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팝 사건,사고 60년(1945~2005) 2부 (1976~20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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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씨와 이용우씨가 194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변천사를 사회적 맥락과 함께 격주로 풀어씁니다. |
대형 스캔들 넘어 ‘쨍’ 하고 해떴네
(33) 태진아, 송대관, 이수만에 대한 기억
지금도 무병장수하고 있는 트로트의 ‘천왕’ 태진아와 송대관이 1970년대 중반 ‘제1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송대관에 대해서는 ‘해뜰 날’이라는 곡이 히트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태진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해뜰 날’ 같은 인기 정상의 히트곡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곡도 분명치는 않다.
그럼에도 태진아의 이름은 당시 언론의 보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1975년 1월 말께 그에 대한 기사가 일간신문의 문화면과 사회면에 오르내렸다는 사실만 알려 두겠다. 불행히도 이건 본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사건이기 때문에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태진아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이루)까지 연예인 2세로 활약하고 있지만, 1975년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가 재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송대관의 노랫말이 그에게는 정말 약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사생활을 들춰서 사법처리까지 불사하는 당시 공식 ‘문화’의 야만성이다. 이런 ‘문화’는 지금도 ‘공인’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다. 비유하자면 당시의 태진아에 대한 여론은 ‘그 사건’ 직후의 백지영이나 유승준에 대한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생활의 정치학’이 이처럼 미시적이고 일방적인 현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사에서 1975년이 하나의 획기를 이룬다면, 그건 ‘긴급조치 9호’(그해 5월13일)라는 정치적 사건이나 ‘대마초 파동’(그해 12월)이라는 문화적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 해에는 유난히도 ‘연예계 대형 스캔들’이 많았다.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지만 나종배와 배성이라는 가수가 1월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취입비 20만원, 피아르비 50만원이 소요된다”, “여자는 몸으로, 남자는 돈과 아부로 (로비를 한다)”라고 폭로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돈 상납’과 ‘성 상납’으로 비화된 이 사건은 4월23일 방송국 피디 7명이 구속되는 사태로 이어졌다(물론 피디들은 벌금형을 받고 풀려 나왔다).
연예계의 ‘스캔들’은 6월 ‘박동명 사건’이 발생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수사 과정에서 그가 배우, 탤런트, 가수 등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놀았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재벌 2세의 엽색 행각’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그 여파로 언론에는 ‘윤락 연예인’, ‘매춘 연예인’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이때 이미 완성되었고, 대마초 사건을 통해 확인사살을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1976년의 가요계는 어땠을까. ‘대마초 연예인’이 사라져서 무주공산이 된 가요계는 김빠진 맥주이자 팥 없는 찐빵이었다. 이 시기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건전한 메시지를 담은 송대관의 ‘해뜰 날’이 대박을 기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아마도 1977년 ‘문화방송 대학가요제’의 개최와 ‘산울림의 데뷔’라는 거대한 사건의 기억작용이 워낙 커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1976년이 송대관과 ‘해뜰 날’의 해였던 것만은 아니다. 그 해 말 문화방송의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이수만이었다. 솔로 가수로서는 ‘신인’이지만 그의 경력은 복잡하고도 화려했다. 최근 <콘서트 7080>에서 30년 만에 모습을 비춘 포크 듀엣 ‘4월과 5월’(백순진·김태풍)에서 초기에 김태풍을 대신했던 인물이 바로 이수만이었다(1971~2년). 그는 또한 ‘서울대 농대 그룹 사운드’ 샌드 페블스의 2대 멤버이자(1972년), 록 그룹 ‘들개들’의 베이스 주자로도 활동했다(1974년께).
음반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대마초 파동 이전에는 오리엔트 프로덕션에 가담하여 ‘모든 것 끝난 뒤’, ‘세월이 가면’, ‘파도’ 등을 녹음했고, 대마초 파동 이후에는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뒤 발표한 ‘행복’과 ‘한송이 꿈’이 히트곡이 되면서 마침내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방송인’으로서의 경력은 생략하더라도 그는 1975년의 광풍 속에서도 생존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류 세계에 가장 안정되게 자리를 잡은 존재였다. 이처럼 쑥대밭이 된 연예계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건 음악 생산자뿐만 아니라 음악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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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진공상태 채운 ‘트로트 고고’
(34)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와 트로트 고고의 등장
그래도 음악은 계속되어야 했다. 유신정권이 한국 팝에 발행한 부고장이나 다름없던 19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만 6년여 동안 가요계의 지형을 변화시켜온 청년음악의 주역 대부분이 싹쓸이된 후에도, 음반은 계속 나와야 했고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의 전파도 지속적으로 송출되어야 했다. 지난 회에 보았듯 1976년의 가요계는 ‘갑작스런 진공 상태 같았다’는 투의 회고가 주류를 이룬다. 사실일까.
그해 어느 방송국의 ‘10대 가수’로 선정된 이들은 송대관, 송창식, 박상규, 김훈, 금과 은, 정미조, 김상희, 조미미, 하춘화, 김인순이었다. 다른 방송국의 리스트도 별 다르지 않았다. ‘10대 가수’의 면면을 일별해 보면 우선 가요계에서 잔뼈 굵은 가수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송창식, 김훈, 김인순 등 대마초 파동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신곡이 아니라 ‘왜 불러’, ‘나를 두고 아리랑’, ‘여고졸업반’ 같이 이미 1975년에 히트한 곡들의 인기가 지속된 결과란 점이 이채롭다. 이는 기성 가수인 정미조(‘불꽃’)나 박상규(‘조약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기 차트가 수시로 변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히트곡의 인기가 오래 지속되는 편이었다고는 해도 상식적인 현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와 같이 1976년의 가요계는 ‘지난 겨울에 사라진’ 청년음악의 기수들의 공백이 커 보였다. 혹시 ‘콘텐츠’가 부족했던 것일까. ‘1976년 한 해 동안 연예협회에 새로 등록한 가수가 140여명,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곡이 8천여 곡을 상회했는데, 이는 예년의 두 배에 해당되는 숫자였다’는 요지의 기사를 보면 통념과 달리 오히려 그 수는 풍성했던 셈이다. 하지만 가요 음반 판매량은 하향평준화되어 가장 많이 팔린 송대관의 음반조차 판매고는 2만여 장에 불과했다는 게 기정사실이었다(<경향신문>, 1976년 12월 16일치). 공백을 메울 만한 신인 가수와 음반들은 쏟아져 나왔으나 저조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76년 말에 시작해 이듬해에 대박을 터뜨린 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각각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동잎’,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크게 히트시켰다. 이들 곡이 실린 음반은 10만 장을 넘나드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주름 가득했던 음반업계의 인상을 펴주었다. 그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모두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라는 것, 그리고 히트곡들은 트로트 선율과 그룹 사운드의 고고 리듬을 결합한 새로운 양식, 이른바 트로트 고고라는 데 있었다.
그 점에서 앞서 언급한 ‘10대 가수’ 중 김훈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다. 김훈은 1970년대 초부터 다운타운가에서 높은 인기를 모아온 그룹 사운드 ‘트리퍼스’의 프론트맨이었고(그룹 이름은 ‘10월 유신 식 창씨개명’으로 인해 1975년께 ‘나그네들’로 바뀌었다), 그가 부른 ‘나를 두고 아리랑’은 트로트 고고 유행의 상징적 전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훈,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선도한 뒤로 장계현, 조경수, 최병걸, 함중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밟아 성공을 거두었다. 정리해 미리 말하면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가 부르는 트로트 고고’는 1970년대 후반 가요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트로트 고고는 상업적 성공은 거두었지만 기존 한국 팝의 팬들, 그리고 진지한 청자들에게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로쿠뽕’이란 당대의 용어가 시사하듯 간단히 무시 혹은 비난을 가하면 그만일까. 좀더 면밀히 검토하고 얘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음에 계속하자.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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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전향, 최헌의 ‘오동잎’
(35) 최헌의 안타 행진: ‘트로트 고고’를 아시나요?
1970년대에 나온 음반들을 뒤적여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김민기가 ‘도비두’ 시절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음원(<첫번 크리스마스>, 1970년), 고 김대환이 조용필과 함께 비틀스의 곡을 연주한 음원(<겟 백>, 1972년), 정태춘이 만들고 이수만이 부른 음원(<한송이 꿈>, 1977년) 등. 마치 비밀스러운 일기장을 읽는 듯한 쾌락을 안겨주는 것들이다.
이번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 그건 ‘조동진이 만들고 최헌이 부른 음원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음반이 ‘최헌과 이연실의 합동 음반이다’라는 사실이다. 조동진의 곡은 ‘가로등 불빛 아래’, ‘해 떨어기 전에’, ‘들리지 않네’ 등 세 곡이나 실려 있고, 이장희의 곡 ‘바람’도 있다. 이 가운데 ‘가로등 불빛 아래’는 ‘투 코리언스’가 부른 음원도 있어서 재미가 더 하다. (‘투 코리언스’는 김도향이 이끌었던 남성 듀엣이었다. 요즘 그의 근황에 대해서는 ‘내 라이벌은 비’라는 타이틀로 소개한 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시길!).
이상의 사실에 대해 1979년 이후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 조동진의 전력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로 나선 건 1979년 이후의 일이니 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최헌에게 집중하자. 이 연재를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최헌이 ‘히 식스(He 6)’와 ‘검은 나비’ 등 인기 그룹 사운드에서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1973년이라면 ‘히 식스’에서 ‘검은 나비’로 이적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무렵부터 그룹에서 노래를 잘 하는 걸출한 보컬리스트가 있으면 그를 솔로 가수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던 셈이다. 이승철과 임재범과 김종서로 이어지는 전통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본격화된 것은 ‘1976년 이후’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정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1975년 이전처럼 음악 활동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마초 파동 이후 음반에 대한 사전 검열이 강화되고, 이와 더불어 음악을 연주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연주하고 녹음하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져 갔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음악을 정말 직업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듯 먹고 살기 위해 못 할 일은 별로 없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곡이 있었으니 ‘오동잎’이었다. 1975년 말에 음반으로 발표된 이 곡은 1976년 후반부터 기세를 몰아 가더니 1977년 초 5만장의 음반을 판매하면서 대마초 이후의 대박을 기록했다. 뽕짝풍의 멜로디와 고고풍의 리듬이 결합되어 당시 ‘뽕짝 고고’, ‘트로트 고고’라고 불린 이 ‘새로운’ 스타일의 주인공이 바로 최헌이었다. 소울과 사이키델릭을 연주하던 그룹 사운드 출신이 뽕짝을 부르는 일은 당혹스러운 것이었지만, 직업적 음악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때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헤비 메탈 밴드 출신으로 솔로 가수가 되어 발라드를 부르는 사람에게도 돌을 던져야 하리라.
‘전향’을 결행한 사람이 ‘가수 최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헌의 음반은 ‘안타 프로덕션’의 첫 작품이었는데, 안타 프로덕션은 ‘영 사운드’의 리더였다가 작곡가로 전업한 안치행이 대표를 맡고, 이태현과 김기표 등 ‘더 멘(The Men)’과 ‘검은나비’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이 한데 모여 차린 사업체였다. 작명이 좋았는지 안타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문자 그대로 ‘히트’ 행진을 계속했다. 최헌은 ‘오동잎’과 유사한 트로트 고고 스타일의 ‘앵두’와 ‘순아’, ‘가을비 우산속’, ‘구름 나그네’를 연이어 히트시켰고, 마침내 1978년 말 문화방송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 1973년 발매된 최헌의 앨범
아직까지도 솔이나 록으로 출발한 음악인이 트로트를 부른 일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건 마치 성실했던 남편의 ‘외도’에 대한 평가처럼 인색해 왔다. 그런데 이런 전향 혹은 외도가 최헌의 개별적 케이스에 끝나지 않고 조용필, 최병걸, 김훈, 조경수 등까지 포괄한다면 이건 개인의 도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질문 하나 더. 젊은 시절 작곡가와 가수로 만났던 조동진과 최헌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한 사람은 아티스트로, 다른 사람은 엔터테이너로 남았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아티스트가 더 불행해 보인다.
(20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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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가요계의 다니엘 헤니
(36) 윤수일과 함중아
1970년대 후반 이른바 트로트 고고 붐은 지난 회에 살펴본 최헌 외에도 여러 스타들을 낳았다. 그 가운데 윤수일과 함중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을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각각 ‘아파트’와 ‘내게도 사랑이’라는 빅 히트곡을 부른 가수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7080 히트곡’을 모르는 세대에겐 ‘그 시절 가요계의 다니엘 헤니와 데니스 오였다’는 비유도 가능할 듯하다. 백인 혼혈이란 이채로운 배경을 가진 대중스타였다는 뜻이다.
윤수일과 함중아는 혼혈 가수란 특징 외에도 같은 그룹 사운드 출신이란 이력도 공유하고 있었다. 부연하면 이들은 1970년대 초중반 펄벅재단의 주선으로 결성된 혼혈인 그룹 ‘골든 그레입스’에서 활동했다. 신중현이 ‘지도’하고 함중아·함정필 형제가 이끌던 ‘골든 그레입스’는 1972년 독집 <즐거운 고고 파티(신중현 사운드 3)>를 발표하고 ‘신중현과 골든 그레입스’라는 이름으로 방송과 고고 클럽 무대에 올라 환각적이면서 역동적인 사이키델릭 록 음악으로 적잖은 인기를 누린 바 있다.
함중아는 ‘골든 그레입스’의 후신으로 ‘양키스’를 만들어 1975년 데뷔작 <양키스 고고 크럽 초대>를 내놓았다. 함중아의 자작곡과 리메이크 곡(경음악)으로 구성된 이 음반은 신중현의 음악적 그림자란 점만 제외한다면 ‘고고 클럽 전성기의 사운드트랙’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초대’였다. 몇 차례 언급했듯이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계는 트로트 고고로 무게중심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트로트 선율과 고고 리듬의 결합을 일종의 혁신으로 평가하든, 변절로 평가하든 1970년대 후반 그룹 사운드 (출신) 음악인들 누구도 트로트 고고란 트렌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그로부터 불과 2~3년 전만 해도 환각적 록 에너지를 뿜어대던 함중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금하다면 그의 대표곡인 ‘내게도 사랑이’와 1976년 이전의 곡들을 비교해 들어보면 안다.
함중아보다 다소 늦게 ‘골든 그레입스’의 기타리스트로 음악계에 공식 입문한 윤수일은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물론 1980년대 전반기에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 차림으로 ‘아파트’, ‘제2의 고향’, ‘황홀한 고백’, ‘환상의 섬’으로 상종가를 치던 때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1976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해 1등상을 차지하지 않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안타 프로덕션에 뽑혀 이듬해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실린 데뷔 음반을 발표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1978년 3대 텔레비전 방송국의 주요 가수상을 받지 않았더라도 1980년대 빅 스타 지위가 가능했을까.
‘윤수일과 솜사탕’의 데뷔작을 재평가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트로트 고고 ‘사랑만은 않겠어요’(안치행 곡) 때문만은 아니다. ‘예상과 달리’, 나머지 수록곡들이 ‘장경수 작사, 함정필 작곡’의 그룹 내부 창작곡들이며 음악 스타일 역시 트로트 고고와는 거리가 먼 그룹 사운드다운 풋풋한 사운드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훗날 윤수일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 의지와는 별개로 기획실에서 장사가 되는 쪽으로만 분위기를 몰고 갔다.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트로트 풍의 노래들도 그때 나온 것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 여부는 각자 판단할 문제지만.
정리하면 ‘윤수일과 솜사탕’의 데뷔 음반은 ‘1할의 트로트 고고와 9할의 그룹 사운드’라고 볼 수 있다. 윤수일을 스타 가수로 견인한 ‘사랑만은 않겠어요’나, 히트하진 못했지만 수록곡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그룹 사운드 풍 창작곡들 중 어느 한쪽을 폄하하거나 과장할 이유는 없다. ‘그 시절’은 아직도 충분한 연구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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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선사시대 발자국 ‘돌아와요…’
(37) 슈퍼스타의 선사시대
조용필에 대해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무후무한 슈퍼스타’라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런데 ‘슈퍼스타 조용필 이전의 조용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또렷하지 않다. 일단 산수를 하면서 그 기억을 더듬어 보자.
2003년 8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가졌던 조용필의 공연은 ‘조용필 35주년 기념 콘서트-더 히스토리(The History)’였다. ‘35주년’이라면 그의 데뷔 연도는 2003-35=1968 이니까, 1968년이라는 이야기고, 숫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한국식 계산을 감안한다고 해도 1969년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민증 까는’ 관행이 허락된다면 조용필은 1950년생이고 그렇다면 1969년은 그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조용필 1집’이라고 알려진 음반은 1980년에서야 나왔다. 발라드곡 ‘창밖의 여자’, 댄스곡 ‘단발머리’, 트로트곡 ‘미워 미워 미워’가 골고루 들어 있는, 그래서 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3대 인기 장르’를 정의해 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 음반 말이다. 이때 이후 조용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지만,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조용필은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 위 공연에서도 1979년 이전 그가 연주하고 녹음했던 곡들은 레퍼토리에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즉, 이 시기는 조용필의 ‘히스토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1970년대는 조용필의 경력에서 ‘역사’가 아닌 ‘선사시대’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한 곡만은 예외였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작곡)다. 역사 이후의 곡들을 연주했던 2003년 공연에서도 이 곡은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곡의 역사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돌아와요 부산항’이 1976년에 발표되어 그해 겨울을 거쳐 1977년 봄까지 음악다방과 고고클럽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버전이 처음 실린 음반이 ‘조용필과 영 사운드’의 스플릿 앨범, 그러니까 엘피 1면을 절반씩 나누어 제작한 앨범이라는 사실도 그 당시에 나온 음반들을 구경해 본 사람은 아는 일일 것이다. 이 곡이 최헌의 ‘오동잎’,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과 더불어 ‘트로트 고고’의 흐름을 폭발시켰다는 음악사적 평가는 이제 지루한 감마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의 역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에 나온 조용필의 첫 독집 앨범(아세아, AALS-0002)의 뒷면 네 번째 트랙에 어쿠스틱 기타 두 대로만 편곡된 이 곡이 실려 있는 것이다. 편곡도 편곡이지만 가사도 조금 다르다. 한 예로 “목 메여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라고 알고 있는 1절 마지막 부분의 16마디의 가사는 ‘1972년 음반’에는 “목 메여 불러 봐도 말없는 그 사람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로 되어 있다. 이렇게 가사가 뒤바뀐 사연에는 70년대 중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고국 방문이 허용됐다는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중가요의 사회사’라는 주제로 한번 연구해 볼 만한 점이다.
» 조용필이 최초로 녹음을 한 음반의 뒷면.
그런데 이 곡의 역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12월에 발표된 한 음반에 김성술이라는 가수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녹음한 자료가 몇 년 전에 한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이때의 가사는 또 달라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라고 되어 있고 작사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설왕설래도 있다. (사족: 김성술 씨는 1971년 12월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때 유명을 달리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대형화재 사건이 참 많았다).
» 조용필의 첫 독집 앨범의 앞면. 독집 앨범에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되어 있다.
노래의 선사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오늘은 조용필의 선사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마쳐야 할 것 같다. 조용필은 위 음반이 나오기 1년 전 음반 데뷔를 한다. <뮤직칼 ‘사랑의 일기’: 변혁 작편곡 제1집>(오스카, OR-1001)이라는 음반의 뒷면에 ‘조영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자장가’ 등 세 곡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저 이름이 오타인지 당시의 예명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푸레이보이컵 쟁탈 가수왕”이라는 문구를 보건대 조용필이 분명하다. 이 문구는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얘기했던 ‘보컬그룹 경연대회(혹은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말한다. 이 대회에서 조용필이 노래 부를 때 드럼을 쳤던 사람은 ‘타악기의 거장’ 고(故) 김대환이었다고 한다. 아, 이 복잡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한 번 더 풀어보아야겠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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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탄생’ 의 서막, 김 트리오
(38) 김대환과 조용필
슈퍼스타 조용필의 무명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꼭 한 달 뒤면 타계 2주기를 맞는 고 김대환(1933~2004)이 주인공이다. 한편으로 김대환은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어 기네스북에 오르고 도올 김용옥도 찬탄한 세서미각(細書微刻)의 달인으로 기억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름은 노년에도 검은 가죽옷 차림에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다닌 기인 바이커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실제 그의 장례식에 일군의 바이커들이 조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조문객의 주축은 음악인들이었다. 김대환은 무엇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드러머이자 타악기 솔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미군 클럽의 하우스 밴드 출신의 무명 뮤지션 조용필을 1971년 중앙무대로 ‘픽업’한 것도 김대환이었다.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퀘션스’가 해산한 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나 ‘크림’ 같은 슈퍼 트리오를 구상하던 김대환은 ‘리드 미 온’을 호소력 있게 부르던 조용필과 그룹 ‘아이들’에서 강렬한 기타 연주를 뿜어대던 최이철을 영입하여 ‘김 트리오’를 결성했다(뒤에 ‘연안부두’를 부른 김 트리오와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그룹이다). 1970년대 말 인기 가수와 기타리스트로 각각 가요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는 조용필과 최이철이 한 그룹에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이들이 한쪽엔 기타, 다른 한쪽엔 베이스를 메고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는 후일담도 전설적이다.
» 1971년 열린 ‘선데이서울컵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할 당시 ‘김 트리오’의 모습. 왼쪽부터 최이철, 김대환, 조용필.
‘김 트리오’는 1971년 5월 제3회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했고 조용필은 가수왕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그룹 사운드 협회 회장이었던 김대환은 김 트리오의 순서 때 직접 무대에 올라 드럼을 연주함으로써 조용필의 가수왕상 수상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게 당시 현장의 논란이자 공공연한 후문이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조용필은 음반을 녹음하고 가요계에 데뷔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지난 회에 살펴본 바와 같다. 최이철은 이미 ‘아이들’ 시절 김대환의 막후 지원으로 리코딩 데뷔를 한 바 있었다.
그런데 ‘김 트리오’도 음반을 남겼을까. 1972년에 녹음한 연주 음반 <드럼! 드럼! 드럼! 앰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가 오늘날 고가의 희귀 음반으로 남아 있다. 비틀스, 호세 펠리치아노 등의 커버곡이 다수를 이루는 이 음반은 당시 ‘김 트리오’의 ‘연주 본색’의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기타리스트’ 조용필의 연주를 만끽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음원들이며, 이와 함께 김대환의 폭발적인 드럼 연주, 최이철 대신 들어온 이남이의 베이스 연주, 그리고 세션으로 참여한 강태환의 재지한 색소폰 연주를 한데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음반이기도 하다.
» ‘김 트리오’의 유일한 음반 사진
음반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 트리오’는 해산되었고, 조용필은 군입대 했고, 이남이는 최이철의 ‘영 에이스’에 합류했다. 조용필, 최이철, 이남이 등의 가요계 데뷔를 주선했던 김대환은 ‘김 트리오’를 끝으로 그룹 사운드 활동과 멀어졌고, 몇 년 뒤 강태환, 최선배(트럼펫)와 전설적인 프리 재즈 밴드 ‘강 트리오’를 결성해 다시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김대환은 단순한 드럼 연주를 떠나 손가락 마디마다 북채를 쥐고 독창적인 타악 연주를 들려주는 거장 솔리스트로 해외에서 먼저 각광받게 된다.
조용필은 그룹 ‘25시’의 보컬을 거쳐 자신의 그룹 ‘그림자’를 결성해 활동했다. 1976년 트로트 고고로 재편곡해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뒤늦게 빅 히트하며 서광을 맞이하는 듯했으나 대마초 흡연 혐의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아 여지없이 어두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78년 초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유흥장 출연 해제 조치로 겨우 ‘생업’에 나설 수 있게 된 그가 전면적인 음악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시해된 1979년 10.26 사태 이후였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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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에서 날리던 ‘트로트’ 꽃미남
(39) 최병걸과 조경수
최병걸도, 조경수도 이제는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조경수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 때문에 회자되고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니라 영화계의 스타로 자리잡은 조승우가 바로 조경수의 아들이다. 그건 그렇고 최병걸과 조경수가 스타 가수로 등극했던 시점은 1977~8년께다. 요즘의 화두인 ‘트로트 고고’와 연관된 시대다. 최병걸은 ‘진정 난 몰랐었네’로, 조경수는 ‘아니야’로 ‘그룹 사운드 출신이 트로트를 부른다’는 현상을 개별적 외도가 아니라 집단적 흐름으로 만들었던 주역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부끄러워 할 것도 없지만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경력이 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대중의 기억에 남겼다.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닐 텐데 특별히 이 두 사람을 한데 모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이유는? 그건 다름 아니라 이 두 명이 ‘정성조와 메신저스’라는 그룹에서 노래하고 연주한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병걸은 ‘리드 보컬’로 활동했고, 조경수는 베이스 주자이자 ‘세컨 보컬’로 활동했다. 정성조와 메신저스(그 전에는 정성조 콰르텟)는 197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몰려들던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로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날리던 존재였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증언이다. 이들의 인기의 비결은 기본적으로 음악 때문이었지만, 두 보컬리스트를 포함하여 멤버들이 유달리 미남이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들의 연주를 생생히 보여주는 음원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라이브 업소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간간이, 가수들의 음반과 영화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온전한 형태의 음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김민기의 음반(1971)과 양희은 2집(1972), 한대수 1집(1974) 같은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에서의 연주가 정성조 악단의 것이라곤 해도 그게 진면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 좀 주소’에서 붕붕 나르는 베이스의 연주가 조경수의 것이라는 사실은 마치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흥미롭지만….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연주를 가급적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음원 자료는 독집 앨범보다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어제 내린 비>(1978) 등이고, 몇몇 곡에서는 최병걸과 조경수의 보컬도 들을 수 있다. 정성조의 영화음악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웬걸? 여기에 실린 음악은 최병걸과 조경수의 ‘뽕짝 히트곡’과는 거리가 멀다. 이건 굳이 사운드트랙 음반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최병걸은 1971년부터 살롱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72년 안혜경과 함께 포크 혼성 듀엣인 찹스틱(뒤에 ‘늘 둘이’로 개명)을 결성하여 몇 개의 음원을 남긴 것이 있다. 1977년 정상급의 미녀 탤런트 정소녀(본명 정애정)과 함께 듀엣으로 자신의 자작곡인 ‘그 사람’이라는 곡을 부를 때만 해도 그가 트로트를 부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 최병걸과 정소녀의 듀엣 <그 사람>이 수록된 음반.
요는 최병걸은 ‘당대 최고의 팝 보컬리스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잊힌 인물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가 암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요절한 셈인데, 요절 가수 이야기가 나오면 김현식, 김광석, 유재하는 쉽게 떠올려도 최병걸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주관적 기억을 떠올려서 유감이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나온 최병걸이 ‘내가 이런 거나 불러야 되나’라는 표정으로 ‘난 진정 몰랐었네’를 부르던 장면이 기억난다. 최병걸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그 곡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고, 그러니 그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 ‘진정 난 모를’ 수밖에 없다.
조경수는? 조경수에 대한 기억은 조금은 다양하다. ‘아니야’와 ‘행복’ 외에도 디스코 댄스곡 ‘징기스칸’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곡을 부르던 무렵이 1979년께이니 그 무렵 나이트클럽의 댄스플로어에서의 유행도 ‘고고에서 디스코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나이트클럽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는 고고 클럽’이 아니라 ‘판 틀어주는 디스코텍’으로. 이 시기 스타 가수들의 운명도 유행의 변화처럼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 <징기스칸>이 수록된 조경수의 음반.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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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요제’ 로 단숨에 신인서 가수왕
(40) 1977년의 신데렐라 혜은이
1977년은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두 개의 가요제가 ‘테이프 커팅’을 치른 해이다. 특정 방송국에서 주최한 가요제가 시작되었음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들 가요제가 일회성 화제에 머물지 않고 가요계에 젊은 피를 공급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전파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이른바 70·80세대라면 ‘엠비시 대학가요제’가 그해 9월 처음 열렸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또 하나의 가요제는 무엇일까. ‘엠비시 대학가요제’보다 4개월 앞서 열린 ‘서울가요제’다. 이듬해부터 ‘서울국제가요제’로 변경된 뒤 10여 년간 이어지며 인상적인 무대를 여럿 남긴 가요제다. 특히 1979년 윤복희가 부른 ‘이츠 유(여러분)’가 그랑프리로 호명되자 윤항기·윤복희 남매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현재 30대 중반 이상의 연배라면 잊지 못할 장면일 것이다. 물론 기억 속 화면은 컬러가 아니라 흑백일 테고.
마찬가지로 1977년 열린 ‘제1회 서울가요제’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남긴 행사로 간주된다.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을 부를 때 작곡가인 10대 여고생(요절 가수 장덕!)이 악단을 지휘하던 모습은 1년 뒤 ‘제2회 엠비시 대학가요제’에서 20대 초반의 여대생(심수봉!)이 피아노를 치며 트로트 ‘그때 그 사람’을 부르던 모습만큼이나 이채로운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고 길옥윤 작사·작곡)의 그랑프리 수상과 앵콜 무대였다. 앳된 용모의 혜은이가 뛸 듯이 기뻐하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 내린 길옥윤도 혜은이와 스스럼없는 장면을 연출하던 모습 그리고 노래하는 혜은이 옆에서 길옥윤이 감미롭게 색소폰을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 혜은이(1977) <고운노래모음집> » 서울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난 뒤 혜은이와 길옥윤의 모습
‘제1회 서울가요제’ 당시 혜은이는 엄밀히 말해 신인은 아니었다. 이미 ‘당신은 모르실 거야’(길옥윤 작사·작곡)로 데뷔한 상태. 하지만 신인 티를 미처 벗지 못한 상태에서 참가한 ‘서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걸 기점으로 가요계의 정상 자리에 단숨에 등극했다. 패티 김과의 결별 이후 6년여만에 제대로 된 여가수 파트너를 맞이한 길옥윤 역시 패티 김과의 콤비 시절이 부럽지 않을 만큼 정상의 작곡가 지위를 탈환했다. 혜은이 길옥윤 콤비에게 1977년은 고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라운지로 직행하는 것과 비슷했다. ‘진짜 진짜 좋아해’ ‘뛰뛰빵빵’ ‘감수광’이 히트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결과 1977년의 신데렐라로 혜은이를 뽑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나아가 1977년은 혜은이의 해라고 불러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77 방송가요 대상’과 ‘77 엠비시 10대 가수 가수왕’을 거머쥐었고, 현해탄 건너 ‘야마하 세계가요제’에 참가하는 등 해외 국제가요제 ‘국가대표’ 가수군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이후에도 5년 연속으로 10대 가수에 선정되는 등 혜은이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훵키(funky)한 리듬의 ‘제3한강교’와 ‘새벽비’를 동반 히트시키며 디스코 열풍의 한 축을 이뤘던 1979년은 혜은이에게 있어 ‘어게인 1977’나 다름없었다. 이 곡들의 히트를 전후해 이은하의 ‘밤차’와 ‘아리송해’, 윤시내의 ‘공연히’와 ‘난 모르겠네’ 등 훵키한 리듬감과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는 춤을 곁들인 여가수의 노래가 유행한 사실은 뒤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혜은이는 길옥윤의 전 파트너 패티 김처럼 허스키한 음색에 성량을 뽐내는 팝 계열 대형 가수 스타일도 아니었고 이미자처럼 비감 어린 가창을 완벽할 정도로 제어하는 트로트 가수 스타일도 아니었다. 성량은 작았고 가창력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까만 눈망울과 깜찍한 인상만큼이나 맑고 단아한 목소리의 호소력은 그런 점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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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영화음악가, ‘겨울여자’ 의 정성조
(41) 영화음악의 산파, 재즈 록의 ‘메신저’
경아, 영자, 이화를 아시는지. 1970년대를 살았던 이들(특히 남자)이라면 그들을 연인처럼 추억하며 각각 안인숙, 염복순, 장미희라는 여배우들과 중첩시킬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병리를 표상하는 문제적 여성상이자 청년의 자화상이 오버랩된 1970년대 영화의 분신들이다. 그들이 등장하는 영화 중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은 29회에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겨울여자>(1977)를 살펴보자. 당시 유행한 것처럼 이 작품들도 문제적 연재소설을 영화화해 흥행했는데, 특히 58만 관객을 동원한 <겨울여자>의 기록이 <장군의 아들>(1990)까지 20년 이상 깨지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이런 초상들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이는 누구일까. 그 주인공 정성조를 지금 소개하려면 전직 한국방송 관현악단장, 혹은 현직 서울예대의 교수, 아니면 재즈 팬들에게는 재즈 색소폰 연주자라는 직함이 더 접근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시절 그는 대표적인 영화음악가였으며, 1970년대 초반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 등의 앨범 작업에서 색소폰, 플루트 연주자 및 편곡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관심은 재즈에 있었다. ‘고고클럽, 생음악살롱의 왕자’라 불린 ‘정성조와 메신저스’도 그러한 관심이 투영된 그룹이었다. 그(들)가 만든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등의 영화음악은, 산업적으로 적확히 간파된 사운드트랙 음반이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 현대적으로 일렉트릭한 사운드를 담은 것이었다.
» 재즈 록의 느낌이 나는 ‘겨울여자’ 이화의 초상 <겨울여자> 사운드트랙음반
음반 발매 직후 판금되기도 했던 <영자의 전성시대>에는 임희숙의 ‘너무 많아요’와 최병걸의 ‘이젠 가야지’가 있다면, 제목 그대로 겨울을 콘셉트로 한 음악들이 수록된 <겨울여자>에는 김세화의 ‘눈물로 쓴 편지’가 있다. 봉고나 무그, 색소폰이나 트럼펫이 일렉트릭 기타와 머무는 ‘메신저스’의 연주음악들과 더불어. 연상하기 어렵다면 음악팬들은 이 시절 유행하던 ‘시카고’나 ‘블러드 스웻 앤드 티어스’ 등의 음악을 생각하면 된다.
강근식(과 동방의 빛)이나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영화음악 음반이 중요한 이유는, 이전 시기처럼 한두 곡의 주제가가 다른 곡들 사이에 관련없이 끼워진 편집 형태가 아닌, 주제가 이외에 배경음악용 연주음악까지 실은 ‘본격적인’ 사운드트랙 음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현악단 오케스트레이션이 주도하던 이전 영화음악과 달리, 그룹(밴드)이 주도하는 일렉트릭한 모던 사운드의 영화음악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1970년대 말 ‘청년영화’로 분류되는 새로운 영화들의 음악을 통해 영화음악계의 비중은 젊은 대중음악인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계에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등이 있다면, 영화음악계에는 강근식과 동방의 빛, 정성조와 메신저스가 있던 셈이다.
한편 1970년대 후반 영화음악의 양상은 어땠을까. 어느 정도 장르별로 전문화되었다는 말로 일단 요약하기로 하자. 악단을 이끌며 작편곡가로 활약한 김희갑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주로 액션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수많은 영화음악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정민섭이나 최창권은 <로버트 태권 브이> 등 만화영화 음악의 대표자가 되었는데, 정민섭은 로큰롤, 트위스트 등 스타일의 음악, 혹은 심우섭 감독과 짝을 이루어 코믹영화의 음악을 맡기도 했던 인물. 그밖에 <별들의 고향>은 시리즈로 계속 발표되었는데 속편(하길종 감독, 1978)에서는 송창식이, 3편(이경태 감독, 1981)에서는 1편의 강근식이 다시 영화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정성조의 영화음악가로서의 행보는 유학 후에도 독보적이었다.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을 비롯, 특히 정수라의 ‘난 너에게’라는 인기곡과 대종상 음악상을 안겨준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 대표적. 또한 배창호 감독의 2기 영화들인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대표적인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이력을 이어갔다.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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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 “내 몸매가 어때서” 노래로 가요계 평정
(42) 아리송한 시대에 기적소리 울리며 나타난 이은하
» 가수 이은하와 이은하의 ‘밤차’로 편곡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한 ‘데블스’와 지인들.
하얀색 모자를 쓴 이가 편곡을 맡은 김명길
음악인과 활동 시대를 실제와 달리 바꿔 상상하면 어떨까. 예컨대 ‘서태지가 1960년대에 활동했다면’이라든가 ‘신중현과 김추자가 2000년대에 데뷔했다면’ 같은 가정 말이다. 동일한 맥락에 1970~80년대를 풍미한 톱 가수 이은하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즉 이은하가 1990년대에 가요계에 입문했다면 어떤 양상을 보여주었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기왕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김에 더 나가자면 옥주현이 이은하의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볍게’ 가정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뜬금없이 웬 옥주현이냐고 묻는다면,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댄스곡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며 동시대에 돋보이는 가창력을 자랑했고 초기에 몸매와 관련된 유쾌하지 않은 별명이 따라붙었다는 점에서 같이 짝 지울 수 있다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정색하고 반문할 팬들이 많을 테니 이후의 상상은 각자에 맡긴다.
이은하를 소개하며 ‘1970~80년대의 옥주현’이라고 비유한다면 20대 이하의 독자를 위한 배려 때문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은하가 1977년부터 1985년까지 한해도 빠뜨리지 않고 한 방송사의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방증이다. 이은하는 1973년 십대 중반의 나이에 ‘임마중’(김주명 작사, 김준규 작곡)으로 데뷔했다. 짧은 시기에 여러 종의 음반을 내놓은 그는 어린 나이라곤 믿기 힘든 음색과 솔풀한 가창으로 ‘제2의 정훈희’ 또는 ‘제2의 김추자’가 될 자질이 충분해 보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안개’나 ‘늦기 전에’ 만큼의 곡도 받지 못했고 ‘방송에 적합한’ 외모가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제대로 ‘얼굴 알리기’도 할 수 없었기 때문.
이은하가 스타덤에 오른 건 그로부터 5년 뒤였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태정 작사, 원희명 작곡)으로 주목받은 뒤 1978년 ‘밤차’(유승엽 작사 작곡), 1979년 ‘아리송해’(이은하 작사, 이승대 작곡), ‘봄비’(이희우 작사, 김희갑 작곡)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정상에 올랐다. 특히 빠른 템포의 훵키한 곡들인 ‘밤차’와 ‘아리송해’는 ‘제3한강교’ ‘새벽비’(혜은이)와 쌍벽을 이루며 디스코 시대의 여명을 밝혔다. 이은하가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머리 위로 ‘동서남북’을 찌르며 육감적으로 춤추던 모습은 1970년대 말 디스코 춤에 대한 ‘스냅사진’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질문. ‘밤차’와 ‘아리송해’는 감각적인 편곡 및 사운드로 갈무리되지 않았더라도 상업적 성공과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기억 속이나 노래방에서가 아니라 실제 음원을 다시 들어보면 이 곡들은 솔/훵크(soul/funk)에 정통한 인물이 뛰어나게 마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누굴까.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한 적 있는 솔 그룹 사운드 ‘데블스’의 김명길이다. 편곡과 기타 연주를 담당한 그는 혁신적인 짜임새와 관능적인 그루브로 곡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참고로 ‘아리송해’에는 또 다른 세션이 참여했는데, 뒤에서 코러스를 넣은 이들은 다름 아닌 ‘벗님들’이다. ‘짚시여인’ ‘사랑의 슬픔’의 그 벗님들? 맞다. 하지만 ‘아리송해’ 때는 3인조로 편성도 달랐고 음악 색채로 퍽 달랐다. 하긴 이때로부터 일이 년 전엔 벗님들이 통기타 듀엣이었다. 이 얘기를 풀어가자면 공간을 이동해야 할 것이다. 대학 캠퍼스로.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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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뻑가게 한 윤시내의 ‘불꽃 창법’
(43) 윤시내: 불같은 정열의 훵크 클레오파트라
‘나를 뻑가게 만든 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가수의 독특한 발성에 대한 기억을 솔솔 되살려 내곤 한다. 한 예로 김추자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이라면 ‘님은 먼 곳에’(1969)의 “님이 아니면 못 살 걸 그랬지”에서 ‘아’를 발음할 때 액센트를 팍팍 주는 김추자의 발음이 귀에 쏙 박혔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10대 남자애들이 20년 쯤 세월이 흐른 뒤에 보아를 회상하면 ‘마이 네임’의 코러스에 나오는 “(기다리는) 폰 콜(phone call)”을 “퐁커얼”로 듣고 ‘뻑이 갔다’며 회상할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걔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불쾌해 할 테니 여기서 줄이겠)다.
이 글의 주인공은 윤시내다. 윤시내는 1980년대 이후 ‘그대에게 벗어나고파’, ‘공부합시다’, ‘디제이에게’ 등의 연발로 히트시키면서 한때 ‘여자 조용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성과를 남긴 인물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윤시내의 노래에는 ‘충격적’인 면은 그리 없다. ‘없다’라고 말하면 가수 본인에게나 그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생각해 보니 ‘공부합시다’에서 “안돼 안돼”라고 외치는 부분은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윤시내가 1970년대에 불렀던 곡들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 1976년에 나온 사계절의 음반. 왼쪽부터 윤시내, 유현상, 신병하(왼쪽).
윤시내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78년의 ‘제 2회 서울국제가요제’다. 이 행사에 대해서는 지난번 혜은이의 데뷔를 소개할 때 말했으므로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단, “1977년 ‘서울국제가요제’의 신데렐라가 혜은이였다면, 1978년의 신데렐라는 윤시내였다”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윤시내는 혜은이처럼 그랑프리를 거머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저건 도대체 뭐야?”라는 반응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곡은 ‘공연히’다. 불행히도 다른 곡들에 비해 히트를 못해서 그 후로 많이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이 곡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이 곡을 들은 사람들은 그때의 벙 쪘던 기억을 분명히 되살릴 것이고, 특히나 “공연히 내가 먼저 말했나 봐”에서 ‘봐’의 발음을 듣고 뇌신경이 이상한 자극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그 자극이 꽤 오래 지속되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건 창자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어 공연장의 천장을 때리고 청자의 머리와 가슴에 꽃혀 내리는 소리였다. 비슷한 시기 발표된 ‘난 모르겠네’도 마찬가지다.
쇼킹했던 것은 윤시내의 목소리 뿐만은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 도무지 웃음이라곤 지을 것 같지 않은 표정, 그리고 양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감쌌다가 내리는 독특한 퍼포먼스는 거대한 의문부호를 그리는 것 같았고, ‘나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늘한 허스키 보이스가 뜨거운 정념의 창법과 결합된 그의 가창은, 인상비평 용어를 사용하면 샤우팅과 토치 싱잉(torch singing)이 뒤섞인 독특한 것이었다.
‘공연히’나 ‘난 모르겠네’에서 충격적인 것은 윤시내의 노래만은 아니었다. 깔짝거리는 기타와 둥둥거리는 베이스가 만들어 내는 훵키한 리듬에 전자 키보드와 관악기가 나왔다 들어갔다하는 사운드는 당시 직업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편곡을 해 주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윤시내의 배후에서 음악을 맡아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일단은 작곡가 최종혁을 첫 손에 꼽을 수 있겠지만, 윤시내 초기 곡에서 편곡을 맡은 고(故) 신병하를 빼놓을 수 없다. 신병하는 <장군의 아들>, <남부군>, <하얀 전쟁>, <애마부인> 등의 영화음악 및 <사랑과 야망>, <그대 그리고 나> 등의 드라마음악으로 유명해졌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밴드의 리더이자 베이스주자로 오래 활동한 인물이다. 실제로 윤시내를 발굴한 인물이 신병하이고, 그 무렵 신병하의 그룹은 사계절이고, 이 그룹을 거쳐간 음악인들의 리스트를 뽑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1970년대 활동한 그룹 사계절의 음반의 표지에 나온 윤시내의 모습을 보는 일은 미스테리같다. 윤시내와 신병하 사이에, 헤비 메탈 밴드 백두산을 이끌었던 유현상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윤시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의 사운드트랙이자 최근 어느 회사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의 순진무구한 목소리도 윤시내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윤시내의 비밀스러운 전사(前史)를 훑어 보면 윤시내 최대의 히트곡 ‘열애’(1979)에서 그 필살이자 압권의 불꽃 창법(torch singing)마저도 비밀스럽지 않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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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요제 나가러 대학 갈래요”
(44)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비상구, 기성 음악에 대한 청량제 - 대학가요제
지난해 가을, 눈길을 끈 한 신인 그룹이 있었다. ‘익스(EX)’라는 혼성그룹과, ‘제2의 김윤아’로 추앙된 이 그룹의 보컬 이상미가 그 주인공.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에 오르고 미니홈피에는 방문자들이 즐비했으며 뉴스에 오르내리는 등 간만에 대중음악계에 깜짝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어떻게 등장했는가. 그것은 전설 같은 연례행사 ‘엠비시 대학가요제’를 통해서이다.
이제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엠비시 대학가요제’가 처음 열린 현장으로 가보자. 때는 1977년 9월 3일, 서울 정동의 문화체육관. 익살스럽게 진행하는 남자 대학생 사회자는, 지금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등극한 이수만(!)이다. 이후 몇 년 동안 대학가요제 단골 진행자가 된 그가 이날 “대학 생활의 낭만과 취미활동의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대학 풍토의 명랑화에 기여하기 위해서 문화방송이 마련”했다고 이 대회를 소개했다.
촌스럽게도 대학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11번째로 등장한 서울대 농과대의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스’(6기)가 이날 히어로로 등극했다는 것은 이미 전설이다(사실 이수만도 샌드 페블스의 2기 멤버였다). 하드록 중심의 외국곡을 연주하던 ‘샌드 페블스’의 창작곡 ‘나 어떡해’ 역시 오래도록 ‘청춘 송가’로 군림했다.
이처럼 대학문화를 방송에 끌어들여 “방송의 질과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한 피디의 소박한 아이디어가 낳은 파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혜성처럼 등장한 김창완·창훈·창익 3형제 ‘악동(樂童)’ 밴드 ‘산울림’의 탄생이다. ‘산울림’이 결성된 것이 첫 대학가요제에 ‘무이(無異)’라는 이름으로 예선에 출전한 직후의 일이었거니와, ‘나 어떡해’의 작사·작곡자가 ‘샌드 페블스’ 멤버였던 김창훈이었으니 ‘1977년 파란’의 진정한 주인공은 산울림이 아니겠는가. 그후 산울림은 90년대까지 활동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과 신화가 되었다.
»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샌드 페블스 6기. 왼쪽부터 최광석(키보드), 이영득(기타), 여병섭(싱어), 김영국(드럼), 김민수(기타).
한편 이듬해인 1978년 동양방송(TBC)에서 ‘엠비시 대학가요제’를 벤치마킹한 ‘제1회 해변가요제’까지 열면서 방송가의 대학생 유치 작전은 극에 달한다. 이들 행사 후에는 ‘실황 중계’라는 이름의 라이브 음반이 당도했음은 물론, 해당 가수의 독집음반이 발표되는 수순을 따랐다. 무엇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캠퍼스 그룹사운드’는 학교의 공식적 인정과 후원을 받았고 해를 거듭하며 기수를 더할 수 있었다. 대학가에 신생 그룹사운드가 우후죽순 생겨났음은 물론이다. 중창단이나 솔로 가수들이 더 많았지만 캠퍼스 그룹사운드는 대학가요제의 상징과 같았다. 배철수가 있던 ‘활주로’, 조하문이 있던 ‘마그마’, ‘샤프’ 등.
물론 여기에 신선한 파격만 있던 건 아니다. 심수봉(출전시 본명은 심민경. 2회 입상)의 ‘그때 그사람’처럼 다소 대학가요제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은 곡도 있었고, ‘당신은 모르실 거야’(1회 은상)처럼 기성곡 출전도 있었다. 또한 ‘외래 향락문화’에 편승하는 관제 행사라거나, 방송사와 음반사를 위한 축제라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학가요제가 기성 가요와 다른, 일종의 비상구이자 청량제라는 공식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어느날 반짝 스타에 그치는 경우도,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어정쩡하게 있다가 사라지는 이들도 부지기수였지만, 참신한 아마추어 예비 음악인들이 이 창구를 통해 가요계에 수혈됐다. 유열, 신해철, 김동률, 이한철 등 이곳을 거쳐간 스타들은 일일이 거론조차 어려울 정도. 많은 수험생들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대학에 지원했다는 말이 괜히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영원한 것이 있을까. 해를 거듭하자 점차 대학가요제의 본연의 빛깔은 퇴색되는 듯했다. 하긴, 어느덧 그때 그시절 언니 오빠들도 쉰 줄이 넘어 추억 속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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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산울림’? 삼형제는 용감했다
(45) 헛헛한 가요계에 울려 퍼진 개구쟁이 록의 울림
1975년 세밑에 불어닥친 대마초 파동 이후 만 2년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간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었고 어떤 이들에게만 그랬다. 어떤 이들? ‘신중현과 엽전들’, ‘검은 나비’, 김정미 그리고 김민기, 한대수, 이장희, 김정호, 양병집 등의 음악을 즐기던 청년들에게 말이다. 송대관의 ‘해뜰 날’과 최헌의 ‘오동잎’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물리도록 신물나게 나오던 2년은 그룹 사운드와 포크 음악에 열광하던 이들에게 너무나 건전하고 평온하며 한없이 따분하고 허전한 세월이었다.
불온과 퇴폐의 싹을 고사시킨 ‘당국의 조치’ 이후 꼭 2년만에 이들 청년의 신물을 멈추게 하는 음악이 나왔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 1977년 9월의 ‘엠비시대학가요제’, 특히 대상을 차지한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는 물리도록 식상한 상차림을 일신하는 사이다와 콜라 같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세 달 뒤 진정으로 새롭고 개운한 메뉴가 등장했다. ‘산울림’이란 낯선 이름의 아마추어 3형제가 투박하게 빚어낸 첫 작품이었다. ‘아니 벌써’로 시작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불꽃놀이’ ‘문 좀 열어줘’를 거쳐 ‘청자(아리랑)’로 마무리하는 아홉 가지 요리묶음은 애피타이저도 디저트도 필요 없는 충격적인 정수(精髓)였다.
3형제는 용감했다. 이들은 학원에 다니지도 교본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조리도구로 ‘집’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자신들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빚어낸 레퍼토리가 데뷔하기 전까지 100여 가지에 달했다. 비록 데뷔 직전에 열린, 아마추어 대학생들끼리 경합하는 문화방송 주최 경연대회에서는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둘째’ 김창훈이 레시피를 만든 ‘나 어떡해’가 대상을 차지한 일은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가요계엔 의미심장한 전조였던 셈이고.
평지돌출 격으로 솟아오른 ‘산울림’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헛헛해하던 청년들은 산울림의 작품을 맛보자마자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열광했다. 당시 주류를 장악한 프로페셔널들의 노련한 레퍼토리와 비교해 형편없는 매무새와 때깔을 가진, 두서없고 볼품없었지만 ‘산울림’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며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1977년 12월 데뷔 후 1년여 동안 다섯 종이 넘는 새 작품집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그 중에는 ‘개구장이’ 등 어린아이들을 위해 선보인 메뉴도 있었는데, 이 신메뉴를 찾는 이들은 애 어른이 따로 없었다. ‘산울림’ 이후 비슷한 퍼즈 톤의 기타와 하드 록 스타일을 앞세운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이 대거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사실은 사족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전혀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영미권의 록 음악과 포크, 특히 사이키델릭, 하드 록·헤비 메탈의 재료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또 ‘산울림’의 작품에서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한국 그룹 사운드 음악의 영향을 배제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어디 하늘 아래 새로운 음악이 있던가. 다른 많은 혁신적인 밴드들이 그렇듯 ‘산울림’은 계승과 단절, 영향과 배제의 양면성을 아우르며 자신들만의 어법으로 새로움을 새겼다.
하지만 ‘산울림’은 ‘노래는 좋지만 연주력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정작 록 음악계에서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 기교와 테크닉에 경도된 프로페셔널리즘의 망령이 오래 지배한 탓이다. 데뷔한 지 20년 후인 19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홍대 앞에 모여든 아마추어 밴드들과 음악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산울림’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한 구절처럼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듯 빚은 ‘산울림’의 음악은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만의 레시피’를 부단히 창작함으로써 새로움을 이루어낸 ‘용감한 아마추어’의 전범이자 전설이 되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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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고 ‘해변’ ‘바다’ 노래 많았을까?
(46) 해변의 추억
» 〈제1회 해변가요제〉실황음반의 앞면. 배철수, 구창모, 왕영은, 주병진, 이명훈, 김성호 등 뒤에 스타가 된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한 장면에는 이른바 ‘해변 고고장’이란 게 나온다. 여름철 해변 백사장에 ‘아시바’를 설치하고 천막을 두른 뒤 입장료를 받고 ‘영업’을 하던 곳이다. 무대에는 ‘그룹 사운드’가 출연하여 ‘고고 리듬’의 곡을 연주하고, 베니어판을 깔아놓은 플로어에서는 피서지를 찾은 청춘군상들이 춤을 춘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연과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 혈기방장한 젊은애들이 바닷가에서 풀어질 때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때 정말 그랬느냐? 영화에만 나오는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애들은 모를 거다”라고 답변해 주고 싶다. 피서지의 ‘한 철 장사’ 중 하나인 셈이었는데, 한때는 꽤나 쏠쏠한 장사였다. 물론 1970년대 후반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생음악을 들으면서 춤추고 노는 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해변의 추억’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니 1970년대 그룹 사운드나 포크송에 ‘해변’이나 ‘바다’가 왜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지 알 수 있다. 키 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4월과5월의 ‘바다의 여인’, 템페스트의 ‘파도’ 등등....
이런 ‘해변의 추억’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시각을 휘어잡은 사건은 1978년 7월22일에 연포 해수욕장에서 열린 <동양방송(TBC) 주최 제1회 해변가요제>일 것이다. 1년 전 쯤 문화방송(MBC) 대학가요제의 성공을 벤치마킹해서 열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행사가 이후에 미친 파장은 넓고도 깊었다. 무엇보다도 ‘아마추어의 숨은 고수’인 대학생 그룹 사운드들이 대거 참여하여, 캠퍼스 그룹 사운드 열풍이 한 해 전 샌드 페블스의 ‘가을의 전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본선에 오른 참가팀 가운데 다섯 팀이 그룹 사운드였을 뿐만 아니라(참고로 뒤에 그룹 사운드로 활동하는 벗님들은 이때는 2인조로 참여했다), ‘구름과 나’(블랙 테트라),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런웨이), ‘바람과 구름’(장남들), ‘그대로 그렇게’(휘버스), ‘내 단 하나의 소원’(블루 드래곤) 등의 곡이 모두 히트를 기록하고 몇몇 곡은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참여한 면면들 가운데 징검다리의 일원으로 참여한 왕영은과 정금화, 주병진·주선숙이라는 듀엣으로 출전한 주병진처럼 의외의 인물을 찾는 재미도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구창모, 김정선(이상 블랙 테트라), 배철수(런웨이), 이명훈(휘버스), 김성호(블루 드래곤) 등은 1980년대 컬러 티비 시대가 개막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므로 나중에 차근차근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포에서 동양방송 주최로 개최된 대학생 가요제’는 1978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1973년 7월 ‘전국 대학생 보컬 경연대회’라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참가 팀은 각 대학별로 17개팀에 이르렀고 1주일 동안 열전을 벌였었다”라든가 “전체 분위기도 그런대로 즐겁고 낭만스런 것이었다”(‘TBC 주최 대학생보컬그룹 경연서 스푸키스 영예의 1위’, <일간스포츠> 1973.7.26.)라는 한 신문기사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캠퍼스 음악이 연포 및 TBC와 맺는 인연은 꽤나 오래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4개 대학 연합그룹’인 박성원과 스푸키스나, 2위를 차지한 서울대 공대 에코우즈(Echoes)는 잊혀져 버렸다. (혹시나 1970년대 초중반 ‘꽃만두 시리즈’로 개그계의 돌풍을 몰고 왔다가 연예계의 관행에 적응하지 못해서 자살로 비운의 경력을 마친 박성원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이 새삼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그룹은 다름 아니라 항공대학교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 런웨이(Runway)였고, 배철수(1953년생, 72학번)는 이 대회에서도 그룹의 리더이자 보컬을 맡아 출전했다. 이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파일럿 복장’으로 무대에 오른 것도 물론이다. 그렇다면 5년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름 아니라 1973년의 대학생 그룹들은 ‘팝송 원곡’을 연주했지만, 1978년에는 ‘가요 창작곡’을 연주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엊그제까지 써클룸에서 ‘시끄럽다’는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 연주하던 곡이 어느날 갑자기 전파를 타면서 ‘젊음의 송가’가 된 것이다. ‘가요제 실황음반’ 외에 음반이라곤 없고 정식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해본 경력도 없던 아마추어들이 말이다. 프로페셔널 그룹 사운드가 이런저런 이유로 활동의 제약을 받고 있을 때 ‘세상 모르고 살던’ 아마추어 그룹 사운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 세상이 그리 멋지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글 /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200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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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포크의 대부 ‘이정선과 해바라기’
(47)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전원적 순수주의가 침윤된 건전 포크송의 초상화
세월이 흐를수록 현재가 과거로 되는 속도는 가속화된다. 한 예로 지난회의 화두였던 여름 노래로 시작해보자. 음악 청취 매체 및 관습의 가속적 변화만큼 여름 바캉스 풍경도 변화한 지금, 해변가에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통기타 반주에 손뼉 치며 입을 모아 노래 부르는 1970년대식 ‘낭만적’ 풍경은 영화 같은 데서나, 그것도 때로는 희화적인 추억 모드로 스케치되지 않던가. 그러니 대표적인 여름 노래로 쿨의 ‘해변의 여인,’ 디제이디오씨의 ‘여름 이야기’ 등을 선곡한다면 벌써 10년 전 이야기라며 구식이라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그래도 키보이스가 부른 ‘해변으로 가요’는 한국판 ‘서핀 유에스에이’로써 한 시대를 대표하는, 불후의 그룹 사운드 버전 여름 노래로 남았다.
그렇다면 포크 버전의 썸머 캠프 송 무엇이 있을까? 여름을 ‘젊음의 계절’ ‘사랑의 계절’로 공식화시킨 ‘여름’이 있다. 물론 그때 애창되던 ‘사랑의 여름’의 한국판 노래는 지극히도 건전했다. 때묻지 않은 순수를,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던 아마추어리즘 포크 송의 한 초상화라고나 할까. 이 노래는 한양대학교 노래모임 징검다리(1기 이성용, 이교일, 이후 80년대에 사회자로 명성을 날린 왕영은, 현재 재독 재즈 보컬인 정금화의 혼성 4인조)의 목소리를 통해 알려졌다. 지난회에 살펴본 1978년 동양방송(TBC) 해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는데, 이 곡은 ‘기성 작곡가’의 곡이었다. 때문에 그룹 사운드들의 많은 히트 창작곡이 분기했던 해변가요제 첫 대회에서 아마추어 창작곡이 아닌 ‘직업적 작곡가’의 곡이 출전, 수상한 점에 대해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징검다리는 이 노래를 어떻게 ‘입수’했을까?
이 곡의 작곡가는 다름 아니라 이정선이다. 그가 한양대의 교내 가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후 여러 면에서 징검다리의 음악적 스승이 되었다는 후문. 이후 해변가요제에서 이름을 바꾼 제3회 젊은이의 가요제(1980년)에서도 징검다리(2기)가 이주호 작곡의 ‘님에게’로 출전, 은상을 수상할 정도로 이정선과, 그가 이끌던 포크 노래모임 해바라기의 음악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징검다리뿐이겠는가. 이정선 하면 무엇보다도 ‘이정선 기타교실’로 대변되는 어쿠스틱 기타의 불후의 교주이며, 해바라기로 상징되는 한국 포크의 대부 아니던가. 결과적으로 아마추어 포크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훗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씬에 지대한 공헌자이기도 하다.
이때 이정선이 수장으로 있던 일명 ‘오리지널 해바라기’는 잘 알려져 있듯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열리던 노래모임이 ‘4인조 혼성 그룹’으로 전화된 형태였다. 이들의 대표곡 ‘뭉게구름’ ‘구름 들꽃 돌 연인’ 등은 전원적 목가풍 서정주의로 대변되는 ‘싱얼롱’ 포크송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들의 다층적 화성에서 어떤 이들은 재즈 보컬 그룹 맨해튼 트랜스퍼까지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인위적 전기 파장 대신 어쿠스틱 기타에 인간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다성(多聲) 화음을 통해 뮤지션과 청자, 발신자와 수신자가 교감했다. 소박하고 건전했으며 또한 중성적이었던 순수 자연주의자들은 말하자면 명동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1970년대 포크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공식적으로 이들은 1977년, 78년 두 장의 앨범을 내고 흩어졌다.
» 생머리, 어쿠스틱 기타, 보컬 하모니로 상징되는 목가적 자연주의, 순수 낭만파 시절 4인조 ‘오리지널 해바라기’의 첫 앨범
그 이후 포크의 행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해바라기 멤버들이었던 이정선이나 한영애가 ‘신촌블루스’로 대표되는, 원초적이고 진한 블루스 음악으로 항해했던 반면, 1980년대 초 이주호는 ‘해바라기’ (일명 ‘이주호+알파의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새로운 멤버 유익종과 함께 만든 2인조 남성 듀오 포맷을 통해 부활(?)시켰다. 해바라기라는 이름의 이 전령사는 1970년대 포크의 계승자로 위치지워졌고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내 마음의 보석상자’ ‘사랑으로’ 등 히트곡을 남기며 1980년대 대표적인 듀오로 자리잡았다. ‘오리지널 해바라기’의 전원적 자연주의 대신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만이 생존한 말랑말랑한 발라드 연가는 1970년대 포크가 이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물론 1970년대 포크 공동체의 또 다른 잔영은 1980년대 중반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린 씬을 통해서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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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제 ‘약발’에 음반 판권값 10배 폭등
(48) 1970년대 말 대학생 대상 가요제의 전성시대
기왕 대학가요제 얘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좀더 가보자. 1977년 가을 문화방송 주최 ‘제1회 대학가요제’와 이듬해 동양방송 주최 ‘해변가요제’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이미 다룬 바 있다. ‘제2회 대학가요제’ 역시 ‘탈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돌고 돌아가는 길’ ‘그때 그 사람’(!) 등의 인기곡을 배출했다는 얘기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복습 겸해서 기억해둘 사항은 ‘1980년대 예비 스타’들이 1978년에 이들 가요제를 통해 대거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제1회 대학가요제’를 보고 ‘대학가의 숨은 고수들’이 하나같이 칼을 벼리었던 까닭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어쨌든, 송골매의 쌍두마차로 활약하게 될 배철수(활주로)와 구창모(블랙 테트라), 당대의 ‘꽃미남’ 가수 이명훈(휘버스), ‘김성호의 회상’의 바로 그 김성호(블루 드래곤)를 비롯해 심수봉, 노사연, 이치현(벗님들) 그리고 이후 가수보다는 진행자로 맹활약한 임백천, 주병진, 왕영은(징검다리) 등이 그해에 배출되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나중에 그룹 들국화에서 ‘세계로 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의 수작을 남긴 조덕환도 고려대 그룹 사운드 고인돌의 멤버로 출전한 바 있다.
»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이 대상을, 옥슨의 ‘불놀이야’가 금상을 수상한 1980년 ‘TBC 젊은이의 가요제’ 음반
이때를 기점으로 이른바 캠퍼스 음악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학생 대상 가요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더 많아진 입상곡들은 더 큰 인기를 모았다. ‘해변가요제’에서 이름이 바뀐 ‘젊은이의 가요제’는 라이너스의 ‘연’,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 옥슨의 ‘불놀이야’ 등을 히트시키며 ‘MBC 대학가요제’의 라이벌로 자리를 굳혔다. 문화방송은 FM 라디오 주최 가요제(‘강변축제’)를 하나 더 개최해 홍삼트리오의 ‘기도’를 인기 차트에 올리며 맞대응했다. 지방 방송국도 가요제 개최 대열에 합류했는데, 광주에서 열린 ‘전일방송 대학가요제’는 김만준의 ‘모모’를 정상에 올리는 수확을 거두었다.
이처럼 ‘장사’가 잘 되었기 때문에 대학생 가요제의 음반 판권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MBC 대학가요제’의 경우 처음에는 판권비가 50만원씩이었는데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자 3회부터는 500만원으로 폭등했고, 200만원이었던 ‘해변가요제’의 판권료는 이듬해 ‘젊은이의 가요제’ 때 63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일간스포츠’ 1980. 6. 4.) <젊은이를 위한 음악 시리즈>라든가 <대학 그룹 옴니버스> 같은 편집음반 발매가 뒤를 이었음은 물론이다.
대학생 가요제 출신 아마추어 가수 및 밴드들은 아이돌 스타이자 청춘 스타로서 가요계를 넘어 방송연예계 전반에 걸쳐 샛별로 떠올랐다. 대학생 중심 방송 프로그램이 신설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현상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980년대 초 한국방송의 ‘젊음의 행진’과 문화방송의 ‘영 11’이 대표적인데, 그 이름만으로 ‘추억은 방울방울’ 맺히는 중장년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1979년 이후 ‘MBC 대학가요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1979년에는 김학래 임철우의 ‘내가’ 정권수 박미희의 ‘영랑과 강진’ 1980년에는 이범용 한명훈의 ‘꿈의 대화’ 마그마의 ‘해야’ 샤프의 ‘연극이 끝난 후’ 1981년에는 정오차의 ‘바윗돌’ 1982년엔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등의 히트곡을 계속 분만했다. 대학생에 대한 10대들의 동경과 대학가요제 입상을 목표로 수험생활을 견뎌낸 대학생들의 참가 열기는 여전히 상종가 행진을 벌였지만, 진부하다거나 풋풋함이 실종되고 있다는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점차 세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이다. 회가 거듭될수록 대학생 가요제 자체의 신선함이나 상업적 약발이 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굳이 그 전환점을 잡아보자면, 아마추어 록 밴드 티가 폴폴 나던 선배들과 달리 짱짱한 연주력을 자랑한 마그마와 캠퍼스 그룹 일반의 무드와는 상이한 연주를 들려준 샤프가 입상한 1980년 즈음으로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1980년이라…. 정치·사회적 환경이나 대학가의 분위기가 대학가요제를 더 이상 ‘축제’로만 대할 수 없게 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해 말이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200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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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 언더그라운드 아지트 ‘서라벌’
(49) ‘서라벌 레코드’의 미스터리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1975년과 이전’과 ‘1976년 이후’를 칼로 무 자르듯 가르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해서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하는 김에 밀고 나가 보기로 하자. 오늘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음반’에 대한 이야기다. 1975년 이전에 나온 엘피 음반들을 서가에 꽂아놓으면 무슨 음반인지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이유는 레코드 표지의 옆면이 얇디얇아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거의 닳아 없어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드물게는 좋은 종이를 사용한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음반을 ‘소장가치가 있는 문화상품’으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다행히도 1976~7년께부터는 음반 표지의 옆면도 꽤 도톰하게 나오기 시작해서 서가에 꽂아놓아도 무슨 음반인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 목표였던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천불 달성”이 1977년 말에 달성된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작자들은 음반을 정성스럽게 만들기 시작하고 소비자들도 나름대로 ‘컬렉션’을 갖추기 시작한 현상의 방증일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이라고 뽑히는 음반들 가운데 1975년 이전에 나온 것이 별로 없는 현상은 산업적 환경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개인적 견해이지만 나는 ‘명반 뽑기’에 시큰둥한 편이다. 상이한 환경에서 나온 작품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명반’으로 뽑히는 음반들을 죽 훑어보면 1975년 이전에는 ‘유니버어살 레코드’라는 상호(레이블)를 달고 나온 음반들이 유난히 많은 반면, 1976년 이후에는 ‘서라벌 레코드’라는 상호를 달고 나온 음반들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1980년대까지 한국 음반업계의 ‘첩혈쌍웅’이었던 지구 레코드와 오아시스 레코드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양사에서 발표한 음반들이 대체로 ‘주류’에 속했다면, 유니버어살과 서라벌은 ‘비주류’에 속한 음반들을 많이 발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78년에 발표된 정태춘의 데뷔 앨범 » 정태춘의 앨범에서 편곡을 맡은 유지연의 데뷔 앨범
유니버어살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는 실기한 것 같으니 생략하고 서라벌 레코드에 집중해 보자. 1970년대 말까지 발표된 음반들과 대표곡들을 간략히 열거해 보면, 산울림(‘아니 벌써’), 사랑과 평화(‘한동안 뜸했었지’), 김태화(‘안녕’), 벗님들(‘또 만났네’), 휘버스(‘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이은하(‘아리송해’), 최백호(‘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산이슬(‘이사 가던 날’), 윤정하(‘찬비’), 하수영(‘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정태춘(‘시인의 마을’) 등이 모두 서라벌 레코드의 레이블을 달고 있다.
이들의 음악이 ‘이질적’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이른바 대명제작(代名製作)이라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다. 말 그대로 (상호의) 이름을 빌려서 음반을 제작하는 관행인데, 음악적 콘텐츠를 제작할 능력은 있지만 녹음 설비와 배급 능력이 없는 제작자(프로덕션)가 기존 음반사의 상호를 ‘빌려서’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서라벌의 상호를 달고 나온 음반들의 제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시점을 연장해 보면 들국화, 김현식, 이문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도 모두 서라벌의 상호를 달고 나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깊숙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런 연구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이 없는 이상 당분간은 미스터리가 걷히기는 힘들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서라벌에서 직접 제작했든, 서라벌을 통해 대명제작을 했든, 서라벌 레코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렀던 음악적 흐름의 아지트였다는 사실이다(물론 언더그라운드에 속하는 음악인들 가운데 서라벌 레코드를 통하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하다). 1980년까지 발표된 서라벌제(製) 음반들 가운데 위에 언급한 히트 음반들 말고 유지연, 양병집, 한돌, ‘참새를 태운 잠수함’, 최성원·이승희·이영재 등의 음반도 있다고 하면 ‘아하’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신촌파’니 ‘명륜동파’니 등등 마치 조폭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지하세계’로 들어가 보자.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을 붙이면, 절대로 조폭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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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떠나 ‘새로운 아지트’ 신촌서 노닐다
(50) 정태춘·유지연·양병집, 상이한 음악을 잇는 동일한 키워드, 신촌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반대시위 현장. 이곳에는 매주 토요일 저녁 ‘비닐하우스 콘서트’가 열린다. 이 콘서트의 중심에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자 음악적 뿌리’라며 고집스레 서 있는 한 가수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니라 정태춘이다. 기왕에 뚝심 있는 투사적 이미지로 각인된 가수이기에, 그의 현재 행보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인다. (지금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10년 전까지도 있던 음반의 사전심의제를 철폐한 것도 그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이미지가 있(었)다. ‘시인의 마을’, ‘촛불’처럼 서정성 짙으면서도 토속적 톤으로 일렁이는, 그러나 현재에는 이를 스스로 부정해버린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이 두 곡이 맨 처음 실린 1978년 첫 번째 앨범 〈정태춘의 새노래들〉의 성공에 대해서는 1979년 문화방송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는 것과, ‘촛불’이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받았다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 음반은 지난 회에 소개한 서라벌 레코드에서 발표된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나온 정태춘이나 산울림 등의 ‘싱글’ 음반도 희귀 수집대상임이 분명하다.
» 정태춘의 싱글 음반(1978)
물론 영미권 포크이면서도 토속적이고 질박한 분위기에 국악이나 민요적 감수성을 버무린 정태춘의 음악 세계는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1980)와 3집 〈우네〉(1982)에서 더 잘 드러났다. 당시 상업적으로는 불운했던 음반들이었지만 정태춘의 향후를 잘 알려준 예광탄 같은 음반들이다. 뮤지컬 〈춘향전〉의 수록곡이었던 ‘그네’, 전통적 가락과 장단이 구수한 목소리에 얹힌 ‘서해에서’처럼 1집에서도 정태춘의 음악적 향방이 예시된 바 있지만, 3집에 이르면 국악기를 도입하는 등 그의 ‘본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가령 ‘여드레 팔십리’의 반주는 1집에서는 양악 버전이었지만 3집에서 국악 버전이다. 물론 정태춘의 네 번째 앨범이자 박은옥과 함께 한 첫 앨범을 지구 레코드에서 발표하면서 질박하면서도 진솔하며 아름다운 서정을 더욱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며 꽃피우게 된다.
그런데 앞서 정태춘의 첫 음반에 실린, 영롱하고 섬세한 핑거링을 얹은 기타 솜씨는 누구의 것일까. 이는 유지연이라는, 1980년대에는 이정선과 더불어 대표적인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손꼽혔던(이후에는 CCM 음악계로 방향전환했던) 인물의 것이다. 자신의 곡을 담은 음반들도 발표했는데 2집 ‘사랑과 평화’(1집에는 제목도 가사도 다른 ‘가을 바람’으로 실림)가 잘 알려진 곡이다. 연주음반 〈어쿠스틱 기타로의 초대〉(1986)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닐 영, 블랙 사바스 등의 곡을 싣기도 했는데 이러한 유지연의 포크 성향과 정태춘의 궁합이 잘 맞았는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데 평택에서 상경한 정태춘이 유지연과 조우한 배후에는 양병집이 있었다. 한국 모던 포크계의 대부 중 한 사람인 그가 ‘음악 카페’를 차려, 후배 뮤지션들이 설 무대를 마련해주고 후배 음악인들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전설이다. 1970년대 중반에 ‘OX’(오엑스 혹은 옥스)를, 70년대 후반에 ‘톰스 캐빈’을,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는 ‘모노’(Mono) 등을 운영했다. 그가 기른 (박호준과 김광민 등이 있던) ‘동서남북’도 모노를 거쳤다. 뿐만 아니라 최성원과 전인권이 후일 폭발의 주역이 될 들국화를 예비하던 곳들이었고, 남성 2인조 ‘해바라기’ 역시 ‘뜨기 전’까지 활동한 보금자리였으며, 김현식도 듀엣으로 노래했다는 후문이 있는 곳들이다.
그런데 양병집이 1970년대 중반 문화적 음악적 메카 명동을 떠나 새로운 독립을 꿈꾸며 무작정 운영하던 카페가, 그리고 그곳을 거쳐간 뮤지션들이 있던 곳은 어디인가. 다름 아니라 신촌이다. 그 양상은 다를지언정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지금처럼 휘황하진 않았지만 조그마한 카페들이 버섯처럼 이곳저곳 돋아 있던 곳. 디오니소스적 보헤미안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자유와 낭만을 논하던 곳.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타진하던 새로운 아지트. 그곳에서 노닐던 예술가들을 편의상 ‘신촌파’라고 부를 것이다. 이제 그들을 만날 차례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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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지하의 암중모색, 결과는 ‘제3의 길’
(51) ‘한국 팝의 얼터너티브’ 신촌파의 옛이야기
신촌 하면 대부분 ‘젊음의 거리’란 이미지를 떠올린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등 여러 대학이 지근거리에 있어 대학생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란 부연 설명은 핀잔 듣기 십상인 사족일 것이다. 청년들의 거리인 만큼 음악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란 추측도 마찬가지.
1990년대 세대라면 신촌 하면 라이브 클럽, 펑크 록, 인디 밴드 같이 ‘신촌-홍대 앞 인디 씬’과 관련한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고, 1980년대 세대라면 신촌 블루스, 들국화 등 속칭 ‘신촌 언더그라운드’와 연관된 추억들이 몰려올 것이다.
요컨대 신촌은 언제부턴가 젊고 새로운 음악을 분만하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이름만으로 많은 걸 상징하는 ‘신촌 블루스’에 주목해 보자. 신촌 블루스가 엄인호와 이정선을 주축으로 1986년에 결성되었고 1988~89년 3종의 앨범을 발매하며 적잖은 인기를 모았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조금만 뒤집어 보면, 그렇게 대중의 시야에 들어와 각광을 받기 이전, 즉 1980년대 중반 이전에 ‘신촌 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중반부터 문화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자유와 낭만을 희구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신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법 촉망받는 신진 예술가부터 예술가연하는 룸펜까지 여러 층이 어울렸는데 그 구분은 어렵거나 무의미했다. 어쨌든 이들 보헤미안 히피가 OX(오엑스), 츄바스코, 4O9(포 오 나인), 하렘, 러시, 톰스 캐빈, 모노 등 수없이 명멸한 음악감상실 또는 카페를 거점 삼아 ‘밤드리 노닐’며 퍼마시고 좌충우돌 교감했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다.
» 신촌파의 슈퍼 그룹 장끼들의 데뷔 음반. 아래 왼쪽부터 엄인호, 박동률, 라원주이다.
골수 신촌파와 미8군 무대 계보와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따로 또 같이’
그렇다면 신촌파는 구미에서는 이미 1970년대의 문턱에서 작파된 히피 반문화의 꿈을 한반도 남쪽에서 이어간 이들일까. 칼로 무 자르듯 말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하에서 암약한 1970년대 중반부터 십여 년간, 신촌이 ‘주류의 대명사’ 명동에 대해 얼터너티브한 공간으로 기능했음은 분명하다. 이들의 대안적 모색과 실천은 1980년대 중반 들국화의 거짓말 같은 성공을 기점으로 주류 음악의 대안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는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 폭발’로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지하에서 암중모색하던 시기와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기 사이에 신촌파의 음악적 색채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없을까. 신촌파의 일면을 표상하는 하나의 음반이 있다.
장끼들이란 낯선 이름의 밴드가 1981년에 내놓은 데뷔 음반이 그에 해당하는데, 멤버와 음반 수록곡의 면면을 보면 거의 ‘악’ 소리가 나올 정도다. 신촌 블루스로 유명하게 되는 엄인호,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활주로-송골매의 알토란 같은 곡들을 작곡한 라원주, 남궁옥분 등을 스타덤에 올린 인기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는 박동률이 밴드의 주축을 이뤘다. 수록곡 또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탈춤’ 등을 메들리로 엮은 트랙을 비롯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골목길’ ‘(네 마음은)바람인가’ 등 이후에 크고 작은 히트를 기록한 곡들이 실려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이 음반은 한마디로 신촌파의 슈퍼 그룹이랄 만한 밴드의 기대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장끼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는 데서 보듯, 파란을 일으키는 대신 까맣게 잊혀진 불운한 음반이다. 하지만 레게를 선구적으로 응용하고(‘별’) 한국적 블루스를 선도적으로 본격화하는 등(‘나그네의 옛이야기’)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아이디어와 어법이 돋보이는 음반이었다.
비록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고 시장의 반응 역시 차가웠으나, 훗날 빛을 본 멤버들과 수록곡의 이름값 때문에 이채로운 음반에 머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 음반이 중요하다면 당대 주류 음악과는 다른 길을 모색한 신촌파의 음악적 특색과 지향을 지문처럼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외국 음악 스타일을 한국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사대와 배척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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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연주인들 이끌고 록아티스트로
(52) 송창식과 석기시대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요즘 말로 포크와 록은 다르긴 다르다. 1970년대까지 전자의 주요 무대는 생음악 살롱과 방송이었고, 후자의 주요 무대는 미8군 무대와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렇지만 포크송 가수가 작사가 및 작곡가로서, 그룹 사운드는 연주자(및 편곡자)로서 양쪽이 제대로 만난 모범적 경우가 있는데, 1970년대 말 송창식과 ‘석기시대’,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가 좋은 예다. 오늘은 전자에 초점을 맞추자.
1970년대 초중반 이미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송창식은 이 무렵부터는 제작자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백 밴드를 거느린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1978년에 발표된 음반에는 유장한 멜로디의 ‘사랑이야’, 유려한 서사를 가진 ‘나의 키타 이야기’, 뽕짝을 멋스럽게 차용한 ‘토함산’ 등의 히트곡을 포함하여, ‘20년 전쯤에’, ‘돌돌이와 석순이’, ‘잊읍시다’처럼 1980년대 대학생들 일부가 애창한 숨겨진 명곡들이 망라되어 있다. 즉, 이 음반은 작곡은 물론 편곡과 연주까지 가수가 미학적으로 통제한 최초의 앨범이었다. ‘아티스트’라는 호칭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라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 1978년부터 1987년까지 최고의 연주인들을 기용해 송창식이 제작, 발표한 음반 중 하나인 〈’87 송창식 참새의 하루〉(한국음반)
이 음반에는 이호준, 조원익, 배수연 등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동방의 빛’의 멤버들뿐만 아니라, 전설적 그룹인 ‘라스트 찬스’ 출신으로, 기타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김석규가 가담하고 있다. 이들은 송창식의 음반과 공연에서 백 밴드로 연주를 해 주는 한편, ‘석기시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음악적 조류를 수용하고 실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에 명동 마이하우스를 들락거린 사람이라면 이들의 존재감이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시 이들은 ‘한정된 시간 동안 연주하고 돌아가는 세션맨’ 이상이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송창식이 작업실과 연습실을 겸해서 스튜디오를 차렸기 때문이다. ‘원효로 스튜디오’라고 불렸던 곳인데, 이곳은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을 비밀리에 녹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다루어야겠지만, 송창식이 운영한 스튜디오가 이른바 민중가요의 ‘비합법 테이프’ 탄생의 요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불행히도 최고의 밴드를 만들고, 자율적 스튜디오를 운영하려고 했던 송창식의 야심은 현실의 벽에 부닥쳐 오래가지 못했다. 원효로 스튜디오는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게 되었고, 석기시대는 송창식으로부터 독립한 뒤 배수연을 중심으로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가 되었고, 디스코를 연주한 음반 한 종을 남겼다.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가 일반적으로 그랬듯 석기시대에는 많은 멤버가 들락날락했는데, 그 가운데는 1980~90년대 음악 산업계에서 연주자와 편곡자로 맹활약한 송홍섭과 한상원도 포함되었다.
백 밴드를 운영하는 야심은 중단되었지만, 최고의 연주인을 세션맨으로 기용하여 수준 있는 음반을 제작한 송창식의 저력은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송창식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찾는 데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가나다라’가 수록된 〈’80 가나다라 송창식〉에 또 한명의 기타 신동 김양일이 참여한 것이나, 〈’87 송창식 참새의 하루〉에는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이 참여한 것이 좋은 예이다. ‘가나다라’에서 ‘담배가게 아가씨’에서의 능숙하면서도 맛깔스러운 기타 연주가 이들의 솜씨다. 송창식은 1987년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1978년부터 1987년에 이르는 그의 궤적은 포크송 가수가 록 아티스트로 전화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송창식은 아직도 ‘포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이 과정은 단지 송창식 개인의 궤적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특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밟은 궤적이었다. 즉, 포크송 싱어송라이터들은 자신들의 음반에 록 사운드를 담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그룹 사운드 연주인들은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팝송’을 연주하는 것 외에 스튜디오에서 가수들의 음반에서 연주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음반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세션맨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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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펑키 주역들에 날개 달다
(53)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
포크 가수가 작곡자로, 그룹 사운드가 연주자로 양쪽이 조우한 경우는 송창식과 ‘석기시대’, 그리고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가 있다. 지난 회에 이어 오늘은 후자를 살펴볼 차례다. 먼저 복습 삼아 송창식의 1978년작 <사랑이야/토함산> 뒷면에 기록된 연주자들을 살펴보자. 김석규, 조원익, 이호준, 배수연의 석기시대 이외에 이색적인 세션 뮤지션 이름이 보인다. 프랑코 로마노(키보드), 사르보(베이스)가 그들이다. 이탈리아인과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프랑코 로마노 밴드’ 멤버들이었던 이들은 198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연주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나미와 머슴아들’이라고 불린 팀의 그 ‘머슴아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슬래핑(초퍼) 주법의 달인으로 통했던 사르보(음반 표기에 적힌 대로라면 본명은 Savatore Cantone)가 연주를 도와준 그룹이 또 있었다. 바로 사랑과 평화이다. 이남이나 송홍섭이 가요를 연주했다면 사르보는 팝송을 연주하는 무대에 섰다.
사랑과 평화가 누구인가. 말하자면, 이들은 지금 하나의 트렌드로서 각광받는 펑키, 퓨전 음악 같은 ‘뜨거운’ 음악을 만들어낸 한국 최초의 주역이다. 또한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1세대 그룹 사운드 중 최장수 그룹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기타 신동으로 불렸던 최이철이나, 1980년대 작편곡가로 활발히 활동한 김명곤 등을 위시해 한국 대중음악계를 빛낸 주역들이 있던 그룹이다. 또한 김광민이나 정원영 같은 퓨전 재즈의 대명사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진작부터 활동했던 이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은 1978년 1집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는 그 배후에 든든한 후원자 덕분이기도 하다. 바로 이장희다. 가수 대신 비즈니스의 길을 선택한 이장희는 사랑과 평화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 낙점시켰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 1집의 ‘한동안 뜸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2집의 ‘장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등의 작곡으로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를 예비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활동을 규제받던 이장희의 본명 대신 다른 이름들(이원호, 이경애처럼 아들이나 부인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물론 화려한 비행을 위한 날개를 달아준 것은, 끈끈하고 펑키하면서도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가미하거나(‘한동안 뜸했었지’처럼), 클래식 레퍼토리를 디스코와 펑키 버전으로 섭렵하는 등 사랑과 평화 본인들의 프로페셔널한 연주력과 탁월한 해석력이 아니겠는가.
» ‘울고 싶어라’를 통해 성공적으로 재기한 사랑과 평화의 3집.
이장희는 작곡에서 더 나아가 음악 사업으로 폭을 넓혔다. ‘락컴퍼니’라는 프로덕션(기획사) 같은 공간을 마련해 사랑과 평화를 비롯, 김현식, 최성원, 이승희, 이영재 등을 육성했다. 송창식이 원효로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것처럼, 이장희도 광화문의 ‘랩스튜디오’라는 녹음 스튜디오 운영도 병행했다. 좋은 장비와 시설을 갖춘 곳은 아니었기에 대개 정식 녹음은 더 좋은 스튜디오(서울 스튜디오 같은)에서 행해졌지만. 이장희가 떠난 뒤에도 이곳은 (송창식의 스튜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언더그라운드인들을 위한 아지트가 되었고, 김영동의 <삼포가는 길>(1982), 최성원이 기획한 프로젝트 <우리노래전시회 1>(1984), 김민기가 실질적인 프로듀서 역할을 한 <노래를찾는사람들 1집>(1984) 등이 태동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은 왜 그렇게도 짧던가. 1980년 여름 ‘제2차 대마초 파동’은 이장희의 꿈을 와해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이장희는 이곳을 떠났다. ‘이장희 사단’의 한 주축이던 사랑과 평화도 상황은 마찬가지. 이후 시골로 내려간 멤버도 있었지만(이남이), 최이철은 송창식이나 김현식 등의 음반에서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고, 김명곤은 ‘한국의 신쓰 팝’이라 할 나미의 ‘빙글빙글’ 등의 작곡을 비롯해 1980년대 많은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자로서 맹약했다. ‘한동안 뜸’하던 사랑과 평화는 1988년 ‘울고 싶어라’로 성공적으로 재기하게 된다.
글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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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아티스트’ 탄생을 증명하다
(54) 전설적 노래굿, 혁신적 콜라주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청년문화의 우상’ 송창식과 이장희가 1970년대 말 록 밴드와 연관을 맺으면서 각각 전면과 배후에서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을 때, 단 한 장의 독집으로 전설이 된 김민기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정권에 의해 위험천만한 인물로 낙인찍힌 김민기는 공식 음악계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77년 군 제대 후 6년여 동안 노동자로, 농부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음악을 청산한 건 아니었다. 이장희처럼 배후에서, 아니 그보다 더 은밀하게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김민기의 작품이 정식으로 발표된 통로는 기왕 그의 ‘대중적인 입’ 구실을 한 양희은을 통해서였다. 그가 군 복무 중일 때 양희은의 목소리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공개되었다. 김민기의 걸작 중 하나인 이 곡은 김지하의 희곡을 연극으로 만든 〈금관의 예수〉(1973)의 주제가였는데, 양희은 버전들이나 뒤에 발표된 남궁옥분 버전(‘금관의 예수’, 1981) 모두 사전심의로 인해 가사가 해괴하게 수정되고 말았다. 그 중 압권은 배경이 ‘가난과 곤욕의 이 거리’에서 ‘북녘 땅’으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란 가사가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둔갑한 것이다. 가히 ‘촌철살인’이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김민기의 새 노래들이 집단적으로 담긴 음반으로는 양희은의 1979년 독집이 있다. 타이틀곡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원제: 상록수)은 ‘아침이슬’을 잇는 대중적 송가로 꾸준히 사랑받아온 곡으로, 20여 년 뒤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체제 때 공익광고 캠페인 송으로 무던히도 흘러나오고 2002년 대선 때 어느 후보의 광고에 쓰여 지금도 잘 알려진 곡이다. 그밖에 군가풍의 ‘늙은 군인의 노래’, 국악 어법의 ‘밤뱃놀이’, 동요적인 ‘식구생각’ 등이 담겨 있다.
특히 ‘늙은 군인의 노래’는 1980년대에 각각 노동자, 농민, 교사를 화자로 한 노래로 바뀌며 널리 구전된 명곡이다. 음반 뒤표지에는 창작자의 이름이 가명으로 적혀 있었지만, 김민기의 곡들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지독한 가뭄 끝의 단비처럼 환영받았음은 물론이다. 음반 자체는 가사 검열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판본을 바꾸며 만신창이가 되어야 했지만.
그런데 이 시기 김민기의 진정한 문제작은 그가 직접 제작한 혁명적 불법 음반 〈공장의 불빛〉이었다. 경제성장의 그늘, 노동 현실과 노조 탄압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노래굿 사운드트랙은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노래운동과 민중가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이 혁명적이었던 또다른 이유는 아예 사전검열을 거부하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독자적으로 배급하면서 민중가요 음반의 미디어, 제작, 배급의 알파와 오메가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장의 불빛〉은 1978년 송창식의 원효로 스튜디오에서 조원익, 배수연, 이호준 등 일급 세션맨을 초빙해 반주를 녹음하고 이화여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서울대 ‘메아리’, 이화여대 ‘한소리’, 경동교회 ‘빛소리’ 등이 동참해 보컬 녹음을 하고 최종 믹싱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된, 온몸을 건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는 포크 스타일뿐 아니라 구전가요, 찬송가, 국악, 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한 형식을 한데 실험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비록 음질은 조악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와 매력을 전염시키는 데 걸림돌은 아니었다.
» 2004년 디브이디로 복각되어 리메이크 음반과 묶음으로 발매된 〈공장의 불빛〉.
〈공장의 불빛〉은 이제 김민기를 더 이상 ‘한국적 모던 포크의 기수’라는 틀에 한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또한 신비롭게 포장된 저항음악의 투사로만 가둘 수 없는 다기한 음악세계를 지향하는 아티스트임을 알려주었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 그는 노래굿(흔한 말로 뮤지컬) 창작자 겸 연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사이 그는 〈공장의 불빛〉의 인연으로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1984)을 만드는 데 관여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자. 노찾사 1집이 이장희가 설립한 광화문 랩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는 사실은 미리 기억해두고.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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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로 이어진 80년대 댄스 디바
(55) 그녀와 머슴아들, 그리고 나미
1970년대 말~80년대 초 ‘그룹 사운드’라고 불린 존재들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직업적 그룹 사운드’와 ‘캠퍼스 그룹 사운드’로 나뉠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어느 한쪽을 좋아하고 다른 한쪽을 싫어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프로’든 ‘아마’든 그룹 사운드는 기본적으로 사나이들(혹은 ‘머슴아들’)의 세계로 기억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룹 사운드’와 ‘여성’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았고, ‘여성 보컬을 앞세운 혼성 그룹 사운드’는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79년부터 81년 사이의 일간신문을 뒤져보면 〈그룹 사운드에 여자 선풍〉이나 〈로크 그룹에 여성시대〉라는 타이틀로 ‘와일드 캐츠’, ‘김 트리오’, ‘조한옥과 은날개’(보컬 조한숙), ‘나미와 머슴아들’(프랑코 로마노), ‘오리엔틀 익스프레스’(보컬 신서희), ‘아리랑 싱어스’(코리아나의 전신, 보컬 이애숙), ‘우먼 파워’, ‘영 러버스’, ‘걸 앤드 걸스’, ‘슈가 하머니’, ‘조상국과 그 여자 일행’, ‘양떼들’, ‘수다장이들’, ‘하늘천 따지’, ‘푸른 동산’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무대’에서뿐만 아니라 ‘음반’으로도 성공을 거둔 그룹은 와일드 캐츠, 김 트리오, 나미와 머슴아들 정도인 것 같다. ‘마음 약해서’(와일드 캐츠), ‘연안부두’(김 트리오), ‘미운 정 고운 정’(나미와 머슴아들) 등.
김영광, 안치행, 장세용 등 ‘기성 작곡가’가 만든 성인 취향의 곡을 그룹 사운드 스타일로 편곡한 노래들이다. 야박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들마저도 ‘원 히트 원더’, 즉 한 곡을 남기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존재가 돼 버렸다. 이들은 현장에서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것일까. 이들의 모델은 아바, 둘리스, 보니 엠 등 유럽의 댄스지향적 그룹들이었다. 고고 클럽이 디스코텍으로 변하면서, 그룹 사운드들도 이런 변화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그룹들의 경력에는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따라다녔다. 대체로 ‘미8군 쇼단’으로부터 ‘월남참전 미군 위문공연단’이라는 60년대 한국 음악인들의 국경을 넘는 활동의 연장선에 있는 흐름들이다. 간혹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혼성 그룹 사운드 출신 가운데 80년대 이후에도 살아남은 존재로는 나미(본명 김명옥)가 단연 돋보인다. (혹시 몰라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철의 엄마’라고 소개해 본다) 80년대 중반 (‘사랑과 평화’ 출신의) 김명곤(작고)의 작·편곡이 빛을 발한 ‘빙글빙글’(1984)을 신호탄으로 ‘유혹하지 말아요’, ‘슬픈 인연’, ‘보이네’(이상 1985)가 연발로 히트를 기록하고, 몇 해 뒤에는 (동방의 빛 출신의) 이호준의 작·편곡이 돋보이는 ‘인디안 인형처럼’(1989)으로 건재를 과시한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니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빙글빙글’이 수록된 나미의 음반 〈빙글빙글/아리랑처녀〉 (태양음향, TYL-2062, 1984). 박춘석, 이범희, 김명곤 등이 편곡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인순이와 더불어 ‘1980년대 댄스 디바’의 하나의 유형을 ‘정의’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여성 보컬 창법의 하나의 전형을 창조한 존재이기도 하다. 사견일 뿐이지만, (핑클 시절의) 이효리와 (롤러코스터의) 조원선처럼 전혀 다른 갈래에 속하는 여가수들 모두 ‘나미 계보’에 속한다.
그런데 나미의 음악 경력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57년 동두천에서 태어나서 7살 때부터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10대 시절 ‘해피 돌스’라는 이름의 여성 그룹의 일원이 되어 국내 미8군 쇼 무대, 베트남 참전 미군 쇼, 미국(샌프란시스코)의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78년 귀국한 그녀는 프랑코 로마노 그룹의 프런트우먼이 되어 나미와 머슴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과 더불어 ‘영원한 친구’가 대중가요로서 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내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온다. 하나. 나미와 프랑코 로마노처럼 국경을 넘으면서 활동했던 내국인 및 외국인 음악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것일까. ‘영원한 친구’는 프랑코 로마노가 만든 곡이다. 둘. 혼성 그룹 사운드, 요즘 말로 혼성 록 밴드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 생각해 보니 80년대 초 대학생가요제로 혜성같이 등장한 로커스트(‘하늘색 꿈’)와 샤프(‘연극이 끝나고 난 뒤’)도 여성 보컬을 앞세웠구나. …. 질문은 계속된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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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열창 ‘라이브의 여왕’
(56) 트로트 고고부터 솔까지: 인순이
1980년대 전형적인 ‘댄스 디바’로는 지난 회에 언급한 나미와 더불어 인순이가 있다.(이들은 모두 1957년생이다) 사실 인순이처럼 쉰줄이 되도록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여가수는 드물다. 무엇보다 ‘혼혈 여성 가수’라는 호칭이 오랫동안 그를 지배해온 그늘이었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트로트, 디스코, 발라드, 그리고 최근 보여준 솔 디바의 면모까지 다층적인 음악 이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 모르겠지만.
인순이의 공식 데뷔는 잘 알려져 있듯 1978년 희자매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보면 3인조로 구성된 희자매는 그렇게 특색 있는 존재는 아니다.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일명 ‘트로트 고고’ 시대의 뒤차에 탑승한, 그만그만한 ‘시스터즈’ 중 하나였다. 첫 음반(1978년)에 실린, 색소폰 반주가 구슬픈, 느린 템포의 ‘실버들’(안치행 작곡)이나, 경쾌한 브라스 섹션과 펑키한 리듬이 민요풍과 조우하는 ‘아리랑 내님아’(김기표 작곡)가 대표적. 1979년에는 문화방송의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희자매가 ‘사랑과 평화’와 더불어 ‘중창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빠른 템포에 ‘율동’이 있는 디스코(아니, 엄밀히 말해 그보다는 펑키 솔)와 ‘뽕끼’를 뒤섞은 희자매 시절의 스타일을 포함, ‘성인 취향’ 음악은 인순이의 디스코그래피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인순이의 앨범 〈아름다운 우리나라〉(1984)
그런데 나미에게 ‘머슴아들’(프랑코 로마노 밴드)이나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 같은 남자들이 있었다면, 희자매와 인순이에게도 ‘배후 세력’이 있다.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작곡가이자 음반제작자인 안치행과 안타기획, 그리고 작곡가 김기표가 그들. 그리고 희자매에서 독립해 인순이라는 이름을 건 첫 솔로 음반 〈인연/차표 한 장〉(1980년) 무렵에는 인순이와 같은 ‘혼혈가수’ 함중아의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뮤직파워를 만들며 재기한 신중현도 인순이를 ‘우먼 프로젝트’로 낙점해 〈떠나야 할 그 사람〉(1981년)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사후적인 평가지만 인순이의 백댄싱 팀 ‘인순이와 리듬터치’는 1980년대 후반 출현하게 될 새로운 댄스 키드들의 아지트를 제공했다. 1980년대 ‘한국의 마돈나’ 김완선도 이곳을 거쳤다. 참고로 김완선의 이모이자 김완선을 스타로 만든 대모 고 한백희는 희자매와 인순이의 매니저 출신이기도 하다.
인순이는 이후에도 대표적인 열창형 레퍼토리 ‘밤이면 밤마다’,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과 쌍벽을 이루는 건전가요인) ‘아름다운 우리나라’(〈아름다운 우리나라〉, 1984년)를 발표했고, 1990년대 들어서도 성인 지향적 음악 ‘착한 여자’(〈여자〉, 1991년) 등을 끊임없이 불렀다. 인순이 자신의 분신과 다름 없는 노래 ’에레나라 불리운 여인’ 등을 실은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1987년)는 인순이에게 그간 지배적이던 통속성과 블루지한 사운드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킨 일종의 콘셉트 앨범이다.
어쨌든, 이른바 ‘열린음악회형’ 건전가수이자 가스펠을 부르는 성녀였고, 디너쇼, 밤무대, 뮤지컬 무대 등을 종횡무진했던 인순이와 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성인 취향’ ‘밤무대 가수’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피부색과 더불어 칭찬의 잣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섰던 수많은 무대의 경험들은 파워풀한 열정적 가창력의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었고, 최근에 이르러 힙합, 아르앤비, 솔 같은 흑인음악 지향의 조류 및 후배 음악인들과 결합하면서 제2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조PD와의 협연으로 유명한 ‘친구여’를 비롯, ‘하이어’처럼….
하지만 〈더 퀸 오브 소울〉(1996년)라는 앨범 타이틀과 같은 호칭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인순이의 음악은 언제나 솔풀하고 재지하며 블루지했다. ‘실버들’ 같은 트로트 고고에서도 솔적 풍취가, ‘에레나라 불리운 여인’ 같은 통속성에서도 진솔한 블루스가 담겨 있지 않던가.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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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완성시킨 한국대중음악계 ‘지존’
(57)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더러는 한 사람의 가수가 한 시대를 표상한다. 그 점에서 조용필은 1980년대와 한 몸이고 한 짝이다. 조용필을 정의하는 데 흔히 달라붙는 ‘가왕(歌王)’ ‘국민가수’ ‘슈퍼스타’ ‘오빠부대의 원조’ 등 최상급의 수식어들도 1980년대라는 시대를 결여해서는 ‘용을 그리는 데 눈을 그려 넣지 않은 것’과 같아질 뿐이다. 그건 대중음악계를 정의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조용필을 빼고는 1980년대의 대중음악을 얘기할 수 없다.
1968년 음악계에 뛰어들어 1971년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상을 받는 등 촉망받는 뮤지션으로 성장했고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돌풍을 일으켰으나 일장춘몽처럼 대마초 문제로 발이 묶여 기약 없는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는 얘기는 중언부언일 테니 생략하자. 그렇지만 1970년대의 마지막 3년의 시간이 자양분 혹은 쓰디쓴 보약이 되어 그를 단련시켰다는 점은 기억해두자. 그가 민요와 창에 관심을 갖고 목을 수련했다는 얘기는 하나의 사족일 테고.
1979년 말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해금조처로 자유를 얻은 조용필은 1980년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담은 데뷔작을 지구레코드에서 내놓았다. ‘이미 독집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왜 그 음반이 데뷔 음반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면 ‘지구레코드에서는 자기 회사에서 취입한 걸 기준으로 셈하는 관행이 있었다’는 정보가 필요할 것이다. 이 음반의 경우 조용필의 얼굴을 사실상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린 음반이 되었으니 이를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야구로 치면 연속타자 홈런이었다. 그냥 홈런이 아니라 대형 장외홈런이었다. 이 음반이 밀리언셀링을 기록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 데에는 여러 층을 동시에 공략하기 위한 포석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을 한데 모은 수록곡 구성을 빼놓을 수 없다. 민요 ‘한오백년’처럼 가장 긴 뿌리를 가진 전통적 감성을 건드리는 곡은 물론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잊혀진 사랑’처럼 트로트와 그룹 사운드 음악을 결합해 청년층과 중장년층을 아우르는 곡도 담겨 있었다. 또 기성의 격조 있는 서정적 가요의 감성과 긴밀히 조응하는 곡으로 애절한 발라드 ‘창밖의 여자’가 음반의 들머리에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10대와 20대 수용자가 갈구하던 젊은 감성을 적확히 꿰뚫는 곡으로 뿅뿅거리는 신시사이저와 가성과 진성을 넘나드는 노래가 흥겨운 댄스곡 ‘단발머리’가 엘피 뒷면의 타이틀곡으로 올라 있었다.
이와 같이 한 장의 음반에 여러 세대와 층을 겨냥한 곡들을 수록하는 전략은 후속 음반들에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드라마 주제가로는 ‘축복(촛불)’ ‘물망초’ 등이, 민요로는 ‘간양록’ ‘강원도 아리랑’ 등이, 트로트 스타일의 성인 취향으로는 ‘외로워 마세요’ ‘미워 미워 미워’ 등이, 청(소)년 세대에게 소구하는 곡으로는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이 뒤를 이었다.
» ‘못 찾겠다 꾀꼬리’가 실린, 1982년 발매된 조용필 4집 앨범 앞면과 뒷면
일거양득이란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런 다면전략을 통해 조용필은 거의 모든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슈퍼스타이자 지존으로 우뚝 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엔터테이너로서 가수’의 역할뿐 아니라 ‘밴드의 리더로서 로커’의 길도 병행했다. 포지션별로 최고의 연주자들로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해 방송과 라이브 공연에 섰던 점은 오늘날 그의 쉼 없는 공연 활동을 예시하는 것으로 좀더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위대한 탄생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자존심’ 같은 한국적 감성의 록 명곡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시 지금 조용필의 1980년대 히트곡들이 선율로만 남아 있다면, 반드시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이 마모한 변화무쌍한 밴드 음악이 생생하게 살아올 테니까.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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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찌른 디스코…‘트로트’ ‘록’도 디스코화
(59) 디스코의 열기 속으로
1970년대 중·후반, 전세계를 강타한 ‘토요일 밤의 열기’는 바다 건너 이곳으로도 후끈하게 불어 닥쳤다. ‘디스코’(좀더 정확히 말하면 ‘유로 디스코’)의 물결은, 이전 시기를 지배했던 이른바 ‘고고’를 낡은 것으로 만들었다. 춤추는 곳 역시 변화해서, ‘고고 클럽’은 ‘디스코텍’이라는 상호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고고 클럽을 지배하던 사이키델릭 록이나 하드록 스타일 역시 인공적인 비트와 원초적인 리듬에 자리를 내주었다. 차갑고도 인위적인 듯한 정박의 리듬을 배경으로 흔들고 비벼대는 달뜬 플로어 앞에서는 격변의 정치 상황도 비켜갈 수 없었다.
이 땅에서 디스코가 허공에 흩날리는 손가락 찌르기 춤으로 요약된 것처럼, 나이트 클럽의 레퍼토리 역시 다분히 한정적이었다. 이럽션의 ‘원 웨이 티켓’, 보니 엠의 ‘리버스 오브 바빌론’, 빌리지 피플의 ‘와이엠시에이’, 징기스 칸의 ‘징기스 칸’, 둘리스의 ‘원티드’, 놀런스의 ‘섹시 뮤직’, 아라베스크의 ‘헬로, 미스터 몽키’ 등이 1980년대 초반경까지 연이어 인기를 끌었다. (방미가 부른) ‘날 보러와요’, (조경수가 부른) ‘와이엠시에이’나 ‘징기스 칸’ 등처럼 이들은 한국어 번안곡으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이 유행 앞에서 그룹 사운드든 솔로 가수든 예외랄 게 있었을까. 이합집산을 겪으며 살아남은 그룹 사운드의 생존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밤무대의 슈퍼 그룹’이었던 ‘검은 나비’나 ‘히 식스’는 디스코의 열기를 반영하는 명시적인 앨범 제목을 내걸고 각각 〈보니 엠 힛트 리바이블〉(1979)과 〈가을에 떠난 사람/ 로라 디스코〉(1980)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떠오르는 새로운 얼굴들은 따로 있었다. ‘연안 부두’의 김 트리오(김대환, 최이철, 조용필의 김 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와 ‘마음 약해서’의 와일드 캐츠(일명 들고양이들). 이 두 그룹은 많은 점에서 비슷했다. 우선 모두 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경우로, 김 트리오는 미국에서, 와일드 캐츠는 홍콩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각각 활동한 바 있다. 또한 아바, 둘리스, 보니 엠 등을 전범 삼은 혼성 편성의 그룹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이때 이러한 여성 가수를 앞세운 혼성 편성의 그룹들은 이 시기 전후에도 ‘나미와 머슴아들’, ‘조한옥과 은날개’, ‘이종식과 사랑의 샘’ 등 줄을 이어 명멸했다. 여성 가수를 내세웠던 ‘검은 나비’의 멤버들은 1980년대에는 아예 ‘김혜정과 검은 장미’로 개명해 활동하기도 했다(이런 여성 보컬리스트를 앞세운 혼성 그룹 사운드의 당시 유행에 대해서는 지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 들고양이들의 첫 음반 〈마음 약해서〉
그런데 많은 한국 음악들이 그러했듯, 이 음악들에도 이른바 ‘뽕끼’가 가미된 사운드가 녹아 있었다. 가령 ‘마음 약해서’는 기왕에 다른 가수가 부른 바 있는, 트로트 작곡가 김영광의 곡이다. 이런 음악의 배후에는 ‘안타 프로덕션’과 ‘오리엔트 프로덕션’이 있었다. (앞의 연재들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는) 안치행과 나현구가 각각 선두지휘하던 곳이다. 이곳을 통해 록이 트로트로 퇴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데 이런 음악들에는 이전 시기와 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시사이저가 뿜어내는 차갑고도 화려한 조미료와 함께, 좀더 댄서블하고 모던한 팝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하는 여정에 있었으므로.
이런 사운드들이 나이트 클럽의 음악으로 등극한 데에는 또다른 외적 요인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이루어진 서울의 강남 개발 붐과 맞물렸던 것. 때문에 더는 수지가 맞지 않는 명동의 생음악 살롱, 고고 클럽 등은 문을 닫거나, 카바레 혹은 성인용 업소 등으로 탈바꿈해 강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성인용 음악으로 바뀐 음악은 다른 식으로 재생되었다. 즉, 라이브로 연주되는 곳이 아닌, 음반을 틀어주는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대 앞에 섰던 유수의 밴드들은 서서히 과거의 뒤안길로 퇴장하거나, 그나마 생존한 그룹들은 변두리나 지방, 혹은 행사장 등 ‘주변화’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디제이가 ‘밤무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리듬 속의 열기는 그렇게 한 시대를 닫고 또 한 시대를 열게 된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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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세무민’ 축제가 남긴 스타 이용
(60) ‘국풍81’과 이용
세기 말 ‘녹화사업’으로 탈바꿈하기 이전만 해도 서울 여의도공원은 거대한 잿빛 광장이었다. 1970년대 초 여의도 개발계획에 따라 조성된 이 공간의 원래 명칭은 5·16 광장, 이름부터 정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4반세기 전 사상 최대의 축제가 열렸다. 이름하여 ‘국풍(國風) 81’이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말처럼, ‘관제 광장’에서 거대한 ‘관변 축제’가 열린 것이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한 ‘국풍81’은 1981년 5월28일부터 6월1일까지 5일간 열렸다. 전국 대학 194곳에서 동원된 학생 6천여명과 일반인 및 단체 7천여명이 출연하고 연인원 1천만 명의 관객이 어우러졌다는 사상 유례 없는 축제였다. 일시적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여의도광장은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국풍 81’은 흥행만이 아니라 개념과 내용 측면에서도 두드러지는 축제였다. 여러 지역의 탈춤, 농악, 굿, 차전놀이, 고싸움, 줄다리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전통예술 마당이자 민속 대축전이었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와 먹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이색적인 축제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 광주의 민주화열기를 군홧발로 참혹하게 진압하고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총 6억원을 들여 벌인 관제축제 ‘국풍81’. 작은 사진은 ‘바람이려오’로 국풍81 가요제에서 금상을 차지하며 스타로 떠오른 가수 이용.
하지만 ‘국풍 81’은 ‘하수상하고 난데없는’ 축제였다. ‘잊고 있던 전통의 멋을 되새길 수 있었는데 관제 행사면 또 어떤가’라고 넘겨버리기엔 우선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광주의 민주화 열기를 군홧발로 참혹하게 진압한 지 정확히 1년 뒤이자, 12·12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 출범 직후에 축제가 열렸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국풍 81’은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입안하고 총 6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경비를 쏟아부어 치러졌다. 전통과 정통성 없는 이들이 전통에 집착한다는 역설을 고려하면, 민속 대축전이란 테마 역시 선의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국풍 81’은 화려한 축제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고 여론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호도책이었다는 평가가 주로다. ‘국풍81’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좀더 자세한 사항은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허문도와 국풍81’ 편(2005년 4월 10일 방영)을 참고하기 바란다.
정치적 의도로 열린 축제였기 때문일까. ‘국풍’은 단 한 해 열리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풍’에서 정치적 의도를 제외한다면, 그 후예에 해당하는 행사들은 20여 년이 지난 뒤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나 지금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각 지방정부에서 엄청난 예산을 배정해 해마다 치르는 지역축제들 말이다.
‘국풍 81’은 또한 대학생 가요제를 통해 가요계에 이용이란 스타 가수를 하나 남겼다. 이용은 ‘국풍 81’의 가요제에서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이용은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서울’ ‘첫사랑이야’ 등을 히트시키며 80년대 초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업템포 곡에서나 발라드 곡에서 모두 절창을 자랑하는 이용은 ‘감상적인 송창식’ 쯤으로 비유할 만한 음색을 아낌없이 토해내며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무엇보다 10월만 되면 어김없이 라디오와 라이브 카페에 울려 퍼지는 ‘잊혀진 계절’은 이용의 대표곡일 뿐 아니라 80년대의 대표곡 리스트에 빠짐없이 오르는 곡이다. 서정적이고 영롱한 피아노 선율에 이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는 노래로 시작되는 ‘잊혀진 계절’은 80년대에 트렌드가 된 이른바 ‘팝 발라드’(피아노 반주가 특징적인)의 전범 중 하나가 되었다. ‘잊혀진 계절’의 엄청난 히트와 함께 시작된 이용의 전성기는 85년 급작스럽게 터진 추문으로 이용이 미국으로 건너가며 때 이르게 중단되었다. 한참 뒤 귀국하여 밤무대와 음반을 통해 끊임없이 재기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가 활동을 중단했던 세월은 레테의 강이 되어 있었고, 가요계의 유행은 그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용의 좋았던 시절은 ‘잊혀진 계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200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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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밖 성공신화 이룬 캠퍼스 그룹
(61) 송골매
1982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그 사람이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때 대학교 캠퍼스에서 방황하던 사람이라면 ‘님을 위한 행진곡’이 기억나겠지만, 그게 만인의 보편적 경험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TV 앞에 죽치고 있거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이라면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는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조용필의 음악에 대해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고집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 기억은 더욱 각별할 것이다.
송골매의 두 번째 정규 앨범에 실린 이 곡은 그해 내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 ‘여기저기’ 가운데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당대를 풍미한 ‘디스코장’이나 ‘롤라장’이었을 텐데, 이는 인상적인 기타 인트로에 이은 펑키한 리듬 때문일 테고, 이 매력은 ‘웃찾사’의 ‘몽키 브라더스’라는 코너의 배경음까지 이어지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후렴구가 끝난 뒤 베이스 기타가 씽코페이션(당김음)을 섞어 한마디를 능숙하게 연주한 뒤 한 박자 쉬고 보컬(구창모)이 ‘움’이라고 뱉는 남성적인 너무나도 남성적인 소리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몇 안 되는 인상적 순간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이들은 ‘아이돌’의 지위까지도 꿰찰 수 있었고, 이는 1970년대 초 ‘히 식스’에 이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송골매는 항공대학교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 런웨이(활주로)와 홍익대학교 그룹 사운드인 블랙 테트라(열대어)의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통해 탄생한 일종의 ‘슈퍼그룹’이었다. 그리고 이 한 곡을 통해 송골매는 캠퍼스 그룹의 ‘캠퍼스 이후’의 성공담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보컬과 기타를 맡은 구창모와 배철수는 상이한 개성과 음색으로 송골매의 양날개 역할을 수행했고, 김정선의 능숙하면서 날카로운 톤의 기타 사운드는 예리한 발톱 역할을 했다. 키보드를 맡은 이봉환은 그 자체로 그림을 제공했고, 오승동(드럼)과 김상복(베이스)은 뒷전에서 조수의 역할을 묵묵히 그러나 충실하게 수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멤버가 조금 많아 보이지만, 이제 막 컬러 TV방송이 시작되고 14인치 텔레비전(‘삼성 이코노 TV'를 기억하는가?)이 대중화된 시대에 6인조 그룹은 손쉽게 화면을 꽉 채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젊음의 행진>과 <영 일레븐>을 기억하는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필살 히트가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 앨범에는 ‘모두 다 사랑하리’(노래: 구창모)와 ‘그대는 나는’(노래: 배철수)이라는 또 하나의 히트곡들을 통해 ‘록 발라드’라는 새로운 경향도 예시하고 있었다. 특히 김정선이 작사하고 김수철이 작곡한 ‘모두 다 사랑하리’는 동경가요제(1983년 3월)에 출전하여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시대의 업무에도 동참했다. 이후 이들은 매년 1종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꾸준한 활동을 보였는데, 이듬해 나온 3집은 ‘처음 본 순간’, ‘빗물’, ‘아가에게’, ‘한줄기 빛’ 등을 통해 특유의 ‘젊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실린 송골매의 2집 앨범 〈송골매 Ⅱ〉.
그렇지만 4집(1984)을 발표한 뒤 구창모가 솔로로 독립한 것은 한국의 음악산업이 록 밴드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 배철수라는 원톱을 주축으로 또 한번의 구조조정을 통해 프로페셔널 밴드로 거듭나려는 송골매의 두 번째 비상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5집 <하늘 나라 우리님>(1985)으로 송골매는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계속 등장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그것이 거의 마지막이었다. ‘새가 되어 가리’가 실린 7집 앨범은 한국 록 음반의 열성수집가들에게는 명반으로 취급받고 있는지 몰라도, 대중의 반응은 변덕스러웠다. 아니 송골매의 음악이 변덕스럽게 변해 갔다. 무엇보다도 1985년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나 한국 사회 전반이 ‘캠퍼스 그룹의 순수한 열기’로 지탱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던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은 서서히 지쳐 갔고 지친 상태에서 창의성이 발휘되기는 힘든 법이다. “매일 밤 나이트클럽에 출연했고 어떨 때는 하루에 네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는 멤버들의 후일담은 송골매를 티브이와 음반으로 접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의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장난으로 연주하자’는 심정으로 녹음한 듯한 ‘모여라’를 마지막으로 송골매의 비상이 끝난 것은 좋은 결말이었다. ‘모여라’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 다시 모이겠다’는 이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200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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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캠퍼스 그룹’ 시대 열어젖힌 김창완
(62) 1980년대 초 캠퍼스 그룹사운드들의 행방
1970년대 말, 캠퍼스 그룹사운드들은 방송사에서 개최하던 가요제들을 등용문 삼아 우후죽순처럼 명멸했다. 졸업 후 캠퍼스에서 세상으로 나간 뒤 음악 활동을 그만둔 이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어떤 이들은 방송가에 얼굴을 내밀고 독집 음반을 발표하며 전문적 음악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들이 지속적 음악활동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뮤지션으로 정착·발전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흐른 80년대로 넘어와야 할 것이다.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산울림이나 송골매 외에 어떤 그룹들이 활동을 했을까? 그들은 어떤 방송사, 어떤 음반사를 통해 ‘주류’의 문을 두드렸을까?
당시 젊은 취향의 음악인들이 모습을 비출 수 있었던 티브이 공간은, 80년대 초반에 생긴 한국방송의 ‘젊음의 행진’과 문화방송의 ‘영 일레븐’이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80년대 경쟁적인 관계로 인기를 모으던 쇼 프로그램으로서, 떠오르는 청춘 남녀 스타들이 엠시(MC)로 선정되었고, 스타급 캠퍼스 밴드들이 항상 프로그램 마지막을 장식했다. ‘젊음의 행진’에서는 송승환과 김현주의 진행이나 대학생 댄싱팀 ‘짝궁’들을, ‘영 일레븐’에서는 이택림과 짝을 이루던 명현숙, 길은정 등의 진행이나 서세원 같은 몇몇 연기자들의 코미디를 기억할 수도 있다. 물론 대미를 장식하던 그룹 사운드는 전자에서는 송골매, 후자에서는 김수철이 있던 ‘작은 거인’이었다. 당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두 프로그램을 비교하며 보던 재미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랴.
그렇다면, 캠퍼스 그룹의 음반은 어떤 곳을 통해 발표되었을까? 당시의 인기를 방증하듯 지구나 오아시스 같은 양대 음반사에서도 ‘활주로’나 ‘블랙테트라’의 음반을 발표했고, 다소 ‘비주류’에 속한 음반들을 많이 발매했던 유니버설이나 서라벌에서 ‘휘버스’나 ‘장남들’등의 음반을 발표했다. 그뿐인가. 서라벌을 통해 ‘피디(PD) 메이커’ 시스템으로 음반 제작을 하던 이흥주가 독립하여 만든 대성음반이라는 곳을 기억해야 한다. 이 음반사에 산울림의 김창완이 입사하면서 일명 ‘포스트 캠퍼스 그룹사운드’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된다. 김창완은 기획과 작사, 작곡 및 프로듀서를 겸했는데, 그와 이런저런 관련 속에 대성음반 둥지에서 음반을 낸 그룹들은 로커스트, 벗님들, 장끼들, 노고지리, 어금니와 송곳니, 하덕규 등이다.
대성음반의 첫 번째 기획이 산울림의 7집(1981)이었고 두 번째 기획은 ‘하늘색 꿈’으로 80년 제3회 티비시(TBC) ‘젊은이의 가요제’(‘해변가요제’에서 개칭된) 대상을 차지한 로커스트의 데뷔앨범(1981)이다. 5인조 그룹으로 변모한 벗님들 역시 84년 앨범을 김창완이 프로듀서를 맡은 대성음반에서 발표했다. 78년 ‘제1회 티비시 해변가요제’ 출전 때는 통기타 듀엣이었다가, 데뷔 앨범(서라벌)을 낼 무렵에는 3인조 그룹 형태로 변했다는 전사는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 1984년 벗님들의 앨범 〈84 벗님들(난 몰라/늦은 밤 깊은 밤)〉
송골매 및 활주로의 명곡을 작곡한 라원주, 후일 신촌블루스에 몸담게 된 엄인호, 그리고 미8군 무대 출신의 작곡가 박동률로 구성된 장끼들 역시 대성음반에서 데뷔 앨범(1982)을 냈는데, 이들 역시 ‘신촌파’에 대한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으므로 생략하자. 그밖에, 김창완의 표현에 의하면 ‘민요를 록으로 만들던’ 노고지리가, ‘찻잔’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등이 실린 2집(서라벌, 1979)에서 산울림과 아주 유사한 성향으로 바뀐 것을 보면 김창완의 개입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많은 캠퍼스 그룹사운드는 로커스트처럼 추억과 기록을 담은 ‘기념음반’ 한 장만을 발매한 뒤 더는 활동하지 않았다. 반면, 몇몇 캠퍼스 그룹 출신 중에는 벗님들처럼 변신을 꾀하며 꾸준한 활동을 벌여 인기를 얻는 그룹으로 안착하거나, 혹은 장끼들처럼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계보가 기존의 미8군 무대 계보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어쨌든, 김창완과 대성음반은 이들에게 캠퍼스 그룹사운드가 전문적인 음악인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감초 구실을 했음이 분명하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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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세 사람의 만남, 가요계 빅뱅 예고
(63) 민해경과 박건호·이범희 콤비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른 신인 여성 스타를 흔히 신데렐라에 비유한다. 진부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궁금증을 푸는 데 별다른 대안이 없는지 여전히 애용되는 표현이다. 하긴 지금도 수많은 (예비)가수들이 바늘구멍 같은 스타의 길을 통과하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기울이는 현실을 감안하면, 상투적이라 해도 신데렐라란 표현과 그 스토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 때문인지 데뷔와 동시에 스타가 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아니 오히려 이 편이 더 흔하려나.
민해경의 경우도 일찍이 성공했다고 오해받는 경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민해경의 대표곡으로 손꼽는 ‘사랑은 이제 그만’ ‘그대 모습은 장미’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등은 그녀의 가수 경력의 첫 자락에 있는 곡은 아니다. 물론 방금 열거한 곡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입까지 계속된 민해경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곡들이지만, 전성기의 스타트를 끊은 ‘사랑은 이제 그만’(1986, 이세건 작사·작곡)은 그녀의 ‘재기작’이었다.
» ‘사랑은 이제 그만’과 ‘내 마음 당신 곁으로’가 실린 민해경의 귀국앨범.
민해경의 데뷔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80년이었다. ‘누구의 노래일까’를 들고 한국방송에서 주최한 서울가요제에 출전한 것. 비록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데뷔 앨범을 통해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일부 인용한 후속작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큰 인기를 모으며 롱런을 예고했다. 그런데 1983년 본인도 납득하기 어려운 루머로 인해 방송에서 하차해야 했고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노래일까’와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강렬한 음색과 댄스로 가요계를 주름잡던 전성기 때와는 사뭇 다르게 차분하고 서정적이었던 그녀의 초기 음악세계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 곡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 곡들이 작사가 박건호와 작곡가 이범희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 인기의 보증수표이던 박건호와 이범희 콤비의 첫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콤비가 일군 첫 번째 빅 히트곡은 이듬해 인기 차트를 뒤흔든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겠지만, 민해경의 노래를 계기로 이들이 손발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원래 시인이었던 박건호는 1970~80년대 정상의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1970년대 초 박인희의 ‘모닥불’로 데뷔했고 이수미가 노래한 ‘내 곁에 있어주’, 장은아가 부른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등 히트곡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가 정상의 인기 작사가로 군림한 것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비롯해 나미의 ‘빙글빙글’ ‘보이네’ ‘슬픈 인연’, 한울타리의 ‘그대는 나의 인생’, 최진희의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등을 작사한 1980년대일 것이다. 그는 섬세하게 조탁한 가사로 대중적 인기는 물론 동료 음악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건호에 비해 조금 아래 연배인 이범희는 서른 즈음에야 작곡가로 데뷔했다. 서울대 음대 출신인 그는 밴드에서 기타 연주자로, 또 레코드사에서 편곡가로 활동하다 박건호의 권유로 작곡가 생활을 시작했다. ‘잊혀진 계절’로 대박을 터뜨린 이후에는 최고의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톱가수치고 그가 작곡한 곡을 한두 곡 안 받은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스튜디오 세션으로 기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발굴’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가 김광석(기타), 변성룡(건반), 배수연(드럼) 등 신진 연주자들을 과감하게 녹음에 기용했다’는 박건호의 증언은 이범희가 음반 세션진을 풍성하게 한 데 일정한 구실을 했음을 증명한다.
1980년대 초 민해경, 박건호, 이범희가 빚어낸 작품은 그들 각각의 경력에서 정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뒤의 더 큰 성공에 가려지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주류 가요계의 빅뱅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또 스타 가수, 작사가, 작곡가로 풍미한 이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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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한’ 서린 절창 ‘여자 조용필’로
(64) 김수희
한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만으로 노래 전체를 압축적으로 상징해 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노래 제목이 가사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오늘 글의 주인공인 김수희의 “멍에”(추세호 작사?작곡)가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멍에. 다른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야속하고 한스러운 운명을 말한다. <멍에>는 사전심의 과정에서 네 번이 반려되었다는 사연도 함께 가지고 있다. 곡에 표현된 한 많은 사연만큼이나 곡 자체가 빛을 보는 과정에도 사연이 많았다.
<멍에>는 1982년 발표된 뒤 해를 넘기면서 히트를 넘어 홈런을 기록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던 이 곡이 아직 기억의 저장 장치에 남아 있다면, 잇다가 끊고 다시 이으면서 길게 흐느끼는 듯한 가수 특유의 발군의 창법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내게은 소중했더어어어어언”으로 들리는 절정부, 그리고 “마음이 괴로울 때며어어어언”으로 들리는 종결부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이 창법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말로 적절히 표현하기는 힘들다. 이 감정은 어떤 감정일까.
» ‘너무합니다’가 실린 1978년 김수희 음반
강준만은 최근 모 주간지에 실린 기사에서 <멍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을 하곤 했던 강남 여인들의 제1순위 단골 레퍼토리로 떠올랐고, 이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남성 고객들의 애창곡으로까지 발전했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강남 여인들’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고, 나 역시 공식적 지면에서는 별다른 대안적 표현을 발견할 수 없는 특정 시대 형성된 특정 집단에 대해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가수와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집단의 정서가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에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몇 년 뒤 본인이 직접 작사한 <서울여자>(김기표 작곡, 1990) 에서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연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멍에>가 김수희의 데뷔작은 아니다. 광주에서 상경한 뒤 1970년대 중반부터 미8군 무대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1970년대 말 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너무합니다>(윤향기 작사?작곡), <남포동 블루스>(신상호 작사?작곡) 등을 조금씩 알리고 있었다. <너무합니다>에 대해 “록 창법을 목이 메는 듯한 질감으로 소화하여, 퇴행적 비극성의 질감으로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평한 가요평론가 이영미의 발언은 그녀의 고된 경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것이 ‘퇴행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평론가 뿐만 아니라 청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어쨌거나 김수희의 노래를 예술로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었겠지만, 그녀의 곡의 호소력은 특정 공간의 특정 집단에 머무르지 않을 정도로 광범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사연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무 합니다>와 <멍에>에 뒤이어 <못 있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줘요>, <남행열차>, <마지막 포옹>, <님>(고 김정호 곡의 리메이크) 등이 크고 작은 히트를 기록했고, 그 결과 그녀에게는 ‘한때 여자 조용필’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 호칭은 아마도 야간업소에서의 유흥을 배경으로 하는 듯한 사운드에 한을 응축한 듯한 절창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수희의 지위가 조용필만큼 오랫 동안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김수희는 인기가 쇠락해 보이던 1993~4년 경 “애모”(유영건 작사?작곡)를 히트시키면서 10년만에 두 번째 홈런을 날린다. 1990년에 자신이 설립한 희레코드를 통해 발표된 이 곡은 한동안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지각 히트한 곡이었다. 1993~4년이라면 ‘신세대 댄스가요’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서, 가요평론가들과 신문기자들은 “한쪽으로 종횡무진 달려가는 획일적 댄스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는 식의 평을 쓰는 훌륭한 소재를 공급했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는 ‘성인의 유흥’의 대중화가 진행된 시대다. 이렇게 대중화된 성인의 유흥문화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우호적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나름대로 절실했고 그 절실함이 때로는 도덕이라는 ‘멍에’를 넘어섰던 것은 아닐까. <멍에>가 히트할 무렵, 강제징집을 당해 전방무대에서 박박 기던 필자로서는, 김수희의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던 ‘군바리’들이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는데, 입대한 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를 몸부림치면서 원망하고 또 그리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설프게 감정이입해 볼 뿐이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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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땅’ 등 당대 젊은이 음악 담아
(65)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
‘뜨거운 감자’, 독도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면 지금까지도 어김없이 불리는 노래가 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 등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지금도 그렇지만) 1982년, 정광태가 부른 이 노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불리는 고전(?)으로 남았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박인호(본명 박문영)는 1970년대 남성 듀오 ‘논두렁 밭두렁’의 원년 멤버로, 라디오 피디, 방송 작가 출신인 작곡가다. 그가 작곡한 노래는 대개 제목만 들어도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곡이다. 1984년 인순이가 부른, 각종 행사용 음악으로 선정된 ‘아름다운 우리나라’, 1989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그리고 최근 발표된, ‘독도는 우리 땅’의 2탄 격인 ‘신 독도는 우리 땅’ 등이 그러하다. 정광태에게 ‘김치주제가’, ‘짜라빠빠’ 등과 같은 코믹 송이나 ‘도요새의 비밀’ 등을 작곡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 이 노래가 실린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1982년 6월)라는 제호의 음반이다. 이 음반은 여러 곡들이 실린, 일명 ‘옴니버스 음반’이다. 요즘 횡행하는 컴필레이션 음반처럼 기존 음원을 재활용하거나 상업적으로 기획해서 베스트 음원을 수록한 것이 아니라, 신선한 감각을 실은 대학생들의, 대학생들을 위한 음악을 발굴한 편집 음반이었다.
»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 신형원의 ‘불씨’와 ‘유리벽’ 등으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 음반 커버 앞뒤.
이 음반을 발매한 음반사는 다름 아닌 대성음반이다. 우리의 기억을 되돌려 보면, 대성음반은 기획, 작곡 및 프로듀서인 김창완의 손을 거쳐 ‘캠퍼스 그룹사운드’들을 포함한 비주류 음악인들을 소개하는 창구 구실을 톡톡히 했던 곳이다.
이 음반을 제작한 이는 서희덕이라는 인물이다. 현재 그를 소개하려면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이라는 직함을 내밀어야 하지만,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4년께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음반기획사 ‘뮤직디자인’의 대표나, (1980년대 초에는) 대성음반의 문예부장과 만나게 된다. 디제이 생활로 잔뼈가 굵었던 그가 몸담았던 대성음반, 혹은 독립해 만든 뮤직디자인을 통해, 정광태(1983), 신형원(1984) 등의 솔로 음반을 비롯해서, 신촌 블루스의 1집 앨범(1988), 오석준·박정운·장필순의 앨범(1988) 등을 제작했다. (정광태와 신형원은 먼저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 음반에 노래를 실었다.) 그가 제작한 음반들에 흐르는 어떤 일맥상통함은, 시간이 흐른 1990년대 후반 모던 록 밴드 ‘델리 스파이스’ 음반을 발매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제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 음반을 살펴보자. 뒷면에 실린 기획의 변을 인용하면,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은 “캠퍼스에서… 즐겨 불”리던 노래, “‘영11’이나 ‘젊음의 행진’ 등 젊은이의 무대에서 활동해 왔”던 이들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던 노래다. “젊음의 신선과 정열 그리고 익살”을 담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덕규(종이비행기 노래의 ‘안녕’ ‘안녕이라 하지 말아요’)와, 엄인호(‘캠퍼스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소개된 김덕유 노래의 ‘처음 본 그녀 모습’) 등도 작곡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이 음반이 지향하는 바를 알려준다. 단, 음반이 표방한 대로 “코믹한 감각의 표현”이 담긴 다소 ‘웃기는 노래’(가령 ‘코끼리 아저씨’)보다는 실제로는 대부분 ‘웃기지 않는 노래’들이 많지만.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 외에 이 음반에서 주목할 만한 곡은 신형원의 ‘불씨’와 ‘유리벽’이다. 1980년대 중후반 ‘얼굴 없는 가수’로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서서히 반향을 일으켰던 여성 가수 신형원은 이 음반을 통해 리코딩 데뷔를 했다. 알려진 것처럼, ‘불씨’, ‘유리벽’, ‘개똥벌레’, ‘터’ 등 신형원의 대표곡을 작곡한 배후인물은 한돌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가기로 하자.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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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민중가요 넘나든 ‘빛나는 예외’
(66) 한돌과 신형원
지금 기준에서 보면 1980년대에는 없는 게 많았다. 인터넷은 물론 피씨통신도 없었고, 케이블방송은 남의 나라 얘기였으며, 지상파 티브이 방송이라고 해봐야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두 곳뿐이었다(교육방송은 논외로 하자). 그래서 대중음악을 소개하고 홍보할 통로도 많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여의도 방송가는 대중음악 홍보의 거의 유일무이한 통로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방송국을 통하지 않고 히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1980년대 중반 들국화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성공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 시절 ‘여의도 바깥’의 홍보 통로로 음악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다방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이곳에서 음악을 주재하던 디제이들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서 만만찮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별한 홍보 없이 자연적으로 히트한다는 업계용어인 속칭 ‘자연뽕’으로 히트한 곡들 가운데는 음악다방 디제이들이 자주 소개해준(또는 작정하고 밀어준) 덕분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84년 신형원이 부른 ‘불씨’와 ‘유리벽’도 음악다방 디제이들이 소개하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하게 되는 경우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 신형원의 음반을 만든 제작자가 디제이 출신으로 뮤직디자인 대표인 서희덕(현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이었다는 점은 당시의 정황을 암시한다. ‘불씨’와 ‘유리벽’은 음악다방에 자주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고 라디오를 통해 확고한 히트곡으로 올라섰다. 슬픈 사랑의 기억 때문에 사랑의 불꽃을 다시 태울 수 없음을 담담히 풀어낸 ‘불씨’와 모두 모른 척하고 아무도 깨뜨리지 않는 소통과 감정의 벽을 그린 ‘유리벽’의 가사, 신형원의 바이브레이션 없는 목소리와 서정적이고 담백한 곡조 모두 극적인 면은 없는 대신 맑고 순수한 이미지가 담뿍 묻어 있어 사람들에게 잔잔한 호소력을 발산했다. 정오차의 ‘바윗돌’이 그랬듯 신형원의 ‘불씨’ 역시 일부에서는 1980년 광주를 그린 곡으로 알려져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타이틀곡 ‘외사랑’은 절절하고 먹먹한 울림을 주는 곡으로 오래도록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 한돌의 1980년 데뷔 앨범.
신형원은 1987년 ‘개똥벌레’와 ‘터’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개똥벌레를 소재로 우화적인 가사와 경쾌한 곡조를 지닌 ‘개똥벌레’, 이 나라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벅찬 멜로디와 연주로 담아낸 ‘터’는 이 ‘얼굴 없는 가수’를 스타의 자리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댄스가요를 필두로 한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악이 대중매체를 점령하던 시절 신형원의 곡들은 1980년대에 ‘경착륙’해버린 포크 음악이 발라드로 변형 수렴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빛나는 예외였다.
신형원의 입을 통해 널리 울려퍼진 곡들의 배후에는 한돌이 있었다. 한돌은 1970년대 후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 참여한 후 1980년 ‘터’를 포함해 10곡을 담은 데뷔 음반을 내놓았지만 시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전담하다시피 신형원에게 만들어준 곡들이 크게 히트하면서 ‘얼굴 없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한영애가 부른 ‘여울목’과 ‘조율’, 구전가요처럼 알려진 ‘못생긴 얼굴’이란 곡도 그의 작품이다. 특히 못생기고 가난한 집의 아이를 화자로 삼은 ‘신랄한 동요’인 ‘못생긴 얼굴’은 대학가에 널리 구전되며 많은 대학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곡이다.
한돌은 사회성을 누락하지 않으면서 일상에서 길어낸 메시지를 잘 조탁한 한국어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를 결합해 한국적 정서와 서민적 정취를 독특하게 갈무리한 음악인이었다. 그가 만든 곡들은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넘나드는 몇 안 되는 예외였다. 비록 그를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작사·작곡가로서 그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김민기와 비교되곤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한돌은 한국의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가져온 영감과 소재를 노래로 빚어낸 장인이자 노래의 사회성과 민족성을 중시한 음악인이기도 하다. ‘홀로 아리랑’은 그 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곡일 것이다. 1988년에 자신이 직접, 이듬해에는 서유석의 목소리를 빌어 녹음한 ‘홀로 아리랑’은 대중적으로 독도문제를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서유석과 함께 독도사랑운동을 펼치면서 이를 뒷받침했다. ‘홀로 아리랑’은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과 함께 유이(唯二)한 독도 사랑 노래로 지금도 남아 있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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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와 산조의 만남 주선한 ‘한국의 딥 퍼플’
(67) 하드 록부터 기타 산조까지: 작은 거인 김수철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이 노래는 잘 알려져 있듯 ‘젊은 그대’다. 어떤 이들은 이 노래를 월드컵 송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재기와 용기를 위해 사용한 모 보험 광고의 로고송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일찍부터 캠퍼스송에서 응원가로 낙점되었다가, 이후 세월이 흐르며 전국민 애창가요로 업그레이드된 이 노래의 주인공은 바로 김수철이다.
1980년대의 김수철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듯, 슈퍼스타 조용필의 독주에 (전영록, 이용, 송골매 같은 캠퍼스 그룹사운드 등과 더불어) ‘감히’ 도전했던 가수 중 하나였다. 처음 그는, 아마추어 대학생들의 음악적 출발이 그랬던 것처럼, 3인조 캠퍼스 그룹사운드 ‘작은 거인’을 통해 등장했다. 1978년 전국대학축제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면서 시작된 그(들)의 재기 넘치는 행보는 열혈 음악광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혹자들은 ‘한국 하드 록의 비조’ 혹은 ‘한국 로큰롤 키드의 원조’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드 록 넘버 ‘일곱 색깔 무지개’, 흔히 국악가요 1호라 칭송되는 ‘별리’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이때 나타났다. 김수철은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의 작곡가로서도 서서히 알려졌다.
» 재기발랄한 음악을 앞세운 대중적 인기의 정점, 이후에 그려질 비의(秘意)의 한국적 수묵화를 예비한 김수철의 2집 앨범(1984).
하지만 김수철의 인기 정점이 솔로 음반(1983년) 발매 이후라는 점은 그 시절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당시 구창모와 더불어 ‘록 밴드에서 독립한 솔로 가수’의 전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기 가도의 신호탄이 된 1집 대표곡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잔잔하게 읊조리다 순간 폭발하는 세칭 ‘록 발라드’의 공식이 십분 활용된 곡이 아닐까. 또한 2집에 실린 호기로운 청춘찬가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도 줄지어 히트했다. 그뿐인가.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맡고 배우로까지 출연하면서 1984년을 ‘김수철의 해’로 만들었다.
그런데 앨범 커버들의 흑백 사진에 서린 비애감과 비장미는 일종의 전조였을까? 무대에서 깡충거리며 재기발랄하게 기타를 후리는 총아로서 급부상했지만, 곧 화려한 환호성과 멀어졌다. 그렇다고 그가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스타덤에서 멀어져 가는 대신 ‘원 맨 밴드’의 야심을 벼렸고, 기타를 물어뜯으며 현란하게 연주하는 ‘한국의 지미 헨드릭스 혹은 딥 퍼플’이라는 이미지 대신, 산조와 일렉트릭 기타가, 사물과 클래식 관현악기가 융합하는 꿈을 꾸었다. ‘국악의 대중화’ ‘전통 음악의 현대화’라는 그의 거대한 목표에 물꼬가 된 것은 영화음악, 무용음악을 비롯해,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게임, 2002년 월드컵 등 국가 이익과 절충된 행사음악 프로젝트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은막 뒤의 음악은 대중적이면서도 심미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매체였고, 국악을 대중적으로 접목하기 위한 훌륭한 소재였다. 〈칠수와 만수〉(1988), 〈그들도 우리처럼〉(1990), 〈베를린 리포트〉(1991) 등 많은 문제작들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특히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등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김수철의 음악이 ‘한국적’ 모드로 결탁했다. 그 중에서 판소리와 조우한 〈서편제〉의 경우 영화음악 음반뿐 아니라 국악 음반으로도 큰 수치의 판매고(대략 70만장)를 기록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진정한 한국적 대중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우리 음악’이란 궁극의 정언명령이자 난맥의 화두인지도 모른다. 이 목록에서 우리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을, 한국 록의 적자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 등을 쉽게 열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김수철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김수철의 시도가 여러 가지 면에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논할 것이 아니지만, 그의 작업이 국악을 대중화한 하나의 전범이자 대명사로 남았다는 것은 기록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난 시절의 ‘팝스 앤드 록’ 음악들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겠지만….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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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같은 하모니 들려준 사랑의 메신저
(68) 해바라기
1980년대 한국 팝에 대한 인상은 화려하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작은 거울을 표면에 무수히 붙인 미러볼이 ‘무도장’의 천장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반사광을 반짝거리는 이미지 같았다. 실제 1980년대는 나이트클럽이 만개했고 ‘총천연색’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런 화려함이 지배적일지는 몰라도 ‘하나의’ 인상일 것이다. 그 반대편에 차분한 인상의 음악들도 엄존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댄스 음악의 화려한 군무와 함께 메탈 밴드가 내뿜는 강렬한 사운드가 좀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 남성 2인조 듀엣 해바라기가 이른바 다운타운가부터 지지세를 높여갔다. 1970년대 말 4인조 해바라기(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반갑지만 낯선 등장이었다. ‘구름 들꽃 돌 연인’ ‘뭉게구름’ 등 자연주의적 포크송과 맨해튼 트랜스퍼풍의 알싸한 하모니를 들려주던 오리지널 해바라기와 달리, 이 새로운 해바라기는 이주호라는 멤버의 계승 외에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었다. 하지만 새 해바라기는 얼마 안 가 4인조 해바라기의 기억을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거의 지우고 ‘해바라기 = 이주호 + 1’이란 등식을 확고히 성립시킬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해바라기 하면 2인조 해바라기를 당연시할 정도다.
2인조 해바라기는 ‘이주호 + 1’의 구성으로 지금까지도 (계속 파트너가 바뀌며) 롱런 중이지만, 2인조 해바라기 하면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라인업은 이주호와 유익종이다. 오리지널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1970년대 ‘그린 빈스’ 출신의 유익종은 1982년 의기투합한 뒤 이듬해 봄 어두운 카페 창가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진을 표지로 한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재미로 하는 말이지만 커버 사진에 담긴 다정한 모습은 요즘이라면 다르게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이 데뷔 앨범의 수록곡들을 지금 새삼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행복을 주는 사람’ ‘사랑의 시’ ‘갈 수 없는 나라’ ‘모두가 사랑이에요’ 등 해바라기의 대표적인 히트곡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흔히 주옥같다고 표현하는 이 레퍼토리들은 노래나 연주, 편곡 모두 크게 흠잡을 구석은 없었지만 대중적 호응을 불러내지는 못했다.
» 1986년에 발매한 해바라기의 3집 앨범.
해바라기는 유익종이 빠지고 그 자리를 이광준이 대신한 뒤 발표한 2집을 통해서야 인지도와 인기를 모았다. 그런데 2집에서 히트한 곡의 다수는 ‘어서 말을 해’를 제외하면 1집에 이미 수록되었던 곡들(위에 열거한 곡들)을 재녹음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노래의 운명은 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그래도 2집 버전의 히트 원인을 궁리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2집 버전들은 요즘 유행하는 ‘포샵질’로 비유하면 채도를 올리고 콘트라스트를 높여서 다소 강한 색감과 좀더 쨍한 이미지로 보정한 것 같았다. 다시 말해 1집에 비해 신시사이저와 기타 연주가 또렷하게 들리는 데서 보듯, 편곡과 연주의 초점이 분명해졌다. 이호준(키보드), 이영재(기타) 등 세션진의 기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해바라기는 2집을 계기로 라디오를 거쳐 티브이에서도 환영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1985년 연말에는 KBS가요대상을 받으며 스타의 자리를 확인받았다. 이듬해 3집에서는 다시 이광준 대신 유익종이 들어왔는데, ‘내 마음의 보석상자’와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를 히트시키며 저력을 보여주었다. 연말 방송사 가요대상을 수상했음은 물론이다. 해바라기의 인기는 1989년 ‘사랑으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해바라기는 닐 영을 닮은 이주호의 음색과 아름다운 보컬 듀엣 하모니, 듣는 이를 따스하게 감싸는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1980년대 후반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듀엣일 뿐 아니라 당시 1970년대 통기타 포크를 계승한 몇 안 되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물론 포크를 발라드 연가로 속화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강렬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변모해가던 가요계에서 오랫동안 분투하며 잔잔하고 차분한 서정성을 깊이 뿌리내린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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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주제곡으로 최단기간에 히트
(69)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과 되찾은 도시의 서민
1983년 6월30일부터 11월4일까지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은? 불행히도 이렇게 질문을 던져 놓고 정확한 통계를 찾는데 실패하고 있지만, 추측컨대 KBS-TV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한때 시청률 64%를 기록했다니 나의 추측이 많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2시간짜리로 시작된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24시간 철야방송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 한 명과 히트곡 한 곡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바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박건호 작사·남국인 작곡)이다.
<잃어버린 30년>은 <아버님께>라는 제목으로 이미 녹음을 한번 했던 곡이고, 원래의 가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바람이 부나 노를 젓는 우리 아버지 / 살을 에는 찬바람도 참고 견디며 / 한 평생을 보낸 낙동강…”. 그런데 갑자기 왜 이 곡이 ‘이산가족’을 다룬 주제곡이 되었던 것일까? 설운도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기억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설운도와 그의 매니저 안태섭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고 있었다. →안태섭이 “이거다!”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작사가 박건호를 불렀다.→박건호가 밤을 새워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다음 날 스튜디오에서 5시간에 걸쳐 노래를 녹음했다. →KBS에 가서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했다 → PD 한 명이 이를 듣고 상부의 허가를 받아 이 곡을 방송했다. 그 결과 이 곡은 ‘최단 기간에 히트한 곡’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돌아와요 부산항에>처럼 <잃어버린 30년>도 개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곡의 또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그런데 설운도는 이 곡이 벼락 히트하기 1년 전인 1982년 KBS의 <신인탄생> 프로그램에서 연속 5주 우승을 차지해서 ‘스페셜 아워’의 주인공이 된 일이 있다. 훨씬 전인 1974년
<잃어버린 30년>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형식의 ‘1960년대풍 엘레지’라서 가수의 개성을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설운도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나침반>(김상길 작사·이유림 작곡)과 <마음이 울적해서>(정월하 작사·김정일 작곡)가 히트하면서 ‘슬프고 구성진 노래’와 연관된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었다. 설운도가 트위스트, 차차차, 삼바 등의 리듬을 트로트 곡조와 뒤섞어 ‘트로트 싱어송라이터’의 독보적 존재가 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지만, 이미 이때부터 ‘장조의 경쾌한 리듬과 명랑한 곡조의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트로트가 농촌적 감성을 벗어나 도회적 감성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게임 주최 등을 앞두고 국제적 메트로폴리스를 지향했던 서울을 ‘제2의 고향’을 삼고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트로트는 특유의 호소력을 이어나갔다. 특히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가 연달아 등장하는 <나침반>의 가사는 1980년대 중반 서민들을 위한 여가의 공공 공간의 위치도를 정확히 그려주고 있다.
그런데 설운도가 <잃어버린 30년>과 <나침반>의 사이인 1984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서 ‘블루 스카이’라는 업소에 출연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자기쇄신을 단행했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가수들에게 ‘일본’은 무슨 의미였을까. 1980년대 꽤 많은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 건너가는데 이런 사례들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알아 보자. ‘트로트=왜색’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일 문화교류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차원에서….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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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스타 예비한 ‘편집음반’의 전범
(70) 혼자 혹은 함께 노래하다: ‘우리 노래 전시회’와 ‘따로 또 같이’
편집 음반(컴필레이션 음반)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여러 가수의 음원을 특정 주제로 묶은 ‘모둠’ 음반, 뮤지션의 대표곡들을 선집한 베스트 음반, 그리고 기존곡들을 재해석해 모은 리메이크 음반 등. 이때 호명되는 음원이란 대개 신품(新品)이 아닌, 구품(舊品)의 재활용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한때 불황의 음악시장에 번졌던, 스타 사진을 앞세우고 물량으로 밀어붙인 편집 음반 신드롬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지만 전범이 될 법한 편집 음반들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70년대 대표작으로는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14집까지 발매된 컴필레이션 시리즈 〈골든 포크 앨범〉이 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서는 이른바 ‘옴니버스 음반’의 대명사로는 〈우리 노래 전시회〉 연작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시리즈는 ‘새로운 감수성’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로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넉 장이 발표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연작은 (특히 〈우리 노래 전시회 I〉은) 작곡과 프로듀싱을 한 최성원의 진두지휘 아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불린 신진세력을 결집시키고, 동시에 이후 전개될 ‘폭발’을 예비하게 된다.
» 〈우리 노래 전시회 I〉 시디 재발매본. 80년대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하는 창구이자, 특히 들국화의 주류 돌파를 예비하게 된 ‘옴니버스 음반’의 대명사다.
첫 〈전시회〉만 주목해 보자. 여기서 한 곡씩 선보인 8인 중 대다수는 나중에 (그룹으로든 솔로로든) 정규 앨범을 성공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음반은 마치 싱글 음반 모음집 같다. 가령 이 음반 발표 사후에 잔잔한 파장의 주역이 된 ‘어떤 날’, ‘시인과 촌장’의 맹아가 ‘너무 아쉬워하지 마’, ‘비둘기에게’라는 트랙을 통해 선재(先在)한다. 이 곡들은, 훗날 버전의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풋풋하고 소박한 풍미가 맛깔스럽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지겨운 이야기겠지만 무엇보다 들국화의 ‘산파’가 된 음반이기도 하다. 후일 들국화의 히트곡들이 먼저 ‘전시’되었으니 두 버전들을 비교해 들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전인권)의 질박한 폭발, ‘매일 그대와’(강인원)의 청아한 서정,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광조)의 다층적인 화성, ‘제발’(최성원)의 담담한 색채 등.
〈우리 노래 전시회 I〉의 단짝 음반도 있는데 바로 ‘따로 또 같이’의 작품, 그중에서도 2집(1984)이 그것이다. 우리 노래 전시회의 수장 최성원은 ‘따로 또 같이’ 2집에 세션 연주로, 전인권은 1집에 보컬로 참여했다. 역으로 ‘따로 또 같이’ 멤버도 우리 노래 전시회 시리즈에 참가했다. 조원익(베이스), 허성욱 및 김광민(피아노), 안기승(드럼) 등 세션의 면모조차 공통적이다. 공교롭게 여성 보컬도 한 트랙씩만 차지했다. 하지만 팀 이름 때문일까. ‘따로 또 같이’는 1집 이후 해체되었지만 몇 년 뒤 이주원, 강인원, 나동민은 다시 만나 2집을 발표했다. 이후 나동민과 이주원의 듀오가 된다.
‘따로 또 같이’ 2집에는 세련된 감각의 작곡과 사운드가 잔잔한 파장을 기록한다. 소년적 감수성의 강인원(‘첫사랑’ 등), 다소 어두운 색채의 이주원(‘하우가’ ‘별조차 잠든 하늘엔’ 등), 나긋나긋하게 읊조리는 나동민(‘조용히 들어요’)의 3인 3색의 메인메뉴에, 객원 보컬 우순실(‘커텐을 젖히면’)의 훌륭한 사이드메뉴까지…. 세션 연주자가 주도하는 1집과 달리, 멤버들의 장악력이 확대된 2집에서는 정갈하고 세련된 사운드로 갈무리되고 있다. 섬세하고도 영롱한 어쿠스틱 기타가 골간을 이루지만 곳곳에서 양념처럼 이영재의 일렉트릭 기타가 뻗어나간다.
그런데 ‘따로 또 같이’라는 이름은 일개 그룹명의 차원을 뛰어넘어, 1970년대 말 이후 언더그라운드라는 판이 모색해낸 (동시에, 보헤미안 특유의 ‘게으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태동한) 하나의 대안적 방식이 아닐까. 이 두 음반은, 도처에 산개하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흐름을 수렴시키고, 또 이를 들국화의 돌파로 응축시킨 나들목 구실을 했다. 이런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은 대개 ‘동아기획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되곤 한다. 이 기수(旗手)들의 이야기는 뒤에서 몇 차례 이어질 것이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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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강요된 건전가요의 대표
(71) 건전가요와 관제가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공공의 적’ 비판과 대중인기 한몸에
지난 시대, 가요가 건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의 바탕에는 대중음악이 연예와 유흥의 도구에 불과하며, 국민과 마찬가지로 계도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오만하거나 위험하거나 또는 두 가지 다 해당될 이런 생각은 지난 세기 오랫동안 횡행하며 대중음악계를 짓눌렀다. 음반의 사전심의와 검열, 금지곡 판정 같은 제도적 폭력과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 고초를 겪는 등의 일상적 폭력이 남긴 흔적은 가요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80년대 음반을 구입해 본 사람이라면 엘피나 카세트테이프에 꼭 한 곡씩 생뚱맞게 들어 있던 건전가요를 기억할 것이다. 그 시대에 발매된 가요 음반에는 음반의 주인공이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음반의 에이면이나 비면의 마지막에 어김없이 군가나 창작 건전가요가 삽입되어 감상자를 ‘깨게’ 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당시엔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의무였으니까. ‘조국찬가’ ‘어허야 둥기둥기’ ‘시장에 가면’ 같은 곡들은 당시 음반 끝자락에 ‘(건전가요)’란 꼬리말을 대동한 채 수도 없이 실렸다.
그런데 건전가요의 대표곡으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박건호 작사, 김재일 작곡)을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크게 히트한 건전가요이며, 나아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가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적인 건전가요가 짜증이나 무시의 대상이었던 것과 달리 이 곡은 ‘뜨거운 감자’ 같은 곡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란 가사는 전두환 정권으로선 쌍수 들어 환영할 만한 모범적인 사례였지만, 당시 정권의 폭압과 부도덕함을 온몸으로 느끼던 사람들에겐 현실을 호도하는 프로파간다에 다름아니었다. 그래서 이 곡은 사회정화위원회와 한국방송협회 제정 건전가요로 뽑히며 무서운 기세로 보급된 반면, 반대편에선 대중가요의 부정적 측면을 증명하는 ‘공공의 적’ 같은 비판 사례로 빠지지 않았다.
» ‘아! 대한민국’이 듀엣으로 실린 ‘건전가요 컴필레이션’ 〈아! 대한민국〉(지구레코드, 1983).
1983년에 발표된 ‘아! 대한민국’은 통념과 달리 원래 정수라의 솔로 곡이 아니었다. ‘즐거운 우리들의 노래’란 부제를 단 컴필레이션 음반 〈아! 대한민국〉에 정수라와 장재현의 남녀 듀엣곡으로 첫선을 보였던 것이다. 이 음반은 ‘우리의 선진조국’ ‘희망의 거리’ ‘서로 믿는 우리 마음’ 등 곡명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듯 건전가요를 망라한 모음집이었다. 물론 ‘아! 대한민국’이 히트한 것은 얼마 뒤 정수라의 독집에 타이틀곡으로 실리면서부터다. ‘아! 대한민국’의 작사가 박건호는 이 곡이 흔히 말하듯 관제가요가 아니며 정권에 아부한 작품도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정화위원회의 모 위원으로부터 건전가요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가사를 쓰게 된 게 사실이지만, 정권과는 무관하게 나라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진심으로 엮은 것이라는 얘기다. (‘아! 대한민국’에 얽힌 자세한 뒷얘기와 박건호의 입장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를 참고하라) 우리가 아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그로부터 10여년 전에도 있었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말이다. 완전히 ‘찍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명곡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온 ‘아름다운 강산’과 달리, ‘아! 대한민국’은 너무나 큰 히트를 기록하고 관제가요로 적극 활용된 탓인지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아! 대한민국’에 대한 그간의 비판들을 거둬야 할까. 우선은 하나의 곡에 대해 개인적으로 왈가왈부하기보다는, 1980년대라는 시대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를 좀더 집단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도 정치와 마찬가지로 ‘생물’처럼 움직이는 것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도 전제해야 할 듯하다. 분명한 것은 ‘아! 대한민국’이 매우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이제 차분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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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들, 가요와 만나고 헤어지고
(72) 정광태의 <화랑 관창>에서 조용필의 <황진이>까지
오랜만에 책장에 꽂혀 있는 옛날 책 한 권을 꺼냈다. 마침 1970년대 중반에 전개되었던 ‘청년문화 논쟁’이 언급되어 있었다. 1974년 소설가 최인호와 가수 이장희 등을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언급한 한 일간지 기사가 있었는데, 대학신문(이른바 ‘학보’)이 이를 반박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나 저제나 ‘여고생’이 좋아하는 문화를 ‘남대생’이 인정하기란 자존심 상하는 법이다. 그런데 당시 대학생 한 명이 “한국 청년문화의 정신은 화랑도”라고 언급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청년문화와 화랑도라. 당시 대학생 엘리트들의 문화 역시 ‘애국애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혹시 ‘화랑정신’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없을까?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의 주인공인 정광태가 1984년에 발표한 앨범의 수록곡이다. 이 앨범의 히트곡은 <도요새의 비밀>이지만, <화랑 관창>과 더불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정광태는 현재 ‘독도명예군수’라는 지위를 가지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그의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보면 될 것이다. 단, 정광태가 1970년대 청년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궤적은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작가 최인호가 <상도>나 <해신>을 쓰게 되는 변화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화랑관창>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곡들이 대거 실린 정광태의 1984년 앨범.
정광태처럼 앨범의 전체 주제를 역사 인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 초중반에는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노래가 꽤 있었다. 그 가운데 선명하게 기억나는 곡은 이동기의 <논개>(이건우 작사·이동기 작곡)다. 이 곡은 이른바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에 해당하는 사례일 것이다. 가수 본인에게는 무례한 말이겠지만, 그 뒤로 이만한 히트곡이 나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후문으로는 1980년대 말 김흥국이 불러서 히트시킨 <호랑나비>를 원래는 이동기가 부를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불운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동기는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조 가수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음악외적으로 그다지 불운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가수로서의 경력은 길고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가수가 부른 노래의 생명은 꽤 오래 남아 있었다. 장조의 전주에 이어 단조의 멜로디가 나오다가 후렴구에서 다시 장조로 변하는 이 곡은 이동기의 씩씩한 창법의 노래와 결합해서 한동안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하지만 ‘논개의 숭고한 헌신적 애국심’을 상상하기에는 이 곡은 너무 경쾌하고 명랑했다. 거기에 “꽃입술 입에 물고”, “뜨거운 그 입술” 등의 가사도 선정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이 곡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는 후렴구의 가사일 것이다. 이걸 야릇한 의미로 해석했다면 그 사람들(주로 남자들)이 문제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어쩔 수도 없는 법이다. 게다가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빌어 간 그 사랑 그 사랑 영원하리”라는 가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빌어 간’이 무슨 뜻이고, ‘사랑’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지금도 묘연하다. 어쨌든 이 곡은 술집(뒤에는 노래방)에서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로 합창하기에 적절한 노래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조용필은 <황진이>를 불렀다. 이 곡은 국악이나 민요를 팝이나 록과 퓨전하는 그 당시 조용필의 음악적 모색의 연장선상에 있는 곡이었지만,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조용필 노래로서는 많이 히트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시간이 한참 뒤에는 일부에서 ‘한국 최초로 랩을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홍서범의 <김삿갓>이 등장했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한편 동요, 군가 등에서 역사적 인물을 다룬 곡은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역사적 인물을 노래의 소재로 삼았던 사례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 등장하면서 일단락을 지은 것 같다. 일단락치고는 다소 희극적이었지만…. 희극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소시적 들었던 <충무공의 노래>라는 군가 혹은 건전가요 때문이다.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으로 장엄하고 살벌하게 시작하는 노래를 기억하는가. 그때는 이런 노래가 ‘대중적’이었다. 하긴, 이 노래를 다시 들으니 희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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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전설적 진혼곡이자 희망가, 노래패 입 통해 ‘민중의 애국가’로
(73) ‘님을 위한 행진곡’과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1980년대는 정치사적으로 불행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광주항쟁으로 상징되는, 이 어두운 시기를 함께 한 노래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거리에 나선 이들에게, 집회의 식순용 (‘애국의례’를 대신하는) ‘민중의례’이면서, 동시에 전의를 다지는 결의가 역할을 했다. 민중가요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은 들어봤을 노래여서 ‘사천만 민중의 애국가’라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하는 비장한 단조 행진곡인 이 노래는 〈빛의 결혼식〉이라는 노래굿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굿은, 1980년 광주항쟁의 상징적 인물 윤상원과, 1979년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다 숨진 박기순의 실제 영혼 결혼식(1982년 2월)을 모티브로 만든 문제작이었다. 〈빛의 결혼식〉의 원본 테이프와 〈님을 위한 행진곡〉의 당시 악보는 지난해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공개되어, 이에 대한 소문만 들었던 이들에게는 궁금증을 푸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 1979년 발표된 서울대학교 노래 동아리 메아리 1집의 1997년 복각판.
그런데 이 노래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영혼 결혼식이 있은 지 몇 달 뒤,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은밀히 〈빛의 결혼식〉과 〈님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는 ‘그 바닥’에서는 유명한 전설이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만들고, (1979년 제3회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작 ‘영랑과 강진’의)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극중에서 결혼을 한 두 영혼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당시 구절은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였다)라고 선동하는 내용인 만큼, 이 노래는 죽은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인 동시에, 광주항쟁으로 대변되는, 패배와 좌절을 경험한 이들을 위한 희망가가 되었다. 이후 이 노래는 빠른 격정미와 느린 유장미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단조 행진곡풍 민중가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노래를 포함한 30여분짜리 노래극은 단지 작은 포터블 카세트 녹음기로 녹음한 조악한 산물이었다. 하지만 ‘원시적’이었을지언정 그 속에 내장된 파급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퍼지며 ‘비합법’의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광주에서 만들어진 테이프 속의 노래가 서울까지 퍼진 데에는 대학 노래패들의 힘이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던 서울대의 메아리, 이화여대의 한소리 등이 대표적이다. 애초 메아리나 한소리 같은 동아리들은 운동 지향적이기보다는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1970년대 포크 문화의 계승자였는데, (특히 메아리는) 김민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메아리와 한소리는 1978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서 ‘얼굴 없는 목소리’로 참여한 바 있다.
역으로, 공식적으로 음반에 발표된 적 없는 김민기의 여러 노래들이 메아리의 음반(테이프)에 먼저 담기기도 했다. 가령 1집 테이프의 ‘개판으로 젖히는 거지 뭘’은 나중에 ‘소금땀 흘리흘리’라고 알려진 곡이다. 1979년의 메아리 1집은 음악녹음실이 아니라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녹음할 수밖에 없었지만, 1980년 여름에 발표된 2집은 (이전에 수 차례 언급한 바 있듯) 이장희가 운영하던 랩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김민기가 주선한 덕이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노래패의 성향이 바뀔뿐더러 이들 멤버가 다수 참여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등을 통해 노래운동의 폭도 넓어진다. 메아리 등은 노찾사를 구성하는 여러 갈래 중 하나가 된 셈이다. 훗날 김광석이 부른 〈나의 노래〉나, 노찾사가 부른 다수의 노래들도 이때 이미 발표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정기·비정기적인 여러 공연을 비롯해 노래책 발간, 노래테이프 보급 등을 통해 당시 합법적으로 발표되지 못했던 많은 노래들을 기록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그 이상의 활동은 캠퍼스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했지만.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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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구 증가와 강남개발 등에 입은 도시의 송가, ‘시티뮤직’
(74) 윤수일의 아파트
대중음악에 시대와 사회상이 묻어 있다는 점은 ‘다들 알고 있지만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다.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등 제목만으로도 구수하고 구슬픈 이미자의 곡들이 1960년대 독보적인 인기를 누린 데에는 그 시절 ‘이촌향도’(離村向都)의 거대한 사회현상과 그에 따른 망향(望鄕)의 정서와 불가분했기 때문이란 해석은 ‘해묵은’ 예일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10년 동안 도시인구는 거의 두 배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대중음악이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인식할 이유는 없지만, 시대 및 사회상과 조응하는 면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는 있을 것이다.
1982년 나온 윤수일의 <아파트>는 제목에서 보듯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82년이라면, 1970년대 후반 서울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막 각광받기 시작하던 시기다. 물론 지금처럼 아파트가 도시의 숲을 이룬 때는 아니고 아직은 동경의 대상인 시기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실제 아파트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는 곳에 있었든 아니었든, 윤수일의 곡은 당시 아파트가 유력한 주거형태로 선망되기 시작하고 도시인구가 전체 인구의 2/3에 이르렀던 시점의 풍경을 음악적으로 보여주는 스냅사진 같은 노래였다.
» 1982년에 나온 윤수일 밴드의 2집으로 ‘아파트’가 실려있다.
여기서 윤수일이 1970년대 중반 골든 그레입스의 기타리스트로 경력을 시작해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스타덤에 올랐으며 <갈대>, <추억>, <나나>, <유랑자> 등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인기 남자 가수로 활약했다는 과거 경력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에 관해선 <한겨레> 2006년 1월 19일치에 실린 이 연재의 36회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하지만 그가 1980년을 끝으로 트로트 고고에 기댄 솔로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자신의 진정한 1980년대를 개막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81년 <떠나지마>와 <당신은 나의 첫사랑>을 타이틀로 한 윤수일밴드의 데뷔 앨범은 그가 솔로 시절에 ‘마음껏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못한’ 음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음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윤수일밴드 1집은 록 음반이었다. 신중현과 엽전들 풍의 <떠나지마>는 그의 음악경력의 시발점을 무엇인지 보여주며, 흥겨우면서 거친 <제2의 고향>은 솔로 시절 트로트 고고를 앞세우면서도 그가 당대의 영미권 록 음악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 그는 트로트의 잔재를 거의 털어내고 하드 록에 가까운 거친 곡과 느린 템포의 록 발라드를 중심으로 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음악을 펼칠지 음악으로 포효한 것이다.
1982년 발표한 2집은 윤수일의 지향점이 대중과 가장 크게 합일한 대표작일 것이다. 타이틀 곡 <아파트>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거의 국민가요 급으로 히트했고, 뒤에 대표적인 스포츠 경기 응원가로, 노래방 애창가요로 큰 인기를 얻었다. 다시 녹음하여 수록한 <제2의 고향> 역시 크게 히트하며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와 유사하게 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록 넘버로 남았다. 윤수일밴드는 1984년 발표한 3집에서 <아름다워>를, 1985년 4집에서 <환상의 섬>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전영록 부럽지 않은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80년대 윤수일은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걸친 채 마이크대를 잡고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지금 다시 유심히 들어보면 깜짝 놀랄 대목이 있을 만큼 그의 노래는 완연한 록 사운드에 바탕한 것이었다. 윤수일이 늘 첨단의 사운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요계에서 밴드를 이끌며 메인스트림 록 음악의 틀을 다진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런데 그 시절 윤수일밴드의 음악은 ‘시티 뮤직’으로 불렸다. 자칭이든 타칭이든, 또 적합하든 아니든, 시티 뮤직이란 명명은 1980년대 윤수일밴드의 음악을 특징짓는 용어로 너른 공감을 얻었다. 아참, 그 시절 <유.에프.오.>라는 곡을 발표한 적도 있다. 궁금한 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아도 좋을 듯.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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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자작곡 여가수 혜성 같은 등장
(75)심수봉과 ‘그때 그사람’
트로트를 ‘예술’이라 부르기 꺼림칙하다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트로트 가수 대부분이 그냥 가수이지 ‘작가’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트로트 가수들은 작사가나 작곡가가 ‘주는’ 곡을 ‘받아’ 부르는 존재인데, 이런 분업관계가 확고하면 그 장르는 예술로 대접받기 힘들다. 이는 일종의 성별 분업이기도 하다. 트로트를 포함한 재래가요의 경우 여성가수의 비중은 남자가수를 압도했지만, 작사가나 작곡가의 경우 여성의 비중은 크지 않다. 결국 트로트계에서 ‘여성 싱어송라이터’란 불가능한 범주같다.
이런 상황에서 심수봉의 탄생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포크송이나 그룹사운드가 중심이던 1978년 엠비시 대학가요제에 본명(심민경)으로 출전,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아이보리색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그때 그 사람>이라는 ‘자작곡 트로트’를 부르던 모습은 하나의 비경(秘經)이었다. 그녀는 수상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혹은 그럴 수 없었지만), 대학가요제에 함께 출전한 최현군과 스플릿 앨범(2인1조 음반)을 발표하면서, 신비감과는 거리가 멀었던 여느 트로트 가수와는 상이한 길을 걸었다. 쥐어짜며 절창하는 트로트의 관행과 달리 그녀는 힘을 주지 않고 비음 섞여 한들거리는 독특한 창법을 가지고 있었다. ‘통속적’인 가사도 그녀의 목소리를 거치면 ‘통속적인 것이야말로 절박한 것’이라는 명제를 마법적으로 확립시켰다.
* 심수봉의 문제작 ‘그때 그사람’이 수록된 (최현군과의 스플릿 음반) <그때 그 사람/백팔번뇌>(1979)
10·26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는 한동안 방송출연을 정지당했다. 1983년 드라마 주제곡으로 작사·작곡한 <순자의 가을>도 ‘순자’라는 이름 때문에 금지되어, 나중에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곡명을 바꾸고 가수를 방미로 교체한 뒤에야 대중과 만날 수 있었다. 꽤나 길었던 수난기가 그녀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의 절절함을 더했을 듯하다.
방송정지가 풀린 1984년 이후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다시 한 번 절절함을 전했지만, 방송사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찾기는 힘들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1980년대 내내 ‘비자발적 언더그라운드’였던 셈. 그러나 <무궁화>(1985), <사랑밖에 난 몰라>(1986), <미워요>(1988)에서 만개한 심수봉의 노래를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방송이나 음반과는 별도로 그 수요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여러 공적 공간에서 감정을 가득 실어 심수봉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찾기 어렵지 않다. 심수봉의 트로트는 대학생이나 지식인은 물론 민중가요와도 대립적이지 않았다.
<무궁화>의 경우 가사가 ‘박 대통령을 연상시켜’ 금지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게 전두환만의 생각인지 작가의 의도도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올해 열린 ‘광주오월음악제’에서 그녀가 <그때 그 사람>과 더불어 <무궁화>를 부른 사실은 설명하기 힘들다. 본인은 그저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엄마 심정을 담았다”고만 밝혔다. 하긴 더이상 설명하면, 흥미가 반감될 일이다. 이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소시적 <아이 러브 로큰롤>을 불렀던 여인이 후일 카바레에서 부르던 <사랑밖에 난 몰라>가 감정은 짠하지만 의미는 선명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트로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양면적인데, 심수봉의 트로트는 그런 양면성을 극한으로 몰아가 신비롭게 만든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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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수로 재능 빛낸 80년대 ‘비’
(76) 만능 연예인의 초상화, 전영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재다능은 많은 연예인들의 꿈이었다. 이런 성공적인 ‘겸직’의 선례는 1980년대에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전영록이다. 요즘으로 치면 비(정지훈)에 빗댈 수 있으려나?
전영록의 부모와 전처로 이루어졌던 연예인 가계도는 너무도 유명하니 생략하자. 몇몇 드라마와, 영화 〈내 마음의 풍차〉(1976)로 시작한 그의 배우 인생은 1980년대 초까지 인기가도를 달렸다. 물론 가수로 먼저 출발했고 또 ‘애심’ 등이 인기를 얻었지만, 1980년대 전까지는 가수보다는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좀 더 높은 편이었다. 특히 당시 ‘하이틴 스타’였던 임예진, 이덕화, 이승현과 함께 하이틴 영화에 단골로 동승하곤 했다. 이것은 1980년대가 되면 대학가의 낭만을 그린 청춘영화로 이어진다. 한 가지 부연하면, 배철수나 구창모 등 송골매 멤버들도 여러 편의 ‘캠퍼스 청춘영화’에 출연하면서 전영록과 함께 ‘청춘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그는 가수로서 상한가를 치게 된다. ‘종이학’(1982),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1983) 등 순정만화 같은 가사와, 속삭이는 듯한 가창으로 소녀팬덤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이소룡 키드’임을 내세운 〈돌아이〉 시리즈의 강한 몸매와 액션이, ‘불티’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의 이미지와 맞물렸다. 이 두 노래는 검은 가죽 재킷, 검은 선글라스에, 마이크를 잡고 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전영록표 포즈로 각인된 노래들이다. 사운드 면으로도 전영록의 이전 노래들보다 다소 강한 비트와 빠른 템포에 ‘뿜뿜거리는’ 관악 세션이 인상적이었다. 끝음절에서 음정을 ‘껄렁하게’ 내려뜨리는 창법과 특히 ‘불티’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전영록의 전매특허로 남아 있다. 참고로 그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에서 ‘뉴웨이브 댄스’를 시도했다고 자평했다.
» 김정택 작곡의 ‘불티’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가 수록된 〈’85 전영록 전속기념 앨범〉(1984년)
그렇다면 이 곡들은 누가 작곡했을까? 에스비에스 관현악단장 김정택이 그 주인공이다. 많은 악단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무대’를 누볐던 연주자이자 히트곡 작·편곡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이런저런 ‘간증’에서 밝힌 작품 수는 (정확하든 아니든) 270여편이나 된다. 그중,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현숙의 ‘정말로’ 같은 열창형 레퍼토리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역추적해 보면 밤을 화두로 한 야상곡도 많은데 (‘밤이면 밤마다’, ‘낮이나 밤이나’를 비롯해)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와 ‘하얀 밤에’ 등이 있다.
전영록은 위의 두 노래 발표 직후, 가수로서 인기 정점에 올랐고, 그것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1985년 ‘그대 우나 봐’와 ‘내 사랑 울보’, 1987년 ‘이제 자야 하나 봐’와 ‘하얀 밤에’, 1988년 ‘저녁놀’과 ‘추억’ 등이 연속으로 히트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가수보다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날리며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면모를 이어갔다. 자신의 노래는 물론,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이은하의 ‘돌이키지마’, 김희애의 ‘나를 잊지 말아요’ 등 발라드류에 재능을 발휘했고, 김지애의 ‘얄미운 사람’ 같은 트로트까지 폭을 넓혔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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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 가창력으로 80년대 언니부대 호령
(77) 강변가요제와 이선희
이쯤에서 1980년대 중반 대학생가요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엠비시 대학가요제 얘기는 몇 차례 다룬 적이 있으니, 이번엔 엠비시 강변가요제에 집중해보자. 1979년 강변축제란 이름으로 시작된 강변가요제는 첫해 홍삼트리오의 〈기도〉(대상 수상곡)를 히트시켰지만 한동안 대학가요제의 위세에 밀려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행사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통념의 밑바닥에는 강변가요제가 출전 자격에서 대학가요제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란 학벌주의적 시각도 엄존했는데, 이는 ‘슬프지만 진실’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강변가요제는 대학가요제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 시발점은 1983년 손현희의 〈이름 없는 새〉(대상)를 들 수 있겠지만, 진정한 대박은 1984년 5회 대회 때 터졌다. 바로 혼성 듀엣 4막 5장이 부른 〈J에게〉(대상)이다. 4막 5장의 여성 리드 보컬이 1980년대 중후반 가요계를 호령한 이선희란 사실은 당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겐 사족이다.
〈J에게〉는 1984년 하반기 최대 히트곡으로 떠올랐고 여세를 몰아 이선희는 이듬해 초 지구레코드를 통해 솔로로 데뷔했다. 이선희의 데뷔작은 타이틀곡 〈아! 옛날이여〉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고 〈갈등〉 역시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로운 디바가 탄생했음을 알렸다. 2집 역시 타이틀 곡 〈갈바람〉을 차트 상위권에 올리며 연속안타를 쳤고, 이런 기세는 1980년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아! 옛날이여’가 실려 있는 이선희 1집(1985년).
1980년대 하반기는 이선희의 전성시대였다. 1986년 발매된 3집부터 1990년 6집까지 넉 장의 앨범은 경중을 따지기 어려울 만큼 히트했다. 3집에서는 양인자 김희갑 콤비가 작사·작곡을 맡은 발라드 〈알고 싶어요〉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경쾌한 분위기의 〈영〉도 그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당대의 메이저 중의 메이저’였던 지구레코드 시절 베테랑 송라이터와 연주자의 뒷받침을 받았던 이선희는 3집을 끝으로 지구레코드와 결별하고 이후 해광기획 소속으로 서울음반에서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4집부터 이선희는 좀더 젊은 송라이터와 연주자를 초빙하고 음악적으로도 자기색을 정련해 나갔다. 4집은 〈나 항상 그대를〉 〈사랑이 지는 이 자리〉를 차트 정상에 올렸을 뿐 아니라 신예 작곡가 송시현을 인기 작곡가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작곡가군에 김범룡, 김창완, 이재성 등을 추가한 5집은 〈나의 거리〉 〈오월의 햇살〉 〈한바탕 웃음으로〉의 히트로 결실을 맺었으며, 6집은 〈왜 나만〉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로 롱런을 이어갔다.
작은 체구에서 믿기 어려울 만큼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는 이선희의 보컬은 단숨에 그리고 오래도록 대중들의 감성을 흡인했다. 맑고 순수하면서 당찬 이미지까지 겸비한 이선희는 수많은 누나부대와 언니부대를 팬층으로 확보했다. 이선희는 1980년대 중후반 소녀팬들의 독보적인 우상이었지만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성장해갔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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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조차도 일본에선 ‘트로트 가수’
(78) 1980년대, 일본으로 간 한국가수와 한국가요
1980년대 후반 한국에 체류했던 저명한 재일교포 작가 강신자(일본명 교 노부코)는 한국 대중음악의 현실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놀랐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전까지 일본에 살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던 것은 엔카(트로트)가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한국 대중음악에 엔카(트로트) 이외의 장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고 새삼스럽게 놀란 것이다. 이는 비단 강신자 개인의 경험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보통 일본인들은 ‘한국가요=엔카(트로트)’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편향된 시각은 198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인 조용필의 경우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조용필이 몇 곡의 트로트곡을 부르기는 했어도 그를 ‘트로트 가수’로 정형화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조용필은 ‘엔카 가수’로만 알려져 있다. 1983년 5월 일본 엔에이치케이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치른 뒤에도 이런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공연 이후 일본에서 조용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지만, 그의 대표곡은 여전히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기 때문이다.
» 1983년 일본 엔에이치케이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한 조용필의 실황음반
1983년 가을 이 곡은 일본어로 번안(혹은 개사)되어 아츠미 지로, 미카와 겐이치, 히노 미카, 기타하라 미레이, 야마구치 아카리 등 수많은 가수가 <부산항헤카에레(釜山港へ歸えれ)>라는 타이틀의 음반(싱글)을 발표했다. 대체로 ‘엔카 가수’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가수로는 조용필 본인, 그리고 그 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성애가 일본어 가사로 레코딩해 음반으로 발표했다. 운좋게 발견한 한 통계에 따르면 아츠미 지로의 음반이 80만장, 조용필의 음반이 26만장, 이성애의 음반이 20만장 판매되는 등 전부 150만장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가히 1983년의 ‘한국가요 붐’이 어땠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 가수가 일본시장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가운데 이성애, 계은숙, 김연자 등이 ‘엔카 가수’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더라’는 여론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연예계에서 한국 가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엔카 가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엔카/트로트 이외의 한국가요(및 가수)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활동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나의 질문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83년 가을’은 (옛)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대한항공 민항기가 요격당하고, 미얀마(버마) 아웅산에서는 한국 정부의 수뇌가 폭탄 테러를 당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살벌한 국제정세가 조성되던 때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한국 엔카도 괜찮네’라고 생각하면서 한국가요를 소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소비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일본의 주류 사회에서 한국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위험한 나라, 문화적으로는 노스탤지어의 원천’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최근의 한류(韓流)도 이런 점에서는 뭐가 그리 다르랴.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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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같이 등장한 80년대 슈퍼루키
(79) 김범룡과 ‘바람 바람 바람’
사람들은 언제나 새 얼굴을 기다린다. 한 시대를 평정한 슈퍼스타 조용필, 그의 아성에 도전했던 전영록, 대학에서 주류 연예계로 입성한 송골매가 1980년대 초부터 아성을 굳히게 되자 가요계에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기를 고대했던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1980년대 중반쯤 실현되었다.
1985년 무렵, 최고의 슈퍼루키는 단연 김범룡이었다. “딴 따 따단”으로 시작하는 그의 데뷔곡 〈바람 바람 바람〉은 봄에 발표되어 여름까지 인기몰이를 했고, 〈그 순간〉과 〈겨울비는 내리고〉가 동반 인기를 얻으며 그의 상승세는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이 노래의 인기를 분석하면서 ‘바람’을 화두로 한 그 무렵의 인기곡들을 도마에 올리며 ‘유행곡은 거의가 바람이 소재’라고 선언한 신문 기사도 있었는데, 화제를 만들기 위한 흥행성 기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범룡과 〈바람 바람 바람〉의 당시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람 바람 바람’이 실린 김범룡 1집
그렇다면, 이 노래가 왜 인기를 얻었던 것일까? 이 노래를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경쾌한 고고 리듬에 젊은층의 취향을 잘 간파한 가사가 강점”인 노래였다는 식의 소개는 불필요할 것이다. 이 노래를, 그리고 김범룡을 다크호스로 만든 건, 속삭이듯 읊조리는 창법, 전주와 간주의 인상적인 선율에 서려 있는 ‘구리지 않을 만큼의 뽕끼’가 아닐까.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는데, 경쾌한 댄스풍 노래와, 애절한 발라드풍 노래를 안배하는 균형감각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규리, 양수경, 장덕, 이선희 등 여러 가수에게 노래를 작곡해주고, 녹색지대 등의 프로듀서를 맡는 등 여러 부문에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그가 작곡자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놀라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985년 상반기께 “캠퍼스의 유행을 거쳐 방송가와 레코드가로 전파시킨 젊은 포크 가수들”을 소개한 한 신문에서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을 포크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포크’는 통상 많은 장르가 포괄되니 이런 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 김범룡이 ‘(충북대 서양화과 출신) 대학생 가수’라는 점이나, 가창과 작곡을 겸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에서 포크로 분류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대학가에서 인기가 높은 대학생 가수”라고 해도, 캠퍼스 그룹사운드나 대학가에서 사랑받은 다른 ‘언더그라운드’ 포크보다는, 주류 취향의 음악에 가까웠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당시 김범룡의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라이벌이란 게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등에서 떨리는 (세칭 ‘염소형’) 목소리로 유명한 임병수와 (약간 시차가 있지만) 몇 년간 쌍벽을 이루었다고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둘 다 ‘뉴 페이스’였지만, 김범룡이 고독한(반항아적?) 이미지였다면, 임병수가 차분한(모범생적?) 이미지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조용필이나 전영록 등에 반해 김범룡과 임병수는 참신한 새 얼굴인 셈이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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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노래운동의 그루터기가 되다
(80) 김민기와 노찾사
1982년 김민기는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 둥지를 틀었다. 전곡에서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쌀농사 농민과 소비자를 직거래로 이어주는 출하사업을 벌여 성공했다. 시인 황명걸이 〈쌀장수 김민기〉란 시를 발표한 시절의 일이다. 하지만 김민기의 ‘쌀장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3년 12월, 살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다시 음악가로 돌아왔다.
대학가에서 김민기가 ‘이미 전설’이었다는 사실은 사족일 것이다. 1970년대 말 대학가에 생긴 노래서클들의 성원 역시 김민기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노래서클들은 1980년 광주와 전두환 정부의 독재를 경험하며 노래의 본연과 사회성에 천착하며 ‘노래패’로 전화해갔다. 이들 노래서클의 1세대는 졸업 후 취업 대신 노래에 대한 고민과 궁리를 심화하고 실천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래운동의 씨앗이 영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민기와 노래운동 1세대가 음반으로 다시 만났다. ‘다시’라고 표현한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 54회(6월 5일치)에서 언급했듯이, 1978년 김민기가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녹음할 때 몇몇 대학 노래서클을 보컬로 참여시켰고 그 녹음작업도 역시 이화여대 방송국에서 했다. 첫 번째 만남이 김민기의 음반으로 여물었다면, 이 두 번째 만남은 노래운동 1세대의 음반으로 영글었다. 두 번째 열매의 이름은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다.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노찾사 1집은 김민기가 프로듀서를 맡아 1984년 녹음한 것이다. 김민기는 원래 어린이 뮤지컬을 창작해 음반으로 내려 했는데 김민기의 작품이란 이유로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접수조차 받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음반을 준비하면서 규합했던 노래패 출신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녹음하게 된 것이다.
이 음반은 흔히 ‘노찾사 1집’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는 노찾사 1집이 아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그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음반 제목이었다. 노찾사가 실체가 되고 주체가 된 것은 1987년 공연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89년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담긴 〈노래를 찾는 사람들 2〉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는 얘기도 사족일 테고. 따라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찾사의 특징적인 음악과 다소 다르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이 음반은 민중가요의 전형적인 작풍과는 거리가 있고, 말 그대로 민중가요의 맹아를 풋풋하게 드러낸다. 싱그런 캠퍼스 포크송풍의 〈바람씽씽〉(한동헌 곡), 뒤에 〈퀴즈 아카데미〉에 배경음악으로 쓰여 인기를 얻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김기수 곡), 김광석의 목소리로 잘 알려진 〈그루터기〉(한동헌 곡) 등은 1970년대 포크의 잔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계〉나 가곡풍 민중가요를 예감케 한다.(김광석은 이 음반에 참여해 노래하고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이 음반은 1984년에 만들었지만 불행히도 당국의 방해로 1987년에야 대중과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고, 1989년 노찾사 2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뒤늦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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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풍 잠재운 색다른 트로트 ‘활짝’
(81) 주현미
가수 주현미의 홈페이지에 가서 본적을 찾아보면 ‘중화민국 산둥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라고 적혀 있다. ‘중화민국 산둥성’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면 ‘한의사였던 중국인 아버지 주금부 씨와 한국인 어머니 정옥선 여사 사이의…’ 라는 가족관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면 된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건너올 때 중국 대륙이 아직 ‘공산화’ 이전이었다면 ‘중화민국’이라는 표현도 틀린 것이 아닐지 모른다. 사설이 길었는데 그녀는 ‘화교’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현미를 생각할 때 ‘화교’라든가 ‘중국인’이라는 특별한 정체성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덩리쥔(등려군)이 부른 노래들, 예를 들어 <야래향> 등을 즐겨 부르기는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강조하지는 않았다. 1988년 결혼한 이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법률적으로도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화교라는 정체성은 점차 소실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추적해 보면 19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몇몇 화교 가수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곡충주’, ‘유미려’, ‘리리온’ 등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주현미도 한성화교학교를 다니던 1976년 아직 10대였을 때 독집 음반을 발표했다는 사실, 그리고 1981년 엠비시 강변가요제에 ‘인삼뿌리’ 2기 멤버로 참가했다는 사실도 대체로 기억 밖의 일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기억하는 <쌍쌍파티 메들리>(1984년)가 그녀의 데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의 진짜 데뷔가 <비 내리는 영동교>(1985)이고, 이어 발표한 <신사동 그 사람>(1988)으로 그해의 ‘가수왕’을 차지했으며,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도 <짝사랑>(1989)으로 정상의 지위를 이어갔다는 사실이 더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 무렵 트로트 계열의 곡들 가운데 ‘영동’, ‘강남’, ‘신사동’, ‘테헤란로’ 등등 서울의 특정 지명이 등장하는 곡들이 양산되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가요평론’들이 지적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반복하지는 않겠다.
» 주현미의 ‘진짜’ 데뷔 음반으로 잘 알려진 <비 내리는 영동교>(1985)
흥미로운 것은 주현미가 등장하면서 트로트에 대해 줄기차게 제기되었던 ‘왜색 시비’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왜색’과 거리가 있는 주현미의 목소리의 효과에 더하여 <비 내리는 영동교>의 리듬이 2박자가 아닌 3박자라는 사실, <신사동 그 사람>이 폴카를 원용하여 경쾌한 리듬을 구사했다는 사실, 두 곡의 조성 모두가 단조가 아닌 장조라는 사실 등이 ‘시비’를 슬쩍 잠재울 수 있었던 요인들이다. 즉, 그녀의 메가히트곡들은 엄밀히 따지면 ‘정통 트로트’가 아닌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성공에 대해서 사회학적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한국형 개발자본주의의 꽃인 강남(혹은 영동)에서 싹이 트고 꽃을 피운 1980년대 이후 밤문화는 통행금지도 사라지면서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었고, 이곳에 즐비한 성인유흥업소에서는 ‘동아시아형’ 접대문화가 발전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의 유흥문화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말한다면 과장이겠지만, 일본형 성인유흥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런 문화를 오버그라운드에서 대표했던 인물이 ‘일본풍’이 아니라 ‘중국풍’이었던 사실은 현실을 적당히 덮어두기에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일본풍’이 강했던 김연자나 심수봉이 이 시기에 이런저런 시련을 맞이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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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랫말이 노래를 더 빛나게
(82) 80년대 가사
촌철살인의 명쾌한 구절이 필요하고, 때로는 (작사가 박건호의 말을 인용하면) ‘3분 드라마’가 되기도 하며, 리듬과 운율을 갖는다는 점에서 노래 가사는 시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일까. 시가 노랫말로 차용된 사례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박인환의 시에 박인희의 청아한 목소리가 입혀진 <목마와 숙녀>나, 고은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 그리고 서정주의 시에 송창식이 부른 <푸르른 날> 등은 지극히 고전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편, 문단(文壇) 혹은 그 지망생 출신의 전문 작사가들도 꽤 있다. (작곡가 김희갑의 부인이자 음악 ‘콤비’인) 작사가 양인자가 소설가와 방송작가를 거쳤다는 점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천 편의 노랫말을 남긴 박건호는 대표적인 시인 출신 작사가이고, 1985년 상반기의 히트곡 <인생은 미완성> 등을 작사한 김지평 역시 문예창작과 출신이다. 물론 대중음악 가사가 문학(시) ‘작품’보다 저급하고 열등하다는 인식 때문에, ‘직종 전환’이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박건호에 따르면 작사가의 길로 들어선 데에는 경제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들이 활동하던 1980년대에는, 방송국이 주최한 가요상의 한 부문이던 노랫말상이 별도로 마련되기도 했다. 1983년 시작된 ‘케이비에스 가사대상’이나, 이와 비슷한 ‘엠비시 아름다운노래대상’이 있었다. 이외에 대중가요 작사가들의 모임인 한국노랫말연구회 주최로 1987년에 시작한 ‘한국노랫말대상’이 있었다.
» 조동진의 노랫말들이 담긴 <조동진 시집: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청맥·1991)
이러한 가사에 대한 시상식은 노랫말의 예술적 가치를 증명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지만, 가요의 ‘순화’와 ‘계도’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회 케이비에스 작사대상에서 서정주의 시에 붙인 <푸르른 날>이 대상을, 박건호가 작사한 <아 대한민국>이 금상을 차지한 것만 봐도 ‘예술성’과 ‘건전성’을 통합시키려는 시상(施賞)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 가요심의제의 부정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완충제 역할도 했던 셈이다.
그런데 시적 가사는 포크 음악과 친밀하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1985년경에 인기를 얻은 곡들만 한정해보면, 질박하고 진솔한 가사가 곁들여진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애잔하고 서정적인 노랫말과 하모니가 어우러진 (유익종·이주호의) 해바라기의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도 떠오르고, 동화적 아이콘 혹은 우화적 상징이 있는 연가로 광주에서 서울까지 인기를 끌어올린 김원중의 <바위섬>도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1985년은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해 같다. 무엇보다 이 해에 들국화를 비롯한 ‘언더그라운드 돌풍’이 몰아쳤으니 말이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의 대부’이자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린 조동진도 5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이 3집에 실린 <제비꽃>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앙드레 슈발츠 바르트의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의 여주인공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곡이라 한다. “한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꿈과 사랑과 좌절과 눈물, 그리고 …성숙해 가는 과정”을 제비꽃에 요약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적 노랫말은 여백 있는 동양화, 아름다운 동화, 철학적 성찰이 담긴 경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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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주류음악 맞서 언더음악 ‘우뚝’
(83) 들국화
이쯤에서 1985년을 한번 정리해보자. 전영록의 <불티>, 구창모의 <희나리>,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나미의 <빙글빙글>, 송골매의 <하늘나라 우리님> 등이 그해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전히’ 조용필이 압도한 해였다. 그는 상반기에 젊은 감성의 7집으로 <어제 오늘 그리고>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를, 연말에 성인 취향의 8집을 내놓아 <허공>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인기 순위 최상위권에 올리며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하지만 1985년은 조용필로 상징되는 ‘텔레비전 중심의 주류 가요’가 강력한 대항마를 만난 해이기도 하다. 뒤에 ‘언더그라운드’라고 통칭된 음악 흐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들국화가 데뷔한 해인 것이다. 그해 9월 발매된 들국화의 데뷔 음반은 수십 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적적인 성공이었다.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인 텔레비전을 배제하고 일궈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들국화의 데뷔 음반이 비틀스의 마지막 정규 음반
» 1985년에 나온 들국화 1집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인권(보컬, 기타), 조덕환(기타, 보컬), 최성원(베이스, 보컬), 허성욱(피아노, 신시사이저, 보컬).
조용필과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들국화 역시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중학생부터 30대 장년층까지, 무난한 감성을 가진 이들부터 주류 음악에 비판적인 학생운동 진영까지 여러 세대와 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들국화의 음악이 록과 포크를 축으로 하지만 여러 스타일을 아울러 다채로운 음악 스펙트럼을 화학적으로 결합했다는 점, ‘중고 신인’이었던 멤버들이 경험을 살려 질박하면서도 세련된 팝 감각을 맵시있게 펼쳤다는 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 삶의 비루함과 갑갑함을 알고 있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낙관적 의지를 갈무리한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이 첨단의 질감이 아니었음에도 당대 청(소)년들의 송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또는 동아기획 사단)의 조류에 햇볕을 비춘 견인차였던 들국화 1집은 가요를 경원시하고 영미권 팝 음악에 경도되어 있던 층에 ‘들을 만한 가요 음반’, 나아가 ‘소장할 만한 가요 음반’의 가치를 알린 시발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메이저 음반사나 기획사를 통해 데뷔해 텔레비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성의 길이 아니라 ‘다른 길’, 그러니까 음반의 음악적 완성도와 부단한 라이브를 통한 직접적 소통이 가능하고 또 이를 선도적으로 실천했다는 데 들국화와 이 음반의 결정적 가치가 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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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머금은 386세대의 마지막 연인
(84) 1986년…한영애…혹은 슬픔이 터져 나온 해
들국화의 1집 음반이 발표된 것이 1985년 9월이고 한영애의 1집 음반이 발표된 것은 1986년 1월의 일이다. 이어서 시인과 촌장의 2집 음반은 1986년 7월, 어떤날의 1집 음반은 그해 12월에 나왔다. ‘1980년대 후반의 대중음악계를 풍요롭게 수놓았던 주옥같은 작품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음반들이다. 같은 기간 동안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1985년 5월에는 ‘서울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이 있었고, 6월에는 ‘구로지역 연대파업 투쟁 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기습점거 사건’이 있었고, 1986년 5월에는 ‘인천 5·3 사건’이 있었고, 7월에는 ‘부천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10월에는 ‘건대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고,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대중음악계 사건과 사회운동권 사건을 병렬해 본 것은 두 가지 세계가 눈 앞에서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 엔트로피가 최고조로 달하던 시점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슬픔, 그리움, 아쉬움, 서러움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대중음악계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상징적 목소리를 두 개만 뽑으라면, (들국화의) 전인권과 한영애일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에서 전인권의 질러대는 목소리가 후련한 해소감을 안겨 주었다면, ‘포크송’인 <여울목>과 ‘블루스곡’ <건널 수 없는 강> 등에서 한영애의 목소리는 슬픔과 서러움을 머금은 상태 그 자체를 표현해 내었다.
한영애의 개인적 경력을 본다고 해도 이런 설명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영애는 이미 1977년 이정선이 이끌던 혼성 4인조 보컬 그룹 해바라기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솔로 음반도 두 장 발표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이 시기의 솔로 음반에 대해서는 거론하는 것조차 꺼리지만, 이는 역으로 그 시대는 ‘끼’를 발휘하고 ‘꿈’을 펼치기는 어림도 없는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오랜 시간의 방황과 고민은 그만큼의 준비로 이어졌고, 세상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 셈이다.
» 한영애의 1986년 공식 데뷔 음반
데뷔 음반 발표 이후 한영애는 신촌블루스에서 객원 보컬로 활동함과 동시에 솔로 활동을 병행했다. 1988년 발표한 솔로 2집 음반은 세상이 어느 정도 좋아진 것을 반영하는지 <누구 없소>, <루씰>, <코뿔소> 등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음반을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다소 뜸을 들인 뒤 1992년 발표한 3집 음반은 <말도 안 돼>와 <조율> 등 또다른 명곡들을 담았다. 이 무렵 연극배우 경력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공연은 충성스러운 고정팬들을 만들어 내었고, 1993년에 발표한 <1993 라이브 베스트 아우성(我.友.聲)>은 그에 관한 기록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386세대들을 위한 연예(좋은 의미에서)를 제공했던 셈이다.
그런데 한영애의 공연에 대해 “소극장 라이브 공연이 붐을 이루던 시기의 중요한 기록”이라고 쓰려고 하니 문득 1992~3년이 ‘신세대 댄스가요의 시작’이라는 판단과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기록을 뒤지니 한영애의 3집이 발표된 시점(1992년 3월 14일)과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이 발표된 시점은(1992년 3월 23일) 불과 9일이다. 1992~3년 한영애가 경력의 절정기에 있다고 간주할수록 이른바 386세대를 위한 연예는 서서히 아니 급속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9일’의 간격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되고 말았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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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한국적 발라드의 황금기 열어젖혀
(85)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 콤비
발라드라는 ‘한국적’ 양식을 세련되게 만든 주인공을 들라면?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 ‘콤비’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발라드를 확고한 대중음악 양식으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단언컨대, 이영훈 없는 이문세, 이문세 없는 이영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이영훈을 만나기 전까지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디제이 겸 엠시로 알려졌다. 시비에스 라디오의 청소년 프로그램 ‘세븐틴’에서 디제이로 발탁된 후,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거친 뒤, 1983년에는 문화방송의 ‘영 일레븐’ 엠시로 전격 기용되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역대 최고 디제이’로 기억하는, 엠비시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별밤지기’를 1985년부터 11년 넘게 맡으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영훈을 만나기 전, 이문세가 비록 수년간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고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어도, (이영훈의 회고를 빌리면) ‘어느 노래는 송창식 같고, 어느 노래는 나훈아 같을’ 뿐이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1981)과 <파랑새>(1984)가 어느 정도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가 유려하면서도 유기적인 작품집을 낸 건 이영훈과 처음 합작한 3집(1985)부터였다.
» 작곡가 이영훈과의 합작을 통해 발라드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이문세의 3집
편곡자 김명곤도 이들의 공조자였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단아하면서도 클래시컬한 이영훈의 곡에, 색소폰과 클라리넷 같은 관악기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같은 현악기 등이 다채롭게 편성되어, 풍성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앙상블이 탄생했다. 이들은 팝, 재즈, 포크 등 여러 양식들을 자양분 삼아 발라드의 황금기를 열어젖혔다. 참고로 3집의 포크적 질감은 <야생마> <혼자 있는 밤, 비는 내리고> 등 이정선의 작·편곡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서정시와 산문시를 적절히 버무린 듯한 이영훈의 가사가 격조를 더했다. 구체적인 스토리와 섬세한 묘사는 절제되고 정제된 슬픔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회한을 획득했다. 과잉되지도, 무미건조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감상적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난 아직 모르잖아요)처럼 인생사를 아우르는 화두도,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녀의 웃음소리뿐’(그녀의 웃음소리뿐)처럼 담담한 회상도 담겨 있다. 이러한 나직한 읊조림은, 후렴 부분(전자는 ‘혼자 걷다가 어두운 밤이 오면’, 후자는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에서 절정부로 흘러간다. 한때 성악가 지망생이었던 이문세의 보컬은 힘있고 낭랑하게 뻗어가면서도, 독특한 그만의 ‘꺾기’가 인상적으로 전개된다.
<사랑이 지나가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이별 이야기> 등이 실린 4집(1987)과 <시를 위한 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이 실린 5집(1988)에 이르면 이문세와 이영훈(나아가 김명곤)의 공작은 정점에 달한다. 이것은 뒷날 ‘변진섭-신승훈-조성모’로 이어지는 발라드 계보를 이룩하면서 여고생과 여대생 등 소녀·여성 취향의 팬덤까지 형성했다. 이영훈과 이문세 콤비 외에도 지근식·하광훈과 변진섭, 윤상과 강수지 등이 발라드 작곡가와 가수의 공조 시스템이 성공한 사례가 될 것이다.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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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가사 세대초월 풋풋한 향취
(86) 마지막 아이돌 캠퍼스 그룹 ‘다섯 손가락’
해마다 12월은 공연장마다 관객들로 북적이는 공연 성수기다. 지난 연말, 가장 문전성시를 이룬 음악공연 경향 중 하나로 이른바 ‘80/90 콘서트’를 뽑아도 별다른 이의는 없을 듯하다. 이 공연들이 10여년 전부터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해 2000년대 초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70/80 붐’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1970년대 포크 가수들과 캠퍼스 그룹이 주축을 이뤘던 중장년층 대상 콘서트의 주인공은 점차 1980년대 브라운관을 주름잡은 왕년의 인기 가수들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으며 1990년대 초 활약한 가수들로 진용이 넓어지는 추세다.
지난 세밑 ‘80/90 콘서트’ 중 화제가 된 음악인들로는 바다 건너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이지연과 원준희,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모인 그룹 다섯손가락을 들 수 있다. 특히 다섯손가락은 지난해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동방신기의 〈풍선〉의 원곡을 부른 이들로 주목받은 바 있다. 다섯손가락이 한 방송사 가요대전 무대에 동방신기와 나란히 올라 〈풍선〉을 함께 부르던 장면은 2006년 가요계의 인상적인 마지막 스냅사진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 맨 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임형순, 강태원, 박문일, 이상희, 이두헌. 1986년 2집 음반을 낼 당시 모습.
» 마지막 아이돌 캠퍼스 그룹 ‘다섯손가락’.
1985년 3월, 다섯손가락은 〈새벽기차〉를 머릿곡으로 한 음반으로 데뷔했다. 이 음반의 뒷면은 색다르다. ‘임형순(보컬·홍익대 영문과 2), 이두헌(기타&보컬·동국대 경제학과 3), 최태완(키보드&피아노·홍익대 산업공학과 3), 박강영(드럼·추계예대 작곡과 3), 이우빈(베이스·서울대 전자공학과 3)’ 같이, 멤버들의 소속 대학은 물론 학과와 학년까지 자세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실제 베이스를 연주한 인물은 세션 연주자 조원익이다).
지금 보면 촌스럽거나 아련하지만, 1970년대 말 대학생 가요제의 폭발적인 성공 이후 대학생 음악인의 음반에 그처럼 신상명세를 적는 것은 당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황혼에 접어들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송골매, (이치현과) 벗님들, 건아들처럼 프로가 된 그룹사운드가 분투했지만, 청(소)년층의 귀가 헤비메탈과 동아기획 사단의 음악으로 급속히 쏠리는 현상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손가락은 ‘70/80 캠퍼스 그룹사운드 붐’의 거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부드럽고 팝적인 멜로디가 두드러진 다섯손가락의 음악은 앞선 캠퍼스 그룹의 투박한 질감이나 이후의 헤비메탈 밴드들의 거칠고 강렬한 포스와 달랐다. 맑은 음색과 섬세한 떨림이 두드러진 임형순(〈새벽기차〉 〈풍선〉)과 탁하고 진중한 이두헌(〈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렇게 쓸쓸한 날엔〉)의 트윈 보컬 체제는 상보관계를 넘어 두 배의 효과를 발휘했다. 또 〈창가에서〉와 〈사랑할 순 없는지〉에서 보듯,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인 멜로디 전개는 강한 감응을 주었다. 다섯손가락 음악이 당대의 인기곡을 넘어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된 요인으로 이두헌의 빼어난 가사를 빠뜨릴 수 없다. ‘수녀가 지나가는 그 길가에서 어릴 적 내 친구는 외면을 하고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듯 세상은 평화롭게 갈 길을 가고’라며 거리 풍경을 짐짓 담담히 묘사하면서 그 안에 먹먹하고 헛헛한 마음의 풍경을 담아낸 〈이층에서 본 거리〉는 대표적이다. 1985~86년 다섯손가락은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2집을 끝으로 임형순이 탈퇴하면서 내리막을 피할 수 없었다. 이두헌 1인 리더 체제로 두장의 음반을 더 내놓았지만 대중들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져간 것이다. 이와 함께 캠퍼스 그룹들의 풋풋한 향취도 사라져갔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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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등 거물급 뮤지션들 후광업고 스타로
(87) ‘댄스가수’ 김완선
1980년대를 대표하는 ‘댄싱 퀸’ 김완선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던가. <오늘 밤>이 수록된 데뷔 음반이 1986년 4월께, <나 홀로 뜰 앞에서>가 수록된 2집 앨범이 1987년 5월 발표됐으니 대략 1986~7년의 ‘어수선한’ 시점에 등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몸선을 강조한 옷차림에 연체동물처럼 춤을 추던 틴에이저 소녀에게 오감을 자극받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그녀에 대한 평가가 관대한 것을 보니 이게 반드시 남성의 시선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조금 각도를 달리 해서 당시 음악산업 ‘시스템’ 속에서 김완선을 살펴보기로 하자.
김완선의 주변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먼저, 김완선이 ‘인순이와 리듬 터치’의 백업 멤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인순이의 뒤에는 고(故) 한백희라는 전설적인 여성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조카였던 김완선도 대중가요계의 정상으로 이끌었다. 이미 고인이 되어 정확한 정보는 얻기 어렵지만 한 자료에 따르면 한백희 역시 ‘미8군 쇼 가수’ 출신이라 하니 미8군 쇼 무대가 대중연예계에 미친 길고도 넓은 영향을 재확인할 수 있다. 김완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리듬 속의 그 춤을>의 작사·작곡가가 놀랍게도 신중현이라는 점도 전세대의 인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인순이가 1980년대 초 ‘신중현과 뮤직 파워’에서 활동하면서 신중현과 연을 맺은 사실을 고려하면 이 인맥도 자연스럽다.
» 김완선의 2집 <나 홀로 뜰 앞에서>
두 번째로 흥미로운 사실은 1집과 2집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을 산울림의 멤버 김창훈이 작사·작곡했다는 점이다. ‘존중받는 록 밴드’ 산울림과 ‘경시되는 댄스가수’ 김완선 사이가 이렇게 가깝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외일 것이다.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비롯하여 3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이장희가 만든 곡들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김완선의 경력의 절정인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수록된 5집(1991)에서는 손무현이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졌으니 생략.
이상에서 보듯 김완선이라는 댄스 가수의 뒤에는 신중현·김창훈·이장희·손무현 등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거물급 뮤지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 말은 그녀가 부른 곡(노래)들의 퀄리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작다는 뜻이다. 그녀의 가창력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쉽게 외면하지 못했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댄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부감이 있어도, 멜로디가 귀를 잡아 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고 보면 ‘춤 잘 추고 얼굴 예쁜 젊은(혹은 어린) 아이’ 하나가 있을 때 각 방면의 전문가가 참여해 스타를 만드는 시스템이 아주 최근에 탄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완선이 1992년 홍콩과 타이완으로 건너가 세 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경력을 이어간 사실을 보면, 이른바 ‘한류’ 시스템마저도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모든 성공적 사건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선례가 있는 법인가.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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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자아 화두삼은 ‘따로 또 같이’ 그룹
(88) 어떤 날, 시인과 촌장
이른바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은 (주류 기성 시스템과는 달리) 자유를 이상으로 삼는다(고 흔히 생각된다). 구속을 기피하는 자유분방한 개개인의 성향은 (전에 소개한 것처럼) 1980년대 중반께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느슨한 그룹 형태를 낳기도 했고, ‘우리 노래 전시회’처럼 새로운 감성의 신진 세력을 소개하고 결집하는 프로젝트와 공존하기도 했다. 다소 확정적 라인업을 갖춘 들국화도 넓게 보면 이런 프로젝트 형식의 그룹에 가깝다.
이들과 관련된 막내뻘 그룹이 ‘시인과 촌장’과 ‘어떤 날’이 아닐까 싶은데, 이들은 ‘포크 언더그라운드’ 계열로 여러 면에서 ‘조동진 사단’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기타, 베이스, 드럼(혹은 신시사이저) 등을 갖춘 온전한 밴드 형태는 아니었다. ‘어떤 날’의 경우, 일렉트릭/어쿠스틱 기타의 이병우와 베이스 기타(특히 직접 만든 프레트리스 베이스 기타)의 조동익이 작곡과 노래까지 맡고, 나머지 부분은 세션 연주로 채웠다. 작곡과 노래를 맡은 하덕규와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꾸린 시인과 촌장도 비슷했다.
이들이 이름을 알린 것은 앞서 말한 프로젝트 ‘우리 노래 전시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밴드 형식뿐 아니라 노래 내용에서도 자유를 화두로 했다. ‘어떤 날’의 두 사람은 고요하고 여린 보컬과 소박하면서도 예민한 기타로 섬세하고 따듯하게 일상을 소묘하면서 꿈에 대한 동경을 담았다. 적당히 꿈꾸고 적당히 패배적이었다고나 할까. 이처럼 꿈과 이상에 대한 추상적 시어는 두 장의 음반(1986년, 1989년)에서 감각적인 재즈풍 사운드와 공명했다. 대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음반과 공연을 매체로 삼는 반면, 어떤 날은 음반에 초점을 맞춘 ‘스튜디오 밴드’에 가까웠다. 폭발적 인기를 끌지도 못했고, 다작이나 장수와도 거리가 멀었지만, 이들의 음악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 ‘시인과 촌장’의 1986년 음반.
‘시인과 촌장’도 마찬가지다. 이전부터 하덕규가 ‘시인과 촌장’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바 있지만 기타리스트 함춘호를 만나 1986년 〈푸른 돛〉, 1988년 〈숲〉 음반을 내면서 주목받았다. 하덕규는 양희은에게 곡(〈한계령〉 〈찔레꽃 피면〉)을 주기도 했다. 시인과 촌장은 주로 비둘기, 고양이, 매, 진달래, 얼음 무지개 등 동물이나 자연물을 노래했는데, 이는 통상의 비유법과는 다르다. 가령 희망과 사랑의 상징으로 치환된 비둘기는 자아 내면의 은유이자 하덕규 자신의 분신이었고, ‘새날’을 꿈꾸는 푸른 애벌레는 섬세한 자아를 가진 소년이었으며, 가시나무는 번뇌하는 구도자의 초상이었다.
이런 프로젝트형 그룹은 느슨하고 자유로웠지만, 그리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영적 구원을 갈망하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이후 음악적 향방을 바꾸었고, 어떤 날은 두 장의 앨범을 낸 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병우는 기타리스트와 영화음악가를 겸직하며 자신만의 ‘음악마을’(무직도르프)을 꾸렸고, 조동익은 세션 베이스 기타리스트이자 음악 프로듀서로 활약하다가 ‘하나뮤직’의 수장이 되었다. 비록 그들의 활동이 시한적이었을지라도 그 영향력은 그들의 음악처럼 잔잔하고도 길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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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음악 대지 일군 ‘디오니소스’
(89) 김현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이면서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터넷 검색 찬스 없이 맞추는 사람은 흔치 않다. 흰소리 같지만, 1980년대 가요계에서 김현식만큼 디오니소스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를 디오니소스에 비유할 때, 외로움을 잘 타고 사랑을 갈구한 그에게 ‘꿀’이면서 겨우 서른두 살에 그를 세상과 작별하게 만든 ‘독’이었던 술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는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대지를 비옥하게 일군 풍요의 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현식(1958~1990)은 1980년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당신의 모습>을 타이틀로 한 독집으로 데뷔했다. 이장희 제작, 사랑과 평화의 연주로 만들어진 이 음반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고 그는 다시 밤무대 생활로 돌아갔다. 4년 뒤 김현식은 동아기획과 손을 잡고 두 번째 음반을 내놓았다. 카페에서 찍은 감상적인 분위기의 음반 표지사진과 호응하는 애상적인 트로트 풍의 발라드 <사랑했어요>가 다운타운가에서 인기를 얻었고, 서정적인 전반부에 이은 폭발적인 클라이맥스가 압권인 <어둠 그 별빛>은 오래도록 숨은 명곡으로 손꼽혔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미미하기만 했다.
김현식이 인기 가수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3집을 발표한 1986년 말부터였다. <사랑했어요>의 후속곡 같은 느낌의 <빗속의 연가>가 엘피 앞면 머릿곡으로 전진배치된 것은 기획사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정작 히트한 곡은 엘피 뒷면 첫 곡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라디오 전파를 자주 타며(지금도 비오는 날 선곡 1순위다) 김현식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비처럼 음악처럼> 때문에 3집을 산 이들은 대부분 그의 팬이 되었다. 고른 완성도와 높은 짜임새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록(<눈 내리던 겨울 밤>), 포크(<슬퍼하지 말아요>), 블루스(<비오는 어느 저녁>), 재즈(<쓸쓸한 오후>)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누구라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3집은 보다 세련된 질감과 일관성, 안정감을 갖추고 있었다.
» ‘비처럼 음악처럼’ 풍미한 1980년대 가요계의 디오니소스 김현식
이처럼 3집이 세련되고 정돈돼 보인 데는 김현식이 자신의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음반을 빚어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전작들처럼 일급 세션진의 연주 대신 자신이 주도하는 그룹에 의한 ‘완벽하진 않지만 유기적인’ 연주로 자신의 음악적 문법을 정립하여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 1970년대 풍 잔재와 느낌이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그룹에 고 유재하가 키보드 연주자로 재적한 바 있고(<가리워진 길>이 수록된 건 그 때문이다), 뒤에 2인조 봄여름가을겨울로 독립하는 김종진과 전태관, 빛과소금을 결성하게 되는 박성식과 장기호가 멤버였다는 사실은 김현식의 팬이라면 ‘상식’이다. 또 이 음반이 들국화 데뷔작에 이은 동아기획(넓게는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연속타자 홈런’이었다는 점은 그 시대를 경험한 음악애호가라면 상식일 것이다.
정리하면 3집은 김현식이 제대로 된 자신만의 ‘음악적 말문’을 떼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멀리는 작곡가 손석우(<이별의 종착역>)를 뿌리로 하여 증식과 이식과 변이를 거치며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팝의 여러 갈래들이 김현식이란 필터를 통과하며 새로운 한 갈래로 태어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걸 단지 ‘김현식 표 한국적 발라드’라고 부른다면 인색한 평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질문은 계속된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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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아이돌 시스템’의 예고편
(90) 소방차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단절’로 얼룩진 것 같아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연속’ 현상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한다. 그런 걸 발견하는 것도 때로는 쏠쏠한 재미다.
일단 이효리와 더블에스오공일(SS501)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이들 소속사 디에스피엔터테인먼트(옛 대성기획)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에스엠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주류 가요시장을 양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효리가 있었던) 핑클과 젝스키스가 이곳 소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갈 기억력이 남아 있다면 잼(Zam)과 아이돌(Idol)도 이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제적인 ‘한류 스타’가 없어서 그렇지 국내시장에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비즈니스다.
이제까지 언급한 모든 그룹 혹은 가수를 발굴하고 길러낸 인물은 이호연 현 디에스피엔터테인먼트 대표인데, 이 정도면 ‘연속되는 계보’라고 말하기 충분하다. 게다가 그가 길러낸 스타들의 계보는 1990년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이제 오늘의 주인공 소방차를 언급해야 할 차례다.
소방차가 데뷔한 시점은 1987년이다. ‘1987년’이라면 일년 내내 의미심장했던 사건들이 발생했던 해일 텐데, 소방차는 그 의미심장한 시점에 전혀 의미심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느날 갑자기 텔레비전 스크린에 등장했다. 별로 고민없이 자란 듯한 허여멀건 얼굴의 세 명의 젊은 아해들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가 핵심일 것이다. 하나는 상의는 정장 차림에 하의는 반바지를 입은 특이한 스타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이크를 집어 던져 올렸다가 다시 잡는 특유의 퍼포먼스였다. 여기에 가끔씩 난이도 높은 ‘고공 덤블링’을 시도하는 장면도 추가할 수 있겠다.
음악은? 아이돌 음악이란 게 거기서 거기겠지만, <그녀에게 전해주오>가 김명곤 작곡, <일급비밀>과 <연애편지>가 이호준 작곡, <사랑하고 싶어>가 박청귀 작곡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조금 놀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 외에 김기표, 유영선, 송홍섭 등 당시 내로라 하는 작·편곡자(이자 연주인)들이 소방차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이후 확립될 ‘아이돌 시스템’의 예고편을 보는 것만 같다. 최고의 작곡가, 최고의 세션맨, 최고의 프로듀서 등등이 힘을 합쳐 춤 잘추고 얼굴 되는 아이를 스타로 만드는 시스템 말이다. 3집(1989) 발표 이후 인기정상의 상태에서 ‘은퇴’를 했던 것도.
마지막으로 소방차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 하나는 ‘일본풍’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니스 기획의 작품인 쇼넨타이(소년대)’의 수입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당시에는 쇼넨타이가 누군지, 자니스 기획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그저 막연히 ‘일본풍’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기서 ‘일본’이라는 기호는 진짜 일본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별로 고민 없이 자란 새로운 주체성’을 표상했다. 이게 5년도 지나지 않아서 한국사회의 주류적 감성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당시에는 그리 많지 않았었다. 고뇌를 머금은 음악이 당분간은 더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었지….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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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잔’ ‘경아’ 부르며 소녀팬 자극한 10대 스타
(91) ‘하이틴 아이돌 가수’ 김승진과 박혜성
영화 <품행제로>을 보면, 여고생들이 ‘롤러장’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스잔파’와 ‘경아파’의 파벌(?) 싸움. 1986년 무렵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추억 속의 스냅 사진처럼 남아 있을 장면이다.
» ‘하이틴 아이돌 스타’로 1980년대 중반 인기를 모았던 박혜성과 김승진의 2집 커버 중에서.
이 두 노래 <스잔>과 <경아>를 부른 김승진과 박혜성은 동갑내기로,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누린 ‘10대 아이돌 스타’였다. 당시 팬들 사이에서는 ‘쾌활하고 남성다운 김승진’ 대 ‘상냥하고 부드러운 박혜성’의 라이벌 관계로 대별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호리호리하고 곱상한 귀공자 스타일의 ‘꽃미남’형 외모, 감미롭고 부드러운 미성의 소유자로 통했다(특히 박혜성은 광고 모델 출신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고등학생 신분으로 가수 활동을 했다는 점 때문에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지금이야 ‘고교생 가수’라는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어릴 때의 음악 활동이 자연스러운(급기야 당위적인?) 일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 때문에 10대 음악 시장이 확장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당시 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에게 큰 인기를 끌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들의 인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소녀 팬과 남자 가수를 둘러싼 고전적인 역할 모형을 거론할 수도 있겠다. 소녀 팬들이 노래 속 여주인공과 자신을 등치시키면서 남자 가수들을 대상화하는 팬덤의 관행이 그대로 드러나므로(이런 진부한 대입에 대한 가치평가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특히 소녀의 이름을 호명한 노래들은 이런 전략을 잘 보여준다. 김승진이 스잔이나 줄리엣이라는 이국적 작명을 택한 반면, 박혜성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친근한 한국식 이름 (지난 세대의 영희도, 순이도 아닌) 경아를 호명하면서 또래 소녀들의 환상을 자극했다고 농반진반 이야기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남자 가수와 소녀 팬 모두 나이가 들면, 이런 마케팅은 금세 시들해지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두 가수도 반짝 히트를 기록했다. 1987년 발표한 2집에서 이들은 각각 <줄리엣>과 <도시의 삐에로>로 인기 정점에 다다른 후 하강곡선을 그었다. 알고 보면 최근까지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 이력을 이어왔다거나(김승진), 텔레비전, 광고, 영화 음악 등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암약하고 있다(박혜성)는 기사를 볼 수 있지만….
남고생 가수로 박혜성과 김승진이 있다면 (조금 뒤의 사례지만) 여고생 가수로는 이지연이 있었다. 긴 생머리에 맑은 목소리를 가진 청순한 이미지로 ‘남학생들의 로망’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녀를 발탁하고 1집에서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등을 작곡한 사람은, 잘 알려져 있듯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유현상이었고, 2집에서 <바람아 멈추어 다오> 등을 작곡하며 든든한 후광 역할을 한 사람은 전영록이었다. 이러한 청순형 여가수 계보는 1990년대 초 강수지와 하수빈 등으로 이어지며 재생산된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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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헤비메탈 시금석 놓은 1세대
(92) 유현상과 백두산
유현상이란 음악인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1990년대 이후 <여자야> <갈 테면 가라지> 등을 구성지게 부른 트로트 가수? 1980년대 후반 이지연 등 신인가수를 발굴한 음반제작자 겸 매니저?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이지연 노래), <성냥갑 속 내 젊음아>(도원경 노래) 등을 만든 작곡가? 1980년대 중반 그룹 백두산을 결성하고 이끈 헤비메탈 1세대 보컬리스트? 요즘의 박태환의 인기를 능가하던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해서 여성지와 스포츠신문을 장식한 가수?
그 모두가 음악인 유현상의 디엔에이를 이루는 요소다. 유현상을 메탈 보컬리스트로 숭배했던 이들에게 그가 이지연의 틴 아이돌 팝 곡들을 작곡하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일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지만, 그가 록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로 오랫 동안 무명 밴드를 거쳤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룹 백두산 이전에 트로트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 역시 금시초문일 공산이 크다.
최이철(사랑과 평화), 이건태(위대한 탄생) 등 동료 음악인들이 입 모아 증언하듯, 유현상은 1970년대 미군을 상대로 한 이태원 클럽가에서 기나긴 무명의 로커 시기를 보냈다. 라스트 찬스, 사계절, 템페스트, 사랑과 평화는 그가 기타리스트로, 보컬리스트로 내공을 다진 수많은 밴드 중 일부일 뿐이다. 트로트와 록이 묘하게 혼합된 솔로 앨범 <사랑의 강>(1985)에서 김도균을 세션 기타리스트로 픽업한 일이 그룹 백두산 결성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사실은 이후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의미심장하다.
» 백두산(1986) - 1집 Too Fast Too Loud Too Heavy
1986년은 헤비메탈 4인방(시나위, 백두산, H2O, 부활)으로 불린 밴드들의 데뷔작들이 쏟아진 해이다. 그해 백두산 역시 1집 를 발표했다. 서정성과 장중함을 갖춘 <어둠 속에서>를 히트시킨 이 음반은 한국 헤비메탈의 시금석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건전 발랄하기 그지없는 가사와 무드(<우리의 것>)와 한춘근의 타미 앨드리지 풍 드럼 솔로(<뛰어>)와 하이톤의 샤우팅(<말할 걸>)이 공존하는 음반이었다. 이듬해 내놓은 2집 에 열광했다. 하지만 백두산 역시 다른 밴드들처럼 해체의 수순을 피하지는 못했고 영광의 시기는 1986~87년의 짧은 2년으로 그쳤다.
백두산은 메탈 4인방 밴드 중 가장 격렬한 음악과 무대 매너를 보여준 밴드다. 단신에, 30대를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웃통을 벗어젖히고 무대를 누비던 유현상의 퍼포먼스는 당시 록 마니아라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다소 희화화된 이미지로 추억되는 측면이 있다. 캔의 배기성이 더러 연예프로그램에서 그 시절 유현상과 백두산을 흉내 내 좌중을 웃기던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 줄 알 것이다. 웃긴가? 그렇더라도 그것 역시 한국 록의 나이테의 하나다. 씁쓸한가? 아직 메탈 시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시작되지도 못했다. 다만 그때는 무겁고 다소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웠을지라도 절실하고 절박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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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무대로 전세계 1700만장 대박
(93) 1988년 ‘손에 손 잡고’ 부른 코리아나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1987년 이전’과 ‘1988년 이후’의 차이는 꽤 크다. 이 차이는 ‘〈한겨레〉가 없던 시대’와 ‘〈한겨레〉가 있는 시대’의 문제다.
‘88 올림픽’을 빼먹을 수는 없다. 올림픽의 유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막상 올림픽이 시작되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올림픽과 더불어 연상되는 노래 하나가 있다. 지금 20대 중반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올림픽 공식 주제곡인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조르조 모로데르 작곡)다. 비공식 통계로는 전세계적으로 1700만장이 팔렸다고 하니 대박은 분명하다. 굳이 숫자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올림픽 기간 동안, 심지어 그 후에도 당분간 이 곡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줄창 흘러나왔기 때문에 이 곡의 ‘히트‘에 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을 부른 4인조 혼성그룹 코리아나(이애숙·홍화자·이승규·이용규)에 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코리아나의 전신은 ‘아리랑 싱어스’인데,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디텍’(디스코텍)의 플로어에 울려 퍼지던 노래들 가운데 〈다크 아이즈〉와 〈아이 러브 유, 유 러브 미〉가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음반 타이틀도 ‘디스코’와 ‘코리아’의 합성인 〈디스코리아〉였다. 이 곡들은 이른바 ‘유로팝’ (혹은 ‘유로디스코’) 스타일인데, 유로팝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 출신의 음악인들이 ‘영어 가사를 가진 음악을 연주하지만, 미국(및 영국) 시장보다는 유럽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을 말한다. 유로팝이 동아시아에서는 영미팝만큼의 인기를 누린 것도 주목할 만하다. 아바(스웨덴), 보니 엠(다국적), 아라베스크(독일), 모던 토킹(독일), 뉴튼 패밀리(헝가리), 아하(노르웨이) 등 ‘7말8초’를 풍미한 그룹이 그 예다.
이렇게 ‘아시아’인이 ‘유로’팝을 연주하게 된 과정은 무엇일까.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어느 정도 밝혀진 사실에 의존한다면, 아리랑 싱어스의 리더인 홍신윤은 미8군 쇼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966년께 해병대 연예단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동남아 순회공연을 거쳐 스위스로 건너간 뒤 아리랑 싱어스를 결성하여 호텔의 바와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코리아나는 아리랑 싱어스에서 홍신윤과 그의 부인이 빠지고 나머지 멤버들이 재결성한 그룹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홍신윤은 최근까지도 스위스에서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전 위문공연’, ‘동남아 순회공연’, ‘유럽의 나이트클럽 신’ 등은 보통의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음악적 실천들이다. ‘국가적 대행사’의 공식 테마송을 부른 사람들이 이렇게 ‘낯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올림픽을 끝마친 뒤 ‘국제적 그룹’ 코리아나의 활동이 뜸해진 것만큼 미스터리한 것이었다. 그 뒤 코리아나는 대전 엑스포 주제가 〈그날은〉(1993), 월드컵 유치 홍보곡 〈위 아 원〉(1996) 등 국가적 대행사와 관련된 행사가 있을 때만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의 마지막으로는 다소 싱거웠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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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한장으로 ‘고품격 발라드’ 확립한 천재
(94) 유재하
천재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요절한 천재’라는 단어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극적인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과잉일 정도로 신화화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대중음악계에 이런 사례를 들라면 유재하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유재하의 음악 경력은 너무 짧다. 음대 작곡과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졸업 뒤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 활동했을 뿐이다. 조용필 7집에 수록된 〈사랑하기 때문에〉, 김현식이 부른 〈가리워진 길〉과 〈그대 내 품에〉, 이문세가 부른 〈그대와 영원히〉 등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탄 곡도 그리 많지는 않다.
»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가수 유재하의 유일한 앨범
하지만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1987년 앨범이 고급 발라드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료, 후배 음악인들의 헌사와 추앙이 계속되는 걸 보면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모차르트”, “음반 한 장으로 전설이 되었다”라는 식의 표현이 과장일지언정 1997년 추모 앨범을 통해 많은 음악인들이 그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표시했고, 유재하가요제라는 경연대회를 통해 후배 뮤지션들이 대중음악계에 등용되어 일군의 계보를 형성하지 않았던가.
베이시스트이자 및 서울음반의 ‘문예부장’이던 조원익이 프로듀싱한 이 앨범에서 유재하는 기타, 피아노 등 여러 악기를 능숙히 연주하며 작사·작곡·편곡·노래까지 겸하는 팔방미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곡은 대개 피아노를 중심으로 관악기나 현악기가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게 수식하는데, 가령 〈가리워진 길〉은 오보에, 클라리넷, 플루트가 고즈넉하게 협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는 실내악 무드의 현악 앙상블을 들려준다. 클래식적 토양(특히 고전주의 스타일)은 〈미뉴엣〉 같은 클래식 소품 연주곡에서도 공공연히 드러나지만, 절제되고 간소한 곡 형식,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단아하고 깔끔한 사운드에서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재즈풍의 즉흥적 피아노 솔로(〈우울한 편지〉)나 기타 솔로(〈사랑하기 때문에〉)를 펼치기도 했고, 이문세가 백업보컬로 참여한 〈지난 날〉, 뉴웨이브·신스팝 스타일의 〈텅빈 오늘밤〉처럼 빠른 템포의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고 퓨전 재즈에서 자양분을 흡수해 고품격 발라드의 공식을 확립했다. 그의 가사도 빼놓을 수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화두로 ‘사랑하기 때문에’ 울고 웃고 ‘우울한 편지’를 띄우며 그에게 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지만 애상적이면서도 담담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1987년의 소용돌이치던 시대적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한 연가를, 다른 식의 은유로 수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우울한 편지’가 우아하게 라디오 전파를 타던 장면처럼….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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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메탈 가능성 뜨겁게 분출
(95) 시나위
예나 지금이나 10대들은 지옥 같은 입시체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범생’이든 ‘날라리’든 예외는 없다. 이런 10대들에게 음악은 늘 피안으로 가는 티켓이었다. 1980년대 중반 10대들이 주로 이용하던 음악 티켓은 유로댄스음악과 헤비메탈이었다. 그 시절 여학생들은 신시사이저 팝과 유로댄스음악으로 갑갑함을 풀었고, 남학생들은 전기 기타로 상징되는 록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목숨을 걸었다. 물론 다 그랬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교실의 ‘문화 오피니언 리더들’ 대부분이 그랬다고 얘기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중·고등학교를 다닌 남성이라면 어제 일처럼 생생할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일명 마대자루를 마이크나 전기기타 삼아 ‘되도 않는’ 괴성을 질러대던 녀석들(또는 자신의) 즉석 공연 모습을. 또 워크맨 볼륨을 끝까지 올려 귀가 터져라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던 기억을 말이다.
오지 오스본이니 주다스 프리스트니 모틀리 크루니 하는 영미산 ‘중금속 음악’에 경도된 이들에게 1986년 봄 발매된 시나위의 데뷔작 〈헤비 메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임재범의 거칠고 힘찬 보컬과 리더 신대철의 강력하고 현란한 기타 연주는 사운드의 강도만큼이나 큰 파장을 낳았다. 출중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외국산과 비교한다면 완벽한 대체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새 시대 한국 록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곧 10대 메탈 키드들의 송가가 되었고 라디오 인기 차트에도 올랐다. 강종수(드럼)의 빼어난 가사와 절정의 헤비 사운드를 결합한 ‘남사당패’는 즉각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가치를 인정받았다. 메탈 발라드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와 연주곡 ‘1월’은 감정의 외적 분출로 채워지지 않는 서정적 간극을 채워주었다.
» 시나위 1집 음반 <헤비 메탈>(1986년)
신대철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가 김종서(보컬), 강기영(베이스), 김민기(드럼)로 교체된 후 녹음한 2집 〈다운 앤 업(Down and Up)〉도 큰 호응을 얻었다. 타이틀곡 ‘새가 되어 가리’와 발라드 ‘해 저문 길에서’는 김종서의 하이톤의 음색이 대변하듯 이들이 좀더 밝고 깔끔한 ‘엘에이(LA) 메탈’ 스타일로 변모했음을 드러냈다.
시나위의 이후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대로다. 멤버 교체, 활동 중단, 음악 스타일 변화의 반복을 겪으면서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으로 남은 사실,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 김바다 등을 배출한 한국 록의 ‘명가’라는 ‘자랑스럽지만 안쓰러운’ 수식어 말이다.
시나위의 등장은 백두산 부활 H2O 등의 음반 제작을 부추기며 메탈의 저변을 넓힌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낙원동 파고다극장과 이태원 록 월드 같은 후미진 유사 공연장과 어둑한 뮤직비디오 감상실을 전전하며 단순히 카피와 감상에 머물던 스쿨 밴드들과 메탈 키드에게 자작곡의 필요성과 자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요컨대 시나위는 1980년대 후반 한국 메탈의 진정한 발화점이었던 것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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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시대 마지막과 변화의 상징
(96) <울고 싶어라>와 <샴푸의 요정>, 그 사이
1988년 ‘청문회 정국’이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내로라하는 정계와 재계 거물들을 앉혀 놓고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몇몇 국회의원은 청문회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지금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는 청문회 정국과 관련해서 히트를 기록한 곡인데, 다름 아니라 이남이가 부른 <울고 싶어라>다. 이 곡은 청문회에 불려 나와서 ‘애송이’ 국회의원에게 수모를 당하던 거물 인사들의 처지를 풍자하는 것으로 이해(혹은 오해)되어 상업적 히트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가수 이남이의 독특한 풍모로 인해 애절한 사연을 담은 솔-고스펠 풍 노래가 ‘코믹’한 코드로 수용되었지만, 이런 일이 대중문화에서 드물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 곡의 주인공은 ‘이남이’가 아니라 ‘사랑과평화’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을 보아도 이남이가 노래를 부른 곡은 이 곡 하나뿐이다. 이 곡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히트할 무렵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몇 년 전 사랑과평화가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때 그 심정을 담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떤 개인 주변의 인간관계의 문제를 담은 곡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셈인데, 이 점 역시 대중문화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다.
대중음악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곡은 ‘그룹 사운드’가 기록한 마지막 히트곡인 것 같다. 이때 ‘그룹 사운드’란 단지 ‘록 밴드의 한국식 명칭’이 아니라 ‘1960~70년대’의 문화에 기반을 둔 계열을 말한다. 1980년대 말 정도가 되면 ‘록 밴드’라는 ‘정확한’ 이름이 정착되면서 ‘그룹 사운드’라는 용어는 점차 사라졌다. 그 결과 이 무렵 그룹 사운드 계열의 흐름은 무언가 쇠락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게 된다.
» <울고 싶어라>가 수록된 사랑과평화의 3집(1988)과 <샴푸의 요정>이 수록된 사랑과평화의 4집(1989).
그렇지만 <울고 싶어라>를 ‘그룹 사운드 마지막 히트곡’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사랑과평화는 1989년 또하나의 숨겨진 히트곡을 가지고 있다. <샴푸의 요정>이라는 곡인데, 홍학표와 채시라가 주연을 맡고 황인뢰가 연출을 맡은 ‘베스트극장’의 주제곡이다. 1988년 말에 방영된 이 드라마를 미처 챙겨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장정일 원작, 주찬옥 극본’이란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 이 곡은 드라마에 들어간 뒤 1989년 사랑과평화의 네 번째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이 사실보다는 이승철과 김진표가 나중에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진 것 같다.
이 곡의 만들고 노래를 부른 사람은 사랑과평화의 부동의 리더 최이철이 아니라 새로운 멤버인 장기호였다. 장기호는 뒤에 빛과소금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시시엠(CCM·기독교 대중음악)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어쨌거나 <울고 싶어라>와 <샴푸의 요정> 사이에는 꽤 큰 경계선이 놓여 있다. 한쪽은 ‘펑키 그룹 사운드’, 다른 한 쪽은 ‘퓨전 재즈 밴드’라고 부르면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평화를 비롯한 그룹 사운드들은 잦은 멤버 교체로 시달렸다. 1980년대 사랑과평화를 거쳐간 인물들 가운데 김광민, 한상원, 정원영 등 지금 ‘실용음악과 교수님’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놀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이철은? 작년 한 방송국에서 <우리가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이라는 이름의 릴레이 콘서트에 출연한 그는 “방송에 하도 오랫동안 출연해서…”라는 말로 공연을 시작했다. 이에 대한 내 소감은 생략한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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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가사로 꽃핀 ‘세련된 발라드’
(97) 변진섭과 여성 작사가들
이문세가 고품격 발라드의 지평을 확립했다면, 그 뒤를 이은 변진섭은 발라드를 세련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변진섭의 발라드 왕국’이 그 혼자만의 힘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7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으며 출발한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신예 작곡가들이었다. 이문세에게 이영훈이 있었다면, 변진섭에게는 하광훈, 지근식, 윤상, 노영심 등이 있었다.
하광훈과 지근식의 공조 체제가 변진섭표 발라드의 주요 뼈대를 이루었지만, 여기서는 변진섭의 2집에 곡을 실은 윤상에 대해서만 잠시 이야기해 보자. 이런저런 무대 뒤에서 전전하다가 김현식의 ‘여름밤의 꿈’(1988)으로 작곡가로 데뷔한 그는 손무현이 주축이 된 김완선의 백밴드 실루엣을 거치며 변진섭, 황치훈, 김민우, 강수지 등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된다. 뒷날 본인의 음반도 발표하며 가수 겸 작곡가,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그에 대한 이후 활동상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 박주연, 지예 등 신세대 작사가들이 참여한 변진섭 2집 ‘희망사항’(1989)
어쨌든 변진섭은 이문세에서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계보의 징검다리였다. 단순화시켜 비교하면, 이문세의 발라드가 시적 서정에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충만했다면, 변진섭의 발라드는 밝고 경쾌한 사운드에 깔끔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주효했다. 힘이 실린 열창형 창법(때로는 ‘꺾기’ 창법)이 이문세 목소리의 묘미라면, 변진섭은 물 흐르듯 감미롭고 유려한 음색으로 사랑의 달콤 쌉싸래함을 노래했다.
(그의) 발라드가 (당시 소녀들에게) 부여한 통속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동은 가사에서도 뚜렷하다. 이는 두 여성 작사가 지예, 박주연의 공적이 크다. 탤런트 출신이자 가수로도 활동한 지예는 변진섭 1집에서 하광훈 곡(‘홀로 된다는 것’ 등), 2집에서 윤상 곡(‘로라’ 등)과 조우했다. 박주연도 〈우리 노래 전시회 1〉(1984)에서 ‘그댄 왠지 달라요’로 데뷔했지만 변진섭 2집의 ‘너에게로 또다시’(하광훈 작곡) 등을 비롯해 김민우의 ‘입영 열차 안에서’(윤상 작곡),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 등 발라드 히트곡 작사가로 명성을 떨쳤다.
세칭 ‘신세대 여성 작사가’들은 (변진섭에게도 곡을 준) 신진 작곡가들과 느슨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 말, 1990년대 초중반, 발라드 황금기의 주역이 된다.(가령 윤상의 앨범에는 ‘이별의 그늘’(박주연 작사), ‘잊혀지는 것들’(지예 작사) 등 윤상이 두 여성 작사가와 호흡을 맞춘 곡들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쓴 노랫말의 매력은? 사랑해서 기쁘고 이별해서 슬프다는 식의 추상적 모티브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산문체와 신선한 구어체의 중도적 화법으로 내면의 정경을 정밀 묘사했다. 남성 가수들이 부른 노래 속의 남성 화자는 진짜 남성의 모습이라기보다 여성이 바라본 남성상, 여성이 상상해낸 산물에 가까울지 몰라도, 사랑과 이별에 이르는 감정과 정황들이 섬세하고도 친근하게 포착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사가들은 발라드 가사의 한 정석을 마련하며 발라드 시대를 만개시켰음은 물론 발라드의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도 명확히 드러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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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주름 잡고 아티스트로 거듭난 ‘닮은꼴’
(99) 이상은과 신해철
‘58년 개띠’란 말처럼, 속칭 ‘쌍팔년도’ 하면 짠한 느낌이 드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도 벌써 20년이 다 된 일이다. 지겹겠지만, 대학가요제 얘기를 한번 더 해야 할 듯하다. 1977년 시작한 대학가요제의 약발이 다했다고들 수군거리던 그때, 걸출한 스타 두 명이 탄생했다. 강변가요제의 히로인 이상은과 대학가요제의 히어로 신해철 말이다.
예의 한여름 남이섬에서 열린 1988년 강변가요제는 이수만(!)과 정혜정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껑충한 키에 선머슴 같은 이상은이 탬버린을 들고 율동을 하면서 〈담다디〉를 부르던 장면은 단연 그날의 걸작이었다. 금세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를 지닌 〈담다디〉에 대상이 돌아갔지만, 사실 그 무대에는 훗날 가요계를 풍미할 쟁쟁한 가수가 여럿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의 이상우가 금상을, 〈한번만 더〉의 박성신이 장려상을 받았고,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의 박광현과 〈유혹〉의 이재영도 이 무대에서 데뷔했다.
세밑에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대학가요제의 스포트라이트는 마지막 참가자 무한궤도의 차지였다. 늘 마지막에 무대에 오르는 조용필처럼(실제 조용필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무한궤도는 현란한 조명에 걸맞은 화려한 사운드로 압도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강력한 대상 후보 주병선(뒷날 〈칠갑산〉을 부른 바로 그)을 밀어내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풍의 신시사이저가 돋보이는 〈그대에게〉는 동시대 헤비메탈이 충족시키지 못한 새로운 대중적 록의 가능성을 꽃피웠다.
무엇보다 가요제 이후 이상은과 신해철은 아이돌 스타로 우뚝 섰다. 소년 같은 중성적 매력을 보여준 이상은은 이듬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할꺼야〉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여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귀공자 스타일에 명문대생이란 후광을 더한 신해철 역시 무한궤도의 데뷔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1989)는 물론, 솔로로 나선 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1990)와 〈재즈 카페〉(1991)를 계속 히트시켰다. 하지만 이상은은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외유하며 아이돌 세계와 작별을 고했으며, 신해철은 넥스트를 결성해 거칠고 장중한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세계로 이탈했다.
그 뒤 신해철과 이상은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며 대중음악계를 호령했다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여기서는 음악세계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이 꽤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점만 확인하자. 대학가요제로 데뷔해 아이돌 스타로 인기를 누리다 자의식 강한 ‘아티스트’로 거듭났다는 점 말이다. 뒤에 둘 다 철학자의 이름을 딴 예명과 밴드명으로 활동한 적 있다는 사실은 사소하지만 흥미롭다. 이상은은 ‘리채’(Lee-Tzsche)로, 신해철은 ‘비트겐슈타인’으로 활동했으니 말이다. (부모의 성에서 한 자씩 따온 리채의 영어철자는 니체와 무관하지 않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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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의 80년대 ‘내게 솔로는 너무 써’
(100) 김창완의 우울한 계절 ‘혹은 1980년대 산울림
1984년 10집 음반을 발표할 무렵부터 산울림은 실질적으로 ‘김창완이 혼자 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친동생들인 김창훈과 김창익은 이후 직업적인 음악활동에서 멀어져 갔는데, 김창훈은 필자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이유를 “배고파서”라고 간략하지만 뚜렷하게 말한 바 있다. 명문대 졸업장을 받은 아들 3형제 모두가 연예계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부모들이 끝까지 대범하기를 기대하기란 힘들었던 모양이다.
1980년대 산울림이 록 밴드로부터 점차 솔로 싱어송라이터로 변모하면서 산울림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도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6집), 〈청춘〉(7집),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회상〉(이상 8집), 〈너의 의미〉(10집),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11집·사진) 등 ‘포크 성향의 발라드’가 주조다. 이 곡들이 그저 부드럽고 서정적인 노래들이 아니라 우울하고 쓰라린 노래들이라는 점을 당시에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 김창완의〈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이 무렵 김창완의 음악을 ‘포크’라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모르지만, 이 시기 김창완은 꾸러기들이라는 통기타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1985년과 86년 한 장씩 음반을 발표한 이 그룹은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곡과 더불어 ‘100일 라이브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이 그룹의 멤버들은 그 뒤 히트곡 한두 가지 정도를 보유한 솔로 가수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간략히만 설명한다면, 최성수(〈후회〉), 임지훈(〈사랑의 썰물〉), 신정숙(〈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윤설하(〈지붕 위의 바이올린〉), 권진경(〈권진경〉) 등등이 그들이다.
이 무렵 김창완이 이은하에게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1984) 등을 작곡해 주고, 동물원의 데뷔 음반(1988)에도 이런저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들도 기억해 둘 만한 일이다. 그 외에 음반 프로듀싱이나 드라마 음악 제작 등 이 시기 김창완의 자취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이에 대해 ‘연예산업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해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창의적인 재능을 보유한 사람이 여유롭게 자신의 창작에 몰두할 수 없는 연예산업의 얄궂은 시스템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예들이다. 이 무렵 김창완의 노래가 우울하고 쓰라렸다면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 ‘김창완 사단’이 대학생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80년대의 언젠가 김창완이 대학교 축제에 초대되어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에서 전기 플러그를 뽑는 등 공연을 방해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면, 이 사실에 대한 공적 해석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 해석으로는, 김창완과 산울림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당시 내 주변의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한결같이 소심하고 섬세했고, 캠퍼스의 주변에서 겉돌았던 것 같다. 그 중 한 녀석은 술이 취해서 노래를 부를 때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라는 부분을 ‘샤우트 창법’으로 불러댔다. 어쩌면 당시 김창완도 그렇게 노래 부르고 싶었을지 모른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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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뽕짝’ 가락에 실려온 춤바람이여
(101) 박남정
아무래도 1980년대 후반 무렵이 그 시작인 것 같다. 현란하고도 가벼운 이미지의 댄스가 이전보다 적극적인 문화 아이템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 댄스 음악을 이끈 삼두마차는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동방신기, 이효리, 비쯤 된다고 해 두자. 물론 지금에 견주면 아주 소박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면, 김완선과 박남정은 댄스 키드들의 우상으로 각광받으며 남녀 댄스 가수로 쌍벽을 이루는데, 그들은 세칭 ‘한국의 마돈나’ 혹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회자되곤 했다.
물론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만, 이 시기의 댄스 음악이 마이클 잭슨으로 대변되는 브레이크 댄스의 수혜자들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박남정이 플로어에서 슈트 차림에 모자를 들고 ‘문워크’를 선보이던 모습이 눈에 선한 이들도 있으리라. 이들의 춤을 비교하면, 가령 소방차가 큰 스케일에 힘을 가미해 애크러배틱한 남성적 춤(가령 공중에서 마이크 던지고 받기, 공중회전하기 등)을 보여 주었다면, 박남정은 작은 체구에 걸맞게 유연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과 민첩하고 ‘발 빠른’ 아기자기한 춤을 전매특허로 내세웠다.
박남정은 1988년 봄 〈아 바람이여〉로 혜성처럼 데뷔해, 같은 해 늦가을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에 이르렀다. 그 중 대표곡인 〈널 그리며〉는 코믹스러운 고갯짓과 손놀림의, 일명 ‘ㄱㄴ 댄스’로 전국적 인기를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 〈사랑의 불시착〉으로 계속적인 인기를 얻으며 명실공히 1980년대 댄스 음악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그는 2집 앨범에 수록된 몇몇 곡들을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 ‘널 그리며’와 ‘사랑의 불시착’이 수록된 박남정 2집 음반.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새로운 세대로 불린 댄스 키드들(의 음악) 역시 1970년대 음악 계보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김완선의 음악이 이장희, (산울림의) 김창훈의 손길을 거쳐 탄생했다면, 박남정의 음악은 안치행과 김기표 등의 손길을 거쳤다. 안치행 작곡의 〈아 바람이여〉나, 김기표 작곡의 〈사랑의 불시착〉 〈안녕 그대여〉 등처럼. 굵직한 그룹사운드 출신인 안치행과 김기표가 직접 음악 비즈니스계에 나서 성공을 거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소개한 것으로 대신하자. 박남정과 소방차뿐 아니라 여러 가수들의 음악을 통해 김기표나 김명곤, 이호준 등 그룹 출신의 뮤지션들이 작·편곡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도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1970년대 말, 80년대 초에 유행한 이른바 ‘트로트 고고’의 잔향이 박남정의 노래에 진하게 남아 있다는 점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단적으로 말해 트로트풍의 단조 선율과 쿵짝거리는 고고 스타일의 리듬이 결합된(또는 트로트 고고가 진화한) 댄스 버전이라 할 만하다. 빠른 댄스 리듬이 ‘뽕끼’ 가득한 선율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곤 하는데, 박남정의 나름(!) 구성진 보컬까지 여기에 가세한다. 이를 두고 ‘토착화한 댄스’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르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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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작곡실력 갖춘 ‘한국형 발라드 황제’
(102) 신승훈
“제 음악의 정서적 기반은 애이불비(哀而不悲)입니다.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울지 않는다는 거죠.” 가수 신승훈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설명할 때면 종종 꺼내는 얘기다. 신승훈이 누군가. 1980년대 ‘이문세-이영훈 조’가 어법을 확립한 한국형 팝 발라드의 계보에서 1990년대 오롯이 빛을 발한 발라드의 대명사 아닌가. 앞서 애이불비 정서의 주어를 1인칭이 아니라 ‘한국형 주류 발라드’란 3인칭으로 바꾸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실 1990년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막 히트했을 때만 해도 신승훈이 훗날 거물이 될 거라 예견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곡, 반주, 가창 모두 당시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큰 스타성을 발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 울리지 마〉 등 후속곡들이 (준)히트하고 데뷔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그의 주가는 급등했다.
신승훈은 이듬해 발표한 2집을 통해 발라드계의 ‘황제주’에 올랐다. 전례 없는 초고속 등극이었다. 애절한 타이틀곡 〈보이지 않는 사랑〉이 그해 가요계를 평정한 일이 결정적 계기였음은 상식일 것이다. 이 곡이 가요 차트에서 10주 이상 정상을 차지했다거나, 베토벤의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를 앞부분에 삽입해 화제가 되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 신승훈을 ‘발라드계의 황제’로 만든 2집 음반(1991년).
이후 그가 걸어간 탄탄대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3집에서 〈널 사랑하니까〉 〈처음 그 느낌처럼〉을 히트시키며 전작의 답습이란 일각의 평가를 무색하게 했으며, 4집은 그 스스로 자부심을 피력하곤 하는 〈그 후로 오랫동안〉과 댄스곡 〈사랑 느낌〉을 통해 ‘발라드 일색’이란 편견을 성공적으로 뒤집었다. 발라드와 댄스가요의 양동작전은 5집에서도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과 〈내 방식대로의 사랑〉으로 훌륭히 재현되었다. 그러는 사이 1집부터 시작된 밀리언셀링 행진은 계속되었고, 5집은 200만장 가까이 팔리면서 정점을 찍었다.
신승훈이 시대를 호령하며 롱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후 김건모, 노이즈, 박미경 등의 음반을 만든 김창환(라인음향)의 조력 역시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승훈이 다른 스타들과 달랐던 가장 큰 요인은 음악세계를 스스로 만들고 디자인할 줄 알았다는 점에 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으로, 흔히 간과되곤 하지만, 뛰어난 작곡 능력을 들 수 있다. 데뷔곡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비롯해 상당수의 히트곡들이 자작곡인데, 이들 곡만으로 노래방에서 1시간 이상 부르고도 남을 만한 정도다.
스튜디오 작업만큼(또는 그 이상으로) 라이브를 중시한 점 역시 롱런의 열쇠 중 하나였다. 조용필, 이승환, 이승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상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팬들과 끈끈한 관계를 지속해온 데에는 라이브에 공들인 덕이 크다. 듣는 이를 흡인하는 신승훈의 마력적인 가창력은 너무나 당연해서 빼놓을 뻔했다. 청아하면서도 애달픈 그의 노래는 풍부하고 진한 표현력에 있어서 동시대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성적으로 지나치게 밀착하도록 하는 가창이어서 싫어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종합하여 셈해 보면 이는 그만의 강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가 정상을 지킨 것을 보면 말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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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서울을 노래한 마지막 ‘아마추어’들
(103) 동물원
동물원에 대해 회고한다는 것은 노스탤지어를 말하는 것과 똑같다. 달리 말하면 동물원의 노래들은 시간이 흘러서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 그 노래들을 들을 때부터 진하고도 강한 노스탤지어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의 많은 노래들은 꿈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 꿈이란 장래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노스탤지어. 동물원에 속했던, 그리고 거쳐 갔던 싱어송라이터들(김광석, 김창기, 박기영, 유준열, 박경찬, 배영길 등)은 ‘서울 아이들’이다. 이때의 서울이란 아찔한 스카이라인를 가진 강남이나 인공적으로 복개된 청계천, 혹은 앞으로 어디에선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사족이지만, 진심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빈다. 정치적 이유가 아니다) 대운하와는 전혀 무관한 서울이다. 또한 내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그리고 그 뒤로도 한동안 때가 꼬질꼬질했던 1950~60년대의 서울도 아니다. 그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때려 부숴지고 파 헤쳐지는 와중의 서울이다. 그 전까지 이런 서울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혜화동’(동물원 2집(1989) 수록)이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동물원 3집(1990) 수록)처럼 구체적 공간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들은 흔치 않다.
» 동물원의 데뷔 앨범(서울음반, 1988). <거리에서>, <변해 가네> 등 수록.
두 번째 노스탤지어. 동물원의 음악은 ‘아마추어 포크’이고, 그들은 1970년대의 아이들이다. 이때 1970년대라는 의미는 아직도 아마추어의 노래를 듣는 것이 매우 익숙했던 시절이다. 프로페셔널 가수와 음악인의 쌔끈한 연주와 녹음을 들을 수 있던 기회만큼이나 더벅머리 총각(혹은 긴 생머리의 처녀)이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시절이다. 가정, 학교, 교회 같은 일상의 공간은 물론 그리고 대학교 주변의 카페나 술집, 혹은 모꼬지(MT) 갔을 때의 민박집 같은 특별한 장소들도 아마추어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던 공간들이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이 이전과는 영 딴판인 세상이 되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던 아마추어들의 노랫가락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우리는 동물원이라는 더벅머리 총각들의 ‘통기타 그룹’의 음반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런 노래들을 듣고 ‘짠’한 느낌을 받고 지금도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서울의 공간들과 아마추어의 노랫가락에 대한 구체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동물원이 발표한 네 장의 음반들은 그 시대의 일상에 관한 소박하면서도 구체적인 기록이다. 공중전화 박스(‘유리로 만든 배’)나 동시상영관(‘명화극장을 보고’) 같은 것들마저 이제 사라져버린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 뒤의 동물원은? 김광석은 2집 이후 동물원을 떠나 솔로 아티스트로 프로페셔널의 경력을 걸었고, 7집(1997) 이후 김창기와 박경찬도 생업을 찾아 탈퇴한 뒤 3인조(유준열, 박기영, 배영길)로 축소 재편되었다. 8집(2001)과 9집(2003) 이후 동물원은 매년 가을 용문산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낯설다. 김광석이 자살한 지 벌써 10년이 더 지났다는 것도, 김창기가 정신과의사라는 직함으로 텔레비전 아침 토크쇼에 나오는 것도 낯설다. 그건 서울이 서울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낯선 것과 마찬가지고, 집에 있는 통기타가 줄 한 두 개가 끊어진 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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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그들
(104) 노찾사, 그리고 김광석·안치환
누가 뭐래도 ‘민중가요 대중화’의 주역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수면으로 급부상하며 제도권에 진입(하는 전략을 시도)한 뒤, 1984년 김민기가 제작한 1집이 뒤늦게 공식 소개되고, 1989년에는 놀랍게도 2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건’도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유화된 1990년대에는 ‘투쟁과 결의’ 대신 ‘일상과 위로’의 모드를 채택했고 얼마 뒤 잠정적으로 활동이 끝났다. 지금은? 그들의 노래는 댄스나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어 인기를 모으기도 했고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이들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이들, 활동을 재개한 노찾사를 보며 ‘7080 콘서트’처럼 추억과 향수를 판매하는 세태와 비교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노찾사 출신의 스타(?) 가수들도 있다.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등이다. 이들이 ‘노찾사’ 태생임은 암암리에 곳곳에서 드러난다. 공연 중심의 활동 방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고단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안의 메시지,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사운드에 실은 포크 지향적 태도…. 특히 비슷한 시점에 김광석과 안치환은 록과 조우하는데 이는 조동익 밴드의 세련된 편곡과 연주에 힘입은 것이다.
‘어떤’ 세대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은 김광석은 노찾사 계열과도, 아마추어적인 분위기의 동물원과도 다소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1천여회가 넘는 소극장 라이브 공연으로 그만의 세계를 찾아나선 것이다. 특히 3집(1993), 4집(1994)에 이르면 포크·포크록 사운드를 강화하며 낭만과 사색이 깃든 음유시인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소박하고 건강한 결의의 송가 <나의 노래> <일어나>, 섬세한 서정으로 삶을 성찰한 <회귀>, 30대의 초상화 <서른 즈음에> 등. 더불어 한대수, 양병집, 이정선 등의 포크 기수들을 ‘다시 부르기 프로젝트’에 등재시키며 자신의 뿌리와 지향으로 은밀히 공명시켰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 한때 노찾사의 ‘목소리’였던 안치환은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이다. 안치환은 현실비판적인 민중가수만도, 사랑노래를 부르는 대중가수도 아닌(아니면 둘 다의) 길을 걸어왔다.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에 실린 그의 음악언어는 무엇보다 시를 통해 빛을 발했다. 안치환이 가장 아끼던 김남주(<저 창살의 햇살이> <자유> 등)를 비롯해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나희덕(<귀뚜라미>), 류시화(<소금인형>), 정호승(<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의 시를 호명했다. 그도 포크를 본거지로 삼았으나 김광석처럼 록을 수용해 3집(1993), 4집(1995) 등을 발표했다(이후 밴드 ‘안치환과 자유’를 거느리게 된다).
» 투박한 진실의 목소리 안치환의 1집 (1990)
이제 ‘삶의 노래, 진실의 노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노찾사의 ‘히트곡’들은 ‘애창가요’ 또는 ‘건전가요’가 되었다. 김광석은 잃어버린 꿈의 메타포, 또는 신화가 되었다. ‘저 들에 불을 놓아’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온 정태춘 같은 이들도 있다. 이 모두가, 노래를 통해 무언가를 꿈꾸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남긴 후일담이 아닐까.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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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거름이 된 ‘헤비메탈의 몰락’
(105) 이승철·김종서·임재범: 발라드 가수로 변신한 메탈의 주역들
1986~87년 시나위, 부활, 백두산, 에이치투오(H2O) 등 이른바 메탈 4인방이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곧 전국적으로 ‘우리도 그들처럼’을 꿈꾸는 새로운 메탈 밴드들이 잇따라 결성됐고, 한국 메탈의 출발을 알린 1세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요컨대 1988~90년은 메탈이 대중화된 시기,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였다. 크라티아(엘에이 메탈), 아발란쉬(스래시 메탈), 디오니서스(바로크 메탈) 등 특정 하위 장르를 추구하는 밴드들도 등장했는데, 여러 갈래로 분화된 양상은 메탈의 기반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메탈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블랙홀, 부활, 시나위 같은 ‘빛나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90년대의 문턱을 넘으며 소멸해 갔다. 그 과정에서 또는 그 결과로 일어난 일은 다들 알고 있는 대로다. 이승철, 임재범, 김종서 등 간판급 보컬리스트들은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가요계의 복판으로 성큼 나아갔고, 악기 연주자들 상당수는 세션맨과 작·편곡가로 ‘업종전환’ 했다.
서태지를 제외하면, 이승철, 김종서, 임재범만큼 성공한 메탈 출신 음악인은 없을 것이다. 부활 출신의 이승철은 88년 일찌감치 솔로로 데뷔하여 단숨에 정상급 가수로 올라섰다. 그가 감성적 호소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같은 발라드를 우선 공략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승철은 이어서 〈소녀시대〉 〈오늘도 난〉 등 댄스곡은 물론 록, 아르앤비,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하며 풍부한 표현력과 가창력을 자랑했다. 라이브의 황제로 공인받고 있는 점이나 2000년대 제2의 전성기를 보내며 롱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조용필의 후계자란 영광스런 칭호는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시나위, 카리스마 등을 거친 김종서 역시 발라드로 스타트를 끊었다. 뛰어난 하이톤을 절절히 담은 〈대답 없는 너〉 〈겨울비〉 등을 히트시키며 솔로로 안착한 그는 록 발라드의 기수로 승승장구했다. 〈세상 밖으로〉 등 흥겨운 업템포 록 넘버들도 인기를 끌었지만, 아무래도 〈아름다운 구속〉같이 서정적 선율과 부담스럽지 않은 록 사운드를 결합한 곡들이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시나위, 외인부대, 아시아나를 거친 임재범도 발라드를 핵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앞의 가수들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데뷔곡 〈이 밤이 지나면〉에서 보듯, 강력한 쇳소리와 파워를 자랑하던 목소리에서 마이클 볼턴을 연상시키는 솔풍의 음색으로 과감히 변신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임재범은 〈사랑보다 깊은 상처〉에서 깊은 울림을 남기며 매우 넓은 호응을 얻었지만, 은둔자적인 활동으로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대마초 파동이란 암초에 걸려 ‘외파’된 70년대 그룹사운드와 달리, 80년대 헤비메탈은 ‘내파’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자부심과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외골수 메탈 공동체 성원들에게 적지 않은 흉터를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기름진 자양분과 옹골찬 열매가 되어 주었다. 누구도 원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지만.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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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추락하는 메탈의 마지막 비상
(108) 멍키헤드, 크래쉬, 넥스트
1990년대 초, 한국 메탈 진영에서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세풀투라 등에 영향 받은 스래시 메탈이 득세했다. 그 와중인 1994년, 터보의 <팔도유람>, 멍키헤드의 <부채도사와 목포의 눈물> <남행열차> 등 스래시 메탈 밴드들이 리메이크한 곡들이 뜻밖의 히트를 기록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만요’(익살스런 노래), 트로트, 만화영화 주제가 등과 강력한 스래시 메탈 사운드, 그리고 익살스런 설정 같은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의 결합은 참신하다는 반응을 낳으며 화제와 인기를 모았다. 이는 한편으로 한국 록의 오랜 엄숙주의와 경직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징후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별미가 아닌 메인 메뉴로는 여전히 대중과의 합일이 힘겹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런데 1994년이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해이다. 이들은 3집에서 음악적으로 얼터너티브 록을 표방하는 한편 통일을 테마로 한 <발해를 꿈꾸며>와 교육문제를 고발한 <교실이데아>를 앞세워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기존 팬층을 더 공고히 하는 동시에 ‘진지한’ 청자들도 새로운 팬으로 끌어들였다. 다들 아는 얘기를 새삼 꺼낸 건 바로 <교실이데아>의 또 다른 주인공, 즉 ‘속 시원한’ 거친 코러스를 선사한 이를 상기하기 위해서다. 크래쉬의 안흥찬(보컬, 베이스) 말이다.
대중적으로는 <교실이데아>와 환경콘서트 ‘내일은 늦으리’를 통해 유명해졌지만, 크래쉬는 이미 메탈 마니아들 사이에서 스타였다. 그해 1월 발표한 데뷔작
1994년은 넥스트가 2집
돌이켜 보면 1994년은 한국 메탈이 몰락하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해였다. 앞서 보듯, 스래시 메탈 풍 코믹 리메이크가 인기를 끌었지만 반짝 해프닝에 그쳤다(메탈의 희화화로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또 크래쉬가 혜성처럼 나타나 영미권에 대한 콤플렉스를 비로소 해소시키며 절대적 지지를 이어갔지만 이후 척박한 환경에서 분투하는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넥스트는 메탈의 색깔을 분명히 함으로써 1990년대 가장 큰 팬덤을 거느린 록 밴드의 지위에 올라섰지만,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메탈 공동체는 급속히 와해되어갔고, 메탈은 점차 컬트가 되어갔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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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저항’ 깃발 아래 윤도현·강산에
(109) 민중가요와 록의 만남
1990년대 들어 민중가요는 대중화·세련화의 길을 걸었지만, 동시에 음악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비판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선택된 것은 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포스트 민중가요’ ‘민중 록’이라 할 수 있다면, 그 선두에는 1993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은 인기를 얻은 〈청계천 8가〉를 할 천지인이 있다. 그 뒤 이스크라(1996), 메이데이(1997)로 이어지며 록을 도입한 민중가요는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자연주의, 순수주의에 입각해 어쿠스틱 사운드, 투명한 소통을 중시했던 그간의 민중가요 공동체가 왜 록을 수용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록=저항의 미학’으로 설정했던 비평적 흐름이 후광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대중문화 담론과 더불어 성행한 록 담론의 직·간접적 효과라고 할까. 음반 사전심의제 철폐, ‘자유’ 콘서트 등도 이런 흐름과 결탁했다.(록그룹 이스크라와 메이데이를 기획한 ‘뮤직센터21’은 몇 년 뒤 인디레이블 ‘인디’로 이어지면서 ‘록=저항=태도’라는 공식을 계속 설파했다.)
하지만 이 담론의 최대 수혜자는 윤도현밴드(현 YB)가 아닐까. 지금이야 록 밴드로 각인되어 있지만 출발은 포크였다. 김현성 등과 함께한 포크 노래동인 ‘종이연’ 출신답게 1995년 솔로 음반은 포크의 연장에 있었지만, 이듬해 밴드 형태의 음악에 박노해 시를 붙인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등을 실은 2집과, 〈한국 록 다시 부르기〉 음반(1999)에서 저항적 록 밴드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YB 멤버 박태희(베이스)와 김진원(드럼)은 메이데이 출신이다.
» 1995년에 발매된 윤도현 솔로음반.
민중가요와 무관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성향의 음악을 담은 가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강산에를 손꼽을 수 있는데, 1집 〈라구요〉(1992), 2집 〈넌 할 수 있어〉(1994), 3집 〈삐딱이〉(1996) 등으로 비평적 상찬과 대중적 인기를 두루 획득했다. 특히 사회에 대한 ‘삐딱’한 태도와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았다는 점에서 민중가요와 무관하면서도 일맥상통한 음악을 만들었고, 한국 전통음악과 전혀 관련되지 않으면서도 한국적 정서가 담긴 록 음악을 불렀다.
1990년대 중후반의 윤도현이나 강산에 음악은 풋풋하면서도 진솔한 포크 록적 기반에 비판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시원한 열창형 노래에 목소리톤까지도…. 그런 점에서 이들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활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음기획’ 소속 뮤지션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들 외에 정태춘과 박은옥, 뜨거운 감자(김C), 권진원 등이 소속된 곳이다.
그렇다면 민중가요, 또는 민중가요적 태도와 록을 혼융한 뮤지션들의 전말은? 민중 록 밴드로 자처한 포스트 민중가요 계열 밴드들은 한 곡 반짝 인기를 누리고는 잊혀지는 이른바 ‘원히트원더’, 또는 음반 한 장을 낸 뒤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한편 윤도현(밴드)은 더없이 좋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의 상반되는 이미지들은 혼란스럽다. 이름에 견줘 창작력도 미비하여 음악적 성취도에서도 이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반미·반전의 기수, 비판적 로커를 자처하다가도, 상업성과 결탁된 월드컵 응원가 사건에 휘말리듯이, 음악 역시 흔한 사랑가와 분방한 록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간다. 연예인과 선동자, 주류적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제대로 봉합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주류 음악이 되지 못한 한국 록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200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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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고 고상한 ‘록’ 웃기시네
(110) 삐삐프로젝트의 ‘방송사고’
‘벌써 10년’ 전인 1997년 2월15일, 한국 대중음악 사상 유례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록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생방송 인기가요 베스트 50〉에 출연해 연주하는 도중,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서구식 욕설을 하고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방송사고를 낸 것이다. 이 사건은 8년 뒤 후속 프로그램인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어느 인디밴드가 전라의 퍼포먼스를 벌인 전무후무한 방송사고로 되살아난 바 있다. 사건의 강도와 사회적 파장이야 단연 후자가 강했지만, 삐삐롱스타킹의 해프닝은 상상조차 못한 사상 초유의 사고였다는 점에서 무엇과도 비견하기 어려운 사고였다.
삐삐롱스타킹, 그리고 이들의 전신인 삐삐밴드(통칭 삐삐프로젝트)는 1990년대 가요계의 돈키호테였다. 95년 데뷔 당시, 이들은 펑크음악을 표방했다. 그런데 인사말을 두서없이 엮은 듯한 〈안녕하세요〉와 “딸기가 좋다”는 막무가내식 악쓰기로 일관한 〈딸기〉처럼, 이들이 내놓은 음악은 펑크에 대한 통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 ‘문화혁명’이란 거창한 음반 타이틀과 대조적으로, 철없는 스무살 여자애는 ‘어이없이 노래’하고 30대 아저씨 둘은 ‘건성건성 반주’하는 모습이었다.
삐삐프로젝트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장난하냐’며 미간을 찌푸리거나 ‘참신하고 재밌다’며 눈을 반짝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찬반양론은 극적인 방송사고에 이어 해체 수순을 밟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불편한 심기를 보인 이들 중에는 록 커뮤니티 성원들도 있었다. ‘아저씨 둘’이 메탈 1세대인 강기영과 박현준임을 알아본 ‘전통의’ 메탈 팬들은 단순 헐렁한 음악 스타일로의 변신에 냉소를 감추지 못했으며(변절자?), 이들과 취향의 라이벌을 형성하던 ‘신흥’ 펑크 마니아들도 삐삐프로젝트가 펑크를 표방한 데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사이비?). ‘진정한’ 록과 ‘진짜’ 펑크를 자임하는 집단들로부터 모두 배척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런 반감과 논란이야말로 삐삐프로젝트가 노렸던 것이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신화이자 예술이 되어버린 록을 패러디하고 희화화함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는 것 말이다. 이들의 전략은 아예 록을 부정한 2집 〈불가능한 작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들은 저급한 음악으로 무시되던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으로 완전 변신했고 방송에 나와 ‘대놓고’ 립싱크 하고 연주하는 척했다. 그럼으로써 댄스음악에 대한 편견과 주류 댄스가요의 획일성에 도전했다.
삐삐프로젝트는 시종 가볍고 유치하며 키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면서 겉으로 말랑말랑 쉬워 보이지만 바탕이 탄탄한 음악을 들려줬다. 이를 통해 고급음악과 저급음악, 진정한 음악과 상업적 팔아먹기의 이분법에 커다란 의문부호를 남겼으며, 오랫동안 진지함과 권위에 억눌려 있던 록에 가벼운 재미를 돌려주었다. 이들 이후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음악 및 활동방식이 뒤따랐음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삐삐프로젝트는 새로운 한국 팝의 한 축을 연 도화선이 되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7-08-30) |
[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 ‘재미를 위한 음악투쟁’ 계속됩니다 | |
연재를 마치며 | |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은 2005년 8월15일 해방 60년을 기념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60살’을 맞이하였고, 그렇다면 해방 이후 대중음악도 60년의 세월을 겪었으니 그사이 대중음악계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훑어보자는 것이 이 기획의 취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대략 1990년대 중반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이 연재를 중단할까 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무엇보다도 90년대 중반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의 대중음악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종합적 평가를 내리기가 영 곤란합니다. 90년대 초의 음악과 음악인을 다루면서 이런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니 최근의 음악들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보다는 ‘당대의 평론’의 형식을 취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음악인들도 자신이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보다는 ‘현재’에 머무르고 싶어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해방 후 60년, 식민지 시대를 포함한다면 최소한 80년에 이르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내려 보면서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확인되는 사실은 대중음악이 확고하게 산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한 예로 과거에 대중음악계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요즘은 철저한 기획과 계산에 의해 대중음악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 형성되었는가를 두고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90년대를 거치면서 이런 시스템이 ‘확립’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건 토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둘째는 90년대 말 이후 ‘제2차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흔히들 ‘정보화’나 ‘디지털화’라고 말하는 변화입니다. 이제는 음반(시디 등)이라는 유형물이 없는 음원이 유통·소비되고 있고, 몇몇 ‘디지털 싱글’이 발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음악의 생산마저도 유형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음반이 판매되지 않는다’는 불평을 넘어 ‘음악의 질(퀄리티)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인지는 토론이 필요합니다.
셋째 한국 대중음악은 이른바 한류 현상 이후 국경을 넘어 전파되고 있고, 아시아권에서 이런 현상은 쉽게 관찰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 대중음악은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생활의 수단이 되었고, 빈번한 교류로 인해 중화권 대중음악을 고정적으로 즐겨 듣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영미 팝의 헤게모니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변화의 조짐도 감지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중음악은 ‘아시아화’(Asianization)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이런 산업적·기술적·지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정감적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실천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음악 페스티벌’이 여름마다 열리는가 하면, 몇몇 ‘뮤지컬’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고, 아이돌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팬 클럽은 여전히 북새통입니다. 홍대앞의 라이브 클럽들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았고, 80년대 이전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중장년층도 인터넷 사이트와 케이블 텔레비전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는 꽉 짜여 관리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게 음악이 갖는 의미는 아직도 사활적입니다.
어떤 저명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듯 ‘재미를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투쟁이 계속되는 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 이른바 ‘담론’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신문 지면만이 아니라 여러 공적 공간에서도…. 대중음악은 공공의 지식이 되었고, 이런 지식들은 한 사회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아디오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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