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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I Love Live

20100430 - Gary Moore 내한공연

by Wood-Stock 2010. 4. 30.

게리 무어 첫 내한공연, 한국과 가장 친밀하고도 멀었던 전설과의 만남

 

[OSEN=최영균의 인사이더] 제프 벡 다음에 게리 무어라니. 2010년 봄은 록 팬들에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시간인 듯하다.

이번엔 게리 무어가 온다. 4월 30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처음이지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공연기획사의 과장된 홍보 카피가 아니다. 게리 무어는 많은 로커들이 ‘제2의 고향’으로 여길 만큼 록 공연의 천국인 일본에서의 공연도 이번에 21년 만에 겨우 가질 만큼 장거리 비행을 좀처럼 할 수 없는 특이한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게리 무어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친근한 록 기타리스트이지만 한국과는 가장 멀리 존재하는 역설적인 전설이었다. 솔로 명반들을 내놓던 그의 절정기 1980년대에도 이웃 일본에는 다녀갔지만 록 공연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고 록 음악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한국에서는 그를 보고 싶어했던 많은 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특히 게리 무어는 한국에서 본의 아니게 ‘국민 기타리스트’였다. 한국 국적 민항기를 소련 공군이 격추시켰던 사건을 다뤘던 노래 ‘Murders In The Skies’ 때문에 당시 한국인들에게 ‘게리 무어’는 단순한 록 기타리스트의 이름 그 이상이었다.

물론 게리 무어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이런 노래를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강대국의 군사 만행에 대한 분노가 동기가 된 것이지만 당시만 해도 약소국인 한국의 억울한 사연을 알아준 세계적인 유명인에게 한국인들은 애정을 쏟아 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게리 무어는 ‘Murders In The Skies’라는 노래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에서는 국민 기타리스트 대접을 받을 만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애절한 록 발라드 성향의 곡들을 특히 많이 발표했고 이 곡들은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록 기타리스트 중에 에릭 클랩튼 정도를 제외하면 게리 무어만큼 한국에서 히트곡이 많은 가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Parisienne Walkways’ ‘Empty Room’ ‘Spanish Guitar’ ‘The Loner’ 등 솔로 활동 때의 수많은 곡들이 한국 록 팬들은 물론 일반 음악팬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질 만큼 사랑을 받았다. 이는 ‘슬픔’의 음악인 블루스에 기반한 그의 록 음악들이 한국인들의 정서에 특히 잘 맞았기 때문이다.

블루스에 뿌리를 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특히 게리 무어가 한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블루스를 너무 무겁고 끈적이지 않게, 대중의 취향에서도 접근하기 쉽도록 록에 접목을 잘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게리 무어에 빠진 한국 록 팬들은 그가 솔로 활동을 하기 전에 활동했던 록그룹의 앨범에도 목이 말라 소위 ‘빽판’이라 부르는 해적판 음반을 찾아 세운상가를 헤맸다. 전설적인 하드록 그룹인 신 리지(Thin Lizzy)나 록에 재즈를 비롯한 여러 음악적 요소들을 가미해 프로그레시브 록에 가까운 음악을 구사했던 콜로세움 II(Colosseum II)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 게리 무어는 한국 록 팬들에게 록의 입문서 구실을 했다. 가장 대중적이었던 록 그룹 스콜피언스나 한국에서도 불멸의 사랑을 받았던 ‘Stairway To Heaven’의 레드 제플린, 그리고 당시 갑작스런 죽음으로 피지 못한 천재성을 그리워했던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가 속했던 오지 오스본 그룹 같은 록 그룹들과 함께 게리 무어를 들으면서 록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가장 사랑했으나 만남을 기약할 수 없었던 게리 무어에 대한 한국 팬들의 외사랑은 역설을 끝날 때가 왔다. 지난 달 한국 록 팬들을 절정의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 제프 벡 기타 소리의 여운이 채가시기도 전에 게리 무어의 처절하고 슬픈 핑거링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한국에서 록 팬인 사실이 슬펐던 시절은 이제 확실히 끝났나 보다.

 

/대중문화가이드 ck1@osen.co.kr

 

 

'슬픈 기타' 게리 무어, 천안함 용사들을 위하여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천안함 침몰로 인해)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다니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 이들을 위로하는 연주를 하고 싶다.”

30일 첫 내한공연을 펼치는 영국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58)는 19일 e-메일 인터뷰에서 “최근에 한국에 충격적인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며 “어떤 곡을 연주할 지 공연기획사와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북아일랜드 벨페스트 출신인 무어는 열 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 열세 살 때 독학으로 기타를 마스터했다. 1970년 영국 록밴드 ‘스키드 로’의 기타리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블루스를 지향하던 그는 그러나 밴드 생활을 하면서 음악이 하드록 쪽으로 기울게 되자 70년대 후반부터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비비 킹(85), 앨버트 콜린스(1932~1993)와 함께 작업한 앨범 ‘애프터 아워스’(After Hours·1992)와 라이브 앨범 ‘블루스 얼라이브’(1993), 잭 브루스(67)와 진저 베이커(71)가 참여한 ‘어라운드 더 넥스트 드림’(1993) 등을 통해 블루스의 절정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연주하는 사나이’라는 별명은 무어의 블루스 기조를 드러낸다. 무어는 “아주 멋진 별명인 것 같다. 고맙다”면서도 “내가 그 별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좀 그렇다”며 웃었다. 블루스 음악을 자신 만의 언어로 표현해달라고 하자 “블루스…, 그것은 인생의 해석”이라고 정의했다.

무어는 아일랜드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연주로 미국보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더 유명한 뮤지션이다. 특히, 1983년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건을 비판한 ‘머더 인 더 스카이스’로 한국 팬들에게 친근하다. “한국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당한 공격 행위에 그 당시 어떻게든 항의를 했어야 했다”며 “한국에 대해서는 이번 방문 후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무어는 비행기를 오래 타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는 특이 질환을 앓고 있다. 이에 따라 골수 팬이 많은 일본도 최근 20년 동안 방문한 적이 없다. 이번 한국 공연은 “항상 오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됐고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며 “혹시 다음에도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한국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하고 싶다”고 바랐다.

“이번 투어가 끝나면 곧바로 나의 새로운 록밴드와 연습에 들어간다”며 “우리는 만든 지 오래된 ‘아웃 인 더 필즈(Out In The Fields)’라는 곡과 새로 작곡한 곡들로 켈트 록을 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블루스만 한다. 어떤 곡들을 연주할 지 기다려 보길 바란다.”

무어의 대표곡으로는 ‘엠티 룸(Empty Room)’, ‘올웨이스 거너 러브 유(Always Gonna Love You)’,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 ‘파리지엔 워크웨이스(Parisenne Walkways)’ 등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연주하는 사나이 '게리무어'

 

70, 80년대에는 누구나 그의 기타 한 두 소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타리스트들이 가장 극찬하는 기타리스트, 대중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치는 사나이로 불리는 게리 무어다. 40년 동안 전세계 매체와 평단의 극찬을 얻고 있는 게리 무어가 30일 첫 번째 내한공연을 갖는다.

흔히 기타, 특히 일렉트릭 기타 하면 록을 떠올린다. 전자 장치로 증폭된 사운드와 헤드뱅잉으로 상징되는 하드로커들의 강한 무대가 남긴 인상 덕분이다. 하지만 기타가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장르가 있다. 블루스다. 블루스는 미국 흑인 음악.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만나 록이 생겨났으니 블루스와 일렉트릭 기타의 관계는 알고 보면 상당히 밀접하다.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에릭 클랩튼만 해도 록과 블루스를 아우른다.

블루스 기타계에는 몇몇 전설들이 존재한다. 멀리는 B.B 킹과 알버트 콜린스, 60, 70년대에는 에릭 클랩튼, 그리고 80,90년대는 게리 무어다. 게리 무어는 1983년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건을 비판한 ‘Murder In The Skies’ 발표 이후 특히 한국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의 대표곡인 ‘Still Got The Blues’는 지금도 한국인의 애청곡 중 하나다.

음악생활 40년만의 내한공연

 

하지만 게리 무어 역시 본격적인 음악은 록으로 시작했다. 1952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0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3년 뒤 독학으로 기타를 마스터했다. 직전의 비틀스가 그랬듯 그 역시 밴드의 꿈을 품고 더블린으로 떠나 18세인 1970년 스키드로우에서 밴드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갈수록 자신의 음악이 록보다는 블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스키드로우가 점차 하드록으로 기울자 밴드에 회의를 느끼고 짧은 밴드 이력을 마감한다. 그의 블루스 행보가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 그리고 20년의 정진 끝에 1990년 블루스 앨범인 ‘Still Got The Blues’로 대박을 내면서 블루스 기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비비 킹, 알버트 콜린스와 함께 한 ‘After Hours’ 라이브 앨범 ‘Blues Alive’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가 참여한 ‘Around The Next Dream’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그의 블루스 행보는 절정에 달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Back To The Blues’ ‘Power Of The Blues’ 그리고 재작년 ‘Bad For You Baby’에 이르기까지 블루스의 한길을 걷고 있다.

게리 무어는 블루스에 내재된 슬픔을 자신만의 색깔로 풀어내는데 일인자다.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테크니션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타에는 기본적으로 블루스의 근간인 ‘한’의 정서가 물씬하다. 고향을 떠나 고된 육체노동이 시달리던 흑인들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아일랜드 음악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서정성과 ‘한’의 정서가 그의 기타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기타 뿐 아니라 황량한 듯하면서도 애잔한 맛을 담고 있는 보컬 역시 기타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제프 백, 존 스코필드, 마이클 솅커, 심지어 속주의 달인인 잉위 맘스틴까지 최고의 테크닉을 자랑하는 기타리스트들이 한결같이 게리 무어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팬들이 보여준 열렬한 성원과 숱한 내한공연 설에도 불구하고 게리 무어가 음악생활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다. 비행기를 오래 타면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특이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 그래서 골수 팬이 많은 공연 대국 일본조차 최근 20년 동안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그만큼 드문 기회가 틀림없다. 장소는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이다.

 

[김지영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224호(10.04.27일자) 기사입니다]

 

 

'슬픈기타' 게리 무어, 엄숙한 광란의 역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당신의 얼굴을 본 지 많은 시간이 흘렀어. 당신이 차지했던 내 마음에는 빈 공간만 남아 있어(So many years since I’ve seen your face. Here in my heart there’s an empty space where you used to be)”

천안함 희생자들을 위해 연주하겠다던 영국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58)가 약속을 지켰다. 무어는 30일 밤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첫 내한공연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이 곡을 바친다”며 자신의 대표곡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연주하며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연주하는 사나이’라는 별명답게 무어의 기타는 애달프고 구슬프게 울었다. 걸걸한 목소리로 슬픔은 배가됐다. 4000여명의 청중은 숙연하게 연주와 노래를 경청했다.

천안함 희생자 영결식이 치러진 다음날 해외 기타리스트의 콘서트는 일종의 위령제가 됐다. 무어는 공연 전 e-메일 인터뷰에서 “(천안함 침몰로 인해)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다니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 이들을 위로하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무어는 1983년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건을 비판한 ‘머더 인 더 스카이스’로 한국 팬들에게 존재를 알린 바 있다.

무어가 천안함의 슬픔만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의 기타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반응했다. 무대 내내 기타와 희로애락을 공유했다. 감미로운 연주는 멜로 영화, 블루스는 에로 영화, 격정적이 되면 액션영화를 찍는 듯했다. 그 때마다 청중은 동시에 관객이 됐다.

무어는 ‘오 프리티 우먼(Oh Pretty Woman)’과 ‘배드 포 유 베이비(Bad For You Baby)’로 무대를 강렬하게 열어젖혔다. 이어 ‘다운 더 라인(Down The Line)’에서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한 핑거링을 선보이며 블루스의 진수를 뽐냈다.

‘해브 유 허드(Have You Heard)’와 ‘올 유어 러브(All Your Love)’, ‘아이 러브 유 모 댄 유일 에버 노(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 등이 울려퍼질 때 객석은 넋을 잃었다.

강력하면서도 블루스한 기타 사운드는 공연장을 진동시켰고 팬들은 전율했다. 기타에 심취, 입을 벌린 채 한껏 일그러진 표정에서는 뮤지션의 진면목이 확인됐다.

무어는 ‘스틸 갓 더 블루스’와 ‘워킹 바이 마이셀프(Walking By Myself)’를 들려준 뒤 본 공연을 마쳤다.

첫 번째 앙코르 ‘더 블루스 이스 올라이트(The Blues is Alright)’가 흘러나오자 모든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흥겨움에 몸을 떨었다. 두 번째 앙코르는 블루스 팬들에게는 전설 같은 곡 ‘파리지엔 워크웨이스(Parisenne Walkways)’였다. 환호작약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었다.

비행기를 오래 타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는 특이 질환을 앓고 있는 무어는 “내년에 다시 보자”고 말하며 무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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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무어 내한공연 ‘영혼마저 울린 기타연주’

30일 펜싱경기장서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 - ‘슬픈 기타’ 40년 내공 확인한 저력의 무대

 

7~80년대 팝음악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그의 연주 한 두 소절 정도는 알아야 했다.

관객들의 영혼마저 빼앗아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58)가 드디어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40년 가까이 한결 같은 연주로 전 세계 평단은 물론 제프 벡, 에릭 클랩튼 등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들의 찬사도 이끌어낸 그다.

30일 오후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그의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은 ‘오 프리티 우먼(Oh Pretty Woman)’이 연주되면서 그 화려한 서막을 알렸다.

비행기를 오래 타면 심장에 무리가 가는 특이질환 때문에 최근 20여 년간 아시아 무대에 서지 못한 게리 무어가 드디어 한국 무대에 선 것이다. 게리 무어의 연주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가 왜 트윈 핑거링의 일인자로 불리는지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공연 내내 관객들의 심장은 요동쳤고, 관객들은 게리 무어의 음악의 메아리 속에 하나가 됐다. 손가락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과 강렬한 블루스 음악은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황량하지만 연륜이 묻어나는 그의 보컬도 기타리스트로서의 명성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이날 공연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곡을 연주하겠다고 예고한 터라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공연 중반 “천안함 희생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이 곡을 바친다”며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날 영결식을 마치고 영면한 희생자들을 위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연주는 구슬펐다. 더불어 국가적 불행과 바쁜 일상에 지쳐 있는 팬들의 응어리마저 동시에 풀어헤쳤다.

또한, ‘해브 유 허드(Have You Heard)’와 ‘아이 러브 유 모 댄 유일 에버 노(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 등 그의 연주 하나하나엔 그의 음악에 대한 확신, 그리고 열정과 연륜이 뿌리 깊게 서려 있었다.

열띤 공연만큼이나 관객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특히 첫 번째 앙코르 ‘더 블루스 이스 올라이트’(The Blues is Alright)가 흘러나오자 팬들의 열기는 절정에 달했고,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

첫 번째 앙코르 연주가 끝나고도 관객들은 그를 놔주지 않았고 두 번째 앙코르 곡 ‘파리지엔 워크웨이스’(Parisenne Walkways)’를 관객들과 하나가 돼 합창하고 나서야 게리 무어는 무대를 떠날 수 있었다.

한편, 게리 무어는 아일랜드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이 한(恨)의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며 미국보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더 유명한 아티스트다.

1970년 밴드 스키드로우(Skid Row)에 들어가면서 밴드생활을 시작한 게리 무어는 하드록을 지향하던 밴드에 회의를 느껴 팀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990년대 본격적인 블루스 음악으로 팬들에게 다가선 그는 1992년 불멸의 블루스 명반 ‘Still Got The Blues’를 발표했으며, 이후 잭 블루스와 진저 베이커가 참여한 ‘Around The Next Dream’(1993)와 베스트 앨범인 ‘Ballads & Blues’로 전성기를 누렸다.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노장이 된 게리 무어는 지난 2008년에도 앨범 ‘Bad For You Baby’를 발매하는 등 40여 년 동안 한결 같은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데일리안 문화 = 이한철 기자] qur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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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무어, 세대와 함께 저물다

 

한 세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를 보낸 충격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무렵, 우리는 또 하나의 대형 뮤지션을 떠나보내야 한다. 하드 록/블루스 기타의 전설 게리 무어(Gary Moore)다. 58세.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았던 스페인의 한 호텔에서 급사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아직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오늘 새벽. 그러니까 한국 시각으로 2월 7일 세상이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트위터를 통해 게리 무어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때까지 믿을 만한 소식통의 관련 보도는 없어,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루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곧 BBC 방송의 공식기사가 발표되었고, 그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사람들은 조금씩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작년 4월 30일의 내한공연은 결과적으로 그와의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 된 셈이다. 필 라이넛(Phil Lynott)은 친구를 얻었지만, 세상은 가장 위대한 블루스 맨을 잃었다. 이건 자연의 법칙이다. 육신은 떠나갔지만, 이름은 회자되고 있으니 이문 남는 교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리 무어의 부고를 들은 나는,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나눴던 친구에 대한 모종의 예의다.

 

랜디 로즈(Randy Rhoads)와 함께 게리 무어는 한국에서 유독 사랑받는 록 기타리스트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공명하는 벤딩과 비브라토는 그의 팬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인정받는 테크닉이었으며, ‘Still Got The Blues’, ‘Empty Rooms’, ‘One Day’, ‘The Loner’, ‘Parisienne Walkways’는 라디오와 음악카페를 지배했던 레퍼토리였다. 특유의 서정과 하드 록의 힘찬 에너지를 포괄한 그의 음악세계는 미국 블루스 뮤지션의 그것과는 분명 차별되는 무엇이었다. 만약 아우라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그에겐 그 비슷한 것이 진짜로 있었다. 무대에 선 그의 표정은 언제나 슬프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가 있다면, 그것이 아니었다고는 차마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누군가와 작별하면 관례적으로 행하는 일을 할 차례다. 1952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1970년 블루스 록 그룹 스키드 로우(Skid Row)의 기타리스트로 음악계의 문을 두드렸고, 이후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록 그룹 씬 리지(Thin Lizzy)에 가입해 [Black Rose]라는 하드 록의 마스터피스를 터뜨리며 극찬을 받는다. 화려했던 솔로시절에 대해 부연하려는 것은 바보짓에 가깝다. 1979년 실질적인 솔로 1집 [Back on The Streets](1973년의 [Grinding Stone]은 게리 무어 밴드(Gary Moore Band)의 이름으로 출시됨)를 발사하며 홀로서기한 이후, 1990년대의 어느 즈음까지 그는 정상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특히 이언 페이스(Ian Paice, 드럼), 닐 머레이(Neil Murray, 베이스) 등 최고의 연주인들과 함께 만든 [Corridors Of Power], [Victims Of The Future]는 하드 록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할 마일스톤으로 남아있다. 1990년대 블루스로 전향하면서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1990년작 [Still Got The Blues]는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한 게리 무어의 흔적이 되었다. 기량이 조금씩 정점에서 내려오던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는 일련의 ‘블루스 연작’들을 공개하며 지치지 않는 열정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필생의 작업인 블루스의 방점은 채 완성되지 못한 형태로 그려지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그의 기타는 울지 않는다. 그의 연주는 화면 속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클릭, 소리와 함께 언제나 그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유튜브 따위가 모든 추억을 돌려줄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제 그의 노래도 뿌옇게 먼지 깔린 LP 판 대신, 클릭, 소리와 함께 재생될 것이다. 그것은 세대가 바뀌는 소리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물들듯이 언젠가는 그도 잊힐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만큼, 그가 그리운 순간은 없다.
 

 

Discography (정규 앨범)

 

Solo
Grinding Stone (1973)
Back on the Streets (1979)
G-Force (1980)
Gary Moore (1982)
Corridors of Power (1982)
Victims of the Future (1984)
Dirty Fingers (1984)
Run for Cover (1985)
Wild Frontier (1987)
After the War (1989)
Still Got the Blues (1990)
After Hours (1992)
Blues for Greeny (1995)
Dark Days in Paradise (1997)
A Different Beat (1999)
Back to the Blues (2001)
Power of the Blues (2004)
Old New Ballads Blues (2006)
Close As You Get (2007)
Bad for You Baby (2008)

 

Skid Row
[Skid] (1970)
[34 Hours] (1971)


Thin Lizzy
Night Life (1974)
Black Rose (1979)

 

Colosseum II
Strange New Flesh (1976)
Electric Savage (1977)
War Dance (1977)

 

Greg Lake
Greg Lake (1981)
Manoeuvres (1983)

 

BBM(Jack Bruce, Ginger Baker, Gary Moore)
Around the Next Dream (1994)

 

Scars
Scars (2002)

 

이경준 / 한겨레 100B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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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사랑하는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 아디오스!

 

[유니온프레스=권석정 인턴기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록 기타리스트는 누굴까?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제프 벡(Jeff Beck)?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 반 헤일런(Van Halen)? 슬래쉬(Slash)? 폴 길버트(Paul Gilbert)? 존 메이어(John Mayer)? 아니면 뮤즈(Muse)의 매튜 벨라미(Matthew Bellamy)?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각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한국의 기타리스트들이 가장 많이 카피하는 록 기타리스트는 누굴까? 아마도 게리 무어(Gary Moore)가 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오랜 세월 국내 무수한 기타 키드들에게 뛰어넘어야 할 산으로 자리했던 게리 무어. 활화산과 같은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가 오늘(7일) 오전 사망했다. 향년 58세. 록 기타리스트로서는 젊은 나이가 아니지만,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는 많은 나이도 아니다. 날이 저물고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게리 무어는 여전히 신세경과 탕웨이, 드라고나(아오이 소라)를 제치고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올라있다. 무시무시한 록 기타리스트가 한중일 삼국의 미녀들을 꺾은 셈이지만, 슬픔은 전혀 가시지 않는다. 맙소사! 게리 무어가 죽은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한 기타리스트

국내 기타리스트들이 유독 게리 무어의 연주에 다가서게 되는 이유는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 '원 데이(One Day)', '파리지엔 워크웨이스(Parisienne Walkways)'와 같이 듣자마자 귀에 바로 꽂히는 애절한 기타 멜로디 때문이다. 처음에는 익숙한 멜로디에 끌리게 되고 도입부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 카피를 시작하게 되지만, 십중팔구 그의 깊이 있는 벤딩과 비브라토 등의 테크닉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게리 무어의 기타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블루스와 테크니컬한 속주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그를 발견하게 되고 더욱더 그의 연주를 경애하게 된다. 게리 무어는 기타 초보들에게 기타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고, 웬만한 실력자들에게는 블루스의 마력을 일깨워주는 연주자다. 이처럼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로 인해 기타에 매진하고, 다양한 연주자로 뻗어나간다.

스키드 로우와 함께 한 16살 게리 무어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유년기부터 앨버트 킹(Albert King)과 같은 블루스 연주자들에게 경도됐다. 이후 그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존 메이올(John Mayall) 등에게 빠져들면서 블루스 록과 사이키델릭 음악에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취향을 실체화 시킨 것이 바로 아일랜드 전설의 3인조 스키드 로우(Skid Row)다.

많은 이들이 게리 무어의 스키드 로우를 꽃미남 보컬리스트 세바스찬 바흐(Sebastian Bach)가 재적했던 80년대 밴드 스키드 로우와 헷갈리곤 하는데 그 음악은 전혀 다르다. 게리 무어는 1969년 베이시스트 브랜든 브러쉬 실즈(Brendan Brush Shiels)가 이끌던 스키드 로우에 가입하게 되면서 자신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필 리놋(Phil Lynott)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필 리놋이 건강상의 문제로 밴드를 떠나게 되고 3인조로 재편된 스키드 로우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어리언스(Experience), 크림(Cream)과 즉흥성이 강한 블루스 록을 펼쳐냈다. 이 당시 발표한 앨범 <스키드(Skid)>에서 잘 드러나듯이, 게리 무어는 선배들의 유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교하고 테크니컬한 연주를 구사했다.

이후 스키드 로우는 플릿우드 맥(Fleetwood Mac)의 오프닝 밴드로 서게 되고 여기서 게리 무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한 기타리스트 피터 그린(Peter Green)과 조우하게 된다. 이 때 게리 무어는 피터 그린과 밤새 잼세션을 하며 우정을 다졌다. 훗날 게리 무어는 피터 그린에게 헌정하는 앨범 <블루스 포 그리니(Blues For Greeny)>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5년에 작업한 이 앨범에서 게리 무어는 피터 그린의 레스 폴을 연주했다. 당시 게리 무어는 자신이 피터 그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했을까?

필 리놋과의 재회

피터 그린의 조언으로 스키드 로우를 나와 1973년 솔로 데뷔작 <그라인딩 스톤(Grinding Stone)>을 발표한 게리 무어는 이듬해 필 리놋이 이끌던 씬 리지(Thin Lizzy)에 투어멤버로 가입한다. 게리 무어는 당시 씬 리지에 정식 멤버가 아니었음에도 투어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씬 리지와 함께 즐겨 연주하던 아일랜드 민요 '위스키 인 더 자(Whiskey In The Jar)'는 게리 무어의 단골 레퍼토리로 남게 된다.

이후 게리 무어는 1978년에 다시 씬 리지의 투어 멤버로 참여하게 된다. 계속해서 게리 무어와 우정을 이어나간 필 리놋은 게리 무어의 1979년도 앨범 <벡 온 더 스트릿츠(Back on The Streets)>에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필 리놋이 만들어준 게리 무어의 대표곡 ‘파리지앤 워크웨이스’가 담겨있다. 같은 해 게리 무어는 씬 리지의 대표작인 <블랙 로즈(Black Rose)>의 작업에 참여했고 이 앨범이 명반으로 거듭나는데 일조했다.

필 리놋이 1986년 36살의 나이로 요절한 이후 게리 무어는 수많은 무대에서 옛 친구 필 리놋을 추억하며 '파리지앤 워크웨이스'를 연주했다. 지금쯤 게리 무어는 저세상에서 필 리놋을 만나 이곡을 연주하고 있을까?


 

ⓒ <Wild Frontier> ⓒ <Together At Last> ⓒ <Back To The Blues>

 


블루스로의 귀환

게리 무어는 솔로와 씬 리지를 오가는 사이 재즈 록 성향을 지녔던 콜로세움(Colosseum II)에서 활동하는 한편, 그렉 레이크(Greg Lake), 코지 파웰(Cozy Powell), 잭 부르스(Jack Bruce),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등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조들과 협연을 하며 음악의 반경을 넓혀갔다. 특히 콜로세움의 경우 당시 칙 코리아(Chick Corea)가 이끌던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나 영국 캔터베리 신(Canterbury Scene)과 같이 즉흥성과 변박이 강조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게리 무어가 이처럼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도달한 음악은 다름 아닌 블루스였다.

게리 무어는 1990년 앨범 <스틸 갓 더 블루스> 이후 블루스에 천착했다. 이 앨범에는 국내에서 게리 무어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노래 '스틸 갓 더 블루스'가 수록돼 있다. 이후 게리 무어는 피터 그린에게 헌정한 <블루스 포 그리니>, <백 투 더 블루스(Back To The Blues)>, <파워 오브 더 블루스(Power Of The Blues)> 등을 통해 록과 블루스가 골고루 섞인 특유의 음악을 추구해나갔다.

그가 블루스의 전설들인 비비 킹(B. B. King), 앨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와 남긴 세션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게리 무어의 록 블루스와 비비 킹의 정통 블루스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는 '신스 아이브 멧 유 베이비(Since I've Met You Baby)', 앨버트 콜린스와 뜨거운 에너지를 주고받은'‘콜드 콜드 필링(Cold Cold Feeling)', '투 타이어드(Too Tired)' 등은 후대에도 오랫동안 귀감이 될 만한 연주다.

게리 무어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1984년 앨범 <빅팀스 오브 더 퓨쳐(Victims of the Future)>에 소련의 칼(KAL)기 격추사건을 다룬 ‘머더 인더 스카이스(Murder in the Skies)’를 수록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 첫 내한공연에서는 천안함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스틸 갓 더 블루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게리 무어는 떠났지만 그의 기타 연주는 우리 가슴 속에 진하게 남아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게리 무어의 연주를 듣고 기타를 잡게 될까? 저세상에서 부디 편히 잠들길. 아디오스! 게리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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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천재 게리 무어와 세계 3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TV리포트 유진모 편집국장] 일렉트릭 기타는 블루스의 발전과 록의 완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악기다. 그래서 록계에서는 ‘6현의 오케스트라’라며 기타리스트의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록음악의 전성기이던 1970년대는 3대 기타리스트로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그리고 제프 벡을 손꼽았다. 지미 헨드릭스는 왼손을 사용하면서도 왼손잡이용이 아닌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연주하는 특이한 주법으로 돋보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의 새로운 주법을 다양하게 고안해내 찬사를 받았는데 국내에서 김수철이 따라했던 이빨로 물어뜯는 주법도 그의 것. 특히 그는 스피커 앞에서 연주하며 하울링을 오히려 연주법으로 승화시킨 피드백 주법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흑인답게 블루지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했지만 강한 비트와 록의 폭발력에 있어서도 백인들을 능가했으며 그를 정점으로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법이 시작됐고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초특급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26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요절했다.

그래서 그의 사후 그의 빈자리에는 지미 페이지가 이름을 올렸다.

 

지미 페이지는 영국 출신의 슈퍼급 하드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로 6현 네크와 12현 네크가 한몸에 붙은 트윈일렉트릭 기타 연주로 유명하다. 전설의 히트 넘버 ‘Stairway to heaven’의 아르페지오가 바로 이 트윈기타를 통해 나왔다.

 

모든 연주에 능하고 작곡실력도 출중하지만 무엇보다도 샤우트 창법의 1인자인 팀의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를 가장 잘 받쳐준 ‘레스 폴의 황태자’로 유명하다. 트윈기타도 깁슨에서 특별제작해줬을 정도로 그는 깁슨의 일대공신이다.

 

에릭 클랩튼은 ‘미스터 슬로우핸드’라는 별명처럼 블루스록 기타의 대가다. 잉베이 말름스틴 이후 토니 매칼파인, 그리고 티아고 델라 베라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속주 기타리스트들이 바이올린의 한계를 뛰어넘었지만 느림의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 에릭 클랩튼의 기타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블루스의 스피릿에 충실한 그는 때로는 읇조리며 때로는 울부짖으며 6현을 밀고 끄는데 특히 어린 아들의 죽음 이후 그의 기타는 더욱 비탄조로 치달으며 우는 기타의 대표적인 주법을 보여줬다.

 

제프 벡은 그의 괴짜다운 행동만큼이나 주법의 영역이 넓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일단 그의 바탕은 재즈다. ‘면도날 기타’라는 별명답게 자로 잰 듯한 정교한 주법과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소화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재즈 록 블루스 퓨전 펑키는 물론이고 중동 등 아시아 지역의 전통음악까지 접목한 그는 경쟁자들과의 연주력의 차이를 넘어서 왕성한 ‘식욕’만큼은 지존이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는 퀸의 브라이언 메이나 오지 오스본 시절의 랜디 로즈를 손꼽기도 하지만 음악이란 게 바로미터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어느 누가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최근 57세로 요절한 게리 무어(스펠링이 Gary Moore인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선 개리가 아니라 게리로 굳었다)도 실력파 기타리스트 명단에서 빠지면 서운할 인물.

 

1952년 4월 4일,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는 무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러 악기를 배우다가 행크 마빈의 기타 연주에 매료돼 6현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60년대말 만난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필 리뇻과 죽이 맞아 트리오 씬 리지를 결성하고 전성기를 연 그는 그후 자신의 독자적인 밴드와 씬 리지를 오가며 눈부신 활약을 벌였고 국내에도 불멸의 히트곡 ‘Parisienne Walkways’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의 기타는 고급스러운 옛날식 열차같다가도 때론 석탄을 때우는 화물차같이 포효한다. 정열적이나 슬픔이 근본이고 블루지하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끌려온 흑인의 설움과는 다른, 아일랜드의 역사를 담은 짙은 안개의 눈물에 휩싸여있다.

 

이제 자신만의 ‘Empty Room’으로 들어가 영면할 헤비메틀블루스 기타의 대가 게리 무어. 그의 울부짖는 기타 리프는 더 이상 현실의 귀로 들을 순 없겠지만 ‘Stairway to heaven'을 밟고 올라간 그가 앞서 간 영원한 음악적 동료 필 리뇻과 레드 제플린 출신의 ‘천둥 드러머’ 존 보냄과 만나 펼칠 천국의 협연은 환청으로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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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무어를 추억하며

~ 딴지일보 파토

 

Gary Moore (1952~2011)

 

 

1985년. 중학생이자 록 팬이었던 우원은 우연한 기회에 일렉기타를 장만하게 된다. 당시 한국, 특히 보수적인 부산의 분위기상 주변 친구들에게조차 미친 짓으로 여겨졌던 모험이었지만, 록 팬이자 학교에 신물을 내고 있던 내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쥔 우원은 코드도 모르는 채 이글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곡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들으면 엉망진창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대로 잘 치는 줄 알았고, 역시 우원이나 비슷한 수준의 귀를 갖고 있던 친구들도 그런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기타에 빠져 즐겁게 허우적대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우원은 게리 무어를 알게 되었다.

 

당시 게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헤비 록 연주자였다. 잉베이 맘스틴이 울나라에 제대로 알려지기 직전, 그는 과거 지미 페이지나 리치 블랙모어 등과는 차별화되는 헤비하고 직선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이른바 ‘속주’ 기타리스트였다. 아래 84년의 라이브 클립처럼 말이다(그 이전에는 퓨전 밴드에도 참여했었지만).

 

특히 1분 30초 경부터의 무반주 솔로를 보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지 알만 할 거다.

 

http://www.youtube.com/embed/c5ECaMU7csY

 

아직 70년대 록의 잔재가 완전히 걷히지 않았던 그 시절, 강력한 오른손 피킹과 시원시원한 톤을 무기로 한 그의 속주 연주는 변방의 우원 등은 물론 국제 기타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게리무어 속주의 특징은 테크닉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으면서도 빠른 연주의 분위기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특히 연조도 경력도 실력도 부족한 우리 어린 기타리스트들에게는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의 엄청난 피킹과 농밀한 표현력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이런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곡, ‘Dirty Fingers’다. 오디오 온리.

 

http://www.youtube.com/embed/upCI0Oq2Bng 

 

이 곡에서 보듯, 잉베이 등 네오 클래시컬 기타리스트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게리는 디스토션 기타를 사용한 클래식 스타일의 연주애 접근하기도 했었다. 이런 곡들이 당시 우리 기타 키즈들에게 끼친 임팩트는 대단한 것이었다.

 

게리에 빠진 우원은 그의 캐치 프레이즈라고 할 테크닉들을 카피하기 시작했고, 위의 ‘End of the World’ 같은 곡의 오프닝 솔로는 엉성하게나마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게리무어 연주법에 대한 글을 써서 당시 국내 록 키드들의 성서이던 잡지 ‘월갑팝송’에 보냈는데, 놀랍게도 이 글을 실어줬던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86년이었으니 우원의 매체 기고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지도…

 

그러나 얼마 후 잉베이와 토니 매컬파인, 비니 무어, 스티브 바이 등 초기교파 연주자들이 등장하면서 속주 지존으로 게리의 위세는 조금씩 빛이 바래 갔다. 허나 우리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강렬한 파워가, 그리고 속주 외에 이국적이면서도 블루지란 발라드의 풍부한 감성이 또한 게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게리의 곡은 위의 속주 연주들이라기 보다는 씬 리지(Thin Lizzy) 시절에 발표한 ‘Parisienne Walkways’ 였다. 이 곡은 유튜브에 신구의 여러 버전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당시 우리가 빽판으로 늘상 들었던 라이브 버전은 바로 아래의 것이었다.

 

이 버전의 특징은 다른 버전들과 달리 노래 파트가 없다는 것과, 연주가 매우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도입부에 게리의 또 다른 연주곡인 ‘Sunset’ 앞 부분이 전주곡처럼 붙어 있다는 것이다. 역시 오디오 온리.

 

http://www.youtube.com/embed/dMg015XIQ9E

 

이 곡은 파리의 산책길이라는 제목에서처럼 프랑스, 혹은 유럽 풍의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아름답고 애수에 차 있으면서도 감정 표현이 뛰어난, 록 기타의 명곡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기타 키즈들이 특히 흉내 내고자 했던 부분은 3분 18초 부분의 볼륨 주법, 그리고 3분 52초경부터 10초나 계속되는 엄청난 피드백 파트였다. 이 부분의 특징은 지저분해지기 쉬운 피드백의 사운드 특성에 반해 열라 깔끔하고도 감성적인 톤이 빚어져 나왔다는 점이다. 이 곡의 다른 버전들에서도 이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소리가 만들어진 적은 없다.

 

물론 우리들 중 누구도 이 톤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실력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섬세한 피드백 톤의 필수 요소라고 할 좋은 기타와 대음량의 고급 앰프 등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만원짜리 기타에 10만원짜리 앰프로 공연하던 시절이니.

 

암튼 그렇게, 게리는 어린 우리에게 속주와 파워, 감성(당시에는 ‘필링’이라고 부르던)을 고루 겸비한 기타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가 울나라를 포함,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90년 그가 블루스로 전향하고 난 후다. 많은 사람들이 ‘Still Got the Blues’를 들었고, 이 곡은 울나라에서 조차 카페와 레스토랑 배경 음악의 단골 메뉴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옛 게리의 팬이었던 우리는 대부분 그 지점에서 등을 돌렸다. 왜였을까.

 

일단은 당시 헤비 록의 인기가 식어가려던 시점에서 게리의 그런 전향이 찬물을 끼얹는 면이 없지 않았고, 그의 강렬한 연주를 사랑하던 우리는 이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Still Got the Blues’라는 이름까지 달고 나온 그의 음악이 그닥 블루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80년대의 헤비 록 팬들은 대부분 프로그레시브 록과 블루스의 팬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블루스는 비비 킹이나 로빈 트라워, 마이크 브룸필드, 제프 벡 같은 연주다. 한편 게리가 블루스라고 들고 나온 곡은 ‘난 아직 블루스를 갖고 있어’ 라는 제목과는 전혀 다른 팝록 기타 연주였다.

 

이 곡의 초반의 코드 진행은 Parisienne Walkways 나 거의 다를 것이 없고, 사실 멜로디 역시 그 곡을 다시 조합한 형태다. 물론 그런 이유로 곡 자체가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알만한 사람인 그가 대중적인 팝록 곡을 선보이면서 ‘블루스’란 이름을 내세웠다는 점과, 이 점을 포인트로 대대적인 마케팅을 했다는 점, 그리하여 울나라에서도 유명해질 정도로 대중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사실.

 

요컨대 블루스를 도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블루스를 빙자한 상업화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의 전향은 우원에게는 변절이었던 것이다.

 

섭섭했고, 우원은 그를 떠났다.

 

…그가 어제 죽었다.

 

시신은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던 호텔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측컨대 심장마비던가 약물, 알코올 등이 개입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58세. 중고등학교때는 까마득한 어른이었던 그는 사실 우원과 불과 십 몇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어려서 그토록 심각하게 느껴졌던 게리의 변절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사소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기타를 놓았거나 댄스뮤직 작곡가나 정치가로 변신한 것도 아니고, 과거에도 간간히 하던 스타일의 연주를 전면에 내세웠을 뿐이었다. 블루스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후 비비 킹 같은 전설적인 블루스 연주자들도 기꺼이 그와 무대에 섰다. 우원의 블루스에 대한 사랑과 안목은 비비 킹을 능가하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거다.

 

그럼 우원은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했던 걸까…?

 

게리는 소년시절 내 영웅이었다. 어려서, 젊어서 사랑하고 추앙했던 인물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나를 둘러싼 세상도 그렇게 변해가는 듯한 허무와 배신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도 게리의 변한 모습은 내가 붙잡지 못한 어린 시절 가치들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틸 갓 더 블루스를 듣기 싫어 내한공연에도 안 갈 정도로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으니.

 

하지만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났다. 어려서, 젊어서 사랑하고 추앙했던 인물의 ‘죽음’을 접하면 이젠 변하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 보다는 내 청춘이 끝났다는 것, 내 삶도 그만큼 사라져 버렸다는 서글픔에 빠지게 된다. 사라짐은 변함의 극단적인 모습이기에. 변하더라도 아직 존재하는 것에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그래서 이제, 변절에 대한 섭섭함은 그만 접어야 할 때인 것 같다.

 

같이 듣자. 스틸 갓더 블루스.

 

http://www.youtube.com/embed/J-0KRM_eROA

 

잘 가시오, 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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