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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영화를 통해 돌아보는 재일조선인

by Wood-Stock 2010. 8. 31.

추성훈, 정대세, 아유미... 그리고 +α가 필요해

 

"(자신에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는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게 된 것도 바로 그 일, 사건이라고 해야 될까요. 운명의 갈림길 아닙니까, 그때가."

 

정대세는 단호했다. 그에게 100년 전 민족적 치욕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삶에 영향을 준 사건으로 먼저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 월드컵의 눈물로 다시 한번 각인된 정대세 선수는 재일조선인 3세다.

 

 

지난 27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방송된 <MBC 스페셜> '축구 그리고 3개의 조국' 편은 어쩌면 경술국치의 역사적 상흔을 삶의 일부로, 아니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재일조선인, 그 중에서도 3인의 축구선수를 조명했다.

 

그들에게는 3개의 조국이 존재한다. 자신의 조국인 북한 대표인 정대세,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대표선수가 된 이충성, 그리고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박강조가 그들이다.

 

"그런데 아직 왜 일본에 우리가 살고 일본 사람하고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내가 왜 나라는 존재는 정말 복잡하잖아요. 재일 조선인 속에서도 복잡하니까 그러니까 설명을 아직 잘 못하고 있어요."

 

잘 알려진 대로, 한국 국적의 정대세는 북한 국적의 어머니와 한국 국적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형과 누나도 모두 한국 국적이지만 자신만은 조국과 대표팀으로 북한을 선택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국적은 한국, 조국은 북한, 소속팀은 독일인 복잡미묘한 존재. 정대세 만큼 경술국치 이후 신산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해야 했던 재일 조선인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정대세와 같은 재일조선인의 삶을 폭넓게 살펴보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간 타자로, 소수로 인식해왔던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피해자로서의 우리 입장을 강변하는 것을 뛰어 넘어 좀 더 총체적인 인식을 가져다 줄 것이 때문이다. <MBC 스페셜>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정대세와 같은 젊은 재일조선인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자.

 

괴물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던 광폭한 시대 <피와 뼈>

 

1923년, 제주도 청년 김준평은 미래를 위해 혈혈단신 오사카에 정착한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영희와 강제 결혼한 그는 고생 끝에 어묵공장을 차리고, 혹독하기 그지없는 사채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김준평은 우리가 그리고픈 모범적인 이주민의 초상이 아니다. 그는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끊임없이 물욕과 성욕에 천착했던 '괴물'이었다.

 

                                                ▲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피와 뼈>는 재일교포 2세 작가 양석일이 쓴 동명의 역작을 역시 재일교포2세 감독이자, 1994년 북한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최양일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영화는 그 김준평이 일본에 정착하면서부터 북한으로 건너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삶과 가족사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와 일본 역사를 종횡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일본인들의 핍박,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들이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 그 속에서 가족을 꾸려야 하는 억척과 생활고까지. 김준평의 아들 마사오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당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고증하는 시대극이자 이해불가의 괴물을 아버지로 둔 아들의 관찰기이기도 하다. 기실 아버지를 모델로 소설을 썼다는 양석일 작가는 세계인들은 물론, 후세대들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1세대 재일조선인들의 그 고집스런 생명력을 특화시켜 괴물을 창조해냈다.

 

첩의 자식과 북한에 건너가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북한에 기증한 아버지는 마사오에 의하면 "평생 제멋대로 산 인물"이다. 어쩌면 그러한 고집이야 말로 2세, 3세들이 쓴 작품에 비춰지는 재일조선인 1세대의 모습을 대변하는 키워드가 아닐 런지. 정대세의 외할머니 김홍선 여사 또한 두 동생을 데리고 아이치 현에 정착, 공장노동자로 일했고, 일본인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다섯 자녀를 모두 자신이 설립에 동참했던 우리학교에 보내는 억척을 보여줬다고 한다.

 

재일조선인 청춘들의 현재와 과거 <박치기>와 <GO>

 

"남학생들은 싸우는 것이 일이라, 공부보다. 공부는 두 번째. 공부할 틈이 없지. 학교 지켜야 하고 여학생들 지켜줘야 하니까."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속 김명준 감독이 만난 재일조선인 1세 할머니의 회고 중 한 대목이다. 맞다. 일본 영화 속 재일조선인 청춘들은 매일 싸운다. 치마저고리 때문에 놀림 당하는 여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성과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리는 일본 아이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싸운다. 1929년 10월 31일, 여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됐다는 광주학생항일 운동을 떠올려보라. 

 

그건 <박치기> 속 1960년대 교토의 조선학교 남학생들이나 <GO>의 주인공인 2001년의 스키하라/이정호나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청춘들은 자신들을 오롯이 조선인이라 자각하고 있고, 현재의 청춘들은 '뉴 자이니치(在日)'로 불리며 여전히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박치기>는 <쉬리>를 배급하며 일본에서 '한류붐'을 주도했던 영화사 '시네콰논'의 이봉우 대표의 경험이 녹아있다. 1960년생인 그 또한 재일조선인 2세. 조선학교 학생들과 교토 재일조선인 커뮤니티를 10대 일본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그린 <박치기>는 1960년대의 시대적 풍경 속에 재일조선인들의 아픔과 그 시대 청춘들의 활력을 자연스레 녹여내 일본에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역시 재일조선인 2세이자 일본으로 귀화한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GO>는 재일조선인 3세 문제아와 일본인 여고생의 로맨스를 경유해 '뉴 자이니치'의 고민을 담아냈다. 민족도, 이데올로기도 아버지 세대의 유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청춘 스키하라. 그가 연애에 반대에 부딪치고, 또 이지메에 의해 친구를 잃게 되면서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는 과정을 청춘 영화 특유의 발랄함으로 승화시켰다.

 

이충성/리 타다나리는 <MBC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귀화가 그리 쉽지 만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다. 재일교포 4세인 그는 2004년 18살의 나이로 청소년국가대표팀 발탁되어 파주에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동료였던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자신을 '반쪽바리'라 부르며 차별하는 모습에서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인들보다도 한국인들이 제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해서 한국에 갔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과 반대의 말을 들었을 때 충격. 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구나. 한국 대표에서 떨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제 세계관이 전부 다 변해버린 큰 사건이 됐어요."

 

일본에서 정대세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조국과 정체성을 밝힌 채 살아가며 성공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버거운 일인 것이다. 이충성 또한 일본 대표팀 발탁 당시 일본 우익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렇게 여전히 법적으로나, 정서상으로나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특히나 민족에 대한 향수와 자긍심이 보다 남다른 조부모, 부모 세대와 달리 이미 3, 4세가 되어버린 젊은 재일조선인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서 과연 누가 달래주고, 또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경계도시>를 만든 홍형숙 감독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 <본명선언>를 통해 재일조선인임을 커밍아웃하는 것 자체까지 크나큰 고민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일본학교 속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아픔을 그려낸 바 있다.

 

지금의 정대세를 있게 해준 <우리학교>

 

"일본에서 민족성 지키는 거 하고 남조선에서 민족성을 지키는 건 질이 틀리죠. 남조선에서는 내면적인 것을 잘 지키고 있으면 되지만, 일본에서 사는 재일동포는 내면에서만 지키고 있어도 외면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점점 내면에서도 침투해가고 결국 일본사람하고 같이 되죠. 그러면 역시 안 되니까 치마저고리도 입어야 하고 우리말도 지켜야 하죠."

 

                                       ▲ 영화 <우리학교>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속 고급부 3학년(고3) 남학생의 말이다. 촬영 당시 스무살도 채 돼지 않았던 그는 보통의 한국 성인보다 민족성에 대해 체험에 의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학교는 그런 곳이다. 지역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근간으로 자리하는 동시에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민족'과 '정체성'을 심어주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3년 5개월간의 촬영기간을 거쳐 <우리학교>를 완성시킨 김명준 감독은 홋카이도 우리학교의 1년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고급부 3학년 학생들의 1년 생활에 집중한다. 한참 예민하고 또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충만해 있을 시기에 그 학생들은 '우리'를 먼저 돌아본다. <GO>의 스기하라처럼 우리학교를 뛰쳐나가는 자유로운 영혼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돋보이고 또 뭉클한 것은 우리학교의 내외적 구성원들에게 충만한 자율성과 인간애다.

 

흥미로운 것은 정대세가 각종 인터뷰에서 언급한 10대 시절의 경험이 <우리 학교> 속 아이들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이다. 우리학교 선생님 출신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우리학교 축구부를 거쳤다. 또 전통적인 평양으로의 수학여행에서 '조국'에 대해 깨닫고는 "북한 대표선수로 이 자리에 다시 서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우리학교>에는 "동포 사회와 동포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기 위해" 대항 축구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과 선생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족한 선수 층으로 인해 아깝게 패배한 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 학생들의 순수함에 '세뇌'나 '훈육'이란 단어를 들이댈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수학여행 당시 가장 좋았던 점에 대해 "당당하게 우리 저고리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라 답에서 그간 차별과 멸시로 얼룩졌던 사춘기 소년, 소년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거기서 그 비슷한 지점에 바로 '정대세의 눈물'이 자리하고 있을 터다.

 

부모 세대와의 화해와 이해 <디어 평양>, 그리고...

 

"어떤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어떤 남자라도 괜찮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미국놈과 일본놈은 안 된다."

 

                                                ▲ 영화 <디어 평양>의 한 장면

 

<디어 평양>을 만든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이다. <피와 뼈>의 김준평이 괴물이라면, <디어 평양>의 아버지는 이념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소시민적 재일조선인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제주 출신으로 15살에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뒤, '조국'으로 북한을 선택, 조총련 간부로 살아왔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을 신봉해왔던 이 고집스런 할아버지 또한 딸자식의 일을 위해 '한국 국적'을 허락할 만큼 자식세대와 소통을 나누고픈 나이로 접어들었다. 사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사는 그리 녹록치 않다. 조총련 간부로 평생을 바쳤던 부모님과 사춘기 시절이던 1971년 평양으로 가는 귀국선에 세 오빠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자본주의 제도와 문화의 세례를 받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성장했으나, 자신의 근본인 핏줄, 더 크게는 조국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어 평양>은 그런 아버지와 감독이 가족을 찾아 평양의 옥류관에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에서 한국 현대사와 재일조선인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했던 재일조선인의 현재를 가감 없이 묘사한다. 그리고 양영희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선화, 또 하나의 나>를 통해 북한에서 살고 있는 조카의 삶을 조명하며 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재일조선인과 북한 문제의 미래까지 조망하고 있다.

 

이러한 성찰적인 작품과는 별개로 적대적인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로 지속 중인 일본이나 심지어 한국에서의 조총련이나 재일조선인에 대한 시각에 획기적인 전환은 아직 없지 않나 싶다. 추성훈이나 정대세의 인기에도 언론은 물론이요, 대중들에게 근본적인 고민까지 안겨주지 못한 까닭이다.

 

"우린 열심히 하는데, 그리고 지고 속상해 하고 있는데 그렇게 쓰면 스포츠 선수에게 실례가 많죠."

 

정대세 선수가 지난 2008년 북한대표였던 안영학 선수에게 '이중스파이'란 호칭을 안겨줬던 보수언론에게 내뱉은 쓴 소리다. '민족'보다 '이념', '사람'보다 '국적'을 먼저 봤던 우리의 과거, 현재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에피소드가 아닐 런지. 어쩌면 그 쓴소리는 순수하게 바라봐야 할 '정대세의 눈물'마저도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잔존하는 한국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적이 다른 동포라는 무의식적 차별이 아닌 연대의 길로

 

"희망이라는 말을 우리도 우리가 주인공으로, 자신들의 해석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중략)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영화 <우리학교>의 한 장면 

 

인권운동가 서준식씨의 동생이자 현재 동경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인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는 저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재일조선인들을 다수자의 시선에서 '동포'라는 차별을 두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연대의 길을 모색하자는 뜻이리라.

 

이제 다수의 재일조선인들은 남한도, 북한도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일본에서의 삶을 영위하겠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지난 현대사에서 입증된 남북한의 '재일동포 귀국운동'의 피로감이나 경제력 차이, 그리고 삶의 터전 문제 등 복잡다단한 이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늦었더라도 이제는 우리 또한 소수자라는 인식을 먼저 버리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한 뼘씩 넓혀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특히나 현대사나 민족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엷어져가고 있는, 그래서 역으로 편견이 덜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제공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계기가 추성훈, 정대세, 아유미와 같은 예체능 스타들일지언정 말이다.

 

"그런데 그 국적은 진짜 과연 뭐일까요? 기호일 수도 있고 그냥 종이 한 조각에 나와 있는 두 글자뿐이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두 글자나 종이 한 조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충성 선수는 살면서 우리한테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 출신 스포츠 칼럼니스트 신무광씨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은 경술국치 100년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가 아닐까?

 

2010. 8.30 / Ohmynews / 하성태(woodyh)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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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기호로서만 존재하는 조선인’의 서글프고 꿋꿋한 존재증명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그 길목에서 영화보다 극적인 이야기들과 마주한다. <우리학교>의 시간은 2000년대지만, 거기에는 해방 직후부터 이어져온 ‘조선학교’의 굴곡진 역사가 여전히 부유하고 있다. 그리고 김명준 감독으로 하여금 그 역사와 인연을 맺게 해준 고 조은령 감독의 흔적이 살아 있다. 말하자면 <우리학교>는 지상을 떠나지 못한 그 두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애도하기 위해 시작된 영화다. 고 조은령 감독은 재일조선인을 다룬 극영화 <하나>를 준비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촬영감독이자 그녀의 남편인 김명준은 살아남은 자가 되어 아내의 미완성된 시선을 <하나를 위하여>로 채워넣었다. <하나를 위하여>를 완성한 뒤 2004년 말, 그는 다시 일본 홋카이도의 ‘우리학교’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아마도 자신의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카메라를 잡았을 것이다. 더이상 아내는 없지만, 아이들은 그 사이 훌쩍 자라 있었고, 그는 비로소 온전한 마음으로 조선학교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운다. 영화의 초반, ‘우리학교’의 주변부를 맴돌며 질문만 하던 카메라는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아이들의 행동에 반응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의 카메라가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면, 이제 아이들의 눈이 카메라 속으로 성큼 들어와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김명준 감독이 우리와 나누고 싶었던 것은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조선 국적을 버리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의 학교(학생들 중에는 한국 국적, 일본 국적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오랜 시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이들에게 교육 원조비를 지원해왔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들을 방치하고 외면해왔다. 김명준 감독이 내레이션을 통해 밝히듯,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은 “사라진 조선, 혹은 기호로서의 조선의 국민”에 불과하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서글픈 운명과 역사. 그러나 그들은 끈질기게 학교를 세우고 지켜왔고 그 안에서 조선말을 배우며 자신들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홋카이도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그걸 보여준다. 일본말을 쓰지 않으려고 일주일간 침묵을 지키기도 하고, 추위를 무릅쓰고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자신들만의 규칙과 의식을 만들어간다. 이들의 관계는 오랜 시간 눈물과 포옹을 나누며 어린아이들처럼 육체적으로 긴밀해지는 반면, 이들이 터득한 민족의식은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고 관념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그 간극이다. 물론 한 학생이 일본과 ‘남조선’에서 민족성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일본 운동선수들과 자신들의 사명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스스로 답할 때, 그 강한 논지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한 논지는 단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습득된 의식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오랜 상처와 슬픔이 마침내 발화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여 ‘조선인은 반드시 조선말을 쓰고 조선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남겨진 거의 유일한, 사투와 다름없는 선택을 두고 민족과 국가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떠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비판하기는 쉽지만, 이들이 서 있는 역사적 맥락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학교>의 아이들이 ‘가져본 적 없는’ 고향을 꿈꾸며 북한에서 유토피아를 보듯, 카메라 혹은 우리의 시선 역시 이들을 순수함 속에만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에는 분명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연민과 감동이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잃어버린,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체없는 향수에 불과하다면? ‘우리학교’, 그건 그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의 현실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학교’가 애틋한 이유는 그것이 가족적 연대감으로 이어진 공동체여서가 아니라, 학교 밖의 현실과 대비되며 그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일본사회로부터 울타리를 치고 있지만(아니, 울타리를 치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중요한 것은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라는 경계의 역사와 정치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 학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이 고별식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때, 보는 이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학교를 졸업한 이 아이들은 울타리를 떠나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김명준 감독이 말하듯, 북한과 일본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우리학교’의 울타리 내부도 더이상 평화롭지만은 않다.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던 날, 우익 시위대가 항구에 모여 아이들을 위협하는 장면은 고통스럽다. 우익단체들의 무시무시한 외침보다도 끔찍한 것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들의 텅 빈 표정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순수함보다도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보고만 있는 우리의 무기력한 태도이다.

 

2007. 3.28 / 씨네 21 / 남다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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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영화 ‘우리 학교’

 

상영된 지 2년이나 지난 영화 하나를 보면서 울었다. 경상도 사투리의 내레이터 목소리가 배경에 깔린 담담한 다큐멘터리일 뿐인데. 하기는 첫 배경음악이 나오면서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 중간 콧물을 훌쩍이다가, 마지막에 아이들이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졸업식 장면에서는 작정하고 눈물을 쏟아버렸다.

김명준이 각본을 쓰고 직접 찍은 <우리 학교>가 그 영화다. 일본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영화에 나오는 명칭을 그대로 옮겼다), 이른바 조총련 계열의 민족학교를 다룬 작품이다. 동포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나 도쿄에 비해 홋카이도 유일의 이 민족학교는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한반도 크기 3분의 2나 되는 홋카이도 전체 재일조선인 숫자가 6000여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등·하교가 불가능할 만큼 집이 멀리 있는 아이들은 초·중·고 12년 내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아이들에게 학교는 집이요, 가족이요,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은 자신의 학교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렇게 부른다. “우리 학교.”

이 명칭 속에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것이다. 조총련계 동포사회에서 민족학교가 차지하는 거대한 정서적·사회적 비중을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처음 알았다. 한반도와 일본 간 정세가 격화될 때마다, 대낮에 시퍼런 칼로 동포 여학생 치마저고리를 갈가리 찢는 사회가 일본이다.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우리 학교”는 아이와 선생님과 학부모를 하나로 묶는 뿌리요, 존재적 자존심의 근원인 것이다.

통일문제는 물론, 해방 이후 재일동포 사회에 대한 남한당국의 참담한 무관심(버릴 棄자와 백성 民자를 써서 기민정책이라 불린다)을 향해 만만찮은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무거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 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아이의 어눌한 고백이 강렬하다. 팀원 6명뿐인 희한한 여자 농구팀의 도전이 싱그럽다. 무엇보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더불어 울고 웃는 학교생활을 통해 선명한 자아의식을 구축해가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모습이다.

러닝타임 2시간이 넘는 영화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굳이 생각을 밝혀보라면, 2주일 동안 북한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만경봉호 난간에서 ‘우리 학교’ 고급부 3학년생들이 던진 목소리가 핵심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원산 부두에 배웅나온 ‘아바이’와 누나들을 향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렇게 외친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이것은 해방 이후 60년 동안, 구 식민지 종주국에 버려진 듯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60만 재일동포들의 한 맺힌 목소리다. 분단된 한반도를 향해 부르짖는 간절한 사모곡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내용을 좀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참는다. 집에서 관람하기 편하도록 DVD가 출시되어 있다. 아직 “우리 학교”를 방문하지 못한 분들께서는 직접 한 번 등교해보시기 바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마지막 장면에서 소리를 참으며 울어보신 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끝난 후 눈물자국 들킬까봐 관객들이 다 나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어본 사람. 당신이 둘 중 하나에 속하신다면, 틀림없이 이 영화를 보면서 0.001ℓ의 눈물쯤은 넉넉히 흘리실 것으로 확신한다.

2008.12.30 / 경향신문 / 김동규(동명대 언론광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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