 설계자와 주역이었다. 천두슈는 제명당했고 저우푸하이는 탈당했다. 천두슈는 중국 신문화운동의 창도자이며 '5.4운동'을 이끈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다. 천두슈는 또 리다자오와 함께 중국공산당을 설계하고 창립한 창시자이자 초기 공산당의 영도자였다. 천두슈는 1927년 8월 7일 이른바 '8.7회의'에서 대혁명 실패 책임 등의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물러나 영향력이 급전직하했다.

초기 공산당 설립의 주역 천두슈(왼쪽), 저우푸하이. 저우푸하이는 시류에 편승해 공산당-국민당정부-일 괴뢰 정부 등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며 매국 한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천두슈와 코민테른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1929년 11월 15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회의를 열어 천두슈를 제명해 출당시켰다. 천두슈는 앞서 1929년 10월 26일 펑수즈(彭述之 팽술지)와 연명으로 코민테른파가 장악한 당중앙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레닌이 죽은 뒤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어졌고 후계자가 된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하고 소련 밖으로 내쫒았다. 천두슈는 트로츠키의 관점과 일치하여 그의 이론을 상당부분 받아들여 당중앙을 비판하는 반대파를 이끌며 코민테른에 맞서왔다. 천두슈의 편지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주석 184)

 

"트로츠키 동지는 이미 1년 전에 당신들의 부정확한 정치노선의 발전과 당신들의 진정한 정치적인 모습에 대해 예견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반대파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들은 반대파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당은 반대파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 편지는  중국공산당이 천두슈를 제명하는 도화선이 됐다. 코민테른의 최고 추종자인 왕밍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천두슈를 난타했다. 28인의 볼세비키인 리리산, 보구가 뒤를 이어 혹독한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취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도 천두슈를 '기회주의자', '파시스트'라고 매도했다. 중앙 조직부장이던 저우언라이는 천두슈 제명 당 결의안을 기초했다. 그 또한 천두슈 제명을 지지했다.

당시 당 영도층에 끼지 못한 마오는 대혁명실패의 책임을 들어 천두슈를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당에서 제명되자 1931년 5월 중국내 트로츠키파들이 만든 '통일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좌파 반대파'의 총서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에게서도 제명당해 트로츠키파와 본원적으로 정치적 관점이 달랐다는 훗날의 평가가 나왔다. 1932년 10월 15일 장제스는 '중화민국에 대한 위해죄'로 천두슈를 체포했다. 천두슈는 1933년 4월 국민당 정부의 장수성(江蘇省) 고등법원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천두슈는 “무슨 이유로 국민정부를 타도하려 했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다.

 

“첫째, 현재 국민당의 정치는 총검을 사용하는 군사정치다. 인민들이 발언권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원들도 발언권이 없다. 이는 민주정치의 원칙에 어긋난다.
 둘째, 중국인민의 곤궁한 생활은 이미 한도를 넘어섰다. 그러나 군벌, 관료들은 재산을 모으고 제국주의 은행에 저금하는 것밖에 모른다. 인민들이 도탄에 빠져 먹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는 고려(高麗; 조선을 이름)가 망할 때에 경험했던 현상이다.
 셋째, 전국의 인민들이 항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부는 계속 양보로 일관하고 있다. 이른바 장기항전이라는 것은 단지 말뿐인 장기적인 저항이고 실제로는 무저항과 같다.

이런 세 가지 관점에 의거하면 인민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고 민권의 실질을 결여하는 이 정부에 반항할 의무를 가짐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자후를 토해냈던 천두슈는 루거우차오교 사건 후 후스(胡適 호적) 등의 보증을 통해 보석으로 풀려났다. 천두슈는 국민당의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천두슈는 공산당 중앙이 있는 옌안으로 가 당과 혁명대오에 참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천두슈의 출옥 후 얼마 뒤 공산당 1대 대표의 한 사람인 둥비우(董必武 동필무)가 당중앙의 지시를 받고 천두슈를 만나 당의 재입당을 위한 서면검토용 글을 쓰라는 권유를 건넸다.

천두슈는 당에 복귀하고 싶었지만 방법상의 서면검토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난징을 떠나 우창(武昌 무창)에 머물렀는데 이때 우한(武漢 무한)대학 총장인 친구의 초빙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내가 배운 것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한 것이 없다”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1938년 7월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한 달가량 머무른 뒤 뱃길로 1백 80리 떨어진 조그마한 장진(江津)현에 은거했다. 극심한 생활고과 울적한 마음과 질병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1942년 5월 27일 중국 공산혁명의 선구자 천두슈는 파란만장한 삶을 갈무리했다. 그의 나이 64살이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 ‘중국공산당 7대 공작방침’에서 천두슈의 일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주석 185)

 

“이제 천두슈에 대해 평을 한다면 공적을 많이 남긴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5.4 운동’때의 총지휘자로 이 운동은 사실상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그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 예컨대 리다자오 동지 등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탓이다. 우리들은 그들 세대가 키운 학생들이었으며, 5.4운동은 중국공산당을 대신해 간부를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천두슈와 그를 둘러싼 일련의 인물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로소 당을 만들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는 그가 계몽운동사업에 투신한 다음 당을 창립했다는 몇 가지 점에서 러시아의 프레하노프와 매우 비슷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가 사상적인 면에서는 프레하노프와 상당히 달랐다. 프레하노프가 러시아에서 대단히 훌륭하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한데 반해 그는 매우 부정확한 주장을 일삼는 등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창당에 대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레하노프는 뒤에 멘세비키로 변신했는데 그 역시 중국의 멘세비키가 됐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당의 역사를 편찬할 때 다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중국 국가주석을 지낸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은 1984년 한 편의 천두슈의 글을 개정할 때 “1차 대혁명시절의 조건아래에서는 천두슈가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천두슈는 혁명에 큰 공헌을 한 역사적 인물로 기록해야 한다. 깊은 역사적 안목을 갖고 관용하며 공정하게 써야한다. 이럴 때 만이 비로소 선현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역사적인 교훈을 깊이 새겨 후인들이 교훈과 이익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의 학계와 당에서는 천두슈가 더 이상 역사의 속죄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석 186)

 

장궈타오가 우한에서 만났던 또 한 사람의 중국공산당 1대 대표인 저우푸하이는 만난 지 얼마 후 전황(戰況)이 불리하자 공산당을 배반한데 이어 또 다시 장제스 국민정부를 배신했다. 저우푸하이는 일본의 괴뢰정부인 난징의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정부에 재정부장 등을 지내다 왕징웨이가 죽은 뒤에는 행정원 부원장 겸 상하이 시장을 지내는 등 거물 한간(漢奸)으로 매국의 길을 걸으며 온갖 영달을 누렸다.

저우푸하이는 1944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괴뢰정부의 몰락이 예견되자 암암리에 다시 장제스에 접근해 ‘보험’을 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데 이어 16일 난징 괴뢰정부가 해산했다. 저우푸하이는 그날 밤 잽싸게 ‘국민당 군사위원회 베이징 상하이 행동총대 난징지부’의 간판을 내걸고 장제스에 충성을 맹세했다. 장제스는 8월 20일 변신의 귀재 저우푸하이를 국민당 군사위원회 상하이 행동대의 사령으로 임명했다.

 

저우푸하이는 환호작약했다. 시류를 좆아 말을 갈아타는 자신의 ‘순발력’에 스스로 대견해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비판여론이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다. 저우푸하이는 1개월간 ‘총대사령’을 지내다 낙마한데 이어 친일 매국노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946년 11월 7일 국민당 수도 고등법원은 저우푸하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국민당 정부에 수많은 ‘지하공작’을 했다며 항변했다. 장제스는 이듬해 3월 26일 ‘저우푸하이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특별조치를 내려 목숨을 건져 주었다.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던 저우푸하이는 51살이 되던 1948년 2월 28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친일 매국노라는 ‘주홍글씨’는 역사의 덮개를 쓰고 있지만 고스란히 그때의 행적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184) 陳獨秀因何成了永遠的替罪羊   人民網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 홍순도 옮김
185)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용례 지음/ 홍순도 옮김
186) 陳獨秀因何成了永遠的替罪羊   人民網

----------------------------------------------------------------------------------------------------------------------------------

 

90. '총성 없는 전쟁' 첩보전의 시작…저우언라이의 두 얼굴

 

중공중앙은 시안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시안에 파견해 국민당과의 통일전선 정책을 협의하는 업무를 맡겼다. 저우언라이는 시안과 우한 등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3가지 공작을 수행했다. 하나는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기구인 8로군 판사처를 설치해 국공합작의 통일전선 업무를 조율했다. 저우언라이는 판사처를 기반으로 반공개적인 싼시성위원회를 가동하고, 비밀리에 정보기관을 두어 대외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공산당을 선전하고 당원을 확충하는 일을 강화했다. 저우는 국민당 정부가 우한에 있을 때 국민당 정부의 허가와 재정지원을 받아 창간한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를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저우언라이는 공개석상에서 국민당의 당정 관계자와 사회 각계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이들을 공산당으로 끌어들이거나 군중동원을 해야 할 때 친중공 인사로 참여시키는 등 국공합작 국면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당시 역사학자이자 시인 등으로 사회에 영향력이 높은 유명한 지식인 궈모뤄(郭沫若 곽말약)를 친중공 인사로 만든 것이다.

저우는 궈모뤄로부터 영향을 받은 많은 중도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동원해 국민당 정부의 소극적인 항일운동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군중에게 심어주기 위한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펼쳐 공산당의 기반을 넓혔다.

궈모뤄는 그때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 3국을 맡고 있었다.

 

 

궈모뤄(郭沫若 곽말약). 중국의 시인, 극작가 겸 사학자 /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의 공산당 이미지 제고 공작은 싼베이의 중공중앙과 마오쩌둥을 취재하려는 외국 기자나 작가들에게도 광범위한 손길을 뻗쳤다. 저우는 그들에게 취재를 주선해주면서 그들을 통해 친중공적인 글을 싣도록 하는 등 폭넓은 대외활동을 펼쳤다. 저우언라이는 1938년 10월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돼 국민당 정부가 쓰촨성 충칭(重京 중경)으로 옮겨가자 12월 충칭에 도착해 3년여 동안 국공합작 업무를 하면서도 이런 비밀공작을 총지휘했다.

 

총성 없는 전장(戰場). 지하 비밀공작은 사느냐, 죽느냐의 또 다른 물밑의 전선(戰線)이었다. 신중국 건국 후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로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흘리며 세련된 매너로 26년간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는 혁명기 중국공산당의 스파이조직(特科 특과)의 창시자이자 비밀 지하활동의 영도자이기도 했다. 저우언라이의 이런 두 얼굴은 세계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보기 드문 이력이다.

장제스가 1927년 ‘4.12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소탕하기 시작하자 공산당원들은 지하로 잠입해 항쟁을 벌였다. 중공중앙은 그해 5월 하순 우한에서 비밀리에 연 정치국 상무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중앙 군사부 부장으로 임명하고 군사위원회에 스파이 조직인 ‘특무공작과’를 만들기로 했다. 저우는 7월 26일 난창기의를 이끌었다가 실패한 뒤 주더와 함께 기의부대를 통솔해 광둥으로 이동해 봉기를 일으켰으나 또다시 좌절되자 홍콩으로 달아났다. 저우는 11월 상순 상하이로 돌아왔다.

저우는 중공임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결정에 따라 그해 말 직접 정보보위 조직인 ‘중앙특과’를 만들었다. 저우는 중앙의 군사부장으로 군사업무를 총괄하면서 정보 보위대, 즉 스파이조직인 ‘중앙특과’를 운영했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보다 2개월가량 늦은 1928년 2월 중앙조직부 산하에 천리푸(陳立夫 진립부)를 책임자로 해 공산당원을 포살(捕殺)하는 ‘당무조사과’를 만들었다.

국민당은 이어 1930년 여름에 조사과에 전문적인 스파이조직인 ‘특무팀’을 증설했다. 장제스는 1932년 3월 다이리(戴笠)를 처장으로 하는 국민당 최대 스파이조직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약칭 군통(軍統)’으로 확대 개편했다.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스파이조직을 한 발 앞서 만든 것은 당시 불법적인 조직으로 간주되었던 공산당은 지하활동밖에 할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조직보호와 신변안전에 대한 고도의 경계 때문이다. (주석 187)

 

187) 紅色警衛   葉健君  李萬靑 著  湖南出版社  細節決定存亡 周恩來鮮爲人知的秘戰藝術   中國共産黨新聞網

----------------------------------------------------------------------------------------------------------------------------------

 

91. 저우언라이의 스파이 3계명 "세심함이 생사를 가른다"

 

공산당 스파이조직인 ‘터커(特科 특과)’의 임무는 중앙기관의 안전을 보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당시 중공중앙은 상하이의 비밀 아지트에 있었다.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도시로 노동자들이 가장 많았다. 또 외국 조계지가 있어 비교적 자유로운데다 여러 나라의 정보요원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공산당 중앙 ‘터커’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 초소형의 정예 ‘특수조직’이었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됐다. 뽑힌 개개인은 뛰어난 특기와 함께 담력과 식견이 특출했다. 

터커는  나중에 인민해방군 원수와 대장, 상장들이 나왔고, 총참모장과 부 총참모장, 그리고 부총리와 장관인 부장들을 배출했다. 원수인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대장 뤄루이징(羅瑞卿 나서경), 천겅(陳賡 진갱), 상장(중장), 리커눙(李克農) 등이 그들이다. 중앙 ‘터커’는 총무, 정보, 행동, 교통(연락) 등 4개과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각과는 평시에 직무가 명확하게 구분돼 담당업무를 수행했지만 서로 업무 협력을 통해 중공중앙의 안전보위에 만전을 기했다. 1928년 4월, 터커가 설립된 초기에 저우언라이, 샹잉 등 중앙영도들이 터커 훈련생들에게 정치사상 교육을 했다. 실무 훈련교육은 소련에서 정탐, 취조, 암살, 폭파, 비밀연락 등 정보업무를 배운 구쉰장(顧順章 고순장), 천겅 등이  담당했다.

터커 1과는 총무과로 과장인 홍양성(洪揚生 홍양생)이 설립 초기부터 1931년 까지 계속 업무를 관장했다. 주요 업무는 중앙을 위해 비밀기관과 연락지점 등을 배치하고, 중앙의 중요 회의 장소 등을 물색하는 일이었다. 또 중앙기관의 경비를 조달하고 각종 사회관계망(인적, 물적 네트워크 구성)을 활용해 합법적으로 구속된 공산당원을 구출하는 일을 한다. 1과는 중공중앙의 총무과로 중앙의 일상적인 대소 잡무를 총괄하는 구실을 했다.

 

터커 2과는 정보과로 설립 초기 과장을 역임한 천겅과 판한녠(潘漢年 반한연)은 중앙 터커에서 가장 유명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의 걸출한 6명의 정보원에 중국공산당 정보의 전3걸(前三杰)과 후3걸(後三杰)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전3걸(룽탄‘龍潭(용담) 3걸’이라고도 함)인 첸좡페이(錢壯飛 전장비), 리커눙(李克農 이극농), 후디(胡底 후저) 3명 모두가 천겅의 지도를 받으며 비밀정보업무를 수행했다. 판한녠은 후3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의 업무는 적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적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정탐하고 수집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한 뒤 중앙기관과 당의 영도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군사정보를 취득해 소비에트지구에 보내는 일을 했다. 이를 위해 저우는 단련된 정보요원을 적의 중요 부서에 심어 놓는 방법과 반간계(反間計), 즉 역 스파이 방법을 구사했다.

‘룽탄 3걸’인 첸좡페이, 리커눙, 후디는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위장을 한 뒤 국민당의 스파이조직인 ‘쥔통(軍統 군통)’의 핵심부서에 직접 들어가 국민당 스파이 조직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살펴 고급정보를 캐내 중공중앙에 제공한 첩보전의 대가들이었다. 저우는 국민당이 스파이 조직을 확충하기 위해 무선전신 훈련반을 창립했을 때 ‘룽탄 3걸’을 그곳에 시험 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학력과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곧바로 요직을 맡았다. 칭화대(淸華大 청화대) 출신인 리커눙은 국민당의 무선전신관리국 총부를 관장했다. 후디는 톈진 북방기관을, 첸좡페이는 기밀비서가 돼 이들 3인이 국민당 스파이조직 건립 초기 이미 비밀리에 무선통신을 장악해 국민당의 모든 기밀을 손금 보듯 가려내 고급정보들이 줄줄이 중공중앙에 전달됐다.

 

역 스파이 활용은 국민당 첩자(特務 특무)들을 끌어내 그들에게 ‘미끼’를 건네주고 신뢰관계를 쌓은 뒤 반간계를 써 허위정보를 흘리거나 조그만 정보를 주고 큰 정보를 취하는 술책을 말한다. 이중첩자를 활용해 생사를 넘나드는 곡예를 펼치기도 했다. 주로 공산당 안에 침투한 국민당의 잠복 첩자, 이른바 내선(內線) 침투 간첩들을 소탕하는 데 이 방법을 이용했다.

 

터커 3과의 정식명칭은 행동과였으나 ‘홍색공포대(紅色恐怖隊)’의 약칭인 ‘홍두이(紅隊 홍대)’로 널리 불렸다. 터커 내부에서는 ‘따꼬우두이(打狗隊)’라고 했다. 개를 때려잡는 팀? 즉 공산당을 배반한 변절자를 응징하는 임무로 배반자와 국민당 정보요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통상적으로 정보과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면 ‘홍대’에서 배신자를 처단하는 집행자의 구실을 했다. 홍대는 정예의 소형 무장부대였다. 이들 구성원은 노동자 규찰대를 골간으로 해 이루어졌는데 상하이 노동자무장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여기에 전투경험이 있는 국민혁명 북벌군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백발백중의 명사수’거나 ‘폭파의 달인’들이었다. 홍대 요원들은 때때로 배를 타고 상하이 앞 바다로 나아가 사격연습을 했다.

홍대는 1929년 하반기에 최고의 전성기로 40여 명의 행동대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개개인이 명사수인데다 당시 흔치 않았던 자동차도 곡예하듯이 운전하는 만능인이었다. 그들은 여러 형태의 권총뿐 아니라 화학수류탄도 갖고 있었다. 오늘날의 최루탄과 같은 이 수류탄은 사용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이들 요원에겐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특수 안경이 지급되었다. 이 화학수류탄은 행동개시 후 적의 추격을 받았을 때 그들을 따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상하이 조계지의 외국회사에서 총기를 구입했는데 심지어 기관총을 사들여 무장하기도 했다.

 

저우언라이가 터커를 이끌었던 기간 중 시종일관 관철했던 지도사상은 요원들이 국민당의 당, 정, 군, 경찰, 헌병, 특수기관 등에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고 내부에 잠입한 간첩을 숙청하며 적들의 파괴음모를 효과적으로 분쇄해 당중앙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도사상에 따라 저우는 엄격한 원칙과 기율을 제정해 터커가 단순히 공포를 조장하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바른 정보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저우는 1)함부로 배신자를 처단하거나 2)공개적으로 스파이활동을 하며 3)임의적 납치행위를 하는 것 등을 일체 불허하는 3개 원칙을 고수했다. 저우언라이가 1931년 말 중앙을 떠나 루이진 소비에트지구로 간 뒤 왕밍의 좌파 모험주의가 득세하면서 터커들이 이런 3대 원칙을 무시하고 공개적인 공포행위를 자행함에 따라 조직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노출된 중공 터커조직은 국민당의 집중 표적이 돼 심대한 타격을 받아 종내 조직이 파괴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주석 188)

 

터커 4과는 교통과로 비밀연락 업무를 관장하면서 당의 영도급 인사를 소비에트지구에 호송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28년에 들어서면서 비밀 무선전신국을 세워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가 됐다. 당시의 무선전신은 신무기에 버금하는 첨단장비로 중공중앙과 코민테른에서부터 각 소비에트지구와 통신 연락하는 주요 구실을 했다. 4과는 나중에 무선전통신과로 바뀌었다.

 

이처럼 비밀 스파이조직을 총지휘하던 저우언라이는 ‘세심한 부분이 생사존망을 가른다’는 철칙아래 시시콜콜한 세밀한 문제에까지 정보요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예를 들면 요원들의 거주지는 앞과 뒤에 문이 있는 집을 물색한다. 앞문에도 길이 있고 뒷문에도 길이 있어야 한다. 만일 적들이 앞문으로 치고 들어올 때 달아날 수 있는 비상통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의를 할 때는 사전에 길을 잘 살펴야 한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막다른 골목으로 피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예방을 하기 위한 것이다. 나들이 할 때는 변장이 필수다.

당시 30대의 저우는 노인에서 부녀자, 외국인 선교사 등으로 자유자재로 변장해 위기를 모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연락을 할 때는 단선(單線) 연락 방식을 고집했다. 상부 선에서는 하부 선의 주소를 알 수 있지만 하부 선에서는 상부선의 주소를 모르도록 했다. 비밀은 위로는 부모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아래로는 집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식이었다.

----------------------------------------------------------------------------------------------------------------------------------

 

92. 구쉰장 배신, 전멸위기 빠진 공산당 운명은

 

1931년 1월, 중공중앙이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6기 4중전회를 열었을 때였다. 모스코바에서 온 왕밍이 미프의 지지로 중앙 영도층에 들어갔다. 당내에 의견이 분분했다. 또 몇몇 공산당원들이 체포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4월에 중공중앙의 터커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인 구쉰장(顧順章 고순장)이 장궈타오를 악예환(鄂豫皖 후베이-허난-안후이) 소비에트지구에 무사히 호송한 뒤 우한에서 머물다 24일 체포됐다.

헌데 그는 그날 밤 변절했다. 구쉰장은 터커의 책임자로 터커 조직뿐 아니라 정보요원들을 다 알고 있었다. 중공중앙의 비밀 아지트도 훤히 꿰고 있었다. 때문에 구쉰장이 모든 것을 불어버리면 국민당이 영도층 뿐 아니라 고위 당원, 정보요원들을 굴비 엮듯 일망타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공중앙의 붕괴는 불문가지였던 것이다. 피바람 부는 대량 살육도 받아 놓은 밥상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배신으로 공산당을 전멸 위기로 몰아넣었던 터커 책임자 구쉰장.


운명의 여신은 공산당을 구원했다. 구쉰장이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흥정하면서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제스를 직접 만나 정보를 불겠다고 버텼다. 구쉰장을 체포한 우한의 전담체포 비밀경찰은 공 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급히 국민당 스파이조직인 당무조사과에 보고했다. 이 비밀 전보는 난징 중앙당부의 스파이조직 책임자 쉬언쩡(徐恩曾)에게 전달됐다. 헌데 쉬언쩡의 신변에는 중공중앙의 룽탄 3걸의 한 사람인 첸좡페이가 암약하고 있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하룻밤 사이에 우한에서 잇따라 6통의 긴급전보가 난징으로 날아왔다. 전보가 오는 족족 첸좡페이의 수중에 들어갔다. 기생집에 드나들던 쉬언쩡이 외출할 때 통신 비밀 번호부를 첸좡페이에게 보관했기 때문이다.

첸좡페이는 곧바로 자기의 사위 류치(劉杞 유기)를 상하이로 보내 리커눙에게 전반적인 상황을 전달하도록 했다. 리커눙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중앙기관을 전부 옮기는 한편, 주요 영도층과 당원, 정보요원들을 긴급 대피시키고 구쉰장이 알고 있는 무선통신 코드와 절차를 모두 바꿔버렸다.

우한의 비밀경찰은 이때 구쉰장을 배에 태워 난징에 보내 장제스를 만나도록 했다. 국민당 쥔통(軍統 군통)은 구쉰장을 인도받아 상하이에 데려와 공산당 소탕에 나섰다. 하지만 반보 앞선 저우언라이의 조처로 중요 영도자와 간부들이 모두 피한 뒤여서 허탕을 쳤다.

그럼에도 구쉰장이 공산당 상하이조직과 장쑤성 조직을 폭넓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통보받지 못한 공산당 간부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27년 공산당 대학살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중공중앙은 풍비박산이 되다시피 했다. 저우는 공산당의 철칙에 따라 잔혹한 보복조처로 당의 존재를 과시했다.

구쉰장의 부인 장싱화(張杏華 장행화)와 몇몇의 친척들이 터커에서 일했다. 저우언라이는 '홍대'에 지령을 내려 무고한 이들을 비롯한 구쉰장의 가족과 친척 15명을 몰살했다. 이때 공산당 총서기 샹중파(向忠發 향충발)는 1931년 6월 저우언라이와 함께 루이진 소비에트지구로 떠나기로 했으나 위험하다는 저우의 경고를 무시하고 연인과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지체하는 바람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왕밍은 모스코바로 떠나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대표가 됐다. 이에 따라 9월 상하이에서 중공중앙은 임시 중앙정치국을 구성해 보구(博古 박고)를 총서기로 임명했다. (주석 189)

189) 細節決定存亡 周恩來鮮爲人知的秘戰藝術   中國共産黨新聞網
----------------------------------------------------------------------------------------------------------------------------------

 

93. 국민당 내부서 암약한 공산당 스파이들

 

영원한 적이 없고, 이해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비정한 현실이다. 현실은 생존과 직결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또한 그러했다. 저우언라이는 이 시기에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품성 등 개인적 매력을 한껏 발휘해 장제스 통치구역인 시안과 우한, 충칭 등으로 무대를 옮기며 공개적으로 국내외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공산당의 브랜드가치를 높였다.

 

저우는 이 시기에 은밀하게 국민당과 군의 고위 관계자들을 친중공 인사로 탈바꿈시키는가 하면 곳곳에 정보 요원들을 심어 공산당의 비선조직을 넓혀가고 있었다. 국민당 서북군 총사령관이자 장제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종난(胡宗南 호종남) 사령부 기밀실의 부주임 다이중롱(戴中溶 대중용), 정탐체포대장 샤오더(肖德 초덕) 등이 비밀리에 중공을 위해 복무하도록 했다. 저우언라이는 후종난의 부관으로 중공 정보요원인 슝샹후이(熊向暉 웅향휘)를 심어 후종난의 일거일동을 살폈다.

 

저우는 또 '정보의 대가' 리커눙을 각 대도시에 파견해 '8판(바반 8辦; 8로군 사무실)'사무실을 개소해 해당 도시의 민주인사와 명망이 높은 각계 인사들을 선발해 책임을 맡도록 했다. '8판'은 이들의 지지와 지원 아래 합법적 통일전선 공작을 펴면서 정보업무를 병행했다. 저우언라이는 투쟁은 항상 공개적인 것과 비밀적인 양면의 손을 갖고 있어 이 두 손을 거친 자료와 정보를 분석해 대응하면 상대방의 전략전술을 사전에 간파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지론을 폈다.

 

저우가 충칭(重慶 중경)에서 국공합작 업무를 수행하면서 정보원 선안나(沈安娜 심안나)를 국민당 총부에 심어 놓은 일이 있었다. 선안나는 글씨를 잘 써 1935년 초 시험을 쳐 저장성 정부에 속기록원으로 들어갔다. 저우는 적당한 시기를 포착해 그녀를 국민당 중앙당부 기요처의 속기록원으로 집어  넣었다. 국민당 중앙회의의 중요 정보가 저우에게 고스란히 올라온 것은 불문가지다.

 

 

국민당의 장제스 주변에 매복했던 여 스파이 심안나 / 시예허겅(謝和賡 사화갱), 왕잉(王瑩 왕영) 부부

 

1946년 3월 국민당 6기 2중전회는 국공간의 '쌍십협정'을 깨고 내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4월에 국민당은 국방 최고위원회 회의를 열어 공산군이 주둔한 해방구를 진공(進攻)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 뒤 선안나는 회의내용을 전부 베껴 옌안에 보냈다. 국민당이 중원지구에서 8로군을 공격해 국부적 내전이 터졌다. 저우언라이는 미리 선안나의 정보를 기초로 8로군을 이전 배치토록 해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정보요원들을 장기적으로 암약케 해 결정적 시기마다 선수를 치는 중요구실을 했다.

 

저우언라이가 심모원계로 정보 요원들을 장기 암약시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저우는 국민당 3대 군부 정예 집단 관구사령부에 항전 초기 '3대 비밀병기'를 심어 놓아 내전이 폭발했을 때 이들 '병기'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서북군 집단사령부 후종난 주변에는 칭화대 출신으로 글을 잘 썼던 슝샹후이(熊向暉 웅향휘)를 암약시켰다. 슝샹후이는 곧 후종난의 깊은 신임을 얻는 비서가 되어  기밀업무를 다루는데 참여할 수 있었다. 슝샹후이가 결혼할 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태자’로 불린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가 결혼증인을 설 정도로 국민당 권력층의 슝샹후이의 신임은 대단히 높았다.

 

중원집단 사령부의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 신변에는 문채가 뛰어나고 풍류에 일가견이 있는 시예허겅(謝和賡 사화갱)을 붙여 놓았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영화배우 왕잉(王瑩 왕영)이었다. 시예허겅은 유격전 강의 원고로 국민당 전군의 극찬을 받았다. 베이핑군구 집단사령부 푸줘이(傅作義 부작의) 옆에는 베이징대 출신의 옌여우원(閻又文 염우문)이 따라붙었다. 옌여우원은 푸줘이의 고향 후배였다. 신문을 만들고 고위 지휘관 학교를 운영하는 소장으로 푸줘이의 비서가 됐다. 옌여우원은 푸줘이가 마오쩌둥에 보낸 전문을 기초해 전국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주석 192)

 

이들은 모두 오래 전에 잠입해 고위 장령으로 성장하며 국민당 권력층의 깊은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국민당의 군사계획 등의 정보를 소상하게 알 수 있었다. 서북군의 경우 후종난 사령관이외에 군단장이나 사단장이 모르는 정보를 옌안에 있는 펑더화이는 리커눙을 통해서 훤히 꿰고 있어 지피(知彼)로 백전불태(百戰不殆)일 수밖에 없었다. 저우는 공산당이 병력이나 무기의 엄청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적의 내밀한 전략전술을 캐낼 수 있는 정보 요원들을 양성해 호구(虎口)속으로 밀어 넣어 실제 전쟁에 앞선 '전쟁'을 벌인 것이다.

 

190) 細節決定存亡 周恩來鮮爲人知的秘戰藝術  中國共産黨新聞網
191) 紅色特科王 李克農;; 戱사蔣介石與毛人凰鬪法   中國共産黨新聞網
192)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94. '총 쏘지 않는 장군' 대 스파이 리커눙의 첩보전

 

중국내전은 이제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국민당 군대는 430만 명, 공산당 군대는 126만 명이었다. 미군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은 전투기 등 현대식 무기를 공급받아 탱크 등 제대로 된 중무기가 없는 공산당군의 화력을 압도했다. 누가 보아도 국민당군이 질 수 없는 전쟁에서 공산당군은 국민당군 8백만 명을 전멸시키며 중국을 통일했다. 장제스는 중국을 잃은 뒤 '군사(軍事)'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보(情報)'에서 져 본토를 잃었다고 탄식한바 있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발굴해 공산당의 '정보 분야의 전설’로 키운 리커눙은 소년시절을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의 신해혁명 발원지인 우후(蕪湖 무호)에서 보냈다. 리커눙은 어린 시절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상황을 보고 진보적 교육을 받아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에 대한 의식을 키워갔다. 리커눙은 낡은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는 혁명사상을 가지고 1926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리커눙은 입당한지 얼마 안 돼 공산당의 안배로 국민당 우후시당 선전부장이 됐다. 리커눙은 1차 국공합작 때 '합법적 신분'으로 민생중학(民生中學)을 설립해 기지로 삼았다. 리커눙은 공산당의 기반을 넓혀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 세력화하면서 안후이성 군벌인 천댜오위안(陳調元 진조원)과 첨예하게 맞서는 투쟁을 벌였다.

'공산당 정보 분야의 전설'로 평가 받는 리커눙

 

환군(皖軍; 안후이성 군) 총사령관 천댜오위안은 성품이 포악한데다 안하무인으로 무력을 동원해 민중들의 고혈(膏血)을 짜내  안후이성 화근의 괴수였다. 리커눙은 1927년 4월 6일 오전 천댜오위안을 징치하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해 수많은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속에 만들어 놓은 '천댜오위안'이라고 쓴 종이로 만든 사람이 시커멓고 마른 긴 손으로 돈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을 내보이는 퍼포먼스로 천댜오위안이 죽어서도 민중을 수탈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민중은 '비적 천댜오위안을 체포해 타도하자!'고 열광했다. 장제스는 "1천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1명의 공산당원을 놔둘 수 없다"며 리커눙 등 공산당원을 추포해 도살할 것을 천댜오위안에게 명령했다. 리커눙은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당했지만 '개를 빌어 개를 물게 하는' 이른바 '이이제이' 계책을 꾸며 천댜오위안이 구명해줬다는 소문을 곳곳에 퍼트렸다. 이런 얘기를 들은 장제스가 대노하자 천댜오위안은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한 나머지 수년 동안 민중을 착취해 긁어모은 재산을 눈물을 머금고 장제스에게 상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주석 191)

 

리커눙은 이후 국민당의 스파이조직에 잠입해 중공 정보 분야의 유명한 '룽탄 3걸'로 수많은 공적을 쌓아 신중국 건국 후 전투를 벌이거나 총 한방 쏘지 않고 상장 계급을 수여 받은 '특수한 장군'으로 유명했다. 마오쩌둥은 외빈과의 접견에서 "리커눙은 중국의 대 스파이다. 단 그는 공산당의 스파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리커눙은 타이완으로 쫒겨 난 국민당 정부가 신중국과 치열한 '스파이 전쟁'을 벌일 때도 타이완의 정보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등 정보 분야의 전설로 통했다. 1962년 리커눙이 병사했을 때 공산당 1대 대표이자 원로인 둥비우(董必武)는 추도사를 통해 리커눙의 공적을 당나라 태종(太宗) 때 유명한 재상 방현령(房玄齡)과 진한(秦漢) 시기의 뛰어난 모사 이좌거(李左車)에 빗대는 등 높이 평가했다. 죽의 장막 시절 중국의 정보기관과 첩보전을 벌였던 미국정보국은 리커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작야 해 정보요원들에게 3일간의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191) 紅色特科王 李克農;; 戱사蔣介石與毛人凰鬪法   中國共産黨新聞網

----------------------------------------------------------------------------------------------------------------------------------

 

95. 국공합작의 균열…'작은 거인' 덩샤오핑

 

1938년 항일 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면서 공산당의 세력이 크게 늘어나자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여우와 두루미’식 공존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일본군은 피부병 정도의 적에 불과하지만 공산당은 복배의 적으로 하루빨리 도려내야 할 대상이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국민당은 ‘적극반공, 소극항일’의 정책을 채택했다. 1939년 1월, 국민당은 5기 5중전회를 열어 ‘융공(融共), 방공(防共), 한공(限共), 반공(反共)’ 방침을 통과시키고 ‘이당(異黨)문제 처리방법’과 ‘이당 활동을 제한하는 방법’ 등의 문건을 제정했다. 공산당의 확장을 방지하고 공산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 조처였다.

1939년 초에 들어서면서 장제스와 국민당 강경파는 공산당의 항일근거지인 ‘싼간닝(싼시-간쑤-닝샤)’지구와 다른 지역에서도 분쟁을 조성했다. 6월 12일, 쓰촨성 군벌 양선(楊森 양삼)의 휘하 부대가 후난(湖南 호남) 핑장(平江 평강)의 신사군 핑장통신소 경비대와 무력충돌을 일으켜 신사군 참의 투정퀀(涂正坤 도정곤)과 8로군 등 6명을 총살했다. 후종난은 12월 ‘싼간닝’ 변계지구를 공격해 ㅤㅊㅝㄴ화(淳化 순화) 등 5개현을 점령했다. 산시(山西 산서) 군벌 옌시산(閻錫山 염석산)도 12월 사변을 일으켜 항일근거지의 유격대원과 진보인사들을 대거 살해했다.

 

장제스는 이어 1940년 2~3월간 8로군 총사령부가 있는 타이항산(太行山 태행산) 구역을 공격했다. 마오는 8로군과 무장 세력들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강력 대응토록 해 타이항산 총사령부는 총력을 기울여 침공한 국민당 97군 주화이빙(朱懷氷 주회빙)부대를 패퇴시켰다. 이처럼 장제스는 항일전쟁 중에도 중공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8로군, 신사군과 간단없는 전투를 이어갔다. (주석 192)

 

앞서 1938년 1월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에 임명돼 타이항산에 주둔하고 있는 129사단에 배속됐다. 류보청(劉伯承 유백승)이 이끌고 있던 이 사단은 약 1만 3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장궈타오가 통솔했던 4방면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8로군의 다른 2개 사단에 비해 사기나 전투력이 떨어졌다.

사단장 류보청은 덩샤오핑과 동향인 쓰촨 사람으로 덩샤오핑보다 12살 많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류보청과 덩샤오핑을 한 몸이라는 뜻의 ‘류-덩’이라고 부를 만큼 둘은 환상의 콤비였다. 덩샤오핑은 훗날 류보청의 전기에서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기술했다. 이들은 중국을 통일할 때 까지 12년간 '주-마오'에 비견되는 '류-덩'부대를 이끌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혁혁한 승리를 일궈냈다.

 

마오에 이어 제2대 중국 영도자로 개혁개방을 선도해 오늘의 중국을 G2 국가 반열에 오르게 한 5척 단구의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성 광안(廣安)현 시예싱향(協興鄕 협흥향) 파이방(牌坊 패방)촌에서 태어났다. 원명은 덩시옌성(鄧先聖 등선성), 학명은 등시시옌(鄧希賢 등희현)이다. 광안중학교를 졸업한 뒤 15살 때인 1919년 일하면서 공부하는 ‘충칭 근검공학 프랑스유학’ 예비학교에 합격해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24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환했다.

1926년 초 소련의 중산대학으로 갔다가 이듬해인 1927년 귀국해 시안 펑위샹(馮玉祥 풍옥상) 국민군 연군(聯軍)에 파견돼 정치공작 업무를 수행했다.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뒤 덩샤오핑으로 이름을 바꾸고 8월 7일 우한(武漢 무한)에서 열린 중공중앙긴급회의에 참석해 마오쩌둥을 처음으로 만났다.

1928~1929년 중공중앙비서장에 임명됐고, 1929년 여름에 광시(廣西 광서)에 파견돼 봉기를 일으켰다. 이어 12월과 1930년 잇따라 바이서(百色 백색)기의와 룽저우(龍州)기의를 일으켜 중국 공농홍군 제7군, 8군을 창건해 근거지를 만들어 홍7군, 홍8군 정치위원 겸 전적위원회 서기에 임명됐다.

 

1931년 여름 장시(江西 강서) 중앙근거지에 와 장시성위원회 선정부장이 되었다. 당시 마오쩌둥 노선을 지지하다 보구 등 좌경노선의 미움을 받아 해임되기도 했다. 이후 홍군 총정치부 비서장, 총정치부 기관지 ‘홍싱(紅星 홍성)’의 편집장을 맡았다. 1934년 10월 장정에 나섰고, 연말에 중공중앙 비서장이 됐다.

1935년 1월 준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홍1군단 정치부 선전부장, 정치부 부주임, 주임을 잇따라 역임했다. 항일 전쟁이 터진 뒤 국민혁명군 제8로군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다가 타이항산 류보청의 129사단 정치위원이 된 것이다.

----------------------------------------------------------------------------------------------------------------------------------

 

96. 백단대전 승리에 마오 불만…노출된 8로군의 군세

 

산시(山西 산서)성 동남쪽에 있는 타이항산은 산이 높고 산세가 험준해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힘든 천험의 요충지다. 129사단은 타이항산 깊숙한 곳에 주둔하고 있어 일본군은 타이항산의 8로군을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1937년 11월 성도 타이위안(太原 태원)을 함락시킨 뒤 북, 남, 동쪽에서 타이위안으로 가는 철로선을 집중 방어하고 있었다. 당시 성 주석은 달아나 지방정부는 이미 와해됐고, 일본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민당 군대는 도망가기 바빴다. ‘류-덩’은 1938~1939년에 이런 곳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산시 중부의 산간지대에 또 다른 근거지를 확장했다. ‘류-덩’은 먼저 국민당군을 쳐부순 뒤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1940년 3월, ‘류-덩’은 타이항산 근거지를 공격한 국민당군을 물리쳤다. ‘류-덩’의 승리로 산시의 8로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을 공격할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다. 당시 화베이 지구의 일본군은 ‘나무 우리’ 책략으로 봉쇄작전을 구사했다. 일본군은 잇따라 3000여개의 거점을 만들고 1만여 개의 토치카를 세웠다.

또 5000여 킬로미터의 철로와 3만여 킬로미터의 도로를 건설했다. '류-덩'은 옌안 군사위원회의 지시 유무와 관계없이 화베이(華北 화북) 철도 연변의 일본군의 거점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8로군은 두메산골에 봉쇄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8로군의 생존과 발전이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8로군 총 부사령관 펑더화이는 일본군의 '나무 우리' 봉쇄작전을 깨기 위해서는 유격전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한판 정규전을 벌이기로 했다. 8로군은 1940년 7월 22일에 예비명령을 발동해 20개 여단이 참가하는 정타이(正太 정태)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 (주석 193)

 

이 전투는 8월 20일 정타이루(正太路 정태로)를 중심으로 한 광활한 지역에서 동시 공격으로 시작돼 6개월 동안 계속됐다. 8로군은 애초 22개 여단 4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나중에 전투 규모가 커져 다른 일본군 주둔지역까지 확대돼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8로군도 병력을 5배로 증강, 유격대와 민병 등 20만 명을 투입하는 대규모 전쟁이 되었다.

백단대전에 참가한 8로군의 모습

 

펑더화이와 줘취안(左權 좌권)은 전투 중 8로군 105개 여단이 이 전역(戰役 ;일전한 전략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통일된 작전계획에 따라 일정한 방향과 시간 안에 행하는 전투)에 참가한 것을 알았다. 그중 85개 여단은 사전 통보 없이 직접 전투에 투입된 꼴이 됐다. 8로군의 '전역과 전투의 분산지휘 원칙'에 따라 애초 8로군 총사령부는 20개 여단을 참전시켰지만 각기 다른 부대에서도 전투에 참가해 대규모 전투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 전사에서 유명한 1백 개 여단이 참전한 '바이퇀 따잔(百團大戰 백단대전)'이다. 이 전투의 특징은 실제적으로 어떤 군지휘자나 어떤 군 기구에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화베이 8로군 각 부대 전체가 주도적으로 적극 참전해 전투 규모가 커진 데 있었다. 8로군은 전투지구 안에 있는 일본군 거점, 철로, 도로, 교량, 전선 등을 대량 파괴했다.

일본군이 혼란에 빠지자 참전 항일부대는 더욱 많아지기 시작했다. 애초 8로군 사령부는 전투기간을 규정하지 않고 단지 예비명령으로 부대가 출동하기 전 1개월의 양식을 준비하도록 했지만 대체적으로 1주일 정도의 기간으로 보았다. 헌데 반년에 걸친 장기 전투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단대전은 전투초기 일본군을 수세로 몰았고 펑더화이는 9월 20일 밤 제 2단계 전투를 시작했다. 패퇴했던 일본군은 9월 말에 들어 8로군에 대한 보복 성격의 섬멸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5개 사단, 10개 혼성여단과 1개 기병여단 등 15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1940년 12월 22일 옌안의 작전사령부에 있던 마오와 주더, 왕자샹은 펑더화이에게 전보를 보내 "백단대전이 끝났다고 대외에 알리지 말라. 장제스가 반공을 고조시킬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백전대전의 성세를 이용해 장제스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단대전은 1941년 1월 24일 8로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단대전은 산시(山西 산서), 허베이(河北 하북)에 주둔한 일본군의 통신시설을 몇 주 동안 불통시키고 몇 개의 도시와 마을(城鎭 성진)을 점령해 인민들의 환호와 함께 8로군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항전기간 항일 통일전선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8로군의 만만찮은 화력을 일본군에 드러내는 결과를 빚어 필연적으로 일본군의 반격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에게도 8로군의 근거지 확보와 막강한 병력 보유의 사실을 알림으로써 장제스의 경계심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옌안의 마오쩌둥은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전투를 치른 백단대전의 승리를 불만스러워 했다. 현지 야전사령부의 펑더화이와 8로군의 군세 노출을 꺼렸던 마오의 전략적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마오는 국민당 신문이 백단대전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언짢아했다.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는 자신이 쓴 회고록에서 "백단대전은 옌안의 동의 없이 10일 전에 전투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대해 마오는 대단히 화를 냈다. 마오는 자신과 덩샤오핑을 포함한 다른 지휘관들이 전투 제1단계 승리 후 대규모 전투로 확대했다고 판단했다. 또 2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한 것은 너무 무모했다고 마오는 생각했다"고 기술했다. 5년 후 1945년 여름, 옌안에서 회의가 있었을 때 펑더화이는 이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펑더화이는 또 1959년 루산(廬山 여산)회의 이후 백단대전과 관련한 과오에 대해 비판을 받았고 문화혁명 기간에는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백단대전은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덩샤오핑 전기에는 백단대전을 평가하는 두 가지를 언급하는 대목이 기술되어 있다. 하나는 "8월 초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38개 여단(지방부대 미포함)을 이끌고 백단대전에 참가했다. 529 차례의 대소 전투를 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왕징웨이 정부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국 인민의 민심을 고무시켰다"고 적고 있다. 또 하나는 "1941년 화베이 적 후방의 항전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단계였다. 일본침략군이 중국침략의 중점을 적의 배후(8로군이 포진한 곳)로 집중했다"고 서술했다. 백단대전의 양면성을 거론했지만 과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주석 194)

 

어쨌든 백단대전 이후 2년 동안 8로군은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태평양전쟁을 터트렸으나 일본은 중국 주둔 일본군의 병력을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근거지 내의 공산당의 군대와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집중 소탕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깡그리 죽이고(殺光), 모두 불태우며(燒光), 모조리 빼앗는(창光)' '3광' 군령아래 여러 차례 근거지에서 공산당원이나 일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대 도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밭에 있던 곡식이란 곡식은 모두 불태웠고 농가에 비축했던 식량은 모조리 약탈해 갔다. 1942년 말이 됐을 때 류보청-덩샤오핑이 건설한 129사단의 2개의 근거지를 포함해 화베이 평원의 공산당 근거지에는 8로군이 통제하는 어떤 무장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8로군이 뿌리박았던 산간지구를 비롯해 백단대전으로 점령했던 도시와 마을(城鎭 성진)도 모두 잃어버렸다.          

193) 百團大戰的幕後故事   理論頻道  新華網
194) 揭秘 129師進軍太行山   人民網

----------------------------------------------------------------------------------------------------------------------------------

 

97. 국민당의 기습공격 '완난사변'…"하늘도 돕지 않았다"

 

장제스와 국민당 보수 강경파들은 항일전쟁 와중에서도 공산당이 날로 세력범위를 넓히고, 군사력을 증강해 가자 또다시 ‘반공(反共)’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중공의 ‘싼간닝(싼시-간쑤-닝샤)’을 비롯한 변계지구와 국민당 관할구역에 주둔하고 있는 8로군을 공격했다. 국공합작 국면에서 벌어지는 ‘여우와 두루미’의 갈등과 모순은 화약고를 걸머진 아슬아슬한 곡예의 연속이었다.

국민당은 1940년 7월 16일 중공중앙에 8로군과 창장(長江 장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는 신4군을 1개월 후 모두 황허(黃河 황하) 이북으로 이동하고 50만 명의 주력부대를 10만 명으로 감축하도록 하는 ‘중앙제시안’을 내놨다. 2개월 뒤 장제스는 장수성(江蘇省 강소성) 북쪽의 반공진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장시성 주석 한더친(韓德勤 한덕근)과 지방실력자 리밍양(李明揚 이명양), 천타이윈(陳泰運 진태운) 등과 밀접하게 협력해 중공의 항일근거지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때 한더친은 26개 연대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시성 북쪽 중공의 활동 근거지인 장옌(姜堰 강언), 황차오(黃橋 황교) 지구로 진공했다. 이 일대의 신4군은 7천여 명이 있었으나 전투 병력은 5천여 명에 불과해 상황이 엄중했다. 9월 30일, 한더친은 1만 5천여 명의 병력으로 신4군 황차오 진지를 공격했다. 천이와 수위(粟裕 속유)가 지휘하는 신4군은 과감하게 공격해 일거에 한더친의 1만 1천여 명을 박살냈다. (주석 195)

 

장제스는 황차오에서 참패한 뒤 앙앙불락하며 기회를 엿보면서 더욱 더 반공정책을 강화했다. 10월 19일,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 부 참모총장인 허잉친(何應欽 하응흠)과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가 8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 주덕), 부사령관 펑더화이, 신4군 군단장 예팅(葉挺 엽정)에게 각각 전보를 보내 국민당의 ‘중앙제시안’에 따라 창장 남북에 주둔한 신4군을 1개월 안에 전부 황허 이북으로 이동하고, 50만의 8로군과 신4군을 합쳐 10만 명의 병력으로 감축하지 않으면 공산당과 무장세력을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중공중앙은 항일전선의 국공합작 유지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창장 남부인 완난(皖南 환남; 안후이성 남쪽)지역의 신4군을 창장 이북으로 이동하는 데 동의하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1941년 1월 4일, 신4군 9천여 명이 주둔지 윈링(雲嶺 운령)에서 길을 에돌아 북상하기 시작했다. 신4군이 6일 징(涇 경)현 마오린(茂林 무림)지구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20만 명에 달하는 국민당군이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신4군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좌충우돌하던 2천여 명만 포위를 뚫고 달아났을 뿐 대부분이 포로가 되거나 살해됐다. 군단장 예팅은 산에서 내려가 국민당군과 담판을 벌이다 억류됐고 부군단장 샹잉과 부참모장 저우즈퀀(周子昆 주자곤)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 원국평)은 포위를 돌파하다 희생됐다.

국내외를 놀라게 한 ‘완난사변’이다. 남방지역에서 3년간 악전고투의 유격전을 벌이며 단련된 정예군단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벌이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신4군 지대를 이끌었던 천이는 완난사변으로 신4군이 소멸됐다고 통탄했다. 국민당의 불시의 기습에 1만 명에 이르는 정예 병력을 잃은 중공중앙은 복장이 터졌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전투의 패인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병력, 무기 등 장비, 전략과 계책, 날씨, 지리적 위치, 정보, 전투력, 지휘관의 자질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병가(兵家)인 손자(孫子)는 전투에서 천시(天時; 때와 날씨)는 지리적 이점(利点)만 못하고 지리적 우세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며 지휘관과 전투원의 단합과 단결을 중시했다. 역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전투는 천시, 지리, 인화 모두 따라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주석 196)

 

신4군을 통솔했던 군단장 예팅과 부군단장 샹잉은 전투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예팅은 일찍이 쑨중산(손문)의 경호단 대대장을 맡으며 광시 군벌 천지융밍(陳炯明 진형명)과 여타 군벌들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북벌군의 명장으로 위명을 떨쳤다. 예팅은 모스크바에 가 마르크스-레닌을 학습하고, 10월 혁명을 경험한 뒤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예팅은 정규적인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아 정규전에 능했다.
 

예팅 / 저우언라이와 예팅.


그는 신4군의 정규 작전능력을 중시했다. 예팅은 집안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자신의 돈으로 광둥에서 총기를 사 부인에게 완난(皖南 환남; 안후이 남쪽 신4군 근거지)으로 운송하기도 했다. 예팅은 개인 의표(儀表)를 중시해 평시에도 의관을 정제하는 깔끔한 차림의 군복을 입었다. 사람 됨됨이가 시원시원하고 호방해 늘 손님을 청해  자리를 마련하는 등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성격은 의지가 굳세 자존심이 강하고 억울한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팅은 1928년 두 번째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곳에서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예팅은 단칼에 작별인사도 없이 공산당과 혁명대오를 떠나 10년의 오랜 세월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샹잉은 중국공산당의 창건자들인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천탄치우(陳潭秋 진담추) 등을 추종해 25살에 중공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후 당정군 중요 영도직을 맡았다.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샹잉은 혁명전쟁 중 많은 공을 세웠다. 샹잉은 특히 남방 3년 유격전을 하는 동안 간난신고를 겪으며 홍군의 역량과 혁명근거지를 지켰다. 샹잉은 조기의 혁명경력으로 영용무쌍한 전투정신과 고생스러운 군 생활이 몸에 배어있었다. 샹잉은 분투정신이 뛰어나고 근검절약하면서 청렴했다. 독직과 부패 징벌에 엄격했다. 샹잉은 도량이 넓고 솔직담백한 성격이었다. 어떤 때는 고집스럽기도 했으나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샹잉은 유격전에 익숙했고 왕밍 노선을 추종했다.

 

예팅과 샹잉은 개인소양이나 영도수준과 공작방식에 관계없이 혁명과정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군대 전략전술 운용에 있어서 정규전과 유격전으로 확연하게 달랐다. 신4군은 공산당이 독립 자주적으로 지휘하는 8로군과는 달리 국민당의 군대편제에 따라 개편돼 국민당의 관할아래 있었다. 장제스는 애초 신4군을 확고하게 통제하기 위해 국민당 고위 장령인 천청(陳誠 진성)이나 장파구이(張發奎 장발규)를 군단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공산당이 강력  반발했다. 마오는 또 펑더화이나 예졘잉(葉劍英 엽검영)을 군단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이 또한 장제스가 용인하지 않았다. 해서 공산당원이었다가 탈당한 비교적 신분이 자유로웠던 북벌군의 명장 예팅이 국공 양당이 동의로 군단장에 임명됐다. 부대명인 신4군의 명칭도 예팅이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제4군’, 즉 ‘신4군’이라 한데서 비롯됐다. (주석 197)

 

신4군은 홍군의 남방유격대를 주축으로 이뤄진 군대로 참모들 대부분이 공산당원이었다. 예팅은 샹잉을 비롯한 참모들과 일정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옌안의 중공지도부와도 마찬가지 관계였다. 중공이 보내는 지시전보나 비밀지령은 전부가 부군단장이자 중국공산당 동남국(東南局)서기이며 실제 신4군 정치위원 노릇을 하고 있는 샹잉에게 보내졌다. 해서 최종 결정권은 군단장인 예팅에게 있었으나 신4군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샹잉이 쥐고 있었다.

예팅의 정규전과 샹잉의 유격전이 적당한 배합을 이뤄 서로간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최선의 작전지휘였지만 둘 사이의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우세를 발휘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전의 관계가 없었기에 개인적인 은원은 없었다. 부군단장인 샹잉은 예팅을 배려해 보고나 문서처리, 지휘 결정 등에 있어서 그가 먼저 의견을 달도록 신경을 썼다. 샹잉은 식사할 때도 예팅의 신분과 경력을 고려해 혼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자신은 장병들과 공동식사를 했다.

 

완난사변 초기 신4군은 정규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예팅이 국민당군의 싱탄(星潭 성담)방어선을 강력 돌파했더라면 기사회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샹잉이 지휘를 하게 되면서 분초를 다퉈야 할 시간에 장장 ‘7시간 회의’를 하는 등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전기(戰機)를 놓쳐버렸다. 또 후기의 쓰징컹(石井坑 석정갱) 포위 돌파 때 예팅은 국민당군의 삼엄한 포위로 외부의 지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진지를 고수하며 정규전을 벌여 돌파의 희망을 찾지 못했다. 부대의 핵심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격전으로 돌파시도를 했어야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샹잉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갔으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문제는 이런 중요한 시기에 두 지휘관이 긴밀히 협조하면서 통일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공 동남국 부서기 라오수쓰(饒漱石 요수석)는 궁지에 몰려 탈출희망이 보이지 않자 예팅에게 산 아래에 내려가 국민당의 구주통(顧祝同 구축동)과 담판을 벌여 신4군 장병들이 장쑤성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보라고 요구했다. 예팅은 “우리들은 현재 패군지장이다. 병력도 없다. 담판조건이 안 된다. 나는 내려갈 수 없다. 대혁명 실패 후 나는 10년 동안 당을 떠났다. 이것이 비통한 교훈이다. 나는 이를 깊이 새길 뿐이다”라며 거부했다. 예팅은 나중에 할 수 없이 담판을 하러 국민당 진지로 내려갔다가 억류당하고 말았다. 산속으로 달아난 샹잉은 완난사변 2개월 뒤인 3월 13일 밤 부참모장 저우즈퀀 등과 미펑(蜜蜂 밀봉)동 동굴에서 잠을 자다 배반한 자신의 부관 류호우종(劉厚總 유호총)이 쏜 총에 맞아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

 

지리적인 조건과 천시도 불리했다. 신4군이 집결하고 이동한 지역을 보면 군지휘부는 분지에 있었다. 각 소속 부대는 작은 평원(平原)의 각 진과 마을에 주둔했다. 칭이(靑弋 청익)강이 가운데로 흘렀다. 작은 평원 주변에는 높은 산이 있고 숲이 우거진 재가 있었다. 높낮이가 커 칭이강이 평소에 완만하게 흐르다 큰 비가 오면 강물이 넘쳐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다. 이런 지형은 큰 싸움을 벌이는데 마땅치 않았다. 적군이 주변 각 산 모퉁이를 점거하면 독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게다가 신4군은 병사들은 화폐 찍는 기계, 인쇄기계 등 각종 사무기기와 생활 도구 등을 운송하고 있어 행동이 불편했다. 또 신4군이 이동한 마오린(茂林 모림)지구는 칭이강 상류의 두 개의 하천이 흐르는 사이에 있어 동, 서, 북 3면이 강물로 둘러싸여있고, 수심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였으나 사방 1백여 리에 불과했다. 적 3개 사단이 험한 곳에 보루를 세워 지키면 지나가기 어려웠다.

작전구역이 높은 산에 중첩되고 통행이 불편한데다 좁고 험한 길과 구덩이, 계곡이 많았다. 산세가 가파르고 나무가 울창했다. 산길이 좁아 일열 종대로 지나갈 수밖에 없는데 각 종대가 재(마루)로 인해 분리돼 종대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서로 지원할 수 없는 꼴이었다. 날씨도 나빴다. 며칠간 겨울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려 산길이 진창으로 바뀌어 전투 행동반경이 크게 제한받았다. 장병들도 행군에 피로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신4군 지휘부가 있는 윈링(雲嶺 운령)과 마오린 지구는 40여 리로 정상적인 날씨에 부대가 강행군할 경우 하루면 넉넉하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날씨 탓으로 부대는 1월 4일에서 6일까지 마오린에 머물렀다. 신4군을 토벌했던 국민당 제 32집단군 사령관 상관윈상(上官雲相 상관운상)은 완난사변 후 1차 연회석상에서 “신4군 포위소탕 작전은 매우 순조로웠다. 하늘이 돕는 듯 작전당시 며칠 계속 비가 내려 신4군은 산 계곡에 갇혔다. 앞은 좁은 산길, 뒤는 칭이강이 넘쳐 물길이 거셌다. 진퇴유곡이었다”고 말해 지세와 날씨 조차 신4군에게 불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5) 新4軍因何在皖南事變中失利   人民網     皖南事變眞相辨析   文史參考  著者  王洪光  新華網
196) 皖(南事變辨析   文史參考  著者  王洪光  新華網   項英被叛徒殺害經過   人民政協報
197) 新4軍因(何在皖南事變f失利   人民網     皖南事變眞相辨析   文史參考  著者  王洪光  新華網

----------------------------------------------------------------------------------------------------------------------------------

 

98. '완난사변' 반격…"정치 공세로 장제스를 압박하라"

 

중국공산당은 완난사변으로 항일전쟁 중 가장 치명적이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보복의 함성이 전당전군에서 들끓었다. 중공중앙은 국민당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중앙은 1월 14일 전국 각지에 전보를 보내 “정치상, 군사상으로 전면 대반격을 신속히 준비해 신4군을 구원하고 반공을 분쇄하라”며 강력한 보복공격을 요구했다.

전보를 받아 본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는 15일 중앙에 “정치상으로 전면 반격하되 군사상 공격은 잠시 보류해야 한다”는 건의 전보를 보냈다. 류샤오치의 건의는 2차 국공합작의 특점과 화중(華中; 중국 중부)지역의 실제상황 등을 분석해 중공의 실리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감정적 대응보다는 이성적 대응이 우선으로 국공합작을 깨지 않는 선에서 정치적 공격으로 장제스를 압박해 실리를 추구하자는 방안이었다. (주석 198)

 

완난사변이 발생한 뒤 7일 이후 류샤오치는 신4군 군지휘부와 중앙의 옌안과 연락을 취하면서 유효한 수습, 투쟁방안을 모색하느라 7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할 정도로 분전했다. 류샤오치는 9일 심야에 샹잉이 부대를 이탈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옌안에 전보로 통보해 중앙이 샹잉의 직을 해직시키도록 했다.

아울러 동남국 부서기 라오수쓰를 정치, 예팅을 군사 책임자로 해 위기상황을 돌파하도록 했다. 12일, 류샤오치는 중앙에 (圍魏救趙 위위구조;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즉 포위군의 근거지를 공격해 포위당한 우군을 구출하는 계책)의 방안을 제시해 포위당한 신4군의 포위망을 완화시키도록 요청했다.

중앙은 류샤오치의 방안을 받아들여 신4군 포위공격에 참가한 산둥의 선홍리예(沈鴻烈 심홍렬), 안후이 한더친의 근거지를 10일 내 공격할 채비를 갖추도록 산둥(山東 산동)의 뤄룽환(羅榮桓 나영환), 천광(陳光 진광)과 장수(江蘇 강소)의 천이(陳毅 진의) 등에 각각 지시했다. 마오는 14일 신4군 지휘부가 절망적 곤경에 빠진 후 예팅이 붙잡혔다는 마지막 전보를 받고 끝내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15일 충칭에 있는 저우언라이, 예졘잉과 8로군 부사령관 펑더화이, 줘취옌(左權 좌권), 류샤오치, 천이 등에 전보를 보내 “장제스의 모든 인의도덕은 말짱 거짓말이다.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중앙은 정치상의 전면 반격과 군사상 진공해 분쇄할 수 있는 모든 필요 역량을 준비할 것을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오르지 맹렬하고 굳센 전면 반격만이 장제스의 도발과 진공을 격퇴시킬 수 있다. 결렬(국공합작)을 두려워 말고 맹렬하게 반격한다. 우리들의 온건한 방침은 이제 끝났다”고 강조했다. ’위위구조‘ 계책이 전면 반공(反攻)의 강경노선으로 바뀐 것이다.

 

류샤오치는 강경노선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한 뒤 마오와 당중앙에 다시 대안을 제시했다. (주석 199)

 

“현재의 형세에서 국민당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 항전하고 있다. 국공합작이 깨져서는 안 된다. 소련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된다. 완난에서 우리 군을 섬멸한 장제스는 제지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장제스가 분쟁을 확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반증이다. 이때 우리당이 완난사건으로 국민당과 분열하는 것은 옳지 않다. 허잉친(何應欽 허음흠)은 우리 군의 보복을 엄히 방비한다고 명령했을 뿐 전국에서 이 기회를 틈타 우리 군을 공격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현재 화중(華中) 근거지는 넓은데, 병력이 넉넉지 않아 공고하지 못하다. 옌푸(鹽阜 염부)지구에서 토비들이 봉기했고, 황차오는 이미 적들이 점령했다. 하이안(海安 해안) 역시 적들이 점령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부대는 휴식하며 정비하는 보충이 필요하다. 고로 화중을 볼 때 반년에서 1년 안에 큰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 않다. 토비를 말끔히 제거하고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지구를 공고히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류샤오치는 이런 여러 상황을 분석해 “전국 주요한 곳에서 정치적인 대반격을 펼치고 군사상 몇 개 지역 이외에는 잠시 반공(反攻)을 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류샤오치는 “국민당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면서 예팅 등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등 조건을 제시한다. 전국과 전 세계에 완난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선전하는 정치적 공세를 펴 국민당의 분열적 행위를 규탄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정치공세 방안을 제시했다. 류샤오치는 “이처럼 우리가 정치상 유리한 상황에서 군사상 온건한 방침을 유지할 경우 장제스와 허잉친이 반년에서 1년 안에 감히 우리의 화중 근거지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화중진지를 굳건하게 다질 수 있다.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다. 류샤오치의 건의는 중공중앙이 ‘완난사변’을 처리하는 정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마오는 류샤오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중앙은 ‘정치상 전면 공세를 취하면서, 군사상 수세 방침’을 결정하고 장제스에 대해 ‘치고 빠지는’정책을 구사했다. 중앙은 전국적으로 맹렬한 정치공세를 펴 장제스가 ‘완난사변’을 조성한 진상을 폭로하고 책임자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1월 19일, 마오쩌둥과 주더, 왕자샹은 연명으로 펑더화이, 류샤오치 등에게 전보를 보내 완난사변 이후 당이 채택한 조처의 지시원칙을 제시했다. (주석 200)

 

“정치상 전면적으로 장제스의 음모를 파헤친다(단 잠시 장제스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는다). ‘신중화보(新中華報)’ 사설과 중공 대변인의 담화를 통해 방어태세를 유지하며 ‘항일견지, 내전반대’의 군중동원 대회를 연다. 군사상 방어전을 취하데 필요시에는 전투를 벌인다. 조직상 각 판사처를 철수하는 척 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중공중앙은 1월 20일 '완난사변'의 12개 요구조건의 해결방안을 국민당에게 제시했다. 12개 요구조건은 이렇다. (주석 201)

 

1.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춰라(懸崖勒馬), 즉 위험한 장난을 중지해 정신을 차려 물러서고, 도발을 중지하라.
2. 1월 17일의 반동명령(신4군이 반란을 일으켜 부대명 취소)을 취소하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라.
3. 완난사변의 원흉 허잉친, 구주통, 상관윈샹 3인을 처벌하라.
4. 예팅의 자유를 회복하고 신4군 군단장을 계속 충당하라.
5. 완난 신4군 전원과 무기를 돌려보내라.
6. 신4군 사상자 장병 모두에 대해 위로하고 무휼하라.
7. 화중(華中)의 공산당 포위소탕군을 철수시켜라.
8. 서북의 봉쇄선을 자유롭게 풀어라.
9. 전국의 모든 체포된 애국정치범을 석방하라.
10. 일당 독재정치를 폐지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라.
11. 3민주의를 실행해 총리(쑨원) 유촉에 복종하라.
12. 친일파 각 우두머리를 체포해 국가재판에 회부하라.

 

공산당의 이런 책략은 주효해 국내외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충칭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국내외 인사들을 대상으로 국민당 정부 도발의 진상을 폭로하는 등 활발하게 선전전을 펼쳤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으며 분석한 국내외 정세 자료를 옌안의 마오에게 전달해 완난사변 대응 정책결정에 크게 기여했다.

국내 민주파 등 각계 진보인사와 해외 지식인들은 잇따라 국민당의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규탄했다. 해외동포들도 ‘내전을 그치고 단결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영국, 소련 등 국가도 국민당에 큰 불만을 터뜨렸다. 장제스와 국민당 보수 강경파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 장제스는 할 수 없이 3월 1일 열린 제2기 국민참정회의 석상에서 “이후로는 다시 공산당을 소탕하는 군사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때 ‘완난사변’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국민당의 고조된 반공분위기는 한풀 꺾였다. 마오는 “군사공세는 장제스의 항일을 방해하는 아주 잘못된 정책이다. 정치공세는 장제스의 항일을 압박할 뿐 장제스의 항일을 방해하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수세, 정치공세’ 8자는 아주 정확했다”고 밝혔다. 이 정확했다고 마오가 밝힌 방침은 류샤오치의 건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 皖南事變 發生後 劉少奇7天7夜沒合眼   時政頻道  新華網
199) 皖南事變 發生後 劉少奇7天7夜沒合眼   時政頻道  新華網
200) 皖南事變 發生後 劉少奇7天7夜沒合眼   時政頻道  新華網
201)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99. '신4군' 재건 성공한 류사오치, 화중지역 탄탄한 발판

 

1941년 1월 2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천이를 국민혁명군 신편 제4군 군단장 대리, 장윈이(張雲逸 장운일)를 부군단장, 류샤오치를 정치위원, 라이촨주(賴傳珠 뢰전주)를 참모장,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를 정치주임으로 각각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 장제스가 신4군 군대 명칭을 거두어 들여 소멸했던 ‘신4군’은 새롭게 태어났다.

애초 신4군은 1937년 12월, 남방 8개 성 13개 지구의 홍군 유격대 1만 3천여 명으로 만들어졌다. 완난사변 전 3년 동안 샹잉은 ‘통일전선에 일체 복종하고, 모든 것은 통일전선으로’라는 왕밍의 우경노선을 추종해 위장된 국민당군의 협공을 타파할 수 없어 신 4군은 완만한 발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완난사변 때 병력이 2만 5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8로군은 3만여 명의 병력으로 출발했지만 완난사변때 병력이 50만 여명에 이르는 등 일취월장의 급성장을 했다.

 

완난사변 후 장제스는 신4군을 ‘반군(叛軍)’이라고 비방하면서 신4군의 부대명을 없애버리고 예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밝혔다. 류샤오치는 장제스의 횡포에 맞서 중공중앙에 “천이를 신4군 군단장 대리로 임명해 장쑤성 북쪽에 군 지휘부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 류샤오치는 18일 천이와 연명으로 중앙에 전보를 보내 재차 건의하는 한편, ‘국민당 보수 반동파가 발동한 완난사변 구실 반박에 관한 통보’를 통해 구체적 사실을 동원해 국민당의 신4군 부대명칭 취소와 중상모략을 논박하며 장제스가 조성한 완난사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류샤오치는 또 “명령을 거역하고, 부대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판창(繁昌 번창), 통링(銅陵 동릉) 일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지정노선을 따르지 않고 징시옌에서 남향해 우군을 습격했다는 발표는 완전히 날조한 것“이라고 통박했다. 중공중앙은 류샤오치와 천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1월 20일 새로운 신4군을 재건하는 군부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 명령을 받은 류샤오치는 신4군 부대의 재건에 착수했다. 류샤오치는 신4군 간부회의를 열어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 소개한 뒤 “우리는 통일전선의 방침과 내전반대를 견지하고 분열적인 방침을 반대해 시국의 위기를 구하고 끝까지 항전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류샤오치는 화중(華中)에 온 뒤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실명을 사용했다. 류샤오치는 전에 줄곧 ‘후푸(胡服 호복)’라는 가명을 써왔다.

류샤오치는 완난사변 이후 나타난 비관적 정서와 일부 8로군 지휘관들이 신4군 개조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를 딛고 고달프고 힘든 세밀한 사상공작을 펼쳤다. 류샤오치는 마침내 신4군을 7개 사단 9만여 명의 병단으로 개편하고 활동구역을 획정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2월 18일 수위(粟裕 속유)를 제1사단 사단장, 류옌(劉炎 유염)을 정치위원, 장윈이(張雲逸 장운일)를 제2사단장, 정웨이산(鄭位三 정위삼)을 정치위원, 황커청(黃克誠 황극성)을 제3사단장 겸 정치위원, 펑쉐펑(彭雪楓 팽설풍)을 제4사단장 겸 정치위원, 리셴녠(李先念 이선념)을 제5사단장 겸 정치위원,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을 제6사단장 겸 정치위원, 장딩청(張鼎丞 장정승)을 제7사단장, 쩡시성(曾希聖 증희성)을 정치위원으로 각각 임명했다.

 

신4군은 병력 9천여 명을 잃은 뒤 9만 명으로 재편성해 부대를 신속히 발전시켰고 항일 전쟁이 끝날 무렵엔 이미 30여 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이로써 공산당은 중국의 한복판인 화중지역에 탄탄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중공중앙은 완난사변의 악재를 신4군과 근거지를 확대하는 호기로 삼는데 성공했다. 장제스의 통제아래 있던 신4군을 공산당의 당군(黨軍)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북으로는 롱하이(隴海 농해)철도, 남으로는 안후이성 남쪽과 장쑤성 남쪽을 방어해 근거지의 활동구역을 크게 확장했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은 샹잉이 서기로 있었던 동남국과 중원국을 통합해 화중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류샤오치는 화중국 서기 겸 신4군 군사위원회 분회 서기가 됐다. 류샤오치는 문장과 문건, 강연 등을 통해 국공 통일전선에서 독립자주를 견지하는 당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이론을 무장화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마오는 완난사변의 처리가 일단락되자 5월 8일 ‘제2차 반공고조를 물리친데 관한 총결’의 당내 지시를 발표해 완난사변의 투쟁경험을 이렇게 밝혔다. (주석 202)

 

“중일(中日) 민족간의 모순은 여전히 기본적이다. 국내 계급간의 모순은 여전히 종속적 변수다. 결코 1927년의 형세(장제스가 1차 국공합작을 깨뜨리고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공산당이 지하로 잠입하는 위축됐던 상황)를 조성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정부를 이끌어 가는 모든 정책은 영미(英美)파 대지주와 대자산가들이다. 양면성의 계급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일본과의 대립이고 또 하나는 공산당 및 기타 광대한 인민을 대표하는 세력과의 대립이다. 그들의 항일과 반공도 또한 각각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왕에 항일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당에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다. 우리당의 방침은 싸움에는 싸움, 휴전에는 휴전으로 대응한다. 이것이 혁명의 양면 정책이다. 장제스의 반혁명 정책에 첨예하게 맞서는 투쟁을 제외하고 어떤 인민혁명 역량이 만약에 장제스의 소멸을 피하려 한다면 그가 이런 역량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1941년 5월 하순 일본군은 재건된 신4군 대소탕전에 나섰다. 류샤오치와 천이는 신4군 3개 사단과 지방부대를 잘 배합해 적극적인 유격전으로 나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신4군은 8월 20일 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요전투 135차례를 치러 일본군과 왕징웨이 괴뢰군 1932명을 사상시키고 1089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류샤오치는 완나사변 이후 어려운 국면에 신4군을 맡아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눈부신 분전과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 중공중앙의 중요 영도자로 성큼 다가서는 기회를 잡게 됐다.   

----------------------------------------------------------------------------------------------------------------------------------

 

100. 옌안 정풍운동… 마오 "중국식 공산주의의 시작"

 

1941년 5월의 옌안(延安 연안). 이미 얼음과 눈이 녹아 살풍경한 황토고원에도 신록이 파릇파릇 돋기 시작했다. 중공중앙은 5월 중순에 고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5월 19일 고급 간부회의에서 ‘우리들의 학습을 개조하자’는 강연을 했다. 마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과 혁명의 실제를 서로 결합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근본 지도사상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또 “우리는 역사를 단절시킬 수 없다. 외국의 혁명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혁명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의 오늘 뿐만 아니라 중국의 어제, 그제(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인재를 결집해 중국의 경제사, 정치사, 군사사(軍事史)  등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자기의 역사를 모르고 자기의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경향이라고 비판했다. 이 강연은 옌안 정풍운동(整風運動)의 신호탄이 됐다.

 

항일 전쟁이 시작된 뒤 옌안에 소재한 공산당 근거지 ‘싼간닝(싼시-간쑤-닝샤)’ 변계지구의 당 조직은 크게 발전했다. 일단의 소자산계급 사상영향이 주입되어 농민의식과 혼재했다. 또한 변계지구 당내에 존재하는 역사, 노선시비 문제가 일부 간부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했다. 사상과 이론상의 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단결된 영도체제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마오는 당 조직과 영도체제를 정비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오의 당내 권위와 권력도 한결 굳건해 지고 있었다. 자신감의 발로였다. 마오는 ‘당의 작풍(作風)을 정비하자’고 전당에 호소하면서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학풍(學風)을 정돈하고, 종파주의에 반대하여 당풍(黨風)을 정비하고, 당 8고(八股; 명청 때 과거의 답안형식 문체, 즉 현학적이고 형식적인 문투)에 반대하여 문풍(文風)을 정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석 203)

 

1941년 9월에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토지혁명투쟁 후기의 ‘좌경’ 과오와 항전 초기의 ‘우경’ 과오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마오는 오랜 동안 당의 통치를 지배하고 있던 주관주의 사상노선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보구(博古 박고)와 장원톈(張聞天 장문천), 왕자샹 등은 자신들이 범했던 과오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왕밍(王明 왕명)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하다 참석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마오는 이처럼 차근차근 군불을 때가며 준비를 하다 분위기가 숙성되었다고 판단해 1942년 2월 중앙당교(中央黨校) 개학식 및 중앙 선전부, 중앙 출판국 연합 선전공작회의에서 ‘정돈(整頓) 학풍, 당풍, 문풍’과 ‘반대 당8고(黨八股)’ 강연을 했다.

마오는 이 강연에서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주관주의에 반대해 학풍을 바로잡고, 종파(파벌)주의에 반대해 당풍을 바로잡고, 당8고에 반대해 문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정풍의 주지(主旨)와 방침은 “징전비후 치병구인(惩前毖後 治病救人; 과거의 잘못을 후일의 거울로 삼고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이라고 밝혔다. 지난날 소련과 코민테른을 믿고 거들먹거린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케 해(병을 치료해)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구제 프로그램이란 뜻이다. 이는 곧 마오의 노선을 따르라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옌안 정풍운동은 정식 막이 올려 장장 3년 동안 계속됐다. 마오쩌둥이 발동한 옌안 정풍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곡절의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옌안 정풍운동 전 공산당은 추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 리리산(李立山 이립산), 왕밍(王明 왕명) 등의 3차례 좌경노선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그중 1931년 1월에 열린 6기4중전회의에서 실권을 잡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가 가장 맹위를 떨쳤다. 무려 4년이나 지속된 왕밍의 전횡은 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폐해 또한 심대했다. 이 기간 동안 마오는 실권(失權)해 권토중래를 기약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왕밍은 군사적으로는 대도시 공격을 감행하는 군사 모험주의를 폈다. 정치상으로는 코민테른 지시에 따른 폐쇄주의로 일관했다. 이런 일련의 좌경 모험주의는 장제스의 5차에 걸친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한 대응실패로 최대 위기에 몰렸다. 홍군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장정(長征)에 나서는 간난신고의 혹독한 길을 걸었다. 이에 따라 남방 근거지를 잇따라 빼앗기고 30만에 이르던 전국의 홍군은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30만 명의 당원도 4만 명으로 줄어들고 장제스 통치지구(白區 백구)의 당 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왕밍(왼쪽), 마오쩌둥

 

 

1935년 1월, 준이회의(遵義會議 준의회의)에서 보구의 좌경 중앙통치가 종식됐다. 하지만 당시의 절박한 군사와 조직문제로 사상과 정치상의 노선문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미뤄져 왔다. 마오는 1940년 12월 정치국 회의에서 6기4중전회이래 형성된 좌경노선의 뿌리를 뽑으려했다. 그러나 교조주의가 당내의 사상적 기반에 완고하게 버티고 있어 실패했다. 마오는 전당 범위에서 광범위하게 정풍운동을 벌여 사상노선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 항일전쟁 초기 왕밍의 우경 기회주의가 당내 사상혼란을 일으켜 국공합작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오는 왕밍이 193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코민테른의 지시를 교조적으로 끌어다 써 ‘통일전선에 일체 복종’,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라는 우경 구호를 만들어 결과적으로 국민당에 양보하는 꼴이 됐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왕밍은 1937년 12월, 1938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통일전선의 독립 자주노선을 결의한 뤄촨(洛川 낙천)회의의 방침과 결정을 다시 반대했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마오를 비판한 것이다.

마오는 당시 왕밍이 당을 쥐락펴락하는 코민테른의 ‘상방보검’을 갖고 있어 대놓고 반격을 하지 못했다. 마오는 왕밍의 우경 기회주의의 득세로 사상혼란이 일어나 항전 초기공작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판단했다. 왕밍의 교조주의 영향을 제거해야만 원활한 공작을 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1941년 1월에 완난사변(皖南事變 환남사변)이 발생했을 때 마오는 국민당 정부에 보복하기 위해 15만 정병으로 국민당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반대로 이 계획이 무산됐다. 마오는 당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코민테른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풍을 통해 코민테른 지시의 신성화와 교조적 분위기를 깨 코민테른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당의 발전, 즉 독립 자주적인 마르크스의 중국화를 담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주석 204)

 

시기도 마오의 결단을 촉구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세계2차 대전이 발발했다. 또한 일본이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미일전쟁이 본격화해 중일전쟁은 세계대전의 한 부분이 되었다. 미국의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지원과 영향력이 늘어나게 됐다. 이에 따라 중국 내에서 중일전쟁은 버티기 단계로 소강국면에 들어갔다. 당 중앙이 있는 ‘싼간닝’ 변계지구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다. 또 교착상태의 전선에서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옌안으로 돌아와 정풍운동을 확대할 수 있었다.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중국공산당에 대한 장악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1943년 5월에는 코민테른이 해체돼 마오로서는 공산당 내의 코민테른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힐 절호의 기회였다. 마오는 1941년 1월에 발표한 ‘신민주주의론’으로 압축된 ‘마오쩌둥 사상’의 싹을 틔우면서 당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신민주주의론의 기조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일본세력과 지주 및 그 지지 세력에 대한 투쟁을 공산당과 4개 계급이 결합해 한꺼번에 혁명을 전개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당을 중심으로 노동계급, 빈농과 중농, 소자산가와 지식분자, 민족자본가 등 4개 계급으로 무산자계급의 독재가 아닌 이들 계급의 연합 전제독재로 규정했다.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민주주의와 구분된다.

이 또한 마오의 자신감의 발로였다. 1938년 9월, 6기6중전회 때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왕자샹이 들고 온코민테른 총서기 디미토로프의 구두전달, 즉 마오의 영수 지위를 인정하는 코민테른 측의 승인으로 마오의 영도자 위치가 한층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국민당의 소극적 항일에 항의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옌안을 찾아와 정풍운동은 공산당의 기반을 넓히고, 이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교육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정풍운동은 이처럼 여러 목적이 있으나 크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 즉 민족주의적 마오노선의 확립이다. 또 하나는 마오 1인지배 구축을 위한 정적(政敵) 제거였다.

 

준비도 치밀했다. 마오는 당사(黨史)를 학습시키기 위해 ‘당서(黨書)’를 편찬했다. 이 책은 장장 280여 만자에 이른다. 1928년에서 1941년까지 당의 중요 문건과 영도자들의 중요 발언, 문장 등 모두 518편으로 구성됐다. ‘당서’와 관련해 전 국가주석 양상퀀(楊尙昆 양상곤)은 이렇게 회상했다.(주석 205)

 

“우리들은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할 때 많은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고 혁명사를 배웠다. 그러나 선생들은 모두 러시아나 영국의 역사와 혁명사례를 가르쳤다. 내는 4년 동안 교실에서 마오쩌둥이나 농민운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의 6대 (1931년 상하이에서 열린 6기4중전회) 대표들이 중산대학에 와 연설할 때 중국 인구의 100분의 90이상이 농민이라도 농민은 단지 노동자 계급의 동맹자일 뿐 혁명의 기본 세력은 아니라고 했다. 또 마오쩌둥이 징강산에서 벌인 혁명투쟁이나 그런 것이 장래의 희망이라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혁명 실패 후 이론이 부족한 노 간부들이 혁명을 단절시키고 있다고 책망했다. 왕밍은 방자하게 중국혁명은 우리 같은 신지식인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며 자신을 내세웠다. 그런데 ‘당서’를 체계적으로 읽다보니 선명하게 비교가 돼 어떤 것이 정확한 노선인지를 알게 됐다. 또 어떤 것이 창조적인 마르크스 주의고, 무엇이 교조주의인지를 이해하게 됐다. 당서는 옌안 정풍운동 때 큰 작용을 했다. 날카로운 무기였다.”

203)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黨史知識大講堂 第4講 ; 延安整風運動與馬克思主義中國化  盧毅  新華網
    延安整風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204)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黨史知識大講堂 第4講 ;延安整風與馬克思主義中國化   盧毅  新華網
205)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

 

101. 저우언라이의 자아비판…마오의 '구원'"

 

5월 하순, 정치국은 중앙 총 학습위원회를 만들어 정풍운동을 이끌어가기로 했다. 마오가 주임, 캉성(康生 강생)이 부주임을 맡아 일상 업무를 주관했다. 중앙 학습조의 48명을 9개 소조로 나눴다. 양상쿤은 런비스, 이푸춘, 왕뤄페이(王若飛 왕약비) 등 6인이 한 조가 된 제3조 조원이었다. 런비스가 조장을 맡았다.

군에도 이런 조직을 만들었다. 왕자샹과 천윈이 이끄는 학습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학습위원회 아래에 모든 부처와 지부, 군부대 등을 포괄하는 학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똑같은 체계가 당 전체와 학교, 옌안과 각 기지에 있는 다른 기구에도 적용됐다. 모든 간부를 낱낱이 점검할 수 있는 방대한 시스템을 갖춰 완벽한 통제가 가능했다. 정풍운동은 대체로 3단계에 걸쳐 실시됐다. 정풍운동이 시작된 1942년 2월부터 4월까지의 1단계는 ‘사상동원 단계’, 1942년에서 1943년 10월까지는 ‘정돈(整頓)3풍 단계’, 그리고 1943년부터 1945년 4월까지의 ‘총결 역사경험 단계’로 구분된다. (주석 206)

 

양상쿤은 정풍운동의 준비기간인 1941년 9월과 2단계 때인 1943년 9월에 열린 두 차례 정치국 확대회의에 참가했다. 양상쿤은 “이 회의는 중앙의 영도층이 정풍과정에서 주요 구실을 한 두 차례 회의였다.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회의에서 사상투쟁을 거쳐 공통적 인식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양상쿤에 따르면 1931년 초부터 1934년 말까지의 당의 역사를 두고 토론 중 서로 다른 의견이 분출됐다. 주요한 의제는 3가지로 1) 6기4중전회 후 정치 노선상에 잘못이 있었나 없었나? 2) 6대 결의안이 정확했나 그렇지 않았나? 3) 항일전쟁 중 정규전 위주냐 유격전 위주냐? 였다. 이밖에 토지개혁, 정군(整軍), 근거지 성질 등의 문제가 쟁론을 일으켰다. 1941년 9월에 열린 1차 회의에 참가한 양상쿤은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주석 207)

 

“주요 폭로와 비판은 소비에트 운동 후기의 ‘좌’경 교조주의의 과오였다. 당시 (저우)언라이 동지는 충칭, (류)샤오치 동지와 펑더화이 동지는 각각 화중과 화베이 전선에 있어 참석하지 않았다. 뤄푸(장원톈)와 보구가 솔선해 자아비판을 했다. 회의는 ‘코민테른 노선’의 잘못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다. 왕밍도 의견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밍은 소비에트 운동 후기의 과오에 대한 마오 주석이 말한 노선문제와 관련해 오늘 뤄푸와 보구가 말한 것에 대해 나도 모두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항전 초기 왕밍이 우한에서 공작할 때 범한 엄중한 우경의 잘못에 대해서는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행태를 보였다. 왕밍은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과 중앙이 통과시킨 ‘싼간닝 변계지구 시정강령’은 ‘너무 좌경’이어서 스탈린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왕밍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로부터 왕밍은 병을 핑게(稱病 칭병)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밍은 왜 그렇게 오만했을까. 양상쿤은 이렇게 분석했다. (주석 208)

 

“왕밍이 선포한 ‘8.1선언’은 그가 기초를 잡은 것이다. 민족통일전선 이론은 왕밍이 만들었다. 실질적으로 ‘8.1선언’은 모두 코민테른의 디미토로프에서 나온 것이다. 왕밍이 주장한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 ‘통일전선에 일체 복종’은 사실상 장제스를 통하고, 장제스에 복종해 독립자주를 방기하는 것이다. 어느 동지가 나에게 만약에 왕밍이 성실하게 잘못을 인정하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지 않았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왕밍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왕밍은 스스로 뒷배경, 밑천이 있어 고집스럽게 ‘코민테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마르크스 주의를 주창했던 왕밍은 정도에서 벗어나 신중국 성립 후 병 치료를 빌미로 소련에 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왕밍은 ‘중공 50년’이란 소책자를 펴내 후르시초프와 함께 ‘반공반화(反共反華)’를 벌였다.”

 

1942년 4월 3일 중앙 선전부는 ‘중앙결정과 마오쩌둥 동지의 정돈 3풍 보고 옌안토론에 관한 결정’을 발표해 진일보한 정풍운동의 목적과 요구, 방법 그리고 절차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부터 '정돈 3풍' 중심내용의 전당 정풍운동이 벌어졌다. 마오는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제를 긴밀히 결합해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주장했다. 양상쿤은 1943년 9월에 열린 2차 정풍확대회의에 참석했다. 의제는 두 개 종파(파벌)주의, 교조 종파와 경험 종파의 척결이었다. 마오는 이 두 개 종파를 배격해야만 당이 통일 될 수 있다고 했다. 9월 회의에는 1차 때 보다 참가인원이 많았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도 참석했다. 왕밍은 칭병하고 불참했다.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주더

 

주더(朱德)는 1940년 5월 화베이 항일전선에서 돌아 온 뒤 중앙의 명에 따라 옌안에 남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마오가 당내에서 사상적으로 의견이 엇갈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곁에서 돕도록 하기위한 조처였다. 그동안 당내에 존재했던 의견불일치가 당의 단결을 해치고 전투력에 영향을 주는 정도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또 이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힌 열악한 환경에서 급속히 신장되고 있는 농민과 소자산계급 출신의 당원에 대한 교육공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서로 다른 의견이 분분해 사상공작이 절실했다. 항일전선도 버티기 국면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오는 정풍운동의 전 단계 준비과정에서 당내에서 덕망 높은 주더의 영향력이 필요해 이런 조처를 내린 것이다. (주석 209)

 

앞서 3월에 마오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됐다. 또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뽑혔다. 이처럼 마오는 당정군의 모든 문제에서 최종 결정권을 확보함에 따라 중국공산당 정책에 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마오의 이런  우월적 지위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가 도입되면서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마오의 사상은 이제 하나의 ‘주의(主義)’가 되었다. 이 단어는 1943년  중국공산당 창당 23주년 기념일 행사에서 왕자샹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왕자샹은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 볼셰비즘,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를 모두 합친 것이다”라고 밝혔다. 류샤오치도 가세했다. 류샤오치는 “우리 당과 프롤레타리아, 또 우리나라의 혁명 군중은 마침내 23년이라는 길고 힘든 혁명투쟁을 거친 끝에 우리 스스로의 영도자인 마오쩌둥 동지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류샤오치는 또 마오는 오랫동안 검증 받은 위대한 혁명가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하고, 또 중국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는 마오와 류샤오치간의 연대를 공식 선언한  것을 뜻했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의 신호탄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충칭에 있던 저우언라이가 2단계 정풍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옌안으로 돌아왔다. 저우언라이는 옌안 귀환 환영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석 210)

 

“지난 3년간 많은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에 힘입어 우리 당은 방향을 잃지 않았고 또 그릇된 길로 빠지지도 않았다. 지난 3년간에 걸쳐 처리한 여러 사건의 결과가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나 견해에 반대하고 또 의구심을 표명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았다. 22년간에 걸친 우리당의 역사는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가 이 기간을 거치며 중국식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중국식의 공산주의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다. 마오쩌둥 동지의 정치노선은 중국의 볼셰비키 노선이다.”

 

저우언라이는 1943년 8월 30일과 9월 1일에 걸쳐 지난 3년간 자신이 이끌어 온 창장국(長江局 장강국) 업무에 관해 보고했다. 저우는 정치국 위원의 신분으로서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 받았다. 저우는 왕밍 등으로 대표되는 교조주의를 비판했으나 자아비판을 강제 당했다.

저우의 발언과 보고는 무려 5일 동안 계속됐다. 1927년 대혁명 실패 후 당의 중요 사건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영도자였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리리산 노선과 결별할 때 자신이 너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었고, 왕밍이 미프와 코민테른의 도움을 얻어 1931년 제6기4중전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왕밍노선에 너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었다”고 자아비판을 했다. 또 상하이 임시중앙의 전략에 따라 대도시 공격, 장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정책결정 등에 대해서도 자신의 책임을 강조했다. 회의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떤 사람이 마오쩌둥에게 “교조종파주의의 실체는 명명백백히 폭로됐다. 현재의 문제는 경험종파주의다. 그들의 위해(危害)도 상당히 크다”며 저우언라이를 지목했다. 캉성이 부채질을 하고 나섰다. 캉성은 “우한 창장국의 기관지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는 완전히 국민당 신문이 됐다. 많은 반공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캉성은 창끝을 창장국을 이끌었던 저우언라이와 예졘잉(葉劍英 엽검영)에게 들이대며 공개적으로 저우언라이를 비판했다.

이때 마오가 제지하고 나섰다. 마오는 "저우언라이 동지는 대혁명 이래 많은 좋은 일을 했다. '8.1 난창기의'는 저우언라이 등 동지가 전투의 첫 총성을 울렸다"며 저우를 구원하고 나섰다. 정풍과정에서 저우언라이의 자아비판을 통해 자신에 대한 지지의 믿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왕밍, 보구, 장원톈 등 '볼셰비키 28인들'은 이미 박살나 회복불능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왕밍노선을 추종했던 경험주의 종파로 분류됐지만 마오로서는 대외활동과 실무경험이 뛰어난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양상쿤은 이때를 "마오의 제지는 대단히 중요했다. 만약 옌안 정풍운동 중에 '구원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반 저우언라이’ 공격이 재개되었을 것이고 그럴 경우 대단히 위험했다"고 회상했다.

206) 黨史知識大講堂 第4講 ; 延安(整風與馬克思主義中國化  盧毅  新華網
207) 延安整風 ;康生讓衆人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文史頻道
208)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209) 朱德對黨的畿個重大決策的突出貢獻   理論頻(道  新華網
210)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 유상철 옮김 베리타스 북스  

----------------------------------------------------------------------------------------------------------------------------------

 

102. 옌안 정풍운동의 끝 "마오는 중국이 낸 영도자"

 

주더는 9월 9일의 중공중앙 정치국회의에서 왕밍의 항전이래의 우경 기회주의의 과오를 비판했다. 주더는 “항전이후의 왕밍노선의 실질은 통일전쟁 중에 영도권이 필요 없고 대지주 대자산 계급에 투항하는 것이다. 또 유격전쟁을 홀시해 중국 혁명의 특색, 바로 유격전에 의존한 자신의 역량 발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코민테른의 입장에 서서 중앙과 당내 관계에서 통일전선을 지휘했다. 이로 인해 대외에는 일체복종하고 대내에만 독립자주라는 관점이 생겨났다”고 왕밍노선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주더는 왕밍 노선과 천두슈 노선의 같은 점을 들추어 조목조목 비판했다. 하나, 두 사람은 혁명의 영도권(주도권)이 필요 없다며, 기꺼이 자산계급에 바치려 했다. 둘, 이들은 무장역량이 필요 없다고 했다. 이것은 혁명성공의 환상이며, 완전한 공상이다. 셋, 무산자 계급의 역량을 무시하고, 자산계급의 역량은 대단히 강하다고 했다. 넷, 유격전쟁을 홀시했다. 천두슈도 홍군을 토비(土匪)라고 질책했다. 다섯, 통일전선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과적으로 투항심리를 만들어 냈다. 다른 점은 천두슈와는 달리 왕밍은 코민테른의 간판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외피를 두르고 사람들을 겁 줬다고 일갈했다. 주더는 이날 회의에서 “중국 혁명은 이미 진정한 영수를 만들어 냈다. 바로 마오 주석이다”라고 선언했다. (주석 211)

 

주더는 1935년 6월 장정 중 장궈타오가 통솔한 4방면군과 마오가 이끌던 1방면군이 ‘촨간(사천-간쑤)’ 변계에서 부대합류를 했다가 장궈타오가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남하할 때 거의 볼모 비슷하게 함께 남하했다. 이때 장궈타오는 주더를 겁박해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우경 도망노선’의 성명을 내도록 했다.

 

주더는 장궈타오의 위협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주-마오, 주-마오는 사람들이 모두 주더와 마오는 한 사람이란 뜻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 내가 어찌 마오를 반대하겠는가? 너희들은 내 몸을 두 동강으로 쪼갤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마오쩌둥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고 강고하게 버텼다. 마오는 훗날 이런 일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 “주더의 도량은 바다처럼 넓고, 의지는 강철처럼 굳세다”고 평한 바 있다. 이런 주더가 이날 ‘주-마오’ 한 몸답게 마오의 충실한 버팀목이자 멘토로 마오를 명실상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주더는 사상을 통일하고 마오쩌둥의 전당의 영수지위를 공고히 하기위해 1942년 10월 19일부터 1943년 1월 14일까지 열린 서북국 고위간부 회의 때부터 사전 정지작업을 벌여왔다. 내용은 이랬다.

 

“우리당은 20여 년 동안 분투하면서 우리의 영수를 만들어 냈다. 바로 마오쩌둥 동지다. 역사과정에서 단련을 통해 나왔다.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가 중국공산당의 영수라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주더의 이 말은 전당이 마오쩌둥을 영수로 하는 당 중앙의 영도에 복종할 것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왕밍의 과오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로 말미암아 고급 간부들이 완전한 인식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진일보한 학습과 제고가 필요했다. 1943년 10월 5일, 중공중앙 서기처는 정풍 점검을 잠시 중단하고, 고급 간부들을 먼저 학습시키는 방안을 결정했다.

 

중공중앙은 10월 6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통보하고 다시 한 번 교조주의와 경험주의의 두 개 종파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마오는 “정풍학습의 목적은 두 개 종파를 분쇄하는 것이다. 교조종파는 머리고, 경험종파는 다리다. 교조종파는 경험종파의 영혼이다. 때문에 교조종파는 극복하고 경험종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해수준을 높이면 된다”고 했다. 회의에서 주더는 마오의 발언에 화답해 자신의 학습체험을 빗대면서 두 개 종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주석 212)

 

“학습을 통해 객관적으로 문건과 문제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왕밍의 교조주의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외국만 알았지 중앙(중국)은 모른다. 우리들은 외국과 중국을 알아 실제 출발이 옳았지만 교조주의 출발은 모두 틀렸다. 경험주의자는 이론을 잘 알지 못해 자연히 교조주의의 포로가 된다. 마오쩌둥은 착실하게 일을 처리한다. 패기가 있고 능력이 있어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항상 방법을 찾아낸다. 사람들이 그를 반대할 때도 실제상황에 따라 일처리를 견지한다. 그의 독서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적지 않은데도 이해를 잘해 이론과 실제를 합일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영도로 당의 각 방면이 발전했다는 것은 증명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면 중국혁명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학습을 통해 개개인이 능력을 키워야한다. 주요한 것은 마오쩌둥의 일처리 능력을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주더는 정풍운동 과정에서 마오를 도와 코민테른을 업고 전횡을 휘두른 왕밍의 교조주의를 척결하고 마오를 부동의 영도자로 확립시키는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보이보(博一波 박일파)는 “옌안 정풍운동 때 주쫑(朱總 주총; 주더 총사령관의 약칭이자 존칭)의 평가에 관해 마오 주석은 주쫑은 중국인민의 영수며 위대한 전사다. 구민주주의에서 신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주쫑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고 했다.

 

마오는 정풍운동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5월 서기처와 정치국을 대표해 마무리 결론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 총결 발언은 당일 열린 6기7중전회에서 결의로 통과시켰다. (주석 213)

 

1. 중앙의 몇몇 개별 동지와 관련해 일단의 동지들이 당 외의 문제로 추측하고 있었으나 모든 자료를 연구 검토한 결과 그들은 당 외의 문제가 아니라 당풍과오(黨風過誤)와 관련이 있다.

2. 4중전회 후 1931년의 상하이 임시중앙 및 그 후 소집된 5중전회는 당시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합법적이다. 단, 선거절차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것은 마땅히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3. 지난날 당의 역사적 과오는 마땅히 사상적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 단, 그 결론은 관대하게 힘써 전당이 단결해 공동 분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4중전회에서 준이회의 기간 동안 당 중앙의 영도노선은 과오를 저질렀다. 단, 아주 정확하게 하기 위해 마땅히 적당한 분석을 해야 하고, 모든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5. 6차대회는 부족함과 과오가 있었지만 기본노선은 정확했다.

6. 당의 역사에서 교조종파와 경험종파가 존재했다. 단, 준이회의 이래 각종 변화를 거쳐 두 개 종파가 정치 강령과 조직형태에 존재했다.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당내에 맹목적인 파벌주의 경향이 엄중히 존재하고 있다.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이런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양상쿤은 정풍운동이 중국공산당사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얘기했다.

 

“옌안 정풍운동은 중국공산당 역사상 아주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역사를 연구하면서 노선을 분명히 하고, ‘3풍’을 정돈한 것이다. 특별한 것은 마오 주석이 제기한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역사경험과 교훈의 고도의 사상방법의 총결은 대단히 위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당의 사상을 통일할 수 없었다. 7대 대회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중국 혁명의 발전도 그렇게 빨리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정풍기간에 과격한 비판으로 일부 동지들에게 상처를 준 것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중요했다. 때문에 7대 대회에서 전에 없었던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또 하나는 학습과정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심사 조사과정에서 사람을 가둬 놓고 진술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조(救助)운동’에 정작 ‘구조’가 없었다.”

1945년 4월 20일, 6기7중전회는 마오쩌둥의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높이 평가하며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옌안 정풍운동은 막을 내렸다. 마오 1인지배의 중국공산당의 막이 활짝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211) 朱德(對黨的幾個重大決策的突出貢獻   理論頻道  新華網
212) 朱德對黨的幾個重大決策的突出貢獻   理論頻道  新華網
213)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

 

103.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만든 조선인 천재 음악가 정율성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굽이굽이마다 큰 격랑의 물결이 출렁일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게 간당(奸黨)의 출현이다. 이들은 음습한 권력에 기생한다. 역설적으로 권력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들은 권력의 주구로 온갖 간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인면수심의 저승사자들이다. 정풍운동에도 그러한 간당이 출현했다. 중국공산당에서 최대의 간신이자 대 음모가로 비난받고 있는 캉성(康生 강생)의 등장이다. 정풍운동을 전후로 정보업무를 관할하는 사회부장을 맡고 있던 캉성의 손끝에서 수없이 많은 고귀한 인명이 사라졌다.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조국의 독립투쟁을 벌였던 조선인 김산(본명 장지락)도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캉성의 독수(毒手)에 걸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스러졌다. 정풍운동에서 온갖 패악을 일삼은 캉성의 악독한 술수는 20여 년 후 벌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대재앙이자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 때 만행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캉성은 1903년 산둥성(山東省 산동성)의 지역유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하이 대학을 졸업한 캉성은 저우언라이가 지휘한 1926년의 상하이 폭동에 참여했다가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대혁명 실패 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1년 1월 샹중파(尙忠發 상충발)가 총서기가 되었으나 노동자 출신으로 지적수준과 조직능력이 떨어져 중공중앙 비서장 겸 선전부장인 리리산(李立山 이립산)이 실권을 장악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가라는 외피를 걸친 캉성은 리리산을 적극 추종해 비서장 직을 꿰찼다.

이 자리는 당내의 권력관계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어 캉성은 비서장 직을 누구와 손잡는 것이 유리한지 등을 저울질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캉성은 1933년 7월에서 1937년 11월까지 4년여 동안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조수로 있으면서 왕밍노선의 최선봉에 섰다. 1937년 겨울에 왕밍과 함께 옌안으로 귀국한 캉성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180도 바꿨다. 하루아침에 표변한 캉성은 되레 왕밍노선을 공격하는 선봉장 구실을 해 마오의 신임을 얻어 사회부장을 맡아 정풍운동의 실무를 총괄 지휘하는 업무를 하게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사상 최대의 간신으로 평가받는 캉성

 

정풍운동 기간 동안 캉성은 1920연대 상하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의 추문과 사상적 문제 등의 정보를 차단하고, 조직과 당을 속인 채 고의로 은폐해 암암리에 장칭을 비호했다.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류샤오(劉曉 류효)와 왕스잉(王世英 왕세영)이 장칭에 관한 의심스럽고 좋지 않은 정보자료를 캉성에게 보낸바 있었다. 그 전에 마오가 장칭과 결혼할 때도 캉성은 샹잉이 보낸 장칭과의 '결혼불가'에 관한  불리한 자료를 숨겼었다. 캉성의 이런 셈법은 미래권력에 대한 확실한 도장 찍기의 심모원계 한 권모(權謀)였다. 정풍운동에서 왕밍노선으로 의심받고 있던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왕밍파 척결과 저우언라이를 물고 늘어지는 집요하고 비열한 공격과는 천양지차였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며 전 국가주석을 지낸 양상퀀은 정풍운동 때의 캉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석 214)

 

“캉성은 군사위원회와 군중단체를 포함한 군정당민의 정풍학습에 모두 관여했다. 대단히 열심이었고 부지런했다. 각 기관의 정황을 취합할 때 직접 기록했다. 당시는 복사기가 없었을 때였다. 그는 일일이 수첩에다 옮겨 쓴 뒤 마오 주석에 보냈다. 캉성은 중앙 직속계통에 대한 종합보고 때 덩파(鄧發 등발)과 나를 이끌고 가 함께 들었다. 캉성은 토론을 하면서 성인군자인양  행세했다. 캉성은 왕밍이 쓴 ‘중앙은 더욱 볼셰비키화와 투쟁을 강화하자’는 소책자를 들어 보이며 문득 깨달은 듯 이 책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이게 완전 사기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때 마오 주석은 그를 대단히 칭찬했다. 모두들 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두 그를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여겼다. 캉성은 또 교조종파주의 조직명단을 작성한다고 설쳐댔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명단은 누구도 내 놓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45명, 어떤 사람은 심지어 100여 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후 이 사건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캉성은 옌안의 공산당 간부들 중에 수백 명은 국민당이 공산당에 침투시킨 특수 요원이라며 숙청의 범위를 확대하려고 광분했다. 저우언라이가 관장했던 창장국 소속 지하당은 이들이 지배하는 ‘홍기당(紅旗黨)’이라며 중상모략을 했다. 캉성은 이들을 ‘반도’, ‘스파이’, ‘내부첩자’ 등으로 매도했다.

 

정풍운동 전후 시기의 옌안은 캉성이 무고한 조선인 청년 김산을 ‘일본 첩자’로 몰아 죽이고 당성(黨性))을 심사한다는 등의 빌미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옌안은 매우 어수선했다. 1937년 10월에 옌안에 온 조선인 청년 정율성(鄭律成)도 주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이 당시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청년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와 김구 주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 중경)으로 가거나 조선독립동맹을 이끌고 있는 김두봉(金枓鳳)과 무정(武亭)이 있는 옌안으로 찾아갔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출신의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등은 충칭으로 갔고, 정율성 등은 옌안으로 왔다.

그런가하면 박정희(朴正熙)처럼 일본이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에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일본을 위해 복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20여 년 뒤 5.16쿠데타 때 이들이 한 몫을 했다. 옌안에 온 정율성은 루쉰(魯迅) 예술학교 음악학과를 다니다 중국인 처녀 딩쉐송(丁雪松)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신중국 건국 후 첫 여성 대사를 지낸 딩쉐송은 1938년 봄에 정율성을 만나 한 눈에 반해 열애를 했다. 청혼은 정율성이 했다. 헌데 딩쉐송 주변의 선배와 당 간부들이 결혼을 말렸다. 조선인들이 사상적으로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율성은 옌안에 와 1939년 1월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지도할 무렵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딩쉐송이 다니던 중국여자대학 부교장 커칭스(柯慶施)도 정율성과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주석 215)

 

“듣건대 네가 정율성과 비교적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너 잘 생각해야 한다. 너는 우수한 젊은 여성이다. 앞날의 전도가 밝다. 당이 너를 키워줬다. 너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조선 사람의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너와 정율성의 관계가 대단히 안타깝다.”

 

정율성은 이때 이미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해 ‘옌안송(延安頌 연안송)’, ‘8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 등을 작곡해 옌안 고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딩쉐송은 번민의 나날을 보내다 8로군 포병단 단장 무정이 전방에서 옌안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딩쉐송은 일찍이 여자대학 부교장 커칭스가 “무정은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해 생존한 조선(朝鮮)동지다. 당이 그를 대단히 신임한다”는 말을 들은바 있었다. 무정은 정율성을 무척 좋아했다. 막내 동생으로 여겼다. 무정은 두 사람의 순탄치 않은 연예관계를 듣고 딩쉐송을 찿아 왔다. 무정은 딩쉐송에게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며 이렇게 자문했다.

 

“율성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율성의 큰형과 둘째 형을 알고 있다. 정율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집안은 혁명가의 가정이다. 나와 율성의 둘째 형은 한 지부에서 조직생활을 한일도 있다.”

 

딩쉐송은 용기를 얻어 당 중앙 조직부에 찾아가 정율성과의 결혼 가능성 여부를 물어보기로 했다. 때마침 조직부장 천윈(陳雲)이 있었다. 딩쉐송은 천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조직의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정율성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습니까?”

“지금까지 어떤 자료에도 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역시 어떤 자료에도 그가 문제가 없다고 증명할만한 자료도 없다.”

“변계지구 회의에 참석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무정 동지를 만났습니다. 그가 정율성의 집안을 잘 알고, 정율성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 그래?”

“저와 정율성이 교제한지 벌써 3년이 됐습니다. 서로 좋아합니다. 그와 결혼해도 괜찮은지 조직의 지시를 바랍니다.”

 

 

신중국 건국 후 첫 여성 대사를 지낸 딩쉐송과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부부 / 조선인으로 중국과 북한에서 군가를 지어 널리 보급한 음악가 정율성

 

천윈은 딩쉐송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너희들이 이미 결정했는데 조직에서 간섭할 수 없다”고 했다. 정율성과 딩쉐송은 마침내 1941년 12월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정율성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 양림정(楊林町)의 선비 집안에서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정해업은 자식들에게 일본의 노예교육을 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집안살림살이를 절약하면서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정율성의 첫째, 둘째 형인 정효룡(鄭孝龍))과 정인제(鄭仁濟)는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큰 형 정효령은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1934년 감옥에서 병사했다. 둘째 형 정인제는 윈난 강무학당을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24군(川軍 천군) 중교(中校) 참모로 근무하다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부형(父兄)의 영향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증오한 정율성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전주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정율성의 매형 박건웅(朴健雄)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북벌전쟁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1932년 장제스의 지원으로 난징(南京 남경) 교외에 세운 조선 독립투쟁 단체인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교육 주임으로 있었다. 정율성은 의열단원인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1933년 5월 8일 고향산천을 떠나 난징의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들어갔다. 동기생 55명과 함께 군사, 정치 등 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나이 어린 이들은 여가시간엔 비장하고 강개한 ‘소년선봉대’, ‘최후의 결전’, ‘적기가’, ‘코민테른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침식을 잊고 세계명곡의 음반을 들었다. 마음을 격앙시키는 혁명가곡을 즐겨 부르며 가슴 가득한 열정을 발산했다. 1934년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졸업한 동기생 대다수는 만주벌판으로 독립투쟁을 하러 달려갔다.

 

정율성은 난징군사학교에 들어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지시로 난징과 상하이간의 일본인 전화를 도청하는 비밀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주말에 상하이에 가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신분을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했다. 매주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 외국 교수인 커리눠와(克利諾娃)에게 성악을 배웠다. 교수는 정율성이 천부적 음악성을 갖고 있다면서 이탈리아에 가 공부하면 ‘동방의 카르소(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악가)’가 될 수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정율성에게 학비를 받지 않는 대신 한 다발의 꽃이면 족하다고 했다. 이탈리아로 가 음악공부를 하면 대성할 것이라고 권유하며 현지의 친지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음악에 빠진 정율성이 난징의 진보청년들이 만든 ’5월문예사‘ 에 참여해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려 지내자 김원봉은 지원을 끊었다. (주석 216)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사건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전면 확대되자 정율성은 옌안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상하이 8로군 판사처에서 판한녠(潘漢年 반한년)이 써준 소개장을 갖고 등에 바이올린과 만다린을 걸머메고 상하이를 떠나 1937년 10월에 옌안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싼베이(陝北 섬북)공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루쉰예술학원 음악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때 딩쉐송을 만난 것이다. 1938년 봄에 작곡한 ‘옌안송’은 조선인 청년 정율성을 일약 유명 음악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정율성은 1939년 7월 공무(公木 공목)와 ‘8로군 대합창’을 만들었다. 그 중 그가 작곡한 ‘8로군 행진곡(八路軍進行曲)’이 유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노래는 내전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곡명을 바꾸었다가 1988년 7월 25일, 당 중앙이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개명해 지금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정율성은 1946~1949년 북한에서 북한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 ‘동해어부’ 등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중국과 북한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해 세계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으로 돌아가 귀화한 정율성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동민요와 소수민족의 노래 등을 채록하면서 수없이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수년 동안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76년 뇌일혈로 쓰러져 숨졌다. 국가주석을 지낸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은 정율성의 추도식에 참석해 그의 생전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정율성은 훌륭한 동지다. 그는 린뱌오(林彪 임표)와 ‘4인방’을 원수같이 대해 애증을 분명히 했다. 옌안시기에 그의 노래는 최고였다. 그는 중국인민의 해방사업과 혁명투쟁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작곡가 정율성은 신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으로 뽑혀 지금도 중국인민의 숭앙을 받고 있다.

214)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思頻道
215)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16)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

 

104. 조선인 무정과 정율성의 활약…일본의 항복

 

정율성은 옌안 정풍운동이 시작된 지 6개월 뒤인 1942년 8월 무정을 따라 타이항산(太行山 태행산) 8로군 총사령부와 얼마 안 떨어진 ‘진둥난(晉東南 진동남: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남부일대)’으로 출정했다. 이때 무정은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진둥난 일대에서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만든 ‘허베이(華北 화북) 조선청년 연합회’를 확대 발전시킨 ‘허베이 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으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이끌면서 항일투쟁을 하고 있었다.

앞서 2만5천리 장정을 마친 무정은 장정 중 오랜 기아와 영양실조로 인한 위장병 등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정은 홍군 총사령부의 배려로 휴양을 한 뒤 1936년 6월 항일 홍군대학(抗大 항대)에서 홍군 제1기 고급 간부과정을 수료했다. 이 과정에는 장정 중 홍1방면군 군단장 린뱌오를 비롯한 뤄룽환, 뤄루이칭, 천광 등 홍군 지도자 38명이 참여했다. 그들은 몸에 평균 3군데 이상의 상처를 지닌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무정은 항대에서 철학, 정치경제학, 군사전략 등을 공부했다. 그해 12월 말 항대를 마친 무정은 군에 복귀해 홍군총사령부 작전과장을 맡았다. (주석 217)

 

중일전쟁이 확전양상으로 치닫자 8로군 총사령부는 ‘중국 포병의 아버지’ 무정을 포병주임에 임명하고 포병부대 창설을 서둘렀다. 1938년 1월 28일, 린펀에서 8로군 포병단 창단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무정이 초대 포병단장에 임명됐다. 무정은 1개 단기 포병간부 훈련반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교관으로 나서 사격원리와 포를 쏘는 요령 등을 가르쳤다. 이때 무정이 양성한 포병간부들은 이후 중국 포병의 간성이 되었다.

 

1938년 4~5월 포병단 제1연대가 황허를 건너 산시성 중양현에서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이끌고 있던 8로군 120사단을 지원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무정은 1939년 2월 중순 뤄촨(洛川 낙천)에서 남하해 황허 동쪽을 건너 8로군 총사령부가 있는 타이항산 지구 진둥난(晋東南 진동남) 일대에서 8로군과 합동군사작전을 펼쳤다. 무정은 이 일대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 온 조선의 젊은이들을 규합해 이들을 옌안에 있는 항일 군정대학에 보내면서 군중조직 결성에 심혈을 쏟았다.

 

1941년에 접어들면서 당 중앙은 정세변화에 따른 조선혁명과 동방 각국의 항일 통일전선 공작의 필요성을 중시하고 조선인 무정이 이 일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포병단장 직책을 면해 주었다. 무정은 1월 10일 타이항산 기슭의 한 마을에서 ‘화베이(華北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6월에는 시안(西安 서안), 뤄양(洛陽 낙양) 등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들을 하나로 묶어 뤄양의 조선의용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의용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10월에 옌안에서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가 열려 무정은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인민의 혁명투쟁 상황 등을 널리 알렸다.

무정은 1942년 7월 11~14일까지 타이항산의 칭장허반에서 ‘화북 조선청년연합회’ 회의를 열어 화북 조선청년연합회와 조선의용대를 각각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명칭을 바꿨다. 무정을 비롯한 김백연, 최창익, 박효삼 등 11명이 화북 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정치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金枓鳳) 주석이 이끌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무정이 통솔하고 있었다. 1944년 1월, 무정은 1년 전에 창설한 ‘화북 조선혁명학교’를 ‘조선혁명 군정학교’로 확대 개편해 교장에 임명됐다. 정율성은 교육장(敎育長))이 됐다. 정율성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218)

 

“주요 임무는 적(일본군) 후방에서 전투하다 돌아 온 조선청년 전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어떤 때는 전투에 참가했고, 어떤 때는 간악한 무리(첩자)를 제거했다. 또 적의 후방을 깊숙이 침투해 적군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했다. 조선동지들은 전방에서 매우 용감하게 싸웠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당 중앙은 나중에 조선동지들을 보호하고 전투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전체 인원을 옌안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옌안과 전방에서 돌아 온 조선동지들은 뤄자핑(羅家坪 나자평)에 집결했다. 조선동지들은 이곳에서 당원을 확충하고, 간부를 양성하면서, 조직을 정돈하고, 혁명대오를 발전시키며 혁명역량을 비축했다.”

 

 

 

정율성이 타이항산 일본군 후방 근거지에서 8로군과 공작을 벌이고 있었을 때 1백 수십여 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들도 참가했다. 이들 이외에 또 다른 조선인들도 있었다. 국공합작 때여서 국민당 지구에서 온 사람, 일본군 점령지구에서 탈출해 온 사람, 포로로 잡힌 사람 등 여러 갈래였다. 교육장을 맡은 정율성은 이들에게 교육훈련을 하면서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그들 중에는 일본군이 파견한 첩자도 색출돼 8로군은 조선인들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했다. 정율성은 신중하게 이들에 대한 심사를 하고 훈련을 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부대이동을 해야 하는 등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눈썹을 휘날리며 공작을 하는 전장(戰場)에서도 정율성은 악곡을 구상하고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작곡한 ‘혁명가’ 등의 노래는 화베이, 동북 조선의용대에서 널리 불려졌다. 정율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신음하고 있는 조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가 만든 ‘그리운 강남(懷念着的江南 회념착적 강남)의 가사는 이랬다.

 

“봄이 왔네. 강남에 갔던 제비가 또 다시 돌아왔네. 우리 모두 빨리 가자. 강남으로 가자.

春天來了  飛到江南的燕子又回來了  大家快走吧  到江南去.“

 

여기서 ‘강남’은 당시의 조국 ‘조선’이었다. 정율성은 “현재 우리들의 조국은 일본이 통치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봄은 또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라며 조국광복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가졌다.

 

1945년 8월 6일과 8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잇따라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은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중일전에 참전했다. 소련은 중국 동북부의 4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을 따라 일본 관동군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오는 이날 성명을 내어 “대일 전쟁은 이제 마지막 단계에 돌입했다. 일본 침략자와 그 주구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소련의 참전을 환영했다. 8월 10일, 옌안 방송국에서는 일본이 동맹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일본 통신이 보도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날 밤 12시 옌안 8로군 총사령부에서 계속 ‘항복과 소련군 작전 협동’의 7호 명령을 발표했다. 그중 6호 명령은 주더 총사령관이 8월 11일 낮 12시 공포했다. 내용은 이랬다. (주석 219)

 

“소련 홍군의 중국, 조선국경 진입작전 협동과 조선인민 해방을 위하여 나는 명령한다.
현재 화베이 대일(對日)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관 무정(武亭), 부사령관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는 즉시 부대를 통솔해 8로군과 원(原)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군해 적과 괴뢰군을 소멸시킨다. 아울러 동북 조선인민을 조직해 조선해방의 임무를 달성하도록 한다.”

 

8로군 총사령부는 3개월 전인 5월에 무정을 조선의용대 사령관으로 임명한바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옌안 성내는 삽시간에 들끓었다. 징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폭죽이 일제히 터졌다. 사람들은 옷이나 모자를 하늘로 던지며 환호작약했다. 과일을 파는 사람들은 광주리에 있는 능금과 배를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던졌다.

이들은 큰소리로 “돈 안 받는 '승리과일' 마음대로 먹어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손에 손을 잡고 양꺼(秧歌 양가; 중국 북방 농촌지역에서 징과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는 민간가무)를 추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하는가 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워 미친듯이 기뻐하며 춤을 췄다. 사람들은 “8년간  힘들고 어려웠던 항전이 드디어 승리했다”, “중국은 다시는 동아(東亞)의 병자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런 분위기가 3일 동안 계속됐다. 광환(狂歡)의 도가니였다.

217)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장군   김순기  요령민족출판사판
218)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19) 作曲家 鄭律成   等著  遼寧出版社

----------------------------------------------------------------------------------------------------------------------------------

 

105. 해방 맞아 고국 향하는 조선의용대, 소련에 길 막혀…

 

9월 초, 드디어 꿈에 그리던 조국, 고향산천을 향해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3~4백여 명의 조선군정 간부와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옌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군하는 날이다. 이들은 떠나기에 앞서 뤄자핑에서 전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金枓鳳)과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한빈(韓斌) 등은 감개무량한 듯 옌안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조선의용대 총사령관 무정, 부사령관 박일우, 박효삼도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대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또 임풍(林楓)이 이끄는 옌안 간부대대가 보무당당한 모습으로 도열했다. 1천여 명의 조선독립군들은 형형한 눈빛으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8로군 사령부는 특별히 1개 독립 여단을 파견해 조선의용대 2개 지대를 호위하도록 했다.

조선의용대는 옌안을 떠나면서 정율성이 작곡해 ‘인민의 노래’가 된 ‘옌안송(延安頌 연안송)을 목이 터져라 일제히 불렀다. 이들은 헤어지기 아쉬운듯 행군하면서도 계속 뒤돌아보며 점점 멀어지는 옌안고성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아, 옌허(延河 연하)!, 아, 칭량산(淸凉山 청량산)이여!, 바오타산(寶塔山 보탑산)이여! 안녕!”하며 정들었던 산천에 인사를 했다. 이들은 또 낯설고 물 설은 이역만리에서 간난신고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준 작고 작은 조선촌 뤄자핑(羅家坪 나가평)을 뒤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조선의용대들은 행군하면서 ‘조국을 향해 전진(向祖國前進 향 조국전진)’이라는 노래를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불렀다. 노랫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정율성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복받쳐 급히 가사를 쓰고 곡을 부쳐 이 노래를 만들어 미리 조선 의용대원들에게 가르쳤다. 노랫말은 이렇다. (주석 220)

 

“굳세고 용감한 조선용사들, 오늘은 화북을 넘고, 내일은 만주를 지나 거리의 장애물을 돌파한다, 조국을 향해 전진, 우리들은 용감하게 투쟁을 한다,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를 위해.

健壯勇敢的朝鮮勇士們, 今天跨越華北, 明天過滿洲, 冲破路上的障碍, 向祖國前進, 我們將勇敢地鬪爭下去, 爲祖國的解放, 爲人民的自由”

 

조선의용대가 행군을 하며 ‘싼간닝’ 변계지구를 지나며 싼베이 사람들에게 친절히 작별인사를 할 때마다 그들은 능금과 붉은 대추를 의용대원들의 호주머니와  행낭에 가득 채워줬다. 이들은 목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옌촨(延川 연천)과 쓰반(石板 석판) 상류의 맑디맑은 계류와 개울을 지나고, 번화한 고진(古鎭) 수이더(綏德 수덕)를 거쳐 자(葭 가)현에서 다리쉼을 했다. 황토빛의 혼탁한 황허의 물결이 북쪽에서 흉맹스럽게 달려와 남쪽으로 용솟음치며 세차게 흘러갔다. 수많은 인파로 대원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다 나룻배를 타고 황허를 건너야 했다. 5명 남짓 태울 수 있는 작은 배에 소와 말 등 짐승을 실어 물이 선창까지 다다랐다. 뱃사공들은 긴장해 노를 저으며 거친 물결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때는 갑작스러운 소용돌이를 피하느라 배가 기우뚱하며 쓰러질 듯 곤두박질해 가슴을 쓸어 내리는 등 어렵사리 강을 건넜다.

 

지금까지 지나온 싼시(陝西 섬서)지역은 해방구라 치안상태가 안전했으나 산시(山西 산서)경내는 상황이 복잡했다. 그곳은 여전히 일본군과 괴뢰군의 거점이었다. 꺼라오후이(哥老會 가로회: 청나라 건륭황제 때 청을 전복하려 만든 비밀결사체)와 토비(土匪)들이 날뛰고 있었다. 조선의용대가 싱(興 흥)현을 지나 오후 4시께 산언덕에서 쉬고 있을 때 꺼라오후이가 기습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해 아슬아슬하게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안전한 숙영지를 찾아 야간 행군을 했다.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통푸(同蒲 동포)철로를 지날 때는 행군을 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일본이 항복했지만 일본군과 왕징웨이 정부 괴뢰군들은 여전히 근거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 국민당이 자신들이 무장해제할 때까지 원지를 방어하면서 8로군에게 무기를 넘겨주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곳곳에서 일본군이 국민당을 위해 공산당군과 전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의용대는 최소한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밤을 도와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는 봉쇄선을 몰래 뚫고 행군했다. 밤길에 120리를 내닫는 질풍노도와 같은 행군이었다.

 

산시(山西 산서)지방은 이름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2000~3000미터에 이르는 산들이 수두룩했다. 대부분 험준하고 높은 민둥산이 많았다. 지예허(界河 계하)에서 커란(岢嵐 가람)으로 가는 산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꾸불꾸불한 구절양장의 가파른 길이었다. 다이(代)현을 지나서는 며칠 동안 계속 높고 험한 산을 산악등반 하듯이 넘어야 했다. 어쩌다 만난 일이십리의 평탄한 산길은 걷기에 힘든 자갈길이었다. 하루 종일 산봉우리를 넘고 넘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당나귀 꼬리에 매달려 산에 오를 수 있었다.

험준한 고산에 오른 어느 날 광풍이 몰아치고 한기가 엄습해 손발이 얼을 정도로 추위가 매서웠다. 한 아낙네는 산을 내려온 뒤 자신의 품속에 있던 어린아이가 얼어 죽은 것을 알고 대성통곡한 적도 있었다. 천야만야한 절벽의 산길을 지날 때는 노폭이 좁아 실족하면 끌고 가던 말이나 당나귀, 노새와 한 덩어리가 돼 천길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 간을 졸이며 걸어야 했다.

 

정율성은 이런 산길을 걸으면서도 악상(樂想)을 가다듬어 두 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하나는 어렸을 때 자신의 고향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떠올려 ‘3.1행진곡’을 지어냈다. 또 하나는 ‘조선해방 행진곡’으로 “적들의 쇠사슬은 이미 깨져 부숴 졌다. 조국의 산하에 다시 찬란한 빛이 비춘다(敵人鎖鏈己被砸碎, 祖國的河山重放光輝)”를 노래한 것이었다.

 

조선의용대가 차하얼성 장자커우(張家口; 차하얼성은 없어졌음. 지금은 허베이성에 속함)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깊은 가을이었다. 8로군은 일본군이 항복하자 제일 먼저 대도시 장자커우를 해방시켰다. ‘진차지(晋察冀 진찰기; 산시성-차하얼성-허베이성)’ 중앙국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무정이 통솔한  조선의용대는 장자커우에서 ‘진둥난(晋東南 진동남) 일대에 서 온 1백여 명의 조선의용대와 부대를 합류시켰다.

 

조선의용대가 장자커우를 떠날 때 기차역에서 8로군 녜룽전(聶榮臻) '진차지' 사령관을 비롯해 텅다이위안(騰代遠 등대원), 샤오커(肖克 초극) 등 8로군 고위 장령들이 환송회를 열어줬다. 조선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8로군이 접수한 기차를 타고 화베이(華北 화북) 평원의 화이라이(懷來 회래) 현으로 갔다가 다시 동북 방향으로 달렸다. 이들은 구베이커우(古北口)를 지날 때 성문에서 총을 메고 서있는 소련 홍군의 초병을 보았다. 소련군이 벌써 이 일대 까지 진군해 주둔하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조선의용대들은 청더(承德 승덕)에서 내렸다. 청더는 일본군이 최후 발악을 하며 결사저항 하는 바람에 성내의 많은 곳이 폐허가 됐다. 다음날 소련군의 군용열차를 타고 진저우(錦州 금주)로 부대를 이동했다. 조선의용대가 도착한 동북의 공업도시 선양(沈陽 심양)은 희뿌연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초순의 겨울로 접어들어 북풍한설이 매섭게 몰아쳐 살을 에는듯 추웠다. 선양은 소련 홍군이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 이미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사회질서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밤에는 늘 총성이 들렸다. 조선의용군은 선양에서 선발대와 합류해 병력이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주석 221)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과 조선의용대 사령관 무정이 이끈 조선의용대원들은  조선에 들어가려 했으나 소련이 막아 귀국을 하지 못했다. 소련은 이미 김일성(金日成)을 앞세워 북조선에 진입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소련은 8로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우는 조선의용대를 배척했다.

선두부대가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련군에 의해 쫒겨 돌아왔다. 김두봉과 무정은 소련 진주군과 몇 차례 교섭을 벌여 소수의 주요 간부들만 개인자격의 신분으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무정은 11월 10일 선양 교외의 조선학교에서 조선의용대 전 장병대회를 열어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무정은 이어 “소수 원로 간부들이 조선으로 들어가 당정공작을 한다. 대부분은 동북에 남아 조선 동포들이 사는 지구에 들어가 군중을 동원하고 조직화해 역량을 확대시켜야 한다. 동북근거지를 공고하게 건립하는데 공헌해 줄 것”을 강조했다. 무정은 의용대를 3개 지대로 나눠 각각 동만주와 북만주, 남만주에 파견해 일본 관동군을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김두봉, 무정, 박일우, 박효삼 등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대 고위 간부들과 정율성은 옌안을 떠난 지 3개월여 만인 12월에 평양에 들어갔다.      

220)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21)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人民出版社

----------------------------------------------------------------------------------------------------------------------------------

 

106. 마오 '일본 군대 싹쓸이' 명령, 장제스의 훼방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1945년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옌안에서 열렸다. 1927년 대혁명실패 후 장제스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 때 1928년 모스크바에선 연 6전대회 이후 17년 만의 개최였다. 이 대회는 마오가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1931년 6기4중전회 이후 당을 지배했던 소련의 지시를 받는 코민테른파의 왕밍노선을 폐기하고 마오쩌둥 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식 공산당을 열어 나가기 시작한 기념비적 회의로 기록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黨章)에 채택, 마오 1인 지배체제의 확고한 중국공산당 통치를 추인하는 대회였다. 단상 아치형 식장에는 ‘마오쩌둥 기치아래 승리의 전진을 하자(毛澤東旗幟下勝利前進)’는 슬로건이 내걸렸고 단합과 단결이 강조됐다. 또 마오를 공산당 영도자에서 장제스에 맞설 수 있는 국가적 영도자로 부각시키려는 대회이기도 했다. 류샤오치는 ‘당의 장정(章程) 개정에 관한’ 보고에서 마오의 이름을 무려 105번이나 언급할 정도였다. 개인숭배의 원류가 되었다.

 

7전 대회의 의제 중 하나는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44명의 중앙위원을 뽑는 선거에서 왕자샹(王稼祥 왕가상)은 탈락했다. 마오는 이례적으로 후보 중앙위원 선출 때 왕자샹을 극력 지지하고 나섰다. 마오는 “왕자샹 동지는 노선과오를 범했고 결점이 있지만 당에 공을 세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왕자샹은 2위로 당선됐다.

마오는 왜 왕자샹을 지지했을까? 왕자샹은 준이회의 때 ‘중요한 1표’를 던져 마오를 지지하고, 왕밍의 좌경교조주의를 바로잡는 데 중요 구실을 했다. 또 하나는 왕자샹이 왕밍, 보구 등과 같은 코민테른파의 일원으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지만, 이런 성향의 사람도 포용한다는 믿음을 줘 당의 단결의 표상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15년의 울퉁불퉁(曲折 곡절)한 당의 역사를 뒤로하고 자신의 기치아래 단결해 일본의 패퇴가 가시화되고 있는 새로운 단계에서 성공적 투쟁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회의에서는 마오가 당 중앙을 대표해 정치보고를 했다. 주더는 ‘해방구 전장’을 논하는 군사보고, 류샤오치가 ‘당의 장정 개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마오는 5월 31일 총결보고에서 “어떤 일이든 모두 좋고 나쁜 양면적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최악의 가능성에서부터 문제를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경계를 제고해야 한다. 절대로 국민당 반동파나 그들의 상전인 미 제국주의에 대한 추호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온 힘을 기울여 내전 발발을 막아야 한다. 혹자는 내전폭발을 미루려 한다. 그러나 주요한 것은 모든 준비를 잘해야 하는 것이다. 곧바로 무장투쟁의 방식을 준비해 인민승리의 과실을 굳세게 보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광범위하게 군중을 동원해 인민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 조직이 바로 우리들의 전투대오다. 항전시기에 우리는 광범한 군중동원으로 인민들의 역량을 강화해 승리를 일궜다. 이 방침을 우리는 영원히 바꿀 수 없다”고 역설했다. 마오는 이때 ‘유격전에서 운동전’으로, ‘향촌에서 도시’로 등등의 혁명발전 단계의 전환을 제기했다. 세계정세가 출렁거렸다. 대회기간인 5월 8일에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해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다. 미국은 8월 6, 9일 잇따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은 10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파죽지세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밀고 들어갔다. 100만의 일본 관동군은 추풍낙엽처럼 깡그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오는 8월 9일 옌안에서 ‘일본 침략자에 대한 최후 일전’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주석 222)

 

“소련정부가 8월 8일 대일작전을 선포했다. 중국인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표시한다. 대일전쟁 시간은 크게 단축됐다. 대일전쟁은 이미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 침략자와 모든 주구들에 대한 최후 승리의 시간이 마침내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민의 모든 항일역량은 전국규모의 반격에 나서 밀접하고 효과적으로 소련과 다른 동맹국과의 작전에 협력해야 한다. 8로군, 신4군 및 다른 인민군대는 모든 가능한 조건하에서 투항하지 않는 모든 침략자와 그 주구들에 대해 광범한 진공을 펼친다. 적의 역량을 소멸시키고 무기와 장비를 빼앗아 맹렬하게 해방구를 확대해 일본군의 점령 지구를 축소해 나간다. 무장 공작대를 광범하게 조직해 적의 후방 깊숙이 투입하면서 인민을 조직하고 적의 교통선을 파괴하며 정규군작전에 협력케 한다. 함락지구의 수많은 군중을 폭넓게 동원해 즉시 지하군을 조직하여 무장기의를 일으키고 외부에서 진공하는 군대와 협력해 적을 소멸시키도록 한다. 해방구를 공고히 하도록 유의한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현재의 1억 인민과 모든 새로운 해방구 인민들에게 세금과 이자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실시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면서 인민정권과 인민무장을 조직한다. 민병 공작과 군대의 규율을 강화한다. 각계 인민통일전선을 견지해 인력과 물력의 낭비를 방지한다. 전국 인민들은 반드시 내전위험 저지에 주의하고, 민주연합 정부건립을 촉성하는 데 노력한다. 중국민족 해방전쟁의 새로운 단계는 이미 도래했다. 전국인민은 마땅히 단결을 강화해 최후의 승리쟁취를 위해 투쟁하자.”

 

주더 8로군 총사령관은 8월 10, 11일 잇따라 투항접수와 반격명령을 담은 7차례 통지를 공포해 해방구의 무장부대들이 적이 점령한 대도시와 교통요지로 진격해 일본군과 괴뢰군의 투항을 받도록 했다. 또 ‘지-러-랴오(冀熱遼  기열료; 허베이, 열하, 요동지역)’ 8로군과 원(原) 동북군 장령인 뤼정차오(呂正操 여정조), 장쉐스(張學詩 장학시), 완이(萬毅 만의) 등이 부대를 이끌고 동북으로 진격해 동북 해방구를 개척하도록 했다. 녜룽전이 통솔한 ‘진차지(晉察冀 진찰기)’ 부대는 일본군과 괴뢰군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진공해 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 톈진, 바오딩(保定 보정) 등 대중(大中)도시를 함락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이끄는 ‘진지위(晉冀豫 진기예; 산시, 허베이, 허난지역)’부대는 54곳 현성을 수복하고, 타이항, 타이웨(太岳 태악), 지난(冀南 기남; 허베이 남쪽지역), ‘지루위(冀魯豫 기로예; 허베이, 산둥, 허난지역)’ 지역 일부를 해방시켰다.

 

허룽(賀龍 하룡)과 리징취안(李井泉 이정천)이 지휘한 ‘진수이(晉綏 진수; 산시, 수원)’부대는 양로로 나뉘어 북쪽으로는 수이웬(綏遠 수원), 남쪽으론 진중(晉中 진중; 산시 중부지역) 지역으로 진격해 30여 곳의 현과 거점을 수복시켰다. 뤄룽환(羅榮桓 나영환)이 이끄는 산둥 부대는 5로로 나눠 옌타이(烟臺 연대), 웨이하이(威海 위해) 등 도시와 현성 32곳을 빼앗았다. 천이(陳毅 진의)와 라오수스(饒漱石 요수석)가 인솔한 화중(華中) 부대는 창장 양안의 적을 공격해 난징(南京 남경), 타이후(太湖 태호), 톈무산(天目山 천목산) 사이의 광대한 향촌, 화이난(淮南 회남) 일대를 해방시켰다. 펑바이쥐(馮白駒 풍백구)가 이끈 화남(華南) 부대는 각각 산터우(汕頭 산두), 위린(楡林 유림) 등지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8로군이 중국 곳곳에서 일본군 점령지를 공격하며 실지를 수복하고 항복을 받아내자 장제스는 8월 11일 2개의 명령을 내렸다. 하나는 자신의 직계부대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점령지를 공격해 수복하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이와는 달리 8로군과 신4군에게 ‘원지에 주둔해 대기명령’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명령은 공산당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무기와 장비를 접수할 경우 무장력 강화와 수복지역의 공산당 근거지화가 불 보듯 뻔해 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마오는 8월 12일 신화사가 실은 ‘장제스 내전선동’ 제목의 논평에서 장제스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마오는 “이것은 적과 아군이 뒤바뀐 조처다. 장제스가 일관되게 적(일본군과 괴뢰군)들과 결탁해왔다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해방구의 인민 항일군대는 절대로 악의에 찬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마오는 주더 8로군 총사령관 명의로 ‘장제스의 잘못된 명령에 견결하게 반대한다’는 2차례의 전보를 장제스에 보냈다. 또 8월 13일 장제스에게 보내는 중공의 입장과 태도를 표명한 전보 내용을 발표했다. (주석 223)


“우리는 이 명령에 대해 당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긴다. 큰 잘못을 범했다. 우리는 부득불 당신에게 이 명령을 견결하게 거부한다는 뜻을 밝히는 바이다. 우리에게 내린 명령은 바른 도리(公道 공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의 민족이익을 위배하고, 단지 일본침략자와 조국을 배반한 한간(漢奸)들에게 이로울 뿐이다.”

 

마오가 16일에 장제스에 보낸 전보는 더욱 강경한 어투로 적나라한 거친 용법을 구사했다.

 

“모든 동맹국의 통솔자 가운데 단지 당신 한 사람만 하나의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나는 당신의 이 잘못은 당신의 사심 때문이라고 본다. 대단히 엄중한 성격을 띠고 있다. 당신의 명령은 적에게 유리하다. 이로 인해 나는 중국과 동맹국의 공동이익의 입장에 서서 견결하고 철저하게 당신의 명령에 반대한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만큼 공개적으로 잘못된 명령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나는 현재 계속 내가 통솔하는 부대에게 소련, 미국, 영국의 군대와 협력해 굳세게 적을 향해 진공(進攻)하라고 명령했다. 이 진공은 적이 실질적으로 적대행위를 멈추고, 무기를 넘겨줘 조국의 국토를 완전히 수복할 때까지 계속된다.”

 

마오쩌둥의 이런 바늘 끝과 바늘 끝이 부닥치는(針峰相對) 초강경 대응은 아연 중국대륙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항일(抗日)의 횃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가운데 내전의 초연(硝烟)이 이미 중국의 상공에 자욱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막 승리의 희열을 느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전운(戰雲)을 머금은 망망한 구름과 안개가 몰려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마오는 혼돈스러운 목전의 시국을 전당과 전국 인민들에게 당의 정책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옌안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항일전쟁 승리 후의 시국과 우리들의 방침’ 제목의 강연을 했다. (주석 224)

 

“중국인민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펼쳐져있다. 광명의 길과 암흑의 길이다. 두 종류의 중국의 운명이 있다. 광명의 중국운명과 암흑의 중국운명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곧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면 이러한 두 개의 앞날을 맞이한다. 중국인민들의 힘들고 어려웠던 항전은 이미 승리를 거뒀다. 항일전쟁은 하나의 역사 발전단계에서 말하면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두 종류의 운명의 투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국민당의 정책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장장 10년 동안 내전을 벌였다. 항일전쟁 과정에서도 1940년, 1941년과 1943년에 3차에 걸쳐 대규모의 반공을 고조시켰다. 모두 우리당의 정확한 정책과 전중국인민의 반대로 무산됐다. 중국 대지주 자산계급의 정치대표인 장제스는 극히 잔인하고 음험한 사람이다. 그는 수수방관하며 항일전쟁의 승리를 기다리며 국민당의 역량을 보존해 내전을 준비해 왔다. 과연 기다렸던 승리가 돌아왔다. 이 위원장(장제스)이 ‘하산(下山)’ 했다. 하산해 무엇을 할 것인가? 복숭아, 즉 항전승리의 과실을 딴다. 그는 말한다. 이 복숭아의 소유권은 나, 장제스에게 있다. 나는 지주고 너희들은 농노다. 나는 너희들이 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한다. 당신은 물을 주지 않았다. 복숭아를 딸 권리가 없다. 우리 해방구의 인민들은 매일매일 물을 주었다. 가장 딸 권리가 있는 사람은 마땅히 우리들이다. 항전승리는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희생하면서 얻은 것이다. 항전의 승리는 응당 인민의 승리다. 항전의 과실은 마땅히 인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한사람은  따려고 하고, 또 한사람은 반대한다. 이래서 싸움이 터진다. 아주 심각한 투쟁이 한바탕 벌어진다.”

 

마오는 강연에서 “장제스는 전국규모의 내전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의 방침은 이미 결정됐다. 우리는 이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 전국적인 내전이 어느 날 발발하든 개의치 말고 우리들 모두 잘 준비해야 한다. 조금 일찍, 내일 아침에 싸우더라도 우리들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경고했다.

222)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23)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在重慶談判的歷史瞬間   時政頻道  新華網
224)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07. 장제스 충칭회담 압박 , 마오 6개 요구안 발표

 

8로군은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일본군과 왕징웨이 정부 괴뢰군 57,900여 명을 섬멸하고, 중소 성시(城市) 159곳을 함락해 수복했다. 또 핑한(平漢 평한), 진푸(津浦 진포), 정타이(正太 정태), 통푸(同浦 동포), 핑수이(平綏 평수), 베이닝(北寧 북녕), 자오지(膠濟 교제) 등의 철도선을 절단했다. 일본은 천황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데 이어 9월 2일 중국에 있는 128만여 명의 일본군이 중국에 항복하는 항복문서에 정식 서명했다. 중국은 2천1백 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천억 달러의 재산상 손실을 입는 등 엄청난 인적, 물적인 피해를 당했다. 8년간에 걸친 중일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돼 국가재건이 당면과제였다. 하지만 중국대륙에 짙게 드리운 전운을 머금은 농무(濃霧)가 한 올씩 흩날리면서 어렴풋이 내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장제스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장제스는 8월 14일 마오쩌둥을 충칭으로 초청해 평화적인 건국방안을 협의하는 회담을 하자는 내용의 전보를 옌안으로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마오쩌둥 선생 훈감(勛鑑)
왜구가 항복해 세계의 영구평화가 실현될 국면에 다다랐습니다. 모든 국내외의 각종 중요문제가 시급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생이 충칭에 오셔서 국가대계의 일을 함께 협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초청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중정(蔣中正) 미한(未寒)"

 

마오는 16일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장 위원장 훈감(勛鑑)
주더 총사령관이 오늘 당신에게 한 통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우리 의견에 대한 진술을 지켜본 뒤에 당신과의 회견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마오쩌둥 미선(未銑)"

 

장제스는 20일 또 마오에게 협상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냈고, 마오는 22일 장제스에게 먼저 저우언라이를 파견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발송했다. 장제스는 24일 마오에게 전보를 보내 거듭 마오쩌둥과의 회담을 요구하면서 (마오가 충칭에 타고 갈) 비행기를 옌안에 보낼 준비가 돼있다며 압박했다. 장제스는 3차례에 걸친 마오와의 충칭회담 제의를 통해 자신이 중국인민과 국가재건을 위해 내전을 막고 평화를 수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세스는 전보를 보낼 때 마다 신문과 방송에 내보내는 등 선전을 극대화했다.

마오가 장제스의 회담제의를 거절할 경우 공산당은 꼼짝없이 평화를 거부하고 인민의 단결을 깨는 내전세력이란 비난을 뒤집어 쓸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당시 공산당은 91만 명의 병력과 230만 명의 민병대, 120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구에 거주하는 주민이 9500만 명이나 되는 등 세력이 급성장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에 비해 현격한 열세였다. 또 장제스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8월 14일 소련과 전격적으로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어 스탈린과의 유대를 이끌어냈다.

마오쩌둥으로서도  국내외적인 세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평화와 단결을 내세워 공산당의 생존과 확장을 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7대 대회 때 제기한 장제스 국민당의 독재 정부를 깨고 공산당과 민주당파 등 각 당파와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연합정부' 정책으로 설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 

  

중공중앙은 8월 23일 옌안 자오웬(棗園)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이 자리에서 우선 저우언라이를 충칭에 파견해 담판을 하도록 하고, 이후에 자신이 직접 충칭에 가겠다고 밝혔다. 마오는 "현재의 상황은 이미 항일전쟁의 단계가 끝나고 평화건설 단계로 진입했다. 전 세계 구라파나 동방 모두가 평화건설 시기에 들어섰다.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면서 항전이후의 정세분석과 공산당의 대책 마련 등에 대해 설명했다. (주석 225)

"우리들이 예측 가능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상황에서 평화단계에 들어갔다. 하나는 우리가 일부분의 대도시를 얻었지만, 또 하나는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약간의 대도시를 진공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주요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외부의 지원이 없었다.  우리들의 무기는 보병총으로 외부의 지원이 없고 기계화가 되지 않아 적을 제압할 수 없다. 미국은 우리를 돕지 않는다. 헐리(주중 미국대사)의 정책은 성공했다. 소련은 중소조약과 국제평화로 인해 우리를 도울 수 없게 됐다. 둘째는 장제스는 합법적 지위를 이용해 일본이 완전히 그들에게 항복하도록 했다. 우리들은 합법적 지위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우리들의 도시공작과 군대공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요인으로 우리들은 과실을 따지 못했다. 우리들은 이런 사실, 즉 대도시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평화단계에 들어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마오는 국공양당과 대내외 문제, 담판문제, 이후 투쟁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석했다. (주석 226)

 

1. 국민당과 공산당이 처한 문제; 장제스의 지위에 관해 유리한 점은 그가 합법적 지위와 함께 대도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리한 점은 그의 앞에 광대한 해방구가 펼쳐져 있고 내부의 모순과 함께 국민당이 인민들의 민주와 민생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민족독립은 일본의 패망으로 기본상 이뤄졌다. 영미는 불평등조약을 폐기했지만 여전히 반 식민지적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 민생문제로 돌출할 것이다. 우리들의 유리한 점은 광대한 해방구의 존재다. 그것을 장제스가 봉쇄할 수 없고 우리들의 민주, 민생의 분투 강령은 장제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리한 점은 우리에게는 대도시와 기계화 군대, 합법적 지위가 없다는 것이다.

 

2. 미소 양국의 대중국정책 및 영향; 미국은 공개적으로 장제스를 돕지 못하고, 소련도 공개적으로 우리를 돕지 못한다. 소련이 우리를 도우면 미국도 반드시 장제스를 돕게 돼 그럴 경우 대전이 폭발해 평화는 물 건너간다. 소련은 구라파에서 불가리아를 돕지만 그리스는 돕지 못한다. 그리스는 영국과 다퉈야 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아시아에서 중국의 경우 미국과 다툼을 벌여야 한다. 주요한 것은 미국의 세력 때문에 우리들의 발전이 제한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만약 난징, 상하이를 점령할 경우 미국이 반드시 간섭할 것이다. 중소조약은 체결했지만 내용이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다. 대개 소련군 진주구역을 동북지역에 한정하고 허베이, 차하얼 지역 진입은 한시적일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이렇게 빨리 종전돼 소련은 중국혁명을 더 도울 수 없게 됐다. 소련은 현재 직접 우리를 도울 수 없고 심지어 말도 못하고 있다. 소련이 진정으로 우리를 원조한다면 돕지 않는 것이 돕는 일이다. 일부 동지들은 실망스럽겠지만 소련이 우리를 돕는 것보다 돕지 않는 것이 중국인민들에게 더욱 유리하다.

 

3. 전쟁과 평화의 문제; 평화는 얻을 수 있는가? 내전은 피할 수 있는가? 우리들의 현재의 구호는 '평화, 민주, 단결'이다. 과거의 구호는 '단결, 항전, 진보'였다. 평화는 소련과 미국, 영국이 필요로 하고 중국내전에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취할 수 있다. 중국은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과거에는 대적을 앞에 뒀으나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방의 각 해방구의 손실이 대단히 크다. 인민들은 평화를 요구하고, 우리도 평화가 필요하다. 국민당도 내전을 결정하기 어렵다. 판을 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병력이 분산되어 있고, 내부 모순이 있다. 국민당은 중앙군과 잡패군(雜牌軍)에 괴뢰군이 가세해 280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후종난은 현재 단지 3개 군으로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국민당 자체에 어려움이 있어 해방구와 우리를 쉽게 소멸할 수 없다. 인민들과 세계 각국이 내전을 반대한다. 이 때문에 내전은 피할 수 있고, 반드시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제기한 '평화, 단결, 민주', 이 3대 구호는 현실에 기초한 것으로 국내외의 광대한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장제스의 공산당 소멸방침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잠시 평화를 채택해 단지 일시적인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장제스는 이 기간에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역량을 키워 앞으로 우리를 소멸할 기회에 대비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일시적 평화를 이용해야 한다.

 

4. 공산당 담판제기 조건; 마오는 저우언라이가 기초한 '당면한 긴급요구'에서 최종 확정된 6개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애초 이 안은 12개 조항으로 작성됐는데 마오가 2개항을 추가해 14개항으로 늘어났다가 보구의 제의를 거쳐 최종 6개항으로 확정됐다.

 

중공중앙은 8월 24일 이 6개항을 '중공중앙의 당면한 시국선언'으로 발표했다. 6개 조항의 주요내용은 이렇다.

1) 중국 해방구의 민선정부와 항일군대를 승인하고, 해방구를 포위하고 진공한 군대를 철수해야만 평화를 실현하고 내전을 피할 수 있다.
2) 8로군과 신4군 및 화남(華南) 항일종대가 일본군 항복을 접수할 수 있는 지구를 획정한다.
3) 한간을 엄벌하고 괴뢰군(왕징웨이 정부군대)을 해산한다.
4)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군대를 재편한다.
5) 각 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한다.
6) 즉시 각 당파와 무당파 대표인사 회의를 소집하고 민주적 시정강령을 제정한다. 훈정(訓政)을 끝내고 민주연합정부를 구성하는 한편, 국민대회를 준비한다.

 

마오는 가장 현실적으로 온 힘을 기우려 쟁취해야 할 조항은 제1조항인 해방구와 해방군의 승인을 들었다. 마오는 이 조항이 쌍방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면서, 결과적으로 과거 오랫동안의 쟁론에 비춰볼 때 12개 사단만을 승인해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5) 담판기간의 선전, 군사와 해방구공작; 국민당에 대한 비판은 원래 중지했었는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장제스는 우리를 '주둔지에서 방어하며 명령을 대기하라'고 요구해 부득불 다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완화시킨다. 이후 여전히 장제스가 반격하면 우리도 반격하고, 장제스가 멈추면 우리도 멈춘다. 최근 2주간의 진군은 필요한 것으로 군대를 집중해 인심을 분기시키고, 이후 한 시기에 더 큰 중소도시를 빼앗아야 한다. 이번 겨울에는 군대를 정돈하고 훈련하면서 내전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장제스와 미국에 보여줘야 한다. 담판 중에 비교적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한다. 각 해방구는 지속적인 정책으로 인민들의 부담을 증대시키지 않고, 겨울에는 대감세 정책을 펴고 내년에 대생산 정책을 시행하도록 한다. 국민당 통치구역에서의 도시공작과 군대공작은 평화 시기에 대단히 중요한 공작이다. 이후 성실하게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날 잘 하지 못했다. 이 두 가지 공작을 잘 하지 못하면 중국인민의 최후 해방은 이룰 수 없다.

 

6. 공산당의 이후 투쟁의 길; 우리는 현재 전국 범위 내에서 대체로 자산계급이 영도하면서 무산계급이 참여하는 프랑스의 길을 가고 있다. 중국의 국면에서 연합정부의 몇 가지 형식에 비춰볼 때 현재는 독재체제에 약간의 민주를 가미하고 있다.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뚫고 들어가 장제스의 얼굴을 세수시켜야지 목을 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 우리당은 각 방면에서 크게 성숙했다. 중국인민들을 더욱 깨우치면 신민주주의의 중국을 실현할 수 있다. 4억5천만의 중국은 구라파와 맞먹는다. 구라파는 현재 많은 나라가 있지만 공산당이 완전히 영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양보에 대해 준비해 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군대가 담판에서 축소되고, 내부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등등의 곤란에 대비해야 한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들 내부의 단결로 우리들이 일치단결하면 적들은 우리를 압도할 수 없다.

 

마오는 마지막으로 "평화, 민주, 단결의 자세를 담은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할 선언을 준비하도록 했다. (저우)언라이 동지는 곧 회담하러 갔다가 이틀 뒤 돌아와 나와 헐리와 함께 간다. 늦출 수 없다. 꼭 간다. 어떤 위험은 없다고 본다. 내가 가면 (류)샤오치 동지가 나의 직무를 대리한다. 우리 는 굳건히 서서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면 모든 거센 풍랑도 두렵지 않다"며 충칭회담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를 털어놓았다.

 

마오는 회의를 이렇게 총결했다.

 

"오늘의 방침은 7대 회의에서 정한 것이지만 항일시기 방침의 계속이다. 7대의 방침은 바로 내전에 반대하는 방침이다. 눈앞에 내전의 위협은 존재한다. 그러나 국민당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최소한 올해에는 큰 내전은 없다. 평화가 가능하고, 꼭 그럴 것이다. 진공이냐 퇴각이냐? 당연히 주요한 것은 진공이다. 평화 속에 진공, 합법공작 속에 진공이다. 단, 부분적으로 퇴각할 수 있다. 1억 인민, 100만 군대. 장제스는 완전히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양보를 준비해 수량상의 양보, 국부적인 양보로 전국적 합법지위를 얻고 정예를 양성해 새로운 형세를 맞이해야 한다. 3개시기의 전쟁을 통해서 현재 평화시기가 왔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환경이다. 북벌과 내전, 항일 시기는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전국인민들을 교육하고 우리들 스스로를 단련하는데 대단히 필요하다. 합법투쟁을 배우고, 국회강당을 이용하는 것을 배우고, 도시공작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런 많은 공작을 배울 때만이 비로소 대도시와 전국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담판이 성공하지 못하면 국민당은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싸울 것인가? 마땅히 싸워야 한다. 조건은 크게 이긴다. 내가 갈 것인가? 우리는 오늘 가는 것을 결정했지 가지 않는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단, 가는 시기는 정치국 서기처에서 결정한다."

225)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26)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中央文獻出版社

----------------------------------------------------------------------------------------------------------------------------------

 

 

108. 미·소의 압박… 호랑이굴로 들어간 마오 "장제스 만세!"

 

마오는 회의에 앞서 이미 이해득실을 꼼꼼하게 따진 뒤 충칭회담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비장한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마오의 안전문제였다. 호구(虎口) 속에 들어갔다가 안전하게 옌안으로 돌아 올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였다. 적지에서의 암살이나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했던 시안사변도 떠올렸다. 내전반대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보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마오의 안위를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오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대책을 세워 놓았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자신의 직무 대리로, 천윈(陳雲 진운)과 펑전(彭眞 팽진)을 후보서기로 임명해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부재한 상황에서 류샤오치를 영도로 한 5인이 서기처를 운용하도록 했다.

 

정치국확대회의가 열린 이날 장제스로부터 3번째 초청 전보와 함께 미군사령관 알버트 워더마이어 장군이 마오를 초청한 전보도 옌안으로 날아왔다. 8월 25일 워더마이어가 다시 전보를 보냈고, 마오는 당일 보낸 답신에서 "나는 장 위원장으로부터 3차례의 초청 전보를 받았고, 헐리 대사가 2번에 걸쳐 옌안에 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시했다. 이런 성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에 뜻을 받들어 헐리 대사가 옌안에 와 면담하는 것을 환영한다. 나와 저우언라이가 헐리 대사와 동행해 비행기를 타고 충칭에 가 장 위원장이 약속한 모든 문제를 논의 하겠다"고 밝혔다. 장제스와 마오의 충칭회담은 이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됐다.

 

중공중앙은 8월 26일 자오웬에서 또다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중앙의 고급간부들에게 "내가 충칭에 가는 문제는 워더마이어에게 보낸 전보에 피력했다. 간다! 이것은 모든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성하지맹(城下之盟; 적에게 침공당해 성 밑에서 체결하는 조약, 즉 굴욕적 강화조약) 가능성을 충분히 판단했다. 서명은 내가 한다"며 다시 한 번 충칭담판의 비장감을 드러냈다. 마오는 충칭담판에서 쓸 '카드'를 점검하고 후속 전략방침을 설명했다. (주석 227)

 

"일정한 양보는 필요하다. 쌍방 간의 근본이익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타협을 할 것이다. 우리들이 양보할 제1 '밑천(카드)'은 광둥에서 허난(河南 하남), 두 번째 카드는 장난(江南 강남), 세 번째는 장베이(江北 강북)이다. 유리한 조건아래에서 양보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의 이런 양보가 안 된다고 하면 그건 성하(城下) 불맹(不盟)으로 감옥에 갈 준비를 한다. 당의 역사상 멋대로 항복한 일이 없다. 결코 두렵지 않다. 만약 연금한다면 더욱 겁내지 않는다. 국제적 압력은 장제스 독재에 불리하다. 앞으로 국내외의 관심은 상하이, 난징에 집중된다. 그곳에서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많은 동지들이 외부에 나가 일을 해야 하지만 영도핵심은 옌안에 있다. 옌안은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안팎의 중심이 될 때 능히 보존할 수 있다. 당의 역량을 화베이(華北 화북), 산둥(山東 산동)과 룽하이루(朧海路 롱해로) 이북에서 내몽고 일대에 집중하고 전력을 기울여 둥베이(東北 동북)를 쟁취해야 한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충칭회담(重慶會談 중경회담) 성사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의 국가이익의 강력한 입김도 작용했다. 미소 양국은 일본의 항복이전부터 새로운 세계질서 개편을 염두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한반도도 이들의 손에 작살나 두 동강으로 허리를 잘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2월 소련의 흑해연안에서 열린 미영소간의 얄타회담에서였다. 이들은 한국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3.8선을 획정해 남과 북의 비극을 만든 것이다. 전쟁 당사자들이자 승전국인 미소 두 나라는 겉으로는 '평화'를 앞세우면서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영향력과 지배권 확대에 총력을 쏟고 있었다. 미소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평형유지를 바랐다.

때문에 이들 두 나라는 중국의 내전을 반대했다. 미국은 미일전쟁을 치르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개입과 지원으로 그들의 입김을 키웠다. 장제스를 축으로 하는 통일중국은 미국의 확신이었다. 문제는 국공 간의 내전 방지였다. 장제스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중국에 있던 미국 고위 군관계자와 외교관들은 날로 세력을 키워가는 공산당에 주목했다. 이들의 주선으로 1944년 6월 미국의 '군사 옵서버팀'이 옌안을 방문해 마오와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영도자를 만나 내전방지를 위한 논의를 벌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8월 23일 이들과의 회견에서 연합정부의 필요성과 국민당과 동등한 공산당에 대한 미국지원을 역설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을 막기 위해 공산당과의 협상에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중국-버마-인도 전선의 미군사령관 조셉 스틸웰도 그들 중 한사람 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에 비판적인 스틸웰을 적극 공략해 장제스의 일당 독재를 비판하면서 다당제의 연합정부 구성을 역설했다. 또 해방구의 인정, 공산당 지원 등의 외교전을 펼쳤다.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관계악화로 1944년 10월 본국에 소환되고, 워드마이어가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개인 특사로 헐리(나중에 미국대사가 됨)를 중국에 보내 국공 간의 화해를 주선하며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11월 7일 옌안에 온 헐리는 저우언라이와 협상을 벌여 공산당이 주장한 연합정부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산당 미래는 한때 낙관적인 전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고, 1945년에 들어 헐리가 되레 장제스 편을 들고 나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협상은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졌었다. (주석 228)

소련도 장제스의 중국 통일정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전후처리 과정에서도 공산당은 장제스의 통일정부에 한 축으로 들어가 공산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스탈린은 마오가 장제스를 대적하기에는 족탈불급이라고 판단했다. 마오를 지원해 괜한 긁어 부스럼으로 장제스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장제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소련은 8월 14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전격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해 중국공산당의 분노를 샀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무산자계급 정당이 아니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마오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다. 항일전쟁 중 마오가 코민테른과 스탈린에게 항전상황과 국민당과의 합작과정에서의 마찰 등을 상세히 소개한 문서를 보낸바 있었다. 스탈린은 "국민당과 싸우지 마라"고 단칼에 무질러버렸다.

 

1942년 말, 스탈린은 옌안에 사람을 파견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항일전 등 공작상황을 설명하도록 요구한 일이 있었다. 마오는 이때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해 스탈린의 의심을 한껏 키웠다. 스탈린이 마오와 중국공산당을 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1944년 6월 10일 스탈린이 소련주재 미국대사 해리만과 1945년 미국 육군 장관 헐리와 각각 만났을 때 나눈 대화에서 약여하게 드러난다. 해리만이 "장제스가 중국을 이끌어갈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자 스탈린이 곧바로 동의를 표하면서 "현재의 상황에서 장제스가 가장 합당한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를 지지한다. 중국 공산당인은 진정한 공산당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스탈린이 헐리와 중국문제를 놓고 회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헐리가 "중국은 사실상 공산당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중국이 합당한 개혁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중국내부의 의견차이로 내전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는 만큼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영미와 협력해 중국군대의 통일을 이뤘으면 한다. 장제스는 애국지사"라고 화답했다. 스탈린은 소련 고위관계자에게도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 스탈린은 "장제스가 중국 영도자 중 가장 낫다. 중국을 통일할 사람은 장제스다. 중공의 영도자들을 장제스 마냥 믿지 않는다. 그들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스탈린의 마오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주석 229)


스탈린의 이런 인식에 대한 주요 원인을 중국에 대한 이해부족과 마오와 관련한 왕밍의 잘못된 정보제공에서 찾기도 한다. 또 하나는 세계 제2차 대전 때 스탈린이 마오에게 6차례 전보를 보내 8로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부근에서 일본군의 소련 변경에 대한 압박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마오는 이러저런 일로 거부했다. 이로 인해 스탈린이 중공에 대한 불만이 커, '장제스를 지원하고 마오를 누르는, 즉 ‘조장억모(助蔣抑毛)' 의식이 싹텄다는 것이다.

 

장제스와 미국이 압박하고 있는 충칭회담과 관련해 스탈린도 8월 22일 옌안에 전보를 보내 마오쩌둥이 직접 충칭에 가서 담판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소련공산당 중앙의 명의로 보낸 전보에선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지 않고 평화를 유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중화민족은 괴멸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보를 본 마오는 "도대체 누가 내전을 벌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느냐"며 노골적으로 소련에 불만을 터뜨렸다. 중공은 곧바로 스탈린에게 중국 상황을 알리는 회신을 보냈다. 스탈린에게서 두 번째 전보가 옌안으로 날아왔다. 전보내용은 이랬다.

 

"세계는 평화를 요구한다. 중국도 평화를 필요로 한다. 설령 장제스가 내전을 도발해 당신들을 소멸한다 할지라도, 그는 재삼 마오쩌둥 동지를 충칭으로 초청해 평화적인 건국방안을 협의하자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거절한다면 국내외 각 방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내전이 발발하면 전쟁의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나는 마오쩌둥 동지가 충칭에 가 회담에 참가하기를 건의한다. 마오의 안전은 소련과 미국 두 국가가 책임을 진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오는 1945년 8월 28일 헐리가 타고 온 수송기를 타고 저우언라이 왕뤄페이, 그리고 미국대사 헐리와 함께 옌안 비행장을 떠나 오후 3시 37분 충칭 지우룽포(九龍坡 구룡포)비행장에 도착했다. 국내외 기자를 비롯한 환영 나온 국민당 관료, 사회 각계인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마오 일행이 트랩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구식 모자(헬멧)를 쓰고 손을 흔들며 비행기에서 내려온 마오는 갑자기 "장 위원장 만세"를 잇따라 3번 불러댔다. 수행했던 저우언라이, 왕뤄페이 등 중공 관계자들은 대경실색했다. 환영 나온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영접한 국민당 고위관계자들이 장제스에 보고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장제스는 마오의 태도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안전을 담보한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고도의 수법이었다. (주석 230) 

 

마오는 10월 8일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장 장즈중(張治中)이 군사위원회 강당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 왕뤄페이 등을 초청해 베푼 연회에서도 이 '만세구호'를 외쳤다. 장즈중이 담판 협정서명(10일)을 앞두고 11일 옌안으로 떠나는 마오를 위한 연회였다. 마오는 자리 연설에서 "우리들은 장 위원장의 영도아래 곤란을 극복하고 독립과 자유, 민주와 통일을 건설해 부강한 신중국을 만들자!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평화, 민주, 단결, 통일을 이룩하자. 우리들의 합작은 장기적인 합작이다. 어려움을 해소해 나가자"고 밝혔다. 마오는 연설을 끝낸 뒤 큰 소리로 "신중국 만세! 장 위원장 만세!"를 외쳤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가는 날까지 확실하게 자신을 낮춰 안전을 담보하자는 계책이었다.

 

‘여우와 두루미의 만찬’격인 충칭회담은 43일간 우여곡절을 거치며 가까스로 파국은 면했지만 '시한폭탄'이 내재한 미봉적인 협상타결이었다. 회담은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인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는 일반적인 의견을 교환하는 탐색기였다. 2단계는 9월 4일부터 21일까지로 실질적 문제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3단계는 5일 동안 중단됐다가 시작한 9월 27일부터 10월 10일까지 마지막 협의 조정단계로 이루어졌다.

협상진행 방식은 양당 최고 영도자인 장제스와 마오 간의 직접협상과 실무협상으로 2원화로 이루어졌다.  실무협상팀은 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대표와 왕뤄페이, 국민당은 장즈중, 장췬(張群 장군), 샤오리즈(邵力子 소력자) 등이었다. 마오와 장제스 사이의 협상은 11차례 열렸다. 대부분 공개적인 장소에서 열렸고, 몇 차례는 비밀리에 배석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주석 231)

 

공산당은 모두 11개항의 의견을 내놓았다.

1. 평화와 민주, 단결을 기초로 전국적 통일을 실현해 독립, 자유와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해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철저하게 실현하자.
2. 장 선생(장제스)을 옹호하고, 장 선생의 전국적 영도지위를 승인한다.
3. 국공양당 및 항일당파의 평등한 합법지위, 장기합작확립, 평화건국 방침을 승인한다.
4. 해방구부대 및 지방정부의 항일전쟁 중의 업적과 합법지위를 승인한다.
5. 한간을 엄벌하고, 괴뢰군을 해산한다.
6. 항복 접수지역을 다시 획정해 해방구부대가 항복 접수공작에 참가한다.
7. 일체 무장충돌을 정지하고, 각 부대는 잠시 원지에서 명령을 대기한다.
8. 당의 통치를 끝내는 과정에서 신속히 필요한 방법을 채택해 정치민주화, 군대국가화, 당파의 평등하고 합법적인 지위에 이르도록 한다.
9. 정치민주화의 필요방법; 국민정부는 각 당파 및 무당파 대표인물의 정치회의를 소집해 국사를 협상하고 건국대계 단결과 민주적인 시정강령을 토론한다. 각 당파가 정부에 참가하고 국민대회를 다시 선출한다. 중공은 '싼간닝 변계지구' 및 러허(熱河 열하), 차하얼(察哈爾), 허베이, 산둥, 산시(山西) 5성부 주석, 수이위안(綏遠 수원), 허난, 장쑤, 안후이, 후베이, 저장, 광둥 및 둥베이 10성의 부주석, 베이핑, 톈진, 카이펑(開封 개봉), 상하이 4개 특별시 부시장을 추천한다. 지방자치를 시행해 보통선거를 실시한다.
10. 군대국가화의 필요방법;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전국 군대를 재편한다. 분기실시 계획을 확정한다. 해방구 정규군은 점차적으로 16개 군 48개 사단으로 편성해 화이허(淮河 회하)유역 및 룽하이루(朧海路 롱해로) 이북지역에 집중 주둔한다. 중공 및 지방군사 인원은 군사위원회 및 기타 각부의 공작에 참가한다. 베이핑 행영(行營) 및 북방 정치위원회를 설립해 중공인원을 주임으로 임명한다.
11.당파의 평등하고 합법적인 필수방법; 정치범을 석방하고, 일체 불합리한 금령(禁令) 폐기, 터우(特務 특무; 스파이)등을 없앤다.

 

9월 2일 밤, 장제스는 중공대표단을 초청해 연회를 베푼 뒤 마오와 단독회담을 벌였다. 장제스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군대문제와 관련해 중공부대를 12개 사단으로 재편하는 것이 중앙정부가 승인할 수 있는 최고한도다. 해방구 문제는 사실상 인정할 수 없고 ‘군과 행정부 통제를 통일’해야 한다.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전시국방최고위원회를 정치회의로 개조해 각 당이 뽑은 인원이 구성원으로 참가할 수 있으나 중앙정부의 조직과 인사는 당분간 바꿀 수 없다. 국민대회 기존 대표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신정부가 출범할 때 각 당파와 무당파가 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 중공이 현재의 중앙정부에 참가할 생각이 있다면 고려할 수 있다. 중공이 국민대표 증원을 요구하면 참작해 증원할 수 있다. 총체적으로 장제스는 ‘공산당 문제의 해결’을 원칙으로 삼아 실제적으로는 ‘정령(政令)과 군령(軍令)의 통일’, 즉 군대와 행정부를 통제하는 통일원칙을 고수했다. 제2단계 회담에서 쌍방 간의 이견이 첨예하게 맞섰다.

 

1. 총론적인 평화와 민주, 통일 문제; 공산당은 ‘평화와 민주, 단결을 통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국민당은 ‘민주와 통일은 다 중요하다. 통일은 모든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전제’가 된다.

2. 군대 문제; 공산당은 48개 사단으로 재편하고 분기에 실시한다. 국민당은 중공부대를 12개 사단으로 재편하되 즉시 그 숫자로 축소해야 한다.

3. 해방구 합법적 지위 문제; 국민당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진행을 거부한다.

4. 국민대회 문제; 공산당은 국민대표는 항전 전에 선출해 임기 6년이 지나 이미 대표자격을 상실해 마땅히 다시 뽑아야 한다. 국민당은 옛 대표자격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유지한다.

 

이 4개 부문 이견문제와 관련해 특히 군대와 해방구 문제가 국공 간에 치열한 투쟁의 초점이 됐다.

----------------------------------------------------------------------------------------------------------------------------------

 

109. 국민당 뒤로는 해방구 공격… '쌍십협정' 체결

 

 

9월 15일, 국민당과 중공 사이의 6차 회담이 열렸으나 회담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대표 장췬(張群 장군)은 “중공이 제기한 군대숫자가 중앙이 규정한 것과 큰 차이가 있어 다시 회담할 필요가 없다. 해방구 문제도 중앙이 이미 밝힌 대로 다시 변경할 수 없다”고 밝혀 파란이 일었다. 회담이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9월 17일,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미국대사 헐리를 초청해 오찬을 하면서 군사문제 부문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이 회담 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교착상태를 깨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고심 끝에 통 큰 양보를 하기로 결정했다. 저우언라이는 17일 7차 회의에서 국민당 국방대표에게 이런 내용을 통보했다.

 

1.헐리가 애초 제안했던 중앙군과 공산당의 군대비율 5분의 1도 장제스가 받아들이지 않아 공산당이 대폭 양보해 7분의 1의 비율로 재편한다.

2. 공산당은 하이난다오(海南島 해남도), 광둥, 저장, 쑤난(蘇南 소남; 장쑤성 남쪽), 완베이(皖北 환북; 안후이성 북쪽), 후베이, 후난, 허난(河南 하남)  등 8개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해 쑤베이(蘇北 소북; 장쑤성 북쪽)와 완베이(皖北 환북; 안후이성 북쪽) 및 룽하이로 북쪽지역에 집중 배치한다.

 

16일 국민당 국방대표가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중공군이 5개 군 6개 사단을 초과할 수 없으며, 군대 주둔지와 해방구가 섞여서는 안 되고, 중공이 각 지방의 행정관원을 추천해주면 중앙에서 임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성인지를 획정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중공이 반발해 여전히 교착상태가 계속됐다.

 

9월 21일 헐리가 상하이와 난징을 시찰한 뒤 충칭에 돌아왔다. 헐리는 이틀 뒤 대사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재에 나선 헐리는 공산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1. 중공 군대 숫자는 장 위원장이 20개 사단으로의 증가를 동의하는 대신 중공은 반드시 그 숫자로 즉시 재편한다. 중앙군의 재편에 비례해 축소하거나 지연해서는 안 된다.

2. 중공은 북방 5성의 주석과 두개 성 부주석 등의 임명 요구를 폐기해야 한다. 국민당 주도의 통일을 승인하던지, 아니면 담판을 깨라.

 

헐리는 또 “해방구 문제에 대한 결과에 얘기가 없으면 성명을 발표할 수 없다. 회담의 성공여부나 성명발표에 관계없이 마오 주석이 옌안에 돌아갈 수 있다”고 강경하게 몰아붙였다. 저우언라이가 이런 내용을 마오에게 보고했고, 마오는 헐리가 내일 돌아가는 만큼 직접 만나 설명하겠다고 했다. 헐리를 만난 마오는 “승인할 수도 없고, 회담을 깰 수도 없다. 문제가 복잡하다. 토론을 해야 한다. 우리당은 장제스의 중공부대 20개 사단 재편 제의를 거부하지 않는다. 더 고려해 보자”고 말했다. 회담이 5일간 중단됐다. 마오쩌둥은 이때 헐리의 이런 비열한 방식에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옌안에 돌아 온 뒤 “미국정부, 워더마이어, 헐리는 우리에게 대단히 나쁘게 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회담이 교착국면에 빠진 9월 21일을 전후해 며칠 동안 긴장이 고조됐다. 하나는 항전이 끝난 뒤 미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는 빌미로 장제스가 대규모 부대를 화중(華中)과 화베이(華北 화북)로 이동하는 것을 지원하고, 미군이 남쪽의 광저우 만(灣)에서 동쪽의 친황다오(秦皇島 진황도)에 이르는 연해의 각 대도시와 교통요지를 지키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공산당 정보기구가 국민당 정보기구인 중통국(中統局)에서 마오와 저우를 억류해 중공의 군심을 흔들어 놓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 분석에 따르면 장제스가 화북지방의 항복접수를 끝낸 뒤 군대를 동원해 공산당 포위소탕전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 고도의 경계태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9월 25일 옌안에 협상 중 발생한 긴장상황을 타전했다. 류샤오치는 즉시 정치국회의를 열어 의견을 취합한 뒤 다음날 마오가 옌안으로 돌아오도록 건의했다. 마오는 “현재의 투쟁은 원칙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담판이 깨져서는 안 된다. 장제스의 고압적 태도를 이용해 정치공세를 펴 중간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충칭체류를 고수했다. (주석 232)

 

이에 따라 저우언라이는 곧바로 문화계, 산업계, 언론계, 여성단체 등과 각 당파 인사들을 폭넓게 만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회담의 진상과 국민당의 꿍꿍이를 폭로하면서 이들의 지지와 지원을 넓혀 나갔다. 각계 민주인사들이 들고 일어나 국민당을 질책하고, 각 당파가 참가하는 회담을 열자는 등 장제스를 압박하고 나섰다. 장제스가 한 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칭회담이 열리고 있던 9월 중순, 국민당은 36개 군 73개 사단을 해방구에 투입해 이른 시일 안에 화중과 화둥(華東 화동)의 전략요충지를 통제하고 동북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북으로 진군할 길을 열 작정이었다. 또한 군사압력을 가해 회담에서 중공을 굴복시킬 뜻도 깔고 있었다. 국민당군의 중공 ‘진지루위(晉冀魯豫 진기노예; 산시-허베이-산둥-허난)’ 해방구 진격으로 내전의 위험이 크게 증대됐다. ‘진지루위’ 해방구는 화북 전략구역의 중앙대문에 위치해 서쪽은 타이항, 타이웨(太岳 태악), 중탸오(中條 중조) 등 3개의 높은 산맥이 둘러싸고, 동쪽은 허베이, 산둥으로 이어지는 일망무제의 대평원이 펼쳐져있다. 남쪽으로는 황허가 세차게 흐르고, 북쪽은 정타이(正太 정태) 간선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져있다. 이곳은 예부터 전략요충지로 국민당의 주요 진공(進攻)방향이 되었다.

 

산시성 동남부에 상당(上黨)지구가 있다. 타이항산, 타이웨산 그리고 중탸오산이 둘러싸고 있다. 장즈(長治 장치)현성의 핵심지역인데 고산준령의 평탄한 지구로 고금(古今)의 병가요지다. 8월 중순, 국민당 옌시산(閻錫山 염석산)은 1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이항산 한복판인 상당지구를 쳐들어갔다. 한순간에 국민당 군은 기세등등하게 해방구를 사방에서 덮쳐 공전의 내전위기가 고조됐다. 충칭회담을 하던 마오는 이 소식을 듣고 “국민당이 한쪽에선 우리와 회담을 하면서 다른 쪽에서 우리 해방구를 공격해 들어가고 있다. 옌시산이 13개 사단을 투입해 공격하고 있다. 우리가 일찍이 정했듯이 ‘침봉상대(針鋒相對; 바늘 끝과 바늘 끝이 첨예하게 맞서듯,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 촌토필쟁(寸土必爭; 손바닥 만한 땅을 다투듯,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음)’”이라고 강력하게 맞서도록 했다.

 

이 지역 해방구는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관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8로군과 국민당군의 화력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전군에 고작 중화기는 6문의 산포(山炮)와 반수의 연대에서 2~4문의 박격포, 3~4정의 기관총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신병들은 칼과 창으로 싸워야 했고, 탄약이 부족해 몇 발 정도밖에 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장비를 잘 갖춘 옌시산의 정예부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류-덩’ 부대는 타이항, 타이웨 지난(冀南 기남; 허베이성 남쪽) 3구에 31,000명의 주력 및 지방 병단 일부를 집중 배치했다. 전투지휘관은 리다(李達 이달), 천시롄(陳錫聯 진석련), 천껑(陳賡 진갱), 셰푸즈(謝富治 사부치), 왕신팅(王新亭 왕신정), 천자이다오(陳再道 진재도), 친지웨이(秦基偉 진기위) 등 맹장들이었다. 

‘류-덩’은 9월 7일 상당 전투 명령을 내렸다. 이때 덩샤오핑은 “우리가 상당전투를 잘 싸워 적들을 철저하게 섬멸하면 섬멸할수록 마오 주석이 더욱 안전해지고, 마오 주석이 협상테이블에서 더욱 힘이 생긴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상당전투는 9월 10일에 시작돼 10월 12일 류보청과 덩샤오핑 부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8로군은 11개 사단과 1개 돌격 종대 등 35,000명을 전멸시키고 산포, 기관총 등을 노획하는 한편, 옌시산 군 제19군 군단장 스쩌보(史澤波 사택파)를 생포했다. (주석 233)

 

국민당과 공산당은 신해혁명 기념일 ‘쌍십절’인 10월 10일, 43일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알맹이가 빠진 ‘불완전한’ 협정을 체결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정부와 중공 대표회담 기요(紀要)’에 서명해 이른바 ‘쌍십협정’이 정식 체결됐다. 주요 내용은 총론으로 국공 쌍방은 “평화, 민주, 단결, 통일을 기초로 공동노력을 한다. 장기 협력으로 내전을 견결하게 피하도록 힘쓴다. 독립과 자유,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한다”는 등의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 

각론으로 국공은 신속히 국민당의 ‘훈정(訓政)’을 끝내고 정치민주화를 실현한다. 인민들이 모든 민주국가의 인민들이 향유하는 민주, 자유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승인한다. 당파의 평등하고 합법적 지위인정, 스파이기관 소멸, 정치범 석방, 적극적으로 지방자치를 시행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한다” 등에 합의했다. 주요 미합의 사항은 핵심사항이었던 해방구 문제, 국민대회 문제, 중공 군대재편 문제 등이었다. 충칭회담은 공산당으로서는 국민당 정부가 ‘중공의 지위를 승인’하고 ‘각 당파의 회의, 즉 정치협상’을 따냈다는 데 그런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10월 11일 옌안으로 돌아갔다.

232) 毛澤東在重慶談判的歷史瞬間   時政頻道  新華網
233)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中央文獻出版社

----------------------------------------------------------------------------------------------------------------------------------

 

110. 마오의 시 두고  벌어진 '필전' … "이것은 시일 뿐"

 

 

마오쩌둥은 충칭에 체류하면서 숱한 화재를 뿌렸다. 숙적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충칭에서 처음 만났고, 첫 악수를 나눴다. 장제스가 마오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의 충칭행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장제스가 충칭에서 마오를 죽이려했다면 식은 죽 먹기였다. 실제로 이후 드러난 자료에 따르면 국민당 비밀정보기구(軍統 군통) 총책 다이리(戴笠 대립)가 마오 암살을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안전을 위해 보디가드처럼 마오를 그림자 경호를 했다. 마오가 음식을 먹기 전에 으레 저우가 먼저 시식했다. 마오가 충칭에 도착한 첫날, 장제스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린웬(林園 임원)에서 마오와 대표단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주인인 장제스가 먼저 마오의 건강을 축원하는 건배를 시작으로 미국대사 헐리, 워더마이어와 국민당 고위 관계자 샤오리즈(邵力子 소력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건배를 제의하며 잔을 부딪쳐 마오는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주량이 보통이어서 자신이 마오의 술을 거의 받아 마셨다. 3순배로 술을 마셨는데 마오가 쌩쌩하고, 많은 술을 마신 저우언라이도 여전히 팔팔한 모습으로 담소를 나눴다. 자리에 있던 장제스와 내빈들이 저우의 마오 챙기기에 감복했다고 한다. (주석 234)

 

장제스의 일기에 이런 글이 보인다. 장제스는 마오가 담배중독이 심하다고 들었다고 한다. 장제스는  마오가 하루에 혼자서 늘 50여 개피의 담배를 피워 손에서 담배가 떠날 새가 없었다고 보고를 받았다. 마오가 충칭에 온 뒤 장제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장제스와의 8시간의 회담 때 한 개피의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유명한 골초인 마오가 상대방을 배려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실을 예리하게 관찰한 장제스가 마오의 강인한 의지력에 감탄했다는 느낌을 일기에 쓴 것이다.

 

마오는 회담기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국내외 각계인사들을 광범위하게 접촉했다. 민주인사를 비롯한 각 당파, 문화계, 여성계, 외국 대사 등 각계각층과 외국기자들의 취재에 응하는 등 ‘협상테이블’ 밖에서 ‘적비(赤匪; 붉은 비적)’로 일그러진 공산당의 이미지를 바로잡고 지지를 얻는데도 힘을 쏟았다. 마오가 만난 유명인사만도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경령), 장란(張瀾 장란), 황옌베이(黃炎培 황염배), 펑위샹(馮玉祥), 궈모뤄(郭沫若 곽말약)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좌, 우, 중도도 가리지 않았다. 마오가 민주당파의 우두머리인 민주동맹 주석 장란을 만났을 때였다. 장란은 “회담은 명명백백하게 장제스의 거짓 연기다. (저우)언라이나 왕뤄페이가 와서 회담하면 됐지, 뤈즈(潤之 윤지; 마오의 자) 선생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가 홍문연(鴻門宴; 항우가 홍문에서 유방을 초대해 연 연회, 즉 상대방을 해치기 위해 마련한 연회)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가 어디에 신의가 있는가! 몇 년 전에 내가 그에게 ‘민주를 실행해야 만이 중국에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장제스) 나에게 ‘단지 공산당만이 민주실행을 말 한다’고 했다. 현재 국내외 정세가 바뀌니까, 장제스도 ‘민주’를 외치며 ‘민주가 왔다!’고 한다”며 장제스를 비판했다. 마오는 해학적인 말투로 “민주가 장제스에게 유행 필수품이 됐다. 그는 가짜 민주 연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의 가짜 연기에 맞서 진짜 연기를 하러왔다. 전국 인민들이 관중이 되어 진짜와 가짜를 보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낼 것이다. 이번 연기는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마오가 충칭에서 각계 인사들과의 교류 중 생긴 일의 백미는 마오의 시 ‘심원춘-설(沁園春-雪)’을 둘러 싼 ‘필전(筆戰)’이었다. 장제스는 어느 날 국민당 선전부 부부장 천부레이(陳布雷 진포뢰)에게 마오가 쓴 시 ‘심원춘-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마오의 ‘제왕사상(帝王思想)’이 괴이쩍다고 지탄했다. 장제스는 “내가 보기에 이 시는 제왕사상을 읊은 내용이다. 마오가 복고적 생각을 갖고 당태종 이세민과 송나라 태조 조광윤을 흉내내며 자칭 패왕으로 군림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천부레이에게 빨리 사람들을 조직해서 마오쩌둥의 시가 담고 있는 제왕사상을 비판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전국의 인민들이 마오쩌둥이 평화를 위해 충칭에 오는 게 아니라 군림하러 온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 ‘필전’은 회담 중에는 벌어지지 않았다. (주석 235)

‘심원춘-설’은 마오쩌둥이 1936년 1월 26일 군대를 직접 이끌고 황허(黃河 황하)를 건너 화베이(華北 화북)전선에서 대일(對日)작전을 준비할 때 일어났다. 부대는 2월 5일 새벽에 싼시성(陝西省 섬서성) 칭지옌(淸澗 청간)현 위안자거우(袁家溝)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함박눈이 며칠 동안 계속 내렸다. 웅혼한 장관의 북국의 설경(雪景)이 마오쩌둥의 시흥(詩興)을 촉발시켰다. 마오쩌둥은 2월 7일 산하(山河)의 장려한 모습을 시상을 가다듬어  일필휘지하며 시를 지었다.

 

“북국의 풍광, 천리 곳곳이 얼음에 잠겼고, 만리 아득히 눈발이 휘날린다. 장성의 안팎을 바라보니, 오로지 흰 눈이 끝없이 펼쳐진다, 도도히 흐르는 황하 잠시 멈춰 섰구나. 산은 은빛 뱀이 춤추는 듯하고, 평원은 밀랍색 코끼리가 치닫는 것처럼, 하늘과 높이를 다투려 하네. 맑게 개인 날 대지는 흰옷에 붉은 단장, 황홀함을 더한다.

강산이 이처럼 무척 아름답구나, 무수한 영웅들이 끝내 허리를 굽혀 굽신거리고. 안타깝도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용맹스러우나 문학적 재능이 없고, 당태종과 송태조는 시부(詩賦)에 부족하고. 일대 영걸 징키스칸은 독수리 사냥을 하느라 큰 활만 당겼네. 모든 것이 흘러갔으니, 진정한 풍류인물은 이 시대에서나 볼 수 있구나. 

 

北國風光, 千里氷封, 萬里雪飄. 望長城內外, 惟余莽莽, 大河上下, 頓失滔滔. 山舞銀蛇, 原馳蠟象, 欲與天公試比高. 須晴日 看紅粧素裏, 分外妖嬈.

江山如此多嬌, 引無數英雄竟折腰. 惜秦皇漢武略輸文采, 唐宗宋祖稍遜風騷. 一代天驕, 成吉思汗只識彎弓射大雕. 俱往矣, 數風流人物, 還看今朝.“

 

 

1948년 경의 마오쩌둥 / 류야즈

 

마오가 충칭에 도착한 뒤 사흘 째 되는 날 옛 친구 류야즈(柳亞子)를 만났다. 류야즈는 일찍이 쑨원을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했었다. 제1차 국공합작시기에 마오와 함께 잠시 일하면서 알게 됐다. 두 사람은 시를 좋아해 다른 사람들 보다 친밀해지면서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 이후 둘은 헤어졌다가 마오가 충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류야즈가 10월 2일 마오가 묵고 있던 구이웬(桂園)으로 찾아와 19년 만의 해후를 했다. 마오는 류야즈를 남송(南宋) 때의 애국시인 천량(陳亮 진량), 루여우(陸游 육유)와 비교하며, 류야즈의 시는 정의감으로 기개가 있고 애국사상을 고취해 천량이나 루여우 보다 낫다고 높이 평가했다.

 

류야즈는 마오가 충칭회담에 참석한데 대해 “깊은 호랑이 굴(虎穴)을 찾아 온 대범한 큰 용기는 인민들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다”며 마오 의 통 큰 결단을 찬양했다. 류야즈는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시 한수를 지어 마오에게 건네면서 부시(賦詩) 한 수를 청했다. 마오는 때가 때인지라 시를 짓는 대신 자신이 9년 전에 지은 ‘심원춘-설’의 부시를 주었다. 류야즈는 시를 읽은 뒤 “중국에 사(詞; 송나라 때 성행한 시체‘詩體’로 노랫가락에 따라 바뀌며 일반적으로 상, 하 양결로 나누어짐)가 도입된 이래 가장 좋은 시다. 소식(蘇軾 소식; 당송8대가 중 한사람), 신기질(辛棄疾)이 겨룰 수 없다. 하물며 나야?”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류야즈는 ‘심원춘-설’에서 운을 따와 마오의 시운에 따라 지은 ‘화사(和詞)’를 11월 11일 충칭에 있는 중공의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에 실었다. 이 시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크게 일면서 사람들은 마오가 쓴 ‘원작’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석간 ‘신민보(新民報)’ 편집부국장 우주광(吳祖光)이 원작과 다소 다른 필사본을 구해 신문에 ‘심원춘-설’의 시를 실었다. 이어 ‘대공보(大公報)’가 28일 마오의 시와 류야즈의 ‘화사’를 게재하면서 각 신문마다 ‘심원춘-설’에서 차운한 시를 지어 쓴 유명 인사들의 시와 평론을 다투어 실었다.

 

마오의 시를 실어 국민당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신민보 우주광의 아버지인 유명한 고고학자 우징저우(吳景洲)도 차운한 ‘화사’인 ‘심원춘-영우(咏霧)’시를 신만보에 실으면서 ‘심원춘-설’과 관련한 ‘화사’와 비평 글이 20여 편 쏟아져 나왔다. 작자(作者)들은 국민당이나 공산당, 보수 묵객, 진보 문인, 중간 그룹의 인사 등 다양했다. 입장차이도 극명해 찬양과 비판으로 엇갈려 필전(筆戰)으로 발전해 난타전을 벌였다. 언론계도 양쪽으로 갈렸다.

 

‘심원춘-설’을 봉건적이고 제왕사상의 패권적 속내를 담고 있다고 공격하는 쪽은 친 국민당계의 ‘중앙일보’, ‘평화일보(원 소탕보)’, ‘익세보’ 등이고, 찬양하는 쪽은 친 공산당계의 ‘신화일보’, ‘민주주간’, ‘객관’ 잡지 등이었다. 독립적 민영신문 ‘대공보’는 양쪽의 입장을 게재해 필전을 확대시켰다. 주인 없는 객들의 ‘필전(筆戰)’은 산성 도시 충칭을 뜨겁게 달구었다가 세밑이 되면서 시나브로 사라졌다.

 

류야즈는 논란을 빚은 ‘심원춘-설’ 마지막 구절 ‘俱往矣, 數風流人物, 還看今朝 구왕의, 수풍류인물, 환간금조’의 풀이에 대해 “백성을 수탈하는 독재 전제정치의 시대는 이미 수명을 다해 종말을 고했고, 인민의 세기가 시작됐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마오는 몇 년 뒤 이 시에 대한 주해(注解)를 달면서 “눈(雪)은 반봉건주의, 2천년 동안의 봉건주의에 대한 반동적 측면을 비판한 뜻을 담고 있다. 문채, 풍소, 대조의 단어는 시를 쓰기 위해 사용했다. 이것은 시를 짓는 일이다! 어떤 사람을 매도하기 위해 쓸 수 있겠는가? 다른 해석은 틀렸다. 마지막 3구는 무산계급을 지칭한 것이다”라고 했다.   

234) 重慶談判蔣介石是否眞想趁起殺掉毛澤東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在重慶談判的歷史瞬間  時政頻道  新華網
235) 重慶和談前, 蔣介石企圖指斥毛澤東帝王思想攪亂時局   安立志(文史學者)  人民網

-----------------------------------------------------------------------------------------------------------------

 

 

111. 동북 지역 확보 위한 각축전…짙게 드리운 내전의 그림자

 

 

충칭회담이 열리고 있는 동안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일본군 항복접수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맞섰다. 두 당의 군대는 소련군이 점령한 동북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미국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북부지역의 일본군 항복접수를 종용하자 8월 12일 8로군에게는 ‘원지 대기명령’을 내린 대신 자신의 직계부대에 대해서는 항복접수를 받도록 해 국지적 충돌을 빚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호시탐탐 소련군 철수에 대비해 ‘무주공산’인 동북지역에 대한 확보전략을 짜고 있었다. 

공산당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중공은 1945년 9월 ‘북부를 확대하고, 남부를 방어하는(向北發展 向南防御)’ 전략적 배치를 결정했다. 당 중앙은 “동북과 러허(熱河 열하), 차하얼(察哈爾) 두 성(지금은 허베이성과 내몽고에 포함됨)을 장악하고, 전국 각 해방구 및 전국의 인민들과 협력투쟁을 벌이면  중국 인민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중공이 남방 근거지를 버리더라도 부대를 북쪽으로 집중 배치해 동북의 관문인 러허와 차하얼 두 성과 동북을 지배하겠다는 의도였다. (주석 236)

 

동북지역은 땅이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해 중국 제1의 중공업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게다가 교통이 편리해 전략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100만 소련 홍군은 8월 9일 미영소 3국이 1945년 7월 일본의 항복을 촉구한 포츠담선언에 따라 동북지역과 러허, 차하얼 두 성에 물밀듯이 진공해 일본 관동군을 쓸어버렸다. 

소련군은 8월 22일 동북 전역을 점령해 관리하고 있었다. 국공 양당 모두 동북장악을 좌우할 전략의 성패관건은 누가 먼저 동북에 근거지를 마련해 화베이, 화중을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갈수록 싸움은 가열되었다. 소련군은 철수를 앞두고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노획한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8로군에게 넘겼다. 이때 미군도 국민당이 동북을 지배할 수 있도록 국민당 병력을 비행기로 대거 동북지역에 이동시켰다. 미군은 또 9월에 잇따라 동해안 탕구(塘沽 당고), 친황다오(秦皇島 진황도) 등지에 상륙했다. 

소련은 동북지역이 미국의 세력범위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소련은 중공에게 러허, 차하얼 두성을 넘겨 국민당의 동북지배를 견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중소조약의 제약으로 중국내전에 말려들 경우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해 곤혹스러워 했다. 소련은 어쩔 수 없이 철수 5일을 앞두고 국민당 군대가 선양(沈陽 심양), 창춘(長春 장춘) 등 동북의 각 대도시에 비행기로 병력이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소련의 동북지역 점령 당시 이 지역은 국민당 부대가 전무했다. 공산당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용해 간부와 군대를 대거 동북에 파견해 광대한 향촌과 중소도시, 교통선을 장악하도록 했다. 제일 먼저 저우바오중(周保中 주보중)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교대가 동북에 들어갔다. 이어 ‘지러랴오(冀熱遼 기열료; 허베이-열하-요령지역)’ 사령관 겸 정치위원 리윈창(李運昌 이운창), ‘진수이(晉綏 진수; 산시-수이원지역)’ 사령관 뤼정차오(呂正操 여정조) 등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동북에 진입했다. 중공은 ‘북부를 확대하고 남부를 방어하는’ 전략에 따라 10만여 명의 주력군을 이동 배치해 러허, 차하얼 두 성을 장악하면서 동북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중공은 펑전(彭眞 팽진)을 서기로 하는 동북국(東北局)을 창설했다. 중공은 11월 초 동북 인민자치군(나중에 동북민주연군)을 만들어 린뱌오(林彪 임표)를 사령관, 펑전, 뤄룽환(羅榮桓 나영환)을 각각 제1, 제2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11월 말에 중공의 각 해방구와 옌안에서 차출한 2만 명의 당정(黨政) 간부와 11만 명의 병력을 동북지역에 배치, 완료했다. 마오는 이런 8로군의 동북행군을 ‘또 하나의 수 천리 장정(長征)'이라고 명명했다.

 

1947년 하얼빈에서 뤼정차오·가오강·천윈·장원톈 등이 참석한 가운데 린뱌오(가운데)가 동북국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중공은 10월 초부터 핑한(平漢 평한), 핑수이(平綏 평수), 진푸(津浦 진포), 통푸(同浦 동포) 등 4개 간선철도를 중심으로 해방구 자위 반격작전의 방어를 굳건하게 구축했다. ‘산시-차하얼-허베이’, ‘산시-수이웬’ 해방구는 수이웬(綏遠 수원) 전투에서 국민당군 12000명을 전멸시켰다. 또 한단(邯鄲) 전투에서는 20000여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과 소련의 협조를 받아 9월까지 러허와 동북지역에 14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중소조약에 따라 동북지역의 도시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국민당군은 11월부터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 잉커우(營口 영구), 번시(本溪 본계)를 점령하고, 창춘, 선양, 하얼빈 3개 대도시를 접수했다.

 

이처럼 국민당군이 기세등등하게 대규모의 병력을 동북에 배치하자 중공은 대도시에서 철수해 넓은 농촌과 중소도시로 근거지를 옮겨 방어하기로 종전의 방침을 바꿨다. 중공중앙은 12월 28일 동북국에 하달한 '동북근거지의 공고한 건립'에 관한 지시에서 "현재 동북지역의 임무는 근거지를 건립하는 것이다. 동 만주, 북 만주, 서 만주에 군사정치 근거지의 기초를 공고히 다져 광대한 인민 군중을 발동해 장기적인 힘든 투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지킬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11월 8일부터 26일 까지 충칭에서 열린 국민당 고급 장령회의에서 장제스는 "근 1개월 동안에 우리군은 많은 전략요지를 수복하고, 많은 간선철로를 장악했다. 이런 속도에 비춰볼 때 우리는 3개월이나 반년 안에 공산당을 소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내전을 부추기는 발언은 인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청년학생, 민주당파와 사회 각계인사들은 국민당에게 '쌍십협정' 준수와 내전중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 1946년 여름 한낮에 쿤밍(昆明)대로에서 내전반대와 평화, 민주를 요구하던 대학교수 원이둬(聞一多 문일다)가 국민당 정부에 의해 살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 학생시위가 번지면서 내전 반대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미국은 트루만이 1945년 중순 사망한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투르만은 전 주중대사 헐리 대신 전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샬을 중국 특사로 임명해 양당의 정전을 중재하고, 충칭협약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했다. 마샬이 11월에 중국에 온 날, 트루만은 '미국의 중국정책 성명'을 내어 "국공이 즉각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주요 정당대표가 참가하는 국민대회를 열어 평화적인 협상방법을 통한 장제스 영도하의 중국통일"을 호소했다. 미국은 한쪽으론 국공분쟁을 중재하고, 또 한쪽으론 국민당 정권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란 것을 승인한 것이다. 이런 정책은 되레 국민당을 고무해 장제스에게 평화적 해결보다는 무력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부추기는 꼴이 됐다.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중국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주석 237)

 

1946년 1월 5일, 마샬의 제안에 따라 국민당정부 대표 장췬(張群; 나중에 장즈중으로 바뀜),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 미국정부 대표 마샬 등으로 정전협상을 위한 '3인 소조'를 만들었다. 1월 10일, 미국의 중재아래 국공 쌍방대표가 '정전협정'에 조인해 13일 밤 12시부터 효력이 발생하도록 했다. '3인 소조'는 이런 휴전명령을 집행하고 합의사항 이행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실무조직인 '군사중재 집행부'를 만들어 베이핑(北平 북평; 나중에 베이징으로 바뀜)에 상주하도록 했다. 

이 '집행부 3인소조'는 국민당 군령부 제2청 청장 정졔민(鄭介民), 공산당 제18집단군(8로군) 참모장 예졘잉(葉劍英), 미국 월터 로버트슨으로 구성됐다. 마샬 등 3인소조는 각지를 시찰한 뒤 3월에 옌안에 왔다. 마샬은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중공군대가 청더(承德 승덕), 츠펑(赤峰 적봉), 둬뤈(多倫 다륜)에서 철수한다면 장제스를 설득해 내전을 막을 수 있도록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장제스는 진공할 것"이라며 마오의 양보를 종용했다. 

이들 지역은 공산당이 이끄는 허베이, 동북 해방구와 연계된 중요 근거지였다. 이곳을 양보하면 동북과 허베이의 전략적 연계가 끊어져 동북 해방구가 고립무원에 빠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동북을 독식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마오는 "절대 안 된다. 이것은 장제스의 백일몽이다"라며 강력 반발해 마샬의 중재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이처럼 3개월 동안 계속된 국공간의 국지적인 내전은 일단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멈췄다. 오랜 동안 전란에 시달렸던 인민들에게 반짝 평화국면이 찾아왔다. 마오를 비롯한 중공중앙은 “지금부터 중국은 곧바로 평화민주 건설의 신단계로 접어들었다”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당일 충칭에서 각 당파가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가한 대표는 국민당, 공산당, 중국청년당, 중국민주동맹, 무당파 인사 등 모두 38명이었다. 중공 대표는 저우언라이,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왕뤄페이(王若飛 왕약비), 예졘잉(나중에 보구), 우위장(吳玉章 오옥장), 루딩이(陸定一 육정일), 덩잉차오(鄧潁超 등영초) 등 7명이었다.

 

4차례에 걸친 정치협상 회의는 정부개조, 시정강령, 군사문제, 국민대회, 헌법초안 등 5개 부문으로 나눠 기초방안을 마련했다. 쟁점은 '국가 민주화'와 '군대의 국가화' 문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정치협상회의는 최종적으로 정부조직안, 국민대회안, 평화건국방안, 군사문제안, 헌법초안 등 5개항의 협의안을 작성해 통과시켰다. 

1월 31일 폐막한 22일간의 정치협상회의는 중국정치의 앞날을 밝히는 전망을 제시한 듯 했다. 회의 결과는 실질적으로 국민당 일당독재와 개인독재의 정치제도와 반 인민정책에 대한 도전과 내전의 부정이었다. 중공이 주장한 신민주주의 강령이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전국 인민들이 갈망하는 평화와 민주에 대한 바람이 담겨있었다. 저우언라이는 폐막식 치사에서 "정치협상 회의가 통과한 각항의 결의는 회의의 큰 성공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만족을 표시했다. (주석 238)

 

중공중앙은 정치협상 기간의 평화무드에 한껏 고취돼 전국의 평화국면 이후를 진지하게 준비하는 한편, 심지어 옌안에서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화이인(淮陰 회음)으로 당 기관을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왕수정(王樹增 왕수증)의 '해방전쟁'에 따르면 정치협상회의가 폐막되기 직전 옌안에 돌아온 저우언라이의 협상진행 과정을 들은 영도자들은 앞날에 대해 매우 낙관적 태도를 보였다.
 
당 중앙은 앞으로 연합정부에 참가할 영도자로 마오쩌둥, 주더, 린보취(林伯渠 임백거), 우위장, 류샤오치, 장원톈, 저우언라이 등 7명을 인선했다. 또 편벽한 옌안을 떠나 풍요로운 장쑤 화이인으로 중공기관을 옮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마오쩌둥 연보에는 "2월 2일 중공중앙이 천이에게 전보를 보내 화중 근거지를 공고히 하라고 지시하며 중앙기관을 앞으로 화이인으로 옮길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앞날에 대한 낙관적 기대는 3월에 접어들면서 비관적 전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3월에 2중전회를 소집해 먼저 정치협상에서 통과시킨 헌법개정 원칙과 정부조직의 협의를 뒤집어버렸다. 국민당은 또 국민참정 4기2차회의를 열어 정치협상에서 결의한 협의안을 완전 부정해 버렸다. 반짝했던 평화국면의 햇살은 내전을 머금은 짙은 먹구름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국공 양당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 동북지역에서 약여하게 드러났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 철수를 미루다가 1946년 2월 26일 철군령을 발표했다. 3월 15일부터 선양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휴전 기간이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3인소조는 동북의 정전협정 체결을 위해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3월 하순 '동북정전 중재협의'를 달성했다. 하지만 협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국민당에게는 아무런 기속력이 없었다. 미국은 여전히 국민당을 지원해 동북에 병력수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은 이런 틈을 타 창춘, 하얼빈을 점령해 동북지역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5월 초에 소련군은 다롄(大連 대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런 과정에서 동북지역이 마침내 대규모의 내전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국민당군은 공산당군을 계속 몰아쳐 스핑(四平 사평), 창춘, 융지(永吉 영길; 지금의 지린) 등 도시를 점령했다. 공산당군은 하얼빈으로 퇴각해 만주 북부지역 전역을 차지했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마샬은 6월 6일부터 동북지역 정전협정을 달성하기 위해 21일 까지 15일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휴전기간을 6월 30일까지 연장했다.

236) 解放戰爭中共爲何決定放棄南方   周明杰  原國防大學黨史黨建政工敎硏室敎授  北京晩報  人民網
237)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38)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12. 미국 장제스 노골적 지원, 몸 피하는 마오의 눈물

 

 

마샬이 중재한 정전회담이 기신기신 힘겹게 진행되던 6월에 미국 국무성이 '중국(장제스)을 지원하는 군사법안(軍事援華法案 군사원화법안)'을 미 상원에 제출했다. 미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장제스 정부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공개화 한 것이다. 마오는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6월 22일 옌안 중공중앙 강당에서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장중한 목소리를 실어 성명을 읽어갔다. (주석 239)

 

"미국 정부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이 중국 국민당 내전중지 선포와 중국문제 약속의 코뮤니케 이행을 선포하고, 아울러 중국 정치협상회의 국가민주화 결의의 전제조건에 관해 이행을 약속했다. 중국공산당은 미국이 중국(장제스 정부)에 모종의 군사원조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전제는 모두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미국의 이른바 군사원조 실행은 실제적으로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이다. 이것은 (미국이)국민당 독재정부를 강력 지지해 중국이 계속 내전, 분열, 혼란, 공포와 빈곤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성명은 전국 각계에서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짙게 드리운 내전의 음영(陰影)은 걷어내지 못했다. 

국민당은 휴전중인 6월 26일 돌연 정치협상결의와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중공 중원(中原)해방구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3년 동안 벌어질 전국적 내전(內戰)을 알리는 총성이 전 중국을 뒤흔들었다.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군의 총병력은 430만 명으로 육군 200만 명, 특수부대원 36만 명, 비정규부대 74만 명, 공군 16만 명, 해군 3만 명, 후방 기관요원 등 101만 명이었다. 중공부대의 총병력은 127만 명이며, 그 중 야전부대 병력 61만 명, 지방부대 병력 66만 명이었다. 공군과 해군은 아예 없었다. 

공산당 군대는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와 장비는 국민당군에 엄청난 열세를 보여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는 8월 마오쩌둥이 옌안 자오웬(棗園 조원)에서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토롱과의 회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오는 "모든 반동파는 도두 종이호랑이(紙老虎 지노호)이다. 장제스와 그를 지지하는 미국 반동파도 모두 종이호랑이다. 인민해방군(1946년 6월 공산당군의 호칭으로 바꿨음)의 좁쌀과 보병총이 장제스의 비행기와 탱크보다 강하다"라고 호언했다.

 

이처럼 현격한 병력과 무기, 장비의 열세를 딛고 어떻게 싸워야 하나. 전투 지휘관들은 전략과 전술개발에 머리를 싸맸다. 1947년 7월, '진지루위(晉冀魯豫 진기로예; 산시-허베이-산둥-허난지역)' 야전군 제4종대 사령관 천겅(陳賡 진갱)은 주력을 집중해 적을 섬멸하는 작전방법을 창안해 냈다. 마오는 전군이 이 전투방법을 학습하도록 했다. 마오는 "매번 화력을 집중해 적과 전투를 벌일 때 그 비율은 3대1의 우세를 점유하도록 하는 게 좋다.  가장 좋은 비율은 4대1이다. 이런 화력집중으로 적을 각개격파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마오는 1947년 말 1년여의 전투경험을 기초로 한 총결에서 '10대 군사원칙'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역시 운동전(運動戰)이었다. 일성일지(一城一地)의 득실을 따지지 말고 적의 역량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 우세병력을 집중해 각개로 적을 격파하는 방안이었다.

 

국민당군은 20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화베이와 화중 등 중국전역의 공산당 근거지로 밀고 들어가 인민해방군을 화중평원과 창장(長江 장강) 하류지역에서 몰아냈다. 8월에는 러허 해방구의 중심인 청더(承德 승덕)를, 10월에는 '진지차(晉冀察 진기찰; 산시-허베이-차하얼지역)' 해방구의 중심인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를, 1947년 1월 산둥 남부 해방구 중심지역인 린이(臨沂 임기)를 점령했다. 

1947년 초, 국민당군은 25만 명의 병력이 중공의 ‘싼간닝(陝西-甘肅-寧夏 싼시-간쑤-닝샤지역)’ 변계지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국민당군 서북군 사령관 후종난(胡宗南 호종남)은 3월 13일 1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홍색수도’ 옌안 공격에 나섰다. 이때 인민해방군 서북야전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통솔하고 있는 병력은 고작 2만 7천명에 불과했다. 옌안은 공산당의 장정이후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심장부인데다 중공중앙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있어 정치적 상징적의미가 컸다. (주석 240)

 

중공중앙은 후종난이 옌안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 배치를 하기 전에 이미 침공사실을 알고 사전에 대비해왔다. 후종난의 기밀비서로 있는 중공의 잠복 정보요원 슝샹후이(熊向暉 웅향휘)가 3월 초 저우언라이에게 옌안침공 사실을 보고했다. 공격 디데이는 3월 13일, 병력은 14만 명의 15개 여단, 군대 위치와 공중엄호 상황 등이었다. 1919년생인 슝샹후이는 칭화대(淸華大)를 졸업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발탁돼 항일전쟁이 터졌을 때 우한(武漢) 전지(戰地)복무단에 참가해 후종난의 부대에 들어갔다. 

 

  후종난, 마오저둥과 저우언라이


슝샹후이는 오랫동안 후종난의 부관과 기밀비서를 하면서 깊은 신임을 얻어 후종난 군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꿰고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일찍이 후종난 진영에 심어 놓은 ‘장기잠복 스파이’였다. 후종난은 항일전쟁이 끝났을 때 슝샹후이를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가 옌안 공격을 앞두고 불러들여 이 작전에 참여시켰다. 후종난은 옌안을 점령한 뒤 그를 1947년 7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보냈다.

 

슝샹후이는 신중국 건국 후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 1949년 겨울 저우언라이가 원래의 국민당 인사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을 때 공산당에 합류한 장즈중(張治中 장치중)이 슝샹후이를 보고 “슝 동생이 아닌가? 당신도 기의(起義)를 했는가?”라고 물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앙천대소하며 “슝샹후이는 ‘기의’를 한 게 아니라 ‘귀대’를 했다. 오늘 내가 여러분들에게 비밀 하나를 공개하겠다. 슝샹후이는 1936년에 입당한 공산당원이다. 우리가 후종난 안에 심어 놓은-.” 참석자들은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훗날 “슝샹후이 한 사람이 능히 몇 개 사단과  맞먹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은 전략적 철수를 결정하고 3월 8일부터 옌안에서 주민을 피난시키는 한편,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형세가 매우 엄중한 상황인데도 주민 소개와 철수가 질서정연하게 이뤄져 옌안성은 별다른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으로 옌안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텅텅 빈  빈성(空城)으로 변해버렸다.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후종난 부대의 상황을 지켜본 뒤 마지막으로 옌안을 떠나겠다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마음이 급했다. 펑더화이는 3월 18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경호 참모 룽페이후(龍飛虎)와 경호소대장 옌창린(閻長林 염장림)이 거주하는 집을 찾아갔다. 펑더화이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241)

“적들이 이미 가까이 왔다. 중앙은 옌안 철수를 결정했다. 현재 전당, 전군과 전국의 인민들은 마오 주석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 많은 동지들은 마오 주석이 빨리 허둥(河東 하동)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다. 헌데 주석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싼베이에 머물면서 작전을 지휘하려고 한다. 마오 주석의 안전을 보위하는 전사로서 영광된 임무를 꼭 완성해야 한다.”

 

펑더화이는 “주석은 개인의 안위를 보살피지 않는다. 우리당이 보살피고, 당신들이 챙겨야 한다! 주석의 성질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는 들것에 실어 (강제로)데려가야 한다. 그래야만이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해가  서산에 걸려있을 때 후종난 군이 7리 남짓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 왔다. 동남쪽에서 총소리가 콩볶듯이 자지러졌다. 이때 마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저우언라이, 허둥에서 온 2종대 사령관 왕전(王震 왕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 온 펑더화이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면서 경호원들에게 큰소리로 질책했다.

 

“어떻게 주석이 아직도 떠나지 않으셨냐? 빨리 모시고 가라. 1분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경호 참모 룽페이후는 펑더화이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형세가 급박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마오에게 보고를 생략한 채 “주석, 펑쫑(펑더화이)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빨리 출발하자”고 서둘렀다. 대화를 나누던 왕전도 “주석,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빨리 떠납시다”라고 거들었다. 저우언라이도 “적들이 이미 가까이 왔어요. 떠나자”라고 재촉했다. 마오는 문밖에서 펑더화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자에 앉으며 경호원에게 물었다.

 

“기관은 모두 철수를 완료했는가?”
“벌써 철수를 끝냈습니다.”
“인민들은?”
“마지막 사람들이 2시간 전에 떠났습니다.”
“응.”

 

마오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가볍게 대답한 뒤 “됐다. 식사하자!”라고 했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저우언라이가 펑더화이를 불렀다. 펑더화이가 문안으로 들어오다 마오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주석. 어떻게 아직도 가지 않았습니까? 개자식들의 졸개 놈들 봐서 뭐 좋을 게 있다고! 가요, 가. 내가 주석대신 보리다. 1분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가십쇼, 빨리.”

 

마오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펑더화이가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일어나면서 감개한 마음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아무 말 없이 동굴집(窯洞 요동)을 나왔다. 이미 모색(暮色)이 창연했다. 주위의 산이 석양(夕陽)의 노을로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났다. 늦은 봄날의 한기가 몸으로 파고들었다. 마오는 홀로서서 옌허(延河 연하) 강변 토산에 우뚝 솟은 바오타(寶塔 보탑)를 그리운 듯 눈 여겨 보고, 10년 동안의 생활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옌안 고성(古城)의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었다. 

 

“너희들은 가고 싶나?”라며 울컥한 마음으로 마오가 물었다. 이 말에 곁에 있던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나는 실제로 가고 싶지 않다. 원래 이곳에서 후종난 부대들이 하는 짓거리를 볼 요량이었는데 펑 라오쫑(펑더화이 애칭)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무어라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구만!”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오는 “동지들! 차에 오릅시다. 우리들은 또 돌아올 것이오!”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왕전은 짙은 하늘색 미식 지프를 타고 왕자핑(王家坪 왕가평)을 떠나 옌허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바오타산 맞은편에 있는 칭량산(淸凉山 청량산) 산자락을 돌아 셴양(咸陽 함양), 위린(楡林 유림) 도로를 따라 동북방향으로 질풍같이 달렸다. 차가 마오(峁 묘) 이북으로 방향을 틀 때 길가에 옌안에서 피난 가는 군중들의 행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에 짐 보따리를 걸머멘 사람, 솥과 주발, 바가지, 국자 등 살림살이를 지고 가는 사람, 돼지와 양을 몰고 가는 사람, 작은 당나귀를 끌고 가는 사람, 어떤 부인네는 등에 물레를 메고 가고, 어떤 할머니는 늙은 암탉을 가슴에 품고 걸어가고 있었다. 

민병들이 무기를 들고 이들을 호위경계하며 행군하고 있었다. 남부여대한 남녀노소들이 길고 긴 난잡하고 무질서한 무리를 이루며 술렁거리며 걸어 누가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오는 침울한 모습으로 문득문득 차창 밖 장사진의 피난행렬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239) 秘密何在? 共産黨爲什嗎能3年戰生國民黨   中國共産黨新聞網 
240) 解密1947年 胡宗南攻占延安   大轉折-決定中國命運的700天  鄧賢 著  湖南人民出版社  理論頻道  新華網
241)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13. 쫓기는 공산당, 당 중앙 셋으로 나누고 '결전 준비'

 

 

옌안을 점령한 후종난 군은 마오 등 중앙 영도자들의 행방추적에 혈안이 되었다. 마오의 행방은 국내외 최대의 관심사가 됐다. 후종난 군지휘부는 중앙기관이 철수한 방향과 대체로 일치하는 지역에 수시로 비행기를 띄워 수색하면서 폭격을 퍼부었다. 후종난은 “일단 목표를 발견하면 자동차나 대오, 가옥을 가리지 말고 즉시 철저하게 공격해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오의 철수대오가 류자취(劉家渠 유가거)의 조그만 마을에 머물 때였다. 철수  차량 위를 수수깡과 풀 더미로 위장해 언뜻 보면 오래된 풀 가리처럼 보였다. 산등성이에서 떠오른 봄날의 태양이 산골 곳곳에 햇빛을 골고루 뿌리고 있었다. 이 햇빛이 차량을 위장한 풀 가리 틈을 비집고 들어가 차안에 있던 거울과 조우했다. 순간 반사광선이 생겨났다. 허공에 뜬 반사광선은 곧 이상한 물체가 있다는 신호로 목표물이 됐다. 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양각관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공중에서 수색을 하던 국민당군 비행조종사들은 이내 눈치 챘다. 두 대의 비행기가 급강하하면서 마을과 행인, 풀 가리와 움집을 가리지 않고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반복적으로 기총소사도 했다. 폭격이 끝난 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됐다. 마오 철수대오의 차량 몇 대도 부서졌다. 마오가 탔던 지프 역시 여러 곳이 탄흔으로 얼룩졌다. 중형폭탄을 터뜨렸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마오는 움집(窯洞 요동)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움집의 문틀을 사격해 물 항아리가 깨져 졸지에 물바다가 됐다. 저우언라이는 화급히 마오가 쉬고 있는 움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우는 마오가 안전한 것을 알고 경호대에게 즉시 출발하도록 지시했다. 폭탄을 장재한 비행기가 두 번째 공격을 하려고 왔을 땐 마을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였다.

 

3월 25일, 싼베이(陝北 섬북) 칭화비옌(靑化砭 청화폄)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마오가 와야바오(瓦窯堡 와요보) 왕자핑(王家坪)에 도착해 ‘5대 서기(五大書記)’가 모두 만났다. 이때 중공 영도기구의 중앙서기처는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5명의 최고 영도자를 ‘5대 서기’라고 불렀다. 이들의 업무분장은 마오가 총책임자 겸 군사위원회 주석을, 류샤오치는 마오의 조수(助手)로 당무(黨務 당무)를, 저우언라이는 행정, 대외공작, 군대(군사위원회 부주석), 총참모부(대리 총참모부장) 등을 관장했다. 주더는 해방군 총사령관, 런비스는 중앙기관을 책임지고 있었다. (주석 242)


칭화비옌 전투에서 펑더화이가 이끄는 서북야전 병단이 후종난 군 31여단 2900명을 전멸시켰다. 마오는 곧바로 펑더화이와 시중쉰(習仲勛 습중훈; 중국 차기영도자 시진핑의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내 “31여단 주력부대를 전멸시켜 승리한 것을 축하한다. 이 전투는 의미가 크다. 전체 장사병에게 치하하는 마음을 전해주기 바란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오는 이어 27일 허룽, 리징취안(李井泉 이정천)과 펑더화이 쉬중신에게 보낸 전보에서 “중앙이 거느린 수백 명은 싼베이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의 인민과 지세(地勢) 모두 좋고 아주 안전하다. 현재 주요 적은 후종난이다. 이 적을 무찔러 국면을 바꿔야 한다. 적을 쳐부술 수 있다. 펑더화이의 전보에 따르면 이미 31여단(1개 연대 부족)을 섬멸하고 2000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여단장 이하 누구도 탈출하지 못했다. 20만발의 탄약을 노획하고 사기가 충천해 믿음이 높아가고 있다. 새로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후종난 군을 각개격파로 전멸시키자”고 전투의욕을 고취시켰다.

 

당 중앙은 칭화비옌 전투의 승리로 잠시 후종난 군의 진공(進攻)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중앙은 왕자핑에서 4일을 머물렀다. 옌안에서 철수한지 1주일 되는 시점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앙서기처 서열 3위지만 관장하는 공작부문이 가장 많았으며 중요한 업무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조직과 행정(정부), 외사와 외교, 선전과 정보, 그리고 군사위원회 공작과 총참모부의 일이 저우의 업무였다. 쉽게 말하면 마오가 결정한 모든 방침과 노선정책은 저우언라이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실행됐다. 

이때 저우는 49살로 연부역강해 밤샘을 밥먹듯 했다. 사람들은 저우언라이를 흔히 삼국시대의 촉나라 제갈량에 비유했다. 저우언라이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같이 일했고, 적이 되어 숱한 협상을 벌인 장제스는 “4억 인구의 대 국민정부에서 어찌 덕과 재능을 겸비한 저우언라이 같은 인물을 찾을 수 없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재능과 인품, 덕망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다.

 

저우언라이는 후종난에게 쫒기는 이때 당 중앙의 안전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마오의 안전과 지속적인 중국의 해방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당 중앙을 둘로 나누는 것을 심사숙고했다. 즉, 마오쩌둥이 중앙기관을 이끌고 황허를 건너 상대적으로 안전한 ‘진차지(晉察冀 진찰기; 산시-차하얼-허베이지역)’ 해방구로 철수하고, 저우 자신이  싼베이에 남아 투쟁을 하는 방안이었다. 주도면밀한 저우언라이는 우선 다른 서기들의 동의를 받은 뒤 마오에게 이 방안을 제시했다. 

마오는 강력 반대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마오는 짙은 후난지방 발음으로 “나는 절대로 싼베이를 떠나지 않는다. 당 중앙도 싼베이를 떠날 수 없다. 내가 말했듯이 후종난을 쳐부수지 않으면 절대로 싼베이를 떠나지 않는다”고 큰소리로 거부했다. 저우는 그러나 이 일은 당 중앙과 주석의 안전을 도모하고 당의 영도핵심과 혁명사업의 생사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인 만큼 뒤로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양보할 수 없다고 여긴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의견에 굳세게 반대했다. 이 ‘반대’는 저우언라이 일생 중 아주 적은 몇 번 안 되는 마오에 대한 ‘반대’였다고 한다.

 

후종난은 칭화비옌 전투에 패배한 뒤 앙앙불락하며 군세를 다잡아 다시 중공중앙에 대한 추격전에 나섰다. 중앙이 머물고 있는 왕자핑에서 불과 몇 십리 안 떨어진 곳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또 달아나야 했다. 마오는 임시 중앙서기처 회의를 주재해 2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다. 하나는 당 중앙이 싼베이에 남는다는 결정은 불변이다. 하지만 투쟁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중앙영도와 기관 공작인원을 싼베이에서 비교적 안전한 ‘진수이(晉綏 진수; 산시-수이웬지역)’ 해방구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어떤 중앙 영도자가 남고, 떠날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즉시 저우언라이를 진시(晉西 진서; 산시성 서쪽) 북쪽으로 파견해 ‘배치(布置 포치)공작’을 하도록 했다. 저우가 직접 황허 동안의 옌베이(雁北 안북) 지구에 가 ‘부분 철수하는 중앙기관과 공작인원에 대한 안배’를 하도록 했다. 옌베이는 왕자핑에서 수 백리 떨어진 곳으로 첩첩산중인데다 길이 험해 말을 타고 여러 날 달려야 다다를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떠나고 오후엔 중앙기관이 왕자핑을 떠나 칭졘(淸澗)현 자오린저거우(棗林則溝 조림칙구)라는 조그만 마을에 도착해 숙영했다.

 

이 당시 중국공산당은 1934년 홍군 장정 이래 다시 가장 모진 형세를 맞고 있었다. 당 중앙은 옌안을 버리고 전략적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도망가는 신세였다. 중공 영도자들은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쫒기면서 때론 비행기 폭격과 기총소사에 몸을 숨겨야했다. 전국의 형세도 나빠지고 있었다. 황허, 화이허(淮河 회하) 이남의 모든 해방구가 국민당군에 공격을 받아 점령당했다. 

중웬(中原 중원)해방구, 쑤베이(蘇北 소북) 해방구도 압박을 받아 중웬야전군과 화중야전군은 각각 허베이(河北 하북), 산둥 작전지구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북방면은 린뱌오가 지휘하는 민주연군(民主聯軍)이 강력한 공격을 받아 쓰핑(四平 사평), 창춘, 지린 등 대도시를 버리고 빙설(氷雪)이 뒤덮인 북만주지역으로 들어가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이 화베이 전략요충지 장자커우(張家口)를 빼앗긴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는 중공의 '싼간닝', 산시, 허베이 해방구에서 동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통로가 끊기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옌안이 함락당하고 신화방송이 한 때 중단되는 바람에 국민당의 일방적 선전이 판을 쳐 '비적 우두머리 마오쩌둥이 이미 생포됐다', '마오쩌둥이 사살됐다' 등의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전국에 떠돌았다. 중국공산당의 앞날에 대한 비관과 회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국제적으로도 서방 반공국가들은 중국공산당의 파멸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해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도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권고를 듣지 않는 중공영도자들의 고집과 협애한 마음이 중국혁명의 숨통을 끊어놓아 완전히 망쳐놓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후종난 대군은 여러 갈래로 병력을 나눠 당 중앙을 맹추격하고 있었다. 서쪽에는 마홍빈(馬鴻賓), 마부팡(馬步芳 마보방)의 기병이, 북쪽에는 덩바오산(鄧寶珊 등보산) 군이 3면을 포위해 펑더화이 병단과 중공중앙을 와야오바오 일대에서 섬멸할 작전을 펴고 있었다. 후종난 군은 공중정찰 지원과 기계화 부대로 무장해 화력의 절대우세를 보여 기세등등하게 공산당군 주위를 에워싸면서 추격공격을 하고 있었다. 

최후 결전의 임전무퇴였다. 후종난 군의 선두부대는 이미 중공중앙 후위 호위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들이 바짝 쳐들어오자 마오는 다시 중앙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중앙기구를 새롭게 구축해 위기에 대응하는 쾌도난마격의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오린저거우(棗林則溝 조림칙구) 회의'다. 마오가 머물고 있는 움집에서 저우언라이가 빠진 채 중앙서기와 중앙 각 부문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마오가 제시한 '3로 분병방안(三路分兵方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당 중앙의 분산, 즉 당을 3갈래로 분산시켜 각각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밤새 열린 회의의 최종 결의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가 부분 중앙기관과 해방군 총부를 이끌고 싼베이에 머물며 견결하게 투쟁해 당 중앙의 직책을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류샤오치, 주더, 둥비우로 구성한 중앙공위(中央工委)를 만들어 '진차지' 해방구로 이동해 공작을 펼치며 류샤오치가 주재하도록 했다. 그리고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양상쿤(楊尙昆 양상곤) 등 젊은층이 중앙 후위(後委)를 구성해 산시 서북쪽으로 들어가 공작을 벌이는 것 등으로 되어있었다. 결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당 중앙이 의외의 일을 당했을 때 중앙공위가 당 중앙의 영도직능을 대신하고, 류샤오치를 대리 중앙주석으로 지정했다. (주석 243)

 

이틀 뒤 당 중앙을 셋으로 나눈 3로 인마(人馬)는 각각 자오린저거우 마을에서 헤어졌다. 류샤오치가 이끄는 중앙공위는 동쪽에서 황허를 건너 시바이포(西柏坡 서백파)로 떠나고, 중앙후위는 산시 북쪽으로 전진했다. 마오와 런비스 등은 계속 북상했다. 이처럼 중공중앙은 중앙을 3분해 국민당과 천하(통일중국)를 놓고 결전하는 전략의 틀로 비장하고 결연한 투쟁의지를 보였다. 

이 방안은 마오가 저우언라이의 헌책을 받아들인 것이다. 자오린저거우 회의가 열린 날 중앙은 허룽이 통솔하는 '진수이' 군구(軍區)에 긴급 전보를 보내 "즉시 저우언라이 부주석이 이른 시일 안에 허시(河西 하서; 황허 서안의 싼베이지역)로 돌아오도록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마오는 기구를 간소화 해 싼베이의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을 4개 대대(전신, 정보, 작전, 기요, 연락, 문비(文秘), 후근(後勤), 경위 등 포함)로 재편해 공작인원은 200명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경호부대는 4개 중대로 모두 8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중앙 직속종대 사령부를 만들어 대외적으로는 '쿤룬(昆倫 곤륜)종대'라 이름하고, 런비스를 사령관, 루딩이(陸定一 육정일)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또 대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마오를 '리더성(李得勝 이득승)', 저우언라이를 '후비청(胡必成)', 런비스를 '스린(史林)'으로하는 암호 이름을 쓰도록 했다. 이들 암호명은 모두 '혁명은 반드시 성공'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오는 자신의 짐도 간단하게 꾸렸다. 반은 책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현지 주민에게 맡겼다. 마오가 지닌 서적은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각종 통로로 수집한 외국번역서로 마르크스, 엥겔스, 스탈린의 정치서적과 철학, 역사, 문화 등의 책이다. 또 한 분야는 고서(古書)로 역사전적, 문학서, 시사가부(詩詞歌賦), 전기야사(傳奇野史) 등등이다. 마오는 평생 책을 가까이 했다. 특히 중국 고대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다. 징강산 투쟁시절에는 삼국지, 수호지를 끼고 살아 코민테른파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른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1947년 4월 14일 마오의 중앙기관은 옌안에서 서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징볜(靖邊)현 왕자완(王家灣 왕가만)에 도착했다. 이날 펑더화이의 서북야전 병단이 양마허(羊馬河 양마하) 전투에서 기습공격으로 후종난 군 135여단의 4700여명을 섬멸하고 여단장 대리 마이종위(麥宗禹 맥종우)를 생포했다. 양마허 전투승리에 고무된 마오는 해방군 각 전략구에 격려 전보를 보냈다.

 

“이 승리는 후종난 침략군에게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후종난을 철저하게 분쇄할 기초를 다지게 됐다. 이번 승리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병력으로 외부의 지원 없이 후종난 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번 승리는 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서 교만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면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군 장병들에 대한 노고 치하(致賀)를 전달하기 바란다. 아울러 전 해방구는 변계지 군민(軍民) 경축대회를 열어 민심을 고취시키고 사기를 진작시켜 계속 적을 무찌르자.”

 

마오는 또 이날 치하전보를 보낸 펑더화이, 쉬중신과 주더, 류샤오치에게 전략방안에 관한 전보를 보냈다.

 

“적은 이미 상당히 피로에 지쳐있으나 아직은 여력이 있다. 적은 이미 식량에 곤란을 겪고 있으나 아직은 극단적 어려움은 없다. 우리 군이 31여단을 전멸시켰으나 대량의 적은 섬멸하지 못했다. 개전 20일 동안 이미 적들이 피곤에 지치고 식량에 어려움을 겪도록 하는 목적은 달성했다. 지금부터는 적들이 완전히 지치고 식량을 고갈시켜 최후로 적을 섬멸하는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의 방침은 과거의 방법을 계속 구사해 현지에서 적과 일정한 시기(1개월 안팎) 동안 술래잡기를 하며 대응한다. 목적은 적이 완전히 피곤에 나가떨어지고 양식이 동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회를 잡아 전멸시킨다.-우리 군은 이러한 방법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라 는 것을 마땅히 장병들과 인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적들이 완전히 피로에 지치지 않거나 기아에 허덕이지 않는다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이 방법은 ‘지연(蘑菇 마고; 버섯, 질질 끄는 것)전술’로 적을 기진맥진하게 한 뒤 소멸하는 것이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이처럼 싼베이 북방 황토고원에서 전국의 모든 전장의 전략과 전술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후종난 군은 자신들을 끌어들여 지형지물에 익숙한 산속으로 달아나는 펑더화이 군을 쫒아 다니느라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하고 지쳐나가 떨어졌다. 도리어 펑더화이 군에 기습을 당해 병력손실이 컸다. 

242) 解密1947年胡宗南攻占延安 大轉折-決定中國命運的700天 鄧賢 著, 湖南人民出版社 理論頻道 新華網
243) 解密1947年胡宗南攻占延安 大轉折-決定中國命運的700天 鄧賢 著, 湖南出版社 理論頻道 新華網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
出版社

----------------------------------------------------------------------------------------------------------------------------------

 

 

114. "적의 가슴을 노린다" 전략 바꾼 공산당 중원탈환 채비

 

 

장제스는 마오 등 중공중앙 영도부가 왕자완에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종난 군의 9개 여단을 수이더(綏德 수덕)로 이동해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1개 여단만이 후방에 남아 중요 군수보급 창고가 있는 판룽전(蟠龍鎭 반용진)을 지키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펑더화이는 홀로남아 판룽전을 지키고 있는 후종난의 정예부대 167여단을 기습 공격해 전멸시키고 여단장 리쿤깡(李昆崗 이곤강)을 생포했다. 4만 벌의 군복과 1백만 발의 탄약과 포탄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뒀다. 수이더에서 급히 류칸(劉戡 유감), 둥자오(董교 동교) 등 구원부대가 달려왔지만 도중에 해방군에게 차단당해 되레 방어에 급급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시안에 있던 후종난은 눈물만 뿌렸다고 한다.

 

1947년 3월 말 벌어진 산둥성 멍량구(孟良<崓> 맹량고) 전투는 내전 초기 인민해방군이 ‘운동전’을 펼친 대표적 전투로 꼽히고 있다. 국민당군은 5대 주력 가운데 3대 주력을 포함해 산둥 전장(戰場)에 45만여 명의 병력을 집중 투입했다. 이에 맞설 천이와 수위(粟裕 속유)가 통솔하는 인민해방군 화둥(華東 화동)야전군은 9개 종대와 1개 특수종대로 총병력은 27만여 명에 이르렀다. 

국민당군의 재편한 정편(整編) 74사단, 11사단과 신5군단은 밀집대형을 강화하면서 차근차근 진을 쳐가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밀고 들어가는 작전방침을 채택했다. 화둥야전군은 지역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양동작전을 펴 고도의 ‘밀집공격’을 깨기 위한 틈을 노렸다. 5월 중순, 정편 74사단을 주력으로 한 국민당군은 화둥야전군 사령부가 주둔한 지역에 대한 중앙돌파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정편 74사단의 위치가 비교적 돌출하기 시작했다.

 

천이와 수위는 몇 개의 주력 종대를 집결해 적의 전투대형의 중앙을 치고 들어가 가장 위협적인 선봉인 정편 74사단과 다른 부대와의 연계 고리를 끊은 뒤 섬멸할 작전을 짰다. 이른바 ‘맹호의 심장을 꺼내는(猛虎掏心 맹호도심)’, ‘호랑이 이빨을 뽑는(虎口拔牙 호구발아)’ 격의 당찬 작전이었다. 종전의 인민해방군 전투는 무기, 탄약 등이 한정되어 일반적으로 약한 적을 골라 병력을 집중해 싸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는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의 최강 정예를 치는 것으로 종전 전투방식의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정편 74사단은 3만 2천여 명의 병력에 미국 기계화 장비로 무장하고 미국 장교들로부터 훈련을 받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1946년 5월 다시 국민당 정부 수도가 된 난징(南京 남경)의 위수(衛戍) 임무를 맡는 ‘어림군(御林軍)'이었다. 사단장 장링푸(張靈甫 장령보)는 황푸군관학교 4기로 졸업한 뒤 항일전쟁 시기 모범군인의 영예를 얻어 장제스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주석 244)

 

 

이에 맞서는 수위(粟裕)는 1907년 후난성 후이통핑(會同坪)촌에서 태어나 1924년 부모가 정해 준 혼사를 떨쳐버리고 가출해 후난성립 제2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수위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돼 1926년 11월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1927년 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우창(武昌)으로 달아나 예팅(葉挺 엽정)사단장이 이끄는 국민혁명군 제24사단 교도대에 들어가 군문의 길에 나섰다. 

 

수위(粟裕)

 

그해 6월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환한 수위는 8월 난창기의에 참가해 경위대 분대장을 했다. 난창기의 실패 후 주더와 천이를 따라 1928년 1월 샹난(湘南 상남; 후난성 남쪽지방)기의에 참여했다가 4월에 징강산에 들어갔다. 징강산에서 근거지 건설과 투쟁을 하면서 마오와 주더의 군사,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격전과 운동전, 전멸전 등의 군사전술을 익혔다.

 

1930년 12월 홍64 사단장, 홍4군 참모장, 홍11군, 홍7군단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1935년 2월 돌격사단장에 임명돼 500여 명을 이끌고 국민당 통치구역의 복판인 저장(浙江 절강)성에 진입해 저난(浙南 절남; 저장성 남쪽지역) 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항일전쟁이 일어난 뒤 1938년 4월 신4군 제2지대 부사령관에 이어 선발지대 사령관으로 장난(江南 강남; 창장 이남) 웨이깡(韋崗 위강)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1941년 1월 완난사변 이후 신4군 제1사단장을 역임하고, 1945년 1월 ‘쑤저(蘇浙 소절; 장쑤-저장성)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 됐다. 수위는 항일전투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류샤오치는 “수위가 통솔하는 신4군 1사단은 항일전쟁 중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우리 군 중에서 제1사 작전이 가장 많았고, 전과가 가장 컸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화중야전군 사령관이 된 수위는 내전이 터지면서 남정북전(南征北戰)해 보름동안 7전7승으로 5만3000여명을 전멸시키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47년 1월 하순 산둥과 화중야전군을 통합해 화둥야전군을 창설하면서 부사령관을 맡은 수위는 라이우(萊蕪 내무)전투에서 운동전으로 70000여명을 섬멸해 내전 1차 전역(戰役) 최다 섬멸신기록을 세웠다. 마오가 아끼는 5호상장군(五虎上將軍) 가운데 수위와 린뱌오가 1, 2위를 다툴 정도로 마오의 신임이 두터웠다. 수위는 신중국 건국 후 1955년 10대 원수를 선발할 때 후보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려 스스로 3차례나 사양했다. 그의 이런 고매한 인품 때문에 대장 계급을 수여받았으나 ‘원수급 대장’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얻어 지금까지 중국 인민들의 가슴속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수위는 국민당군 정편 74사단을 전멸하기 위해 화둥야전군 5개 종대에 적을 에워싸 섬멸토록 하고, 4개 종대를 두 날개로 삼아(兩翼 양익) 원군을 막도록 명령했다. 이때 국민당군과 인민해방군의 병력 대비는 1대5로 화둥야전군이 숫자상으로는 절대 우세였다. 3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74사단은 완전 궤멸됐다. 사단장 장링푸도 사살됐다. 뒤늦게 국민당군의 지원군이 달려왔으나 수위의 작전대로 양익에 저지당해 손도 쓰지 못했다. 멍량구 한 산속에서만 7000여 명의 국민당군이 몰살했다. 

장제스는 “멍량구 실패는 우리군이 공산당 포위소탕전 이래 가장 가슴 아프고, 가장 애석한 사건”이라고 애통해 했다. 마오쩌둥은 “1년 작전 중 전국 각 전구의 전과에서 최대의 군대임을 과시했다”고 기뻐했다. 사령관 천이는 “수위 장군의 작전지휘는 일관되게 상승기록을 유지한다. 나갈수록 기이하고 싸울수록 묘하다”고 칭찬했다. 내전의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당 군대 다수의 병력이 이렇게 공산당군에 의해 야금야금 빠르게 먹혀가고 있었다.

 

 

이처럼 각 전투현장에서의 승첩이 잇따라 형세 변화가 빠르게 진전되자 마오는 싼베이 징볜현 조그만 마을인 '샤오허(小河 소하)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군 지휘관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1947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샤오허 회의'는 지금까지의 군사전략과 전술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전략방침을 결정한 인민해방군 전사의 유명한 회의였다. 이 회의를 전후해 인민해방군이 산간지역으로 적을 유인해 게릴라전을 펴던 '방어적 공격'에서 드넓은 평원으로 진출해 운동전으로 '적극적 공격'을 전개하는 분수령이 됐다. 저우언라이는 회의에서 전쟁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주석 245)

 

"내전이 발발한 1946년 6월부터 지금까지(1947년 7월) 해방군은 국민당군의 3분의 1가량을 몰살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 몇 달에 걸친 대치기간 동안 국민당군은 광대한 지역으로 넓게 퍼지면서 공산당 근거지 안에 있는 104개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장제스는 1947년 3월에는 전면적인 공세에서 싼시 북부와 산둥성 등 주요 지역에 대한 공격으로 전략을 바꿔야 했다. 방어적이었던 우리 해방군은 이제 공세적으로 나서기 시작해 62개 도시를 되찾았고 병력을 190만 명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군 병력의 확대는 다음 단계(1947~1948년)의 전쟁을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마오는 자신이 구상한 전략방침과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주석 246)

"장제스의 '황허전략'은 한 주먹으로 산둥을 때리고, 또 한 주먹으로는 싼베이를 치는 것이다. 산둥에 56개 여단 40여만 명을 투입했고, 싼베이에는 30여 개 여단 20여만 명을 투입했다. 류보청은 이런 형상을 아령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른바 '아령전술'이다. 장제스의 이런 전술의 목적은 우리를 압박해서 화베이(華北 화북)에 끌어들여 결전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제스는 두 주먹을 한번 뻗었을 때 자신의 가슴이 노출되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화베이에 가서 맞장 뜨는 강력한 대응, 즉 침봉상대(針鋒相對)하는 황허전략, 두 주먹을 꽉 쥐어 잡고 열린 가슴팍에 칼을 꼽는 황허전략을 보여주자. 우리는 적들의 중점적 진공을 기다리지 말고 완전히 분쇄해야 한다. 우리들의 장비수량도 보충되었기 때문에 전략적 진공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곧 진공(進攻)에 들어가고, 우리들의 주력은 즉시 바깥의 적의 포위망(外線)을 깨부수자!"

 

저우언라이가 구체적으로 마오의 구상을 부연 설명했다.

 

"장제스의 병력은 산둥과 싼베이 양익에 중점 배치돼 있어 천험의 황허가 흐르는 중간지대(화베이)에는 소수 병력밖에 없다. 장제스는 황허를 바깥 해자(垓字; 성 바깥쪽을 따라 적이 침공하지 못하도록 파 놓은 못)로, 룽하이 철로를 '철사망(鐵絲罔); 거점 진지)'으로, 창장(長江 장강)을 내부 해자로 삼고 있다. 우리는 바깥 해자를 넘고, 거점 진지를 넘어 장제스의 내부 해자를 쳐야한다."

"여기 중간을 돌파해 가슴팍에 칼을 찔러야 한다."  

마오가 벽에 걸려 있는 지도의 화베이 일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이 칼은 바로 류보청-덩샤오핑 대군이다. 지금 그들은 이미 황허를 건넜다. 용감하게 다비예산(大別山 대별산)으로 전진해 준비한다. 그런 연후에 장제스의 가슴을 곧바로 찌른다. 바깥해자 전략(外線作戰)은 총체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배치한다.“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한 뒤 지도를 가리키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류-덩 대군이 다비예산을 차지하는 것 이외에 천이, 수위의 화둥야전군이 '위완쑤(豫晥蘇 예환소; 허난-안후이-장쑤성일대)'로 진격하고, 천겅, 시예푸즈가 이끄는 '진지루위(晉冀魯豫 진기로예; 산시-허베이-산둥-허난성일대)' 야전군 일부는 황허 도하를 강행해 허난 서쪽으로 진출한다. 싼베이, 산둥도 일제히 움직여 전면적으로 협력한다."

"이 진세는 내가 보기에 '품(品)'자 형과 같다."

허룽이 웃으며 지도 앞으로 걸어 나와 그의 브랜드마크인 '파이프 담뱃대'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오가 허룽의 말을 받아 설명했다.

 

"그렇다. 이것은 '품'자형 진세(陣勢)다. 우리들은 바로 남쪽 창장에서 일어나 북쪽 황허에, 서쪽은 한수이(漢水 한수), 동쪽은 화이허(淮河 회하)의 중원(中原)대지에 이른다. 3로 대군이 '품'자형 진세를 펼쳐 합동작전으로 서로 의지하고 협동해 적을 향해 진공한다. 이렇게 해 더욱 빨리 전쟁을 승리하도록 한다. 이번 전략의 총체적인 중심부분은 류-덩 대군의 다비예산 진격이다. 중국역사는 우리에게 중국을 통일하려면 중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중원축록(中原逐鹿),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 보자!"

 

중국은 예부터 중원(中原)을 차지하는 인물이 천하를 제패해 중국을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원의 사슴을 쫒는 다는 중원축록(中原逐鹿)의 고사성어는 유방을 도와 초패왕 항우를 깨뜨리고 통일중국의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한신(韓信)을 다룬 사마천의 사기 '회음후 열전'에 나온다. 즉 봉건 왕조시대 뭇 영웅과 야심가들이 중국의 어복(魚腹)으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펼쳐진 화중평원(中原 중원)에 몰려드는 형국을 빗대 제위(帝位), 즉 정권을 다투는 뜻으로 쓰고 있다. 마침내 죽고살기의 대회전, 중원축록(내전)의 2단계 막이 오른 것이다. 기실 중공중앙의 이런 전략방침 이면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내전이 발발한 1946년 7월 이래 1년 동안 국민당군은 병력이나 무기, 장비 등에 있어 여전히 월등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이런 열세로 인해 정면대항을 피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전쟁이 공산당의 해방구에서 벌어졌다. 전쟁의 피폐화는 물론 자연재난도 계속돼 해방구의 경제가 심각할 정도로 파괴돼 인적, 물적 동원이 이미 한계점에 이르렀다. 때문에 전장터를 국민당 통치지역으로 끌고 가 해방구의 전쟁소모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한 국민당군이 포진한 싼베이, 산둥의 양익을 끌어들여 두 지역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줄일 목적도 있었다. 중공중앙은 대담하고 극히 모험적인 전략방침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류-덩 대군이 근거지를 떠나 국민당군의 전략적 후방지구를 직접 뛰어 들어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샤오허 회의가 끝난 뒤 류-덩, 천이-수위, 천겅-셰푸즈 3로군 대군은 날카로운 삼지창으로 장제스의 가슴을 찌르는 형상의 결기를 다지며 출정에 나섰다. 1947년 6월 30일 '전신(戰神)' 류보청(劉伯承 유백승)과 오척 단구의 대물(大物)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12만 대군을 휘몰아치며 후베이성(湖北省) 황안(黃安 황안; 현재 紅安)현 다비예산(大別山)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244) 秘密何在? 共産黨爲什嗎能3年戰勝國民黨 中國共産黨新聞網
245)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 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246)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15. 공산당, 중원 공략 성공…해방전쟁 승리 기틀 다져

 

 

중공중앙은 옌안과 산둥지역을 압박하는 장제스의 ‘아령전술’을 깨고 중원  전략 정지작업으로 류보청-덩샤오핑 12만 대군이 다비예산(大別山 대별산)으로 떠나기 한 달 전인 5월에 덩샤오핑을 서기로 하는 중원국(中原局)을 설립했다. 다비예산 근거지를 확보해 전쟁준비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긴 것이다. 공산당의 중원전략을 간파한 장제스는 류-덩 대군이 북쪽에서 황허를 건너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한편, 화베이 야전군을 이끌고 있는 천겅과 셰푸즈 부대의 남하를 저지해 류-덩 부대의 지원을 봉쇄하고 고립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다비예산을 중심으로 한 ‘어위완(鄂豫皖 악예환; 후베이-허난-안후이 지역)’은 일찍이 장궈타오와 쉬샹쳰이 통솔한 홍4군 창설지역의 해방구로 공산당의 지배력이 강한 곳이다. 홍4군이 국민당군에 쫓기어 쓰촨지역으로 장정을 한 뒤에는 홍5군, 홍25군, 홍28군이 잇따라 이 지역에서 투쟁을 벌였다. 항일전쟁 후에는 리셴녠(李先念 이선념)이 지휘한 신4군 제5사단이 근거지로 삼아 전투를 벌였다.

때문에 천리행군의 쾌속진군으로 황허를 도강한 류-덩 부대는 국민당군의 저지를 뚫고 다비예산에 교두보를 마련해  빠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포위공격도 만만찮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류-덩 부대는 11월 하순 포위 공격군 3만여 명을 섬멸하고, 33개 현에 인민 민주정부를 세워 해방구의 틀을 갖췄다. 이즈음 국민당 통치 지구에서는 이런 풍설이 나돌았다. (주석 247)

 

“일성(一誠(陳誠 진성) 은 일승(一承(劉伯承 유백승)보다 못하고, 5류(劉峙(유치), 劉茂恩(유무은), 劉汝明(유여명), 劉廣信(유광신), 劉汝珍(유여진)는 일류(一劉)만 못하다.”

 

국민당군 육군 참모총장인 천청의 이름 끝 자의 발음 ‘청’자와 류보청의 끝 자 발음 ‘청’을 따와 비교하면서 천청의 능력이 류보청에 뒤지고, 유씨 성의 국민당군 장군 5명을 한데 합쳐도 성씨가 같은 류보청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빗대는 얘기다. 류보청의 뛰어난 군사지휘 능력에 맥없이 고꾸라지는 국민당군 장령들의 무능을 조롱하는 풍자였다.

1948년 초 류-덩 야전군이  다비예산에 온 지 6개월 남짓했을 무렵 부대의 탄약, 군복, 식량 등 군수보급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국민당군이 5개 사단을 풀어 다비예산 류-덩 야전군에 대한 일대 소탕작전에 나섰다. 류-덩 야전군은 국민당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 화둥야전군이 남하해 지원해 줄 것을 당 중앙에 요청했다. 마오는 화둥야전군 사령관 천이의 동의를 얻어 실제적 지휘를 하고 있는 부사령관 수위에게 3개 사단을 이끌고 황허를 건너 남하해 류-덩 야전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당 중앙의 명령을 받은 수위는 되풀이 해 이 작전을 뜯어봤지만 이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위는 이 일대 지리와 지형지물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수위가 1934년 홍7군 사단장 팡즈민(方志敏)을 따라 북상했을 때 국민당군의 포위망에 걸려 상관인 팡즈민은 사로잡혀 총살당하고 홍7군이 궤멸돼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경험이 있었다. 수위는 요행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장난(江南 강남; 창장 중하류 지역)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간난신고의 투쟁을 벌였다.

장난은 국민당의 핵심 근거지역으로 황허를 건너 진공할 경우 반격을 받을 것이 뻔했다. 국민당군이 포위를 했을 때 후속대책이 난감했던 것이다. 이럴 때 당 중앙의 명령도 관철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병력손실만 있을 것으로 보여 고민스러웠다. 수위는 황허를 도강해 지원하는 것보다 오히려 창장(長江 장강)이북에서 국민당군 주력 부대들과 전투를 벌여 무찌르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즉, 자신의 부대 3개 사단이 강을 건너지 않고 중원에서 작전을 전개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이때 화둥야전군 사령관 천이(陳毅 진의)가 사령부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해 당 중앙의 명령을 전달했다. 중원작전을 위해 장난을 흔들어야 하고, 화베이(華北 화북)작전을 위해 중원에 변화를 줘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게 중앙의 뜻이라고 설명했다.

 

회의 휴식시간에 수위가 천이를 찾아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당 중앙의 작전명령이 잘못됐다는 게 요지였다. 천이는 의아해 했으나 수위의 얘기를 듣고 보니 옳은 전략일 듯도 했다. 하지만 일개 전구(戰區)사령부에서 당 중앙의 전략방침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천이로서는 난감했다.

당 중앙의 전략방침은 곧, 마오, 저우언라이, 주더가 내린 결론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례가 없었다. 천이는 고민 끝에 그래도 수위의 작전전략이 일리가 있어 중앙군사위원회에 수위의 의견을 개진키로 했다. 수위는 장문의 전보를 보냈다. 화둥야전군이 창장을 도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중원작전의 세부 전략계획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주석 248) 

 

마오는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천이와 수위가 당 중앙이 머물고 있는 허베이(河北 하북) 푸핑(阜平 부평) 청난좡(城南庄 성남장)에서 여는 중공중앙 서기처 확대회의에 참석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청난좡 회의는 꼬박 1주일간 열렸다. 중원전략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회의였다. 공산당 앞날의 사활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수위는 이 회의에서 거듭 3개 사단이 잠시 도강하지 않고 중원지구에 병력을 집중해 적들을 섬멸하는 방안을 여러 근거를 제시하며 설명했다. 중앙 영도자들이 수위 안(案)을 놓고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최종 결론은 모두가 수위가 제시한 방안을 받아들였다. 회의는 화둥야전군 사령관 천이를 중원국 제2서기 겸 중원야전군 제1부사령관으로 임명해 류-덩 작전을 돕도록 했다. 또 수위를 화둥야전군 사령관 대리 겸 정치위원 대리로 임명하고 화둥야전군의 작전 지휘권을 주는 등 수위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을 보였다.

마오는 수위의 헌책을 받아들여 류보청-덩샤오핑이 통솔하는 야전군이 다비예산에서 화이허(淮河 회하), 룽하이(隴海 농해), 샤허(沙河 사하), 푸뉘우산(伏牛山 복우산) 사이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또 류-덩 야전군 3개 사단, 화둥야전군 천스쥐(陳士榘 진사구), 탕량(唐亮 당량) 4개 사단, 천겅, 셰푸즈 1.5개 사단 등 총 8.5개 사단을 화이허, 한수이(漢水 한수), 룽하이, 진푸(津浦 진포) 사이에 집결해 기동전으로 국민당군을 격파하도록 했다.

국민당군과의 전투는 수위가 예측했던 대로 흘러갔다. 화둥야전군은 잇따라 위둥(豫東 예동)과 지난(濟南 제남) 전투를 벌여 국민당군을 대량 섬멸해 중원지구의 전략 주도권을 잡았다. 마오의 이런 중원전장(中原戰場)의 전략적 배치는 국민당군의 주력을 화이허, 한수 이북으로 끌어들여 수위 부대의 기동력을 원활하게 하면서 다비예산, 장한(江漢 강한) 등지를 공고하게 한 뒤 국민당군을 섬멸하는 계책이었다. 

 

당 중앙은 중원국을 확대해 1948년 5월 9일 덩샤오핑을 중원국 제1서기, 천이를 제2서기,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를 제3서기에 임명했다. 아울러 중원군구(中原軍區)를 창설해 류-덩 야전군, 천겅-셰푸즈 부대를 중원야전군으로 개편했다. 류보청을 중원군구 사령관 겸 중원야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덩샤오핑을 중원군구 정치위원과 중원야전군 정치위원, 천이를 중원군구 제1부사령관, 리셴녠을 중원군구 제2부사령관에 각각 임명했다.

천이는 계속 화둥야전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맡도록 했다. 중원국과 중원군구는 위시(豫西 예서; 허난 서쪽지역), 어위(鄂豫 악예; 후베이-허난지역), 위완쑤(豫皖蘇 예환소; 허난-안후이-장쑤지역), 통바이(桐柏 동백) 등 7개구 당위원회와 2급 군구를 관할하도록 했다. 중원국은 중앙이 파견한 기구로 중원지구의 모든 정치, 군사, 경제, 당무(黨務), 중원전장에서 중원야전군과 화둥야전군의 합동작전을 지휘하도록 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주석 249)

 

덩샤오핑, 류보청, 천이가 이끄는 중원국, 중원군구, 중원야전군 총사령부는 6개월 동안 바오펑(寶豊 보풍)에 있으면서 중원 인민해방전쟁의 총사령부 구실을 했다. 1948년 봄부터 중원야전군과 화둥야전군은 협동작전을 펼쳐 잇따라 뤄양(洛陽 낙양)전투, 완시(宛西 완서; 삼국시대 때 고대 이름은 남양시 완성), 완둥(宛東 원동), 위둥(豫東; 허난 동쪽지역), 샹판(襄樊 양번)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국민당군 정규군 17만여 명과 지방단대 10만여 명을 전멸시켰다. 점령지역인 뤄양, 카이펑(開封 개봉), 샹양(襄陽 양양) 등 중요 도시를 견고하게 방어해 국민당군의 중원 방어체계를 분쇄하고 중원지구의 광대한 지역을 해방시켰다. 카이펑은 당시 허난성 성도로 인민해방군이 점령한 첫 중국 심장부의 성도였다. 또한 룽하이 철로와 징광(京廣 경광; 베이핑-광저우)철로의 교차지역이자 국민당군의 군수물자 등을 공급하는 총 후방기지인 전략적 요충지, 정저우(鄭州 정주)를 점령해 중원야전군의 무기와 장비를 크게 개선시켰다.

 

중원국은 바오펑(寶豊)에 중원대학(中原大學; 현재 중남 재경전법대학 등원교)을 설립해 광범위한 지식분자들을 끌어들이고 청년학생들을 교육시켜 대량의 간부들을 배출했다. 중원국, 중원군구, 중원야전군 총사령부 간부들도 중원대학에서 국제형세, 각국의 혁명 상황 등을 배웠다. 덩샤오핑은 1948년 6월 6일 ‘반좌(反左), 규좌(糾左; 좌경의 잘못을 바로 잡음)’를 견지하는 이른바 ‘6.6지시’를 기초해 전쟁승리를 위한 견실한 정치적 기초를 다지도록 했다.

덩샤오핑은 중원에 진출한 이래의 경험과 교훈을 바탕으로 한 ‘중공중앙의 토지개혁과 정당(整黨)공작에 관한 지시의 집행관철’(6.6지시)을 만들어 신해방구의 토지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급진, 조급병 등 12개 방면 분야를 분석해 엄중한 교훈으로 삼도록 했다. 특히 다비예산 지구의 토지개혁 운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덩샤오핑은 “전 지구는 즉시 토지분배를 중지하고, 토호들을 공격해 빼앗은 재산분배, 마구잡이 몰수를 중지하고, 모든 파괴를 금지하며, 함부로 구타하거나 체포, 살인 등의 현상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덩샤오핑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2개 방침과 단계적 방안을 제시했다. ‘6.6지시’가 당 중앙에 보고된 뒤 마오는 류샤오치, 주더, 저우언라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중원국의 ‘6.6지시’를 중원이외의 각 중앙국, 중앙 분국, 각 대야전군 전위(前委) 등에 보내 ‘6.6지시’에 따라 일처리를 하도록 했다.

이처럼 중원국은 덩샤오핑, 류보청, 천이를 통해 중원전장 기간 동안 통일지휘로 다비예산을 축으로 한 근거지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 중국 해방전쟁의 3대 전투의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회해)전투와 창장(長江 장강) 도강전투, 강남 해방의 중요기초의 디딤돌을 놓는 성과를 거뒀다.

247)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48) 粟裕怎樣改變中原戰局 時政頻道 新華網
249) 鄧小平 劉伯承 陳毅在中原戰場; 運籌帷幄 決勝千里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16. 마오, 북한을 후방기지로…대대적 토비 소탕

 

 

1945년 11월 말 창춘, 선양, 하얼빈 등 동북지역 대도시를 국민당군에 내주고 향촌 중소도시로 철수한 동북 인민해방군들은 권토중래를 위해 무기와 장비를 보충하고 병력을 충원하면서 호시탐탐 반격을 노렸다.

서만주 일대의 인민해방군은 송화장(松花江 송화강) 이북으로 철수했다. 때문에 서만주, 남만주의 광대한 지역과 특히 주요교통 간선도로가 국민당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따라 뤼순(旅順 여순), 다롄(大連 대련) 및 화둥(華東 화동) 해방구와 북만주, 남만주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처지에 놓여 목전의 화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인민해방군이 철수할 때 대량의 장비와 물자, 부상자와 가족들을 안전하게 호송하고 안치하는 문제도 시급했다.

 

동북국은 1946년 6월 연구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북조선(북한)을 은폐한 후방기지로 삼아 남만주지역 작전을 펼치는 방안”을 짜냈다. 북한의 동의를 얻어 낸 동북국은 동북민주연군 부 총사령관 샤오진광(肖勁光 초경광)과 북만주 분국 비서장 주리즈(朱理治 주리치)를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 중앙과 회담해 평양에 중공중앙 동북국 판사처(辦事處; 사무소)를 설립해 일처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주리즈가 중공중앙 동북국 및 동북 민주연군 평양주재 전권대표로 임명됐다.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미소 두 나라가 남북에 각각 진주해 공동 관리하는 형국이었다. 또 장제스의 국민당이 미소 두 나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등 복잡한 형세였다.  따라서 동북국은 평양의 판사처를 은폐와 공개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 대외적으로 ‘평양이민공사(平壤利民公司)’라는 간판을 달아 실체를 숨겼다.

 

 

판사처(평양이민공사)는 대동강 서안 채관리(釵貫里) 140번지에 둥지를 틀었다. 이민공사는 또 북한 경내의 주요 교통중심지인 항구도시 진남포, 신의주, 황포와 나진 4곳에 판사처 분실을 두고 ‘평양이민공사 모모(某某) 분공사’라는 간판을 달아 엄폐했다. 천재적 작곡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율성의 부인 딩쉐송(丁雪松 정설송)은 저서 ‘작곡가 정율성’에서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주석 250)

“(나는)이민공사 부분공작에 참여해 주리즈 동지가 이끌었던 판사처를 2년여 동안 직접 보고 들었다. 주리즈 동지의 공작은 김일성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조선노동당 중앙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김일성 동지는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당신들의 일은 바로 우리들의 일이다’, 또 ‘조선의 혁명은 중국혁명의 계속이다, 중국의 해방이 조선의 해방이다’라고 말했다.”

 

이민공사의 일은 안둥(安東 안동; 지금의 단둥), 퉁화(通化 통화)에서 철수한 동북 인민해방군 1만8천여 명의 부상자, 가족과 후방인원을 북한 경내에 안치시키고 2만여 톤의 전략물자를 운송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조건과 환경은 경제적으로 먹고 입는 것들이 모두 부족했다. 또 정치적으로는 국제여론의 압력 때문에 많은 부상병들이 장기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집에 머물러 치료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전략물자를 옮기는 것도 외부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북한의 당정기관이 강 연안의 노동당 당원을 대거 동원해 어깨에 메고 등짐으로 날랐다.

전략물자는 강변에서 은폐한 지점으로 옮겨 보관했다. 이에 따라 북한을 통해 전략물자를 남북만주에 보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시 북만주의 식량과 면화, 석탄을 다롄(大連 대련)으로 운송되고, 다롄의 소금, 포목, 기타 공업품, 의약품, 의료기기, 공업원료와 북만주에서 급히 필요로 하는 물품 등을 남북만주에 보내졌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1947년 초부터 7개월 동안 물자 21만 톤, 1948년 한 해 동안 30만 톤이 북한을 거쳐 운송됐다.

 

북한 땅을 통해 남북만주로 월경한 중국 인원도 상당히 많았다. 1946년 하반기에 3천명, 1947년, 1948년 월경 인원수는 각각 1만 명 안팎이었다. 1948년 홍콩에서 적지 않은 민주당파, 무당파와 해외 화교의 유명 인사들이 북한을 경유해 베이핑에서 열린 제1기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이 내전 중이라 이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북한을 우회한 것이다.

리지선(李濟深 이제심), 선쥔루(沈鈞儒 심균유), 장란(張瀾 장란), 마쉬뤈(馬叙倫 마서륜), 차이팅카이(蔡廷鍇 채정개), 탄핑산(譚平山 담평산), 궈모뤄(郭沫若 곽말약) 등 수십 명의 유명 인사들이 북한을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 공산당 영도자들은 더욱 많았다. 천윈(陳雲 진운),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주루이(朱瑞 주서), 류야러우(劉亞樓 유아루), 샤오화(肖華 초화), 장아이핑(張愛萍 장애평), 한시옌추(韓先楚 한선초) 등이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접수한 전략물자를 넘겨받아 중국공산당을 지원해주는 등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북한과 중국공산당은 우호협정을 체결해 중국공산당과 압록강을 공동 운항하고, 수풍발전소의 전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북한 거주 화교들의 모임인 화교연합총회 위원장을 겸직한 딩쉐송은 화교연합회 회원들이 부상자를 후송하고, 보살피면서 북만주에 전략물자를 운송했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251)

 

“전쟁초기 국민당 군대가 남만주 대부분의 지역과 교통요도를 점령했기 때문에 랴오둥(遼東 요동)남쪽과 산둥(山東 산동) 전장에서 철수한 부상병을 부득불 해상을 통해 북한 남포항으로 운송했다. 부상병들을 그곳에서 분산 수용했는데 북한 주민들의 집이나 평양과 남양 등지를 거쳐 동만주와 북만주로 후송했다. 매번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남포와 평양 두 시의 화교연합회 분회에서 조직을 만들어 들것으로 부상병을 실어 나르고, 간호를 하는가 하면 기차로 이송하는 일을 했다. 이 일은 동북지역이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전략물자 운반도 화교들이 힘썼다. 1947년 북한의 지원으로 산둥에서 수백 톤의 탄약을 남포항으로 운송했을 때도 화교들을 선발해 하역시켰다.”

 

동북국 평양주재 판사처는 1948년 봄 동북해방군이 창춘, 선양, 진저우(錦州 금주)를 점령하는 등 ‘랴오-선(遼沈 요선; 요동-심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동북 인민해방군이 동북전역을 점령한 뒤 간판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인 1946년 7월 동북국 확대회의가 열리기 전 동북국과 동북민주연군 총사령부에서 '비적소탕에 관한 결정'을 통보했다. '결정'은 이랬다.

 

"북만주-동북의 가장 기본적 전략근거지 마련을 위해 허장(合江 합강)과 무단장(牡丹江 목단강) 지구를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가장 이른 기간 안에 이 지역 확보가 급선무다. 그런 연후에 철저하게 토비들을 소탕하면서 드넓은 지역의 농민들을 규합해 장기투쟁을 위한 공고한 후방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동북국과 동북민주연군은 창춘, 선양 등 대도시를 내주고 국민당군에 일패도지를 당해 중소도시와 향촌으로 퇴각했다. 세 불리한 동북국과 민주연군은 하얼빈 동남방 쪽으로 밀려났다. 국민당군과 싸우기에도 버겁던 민주연군은 날뛰는 토비(마적)들과도 겨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해서 토비소탕 동북국 확대회의가 열린 것이다. 회의가 끝난 뒤 동북국과 민주연군총사령부는 각 부대에 지시전통을 내렸다. (주석 252)

 

"각 사단과 여단은 3분의 1 병력을 추려내 토비소탕전을 벌인다. 아울러 토비소탕 임무를 맡은 각 부대는 경중과 완급을 조절하고, 병력집중과 추격을 아우르는 등의 작전계획을 짜 온갖 못된 짓을 하는 토비를 발본색원 한다."

 

대규모 토비소탕전이 벌어졌다. 토비소탕전이 후방근거지를 안정화시키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무단장 군구 부사령관 류시옌취옌(劉賢權 유현권)은 주력을 이끌고 헤이룽장성 무링(穆棱 목릉), 수이양(綏陽 수양)지구로 쳐들어가 수년 동안 이 일대를 소굴로 한 왕즈린(王枝林 왕지림), '우자싼후(吳家三虎 오가3호)' 마적집단을 쓸어버렸다. 토비 800여 명을 사상(死傷)시키고, 둥닝(東寧 동령), 수이양 등을 해방시켰다.

무단장에서 수이펀허(綏芬河 수분하)까지의 교통로를 원활하게 뚫었다. 8월 23일, 동북민주연군 359여단은 허장군구(合江軍區 합강군구), 무단장 군구 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부대를 3로로 나눠 둥안(東安 동안), 미산(密山 밀산)일대의 최대 토비집단인  셰원둥(謝文東  사문동)의 산채를 3면에서 포위 공격해 들어갔다.

 

이틀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00여 명의 토비를 전멸하자 살아남은 패거리들이 바오칭(寶淸 보청), 푸진(富錦 부금)지구로 달아나 숨었다. 동북민주연군은 또 후린(虎林 호림), 라오허(饒河 요하)일대에서 날뛰던 '우자싼후' 마적떼를 일거에 섬멸했다. 동북 민주연군은 8월 24일 밤 국민당군과 협동작전으로 민주연군을 토벌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한 일본 관동군 장군출신 장펑페이(姜鵬飛 강붕비) 패거리를 일망타진했다. 장펑페이는 일본이 항복하자 동북일대에서 토비들을 끌어 모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해 동북지역을 주름잡고 있었다.

장펑페이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중장계급을 수여받고 국민당군 육군 신편 27군 군단장이 된 거물이다. 국민당군과 안팎협공 작전을 펼치기 위해 하얼빈에 숨어들어와 계획을 짜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민주연군에 붙잡힌 것이다. 민주연군은 이어 리화탕(李華堂 이화당) 등 크고 작은 토비 떼를 섬멸해 하얼빈, 무단장지역 근거지를 안정화 시키고 국민당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준비에 들어갔다. 

250)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51) 作曲家 鄭律成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52) 解放戰爭初期東北的大剿匪 理論頻道 新華網

----------------------------------------------------------------------------------------------------------------------------------

 

117. 국민당군 이어지는 패배에 장제스 격노

 

 

마오는 동북전구(戰區) 총사령관 린뱌오(林彪 임표)에게 동북 민주연군이 추계공세를 끝낸 1947년 10월 15일 전보를 보냈다. 장제스의 동북지원이 힘든 만큼 주력군을 베이닝(北寧 북녕), 핑수이(平綏 평수) 양선(兩線)으로 돌려 선양(沈陽 심양)-진저우(錦州 금주)간, 진저우-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간, 산하이관-톈진(天津 천진)간, 톈진-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간, 베이핑-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간의 지구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린뱌오는 부대가 관내(산해관 서쪽)로 진격해 공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지둥(冀東 기동; 허베이 동쪽지역) 공격작전을 1948년 봄으로 미뤄줄 것을 건의하는 전보를 마오에게 보냈다. (주석 253)

 

“우리군은 진저우에서 선양일대의 강물이 결빙되는 시기를 틈타 대병력을 투입해 진저우-선양 작전을 펼 계획이다. 대도시 공격을 위해 우리는 내년 4, 5월에 다시 1백 개 신병단으로 확대해 지둥과 핑수이 작전을 펴려고 한다. 린(林; 린뱌오), 뤄(羅; 뤄룽전), 류(劉; 퓨야러우)는 현재 대군이 출병하면 보충공급이 곤란해져 대군이 아닌 즉, 병력을 분산해 소전투를 벌여하는데 그도 여의치 않다. 대규모 전투는 병력이 충분치 않다. 잠시 출병을 보류해 내년 강물이 결빙됐을 때 형세를 보아 작전을 펼치는 게 좋을 듯하다.”

 

동북 전구(戰區) 국민당군이 대도시에 병력을 집중해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린뱌오가 전투를 할 경우 4, 5개 사단을 투입해 공격하거나 6, 7개 사단으로 대규모 운동전을 펼쳐야 했다. 당 중앙의 승인을 받은 린뱌오는 부대 정돈과 훈련, 확충을 통해 추계작전 당시 22만 명의 병력을 근 74만 명으로 크게 증가시켰다.

군대의 병력이 동북지구에서 처음으로 국민당군의 병력을 초과해 되레 25만 명 정도 많았다. 동북 민주연군이 추계공세를 펼쳐 철도교통을 끊어 대도시에 둥지를 틀고 있는 국민당군은 식량이 끊기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병력보충도 큰 장애에 부닥쳤다. 제일 큰 문제는 부대의 사기가 떨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12월 초 동북지구 기온이 섭씨 영하 20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이 꽁꽁 얼어 무거운 장비를 실은 차들의 통행이 가능했다. 민주연군은 12월 15일을 전후해 두터운 솜옷과 우라차오(烏拉草 오랍초)를 넣어 만든 신발을 신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진군한 2군단과 7군단이 선양 이북의 파쿠(法庫 법고)를 포위했다. 7군단은 파쿠 서쪽의 장우(彰武 창무), 8군단은 장우 이남의 신리둔(新立屯 신립둔)을 각각 포위했다.
 
1, 3, 6군단이 파쿠, 신민(新民)과 선양 사이를 진격하고, 4군단이 선양 근처를 압박했다. 9군단은 선양 서북쪽의 신민부근에 당도했다. 국민당 동북 군정장관이자 참모총장인 천청(陳誠 진성)은 아연 긴장해 티예링(鐵嶺 철령)에 주둔한 신6군단, 신22사단이 파쿠를 지원하도록 했다. 신22사단이 린뱌오 부대를 대적해 전투의 실마리를 찾도록 했다.

 

린뱌오는 2군단과 7군단 주력이 신속하게 파쿠 동남쪽으로 진격해 양쪽에서  협공해 진공하도록 명령했다. 3군단은 우회해 티예링으로 진격해 국민당군 신22사단의 퇴로를 끊어 신3군단 14사단과의 연계를 막도록 했다. 천청은 12월 26일 국민당군 신22사단이 톄링과 파쿠 사이에 있는 전시바오(鎭西堡 진서보), 냥냥먀오(娘浪廟 낭낭묘) 일선으로 나아가 파쿠 동쪽의 민주연군 2군단을 공격하도록 했다. 

민주연군 2군단은 반격을 하면서 5사단을 국민당군 옆구리로 우회하도록 했다. 국민당군 22사단은 급히 후로(後路)가 끊길 것을 우려해 티예링으로 철수했다. 천청은 12월 20일 급히 창춘을 방어하고 있는 신1군단 50사단과 53사단, 스핑을 지키고 있는 71군단 87사단, 91사단, 카이위안(開原 개원)을 방어하고 있는 53군단 103사단과 30사단, 랴오난(遼南 요남; 요동 남쪽)의 52군단 2사단을 각각 선양과 티예링지구로 진공해 린뱌오 부대가 압박하고 있는 선양의 군사위협을 풀도록 했다. 

 

린뱌오는 국민당군의 이런 대규모 군사이동을 줄곧 기다리다 성동격서(聲東擊西)와 출기불의(出其不意) 전략으로 2군단과 7군단이 서쪽으로 진출해 장우(彰武 창무)를 공격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국민당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썼다. 장우는 선양 이북의 철도상의 중요거점이었다. 국민당군 49군단 79사단의 3개 연대가 지키고 병력은 1만 명 남짓했다.

 

12월 28일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5시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장우성 국민당군 수비군 1만여 명이 궤멸했다. 49군단 79사단 소장인 부사단장 리포타이(李佛態 이불태) 등 7000여 명이 생포됐다. 이것은 린뱌오 부대가 처음으로 낮에 도시를 공격한 전투로 이후 동북 민주연군은 도시를 공격할 때 대부분 낮에 전투를 벌였다. 장우전투가 막 끝난 뒤 린뱌오는 1, 8, 9군단이 베에닝(北寧 북녕)으로 계속 전진해 진저우와 선양 간의 교통로를 철저하게 절단하도록 공격명령을 내렸다. 
 
천청은 린뱌오 부대가 사상자가 많아 다시 전투를 벌이기 어렵다고 오판했다. 그래서 파쿠 이남과 린뱌오 주력부대에 병력을 배치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국민당군 총 5개 군단이 동쪽 티예링과 서쪽 신민에서 랴오허(遼河 요하) 양안을 따라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정면 부채꼴 모양의 진을 펼치며 진격했다. 천청 대군이 진공한 이날은 1948년 1월 1일, 원단(元旦)이었다.

 

앞서 동북 민주연군 총사령부는 12월 30일 오후 5시 ‘동북민주연군 총사령부를 1948년 1월 1일부터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 사령부’로 이름을 바꿔 약칭인 ‘동쫑(東總; 동북군구 총사령부)’을, ‘동사(東司; 동북군구 사령부)’로 변경했다. 린뱌오는 천청의 3로 대군 중 좌로군의 신5군단의 진격이 빨라 돌출하고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동북 군구 사령부는 6군단이 신5군단을 가로막아 전투를 벌이며 유인전술을 펴도록 했다. 2, 7군단은 전력을 다해 신리둔 북, 서쪽 지구에 도착한 뒤 공격명령에 대기하도록 했다. 3군단은 신5군단의 우익에 뛰어들어 신민으로의 퇴로를 끊어 버리고 10, 1군단, 독립 2사단, 4군단이 공동으로 국민당군 우, 중 양로와 좌로 신5군단의 연계를 차단하도록 했다. 8, 9군단은 랴오중(遼中 요중; 요동 중부)지구에서 신민(新民)서쪽으로 되돌아와 명령을 기다렸다 참전하도록 했다. (주석 254)


황푸군관학교 4기생인 국민당 신5군단장 천린다(陳林達 진림달)는 부대를 이끌고 출동할 때 동북전장에서 첫 번째로 생포당하는 국민당 군단장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48년 1월 1일, 국민당군 신5군단은 선양(沈陽 심양)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쥐류허(巨流河 거류하)역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천린다가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원(雪原) 뿐이었다. 천린다는 천청으로부터 새해 첫날 출동명령을 받고 기분이 언짢았다. 천린다는 이 작전을 기껏해야 선양 부근의 공산군 주력을 먼 곳으로 쫓아내는 정도로 여겼다. 천청은 천린다가 출발할 때 10일 간의 식량과 탄약을 준비하고 10일을 넘기지 않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천린다는 각 부대가 쥐류허 역을 출발할 때 현지 주민들의 트럭을 이용하고 3일치의 식량과 탄약을 준비해 행군하도록 했다. 남은 식량과 탄약은 쥐류허 역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 차로 운송할 요량이었다. 신5군은 준비를 끝낸 뒤 도로를 따라 쥐류허 북쪽 공주둔(公主屯)으로 행군했다. 다음날 천린다가 부대를 이끌고 안푸둔(安福屯 안복둔)에 도착했을 때 먼저 공주둔과 황자산(黃家山 황가산)으로 출발했던 선봉부대가 공산당군의 저지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5군단을 막아 공격하면서 유인작전을 책임진 동북 군구사령부 6군단은 신5군단의 계속적인 집단돌격을 완강하게 저지했다. 3일째의 저지 공격전은 중요했다. 공산당군은 이를 위해 2, 3, 6, 7군단과 포병 1, 2, 4여단을 급히 공주둔으로 진군시켰다. 나흘째 되던 날 신5군은 가로막고 있는 6군단에 공격의 강도를 높여 여러 차례 맹공을 폈으나 진전이 없었다. 황혼 무렵 천린다는 린뱌오의 대부대가 접근해 오는 것을 알고 중포(重炮)로 6군단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돌파하도록 했다. 하지만 6군단이 완강하게 저항해 뚫고 나갈 수 없었다.

 

5일 새벽녘에 신5군단은 공주둔과 서남지구에서 포위당했다. 천청은 신5군에게 진지를 고수하고 증원군을 기다리도록 했다. 안푸둔에서 고립된 천린다가 고수하느냐, 철수하느냐 고민하고 있을 때 천청은 각로 증원부대들이 ‘완강한 전진’을 주장하는 보고를 올려 여전히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린뱌오는 공격임무를 2군단에 맡겼다. 2군단 부사령관 우신취안(吳信泉 오신천)이 먼동이 틀 때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우물쭈물하던 천청은 6일 밤 신5군단이 선양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7일 날이 밝자마자 공산군은 총공격을 시작했다. 60여 문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원자타이(聞家臺 문가대), 황화산(黃花山 황화산) 두 개 마을에 집결한 신5군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어 2, 3군단이 다른 지역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신5군은 궤멸되고 군단장 천린다는 생포됐다. 또 195사단 사단장 셰다이쩡(謝代蒸 사대증), 43사단 사단장 류광톈(留光天 류광천) 등 1만3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2만여 명의 신5군은 완전히 섬멸됐다. 기진맥진한 천청은 랴오양(遼陽 요양)을 지키는 52군단 주력과 스핑(四平 사평)을 방어하는 71군단 주력을 긴급히 선양으로 불러들여 방어하게 한 뒤 위병으로 쓰러졌다.

 

장제스가 1월 10일 급히 선양(沈陽 심양)으로 날아왔다. 국민당군 동북 임시병영에서 사단장급 이상 장령들이 참석한 군사회의를 열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장제스는 “너희들 중 절대다수가 황푸군관학교 학생들이다. 당년의 황푸 정신은 모두 어디로 갔나? 그야말로 부패다!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한다!”고 통렬하게 질책했다. 장내의 장군들은 겁에 질려 숨소리조차 쉬지 않는 듯했다. 

장제스는 몇 십분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장제스는 랴오야오샹(廖耀湘 요요상), 리타오(李濤 이수)를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해 죽음을 불사하고 구원하지 않아 신5군이 전멸했다고 명령불복종으로 질타했다. 회의 참석자들의 예상을 깨고 뜻밖에도 랴오, 리 두 사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천린다로부터 증원요청의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다며 자신들을 극구 변명하고 나섰다. (주석 255)

동북 군정장관 천청이 곧바로 반박하자 두 사람도 지지 않고 대들어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런 모습은 종전에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천청이 의기소침해 일어나 “신5군이 소멸한 것은 완전히 내 스스로의 지휘 무능 때문이다. 다른 장령들은 책임이 없다. 국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장제스는 애초 랴오, 리 두 사람을 처벌하려 했으나 천청이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전투 중이므로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공과를 따지겠다”고 회의를 정리했다. 장제스가 회의장을 나가자 천청이 일어나 몇 마디 자신을 자책한 뒤 “선양 보위를 결심했다. 만약 공산당군이 선양을 공격한다면 나는 선양과 함께 하겠다. 최후에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회의가 끝난 뒤 장제스는 중요결정을 내렸다. 산둥에 있는 54군단의 두 개 사단을 선양으로 차출하는 한편, ‘동북 비적(공산당)소탕 총사령부’를 만들었다. 또 진저우(錦州 금주)에 ‘지러랴오(冀熱遼 기열료; 화북-열하-요동지역)’변계지구 기구를 만들어 동북과 화북 두 개 지구를 연계하도록 했다. 

 

 

 

린뱌오(林彪 임표) / 천청 [陳誠(진성), 1898.1.4~1965.3.5]  타이완의 정치가, 군인. 1924년 황푸 군관학교 교관이 되어 장제스[蔣介石]와 알게 된 후로 행동을 같이하였다. 전후의 국공내전에서 참모총장으로서 공산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타이완으로 탈출하였다. 1954년 이후 부총통을 연임하고, 1957년 국민당 부총재를 맡는 등 한평생 장제스를 보좌했다.

 


장제스는 1월 17일 육군 부총사령관 웨이리황(衛立煌 위립황)을 동북 임시병영 부주임 겸 ‘동북 비적소탕 총사령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또 정동궈(鄭洞國 정동국), 판한졔(范漢杰 범한걸), 량화성(梁華盛 양화성), 천티예(陳鐵 진철), 쑨두(孫渡 손도)를 각각 비적소탕 부사령관에, 자오자샹(趙家驤 조가양)을 참모장, 펑졔(彭杰 팽걸)를 부참모장으로 각각 임명했다. 비적소탕 부사령관 판한졔를 ‘지러야오 변계지구’ 사령관을 겸하도록 했다.

 

장제스가 난징(南京 남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동북전황의 비보가 날아왔다. 린뱌오 부대가 1개월 가까이 포위하고 있던 신리둔 지역의 국민당군 49군단 26사단을 궤멸했다는 내용이었다. 26사단 장병 9천여 명은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고 동상(凍傷)환자가 수두룩해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갑자기 공산당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1월 26일, 사단장 펑공잉(彭鞏英 팽공영)은 부대를 나눠 신리둔 동북, 서북과 서남 등 3개 방향으로 포위돌파를 시도했다. 펑공잉이 이끄는 5백여 명만 푸신(阜新 부신)으로 달아났을 뿐 나머지는 모두 포로가 됐다.

 

천청(陳誠 진성)은 음식이 목에 걸리고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듯 불안해하다 비적소탕 부사령관 정동궈를 데리고 난징의 장제스를 찾아갔다. 천청은 장제스에게 또다시 자신의 지휘 탓이 아니라 장령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발병을 털어놓았다.  변명만 늘어놓는 천청의 얘기를 들은 장제스는 “그대는 마음 놓고 병이나 치료해라.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천청이 고위 지휘관 회의 때 많은 장령들 앞에서 “선양과 생사를 함께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권총으로 자살 하겠다”는 말은 그의 병의 근원이 되었다. 

장제스는 천청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천청은 마침내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1948년 2월 5일 천청은 동북 군정(軍政)을 맡은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풀이 죽은 채 선양을 떠났다. 국민당내 일각에서 “천청을 죽여 천하(나라와 인민)에 사죄해야 한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천청은 상하이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국방부 참모총장직도 버렸다. (주석 256)

253) 林彪鏖戰東北國民黨大喊“殺陳誠謝天下 時政頻道 新華網 解放戰爭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
254) 林彪鏖戰東北國民黨大喊“殺陳誠謝天下” 時政頻道 新華網
255) 林彪鏖戰東北國民黨大喊“殺陳誠謝天下” 時政頻道 新華網 解放戰爭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
256) 解放戰爭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  林彪鏖戰東北 國民黨 “殺陳誠謝天下”  時政頻道  新華網
----------------------------------------------------------------------------------------------------------------- 

 

 

118. 마오 죽을 고비에도 "담배 한대 달라"

 

 

동북 인민해방군의 동계공세 1단계 작전은 끝났다. 동북 해방군은 이 작전에서 국민당군 5만여 명을 전멸시키고 베이닝 철로를 끊어버려 국민당군은 동북의 요새 선양의 문호인 동카이(洞開 동개)만 굳게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인민해방군은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기온이 늘 영하 섭씨 40도까지 떨어져 땅이 꽁꽁 얼어붙은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수많은 장병들이 동상에 걸렸다. 8천여 명이 동상에 걸렸고 그중 3분의 1이 심한 동상으로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장애인이 됐다. 칼바람이 부는 동토지대의 참혹한 전쟁으로 공산당군도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싼베이(陝北 섬북)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중앙 영도자와 기관요원들은 후종난 군에 계속 쫒기고 있었다. 앞에는 위린(楡林 유림)에서 남하하는 후종난 군이 압박하고, 뒤에서는 류칸(劉戡 유감)의 7개 여단이 추격하고 있었다. 후종난 군 양로의 10만 병력이 마오의 중앙기관을 우딩허(無定河 무정하)와 황허(黃河 황하) 사이의 협소한 지역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오의 중앙기관이 징얼핑(井兒坪 정아평)에 도착했을 때 류칸 부대가 60리 지점까지 추격한 뒤 숙영했다. 마오는 “그들이 쉬면 우리도 쉬자”고 했지만 북로(北路)의 적들이 미즈청(米脂城 미지성) 북쪽 전촨바오(鎭川堡 진천보)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또다시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마오의 대오는 우룽푸(烏龍浦 오룡포)에서 1박을 하고 동쪽을 향해 하염없이 발길을 내디뎠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번개가 번쩍거리는 악천후를 뚫고 차오좡(曹庄 조장)에 도착해 파괴된 야오동(窯洞 요동)을 찾아 비를 피했다. 한 주민이 등불을 들고 나와 “황허가 바로 앞에 있다.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했다. 대오의 7, 8명이 일제히 “주석이 적을 패퇴시키지 않으면 결코 황허를 건너지 않겠다고 했다”며 도강을 반대했다. 런비스가 비바람을 맞으며 뛰어왔다. 런비스는 “부대 행군방향은 불변이다. 계속 강을 따라 북상한다”고 말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섬광을 뿌리는 칠흑 같은 밤을 뚫고 내달렸다.

 

먼동이 틀 무렵 비가 그쳤을 때 부대는 자루허(葭蘆河 가로하) 변에 도착했다. 뒤에서 추격하는 후종난 군이 30리 떨어진 곳까지 따라붙고 대포소리가 온 산을 뒤흔들었다. 주위는 온통 물의 세계로 둘러싸인 데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운무가 온 산을 휘어 감았다. 오솔길도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릴 때 마오가 산꼭대기로 올라가자고 했다. 

기다시피 모두 산 정상에 올랐다. 푸르스름한 빛의 안개가 피어오르고 산 아래의 자루허가 마치 가느다란 실개천마냥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험산준령 사이로 반사된 햇볕에 황허의 물비늘이 가없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잠시 적의 추격도 잊고 주위의 빼어난 풍광에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황허송(黃河頌 황하송)’을 부르자 모두가 큰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주석 257) 

“우리는 산꼭대기에 서서 도도히 굽이쳐 흐르는 황허를 바라본다. 동남쪽으로 세차게 흐른다-.”

 

1948년 3월 23일. 마오쩌둥과 중앙의 부대들이 싼베이 황토 고원지대를  370여 일 전전하며 도망쳐 다닌 마지막 날이다. 마오는 1년 전인 1947년 3월 18일 저녁 후종난 군이 옌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철수한 뒤 싼베이 지역 곳곳으로 숨어 다니며 전국의 해방전쟁을 지휘했다. 세계 전사상(戰史上) 가장 작고 초라한 ‘사령부’인 싼베이의 토담집과 움집의 등불 아래서 인민해방전쟁을 지휘했던 나날을 일단락 짓는 날이다. 마오는 3월 21일 중앙기관 부대를 이끌고 야자거우(楊家溝 양가구)를 출발해 수이더(綏德 수덕), 자(葭)현  류자핑(劉家坪 유가평)을 거쳐 23일 우바오(吳堡 오보)현 촨커우(川口) 마을 남쪽에 있는 웬저타(園則塔 원칙탑) 나루터에 도착한 것이다.

 

마오와 중앙기관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황허를 건너 진수이(晉綏 진수;산시 수웬지역 )해방구로 떠났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이날 정오쯤 걸어서 웬저타 나루터에 도착했다. 마오는 황허 서안의 모래톱을 천천히 걸으면서 감개무량한 듯 주변 곳곳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때로 멀리 솟아있는 싼베이의 큰 산을 바라보는가 하면 때론 용솟음치며 솟구치는 황허를 바라보았다. 

 

 

시바이포의 마오쩌둥


13년간 자신을 보듬어 준 오랜 풍상을 겪은 황토고원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듯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수많은 부근 마을 주민들과 현 간부들이 마오와 중앙 부대원들을 환송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마오는 이들에게 석별의 인사를 했다.

 

“우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곳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미리 식사준비를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유격전을 하면서 바깥에서 식사하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나는 싼베이 인민 군중들이 우리들에게 잘 대해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싼베이를 떠나려고 합니다. 정말로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해방이 되는 그날, 우리들은 또 돌아와서 여러분들을 뵙고 싶습니다. 여러분, 싼베이의 향촌사람들, 감사합니다.”

 

마오는 나루터의 목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도 연신 뒤돌아보며 싼베이 마을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고별인사를 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각각의 배를 타고 황허 서안을 떠나 동쪽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뱃사공들의 곱고 낭랑한 메김 소리를 신호로 배가 천천히 나루터를 미끄러져 나갔다. 마오는 서안 쪽을 바라보며 일어나 한 손을 높이 들어 휘휘 내저으며 석별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황허의 물결이 세차게 솟구치며 흘러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배가 강 한복판을 지날 때 마오가 벌떡 일어나 동안(東岸)을 바라보며 참모장 예즈룽(葉子龍 엽자룡)에게 “어떤가, 싼베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주게!”라고 했다. 예즈룽이 일어나 “좋습니다. 한 장 찍겠습니다”라며 사진기를 들이댔다. 마오는 “좋아, 싼베이 사람들, 싼베이 산수를 찍어 좋은 기념이 되겠네”라며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황허를 건넌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중앙은 4월 11일 허베이성 푸핑(河北省 阜平 하북성 부평) 청난좡(城南庄 성남장)에 도착했다. 마오는 ‘진차지(晉察冀 진찰기;산시-차하얼-허베이지역)’ 군구사령관인 녜룽전(聶榮臻 엽영진)의 사령부 관사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했다. 저우와 런비스는 먼저 시바이포(西柏坡 서백파)로 떠났다. 5월 2일 이른 아침. 마오는 평소의 습관대로 새벽녘까지 일을 한 뒤 수면제를 복용하고 취침해 일어나지 않았다. 

녜룽전은 일찍 기상해 바깥 산책을 하고 사령부 안마당으로 들어오다 막 일어난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을 만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청난좡 북쪽의 산 정상에서 갑자기 경보사이렌이 울렸다. 마오의 비서 리인차오(李銀橋 이은교)는 가슴 졸이며 사령부 뜰 바깥마당으로 황급히 뛰어나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국민당군 정찰기 한 대가 청난좡 상공으로 날아와 선회하기 시작했다. 조금 뒤 멀리서 두 대의 비행기가 또 모습을 드러냈다.

 

비행기를 바라보던 리인차오는 B-25형 폭격기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챘다. 위기를 직감했다. 지금 마오가 자고 있는 집과 뜰 밖의 방공호까지는 30여 미터 떨어져있었다. 옌안에 있을 때 마오의 거소는 돌 속의 동굴 집으로 비교적 안전했다. 하지만 이곳은 일반 가옥으로 안전문제가 허술했다. 리인차오는 마오의 방으로 달려가 깨우려했으나 늦게까지 일하다 수면제를 먹고  자는 마오를 깨울 수도 없어 밖에서 가슴을 졸이며 서성거렸다. 이때 경호 소대장 옌창린(閻長林 염장림)이 살금살금 달려와 목소리를 낮추고 “왜 그래? 주석이 안 일어나?”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인차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멍청히 비행기만 쳐다봤다. 천만다행으로 3대의 비행기는 상공에서 몇 바퀴 빙빙 돌다 동북쪽으로 날아갔다. 리인차오는 비행기가 바오딩(保定 보정)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곧바로 폭격기가 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리인차오는 옌창린과 함께 장칭을 찾아가 상의했다. 장칭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녜룽전은 비서 판지성(范濟生 범제생)을 보내 이들과 상론토록 했다. 결론은 마오를 잠시 깨우지 않기로 했다. 리인차오와 옌창린은 호위조와 경호소대원들을 불러 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옌안에서부터 갖고 온 들것을 주변에 대기시켜 놓았다. 이들은 폭격기가 날아오면 들것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마오를 태워 방공호로 달려가도록 조처했다.

 

아침 8시쯤 되었을 때 북쪽 산꼭대기에서 또다시 방공 경보사이렌이 울렸다. 리인차오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다시 우물쭈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옌창린이 “펑쫑(펑더화이 애칭)이 말했던 것처럼 하자!”고 큰 소리로 말했다. 펑더화이는 마오가 옌안을 떠날 때 경호 소대장 옌창린에게 “긴급한 상황에서는 주석의 동의와 관계없이 무조건 들것에 태워 안전지대로 모셔야 한다. 

주석도 너희들을 양해할 것”이라며 마오의 안전문제를 신신당부한바 있었다. 녜룽전도 급히 달려왔다. 리인차오가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오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혼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녜룽전이 목소리를 낮춰 마오를 깨었다. (주석 258)

“주석, 적기가 폭격하러 옵니다. 빨리 방공호로 대피해야 합니다.”

마오는 잠결에 녜룽전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몸만 뒤척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리인차오가 마음이 급해 마오의 귀 쪽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주석, 주석,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떤 상황?”

깜짝 놀란 마오가 몸을 일으키며 몽롱한 눈으로 리인차오를 쳐다봤다.

“주석, 적기가 폭격하러 왔습니다! 조금 전에 3대의 적기가 와서 정찰하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방공경보가 또 울렸습니다. 폭격이 틀림없습니다. 빨리 방공호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옌창린이 큰소리로 보고했다. 리인차오가 강제로 마오의 팔을 들어 올려 낡은 솜옷을 입혔다. 마오는 많은 사람들이 방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사태를 직감했다. 그러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우선 담배 한 개피 갖고 와라.”
“주석, 늦습니다!”
“뭐라, 폭탄이라도 떨어졌냐?”

마오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핀잔을 했다.

“방금 전 정찰기는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이번에 오는 폭격기는 폭탄을 투하할 겁니다. 폭탄이 터지면 대피할 수 없습니다-.”
“폭탄투하가 뭐 그리 대단하냐? 우선 담배에 불좀 붙여 와라. 한 대 태우고 가자.” 

마오는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옌창린의 말을 끊었다.

“주석, 적기가 폭격하러 왔어요. 빨리 방공호로 가시지요!”

녜룽전이 보다 못해 급히 다시 말했다.

“괜찮다. 뭐 그리 대단하다고! 철 덩어리 몇 개 떨어뜨리는 것이다. 잘되었구만. 괭이 몇 개 만들어 개간하는데 쓰면 되겠네!”
“주석, 즉시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주석의 안전 때문입니다!”

녜룽전이 또다시 재촉했다. 마오는 침상에 앉아서 자신의 아래턱에 난 사마귀를 매만지고 리인차오를 쳐다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빨리, 빨리!”

리인차오가 대원들에게 서두를 것을 지시했다. 방문 앞에 있던 장칭은 연신 “비행기가 온다! 비행기가 온다!”고 외치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장칭은 계속 바깥에서 자지러지듯 “출발, 출발! 빨리, 빨리!”라고 소리쳤다. 상황이 긴박해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리인차오는 마오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마오를 일으켜 세웠다. 모두가 마오를 들어 들것에 태웠다.

“빨리 해, 빨리! 적기가 폭격하려 한다. 적기가 폭탄을 투하하려 한다!”

호떡집에 불난 듯 연신 녜룽전이 소리쳤다. 대원들이 마오를 태운 들것을 들고 방 바깥으로 몇 발짝 뛰어나갔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려 모두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아래 황토가 파헤쳐지면서 산지사방으로 흙덩어리가 튀었다. 동시에 “획-.”하는 둔탁한 소리가 귀를 찢었다. 마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몸이 얼어붙은 듯 멍청히 서있었다.

“아-.”

방공호로 대피한 장칭은 방공호 입구에서 이 모습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느님, 맙소사!”

그랬다. 3개를 묶은 폭탄이 그들 바로 앞에 떨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모두들 놀라서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몇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빨리 뛰어!” 소리와 함께 들것에서 내린 마오를 부축해 비호같이 방공호 쪽으로 돌진했다.

“빨리, 빨리!”
“적기가 또 폭탄을 떨어뜨린다!”

녜룽전과 자오얼루(趙爾陸 조이륙)가 외쳤다.

“놔라, 뛰지 않겠다!”

마오가 자신을 부축해 뛰는 4명의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 군구사령부 후문 뒤쪽 산기슭에 있는 방공호 가까이로 대피하고 있을 때 마오가 묵고 있던  집 뜨락에 폭탄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시커먼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괜찮다. 폭격 목표가 집이다. 우리들은 집에서 많이 떨어져 있다. 허둥댈 필요 없다.”

마오는 천천히 걸으면서 말했다.

“주석,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린인차오는 마음이 안 놓여 재촉했다.

“담배 좀 달라. 담배를 태우지 못했다.”

마오는 방공호 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여전히 담배 타령이었다.

이때 멀리 떨어진 곳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격을 끝낸 비행기들이 기수를 틀었다. 대원들이 군구사령부 건물 뜨락으로 돌아갔다. 마오가 대피할 때 3개 묶음의 폭탄이 떨어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창문의  유리가 다 깨지고 침상, 가재도구가 박살났다. 대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오쩌둥은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을 운 좋게 넘겼다. 마오가 겪은 가장 아찔한 순간이었다. 녜룽전은 마오의 안전을 위해 청난좡에서 15리 남짓 떨어진 화산촌(花山村)으로 거소를 옮겼다. 나중에 국민당군의 청난좡 폭격사건은 군구사령부에 잠입한 스파이가 위치정보를 전달해 일어난 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마오는 5월 27일 화산촌을 떠나 ‘중앙공위(中央工委)’가 있는 시바이포(西柏坡)로 향했다.

 

257)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58) 毛澤東一次最危險的境地 人民網 毛澤東遭遇最驚險的一次國民黨飛機轟炸 中國共産黨新聞網(在毛主席身邊20年 孫勇 著 中央文獻出版社)

-----------------------------------------------------------------------------------------------------------------

 

 

119. 마오 "최후 결전의 시기" 3대 전역 결심

 

 

당일 시바이포에 도착한 마오는 1년 동안 헤어졌던 주더, 류샤오치를 만나 ‘5대서기’는 반갑게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당 중앙을 3분했던 중앙전위, 중앙후위, 중앙공위는 모두 자동 폐지됐다. 시바이포는 1년 전인 1947년 6월, 중공중앙을 3분할 때 주더와 류샤오치가 통솔한 ‘중앙공위(中央工委)’가 자리 잡은 곳으로 해방군 총사령부가 있었다. 

시바이포는 허베이성 핑산(平山 평산)현에 있는 조그만 산촌으로 후퉈허(滹沱河 호타하)가 마을 앞을 빠르게 흘러가는 곳이었다. 후퉈허 서쪽으로는 높고 큰 타이항산맥이 흘러내린다.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유명한 일망무제의 화베이(華北 화북) 대평원이 가없이 펼쳐진다. 농투성이 70~80호가 둥지를 틀고 있는 조그만 산촌이다. 여기서 성도인 쓰자좡(石家庄 석가장)까지는 대략 9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마오에게 혁명투쟁 기간의 지휘소로 징강산과 옌안에 이어 3번째가 되는 장소였다. 이로써 시바이포는 중국혁명의 중심이자 중국 혁명전쟁의 최후 농촌지휘소가 됐다. ‘중국명운은 이 마을에서 결정됐다’, ‘신중국은 이곳에서 나왔다’는 글귀가 지금도 중공중앙 옛터 기념관에 나붙어 중국공산당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한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석 259)

 

 

 시바이포 (西柏坡)에 있는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의 기념 동상.

 

 

이즈음 공산당의 전국 각 전장(戰場)상황은 크게 호전되었다. 펑더화이가 이끌고 있던 서북야전군은 반격작전으로 후종난군을 대파해 옌안을 수복하고 남하하면서 바오지(寶鷄 보계)를 공격하고 있었다. 쉬샹쳰 사령관이 통솔하는 화베이 제1병단은 산시 남쪽지역을 점령한 뒤 린펀(臨汾 임분)으로 쳐들어가 성도 타이위안청(太原城 태원성)을 포위해 고립시켰다. 류보청-덩샤오핑의 중원야전군과 천이-수위가 이끄는 화둥야전군은 합동작전을 펼쳐 뤄양, 카이펑 등 중원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해 광활한 중원지역을 손에 넣었다. 

수위의 화둥야전군 내선병단은 잇따라 쟈오지시옌(膠濟線 교제선)과 진푸시옌(津浦線 진포선)을 공격해 성공, 산둥의 국민당군은 지난(濟南 제남), 칭다오(靑島 청도), 린이(臨沂 임기) 등 소수 거점 도시만 지키고 있었다. 린뱌오가 이끄는 동북야전군은 전면 대반격에 들어가 15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스핑(四平 사평), 잉커우(營口 영구) 지린(吉林 길림) 등지를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선양, 창춘, 진저우(錦州 금주) 등 대도시에 고립된 채 증원군만 목이 빠져라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타이항산 동쪽기슭의 시바이포는 중공중앙의 총지휘부로 해방전쟁을 갈무리해 중국의 명운을 바꾼 랴오선(遼沈 요심; 랴오동-선양), 화이하이(淮海 회해), 핑진(平津; 베이핑-톈진) 3대전투의 최고사령부였다. 1948년 6월 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의 전력은 현격한 변화를 보였다.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20만 명이나 증가해 280여만 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국민당군은 430만 명의 병력이 3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전선 병력은 170여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인민해방군 병력은 국민당군에 별로 뒤지지 않았지만 무기, 장비부문에서는 여전히 열세였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2년 동안 전투를 하면서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무기도 국민당군의 현대화 장비를 다량 노획해 대폭 강화했다. 강대한 포병과 공병을 만들어 요새 공격능력을 크게 키웠다. 쓰자좡, 스핑, 카이펑 등 전투에서 공격능력을 축적해 운동전뿐만 아니라 진지전(陣地戰) 능력도 배양했다. 해방군은 전투틈새를 십분 활용해 군사기술과 전술을 개발하고 해방구의 농촌에서 대거 병력을 충원했다. 

국민당군의 포로들이 정치교육과 심사를 통과한 뒤 스스로 자원하는 사례도 늘어나 병력보충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해방구 면적이 크게 확대돼 235 평방킬로미터로 전 국토면적의 4분의 1에 이르렀다. 인구도 1억6천 명으로 증가해 전국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해방구는 기본적으로 토지개혁을 완성해 생산성을 제고하고, 군중들의 혁명 적극성을 크게 제고시켜 후방을 더욱 공고하게 다졌다.

 

공산당은 전국 범위 내에서 인민혁명 통일전선을 더욱 확대시켰다. 국민당군은 계속 패퇴하면서 ‘전국방어’와 ‘분구(分區)방어’ 대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점선(點線)을 지키는 ‘중점방어’ 전략개념으로 바꿔 2선 부대를 확충하는 등 소극 전투자세가 되었다. 국민당군의 전략 집단군은 이미 서북, 중원, 화둥, 화베이, 둥베이(東北 동북) 등 5개 전장에서 인민해방군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국민당군 동북전장을 책임 맡은 웨이리황(衛立煌 위립황)집단군은 병력이 48만 명으로 창춘(당시 2개월 동안 포위당하고 있었음), 선양, 진저우 3개 지구에 배치되었으나 고립된 상황이었다. (주석 260) 

 

화베이(華北 화북)전장의 60여만 대군의 국민당군은 핑수이시옌(平綏線 평수선)이 지나는 구이수이(歸綏 귀수),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와 베이닝시옌(北寧線 북녕선)이 지나는 베이핑, 톈진, 탕산(唐山 당산),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 등은 탕구(塘沽 당고)항에 의존하면서 해상보급으로 버겁게 버티고 있었다. 타이위안(太原 태원)성은 겹겹이 포위당해 외로운 처지가 됐다. 류즈(劉峙 유치)가 이끌고 있는 60만 병력의 화둥(華東 화동) 집단군은 북쪽전선 지원을 하지 못하다가 지난이 점령당한 뒤에는 쉬저우(徐州 서주)를 중심으로 집중 배치됐다. 

서쪽으로 상치우(商丘 상구), 동쪽으론 롄윈(連雲 연운)항의 룽하이시옌(隴海線 롱해선) 및 남쪽으로 방부(蚌埠 방부)의 진푸선(津浦線 진포선)에서 화둥해방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국민당군 75만 대군을 통솔하는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 중원 집단군은 핑한시옌(平漢線 평한선) 남단 및 한커우(漢口 한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서북전장의 후종난 집단군 35만 병력은 옌안에서 패퇴해 시안(西安 서안) 중심의 관중(關中 관중)일원에 배치됐다. 이 5개 전장(戰場) 이외에 36개 여단 23만 여명의 후방병력은 인민유격전으로 기동작전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시바이포(西柏坡 서백파)에서 인민해방전쟁을 총지휘하던 마오는 전국 전장터의 상황을 예의 분석하고 전략전술을 다듬으며 최후결전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랴오선(遼沈 요심; 랴오닝-선양지역), 화이하이(淮海 회해; 쉬저우를 중심으로 한 회수이북과 해주일대의 지역), 핑진(平津 평진; 베이핑-톈진지역) 3대 전역(戰役; 전략목적 실현을 위해 통일작전 계획에 따라 일정한 방향과 시간 안에 벌이는 전투)을 입안해 국민당군과 대회전(大會戰)을 벌이기로 했다. 

이 3대 전역의 대회전은 1948년 9월 12일부터 시작돼 4개월 19일 동안 해당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정규군 144개 사단(여단), 비정규군 29개 사단 총 154만여 명을 전멸시켰다. 이 기간 동안 인민해방군은 다른 지역에서도 대량의 국민당군을 섬멸했다. 인민해방군은 내전 2년 동안 월 평균 8개 여단 안팎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내전 3년차인 이때 월 평균 38개 여단을 섬멸, 공산당군의 전투력이 국민당군을 훨씬 압도하고 있었음이 보여진다. 이 3대 전역은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 정예부대를 겨냥해 승리함으로써 이후 대단히 빠르게 국민당군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의 명운을 가른 3대 전역의 전초전은 1948년 9월 인민해방군 화둥(華東 화동)야전군이 산둥성 성도인 지난(濟南 제남)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259) 西柏坡 成爲中國共産黨的一處心靈故鄕 新華網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60)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秘密何在? 共産黨爲什麽能3年戰勝國民黨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

 

 

120. 공산당-국민당 지난성 놓고 '질 수 없는 싸움'

 

 

고도(古都) 지난(濟南 제남)은 산둥성의 성도(省都)이자 교통의 요지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북쪽으로는 황허(黃河 황하)에 기대고, 남쪽으로는 크고 작은 많은 산에 의지하는 지리적 위치로 지난고성(古城)은 군사요새(要塞)로 거듭났다. 지난 성안에는 왕야오우(王耀武 왕요무)가 이끄는 9개 정규여단, 5개 보안여단과 특수부대 등 근 10만 병력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또 남쪽에 치우칭취안(邱淸泉 구청천), 리미(李彌 이미)와 황바이타오(黃百韜 황백도)의 3개 기동병단 17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단 지난이 공격을 받으면 수시로 이들 기동병단이 북쪽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구조였다. 마오는 애초 7월 16일 화둥(華東 화동)야전군 사령관 수위(粟裕 속유)에게 전보를 보내 지난 공격을 재촉했다. 수위는 불안했다. 세밀하게 작전계획을 검토한 결과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고 부대를 정비할 때라고 판단했다. 수위는 중앙 군사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앞으로의 작전계획과 함께 장병들이 쉬면서 부대정비를 할 수 있는 1개월의 말미를 줄 것을 건의했다. 그런 연후에 화둥야전군의 주력을 집중 배치해 지난을 공격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중앙 군사위원회는 수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1개월의 부대 정비기간을 주되 끝난 이후의 작전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

 

수위는 중원야전군 주력이 신양(信陽) 또는 난양(南陽 남양), 한수이(漢水 한수) 유역으로 진격해 국민당군 황웨이(黃維 황유) 12병단의 남하를 이끌어내  북쪽지원을 어렵게 만들고, 천셰(陳謝 진사) 병단이 정저우(鄭州 정주) 부근에서 공세를 펼쳐 국민당군 쑨위안냥(孫元良 손원량)의 16병단이 동쪽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작전계획을 건의했다.

 

마오는 수위의 2개 군단이 지난을 공격하는 데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수위의 작전계획에 이의를 제기했다. 마오는 윈허(運河 운하) 양안에 병력을 매복해 전투하는 '매복전장' 설치를 제시했다. 수위는 군사위원회 방침을 따르되 병력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쑤베이(蘇北 소북; 장쑤성 북쪽지역)병단 주력병력의 참전을 요구했다. 

중앙 군사위원회는 8월 22일 쑤베이 병단 2개 여단을 제외하고 2개 군단과 1개 여단병력 모두 북상해 전투에 참가하도록 명령했다. 마오는 8월 25일 수위와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에게 전보를 보내 양병(養病) 중인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를 지난성 공격의 공성(攻城)부대를 지휘하도록 지명했다. 마오가 쉬스여우를 지목한 것은 물불 안 가리는 맹장(猛將)인 그의 용맹 분투의 작전기풍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주석 261)

 

쉬스여우는 1906년 2월 후베이성 마청(麻城 마성)현 쉬자와(許家窪; 현재 허난성 신현 쉬와)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무술을 배우기 위해  송산(嵩山 숭산)의 샤오린스(少林寺 소림사)에 들어가 8년간 18반 무예를 익혔다. 추녀와 벽을 나는 듯이 넘나드는 무예 비첨주벽(飛檐走壁)을 터득했다. 고향에 돌아갔다가 악질지주를 때려죽인 뒤 ㅤㅉㅗㅈ기는 몸이 되어 이곳저곳 유랑생활을 하다 직계 군벌 우페이푸(吳佩孚 오패부) 부대에 들어가 군인이 됐다. 

1926년 우창(武昌) 국민혁명군 독립 제1사단1연대 중대장으로 있다 9월에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1927년에 중국공산 당원으로 전환한 쉬스여우는 1932년 홍4방면군 제4군 제12사단 34연대장을 역임했다. 장제스군이 '어위완쑤(鄂豫晥蘇 악예환소; 후베이-허난-안후이-장쑤지역)' 소비에트지구 포위 소탕전을 벌일 때 7차례에 걸쳐 결사대원으로 전투에 나섰고, 두 번 결사대 대장을 맡을 정도로 용맹했다. 1935년 홍4군 군단장이 되어 장궈타오가 이끈 홍4방면군 장정에 참가했다.

 

1936년 장궈타오와 함께 싼베이 옌안으로 온 뒤 그 해 말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군정대학 교무부 부부장에 임명됐다. 이때 당 중앙에서 장궈타오가 비판을 당하자 회의와 불만을 갖고 옌안을 떠나 쓰촨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일 준비를 하다 적발돼 8개월 동안 당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항일전쟁 후 1938년 8로군 제129사단 386여단 부여단장으로 핑위안(平原 평원)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왕야오우 (王耀 武-왼쪽) 쉬스여우 (許世友)

 

 

1940년 8로군 산둥군단 제3여단장, 군단 참모장을 거쳐 1942년 쟈오둥(膠東 교동)군구 사령관에 임명됐다. 1947년 화둥야전군 제9군단 사령관으로 우라이, 멍냥구 전투에 참가한 뒤 화둥야전군 동선병단(東線兵團; 산둥병단) 사령관에 임명됐다. 쉬스여우는 탄쩐린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쟈오둥 보위전과 저우좡(周庄 주장), 옌저우(兗州 연주)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가 양병 중 마오의 직접 지명으로 지난전투 공성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명령을 받은 쉬스여우는 급히 산둥병단 사령부에 부임했다. 쉬스여우는 지난 공격의 핵심으로 소를 잡는 것처럼 전광석화로 급소에 칼을 꼽는 이른바 ‘소잡는칼 전술(牛刀子戰術 우도자 전술)’을 쓰기로 했다.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동, 서 양쪽을 공격하면서 날카로운 칼로 혈로(血路)를 열어 방어하는 국민당군의 심장을 사납고 거칠게 도려낸다는 전술이었다. 쉬스여우는 지난성을 공격하는 각 부대에 “곤란하다거나 변명은 안 된다. 각자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때든지 공격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한편 장제스는 ‘지난이 안정돼야 쉬저우(徐州 서주)가 안정되고, 쉬저우가 안정돼야 중원(中原)이 안정된다’는 것을 폐부 깊숙이 느끼고 있었다. 1947년 2월 우라이(蕪萊 우래)전투에서 패한 뒤 장제스는 지난을 직접 찾아가 지난 방어사령관 왕야오우(王耀武 왕요무)에게 “지난은 정치, 군사, 지리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지난을 반드시 지켜야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대가 책임져야 한다”며 철통방어를 지시했다.

 

9월 초, 장제스는 화둥야전군이 지난(濟南 제남)방향으로 이동하며 병력을 집결한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칭다오(靑島 청도)를 지키고 있는 정편 74사단 (멍냥구 전투 이후 새로 창건) 57여단과 쉬저우를 수비하고 있는 정편 83사단 19여단 병력을 긴급히 항공기로 지난에 수송토록 했다. 또 지우칭취안(邱淸泉 구청천)의 제2병단을 허난성 북쪽 상치우(商丘 상구)일대에 집결시키고, 황바이타오(黃百韜 황백도)의 7병단을 장쑤성 북쪽 신안(新安)진 일선에, 리미(李彌 이미)의 13병단을 장쑤성 북쪽 수(宿 숙)현 일선에 각각 배치해 지난 북쪽의 병력 증원을 도모했다. 

왕야오우는 지난성이 크기 때문에 성내 곳곳에 방어시설을 구축하느라 병력의 부족함을 절감했다. 왕야오우는 보유병력을 지난성에 투입해 성의 동, 서쪽 수비구역을 나눠 방어하기로 했다. 또 중점 방어구역을 비행장 서남쪽에 두고 수비하기로 했다. 당시 지난의 크고 작은 신문들은 ‘왕야오우 찬가’를 부르는 기사를 쏟아냈다. (주석 262) 

 

“당년 창사(長沙 장사)에서 벌어진 전투 3차례 이겼고, 근래에는 황허를 지키는 기둥일세, 고성(지난성)의 명장, 능력을 뿜어내 두드러진다, 지난성(濟南城 제남성) 방어, 반석같이 견고하니, 철옹성(金城湯池)이로다.

當年三捷長沙, 近日砥柱黃河, 古城名將, 相得益彰, 濟南城防, 固若金湯."

 

1948년 9월 16일 밤 12시 지난전투가 시작됐다. 화둥야전군 공성병단은 동, 서, 남, 북쪽 100리에 걸친 광활한 지역에서 일제히 지난성 외곽 거점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왕야오우는 주요 공방전이 서쪽 비행장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으로 보고 예비대인 정편 83사단 19연대를 비행장 쪽으로 배치하고, 정편 74사단 57여단을 성으로 불러들여 서쪽 성을 지키도록 했다.

 

화둥야전군 서(西) 병단 10군단이 서쪽에서 동쪽을 공격했다. 동이 틀 무렵 수비군 19여단 55연대가 소문을 듣고 그대로 철수했다. 28사단은 국민당군을 추격해 서쪽 고성(古城) 부근에서 정편 2사단 211여단을 전멸시켰다. 고성을 공격하던 돌격부대들은 국민당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후 성 안팎을 넘나드는 근처에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면서 공산당군 28사단이 개활지에 있는 해자 안쪽에 다시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마침내 국민당군 수비군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때 29사단은 위푸허(玉符河 옥부하) 부근의 창치둔(常旗屯 상기둔) 국민당군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창치둔 거점은 국민당군 211여단 본부가 있는 곳으로 앞에 너비 100미터의 위푸허가 흐르는 곳이었다. 강변에는 곳곳에 보루가 설치되어 있었고 지뢰밭구역이 있었다.

 

공산당군의 결사대가 힘겹게 한 보루를 점령했다. 한편 공산당군 동(東)병단 9군단의 공격목표는 성 동쪽의 방어고지인 마오링산(茂嶺山 모령산)과 옌츠산(硯池山 연지산)이었다. 마오링산은 지난성 방어체계에 있어 중요한 외곽 진지다. 9군단 25사단 74연대의 3개 중대가 일제히 공격에 들어갔다. 2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74연대가 큰 피해를 당하면서 힘겹게 마오링산 주진지를 점령하고 산허리에 있던 국민당군을 섬멸했다. 25사단 75연대도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끝에 버겁게 옌츠산 진지를 점령했다.

 

261) 攻占濟南; 華野激戰8晝 許世友活捉王耀武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262) 攻占濟南; 華野激戰8晝夜 許世友活捉王耀武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

 

 

121. 지난 정복한 공산당 "통일 기틀 잡았다"

 

 

9월 18일,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의 전투는 서쪽은 비행장, 동쪽은 마자좡(馬家庄 마가장)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양군은 처절한 전투를 계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성 서쪽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당군 정편 96군단 군단장 겸 정편 84사단 사단장 우화원(吳化文 오화문)이 총구를 국민당군에 돌렸다. 이른바 ‘기의(起義; 투항이지만 명분상 봉기)’를 한 것이다.

 

19일 밤 우화원은 정편 96군단 본부와 정편 84사단 본부, 155여단, 161여단, 독립여단 등 2만여 병력을 이끌고 공산당군에 합류했다. 우화원은 비행장과 주위 방어구역을 모두 서(西)병단을 지휘하는 10군단 사령관 쑹스뤈(宋時輪 송시륜)과 정치위원 류페이산(劉培善 유배선)에게 넘겼다. 9월 20일 국민당군의 지난 외곽 방어거점은 모두 공산당군에 빼앗겼고 화둥야전군은 본격적인 지난성 공격에 들어갔다.
 
화둥야전군 군단장 수위는 같은 날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와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에게 전보를 보내 “3군단, 10군단, 13군단은 신속히 상푸(商埠 상부)를 공격해 전력을 기울여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쉬스여우는 서(西)병단이 밤에 성 서쪽 수비구역 상푸를 공격하도록 하고, 예비대인 저우즈졘(周志堅 주지견)의 13군단도 상푸작전에 투입됐다. 이때 중앙 군사위원회는 수위 등에게 전보를 보내 “왕야오우가 톈진 또는 칭다오, 린이(臨沂 임기) 등지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갈 수 있다. 수위는 신속하게 증원병단을 동원해 지난 외곽에 3겹 방위선을 만들고, 예페이(葉飛 엽비)의 1군단 주력을 지닝(濟寧 제녕)과 옌저우(兗州 연주) 사이에서 기동작전을 펴도록 지시했다.
 
이때 성안의 왕야오우는 각각 쉬저우(徐州 서주)와 난징(南京 남경)에 전보를 때려 북쪽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할 뜻을 개진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왕야오우를 심하게 질책하고 전력을 다해 성을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왕야오우는 전보를 다 읽은 뒤 ‘고수(固守)’ 두 글자 옆에 동그라미 4개를 치고, ‘원군(援軍)’ 두 글자 옆에 4개의 가위표시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여단장 이상의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다. 왕야오우가 말문을 열었다. (주석 263)
 
“노선생(장제스)은 영명하시다. 우리는 그를 믿는다. 지난은 전략요지다. 노 선생은 우리에게 (성을) 고수하라고 했다. 두(杜; 杜聿明 두위명)부사령관이 독군으로 직접 지우칭취안(邱淸泉 구청천), 리미(李彌 이미), 쑨위안량(孫元良 손원량) 등 3개 병단을 이끌고 구원하러 온다. 우리가 1주일만 굳게 지키면 된다. 원군은 꼭 도착한다. 우리는 마땅히 노선생의 지시를 받들어 전력을 다해 굳게 (성을)지키자.”
 
‘원군’ 글자 옆에 가위표시를 한 왕야오우는 참모들에게는 ‘원군’이 온다고 거짓말을 했다. 회의를 끝낸 뒤 왕야오우는 성내 장정(壯丁)보충부대를 소집해 노인, 어린이, 부녀자, 아이들을 모두 소개(疏開)하고 공수 쌍방의 분계선을 분명하게 표시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공군폭격의 이점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 군법처와 군사감옥에 전화를 걸어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이례적으로 수감된 공산당 당원과 포로로 잡힌 해방군 장병들을 석방하면서 장교는 5원(元), 사병은 3원씩을 주어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는 데 상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이날 휘영청 밝은 달 아래서 갑자기 포화(炮火)가 작렬하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화중야전군 공성부대가 서, 남, 북 3면에서 상푸를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쌍방이 이틀 밤 사흘 낮 동안 벌인 처절한 전투는 피가 흘러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만들었다. 내전 중 일찍이 보지 못한 처절한 공방전으로 쌍방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22일 오후 화중야전군 공성부대가 상푸를 점령하고 왕야오우 패잔 부대는 성안으로 후퇴했다.
 
장제스는 22일 비행기를 타고 지난성 상공으로 날아와 공중에서 전투를 직접 독전했다. 장제스는 지난성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하면서 왕야오여우에게  전화를 걸어 매우 온화한 말투로 입을 뗐다. (주석 264) 
 
“준재(俊才), 지금 어디에 있나?”
 “성 안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왕야오우는 하늘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대는 이미 공산당군의 여러 차례 진공을 격퇴했다. 귀관의 10만 장병은 모두 애당애국의 용감무쌍한 전사들이다. 전국 군민들은 그대가 다시 천하의 기공(奇功)을 세우기 바라고 있다.”
 
장제스는 왕야오우의 불퇴전의 투지를 고취시켰다.
 
“학생(學生), 잘 알았습니다.”
 
지난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눠져 있다. 내성과 외성 모두 높고 견고한 성벽을 두르고 있다. 왕야오우는 상푸를 공격한 공산당군이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은 만큼 최소한 3~4일의 정비기간을 거쳐 다시 공격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랬다. 화둥야전군의 공성부대도 극도의 피로에 지쳐 탈진한 상태였다. 인명손실에 따른 병력보충도 없었다. 부상병들도 계속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탄약과 공성작전에 필요한 장비들도 거의 바닥났다. 일반적 작전교범에 따르면 당연히 며칠간의 휴식과 정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쉬스여우는 “왕야오우에게 숨 쉴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며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전투명령을 내렸다.
 
22일 서쪽 하늘에 곱디고운 저녁노을이 황홀함을 더했지만 지상에서는 피를 부르는 살육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외성은 지난성의 제2방어선 구실을 한다. 성벽은 큰 돌과 반듯반듯한 벽돌로 축성됐다. 높이가 8미터, 두께가 10미터였다. 오후 6시 30분 화둥야전군 공성부대 동, 서 병단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국민당군 방어군도 즉시 기관총으로 응사하며 독가스탄을 투척하고 화염방사기로 불꽃을 피웠다.

 

외성은 불바다로 변했다. 독가스가 짙은 농무를 만들면서 매캐한 냄새를 내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숨이 차고 눈물범벅인 상황에서도 서남방의 융수이먼(永綏門 영수문)을 공격하는 10군단 돌격대들은 엄호사격 속에 바깥 해자를 폭파하는데 성공했다. 외성 성벽이 너비 2미터 가량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외성에 진입한 10군단 돌격대는 여기저기에 폭약을 터트려 3장(丈) 높이의 성문을 부숴버리고 방어하는 국민당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10군단 후속부대들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갔다.
 
한편 동쪽 융구먼(永固門 영고문)을 공격하는 9군단은 루난(魯南 노남)전투에서 노획한 4대의 15톤 무게의 미국식 경 탱크를 몰고 돌진했다. 왕야오여우 방어군의 탱크는 거꾸로 낡은 일본식 탱크였다. 아이러니한 대결이었다. 공성부대 73여단 돌격대들이 화력이 뛰어난 미국식 탱크의 엄호를 받으며 융구먼을 깨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화둥야전군은 23일 지난 외성을 완전 점령했다. 왕야오우 수비군은 내성으로 후퇴해 결사방어에 들어갔다. 쉬스여우의 공성부대들은 계속된 돌격전투로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했다.
 
23일 오전 9시. 쉬저우(徐州 서주) ‘비적 소탕 총사령부’ 총사령관 류즈(劉峙 유치)와 공군 부사령관 왕수밍(王叔銘 왕숙명)이 비행기를 타고 지난 상공에 나타나 무선전화를 걸어 왕야오우에게 굳건하게 성을 지키면서 원군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왕야오우는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고 그저 끝까지 외롭게 성을 지키겠다는 뜻만 밝혔다.

 

이때 화둥야전군 공성부대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이미 1만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쉬스여우는 이에 개의치 않고 23일 오후 6시에 내성 공격명령을 내렸다. 돌격대들이 부교를 설치하고 성벽 근처로 돌격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인명손실이 대량 발생했다. 9군단 25사단 73연대의 일부 부대는 동남쪽 성벽을 타고 오르다 후속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성에 오르던 전원이 몰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공성부대들은 연속 7일 낮과 밤 전투를 벌여 기력이 다한 데다 국민당군의 저항도 만만찮아 마지막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쉬스여우가 안간힘을 다해 전투의지를 북돋았다. (주석 265)
 
“우리들은 큰 어려움에 처해있다. 적들의 어려움은 우리들 보다 더욱 크다. 지금은 누가 상대방보다 더 버티는 가에 달렸다. 우리들은 적들보다 강인하고 완강하며 뒷심이 강하다. 승리는 왕왕 최후의 5분에 결정 난다!”
 
처절한 육박전으로 성 안팎을 피로 물들이며 마침내 화중야전군 공성부대들이 성루에 깃발을 꽂아 지난성을 점령했다. 24일 새벽 왕야오우는 혼란한 틈을 타 성 밖의 한 조그만 촌락으로 숨어들어 옷을 바꿔 입은 뒤 달아났다. 이날 화둥야전군은 국민당군 제2수정구(綏靖區) 사령부를 접수했다. 도망갔던 왕야오우는 28일 소우광(壽光 수광)현에서 붙잡혔다.

 

화둥야전군이 8일 낮과 밤 격전을 벌인 지난전투는 국민당군 8만 4천여 명을 전멸시켰으나 공산당군도 2만6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대가를 치렀다. 지난전투는 중무장으로 무장한 국민당군이 철옹성처럼 지킨 성도인 대도시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화베이, 화둥 2개 지구의 큰 해방구를 하나로 묶어 화둥야전군과 중원야전군이 남하해 벌인 3대 전역의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회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유리한 기반을 구축했다. 저우언라이는 “3대 전역의 서막은 지난 전투”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를 전초전으로 중국의 명운을 결정한 랴오선(遼沈 요심; 랴오시-선양), 화이하이(淮海 회해), 핑진(平津 평진; 베이핑-톈진) 등 3대 전역은 1948년 9월 12일 ‘랴오시-선양’의 동북전장을 시발로 1949년 1월까지 5개월 사이에 사투를 벌인 대형 전장이었다. 전투결과는 인민해방군이 모두 승리함으로써 창장(長江 장강)이북의 북중국을 석권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상 중국이 창장을 경계로 두 동강난 꼴이 됐으나 상승세를 탄 인민해방군의 중국통일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당시 동북군구 총사령관 린뱌오가 이끌고 있는 동북전장의 상황은 천청이 물러나고 웨이리황(衛立煌 위립황)이 총사령관으로 국민당군을 통솔했다. 하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병력도 74만 명 대 49만 명으로 열세였다. 국민당군은 대도시 창춘(長春 장춘), 선양(沈陽 심양), 진저우(錦州 금주) 3개 도시에 고립돼 방어에 급급했다. (주석 266)
 
263) 攻占濟南; 華野激戰8晝夜 許世友活捉王耀武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264) 攻占濟南; 華野激戰8晝夜 許世友活捉王耀武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265) 攻占濟南; 華野激戰8晝夜 許世友活捉王耀武 人民網 中國共産黨新聞網
266) 1948年圍困長春; 解放軍爲何阻攔饑民出城 解放戰爭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出版 人民網 文史頻道

-----------------------------------------------------------------------------------------------------------------

 

 

122. 진저우 함락, 창춘성 고립 '인간지옥' 으로

 

 

중공중앙은 동북전장의 마지막 숨통을 죄는 공격지점에 대한 전략분석에 들어갔다. 창춘은 고립됐지만 해방군의 군대를 오랫동안 피로에 지치게 하는 동북전쟁의 약점이 존재했기에 이 문제를 해소해야 했다. 또 국민당군이 창춘에서 해방군을 견제하고 선양을 엄호하면서 진저우의 상황을 개선하는 전략을 쓸 수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철수준비 공작을 할 수 있었다. 진저우는 국민당군 병력이 창춘보다 비교적 많고, 주위에 약간의 거점이 있었다. 진저우를 공격할 때 화베이 국민당군이 증원할 수 있었고 해상지원도 가능했다. 만약 진저우를 신속하게 공격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방군이 수세에 몰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해방군 주력의 멀리 떨어진 북만주에서의 남하가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저우에서는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에 이르는 국민당군의 부대들이 고립 분산되어 있어 해방군이 공격할 경우 비교적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베이닝선(北寧線 북녕선) 작전은 창춘과 선양의 국민당군 증원군을 끌어들여 유리한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국민당군을 화베이(華北 화북)전장과 동북전장의 양대 전략집단으로 나눠 화베이 국민당군의 증원을 화베이 해방군의 견제로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진저우는 동북 국민당군이 관내(산하이관 서쪽지역)로 통하는 요충지다. 전략적 요지인 진저우를 공격해 동북의 대문에 빗장을 걸면 웨이리황의 국민당군은 ‘독안에 든 쥐’꼴이고, 해방군이 베이닝선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해방군의 근거지 전쟁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분석한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진저우가 동북 국민당군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마오는 ‘랴오선 전역의 작전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주석 267)

 

“적들을 전멸하기 위해 주력은 창춘, 선양 두 지역의 적들을 신경 쓰지 말고  진저우를 공격할 때 창춘, 선양에서 증원군을 보내면 이들 적을 전멸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창춘, 선양의 적들이 증원하면 그대들은 진저우 등지에서 증원군을 섬멸해 웨이리황 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 진저우 공격은 모든 전투의 승리의 관건이다. 인민해방군의 주력을 진저우 작전방면에 돌려야 한다. 가능한 한 신속히 진저우 성을 공격해야 한다. 모든 것을 미루고 진저우를 공격하면 주도권을 쥐어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전략방침에 따라 동북 인민해방군은 1948년 9월 22일 전력을 기울여 진저우를 공격했다. 선양의 웨이리황 국민당군 총사령관은 주력을 진저우로 증원하는 문제를 고민하다 끝내 파견하지 않았다. 고립무원이 된 동북 '비적소탕 사령부' 부 총사령관 판한졔(范漢杰 범한걸)는 이틀간 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성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군 10만여 명이 전멸하고, 부 총사령관 판한졔(范漢傑 범한걸)를 비롯한 6병단 사령관 루쥔취안(盧浚泉 노준천) 등 고급 장령들이 포로로 잡혔다. 장제스는 진저우 성이 해방군의 손에 떨어지자 랴오야오상(廖耀湘 요요상) 병단에게 계속 전진해 진저우 탈환을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다 랴오야오상도 생포되고 말았다. 진저우가 함락된 것은 동북의 명운을 가르는데 치명적이었다. 증원부대도 진시(錦西 금서) 호우징(候鏡 후경) 해변에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랴오야오샹 병단은 길 중간(半路 반로)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했다. 오랫동안 포위를 당한 창춘은 양식과 탄약이 끊겼고, 병력이 별로 없는 선양은 인심이 흉흉했다. 이에 이르러 동북지구의 ‘대문’은 이미 인민해방군이 완전히 빗장을 질러 버린 상태였다.

 

“창춘은 전투도 제대로 벌이지도 못하고 서서히 함락돼 가고 있다.” 
미국 여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이렇게 기사를 타전했다.

 

1948년 해방군과 국민당군의 전쟁을 그린 영화 펑 사오강 감독의 2007년 작 '집결호'의 한 장면.

 

 

 

20만 주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성 밖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장제스는 비행기를 동원해 공중에서 국민당군에 양식 등 보급품을 공급했다. 그런데 보급품을 둘러싸고 부대 간에 마찰이 있었다. 60군단의 장사병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윈난(雲南 운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보급품을 ‘장제스 직계부대’와 미국 장비로 무장한 7군단에 배급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창춘의 모든 장사병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단지 항복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들의 상관이 “공산당은 포로를 죽이다”고 을러댔기 때문이다. 창춘은 동북 야전군에 포위당한 뒤 ‘인간지옥’로 바뀌었다. 서로 살겠다고 핏발이 곤두서 약탈과 살인을 밥 먹듯 하는 무법천지였다. 

앞서 1948년 6월 동북야전군은 중앙 군사위원회 비준을 받아 ‘장기 포위, 정치공세, 경제투쟁’의 책략을 쓰기로 하고 최 일선에 창춘 포위지휘소를 만들었다. 샤오진광(蕭勁光 소경광)을 사령관, 샤오화(蕭華 소화)를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천광(陳光 진광), 천보쥔(陳伯鈞 진백균)을 부사령관, 탕톈지(唐天際 당천제)를 부 정치위원 겸 정치부주임, 지예팡(解方 해방)을 참모장에 각각 임명했다. 이렇게 사령부를 만들어 야전군 12군단 34, 35사단, 6군단 18사단, 독립6, 7, 8, 9, 10사단과 1개 포병단이 창춘을 물샐틈없이 봉쇄했다. 6월 5일 린뱌오, 뤄룽환(羅榮桓 나영환), 탄정(譚政 담정)이 연명으로 ‘창춘 포위방법’을 하달했다. (주석 268)

 

“창춘의 교통과 모든 상업(商業)관계를 끊어 성 밖의 각지의 물자, 제일 먼저 양식, 땔감용 건초, 채소 등 생활필수품의 창춘 반입을 막아 수비군들이  시외에서 공급받지 못하도록 한다. 대포와 고사포로 공중을 통제해 국민당군  비행기가 저공비행해 보급품을 떨어뜨리거나 착륙하지 못하도록 한다.”

 

창춘 포위지휘소는 창춘 주위 25킬로미터 이내에 봉쇄구역을 만들어 군(軍 )관계자 이외에는 인원, 거마(車馬) 등의 자유통행을 금지했다. 창춘 포위 인민해방군 병력이 10만 명이었고, 포위당한 국민당군 방어군 병력도 10만 명에 이르렀다. 동북 비적소탕 사령부 부 총사령관 정동궈(鄭洞國 정동국)는  장제스와 웨이리황이 동북 철수문제를 논의하다 시일을 천연하는 바람에 동북지역의 수십 만 명의 군대가 장송곡을 부르며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정동궈는 웨이리황에게 베이핑에 가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휴가를 내 동북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정동궈의 휴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핑(四平)이 공격을 받고 있었고, 융지(永吉 영길)수비군 60군단이 창춘으로 철수하는 등 비상 시기였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되레 정동궈를 창춘 제1병단 사령관 겸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주석에 임명했다. 정동궈는 훗날 “그때부터 그해 10월 창춘이 해방되기 전날까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그때 창춘은 사면이 포위당해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데다 물자 품귀현상을 빚어 민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동궈는 부임하자마자 방어체계를 정돈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장기적 고수(固守) 방안을 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창춘 성곽방어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일본의 괴뢰 만주국의 ‘수도’로 성내와 교외지역은 영구, 반영구식으로 방어공사를 했다. 특히 도시 중앙에는 원래의 관동군사령부, 공군사령부 등 4채의 큰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크고 견고한 보루였다. 건물 아래로 갱도를 만들어 서로 통하게 했다. 또 두꺼운 담과 철창에 지붕을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 싸 포탄을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걱정은 창춘에 주둔한 부대들이었다.

 

창춘 방어군의 주력은 신7군단과 60군단이었다. 신7군단은 천청(陳誠 진성)이 확대개편한 중앙군 직계부대였다. 병력은 3만 명 안팎으로 원래의 신편 38사단장 리홍(李鴻 이홍)이 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군단 관할의 3개 사단 중 56사단의 7천여 명의 병력은 만주국 군인들로 이루어져 전투력이 대단히 약했다. 신7군단에서 1만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한 신편 38사단만이 전투력이 강했다. 

이처럼 주력부대인 신7군단의 속내는 잠복한 병폐가 많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7군단과 60군단 간의 갈등이었다. 윈난군으로 이뤄진 60군단은 장제스 직계부대인 신7군단으로부터 홀대를 받아 ‘촌놈군대’ 취급을 당했다. 정동궈는 부임 후 쩡쩌성(曾澤生 증택생)을 군단장 겸 제1병단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정동궈는 7군단 군단장, 사단장 등 장령들에게 60군단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엄하게 경고하면서 위난 시에는 같은 배를 타고 건너는 관계임을 거듭 강조했다.

 

267)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68) 1948년圍困長春; 解放軍爲何阻攔饑民出城 解放戰爭(下)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出版 人民網 文史頻道
269) 1948年圍困長春; 解放軍爲何阻攔饑民出城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出版 人民網 文史頻道

-----------------------------------------------------------------------------------------------------------------

 

 

122. 국민당군 내부분열…공산당 창춘 무혈입성

 

 

항공기 보급품 공급이 끊긴 뒤 창춘 수비군에 기아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7군단과 60군단의 6명의 사단장이 연명으로 장제스에 전보를 보냈다. 포위당한 창춘 수비군의 어려운 상황과 대군을 증원해 해방군의 포위망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다. 장제스는 사단장 모두에게 일일이 전보를 보내 하나마나한 얘기만 되풀이 했다. (주석 269)
 
“나는 그대들과 부하 장사병들을 나의 형제자매처럼 대하고 있다. 그대들의 어려운 상황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증원군이 중도에 전멸 당했다. 그대들이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견지하기 바라며 끝까지 지지한다.”
 
1948년 5월부터 10월 사이 창춘의 시민들이 기아에 허덕여 참혹한 정경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이 떨어지거나 군대에 의해 식량을 뺏겨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병들어 죽거나 기아사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그대로 황천길이었다. 거리에 주검이 넘쳐나지만 안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급기야 거리에서 인육(人肉)을 파는 천인공노할 참상도 나타났다.

 

8월께 장제스는 군사적 압력을 줄이기 위해 정동궈에게 창춘 성내의 주민들을 소개하도록 했다. 창춘 성을 빠져나가는 20여 만 명의 피난민 대열이 끝없이 이어진 이유다. 수비군들의 투항도 잇따라 9월에 이르러 1만여 명에 달했다. 해방군의 심리전도 크게 늘어났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전략이다. 해방군들은 목소리를 높여 ‘고향’, ‘형제’ 등 정서적 구호를 외치며, “누구를 위해 목숨을 팔고,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느냐”며 국민당군의 마음을 쥐어뜯었다.
 
“나와라, 우리는 노비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왜 윈난부대와 직계부대의 생활대우가 서로 다른가?”
 
초패왕 항우가 해하(垓下) 고성(孤城)에 포위돼 밤에 사방에서 불어대는 처연한 초나라 노랫소리(四面楚歌)에 궤멸됐듯이, 창춘 고성(孤城)을 후벼 파는 밤낮 없는 해방군들의 외침이 따뜻한 남쪽에서 온 윈난군들의 마음을 쥐어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제일 곤혹스러운 사람은 윈난군을 이끌고 있는 60군 군단장인 쩡쩌성이었다. 전전반측하던 쩡쩌성이 182사단장 바이자오쉐(白肇學 백조학)와 21사단장 장룽야오(長隴耀 장롱요)를 불러 속내를 떠봤다. (주석 270) 
 
“부대의 앞날과 출로문제에 대해 우리들은 많이 얘기했다. 오늘 밤 모인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기 위해서다.”
 “상의는 무슨 상의입니까, 군단장께서 어떻게 결정하든 결정하는 데로 따르겠습니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장룽야오가 걸걸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바이자오쉐는 신중한 자세로 만전지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쩡쩌성은 60군단이 투항하는 이른바 ‘기의(起義)’를 털어놓았다. 이때, 9월 22일 밤 10시쯤이었다. 진저우의 판한졔 대군이 해방군에 포위돼 절망적이란 소식이 날아들었다. 장룽야오가 쩡쩌성의 ‘기의’를 옹호하고 나섰다.
 
“우리 60군단은 근년에 (장제스)직계부대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일선에서 죽어라하고 싸우고, 철수할 때는 엄호하는 고생만 했지만 정작 상은 그들(7군단)이 받았다. 이런 억울함은 받을 만큼 받았다. 나는 기의를 찬성한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군문에 들었다. 본래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한데 몇 십 년 동안 싸우며 생각해보니 이건 동족상잔이다. 나는 목석이 아니다. 많은 상처를 입었다.”
 
바이자오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 뒤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 무기를 버리고 장병들을 무장해제해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면 한다고 했다. 바이자오쉐도 끝내 기의에 찬성했다.

 

 

10월 15일 진저우 성이 함락됐다. 장제스는 17일 창춘성의 포위망 돌파를 명령했다. 돌파하지 않아도 죽고, 돌파해도 죽어 이래저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군인의 명예를 위해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동궈는 16일 밤 준비한 뒤 17일 사면에서 공격하고, 18일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했다. 이런 명령이 떨어지자 쩡쩌성은 안절부절 했다. 공산당군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는데 깜깜 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기의를 하려면 18일 전에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동궈와 함께 포위망을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었다. 좌불안석하던 차에 노을이 질 때쯤 밀사가 돌아왔다. 공산당군이 60군단의 기의를 받아들이겠다는 회답을 갖고 온 것이다. 쩡쩌성은 21사단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을 소집했다. 쩡쩌성은 이들에게 윈난군이 그동안 당한 멸시와 배척사례를 말한 뒤 현재 처한 상황을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군단장께서 하는 대로 하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양으로 돌파하자”고 했다. 쩡쩌성이 우리가 선양에 당도하기 전에 전멸한다고 했다. 이때 한 군관이  일어나 “우리 기의합시다!”라고 외쳤다.

 

모두 머리를 돌려 그 군관을 쳐다보고 군단장 쩡쩌성을 바라보았다. 쩡쩌성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기의는 하나의 활로방법이다. 내가 이 의견에 찬성하면 그대들은 기의에 동의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자리를 가득 메웠던 군관들이 일제히 “동의!”라고 외쳤을 때 장룽야오 사단장이 일어나 “21사단 모두가 기의에 찬성한다, 군단장께서 명령만 내리십시오!”라고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쩡쩌성이 “곧바로 신7군단을 방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쩡쩌성은 182사단 군관들을 찾아가 “21사단은 이미 기의를 결정했다. 나도 찬성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모두가 “기의”라고 외쳤다. 쩡쩌성은 바이자오쉐 사단장에게 “만약 신7군단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굳건하게 그들과 싸우자!”고 했다. 60군단 예하에 윈난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은 52사단이 있었다.

 

쩡쩌성은 회의를 한다며 52사단장 리송(李嵩 이숭)과 3개 연대장을 사령부로 불렀다. 이들에게 윈난 장병들은 기의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쩡쩌성은 “우리와 함께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대들을 사살하겠다. 그런 연후에 사단을  섬멸한다”고 윽박질렀다. 리송은 전화로 부 사단장과 부 여단장들을 불러 모았다. 부 사단장 아오양우(歐陽午 구양)의 손을 붙잡아 끌면서 “기의! 기의! 절대 농담이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10월 17일 이른 아침 쩡쩌성은 총사령관 정동궈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주석 271)
 
“창춘이 포위당하여 환경이 날로 힘들고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장병들은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고 거리에 인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내전의 참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의 시국은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해 관료들의 탐욕적인 횡포는 역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가문과 자본가들이 권세를 빌어 경제를 농단하고 억압하며 착취해 국민경제가 붕괴되었습니다. 인민들은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모든 게 장제스 정부로 인한 것으로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죄악입니다. 뜻있는 인사들은 뼈 저리게 침통해하고 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대는 인민을 위한 무력입니다. 개인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아닙니다. 극도의 곤경과 위험에 처한 인민을 구해야 합니다. 이번에 장병들이 한 마음으로 군사행동을 하기로 동의해 내전을 반대하고 장씨(장세스)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습니다. 국가존망의 위기를 구하여 인민들에게 속죄하고 스스로 진창의 수렁에서 몸을 빼야 합니다. 공(정동궈)은 창춘 군정의 우두머리로 전성의 안위를 보살피는 만큼 창춘 군민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창춘은 전화(戰火)가 아니라 극도로 부패해 썩어문드러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해 단연 기의를 일으키기로 했습니다. 함께 의거를 일으키면 국가와 지방에 더 이상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온 힘을 기울여 봉행하고자 합니다. 삼가 답신을 기다립니다.”

 

 

정동궈는 “나는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쩡쩌성은 이날 국민당군 60군단이 봉기(起義 기의)했다고 전국에 알렸다. 18일 정동궈의 지휘 아래 포위망을 뚫고 선양으로 철수하는 날이었으나 어느 부대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쩡쩌성의 60군단이 잇따라 성을 나섰다. 동북야전군이 창춘의 반을 접수했다. 19일 7군단 부 군단장 스숴(史說 사설)와 참모장 룽궈쥔(龍國鈞 용국균)은 해방군과 이미 교섭을 끝내고 전군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로 했다. 이런 내용을 통보받은 정동궈는 “룽궈쥔! 너와 스숴는 나와 몇 년을 같이 일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거늘 오늘 어째서 장쉐량, 양후청처럼 나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가”라며 힐책했으나 때는 늦었다.

 

 

<< 동북 비적소탕 사령부 부 총사령관 정동궈(鄭洞國 정동국)

 

 

결국 7군단이 무기를 버렸다는 것은 창춘이 동북야전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장제스를 대신해 두위밍(杜聿明 두율명)이 정동궈에게 전보를 보내 창춘에 헬리콥터를 보낼 테니 탈출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창춘 어디에도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는 지점이 없었다. 정동궈는 “지금은 이미 늦었다. 부대를 떠날 수 없게 됐다. 단지 죽음으로 명령에 보답한다”고 회신전보를 보냈다. 21일 새벽 정동궈는 맹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최후의 순간을 직감한 정동궈는 권총으로 자살하려 총을 찾았다. 그때 호위병들이 끌어안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이 창춘에 무혈입성한데 이어 고립무원의 선양과 잉커우(營口 영구)도 평화적 해결방식으로 인민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2개월도 안 돼  끝난 랴오선 전역으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47만 명을 전멸시키며 동북 전체를 석권해 통일중국 축록전에서 한 발 앞서가게 됐다.

 

270) 1948年圍困長春; 解放軍爲何阻攔饑民出城 解放戰爭(下)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出版 人民網 文史頻道
271) 1948年圍困長春; 解放軍爲何阻攔饑民出城 解放戰爭(下) 王樹增 著 人民文學出版社出版 人民網 文史頻道

-----------------------------------------------------------------------------------------------------------------

 

 

124. 화이하이 승리 "인민의 손수레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화이하이(淮海 회해) 전역이 남쪽전선의 결전으로 남쪽전장의 상황뿐 아니라 중국 전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화이하이 전역은 막 끝난 랴오선 전투와는 달랐다. 동북전장(戰場)에서 동북야전군과 국민당군의 병력대비는 동북야전군의 절대우세였다. 그러나 화이하이 전장에서 인민해방군의 총병력과 무기, 장비 등은 국민당군에 비해 열세였다. 

장제스는 1948년 8월 이래 해방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창장(長江 장강)을 굳게 수비해 수도 난징(南京 남경)을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방비하고 있었다. 쉬저우(徐州 서주)를 중심으로 한 룽하이루(隴海路 롱해로)와 진푸루(津浦路 진포로) 선상에 최신무기와 장비를 가진 정예의 장제스 직계부대를 배치해 놓았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장제스는 ‘비적소탕 총사령부’의 주요 병력과 동북에서 철수한 병력을 화이하이 전장에 투입한 바 있었다. 그  병력이 80만여 명에 달했다. 이 병단은 화포가 대포 2000문을 포함해 4215문, 탱크 1800대, 비행기 400대와 수많은 차량을 보유했다. 

이에 반해 인민해방군은 지방무장 세력을 포함해 병력 60만 명으로 열세였다. 게다가 화포 1364문, 탱크 22대, 비행기는 한 대도 없어 무기와 장비가 국민당군에 족탈불급이었다. 특히 중원야전군은 다비예산에서 손실한 중무기를 아직 보충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은 역량(힘)의 대결로 병력, 무기, 장비 등의 객관적 요소와 전쟁을 하는 지휘관과 전투원들의 주관적 의지로 이뤄진다. 부족한 객관적 요소를 주관적 의지로 극복해 가는 동안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마오는 이 점을 노려 전쟁개시 시점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1월 6일, 인민해방군 중원야전군과 화둥야전군 2개 군이 국민당군과 사활을 걸고 벌이는 65일 동안의 격렬한 화이하이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규모는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커졌다. 해방군은 화이하이 이북의 국민당군 부대에 대해서도 공격을 감행했다. 중앙 군사위원회는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수위, 탄쩐린 5명의 총 전적위원회를 만들어 덩샤오핑을 서기로 임명해 화이하이 전역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참전 부대와 군사의 수는 화둥야전군 산둥병단, 쑤베이(蘇北 소북)병단, 시시옌(西線 서선) 병단 등 16개 군단 36만 명, 중원야전군 7개 군단 15만 명, 화베이(華北 화북) ‘지루위(冀魯豫 기로예; 허베이-산둥-허난지역)’ 군구의 지방부대 등 총병력 60만 명에 이르렀다. 마오는 11월 10일 오전 3시 천이, 덩샤오핑, 수위, 장쩐(張震 장진), 탄쩐린, 왕졘안(王建안 왕건안) 등에게 잇따라 전보를 보냈다.

 

천이와 덩샤오핑에게 보낸 전보에서 마오는 “그대들은 4개 군단으로 수(宿 숙)현을 공격해 쑨위안량(孫元良 손원량) 등의 부대를 섬멸시켜 쉬방루(徐蚌路 서방; 서주-안후이성 방부<蚌埠>를 잇는 도로)를 끊어야 한다. 화둥야전군 싼광(三廣 삼광) 2군단 역시 쉬수(徐宿 서숙; 서주와 숙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마오는 이들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류즈(劉峙 유치)가 배치한 쉬저우, 황커우(黃口 황구), 수현을 전력을 다해(삼광 2군단 포함) 공격해  쑨위안량 부대를 전멸시키고 쉬방지역을 통제하면서 적의 퇴로를 끊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지시했다. 또 수위, 장쩐, 탄쩐린, 왕졘안에 전보를 보내 “적 7병단, 13병단이 쉬저우로 철수할 때 그대들은 두 병단을 포위해 섬멸하면서 황바이타오(黃百韜 황백도)의 퇴로를 끊을 수 있다. 특히 7, 10, 13군단 및 쑤베이 11군단은 국민당군 13군단이 황망히 철수하는 틈을 타 용맹하고 신속히 공격하면 적을 멸할 수 있다”고 했다.

마오는 또 이날 밤 9시 천이, 덩샤오핑, 수위, 탄쩐린에 전보를 띄워 이렇게 지시했다. (주석 272)

 

“13병단은 이미 인허(引河 인하)와 쉬저우 사이의 협소한 지역으로 후퇴해 북쪽에서 쉬저우를 보위하고, 치우(邱 구; 치우칭취안)병단은 여전히 황커우를 지키고 있다. 류쯔는 화둥야전군 6개 군단이 진샹(金鄕 금향), 위타이(魚臺 어대), 청우(成武 성무)에서 남하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때문에 치우 병단은 서쪽을 방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 10군단은 구왕(賈汪 고왕)에서 쉬저우 동남쪽으로 진출해 쉬저우 부근의 13병단을 방어하면 된다. 필요할 때는 남쪽으로 나아가 황 병단을 요격할 수 있다.”

 

마오는 “국민당군 허지펑(何基灃 하기풍), 장커샤(張克俠 장극협)부대가 봉기(기의)한 뒤 류쯔가 쉬저우 방어를 강화하고, 방부(蚌埠 방부)의 99군단의 병력을 쉬저우로 이동시켜 철벽방어하고 있다. 류쯔는 또 급히 쑨위안량 2개 군단을 멍청(蒙城 몽성)에서 수현으로 돌아가 수비하도록 했다. 천이와 덩샤오핑의 각 군단은 오늘 내일 사이로 수현에 도착해 쑨위안량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황바이타오의 도주로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날 류보청은 급히 위시(豫西 예서)에서 융청(永城 영성)으로 부대를 이끌고 달려와  천이, 덩샤오핑 군단과 합류했다. 이들은 ‘쉬저우-방부 작전계획’을 짜 11월 11일 밤에 수현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마오는 그들의 전략을 칭찬한 뒤 "이번 전쟁의 승리는 쉬저우를 완전 포위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 연후에 수현을 중심으로 모든 쉬저우-방부선을 통제할 수 있도록 몇 겹의 방어선을 구축해 쉬저우에서 남쪽으로 도주하는 적들을 기다렸다가 화둥야전군과 협동작전을 펼쳐 쉬저우 적들을 전멸시키면 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주석 273)

 

마오는 이 전략에 엄청나게 집중했다. 쉬저우 동쪽의 룽하이루에 있는 류보청, 덩샤오핑의 중원야전군과 천이, 수위의 화둥야전군이 국민당군 황바이타오 군단, 리미(李彌 이미) 군단을 공격해 섬멸하고 쉬저우 남쪽의 진푸로에 있는 수현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 쉬저우 공파(攻破)전략은 국민당군들의 오른쪽 팔뚝을 끊어버리고 복부를 찌르는 작전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 황바이타오, 쑨위안량, 치우칭취안(邱淸泉 구청천), 리미 등 5개 병단 22개 군단, 장제스의 ‘5대 주력’인 18군단, 5군단 등 55만 5천명을 전멸시켰다. 또 쉬저우 '비적소탕 총사령부' 부 총사령관 두위밍(杜聿明 두율명), 12병단 사령관 황웨이(黃維 황유) 등 고위 장령들을 생포했다. 인민해방군 야전군 사상자도 13만 4천명이 발생했다. 인민해방군의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는 장제스가 철통수비를 자랑한 창장 이북의 ‘중점방어 체계’를 깡그리 무너뜨렸다. 

국민당군의 화둥(華東 화동), 중원 전장의 정예 주력이 한 순간에 소멸됐다. 국민당의 정치, 경제의 중심인 수도 난징, 상하이(上海 상해), 우한(武漢 무한) 등 중요 도시가 해방군의 직접 공격권에 들어가 장제스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됐다. 화둥야전군 총사령관 수위는 이 전역에서 적시에 ‘화이하이 전역’을 건의하고, 심모원계의 작전을 짜내 승리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마오는 “화이하이 전역에서 수위 동지가 1등의 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는 인민대중의 손수레 덕분이다.”
천이는 이렇게 말했다.

 

천이는 화이하이 승리가 후방의 인민들이 손수레를 이용, 전선에 양식과 탄약 등 각종 보급품과 무기를 날라 준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고 공을 돌렸다. 이른바 ‘개미군단’의 힘이다. 화이하이 전투기간 손수레로 각종 보급을 도맡았던 인민들이 자그마치 543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 노역자(民工 민공)들이 이용한 손수레는 지금도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화이하이 전역 기간 동안 손수레 등을 이용해 인민해방군을 도운 인민들의 모습.

 

 

목제로 만든 이 일륜 손수레는 바퀴 하나를 달아 물건운반을 편리하도록 했다.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상용한 운송도구였다. 화이하이 전역기간 군수품, 탄약, 양식과 여물 등 보급품의 80%를 이들 ‘개미군단’이 등에 짊어지고 어깨에 메거나 손수레 등의 수단으로 운송했다. 88만개의 손수레와 31만개 들것이 동원됐다. 전투원 1명에 9명의 민공(民工; 노역자)들이 들어붙어 지원했다고 한다. (주석 274)

 

'개미군단'인 이들 민공 무리들은 홍까오량(紅高粱 홍고량; 붉은 수수), 홍라쟈오(紅辣椒 홍랄초; 붉은 고추), 홍뤄부(紅蘿卜 홍라복; 홍당무), 시옌차이(鹽菜 짠지)를 몸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 이들 중 붉은 수수, 붉은 고추, 홍당무는 중국인들의 유명한 ‘3紅’이다. 

민공 무리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은 스스로 갖고 다녔다. 숴이(蓑衣 사의; 도롱이), 주깐(竹竿 죽간), 후루퍄오(葫蘆瓢 호로표; 표주박)는 민공 무리들의 ‘3보(寶) 즉, 3가지 보물로 통했다. 도롱이는 눈과 바람을 막아주고, 죽간은 강이나 냇가를 건널 때 유용한 도구였다. 표주박은 밥 짓는 물을 뜨거나 세숫대야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또 단자(擔架 담가; 들것), 단자처(擔架車 담가거), 단자펑(擔家篷 담가봉) 등 들것은 들거나 끌고 가거나 비바람을 막기 위해 들것에 덮개를 덮은 것 등을 이른다. 이것을 민공들의 '들것 3대 발명'이라고 했다. 이들 '들것 부대'들은 전쟁터에서 9만8천여 명의 부상자들을 옮겨 수많은 고귀한 목숨을 구했다.

272)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73) 淮海戰役粟裕立了第一功; 3次 ‘斗膽直陳’ 北京晩報 人民網
274) 決定中國命運的戰役 解放軍報 人民網

-----------------------------------------------------------------------------------------------------------------

 

 

125. 푸줘이 투항· 장제스 하야 "대세는 공산당에"

 

 

인민해방군이 랴오선 전역과 화이하이 전역을 잇따라 승리함에 따라 국민당 화베이 비적소탕 총사령부 사령관 푸줘이(傅作義 부작의)는 화베이와 둥베이(東北 동북) 양대 야전군의 협공을 받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푸줘이 집단군은 4개 병단 13개 군단과 기타 부대 등 60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1948년 11월, 푸줘이는 각 지역의 병력을 서쪽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에서 동쪽 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 톈진, 탕산(唐山 당산), 탕구(塘沽 당고),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에 '일자(一字) 장사진' 으로 배치했다. 나중에는 병력을 베이핑, 톈진, 장자커우에 중점 배치하면서 탕구 해안을 굳게 지켰다. 

마오는 '핑진(平津 평진; 베이핑과 톈진) 전역에 관한 작전방침'에서 "적들이 해상으로 도망가는 것이 저어된다. 2주일 안에 포위하면서 전투를 하지 않고, 포위하되 거리를 두어 포위를 알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써 적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장제스가 부대의 톈진 해상에서의 남하를 명령하지 않도록 착각을 유발하고, 산둥방면의 주요 지역을 통제해 화베이 국민당군이 칭다오(靑島 청도)로 달아나 해상탈출을 못하도록 한 지시이다. 

마오는 랴오선 전역이 끝나자마자 군대를 정비할 것으로 생각하는 국민당군의 의표를 찔러 동북야전군을 곧바로 비밀리에 신속하게 산하이관으로 남하시켜 포위망을 구축해 화베이 양대 야전군과 합동작전을 펴도록 했다. 동북야전군 주력이 11월 하순 3로로 나눠 산하이관으로 들어오기 전 핑진(平津 평진; 베이핑-톈진) 전역을 일으켰다. 

해방군은 화베이 2개 병단 7개 군단과 지방부대 등 병력이 20여 만 명이었다. 여기에 동북야전군 14개 군단 80만 명이 가세해 총병력은 100만 명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상순 중공중앙은 린뱌오(林彪 임표), 뤄룽환(羅榮桓 나영환),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등으로 핑진전역 총 전적위원회를 구성하고 린뱌오를 서기로 임명해 핑진전역을 통일적으로 영도하고 지휘하도록 했다. (주석 275)

 

텐진은 화베이(華北 화북) 최대의 상공업 도시로 강이 종횡으로 흐르고 높은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차는 있는 등 번화했다. 성의 방어는 견고해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국민당군은 성 안팎에 380개의 토치카를 세우고 성 주변에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했다. 국민당 톈진 경비사령관 겸 방수(防守)사령관 중장 천창지예(陳長捷 진장첩)는 톈진성곽은 견고하기가 금성철벽이라고 큰 소리쳤다. 

하지만 해방군에 완전 포위를 당한 푸줘이 집단군은 달아날 출로가 막혀 진퇴양난에 빠졌다. 푸줘이는 11월 7일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냈다. 구국구민의 목적으로 푸줘이 자신의 60만 군대를 마오의 지휘에 둘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협상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감감 무소식이 이어지자 목마른 자 샘을 판다고 푸줘이는 11월 14일 또다시 전보를 보내 평화회담을 요구했다. 푸줘이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 조만간 공산당의 천하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푸줘이는 마오쩌둥의 '연합정부'를 연구하고 검토해 공산당의 영도를 인정한다는 전제아래 '지차수이(冀察綏 기찰수; 허베이-차하얼-수위웬)' 3성(省)의 실력자 자격으로 연합정부에 참여할 때 자신의 기반과 군대를 보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푸줘이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갑'이 된 마오는 모른 채하고 자신의 수순에 따라 행마(行馬)에 들어갔다. 푸줘이를 더욱 옥죄기 위한 수순으로 린뱌오(林彪 임표)에게 펑타이(豊臺 풍대)를 공격해 베이핑과 톈진사이의 철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주석 279) 푸줘이는 이 전투에서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했다. 펑타이 전투에 참가한 동북야전군 3대대 부 대대장 마전궈(馬振國 마진국)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276)

 

"펑타이루에 있는 지금의 징시(京西 경서)호텔 부근에 매우 큰 집들이 몇 채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포로에게 푸줘이의 '비적소탕 사령부'가 어디 있는 지를 물었다. 희미하게 드러난 큰 집들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이 돌격해 들어갔을 때 집안은 이미 비어있었다. 우리가 앞문으로 치고 들어갔을 때 푸줘이는 후문을 통해 달아났다. 10여 분 남짓한 간발의 차이였다. 식탁에는 먹다 남은 만두가 놓여 있었는데 따뜻했다."

 

 

 1948년 11월 베이핑에 모인 푸줘이, 장제스, 웨이리황

 

 

펑타이(豊臺 풍대)로에 있던 푸줘이의 총사령부는 징시(京西 경서)에서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로 옮겨졌다. 푸줘이는 자신의 기반이자 친위부대인 35군단이 신바오안(新保安 신보안)에서 포위당한 사실을 알고 공산당 지하당원인 자신의 딸 푸동쥐(傅冬菊 부동국)에게 "35군단은 나고, 나는 바로 35군단"이라고 비통해 했다. 푸줘이는 1927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할 때 쭤저우(탁州 탁주)를 기습 공격해 점령했다.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의 펑톈(奉天 봉천)군벌은 반격을 펼쳐 쭤저우를 포위 공격했다. 

푸줘이는 겹겹이 포위당해 지원군이 없는 상황에서 3개월을 버텼다. 결국 펑톈군이 패퇴해 수성(守城) 장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이 이 35군단이었다. 푸줘이는 제일 아끼는 35군단 장병들이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이들을 구하기 위해 심사숙고 끝에 해방군과 협상을 하기로 했다. 푸줘이는 12월 15일 협상대표로 '핑밍르바오(平明日報 평명일보) 편집국장 추이자이즈(崔載之 최재지)를 성 밖으로 보내 해방군과 담판을 벌였다. 푸줘이는 해방군이 모든 공격을 중지하고 양군이 후방으로 철수하며 35군단이 베이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요구했다. 화베이 연합정부가 구성되면 35군단을 연합정부에 소속시킨다는 조건을 내걸어 협상을 매듭지었다.

 

푸줘이는 베이핑 중난하이 쥐런탕(居仁堂 거인당)의 '비적소탕 사령부' 사무실에서 투항하는 문제를 놓고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푸줘이는 참모장 리스졔(李世杰 이세걸)에게 "평화담판은 투항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덕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지난날의 역사는 끝났는가?"라며 비통한 심정으로 물었다. 

리스졔는 "평화담판은 혁명입니다. 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혁명도덕을 말해야 합니다. 봉건도덕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응당 보존할 수 있고, 보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애석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위로했다. 푸줘이는 같은 문제를 다른 참모들에게도 묻고 또 물었다. 방송은 인민들은 전범자(戰犯者) 처단을 원한다는 소리를 잇따라 내보냈다. 푸줘이도 당연히 전범자 명단에 있었다. 이 또한 푸줘이가 투항을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마오도 푸줘이가 전범자 명단에 들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전보를 보내 지하당원을 푸줘이에게 파견해 전범자 명단에 이름을 넣은 것은 장제스가 푸줘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기위한 조처란 뜻을 전달해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런 전언을 들은 푸줘이는 1949년 1월 6일 막역한 친구 저우베이펑(周北峰 주북봉)과 민주연맹 상임위원 장둥쑨(張東蓀 장동손)을 베이핑 성 밖으로  보내 지(薊 계)현에 주둔한 해방군 핑진(平津 평진; 베이핑-톈진)지휘부에서 린뱌오, 녜룽전과 회담을 하도록 했다. 저우베이펑은 "푸 선생은 이미 형세를 잘 알고 있다. 우리를 파견한 것은 해방군의 조건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라고 입을 떼었다. 

린뱌오는 "조건은 아주 간단하다. 모든 군대를 해방군에 소속시킨다. 모든 지역을 일률적으로 해방구화 한다"고 했다. 회담은 빠르게 진전돼 회담내용의 초안을 작성하고 가서명을 했다. 베이핑 성 안으로 돌아 온 저우베이핑은 푸줘이에게 회담내용을 설명했다. 푸줘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침묵 끝에 푸줘이는 "이 문건은 이틀 뒤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마오는 푸줘이의 투항결심을 촉구하기 위해 톈진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해방군의 톈진 공격 하루 전에 푸줘이는 부사령관 덩바오산(鄧寶珊 등보산)을 린뱌오 진영에게 보내 담판을 했다. 녜룽전은 단도직입적으로 "지난 번 회담에서 최후 회답시간을 14일 밤12시로 정한바 있다. 현재 10시간도 안 남았다. 이번 담판은 톈진을 제외하고 베이핑 문제만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덩바오산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당신들은 톈진을 공격하는가? 얼마동안  톈진을 공격하는가?"라고 물었다. 

린뱌오는 "명령이 이미 하달됐다. 3일간 공격한다. 덩바오산은 경색된 표정을 지으며 "3일? 30일을 공격해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푸줘이도 공산당마냥 두 가지 책략을 썼다. 덩바오산을 시켜 계속 회담을 하게 하면서 톈진 방어군에게는 견결하게 저항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동북야전군은 1월 14일 톈진을 공격해 들어갔다. 전투결과는 허망했다. 동북야전군은 3일은 고사하고 29시간만의 전투 끝에 국민당 방어군 13만여 명을 전멸하고 톈진을 점령했다. 텐진 경비사령관 겸 방수사령관 천창지예 등 고위 장령 28명을 생포했다. 동북야전군은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탕구(塘沽 당고)에 있던 국민당군 5만여 명은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베이핑은 국민당군의 화베이 최대의 전략요지였으나 동북야전군 주력이 산하이관을 쾌속 질주해 베이핑을 철갑을 두르듯 포위해 버렸다. 푸줘이 부대는 서쪽이나 남쪽으로 달아날 길이 모두 봉쇄됐다. 20만여 명의 방어군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다. 푸줘이는 이제 모든 게 마오의 손에 달렸고, 자신에게는 다른 출로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푸줘이는 3차례 회담을 벌여 1월 19일 '22일 오전 10시부터 쌍방이 휴전'하기로 한 '베이핑 평화적 문제해결에 관한 협의서' 에 서명했다. 푸줘이는 서명 하루 전에 '비적소탕 사령부' 부참모장 이상의 고위 장령과 소속 각 병단사령관, 군단장을 소집해 회의를 열어 평화회담 협의내용을 공표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통곡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미안합니다, 영수(領袖)여! 죄송합니다, 영수여!"라고 울부짖었다. 그들이 말한 '영수'는 장제스로, 장제스는 그날 하야(下野)를 발표하고 고향인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시커우(溪口 계구)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물러나기 전 푸줘이에게 전보를 보내 서로 떨어진 지 오래로 보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보내는 비행기에 중앙군 소령이상 군관과 필요 무기를 운송하도록 했다. 

푸줘이는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도록 했다. 1월 23일 이른 아침 리원(李文 이원) 등 중앙군단 이상 군관들을 둥단(東單 동단) 비행장에서 두 대의 비행기에 태워 난징(南京 남경)으로 돌려보냈다. 둥단 비행장은 활주로가 아주 짧아 해방군이 포를 쏘면 그들은 난징으로 갈 수 없었다. 하지만 해방군은 포를 쏘지 않았다. 푸줘이의 부인과 아이들이 아직 충칭(重京 중경)에 있어 교환조건으로 리원 등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주석 277) 푸줘이는 마침내 투항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딸 푸동쥐(傅冬菊 부동국)에게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했다. (주석 278)

"마오쩌둥 선생.
나는 다시 내전을 바라지 않습니다. 베이핑의 고적(古迹)을 보위하고,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해치고 파괴하지 않기 위하여 마오 주석의 영도를 받아들이고 평화회담을 접수합니다. 담판을 할 수 있도록 난한천(南漢宸 남한신)선생을 파견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나에게는 현재 수십만 명의 군대가 있고, 200대의 비행기가 있습니다. 나는 지난날 장제스를 중심으로 해 국가의 위망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인민들을 구원한다는 환상에 빠져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생각과 방법이 철저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후 마오 주석과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구국구민의 목적에 다 달아-."

 

푸줘이는 마침내 1월 22일 부대를 이끌고 베이핑 성문을 나와 린뱌오와 녜룽전에게 부대 지휘권이양과 개편 등에 관해 우여곡절의 협의를 거쳐 합의 했다. 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 4군단이 1월 31일 부대를 이끌고 성 접수와 방어임무를 위해 베이핑 성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고도(古都) 베이핑은 평화적 해방을 맞았다.    
 
275)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276) 淮海戰役粟裕立了一功; 三次'斗膽直陳'   北京晩報  人民網
277 傅作義見毛澤東; 主席, 我有罪 人民網 
278) 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26. 국민당 권력다툼, 물러나는 장제스와 떠오른 리중런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141일 동안 중국의 명운을 걸고 벌어진 랴오-선(遼沈 요선), 화이하이(淮海 회해), 핑진(平津 평진)전역이 인민해방군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장제스는 풍전등화의 신세가 됐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뜨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대륙의 역사와 주인이 시나브로 바뀌고 있었다. 해방군은 ‘3대전역’ 전투기간 국민당군 정규군 144개 사단, 비정규군 29개 사단을 전멸하고 86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또 25만 명을 살상하고 기의(起義) 5만여 명, 항복 12만 명, 개편(改編) 25만 명 등 총 154만 명의 국민당군 병력을 소멸했다. 공산당군도 24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민당군의 주력이 궤멸됨에 따라 국공 양당의 군사력에 근본적 변화가 나타났다. 국민당군은 365만 병력이 204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공산당군은 280만 명에서 357만 명으로 늘어났다. 마오는 ‘3대전역’이 한창인 1948년 11월 양군의 병력상황에 근거해 “현재의 상황에 비춰볼 때 1년 정도면 국민당 정부를 타도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는 애초 마오가 1946년 7월 5년 안팎이면 국민당을 타도할 수 있다고 밝힌 것보다 2년을 앞당긴 셈이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오랜 동안의 전쟁과 부패로 경제구조가 붕괴돼 재정이 고갈되고 물가폭등으로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민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이런 때 ‘3대 전역’의 참패는 장제스를 완전히 나락으로 빠트려 기진맥진하게 했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반란평정(공산당 소탕작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평화를 호소했다. 장제스는 “화의(和議)는 국가독립을 보존하는 데 무해할 뿐 아니라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켜 원기를 회복하게 한다. 신성한 헌법을 위반하거나 민주헌정을 파괴하지 않고 중화민국의 국체를 확보해 중화민국의 법통을 유지한다. 군대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인민은 자유생활 방식을 향유 한다”며 공산당과의 화의 제스처에 나섰다. 

난징정부의 평화담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3지대의 인사들도 동조하고 나섰다. 베이핑의 장선푸(張申府 장신부) 교수는 ‘평화를 호소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민주인사 량수밍(梁漱溟 양수명)은 상하이 ‘다공바오(大公報 대공보)’에 ‘중국공산당에 삼가 고한다’라는 글을 실어 “호전자(好戰者)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내전은 마땅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문제도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하고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평화회담을 호소했다. 마오는 인민해방전쟁이 지나온 굴곡진 과정을 회고하며 국민당 반동파와 제국주의 세력의 ‘평화음모’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주석 280)

 

마오는 1949년 새해를 맞아 공산당 기관지 신화사(新華社)에 실은 신년사  ‘혁명을 끝까지 진행한다’에서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은 창장(長江)이남으로 진군해 지난해 보다 더욱 위대한 승리를 이룩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런 공산당의 군사, 정치적 압력과 구이파(桂派 계파; 리중런 바이충시 등 광시 군벌)와의 갈등 등으로 장제스는 1949년 1월 21일 총통직에서 ‘하야(下野)’해 2선으로 물러났다. 

 

 

 리중런과 장제스

 

 

리중런(李宗仁 이종인)이 총통대리가 돼 난징정부를 이끌게 됐다. 리중런이 구원 등판했지만, 일락서산(日落西山)이었다. 게다가 국민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권력의 깨진 '쪽박'을  차지하겠다고 계파가 서로 으르렁거렸다. 고향인 저장성 시커우(溪口 계구)로 들어간 장제스는 말만 은거일 뿐 '상왕'으로 수렴청정 해 리중런은 핫바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변화와 혁신의 시대흐름에 밀려 난파한 장제스는 1948년 말 이듬해 하야를 앞두고 비통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은 본래 군사적인 힘에서 '공비(共匪 공비; 공산당 비적)'들보다 수십 배는 앞섰다. 제공권,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상황에서 '장시 자오페이(江西剿匪 강서초비; 장시성 징강산에 근거지를 둔 마오의 무리)' 포위소탕전을 벌일 때도 엄청 유리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급 군관들이 재물 모으는데 급급하고 사치방탕에다 주색잡기에 빠져 오만방자한 마음으로 군대를 지휘했다. 군대를 제멋대로 운용해 기율이 파괴되고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장병들의 투지는 온데간데 없어 졌다. 우리들의 실패는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세상사 이치 ‘물이 정수리에 떨어지면 발등까지 가게 되는 법’이었다. 나는 '바담 풍'하지만 너희들은 '바람 풍' 하라고 해봤자 소용없는 셈이다. 권력의 노예였던 장제스가 아무리 금옥 같은 말을 토해내도 자신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를 인정했으면 이런 비참한 꼴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철칙이다. 어쨌거나 장제스는 '권력'이라는 총통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1948년 3~5월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南京 남경). 

국민당군이 전국 전쟁터에서 연전연패당하는 것과는 달리 난징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장제스가 총통에 당선된데 이어 부총통을 뽑는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부총통 직은 장제스 밑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는 한직이었다. 모든 정사(政事)를 장제스 혼자 챙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권력’은 좋았다. 

후보자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 국민당에서 리중런(李宗仁 이종인), 쑨커(孫科 손과), 청치옌(程潛 정잠), 위여우런(于右任 우우임), 민사당의 쉬푸린(徐傅霖 서부림), 재야의 모더후이(莫德惠 모덕혜) 등이 나왔다. 이들 중 유력후보는 쑨원의 아들이자 행정원 원장인 쑨커와 광시 군벌의 대부이자 국민정부 베이핑 행원(行轅)주임 리중런이었다.

 

문제는 장제스파와 구이(桂 계; 광시)파 간의 충돌이었다. 리중런의 구이파는 장제스파에 대항할 유일의 최대 실력집단이었다. 1891년 구이린(桂林 계림)에서 태어나 광시성을 기반으로 신군벌을 구축한 리중런은 항일전쟁 기간에도 장제스에게 맞서는 등 암투를 벌여왔다. 리중런은 1938년 봄 타이얼좡(臺兒庄 대아장)에서 벌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으로는 처음 일본군을 대파해 전국에 위명을 떨쳤다. 

이처럼 성망(聲望)이 높아지자 장제스에 반대하거나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리중런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장제스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리중런을 실권 없는 '군사위원회 위원장 베이핑 행영(行營: 군대의 임시 병영)주임'으로 임명해 베이핑으로 보냈다. 

장제스는 1946년 9월 1일 명칭을 바꿔 리중런을 '화베이(華北 화북)군정 최고장관'으로 임명했다. 역시 실권은 주지 않았다. 당시 베이핑 시정부는 베이핑 행원의 직속기관으로 지척에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 심복인 베이핑시장 처환(撤換 철환)은 난징에 있는 장제스에게는 칼같이 보고했지만 리중런은 철저하게 ‘왕따’ 시켰다. 근처의 톈진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리중런은 "내가 베이핑 행원주임으로 3년을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위로는 하늘에 이를 수 없고, 아래로는 땅을 밟을 수 없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리중런도 머리를 썼다. 1946년부터 장제스의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장제스와의 차별화 정책을 내놨다. '인민'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펴야한다고 떠들어 댔다. 개명인사와 민주인사들은 환호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리중런은 '민주 장군'이란 이름을 얻었다. 

장제스에 신물이 난 미국도 리중런을 밀기 시작 했다. 미국과 밀착한 리중런은 베이핑 개혁언론들의 지원을 받아 '변화와 혁신'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혁신인물'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개혁의 기수로 떠오른 리중런은 국내외 매체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몸값을 올렸다. 장제스 이후의 차기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다 1947년 가을부터 동북지역을 석권한 공산당군은 리중런의 위수지역 화베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리중런은 훗날 이때의 상황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주석 281)

 

"동북이 무너지면 화베이가 제일 먼저 공격을 받게 됐다. 동북패전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화베이도 동북을 뒤 따를 것이 뻔 했다. 만일 내가 공산당군의 포위를 당해 고성에서 홀로 남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리중런이 고뇌할 때 부총통 선거가 공고됐다. 리중런은 미국인들이 요구하는 '혁신'에 부응하고 인민들을 위한 '민주성'을 내세우며 부총통 선거에 나설 결심을 했다. 자신의 곤란한 처지도 벗고, 잘 하면 부총통이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성공하면 광시파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공산당군이 포위할 것으로 보이는 베이핑을 떠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시쳇말로 밑지지 않는 ‘장사’라고 본 것이다.

 

리중런은 측근인 청스위안(程思遠 정사원)을 베이핑으로 불러 3통의 편지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나는 장제스에게 보내는 것으로 자신이 부총통 선거에 나서겠다는 뜻과 허락해 줄 것을 내용으로 한 편지였다. 또 하나는 장제스의 책사 우중신(吳忠信 오충신)에게 보내는 편지로 장제스에게 잘 말해달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은 존 레이튼 스튜아트 미국대사의 개인비서 푸징보(傅涇波 부경보)에 보내는 편지였다. 

리중런은 구이파 군벌의 후배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뜻을 밝힌 뒤 장제스의 기색을 잘 살필 것을 부탁했다. 리중런이 부총통 출사표를 던지자 미국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1947년 7월 하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특사로 중국에 온 워더마이어는 베이핑에서 리중런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 워더마이어는 1개월 뒤 중국을 떠나기 전 날 공개적으로 국민당 정부가 "탐욕스럽고 무능하고", "(모든 일에 대해) 마비되어 관심이 없다", "사람들을 용기 잃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한다"고 국민당 정부를 비난한 뒤 "(중국은)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리더십과 참신한 도덕성을 갖춘 지도자를 갈망한다"고 노골적으로 리중런을 지지했다.

 

워더마이어가 떠난 뒤 미국대사 스튜아트는 ‘현장조사’라는 이름아래 칭화(淸華 청화), 옌징(燕京 연경) 및 베이다(北大 북대) 등 대학을 돌면서 학생들과 접촉했다. 그는 이런 명분으로 난징에서 베이핑까지 '여행'을 한 뒤 미국 국무성에 특별 보고를 했다. 스튜아트는 보고에서 "일반 학생들은 마음속으로 국민당 통치를 상징하는 장제스에 대해 자격과 명망이 날로 약해지고 심지어 과거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리중런 장군의 자격과 명망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고 리중런을 추켜세웠다. 

리중런은 10월에 부총통 출마를 최종 결정했다. 미국 트루만 정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른바 미국이 만든 '기획 후보'였다. 그러나 난징의 구이(桂 계; 광시)파 수뇌부의 바이충시와 황사오홍(黃紹竑 황소횡)은 출마배경을 알지 못해 당선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해 반대했다. 이들은 리중런이 장제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떨어지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보았다. 만일 리중런이 장제스의 뜻에 반해 출마했다가 떨어지면 둘 간의 골이 깊이 패어 '구이파'가 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괜히 구이파가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피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해서 리중런에게 부총통 보다 감찰원 원장에 나서라고 권유했다. 리중런은 이들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출마준비에 들어갔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었다. 이때 미국의 주요 신문들이 리중런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국내외에 관련기사들이 쏟아졌다. 

280) 1949; 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同舟共進’ 第8期 陸茂淸(文史學者)
281)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

 

 

127. 리중런의 국민당 "창장 이남 지키자" …마오 "전중국 해방"

 

 

리중런은 1948년 3월 11일 베이핑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에 있는 베이핑행원에서 부총통 출마를 공식 선포했다. 선거공약으로 민주개혁의 실현을 내걸었다. 장제스 통치에 반대하던 사회 각계인사들이 리중런을 지지한 것은 불문가지다. 리중런은 베이핑과 난징에 잇따라 '경선(競選)사무위원회'를 개소했다. 바이충시와 황사오홍도 어쩔 수 없이 리중런을 돕기 위해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구이(桂 계)파 3거두가 맹렬한 득표활동에 나섰다. 리중런의 출마를 반대한 장제스는 '자유경선'이라고 밝힌 만큼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어 속앓이를 하다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리중런을 낙선시키는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장제스가 볼 때 국민당 원로인 청치옌이나 모더후이 등은 리중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 손과)만이 리중런을 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애초 쑨커는 현재의 직책인 입법원 원장에 만족해 부총통에 출마하려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을 시켜 두 차례 쑨커를 찾아가 출마를 권유했으나 쑨커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장제스가 직접 쑨커를 만나 설득한 끝에 쑨커는 '당의 지시를 받든다'는 모양새를 취하며 경선에 뛰어들었다.

 

 

리중런과 쑨커의 치열한 선거전이 구이파의 선전으로 나타나자 장제스의 불만스러운 마음은 초조한 마음으로 바뀌어 직접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4월 3일 밤 리중런을 자신의 관저로 불러 노골적으로 출마포기를 강박했다. 리중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히려 리중런에게 출마한 위여우런, 청치옌 두 사람과 '공수동맹'을 맺어 되레 연합전선을 펴는 마당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

 

리중런


4월 19일의 총통선거에서는 당연히 장제스가 당선됐다. 20일부터 실시된 부총통 선거는 난타전이 되면서 이전투구 양상을 보였다. 게다가 장제스가 개입한 적나라한 관권선거로 혼탁의 극치를 이뤘다. 당시 중국을 말아먹던 장(蔣 장), 쑹(宋 송), 콩(孔 공), 천(陳 진) 4대 가문 중의 하나인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陳立夫 진립부)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조직을 풀가동해 쑨커의 득표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장제스도 마찬가지였다. 장제스는 선거인단 대표 중 황푸(黃포 황포)파를 불러 "리중런의 부총통 출마는 의심할 것도 없이 내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꼽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학생'이고, 나의 충절한 간부라면 마땅히 나를 대신해 칼을 뽑아내야 한다"며 쑨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황푸파를 중심으로 한 범 장제스파들은 당의 단합이라는 이름으로 쑨커 지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극우파인 천리푸의 cc파와 삼청단(三靑團)의 이해가 엇갈렸다.

삼청단은 장제스가 천리푸에 의존하는 만큼 자신들이 쑨커를 지지하면 장제스가 앞으로 더욱 천리푸에게 기대어 cc파가 득세할 것을 우려했다. 삼청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은밀히 리중런을 밀기로 했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리, 쑨 두 후보 진영은 온갖 향응을 베풀고 노골적으로 금품을 뿌리고 회유, 매수 등을 서슴지 않으며 선거는 극도로 타락한 '막장'이 되어갔다. (주석 285)

4월 23일 1차 투표에서 리중런은 754표를 얻어 1위를 했다. 2위는 쑨커로  589표, 3위 청치옌이 522표를 득표했으나 모두 재적투표 과반수를 얻지 못해 이들 상위득표 3명을 대상으로 한 2차 투표가 4월 24일 실시됐다. 리중런이 1위로 1163표, 쑨커가 2위로 945표, 청치옌이 3위로 616표를 얻었다.  역시 과반 득표자가 없어 3차 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날 오후 장제스는 국민당 원로인 청치옌과 단독회견을 하면서 자리와 금품 제공을 미끼로 사퇴를 회유했으나 청치옌은 강력 거부했다. 이날 난징 거리에 정체불명의 괴청년들이 차를 나눠 타고 다니며 "리종런이 부총통에 당선되면 '비궁(逼宮 핍궁; 신하가 황제 퇴위를 강요하는 것)' 운운하는 전단지를 뿌려 삽시간에 시내에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리중런 진영은 '후보사퇴'라는 초강수로 맞불작전을 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난징의 각 신문들이 1면에 리중런이 '모종의 압력으로 후보를 사퇴한다'는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발칵 뒤집혔다. 장제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은바 있는 청치옌은 리중런과 '공수동맹'을 맺은바 있어 선거보이코트에 가세했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이 뿌려진 격이었다.

진땀을 흘리던 장제스가 '자유경선'을 강조하며 중재에 나서 가까스로 파국을 막았다. 장제스는 26일 3차 투표를 앞두고 리중런의 오른팔인 구이파 바이충시를 불러 선거에서 손을 떼라고 압력을 가했다. 바이충시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만큼 고분고분 따랐다. 28일 실시된 3차 투표결과 리중런 1156표, 쑨커 1040표, 청치옌 515표를 각각 얻었다. 1위인 리중런이 116표차로 쑨커를 따돌렸다. 장제스는 여전히 쑨커를 지원했다. 29일 오전에 리중런과 쑨커를 놓고 마지막 4차 투표를 실시했다. 리중런이 1438표로 1295표를 얻은 쑨커를 143표 차이로 이겨 마침내 부총통에 당선됐다.

 

미국대사 존 레이튼 스튜아트는 "쑨커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장제스가 심대한 좌절을 맛보았다"면서 "국민당내의 반대파들은 cc파와 황푸파를 중심으로 한 정당독재에 승리의 도전을 가했다"며 장제스에게 찬물을 뿌렸다. 리중런의 부총통 당선으로 구이파(廣西 광시파)들의 영향력은 확대됐지만 장제스파와의 갈등은 더욱 악화됐다. 국민당내의 모순도 더욱 격화했다. 장제스와 구이파간의 권력쟁탈전은 일단 구이파의 승리로 끝났고 장제스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져 하야까지 이끌어 내게 된 것이다.

 

1949년 1월 21일, '장왕조(蔣王朝 )'로 불릴 만큼 22년 동안의 철권통치로 중국대륙을 다스렸던 장제스는 권력의 무상함을 뒤로하고 고향인 저장성 시커우(浙江省 溪口 절강성 계구)로 쓸쓸하고 고독한 귀거래를 했다. 장제스 권력의 해넘이가 잿빛 구름을 드리울 때, 허베이성 시바이포(河北省 西伯坡)의 마오는 새로운 중국의 해맞이를 구상하고 있었다.
 

마오는 붉게 타오르는 동쪽 하늘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무량한 감회에 젖었다. ‘갑’이 된 마오는 마땅히 승세를 몰아 궁지로 몰린 적들을 추격해 강남으로 쳐들어가 전 중국을 해방시키느냐, 아니면 초패왕 항우를 본 따 창장(長江 장강)을 경계로 '남북조(南北朝)'의 패왕에 만족할 것인가를 더듬고 있었다. 마오는 자신이 쓴 새해 신년사 "혁명을 끝까지 진행한다"를 되뇌이며 '혁명'과 '인민해방', '통일중국', '신중국' 등의 열쇳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투지를 다졌다.

장제스와 리중런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정적(政敵)이었지만 창장(長江 장강)을 경계로 한 창장 이남지역의 반쪽강산(半壁江山)을 통치하는 방안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 리중런이 내놓은 공산당을 상대로 한 '창장 이남의 지역'을 지키려는 이른바 '남북조(南北朝)' 통치협상 방안을 적극 지지했다.

 

장제스는 하야 직전에 공산당이 창장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기 위해 군사배치를 했다. 자신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 탕은백)를 '징후항(京滬杭 징호항; 난징-상하이-항저우지역)‘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해 '쑤저완(蘇浙晥 소절환; 장쑤-저장-안후이성지역)' 3성과 난징, 상하이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하야 후 1월 하순 시커우에서 창장방어에 관한 회의를 소집해 창장 방어를 위한 양대 전구(戰區) 설치를 결정했다.

 

후베이 이창(湖北宜昌 호북 의창)에서 후커우(湖口 호구) 서쪽지역은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가 40개 사단병력 25만 명으로 방어하도록 했다. 후커우 동쪽에서 상하이지역 까지는 탕언보가 75개 사단 45만 병력으로 지키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함대 172척, 비행기 230대를 배치해 합동작전을 펼쳐 창장일선을 방어하도록 했다.
 
한편 소련의 스탈린은 1월 10일 난징정부가 소련, 미국, 영국에 중국내전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전보를 중공중앙에 보냈다. 전보내용은 이랬다. (주석 286)

 

"우리들은 이렇게 답변을 보내려 한다. 소련정부는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중국이 내전을 중지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찬성한다. 그러나 중재에 동의하기 전에 다른 일방인 중국공산당이 소련의 중재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로 인해 소련은 다른 일방인 중공에게 중국정부의 이런 평화조처를 알리는 동시에 소련이 진행할 중재 동의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
 
마오는 중국내전 중지와 평화실현이라는 스탈린의 전보내용이 실제적으로 장제스가 평화를 구하는 척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마오는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남북조' 양대 정부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 마오는 4년 전 스탈린이 '혁명불허'를 한 조처를 상기했다. 장제스가 마오를 충칭으로 초청해 국가대계를 논하자는 충칭회담을 제의했을 때 스탈린은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마오를 압박한 바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오에게 보낸 전보에서 "중국공산당이 다시 장제스와 싸우는 것을 반대한다. 만약 중국에 내전이 발생하면 중화민족은 괴멸한다. 장제스가 이미 재삼 마오를 충칭에 초청해 국사를 논하자고 한 만큼 만약 거절한다면 국내외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내전이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라며 마오의 충칭담판을 강제했다. 마오는 이때의 스탈린 조처에 대해 혁명을 하지 말라는 '혁명불허'라고 분노를 터뜨린 바 있었다. 이런 일련의 스탈린의 ‘장제스 편향’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마오는 완곡하게 중재를 거부하는 내용의 회답전보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만약 소련이 난징정부에 대해 1월 10일의 전보내용대로 조처할 경우 미국, 영국은 당연히 중재조정에 참가할 것이다. 그럴 경우 국민당은 우리를 모욕하는 구실을 얻게 된다. 우리를 호전분자라고 매도할 것이다. 국민당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고, 아울러 인민해방군의 빠른 승리를 희망하는 광대한 인민군중들은 실망을 할 것이다-."
 
마오는 나중에 여러 차례 이 일을 거론하면서 시종 마음속으로 소련을 불만스러워했다. 마오는 1949년 4월 11일 담화에서 "우리들은 그들의(스탈린 등 소련지도자) 말을 듣지 않고 창장을 건넜다. 미국은 출병하지 않았고, 중국도 남북조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도 이 일을 지적했다. 1955년 1월 모스크바에 부임하는 소련대사 류샤오(劉曉 유효)에게 "당시 군사, 정치형세 모두 매우 좋았다. 우리들은 전 중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남하해 창장을 건널 준비를 했다. 소련은 이에 대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내전 중지를 요구했다. 실제적으로 '남북조', 두 개의 중국을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논(論)10대 관계'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중국에 대해 잘못된 일을 했다.-해방전쟁 시기, 먼저 혁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에 내전을 하면 중화민족이 괴멸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말했다. 싸움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서 승리했다. 또 우리의 확고한 승리를 회의했다. 1949, 1950년대 우리들에 대한 (소련의)압력이 대단히 컸다."
 
내전중지의 난징정부의 평화공세에 대응해 마오는 1월 14일 '시국성명에 관하여'를 발표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철저한 승리목적과 국가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국공담판의 기초로 8개항을 제시했다. 1월 22일, 각 민주당파 영수와 무당파 민주인사 리지선(李濟深 이제심), 선쥔루(沈鈞儒 심균유), 마쉬뤈(馬敍倫 마서륜), 탄핑산(譚平山 담평산), 차이팅카이(蔡廷개 채정개), 궈모뤄(郭沫若 곽말약) 등 55명이 연명으로 '우리들의 시국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이들은 중공의 8조항 평화조건과 해방군이 강남으로 진군해 전 중국을 해방시킬 것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들은 "난징 국민당 정부는 곧 완전히 무너진다. 남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기 위해 겉으로 평화회담을 제기하지만 시간을 벌기위한 음모다. 반혁명 잔여세력은 창장 이남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철저한 혁명을 진행해 잔존목숨을 부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 이룬 혁명대업을 막판 실수로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리중런은 강남을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중공과의 담판을 통해 어려운 국면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리중런은 1월 22일 마오쩌둥이 제시한 8조항을 기초로 한 조건을 받아들여 평화회담 개최를 희망한다는 뜻을 공표했다.
 
마오는 '베이핑 방식'을 난징정부와의 평화회담 모델로 삼았다. 베이핑의 평화적 해방은 국민당 화베이 '비적소탕 총사령부' 사령관 푸줘이가 중공 쪽의  개편을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다. 마오는 3월 5일에서 13일까지 시바이포에서 열린 7기 2중전회에서 "우리들의 방침은 담판을 거부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완전히 8조항을 승인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건 값을 흥정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리중런과 바이충시가 베이핑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톈진방식, 즉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마오가 말한 '베이핑 방식'은 평화적으로 도강해 강남 접수를 준비하는 것이고, '톈진 방식'은 무력으로 강남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마오는 일찍이 2월 초에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수위, 탄쩐린 등 5인으로 총 전적위원회를 구성해 '도강(渡江) 전역'을 준비하도록 한바있다. 덩샤오핑이 총 전적위원회 서기로 임명돼 총괄 지휘하기로 했다.
 
난징정부 평화담판 대표 장즈중(張治中)은 3월 3일 시커우로 장제스를 찾아가 평화회담 초안을 보고했다. 장즈중은 "우리들은 화베이, 둥베이 각 지역이 중공 영도들이 통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장 이남의 성을 완벽하게 확보해 국민당 영도들이 통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장제스는 수긍했다. 장제스는 표면상 하야했지만 2개월 동안 매일 시행령을 공포하고 전투준비와 평화구호를 내세워 창장방어 작전과 병력배치 등을 지시했다.

 

국방부 부장 허잉친(何應欽 하응흠)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12개 편제로 사령부를 개편하고 신병을 훈련시켜 병력을 보충하고 있었다. 해방군이 소멸시킨 장제스 직계부대의 각 사단의 편제를 빠르게 복원하면서 장제스의 신임을 받는 장군들을 사단장으로 임명했다. 리중런은 3월 상순 자신과 바이충시가 회담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발한 구이파의 골간인 류페이(劉斐 유비)에게 이렇게 말했다.(주석 287)
 
"내가 화평을 주장하는 3개 방면의 유리한 조건이 있다. 즉 전국 민중이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입법원 다수가 평화를 주장하고, 존 레이튼 스튜아트는 미국이 내가 말하는 화평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이것을 소련과 중공이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고 있는 화평은 어떠한 것인가?"
 
류페이가 물었다. 리중런이 내막을 설명했다.
 
"나는 강(창장)을 경계로 통치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공산당은 대체로 만족한다. 다만 동남 반쪽지역을 보전해야 하는데 나에게 생각이 있다."
 
"창장 분할통치는 부총통의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는 독장수셈이다. 내가 예측하기에 현재의 상황에서 대단히 힘들 것으로 보인다."
 
류페이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리중런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대는 마음 놓고 담판이나 하라. 나에게 방법이 있다. 다만 장(제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공산당은 이미 이렇게 많은 지역을 얻었다. 내 생각에 그것을 일시에 소화하지 못한다. 동남의 반쪽 강산을 확보한다면 최소한도 절반씩 나누어 가진 기초아래에서 민주연합정부를 조직할 수 있다."
 
리중런과 바이충시는 정치적으로는 적극적인 담판 의지를 보이며 군사상으로는 강 분할 통치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화담판 시기에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제시해 3~6개월의 시간을 얻어 150만~200만의 신병을 훈련시켜 군사상의 우세를 만들어 해방군의 도강을 막을 심산이었다. 당시 우한(武漢 무한) 하류의 창장이남 지역에 난징정부는 잔존 100여만 명의 육군과 해군, 공군을 완전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또 신병을 잇따라 보충해 총병력이 30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리중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록 (병력의)질이 떨어지더라도 결전만 하지 않는다면 창장을 지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구이파의 수십 만 명의 정예부대가 창장을 방어하고 있어 공산당과 강을 사이로 대치하면 3~5년은 지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바이충시는 평화담판 대표의 한 사람인 구이파 황사오홍(黃紹竑 황소횡)에게 "창장 북안에 있는 경비부대 뿐만 아니라 모든 병력을 남안으로 철수해 방어하고 우리들의 해, 공군이 엄호하면 천험의 창장과 더불어 공산당군이 건너올 수 없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285) 1949; 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同舟共進’ 第8期 陸茂淸(文史學者)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286)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1949;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陸茂淸(文史學者)
287)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1949; 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同舟共進’ 第8期 陸茂淸(文史學者)

----------------------------------------------------------------------------------------------------------------------------------

 

128. '개선장군' 마오, 베이핑 입성 …국공협상 시작

 

1949년 3월 23일은 마오가 중공 중앙기관을 이끌고 ‘3대 전역’ 등 인민해방전쟁을 총 지휘했던 시바이포를 떠나 마침내 베이핑으로 무혈 입성하는 날이었다. ‘홍비(紅匪; 붉은 비적)’로 몰려 22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인간한계를 뛰어넘는 2만5천리 장정 등 삶과 죽음을 넘나 든 투쟁 끝에 중국의 상징 베이핑(베이징)으로 떠나게 된 마오는 감개무량했다. 오전 10시쯤 저우언라이가 마오를 찾아와 “어젯밤 잘 쉬지 못했습니까? 충분히 쉬어야 좋습니다. 차를 타고 장거리 행군을 하면 대단히 피곤합니다”라고 아침인사를 했다.(주석 288)

 

“오늘은 서울(베이핑)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잠을 제대로 못자도 기뻐요. 서울로 과거보러(赶考 간고)가는 날입니다. 과거보러 가는 데 정신이 맑지 못하면 어찌되겠소?”

흥분된 마음으로 시바이포의 마지막 날 밤잠을 설쳤던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밝은 웃음을 띠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마땅히 모두 과거에 급제할 겁니다. 퇴짜 맞아 되돌아 와서는 안 됩니다.”

저우언라이도 웃으면서 말했다.

“되돌아 나오면 실패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리즈청(李自成 이자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기를 바랍니다.”

 

마오쩌둥이 왜 특별히 리즈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일까? 리즈청은 지금부터 300년 전 갑신년(甲申年)에 농민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수도인 베이핑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교만함과 성급함을 경계하지 않아 일부 장군들이 부패하고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투쟁이 벌어져 스스로 무너졌다. 중국의 광대한 농촌의 농민들은 수백 년 동안 “리즈청은 남정북전으로 18년 동안 싸워 베이징(北京 북경)에 들어갔으나 불과 18일 동안 권좌에 앉았다”는 속설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리즈청 이후 305년 뒤인 1949년 3월, 마오도 베이핑으로 개선하는 길이었다. 공산당은 20여 년 동안 남정북전하면서 쉽지 않은 승리를 일궜다. 리즈청의 전철을 어찌 밟을 수 있겠느냐는 뜻의 교훈을 마오가 새긴 것이다. 마오는 이날 베이핑에 입성해 베이핑 교외 샹산(香山)자락에 있는 쐉칭(雙淸 쌍청)별장에 임시로 거주하면서 평화담판을 조율하고 있었다.

 

리중런은 3월 31일 총통부에서 평화회담 대표단 환송연회를 베푼 뒤 중요 군사회의를 열어 창장방어를 강화하도록 했다. '징후항(京滬杭 경호항; 난징-상하이-항저우지역) 경비사령관 탕언보와 화중(華中 화중)군정장관 부서가 책임을 지고 각 부대에 명령을 내려 공산당군의 도강을 엄히 방어하도록 했다. 아울러 해군이 창장연안을 순시하고 공군이 구역을 나눠 정찰하도록 하는 한편, 교통 보급 등의 사항을 규정했다. 또 참모총장 구주통이 책임지고 2선 병단과 쯔장(資江 자강) 방어 후속부대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1949년 4월 1일 난징정부 평화회담 대표 장즈중, 샤오리즈(邵力子 소력자), 장스자오(章士교 장사교), 황사오홍, 리쩡(李蒸 이증), 류페이 일행이 베이핑에 도착해 국공담판을 시작했다.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신분으로 광저우(廣州 광주) 중앙당부에 당의 이름으로 리중런이 평화회담은 반드시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공산당군이 도강하면 즉시 평화회담을 중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압박지시를 내렸다.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장제스의 평화회담 방침을 통과시키고 중공의 도강(渡江)을 반대했다. (주석 289)

 

리중런은 공산당의 평화회담에 대한 반응을 살피기 위해 2월 27일 난징, 상하이 지역의 교육계 지도자와 옌후이칭(顔惠慶 안혜경), 장스자오 등 사회 유명 인사들로 '인민대표단'을 구성해 베이핑에 보낸 바 있다. 난징으로 돌아 온 이들 대표단은 마오가 리중런에게 보내는 서신과 함께 구두로 전한 "류중롱(劉仲容 유중용) 선생은 구이파의 측근이고, 또 중공의 친구로 우리들은 그가 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시바이포의 마오쩌둥 / 리중런 국민당 부총통(왼쪽), 바이충시 구이파 군벌

 

 

류중롱은 1903년 후난성 이양(益陽 익양)에서 태어나 일찍이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 오랫동안 구이(桂 계)파 리중런, 바이충시의 고급 참모로 일했다. 항일전쟁 기간 적극적으로 애국민주운동에 참가했고, 여러 차례 옌안에 와 마오와 저우언라이 등 중공 영도자들을 만나 항일 민주통일전선 문제를 건의했다. 류중롱은 공산당과의 밀접한 관계로 장제스, 바이충시 심지어 리중런의 부인 궈더구(郭德沽 곽덕고)도 그를 공산당원으로 생각했다. 리중런은 심사숙고한 뒤 류중롱을 파견해 중공과 교섭해 평화회담의 사항을 상의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5개항에 걸친 담판 요지를 작성해 류중롱을 통해 중공의 뜻을 타진하기로 했다. 5개항은 이랬다. (주석 299)

 

1. (난징)정부는 국내의 모든 문제를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동의한다.
2. 쌍방은 즉시 정식 대표단을 조직해 평화담판을 회복시킨다.
3. 평화담판 기간에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한다.
4. 이후 국가건설은 정치민주, 경제평등, 군대국가화, 인민생활 자유 등의 원칙을 지킨다.
5. 이후 외교방침은 마땅히 평등 호혜원칙을 준수한다.

 

바이충시는 류중롱이 베이핑으로 떠나기 전날 시의(時宜)에 적합한 대책을 직접 알려줬다.

 

"리중런 총통대리 이후 국공 쌍방은 모두 다툼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바람을 표시했다. 평화적 분위기가 있다. 이른 시일 안에 평화담판을 희망한다. 이후 '창장획정 분할통치'의 정치국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중공군대가 창장을 도강해서는 안 된다. 국민당 군대의 주력이 비록 부분적으로 전멸했지만 강대한 공군, 해군과 수 십 만의 육군이 있다. 만약 중공이 무리하게 도강을 한다면 손해를 볼 것이다. 이미 쌍방이 평화담판에 대한 바람을 표시한 만큼 중공이 강을 건너면 판이 깨져 담판을 할 수 없다."

 

바이충시는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 반드시 이런 내용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

중공중앙과 마오는 리중런과의 평화담판을 매우 중시했다. 마오는 3월 21일 중원국에 전보를 보냈다.

 

“리중런, 바이충시의 대표 류중롱이 16일 한커우(漢口)에 도착해 바이충시와 며칠 동안 상의할 것이다. 대략 20, 21, 22일 마디옌(馬店 마점)에 도착한다. 그대들은 즉시 루성타오(盧聲濤 노성도)에게 신속히 마디옌에 가서 (그를) 영접하도록 지시를 내려라. 류중롱이 도착하는 즉시 적당한 사람을 파견해 그를 수행하여 차로 쉬저우, 지난, 톈진을 거쳐 베이핑 시정부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시장이 있는 곳으로 모셔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3월 하순 베이핑에 도착한 류중롱은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그를 중난하이의 펑쩌웬(豊澤園 풍택원)에 묵도록 했다. 류중롱은 그날 밤 지프를 타고 은밀하게 베이핑 서쪽 교외의 샹산(香山 향산) 기슭 쐉칭(雙淸 싸청)별장에 머물고 있는 마오를 만났다. 마오는 지난 3월 23일 시바이포에서  베이핑으로 금의환향한 바 있다. 두 후난 사람은 반갑게 서로의 문후와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화제는 빠르게 평화담판 문제로 돌아갔다. 마오가 먼저 난징정부의 동향에 대해 물었다. (주석 300)

“제가 보기에 난징정부에 3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는 국민당의 명운은 이미 결정됐다. 평화를 구하고 전쟁을 끝내자는 주화파(主和派)가 있습니다. 또 한 부류는 ‘평화를 내세워 전쟁 준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국이 꼭 앞으로 나와 관여할 것이다. 평화는 시간을 벌기위한 것으로 다시 싸움을 준비하자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보수반동파들입니다. 그중 한 종류는 장제스는 죄를 지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공산당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 동요하고 배회하면서 매우 고민하는 고민파가 있습니다.”


류중롱이 이렇게 대답했다. 마오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한 뒤 웃으면서 물었다.

 

“리중런과 바이충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장(제스)과 구이파(桂 계; 광시파)는 여러 차례 부딪쳤습니다. 숙원이 깊습니다. 지금 두 집안은 또 안면을 몰수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원한을 갖고 있어요. 리중런, 바이충시는 장제스가 쉬고 있을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장제스의 ‘흉계’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또 공산당이 구이파 군대를 쓸어버릴까 겁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평화담판을 주장해 ‘강(창장)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劃江而治 획강이치)’ 국면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바이충시는 극력 해방군이 도강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는 해방군이 도강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병력을 60만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창장의 천험과 해, 공군의 고수로 해방군이 생각하고 있는 도강은 그렇게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바이충시는 우리가 도강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요.”

 

마오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오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도강작전에 투입할 해방군은 60만이 아니라 100만 명이요. 이밖에 또 100만 명의 민병이 있소이다. 우리들의 민병은 국민당의 민단과는 달라요. 우리들의 민병은 전투력을 갖고 있어요. 우리들의 도강을 기다리는 강남의 광대한 인민들 모두가 우리를 옹호합니다. 그때 공산당의 힘은 더욱 강대해 집니다. 이것을 바이충시는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오와 류중롱의 대화는 밤 8시부터 시작해 다음 날 새벽 3시에 끝났다.

4월 3일 밤 마오는 다시 류중롱을 접견했다. 마오는 류중롱이 난징으로 돌아가면 리중런과 바이충시가 중요한 역사적인 시기에 형세를 명확하게 보고 인민들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힘써줄 것을 바랐다. 마오는 류중런이 리중런과 바이충시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마오의 전달내용은 이랬다. (주석 301)

 

1. 리중런의 정치지위에 관하여 잠시 변동이 없다. 총통 대리로 난징에서 종전대로 명령을 내리고 법령을 시행할 수 있다.

2. 구이파 부대에 관하여 (그들이)출동해 공격하지 않으면 해방군도 공격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시 구체적으로 협의할 때까지 기다린다. 장제스의 직계부대도 역시 이렇게 한다. 만약 그들이 출격하지 않으면 리중런이 그들의 부대를 잠시 맡아 협상처리를 기다리도록 한다.

3. 국가통일문제에 관해서 국공 쌍방이 정식으로 협의할 때 리종런이 참석하면 마오쩌둥이 직접 참석한다. 만약에 리중런이 오는 게 마땅치 않으면 허잉친이나 바이충시를 대표로 해도 된다. 중공 방면에서는 저우언라이, 예졘잉, 둥비우가 참가하고 회담장소는 난징은 안 되고 베이핑으로 해야 한다. 쌍방협상에서 의견이 일치하면 중앙 인민정부를 세운다.

4. 현재 쌍방은 이미 평화담판을 시작했다. 미국과 장제스 반동파는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평화담판을) 깨뜨리려 할 것이다. 리중런과 바이충시가 확실한 주견을 갖고 미 제국주의와 장제스를 따라서는 안 된다.

 

마오는 “바이충시는 군대통솔을 좋아한다. 그의 구이파 부대는 10여 만에 불과하다. 앞으로 평화회담이 성공해 일단 중앙 인민정부가 성립돼 국방군을 건립하면 우리는 그가 계속 군대통솔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그가 30만 군대를 지휘해 그 재능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 국가에도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류중롱에게 말했다.

 

“바이충시는 우리들의 군대가 강을 건너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의 대군이 강을 건넌 이후 그가 고립감을 느낀다면 창사(長沙 장사)로 물러나 다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그가 광시(廣西 광서)로 물러날 수 있다. 우리들은 신사협정을 맺어 그가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3년 동안 광시로 들어가지 않겠다. 어떻겠는가?”

 

이렇게 말한 마오는 류중롱에게 “보시오, 우리가 매우 고심하고 있는 게 아니겠소?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패퇴시킬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민들이 손실을 덜 입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류중롱은 매우 진지하게 “이런 조처는 그들에게 모든 성의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곁에 앉아있던 저우언라이가 “이번에 난징에 가서 전할 내용의 총체적 원칙은 그들이 우리들의 도강을 동의하면 무엇이든지 이야기할 수 있으나 저항한다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 우리들이 강을 건너는 것은 절대 그들이 고립되는 게 아니라 광대한 인민들이 우리 편에 서서 우리들을 옹호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기 바란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류중롱이 베이핑에 체류하고 있던 4월 1일 장즈중(張治中 장치중)을 우두머리로 한 난징정부 평화담판 대표단이 베이핑에 도착했다. 대표단은 샤오리즈, 장스자오, 황사오홍, 리쩡, 류페이 등이었다. 중공은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다. 성원으로는 린보취, 린뱌오, 예졘잉, 리웨이한(李維漢 이유한), 녜룽전 등이었다. 어쨌든 류중롱은 밀사로 베이핑에 온 것이기 때문에 난징에서 온 대표단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288) 中國共産黨‘進京赶考’的征程; 時政頻道 新華網 ‘同舟共進’ 劉統 上海交通大學敎授
289)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299) 李 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300) 1949; 李 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同舟共進’ 陸茂淸(文史學者)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301)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

 

 

 

129. 국공협상 결렬 … 마오 "100만 대군 창장을 건넌다"

 

 

류중롱은 4월 5일 오후 1시께 난징에서 보낸 중국항공공사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류중롱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리중런을 찾아가 회견과 전달내용 등을 자세히 보고하고 4월 5일판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를 건넸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베이핑에서 갖고 온 겁니다. 이 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공산당의 정책방침과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류중롱은 1면에 실린 ‘난징정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사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리중런은 진지하게 글을 읽어본 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연신 한 숨만 쉬다 비서에게 허잉친을 부르라고 했다.

“괜찮겠습니까?”

 

류중롱이 매우 의아해하며 물었다.

“징즈(敬之 경지; 허잉친의 자)는 행정원장이요. 마땅히 그도 들어야 합니다.”

 

잠시 뒤 허잉친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류중런을 쳐다보며 거푸 물었다.

“무슨 소식을 갖고 왔습니까? 그곳에서 대표단을 만나봤나요?”

“보지 못했소, 나는 더공(德公 덕공; 리중런의 자)이 파견해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가 왔소. 막 보고를 했소이다.”

 

류중롱이 짧게 말을 받았다.

“당신이 보기에 공산당은 성의가 있습디까? 마오 선생은 만났습니까?”

 

허잉친이 잇따라 물었다.

“만나 보았소. 마오 선생이 이럽디다. 국공 두 집안이 몇 해 동안 싸워왔는데 쉬자고 해요. 담판이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요. 공산당이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른 시일 안에 내전을 끝내 지방과 인민들이 손실을 덜 입어야 한다구요. 마오 선생은 또 해방군이 꼭 강을 건널 것이고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합디다. 그는 당신과 더공이 협상을 통해 모든 문제를 풀러 직접 베이핑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바이충시는 마오가 창장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 방안을 거절한 얘기를 듣고 노기를 띠면서 “그들이 꼭 강을 건너려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무얼 이야기 하겠는가?”라며 결연한 뜻을 보였다. 바이충시는 “공산당이 만약 평화에 성의를 보인다면 지금 즉시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강을 건너서는 안 된다. 도강문제는 모든 문제의 전제 조건이다. 중공이 현재 전투로 강을 건너려 한다면 평화회담의 결렬은 피할 수 없다”고 했다.

 

 

4월 7일 리중런이 난징정부 대표단장 장즈중을 통해 마오에게 평화담판과 관련한 전보를 보냈다. 8일에는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샹산에서 장즈중과 4시간에 걸친 회담을 한 뒤 그 결과를 리중런에게 전보로 타전했다. 이날 밤 장즈중은 리중런에게 전화를 걸어 회담상황을 보고했다. 장즈중은 리중런에게 “대표단은 중공이 큰 양보를 했다고 여기고 있다. 단 해방군의 도강문제는 추호도 바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1948년 경의 마오쩌둥


이 평화협정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시”를 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리중런은 막 지피고 있는 희망의 불씨에 한순간에 찬물이 끼얹어진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평화담판 성공이 대단히 막막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중공이 도강을 강행한다면, 측근인 바이충시조차도 접수하지 않는 판에 장제스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리중런은 장즈중에게 계속 정전을 견지해 해방군이 도강하지 않을 것과 전쟁책임을 묻지 않을 것 등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주석 289)

 

류중롱이 4월 12일 다시 난징에서 베이핑으로 날아가 마오를 만났다.

“리중런, 바이충시의 태도가 바뀌었습니까?”

“바이충시는 여전히 완강하게 해방군이 도강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류중롱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리중런은?”

“아직 노력해야 합니다. 주석, 저에게 준 임무를 잘 처리하지 못 했습니다-.”

류중롱은 송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마오는 류중롱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그대의 일이 아니요. 중공중앙은 이미 해방군이 도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결정했소이다. 더리옌(德鄰 덕린; 리중런의 자) 선생이 해방군이 도강했을 때 난징을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난징이 불안정하면 비행기로 베이핑으로 올 수 있어요. 공산당은 그를 귀빈으로 환대할 것이요. 그때 평화회담을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

 

4월 15일 밤 중난하이에서 국공 평화담판 대표단 제2차 정식회의가 열렸다. 저우언라이는 회의에서 “제1차 정식회의 이후 나와 원바이(文白 문백; 장즈중의 자) 선생이 협정초안 전 내용의 요점을 다시 추려 구체적 의견을 나눴습니다. 중공 대표단은 가능한 한 난징정부 대표단의 많은 의견, 평화사업에 유리하고 중국 인민해방에 유리한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들은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 했습니다. 아울러 4월 20일이 서명의 마지막 기한임을 선포합니다”라고 밝혔다.

 

난징정부 대표단은 ‘국내 평화협정’ 최후 수정안을 검토한 뒤 황사오홍(黃紹竑 황소횡)과 고문 취우(屈武 굴무)가 문건을 갖고 16일 난징에 돌아가 지시를 받도록 결정했다.

 

리중런은 16일 구이파 핵심인물들을 소집해 대표단이 갖고 온 평화협정 문건과 관련한 회의를 열었다. 리중런은 비분강개한 어조로 황사오홍에게 “그대는 베이핑에 돌아가 장원바이(장즈중)에게 내가 국민정부 총통대리의 신분으로 베이핑에 가서 죄를 청할 테니 중공 대표단에게 전범을 체포하겠다는 이 조항을 취소하도록 설득하라고 하시오. 내전에 대한 죄는 나 혼자 책임을 질 테니 국민정부 소속의 군정관계자들의 과거의 죄과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타 조항은 우리 모두가 승인키로 한 것이니 성실하게 집행할 수-”라고 말끝을 흐렸다. 리중런은 관건이 되고 있는 해방군의 도강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바이충시는 일찍이 “중공이 도강을 견지한다면 평화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심을 굳히고 황사오홍과 서명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다퉜다. 둘은 각자 자기의견을 주장하며 양보를 하지 않아 얼굴을 붉힌 채 헤어졌다. 곁에서 이들의 다툼을 지켜 본 리중런은 일언반구도 벙긋하지 않았다.

만일 리중런이 동의를 표시하면 같은 군대끼리 충돌이 불가피하고, 막후에서 여전히 힘을 행사하는 장제스가 한마디 하면 하야(下野)는 물론 심지어 생명에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동의하지 않으면 식언(食言)으로 인민들의 불신을 살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었다. 설령 자신이 대표단이 갖고 온 ‘국내 평화협정’안에 서명한다 하더라도 시행, 관철을 보증할 수 없었다.

 

앞뒤를 깊이 생각한 리중런은 평화협정을 접수하지 않고 서명권을 ‘평화회담 지도위원회’에 미루었다. 리중런은 이와 함께 장제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장췬(張群 장군)이 ‘국내 평화협정’안을 갖고 시커우의 장제스를 찾아가 설명하도록 했다. 장제스는 “원바이(평화담판 대표단장 장즈중의 자)가 무능하고, 주권을 상실하여 국가를 욕되게 했다”고 노발대발했다.

 

4월 18일 광저우 국민당중앙상무위원회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국내 평화협정’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난징의 리중런과 행정원장 허잉친에게 성명내용을 통보해 그대로 처리하라고 요구했다. 허잉친은 행정원 회의를 주재해 리중런이 참석한 가운데 형식상 최종 결정을 내렸다. 회의에 참석한 중앙당부 비서장 우티예청(吳鐵城 오철성), 참모총장 구주통(顧祝同 고축동), 행정원비서장 왕샤오구(王少谷 왕소곡) 등은 모두 장제스 사람들로 협정서명을 일제히 반대했다. (주석 290)

 

리중런은 19일 평화회담 지도위원회 회의를 열어 중공에 평화협정 서명기한연장을 요청해 약간의 기본문제를 계속 협의하도록 하는 방안을 채택해 평화담판 대표인 장즈중에 전보를 보내도록 했다. 이날 밤 난징방송은 난징정부가 평화협정 8조24항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냈다.

 

마오는 장즈중에게 평화협정 서명연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중공 쪽의 입장을 리중런에게 전달할 것을 통보했다. 리중런과 허잉친은 20일 연명으로 장즈중에게 전보를 보내 중공이 요구한 최종 서명기한에 대해 이미 정부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 뜻을 통보하도록 했다. 이처럼 난징정부가 최종적으로 ‘국내 평화협정’ 서명을 거부해 국공간의 평화담판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는 20일 밤 12시를 기해 ‘전국을 향해 전진’이라는 명령을 21일 공포해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정병은 일제히 벌떼처럼 창장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289) 1949; 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人民網 ‘同舟共進’ 陸茂淸(文史學者)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290) 李宗仁何敢要價 ‘劃江而治’ 人民網 ‘毛澤東與國民黨愛國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

 

 

130. 국공 양군,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

 

 

1949년 3월 초,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南京 남경)의 국방부 건물.

총통대리 리중런(李宗仁 이종인), 행정원장 허잉친(何應欽 하응흠), 참모총장 구주통(顧祝同 고축동), ‘징후항(京滬杭 경호항; 난징-상하이-항저우지역)’경비 총사령관 탕언보(湯恩伯 탕은백), 작전청장 차이원즈(蔡文治 채문치) 등 국민당 고위 장령들이 작전회의를 열고 있었다. 리중런이 허두를 떼었다.(주석 291)

 

“군사적 상황이 오늘날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강을 지키려면 우리들의 명운을 창장(長江 장강)의 천험에 걸어야 한다. 이미 하책이지만 우리에게는 강대한 공군과 수십 척의 군함이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장처(長處)다. 우리가 잘만 이용한다면 공산당군은 나는 듯이 빨리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먼저 당신들 작전청의 계획을 말해보시오.”

 

참모총장 구주통이 작전청장 차이원즈에게 말했다.

“우리군의 강 방어주력은 난징에서 상, 하류로 뻗어 있습니다. 창장의 강폭이 비교적 좁기 때문에 북안의 지류가 매우 많습니다. 공산당군이 도강할 목선과 민간 배들을 징집해 이런 강기슭에 많이 감춰놨습니다. 장인(江陰 강음) 밑으로는 강폭이 아주 넓습니다. 공산당군이 몰래 강을 건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차이원즈가 이렇게 보고하고, 강 방어 작전지도가 걸려있는 앞으로 걸어가 계속 설명하려 할 때 ‘징후항’ 경비 총사령관 탕언보가 차이원즈의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이 작전방안은 근본적으로 안 됩니다. 총재(장제스)의 의도에 위배됩니다. 나는 주력을 장인 아래 상하이를 거점으로 해 집중 배치해야 한다고 봅니다. 난징 상, 하류에는 소수부대를 배치해 대응하면 됩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주위가 소연해졌다.

 

“상하이를 지키고 창장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책이요.”

참모총장 구주통이 말했다.

 

“탕 사령관은 다시 생각할 수 없겠는가?”

리중런이 물었다.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는 장시(江西 강서) 상류인 후커우(湖口 호구)에서  하류인 상하이까지 45만 명의 대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탕언보에게 난징-상하이 지구 작전방침을 이렇게 지시한바 있다. 창장 방어선의 외곽은 상하이-항저우 삼각지대를 중점으로 하고, 송후(淞滬 송호; 장쑤성 태호에서 상하이지역)를 핵심으로 해야 한다. 지구(持久)방어 전략을 채택해 마지막으로 송후를 굳게 지키다 타이완에서 지원을 받아 반격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되어있었다. 이런 작전계획을 리중런 등은 전혀 몰랐다.

“이것은 총재의 방안입니다. 나는 반드시 집행해야 합니다!”

 

탕언보는 이중런의 작전방침 변경제의를 문질러 버렸다. 차이원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략과 전술로 볼 때 어떤 국내외 군사 전략가들도 모두 창장을 방치하고 상하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지금 총통 대리와 구 참모총장께서 모두 우리들 작전청의 방안에 동의하시는 데 어째서 사령관 혼자 이의를 제기하십니까?”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총재께서 어떻게 하든 분부를 내리면 그대로 할 뿐이다.” 탕언보는 장제스를 내세워 막무가내였다.

“총재는 이미 하야 하셨습니다. 사령관께서 고압적인 태도로 억누르려하는 것은 참모총장의 작전계획을 거역하는 겁니다. 적들이 도강하면 상하이를 지킬 수 있다고 보십니까?”

차이원즈가 탕언보에 대들었다. 탕언보는 애초 차이원즈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탁자를 치며 큰소리로 노호했다.

“너, 차이원즈가 무엇하는 놈이야?! 강을 지키네, 못지키네 뭔데 떠들어. 다시 한 번 말하면 내가 총살한다-.”

탕언보는 말을 끝낸 뒤 문건을 밀쳐놓고 회의장 밖으로 뛰쳐나가 활갯짓 걸음을 하며 훌쩍 떠나버렸다. 리중런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장제스와 탕언보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주석 292)

 

“장 선생(장제스)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관여는 정부의 창장방어 계획을 파괴한 것이다. 장 선생은 장재(將才)가 아니다. 둥베이(東北 동북)와 쉬방(徐蚌 서방; 쉬저우-방푸) 두 곳의 전역을 장제스가 직접 지휘했다. 당시 나와 바이충시는 쉬방 전역은 마땅히 ‘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이허를 방어해야 한다’고 전통적인 원칙적 작전을 역설했다. 장은 듣지 않았다. 쉬저우(徐州 서주)의 4차례 전투에서 일패도지했다. 이후 강의 방어는 하책이었지만 우리들은 하늘(상공)을 장악하는 강대한 공군과 수십 척의 전함이 있어 그렇지 못한 공산당군에 대해 잘 이용하면 그렇게 빨리 창장을 건널 수 없었다. 장 선생은 강을 지킬 뜻이 없고, 오로지 상하이의 ‘죽은 도시’를 방어하려고만 했다. 이런 잘못된 전략을 그가(장세스) 가장 총애한, 실제적으로 가장 쓸모없는 놈인 탕언보가 집행했다.”

 

리중런이 난징 위수사령부에 ‘난징 방어계획’을 지시해 국방부가 3개월에 걸친 방어공사를 할 즈음 탕언보는 비밀리에 장닝(江寧 강녕) 요새에 배치했던 대포를 상하이로 빼돌렸다. 난징 샤오링(孝陵 효릉)에 총 지휘부를 둔 탕언보는 난징을 사수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시로 1백~2백대의 트럭을 대기시켜 여차하면 난징을 떠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비록 난징을 사수(死守)하겠다는 의지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다. 난징을 버리고 달아날 경우 그 타격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리중런은 최선을 다해 방어준비를 했다. 탕언보도 태만할 수는 없었다. 2400여 년의 도시역사를 갖고 있는 난징(南京 남경)은 중국의 유명한 고도(古都)다. 삼국시대 때 주거량(諸葛亮 제갈량)은 “난징은 용이 서려있고,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듯한 지세로 제왕의 땅(鐘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也)”이라고 부른바 있다. 손권의 오나라 건업이후 수(隋)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 여섯 나라(六朝 육조)가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그 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이곳에 수도를 세워 번영을 누렸다. 홍수전의 태평천국군도 난징을 도읍으로 삼았다. 장제스는 1927년 ‘4.12쿠데타’를 일으킨 뒤 난징을 국도(國都)로 정했다. 장제스는 항일전쟁 후 우한과 충칭으로 8년 동안 천도했다가 항일전쟁을  승리하면서 다시 난징을 수도로 삼아 14년을 이어오고 있었다.

 

공산당의 창장도강 계획은 1948년 12월 화이하이(淮海 회해) 전역을 승리로 이끌 무렵 중앙군사위원회, 마오와 총 전적위원회가 작전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1개월 뒤 류보청이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총 전적위원회를 대표해 도강은 국민당군의 일자형 장사진(長蛇陣)에 맞서 병력을 안정적으로 집중해 한꺼번에 공격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1949년 1월 29일 덩샤오핑은 상치우(商丘 상구)에서 중원국 회의를 열어 도강작전 준비와 관련해 집중 토론을 벌였다.

 

덩샤오핑은 2월 8일 상치우에서 열린 중원국 영도자들이 참석한 총 전적위원회 회의에서 도강작전 시기, 배치, 보급 등의 구체적 문제를 토론해 ‘도강작전 방안과 준비공작 의견에 관하여’ 를 중앙군사위원회에 보고했다. 2월 19일 중앙군사원원회가 화이하이(淮海 회해) 전역을 승리로 이끈 5인 총 전적위원회를 ‘창장도강 총사령부’로 구성해 도강계획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을 서기로 한 총 전적위원회는 류보청, 천이, 수위, 탄쩐린 등 5명이며, 류보청과 천이는 상임위원이었다. (주석 293)

 

마오는 3월 5일부터 시바이포에서 열린 중공 7기2중전회에 참석한 덩샤오핑 등을 불러 도강작전 문제를 상의했다. 마오는 몇 가지 중요 문제를 제기했다. 도시와 농촌문제에 관해 1차 대혁명 실패 이후에 농촌을 무시하고 도시에 중점을 뒀으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은 도시로 진입해 정권을 잡아야 하는 시기다.

 

도시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에서 농촌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연계하는 ‘공농연맹’을 잘 일궈내야 한다. 공작의 중심이 도시로 이행하는 것으로 혁명의 승패가 걸린 전략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총 전적위원회로 돌아 온 덩샤오핑과 천이 등은 3월 26일 3야전군단의 각 병단 지휘관들이 보고한 도강작전 준비상황을 듣고 ‘징후항(京滬杭 경호항; 난징-상하이-항저우 지역)’ 지구 전역 실시방안을 연구했다. 덩샤오핑은 3월 31일 총 전적위원회가 주둔한 안후이성 페이둥현 야오강촌(安徽省 肥東縣 瑤崗村 안휘성 비동현 요강촌)에서 ‘징후항 전역 실시요강’을 기초했다.

 

총 전적위원회는 4월 1일 ‘징후항 전역 실시요강’을 중앙 군사위원회에 보고했고, 군사위원회는 3일 비준했다. 모든 지휘계통과 부대는 긴장된 전투태세 준비에 들어갔다. 국공 양군은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대회전을 앞둔 정적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4월 15일 중앙 군사위원회는 덩샤오핑과 천이가 있는 총 전적위원회 총부와 수위, 장전(張震 장진), 류보청, 장지춘(張際春 장제춘), 리다(李達 이달)에게 전보를 보내 “평화담판이 20일 최종 기한으로 결정됐다. -그대들은 이 전보를 받는 즉시 20일 안칭(安慶 안경), 양푸(兩浦 양포) 뿐만 아니라 모든 북안(北岸)과 강상의 거점을 공격해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1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창장 중하류 남안에 70만 명의 대군을 장사진으로 펼쳐 ‘육해공군의 입체작전’을 꾀하고 있었다. 창장 전역을 총지휘하는 덩샤오핑은 허페이(合肥 합비) 부근의 야오강촌에서 3야전군단인 화둥야전군과 2야전군단인 중원야전군을 총괄지휘하며 배치를 완료했다.

 

291) 1949;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陸茂淸(文史學者) ‘同舟共進’ 8期 人民網
 李宗仁何敢要價‘劃江而治’ ‘毛澤東與國民黨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人民網
 揭秘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292) 李宗仁何敢要價‘劃江而治’ ‘毛澤東與國民黨將領’ 李濤 編著 長征出版社出版 人民網
1949;李宗仁差点兒取代蔣介石劃江而治中國 陸茂淸(文史學者) ‘同舟共進’ 8期 人民網
 揭秘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293) 鄧小平; 渡江戰役是毛澤東親自交給我指揮的 新華網 ‘中國歷代疑案解密’ 諸葛文 著 中國戱劇出版社出版

-----------------------------------------------------------------------------------------------------------------

 

 

131. 일필휘지 인민해방군 난징점령 7율(七律)의 시

 

 

창장 도강 총 전적위원회는 국민당군이 창장 남안에 강을 따라 펼친 4천리에 이르는 장사진(長蛇陣 장사진)을 공파(攻破)하기 위해 뱀의 허리를 자르는 전략을 짰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돕지 못하도록 목을 끼우고 꼬리를 공격하면서 주력을 집중해 진(陣)의 한복판을 치고 들어가도록 했다. 4월 20일 난징 정부가 평화담판 서명을 거부함에 따라 중앙 군사위원회는 총 전적위원회에 도강명령을 하달했다. 총 전적위원회는 이날 밤 7시 30분에 모든 부대에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렸다. 국공간의 최후의 대결전인 창장전역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됐다. 총 전적위원회는 먼저 돌격 집단군이 구이츠(貴池 귀지)에서 우후(蕪湖 무호)에 이르는 중간을 돌파해 국민당군의 창장방어선의 허리를 절단하도록 지시했다.

 

강안의 공산당군 중 집단군(중군)의 대포가 불을 뿜어댔다. 포탄이 비오듯 남안과 강상(江上)의 국민당군 진영에 쏟아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귀를 찢고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창장을 뒤덮었다. 창장 방어선의 허리의 허점을 공격당한 국민당군이 놀라 허둥대자 총 전적위원회는 동 집단군과 서 집단군에게 21일 황혼 무렵 동시에 동쪽 장인(江陰 강음)에서 서쪽 마당(馬當)까지 약 600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상의 적을 집중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도강 공격부대들은 4야전군단의 협동작전과 강대한 대포 화력의 엄호를 받으며 1만 척의 목선과 배를 타고 일제히 진격했다.

 

“창장을 건너 전 중국을 해방시키자.”

 

새카맣게 강상(江上)을 메운 목선과 돛을 올린 배에 탄 공산당군들이 구호를 외치며 산을 밀어내고 바다를 뒤집어 업는 기세로 남쪽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강상의 국민당군의 방어선을 뚫어 승기를 잡은 서 집단군은 국민당군의 깊숙한 방어선까지 파고들었다.

 

동 집단군 포병은 창장 동쪽을 봉쇄해 국민당군 함대가 달아나는 퇴로를 끊었다. 또 다른 부대는 창저우(常州 상주), 단양(丹陽) 등지의 성을 공격해 ‘징후(京滬 경호; 난징-상하이)’ 철로 교통선을 절단했다. 23일 류보청, 장지춘, 리다가 지휘하는 서 집단군은 구이츠, 펑쩌(豊澤 풍택) 등지를 점령했다. 주력부대는 ‘저장(浙江 절강)-장시(江西 강서)’선상으로 돌진해 도주하는 국민당군을 섬멸했다. 아울러 탕언보와 바이충시 집단군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수위와 장전이 지휘하는 동 집단군은 단양, 창저우, 전장(鎭江 진강), 푸커우(浦口 포구), 우시(無錫 무석) 등지의 성을 점령했다.

 

35군단 대 부대들이 23일 한 밤중에 기세 드높게 이장먼(挹江門 읍강문)을 통해 난징시내에 들어갔을 때 국민당군은 이미 모두 달아나  난징은 텅 빈 공성(空城 공성)이었다. 공산당군의 입성 하루 전인 22일 정오 리중런은 항저우에서 장제스와 상의한 뒤 난징을 포기하기로 결정해 국민당군은 철수했다. 리중런은 이날 밤 항저우에서 난징으로 돌아온 뒤 23일 새벽 전용기를 타고 파괴된 난징 성 상공을 두 바퀴 돈 뒤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어 참모총장 구주통, 작전청장 차이원즈 등이 비행기를 타고 항저우로 달아났다. 오전 10시 공군총사령관 저우즈로우(周至柔 주지유)가 마지막으로 난징을 탈출했다. 24일 새벽 인민해방군 8병단 35군단 104사단 312연대 사단 참모장 장샤오안은 부대를 이끌고 홍기를 높이 든 채 총통부로 진입해 문루(門樓)에 올라가 국민당 정부의 청천백일기를 끌어내리고 홍기(紅旗)를 달았다. (주석 294)

 

베이핑 서쪽 교외 샹산(香山 향산)의 쐉칭(雙淸 쌍청)별장에 임시 거주하고 있던 마오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가 4월 23일 호외로 발행한 1면 머리기사 통단제목 ‘인민해방군 난징점령’ 기사를 보고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마오는 먼저 덩샤오핑과 류보청에게 축하전보를 써 보낸 뒤 분출하는 시흥(詩興)을 가다듬어 ‘7율(七律)-인민해방군 난징점령’ 시를 일필휘지했다.

 

“종산(난징의 주산)의 비바람(시국) 변화무쌍하다, 백만 정예 창장을 건넜네.
 제왕의 땅 오늘 옛날이 다 했구나, 하늘과 땅이 뒤집혀 의기 드높다.
 마땅히 남은 힘 궁지몰린 적 추격해, 초패왕을 배워 따라 해서는 안 되리.
 하늘이 (사람마냥) 정이 있다면 늙고, 세상사 상전벽해 바른 이치 일러라.

 鐘山風雨起蒼黃,  百萬雄師過大江.  虎踞龍盤今勝昔,  天翻地覆慨而慷.
 宜將剩勇追窮寇,  不可沽名學覇王.  天若有情天亦老,  人間正道是滄桑.”

 

 

덩샤오핑과 천이 / 마오저둥과 저우언라이

 

마오는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을 함락시켜 꿈에 그리던 통일중국을 눈앞에 두게 됐다. 마오는 이 시에서 영용하게 싸운 인민해방군의 용맹 분투정신을 기리고, 난징 공격을 앞두고 결렬된 국민당 정부 총통대리 리중런과의 평화담판에서 고민을 했던 일단의 감회를 적었다.

 

국민당 정부가 제시한 창장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劃江而治 획강이치) 방식이 평화담판의 쟁점이었다. 중국의 첫 통일제국, 진나라를 멸한 뒤 초나라의 항우는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참모인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서초패왕으로 만족했다. 기회를 놓친 항우는 그 뒤 한의 유방과 천하를 두고 각축을 벌이다 유방을 광무산에 고립시켜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또다시 성고(成皐), 영양을 경계로 한 유방 쪽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였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휴전협정을 깨고 항우를 공격해 해하성(垓下城) 최후 일전의 승리로 천하를 차지하면서 통일제국 을 열었다. 이런 고사를 알고 있던 마오는 패왕에 만족한 항우의 전철, 여기서는 창장을 경계로 한 두 중국인 ‘남북조’의 분할통치를 거부하고 창장을 도강해 난징을 함락시켜 패왕의 교훈을 되새김하고 있다 하겠다. 쉽게 말하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사는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의 풍운조화로 세상이 주기적으로 바뀌면서 진화하고 있다. ‘홍비(紅匪)’로 몰렸던 공산당이 난징을 점령하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몰고 와 중국통일을 앞두고 있는 마오의 강개한 마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간 저장성 펑화(奉化 봉화)현 시커우(溪口 계구)진 고향집에 들어박혀 있던 장제스는 가족들을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풀이 죽어 맥 빠진 목소리로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를 불렀다. (주석 295)

“배를 준비했으니 우리 떠나자!”

 

장징궈는 이때를 훗날 “아버지의 마음은 울적하고 침통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도강전역 총 전적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덩샤오핑과 천이는 4월 27일 안후이성 하페이(合肥 합비) 야오강(瑤崗 요강)촌에서 총통부로 입성했다. 29일에는 총 전적위원이자 난징시 군사관제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된 류보청도 총통부에 도착해 덩샤오핑, 천이와 합류해 총통부를 둘러봤다. 이들은 장제스의 총통 집무실에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커다란 탁자가 창가에 비스듬히 놓여있고 벽에는 거울 상자에 끼워 넣은 장제스의 큰 사진이 걸려있었다. 1943년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때 군복정장을 한 사진이었다. 탁자위에는 탁상시계, 붓꽂이, 붓, 문진 등이 놓여있고, ‘쩡원정(曾文正 증문정)전집’도 보였다. 장제스는 청나라 말기 중신인 쩡궈판(曾國藩 증국번)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던 덩샤오핑은 짙은 쓰촨 목소리로 “장 위원장, 우리들이 왔소이다. 우리들을 오랫동안 잡으려고 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제 발로 들어왔소이다. 또 당신이 어떤 허풍을 치나 보겠소이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류보청은 탁상용 달력을 가리키며 “여기 봐, 장 선생의 달력 날자가 23일이네. 떠난 지 얼마 안 되는구만”이라고 했다. 천이는 장제스 집무책상 앞에 있는 가죽의자에 앉아 마오의 베이핑 샹산 쐉칭 집무실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마오에게 “주석, 저 천이입니다. 제가 지금 장 총통의 의자에 앉아 주석께 보고드린다”며 난징 해방소식을 전했다.

 

294) 揭秘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295) 揭秘 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

 

 

132. 마오, 대부분 국토 해방…신중국 청사진 제시

 

 

탕언보는 난징이 함락되자 우후(蕪湖 무호) 서쪽에 있는 부대를 ‘저깐로(浙竷路 절감로; 저장-장시)’ 쪽으로 철수시키고, 우후 동쪽에 배치한 부대는 각각 상하이와 항저우로 퇴각하도록 했다. 국민당군 창장방어 나머지 부대들은 남쪽으로 패주했다. 서 집단군을 이끌고 있는 류보청은 2야전군 비 주력군과 3야전군이 협동작전으로 국민당군이 새롭게 방어진지를 쌓고 있는 ‘저깐선’ 공격에 나섰다.

 

서 집단군 2야전군 3개 병단을 3로(路)로 나눠 추격전을 벌였다. 류보청은 5월 상순 400킬로미터에 이르는 ‘저깐로’를 장악해 국민당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해 저항하려는 기도를 완전히 분쇄했다. 중공중앙은 5월 1일 인민해방군 도강작전에 참가한 각 부대에 축하 전보를 보내 ”난징은 신속히 해방되었다. 국민당 반동 통치는 이로부터 멸망됐음을 선포한다-현재의 모든 형세는 인민과 인민해방군에 매우 유리하다. 전선의 장사병들이 계속 진공하고-반혁명 잔여 세력을 소멸하고 전국의 인민해방과 통일적이고 민주적인 신중국을 건립하기 위해 분투하자“고 격려했다.

 

한편 덩샤오핑, 천이와 수위 등은 창장 도강 후 동(東), 중(中) 양 집단군을  지휘해 ‘집게형 공격(협공)’으로 신속하게 전진해 낭시(郞溪 낭계), 광더(廣德 광덕)산간지역을 포위해 국민당군 5개 군단 8만여 명을 궤멸시켰다. 탕언보의 집단군 20만 명은 상하이로 퇴각했다. 덩샤오핑은 3야전군 8개 군이 여전히 ‘집게형 공격’을 하며 진격해 국민당군의 해상탈출로를 막았다. 국제도시이자 전국의 경제중심지인 상하이는 장제스가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버티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였다.

 

장제스는 4월 26일 급히 상하이로 달려와 직접 방어배치를 완료했다. 장제스는 20만의 수비군이 상하이를 방어하는 동안 상하이에 있는 황금과 귀중한 물자를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빼돌리면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촉구하는 등의 전술을 병행해 저항대비를 하고 있었다. 덩샤오핑과 천이, 수위는 상하이 공격작전을 신중하고 세밀하게 짜기 시작했다. 천이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특수성을 감안해 ‘도자기점의 쥐를 잡는’ 격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국민당군을 섬멸하되 도시의 건물 등 중요 문화재도 보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석 296)

 

당중앙과 중앙 군사위원회, 마오는 덩샤오핑과 천이 등에게 “상하이를 방어하고 있는 적을 전멸하고 상하이가 전화(戰火)파괴를 면할 수 있도록 조처해 이후 재건에 유리하도록 작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덩샤오핑은 구체적인 부대배치를 하면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덩샤오핑 등은 5월 2일 1) 장기포위 전략 2) 국민당군의 취약한 곳 공격 3) 양익으로 우송커우(吳淞口 오송구)를 협공해 국민당군의 해상퇴로를 끊은 뒤 시 교외로 적을 유인해 공격하는 방안 등 3개 작전방안을 놓고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덩샤오핑 등은 3)방안을 채택해 잠시 상하이시 지구 공격을 유보한 채 도시가 최소한의 피해에 그칠 수 있도록 조처하면서 국민당군의 퇴로를 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상하이 전역 1단계는 시교외의 우송(吳淞), 가오차오(高橋 고교)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도록 했다. 인민해방군은 10일간의 격전을 벌인 끝에 국민당군의 우송 외곽방어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덩샤오핑의 2단계 시 지구 공격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공격 대오를 유지하면서 총공격을 펴는 방식이었다. 5월 23일 밤 상하이 시 지구에 대한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해방군은 중무기 불사용 사격규정을 엄격히 지키면서 기민한 기동전술로 시 지구의 중요거점을 점령하기로 했다. 해방군은 25일 ‘송후(淞滬 송호; 우송-상하이)’ 경비 부사령관 류창이(劉昌義 유창의)의 기의(起義)를 책동에 성공해 27일 오후 상하이를 완전 해방시켰다.

 

상하이 전역(戰役)은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이 16일 동안 처절한 격전을 벌여 해방군은 2만4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국민당군은 15만 명이 섬멸 당했다. 이로써 한 달여에 걸친 창장 도강 전역이 끝났다. 덩샤오핑은 “이 전역의 승리로 정치적으로는 난징 국민당 정부가 멸망했고, 군사상으로는 창장 이남의 최대, 최고의 무장역량이 사라졌다”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덩샤오핑은 1989년 11월 20일 제2야전군 전사(戰史) 집필 관계자들을 회견하는 자리에서 창장 도강 전역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마오 주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창장 전역)지휘권을 그대(덩샤오핑)에게 주겠다. 이것은 마오 주석이 직접 나에게 말한 것이다.-도강작전으로 부대가 (국민당군의)강 방어를 돌파한 뒤 3야전사령부를 지휘했다. 장전(張震 장진)이 참모장이었다. 도강 전역, 바로 ‘징후항(京滬杭 경호항: 난징-상하이-항저우)’ 전역의 실시강요(實施綱要)는 내가 기초한 것이다.”

 

창장 도강전역은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전역으로 43만 명의 국민당군을 전멸하고, 국민당 정부 수도인 난징과 항저우, 상하이, 난창(南昌 남창), 우한(武漢 무한) 등의 대도시를 해방시키는 등 장쑤성, 장시성, 안후이성, 푸젠성, 후베이성 등 광대한 남부지역을 점령했다. 이 전역의 승리로 인민해방군은 화난(華南 화남; 중국 남부지역), 시난(西南 서남; 중국 서남지역)으로 패퇴한 국민당군을 토벌하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통일중국의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오척 단구의 대물(大物) 덩샤오핑은 이 전역의 총 전적위원회 서기로 전투현장에서 100만 대군을 지휘했다. 이때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중공은 3년여의 내전기간 동안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세를 딛고 피 흘려 싸우면서, 특히 랴오선(遼沈 요심), 화이하이(淮海 회해), 핑진(平津 평진)의 3대 전역과 창장(長江 장강)도강전역으로 국민당군 주력을 소멸해 국민당 정부를 사실상 붕괴시키고 대부분의 국토를 해방시켰다. 마오는 화난과 시난으로 달아나 저항하고 있는 국민당군 잔당소탕을 지휘하는 한편, 치밀하게 새로운 정치협상회의를 주비해 신중국의 청사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협상회의가 화베이(華北 화북)에서 곧 개최됩니다. 중국인민혁명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중산(中山 중산; 쑨원의 자)선생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지금까지 실현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북쪽에 오셔서 인민들의 역사적인 위대한 사업에 참가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신중국을 어떻게 건설할 지에 대해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일찍이 1949년 1월 19일 상하이에 있는 쑨원(孫文 손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에게 이런 내용의 전보를 보내 앞으로 열릴 새로운 정치협상회의에 그녀를 초청했으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후에도 저우언라이가 여러 차례 전보를 보냈으나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신정치협상회의에 ‘쑨푸런(孫夫人 손부인; 쑹칭링)’이 꼭 참석하기를 바랐다. 신해혁명으로 상징되는 중국혁명의 대부 쑨원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의 언니로 장제스에게는 처형이 되는 미묘한 관계가 깔려있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상의를 거듭한 뒤 1949년 6월 19일 중공 후보 중앙위원이자 저우의 부인인 덩잉차오(鄧穎超 등영초)를 상하이로 파견해 ‘쑨푸런’을 맞이하기로 했다. 마오는 쑹칭링에게 보내는 친필 편지를 써 덩잉차오에게 주었다. 편지내용은 이랬다. (주석 297)

 

칭링 선생.
충칭에서 헤어진 지 어언 4년이 됩니다. 삼가 뵙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국 혁명승리가 임박해 (국가)대계(大計) 건설과 시급히 상의해야 할 일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덩잉차오 동지를 파견해 문후를 드리며 선생의 북상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삼가 베이핑에 오시어 가까이에서 가르침이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는 바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라며, 이에 특별히 말씀드립니다. 삼가 축하를 드립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1949년 6월 19일  마오쩌둥

 

296) 鄧小平;渡江戰役是毛澤東親自交給我指揮的 時政頻道 新華網 ‘中國歷代疑案解密’ 諸葛文 著 中國戱劇出版社 出版

29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柯延 主編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33. 마오저뚱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짧은 편지글이었지만 구구절절 쑹칭링에 대한 존경과 믿음,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넘쳐흘렀다. 덩잉차오가 쑹칭링을 맞이하러 상하이에 갈 때 쑨원과 함께 국민당을 이끌다 암살당한 랴오중카이(廖仲愷 요중개)의 딸로 쑹칭링 곁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랴오멍싱(廖夢醒 요몽성)을 대동했다. 상하이의 쑹칭링을 찾은 랴오멍싱은 인사를 한 뒤 방문한 뜻을 밝혔다.

 

“구구(姑姑 고고; 손위부인에 대한 경칭), 각계인사들이 모두 ‘구구’가 베이핑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중앙이 덩따졔(鄧大姐 등대저; 등 큰언니로 덩잉차오에 대한 존칭)를 파견해 ‘구구’를 맞이하러 왔어요.”

“(저우)언라이가 몇 통의 편지를 보내 다 읽어봤다. 단지, 베이핑은 내가 상심(傷心)한 땅으로 그곳에 가기가 겁난다.”

 

쑹칭링이 말하는 뜻을 랴오멍싱은 잘 알고 있었다. 쑨중산이 일찍이 위안스카이(元世凱 원세개)와 회담하기 위해 베이핑에 왔다가 병사해 쑹칭링은 베이핑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계속 미루고 베이핑에 가지 않았다.

 

“구구, 베이핑은 홍색중국의 수도가 됐어요. 덩따졔가 중공중앙,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를 대표해 특별히 ‘구구’를 맞이하러 왔어요. 언제 그녀를 만나 보겠어요?”

 

쑹칭링과 덩잉차오는 몇 차례 만나 의견을 나눈 뒤 쑹칭링이 베이핑에 갈 결심을 했다. 쑹칭링은 7월 1일 상하이에서 거행된 중국공산당 창당 28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중국공산당에 경하 드린다’는 연설을 했다.

 

“우리들의 영도자를 환영한다. -이 상하이에서 탄생해 장시(江西 강서; 징강산)의 산골에서 성장하면서 2만5천리 간난신고의 장정을 통해 담금질을 하고, 농촌의 진흙 속에서 영도자로 성숙했다. 중국공산당에 대해 경하를 드린다.”

 

마오는 이 연설 내용을 들은 뒤 극찬했다. 마오는 주변 공작원들에게 “쑹칭링은 걸출한 인물이다. 중국여성의 전형적인 대표로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유명하다. 그녀는 일찍이 쑨중산을 따라 혁명적 삶을 살았다. 나중에 쑨중산 선생의 (혁명)사업을 배반한 장제스와 결별하고 중국공산당과 합작했다”고 말했다.

 

8월 25일 마오는 쑹칭링이 베이핑에서 열리는 신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덩잉차오가 당중앙이 준 임무를 완성했다며 크게 기뻐했다. 8월 28일 오후 3시 45분 마오는 쑹칭링을 영접하기 위해 베이핑 기차역으로 마중 나갔다. 역 주변은 주더, 저우언라이 등 80여 명의 환영객들로 북적거렸다. 쑹칭링이 탄 전용열차가 서서히 역에 진입해 멈췄다. 마오는 기차 안으로 올라가 쑹칭링을 직접 영접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당신들의 초청에 감사합니다. 당신들에게 축하드립니다.”

 

쑹칭링도 마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인사했다.

“당신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신중국 건설대업을 주비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중국공산당이 당신의 영도아래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합니다.”

 

이날 밤 마오는 쑹칭링을 위한 연회를 베풀어 국가대사를 함께 논의하게 된 데 대해 다시 한 번 열렬하게 환영했다. 쑹칭링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가 베이핑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정식 개막됐다. 전국 각지에서 온 민주당파, 인민단체, 인민해방군, 각 지구, 각 민족과 해외화교 등 634명의 대표와 300명의 내빈들이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개막사에서 격동적인 언어구사로 전 세계에 대해 이렇게 천명했다. (주석 298)

 

“인류의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중국인은 지금부터 일어섰다.”, “우리들은 단결해 인민해방전쟁과 인민대혁명으로 내외 압박자들을 타도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우리의 민족은 다시는 모욕 받는 민족이 아니며, 우리들은 이미 일어섰다.”  

 

쑹칭링도 열정적으로 연설했다.

“우리나라가 오늘의 역사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때문이다. 이것은 유일한 인민대중을 옹호하는 정당이다. 쑨중산의 민족, 민권, 민생 3대주의의 승리의 실현이다.”

 

회의는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조직법’과 임시 헌법구실을 하는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 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켰다. 선거를 통해 마오쩌둥 등을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 마오쩌둥을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주더, 류샤오치, 쑹칭링, 리지선(李濟深 이제심), 장란(張蘭 장란), 가오강(高崗 고강) 등 6명을 부주석으로 뽑았다.

 

이들 6명의 부주석 가운데 쑹칭링과 리지선은 국민당 좌익혁명위원회 주석을 역임했고, 장란은 중국민주연맹 주석으로 이들 3명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천이 등 56명은 중앙인민정부 위원으로 선출됐다. 회의는 또 베이핑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결정하고 이름을 ‘베이징(北京)’으로 바꿨다. 서력기원을 채택하고 ‘의용군 행진곡’을 국가로, 오성홍기를 국기로 각각 선정했다.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는 9월 30일 폐막식에서 마오가 기초한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립을 선포했고, 중국인민은 이미 자신들의 중앙정부를 갖고 있다. 이 정부는 공동강령에 따라 전 중국경내에 인민민주 전정(專政; 독재)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298) 毛澤東生平全紀錄(下) 柯延 主編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34. 텐안먼 광장에 오성홍기·의용행진곡 울리자 환호성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성루(城樓).

 

중앙인민정부 비서장 린보취(林伯渠 임백거)가 건국대전 개회식을 선포했다. 마오가 주석단에서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와 장엄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됐다”고 선포했다. 마오는 이어 “우리 중국인민은 일어섰다. 우리의 미래는 무한히 밝다”고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30만 명의 군중을 향해 외쳤다. 삽시간에 환희에 찬 군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톈안먼 광장을 뒤흔들었다.

 

“인민공화국 만세!”, “마오 주석 만세!”소리가 들끓었다. 3시 10분, 린보취가 “마오 주석, 국기계양”이라고 말하자 마오는 톈안먼 광장 국기게양대와 연결돼 있는 식장의 전동단추를 눌렀다. 빨간 바탕에 공산당을 뜻하는 큰 별을 둘러 싼 4개의 작은 별, 즉 농민, 노동자, 소자산가, 민족 자산가 계급을 상징하는 오성홍기가 ‘의용행진곡’의 국가가 흘러나오는 장엄한 선율과 28발의 예포가 터지는 가운데 천천히 게양되었다. 예포 28발은 공산당이 걸어 온 28년의 간난신고의 역정을 상징했다.

 

이어 열린 열병식에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는 열병부대를 지휘한 녜룽전 장군을 대동하고 사열을 받았다. 주더는 다시 톈안먼 성루에 올라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전군이 중앙인민정부와 위대한 인민영수 마오 주석의 모든 명령을 견결하게 집행하고, 국민당 반동군대의 잔여세력을 신속히 소탕하며 모든 미 해방의 국토를 해방시키도록 계속 노력한다”고 선언했다.

 

분열식은 전차사단의 전차가 창안졔(長安街 장안가) 중단에서 행진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톈안먼 상공으로 17대의 비행기가 축하비행을 하면서 펼쳐졌다. 3시간에 걸친 열병과 분열식이 끝나자 날은 이미 저물어 톈안먼 광장의 창안졔 거리는 형형색색의 등불이 일제히 켜졌다. 밤 9시 25분 캄캄한 밤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등불의 행렬시위를 마지막으로 건국 경축행사가 모두 끝났다. 마오는 이날 꼬박 6시간 톈안먼 성루에 서 있었다. (주석 299)

 

앞서 이날 오후 2시 중난하이 친정디옌(勤政殿 근정전)에서 열린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린보취를 비서장으로 선출하고 저우언라이를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 부장(장관)에 임명했다. 저우는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26년 동안 총리를 지냈다. 회의는 마오를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선쥔루(沈鈞儒 심균유)를 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법원 원장, 뤄룽환(羅榮桓 나영환)을 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검찰서 검찰장에 각각 임명했다.

 

신중국 건국을 전후해 서북지역의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은 신장(新疆 신강) 지역으로 진군해 9월 26일 신장성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 화둥(華東)지역의 제3야전군은 미국의 군사개입에 대비하면서 타이완과 연해 도서에 대한 부대의 적극적 배치를 해놓고 있었다. 패퇴한 국민당군의 한 갈래는 후난성 남부와 광둥, 광시 등 중난(中南 중남)지구로 퇴각해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또 한 갈래는 쓰촨(四川 사천), 윈난(雲南 운남), 시캉(西康 서강), 구이저우(貴州 귀주), 시장(西藏 서장)지역으로 후퇴해 저항하고 있었다.

 

중난 지구의 국민당군은 구이파(桂 계; 광시 군벌)의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 집단군과 광둥의 위한모우(余漢謀 여한모) 집단군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바이충시 집단군은 헝양(衡陽 형양), 바오칭(寶慶 보경; 지금의 샤오양 邵陽)을 중심으로 한 샹난(湘南 상남; 후난성 남쪽지역) 지구, 위한모우 집단은 ‘샹웨(湘粤 상월; 후난-광둥)’ 연합 방어선을 구축해 해방군의 남진(南進)을 저지하려 했다. 서남지구의 국민당군은 후중난(胡宗南 호종남)과 쑹시리옌(宋希濂 송희렴) 집단군이 주력군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여기에 국민당 윈난성 주석 겸 윈난 수정공서 주임 루한(盧漢 노한)과 국민당 시캉성 주석 류원후이(劉文輝 유문휘), 국민당 서남 군정장관 공서 부장관 덩시호우(鄧錫侯 등석호), 판원화(潘文華 반문화) 등의 부대들이 가세하고 있었다.

 

바이충시는 국민당 군대에서 ‘작은 제갈량’으로 불릴 만큼 전략적 두뇌가 뛰어나 작전이 민활했다. 바이충시가 장악하고 있는 구이파 군대는 전투력도 비교적 강한데다 창장전투에서 크게 타격을 당하지 않았다. 바이충시는 병력의 전투력을 보존하려고 인민해방군과 가급적 교전을 피한 채 남쪽으로 후퇴했다.

 

마오는 “바이충시는 중국에서 가장 교활한 군벌로 그와의 작전은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한바 있다. 마오는 바이충시 부대가 구사한 그동안의 작전을 분석한 결과 궤멸시킬 새로운 작전방법을 고안해 냈다. 여우처럼 간교하게 치고 빠지는 바이충시의 전략을 깨기 위해 대(大) 우회 포위전술을 쓰기로 한 것이다. 제4야전군 영도자인 린뱌오,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 샤오커(蕭克 소극)에 전보를 보내 작전지시를 내렸다. (주석 300)

 

“바이충시의 작전지점은 내가 판단하기에 샹난, 광시, 윈난 3곳 가운데 광시의 가능성이 가장 크다. 차링(茶陵 차릉), 헝저우(衡州 형주) 이남의 어떤 지방이나 취엔저우(全州 전주), 구이린(桂林 계림) 등 혹은 그가 있는 곳에 대해 근거리 포위 우회방식 대신, 원거리 포위 우회방식으로 바이충시 후방을 점령해야 한다. 그런 뒤 바이충시의 10만 병력을 광시 구이린, 난닝(南寧 남녕), 류저우(柳州 유주)로 유인해 전멸시킬 준비를 하면 된다. 아니면 쿤밍(昆明 곤명)으로 추격해 들어가 섬멸할 수 있다.”

 

마오는 9월 12일 제2야전군 영도자인 덩샤오핑, 장지춘, 리다에게 전보를 보내 “바이충시와 서남 각 지역 적들에 대해 크게 우회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되 먼저 포위를 한 뒤 다시 되돌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대 우회 포위전술을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이런 새 전략방침에 따라 린뱌오의 4야전군과 덩샤오핑의 2야전군의 4병단은 동, 서, 중 3로로 나눠 9월 중순께 광둥, 샹시(湘西 상서; 후난 서쪽), 샹난(湘南 상남; 후난 남쪽) 으로 진격했다.

 

4야전군 13병단으로 이뤄진 서로군(西路軍)은 우익으로, 우회해 샹시로 돌진해 들어갔다. 서로군은 바이충시의 ‘샹웨(湘粤 상월; 후난-광둥)’ 연합방어선을 돌파해 주력군이 구이저우로 후퇴하는 도로를 끊어버렸다. 4야전군 12병단으로 이뤄진 중로군(中路軍)은 샹난에서 헝바오(衡寶)전역을 일으켜 바이충시의 정예부대 약 4개 사단을 전멸시켰다.

 

이와 함께 2야전군 4병단, 4야전군 15병단으로 구성한 동로군(東路軍)은 광둥으로 쳐들어가 10월 14일 광저우(廣州 광주)를 해방시켰다. 10월 하순 샹난과 광둥을 해방시킨 뒤 3로군은  즉시 군사를 몰아 광시로 진입해 대 우회작전을 펼쳐 먼저 광시군대가 후퇴할 윈난, 레이저우(雷州 뢰주) 반도, 구이난(桂南 계남) 및 베트남의 각 도로의 퇴로를 절단했다. 그런 연후에 국민당군 부대를 공격해 12월 24일 총 17만 3천 명을 섬멸해 광시성 전 지역을 해방시켰다. 바이충시 집단군은 완전 붕괴됐다. 리중런과 바이충시가 구축한 구이파의 거대 병단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만사휴의였다.

 

리중런은 11월 20일 억장이 무너지는 처연한 마음으로 전용기에 몸을 싣고 홍콩으로 갔다가 12월 5일 위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몸을 부렸다. 미국에서 장장 16년의 떠돌이 생활을 하다 신중국으로  돌아와 1965년 베이징에서 눈을 감았다. 수구초심이었다. 린뱌오의 4야전군은 치융야(瓊崖 경애)군단과 협동작전을 벌여 1950년 3월 상순 중국의 최남단 하이난도(海南島 해남도)에서 전투를 벌여 5월 1일 이 지역을 완전 해방시켰다.

 

국민당 정부는 광저우를 거쳐 항일전쟁 당시 수도였던 충칭(重慶 중경)으로 다시 옮겨갔다. 원래의 ‘촨싼(川陝 천섬; 쓰촨-싼시지역)’ 지구에 있던 후중난 집단군도 시난(西南 서남)으로 철수했다. 장제스는 1949년 8월 중순 천리푸(陳立夫 진립부),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 등 당, 군 관계자들을 데리고 타이완에서 충칭으로 날아왔다. 국민당군이 시난 지역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해 뿌리를 내려 권토중래를 꾀할 작정이었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시난의 중심지역은 쓰촨(四川 사천)으로 삼국시대 때 유비가 촉나라를 세워 위, 오나라와 함께 3국 정립시대를 열었던  곳이다.

 

299)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300)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

 

 

135. 포로 장신(張新)의 신발 밑창엔 문건과 편지가…

 

 

1949년 10월 8일 밤 난정성(南鄭城 남정성)에 주둔한 후중난(胡宗南 호종남)은 시위대장인 탕시웬(唐西園 당서원)으로부터 돌연한 보고를 받았다. 1947년 10월 싼베이 칭지옌(陝北淸澗 섬북 청간) 전역에서 포로로 잡혀간 정(整) 24여단 여단장 장신(張新)이 최근 시안에서 바오지(寶鷄 보계)를 거쳐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이 대치하고 있는 친링(秦嶺 진령) 봉쇄선을 넘어와 붙잡아 조사를 한 뒤 시위대의 감옥에 가둬놨다는 것이다. 탕시웬은 중공 쪽에서 장신을 파견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 지 후중난에게 지시를 청했다. 이틀 뒤인 10월 10일 후중난은 탕시웬과 2명의 무장사병을 대동하고 장신이 갇혀있는 곳으로 가 면담했다. 후중난이 장신을 보고 물었다. (주석 301)
 
“돌아왔나?”
“돌아온 게 아니라 중공 서북국이 파견해 왔습니다.”
 
장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을 파견해 무엇을 하려고?”
“대충 아실 겁니다. 나는 단지 당신만 보면 임무를 완성한 겁니다.”
“어째서?”
 
장신은 신었던 신발을 벗어 후중난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후공위안(胡公冤 호공원) 선생이 나보고 전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신발 밑창에 문건과 편지가 있습니다. 내용은 모릅니다. 직접 뜯어보시지요.”

"후공위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충격을 받은 후중난은 어안이 벙벙한 채 물었다.
“내가 출발할 때 시안 시징(西京 서경)초대소에 있었습니다.”
“후공위안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는 단지 나에게 당신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보기만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후공위안은 황푸(黃埔 황포)군관학교의 위병사령으로, 후중난과 저장성 동향사람이었다. 황푸군관학교와 북벌 동정(東征 동정) 때 상당히 친했다. 1927년 장제스의 ‘4.12 쿠데타’ 뒤 후공위안은 중공당원으로 국민당 정부의 수배를 받았다. 후공위안은 당의 지령에 따라 저장성 고향으로 돌아가 현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홍13군을 만들어 우두머리(軍長)이가 됐다.

 

 

봉기가 실패한 뒤 1932년 4월 상하이에서 체포돼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36년 출옥 후 시안에 있던 후중난에게 몸을 의탁했다. 후중난은 후공위안을 총사령부 막료로 임명했고, 나중에 간쑤(甘肅 감숙)성 민(岷 민)현 행정독찰직 등을 추천해 근무하게 했다. 국공내전이 폭발한 뒤 후공위안은 상하이에서 생활하다 1947년 겨울 중공 정보원 우커젠(吳克堅 오극견)과 연락을 맺고 중공의 지하공작을 수행했다. 옛날 국민당군 시절의 관계를 이용해 국민당 장령들의 봉기를 부추키는 공작을 해왔다.
 
이번 후중난을 대상으로 한 공작은 저우언라이가 직접 틀어쥐고 추진해 왔다.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주임으로 근무한바 있어 국민당군 황푸 인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후중난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을 물색하다 후공위안이 후중난과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사실을 알고 후중난을 설득해 기의(起義)하도록 비밀공작을 맡긴 것이다. 마오는 후공위안의 후중난 회유공작을 매우 중요시했다. 마오는 1949년 8월 6일 서북해방군 영도자인 펑더화이, 허룽, 시중쉰(習仲勛 습중훈)에게 후중난 공작과 관련해 특별 지시를 내렸다.

 

“후공위안이 이미 시안(西安 서안)에 갔다. 당신들은 그가 후중난 부대로 들어가 공작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현재 청쳰(程潛 정잠), 천밍런(陳明仁 진명인)은 후난에서 기의해 우리 쪽에 가담했다. 장, 구이(桂 계; 광시파), 후 부대에 반드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들에게 각 부대를 분화시키는 기회를 줄 것이다.”

 

지시내용 가운데 장은 장제스, 구이는 리중런, 바이충시, 후는 후중난을 가리킨다. 시안에 온 후공위안은 중공 제1야전군 연락부에 있는 전 후중난 집단군 여단장으로 있다 포로가 된 장신(張新)을 찾아 여러 차례 후중난 기의문제를 논의했다. 후공위안은 후중난에게 보낸 친필 서신에서 당면한 형세와 중공정책 등을 설명하고 신속히 군대를 일으켜 기의하도록 권유했다. 후공위안은 이 편지와 중공 서북국의 관련문건을 장신이 후중난을 찾아가 전달하도록 한 것이다. 장신은 신발 밑창에 편지와 문건을 숨긴 뒤 9월 23일 시안을 떠나 바오지를 경유해 촨싼(川陝 천섬)공로를 따라 한중(漢中 한중)으로 들어가 친링(秦嶺 진령)을 넘어 국공간 대치하고 있는 봉쇄선을 넘었다. 10월 8일에 싼난(陝南 섬남) 바오성(褒城 포성)에 도착해 후중난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후중난을 면담한 것이다. (주석 301-1)

 

후중난은 장신이 건네 준 신발을 들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신발 밑창을 뜯어 편지와 문건을 꺼낸 뒤 읽어봤다. 후중난은 방에서 나와 계속 장신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히 부끄럽습니다. 칭젠 전투에서 제가 후 선생이 제게 준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장신은 정(整) 24여단 여단장으로 칭젠 전투에 참가했다가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데 대해 상관인 후중난에게 이렇게 사죄했다.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후중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했다.

“저는 당신의 옛날 부하였습니다. 이번에 와서 장관(長官; 고위직 장령에 대한 존칭)의 근황이 어떤 지를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이후 항상 같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신은 은근히 후중난의 의중을 떠봤다. 후중난은 앙천대소하다 화제를 바꿨다.

“공산당의 전략전술이나 말해보시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냈다. 후중난은 장신이 감옥으로 돌아가 쉬도록 했다. 하루가 지난 10월 12일 후중난은 늦은 밤에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한타이(漢臺 한 대)로 장신을 불러 2차면담을 했다. 후중난은 대단히 겸손한 말투로 장신이 감옥에서 먹고 자는 것 등이 어떤지를 물었다.

“후 선생, 결심하셨습니까?”

 

후중난은 웃으면서 또 화제를 돌렸다.

“8로군이 친링 이북에 있소. 펑더화이가 난저우(蘭州 난주)를 치러 갔소이까?”

“예, 펑더화이가 난주를 공격하러 갔습니다. 만약 해방군이 한중을 공격하러 남쪽으로 갔으면 우리들이 이곳에서 얼굴을 볼 수 없지요.”

“당신은 공산당이 족치는 것이 겁나지 않소?”

“공산당은 과거의 잘못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장신은 공산당 정책에 관해 보고들은 것과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 했다. 후중난은 듣는 척 마는 척하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또 갑자기 앉곤 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닦고, 어떤 때는 히죽거리다가 껄껄대기도 했다. 결론없이 두 시간이 흘러갔다. 후중난은 지난번처럼 장신을 감옥소로 되돌려 보냈다. 후중난은 마음이 흔들려 방황한 것이 분명한 듯했다. 장제스의 최측근으로 ‘서북왕(西北王)’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후중난이었다. 단지 마음속에 일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에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사령관 장관’이란 자존심으로 속내를 숨겼을 뿐이었다. 이틀이 지난 10월 15일 후중난은 지난번과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장신을 3번째 면담했다. 후중난은 더욱 더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펑더화이 몸은 괜찮소?”

“몸이 아주 좋습니다. 항일항전 초기 당신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옛 친구라 할 수 있지요.”

“자오소우산(趙壽山 조수산)은 그곳에서 잘 나갑니까?”

“중공 쪽에서 환영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중공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나를 어떻게 부릅니까?”

“후중난이라고 합니다.”

“나를 후페이(胡匪 호비; 후중난 비적)라고 부르지 않소?”

“당신이 그들 쪽에 서게 되면 그때는 후 장군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반(半) 군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내가 반 군벌이라고?”

 

후중난은 노기서린 목소리로 다그쳤다. 후중난은 자신이 평생 혁명을 표방하며 살아 온 ‘혁명군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군벌’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일 겁내고 싫어했다.

 

“그곳에서 원톈샹(文天祥 문천상; 남송 때의 충신으로 ‘정기가 正氣歌’로 유명함.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함)이란 사람을 어떻게 봅니까?”

“원톈샹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족에게 굴복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절개를 지켰습니다. 당연히 좋게 보지요. 인민들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단, 당신과 내가 하는 일은-우리들은 원톈샹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장신은 후중난이 무슨 뜻으로 원톈샹의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다. 장신은 중공 쪽에서 일러준 논리대로 대답했다. 장신의 말은 후중난의 마음을 후벼 팠다. 후중난의 짙은 눈썹이 꿈틀대고, 무서운 눈초리로 장신의 눈을 노려보다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士爲知己者死!)! 당신도 황푸 출신이다. 당신, 교장(장제스)을 생각해 봤소?”

 

실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후공위안 선생이 당신이 인민의 적이 되면 죄악이 크고, 당신이 인민의 품안으로 돌아오면 공로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후중난이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 나는 교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장에게 죄송스럽게 할 수 없다!”

 

후중난은 감정이 복받쳐 소파에 쓰러져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방 바깥에 있던 시위대장 탕시웬이 급히 뛰어 들어와 장신을 데리고 감옥으로 돌아갔다. 후중난은 이후 두 번 다시 장신을 보지 않았다. 장신은 그 후 줄곧 감옥에 갇혀있었다.

 
301) 301-1) 胡宗南拒絶中共勸降; 士爲知己者死!  人民網 文史頻道  ‘胡宗南大傳’  經盛鴻 著  團結出版社出版

-----------------------------------------------------------------------------------------------------------------

 

 

136. 마오의 양동작전 대성공…장제스 고립무원 처지

 

 

애초 후중난(胡宗南 호종남)은 국민당군의 최후 방어지역을 충칭(重慶 중경)과 청두(成都 성도)를 축으로 하는 시난(西南 서남)지역 보다 구이저우(貴州 귀주) 서중부 쪽인 미옌(緬 면) 변계지역을 선호했다. 1949년 8월 11일 국민당 ‘촨샹어(川湘鄂 천상악; 쓰촨-후난-후베이지역)’ 변구 수정공서(綏靖公署) 주임 쑹시리옌(宋希濂 송희렴)이 비행기로 한중(漢中)으로 날아와 후중난과 만나 최후 방어지역을 상의했다.

 

두 사람은 황푸(黃埔 황포)군관학교 1기 동기생이다. 이들은 국민당군 최후 방어지역을 구이저우 서중부 미옌 변계지역으로 꼽았다. 부대를 이 일대로 집결해 란창장(瀾滄江 난창강), 누장(怒江 노강)과 가오리공산(高黎貢山 고려공산)의 지형적 이점을 의지해 계속 저항하기로 했다.

 

이들은 만부득이 할 경우 접경지역인 미얀마로 퇴각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당시 후중난은 30만 명, 쑹시리옌은 10여 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일패도지한 국민당군 대부분의 병력에 해당했다. 쑹시리옌은 항일전쟁 시기 11집단군을 이끌고 인미옌(印緬 인면)으로 원정해 구이저우와 미얀마 변경에서 4년 동안 전투를 벌여 이 일대의 지형과 민정(民情), 물산 등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주석 302)

 

이들은 제1단계로 시캉(西康 서강)과 촨시(川西 천서; 쓰촨 서쪽지역)를 통제해 점차적으로 구이저우와 미얀마 변계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했다. 2단계로는 해방군이 서남쪽에서 진군할 때 곧바로 주력을 구이저우 서쪽의 바오산(保山 보산), 텅충(騰冲 등충), 룽링(龍陵 용릉), 망스(芒市 망시) 일대를 축으로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난창장, 누장과 가오리공산의 천험을 이용해 해방군의 진공을 막기로 했다.

 

그런 연후에 상황에 따라 구이저우 미옌타이(緬泰 면태) 변경과 미얀마 경내로 들어가 해방군과 싸운다는 전략이었다. 후중난과 쑹시리옌은 장제스가 8월 중순 충칭에 도착했을 때 관저로 찾아가 이런 전략계획을 보고했다. 뜻밖에도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 된다! 이 계획은 절대로 안 된다! 너희들이 쓰촨(四川 사천)과 시난(西南 서남) 반벽강산(半壁江山)을 마오쩌둥에게 거저 바치려는 게 아닌가?”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군사상으로 볼 때 쓰촨은 타이완이나 하이난(海南 해남), 저우산(舟山 주산)과 달리 공산당군이 4방에서 포위 공격해 온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안 돼! 절대 안 돼! 너희들은 군사는 알지만 정치를 모른다! 너희들이 단 지 6개월만 지켜준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폭발할 수 있다. 그때 베이핑, 진링(金陵 금릉; 난징), 상하이는 우리 것이 된다.”

 

장제스는 손을 휘저어가며 이들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설명했다. 나중에 후중난이 쓰촨으로 퇴각할 때 그의 수중에는 국민당군의 정예인 제1군단을 포함해 30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 후중난은 다시 장제스에게 시창(西昌 서창), 윈난(雲南 운남)으로 퇴각해 방어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한편 마오는 국민당군의 최후방어 저지선인 시난을 공파(攻破)하기 위해 북쪽에서 치고 들어가는 척하면서 남쪽에서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예부터 쓰촨을 공략하는 방안은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싼시(陝西 섬서)에서 친링(秦嶺 진령)을 넘어 진격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어시(鄂西 악서; 후베이 서쪽)’에서 창장(長江 장강)의 원류를 따라 쓰촨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장제스는 마오가 펑더화이, 허룽이 이끄는 제1야전군의 주력을 친링으로 보내 쓰촨을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이런 판단에 따라 8월 시난 군정장관 공서 군사회의를 열어 직접 ‘쓰촨-싼시’ 변계를 중점 방어하는 시난 방어를 위한 병력배치를 완료했다. 후중난 집단군의 주력이 친링의 주산맥을 따라 제1방어선을 구축하고, 바이룽장(白龍江 백룡강), 미창산(米倉山), 다바산(大巴山 대파산) 지역에 제2방어선을 설치하는 방어계획이었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쓰촨 동쪽과 구이저우 방면에 병력을 별도로 배치했다. (주석 303)

 

하지만 마오는 통상적인 진공노선 대신 제2야전군이 대 우회작전을 펼쳐 후난 서쪽, 후베이 서쪽에서 직접 구이저우로 진격해 쓰촨의 쉬푸(叙府 서부; 지금의 이빈 宜賓), 루저우(瀘州 노주), 충칭(重慶 중경)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이런 작전은 인민해방군이 출기불의(出其不意)로 국민당군의 시난 방어선의 뒤쪽에서 후중난 집단군과 쓰촨 변계에 포진한 국민당군의 퇴로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쓰촨 경내의 국민당군 주력은 대문이 닫히는  꼴로 쓰촨성 내에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제1야전군 일부 부대가 친링으로 진격해 대거 쓰촨을 공격하는 모양새의 거짓 공세를 펼쳐 후중난 집단군이 북쪽 방어선에 주력하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국민당군의 의표를 찔러 부대를 남하시켜 쓰촨 북쪽과 청두(成都 성도)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는 성동격서 전략을 펼쳤다.

 

이런 군사행동은 예측불허의 전략이었지만 위험부담도 높았다. 대병단이 ‘쓰촨-후베이-후난-구이저우’의 수천 미터 높이의 고산과 험난한 협곡을 행군해야 하고, 원활하지 못한 보급을 인내심 있게 극복해야 했다. 때때로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하듯 목숨 걸고 덤비는 국민당군의 최후의 저항에 맞서 싸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장제스가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시난 방어선은 변변한 전투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11월 1일, 일찍이 몰래 후난 서쪽지역에 집결한 해방군 제2야전군 3, 5 두 개  병단은 제4야전군 일부 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쾌속으로 진격해 일거에 ‘후난-구이저우’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들은 15일 구이양(貴陽 귀양)을 해방시키고, 21일에 준이(遵義 준의)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 해방군은 쓰촨성 경내에 있는 국민당군의 구이저우(貴州 귀주) 퇴로를 끊어버렸고, 승기를 잡아 남쪽에서 쓰촨 남쪽을 포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만들었다.

 

이때 충칭에서 지휘하던 장제스는 허를 찔려 장담했던 철통방어가 남가일몽(南柯一夢)이 되자 부랴사랴 후중난 부대를 쓰촨으로 후퇴시켜 방어하게 하고, 쓰촨 동쪽 방어군도 서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해방군 제2야전군은 국민당군의 어수선한 부대배치를 틈타 쓰촨 서쪽으로 철수하는 국민당군 동쪽 방어군과 후중난 일부 부대를 우회해 포위했다.

 

해방군은 이들을 쓰촨 남쪽 산골짜기에서 궤멸시키고 30일 충칭을 점령했다. 청두(成都 성도)로 후퇴한 장제스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날로 압박해 들어오는 공산당군의 공격에 쩔쩔매었다. 마침내 권토중래의 꿈이 물거품이 되면서 대륙을 탈출해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됐다. (주석 304)

 

지금까지 장제스의 정확한 탈출 날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다. 1949년 12월 8일, 10일, 13일설이 나돌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12월 10일로 보고 있다. 탈출 비행장도 펑황산(鳳凰山 봉황산)비행장, 신진(新津)비행장으로 엇갈리고 있다.

 

가장 유력한 10일설의 주요 근거는 12월 11일 ‘신신신문(新新新聞)’이 보도한 ‘장총재(장제스)롱을 떠나 타이완으로 가다(蔣總裁離蓉飛臺 장총재리용비대)’제하의 기사다. 구체적 시간은 10일 낮 12시 30분으로 보도했다. 당시 국민당 쓰촨성 주석 왕링지(王陵基 왕릉기)도 회고하는 글에서 10일이라고 밝혔다. 왕링지는 “아침을 먹은 뒤 이날 막 잠깐 눈을 부치려하고 있는데 장제스가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차를 타고 펑황산 비행장으로 환송하러 갔다. 장제스와 몇 마디 이야기했다.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술회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도 일기에서 그들 부자가 10일 오후 2시에 펑황산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출발시간은 신문과 두 사람의 이야기들이 모두 다르다. 장제스가 청두를 허겁지겁 떠난 것은 국민당 윈난성 정부 주석 겸 윈난 수정공서 주임 루한(盧漢 노한), 시캉성(西康省 서강성) 정부 주석 류원후이(劉文輝 유문휘), 시난 군정장관 공서 부장관 덩시호우(鄧錫侯 등석후), 판원화(潘文華 반문화)와 이빈(宜賓 의빈)주둔 국민당 제72군 군단장 궈루구이(郭汝瑰 곽여괴) 등이 집단으로 기의(起義; 봉기해 공산당에 귀순)를 전화로 통보한 데 따른 것이다.

 

류원후이, 덩시호우, 판원화 등이 기의를 통보한 시간은 12일 심야에서 새벽, 궈루구이가 통보한 시간은 12일 오후 등으로 되어있어 이를 근거로 한 탈출날짜는 13일로 추정한다. 어쨌든 당시 청두에서 장제스를 보위하고 있던 고위 장령들의 집단 봉기는 장제스의 숨통을 죄어 청두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든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류원후이, 덩시호우, 판원화 등은 장제스가 묵고 있던 황푸러우(黃埔樓  황포루)에 기의소식을 전화로 통보했다.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내용은 이랬다.

 

“베이징 마오 주석, 주더 총사령관과 각 야전군사령관 및 전국인민께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도적 장제스(蔣賊介石)가 국권을 도둑질한 지 20여 년으로 죄상이 아주 뚜렷한 것은 나라의 모든 사람이 본 봐와 같다. -쓰촨, 시캉의 전체 군정인원이-인민해방군과 협동해 국민당 반동파의 잔당을 소멸하고 쓰촨, 시캉 전 지역을 이른 시일 안에 해방하도록 노력할 것임을 말씀드리는바 입니다. 삼가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302) 國民黨4位一級上將在臺灣的最後結局 新華副刊 新華網
‘龍門陣’, 原題 ‘國民黨軍4位一級上將在臺灣 謝天開 著者

303)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04) 蔣介石最後離開大陸之迷如何脫新?  時政頻道  新華網 蔣介石-在大陸的最後日子   作者  陳 宇   當代世界出版社
----------------------------------------------------------------------------------------------------------------------------------

 

 

 

137. 10대의 장갑차와 탱크, 철통 같았던 장제스 호위 작전

 

 

이미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장제스는 한시라도 빨리 청두를 떠나고 싶어 했다. 신변안전을 위한 ‘호송작전’에 들어갔다. 후중난은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 주변의 불순분자들을 정리해야 했다.

 

급히 부대를 동원해 성 남쪽 교통의 요지인 우허우츠(武侯祠 무후사)에 주둔하고 있는 류원후이의 파견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우허우츠는 청두 시내 남쪽에 있는 명승고적지로 삼국시대 유비의 묘인 혜릉과 우허우(武侯 무후)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오늘날은 삼국지의 명소로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때 이곳에는 기의한 류원후이의 24군단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비행장으로 가려면 류원후이가 왕년에 아편을 팔기 위해 만든 검문소가 딸린 우허우츠 세관이 있어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사전에 이 일대에 대한 공격을 가해 류원후이 부대를 소탕해야했다. 후중난은 엄격하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비밀리에 10대의 장갑차와 탱크로 장제스의 승용차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비행장으로 가는 ‘장제스 호송작전계획’ 실천에 들어갔다. (주석 305)

 

장제스는 떠나기 전 날 황푸러우에서 참모총장 구주통(顧祝同 고축동) 등 이곳 군대를 지휘하는 남는 사람들과 고별연을 했다.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와 함께 비통한 마음으로 중화민국 국가를 불렀다. 부자(父子)를 바라보던 일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후중난은 장제스가 청두를 떠나는 날 새벽에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우허우츠에 주둔한 류원후이 군대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100여 명을 사상하고 대부분은 포로로 잡았다. 후중난은 이어 장갑차와 탱크로 장제스의 차를 둘러 싼 철갑(鐵甲)호송을 하고 비행장으로 떠났다. 길 가던 시민들은 이틀 전부터 이 일대에 장갑차와 탱크가 다니도록 예행연습을 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민들은 매미가 허물을 벗고 하늘로 나르듯 장제스가 감쪽같이 몸을 빼 타이완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을 몰랐다. 단지 새벽녘 우허우츠 쪽에서 들린 포성과 총소리에 잔뜩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장제스는 비행장에 도착해 곧바로 중메이(中美 중미)호 전용기에 오른 뒤 비행기 옆에서 도열한 후중난 등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타이완으로 떠난 뒤 장제스는 죽을 때까지 대륙탈환을 부르짖었으나 고향 땅 저장성 펑화시옌 시커우(奉化溪口)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1975년 4월 5일 심장병으로 포폄훼예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88살이었다. 

  

한편 패주한 쓰촨 동쪽 방어군 사령관 쑹시리옌은 무선기를 폐쇄해 국민당 국방부와의 연락을 끊고 잔여 병력 1만여 명을 분산해 ‘구이저우-미얀마’ 변계지역으로 퇴각하려 했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쑹시리옌이 부대를 이끌고 어(峨 아)변계에서 다두허(大渡河 대도하)를 막 건너 달아나려다 12월 19일 생포됐다.

 

해방군 제2야전군과 친링을 남하한 제1야전군 18병단은 청두(成都 성도)로 패퇴한 국민당군에 대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제2야전군 선두부대는 20일 ‘청위(成渝 성유)’도로에서 졘양(簡陽 간양), 런서우(仁壽 인수) 부근을 압박하고 민장(眠江 면강) 양안의 선두부대는 이미 신진허(新津河 신진하) 대안에 도착해 후중난 5병단과 강을 사이로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해방군 제1야전군은 이미 몐양(綿陽 면양)을 해방시키고 남하하고 있었다. 후중난은 청두가 매우 위급하다고 판단하고 부대를 시창(西昌 서창)으로 철수했다. 후중난은 21일 신진(新津)에서 고급 군관회의를 열어 뤄광원(羅廣文 나광문)의 15병단과 천커페이(陳克非 진극비)의 20병단이 충칭을 공격하는 척하다 남쪽 포위망을 돌파해 구이저우 비졔(畢節 필절)를 거쳐 윈난 변계로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뒤 후중난 집단군 주력의 엄호아래 시캉(西康 서강)의 포위망을 돌파할 작정이었다.

 

회의 다음 날 후중난은 전화로 5병단 리원(李文 이문)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23일 오전 10시 참모장 뤄리예(羅列 나열) 등과 청두 봉황산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창(西昌 서창)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뜬 뒤 기상악화로 목적지를 바꿔 하이난다오(海南島 해남도) 싼야(三亞 삼아)비행장에 내렸다.

 

후중난이 하이난다오에 불시착한 것은 장제스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것으로 이를 안 장제스는 참모총장 구주통을 파견해 후중난을 조사토록 했다. 구주통은 안면을 생각해 후중난이 시창으로 돌아가 쓰촨 서쪽 포위망을 뚫고 나온 부대를 수습해 지휘하도록 주선했다. 후중난은 할 수 없이 12월 28일 비행기를 타고 시창으로 날아갔다. 시창으로 돌아 온 후중난은 리원(李文 이문)이 이미 달아날 수 없게 되자 공산당군에 투항한 사실을 알고 매우 비통해 했다. 후중난은 묵고 있는 공하이신(邛海新 공해신)촌 자신의 집을 걸어 잠근 채 대성통곡하는 등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주석 306)

 

“다 끝났다! 나의 40만 인마(人馬), 3개 병단은 모두 사라졌다! 교장(장제스), 당신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당신이 부대를 모두 날려 보냈다. 나를 시창으로 보내서 무엇을 하려 했습니까? 시창은 병가(兵家)의 궁지입니다!”

후중난은 뼈저린 상심을 하면서 장제스를 원망하며 때론 벽을 쳐다보고 미친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해방군 2야전군과 친링을 넘어 남하한 1야전군 18병단은 12월 27일 청두를 해방시켰다. 장제스의 최대 버팀목이었던 후중난 집단군은 완전 궤멸했다. 윈난성 정부 주석 루한, 시캉성 정부 주석 류원후이의 기의로 윈난, 시캉 두 성도 평화적으로 해방을 맞았다.

 

대륙에서 마지막 남은 시짱(西藏 서장; 티베트)은 1951년 4월 아페이(阿沛 아패), 아왕진메이(阿旺晉美 아왕진미)를 우두머리로 한 시짱 대표들이 베이징에 와 신중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5월 23일 ‘중앙인민정부와 시짱 지방정부의 시짱 평화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에 비준함으로써 티베트는 중국 땅에 귀속됐다. 이로써 신중국은 타이완(臺灣 대만), 일부 연해 도서(島嶼), 홍콩(香港 향항), 아오먼(澳門 오문; 마카오) 등을 제외하고 중국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후중난은 시창에서 구차스러운 생활을 하다 해방군이 돌연 시창 비행장을 압박하자 1950년 3월 26일 시창에 주둔한 6만여 명의 국민당군에 대한 지휘권을 참모장 뤄리예(羅列 나열)에게 넘긴 뒤 비행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날아가 버렸다. 후중난은 1951년 3월 ‘장시-저장 인민반공유격총지휘’ 겸 ‘저장성정부 주석’으로 임명돼 몇 개 섬의 1만 명도 되지 않는 병력을 거느렸다. 한 때 40만 병력을 호령해 ‘서북왕’으로 불렸던 후중난은 이처럼 신세가 영락(零落)하자 이름을 ‘친둥창(秦東昌 진동창)으로 바꿨다. 친(秦 진)나라 땅이었던 싼시(陝西 섬서)지역을 기반으로 ’서북왕‘이란 위명을 떨친 만큼 다시 둥산(東山 동산)에서 재기하겠다는 강렬한 뜻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1955년 8월, 장제스는 홀연 근 60살이 된 후중난을 펑후(澎湖)열도 방수사령관에 임명했다. 어느 날 국방부 참모총장 펑멍지(彭孟緝 팽맹집)가 비행기로 펑후열도를 시찰하다 비행장에 착륙한 뒤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했다. 수행원이 펑후열도 방수사령관 후중난이 직접 비행장에서 영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펑멍지는 후중난의 학교 후배였다. 비행기 트랩에 발을 걸쳤다가 얼른 비행기 안으로 들어 온 펑멍지는 수행원에게 후중난을 돌아가게 한 뒤 내리겠다고 했다. 수행원은 후중난이 돌아가도록 전했으나 후중난은 방수사령관의 신분으로 상관인 참모총장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비행기 옆에서 계속 도열해 있었다. 펑멍지는 어쩔 수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눈물을 뿌리며 후중난을 얼싸 않았다. 후중난의 활달하고 초연한 마음에 감격했다고 한다. 1962년 3월 13일 ‘서북왕’ 후중난이 심장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직접 문병을 오자 감격한 후중난은 눈물을 흘리며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때 나이 66살이었다.

 

305) 蔣介石最後離開大陸之迷如何脫身? 時政頻道 新華網 蔣介石-在大陸最後日子 作者 陳 宇 當代世界出版社

306) 國民黨軍4位一級上將在臺灣的最後結局 新華副刊 新華網 龍門陣, 原題 國民黨4位一級上將在臺灣 作者 謝天開

-----------------------------------------------------------------------------------------------------------------

 

 

138. 마오, 소련 스탈린 만나러 첫 해외 공식 방문

 

 

마오는 1949년 12월 6일 전용열차를 타고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 모스크바로 떠났다. 신중국 건국 후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영도자의 첫 번째 해외 공식 방문이자, 마오로서는 평생 처음 외국에 나가는 나들이였다. 수행원은 교수신분으로 비서인 천보다(陳伯達 진백달), 예즈룽(葉子龍 엽자룡), 통역인 스저(師哲 사철), 경호간부 왕둥싱(王東興 왕동흥) 등이었다.

 

주요 방문목적은 스탈린과 중소 양국의 정치, 경제 문제를 협의하면서 1945년 국민당 정부와 소련이 맺은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폐기하고 새로운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마오는 이 조약은 미국, 영국, 소련이 비준한 얄타협정의 산물로

중국의 주권과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12월 21일의 스탈린 70회 생일축하와 국가재건에 필요한 소련의 원조요청이었다. 앞서 류샤오치가 6~8월 비밀리에 스탈린을 만나 중국 국내정황을 설명하고 소련이 1945년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중소 우호동맹조약 처리문제, 소련의 중국 지지와 원조 등의 문제를 협의했다. 또 마오의 소련 방문 의향을 타진하고 소련이 3억 달러의 차관공여와 경제 전문가들을 파견해 중국을 돕고 있는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류샤오치는 국제형세, 전쟁위험 및 소련과 미국, 영국과의 관계 등에 관한 스탈린의 분석과 평가, 전망 등을 청취했다. 류샤오치의 소련방문은 마오의 방문을 대비한 사전 실무정지 작업이었다. (주석 307)

마오는 크렘린궁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첫 번째 회담에서 세계평화에 관해 물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평화보장에 관한 것이다. 중국은 경제를 회복시켜 전쟁 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국내 정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3~5년의 평화적 기간이 필요하다. 중국이 이러한 중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앞날의 평화에 달려있다. 중공중앙은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그리고 얼마 정도 국제적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지 알아봐 줄 것을 위임했다.”

 

“중국은 지금 직접적인 전쟁위협은 없다. 일본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쟁준비를 할 수 없다. 미국은 전쟁을 떠들고 있지만 가장 전쟁을 겁낸다. 유럽 각국은 전쟁을 무서워하고 있다. 실제 어는 국가도 중국과 싸우려하지 않는다. 평화는 우리들의 노력에 따라 달려있다. 만약 우리들이 함께 노력하면 5~10년의 평화를 능히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25년, 더 나아가 장구한 시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마오는 이어 중소조약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민감한 문제였다.

 

스탈린은 “1945년 체결한 소중(蘇中) 우호동맹조약은 마땅히 보류를 선포하거나 고치도록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 혹자는 지금 당장 상응하는 조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며 조약의 폐지나 개정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두가 알다시피 이 조약은 얄타협정에 따라 체결됐다.

 

이 협정은 조약의 주요 내용을 규정한다. 이 의미는, 조약의 비준은 미국과 영국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들은 자기의 소규모 범위 안에서만 결정할 수 있다. 이 조약은 잠시 어떤 개정도 할 수 없다. 미국과 영국에 빌미를 줄 수 있다”며 조약개정 불가를 시사했다. 회담은 지지부진했다.

 

스탈린의 생일축하 행사가 끝나 다른 나라 대표단들은 모두 떠났다. 하지만 마오는 계속 소련에 남아 새로운 조약체결 투쟁의지를 불태웠다. 신중국 초대 소련대사 왕자샹(王稼祥 왕가상)은 외교부 이곳저곳 쫒아 다니며 스탈린과의 회담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지연작전으로 모른 체했다. 천덕꾸러기가 돼 시간만 죽이던 마오는 끝내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소련 쪽 연락관과 통역에게 “내가 모스크바에 온 것은 단지 스탈린 축수(祝壽) 때문만은 아니다. 당신들은 국민당과 체결한 조약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잘 해 봐라. 나는 며칠 있으면 간다. 나는 지금 먹고 똥 싸고 잠자는 일밖에 없다”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마오는 모스크바에서 세밑새해를 맞이했다. (주석 308)

 

이때 마오의 행적을 추적하던 영국의 통신사가 스탈린이 마오를 연금했다는 뜬금없는 풍설보도를 내보냈다.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세계의 관심사가 됐다. 소련은 바짝 긴장했다. 중소 양쪽은 부랴사랴 협의를 거쳐 마오가 소련 타스통신 기자와의 문답처리 식 인터뷰기사를 내보내 유언비어를 차단하고, 마오 건재를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해가 바뀐 1950년 새해 벽두, 1월 2일 타스통신 기자의 ‘기자 질문에 답하다(答記者問)’ 형식의 기사에서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소련에 머물고 있는 기간의 길고 짧은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이익에 관한 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라 부분적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문제 중에는 우선적으로 현재 중소우호동맹조약 문제, 소련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차관문제, 양국 간의 무역과 무역협정에 관한 문제, 기타 문제 등이 있다.” “나는 소련의 몇 개 지방과 도시를 방문할 계획이다. 이것은 소련 소비에트공화국의 경제와 문화, 건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나가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언비어가 사라지고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가 일가 시작했다. 스탈린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견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우언라이가 소련으로 날아와 협상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날 밤 8시 정치국원인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마오가 묵고 있는 별장으로 찾아와 스탈린이 회담할 용의가 있음을 통보했다. 마오는 이들에게 “전보가 1월 3일 베이징에 도착하면, 저우언라이가 준비하는 데 5일이 필요하다. 1월 9일 베이징을 출발할 수 있다. 기차로 11일이 걸려 1월 19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다. 1월 20일에서 월 말까지 10일간의 시간에 담판과 각 항의 조약을 비준할 수 있다. 2월 초에 저우와 함께 귀국 하겠다”고 말했다.

 

1월 20일 총리 겸 외교부장(장관)인 ‘협상의 해결사’ 저우언라이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월 22일 밤 중소양국 간에 새로운 조약체결에 관한 정식 담판이 시작됐다. 스탈린은 더 이상 얄타협정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조약에 관한 협상은 ‘해결사’ 저우언라이가 술술 풀어갔다. 2월 14일 크렘린궁에서 ‘중소 우호동맹호조(互助)조약’ 체결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어 ‘중국창춘(長春 장춘)철로, 뤼순(旅順 여순)항 및 다롄(大連 대련)에 관한 협정’, ‘소련의 중국 공여 차관에 관한 협정’을 각각 체결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52년 까지 뤼순과 창춘철로에 대해 영향력 확대, 즉 소련으로부터 넘겨받을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은 얄타협정에 따라 자유항 지위의 다롄에 대해 행정권을 접수하기로 했다. 마오는 첫 소련과의 회담결과에 대해 만족했다.

 

중국의 민족존엄과 국가주권을 지키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며 중소우호협력 관계를 정착화 시켰다. 이것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공고히 하고, 신중국이 신속하게 국민경제를 회복하면서 대규모 경제건설의 새로운 시기를 창조하는 좋은 조건을 마련했다.

 

또한 국제적으로 중소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국가의 단결과 영향력 제고 등의 외교적 성과를 들었다. 국가원수가 외국에 2개월 동안 머물면서 회담을 하는 유례없는 전례를 만든 마오는 2월 17일 소련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라 하얼빈, 창춘, 선양(沈陽 심양) 등지를 시찰한 뒤 3월 4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30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08)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

 

 

139. 北 김일성, 소련과 중국에 무력통일 지원 요청

 

 

당시 마오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한반도에 관한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스탈린은 “김일성(金日成)이 나에게 남한을 취할 행동을 생각하고 있다. 김은 젊고 용감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 유리한 것만 높이 평가했다”고 마오에게 전했다.

 

마오는 “우리들은 마땅히 어린 김(小金)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이어 “조선은 현재 복잡한 국면에 직면해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와 스탈린의 통역을 맡은 스저(師哲 사철)는 자신이 쓴 ‘나의 일생-스저 자술(自述)’에서 “기실 마오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할 때 스탈린은 이미 김일성이 싸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씨는 싸울 의견만 들을 뿐 싸우지 않는 의견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 스탈린이 이 말을 할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 후 스탈린은 마오와 조선 문제에 대해 발전된 토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석 309)

 

스탈린이 나중에 생각을 바꿔 김일성의 무력행동을 지지한 것은 미국 정책의 영향이 컸다. 미국 트루만 정부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중국의 타이완과 한국은 미국의 방어권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그렇다면 김일성이 한국을 공격하더라도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미소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소련 정보기관이 더글라스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비밀 보고 중에 남북한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한 통의 비밀서신을 보냈다.

 

“만약 김일성이 한국을 공격하는 문제로 나를 만나려고 생각한다면 언제라도 회담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의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대사는 내가 김일성을 도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라. 우리들은 매년 2만5천 톤의 납을 얻기를 바란다고 전해라.”

 

스티코프가 이런 내용을 김일성에게 통보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흥분했다. 김일성은 “스탈린 동지가 남한 공격을 동의했는가?”를 다시 스티코프에게 물었다. 김일성은 10~15일 이내로 소련이 요구하는 납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스탈린은 2월 2일 다시 스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내 한국을 공격해 무력으로 조선을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절대비밀에 부칠 것을 김일성에게 신신당부하도록 했다. 내용은 이랬다.

 

“조선의 다른 영도자뿐만 아니라 중국 영도자들도 모두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적들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틀 후 김일성은 스티코프를 만나 조선인민군 10개 사단을 늘리는 편제확대를 요구하고, 소련이 1951년(내년)에 공여할 7천만 루불의 차관을 앞당겨 쓸 수 있도록 요청했다. 스탈린은 동의하는 회신전보를 보냈다. 김일성은 곧바로 다시 소련방문 준비에 나섰다.

 

2차 대전 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두 패로 갈라져 ‘냉전(冷戰)’이 시작되면서 각 나라는 양대 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소련을 상전으로 대하며 그들을 추종했다. 미소 간의 쟁패는 유럽이 주 전장이었지만, 동북아 문호를 지키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양대 진영의 뜨거운 각축장이었다.

 

남과 북은 당시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이 체결한 얄타협정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고 있었다. 남한이 1948년 8월 15일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자,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립해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남한은 이승만(李承晩), 북한은 김일성이 국가원수가 됐다. 한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찢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 줄잡아 38선을 경계로 2000건에 이르는 크고 작은 분쟁이 잇따랐다. 양쪽 모두 남북한 통일을 갈망했으나 역량부족으로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국에 의존한 채 군사충돌이 날로 늘어나고 확대되면서 아슬아슬한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소련정부에 조선의 정치, 경제, 특히 군사상 전면 원조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 즉 동맹조약을 요구해 체결했다. (주석 310)

 

조선 내각수상 김일성은 1949년 2월 22일 조선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전용열차로 처음으로 정식 소련 방문길에 나섰다. 대표단은 부수상 겸 외무상(外務相) 박헌영(朴憲永), 민족보위성 부상(副相) 김일(金一) 등이었다. 3월 3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곧바로 두 차례 스탈린과 회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3월 5일 스탈린과 처음으로 한국 침공문제를 놓고 비밀 회담을 했다. (주석 311)

 

김일성: 남조선(한국)과 미군 반동세력들의 북조선(조선)에 대한 도발이 날이 갈수록 격렬해 지고 있다. 우리들은 비록 육군이 있지만 해군방어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우리들은 이 방면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하다.

스탈린: 미군은 남조선에 얼마나 있나?

김일성: 가장 많을 때 2만 명이다.

스탈린: 남조선에 군대가 있는가?

김일성: 있다. 대략 6만 명 정도다.

스탈린: 이 숫자는 경찰을 포함한 숫자인가?

김일성: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정규군의 숫자다.

스탈린: 그들이 겁나나?

김일성: 두렵지 않다. 단 우리는 해군을 보유하려 한다.

스탈린: 누구의 군대가 더 강한가, 당신들 아니면 그들?

박헌영: 우리들의 군대가 더 강하다.

스탈린: 당신들이 해군을 건립하도록 원조하겠다. 군용비행기도 주고. 당신들 사람들이 남조선 군대의 내부에 있는가?

박헌영: 있다. 하지만 모두가 하급 군관이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스탈린: 현재 아무 것도 할 수 없더라도 좋은 일이다. 남조선도 당신들의 북쪽에 간첩을 파견하기 때문에 경계를 제고할 수 있다.

 

스탈린은 38선 부근의 쌍방 간의 공방상황을 들은 뒤 “38선은 마땅히 평화지대다. 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며 한반도의 형세가 악화되는 것을 꺼렸다. 김일성, 박헌영은 3월 7일 2차 비밀 회담을 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소련의 군사원조와 한국에 대한 진공(進攻) 지지를 강렬하게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완곡하게 거부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은 허락할 수 없다. 첫째,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군대에 대해 진정한 우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병력 수에서 열세다. 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한다. 셋째, 소련과 미국 간의 38선 분할협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명분과 이치에 맞게 미국의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스탈린은 조선의 군사역량이 강대하지 않아 무턱대고 움직일 경우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으로 미소 쌍방이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우려했다. 다만, 스탈린은 조선쪽의 군사원조와 경제협력 요구에 대해서는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쌍방은 3월 17일 ‘조소(朝蘇)경제문화협력 협정’과 ‘조소(朝蘇)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조소(朝蘇)군사비밀 협정은 소련이 조선의 무기와 장비원조를 보충하는 것으로 조선 인민군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 부대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조선의 공군력을 증강하고 충분한 훈련을 보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련은 조선에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도록 했다. 또 1949년 5월 20일 전까지 소련이 120명으로 구성된 특별 군사고문단을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에 10만 루불의 물자를 원조하기로 했다.

 

몇 개월 후 소련 군사요원과 대량의 소련 군사장비가 조선에 도착해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됐다. 귀국한 김일성은 스탈린이 완곡하게 거부한 조선의 이른바 민족해방전쟁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49년 8월 조선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한국 쪽 영역인 옹진반도 공격계획을 제기했으나 스탈린의 재가를 얻지 못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영도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파죽지세로 일로 창장(長江 장강)을 건너 남하해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해방시키고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자 크게 고무됐다.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결심하고 5개월 전 자신의 특사로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金一)의 말을 떠올렸다. 당시 마오는 김일에게 “중국 전쟁이 승리하면 조선의 통일행동을 지지한다”고 밝힌바 있었다. 게다가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원동(遠東; 태평양지역)지역 방어권에 한반도와 타이완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자 김일성은 한국을 공격하더라도 미국 군대가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주석 312)

 

309) 1950年斯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參考 文;秋風客 人民網
 韓國戰爭爆發的原因; 蘇聯僅僅想要一個出港口? 人民網 文史頻道 ‘熱血1950’ 何楚舞 著 大衆文藝出版社出版

310)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1950年斯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參考 人民網 文;秋風客

311) 1950年斯 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參考 人民網 文;秋風客

312)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1950年斯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頻道  人民網 文;秋風客

-----------------------------------------------------------------------------------------------------------------

 

 

140. 마오 “美와 한번은 겨뤄야 할 것”… 조선 출병 결정

 

 

조선의 당정군(黨政軍) 중요 영도자들이 1월 17일 밤 부수상 겸 외상인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신중국 초대 조선대사로 떠나는 이주연(李周淵)의 환송연에 참석했다.

 

김일성은 연회에 참석한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중국은 이미 해방됐다. 지금은 한국인민들을 해방시켜야 할 때"라면서 "다시 한 번 스탈린과 회견해 (한국공격)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소련방문을 주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조선인민군의 병력은 11만 명에 달했고, 새로운 전투사단을 만들고 있었다. 이틀 뒤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말한 내용을 전문(電文)으로 보고했다. 내용은 이랬다.

 

"김일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조선 인민들은 나를 믿고 나와 함께 하려고 한다. 근래에는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실현을 다시 미루면 나는 조선인민의 신임을 잃어버린다. 나는 다시 스탈린 동지를 만나 남부 진공(進攻)에 대한 승낙을 얻고 싶다. 스탈린 동지의 나에 대한 명령은 법과 마찬가지로 그(스탈린 동지)의 허락은 필수적이다."

 

스티코프는 전보에서 "김일성이 만일 스탈린 동지를 만날 수 없으면 그때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오쩌둥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때 마오는 처음으로 장장 2개월 동안 소련을 방문해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 호조(互助)조약'을 체결하고 중국이 창춘철로와 뤼순항의 일체 권리를 회수하는 등의 협정을 맺었다.

 

스탈린은 태평양지역과 세계정세 변화가 급변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꾸고 있었다. 특히 동북아 지역에서의 부동항, 즉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항구 확보에 고심하고 있었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는 한 겨울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반(半)부동항인데다, 뤼순항을 일시적으로 중국과 공동 사용하기로 했지만 신중국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대안 마련에 부심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출항기지로 한반도의 4개 천연 양항(良港)에 눈독을 드리고 있었다. 조선의 원산항(元山港), 한국의 인천항(仁川港), 부산항(釜山港), 제주도(濟州島)였다.

 

1950년 3월 30일 한 대의 소련 전용기가 모스크바 비행장에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근 1개월 만에 다시 비밀리에 스탈린을 만나  3차 회담을 하기 위해 소련에 온 것이다. 이미 비밀 해제된 소련 문건에 따르면 3차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이 한국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하고, 마오쩌둥의 동의를 꼭 얻을 것을 강조했다. 3차 회담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이 나눈 기밀보고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주석 313)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는 우리들의 전 조선을 해방시키는 의견을 줄곧 지지해 왔다.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우리들을 돕겠다고 몇 차례 말한바 있다. 필요시에는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조선의 통일을 이루려고 한다. 우리들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스탈린: 완벽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게 필요하다. 증가한 사단의 무기를 비축하고 기동력과 전투수단의 기계화를 실현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이 방면의 모든 것을 요구한데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상세한 작전계획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 작전은 기본적으로 3단계로 진행해야 한다. 제1단계는 병력을 38선 부근 지정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제2단계는 북조선 당국이 계속 평화통일의 새로운 제의를 내놓는다. 상대방이 틀림없이 거부할 것이다. 제3단계는 상대방이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한 뒤 돌연히 진공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돌발적이고 신속해야 한다. 남조선과 미국이 숨 쉴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강력한 저항과 국제지원을 동원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스탈린은 "소련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소련이 다른 지역, 특히 서방에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마오쩌둥과 상의해야 한다. 그는 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다"고 마오와 협의할 것을 강조했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은 한국 침공에 대한 견해를 일치했고, 1950년 여름,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소련 고문단의 도움아래 구체적으로 남한 공격방안 계획을 짜도록 했다.

 

1960년대 중반기 소련 외교부 관련문건 기구가 집필한 '조선전쟁의 배경보고' 의 비망록에 따르면 소련은 베트남 지원방식을 참고했으며, 김일성이 1950년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에게 한국에 대한 작전계획을 설명했고, 스탈린이 동의한 것으로 기록했다. 비망록에 기록된 내용은 이랬다.

 

"회담이 시작됐을 때 스탈린은 김일성의 반복적인 요구에 대해 보류태도를 보였다. 스탈린은 '이것은 남조선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로 대단히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단, 스탈린은 원칙상 이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방안에 대해 최종으로 승낙한 것은 김일성이 1950년 3~4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였다. 이후 김일성은 5월에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았다. 1950년 5월 말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와 소련 군사고문단이 공동으로 38선에 군사집결을 이미 완료했다는 보고를 했다. 김일성은 군사행동 개시시간을 1950년 6월 25일로 잡았다."

 

이 보고서는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에서 조선의 군대가 한국 군대를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기재했다. 남북역량의 대비는 1:2로 북한이 한 배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 1:2, 기관총 1:2, 경기관총 1:13, 탱크 1:6.5, 비행기 1:6으로 비교됐다. 보고서는 조선이 속전속결의 진공계획으로 제정해 매일 15~20킬로미터씩 전진하고, 주요 군사행동은 22~27일 안에 끝내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련은 김일성과 스탈린 회담 뒤 조선이 요구한 1억3800 루불 상당의 무기와 탄약을 보냈다. 조선은 금 9톤, 은 40톤, 기타 광석 15,000 톤을 소련으로 보내 보답했다.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의 비극적인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3년 동안 계속됐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지휘함인 마운트 매킨리 함에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으로부터 인천시가에 대한 포격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개전 이래 승승장구하며 낙동강 전선까지 남진했던 인민군은 9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이끄는 7만 명의 병력이 260여 척의 함정을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가 뒤집어졌다. 한국군은 9월 25일 서울을 수복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연합군은 강력한 공습으로 인민군의 탱크와 야포를 부수며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서울 아래 남쪽으로 진군한 인민군은 보급과 병력지원이 끊기면서 급격히 무너졌다.

 

전세가 크게 기울자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연명으로 스탈린에게 서신을 보내 소련이 직접 출병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이 출병해 조선을 지원할 것을 제의했다. 중국군이 출병할 때는 지원자(志願者) 신분으로 하고, 중국의 지휘관이 지휘하도록 했다. 같은 날 조선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이 마오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서신을 휴대하고 베이징으로 화급하게 날아왔다. 박헌영은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만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출병을 간청하고 김일성의 서신을 전달했다. 내용은 이랬다. (주석 314)

 

"조선 인민해방전쟁의 전황: 미국 침략군이 인천상륙을 하기 이전에는 인민군이 대단히 유리했다. 적들은 연전연패해 조선(한국) 남단의 협소한 지구에서 궁지에 몰려 조선인민은 최후의 결정적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미국 군사위신은 극도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가 떨어진 위신을 만회하고, 조선을 식민화와 군사기지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급거 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해 9월 중순 인천에 상륙한데 이어 서울을 점령했다. 인민군이 상륙한 적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상륙한 적들과 남부전선 적의 부대들이 이미 함께 연합해 인민군의 남북 부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남부전선의 인민군이 적들에게 끊기고 분할될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적들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계속 38선 이북지역으로 진공할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이 각종 불리한 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적들의 기도가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편지는 이렇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전쟁 상황을 기술하고, 중국의 지원요청과 전투의지를 다졌다.

 

"조선인민은 사납고 포악한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국 침략에 반격해 독립해방을 쟁취하고 끝까지 전투를 할 작정이다. 아울러 중국인민들이 특별한 지원을 해 주기를 요청한다. 우리들은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들이 조선을 식민화하고 군사기지화 하는 것을 막을 결심이다. 우리들은 반드시 피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의 피를 흘릴 때까지 조선인민의 독립, 해방, 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결심이다! 우리는 지금 전력을 집중해 새로 편제한 훈련사단과 남부의 10여 만 부대를 작전상 유리한 지역으로 집결하고 전체 인민을 동원해 장기 작전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 적들은 우리들의 엄중한 위기를 틈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계속 38선 이북으로 진공(進功)하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역량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부득불 우리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곧 적들이 38선 이북으로 진공하는 상황에서 중국인민 해방군들이 직접 출동해 우리군의 작전을 지원해 줄 것을 애타게 바라는 바이다."

 

김일성은 이날 밤 조선 주재 중국대사 니즈량(倪志亮 예지량) 등을 불러 중국이 이른 시일 안에 군대를 파병해 조선인민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미국 침략을 막아주기를 바랐다. 김일성은 압록강 변에 집결하고 있는 중국군 30병단이 빨리 강을 건너 지원해줄 것을 제기했다.

 

1950년 10월 1일은 신중국이 건국 후 첫 번째로 맞는 국경절이어서 전국이 축제분위기였다. 바로 이때 한국군이 38선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고, 김일성이 중국군의 참전을 요청하며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맥아더는 조선인민군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열린 건국절 행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마오는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벽에 걸려 있는 큰 세계지도 앞에 서서 오랫동안 한반도와 타이완 해협을 응시했다. 마오는 출병문제를 심사숙고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랬다. (주석 315)

 

하나, 국제주의의 모든 이익에서 출발하는 관점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적인 요구에 비춰볼 때 반드시 출병해 조선인민을 도와야 한다.

둘, 미 제국주의의 침략 확대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겨누는 것이다. 미 제국주의는 오랫동안 완고하게 장제스 집단을 지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적으로 하는 정책을 펴왔다.

셋, 우리들과 미 제국주의가 한 번 겨루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 제국주의는 경제, 기술, 장비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약점도 있다. 싸워 이길 수도 있다.

 

마오는 10월 2일 이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조선출병을 결정했으나 행동명령은 유보했다. 조선 정부에게 통보도 하지 않았다. 마오는 이날 새벽 동북군 사령관 가오강(高崗 고강)에게 전보를 받는 즉시 베이징으로 와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또 선양(沈陽)에 있던 덩화(鄧華 등화)에게 13병단을 이끌고 급히 둥베이(東北 동북) 압록강 변으로 부대이동을 하도록 명령했다. 13병단은 제4야전군의 주력으로 38군, 39군, 40군으로 구성돼 동북야전군의 3마리 호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예부대였다. 이 부대는 모두 린뱌오가 지휘했던 부대였다. 마오는 부대 배치를 끝내고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채비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이날 오후 중공중앙 서기처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반도 상황과 중국출병 문제를 토론했다. 마오는 린뱌오(林彪 임표)를 조선출병 수장으로 임명해 보낼 작정이었으나 병(病)을 핑게로 사양하는 바람에 펑더화이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회의는 10월 4일 확대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정식으로 조선 지원군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비행기를 시안(西安 서안)으로 보내 펑더화이를 베이징에서 열리는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는 중공중앙 서북국(西北局) 제1서기, 서북국 정치위원회 주석, 서북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었다. 신중국 건국 후 펑더화이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된바 있다. 

 

313) 1950년斯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頻道 人民網 文:秋風客

314)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15)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41. 항미원조 명분…펑더화이가 군 수장으로 전쟁 개입

 

 

마오는 이날 하루 전 스탈린이 중국이 즉시 최소한 5~6개 사단을 38선에 파병해 조선이 38선 이북을 보위하는 전투를 할 수 있게 하라는 전보에 대한 회신으로 6개항에 이르는 장문의 전보를 직접 기초했으나 발송하지는 않았다. 1항의 내용은 이랬다. (주석 316)

 

"우리들은 지원군의 이름으로 일부분의 군대를 조선 경내에 파견해 미국 및 그 주구인 이승만의 군대와 싸우는 조선 동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 조선을 미국이 점령한다면 조선의 혁명역량은 근본적인 실패를 맞게 되고, 미국 침략자들은 더욱 창궐해 모든 동방이 모두 불리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문내용은 중국이 출병해 조선지원의 필요성과 출현 가능한 각종 정황을 분석하고, 중국 출병작전의 전략배치와 방법 및 국내 대응부대의 동원상황 등을 설명했다. 동시에 소련이 작전승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필수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을 제기했다.

 

애초 이 전문(電文)은 이날 열린 서기처 회의 전에 기초해 회의에서 출병이 결정되면 스탈린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다수가 출병을 반대해 전보를 보내는 것을 유보하고, 회의에서 나온 다수의 의견을 소련대사에게 전달해 스탈린에게 전하도록 했다. 마오는 그러나 정치국의 최종 결정은 아직 내려진 상태가 아니고, 이후 토론결과에 따라 결정이 날 것이라고 밝혀 출병의 여지를 남겼다. 

 

저우언라이는 10월 3일 오전 1시에 중국 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불러 외교경로를 통해 미국에 중국의 ‘통지’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아 인도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려 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파니카에게 "네루 총리가 제기한 문제로써 긴급한 사안이다. 바로 조선 문제다. 미국은 38선을 넘어 전쟁확대를 기도하고 있다. 미국 군대가 38선을 넘으면 우리들은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들은 관여할 것이다. 이런 점을 귀국 정부의 총리(네루)에게 보고해 주기 바란다"고 중국의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이것은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 4일 마오의 주재아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중난하이 이니옌탕(頤年堂 이년당)에서 열렸다. 정회원 참석자는 마오,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린보취, 둥비우, 펑전(彭眞 팽진), 천윈(陳雲 진운), 장원톈, 가오강, 그리고 회의도중에 참석한 펑더화이였다.

 

업저버  참석자는 뤄룽환, 린뱌오, 덩샤오핑, 라오수스(饒漱石 요수석), 보이보(薄一波 박일파), 녜룽전,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후차오무(胡喬木 호교목), 양상쿤이었다.

 

마오는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병의 불리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다수가 출병에 반대했고 혹자는 우려했다. 주요 이유는 중국이 막 내전을 끝냈고, 경제가 매우 곤란한 상황이며, 전후복구의 재건사업 등 화급히 해결할 사안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또 새로운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이 아직 진행되지 않았고, 중국군의 무장장비가 미군에 비해 월등히 낙후한데다, 특히 제공권과 제해권이 없어 불리하다는 점 등이 거론됐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사진 위쪽)과  중국인민지원군 모 부대가 귀국전 조선인민군과의 고별모임 장면. © 신화사·흑룡강신문
 

마오는 “당신들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들이 수수방관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회의 진행 중에 시안에서 급히 베이징으로 날아 온 펑더화이가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펑라오쭝, 고생 많았다. 아주 잘 왔다! 미 제국주의 군대가 이미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공하고 있다. 현재 정치국에서 조선출병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모두가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있다. 당신도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기 바란다”고 반갑게 맞이했다.

 

펑더화이는 사전에 회의내용을 몰라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만 했을 뿐 발언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회의가 끝난 뒤 양상쿤으로부터 회의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10월 5일 오전 마오의 부탁을 받은 덩샤오핑은 펑더화이가 묵고 있는 베이징호텔을 찾아가 펑더화이를 데리고 중난하이의 쥐샹슈우(菊香書屋 국향서옥) 마오의 집무실로 왔다. 마오는 이때 펑더화이의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린뱌오 등 군부에서 반대를 하고 있는 만큼  군부에서 위상이 높은 펑더화이의 의중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펑더화이를 본 마오가 웃으면서 운을 뗐다. (주석 317)

 

"어제 회의에서 라오펑(老彭 노팽; 펑더화이)은 한 마디도 안 했다. 당신답지 않았소.“

“베이징에 오면서 무슨 일인가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엔 서북건설만 떠올랐습니다. 참전(參戰)여부를 둘러싸고 견해차이가 그렇게 큰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많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해 듣기만 했습니다.”

“이 회의는 내가 제의해 열렸소. 당내외의 동지들이 참전에 불리한 이야기만 늘어 놉니다. 어제 밤늦게 린뱌오, 가오강 두 동지가 이곳에 와 오랜 동안 이야기 했소. 헌데 3차 세계대전 운운하며 여전히 출병을 말립디다.”

 

펑더화이는 그윽한 눈빛으로 대단히 피곤해 보이는 마오의 얼굴을 쳐다보다 갑자기 일어나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워야 합니다.”

 

마오가 어리둥절해 하며 펑더화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출병(出兵)! 이미 다 들었습니다. 나는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어요. 출병에 찬동합니다.”

 

펑더화이가 마오의 조선출병을 옹호했다. 마오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수장이 됐으면 하나?”

“주석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라오펑은 어떻소?”

 

마오는 조선출병의 막중한 임무를 펑더화이에게 맡길 의중을 떠봤다.

“나는 중앙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마오는 감개한 마음으로 펑더화이에게 부탁을 했다.

“이제 마음을 놓게 됐소이다. 현재 미군이 이미 무모하게 38선을 향해 돌진하고 있소. 우리들은 가능한 빨리 출병해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오늘 오후 정치국회의가 계속됩니다. 당신의 견해를 밝혀주기 바라오.”

 

이날 오후 중난하이 이니옌탕에서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여전히 두 가지 의견이 엇갈렸다. 펑더화이가 자신의 관점을 털어 놓았다.

“출병해 조선을 돕는 것은 필요하다. 무르익었다. 미국이 전 조선을 점령하면 앞으로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미군이 우리들 집의 대문 앞인 압록강 변과 타이완에 진출해 군대를 배치하면 그들은 침략할 생각을 하게 된다. 수시로 그런 빌미를 줄 수 있다. 나중에 싸우는 것 보다 일찍 싸우는 게 낫다. 전쟁을 끝낸 뒤 다시 건설하자.”

 

마오가 서둘러 펑더화이의 말을 받아 발언에 나섰다. (주석 318)

“요 며칠 동안 많은 동지들이 출병해서 안 되는 많은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과 조선당의 동지들은 우리들과 항일, 해방전쟁을 하면서 중국혁명 사업을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그들 민족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1백 가지 이유, 1천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한 가지 이유, 즉 우리가 마땅히 갖고 있는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이웃이 어려울 때 나아가 지원하는 것을 논박할 수는 없다. 정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드는 것은 중화민족의 미덕이다! 100년 동안 중국인들은 늘 얻어맞았다. 중국을 기름진 고깃덩어리로 여겼다. 그러나 중국인민들은 이미 일어섰다! 맞다, 미국의 대포는 우리보다 많다. 단, 역사는 대포가 쓰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잡아 그들이 원자탄으로 싸우면 우리는 수류탄을 들고 싸운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의 세계는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돌을 머리로 옮기려다 떨어뜨리면 자기 발등을 찍는다. 자업자득이다.”

 

10월 2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열린 회의는 이날 최종적으로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펑더화이가 수장이 되어 지원군(군대)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가기로 했다. 출병이 결정되자 중공중앙과 마오는 어떤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유리한지 ‘작명(作名)’에 고심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애초 ‘지원군(志願軍)’과 지원군(支援軍)‘을 놓고 연구에 연구를 계속하다 마오가 경험이 풍부한 민주당파 인사들의 의견을 구하는 게 좋겠다고 제의해 의견청취에 나섰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경제계의 원로 인사이자 비공산당원인 부총리 황옌페이(黃炎培 황염배)와 얼굴을 마주했다. 황옌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석 319)

 

“예부터 출사(出師; 군대출동)할 때는 명분을 달았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싸움을 잘 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지원군(志願軍)’이나 또는 지원군‘(支援軍)’으로 부르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말했다.

“지원군(支援軍)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군대를 출병하는 게 아닌가? 고려가 필요하다.”

 

황옌페이는 출병에는 명분이 중요한 만큼 그에 합당은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왜, 정당한 명분의 출병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지원군(支援軍)이란 뜻은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누가 파견해 지원한다는 말입니까? 국가? 우리들이 미국과 싸우자고 선전포고하자는 뜻이 아닌가요?”

“아, 일리가 있습니다!”

 

마오가 무슨 뜻인지 얼른 알고 옆에 놓여 있던 붓을 들어 ‘지원(志願)’이라고 큰 글씨로 쓴 뒤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미국과 선전포고하고 싸우는 게 아니다. 국가와 국가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들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민간의 일이다. 인민들이 지원해 조선인민들을 돕는 것으로 국가와 국가의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맞다! 세계 역사에 있어 많은 ‘지원군(志願軍)’의 선례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보위전은 각국의 지원군들이 참여했습니다.”

 

저우언라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손을 휘저어가며 말했다.

“정당한 명분으로 출병한 군대는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出師有名則戰無不勝).”

 

황옌페이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오는 동북에 집결한 수십 만 중국인민 해방군들에게 ‘국제복’이란 군복으로 갈아입혀 ‘지원(志願)아닌 지원군(志願軍)’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이른바 중국의 ‘캉메이위안차오(抗美援朝 항미원조; 미국에 저항해 조선을 돕는다)’의 ‘지원군(志願軍)’은 국제적 꼼수였던 것이다.

 

316)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17)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18)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19)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

 

 

142. 마오, 자신의 아들 안잉도 전장에 보내는데…

 

 

10월 7일 정오, 마오가 거주하고 있는 중난하이 쥐샹슈우(菊香書屋 국향서옥) 위로 펼쳐진 하늘이 껑충 뛰고 엷은 구름이 한가로이 노닐며 피를 부르는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삽상한 가을바람이 청량함을 더하고, 뜰에 흐드러지게 핀 황금색 국화는 옥호인 쥐샹슈우에 걸맞게 그윽한 내음을 뿜어대고 사위는 적요해 우아한 기풍이 흘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 사뭇 다른 천양지차(天壤之差)의 도원경을 방불케 했다. 마오는 담배를 피워 물고 각양각태의 현란한 자태를 뽑내는 국화꽃을 바라보며 거닐면서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주석 320) 

 

“어질고 재능 있는 장재(將才)를 얻으면 군사력을 강화해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어질고 재능 있는 장수를 얻지 못하면 군사력을 약화시켜 나라를 망하게 한다. 得賢將者, 兵强國昌, 不得賢將者, 兵弱國亡.”

강태공으로 더 잘 알려진 태공망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마오는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는 지원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인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를 초청해 집무실 겸 사랑으로 쓰고 있는 쥐샹슈우에 딸린 곁채에서 조촐한 장행(壯行) 연회를 베풀기 위해 마당을 거닐며 펑더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모안영)이 펑더화이를 안내해 들어오고 있었다. 마오는 펑더화이와 악수를 하면서 “라오펑(老彭 노팽; 펑더화이)아, 내일이면 동북으로 달려가 임지에 부임해야하는 만큼 오늘 밖에 시간이 없을 것으로 보여 간단한 식사나 할까 해 불렀다”고 말을 건넸다.

 

식사는 평소 마오가 먹는 4가지 반찬의 1탕에 두어 가지 반찬을 곁들인 소박한 메뉴였다. 펑더화이는 식탁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며 “좋은 음식입니다. 후난(湖南 호남)의 풍미(風味)”라며 반색을 했다. 마오는 “모두 안잉이 어른들(楊開慧 양카이후이의 모친 등)을 찾아뵈러 고향에 갔다가 갖고 온 것이다. 오랫동안 고향의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고 했다.

 

펑더화이는 “그래요. 나도 오랜 동안 후난의 라로우(臘肉 납육; 말린 고기), 라위(臘魚 납어; 건어물), 라쟈오(辣椒 날추; 고추)를 먹지 못 했습니다”라고 맞장구쳤다. 두 사람은 샹장(湘江 상강)이 흐르는 후난지방의 고향사람들이었다.

둘이 몇 잔의 술을 마신 뒤 마오가 더듬는 목소리로 펑더화이에게 말했다.

 

“라오펑아, 부탁이 하나 있네.”

“주석, 말씀하시지요.”

펑더화이가 젓가락을 탁자에 놓고 마오를 쳐다봤다.

 

“내, 아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네. 이 녀석이 펑쫑을 따라 조선에 가 싸우고 싶어 하오. 캉메이위안차오(抗美援朝 항미원조)는 정치국 동지들이 집체토론을 거쳐 결정했소. 아들이 지원군으로 신청한 것은 자기가 선택했소이다. 이 녀석은 내가 허락해주기를 바라오. 내게 이런 권력은 없습니다! 당신이 사령관이오. 당신이 보기에 이 녀석을 병(兵)으로 거두어 줄 수 있겠소이까?”

 

펑더화이는 얼이 빠져 멀거니 곁에 있는 마오안잉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네가 있는 공장에서 중요한 책임이 있다. 그만 둘 수 없을 텐데? 조선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비행기가 도처에 폭탄을 투하한다. 너는 후방에 있어라. 국내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는 것도 항미원조를 지지하는 것이다.”

 

펑더화이의 얘기를 듣고 있던 마오안잉이 황급히 말했다.

“아저씨, 농담이 아니예요.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제 눈으로 직접 미국의 종이호랑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소련에 있을 때 군사학교에 들어가 탱크병과로 기갑교육을 받았어요. 소련이 대반격을 펼칠 때 탱크를 몰고 베를린으로 쳐들어가며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용기가 있어 좋다! 너는 2차 대전에 참전해 탱크를 지휘하는 중위로 히틀러 군대와 싸웠다. 현대화 작전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게 말하며 마오를 쳐다보는 펑더화이의 얼굴은 주석이 결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냐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젓가락을 들며 “천천히 이야기 하자. 사람은 먹는 게 하늘이라고 했으니 우선 식사하는 게 중요하다”며 식사를 재촉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부으며 술을 권했다.

 

“펑 아저씨, 우리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니 많이 드십시오. 제가 어른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 술은 아저씨가 좋아하는 마오타이주(茅台酒 모태주)예요!”

“그래, 안잉. 네가 결혼한지도 곧 1년이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너의 결혼주를 마시지 않았구나!”

“이것 좀 들어보시오. 이것도 들어보시오.”

 

   
마오쩌둥과 그의 아들 마오안잉(오른쪽). ©국방부
 

마오가 부지런히 펑더화이의 접시에 이런저런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다 놓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항미원조는 내가 적극분자고 당신, 라오펑은 100퍼센트 나를 지지했어요. 그러나 이 결심은 쉽지 않았소. 한 마디 명령으로 3군이 출동하고, 그것은 수십만 명의 목숨이 걸려있습니다. 잘 싸워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잘못되면 국내정국이 위태롭고, 심지어는 우리 강산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그리되면, 나 마오는 역사와 인민에게 모두 할 말이 없어집니다!”

 

“주석, 마음 놓으십시오. 우리들은 출병합니다. 반드시 이 싸움을 이길 겁니다.”

펑더화이가 견결하게 말했다.

 

“일이 어디 그렇게 간단하겠소. 미국은 경제력이 대단할 뿐 아니라 군사도 많고 장령들도 넓게 포진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강철 생산량은 65만 톤 이지만 미국은 9천8백만 톤이나 됩니다. 우리의 1백63배입니다. 미국은 85년 동안이나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없었고, 무기나 장비도 우리보다 강하고 많습니다. 미국은 1개 군(軍)마다 각종 포(炮)가 1천5백문인데 반해 우리는 36문이요. 새발에 핍니다. 차이가 너무 크지요.”

“차이가 확실히 크고 위험도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조선이 위난에 처했고, 국제주의적으로나 애국주의적으로 볼 때 우리들 모두 좌시하거나 오불관언해서는 안 됩니다.”

 

펑더화이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힘차게 말했다. 마오가 동의하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제국주의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는 두려워합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오. 내가 보기에 한 번 찔러보면 뭐 대단할 것도 없을 것이오!”

“관건은 이기느냐, 지느냐 입니다. 이기면 위험은 적고, 지면 위험이 큽니다. 그래봤자 그들이(미국) 온다면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가 전투하며 몇 년 지나면 늦게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대단한 겁니다!”

“라오펑아, 이것은 옌안(延安 연안) 보위전에 비해 아주 힘들고 복잡한 전쟁이오. 어찌해야 적을 이길 수 있는 지 생각해 봤소?”

 

마오는 자신들이 맞설 상대는 썩어문드러진 국민당 군대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단련한 세계 최강의 군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선진적이고 많은 무기를 보유해 실제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321)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맥아더는 강한 것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안하무인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교만을 파고들어 주석이 말한 대로 ‘그들이 원자탄을 갖고 싸운다면, 우리는 수류탄 갖고 싸운다’는 굳건한 정신만 있다면  우세를 발휘해 끝내 적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또 세계 인민들, 미국 인민들을 포함해 그들은 도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들을 지원할 겁니다.”

“맞소, 맞소이다! 라오펑아, 내가 보기에 첫 전투는 우선 미국을 두려워하는 ‘콩메이빙(恐美病 공미병)’을 날려버리는 것이오. 펑쫑의 어렸을 때 이름이 돌을 뚫는다는 ‘스촨(石穿 석천)’이고, 나의 아명이 ‘스싼야즈(石三伢子 석삼아자)’로 나는 이 돌(石)을 트루만에게 던지고, 펑쫑의 돌은 맥아더에 던지면  그들을 깨부수지는 못해도 놀라게 해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겁니다!”

 

두 사람은 쥐샹슈우가 떠나가도록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이때 마오안잉이 두 그릇의 죽을 들고 들어왔다. 마오가 웃으면서 “안잉아, 너 방금 펑 아저씨가 싸운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마오안잉은 “예, 방금 펑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고 대답한 뒤 펑더화이 곁으로 다가가 “펑 아저씨, 지금 허락해 주세요”라고 졸랐다.

 

펑더화이는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마오안잉에게 “좋다! 내가 조선 지원군에 신청한 첫 번째 전사로 너를 거두 마”라면서 “너는 내가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오안잉은 “예,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겠습니다. 조선으로 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펑더화이는 “너는 러시아 말을 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내 곁에서 통역관을 해라. 앞으로 소련과 교섭할 일이 많은 것이다”라고 했다.

마오안잉은 “감사합니다. 펑 아저씨”라고 기뻐했다.

 

펑더화이는 “에이~”하며 발음을 길게 끌면서 “앞으로 다시는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너의 사령관이다. 너는 나의 참모다. 네가 다시 펑 아저씨라고 부르면 너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설핏 으름장을 놨다.

마오안잉은 “예, 펑쫑(彭總 팽총; 펑 총사령관)!”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에게 “주석, 주석이 친히 아들을 항미원조를 위해 전선으로 보낸다는 것을 기자들이 안다면 1면 기사거리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마오는 “그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트루먼이 알게 되면 나를 호전(好戰)분자라고 할 것이다. 전투를 잘 하려면 군사기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조선 참전을 허락했지만 심적 부담이 컸다. 처음으로 벌이는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친미(親美), 숭미(崇美), 공미(恐美)파가 적지 않았다. 마오는 이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 일종의 시범을 보이기 위한 조처란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마오가 안잉을 대단히 귀여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안잉은 마오가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그리는 양카이후이(楊開慧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었다. 마오안잉은 8살 때 어머니 양카이후이가 총살당하기 직전인 1930년 11월 후난성 창사 육군감옥소에서 함께 갇혀있었다.

 

마오는 자신 때문에 안잉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모진 고생을 겪은데 대한 죄의식과 연민의 정으로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 그러나 전쟁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기 때문에 펑더화이는 둔중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펑더화이는 다시 마오에게 숙고해 보도록 했다. 마오는 "방금 라오펑이 응답하지 않았나? 군자가 말한 한 마디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따라 잡을 수 없다(君子一言, 駟馬難追 군자일언 사마난추)"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석, 내 말을 들어…"

 

펑더화이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는 마오는 말을 자르며 부드럽고 간곡한 어투로 말했다.

"라오펑아, 당신이 그 애를 거둬주기 바란다. 안잉을 대신해서 사정하오! 전쟁은 사람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으로, 꼭 어떤 사람들은 희생되기 마련이오. 내가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마땅히 먼저 내 아들을 전선에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안잉이 러시아어와 영어를 할 줄 아오. 라오펑이 조선에 가면 소련인,  미국인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당신 곁에 두어 각 방면에 연락할 때 쓰도록 하시요."   

 

펑더화이는 더 이상 만류를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핑 돌았다.

 

320) 毛澤東因何爲彭德懷懷喝酒 理論頻道 新華網
321) 毛澤東因 爲彭德懷 理論頻道 新華網

-----------------------------------------------------------------------------------------------------------------

 

 

143. 중국군, 운산전투 첫 기습공격…전쟁 개입 신호탄

 

 

1950년 10월 8일, 중국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지원군' 결성에 관한 첫 명령을 선포했다. 저우언라이를 비밀리에 소련에 보내 출병결정을 통보하고 전쟁지원을 협의하도록 했다.

 

신중국 성립직후라 재정상태가 턱없이 부족해 경제적 지원이 시급한데다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무기탄약, 운송수단, 공군지원 등 부문에서 소련의 지원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통역관 스저(師哲 사철)와 함께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이때 스탈린은 흑해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10월 10일 일부러 병을 빙자해 지원군 사령관직을 고사하고 모스크바에서 양병(養病) 중인 린뱌오를 데리고 흑해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다. (주석 322)

 

스탈린: 미군이 이미 38선을 넘어 조선 북부로 진격하고 있다. 조선이 지원을 받지 못하면 기껏해야 1주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이미 중대한 패배를 해 형세가 엄중하고, 중국이 이미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니 잘한 일이다. 그러나 마땅히 다른 방면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은 오늘날 세계의 군사강국이다. 미국은 막강한 해군과 공군을 보유하고 있고, 군사기술과 장비가 우세하다.

 

저우언라이: 우리들은 조선과 미국 군대의 전투,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전쟁상태 선포, 미국의 중국에 대한 공중폭격 등에 대비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스탈린: 중국동지들이 고려하는 문제는 깊고 심각하다. 당연히 현재 뿐만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이후의 모든 문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떻게 출현하는 상황에 대응할 지에 대해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저우언라이: 때문에 이번에 마오쩌둥 주석이 나를 파견해 출현 가능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소련 정부가 군사원조와 공군을 지원해 주기를 희망한다.

 

스탈린: 우리는 이 문제를 검토해봤다. 우리들도 어떻게 직접 조선 동지를 도울지에 대해 고려했다. 단, 소련 정부가 일찍이 성명에서 발표했듯 조선에서 우리들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다. 현재 우리들이 다시 조선에 출병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미국과 직접 교전하자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중국 출병에 대해 우리들은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겠다. 아울러 일정 대수의 공군이 엄호할 수 있도록 출동시키겠다. 당신들이 제기한 무기장비 개선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2차 대전이후 남은 무기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군부 쪽과 중국동지들이 잘 협의해 해결하기 바란다. 조선 동지들이 전쟁 발발시 순조롭게 진군해 적을 가볍게 봤던 것 같다. 미제의 반격을 막을 수 없게 됐다. 만약에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하면 적들은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민군이 적들에게 무망한 저항으로 최종 소멸당하니 보다, 곧바로 그들에게 조직을 추슬러 철수하도록 일러줘야 한다. 아울러 그들의 주력을 중국 동북에 철수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가)승낙해야 한다.

 

저우언라이: 우리들은 김일성 동지에게 그들의 주력이 우리나라의 동북에 철수할 수 있도록 전달하겠다.

 

스탈린: 당신들 출병의 첫 번째 싸움의 관건은 버티는 데 달려있다. 일단 당신들의 부대가 미군의 진공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소련이 출병해 지원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미군 군대와의 직접적 대항이다. 그렇게 되면 3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인류는 또 재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저우언라이: 우리들은 스탈린 동지가 말한 이런 상황이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전쟁승부의 결정적 요인은 인심향배에 달려있다. 5억 중국인민과 전 세계인민들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우리들을 지지할 것이다. 우리들은 꼭 승리한다. 지금 미국 침략자들이 조선에 왔다. 침략자들을 물리치면 능히 평화를 보위할 수 있다.

 

스탈린: 전쟁과 평화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다. 중국 동지(저우언라이)가 말하는 방식대로 꼭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우언라이: 도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가 많은 약소국가들을 먹어치우는 것을 좌시해 히틀러의 야심이 더욱 커져 대전을 피할 수 없었다.

 

회담을 끝내면서 스탈린은 먼저 중국 10개 사단에 대한 장비공급을 약속하고, 아울러 중국 연해 대도시의 방어를 위해 안둥(安東 안동; 지금의 단둥)에 공군을 파견해 주둔하는 것에 동의했다. 저우언라이는 모스크바로 되돌아와 마오에게 즉시 회담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날 밤 몰로토프가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은 중국이 즉각 출병하는 것에 반대하고, 공군지원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소련이 공군파견 준비가 안 돼 있고, 스탈린이 중국의 지원군 파견문제를 더 고민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스탈린은 중국의 지원군 파견이 세계대전을 불러올까봐 걱정하면서, 심지어 조선이 패퇴할 경우 김일성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철수해 '망명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는 곧바로 소련 쪽에 "막 결정한 사안을 당신들은 뒤집을 참인가"라며 불만을 터뜨리면서 "소련이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우리나라는 이미 조선 출병을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번복을 즉시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곧바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동북군 사령관 가오강과 조선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급히 베이징으로 불렀다. 조선 내무상 박일우(朴一禹)가 10월 12일 안둥(단둥)에 와 있는 펑더화이에게 전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왔다.

 

박일우는 미군 3개 사단, 영국군 1개 여단과 남조선군 1개 사단이 38선 이북의 개성, 금화(金化)지구에 집결해 평양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수도 평양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박일우는 동부전선은 남조선군 주력 2개 사단이 이미 원산을 점령했고, 다른 3개 사단이 원산 부근지역에 집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미군 8군 사령부 3개 사단은 대전, 수원 지구에서 북진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남부 쪽에 진군했던 5만여 명의 인민군이 북쪽으로 철수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남조선에 묶여있다고 밝혔다. 박일우는 상황을 설명한 뒤 다시 한 번 김일성 수상과 조선 당중앙이 이른 시일 안에 중국군이 출병해 지원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주석 323)

 

 

중국이 펴낸 전사자료집에 실린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들의 모습.

 

 

마오는 10월 13일 주더,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가오강과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이 공군을 파견해 엄호할 수 없다는 통보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한 결과 소련의 공군 파견 지원여부와 관계없이 출병하기로 결정했다. 마오는 회의내용을 저우언라이에게 보내 소련 쪽에 전달하도록 했다. 내용은 이랬다. (주석 324)

 

1. 정치국 동지와 협의한 결과 우리 군이 조선에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데 견해를 일치했다. 제1시기는 전적으로 한국군을 공격한다. 우리 군은 한국군 대응에 우세하다. 원산과 평양 이북의 큰 산 지구에 조선의 근거지를 만들어 조선인민들을 진작시킨다. 제1시기에 단지 몇 개의 한국군 사단을 전멸시키면 조선의 형세는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변화할 수 있다.

 

2. 우리들이 이런 적극 정책을 채택한 것은 대 중국, 대 조선, 대 동방, 대 세계 모두에 극히 유리하다. 우리가 출병을 하지 않으면 적들이 압록강변을  압박해 국내외적으로 반동의 위세가 더욱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각 방면에 불리하게 된다. 먼저 동북이 아주 불리해 진다. 모든 (동북)변방군이 대응해야하고 남만주 전력을 통제 당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참전하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참전은 이익을 극대화 시키고, 불참전은 손해를 극대화 시킨다.

마오쩌둥
1950년 10월 13일

 

이날 오후 저우언라이는 다시 스탈린 집무실을 찾아갔다. 스탈린은 저우언라이가 공군지원 문제를 또 다시 요구하러 온 것으로 여겼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명확하고 견결하게 말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이미 소련의 공군출동 여부와 관계없이 출병해 조선을 돕는 정책을 채택했다."

"중국동지들이 이렇게 결심했다니 얼마나 큰 불행을 맞이할지 모르겠다. 참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마오쩌둥 동지와 정치국 동지들이 이 문제를 모두 진지하게 연구하고, 신중하게 고려했다."

"중국동지들이 위대"

스탈린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북한 신의주에서 1킬로미터 남짓한 강폭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안둥(지금의 丹東 단동)이다. 동북으로 날아온 펑더화이는 10월 8일부터 도강시점인 19일까지 짧은 시간 안에 동북군 13병단을 주축으로 한 26만 명의 조선 지원군을 꾸렸다.

 

13병단 영도층은 사령관 덩화(鄧華 등화), 부사령관 홍쉐즈(洪學智 홍학지), 한시옌추(韓先楚 한선초) 참모장 졔팡(解方 해방), 정치 주임 두핑(杜平 두평) 등으로 구성됐다. 펑더화이는 1차로 26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안둥에서 압록강철교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갈 계획을 짰다.

 

마오와 중공중앙, 조선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중국군의 참전을 극비에 붙였다. 출기불의(出其不意)로 첫 전역(戰役)을 치러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때  유엔군 총병력은 42만 명으로 비행기 1100대, 군함 300여 척을 보유하고 이었다. 그 중 미군이 3개 군 6개 사단, 한국군 9개 사단으로 총 15개 사단의 병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  영국, 프랑스, 터키, 호주, 태국, 필리핀 등 연합군 병력이 버티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10월 17일 '유엔군 제4호 작전명령'을 내려 4개 군 부분병력 13만 명을 동원해 평양, 원산 두 지역을 동, 서부 전선으로 나눠 압록강을 향해 계속 전진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펑더화이는 조선지원군 각 군 군단장과 정치위원이 참가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제1차 조선 진군(進軍)부대를 배치했다. 39군, 40군, 38군, 42군의 순서에 따라 이들 부대가 평양, 원산 이북의 귀성(龜城), 태천(泰川), 박천(博川), 영변(寧邊), 덕천(德川), 영원(寧遠), 노오리(老五里) 주변 선(線)을 따라 북진하는 유엔군과 한국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10월 19일, 39군은 안둥과 창디옌(長甸 장전) 하구(河口), 40군은 안둥, 38군과 42군은 집안(輯安)에서 비밀리에 도강하도록 명령했다. 마오는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가는 이날 중공중앙 중난(中南 중남), 화둥(華東 화동), 시난(西南 서남), 시베이(西北 서북) 국(局)의 영도자들에게 일제히 전보를 보냈다. (주석 325)

 

"중국을 보위하고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지원군이 오늘 출동한다. 지금부터 수개월 동안 이 일에 대해 말을 하거나 신문에 공개적으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 당내 고급 영도간부들은 이 일을 명심해 일을 안배해 준비토록 하라."

 

펑더화이는 이날 각 부대들이 무선기를 통제하고, 엄밀하게 위장해 밤에 행군하고, 새벽에 취침하며, 대로를 피하고 은폐하면서 지정한 작전지구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또 각급 조직과 구성원들이 지원군의 일체의 행동, 부대의 명칭을 포함해 지휘관 관등성명, 부대배치, 서열, 기동 등 모든 행동에 대해 대외선전을 일절 금하고, 모두 엄격하게 비밀을 지켜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황혼 무렵, 석양은 이미 압록강 강상(江上)에 떨어져 하늘가에 걸려있는 검은 구름만이 새까맣게 개미떼처럼 압록강변에  몰려들고 있는 중국군대의 한국전쟁 개입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의주 상공 저편에는 미군기의 폭격으로 대지가 불타오르고 새까만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북국의 겨울 짧은 해가 하루를 다하고 어스름한 밤이 시작되자 중국군의 도강이 시작됐다. 펑더화이는 안둥 하늘에 새까만 구름이 몰려오면서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오후 5시께 압록강 철교를 따라 도강하는 부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펑더화이의 군사비서 양펑안(楊鳳安 양봉안)이 조선 외상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회동 안내를 위해 신의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펑더화이는 차에 올라 압록강을 건너며 장병들이 등화관제 속에서 홍수의 물결처럼 조선 쪽 대안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예의 '개미군단'인 민공(民工 민공)과 트럭, 대포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0월 21일 새벽, 펑더화이는 신의주 수풍발전소에서 박헌영의 안내를 받으며 평안북도 대유동(大楡洞) 부근 터널에 전쟁 지휘사령부를 설치하고 전투를 독려하고 있는 김일성과 만났다. 펑더화이가 먼저 중국의 전략방침과 병력배치에 대해 말했다. (주석 326)

 

“1차로 조선에 들어 온 지원군부대는 12개 보병사단, 3개 포병사단 등 20여만 명이다. 앞으로 20개 사단 규모의 지원군이 2차, 3차로 조선에 투입된다. 우리들은 평양, 원산 이북의 덕천과 영변 일선이남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한다. 현재의 문제는 근거지 확보여부다. 3종류의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근거지를 확보해 적을 섬멸하면서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쟁취하는 것이다. 둘째는 근거지를 확보해 쌍방이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가능성을 쟁취하려 한다.”

 

김일성은 마오와 중공중앙이 조선 출병을 결정한데 대해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전쟁 상황을 설명했다.
 
“미 침략군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 적들은 우리들 보다 비행기, 대포가 훨씬 많고, 또 원자탄까지 있다. 최근 며칠 동안 적들의 진공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당신들이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데 대단히 힘들 것으로 보여 걱정이다.”

“적들의 진공 상황은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실제상황에 따라 준비를 하려한다. 인민군의 적들에 대한 지연상황은 어떤가?”

“적들의 병력이 우세한데다 대포 등 화력이 강하고 비행기가 많아 우리 부대가 적들의 진공을 지연시키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민군의 현재 병력은 얼마나 되나?”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펑 총사령관에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현재 겨우 3개 사단정도를 갖고 있다. 1개 사단은 덕천, 영변 이북, 1개 사단은 숙천(肅川), 1개 탱크사단은 박천에 있다. 여기에 1개 노동연대와 1개 탱크연대가 장진(長津)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 남쪽에 차단된 부대들이 점차 북쪽으로 철수하고 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은 조중부대(朝中部隊) 연합지휘에 관한 문제를 상의하고, 지원군 사령부를 김일성의 전쟁지휘 사령부가 있는 대유동(大楡洞)에 설치하기로 했다. 또 조선에서 내무상 박일우를 전권대표로 지원군 사령부에 파견해 지원군 부사령관 겸 부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부서기를 맡도록 했다. 펑더화이는 10월 25일 대유동 지원군 지휘 총사령부에서 지원군사령부 정식 선포식을 열고 1차 작전회의를 열었다. 작전처 부처장 청푸(成普 성보)가 펑더화이에게 종합적인 전황을 보고했다. (주석 327)

 

“적군들은 각자 부대를 나눠 북으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선봉에 선 남조선군 6사단의 선두부대는 이미 고장동(古場洞)을 점령하고, 곧바로 초산(楚山)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남조선군 8사단은 영원(寧遠)에 도착해 희천(熙川)에서 강계(江界)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1사단이 영변에서 창성(昌城)으로 향하고, 영국군 27여단은 안주(安州)를 지나 신의주로 진공할 태세입니다. 또 미국 기병 1사단, 보병 2, 24, 25사단은 평양에 집결해 있고,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사단은 원산에 상륙했습니다.”

 

청푸는 벽에 걸린 쌍방 병력배치도에서 운산(雲山)에서 온정(溫井)지구를 가리키며 “이 일대는 적들이 진공하는 중점지역으로 우리들은 이 요충지를 방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펑더화이는 11월 1일 오전 9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제38군은 구장(球場)지구의 적을 신속히 섬멸한 뒤 청천강(淸川江) 왼쪽 연안에서 원리(院里), 군우리(軍隅里), 신안주(新安州) 방향으로 돌격해 적의 퇴로를 끊는다. 제42군 125사단은 덕천으로 돌격해 점령한 뒤 동쪽과 남쪽 양쪽에서 지원하는 적들을 견결하게 저지한다. 제40군 주력은 영변의 남조선군 1사단 주력을 포위하여 기회를 잡아 전멸한 뒤 계속 남쪽으로 돌격해 용산동(龍山洞)의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 제39군은 운산의 적을 공격해 섬멸한 뒤 제40군과 협동작전을 벌여 용산의 미 기병 1사단, 제66군 일부를 귀성(龜城) 서쪽에서 전멸시켜 미 24사단을 견제한다. 그런 연후에 상황을 보아 적의 뒤쪽으로 돌격해 섬멸한다.”

 

이렇게 해 중국과 미국의 양국 군대가 한국 전장터에서 현대사 사상 첫 전투를 벌이게 됐다.

평안북도 운산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1천여 가구가 사는 소도시였다. 운산을 지키는 군대는 미 기병 제1사단 8연대와 한국군 제1사단 12연대 병력이었다. 중국 지원군은 애초 11월 1일 밤 7시 30분 운산을 방어하고 있는 미군과 한국군에 대해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3시 30분 미군과 한국군이 방어진지 교대임무에 들어가 시간을 앞당겨 황혼 무렵인 오후 5시에 일제히 공격에 들어갔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밤 11시 중국군 116사단이 운산에 진공했을 때 대부분이 한국군이 아닌 미군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2일과 3일까지 미군은 비행기와 탱크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으려 총공격을 폈으나 역부족이었다.

 

중국군의 승리였다. 중국군은 이 운산전투에서 미 기병 1사단 8연대 대부분 병력과 한국군 제1사단 12연대 일부분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포로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중 1800여 명이 미군이었고, 비행기 3대를 격추하고 비행기 4대를 노획했다. 탱크 28대, 트럭 등 차 170여 대, 각종 화포 119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펑더화이는 운산전역이 끝난 뒤 총결에서 기염을 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와 제1차 전역에서 승리했다. 이 전역에서 모두 1만5,800여 명의 적을 전멸시켰다. 마오 주석이 대단히 기뻐했다. 처음에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미군과의 전투가 우리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걱정했다. 지금 볼 때 이런 곤란은 극복할 수 있다. 우리들의 근접전과 야간전투의 자랑은 비행기가 없고, 대포와 탱크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싸우면 승리를 할 수 있다! 미국 군대는 뭐, 대단하게 아니다. 우리들은 괴뢰군(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일의 군대, 조지 워싱턴이 건국당시 만들었던  미군 기병 1사단도 이겼다. 이 군대는 미국에서 유명하다. 이제까지 진 일이 없는 군대인데 이번에 패전했다. 우리 39군의 손에 패전했다!”

 

322)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23)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24)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25)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26)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27)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

 

 

144. 미, 중국 개입에 당황… 마오 "계속 남진하라"

 

 

미군과 한국군은 압록강으로 북진하다 운산에서 돌연한 중국군의 기습을 받아 서부전선은 부득불 청천강 이남으로, 동부전선은 장진호 이남으로 각각 후퇴했다. 맥아더가 추수감사절 안에 전쟁을 끝내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호언장담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국 당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뜻하지 않았던 중국군의 출현 때문이었다. 중국군의 참전의도와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11월 9일 1차로 미국정부의 참모장 긴급 연석회의가 열렸다. 참모장 연석회의 의장 오마 넬슨 브래들리가 말문을 열었다. (주석 328)

 

"지금 한국전쟁 상황에 뜻밖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리들은 원래 중국이 참전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북한지역에서 대량의 중국군들이 참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군이 한국에서 정규군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도쿄(맥아더 유엔군 사령부)보다 워싱턴(트루만 정부)에서 더욱 우려하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 스미스가 정보보고를 했다.

"우리들은 현재 중국의 부대병력이 얼마나 북한에 출병했고, 다시 얼마만큼의 부대를 파병하고, 그들의 (출병)목적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있다. 중국은 동방의 거인이다. 그들은 거대한 인력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육군 규모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다. 중앙정보국은 중국군 부대가 소련의 물자원조 아래 참전해 우리들과 충분히 겨뤄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소련은 거인 중국이 미국과 전면전쟁을 벌이는 것을 대단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소련은 단지 공군엄호와 군용물자 지원만 하고 있다. 이럴 경우 우리들의 전략적 중점을 한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들이 소련의 공군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과의 전면적 전쟁에 직면해 전진하든지 아니면 후퇴하든지 선택을 해야 한다."

 

브래들리가 상황분석을 내놨다.

"각 방면의 정보 분석에 따르면 나는 중국인들이 북한에 출병한 동기를 3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압록강변의 전력시설을 힘써 보호하고, 강남 연안에 경계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중국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의 군사력을 한국에서 견제해 우리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제한적인 소모전을 펼치려는 것이다. 셋째는 소련의 해공군력의 지원 없이는 중국이 성공할 수 없다. 유엔군을 서둘러 한국에 파견한 것과 관련해 소련이 간여하는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중국은 이제 막 건국했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한 상황에서 미국과 대규모로 대결할 수 없다. 유엔군이 한국군 퇴각으로 부산 방어에 급급했던 유리한 때와 인천상륙의 관건시기에는 중국이 출병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북한과 중국의 변계를 압박하자 출병했다. 때문에 첫 번째 가능성이 제일 크다. 중국이 소수의 부대를 강 건너로 파병해 압록강 연안의 전력시설을 보호하고 일종의 완충지대를 만들려는 심산이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돼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내가 매우 곤혹스럽고 엄중하게 느끼는 것은 중국이 북한에 얼마의 군대를 파병했느냐 하는 문제다. 그들의 진정한 기도(企圖)와 한시적 여부다."

 

브래들리가 설명에 나섰다.

"맥아더가 최근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북한에 들어 온 부대병력은 2만여 명으로 많아야 6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큰 가능성은 중국이 '지원군' 명의로 비밀리에 북한군을 지원해 전멸을 막아 근거지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맥아더는 중국인들이 감히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들 부대는 이미 승리의 문 앞에 다 달았다. 전진을 막을 수 없다. 압록강이 얼기 직전에 북한을 점령할 것이다."

 

미국 국방장관 조지 마샬은 맥아더가 더욱 군사적인 모험을 채택해 미국을 재난으로 끌어들일까봐 조바심을 내며 걱정했다.

"한반도의 군사형세는 너무 낙관할 수 없다. 우리들은 북한의 동쪽 방어선이 너무 넓기 때문에 공격받기 쉽다. 제10군과 1사단이 만주 쪽으로 진공하면 그들과 서부전선의 제8군단의 간격이 너무 벌어진다. 만약 중국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면 세계에서 전투시간이 가장 길고, 지상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이기 때문에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

 

브래들리가 낙관적 전망을 내놨다.

"중국은 감히 정규군 참전을 선포하지 못하고 '지원군'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주력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임시 규합한 공안부대일 가능성이 높다."

 

마샬이 답답해하며 참견했다.

"나는 2차 대전과 전쟁이 끝난 뒤 중국에 가봤다. 당신들은 중국인을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세계 고대의 대 병법가 손자(孫子)가 중국인이다. 그들의 전략전술은 대단히 유명하다. 중국공산당 군대는 일본을 깨고 장제스의 수백 만 군대를 패배시켰다. '지원군'은 무슨 지원군인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의 정예부대일 가능성이 크다. 마오쩌둥은 일관되게 첫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미군과 교전하기 위해 반드시 뛰어난 장군과 정예병을 선택했을 것이다. 소련은 이미 중국에 200대의 비행기를 보냈다고 한다. 소련인은 직접 출병의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신중해야 한다."

 

브래들리가 다시 입을 뗐다.

"승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필요하다면 중국 만주도 폭격할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

 

말을 아꼈던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 마디 던졌다.

"진공(進攻) 이외에 더 적합한 방법을 찾아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면 그게 제일 좋다. 우리들이 전 한반도를 정복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은 아니다."

 

마무리 발언은 의장인 브래들리가 했다.

"됐다. 회의는 여기까지다. 우리들의 방침은 마땅히 다시 공세를 펼쳐 강력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맥아더에게 압록강의 물이 얼기 전에 북한을 완전히 점령하도록 한다. 단, 만주폭격은 안 된다."

 

중국군은 11월 25일부터 제2차 전역(戰役)에 들어갔다. 이날 오전 11시께 4대의 미군 폭격기가 중국 지원군 총사령부가 있는 건물 상공 쪽으로 비스듬히 지나 북쪽으로 날아갔다. 전날 오전에는 미군 정찰기 1대가 총사령부 상공 주위를 근 1시간 정도 선회하다 돌아간 바 있었다.

 

이날 4대의 폭격기가 날아오자 적기가 왔다며 부근 산언저리에 있는 방공호로 피하라는 대피령이 내렸다.

 

펑더화이는 괜찮다고 했으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부사령관 홍쉐즈(洪學智 홍학지)가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홍쉐즈는 작전실에 있던 펑더화이를 이끌고 마오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모안영) 곁을 지나 방공호로 대피했다.

 

 

 1951년 미 공군 폭격기가 북녘에 폭탄을 퍼붓고 있다.

 

 

 

이때 마오안잉은 전보 발송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오안잉은 러시아 통역업무를 담당했으나 비교적 한가했기 때문에 전보 수발업무를 병행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날아갔던 4대의 미군 폭격기가 다시 작전실 상공 위를 비스듬히 지나갔다가 방향을 돌려 되돌아오면서 100여 발의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작전처 부처장 청푸(成普 성보)가 작전실에서 아직 대피하지 않았던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高瑞欣 고서흔)을 부르려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곧바로 화염이 치솟으며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마오안잉의 나이 28살 이었다. (주석 329)

 

펑더화이가 한국전이 한창인 1951년 2월 하순 한반도 상황과 작전방침 지시를 받으러 베이징에 와 마오를 만났을 때 마오안잉의 주검을 송환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마오는 "청산(靑山) 곳곳에 충골(忠骨)들이 묻혀있다. 구태여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다 죽었는데 송환해 장사지낼 필요가 있겠는가. 지원군의 영웅 자녀들은 적과 피 흘려 싸웠다. 수없이 많은 우수한 전사들이 희생되었다. 안잉도 희생된 수많은 열사 중의 한 사람이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특수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곳의 황토에 모두 묻혀있다. 안잉은 희생된 우수한 전사들과 함께 조선의 국토에서 장사지내면 된다"고 했다.

 

중국군은 11월 2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벌어진 2차 전역에서 인해전술을 앞세워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평양을 탈환하고, 38선 이북 전역을 회복시켰다. 100여 년 동안 외국의 침략을 받아 희망 없는 나라로 멸시 받던 중국이 일약 최강의 군사대국 미국을 꺾었다는 것은 중국공산당은 물론 중국인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다.

 

정권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구사일생한 김일성은 중국군의 승리에 고무돼 12월 3일 중국군 후방사령부가 있는 선양(沈陽 심양)에 들려 동북군 사령관이자 지원군 후방사령관인 가오강(高崗 고강)과 함께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김일성은 이날 밤 마오의 집무실인 중난하이 펑쩌위안(豊澤園 풍택원) 쥐샹슈우(菊香書屋 국향서옥)에서 마오와 회견했다. 마오가 입을 열었다. (주석 330)

 

"원래는 두 가지 문제를 걱정했다. 첫째는 지원군이 도강한 뒤 조선에서 근거지 마련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였다. 1차 전역을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됐다. 둘째는 현재의 장비로 현대화된 미군과 교전해 승리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였다. 현재 이 문제도 해결됐다. 사실이 증명하듯 우리들은 미군과 교전했을 뿐만 아니라 승리를 했다. 보아하니 원래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 나는 먼저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을 대표해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들의 사심 없는 원조에 감사를 드린다. 중국인민의 우수한 자녀를 파병해준 데 감사하고, 특별히 공로가 탁월한 펑더화이 장군을 파견해 우리들이 미국침략자를 타격하는 데 도움을 줘 감사드린다. 조선인민은 대대손손 중국인민들의 깊은 호의를 마음속에 기억할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들이 가장 곤란한 때에 가장 강력한 원조를 해 주었다!

 

마오쩌둥: 우리들 한 집안은 두 집안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양당, 두 국가 인민들은 서로 지지하고 서로 원조한다. 현재 전쟁은 아직 안 끝났지만 승리는 이미 공중누각(空中樓閣)이 아니다. 이후 어떻게 할지 우리들이  잘 연구하자.

 

김일성: 나도 이 일 때문에 왔다. 며칠 전인 11월 30일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기자회견에서 조선전장에 원자탄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소식은 전 세계 각 방면에서 공포와 엄중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마오 주석께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마오쩌둥: 이런 식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적나라한 핵 공갈이다. 소련은 이미 핵무기를 장악하고 있다. 트루만은 감히 원자탄전쟁의 모험을 할 수 없다. 일본에 했던 것처럼 조선에 원자탄을 투하할 수 없다. 트루만의 이런 방법은 실질적으로 위협과 협박이다. 그럼, 중국 공산당 사람들이 트루만의 위협에 겁을 먹겠는가? 겁먹지 않는다. 오늘의 중국인민은 이미 선진계급의 영도아래 일어 선 인민이다. 다시는 어떤 외세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중국지원군은 1, 2차 전역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또 싸워야 한다. 그들은 감히 38선을 넘어 북진(北進)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어째서 38선을 넘어 남진(南進)할 수 없는가?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의 방법에 완전 동의한다. 응당 승세를 타고 전진해야 한다. 중국 지원군들은 대단히 영용하게 잘 싸운다. 이번에 전멸시킨 3만6천 명 중에 미군이 2만4천명 이다. 이것은 대단한 승리다.

 

배석했던 저우언라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우언라이: 스탈린 동지가 2차 전역 상황을 통보받고, 우리 군이 싼리숴(三里所 삼리소), 룽위안리(龍源里 용원리), 송구펑(松骨峰 송골봉)에서 비장하고 참혹한 저지전(阻擊戰 저격전)을 벌인 것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군대라고 칭찬했다.

 

마오쩌둥: 이것이 바로 중국 선진계급의 군대다. 명확히 자기가 걸머진 사명감을 알면 반드시 용감하게 매진한다. 전사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운다. 이런 인식에 의존한다. 이것이 혁명의 정기다. 내가 보기에 지원군이 미군을 패배시킨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의 힘이다. 미군은 안 된다. 그들은 강철 같은 힘이 부족하다. 김일성 동지는 어떻게 보나?

 

김일성: 맞다. 지원군은 무기와 장비에서 열악했지만 미군을 이겼다. 혁명정신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 때문이다.

 

저우언라이: 당연하다. 또 마오쩌둥 주석과 펑더화이 사령관의 정확한 영도, 이것이 아주 중요했다. 중조(中朝) 양국 군대가 어떻게 협조해 통일지휘를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 펑더화이 동지가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이 문제가 이른 시일 안에 빨리 해결돼야 한다.

 

 

1950년 10월 초 압록강 북쪽에 배치되었던 동북변방군이 신의주를 통해 입북하자 신의주 주민들이 환영하고 있다.

 

 

중국 동북군 사령관이자 지원군 후방사령관인 가오강(高崗)이 지원하고 나섰다.

 

가오강: 그렇다. 전장에서 지휘관의 통일명령은 작전에 유리하다. 지난 번 내가 조선에 갔을 때 펑더화이 사령관이 중조 군대 간에 지휘가 통일되지 않아 때때로 오해가 생긴다고 말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기편끼리 전투하는 바람에 포위당한 미군이 달아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이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한다. 비록 오해지만 범죄행위다. 마땅히 중조 군대의 통일지휘가 이루어져야 한다.

김일성: 알겠다. 통일지휘 문제에 관해서 나의 의견은 이렇다. 중국 지원군은 작전경험이 풍부하다. 중조 연합군 사령부를 만들면 마땅히 중국 동지가 정(正)이 되고 조선 동지가 부(副)가 되어야 한다. 이 문제를 노동당 정치국에서 토론해 이미 동의를 얻었다.

 

마오쩌둥: 아, 그러면 우리들은 사양하지 않겠다. 우리들 쪽에서는 펑더화이 동지를 지원 연합군대의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추진토록 하겠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김일성: 아주 좋다. 우리들 쪽은 노동당 정치국에서 김웅(金雄) 동지를 부사령관, 박일우 동지를 부 정치위원으로 결정했다.

마오, 저우언라이: 잘 됐다.

 

저우언라이: 이후 연합사령부의 명령은 펑, 김, 박 3인이 서명하고 통일 지휘한다. 그러나 후방의 동원, 훈련, 군정(軍政), 경비 등의 업무는 조선정부가 직접 관할하고, 연합사령부는 후방에 요구하고 건의할 수 있도록 하자.

 

가오강: 그러나 철도운수와 수리(修理)는 전쟁과 대단히 밀접하다. 마땅히 연합사령부 지휘를 받도록 해야 한다.

 

마오쩌둥: 연합군사령부는 내외와 통합하고 분할하는 기능이 있다. 연합사령부는 대외에 공개하지 않는 게 좋다. 대내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자. 이밖에 연합군사령부 중국인민 지원군사령부와 조선인민군 참모부 등 두 개의 기구로 나누고, 한 사무실을 쓰면서 협력하고 연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일성이 동의를 표시하고, 트루만과 영국수상 클레멘트 애틀리가 워싱턴에서 회담한 내용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주석 331)

 

저우언라이: 트루만은 조선전장에서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선포해 국내외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노동당에서 100명이 청원서명을 해 애틀리  수상에게 미국의 핵무기사용을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 적들의 형편도 좋지 않다.

 

마오쩌둥: 그렇다. 영국은 홍콩에 이해관계가 있다. 절대로 우리들 공산당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쉽게 조선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전장의 주도권은 이미 우리가 쥐고 있다.

 

김일성: 조선전쟁의 앞으로의 진전 문제에 관해 마오쩌둥 주석의 견해를 듣고 싶다.

 

중국 최고 영도자의 해법과 계획은 김일성에게는 절박한 관심문제로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이었다.

 

마오쩌둥: 내가 볼 때 전쟁은 신속하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발생해 시간을 끌 수도 있다. 우리들은 최소한 1년을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조선도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자력갱생을 하면서 외국원조를 보충해야 한다.

 

김일성: 옳은 말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장기계획을 세우면서 단기적 해결을 쟁취해야 한다. 과거 우리들은 확실히 장기계획이 부족했다. 단지 빨리빨리 해결하려고 생각해 곤란을 극복할 준비가 부족했다. 미군의 인천상륙에 관해 서도 필요한 준비가 부족했다. 마땅히 과거의 교훈으로 명심해야 한다.

 

저우언라이: 조선전장에서 다시는 제2의 ‘인천실패’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동서 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고, 특히 앞으로 전선(戰線)을 길게 끌게 될 경우에 대비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수시로 적들의 상륙작전에 대한 반격준비를 해야 한다.

 

김일성: 만약에 적들이 정전담판을 요구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적들이 패배하면서 이미 전쟁을 중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저우언라이: 적들이 정전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인도 등 13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의안을 제기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하려고 한다. 핵심은 먼저 전쟁을 중지하고 우리들이 38선에서 멈추는 것이다.

 

마오쩌둥: 당신들의 분석이 맞다. 적들이 정전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미군은 인천상륙 이후 대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왜 정전을 제기하지 않았나? 지금은 패퇴하니까, 정전을 들고 나온다. 정전을 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반드시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을 승인하고, 먼저 38선 이남으로 철수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평양뿐 아니라 서울을 우리들 수중에 넣는 것이다. 주요한 것은 적을 소멸하는 것으로, 먼저 괴뢰군(한국군)을 전멸시키고 미 제국주의가 철병하도록 촉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미 제국주의가 철병을 승인하면 유엔이 중소(中蘇)가 참가하는 것을 동의하는 조건아래 전 조선인민이 유엔 감시아래 자신들의 정부를 선택하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미제(美帝)와 장제스는 같아서 언약이나 협정은 모두 믿을 수 없다. 때문에 제일 나쁜 상황방면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김일성: 나는 전적으로 마오 주석의 의견에 찬동한다. 우리들은 적들이 숨 쉴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승세를 타고 전진해 평양, 서울을 취하고 적들이 조선에서 철병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마오쩌둥: 내가 곧바로 펑더화이에게 일지(一支) 부대를 평양으로 진공시켜  점령하라는 전보를 보내도록 하겠다. 평양은 당신들의 수도다. 이 도시를 수복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크다. 서부전선 부대는 연속적인 작전으로 이미 대단히 피로하다. 쉬면서 정비하고, 양초(粮草)와 탄약을 보충해야 한다.

 

김일성: 우리들은 이미 이에 대해 각 지역의 당 조직에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도로 중국지원군을 지원하겠다. 지원군들이 양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빨리 돕도록 하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들은 마음을 놓기 바란다.

 

쌍방은 부대 보급문제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저우언라이는 자신과 가오강이 상의해 동북에서 철도운수 회의를 소집했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철도통행은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트루만이 장기전을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한다.

김일성: 마오쩌둥 주석, 중국이 우리들에 대한 도움은 대단히 크다. 조선인민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 고마워할 것 없다. 우리들은 전우다. 만약에 고맙다고 한다면 오히려 트루만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미군의 밑바닥을 들춰보도록 했다. 단지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328)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29) 現場目擊者見證 毛岸英犧牲眞相 口述 成普 中國共産黨新聞網 
330)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331)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

 

 

 

145. 한국만 빠진 미·북·중 정전협정…현재도 ‘두동강’

 

 

중국은 12월 5일 대외에 정식으로 ‘중국 지원군’이란 부대명칭과 조선출병을 선포했다.

 

이날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이란 등 아시아-아프리카 유엔 13개국 대표단은 성명을 내어 “북조선 당국과 중국은 즉각 그들이 통제하고 있는 어떠한 부대들도 38선 이남으로 진격할 뜻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호소했다.

 

인도 주중 대사 파니카는 12월 7일 저우언라이를 방문해 13개국 대표들이 곧 ‘선 정전, 후 협상’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파니카는 “중국이 38선을 넘지 않는다고 선포하면 이들 국가의 환영과 도의적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5개 조건을 내걸었다. (주석 332)

1. 모든 외국군대는 조선에서 철수하라.
2. 미국 군대는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에서 철수하라.
3. 조선 문제는 조선인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4.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가 유엔에 참가하고, 유엔은 중국을 대표해 참가하고 있는 장제스의 대표를 축출하라.
5. 미국, 소련 등 5대국 외상회의를 소집해 대일(對日) 평화조약을 준비하라.

 

중국은 유엔이 이 5개 조항을 받아들이면 즉시 5대국 대표회의를 소집해 정전조건에 서명한다고 밝혔다. 중국정부는 12월 7일 주중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의견을 구했고, 스탈린은 중국정부의 5개 조건에 동의했다.

 

마오는 2차 전역으로 한국전에서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고 판단하고,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12월 11일 13개국 제안과 관련해 “미군이 이미 38선을 넘었다. 38선은 이미 맥아더가 파괴한 만큼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38선을 넘지 않겠다고 선포하지 않겠다”고 제안을 거절했다.

 

마오는 12월 13일 펑더화이에 보낸 전보에서 지원군이 모든 곤란을 극복하고 인내심을 발휘해 38선을 돌파해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주문했다. 마오는 미, 영 등 각국이 중국군의 38선 이북 정지요구는 유엔군이 군사력 정비시간을 벌어 다시 공격할 것으로 보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38선 이북에서 머물 경우 정치적으로 볼 때도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개성(開城)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큼 한국군과 유엔군의 서울방어력을 시험해 서울을 견고하게 지킬 경우 개성으로 물러나 부대를 정비하면서 서울 공략준비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몇 개 사단을 한강(漢江) 중류 북안(北岸)에 주둔시켜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 한국군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한다는 속셈이었다. 만약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면 서부전선에 배치한 6개 군단을 평양과 서울에서 일정한 기간 한꺼번에 휴식을 취하면서 부대를 정비해 다시 전투에 대비할 방침이었다.

 

마오는 춘계 대공세를 펼쳐 새로운 일격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에 패전심리를 가중시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계획이었다. 당시 38선 대치병력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20만 명,  중국군은 30만 명이었다.

 

펑더화이는 김일성과 협의해 중국인민 지원군과 조선인민군 연합사령부를 만들어 펑더화이가 연합사령관 겸 정치위원, 조선쪽에서 김웅이 부사령관, 박일우가 부 정치위원을 각각 맡았다. 조중(朝中) 연합사령부는 38선 돌파를 지휘하기 위해 12월 중순 평양 동북쪽의 강동(江東)과 성천(成川) 사이에 있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광산지역인 군자리(君子里)로 이동해 둥지를 틀었다.

 

1951년 11월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오른쪽)이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정하는 협정을 시작하고 지도에 38선을 긋고 있다.

 

 

 

미국은 12월 하순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38선 이남 철수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숨지자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다.

펑더화이는 3차 전역 공격 시기를 1950년 12월 31일 오후 5시로 잡았다. 펑더화이는 이때가 음력 중순으로 달이 밝아 야간공격이 수월한 데다, 미군과 한국군이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세밑새해를 맞는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야간방어가 비교적 소홀한 시기를 공격날짜로 택했다. (주석 333)

 

38선 돌파공격의 모든 채비를 끝낸 중국과 북한군은 12월 30일 밤에 38선 전 전선에서 일제히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급습을 당한 미국과 한국군은 1950년 1월 3일 서울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1·4후퇴’다. 1월 4일 낮 12시 중국군 50군단, 39군단의 일부 병력과 북한군 1군단이 서울에 진주했다. 중국군은 또 1월 25일부터 2월 16일까지 대규모 4차 전역을 개시하며 퇴각했던 한국군, 미국군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유엔군과 한국의 대반격으로 중국군과 북한군은 3월 14일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후퇴했다.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4월 11일 확전론으로 이견을 보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를 임명했다. 중국군은 4월 22일부터 6월 1일까지 임진강(臨津江)을 사이에 두고 대규모의 5차 전역의 총공세를 폈으나 일진일퇴하는 양상을 보이며, 38선에서 맞서는 교착국면에 들어갔다.

 

1951년 6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만나 미국이 제의한 정전담판 문제를 협의하고 미국과 정식 정전담판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정전담판을 제의하면서 우세한 공군력을 앞세워 북한 북부지역의 전력시설과 평양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해 회담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결국 미국의 휴전협정 제의를 받아들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도 동의해 7월 17일 저우언라이가 기초한 정전담판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내 동의를 얻었다. 저우언라이는 8월 15일부터 9월 22일까지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 중국 1차 5개년 계획과 정전담판 등 조선형세에 관한 문제를 협의했다.

 

9월 초에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과 중국의 펑더화이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구체적인 정전담판 문제를 조율했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상은 한국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 북한, 중국 대표가 1951년 7월 말부터 시작해 2년여에 걸쳐 끌고 당기는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板門店)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정전회담 시작 무렵인 1951년 7월 ‘중국포병의 아버지’ 무정(武亭)은 김일성의 군사적 문책을 받고 인민군 제2군단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뒤 평양에서 병사했다. 그때 나이 46살이었다. 1952년 11월에는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새 대통령에 당선됐고, 1953년 3월에는 스탈린이 사망해 흐루시초프가 뒤를 이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주도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중국군 참전이후에는 마오쩌둥이 핵심구실을 했다. 동족상잔으로 민족의 파탄을 부르고 한반도를 폐허로 만든 전화(戰火)의 인적, 물적 피해는 상상을 절한다.

 

전투 병력의 경우 유엔군은 한국군 14만 9000여 명, 미군 3만 7000여 명 등 18만여 명이, 공산진영은 북한 29만 4000여 명, 중국군 13만 6000여 명 등이 각각 귀중한 목숨을 바쳤다. 민간인은 한국 37만 4000여 명, 북한 40만 6000여 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전투 병력의 부상, 실종은 한국 84만여 명, 북한 34만 6000여 명, 민간인의 부상, 실종은 한국 60만여 명, 북한 227만여 명이 발생했다. 중국 전투병의 부상, 실종은 23만 4000여 명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그 숫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이런 씻을 수 없는 유·무형의 엄청난 대가를 치렀음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선으로 허리가 잘린 채 세계유일의 반동강이 국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32)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33)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抗美援朝戰爭中毛澤東, 斯大林, 金日成是何關系 人民網-中國共産黨新聞網

-----------------------------------------------------------------------------------------------------------------

 

 

146. '권력실세' 가오강, 2인자 위한 본격 작업 돌입

 

 

신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전쟁을 벌이기 전 항일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화 한 전후복구의 국가재건과 경제건설이 최우선의 국가과제였다. 특히 5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문제, 즉 경제문제는 최고의 숙제였다.

 

마오와 중공중앙은 본래 3년 안에 전국의 토지개혁을 완성해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초적 기반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런 연후에 공업과 상업 부문을 조정하고 국가기구의 대량 비용절감 등을 통해 국민경제를 회복시킨 뒤 본격적인 국가건설에 돌입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항미원조’로 차질을 빚어 전쟁을 하면서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과 국가 경제건설을 병행하는 투 트랙의 정책결정을 채택했다.

 

마오는 1951년 2월에 소집한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3년 준비, 10년 계획경제 건설’의 발전전략을 제시했다. ‘3년 준비’는 실제적으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대한 사상적 통일작업 완수였다.

 

마오는 특히 3대 임무를 강조했다. 항미원조와 토지개혁, 반혁명진압 공작이었다. 항미원조는 전국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교육운동을 펼쳐 국민단합을 꾀하도록 했다. 토지개혁은 농민 대표회와 토지개혁 훈련반을 편성해 토지개혁을 완료한 뒤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과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반혁명 진압공작은 통일이후 장제스 정부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와 그들에 대한 사상개조, 군정기관 내부에 암약하는 반혁명 분자들의 색출 이었다. 마오는 이런 공작이 신중국이 앞으로 추진할 계획경제건설의 필수적인 선결 준비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주석 334) 

 

중공중앙은 '3년 준비'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제1차 5개년 경제계획과 사회주의국가로 이행하는 과도시기의 총노선 정책을 제정해 사회주의 공업화 터전마련에 매진했다. 중앙은 특히 국방의 기초가 되는 낙후한 중공업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재정증대와 안정화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이런 국가발전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오와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사이에 재정과 경제발전 속도에 관한 이견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사회발전 단계에서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국가체제로의 전환을 다그쳤다.

 

급진적인 마오는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의 점진적 사회개혁과 경제발전속도에  불만을 터뜨렸다. 생존 가능한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모델의 방법론을 놓고도  갈등을 빚었다. 이때의 권력구도는 류샤오치와의 ‘동맹제휴’로 구축한 1945년 7중전회의 5대서기 체제였다.

 

마오가 당군정(黨軍政)을 총괄 지배하는 1인 우두머리였고, 당은 국가주석 류샤오치, 정부는 총리 저우언라이, 군은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 일반 행정을 맡았던 런비스가 1950년 사망해 천윈(陳雲 진운)이 뒤를 이은 순의 서열로 정치국 서기처가 구성됐다.

 

중공중앙은 1952년 상반기 ‘10년 건설’, 즉 대규모 계획경제건설 등의 시기가 도래함에 따라 필요한 유능한 인력을 발탁해 중앙의 영도지도부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는 마오의 제의에 따른 것이다.

 

류샤오치는 ‘중공중앙 판사기구(辦事機構) 강화에 관한 실시방안’을 제정하고, 중앙 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 양상곤), 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즈원(安子文 안자원) 등에게 중앙기구의 설치문제를 공동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류샤오치는 6월 22일 직접 소련주재 중국대사 장원톈(張聞天 장문천)에게 소련 중앙기구의 설치상황을 파악했다. 양상쿤과 안즈원은 ‘당중앙 판사기구 강화에 관한 의견’을 기초해 지역을 맡고 있는 중앙국의 서기들을 발탁해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중앙의 영도부를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럴 경우 중앙이 관할하고 있는 각 부, 위원회, 판공청의 조직과 공작을 강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몇 개의 새로운 부서나 위원회 증설을 제기했다. 류샤오치는 7월 18일 이 의견서를 마오,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펑더화이에게 회람했다.

 

이때 마오는 평더화이를 한국전장에서 불러들여 저우언라이가 맡고 있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혁명 이래 맡아왔던 군사업무를 접고 행정부 일에만 전념하게 됐다. 마오는 8월 4일 류샤오치에게 “즉시 샤오치 동지의 건의대로 준비해 각지에서 일단의 인력을 선발하고, 기구를 만들어 배치하라”고 비준했다. (주석 335)

 

당시 신중국의 통치시스템은 당정군을 틀어쥐고 있는 중공중앙의 영도기구아래 전국을 동북국(제1서기 가오강), 화동국(제1서기 라오수스), 중남국(제1서기 린뱌오), 서북국(제1서기 펑더화이) 서남국(제1서기 덩샤오핑) 등 5개 권역으로 나눠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 서기는 현지의 당정군의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 지역을 다스렸다. 1952년 8월 서남국(西南局)의 제1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이 맨 먼저 중앙에 올라와 국무원 부총리를 맡아 중앙의 영도공작에 참가했다.

 

이어 동북국(東北局)의 제1서기 가오강(高崗 고강), 화동국(華東局)의 제1서기 라오수스(饒漱石 요수석), 중남국(中南局)의 제2서기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 서북국(西北局)의 제2서기 시중쉰(習仲勛 습중훈), 그리고 일단의 중요 영도간부들이 중앙의 발탁으로 중앙 영도기구에서 일을 하게 됐다.

 

마오는 총애하는 가오강을 중앙인민정부 편제에 근거해 새로 만든 국가계획위원회 수장에 앉혔다. 국가계획위원회는 저우언라이가 이끌고 있는 정무원에서 독립한 중앙인민정부 직속기구로 국민경제계획과 예산을 다루는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당시 47살의 가오강은 단박에 실세의 반열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위원회 구성원도 호화 멤버였다. 주석인 가오강은 이 직을 맡기 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공 동북국 제1서기, 동북인민정부 위원회 주석직에 있었다. 부주석은 동남국 제2서기 등즈후이였으며, 위원으로는 천윈, 덩샤오핑, 펑더화이, 린뱌오, 라오수스, 펑전(彭眞 팽진), 보이보(薄一波) 등 십 수 명이었다. (주석 336)

 

이때 사람들은 가오강이 지역에서 올라 온 5명의 서기 중 가장 잘 나간다는 뜻으로 “현재 5마리의 말이 서울로 올라 왔는데, 한 마리가 앞장서고 있다(五馬進京一馬當先 오마진경 일마당선/또는 대장 말이다)”고 빗댔다.

 

그 중 한 마리인 라오수스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화동국 제1서기인 라오수스는 화동군정위원회 주석을 겸하는 등 화동지역의 당정 부문에서 1인자였다. 라오수스는 베이징에 올라와 중앙조직부 부장(장관)자리를 꿰찼다. 

 

가오강은 1905년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헝산(橫山 횡산)에서 태어나 시안(西安 서안)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류즈단(劉志丹 유지단)과 함께 산베이(陝北 섬북) 소비에트지구를 개척했다. 마오가 장정을 마무리하고 산베이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류즈단과 가오강의 도움이 컸다.

 

가오강은 1945년에 정치국원에 진입했고, 1949년 신중국 건국 때 국가 부주석이 되었다. 6명의 국가 부주석 가운데 중앙의 베이징 주재가 아닌 유일한 지역국 인사였다. 가오강은 산베이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권력기반은 중공업 지역인 동북3성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동북군구 사령관 겸 후방지원군 사령관으로 병참업무를 총괄 지휘했다.

 

가오강의 활동공간은 비교적 단순하다. 대부분 서북 황토고원에서 동북 흑토지대로 이동해 군사경력을 쌓았다. 어쩌다 길을 지날 때 화북을 경유해 가오강은 북자(北字) 돌림인 ‘서북-동북-화북’을 지칭하는 ‘3북(北)’을 떠나지 않은 사람으로 불렸다.

 

가오강의 근거지인 동북지역은 당시 선진적인 곳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중공업지대로 선양(沈陽 심양), 창춘(長春 장춘), 하얼빈(哈爾浜 합이빈) 등 대도시가 발달했다.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선진국 소련과의 교역도 활발해 경제적 기반이 비교적 탄탄한 편이었다.

 

특히 소련은 창춘철도를 중국과 한시적으로 공동 관리하고, 다롄(大連 대련), 뤼쉰(旅順 여순)의 해군기지를 운용해 많은 소련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소련은 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을 중시해 동북지역 제1서기 가오강은 소련의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스탈린은 가오강에게 승용차를 선물할 정도였다. 가오강은 스탈린을 내세워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다. 대표적인 친소인물로 꼽혔다.

 

만주의 1인자로 불려 ‘동북왕’이란 소리까지 들었다. 이런 이유로 중공중앙이 가오강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란 설도 나돌았다. 야심만만하고 권력의지가 강한 가오강은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하는 과도 총노선을 둘러싼 마오와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와의 갈등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가오강은 마오 다음의 권력을 노렸다. 최대의 걸림돌은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의 기치를 내걸고 제거작업에 들어갔다. 권력의 화신(化身)이 된 가오강은 신중국 건국 후 첫 권력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주석 337)

 

세제(稅制)를 둘러싼 논쟁에서 첫 포문을 열었다. 신중국의 세제는 당분간 옛 세법을 따른다는 방침에 따라 1950년 초에 제정됐다. 경제규모가 발전하면서 원래의 세제가 경제 활성화의 폐단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정무원 재경(財經)위원회는 1952년 12월 31일 ‘세제의 약간 수정 및 실행시기에 관한 통고’와 ‘상품유통세 시행방법’에 관한 법안을 공포했다.

 

당시 중앙 재경위원회 부주임 겸 재정부 부장(장관)인 보이보(薄一波 박일파)는 ‘공사(公私)일률적인 평등납세’를 뼈대로 한 세제를 내놨다. 이 법안이 공포되자, 마오는 “‘공사일률 평등납세’의 구호는 7기2중전회의 결의에 위배된다. 수정 세제를 사전에 중앙에 보고하지 않고, 자본가들과 상의했다. 자본가들을 당중앙보다 더 중하게 대했다. 이 세제는 자본가들이 좋아하는 우경기회주의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엄중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공격의 창끝을 정무원 수장인 저우언라이를 겨냥해 ‘분산주의’의 과오를 범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앙정부의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정무원은 5월 15일 중공중앙의 결정에 따라 22개부서 중 경제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핵심적 부서인 중공업부, 1기부(一機部), 2기부(二機部), 연료공업부, 건축공정부, 지질부, 경공업부, 방직공업부 등 8개 부서를 가오강이 이끌고 있는 국가계획위원회에 배속시켰다. 마오의 말 한 마디로 핵심적인 국가조직을 떼었다 붙였다하는 것은 이미 중앙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민주협의체적 논의구조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했다.

 

마오의 1인 독재체제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제계획을 주도해왔던 저우언라이는 이 부문에서 도중하차 했다. 총리로서 형식상 정부의 전 부서를 이끄는 모양새였지만 행정과 외교 등 몇 개 부서만 관할하도록 했고, 그나마 다른 부서도 직접 중앙에 책임지도록 하는 정부조직개편이 이뤄졌다. 권한이 대폭 축소돼 허울뿐인 총리로 전락했다.

 

반면, 날개를 달은 가오강의 국가계획위원회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돼 실세 ‘경제내각’으로 불렸다. 예나 제나 권력의 추에 따라 사람이 모이고 흩어진다. 가오강의 진영에 권력을 쫓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마오는 한발 더 나아갔다. 나흘 뒤인 5월 19일 류샤오치와 양상쿤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중앙 명의로 발송하는 문건, 전보는 반드시 모두 내가 본 뒤에 발송하라, 그렇지 않으면 무효니 주의하기 바란다”고 류샤오치를 옥죄기 시작했다.

 

편지내용에 ‘그렇지 않으면 무효(否則無效 부즉무효)’라고 쓴 4글자에 중요표시를 했다. 마오는 또 이날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양상쿤에게 지시공문을 보내 “1) 지난해 8월 1일부터 올해 5월 5일까지 중앙과 군사위원회 명의로 발송한 전보와 문건 가운데 내가 보지 않았던 것이 있는지 여부와 있으면 얼마나 되지는 지, 그 결과를 나에게 보고 하라(내가 순시했을 때나 병가를 냈을 때는 제외). 2) 과거 여러 차례 중앙회의 결의를 내가 보지 않은 채 멋대로 내 보낸 것은 잘못이고, 기율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마오가 정부의 저우언라이를 비판한 것처럼 당중앙의 영도과정에서의 ‘분산주의’를 경고하면서 류샤오치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마오의 이런 행위에 고무된 가오강은 본격적으로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 타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주석 338)  

 

그러나 가오강의 경륜과 경험 부족 등으로 1953년 상반기 국가의 재정경제 부문에서 문제가 생겼다. 국가 예산집행결과 21억 5천만 위안의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중공중앙은 이 문제 해결과 함께 사회주의 과도시기의 총노선 문제와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차 재경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6월 14일부터 8월 12일까지 장장 2개월 동안 계속됐다.

 

가오강은 재정적자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 채 회의의 본질에서 벗어난 이념공세를 펴고 나왔다. 비판의 화살을 신 세제를 실시한 중앙 재정위원회와 재정부장 보이보에게 쏟아 부었으나, 공격의 창끝은 점점 류샤오치로 향했다.

 

가오강은 “보이보가 농촌정책을 집행하면서 당중앙과 마오가 지시한 ‘자영농을 점차적으로 (합작경영의)집단체제 방향으로 발전시키라’는 방침을 배척해 농촌경제의 발전은 실질적으로 부농(富農)정책을 지향하고 있다”고 강력 비판했다.

 

334)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 主編 柯延 中央文獻出版社
335)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高崗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週刊 人民網
336) 高崗號毛澤東之‘脈’; 借斯大林擡高自己壓低劉少奇 人民網-文史頻道 勸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337) 高崗的1953;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高崗的權力何以能迅速超越周恩來與劉少奇 戴茂林 趙曉光 人民網
338)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高崗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跌落的高崗; 從滿洲頭號人物到反黨集團主角 文; 李 輝 人民網-文史頻道

-----------------------------------------------------------------------------------------------------------------

 

 

147. 건국후 최대 논쟁, 총공회 공작문제… 궁지에 몰린 류사오치

 

 

당시 가오강의 비서였던 자오자량(趙家梁 조가량)이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이때 가오강이 발표한 연설문은 여러 명의 비서들이 참가해 기초했다. 재경 회의 이튿날 마오가 과도시기의 총노선과 자산계급의 우경사상을 비판하는 보고연설을 했다.


사유제(私有制)와 부농(富農)경제, 개인자본주의 경제를 깨고, 집단 공유제의 사회주의 체제로 향하라는 진군나팔을 불어 댄 것이다. 비서진들은 가오강의 연설내용을 마오의 견해와 일치시키는 연설문으로 작성했다. 이는 단순히 보이보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류샤오치를 겨냥했다는 것이다.


작성된 원고를 본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모두 동의했다. 마오는 한술 더 떠 연설문 가운데 ‘우경(右傾)’ 단어의 앞에 ‘자산계급(資産階級)’의 4글자를 보태는 등 가오강을 격려했다.


가오강은 이 회의에서 그동안 수집해 놓은 류샤오치의 문제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중 하나가 톈진(天津 천진)발언이었다. 류샤오치가 톈진에서 연설할 때 "착취도 공(功)이 있다. 착취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한 발언을 들고 나왔다. 이는 당시 민족자본이 국민경제를 회복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뜻의 해학적 언사였다.


가오강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아 류샤오치가 무산자계급의 처지를 망각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비판했다. 산시성(山西省) 위원회에서 연설한 농업생산 호조(互助)합작문제 발언도 빌미가 됐다. 류샤오치는 산시 성위원회의 급격한 사유제 폐지로 농민들이 반발한 것과 관련해  신민주주의 경제건설의 일정한 시기 안에서 점진적 추진을 요구하며 산시 성 위원회를 질책한 바 있었다. 이 발언은 나중에 마오로부터 크게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가오강은 이런 사례를 내세워 우경기회주의고, 주자파(走資派)의 ‘주요 증거’라며 류샤오치를 몰아부쳤다. (주석 339)


가오강의 류샤오치 견제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신중국 건국을 앞두고 마오의 소련방문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류샤오치가 1949년 소련을 방문했을  때 대표단의 일원으로 가오강을 대동했다. 가오강은 소련으로 떠나기 전 동북지역 경제고문인 소련인 커와야오프(柯瓦廖夫 가와료부)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류샤오치가 중공내부에서 ‘친미파(親美派)라고 불린다며 소련과 류샤오치를 이간하는 요언을 했다.


커와야오프는 귀국해서 스탈린에게 ’중공중앙의 약간의 정책과 실제에 관한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커와야오프는 이 보고서에서 “중공당 안에 중앙위원 중 과거에 친미적이고 반소적인 인사들이 있다. 중앙의 영도들은 현재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 류샤오치 조직과 영도들은 근거 없이 가오강을 비판한다”고 기술했다.


류샤오치와 일단의 영도자들이 가오강을 비판했다는 내용은 개인자본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가오강의 지나친 '좌'적 경향을 경고한 것을 지칭한 것이었다. 류샤오치와 가오강이 귀국한 뒤 가오강은 “스탈린은 류샤오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류샤오치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류샤오치를 헐뜯으면서 스탈린의 입을 빌려 자신을 높였다. 마오가 그해 12월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커와야오프가 작성한 보고서를 귀국하는 마오에게 건넸다. (주석 340)


1950년 7월 중공중앙 중남국 제3서기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가 중남지구 총공회(總工會 총공회; 노동조합) 주비위원회 확대회의 보고연설에서 노동조합이 노조구성원 군중들을 이탈하는 현상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덩즈후이는 “일부 노조간부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의 결핍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중시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노조공작의 입장문제, 노조가 구성원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문제, 노조공작의 방법과 기풍문제 등”을 제기했다. 덩즈후이의 문제제기는 사회주의 과도 총노선 방침에 따라 사기업이 공영기업화하면서 노조의 일부 간부들이 노조원들을 ‘공장의 부품화’하는 현상에 대해 제동을 건 것이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만큼 노동자 군중들의 일상적인 밀접한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덩즈후이는 7월 29일 마오에게 전문을 보내 회의상황과 자신이 만든 회의 줄거리를  보고했다. 그리고 30일에 중남국의 기관지 ‘창장르바오(長江日報 장강일보)’에 보고내용을 실었다.


류샤오치는 덩즈후이의 보고내용을 보고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류샤오치는 8월 4일 자신이 기초한 중공중앙의 지시문서를 통해 “노조공작은 현재 우리당의 주요 공작의 하나이다. 그런대도 각 지역의 당위원회가 노조에 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덩즈후이의 (노조관련) 보고가 잘 되어있다. 이런 방법으로 각급 당위원회가 노조에 대해 더욱 주의를 기울여 노조공작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류샤오치의 지시문서는 마오와 저우언라이, 전국 총공회 주석 리리산(李立三 이립삼) 등의 회람을 거쳐 발송됐다. 덩즈후이가 보고에서 지적한 노조의 새로운 문제와 관점은 영도간부와 노조 공작자들의 광범한 관심과 격렬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노동운동의 초창기 대부인 류샤오치는 1951년 2월 3일 중화 전국 총공회 상임위원회 확대회의 연설에서 덩즈후이의 노조 공작문제의 보고와 관점을 거론하면서 일정부분 지지를 표시했다. 그러나 모두가 찬성하고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류사오치

 

먼저 가오강의 동북지역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가오강은 일찍이 덩즈후이가 보고를 발표하기 전인 7월 21일 동북 총공회 집행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당정공(黨政工)은 하나의 목적으로 친밀하게 단결해 생산을 해야 하며, 절대로 대립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밝힌바 있었다.


무늬만의 노조를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북지역 공작회의에서는 당연히 덩즈후이가 기회주의 원칙과 이론을 선전한다고 비판했다. 가오강은 회의 총결 연설에서 “타당하지 않으며 사상을 헷갈리게 한다”고 논박했다. 가오강은 1951년 4월 관련 전문가를 동원해 덩즈후이의 글을 비판하는 문건을 작성했다. 가오강은 이 글을 기관지 ‘둥베이르바오(東北日報 동북일보)’에 싣기 위해 사전에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문건을 검토해 수정하고, 신문에 발표여부를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오의 신문, 잡지 등 간행물 및 선전 담당 비서인 후차오무(胡喬木 호교목)는 글과 편지를 읽어 본 뒤 마오와 류샤오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341)


“덩즈후이 동지의 견해가 확실히 만족스럽지 못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일보에 글을 실어 정면으로 논박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덩즈후이가 제기한 구체적 입장에 대한 다른 관점이 원인입니다. 노조는 응당 노동자들의 직접적 복리를 더 중시해야 합니다. 많은 노조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조와 국영기업, 정부의 구체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의 노조간부들이 이 점을 강조해 공장 쪽과 대립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후차오무는 “이 글을 동북일보에 싣거나 또는 인민일보에 싣는 게 좋은 지 고려한 뒤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류샤오치는 가오강의 글과 후차오무의 편지를 보고 5월 10일 후차오무에게 보낸 공문에서 “내 의견은 가오강 동지의 글을 잠시 발표하지 않는 게 좋다. 4중전회를 기다렸다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토론하는 게 낫다. 가오강의 글을 덩즈후이 동지에게 열람하도록 보내라”고 지시했다.


류샤오치는 가오강에게 서신을 보내 “당신이 쓴 글을 보았고, 주석에게 보냈다. 주석은 아직 보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의견은 4중전회가 곧 열리면 이 문제를 토론했으면 한다. (덩)즈후이 동지도 참석한다. 그때 토론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의 글은 잠시 발표하지 않는 게 좋다”고 신문에 싣는 것을 반대했다.


류샤오치는 가오강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첫째는 당내에 통일적인 인식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 공개할 경우 이 문제가 복잡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판단했다. 둘째는 가오강의  글이 너무 강해 공개적인 비판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셋째는 류샤오치 또한 아직 이 문제에 대한 확정한 관점이 없었다. 그러나 덩즈후이의 관점과 비슷했다. 이 때문에 류샤오치는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5~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류샤오치는 이때 ‘덩즈후이와 가오강 동지의 두 편의 글을 읽고 쓴 수상(讀鄧子恢和高强同志兩篇文章的筆記)’에서 근 9천자에 이르는 글로 자신의 노조 공작문제의 관점과 인식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류샤오치의 이 글은 나중에 발생하는 인민내부의 모순에 관한 문제를 일찌감치 예상해 논술했다. 이 글은 류샤오치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다른 영도들에게 회람하거나 의견을 교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글 존재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85년 ‘류샤오치 선집’ 하권을 출판할 때 발굴돼 30여 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류샤오치는 애초 4중전회에서 노조 공작문제를 집중 토론할 계획이었으나 상황변화로 실현하지 못했다. 10월 초, 전국 총공회 주석 겸 당조(黨組) 서기 리리산이 당내 노조 공작방침 문제를 둘러 싼 쟁론을 마오에게 보고했다.


두 개의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하나는 국영기업에서 공사(公私)이익은 완전히 일치해 모순이 없다. 때문에 하나로 일치하는 만큼 국가의 공적 부분과 개인의 사쪽 부분을 두루 챙기는 ‘공사겸고(公私兼顧)’의 정책은 국영기업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노조 본래의 목적을 부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국영기업에서 공사이익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관련 노동자 생활과 노동조건 등의 문제에서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의 성질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모순으로 협조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즉 공사 모두를 살피는 ‘공사겸고’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주석 342)


리리산은 “‘공사겸고’는 현재 국영기업뿐만 아니라 장래 사회주의 시기의 각종 대내외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의 주요 문제다. 국영기업에서 ‘공사겸고’ 원칙의 운용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시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이런 리리산의 보고와 류샤오치가 쓴 미공개의 글이 누가 본 적이 없는데도 놀랍게도 비슷한 관점을 보였다.


그러나 마오는 리리산의 생각과 달랐다. 마오는 리리산이 노조 공작과정에서 과오를 범했다며  강력 비판하고, 리리산의 전국 총공회 주석과 당조 서기직을 박탈해 버렸다. 대신 류샤오치,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펑전(彭眞 팽진), 라이뤄위(賴若愚 뢰약우), 리리산, 류닝이(劉寧一) 등 6인으로 전국 총공회 당조간사회(黨組干事會)를 만들어 총공회 공작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해 12월 총공회 논쟁은 가오강 집단의 끈질긴 공격으로 리리산이 자아비판을 한데 이어 덩즈후이도 중남국 회의에서 비판을 했다. 건국 후 최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총공회 공작문제는 더 이상 진전이 안 된 채 논의가 중단됐다.


이처럼 가오강은 당내 2인자인 류샤오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왔다. 가오강이 재경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재정부장(장관) 보이보를 줄기차게 공격하는 것도 류샤오치를 끌어내리기 위한 계산된 투쟁이었다. 가오강은 원래의 회의의제인 예산, 지방재정과 대도시 재정, 세수(稅收), 경제 5개년 계획, 군비(軍費) 등의 토론문제를 제쳐놓고 마오의 비위를 건드린 신 세제문제를 물고 늘어지자 마오는 공개토론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도록 저우언라이에게 지시했다. 보이보는 7월 13일 131명이 참가한 영도소조 확대회의에서 책임추궁을 당한 끝에 1차 자아비판을 했다. 보이보는 훗날 이날 열렸던 회의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저우언라이가 보낸 서신에 따라 1차 자아비판을 했다. 회의 분위기가 즉시 긴장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공개석상 토론’의 집중 타깃이 됐다. 7월 14일부터 7월 25일까지 잇따라 8차 확대 영도소조 회의가 열렸다. 나에 대한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나는 성의를 다해 나의 잘못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회의 참가자들은 끝없는 비판을 날렸다. 그러다보니 2개월 동안의 회의에서 마오 주석이 부의한 총노선 문제, 5개년 계획, 재정문제, 민족자산계급 문제 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지 못했다. 원래의 회의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왜 회의가 이런 모습으로 변질됐는지, 사상적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 부단히 큰 모자(大帽子 대모자; 죄명이나 딱지를 부치는 것)를 씌우려 했다. 이것은 바로 홍문연에서 ‘항장이 검무를 추지만 사실은 패공 유방을 찌르려는 형국’과 같았다. 나를 비판하는 체 하면서 샤오치 동지를 타도하려는 목적이었다.”


몇 개월 뒤 진상이 밝혀졌다. 마오의 뒷배를 믿고 위세를 부리는 가오강이 라오수스와 한 패가 되어 분탕질을 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처에 ‘동맹군’을 끌어들여 보이보를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가오강은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이번 회의에서 류샤오치의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보이보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343)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교란으로 회의가 마오 주석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동떨어진 방향으로 흘러가자 마오 주석은 저우 총리에게 이른 시일 안에 회의를 끝낼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나에 대한 비판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나를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영도 핵심인 류샤오치, 저우언라이를 겨냥하는 것을 알고, 이후로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안했다. 당시 회의는 나에게 3차 자아비판을 요구했으나 거부했다. 저우 총리는 나의 태도를 마오 주석에게 보고했다. 마오 주석은 '보이보 동지는 자아비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저우 총리가 전했다.”


회의가 쉽게 끝나지 않자, 마오는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에서 휴가 중인 천윈과 덩샤오핑을 ‘구원병’으로 불러 회의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덩샤오핑은 8월 3일 회의에 참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보이보 동지의 과오를 비판한다. 나도 찬성한다. 개개인 모두 과오를 범한다. 나 스스로도 적지 않은 과오가 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동지들도 과오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보이보 동지는 대단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한두 근(斤)이 아니라 1, 2톤 정도다. 그가 범한 과오가 더 많더라도 노선의 과오라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몇 년 동안 일하면서 이런저런 과오를 저질렀다고 할 수는 있으나, 노선상의 과오를 범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천윈은 8월 6일 열린 재경회의 영도소조회의에서 “신 세제의 결과는 분명하다. 사회주의 경제에 불리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유리하다. 보이보는 중앙 재경위원회에서 많은 일을 했다. 일을 하다보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앙재경위에 두 개의 노선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보이보 구원에 나섰다.


천윈과 덩샤오핑이 회의에서 보이보의 공작에 긍정적 평가를 하면서 서슬이 퍼렇던 회의분위기는 수그러들었다. 8월 11일,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열린 전국재경회의 대회에서 저우언라이가 총결보고를 했다. 마오는 보고에서 (류샤오치를 겨냥한)분산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가오강과 라오수스 등의 당의 단결을 해치는 지나친 행위에 대해서 경고발언을 했다.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그 전에 중앙조직부 부부장(차관) 안즈원(安子文 안자문)이 초안으로 작성한 중앙영도 명단을 놓고 ‘토안벌유(討安伐劉; 안즈원과 류샤오치 제거)’의 흉계를 꾸미다 도리어 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가오강은 1953년 3월 초 조직부 부부장인 안즈원에게 마오가 ‘중앙정치국 구성원을 개편해 중앙 각부기구를 강화 한다’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고 전달했다. 안즈원은 중앙의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채 중앙정치국 위원명단과 중앙 각 부의 주요 책임자 명단의 초안을 작성했다. 안즈원은 명단을 작성해 가오강을 보여줬고, 상관인 조직부 부장 라오수스와 명단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중앙이 이 일을 알고 비판했다. 중앙 영도층의 명단은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민감한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랐다. 안즈원은 서면으로 자아비판을 하면서 자신을 처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7월 말 안즈원은 경고처분을 받았다. 마오는 더 이상 사건이 확산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며 서둘러 진화작업에 나섰다. (주석 344)


그럼에도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명단’을 의심암귀하며 류샤오치를 음해하는 책동수단으로 활용했다.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사석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단을 류샤오치가 제멋대로 만들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가오강은 한 술 더 떠 정치위원 명단에 ‘유박무림(有薄無林; 보이보는 이름이 있고, 린뱌오는 없다)’이란 말을 날조해 퍼뜨리면서 주(朱)총사령관(주더)도 이름이 빠졌다고 유언비어를 날렸다.


가오강은 류샤오치가 천정런(陳正人 진정인)은 건설위 부주임 또는 조직부 부부장에 임명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고, 타오주(陶鑄 도주)가 광시(廣西 광서)에서 공작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등등의 '카더라 방송'을 틀어댔다. 라오수스도 누구누구는 종파주의고, 아무개는 누구 파벌인데, 류샤오치가 그들을 지지한다며 이간질을 해댔다.


중앙 조직부장인 라오수스는 ‘명단’을 문제화 시켜 조직부 내부에서 두 차례의 회의를 열어 부부장인 안즈원을 공격했다. 라오수스는 9월에 열린 간부공장 강화와 과도기 당조직 공작의 임무를 주제로 한 전국 조직공작회의에서도 회의의 방향과는 달리 안즈원 비판에만 매달렸다. 류샤오치를 낙마시키기 위한 공세였다.


이 사실을 안 류샤오치가 라오수스를 불러 당의 단결을 해치는 조직 내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을 환기시켰으나, 라오수스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류샤오치 해코지를 계속했다. 참다못한 류샤오치는 10월 22일 열린 전국 조직공작회의 영도소조회의 연설에서 라오수스를 비판하면서 조직의 수장으로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자아비판까지 했다.


339)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 -文史頻道
340) 高崗號毛澤東之‘脈’; 借斯大林擡高自己壓低劉少奇 權力紛爭;

高 崗 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341)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342) 高崗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毛澤東傳(上)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43) 權力紛爭; 高 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44) 高 崗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

 

 

148. 가오강의 비극적 결말…마오 리더십에도 큰 흠결

 

 

가오강은 10월 3일부터 11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항저우(杭州 항주) 등 남방지역으로 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린뱌오가 시후(西湖 서호)에서 양병(養病)을 하며 쉬고 있었다. 린뱌오는 가오강의 옛 상관이었다. 동북해방전쟁 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건국 후에는 가오강이 동북지역, 린뱌오가 중남지역을 관할하면서 돈독하게 지냈다. 항저우에 온 가오강은 마오의 '확산금지' 엄명에도 불구하고 린뱌오를 찾아가 '3월 명단' 사건을 떠벌려 린뱌오를 충동질했다. 가오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류샤오치를 거론하며 현재 당을 '백구파(白區派; 류샤오치 등 장제스 통치지역에서 지하운동을 한 그룹)'가 장악해 공산혁명의 주류인 '근거지파와 군부'가 끈 떨어진 쪽박이라고 린뱌오를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 동안 남방지역을 돌아다니며 당정군 고위 영도자들을 만나 군이 당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른바 '군당론(軍黨論)'을 설파하며 류샤오치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군당론'은 마오의 '당이 군을 지배한다'는 공산혁명의 철칙을 어기는 것으로 마오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꼴이 됐다. (주석 345)

 

권력의 부나방이 된 가오강은 이 문제를 도외시 해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오강은 "총구에서 당이 나온다', "당은 군대가 창조한다"는 이론을 내세워 마오가 제기한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또 당의 6기7중전회가 통과시킨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결의는 류샤오치가 한 백구공작은 정확한 노선을 대표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오강은   잘못된 것으로 새로 결론을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가오강은 예민한 당의 역사문제도 들쑤셔댔다. 당을 '백구당'과 '근거지와 군대의 당' 두 부류로 나누고 마오가 '홍구(紅區; 근거지)를, 류샤오치가 '백구(白區)'를 각각 대표한다며, 당을 '이원화(二元化)시켰다. '군대의 당'이 당의 주체고, 자신이 주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웠다.

 

가오강은 "현재 당과 국가의 영도 권력이 '백구당'의 수중에 들어갔다. 백구 간부가 당을 찬탈한 것이다. 마땅히 철저하게 바꿔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가오강은 이런 주장을 펴면서 '동맹자'를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돼 천윈, 덩샤오핑 등에까지 손을 뻗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천윈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이런 상황을 보고했다. 덩샤오핑은 훗날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일은 내가 아주 뚜렷하게 알고 있다. 마오쩌둥 동지가 1953년 말 '중앙 1선(線), 2선(線)'을 제기한 뒤 가오강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먼저 린뱌오의 지지를 얻자 광범하게 손을 뻗쳤다. 그때 동북은 자신이 관할했고, 중남은 린뱌오, 화동은 라오수스, 서남은 내가 관할했다. 그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나에게 정식으로 이야기 했다. 류샤오치 동지는 성숙하지 못하다. 자신과 함께 류샤오치 동지를 끌어내리자고 했다. 나는 명확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류샤오치 동지의 당내에서의 지위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류샤오치 동지는 잘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위를 바꾸려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가오강은 또 천윈 동지를 찾아가 담판했다. 그는 천윈 동지에게 몇 개의 부주석은 당신과 내가 하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되자 천윈 동지와 나는 비로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마오쩌둥 주석을 찾아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가오강은 류샤오치 동지를 넘어뜨리려고 거래를 한 것이다. 음모적이고 모략적인 방법으로 대단히 비정상적 행위였다."

 

덩샤오핑은 린뱌오와 라오수스가 가오강을 지지했는데, 린뱌오는 가오강과 밀착하지 않은 반면 라오수스는 가오강의 반당행위에 적극 가담해 두둔하고 부추겼다고 회억했다. 보이보는 "일단의 동지들의 인상에서 라오수스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사람으로 류샤오치 동지의 신임을 받았다"며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혁명전쟁 시기에 라오수스는 신4군과 화중국(華中局)에서 일했다. 건국 후에 중앙 화동국 제1서기, 화동국 정치위원회 주석으로 화동의 당정군 공작을 이끌었다. 1952년 '다섯 마리의 말 중의 하나(五馬之一)'로 중앙으로 발탁돼 중공중앙 조직부장에 임명됐다. 그는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으로부터 몇 차례 비판을 받자 류샤오치가 실각하는 것으로 오판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오강과 한통속이 되어 류샤오치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덩샤오핑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이쪽저쪽으로 돌아다니며 싸움질을 했다'고 말했다."

 

마오는 가오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마오는 가오강을 지지했던 린뱌오에게 천윈을 시켜 가오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은 뒤 가오강 반당사건 처리과정에서 제외시켰다. 린뱌오를 구제하기 위한  배려였다.

 

마오는 가오강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12월 24일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베이징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이끄는 사령부로 밝은 바람이 불고, 밝은 불이 타오른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이끄는 사령부로 음산한 바람이 불고, 음산한 불이 타오른다. 지하에서 불길이 타오른다. 도대체 정치가 하나의 문(門)에서 나오나, 그렇지 않으면 정치가 여러 개의 문에서 나오는 것인가?"라며 가오강과 라오수스를 겨냥한 폭탄발언을 했다.

 

1954년 2월 마오의 건의에 따라 베이징에서 7기4중전회가 열려 '당의 단결증강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류샤오치는 보고연설에서 "일부분의 간부, 심지어 모 고급간부들이 당의 단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집체영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중앙 위신 공고와 제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개인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개인의 위신을 강조해 스스로 천하제일인양 찬양만 들으려하고 비판이나 감독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비판자에 대해서는 억압과 보복을 하고, 심지어 자신이 이끄는 지구나 부문을 개인의 밑천이나 독립왕국으로 여기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회의에서 주더, 저우언라이, 천윈, 덩샤오핑 등은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반당분열 활동'을 엄히 비판하고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과오를 고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주석 346)

 

이런 와중에서 2월 17일 궁지에 몰린 가오강의 자살 미수사건이 터졌다. 당중앙은 당에 대한 항거로 규정하고 전면적으로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반당음모 조사에 들어갔다.

 

중앙 서기처는 2월 18일부터 3일 동안 가오강 문제에 관해 토론회를 열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지막 날 총결발언에서 가오강의 당 분열 및 당과 국가권력 탈취음모 활동의 '10대 범죄행위'를 나열했다. 그런 연후에 가오강의 자살행위는 당과 인민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범죄행위라고 준열하게 비판했다.

 

10대 범죄행위 가운데 당연히 마오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총에서 당이 나온다’, ‘군대가 당을 만든다’는 이른바 ‘군당론(軍黨論)’이 제일 앞자리에 나붙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가오강이 군당론을 내세워 당을 분열하고, 영도 권력을 탈취하려는 도구로 이용했다는 죄목이다.

 

"가오강은 4중전회와 이후의 좌담회에서 두 차례 표면적으로는 자아비판을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반성을 거부했다. 종국에는 자살이라는 치욕적인 행위로 당과 인민을 스스로 저버렸다. 비록 자살이 동지들의 저지로 미수에 그쳤지만 이것은 실제적으로 당에 대한 배반행위란 것이 완전히 드러났다.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가오강은 이 해에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라오수스는 이때 숙청돼 옥살이를 하다 1975년에 감방에서 병사했다. 덩샤오핑은 1955년 3월 21일에서 31일까지 열린 당의 전국대표대회에서 '가오강, 라오수스 반당 연맹에 관한보고'에서 가오와 라오의 당적 박탈을 통과시키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철회했다. 마오는 회의 개막과 폐막식 총결에서 가오와 라오사건의 교훈에 관해 연설을 했다.

 

"장기적인 혁명투쟁에서 가오강이 혁명의 일면에 정확한 공이 있고, 당의 신임을 폭넓게 받았더라도 그의 개인주의 사상(순탄할 때 돌출적인 교만과 자만, 오만방자와 발호, 여의치 못했을 때 일득일실(一得一失)에 전전긍긍하고, 울분을 터뜨리며 동요함)과 방탕한 사생활은 오랫동안 고치거나 제지하지 못하고 전국 승리 후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그의 어두운 일면이다. 가오강의 최근 시기의 반당행위는 바로 그의 어두운 면이 발전한 필연적인 결과다."

 

마오는 1956년 11월 15일 중공 8기2중전회에서 "여기서 말하는 외국과의 내통문제(里通外國 리통외국)와 관련해 우리들 중국에서 이런 사람이 있는지 여부, 중앙에 기대어 외국인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이런 사람이 없는지? 내가 보기에 있다. 예를 들면 가오강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것은 많은 사실들이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가오강과 소련이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는 중소분쟁의 시기였다.

 

마오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련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을 때는 거론하지 않아 알고도 모른 체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오는 과거에 가오강을 신임했고, 그의 강한 권력욕도 일찍이 간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가오강이 능력이 있다"고 총애 해 중용했다. 이와 관련해 덩샤오핑은 1980년 3월 19일 중공중앙 책임자들과의 담화에서 일정 부분 마오의 책임을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주석 347)

 

"가오강이 감히 그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른(老人家 노인가)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어른은 해방초기 류샤오치 동지, 총리(저우언라이)와 이견이 있었다. 가오강을 비교적 높게 평가해 '경제내각'을 구성했다. 바로 (국가)계획위원회다. 몇 개 큰 지역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위원이어서 권력이 대단히 컸다. 정무원이 관여하는 경제의 대권을 모두 가져갔다. 가오강은 또 마오 주석의 주변소식을 탐지해 기분을 맞췄다. 어른이 그를 중용했다. 또 4개 큰 지역에서 지지해 이 때문에 (가오강의) 머리가 돌아 버렸다."

 

건국 초기에 권력투쟁 양상으로 번진 가오강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마오의 리더십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철저한 위계질서가 생명인 공산당 영도기구를 무시한 채 방약무인으로 휘젓고 다닌 것은 일정부분 마오가 용인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오가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했던 정부기구의 8개 부서를 가오강 사건 뒤 다시 정무원에 배속시켜 총리업무를 정상화시켰지만 금이 간 마오 리더십의 흠결을 덮을 수는 없었다. 신중국의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마오와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의 견해 차이는 이후 생산성 제고를 둘러싼 ‘돌격주의’로 파열음을 냈다.

 

또 다른 가오강 무리에 둘러싸여 소통부재의 1인 권력을 휘두른 마오의 우격다짐은 ‘대약진운동’으로 질주했고, ‘대약진’은 대재앙이 되면서 이념적 권력투쟁으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345) 權力紛爭; 高 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346) 高崗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權力紛爭; 高崗欲借毛澤東之手扳倒劉少奇和周恩來 魯彤 馮來剛 人民網-文史頻道
347) 高崗 的1953年; 毛澤東爲何對其態度大變 中國新聞網 人民網

-------------------------------------------------------------------------------------------------------------------------------------------------------

149. ‘수어지교’ 마오와 저우, 신중국 기틀 마련 박차

 

마오는 간난신고 끝에 신중국을 창업(創業)했지만 접수한 것이라 곤 만신창이의 사망 직전의 구중국 사회였다. 사회 구석구석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 정치사회에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통치구조의 틀을 짜 안착시켜야 했다.

 

마오와 중공중앙은 ‘3년 준비, 10년 계획경제’의 비전을 제시하며 ‘3년 준비’의 핵심부문인 토지개혁과 반혁명 진압 공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정의 과도기간 총노선 투쟁 현장으로 인민들을 몰아쳤다. 토지개혁과 사유재산의 공유제에 대한 지주, 자산계급의 격렬한 저항과 농업 합작화 운동에 대한 농민들의 거부, 사회주의 개조에 대한 공상업계의 반발이 잇따랐다.

 

뿐만 아니라 통일이 됐지만 장제스 타이완 정부의 대륙탈환 노선에 따른 국민당 잔류세력의 무력도발, 사회 곳곳에 잠복한 비 공산세력의 도전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오와 중공중앙은 이 3년 동안에 철권통치로 반혁명분자들을 척결하며, 강력한 사상통일과 사회주의 사회개조 드라이브 정책을 펴 어느 정도 마무리 했다.

 

당시 국민당 패잔병을 주축으로 한 무장토비와 일반 비적의 무리 200여만 명을 비롯해 간첩, 악질토호, 중공 당군정(黨軍政)에 침투한 국민당 첩보요원, 지하 비밀결사조직 등의 활동이 창궐해 사회 치안질서가 극도로 혼란했다.

 

중공중앙은 3년 동안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쳐 280여만 명을 체포, 구금해 70여만 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 유, 무기 징역형 120여만 명, 나머지는 사상 개조작업을 벌이는 등 반혁명진압 공작이란 명분으로 숙청했다. 이런 위하(威嚇)정책과 토지개혁을 펼쳐 단기간에 농업 생산성이 신속하게 회복하는 등 농민 생활수준이 빠르게 개선됐으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과도 총노선을 밀어붙이면서 다시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에서 마오를 비롯한 일단의 급진파 ‘돌격주의(冒進主義 모진주의)’와 저우언라이 등 경제개발 실무계획 진영을 주축으로 한 점진적 개혁그룹의 ‘반(反)돌격주의’간에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주석 348)

 

가오강의 몰락으로 저우언라이가 다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수장이 됐다.

 

독립적인 ‘경제내각’이었던 국가계획위원회는 리푸춘(李富春 이부춘)이 맡았으나 저우언라이가 관할해 저우의 정치적 입지가 다시 넓어졌다. 경제기구인 재정위원회의 천윈이나, 경제위원회의 보이보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가오강으로 인해 틈새가 벌어졌던 마오와 저우의 관계가 복원됐으나 국가 전반을 통일적으로 이끄는 마오의 리더십과 현장에서 마오의 구상을 집행하며 처리하는 저우의 리더십이 충돌한 것이다.

 

마오쩌둥와 저우언라이 두 사람은 중국 현대사에서 물과 고기의 관계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사이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흔히 중국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과 소하,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로 비유된다.

 

또 근현대에서는  태평천국의 홍슈취안(洪秀全 홍수전)과 양슈칭(楊秀淸 양수청), 무술유신(戊戌維新)운동 때의 캉여우웨이(康有爲 강유위)와 량치챠오(梁啓超 양계초), 신해혁명 시기의 쑨원(孫文 손문)과 황싱(黃興 황흥), 중국공산당 건설 전후의 ‘남진북이(南陳北李)’인 천두슈(陳獨秀 진독수)와 리다쟈오(李大교 이대교) 등처럼 숙명적 짝으로 꼽힌다.

 

이들 조합의 특성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주도적인 주연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연급 조연으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 짝들은 서로가 의존하고 보충하면서 공동으로 추구하는 세계를 일궈나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재능을 상호 보완해 힘을 배가시키면서 추구하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했다.

 

중국공산당 1대 영도집단에서 ‘마오-저우(毛周)’라는 표현법은 없지만 두 사람의 찰떡궁합은 중국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주도적 구실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마오다. 덩샤오핑은 이들에 대해 “마오 주석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둠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이 없다면 저우언라이도 우리들이 지금 보는 저우언라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며 두 사람의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말했다. 마오가 가장 의존했던 사람이 저우언라이였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들은 공산혁명과 신중국 통치과정에서 대부분 마오가 전반적인 통찰력으로 큰 방향을 잡아 생각을 이끌어 가면, 저우는 마오의 방향과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구체화하고 집행하는 역할분담을 해왔다. 마오와 저우는 1924년 광저우(廣州 광주)에서 처음 만나 1976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52년의 세월을 함께 일해 왔다.

 

저우는 신중국 건국 후 정부에서 중앙인민정부의 주석인 마오의 유일한 총리로 27년 동안 역임했다. 당에서는 마오가 중앙위원회 주석일 때 5대 서기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이후 부주석이었다. 군부에서 마오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일 때 저우는 부주석이었다. 각 방면에서 마오가 주도적 구실을 했고, 저우는 마오를 보좌해 모든 일을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집행자 구실을 했다.

 

저우언라이는 다른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특장(特長)을 갖고 있다.

 

첫째,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부문에서 겪은 풍부한 경험으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방면의 일을 훤히 꿰뚫고 있다. 이런 다재다능한 능력을 갖춘 인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둘째, 저우언라이의 업무스타일은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여러 업무를 챙기면서도 전심전력을 쏟는 형(型)이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궈모뤄(郭沫若)는 "나는 저우 공(公; 저우언라이)에게 진심으로 기쁘게 탄복한다. 사물에 대한 조밀함, 일 처리의 민첩함이 전광석화 같다. 모든 헌신하는 정신은 마치 영원히 피로하지 않은 듯하다. 몇 날 며칠 잠을 안잔 채 쉬지 않고 일을 하지만 피로한 기색이 없다. 처리하는 일은 조리 있고 논리정연하다. 엄격한 규율의 긴장 속에 있으면서도 해학과 힘찬 율려(律呂)가 스며있다"고 극찬했다. (주석 349) 그처럼 저우는 오랜 업무처리에도 활기찬 정력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를 용의주도하게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인재였다.

 

셋째, 5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최고 영도기구에서 고위 지도자로 일해 당의 간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저우는 국민당 통치지구에서 일할 때 당 밖의 민주인사나 지식인들과 폭넓은 교류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람을 대할 때 성실하고 겸손하며 너그럽고 후하게 대해 많은 인심을 얻었다. 이런 처신은 사람들을 단합시켜 공동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넷째 저우언라이는 청년시대를 일본, 프랑스, 독일 등 현대화한 국가에서 보내 해외 견문을 넓혔다. 신중국 건국 후에는 경제원조, 국방, 외교문제 등으로 소련, 동구 유럽과 외교적 교섭을 통한 다양한 외교적 경험으로 국제 감각과  식견이 높았다. 반면 마오는 두 차례 소련을 방문한 것 이외에는 중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때문에 마오는 자신이 갖지 못한 부분을 저우를 통해 보완하는 바늘과 실의 관계를 맺었다.

 

348)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周恩來1958年爲何提出要辭去總理職務? 楊明偉 人民網
349) 新中國初期的毛澤東和周恩來; 合作大于分歧 金冲及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

 

 

150. “나도 진시황이다”… 전제적·급진적 사상에 젖어드는 마오

 

1952년 7월 초 저우언라이는 마오와 류샤오치에게 경제건설에 관련한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는 작업내용이었다. 당시 중국은 부분적 경제 발전계획은 있었으나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연차적 발전계획은 전무해 경험이나 관련자료 등이 없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저우는 서신에서 "7월부터 나의 업무중심을 5년 (경제)계획 연구와 외교부문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5년 계획은 종합공작으로 중요한 만큼 중앙에 전반적 의견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자료수집 교섭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자료교섭은 소련과의 담판을 통해 요구한 경제지원과 소련 경제개발 방식에 관한 자료였다. 저우는 1개월 동안 압축공작을 벌여 '3년래 중국 국내 주요정황의 보고'를 작성해 5년 계획의 방침과 임무를 제시했다.

 

저우는 이를 기초로 8월 중순 '중국 경제상황과 5년 건설의 임무'를 작성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방침과 주요지표 등을 상세하게 밝히면서 설명했다. 저우는 8월 15일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천윈과 리푸춘 등 중국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해 경제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경제개발 관련 자료 등을 수집했다.

 

저우는 5년 경제건설의 큰 방침을 확정한 뒤 1954년 11월 광저우(廣州 광주)에서 마오, 류샤오치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과 수정을 거쳐 이듬해 제1기 전국 인민대표대회 2차 회의에 부의해 정식으로 통과시켰다.

 

이런 국가의 대역사(大役事)와 사회주의 과도 총노선의 사회개조 과정에서  마오의 급진적 리더십과 저우의 점진적 리더십이 충돌하면서 상호보완적인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것이다. 그즈음 가오강이 틈새를 파고들어 저우의 구실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가 가오강의 퇴장으로 다시 경제개발 추진체의 수장으로 다시 나섰다. 하지만 균형적 점진 개혁론을 편 저우는 마오로부터 번번이 비판을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마오의 급진노선은 이후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대재앙인 대약진(大躍進)운동 실패로 엄청난 좌절을 맛보게 됐다. 마오는 중국에서 권력과 정치문화의 상징적 '부호(符號)'로 통하는 진시황(秦始皇)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통일이후 변화한 모습을 보여 리더십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오는 통일이전 장제스의 부패한 권력집단에 저항한 혁명투쟁의 연대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진시황을 토멸하는 것은 농민의 저항운동으로 '농민혁명 전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 마오는 통일이후 "많은 일들을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460명의 지식분자를 죽이고 책을 불태웠다(焚書坑儒 분서갱유)"는 것을 비교적 이해할 만하다며, 진시황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폭군(暴君)적 리더십을 인정한 것이다.

 

마오는 1954년 1월3일 소련의 외빈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진시황의 사적을 들추면서 평가한 적이 있었다. 마오의 통역을 맡았던 스저(師哲 사철)는 자신이 쓴 '역사거인의 곁에서-스저 회억록(回憶錄)'에서 마오의 진시황 평가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주석 350)

 

"마오쩌둥은 우리들 당내, 혹은 국내에서 소동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내가 오늘 말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다. 장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다려 보아야 한다. 이 소동의 성질은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어떤 사람이 나를 타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킨 일이 있다. 진(秦)나라가 초(楚)나라를 멸망시켰다. 진은 바로 그들 산시(陝西 섬서; 마오는 손으로 나를 가리킴)에 있던 나라고, 초는 바로 후난(湖南 호남; 마오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킴)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 현재는 어떤가? 또 기다려 봐야 한다."

 

마오는 여러 차례 진시황과 한무제(漢武帝)의 업적을 말했다. 마오는 1953년 7월 7일 쓴 한 서신에서 "진시황과 한무제의 업적은 고대 봉건제왕의 일로써 진시황의 역사적 공업(功業)은 먼저 전국시대의 전란을 끝내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제의 대일통(大一統)제국을 건립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진나라의 정치체제는 실질적으로 2천여 년의 중국정치의 기본 틀을 짜놓았다"고 밝혔다.

 

마오는 또 진시황은 현실적 정치가로 규정하고 여러 차례 인물평을 했다. 시대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으로 평가했다. 마오가 1926년 광저우 농민운동 강습소에서 '중국 정치사와 중국 지주계급' 제목의 강의를 했을 때였다. 마오는 진왕조의 역사를 이렇게 분석해 강의했다.

 

"중국의 정치는 지주계급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황제는 지주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여러 왕조의 황제를 엎어버리는 것은 지주계급의 분열이었다. 진나라 말 2세 때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인민의 인적, 물적 재부를 소진시켰다. 한나라 유방(劉邦), 초나라 항우(項羽),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들고 일어났다. 한고조(유방)가 함곡관에 제일 먼저 들어가 진나라 부로들과 약법3장(約法三章)을 맺어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다. 이것은 소수 지주를 일컫는 말이다."

 

마오는 진승과 오광이 진시황의 악정(惡政)으로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기의(起義)의 깃발을 올린 것은 농민들의 이익을 대표한 것으로, 기실은 진나라 2세 때지만 진시황의 정책을 부정한 것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마오는 1944년 4월 29일 리딩밍(李鼎銘 이정명)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진나라 말기의 농민기의를 높이 평가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진나라 이래 2천여 년 동안 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추동한 것은 농민전쟁이었다. 지주계급이 농민들에 대해 잔혹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박을 가해 농민들이 수백여 차례 기의를 일으켰다. 이것은 지주계급통치에 대한 농민들의 반항이었다. 모두가 농민들의 저항운동이고, 모두 농민의 혁명전쟁이었다. 중국역사상 농민기의와 농민전쟁의 규모가 큰 것은 세계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중국 봉건사회에서 이런 농민의 계급투쟁, 농민의 기의와 농민의 전쟁은 역사발전의 진정한 동력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기의는 폭정을 펼친 진나라에 반대, 포괄적으로 진시황에 반대한 것으로 완전 정의(正義)이다."

 

그러나 마오는 1950년 대 중기부터 진시황 평가와 관련해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로 폄하하는 것에 명확하게 반대했다. 진시황의 '명예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마오는 진시황과 공자(孔子)를 비교할 때 진시황이 더 위대하다는 논리를 폈다. 마오는 1958년 5월 8일 중공8대 2차 회의 연설에서 진시황 옹호론을 펼쳤다. (주석 351)

 

"나는 최근에 판원란(范文瀾 범문란)동지가 쓴 한 편의 글인 '역사연구는 반드시 옛 것보다 현재의 것을 중시해야 한다(歷史硏究必須厚今博古 역사연구필수후금박고)'를 읽고 대단히 기뻤다. (마오는 이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풍부한 사실을 인용해 가며 '후금박고(厚今博古; 현재를 과거보다 중하게 평가함)'를 사실적으로 증명한 전통적 사학(史學)이다. 글은 사마천(司馬遷), 사마광(司馬光)을 인용했는데 아쉽게도 진시황을 인용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이고비금자족(以古非今者族 옛것으로 현재를 재단하는 사람이 아님)'을 주장한 사람으로 진시황은 '후금박고'의 전문가다. 당연히 나도 진시황을 인용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이때 린뱌오가 자리에서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한 사람이라고 참견했다.) 진시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단지 4백60명의 유가(儒家)를 땅에다 묻었지만 우리들은 4만6천명의 지식인을 묻었다. 우리들이 반혁명분자를 진압할 때 일단의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죽이지 않았나! 내가 민주인사들과 논쟁할 때 그들은 우리들을 진시황이라고 욕한다. 틀렸다. 우리들은 진시황을 1백배 초과했다.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욕하는 것은 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일관되게 그들이 말한 것은 충분하지 않고, 왕왕 우리들은 더 보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해 8월 마오는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에서 열린 회의에서 "마르크스와 진시황을 결합해야 한다. 민주와 집중을 결합해야 한다"며 진시황의 1인 전제정권의 정책을 '(권력)집중(集中)'에 비유했다. 마오는 후반으로 갈수록 진시황에 대한 평가를 더욱 더 높이 떠받들었다. 마오는 1964년 6월 24일 외빈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공자와 진시황을 비교하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공부자(孔夫子; 공자에 대한 존칭)는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러나 아주 훌륭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마땅히 공평하게 말해야 한다. 진시황이 공부자보다 더 위대하다. 공부자는 빈 소리(空話)만 했다.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다. 정치상 중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문자를 통일했고, 중국의 각종 제도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이런 제도는 나중에까지 계속 사용해 왔다. 중국의 지난 날 봉건군주들 중에서 그를 초월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수천 년 동안 욕을 얻어먹고 있다. 욕을 먹는 것은 두 가지다. 460명의 지식인을 죽이고, 책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마오의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시대진전에 따라 고도화 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절대적 경향성을 띠면서 찬양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3년 9월 23일 이집트 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또 진시황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에서 제일로 유명했던 황제다. 나도 진시황이다. 린뱌오는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다. 중국은 예부터 두 파가 있다. 한 파는 진시황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또 한 파는 진시황은 나쁘다고 한다. 나는 진시황에 동의하고, 공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시황은 첫 통일중국을 이루고 문자를 통일했으며, 넓은 도로 수축과 나라 속의 나라를 인정하지 않은 중앙집권제의 통치구조를 만들었다.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으로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고 기간에 따라 바꾸면서 세습제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마오가 이때 '나도 진시황이다'라고 한 말은,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임립과)가 마오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비밀계획서인 '571공정기요'에서 "마오쩌둥이 당대의 진시황이다"라고 기술한데 대한 해학적 언사라고 한다.

 

어쨌거나 마오가 통치사상의 변화과정을 겪으며 전제적이고 급진적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마오의 통치철학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저우언라이는 마오와의 숙명적 관계인 '주연과 조연'으로서 숱한 갈등과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마오는 신중국 건국 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거느린 사회주의 국가로 세계최강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강대국의  꿈'과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다. 마오는 1955년 3월에 열린 중공 전국대표회의에서 "우리들은 현재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처해 있다. 6억 인구의 동방국가가 사회주의혁명을 하고 있다.

 

이 국가를 역사의 방향과 국가면모를 바꿔야 한다. 대략 3차 5개년계획 기간 안에 기본적인 공업화 국가를 이루고, 아울러 농업, 수공업과 자본주의 공상업(工商業)을 사회주의로 개조해야 한다. 대략 몇 십 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자본주의 국가(미국)를 따라잡거나 추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오가 신중국 성립 5년여 만에 처음으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겠다는 담대한 국가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급격한 사회주의 이상세계, 유토피아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석 352)

 

350) 毛澤東; 秦始皇比孔夫子偉大 人民網
351) 毛澤東; 秦始皇比孔夫子偉大 人民網
352) 迫不及待的强國夢; 毛澤東擬定‘超美’時間表 胡鞍鋼 人民網-人民論壇

-------------------------------------------------------------------------------------------------------------------------------------------------------

 

 

151. 저우의 견제에도 마오, ‘대약진(大躍進)’운동 총동원령

 

초강 국가와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마오는 공업화의 기반인 농업부문에 대한 급격한 사회주의 개조, 농촌의 집체화(集體化)를 다그쳤다. 농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부총리 덩즈후이와 저우언라이는 전래의 개인소유와 공동체 해체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마오는 못마땅해 했고, 이들을 우경보수주의라고 찍어 눌렀다.

 

1955년 10월 열린 중앙위원회는 마오의 주장대로 농촌 집체화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1955년 말까지 63.5%의 농촌가구가 합작사에 가입했다. 1956년 11월까지는 96%가 참여했다. 영도부는 애초 15년 계획으로 생각했던 농촌의 사회주의 개조가 불과 4년 만에 이뤄졌다고 선언했다.

 

고무된 마오는 수공업과 공상업 부문에 대해서도 바짝 다그쳤다. 강압적인 공권력으로 자본주의 기업경영체제를 사회주의 과도 총노선의 공사합영체제로의 전환을 윽박질렀다. 1956년 말까지 사기업의 99%, 상업의 82%가 각각 공사합영 체제로 전환했다.

 

수공업 분야도 1956년 말까지 92%의 노동자가 집단기업 체제에 가입했다. 이런 급격한 전환 속도는 마오의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산업화 가속화에도 불을 지펴 국가 전반적 계획목표를 상향 조정하는 등 목표달성 돌격 지상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주석 353)

 

마오는 1956년 1월 21일 중공중앙이 소집한 ‘지식분자 문제’회의에서 중국제일(中國第一)의 전략목표를 설정했다. 기염을 토했다. (주석 354)

 

"우리나라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 위치가 좋고, 해안선이 가장 길다. 마땅히 세계 제일의 문화, 과학, 기술, 공업 선진국가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은 사회주의 제도를 갖고 있어 더욱 노력하면 능히 이룰 수 있다. 6억 인구가 근로와 용감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몇 십 년 이후 세계 제일의 대국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미국은 단지 10여 개의 수소폭탄, 1억 톤의 강철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중국은 수억 톤의 강철을 생산할 수 있다. 국가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1955년 중국의 강철생산량이 285만 톤이지만 1996년에는 1억 톤이 넘고, 2008년에는 5억 톤을 돌파한다."

 

저우언라이는 1956년 2월 8일 국무원 1차 전체회의에서 "각 부문이 제정한 계획, 12년 장기계획 뿐만 아니라 올해와 내년도 계획을 모두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해 처리해야 한다. 당연히 우경 보수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중요하다. 군중들의 적극성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영도들의 뜨거운 머리를 찬물로 식혀 두뇌를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마오는 한 달 전에 경제발전 과정에서 속도를 늦추거나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는 것은 인민들의 사회주의 열정을 꺾는 우경 보수주의라고 맹렬하게 비판하고  산업화 속도를 다그쳤었다.

 

저우는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속도에 매달려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무조건 돌진하거나 실현가능이 어려운 목표치 설정, 수치 부풀리기 등의 풍조가 만연하자 견제에 나선 것이었다.

 

저우는 이 해 11월 중공 8기2중전회에서 ‘1957년 국민 경제계획에 관한보고’ 연설에서 “과거에 세운 미래계획의 발전 속도가 방만한 것은 아닌지? 8대 전후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들은 방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단히 잘못을 발견하고, 이런 과오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전진할 수 있다. 1953년에 ‘소 돌격주의’라면 올해는 ‘대 돌격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며 무턱대고 달려드는 무모한 돌격주의(冒進主義 모진주의)를 다시 경계했다.

 

마오는 5일 뒤 같은 회의에서 “간부와 인민들의 적극성을 보호해야 한다. 그들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이미 찬물을 끼얹었다. 농업사회주의 개조문제에 찬물을 끼얹어 퇴보시키지 않았나? 그 때 우리들은 ‘퇴보위원회’였다. 우리들이 찬물을 끼얹지 않을 때 ‘촉진회’가 된다. 본래 우리가 계획했던 것은 (경제발전계획)18년이다. 매우 빨리 촉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발전속도를 둘러싸고 저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마오는 이날 회의에서 비판대상을 실명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저우를 겨냥한 비판발언이었다.

 

마오는 1957년 11월 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10월 혁명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소련을 방문했다. 마오는 기념식에서 흐루시초프가 소련이 각종 제일 중요한 생산품 생산량에서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앞설 수 있다는 연설을 하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흐루시초프 연설에 자극과 영향을 받은 마오는 15년 후에 중국이 강철생산량과 주요 공업생산품 생산량에서 영국을 추월한다는 생각을 다시 고려하기로 했다.

 

국가 경제발전을 급히 이루겠다는 성급한 마음으로 바뀐 마오는 현재의 경제계획 시간표를 대폭 수정해 앞당기기로 작정했다. 마오는 흥분한 나머지 소련에서 베이징 중앙 영도부에 전화를 걸어 “1956년의 ‘반마오진(反冒進 반모진; 돌격주의 반대)은 옳지 않다. 이후 다시는 '반마오진'을 거론하지 말라”고 단호한 의지를 전달했다.

 

마오의 이런 조급증이 대약진운동을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의 리더십은 이성에서 비이성적으로, 실사구시에서 주관주의로 흘러 실패의 좌절을 겪으면서 폭압적 통치스타일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대약진운동 철강증산운동 모습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가 1958년 1월 1일 원단(元旦)에 실은 ‘어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아가자(乘風破浪 승풍파랑)’ 제목의 사설이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한 해를 예고했다.

 

사설은 “사람들의 사고는 항상 실제에서 낙후되어 있다. 빠르게 변하는 객관적 형세발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현재 전국농업은 이미 공전의 생산 최고조(最高潮)를 열었다. 각 지역의 당 위원회는 반드시 이런 고조를 적극적이고 적절하게 이끌어 1958년 농업생산의 대약진과 대풍년을 쟁취하자”고 역설했다.

 

사설은 또 “우리들은 어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아가자! 우리들은 서풍을 압도하고 동풍으로 전진하자! 우파를 압도하고, 관료주의를 압도하고, 보수사상을 압도하는 공산주의 바람(風 풍)으로 전진하자!”는 선동적 구호를 외쳤다.

 

마오는 1월 2일에서 4일까지 항저우(杭州 항주)에서 부분 성시(省市) 서기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1958년 국민경제계획 초안 보고와 제2차 5개년계획의 수정문제를 빌미로 저우언라이가 주장한 돌격주의 반대를 직접 비판했다.

 

서기들이 돌격주의를 이탈했다고 질책한데 뒤이어 열린 보다 큰 범위의 회의에서 계속 저우언라이 등을 강력 비판했다. 이때 경제관련 회의를 주재하던 저우는 비판에 함몰돼 심지어 발언권조차도 박탈당하기도 했다.

 

항저우 회의가 끝난 며칠 뒤 중난하이 쥐런탕(居仁堂 거인당)에서 서기처 회의에 참석했던 인민일보 총편집 겸 신화사 사장인 우렁시(吳冷西 오냉서)는 광시성(廣西省 광서성) 난닝(南寧 남녕)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통지’는 마오가 직접 쓴 글인데, 회의 참석자 27명의 명단 가운데 자신의 이름이 제일 앞에 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 뒤에는 총리, (류)샤오치 순이었고 명단 끄트머리에 마오쩌둥이라고 적혀있었다. 모두 참석자의 이름을 썼는데 저우언라이만 총리로 씌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우렁시는 회의가 신문과 통신에 관련한 것으로 보고 곰곰이 생각하다 1월 1일치에 실은 새해사설 ‘승풍파랑(乘風破浪)’을 떠올렸다. 이 사설은 당시 마오가 항저우에 있었기 때문에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의 검토를 거쳐 실었다.

 

사설내용에 문제가 없는지 더듬어 보았다.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추월한다는 내용으로, 마오가 모스크바에서 흐루시초프 연설에 고무, 감명 받은 것을 뼈대로 한 글이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어보였다. 지난해 11월 18일치 사설도 생각해 보았다. 농업합작화 고조의 도래를 맞아 농업생산성을 고조시키고, 공업생산을 고조시켜 생산의 대약진을 이룩하자는 내용으로 역시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대약진(大躍進)’ 명사는 이때 인민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출현했으며, 이후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광범하게 퍼진 용어가 됐다.

우렁시는 근래의 몇 편의 사설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지만 문제될게 없어 궁금증이 더했다. 우렁시는 마오의 언론담당 비서 후챠오무(胡喬木 호교목)와 서기처 양상쿤에게 회의명단 배열의 미스터리를 물어보았다.

 

그들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단지, 후챠오무의 얼굴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구나 하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주석 355)

 

353)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 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354) 迫不及的强國夢; 毛澤東擬定‘超美’時間表 胡鞍鋼 人民網-人民論壇
355) 毛澤東生平全紀錄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

-------------------------------------------------------------------------------------------------------------------------------------------------------

 

152. 신문 사설까지 들먹이며 저우언라이 질타

 

마오는 1958년 1월 12일 광시성 난닝에서 열린 회의에서 작심하고 1956년의 ‘돌격주의 반대’는 잘못이라며 질타했다.

 

마오가 말한 ‘돌격주의 반대’는 1956년도 국가 경제계획이 수정돼 모든 분야의 목표가 상향조정 되었다. 적지 않은 지방과 부문에서 수리시설 건설 등 중구난방식 과도한 사업 집행으로 재정적자가 심화되고 원자재 고갈 등으로 인한 혼란이 발생했다.

 

저우언라이는 국가 경제계획을 토의하는 회의를 주재했을 때 자본투자나 철강, 석탄, 양곡, 목화와 같은 일부 주요 품목의 연 생산량 목표를 상향 조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낮췄다. 국무원과 정치국 회의에서 정부예산을 삭감해 자본 투자 비율을 줄이고 생산량을 낮추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오가 주장한 ‘더 많이, 더 빨리’의 돌격주의를 반대할 수 없어 ‘보수주의에 반대 한다’는 ‘돌격주의’와 저우언라이의 ‘조급한 돌격주의에 반대 한다’는 ‘반 돌격주의’를 동시에 채택해 어정쩡한 상태가 됐었다.

 

저우는 11월 8차2중전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의 산업화는 15년 이상 걸릴 것이며, 경제 각 분야에서 적정한 균형을 달성하지 못하면 이런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제 각 분야의 균형달성은 중공업분야의 성장완화를 뜻했다. 마오의 조급한 성장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였다.

 

마오는 이때의 저우언라이의 정책 잘못을 지적하며 비판한 것이다. 돌격주의에 대한 반대는 간부들과 군중들의 적극성을 손상시키고, 특히 농민들의 적극성을 꺾는 잘못된 방침이라고 꾸짖었다. 마오는 국무원의 정부공작, 재정공작, 계획공작 보고를 엄히 비판한 뒤 1956년 6월 20일치 ‘반 돌격주의’를 다룬 인민일보의 사설(제목은 ‘보수주의에 반대하며, 조급한 의욕도 반대 한다’)은 매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이때 우렁시는 비로소 자기의 이름이 난닝회의 명단 첫머리에 올린 이유를 알고 진땀을 흘렸다. 회의가 끝난 뒤 혼비백산한 우렁시는 후챠오무와 사설의 잘못된 부분을 논의했으나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우렁시와 후챠오무는 베이징 인민일보에 전화를 걸어 6월 20일치 사설과 사설 집필, 수정, 확정 과정의 상황을 작성해 난닝회의 장소로 급히 보낼 것을 긴급지시했다.

 

애초 이 사설은 인민일보 편집부가 기초해  중앙선전부에서 여러 차례 토론을 거친 뒤 다시 루딩이(陸定一 육정일)가 작성했다. 루딩이는 기초한 사설을 류샤오치에게 보내 지시를 청했다. 류샤오치는 정치국 회의의 규정에 따라 직접 중앙선전부 구성원을 꾸려 왕중이(王宗一 왕종일)가 사설을 다시 기초하도록 했다.

 

중앙선전부는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수정한 사설을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에게 보내 검토를 받도록 했다.

 

두 사람이 상의한 뒤 일정 부분 수정과 일부 의견을 추가할 것을 요구해 루딩이가 사설을 수정했다. 마지막으로 류샤오치와 마오에게 보내 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류샤오치는 몇 군데를 고친 뒤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비준란의 자신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는 보지 않겠다”고 몇 글자를 쓴 뒤 사설을 돌려보냈다.

 

마오는 인민일보의 사설요지를 인쇄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하면서 ‘비준 지시글’을 첨부했다. 내용은 “졸렬하고 속된 마르크스주의, 졸렬하고 속된 변증법, 글은 마치 ‘반좌(反左)’ 또는 ‘반우(反右)’ 같이 썼으나  실제적으로는 ‘반우’가 아니고, 전적으로 ‘반좌’다. 그리고 날카롭게 나를 겨냥했다”고 적었다.

 

마오는 회의에서 여러 차례 인민일보의 사설을 비판하고, 이 사설은 당시 일부 동지의 ‘반 돌격주의’를 증명한다며 자근자근 사설을 준열하게 씹어댔다. ‘일부 동지’는 바로 5일 전인 6월 15일 국무원을 대표하는 부총리 리셴녠(李先念 이선념)이 1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1955년 국가결산과 1956년 국가예산에 관한보고’를 하면서 “조급한 돌진의 결과는 사회주의 사업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손실을 초래할 뿐”이라고 한 발언을 지적한 것이다.

 

마오는 이 말을 걸고 넘어 지면서 이것은 바로 “중앙이 이미 돌격주의를 반대하기로 결정한 명백한 증거”라고 통렬하게 논박했다. 마오는 이날 회의에서 인민일보의 사설 ‘반돌격주의’는 전국시대 때 초나라 문학가 쑹위(宋玉 송옥)가 덩투즈(登徒子 등도자)대부를 공격하는 수법이라면서 장황하게 고사까지 동원해 ‘반 돌격주의’에 맹공을 퍼부었다.

 

마오는 아예 다음날 회의에 쑹위의 글(賦 부)을 인쇄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반면에 마오는 원단 사설 ‘승풍파랑(乘風破浪; 어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아가자)’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오는 우렁시와 후챠오무를 별도로 불러 사설을 누가 썼는지 각별하게 묻는가하면 잘 쓴 사설이라고 칭찬했다. 제목이 눈길을 끈다고 말한 마오는 표제를 남북조시대 송나라 중췌(宗慤 송각)가 ‘원승장풍파만리랑(愿乘長風破萬里浪)’이라고 쓴 글에서 따왔다며 출전을 들먹였다.

 

마오는 지금 우리는 동풍(東風; 중국의 사회주의를 지칭)을 타고 서풍(西風; 서구의 자본주의)을 압도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사설 제목에 빗대 돌격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오는 이들에게  신문의 제목달기 강론도 잊지 않았다.

 

마오는 “그대들이 신문을 만들 때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제목을 달아 사람들이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을 끌어들여야 한다. 신문은 눈길을 끄는 제목을 달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마오는 당시 6월 20일치 사설을 비준할 때 “나는 보지 않겠다”라고 쓴 데 대해 “나를 욕하는 것을 내가 왜 보아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마오는 1월 16일 오전 공개적인 회의석상에서 마침내 저우언라이의 실명을 거론하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중공 상하이시위원회 제1서기 커칭스(柯慶施 가경시)가 쓴 ‘어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아가자, 새로운 사회주의 상하이를 건설하자’는 보고서를 칭찬하고 주요 신문에 싣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저우)언라이, 당신은 총리다.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직접 추궁했다. 저우는 “나는 쓸 수 없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마오는 커칭스를 띄우고 저우를 끌어내렸다. 마오에 맞장구를 치며 캉성(康生 강생), 커칭스가 저우의 ‘반 돌격주의’를 비판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보이보(薄一波 박일파)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356)

 

“이 회의에서 마오 주석의 총리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준열했다. 마오 주석은 ‘당신은 반 돌격주의가 아닌가? 나는 돌격주의에 반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판판마오진(反反冒進 반반모진)이다‘라고 총리를 몰아부쳤다. 회의에서 캉성이 설쳐댔고, 커칭스, 리징취안(李井泉 이정천)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총리를 비판했다. 그들의 비판태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사람들을 난감하게 했다.”

 

356) 周恩來1958年爲何提出要辭去總理職務 楊明偉 人民網 新中國初期的毛澤東和周恩來; 合作大于分歧 金冲及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

 

153. ‘대약진’ 광풍 속 저우의 ‘반 돌격주의’ 는 자아비판 대상

 

저우는 1월 19일 밤, 침통한 마음으로 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저우는 돌격주의에 반대해 방침에 대한 동요와 잘못을 저지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저우는 “이런 잘못은 생산관계를 개혁해 (경제의) 약진적인 발전을 시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인식으로 인해 군중을 발동해 사회주의 혁명과 경제건설을 방관하고 위축시켰다. 종종 사물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했다. 특히 많은 다른 현상을 일반현상이거나 주요 현상으로 과장했다. 일종의 우경 보수주의 사상이다”라고 자신을 비판했다. 저우는 돌격주의에 반대해 1957년의 농공업 생산에 영향을 받았고, 일정 부분의 건설도 감소했다. ‘반 돌격주의’의 과오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당시 회의장에 있던 보이보는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아비판을 했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조직의 원칙상 부득불 자아비판을 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저우는 마오의 조급한 생각이 필연적으로 난닝회의의 ‘반반모진(反反冒進; 돌격주의 반대의 반대)’ 바람을 조장해 당내에 조급한 돌격주의 생각을 더욱 팽창시킨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저우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당과 조직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책하며 번민과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한편 마오는 난닝회의를 계기로 개인숭배(個人崇拜)에 대한 태도에 중대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오는 회의에서 저우가 관할하고 있는 국무원 경제부문을 ‘분산주의’라고 매섭게 비판하면서 권력집중을 강조했다. 마오는 그러면서 “큰 권력은 독점하고 작은 권력은 분산한다, 당위원회가 결정하고 각 방면이 일을 한다, 하는 일에는 결정권이 있고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 일은 점검하고 당위원회에 책임이 있다(大權獨攬, 小權分散. 黨委決定, 各方去辦. 辦也有決, 不離原則. 工作檢査, 黨爲有責.)”는 구결(口訣)을 읊었다. (주석 357) 

 

저우의 시련과 수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난닝회의 이후 당내의 성급함을 경계하는 ‘반 돌격주의’의 목소리는 사그러들고, 실사구시와 온당하게 사회주의와 경제건설하자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신 돌격 지상주의가 득세해 ‘좌경’사고가 판을 치면서 ‘대약진’의 광풍(狂風)이 전국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1958년 2월 초, 저우언라이는 부총리 리셴녠이 1기 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1957년 국가 결산집행 상황과 1958년 국가 예산초안에 관한보고’ 초안을 검토했다. 저우는 원고에서 “15년 안에 강철과 기타 중공업 생산품의 생산량을 영국을 따라잡거나 추월하기 위해”의 자귀 중에서 ‘15년’ 뒤에 ‘혹자는 더 많은 시간’의 9개 글자를 추가하고, “이후 10년, 혹자는 더욱 짧은 시간 안에 전국 농업발전 실현 강요(綱要)”의 글귀에 ‘혹자는 더욱 짧은 시간 안에’의 8개 글자를 빼버렸다. 이런 보태고, 뺀 글자의 의미는 저우의 차가운 이성과 주도면밀한 그의 성격의 단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철저한 실사구시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난닝회의 이후 ‘대약진’ 사고의 물꼬가 터졌지만 마오는 여전히 ‘반 돌격주의’에 대한 비판을 늦추지 않았다. 마오는 2월 23일 베이징에서 소집된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반 돌격주의’는 자신의 발등을 스스로 돌로 내려치는 행위라며 꺼진 불도 다시 본다는 식으로 쐐기를 박았다.

 

1958년 3월, 막 60살이 된 저우는 창장(長江 장강) 싼샤(三峽 삼협)를 현지 시찰한 뒤 3월 8일부터 26일까지 마오가 소집한 청두(成都 성도)에서 열리는 중공중앙 공작회의에 참석했다. 마오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다시 ‘반 돌격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고 나왔다.

 

마오는 “돌격은 마르크스 주의고, 반 돌격은 비 마르크스 주의”라고 개념을 정리하고, 우리가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라는 당연한 논리를 내세우며 ‘돌격’을 내세웠다. 마오는 “군중들의 적극성을 타격한 반 돌격 사건이 생겨날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파들을 미친듯이 진공하게 해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후 누가 반 돌격 행위를 할 지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저우언라이는 3월 25일 회의에서 또 다시 ‘반 돌격’에 대한 자아비판을 했다. (주석 358)

 

“나는 ‘반 돌격’ 보고를 제기한 주요 책임자로서 군중들의 생산고조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로 인해 촉진이 아닌 퇴보가 이뤄졌다.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생산적인 정책을 펴지 못했다. 그리고 더 적게, 더 느리게, 더 나쁘게, 더 낭비적으로 정책을 폈다.”

 

마오는 청두회의에서 개인숭배 문제를 거리낌 없이 꺼냈다. 마오는 “개인숭배는 두 종류가 있다. 한 종류는 정확한 숭배, 이를테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같은 정확한 것들로 우리는 반드시 숭배하고, 영원히 숭배해야 한다.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는 그들의 손에 있다. 왜 숭배를 하지 않나? 다른 하나는 부정확한 숭배로 분석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천보다(陳伯達 진백달)는 회의에서 왕밍(王明 왕명)이 말한 옌안 정풍운동의 두 가지 발언, 즉 민족주의와 개인숭배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이때 마오가 천보다 발언에 끼어들어 “개인숭배를 말한 것은 바로 나를 숭배하는 말이었다. 나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를(왕밍) 숭배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나를 숭배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마오가 진시황적 사고,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길목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357) 毛澤東個人崇拜直言不諱; 還是崇拜我好一点 人民網-文史頻道
358) 周恩來1958年爲何提出要辭去總理職務 楊明偉 人民網

-------------------------------------------------------------------------------------------------------------------------------------------------------

 

154. 마오와 저우 숙명적 운명, 신중국 역사 견인

 

저우언라이는 5월 5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는 1000여 명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중공 8대 2차 회의를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마오를 떠받드는 자아비판을 또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우의 비서 판뤄위(范若愚 범약우)는 이렇게 회상했다.

 

“1958년 4월 총리가 8대 2차 회의의 발언원고를 준비할 때였다. 어느 날 (총리가)나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발언하는 주요한 내용은 자아비판이다. 내가 ‘반 돌격의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번 발언원고는 과거 다른 사람들이 기초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내가(저우)가 구술하면 당신이 받아 적어 작성하도록 하자고 했다. 총리가 구술할 때 천윈(陳云 진운)동지의 전화가 왔었다. 전화통화가 끝난 뒤 총리의 구술은 대단히 느렸다. 어느 때는 심지어 5~6분이 지나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 ‘반 돌격 문제’에 대해 총리가 내심의 모순(양심상의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총리가 말하고자 하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그랬다. 저우는 그동안 체면불고하고 수없이 자아비판을 했다. 매번 자아비판을 할 때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과 조직, 마오가 저지르면 자신은 뒤치다꺼리를 하는 관계 등이 맞물리면서 신념에 반한 비판을 해왔다.

 

저우는 또 다시 1000여 명이나 되는 수많은 대표들 앞에서의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데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 5월 5일 중공 8대 2차 회의가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류샤오치가 당 중앙을 대표해 마오의 생각대로 정리한 공작보고를 했다. (주석 359)

 

“우리나라는 현재 두 개의 착취계급과 두 개의 노동계급이 있다.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전에는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투쟁, 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의 투쟁은 시종 우리나라 내부의 주요 모순이었다. 마오쩌둥 동지는 15년에 영국을 따라잡거나 추월한다는 구호를 제기했다. 의욕을 북돋우고, 앞서기 위해 분투노력으로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생산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구호다. 촉진파의 구호고, 퇴보파의 구호가 아니다. 신속하게 수억 인구가 노동대군으로 위대한 물질적 힘을 장악하고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고는 마오가 주장한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촉진파가 되고 퇴보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구호를 외치고, 1956년 약진 중 ‘반 돌격’의 잘못을 저질러 ‘그 결과는 군중의 적극성을 손상시켰다’고 당내 문건으로 형식상 확인했다.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반 돌격’의 과오를 결정함에 따라 ‘반 돌격주의’의 우두머리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천윈, 리셴녠, 보이보 등은 회의에서 다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5월 17일 천윈이 자아비판을 한 다음날 저우는 구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양심의 갈등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했던 자아비판을 했다. (주석 360)

 

“이번 회의는 사상해방의 대회다. 또한 공산주의 풍격이 충만한 대회다. 대회의 발언도 풍부하고 다채롭고 생동적으로 인민의 생산 대약진, 사상 대해방(大解放)으로 건설한 기적과 혁명의 기개를 반영했다. 정말로 하루가 20년, 반년이 수천 년을 추월했다. 이런 위대한 시대에 처해서 단지 하나의 진정한 혁명자, 공산주의의 씩씩한 기백, 당 중앙과 마오 주석의 (사회주의)건설노선의 정확성을 충심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더욱 더 ‘반 돌격주의’의 잘못에 대한 엄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반 돌격’의 잘못은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다. 이런 잘못의 사상적 근원은 주관주의와 형이상학에 있다. -사상방법상의 이런 잘못은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건설 과정에서 우파 보수주의 과오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해 마오 주석이 일관적으로 주장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과 총방침을 위배했다.”

 

저우는 처절한 심경으로 자아비판을 한 뒤 이런 잘못의 주요 책임자로 잘못을 통해 더욱 큰 교훈을 얻었다는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어긋나는 발언을 해야 했다. 목적을 달성한 마오는 만족했다. 자신에 도전하는 어떠한 사람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 회의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보여 줬다고 흡족해 했다.

 

통치의 수단인 채찍과 당근에서, 이제는 당근이 필요한 관용을 베풀 때였다. 마오는 ‘반 돌격주의’ 문제는 해결됐고, 현재는 중앙이 단결했으며, 전 당이 단결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마오는 “대회에 참가한 동지들은 주의해야 한다. 중앙위원회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누구도 대국을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도 곤두박질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사직서를 썼다거나 구두로 사의를 표시했다는 등의 본인의 기록은 아직 밝혀진바 없다. 그러나 당의 문건에 중공중앙이 저우의 사직문제를 토론했다는 간략한 기록이 남아 저우가 어떤 형식을 밟았든 사의를 표시한 것은 확인되고 있다.

 

중공중앙은 전국대표대회가 끝난 뒤인 6월 9일에 저우가 제출한 ‘계속 국무원 총리를 맡는 것에 대한 합당여부’를 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해 토론했다. 참석자들은 ‘마땅히 현재 맡고 있는 공작을 계속 맡는다. 다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저우의 총리 직무는 그대로였다.

 

허나, 8대 2차 대회이후 중국은 ‘대약진’의 광풍 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우 등 무모한 돌진을 경계했던 ‘반 돌격주의’ 일단의 영도자들은 중국 경제건설 과정에서 발언권을 잃어버려 어떤 경고음도 내지 못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아비판에서 제일 먼저 “(마오)주석은 늘 전략적으로 문제를 보고, 나는 왕왕 전술적 고려에서 문제를 본다”고 했다. 저우는 마오가 멀리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식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겪었던 역사적 사실에 비춰 마오가 자신보다 멀리 보고,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었다.

 

숙명적으로 엮인 ‘주도자’ 마오와 ‘집행자’ 저우의 관계가 한때 리더십 충돌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해 세상을 뜰 때까지 우호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을 이끌었다.

 

359) 周恩來1958年爲何提出要辭去總理職務 楊明偉 人民網 新中國初期的毛澤東和周恩來; 合作大于分歧 金冲及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360)周恩來 1958年爲何提出要辭去總理職務 楊明偉 人民網

-------------------------------------------------------------------------------------------------------------------------------------------------------

 

155. ‘신선회’라 불린 여산회의…정책결정 핵심 장소로


 

루산(廬山 여산).


장시성(江西省) 쥬장(九江) 남쪽에 해발 1300~1400미터 높이의 봉우리들이 운무(雲霧)와 노닐고 있다. 이런 여산의 빼어난 자태는 예부터 숱한 시인묵객들을 불러들였다. 여산은 특히 인문적(人文的) 명산으로 이름이 높다. 이 산은 특수한 지형조건과 기후가 조화를 부려 안개와 구름을 만들어 내 시시각각으로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운무와 여산이 그려내는 풍경이 볼만하다.


도연명(陶淵明)으로 더 잘 알려진 4세기 동진(東晉) 때 도잠(陶潛)이 이곳에 은거하며 “돌아가리라, 전원에 잡초가 무성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로 운을 떼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여산의 폭포에 넋을 잃은 채 ‘여산을 바라보며(望廬山瀑布 망여산폭포)’라는 시를 지어 중국특유의 과장으로 여산을 예찬했다.


“햇살이 향로봉에 비추니 푸른 안개 자욱이 피어오르고, 멀리 바라보이는 폭포 긴 내를 걸어 놓은 듯하다. 흩날리며 내려 쏟아지는 폭포 삼천척이나 되네, 은하수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구나. 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일조향로생자연, 요간폭포괘장천.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낙구천”


당송(唐宋)8대가의 한 사람인 송나라의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제서림벽(題西林壁)’ 제목의 시에서 여산을 철학적 물음으로까지 끌어올려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앞에서 보면 마루 같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로세. 멀고 가까운데서 높고  낮은데서, 보는 모습이 서로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일세.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횡간성령측성봉, 원근고저각부동. 불식여산진면목, 지연신재차산중.”


마오는 1959년 7월 2일부터 한 달 예정으로 여산(廬山)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마오가 여산에서 회의를 연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던져서 추진하고 있는 사회주의 과도 총노선, 인민공사운동, 지난해 부터 시작한 대약진운동 등 ‘중국식 공산주의’인 ‘삼면홍기운동’을 펼쳤으나 상황이 극도로 나빠져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중앙영도들이 머리를 식히고 여유를 가지면서 차분한 토론을 벌여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방략을 짜기 위해 여름 피서지인 산 좋고 물 좋은 여산을 택한 것이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압박하면서 ‘돌격주의’를 강행했으나 저우가 우려했던 폐해들이 곳곳에서 들어나고 있었다. 지방간부들의 맹목적 사업집행과 농공업부문의 생산목표를 허위로 부풀려 재정이 악화되고 생산력이 급속히 떨어져 국민경제가 파탄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인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여 몇몇 지방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마오는 자신의 조급한 정책이 실패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책방향을 일정부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민들의 맹목적 열정을 부추겼던 자신과 영도들의 뜨거운 머리를 식혀 ‘좌’ 편향적인 정책을 수정해 저우언라이가 내세웠던 ‘반 돌격주의’ 방향으로 조정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책적 오류를 전면 수정하는 것은 공산당과 자신의 권위훼손이 따르는 만큼 완곡한 과오인정에서 그치기로 했다.


마오는 회의 개막식에서 영도들이 회의기간 부족한 지식, 특히 경제발전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경제지식 부족을 보충할 수 있도록 독서를 하고, 형세를 분석하면서 올해의 추진사업을 차분히 정리하도록 했다. 또 군중동원에 대한 선전, 부작용이 만연한 인민공사의 식당운영 등 19개 문제와 관련해 영도들이 지역별로 조를 나눠 집중토론을 거쳐 대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마오는 전반적 형세분석에서 좋지 않은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으나, 지난해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밝은 미래를 제시했다. 국민경제 종합평가 부문에 대해서는 추진과정에서 맹목적인 열광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열정은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마오는 그동안 강대국가 건설을 위해 애초 15년 안에, 심지어 7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조급하게 추진했던 중공업 제일주의 정책을 펴 왔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원조와 기술지원이 점차 끊기고, 기초자원과 기술력 부족 등으로 적수공권의 열정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오히려 경제구조 왜곡현상을 불러 농업생산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오는 뒤늦게 균형경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가 경제개발 우선순위를 종전의 중공업, 경공업, 농업의 순에서 다시 농업, 경공업, 중공업 순으로 바꿨다.


만시지탄이지만 6억5천 인민의 의식주 문제해결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주석 361)

마오는 독서문제에 대한 연설에서 “지난해 많은 동지들이 사회주의 경제문제에 대한 이해력 부족과 경제발전 규율을 제대로 알지 못해 행정 실무주의에 매몰됐다”면서 “중앙, 성, 시, 지방위원회 1급 및 현(縣) 위원회 서기들이 소련의 ‘정치경제학’을 독서할 것”을 권했다.



마오는 또 19개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발동한 ‘삼면홍기’의 방향은 정확하다고 발언해 ‘좌’적 지도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방침은 없었다. 단지 ‘좌’적인 열광성에 따른 부작용은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조위에서 ‘여산회의’는 7월 3일부터 10일까지 소조를(小組)를 만들어 토의를 하기로 했다. 조(組)는 지역에 따라 구분해 동북, 화북, 화동, 중남, 서남지역 등 6개조로 나눴다.


조원들은 마오가 제기한 ‘19개의 문제’에 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기탄없는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여산회의’는 낮에는 회의를 열어 자유토론을 하고, 독서를 하면서 업무와 관련한 문건을 처리하는 회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저녁에는 자유 시간으로 연극을 보거나 춤을 추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일요일에는  회의가 없어 주변 산을 등산하거나 일출을 보고 시를 짓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마오는 여산에 오기 직전 32년 만에 고향인 샤오산(韶山 소산)에 들려 느낀 감회를 적은 ‘샤오산에서(到韶山 도소산)’와 ‘여산에 올라(登廬山 등여산)’의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마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도연명이 읊은 귀거래사처럼 홀가분하고 편안하게 신선놀음을 한다고 하여 여산회의를 ‘신선회(神仙會)’라 불렀다. 헌데 소동파의 철리(哲理)적 물음인 여산 속에 있다 보니 여산의 진면목을 모르듯, 이후 회의상황이 상전벽해로 급변해 이태백의 ‘비류 삼천척’ 모양 중앙의 고위 영도자들이 ‘삼천척’아래로 굴러 떨어질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더 나아가 여산회의의 피바람으로 중국의 명운이 20년 동안 역사의 수레바퀴가 중세 봉건사회로 거꾸로 가는 분수령이 될 줄 또한 아무도 몰랐다.


여산(廬山)과 중국공산당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마오는 건국 후 죽을 때까지 여산에 3번 올라 중앙회의를 주재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중요 결책(抉策)을 결정했다.

여산 1차 회의는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8월 2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8기8중전회로 ‘대약진’, ‘인민공사’ 등의 문제풀이 회의였다. 그러나 급격한 상황변화로 당의 고위 영도자인 펑더화이, 장원톈 등이 우경기회주의로 몰려 숙청을 당하는 현장이 되었다.


마오가 스스로 좌경적 요소를 줄이며 이성적 통치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도리어 좌경노선을 강화해 전제적 통치로 나감으로써 대약진의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최소 2000천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굶어죽는 처참한 비극을 불러왔다.


여산 2차 회의는 1961년 8월 23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 중앙 공작회의였다. 이 회의는 아직도 안개 속 회의로 통하고 있다. 회의에 관한 언론보도가 일체 없는데다 참석자 명단을 밝히지 않고 있다. 회의를 주재한 마오쩌둥의 이름을 비밀에 붙였으며, 당사(黨史) 기록에서도 숨기고 있다. 하지만 대약진 실패에 따른 경제조정 회의로 실제적으로는 국정운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마오가 2선으로 후퇴하고, 국가 주석직을 류샤오치에게 넘겨준 회의로 알려지고 있다.


여산 3차 회의는 1970년 8월 23일부터 9월 6일까지 열린 9기2중전회로 헌법수정과 국민경제계획, 전비(戰備)강화 등의 회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열린 이 회의에서 린뱌오의 앞잡이 구실을 했던 천보다(陳伯達 진백달)가 린뱌오 진영을 대표해 마오에 대한 ’천재론’을 내세우며 국가 주석직을 부활시켜 마오가 다시 국가주석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사실은 린뱌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기 위한 전략이었다. 속내를 알고 있는 마오는 천보다를 숙청했고, 린뱌오 그룹이 서리를 맞았다. 린뱌오는 이듬해 소련으로 탈출하다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여산회의’는 중국 공산당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여산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신선회라고 불린 여산회의와 관련해 마오의 비서였던 리루이(李銳 이예)는 ‘여산회의 실록’에서 “왜, 신선회라고 불렀는가? 여산은 천하명산이다. 역사고적이 풍부하고, 신선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오의) 마음이 대단히 유쾌하고 편안해 보였다. 서로가 마음껏 진언(進言)하는 등 대단히 화기애애했다”고 회의 초반 분위기를 전했다.


마오는 분임토론에 참석하지 않고 전, 현직 비서인 리루이, 후챠오무, 톈자잉(田家英 전가영) 등이 수집한 토론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7월 3일의 토론내용은 이랬다. (주석 362)


“1957년 반(反)우파정풍 이래 정치, 경제의 승리로 당의 위신이 높아졌다. 당의 위신이 높아지자 체신머리가 없어졌다. 중요한 문제다. 결론적으로 머리가 너무 뜨거워 뚜껑이 열렸다.”

“마오 주석 고향의 인민공사는 지난해 증산(增産)이 두드러졌다고 하나, 실제적으로는 16% 증산에 그쳤다. 내가 저우샤오저우(周小舟 주소주; 후난성 서기) 동지에게 물어보니 단지 14%라고 하더라. 국가가 많은 지원을 하고 대출을 해 준다. 주석도 이 공사에 갔었다. 내가 주석에게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이 일에 대해 말씀을 하지 않고-”


361) 毛澤東生平全紀錄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62) 揭秘廬山會議; 前後兩次都是中途變局和沒完沒了的檢討 錢伯城(文史學者) 人民網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彭德懷的意見書; 毛澤東爲何握了三天才發? 權延赤 人民網-文史頻道

-------------------------------------------------------------------------------------------------------------------------------------------------------


156. 펑더화이 “1서기 체제가 문제”, 마오는 허쯔전과 만나는데…

7월 4일에도 난상토론이 계속됐다.

 

“무산계급 전제정치 이후 관료주의를 범하기 일쑤다. 제도상의 문제가 아니다. 당의 위신이 높아졌기 때문에 군중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로 인해 행정명령이 많아졌다. 마르크스는 파리공사에서 무산계급의 독재는 관료주의를 방지해야 한다고 했다. 방지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작인원을 선거를 통해 뽑아, 군중들이 언제든지 파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기술인원의 임금은 최고 대우를 해줘야 한다. 외국으로 달아난다. 또 인민들의 이익과 일치하도록 일을 해야 한다. 우리들은 할 수 있다. 인민들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을 없애야 한다. 당이 군중들에게 위신이 높기 때문이다.”

“경험과 교훈을 찾아야 한다. 수원수구를 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 모두가 책임이 있다. 마오쩌둥 동지를 포함해서 사람들 모두가 역할이 있다.”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는 이날 서남구 소조(小組) 토론에서 “1958년 큰 성취를 이룩한 것은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당과 전인민은 깊은 교훈을 얻었다. 추호도 비관할 필요가 없으며 원망할 필요도 없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성과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했고, 결점도 투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영원한 총사령관’으로 덕망이 높은 주더(朱德 주덕)는 7월 6일 중남구 소조(小組) 토론회에서 “농민들은 아직도 소유제의 일면을 갖고 있다. 공급제는 공산(共産)제다. 농민들이 이 공산제를 원하고 있는가? (인민공사의)식당이 전부 무너졌는데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농민들은 부(富)를 필요로 하고 부자가 되려고 한다. 부자농(富者農) 노선을 이룰 수 없다. 공업부문에서 중요한 것은 강철제련 작업이 엉망진창이 됐다는 것”이라며 거리낌 없는 발언을 했다. 서북구 소조 토론에 참석한 국방부장(장관)이자 부총리인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는 3일부터 10일까지 7차례 발언을 했다.

 

펑더화이는 “1957년 ‘반 우파 투쟁’ 이래 정치, 경제적으로 승리를 거둬 당의 위신이 높아졌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돈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그런  큰 일을 시험도 하지 않은 채 시행했다”고 지적했다. 펑더화이는 흙으로 만든 재래식 용광로에 의한 강철 제련과 인민공사화 운동에 대해 “베이다허(北戴河 북대하) 회의 이후 ‘좌’경 노선을 부추겨 전 인민을 강철 제련현장에 투입했다. 이 구호가 맞는 것인가? 인민공사화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시행했다. 1년 정도 시험을 한 뒤 시행했어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내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했다. (주석 363) 

 

“현재 당 위원회는 집체 영도제가 아니다. 개인이 결정한다. 제1서기 혼자서 다 한다.”, “당내에서 ‘좌’파적 사고를 고치기 쉽지 않다. ‘우’파적 사고는 비교적 잘 고쳐졌다. ‘좌’파적 사고가 모든 것을 압도해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각종 딱지를 부쳐 깔아뭉갠다. 광범한 언로(言路)를 여는데 영향을 미친다.” 등등이었다.

 

펑더화이는 총결 발언에서 “마오 주석과 당은 중국인민 속에서 위신을 높였다.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위신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회의 참석자들의 토론열기가 한층 높아져 갔다.

 

이런 가운데 마오는 7월 9일 밤, 두 번째 부인(실질적으론 세 번째)이었던 허쯔전(賀子珍 하자진)을 자신이 묵고 있는 ‘메이루(美廬)’에서 22년 만에 비밀스럽게 만났다. (주석 364)

 

허쯔전은 1937년 마오와 헤어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소련으로 갔다가 1947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당은 허쯔전이 마오가 있는 베이징으로 오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장칭(江靑 강청)이 마오의 부인으로 버티고 있었고, 옌안(延安 연안)에서 허쯔전이 마오와 헤어진 뒤 당 조직에서 이혼을 공식 결정한바 있기 때문이었다.

 

허쯔전은 자신이 마오를 떨치고 소련으로 간 것을 몹시 후회했다. 중국에 돌아와서는 마음속으로 마오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러나 조직의 결정으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1954년 9월, 전국 제1기 인민대표  대회기간에 우연히 라디오를 켰다가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라디오에 귀를 바짝 대고 정신을 집중해 들었다. 마오의 연설 목소리였다. 충격을 받은 허쯔전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혼절해 소파에 쓰러졌다.

 

응급치료를 받고 깨어난 허쯔전은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분열증 현상을 보였다. 상하이에서 생활하던 허쯔전은 정신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난창(南昌 남창)으로 돌아가 외부와 격리한 채 휴양을 하며 몸을 추스렸다. 증상이 날로 심해져 발병했을 때는 누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과도한 공포 증세에 시달렸다. 심할 때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몸이 급속도로 나빠져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마오는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마오는 허쯔전과의 사이에서 난 딸인 쟈오쟈오(嬌嬌 교교; 李敏 리민)를 여러 차례 허쯔전에게 보내 간병하도록 했다. 마오는 허쯔전에게 구하기 힘든 약과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고 한다. 허쯔전은 그 후 점차 건강을 회복해 정상적 상태로 돌아왔다.

 

장시성 제1서기 양상쿠이(楊尙奎 양상규)는 여산회의가 열리고 있던 7월 7일 부인 수이징(水靜 수정)에게 “마오 주석이 허쯔전 동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 난창에 들려 허쯔전 동지를 모시고 여산으로 갈 때 주단화(朱旦華 주단화; 마오의 둘째 동생 마오쩌민의 전 부인) 동지도 대동하라“고 마오의 지시를 전했다.

 

양상쿠이는 “이 일은 아주 특수한 임무다. 주석이 절대로 비밀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허 따지예(大姐 대저; 허쯔전) 에게 주석을 만나러 간다고 하지 마시오. 혹시 감정이 격해져 발병할 수도 있어요. 주석이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양상쿠이는 거듭 장칭이 알면 시끄러워지므로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산수이징은 7월 8일 허쯔전을 대동하고, 여산으로 올라가 회의 참석자들이 묵고 있는 숙소 쪽과는 다른 지역인  한동(涵洞 함동) 왼쪽의 28호 집에 도착했다.

 

루산의 해발 1000미터 남짓한  분지일대는 19세기 때부터 중국에 온 유럽과 미국인들이 여름 피서지로 별장촌을 건설해 유럽풍의 크고 작은 별장이 수백 채 들어서 있다. 마오가 묵고 있는 180호 집 ‘메이루(美廬 미려)’는 영국 여성 바루이(巴瑞 파서)가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에게 선물한 별장이다. 쑹메이링의 여산 별장이란 뜻으로 ‘메이루’라고 불렀다.

 

7월 9일 밤 9시, 수이징은 허쯔전을 수행해 마오가 있는 ‘메이루’에 도착해 2층 경호원 당직실로 들어갔다.

수이징은 이곳에서 대기하고 경호원이 허쯔전을 마오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때 마오의 나이 66살로 인생 황혼기였다. 1시간 정도 지난 뒤 경호원 당직실로 벨이 울렸다. 경호원이 마오의 방으로 들어가 허쯔전을 부축해 당직실로 들어 온 뒤 주석이 찾는다고 수이징에게 전했다.

 

마오의 방에 들어 선 수이징은 마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금방 알아챘다. 마오는 수이징에게 “안되겠다. 머리가 좋지 않다. 말이 잘 안 통한다”며 한 숨을 내쉬었다. 마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창백했다. 마오가 수이징에게 말했다.

 

“허쯔전이 너무 감정이 격해 있다. 당신이 그의 감정을 잘 살펴야 한다. 내일 허쯔전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라. 한 걸음도 허쯔전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지금 허쯔전은 이미 내가 산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바깥에 나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겁난다. 그럼, 좋지 않다. 옌안 시절에 아는 사람이 많다. 당신이 꼭 곁에 있어야 한다.”

“주석, 마음 놓으세요. 제가 한 걸음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잘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허쯔전이 수면제가 들어 있는 3개의 조그만 약병을 가져갔다. 대단히 위험하다. 많이 먹으면 사고 난다. 당신이 방법을 잘 생각해 수면제 약병을 회수해야 한다.”

 

수이징은 묵고 있는 별장으로 돌아와 허쯔전에게 주석을 만난 소회를 물었다.

“따지예(大姐 대저; 큰언니), 마오 주석이 많이 변하셨습니까?”

“다른 모든 것들이 전과 같다. 많이 늙으셨다. 내가 보기에 많이 피곤해 보였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신다. 수면제도 너무 많이 복용하고-”

 

수이징은 마오의 부탁대로 허쯔전을 잘 구슬러 약병을 회수했다. 허쯔전과 수이징은 다음날 난창으로 돌아왔다. 마오와 허쯔전의 만남은 옌안에서 헤어진 뒤 22년만의 첫 만남이자, 이승에서의 영결(永訣)이 됐다. 혹자는 여산회의가 파국으로 치달은 한 원인 중의 하나로 허쯔전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입어 상심한 마오의 정신적 충격을 보태기도 한다.

 

363) 彭德懷廬山發言; ’大躍進’毛澤東也有責任 于幼軍 羊城晩報 人民網
364) 毛澤東賀子珍後的失望心情影響到廬山會議? 人民網 文史頻道

-------------------------------------------------------------------------------------------------------------------------------------------------------

 

157. 펑더, 편지로 ‘삼면홍기’에 대한 애국충정 전달

 

여산회의는 시간이 갈수록 ‘삼면홍기’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펑더화이와 장원톈은 담을 사이에 둔 숙소에 배정됐다. 때문에 회의가 끝나거나 식사 후, 또는 산책을 하다 자연스럽게 만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면 ‘좌’경  편향성으로 인민들을 광적으로 몰아붙이는 행태에 우려를 표시했다.

 

당시 철강을 생산하겠다고 9천만 명의 인민들을 동원해 집 뜰에다 수백 만 개의 흙으로 만든 작은 용광로를 만드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함량미달의 원시적 제철방법의 해프닝은 농촌인력의 일손 부족을 가져와 농업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악영향을 끼쳤다.

 

또 연료용 나무와 철광석을 찾아 전국토를 헤집고 다녀 산림자원을 훼손하고 고갈시켰다. 이런 광풍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국가적 낭비를 초래해 국가경제를 거덜 내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다. 펑더화이와 장원톈은 또 당내 민주집중제 문제를 걱정하고, 스탈린이  만년에 저지른 과오와 마오의 반 민주의식 등을 토론하기도 했다. (주석 365)

 

마오는 비서들을 통해 그날 그날 배포하는 회의내용을 추려 실은 ‘간보(間報)’를 통해 회의 진전 상황을 파악하고, 이러저런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마오는 7월 10일 조장회의 연설에서 당 밖의 우파들을 부정하고 일부 간부들이 지난해 대약진이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고 우려하는 것을 비판했다. 마오는 대약진은 총체적으로 볼 때 잃을 게 없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 운동에 나타난 문제점은 이미 점차적으로 해결됐다는 등의 낙관적 전망을 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좌’경 편향적 과오를 바로잡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언급하지 않았다. 회의 참석자 다수들, 특히 펑더화이나 장원톈 등은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마오는 이날 회의에서 15일에 여산회의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펑더화이(왼쪽)와 마오쩌둥

 

펑더화이는 ‘좌’경의 과오를 철저하게 바로잡지 않고 회의를 마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하며 번민하고 노심초사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고민을 하다 마오의 비서를 지냈던 저우샤오저우(周小舟 주소주)에게 자문을 구했다.

 

펑더화이는 “주석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마오의)개성 때문에 잘못될까봐 이야기하기 겁난다”고 말했다.

저우샤오저우는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펑더화이가 주석에게 직언을 할 수 있도록 권했다. 저우샤오저우는 “우리들이 주석과 이야기 할 때 대단히 편안하게 이야기 한다”며 격려했다.

 

펑더화이는 다음날 마오를 찾아가 이야기할 내용을 밤새워 준비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마오를 면담하러 찾아 나섰다.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아직 논의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데 회의가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거듭 생각했다. 회의 참석자들의 인식도 일치하지 않고 있었다.

 

‘좌’경 편향성 문제를 그대로 놓고 ‘삼면홍기’ 운동을 벌이면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으로 펑더화이는 확신했다. 마오의 들뜬 머리를 식혀야하는 직언(直言)이 필요했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마오를 움직여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펑더화이는 뼈가 목구멍에 걸린 듯 말을 내뱉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오가 묵고 있는 ‘메이루’에 도착한 펑더화이는 집을 지키고 있는 초병에게 마오의 기상여부를 물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대답이었다. 마오의 잠습관은 중공 영도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새벽녘까지 일을 한 뒤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일단 잠에 떨어지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펑더화이는 이미 전쟁이 끝났고, 여산의 수려하고 그윽한 분위기에 속에 편안하고 포근한 잠을 이룰 수 있는 만큼, 일어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오의 잠습관은 여전했던 것이다. 펑더화이는 하릴없이 서성거리다 가볍게 탄식을 내뱉고 천천히 뒤 돌아섰다.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지만 이때 마오가 일어나 펑더화이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했다면? 많은 당사연구가나  역사학자들은 신중국의 퇴보적 역사발전과 문화대혁명의 처참한 비극을 막지 않았을까 하는 애석한 생각들을 토해내고 있다.

 

또 최소한 펑더화이의 개인적 삶이 처참하게 무너져 참혹하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는 냉엄한 현실의 집적물(集積物)이다. 인간이 주체적 의지로 역사를 열어나가지만, 때론 우연과 필연의 교직(交織)이 역사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숙소로 돌아 온 펑더화이는 말 대신에 글로 마오에게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기로 마음먹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주석’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펑더화이가 새벽녘까지 쓴 것으로, 구구절절 애국충정과 강직한 품성이 녹아있는 간언(諫言)이었다.

장장 4천자에 이른다. 편지 말미에는 ‘경례(敬禮)!’ 펑더화이로 끝을 맺고 있어 지금도 중국인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이랬다. (주석 366)

 

“주석, 이번 여산회의는 중요하다. 나는 서북 소조(小組)에서 몇 차례 이야기했다. 소조에서 전부 이야기하지 못한 일단의 의견을 써서 보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단지 내가 단순해 사람들이 장비(張飛)로 부를 만큼 확실히 거칠고, 세밀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때문에 (이 글이)참고가치가 있는 지 여부를 헤아려 살피시기 바란다. 타당하지 않으면 번거롭지만 가르침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허두를 뗀 펑더화이는 글 형식을 갑(甲)과 을(乙)부분으로 나눠 기술했다.

갑(甲) 부분은 펑더화이가 긍정한 ‘삼면홍기’의 정확한 노선과 성과, 그리고 결점과 시행착오를 열거한 뒤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펑더화이는 “대약진의 성과는 긍정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정확하다. 국민경제의 성장속도는 세계 각국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대약진을 통해 기본적으로 더 빨리, 더 생산적 정책인 총노선은 정확했다”고 서술했다.

 

인민공사와 관련해 펑더화이는 “위대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농민들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정확한 길을 더욱 빠르게 건설하도록 하고 있다. 소유제 문제에 대한 혼란이 있지만 심각한 현상은 공작 추진과정에서 나타나는 결점과 잘못”이라며 이를 시정할 것을 제시했다.

 

펑더화이는 전 국민 강철 제련과 관련해 “흙으로 만든 조그만 용광로에서 철을 생산한다며 물력과 재력, 인력을 낭비하면서 큰 손실을 일으켰다. 그러나 적지 않은 기술 인력을 배양하고 수많은 간부들이 운동 중에 단련되고 기술이 제고됐다. 비록 학비(20여 억 위안)를 지출해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고 평가했다.

 

편지의 을(乙) 부분은 갑(甲)부분 보다 지면을 더 많이 할애했다.

어떻게 공작 과정에서의 경험과 교훈을 얻을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강조했다. 펑더화이는 “정치우선은 경제법칙을 대신할 수 없다. 경제 공작과정에서의 구체적 조처는 더욱 대체할 수 없다. 정치우선과 경제 공작과정에서의 확실한 유효 조처는 양자 모두 중요하다. 편중하거나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편지를 쓴 목적은 마오를 통해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좌’경 편향성을 바로 잡고, 경험과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펑더화이가 편지글을 ‘참고용’으로 한 것은 당의 조직과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고, ‘삼면홍기’의 결점과 잘못을 서술한 것도 마오 스스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펑더화이가 경험과 교훈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1차 정저우(鄭州 정주)회의 이래 마오쩌둥의 주재로 추진하고 있는 ‘좌’ 편향  정책을 오른쪽으로 클릭해 주기를 바라며 내비친 불만이었다.

 

365) 彭德懷廬山發言; ’大躍進’毛澤東也有責任 于幼軍 羊城晩報 人民網 彭德懷的意見書; 毛澤東爲何握了三次天才發? 權延蘇 人民網-文史頻道
366)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 統 人民網 文史參考 彭德懷的意見書; 毛澤東爲何握了三天才發? 權延蘇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58. 마오 ‘펑더의 편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펑더화이는 ‘좌’ 편향적 정치사상의 근본 지도노선과 방침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좌’적 과오를 범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 지점에서 마오가 7월 10일 연설한 내용과 펑의 해법이 크게 이견을 보이고 있었다 마오는 연설에서 이미 ‘반좌(反左)’적인 분위기로 ‘우경(右傾)’정서를 이끌어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마오는 펑더화이가 지적한 “소자산 계급의 열광성은 우리들이 쉽게 ’좌’적 잘못을 저지르게 하고”, “철강 생산에 있어서 유실유득(有失有得;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에서 ‘실(失)’을 ‘득(得)’ 보다 앞서 쓰는 등의 글귀를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여산회의 참석에 앞서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고 흐루시초프와 회담하고 귀국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마오는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삼면홍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해 좋지 않게 보고 있는 터였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좌’경 편향성 과오의 글을 흐루시초프와 연계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다.

 

펑더화이가 이 편지를 쓴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펑더화이가 일단의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이런 태도가 당면한 형세와 대국(大局)에 어떤 후과를 가져올 것인가? 마오는 골똘히 이러저런 생각을 하다 분노를 터뜨렸다.

 

“도대체 무얼 하자는 것인가?” 마오는 자신이 ‘좌’경 편향성과 관련해 형세를 바라보는 해법의 불일치를 여러 차례 이야기하면서 단결을 강조했다. 그런데 펑더화이를 비롯한 일단의 사람들이 들으려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의 속내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주석 367)

 

마오는 펑더화이의 편지를 받은 지 3일 째 되는 날인 16일, 펑의 글을 인쇄해 회의 참가자들에게 참고용으로 배포하도록 지시하고 ‘펑더화이 동지의 의견서’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런 뒤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이 편지의 성질을 평론할 것’을 제기했다.

 

마오는 이날 갑자기 여산회의를 1주일 연장하고, 베이징에 있는 펑전(彭眞 팽진), 천이(陳毅 진의), 황커청(黃克誠 황극성) 등 영도들에게 여산회의에 참가하도록 긴급지시를 내렸다. 회의 참가자들은 돌연한 회의연장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보수집에 동분서주했다. 베이징에 있다가 17일 여산회의에 참석한 총참모장 황커청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산에 올라와 막 숙소에 들어갔을 때 펑더화이가 마오 주석에게 보냈던 편지를 나에게 보여줬다. 나는 자세히 훑어본 뒤 말했다. 편지에서 제기한 의견에 나도 찬성한다. 그러나 글을 쓴 방식이 좋지 않다. 글 중에 제기한 방법이 자극적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고 물었다. 펑더화이는 실제상황이 그렇게 엄중하다. 회의 참석자들이 예민한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렇게 썼다고 말했다. 나는 당신은 항상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당신과 주석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오지 않았나.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비교적 깊은 관계다. 이런 말을 어찌 주석과 대화를 하지 않고 구태여 편지로 썼느냐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자신의 개인 편지를 마오가 ‘펑더화이 동지의 의견서’라는 표제를 붙여 회의 참가자들에게 회람시킨 데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펑은 개인 편지로 사람들에게 토론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마오가 무슨 뜻으로 회람을 시켰는지 의아해하면서 분노와 불안이 교차했다.

 

회람한 참가자들은 다수가 펑더화이의 의견이 실제상황에 부합하다며 지지의 뜻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소수는 펑더화이의 해법에 반대하고 일부 용어를 들어 질책했다. 다수와 소수의 견해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토론은 쟁론으로 번져 더욱 격렬해 지기 시작했다. 편안한 기분으로 생동감이 넘쳐흘렀던 ‘신선회’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면서 경직된 회의로 돌변했다.

 

마오는 7월 17일 오후 다시 자신의 전, 현직 비서인 저우샤오저우, 저우후이(周惠 주혜), 리루이(李銳 이예), 후챠오무, 톈자잉 등 이른바 ’수재(秀才)’ 그룹을 소집해 회의 진행상황 등에 대해 청취했다.

 

마오는 “총노선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으나 꼭 대답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마오는 이어 “내가 보기에 옹호하는 사람이 100분의 70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옹호자 중 진정한 골간은 100분의 30이 되지 않고, 대부분은 대세를 따른다”고 말했다. (주석 368)

 

회의 진전 상황의 정보가 부단히 마오가 있는 곳으로 전해졌지만 마오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펑더화이의 편지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지 확실한 통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찬성 숫자가 확실히 적지 않은 것 같았고, 동북조는 거의 찬성했다는 정보가 날아왔다.  

 

황커청과 저우샤오저우, 장원톈의 발언이 급기야 마오를 격노케 했다. 황커청은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이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베이징에서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을 처리하느라 애초 여산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황커청은 19일 소조(小組)회의 발언에서 펑더화이의 의견서를 지지했다. 황커청은 “펑더화이의 편지는 전체적 정신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발언에서 공사제도는 우월하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잘 됐는가 아니면 잘못됐는가? 나는 잘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멀리 내다볼 때 잘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볼 때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저우샤오저우도 이날 “펑쫑(펑더화이)의 편지에 완전히 동의한다. 전체적 정신이 좋다. 제기방식, 분별, 용어 등을 헤아릴 수 있다. 각자들은 공작방면이 서로 다르고, 접촉사물도 같지 않기 때문에 해법도 서로 다르다. 모두가 함께 토론해 각 방면의 문제를 끄집어 내 분석을 통해야만 일치할 수 있다”고 했다.

 

펑더화이는 이날 회의 참석자 모두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편지글의 배경을 설명했다. ‘의견서’는 주석에게 참고용으로 쓴 것으로 황급하게 썼다. 글 중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총노선의 정확성에 대해 조금도 회의(懷疑)하지 않는다. 모두들 우리들의 당이 소자산계급의 정당이라고 내가 말한데 대해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펑더화이는 ‘소자산계급의 열광성’과 관련해 “지난해 하반기 당내에 일단의 ‘좌’ 편향성이 확실히 두드러졌다.

 

예를 들면 허풍이 생겨났다. 과학을 대신한 열정만으로 일거에 전국의 모든 사람이 돈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지방에서는 며칠 사이에 수없이 많은 집들을 철거해버렸고, 짧은 시일 안에 문맹을 퇴치하겠다는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좌’ 편향성이 생겨나 소자산계급의 열광성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주석 369)

7월 21일 화동(華東) 소조에서의 장원톈(張聞天 장문천)발언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마오의 비서이자 중공중앙 서기처 후보 서기인 후챠오무는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칠 것을 예감하고 장원톈에게 발언 전날 짧게 발언할 것을 권유했다.

 

장원톈은 1935년 1월 준이(遵義 준의)회의 때 왕자샹과 함께 보구를 쳐버리고  마오를 지지해 마오가 중공의 최고 영도자가 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장원톈은 이때 중공중앙 총서기가 됐으나 옌안 정풍운동 때 마오의 배척을 받고, 핵심 영도부에서 밀려났다. 당내의 뛰어난 이론가였으나 마오의 미움을 사, 건국 후 초대 소련대사와 유엔 중국대표부 단장을 거쳐 저우언라이 밑에서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맡고 있었다.

 

장원톈은 이론가답게 장장 3시간 동안 대약진의 성과, 결점의 후과, 생산결점의 원인, 주관주의와 편면성, 정치와 경제, 민주와 집중, 펑더화이 동지의 의견서에 관하여 등 13개 문제로 나눠 발언을 했다. 발언은 대약진 이래 나타난 엄중한 문제와 후과(後果)를 이론적으로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설명했다. 장원톈은 생산 결점의 원인에 대해 “경험부족으로만 말해서는 안 되며, 생각하는 방법과 기풍을 연구 토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황당무계한 주관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 정치를 우선해서는  안 되며, 객관적인 경제규율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원톈은 “목표에 달성했다는 성취감은 사람들의 머리를 뜨겁게 하고, 오만하고 자만하게 만들어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당내에 민주적인 기풍을 확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내에서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소통부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주석 370)

 

“주석은 다른 의견을 개진하기 위하여 능지처참 당할 각오를 하고,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요구만 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다른 일면은 영도들이 그런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아래에서 마음껏 다른 의견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동적이고 활발하게 충분히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국면을 형성해야 한다. 겁날 게 무엇이 있나? 진정으로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군중노선을 견지하는 사람은 꼭 (다른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하고, 반드시 들으려고 해야 한다. 다른 일면의 의견을 듣는 것은 군중노선을 견지하는 것이고, 실사구시를 견지하는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다. 마오 주석은 군중노선, 실사구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말하기는 쉬우나 실제 행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진정한 것은 이런 기풍을 배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장원톈이 마지막으로 펑더화이의 편지에 지지를 표하고, 글 속에서 언급한 ‘소자산계급의 열광성’, ‘각 부문에서의 허풍과 우쭐증’에 관해 펑더화이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때 ‘좌’경 편향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불시에 말참견을 하거나 발언을 중단시켜 회의장의 분위기가 아연 험악해지기도 했다.

 

장원톈은 당시 이런 상황을 자신의 비서에게 기록하도록 지시해 훗날 ‘장원톈 문집’과 ‘장원톈 선집’에 ‘여산회의에서의 발언’ 제목으로 회의 상황이 수록됐다. 장원톈의 이날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소수의 ‘좌’파 쪽 사람들은 장원톈을 강력 비판했다. 장원톈의 발언은 마오의 특별한 주의를 끌었다.

 

36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68)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 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 統 人民網 文史參考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揭秘廬山會議; 前後兩次都是中途變局和沒完沒了的檢討 錢伯城(文史學者) 人民網
369) 揭秘廬山會議; 前後兩次都是中途變局和沒完沒了的檢討 錢伯城(文史學者)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70) 張聞天在廬山會議上的抗爭; 這樣以後誰還敢講話?! 聞 集 人民網

-------------------------------------------------------------------------------------------------------------------------------------------------------

 

159. 마오, 펑더화이 겨냥 분노의 연설에 분위기 험악

 

마오는 7월 22일 상하이 시장 커칭스(柯慶施 가경시), 리징취웬(李井泉 이정천) 등 몇 사람을 불러 대화를 나눴다. 커칭스와 리징취웬은 ‘좌’ 편향성을 바로 잡는 문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커칭스는 한술 더 떠 마오를 충동질했다. 커칭스는 지금은 마오 주석이 회의장에 나아가 의견을 개진해 버팀목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오가 산산이 흩어진다. 펑더화이의 편지는 총노선에 대한 정면 대항이고, 마오 주석에 대한 대항이라며 불씨에 풀무질을 해댔다. 마오는 이날 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와 대책회의를 열고 다음날(23일) 마오가 직접 회의장에 나가 연설할 내용들을 준비했다. (주석 371)

 

마오는 7월 23일 오전 대회에 참석해 반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오랫동안 이야기 했다. 내가 한 시간정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괜찮겠소? 수면제를 세 번 먹었으나 잠을 이룰 수 없다. 내가 동지들의 발언기록과 문건을 보고, 일부 동지들과 이야기를 했다. 두 가지의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또 하나는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과 같은 부류다. 일부분의 동지들은 압력을 받고 있다. 즉, 좋지 않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좋은 말만 하기를 바란다. 좋지 않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동지들에게 들어야 한다고 권한다. 좋은 말이나, 좋지 않은 말이나 모두 말이다. 모두 들어야 한다.”

 

“현재 당 안팎에서 우리를 협공하고 있다. 우파들은 말한다. 왜, 진시황은 쓰러졌는가? 만리장성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들은 톈안먼(天安門 천안문)을 수축하고 있지만(사회주의 건설), 붕괴될 것이라고 한다. 우파들의 이야기다. 우리들은 군중을 이탈했다고 한다. 잠시다. 군중들은 역시 우리들을 옹호한다. 현재 군중과 우리들과의 결합은 아주 좋다. 소자산계급의 열광성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광범한 군중운동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소자산계급이 아니다. 빈농, 하중농(下中農), 무산계급, 반 무산계급이다. 이렇게 긴급한 고비에서 동요하지 말라. 일부 동지들은 동요하고 있다. 대약진, 총노선, 인민공사는 정확하다. 방향이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 지 그것을 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유실유득(有失有得)’이라고 했는데 ’득(得)’을 뒤에 놓았다. 헤아려 볼 때 만약에 모자를 씌운다면(죄나 딱지를 부치는 것) 이것은 자산계급의 동요성이다.”

 

마오의 이야기 중 ‘자산계급의 동요성’은 펑더화이가 편지에서 쓴 ‘소자산계급의 열광성’에 대한 마오의 되치기이며, ‘유실유득’도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를 겨냥한 것이다.

 

“만약에 10건의 일을 처리하는데 9건이 나쁘면 반드시 망한다. 그때 나는 농촌으로 들어간다. 농민을 이끌고 정부를 엎어버리겠다. 당신들 해방군이 나와 같이 가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조직한다. 따로 해방군을 조직한다. 내가 볼 때 해방군은 나와 함께 갈 것이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일순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오가 국방부장인 펑더화이와 총참모장 황커청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펑과 황을 배제할 수도 있다는 함의(含意)였다. 전제적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마오의 공갈, 협박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일부분의 동지들은 말을 하는 방향에 주의를 해야 한다. 말하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정확하지만 부분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런 동지는 내가 볼 때 우파는 아니고 중간파다. 좌파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못에 찔려 머리에서 피가 흐르면 근심걱정으로 애달아 안정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동요한다. 중간파에 선다. 또다시 1956년 하반기와 1957년 상반기 때 잘못을 범한 동지들의 길로 간다. 그들은 우파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우파의 가장자리로 던져버렸다. 우파와 3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우파들은 이런 논조를 대단히 환영한다. 이런 유의 동지들은 ‘(우파의)가장자리 정책’을 취하게 되는 데 상당히 위험하다. 믿지 말고 앞을 바라보라.”

 

마오의 발언은 ‘우파와의 거리가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비유를 들어 펑더화이의 편지에 동의하는 참석자들에게 경고음을 보냈다. 그런가하면 애초 여산회의에서 어느 정도 바로 잡으려했던 ‘좌’경 편향성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난데없이 ‘우파’ 문제가 불거지면서 참석자들은 사색(死色)이 되어 깊은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사상 이데올로기 투쟁은 ‘붉은 피’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주석 372) 

 

“나는 두 가지 죄가 있다. 하나는 강철 1,070만 톤 문제다. 철강 생산은 내가 결심한 것이다. 죽일 놈은 나다(始作俑者 시작용자). 주요 책임은 내게 있다. 또 하나는 인민공사다. 인민공사는 전 세계가 반대하고, 소련도 반대했다. 인민공사는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널리 보급한 책임이 있다. 동지들 스스로의 책임을 모두 분석하기 바란다.”

 

마오의 연설은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무언가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하고 음습한 기운이 참석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커청은  마오의 연설을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의 연설은 우리들의 머리를 한 방 가격한 것이었다. 모두들 크게 놀랐다. 내가 주석에 대한 이야기는 말이 통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펑더화이의 부담은 엄청 컸다. 우리들 두 사람은 모두 저녁을 먹지 못했다. 숙소가 같은 동에 있었으나 얘기하는 것을 피했다. 나는 주석이 왜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좌’경 편향성 교정(矯正)회의가 ‘반우(反右)’ 회의로 바뀌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오가 연설을 끝내고 회의장을 떠날 때였다. 펑더화이가 마오의 앞으로 나와 “주석, 그 편지는 내가 참고용으로 써서 보낸 것입니다. 왜, 인쇄해 배포했습니까?”라고 언짢은 기색으로 항의했다. 마오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당신도 인쇄해 배포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펑더화이는 그날 쓴 수기에서 “나는 당시 격동하는 감정을 억제하고 말다툼을 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적었다.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오는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 커칭스, 타오주(陶鑄 도주), 왕런중(王任重) 등과 함께 언덕에 있는 강당을 떠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앞서  내려가던 펑더화이가 뒤돌아 보다 마오와 눈길이 마주쳤다. 마오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주석 373)

 

“펑쫑, 우리 얘기 좀 하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펑더화이는 눈을 치뜨고 한번 노려보더니 멈추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외쳤다.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뭐, 좋은 얘기도 아니면서.”

마오는 얼이 빠져 멍청히 서 있다가 몸을 반쯤 굽힌 채 펑더화이를 쳐다보면서 다시 말했다.

 

“뭐, 좋은 얘기가 아니더라도 앉아서 얘기하자.”

“무슨 좋은 얘기 있습니까? 뭐, 좋은 얘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펑더화이는 큰 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하고 멈추지 않은 채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가버렸다.

마오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본 마오의 경호대장 리인챠오(李銀橋 이은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374)

 

“많은 중앙의 수장들이 지켜보는 면전에서 펑더화이가 주석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자 주석은 대단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공분(公憤)을 일으켰다. 마오 주석이 숙소에 도착한 뒤 원래는 산을 내려갈 준비를 했었다. 나중에 일부 수장들이 똘똘 뭉쳐 일을 잘 해보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석에게 말한 이야기가 반영됐다. 밤에 하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 전체회의를 소집해 노선문제 해결을 토론했다.”

 

371)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372)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73) 彭德懷與毛澤東的’失之交臂’ 人民網
374) 彭德懷與毛澤東的’失之交臂’ 人民網

-------------------------------------------------------------------------------------------------------------------------------------------------------

 

 

160. 펑더화이 결국 '토사구팽' 신세로 전락

 

 

황혼 무렵, 마음이 무겁고 산란한 펑더화이는 이날 발생했던 이런저런 일을 곱씹으며 산책을 하다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펑더화이에게 오전에 있었던 마오의 발언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펑더화이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일이 지나고 나면 자연히 밝혀진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은 “조금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주석은 발언에서 정치, 조직, 노선상으로 이미 고도의 원칙을 제기했다. 당신은 당과 인민에 대해 어떤 것이 이로운지 고려해야 한다. 서면으로 발언(자아비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좋은 뜻으로 펑더화이에게 권유했다. 펑더화이는 “지금 대단히 피곤하다. 글이 써질 것 같지도 않고, 명확하게 쓸 수도 없다”고 응답했다. 펑더화이는 숙소에 돌아와 필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주석 375)


“16일 중앙 판공청이 (펑더화이의 편지를)인쇄해 배포한 뒤 22일까지 각 소조가 6일 동안 토론을 벌였다. (회의 참석자들이)편지의 내용에 대해 완전히 동의했다. 단지 한 동지가 반대했고, 한 동지가 기본상 동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발언한 대다수의 동지들은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주석이 편지 내용에 있는 일부의 문제를 고려해 주기를 희망했는데 주석은 문제를 이렇게 매우 엄중하게 언급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현실상황에서 벗어난 ‘고도의 원칙’을 이야기 했다. 이로 인해 경제건설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좌’경 조급성으로 돌진하는 ‘돌격주의’와 다시 맹렬하게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는 노선투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손실을 조성하고, 더욱 엄중한 균형파괴로 당 내외에 일정한 기간 혼란을 일으키며, 생산과 인민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펑더화이는 이런 걱정으로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밤을 새다시피 했다. 펑더화이는 “내가 비록 주석과 비교적 늦게 만났지만 30여 년을 같이 지냈다. 내 편지가 이렇게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째서 나를 찾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라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펑더화이는 “만일 마오쩌둥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위신이 손상을 입으면 국제 무산자계급 운동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곱씹던 펑은 자아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한 애초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날이 밝자 펑더화이에게 호의적인 두 사람이 찾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전체적 국면을 생각해 자아비판을 할 것”을 완곡하게 권유했다. 그들과 펑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헤어졌다. 감격한 펑더화이는 자아비판을 하기로 결심했다.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각 소조 회의에서 마오의 관점을 충실히 따르는 인간 하이에나가 되어 펑더화이와 그를 지지했던 장원톈, 황커청, 저우샤오저우에 대해 무차별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의 근본노선과 마오의 정확한 영도를 반대하는 ‘반당집단’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이에나들은 증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형체도 없는 바람과 그림자를 쫒아 다니며 ‘물건’을 만들어야 했다. 이들은 펑, 황, 장, 저우를 실체도 없는 ‘군사구락부(軍事俱樂部)’를 만든 ‘반당집단’으로 몰아세우며 굴비 엮듯 줄줄이 엮기 시작했다.


오동잎 한 이파리가 떨어지면 얼른 가을이 온 것을 알아야 했다(梧葉一落 知天下秋 오엽일락 지천하추). 그랬다. 어제까지만 해도 펑더화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줄을 바꿔 서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권력을 좆는 자들의 비애(悲哀)였다. 다투어 자아비판을 하면서 펑더화이 등과 명확한 선긋기를 선언했다. 회의는 ‘반우(反右)’와 펑더화이 등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 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마오는 부지런히 펑더화이 등을 궁지에 몰아넣을 만한 자료들을 인쇄해 회의 참가자들에게 배포했다. 그 중에는 흐루시초프가 중국 인민공사를 비판한 신화사 보도와 국내외에서 ‘삼면홍기’를 비판한 자료들도 들어 있었다.


중앙 정치국 상임위원회는 7월 28일 8기8중전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마오는 이날 중공중앙 상임위원회를 주재하면서 펑더화이에게 수십 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3할 협력, 7할 불 협력’으로 몇 차례 당내 노선투쟁 중 모두 잘못된 노선에 서 있었다고 펑을 비판했다. 이런 잘못된 노선으로 군벌주의, 대국주의와 몇 차례의 과오노선을 걸었다고 질타했다. 펑더화이는 최소한 ‘5할 협력, 5할 불 협력’ 정도는 했다며 마오에게 불만스럽게 이야기 했다. (주석 376) 


곁에 있던 린뱌오(林彪 임표)가 펑더화이 공격에 나섰다. 린뱌오는 “군사력을 증강한 것은 음모가이고 야심가이며, 위선자를 증명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은 단지 마오쩌둥만 대영웅이고, 누구도 영웅이 아니다”라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한때 펑더화이를 ‘나의 유일한 대장군’이라고 극찬했지만, 지금은 과오만 헤집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중국공산당 혁명과정에서 수십 년 동안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5년 신중국 건국 후 논공행상으로 10대 원수를 선발할 때 ‘인민해방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더(朱德 주덕) 다음인 서열 2위의 원수(元帥)가 됐다.


마오와는 1928년12월 징강산(井崗山 정강산)에서 만나 장제스의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으로 마오와 주더가 푸젠성 변계지역으로 철수할 때 홀로 고군분투하며 징강산을 지키기도 했다. 마오가 항미원조(抗美援助)를 결정할 때 군부에서 린뱌오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령들이 반대했다.


마오는 서북국 1서기이자 서북군구 사령관인 펑더화이를 급히 불러들여 그를 방파막이로 내세워 군부의 반대를 막았다. 펑더화이를 ‘항미원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지금은 무장혁명의 시기가 아니라 ‘사상혁명’의 시기였다. 펑더화이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가 되고 있었다. 공로는 필요 없고 과오만 부풀려야 했다. 권력은 잔혹 무비한 투쟁을 부르고 있었다.


마오는 역시 책략(策略)에 능했다. 8월 1일 초대 소련대사를 지낸 왕자샹(王家祥 왕가상)에게 비준글로 쓴 한 통의 편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마오는 “백화제방(百花齊放), 인민공사, 대약진 등 이 3건은 흐루시초프 등이 반대하고 혹자들은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피동적이었고, 우리들은 대단히 능동적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 3건은 전 세계와 당 내의 대규모 반대파와 회의파에 대해 (공격) 작전을 펴야한다”고 반응을 떠보았다.


마오는 얼마 전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면서 흐루시초프와 회담한 펑더화이와 소련대사를 지낸 장원톈을 흐루시초프와 결탁해 ‘외국과 내통’ 했다는 큰 모자(죄명)를 씌우려 획책하고 있었다. 신선회에서 돌발적으로 파생한 8기8중전회가 8월 2일 오후 숨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열렸다. 회의는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 147명, 회의 참관자 15명 등 모두 1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375)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376)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61. 중국 좌경사상 범람…권력투쟁 확대 일로


마오는 8월 2일 열린 8기8중전회 개막식에서 두 가지 문제를 거론했다. 하나는 농공업 부문의 각종 생산목표의 지표를 재조정하는 문제였다. 또 하나는 노선문제였다. 그러나 회의의 핵심은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와 장원톈(張聞天 장문천)등 이른바 ‘반당집단’에 대한 확실한 분쇄였다.

 

마오는 연설에서 “현재 분열적 경향이 있고, 이미 뚜렷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우리들은 9개월 동안 ‘좌(左)’에 대한 교정 작업을 벌였지만 현재는 이 방면의 문제가 아니다. ‘반우(反右)’에 대한 문제다. 우경 기회주의가 당과 당의 영도기관에 미친 듯이 진공(進攻)하고 있다.

 

6억 인민의 기세 드높은 사회주의 사업을 향해 진공하고 있다”며 우경주의 타파를 선언했다. 회의 참가자들에게 펑더화이, 장원톈 등에 대한 공격을 교시한 연설이었다. 회의의 기조는 ‘반당집단의 분열활동’으로 정해졌다. 마오는 회의 전에 장원톈에게 조롱하는  투로 써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군사구락부(軍事俱樂部)’ 호칭을 사용했다. (주석 375)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군사구락부에 들어갔는가. 정말로 사물은 비슷한 것 끼리 모이고, 사람도 무리지어 나뉜다. 유유상종이다. 그대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 했는가? 그렇게 사면팔방으로 부지런히 힘들이며 어렵게 뛰어 그런 시꺼먼 단체를 찾았다. 정말로 보배로다!-나는 그대가 옛날 병이 도졌다고 생각한다. 옛날 학질의 원충을 멀리 떼어버리지 못해 지금 또 오한과 신열을 앓고 있다. 그대는 마르크스의 진리를 모두 잊어버리고 군사구락부로 뛰어 들어갔다. 정말로 문무(文武; 문은 장원톈, 무는 펑더화이를 일컬음)를 다 갖추어 돋보이는 도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두 글자로 말하노니  ‘철저하게 고칠 지어다(痛改 통개)’.”

 

마오는 장원톈에게 크게 불만을 터뜨렸다. 펑더화이와 함께 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기 때문이다. 8월 3일부터 10일까지의 회의는 펑더화이의 편지와 펑더화이, 황커청(黃克誠 황극성), 장원톈, 저우샤오저우(周小舟 주소주) 등이  정치국 확대회의 기간 동안 발언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루산(廬山)회의 기간 동안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한 내용과 수십 년 동안 당내투쟁의 행적을 뒤져 결점과 과오를 끄집어 내 집중 포화를 날렸다. 펑, 황, 장, 저우 등은 악다구니처럼 덤벼드는 '인간 하이에나'들의 압박과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이들은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양심에 반하는 자아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펑더화이는 당 중앙과 마오의 위신을 고려해 ‘하이에나’들이 요구하는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외국과의 내통’과 ‘군사구락부’ 문제에 대해서는 견결하게 부인했다. 마오는 8월 16일 ‘기관총과 박격포의 내력과 기타’의 글을 통해 “루산에서 벌어진 이번 투쟁은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과거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양대 세력이 대항했던 생사투쟁의 연속이다. 중국에서, 우리 당에서, 이런 유의 투쟁은 최소한 20년이 필요하다. 반세기를 투쟁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계급이 완전히 사라질 때 투쟁은 비로소 종식된다”고 밝혔다. 마오는 “어제의 공신이 오늘은 화근덩어리의 원흉이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며 펑더화이 등을 강력 비판했다.

 

8기8중전회는 8월 16일 ‘펑더화이 동지를 우두머리로 한 반당집단의 과오에 관한 결의’ 등을 통과시켰다. 8중전회는 “펑더화이를 우두머리로 한 반당집단은 루산회의 기간과 이전의 활동을 살펴볼 때 목적성을 갖고 준비와 계획을 한 조직적 활동이었다. 이런 활동은 ‘가오강-라이오수스 반당연맹사건’의 계속이고 발전”이라고 규정했다. 전회는 펑더화이를 ‘위선자, 야심가, 음모가’라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마오는 펑더화이가 ‘결의(決議)’를 통해 명확한 태도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펑더화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혁명을 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自殺)하지 않는다. 이후 공작(업무)을 하지 못하면 노동생산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 한다”고 3가지를 보증했다.

 

장원톈은 이날 조롱한 편지를 보낸 마오에게 편지를 띄워 “이번 대수술은 건강이 좋아지는 데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나는 충심으로 당신과 중앙의 다른 동지들이 도움을 준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나는 반드시 어제의 그런 반동의 나를 영원히 결별 하겠다. 당신의 많은 지도를 바란다”고 밝혔다. 마음에 없는 패자의 처절한 절규였다. (주석 376) 

 

주더(朱德 주덕)는 루산회의에서 드러난 비정상적 투쟁과 펑더화이 등에 대한 불공정한 처리에 절망했다. 주더는 루산회의가 끝난 뒤 주변인사에게 매우 격동적인 말투로 “누가 우리들이 한 밥솥에서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라고 믿겠는가?!”라고 허탈해했다. 당내에서 ‘인민해방군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는 주더는 마오의 전제적 독주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못내 한스러워했다. 이로부터 마오의 개인 전제와 개인숭배가 당내에 만연해지고 이후 좌경사상의 범람으로 심각한 권력투쟁이 확대일로를 걷게 된다.

 

375)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 統 人民網 文史參考
376) 彭德懷與毛澤東失之交臂 人民網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

 

162. 전국적 ‘좌’경 회오리에 마오 개인숭배 확대


 

46일간의 루산회의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9월 베이징에서 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렸다. 중앙은 펑더화이가 ‘외국과의 내통’과 ‘군사구락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아, 군대 사단이상 간부 1061명, 참관간부 508명이 참석하는 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해 펑더화이와 황커청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이 회의는 시종 비밀리에 진행됐다. 때문에 현재 이에 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 회의 참석자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이 많은 군 간부 중에 단지 베이징군구 참모장 중웨이(鍾偉 종위) 소장만이 정의(正義)를 내세워 펑더화이의 억울함을 해명하다 회의장에서 끌려 나가 ‘반혁명’분자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회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고급 장령들은 펑더화이를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대부분 펑더화이의 원칙적 근무태도나 거친 지휘기풍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장령들이었다. 이들은 사적 감정을 이때다 싶어 ‘끈 떨어진 상관’을 향해 종 주먹질을 해댔다. 원수 서열 3위인 린뱌오(林彪 임표)는 펑더화이의 추락을 자신의 권력기반 확충의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다. 일대 효웅(梟雄) 린뱌오의 독랄한 비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주석 377)

 

“이 사람은 아주 영웅주의고, 대단히 교만하며, 매우 오만방자해 사람을 깔보는 등 안하무인이다. 사람에 대한 평등한 태도가 없다. 아랫사람은 애들 대하듯 욕하고, 윗사람에 대해서는 존경하려 하지 않는다. 위아래 알기를 우습게 안다. 그는 야심이 매우 크다. 크게 한바탕 할 꿍꿍이를 갖고 있다. 큰 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날리고, 대권을 잡아 큰 자리에 앉아 명성을 날리고 싶어 한다. 죽은 뒤에는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 한다. 그는 대단히 날뛴다. 머리를 높은 곳을 쳐다보며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늘 대영웅을 생각한다. 마오 주석만이 진정한 대영웅이다. 그는 자신도 대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자고로 두 영웅은 공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마오 주석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펑더화이(왼쪽)와 장원톈

 

 

십자포화를 맞은 펑더화이는 어쩔 수 없이 9월 4일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자아비판을 했다. 펑더화이는 “8기8중전회와 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나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폭로비판은 내가 잘못을 바로잡는 데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면서 “중앙이 내가 학습을 하거나 베이징을 떠나 인민공사에서 학습하면서 부분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다. 마오는 편지를 받은 뒤 펑더화이에게 전화를 걸어 자아비판 태도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나이가 많은 만큼 육체노동은 적합하지 않다. 시간 있을 때 공장이나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혼자 말한 뒤 펑더화이가 이야기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펑더화이는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으면서 마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마오는 9월 9일 펑더화이의  편지를 비준하는 글에서 “나는 열렬하게 펑더화이 동지의 편지를 환영한다. 그의 입장과 관점은 정확하고, 태도가 성실하다. 지금부터 철저하게 변해 다시는 큰 동요를 하지 않으면(작은 동요는 피할 수 없음) ‘즉시 부처가 될 수 있고’, 즉시 마르크스주의자로 바뀔 수 있다. 나는 전당 동지들이 펑더화이 동지가 편지에서 밝힌 태도를 환영할 것을 건의한다. 엄숙히 그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항상 진보하는 그에 대해 모두 환영을 표시한다. 이런 두 가지 태도는 우리들과 31년 역사를 같이 한 노 동지를 돕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마오는 비준 글을 전당에 배포했다. 이틀이 지난 뒤 마오는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비준 글과는 180도 다른 연설을 했다. (주석 378)

 

“동지들, 펑(더화이)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같이 가는 사람일 뿐이다. 음모를 꾸며 분열활동을 획책해 당의 규율을 위반하고 무산계급 전정(專政)을 파괴했다. 조국을 배신해 외국과 내통했다. 자고이래로 외국과 내통한 사람은 종래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

 

펑더화이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펑더화이는 당연히 국방부장직에서 해임 당했고, 린뱌오가 9월 17일 그 자리에 앉았다. 한편 루산회의를 마치고 8월 20일 베이징에 돌아 온 장원톈에게도 넘어야 할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 류잉(劉英 유영)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장원톈을 원망하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주석 379)

“당신은 외교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구태여 경제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발언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루산 발언으로 화를 초래하나?”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은 이미 벌어졌다. 사실상 내가 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빨리 밥을 먹지 못한다! 경제가 이렇게 내리막인데 인민들의 생활은 어떻겠는가? 머릿속에 많이 들어있고, 마음속에 할 말이 많은 데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공산당원이다. 마땅히 사실을 말해야 한다.”

 

장원톈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발언한 내용 가운데 사실이 아닌 게 어디 있는가? 루산의 연설에서 생각하는 방법과 민주적인 기풍을 이야기할 때 일부는 날카로운 부분이 있었으나, 이 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이 만년에 범했던 과오를 피하기 어렵다. 봉건사회에서도 임금의 안색이 흐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직간을 한다. 공산당원이 무엇이 두려운가? 만약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킨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는가? 당의 회의에서 어떤 의견이 있으면 모두 말하게 해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8월 24일 공안부 강당에서 외교부 당위원회 위원과 귀국한 대사들에게 루산회의 상황을 설명했다. 천이(陳毅 진의)는 이날 외교부문 회의(통칭 外事會議 외사회의)를 소집해 장원톈(당시 외교부 부부장) 비판대회를 열었다. 대회(大會), 소회(小會)를 열어 집중적으로 ‘반당집단’과 ‘외국과의 내통’ 문제를 들추어 강력 비판했다.

 

장원톈은 8월 28일 ‘나의 자아비판’의 글에서 “루산에서 펑더화이와의 대화중 ‘중앙 정치국회의 토론문제 때 다른 의견을 거론하기 쉽지 않다.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을 거론했다. (우리)두 사람은 ‘마오쩌둥은 개인이 말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집체영도가 부족하다. 스탈린의 만년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장원톈은 9월 5일 또 다시 2차 자아비판을 했다. 장원톈은 ‘나의 제2차 자아비판’의 글에서 “외국과의 내통 죄명과 관련해 ‘사상적인 관점’에서 소련공산당 영도자와 내가 ‘우리당의 총노선을 반대한다’는 ‘공통점’은 있다. 이것을 정치사상적으로 ‘외국과의 내통’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상, 즉 정보관계에서 내가 외국과 내통했다고 하면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장원톈은 9월 15일 외교부 부부장직을 박탈당했다. 이처럼 루산의 신선회는 급기야 우경기회주의 숙청의 처절한 계급투쟁으로 변질돼 360만 명 이상의 당 간부들이 조사를 받는 등 전국에 ‘좌’경 회오리가 몰아쳤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도 더욱 확대됐다. 졸지에 ‘반당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펑더화이와 마오의 관계는 루산회의 이전부터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마오는 ‘항미원조(抗美援助)’로 중국의 위신을 높인 펑더화이를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과 국방부장에 임명해 인민해방군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마오는 당이 군을 지배하지만 군부를 가장 중시했다. 군에 관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펑더화이의 권한이 강화되고 때론 마오의 지시를 충분히 수렴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나기도 했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점 다루기가 만만찮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마오가 루산회의 때 펑더화이에게 ‘3할 협력, 7할 불협력’ 했다고 비판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펑더화이가 1956년 11월 모(某) 부대를 시찰한 적이 있었다. 펑더화이는 벽에 붙어있는 ‘군인의 맹서’ 제1조에 ‘우리들은 마오 주석의 영도아래-’로 시작하는 글을 보았다. 펑은 “이 문장은 잘못됐다. 현재의 군대는 국가의 것이다. 어떤 사람의 영도아래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유물(唯物)주의자들이다. 마오 주석이 죽으면 누가 영도하는가? 고치라”고 지시했다. 펑은 또 1959년 1월 30일 병참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육체는 모두 죽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른다. 받들어 모시는 것인데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도 일만세(一萬歲)를 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의 연대에 이런 말은 일종의 '금기'를 깨는 처신으로 쉽지 않은 행위였다. (주석 380)

 

377)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 統 人民網 文史參考 
378)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 統 人民網 文史參考 毛澤東傳(1949-1976 下)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379) 張聞天在廬山會議上的抗爭; 這樣以後誰還敢講話 聞 集 人民網 
380)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廬山會議前後毛澤東與彭德懷鬪爭的歷史眞相 劉統 人民網  文史參考

-------------------------------------------------------------------------------------------------------------------------------------------------------

 

163. 펑더, 비극적 종말… 마오, ‘대약진’ 총체적 실패 자아비판

 

 

1958년 중공8대 1차 회의 때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당장(黨章) 개정을 보고하면서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이런 개인숭배 반대풍조가 공산권에 번져 국가의 위신 등을 고려해 중국에서도 당장을 손보자는 여론이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8대 회의는 이런 의견을 반영해 당장에 ‘당의 지도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이다’라고 규정한 내용을 삭제해 버렸다. 마오는 겉으론 용인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이때 당장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빼자고 제의한 사람이 바로 펑더화이였다. 펑의 제의에 류샤오치, 덩샤오핑이 찬성했다. 중공 당사(黨史)에서 대단한 사건이었다. 마오가 5월 6일 중공8대 2차 회의 연설에서 “당의 분열에 대처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 발언은 바로 당장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빼자고 주장한 펑더화이를 겨냥한 것이었다.

 

마오는 5월 25일 중공중앙 8기5중전회에서 수년 동안 양병(養病)하던 린뱌오를 펑더화이 보다 서열이 위인 중공중앙 부주석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에 임명했다. 처지가 묘해져 거북살스러워 하던 펑은 중앙에 국방부장 사직을 요청했다.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6월 9일 그 해 1월 난닝(南寧 남녕)회의에서 ‘반 돌격주의’로 마오한테 심한 비판을 받아 총리 사직을 요청한 저우와 펑의 문제를 함께 다뤄 모두 유임시켰다.

 

마오는 펑이 사의를 표시한 것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라고 여겼다. 펑더화이는 1959년 3월 상하이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다시 마오에게 사의를 표했다.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부총리 겸 국방부장으로도 부족한 것인가?”라고 심하게 쏘아 부쳤다. 펑은 할 말을 잃었다.

 

마오는 펑더화이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 후 미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마오와 펑더화이는 급기야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마오는 상하이에서 열린 국가계획위원회 공작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화제를 돌려 뜬금없이 펑에게 “펑더화이 동지, 당신은 내가 비판했다고 해서 나를 대단히 증오하고 있다. 당신을 비판한 것은 당신을 위해서다. 나는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당신, 펑더화이는 일관되게 나를 반대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는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나를 건드리면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을 그냥두지 않는다. 나는 나이가 많다. 뒷일을 해야 한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마오의 이런 경고는 펑더화이에 대해 매우 심각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펑더화이도 정치적으로 뭔가 위기를 느꼈으나 영문을 몰라 다른 사람들에게 “주석이 왜 나를 두드리느냐”고 묻기도 했다. 당시 총참모장인 황커청(黃克誠 황극성) 대장은 훗날 마오와 펑더화이의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381)

 

“이른 시기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주석이 펑더화이에게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라오쫑(老總 노총; 군인 등에 대한 존칭), 우리 합의를 하자. 내가 죽은 뒤 당신은 반역하지 마라, 알았소?’ 주석은 펑더화이를 대단히 꺼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펑은 이런 경계심을 줄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루산회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물꼬를 틀어 비극을 초래한 한 원인 중의 하나로 펑더화이의 직정적(直情的)인 품성을 들기도 한다. 강직하고 원리원칙의 소유자로 화끈한 성품은 좋으나 감성적이고 즉흥적으로 쉽게 달궈지는 불같은 성격이 마오를 도발했다는 논리다. 차분한 이성적 대응을 했더라면 루산회의가 이런 엄청난 사태로까지 비화하지 않았을까하는 기대어린 추론도 한다.

 

루산회의에서 ‘반당집단’으로 몰린 펑더화이, 장원톈 등은 또다시 문화대혁명 때 온갖 수난과 박해를 당하다 처참하게 숨지거나, ‘유배지’에서 고단한 삶을 정리하는 등 비극적 종말을 고했다. 이들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으로 복권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루산회의 이후 거꾸로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들을 깔아뭉개면서 마오의 개인숭배와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하지만 대재앙인 대약진의 처참한 말로로 치달았다.

 

 

조리돌림 당하는 펑더화이

 

 

하늘도 돕지 않았다. 루산회의를 전후해 자연재해가 중국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은 경제파탄의 최악의 시기였다. 주검이 대륙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중공중앙은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곤란을 극복하기 위한 각종 대책을 쏟아 부었다. 밑 빠진 독이었다. 1960년 여름, 마오는 대약진, 인민공사화 운동 등 총력을 기울였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스트레스를 받은 마오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중공중앙은 1960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상하이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화급한 경제와 국제문제에 관한 대응책 마련 회의였다. 회의 마지막 날 마오는 이른 아침부터 2시간에 걸쳐 ‘10년 결산’의 글을 썼다. 말은 10년이었지만, 사실은 3년의 대약진운동의 총결이었다.

 

마오는 오후에 열리는 폐막식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제출한 ‘신방안(新方案)도 뾰족한 대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이후 3년의 생산목표도 여전히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 가능하려면 지표를 크게 하향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당사자는 된장인지 똥인지도 모른다”고 질타했다. 마오는 “어제 상임위원회와 몇몇의 경제 책임자 동지들과 이야기를 했다. 헌데 이 조정방안을 또 하향 조정해야 한다고 동지들이 말했다”며 분노했다. 중앙 서기처 서기 덩샤오핑은 “이번 회의에서 모두들 개량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주석 382)

마오는 ‘10년 총결’에서 “나, 본인도 많은 과오를 범했다. 일부분은 당사자와 함께 (과오를) 범했다”고 자아비판을 했다. 조급한 목표달성을 위해 비과학적으로 부풀린 높은 생산목표를 고칠 결심을 했다. 마오는 “주도권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파죽지세와 같은 것이다’. 실사구시를 가져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진실한 것을 반영하는 객관적인 상황을 가져온다. 즉, 사람들이 객관적 외부상황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과정이다”라며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의식을 제기했다.

 

마오는 “우리들은 사회주의 시기의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대단히 큰 맹목성, 또 대단히 큰 인식의 필연적인 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들은 깊이 있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들은 다음 10년 동안에 그것을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인식의 고유한 법칙을 찾아내 사회주의 건설과 복무하는 법칙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객관적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오의 ‘10년 총결’은 마오가 체계적으로 10년을 회고하고, 특히 ‘대약진’을 총결하면서 스스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과오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지도사상의 ‘좌’경 과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마오는 상하이 회의에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농업상황과 관련해 저우언라이와 이야기를 했다.

 

저우언라이는 “근년의 높은 생산목표, 높은 예상 수확고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왔다. 2년 동안의 흉년으로 내년에는 생산량을 확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극복해야 한다. 1962년 계획 예측은 비교적 믿을 수 있는 수치이기 때문에 생산량을 실현하거나 초과할 수 있다. 주석이 ‘10년 총결’에서 말했듯이 주도권을 갖고 이번에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바로 자유롭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손발을 묶어 놓으면 스스로 변신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해방군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스스로 해방되지 못했다”고 저우의 견해에 찬성을 표시했다. (주석 383)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말을 받아 식량, 면화(棉花), 양돈의 목표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저우는 농업의 목표를 만약에 높게 잡으면 인민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경공업의 원료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면 또다시 인민생활에 간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 모두가 (인민들이) 제대로 먹는 것을 반영하지 못하면 우리들이 불안하다고 했다.

 

류샤오치는 “(생산)목표를 바꾸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오 주석의 이번 총결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미 경험을 했다. 학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농업부문의 목표에서 3년 동안 피동적으로 움직였다. 일차적으로 자발적 전환이 좋다”고 거들었다. 덩샤오핑도 “이번 회의에서 자발성(주도권) 쟁취를 제기한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면서 “진정으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했다. 중앙의 주요 영도들이 문제풀이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면서 주도적으로 계획목표를 조정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데 초보적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381)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382) 解密; '變局'; 毛澤東與七千人大會始末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揭秘; '三年經濟困難' 鄧小平如何調整國民經濟 수 城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383)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

 

 

164. 삼면홍기 실패·경제파탄 책임…마오 사실상 2선후퇴

 

이처럼 루산회의 이후 새로운 ‘대약진’의 발동과 농촌 인민공사화 운동에서 나타난 ‘좌’경적 열광성이 되레 엄중한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이런 경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중공중앙은 부득불 과장된 생산목표치를 현실에 맞춰 대폭 낮추는 등 경제 각 부문에 대한 전반적 조정정책을 시행하기로 했다.

 

 

중공중앙은 1961년 3월 광저우(廣州 광주)에서 공작회의를 열어 ‘농촌 인민공사 공작조례(초안)’, 즉 ‘농촌 60조’를 통과시켰다. 중앙은 회의 마지막 날 성실하게 (현장)조사연구를 진행하는 문제와 관련한 서신을 각 중앙국, 각성, 시, 자치구 당위원회에 발송했다.

 

 

중앙은 당의 고위 간부들이 최근 몇 년 동안의 공작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살려 성실하게 마오의 ‘조사공작에 관하여’를 학습하도록 지시했다. 서신은 “최근 몇 년간 농업, 공업부문의 구체적 공작과정에서 나타난 결점과 잘못의 주요한 것은 조사연구 공작을 소홀히 해 호언장담하거나 나쁜 기풍에 태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은 현(縣) 이상의 당위원회 지도자들이 조사업무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하면서 제도를 만들고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지시했다.

 

 

광저우 회의이후 당의 각급 영도간부들은 잇따라 기관을 떠나 기층 속에 들어가 현장 조사연구 활동을 벌였다. 덩샤오핑은 베이징 근교의 순이(順義 순의) 농촌에 들어가 15일 동안 조사연구를 벌였다. 덩샤오핑은 먼저 현장실습을 하고 농민, 공사간부 등과 토론을 하면서 농촌의 실제 문제와 간부들의 행태를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간부들은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즉 삼면홍기(三面紅旗)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반우파’ 투쟁과정에서 비판을 받아 우물쭈물하며 직언을 하지 않았다. 루산회의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좌’경 열광성과 ‘반우 투쟁’으로 간부들이 적극적인 공작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했다. 인민공사의 식당도 사원들이 이용하지 않고 집에서 식사를 하는 등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전혀 딴판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실도 알았다.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는 4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44일 동안 후난(湖南 호남) 창사(長沙 장사)의 농촌으로 들어가 조사연구 활동을 했다. 당시 류샤오치를 수행한 보건의사 쉬페이민(許佩珉 허패민)은 “당시 창사의 날씨는 대단히 춥고, 습도가 높았다. 우리들은 4월 2일 왕자완(王家灣 왕가만) 생산대에 도착했다. 성(省) 부서기가 조사대장을, 류샤오치 동지는 부대장을 맡았다. 샤오치 동지는 모두에게 ‘주석’이나 ‘수장(首長)’이란 호칭 대신 그냥 ‘대장(隊長)’으로 부르도록 했다. 백성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하기위한 것으로 비밀 엄수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대약진운동에 따른 집단노동 동원의 첫 신호탄은 농촌 수로와 관개 운동이었다. 사진에서 보듯 장시성에서도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지역 농민들이 14만 입방미터의 흙을 옮겼다. 1957년 12월 사업을 시작했으며, 1년이 지난 뒤에 마오쩌둥은 이 계획들로 인한 인명 손실에 놀라워했다.

 

 

류샤오치는 인민공사 ‘완터우(萬頭 만두) 양돈장’이라고 써 부친 것을 보고 양돈장에 들어갔다. 양돈장에는 피골이 상접한 돼지 2마리만 있을 뿐 사육사는 없었다. 집도 텅 비어 있었다. 류샤오치는 이 양돈장에서 6박6일을 보냈다. 쉬페이민은 “모두들 침대에 짚을 깔고 잘 요량으로 짚을 구하러 다녔는데 구경할 수 없었다.

 

후난은 물고기와 쌀의 고장(魚米之鄕 어미지향)으로 벼농사가 잘 됐다. 그런대 짚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었다. 류샤오치 동지는 충격을 받고 줄곧 담배만 태우고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참혹한 농촌실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주석 384)

 

“다음 날 류샤오치 동지는 상황을 살피러 마을 뒤에 있는 조그만 산에 올라  갔다. 나무는 거의 없었다. 다 베어 갔다. 산에서 내려 올 때 어린 아이가 누은 것으로 보이는 대변을 보았다. 나뭇가지로 대변을 헤쳐 보니 한 톨의 곡식도 없는 섬유질 뿐 이었다. 통상적으로 집안에서 어른들은 가장 맛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준다. 아이들은 보통 음식을 급히 먹어 소화가 불충분해 대변에 옥수수 등 입자들이 섞여 나온다. 샤오치 동지는 이 지방의 식량문제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알 수 있었다.”

 

쉬페이민은 “3년 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이 기간 동안 류샤오치 동지는 우유도 마시지 않고, 돼지고기도 안 먹었다. 나중엔 기름조차도 먹지 않았다. 유일한 비교적 영양가가 있는 것은 계란이었는데 하루에 한 개를 먹었다. 류샤오치 동지의 업무가 대단히 과중해 약간의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도 1961년 봄에 몇 주 동안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의 몇 개 마을을 둘러보았다. 저우언라이는 인민공사의 공동 취사제도와 관련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요구하고 공동 취사제도를 폐지할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농부는 “인생이 더 고달파졌다”고 탄식하며, 손으로 저우를 가리키면서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우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 농부는 “우리는 우리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곡물판매를 중단할 것이다. 당신은 우리로부터 어떤 것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신은 먹을 게 하나도 없어 굶어죽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저우언라이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방안을 짜내느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저우언라이는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탄전린(潭震林 담진림), 쉬중쉰(習仲勛 습중훈) 등 부총리들과 ‘식량대용 영도소조’를 만들어 직접 지휘했다. 소조는 사람들에게 옥수수나 조류(藻類)와 같은 곡물 대용품을 찾도록 권유하고,   집에 야채를 심고 토끼나 병아리 등 가금류를 길러 먹을 수 있도록 선전했다. (주석 385)

 

 

루산(廬山 여산) 2차 회의가 8월 23일부터 9월 16일까지 중앙과 각 성, 시, 자치구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25일 동안 열렸다. 주요 의제는 식량문제, 시장문제, 2차 5개년계획과 공업문제, 공업기업관리 문제 등이었다. 공업부문에서 경제 조정정책에 따라 1961년의 철강 생산목표는 애초 19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낮추고, 1962년은 750만 톤으로 줄이도록 했다. 마오는 “나는 공업에 대해 발언권이 없다”고 스스로 말해 전체회의에서 연설은 하지 않고, 중앙 상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몇 차례 연설했다. 마오는 8월 23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석 386)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면 잘 알지 못한다. 인민공사 공작 60조, 즉 소유제, 분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모두가 사회주의다.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들은 방법이 있다고 하나, 나는 그리 믿지 않는다. 광저우나, 베이징회의처럼 할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년을 맞이해서 큰 장애를 만났다. 망할 것인가? 안 망한다.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을 것인가? 그럴 것이다. 현재 장애를 만나 좌절과 실패를 겪고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더 많이 겪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우리들은 현재 조금 알고 있을 뿐 잘 알지 못한다. 우리들이 사회주의를 하는 것은 건설하면서 학습하는 것이다. -경험 없이 이미 12년을 해왔다. 단지 12년이다. 우리들은 현재 스탈린시대, 즉 2차 5개년계획 시기에 처해 있다. 우리들은 원자탄이 없다.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다. 우리들의 시간은 짧다. 예를 들면 공업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계획공작을 어떻게 할 것인 지, 현재는 좋지 않다.” 

 

 

덩샤오핑은 9월 5일 회의에서 먼저 국민경제가 심각하게 균형을 잃어 엄중한 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을 설명하고 경제 조정방침의 절박성을 호소했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은 도가 지나쳐 객관적인 법칙을 위반했다. 지나친 것은 끌어내려야 한다. 조정의 목표까지 충분히 끌어내려야 한다. 공업은 석탄생산에 역량을 집중하고, 농업은 식량과 면화 생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산 2차 회의는 경제 조정회의 형식으로 열렸으나 실제적으로는 대약진 운동 등 삼면홍기 정책실패로 국가경제가 파탄하면서, 마오가 국정운영의 책임을 지고 2선으로 후퇴하고, 국가 주석직을 류샤오치에게 넘겨주기로 한 회의로 알려지고 있다.

 

384) 揭秘1961年劉少奇湖南農村調査細節; 在養猪場住6天6夜 新華網 時政頻道 
385)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지음/ 유상철 옮김 베리타스북스 
386)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周恩來檢討大躍進毛澤東揷話'交代一回也好' 人民網-文史頻道 

-------------------------------------------------------------------------------------------------------------------------------------------------------


165. 류사오치, ‘3푼 천재, 7푼 인재’ 발언 일파만파

 

 

1961년 말이 되면서 경제 조정정책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해 농촌형세가 호전되고, 공업 분야에서도 하향 추세가 수그러 들었다. 그러나 형세발전은 불균형으로 인해 도시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공업 분야도 피동적인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중공중앙은 이런 당면한 경제적 난국을 돌파할 해법 마련을  위해 1962년 1월 현(縣)급 이상 당위원회 주요 책임자와 일단의 중요 공장, 광산, 부대 책임 간부들이 참여하는 '확대한 중앙 공작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회의 참가자가 무려 7000여 명이나 돼 이른바 ‘7천인 대회’로 불렸다. 역사상 이처럼 대규모의 참가자가 참석하는 회의는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일이었다. 당시 턱없이 부족한 식량 공급문제 해결은 최우선적인 국가적 과제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1958년에 시작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3년 동안 계속된 자연재해로 전국의 식량상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정부의 식량 구매계획 은 붕괴됐다. 1961년 11월 중순 당년 목표의 20%에 불과했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 3대도시는 식량이 끊어질 위기에 처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었다. 당 중앙은 6개 중앙국 제1서기 회의를 소집해 협의를 거쳐 방법을 찾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회의가 끝나 해당 지역으로 돌아 간 뒤 정부가 요구한 식량구매 수량에 난색을 표해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 중남국 서기 타오주(陶鑄 도주)가 차라리 베이징에서 전국의 지방 당위원회 서기회의를 열어 ‘인식공유(打通思想 타통사상)’, 즉 서로의 생각이 통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건의했다. 지방 간부들은 식량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분산주의와 자기 본위주의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래야만 정부의 식량 구매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오는 타오주의 제의에 동의하고 더 나아가 현(縣)위원회 서기들까지 회의에 참가시켜 규모를 확대시켰다.

 

이렇게 해 7천여 명이 참가하는 사상 유례없는 만민공동회 형식의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마오의 이런 발상의 전환은 루산 1차회의 때 언로를 틀어막았던 것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하겠다.

 

확대한 중앙공작회의 즉, ‘7천인 대회’는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27일 동안 열렸다. 회의의 주요 의제는 최근 몇 년 동안의 공작경험, 기풍에 관한 문제와 공작과정에서 드러난 부정확한 관점과 분산주의, 자기 본위주의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또 식량 등 농산품에 대한 국가 구매문제와 경제 재조정 문제에 관한 토론을 통해 인식을 공유하고, 단결을 강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대약진 이래의 성과와 결점을 명확하게 토론해 총괄적 경험을 공유하고, 공작과정에서 나타난 분산주의 반대를 확고히 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류샤오치는 1월 27일 원래의 계획에 따라 대회에서 ‘확대한 중앙공작회의상의 보고’를 낭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회 개막전 날 마오가 류샤오치에게 ‘보고’는 이미 인쇄해 배포했으니 읽을 필요 없이 보고정신에 따라 자유롭게 이야기할 것을 제의했다. 류샤오치는 밤을 도와 요점을 정리해 개회 전에 마오와 다른 정치국 상위위원들에게 회람했다. 류샤오치는 위원들의 동의를 받은 뒤 긴 연설을 했다.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천재(天災)로, 3년 동안의 자연재해로 농업과 공업부문의 생산성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는 1958년 이래 공작과정에서 나타난 결점과 과오였다. 어떤 지방의 농업과 공업의 감산(減産)은 주요 원인이 천재였고, 어떤 지방의 감산의 주요 원인은 천재가 아니었다며 공작과정에서의 결점과 잘못을 지적했다. (주석 387)

 

류샤오치는 지난해 후난지방으로 조사연구를 하러 갔을 때 농민들과의 대화를 끄집어냈다. 류샤오치는 “내가 당신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천재인가?라고 물었다. 농민들은 천재가 있긴 하지만 작다. 생산이 곤란한 원인은 ‘3푼이 천재고, 7푼은 인재다’라고 말했다. 내가 어떤 지방에 가 저수지가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 1960년에도 이 저수지가  말랐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들은 마르지 않았다고 답했다. 저수지에 물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은 천재가 그리 엄중하지 않다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류샤오치는 전국의 총체적 상황에 비춰볼 때 3년 연속의 자연재해의 영향도 있지만 다른 일방에는 우리들의 공작과 기풍상의 결점과 과오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회의 참가자들이 토론해 실사구시적으로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나중에 마오는 류샤오치가 말한 ‘3푼 천재, 7푼 인재’는 농민들의 말이라며 류샤오치를 비판했다. 류샤오치는 서면보고에서 명확하게 성과와 결점, 과오의 비례관계를 기술하지 않았지만 이날 연설에서 전통적인 성과와 결점, 과오의 비례관계를 깨고 ‘3대7의 비율’을 거론했다. 성과가 7푼이고, 3푼은 결점과 과오라는 것이다. 서면보고는 단지 성과가 1위고, 결점과 과오는 2위라는 식으로 기재해 구체적 비중을 알 수 없었다. 지난 날 마오는 통상적으로 결점, 과오와 성과를 하나의 손가락과 9개의 손가락으로 비유하곤 했다.

 

덩샤오핑과 펑전(彭眞 팽진)은 류샤오치의 ‘3푼 천재, 7푼 인재’ 발언은 마오의 잘못된 방법을 지적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고 회상했다. 기실은 이런 일이 있었다. 1월 18일 소집한 '7천인 대회' (류샤오치)'보고' 기초위원회 자리였다. 펑전은 애끓는 마음으로 충직하게 말했다. (주석 388)

 

"우리들의 잘못은 먼저 중앙 서기처에 있다. 주석, (류)샤오치와 중앙 상임위원회 동지들의 책임이 아닌가? 포함이 됐든 안 됐든, 얼마의 과오가 있든 없든지 간에 마오 주석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3~5년 과도 문제와 (인민공사의) 식당문제는 모두 마오 주석이 비준한 것이다."

펑전이 열을 받아 핏대를 올릴 때 덩샤오핑이 끼어들었다.

"우리들은 주석이 어딜 가든 가는 곳으로 간다. 주석이 말했다. 너희들의 보고는 나를 성인으로 쓴다. 성인은 무슨 얼어 죽을 성인이냐. (누구나) 결점이 있고 과오를 범한다. 단지 얼마만큼의 과오를 범하느냐, 범하지 않느냐에 있다. 나의 결점을 말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혁명은 천두슈(陳獨秀 진독수), 왕밍(王明 왕명)이 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것이다."


이때 펑전이 또 말참견을 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은 에베레스트 봉우리도, 타이산(泰山 태산)도 아니다. 그렇게 높지 않다. 현재 당내에 하나의 경향이 있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아)비판하면 자리에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오 주석이 1백분의 1, 1천분의 1의 과오라도 자아비판을 하지 않으면 우리당에 악영향을 끼친다. 성(省)과 시(市) (간부들이) 책임을 떠맡으려 할까? 좋지 않은 것을 쫄따구들에게 떠다 박질하면 교훈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마오 주석부터 지부서기에 이르기까지 각자 생긴 대로 논다."

다음날 어쩌다 '쥐새끼'들이 이 얘기를 들어다 들었다. 천보다(陳伯達 진백달)는 펑전에게 "펑전 동지가 어제 한 마오 주석과 관련한 발언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천보다는 "우리들은 많은 일들을 엉망진창으로 했다. 마오 주석이 책임이 있다고? 마오 주석이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자고?"라면서 침을 튀어가며 펑전을 몰아쳤다. 펑전은 부득불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펑전은 "마오 주석에 관한 문제는 내가 명확하게 말하겠다. 나, 펑전이 마오 주석을 비판해서는 인심을 얻지 못한다. 내 말은 그런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아)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오 주석이 스스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고 석명했다. 이때의 펑전과 천보다의 쟁론은 나중에 펼쳐지는 문화대혁명 시절 처참한 당내투쟁에 짙은 검은 그림자를 던진 것이었다. 

 

어쨌거나 류샤오치의 '3푼 천재, 7푼 인재'의 발언은 마오와 류샤오치의 견해차이가 확연해지면서 훗날 척을 져 비극적 사태로까지 번진다. 류샤오치는 대약진 과정에서 나타난 ‘공산풍(共産風)'과 부정확한 구호와 방법을 비판했지만 예민한 '삼면홍기(三面紅旗)'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었다.

 

우리들은 현재 모두 취소할 수 없다. 계속 삼면홍기를 위해 분투하자고 했다. 현재 일부의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명료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5년, 10년 이후에 우리들이 경험을 총결할 때가 오면 더욱 더 나은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류샤오치는 당내의 '좌우 투쟁'과 관련해 '좌우' 모두 방향성과 노선상의 과오를 저질렀다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다고 할 수 없고 실사구시적으로 당내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 시기 '대자보'를 쓸 때 '1962년의 우파'와 '연계'됐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류샤오치의 이때의 발언을 걸고 들어갔다.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은 문화대혁명 초기 “7천인 대회 때 (마오가)답답해 했다. 문화대혁명이 되면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말해 마오가 류샤오치를 못마땅해 한 것을 대변했다.

 

387) 解密'變局'; 毛澤東與七千人大會始末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劉少奇要'推飜' 毛澤東; 檢討大躍進 竟强調'人禍' 人民網-文史頻道
388)1962年 '七千人大會'人人檢討, 唯林彪獨樹一幟   人民網-文史頻道 

-------------------------------------------------------------------------------------------------------------------------------------------------------

 

 

166. 린뱌오, 마오 개인숭배 전파하며 독자적인 계파 형성

 

 

마오는 29일 대회에서 많은 회의 참가자들이 기간이 짧아 충분히 발표를 하지 못했다는 의견들을 받아들여 마음껏 기를 발산하며,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회의라고 해서 이른바 '출기회(出氣會)'로 불린 '7천인 대회'의 기간을 연장했다. 마오는 1월 30일 전체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389)

 

“이번 회의 개막을 앞두고 류샤오치 동지와 다른 몇몇의 동지들이 ‘보고’ 원고를 준비했다. 이 원고는 중앙정치국의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 내가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토론하지 말고 즉시 대회참가 동지들에게 배포해 평론과 의견을 듣자고 제의했다. 동지여러분, 당신들은 각 방면의 각 지방 사람들이다. 각계의 성위원회, 지방위원회, 현위원회, 기업 당위원회 그리고 중앙의 각 부문에서 참석했다. 당신들 가운데 다수는 비교적 기층에 접촉하기 때문에 우리들 중앙상임위원,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의 동지들 보다 상황과 문제를 더욱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당신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서 여러 각도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당신들의 의견 개진을 바란다.”

 

이렇게 서두를 뗀 마오는 특별히 루산회의 때와는 달리 민주 집중제의 '민주'를 강조하면서 민주가 없이는 정확한 집중이 불가능하다며, 당위원회의 영도는 집체적 영도로 제1서기 개인이 독단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제1서기와 기타 서기, 위원들의 관계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해야 하는 데 현재 제1서기 개인이 모든 일을 처결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오는 "서초패왕 항우는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유방은 활달하고 도량이 커 신하들의 직간을 물 흐르듯 잘 받아들였다. 항우는 종국에 실패했다"며 패왕별희(覇王別姬)의 고사를 끌어다 소통을 강조했다.

 

"지식분자인 역이기(酈食其)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유방을 만나러 갔다. 처음에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공부자(孔夫子)의 일파다. 현재 군사업무로 유생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역이기가 화가 났다. 그는 시위 기사에게 나는 고양(高陽)의 술꾼이고 유생이 아니라고 들어가서 보고하라고 했다. 기사가 유방에게 그렇게 전하니 좋다고 들어 보내라고 했다. 역이기가 들어가니 유방은 발을 씻고 있었다. 역이기는 유방이 유생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나 유방을 크게 비판했다. 역이기는 "당신은 도대체 천하를 취할 건가 말 건가. 어째서 장자(長者)를 경시하는가. 이때 역이기는 60살이 넘었다. 유방은 그 보다 어렸다. 유방은 그 얘기를 듣고 사과했다. 곧바로 역이기가 진류현을 빼앗을 수 있다는 그의 계책을 들었다. 유방과 항우는 몇 년 동안 싸워 유방이 이기고, 항우가 패했다. 우연이 아니다. 현재 일단의 제1 서기들은 봉건시대의 유방만도 못하다. 도리어 항우 같다. 이런 동지는 만약에 고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실패하게 된다. 연극의 '패왕별희'가 아니다. 고치지 않으면 어느 날 '별희(虞美人 우미인)' 꼴이 되고 만다."

 

'패왕별희'는 항우(項羽)와 애첩 우희(虞姬)의 비극적 사랑을 엮은 영웅말로의 역사이야기다. 서초패왕 항우의 용력은 세상에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오만하고 교만해지면서 다른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악과(惡果)를 씹어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 링비(靈壁 영벽)현 동남쪽에 있는 가이허(垓河 해하) 일전에서 전군이 궤멸되다시피 했다. 가이허 고성에 포위된 항우는 성 바깥 도처에서 들려오는 초가(楚歌), 즉 자신의 나라 노랫가락(四面楚歌)에 억장이 무너졌다. 포로로 잡힌 초나라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기실은 유방의 군사(軍師) 장량의 책략이었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어쩔 수 없는 항우는 비탄에 빠져 노래를 읊조렸다.

 

힘은 산이라도 뽑아 올리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듯한데, 때를 얻지 못해  추(騅; 항우의 말)가 가지 않으니. 추가 가지 않으면 어찌하란 말인가, 우야, 우야, 어찌하란 말이냐.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추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역발산혜기개세, 시불리혜추불서. 추불서혜가나하, 우야우야나약하.

 

우미인(우희)은 자결하고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해하 성(城)을 탈출했으나 우장(烏江 오강) 강변에서 한나라 군과 싸우다 세 불리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와는 달리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겸허한 마음으로 직간을 잘 받아들이고, 어진 이를 겸손과 예의로 대했다. 또 자기의 잘못에 대한 남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물 흐르듯 했다. 유방은 천하통일을 한 뒤 뤄양(洛陽) 남궁(南宮)에서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천하를 얻은 오묘한 이치를 말했다.

 

"군막에서 작전계획을 짜고 책략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하게 하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 張良 장량)만 못하고,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양도(糧道)를 끊기지 않고 군량을 보내 군(軍)을 먹이게 하는 일은 소하(蕭何)에 미치지 못한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한신(韓信)을 따르지 못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인걸로서 내가 잘 기용한 것이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다. 항우는 한 사람의 범증(范增)이 있었으나 그를 쓰지 않아 이런 연유로 내가 천하를 얻었다."

 

마오는 이처럼 유방과 항우를 빗대 지도자의 품성과 덕목, 그리고 언로(言路), 즉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오는 "지난 해 6월 12일 중앙 베이징 공작회의 마지막 날, 나는 나의 결점과 잘못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동지들이 각 성과 지방에 돌아가 전달하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다. 많은 지방에서 전달하지 않았다. 나의 잘못을 감추려고 했던 것 같다. 숨겼다. 동지들, 숨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오는 자신의 자아비판과 관련해 "무릇 중앙이 범한 잘못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고, 간접적으로도 내게 책임이 있다. 내가 중앙의 주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 다른 일단의 동지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제1의 책임은 당연히 나다. 책임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호랑이 엉덩이를 건드리지 못한다. 대저 이런 사람은 열이면 열 다 실패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오는 이날 이렇게도 말했다. (주석 390)

 

"사회주의 건설에서 우리들은 또 아주 큰 맹목성이 있다. 사회주의 경제는 우리들에게 있어 아직도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필연적인 왕국이다. 나는 경제건설 공작과정에서 겪은 많은 문제들을 알지 못했다. 공업, 상업도 그리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나 보다 (류)샤오치 동지가 더 잘 알고, (저우)언라이 동지가 나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덩)샤오핑 동지가 나 보다 더 잘 안다. 천윈(陳云 진운) 동지는 특별해 비교적 많이 안다. 농업에 대해서 나는 조금 안다. 많이 알지 못한다. 비교적 안다는 것도 제도방면의 문제지, 생산방면에 대해서는 지식이 아주 적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우리 전당에 비춰볼 때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 우리들은 마땅히 오늘 이후 일정시간에 경험을 축적하고 학습노력을 해야 한다. 실천하면서 점차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를) 깊이 있게 인식하게 되고 법칙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마오의 이날 연설에서 한 자아비판은 당 내외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실제로는 마오가 겉으로 민주와 자아비판을 내세워 '낚시(釣漁 조어; 반대세력 제거)'를 했다는 설도 없지 않다. 리중런(李宗仁 이종인) 난징정부 당시 국공협상을 위해 국민당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왔다가 결렬된 뒤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신중국 건설에 참여한 장즈중(張治中 장치중)은 저우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장즈중은 "나는 십 수 년 동안 국민당 중앙 상임위원을 지냈다. 장제스가 자신의 결점과 잘못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듣지 못했다. 장제스는 대회나 소회에서 이것저것을 욕하지만 자기는 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오가 앞장서 자아비판을 하자 다른 영도들도 자아비판에 나섰다. 저우언라이는 2월 6일 푸젠조(福建組 복건조) 회의에서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오쩌둥 동지가 말한 실사구시다. 바로 참된 말을 했다. 진짜 힘을 북돋우고, 사실적으로 일을 하면 실효를 거둔다"고 마오에게 찬사를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대약진' 정책과정에서의 잘못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주석 391)

 

"나 개인이 잘못을 저질렀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말하겠다. 하나는 바로 1959년 8월 26일 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에서 나는 1959년 국민경제계획 을 조정하는 주요 지시의 보고에서 공농업의 매년 증산의 약진속도를 과오를 저질러 일방적으로 규정했다.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약진속도를 정해 많이, 빨리에 신경을 쓰고 좋게, 절약하는 것은 부주의 했다. 수량에 신경을 쓰고, 품종이나 질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요구에 급급했고 장기적인 생각이 없었다. 해마다 같은 고도속도만 요구했다. 또 하나의 예는 빠른 건설속도를 위해 점차적으로 전국에 비교적 완전한 공업체계의 경제구역을 형성하기로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공업 98.5%와 중공업 76%의 통제권을 지방정부에 이양했다. 이어 재정, 금융, 무역, 문화, 교육, 과하기술의 관리권도 지방정부에 넘겨주었다. 지금 볼 때 권력의 지방정부 이양이 과다하고 너무 분산됐다. 이것이 분산주의(分散主義) 근원의 하나가 됐다. 이 문건은 나의 주재로 기초한 것이다. 이런 실제에 맞지 않는 요구는 필연적으로 지방에서 생산목표의 맹목적 추구를 조성해 엄중한 악영향이 나타났다."

 

저우언라이는 “요 몇 년 동안 정부공작 중 많은 결점과 잘못을 저질렀다. 이러한 결점과 잘못으로 많은 인력을 낭비하고 많은 국가의 물자를 소모시켰다. 이런 적지 않은 손실로 모두에게 대단히 큰 압박을 주었다. 나는 이 기회를 빌어 우리 정부공작을 하는 동지들을 대표해 여러분 모두에게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우는 “나는 이 문제를 3월의 인민대표대회, 정협(政協) 회의에서 적당한 설명을 하겠다. 이것은 나의 빚이다. (잘못을) 진술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때 마오쩌둥이 손을 흔들며 “고백은 한 번이면 됐다”고 말허리를 잘랐다. 

 

저우언라이가 애초 경제건설 과정에서 마오의 조급한 돌격주의에 반대한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저우는 속도 조절론을 펴 마오로부터 당신은 ‘반 돌격주의’고 나는 ‘반반(反反) 돌격주의’라고 비판을 받은 뒤 마오의 지시를 따라 자신이 내키지 않은 대약진의 정책들을 집행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회의 참석자 한 사람이 “총리, 당신은 모든 일을 다 자신이 걸머질 수는 없다”고 소리쳤다. 저우는 웃으면서 “나는 총리다. 중앙, 국무원이 결정한 일은 내가 모두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대약진이 대재앙이 되면서 마오가 자아비판을 해 권위와 위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우언라이는 이처럼 안간 힘을 다했다. 마오의 충실한 협력자로 몸을 던져 마오 방어에 나선 것이다. 뒤치다꺼리였다. 덩샤오핑도 이날 대회에서 연설을 했다. 덩샤오핑은 먼저 당의 좋은 점을 말했다. 즉, ‘5호(好)’론이다. (주석 392)

 

“중국공산당은 5가지의 좋은 점이 있다. 좋은 지도사상을 갖고 있다. 좋은 중앙은 많은 좋은 골간들을 보유하고 있다. 좋은 전통이 있다. 당을 신뢰하는 좋은 인민을 갖고 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당은 인민들의 혁명승리 쟁취를 이끌었고, 인민들의 사회주의 건설 쟁취를 이끌었다. 국내공작을 잘 할 수 있고, 반드시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스스로 걸머진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당의 영도와 공작에 엄중한 결점을 보였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당의 우량전통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방은 아주 크게 약화돼 심각한 상태다. 어떤 지방은 괜찮은 편이다. 전당으로 볼 때 상당한 정도로 약화되었다.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전당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몇 년 동안 많은 동지들이 구체적 공작에 분주해 당의 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당의 건설에 그리 주의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엄숙하게 지적했다. 덩샤오핑은 “우리들 연대에 반드시 우리당의 좋은 전통을 견지하여 좋은 모범을 수립해 좋은 인민의 공복으로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사업과 세계인민의 해방 사업에 자신이 마땅히 맡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당과 당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압권은 린뱌오(林彪 임표)의 발언이었다. 린뱌오는 ‘3년 동안 발생한 결점’은 우리들이 경험을 얻었고, 매우 큰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들은 조금 ‘학비’를 치렀지만 가치가 있었다고 사뭇 다른 논리를 폈다. 대약진으로 최소 3천 만 명의 고귀한 목숨이 굶어죽고, 국민경제가 거덜 나는 미증유의 국가재난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마오의 비위를 맞추느라 열을 올렸다. 린뱌오는 “어려움은, 어떤 방면이나 어떤 정도에 있어서 바로 우리들이 마오 주석의 지시와 마오 주석의 경고, 마오 주석의 생각대로 따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만약에 마오 주석의 말을 듣고, 마오 주석의 정신을 체득했더라면 굴곡은 낮아지고, 오늘의 곤란은 적어 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며 마오의 개인숭배에 열성을 보였다. 가관(可觀)은 계속됐다. (주석 393)

 

“내 개인이 몇 십 년 동안 체득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마오 주석의 가장 돌출한 장점은 ‘실제(實際)’이다. 그는 항상 실제에서 열이면 여덟, 아홉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실제의 주위에 있고, 실제를 둘러싸고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다-나는 깊이 있게 느꼈다. 우리들의 공작이 잘 될 때는 마오 주석의 생각이 순리적으로 관철되고, 마오 주석의 생각이 방해받지 않을 때였다. 만약에 마오 주석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거나 큰 방해를 받으면 그런 때는 일이 잘못됐다. 우리당 몇 십 년간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역사였다.”

 

마오는 린뱌오의 발언을 대단히 칭찬했다. 저우언라이가 ‘반 돌격주의’로 마오한테 곤욕을 치렀을 때 마오는 커칭스(柯慶施 가경시)가 쓴 글을 들고 저우에게 “당신은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모멸적으로 물은바 있었다. 저우는 이때 “나는 쓸 수 없다”고 말했었다. 마오는 이때도 곁에 있던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에게 “린뱌오 동지의 연설 수준이 대단히 높다. 이런 연설을 그대는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뤄루이칭은 당년의 저우언라이 마냥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는 그 해 3월 20일 린뱌오의 연설문을 수정한 뒤 비서인 톈자잉(田家英 전가영)과 뤄루이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린뱌오의 연설문)문건을 한 번 훑어보았다. 아주 좋은 문장이다. 아주 무게가 있는 글이다. 매우 기쁘게 보았다”고 적었다. 린뱌오의 이런 발언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7천인 대회’에서 류샤오치가 마오의 개인숭배를 말하지 않은 대신에 린뱌오는 마오의 개인숭배를 전파하면서 독자적인 한 파를 형성해 갔다.

 

389)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與劉少奇之間何時出現了分琪岐的苗頭 人民網-文史頻道
390) 毛澤東傳(1949-1976 하)  主編  逢先知  金충及   中央文獻出版社 
391) 周恩來檢討大躍進 毛澤東揷話'交代一回也好   人民網-文史頻道 
392) 1962年 七千人大會人人檢討, 唯林彪獨樹一幟   人民網-文史頻道 
393)1962年 七千人大會 人人檢討, 唯林彪獨樹一幟   人民網-文史頻道

-------------------------------------------------------------------------------------------------------------------------------------------------------

 

167. 경제정책 마저도 폭군 통치…문화대혁명 불씨

 

7천인 대회는 2월 7일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서면보고를 통과시키고, 마오의 대회폐막 선언을 끝으로 7천여 명이 참석한 전무후무한 대규모 대회를 마쳤다. 마오는 2월 8일 밤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떠나 지방순시에 나섰다. 중앙의 일상 업무는 1959년에 마오가 당 주석직만 보유한 채 2선으로 물러나, 국가 주석직을 승계한 류샤오치가 총괄하면서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함께 1선의 국가운용을 책임지고 있었다.

 

7천인 대회는 민주기풍을 한껏 발양해 참석자들이 마음껏 이야기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식 대회였으나 여전히 ‘삼면홍기’는 완전 정확하다고 확인했다. 좌경 지도노선에 대해서는 근본적 변화가 없어 이후 당내투쟁의 불씨를 남겼다.

 

이 대회는 마오를 비롯해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당의 최고 영도자들이 자아비판을 하고, 마오 1인 전정체제를 견제해 영도집단의 민주 집중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이후 관철되지 않아 중국 정치사상 최대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는 마오의 폭군적 통치체제가 극성을 떨게 됐다.

 

어쨌든 7천인 대회는 수렁에 빠진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중지(衆智)를 모으는 대회로 눈길을 끌었다. 마오는 대회에서 자신이 경제를 모른다고 이실직고했다. 마오는 중앙 영도자들의 경제를 다루는 능력을 비교하면서 천윈(陳云 진운)을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의 부주석이자 5대 서기의 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통인 천윈은 대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꼴이었다. 천윈에게는 중국 사회주의 경제  초석을 다진 인물, 중공 재경(財經)의 1인자, 홍색 짱구이(掌柜 장거; 지배인), 개국재두(開國財頭), 재능이 뛰어난 재사(才士)란 뜻의 ‘능인(能人)’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마오는 루산 1차 회의 때 전·현직 비서출신, 이른바 마오가 말한 ‘수재(秀才)’ 그룹인 중공중앙 후보위원 겸 후난성위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 주소주), 수전부(水電部) 부부장 리루이(李銳 이예), 중앙위원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후챠오무(胡喬木 호교목), 중앙판공청 부주임 톈자잉(田家英 전가영) 등과 경제난국 돌파를 위한 해법을 찾는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수재’ 그룹들은 천윈에게 경제를 맡길 것을 진언했다.

 

마오는 천윈이 1956년 저우언라이와 함께 앞장서서 ‘반 돌격주의’를 주창해 그를 경제부문에서 제외시켜 불만스러워 했다. 마오는 그러면서도 삼국시대 때 조조가 관도대전  초기에 원소에게 대패하자 요절한 책사 곽가(郭嘉)를 그리워했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천윈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오는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장군이 그립고,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國亂思良將 家貧念賢妻 국난사양장, 가빈념현처)”며 천윈을 높이 평가했다. (주석 394)

 

공산당이 중국을 막 통일했을 때 공산당의 국가통치 능력을 회의적으로 본 사람들은 “공산당이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으나, 천하는 말위에서 통치할 수 없다”고 냉소적인 자세를 보였다. 자본가들은 심지어 “공산당은 싸움은 100점, 정치는 80점, 경제운용 능력은 0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공산당의 집정초기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고, 경제가 썩어 문드러져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국 금융 중심지역 상하이는 모리꾼들이 매점매석을 하고, 투기업자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이때 상하이 자본가들이 ‘시골뜨기’ 공산당이라고 조롱을 할 때 천윈에 상하이에 급파됐다. 천윈은 실타래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킨 경제난맥을 능수능대하게 처리해 이른 시일 안에 경제를 정상화시켰다. 자본가와 투기꾼들은 혀를 내두르며 무릎을 꿇었다.

 

상하이뿐 만 아니었다. 서쪽으로는 ‘싼간닝(陝甘寧 섬감녕; 싼시-간쑤-닝샤지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랴오닝, 선양, 하얼빈 등에 이르기 까지 천윈은 동분서주했다. 천정부지의 물가를 잡고, 무너진 경제시스템을 구축해 ‘경제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다.

 

천윈은 초강경 조처도 마다하지 않아 사람들은 “천윈의 초식이 매우 모질었다”고 했다. 천윈은 “그렇지 않으면 천하대란을 막을 수 없다”고 응수했다. 어수선한 건국초기 몇 개월이 안 돼 물가가 안정되고, 민심이 진정되면서 경제가 정상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마오는 “천윈의 공적은 화이하이 전투(淮河戰鬪 회하전투; 중국 해방전쟁의 3대 전역 중 하나)에 뒤지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마오와 천윈의 갈등은 천윈이 1차 5개년 계획을 이끌면서 3년차 시기에 들어섰을 때 경제발전 속도에 불만을 터뜨린 마오가 “전족을 한 여인네 걸음처럼 뒤뚱 거린다”고 비판하면서 불거졌다. 마오의 한 마디에 각 성, 시 등 지방정부가 각 부문의 경제 생산목표의 지표를 높이고, 기반시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속페달을 밟았다. 1956년부터 이런 무모한 돌진의 돌격주의가 나타나자 천윈은 크게 우려했다.

 

중앙재경위원회 총책을 맡고 있던 천윈은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지금 말이 대단히 위험하게 달려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달려가면 내후년과 내내 후년이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내년의 투자를 줄이고,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천윈은 “실사구시는 전족을 한 여인네가 뒤뚱 거리며 걷는 게 아니다”며 마오와 정면충돌했다. 천윈은 건설규모는 국가의 재력과 물력 등의 국력에 맞도록 해야 하며, 조급하게 돌진하면 경제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오는 1957년 9월 20일 중공8기3중전회에서 “반 돌격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든 ‘후퇴 소조’를 만들었다. 공산당은 마땅히 급진파 위원회고, 국민당은 바로 후퇴파 위원회”라고 저우언라이, 천윈 등을 맹비난했다.

 

1958년 1월 12일부터 광시성 난닝(南寧 남녕)에서 경제관련 회의가 열렸을 때 마오는 16일 회의에서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커칭스(柯慶施 가경시)의 정치비서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가 기초한 ‘승풍파랑(乘風破浪; 어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아가자), 새로운 사회주의 상하이 건설을 가속하자’는 보고서를 내밀며 저우언라이, 천윈 등 ‘반 돌격주의’그룹을 맹타했다. 중앙재경공작 5인소조(小組) 중 병으로 참석하지 않은 천윈을 제외한 리푸춘, 리셴녠, 보이보, 황커청 등 ‘반 돌격주의’ 그룹의 4명은 줄줄이 자아비판을 했다.

 

마오는 1개월 뒤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열린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경제에 관련한 일은 모두 천윈이 서명한다. 이것은 나를 봉쇄하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반 돌격주의 사람들은 우파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대략 50미터 정도”라고 천윈을 공격했다.

 

이에 놀란 천윈은 회의에서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재경공작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했다. 천윈은 1980년에 “당시 민주 집중제는 이미 파괴되었다. 당내 생활은 비정상적 이었다”면서 “중앙 영도들이 모두 참석했지만 마오의 ‘판판마오진(反反冒進 반반모진; 반 돌격주의에 반대) 한 마디에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고 회상했다. 이때부터 마오가 천윈을 1선 경제공작에서 배제시켰다.  경제대권을 직접 틀어쥔 마오는 기세 좋게 대약진 운동을 펼쳐 나갔다.

 

천윈이 이끄는 중앙재경 소조는 실권 없는 기구로 전락했다. 단지 마오에게 경제소식과 각종 의견을 전달하는 유명무실한 자문기구에 그쳤다.

 

394) 毛澤東爲何点名要陳云收拾‘大躍進’殘局? 葉 子 人民網

-------------------------------------------------------------------------------------------------------------------------------------------------------

 

168. “파국만은 막자”…경제 생산목표 지표 대폭 하향

 

마오는 1959년 강철생산량을 3000만 톤으로 잡고 강력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난맥상만 노출한 채 경제전반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마오는 급한 나머지 천윈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 천윈은 마오에게 영국은 강철 연 생산량 869만 톤을 1655만 톤으로 끌어 올리는 데 17년이 걸렸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무리한 생산목표 지수를 대폭 줄이고 전반적 균형경제 정책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마오는 강철생산량 목표를 3000만 톤에서 1800만 톤으로 줄였다. 이 또한 실현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천윈은 당시 마오의 정치비서 후챠오무(胡喬木 호교목)를 찾아가 전반적인 경제상황을 설명한 뒤 마오에게 지표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후챠오무는 마오가 누구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노여움만 살 것으로 보여 보고하지 않았다. 후챠오무는 1959년 3월 하순 소집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하루 전날에서야 천윈의 건의를 보고했다.

 

마오는 “너는 일개 비서다. 부주석의 의견을 보고하지 않았다?”라며 엄하게 꾸짖었다. 이때는 역시 천윈의 건의대로 1800만 톤의 강철생산은 언감생심이었다. 게다가 균형경제의 파탄으로 하루가 다르게 경제상황이 더욱 위험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마오는 이미 마음속으로 천윈과 저우언라이가 주장한 ‘반 돌격주의’로 방향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뒤늦었지만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경제의 각종 생산목표 지표를 대폭 내리고,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회의에서 천윈의 건의 내용을 떠올리며 “대단히 용감하다. 진리를 견지하는 것도 용감하다. 진리는 왕왕 한 사람의 손에 있을 수 있다”며 천윈을 추켜세웠다. (주석 395)

 

결국, 마오는 ‘7천인 대회’에서 “중앙이 범했던 과오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내가 중공중앙의 주석이기 때문이다”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했다. 마오는 연설에서 천윈을 거명하면서 “천윈이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며 천윈을 다시 중앙재경 소조장(小組長)에 임명했다.

 

죽을 쓰고 있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구원투수로 등판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최대의 문제는 식량이었다. 인민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부족으로 인한 부종(浮腫)으로 온 몸이 퉁퉁 붓거나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윈은 도시인구의 한 사람에게 매월 3근의 콩을 공급할 것을 건의했다.

 

한 사람이 매일 최소한 70그램의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근의 식량은 45그램 정도의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고, 1~2근의 콩은 20그램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매년 도시에 30억 근의 콩을 공급해야 했다. 이것은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고기의 단백질이 부족한 상태에서 콩으로 영양을 보충하는 것은 비교적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콩으로만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밥을 먹어야 했다. 천윈은 식량수입을 건의했다. 중국정부는 500만 톤의 식량을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에서 긴급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천윈은 통화팽창에 주목했다. 이때 화폐유통은 130억 위안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70억 위안만 유통되고 있었다.

 

숨어있는 60억 위안 이상의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물가가 널뛰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설탕 값을 올려 숨은 돈을 끌어내 화폐를 회수하면 어느 정도 통화팽창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농업 부문의 회복이었다. 천윈은 심지어 마오가 사회주의 집단 생산방식에 어긋난다며 강력 반대하는 전답을 나눠줘 개인책임으로 생산하는 ‘분전단간(分田單干)’과 농가할당 생산 방식인 ‘포산도호(包産到戶)’제 시행을 건의했다. 농민의 노동의욕을 권장해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천윈은 ‘7천인 대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천윈은 “연설할 (경제 해법)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천윈이 완곡하게 연설을 거절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천윈은 7천인 대회가 끝난 뒤 14일 만에 류샤오치가 주재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 이른바 ‘시러우(西樓 서루)회의’에서 경제정책 전반에 관해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경제해법이 회의에서 채택돼 이후 경제정책을 시행하고 집행하는 기본이 됐기 때문이다. 천윈이 7천인 대회에서 연설을 거절한 내용은 3가지로 뜯어볼 수 있다. (주석 396)

첫째, 당시 천윈이 판단하고 있는 경제의 형세와 해법이 마오와 달랐다. 마오는 경제 형세판단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는 지나가 2~3년 이면 경제가 회복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류샤오치가 서면보고에서 밝혔듯이 (경제발전)10년 계획을 확정했다. 천윈은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고 예측했다. 전국의 농업이 회복되려면 2~3년이 아니라 최소 5년이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10년 계획을 확정하는 것이 급한 게 아니고 10년 계획 중 5년은 회복기로 잡고, 5년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마오와 천윈의 견해가 크게 달라 7천인 대회 분위기에 맞지 않아 연설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천윈은 생각한 것이다.

 

둘째, 천윈은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탐탁케 여기지 않는 성품이라는 것이다. 천윈의 경력과 성격에 비춰볼 때 그럴 경우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약진 운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가 뜨거워져 부화뇌동하면서 열광적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천윈은 소극적이었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마오쩌둥 동지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우리들은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류샤오치 동지, 저우언라이 동지와 나,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 천윈 동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술회해 천윈이 침묵하는 조심스런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마오의 심기를 건드려 루산회의 때처럼 대회가 돌변해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을 우려했다. 루산회의의 두려움이 아직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오가 7천인 대회에서 언로를 열고 스스로 비판하는 등 깨어있는 의식을 보여줬다. 하지만 여전히 ‘좌’경 방향을 선회할 조짐을 보여주지 않는데다 계속 ‘반우(反右)’운동을 펴고 있어 마오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윈은 1962년 현재의 상황을 1959년 루산회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해 변화무쌍한 정세변화가 눈앞에 역력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천윈은 나중에 연설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1962년 7천인 대회 때 마오 주석은 나에게 연설하도록 이야기했다. 나는 안하겠다고 했다. 주요한 것은 대충 대충하는 것이 나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마오 주석을 어렵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회상했다.

 

천윈은 1905년 6월 13일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칭푸(靑浦 청포; 현재 상하이에 속함)에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 4살 때 어머니가 모두 사망해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1919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이 빈한해 진학을 포기하고 상하이로 나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학생으로 있다가 점원이 되었다. 1925년 상무인서관의 파업위원장에 임명돼  상무인서관 대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 1931년 잇따라 중공6기3중, 4중전회에서 중앙 후보위원에 당선됐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2년 임시 중앙 상임위원으로 있다가 전국 노동조합단체인 전국 총공회 당단(黨團) 서기에 임명됐다.

 

395) 七千人大會, 毛澤東爲什麽請不動陳云講話?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爲何点名要陳云收拾‘大躍進’殘局?   葉  子   人民網
396)七千人大會, 毛澤東爲什麽請不動陳云講話?   人民網-文史頻道

-------------------------------------------------------------------------------------------------------------------------------------------------------

 

169. 천윈, 경제난국 타개 5개방면 6가지 조처 제시

 

 

1933년 루이진(瑞金 서금) 중앙소비에트 혁명근거지로 들어가 1934년 6기5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됐다. 장정(長征)에 참가해 준이(遵義 준의)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했다. 1935년 6월 장정 중 홍군이 루딩교를 건널 때 특수임무를 띄고 비밀리에 장정대오에서 떠났다.

 

천윈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성도), 충칭(重慶 중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공산당 재건 비밀공작을 펼쳤다. 그 후 소련 모스크바로 가 코민테른에 홍군 장정과 준이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천윈은 제일 먼저 홍군의 장정을 국내외에 알린 ‘수군서행견문록(隨軍西行見聞錄)’을 집필해 발간했다.

 

1937년 4월 신장(新疆 신장) 우루무치(烏魯木齊 오로목제)로 귀국해 신장 중공중앙 대표에 임명됐다. 11월에 옌안(延安 연안)으로 돌아온 뒤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을 맡았다. 1945년 6월 중공7기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됐다.

 

1948년 10월 중화(中華) 전국 총공회 주석에 뽑혔다. 신중국 건국 후 중앙 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돼 전국의 재정경제 공작을 주재했다. 1954년에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됐고, 상업부 부장(장관), 국가기본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57년 1월 중공중앙 경제공작 5인소조 조장(組長)에 임명돼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천윈이 장정 중 비밀리에 사라져 상하이를 거쳐 소련 모스크바에 도착해 코민테른에 홍군의 장정소식을 전하고 그곳에서 ‘수군서행견문록’을 집필했다. 천윈은 1936년에 잡지 ‘전민월간(全民月刊)’에 ‘리옌천(廉臣 염신)’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연재해 홍군의 장정소식을 제일 먼저 국내외에 알렸다. 이것은 미국의 저명한 신문기자인 에드가 스노우가 홍군의 장정 등을 쓴 ‘중국의 붉은별’보다 1년 먼저 세상에 나왔다.

 

당시 글쓴이의 이름이 ‘리옌천’으로, 사람들은 미국 기자로 추정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천윈으로 확인된 것은 장장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리옌천’은 천윈의 필명이었다. 장정직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겸 홍5군 중앙대표로 장정에 참가한 천윈은 군사위원회 종대 정치위원, 진사장(金沙江 금사강) 도하사령부 정치위원 등을 맡았다.

 

천윈은 1935년 6월 진사장 도강 후 홍군이 루딩교를 건널 때 몰래 장정대오에서 이탈했다. 당시 천윈과 가까운 사람들조차 천윈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중공중앙이 천윈을 비밀리에 장정대오에서 뺀 것은 상하이에 돌아가 무너진 공산당조직을 재건하는 것과 장정으로 연락이 끊긴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결정은 중앙의 핵심 기밀이었기 때문에 극소수의 영도자만 알고 있었다.

 

1935년 7월 초 쓰촨성을 거쳐 상하이로 온 천윈은 코민테른 대표단과 만나 소련으로 가서 ‘수군서행견문록’을 1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책의 내용은 홍군에 생포된 국민당군 군의관을 가탁해 1934년 10월 중앙 홍군이 장시(江西 강서)를 출발해 8개월 동안 6개 성 12000천리를 거치면서 겪고, 본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글은 비록 전문이 3만자로 짧은 편이지만, 생동감이 넘치고 믿을 수 있도록 썼다. 예를 들면 홍군 장교와 사병들이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석 397)

 

“위로는 총사령관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음식이 일률적으로 평등하다. 홍군 장교들은 사병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주더(총사령관)는 ‘취사반장’으로 불린다. 누가 군단장인지, 누가 사단장인지 알 수가 없다-”

 

홍군 영수들이 어떻게 인민들을 사랑하는지, 세세한 부분까지 챙겼다. 마오가 구이저우(貴州 귀주)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한 사례를 이렇게 묘사했다.

 

“마오쩌둥이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늙은 부인과 어린아이를 보았다. 몸에 홑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즉시 벗은 털옷과 행장에서 무명옷 한 벌을 꺼내 늙은 부인에게 주었다. 또 백미 한 되를 주도록 지시했다. 늙은 부인은 계속 고맙다는 말을 하며 웃으면서 걸어갔다.”

 

이처럼 장정 중인 홍군의 존재와 공산당을 선전하는 이 글은 1936년 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중국화교 조직이 운영하는 중문잡지 ‘전민월간(全民月刊)에 연재되었다. 7월에 모스크바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7천인 대회에서 마오가 천윈의 존재를 인정하고, 경제 2선으로 물러나면서  천윈은 다시 경제를 총괄하게 되었다. 류샤오치는 1962년 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중난하이 시러우(西樓 서루) 회의실에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통칭 ‘시러우 회의’로 불린다. 류샤오치는 천윈이 23일 회의에서 현재의 재정경제 형세와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 등 해법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천윈은 긴 연설을 하면서 7천인 대회에서 결의한 일단의 관점과 정책결정을 대담하게 수정할 것을 제시했다. 천윈은 5개 방면의 주요 어려운 점을 적시하고, 이를 극복할 6가지의 중요조처를 제시했다.

 

천윈은 경제난국 타개의 해법으로 1) 10년 경제계획을 두 단계로 나눠 전(前) 1단계 5년은 회복단계로 하고, 후(後) 1단계는 발전단계로 한다. 2) 도시인구를 감소하고, 군대의 정예화와 행정을 간소화한다. 3) 통화팽창을 강력하게 막는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 4) 도시인민의 최저 생활수요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5) 농업증산에 모든 가능한 역량을 동원한다. 6) 기획기관의 주요 주의력을 공업, 교통방면에서 농업증산과 통화팽창을 막는 방면으로 돌린다. (주석 398)

 

천윈의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두들 천윈의 연설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참석자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마오는 천윈의 ‘시러우 회의’ 발언을 전해 듣고 불만을 터뜨렸다.

 

천윈이 경제 형세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게 불만의 요인이었다. 마오는 나중에 여러 차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천윈이 말한 농업이 5년에서 8년이 지나야 회복된다는 것을 비판했다. 나중에 정책을 실행하면서 경제 회복시기가 천윈이 안정적으로 예측한 기간보다 빨랐지만, 천윈의 해법은 이후 경제회복에 대한 처방으로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렇다면 7천인 대회에서 연설하지 않았던 천윈은 14일 만에 ‘시러우 회의’에서는 왜, 발언을 했을까?

 

첫째, 시러우 회의는 규모가 작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로 연설 장소로써 비교적 적합하다. 의견을 전달하는 데 큰 규모의 회의 보다 조그만 규모의 회의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둘째, 마오가 7천인 대회에서 연설할 때 자신이 경제공작에서는 천윈만 못하고, 천윈이 ‘비교적 많이 안다’고 말했다. 이것은 마오가 7천인 대회에서 발언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전당에 경제는 천윈이 제일 잘 안다는 것을 선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자신을 포함해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을 거론하며 경제는 천윈만 못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해 천윈의 존재를 높이 평가했다. 천윈이 한껏 고무된 것이다.

 

셋째, 마오가 7천인 대회 참가자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권유하는 등 민주적 기풍을 발양하는 것을 구체적 실행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하면서도 마오가 다른 의견을 잘 듣겠다는 생각이 돌아온 게 아닐까하는 믿음이 있었다. 천윈은 실제로 2월 8일, 7천인 대회 싼시(陝西 섬서)조에서 발언 할 때 참석자들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비평의 문이 점점 넓어질 것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넷째, 엄중한 경제 상황이었다. 7천인 대회이후 중앙은 1962년의 국가예산이 표면상으로는 수지균형을 이뤘지만 실제적으로는 50억 위안의 적자가 발생한 것을 알고 놀랐다. 중앙의 고위 영도자로서 고도의 정치적 책임감과 사명감이 분출했다.   

 

이런 몇 가지 이유가 천윈이 7천인 대회와 달리 ‘시러우 회의’에서 대담하게 연설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하겠다. '시러우 회의'는 7천인 대회의 통일적 인식의 기초아래 천윈의 경제위기극복 해법을 대폭 수용해 3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1) 현대 경제상황은 비상시기에 처해 있다. 우리들은 농업회복, 시장안정, 재정경제 상황의 기본적 호전(好轉) 쟁취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2) 이후 10년을 두 단계로 나눠 전(前) 1단계는 조정단계로 (경제)회복이 우선이며, 부분적으로 발전을 기하도록 한다. 후(後) 1단계는 발전단계로 (경제)발전이 우선이며, 부분적으로 회복을 기하도록 한다. 3) 천윈과 리푸춘, 리셴녠은 국무원 각부 위원회 당 조직 성원들에게 이번 회의의 정신과 중앙의 방침을 전달한다. (주석 399)

 

397) 揭秘; 陳云爲何在長征途中突然消失? 文滙報  人民網
398) 毛澤東傳(1949-1976 하)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爲何点名要陳云收拾‘大躍進’殘局?  葉子 人民網
399)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70. 마오, 흑암풍·단간풍·번안풍 ‘3풍’ 강력 비판

 

중공중앙은 1962년 5월 7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공작회의, 이른바 '5월회의'를 열었다. 덩샤오핑은 이 회의에서 루산회의 이후 극성을 떨었던 좌경 바람으로 '우경 기회주의분자'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간부들에 대한 명예회복 조처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건의했다.

 

생산성 제고를 위해  우경 기회주의 분자로 찍혀 풀이 죽은 간부들의 적극성을 이끌어 내어 생산현장에 투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縣)이하 농촌간부와 군중들의 적극성을 동원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명예회복 조처는 주요 대상이 간부지만, 간부 개개인마다 가족, 친척 등 인민들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대규모의 인민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여기에 주목했다. '5월회의' 이후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명예회복 조처가 전면 실시돼 그 해 8월까지 당원 간부 365만 명, 일반 군중 370만 명 등 모두 700여만 명에 대해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었다. 덩샤오핑은 또 농민들이 더 많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개별경작 형태의 농가할당 생산방식인 '바오찬다오후(包産到戶 포산도호)' 제도를 명확하게 지지했다.

 

덩샤오핑은 쓰촨성 속담인 '검은 고양이든 노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며 실용적 노선을 확고히 했다. 이 말은 나중에 덩샤오핑의 전매특허가 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의 원래의 버전이다. (주석 400) 

 

'바오찬다오후(包産到戶 포산도호)'는 농민들이 인민공사에서 집체적으로 농업생산을 하는 형태와는 달리 토지를 농가별로 할당받아 생산량을 책임지고 초과분은 임금형태로 지급받는 제도다. 애초 이 제도는 1961년 2월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위원회에서 서기처 회의를 소집해 이 제도를 연구한바 있었다.

 

성위(省委)서기 쩡시성(曾希聖 증희성)은 노동력에 따라 경지(耕地)를 분배해 식량생산을 초과한 분분에 대해서는 임금형식으로 경작 농민에게 주도록 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제기했다. 이 제도를 '바오찬다오후'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는 농민들이 개별 생산하는 '바오찬다오후'였다. 루산회의 당시 '바오찬다오후'는 자본주의 길로 가는 생산방식이라고 해서 엄중한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성위 서기처는 먼저 상급기관인 화동국(華東局) 제1서기 커칭스에게 지시를 청했다.

 

커칭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이 제도를 널리 보급하지 않고 현(縣)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안후이성은 허페이(合肥 합비)시 교외 수산공사(蜀山公社 촉산공사) 징강(井崗 정강)대대 난신좡(南新庄 남신장) 생산대대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했다.

 

그 후 반응이 좋아 쩡시성은 모든 현에 1~2개의 '책임전(責任田)'을 두고 농가 할당제 생산방식을 운영했다. 짧은 시일 안에 농가 할당 생산대(生産隊)가 39.2%에 이르렀다. 7천인 대회 때 쩡시성은 사회주의의 집체경제를 무너뜨리는 수정주의라는 마오의 비판을 받고 서기직을 박탈당했다. 이렇게 해 각 성으로 번져나가던 '바오찬다오후'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7천인 대회가 끝난 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져 서로 다른 의견이 맞섰으나 덩샤오핑은 확고하게 이 제도를 찬성했다. 중앙서기처는 7월 2일 회의를 열어 형세분석과 '바오찬다오후'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덩샤오핑은 "농업을 회복시키기 위해 상당히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나눠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천윈은 "과도시기에 어떤 방법이 (농업)회복에 유리하다면 어떠한 방법도 써야 한다"며 이 제도를 적극 검토하는 데 찬성했다.

 

덩샤오핑은 7월 7일 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 청년단) 3기7중전회 회의에서 "각종 형식의 '바오찬다오후'가 20%도 되지 않는 것을 겁내는 것은 큰 문제다. 이런 문제는 마땅히 백가쟁명으로 논해야 한다. 모두가 의견을 말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샤오핑의 연설은 계속됐다.

 

"어떤 형식이 어떤 지방에 농업생산 발전을 비교적 빠르게 회복시키고, 용이하면 그 형식을 채택하고, 군중들이 원하면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류보청(劉伯承 유백승) 동지는 전투를 할 때 늘 쓰촨 속담인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이렇게 해 장제스를 물리칠 수 있었다. 바로 옛날 규칙, 옛날 길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상황을 살펴서 이기면 그것으로 됐다. 현재 농업생산을 회복하려면 상황을 살펴야 한다. 바로 생산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일종의 고정불변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어떤 형식이 군중들의 적극성을 동원할 수 있다면 그런 형식을 채용해야 한다. 농촌방면에 일단의 정책을 채택하는 목적은 더 많은 식량을 얻고, 더 많은 나무를 심고, 밭갈이 소(耕牛 경우)를 번식시켜 농민들을 비교적 만족시키는 것이다. 한쪽으로 자신이 많이 먹을 수 있고, 한쪽으로 국가에 많이 공급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전국이 집체경제를 공고히 하는 것은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근본적인 방향이다. 농촌에서 기층의 생산관계를 조정하려면 여러 가지의 형식을 인정해야 한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여러 가지의 형식이 비교적 좋다."

 

지방순시를 마치고 베이징에 온 마오는 7월 6일 당내 고위 영도자들이 갈수록 '바오찬다오후'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농촌정책 조정의 전제조건으로 인민공사체제를 견지하고, '바오찬다오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7월 8일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천보다, 톈자잉 등을 불러 회의를 하면서 '바오찬다오후'에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를 명확하게 밝혔다.

 

농촌의 경제형태가 집체경제에서 개인경작의 사영(私營)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근본부터 흔드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형태는 수정 자본주의(修正資本主義)로, 자본주의 체제로 회귀해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건설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거대한 저수지도 땅강아지 한 마리가 뚫어 놓은 작은 구멍 때문에 맥없이 무너지지 않는가. 중앙 영도부들에게 싹트고 있는 수정주의의 싹을 미리 없애야 했다. 마오의 사회주의 건설의 조급성은 이제 급진적 과격주의로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뜻을 접었다. (주석 401)

 

중공중앙 공작회의가 중앙 영도자들의 휴양지인 발해만에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에서 7월 25일부터 8월 24일까지 장장 1개월 동안 열렸다. 마오는 8월 6일 베이다이허 중앙 공작회의에서 작심하고 3개 부분에 대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밝히면서 설명했다. (주석 402)

“나는 베이다이허에서 계급, 형세, 모순 등 3가지 문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계급(階級)에 대해서 말하겠다. 국제 제국주의, 민족주의 그런 것들은 모두 자산계급의 국가다. 계급투쟁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우리들은 반제(反帝)의 임무가 있다. 반제 민족혁명운동을 도울 임무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는 계급이 있는가, 없는가? 계급투쟁이 있는가,  없는가? 마땅히 (계급이)있고, (계급투쟁이)존재한다. 레닌은 사회주의 승리이후 오랜 시기 동안 국제 자산계급이 존재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자산계급의 잔존세력이 존재하고, 소자산계급이 농민계급 속에서 부단히 자본주의분자로 성장한다. 착취계급이 비록 전복됐지만 장기적으로 존재하면서 심지어 부활하려고 한다.-우리들은 국가를 아주 잘 장악해야 한다. 아주 잘 이 문제를 인식하고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말하는 순간부터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해야 한다.”

 

마오는 경제 조정정책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영경제 체제의 위기의식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로 계속적인 계급투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사상무장을 강조했다. 마오는 이어 수년 동안의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면서 국제형세는 좋은 데 국내 상황은 나쁘다고 말했다.

 

특히 1959년, 1960년 두 해가 높은 농산물 구매와 눈먼 지휘로 많은 과오를 범해 수정주의가 나타나고, 수정주의가 우리를 압박해 상황이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마오는 대체적으로 일단의 사람들은 과거 몇 년 동안 단지 밝음(光明 광명)만 바라보고 어둠을 보지 않았다. 지금 일부분의 사람들과 동지들은 어둠(黑暗 흑암)만 보고 무슨 밝음이 있었느냐고 한다. 만약 모두 맞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밝은 것이지만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마오는 우리들이 1차 루산회의에서 말했던 세 마디 말, ‘성과는 크다, 문제는 적지 않다, 앞날은 밝다’고 말했다. 마오는 비관적 생각과 어둡고 부패한 사회에 대한 비관주의 바람(黑暗風 흑암풍), 농촌에서 집체경제를 허물고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바람(單干風 단간풍), 우익 기회주의자와 반혁명분자들에게 내린 판단을 뒤집는 바람(飜案風 번안풍) 등 이른바 ‘3풍(風)’을 강력 비판했다.

 

‘바오찬다오후(包産到戶 포산도호)’를 선호했던 농촌 공작부 부장(장관)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는 마오의 엄중한 비판을 받고 자아비판을 했다. ‘번안풍’은 덩샤오핑이 강력 주장해 관철했던 억울한 누명을 쓴 당 간부와 인민들에 대한 명예회복을 지칭한 것이다. 이때 펑더화이는 여전히 복권이 되지 않았다.

마오는 세 번째 문제인 모순(矛盾)에 대해 말했다. (주석 403)

“우리 중국에도 중국적 수정주의의 모순이 있다. 우리들이 과거에 불렀던 우경 기회주의는 지금은 이름을 바꿔 중국적 수정주의로 탈바꿈했다. 베이다이허와 베이징의 이 2개월간의 회의는 두 가지, 즉 공작문제와 계급투쟁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다.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투쟁의 문제다.”

 

당시 소련과 불화를 겪고 있던 마오는 소련을 수정주의 사회주의국가로 비난하며, 이런 기류를 국내와 당내의 문제로 연결해 류샤오치, 천윈, 덩샤오핑 등을 겨냥했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 등을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낙인찍었던 ‘딱지’를 이제 포장을 바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수정주의자들에게 붙여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계급투쟁에 관한 연설은 전체회의와 중앙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회의 ‘결의(決議)’에 삽입됐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난 뒤 ‘결의’에 수록한 계급투쟁을 전국에 광범하게 선전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좌(左)’경 이론을 받아들여 ‘계급투쟁’이론이 확장되고 절대화하는 관점이 되어 광범한 군중기초를 이루었다. 하나의 사회적 사조(思潮)로 ‘괴물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400) 揭秘; 三年經濟困難 鄧小平如何調整國民經濟?  睢 城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401)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02)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03)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71. 전국적 사회주의 교육운동 들불처럼 번져

 

한편 1962년 1월의 ‘7천인 대회’는 루산회의의 ‘반우(反右)’ 투쟁을 다시 확인해 관련자들에 대한 억울한 누명을 벗겨 명예를 회복시키는 ‘핑판(平反 평반)을 고려하지 않아 펑더화이는 정치국 위원직은 유지했지만 여전히 ‘우경기회주의자’로 매도돼 ‘따돌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류샤오치는 1월 27일 대회에서 펑더화이에 대한 복권조처를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루산회의가 펑더화이 동지의 반당집단에 반대투쟁을 벌이는 것은 펑더화이 동지가 오랫동안 당내에서 소집단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오강(高崗 고강), 라오수스(饒漱石 요수석)의 반당집단에 참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오강이 펑더화이를 이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펑더화이가 가오강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모두 국제적 배경을 갖고 반당활동을 했다. 중국에서 아무개 외국인과 전복활동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복권될 수 있지만 펑더화이 동지는 안 된다.”

 

펑더화이는 중상모략이라며 크게 분노했다. 펑은 중앙 판공처 주임인 양상쿤(楊尙昆 양상곤)에게 전화를 걸어 “주석과 류샤오치에게 이에 대한 성명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사람들에게 류샤오치의 발언을 보고 대단히 마음이 좋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펑더화이는 6월 16일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과 시비곡직(是非曲直)을 자세히 쓴, 나중에 펑더화이 복권(復權)의 ‘팔만언서(八萬言書)’라고 불리는 자료를 직접 양상쿤에게 전달했다.

 

펑더화이는 장장 8만자에 이르는 '팔만언서'에서 류샤오치가 보고에서 발언한 '소집단 구성'과 관련해 "이 소집단의 정치 강령은 무엇인가? 어디에 구성원이 있는가? 정치 강령도, 구성원도 없다. 그것은 날조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항변했다. 펑더화이는 외국과의 내통에 대해서 "나는 어떤 외국인과 개인적으로 접촉한 일이 없다. 완전히 없는 사실을 꾸며낸 것이다. 진리는 단지 하나다.-이런 결론은 주관주의 적이고 사실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나에 대한 중상모략이다!"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양상쿤은 이 자료를 인쇄해 마오와 중앙 정치국, 서기처 위원들에게 배포한바 있었다. (주석 404)

 

마오는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펑더화이의 복권과 관련해 비난을 퍼부으며 ‘번안풍, 흑암풍, 단간풍’ 등 ‘3풍(風)’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9월 베이징에서 개최한 8기10중전회와 이어 열린 13주년 국경절에 펑더화이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마오는 회의에서 "내가 펑더화이를 비교적 잘 안다. 복권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전회는 '펑더화이 전담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면 심사에 들어갔다.

 

중공 8기10중전회에서 계급투쟁을 다시 거론한 뒤 마오가 ‘판슈팡슈(反修防修 반수방수;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막음)’ 전략으로 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사상교육이었다. 마오는 1963년 5월 9일 저장성(浙江省 절강성)위원회 판공청이 인쇄해 배포하도록 한 자신이 쓴 ‘간부들의 노동참가 재료’에서 당 간부들이 생산노동에 참가하는 것은 위대한 혁명적 의의가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이렇게 기술했다.(주석 405)

 

“계급투쟁, 생산투쟁과 과학실험은 사회주의 강대국가 건설의 3가지 위대한 혁명운동이다. 공산당원이 관료주의를 막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를 피하면서 영원히 확고한 기초에 서있는 것을 보증한다. 무산계급은 능히 광범한 노동군중과 연합하면 민주전정(專政)을 실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짧으면 몇 년에서 십 수 년, 길어야 몇 십 년 안에 전국적으로 반혁명이 부활하고, 마르크스-레닌의 당이 수정주의 당, 파시스트 당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전 중국의 얼굴이 바뀐다. 동지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위험한 광경인가!”

 

마오는 당 간부들이 생산현장에서 군중들과 연합해 계급투쟁을 실천하면 공산사회의 자본주의 오염을 막을 수 있다고 선동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의식혁명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상개조다. 그 기초는, 사상의 원류인 인식과 실천에 있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사람의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두 개의 비약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무수한 감성적 인식이 많이 쌓이다 보면 첫 번째 비약(飛躍)을 하게 되고, 그런 뒤 이성적 인식으로 변한다. 이게 바로 사상(思想)이다. 모든 인식과정의 1단계로, 즉 객관적인 물질이 주관적인 정신적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2단계는 1단계에서 얻은 인식을 사회에서 실천하면서 얻은 실천적 경험이 또 하나의 비약을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이런 인식과 실천을 여러 차례 반복할 때, 즉 정(正)-반(反)-합(合)으로 발전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인식이 완성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며, 변증 유물론적 인식론이라고 마오는 규정했다. 마오는 정확한 사상(생각)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를 이렇게 풀어 설명했다.

 

“사람의 정확한 사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자신의 머릿속의 고유한 것인가? 아니다. 사람의 정확한 사상은 실천과정에서 나온다. 사회의 생산투쟁, 계급투쟁과 과학실험의 이 세 가지 실천과정에서 나온다. 사람들의 사회적 존재는 사람들의 사상을 결정한다. 선진 계급의 정확한 사상을 대표해 일단 군중을 장악하면 사회를 개조할 수 있으며, 세계의 물질역량을 개조할 수 있다.”

 

1960년대 중국의 주변 국제환경은 긴장상태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62년 말부터 중국과 소련이 날선 논전(論戰)을 벌이고, 중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압력이 가중되는 등 중소관계가 날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동쪽으로는 일본-한국-타이완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전략적 포위망이 구축되고, 장제스의 타이완 정부가 대륙탈환을 위한 반격 정책을 펴고 있었다. 특히 남쪽은 1961년 시작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해 중국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서쪽은 1962년 10월부터 중국과 인도가 국경선에서 군사충돌을 벌였다. 이에 따라 사방에서 봉쇄된 ‘죽의 장막’ 중국은 준 전시상태에 들어갔다. 마오의 계급투쟁을 앞세운 사상개조와 준전시상태로 전쟁분위기를 고조시켜 비교적 군중동원과 국가적 통제가 쉬운 편이었다.

 

이런 국내외 뒤숭숭한 분위기에 편승해 펑더화이의 몰락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마오의 복심 린뱌오는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국방부장으로 군내에 마오의 개인숭배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린뱌오는 1961년 4월 하순 인민 해방군 기관지 ‘지예팡쥔바오(解放軍報 해방군보)에 마오의 저서(著書)나 연설에서 따온 마오의 어록(語錄)을 싣도록 지시했다.

 

린뱌오는 4월 30일 중앙 군사위원회 상임위원회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는 허룽(賀龍 하룡), 뤄룽환(羅英桓 나영환),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원수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 국방부 부부장(차관)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 등이 참석했다. 군인들에게 마오의 저작에서 따온 경귀를 암송하게 하고, 이른 시일 안에 마오의 정신을 주입시키는 사상교육 등에 관한 회의였다. 린뱌오는 몇 개의 회의 안건을 통과시킨 뒤 다른 의견이 있는 지를 물었다. 뤄룽환이 발언권을 얻어 지시문서에 특별히 강조한 마오선집의 ’문제학(問題學)을 갖고‘의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개인숭배의 도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주석 406)

 

“마오선집의 ‘문제학(問題學)을 갖고’라는 구절을 고려해야 한다. 이 구절은 결함이 있다.”

“이 구절 어디를 말하는 가?”

 

이런 구절을 만든 린뱌오는 일부러 모르는 체하며 되물었다. 뤄룽환은 문제의 구절을 낭독했다. 당황한 린뱌오는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무슨 학(學)’ 이라고 해야 하나?”

“마오 주석의  저작의 실질적인 정신을 학습해야 한다. ‘문제학을 갖고’ 부분은 빼버리는 게 좋다.”

“좋지 않다면 빼버리시오!”

 

린뱌오는 한참 생각하다 퉁명스런 말투로 말했다.

 

“빼버리는 게 좋다. 마오 주석의 저작 학습은 꼭 근본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 가지 도리와 사리에 정통하려면 입장과 관점, 방법 등을 학습해 긴밀하게 실제와 연결시킬 수 있도록-”

“됐소. 산회(散會).”

 

열 받은 린뱌오는 뤄룽환의 말을 자른 회의에 참석한 군의 선배 원수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회의를 서둘러 끝내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린뱌오의 지시로 ‘해방군보’는 5월 1일부터 마오의 어록을 싣기 시작했다.

 

린뱌오는 내용과 당일 지면에 맞도록 요구하고, ‘살아있는 학문을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해방군보에 실은 마오의 어록은 1964년 ‘마오주석 어록’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이른바 소홍서(小紅書)인 ‘마오쩌둥 어록’으로 이름을 바꿔 50억 부를 전국에 뿌려 마오의 신격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뤄룽환은 린뱌오가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자 직접 중앙 서기처 총서기인 덩샤오핑에 전화를 걸어 부당함을 지적했다.

 

뤄룽환은 린뱌오가 마오를 신격화하고, 마오 사상을 비속화 시키며, 교조화 하는 행위에 반대했다. 덩샤오핑은 중앙 서기처 회의를 소집해 토론을 거쳐 마오쩌둥 사상을 비속하게 한다는 뤄룽환의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린뱌오는 그 후 뤄룽환에 대한 보복에 들어갔다. 자신이 만든 ‘4개 부분을 잘하는 부대를 창조하자’, 사상, 훈련, 기풍, 생활 등 이른바 ‘4조(抓) 운동’에 협조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뤄룽환을 반당집단으로 매도했다.

 

당시 국방부 부부장 겸 총참모장인 뤄루이칭(羅瑞慶 나서경)이 동의하지 않자 린뱌오는 얼마 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칠 때 뤄루이칭에 뤄룽환과 짜고 마오 주석에 반대했다며, 뤄루이칭을 ‘반당집단’으로 음해해 제거했다. 1965년에 뤄룽환은 세상을 떠 박해는 피했지만 그 부인 린웨친(林月琴 임월금)은 ‘의식이 퇴폐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난을 겪었다.

 

린웨친의 동생은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뤄룽환은 생전에 자식들에게 청나라의 기득집단인 ‘팔기자제(八旗子弟)’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특권 없는 자발적 삶을 교육한 엄격한 훈도로 유명했다. 마오는 뤄룽환이 사망했을 때 애도하는 7율시를 지어 “나라가 어려울 때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國有疑難可問誰 국유의난가문수)?”라며 그의 뛰어난 지혜와 고결한 품성을 추모했다. 

 

404) 揭秘; 廬山會議之後的彭德懷   新華網  理論頻道  楊尙昆‘萬言書’; 主席沒料到多數人會支持彭德懷   人民網-文史頻道
405)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06) 羅 英桓與林彪的嚴重分歧  羅英桓傳   當代出版社  新華網  理論頻道

-------------------------------------------------------------------------------------------------------------------------------------------------------

 

171. 새로운 ‘4청(淸)’ 운동, 류샤오치 영도체제 전면 부정 신호탄 

 

마오의 부인이자 비서인 장칭(江靑 강청)도 이즈음부터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다. 중국 초유의 여황제 측천무후를 꿈꾸는 장칭은 마오의 개인숭배를 찬양하고, 사회문제에 참견하는 등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장칭은 16세기 명나라 가정황제(嘉靖皇帝) 때 직간으로 유명한 대신인 강직한 해서(海瑞)가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황제에게 거침없이 간언하다 쫒겨 나는 내용을 그린 경극(京劇) ‘해서(海瑞)’ 등 문예작품들을 못마땅해 했다. 배우출신인 장칭은 1962년 이 경극이 문제가 많다며 중앙선전부, 문화부 등에 비판을 제기했다. 장칭은 “무대에서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 자산계급과 봉건주의적인 것 들이다”라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장칭은 이때부터 문예비평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문화대혁명을 추동하는 혜성처럼 떠오른 ‘좌파’의 기수(旗手)로 눈길을 끌었다. (주석 407)

 

마오는 1962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경제가 조금씩 호전되면서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오는 1964년에 들어 4개 부문을 맑게 하는 이른바 ‘4청(淸)’, 즉 당 간부들의 독직(瀆職)에 반대하고, 낭비에 반대하고, 많이 먹고 많이 소유하는 것에 반대하고, 반혁명의 파괴에 반대하는 운동이 부족하다며 철저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다그쳤다.

 

중공중앙 공작회의가 1964년 5월 15일부터 6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주요 의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제3차 5개년 계획의 초보적 구상, 베트남 전쟁 등과 관련해 국가 중요시설의 재배치에 따른 3선(線)건설 등이었다. 마오는 6월 8일 수정주의(修正主義) 문제에 대해 연설했다.

 

마오는 “현재 세계에는 두 종류의 공산당이 있다.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다”라고 말할 때 류샤오치가 끼어들었다. 류샤오치는 “소련의 경우, 하나는 이번에 출현한 수정주의다. 하나는 10월 혁명이다. 모두 위대한 국제적 의의가 있다. 우리들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수정주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주의하지 않으면 반드시 출현 한다”고 말했다.

 

이때 마오가 “이미 출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오는 “내가 보기에, 우리 국가 3분의 1의 권력은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적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 -만약에 흐루시초프가 출현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중앙의 수정주의 문제를 맹비난 했다.

 

마오는 그 후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제기방식과 방법을 거론하면서 “어떤 사람이 독립왕국을 만들고 추종자들이 대단히 많다”며 또 다시 당내의 수정주의 위험을 경고했다. 국무원 부총리 보이보(博一波 박일파; 현재 충칭 서기 보시라이(博熙來 박희래)의 아버지)는 훗날 “당내 고위  영도층에서 발생한 이런 사상적 이견은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엄중했던 것은 마오 주석의 류샤오치 동지에 대한 불신임이었다. 이때부터 문화대혁명 발동의 씨앗이 묻혀있었다”고 회상했다. (주석 408)

중공중앙 정치국 공작회의가 1964년 12월 15일에서 1965년 1월 14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경험을 총결하고, 다음 단계의 공작을 토론하는 이 회의에서 마오와 류샤오치가 운동방법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류샤오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타오주(陶鑄 도주) 동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농촌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부유계층과 극빈계층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또 일부 지방의 자산계급분자를 거론했다. 농촌에서 신자산계급분자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가? 아니면 직위나 직무를 이용해 불법으로 재물을 모은 독직분자나 투기꾼을 말함인가?”

“농민들은 무엇이 자본주의인지를 모른다. 농민들은 당신이 말한 투기꾼이나 독직분자, 도둑질한 자들로 이해한다.”

“내가 볼 때 공작대 골간들이 역량을 배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지도력이 강하지 못하다. 전선이 너무 긴 게 아닌가? 전선을 단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 단축하나?”

“(전선의 단계를) 줄이는 것은 쉽다. 당신이 단축하면 된다.”

“지방에서 기관 가족 중에 많은 악질토호, 지주, 부농분자들을 제기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문제다.”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전국의 인구가 수억으로 그런 자들은 몇 백만 정도에 불과하다. 또 각지에 흩어져있다. 맑게 하려면 맑게 할 수 있다. 많은 건 많은 게 아니다. 있는 건 있는 거다.”

 

마오는 대화에서 류샤오치가 거론한 문제에 높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류샤오치의 방법에 대해 건성건성 이야기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류샤오치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오는 11월 말 류샤오치로부터 공작상황을 보고받다가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했다.

 

“샤오치 수장(挂帥 괘수),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4청(淸)’, ‘5반(反)’, 경제공작 등 모두 당신이 관장한다. 나는 주석이고, 당신은 제1부주석이다. 하늘의 비바람(정세변화)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죽은 뒤 당신이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교대해 당신이 주석이 되어 진시황이 돼라. 나는 나의 약점을 잘 안다. 어머니를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약빠르지 못하다. 당신은 대단하다. 당신은 어머니를 원망하는 수장이다. 당신은 (덩)샤오핑과 총리(저우언라이)를 잡고 있다.”

 

마오가 ‘대단하다(리하이(厲害 여해)’라고 말한 이면에는 류샤오치가 ‘4청(淸)’작업을 하면서 독직이나 투기꾼 노릇을 한 공사간부 정(正), 부장(副長) 180여 명과 기타 간부 1000여 명을 해직시키는 강경조처도 한 몫을 했다. 류샤오치는 깜짝 놀라 발병을 하고 나섰다. 류샤오치는 “‘4청’은 내가 관장하고, ‘5반’은 셰푸즈(謝富治 사부치), 펑전(彭眞 팽진)이 많이 관할한다. 경제공작은 덩샤오핑이 총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는 “여전히 당신은 수장이고, (덩)샤오핑은 비서장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교육운동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12월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류샤오치는 농촌의 당면한 문제로 부유한 농민계층과 광범위한 극빈계층간의 모순을 거론했다. 류샤오치는 타락한 나쁜 간부들이 지주들과 결합해 군중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오는 달랐다.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당권파(黨權派)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농민들의 머리에 올라타 농민들은 가난에 찌들어 죽어간다고 비판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당권파’ 문제라고 했다. 마오는 중공중앙의 5대 서기인 5대영수를 당권파로 몰아쳤다. 군중을 발동하는 것은 바로 우리당을 바로 잡는 일이다. 중심문제는 당을 정화하는 것이다. 당을 정화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질타했다.

 

12월 26일은 71살이 되는 마오의 생일이었다. 건국이후 마오는 공개적으로 생일축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스로 초청명단을 작성해 중앙 영도자, 각 중앙국 책임자, 3기 인민대회 1차 회의에 참가한 모범 노동자, 과학자 등 40여 명을 인민대회당으로 초청했다. 마오는 연회 자리에서 “오늘은 내가 한 턱 내는 게 아니다. 더욱 축수(祝壽)하는 자리도 아니다. 내가 원고료로 여러분을 밥 한 끼 대접하는 자리다. 밥만 먹어서는 안 된다.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현재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막 시작됐다. 나는 현장에 실습을 가지 못한다. 발언권도 없다”고 말했다. 마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주석 409)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이제 71살이다. 나는 늙었다. 혹시 얼마 있다가 마르크스를 보러갈지 모른다(공산당 영도들이 죽는다는 뜻으로 쓰는 말). 때문에 오늘 여러분을 초청해 밥 한 끼를 먹는 것이다. -5월, 6월 소집한 중앙공작회의에서 전국 기층의 3분의 1의 영도권이 나의 수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당 중앙의 수정주의를 걱정한다! 수정주의의 출현은 자산계급이 정치무대에서 흥기(興起)하는 것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영도자는 이미 변했거나 혹은 변해서 노동자들의 피를 빠는 자산계급분자다. 이들은 투쟁의 대상이고, 혁명의 대상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생일연회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보이보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오 주석은 몇 명의 과학자와 모범 노동자들이 있는 탁자에 앉았다. 다른 중앙 상임위원과 정치국 동지들은 별도의 탁자에 앉았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인식의 과오와 제시방법을 계속 비판했다. 무슨 ‘4청(淸)’과 ‘4불청(不淸)’, 당내의 모순 교차? 이것은 비 마르크스주의다. 중앙은 ‘독립왕국’을 구축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또 당내에 수정주의의 위험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자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연회에 참석했던 쩡즈(曾志 증지)는 “주석은 술을 마시면서 말을 했다. 특별히 많은 말을 했고, 말속에 말이 있었다. 무서웠던 말은 ‘어떤 사람이 독립왕국’을 구축하고 있고, 추종자들이 많다‘고 한 것이다. 전혀 수연(壽宴) 분위기가 아니었다. 개개인들은 모두 긴장하고 곤혹스러워 했다. 주석이 왜 그러는가? 실내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단지, 주석이 혼자 풍자적 웃음(嬉笑 희소)을 지으며 질책하는 소리를 들을 뿐 이었다. 어떤 추측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타오주(陶鑄 도주)는 나중에 “불행한 일은 주석의 창끝이 바로 류샤오치를 겨냥했다”고 했다. 중앙공작회의는 12월 27일 ‘농촌 사회주의 교육운동 중 목전에 제기된 일단의 문제(이 문건이 모두 17조로 되어 있어 약칭 ‘17조’라고 함)’를 토론하고 수정한 뒤 통과시키고 중앙의 명의로 반포했다. 이 ‘17조’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중점은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走資派 주자파)를 바로 잡는 것’이라고 제기했다. 17조는 또 이후 도시향촌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종전의 ‘4청(淸)’과는 달리, 새로운 ‘4청(淸)’, 즉 정치를 맑게 하고, 경제를 맑게 하고, 사상을 맑게 하고, 조직을 맑게 한다는 4개 부문을 일율적으로 통일했다. 이것은 그동안의 류샤오치 영도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신호탄이 됐다.

 

40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08) 毛澤東與劉少奇之間何時出現了分歧的苗頭)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對劉少奇說; 你厲害   新華網  時政頻道
409)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對劉少奇說; 你厲害   新華網  時政頻道 毛澤東與劉少奇之間何時出現了分歧的苗頭?   人民網-文史頻道

-------------------------------------------------------------------------------------------------------------------------------------------------------

 

172. 권력을 쫓는 ‘인간 하이에나’와 야오원웬의 등장

 

산에 비가 쏟아지려 하는데 누각에 바람이 가득 몰아치고 있었다(山雨欲來風滿樓 산우욕래풍만루). 그랬다. 마른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는 가운데 폭우를 머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이처럼 마오의 잇따른 파국을 부르는 비판은 한바탕 살벌한 분위기의 격렬한 투쟁을 예고했다. 권력을 좇는 ‘인간 하이에나’들이 먹잇감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장칭(江靑)과 린뱌오(林彪)였다. 1964년 10월 정치무대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던 장칭(江靑 강청)은 베이징 문화계의 문예비평가 리시판(李希凡 이희범)을 찾아갔다.

 

장칭은 리시판에게 명사(明史) 전문가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 오함)이 쓴 ‘하이루이바관(海瑞罷官 해서파관)’을 비판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60년 경극 극본으로 쓴 ‘해서파관’을 1962년에 불어 닥친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바람, 즉 단간풍(單干風)과 연계시켜 비판해달라는 것이었다. 리시판은 ‘해서파관’이 순수한 학술적인 글이어서 필자인 우한과 역사, 예술적 측면에서 토론을 한 바 있었다.

 

리시판은 이런 글에 정치적 음습한 냄새가 나는 수정 자본주의로 몰아치기 위해 ‘단간풍’과 연계시켜 비판하는 것은 억지라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 장칭은 11월에도 리시판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리시판의 상관인 중공중앙 선전부 부부장 저우양(周揚 주양)의 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을 요구했다.

 

리시판은 저우양의 수준이 자신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화가 난 장칭은 상하이로 달려갔다. 장칭은 마오의 신임을 받아 좌파의 한 축을 이끌면서 상하이를 관할하는 중앙 화둥국(華東局 화동국) 제1서기 커칭스(柯慶施 가경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커칭스는 상하이시위원회 제1서기, 시장 등을 역임한 상하이에 정치기반을 둔 거물이었다.

 

커칭스가 병사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훗날 악명을 떨친 ‘4인방(四人幇)’은 ‘5인방(五人幇)’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이들의 ‘대부’ 구실을 했다. 커칭스는 자신의 정치비서였다가 상하이시 문교(文敎)서기를 맡고 있는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에게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을 소개해 줄 것을 지시했다. (주석 409)

 

‘해서파관’은 애초 1959년 4월 마오가 중공8기7중전회에서 16세기 명나라 가정황제(嘉靖皇帝) 때 대신 해서(海瑞)의 직간(直諫)정신을 배우자는 지시에 따라 씌어졌다. 마오는 후챠오무(胡喬木 호교목)의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 역사 전문가이자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吳晗 오함)에게 ‘해서’에 대한 글을 쓰도록 해 그해 6월 ‘해서, 황제를 꾸짖다(海瑞罵皇帝 해서매황제)’를 발표했다. 9월 21에 또 ‘해서를 논한다(論海瑞 논해서)’의 글을 내놨다. 이때는 루산회의가 끝나 펑더화이가 우익 기회주의자로 몰려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찍혀 실각했을 때였다. 우한은 ‘해서를 논한다’에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보탰다.

 

우한은 나중에 경극(京劇) 공연예술가이자 베이징 경극단 단장인 마롄량(馬連良 마련량)의 요청으로 경극 ‘해서’의 희곡을 썼다가 나중에 친구 차이시타오(蔡希陶 채희도)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서, 파직당하다(海瑞罷官 해서파관)’로 제목을 바꿨다. 이 희곡은 1961년 1월 ‘베이징문예(北京文藝)’에 발표됐고, 이어 베이징 경극단이 무대에 올렸다.

 

줄거리는 해서가 응천부(應天府) 순무(巡撫; 명나라 때 지방의 민정, 군정을 순시하던 대신)로 지방을 순시하다 재상의 아들이 강제로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부녀자를 강탈하는 패악을 저지른 것을 적발해 사형에 처하고 땅을 돌려준다. 또 가정황제의 악정을 직간하다 끝내 파직당하는 해서의 강직하고 아부하지 않는 올곧은 정신 등을 선양하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이 경극이 무대에 올려 지자 매우 기뻐했을 뿐 아니라 해서로 분장한 마롄량을 집에서 접견한바 있었다. (주석 410)

 

당시 34살의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은 상하이 사상문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내 '북이남요(北李南姚; 베이징의 리시판, 상하이의 야오원웬)'라고 할 정도로 신진기예 그룹에서 필명을 날렸다. 야오원웬의 아버지 야오펑즈(姚蓬子 요봉자)는 시인으로 공산당에 가입해 1930년 상하이에서 중국 좌익작가연맹을 설립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야오펑즈는 딩링(丁玲 정령)과 함께 좌경 잡지 '베이더우(北斗)'를 창간했다. 야오원웬은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야오펑즈는 한 살이 된 야오원웬을 데리고 ‘아큐정전(阿Q正傳)’, ‘광인일기’ 등을 쓴 중국의 문호(文豪)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 노신)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야오원웬은 나중에 이때를 떠올리며 루쉰을 보았다는 얘기를 즐겨했다. 야오원웬의 아버지 야오펑즈는 1933년 12월 톈진에서 체포돼 전향하면서 국민당의 기관지 중양르바오(中央日報 중앙일보)에 '야오펑즈, 공산당 탈당선언'의 성명을 싣고 공산당을 떠났다. 야오펑즈는 성명에서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며 지난날의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공산당을 탈당해 삼민주의 기치아래 서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주석 411)

이런 집안내력을 갖고 있는 야오원웬은 1948년 10월 후신(滬新 호신)고등학교에 다닐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야오원웬은 건국 후 공청단(共靑團) 상하이시 루완구(盧灣區 노만구) 노조위원회 선전부 부부장, 루완구 당위원회 선전부 교육과장 등을 맡으면서 글을 썼다. 야오원웬이 문단의 '샛별'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57년 2월 6일 원후이바오(文滙報 문회보)'에 실은 '교조와 원칙-야오쉐인 선생과의 토론(敎條和原則-與姚雪垠討論)'에 관한 글이다. 야오쉐인은 문단의 원로로 마오가 눈여겨보던 작가였다.

 

야오원웬은 야오쉐인에게 문예창작에 관한 방법에 대해 토론을 제기한 것이다. 야오원웬은 이때부터 마오의 눈길을 끌었다. 야오원웬은 6월 10일 '문회보'에 '녹이비고(錄以備考)-독보우감(讀報偶感)' 제목의 글을 실어 문회보의 편집방향이 옳지 않다고 비판한 내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을 본 마오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에 전재를 지시해 6월 14일에 이 글이 실렸다. 야오원웬의 글이 계기가 되어 인민일보는 편집부 명의로 '문회보-한 시기내의 자산계급 방향'이란 글을 실어 문회보를 비판했다. 야오원웬은 일약 '반우(反右)파'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전국적 인물로 껑충 뛰어올랐다.

 

야오원웬의 글은 순수 문예비평과는 달리 정치비평에 주안점을 뒀다. 문단의 이단아가 된 야오원웬은 붓 한 자루로 글의 형식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주문생산’을 하면서 '닥치고 조지는' 붓방아를 찧어댔다. 야오의 필봉아래 무수한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수난을 당했다.

야오워웬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류와 문단의 노장들인 류샤허(流沙河 유사하), 쉬마오공(徐懋功 서무공), 펑쉐펑(馮雪峰 풍설봉), 아이칭(艾靑 애청), 바진(巴金 파금), 딩링(丁玲 정령) 등에게 무차별적으로 '붓 몽둥이‘를 휘둘렀다. 야오원웬은 이때 남을 해코지하는 글을 쓴다는 뜻으로 '권즈(棍子 곤자; 몽둥이)', '차오방(撬棒 효봉; 지렛대)'이라는 악명이 붙었다. 시쳇말로 문단의 개망나니라는 뜻이었다. 야오원웬은 이제 장칭의 주문을 받아 3백여 년 전에 죽은 '해서'를 관속에서 꺼내 '닥치고 조지는' 붓 몽둥이로 우한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작업에 들어갔다. (주석 412) 

 

문화대혁명 때 '상하이방(上海幇 상해방)‘, 나중에 왕홍원(王洪文왕홍문)'이  가세해 4인방(四人幇)'으로 불리는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 3명이 이때 만났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수시로 만나 비밀토론을 벌이며 흉계를 꾸몄다. 야오원웬은 해서파관의 극중에서 토지를 돌려주는 '퇴전(退田)과 억울한 죄의 재판사건을 재심리해 진실을 밝히는 '평원옥(平寃獄)’을 정치적 사건과 연계시켰다. 야오원웬은 '퇴전'과 관련해 해서가 토지를 중소 지주와 부농에게 돌려주고 농민에게 돌려준 게 아니다.

 

때문에 이것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1961, 1962년의 현실정치를 접목시켜 '퇴전'과 농민들이 요구하는 바오찬다오후(包産到戶 포산도호)의 단간풍(單干風)을 연계시켰다. '평원옥'은 루산회의에서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 실각한 펑더화이를 복권시키려는 음모, 이른바 '번안풍(飜案風; 우익 기회주의자나 반 혁명분자들에 대한 재심 후 복권)으로 엮어버렸다. 야오원웬은 비판 글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주석 413)

 

"1961년은 바로 우리나라가 잇따라 3년 자연재해로 잠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제국주의, 각국의 반동파와 현대 수정주의가 반 중국 분위기를 고조시킨 상황에서 마귀와 요귀(牛鬼蛇神 우귀사신; 사회의 온갖 악인, 즉 수정 자본주의자)들이 '단간풍', '번안풍'을 불어댔다. 그들은 '단간'의 '우월성'의 바람을 불어대며 경제회복과 '퇴전'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지주, 부농의 죄악통치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평원옥'을 내세워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려 무산계급 독재(專政 전정)에 대항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위해 불평을 감싸않고, 그들을 위해 '번안(복권을 시킴)'을 해 그들은 다시 집정을 하려고 한다. '단간풍', '번안풍', '퇴전', '평원옥'은 바로 당시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초점을 반대한 것이다. 해서파관은 이런 계급투쟁형식의 반영이다. 해서파관은 향기를 풍기는 향화(香花)가 아니라 하나의 독초(毒草)다."

 

야오원웬은 제멋대로 글을 날조해 그럴듯하게 꾸며 우한(吳晗 오함)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야오원웬이 우한의 '해서파관'을 비판한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評新編歷史劇 '海瑞罷官' 평신편역사극 해서파관)'는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 '문회보'에 실렸다. 글이 발표되자 전국을 뒤흔들었다. 중국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자 최악의 야만적 행위를 저지른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됐다. 장칭의 책략으로 야오원웬이 쓴 이 글은 신문에 실리기 전에 장칭이 마오에게 전달해 마오가 읽고 비준해 싣게 되었다. 마오는 1년여 뒤 한 외국인에게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주석 414)

 

"한 시기에 이런 투쟁도 준비했다. 지난 해 11월 한 역사학자 우한이 발표한 글을 비판하는 글이다. 이 글은 베이징에서 그룹을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쓸 수 없었다. 단지 상하이에서 야오원웬을 찾아 그들이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이글을 쓸 수 있었다. 처음 쓰여 질 때는 나도 몰랐다. 장칭이 이 일을 했다. 먼저 나에게 비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베이징에서 조직을 꾸릴 수 없어 상하이로 가 조직을 만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몰랐다. 내게 건네 준 글을 보니 잘 썼다. (장칭은)이 글은 단지 나 혼자 보는 글이라고 했다. 저우언라이, 캉성(康生 강생) 등도 볼 수 없었다. (내가)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조처해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전, 루딩이(陸定一 육정일) 등이 볼 수 있었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이런 사람들은 이 글을 발표하는 것을 반대했다."

 

문회보에 야오원웬의 글이 실린 날 중공중앙은 양상쿤을 중공중앙 판공청 주임직에서 면직시키고, 왕둥싱(王東興 왕동흥)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당시 이 일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당 상층부에 정치적 긴장 분위기가 한껏 높아졌다. 야오원웬의 글이 발표된 이튼 날 마오는 전용열차를 타고 항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야오원웬의 글은 '문회보'에 실린 뒤 상하이에서 발행하는 '졔방르바오(解放日報 해방일보)에서 전재(轉載)한데 이어 화둥(華東 화동)지구의 신문인 '저장(浙江 절강)일보', '대중일보', '산둥(山東 산동)',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신화일보', '푸졘(福建 복건)일보', '안후이(安徽 안휘)일보', '장시(江西 강서)일보' 등에 실렸다. 이 성들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화둥국(華東局 화동국)의 관할아래 있었다. 화둥국 서기 웨이원보(魏文伯 위문백)는 야오원웬의 글을 쓴 배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신문에  사전 통보해 싣게 되었다.

 

409) 毛澤東; 批‘海瑞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人民網
410) 毛澤東; 批 ‘海瑞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人民網
411) ‘四人幇’ 中姚文元 最後離世 墓碑上只寫了妻子名字   葉永烈  人民網  姚文元 ‘成長三部曲’; 墨水甁爬出了一位政壇高層   夏國勝   黨史文苑   人民網
412) ‘四人幇’ 中姚文元最後離世 墓碑上只寫了妻子名字   葉永烈  人民網  毛澤東; 批 ‘海瑞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人民網
413) 毛澤東傳 (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14) 毛澤東生平全 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

 

174. ‘해서파관’ 빌미… 문화대혁명 서막

 

중앙과 다른 지방의 신문편집부는 예의 주시를 하면서도 대부분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이 문회보에 실린 뒤 사흘째 되는 날 베이징시위원회 선전부는 상하이시위원회 선전부에 전화를 걸어 글을 싣게 된 배경을 물었다. 하지만 상하이시위원회 선전부는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베이징시위원회 서기 덩퉈(鄧拓 등탁)와 시위원회 선전부장 리치(李琪 이기), '베이징(北京 북경)일보' 총편집 판진(范瑾 범근) 등은 11월 13일 야오원웬의 글 전재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다. 이들은 먼저 '문회보'의 상황을 파악해 만약 야오원웬의 글이 마오가 결정한 것이라면 '베이징일보'에 싣고, 그렇지 않으면 싣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장춘챠오는 베이징과 중앙에 어떤 정보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봉쇄했다.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베이징시위원회 서기 덩퉈는 외지에 나가 있는 펑전(彭眞 팽진)에게 연락해 지시를 청했다. 펑전은 자신이 베이징에 돌아갈 때까지 글을 싣지 말 것을 지시했다. 베이징과 상하이 두 시위원회는 서로 삐쳐버려 갈등을 빚게 되었다. 앞서 마오는 9월에 우한(吳晗 오함)을 비판한 것을 베이징 시장이자 정치국 중앙위원인 펑전(彭眞 팽진)에게 통지한바 있었다. 그러나 펑전은 문제의 엄중함을 모른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주석 415)

 

11월 17일 상하이에 온 마오는 베이징에서 야오원웬의 글을 전재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괘씸하게 생각했다. 마오는 상하이시가 야오원웬의 글을 단행본으로 인쇄해 뿌릴 수 있도록 전 성(省)의 할당량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베이징시는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베이징시가 야오원웬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는 글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립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마오는 이를 계기로 베이징시를 ‘손봐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이제 글의 게재 시비문제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반달 동안 이런 교착상태가 계속됐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마침내 상하이시가 베이징 부시장 우한을 비판하고 나섰다. 여전히 베이징시는 대응하지 않았다.

 

상하이시 제1서기 천페이시옌(陳丕顯 전비현)은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의 배경을 총참모장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에게 설명하고, 이런 내용을 저우언라이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뤄루이칭은 인민해방군 기관지 '졔팡쥔바오(解放軍報 해방군보)‘에 전재했고, 저우언라이도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에 글을 싣도록 지시했다. 베이징일보는 11월 29일 야오원웬의 글을 전재하면서 “서로 다른 의견은 토론을 전개하고, 실사구시적으로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고 밝혔다.

 

인민일보도 30일에 야오원웬의 글을 실으면서 저우언라이와 펑전의 의견을 수렴한 편집자 글에서 실사구시적 토론을 강조했다. 인민일보는 “우리들은 이번 토론을 통해서 여러 의견간의 상호쟁론과 비판이 더욱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들은 이미 비평의 자유를 허용하는 만큼, 반 비평의 자유도 허용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우리는 잘못된 의견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방법과 실사구시,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인민일보는 베이징 부시장이 관련돼 있는데다 정치적 비화를 막고 학술적 토론으로 유도하기 위해 마오의 뜻과는 달리 이 글을 학술란에 실었다. (주석 416)

 

그 후 베이징 관할의 화베이(華北 화북)지구의 허베이(河北 하북)와 톈진 지역의 신문들이 12월 초에 일제히 글을 싣기 시작했다. '광저우(廣州 광주)일보'는 12월 1일에 글을 전재했다. 상하이시위원회 제1서기 천페이시옌이 타오주(陶鑄 도주)의 부인 쩡즈(曾志 증지)에게 알려줘 싣게 되었다. 타오주는 이때 글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일희일비의 비극적 삶을 살았다.

 

‘희(喜)’는 중앙위원 서열 96위였던 타오주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얼마 뒤 베이징으로 발탁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에 임명되고, 중공중앙 서열 4위까지 승승장구한 것을 말함이다. ‘비(悲)’는 타오주가 베이징 중앙에 진입한 뒤 장칭과 첨예하게 대립하다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이름이다. 장칭은 “중국 최대의 보황파(保皇派) 타오주를 타도하자!”고 선동했고, 야오원웬은 붓방아로 사상적 공격을 퍼부어 타오주를 실각시켰다. 장칭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紅衛兵)들은 타오주를 비판대회에 끌고나와 “머리를 숙이고 죄를 인정하라!”며 야만적 폭력을 가했다. 타오주는 끝까지 머리를 꼿꼿이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타오주는 감옥에 갇힌 뒤 화병과 담낭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한원을 품은 채  1969년 11월 30일 세상을 등졌다.

 

마오는 1967년에 "야오원웬의 글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신호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라고 말한바있다. ‘신호’를 보내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상하이의 장칭과 장춘챠오 등이 숨죽이며 상황을 살폈고, 마오도 관찰했다. 장춘챠오는 1966년 5월 "야오원웬이 글을 발표한 뒤 우리는 매일매일 베이징의 소식을 기다렸다. 우리들은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베이징은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칭은 이런 상황을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1967년 5월 "전국 대다수의 신문이 모두 (야오원웬의)글을 실었다. 단지 베이징과 후난(湖南 호남)만 싣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단행본을 건의했을 때도 배척했다. 통하지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마오의 중앙 선전부에 대한 분노는 더욱 높아갔다. 마오는 중앙에 "베이징시는 바늘 꽂을 틈도 없었고,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었다"고 노여워했다.

 

이런 배경과정의 또 다른 이면에는 ‘낚시(반대세력의 가늠과 제거)’를 했다는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야오원웬의 글을 실은 문회보는 11월 29일 2판에 통단 제목을 뽑아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에 대한 독자들의 지상토론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토론내용에 관한 편집자 글은 장춘챠오가 직접 썼다. 장춘챠오는 “해서파관의 연극과 연극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원칙과 문제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토론을 통해 분명하게 하기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대혁명 선봉으로 이용된 어린홍위병(왼쪽)의 모습과 화려한 옷차림을 한 부르주아 여인을 공개처단하는 모습.

 

이런 편집자 글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6일 동안 계속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각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토론에 참여해 야오원웬의 글에 대한 찬, 반 논쟁을 벌였다. 문회보는 12월 6일부터 각 지방의 신문사들이 야오원웬의 글을 전재한 순서에 따라 신문사들의 편집자 글을 실었다. 편집자 글은 야오원웬의 글에 대한 시각들이 달랐다. ‘해방군보’가 가장 비판적이었고, ‘베이징일보’는 토론을 환영하는 태도였으며, ‘인민일보’는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비교적 중립적 자세를 보였다.

 

문회보는 12월 7일 갑자기 우한(吳晗 오함)의 해서파관의 극본과 이 연극을 찬양하는 글을 잇따라 실었다. 장춘챠오는 1962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해서파관을 옹호하는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일부러 꾸민 흉계였다. (주석 417)

 

야오원웬이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발표한 뒤 베이징과 상하이의 학술계, 문화계, 언론계 등이 발칵 뒤집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해서파관을 쓴 우한은 대단히 긴장하면서도 야오원웬이 현실정치와 연계해 비판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우한은 “해서파관은 1960년에 썼다. 바오찬다오후(包産到戶 포산도호)의 ‘단간풍’은 1962년에 나타났다. 1960년에 미리 1962년에 출현할 것을 예측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항변했다.

 

마오는 12월 21일 항저우(杭州 항주)에서 천보다, 아이스치(艾思奇 애사기), 관펑(關鋒 관봉)과 야오원웬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마오는 “야오원웬의 글은 아주 잘 쓴 글이다. 연극계, 역사계, 철학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정곡(正鵠)을 찌르지 못했다. 핵심문제는 ‘파직이다(罷官 파관)’. 가정황제가 해서를 파직했다. 1959년 나는 펑더화이를 해직시켰다. 펑더화이도 해서다”라고 말했다. 마오의 이런 해석은 핵심이 ‘퇴전(退田)’에서 ‘파관(罷官)’으로 바뀌면서 정치적 비판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우한은 나중에 홍위병들의 만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은 베이징시위원회를 겨냥해 ‘삼가촌예기(三家村禮記)를 쓰던 덩퉈(鄧拓 등탁), 당위원회 통일전선 부장 랴오모사(寥沫沙 요말사)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상공세에 시달리던 덩퉈는 한을 품은 채  자살했다.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됐다. 마오는 1958년 ‘대약진’이래 루산회의, 7천인 대회, 시러우(西樓 서루)회의와 4청(四淸)운동 중에서 나타난 다른 의견을 비판하는 데 ‘해서파관’의 문예문제를 도구로 삼아 돌파구를 열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비판의 강도가 나날이 높아지자 엄중성과 격렬하다는 것을 느겼다. 하지만 사상 유례없는 극심한 국론분열과 인명살상, 대량파괴의 광란을 몰고 온 야만의 시대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415) 毛澤東; 批 ‘海西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16)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 批 ‘海西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人民網
417)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 批 ‘海西罷官’ 的文章只有湖南沒轉載  朱永嘉  口述, 金光耀  整理   人民網

-------------------------------------------------------------------------------------------------------------------------------------------------------

 

 

175. 린뱌오-뤄루이칭, 정치우선 문제 놓고 다툼

 

저우언라이는 1966년 2월 6일 베이징에서 중앙의 일상적 업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과 함께 펑전을 조장으로 한 문화혁명 5인소조로부터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술토론(해서파관)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문화혁명 5인소조는 1964년에 펑진(彭眞)을 우두머리로 해 루딩이(陸定一 육정일), 캉성(康生 강생), 저우양(周揚 주양), 우렁시(吳冷西 오냉서) 등으로 구성된바 있었다.

 

펑진은 우한의 문제는 학술의 문제이지, 정치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한과 펑더화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학술문제에서 ‘백화제방(百花齊放)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을 견지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참석자들도 이에 동의했다. 펑전 등은 2월 8일 우한(武漢 무한)에 머물고 있는 마오를 찾아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가 동의한 ‘2월 요강(滙報提綱 회보제강)’을 보고했다. 마오는 반대하지 않았다.

 

중공중앙은 2월 12일 정식으로 ‘문화혁명 5인소조의 직면한 학술토론에 관한 보고요강’을 승인하고 회람을 인가했다. 마오는 이때 겉으로는 펑진이 보고한 ‘2월 요강’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펑전이 우한(吳晗 오함)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오는 펑진이 관할하고 있는 베이징시위원회가 ‘바늘 꽂을 틈도 없고, 물 한 방울 샐 틈이 없을 정도’로 방어가 견고한 ‘독립왕국’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혔다. 마오는 이때 펑전을 비롯해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즈음 린뱌오(林彪 임표)는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이자,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인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 제거공작에 들어갔다. 린뱌오는 1965년 11월 30일 자신의 부인 예췬(葉群 엽군)에게 자신이 쓴 편지와 모종의 자료를 갖고 항저우에 있는 마오를 찾아가 뤄루이칭 문제를 보고하도록 했다. 당시 마오에게 보고한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과 자료에 따르면 뤄루이칭이 군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요지로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뤄가 일관되게 군(軍)에서의 정치우선을 반대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는 것 등을 거론하며 제거할 것을 마오에게 건의했다. 이때 뤄루이칭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쿤밍(昆明 곤명)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었다.

 

중앙은 12월 10일 뤄루이칭에게 돌연 상하이에서 열리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뤄루이칭은 영문을 모른 채 급히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영접 나온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페이시옌(陳丕顯 진비현)과 공군사령관 우파시옌(吳法憲 오법헌)은 뤄루이칭을 회의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안내해 사실상 연금시켰다. 저우언라이가 주재하고 있던 회의 장소에서는 린뱌오의 부인 예췬이 마오와 면담한 내용을 공개하고, 뤄루이칭이 류야러우(柳亞樓 유아루; 공군사령관, 1965년 6월 병사)와 밀담했다는 내용을 진술하고 있었다. 예췬은 뤄루이칭과 죽은 류야러우가 말했다는 4가지를 설명했다. (주석 418)

 

1. 린쫑(린뱌오에 대한 존칭)은 조만간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지 않으면 물러나게 해야 한다. 현재 물러나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2. (병약한)린쫑의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
3. 이후 린쫑은 다시는 군대의 일에 많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뤄 총장이 (군대의 일을)잘 처리하고 있다.
4. (군대의)모든 것은 뤄(루이칭)가 관여하기 때문에 린쫑이 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또 뤄루이칭이 린뱌오를 ‘똥통을 깔고 앉아서 똥을 누울 수 없다’고 욕했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물론 뤄루이칭이 말했다는 4가지 밀담내용(4條)은 모두 사망한 사람을 이용해 날조한 소설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린뱌오는 회의에서 뤄루이칭의 직무(서기처 서기, 부총리, 국방부 부부장, 총참모장, 군사위원회 비서장)를 철직시켰다. 죄상은 3가지였다. 하나는 린뱌오에게 반대하고 린뱌오를 봉쇄하면서 린뱌오를 돌연 공격했다. 두 번째는 린뱌오가 주장하고 있는 군대에서의 ‘정치우선’에 반대했다.

 

세 번째는 당에 대해 손을 뻗쳤다는 것 등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뤄루이칭은 일단 베이징으로 돌아와 격리심사를 받았다. 1966년 3월부터 뤄루이칭에 대한 비판공세는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 뤄루이칭은 3월 18일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3층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리만 부러졌다. 뤄루이칭의 자살미수사건은 당에게 책임을 전가하려했다는 이유로 고강도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주석 419)

 

대장출신인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은 린뱌오와 황푸(黃埔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다. 린뱌오는 1959년 펑더화이의 뒤를 이어 국방부장이 되었을 때 9월에 뤄루이칭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거론해 뤄가 총참모장이 된 뒤 린뱌오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군사전략 관점에서 이견을 보여 소원해졌다.

 

뤄루이칭은 전쟁에 대비한 군의 대규모훈련을 강화하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현대전과 정규군화 노선의 적극적 방위 전략을 추구했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의 전통적 전략전술인 유격전을 기반으로 한 인민전쟁의 공격적 포위전략을 우선시했다. 린뱌오는 대규모의 군사훈련보다 정치와 사상공작을 더욱 강조했다.

 

인민해방군은 1963, 1964년에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계속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면서 중국의 국경지역인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중국을 긴장시켰다. 또 중소관계가 악화되고 인도와 국경충돌이후 불안한 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오는 전쟁발생가능성에 대비해 총력을 기울여 전비를 확충하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강화해 전투력을 제고시켰다.

 

린뱌오는 1964년 11월 30일 전군 조직공작 회의에서 또 다시 ‘정치우선’ 정책을 제기해 정치사상 공작강화를 지시했다. 대규모 군사훈련 때 린뱌오는 뤄루이칭이 말을 듣지 않아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다.

 

당시 린뱌오는 건강이 좋지 않아 중앙은 허룽(賀龍 하룡)이 군사위원회 공작을 주재하도록 했다. 군사위원회 비서장인 뤄루이칭은 자연히 허룽과의 접촉이 잦아졌다. 뤄루이칭은 종전에 허룽과 일해본 적은 없었으나 이때 서로 마음이 맞아 가깝게 지냈다. 린뱌오는 뤄루이칭과 허룽의 관계를 의심해 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정변 政變)으로 의혹을 키웠다.

 

반면 뤄루이칭은 린뱌오가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거리감을 두었다. 뤄루이칭은 원리원칙을 너무 따져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옌안(延安 연안)시절 마오는 뤄루이칭에게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라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글귀를 준적이 있을 정도였다.

 

마오는 건국 후 원칙에 바르고 맑은 물처럼 투명한 뤄루이칭을 초대 공안부장 겸 베이징시 공안국장에 임명했다. 당시 베이징은 흑도(黑道)가 판을 쳐 폭력과 불법이 창궐하고, 기방(妓院 기원), 사창(私娼)이 즐비해 사회풍속질서가 만신창이였다.(주석 420)

 

418) 林彪精心製造一顆‘原子彈’ 置羅瑞卿于死地?   人民網-文史頻道
     羅瑞卿大將一家在 ‘文革’中的遭遇  口述; 羅原  撰文; 紀彭   人民網
419) 羅瑞卿大將一家在 ‘文革’中的遭遇  口述; 羅原  撰文; 紀彭   人民網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20) 毛澤東和愛將羅 瑞卿如何整治黑道?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的 ‘水至淸則無魚’ 讓羅瑞卿疑惑至死  孫言誠   人民網-文史頻道

-------------------------------------------------------------------------------------------------------------------------------------------------------

 

176. 마오쩌둥의 ‘통지’…당 공포의 도가니

 

중국사회는 수천 년 동안의 왕조사회로 종족관념이 강하고 패거리 의식(行幇 항방; 동업조직)이 비교적 강했다. 20세기 초 청왕조가 무너지고 근대 국가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군벌(軍閥)이 할거하고 잇따른 전쟁 등으로 지하세계의 범죄 집단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홍(洪), 청(靑), 한(漢), 예(禮), 백(白) 등 5대 범죄조직인 방(幇)들이 극성을 떨었다. 베이징의 경우 청방(靑幇)의 세력권에 있었다. 청방은 동, 서, 남, 북으로 조직을 나눠 아편밀매, 도박장개설, 기원이나 사창운영, 강간약탈 등을 자행해 치안질서가 엉망진창이었다. 마오는 이른 시일 안에 민심을 안정시키고, 사회치안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적임자로 뤄루이칭을 꼽은 것이다.

 

뤄루이칭은 마오의 기대에 부응해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범죄조직을 소탕하고 베이징의 치안질서를 바로잡았다. 마오의 뤄루이칭에 대한 신임은 높았지만, 개인숭배로 마오를 떠받드는 린뱌오에게는 족탈불급이었다. 뤄루이칭은 결국 린뱌오의 덫에 걸려 군권을 탈취하려는 반당,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마오는 1966년 3월 17일부터 20일까지 항저우에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학술계와 교육계에 대한 강도 높은 정치비판을 논의했다. 마오는 지진상황을 살피고 18일 톈진에서 뒤늦게 회의에 합류한 저우언라이와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진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전국적으로 광범한 계급투쟁 전개를 제기했다. 범위는 교육, 출판, 언론, 문예, 영화, 연극계 등 각계 방면을 모두 포괄했다.

 

또 당면한 학술비판(해서파관 비판)에서 ‘좌파’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하고 있다고 중앙 선전부를 맹비난했다. 회의가 끝난 뒤 캉성이 3월 31일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와 저우언라이와 펑전 등에게 마오의 3차례에 걸친 담화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했다. 마오는 담화에서 펑진, 루딩이 등의 실명을 거론하며 격렬하게 비판하고, 만약 나쁜자들을 비호하면 중앙 선전부와 베이징시위원회, ‘문화혁명 5인소조’를 해산하겠다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고 전했다.

 

마오는 4월 16일부터 26일까지 항저우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열었다. 이 회의는 실질적으로 ‘문화대혁명’ 발동을 준비하는 모임이 되었다. 마오는 4월 22일 긴 연설을 통해 “나는 단지 우한(吳晗)의 문제로 믿지 않는다. 이것은 영혼에 와 닿게 하는 투쟁이다. 이데올로기 문제다. 매우 광범위하게 건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수정주의의 출현은 단지 문화계만이 아니라 당정군(黨政軍)에도 나타났다. 특히 당과 군에서 나타난 수정주의는 크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중앙에 출현한 수정주의로 즉시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압박했다. 마오는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한 차례의 ’대혁명‘을 발동해 이미 눈앞에 임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뤄루이칭(왼쪽)과 문화대혁명 당시 뤄루이칭이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어 광장에서 끌려 나가는 모습.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류샤오치의 주재로 5월 4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펑전(彭眞 팽진),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 루딩이(陸定一 육정일), 양상쿤(楊尙昆 양상곤)이 집중 비판을 받았다. 펑전은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서기처에서 덩샤오핑 다음의 서열로 베이징시를 관장하고 있었다.

 

뤄루이칭은 부총리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었고, 루딩이는 중앙 선전부장이었다. 중앙 판공청 주임 양상쿤은 옌안에서 국민당 후중난(胡宗南) 군에게 쫓기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중공중앙을 세 갈래로 쪼개 영도부를 구성할 때 차세대의 영도자로 후방 중앙 주석을 맡기도 했었다. 이들은 장칭과 린뱌오가 잡아 올린 당군(黨軍)의 고위 영도자들이었다.

 

1966년 5월 16일 오전 9시.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 제2차 회의가 인민대회당에서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 주재로 열렸다.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이 마오가 친필로 쓴 ‘통지(通知)’ 내용을 설명했다. ‘통지’를 토론할 때 모두 찬성했다. 다른 의견이 제시되지 않았다. 류샤오치는 회의 참석자들이 거수(擧手)로 표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회의 참석자 모두 손을 들어 ‘통지’의 일자일획도 고치지 않은 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 ‘통지’는 정식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지’가 되었다. 5월 16일 날 통과돼 ‘5.16 통지’라고 부른다. 회의는 또 ‘문화혁명 5인소조’를 철회해 기구를 해산하고, 새로 ‘문화혁명소조’를 만들어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소속시켰다. ‘통지’는 중앙이 2월에 마오에게 보고한 ‘2월 요강’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통지는 “‘2월 요강’은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는 것을 반대하고, 마오쩌둥 동지를 우두머리로 한 당중앙의 문화혁명 노선을 반대했다. 또 무산계급 좌파를 타격하고, 자산계급 우파를 비호하면서 자산계급의 부활을 위해 여론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2월 요강’은 자산계급 사상의 당내 반영이고, 철두철미 수정주의”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회의 참석자들을 전율(戰慄)하게 한 ‘통지’의 두 단락은 이랬다. (주석 421)

 

“무산계급 문화혁명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반당, 반사회주의의 이른바 ‘학술권위’의 자산계급의 반동입장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학술계, 교육계, 언론계, 문예계, 출판계의 자산계급의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이 문화영역에서 영도권을 탈취하자. 이렇게 하여 반드시 당, 정부, 군과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잠입한 자산계급 대표인물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그들의 직무를 배치 전환하자. 특히 이들이 문화혁명의 공작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과거와 지금,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작을 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당, 정부, 군대와 각종 문화계에 잠입한 자산계급의 대표인물은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다. 일단 시기가 성숙하면 그들은 정권을 탈취하여 무산계급 독재를 자산계급 독재로 바꾸려 한다. 이런 인물은, 일부는 이미 우리들이 꿰뚫어 보았고, 일부는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우리들의 믿음을 받고 우리들의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다. 예를 들면 흐루시초프 같은 그런 인물이다. 그들은 현재 우리들 곁에서 잠자고 있다. 각급 당위원회는 반드시 이 점을 충분히 주의해야 한다.”

 

이 ‘통지’는 마오쩌둥의 당과 국가 정치형세에 대한 평가를 집중 반영하고 있다. 심각하게 시비(是非)를 헛갈리게 하고, 적과 아군을 헛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마오는 자신이 제기한 사회주의 건설의 주장이 줄곧 겹겹의 방해로 추진할 수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모든 문제를 말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오의 이런 평가는 소련 당내에 흐루시초프가 출현한 교훈과 연계시켜 당과 국가의 앞날의 발전이 극히 우려된다는 논리였다. 마오는 그런 흐루시초프와 같은 인물을 거론하면서 그런 인물들이 우리들의 곁에서 잠자고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당이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패닉, 그 자체였다.

 

421)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77. 인민일보 사설로 ‘문화대혁명’ 공포…대륙은 혼돈속으로

 

회의는 이틀 쉰 뒤 5월 18일 계속됐다. 린뱌오가 연설을 했다. 이른바 ‘5.18연설’이다. 린뱌오는 “이번 회의는 정치국 확대회의다. 지난 번 마오 주석이 소집한 상임위원 확대회의에서 펑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실체를)폭로했다. 이번에 계속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뤄루이칭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 루딩이, 양상쿤 문제는 지하 활동을 한 문제를 조사해 이미 무르익은 지 오래 됐다. 지금 한꺼번에 해결해야 한다. 네 사람의 문제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공통점이 있다. 주요 인물은 펑전이다. 그 다음이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린뱌오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정변(政變)”이라고 크게 말한 뒤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 정변이 있어왔고, 우리들 사회주의 국가에도 있다고 경고했다. 린뱌오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류샤오치를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류샤오치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회의는 5월 23일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의 처리결정을 통과시키고 전담심사를 하기로 했다. 타오주(陶鑄 도주)가 중앙서기처 상무서기에 임명되고 중앙 선전부장을 겸임토록 했다. 원수 예ㅤㅈㅖㄴ잉(葉劍英 엽검영)이 중앙서기처 서기 겸 군사위원회 비서장에, 리쉐펑(李雪峰 이설봉)이 베이징시 제1서기에 각각 임명됐다. 회의는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예고한 ‘5.16통지’를 통과시키고 끝났다. (주석 422)

 

이 ‘5.16 통지’는 마오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작성됐다. 애초 마오는 중앙이 보고한 ‘2월 요강’에 대단히 불만이 많았으나 겉으론 반대를 하지 않고 승인했다. 마오는 3월 하순께 ‘2월 요강’을 철회시키기 위한 ‘통지’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마오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캉성(康生 강생)은 왕리(王力 왕력)를 문안 기초자로 선정했다. 캉성과 왕리가 작성한 초안을 항저우에 머물고 있는 마오에게 급히 보냈다.

 

초안을 본 마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오는 “‘통지’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이론적이어야 한다”며 당내의 ‘이론가’로 불리는 천보다(陳伯達 진백달)를 통지 기초자로 추가시켰다. 천보다는 나중에 “마오쩌둥의 뜻을 간파했다. 고도의 이론으로 ‘2월 요강’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울림이 큰 한 편의 대문장(大文章)이 필요했다. 왕리와 힘을 합쳐 빠르게 4월 초에 초고를 작성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주석 423)

 

천보다는 초고를 마오에게 보냈다. 글을 읽어 본 마오는 통지를 기초할 1개소조를 구성하고 천보다를 조장으로 임명했다. 마오는 4월 16~26일까지 항저우에서 열리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문화대혁명’ 발동을 준비하는 회의로 삼으려 했다. 마오는 ‘통지 기초 소조원’들이 항저우와 가까운 상하이에서 은밀하게 작업하기를 바랐다.

 

기초 소조원들이 상하이로 달려와 상하이 진장(錦江 금강)호텔에 묵으면서 겉으론 중앙회의 자료를 준비하는 것처럼 하고, 실질적으로는 소조원들이 토론을 하면서 ‘통지’를 기초했다. 원고가 완성돼 장춘챠오가 인편으로 기초 초안원고를 마오가 있는 상하이로 보냈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원조 천보다(陳伯達). 문화대혁명 후기 중공중앙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대자보

 

마오는 원고를 읽어본 뒤 수정해 다시 상하이의 장춘챠오에게 보냈다. 기초 소조원들이 토론하고 문안을 고쳐 다시 항저우의 마오에게 보내면, 마오는 또 다시 고친 뒤 상하이로 보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처럼 상하이와 항저우를 발바닥에 도롱테를 달고 왕래하며 ‘통지’를 작성했다는 것은 마오가 얼마나 ‘통지’를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밀리에 상하이-항저우를 오가며 작성한 ‘5.16 통지’는 메가톤급 위력을 발휘해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5.16 통지’는 실질적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강령과 선언이었다. 10년 문화대혁명(‘문혁’)은 ‘5.16 통지’가 통과된 이날부터 셈하고, ‘문혁’이 공식적으로 시작한 첫날로 기록하고 있다.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5월 25일 오전에 끝나자마자 이날 오후 2시께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총지부 서기인 여성 강사 녜웬즈(聶元梓 섭원재)등 7명이 베이징대 학생식당 동쪽 벽에 ‘대자보(大字報)’를 붙였다. 제목은 ‘쑹숴(宋碩 송석), 루핑(陸平 육평), 펑윈(彭云 팽운)은 문화대혁명 중에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였다. 쑹숴는 베이징시위원회 대학부 부장이었고, 루핑은 베이징대학 당위원회 서기였다. 펑윈은 베이징대학 당위원회 부서기였다.

 

대자보의 창끝은 베이징시위원회 대학부와 베이징대학 당위원회, 그리고 베이징시위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 대자보는 1957년 이래 처음으로 나붙은 대자보였다. 단박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학교내부와 학생들은 곧바로 두 패로 쫙 갈라졌다. 한 패가 대자보를 반대하면, 다른 한 패는 대자보를 옹호했다. 두 패는 열을 받아 말씨름을 하며 밀치락달치락하다 끝내 패싸움으로까지 번졌다.

 

학내가 소연해지자 외부인들이 구경하러 물밀듯이 학교로 몰려들었다. 당시 베이징대학의 외국유학생들이 대자보 내용을 외부로 전해 문화대혁명의 소식이 죽(竹)의 장막을 뚫고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베이징대 대자보 사건은 캉성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뤄졌다. 캉성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끝나기 전 날 자신의 부인 차오이오우(曹軼歐 조일구) 등을 베이징대학에 보내 녜웬즈 등과 사전에 결탁해 계획을 짰다.

 

중국 10대 원수 중 한분이며, 상하이시 초대시장, 중국국무원 외교부 초대부장을 지냈던 천이(陳毅)에 대한 비판투쟁대회를 보도한 신문. 왼쪽 제일 위 사진의 붓글은 '3반분자 진의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다. ©대자보

 

문화혁명소조 조장(組長)인 천보다(陳伯達 진백달)는 직접 ‘인민일보’사로 달려가 우렁시(吳冷西 오냉서) 사장의 직책을 빼앗고 인민일보를 개조하면서 중앙이 공작조를 파견해 진주한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중앙이 파견한 첫 번째 공작조였다. 천보다는 인민일보를 접수해 본인이 직접 이끌기 시작했다. 캉성은 베이징의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을 따돌리고 몰래 녜웬즈의 대자보 초고를 항저우에 있는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전국의 첫 번째 마르크스-레닌의 대자보”라며 칭찬했다. 마오의 이 한 마디로 ‘문혁’의 불길은 삽시간에 도처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대자보 내용은 6월 1일 밤 라디오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미친 듯이 날뛰며 여기저기 ‘불’을 놓고 다니는 캉성은 한 집회에서 “대자보가 방송된 뒤 나는 해방을 느꼈다”며 선동했다. (주석 424)

 

인민일보는 6월 1일 ‘모든 마귀와 요귀를 쓸어버리자(橫掃一切牛鬼蛇神 횡소일체우귀사선)’ 제목의 사설에서 “혁명의 근본문제는 정권문제다. -정권을 잡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정권을 잡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무산자계급이 정권을 탈취한 후 일이 어떻게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을 지라도, 이에 관계없이 모두 영원히 정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방향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중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 사설은 실제적으로 린뱌오의 ‘5.18 연설’을 군중들에게 공포한 것이다. 사설은 “무산자계급의 문화대혁명의 고조는 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사회주의 중국을 흥기시킬 것이다”라고 선동했다. 인민일보는 6월 2일에 녜웬즈 등의 대자보를 전재하고, 평론원의 글인 ‘베이다(北大 북대; 베이징대학)의 한 장의 대자보를 환호한다’를 실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전국을 뒤흔들었다. 각 대학, 고등학교 학생들이 잇따라 들고 일어나 대자보를 붙이고, 공개적인 집회를 열어 비판하면서 ‘수정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구호를 외쳐댔다. 문화혁명의 운동 열기는 베이징과 전국으로 맹렬한 기세로 번져나갔다. 수정 자본주의 타도의 불씨가 광활한 대륙을 활활 불태워 가고 있었다.

 

422) 毛澤東生平全 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423) 李雪峰;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24)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78. 마오 “천하대란이 천하대치에 이르는 길”

 

 

베이징에서 중앙의 일상 업무를 주재하고 있던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은 당의 공작조를 현장에 파견해 혼란을 막으려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항저우에 머물고 있던 마오는 6월 15일 전용열차로 항저우를 떠나 16일 후난성 창사(長沙 창사)에 도착했다.

 

마오는 17일 오후 승용차를 타고 건국 후 두 번째로 고향인 샤오산(韶山 소산)의 디수이동(滴水洞 적수동) 별장으로 갔다. 마오는 이곳에서 11일 동안 머물렀다. 마오는 베이징에서 보내는 문건과 자료 등을 보면서 ‘예상치 않았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신속하고 흉맹스럽게 내습하고 있는 ‘자오판(造反 조반; 반역, 항거 등으로 혁명을 지칭)’의 거대한 물결을 어떻게 활용할 지, 깊은 사색을 했다.

 

마오는 26일 후난성위원회와 샹탄(湘潭 상담)지방위원회 서기 등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전에 나는 당신들을 데리고 장정(長征)을 했다. 지금, 또 나는 당신들을 데리고 장정을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6월 28일 오전 샤오산을 떠나 우한(武漢 무한)으로 갔다. 마오는 7월 8일 부인인 장칭(江靑 강청)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해외순방을 마치고 보고하러 우한에 온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으로 돌아갈 때 상하이에 있는 장칭에게 전달했다. (주석 425)

 

“천하대란(天下大亂)은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길이다. 7, 8년이 지나면 또 한 차례 온다. 마귀, 요귀(牛鬼蛇神 우귀사신)가 스스로 튀어나온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급본성으로 결정하려 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친구의 말은 중앙이 발동하도록 재촉하고 내가 동의할 태세를 갖추기를 요구한다. 그는 정변(政變)문제를 말했다. 이 문제는 그가 이렇게 과거에 말한바 없었다. 그의 이런 표현법은 나를 항상 불안하게 한다(他的一些提法, 我總感覺不安 타적일사 아총감각불안). -중대한 문제에 있어 본심을 어겨가며(-違心地同意別人 위심지동의별인).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것은 나의 일생에서 처음이다.”


 

“내가 그들의 본심을 추측해 보건대 귀신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중쿠이(鍾馗 종규; 중국에서 역귀(疫鬼)를 쫒아낸다는 신)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나는 20세기 60년대 공산당의 종규다. 현재의 임무는 전당(全黨), 전국에서 기본상(전부는 불가능) 우파를 타도하는 것이다. 7, 8년 이후에 또 한 차례 마귀, 요귀를 쓸어버리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후 또 여러 차례 쓸어버려야 한다.”

 

“중국에 반공의 우파 정변이 일어난다면 나는 단언컨대 그들도 평온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단명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100분의 90이상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가들은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문화대혁명은 한 차례 진지한 연습이다. 어느 지구(예; 베이징시)는 토대가 아주 튼튼하지만 일거에 멸망한다. 어느 기관(예; 베이다‘北大 북대; 베이징대’, 칭화‘淸華 청화; 칭화대’)은 구세력의 뿌리가 깊어 제거하기 어렵지만 순식간에 무너진다. 무릇 우파가 날뛰는 지방일수록 그들의 실패는 더욱 참담해지고 좌파가 점점 힘을 쓸 것이다. 이것은 한 차례 전국적인 연습이다. 결론: 전도는 밝지만, 길은 구불구불하다. 이 두 마디는 늘 하는 말이다.”

 

마오가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대란이 천하대치에 이르는 길이다.’는 세상이 한바탕 큰 난리를 겪어야만 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창조적 파괴를 이름이다. 이것은 마오가 디수이동(滴水洞 적수동)에서 어떻게 ‘난(亂)’의 문제에 대응할 것인가를 반복적으로 사고한 뒤에 나온 것으로 중요한 결론이라 하겠다.

 

마오는 현재의 중국이 사회주의를 견지하는 길로 가는 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가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당과 국가의 앞날의 명운에 미치는 가장 큰일(大事 대사)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대란(大亂)을 당과 국가의 정상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가로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때만이 중국에서 생겨난 수정주의의 사회적 기초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마오의 처방이었다. 대란은 손실을 초래하지만 전국(全局)을 고려할 때 이러한 대가는 치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편지에서 마오가 말한 ‘나의 친구의 말은-’에서의 친구는 린뱌오로, 그가 5월 18일 날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 발언을 가리키는 말이다.

 

린뱌오는 ‘5.18 발언’에서 특히 마오의 개인숭배를 극대화 시키고, ‘정변’을 강조해 마오를 불안하게 했다. 여기서 ‘따구이(打鬼 타귀; 귀신 타도)’, ‘마귀, 요귀를 쓸어버린다(橫掃牛鬼蛇神 횡소우귀사신)’는 것은 중국에서 생겨나는 수정주의를 방지하겠는 뜻을 담고 있다. 마오는 중국의 얼굴이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 중대한 문제에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본심을 어겨가며 다른 사람에게 동의한다고 결연한 뜻을 밝혔다. 다른 사람은 바로 린뱌오를 말한다. 마오는 ‘이번 문화대혁명’을 ‘반공적 우파의 정변’을 방지하는 해법으로 ‘한 차례 진지한 연습’이라고 여겼다. ‘천하대란’은 ‘천하대치’에 이르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로 본 마오의 사상(思想) 영도 아래서 문화대혁명의 대동란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군복에 연설을 하는 문화대혁명당시의 장칭(江靑, 모택동의 부인, 중공중앙 문화대혁명 영도소조 조장). ©대자보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수난을 받은 중국 문화 유산.

 

한편 마오가 편지에서 ‘정변’이나 ‘늘 불안을 느낀다’, ‘일생 중 처음으로 본심을 어겨가며 동의한다’ 등의 구절은 젊은 날 혁명가로서의 불굴의 신념과 기개, 전쟁터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투쟁했던 마오의 흔적은 한 터럭도 찾아볼 수 없어 편지를 읽는 이들의 연민(憐憫)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인생 마감을 지척에 둔 73살의 무한 권력자가 내려놓고, 비워야할 권력에 대해 끝없는 집착을 드러내고, 정변에 불안해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허허로움을 더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패망한다는 역사적 사실은 일반 통치자들이나, 살아있는 독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무서운 양면적 얼굴이다. 홍군이 장정 당시 늪지대를 지날 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몸은 점점 늪 속으로 빠져들고 끝내 회생할 수 없었다. 권력의 심연(深淵)에 빠진 마오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검 푸른색의 전용열차가 질풍같이 창장(長江 장강)을 건너고 황허(黃河 황허)를 넘어 광활하게 펼쳐진 화베이(華北 화북) 대평원을 나는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전용열차였다. 마오는 1965년 11월 남방순시에 나서 이미 상하이, 항저우, 고향인 샤오산 디수이동, 우창(武昌 무창) 등지에서 8개월 동안 머물다 아수라(阿修羅)로 바뀌고 있는 베이징으로 가고 있는 길이었다. 마오가 베이징을 이렇게 장기간 비운 것은 건국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오는 이번 남방순시 길에서 1966년 7월 16일 우한(武漢 무한)에서 73살의 고령의 나이에 창장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당시 ‘죽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정보에 목말라 하던 서방세계는 마오의 수영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바 있었다. 피바람을 몰고 쾌속 질주한 전용열차가 7월 18일 밤 베이징에 도착했다. 마오는 거처인 중난하이 펑쩌웬(豊澤園 풍택원)에 돌아왔다.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마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의 업무보고와 문후를 하러 곧바로 펑쩌웬으로 달려갔다. 경비원에게 통보했으나 ‘주석이 쉬어야 한다’는 소리만 들었다. 퇴짜를 맞은 것이다. 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듯한 싸늘한 한기(寒氣)가 류샤오치의 등골을 파고들었다. 류샤오치는 망연자실해 마오의 방을 우두커니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425) 毛澤東傳(1949-1976 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179. 홍위병과 공작조 등장…문화대혁명 비극의 중심에

 

 

1966년 6월 24일 베이징의 칭화(淸華 청화)대학 부속 중학교(중, 고등학교)에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자보 제목은 ‘무산계급 혁명 조반정신(造反精神)정신 만세’라고 씌어 있었다. 대자보 내용은 이랬다. (주석 426)

“혁명은 자오판(造反 조반; 반역, 항거, 저항을 뜻함)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영혼은 바로 조반이다.”, “조반하지 않으면 100분의 100이 수정주의(修正主義)가 된다!”, “수정주의 학교통치가 17년이 되었다. 지금 조반을 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우리들은 이미 조반을 한 이상 당신들을 따를 수 없다! 전투의 기미가 짙어지고 있다. 폭파통과 수류탄을 갖고 나가 대격투, 대결투를 벌이자! 무슨 ‘인정(人情)’이고, 무슨 ‘전면(全面)’인가, 모두가 힘차게 나아가자.”-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紅衛兵)


대자보 끝머리에 ‘홍위병(紅衛兵)’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세상에 홍위병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마오의 사회주의 국가를 보위하는 위병(衛兵)으로 자처한 ‘홍위병’은 칭화대학 부속중학교 학생들이 처음 만들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는 자주적 조직의 이름이었다. 홍위병의 이름은 이후 중고등학교와 대학으로 급속히 번져 너도나도 홍위병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전위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홍위병의 이름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져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은 정치적 산물의 태생적 한계로 자주적 조직체였지만 꼭두각시로 전락해 문화대혁명 동안 악명을 떨쳤다. 홍위병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했다. 

마오가 베이징에 돌아온 뒤 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들이 두 장의 대자보를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7월 31일 칭화대 부속중학 홍위병들에게 이렇게 답신을 썼다. (주석 427)

“두 장의 대자보는 착취당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혁명지식분자와 혁명당파가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와 그들의 주구에 대해 분노와 성토를 설명하고 있다. 반동파에 대한 조반유리(造反有理; 항거에는 이유가 있다)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마오는 답신을 발송하지는 않았으나 8기11중전회 문건으로 인쇄해 배포했다. 이에 따라 이런 내용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학교와 중고등학교에 급속하게 전파됐다. 이에 고무돼 전국의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홍위병조직의 열풍이 폭풍처럼 거세게 일면서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홍위병들은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의 초법적 구호를 외치면서 사회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광란적 행위를 당연시했다. 마오가 홍위병을 지지하는 이유는 젊은 학생들이 옛 사상의 영향을 적게 받아 생기발랄하고 용맹하다는 점을 들었다. 마오는 주변의 공작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428)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군중들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청년 학생들이다. 그들이 직접 투쟁의 엄중성을 체험하고, 그들이 체득한 경험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해 중국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수 있다. 내가 군중을 발동하는 것은 비판적인 무기를 군중들에게 주어 군중들이 운동을 하면서 교육을 배우고, 그들의 능력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고, 어떤 길은 가서는 안 되는지를 알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법을 시험해 나도 실패에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군중발동이 이뤄졌다. 나는 대단히 기쁘다. 그들은 나의 방법에 동의했다.”

류샤오치는 베이징대학에서 문화대혁명(문혁)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1966년 6월 3일 학생들의 무질서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했다. 류샤오치는 이 회의에서 도출한 8개항의 지시사항을 베이징대학 당위원회에 하달했다. 

주요내용은
1) 대자보는 학교 안에서만 부착한다. 
2) 회의는 공작이나 면학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3)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것을 금지한다. 
4) 학내외를 구별해 외국인의 참관과 외국학생들이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한다. 
5) 비판대상을 적발하기 위해 집안을 뒤지는 등의 소란행위를 불허한다. 
6) 비밀보호에 주의한다. 
7) 구타를 불허한다. 
8) 자리를 지키며 적극적으로 (학생들을)이끌어 나가도록 한다 등이었다. 


중앙은 이날 허베이(河北 하북)성위원회 서기 장청셴(張承先 장승선)을 조장으로 한 공작조를 베이징대학에 급파해 당위원회 직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중앙은 또 각 대학과 중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해 무질서한 학내활동을 바로잡도록 지시했다. 중앙의 공작조들이 각 학교에 진입해 공작활동을 폈으나 상황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이징대학의 경우 학생들은 18일 비판 대상자를 적발해 일정한 장소에 설치한 비판대에 올려놓고 성토하는 ‘따구이타이(打鬼臺 타귀대)’, 규찰대(糾察隊) 등을 만들어 운용했다. 홍위병들은 비판할 사람들을 적발하기 위해 시내 곳곳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뒤 짐질하는 불법을 자행했다. 불순분자들은 이때다 싶어 홍위병들의 틈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등 설쳐대 폐해가 더욱 컸다. 이날 베이징대학에 공작조장으로 파견된 장청셴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석 429)

 

“이날 오후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60여 명이 비판을 당했다. 다수가 간부들이었다. 비판 대상자들의 머리에는 큰 고깔모자가 씌워지고 얼굴은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그들은 몸에 대자보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판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머리칼을 길게 헝클어 놓았고, 옷을 찢었으며, 손과 발로 마구 구타하고 조리돌림을 했다. 더욱 심한 것은 여성들을 부랑인 행위를 하도록 하는 모욕을 가했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이런 패악을 저지른 사람들 중에는 국민당군으로 있다가 포로로 잡혔던 사람, 절도행위로 학교에서 축출된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문화혁명 당시 모택동의 홍위병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홍위병들의 무질서한 혼란상을 바로잡기 위해 중앙에서 공작조를 파견했으나 베이징의 일부 대학과 중학교에서는 정부가 파견한 공작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충돌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움직임은 더욱 번져갔다. 베이징사범대학과 베이징지질학원 조반파 학생들이 6월 20일 학내에서 공작조를 내ㅤㅉㅗㅈ는 일까지 나타났다. 21일에는 칭화대에서 공작조 반대사건이 발생했다. 공정(工程)화학과에 다니는 20살의 청년 콰아이다푸(蒯大富 괴대부)는 이날 담벼락에 붙어있는 대자보 빈자리에 “지금 권력은 공작조의 수중에 있다. (공작조는)우리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다시 권력을 탈취하여야 한다”고 써 넣었다. 콰아이다푸는 며칠 전에 공작조 축출을 주장한바 있었다.

 

칭화대 조반파는 24일 공작조 파견 반대집회를 열고 공작조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공작조장인 예린(葉林 엽림)은 “콰아이다푸가 공작조의 권한을 탈취하려는 것은 반 혁명행위”라고 강력 비판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학생과 선생들이 26일 칭화원에서 ‘공작조를 옹호’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여 충돌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대학가와 중학교에서는 조반파와 정부가 파견한 공작조가 날카롭게 맞서 충돌하면서 폭력사태로까지 번지는 등 혼미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426) 毛澤東爲何搞 ‘文革’; 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金冲及   人民網-文史頻道
427)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428)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爲何搞 ‘文革’; 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人民網-文史頻道
429)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爲何搞 ‘文革’; 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人民網-文史頻道

-----------------------------------------------------------------------------------------------------------------

 

 

180. "사령부를 포격하라", 마오의 폭정과 난정

 

 

중공중앙 영도부에서도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반파 학생들과 연대해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여기저기의 집회현장을 돌아다니며 선동하는 불을 놓고 다니는 그룹과 이런 불을 끄려고 안간힘으로 저지하려는 그룹으로 갈렸다. 불을 놓고 다니는 패거리는 ‘5.16 통지’에 따라 새로 만든 ‘중앙 문화혁명소조(문혁소조)’ 구성원들이었다.

 

1940년대 초 옌안(延安 연안)정풍운동을 벌일 때 ‘저승사자’로 악명을 떨친 ‘문혁소조’ 고문인 캉성(康生 강생)을 비롯해 조장인 천보다(陳伯達 진백달), 부조장인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 그리고 린뱌오(林彪 임표) 등이 핵심이었다. 불을 끄려고 노심초사하는 중앙 영도로는 국가주석 류샤오치, 총리 저우언라이, 총서기 덩샤오핑 등이었다.

 

베이징에 혼란상황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을 때 마오가 돌아온 것이다. 마오는 8월 1일부터 12일까지 인민대회당에서 8기11중전회를 열었다. 회의에는 중공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141명, 각 중앙국, 각 성시자치구 당위원회 위원과 중앙 관련기관 책임자들이 참석했다.

 

회의는 종전과 달리 ‘중앙 문혁소조’ 조원과 수도인 베이징에 있는 대학교의 ‘조반파 선생과 학생 대표’들을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시켰다. 첫 대자보의 주인공인 베이징대학 조반 대표인 녜원즈(聶元梓 섭원재) 등도 참석했다.

 

류샤오치가 일상적인 업무와 국내외 중요정책 등을 보고한 뒤 문화대혁명 이래의 공작과 공작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마오가 빈번히 보고 중에 끼어들어 회의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주석 430)

 

류샤오치; -문화대혁명의 시기, 일주일간의 베이징 상황을 주석에게 1차 보고를 드린다. 이 시기에 내가 베이징에 있으면서 문화혁명 중에 잘못을 저질렀다. 특히 공작조 문제가 갈등을 일으켰다. 주요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천보다 동지가 정식으로 공작조가 필요 없다고 서면으로 제기했다. 두 가지였다. 토론할 때 다수 동지의 의견이 공작조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발언했다. 나는 공작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공작조의 운영방식은 비교적 편리했다. 보낼 수 있으면 보내고, 철수하면 철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가 류샤오치의 보고 중에 끼어들었다.

마오: 당시 단지 보내는 문제였나?

류샤오치: 그때는 이미 철수하는 문제였다. 나는 이것을 비교적 간단하게 말했다. 철수하라고 하면, 명령으로 철수했다.

마오가 반박하고 나섰다.

마오: 천보다는 철수했다. 당신들은 철수하지 않았다.

류샤오치: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큰 운동, 베이징의 각 단과대학과 대학교의 대부분의 조직이 이미 마비됐다. 당의 영도가 중단될 것으로 우려했다.

마오가 또 말허리를 자르고 참견했다.

마오: 어떻게 중단될 수 있나?

회의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참석자들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두 주석(마오는 당 주석, 류샤오치는 국가주석)의 심상치 않은 대화에 귀를 곤두세웠다.

류샤오치: 당시 나는 (공작조를)철수할 것인가, 아니면 먼저 살펴볼 것인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이럴 때 주석이 돌아왔다. 우리들은 (주석의)지시를 바란다. 주석이 결심하면 공작조를 철수한다. 주석이 첫날 일부 동지들과 (폐지를)이야기 했다. 타오주(陶鑄 도주)동지, 리쉐펑(李雪峰 이설봉)동지도 그곳에서 대화를 했다.

마오는 다시 류샤오치의 말을 끊고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마오: 공작조가 잘한 게 100분의 10도 되지 않는다. 100분의 90이상의 공작조는 완전히 잘못했다. 어떻게 나쁜 일을 저질렀는지는 차치하고, 첫째, 싸울 수 없고 둘째, 비판할 수 없고 셋째, 고칠 수 없다. 군중을 진압하고 군중의 역할을 막아 나쁜 작용만 했다.

 

이날의 회의는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오후 4시 40분에 산회했다.

 

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가 8월 4일 오후 3시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주석 431)

마오는 공작조를 파견한 것은 “학생운동을 진압하고”, “노선의 잘못이다”라고 호되게 질책했다. 류샤오치는 스스로 책임을 인정했다. 류샤오치는 “이 시기에 주석은 안 계시고, 내가 공작을 이끌었다. 주요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마오는 “당신은 베이징에서 독재를 했다, 독재를 잘했다!”고 쏘아 부쳤다. 마오는 또 “방향성의 과오를 저질렀고 실제적으로 자산계급의 입장에 서서 무산계급 혁명을 반대했다고 좀 성의 있게 말하라. 왜 맨날 민주, 민주가 왔다고 말하나. 또 그러면 겁이 날줄 아나?”라고 되물었다.

 

류샤오치는 “단지 그만 두는 게 아니다. 그만 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곁에 있던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예젠잉(葉劍英 엽검영)이 분위기를 눅이려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예젠잉은 “우리들에게는 수 백 만의 군대가 있습니다. 어떤 마귀, 요귀(牛鬼蛇神 우귀사신)도 겁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엄한 목소리로 “마귀, 요귀는 여기에 앉아있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음 날인 8월 5일 마오는 더욱 더 준엄한 조처를 취했다. 사람들이 까무러칠만한 글을 쓴 것이다. (주석 432)

 

“전국 첫 번째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자보와 인민일보 평론원의 평론은 어쩌면 그토록 잘 썼는가! 동지들은 다시 한 번 이 대자보와 평론을 읽어보기 바란다. 50여 일 동안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아무개 영도 동지는 도리어 반대되는 일을 했다. 반동의 자산계급의 입장에 서서 자산계급의 독재를 하면서 무산자계급의 기세 드높은 문화대혁명 운동을 타격했다. 옳고 그름이 전도되고, 흑과 백이 헛갈리고, 혁명파를 포위 소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했다. 백색공포를 실행해 만족해하며 자산계급의 위풍을 조장하고, 무산계급의 패기를 멸(滅)하니 어찌 악독하다 아니할 것인가! 1962년의 우경과 1964년 ‘좌’형(形)에서 실제론 우경의 잘못된 경향과 연결돼 있다. 어찌 사람들을 깊이 반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오는 이렇게 쓴 글 위에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고 표제를 붙였다. 마오는 이틀 전에 쓴 이 글을 8월 7일 열린 중앙전회에 인쇄해 배포하도록 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글에서 비록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무개 영도 동지는 류샤오치였다.중앙 이외에 존재하는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뜻은 류샤오치의 후계자의 지위를 바꾸겠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실제 자산계급의 별도의 ‘사령부’는 없는 ‘가공’이었다. 마오의 이런 선택은 린뱌오가 비교적 젊다(마오 보다 14살,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보다 9살 아래 임)는 것을 들 수 있지만 사실은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로 충성심이 높고, 린뱌오가 중앙 군사위원회 공작을 하면서 군대에서 ‘정치우선’ 정책을 펴는 등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린뱌오는 이때 휴가를 내어 다롄(大連 대련)에서 양병(養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베이징회의에 참석하도록 긴급 통보해 린뱌오는 8월 6일에 회의에 참석했다.

 

오늘의 마오가 있기까지는 류샤오치의 20여 년의 헌신적 보위가 있어 가능했다. 마오는 이제 류샤오치가 버거워 살가운 린뱌오를 후계자로 선택해 2인자인 류샤오치를 냉혹하게 용도폐기 시킬 결심을 한 것이다. 권력의 세계에서 2인자가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될지는 동서고금에 비춰볼 때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류샤오치는 이제 바람 앞의 촛불신세로 전락해 정치생명은 고사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마오의 폭정(暴政)과 난정(亂政)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430)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3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32) 毛澤東爲何搞 ‘文革’; 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金冲及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

 

공산당 창건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2)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