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전조, 파시즘에 관한 우화 <하얀 리본>
MB정부에게서 파시즘의 징후가 읽힌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완전한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 중 일부는 전해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이 어쩌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명확하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흑백영화 <하얀 리본>은 늙은 교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은 독일의 한 마을에서 시작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로 비약합니다. 그 마을이 근대 독일 사회의 축소판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대체 그 마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1913년 영화 속 독일의 어느 마을. 이듬해인 1914년 6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합니다. 이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방이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으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입니다. 영화와 현실을 잇는 알레고리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한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어떻게 1차 대전과 파시즘의 기원을 탐구하는 연결고리가 되는지 탁월하게 묘사해 나가면서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거울이 됩니다.
그 마을에서 왜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걸까?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의사가 누군가 매어 놓은 줄에 걸려 넘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하지만 오리무중. 이어 농부 펠더의 아내가 의문의 사고로 숨집니다. 추수감사절 날, 마을 영주인 남작의 양배추 밭이 작살납니다. 남작의 아들 지기는 바지가 벗겨져 거꾸로 매달린 채 볼기짝이 터져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 마을의 주인인 남작의 영지가 한 밤중에 불에 타오른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도 밝혀지기 전에 농부 펠더는 목을 매 자살한다.
얼마 뒤, 남작의 영지가 불에 타 오르고 이튿날 농부 펠더가 목을 매 자살한 채로 발견됩니다. 마을의 산파 바그너 부인의 지체장애 아들 카를리는 두 눈이 실명위기에 처할 정도로 처참하게 린치를 당합니다. 지기가 관리인 아들에게 피리를 뺏기지 않으려다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합니다. 그 와중에 급전이 당도합니다.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했다는…, 이윽고 희번덕거리는 눈빛들 속에 곧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마을을 휘감아 돕니다.
이렇게 영화는 성격이 다른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중첩시킵니다. 그와 함께 대체 범인이 누굴까 하는 의심에서, 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걸까하는 의문으로 관객의 눈을 이동시킵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명쾌하게 밝혀지는 건 없습니다. 권력과 계급과 세대와 폭력이 얽히고설킨 축약을 통해 마치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이, 숱한 의문부호를 관객의 몫으로 던져 놓습니다.
다만 영화는 세 가지 축의 '억압기제'는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마을의 주인인 남작과 목사와 의사입니다. 이 삼각지배체제의 숨 막히는 통제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표출되고, 악의와 위선 그리고 폭력을 통해 파시즘이 어떻게 잉태되고 발흥하는지를 알레고리 가득한 카메라는 근래에 보기 드문 정치사상적 성찰을 탐구해 갑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마을 주민들은 남작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농들입니다. 그는 공동체의 법이자 최고 권력입니다. 남작의 오른 편에 서 있는 목사는 주민들의 영혼을 하느님과 남작에게로 인도하는 한편 그들의 일상을 감시합니다. 의사는 지식과 전문기술을 갖춘 신흥 엘리트로 부상하며 지배체제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렇게 마을의 억압기제는 삼각편대를 이루며 작동하고 있습니다.
남작은 곧 마을입니다. 루이 14세가 말한 것처럼 '남작이 곧 법'이요 진리입니다.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권력을 불러 마을을 공포와 불신과 폭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남작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파시즘의 준동을 상징하는 기제로만 읽힐 뿐, 그 '징후'를 드러내는 이는 목사와 의사, 그리고 아이들입니다.
▲ 저녁식사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절 묶었던 하얀 리본을 완장처럼 찬 마르틴.
순수와 억압의 상징인 하얀 리본은 나치의 철십자 완장을 연상케 한다.
목사는 가장 교활하고 지능적인 억압 기제로 꼽힙니다. 자신의 자식인 클라라와 마르틴이 저녁 시간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식구들 모두 밥을 굶기고 혹독하게 체벌을 가합니다. 그리곤 순수와 억압을 상징하는 '하얀 리본'을 머리와 팔에 묶습니다. 믿음이 회복되는 날 풀러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목사는 또 조숙한 아들 마르틴에게 끔찍한 거짓말로 자위행위 하는 것을 실토케 합니다. 마르틴이 눈물범벅인 채로 고백하자 밤마다 침대에 양 손을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해 놓고 자라고 합니다. 클라라가 교실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벽을 보고 세워 놓은 채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줘 그 자리에서 실신케 합니다.
순결과 정직을 빌미로 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목사는 폭력과 세뇌를 병행합니다. 그런 목사에게 있어서 '하얀 리본'은 엄격한 규율과 금기의 내면화이자 종교적 권위를 지탱해 주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이런 권위는 또 다른 폭력 앞에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목사의 억압에 극단적인 그러나 소리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는 클라라와 마르틴 등 아이들입니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걷는 마르틴을 발견한 교사에게 "신께 저를 데려갈 기회를 주었는데, 아직 저를 데려가지 않아 기쁘다"고 말합니다. 클라라는 목사가 애지중지 키우던 새의 머리를 가위로 찔러 죽인 뒤 십자가 모양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잉태한 결과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낳은 증오와 폭력
시대가 불온한 광기로 접어들면 욕망의 화신 또한 추악한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의사는 산파와 내연관계입니다. 둘의 관계가 의사 아내가 죽기 전부터인지, 카를리가 의사의 아들인지, 둘이 작당해 아내를 죽였는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의사는 산파에게 역겹고 토할 것 같다며 헤어지자고 합니다. 즐길 만큼 즐겼으니 지겨워진 것입니다. 대신 의사는 자신의 딸 안니를 더듬다 겁간하기에 이릅니다.
영화는 힘의 논리에 기인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방종할 경우 그 끝이 어딘지를 의사를 통해 극명하게 들춰냅니다. 알레고리를 통해 의사의 욕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지배력에 있다는 것도 증언합니다. 또한 내연녀와 안니를 통해 각기 다른 방면에서 의사와 카를리에게 끔찍한 증오의 폭력이 가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 산파와 의사가 사라진 뒤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다. 평온을 되찾은 듯한
모습 뒤로 1차 대전의 포화와 파시즘의 대두라는 악마의 전주곡이 울린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산파와 종적을 알길 없는 의사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혐의를 떠넘기고 시치미를 뚝 뗍니다. 단 한 사람, 교사만이 클라라와 마르틴을 만나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돌변하며 야릇한 미소를 띨 뿐입니다.
<퍼니게임>과 <히든>등 전작들에서 개인과 가족의 파멸과 붕괴를 충격적 영상으로 그려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하얀 리본>에서 그 파멸의 대상을 아이들에서 시작해 사회로까지 확장해 나갑니다. 개인과 가족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떻게 사회로 확장되고 한층 견고해진 폭력과 억압이 다시금 개인과 가족으로 순환되면서 파시즘이 대두하는지를 다양한 색감의 알레고리로 직조해 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아이들은 20년 뒤 어떤 모습일까
영화는 억압과 통제가 켜켜이 쌓일 경우 그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성찰케 합니다. 폭력으로 통제되는 획일화된 집단속에서 '폭력의 잉태'가 어떻게 '폭력의 역류'로 준동하는지를 영화는 아이들을 통해 예시해 줍니다. 영화의 부제가 '독일 아이들의 이야기'이듯이 그 모습은 클라라와 마르틴으로 함축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폭력과 위선과 욕망과 적대를 보고 느끼며 체화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소통과 교감 속에 사건을 도모합니다. 그 대상은 남작 아들이나 의사 같은 강자이기도 하고 카를리처럼 약자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억압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되갚는다는 점입니다. 파시즘의 맹아는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에서 패한 지 20년 뒤, 철십자 완장을 차고 게르만 혈통의 순수를 부르짖으며 인종 학살의 파시즘에 앞장서는 청년들은 바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 속 아이들 못지않게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분노와 무기력에 찌든 채 어른들의 폭력과 통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사회의 아이들은 20년 뒤 어떤 모습일까요? 더군다나 4대강 독선은 여전하고, 천안함 사건으로 준전시상태라면서 고속단정타고 관광이나 하고, 고문과 구타와 민간인 사찰이 부활하는 갈등과 적의의 시대에, 이명박 정부의 '불도저식' 억압과 통제의 기제가 한국사회의 저류를 관통하며 파시즘의 도래를 경고하는 상황에서 <하얀 리본>이 던지는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만 오락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다, 상영관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세계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를 낳은 근대 유럽의 억압과 폭력의 기제를 성찰하는데 있어 최고의 영상 텍스트로 꼽히는 만큼, 파시즘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시간과 발품을 팔아 볼 만합니다.
201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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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 거장 하네케, 20세기초 ‘인간 광기’를 논하다
칸영화제에 등장할 때마다 황금종려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카엘 하네케는 안타깝게도 매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09년, 그에게 드디어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하얀 리본’은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하얀 리본’은 서늘한 모던시네마와 자극적인 소재, 충격적인 장면을 예상한 관객이 하네케를 새로 보게 만든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옛 사진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흑백영상은 20세기 초반의 북(北)독일 지방을 충실하게 재현했으며, 실로 거룩하게 부활한 영화예술의 향취에선 칼 데오드르 드레이어, 잉마르 베르히만,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떠오른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얼마 전, 겉보기에 평화로운 독일 북부의 한 마을에서 이상한 사건이 하나둘 일어난다. 마을의 실질적 주인인 남작의 아들이 사고를 당하면서 연결되지 않던 의문들이 해결점을 찾는 듯하지만, 구체제에 얽매인 남작과 신부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변화의 시간이 몰고 온 낯선 일들이 뜻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다. 마을 전체가 의심과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을 선생이 뜻밖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하얀 리본’은 루터의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지배하는 고립 사회를 빌려 이후 독일에서 벌어질 광기의 역사를 읽는다. 하네케에 따르면, 소명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맹신하고 행동을 강요하면서 역사의 비극을 빚는다는 거다. 그리고 아이들이 맞이할 미래의 시간에 어른들의 죄가 유전되는 순간 비극이 순환된다는 거다. 하네케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죄악에 복수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에게 복수할 마음마저 없는 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얀 리본’의 포스터는 울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담았다. 아이들은 정녕 슬픈 마음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1940년대 초반 연출한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에서 비슷한 주제를 탐구한 바 있다. 어떻게든 가족이 화목하길 원하는 어린 소년과 달리, 소년의 부모는 가정을 지키는 데 서툴다. 끝내 아빠가 자살하자, 기숙학교에 다니던 소년은 엄마가 내미는 손길을 거부하고 돌아선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어른들의 책임을 통감했을 데 시카는 소년이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묻는다. 미래에 대한 데 시카의 근심은 ‘하얀 리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어른들이 종종 잊고 지내는 사실은, 아이들이 어른의 거짓과 죄·잘못을 분명히 보고 듣는다는 점이다.
하네케는 ‘하얀 리본’이 역사에 관한 영화가 되길 의도했으면서도 명확한 역사적 사건을 그리진 않았다. 선생의 내레이션이 영화 내내 지속되지만, 그는 자기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고 고백하며, 영화 스스로도 끝내 범죄자를 밝히지 않는다. ‘하얀 리본’의 ‘종결되지 않은 드라마 투르기’는 관객이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하얀 리본을 본 관객이 극장을 나서면서 질문을 계속하는 건 그래서다. 하네케는, 관객이 이야기와 주제에 개입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와 좀더 자유롭게 호흡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얀 리본’은 그의 바람이 단지 희망사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2010. 6.22 / 서울신문 / 영화평론가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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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얀 리본’, 마하엘 하네케의 절제된 흑백필름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하얀 리본>(사진)이 일년 만에 국내에서 7월1일 지각 개봉한다. 역대 수상작들이 한국에서는 흥행과 무관했던 만큼 그러려니 하지만 영화 마니아들한테는 그래도 반가운 일이다.
칸 수상작이거니 어려울 법한데다 <퍼니게임> <피아니스트> <늑대의 시간> 등을 만든 거장 감독 마하엘 하네케의 작품이라 꼼꼼히 봐야 한다. 배경은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 독일의 어느 마을. 그해는 사라예보의 총성 하나가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툭 건드리면 터질 듯 모순이 팽배했고 그런 징후는 ‘독일의 어느 마을’까지 뒤덮고 있었다. 제목 하얀 리본은 순결, 정직을 빌미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구속하던 ‘끈’에서 따왔다. 그 끈은 한해 동안 아이들의 팔뚝에 완장처럼 채워 행동과 의식을 옥죄고, 밤이면 침대에 묶어 잠자리에서조차 옴짝달싹 못하도록 묶는 도구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절제된 흑백필름이고, 그 색깔은 기억이 탈색된 노인의 회고담이라는 형식과 일치한다. 이상 준비운동 끝.
시작은 마을에 하나뿐인 의사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다. 이어 농부의 아내가 실족(?)해 숨지고, 마을의 주인 격인 남작의 아이 하나가 심하게 구타당한다. 누군가 양배추 밭을 쑥밭으로 만들고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사건이 터진다. 성격이 다른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관심은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일까에서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질까로 관심이 옮겨간다. 아들이 린치를 당하자 남작이 마을사람들의 협조를 당부하면서 마을은 불신에 휩싸이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 감독 역시 사건해결에는 무관심해 그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총각선생이었던 화자의 시각에서 몇 개의 단서를 주고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면서 ‘알아서들 판단하라’고 던져줄 뿐이다. 그러곤 전쟁이다. 골치 아픈 감독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골치 아프게 한다. 당대 독일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작품을 응용한 터라 영화는 배경, 인물, 의상, 구도 등이 똑 부러지는 흑백사진이다.
2010. 6.23 /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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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을 단 파시스트들은 어디에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거장 미하엘 하네케의 신작 <하얀 리본>은 독일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시대극이다. 1913년 독일의 어느 개신교 마을에서 연속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마을 의사는 누군가가 몰래 설치해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고, 소작농의 주인은 제재소의 나뭇바닥과 함께 추락해 죽고, 남작의 어린 아들은 마을 축제가 벌어지는 날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고, 마을 산파의 장애아들은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두 눈을 잃어버린다. 마을에 갓 부임한 신임 교사는 사건을 조금씩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하얀 리본>에서 범죄자를 밝혀내는 후더닛(whodunit)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미하엘 하네케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개신교 마을 사람들의 속내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마을 의사는 사실 친딸을 겁탈하는 변태이고, 개신교 목사는 아이들을 학대하는 이기주의자 겁쟁이일 뿐이다. 유럽의 현대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하얀 리본>이 ‘어떻게 파시즘이 독일에서 발현했는가’에 대한 우화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얀 리본>은 제6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7월 1일 개봉한다.
미하엘 하네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도 꽤 있을게다. 하네케의 전작 <퍼니 게임>, <피아니스트>, <히든>은 (하네케의 표현에 따르자면) 관객을 겁탈하는 영화다. 시각적인 폭력이 강렬해서는 아니다. 하네케의 영화들은 마음 약한 관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폭력과 위선을 스크린에 드러낸 뒤 우리를 향해 조소한다. 우리의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 나쁜 씁쓸함이야말로 하네케 영화의 힘이다. 하지만 <하얀 리본>은 조금 다르다. 이 영화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안이 벙벙하도록 유미주의적인 흑백화면의 정갈함을 통해 관객의 숨을 틀어막는다. 아마도 가장 덜 불편하고, 가장 아름다운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라고 할 만 하다.
영화의 제목인 <하얀 리본>은 목사의 아이들이 한쪽 팔에 차고 있는 하얀 완장을 의미한다. 목사는 저녁식사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사춘기가 되어 자위행위를 시작한 아이를 회초리로 체벌한 뒤 팔에 순결의 상징인 하얀 리본을 매준다. 물론 하얀 리본은 나치즘의 명징한 상징이다. 나치 문장이 그려진 완장을 찬 히틀러 유겐트의 아이들은 유태인들에게 파란색별이 그려진 하얀 완장을 채운 뒤 가스실로 보냈다. 이 명징한 상징을 통해 <하얀 리본>은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물론 이걸 독일과 나치즘의 이야기라고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하얀 리본을 단 파시스트들은 어디에나 있다. MBC를 장악한 그들도, 똥통을 들고 시민단체를 공격하는 그들도, 혹은, 그 모든 걸 보고서도 입을 다문 우리들도, 하얀 리본을 달고 있다. <하얀 리본>은 1913년의 독일로부터 보내는, 지금 이 시대의 우화다.
2010. 6.29 / 씨네21 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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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리본' 순수의 리본은 어떻게 광기의 완장으로 변하는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13년, 평화롭기 그지없는 독일의 한 시골마을에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따른다. 마을 의사는 말을 타고 가다 누군가 몰래 설치한 줄 때문에 낙마해 크게 다치고, 한 농부의 아내는 마을의 영주나 다름없는 남작의 헛간에서 일을 하다 추락사한다. 마을 축제날 남작의 양배추밭이 훼손되고, 남작의 어린 아들은 잠시 실종됐다 볼기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다.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고, 아내를 잃은 농부는 스스로 목을 맨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과연 누가 이런 끔찍한 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을까. '하얀 리본'은 통속적인 스릴러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왜 한적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마을이 조금씩 불신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지를 정치하게 파고들며 관객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한다. 그 과정은 스크린만한 크기의 커다란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빌린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아예 "많은 것들이 애매하고 많은 질문이 남아있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영화의 숨겨진 메시지를 깨달았을 때의 전율이 만만치 않다.
흑백 화면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의 이면을 조금씩 소개할수록 관객은 혼돈과 경악 속으로 빠져든다. 의사는 마을 산파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넘어 딸과의 천륜까지도 부정한다. 천진난만한 듯한 아이들은 그들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며 어른이 없는 곳에서 스스럼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공개석상에서 남작의 음덕에 감사를 표하지만 뒤에선 그의 괴팍한 성격을 입에 올리며 두려워한다. 사소한 잘못도 놓치지 않으며 아이들을 옥죄는 목사의 행동도 마을을 숨막히게 만든다.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듯한 마을이 사실 지배와 피지배의 정교한 종속관계, 억압과 핍박의 숨막히는 폐쇄적 구조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영화는 나지막한 톤으로 암시한다.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 이 나라의 일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는 대사는 당시 독일의 사회상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마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피아니스트'와 '퍼니 게임' '히든' 등을 만든 오스트리아의 거장 미카엘 하네케 작품.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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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 악마적 순수의 전조
순수는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태반이다. 순수한 악의가 있듯 순수하다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모든 이의 믿음은 순수하다. 어린 아이가 순수한 얼굴로 당신의 머리에 망치를 내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순수한 본성에 어떤 믿음을 심어주느냐에 달린 것이다.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린 뒤 채색을 한 뒤에는 그림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겹겹이 쌓이는 경험과 미장된 훈육으로 단단하게 건축된 인간의 믿음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뒤늦게 파괴적인 시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13년, 독일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하얀 리본>은 어느 누군가가 믿었던, 혹은 여전히 믿고 있는 어떤 순수한 신념으로부터 야기된 거대한 사건의 징후와 전조를 살피는 영화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던 이상한 사건’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은 곧 그 사건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부연이 될 것임을 첨언한다. 그 이상한 사건의 시작은 마을 의사의 낙마다. 여느 날과 같이 자신의 말을 타고 집으로 들어서던 의사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말에서 떨어져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의도에서 기인된 결과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되는 방화와 실종, 그리고 처참한 테러까지 마을 사람들을 동요시킬 만한 사건이 이어진다.
평화롭게만 보이던 마을에는 의심과 경계가 개개인의 심리 밑바닥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사건을 통해 발견된 것에 가깝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발적이라기 보단 점층적이다. 이는 사건의 연속적인 형태가 아닌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팽배한 심리적 긴장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사건의 흐름은 인물들의 심리적 기저를 살피기 위한 일종의 지표와 같다. 계층적인 갈등과 세대 간의 소통 부재가 팽배한 마을은 마을 사람들에게 밀폐된 섬에 가둬버린 듯한 극악한 고립감을 제공한다. 좀처럼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포기해버린 하층민의 분노나 기성세대의 강압적인 훈육 앞에서 논리적 항변을 허락받지 못한 어린 세대들의 불만은 직접적인 언어를 통해 고백되기 전에 간접적인 관찰을 통해 목격된다.
1인칭 시점으로 진전되는 후일담 형식의 내레이션은 화자의 구도를 통해 이 모든 사건들을 관객에게 객관적으로 중계한다. 마을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마을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목격하거나 전해듣는 교사(크리스티안 프리에델)는 그 사연들로부터 적당히 분리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 끝내 그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발원지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하얀 리본>은 ‘누가’라는 의문을 증폭시키는 후더닛 구조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의문은 끝내 그 모든 현상의 근본에 자리한 사회병리학적 증상들을 포괄함으로서 거대한 질문 앞으로 감상을 집결시킨다. 강압과 폭력을 통해 순수를 훈육당하는 어린 아이들의 팔에 채워진 하얀 리본은 순결주의의 훈장이자 차별주의의 완장이 되어 배타와 응징으로 집단적인 심리를 작동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한 마을을 비추는 <하얀 리본>은 거대한 광풍이 어디에서 불어왔는가를 살핀다. 모든 것은 지독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개인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의 차이를 증상으로 간주하며 차별을 양성하고 끝내 폭력적인 강요와 관철로서 상대를 유린한다. 그 모든 증후의 소산은 결국 믿음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독실한 신앙이 곧잘 거대한 전쟁의 원흉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란 때로 폐쇄적이기에 그만큼 아득하고 위험한 광기를 잉태한다. 그리고 순수한 믿음은 때로 그 모든 광풍의 핵이다. 순수한 믿음에는 방향이 없다. 단지 강력하고 막강한 것이다. 선에 대한 믿음도, 악에 대한 믿음도, 순수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 믿음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 곳곳에서 누군가와 이 세계의 삶을 유린해 왔던 것이다. <하얀 리본>은 바로 그 순수한 믿음으로 강요한 훈육의 결과가 세계를 어떤 지경으로 몰아넣었는가에 대한 후일담이다.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을 새겨넣는 영화의 영상은 되레 정갈하고 결벽하다. 이 엄격한 흑백영상은 추악한 내면을 가린 그 세계의 위장된 평화처럼 안온하고 담담하기에 더욱 위태롭고 잔인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경계를 실험하듯 관객에게 특수한 체험적인 가학을 주저하지 않던 미하엘 하네케는 <하얀 리본>을 통해 체험보다는 목격과 증언으로서 지난 과오의 역사를 잉태한 근본적 뿌리를 인지시킨다. <하얀 리본>은 깨어 있는 눈과 차가운 머리로 우리에게 매여진 <하얀 리본>을 직시하고 가리키며 경고한다. 악마적인 순수의 전조는 여전히 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우린 그 시대로부터 멀어져왔지만 여전히 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위대한가. 악마는 우리 주변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바로 그 믿음을 먹고 자란다.
2010. 7. 2 / 무비스트 /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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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영화가 왜 예술인지 알려준다
1910년대 독일의 작은 마을이 현재 우리 모습과 겹쳐 보이는 아이러니
미하일 하네케 감독은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거장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유럽영화제와 칸영화제에서 큰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가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작품마다 영화평론가 혹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한 작품 한 작품 노력하면서 만들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 같다.
그가 2000년대에 연출한 작품 중 대다수가 수작 이상으로 기억된다. <미지의 코드>(2000년), <피아니스트>(2001년), <늑대의 시간>(2003년), <히든>(2005년), <퍼니 게임>(2007년)에 이르기까지 항상 문제작을 양산해 내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의 영화가 작품성이 너무 강해서 일반관객들이 보기 쉽지 않다는 것.
분명 영화평론가와 비평가로부터 문제작 혹은 수작이란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받은 작품도 한국에서 개봉한 후 지루한 영화 혹은 돈 주고 보기 아까운 영화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예술영화로서의 가치, 작가주의 영화로서의 가치는 아주 높은 작품이었지만 상업적인 가치가 떨어지면서 따라 붙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2009년 작 <하얀 리본>은 한국에서 개봉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사전 정보를 통해 이 작품이 어떤 방식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리본>은 흑백영화에 내레이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진행되는 영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작품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예술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로서 걸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이란 이야기다. 이런 작품 완성도는 세계유수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여러 상을 받으면서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제62회 칸영화제(2009) 황금종려상 수상, 제22회 유럽영화상(2009)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며 2009년 유럽에서 나온 영화중에 최고임을 인정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35회 LA 비평가 협회상(2009), 제74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2009), 제44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2010) 등에서 촬영상을 수상하며 영화 촬영테크닉 부분에서도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또한 제22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2009)과 제6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2010)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작품성 역시 인정받은 영화다.
무엇이 이 많은 영화 시상식에서 <하얀 리본>에 상을 몰아 준 것일까?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걸작 영화
영화는 자본으로 만들어진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상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단지 영화만 제작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위한 극장 시설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래저래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영화 자체가 너무나 상업적인 냄새가 많이 묻어나면서 예술적인 가치에 대해 등한시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 자체도 예술의 영역에 포함이 된다.
<하얀 리본>은 영화가 어떻게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반관객들이 보기에 분명 지루한 요소들이 많지만 영화에 대해서 조금만 더 깊이 있게 파고든다면 이 작품이 전해주는 여운은 묵직하다. 독일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이곳에 학교교사로 오게 된 인물에 의해 한 마을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은 어느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를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객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실제 그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상상하고 어떤 결론을 자신 스스로 유도하게끔 흘러가고 있다. 사건이 존재했지만 그 사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과 결론 그리고 이 영화에서 던지는 여러 가지 질문은 관객들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하얀 리본>에서 가장 큰 축이 되는 것은 어른과 아이들이다. 이 관계는 억압적이면서도 계급이 존재했던 1차 대전 이전의 독일 사회의 경직된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주가 보여주는 모습과 종교인인 목사와 그의 딸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 그리고 아이들에게 엄격함을 강조하는 어른들의 모습.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큼 세상을 올바르게 살거나 불의에 대항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너무 물들어서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하얀 리본>에서는 담담하면서 제 삼자의 시선으로 그대로 카메라에 담긴다. 목사는 엄격함을 강조하지만 그의 딸 클라라(마리아-빅토리아 드래거스)는 오히려 장애아를 괴롭힌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하는 학교 교사의 심증적인 이야기다. 이뿐만 아니라 클라라는 엄격함만을 강조하는 목사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뜻으로 새를 죽여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숨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은 이런 경직성이 가져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런 경직성과 어른의 위선. 그리고 아이들의 반항적인 행동. 마을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 모든 것들이 불안하고 어둡기만 했던 그 시대를 작은 마을을 통해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런 것들이 직접적이거나 감독의 의도가 강하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충분히 관객들이 제 삼자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조망하게 해주면서 진행되기에 이 작품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영화에 간섭할 수 있게 해준다.
1910년대 독일 시골마을의 경직성이 지금 우리 모습이란 것이 아이러니
<하얀 리본>을 본 관객들이라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은 1910년대 독일의 작은 마을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그 모습이 현재의 우리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마을의 모습. 모든 것이 억압되면서 다른 것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까지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넓게 보면 <하얀 리본>에서 보여준 이야기들은 결국 어떤 곳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잘못과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약자를 억압하며, 종교란 이름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억압당하는지, 그리고 그런 규제와 제도에 물들어 버린 어른들이 보여준 경직성 등은 단지 1910년대 독일의 작은 마을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누군가를 통제하고자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 것들이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것은 아무런 해결도 결론도 나지 않는 경직성과 암울함을 보여주는 <하얀 리본> 속 작은 마을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하얀 리본>은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영화에 죽고 사는 관객들, 그리고 영화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영화가 어떻게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할 수 있는지, 왜 영화 예술이 감독의 예술이라고 불리는지 이 작품을 통해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통용되는 이야기를 1910년대 한 독일의 작은 마을을 통해 모두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하얀 리본>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2010.07.05 - 제상민(moviejo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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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통찰, 하얀 리본 ~ 순수한 폭력의 의식이 현실의 의지를 만날 때
흔히 폭력에 대해 지니기 쉬운 오해 중 하나는, 그것을 제한된 범위의 가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바른 인도와 교화를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거나 적어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목도하는 폭력은 기표에 불과하다. 통제가 가능한 것은 단지 드러난 행위일 뿐, 저변에 자리한 순수한 폭력의 의식에까지 외부의 힘이 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조리한 현실의 개입이야말로 폭력의 지속적 성장에 은밀한 자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의식에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로 변질되기 쉽다.
독일의 시골에 위치한 조용한 전원 마을.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처럼 보이는 이 작은 마을의 의사가 누군가 걸어놓은 줄에 의해 낙마하는 사고가 터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게 되고, 마을에는 흉흉한 불안감이 점차 퍼지기 시작한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서는 남작의 소작인으로 일을 하던 한 중년의 여성이 사고사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고, 남작의 어린 아들은 린치를 당한 채 발견된다. 막연한 불안감은 점차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구체화되며 고조되기 시작한다. 이 불신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의사의 아들이 두 눈이 도려진 채 숲에서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터진다.
여기까지 이어지는 줄거리를 듣자면 영화는 마치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구조를 따르게 될 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하얀 리본>은 장르라는 진부한 관습의 틀 속에서 파악하고 해석이 가능한 형질의 영화가 아니다(이 작품의 감독은 관객을 철저히 무기력하게 만든 뒤 가지고 놀던 <퍼니 게임>의 미카엘 하네케임을 잊지 마시길). 오히려 영화는 폭력이 잉태되고 발현되는 현실적 과정을 고찰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너무도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폭력에 대한 고찰이 엿보이는 다큐멘터리 말이다.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의도로 일어났는가를 장르적 공식에 따라 추적하는 추리 따위는 의미 없는 시도에 불과해진다. 폭력이 분출하는 기저에 자리한 순수한 배타성과 이와 관련된 광기에 가까운 믿음, 그리고 이 믿음에 밑거름을 제공하는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며 위선적인 기성세대의 사회. 이런 영화적 세계관 속에서 행위 주체로만 한정된 동기의 상정은 폭력의 보편성과 작품에 담긴 진의를 오히려 훼손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영화를 보면서 의식해야 할 사실은 이 보편적인 순수 의식이 빚어내는 ‘광기의 역사’이며, 현실적 의지인 망탈리테가 창출하는 ‘성스러운 폭력’이다. 물론 <하얀 리본>이 폭력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현상(develop)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병리적 현상(phenomenon)의 기원과 발생과정을 다루며 그러한 역사의 도래에 대한 설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결과 복종의 상징인 하얀 리본과 자생적인 폭력이 결합한 뒤 완성된 배타적 폭력의 완장이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자면 말이다. 때문에 영화 속의 시골마을은 단순히 세계대전 이전 폭력이 난산된 독일만으로 한정된 장소가 아닌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이후에 맞닥뜨리게 된 전 세계적인 공간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요소는 하네케가 폭력의 이 모든 과정을 흑백의 정적인 화면 속에 시각적인 자극이 없이 담아낸다는 점이다. 헤모글로빈이나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장면 없이 말이다(덕분에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폭력을 다룬 작품에 정작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은 부재하단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는 비가시적인 폭력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하네케만의 오래된 방법론의 고수일 뿐이다. 사실 이는 <퍼니 게임>이나 <피아니스트>와 같은 하네케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표현방식으로, 결과나 현상을 표현하려는 집착이 오히려 진실에 대한 인식과 탐구를 흐리게 만든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형식의 선택과 고수 덕분에 역설적으로 폭력에 내재한 의지는 그 순수성을 증명해낸다.
<하얀 리본>의 폭력은 자생적이며 순수하고 동시에 사회적인 공포다. 단절된 세대 속에서 자연히 생긴다는 점에서 자생적이고, 방향성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하며, 강압과 훈육이란 방법에 의해 성장하고 가다듬어진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무서운 것은, 이 폭력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자라고 있는 중이란 사실이다. 그것도 ‘성스러움’으로 포장된 이정표를 따라서 말이다. 하네케의 비범한 통찰력이 피부로 와 닿는 까닭이다.
2010. 7.19 / 민중의 소리 / 안세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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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수 감독, “‘하얀 리본’은 마취 없이 환부를 들춰내는 영화”
스릴러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로 올해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진출한 신인 장철수 감독이 영화 <하얀 리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장철수 감독은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을 본 후 “<퍼니게임>, <피아니스트>를 볼 때의 충격이 다시 한번 밀려왔다”며 “날 선 흑백의 영상을 보며 감독이란 직업이 때론 저렇게 마취 없이 환부를 들춰내는 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렵고 숨이 막혔다. 하네케 감독은 신이 만든 가장 위험한 인간-인간계의 휘슬 블로어(내부고발자)다”라는 평을 남겼다.
또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본 이명세 감독도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라며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같다”고 평했다.
이들 외에도 이준익 감독, 오세훈 서울 시장, 노영심, 박완서, 최민식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하얀 리본>을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는 지난 1일, 씨네큐브 광화문과 하이퍼텍 나다의 단 2개관에서만 개봉했으나 4주차 장기 개봉으로 지속적인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하얀 리본>에 대한 평을 남겼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하얀 리본>은 144분간의 러닝타임 내내 정말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순간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영화 속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불신과 광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라는 말로 영화의 감동을 전했다.
지난 2009년 제6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전세계 영화인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영화 <하얀 리본>은 유럽의 가장 문제적 작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144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팽팽하게 이어지는 긴장감과 관객을 압도하는 흑백의 유려한 영상,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펼쳐지는 의문의 사건들 이면의 진실을 관객에게 사고하도록 만드는 걸작이다.
<하얀 리본>은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들을 쫓는 한 교사의 시선을 통해 그 동안 숨겨져 있었던 타락한 인간본성과 어른들에게 억압당해 온 아이들의 어두운 세계를 묵직한 공포와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생생하게 전달,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묘사를 드러낸다. 거장 미카엘 하네케 감독 생애 최고의 걸작 <하얀 리본>은 지난 1일 개봉해 현재 상영중이다.
2010. 7.21 [유니온프레스=신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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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작으로 보이던 <하얀리본>의 한 장면에서 안도를 느낀 이유
영화가 시작하자, 암전된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완전히 사실인지는 모른다. 일부는 전해 들은 이야기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많은 것들이 애매하고 질문은 남아 있다.” 주의 깊게 생각할 단어는 ‘애매함’이다. 그건 또한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급진적으로 해답을 부정할 때, 관객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나설 것”(<씨네21> 760호)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평들도 그 점을 미덕으로 꼽는다. 알려진 대로 스릴러의 외투를 빌리고 있지만, 누가 사건의 범인인지에 대한 답을 밝히지 않는 설정에 대해 충분히 납득한다는 견해들이다. 낯설지 않다. 하네케는 자신의 서사 안에서 ‘누가 그랬는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그것을 회피하거나 중시하지 않아야 된다는 일종의 원칙이 있는 감독이다. 그는 그것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영화를 만들 때, 감독으로서의 윤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전작인 <히든>에서도 부르주아 중산층 가정을 공포로 균열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도대체 누가 보냈는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네케 역시 그것이 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정말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가? 물론 그의 의도가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의 장르적 쾌감에 대한 거부이고, 관객 스스로의 사유를 위한 선택이라면 어느 정도는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히든>에 대한 우호적인 평들, 특히 최근 <하얀 리본>에 대한 한결같은 극찬이 하네케의 위와 같은 의도를 거리낌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할 때 어떤 불편함이 있다.
물론 <히든>과 <하얀 리본>은 다른 영화다. 나는 <히든>이 평론가 허문영의 지적처럼 하네케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누가’ 악몽의 비디오테이프를 부르주아 가정에 보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씨네21> 547호). 그 질문을 영화를 지탱하는 텅 빈 질문으로 여길 때, 달리 말해, 그 질문의 강력함에 시종일관 몸서리치면서도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을 애초 불가능성 안에 가둬버릴 때, 여기에는 결국 체념만 남게 된다.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시대에 그걸 믿는 영화는 오히려 위선에 가까워진다. <히든>의 태도를 지지할 수 없는 건 영화가 세상 안으로 질문을 안고 들어올 때, 답도 함께 안고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끝내 자신의 질문을 무화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니까 <히든>이 결과적으로 답을 구하는 과정을 하찮게 여겼다는 점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동체의 부도덕
<하얀 리본>의 경우는 좀 다른 맥락에 놓인다. 하네케의 말처럼 이 영화는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추리하는 데 목적을 둔 이야기가 아니며 이에 수긍할 만하다. 의사의 낙마사고가 일어나고, 소작농의 아내가 추락사하고, 남작의 아들과 산파의 장애를 가진 아들이 집단 폭행을 당했어도, 이 사건들의 배후를 파헤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우선 영화가 추리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영화 속 마을 사람들 또한 사건의 강도에 비해 사건의 배후를 탐문할 생각이 없으며(경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단지 의례적인 수사만 할 뿐이고, 영화 후반에 내레이션의 주체자인 마을의 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갑작스럽게 추궁하지만 그 과정이 치밀하지 못할뿐더러 끈질기지도 않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 역시 범인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말대로 “나쁜 일들은 때때로 아무런 이유 없이도 벌어진다. 우주는 인간의 규범을 비웃고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는 식으로 설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얀 리본>은 사건의 원인이 도처에 꽉 차 있지만, 정작 범인은 없는 상황과 마주하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 원인은 비교적 명확하다. 공동체 내부의 거짓, 이기심, 폭력, 의심, 기만, 억압, 분노 혹은 계급적 적대 등이 하얀 리본이 상징하는 순결함 속에서 은폐되고 통합된다. 사건의 결과는 있지만 범인을 찾을 수 없는 영화는 많이 봤어도, 추정할 수 있는 원인들과 끔찍한 결과는 목격해도 그 범인은 없는, 아니, 분명 눈앞에 있는 존재들 중 하나지만, 아무도 그걸 찾으려고 하지 않는 상황은 흔하지 않다. 그 누구라도 위반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더이상 존속할 수 없을 만큼 원인들로 팽창한 공동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반을 저지른 자를 모른 체하며 유지되는 공동체. 이것이 공동체의 악순환이다. 하네케가 그런 공동체의 악순환을 보여주면서 자신 역시 범인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물론 다른 데 있다. 그는 사건들이 특정 인물의 악행으로 소급되는 것을 경계한다. 억압적인 도덕에서 시작된 사건일지라도 이 사건을 개인의 도덕 안에만 한정짓는 건 그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가 이 영화를 “테러리즘의 기원, 악의 기원, 급진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굳이 첨언하는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당신에게 찬탄할 만큼 충격적으로 새로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 대해 그동안 무지했거나 모른 체한 것이다. 1913년의 이야기가 2010년의 현실에 겹쳐진다는 건 분명 끔찍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 혹은 결론에서 대단한 각성을 얻은 것처럼 대하는 반응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끝내 범인이 안개 속에 남게 하는 영화의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비평 중에서도 그게 왜 중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 또한 아직 보지 못했다. 한 가지 전제만은 공통되는데, 영화가 직접 제시하지는 않아도 마을 아이들을 사건의 배후로 암시하고 있고 그 안에서 다음 세대의 파국의 근원을 보고 있다는 견해다. 영화가 아이들의 범죄 행각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폭압적인 집에서는 기계처럼 복종하고 밖에서는 집단적으로 유령처럼 떠다니는, 그러면서 때때로 잔혹성을 분출하는(새를 죽이는 소녀!) 모습이 정황상 그런 전제를 제공한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 생각이 없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 하네케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 대한 영화다”와 같은 영화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 를 지지하는 일련의 반응들이 위의 전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하얀 리본>을 현실정치 안으로 불러들이고, 그런 차원에서 영화의 위치를 격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편의 영화로서 <하얀 리본>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구세대 괴물의 전이가 시작되는 1914년
이 영화가 어쨌든 스릴러의 구조 안에서 결국 누가 범인인지의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하는 것, 그러니까 결론을 열어두는 것이 앞서 말했듯 메시지를 전면화하려는 하네케의 의도 때문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스스로를 애매하다고 칭한 내레이션의 내용처럼 이 영화의 이야기도 모호한가? 달리 말해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하네케의 의도와는 별개로) 범인의 존재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던 이유는 각 장면 혹은 각 가족의 에피소드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뭔가 구멍이 난 채로 비밀을 감싸며 내러티브를 만들어간다는 인상이 적었기 때문이다. 각 장면들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덮여 있고 이들의 연결에서 어떤 긴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장면 내의 알레고리, 상징, 징후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지극히 명료하거나 때로는 관습적으로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하네케가 해답이 아닌 퍼즐에 능한 감독이라고 할 때, <하얀 리본>이 퍼즐이라면 그건 영화가 결과적으로 범인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럴 뿐이지, 각 장면의 미장센 혹은 각 가족의 에피소드의 함의가 모호함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들은 자체적으로 별다른 잉여없이 충분히 의미화되고 있고 정서적으로도 정돈된 느낌이다. 장면들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틈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설명을 통해 이어주는 내레이션의 회상도 어딘지 규정적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점에 양해를 구한다면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에서 <하얀 리본>의 영화적 흥미로움이 반감된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은 무시무시하게 낯설었고 해석을 기다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들에 대해 말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엄격한 목사 아버지를 둔 소년은 사소한 일로 체벌을 당한 뒤 팔에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 리본이 묶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다시 등장할 때 그는 높은 다리 위의 난간을 위태롭게 걷고 있다. 이 모습을 우연히 본 교사가 쫓아가 말리자 소년은 대답한다. “저를 죽일 기회를 주는 거예요.” 담담한 소년의 표정이 무섭다. 교사가 “누구에게?”라고 묻자 소년은 “신에게”라고 답한다. 왜 신이 그런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침묵하던 소년에게 교사가 아버지를 들먹이자, 소년은 갑자기 두려운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애원한다. 이 마을에 이미 두번의 사고가 지나간 뒤다. 아이는 정말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고자 한 것일까? 그 행위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내게 주어진 힌트는 이 영화의 배경이 1913년이라는 것, 영화도 나중에 말하듯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이 시골 공동체는 그 전면적인 변화를 앞두고 과거의 관습과 가치를 붙들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어쨌든 이 시기가 중요하다.
에릭 홉스봄은 “1914년 이전에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1914년 이전과 이후가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의 어떠한 연속성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화는 1914년 이전을 의미했고 1914년 이후에는 더이상 평화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며 1914년 이후를 파국의 시대라고 일컬었다. <하얀 리본>은 단지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대치가 아니라, 19세기 문명의 붕괴와 20세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 위태롭고 불균형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을 본다. 영화가 그 둘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구세대의 괴물이 어떻게 새로운 세대의 괴물로 전이되는지 말하고 있다는 건 다시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위치한 1913년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윤리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고수하는 이 공동체의 모습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신이 이미 죽은 시대를 증명하는 풍경처럼 보인다. 신에게 죽일 기회를 준다고 말하는 소년의 기이한 발상과 행동에서 나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제스처를 본다. 그 제스처에 이미 신의 무응답, 혹은 신의 무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무력함을 안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신의 죽음을 은폐하는 초자아로서의 아버지가 들어선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죄는 모른 채, 아니, 정확히 말해 죄가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이미 항상’ 죄인인 자들이고 구원의 신은 오래전 죽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찌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짓누르는 절망과 어쩔 수 없이 예견되는 미래의 불길한 무게를 잊기 어렵다.
부재하는 신이 마련한 슬픔
신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 산파의 아들이 폭행당한 채 나무에 묶여 있는 걸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그 옆에 아마도 범인이 남기고 간 듯한 쪽지가 있다. 그 쪽지의 글귀가 섬뜩하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 아이가 죄를 갚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아이가 누구의 죄를 대신 갚았다는 걸까? 그 죄는 어떤 죄일까? 누구도 묻지 않는 죄의 내용.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중요하고 사후적으로 죄를 만드는 희생제의가 중요하다. 쪽지를 쓴 자, 그러니까 범인이 마을의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이 잔혹한 희생제의는 출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둠으로 치달은 마을이 애타게 신을 부르는, 그러나 도리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마는 절박하고 기만적인 의례다. 비약을 무릅쓰고 만약 이 쪽지의 주인이 그야말로 신 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신은 그저 대가를 바라는 악의 신일 따름이다. 카메라가 두눈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의 얼굴을 비출 때, 우리가 기다리는 신은 그곳에 없다.
그런데 이 모든 폭력과 불신의 사건들이 지나간 뒤, 놀랍게도 순간의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기대도 될지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세계의 그 어떤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고 밀고 가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듯 보일 때, 마음이 움직인다. 목사의 어린 아들이 어느 날 다친 새를 들고 찾아와 키워도 되는지 허락을 받는다. 목사는 그 새에게 정을 주지 말고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뒤, 목사가 키우던 새장의 새가 그에게 반감을 가진 딸에게 살해된다. 며칠이 지나고 어린 아들은 자신이 소중히 돌보던 새를 새장 속에 넣어 가져온다. 왜 그걸 가져왔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이는 “죽은 새 대신이에요. 슬플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며 방을 나간다. 그때 더없이 완고했던 목사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정의 일렁임을 꾹 참고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증오도, 무관심도 아닌 슬픔이 밴 장면이다. 슬픔, 그것은 타자에 대한 공감이며 온건한 감정이지만 이 장면의 슬픔은 순간 영화를 얼어붙게 한다. 이 장면이 신에게 구할 수 없는 구원의 가능성을 인간에게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해석일 것이다. 다만 신이 죽은 시대의 길목에 막혀 괴물이 되어가는 이 가련한 아이들에게 루머와 의심, 죽음의 주체가 아니라 슬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잠시라도 마련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안도를 느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네케의 냉정한 날카로움에 경탄해도, 나는 거기서 별다른 울림을 받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내게 <하얀 리본>의 질문과 답은 여기, 이 슬픔의 자리에 있다.
2010. 7. 22 / 씨네21 / 영화평론가 남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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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비판이기엔 모자란 그 무엇 <하얀 리본>
무표정을 고집하면 역설적으로 주목되는 게 심리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메마른 표면은 오히려 불안한 내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의 가면 때문이다. 문학이론가 피터 브룩스에 따르면 이런 표면과 내면의 역설적 관계가 멜로드라마의 기제다. 발자크의 소설에서처럼 작가는 사물의 표면 기술에 자신의 풍부한 어휘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사실 발자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찬란한 언어로 장식된 표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숨어 있는 그 무엇을 브룩스는 ‘모럴 오컬트’(moral occult)라고 정의했다. 마치 밀교적인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입장의 맹목적 지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밖으로는 가치판단이 배제된 표피적인 사건을 풀어놓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윤리적 테마를 강조하는 게 발자크 소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은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다. 윤리적 테마를 숨기고, 그 테마를 내포하는 표면을 무심한 듯 그리고 있다. 마치 감독은 가치판단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듯 세상의 표면을 냉정하게 관찰한다. 사람들이 대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잡혀 있으며, 특별히 내세울 만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온갖 장치들이 난무하는 대중영화와 달리 <하얀 리본>의 카메라는 대단히 중립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관객에 따라서는 영화에 쉽게 몰두가 안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네케의 이런 영화적 태도는 <히든>(2005)을 통해 이미 드러났는데, <하얀 리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자주 비교되는 게 독일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이다. <하얀 리본>은 아예 잔더의 사진작품을 보듯 스크린을 흑백의 건조한 이미지로 그려놓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카메라의 대상이 되어, 무심한 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객관적 표현법으로 <하얀 리본>은 흔히 할리우드에서 컬러로 재현되는 역사극과 달리 거짓과 과장의 드라마가 아니라, 흑백으로 기록된 진정한 역사라고 말하는 듯하다. 허구의 재현이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진실만 냉정하게 기록한 듯한 수법도 아우구스트 잔더의 작업과 유사하다.
잔더는 인물사진을 말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독일 작가다. 1920년대 독일인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포부를 품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찍었다. 그 결과의 일부는 <우리 시대의 얼굴>(1929)에 남아 있다. 마치 린네가 식물을 분류하듯 그는 과학자의 자세로 독일인들을 분류하려 했다. 잔더의 카메라에는 모든 독일인들이 평등하게 잡혀 있다. 굳이 차별이 있다면 상층계급은 실내에, 하층계급은 실외에서 주로 촬영됐다는 정도다. 실내의 문명과 실외의 자연으로 두 계급이 나눠져 있는데, 사실 그들의 존재 조건이 그렇게 구분돼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식물도감처럼 찍힌 그의 사진들에서도 ‘평등’이라는 진보적인 시각이 감지된다. 사실 사람을 평등하게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무래도 애정이, 싫어하는 사람에겐 증오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과 롱숏이 있듯 말이다. 잔더는 자신의 사회주의 가치를 공공연히 드러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그의 활동을 방해한 데서 잔더의 정치적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잔더의 아들은 매우 적극적인 사회주의자였고, 결국 나치에 체포되고, 감옥에서 죽었는데, 아들의 운명이 아버지의 윤리적 태도와 상관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평등’한 인물사진
표면을 ‘중립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공포를 감수해야 하는 작업이고, 리얼리즘의 폭발성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만약 나치의 리더들과 거리의 부랑아가 평등하게 찍힌다면 이런 게 바로 리얼리즘의 토대이자 제도에 대한 도전이다. 잔더는 나치가 지지하는 독일인의 모습만 기록한 게 아니라, 숨기고 싶은 사실도 어김없이 남겼다. 그의 작업도 브룩스가 본다면 ‘멜로드마라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드라마다. 무표정한, 혹은 무관심한 표면 아래에 강력한 윤리적 테마를 숨겨놓은 까닭이다.
<하얀 리본>의 이야기는 단순한 듯 복잡하다. 1913년,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독일의 어느 시골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난다. 의사가 낙마하고, 농부의 아내가 추락사하며, 곡물창고에 불이 나고, 남작의 아들이, 그리고 과부의 장애아가 린치를 당한다. 도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하는가? 영화는 범인을 찾아가는 긴장된 스릴러가 된다. 그런데 <히든>에서처럼 <하얀 리본>에서도 범인은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이젠 하네케 드라마의 상투구가 된 열린 결말이 여기서도 이용됐고, 범인의 존재는 우리 각자의 상상 속에 남겨졌다. 영화가 복잡했다면 이런 모호한 종결과 뚜렷한 주인공이 없는 비관습적인 서사 형식이 가장 큰 이유일 터다.
자, 그러면 이제 영화의 윤리적 테마를 정리해보자. 영화가 공개된 뒤 나온 일반적인 평가대로 이 영화는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공동체의 성격이 특히 그렇다.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작의 농장에서 소작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남작과 그의 권력에 윤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성직자, 이들은 부와 윤리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종속된 대부분의 가난한 농부들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남자들은 마치 잔더의 사진집 제목처럼,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별로 없고, 대개 ‘남작’ ‘목사’ ‘아버지’ 같은 사회적 역할로 호명된다. 여성들과 아이들처럼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개인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종종 이름으로 불린다. 부와 윤리가 독점되며, 개인이 지워지고, 공동체가 강조된 이곳은 누가 봐도 파시즘의 은유이며, 현 지구촌의 패러디다.
<하얀 리본>은 구시대적 권력층의 파시즘은 결국 저항을 불러올 것이며, 세상은 테러가 횡행하는 디스토피아로 변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얀 리본>은 파시즘에 대한 준엄한 고발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파시즘을 닮아가는 현 지구촌의 운명에 대한 묵시록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죽은 주제 사라마구의 표현법을 빌리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한 날카로운 경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범인을 암시하는 태도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의심받는 대상은 어린아이들이다. 범죄의 책임을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묻는 태도는 호러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장치로, 주로 보수 세력이 이용하는 낡은 수법이다. 제도권에 포섭되지 않는 대상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학습되지 않았고, 심지어 제도의 명령을 위반하는 타자들로 배제돼 있다. 하네케는 짐짓 파시즘의 폐해를 기록하며 현 지구촌의 모순을 염려하는 듯하지만, 그런 파시즘을 잉태한 공동체의 구조에 대한 자기반성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공동체에 섞여들지 않는 사람들을 타자로 배제하는 데 더 역점을 두는 것 같다.
공동체의 타자로서의 아이들
영화의 후반부, 마치 피터 브뤼겔의 겨울 풍경화를 보듯 평화로운 마을의 표면이 스크린을 지극히 아름답게 장식한다. 아이들은 이런 아름다움과 평화를 깨는 악마의 무리처럼 떼지어 다닌다. 이 마을이 현 지구촌의 은유라고 할 때, 그러면 아이들의 은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영화의 염려대로 21세기도 파시즘이 잉태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면, 권력과 윤리를 독점한 파시즘에서 비켜나 있는 아이들은 누구일까? 단언컨대 서구의 제도권 내의 사람들은 결코 아닐 것이다. 파시즘의 잉태와 그 폐해에 대한 드라마였던 <하얀 리본>이 윤리적 테마에서 온전한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타자로서의 아이들에 대한 시각 때문이다. 파시즘과 테러리즘 가운데 영화는 뒤로 갈수록 테러리즘에 방점을 찍고 있다.
2010. 7.29 / 씨네21 / 영화평론가 한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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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탄생 다룬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
히틀러의 아이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영화 <하얀 리본>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밝아오는 상영관의 조명과 동시에 제 머릿속을 때린 질문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목의 시계바늘과 골반의 저릿함은 영화 시작 이후 2시간도 넘게 흘렀다는 걸 알리고 있었지만, 저를 포함한 관객들의 멍때림은 고요히 이어졌습니다. 서로 누구 나가는 사람 없나 두리번거렸죠.
상영관 안내요원이 나가시는 문은 이쪽이라고 외칩니다. 그제서야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상영 내내 쉽사리 감을 잡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저의 영화적 감상과 지식을 총동원해 봤지만, 그 순간에도 눈앞에 흘러가는 영화 관람을 동시에 병행하는 멀티태스킹은 불가능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분명 쉽지 않은 영화였구요, 저의 추천으로 이 영화를 함께 관람한 후배의 원망스런 눈초리가 매서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감독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캐물을 기세더군요. 제 옆에서 영화표값 본전 운운하며 불평하는 후배를 간신히 누그러뜨리고, 우린 함께 지나간 영화를 천천히 되짚어나갔습니다. 영화 <하얀 리본>의 상영은 끝났지만, 본격적인 감상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극장 문을 나선 순간부터 지나간 장면들이 또렷해지는 영화가 있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하얀 리본>이 그런 영화더군요. 1913년 독일의 어느 마을, 말을 타던 의사가 누군가 매어놓은 줄에 걸려 부상당하고, 농부의 아내가 썩은 마룻바닥 아래로 추락사하고, 한밤 중 헛간이 불에 타고, 장애를 가진 꼬마의 눈이 도려내지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영화는 당시 마을의 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사가 내레이션으로 과거 마을의 모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데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교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의 용의자로 마을 아이들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2시간 러닝 타임 내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해 오던 이 사건들의 범인을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나 버리죠. 때문에 대다수 관객들은 "그래서 도대체 범인이 누구라는거야?"하며 의뭉스런 불만을 안고서 상영관을 나섭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뿐더러, 영화 속 교사의 추리처럼 범인은 (제 생각엔) 사실상 마을 아이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가?
▲ 1913년 독일의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마을의 아이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강력한 심증이 남았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다. 영화의 열린 결말에 의해
"누가 범인인가?"라는 구태의연한 의심은 사라지고 "아이들은 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는 새로운 의문이 오롯이 솟아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913년 당시 독일(유럽)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점차 계급질서가 몰락하고 농업/수공업 경제구조를 탈피해가며 산업경제질서에 기반한 시민사회로 접어드는 과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과 같은 한적한 시골지방에는 여전히 중세 봉건적인 공동체 질서가 남아있었나 봅니다.
영화는 남작, 목사, 농민, 의사 각각 네 가정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담담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려나가는데요. 이 네 가정은 각각 귀족, 성직자, 농민(농노), 그리고 근대사회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지까지, 당시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던 근대 초기 유럽 시골의 공동체를 구성하던 네 계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근데 이 네 집안의 공통점이라면, 하나 같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겁니다. 기성세대인 부모와 신진세대인 자녀들간의 대립이 집집마다 끊이질 않죠. 농부의 집에서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며 계급적 차별을 비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뺨따귀를 날립니다. 의사라는 인간은 죽은 아내를 뒤로 하고 옆집 유모와 불륜이나 피우며 자신의 친딸을 성노리개 삼는 변태입니다. 목사의 집안에선 저녁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고 딸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매질하지를 않나, 사춘기가 되어 성기를 만진 아들의 손을 밤새도록 침대에 묶어두질 않나.
▲ 목사네 집안 풍경. 회초리로 얻어맞은 두 아이는 구석에 처박힌 채, 나머지 아이들은 강압적 제식을 강요당한다.
아버지 목사의 저 역겹게 권위적인 표정을 보라. 그리고나서 억눌린 아이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돌아보라.
따스하고 정다워야 할 가정에서조차 비정상적인 군기를 강요당한 아이들은 노이로제에 걸린다. 그 결과는?
여기서 아이들의 아버지인 목사는 하얀색 리본을 아이들의 팔에 완장처럼 채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얀 리본은 순결을 상징한다!"고 말이죠. 본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자신들의 윤리규범을 자식들에게 강제를 통해 전수하려는 부모의 세대간 폭력과 그것으로부터 자식들이 느낄법한 살인적인 억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나라면 저런 집안에서 살다가 숨이 막혀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나저나 저 애들은 도대체 저런 걸 보고 뭘 배울까'라는 걱정도 듭니다. 바로 저의 이 걱정이 우려하던 바, 즉 어른들의 악습을 무의식적으로 학습당한 아이들의 변질입니다.
그제서야,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범인이 정말 아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아이들의 탈선에서 단순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학습한 폭력과 악습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13년인 건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의사를 다치게 하고, 농부의 부인을 살해하고, 장애 아동을 실명시키는 것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영화 이후 20년이 흐른 뒤의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히틀러를 당선시키고 파시즘을 탄생시키며 2차 세계대전과 반인류적 죄악의 주체로 거듭나죠.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이 더욱 더 섬뜩하게 다가온 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 아버지인 목사에 의해 강제로 팔에 하얀 리본이 묶인 소년의 모습. 기성세대의 윤리관을 강압적으로
승계시키는 매개로써 작동하는 기독교 윤리,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주목하라.
이것은 20여년 후 이 소년 앞에 나타날 데자뷰의 한 장면이다. 분노와 슬픔으로 강요받은 십자가와 하얀 리본은
그 속에 폭력을 잉태하였고, 그것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각각 유겐트(卍)와 나치 완장으로 변모할 잠재가능성을 내포한다
인류 최악의 범죄자라 불리는 히틀러의 독재도 사실은 선출된 권력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잘 발달된 민주적 정치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왜 나치의 파시즘이 도래한 걸까요.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말하길, 당시 근대 산업사회의 기계문명과 자본주의 노동소외에 의해 억눌린 대중의 감정과 심리가 방출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 순간 충동적으로 분출되어 나온 기형적인 결과가 파시즘이라 분석한 바 있구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프 르봉은 저서 <군중심리>를 통해, 여러 각각의 개인들이 '군중(혹은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합체로 결속될 때 개개인의 저마다 고유한 정체성은 희석되어 사라지고 제3의 새로운 성질을 부여받은 균질한 집단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른바 유기체적 결합원리에 의한 파시즘의 탄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경우엔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성숙이나 자아실현이 박해당할 때 정신적 위기에 빠지고 결국 파시즘과 같은 자기부정의 권위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죠.
위의 여러 뛰어난 이론들이 파시즘의 태동의 배경과 작동원리를 하나 같이 대중, 집단 단위를 통해 거시적으로 분석했다면,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하얀 리본>은 파시즘을 개인 단위에서 통찰하고 규명한 탁월한 미시적 보고서입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탐구 대상이자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앞서 말한대로 아이들이 되는 거겠죠.
근데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이 영화에 없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음악이 없고 색깔이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가 굉장히 차가운데요. 특히 목사에게 아이들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맞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체벌이 이루어지는 방 안이 아니라 방의 바깥에서 방문만 비춘 채,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고통을 깨무는 아이들의 신음소리만 나직이 흘립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자극하는 미니멀리즘 기법이 인상적입니다. 정말 관객의 숨이 다 막힐 정도죠.
게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린 관객의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줄 음악도 없습니다. 그리고 관객의 긴장 좀 풀어준답시고 카메라는 화창한 태양이 내리쬐는 따스한 하늘을 비추지만, 흑백필름에서 태양빛은 그저 창백한 백색광일 뿐이죠. 영화 상영 도중 서늘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추스리는 방법은 상영관을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이더군요. 영화 <하얀 리본>은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다양한 자극과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풍요로운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 영화 <하얀 리본>의 마지막 장면. 1층에 자리잡은 어른들과 2층의 모여있는 아이들. 영화의 메시지를
한 컷에 농축해놓은 환상적인 구도가 아닐 수 없다. 기성세대와 아이들을 상하로 배치시킴으로써,
정형화된 세대 간 소통구조를 통해 폭력과 악습이 학습되고 계승되는 알고리즘을 도형적인 구도(앵글)로 담아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표현대로 '살떨리는 완벽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 섬뜩하도록 치밀한 마지막 장면 속
구도적 섬세함은 이 영화의 완벽함에 마지막 구두점을 찍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영화 <하얀 리본>은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것도 후자 축에서도 대단히 놀라운 작품인데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두고 치밀하게 고민한 흔적이 기교적 테크닉으로 영화 곳곳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화술의 영역에 있어서도 미장센과 영상미를 치밀하게 버무려낸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하게 됩니다(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괜히 흑백인 게 아닙니다).
그리고 2009년 칸 영화제는, 이 뛰어난 작품 앞에 범작들을 향한 자질구레한 헌사들을 대신하여 마스터피스에 바치는 황금종려상을 선사했습니다. 새로운 영화적 즐거움을 한가득 담고 있는 작품 <하얀 리본>은 그 정도 찬사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새로운 걸작입니다.
2010. 9. 6 / 김예환(enamigisto)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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