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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겨레 연재) 세상을 바꾼 노래 (1971~1980)

by Wood-Stock 2009. 6. 18.

존 레넌의 <이매진>(1971년) ~ 추악한 정치사찰 이겨낸 ‘뉴토피아 송가’

 

“국가의 경계가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그건 생각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죽일 일도 죽을 일도 없겠지요/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럼 세상은 하나가 되겠지요”

 

1970년 4월 비틀스라는 거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온 존 레넌은 반전과 인권 운동의 첨예한 일상으로 뛰어들었다. 비틀스의 일원으로서는 말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거리낌 없이 피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음악이 그의 도구였다. 그것으로 레넌은 노동자(<워킹 클래스 히어로>)와 민중(<파워 투 더 피플>)과 여성(<우먼 이스 더 니거 인 더 월드>)과 평화(<해피 크리스마스 (워 이스 오버)>)를 위한 노래들을 만들어 냈다. <이매진>은 그 화룡점정이었다.

 

<이매진>은 레넌이 1971년 발표한 동명 앨범의 수록곡이다. 솔로 데뷔작 <플라스틱 오노 밴드>(1970)의 격렬한 방법론을 지양하고 좀 더 대중친화적 노선을 취한 앨범의 상징적인 서막이었다. 그러나 레넌의 온화한 음성과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온순한 음상이 만들어 낸 따뜻한 느낌과 달리, <이매진>은 음악사상 유례 없는 급진적 메시지의 선언문이다. 여기서 레넌은 종교, 계급, 국가, 사유재산 따위가 없는, 온전히 사람이 중심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제안했다. 스스로 ‘뉴토피아’라 이름 붙인 신세계였다. 그것은 흔해 빠진 정치 선전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뿌리박은 호소였다.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이 <이매진>을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들” 가운데 세 번째 순위로 꼽고, “우리가 극심한 비탄을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준 영원한 위로와 약속의 송가”라고 상찬해마지 않은 근거도 거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매진>은 위력적이었다. 미국 정부가 이 노래의 발표 즈음 레넌에 대한 정치사찰을 시작한 것이 단적인 예다. 에드가 후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제안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추인한 정치공작이었고, 레넌을 국외로 추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무려 14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당시 연방수사국이 작성한 ‘존 레넌 파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도록 만든 존 위너 캘리포니아대 교수(역사학)는 “록 음악이 실재한 정치적 움직임과 연계할 때 강력한 정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존 레넌은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레넌은 몽상가였던 만큼이나 행동가였다는 것이다.

 

1980년 12월8일 레넌의 죽음에 부친 글에서, 사회학자이자 비평가인 사이먼 프리스는 “존 레넌이야말로 ‘우리’를 설득력 있게 노래한 유일한 록 가수”라고 썼다. 비평가 레스터 뱅스는 “실존의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인물”이라고 했다. 출범 1년 만에 돈과 계급과 종교의 잣대로 이 나라를 동강내버린 지금 정권 앞에서 <이매진>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생님을 빼앗긴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줘야 할 이유와 다름 아니다.

 

 

 

 

 

캐롤 킹의 <유브 갓 어 프렌드>(1971년) 여성 목소리 해방시킨 ‘70년대 정신’

 

1960년대의 포크 뮤지션들과 1970년대의 싱어-송라이터들 사이의 차이에 관하여 비평가 길리언 가는 “포크 예술가들이 기성 장르의 내부에서 역사적 전통에 몰두했던 반면,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은 극도로 개인적인 관점으로부터 나타났다”고 구분했다.

 

음악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창조적 열매는 서로 다른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1년의 간격을 두고 발표된 두 개의 걸작에 대한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비교 평가 또한 유사한 관점을 띠고 있었다. 그는 진정성과 현실성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캐롤 킹의 <태피스트리>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1970)보다 설득력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70년대성’의 탄생이었다.

 

<태피스트리>는 모든 면에서 당대의 기념비적인 앨범이었다. 대중적 성공의 규모부터가 그랬다. 15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 자리를 지키며 여성 뮤지션의 작품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다이아몬드 레코드’(천만 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고, 신인상을 제외한 모든 주요 부문을 휩쓸며 네 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석권했다. <태피스트리>는 캐롤 킹을 싣고 날아오른 ‘마법의 양탄자’였다.

 

음악사적인 의미는 더욱 크다. 싱어-송라이터의 예술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태피스트리>는 70년대 전반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범이다. 좀 더 주목할 점은 캐롤 킹이 그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이 앨범이 “무엇보다도 캐롤 킹이 여성으로서 개별적 인격을 확립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썼다. 킹의 피아노 연주와 목소리에 담긴 맨 얼굴의 아름다움이 대중음악의 남성적 기준에 대한 요구를 “아마도 영원히, 파괴해버렸다”는 것이다. 비평가 존 랜도가 “완벽한 음악”이라고 평했던 ‘유브 갓 어 프렌드’는 <태피스트리>의 그런 미덕을 완벽하게 집약해낸 노래다.

 

‘유브 갓 어 프렌드’는 결여됨으로써 충만하다는 아이러니를 입증해낸 작품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고 심지어 본인조차도 인정하듯 캐롤 킹은 결코 훌륭한 보컬리스트가 못 된다. 음상은 위태롭고 음역은 협소하다. 그러나 킹은 친우이자 동료 뮤지션인 제임스 테일러의 조언을 따라,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오히려 상처받기 쉬운 여성성과 마음으로 호소하는 진정성의 마술적 흡인력을 보여주었다. 솔로 데뷔작 <라이터>(1970)가 제목에서부터 스스로를 작곡가의 틀에 옭아매고 있었던 것과는 극명하게 달라진 면모다. 수많은 히트곡을 합작했던 작사가 남편 제리 고핀과의 결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계기로 삼아 노랫말을 썼다는 사실도 그렇다. 그래서 존 랜도는 “가사와 선율이 과거보다 훨씬 굳건하게 결합했다”고 평했던 것이다. ‘유브 갓 어 프렌드’는 최고의 작곡가로 60년대를 지나온 킹이 위대한 싱어-송라이터로 70년대를 맞이한 전환점이었다.

 

상업적 성공이 음악적 성취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때로 상업적 성공 때문에 음악적 성취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 노래가 그 사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예외다.

 

 

 

 

길 스콧-헤론의 <더 레볼루션 윌 낫 비 텔리바이즈드> (1971년)

‘TV 독립성’ 깨는 세력에 음악적 선전포고

 

시사평론가 닐 포스트먼은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다룬 양대 걸작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와 조지 오웰의 <1984>(1949)가 상반된 방향에서 핵심에 접근한다고 했다. “오웰은 두려움이 우리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욕망이 우리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두 작가가 형상화시킨 미래 국가의 모습은 본질적인 면에서 서로 동류다. 감시와 처벌의 강화를 통해 언론을 통제하는 <1984>의 경찰 국가 ‘오세아니아’와 쾌락과 향유의 촉진을 통해 여론을 마비시키는 <멋진 신세계>의 소비 제국 ‘월드 스테이트’는, 개성과 다양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언론과 여론이 제 몫을 못하는 사회에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동시에 미디어 파수꾼으로서 시민의 역할을 촉구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길 스콧-헤론의 <더 레볼루션 윌 낫 비 텔리바이즈드>는, 20세기 중반 이후 줄곧 가장 강력한 미디어로 군림하고 있는, 텔레비전 매체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정서적으로 물화한 티브이 방송을 거침없이 풍자하고 냉소한다. 여기서 텔레비전은, 마치 <1984>의 통제 도구인 ‘텔레스크린’과 <멋진 신세계>의 소비 상품인 ‘소마’(인위적으로 행복감을 주입하는 약물)를 결합시켜 놓은 듯한, ‘왜곡된 인식의 마취제’로 간주된다. 백인 남성 중심의 차별적 시각으로 현실도피적 물신주의를 부추기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더 레볼루션…>의 문제의식은 당대 미국의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였다. 동서냉전이 고착화하던 정치적 환경과 30년 호황 끝에 위기로 빠져들던 경제적 여건 속에서 티브이 방송이 선무 도구로 전락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었다. 텔레비전 미디어 자체를 문제 삼았다기보다는, 그것을 조종하는 정략적 권력을 성토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시대적 명분으로 포장한 이른바 ‘대의적 가치’를 내세워 인종과 빈곤층 문제 따위는 외면해버린 텔레비전을 통해서 혁명이 중계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길 스콧-헤론은 이 노래를 통해 대중음악사에도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랩 형식을 전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힙합 형성 과정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 상황을 닮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것의 음악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일마저 껄끄럽게 만든다. 그 노랫말과 메시지에 더욱 절실하게 끌리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선전 방송, 부시의 걸프전 여론 조작, 독재 군부의 ‘땡전뉴스’처럼, 정권과 자본의 하수인이 된 방송은 ‘무심한 괴물’이나 다름없다. <더 레볼루션…>은 말한다. 삽을 든 ‘빅 브라더’와 ‘사상경찰’이 ‘1984’년쯤에나 가능했던 방법으로 그들만의 ‘멋진 신세계’를 건설한다며 텔레비전을 볼모 삼으려는 지금,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은 시민적 의무와 다르지 않다.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마빈 게이의 <와츠 고잉 온>(1971년) ~ 국가를 움직이는 노래의 조건

 

2009년 벽두 미국 대중음악계의 관심은 설립 50주년을 맞은 모타운 레이블의 대대적인 기념 캠페인에 쏠렸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미국 최초의 흑인 소유 회사였던 모타운의 창립 기념식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식이 불과 8일 간격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버락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한 1월20일은 모타운 역사상 최대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와츠 고잉 온’이 발매 38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흑인 음악의 혁신과 미국 역사의 혁명이 한 세대를 간격으로 나란히 섰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와츠 고잉 온’은 마빈 게이가 베트남 전쟁의 악몽을 경험한 병사의 시각으로 당대의 미국 사회를 돌아보며 던진 비탄의 화두였다. 참전 군인이었던 두 살 터울의 동생 프랭키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간접 경험한 마빈 게이는 노래를 통한 치유책을 떠올렸고 ‘와츠 고잉 온’을 만들었다. 거기에 게이 자신의 슬픔이 더해지면서 상승 작용을 이루었다. 음악적 동지였던 여가수 테미 터렐의 죽음이 가져온 개인적 상실을 트라우마 얼룩진 사회적 아픔으로 환기시키고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위대한 것은… 모든 면에서 격렬한 만큼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전쟁과 빈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면서도 사랑에 대한 확신”을 결코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수백만 장이 팔린 상업적 성공은 그런 인간적 온기에 대한 대중적 화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와츠 고잉 온’이 그토록 거대한 히트작이 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모타운 레이블의 소유주 베리 고디는 발매 자체를 강력히 반대했다.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와츠 고잉 온’은 어느 모로 보나 당대 모타운의 기조와 맞지 않았다. 인권 운동이 가장 첨예하던 시절에도 백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달콤한 팝 싱글 제작에만 몰두했던 모타운의 성격에 비추어 이 노래는 지나치게 사회적이었고 너무나도 쟁점적이었던 것이다.

혁신은 갈등 속에서 탄생했다. 베리 고디의 매제이자 ‘모타운의 왕자’로 불렸던 마빈 게이는 “노래를 발매하지 못하게 한다면 향후 모타운의 어떤 작품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게이는 베리 고디의 입김을 차단하고 앨범 제작의 전권을 쟁취한 모타운 최초의 뮤지션이 되었다. 레이블의 동료이자 후배들인 스티비 원더와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아티스트적 자의식의 모범을 제시했던 것이다.

 

‘와츠 고잉 온’은 모든 면에서 전환점이었다.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마빈 게이 자신의 좌표 수정은 물론이고, 60년대 후반 이후 침체 상태에 있었던 모타운 레이블의 방향 전환과, 사회적 소통수단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있던 흑인 음악계의 궤도 설정에 공히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솔 음악의 토대 위에 라틴 리듬과 재즈 어법, 클래시컬한 현악 세션을 결합한 독창적 사운드, “비로소 노래하는 법을 배웠다”고 토로한 마빈 게이의 원숙한 창법 또한 그 수정된 좌표 위에서 나타난 새로움이었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패밀리 어페어>(1971년) ‘킹 목사의 꿈’ 음악적 증폭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 연설에서 “나의 어린 자식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의 함량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고 염원했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은 그러나, 애당초 실현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연설을 행한 때로부터 채 5년도 지나기 전에 킹 목사가 암살당했고, 그 죽음의 여파가 거대한 혼란의 후폭풍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인종 폭동이 도처에서 발생했고 블랙 팬서와 같은 과격 단체가 세를 불렸다. 그것은 60년대의 이상에 대한 사망 판정에 다름 아니었다. 밴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하 패밀리 스톤)의 등장이 일견 경이롭게까지 비쳤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패밀리 스톤은 무엇보다 흑백의 인종 경계와 남녀 성별의 장벽을 동시에 무너뜨린 최초의 메이저 밴드였다. 흑인 남성 셋을 중심으로 두 명의 백인과 두 명의 여성이 7인조 편성을 이룬, 전례 없는 라인업이었다. 밴드를 ‘가족’으로 명명한 의도에 값하는 파격이었다. 그런 열린 태도는 노랫말에서도 드러났다. 날 선 공방이 횡행하던 시대에 평등과 공존의 보편적 가치를 호소하는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그들의 인기가 1968년 하반기부터 급상승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가 당시 그들의 히트곡들을 가리켜 “워싱턴 행진의 선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새로움은 음악적인 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카리스마적 리더였던 슬라이 스톤은 당대 흑인 솔 음악의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고 백인 록 음악의 장점까지 모조리 흡수한 새로운 사운드를 디자인해냈다. 그래서 비평가 리키 빈센트는 당대 흑인음악에 가장 거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슬라이 스톤을 제임스 브라운과 나란히 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임스 브라운이 흑인 게토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확립했던 반면, 슬라이 스톤은 인종 용광로 안에 놓인 모든 이를 대표했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음악에 나타난 통합적 특성의 혁신을 평가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펑크가 그로부터 탄생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패밀리 스톤의 후기 대표작 ‘패밀리 어페어’는 그 극단적 진화상이었다.

 

마빈 게이의 걸작 <와츠 고잉 온>에 대한 슬라이 스톤의 응답 격인 앨범 <데어스 라이엇 고잉 온>의 수록곡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듯, ‘패밀리 어페어’는 음악적 형식과 내용에서 공히 폭동을 작정한 실험을 담지하고 있었다. 기존 솔 음악의 어법은 물론이고, 패밀리 스톤을 스타덤에 올려준 경쾌한 리듬과 명쾌한 가사의 조합도 송두리째 뒤집어버렸던 것이다. 혼자 완성하다시피 한 이 노래에서 슬라이 스톤은 드럼머신 리듬과 반복 녹음을 통한 구성으로 펑크의 방법론을 다시 쓰는 한편,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목소리로 모호한 윤리적 가치를 읊조림으로써 시대적 불화를 온몸으로 은유했다. 비평가 존 랜도의 말마따나 “한 개인의 영혼에 내재한 혼란스러움을 넘어서는 어떤 폭동의 진행형”을 담아냈던 것이다.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변용해 증폭시킨 음악적 최대치였다.

 

 

 

 

티렉스의 <겟 잇 온>(1971년) ~ 영국 ‘글램 록’ 표준을 제시하다

 

영국에서 계급성의 문제는 문화의 양상으로 드러나곤 했다. 특히, 대중음악의 소비 행태에 있어 노동자층과 중산층 사이의 긴장감은 복잡한 사회적 요인들과 겹쳐 갖가지 청소년 하위 문화의 양상을 만들어냈다. 사회학자이자 비평가인 사이먼 프리스가 “또래 집단들을 서로 구분하는 수단으로서 음악은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특별히 중요했다”고 쓴 배경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드’족과 ‘로커’족으로 양분됐던 1960년대 영국 청소년문화의 판도는 1970년대로 접어들어 더욱 세분화한 동시에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했다고 볼 것이다. 글램(화려함을 추구하던 당대 유행)은 70년대의 모드였고, 로커였던 동시에 그들과 다른 무엇이었다.

 

음악학자 캐서린 찰튼은 글램 록의 유행이 “어떤 측면에서는 60년대 록 음악과 카운터컬처(비주류 문화)에 대한 반작용이었지만, 또다른 측면에서는 그런 문화의 확장이기도 했다”고 평했다. 우선, 글램 록은 외양에서 먼저 차별성을 드러낸 유행이었다는 점에서 모드의 극단적 연장선상에 있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복장을 차려 입은, 중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섹슈얼리티의 외양을 한 뮤지션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글램 록은 1950년대 로커빌리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 로커의 취향과도 상통했다. 글램 록은 모드족과 로커족의 문화 사이에 이종교배로 낳은 당대 대중문화의 사생아였고, 전적으로 영국적인 현상이었다.

 

글램 록이 70년대 초반 영국의 가장 첨예한 유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마크 볼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이키델릭풍의 포크 듀오 티래너소러스 렉스의 일원으로 60년대를 보낸 그는 밴드의 이름을 티렉스로 축약하고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와 번쩍이는 메이크업을 덧입음으로써 글램 록의 창시자로 거듭났다. 티렉스의 리더로서 데뷔 싱글 ‘라이드 어 화이트 스완’과 뒤이은 ‘핫 러브’를 연이어 영국 차트 정상에 올린 그는, 마침내 ‘겟 잇 온’을 통해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비평가 필립 오스랜더가 “티렉스터시(티렉스+엑스터시)는 새로운 비틀마니아”라고 평했던, 거대한 스타덤이었다.

 

‘겟 잇 온’(미국에서는 같은 제목이 붙은 다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해 ‘뱅 어 공(겟 잇 온)’으로 소개됐다)은 명쾌한 부기 리듬과 단순한 기타 리프로 순식간에 대중의 귀를 잡아끌었다. 실험적 대작들을 쏟아내던 당대 밴드들과 달리, 티렉스는 로큰롤의 원초적 스타일을 세련된 프로덕션에 담아내면서 팝과 록의 미덕을 한 번에 포착해냈다. 심하게 일그러진 퍼즈 기타와 유혹적인 속삭임이 전면에 나선 글램 록 사운드의 표준을 제시한 것이었다.

 

마크 볼런의 티렉스는 또다른 슈퍼스타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70년대 전반의 영국 대중문화를 규정한 아이콘이었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그들 간의 차이를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은 볼런의 “플라워 파워풍 시적 영감”과 배우 출신인 데이비드 보위의 “웨스트엔드 식 극적 연출”로 구분한 바 있지만, 그 둘 모두가 기본적으로는 “영국 스타일”이라고 전제했다. 미국에서 글램은 록 밴드 키스의 분장 두께만도 못한 소재였으니까.

 

 

 

 

데이비드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1972년) ~ 통속성을 극단화해 통속성을 희롱하다

 

모드냐 로커냐. 1960년대 영국의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어떤 하위문화 집단에 속하는가가 곧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음악영화 - 비틀스의 <하드 데이스 나이트>(1964)와 토드 헤인스 감독의 <벨벳 골드마인>(1998)에서 그에 대한 물음이 공통적으로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당신은 모드입니까 로커입니까?” <하드 데이스 나이트>에서 질문은 기자의 몫이다. “나는 모커(비웃는 사람)입니다.” 링고 스타의 답이다.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비틀스는 정형화된 기존 문화의 틀을 벗어난 존재라고 주장한 것이다. 같은 질문을 <벨벳 골드마인>은 청춘남녀의 대화 속에 위치시킨다. 청년이 대답한다. “난 그 밖의 다른 여섯 가지를 한 몸에 가지고 있어.” 그리고 영화는 청년이 글램 록 스타로 등극하는 과정을 좇아나간다. 60년대 후반 영국 젊은이들의 하위문화 판도가 모드와 로커에서 글램으로 옮아가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영화가 주인공 청년의 실존 모델로 삼은 인물이 바로 데이비드 보위였다. 적확한 선택이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스타덤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1971년 앨범 <헝키 도리>를 발표하며 글램 록으로 전향한 데이비드 보위는 이듬해 <더 라이즈 앤 폴 오브 지기 스타더스트 앤 더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라는 제목의 작품을 통해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여기서 보위는 뮤지션이자 예언자인 ‘지기 스타더스트’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자신의 페르소나(타인에게 비치는 인격적 실체)로 삼았다. 거기에 빨갛게 염색한 머리, 번쩍이는 짙은 화장, 관능성을 과장한 옷차림으로 이미지를 가시화시켰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보위의 비전이었고 앨범의 주인공이었으며 노래의 제목이기도 했다. 비평가 짐 밀러는 그것을 가리켜 “로큰롤의 유명세를 포장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썼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글램 록의 전형과 하드 록의 요소가 뒤섞인 노래다. 인상적인 선율과 구성을 갖추고는 있지만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면은 결코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통속적이라 간주할 여지가 더욱 크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바로 데이비드 보위의 의도였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이 바로 혁신이었다는 측면이다. 말하자면 기성의 방식을 극단화시킴으로써 기성을 희롱하는 방식이었다. ‘지기 스타더스트’에 언급된 기존의 흔적들이 그것을 방증한다. 동료 뮤지션인 레전더리 스타더스트 카우보이와 이기 팝에게서 차용한 이름, 영국 1세대 로큰롤 스타 빈스 테일러의 자기파괴적 생애에 토대한 페르소나, 마크 볼런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운드와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에게서 영감을 얻은 이미지까지. 그래서 짐 밀러는 보위의 방법론을 패러디라고 특정했고, 사이먼 프리스는 이데올로기를 상품화했던 60년대의 가식과 허구를 찢어발겼다고 평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70년대 중반 글램 록 노선을 폐기하고 변신을 감행했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결국 음악산업의 스타 시스템이 만든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몸소 입증한, 자기 패러디의 결정이었다. 영원불변의 혁신이란 없다.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 (1971년) ‘상업적 자살’로 죽지 않는 신화 만들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웅은 일상의 세계로부터 초자연적 경이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거기서 막강한 세력과 마주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영웅은 동료 인간들에게 혜택을 수여하는 힘을 얻어 이 신비로운 모험에서 돌아온다.” 서사 구조의 분석 틀로서 이른바 ‘영웅의 여정’이라 일컬어지는 원형 신화의 골격을 제시한 것이다. 그와 같은 신화적 전형은 작품의 내력에서뿐만 아니라 작가의 이력에서도 나타나곤 하는데, 대중 음악의 역사에서 그런 영웅적 풍모에 가장 근접한 존재는 레드 제플린이었다고 할 것이다.

 

경력의 시종부터가 그렇다. 출발부터 ‘슈퍼 그룹’으로 환영받았던 레드 제플린은 드러머 존 본햄의 급사 이후 미련 없이 해산을 결정해버렸다. 출신 성분과 극적 종말, 모두 신화적이다. 경력을 통틀어, 고난은 있었을지언정,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신화화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마케팅 이론의 정반대로 움직이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거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네 번째 앨범은 레드 제플린 신화의 정점이었고, ‘스테어웨이 투 헤븐’은 그 네 번째 앨범의 정수였다고 할 것이다.

 

레드 제플린의 네 번째 앨범에는 공식적인 타이틀조차 없다. 앨범의 제목은 물론이고 밴드의 이름과 멤버의 사진도 싣지 않은 채 발표한 탓이다. 게다가 멤버들의 이름은 네 개의 심벌로만 표기했다. 그래서 앨범은 ‘언타이틀드’, ‘포 심벌스’, ‘네 번째’ 따위의 이름으로 제각각 통용되었다. 소속사 어틀랜틱 레코드의 간부는 그것을 “상업적 자살” 행위라고 우려했다. 앨범 발매와 동시에 즉각적인 히트곡으로 떠오른 ‘스테어웨이 투 헤븐’을 싱글로 발매하지 않은 결정도 그렇다. 따놓은 당상과도 같은 성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한 일은 일반의 상식과 거리가 먼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레드 제플린의 신화를 더욱 신화적으로 연출해낸 배경이 되었다.

 

대중음악사상 레드 제플린의 네 번째 앨범보다 많은 판매량을 올린 작품은 오직 둘 - 이글스의 <데어 그레이티스트 히츠>(1976)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1982)뿐이라는 사실이 입증하는 바가 그렇다. ‘스테어웨이 투 헤븐’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991년 미국의 남성잡지 <에스콰이어>는 이 노래의 방송 분량을 시간으로 합산하면 44년에 이른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연주 시간 8분의 노래가 300만번 가까이 방송되었다는 얘기다. 이제와 ‘스테어웨이 투 헤븐’을 다시 소개하는 일이 쓸모없는 동어 반복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완성된 순간 이미 걸작의 반열에 오른 듯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함께한다. 그래서 그 창조의 비밀을 캐려는 비평가들과 학자들의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걸작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라는 수사는 그런 경우를 위해 마련해둔 변명거리임에 틀림없다. ‘스테어웨이 투 헤븐’은 그렇게 신화로 탄생한 노래다. 들어보면 알게 된다.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 (1972년) ~ 록 역사상 가장 쉽고 유명한 ‘리프’

 

2008년 8월20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521명이 동시에 기타를 연주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에너지의 날’ 기념행사의 일환이었던 이날 ‘대규모 기타 앙상블’은 포크 뮤지션 한대수를 중심으로 그의 히트곡 ‘행복의 나라로’를 함께 연주했다. 하지만 애초 목표로 했던 세계 기록 작성에는 실패했다. 이 전해 같은 날에 수립한 한국기록(903명)도 바뀌지 않았다. 기네스북을 보면, 현재까지 관련 최고 기록은 2007년 6월26일, 독일 에슬링겐에서 1802명이 동시에 연주한 사례가 등재되어 있다. 이는 그보다 불과 23일 앞서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1721명이 연주했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들 기록 사이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같은 노래를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역대 3위에 해당하는 1994년 캐나다 밴쿠버의 1322명 기록에서도 연주 곡목은 동일했다.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였다.

 

그들이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스모크 온 더 워터’를 연주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우선, 이 노래는 레드 제플린의 ‘홀 랏 오브 러브’, 블랙 새버스의 ‘패러노이드’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유명한 리프로 익숙하다. 그처럼 단 한 번만 들어도 뇌리에 각인되는, 비평가 데이비드 코노의 말마따나 “범죄적이라고 할 정도로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리프”는 실상 많지 않다. 거기에 더해 ‘스모크 온 더 워터’는 다른 유명한 곡들이 갖지 못한 미덕을 하나 더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주하기 쉽다는 점이다.

 

비평가들의 이구동성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음악지 <롤링 스톤>은 “초짜 기타리스트가 맨 처음 시도하는 리프”라고 했고, <모조>는 “모든 스쿨 밴드들의 교가”라고 했다. 또한 토비 크레스웰은 그것이 “30년 넘는 세월 동안, 검은 티셔츠를 걸친 수백만 십대 소년들의 가슴을 날려버린 코드 3개짜리 서사시”이자 “에어 기타(Air Guitar: 입으로 소리를 내며 손으로 연주 흉내를 내는 행위)의 고전”이라고 평했다. 2천명 가까운 사람이 동시에 연주를 하기에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스모크 온 더 워터’는 1971년 12월 스위스 몽트뢰에서 있었던 대형 화재 사건을 소재로 한 곡이다. 딥 퍼플의 보컬리스트 이언 길런은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의 저 유명한 리프에다 사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 가사를 얹었다. 사건 기록을 방불케 할 만큼 생생한 노랫말이었다. 마침 그때 딥 퍼플은 “모바일 스튜디오 설비로 레코드를 제작하기 위해 / 제네바 호숫가의 몽트뢰에 있었”던 것이다. 사건 당일 밤 그곳에서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프로그램의 하나로 “프랭크 자파 앤 더 머더스가 / 가장 좋은 장소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어떤 멍청한 녀석이 조명탄을 쏘는 바람에 / 공연장이 불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기가 수면에 차고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 현장에서 로큰롤의 걸작은 탄생했다.

 

짐작하건대,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대규모 기타 앙상블’의 기네스 기록이 새로 쓰인다면 그때도 연주곡명은 ‘스모크 온 더 워터’일 게 분명하다. 고전이라고 반드시 난해한 것만은 아니다.

 

 

 

 

 

매클린의 <아메리칸 파이>(1972년) ~ 로큰롤 역사 담은 ‘매혹적 8분 30초’

 

“난 그 서프 음악 나부랭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디 홀리가 죽은 뒤론 로큰롤도 내리막이야.”

 

조지 루커스 감독의 출세작 <아메리칸 그래피티>(1973)의 한 장면이다. 1962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루커스는 “순수성의 상실이라는 관점”으로 “한 시기의 종말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에게 ‘버디 홀리의 죽음’은 1950년대의 낭만에 종언을 고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또래의 베이비 붐 세대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루커스와는 한 살 차이로, 당시 열세 살이었던 소년 돈 매클린에게도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다. 1959년 2월3일 버디 홀리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그날, 매클린은 음악도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2월(의 어느 날)은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지 / 내가 배달한 신문들 때문이었어 / 문가에 가져다 놓은 나쁜 소식에 / 나는 한 걸음도 더 움직일 수 없었지 / 내가 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 미망인이 된 그의 신부에 관해 읽었을 때 / 하지만 무언가가 내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졌지 / 음악이 죽은 날에”

 

돈 매클린은 1972년 발표한 노래 ‘아메리칸 파이’에서 13년 전의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버디 홀리를 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성장한 또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무려 8분 30초에 달하는 반상업적 노래가 빌보드 싱글 차트를 정복하고 밀리언셀러 고지에 오르도록 만든 동력은 바로 그들,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베이비 붐 세대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음악이 죽은 날”이란 노랫말은 ‘버디 홀리가 세상을 떠난 날’을 가리키는 관용어로 미국 상식 사전에 등재되었다.

 

물론 ‘아메리칸 파이’는 단순히 버디 홀리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가 아니다. 버디 홀리의 죽음 이후 달라진 세상에 관한 노래다. 순수의 50년대를 보내고 질풍노도의 60년대를 거쳐온 세대의 만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메리칸 파이’는 <아메리칸 그래피티>와 기본 정서를 공유한다. 후자가 격변의 60년대를 앞둔 ‘폭풍 전의 고요’에 관한 영화라면, 전자는 ‘폭풍 후의 잔해’에 속한 노래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아메리칸 파이’에서 매클린은 특히, 로큰롤 1세대가 퇴장한 이후의 음악적 부침을 통해 60년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다.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밥 딜런과 버즈,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연대와 ‘알타몬트 콘서트’의 비극을 암시하는 메타포들이 노랫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비드 웰스는 이 노래가 “로큰롤의 역사를 담은 매혹적인 8분 30초”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아메리칸 파이’는 여전히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다.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구절들에 대해 작가인 돈 매클린이 해제를 거부한 탓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둘러싼 이야기는 하나의 우화처럼 보인다. 인생을 바꾼 음악이 있고, 음악에 건 인생이 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음악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느끼고 감사하는 법은 망각해버린 시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무엇이다. 음악은 그렇게 우리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엘튼 존의 <캔들 인 더 윈드>(1973년) ~ ‘노마 진’ 당신을 기억합니다

 

마릴린 먼로와 다이애나 스펜서. 할리우드의 섹스 심벌과 영국의 왕세자비.

 

서로 다른 시공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다 간 두 사람은 그러나, 공히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운명의 우연한 일치 외에도,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 그들은 불안정한 성장기를 거쳐 화려함의 절정에 오른 현대의 신데렐라들이었고, 만인의 선망을 한 몸에 받은 시대의 아이콘들이었다. 동시에 권력 최상부의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당사자들이었으며, 의문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극의 희생자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대중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추모곡의 주인공들이라는 사실로 서로에게 결속되었다. 엘튼 존의 ‘캔들 인 더 윈드’를 통해서다.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두 사람의 인생이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승화한 접지점이다. “당신의 촛불은 오래전에 소진되었지만 / 당신의 신화는 영원히 타오를 겁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먼로에게 헌정된 ‘캔들 인 더 윈드’와 다이애나비에게 바쳐진 ‘캔들 인 더 윈드’를 똑같은 노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 자체로 추도사이기도 한, 노랫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먼로 사후 11년이자 다이애나가 12살이던 1973년 발표된 오리지널 버전에 대하여, 그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후자에는 ‘캔들 인 더 윈드 1997’이라는 명시적 제목이 붙었다.

 

‘캔들 인 더 윈드’의 두 가지 버전은 각기 다른 의미로 대중음악사에 자취를 남겼다. 오리지널 버전이 대중문화와 문화자본의 신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자성적 독백이라면, 1997년 버전은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새로운 신화를 구축한 현상적 반향이었다. 그러므로 두 버전의 가치를 동일한 기준으로 저울질하는 것은 부질없다. 다만, 행간에 담긴 신랄한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오리지널 버전이 오늘날에도 가슴을 짓누르는 여운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엘튼 존의 작사 파트너인 버니 토핀은 오리지널 버전의 노랫말을 통해 연예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특히, 마릴린 먼로의 죽음을 다룬 부분은 끔찍할 정도다. “심지어 당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조차 / 언론은 당신 뒤를 캐고 다녔지요 / 모든 매체가 떠들어 댔습니다 / 마릴린은 벌거벗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스타의 삶에 기생하며 이윤을 착취하는 자본의 탐욕이 그 죽음마저 사고파는 행태를 개탄한 것이다.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 다이애나비의 죽음은 저 섬뜩한 구절의 기시적 재연과 다름 아니다.

 

한 젊은 여배우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로 최근 한동안 국내 언론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권력은 죽음조차 거래할 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을 재확인시켰을 뿐, 이제와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여배우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캔들 인 더 윈드’의 감동은 스타로서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노마 진’(먼로의 본명)을 기억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의 <노 우먼 노 크라이>(1974) 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하다

 

때로 한 장의 인물사진이 시대의 정서와 정세를 상징하곤 한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주장처럼 “모델을 정신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드러나는 “사진의 심리적 측면”이, 중세의 성상화와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다. 학생 운동이 절정에 이른 1960년대 후반 전세계의 대학 캠퍼스를 벽지처럼 장식했던 베레모의 체 게바라와 인민복의 마오쩌둥 사진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건대, 1970년대 중반 그 사진들을 대체한 것은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드레드록 헤어스타일의 밥 말리 초상이었다. 그것은 일개 록 스타의 포스터가 아니라 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시킨 영웅적 존재의 이미지였다.

 

비평가 윌리엄 매킨은 “어떤 대중음악가도 정치적 존재감과 음악적 위상을 밥 말리와 같이 결합시키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말리는 가난한 섬나라 자메이카를 레게 선율의 명료한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 위대한 뮤지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제3세계 부흥 운동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300년 넘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1962년 비로소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자메이카는 여전히 인구의 2%가 부의 80%를 독점하는 불평등의 나라였고 빈곤이 범죄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도 킹스턴의 대표적 슬럼인 트렌치타운의 비루한 공공주택단지에서 성장기를 보낸 말리는 그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노래들로 세상을 각성시킨 혁명가였던 것이다.

 

웨일러스의 멤버로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밥 말리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마침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에게 공연의 오프닝을 맡긴 롤링 스톤스(당시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는 항상 밥 말리의 아이콘적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와 그의 노래 ‘아이 샷 더 셰리프’를 커버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린 에릭 클랩턴의 외적 조력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노 우먼 노 크라이’의 성공이었다. 1974년 앨범 <내티 드레드>의 수록곡으로 처음 발표되었던 이 노래는 이듬해 7월 벌어진 전설적인 런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의 실황 녹음으로 최상의 격찬을 받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트렌치타운에서 보낸 과거를 회상하며 만든 노래다.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과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 위대한 미래에도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서글프지만 결연한 외유내강의 진혼곡이다. 말리는 이 노래의 저작권을, 기타 연주를 가르쳐준 멘토이자 거처를 제공해준 은인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필생의 친구였던, 빈센트 포드에게 줌으로써 곤궁한 시기의 기억을 스스로 보상하기도 했다. 인민의 영웅다운 행보였다.

 

고로, 노래 제목의 의미는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가 없으면 울 일도 없다)가 아니라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여 울지 말아요)가 맞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아우토반>(1974년) ~ 전자음악 역사를 다시 쓴 23분

 

양차 대전을 치르며 독일이 파괴한 것은 물질적인 가치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문화적 전통에도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독일은 스스로 가해자였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럽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던 독일의 음악적 전통이 명맥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대중음악이 구대륙을 휩쓸고 음악적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그 여파가, 비록 복잡한 연관성으로 얽혀 있기는 했지만, 얼마나 현격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재즈를, 2차 대전 이후 로큰롤을 각각 유럽에 이식하며 대중음악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독일은, 한스 아이슬러와 쿠르트 바일 같은 마이스터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현대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연결고리를 새로운 전통으로 수렴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독일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흔적이라곤 엘비스 프레슬리의 군 복무지였으며 비틀스의 무명 시절 근거지였다는 호사적 일화들뿐이었다. 이른바 ‘크라우트록’이 등장한 배경은 그처럼 황량했다.

 

크라우트록은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독일 음악계의 대세를 주도했던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일을 비하하는 표현의 크라우트와 록 음악의 합성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주류 평단은 그것을 철저하게 ‘독일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등 고전음악 전통의 현대음악 실험에다 사이키델릭 록과 전자악기 등의 대중음악적 가능성을 결합함으로써 구체화시킨 독일산 하이브리드라는 것이었다. 크라프트베르크는 그 속에서 탄생한 돌연변이의 진화형태였다.

 

크라우트록이 비로소 독일 대중음악의 정체성을 발현한 현상이었다면, 크라프트베르크는 마침내 그것을 세계 시장에 각인한 존재였다. 크라우트록이 음악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과 없이 쇠퇴하던 70년대 중반, 크라프트베르크는 노선 변경을 선언한 네 번째 앨범 <아우토반>을 통해 독보적 밴드로 거듭났다. ‘발전소’를 의미하는 밴드 이름에 내재하던 테크놀로지 지향적 태도가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과 보코더(음성변환장치) 등의 전자적 방법론과 만나면서 전대미문의 음악적 혁신을 낳았던 것이다.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이 “대중음악의 새로운 팔레트”였다고 평한 타이틀 트랙 ‘아우토반’은 바로 그 변혁의 상징이다.

 

‘아우토반’은 무엇보다, 인간의 목소리마저 기계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노래에 대한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시도였다. 게다가 23분에 육박하는 오리지널 버전을 4분짜리 싱글로 편집한 작업이나, 그렇게 압축된 버전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 과정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크라프트베르크가 이후 일렉트로닉 음악 전반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은 그렇게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평가 맷 스노에 따르면 ‘아우토반’은 현대사회의 물질적 병리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동력과 여유를 축복하는 동시에, 반복 행위와 통제 불능의 어렴풋한 불안감을 조종자의 입장에서 내색한다”는 것이다.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 버드>(1974년) ~ 운명의 극적인 아이러니

 

상식의 금기를 넘나들었던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는 “미국 사회에서 감히 남부 사투리의 억양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불신을 받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수많은 배우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최소화하거나 지우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고착된 남부의 반동적 이미지가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지적한 말이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입구의 언저리에서 불쑥 치솟은 ‘서던 록’의 열기는 미국인들 스스로에게 사뭇 당황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것은 모순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전세계가 향유하는 대중음악의 뿌리는 미국 남부의 토양에서 생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던 록을 특정하는 음악적 요인들만 봐도 그렇다. 컨트리 앤 웨스턴과 리듬 앤 블루스의 원형을, 즉흥성과 비중의 측면에서 재즈에 비견할 솔로 연주와 함께 담아낸 하드 록 사운드가 그것이다. 익숙한 전통의 충실한 재연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서던 록이라는 분류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비평가 존 코바치가 지적한 바대로, 서던 록이라는 명칭은 남부 사람들이 내세운 브랜드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붙인 꼬리표였다. 골 깊은 불신감으로 아로새긴 ‘주홍글씨’였다. 그래서 비평가 조 패토스키는 “70년대의 서던 록 신화는 순진한 낙관주의와 지방색,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정도는 간단히 추월해버린 불가피한 비극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분석했던 것이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서던 록이 탄생시킨 최대의 스타였고, ‘프리 버드’는 그들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그래서 관객들은 항상 공연의 막바지에 ‘프리 버드’를 연호했고, 레너드 스키너드는 언제나 이 노래를 커튼콜 후의 마지막 연주로 남겨두었다. 오리지널 버전 자체가 9분을 넘는 대곡인데다 공연에서는 15분을 전후한 확장 버전으로 연주된 이 곡에서, 압권은 세 대의 리드 기타가 작열하는 솔로 연주 파트에 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영원토록 폭주할 것처럼 경합하는 연주자들의 전면전은 일렉트릭 기타의 카타르시스를 최대치까지 증폭시킨다.

 

‘프리 버드’는 1977년 10월20일, 레너드 스키너드 멤버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 사고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자유로이 나는 새’와 ‘추락한 비행기’의 반어적 대비였던 때문이다. 레너드 스키너드가 당초 이 노래를 1971년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듀언 올맨(서던 록의 원조 격인 올맨 브러더스 밴드의 기타리스트)에게 헌정했었다는 사실도 거기에 일조했다. 서던 록이 타고난 출신 성분의 비극적 은유에 대한 체현이었을까? 그 결과 오늘날 ‘프리 버드’는 운명의 극적인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특정한 인물·사물·감정 등을 상징하는 동기)로 남았다. 하긴 노랫말조차 그 어떤 죽음에 부쳐 어색함이 없다.

 

“오늘 내가 여기서 떠난다고 해도 / 당신은 여전히 나를 기억할 건가요? …더 이상 모든 것이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 나는 지금 새처럼 자유로우니까요.” 문득,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 떠오른다. 부디 영면하시길.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본 투 런>(1975년) ~ 노동계급이 낳은 미국 록의 ‘메시아’

 

1975년 10월27일, 미국 미디어 업계에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 <뉴스위크>가 동시에 같은 얼굴을 표지 모델로 삼은 것인데, 관건은 그들 커버스토리 속 인물이 유력 정치인도 거물 경제인도 아닌 일개 록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막 스타덤에 올라서기 시작한 참이었다. 음악 산업의 변방 뉴저지의 촌놈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도 이루지 못한 진기한 기록의 주인공으로 대중음악사 복판에 등장하던 날의 풍경이다.

 

그는 갑자기 돌출한 변수처럼 보였다. 앞서 발표한 두 장의 앨범으로 변변치 않은 성적만 확인했을 뿐인 신출내기가 순식간에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장 뜨거운 스타로 거듭났으니까.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다르다. 스프링스틴은 1960년대 후반부터 오랜 기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열정적인 라이브 콘서트로 지역시장에서 작지만 단단한 명성을 구축해왔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주류 시장으로 입지를 넓혀왔던 것이다. 존 랜도는 1974년 봄 진작에, 대중음악 비평사상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그에게 헌정한 바 있다. “나는 로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 그렇게 무르익은 기운이 세 번째 앨범 <본 투 런>의 발표와 때를 같이 하면서 폭렬하는 불꽃으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비평가 제임스 밀러는 그의 벼락같은 등장을 “음악적 메시아의 출현”으로까지 묘사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창조해낸 가상의 록스타 캐릭터인 ‘지기 스타더스트’에 빗대, 스프링스틴은 “구원자를 가장한 존재가 아니라 진짜 구원자였다”는 것이다. 그런 판단의 근거에는 급격한 비대화로 위기를 맞은 70년대 음악 산업에 대한 성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큰롤이 본래 가치를 잃고 주류 시장의 ‘공산품’으로 전락해가던 상황을 되새긴 것이다. 한편으로, 당대를 지배한 영국산 록 음악에 대해 미국적 자존심을 일깨웠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거칠지만 순수하고, 새로우면서도 전통적인 스프링스틴의 음악에서 미국의 비평가들은 아메리칸 로큰롤의 부활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세 번째 앨범의 동명 타이틀 트랙인 ‘본 투 런’은 초기 스프링스틴 음악의 정수다. 데뷔 이후 줄곧 천착해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주제의식이 뜨거운 응어리를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 현실 극복의 이상을 투영하는 특유의 어법으로, 노동계급 젊은이들의 현실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좌절과 개척자적 탈출을 노래하는 보통사람들의 찬가. 그래서 관객들은 스프링스틴을 ‘노동계급의 영웅’이며 ‘보스’라고 불렀고, 비평가들은 그의 음악에 미국적 본질로서 ‘하트랜드(Heartland) 록’이라는 애정어린 꼬리표를 달아주었던 것이다.

 

평범한 영웅의 위대한 도전을 허망하게 쫓아버린 우리의 실패를 기억할 일이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1975년) ~ 음악 혼과 기술의 위대한 합창

 

1970년대 중반은 대중음악사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음악적 다양성이 1960년대의 이념적 병목을 통과하면서 봇물을 터뜨렸다.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싱어-송라이터 계열을 필두로, 블루스 록과 서던 록, 펑크(Funk)와 디스코, 거기에 펑크(Punk)와 뉴 웨이브까지. 거대화와 세분화가 동시에 진행된 음악 시장의 현황은 그런 양상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그런 측면에서 당대의 아이콘적 지위는 단연 퀸의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레드 제플린처럼 육중하면서도 데이비드 보위만큼 컬러풀했던, 퀸은 그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너무 유명한 탓에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곤 하지만 실상, 퀸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밴드다. 음악적 다채로움부터 실존적 아이러니까지, 그 복합성은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당대의 평단이 당황했던 것도 당연하다.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그들만큼 호평과 혹평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던 경우는 없다.

 

퀸은 신성한 미스터리보다는 복잡한 페르소나였고, 그 산물로서 앨범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는 다양성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일관성의 분열이라고 할 작품이었다.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핵심을 응축한 ‘매그넘 오퍼스’(최고 걸작)였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무엇보다 독창적인 구조의 노래다. 템포와 코드가 각기 다른 다섯 개의 독립적인 악장을 하나의 완결된 악곡으로 결합시킨 구성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아카펠라 형태의 인트로(도입부)를 시작으로, 발라드와 오페레타와 하드 록의 형식을 차례로 넘나든 끝에, 수미쌍관 격인 아우트로(종결부)가 6분 가까운 연주 시간의 대미를 장식한다.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은 “(상이한 두 곡을 결합하여 파격적 실험을 선보였던) 비틀스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가 한끼 식사라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푸드코트의 뷔페와 같다”고 비유했을 정도다.

 

다층적 메타포와 다양한 고유명사가 난무하는 노랫말의 의미도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널리 알려진 ‘사형수의 독백’이라는 주장은 기실 평면적 해석에 불과하다. 곡을 만든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는 비밀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의 뜻에 따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진실은 아마도 욕망과 죄의식, 죄와 벌,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기술과 예술의 동거를 보여주는 전범이기도 하다. 오페레타 부분의 거대한 합창을 멤버들의 음성만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것은 무려 180여 회의 오버더빙(중복녹음)을 거쳐 음역대별로 축조한 ‘소리의 벽’이었다. 이 노래의 홍보를 목적으로 제작한 영상이 현대적 뮤직비디오의 원조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도 그렇다. 단순히 연주 장면들을 편집하는 차원을 넘어, 음악의 본질을 영상의 언어로 묘사하고자 했던 대담한 시도의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시종일관 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음악지 <롤링 스톤>조차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까닭이다. 물론 결과론이지만, 대다수 대중은 열렬히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1976년) ~ ‘낭만적 서부’ 현실과 마주서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미식축구팀의 이름(‘포티나이너스’)으로 여전히 자취를 남기고 있는 19세기 중반의 골드러시 이래, 1930년대 대공황의 시대였건 2차 대전 이후 ‘풍요의 시대’였건 관계없이, 꿈을 찾는 사람들로 날마다 팽창중이었다. 요인은 무엇보다 캘리포니아의 천혜 자연, 자원 조건이었다. 거기에 할리우드의 존재감 또한 한몫을 했다. 스튜디오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한 1910년대 이후 할리우드는 캘리포니아에 대한 ‘낭만적 서부’의 환상을 부추긴 상징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낙관주의와 이상주의가 이곳의 문화적 토양으로 자리잡은 배경들이다.

 

대중음악사에 기록된 캘리포니아의 흔적이 말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독자적인 서부 스타일이었던 서프 음악과 뉴욕 프로테스트의 유토피아적 대응 함수였던 사이키델릭 록은 온전히 ‘캘리포니아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의 70년대’에 들어 로스앤젤레스가 처음 뉴욕을 제치고 한시나마 음악 시장의 판세를 주도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야흐로 이상이 이성을 누른 시대였고, 캘리포니아는 시대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 인기 밴드로서 이글스는 ‘서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글스의 오리지널 라인업에 캘리포니아 출신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쾌락주의를 차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로 삼은 태도 또한 이글스가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구현이었다는 점을 명백히해준다. 그러므로 미국 건국 200주년에 발표한 ‘호텔 캘리포니아’를 통해 이글스가 성공 신화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얼핏 아메리칸드림의 ‘시적 정의’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뒷날, 레이건의 공화당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본 인 더 유에스에이’를 미국 찬가로 오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호텔 캘리포니아’ 발표 전만 해도 이글스에 대한 평단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으로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그들이 “오직 교외 지역의 부유한 중상류층에 의해서만 실현되어 왔던 충족의 판타지”를 선전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그러한 비판적 견해에 대한 자기성찰의 결과였다. 이 노래에서 캘리포니아는 더는 달콤한 약속의 땅이 아니다. 보컬을 담당한 돈 헨리는 이 노래가 “순수의 상실과 영광의 퇴색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캘리포니아는 미국을 축약한 소우주”라고 밝힌 바 있다.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처럼, “원하면 언제든 나갈 수는 있지만 결코 떠날 수는 없는”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의 욕망과 신기루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태도”로 마주 선 것이다.

 

더불어 ‘호텔 캘리포니아’는 당대의 트렌드(포크 록과 컨트리 록)에 안주하던 이글스가 음악적 혁신을 이룬 지점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기타 솔로 파트에서 드러나듯 이글스는 이 노래를 통해 하드 록의 요소들까지 포용해냄으로써, 이후 저니와 하트 등을 통해 정형화하는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의 원형을 제시했다. 이제 캘리포니아는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도나 서머의 <아이 필 러브>(1977년) 마돈나 전에 ‘디스코 여왕’ 도나가 있었다

 

디스코는 총체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음악의 장르였고 춤의 종류였을 뿐만 아니라 춤추는 장소를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에세이스트 찰스 패너티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디스코(텍)에서 디스코에 맞춰 디스코를 췄다.”

 

디스코는 또한 논쟁적인 문화였다. 1970년대 후반 인기의 절정기에조차 주류 바깥에서 주류와 충돌했다. 흑인, 노동 계급,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의 도피적 하위 문화에서 출발한 디스코는 태생부터가, 중산층 백인 중심 사회의 엘리트주의로 웃자란 록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종적, 계급적, 음악적 대립항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평가 캐럴 쿠퍼는 “1970년대 들어 팝 음악의 과거사에 존재했던 문화적, 상업적 아파르트헤이트가 다시 컴백했다”고 지적하고 “거기서 디스코가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디스코의 정치적 특이성은 음악적 특수성과 결합하면서 더욱 쟁점적인 것이 되었다. 디스코는 솔과 펑크의 지류라는 점에서 흑인 음악의 전통과 맞닿아 있었지만, 동시에 춤추기에 특화한 음악으로 ‘개발’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적 감수성보다 유희적 기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초창기 디스코가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에 의해 주도되었고, 창조적 작품이 아닌 상업적 제품으로 간주되었으며, 보컬리스트의 역할 또한 스타성을 잠재한 프런트맨이 아니라 익명성을 담보한 세션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근원적인 이유가 거기 있다. 대중음악의 보편적인 창작 과정에 상치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톰 스머커는 “디스코의 미학과 그에 응답하여 발전한 음악”이 “기성적 록의 기준에 비춰 대안 없이 비인격화한 것들로 보였다”고 썼다. 도나 서머의 등장은 그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도나 서머는 디스코 시대의 최초이자 최대 스타였다. 디스코가 음악적 혁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타공인 ‘디스코의 여왕’이자 당대의 디바로 등극했다. 서머는 무엇보다, 굽이치는 리듬 위를 넘실대는 육감적인 보컬로 디스코의 쾌락적 사운드에 인간적 희열을 불어넣었다. ‘아이 필 러브’를 극적으로 만든 구조적 요인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는 모든 연주 부분에서 실제 악기의 사용을 배제하고 신시사이저의 기계음만으로 완성시킨 최초의 대중음악 히트곡이었다. 오로지 도나 서머의 보컬만이 실연이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이 필 러브’의 성공은 최고의 디스코 프로듀서로 꼽히는 조르조 모로더의 파격적 접근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이었다.


미국 흑인 여성 서머와 이탈리아 백인 남성 모로더가 독일에서 만나 활동을 시작했다는 배경도 흥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미국 문화의 변두리에 머물던 디스코가 유럽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끝에 본국으로 역수입된 과정은 그것의 정치적, 음악적 특이점과 상호 영향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디스코와 록의 요소를 결합한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방법론, 그리고 전자악기를 전면에 부각시킨 신스팝의 사운드 등 1980년대를 지배한 경향들의 원형은 바로 그 과정에서 파생한 산물이다.

 

 

 

 

 

디스코 옷 걸친 유로팝 ‘미국 정복’ ~ 아바의 <댄싱 퀸>(1976년)

 

 “비틀스 이래 가장 성공한 대중음악 스타”로 꼽히던 전성기에조차 그룹 아바의 위상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열세 때문이었다. 차트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랑프리를 차지한 노래 ‘워털루’로 세계 무대에 데뷔한 이래 마지막 정규 앨범 <더 비지터스>(1981)를 발표하고 해체할 때까지, 아바는 영국에서 9곡의 넘버원 싱글을 포함해 19곡의 톱텐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초기 두 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앨범을 차트 정상에 올렸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에서는 겨우 4곡이 톱텐에 진입했고 그중 단 한 곡만이 차트 정상에 섰을 뿐이다. 앨범 차트 기록은 더욱 초라하다. 넘버원은커녕 톱텐에도 근접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음악전문지 <크림>의 분석은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유럽 청소년들에게 로큰롤 혁명은 1950년대 일어난 일이 아니라 1963~64년 사이 비틀스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 결과 유럽 (대중)음악은 현격하게 탈흑인음악적으로 남았다. 이것은 한편으로 크라우트 록의 발전을 의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바(의 존재)를 의미했다.” 대중음악의 보편적 양식이 미국 문화에서 비롯했으며 그 근간에 흑인음악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에 비춰, 유럽 대중음악이 탈중심적이며 그 산물은 미국인들의 취향과 거리가 있다는 의미다.

 

아바의 전기 작가 칼 망누스 팔름의 해석 또한 비슷하다. 그는 ‘팝송’을 의미하는 독일어 ‘슐라거’가 일반적으로 ‘이지 리스닝’과 동의어로 간주된다는 점을 들며 유럽 대중음악의 속성이 미국의 그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 재즈 혹은 리듬 앤 블루스의 억양을 제거한” 스타일, 이른바 ‘유로팝’의 정체를 가리킨 것이다. 유로팝의 전형이자 정수로서 아바의 음악이 미국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아바를 향해 “우리의 적을 만났다”고 썼는데, 그들의 높은 음악적 성취와 미국에서의 낮은 대중적 성과를 함축하여 보여주는 정황적 사료라고 할 것이다.

 

‘댄싱 퀸’의 성공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정황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노래는 유럽은 물론 미국 차트 정상까지 정복한 아바의 최대 히트곡이다. 영미권 출신이 아닌 대중음악인으로 그처럼 거대한 국제적 성공을 거둔 예는 없었다는 점에서 ‘댄싱 퀸’은 아바를 진정 위대한 팝 밴드로 격상시킨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오죽하면 <크림>은 1976년을 ‘아바의 해’로 선포했을 정도다.

 

‘댄싱 퀸’에서 아바는 디스코의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대서양의 양안 사이에서 합의점을 도출해냈다. 조지 매크레이의 히트곡 ‘록 유어 베이비’(1974)에서 당대의 트렌드였던 디스코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것을 유로팝의 공식에 화학적으로 대입한 것이다.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선율과 걸 그룹 스타일의 풍요로운 하모니를 결합하고, 고전적인 실내악 앙상블과 현대적인 신시사이저 음향을 혼합한 방식도 마찬가지다. ‘댄싱 퀸’은 무엇보다 절충적 실용성의 승리였다. 요즘 우리 곁을 떠도는 일방적 실용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사운드트랙 새 역사 쓴 ‘디스코 해방구’ ~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1977년)

 

표면적인 양상만으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의 가치를 오늘에 공감하기는 힘들다. 작금의 기준에 비추자면 한물간 음악과 촌스런 패션으로 가득한 이류 영화로 보일 뿐이다. 요컨대, <토요일 밤의 열기>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그 주제의 보편성이다. 인생의 희망과 현실의 좌절로 교직해낸, 현대 사회의 생존 문제에 직면한 ‘젊음의 초상’을 그린 내러티브가 시대를 초월하는 현재성을 담지하는 덕분이다. 여기서 디스코는 시대 상황의 배경막이자 당대 청춘의 소통구로 제시된다.

 

<토요일 밤의 열기>가 대중음악 비평가의 원고를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디스코의 의미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 6월 7일치 <뉴욕 매거진>에 실린 비평가 닉 콘의 13쪽짜리 르포가 그 바탕이었다. ‘새로운 토요일 밤의 집단 제의’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그는 뉴욕 브루클린의 이탈리아 이민 3세대 노동 계급 젊은이들을 매개 삼아 디스코가 상징하는 당대 대중문화의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콘은 디스코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밥 딜런이 누구인지조차 기억 못하는” 새로운 세대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도전의 여지가 거의 없는” 규격화된 인생을 사는 그들

이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밤에 거대한 해방의 순간을 맞아 분출한다”고 덧붙였다. 1950년대의 로큰롤과 1960년대의 사이키델릭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 문화와 하위 문화의 집대성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적 주체들의 탈출구로서 디스코가 그때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거물급 음반 제작자로 뮤지컬과 영화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하던 로버트 스틱우드가 기사의 내용에서 상업적 잠재 가치를 발견한 것은,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틱우드의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있던 비지스가 영화 음악에 참여한 것 또한 마찬가지 필연이었다.

 

비지스는 탈고도 되지 않은 시나리오 초안만 읽고 일주일 만에 다섯 곡을 만들었다. 뉴욕 거리를 걷는 주인공(존 트래볼타)의 이미지와 함께 영화 서두를 장식하는 노래 ‘스테잉 얼라이브’는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주인공의 경쾌한 발걸음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리듬과 “도시의 정글에서 살아남기”를 얘기하는 노랫말은 <토요일 밤의 열기>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침체 상태였던 비지스의 변신 의지와 생존 투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스테잉 얼라이브’의 엄청난 성공이 놀라움을 자아낸 이유도 거기 있었다. 주류 백인 밴드가 사그라지던 디스코 열풍에 마지막 절정을 선사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완전연소시킨 의외성 때문이었다.

 

‘스테잉 얼라이브’의 성공은 <토요일 밤의 열기>를 그해 최고 흥행작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수록 앨범을 사상 최대 판매량의 사운드트랙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또한 음악 업계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정착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음악적 유행을 영화와 결합시키고 그 사운드트랙을 홍보 도구이자 수익의 원천으로 두루 활용하는 자본집약적 이윤극대화 전략이다. “상업적 성공의 새로운 표준”이었다.

 

 

 

코드 세개로 자본폭력 공격 ‘펑크 1세대’ ~ 라몬스의 <블리츠크릭 밥>(1976년)

음악적 형식이 아니라 개념적 실재로 우선했다는 측면에서, 펑크는 블루스와 닮은 점이 있다. 요컨대, 블루스가 ‘정서’라면 펑크(punk)는 ‘태도’다. 블루스가 억압적 현실에 대한 흑인 노예의 정서 속에 싹튼 것처럼, 펑크는 폭력적 자본을 향한 아웃사이더의 태도에서 발아한 것이었다.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서 형식의 문제는 그다음에 왔다. 블루스의 정서가 오랜 시간을 거쳐 12소절 기본 형식으로 정착한 것처럼, 펑크의 태도는 분방한 실험 속에서 3코드의 단순한 패턴으로 귀착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블루스의 12소절 형식은 창안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반면에 펑크의 3코드 전형은 원조가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라몬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라몬스는 197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시비지비’(CBGB) 클럽에서 데뷔한 펑크 1세대 가운데 하나다. 패티 스미스, 딕테이터스, 토킹 헤즈, 텔레비전, 블론디, 수어사이드 등과 함께 주류 음악계의 흐름과는 철저히 무관하거나 역행하는 사운드를 실험했다. 주목할 것은, 라몬스를 포함한 그들이 처음부터 펑크라고 불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뒷날 각각 비평가와 만화가로 이름을 새기게 되는) 렉스 맥닐과 존 홀름스트롬이 조악한 인쇄물의 팬진을 발간하며 <펑크>란 이름을 붙인 것을 계기로, 시비지비 클럽의 반주류적 뮤지션들을 아우르는 총칭으로서 펑크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음악적 동류가 아니라 대안적 연대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오직 태도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그들 각자의 스타일은 천차만별이었다. 비평가 존 새비지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펑크는 “거기 속하는 그룹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상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라몬스의 만화 같은 속성, 토킹 헤즈의 사립학교 학생 같은 태도, 수어사이드의 적대적 방식, 블론디의 헐떡대는 1960년대 팝 스타일, (텔레비전의 창단 멤버인) 톰 벌레인과 리처드 헬의 세기말적 퇴폐의 낭만주의”까지 각양각색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라몬스가 발표한 첫 싱글이자 데뷔 앨범의 오프닝 트랙으로서 ‘블리츠크릭 밥(Blitzkrieg Bop)’의 음악사적 의미가 돋보이는 이유도 거기 있다. 당대 다양한 양상들이 ‘뉴 웨이브’라는 개념으로 분화하면서 그들의 직선적이고 단순한 3코드 양식이 펑크의 전형으로 부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분 남짓 짧은 연주시간 내내, ‘돌격전’이라는 제목 그대로, 시종일관 질주하는 이 노래는 라몬스 사운드의 표본이다. 거칠고 조악한 리프에 이어지는 “헤이! 호! 레츠 고!”라는 외침은 뒷날 라몬스를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로 자리잡기도 했다.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이미지와 실없게 들리는 노랫말도 그렇다. 비평가 톰 카슨은 펑크의 문자적 의미가 “무법자로 행세할 만한 자신감도 없는 절망적인 낙오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라몬스는 자신들의 그런 면을 포장하기는커녕 스스로 부적응자임을 찬양했다”고 썼다. 거기에는 “섬뜩하고 짜릿한 위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몬스의 펑크는 로큰롤의 반항이 기성을 거스르는 즐거움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 각성제에 다름 아니었다.

 

 

 

반정부 구호로 펑크 이데올로기 확립 ~ 섹스 피스톨스의 <아나키 인 더 유케이>(1976)

 

1976년 12월 1일, 런던 ‘템즈 텔레비전’의 매거진 프로그램인 ‘투데이’에서 방송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출연한 신인 록 밴드가 말썽이었다. 진행자와의 언쟁 가운데 욕설을 포함한 방송 금지용어들을 무더기로 쏟아냈던 것이다. 다음날 영국의 모든 신문이 이 사건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데일리 미러>는 “천박함과 흉포함”을 헤드라인으로 내걸었는데, 그것은 뒷날 이 밴드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더 필스 앤 더 퓨리>, 2000)으로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문제의 밴드는, 이미 그 이름부터 선정적인, 섹스 피스톨스였다.

 

‘템즈 텔레비전’ 사건은 섹스 피스톨스의 악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동하기 시작한 펑크 록의 현상적 실체에 미디어의 관심을 유도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로써 1976년 9월 20일과 21일, 양일간 런던의 ‘100 클럽’에서 벌어진 페스티벌(‘100 클럽 펑크 스페셜’)로 첫 걸음을 내디딘 영국의 펑크 록 무브먼트는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되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영국의 정세 때문이었다.

 

1976년 영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들여올 만큼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대영제국’의 명성은 퇴락하고 ‘유럽의 환자’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국제통화기금의 압력에 따라 공공부문의 지출을 대폭 삭감한 결과, 청년실업을 비롯한 사회 문제가 증폭되었다. “태양 아래 빈둥대는 젊은이들”(섹스 피스톨스의 노래 ‘홀리데이 인 더 선’)의 불만이 극에 달했음은 자명한 수순이다. 그것이 펑크 록의 인화성에 불을 놓았고, ‘아나키 인 더 유케이’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아나키 인 더 유케이’는 섹스 피스톨스의 데뷔 싱글인 동시에 펑크 록 이데올로기를 확립한 전범으로 꼽힌다. 기실, 영국 최초의 펑크 록 싱글로 간주되는 것은 이 노래보다 한 달쯤 앞서 발표된 댐드의 ‘뉴 로즈’다. 그러나 이후 펑크 록에 끼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이 노래가 제시한 표준은 초유의 것이었다. 요컨대, ‘뉴 로즈’가 여자 친구를 소재 삼아 로큰롤의 오랜 관습에 천착했던 반면 ‘아나키 인 더 유케이’는 반기성의 태도를 반정부의 구호로 확장시킨 최초의 사례였던 것이다. 그 차이는 일렉트릭 기타의 굉음 사이로 터져 나오는 이 노래의 서슬 퍼런 첫 구절에서 이미 결정 나버린다. 보컬리스트 조니 로튼이 불쾌하게 거슬리는 빈정거림으로 “나는 반기독교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다”라고 선언한 순간이다. 이 노래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포스터 또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누더기가 된 ‘유니언 잭’을 안전핀과 집게로 고정시켜 놓은 그 이미지는 이후 영국 펑크 록 무브먼트의 깃발로 곧추서게 된다.

 

이 노래의 발표 뒤 일주일 만에 섹스 피스톨스는 문제의 ‘템즈 텔레비전’ 사건을 일으켰다. 싱글을 발매한 레코드회사 이엠아이는 여론에 떠밀려 대국민 사과와 계약 해지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록 음악의 하위 문화는 이때를 기점으로 영원히 바뀌었다.

 

  

 

2007년 런던 방문 당시 찾았던 100클럽에 붙어 있던 Sex Pistols의 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출시 30주년 기념공연 포스터...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무명 펑크밴드 ~ 텔레비전의 <마키 문>(1977년)

 

펑크 록의 3분-3코드 형식은 그것의 아마추어리즘과 관계 깊다. 이른바 펑크 록의 에토스라는 ‘디아이와이’(두 잇 유어셀프)의 태도가 가리키는 바다. 비평가 데이비드 브래킷은 펑크의 아마추어 미학이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사운드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록 음악을 가장 기본적 요소들로 해체하는 미니멀리즘”이 방법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펑크 록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발생하곤 한다. 펑크 록은 반기교적이라는 믿음이다.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니다. 실제로, 대표적인 펑크 록 아이콘들인 시드 비셔스(섹스 피스톨스)와 리처드 헬(보이도이즈) 등은 연주도 거의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최초의 펑크 록 팬진 가운데 하나인 <스니핑 글루>는 심지어 “여기 세 개의 코드가 있다. 이제 밴드를 결성하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문제는 아마추어리즘을 마치 필요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당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사운드의 의미를 곡해하는 경우다. 요컨대, 관건은 연주력을 제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연주력이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기존 음악계와 기성 방법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창조성의 위기에 빠진 대중음악계의 대안으로서, 펑크 록의 의의는 로큰롤의 활기와 열정을 되살릴 미디엄이라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 제임스 울콧이 뉴욕의 시비지비 클럽에서 시작된 최초의 펑크 무브먼트에 대해 “로큰롤의 원동력으로서 그 정신의 복원을 시도”했다고 쓴 근거다. 그가 텔레비전이라는 밴드를 중요한 사례로 언급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은 3분-3코드 형식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도리가 없는 밴드다. 그들 데뷔 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마키 문’은 마치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래처럼 보인다. 10분 40초에 달하는 연주 시간의 장대함이 그렇고, 두 대의 기타가 만들어내는 솔로 파트의 생경함이 그렇다. 이미 1974년께 완성해 놓았던 이 노래를 수년간 가다듬고 고쳐낸 끝에 앨범에 담았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밴드의 리더인 톰 벌레인은 연주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창단 멤버인 리처드 헬과 결별했을 정도다. ‘마키 문’의 낯설지만 아름다운 선율은 펑크의 아마추어리즘이 무능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다른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텔레비전은 펑크의 성지로서 시비지비 클럽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컨트리, 블루 그래스 앤 블루스’의 이니셜을 조합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애초 펑크와는 아무 상관 없던 시비지비에서 공연을 시작한 최초의 밴드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영어 발음으로 벌레인)의 이름으로, 존 콜트레인의 프리 재즈를 일렉트릭 기타에 접목하고자 했던 톰 벌레인과 텔레비전은 그곳에서 펑크의 열린 가능성을 실험했다. 이후 시비지비에서 데뷔한 동료들과 달리 결코 대중적 성공을 누리지 못한 그들이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무명 밴드”(비평가 로니 새릭)로 기억되는 까닭이다.

 

  

 

 

펑크 무브먼트 젠더 장벽 허문 ‘한방’ ~ 엑스레이 스펙스의 <오 본디지, 업 유어스!>(1977)

펑크 무브먼트의 대중음악사적 의의 가운데 하나는 젠더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데 있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적 영역으로 남아 있던, 남근 숭배적 자의식을 특성이자 특권으로 포장하는 일조차 비일비재했던 록 음악계의 관성을 거스르고 여성 뮤지션들이 전위로 나서는 현상을 본격화시킨 것이다. 변혁의 동인은 펑크 구성원들의 동질감에서 비롯했다. 국외자와 소수자의 연대가 가져온 부수적인 효과였던 셈이다. 당대에 불어닥친 페미니즘 문화운동은 그런 흐름의 가속화에 한몫을 했다.

 

여성 뮤지션들의 약진은 영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뉴욕의 펑크 무브먼트를 주도했던 패티 스미스, 데비 해리(블론디), 티나 웨이머스(토킹 헤즈) 등의 존재감이 자극제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영국적 상황의 아이러니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 비평가 조이 프레스의 말마따나, “펑크 이전의 영국 로큰롤은 실질적으로 여성이 전무한 사막”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런던의 펑크 무브먼트에서 여성의 역할이, 뉴욕의 경우와 달리, 음악계 외부에서 내부를 향해 이동하는 양상을 띤 것을 봐도 그렇다.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 맬컴 매클래런의 파트너로서 펑크 패션을 창안하다시피 했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와, 펑크 무브먼트의 페미니즘적 속성을 가장 먼저 의제화했던 화가 겸 작가 캐럴라인 쿤의 역할은 그래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영국 최초의 여성 펑크 로커들이 팬덤의 소산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18살 나이에 엑스레이 스펙스를 결성한 소녀 메리언 엘리엇은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엑스레이 스펙스는 3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 단 한 장의 정규 앨범만을 남기고 단명했음에도, 영국 펑크 록의 역사에 가장 두드러진 흔적을 남긴 밴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무엇보다 강렬한 개성과 독자적 시각으로 시대를 앞섰던 덕분인데, 거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주인공이 바로 보컬리스트 메리언 엘리엇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자각에 더해 소비자로서의 인식까지 메시지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는, 대량소비 문화와 그것의 인공적 속성을 상징하는 폴리 스타이렌을 예명으로 삼음으로써 펑크의 반자본적 윤리를 진화시켰던 것이다.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에서 밴드 이름을 빌린 목적도 물론, 같은 이유였다. 엑스레이 스펙스의 데뷔 싱글 ‘오 본디지, 업 유어스!’는 그처럼 현대적인 문제의식이 만들어낸 매니페스토에 다름 아니었다.

 

여성에 대한, 물질에 의한 “속박은 집어치워”라고 외치는 ‘오 본디지, 업 유어스!’의 주장은 색소폰을 전면에 내세운 생경한 사운드의 실험을 통해 더욱 신선한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16살 여고생으로 엑스레이 스펙스에 합류한 로라 로직의 연주였다. 비록 이 노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기고 결별하긴 했지만, 스타이렌과 로직의 협연은 펑크 무브먼트에서 여성 파워의 성장을 상징하는 이정표로 남기에 충분했다. 생각건대, 언론소비자 주권 운동이 범법행위 취급을 받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이 심대한 위협을 받는 지금 여기의 상황은 이 노래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격렬한 ‘양손 태핑’ 헤비메탈 구원하다 ~ 밴 헤일런의 ‘이럽션’(1978)

 

펑크 무브먼트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음악계 전체의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그러나 혁명이 급진적이었던 만큼 반성과 반동의 역풍도 거셌다. 내부적으로는 펑크 무브먼트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세포분열이 왕성한 진행을 보였는데, 이미 1978년쯤에 그 이념과 태도와 양식에 따라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 노 웨이브 등으로 흐름이 분기한 상태였다. 더욱 주목할 것은 외부적 요인이었다. 메시지보다 사운드를 선호하는 기성 록 지지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음악업계의 위기의식 또한 상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헤비메탈의 부활은 그러한 분위기가 산출해낸 반작용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헤비메탈 계열 역시 자극이 필요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보내면서 자아도취와 매너리즘으로 침체를 자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군의 젊은 영국 밴드들이 이른바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메탈’을 기치로 등장한 배경도 거기에 있었다. 새로운 스타가 절실했다. 다만, 헤비메탈의 구원자가 캘리포니아의 조그마한 교육도시 패서디나에서 등장하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태생의 형제 알렉스와 에드워드를 주축으로 하는 밴드 밴 헤일런이었다.

 

밴 헤일런의 데뷔는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기타리스트 에드워드 밴 헤일런의 연주 때문이었다. 양손 태핑 혹은 라이트 핸드 주법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주특기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지판 위에 직접 때려 누르는 생경한 방식이었다. 왼손으로 코드를 짚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퉁기는 연주의 기본 원리를 뒤엎은, 기타와 피아노의 하이브리드처럼 보이는 그의 연주는 일렉트릭 기타의 사운드와 이미지를 동시에 바꿔놓은 혁신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양손 태핑을 구사한 연주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밴 헤일런만큼 빠르고 격렬하게 프레이즈를 펼쳐낸 이는 없었다. 그래서 <기타 월드>지는 그를 무대 위의 존재감만으로 모든 연주자를 주눅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지미 헨드릭스 이래 최초이자 최후의 기타리스트”라고 평가했다. 한 곡만으로도 충분하다고도 했다. 밴 헤일런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1분 42초짜리 연주곡 ‘이럽션’이 그것이다.

 

헤비메탈의 날카로움과 바흐 선율의 우아함을 낯설고 현란한 테크닉으로 결합해낸 ‘이럽션’은 제목 그대로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 같은 연주였다. 비평가 피트 브라운과 에이치피 뉴퀴스트는 그것이 “심장마비 환자를 재생시킨 전기충격”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밴 헤일런의 등장을 통해 당대가 “(일렉트릭) 기타의 황금시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의 기타 혁명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브라운 사운드’라 불리는, 에릭 클랩턴의 ‘우먼 톤’과 함께 일렉트릭 기타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음색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이 연주할 기타를 스스로 제작(사진)함으로써 그런 독자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데, 그의 ‘프랑켄스트랫’은 브라이언 메이(퀸)의 ‘레드 스페셜’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자작 악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디아이와이’ 에토스가 펑크의 전유가 아님을 입증한 사례였다. 전대의 기타 영웅들인 척 배리와 지미 헨드릭스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로큰롤은 언제나 그랬다.

 

 

 

 

흑인 사회 안은 ‘힙합 라임’ 대중과 조우 ~ 슈거힐 갱의 <래퍼스 딜라이트>(1979년)

 

힙합은 지난 30년 동안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준 대중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다. 게토 지역 흑인들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양상이 어느덧 인종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전지구적 청년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힙합은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가 걸었던 노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흑인문화적 특성의 반영이었고 백인 주류가 간과한 틈새로부터 나타났으며 궁극적으로는 시대를 주도하는 음악적 경향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슈거힐 갱의 ‘래퍼스 딜라이트’를 매미 스미스의 ‘크레이지 블루스’(1920)에 비견한들 어색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블루스 히트곡으로서 ‘크레이지 블루스’의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최초의 힙합 히트곡으로서 ‘래퍼스 딜라이트’의 의미 또한 평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래퍼스 딜라이트’가 최초의 힙합 레코드였던 것은 아니다. 평자에 따라서는 길 스콧헤론이나 라스트 포이츠 등의 음반을 먼저 꼽기도 한다. 슈거힐 갱이 최초의 힙합 뮤지션이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힙합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디제이 쿨 허크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성에 관한 한 ‘래퍼스 딜라이트’와 슈거힐 갱의 성과에 근접한 사례는 전에 없었다. 이 노래는 싱글 차트에서 히트곡의 기준선인 40위권을 돌파한 최초의 힙합 넘버였다. 대부분의 백인들에게 랩이 여전히 생경한 표현 방식이었음을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좀더 주목할 것은 이 노래가 아르앤비(R&B) 차트에서 정상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디스코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흑인 음악의 양상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9년 7월 12일 미국 프로야구단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에서는 ‘디스코 파괴의 밤’이라는 행사가 벌어져 관련 음반들을 파쇄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대의 펑크 무브먼트가 디스코에 대한 혐오를 상당 부분 동력으로 삼고 있었다는 배경을 봐도 그렇다. 힙합의 부상은 흑인 음악의 새로운 대안이었던 것이다. ‘래퍼스 딜라이트’가 같은 해 발표된, 디스코 시대의 마지막 걸작인 시크의 ‘굿 타임스’를 샘플링한 곡이라는 점은 그래서 상징적인 시사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래퍼스 딜라이트’는 음악적 형식으로써 힙합의 진화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도 괄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래퍼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힙합의 현대적 스타일은 랩을 담당하는 엠시와 사운드를 만드는 디제이가 결합한 창작 프로세스에 있는데, 슈거힐 갱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디제이의 몫이 훨씬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비평가 크레이그 워너의 말마따나, 역사적으로 “래핑은 흑인문화 내부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거힐 갱은 세 사람의 엠시를 내세워 흑인 사회 내부의 목소리를 정련된 라임으로 옮겨놓음으로써 랩의 수준을 상승시켰다. ‘래퍼스 딜라이트’는 힙합의 새로운 문법이 대중과 본격적으로 조우한 계기였던 것이다.

 

 

 

 

 

‘포스트펑크’ 시대 연 암울한 사랑노래 ~ 조이 디비전의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1980)

 

조이 디비전이란 이름을 다루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운영했던 강제매춘 부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수인번호(카-체트닉 135633)를 필명 삼아 펴낸 체험소설 <더 하우스 오브 돌스>(1955)에서 폭로한 사실이다. 거기서 이름을 차용한 록 밴드라니, 일제의 군대위안부 만행을 기억하는 우리로선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명명이다. 논란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조이 디비전이라는 록 밴드는 숙고와 의문의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낙인 같은 이름을 머리에 새기고 혁명 같은 음악을 가슴에서 뽑아낸 존재였다. 밴드 이름이 킬러스라고 해서 멤버들이 살인자들은 아닌 것처럼, 조이 디비전 또한 네오-나치 따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유투의 보노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이 공공연히 그들을 추앙한다고 밝힐 수는 없었을 게 분명하다. 이를테면 조이 디비전이란 이름은 ‘불편한 사실’이고, 조이 디비전은 그런 사실들을 들춰낸 불편한 밴드였던 것이다.

 

조이 디비전은 펑크의 허무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그 추진력은 보컬리스트 이언 커티스로부터 나왔다. 심각한 우울증과 간질을 앓고 있던 그가 염세적인 관점으로 인생을 보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내적 상흔을 타자화시킨 노랫말로써 조이 디비전을 당대의 수많은 아류들과 차별화시킨 측면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가 “인간성의 무한한 비인간성에 대한 숙고를 즐겼다”고 평했는데, 밴드 이름도 결국은 그런 태도의 산물이었다. 커티스가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끊임없는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그것이 종래 그를 자살로 몰아간 요인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의 말마따나 그는 “펑크의 허무주의를 개인적으로 체화한” 장본인이었다. 본격 활동을 펼친 기간이 채 2년도 안 되는 인디 밴드가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흔적으로 남을 수 있었던 저력 역시 거기 있었다. 커티스 사후 한 달 만에 공개된 싱글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는 그 모든 것의 결정체였다.

 

조이 디비전의 최초이자 최후의 히트곡인 ‘러브 윌 테어 어스 어파트’는 역사상 가장 암울한 사랑노래 가운데 하나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를 맹세한 결혼 생활이 결국 “사랑이 우리를 갈라놓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향해 추락하던 상황을 묘사한, 커티스의 공개 유언장이었다. 주목할 것은, 모든 관계의 종말을 예견했던 이 노래가 새로운 관계의 실마리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음악적으로 이 노래는 베이스가 리드하고 키보드가 동조하는 어두운 사운드를 통해 이른바 ‘고딕 록’의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포스트펑크의 실험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역적으로는 고향 영국 맨체스터의 반골적 음악 전통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적으로는 밴드의 남은 멤버들이 뉴 오더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설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한 시대의 종말은 그렇게 새 시대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최초의 헤비메탈-펑크 록 크로스오버 밴드 ~ 모터헤드의 <에이스 오브 스페이즈>(1980년)

 

대중음악 장르는 그만의 하위문화를 동반한다. 그것은 스타덤이 만들어내는 밈(문화의 구성 요소)의 현상인 동시에, 팬덤이 구축해내는 연대 의식의 기반이다. 새로운 음악적 경향이 복장, 머리 모양 따위의 유행을 수반하는 양상이 쉬운 예다. 비평가 키스 네거스가 “음악 장르들의 내부 혹은 사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란 음악적 행위 이상의 사회적 행위다”라고 지적한 근거다. 하위문화의 파급력이 해당 장르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패러다임 또한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비메탈과 펑크 록이다. 젊음과 반항의 표상으로 일반화한 하위문화 코드들을 통해 유행의 부침을 넘나들며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두 장르가 상호 대립적인 인자들을 강조함으로써 공생해 왔다는 아이러니다. 예를 들어 헤비메탈은 치렁치렁한 장발과 가죽 재킷을, 펑크 록은 삐죽삐죽한 단발과 티셔츠를 각각의 유니폼 삼아 서로의 차이를 명백히 했다. 음악적인 면도 마찬가지다. 물론, 볼륨에 대한 집착이란 측면에서 헤비메탈과 펑크 록은 얼핏 유사해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접근법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비평가 스티브 왁스먼은 음량에 대한 헤비메탈과 펑크 록의 상반되는 가치관을 분석한 바 있다. 요컨대, 헤비메탈은 소리의 크기를 “압도적인 권력의 인식으로서 투사하고 전도하는” 반면에 펑크 록은 “사운드의 관습을 교란하여… ‘소음’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헤비메탈이 기존 질서의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펑크 록은 그것을 거부하는 역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상호 대척적인 입지가 개별 생존의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모터헤드란 밴드의 등장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모터헤드는 장르의 사생아와 같은 존재였다. 전례가 없었다. 비평가 스티브 왁스먼은 모터헤드가 “최초의 헤비메탈/펑크 록 크로스오버 밴드이거나, 적어도 그렇게 묘사된 최초의 밴드”라고 썼다. 게리 멀홀랜드는 그들이 “펑크 록과 헤비메탈, 그 각각의 최악(혹은 최선?)의 극단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평했다. 모터헤드는 장발에 가죽옷을 걸치고는 3분짜리 소음을 연주한 밴드였다. 전통적인 음향의 구성과 테크니컬한 기타 솔로 채용에서라면 헤비메탈이었고, 두어 개의 코드 사이를 질주하는 단순함과 정제되지 않은 질감에서라면 펑크 록이었다. 게다가 베이시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레미의 야수 같은 목소리에는 양자의 특성이 혼재해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후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혹은 퓨전) 경향이 본격화하면서 모터헤드의 포스트모던적 특성이 시대를 앞선 미덕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80년대의 스래시 메탈과 90년대의 그런지 록에서 모터헤드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터헤드의 궁극적 찬가로 일컬어지는 ‘에이스 오브 스페이즈’는 가장 유력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장르의 구분은 의미를 상실한다. 밴드의 말마따나 이건 “무엇보다 로큰롤”이고 “그저 로큰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