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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국팝 사건,사고 60년-1(1945~1975)(한겨레 연재)

by Wood-Stock 2009. 8. 11.

< 한국팝 사건,사고 60년(1945~2005) 1부 (1945~1975) >

 

 

한겨레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씨와 이용우씨가 194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변천사를 사회적 맥락과 함께 격주로 풀어씁니다.
해방공간 ‘아메리카’ 의 얼굴
① 미군이 안겨준 ‘선샤인’과 ‘슈샤인’

 

‘해방 60년’이니 한국 대중음악도 ‘독립 60년’이 된 것일까.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이르는 시공간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통념대로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유행가, 즉 트로트가 이 당시를 지배했을까. 이후의 신산스러운 역사를 보았을 때 그랬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해방은 ‘귀향’의 시기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들 가운데 대중예술인도 많았다. 귀향 뒤 이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지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현인(玄仁)일 것이다. 그에게는 ‘상하이에서 귀국한’이라는 경력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그의 경력을 더 뒤져 보면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 수학(1942)’, ‘중국 도시들의 악극단과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부르다, 상하이에 정착(1943)’, ‘일본군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귀향 중 베이징의 형무소 수감’(1945) 등이 남아 있다. 현인이라는 ‘중국인’같은 예명은, 한국인 본명인 현동주(玄東柱)라는 이름과 일본에 있을 때 창씨개명한 고토징(後藤仁) (혹자에 의하면 고토 히로시(後藤弘))이라는 이름이 뒤섞이고 변형되어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그가 풍운아처럼 아시아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는 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현인은 1947~8년께 무대에서 ‘신라의 달밤’을 부르고, 1949년에는 작곡가 박시춘에 의해 음반 취입이 이루어지면서 대중가요계의 슈퍼스타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중가요를 부르기 전 외국곡들을 번안해서 부른 주역으로 더 유명했다. 그 가운데 한 곡이 멕시코 노래인 ‘베사메 무초’였고 이 낯선 외래의 선율은 익숙한 한국어 가사와 만나 대중의 귀를 파고 들었다. “베사메 무초야 리라 꽃같이 귀여운 아가씨 / 베사메 무초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 마리아”라는 노랫말을 지금 들으면 어이 없기는 하다. ‘키스 미 머치’라는 뜻의 스페인어 ‘베사메 무초’가 여인의 이름으로 둔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도 현인에 대해 “월드 뮤직을 최초로 이 땅에 수혈했던 국민가수”라는 생뚱맞은 평이 나오고 있으니, 세상이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는 ‘월드 뮤직’은 고사하고 ‘팝 뮤직’이라는 말도 없을 때였다. ‘재즈’나 ‘양곡(洋曲)’이라는 용어만 있을 때였다. 이런 재즈, 당시 말로 ‘쟈스(ジャ-ス)’의 기원은 1920년대 후반의 경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대 ‘총력전 체제’가 성립되면서 일제가 재즈를 ‘적성국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금지시킨 일이 있지만, 1945년 이후 재즈는 전세계를 주름잡게 된 미군의 존재와 직결되어 한반도 여기저기의 ‘미군 구락부(club)’에서 흘러나왔다. 현인, 박단마, 박혜옥, 이인숙 등이 당시의 ‘재즈 가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베사메 무초’가 재즈인가. 아, ‘쟈스’는 ‘재즈(jazz)’가 아니라, 외래 대중음악을 총칭하는 범주였다. 그러니 샹송, 탱고, 칸쏘네, 맘보처럼 미국의 대중음악과 거리가 있는 음악들도 모두 ‘쟈스’에 포함되었다. 샹송인 ‘고엽’이 ‘베사메 무초’와 더불어 현인의 또 하나의 히트곡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용어의 교통정리가 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재즈 가수들이 히트시킨 ‘재즈곡’에는 위 두 곡과 더불어 ‘유 아 마이 선샤인’이 언급된다. 선샤인. 아마도 미군이 가지고 온 추잉껌, 초콜릿, 씨레이션 등이 ‘선샤인’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기 때문에 이 곡이 더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짝반짝 빛나야 할 것은 ‘당신(You)’만이 아니었다. 몇 년 뒤의 일이지만 박단마가 불러 히트시킨 ‘슈샤인 보이’(이서구 작사, 손목인 작곡)라는 노래를 들으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해방’이 무색해지는 과정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서는 ‘도쿄 슈샤인 보이’나 ‘긴자 캉캉 무스메(긴자의 캉캉 걸)’라는 노래가 히트를 기록했으니 ‘미군의 점령’이라는 동아시아의 현실은 무척이나 혼동스럽고 모순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 가지 더. 몇 년 전 영화 ‘신라의 달밤’이 히트했을 무렵 평양발 통신이 하나 내려 왔다. 내용인즉슨 ‘신라의 달밤’은 해방 이전부터 존재했던 곡이고, 원제는 ‘인도의 달밤’이라는 것이다. 노랫말이 엉뚱하게 바뀐 것은 작사가 조령출(조명암)이 월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한겨레>, 2001년 7월19일치).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고, 북한은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하지만 1940년대를 보내면서 ‘신라의 달밤’의 원작자와 연관된 ‘북한’라는 기호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금기의 대상이 됐다. 현인의 경력에 등장하는 ‘도쿄(일본)’와 ‘상하이(중국)’도 마찬가지로 기억에서 점차 삭제되어 갔다. 대한민국, 즉 남한에서는 날이 갈수록 미군이라는 물리적 권력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라는 상징적 권력이 더욱 강해져 갔다. 이 권력의 작용은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이었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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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만능선수” 김해송

②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조선 짜스의 귀재’

 

현인, 박단마 등이 부른 ‘베사메 무초’ ‘슈샤인 보이’ 같은 곡이 ‘진짜 재즈’가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자스’는 ‘짝퉁’이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여기서 ‘복습 겸 예습’으로 잠시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오색찬란한 네온싸인 속으로 흘러나오는 째쓰… 쎈티멘탈한 류행가의 멜로듸에 33년의 세모는 그 긔분을 심각케 하였다” “근대 음악의 꼿이오 경쾌무비한 조률(調律)로서 흥분과 감격을 한업시 주게 되는 짜스” “대중오락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십히 하는 째스의 경쾌하고도 유모어한 리슴.”(차례로 <매일 신보> 1933년 12월 29일치, 1937년 1월 20, 22일치)

 

‘1930년대에 이미 조선어로 창작된 재즈가 음반화되었을 정도’란 말이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흔적은 어디 있을까. 최근의 흔적부터 뒤져보자. 2004년 인디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곡 ‘김포 쌍나팔’에 샘플링 되기도 했고 1999년 영화 <해피 엔드> 사운드트랙에 통째로 실려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청춘계급’이 있다. 들어보면, ‘새삼스럽게 웬일일까’ 하는 의문에 앞서, 그 시절 이미 스윙 재즈를 소화한 ‘조선 자스’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기 바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블루노트를 쓴 ‘다방의 푸른 꿈’(이난영 노래)이나 만요(漫謠)와 재즈 스타일이 만나는 ‘엉터리 대학생’(김장미 노래)은 ‘청춘계급’의 스윙이 우연이 아니란 점을 ‘귀’로 확인해 준다.

 

앞서 언급한 곡들은 모두 1938~39년께 발표된 창작곡으로 ‘조선 자스’의 여러 층위를 보여준다. 동일한 작곡가의 작품이란 공통점도 있다. 누굴까. 당시 “짜스의 귀재(鬼才)” “음악에는 만능선수”란 평을 받았지만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 김해송이다. 남쪽에서 그의 이름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의 ‘남편’으로 호명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1950~60년대 국제적으로 활약한 김 시스터즈의 ‘부친’으로 일부 거론되기도 했다. 그나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들머리에 쓰여 화제가 된 ‘오빠는 풍각쟁이’(김해송 작곡, 박향림 노래)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실제 김해송은 누구의 남편이나 부친, 코믹한 노래의 작곡자 그 이상이었다.

 

 

김해송은 1930~40년대 조선 대중음악계에서 천재적인 존재였다는 게 당대를 경험한 이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1911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김해송은 1935년 오케(OKEH) 레코드의 연주단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1936년부터 작·편곡가, 가수, 하와이안 기타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락선은 떠난다’ ‘울어라 은방울’ ‘역마차’(이상 장세정 노래) ‘울어라 문풍지’(이난영 노래) ‘선창’(고운봉 노래) ‘화류춘몽’(이화자 노래) 등을 히트시켜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고(작곡자로는 본명인 김송규를 더 많이 썼다), ‘개고기 주사’ ‘모던 기생 점고’ 등을 불러 가수로서도 인기를 구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김해송의 레코딩은 작곡가, 가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긴 하지만 한계 역시 뚜렷하다. ‘무대가 본령’이었던 그의 진면목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고의 흥행단체였던 오케 그랜드 쇼단과 조선악극단에서 그는 지휘자, 편곡가, 가수, 연주자로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1946년에는 백은선(무용가), 김정환(무대미술가, ‘김정항’이라는 이견도 있다)과 함께 KPK 악단(혹은 쇼단)을 설립해,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가수 윤항기의 부친) 등 ‘올스타급’ 라인업과 함께 미군 구락부와 극장 쇼를 주름잡았다. 그는 민요, 라틴 음악, 트로트, 클래식, 1920~30년대 시카고 재즈 및 스윙 재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악 편곡과 연출로 일제시대 일본인과 해방 이후 미군들에까지 극찬 받았다.

 

특히 김해송은 KPK에서 오페라 ‘투란도트’, ‘카르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원용해 뮤지컬을 실험한 무대 예술의 전위였다. ‘뮤지컬의 선구자’라는 평은 비단 어느 가요 평론가의 사견에 머물지 않는다. 김해송이 해방 후 대중음악협회의 창단총회에서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점은 당시 그의 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미군 공연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납북’된 뒤 곧 생을 마감하였고(사망 과정에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을 작사한 조명암, 박영호가 월북했고 그 역시 월북했다는 혐의로 남쪽에서 그의 작품 상당수가 금지되거나 다른 이의 이름을 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김해송이란 이름이 낯선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한 음악인의 목숨과 작품에만 영향을 끼친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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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대중음악의 ‘분단’

③ 미아리와 테네시

 

한국전쟁이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일까. 분명한 것은 전쟁이 휩쓸고 가면서 한반도는 서로를 ‘괴뢰’라고 생각하는 반쪽짜리 국민국가로 분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 개인으로서는 ‘도 아니면 모’ 식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인한 상황을 낳았다. 즉, ‘반공 아니면 반제’였고, 중간은 없었다. 따라서 대중음악도 분단되었다.

 

이는 대중음악인 개개인이 ‘조선(북한)’과 ‘대한(남한)’을 선택했다는 차원을 넘어, 작품 속에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중음악의 가사에는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을 사람들이나 사용할 적대적 어휘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우 사정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지만, 남한의 경우는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두 인물을 꼽으라면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이다. 논란은 있겠지만 서민의 애환을 잘 그려낸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 평가되는 대중문화계의 거인들이고, 이들은 이미 해방 공간에서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을 합작했다. 박시춘이 작가로 활동했던 럭키 레코드에 유호가 한때 문예부장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각별한 연을 상징해 준다. 이 두 명이 1950년 가을 서울이 ‘수복’되어 재회한 자리에서 만들어낸 곡은 ‘진중가요’인 ‘전우야 잘 자라’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로 시작하여 ‘낙동강’, ‘추풍령’, ‘한강수’, ‘삼팔선’이 차례로 등장하는 이 곡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두 인물은 그 외에도 전쟁을 소재로 한 곡들을 남겼다. ‘1·4 후퇴’를 배경으로 한 ‘전선야곡’(발매는 1952년 5월께), 서울 환도를 배경으로 한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년 8월께)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의 주요 고비 때마다 대중가요는 전쟁에, 즉 정치에 깊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박시춘은 해방공간에서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남인수 노래), 전쟁 막바지에는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현인 노래)를 작곡했고, 유호는 ‘대한민국 군가 넘버 원’이라고 부를 만한 ‘진짜 사나이’를 작사했다.

 

» 박시춘과 제자 금사향(왼쪽), 황금심(오른쪽).

이런 경향이 두 인물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기 그리고 그 직후 제작된 음반들에서 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한 곡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꿈에 본 내 고향’(박두환 작사/김기태 작곡/한정무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반야월/이재호/이해연 노래), ‘판문점의 달밤’(유노완 작사/이봉룡 작곡/고대원 노래), ‘삼팔선의 봄’(김석민 작사/박춘석 작곡/김석민 노래) 등등…. 전쟁과 분단은 ‘한국 대중가요의 주조(主調)는 비탄과 탄식’이라는 세간의 편견을 더욱 고착시켜 버렸다.

 

따라서 2년 전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전우야 잘자라’를 합창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는 보도를 보고 심난해 할 필요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자유대한’을 선택한 그 세대의 정체성에서 이런 가요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유행에 대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점도 있다.

 

다름 아니라 전쟁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비장하거나 구슬픈 분위기의 노래들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페르샤 왕자’, ‘홍콩 아가씨’ 같은 이국적 분위기의 곡들이 거의 동시에 히트했다는 점이다. 이 곡들의 작사가인 손로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해야겠지만,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박시춘의 작곡이라는 사실은 지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이국 취향의 곡들에 대해 ‘무의식적 욕망마저 서양화(미국화)되어 버렸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단정적인 평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형성된 정신적 구조를 단순화시켜 버린다. 전쟁 상황에서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기저에는 무정형의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는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가장 인기 있었던 미국의 팝 가수는 누구였을까. 한 명만 뽑으라면 단연 패티 페이지(Patty Page)일 것이다. ‘테네시 왈츠’, ‘체인징 파트너스’,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 등 그 우아한 3박자 리듬의 곡들이다. 2박자 트로트 리듬의 애달픈 가요와 3박자 왈츠 리듬의 우아한 팝송 사이의 거리는 ‘미아리’와 ‘테네시’의 거리와 비슷했다. 때로 아주 멀면 그게 더 큰 동경을 낳는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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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홀 열풍과 김광수·엄토미

④쉘 위 댄스?: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

 

때는 1937년 벽두. 잡지 <삼천리>에는 총독부 경무국장을 수신자로 한 공개 청원의 글이 실렸다. 레코드사 문예부장, 배우, 다방 마담, 기생 등 당대의 ‘모던 남녀’들이 연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는 것. 당연지사 일축된 이 일은 식민통치와 ‘총력전 체제’가 심화하던 시기에 일어난 ‘언감생심’ 해프닝으로 보일지 몰라도, ‘구미(歐美)식 가무(歌舞) 공간’에 대한 욕망이 일찍이, 그리고 자연스레 발현되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피폐하고 겨를 없던 복구의 시기’에도 일어났다. 이번에는 탄원성 글 대신 두 가지 사건이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나는 1954년 한 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사교 댄스와 성 윤리에 대해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이 소설은 인텔리의 사회 풍조 개탄이나 이중성과는 별도로 단행본 출간과 영화화로 이어지며 쾌조의 흥행을 구가했다. 다른 하나는 1955년 여러 지면을 뒤흔든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해군 장교를 사칭해 70여 여성들을 농락한 사건의 주인공은 ‘춤만 추고 나면 거의 다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는 증언과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희세의 무죄 판결을 두고두고 회자시켰다.

 

이 두 사건은 선정주의적 보도와 논란, 성 윤리의 아노미 현상을 제거하면 사교댄스와 댄스홀 열풍을 배경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남선녀와 음악과 춤이 삼위일체로 만나니 ‘남녀상열지사’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었을 터. 하지만 문화면을 넘어 사회면을 강타한 당시의 센세이션이 ‘근엄한 척하기 일등’인 신문과 식자층에 의해 증폭되었음을 지적하는 건 중언부언에 가까울 것이다. 요즘도 심심찮게 보이는 ‘후려치면서 팔아먹는’ 수법에 기반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그런데 1950년대 춤바람과 댄스홀 붐이 대체 어때했기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걸까. 색안경을 벗고 보면, 대단했다는 게 공통된 증언이다. 해방 직후, 미쓰코시백화점(이후 동화백화점, 현재 신세계백화점)과 조지야백화점(이후 미도파백화점,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대규모 고급 댄스홀이 개장했다. 1950년대에 들어 곳곳에 댄스홀이 우후죽순 들어서며 ‘댄스홀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과장을 보태자면, ‘무허가 교습소’에서 트레이닝을 마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셈.

 

그렇다면 1950년대 댄스홀을 뜨겁게 달군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신나면서도 격조 있는 음악, 즉 재즈, 스탠더드 팝, 라틴 음악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이국적 가사와 정서가 등장하는 가요와 함께 탱고, 맘보, 차차차 등 라틴 ‘팝송’이 유행하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때의 주역으로는 김광수와 엄토미의 존재를 우선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수라면 ‘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외삼촌,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 말기 일본에서 사쿠라이 기요시 탱고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김광수는 1940년대 후반부터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고 이후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방송국 악단장을 역임하며 경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최고로 평가받던 김광수 악단을 거친 이들로는 연주자 노갑동, 최상룡, 김인배, 이봉조 등과 가수 현미, 이금희, 배호 등이 있다.

 

색소폰 및 클라리넷 연주자인 엄토미(본명 엄재욱)도 1940년대 말 이후 연주자와 악단 리더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김광수와 마찬가지로 작곡, 영화음악, 방송국 악단 등에 두루 솜씨를 발휘한 엄토미는 부산 피난 시절 김광수, 박춘석(피아노)과 함께 ‘올스타 쇼’ 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광수 악단이 라틴 음악의 선두주자였다면, 엄토미 악단은 재즈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다. 엄토미가 영화배우 엄앵란의 숙부란 사실은 연예정보 이상은 아닐 테지만, 그가 은성살롱에서 무명 시절의 신중현을 종종 무대에 올렸다는 점은 신중현 바이오그래피의 한 대목 이상이다(김광수도 이 ‘당돌한 10대’를 무대에 데뷔시켜준 일화가 있다).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당시 하늘 같은 분이었다’는 말로 엄토미와 김광수를 회고하는 것도 가십 이상이다.

 


마라카스를 들고 악단을 지휘하던 김광수의 모습이나 잘 생긴 외모에 색소폰을 연주하며 악단을 리드하던 엄토미의 모습, 그리고 이 같은 전속 악단의 반주에 맞춰 양복을 말쑥하게 입은 남성과 한복과 고무신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여성이 짝을 이루는 광경은 당시 댄스홀 붐에 관한 스냅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방송으로도 이어진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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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전속가수’ 를 아십니까?

⑤ ‘라디오연속극’ 주제가. 히트곡이 되다

 

이쯤 해서 ‘해방 60년’을 맞아 대중음악의 굵직한 사건을 정리하겠다는 이 기획의 의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간은 생략하고, 60년 기간의 시작과 끝을 비교하면서 격세지감을 느껴 보자. 그러면 구호물자에 연명하던 나라에서 좌우지간 순원조국으로 바뀌고, 인구가 바글바글하던 나라에서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의 나라로 바뀐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대중가요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해서 비탄과 탄식을 주조로 하던 ‘유행가’가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찬미하는 ‘K-pop’으로 바뀐 모습이 선명하다. 물론 지배적 형상이 그럴 뿐, 자세히 속을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대중음악의 60년 사이의 변화에서 또하나의 대조적 이미지는 ‘방송’과의 관련이다. 현재의 대중음악의 지배적 형식이 ‘방송 출연’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은 새삼 강조하는 게 면구스러울 정도다. 다행이든, 불행이든, 언제부턴가 대중음악을 경험하는 지배적 방법은 ‘TV를 시청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60년 전쯤에는 어땠을까. 가요평론가 고(故) 황문평의 증언을 들어 보자. “서울중앙방송국이 호출부호도 새롭게 HLKA로 되면서 음악 프로그램 포맷도 현대화되어갔다. 방송국에 전속경음악단을 두고 무대나 레코드에만 의존하던 종래의 가요 보급이 전파로 실리게 되었다”. 하나 더. “각 가정에 신속한 보도와 더불어 음악과 극 등, 교양과 오락을 더해서 즐거운 방송을 보내고 있는 H.L.K.A 서울 방송”(<대한뉴스>, 제 93호, 1956.10.)이라는 공보영화의 멘트도 함께 인용해 두자. HLKA나 서울방송이 현재의 한국방송과 연관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에는 방송국이 한국방송밖에 없었다는 점을 짚어 두자.

 

방송국 전속경음악단은 그리 생소한 명칭은 아니다. 그런데 ‘방송국 전속가수’는 이제 아주 생소해져 버렸다. 당시는 마치 방송국 직원 모집하듯이 시험을 거쳐 가수를 모집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제도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송민도, 금사향, 원방현, 고대원 등이 초기의 방송국 전속가수로 이름을 올린 인물들로 기록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거친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안다성, 권혜경 등이 다시 이름을 올리고, 그 뒤로는 인기가수의 경력을 이어간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송민도, 안다성, 권혜경의 이름으로 이들의 노래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악극단이나 댄스홀같은 ‘일반무대’에 올라가는 ‘딴따라’와 달리, 격조와 품위가 있는 ‘방송무대’에 어울리는 인물들이다(물론 나는 ‘딴따라’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한국방송밖에 없던 시절 방송가요를 상징하는 곡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1956년에 발표된 ‘청실홍실’일 것이다. 송민도와 안다성이 듀엣으로 노래하고, ‘시온성(詩溫城) 혼성합창단’이 뒤를 거든 이 곡은 그 뒤로 오랫동안 ‘결혼식 축가’로 애송된 곡이다. 이 곡의 기원을 추적하면 역시 지금은 거의 멸종된 문화형식이 발견된다.

이른바 라디오 드라마, 당시 용어로 ‘연속방송극’이다. ‘드라마를 왜 텔레비전에서 하지 않고, 라디오에서 했을까’라고 물어보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젊은 축에 속할 것 같다. 이유는 생략. 한편 ‘청실홍실’을 정윤희, 한진희 주연의 텔레비전드라마로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은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드라마 주제가인 ‘청실 홍실’은 라디오 전파를 통해 히트하는 대중가요의 전범이 되었다. ‘3박자의 리듬과 7음계의 멜로디’는 ‘2박자 리듬과 5음계 멜로디’를 벗어나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드라마 주제가이든 아니든 ‘방송전파를 타는 고품격 가요는 이래야 한다’는 하나의 전범을 만들어 냈다. 당시 발표된 ‘3박자 7음계’의 곡들 가운데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두 곡을 더 나열하면 기억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산장의 여인’, ‘나 하나의 사랑’ 등등.

 

‘청실홍실’의 작사가 조남사는 유호, 한운사와 더불어 방송 드라마 초기의 작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고, 작곡가 손석우는 당시 한국방송의 대중가요 방송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KPK 악극단의 기타 연주자였던 그는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청춘고백’(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꿈 속의 사랑’(중국 곡, 현인 노래) 등에서 사랑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한 가사를 쓰면서, 가요 작가의 경력을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패티 페이지의 ‘눈물의 월츠’의 한국어 작사도 그의 솜씨였다. 송민도를 ‘한국의 패티 페이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역시 송민도가 노래한 ‘나 하나의 사랑’은 ‘청실홍실’ 이전인 1955년께 발표된 곡인데 이때는 당시로서 이례적으로 작사와 작곡을 모두 맡았다. 당시의 방송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지만, 방송을 새로운 무대로 했던 손석우의 활동은 이후 방송이 대중음악에 미칠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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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보·차차차·탱고의 시대 

⑥라틴 가요 열풍

 

탱고, 맘보, 차차차, 삼바 등의 라틴 음악은 한국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낯설기는커녕 이제 지겹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선풍을 일으킨 바 있다는 얘기다. 언제부터일까.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라틴 유행의 자락을 붙잡을 수 있다.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1993)를 비롯해, 발표 2년 뒤 지각 히트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1994) 등이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한다면, 신승훈의 ‘내 방식대로의 사랑’과 김부용의 ‘풍요 속의 빈곤’(1996) 등은 청년층의 추억을 환기시킬 것이다. 이 곡들은 각각 차차차, 탱고, 맘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그 뒤 룸바나 삼바를 앞세운 임현정의 ‘첫사랑’이라든가 백지영의 ‘선택’이 인기를 얻은 1999년 무렵에 이르면 라틴 음악 스타일은 여름 한철을 겨냥한 하나의 히트 옵션이자 아이템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곡들을 ‘라틴 가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있든 없든, 이런 움직임이 최근의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다. 1950년대 중후반,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가요’들이 ‘인기가요’의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를 풍미한 라틴 리듬은 단연 ‘맘보’였다. 두 주 전 <자유부인>을 언급하면서 이야기했던 댄스홀 열풍이 단지 무도장의 현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음반과 방송에까지 파급을 미친 것이다.

 

외래 음악 스타일의 유입과정에서 반드시 수반되는 현상은 ‘나름대로 토착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맘보’가 인기가요가 되기 위해서는 ‘닐리리 맘보’가 되어야 했다. ‘닐리리 맘보’는 1950년대 중반 맘보 열풍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배경으로 전국적으로 히트했다. 이 곡만이었을까. 천만에. ‘아낙네 맘보’, ‘맘보 타령’, ‘아리랑 맘보’, ‘도라지 맘보’, ‘양산도 맘보’, ‘코리아 맘보’, ‘맘보 잠보’, ‘나포리 맘보’ 등 당시 인기가요 가운데 맘보를 곡 제목으로 내세운 곡들에 대한 조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맘보라는 이름이 제목에 없는 경우라도 맘보 리듬을 차용한 곡들에 대한 조사는 말할 것도 없다.

 

1950년대에 유행한 라틴 리듬이 맘보만은 아니었다. 차차차, 탱고 등의 댄스 리듬이 한국 가요로 만들어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누구나 다 알만한 노래들인 ‘노래가락 차차차’, ‘비의 탱고’ 등은 그 중 일부에 불과하다. 당시 작곡가들의 참으로 왕성한 ‘외래문화 수용능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시기를 더 소급할 수도 있겠지만, 현인이 ‘서울야곡’을 발표했던 1940년대 후반에는 라틴 리듬이 매우 이국적이고 희귀한 것이었고 195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일반화’, ‘대중화’되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맘보와 차차차의 ‘고향’을 따져보면 맘보는 ‘아프로쿠반’ 리듬,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리듬이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가 당시에는 그다지 중요했던 것 같지 않다. 쿠바든 아르헨티나든 모두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온 리듬이었다. 참고로, 이 모든 리듬이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유입되기 전에 이미 미국을 한바탕 휩쓸고 갔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리고 맘보 대유행(mambo craze)이 세계적이었다는 점도.

 

1950년대 중반 라틴 열풍을 두고 ‘월드 뮤직이 일찌감치 한국에 유입되었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신대륙의 잡종문화가 한반도 남단에서도 ‘매혹의 리듬’을 선보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라틴 무드는 당분간 더 지속되었다. 또한 당시를 풍미한 악단들에 아코디언, 마림바, 마라카스, 봉고처럼 뒤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악기가 기본 편성처럼 존재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이유도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한국에서 ‘미국 대중 문화의 압도적 영향’이라는 말을 쉽게 할까. 이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선명해지게 된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민족주의의 대두라는 정치적 현실을 거치면서 이 점은 보다 또렷하게 나타난다. 다음에 하자.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200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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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와 뒤섞여 부기우기 부기우기

⑦기타 부기

 

1950년대 중후반 ‘라틴 무도음악’이 서울 등 한국 대도시의 무도장과 음반가를 평정했다는 점은 지난 주에 소개한 바 있다. 그것을 ‘미국 음악이 아닌 라틴 음악’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아메리카를 ‘미국’이 아닌 ‘미주(美洲)’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평도 덧붙인 바 있다. 아직까지도 이 모든 것을 ‘재즈’라는 범주로 뭉뚱그리는 관행이 있었다는 점도 다시 한번 기억해 두자.

 

맘보를 비롯한 라틴 무도음악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범(凡) 미주 음악이 아니라 ‘진짜’ 미국 음악의 영향도 간단히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즉, 맘보, 차차차, 탱고 등 ‘중남미’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리듬 외에 스윙, 부기(부기우기), 트위스트 등 ‘북미’에서 연원한 리듬도 거의 동시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것이다.

 

팝 음악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스윙, 부기우기, 트위스트 등이 ‘로큰롤의 탄생’과 이렇게 저렇게 관련된 음악의 갈래들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갈래(장르)들이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의 후손들’, 간단히 말하면 ‘미국 흑인’, 복잡하게 말하면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음악이라는 사실도 알 것이다. 소통의 편의를 위해 ‘흑인 음악’이라는 말을 잠시 사용하도록 하자.

 

스윙, 부기우기, 트위스트 등도 맘보, 차차차, 탱고와 마찬가지로 ‘대중가요’로 뿌리박기 위해서는 토착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대표적인 곡은 1950년대 말에 발표된 ‘기타 부기’(이재현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다. 부기우기 리듬의 흔적은 기본 박자 하나를 2:1 정도로 세분하는 이른바 ‘셔플 리듬’으로 드러난다. 기타 줄을 음표 하나 하나 끊어치는 전주나 “부기우기 부기우기 부기우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라고 외치는 후렴구 등에서 미국 흑인음악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물론 기타를 앞세우기는 했어도 아코디언과 우드 베이스가 등장하는 반주는 ‘부기우기 리듬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라는 후대의 통념과 괴리되고 있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기우기’가 무엇인지 알고 후렴구를 따라 불렀는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 곡이 히트를 기록한 1957년이면 태평양 건너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지 이미 1년 정도가 지난 뒤이다. 과장인지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20세기 후반 최대의 사건’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일이고, 로큰롤의 ‘댄스 열풍(dance craze)’이 세계 각지의 10대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들썩이게 했을 바로 그때다.

 

물론 ‘기타 부기’는 로큰롤은 물론 부기우기와도 거리가 있다. ‘기타 부기’가 한국에서 히트할 무렵인 1957년 로큰롤 스타 가운데 한 명인 척 베리(Chuck Berry)의 그 유명한 ‘스위트 리틀 식스틴(Sweet Little Sixteen)’의 싱글 뒷 면의 곡이 ‘기타 부기(Guitar Boogie)’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해서, ‘부기우기가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히트했다’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기타 부기’같은 스타일의 곡은 미국 대중음악보다는 일본 대중음악의 유행의 흔적이 더 강하다.

 

어쨌거나 일본 대중음악사의 기본만 안다고 해도, 작곡가 하토리 료이치(服部良一)가 만든 ‘도쿄 부기우기’와 ‘샤미센 부기우기’ 등이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일본 열도를 후끈 달아 오르게 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부기우기의 히트는 한국 대중음악의 많은 유행이 그러했듯 ‘일본의 매개’를 확인하는 것으로 족한 것일까. 하지만 모방이니 (재)창조니 하는 논의는 소모적일 때가 많다. 창조성이 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음악이 유행한다면, 그 하나의 이유는 수용자들이 이미 그걸 받아들일 태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부기우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라는 후렴구를 기꺼이 따라불렀던 수용자의 감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음반이나 라디오같은 정상적 매체도 어느 정도는 대중화되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미국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직접적인 전달 수단도 있었다. 통상 ‘미8군 무대’라고 부르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일반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다음에는 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 보자.

 

신현준/음악평론가 (200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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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클럽서 ‘훈련받은’ 대중음악

⑧미8군 쇼 무대

 

1950년대 이 땅에는 대중음악 ‘별세계’가 존재했다. 다름 아니라, 흔히 ‘미8군 무대’라고 부르는 세계다. 1960~70년대에 별처럼 빛나는 활약을 보인 대중음악인들을 얘기할 때 전설처럼 언급되는 바로 그 무대 말이다. 미8군 무대란 말이 금시초문인 이들에겐 ‘주한미군 및 군무원을 대상으로 한국 연예인들이 벌인 쇼 무대’라는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미8군 무대의 효시는 1945년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이 주둔한 곳에 째즈 밴드가 동원되어 원시적인 외화획득의 효시가 되었다”는 평론가 황문평의 회고라든지, “해방되던 해 반도호텔에서 지까따비(주: 일본 버선 모양의 노동자용 작업화)에 모닝코트를 입고 미 항공단 환영 연주를 했던 김호길은 한국전쟁 후에는 대구에 머물면서 미군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동촌 비행장에 나가 연주를 했다”(<동아일보>, 1973년 4월 5일치)는 기사는 참고할 만하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는 미군 무대가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했음도 엿볼 수 있다.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 중반 이후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휴전 이후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게 된 일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에 있던 미8군 사령부가 1955년 서울로 이전한 사실은 시사적이다. 주한미군의 규모가 커지자 이들에 대한 공연 수요도 늘어났다. 직접 미군위문협회(USO) 공연단이 방문해 위문공연을 벌이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공연단에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등 희대의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일상적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일상적이고 체계적인 미군 위문공연을 위해선 한국 연예인이 편재(遍在)하는 방법 외엔 없었다.

 

1957년경 미8군 쇼 무대에 한국 연예인을 송출하는 용역업체들이 앞다투어 등장했다. 이전 시기에는 연주자 개인이나 팀이 개별적으로 클럽과 교섭하여 쇼를 벌였다면, 이제 공급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때 생긴 화양, 유니버설, 삼진, 공영 등의 용역업체들은 산하에 쇼 단체들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는 미군 당국이 쇼에 대한 심사(일명 ‘오디션’)에 엄격했기 때문이다. 각 쇼단은 보통 6개월마다,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음악전문가들이 심사하는 엄준한 오디션 절차를 거쳐 더블 A, 싱글 A 하는 식으로 등급이 매겨졌는데, 기득권이나 명성은 전혀 통하지 않아 탈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디션에서 좋은 등급을 받으면 자축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하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8군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왕도는 없었다. 최신 레퍼토리를 입수해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실력과 흥행성을 배가하는 길이 유일했다. 악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미군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고 최신 음반을 입수해 일일이 채보하면서 소속 용역회사 창고에서 지지리 연습했다는 얘기는 미8군 무대 출신 음악인들의 공통된 후일담이다.

 

당시 실제 미8군 쇼는 어떤 것이었을까. 빅 밴드 편성의 악단은 재즈를 위주로 컨트리, 리듬앤블루스, 로큰롤 등 다기한 스타일을 연주했다. 쇼는 음악이 중심이긴 하지만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1시간 남짓의 버라이어티 쇼에 가까웠다. 그래서 쇼 단체는 악단 외에, 가수, 무용수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멀티 플레이어도 적지 않았다. 베니 쇼, 에이 원 쇼,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 토미 아리오 쇼, 웨스턴 주빌리 쇼 등은 당대 미군 클럽들을 누비던 대표적인 쇼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무대가 한창 정점에 이르렀을 때 미군 클럽은 264곳에 이르렀고 미군 쇼를 통해 한국 연예인들이 수익은 연간 120만 달러에 육박했다는 증언이 있다. 정확한 수치인지는 ‘복기’할 필요가 있지만, 당시 경제나 무역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질문. 미8군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 씬(scene)에 포함할 수 있을까. 미군 클럽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한국인이 아니라 미군 청중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의 주체가 한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포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난 시절, 구미(歐美)화된 음악을 지향하던 음악인들에게 미8군 무대란 별세계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그렇듯, 20세기 후반 한국 대중음악 역시 한편으로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이식적으로, 창작보다는 모방의 과정을 통해 첫 발걸음을 뗀 셈이다.

 

미8군 쇼 무대에서 단련한 음악인들은 1960년대부터 한국인 대중을 상대로 한 이른바 ‘일반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 대중음악이 미국화의 가속 페달을 힘껏 밟기 시작했다는 점은 통설이다. 그 과정에서 ‘젊은 피’로 수혈된 미8군 출신 음악인을 일일이 열거하면 이 지면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니 턱없는 일이지만 이봉조, 김대환, 김희갑, 신중현, 김홍탁 등의 연주자(및 작편곡가), 한명숙, 최희준, 현미, 패티 김, 윤복희, 펄 시스터즈 등의 가수 이름을 기억하는 선에서 갈음하고, 1960년대의 문턱을 넘어보자, 폴짝.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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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군인과 한국 소녀의 로맨스?

⑨전쟁을 매개로 한 한류의 전사?

 

1950년대까지를 마무리지을 시점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최근에 방콕에 갔다가 발굴(?)한 희한한 음반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타이의 ‘흘러간 가요’를 재발매한 시디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에서 발견한 음반인데, 타이 군복을 입은 군인과 일본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포옹을 하는 표지 그림이 눈길을 잡았다.

 

나중에 타이의 지인에게 물어 보니 음반 제목은 ‘Ari-dang’이며, ‘original Korean and Japanese music’이라는 뜻의 부제와 ‘Sad Voices from Korea'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두 번째 트랙에서 난데없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흘러나왔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로 알려진 그 노래다. 1절은 한국어 가사 그대로였고, 2절과 3절은 타이어로 번안한 가사였다. 다른 트랙들은 한국 가요도 있었고, 일본 가요고쿠(歌謠曲)도 있었다. 한국 가요가 타이까지 전파된 것이 놀라왔지만, 타이인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구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했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의 작사가 손로원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이국적 분위기의 작사를 도맡다시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샌프란시스코’,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페르샤 왕자’, ‘사하라 사막’, ‘런던 소야곡’, ‘바다비아의 밤’, ‘밤 깊은 차이나타운’, ‘이별의 월남선’, ‘카이로 시장’, ‘내가 울던 빠리’, ‘모로코 사랑’, ‘베니스의 창문’, ‘워싱턴 블루스’, ‘정거장 에키타스리’, ‘차이나 워리 꾸냥’ 등등(작곡자와 가수는 생략한다).

 

이 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국적불명’이라는 우호적이지 않은 평이 따라 다녔다. 그런데 달리 보면 북새통 같았던 시대에 저렇게 과감한 상상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이를 그저 작사가 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해석하면 그만일까. 그보다는 한국전쟁기 ‘다국적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이국(異國)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한국인의 상상에 들어온 징후라고 평하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저 노래들이 그저 소수만 듣고 흘러간 것이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면 말이다. 1940년대 중반까지 ‘대동아전쟁’을 거치며 한국인들이 아시아 각지에 흩어지면서 이국의 문화를 경험했다면,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온 이국의 군인들을 통해 외국의 다양한 문화들이 수입된 셈이다.

 

역의 흐름도 있었다. 타이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을 통해 한국의 노래들이 다수 전파되었고, 특히 지금도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아리랑’을 대부분 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전쟁에 참전한 타이 군인이 한국에서 만난 한 소녀와의 슬픈 로맨스에 대한 일화도 타이의 일반 민중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소의 왜곡이 있지만 저 이상한 음반 표지에 대한 설명은 대충 될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의 ‘한류(!)’는 전쟁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작금의 한류는 무엇을 매개로 한 것일까. 자본? 기술? 이수만이라면 ‘문화 컨텐츠’라고 답하겠지만 ‘글쎄올시다’이고, 대답은 나중에 하자. 궁금하면 비가 타이의 여가수 타나파(Thanapa)와 함께 부른 “I Do”를 들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전쟁은 이런 아시아 나라들 사이의 역내 문화교류마저 당분간 소강상태에 처하게 했다. ‘냉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이다. 냉전의 효과는 단지 민족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한미동맹’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또 하나의 부수효과를 가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960년대 이후 이국적 상상이 점차 소멸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인은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국가’를 부르면서 ‘국민의례’를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보’를 자랑스러워 하고, ‘국가대표’ 팀을 응원하고, ‘국경일’의 행사에 동원되어야 하고…. 한 마디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의 연재를 통해 당시의 음악문화가 ‘한많은 애가(哀歌)’ 일색이 아니었고, 다양하고 풍부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것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과 격동’을 겪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놀 때는 놀아야’ 하는 법이고, 노는 것 가운데 음악처럼 중요한 것은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건 1960년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단,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방송에서는 민간방송이 속속 설립되고 텔레비전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유성기는 ‘전축’으로, SP는 LP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5·16 혁명’에 이은 ‘조국 근대화’가 추진되던 분주하고 어수선한 시기의 일들이다. 그리고 어느 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곡이 흘러 나왔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는 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주 감각적인 곡이었다. 그 새로운 시대를 문화적으로 누가 소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화적 세력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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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스타일’ 가요의 등장

(10)‘노오란 샤쓰 사나이’, 1960년대를 열다

 

한국 대중음악의 ‘진정한 1990년대’는 통상 1992년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언급하는 것은 지겹지만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볼 1960년대의 경우는 어떨까. 1960년대 역시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히트한 1961년이 기점이 된다는 얘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90년대에 ‘난 알아요’가 그랬던 것처럼,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단지 상업적 ‘대박’을 터뜨린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시대의 개막을 표상하는 팡파르였던 것이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너무나도 새로운 곡이었다. ‘너무나도’라는 말을 꼭 붙여야 한다. 새로운 만큼, 사람들이 보인 처음 반응은 무심하거나 냉담했다. 반주를 주도하는 경쾌한 힐빌리(컨트리)풍의 바이올린 연주는 ‘방정맞고 해괴한 반주’란 소리를 들었다. 또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하던 한명숙의 허스키한 보컬은 ‘은쟁반에 옥 구르는’ 한국 여가수의 전통적 보컬의 질감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목이 쉰 듯한 괴상한 목소리’란 반응도 있었다. 가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아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란 노랫말은 당시로서는 아주 직설적이고 당돌한 것이었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의 새로움은 곡 자체에 머물지 않았다. 이 곡이 실린 10인치 LP <손석우 멜로듸>의 음반 커버는 관례와 달리 원색적인 색채의 가수 사진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작곡가인 중년 남성의 모습을 담백한 색채로 스케치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도매상의 핀잔과 함께 반품되는 일도 있었다는 일화가 당시 시각적 반응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어느 순간 ‘그렇기 때문에 좋다’는 열광적 호응의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점이 참 묘하다. 1961년 초 발표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다 여러 달이 지난 그해 하반기에 히트했는데, 그 한복판에 한국 사회를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란 바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였다. 상큼하고 분방한 이 곡이 ‘4.19 이후’가 아니라 ‘5.16 이후’에 히트한 사실, 그 과정에서 새 시대의 기풍을 불어넣으려는 정권과 방송의 이해관계가 이 곡의 히트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얄궂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해방 후 최대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프랑스 가수 이베트 지로, 일본 가수 하마무라 미치코 등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히트하며 한류의 선구적 사례가 되었다. 음반 <손석우 멜로듸>가 찍어내기 무섭게 팔려나갔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음반 커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작곡가 손석우(1920년 생)다. 그의 경력은 5주 전에 잠시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할 테니 궁금한 분들은 인터넷을 뒤져보길 바란다.

 

단, 1950년대 말 당시 분신처럼 신뢰하던 손시향의 목소리로 발표한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은 언급해야겠다. 예사로운 소재를 범상치 않게 형상화한 가사와 뛰어난 악곡으로 갈무리한 독특한 곡들이었다.

 

물론 손석우가 가요계의 거목이 된 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계기였다. 최희준(‘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김상희(‘처음 데이트’), 블루 벨스(‘열두 냥 짜리 인생’)를 데뷔시켜 인기 가수로 견인한 것도 손석우였다. 이춘희, 김성옥, 차도균, 송창식 등은 손석우의 손을 거쳐 솔로 데뷔한 가수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는 또한 오늘날의 인디 레이블 격인 뷔너스 레코드를 설립하여 음반의 자주제작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뷔너스 레코드의 첫 음반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담긴 <손석우 멜로듸>였고, 이 음반이 1960년대가 LP 시대가 될 것임을 예시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손석우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파란을 일으킨 이후, 엄토미, 이봉조, 송민영, 김호길 등 악단장 겸 작곡가와 현미, 패티 김, 윤복희 등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여 새로운 물결을 이루었다. 1960년대 ‘팝 스타일의 가요’의 시원에 손석우와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있는 것이다. 손석우를 현대적인 국산 대중음악의 작가, 즉 한국 팝 최초의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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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흥행 성공 = 가요 성공

⑪‘영화주제가’와 ‘가요’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이르는 시기, 전쟁의 상흔, 정치에 대한 불신,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달래준 것은 대중음악만이 아니었다. 은막의 세계는 당시 한국인에게 하나의 새로운 출구였다. 핫이슈를 몰고온 <자유부인>에서는 바람난 유부녀와, <마부>에서는 따스한 아버지와, <오발탄>에서는 전후의 비참한 현실과, <맨발의 청춘>에서는 비극적인 청춘군상과 조우하며 울고 웃었다. 말 그대로 ‘시네마 천국’이었다.

 

이 시기는 속칭 ‘고무신짝’의 시대였다. 주부 혹은 중년여성들은 ‘고무신짝’ 운운되던 비하조의 시각에 일침을 가하듯 문화 향유의 주도자로 군림했다. 영화의 절반 이상, 심지어 8할에 육박했던 ‘통속’(이라 불린) 멜로드라마의 수치가 단적인 증거다. 1950년대 말부터 ‘라디오 극장’이 ‘영화 극장’으로 옮겨가는 작품이 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곧 이 ‘고무신’ 관객들이 이주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영화음악 역시 라디오 연속극으로부터 왔다. 여기에 사용되거나 작곡된 곡은 (동일가수든 아니든) 영화에서도 ‘주제가’로 거듭났다. 지난주에 소개한 ‘한국 팝 최초의 작가’ 손석우는 1950년대 말,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의 효시인 ‘청실홍실’(송민도, 안다성 노래), 히트곡 영화화의 시원격인 <나 혼자만이>(곡명은 ‘나 하나의 사랑’)로 영화음악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꿈은 사라지고>(1959)의 두 주제가가 그의 작품으로, 기왕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던 ‘꿈은 사라지고’는 최무룡이,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된 ‘나는 가야지’는 문정숙이 노래했다. 이외에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1959), <이별의 종착역>(1960)의 노래는 그와 콤비를 이룬 손시향의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사실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곧 ‘영화주제가’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영화 홍보를 위해, 혹은 음반 판매 전략으로 영화주제가에 ‘가요’를 사용하는 것이 이때만큼 두드러진 시기도 없을 것이다. 한 해에 100편 이상 찍어대던, 그래서 흥행 소재를 희구하던 영화는 대중음악으로부터 힌트를 얻었고, 대중음악 음반은 영화로부터 이미지와 판매고를 보장받는 식으로, 이 둘은 동일한 제목아래 쌍방간 흥행보증수표를 발행했다.

 

당시 발매된 대중음악 음반들에는 ‘영화주제가’라는 부제의 곡이 필수조항처럼 한 두 곡 이상 실렸다. ‘히트곡 작곡가=영화주제가 작곡가’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 ‘동백아가씨’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명의 이미자를 일약 스타반열에 올려놓은 일종의 ‘사건’이었는데 이 곡은 애초부터 영화주제가로 작곡되었다. 이 곡을 작곡한 백영호도 수많은 영화주제가가 되는 노래들을 작곡했다.

 

영화주제가의 특급대우는 가수들이 은막 속으로 외유하는 일로 이어졌고, 역으로 영화배우가 노래를 ‘취입’하는 일(최무룡, 문정숙 등)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나애심의 경우는 영화배우와 가수로 모두 성공한 경우이다. 한편으로 이봉조 같은 밴드 마스터 혹은 연주자 출신의 작편곡가가 ‘경음악’으로 영화음악을 만드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당시의 음악과 연주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가수들이나 ‘경음악’ 악단이 댄스홀에서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영화들이 그 증빙사료가 될 것이다.

 

영화의 경향에 따라 음악의 경향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멜로드라마에는 느리고 애절한 노래들이 많았다. 1960년대 중반 텔레비전 안방극장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하던 ‘고무신’ 여성들 대신, ‘하이힐’ 세대들을 포섭하기 위한 ‘청춘영화’가 극장에 걸렸는데, 이런 영화에는 트위스트, 혹은 당시에 팝 음악까지 포괄하는 명칭이었던 ‘째즈’ 음악이 포괄되었다.

 

대표적인 청춘물 <맨발의 청춘>(1964)에서는 이봉조가 영화음악을 맡고 최희준의 동명의 노래를 불렀는데 2회 청룡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성한 다작이 고품질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영화음악의 사정은 영화계와 마찬가지였다. ‘최소비용 최대효과’를 노리는 ‘속전속결’ 영화제작단계에서 영화음악은 특히나 특혜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영화음악을 위해 ‘레코드판’만 이용하던 시대를 거쳐 ‘창작곡’의 시대로 이행되고 있었지만, 그 창작곡이란, 다소 과장해 말하면 ‘가요곡’을 작곡하는 것에 한정되었다. 게다가 영화 내에서 음악은 과잉적이었는데, 이는 영화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발생한 표현력의 제약을 음악으로 커버하려는 목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주제가의 선율만을 단조롭게 변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심지어 기왕에 사용된 음악의 재활용(일명 쓰까이마와시)도 암암리에 행해졌다는 후문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비단 과거지사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차는 있지만 현재도 영화음악은 영화의 주변 영역이므로.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옥같은 명작은 탄생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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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는 중창단 전성시대

⑫보컬 그룹: 건전하고 화목한 자매들과 형제들

 

“어빙 벌린(Irving Berlin)은 “쇼 비즈니스 만한 비즈니스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자매의 이야기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이것은 남한의 G.I. 캠프에서 시작된 쇼 비즈니스계의 전설적 이야기입니다. 남한의 유명 음악인이었던 아버지는 전쟁 중에 죽었고, 피아노조차 구경하기 어렵던 여건에서 미망인은 딸들에게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남한에 있는 부대에서 우리의 텔레비전 쇼를 시청한 G.I.들은 이들 자매가 언젠가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수백 만 명의 시청자들을 상대로 노래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쇼 비즈니스 만한 비즈니스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한국 출신의 여성 중창단의 데뷔 음반에 미국의 유명 방송인이 적은 발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발문을 쓴 사람은 팝 음악 팬이라면 모를 리 없는 에드 설리반(Ed Sullivan). 그가 진행을 맡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에드 설리반 쇼’는 1950~6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팝 음악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예컨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해 ‘음란하게’ 엉덩이를 뒤흔들며 노래한 것이나 1964년 비틀스가 출연해 소녀들의 광적인 반응 속에 연주한 것은 ‘에드 설리반 쇼’가 남긴 대표적인 장면일 뿐 아니라 20세기 로큰롤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앞서 에드 설리반이 소개한 ‘자매들’은 누구일까. 1930-40년대 대중음악계의 귀재 김해송과 명가수 이난영의 딸들인 김숙자, 김애자, 그리고 이난영의 오빠이자 작곡가인 이봉룡의 딸 이민자로 구성된 3인조 김 시스터스이다. 1950년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 미국인 흥행사의 눈에 띄어 1959년 도미한 김 시스터스는 ‘에드 설리반 쇼’에 수십 차례 출연하며 많은 미국인들의 눈과 귀를 매혹시키며 ‘그후로도 오랫동안’ 미국의 쇼 무대에서 활약했다.

 

 

당시 활약상은 외국 잡지와 외신을 통해 전해졌고 김 시스터스는 ‘국위를 선양한’ 가수로 모국에서도 유명세를 누렸다. 비록 몇 차례의 내한 공연과 음반 발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의 활동은 거의 없었던 셈이지만 ‘한국 최초의 보컬 그룹’의 의미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앤드루 시스터스, 맥과이어 시스터스 등을 모델로 한 전형적인 여성 중창단이었으나, 멤버 모두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등 단순히 ‘노래하는 중창단’에 머물지는 않았다.

 

김 시스터스 이후 ‘슬픈 영화’의 정 시스터스, ‘검은 상처의 블루스’의 김치 캣츠, ‘여군 미스 리’의 이 시스터스 등 여성 보컬 그룹들이 등장해 인기를 누렸다. 또 에임스 브라더스, 브라더스 포 등에 영향 받은 남성 보컬 그룹들도 등장해 큰 인기를 얻었다. ‘즐거운 잔칫날’의 블루 벨스, ‘빨간 마후라’의 쟈니 브라더스, ‘꽃집의 아가씨’, ‘육군 김일병’의 봉봉 사중창단, ‘동물농장’의 아리랑 브라더스 등이 그들이다.

 

 

김 시스터스가 여성 보컬 그룹의 탄생을 알렸다면, 블루 벨스는 남성 보컬 그룹의 시금석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현양, 서양훈, 김천악, 박일호로 구성된 블루 벨스의 멤버들이 본래부터 보컬 그룹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자 솔로 가수로 성공을 꿈꾸며 작곡가 손석우를 찾아온 그들은 손석우의 조언과 도움으로 최초의 남성 보컬 그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보컬 그룹은 1960년대 초중반을 중창단의 전성시대로 수 놓았다. 가수라면 당연히 솔로 가수만을 접했던 대중들은 풍성한 화음을 자랑하는 보컬 그룹의 출현에 처음에는 낯설어 했지만 곧 뜨겁게 반응했다.

 

보컬 그룹의 음악은 ‘즐거운 잔칫날’ 같은 건전가요 스타일의 노래, ‘빨간 마후라’ 같은 대중가요 풍의 군가, ‘동물농장’ 같은 코믹한 노래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음악이 1960년대 당시 우후죽순 생겨난 민영방송의 ‘가족 지향’의 버라이어티 쇼와 베트남전 참전이란 사회 분위기에서 ‘그림이 되고 환영받았음’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1960년대에 활약한 대부분의 보컬 그룹은 사실 노래만 하는 중창단에 가까웠다. ‘송라이팅은 직업적 송라이터, 연주는 직업적 연주인, 노래는 가수’라는 전통적 분업체계에는 변동이 없었던 셈이다. 이에 균열을 가하는 다른 의미의 ‘보컬 그룹’이 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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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무대’ 가 원하는 음악

⑬극장 쇼의 스타들과 ‘슬로우 록’ 히트가요들

 

소시적 기타 학원에서 기타를 배워본 사람은 ‘슬로우 록’이라는 용어에 익숙할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양희은), ‘사랑해’(라나에로스포), ‘당신도 울고 있네요’(김종찬), ‘친구여’(조용필) 등 1970~80년대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슬로우 록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악보로 설명한다면, 한 박자를 3등분해 네 번 반복되는 패턴, 악보로 설명하면 셋잇단음표 네 개가 한 마디를 구성하는 패턴이고, 1박보다는 2박에, 3박보다는 4박에, 즉 백비트에 강세를 두는 센스도 발휘하면 더 좋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주옥 같은 히트곡들도 바로 이 12비트의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리듬 패턴의 기원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기타 교본을 뒤져 보면 악보와 더불어 이런 설명까지 등장하고 있다. “본래는 록카 발라드(Rock'a Ballad)라는 리듬으로 최근의 히트곡에 이 리듬이 급증하고 있다. 천천히 흐르는 듯한 감정 표현에 매우 적합한 리듬 형태이다”. 옳거니 ‘록’과 무언가 관련이 있기는 하되 ‘천천히 흐르는’ 감정을 담은 ‘발라드’에 어울리는 리듬이렸다. 템포가 더 느리면 ‘부루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 용어가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기로 하자. “한국에서는 모든 게 ‘짝퉁’이고 ‘야메’”라고 냉소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위에서 ‘최근의 히트곡’이라고 말한 곡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1960년대에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유호 작사·이봉조 작곡),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번’(김진경 작사·이재현 작곡), 정원의 ‘허무한 마음’(전우 작사·오민우 작곡),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백영진 작사·서영은 작곡), 황규현의 ’애원’(박진하 작사·작곡)을 비롯해 그 외에도 더 많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 좁혀 보자. 아마도 이 곡을 들으면 선술집에서 젓가락을 두들기면서 목이 터져라 열창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현미와 황규현을 제외한다면, 위 가수들의 경력은 미 8군 쇼 무대에서 경력을 쌓은 뒤 방송 무대로 진출하는 ‘팝 싱거(당시 표기법이다)’의 표준적인 경력과는 조금 다르다. 남진은 ‘트로트 가수’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므로 일단 오늘 논의에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물론 당시의 연예인이라면 미 8군 무대와 연관된 클럽에 얼굴을 몇 번 들이미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 무대를 본다면 미8군 무대나 방송무대 같은 특별 무대가 아니라 ‘일반 무대’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일반 무대란 ’극장 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극장 쇼를 ‘뽕짝과 신파극의 버라이어티 쇼’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1960년대 중반이 되면 극장 쇼에도 모종의 변화가 발생하고, 이런 변화는 ‘변두리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노벨극장(신설동), 신영극장(신촌), 봉래극장(마포), 화양극장(서대문) 등이 ‘변두리 극장’들인데, 극장 쇼의 분위기는 “쇼가 시작되면서 트위스트 노래가 나오면 앞에 앉아 있던 10대들의 몸은 가만있지 않는다. 일어나서 몸을 비비 틀고 심하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같이 합세하는 법석을 떤다”는 당시 한 잡지의 기사(<명랑>, 1968/4.)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기사가 <10대악()을 자극하는 악류()>라는 살벌한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크게 달랐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슬로우 록’이 무엇인지 그 실체는 명확해진다. 정원, 쟈니 리 같은 극장 쇼 스타들의 주된 레퍼토리는 트위스트나 로큰롤 같은 본격 댄스 음악이었지만, 깁의 대중적 히트곡은 ‘슬로우 록’이나 ‘로카 발라드’였던 셈이고, 이 곡들이 깁의 대표곡으로 ‘가요반세기’ 등의 책자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헤비 메탈’이나 ‘얼터너티브 록’을 하고 싶어도 인기가수가 되어 히트곡을 내려면 ‘록 발라드’를 불러야 하는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정원과 쟈니 리는 노래도 노래지만 <청춘대학>이나 <폭발 1초전> 같은 ‘B급’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기도 했다. 태동기의 국산 B급 문화에 대한 논의가 매우 적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아, 그런데 ‘트위스트 가요’도 있지 않냐고? 트위스트가 가요가 되는 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알아 보자.

 

» 슬로우 록’을 빌어 ‘뜨거운 안녕’ 등 인기곡을 내놓은 쟈니 리의 한 앨범 재킷.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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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청년들 ‘꽈배기 춤’ 에 미쳤다

⑭트위스트: 로큰롤 댄스 열풍

 

» 신중현이 ‘히키 신’이란 미8군 부대 예명으로 발표한 앨범.
20세기 로큰롤의 ‘결정적 장면’을 말할 때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와 1964년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장면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는 사실은 2주 전에 얘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에 로큰롤 댄스 열풍을 낳은 ‘1956년 엘비스’와 ‘1964년 비틀즈’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트위스트가 있었다.

 

트위스트의 서막은 처비 체커가 열었다. 1960년과 이듬해에 두 번이나 차트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운 ‘더 트위스트’, 역시 1961년 탑 10 히트곡이 된 ‘레츠 트위스트 어게인’은 단지 처비 체커를 스타로 만드는 데 머물지 않았다. 리듬앤블루스의 12마디 형식을 변용한 트위스트 음악의 빠른 리듬에 맞춰 청년들이 댄스플로어에서 춤추며 광란의 시간을 보내는 현상을 세계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땠을까?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처비 체커의 곡들과 벤처스의 ‘상하이드 트위스트’, ‘기타 트위스트’ 등이 크게 유행했다.

 

또 이런 음악에 맞춰 일명 ‘꽈배기 춤’이라 불리기도 한 ‘바닥에 발 비비며 몸을 뒤틀고 흔드는 트위스트 춤’을 추는 것은 청년들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도 ‘교실 밖’ 필수 코스였다. 당시 청년들의 주요 문화공간이었던 음악 감상실에서는 정기적으로 트위스트 춤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요즘 나이트 클럽에서 댄스 경연대회를 여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 감상’의 공간에서 춤 경연대회가 열린 이유는 지금처럼 마땅히 춤추며 즐길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트위스트 김이란 예명을 가진 가수 겸 배우가 등장한 사실은 당시 트위스트가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예다.

 

1950년대 후반 맘보가 그랬던 것처럼, 트위스트는 1960년대 ‘가요계’의 트렌드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 시스터즈의 ‘울릉도 트위스트’,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상 황우루 작사·작곡)은 ‘트위스트 가요’로 큰 인기를 누렸다. 맘보가 성인 사교댄스의 사운드트랙이었던 반면 트위스트는 청년 댄스 사운드트랙이었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청춘은 트위스트’, ‘아리랑 트위스트’, ‘둘이서 트위스트’ 등 제목에 트위스트란 용어를 쓴 노래들이 우후죽순 등장한 점은 맘보 유행과 공통적이다.

 

한국에서 트위스트는 비단 1960년대 초·중반에만 유행한 것은 아니다. 물론 트렌드는 1960년대 말 솔(soul)로, 1970년대 고고(gogo)로 옮겨갔지만, 트위스트는 적어도 1960년대 내내 그리고 부분적으로 1970년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19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고고 세대’에게 물어보면 야전()을 들고 야외에서 춤추던 레퍼토리 중 트위스트가 빠지지 않았다는 추억 어린 후일담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1958년 생 트로트 가수의 한 노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트로트 사대천왕’ 중 하나로 롱런하고 있는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이수진 작사, 설운도 작곡, 1997) 말이다. “학창시절에 함께 추었던 잊지 못할 상하이 트위스트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 속의 사랑의 트위스트”로 시작되는 그 곡은 1960년대 이후에도 트위스트가 학창시절의 사운드트랙으로 인상 깊게 남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랑의 트위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터보의 ‘트위스트 킹’과 디제이디오시의 ‘울릉도 트위스트’ 커버 버전이 발표된 현상을 트위스트 리바이벌이라고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1997년께 트위스트를 다시 떠올리거나 새롭게 귀동냥할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60년대 트위스트 붐에서 가요화뿐 아니라 연주의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트위스트를 처음 수용한 미8군 쇼 무대와 그곳 출신 음악인들의 연주 말이다. 1960년에 접어들면서 10인조 이상의 빅 밴드보다는 4~7인조 가량의 소편성 악단이 미8군 무대의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편성의 변화는 밴드에서 단지 하나의 악기에 불과하던 기타를 상대적으로 비중 있는 악기로 부각시켰다. 신중현이 ‘히키 신’이란 미8군 무대의 예명으로 발표한 음반에 실린 ‘히키 신 키타 투위스트’란 연주곡은 단지 트위스트의 유행뿐 아니라 이후 한국의 록 음악사와 관련해서도 시사적인 것이었다. 전기 기타의 시대, 이를 앞세운 한국의 로큰롤을 예시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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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대세 뚫고 싹튼 ‘변혁의 씨’

⑮1967년 한국, 청년문화의 어떤 전조(前兆)

 

» 1967년 ‘유럽풍’이라는 찬사를 받은 노래 ‘안개’로 등장한 정훈희. 사진은 1970년 11월 서울시민회관예서 열린 ‘팝스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당시 그의 모습이다.
팝 음악의 역사’같은 책을 보면 1967년을 ‘사랑의 여름’이라고 부른다. 이 해에 발표된 ‘록 음악의 명반’을 나열하면 이번 지면은 다 끝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그때의 알딸딸한 분위기는 아직 ‘해외토픽’일 뿐이었을 게다. 몇 년 뒤 청평과 남이섬에서 ‘페스티벌’이 열리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만 아껴 두자.
 

물론 당시 모든 첨단적인 것의 집결지였던 서울 명동에서는 이런 ‘자유의 바람’의 냄새를 맡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기는 했다. 그게 진정한 자유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제껴 두어야 할 정도로 이 냄새의 중독성은 매우 강했던 모양이다. 음악감상실이나 생음악살롱(주의! 룸 살롱과는 무관)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는 최신 유행을 따라잡으려는 언니, 오빠들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증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지촌 GI 문화’로 유입된 아메리카 문화는 이제 한국의 중간계급 청년과 만나서 ‘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 가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1964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한국 대중가요는 이미자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967년 봄의 한 주간지 기사를 뒤져보면 “이미자는 국산 취입 디스크 판매율의 6할을 차지해왔다는 달러 박스. 디스크 상()에서 팔리는 10개 중 6개는 이미자의 것이었다는 통계다”라는 기사가 나오니 이미자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문주란, 은방울 자매, 남진, 나훈아, 배호 등 신인까지 등장하면서 ‘이 장르의 음악’은 한국 대중가요의 전형처럼 굳어져 갔다. ‘트로트’라고 불러도, ‘뽕짝’이라고 불러도 올바른 용어법은 아닐 테지만 좌우지간 이 음악은 널리 널리 오래 오래 장수했다.

 

그렇지만 한반도 남쪽의 보수적인 방송가라고 해도 ‘1960년대’라는 국제적 청년문화의 시대를 완전히 비켜갈 수는 없었는데, 그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그 해 여름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른바 ‘김포공항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미국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윤복희가 김포공항에 내릴 때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내린 사건이다(참고로 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다). 미니스커트는 연예인의 의상에 그치지 않고 멋쟁이 아가씨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그 뒤 여성들의 치맛자락은 최신 유행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에서는 지워졌지만 ‘1967년 무렵’은 가요계에서도 신풍()과 신인()의 등장을 회고해 볼 수 있다.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패티 김, 김상희, 이금희, 현미, 최양숙 등 여가수들,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등 남가수들은 ‘클래식풍’의 품격 있는 가요를 남겼다. 이 사람들의 히트곡에 대해 언급하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박재란의 ‘순애’,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티 김의 ‘초우’ 등이 1960년대 중후반 방송가요계에서 환대받은 음악의 분위기를 전해줄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가수도 가수지만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 김호길, 김인배, 김강섭 등 ‘악단장과 연주자와 작곡가’를 겸했던 스타 음악인들의 모습을 함께 불러온다.

 

이런 곡들에 이르게 되면 1960년대 초 손석우 등이 시도했지만 대중성을 얻지는 못했던 7음계의 멜로디가 대중의 기호와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는 반음계를 시도한 곡도 히트곡의 반열에 오른 일도 있는데 1967년 ‘혜성같은 신인’, ‘여고생 가수’로 정상에 등극한 정훈희가 부른 ‘안개’(이봉조 작곡)가 대표적이다. 따지고 보면 1967년 가요계에는 신인 가수들이 정상 부근까지 올라 일종의 세대교체를 이룬 해이기도 했다.

 

한편 정훈희와 더불어 이 해 신인으로 가요계에 이름을 선명히 남긴 사람으로는 차중락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 ‘에니싱 댓츠 파트 오브 미’의 번안곡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다가 1968년 11월 정말 낙엽 따라 가 버린 그의 짧은 생애는 김정호,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요절 가수’의 신호탄을 보는 것만 같다.

 

정훈희와 차중락으로 대표되는 1967년의 신인가수들은 청년문화의 기수였을까. 그렇지만 이들이 표상한 청년문화는 아직 자기 발로 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들이 주 무대로 활동했던 방송무대와 일반무대(극장 쇼)에서는 각기 보수적인 관행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점에서 본격적 파란이 발생한 시점은 1969년께 언젠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을 말할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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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연주 몸섞어 ‘록밴드’ 를 낳다

(16) 한국의 비틀스: 애드 훠와 키 보이스

 

한국 청년문화의 통념을 형성한 오랜 수사법은 1970년대라는 시기와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라는 대표적 기호를 언급하면서 낭만과 저항을 서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 청년문화가 본격적으로 파란을 일으킨 시점은 197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상징적 기호 또한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보다 훨씬 풍부했다. 1960년대의 문화적 현상이 단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전조’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기억해두고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풀기로 하자.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1964년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가요계의 형세는 이미자의 독무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지난 주에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1964년은 한국 팝, 의미를 더 좁히자면 한국 록(큰롤)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해다. 다름 아니라 ‘한국의 비틀스’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록의 선구자로 기록될 그 주인공은 애드 훠(Add 4)와 키 보이스(Key Boys)다. 애드 훠는 한국 록의 대부로 흔히 일컬어지는 신중현이 만든 밴드로, 미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날리던 그가 미군이 아니라 한국 대중을 겨냥해 처음 결성한 밴드다. 싱어 서정길, 드러머 김대환 등이 정규 멤버로 거쳐갔고 가수 장미화 등도 객원 멤버로 활동한 바 있다. 김홍탁(리드 기타), 윤항기(드럼),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옥성빈(리듬 기타)으로 구성된 키 보이스 역시 미8군 무대에서 싱어 송영란과 함께 락 앤 키(Lock and Key)란 이름으로 활약한 밴드다.

 

1964년 애드 훠와 키 보이스의 데뷔 음반이 발매되었다. 먼저 나온 것은 키 보이스의 음반 <그녀 입술은 달콤해>였다. 이 음반에는 ‘아이 원 투 홀드 유어 핸드’(비틀스)를 비롯한 번안곡 일곱 곡과 ‘정든 배는 떠난다’를 포함한 창작곡 여섯 곡이 수록되었다. 창작곡의 경우 키 보이스의 자작곡은 아니고 이들의 친구이자 당시 신예 작곡가였던 김영광이 만든 곡들이다.

 

반면 그해 말에 발매된 애드 훠의 음반 <비속의 여인>은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곡들로 채워져 있다. 연주와 노래는 물론 작곡과 편곡도 밴드 자체적으로 소화한 놀라운 음반이다. 키 보이스의 음반이 전체적으로 백인 록큰롤 풍인데 반해, 애드 훠의 음반은 리듬 앤 블루스의 색채가 진하게 남아 있다. 뒤에 다른 ‘가수’가 불러 히트한 ‘내 속을 태우는구려’(펄 시스터스의 ‘커피 한잔’), ‘비속의 여인’(장현)의 원형이 담긴 음반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록 음반으로 기록되는 이 두 음반은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신중현의 표현에 의하면, ‘망했다’. 전기 기타와 드럼이 자아내는 시끄러운 사운드가 하나의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노래는 가수(솔로 또는 중창단), 반주는 악단, 송라이팅은 직업적 작사·작곡가’ 체제가 너무나 당연했던 시절, 너댓 명의 청년들이 그룹을 이뤄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는 모습은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나 ‘한국의 처비 체커’가 아니라 ‘한국의 비틀스’의 등장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가수, 악단, 작사·작곡가라는 전통적 분업체계에 균열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컬 그룹(중창단)과 캄보 밴드의 구분을 지우고 노래와 악기 연주가 통합된 새로운 형태의 그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1964년을 한국 록의 원년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데 한국 록의 선구자를 이룬 밴드가 그들뿐이었을까. 최영훈과 최영한 형제가 주축이 된 ‘코끼리 브라더스’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회자된다. 아쉽게도 음반이 발견되지 않아 기억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이들 세 밴드의 등장을 신호탄으로, 수많은 ‘한국의 비틀스’들이 뒤이어 등장했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200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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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포크의 상륙, 번안곡이면 어떠랴

(17) 펄 시스터스와 트윈 폴리오: 소울과 포크의 수입대체

 

1969년. 한때 팝 음악의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해’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 알딸딸하고 몽롱한 잔치 분위기가 몇 달 뒤 ‘알타몬트의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도 기억한다면, ‘전문가’ 행세를 해도 좋으리라. 일요일 오후쯤 ‘와이들 씽’이나 ‘댄스 투 더 뮤직’을 틀어놓고 자기가 마치 1969년에 뉴욕 주 어떤 농장에 가 본 것 같은 망상에 젖는 ‘마니아’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이렇게 전문가이거나 마니아인 척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1970년대의 <월간 팝송> 같은 음악잡지를 읽으면서 ‘복습’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1969년을 상징하는 불멸의 아티스트들, 예를 들어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 같은 불멸의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1969년 한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소수의 예민한 한국의 음악인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반응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한국에서 ‘팝송’은 무풍지대였는가. 천만의 말씀. 명동과 종로 등지의 음악감상실과 생음악 살롱에서는 팝송에 중독된 젊은이들이 득시글했다는 것이 당시를 살아간 이들의 증언이다. 그런데 어떤 팝송? 다양했겠지만 1960년대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음악은 역시나 ‘비틀스(The Beatles)’ 같은 영국 젊은애들로 이뤄진 그룹의 음악이었지만, ‘솔’과 ‘포크’의 위세도 그에 못지 않았다. 솔과 포크가 무슨 음악인지, 한국에서는 어떤 곡이 인기를 누렸는지, 누가 이런 음악을 보급했는지 등의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생략하고, 몇 달 전 나온 좋은 책 한 권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아마 제목이 <한국 팝의 고고학 1960>일 것이다. 단, 표지를 보고 미리 실망하지는 말기를 당부한다.

 

1960년대가 지나기 전 나온 묘한 음반 하나는 솔과 포크가 한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음반은 기본적으로 ‘펄 시스터스’와 ‘트윈 폴리오’의 합동 음반이고 ‘김인배 편곡집’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거두절미해서 말한다면 여성 듀엣 ‘펄 시스터스’와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는 당시 ‘남고생의 취향’과 ‘여고생의 취향’을 각각 대변한 존재들이다. 10대 남자가 미니 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몸매의 ‘펄 시스터스’를 보았을 때, 10대 여자가 청바지를 입은 해사한 용모의 ‘트윈 폴리오’를 보았을 때의 그 생생한 느낌은 나의 문장력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대부분 번안곡들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뿌리가 ‘가요’가 아니라 ‘팝송’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슈프림스(The Supremes)’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을 수입대체한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수입대체가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랴. 그렇지만 두 듀엣에는 ‘기성’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고, 그것으로 필요충분한 것이었다. 경음악 악단장 김인배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당시 음반업계의 관행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베테랑 음악인이 젊은 음악인을 후견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용어로 ‘솔 싱어’와 ‘포크 싱어’가 합동으로 음반을 발표하는 일은 본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미국과 한국이 얼마나 달랐는지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당시 ‘팝’을 하려고 했던 음악인들 사이에서 장르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이 음반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두 듀엣을 대표하는 음반은 아니다. ‘트윈 폴리오’는 이듬해인 1970년에 발표한 독집 음반이 두고 두고 쏠쏠하게 팔렸고, ‘펄 시스터스’는 이 음반 이전에 발표한 음반이 이미 대박을 친 상태였다. ‘트윈 폴리오’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할 기회가 있을 테니 ‘펄 시스터스’에 집중하면서 마무리하자.

 

이제까지 열심히 떠든 위 음반에는 ‘펄 시스터스’의 이름을 따라 다니는 두 개의 히트곡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는 ‘커피 한 잔’이고 다른 하나는 ‘님아’다. 이 곡들은 ‘펄 시스터스’도 ‘펄 시스터스’지만, 신중현이라는 이름과도 긴밀하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 텐데, 한국에서 ‘솔’을 보급한 것은 실질적으로 ‘작곡가 신중현’의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1969년 말 ‘엠비시(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펄 시스터스’가 ‘영예의 가수왕’상을 차지한 사건을 우드스탁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더라도 팝 혁명의 한국형 버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뻥’일까. 신중현이라는 인물이 했던 일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뻥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뻥도 아닌 사건들이 드러날 것이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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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보이스’ 시작으로 ‘∼스’ 전성시대

(18) 1969년 그룹 사운드 붐

 

1969년 5월17일. 광화문 앞 세종로의 한쪽 블록에는 젊은이들의 대열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소는 서울 시민회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이었다. 그 날만이 아니라 나흘간이나 동일한 진풍경이 반복되었다. 3000석 규모의 시민회관은 하루 네 차례 물갈이하며 연인원 4만여명의 청중으로 만석을 이뤘다. 암표소동도 벌어졌다는 후문이다.

 

대체 어떤 행사였기에 그런 진풍경이 연출된 것일까. 행사의 타이틀은 ‘5·16 기념 플레이보이배 쟁탈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였다. ‘5·16 기념’이란 문구는 시기적으로 그때가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한복판이었음을 감안하면 관행의 결과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플레이보이란 명칭은 행사를 주최한 플레이보이 프로덕션(단장 이순우)에서 나온 것이다.

 

이 경연대회는 총 17팀의 출연진이 출전해 불꽃 튀는 연주를 뽐내며 자웅을 겨뤘다. 경연대회의 최고상은 ‘키 보이스’, 우수상은 ‘히 화이브’, 구성상은 ‘가이스 앤 돌스’, 가수상은 이필원(타이거스), 연주상은 조영조(키 보이스)가 차지했다. 이들을 포함한 출전팀 거의 대부분은 미8군 무대 출신이었다. 경연대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당시를 경험한 이들에게 물어 보라. 공통적으로 ‘정말 대단했지!’라는 감회 깊은 감탄문이 즉각 나올 것이다. 그리고는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에 대한 정황 설명과 함께 ‘키 보이스’는 어땠고 ‘히 화이브’는 어땠고 하는 생생하고 장황한 얘기들이 무용담처럼 뒤를 이을 것이다.

 

 

당시 취재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1류 가수, 코미디언을 동원해도 텅텅 비기 일쑤인 시민회관이 암표소동을 벌일 만큼 붐볐으니 하나의 이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팀이 바뀌고 레퍼터리가 바뀔 때마다 회관이 떠나가라 박수를 보냈다. 무대에서 연주,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청중은 이에 따라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무대와 관객석이 한데 어울리는 흥겨움. …보컬 사운드의 특징인 엘레기(전기 기타)의 다이내믹한 볼륨과 유니 송의 창법, 생동하는 스테이지 매너가 청중을 매혹시켰다.”(<선데이서울>, 1969년 6월1일치)

 

지지난 주에 1964년 ‘키 보이스’와 ‘애드 훠’의 ‘일반 무대’ 데뷔가 절반의 성공에도 못 미쳤다고 얘기한 바 있는데, 그로부터 5년만에 상황은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그 사이, 그러니까 ‘키 보이스’와 ‘애드 훠’를 신호탄으로 ‘한국의 비틀스’들이 뒤를 이어 등장하여 분투하던 시기가 징검다리가 되었다. ‘바보스’, ‘김치스’, ‘샤우터스’, ‘다크 아이스’, ‘포 가이스’, ‘화이브 휭거스’ 등이 미8군 무대를 근거지로 맹활약했다. 하청일이 당시 ‘샤우터스’ 멤버로 연주생활을 했다는 사실, 조용필이 1960년대 후반 ‘화이브 휭거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유명 음악인의 그룹 사운드 시절을 증언하는 극히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며, 베트남전으로 주한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미군 쇼 무대가 축소되었다. 반면 미도파 살롱을 비롯한 생음악 살롱 등 그룹이 설만한 일반 무대는 점차 늘어났다. 이에 따라 미8군 무대 출신 그룹들이 한국 대중을 상대로 문을 두드리는 일이 가속화했다. 팝송을 즐기는 열혈 청년의 비중이 점차 늘어갔고 연주를 하고자 직접 악기를 잡는 이들도 점점 늘어갔음은 물론이다.

 

1969년 솔 열풍을 일으킨 ‘펄 시스터스’와 김추자의 대박 행진 뒤에도 그룹 사운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중현과 그의 그룹 ‘덩키스’가 주인공이다. 그해를 뒤흔든 펄 시스터스의 ‘커피 한잔’과 ‘님아’, 김추자의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김상희의 ‘어떻게 해’ 등은 신중현이 작사, 작곡, 편곡을 하고 덩키스가 연주한 곡들이었다.

 

이 무렵 그룹 사운드들은 종래의 4인조 기본 편성(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에 오르간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Vida’가 태평양 넘어 이 곳까지 환각적인 사이키델릭 열기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자세한 얘기는 뒤에 하자. 단, 솔로 가수에 의한 열창형의 가창, 그룹 사운드에 의한 사이키델릭 풍 연주가 뒤섞인 새로운 감성의 곡들이 청년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는 점은 기억해두고.

 

(200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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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그룹 사운드 대변한 ‘거짓말이야’

 (19) 추자의 전성시대

 

구미의 대중음악을 논하는 문헌을 보면 1960년대는 ‘좋은 시절’이었던 반면, 1970년대는 ‘그저 그런 시절’이었다는 식의 평을 심심찮게 나온다. 경험과 실감도 부족하니 논평은 삼가자. 그런데 되돌아보면 한국에서도 1970년대가 접어들면서 ‘좋은 시절 다 갔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1960년대 말까지 그럭저럭 풀어 주었던 문화적 분위기가 1970년대 접어들면서 옥죄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거시적 수준에서 정치적 담론을 독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시적 수준에서 일상생활에 개입하는 정책들이 착착 진행되었고, 그 배후에 1969년 1월 ‘3선개헌’의 추진을 시작으로 1971년 4월의 제 7대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72년 10월의 ‘10월 유신’에 이르는 정치적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민족문화 중흥’의 기치 아래 ‘외래·퇴폐풍조 단속’을 선언한 정책 아래 남성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성의 치마 길이까지 규제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대중음악계가 무사할 리는 없었다. 1969년 시작된 ‘전국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1971년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린 점, 그리고 그 에너지는 지하의 ‘고고 클럽’으로 숨어들었다는 점은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하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던 사람들에게 1970년대 초반 주류 대중연예계는 ‘대형 슈퍼스타들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남성 가수의 경우는 남진과 나훈아가 ‘오빠부대’라고 할 만한 팬층을 거느리고 용호상박의 라이벌전을 펼쳤다. 남진의 팬을 자처하는 이가 나훈아에게 병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등 때로는 험악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보다는 정도가 덜 했고 많이 잊혀졌지만 여성 가수의 경우도 김추자와 김세레나 사이에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다. 이들의 주요 무대는 아직 음반이나 방송보다는 극장에서의 ‘쇼’ 혹은 ‘리싸이틀’이었다. 서울 시민회관을 비롯한 대도시의 극장들에서는 가수의 이름을 타이틀에 건 ‘리싸이틀’이 성황리에 전개된 것이다. 당시의 업계 용어로 ‘아다마 가수(으뜸 가수)’라고 불렀던 이들 대형 가수들은 흥행의 보증수표였고, 이들의 쇼는 추석이나 설 같은 연중 대목을 장식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들 스타들 사이의 라이벌전만큼이나 팬들의 극성스럽고 ‘능동적인’ 모습이었다. ‘사소한 데 목숨 거는’ 팬덤 현상은 도시화에 따라 대중연예의 새로운 형식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벌이라는 상징 작용을 통해 ‘경쟁을 통해 승리해야 한다’는 의식을 대중의 신체에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스타는 무대 위나 무대 뒤에서의 각종 사고나 스캔들로 연예계의 가십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최고의 대중스타로 김추자를 뽑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는 주류 연예계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분고분한 연예인’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특이한 존재였다. 하체가 꽉 끼어서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나팔바지(판탈롱)와 민소매를 즐겨 입은 차림으로 손과 발을 휘저으면서 육감적인 춤을 추는 모습은 그 자체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음 섞인 창법은 솔이라는 ‘외래풍조’를 기초로 토속적 감각을 가미한 독창적인 것이었다.

 

정상에 등극할 때까지 그의 배후에, 신중현의 작사와 작곡, 그리고 그의 그룹 덩키스, 퀘션스의 연주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남진, 나훈아, 김세레나 등 197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들이 대체로 ‘재래가요’의 문법에 충실했던 반면, 김추자의 경우 ‘외래가요’(팝)와 ‘재래가요’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꽃잎’ 등의 ‘가요’들은 지하에서 그룹 사운드들이 연주하던 ‘광란의 솔·싸이키델릭 사운드’를 지상에서 뾰족하게 대표했다.

 

그의 존재가 흥미로웠던 것은 무대 위 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연 조건이 맞지 않으면 ‘펑크’를 서슴지 않았고, 주간지에서는 ‘노팬티설’, ‘열애설’, ‘임신설’, ‘간첩설’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풍문이 끊이질 않았다. 이 가운데 ‘간첩설’에는 또 다른 루머가 전해 내려온다. 1971년 7월 부산에서 열린 한 리싸이틀에서 그가 김세레나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운’ 끝에 가수협회로부터 3개월 자격정지를 당하자, 그의 매니저 소윤석이 무대 복귀를 위해 연출한 ‘언론 플레이’라는 루머다. 자격정지에서 풀린 뒤 그에게 악몽 같은 ‘스캔들’은 발생했는데, 마침내 1971년 12월의 리싸이틀 무대에서 김추자의 분신과도 같았던 소윤석이 휘두른 술병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뒤로 그는 재기에 성공했지만, 1975년 12월 다시 한 번 시련을 맞이한 뒤 점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슈퍼스타의 ‘굵고 짧은’ 5년이었다. ‘1975년 12월’이란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4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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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비운의 음악’ 이라고? 무슨 말씀!

(20) 잊혀진 록의 시대

 

1975년 이후 록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애호가들 사이에는 ‘한국에서 록은 안돼’라는 자조와 패배의식이 깊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록 음악이 주류에서 성공을 거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과 평화’, ‘산울림’, ‘송골매’, ‘들국화’, ‘시나위’, ‘넥스트’, ‘크라잉 넛’, ‘윤도현 밴드’ 등이 시대를 풍미하며 활약해왔고 솔로 가수도 록 스타일의 곡들로 인기를 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록 마니아 집단 안에서는 한국에서 록이 비운의 음악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지 오래다. 영미권에 대한 높은 동경과 깊은 열등감으로 이뤄진 패배주의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자중과 자애 그리고 자긍심을 가질 만한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탓도 있다. 역사는 커녕 기초적인 데이터베이스의 보존과 정리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유실과 망각을 방임해온 게 사실이다. 그나마 몇 해 전부터 지나간 한국 팝의 역사에 대한 반추와 복원, 재평가의 움직임이 각개전투처럼 이어져 뒤늦게나마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처럼 무겁게 말문을 연 까닭은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한국에서도 ‘록의 시대’로 불릴 만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이 시리즈의 최근 연재분에서 언급했듯이 그때는 다름 아니라 1969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에서 멈춘다. 1969년 5월 ‘제1회 전국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촉발된 ‘그룹 사운드 센세이션’은 1971년께까지 엄청난 열기를 내뿜었고 솔, 포크와 삼두마차를 이루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고고 붐’의 주역이 되며 1975년까지 청년 대중음악의 한 축을 이루었다. 포크와 고고 붐에 대해서는 뒤에 별도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제1회 전국 보컬 그룹 경연대회’의 여파는 컸다. 이후 서울 시민회관에서는 유사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수시로 열렸음은 물론이다. 미도파 살롱, 오비스 캐빈, 라스베가스 등 명동·소공동·무교동·종로 일대의 생음악 살롱에는 이들 그룹 사운드가 상시로 무대에 올라 장발에 판탈롱과 미니 스커트로 맵시를 낸 ‘명동족’들의 광란을 이끌어냈다. 또 그룹 사운드는 지상파 텔레비전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동양방송(TBC)의 ‘원 투 쓰리 고’, ‘쇼쇼쇼’ 같은 프로그램에 붙박이처럼 출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생생한 경험에 대해서는 뒷날 누구나 알 만한 뮤지션이 된 한 음악인의 회고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명동 살롱가의 스타 밴드 히 식스의 김홍탁(왼쪽)과 조용남(오른쪽).

 

 

“음악이 시작되면 해피 스모크의 연기가 피어오르고(당신엔 대마초 규제가 없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갈래머리 여학생들 역시 흥청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각 밴드가 번갈아 나오면서 ‘지미 헨드릭스’, ‘산타나’, ‘비틀스’, ‘애니멀스’, ‘시시아르(CCR)’ 등 우리가 흔히 라디오에서 듣던 서양의 팝송들을 멋들어지게 연주했다. 그 형들은 정말 한마디로 멋쟁이들이었다. 긴 머리에 나팔바지, 그리고 히피 마크와 부츠…. 이런 패션이 당시 그룹들의 트레이드마크였다.”(다음 카페 ‘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http://cafe.daum.net/march)에서 발췌)

 

위 글을 쓴 인물은 ‘들국화’의 베이스 연주자로 유명한 최성원으로 그 역시 ‘멋진 형들에 열광하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환각적인 사이키 조명 아래 이들 그룹 사운드는 ‘레어 어스’의 ‘겟 레디’, ‘스테픈울프’의 ‘본 투 비 와일드’, ‘바닐라 퍼지’의 ‘유 킵 미 행잉 온’ 등을 즐겨 연주했다. 특히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인-어-가다-다-비다’는 공연의 정점을 장식하는 필수 레퍼토리였다. 이들이 팝송 커버만 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창작곡을 섞어 독집을 내기 시작했고 창작곡의 비중은 곧 커버곡을 압도해갔다. 그렇게 레코딩으로 남은 ‘키 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일명 ‘해변 시리즈’), ‘님 떠나 갈 시간’, 그리고 히 화이브/히 식스의 ‘초원’, ‘초원의 사랑’, ‘초원의 빛’(일명 ‘초원 시리즈’),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당신은 몰라’, ‘키 브라더스’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곡들은 당대의 히트곡이자 지금도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 ‘키 보이스와 히 화이브/히 식스’는 ‘남진과 나훈아’처럼 불꽃튀는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살롱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주역이었다. 물론 1970년을 전후한 때에 ‘솔 & 사이키’만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처럼 남은 포크 음악이 있다. 이건 다음 회에.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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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없이 통기타 맨 ‘낭만’ 대학생의 반란

(21) 포크송, 대학생의 낭만으로부터 창작의 자의식으로

 

올 가을 젊은애들이 몰려다니는 페스티벌들이 많다. 그런데 1970년 가을,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확히 ‘4반세기 전’에도 페스티벌이 유난히 많이 열렸다. 지난 번에 언급한 ‘전국 보컬 그룹(그룹 사운드) 경연대회’(1969년부터 1971년까지)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잔치’가 많이 열렸다. 기록을 뒤져보니 1970년 9월 4일부터 4일 동안 서울 시민회관에서 ‘후트네니 고고고’라는 이름의 대형 공연이 있었는데, 당시 용어로 말하면 팝 계열의 음악인이 총망라된 무대였다.

 

이런 대형 공연 외에 아기자기한 공연도 많이 있었다. 9월2일에는 YMCA 강당에서 ‘Y 포크 페스티벌’이라는 행사가, 그리고 11월 20일에는 YWCA 강당에서 ‘청개구리 사운드’ 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런 잔치 분위기는 이듬해 여름에 절정을 이루어서 이제는 ‘도심의 실내’가 아닌 ‘교외의 야외’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971년 8월 17일부터 6일 동안 청평에서 ‘한국판 우드스톡’이라고 부를 만한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970년부터 ‘팝 싱거’나 ‘보컬 그룹(그룹 사운드)’ 이외에 ‘포크 싱거’라고 불리던 존재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당시의 포크에 대해 ‘그게 무슨 포크냐?’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1970~71년에 ‘포크’라고 불렸던 음악은 ‘팝’의 하나의 계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창작곡보다는 번안곡의 비중이 높았고, 번안곡도 ‘포크’라는 범주와는 거리가 있었고, 그 미학적 코드도 자기성찰과 사회비판이라기보다는 순수, 매혹, 격조, 낭만 등이었다. 이게 ‘수입되고 번역된 한국 포크송’의 현실이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 1971년 8월 개최된 청평 페스티벌에서 ‘포크 싱거’ 김민기가 노래하는 모습. 마이크를 들고 있는 이는 양희은과 윤형주(왼쪽), 그리고 이백천 PD(오른쪽)이며, 뒤에서 기타 반주를 도와주는 이는 ‘솔 싱거’ 이용복이다

 

이 무렵 우후죽순처럼 결성되어 세상에 이름을 알린 포크 싱어들과 그들의 히트곡을 나열하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분위기 가운데 하나는 혼성 듀엣이 부르는 ‘연인들의 밀어’ 같은 곡들이다. 뚜아에무아(이필원, 박인희)의 ‘약속’, 라나에로스포(한민, 은희)의 ‘꽃반지 끼고’, 바블껌(이규대, 조연구)의 ‘짝사랑’ 등의 곡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현재 40대 중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풋풋하고 설레였던 ‘첫사랑의 추억’처럼 남아 있는 곡들일 것이다. 물론 당시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한편 남성 듀엣(혹은 트리오)들의 등장도 두드러진다. 한국 포크의 효시라고 할 만한 ‘트윈 폴리오(윤형주, 송창식)’ 이외에 ‘투 코리언스(김도향, 손창철)’, ‘트리플(장계현, 김세환, 김운호)’, ‘쉐그린(이태원, 전언수)’, ‘투 에이스(오승근, 홍순백)’, 이장희와 강근식, ‘도비두(김민기, 김영세)’, ‘4월과5월(백순진, 이수만(!))’ 등이 당시의 주간지를 장식한 이름들이다.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동아시아권에서 유난히 인기가 높았던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도 있겠고, ‘피보다 진한 우정’을 표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대학가’나 ‘살롱가’에서 아마추어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음반가’나 ‘방송가’에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을 뒤에서 후원해 주면서 방송국 스튜디오나 음반사 스튜디오까지 끌고 갔던 사람들이 있었던 셈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긴 생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은 여대생’이나 ‘허줄한 옷차림에 더벅머리를 한 남대생’이 대중매체를 통해 표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통기타’는 이들의 필수 휴대품목이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71년 말에 일어났다. 청평 페스티벌 등을 통해 ‘젊은이의 우상’으로 부상한 인물들이 일제히 음반을 발표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작자창(自作自唱)’이라는 대담한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한대수, 서유석, 이연실, 방의경, 김광희, 조동진, 이장희 등 이 시기에 자작자창을 시도한 인물들의 이름도 기억해 두어야 하겠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겁대가리 없던’ 인물은 김민기였다. ‘아침이슬’, ‘그날’ 등이 수록된 양희은의 데뷔 음반(1971.9)에서 작사, 작곡, 기타 연주를 맡더니,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이 창작한 곡들을 중심으로 데뷔 음반(1971.11)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음반에 대해서는 신화와 전설이 많으니 반복하지 말자. 그런데 신화와 전설은 더 있다. 김민기의 독집이 나오기 1년 전 쯤 발표된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1970.12)에는 ‘친구’를 비롯하여 도비두의 이름으로 노래 세 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얼마 뒤에 나온 양희은의 2집 음반(1972.5)의 뒷면에는 ‘도와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수만(!)의 이름이 등장한다. 지난 여름 발표한 보아의 5집의 마지막 트랙이 ‘가을편지’(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였던 것이 아주 해괴한 일만은 아니었나보다. 당시 청년문화의 생기가 맺어준 오랜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 초래한 질긴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 질문은 계속 된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200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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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스바람’ 기합도 주며 신인 강훈련

 (22) 팝 혁명의 막후 지원자들

 

1970년을 전후해, 포크, ‘소울 & 사이키’ 같은 이른바 팝 계열 음악이 대중음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데에는 그 주역인 음악인들 뿐 아니라 막후 지원자들의 역할도 컸다. ‘히 식스’와 ‘쥰 시스터스’ 등을 후원한 조용호, ‘키 보이스’와 ‘트리퍼스’ 등을 지원한 이종환, ‘뚜아 에 무아’의 후견인이었던 이해성, 특정 가수를 거명할 필요 없을 ‘한국 포크의 담임선생님’ 이백천, 그리고 이성애와 이석 등을 후원한 김정호 등이 그들이다. 대부분 시대를 풍미한 방송인들이다.

 

그런데 팝 계열 음악의 후원자 가운데 ‘너무나 중요하지만 망각된’존재로 서병후라는 이름이 마땅히 호명되어야 할 것이다. 서병후는 팝 음악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967년 최초의 팝 음악 잡지이자 문화 잡지인 <팝스 코리아나>를 창간하고 이후 <주간경향>, <주간중앙> 등의 기자로, 팝 컬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일간신문에서는 가수나 가요에 관한 이야기를 저질로 여겨 기사로 다루지 않던 시절이었다.

 

‘펄 시스터스’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음악을 빚어낸 신중현을 발굴해 처음 대중적으로 알린 것도 그였고, 당시 신중현 사단이라 불린 김추자, 박인수 등은 물론 많은 그룹 사운드를 가장 왕성하게 소개한 것도 그였다.

 

» 팝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 서병후

 

무엇보다 서병후는 필력을 날리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을 날려 각종 리사이틀과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의 기획자이자 프로모터로 활약했다. 고고 클럽의 탄생에도 산파 역할을 했고 이런 무대에 무명의 가수와 그룹 사운드가 설 수 있도록 매개가 되는 데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활약한 음악인들로부터 그의 조언과 도움을 고마워하는 증언을 지금도 종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1960-70년대 ‘팝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대중음악계에 그가 남긴 성과는 휘발되고 지금은 그저 힙합 그룹 드렁큰 타이거의 리더 ‘타이거 JK(서정권)의 아버지’란 설명을 앞세워야 이해하기 쉬운 상황이다. 이게 현단계 한국 대중음악계의 ‘슬프지만 진실’일 테지만.

 

또 한 명 언급해야 하는 이름은 박영걸이다. 그는 뒤에 ‘신중현과 엽전들’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고 1970년대 중반 음반 및 매니지먼트 전반을 관장한 노만기획을 설립하여 이은하, 정난이, 벗님들 등을 거느렸던 한국 매니지먼트계의 ‘큰 형님’ 격인 인물이다.

 

박영걸이 가요계의 수면 위로 처음 올라온 것은 1970년의 일이다. 그해 열린 제2회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라스트 찬스’, 구성상을 받은 ‘데블스’가 그의 사단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룹이었고 그 결과 그 자신은 지도상을 수상했다. 훗날 ‘안녕’ 등으로 인기를 얻은 김태화가 재적했던 ‘라스트 찬스’가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발광’의 무대를 선사하고, 보컬 연석원이 가수왕상을 수상하기도 한 소울 그룹 ‘데블스’가 해골 복장에 여성 주검이 들어있는 관을 설정해 연출했던 일은 지금도 센세이션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른 맥락이지만, ‘데블스’와 ‘라스트 찬스’는 ‘엘리트 코스’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고생을 거듭하다 중앙무대로 성공적으로 올라온 경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신중현이나 김홍탁의 그룹처럼 미8군 무대의 최고의 자리에 이어 일반무대에서도 지식인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게 아니라, 왜관, 파주 등지의 지방 기지촌에서 밴드 생활을 전전하며 한겨울 ‘빤스 바람’ 기합에 더러 ‘빳따’도 불사하는 전설 같은 강훈을 거쳤다는 얘기다.


이제까지 언급한 후견인들은 방송, 잡지, 공연 등을 통해 대부분 순진하리 만치 사심 없이 팝 계열 음악인들을 도와 팝 혁명에 조력한 인물들이다. 현재의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 같은 거물들처럼 기업형 종합매니지먼트를 꾸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다. 하지만 이후 기획사를 차려 성공한 박영걸의 경우처럼 그 맹아를 보여준 측면은 있다. 그래도 그 시절 후견인들은 음악인들에게 ‘사장님’이나 ‘선생님’이 아니라, ‘맏형’ 같은 존재였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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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로만 남기엔 안타까운 ‘그건 너’

(23) 강근식, 나현구, 이장희: 잊혀진 사람

 

지난해 가을 이장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조영남의 ‘마지막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30년만에 무대에 오른 이장희’라는 식으로 떠들썩할 법도 했건만 의외로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은 범상치 않았다. 1970년대 전반기 그의 대표곡인 ‘그건 너’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두 곡이 연주되었을 때 스냅 사진처럼 1970년대의 특정 시점이 스쳐 지나갔던 것은 물론이다.

 

1973년 언젠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소리소문 없이 몰고 온 파장을 실감있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라는 여과도 필요 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 필요할 때 터져 주는 후렴구, ‘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의 맥빠지는 음악평론식 해설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장희의 작곡과 노래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장희를 ‘포크 가수’라고 부른다면 이 음악의 실체에 절반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장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이 없었다면 이장희도 없었다. ‘그건 너’의 후렴구를 다시 들어 보라. 이장희의 노래와 강근식의 기타는 마치 선창과 후창, 이른바 콜 앤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처럼 능숙하게 주고 받기를 반복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이렇게 잘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은 음악을 조금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연대 생물학과를 중퇴한 이장희와 홍대 조소과를 졸업한 강근식의 만남은 1960년대 후반의 ‘생음악 살롱가’에서 활동하던 듀엣 ‘이장희와 강근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장희는 연대 재학시절 윤형주와 함께 ‘라이너스’라는 보컬 그룹으로 활동했고, 강근식은 ‘홍익 캄보’라는 그룹을 만들어 학내에서 활동했고, 그러다가 세시봉 그룹의 일원인 이상벽(!)의 소개로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이장희도, 강근식도 잊혀진 마당에 말이다.

 

 이장희 & 강근식

 

어쨌든 이장희와 강근식은 ‘한 잔의 추억’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나야 나’ 등으로 이어지는 로킹(rocking)한 리듬의 곡으로 이유없는 불만에 차 있던 젊은 애들(특히 남고생)의 꼭지를 돌게 만들었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촛불을 켜세요’, ‘잊혀진 사랑’ 등의 발라드로 여고생들의 가슴을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10대 청춘 군상들이 시커멓거나 새하얀 것 아니면 입을 옷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이 모든 현상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은 1972년 12월 2일 드라마 센터와 1974년 4월 14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이장희 리싸이틀’일 것이다.

 

이장희와 강근식보다 더 잊혀진 인물도 있다. 다름 아니라 이장희의 음반을 필두로 비로소 때깔이 좀 나는 앨범(LP)을 국수 뽑듯 말아 내던 나현구 사장이라는 이름이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라는 또하나의 전설적인 프로덕션이자 스튜디오를 통제했던 나현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듀서였다. 이장희를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연실, 조동진, 양병집, 김의철, ‘현경과 영애’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을 발굴하거나 스카우트하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음반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으로 음반업계에서 보기 드문 대졸 경력을 가진 그의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맹숭맹숭한 말 이전에 ‘팩트’라도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신파조의 발라드로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사용하는 몰역사적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14집까지 발표되었던 컴필레이션 시리즈 ‘골든 포크 앨범(Golden Folk Album)’의 음원들이 주인이 바뀐 채 ‘가요골든히트’라는 이름의 편집 음반으로 선별적으로만 나오고 그나마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업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만들었던, 대마초 파동으로 불리는 ‘그때 그 사건’은 12월이 되면 정확히 30주년을 맞는다. 무슨 사건이냐고? 말하기도 싫다. 그런데 기념도 뭐도 아무 것도 없이 조용하다. 가수 데뷔 30주년 어쩌고 하는 공연은 많고, 심지어 인디 음악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없다. 이렇게 계승되지 않고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노스탤지어로만 남아 있는 ‘대중문화의 역사’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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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대부’ 도 통기타와 친해
(24) 통기타를 든 신중현

 

한국에도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설립된다면 맨 처음으로 오를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신중현이다. 한국 그룹 사운드의 초창기부터 밴드를 이끌면서 선구적 길을 개척한 업적은 단골로 붙는 수식어인 ‘한국 록의 대부’란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이름 앞에 곧잘 따라오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히트곡 제조기’라는 것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68년 ‘님아’, ‘커피 한잔’(펄 시스터스)을 신호탄으로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김추자), ‘꽃잎’(이정화), ‘봄비’(퀘션스/박인수)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분만해 냈다. 이 곡들이 시기적으로 불과 만 2년 사이에 발표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게 전부일까. 그 뒤에 발표되어 히트한 곡들만 해도 ‘노래방에서 1시간 안에 부를 수 없는 분량’이란 점만 일단 확인해 두자.

 

신중현이 한국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면 어떤 사진이 걸릴까. 대다수가 떠올리는 모습은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작곡가로서 업적이 못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되는’ 건 연주자로서의 모습인 까닭이다. 그런데 사진이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 걸린다는 전제하에 이런 사진은 어떨까. 통기타를 든 신중현 사진 말이다.

 

» 한국 록을 이끈 신중현(사진 왼쪽)과 신중현 음악의 정점을 보여주는 김정미의 독집 ‘나우(NOW)’

 

1969년 한국 팝의 혁명 이후 솔, 사이키델릭, 포크 음악이 삼두마차가 되어 가요계의 지반을 뒤흔들었던 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아도, 이 시기 신중현이 통기타 포크 음악(당시 용어로 ‘폭송’)을 시도하고 관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중현과 포크’라면 보통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그는 1968년 김응천 감독의 영화 <푸른 사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조영남(‘빗속의 여인’), 트윈 폴리오(‘떠나야 할 그 사람’) 등이 부른 노래의 작곡가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푸른 사과> 사운드트랙이 단지 작곡가와 가수로서 일회적 인연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통념과 달리 신중현은 작곡할 때도 통기타를 애용했고 스튜디오에서도 종종 연주했다. 신중현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아름다운 강산’의 오리지널 버전(1972년)을 유심히 들어보면 전기 기타가 아니라 통기타 반주가 내내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예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1972~73년께 신중현의 통기타 연주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곡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강산’을 분만한 바로 그 시기 신중현은 ‘더 멘(The Men)’이란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더 멘’은 솔과 사이키델릭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신중현의 이전 그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서울시향의 관악기 연주자 손학래를 멤버로 영입하고 훗날 작곡가로 대성하게 되는 김기표 등 ‘젊은’ 멤버들과 함께 실험적인 음악들을 다수 남겼다. ‘더 멘’은 독집을 남기지 않았지만 장현, 윤용균, 지연 등의 솔로 가수 음반(물론 ‘신중현 작편곡집’)의 뒷면에 남긴 ‘길고 몽환적인 롱 버전들’을 통해 한국 록 음악사에 돋을새김에 해당하는 명연(名演)들을 남겼다.

 

신중현이 ‘더 멘’ 시절 남긴 명연에 대곡 성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어쿠스틱 기타, 또는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하더라도 이펙트를 쓰지 않고 생톤으로 스트러밍하는 소박한 연주들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한 장현의 ‘나는 너를’, ‘마른 잎’, ‘미련’ 등은 신중현이 이 시기 기타의 포크적 구사에도 몰두했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김정미의 독집 (1973)는 그 정점일 것이다. 사이키델릭과 포크, 관능과 순수를 결합한 김정미의 노래들은 신중현 음악의 정점이자 한국 팝의 정점이기도 했다.

 

그 무렵 신중현은 대표적인 포크 가수였던 양희은, 서유석의 음반들도 주도해서 만든 적이 있다. 비록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신중현이란 대표적인 솔·사이키 음악가와 양희은과 서유석이란 포크 가수의 결합은 진기한 음악적 경험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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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부르 사단’ 에 여고생 가슴은 살랑∼

(25) 어니언스, 김정호 그리고 ‘인건마 편곡집’

 

1970년대 중엽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길어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명하기로 하고 1973년 말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 해의 대중가요계를 결산하는 이 무렵의 기사들은 한결같이 한 해 동안 일어난 대중가요계의 ‘지각변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각변동’의 내용은 대체로 ‘팝 계열’이 ‘트로트 계열’을 압도하고 점차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젊은 음악’이 음반도 잘 팔리고, 방송도 잘 타면서 주류로 부상한 중요한 기점이었다.

 

당시 지각변동을 일으킨 문제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대박으로 손꼽히는 곡은 패티 김의 ‘이별’, 장현의 ‘마른 잎’, 이장희의 ‘그건 너’ 세 곡이다. 이들 가수와 노래 뒤에 작곡과 편곡과 연주를 맡아준 별도의 인물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패티 김 뒤에는 길옥윤이, 장현 뒤에는 신중현이, 이장희 뒤에는 강근식이 있었다는 점 등등. 패티 김은 ‘젊은 음악’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나머지 두 곡은 각각 ‘솔’과 ‘포크’라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두면 더 좋겠다.

 

그런데 1973년 중반부터 시작해 1974년으로 해를 넘기면서 또 한 명의 혜성 같은 신인이 대박 행진에 명함을 내밀었다. 주인공은 임창제와 이수영으로 이루어진 남성 듀엣 어니언스(Onions)로 ‘작은 새’, ‘편지’,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 등 음반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을 히트시키는 기염을 토하면서 방송가, 음반가, 살롱가 모두에서 고른 성공을 거두었다. ‘말빨’이 받쳐 주는 임창제와 ‘얼굴’이 받쳐 주는 이수영은 갈래머리에 하얀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의 가슴을 살랑거리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임창제와 이수영이 문희준과 강타를 20년 전에 예견했다면 지나친 말일까? 재미로 해 본 말이니 항의 없기를!).

 

» 어니언스의 1974년 음반 <작은 새/초저녁별(안건마 편곡집)> 표지.

 

 

이들의 위세는 당시 음악잡지에 나온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대강당에서 지난 74년 5월 4일 열렸던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은 모여든 관객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가 관객들이 강당에서 이대교문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등 대학가에서 흔치 않은 진풍경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시작되었다. (중략) 교복차림의 중고교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 관객들은….” (부연하면 이들은 1973년 9월 드라마센터에서 이미 리사이틀을 가진 상태였다).

 

해가 바뀌기 전 이수영은 충무로에 진출하여 영화 <그대의 찬 손>(감독: 박종호)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가 이수영의 데뷔작인 것은 물론 배우 유지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한다면 당시 여고생이었을 확률이 높고, “이것은 앤티 포르노 넌프리섹스 영화다(anti-porno, non-free sex)”라는 포스터의 문구가 기억나는 사람이라면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은 청춘인 사람일 것이다.

 

그 전부터 ‘어니언스’는 또 하나의 가십을 제공했다. 다름 아니라 자작곡으로 알려졌던 ‘어니언스’의 히트곡들 대부분이 ‘편지’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저작권 분쟁’이나 ‘표절 사태’ 같은 험한 사건을 낳지는 않은 채 원만하게 문제는 해결되었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이 주옥같은 곡들의 진짜 주인공인 김정호가 ‘어니언스’에 이어 또 하나의 ‘젊은이의 우상’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름 모를 소녀’라는 또 하나의 명곡과 더불어….

 

이들을 발굴하고 스타로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문화방송의 피디이자 디제이였던 이종환, 그리고 그와 인척지간인 애플 레코드의 김웅일이었다. 지금도 대도시 교외에 프랜차이즈점을 거느린 음악실 쉘부르는 ‘이종환 사단’에 속하는 통기타 가수들이 스타가 되기 전 거쳐갔던 산실이었다. ‘어니언스’와 김정호 외에도 홍민, 석찬, 이영식, 이수만, 채은옥, 김인순, 김세화, 현혜미, 권태수, 남궁옥분 등이 쉘부르를 거쳐간 인맥들의 아주 짧은 리스트다.

 

그런데 이들의 히트곡들의 음악 감독은 따로 있었다. ‘안건마 편곡집’이라는 문구가 기억난다면, 그가 당시 정성조(현 KBS관현악단장)와 더불어 음악 신동으로 불리던 인물이자 안건마 악단을 이끌면서 무대와 스튜디오를 오가며 숱한 명연(名演)을 들려주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다 잊혀진 이야기다. 따라서 이 글에 등장한 이름들과 더불어 ‘이수미’나 ‘박성원’과 관련된 스캔들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가로 커밍 아웃해야 한다. 당시 부모와 교사의 눈을 피해 주간지와 스포츠신문을 탐독했던 그 열정이 지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겠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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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고고클럽에 둥지 틀다

(26) 고고클럽, 미드나이트 레볼루션 혹인 열반의 추억

 

모든 것은 닐바나(Nirvana)에서 시작되었다. 집단적인 음악적 경험과 관련해 닐바나라는 이름은 청장년층이나 초로기의 ‘마음은 청춘’들 모두에게 열반의 추억을 낳은 존재로 남아 있다. ‘1990년대의 아이들’에게 닐바나는 앨범 <네버마인드>(1991년)로 얼터너티브 붐의 도화선을 지펴 팝 음악계의 지형을 바꾼 미국 밴드일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의 청년들’에게 닐바나는 최초의 고고클럽으로 개장(1971년)하며 한국 팝의 1970년대를 고고클럽의 시대로 채색하기 시작한 곳일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물리적 거리와 20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아련하면서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좋던 시절’의 상징이란 점에서 두 닐바나는 공통적이다.

 

 

1971년 서울 회현동 오리엔탈호텔에 둥지를 튼 닐바나는 최초의 고고클럽답게 ‘온갖 조류와 맹수의 표본, 환각조명, 원색 슬라이드 및 블랙 라이트로 장식된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했다(<주간경향>, 1971년 4월 28일치). 닐바나란 이름을 작명하고 기획과 출연진 섭외를 맡은 인물은 전에 언급한 바 있는 ‘그룹 사운드의 막후지원자’ 서병후였다. 닐바나는 일급 그룹 사운드들이 무대에 올라 연주한 라이브 공간이자, 주류가 유통되는 술집이자, 장안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선남선녀들이 춤을 추던 댄스 공간이었다.

 

» 최초의 고고클럽이었더 ‘닐바나’ 의 광고전단 사진.

 

닐바나, 나아가 고고클럽이 새로웠던 것은 술과 라이브 연주가 어우러진 생음악 살롱의 특징에 더해 플로어에서 자유로운 춤의 향연이 벌어진다는 점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이 합쳐진 것과 비슷했다. 알코올을 곁들이면서 음악을 온몸으로 즐기는 공간이란 점에서 고고클럽의 등장과 유행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닐바나 이후, 풍전호텔, 로열호텔, 타워호텔, 센트럴호텔, 라이온스호텔, 천지호텔 등 장안 곳곳에 고고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고고클럽은 기본적으로 ‘호텔 나이트클럽’이었지만, 그룹 사운드의 록 음악과 청년 중심의 공간이란 점에서 기존의 업소들과 달랐다. 물론 호텔을 끼지 않은 독자적인 고고클럽도 뒤따랐고, 서둘러 고고클럽으로 개조하거나 고고타임을 운영하는 나이트클럽들도 늘어가는 등 고고클럽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나중에는 이른바 ‘막걸리 고고장’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고고클럽이 청년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으면서 그룹 사운드에 대한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키 브라더스’, ‘피닉스’, ‘더 멘’, ‘데블스’, ‘파이오니아’, ‘드래곤스’, ‘템페스트’, ‘검은 나비’ 등 당시 고고클럽을 뜨겁게 달군 그룹 사운드의 명단을 일별하는 일은 1990년대 인디 음악을 거론하면서 ‘크라잉 넛’, ‘노 브레인’, ‘코코어’, ‘삼청교육대’, ‘허클베리 핀’ 등을 열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일일이 말할 수 없지만 그건 너무 많아서이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울러 미8군 쇼 무대와 생음악 살롱, 시민회관을 거점으로 등장한 그룹 사운드 1세대에 이어 고고클럽을 둥지로 한 그룹 사운드 2세대도 속속 등장했다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다.

 

고고클럽은 그룹 사운드의 연주, 젊은이들의 춤, 그리고 맥주가 중심이 된 새로운 형태의 공연장이자 유흥 공간이었다. 하지만 중심축은 뒤로 갈수록 후자에 기울었다. 플로어의 청년들이 흥겹게 춤추며 즐길 수 있는 최대공약수에 해당하는 음악들이 중심이 되어간 것이다. 그래서 고고클럽은 그룹 사운드의 요람이었지만, 창의적인 음악을 분만하는 데는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미권처럼 공연과 투어가 자리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이곳’의 사정을 고려하면 사치스런 가정이다. 엄혹한 유신시대, 야간 통행금지가 엄존하던 시절, ‘밤드리 노닐던’ 청춘들이 자정부터 새벽까지 문 걸어 잠근 고고클럽 안에서 억눌린 자유를 제한적으로 풀어헤치던 공간으로서 고고클럽은 족했다. 불법이었지만, 법과 권력이 정의와 거리가 멀던 시절인 바에야.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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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오빠들 미국으로 간 까닭은?

(27) 그룹 사운드 히트곡과 도미 음악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고고장’에 간 남녀 고딩들이 서로 ‘부루스’를 출 때 나오는 노래가 하나 있다. “빠빠빠빠빠 빠”라는 중창으로 시작하고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라는 구성진 노래와 더불어 색소폰이 울어 예는 사운드다. 이때 테이블에서 ‘작업’에 들어가려는 여자 고딩이 말한다. “이 노래 좋지? 난 가요는 잘 안 듣는데 이 노래는 좋더라”. ‘등불’이라는 제목의 이 곡의 원 주인공은 ‘영 사운드’이고, 작곡가는 그룹의 리더였던 안치행이다.

 

그렇다면 팝송을 좋아하면서 가요는 시시하게 치부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던 가요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 기획에서도 몇 차례 소개한 ‘포크송’이고(‘팝’에 가까운 형식의 음악을 왜 굳이 ‘포크’라고 불렀는가는 학술대회 같은 데서 따지도록 하자), 다른 하나는 ‘그룹 사운드’다. 그런데 국산 포크송의 경우 중간계급 대학생으로부터 사랑 받았던 반면, 그룹 사운드의 경우는 다소 모호하다. 지난 주에 보았듯이 그룹 사운드란 기본적으로 ‘미8군 무대’를 거쳐 ‘고고 클럽’으로 자리를 옮겨서 춤추는 군상들이 춤추기 좋은 사운드를 내뿜던 존재였고, 그래서 ‘가요계’와는 거리가 있던 존재들이었다. ‘뷰티풀 선데이’, ‘프라우드 매리’, ‘에빌 웨이스’ 등 연주하기도 쉽고 춤추기도 좋은 ‘히트 팝스’들이 그룹 사운드들이 싫든 좋든 연주해야 했던 곡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이전의 그룹 사운드는 몇 개의 히트곡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키 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과 ‘해변으로 가요’, ‘히 화이브/히 식스’의 ‘초원’, ‘초원의 빛’, ‘당신은 몰라’, ‘키 브라더스’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노래하는 곳에’ 등이 ‘키(Key)’라는 글자와 연관된 복잡한 계보의 그룹들이 만들어낸 히트곡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외국 곡의 번안곡이고, 다른 일부는 직업적 작곡가가 만든 곡들이고, 또 다른 일부는 그룹 자신의 자작곡들이지만 설명이 복잡해지니 생략한다.

 

» 일종의 히트곡 모음집인 <오아시스 팝 페스티벌 Vol.1>(1973)의 커버. 제목과 달리 이 음반에는 ‘영 사운드’, ‘히 식스’, ‘4월과 5월’, ‘빅 화이브’(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의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곡이 담겨 있다.

 

이들 1세대 그룹 사운드 이후의 그룹들도 히트곡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영 사운드’의 ‘등불’과 ‘달무리’, ‘드래곤스’의 ‘떨어진 잎새’, ‘템페스트’의 ‘파도’와 ‘내 곁에 있어 주’, ‘트리퍼스’의 ‘옛님’, ‘데블스’의 ‘그리운 건 너’ 등등. 대략 1972년부터 1974년 사이에 음반으로 발표되고 방송가와 살롱가에서 히트한 곡들이다.

 

그렇다면 ‘야간업소’나 ‘밤무대’가 그룹 사운드의 일상적 음악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고는 해도, 한국의 그룹 사운드들은 서서히 모방과 번안을 벗어나 응용과 창작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그렇게 순순히 해석하기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그룹 사운드 히트곡’들을 ‘한국 록의 고전’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있다는 말이다. 이 곡들이 그룹의 자작곡인 경우도 있지만 다른 작곡가의 곡인 경우에는 평가가 더욱 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단지 청자의 평가뿐만 아니라 음악을 직접 연주한 본인들의 평가인 경우도 있다. 당대의 멋쟁이 오빠들과 인터뷰를 해 보면 ‘자신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음악’이라기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필요에 의해 만든 음악’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참 이상하다. 당시 이들이 남긴 음원들 가운데 ‘팝송’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면 경쾌하게 달리고 날아다니는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가요’를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면 무언가 침울하고 갑갑하다. 왜 그랬을까.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같은 정치적 억압 때문에? 아니면 밤무대에서 젊음을 탕진해야 했던 갑갑함 때문에?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들 그룹 사운드 오빠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재미동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홍탁(히 식스), 김선(바보스), 조영조(키 보이스), 심형섭(휘닉스), 박명길(드래곤스), 안건마(안건마 악단) 등이 1970년대가 지나기 전 도미(渡美)를 택했다. 이런 ‘이민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영화 <헤드윅>에서 미국의 기지촌을 찾아간 헤드윅이 그곳에서 한국계 여성 멤버들과 연주하던 장면이 새삼스러워진다. 그리고 4반세기의 세월이 더 지난 지금 이들 이민자의 자식뻘되는 아이들은 팝송보다 가요를 더 좋아하고 가끔은 가수가 되기 위해 귀국도 한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바보스럽게도 필자가 독자에게 묻게 된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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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 지축 흔든 ‘미인’ ‘당신은 몰라’

(28) 1970년대의 정오, 슈퍼 그룹들 비상하다

 

1973년에서 197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무대 위에서 다섯 사내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 이 사진은 사내들의 얼굴을 알아볼 만한 한국 록 애호가라면 ‘이런 라인업의 슈퍼 그룹이 존재했던가’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만한 것이다. 다름아니라 그 주인공이 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이기 때문이다.

 

신중현이야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으므로 한번 더 언급하는 게 사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 역시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내 마음은 당신 곁으로’ 등의 인기 작곡가 김기표,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이장희 작사 작곡)의 주인공 최이철 하는 식으로 조금만 부연하면 금방 알 만한 이들이다. 한 마디로 당시 쟁쟁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이자 이후 1980년대까지 가요계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음악인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들 멤버의 팬이라면 타임 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연주를 듣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아쉽게도 이 슈퍼 그룹은 단명하여 전설로만 남았다. 본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타워호텔 고고클럽에서 당시 업계 용어로 ‘비즈니스 제의’가 들어와서 몇 달 간 잠시 뭉쳐 연주한 것이었다. 당사자들도 정확한 그룹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뜻을 같이해 정식으로 결성한 밴드가 아닌 일시적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슈퍼 그룹 사운드의 비상을 예시하는 상징적 스냅 사진이었다. 짧은 비즈니스 이후, 세 개의 슈퍼 그룹이 갈라져 나왔다. 신중현과 이남이는 김호식(뒤에 권용남으로 교체)을 영입해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했고, 김기표와 문영배는 이태현, 손학래, 최헌(‘오동잎’의 바로 그이!)과 함께 ‘검은 나비’를 만들었으며, 최이철은 김명곤, 이철호 등과 의기투합해 ‘서울 나그네’를 결성했다. 이 중 ‘서울 나그네’는 ‘사랑과 평화’로 개명한 뒤 1970년대 말 빅 히트를 기록한 반면, ‘신중현과 엽전들’ 그리고 ‘검은 나비’는 각각 ‘미인’과 ‘당신은 몰라’를 통해 곧바로 가요계를 뒤흔들었다.

 

» 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왼쪽부터)이 1973~74년 겨울에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발표된 ‘미인’과 ‘당신은 몰라’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와 함께 1975년 전반기 인기가요 차트 상위권을 주름잡았다. ‘검은 나비’의 ‘당신은 몰라’는 ‘히 식스’의 1972년작을 리메이크한 것이었지만, 최헌이 노래를 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최헌의 짙은 허스키 음색은 ‘검은 나비’의 노련한 연주와 결합하면서 더욱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고 품격 있는 발라드로서 두고두고 애청되고 애창되었다.

 

성별과 세대와 도농(都農)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히트한 ‘미인’은 삼천만의 애창곡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신중현이 솔로 가수의 작편곡가로서 대박을 기록해왔던 데 비해 자신의 그룹으로는 가요계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면 자신이 보컬까지 도맡은 ‘미인’의 성공은 각별한 것이었다. ‘더 멘’ 시절 풍성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펼치다 3인조의 단순하고 응축적인 사운드로 변신하여 거둔 성과란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미인’이 신중현 개인 차원을 넘어 각별하다면, 여러 평자들이 높이 평가해왔듯이 가야금의 농현(弄絃)을 응용한 기타 주법과 강렬한 하드 록 사운드를 결합해 한국적 록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1969~71년 미8군 무대 출신 그룹들이 등장해 생음악 살롱과 시민회관을 거점으로 활약하며 한국 팝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1971~73년 신구의 그룹 사운드들이 조화를 이뤄 지하 고고클럽에서 절치부심하며 ‘한 밤의 지하 레볼루션’을 도모했다면, 1974~75년은 지하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시 양지로 솟아올라 가요계의 지축을 뒤흔든 시기였다. 슈퍼 그룹도 탄생하고, 구미(歐美)의 어법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한층 성숙된 한국 팝·록이 빚어내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1970년대의 정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불행히도, 아니 공분을 금치 못하게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뒤에 얘기하자.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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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 덕에 성공한 영화, ‘별들의 고향’

(29) 새로운 영화, 본격적인 사운트트랙 음반의 화학작용

 

영화음악에서 대중음악의 상업적·미학적 가치가 ‘온전히’ 획득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미국의 경우가 1960년대께 산업적 발전(라디오, 레코드, 레이블)과 음악적 변화(취향의 변화)를 겪으며 낭만주의 클래식 어법의 관현악 스코어의 대안으로 팝 사운드트랙이 새롭게 주목받았다면, 한국의 경우는 1970년 중반에 이르면서 해외 사례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풍경을 펼친다. 대중음악(팝) 스타일의 영화음악이 영화와 음반간의 크로스프로모션(상업적 기능)은 물론, 영화의 극적 표현까지 담지하게 된 것은 ‘청년영화’로 명명된 영화의 음악들에서였다. 그 선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두 젊은 감독의 청춘영화 혹은 호스티스 멜로 드라마는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없이 이 영화들의 성공은 영화음악에 빚진 바 크다. 이 공과는 사운드트랙 음반에 집약되어 있다.

 

  

» 본격적인 사운드트랙 음반. <별들의 고향><바보들의 행진>

 

이 사운드트랙 음반은 애초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획은 누가 했을까? 바로 전에도 몇 번 소개한 바 있는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사장 나현구이다. 다시 말해, 프로듀싱과 비즈니스가 나현구 사장의 몫이었다면, 작곡이나 노래는 이장희가, 연주 및 편곡은 ‘동방의 빛’이 분담한, 오리엔트 프로덕션만의 시스템이 구현된 결과이다. 특히 <별들의 고향>은 ‘본격적인’ 사운드트랙 앨범의 시초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음반’이라는 것을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웠을 때, 노래 형식의 주제가뿐 아니라 연주음악(예컨대 “별들의 고향” 연작 시리즈), 다이얼로그 클립(실제 성우 목소리를 무단게재했다는 비사를 남기기는 했지만)까지도 과감히 담아냈으므로. 이는 한두 곡의 영화주제가가 컴필레이션 음반에 여러 곡 중 일부로 끼워있던 이전의 관행과는 대조적이다. 이 영화음악 음반은 작품성과 흥행성의 성과에 힘입어 후일에도 커버만 바뀌거나 수록곡이 뒤바뀌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재발매되기도 했다. 반면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 음반은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발매하던 ‘골든 포크 앨범’ 시리즈의 일부로 발표되었다. 단, <골든 포크 앨범 Vol.11>의 앞면만 영화와 관련된 음원들이다. 주제곡 세 곡과 이의 변주 버전 두 곡만 삽입되어 다소 단조로운 양상을 띄지만 음악적 의미는 감퇴되지 않는다. 송창식이 작곡한 ‘왜 불러’와 ‘고래사냥’ 외에, 김상태의 곡 ‘날이 갈수록’은 실제 대학생들의 유행가를 대학가 주점에서 발굴한 결과라는 후문.

 

이 영화음악들의 연주자인 동방의 빛은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스튜디오 밴드였다. 가수 이장희의 죽마고우 강근식(기타)을 비롯해, 이호준(오르간), 유영수(베이스), 조원익(드럼)으로 구성된 이들은, 이장희, 송창식, 김의철, ‘원 플러스 원’, ‘4월과 5월’, 김세환, ‘투 코리언스’ 등 여러 가수의 음반에 편곡과 연주를 담당한 바 있는 1급 세션 밴드였다. 악단이나 오케스트라가 아닌 단촐한 밴드 시스템과도 화학반응을 일으켰는데 이는 영화음악들에서 빛을 발한다. 새로운 악기의 사용(가령 무그 신시사이저), 새로운 사운드(노이지한 일렉트릭 록)를 통해서. 물론 영화 속에서 도식적이고 직접적인 대입과 과잉적인 음악 삽입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이들의 탓은 아닐 것이다.

 

한편, 이 두 영화음악의 ‘목소리’는 각각 청년문화의 아이콘인 이장희와 송창식. 연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청춘송가 ‘고래사냥’의 주인공들이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신중현의 ‘미인’과 쌍벽을 이룬, ‘왜 불러’는 송창식에게 한 방송사가 주최한 10대가수가요제의 가수왕까지 안겨 주었다. 이 곡들 대개가 곧 이어 벌어진 한파(대마초 단속)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이상의 영화음악들은, 마치 <졸업>(1967)으로 대표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 그대로 고뇌하며 ‘달리는’ 청춘군상, 혹은 사회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비극적 여인을 감각적인 음악으로 적확하게 표현한다. 이로써 신선한 감각의 음악을 탑재한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동방의 빛(혹은 <어제내린비>,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음악을 맡은 정성조와 메신저스) 같은 이들은, 작품 숫자로는 기성의 영화음악 작곡가들과 비교불가능하겠지만, 영화음악의 판도를 바꾸었음에 틀림없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200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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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찬란했던 금지곡 판정

(30) 금지곡의 전성시대 ‘1975년의 서글픈 블랙코미디’ 

 

벌써 하얗게 잊혀진 듯하지만, 대중문화와 예술에 대한 검열의 시대가 있었다. 사실상 검열장치였던 사전심의제가 철폐된 지 만 1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리 오래된 과거도 아니다. 사전심의제는 아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 나오더라도 사지가 잘려나가고 뒤틀린 작품들을 무수히 양산했다. 지금도 황학동이나 고물상 또는 인터넷 중고음반 쇼핑몰을 뒤져보면 금지곡으로 누더기가 된 음반, 아예 음반 자체가 금지되어 고가의 희귀작이 된 음반, 불법 복제 음반인 이른바 ‘빽판’ 등을 통해 그 시대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그 꽃(‘꺾인 꽃’)은 금지곡이었다. ‘고수들’이라면 해방 후 최초의 금지곡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겠지만, 여기서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총대를 메고 금지곡 낙인을 본격적으로 찍어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절정은 1975년에 일어났다. ‘대체 어땠기에’라고 묻는다면, 대통령이 숨질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법을 만들고(1972년 10월 유신) 이에 대한 여하한의 반대나 개정 주장을 하는 자는 영장 없이 구속해 군법회의에서 처단(!)하는 조치(1974-75년 긴급조치)를 취하던 ‘황당무계하지만 살벌한’ 시대였다는 당시의 사회적 공기를 전하는 수밖에 없다.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자도 처단 사례였다는 점을 부연한다. 경거망동은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함 또는 그런 행동’이란 뜻이다. 세상에!

그러니 당시 위정자의 관점에서 문화적인 경솔한 행동 역시 좌시할 수 없는 중대 범죄가 아닐 수 없었다. ‘친절한 문화공보부 씨’께서는 1975년 6월 7일 ‘공연물 및 가요정화 대책’을 발표하여 각론을 세웠고, 이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에서 ‘모든 노래를 제작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평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 금지곡으로 판정 받은 곡은 국내 가요만 223곡, 외국 가요는 260여 곡에 달했다.

 

양적인 측면 뿐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1975년의 금지곡 지정은 가요계에 막강한 타격을 날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금지곡이라면 방송금지 조처에 그쳤으나 이제 한번 금지곡 판정을 받으면 방송금지는 물론 그 곡이 담긴 음반 자체의 생산과 유통, 공연까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금지 사유는 창법 저속, 시의 부적합, 불신풍조 조장, 냉소 등 유치찬란한 것들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유치찬란하면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점은 불변이다. 더 황당한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겠지만….

 

김민기의 정규 데뷔 음반이 소리소문 없이 금지반이 된 건 너무나 유명한 일일 것이다. 한대수가 뒤늦게 내놓은 데뷔작이자 명반 <멀고 먼 길>(1974)은 판매금지 조치는 물론 마스터테이프까지 압수되었고, 같은 해 나온 이정선의 데뷔 음반은 한번은 가사 때문에 또 한번은 표지 사진에 나온 장발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세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오세은, 양병집, 김의철의 음반들 또한 유사한 과정을 거쳐 공적 소통의 장에서 추방당했다. 1975년작으로 거의 국민가요 급인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송창식의 ‘고래사냥’조차 금지곡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거짓말이야’ ‘그건 너’ 같은 지나간 히트곡들이 숱하게 소급적용 되어 금지곡 판정을 받은 일은 일도 아니었다.

 

금지곡의 타겟이 당대 청년 음악문화를 대표한 록과 포크 음악들이었는지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가 록과 포크 음악이었던 건 사실이다. 오죽하면 ‘금지가요 잘 팔린다’(<경향신문> 1975.8.28.)는 기사가 버젓이 나올 정도였겠는가. 결국 그해 성탄절 이브, 금지가요가 실린 음반의 제작 및 배포를 이유로 일곱 곳의 음반사(당시 등록 음반사는 열 곳에 불과했다!)에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진 일은 마지막 숨통을 끊는 일종의 ‘확인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건전’이란 가면을 쓴 곡들이 급속히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200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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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곡·가수왕 히트곡도 ‘금지’ 딱지

(31) 국제가요제 출전곡과 금지곡 행진

 

‘국제가요제’라는 말은 요즘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지만 197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아바’가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서 ‘워터루’로 입상해 세계적 스타로 뜬 것이 1974년이니 말이다. 그런데 동아시아권에서는?

 

“왜 정미조 양의 ‘불꽃’은 동경의 비 내리는 15일 밤 부도깡 홀에서 비실비실 꺼지고 말았는가”(<일간스포츠> 1975년 11일 26일치) 1975년 11월에 열린 제 6회 ‘동경가요제’(정식 명칭은 ‘세계가요제’)에 대한 보도다. 당시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곡은 송창식이 작사·작곡하고 정미조가 노래한 ‘불꽃’이었다. 같은 해 정훈희가 ‘칠레가요제’에 출전해 ‘무인도’(이봉조 작곡)를 불러 3위를 차지한 것이나 1974년 동경가요제에서 패티 김이 ‘사랑은 영원히’(길옥윤 작곡)로 동상을 차지한 것으로 만족한 것보다 좋지 않은 성적이었다. 후문으로 패티 김은 자신이 ‘동상’에 머문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음악이 스포츠도 아닐 텐데 말이다.

 

» 정미조의 ‘불꽃’이 실린 <골든 포크 앨범Vol.12> 커버.

 

당시에는 국제가요제에서 거둔 성적이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서 거둔 성적처럼 인식되던 때였다. ‘국위선양’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뉘우침이 없는 스태프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국팀의 업저버였던 나현구 씨(오리엔트 프로덕션)의 경우 리허설이 진행 중인 부도깡(武道館) 홀의 위켠에 풍채 좋은 자세로 점잖게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보니 오가는 참가자들은 그를 심사위원 쯤으로 알았는지 정중한 인사를 해 올 정도였다.” 청춘의 우상들을 레코딩 아티스트로 길러낸 ‘음반업계의 전설’인 나현구 사장에 대한 비난은 불길한 징조같기만 하다.

 

한 달 뒤인 1975년 12월 ‘불꽃’은 ‘방송부적격’이라는 애매모호한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국제가요제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못지 않게 황당한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불꽃’의 작곡가인 송창식이 겪은 일이다. 그는 동경가요제에 ‘불꽃’을 출품하기 전인 11월 1일 문화방송의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예를 누렸다(그때는 가수왕을 일찌감치 뽑았다). 그렇지만 이 해 최고의 히트곡이라고 할 만한 ‘왜 불러’는 그가 가수왕에 오른 뒤 금지곡 리스트에 추가되고 말았다. 한 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왕’이 부른 최고의 히트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나라는 우주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송창식이나 정미조처럼 대중의 인기를 누린 사람들도 이랬으니 삐딱하게 보이는 가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정선, 한대수, 오세은, 양병집, 김의철 등 1974~75년에 음반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들이 줄줄이 금지곡을 지정당하고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한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들 음반은 ‘금지곡 지정 이후 음반 전량 회수’라는 절차를 취하면서 일반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희귀음반이 되어 갔다.

 

지난 회에 보았듯, 1975년 가요계는 ‘금지곡의 행진’이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금지곡을 지정하는 일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1975년이 특별했다면 “모든 노래를 제작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전면적으로 ‘재심의’를 했다는 점이다. 1975년 6월 7일 문화공보부가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대책’은 “1) 국가안전 수호와 공공질서 확립에 반하는 공연물 2) 국력배양과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해하는 공연물 3)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공연물 4) 사회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퇴폐적인 공연물” 등 20개 항목에 해당하는 기준에 걸리면 어김없이 ‘정화’의 칼날을 뽑아든다는 것이었다.

 

이 ‘가요정화운동’을 기점으로 사전검열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음반 마지막 트랙으로 ‘건전가요’를 뜬금없이(하지만 반드시!) 삽입하는 역사와 더불어 말이다. 1975년 5월 13일이 긴급조치의 집대성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시점이니 정치적 탄압과 문화적 억압은 손에 손 잡고 착착 진행된 셈이다.

 

결국 1975년 6월 이후 5차에 걸쳐 업데이트된 금지곡 리스트에는 1974~7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 잔의 추억’(이장희), ‘미인’(신중현과 엽전들), ‘왜 불러’(송창식) 등이 골고루 포함됐다. 이 가운데 송창식을 제외한 신중현과 이장희의 이름은 1975년 12월 초 신문 지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했다. 그것도 ‘연예면’이나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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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의 ‘거친’ 징글벨

(32) 그때 그 캐롤들

 

이 시대 ‘최대 명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탄절이 임박하니 캐롤이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흘러나오고 있다. 이맘때면 인기 가수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뽐낸 캐롤 음반을 앞다투어 발매하는 게 ‘달력행사’다. <심형래 코믹 캐롤>(1984)의 대박 이후 보편화된 개그맨의 코믹 캐롤 음반도 여전하고(심형래 버전 ‘징글벨’을 기억하십니까. 영구 톤으로 어눌하게 노래하는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릴까 말까 달릴까 말까 […중략…] 종이 울려서 울릴까 말까 흥겨워서 소리 높여 울릴까 말까”).

 

이쯤에서 지난 시대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살펴보자. 30여 년 전 크리스마스는 어땠을까. 성탄절이 성스런 날이기만 하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떤 면에서 그 시절의 성탄절은 더 각별했다. 야간 통행금지가 엄존하던 시절(1945년부터 1982년까지 무려 37년간!)에 크리스마스는 1년 중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해방일’이었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밤드리 노닐’ 수 있는 날이니 만큼, 서울로 치면 명동, 충무로, 종로를 축으로 한 도심 삼각지대가 새끈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요컨대 ‘크리스마스 베이비’ 같은 용어가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되던 시절의 일이다. 물론 이는 ‘바캉스 베이비’처럼 인구통계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이 연재를 챙겨보는 독자라면 ‘1968~75년 사이의 가요에 대해 참 길게도 서술하고 있네’라는 생각(불만?)을 해봄직 한데, 그 시기에 뭔가 색다른 캐롤 음반이 없을 리 없다. 기성 인기 가수의 캐롤 음반들이야 상례적인 일이니 제외하고, 1969년을 기점으로 그룹 사운드의 캐롤 음반들이 발매되기 시작했던 점은 기억할 만하다. 보수적인 음반업계의 속성상 신진급인 그룹 사운드의 캐롤 음반이 여러 종 제작되었던 건 새로운 현상이었는데, 이는 청년층에게 그만큼 그룹 사운드가 인기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동시에 그룹 사운드의 해석과 연주력이 신뢰할만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자와 관련해,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무수히 캐롤을 연주했던 그룹 사운드가 그간의 노하우를 살린 거라고 부연할 수 있다.


그룹 사운드의 대표적인 캐롤 음반으로는 ‘히 화이브’의 <메리 크리스마스 사이키데릭 사운드(고요한 밤/징글벨)>와 ‘키 보이스’의 <키 보이스 메리 크리스마스(징글벨 락)>(이상 1969), 라스트 찬스의 <라스트 챤스의 폭팔적인 싸운드(화이트 크리스마스/징글벨)>, 이연실과 메가톤스의 합동 음반인 <이연실 크리스마스 캐롤 특집(고요한 밤/징글벨)>(이상 1971) 등이 있다. 이런 음반에서 경음악풍 반주로 익숙한 캐롤이 진행되다 갑자기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인어가다다비다’가 장중하게 흘러나오거나 거친 사운드에 즉흥적인 연주로 넘어가는 곡 전개를 단골로 발견할 수 있다.

 

히 파이브(1969)  김인배(1970)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음반은 <메리 크리스마스(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1970)이다. 김인배가 리드하는 악단 스타일의 경음악과 신영균의 보컬 곡이 담긴 이 음반이 각별한 것은 김민기가 독집을 내기 이전에 녹음한 곡들이 실려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음반에서 김민기는 ‘도비두’란 듀엣으로 김영세와 짝을 이뤄 ‘첫번 크리스마스’, ‘친구’, ‘세노야’를 녹음하면서 레코딩 데뷔를 하게 되는데, 독집과 달리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노래만으로 담백하게 편곡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캐롤의 한글 제목과 노랫말이 오늘날과 다를 뿐 아니라 통일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의 음반들이다. 록 음악 애호가라면 앞서 말한 그룹 사운드 캐롤 음반은 충격적일 것이고, 김민기의 팬이라면 김인배 작·편곡 캐롤 음반은 인터넷을 뒤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200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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